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보다 못하구나 역시."


의자를 뒤로 젖혀 쉬고 있던 刘知珉이 겨우 눈을 뜨고 손목 시계를 확인했다. 12시 32분. 아직 점심시간이었다. 불청객을 마주치지 않으려면 진작 문을 걸어뒀어야 했는데. 대꾸할 힘도 없어 반대쪽으로 의자를 돌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목이 아프다 싶더니 업무를 하는 동안에는 결국 열까지 올라왔다. 급한대로 책상을 뒤져서 겨우 찾은 해열제를 먹기는 했지만 어째서인지 몸은 축축 늘어졌다. 잠을 좀 자면 나아질까 싶어서 점심을 거르고 사무실에 남아 있던 건데 어떻게 알고 불쑥 나타났는지.


"구내 내려갔는데 너희 수사관님이랑 계장님만 보이잖아. 그래서 유 프로 오늘 출근 안 했냐고 물어봤는데, 아까부터 콜록거리기다가 뻗었다나 뭐라나. 혼자서 궁상 떨 게 뻔해 와봤더니 역시나네요. 감기 옮기지 말고 그냥 싸게싸게 조퇴하세요. 이 갸륵한 선배의 마음을…듣고 있니?"


듣고 있을 것도 없었다. 정말 쉬고 싶었다. 지금은 그래야만 한다. 당장 한시간 뒤에는 참고인 조사가 있었고, 조사를 마친 뒤에는 자료를 토대로 보고서를 만들어 오늘 중으로 부장에게 검토 받아야 했다. 한가롭게 농담 따먹기 할 시간이 없었다. 刘知珉은 뜨거운 숨을 뱉어내며 눈가에 팔을 올렸다.


"살다보면 삐끗하는 날도 있고 그런 거지. 재판 진 게 대수냐. 어차피 항소했다며, 그거 준비 잘하면 되는 거야. 비슷한 판례 몇 개 찾아뒀는데 메신저로 보내줄게."

"…선배."

"왜요."

"…나 하루만 재워주라."

"…뭐세요?"


의자가 빙글거리며 돌아갔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참을 새도 없이 앓는 소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갔다. 刘知珉이 허벅지에 떨어진 팔을 겨우 들어올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너 진짜 무슨 일 있니? 설마 애인이랑 헤어졌어?"

"선배 말대로 옮길까봐 그래요…"

"뭐를? 재수?"

"감기요 이 사람아."

"그거랑 외박이랑 무슨 상관…동거해 너?!"


제발 목소리 좀. 말을 끝마치지 못한 刘知珉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해열제를 먹었는데 아직까지도 온 몸이 뜨끈뜨끈했다. 刘知珉이 머릿속을 헤집어 단어를 고르다 가까스로 그럴듯한 변명을 꺼내뒀다.


"뭐래…집에 유지현 와 있어서 그래요."

"유지현이 누구…친언니?"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아픈 거 알면 입원해야 된다면서 유난 부린단 말이야…"

"그러면 나는 집으로 돌려보내는 게 맞는 것 같다만."

"빈 손으로 안 가요."

"한우?"

"카드 줄 테니까 알아서 하시고."

"야 知珉아."

"뭐요 또."

"전화 와."

"스팸이에요."

"유진인데?"

"그것도 스팸이에요."

"너는 스팸을 굳이 저장까지 해놓으세요?"

"그래야 안 받지."


刘知珉은 홀드버튼을 누른 핸드폰을 구석으로 던져두고 옆에 있던 약통을 집어들었다. 비타민이 무슨 만병통치약이냐. 여자가 못마땅하다는듯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잠을 잘 자는 것도 아니고, 밥을 제대로 챙겨 먹는 것도 아니고,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최근에는 거의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몸을 굴렸다. 때마침 金旼炡도 스케줄로 인해 집을 자주 비웠다. 틈이 나는 대로 주고 받던 연락도 부쩍 줄어들게 됐다. 그러다 보니 이따금씩은 답장을 보내놓고도 한동안 손에서 핸드폰을 내려두지 못했다. 

딱히 기다리는 건 아니었지만 괜히 속으로 몇 번씩 문자를 곱씹어 봤다. 그러다 인기척이 느껴지면 딴청 부리지 않은 척 서류에 의미 없는 밑줄만 벅벅 그었다. 밀어내지 말라고 했으니 집으로 찾아오는 金旼炡에게 사소한 참견을 얹을 수는 없었다.  꽤나 번잡스러운 동선이 신경 쓰여도 딱 거기까지였다. 이렇게라도 얼굴을 봐야 되겠다는 金旼炡을 앞에 두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옆자리를 내어주고, 팔베개를 해주고,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등을 토닥여주는 것 뿐이었으니. 

본의 아니게 들켜버린 것들이 많았다. 한유진의 존재, 한유진과 차석현의 관계, 한유진에 대한 미련까지. 그러니 지금은 아픈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적어도 金旼炡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어떤 생각을 할지 너무도 뻔하기만 했고, 그것이 아주 틀리다 할 수도 없었다. 刘知珉은 맥없이 숨을 고르다 이마 위에 팔을 올렸다.


"진짜 우리 집에서 자고 갈 거야?"

"기왕이면 운전도 해주실래요."

"아무렴요, 너한테 맡겼다가는 퇴근길이 황천길이 되겠지."

"의외로 좋은 선배네요."

"반하지마라. 임자 있는 사람이니까."

"정말로 결혼할 거에요?"


여자는 정수기 옆 서랍을 뒤적여 메밀차과 간식을 각각 꺼내들었다. 종이컵에 뜨거운 물을 받아 가지고 와서는 포장지에서 꺼낸 티백을 그 안에 넣어뒀다. 저거 金旼炡이 준 건데. 입 밖으로 꺼내둘 수 없는 말은 한숨과 함께 삼켜두고 건네는 종이컵을 받아들었다. 머리는 여전히 지끈거리기만 했다.


"나이가 나이잖아."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쿠키를 밀어주는 척한다. 단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 예의상 저러는 거였다. 아픈 와중에도 뻗대고 싶은 심보가 불쑥 튀어 올라 刘知珉이 여자의 손에 들린 과자를 가져가 단번에 먹어치웠다. 거친 모래를 씹어 삼긴 것처럼 입 안이 까끌거렸다.


"선배."

"뭐요."

"청첩장은 언제 돌릴 거에요."

"우린 아직 상견례도 안 했는데요."

"그거 나왔으면 끝났다고 봐야겠네요."

"…너 혹시 예전에 바람 어쩌구한 거 설마"

"첫사랑한테는 축의금을 얼마나 해야 돼요?"

"예? 누구요?"

"헛소리에요. 그냥 흘려들어요."


대충 손을 휘적이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주변이 핑 돌았다.가까스로 책상을 짚고 버티어 섰다. 여자는 그런 刘知珉을 올려다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물 떠다 줘? 딱히 갈증이 나지 않았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서글펐던 것도 같다. 이런 얘기를 터놓을 사람이 고작해야 직장 선배가 전부라니. 그게 아니면 저 영감님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刘知珉은 인상을 찌푸린채 왼손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종이컵을 내려두는 여자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병원 안 가봐도 되겠어?"

"약 먹고 쉬면 금방 나아요."

"첫사랑 얘기는 또 뭔데."

"말한 그대로에요."


그리고는 컵에 든 것을 곧장 비워냈다. 나름 신경써서 미지근한 물을 떠다준 걸 텐데 몸이 뜨거워서 그런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썩 좋지 않았다. 한 손으로 종이컵을 구겨 책상 아래 휴지통에 던져두고 흐트러진 서류를 모아 구석으로 치워뒀다. 여자는 그런 刘知珉을 지켜보다 책상 정리를 거들었다. 첫사랑 결혼한대냐. 넌지시 묻는 폼은 그다지 조심스럽지 않았다. 

모니터 아래에 있던 피규어는 자취를 감추었다. 키보드 밑의 손목보호대도 마찬가지였다. 주말이 끝나고 출근하자마자 데스크 캘린더 안에 넣어뒀던 사진도 파쇄기에 갈아버렸으니. 적어도 사무실 안에서는 한유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었다. 진즉 바꿨어야 할 취향이었다. 애저녁에 버렸어야 할 미련이었다. 텅 빈 책상을 살펴보던 刘知珉이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어느덧 점심시간도 10분 밖에 남지 않았다.


"6시에 바로 퇴근할 거니까 느작거리지마."

"여부가 있겠나요."

"야 그런데 나는 뭐 감기 옮아도 되냐?"

"갈 때 소독제도 살거에요."

"이거 상태가 심상치 않다 싶으면 바로 119 부를 거니까 그렇게 알아."

"유난이라니까 이 쪽도…"


출입문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잊지 않고 서랍에서 과자를 챙겨든다. 刘知珉은 딱하다는 듯 여자를 바라보다 고개를 가로젓고 핸드폰 화면을 건드렸다. 


"선배."

"쿠키 그거 얼마나 한다고 쪼잔하게."


궁시렁거리던 여자가 주머니에 넣어뒀던 과자를 꺼내 다시 서랍 안에 넣어뒀다. 


"도 검사님이랑 싸운 걸로 합시다."

"야 니가 애인이랑 사이 안 좋은 걸 왜 우리까지,"

"나는 취한 선배 집에 데려다 주다가 시간이 늦어서 어쩔 수 없이 자고 가는 걸로."

"누가 법조인 아니랄까봐 알리바이부터 확보해두는 거 봐라."


이번에는 티백을 한손 가득 움켜쥐고 서랍을 닫는 것이었다. 刘知珉은 야트막한 헛웃음을 터트리며 안경을 바로 썼다. 흐릿했던 시야가 불필요할 만큼 선명해졌는데도 어지럼증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히는 문을 쳐다보던 刘知珉이 탁한 숨을 뱉어냈다. 잠깐 스쳐 지나가는 감기는 아닌 모양인지 타이레놀을 먹어도 좀처럼 열기가 가시지 않았다. 그러니 오늘은 외박을 하는 게 맞다. 분명 金旼炡은 열 일 제쳐두고 병간호를 하려 들 터였다. 본인부터 챙겼으면 좋으련만 가끔은 너무하다 싶을 만큼 대책 없고 무모하게 굴었다. 

요즘은 그런 金旼炡이 고맙다기 보다는 걱정이 됐다. 앞뒤 생각하지 않고 매 순간마다 진심을 쏟아 부어버리는데 과연 남는 게 있을까. 되돌려 받지 못할 마음이라는 건 본인도 모를 리 없었다. 언젠가는 분명히 정리해야만 하는 관계임을, 金旼炡 또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저와는 달리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이었다. 재미로 시작한 만남은 딱 그정도에서 그쳐야 한다. 버려지는 건 刘知珉이다. 그건 당연하면서도 익숙한 결과였다. 이미 겪어 봤는데 두 번이야 어려울까 싶었다. 더욱이 이번에는 우선순위가 지극히 확실했으니, 불청객은 때가 되면 사라져야 마땅하다. 바람이란 그런 거다. 오래 머물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게 순리였다. 그래야 누구든 다치지 않는다. 아프지 않고, 상처받지 않는다. 흔들리는 건 잠깐이다. 刘知珉은 창밖을 내다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게, 맞는 거다.










주인이 부재중인 집에 혼자 머무는 게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침실 문고리를 잡아 돌린 金旼炡은 깜깜한 안을 살펴보다 발걸음을 돌렸다. 거실이고 부엌이고 괜히 기웃거렸지만 인기척이라고는 머리카락 한 올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냉장고에서 생수 하나를 꺼내들어 소파로 돌아왔다. 습관처럼 리모컨을 집어들고 티비부터 켰다. 적막한 공간에 금방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어찼다. 볼륨을 최대한으로 줄인 다음에는 자세를 고치며 쿠션을 끌어안았다. 

창문을 때리는 빗방울은 어느덧 제법 굵어졌다. 택시 타고 올 때까지만 해도 부슬비였는데, 밤새 한바탕 크게 쏟아질 모양인지 내리붓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늦게까지 야근한 뒤에 운전해서 올 것을 생각하면 지검 근처에 있다던 선배의 집에서 자고 오는 게 나을 것도 같았다. 간만에 촬영이 딜레이 없이 제시간에 끝나 자정 전에 들어왔지만 아무튼, 배우들끼리 술 한잔 하자는 제안도 거절하고 온 거지만 어쨌든. 지방으로 내려가기 전까지는 자는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눈에 담고 싶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그마저도 상황이 녹록치 않았다. 

방송국의 편성 문제로 인해 첫방이 앞당겨진 만큼 현장 스케줄은 배로 빡빡해졌다. 감독은 여름이라 해가 길다는 점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동 트자마자 일단 카메라부터 돌렸다. 덕분에 스탭은 물론이고 배우들의 퇴근 또한 점차 희미해져갔다. 일단 출근했다하면 각자 분량을 한꺼번에 몰아서 찍느라 차 안에서 쪽잠 자며 대기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주연을 맡은 金旼炡 역시 그에 예외일 수는 없었다. 바빴다. 실은 바쁘다라는 단어에 채 담지 못할 정도로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가고 있다. 눈 깜짝할 새에 오늘이 끝났고, 또 잠깐 숨을 돌리면 내일이 찾아왔다. 끼니를 거르는 건 그다지 대수롭지 않았다. 잠을 푹 못 자는 것도 그럭저럭 버틸만 했다. 


  "…보고 싶은데."


 그러나 이것만큼은 도무지 적응이 안 됐다. 金旼炡은 너덜너덜해진 대본집을 허벅지에 내려두고 핸드폰 잠금을 풀었다. 이제는 아주 어색하지 않은 그 이름과 주고 받았던 문자를 속으로 찬찬히 읽어봤다. 

검사님 오늘도 야근해요? 조금 할 것 같아요. 저는 9시면 집에 들어갈 것 같아요. 아 그래요 푹 쉬어요. 언제쯤 와요 검사님은? 저번에 식당에서 저랑 같이 왔던 사람 혹시 기억해요? 옆방 선배님이요? 남자친구랑 다퉈서 속상하다고 술을 좀 많이 마실 것 같아요. 검사님도요? 술동무는 해주려고요. 제가 이래저래 신세 진 게 많아서요. 많이 늦어요? 자고 갈 수도 있어요 그 선배 집에서. 왜요? 지검이랑 가깝기도 하고, 저도 아침에 일찍 출근해서 오늘 못한 거 마무리하려고요. 그렇구나. 미안해요 기다리지마요. 아니에요 저 신경 쓰지 말아요, 그런데 술은 적당히 마셔요.

읽음  표시 옆에 붙어 있는 숫자를 확인했다. 18: 28 그 아래로 덧붙여진 말풍선은 없었다. 엄지로 화면을 쓸어보다가 고개를 뒤로 젖혀 새하얀 천장을 올려다봤다. 피곤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당장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金旼炡이 마른세수하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핸드폰을 쥔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다 잠금화면 상단에 박힌 숫자를 중얼거렸다. 아홉시 십칠분.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자 금방 자판이 떠올랐다. 金旼炡은 더듬거리며 자음과 모음을 순차적으로 누르다갸 핸드폰 하단부분을 위로 밀었다. 즐겨찾기에 저장된 이름을 빤히 바라보더니 엄지를 옮겼다. 知珉언니. 다시금 빠르게 전환되는 화면에서부터 단조로운 통화 연결음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보고 싶었다. 그런데 당장은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랬다. 목소리는 들어야 마음 편히 잠을 잘 것 같았다. 刘知珉만 없는 刘知珉의 집이 유독 넓어서, 고요해서, 쓸쓸해서. 金旼炡이 티비 볼륨을 하나 더 높인 뒤에 리모컨을 쿠션 옆으로 치워뒀다.


 - 어디에요


더불어 그와 엇비슷한 타이밍에 연결음이 끊겼다. 기분 탓이겠지만 거실이 아까보다는 조금 더 환해진 것도 같았다. 金旼炡은 핸드폰을 고쳐 잡으며 대답했다. 맞춰봐요. 그래놓고는 잠시도 참지 못하고 본인이 먼저 선수를 쳤다. 검사님 침실 화장실 불 안 끄고 갔더라. 제 딴에는 나름 농담을 던진 건데 건너편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미안하다며 사과를 건네는 것이었다. 뻘쭘해진 金旼炡이 보일 리도 없는데 손을 휘적이며 아니라고 대꾸했다. 


- 공판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집이 좀 엉망이에요

  "엉망이라는 단어의 뜻이 제가 모르는 사이에 바뀐 건 아닐텐데"


원체 인테리어는 깔끔한 편이었으며, 얼마 없는 물건 또한 늘 그러했듯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金旼炡은 집안을 쭉 둘러보고서는 리모컨을 집어 티비를 껐다. 까맣게 점멸된 화면 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제 모습이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외로움을 타는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金旼炡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소파를 벗어났다. 


  "아무튼 그건 그거고, 그래서 검사님은 지금 어디에요? 술집 치고는 조용하네요."


복도를 걸어 침실에 다다르면 막 집에 왔었을 때는 느끼지 못한 디퓨저 향이 코끝을 스쳤다. 고작 전화 한 통으로 달라지는 게, 참 많았다.


 - 밖에서 마시면 흐름 끊긴다고 아예 술 사들고 집에 왔어요

  "소주? 위스키?"

 - 둘 다요

  "선배님도 주량이 좋으시구나."

 - 그럭저럭나쁘지는 않아요


金旼炡은 매트리스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터 앉아 다리를 위아래로 휘적였다. 밥은 먹었어요? 刘知珉의 질문에 얕게 웃으며 그렇다 대답했다. 검사님은요? 바로 되묻자 刘知珉은 지검 근처에서 해결하고 들어왔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끼니를 거르지 않았다는 것에 남몰래 안심하며 스탠트 스위치를 가뿐히 반대로 넘겼다. 만약 누가 봤다면 다 큰 성인이 밥 챙겨 먹는 게 대수냐고 비웃을 수도 있었다. 물론 金旼炡에게는 한 귀로 흘려 듣고 말 타격 없는 야유겠지만. 버튼을 몇 번 만지작 거리며 밝기를 조정했다. 활짝 열린 방문 너머에서 들어온 불빛에 또다른 조명이 더해지니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눈이 부실 정도로 쨍하지도, 적적할 만큼 어두컴컴하지도 않은 적당한 조도였다.


 "지금도 술 마시고 있어요?"

- 전화해도 돼요, 집주인도 본인 애인이랑 통화하러 갔어요


문장과 물음표 사이에 슬그머니 감춰뒀던 염려를 손쉽게 발견한다. 오늘도 刘知珉은 金旼炡 머리 위에 있다. 중증은 중증이다. 이제는 그마저도 다 좋다니.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냐며 기분 나빠했던 게 고작 한두 달 전이었다. 밤낮없이 붙어 있으려 해서 그랬을까. 몸도, 마음도 너무 쉽게 내어줬다. 몰랐는데 꽤나 손을 타는 편이었던 것 같다.


 - 드라마 촬영할 때는 주중 없이 바쁘나봐요

  "방송국 사정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대체로 일정이 점점 타이트해지더라고요. 일찍 끝나면 제작비도 그만큼 세이브 되고, 후작업할 시간도 늘어나니까요."

  - 생각했던 것보다 워라밸이 무척 별로구나

  "검사님이 할 말은 아니지."

  - 부정은 못 하겠네요

  "하여튼검사님은 안 아파도 아프다고 꾀병 좀 부릴 필요가 있어요. 요령도 피우고, 가끔은 땡땡이도 치고."


잔소리를 해도 그때 뿐일 것이다. 제가 아는 刘知珉은 아파도 안 아픈 척 할 사람이었다. 알아서 잘하는 것처럼 보여도 의외로 어떤 부분에서는 허술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서 때때로는 그 아킬레스건에 적힌 이름을 목격했다.


  "검사님."

  - 네

  "내일은 집에 올 거죠?"


 스피커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金旼炡의 입이 마른다는 것은 어쩌면 알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본인 집에 오는 걸 이렇게까지 고민할 일인가. 쓴웃음을 삼킨 金旼炡은 푹신한 이불보를 매만지다 바닥을 딛고 일어났다. 침대를 빙 돌아 반대편으로 와서는 협탁만한 사이즈의 미니 냉장고로 손을 뻗었다.


  - 갈 거에요

  ""

  - 야근 안 하고 일찍

  ""

  - 6시 되자마자 짐 싸서 퇴근할 테니까


 투명한 유리창 반대편에는 가지런히 줄 지어 늘어선 페트병이 보였다. 잘못 읽었나 싶어 핸드폰을 들지 않은 손으로 눈도 몇 번이나 부볐다. 그럼에도 똑같았다. 생수병을 휘감은 라벨의 국적이 바뀌어 있었다. 유럽에서 남태평양으로. 조심스럽게 유리문을 연 金旼炡이 페트병 하나를 손에 쥐었다.


 - 너무 보고싶어 하지는 마요


술은 내가 마셨던가. 별안간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귓가를 타고 선배로 추정되는 이의 목소리가 아득히 넘어왔다. 먼저 끊어야 할 것 같아요. 잘 자고 스케줄 조심히 다녀와요. 그 인사가 마지막이었다. 기척도 없이 등장한 고요함이 금세 침실을 물들였다. 金旼炡은 손에 쥔 것을 빤히 바라보다 제 뺨에 병을 가져다댔다. 차갑다 못해 시린 기운이 뺨을 타고 정수리까지 닿는 것 같았다. 뒷목이 저릿했다. 그럼에도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金旼炡은 刘知珉을 만나지 못했다. 대신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문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다소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주아주 불필요하며, 대단히 더없이 달갑지 않은 경험이었다. 

처음에는 그날 투정을 부려서라도 刘知珉을 집으로 불러들었어야 했나 하고 내내 후회했다. 그 다음에는 바다 건너 이억만리 타국도 아니고 같은 서울 하늘 아래에 있는데도 만나러 갈 수 없는 현실을 원망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씁쓸하지만 눈앞의 상황을 받아들이며 하루에 한 번 전화하는 게 어디냐며 체념했다. 그래, 시차는 없으니까. 다같이 점심 먹을 때면 刘知珉도 쉬고 있으니까, 내가 촬영 대기하며 올려다 보는 달이 刘知珉도 비추고 있을 테니까.

대학 측에서 협조 기간을 축소라도 했는지, 감독은 강의실을 배경으로 하는 장면들은 최대한으로 몰아서 찍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이현의 소속사 대표는 간식을 사서 촬영장을 찾은 김에 감독에게 넌지시 물어보기도 했다. 혹시 저희 여기서 촬영 다 끝내고 지방 내려가는 건가요? 

탁 감독은 그늘막 아래 앉아 휘핑크림을 휘저으며 연신 앓는 소리만 늘어놓았다. 국장에서부터 본부장까지 하루라도 빨리 작업 시마이 치고 제발(제작 발표회) 잡으라고 난리에요, 윗선에서 쪼는데 저희가 별 수 있나요, 오죽하면 메모리 미리 받아서 실시간으로 편집하겠냐고요. 시청률 하락, 광고 수익 감소 등의 이유로 드라마국이 개편되면서 기존에 정해뒀던 편성마저 갑작스레 꼬여버렸다는 건 대표도 익히 아는 터라 별다른 반박은 않았다. 그저 우리 애 좀 잘 신경 써 달라며 탁 감독과 맞잡은 손만 거듭 흔들었다. 

소속사 대표가 왔다 간 마당에 조기 크랭크 업을 핑계로 배우들을 밤낮없이 붙잡아 두는 것도 면이 안 사니 탁 감독은 스탭들을 불러모아 주간 스케줄을 재조정했다. 金旼炡의 매니저는 그 모습을 구경하다 오 대표는 리딩 때부터 지금까지 코빼기도 안 보이면서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재계약을 밀어붙이냐며 볼멘소리를 했고, 金旼炡은 오피스텔 자체가 세대수도 적은데다가 대부분 실거주 목적으로 매매를 해서 나온 매물이 없다는 공인중개사의 문자에 근처 아파트도 알아봐라는 답장을 보냈다. 

완벽한 동상이몽이었다. 그러니 탁 감독이 선심쓰듯 돌려준 주말을 앞두고 매니저는 데이트는 나중에 하고 집에서 푹 쉬라는 설교를 돌림노래처럼 반복하는 거고, 金旼炡은 알겠다 대꾸하며 디저트 카페에 주문을 넣고, 서초동 근처의 평이 괜찮은 식당을 찾아보는 거다. 마음은 이미 콩밭에 가 있었다.

택시 타고 오피스텔로 향하는 동안에는 줄리엣을 만나러 가는 로미오의 심정을 떠올려 봤다. 한때는 다시 없을 세기의 사랑이라 생각 했는데, 자세히 들여다 보니 그래도 거긴 집안만 반대를 하더라. 반면에 요즈음은 밖에 나가서 이름 말하는 것도 조심스럽다는 여자친구를 차마 붙잡을 수 없었던 金旼炡은, 이니셜 박힌 찌라시 들고 와서 이거 너랑 그 친구 아니냐며 노발대발하는 대표를 바라보다 끝내 정태준의 여자친구가 되기로 결심한 金旼炡은, 여자 좋아한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팔자에도 없는 공개연애를 선택한 金旼炡은, 사랑을 두고 포기해야 할 것이 참 많기도 했다. 한참 방송 중인 작품에 누를 끼칠 수도 없었고, 이제 겨우 인정받기 시작한 연기를 놓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강산이 바뀌려면 아직 한참 멀었는데, 金旼炡은 지난날 소란을 그새 잊어버린 듯 굴었다. 주변에서 걱정하는 걸 뻔히 알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고 있다. 한 번 크게 데여봤으니 다음에는 몸 사릴만도 한데, 어째 날이 갈수록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며 구차한 변명만 자꾸 덧댔다. 

누군가는 비웃을 무식하고 무모한 애정이었지만 뭐 어떠나 싶었다. 刘知珉이 우는 거 본 적 있어요? 없죠, 그러면 말을 마요. 刘知珉이 웃는 건 본 적 있어요? 그러면 말이 좀 통할 수도 있겠네. 세상을 이분법으로 구분하며 그 기준에는 무조건적으로 刘知珉을 뒀다. 그동안 쌓아 올린 커리어나, 레드카펫 깔린 앞날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말이다. 대신 속 편히 저울질이나 했다. 철천지 원수 집안의 자식에게 마음 뺏긴 애보다는 그래도 제 쪽이 더 괜찮지 않나, 하는. 과연 딱 스물 여섯답게 철 없었다.

구닥다리 비극 속 주인공과 불행배틀 하다보면 서초동 오피스텔까지는 금방 도착했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에는, 로비를 지나치는 발걸음에는 일말의 어색함이 없었다. 누가 봐도 손님의 모습은 아니었다. 15층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저녁 메뉴를 고민하고, 반질반질한 대리석 복도를 걸으면서는 주말까지 휴가를 받았다는 문자를 보냈다. 답장은 2분 뒤에 돌아왔다. 외식할까요 아니면 포장해서 들어갈까요. 집에서는 식기를 셋팅하고 치워야 하니 밖에서 먹는 게 서로 편했지만, 제대로 대화도 못 나눌 걸 생각하면 차라리 잠깐 번거로운 게 나았다. 

안으로 들어온 金旼炡이 운동화를 벗으며 자판을 눌렀다. 검사님만 괜찮으면 시켜 먹을. 그러나 문장을 완성시키지는 못했다. 제가 뒷정리 할 거니까 그냥 집에서 먹어요. 조금, 아니 실은 많이 얼떨떨했다. 연달아 핸드폰이 진동한다. 길이는 짧았지만 틈 없이 계속 이어지니 마치 전화가 오는 것도 같았다. 旼炡씨가 먹고 싶은 거 시켜요. 금방 갈게요. 쉬고 있어요. 아이스크림은 아마 냉장고에 그대로 있을 거에요. 도착하면 40분쯤 되려나. 이따가 봐요. 

이럴 때는 괜히 스크롤을 끝까지 올려본다. 그러니까, 刘知珉이 刘知珉처럼 실감 나지 않을 때. 남들은 무슨 얼토당도 않는 소리냐고 하겠지만, 그동안 주고 받았던 문자를 같이 읽다보면 한 명쯤은 공감해주지 않을까 싶다. 서서히 바뀌어 가고 있었다. 刘知珉에 대한 金旼炡의 마음만큼이나, 刘知珉이 金旼炡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분명 달라졌다. 때문에 金旼炡은 없지 않아 억울하기도 했다. 그런 刘知珉을 어떻게 안 좋아하고, 덜 좋아하고, 그만 좋아해. 그것이야말로 억지였다. 받은 만큼 돌려주겠다는 사람인데, 그래놓고도 미안하다는 입에 말을 달고 사는 사람인데.

허기가 지는 줄도 모르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대충 아무거나 시킬까 하다가도, 대충 아무거나 먹이고 싶지는 않아서 배달 어플 속 메뉴를 고르고 또 골랐다. 6시가 조금 넘어가자 매니저로부터 전화가 왔다. 旼炡아 저녁은 먹었어? 이제 시키려고. 그래, 끼니 거르지 말고. 언니도 맛있는 거 사 먹어요. 월요일에는 오후에 나가도 될 것 같더라. 웬일로 감독님이 스케줄을 널널하게 빼줬지. 아마 이거 마지막 휴식일 거야. 응? 지방 내려가야 하잖아 우리. 벌써 그렇게 됐어요? 이번 주에 선발대로 먼저 출발한 스탭들도 있다는데 뭐. 金旼炡은 잠시 말을 잃었다. 아무튼 집에서 푹 쉬고, 겸사겸사 짐도 싸놔. 어영부영 알겠다 대답하며 매니저와 통화를 끝낸 뒤에 캘린더를 살폈다.

못해도 삼주는 떨어져 지내야 한다. 오늘도 나흘만에 겨우 만나는 건데, 앞으로는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다는 것이다. 한숨만 연거푸 터져나왔다. 몰래 택시를 잡아탈 수도 없었다. 서울까지 올라오는데만 한나절이 걸릴 는 것은 고사하고, 애초에 매니저에게 발각되지 않고 숙소 근처를 벗어나는 게 불가능했다.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새어나갔다. 진짜 하루종일 붙어 있어야겠네. 물론 다른 날이라고 그러지 않았던 건 아니었지만. 

핸드폰을 챙긴 金旼炡이 거실을 벗어나 현관으로 걸어갔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刘知珉을 봐야 헛헛한 마음이 채워질 것 같았다. 내일 당장 떠나는 것도 아닌데 괜히 조바심이 들었다. 金旼炡은 로비에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발만 동동 굴렀다. 지하주차장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차가 드나드는 입구 쪽으로 고개를 쭉 빼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인기척이 느껴지면 급하게 뒤를 돌아 비상구만 쳐다봤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지검으로 간다고 할 걸 그랬다는 뒤늦은 후회를 곱씹으며 엘리베이터 주위를 빙글빙글 배회했다.

어디까지 왔냐고 전화를 해볼까 하다가도 운전 중일 게 뻔하니 핸드폰으로는 시간만 확인하고 말았다. 1분이 1년 같았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거다. 자기 전에 목소리를 듣는 거나, 얼굴을 보는 거나 거기서 거기니까. 음성통화가 영상통화가 되는 것 뿐이니까. 金旼炡은 무언가를 다짐한듯 주먹을 말아쥐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金旼炡."


잠깐은 망설였다. 모자도 쓰지 않았고, 얼굴을 가릴 만한 무언가가 없어서.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뒷모습만 보고 金旼炡이라는 것을 알아챌 사람이 이 오피스텔 거주자 중 몇이나 될까. 제 기억 속에는 한 사람 뿐이었다.


  "旼炡아."


뒤돌아 서면 어느덧 발치까지 다가와 있는 刘知珉 말고는, 없었다. 원래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꼭 들어맞는 품에 안긴 金旼炡이 얄따란 셔츠를 움켜쥐었다.


  "미안해요…보고 싶었어요."

  "…검사님."

  "안 되는데…"


모르겠다. 미안해서 보고싶었다는 건지, 보고싶어서 미안하다는 건지, 그래서 뭐가 안 된다는 건지, 왜 보고싶어만 해도 사과해야 하는 건지. 아무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직까지 어렵기만 했다. 여전히 쉬운 게 없었다. 刘知珉이 좋은 건데, 刘知珉과 함께 있고 싶은 건데, 刘知珉이 웃기를 바라는 건데, 그게 전부인데. 金旼炡은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정말 내가 이 옆에 머물러도 되는 걸까. 그러나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金旼炡은 한동안은 지하 주자창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刘知珉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미안하다는 말은 끝까지 못 들은 척 했다. 목구멍을 간질이는 속상함은 애써 삼켜버렸다. 지금은 어설픈 추측이나 짐작으로 시간 낭비할 겨를이 없었다. 刘知珉도 마찬가지로 金旼炡을 보고싶어 했다. 그게 전부였다. 그 이상으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고, 그 이하로 의미를 깎아내리지 않았다. 복잡한 머릿속은 이틀 뒤에 비워내면 그만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샵에서 메이크업을 받으면서, 촬영장에서 대기하며 나중에 정리하면 됐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저녁으로 먹을 장어덮밥이니, 돈까스니, 냉우동이니 시키는 것까지는 좋았다. 금요일이지만 배달도 늦지 않게 도착했다. 일하다 온 건 마찬가지면서 刘知珉은 식탁 셋팅에서부터 뒷정리까지 전부 혼자 도맡았다. 손을 다친 것도 아닌데 金旼炡이 거들려고 하면 刘知珉은 정색하듯 얼굴을 굳히고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쥐여줬다. 그러는 본인은 분명히 그 전보다 살이 내렸으면서 오랜만에 만나서 그렇게 보이는 것 뿐이라며 말을 돌렸다. 金旼炡도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속아 넘어갔다. 사흘만에 얼굴을 봤으니까, 주말이 끝나고 헤어지면 언제 다시 볼 지 모르니까, 당장 다음주부터는 지방으로 내려갈 수도 있으니까. 

刘知珉과 보내는 순간이 귀했고 찰나가 아까웠다. 침실과 거실에 딸린 화장실에거 각각 샤워를 하고 나온 뒤에는 본드칠을 해놓은 듯 내내 붙어 있었다. 폭풍을 부르는 정글도, 슬기로운 의사생활도, 아메리칸 스나이퍼도 디지털 병풍으로 이용만 당했다. 틀어 두기는 해도 볼륨은 거의 음소거에 가까울 정도로 작게 낮추었다. 金旼炡이 먹던 아이스크림은 반도 비워내지 못한 채 그대로 녹아버렸고, 刘知珉이 마시던 맥주는 탄산이 다 빠져 미적지근해졌다. 

대화를 많이 나누었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연락은 계속 주고 받았으니, 어제는 동기가 담당하는 사건의 판례를 찾아주느라 늦게 퇴근한 것도, 그저께는 이현이 NG를 많이 내서 자정까지 현장에 남아 있던 것도 전부 알고 있으니 다른 방법으로 그리움을 달랬다. 침실에 들어간 이후로는 시간도 확인하지 않았다. 핸드폰을 식탁과 거실 테이블에 두고 왔다는 것도 다음날 정오에야 알았다. 해가 떠 있을 때는 소파에 누워 가만히 안겨 있었고, 달이 고도를 낮출 때는 침대에서 뒤척이며 새벽을 지세웠다. 그렇게 이성보다는 본능에 충실한 시간을 보냈다.

나른했던 분위기가 삐끗거리기 시작했던 건 金旼炡이 정수기에서 물을 따르다 위에 놓인 약봉투를 발견한 이후였다. 심지어 하루이틀 먹다 말았는지 봉투 안에는 약이 꽤나 많이 남아 있었다.

刘知珉 / 5일분 / 아침 점심 저녁 / 식후 30분/ 서초세브란스의원 / 02-1117-4111 / 서울 서초구 서초로 11-17

金旼炡은 봉투를 뒤집어 약품명과 복약 안내를 찬찬히 읽어봤다. 써스펜이알서방정, 명문록소프로펜정, 엘도스캡슐, 리노에바스티서방캡, 에이클란듀오정 500. 소염 및 진통 해열, 기침, 두통. 핸드폰으로 검색하지 않아도 될 만큼 상세한 설명이었다. 감기 걸렸었구나. 약봉투를 제자리로 돌려두려던 金旼炡이 멈칫하고 앞부분을 재차 확인했다. 주소 아래 적힌 날짜는 4일 전이었다. 간만에 촬영이 일찍 끝났던 그날, 刘知珉이 외박했던 그날, 선배 집에서 술을 마셨다는 그날.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런 거짓말을 할 줄은…정말 몰랐는데. 실소가 절로 새어나왔다.

다 나았으면, 이제 아프지 않은 거면, 그러면 된 거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金旼炡은 바스락거리는 약봉지를 만지작거리다 유리잔에 든 냉수를 단번에 비워냈다. 머리가 띵한 게 단순히 혈관의 수축과 팽창 때문은 아닐 것이다. 차가운 물을 마셨지만 속은 달래지지 않았다. 도리어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