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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낙파이] 재앙 이후의 일들  [阿纳克派] 灾后余波

[아낙파이] 재앙 이후의 일들  [阿纳克派] 灾后余波

  • 2025.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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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에 가까운 무언가.   某种接近组合的存在。

불훔자 = 파이논 기반입니다. 
火焰使者 = 基于派农。

캐붕 주의.   注意崩溃风险。



 


그는 아직도 그 소년을 기억한다. 엘리사이 에데스의 파이논, 이라고 또랑또랑하게 말하던 백발의 소년을.
他仍记得那个少年。那个用清脆声音说着“艾丽莎伊·埃德斯的派农”的白发少年。

학기의 첫 수업이었고, 그는 나른함을 느끼며 아카데미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오크마에서 두 명의 황금의 후예가 아카데미의 파견될 예정이라고 했다. 자연히 그들은 기초 과목을 가르치는 아낙사의 수업을 듣게 되었다. 아이도니아의 독전 성녀 카스토리스, 그리고 엘리사이 에데스의 파이논. 멸망한 도시의 이름 옆에 놓인 소년과 소녀의 이름을 그는 한참 들여다봤었다.
那是学期的第一堂课,他带着倦意走在学院的走廊上。奥克玛传来消息,两位黄金后裔即将被派遣到学院。自然,他们需要参加教授基础课程的阿纳克萨的课。伊多尼亚的独战圣女卡斯托里斯,以及艾莉赛·埃德斯的派农。他久久凝视着这两个少年少女的名字——它们被并列放置在那座已消亡城市的名号旁。

파이논은 잘 웃는 학생이었다. 언제나 강단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꼿꼿한 자세로 수업을 들었다. 수업에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만 질문하고 대답할 줄 알았고, 항상 함께 있는 내성적인 소녀를 챙길 줄도 알았다. 아낙사는 그 소년이 자신의 손길 아래서 정제되고 성장하는 것을 느꼈다. 토론 대회에서 그의 조언을 듣고 그가 하던 방식으로 연설해 승리를 거머쥐는 파이논을 보았을 땐 부당한 보람마저 느꼈다.
派农是个爱笑的学生。他总是端坐在能清晰看见讲台的位置,以挺拔的姿势听课。懂得在课堂提问时把握恰到好处的分寸,也始终照顾着身边内向的少女。阿纳克萨能感受到这个少年在自己指导下逐渐被雕琢、成长。当看到他在辩论大赛中采纳自己的建议,用她传授的方式演讲并赢得胜利时,她甚至感到一种不合时宜的欣慰。

그가 아낙사의 가장 아끼는 제자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他成为阿纳克萨最珍视的学生,是再自然不过的事。

물론, 시간이 흐르며 피상적인 첫인상은 벗겨졌다. 소년은 겪지 않아도 될 재앙을 겪었고, 그것으로 자신을 규정했다. 오크마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는 검은 물결이 잠식한 엠포리어스를 떠돌아다녔다. 그저 장소만 이동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관계, 생활, 이념에서도 안식을 찾지 못했다. 지나치게 오래된 슬픔은 그의 일부를 이루는 정체성이 되었다.
当然,随着时间流逝,那些浮于表面的初印象逐渐剥落。这个少年经历了本不该承受的灾厄,并以此定义自我。在抵达奥克玛之前,他游荡在被黑色浪潮侵蚀的恩珀里厄斯。那不仅仅是地理上的迁徙。他在任何关系、生活或信仰中都找不到慰藉。那些过于古老的悲伤,早已成为构成他身份认同的一部分。

아낙사는 그를 보며 황금을 떠올렸다. 용광로에 올려진 채 녹아 흐물거리는 황금을. 단단한 형체를 잃고, 이 다음에 무엇이 되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그에게는 재앙을 겪은 사람 특유의 체념이 있었다. 물론, 파이논은 활기찼다. 얼핏 보면 또래 남자아이들과 다를 게 없었다. 잘 웃고, 잘 먹고, 잘 잤다. 검은 물결에 관해 들을 때면 복수심에 눈을 불태웠다. 그것들이 없어지면 어린 시절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 듯이. 하지만 아낙사는 알았다. 그는 복수를 믿을 만큼 멍청하지 못했다. 무슨 짓을 해도, 한때 사랑했던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阿纳克萨望着他时想起了黄金。熔炉上正在熔化流淌的黄金。失去坚固的形态,犹豫着接下来该成为什么。他身上带着经历灾难之人特有的认命感。当然,派农是充满活力的。乍看之下与同龄男孩没什么不同。爱笑,能吃,能睡。听到黑色浪潮的事时,眼中燃烧着复仇的火焰。仿佛相信只要它们消失,童年就会回来。但阿纳克萨知道。他还没蠢到相信复仇。无论做什么,曾经爱过的一切都不会再回来。

부서지고 녹아내린 채, 소년은 자신이 무엇이 될 것인지 몰랐다. 그는 어리고 불안정했다.
支离破碎、熔化殆尽的状态下,少年不知道自己会成为什么。他年幼而不安。

그는 아낙사의 오래 전 기억을 끄집어냈다. 엉망이 된 실험실에서, 한쪽 눈으로 피를 흘리며 광인처럼 웃던 한 미친 바보를. 그는 기억한다. 십수 년 만에 다시 만난 누이는 얼마나 작았던지 정수리가 그의 허리께에 닿을락 말락했다. 그는 그녀를 꼭 껴안았고, 그 이후에는 갑자기 천치가 되어 그녀에게 한참 휘둘렸다. 하고 싶었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눈에 붕대가 감겨 있었고, 자기가 죽은지도 모르던 소녀의 유령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他翻出了阿纳克萨尘封已久的记忆。在凌乱的实验室里,一只眼睛流着血、像疯子般大笑的傻瓜。他记得。时隔十几年重逢的妹妹是那么娇小,头顶才将将够到他的腰间。他紧紧抱住她,之后却突然像个白痴一样被她牵着鼻子走。想说的话一句都没能说出口。等再次清醒时,眼睛已缠上绷带,那个他以为早已死去的少女幽灵也不知去向。

그때의 그 우둔한 아낙사고라스. 성격이 전혀 다름에도, 그는 파이논을 보며 그때를 떠올렸다. 이제 파이논은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었다. 앞으로 수년간 겪을 일들, 만날 사람들, 받을 상처들이 그라는 사람을 제련할 것이었다. 그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소년이 티없이 웃으며 그 ‘사람들’ 중 한 명으로 자신을 골랐을 때, 그것은 놀랄 일이었다.
那个愚钝的阿纳克萨戈拉斯。尽管性格截然不同,他看着派农时仍会想起那时。现在派农将决定自己的未来。未来数年要经历的事、遇见的人、承受的伤痛,都将锤炼出他这个人的模样。这本不足为奇。但当少年天真无邪地笑着,选择他作为那些"人"之一时,这确实令人惊讶。

파이논은 그에게 일종의 애착을 가졌다. 언제나 그를 도왔고, 누구보다 열심히 학문을 정진했다. 오크마의 ‘구세주’가 나무 정원의 학자가 되려 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무엇보다 그는 모두가 입을 모아 비난하는 아낙사의 이론을 열심히 들었다. 아낙사는 눈치챘다. 파이논이 자신을 비판하거나 비난하지 않는 것은 동의의 표시가 아니었다. 조용한 자기방어에 가까웠다. 상관없었다. 한참 어린 학생 하나를 말로 승복시키는 것 따위는 그의 목표가 아니었다. 파이논의 애착을 그의 불행과 연관지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그에게 무례한 일이고, 심지어 잔혹한 일일 테니까. 
菲农对他怀有某种依恋。总是帮助他,比任何人都更努力钻研学问。甚至有传言说奥克玛的"救世主"想成为树园学者。最重要的是,他认真倾听众人一致谴责的阿纳克萨理论。阿纳克萨察觉到了。菲农没有批评或谴责她,但这并非同意的表示,而更接近于一种沉默的自我防卫。这无关紧要。让一个年轻学生口头屈服并非他的目标。他也不愿将菲农的依恋与其不幸联系起来思考。那样做对他太失礼,甚至堪称残忍。

나무그늘 밑에서, 식당에서, 빈 교실에서, 그들의 시간은 흘렀다. 일 년, 이 년, 카스토리스가 오크마로 돌아간 이후에도, 파이논은 남았다. 녹아내린 황금, 그 모습 그대로. 몇 년 사이 몰라보게 얼굴이 성숙했지만, 그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와 친하게 지내던 몇몇 학생들은 떠났다.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눈매가 침침한 연구원이 되었다. 바깥에선 또 다른 도시 국가가 검은 물결에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학자들은 티탄과 국가, 피와 희생, 구원과 절망을 말했다. 케팔의 동상만이 세상을 짊어진 채 미동없이 서 있었다.
树荫下、食堂里、空荡的教室中,他们的时光静静流淌。一年、两年,即便在卡斯托里斯返回奥克玛后,菲农依然留了下来。像融化的黄金般,保持着原本的模样。几年间他的面容已成熟得认不出来,但他丝毫未变。与他交好的几位学生陆续离开,有的回到故乡,有的成为目光阴郁的研究员。外界传来又一座城邦被黑色浪潮吞噬的消息。学者们谈论着泰坦与国家、鲜血与牺牲、救赎与绝望。唯有刻法勒的雕像背负着世界,纹丝不动地矗立着。

미동이 없는 것은 나무 정원도 마찬가지였다. 이른 오후였다. 그는 파이논과 함께 나무 정원의 꼭대기 정원에 있었다. 오후 수업이 시작하기까진 시간이 좀 남았다. 가벼운 편두통을 느끼며 늦은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파이논이 치즈와 설탕에 절인 레몬을 가져왔다. 그는 계속 음식을 아낙사 쪽으로 밀어두었지만 먹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몇 주간 공들인 실험이 실패했다. 시약이 폭발해 손에 화상을 입었고 약물 냄새가 지독한 탓에 생활 공간으로 돌아가 샤워를 해야 했다. 다시 채비를 갖춰 나왔을 땐 점심때가 지난 후였다.
树园同样一片寂静。时值午后,他正与派农一同待在树园顶层的花园里。离下午的课程开始还有些时间。他正吃着迟来的午餐,感到轻微的偏头痛。派农带来了用奶酪和糖腌制的柠檬。尽管他不断将食物推向安纳克那边,却丝毫没有食欲。数周精心准备的实验以失败告终。试剂爆炸导致他手上留下了烧伤,刺鼻的化学气味迫使他不得不返回生活区冲洗。待他重新整装出来时,早已过了午餐时间。


“오늘 아글라이아 님의 메시지를 받았어요.”
“今天收到了阿格莱娅大人的消息。”


손에 묻은 꿀을 핥으며 소년은 그렇게 말했다.
少年舔着沾在手上的蜂蜜,如此说道。


“최근에 멸망한 도시 국가의 난민들이 오크마에 도착했는데, 갈등이 조금 있는 것 같아서요. 트리비 님에게 부탁할 테니 수업이 없는 날 잠깐 와달라고요.”
“最近有个灭亡城邦的难民抵达奥克玛,似乎有些小摩擦。想拜托特里比老师抽空在没课的日子过来一趟。”


레몬은 시다못해 썼다. 아낙사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莱蒙勉强写了下来。阿纳克萨心不在焉地应着。


“오크마 성주가 꽤나 바쁜가 보군, 일개 학생의 손까지 빌리려 하다니.”
“看来奥克玛领主相当忙碌啊,竟然连一个学生的手都要借。”

“다녀와도 될까요?”  “我可以去去就回吗?”

“그걸 왜 나한테 물어?”  “为什么要问我这个?”


파이논은 고개를 푹 숙였다. 순식간에 자신감 없는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간 그를 향해 아낙사는 한숨지었다.
派农深深地低下了头。看着他瞬间变回那个缺乏自信的少年模样,阿纳克萨叹了口气。


“말해 봐, 무슨 일이지?”  “说吧,发生什么事了?”

“아글라이아 님은 제가 사람들을 화해시키길 바라시는 것 같아요. 선생님, 전 모르겠어요. 그 사람들, 갑자기 고향을 잃고 가족을 잃었을 텐데, 대체 무슨 말을 해 줘야 할까요.”
“阿格莱娅大人似乎希望我能让人们和解。老师,我不明白。那些人突然失去了家乡,失去了家人,我到底该对他们说什么才好。”


아낙사는 이 눈빛이 지겹도록 익숙했다. 선생님, 말씀해 주세요. 이 재앙을 부디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해주세요. 앞으로 삶은, 세상은 어떻게 변할 것인지 말씀해 주세요. 현자여, 부디 저희에게 지혜를 빌려주세요.
阿纳克萨对这眼神已经熟悉到厌倦了。老师,请告诉我们吧。请让我们理解这场灾难。请告诉我们未来的生活、世界将会如何变化。贤者啊,请赐予我们智慧吧。


“너도 비슷한 일을 겪지 않았나? 네가 듣고 싶었던 말을 해.”
“你不是也经历过类似的事吗?说出你想听的话。”

“전 제가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我不知道自己想听什么。”


쥐어짜내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아낙사에게는 들렸다.
那声音仿佛是从牙缝里挤出来的,但阿纳克萨还是听见了。


“선생님은 항상 옳은 선택을 하시잖아요. 언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고 계시잖아요. 제게도 말해 주세요.”
“老师您不是总能做出正确选择吗?您明明知道什么时候该说什么话。请也告诉我吧。”


아낙사는 코웃음을 쳤다.  阿纳克萨发出一声嗤笑。


“그게 진담이라면, 파이논, 넌 내 수업을 하나도 제대로 듣지 않은 거야.”
“如果这是真的,파이논,你根本没好好听过我的课。”


몇십 분 전에도 실험 하나를 실패하고 왔는데, 나무 정원에서 보낸 매 순간 ‘우둔한 아낙사고라스’라는 별명을 들어 왔는데, 멍청한 이기심 때문에 눈알 하나를 잃고 사랑하는 사람을 손가락 사이로 놓쳐버렸는데. 소년은 그런 그를 ‘옳은’ 사람이라 불렀다.
就在几十分钟前,我又一次实验失败而归,在树园度过的每一刻都被人唤作“愚钝的阿那克萨戈拉”,因愚蠢的自私失去了一只眼球,又让挚爱之人从指缝间溜走。少年却称这样的他为“正确”之人。


“그런가요.”  “是这样啊。”


파이논은 나무에 머리를 기대며 배시시 웃었다. 그 미소는 그가 아낙사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때 짓는 미소였다.
派农倚靠着树干,眯眼笑了起来。那是他不同意阿那克萨观点时特有的笑容。

아낙사는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최근 학계 동향이나 논문, 진행 중인 실험에 대하여. 파이논 또래의 학생이 듣는다면 잠들기 딱 좋은 주제였다. 파이논은 웃으며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크램노스 성처럼 전통이 남아있는 도시 국가에서 꺼냈다간 화형당할 법한 신성모독적인 이야기까지도.
阿纳克萨无奈地开始讲述起来。关于最近的学术动态、论文以及正在进行的实验。如果是与派农同龄的学生听到这些,肯定会觉得是绝佳的催眠话题。派农只是微笑着倾听。甚至包括那些在像克拉姆诺斯城这样保留着传统的城邦里说出来可能会被处以火刑的亵渎神明的内容。


“반박 한 번 안 하는군. 제대로 듣지 않아도 상관은 없어.”
“一次反驳都没有呢。就算不好好听也没关系。”

“아니에요! 듣고 있었어요.”  “不是的!我在听呢。”


그는 멋쩍게 웃었다.   他尴尬地笑了笑。


“그냥 좋아서요. 선생님의 이론을 듣고 있으면, 분명 잘못됐다는 건 아는데,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들떠요. 왜 그럴까요?”
“只是觉得喜欢。听老师讲理论时,明明知道是错的,却奇怪地心跳加速、心情雀跃。为什么会这样呢?”


나이도 어리면서 악취미가 들었군, 지나가듯 그렇게 생각했었다. 
年纪轻轻就染上了恶趣味啊,我曾这样漫不经心地想过。

그날 이후 얼마 되지 않아 파이논은 졸업했다. 아낙사는 학생 명부에 그에 대한 최종 평가를 써넣고 학적을 변경했다. 그 파일은 그의 연구실 구석 서랍에 보관되었다. 그는 여전히 기억했다. 몇 년간 기록해온 한 소년과 소녀의 변곡점이 초라한 연구실 한곳에 잠들어 있는 것을. 그보다 더 깊은 서랍장에는 받은 후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졸업앨범이 있는 것을. 이제 그곳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기록물은커녕 벌레 한 마리 남지 않았다는 것을.
那天之后不久,派农就毕业了。阿纳克萨在学生档案里写下了对他的最终评价并更改了学籍。那份文件被收藏在他研究室角落的抽屉里。他依然记得。多年来记录的一个少年和少女的转折点,就这样沉睡在简陋研究室的某个角落。而在更深的抽屉里,有一本毕业后从未翻开过的毕业相册。如今那里已彻底毁灭,别说记录资料,连一只虫子都没能留下。

파이논의 과거는 그렇게 하나 더 사라졌다.
菲农的过去就这样又消失了一个。

 

*

 

남자는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男人没有呼吸。

아낙사고라스는 꽃바다에 있었다.  阿纳克萨戈拉斯置身于花海之中。

병든 달의 달무리에 죽음의 용의 그림자가 비쳤다. 저 그림자 속 어디엔가 소녀도 있을 것이었다. 그녀는 이 허무와 휴식의 공간에서 나름대로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망자들을 인도하고 그들의 휴식을 보장하며, 꽃들을 쓰다듬고 폴룩스를 산책했다. 아낙사고라스가 이곳에 도착한 후 영원이 흘렀다. 혹은, 수 초가 겨우 흐른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간은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동안 그는 카스토리스와 대화하거나 홀로 사색했다. 이상하게도 지루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생전이었다면 잠깐의 휴식도 아쉬워 실험을 하거나 책이라도 읽었을 텐데, 이곳은 그런 감정을 초월한 곳이었다.
病月的月晕中,死亡之龙的影子投下。在那影子的某处,少女也应当存在。她在这虚无与休憩的空间里,以自己的方式忙碌着。引导亡者,确保他们的安息,轻抚花朵,带着波鲁克斯散步。自阿那克萨戈拉抵达此处后,永恒已然流逝。又或许,仅仅数秒刚过。时间不再具有任何意义。在此期间,他与卡斯托里斯交谈,或独自沉思。奇怪的是,他并未感到无聊。若在生前,他定会因短暂的休憩而惋惜,转而投入实验或阅读书籍,但此地却超越了此类情感。

망자들은 그림자의 형태로 꽃바다를 유유히 헤엄쳤다. 아무도 서로에게 관심 갖지 않았고, 아무도 서로를 볼 수 없었다. 모두가 가장 자폐적인 형태로, 동시에 가장 개방적인 태도로 세상 이후의 세상을 즐기고 있었다. 재앙처럼 아름답고 고요했다.
亡者们以影子的形态在花海中悠然游弋。无人对彼此投以关注,亦无人能互相看见。所有人都以最自闭的姿态,同时却以最开放的态度享受着现世之后的那个世界。如灾难般美丽而宁静。

두 가지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 나무 정원에 밀려오는 검은 물결과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괴인. 창세의 소용돌이와 동료들의 얼굴,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생생한 감각.
最后两个瞬间在脑海中浮现:涌入树园的黑潮与反戴黑色兜帽的怪人。创世的漩涡与同伴们的面容,灵魂从躯体抽离的鲜活触感。

불을 쫓는 여정이 마무리된다면, 다시 그 감각을 겪어 현세로 내려가야 하겠지. 하지만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무한할 정도의 시간이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如果追逐火焰的旅程结束,就必须再次经历那种感觉,回到现世。但时间还很充裕。无限的时间掌握在他的手中。

그러니, 눈앞의 이 자를 심문할 시간은 충분했다.
因此,审讯眼前这个人的时间绰绰有余。

아낙사는 남자를 꽃바다 한가운데 눕혔다. 보통 사람의 두 배는 될 거구에 온통 검은 옷을 입은 남자였다. 첫 번째 죽음에 기억에 등장하던 그 자. 그가 힘을 잃은 채 아낙사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阿纳克萨将男子安置在花海中央。那是个身着全黑装束、体型约是常人两倍的男子。第一次死亡记忆中出现的那个存在。此刻他力量尽失,任由阿纳克萨摆布。

아낙사는 천천히 남자의 가면을 벗겼다. 가면은 풀이라도 붙어 있던 것처럼 얼굴에서 찐득하게 떨어져나왔다.
阿纳克萨缓缓揭下男子的面具。面具如同黏附在脸上般,带着黏腻的触感剥落下来。

눈을 감고 있어도 알아볼 미남이었다. 이목구비는 뚜렷했고, 가지런한 골격에 얼굴에 적당히 음영이 졌다. 유일한 흠이라면 피부가 죽은 사람처럼 창백하다는 것이었다.
即使闭着眼也能认出的美男子。五官深邃分明,骨骼匀称的面庞上恰到好处地映着阴影。唯一的瑕疵是那如死人般苍白的肤色。

아낙사는 이 자를 알았다.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생명 때문이었다. 수많은 가설과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실험들이 머릿속을 스쳤다가 사라졌다. 생전이었다면 근면한 학자는 당장 그것들을 써내려갔을 것이다. 머릿속이 단박에 시끄러워졌다. 엠포리어스가 또 다른 진실의 실마리를 그에게 제공하고 있었다. 불꽃이 튀는 머릿속에 담긴 생각을 전부 붙잡아둘 수만 있다면 다시 죽어도 좋았다. 영겁과도 같은 저승에서, 다시 산 자의 욕망을 느끼게 될 줄이야.
阿纳克萨认识这个人。手开始颤抖。不是因为恐惧,而是因为生命。无数假设和为了证明它们而进行的实验在脑海中闪过又消失。若在生前,这位勤奋的学者定会立刻将它们记录下来。脑海瞬间嘈杂起来。恩普里奥斯又向他提供了另一条真相的线索。只要能抓住脑海中火花四溅的全部思绪,哪怕再死一次也心甘情愿。在永恒般的地狱里,竟能再次感受到生者的欲望。

역시, 그랬다.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나무 정원에서 이 자를 봤을 때 그 검술이 익숙하다고 생각했었다. 우습게도, 그조차 ‘구세주’라는 별명에 속아넘어갔던 것이다. ‘구세주’라면 이런 일을 할 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파이논은 구세주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불렀을 뿐.
果然,是这样。所有的拼图都拼上了。在树木庭院看到这个人时,就觉得他的剑术很熟悉。可笑的是,连这个都被“救世主”这个绰号给骗过去了。想着“救世主”不可能做这种事。派农不是救世主。只是别人这么叫他罢了。

쌍커풀이 짙은 눈이 열리고 천구를 닮은 푸른 눈동자가 그를 향해 드러났다.
双眼皮浓重的眼睛睁开,露出如天球般湛蓝的瞳孔直视着他。

 

*

 

언제였던가. 오크마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那是何时的事呢。发生在奥克玛的往事。

황금의 후예의 노고를 치하하는 연회가 열렸다. 오크마의 목욕탕이 아닌 원로원이 준비한 연회장에서.
为赞颂黄金后裔功绩的宴会在元老院准备的厅堂举行,而非奥克玛的浴场。

아글라이아는 과일 접시가 놓인 테이블에 앉아 원로원 측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카스토리스는 장갑을 몇 겹이나 껴놓고도 트리스비오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파이논은 크램노스 왕세자의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건 춤이라기보단 장난처럼 보였다. 아낙사는, 그는 떠날 참이었다. 오늘 이미 히아킨과 춤을 한 곡 추었다. 연회의 손님으로서의 의무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阿格莱娅坐在摆满水果拼盘的桌边与元老院代表交谈;卡斯特里斯戴着层层手套仍犹豫是否该将手搭在特里斯比奥斯的肩上;派农握着克拉姆诺斯王储的手转圈嬉戏,那模样不像跳舞倒像玩闹;而阿纳克萨——他已准备离席,今日与希亚金共舞一曲后,作为宴会宾客的义务便算尽到了。


“선생님! 저와도 같이 춤춰주세요.”  “老师!也请和我一起跳舞吧。”


파이논이 잔뜩 들떠 다가왔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주변 몇몇의 이목을 끌 정도였다. 얼굴이 상기된 것을 보니 이미 술을 몇 잔 한 것이 분명했다. 격식 없이 내밀어진 손엔 우아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분명 아글라이아나 트리스비오스 상대였다면, 그는 더 얌전했으리라. 
派农兴高采烈地走了过来。她的声音大得足以吸引周围几个人的目光。从她涨红的脸来看,显然已经喝了好几杯酒。那只不拘礼节伸出的手上,找不到一丝优雅。如果面对的是阿格莱亚或特里斯比奥斯,她肯定会更乖巧些。

그는 한숨을 쉬고 제자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이 자신의 손을 이끌도록, 그의 팔이 허리에 감기도록, 그의 발이 춤을 리드하도록 두었다. 정작 파이논은 춤이 시작되자 그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 표정으로 먼 곳만 바라보았다.
他叹了口气,握住弟子的手。任由对方的手牵引自己,手臂环住腰间,脚步带动舞姿。然而当舞步开始时,派农却无法直视他,只是突然露出回到现实的表情,凝望着远方。


“죄송합니다. 불편하셨어요?”  “抱歉,给您带来不便了吗?”

“이미 늦었으니 사과할 것 없어.”
“已经太晚了,不用道歉。”


느린 음악이 나왔다. 모두, 적어도 겉으로는, 평화로운 척 춤을 추었다. 파이논은 여전히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친구 앞에서 시골청년처럼 굴었던 주제에, 춤 실력은 괜찮은 편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우아함이 묻어나오는 그의 춤선에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얼굴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파이논은 나무 정원에서 보낸 시간만큼, 그 이상으로 오크마에도 오래 머물렀으니까. 그럼에도 아글라이아가 그에게 가르치지 못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舒缓的音乐响起。所有人,至少表面上,都假装平静地跳着舞。派尼恩依然没有看向他。明明刚才在朋友面前还表现得像个乡下青年,舞技却意外地不错。从他优雅得有些违和的舞姿中,浮现出一张不愿想起的面孔。细想起来也是理所当然——派尼恩在橡木园度过的时间,远不及他在奥克玛停留的漫长岁月。但阿格莱亚唯独有一件事没能教会他。


 “아까부터 어딜 보는 거지? 춤을 출 땐 파트너의 눈을 마주치는 게 예의야.”
“从刚才起你一直在看哪里?跳舞时要注视舞伴的眼睛才合乎礼仪。”


 파이논이 멋쩍게 미소지으며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 빛무리가 새겨진 눈동자가 아낙사의 외눈과 어색하게 연결되었다. 허리에 놓인 손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派尼恩尴尬地微笑着将视线转向他。镌刻着光晕的瞳孔与阿纳克萨的独眼不自然地交汇。他感觉到放在自己腰间的手突然颤了一下。


 “술 마셨어?”  “你喝酒了?”

 “조금만요.”  “请稍等。”


 그렇게 말하는 청년의 입에선 짙은 술냄새가 났다. 저 상기된 뺨도 술기운 때문일까?
青年说话时,口中散发着浓重的酒气。他那泛红的脸颊也是因为酒劲吗?


 “선생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老师,这段时间您过得还好吗?”


 그는 지금 자기가 듣고 싶었던 말을 하고 있는 걸까?
他现在说的,是他想听的话吗?


 “나무 정원에서의 삶이 어떤진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변한 건 없어.”
“树园里的生活是什么样子,你应该也知道的吧?一切都没变。”


 나무 정원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긴장이 풀렸는지 다시 헤프게 웃기 시작했다. 
一提到树园的事,他似乎放松了下来,又开始轻率地笑了。


 “그때 기억나세요? 제가 선생님 총을 쏴 보려다가 온 방안에 총알이 튀었을 때…”
“还记得那时候吗?我想试试老师的枪,结果子弹在房间里到处乱飞…”

 “다시 한 번 더 그랬다간 그 총에 네가 맞게 될 줄 알아.”
“再敢那样做的话,下次中枪的就是你了。”


 아낙사는 맞잡은 파이논의 손을 꽉 쥐고 눈에 살기를 띄웠다. 오래 알고 지낸 관계의 단점이었다. 서로간에 너무 많은 일이 생겼다. 어처구니없는 일, 온갖 바보 같은 일까지도. 그는 파이논의 학창시절 내내 그의 담당교수였다. 가끔 그는 자신이 저 황금에 작은 자국이라도 남겼을지 궁금했다. 그가 짧게라도 대답을 해주자 파이논은 신나서 추억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다음은 오크마에서 친해졌다는 그 왕세자 얘기였다. 다음은 카스토리스, 트리비…. 집에 온 어린애처럼 미주알고주알 끝도 없었다. 
阿纳克萨紧攥着派农的手,眼中燃起怒火。这是长久相识的弊端——彼此间经历了太多事,荒唐的、愚蠢的,无所不有。他担任派农整个学生时代的导师,有时会想自己是否在那块黄金上留下了些许划痕。当他简短回应后,派农便兴奋地开始絮叨往事:先是奥克玛结识的那位王储,接着是卡斯特里斯、特里维……活像归家的孩子般事无巨细地喋喋不休。

 그는 아직도 녹아내린 황금 그대로일까. 
他是否依然保持着熔化的黄金之姿。


 “마이데이가 항상 절 구세주라고 불러서, 요즘은 동네 꼬마들까지도 저한테 구세주님, 하는게 아닐까 할 정도예요. 하아, 정말이지.”
“因为麦德总是叫我救世主,最近连附近的小孩都开始对我喊‘救世主大人’了。唉,真是的。”


 왕세자는 생긴 것과 달리 날카로운 감을 가지고 있었다. 
王世子虽外表温润,却有着敏锐的直觉。


 “넌 결함 없는 황금의 후예니까.”
“你可是完美黄金的后裔啊。”

 “선생님까지!”  “连老师也这样!”


 적어도 이젠 되받아칠 여유를 찾은 모양이었다. 학창 시절이었다면 중압감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을 텐데. 파이논은 나이를 먹을수록 능청스러워졌다. 이것도 저 여자의 영향일까. 적어도 아낙사 자신은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었다. 
看来至少现在有余力回击了。若是学生时代,那份压力恐怕会直接写在脸上。派尼翁随着年龄增长愈发油滑,莫非也是受那女人的影响?至少阿纳克萨不记得自己教过这些。


 “음, 하지만, 반신이 되지 않으면 아무도 결함을 가질 필요 없는 것 아닌가요? 그럼 모두 결함 없는 인간으로 남을 수 있겠죠.”
“嗯,可如果不成为半神,大家不就没必要背负缺陷了吗?这样所有人都能保持完美无缺的人性。”

 “엠포리어스가 우리의 의지대로 굴러간 적이 있었나?”
“恩普瑞斯什么时候按我们的意志运转过?”


 파이논의 손에 힘이 점점 빠져갔다. 그는 춤추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술도 깼는지 상기된 볼도 가라앉은 후였다. 시선은 다시 아낙사의 눈을 보지 못한 채 갈 곳 모르고 배회했다. 그의 기분과 상관없이, 음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발을 멈춘 그 대신 아낙사가 춤을 리드하기 시작했다. 똑같이, 그의 손을 잡고 그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그의 발로 파이논을 이끌었다. 훤칠한 몸이 바짝 끌려오며 일순 숨이 섞일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 
菲农的手逐渐失去了力量。他看起来并不想跳舞。酒意或许已醒,涨红的脸颊也恢复了平静。目光再次无处安放,始终不敢直视阿纳克萨的眼睛。尽管他情绪低落,音乐却仍未结束。当他停下脚步时,阿纳克萨主动引领起舞步。她同样握着他的手,将手搭在他腰间,用步伐牵引着菲农。修长的身躯被轻轻带动,两人距离骤然拉近,近到能在一瞬间交换呼吸。


 “파이논, 넌 언제나 내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했지. 그러니 지금 내가 세우고 있는 가설 하나를 알려주겠어. 넌 언젠가 창세의 티탄이 될 거야. 그때가 되면 넌 세상을 다시 만들어야 할 거야. 그리고 그 세상을 의식의 마지막 순간까지 짊어져야 하겠지.”
“菲农,你向来最爱听我讲故事。所以现在我要告诉你一个假设——终有一天,你会成为创世的泰坦。到那时,你必须重塑这个世界。并且要肩负那个世界,直至意识消亡的最后一刻。”


 아낙사는 연회장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阿纳克萨环视宴会厅一周。


 “그때가 되면 네가 무엇을 사랑했는지 기억해 둬. 그 모습대로 세상을 창조할 수 있도록.”
“等到那天来临,务必记住你所爱之物的模样。这样你才能按照心中所想来塑造世界。”


 음악은 끝이었다. 아낙사는 학생이 가게 두었다. 그리곤 홀로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音乐结束了。阿纳克萨让学生留了下来。然后独自离开了宴会厅。

 

*

 

 그는 빠르게 숨을 들이쉬었다. 의식이 돌아오며 영혼이 몸으로 추락하는 감각이 소름끼쳤다. 
他迅速深吸了一口气。意识恢复时,灵魂坠入躯体的感觉令人毛骨悚然。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무기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손을 뻗으려 발버둥쳤을 때 무언가가 어깨를 잡고 있는 것을 느꼈다. 
最先闪过的念头是必须握住武器。当我挣扎着伸手时,感觉到有什么东西正抓着我的肩膀。


 “파이논.”  “派农。”


 익숙한 목소리가 그렇게 불렀다. 주문처럼 계속. 그 목소리가 그의 의식을 붙잡아두었다. 천천히, 몸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일까. 계속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굴까. 확실한 것은 고통뿐이었다. 생전 느껴보지 못한 끔찍한 고통이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비명을 지를 수 있는 종류의 고통도 아니었다. 그는 기진맥진한 채 시야를 가다듬으려 노력했다. 
熟悉的声音这样呼唤着。像咒语般持续。那声音拽住了他的意识。慢慢地,身体开始脱力。究竟怎么回事。一直呼唤我名字的人是谁。唯一确定的是痛苦。从未经历过的可怕痛苦缠绕全身。那甚至不是能让人惨叫出声的痛苦。他精疲力竭地试图聚焦视线。


 “선생님….”  “老师…...”

 “그래.”  “好吧。”


 남자는 입을 지그시 다물었다. 나직한, 동시에 힘있는 목소리였다. 
男人紧紧抿住了嘴。那声音低沉却有力。


 “긴 꿈을 꾼 것 같아요….”
“好像做了个很长的梦……”

 “무슨 꿈?”  “做了什么梦?”

 “전 나무 정원을 졸업했어요. 오크마로 돌아가서, 동료들을 만나고, 티탄과 싸우고, 검은 물결에 맞섰어요.”
“我从树艺学院毕业了。回到橡木镇,见到同伴们,与泰坦战斗,对抗了黑色浪潮。”


 양볼이 간지러웠다. 몇 번 흐려진 시야를 갈무리한 뒤에야 그것이 머리카락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무 그늘이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 그물처럼 드리워진 그림자가 빛을 쥐고 있었다. 아무리 해봐도 절대 잡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脸颊发痒。视线模糊了几次后才意识到那是垂落的发丝。树荫遮蔽了阳光。网状的影子攥着光线。明明知道无论如何也抓不住。


 “키레네…….”  “克列涅……”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没有回应传来。


 “내가 어른이 되어버리는 꿈을 꿨어. 영웅이 되는 꿈을 꿨어….”
“我梦到自己长大成人了。梦到自己成为了英雄……”


 그는 검은 물결이 휩쓸고 지나간 곳에 서 있었다. 기억에 흐릿한, 한때 존경하던 사람이 찬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표정은 평온하고, 한 손엔 총을 든 채. 죽음을 받아들인 그 표정이 이 사람 나름의 비웃음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남자를 의자로 옮겼다. 그리곤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원하는 답을 결코 주지 않았던 현자를. 몸에 맞지 않는 넓은 의자에 앉은 남자는 몰락한 왕 같았다. 
他站在黑色浪潮席卷而过的地方。记忆中模糊的、曾一度敬仰之人正倒在冰冷的地上。表情安详,一手持枪。那接受死亡的神情让他觉得或许正是此人特有的嘲讽。他毫无想法地将男人挪到椅子上。然后久久凝视着他。这位从不给予所求答案的先知。坐在不合身的宽大椅子上的男人,宛如陨落的君王。

 세르세스의 불씨. 회수해야만 해.
瑟曦的余火。必须回收。

 그러나 그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눈앞의 남자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못했다. 갑자기 쉬고 싶었다. 그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고 싶었다. 으깬 나뭇잎 냄새가 기억을 뚫고 풍겨왔다. 
然而他久久无法动弹。连一根手指都碰不到眼前的男人。突然想休息了。想把脸埋进他的膝盖,闭上眼睛。被碾碎的树叶气味穿透记忆飘散而来。


 “파이논, 또 기억나는 건?”
“派农,又想起什么了吗?”


 학자의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끌어내렸다. 이제는 숨쉬는 것도 버거웠다. 겨우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내쉰 뒤, 그는 몸을 비틀었다. 차가운 손이 눈 위를 덮었다. 이상하게도 그 한기가 고통을 경감시켰다. 
学者的声音将他拉回现实。此刻连呼吸都变得艰难。他勉强吸进一口气又呼出,随后扭动身躯。冰冷的手覆上双眼。奇怪的是,那股寒意竟缓解了痛楚。


 “선생님, 죄송해요, 죄송해요…….”  “老师,对不起,对不起……”


 눈두덩을 덮은 손이 엄지를 움직여 이마를 쓸어내렸다. 그 손길이 닿는 곳마다 그는 자신의 몸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깨달았다. 
覆盖眼睑的手移动拇指,拂过他的前额。那触碰所及之处,让他意识到自己的身体有多么滚烫。


 “쉿, 이제 다 괜찮아. 다 끝났어. 넌 악몽을 꾼 거야.”
“嘘,现在都没事了。一切都结束了。你只是做了场噩梦。”


 악몽?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근처에서 익숙한 토론하는 소리와 낡은 책 냄새, 초여름 태양의 냄새가 났다. 기시감이었다. 그가 고민하고 과제 때문에 밤을 세우고 친구를 만나고 은사를 만났던 그곳. 아, 이제 기억이 났다. 그들은 늦은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분명 선생님은 또 연구하느라 밥을 굶으셨을 테니까. 마음 같아서는 포만감이 있는 샌드위치 따위를 가져가고 싶었지만, 선생님이 싫어하실까봐 간단한 것들만 챙겨 왔었다.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그는 아직 구세주가 아니었다. 불씨를 사냥하는 괴물은 더더욱 아니었다. 마음껏 고민하고 마음껏 방황할 수 있었다….
噩梦?阳光正倾泻而下。附近传来熟悉的讨论声,夹杂着旧书的气味和初夏阳光的气息。既视感袭来。那里是他曾因烦恼课题而通宵达旦、与友人相见、邂逅恩师的地方。啊,现在想起来了。他们当时正在吃迟来的午餐。老师肯定又因为埋头研究而饿着肚子。虽然心里想着该带个饱腹感强的三明治过去,但又怕老师不喜欢,最后只简单准备了些食物。时间还很充裕。那时的他还不是救世主。更不是狩猎火种的怪物。可以尽情烦恼,尽情彷徨……


 “피곤하다면 잠들어도 좋아. 수고했어, 파이논.”
“如果累了就睡吧。辛苦了,派农。”

 “선생님, 수업이 시작될 때, 다시 깨워 주세요….”
“老师,开始上课的时候,请再叫醒我……”



 

 수익은 전무했다.  收益几乎为零。

 아낙사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던 남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꽃바다 사이로 빛무리가 되었다가, 이내 그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阿纳克萨抬起头。原本枕在他膝上的男子已消失得无影无踪,化作花海间的光晕后,连那光晕也渐渐看不见了。

 대화로 알아낸 정보가 너무 적었다. 불을 훔치는 자는 이미 사라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게다가 깨운 것이 미안할 정도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通过对话获取的信息实在太少。偷火者已濒临消失边缘,而且被唤醒时痛苦得令人心生愧疚。


 “선생님!”  “老师!”


 하늘을 걷던 카스토리스가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正在天际漫步的卡斯托里斯小跑着向他靠近。


 “괜찮으세요? 저 자는….”
“你还好吗?那个人……”

 “난 괜찮아. 전부 지켜보고 있었나?”
“我没事。你一直在看着这一切吗?”


 소녀는 가볍게 눈을 깜박였다. 
少女轻轻眨了眨眼。


 “선생님은 끼어드는 걸 싫어하시니까요. 하지만 위험할까 봐 걱정돼어서….”
“因为老师不喜欢别人插手。但我担心会有危险……”


 그는 닿을락 말락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카스토리스는 분명 불을 훔치는 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시야를 가리기 위해 일부러 머리카락을 늘어트려 숨겼으니까. 
他的手几乎要触碰到她的发丝,却又悬在半空。卡斯托里斯肯定没能看清盗火者的面容——她故意垂下长发遮挡视线,就是为了不让他看见。


 “그 사람은 어떻게 찾으셨어요? 만일 이곳에 위험이 생긴 거라면,”
您是怎么找到那人的?如果这里真出现危险的话,

 “진정해. 그럴 가능성은 낮아.”
冷静,这种可能性很小。


 어떻게 찾았느냐고? 그는 산책 중이었다. 꽃바다를 벗어날 정도로 오래 걸었다. 스틱스 강을 따라, 어둠이 내린 들판을 걸어내려갔다. 그때, 발에 치인 것이다. 물밖으로 튀어나온, 창백하고 푸른 살결이. 한둘이 아니었다. 검은 복면을 쓴 가면의 형상이 물속에 바글바글했다. 소임을 다가고 버려진 인형, 혹은 마네킹처럼, 그것들은 거기서 잊혀져가고 있었다. 
怎么找到的?他当时正在散步。走了很久,久到远离了花海。沿着冥河行走,穿过暮色笼罩的原野。就在那时,他踢到了——从水中突兀刺出的,苍白泛青的肢体。不止一两具。戴着黑色面罩的假面在水下密密麻麻漂浮着。像完成使命后被丢弃的人偶,或是服装模特,它们正在被世界遗忘。

 아낙사는 그 중 하나를 주워왔을 뿐이었다. 
阿纳克萨只是捡起了其中一个而已。

 파이논은 구세주가 아니다. 
派农并非救世主。

 살아 있었더라면, 그는 시간을 두고 그를 관찰했을 것이다. 그의 변화를, 성장을, 심리를 들여다보고 사무적인 문장으로 정리해 학생 명부에 적었을 것이다. 
倘若他还活着,定会花时间观察他。审视他的蜕变、成长与心理活动,用事务性的语句整理后记录在学生名册上。

 하지만 이젠 너무 늦었지. 
但现在为时已晚。

 재창기의 여명이 다가온다. 그때가 되면 아낙사고라스라는 인간은 완전히 소멸할 것이다. 영원히 고민해 왔고, 답을 얻었다고 생각해 이승을 떠났지만 지식을 갈구하는 마음은 결코 충족되지 못했다. 
再创纪元的黎明即将来临。到那时,名为阿那克萨戈拉的人类将彻底消亡。他终生苦思冥想,自认为寻得答案后离开尘世,但渴求知识的心灵却从未得到满足。

 케팔, 대체 우리는, 나는, 너는 누구일까?
凯法尔,说到底我们是谁,我是谁,你又是谁?

 우둔한 학자더라도, 불안정한 황금이더라도 그들은 신이 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자신들도 모르는 질문을 후대의 인간들에게 뿌려야 했다. 
即便是愚钝的学者,或是不稳定的黄金,他们都不得不成为神明。并且必须向后世的人类撒下连他们自己都不知晓的问题。

 아낙사는 웃음을 터트렸다. 옆에서 카스토리스가 움찔하며 놀라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는 신경쓸 수 없었다. 
阿纳克萨突然放声大笑。虽然能感觉到身旁的卡斯托里斯因惊吓而颤抖,但他已无暇顾及。

 손틈 사이로 녹아내린 황금이 빠져나간다. 
从指缝间熔化的黄金正不断流失。

#스타레일#아낙파이  #星穹铁道#阿娜克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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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7

    선생님의 멋진 글 너무너무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훌륭한 필력과, 실제 인게임의 아낙사와 파이논이 했을 법한 말과 행동, 캐릭터들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고민이나 갈등마저 완벽히 그 캐릭터 자체를 써내려가시는 캐릭터 해석력에 읽는 내내 정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정말 좋아하는 두 캐릭터들의 커플링으로 이렇게나 멋진 글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기쁘고, 멋진 글을 남겨주신 선생님께도 너무너무 감사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오후에 처음 읽고부터 줄곧 댓글 남기고 싶었는데, 어떤 말을 드려야 할지 고민하다 늦은 새벽에라도 살짝 댓글 남겨봅니다!
    老师的精彩文章我读得津津有味🥺 老师出色的文笔,以及游戏中 Anak 和 Pyon 可能说出的台词和行动,甚至角色内心深处的烦恼与冲突,都完美地描绘出角色本身,阅读时让我完全沉浸其中!能以我最喜欢的两位角色的 CP 看到如此精彩的文章,真的非常开心,也想对留下这篇佳作的老师表达万分感谢🥹 从下午初次阅读后就一直想留言,但纠结该说什么才好,直到深夜才终于鼓起勇气留下评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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