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회
36. 공작님의 가족 상봉 (2)
총체적 난국이라 어디에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다.
먹먹하면서도 막막한 기분이 들어 고개가 푹 수그러졌다.
"세르···."
"미안하다."
세르펜스가 뜬금없이 내 정수리에다 대고 사과했다.
다시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니, 부모에게 혼나는 어린아이처럼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세르펜스가 왜 제게 미안해해요?"
"이런 얘기를 선우에게 말하지 않아서···?"
"그건 미안해하세요."
"정말 미안하다."
몸을 움츠리며 내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애처롭기 그지없다.
이걸 혼낼 수도 없고···.
"진심으로 미안하면 야옹해보세요."
"···야옹?"
"네, 이제 됐어요. 용서했으니까, 그만 사과하셔도 됩니다."
"이걸로 됐다고···?"
내 뜬금포 같은 소리에 그저 반문했을 뿐인데 용서를 받자, 세르펜스의 눈이 왕방울처럼 커졌다.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설마, 선우는 상대가 고양이 소리만 내면 뭐든지 다 용서해주는 건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세르펜스가 지나치게 울적해 하니까, 분위기 전환 겸 장난친 것뿐입니다."
그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장난쳤다가 괜히 손해만 봤다.
얘는 왜 자꾸 나를 이상한 취향으로 만들지 못해서 안달인지 모르겠다.
세르펜스의 얼굴에서 우울함은 사라졌지만, 대신에 미심쩍다는 표정이 그곳에 자리했다.
"그 얘긴 이제 됐고, 그거 말고 제게 말 안 한 거 또 있어요?"
"으음···. 당장 떠오르는 건 없군."
진짜 없는 건지, 문제를 못 느끼고 있는 건지 분간이 안 간다.
앞으로는 유별난 구석이 보이거든 바로바로 붙잡고 따져봐야겠다.
"무슨 꿈을 꿨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아, 말하기 힘들면 무리해서 말씀하실 필요는 없고요."
"···얼마나 자세히?"
"네?"
세르펜스의 녹색 눈동자가 나를 빤히 직시했다.
본능적으로 불안함을 감지한 심장이 크게 약동(躍動)했다.
"그, 그게, 그러니까···."
"이미 선우도 짐작하는 바가 있지 않은가? 내가 악몽을 꾼다면, 그것이 어떤 내용일지···."
"이, 일단 마음의 준비를···."
"듣지 않는 편이 나을 텐데?"
크게 말한다 해도 듣는 사람은 없었지만, 새어나가서는 안 될 비설이다.
세르펜스가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낮게 읊조리듯 물었다.
어차피 대략적인 내용은 다 알고 있을 텐데, 어째서 비위가 상해가면서까지 그것을 들으려 하냐는 질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성검의 주인]은 전체 이용가 소설이었···지?'
정도 이상의 잔인한 묘사와 어린아이를 향한 폭력 행위에 관한 내용은 생략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생략되어서 나온 게 '그거'라는 소리다.
[성검의 주인]에서 나왔던, 어린 세르펜스가 아비라는 작자에게 고문당하던 장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바로 눈앞에 세르펜스의 얼굴이 있는 탓일까?
쓴웃음을 머금은 그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다면 어떤 느낌일지.
귓가에 울리는 감미로운 목소리가 처절한 비명으로 변하면 어떻게 들릴지.
어느 때보다도 뚜렷하고 상세하게.
원하지 않아도 그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지고, 상상하게 되었다.
"읍···."
"거 봐라."
속이 울렁거리며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느낌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세르펜스가 손을 뻗어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세르, 펜스. 이럴 때 등을 토닥이면, 저 진짜로 토합니다."
"······."
그가 말없이 손을 거두고 책상 위의 서류들을 모아서 한쪽으로 밀어놨다.
이런 야박한 녀석 같으니.
나는 후우-, 길게 숨을 내쉬며 호흡을 골랐다.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저까지 외면할 수는 없잖아요."
"이미 선우는 나를 제대로 마주하고 있잖은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래도···."
세르펜스가 걱정된다는 눈으로 나의 눈을 마주 보았다.
지금 걱정 받아야 할 사람이 누군데, 누구를 걱정하고 있는 건지.
녀석이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무력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당시의 일을 되풀이했을 뿐이다. 실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자에게 고문을 당할 때, 그것을 당시의 공작저 인원 전부가 둘러싸고 지켜보고 있다는 것뿐. 그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그 차가운 시선에 그것마저 포기해 버리고···. 그냥, 그랬을 뿐이다."
"세르, 펜스···."
"어차피 꿈인지라 신체적인 고통 같은 건 없었으니, 너무 그런 표정은 짓지 마라."
결국, 그가 자신이 당했던 일을 자세히 털어놓는 일은 없었다.
그것이 자기가 말하기 힘겨워서가 아니라, 내가 듣기 힘들까 봐. 그런 이유라서 더욱 마음이 아팠다.
꿈이라 고통은 없었다 말하지만, 실제 겪었던 일인데 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그저 꿈일 뿐이다."
"그 꿈이 무서워서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했던 주제에···."
"······."
"중간에 깨면 다시 잠드는 게 무서워서, 차라리 그대로 아침까지 시달리는 게 낫다면서요? 그런···, 그런 말이 세상에 어딨습니까!"
"그렇게까지 말하진···."
"말했습니다, 말 하셨어요!"
세르펜스는 무력했던 건 어린 시절뿐이라는 식으로 말했지만, 지금도 정신적인 면에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무력감에 사로잡혀, 자신을 놓아버렸다.
나는 책상 위에 힘없이 올려져 있는 그의 손을 있는 힘껏 붙잡았다.
"저한테서는 잘도 도망쳤으면서, 꿈속에서는 왜 그러질 못해요? 어떻게든 발버둥 치세요. 그들로부터 도망쳐서, 저에게로 피신하면 되잖아요."
"그런 게···."
"가능해요. 원래 꿈이라는 게 무의식의 반영이라잖아요? 세르펜스는 머리도 좋고 기억력도 좋으니까 저를 떠올리고,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제가 꿈속에 짜잔 하고 나타나서 나쁜 사람들을 다 벌씌워 줄게요! 세르펜스에게 손이 발이 될 때까지 싹싹 빌도록 아주 혼구녕을 내 줄 테니까, 저만 믿어요!"
내 듬직한 말에 세르펜스가 푸흣-, 하고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아, 왜요? 저 완전 진지하거든요? 웃지 말아 주실래요?"
"그렇게 말하는 선우도 웃고 있지 않은가?"
"원래 애가 웃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따라 웃게 되어 있어요."
"헛소리."
세상에 헛소리라는 단어를 저렇게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사람은 세르펜스 말고는 또 없을 거다.
"뭐, 그게 안 되거든, 아예 꿈에서 깨서 진짜 저를 찾아오면 되잖아요. 원래 제가 자다 깨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세르펜스는 특별히 봐줄 테니까, 언제든 깨워도 됩니다. 그럼 제가 자장자장이라도 해줄게요."
"자장자장···?"
"자장자장도 몰라요? 궁금하면 찾아와 보시던가요."
내 말을 그런 것도 모르느냐는 도발로 받아들였는지, 녀석이 자장자장이란 말을 중얼거리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 자식 이거, 그동안 보육원 봉사 허투루 했네.'
이래서 정치가의 보여주기식 봉사 활동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다. 봉사는 진실한 마음으로 해야지.
"그보다 괜찮겠어요?"
"아까는 괜찮으냐고 묻더니, 이제는 괜찮겠냐는 질문을 하는 건가?"
"이단 심문관님을 뵙는 거 말입니다. 그런 꿈을 꾸고 난 직후인데···.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서라도 하루만 미루지 그러셨어요."
"언제는 괜찮은 사람이라 하지 않았나?"
녀석이 비죽거리며 말했다.
사람들 앞이라 좋게 말했을 뿐, 역시 '그런' 사람이냐는 질문이었다.
"아뇨, 좋은 사람 맞아요. 그렇긴 한데 좀···. 닮았거든요, 얼굴이."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정확한 주어는 빼먹었지만, 내 말이 '그가 세르펜스와 닮았으니, 선대 공작 또한 닮았을 것'이라는 뜻임을 그는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그리고 답변했다.
"사람은 외면이 전부는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그···자의 얼굴은 못 봤지만, 분명 세르펜스가 훨씬 잘 생겼을 겁니다!"
"말의 앞뒤가 안 맞는 거 아닌가?"
"그딴 거, 알 게 뭡니까?"
세르펜스가 어이없다는 듯이 허, 하고 짧은 헛바람 소리를 내었다.
"공과 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단 심문관에게 따져 물어야 할 것도 있고."
"따져요?"
"위험한 장소에 무력이라고는 전혀 갖추지 못한 사람을 미끼로 던져 넣었으니, 당연히···."
"공과 사를 지키겠다고 말한 지 불과 1분도 지나지 않았는데요?"
"나는 어느 때보다 냉정하다."
"냉정 좋아하시네! 말의 앞뒤가 안 맞잖습니까?!"
"그딴 건 내 알 바가 아니다."
조금 전에 기가 차다는 식으로 반응해 놓고, 바로 써먹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세르펜스도 절 미끼로 써먹었잖아요?"
"그래서 위험한 일이 생기면 바로 대응할 수 있는 거리에서 대기했잖은가.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선우의 입에서 마왕 새···."
"잠깐!!"
"마왕 새···."
"워어, 워-!!"
녀석이 지금 대체 뭐 하는 짓거리냐는 눈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가까이서 매서운 눈초리를 받으니 부담스럽기 그지없다. 잡고서 깜박 잊고 있던 그의 손을 놓아주고, 허리를 세워 바르게 섰다.
"바르고 고운 말을 씁시다. 적당히 '마새개새'쯤으로 줄여서 말하죠."
"뭐가 다른 거지?"
"적어도 된소리는 안 나오잖아요."
"개새···."
그렇게까지 줄여버리면 마왕이 아니라 나를 개새끼라 욕하는 것처럼 들리잖아?
어째서인지 무척이나 찝찝해졌다.
"나라면 그 '마새개새'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바로 돌입해서 선우의 안전부터 확보했을 거다."
"문이 닫혀서 못 들은 거겠죠. 이단 심문관님도 알았으면···."
"당연히 그 전에 몰래 숨어들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것이 안 되면 문에 귀라도 붙이고 있었어야지."
성기사나 이단 심문관이 암살자도 아닐진대, 세르펜스는 그들에게 너무 과한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악마 숭배자가 부 집사에게 흑마법을 사용해서 조종했다고 하였잖은가. 그것이 만약 선우, 당신에게 쓰였다면 어찌할 뻔했지? 그래서 자살하라는 명령이라도 내렸다면···!"
"진정해요, 세르펜스."
"이미 진정하고 있다."
"엄청나게 감정적이거든요?"
"당신이 찔려서 그렇게 느끼는 거겠지."
막무가내가 따로 없다.
이대로 이단 심문관을 만나게 된다면 아주 대판 싸울 기세다.
"모처럼 가족과의 첫 만남인데···."
"가주로서, 당연히 따질 수 있는 부분이다."
"그래도 세르펜스가 다른 사람의 편만 들면 서운하지 않을까요?"
"선우도 가까이 사는 이웃이 먼 곳에 사는 사촌보다 낫다고 말했잖은가."
"이단 심문관님은 사(四)촌이 아니라 삼(三)촌이잖아요."
"상관없다. 어느 쪽이건 나에겐 똑같이 남이다. 애초에 서운해할 것 같다든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든가. 그건 모두 선우의 추측일 뿐이잖은가?"
평소라면 이미지 관리 때문이라도 먼저 싸움 거는 일은 없는 녀석인데···.
밤새 칼이라도 갈았는지 오늘따라 날이 바짝 서 있다.
'잠깐만?'
설마 밤새 꿈에서 전 프라시더스 공작에게 시달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받은 연락이 그자의 형인 이단 심문관의 방문 소식이라서.
그리고 그가 겨우 마련한, 자신을 드러내고 기댈 수 있는 존재인 나를 위험에 빠트렸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이렇게 적개심을 불태우고 있는 건가?'
그럴듯했다.
그에게 있어 혈연이란, 언제나 자신의 숨통을 조여오는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세르펜스도 그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판단한 거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대화로 풀려고 하고 있잖은가. 냉정하게."
이 자식, 이거.
괜찮지 않은 사람이라는 판단이 섰으면 몰래 암살이라도 했을 기세다.
누가 오리지널 서스펜스 아니랄까 봐, 쥐도 새도 모르게 킬각을 재고 있었다.
판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