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특별 외전 but 연말개바쁨이슈로 뒷북치기

뇌 빼고 가볍게 읽어주셔야만







바빠?

뭐해

이여주 생각

한가하단 뜻이군 ㅋㅋ

나에 대해서 뭔 생각 했는지

구체적 서술 바람

대낮부터? 곤란한디

긍까 대낮부터 몬 미친 생각을 한거냐고

집가서 뜨겁게 속삭여주께

옆에 부장님 있음 ㅎ

ㅉㅉ

난 지금 사무실에 혼자지롱><

당장 쳐들어가서

뽀뽀박고 싶다 ㅋㅋ

ㅋㅋ😘💋

심 심 해 ㅠ

이여주 5명 vs 5살 이여주

골라봐

당연 전자

엥 감당가능?

예쁜애 5명? 개꿀이지

5살 이여주는 육아 난이도가 좀

그럼

이여주 20명 vs 20살 이여주

흠 ㅋㅋ

이건 20살 이여주

ㅁㅊ 음흉핑;;;

20살 소녀 데리고 뭐할건데;;;;;;

아니 아니

아무것도 안 하지;;

니 스무살 때 나름 귀여웠던 거 같아서 ㅎ

그럼 그때 확 잡아먹지그랫냐

그니까

평생 영원히 후회함

잡아먹을걸 ㅋㅋ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12월 크리스마스 시즌.

이번에는 크리스마스 당일이 월요일이라 총 3일의 연휴가 생겼다. 고로, 재현과 여주의 계획은 이러했다. 23일 토요일에는 영훈 커플을 집으로 초대해 홈파티하기. 24, 25일에는 예약해 둔 풀빌라 펜션에서 둘이 놀다 오기.

내년 하반기에 결혼하기로 확정된 만큼, 올해는 연인으로서 보내는 마지막 크리스마스였다. 재현은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고 무탈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23일 늦은 아침, 차마 믿기 힘든 광경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어으, 죽겠네."


전날 야근이 꽤 피곤했던지라, 입이 찢어져라 하품하며 눈 떴다. 마음 같아서는 더 자고 싶지만 영훈 커플이 점심부터 오기로 했으니 그 전에 집 청소나 해둘 양이었다.

와중, 아침잠 많은 여주는 이불에 파묻힌 채 기척도 없었다. 깊이 자나. 그럼 몇 분이라도 더 재워야지. 별 생각 없이 돌아선 재현은, 씻고 나온 뒤 청소 한바탕 하고 나서야 여주(로 추정되는 이불더미) 앞에 섰다. 슬슬 깨우려고 손 뻗기 직전.


"...?"


의아한 시선이 침대 옆 협탁을 향했다. 평소처럼 놓인 여주의 휴대폰이... 뭔가 이상했다. 아이폰 7 매트블랙? 이 구닥다리가 여기 왜? 여주가 대학교 새내기 시절에나 쓰던 모델이었다. 어제 잠들기 전 여주는 분명 재현이 선물한 아이폰 16 프로를 만지작대고 있었는데.

갑자기 뿅 등장한 옛날 폰을 재현은 떨떠름하게 들어 올렸다. 동그란 홈 버튼을 꾹 눌러 켜니 여러 개 쌓인 카톡 알림이 보였다. 잠시만, 공기계가 아니라고? 극도의 수상함에 곧장 최근 알림을 누르자, 스무스하게 나타난 카톡 대화방. 기어이 입을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정신 나간 대화인지, 뇌 정지 와서 한참을 들여다본 뒤에야 파악했다. 날짜 2016년 4월 말. 지금으로부터 약 8년 전인 스무 살. 영훈과 여주가 한창 썸 타면서 속 긁어놓던 바로 그 시점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영훈의 프로필 사진을 클릭했다. 입학하자마자 선배 누나들한테 귀여움 독차지하던 그 추억의 얼굴. 갓 태어난 송아지마냥 앳되고 초롱초롱한 셀카. 심지어 옆엔 똑같이 어린 그 시절 재현이 있었다. 와, 내가 이 새끼랑 이딴 사진도 찍었었나. 온통 희뿌연 필터에다 사이드에는 b612가 대문짝만하게 박혀 옛 감성을 제대로 자아냈다.

근데 문제는, 이 옛날 대화방이 왜 아직도 살아 있으며 어떻게 이 폰에 알림이 떴냐고. 왜 지금 눈에 다시 띄냐고, 개 열받게. 스크롤을 더 올리려다 눈 질끈 감고 침대에 내팽개쳤다. 더럽게 안 궁금했다. 그 시절 둘이 나눴을 핑크빛 유치한 대화 따위.


"이여주, 일어나 봐."


더는 못 참고 이불 더미를 확 걷어 올렸다. 올리자마자 더 기함했다. 그러니까, 새근새근 잠든 인간이 분명 이여주는 맞는데... 아니 내가 헛것을 보나.


"와, 이거 뭔데."


어젯밤 여주는 춥다며 두툼한 수면 잠옷을 껴입고 잤었다. 재현과 커플로 맞춘 겨울용 잠옷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여주가 입은 건 봄에나 입을 반소매 파자마. 불과 어젯밤까지 재현이 코 박고 향기 맡던 새까만 머리칼 역시 물 빠진 염색모로 변해 있었다. 풀려가는 펌 때문에 곱슬곱슬한 머릿결을 재현은 멍하니 내려다봤다. 

...이 소름 돋는 기시감. 생생히 기억하건대 스무 살 여주가 하고 다녔던 머리였다. 심지어 세상모르고 잠든 얼굴엔 뽀얀 젖살이 도톰했다. 그러니까, 누가 봐도 이건...


"야, 니 미쳤어? 왜 애새끼가 됐냐고!"


여주의 8년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28살 여주가 어딘가로 실종됐다. 하룻밤 사이에 스무 살로 돌아가 버린 여자친구를 재현은 울며불며 흔들어 젖혔다.


"아, 시끄러! 왜 깨워!"


단잠을 방해받은 여주가 끝내 오만상으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졸려서 잔뜩 구겨진 눈으로 노려보는 태도에 재현은 아무 말 못 하고 침만 꼴깍 삼켰다. 이런 미친, 목소리도 존나 어려졌잖아. 기억 속 그 스무 살짜리가 눈앞에 다시 살아 숨 쉰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이재현 니가 여기 왜 있어?"

"......"

"나 어제 술 먹고 너네 집에서 잤나? 아닌데..."


어리둥절 눈 비비며 일어나더니 고갤 돌려 주변을 살피는 여주. 그러다 금세 사색이 된다. 재현과 여주가 동거하는 집, 숨 쉬듯 익숙한 이 공간을 마치 처음 본다는 양 얼떨떨한 눈빛이었다.


"뭐야, 너네 집 아니잖아! 여기 어디야!"

"하... 진정하고 일단 앉아 봐."

"...잠깐만. 이재현?"

"왜."

"재현아!"

"왜!"

"약 빨았어? 덩치 왜 이렇게 커졌어?"

"......"

"아니, 얼굴이... 존나 삭았는데? 니 왜 헬창 아저씨가 됐냐고!"


아 씨발. 이 잼민이가.


"앉아 보라고, 일단."

"우리 설마 이상한 데 갇힘? 나도 이제 늙는 거야?"

"지랄 좀, 내가 그렇게 늙었냐?"

"어! 세월 정통으로 맞았는데?"


재현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느라 이마를 짚었다. 하긴, 스무 살엔 지금보다 한참 키 작은 말라깽이에다가 골격도 밍숭맹숭했었지. 남자치고 너무 예쁘게 생겨서 컴플렉스였던 그 시절.

그 어린 재현만을 봐온 어린 여주의 눈에, 지금 이 와꾸는 당연히 헬창 아저씨려나. 하긴, 저도 당시에 이십 대 후반 형님들이 어떻게 보였는지 되새겨 보면 그럴 만도 했다.


"됐고, 지금 뭔가 많이 잘못됐으니까... 대화를 좀 해보자 우리."


치미는 현타를 애써 잠재운 뒤, 방방 날뛰는 스무 살 여주를 반강제로 침대에 앉혔다. 와, 얘 요즘 많이 차분해지고 어른스러워진 거였네. 지금은 행방을 알 길 없는 스물여덟 이여주가 미친 듯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너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지금 몇 년도야."

"늙어서 날짜도 못 세?"

"묻는 말에만 대답하라고."

"2016년! 왜!"

"너 어제 뭐 했는지 말해 봐."

"어제? 중간고사 끝나고 영훈이랑 술 마셨는데. 너도 오라고 전화하니까 쌍욕 박고 끊었잖아, 싸가지야."


얼핏 기억났다. 입학 이후 첫 중간고사 치르곤 PC방 처박혀 롤이나 하던 그날. 야, 나 영훈이랑 땡땡포찬데 끼실? 속 좋게 떠드는 여주 전화에 불같이 성질 냈었지. 둘이 까르르 붙어 다니는 게 세상에서 제일 꼴 보기 싫었으니까. 그렇게 뭐 특별할 것도 없이 흘러간 날이었다.


"암튼 술 마시고 영훈이가 집까지 데려다줬어, 새벽까지 통화도 했어. 나 분명 내 집에서 잠들었다니까?"

"그러셨겠지."

"근데 왜 눈 뜨니까 여기냐고. 술이 덜 깼나?"

"어제 뭐 이상한 점 없었어?"

"없었어! 나 오늘 영훈이랑 캡틴아메리카 보러 가기로 했는데!"


그놈의 영훈이 영훈이. 귀에 딱지 앉기 직전이었다. 짧고 굵게 썸 탔던 거 알고는 있었지만, 애가 김영훈한테 홀라당 미쳐 있었네 아주. 지금의 여주에겐 흑역사쯤 될 과거들이 스무 살 여주에겐 제법 큰 설렘이었겠지. 재현은 심기가 매우 불편해졌다.


"야, 잘 들어. 지금은 2024년 12월이세요."

"뭐?"

"무려 8년이 지나셨어요. 갑자기 니 혼자 미래로 날아왔다고."

"......"

"아닌가? 8살 어려진 건가? 아무튼."

"약 빤 거 맞네. 어떡해..."


8년 동안 아주 많은 것이 변했으며, 넌 김영훈이 아닌 내 여자♡가 됐다고 설명하기도 전에 말문이 턱 막혔다. 진지하게 정신병자로 보는 듯한 저 잼민이의 시선.


"근데 여기 왜 이렇게 추워?"

"당연히 춥지! 12월이라니까? 이틀 뒤에 크리스마스라고!"

"중간고사 어제 끝났는데 뭔 개소리냐고! 나 어제 영훈이랑 벚꽃엔딩 들었다고!"


어제 뭐, 영훈이랑 벚꽃엔딩을 들어? 나는 어젯밤에 너랑 뭐 했게. 알려주면 까무러치겠지.

빡빡 우기는 여주를 노려보다, 한숨 푹 내쉬고는 두꺼운 잠옷 꺼내 준 뒤 보일러도 최대로 올렸다. 암만 얄미워도 여친 감기 걸리는 꼴 두고 볼 순 없었다.


"일단 씻고 나와. 따뜻한 물 받아 놨으니까."

"뭐야... 늙어서 철들었어? 갑자기 잘해주는 척."

"어이. 늙은 게 아니라 남자가 된 거다."

"모르겠고, 우리 여기 갇힌 거 맞지? 나 씻고 나오면 탈출 방법 찾아보자."

"아니 뭔 탈출을 해, 여기가 내 집인데."


흘려듣는 표정을 보니 역시 깔끔하게 개소리로 치부 당했다. 하긴, 저 여주의 세계관에서 재현 집이란 그 아담한 뒷집 자취방이 전부일 테니.

여주가 욕실로 들어가자마자 재현은 머리 감싸 쥐고 주저앉았다. 앞으로 설명해야 할 게 산더미라 벌써 두통이 도졌다. 아니, 이게 무슨 날벼락. 어떻게 하면 되돌릴 수 있지? 물론 스무 살 여주는 꽤나 하찮고 귀엽지만, 저 어린애랑은 연애 못 한다. 계획했던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도 없다. 만약 영영 못 되돌린다면? 우리 결혼은!

돌아버리겠네. 재현은 불안하게 손톱을 뜯었다. 처남 주연에게 전화해 알릴까 하다 그만뒀다. 일이 커져서 좋을 건 없었다. 크리스마스에 뉴스 타긴 좀. 우선은 어떻게든 제 선에서 해결 봐야 했다.


"근데 이 집 되게 좋다. 혹시 먹을 것도 있나?"


머지않아,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싼 채 총총 걸어 나오는 여주. 씻으니까 더 뽀얘져서 미성년자래도 믿을 꼴이었다. 갑자기 도둑놈 된 것 같은 죄책감에 재현은 이마 짚고 악착같이 외면해야만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주는 방문 박차고 나가 주방을 뒤지기 바빴다. 뭐야, 이거 첨 보는 술인데? 신상이야? 냉장고 구석을 채운 짐빔 하이볼 만지작대며 감탄하기까지. 이슬톡톡 유행하던 16년도에서 날아온 인간다웠다.


"지금은 먹을 거 없어. 장 봐야 돼. 이따가 영훈,"


영훈이 커플 오면 같이 밥 먹자 하려다 그대로 뜨악했다. 잠깐만, 김영훈이 여기 오면 좆되는 거 아녀. 다급하게 시계를 보니 장 볼 시간이고 뭐고, 약속 시각이 임박했다. 하도 정신 없어서 까먹은 탓이었다.


"안 돼, 이 새끼 오면 안 돼!"


곧장 허옇게 질려서 영훈에게 전화 걸려던 순간,


- ♪♬♪♬♪♬


세상에서 제일 소름 돋는 초인종이 울렸다.


"어? 누구세요?"


자기가 집주인이라도 된 양 현관으로 뛰어가는 여주를 막으려다 놓쳤다. 한편, 제 정체를 알리고자 인터폰 화면에 당당히 얼빡 들이대며 장난 치는 영훈. 갑작스러운 썸남의 등장을 여주는 이 감옥에서 꺼내줄 백마 탄 왕자님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헐 영훈이다!! 영훈아♡"

"열지 마!"

"아, 왜 이래! 놔 봐!"


현관문 앞에서 필사적으로 여주를 붙들고 늘어졌다. 이거 열면 개씹 파국이다. 어려진 여친이 당시 썸남 조우한다는데 기분 개 같은 건 당연하고, 무엇보다 이 문밖에는 영훈의 현 여친도 있다. 이여주와 김영훈이 한때 그렇고 그랬다는 암묵적 비밀이 김여주에게 까발려지기 직전이었다.


"억!"


몸싸움은 다소 허무하게 끝났다. 바둥대던 여주가 팔꿈치로 재현의 명치를 가격했고, 재현이 흠칫 괴로워하는 사이 현관문은 보기 좋게 열리고야 말았다.


"뭐야, 안 열어주는 줄 알았네. 뭘 그렇게 싸우냐?"

"안녕하세요...!"


뭣도 모르는 영훈네 커플이 알콩달콩 손 잡고 들어섰다. 어엿하게 알파메일로 성장한 스물여덟의 영훈, 그리고 옛 시절에 멈춰 버린 이여주가 기어이 서로를 마주하고야 말았다.


"영훈아, 잠시만. 너도 세월 엄청 맞았네..."


"...오 마이 갓."


그야말로 파국의 서막이 열렸다. 한순간 싸해진 분위기를 느끼며 재현은 자포자기해 마른세수를 했다.


"근데 이 분은 누구셔? 오늘 나랑 영화 보기로 했잖아."

"뭐?"


옛 썸녀로 회귀한 이여주를 멍하니 내려다보는 영훈 얼굴이 경악에 휩싸였다. 옆의 김여주도 마찬가지, 어떻게든 상황 파악하려 애쓰는 눈치였다. 굳어서 아무 말도 못 하는 제 남자친구 대신 애써 웃음 짓는 노력이 가상했다.


"우와, 언니 염색하셨네요...! 스타일이 많이 달라지신,"

"나 알아요?"

"어, 언니... 이거 상황극인 거죠...?"

"내가 언니예요? 아닌 것 같은데."

"네...?"

"누구신데 김영훈 손을 잡아요. 얘 어제 나랑 손 잡았는데."


철부지 스무 살의 질투란 당돌하고도 매서웠다. 그 날것의 패기에 짓눌린 김여주가 영훈 코트 자락 뒤로 우물쭈물 몸을 숨겼다. 당황해 입술만 짓씹던 영훈이 시선을 옮겨 재현을 찾았다. 소리 없이 설명 요구하는 눈빛이 다급하면서도 간절했다.


"나도 몰라. 자고 일어나니까 이렇게 됐던데."

"......"

"지금이 2016년이래. 지 혼자 스무 살로 돌아간,"

"뭔 개소리야, 짜고 장난 치는 거잖아."

"......"

"그만해라. 재미 없어 이런 거."


말을 끝까지 마무리할 수 없었다. 기어코 싸늘한 투로 정색하는 영훈 앞에서 무기력하게 고개만 절레절레 내저었다. 못 믿음 말고. 이 비현실적인 전개를 한 방에 믿는 게 이상하긴 했다.


"장난? 영훈아, 넌 나랑 한 게 다 장난이었어?"

"......"

"우리 맨날 같이 놀았잖아! 오늘은 영화 보자며? 예쁘게 입고 나오겠다며! 기억 안 나?"


끝끝내 유물 아이폰 7을 꺼내 든 이여주가 영훈 눈앞에 카톡을 들이밀었다. 야무지게 스크롤 오르내리는 퍼포먼스까지. 애새끼 시절 흑역사를 졸지에 파묘 당한 영훈의 안색이 새파랗게 물들어 갔다. 갈 곳 잃은 동공에선 지진이 났고, 김여주랑 깍지 낀 손은 파르르 경련하는 중이었다.

저 불쌍한 꼴을 차마 못 보겠기에 재현은 조용히 먼 산으로 눈을 돌렸다. 그야말로 숨이 턱턱 막히는 공기였다. 이토록 분위기 개판 나든 말든, 어려서 과하게 용감한 이여주는 치와와마냥 깡깡 짖어댔다.


"와, 김영훈 이 새끼 착한 줄 알았는데 쓰레기였네! 니 여자 몇 명이냐? 어장 친 거야?"


근데 쪼끄만 게 보자 보자 하니까 선 넘는다 싶었다. 멘탈 나가서 뭐라 받아치지도 못하고 얼어붙은 영훈 꼴이 볼만했다.


"니 입 없냐고! 해명해! 해명, 웁!"


눈물 그렁한 눈으로 번갈아 보던 김여주가 기어코 영훈 손을 세차게 놓아버릴 때쯤, 재현은 사냥하는 육식동물마냥 이여주 뒤로 다가가 입을 틀어막았다.


"꼬맹아, 오바 좀."


제압당한 이여주가 퍼덕퍼덕 발버둥 치는 걸 제외하면 숨 막히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여자친구한테서 뿌리쳐진 손을 허망하게 내려다보던 영훈이 고개 숙여 헛웃음을 뱉었다.


"너랑 나랑? 잠깐이었잖아. 서로 잘 정리해서 끝냈고."

"......"

"그냥 귀여운 추억인 거지, 여기서 다시 꺼낼 일은 아니지 않나? 언제적 얘기를,"

"언제적 얘기든 다 사실이라는 거네."


영훈 말을 딱 잘라 끊은 건 다름 아닌 김여주였다. 그새 눈물 벅벅 비벼 닦고 단호한 낯으로 나선 김여주가 제 남자친구를 똑바로 올려다봤다.


"믿기는 어렵지만... 지금 언니가 갑자기 스무 살로 되돌아갔고, 그때 기억으로 얘기하는 것 같은데."

"......"

"오빠 16년도에 언니랑 사귀었어? 왜 말 안 했어?"

"그게 아니라,"

"좋았겠다. 나랑 언니랑 이름 똑같아서."


대답 듣고자 꺼낸 말은 딱 봐도 아니었다. 이내 영훈을 팍 밀치고 드라마 한 장면처럼 뛰어나가는 모습엔 일말의 미련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여주 눈에 지금 이 상황은 충격적인 동물의 왕국 그 자체였다. 그토록 소심한 김여주도 각성시켜 분개하게 만드는.


"아니, 빵떡아! 그런 거 아니야!"


별안간 천하의 의자왕으로 전락하면서 전신이 새빨개진 영훈이 황급히 따라 나갔다. 세상에서 제일 가엾고 눈물겨운 뒷모습이었다.

둘이 휑하니 사라지자 재현은 천천히 입 막은 손을 뗐다. 기다렸다는 양 치와와가 다시 기세 좋게 짖어 댔다.


"미친 새끼! 방금 들었어? 잘 정리해서 끝냈대! 전혀 끝낸 적이 없는데!"

"조용. 젊은 친구라 에너지가 과하네."


이건 마치 명절에 비글 사촌동생 케어하는 기분. 지친 동태눈깔로 현관문 닫아 정리했다. 크리스마스 앞두고 친구 커플 대판 싸움 나는 건 유감이지만, 저쪽 사정을 마냥 동정할 여유도 없었다. 제일 심각한 건 재현 자신이었다.


"니 친구 왜 저래? 남소를 해 줘도 뭐 저딴 걸!"

"남소 이러네. 지들끼리 눈 맞아 놓고."

"하루 만에 대따 삭아버린 것도 어이없는데 그 사이에 여친을 쳐 사귀냐! 잘생기면 다야?"


씩씩대며 영훈 번호 차단하기 바쁜 여주를 재현은 힐끗 흘겼다. 이마빡 피도 안 마른 주제에, 세기의 사랑도 아니면서 오바는. 이제 좀 쿨해진 줄 알았는데 과거사에 버튼 눌리는 건 여전했다. 다만, 괘씸한 마음 꾹 참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설명해야 할 시간이었다.


"하루만에가 아니고 8년 만이라니까."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몇 번 말하니, 아가야. 지금 2024년 12월. 아까 걔네 코트 껴입은 거 못 봤니."


휴대폰 캘린더를 띄워 친절하게도 보여 줬다. 16년도에는 구경도 못 했을 요즘 아이폰 자태에 경악하기도 잠시, 날짜와 연도를 직접 확인한 여주가 비장하게 침을 삼켰다. 


"어이, 니랑 영훈이랑 안 사귀고 쫑났어. 썸인지 뭔지 한 달따리? 그냥 애들 장난이었다고."

"......"

"그리고 아까 걘 김영훈 현 여친. 둘이 찐사세요."

"......"

"어쩌냐. 니가 나대서 저 커플 깨지게 생겼는데."


기어코 제 트롤짓을 깨달은 여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성난 치와와는 어디 가고, 그새 한껏 창백해진 낯빛엔 수많은 혼란이 스쳐 지나가는 중이었다.


"진짜로... 너희가 늙은 게 아니라 내가 어려진 거라고?"

"어."

"너네 지금 진짜로 스물여덟이야? 요?"

"어."

"그럼 내가... 백만년 전 일로 영훈이... 영훈 님을 곤란하게 한 거네? 요?"

"그냥 반말 해."

"영훈이 개빡쳤겠다..."

"솔직히 손절 당해도 할 말 없다고 본다."


물론 쟤네가 이 일로 깨질 커플도 아닐 뿐더러, 만약 깨진다면 친구 여친한테 직접 찾아가서라도 오해 풀어 줄 의향이 있었다. 그래도 괜히 겁 주고 싶었다. 송아지한테 나름 진심이었던 그 시절 여주가 제법 얄미워서.

잔소리 더 하려다, 핏기 다 빠져서 울상 된 꼴이 안쓰러워 그만뒀다. 싹싹 빌어 사과하겠다길래 대신 전화도 걸어 줬지만 영훈은 받을 생각을 안 했다. 아마 지금쯤 여친 달래느라 정신 없으려나. 심심한 위로를 건네는 바였다.


"근데 나도 억울해! 하룻밤 사이에 8년 점프할 줄 몰랐지 나는."

"난들 알았겠냐. 분명 어제 잘못 먹인 건 없는데."

"너 어제 나랑 놀았어? 그니까 스물 여덟 살의 나랑?"


악의 없이 순수하게 묻는 투. 얼떨결에 고갤 끄덕였다. 뭐 하고 놀았는지는 아무래도 비밀이긴 했다.


"왜? 우리가 8년이 지나도록 절교 안 했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근데 이게 진짜. 험한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겨우 삼켰다. 장난하냐? 우리 사귄다니까? 사랑하는 사이라니까? 그것도 존나 뜨겁고 딥하게!

당장 밝히고 싶은데 자꾸 목구멍에 걸렸다. 여주 입장에선... 소싯적 치고받던 찐친과 눈 감았다 뜨니 결혼 앞둔 건데. 겁나 청천벽력일 텐데. 그야말로 반응 개썩을 것 같은 불안한 예감. 스무 살 꼬맹이한테 파혼당하는 건 아무래도 끔찍했다.


"우, 우리 나름 잘 지내거든? 그때랑은 다르지 인마."

"흠..."

"뭘 그렇게 빤히 봐."


그러다 별안간, 재현의 달라진 외양을 새삼 흥미롭게 쳐다보는 눈빛. 저 입에서 또 무슨 헛소리가 튀어나올지 몰라 뻣뻣하게 긴장했다.


"오. 잘 컸다, 이재현."

"갑자기?"

"늙었단 말 취소. 스물여덟치곤 동안이네."

"...참 고맙다."

"운동했어? 8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그럼 그렇지, 나이가 몇 살이건 이여주 취향은 어디 안 가는 법이었다. 니가 나한테 괜히 반했겠냐. 재현은 과시하듯 어깨를 쫙 펴 수컷미(?) 따위를 어필했다. 애석하게도 길게 관심받진 못했다.


"여긴 지금 니가 사는 집?"

"어."

"성공했구나? 역시 내 친구♡"


그새 상황을 받아들인 여주는, 이윽고 넓은 거실 여기저기 쏘다니며 감탄하기 바빴다. 스무 살 치곤 상당히 세속적이며 물질적인 행태에 황당한 헛웃음이 샜다. 지랑 동거하는 집인 거 알면 어떻게 반응할까. 어제 퇴근하고 상사 까면서 소파 드러누워 감자칩 쌔리던 이여주는 어디 갔을까. 보고 싶다 자기야...

재현은 지끈대는 두통을 참으며 눈으로만 잼민여주를 좇았다. 남의 속도 모르고 소풍 온 마냥 구경하던 여주 시선이 살짝 열린 옷방 문에 닿았다. 재현 눈치 힐끗 살피더니 슬쩍 열어보기까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문제는 거기서 일어났다.


"뭐야. 너 여자랑 동거해?"

"......"

"여친 어디 갔어? 그분이 나 아셔? 나 여기 있음 안 되는 거 아닌가?"


옷방 행거에 잘 정리된 제 옷이며 화장대를 못 알아보고 속 터지는 헛소리나 뱉는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이제... 슬슬 밝혀야겠지. 속으로 심호흡 세 번 한 재현이 큰맘 먹고 선포하려던 순간이었다.


"하여튼~ 어떻게 결혼 전에 동거를 하냐. 양아치."

"뭐?"

"혼전순결 몰라? 짜식이 발랑 까져 가지고."

"......"

"조심해, 남자가 그거 많이 하면 뼈 삭는대."


재현은 귀를 의심했다. 미자 탈출 4달 차 꼬맹이가 혼전순결을 논하다니. 그것도 개변태 이여주가? 하도 가소로워서 푸하학 비웃음 터질 뻔했다. 스무 살 4월까지만 해도 여주 가치관이 혼전순결이었다니 처음 안 사실. 근데 그럼 뭐해? 안 지켰잖아. 쟤 첫 경험 나보다 훨씬 빠르지 않았나.


"...씨발."


생각해 보니 처웃을 때가 아니었다. 문강우 씹새끼. 저 꼬맹이가 두 달 뒤쯤 사귀게 될 첫 남자친구. 지난번 헬스장 그 사건에서 끔찍한 오해를 불러일으켜 사나이 피눈물 나게 만든 인물이기도 했다. 생생하게 기억나는 그 헬창새끼 면상짝을 후려갈기고 싶어졌다. 지까짓 게 감히 이여주 처음을 함께해? 어린 이여주는 저렇게나 순수한데, 새끼가 뭐라고 입 털어 꼬셨길래 무려 혼전순결 가치관을 박살 내냐고.


"냅다 욕질이야 왜!"


8년이 지나도 그 성질머리 못 고쳤냐며 혀 쯧쯧 차대는 여주 앞에 비장하게 섰다.


"이여주.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

"왠지 벌써 기분이 나쁜데?"


"사실... 나 니 남자친구야. 우리는 결혼 전제로 동거하고 있고."

"......"

"저 옷, 저 화장품 다 니 거라는 뜻."


눈 딱 감고 질렀다. 흡사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적막의 공간에서 째깍째깍 시곗바늘 소리만 우렁차게 들렸다. 그 어떤 리액션 없이 눈만 깜박이는 여주 앞에서 재현은 공연히 목덜미만 긁었다.


"뭐... 그렇게 됐다."


약 5초 뒤, 여주가 간신히 입 열어 물었다. 너랑 나랑 사귄다고? 언, 언제부터?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다 말해 줘? 날밤 깔 텐데."

"......"

"확실한 건, 니가 나를 겁나 좋아해."

"지랄하지 마!"

"나는 더 좋아하고."


폰 앨범에 소중하게 모아 둔 커플샷들을 태연하게 내보였다. 잘 어울리지? 우리 어제까지 이러고 살았다고.

한편, 자기 미래 모습과 미래 남자친구를 사진으로 직관 중인 여주는 그야말로 벙찐 낯이었다.


"거짓말."

"꼬맹아. 부정하고 싶겠지만 니 미래는 바뀌지 않아."

"그럼... 그럼 내 혼전순결은!"

"...어?"

"잘 지켜지고 있는 거지?"


이게 뭔. 예고 없이 묵직한 어퍼컷이 날아왔다. 순간 당황 타서 어버버하는데 곧바로 멱살이 꽉 붙잡혔다.


"니 나 건드렸기만 해봐, 바로 파혼이야 변태 새끼야!"


혼전순결은 얼어 죽을, 사귀기도 전에 덜컥 잔 게 우린데. 핑크바나나 환장하는 누구 덕분에 매 순간 음탕한 라이프로 연명 중인데 뭔.

입 열어 따지려 해도 기침만 나왔다. 바짝 당겨진 멱살이 어지럽게 짤짤 흔들려 댔다. 이 순간 여주는 그 누구보다 진지하고 살벌했다. 사실대로 직고하면 바로 부엌 가서 식칼 찾을 기세였다.

이쯤에서 재현은 미친 듯이 억울해졌다. 이 나이에 스무 살짜리한테 이 꼴 당하면서 살아야 하나. 여주 앞에서 하염없이 노간지 하남자 되는 인생, 사주팔자상 못 피할 일이 분명했다. 아니근데내가뭘잘못했는디! 씩씩대면서 멱살 떼어낸 다음 근엄하게 자세 고쳐 섰다.


"어이, 냅다 변태 새끼라니. 좀 상식적으로 생각을,"

"상식은 니가 챙겨야지! 나 건드렸냐고 안 건드렸냐고!"

"장난하나! 그거야 당연히!"

"당연히 뭐?"


"당연히... 손만 잡고 잤찌..."


치욕스럽지만 결국 인정해야만 하는 치명적인 팩트. 이여주는 스무 살이어도 열 살이어도 절대 이길 수 없다.












하루가 도통 어떻게 흘러갔는지 의문이었다. 여자친구가 갑자기 어려졌습니다 어떡하나요... 네이버에다 물어봤으나 내공 먹튀만 당했고, 혹시 몰라 병원 데려가니까 나란히 망상증 환자 취급이나 받았다. 그렇게 연휴 첫날을 허무하게 날려 보내고 자포자기한 채로 찾아온 밤.

침대 위, 재현은 두 팔로 뒤통수 받치고 누워 멀거니 천장만 바라봤다. 집에 널린 핑크바나나 흉물들을 여주 몰래 숨기느라 진이 다 빠진 상태. 더군다나 옆에 누운 여주를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다. 어려진 저 모습 때문에 아무것도 안 해도 양심이 파사삭 빠개지는 탓이었다. 손만 잡고 잔다 큰소리 쳐 놨는데 손조차도 못 잡을 것 같았다.


"자고 일어나면 돌아와 있겠지?"

"......"

"제발. 우리 내일 펜션 가야 된다고."


예약해 둔 펜션은 전날이라 취소도 안 됐다. 펜션도 펜션이지만 설마 연휴 끝까지 안 돌아온다면? 여주 출근은 당장 어떻게 할 것이며 가족들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일단 자자~ 어떻게든 되겠지."


반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여주가 이불 밑에서 스리슬쩍 움직여 재현 손을 끌어 잡았다. 주섬주섬 손깍지가 끼워졌다. 첫 스킨십에 흠칫 놀라 곁눈질로 쳐다보자 순진무구 해맑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너랑 나랑 맨날 이렇게 잤다는 거 아니야, 그치."

"......"

"으으, 이상해. 낯간지러워."


오바하는 꼴을 빤히 보다가 시시한 웃음이 터졌다. 이여주가 이럴 때도 있었네. 음란마귀로 타락하기 전 클린한 여자친구 구경하는 재미도 나쁘진 않았다. 덩달아 멋모르고 순수해지는 기분. 귀엽단 말 겨우 삼키고 콧등 한 번 꼬집어 줬다.


"자. 까불지 말고."


꼼짝없이 붙잡힌 손에 더 큰 힘을 주어 감싸 쥐었다. 괜히 간지러운 심장을 애써 흐린 눈 하며 불 끄고 잠을 청했다. 뭐, 어쩌면... 딱 하루 정도는 얘를 더 봐도 괜찮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