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지금 뭐 입고 있어."

"교복."

"난 뭐 입고 있어."

"간지 쩌는 수트."

"뭘 좀 알겠어?"

"뒤지게 멋있는 조합이다?"

"됐다."

"뭐 왜요."



오른손에는 펜을, 왼손에는 산의 손을 쥐고 있다. 한적하지도 소란스럽지도 않은 길가의 프랜차이즈 카페. 교복 넥타이 풀어 헤친 남학생과 정장 쫙 빼입은 남자가 손까지 잡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으니 꼴이 말이 아니다. 그나마 한쪽이 문제집 펼쳐 놓고 있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이상한 사이로 오해라도 받을 뻔했다. 결혼식 가기 전에 잠깐 본다는 게 이 사달을 일으켰다.


우영이 산 따라 대학 가서 씨씨 할 거라는 방대한 목표를 품은 지 어언 3개월. 그러나 의지를 심어 주는 동기도 산이고, 당장 게을러지는 이유도 산이다. 외롭지는 않지만 보고 싶어서. 더 이상 교내에 산을 찾아갈 곳이 없어서. 우영은 수업 중에 책 세워 놓고 몰래 폰을 들어 카톡을 마구 날렸다. 형은 대학교에서 강의 듣고 있을 텐데. 산이 알림을 무음으로 바꾼 걸 알고 있어서 걱정 없었다.


고작 학년 하나 올라갔다고 머리가 더 커 버렸다. 시간 있으면 자기 공부 도와줄 수 있냐던 부탁이 수작이었나 생각이 들 정도로 정우영은 치밀하고 계획적이었다. 제 손을 감싼 우영의 손을 쉽게 뿌리치지 못하는 것도 알고 있을 터다. 힘의 문제가 아니었다. 뿌리칠 마음이 안 드는 거다. 조금이라도 뒤로 빼내려 하면 도로 쫓아오는 손길이, 반짝이는 눈빛이. 도무지 벗어나길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형 오늘 잘생겨서 놓기 싫은데요.



"자꾸 기다리라고 해 놓고 이럴래?"

"손에 뽀뽀도 했는데 무슨."

"네가 갑자기 한 거잖아!"

"아, 좀 봐주면 안 돼요?"



날이 갈수록 우영은 산의 약점을 속속들이 알아냈다. 최산은 부탁에 약했고, 앙탈에 약했으며, 연하에게 약해졌다. 좋아서 스스로 약해지는 게 아닌 그냥 강약 대결에서의 약. 강하고 멋진 어른 연상의 로망을 가진 산은 연하에게 유독 어른이 되고 싶었다. 평생 짊어졌던 책임감이다.



"왜 봐줘야 돼?"

"나 형한테 신경 쓰여야 되니까."



그래서 사랑을 이유로 앙탈 부리며 부탁하는 연하 정우영에게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흔해 빠진 로맨티스트

로썸








우영에게 보라색 장미를 받은 졸업식에서부터 약 두 달이 지났을 무렵인 3월 말. 오티에서 처음 술을 마셨던 산에게 또 한 번 술을 마실 자리가 생겼다. 엠티. 당연히 이 소식에 죽어 나가는 건 정우영이었다. 선배 그 엠티 가지 마요. 안 가면 안 돼요? 어쨌든 거기에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잖아요. 그 말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내 주량 다 들어서 이러나.



"필참이야. 가야 된대."

"그런 게 어디 있어. 수련회예요? 강제 참여를 시키게?"

"비슷할걸?"

"술 마시잖아요."

"많이 안 마셔."

"형 엠티 가면 나 울 거예요."



영아. 산은 가끔 우영의 끝 글자만 불렀다. 우영은 그걸 좋아했다. 내 이름 형이랑 똑같이 한 글자로 만들려고요? 하고. 가끔은 설렌다며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혼자 부끄러워했다. 물론 이번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설레게 영아, 하고 불러도 울겠다는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왜 우냐고. 형이 엠티를 가잖아요. 그러니까 그거랑 무슨 관련이. 형이 나 없는 데에서. 그만.



"형은 이렇게 어린애를 울리고 싶어요?"

"뭐?"

"울리고 싶어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울리고 싶냐고!"

"울지 말라고!"



나까지 어린애 되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지니 주위 눈치가 보인다. 산이 짧게 한숨을 쉬자 우영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어차피 갈 거 아는데 말해 봤어요. 근데 왜 그래. 속상해. 반말. 요. 이러면서 손 꼭 붙잡고 있는 게 아이러니였다. 결국 산은 엠티 가서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술 마시지도 않고 무사히 자리를 빠져나와 우영과 전화했다. 통화 내내 우영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기다릴 거라는 그 말이 무색하게 산은 벌써 여러 번 우영에게 흔들렸다. 정확히 말하면 정우영이 최산을 가만히 두질 않았다. 자기가 기다려 달라고 해서 기다리고 있는 건데 안 흔들리면 이상한 사람 만들었다. 내가 갈대 같은 게 아니라 쟤가 나를 꼬신 거라니까요. 억울하다 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다. 정신 꽉 붙잡아 최산. 너 성인이야. 우영이는 민증도 안 나온 고딩이고. 그래서 산 혼자 마음을 다독였다.




언제는 또 그랬다. 기말 과제 때문에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 있었던 6월. 겨우 하루 분량을 마치고 노트북 챙겨 집으로 가려던 길에 정우영이 눈앞에 나타났다.



"짠."

"너 어떻게 왔어?"

"형 보고 싶어성."



얼마나 바깥에서 기다렸던 건지 도서관 건물 앞에서 쪼그려 앉아 있던 회색 후드티 입은 고딩. 겨울방학 본가에 내려가 있던 그때의 통화에서 들은 말투 그대로였다. 내 어디가 그렇게 좋다고 이러는 건지. 산은 기분이 좋으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잘난 데 많아 보이는 정우영이 어쩌다 최산에게 꽂혀서 이 시간까지 여기에서 자신을 기다린 건지. 질문을 꺼낸 건 순전 호기심 탓이었다.



"학교에서 너한테 고백하는 애들 없어?"

"고백 많이 받게 생겼죠?"

"……."

"표정 뭐야."



괜히 물었나. 사실이기도 했고 자신감 넘치는 것도 좋긴 한데 본인 입에서 그런 말 튀어나오는 걸 듣자니 좀 묘해졌다. 반쯤은 장난이고 반쯤은 진심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우영의 눈썹이 찡긋하고 위로 솟았다 떨어진다.



"있냐고."

"없어요."

"진짜?"

"구라죠. 사실 있었어요."



눈도 깜짝 안 하고 장난으로 거짓말을 했다. 항상 속는 건 산의 몫이다. 허, 하고 기가 찬 소리를 내자 또 속았다며 좋아한다. 이 고딩을 어쩌면 좋지. 달리 어떻게 할 방법도 없다. 매번 속는 수밖에.



"근데 깠어요.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

"잘했죠."



칭찬이라도 해 달라는 듯 잘했죠, 하지만 표정이 그렇지가 않다. 뿌듯함이나 그런 게 있을 줄 알았다. 하다못해 사람 꼬시려는 그 미소라도 지을 줄 알았다. 우영은 지나치게 덤덤했다. 힐끗 산을 쳐다보는 시선 외에는 모든 게 변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라는 것처럼. 보통 어린애는 아니었다.




또 언제더라. 9월 대학 축제였을 거다.



"산아아."



평소 끼고 살던 후드랑 아디다스 다 어디다 치웠는지 갑자기 티셔츠에 재킷 걸치고 나타나선 이름을 불렀다. 얘 왜 이래. 동기들 사이에서 눈만 끔벅이고 있었더니 산이 고등학교 친구라며 그새 동기들한테 인사하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우리 얼굴 얼마 만에 보는 거야?"

"어제 봤잖아……."

"쉿."

"……기다려 봐. 잠깐만."



산은 우영의 손목을 잡고 급히 자리를 떴다. 다른 애들이 보이지 않을 만큼 나무 심어진 길 사이로 들어가 버렸다. 뭐가 좋다고 우영은 실실 웃었다.



"콘셉트야?"

"당연한 거 아니에요?"

"스무 살인 척해서 술 마시게?"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이왕 온 거 그래야겠다."

"안 돼."

"왜요."

"어디서 고딩이 술을 마셔."

"와, 형 방금 진짜 꼰 그거 같았음."

"꼰대 아니라, 하. 아무튼 안 돼. 너 오늘 반말은 되는데, 술은 안 된다. 알았어?"

"그래, 산아."



벌써 망한 기분이다.



"산이? 아, 끝장났죠. 산이 우리 학교 저거도 했는데. 학생회장."

"와, 진짜요? 왜 말 안 했냐?"

"우리 학년에서 최산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지, 산아."

"야, 얘 말 듣지 마."

"우리 사니 오늘 왜 이렇게 까칠하지?"



기분이 아니라 진짜 망했다. 고삐 풀린 것처럼 동창 코스프레 제대로 하더니 친구처럼 대하는 데에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누가 보면 진짜 다른 대학 다니는 스무살 동갑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새삼 대단하다 싶다가도, 이런 식으로 자신한테 구라친다고 생각하니 또 마음이 복잡했다. 왜 이렇게 거짓말을 잘해.


잠깐 화장실 다녀오는 새에 우영이 소주를 들이마셔 버렸다. 그거 말린다고 잔 뺏어서 원샷했다. 나 술도 못 마시는데. 동기들은 여얼. 흑기사 뭐냐. 하면서 한참 산을 놀려댔다.



"혀엉."

"아까는 반말 시일컷 하더니."

"형이 하라고 했잖아요."

"너 술 냄새 나."

"형도 나요."

"알아."

"근데 왜 나한테만 뭐라고 해."

"마시지 말라고 했잖아아."

"어우, 어떡해? 벌써 마셔 버렸는데."



얄미워 죽겠다. 술은 산보다 우영이 더 마셨는데 제정신 아닌 쪽은 자기인 것 같아서 더 짜증 났다. 얘는 무슨 술을 이렇게 잘 마셔서. 주량 한 병도 못 채우는 최산은 괜히 정우영을 원망했다. 집에 바래다준다며 산에게 어깨를 내어 준 우영만 멀쩡해 보였다. 정작 산은 초점 하나 맞추기 어려웠는데.



"형."

"왜."

"혀엉."

"왜에에."

"왜 귀엽게 말해요?"

"내가 언제에."



자꾸 말끝이 늘어졌다. 아, 나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훅 끼치는 열기가 바람을 맞아도 가시지를 않았다. 겨우 계단을 올라 빌라 옥탑방 앞에 놓인 평상에 털썩 앉았다. 고개를 드니 하늘이 보인다. 맑은 가을 밤하늘에 별이 피었다. 산은 별의 개수를 셀 수 없었다. 눈을 힘차게 감았다 떠도 보고 있는 게 사방으로 늘어나서였다.



"형 여기 있을 거예요?"

"응."

"나 가요?"

"아니."

"뭐 어떡하라는 거야."

"옆에 있어."



산이 형은 취하면 귀여워진다. 목을 한껏 뒤로 꺾더니 하늘만 보며 대답하는 게 그렇게 귀여워 보일 일인가. 우영은 산의 옆에 앉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얼굴이고 손이고 다 빨갛게 달아서는. 평소에 볼 수 없는 모습을 눈에 다 담아 두고 싶었다. 그러다 하늘에 별은 많은지, 이곳에서 보이는 풍경이 어떤지 주위를 둘러본다. 빛이 났다.



"나는, 영아. 연하를. 안 만날라구 했거든?"

"그럴 것 같더라."

"근데에. 너 왜 나 자꾸 꼬셔?"

"좋긴 해요?"

"웅."

"연하를 왜 안 만나려고 했는데요?"



입이 멋대로 움직인다. 입을 다물고 싶었는데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근데 말하고 싶어. 나 너무 답답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제 취향을, 자신을 좋아하는 우영에게 말한다면 그건 괜찮을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몸이 붕 떠 있는 것 같다.



"나느은…… 좀 무서워. 영아."

"……."

"누가, 나한테 기대면. 나두 같이 무너질 것 같아."



나가는 문장의 발음이 다 뭉개진다. 지금도 몸이 비틀거리는 게 금방 무너질 것 같았는데. 끝끝내 뒤로 넘어가려는 산의 고개 아래로 우영이 손을 집어넣었다. 엉성하게 동화 속 왕자님과 공주님 자세가 된다. 산은 이제 고개를 꺾지 않아도 하늘이 보인다. 더불어 우영이 보인다. 그냥 열여덟 어린애였는데. 술기운 때문일까. 정우영에게서 나이가 보이지 않는다. 옅은 바람이 둘 사이를 스쳐 지나간다. 기우뚱했던 축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는데도 우영은 산에게서 손을 떼지 않았다.



"산아."

"……."

"키스해도 돼?"



무슨 용기가 솟구쳤는지 모르겠다. 정말 술기운 때문일까. 언젠가는 있어야 했던 도전과도 같은 행위일까. 얼굴이 달아오른다. 소주 한두 잔에 붉어진 산에게 옮은 거라 여기기로 한다.


언젠가 산이 그랬다. 야경 예쁜 곳을 좋아한다고. 우영 딴에 이곳은 별도 빛나고 도시 건물도 빛나는, 최고의 야경 스폿이다. 어쩌면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될 거라고 생각한 이유가. 이미 눈을 반은 감았던 산이 마저 눈꺼풀을 덮었다. 졸업식 날 꽃다발에 막혀 전해지지 않았던 심장박동이 고스란히 산에게까지 닿았다. 술기운이다. 자신에게까지 거짓말을 표했다. 우영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겹쳤다. 막연히 다른 생각이 든다.


형이 나를 기다릴 수 있을까. 형한테 나를 기다려 달라고 해도 될까.










"야, 다 폰 꺼내. 제일 마지막으로 연락한 사람 누구야."

"뭐, 왜?"

"마지막으로 연락한 사람한테 카톡 보내서 제일 먼저 데리러 오는 사람 오늘 술값 안 내는 걸로."

"미쳤냐? 나 엄마임."

"아, 봐줬다. 그럼 제일 먼저 전화 오는 사람."



……마지막 연락? 산이 최근 통화 기록을 켰을 때 보이는 건.

우앵.

큰일 났다.



"우앵이가 누구냐?"

"어떻게 사람 이름이 우앵."

"있어. 친한 동생."

"넌 무슨 친한 동생이랑 통화를 존나 많이 했냐."

"내, 내가 과외 해 줘서."

"너 동창 이름이 우영인가 그러지 않았냐?"

"걔는 우형이고! 얘가, 우영이고. 둘이 형제."

"아아."



대충, 진짜 대충 넘어가자. 통화 잠깐이면 되잖아. 아니, 연락 안 되는 게 오히려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만우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거짓말 다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 모르겠다. 정신 차리고 보니 산은 어느덧 스물한 살이 되어 친구들과 조촐한 개강 파티를 열었다. 한두 잔에도 맛이 가던 알쓰는 단련이 되어 겨우 소주 한 병 언저리까지 주량이 자라났다. 그날 말 쏟아낸 이후 ─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 최산의 주사는 말수가 줄어드는 행동으로 자리 잡았다. 다만 이런 경우에는 아니다. 등골이 서늘해져 갑자기 말이 우다다 나갔다.


축제 뒤로 이전보다 연락이 줄었다. 산도 바빴고, 우영도 공부에 전념하겠다며 학교에 있을 때 더 이상 연락을 보내지 않았다. 가끔씩 오던 고양이 그림도 한동안은 받을 수 없었다. 겨울방학 때 메모지 한 뭉텅이 분량의 고양이를 받긴 했지만.



"하나, 둘, 셋 하면 누르는 거다."



네 사람의 엄지손가락이 전송 버튼 위를 떠돌았다. 이렇게라도 제대로 연락할 구실을 만들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하나.

둘.

셋.



잠깐 통화할 수 있어? >



전송.

바로 없어지는 카톡 옆 숫자 1.

그리고 걸려 오는…… 우앵으로부터의 전화.



"와, 미친."

"너 기다린 거 아님?"

"짠 거 아니냐?"

"웃기시네. 내기 네가 걸었다."

"야, 일단 받아. 끊어지겠다."



막상 이름 뜨니까 머뭇거렸다. 산이 바빴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우영과의 키스 이후 그를 조금씩 피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모르는 척,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다 티가 날 것 같아 아예 만나는 횟수를 줄여 버렸다. 정우영만 보면 밤하늘 아래 맞닿았던 입술의 촉감이 떠올랐다. 감당이 되질 않았다. 통화를 받고 조심히 귀에 폰을 붙였다.



"여보세,"

[형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잠깐, 잠깐만."

[오늘 술 마시러 간 거 아니었어요?]

"맞는데, 좀 작ㄱ……."

[데리러 가야 돼요?!]

"작게 말해!"



딱 들어도 진정하지 않는 목소리여서 괜히 밖으로 샐까 봐 작게 말하라고 소리쳤다. 지가 크게 말하는데. 옆에 있던 동기 하나가 그렇게 말하고 킥킥대길래 살짝 째려보곤 마저 우영의 목소리를 들었다.



[오케이. 형 취했구나.]

"아닌데?"

[취했네. 갈게요. 형 저번에 갔던 거기죠?]

"야, 야. 오지 마."

[갈 거임. 기달.]

"오지 말, 야. 야!"



지 때문에 팍 깨 버린 것도 모르고. 전화가 끊긴 폰 화면을 보다가 머리를 쓸어올렸다. 왜. 여기로 온대? 어. 얘 나 취한 줄 알아. 취했잖아. 맞긴 해. 더 얘기 꺼냈다가는 진짜 무슨 실수라도 할까 봐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사이냐고 묻는데 뭐라고 답할 말도 없었다. 거짓말 쏙 빼면 무슨 사이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아예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켜 가게 밖으로 나갔다. 서늘한 공기에 으슬으슬해진 몸이 움츠러든다. 멀리서 맨투맨에 모자 하나 푹 눌러 쓰고 오는 정우영이 보였다. 괜히 머쓱해진다. 눈에 보이는 우영이 조금씩 흔들렸다.



"미안. 부르려던 건 아니었는데."

"됐어요. 뭐 이런 거 가지고."

"……들어갈래?"

"술자리 끝난 거 아니에요?"

"그렇, 긴 하지?"

"가요 그럼."



아님 형 짐 내가 들고 올게요. 문을 당겨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는 우영의 팔을 잡아챘다.



"가기 전에."

"에?"

"너 누가 나이 물어보면 스무 살이라고 해. 알았지."

"형 고딩 만난다고 소문날까 봐 걱정했죠."

"안 하게 생겼어?"

"형. 나 정우영이에요."



그런 것도 모를까 봐. 헛웃음에 가까운 미소에 자신감이 어렸다. 그래, 걱정은 안 하지만. 우영은 금세 산의 가방과 겉옷을 들고나온다. 형 아예 사람 하나 만들었더라. 저 형들이 뭐라고 했는 줄 알아요? 너희 형이랑 똑같이 생겼다. 이랬어요. 무슨 말인가 했네 진짜. 눈치도 빨라서는 가볍게 '그런 소리 많이 들어요' 했단다. 이 정도면 재능으로 치부할 능력이다.



"내가 너 다른 사람 만들어 놨네."

"맞지 뭐. 형 덕에 나 이제 욕도 안 하잖아요."

"그건,"

"난 형이 나 애 취급하는 거 다 알아요."

"……."

"근데 상관없어요."



우영이 예전 그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지 않은 소리를 하며 당연하다는 얼굴을 했다. 없는 사람 만들어내 형 동생 역할 둘 다 맡겼다는 의미로 말했는데, 우영은 본인이 개과천선했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확실히 정우영은 조금, 아주 조금 어른이 됐다. 산에게 애로 비친다는 것도 잘 알았다. 일부러 밝히지 않았던 속내가 다 들추어내졌다. 우영이 어른이 될수록 산은 더더욱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애면 애인 거고. 형한테 일부러 으른같이 안 굴어도 사랑받는 사람 하고 싶어서."

"……."

"척했다가 형이 그거에 빠져 버리면 나 자체를 좋아하는 게 아닌 게 되니까."



그럼 너한테 어른인 척하고 있는 나는. 한순간 마음이 얽히고설켰다. 지난날 네게 어른이 되고자 아무것도 털어놓지 않았던 나는. 이상한 시기 같은 게 생긴다.


너는 나 자체를 좋아하고 있을까.


기댈 곳이 필요했다. 연상을 추구하던 버릇도 그래서 생겼다. 최산에게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란 모두 그런 존재였다. 멋진 사람. 기댈 수 있는 사람. 든든하고 매사 여유로운 사람. 연하를 만나지 않으려던 이유도 그래서였다. 누군가 자신에게 기대게 될까 봐.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까 봐. 짊어진 책임감 따위를 떨치고 살고 싶은 게 컸다. 누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 그게 제일 마음이 편했다.


최산은 자기도 모르게 인생이 버거웠다. 그래서,



"산아, 점심 먹었어?"

"어? 아니. 왜?"

"같이 먹으러 갈래? 형이 사 줄게."



그 버거움을 덜 수 있는 휴식처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바람 같은 것도 아니다. 실질적으로 정우영과 최산은 사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저 미래를 기약한 사이. 키스는 했지만 이렇다 할 관계는 없는 사이. 처음부터 그랬잖아. 연상 추구 게이라고. 최산이 하재열에게 눈길이 가는 이유는 정우영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아서 따위가 아니다. 산은 지쳤다. 정말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정우영은 기대기엔 너무 좋은 사람이다. 그런 우영에게 부담이 되기 싫었다.


풀썩 침대에 누웠다. 테이블 위 보라색 장미는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색이 빠지기 시작했다. 이게 운명인 거야. 이게.






하재열은 최산이 소망하던 이상형 그 자체였다. 우영은 고3이 되어 연락이 더 줄었고, 산은 구태여 그 연락을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잘만 받던 우영의 전화를 가끔씩은 일부러 못 본 척하기도 했다. 우영에게 부담이 되기 싫다는 건 핑계다. 기다림에 지쳐 다른 사람을 바라보게 되었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다만 미안해지기만 하는 거다. 솔직할 수 없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게 다였다.


봄에서 여름. 여름에서 가을. 그리고 가을 끝자락과 겨울 시작점 사이 그 어딘가. 지겹도록 보는 얼굴은 정우영이 아닌 하재열이 되었다. 우영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수험생한테 민폐다. 얼마 지나지 않은 디데이 어플 아래로 우영의 카톡 알림이 뜬다. 몸이 좀 안 좋아서 집에 일찍 갈 것 같다는 말에 몇 번이고 걱정했다. 제 옆에는 재열이 있었다. 답장은 못 보냈다.


하재열이 좋아서 고백에 응했을까. 그건 모르겠다. 트여 있는 숨구멍이 그곳밖에 없어서 불가피하게 택했던 것도 같다.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고 솔직히 말했지만 일단 만나 보면서 생각해 달라고 하길래, 그냥 얼결에 그렇게 됐다. 언젠 또 내 주장이 있었다고.



"아픈 건 괜찮아?"

"잠깐 컨디션이 안 좋은 거였나 봐. 괜찮아. 바래다줄 정도는 아니었는데……."

"내가 데려다주고 싶어서 데려다주는 거야."



배시시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일 년 전 이맘때에도 취한 산은 하늘을 봤다. 지금은 술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지만, 오늘은 문득 별이 보고 싶은 날이었다. 취해서 눈이 핑핑 돌았을 때. 그땐 별이 많아 보였는데. 오래 봐야 겨우 서너 개 나타나는 점이 지난 가을을 그립게 한다. 이제 거의 집 앞이다. 산은 고개를 내려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빌라 건물 앞에 서 있는 게 멀리서부터 정우영이다. 눈이 마주쳤다.



"……."



입을 꾹 다물고 성큼성큼 다가와 들고 있던 봉지를 건넸다. 얼결에 받은 봉지가 제법 묵직하다. 우영은 그대로 아무 말 없이 뒤를 돌아 가 버렸다. 편의점 봉지 안에는 따뜻하게 데워진 우유도 있었고, 약국에서 산 듯한 진통제, 소화제, 그 외 먹을 것 여러 개가 보였다.



"누구야?"

"……미안. 나 잠깐만."



뭔가 잘못됐다. 산은 우영에게서 받은 봉지를 재열에게 맡기고 골목길로 꺾어 사라진 뒷모습을 향해 뛰었다.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듯 가는 걸 겨우 쫓았다. 다급하게 손목을 잡았다. 숨을 고르는 동안 우영이 뒤를 돌기만을 기다렸다. 까만 뒤통수가 도통 움직이질 않았다. 쉽사리 말을 꺼낼 수가 없다.


이렇게 정우영의 뒷모습을 오래 본 적이 있었을까. 우영이는 내 뒷모습을 얼마나 봤을까. 내가 네 뒷모습을 보지 않았던 만큼 너는 내 뒷모습만을 보고 있었을까. 한참을 뒤돌지 않았다.



"……놔요."



푹 꺼져 갈라진 목소리. 놓을 수가 없다. 손목에 있던 손을 흘리듯 내려 우영의 손을 감싸 쥐었다. 지금 놓으면 영영 빠져나가 다시 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산은 그게 두려웠다. 우영이 자신을 떠나는 게 싫었다. 먼저 다른 사람 만나다 들킨 건 나인데. 이기적이었다. 처음으로 남에게 비겁하게 굴게 됐다. 정우영 때문이다. 나 때문이다.



"우영아. 얼굴 보고 얘기하자. 응?"

"……."

"내가 다 설명할게. 내가,"



힘없이 빠져나가는 손을 쫓으려다 움직임이 늦었다. 우영이 뒤를 돌았다.



"그래서 연락 안 됐구나."

"영아."

"나는 형한테 뭐였는데요?"

"영아, 그게 아니라……."

"어린애가 형 좋다고 따라다녀 주니까 좋아요? 뭐 키링 같아 보였어요? 그냥 좋아한다, 좋아한다 하니까 장난인 것 같았어요?"



정우영이 울었다.



"형한테는,"



험한 말 나올 법도 한데 그 입에서 욕 끄트머리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했던 게 진심으로도 안 보였구나."



내가 욕하지 말라고 해서.

우영이 쓰게 웃었고, 다시 뒤를 돌아 걸었다. 붙잡을 수 없었다. 모든 게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너를 오랫동안 기다렸던 이유는 네가 기다려 달라고 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너를 좋아해서. 산의 자기주장은 처음부터 있었다.


이것이 주인공 최산의 지난 1년 7개월이 담긴 영화. 한 씬도 빠지지 않는 정우영. 로맨스 장르에 꼭 있다는 관계의 갈등. 비로소 자신이 무얼 해야 하는지 알아차리는 주인공. 산은 그렇게 성장한다. 정우영을 만나 갇혀 있지 않아도 되는 틀을 벗어난다. 그동안 바라보지 못했던 우영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