這是用戶在 2024-10-4 23:48 為 https://viewer.mrblue.com/ebook/E000073444/5?mode=view&detailPath=novel 保存的雙語快照頁面,由 沉浸式翻譯 提供雙語支持。了解如何保存?
5권  第五冊

프로푼디스 5권 Profundis 第五冊



지은이|아이제 李智恩|Aije

펴낸곳|이클립스 已開啟|Eclipse

투고 및 문의 | eclipse@sybook.kr
投稿與查詢 | eclipse@sybook.kr


ⓒ아이제, 2020 艾澤,2020 年


이 전자책은 대한민국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저작물입니다. 출판권자로부터 서면에 의한 허락 없이 이 책의 일부나 전체를 어떠한 형태로도 재가공할 수 없습니다.
本電子書為著作,受大韓民國著作權法保護,未經出版者書面許可,不得以任何形式複製本電子書之全部或部分內容。

10. 우리 (하) 10. 我們(哈)




전신이 뼈로 된 용이 알무텐을 향해 돌진했다. 마구 휘둘러지는 촉수에 몸 곳곳이 부서져 나가도 멈추지 않았다. 그 위에 탄 문영이 외쳤다.
一隻全身是骨的巨龍衝向阿爾穆坦。它沒有停下來,即使它的觸手粉碎了它身體的每一部分,騎在它身上的月英也哭了出來。

“공격하세요! 전 신경 쓰지 말고……. 큭!”
"攻擊我!別管我.......砰!"

말이 나기가 무섭게 촉수가 용의 옆구리를 정확히 후려갈겼다. 갈비뼈가 와르르 무너졌다. 균형을 잃은 본 드래곤이 헛된 날갯짓을 몇 번 하다 곤두박질쳤다. 문영은 수백 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는 와중에도 고함을 질렀다.
觸手狠狠地撞在龍的側面,幾乎硬得說不出話來。它的肋骨噼啪作響。失去平衡的巨龍徒然拍打了幾下翅膀,然後急速下墜。月英尖叫著從數百公尺高的地方摔了下去。

“지금!” 「現在!」

잠시 주춤했던 사람들이 공격을 재개했다. 성채처럼, 별처럼 거대한 변이종의 몸에 수많은 공격이 쏟아졌다.
在短暫的停頓之後,他們恢復了攻擊。變種人的星辰般的身體就像一座碉堡,傾瀉下無數的攻擊。

심연의 바닥에 갓 흐른 피가 강이 되어 흘렀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사람들은 조금씩 틀을 잡아 가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제단을 지키는 형체들과 사투를 벌이느라 이곳에 꽤 적응한 상태였다. 물론 알무텐이 그런 잔챙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크고 강력했지만, 결국 같은 핏에서 태어난 것들이라 본질은 비슷했다.
在深淵的底部,新鮮的血流成河。無數的人死的死,傷的傷,昏迷不醒。但是,即使在這一切之中,人們也在逐漸適應;他們早已適應了這個地方,與守衛祭壇的形態奮力搏鬥。當然,阿爾穆騰人比那些可憐蟲更龐大、更強壯,但他們畢竟是流著同樣的血。

희생과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대응 전략을 세웠다. 알무텐의 능력으로 인해 누군가 폭주하면 당황하지 않고 바로 후방으로 내돌려 전투 현장으로부터 차단했다. 아군이 피해를 받지 않도록. 돌이킬 수 없이 심각한 경우가 아닌 이상은 가이딩으로 폭주를 어느 정도는 진정시킬 수 있었다.
戰略是建立在犧牲和試誤的基礎上。如果 Almuten 的能力導致有人亂跑,我們不會慌張,而是立刻將他們移到後方,並將他們從戰場上截斷。讓他的盟友遠離傷害。除非情況到了無法逆轉的嚴重程度,他才會透過引導,在某種程度上平息橫衝直撞。

그렇다. 이 전장에는 가이드가 있었다. 어떤 레이드에서도 겪어 보지 못한 일이었다.
是的。這張地圖有導引。這是我在任何突擊中從未體驗過的。

에레혼 1팀 전속이라는 젊은 가이드는 밸브가 달린 마스크를 쓴 데다 각종 장비로 무장했다. 언뜻 보아서는 하급 헌터와 잘 분간이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 가이드는 잔해와 시체가 널브러진 전장을 몸을 사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돌 조각이 날아오거나 땅이 갈라지는 등의 공격 여파도 능숙하게 피했다. 전투도 단련도 할 필요 없이 후방 지원만을 맡는 다른 가이드와는 상당히 괴리가 있었다.
這位年輕的嚮導是 Erehon 第一小隊的成員,他戴著閥門式面罩,身上配備著各式各樣的裝備。乍看之下,他和低階的獵人沒有什麼區別,因為他在滿是碎石和屍體的戰場上飛奔。他巧妙地避開了攻擊的餘波,例如飛起的石塊和破裂的地面。這與其他不需要戰鬥或訓練,只需要提供後方支援的嚮導有天淵之別。

그는 에레혼 1팀의 곁에 머물러 있다가 짬이 날 때마다 다른 소속의 부상자들에게도 서슴없이 다가갔다. 손을 잡거나 옷 위로 몸을 만지는 이상의 접촉은 하지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처음에 반신반의하던 이들도 결국은 그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他一直陪伴在 Erejón 1 隊的身邊,但只要有機會,他就會去看其他隊伍的傷員。他從未接觸他們,只是握著他們的手或隔著衣服觸摸他們,但在當時的情況下,這已經足夠了。最後,即使是最不情願的隊員也別無選擇,只能依靠他。

격렬한 진동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기어이 알무텐의 다리 한쪽이 잘려 나갔다.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화력을 모아 한곳만 집요하게 노린 결과였다. 맹독을 품은 새까만 체액이 비처럼 흩뿌려져 대지를 녹였다.
劇烈的震動撼動了一切。Ghey Almuten 的一條腿被切斷了。這是不顧代價、一心一意集中火力的結果。黑色的毒液如雨般傾瀉而下,融化了大地。

“크허엉!” 「啊啊啊啊啊啊!」

잘린 다리 앞에 선 흑호가 고개를 쳐들고 포효했다. 어느덧 그도 제법 지쳤다. 윤기가 흐르던 털가죽 곳곳이 찢겨 나가 속살이 드러났다. 하지만 승산이 보였다. 이대로 집중을 흩뜨리지 않고 전략만 잘 지킨다면 알무텐을 쓰러뜨리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벌써 다리 하나를 잘라 낸다는 업적을 달성하지 않았는가? 이제 조금만 더, 정말 조금만 더 하면…….
站在斷橋前,黑虎仰頭咆哮。現在,它已經受夠了。它光亮的皮毛多處破損,露出了肉體。但他還有機會。如果他能專心一致,堅持他的策略,拿下 Almuten 並不是不可能的事。我已經完成了砍掉他一條腿的壯舉,現在我只需要再多一點,再多一點.......。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然後發生了一件事

“지금이다! 움직여.” "現在快走

군말 없이 헌터들과 협조하여 잘 싸우던 에스퍼들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였다. 검붉은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전열을 무시하고 멋대로 튀어 나갔다. 그 뒤에 배철성 중장이 있었다.
與獵人隊合作打得有聲有色的Espers,出現了奇怪的動向。一群黑衣人大步走了出來,對陣型視若無睹,在他們身後的是裴哲成中將。

“빨리 안 움직이고 뭐 하나!”
「你走得不夠快!」

“하지만, 본부장님. 여기서 단독 행동을 했다가 위험해지면.”
"但是,長官如果你在這裡單獨行動 你會有危險"

“이미 다 잡은 사냥감인데 무슨 소용이야. 그러다가 저 하이에나 같은 놈들이 선수를 쳐서 공적을 죄다 채 갈지 어떻게 아나. 어서 돌격해!”
「當你已經得到了獵物,狩獵還有什麼意義?」 「你永遠不知道什麼時候,其中一隻土狼會撲向你,奪走所有的功勞,所以衝啊!」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늙은 남자의 눈에 절박한 탐욕이 일렁였다. 죄다 죽을 지경인 절망적인 상황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눈앞에 승산이 빤히 보였다. 레이드가 끝난 후의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을 수가 없다.
老人的眼中閃過絕望的貪婪,他對著鯨魚大喊。在不那麼絕望的情況下,當他們所有人都快要死的時候,機率會對他們有利。我不禁懷疑,這次突襲結束後,是否還有意義?

“마지막 일격은 뺏기지 마라! 놈의 숨통은 우리가 끊는 거다!”
「別讓他笑到最後,是我們截斷了他的呼吸!」

졸지에 뒤통수를 맞은 헌터들이 우왕좌왕했다. 급하게 그들의 빈자리를 메우자니 빠진 에스퍼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수백 명의 죽음을 기반으로 간신히 다져 놓은 전열이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被 Zolzi 從背後捅了一刀的獵人們四散奔逃。在他們急於填補空隙的時候,失蹤的 Espers 數目太多了。瞬間,建立在數百人死亡基礎上的勉強鞏固的防線搖搖欲墜。

“중장님께서는 정말……. 변한 것이 없으시군요. 옛날부터 참으로 한결같으십니다.”
"你真的.......你沒有變,你還是老樣子"。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신제의 목소리를 중장이 용케 들었다.
中將聽到辛捷的聲音,喃喃自語。

“그러는 우 단장 자네는 너무 많이 변했어. 사람이 죽을 날을 받아 놓으면 갑자기 바뀐다던데. 아무래도 여기서 죽는 건 내가 아니라 우 단장 쪽이 될 모양이군?”
「所以,吳老師,你變了很多,他們說當一個人接受了自己死亡的那一天,他就會突然改變,我想在這裡死去的不是我,而是你吧?」

“글쎄요. 어떨까요.” 「我不知道,也許吧」

신제는 말끝을 흐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말은 유들유들하게 했으나 그의 눈에 초조한 빛이 역력했다. 알무텐은 사람의 혼란과 공포를 감지하는 데는 도가 튼 놈이었다. 이제까지는 수적·전략적 우세를 이용해 어떻게든 버텼다지만, 빈틈을 보인 이상…….
神父結結巴巴地咬著下唇。他的說話很流暢,但眼中卻閃爍著緊張的光芒。Almuten 是感知人類困惑與恐懼的高手。到現在為止,他還能透過純粹的數量和戰略優勢勉強維持,但現在他已經展現了他的脆弱.......。

“유건이 형!” "Yugan!"

옆에서 희수가 다급한 외침과 함께 달려 나갔다. 그의 시야에 오로지 유건만이 담겼다. 지금까지 유건은 후방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에스퍼들이 갑자기 우르르 몰려간 탓에 앞이 텅텅 비었다. 알무텐의 시선으로부터 그를 가로막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졌다.
在他身旁,Hee-su 緊急地叫著跑了出來,他的視線集中在 Yugan 身上。到現在為止,他一直在後面。但是突然衝出來的艾斯佩斯人已經掃清了道路。沒有任何東西可以阻擋阿爾穆騰的視線。

거칠고 두꺼운 표피 아래, 적색왜성 같은 거대한 눈이 스르르 움직였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알무텐이 유건을 인지한 것 같았다. 모두가 죽은 참사 현장에서 형과 함께 아득바득 살아남은 그때 그 아이를. 본능적으로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희수는 있는 힘껏 달리며 이를 갈았다.
在粗糙厚實的表皮下,紅色矮星般的大眼睛眨來眨去。不知道是不是因為心情的關係,Almuten 似乎認出了 Eugene。在那場災難中,他和他的哥哥勉強活下來,其他人都死了。他有一種本能的不祥預感。熙洙拼命地跑著,磨著牙。

“중장인지 뭔지, 다 늙은 꼰대 새끼가 일 한번 더럽게 꼬네……. 짜증 나게.”
"中將什麼的,你這個老混蛋,你想把事情弄得髒.......煩人"

다음 순간, 그는 유건을 등지고 몸을 날렸다. 공기가 끈적하고 차가워졌다. 알무텐이 눈알을 굴려 희성을 응시했던 바로 그때처럼.
下一秒,他就飛了起來,背對著 Eugene。空氣又黏又冷。就在 Almuten 揉揉眼睛,盯著 Hee-Sung 的時候。

“피해요!” 「閃避!」

퍽. 퍽! 희수의 눈에서부터 두 차례 피 분수가 일었다. 희수가 등을 돌리고 있는 탓에 유건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허공에 흩뿌려지는 피가, 잘게 조각난 안구의 파편이……. 너무도 느리고 선명하게 보였다.
帕克兩道血泉從熙秀的眼中噴出。由於熙秀背過身去,雨筠看不清楚到底發生了什麼事。但是噴射到空中的血液、眼球碎裂的碎片.......。太慢、太清楚了。

유건에게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다. 에레혼 1팀은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전투 도중에 좀 다치는 한이 있어도 금세 나을 거라 믿었다. 이제까지 줄곧 그랬듯이, 죽지도 않고 징글징글하게 살아남아서 오래도록 건재할 거라고.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믿음에 금이 갔다.
Yugan 有一個毫無根據的信念。那就是 Erehon 1 小隊無論如何都不會死。即使他們在戰鬥中受傷,也會很快痊癒。他們會一如既往地生存下去,茁壯成長。但現在,在這一刻,這份信任被打破了。

“권희수!” 「權熙洙!」

희수의 뒷모습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유건은 앞뒤 잴 것 없이 그를 향해 달렸다. 희수는 빈말로라도 괜찮다고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얼굴이 전부 피범벅이었다. 그나마 입과 턱에는 피가 덜 묻었지만, 눈 쪽은 차마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熙洙的背像沙堡一樣崩塌了。余甘頭也不回地朝他跑去。熙洙的狀態不能用好來形容。他的臉上滿是血,嘴和下巴上的血還比較少,但是他連眼睛都不敢看。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간 바위가 수백 개로 쪼개져 알무텐을 노렸다. 신제였다. 그의 뒤를 이어 각양각색의 공격이 매섭게 꽂혔다. 폭발음과 비명, 고함으로 귀가 먹먹했다.
一塊巨石橫空飛來,劈成數百塊碎片,目標是阿爾穆騰。他是一名祭司,接踵而來的是一連串的攻擊。爆炸聲、尖叫聲、呼喊聲震耳欲聾。

“출혈이……. 빌어먹을.” "The bleeding is.......該死"

유건은 희수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상체를 안아 올렸다. 이를 악물고 엉망이 된 눈가에 손바닥을 얹었다. 가이딩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지는데 출혈은 여전히 멎지 않았다. 피 웅덩이 가운데 쓰러진 희수가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Yugun 在 Hee-Su 面前跪下,抱住他的上半身。他咬緊牙關,將手掌覆蓋在被打傷的眼角上。他能感覺到有引導力進入,但血仍未止住。熙洙倒在血泊中,笑了。

“아……. 하하하.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네요. 유건이 형이 제 걱정을 다 해 주고. 와, 짜릿해라.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눈 한 개쯤은 뽑아 볼걸.”
"啊.......哈哈哈,生活真賤啊!Yoo-gan 為我解決了所有的煩惱。哇,好刺激。早知道會這樣,我一定要挖出一兩隻眼睛來"。

“지금 그런 소릴 할 때야?”
「現在是說這個的時候嗎?」

유건이 버럭 외쳤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사납게 일그러진 그의 표정이 뇌리에 선했다.
Yugan 喊道。即使不看他,我也能看出他表情中的凶狠。

“제 정신계 저항력 때문에 폭주가 잘 안 먹히니까, 아예 눈을 터뜨려 버린 거 같아요. 저는 시선을 안 마주치면 능력을 못 쓰거든요. 하하, 저 새끼 진짜 영악하네…….”
「我覺得他剛剛把眼睛瞪出來,是因為我的精神抵抗力讓他無法使用超能力。 如果我不和他有眼神接觸,我就無法使用超能力。 哈哈,那家伙真聰明.......」

“제발 좀 닥치고 있어.” 「請閉嘴」

“치이. 형은 맨날 나만 보면 조용히 하래.”
「齊一,我哥哥見到我總是叫我安靜」

가이딩이고 뭐고 일단 지혈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유건은 자신의 셔츠 소매를 찢어 희수의 눈에 안대처럼 둘렀다. 한때 희수가 그에게 해 주었던 것처럼. 그의 손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不論是否是引導者,這似乎是個好的開始。Yugan撕下襯衫的袖子,像貼眼罩一樣貼在Hee-Su的眼睛上。就像 Hee-Su 曾經為他做過的一樣。他的手像在顫抖。

그는 희수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가 개인적으로 희수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와는 별개였다. 상대가 누구든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알무텐에 의해 목숨을 잃는 사람을 보는 건 이제 지긋지긋했다.
他不希望她死,無論他個人喜歡或不喜歡她都無關緊要。不管是谁都一样。他厭倦了看到人們被 Almuthen 殺死。

“지금 네 꼴이 어떤지 알아? 가이딩도 큰 효과가 없고, 피도……. 젠장. 왜 안 멎지…….”
"你知道你現在是什麼樣子嗎?指導沒有多大用處,血不是.......。該死,為什麼不停......."

“그럼 어때요? 전 여기서 죽을 각오를 하고 들어왔어요. 최종 보스라. 이 정도면 오래 버텼죠.”
"好吧,那又怎樣,我來這裡就是為了死的,最後的BOSS我堅持了這麼久"

“…….” "......."

“으음. 좀 아쉽긴 하네요. 아직 형이랑 못 해 본 거 많은데. 도그플도 못 해 봤고, 안대플…… 이건 해 봤다. 그리고 폰섹이랑 또…….”
"嗯「真可惜,我還有很多事沒跟你做呢。 我還沒做 Dogflesh,還沒做 EyeDapple......,我做了這個,又做了 PonSec.......」。

“네놈들한테는 사는 게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그딴 식으로 장난처럼 말하고 죽으면 끝이냐고!”
「生命對你們這些人來說就一文不值嗎? 你們就這樣說話,像個笑話,然後就死了!」

유건은 상처를 지혈하던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희수는 신음 한 번 지르지 않고 입매를 올려 웃었다.
Yugun吃力地用手去處理他的傷口。但是熙秀連呻吟都沒有,只是微笑著。

“당연하죠. 태어나기를, 하아……. 아무것도 아닌 걸로, 태어났으니까.”
"當然,願你出生, ha.......出生,如同無物。"

희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바닥을 통해 진동이 전해졌다. 전투의 울림이었다. 그에게는 교실보다, 가정집보다, 번화가보다 오히려 이곳이 더 익숙했다.
Hee-Su 呼出一口長氣。震動在地板上穿梭。比起教室,他更熟悉這個地方,更熟悉他的家,更熟悉熙熙攘攘的街道。

그의 탄생과 동시에 죽은 어머니와 그를 혐오스러워하다 내다 버린 아버지가 지금의 그를 본다면 뭐라고 생각할까. 징그러운 괴물 놈이 드디어 죽어서 잘됐다고 여길까? 아니면 그래도 제 피를 이은 자식이라고 조금쯤은 안타까워해 줄까.
如果他出生時就死了的母親和厭惡他並拋棄他的父親看到他現在的樣子,他們會怎麼想? 他們會認為這個噁心的怪物終於死了是件好事嗎?或者他們會為他感到有點遺憾,因為他還是我的骨肉。

어찌 됐든 이거 하나만은 확실했다. 그에게 온갖 짓을 당해 놓고도, 그럼에도 손까지 떨면서 그를 걱정해 주는 가이드는 유건이 유일했다. 전에도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但有一件事是肯定的在他對他做了那麼多事之後,Yuugan 是唯一一個還會和他握手的導遊。以前沒有過,也許以後也不會有了。

“권희수. 내 말 들려?” 「權熙秀你能聽到我嗎?"

“…….” "......."

“정신 차려. 대답 좀 해 봐. 희수야, 권희수!”
"醒醒回答我熙秀,權熙秀!"

희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건은 그를 꽉 끌어안은 채 일어섰다. 고개가 툭 꺾여 품에 고스란히 떨어졌다. 손끝에 느껴지는 희미한 맥박이, 아직도 줄기차게 빨려 나가는 가이딩이 아직 그의 숨이 붙어 있음을 알리는 유일한 지표였다. 

쾅! 알무텐의 촉수가 그들의 바로 앞에 내리꽂혔다. 곳곳에 작살처럼 돋아난 가시로 에스퍼의 몸을 꿴 채였다. 에레혼 단원들이 급히 달려왔다. 

“권희수 헌터님. 가이드님!” 

유건은 희수를 데리고 그들의 엄호를 받으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시선은 전투 현장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모두가 힘을 합쳐 간신히 지키고 있던 대열이 각성자 관리 본부의 돌발 행동으로 완전히 무너진 지 오래였다. 혼돈이 그 자리를 집어삼켰다. 

알무텐이 입을 벌렸다. 건물도 통째로 들어갈 정도로 컸다. 놈의 입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보통은 어느 생물이든 입을 벌렸을 때 이빨이나 입천장, 혀가 보일 텐데 블랙홀처럼 온통 새카맣기만 했다. 최전방에 있던 에스퍼 하나가 발을 헛디뎌 그 입 속으로 떨어졌다. 어둠에 잡아먹힌 척추와 내장이 으득으득 으스러졌다. 

“아아아악! 흐아, 악, 끄아악!” 

에스퍼의 허리와 가슴이, 어깨가 차례차례 어둠에 잠겼다. 그는 피거품을 물고 비명을 지르다가, 목 언저리까지 잡아먹히자 눈을 까뒤집고 조용해졌다.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검붉은 피가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이윽고 머리통마저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허억!” 

“아, 아아…….” 

눈앞에서 동료가 끔찍한 최후를 맞는 광경을 목격한 에스퍼들은 공포에 질렸다. 맹공을 퍼부어 최후의 일격을 따내라는 지시마저 잊고 주춤주춤 물러섰다. 

“멍청한 놈들. 겁먹지 말고 덤벼! 자꾸 도망칠 궁리만 하니까 저놈이 더 기세등등해서…….” 

중장의 불호령이 도중에 잦아들었다. 중장은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전신에 빈틈없이 칭칭 두른 실드가 어느새 깨져 있었다. 그리고 하반신에는, 통나무처럼 굵직한 촉수가. 

“본부장님!” 

에스퍼들이 비명처럼 외쳤다. 중장의 몸을 칭칭 감은 촉수가 콱 조여들었다. 그의 얼굴 절반을 메운 흉터가 씰룩 뒤틀렸다. 그 직후, 입가를 타고 한 줄기 피가 흘렀다. 

“컥!” 

촉수는 중장을 붙잡은 채 본체로 돌아갔다. 그의 몸이 허공을 가로질러 수 킬로미터를 날았다.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에스퍼들과 경악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헌터들이 한 번씩 스쳐 지나갔다. 

“뭐 하고 있나! 으윽, 빨리 날 구하지 않고.” 

중장이 처절하게 고함을 질렀다. 그 와중에도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니, 역시 각성자 관리 본부의 수장 자리를 공으로 차지한 건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중장이 몇 번이고 도움을 청했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헌터들은 물론 자신의 직속 부하들까지도. 

에스퍼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당연히 알고 있었다. 중장이 내리는 명이 이 상황을 타개하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무리한 것들뿐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들이 중장의 얼토당토않은 명을 수행하다 죽는다 한들 중장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이제까지는 상관의 명을 어겼다가 벌을 받을 것이 두려워 울며 겨자 먹기로 따랐다. 하지만 전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커져 갔다. 모두가 죽을 판국인데 상명하복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이……. 멍청한 놈들.” 

중장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 멀리서 그를 빤히 쳐다보는 신제가 시야에 들어왔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빠른 속도로 끌려가는 도중인데, 이상하게 그의 모습만큼은 또렷이 보였다. 신제는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우신제…….”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와 모욕감이 치밀어 올랐다. 저놈은 보나 마나 속으로 자신을 비웃고 있을 것이다. 저놈 따위가 감히. 실험체 주제에. 장기짝 주제에. 앞날을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알무텐을 죽여야겠다는 생각에만 눈이 먼 주제에! 

“네놈들! 돌아가면, 헉, 전부, 명령 불복종으로, 커억…….” 

목구멍에서 쉭쉭대는 소리가 났다. 남은 힘을 짜내어 외치던 도중에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다. 중장의 안색이 뻘겋게, 허옇게, 마침내는 퍼렇게 질렸다. 

“크, 억, 끄윽.” 

그의 상체와 하체가 촉수가 조이는 힘을 견디지 못하고 분리되었다. 몸 안의 장기를 받쳐 주던 근육과 가죽이 위아래로 찢어졌다. 

“끅…….” 

절단면에서부터 피에 젖은 내장 덩어리를 쏟으며, 중장의 상체가 알무텐의 입 속으로 던져졌다. 미처 눈조차 감지 못한 채였다. 제복을 입고 구두를 신은 하반신이 바닥을 뒹굴었다. 모두가 침묵했다. 비명을 지르지도, 슬퍼하지도, 심지어는 통쾌해하지도 않았다. 이 나라의 정부에 소속된 모든 각성자들을 다스리던 이의 최후답지 않게 너무도 허망했다. 

지상을 가득 메운 알무텐의 본체가 느리게 꿈틀거렸다. 놈은 입 안에 든 것들을 씹어 삼키고 있었다. 그으으으…….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심해 생물의 울음과 망가진 음향 기기의 소음을 뒤섞은 듯한 소리가 마자로스 전체를 울렸다. 꼭 기뻐하는 것처럼 들렸다. 잠시 사람 모습으로 돌아와 숨을 고르던 찬이 빈정거렸다. 

“무슨, 당 충전 타임이냐? 나도 못 먹은 간식을 어디서 신나게 처먹고 있어.” 

일반인이라면 진작 빈사 상태에 빠졌을 부상을 입고도 말소리만큼은 또렷했다. 그는 옆에 선 신제를 향해 이를 갈았다. 

“이런 걸 잡자고 날 끌어들였단 말이지? 미친 새끼. 그냥 처음부터 집단 자살을 하자고 하지 그랬냐.” 

“왜. 이제 와서 도망치고 싶어지기라도 했어? 그러든가. 유건이도 자리 지키고 있는데 네가 내빼면 볼만하겠네.” 

“내가 언제 도망간댔냐? 그리고, 씨발. 여기서 백유건이 왜 나오는데?” 

도망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싸우다 죽을지언정 적이 무서워 내빼는 꼴사나운 짓은 안 하는 게 찬의 성격이었다. 거기다 신제가 한층 불을 지폈다. 유건은 그의 역린이었다. 

이제까지 그의 삶은 몹시도 순탄했다. 어릴 적부터 또래보다 체격이 훌쩍 큰 데다 사납게 생긴 덕에 누구든 그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성적도 공부를 전혀 안 하는 것치고는 괜찮게 나왔고, 운동도 뭘 하든 시시할 정도로 뛰어났다. 심지어는 인기까지 많았다. 

각성자가 된 뒤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냥 학교 다니면서 무던히 잘 살던 와중에 갑자기 각성해 버렸다. 그것도 전 세계에서 알아준다는 S급으로. 잘은 모르겠지만 존나 쩐다고 생각했다. 그 후 부모님이 권유하는 대로 센터에 들어갔다가, 좆같아서 몇 달 만에 때려치웠고, 멋있어 보여서 에레혼을 만드는 데 동참했다. 그는 어딜 가나 서열 최상위였고 승자였다. 

같은 맥락에서 찬은 에레혼 1팀 중에서 자신이 가장 낫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딜 가나 칭송받는 S급이고, 피지컬 안 달리고, 전투 능력도, 뭐. 누구 하나 죽을 때까지 싸워 본 적이 없어서 그렇지 각 잡고 붙으면 이길 자신이 있었다. 단장도 부단장도 되지 않은 건 그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귀찮아서. 그냥 귀찮아서 감투를 양보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유일하게 뒤처지는 것이 바로 유건에 관한 일이었다. 우신제와는 아주 지랄 염병 신파를 찍고 주태인에게도 고분고분하게 굴면서, 심지어는 권희수 그 사이코한테도 연하라 그런지 조금 유해지면서, 유건은 찬에게 유독 박했다. 그는 찬만 보면 집에 침입한 강도를 발견한 개새끼처럼 잔뜩 경계했다. 정체를 숨기고 고양이 모습으로 접근해서야 웃는 얼굴을 처음으로 보여 줬다. 

왜 나는 안 되는데? 다른 놈들이랑은 이런 짓 저런 짓 다 했으면서.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났다. 눈만 감으면 그 빌어먹을 가이드 새끼 생각이 나서 잠도 오지 않았다. 사실은 수컷들 간의 경쟁이니 뭐니 그런 걸 넘어서 그냥 애가 탔다. 짝사랑 한번 찌질하게 한다 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곧 모든 게 끝날 텐데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래……. 말 나온 김에.” 

찬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돌려 풀었다. 

“백유건한테 마지막으로 멋있는 모습 좀 보여 줘야지.” 

알무텐은 사람들을 삼키느라 잠시 공격을 멈추었다. 사람들은 그 틈을 타 기세를 가다듬었다. 찬 또한 다시 모습을 바꾸었다. 전신이 피로 물든 맹수가 절뚝이며 알무텐에게 달려들었다. 

한 차례 혼란을 겪으면서 인원이 확연히 줄었다. 이제는 땅을 딛고 서 있는 사람들보다 쓰러진 사람이 더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싸웠다. 핏발이 선 눈에 살의를 품고, 수천수만 배 더 크고 강한 적에 맞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괴물이 된다. 우리가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본다. 심연을 박차고 나가기 위해서는 먼저 심연 밑바닥까지 내려가야 한다. 여기는 심연의 밑바닥이자 오랜 세월 동안 인류가 빠져 허우적대던 구덩이(Pit)이다. 가장 아래까지 내려왔으니 이젠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 

“크아아아!” 

알무텐이 입을 쩍 벌리고 포효했다. 그 소리를 가까이서 들은 사람들의 고막이 터지고 귀에서 피가 흘렀다. 놈의 분노에 호응하듯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소용돌이가 일었다. 소용돌이는 얼음 기둥이자 폭풍의 눈이 되어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순식간에 얼렸다. 브리니클(Brinicle). 심해의 고드름이었다. 

싸우던 모습 그대로 얼어 버린 사람들 사이로 찬이 달려나갔다. 그도 브리니클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살짝 스쳤는지 흰 얼음이 뒷다리를 타고 올랐다. 물론 평범한 얼음은 아니었다. 냉기에 잠식된 곳을 따라 빠르게 감각이 사라졌다. 아마도 신경과 근육이 모두 죽었을 것이다. 

그는 알무텐의 옆구리에 달라붙어 딱딱한 표피에 발톱을 박아 넣었다. 할퀴고 물어뜯으며 집요하게 공격한 끝에 다리 하나를 끊어 냈다. 이제 놈에게 남은 다리는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활약은 거기까지였다. 아래에서부터 타고 올라온 냉기가 기어이 전신을 뒤덮었다. 까만 털가죽 전체에 하얗게 서리가 끼었다. 의식이 희미해졌다. 

조금만 더 하면 놈을 죽일 수 있는데. 이제 거의 다 왔는데! 너무도 분했다. 찬은 점점 굳어 가는 근육을 간신히 움직여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크릉…….” 

높은 곳에 매달려 있던 그의 몸이 스르륵 떨어졌다. 순번을 교대하듯 그를 지나쳐 태인이 달려갔다. 칼날을 타고 번져 손까지 넘보는 얼음을 독기로 겨우 녹이면서. 거기에 신제가 합류했다. 남은 다리 하나를 처치하는 것은 태인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그는 몸통 바로 앞까지 바짝 접근했다. 놈의 심장만을 노렸다. 

독을 가득 실은 칼날이 다리의 뿌리 부근을 베었다. 불과 얼음과 충격파와 뇌전과 그 외에 서로 다른 속성의 공격들이 그 자리에 거듭 꽂혔다. 신제가 몸통에 난 상처를 염력으로 벌렸다. 까득, 우드드득. 표피가 찢어져 상처가 크게 벌어졌다. 

그 속에서 수없이 많은 시체들의 형상이 꿈틀거리며 울부짖었다. 우성연 준장, 배철성 중장,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살리기아 부대원들, 정창혁 소령, 백희성……. 짐승의 살에 알을 까고 나온 구더기처럼 우글우글 모여서는, 이쪽을 노려보며 저주를 퍼부었다.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자신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로 중얼거리며 신제는 손을 뻗었다.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태어난 이후로 세상은 줄곧 그에게 감옥이었다. 아니, 감옥조차 되지 못했다. 감옥은 죄를 지은 ‘사람’을 가두는 곳이 아닌가. 이곳은 그에게 우리였다. 실험용 짐승을 가두는 우리. 

그러니 이제는 부디 해방시켜 주소서, 이 우리에서 나를……. 그는 시체들이 꿈틀거리는 상처 속에 손을 불쑥 집어넣었다. 알무텐의 심장에 곧바로 능력을 쏘아 보냈다. 

“캬아악! 캬악! 키이이익!” 

알무텐이 몸 전체를 들썩이며 발광했다. 촉수가 달린 다리가 날아와 신제를 후려갈겼다. 수십 명이 달라붙어 있었는데, 그 많은 인원을 단번에 뿌리치고. 

“윽!” 

급하게 반쯤 굴렀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한쪽 팔이 으깨졌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그 아래 드러난 어깨뼈 또한 산산조각 났다. 하지만 아픔은 전혀 없었다. 정신이 이상하리만치 고양되었다. 자신의 숨소리가, 놈이 내지르는 괴성이,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정보가 슬로 모션처럼 느리게 재생되었다. 

신제는 곧바로 벌떡 일어났다. 좁아진 시야에 갈라진 살 사이에서 펄떡이는 거대한 심장만이 보였다. 망가진 한쪽 팔 따윈 인식의 범위 밖으로 밀려났다. 그는 다시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명치 저 아래에서부터 힘을 끌어 올렸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까닭에 손발을 쓰는 것보다 더 편리한 염력을, 한 지점에 아낌없이 퍼부었다. 

심장이 기이한 형태로 일그러졌다. 조직이 꿈틀거렸다. 웬만한 지하도나 터널만큼 큰 동맥이 부풀었다. 신제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한계를 넘어 능력을 쥐어짠 탓에 전신의 신경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퍼억! 뒤틀고 짓이기는 힘을 이기지 못한 동맥 하나가 툭 끊어졌다. 일부의 균열은 곧 전체의 붕괴로 이어졌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 큰 파열음과 함께 심장이 터졌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우주를 유영하는 오래된 별처럼 일렁이던 알무텐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단장님.” 

뒤에서 유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신제의 이성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초점 없는 눈으로 몇 번이고 확인 사살을 했다. 이미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꺼먼 피에 절어 버렸는데도 개의치 않고. 퍽, 퍽, 퍽! 이미 고깃덩이로 전락한 심장이 조각나고 또 조각났다. 

“……우신제!” 

유건이 처절하게 악을 썼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그의 앞에 알무텐의, 평생을 걸고 노리던 적의 사체가 있었다. 얼음이 녹아내리듯 깨달음이 번졌다. 알무텐이 죽었다. 기어이 놈을 죽였다. 

“유건아.” 

이럴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신제는 잘 알지 못했다. 숙원을 이루었으니 아무래도 기뻐해야 할 타이밍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습관적인 웃음을 머금은 채 돌아보았다. 

“…….” "......."

하지만 유건이 이상했다. 신제는 유건의 그런 얼굴을 처음 보았다. 

그의 형이 죽었을 때 이런 표정을 지었던가? 아니다. 그때는 좀 더 격렬하게,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펑펑 울었다. 지금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을 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데. 어째서……. 

왜 그런 표정을 지어요? 그렇게 물으려 했다. 하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신제는 헛되이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 그의 시선이 유건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는 알아차렸다. 

자신의 가슴 한복판을 뚫고 굵고 날카로운 것이 튀어나와 있었다. 알무텐의 촉수 끝에 달려 있던 가시가. 가시 전체가 신제의 피로 붉게 번들거렸다. 

“……아.” 

신제는 가시를 발견하고도 굳어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의 눈이 놀란 듯 살짝 커져서 유건만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눈매가 왈칵 일그러졌다. 눈시울을 따라 투명한 물기가 고였다. 

유건은 가끔 신제의 우는 모습이 궁금했다. 물론 좋은 의도는 아니었다. 저 증오스러운 남자에게도 인간적인 감정이란 게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에게도 붉은 피가 흐르는 건 확인했는데, 눈물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유건의 상상은 항상 조악한 수준에서 결론지어졌다. 신제가 우는 때는 가증스럽게 연기를 할 때뿐일 것이라고. 울 때도 잔뜩 처연한 척하면서 예쁘게 울겠지. 알맹이는 흉악하기 짝이 없는 주제에. 

하지만 실제는 정반대였다. 신제는 눈매를 일그러뜨리고 입가를 파르르 떨면서, 평소의 능숙하게 꾸며 낸 표정이 아닌 낯선 얼굴로 울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희미한 헐떡임이 새어 나왔다. 한쪽 눈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뺨을 지나 턱에 맺혔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신제의 몸이 풀썩 무너져 내렸다. 그의 가슴을 관통한 가시가 빠져나갔다. 멈췄던 시간이 도로 흐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죽는다고?” 

신제가 쓰러진 뒤에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다가, 유건이 중얼거렸다. 

“아니야……. 당신은 이대로 죽으면 안 돼. 내게 갚아야 할 죗값이 얼만데 이딴 식으로…….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당신 입으로 그랬잖습니까. 내 손으로 직접 죽여 달라고. 그렇게 부탁까지 해 놓고, 빌어먹을. 누구 마음대로!” 

유건은 넋이 나간 채 신제의 위에 주저앉았다. 피범벅이 된 가슴에 손을 얹었다가, 그것으로도 부족하게 느껴졌는지 고개를 푹 숙여 손등에 이마를 겹쳤다. 

“이대로 죽게 두지 않을 겁니다. 내가, 당신의 가이드가 있는데, 절대 이렇게는…….” 

구멍이 뚫린 가슴에서 자꾸만 피가 솟구쳤다. 유건은 이를 악물며 상처 부위를 눌렀다. 가이딩이 미친 듯이 흘러들어 갔다. 혈관에 굵은 관을 박고 전신의 피를 쭉쭉 뽑아내는 느낌이었다. 삐익……. 귓속에서 불길한 이명이 들렸다. 신제를 짚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다. 빼앗긴 생기를 돌려 달라 갈구하듯 심장이 미친 듯이 뛰다가, 그것조차 서서히 잦아들었다. 

하지만 가이딩을 멈출 수는 없었다. 거의 멎은 것만 같던 신제의 맥박이 아주 희미하게나마 돌아왔다.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이 아닌 명치 정중앙을 꿰뚫려서일까. 그는 아슬아슬하게 숨이 붙어 있었다. 유건은 정신력을 모두 끌어모아 가이딩에 집중했다. 

“백유건 가이드!” 

뒤에서 누군가 그를 확 잡아당겼다. 태인이었다. 그도 결코 성치 못했다. 다친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로 앞이 보이지 않아서 한쪽 눈을 찌푸리듯 감은 채였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 비하면 양호한 축이었다. 

“그만하십시오. 가이딩을 계속하면 당신까지 위험해집니다.” 

“…….” "......."

“이대로 죽을 겁니까? 그 남자와 같이.”
「你打算就這樣和那個男人一起死嗎?」

“아직 안 죽었습니다! 안 죽었다고요. 마저 낫게 해야……. 컥!”
"我還沒死!我還沒死!我還沒死!我需要完成癒.......KUCK!"

몸부림치는 도중에 유건이 왈칵 피를 토했다. 한순간 시야가 까맣게 나갔다 돌아왔다. 태인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를 강제로 떼어 놓았다.
在掙扎中,Eugene 咳出了一口血。他的視線有一瞬間變黑,然後又回來了。Taein 咬住他的下唇,迫使他抽離。

“죄송합니다. 하지만……. 당신까지 잃을 순 없어.”
「我們很抱歉。但是.......我不能也失去你們"。

“싫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릴 겁니다! 이거 놔……. 빌어먹을, 헉, 당장 놓으라고!”
"我不要無論如何我都要救他! 放開這個.......看在上帝的份上,放開我!"

태인은 신제에게 도로 달려들려는 유건을 만신창이가 된 팔로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유건이 그를 밀치고 걷어차고 때리는 것을 모두 고스란히 받아 주면서. 각성자에 의해 잡아먹히듯 죽는 가이드는 그의 동생만으로 족했다.
Tae-in 伸手抓住 Yu-gun 不放。他的弟弟是唯一死去的嚮導,被覺醒者吞噬了,因為他承受了所有的推搡、踢打和拳擊。

유건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몸으로 이제까지 정신을 붙들고 있던 게 용할 정도로. 그가 아무리 악을 써도 태인을 이길 수 없었다. 태인의 품 안에서 버둥거리던 움직임에 점차 힘이 빠졌다.
余干已是全力以赴。無論他使用多少邪法,都無法擊敗鐵隱。他在鐵隱的懷中掙扎,體力逐漸耗盡。

“백유건 가이드, 제발.” 「請接Baek Yoo Gun導遊」

한숨처럼 속삭이는 태인의 입매가 파르르 떨리며 일그러졌다. 유건이 남은 힘을 쥐어짜 돌아보았다. 초점을 잃고 흐려진 눈동자 아래에 엷게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가 곳곳이 터져 피가 맺힌 입술을 힘겹게 달싹였다.
泰因的嘴角抽搐了一下,捲起了嘆息。Yuugan 擠出最後的力量,抬起頭。在他那沒有焦點、模糊不清的眼睛下方,積聚了一層薄薄的淚膜,他努力地將嘴唇壓在一起,嘴唇有的地方已經乾裂,有的地方已經充血。

“왜…….” "Why......."

마지막까지 독하게 저항하던 유건이 결국 의식을 잃었다. 피와 먼지로 얼룩진 그의 창백한 뺨에, 갑자기 내린 소나기의 첫 빗방울처럼 가느다란 빛이 내려앉았다. 맑은 빛……. 살아서는 결코 다시 볼 수 없을 거라 여겼던.
在激烈地抵抗到最後一刻後,余甘終於失去了知覺。在他蒼白的臉頰上,沾滿了血跡和灰塵,一道薄薄的光線如驟雨的第一滴落下。 一道清澈的光.......。他以為這輩子再也見不到了。

품 안에 쓰러진 가이드의 심장은 희미하지만 규칙적으로 뛰고 있다. 몸 또한 여전히 따뜻했다. 태인은 유건을 꽉 끌어안으며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몇 안 남은 생존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약속이나 한 듯 위를 보았다.
嚮導倒在我懷裡時,心臟微弱但有規律地跳動著。他的身體仍然溫暖。Taein緊緊地抱著Eugene,抬起頭瞥了一眼,剩下的幾個倖存者也是如此。 他抬起頭,好像許下了承諾。

머리 위에 드리운 심해에 하나둘 구멍이 뚫렸다. 구멍은 어느덧 수천수만 개로 늘어났다. 오랜 먹구름이 걷히고 날이 개듯. 그 사이로 눈부신 빛이 길게 쏟아져 내렸다.
一個接一個的洞出現在深海的上空。洞口成千上萬。漫天的烏雲散去,天亮了。一束長長的刺眼光線穿過它們。

단 한 번도 어둠에서 벗어난 적 없던 심해의 밑바닥을, 무수히 많은 빛줄기들이 처음으로 적셨다. 검고 축축한 땅이 반짝였다. 모든 것이 희고 고요한 빛무리에 감싸였다. 알무텐의 사체도, 벽과 바닥 곳곳에 돋아난 이끼와 곰팡이도, 쓰러진 사람들도.
無數的光束第一次淋濕了深淵的底部,這個從未走出黑暗的地方。黑色潮濕的大地閃爍著光芒。一切都被籠罩在白色、寂靜的光環中。阿爾穆騰的屍體、牆壁和地板上長出的苔蘚和霉菌、倒下的人。

영원히 걷히지 않을 것만 같던 어둠의 장막이 비로소 걷혔다.
看似永遠無法揭開的黑暗帷幕終於揭開了。


* * *


“바리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我們已經向Bari求助了」

붕대와 거즈가 감긴 남자의 손이 탁자에 명함을 내려놓았다. 유건은 멍하니 그의 움직임을 좇았다. 모든 감각이 아득했다. 마자로스에서 나온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깊은 물에 잠겨 있는 것만 같았다.
那名男子包著繃帶和紗布的手將一張名片拍在桌上。Eugene 昏昏沉沉地跟著他的動作。他所有的感官都麻木了。他離開 Mazaroth 已經很久了,但他仍然覺得自己處於水深火熱之中。

“백유건 가이드! 제 말 듣고 계십니까?”
「白玉崑導師,你在聽我說話嗎?」

“아.” 「啊」

유건이 필요 이상으로 놀라 움찔했다. 초점이 없는 눈동자가 한 박자 늦게 태인을 올려다보았다.
Eugene 比必要時更退縮了。沒有焦點的眼睛抬頭看著泰因,晚了一拍。

항상 단정한 와이셔츠 차림을 고수하던 태인은 티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가르마를 타서 넘기던 흑갈색 머리도 아무 손질을 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늘어뜨렸다. 매사에 빈틈없고 칼 같은 부단장의 면모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당연한 일이다. 이제 그는 에레혼의 부단장이 아니므로.
一向穿著利落白襯衫的泰仁現在穿著 T 恤和棉褲。他的黑褐色頭髮披散著,沒有打理。完全看不出他平日嚴肅如刀的神情,這也是有原因的。他不再是 Erehon 的副手。

에레혼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본부 건물이 잿더미가 된 데다, 단원의 과반수가 죽었고 나머지도 대부분 생사불명이거나 중환자이며, 가장 결정적으로 모두의 구심점이 되어 주어야 할 단장이 치명상을 입었으니 해체된 거나 마찬가지다.
Erehon 實際上已經解散。總部大樓化為灰燼,大多數成員死亡,剩下的大多數不是死亡就是情況危急,而最關鍵的是,本應是其集結點的領袖卻受了致命的傷。

아무리 모진 소리를 들어도 끄떡없던 가이드가 고작 이름 한 번 부른 것만으로 동요한다. 길에 버려진 새끼 강아지 같다. 붙들고 윽박지르기라도 했다간 아주 경기를 할 기세다. 어쩌다 이렇게……. 아니, 이렇게 되는 게 당연한가. 태인이 한숨을 삼켰다.
嚮導聽慣了天方夜譚,只要一提到他的名字就會發抖。他就像一隻被遺棄在路上的小狗。如果我抓著他對他咆哮,他一定會準備打架。這怎麼會發生.......不,這是很自然的事。泰仁吞下一聲嘆息。

“석문영 단장이 차를 보내 준다고 하더군요. 운전할 사람도 같이.”
「他說他會送我一輛車 還會有人開」

“…….” "......."

“저희 쪽 차로 움직였다간 누구든 곧바로 알아챌 겁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결정했습니다.”
「如果我們駛進他們的車道 任何人都會馬上知道 所以我們別無選擇」

“차라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Charani.......你在說什麼?"

유건이 신음처럼 물었다. 헐렁한 소매 아래로 드러난 마른 손등이 움츠러들었다. 태인의 시선이 유건의 상처투성이 손등에, 이제는 아무것도 걸고 있지 않은 목에 한 번씩 닿았다 떨어졌다. 마자로스에서 나온 직후 태인이 키를 찾아와 직접 풀어 주었다.
Eugene 呻吟著問。他瘦弱的手背在寬鬆的袖子下緊攥著。Taein 的目光閃爍地看著 Eugene 滿是疤痕的手背,然後看向他的脖子,他的脖子上現在什麼也沒有。在離開 Mazaroth 之後不久,Thane 拿回了鑰匙並親自開鎖。

신제를 가이딩하려다 쓰러졌을 때 유건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다른 가이드들 수십 명이 모여도 못 하는 일을 혼자 하려 덤빈 대가였다. 그때 태인이 유건을 억지로 떼어 놓지 않았다면 유건 또한 생명이 위태로웠을 것이다. 유건마저 의식을 잃은 가운데, 태인은 홀로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제 몸도 성하지 않으면서. 다른 팀원들 중 성한 이가 없으니 자신만이라도 버텨야 했다.
當他試圖引導新人時暈倒了,Yugan的情況比他想像的還要嚴重。如果不是泰仁把他拉走,他就會有生命危險,如果他沒有努力去做其他幾十個向導都做不到的事。在裕君失去意識的情況下,泰因站在原地在沒有自己身體的情況下其他隊員都不堅強 所以他只能堅持自己

“백유건 가이드.” 「Backuigan指南」。

태인이 눈을 마주친 채 또렷이 말했다.
Tae-in 說得很清楚,並保持眼神接觸。

“여기서 나가십시오.” 「離開這裡」

마자로스에 들어가기 전부터 계획했던 일이다. 실행에 옮길 타이밍은 바로 지금이었다. 찬은 아직 거동이 힘들고, 신제와 희수는 의식이 없다. 지금이라면 그들의 눈을 피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유건을 빼돌릴 수 있었다.
這是我在進入 Mazaros 之前就計劃好的。現在是付諸行動的時候了。陳仍無法動彈,心潔和熙秀也昏迷不醒。現在正是神不知鬼不覺地偷走遺物的好時機。

재앙이 휩쓸고 지나간 세상은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이럴 때 각성자 관리 본부에서 앞장서 시국을 안정시켜야 할 텐데, 본부장을 비롯한 수많은 에스퍼들이 마자로스에서 죽었기에 어쩔 도리가 없다. 피해 복구는커녕 피해자가 몇 명인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상태였으니 말 다 했다.
世界已經被災難摧毀。在這種時候,覺醒行政總部應該帶頭穩定局勢,但是馬扎羅斯死了這麼多Espers,包括總部的頭兒,他們也無能為力。你甚至不知道有多少人被殺,更不用說如何修復損傷了。

각성자 관리 본부뿐만이 아니었다. 정부가, 나아가서는 국가 전체가 마비되었다. 비행기나 기차, 고속버스 따위가 정상적으로 운행할 리 만무했다. 그래서 태인은 어렵사리 차를 구했다. 유건을 먼 곳으로 보내 줄 차를.
這不僅是覺醒者的行政總部。政府,甚至整個國家,都癱瘓了。沒有正常運行的飛機、火車或快速公車,所以泰仁想辦法找到了一輛車。一輛可以帶他去很遠的地方的車。

사실 굳이 다른 오더에 도움을 요청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태인이 직접 지시하여 유건을 내보낸다면 자연스레 그의 행선지를 알게 될 테고, 그러면……. 쓸데없는 미련이 생길 것 같았다. 그래서 자존심을 꺾고 문영과 슬비에게 부탁했다. 부디 아무에게도, 자신에게도 알리지 말고 유건을 빼돌려 달라고.
其實還有一個原因,就是要向別令求救。如果太乙真人親自送余幹離開,我們自然會知道他的去向,那麼.......就會浪費時間。於是我忍氣吞聲,問了月英和悲比。請不要告訴任何人,連你自己也不要說,把余幹帶走。

“…….” "......."

태인의 말을 듣고도 유건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드디어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으니 기뻐해야 할 텐데.
Tae-yin的話,Yu-gun沒有任何反應。你應該高興,你終於可以離開這個鬼地方了。

“계약은 끝났습니다. 가이드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여기에 머물러 봤자 더 괴로울 뿐입니다. 혼자 힘으로는 이동 수단을 구하기 어려울 테니, 일단 제가 말씀드린 대로…….”
"合約已經結束了。你的向導知道這一點,留在這裡只會讓情況更糟。你不可能自己找到交通工具,所以就像我說的,你必須去......."

“이제요?” 「現在?」

유건이 고개를 푹 숙였다. 헝클어진 흑발과 둥근 귓바퀴, 그 아래로 곧게 뻗은 목덜미가 유독 창백해 보였다.
Eugene 深深地低下了頭。他看起來異常蒼白,黑色的頭髮亂蓬蓬的、耳垂圓圓的、頸部直直地延伸到耳垂下方。

“이제 와서요.” 「只有現在」

태인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수백 번을 되풀이했던 뼈아픈 후회가 다시금 번진다. 유건을 들이는 게 아니었다. 에레혼에도, 그의 마음에도. 그에게 일말의 감정도 느끼지 말았어야 했다. 이제까지 수많은 가이드에게 해 왔던 것처럼 유건이 어디서 무슨 짓을 당하든 방관했어야 했다.
Taein 緊緊地閉上了眼睛。他之前百感交集的痛苦悔恨再次湧上心頭。他不該讓 Yugun 進來。他不該對他有任何感覺,不該在 Erehon,不該在他的心中。我應該像我在他之前對許多引導者所做的一樣,讓他走,不管他在哪裡,不管他在做什麼。

그랬다면 태인은 마지막까지 후련하게 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바랐던 대로, 드디어 어머니와 여동생이 있는 곳으로 가 죄를 청할 수 있었겠지. 스스로도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 세상에 무슨 미련이 있다고, 무슨 책임감으로 아직도 꾸역꾸역 살아남아 유건을 내보낼 생각을 하고 있는지.
這樣他就可以安詳地死去。他終於可以去找他的母親和姐姐,懺悔他的罪過,就像他一直以來所希望的那樣。他不瞭解自己。他到底是怎麼了?他有什麼責任感,竟然還活著,還想著要把玉君送走。

“이제 와서 도망쳐 봤자 제게 뭐가 남습니까?”
「如果我現在逃跑,我還剩什麼?」

“…….” "......."

“부단장님, 제게 뭐가 남나요.” 「先生,你還有什麼要給我的?」

“…….” "......."

“형이 죽었습니다. 돌아갈 집도 불타 사라졌고요. 형을 지키고 부모님의 복수를 하려고 살았는데, 이제 뭘 해야, 저는 이해가, 왜……. 왜 아직도 제가 살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해가 안 됩니다.”
"我哥哥死了。我不得不回去的房子被燒掉了。 我活下來是為了保護我的弟弟,為我的父母報仇,但是我現在該怎麼辦,我不明白,為什麼.......。我不知道為什麼我還活著,我不明白"。

유건은 자신의 손끝만 내려다보며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태인은 이유 모를 울분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태인은 여전히 유건이 싫었다. 본질은 결국 동족혐오다. 가족을 잃고 매일을 죄의식과 의무감으로 사는 이의 삶이 어떤지는 찬도, 희수도, 신제마저도 알지 못하리라.
玉根低頭盯著自己的指尖,說話結結巴巴。泰仁感到莫名的憤怒。他還是恨他。究其核心,那是一種恐同的憎恨。沒有人知道失去家人的滋味,每天都活在愧疚和責任感中,即使是陳道、熙秀或申捷也不知道。

“사는 데 이유가 필요합니까? 가족이 죽었다고 당신까지 죽어야 합니까.”
「你需要活下去的理由嗎 你家人的死一定要殺了你嗎」

“…….” "......."

“마자로스에서 힘들게 살아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그냥 살아도 됩니다. 홀로 살아남았다 해서 아무도 당신을 혼내지 않습니다.”
"你艱苦地從Mazaroth活下來,所以你可以忍受它。沒人會因為你獨自生存而責備你"

이 말은 어쩌면 태인이 과거의 자신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이상하게도 목이 메었다. 태인은 습관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꾹 감았다. 감정이 멋대로 요동치고 이성이 흐려졌다. 스스로가 통제를 벗어나는 기분이 몹시도 불쾌했다. 유건을 눈앞에서 치워 버리고 나면, 그러면……. 이런 기분을 느끼는 일도 다시는 없을 것이다.
這句話奇怪地卡在他的喉嚨,也許是他希望能對過去的自己說的話。Taein 習慣性地皺了皺眉頭,閉上了眼睛。他的情緒失控,理智渾濁。失控的感覺真是令人不快。一旦我讓雄君離開我的視線,那麼.......。我就再也不會有這種感覺了。

“이게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전부입니다. 퇴직금 대신이라 생각하십시오.”
"我能為你做的只有這些就當是代替遣散費吧"

“하지만, 부단장님. 저는…….” "但是,先生。我......."

“백유건 가이드. 제발!” "白槍指南。拜託了!"

충동적으로 유건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유건이 고개를 확 들었다. 놀람으로 떨리는 눈동자에 태인의 모습이 고스란히 비쳤다.
我衝動地抓住 Eugene 的肩膀。他猛地抬起頭。他從眼中看到了 Taein 的倒影,他的眼睛因為驚訝而顫抖著。

“제발, 보내 준다고 할 때 떠나십시오. 당신이 그딴 식으로 망설이면 망설일수록, 혹시 남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자꾸 착각하게 되니까.”
"求求你,當他們說會讓你走的時候就走吧。你這樣猶豫的時間越長,我就越懷疑你是否有任何部分想要留下.......我就越想錯了"。

“…….” "......."

유건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태인에게 팔을 고스란히 잡힌 채 피딱지가 앉은 입술을 달싹일 뿐이었다. 그 수모를 겪으면서도 꿋꿋이 버틸 땐 언제고. 어리고 가엾은 가이드. 모든 걸 잃고 이번에야말로 정말 혼자가 되어 버린.
余幹沒有回答。他只能咬著結痂的嘴唇,手臂仍然緊緊抓著泰仁的手臂。你失去了一切,這一次是真正的孤獨。

태인은 한숨을 쉬며 뿌리치듯 손을 놓았다. 그리고 의자를 드르륵 밀며 일어섰다. 평소보다 확연히 거친 동작이었다.
Taein 嘆了口气,颤抖着松开了手,然后推开椅子站了起来。這個動作顯然比平常粗暴。

“내일 아침에 출발할 겁니다. 준비해 놓으십시오.”
「我們明早出發,請做好準備」

그 말을 마지막으로 태인은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등 뒤의 유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랬다가는 미련이 생기는 건 오히려 자신이 될 것 같아서.
說完這番話,泰因衝出了房間,盡量不去想他身後Yugun的表情,因為如果他想了,後悔的會是他自己。

태인이 떠난 후에도 유건은 침대맡에 한참 동안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파격적인 제안을 들었는데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세찬 파도가 머릿속을 모조리 쓸어가 버린 것 같았다.
泰仁走後,裕君在床上坐了很久。儘管他聽到了這麼激進的建議,卻沒有任何感動。彷彿有一股強大的波浪捲走了他腦海中所有的想法。

두꺼운 유리창을 뚫고 햇빛이 스며들어 왔다. 방 안의 자잘한 먼지가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살아서 햇살을 다시 보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유건은 몸을 일으켰다. 덜 나은 다리로 절뚝거리면서 방을 가로질렀다. 뼈대가 도드라지는 목 뒤쪽과 어깨와 등허리를 타고 희뿌연 햇살이 흘렀다.
陽光穿過厚厚的玻璃窗。他可以看到房間裡漂浮的灰塵。他沒想到在有生之年還能再見到陽光。 尤金推自己站起來。他拄著少了一條的腿,一瘸一拐地走過房間,蒼白的陽光從他骷髏般的後頸淌下,灑在他的肩膀上,再從他的小背脊淌下。

한쪽 벽면에 있는 옷장을 열었다. 옷장은 휑하기 그지없었다. 유건이 가진 옷이라고는 에레혼에 갓 들어왔을 때 받은 것들뿐인데, 그것마저 본부가 무너지고 급히 대피하느라 제대로 챙겨 오지 못했다. 유니폼과 여분의 옷 두세 벌이 전부였다.
他打開靠著一面牆的衣櫃,裡面空空如也。他唯一擁有的衣服是他剛到 Erehon 時得到的,甚至那些他在總部倒塌後匆忙撤離時也沒有好好收拾的衣服。他的制服和兩三套備用衣服就是他的全部家當。

버릇처럼 유니폼을 집어 들려던 손이 뚝 멈췄다. 유건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다른 옷을 들어 뒤로 휙 던졌다. 허공을 날아간 옷가지들이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쌓였다. 처음 가져왔던 백팩은 챙기고 배터리가 나간 단말기와 총, 탄창, 다른 장비들은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이젠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因為習慣而伸向制服的手停住了。他咬著下唇,拿起其他衣服往後一甩。衣服在空中飛過,雜亂地堆在床上。他拿起隨身攜帶的背包,但把沒電的電 池、槍、彈匣和其他裝備留下。我不再需要它們了。

유건의 짐은 그게 끝이었다. 당일치기 여행용 짐이라 하기에도 너무 단출했다. 에레혼에서 보낸 몇 달의 시간들이 고작 가방 하나에 정리되었다.
Eugene 的行李到此為止。這對於一日遊來說太簡單了。在 Erechon 度過的幾個月時間都裝在一個行李箱裡。

미처 못 챙긴 짐이 있을지도 모른다. 욕실이나 서랍장에……. 유건은 몸을 돌렸다. 그때 문밖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가느다란 갈퀴로 문을 박박 긁는 것 같은 소리였다. 문을 열자마자 새까만 고양이가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동그란 머리 위로 돋아난 귀가 쫑긋거렸다. 고양이는 한 뼘도 안 되는 틈을 용케도 비집고 들어왔다.
您可能忘了收拾行李。也許在浴室或抽屜裡 .......Eugene 聽到門外有輕微的聲音,便轉過身來。聽起來像是細耙子刮門的聲音。他一開門,一隻黑貓就探出頭來。它的耳朵豎在圓圓的頭上。貓從門縫中擠了出來。

“어떻게 여기까지 따라왔냐? 이번에는 왜 왔어. 또 밥 달라고?”
「你是怎麼跟蹤我到這裡的?」 「為什麼這次又來要吃的?」

유건은 무심하게 묻고는 몸을 돌렸다. 그는 고양이가 뭘 하든 상관하지 않고 원래 하던 일을 재개했다. 고양이는 유건의 무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발치에서 맴도는 걸로도 모자라 침대에 훌쩍 뛰어올라선 유건의 허벅지에 몸을 비볐다.
Eugene 不冷不熱地問了一句,然後轉過身去。 他不關心那隻貓在做什麼,繼續他的工作。那隻貓繼續悄悄靠近,對他的無知毫不在意。好像在他腳邊徘徊還不夠似的,它跳上了床,在他的大腿上蹭來蹭去。

“미안한데 지금은 먹을 게 없어. 달라고 보채도 못 줘.”
「對不起,我現在沒有東西吃」 「我甚至不能看著你要」

그는 자꾸만 치대는 고양이를 손등으로 툭 밀어냈다.
他用手背把貓彈開。

“앞으로는 딴 데 가서 알아봐. 어차피 난 내일이면 떠날 테니까.”
"你得去別的地方反正我明天就要走了"

고양이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貓不再動了。

“상황이 상황이라 네 밥 챙겨 줄 사람이 있을진 모르겠는데.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다고, 한 명쯤은 널 돌봐 주지 않겠냐. 뭐, 넌 덩치도 크고 똑똑하니까 야생으로 돌아가도 괜찮을 거야.”
「我不知道在這種情況下會不會有人餵你 但你不會死的 我相信他們中的一個會照顧你 你又大又聰明 回到野外會沒事的」

유건은 어질러진 옷가지를 백팩에 마저 쑤셔 넣었다.
Yugan 把最後一件凌亂的衣服塞進背包。

“사람이 없는 세상이 네겐 오히려 천국일지도 모르지. 쥐약도 없고 음식물 쓰레기 같은 거 뒤질 일도 없고. 그래도 몸조심해. 아무거나 막 주워 먹지, 말……. 고…….”
"一個沒有人的世界 對你來說也許是個天堂不用老鼠藥,不用搜刮食物垃圾,但要小心。你會吃掉任何你能找到的東西,Mal.......Go......."

이상함을 느낀 유건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들고 있던 옷이 툭 떨어졌다. 그는 그 자세 그대로 시선만 내려 아래를 보았다. 까만 털의 고양이 대신……. 자신의 허리를 휘감은 탄탄한 팔이 보였다. 피가 점점이 묻은 흰 붕대가 구릿빛 피부 위를 뒤덮었다. 남자의 머리통이 뒤에서부터 유건의 어깨에 툭 기대어졌다.
Eugene 意識到有些不對勁,他的聲音頓時低了下去。他手上的衣服掉到了地上,他保持著那個姿勢,低頭凝視著。他看到的不是黑毛貓.......他看到一隻強壯的手臂纏在他的腰上。點點血跡的白色繃帶覆蓋著銅色的皮膚。那人的頭從後面斜靠在 Eugene 的肩膀上。

“……안 가면 안 되냐?” 「我們能不能不去 ......?」

찬이 속삭였다. 원래도 낮은 목소리가 잔뜩 쉬고 갈라져서 더 낮아졌다. 평소 성격답지 않게 착 가라앉아 우울한 어조였다. 부상이 심해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라더니, 여기까진 어떻게 찾아온 걸까.
Chan 低聲說。他平日低沉的嗓音斷裂了又斷裂,斷裂了又斷裂。他的語氣一反常態地低沉憂鬱。他受了傷,甚至無法從座位上站起來,我不知道他是怎麼找到這裡來的。

귓가가 찌르르하게 울리고 목덜미의 솜털이 곤두섰다. 하지만 유건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아까 떨어뜨렸던 옷을 도로 집어 들었다.
他的耳朵豎了起來,頸背上的汗毛也立了起來。但 Yuugan 沒有回頭,他撿起之前掉在地上的衣服。

“말도 안 되는 얘긴 거 알아. 그래도 한 번만,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주면…….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할게. 무릎이라도 꿇으라면 꿇을게. 날 패고 싶으면 얼마든지…… 씹, 내가 지금 무슨 소릴 지껄이는지 모르겠는데.”
"我知道這很荒謬,但如果你能考慮一次,就一次,就一次.......。你要我做什麼,我就做什麼。如果你要我跪,我就跪。如果你想打我,隨便......,我不知道我他媽在說什麼"。

“하.” 「哈」

유건이 메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찬이 그를 끌어안은 채 얼어붙었다.
Eugene 發出乾笑。Chan愣了一下,抱住了他。

“우리 사이가.” 「我們之間」

“…….” "......."

“고작 그런 걸로 어떻게 될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아시잖아요.”
「事情不會這樣的,你知道的」

유건의 어깨와 목덜미에 와 닿는 숨결이 조금 거칠어졌다.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유건을 꽉 안고 있던 팔이 느리게, 아주 느리게 풀려 나갔다.
Eugene 抵著他的肩膀和頸背,呼吸變得有點粗重。慢慢地,非常緩慢地,緊緊抱住他的雙臂鬆開了,好像永遠不會放手似的。

그는 유건의 뒤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한참 침묵했다. 유건도 침묵했다. 정적이 이어졌다. 기다리다 못해 유건이 다시 백팩에 손을 뻗을 때쯤, 찬이 불쑥 입을 열었다.
他坐在余甘身後,低著頭,沉默了很久。余甘也沉默著。沉默持續著。直到余甘再次不耐煩地伸手去拿背包時,陳才開口說話。

“그래. 백유건.” "是啊Baek Yugun."

“…….” "......."

“우리 이제 다신……. 다시는, 보지 말자.”
"我們永遠不會.......再也不會"。

그가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씹어 뱉었다. 억눌렀던 감정을 쥐어 짜냈다. 끝내 고개는 들지 않았다.
他咬緊牙關,咀嚼吐出每一個字母。他擠出壓抑的情緒,但他沒有抬頭。

“사과는 안 한다. 해 봤자 의미 없을 테니까.”
"我不道歉。那沒有意義"

“예.” 「是的」

“잘 가라. 잘 살고.” "再見了好好生活"

찬은 기지개를 켜는 맹수처럼 느리게 일어났다. 벗은 상체를 뒤덮은 붕대 아래에서 단단한 근육이 꿈틀거렸다.
陳慢慢地站起來,就像野獸在伸展身體一樣,他堅硬的肌肉在覆蓋著赤裸軀幹的繃帶下彎曲。

“응? 이젠 좀 잘 살란 말이야. 또 우리 같은 미친놈들한테 걸리지 말고. 너 미친놈 끌어들이기 딱 좋은 타입인 거 알긴 하냐?”
「我只是想說,你現在要好好生活,別再和我們這樣的瘋子在一起了。 你知道你是那種會吸引瘋子的人,對吧?」

침대에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유건을 눈에 담으며, 찬은 제풀에 픽 웃고 말았다.
陳自嘲地笑著,因為他看到 Yu-Gun 從床上坐起來,抬頭看著他。

“보는 건 지금이 마지막이겠네. 내일 따로 낯간지럽게 작별 인사 같은 거 할 생각 없으니까.”
"這將是我們最後一次見面明天我不會做任何奇怪的道別"

첫사랑은 성공하는 법이 없다더니. 첫사랑에 짝사랑, 심지어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도 좆같이 잘못 끼운 관계. 결말은 뻔하다. 유건을 납치해 갔던 그 개새끼들과 자신이 다른 게 뭔가.
他們說初戀從來沒有結果 初戀、暗戀、甚至是從一開始就大錯特錯的關係 結局都是可以預料的你身上有種特質 讓你和綁架尤金的混蛋不同

“아. 딱 하나 사과할 게 있는데.”
「哦,我只有一個道歉」

“뭡니까?” 「怎麼了?」

“그게, 크, 흠. 고양이인 척해서 미안했다.”
"嗯,唉,嗯。很抱歉我假裝成一隻貓"

“신경 안 씁니다. 어느 정도는 짐작하기도 했고.”
"我不在乎我有點想通了"

“짐작했다고?” 「你猜到了?」

“하는 짓이 똑같아서요.” 「因為你也在做同樣的事」

유건의 말에 찬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대체 언제부터 알아챈 거지? 그럼 설마 유건의 목에 냅다 올라타서 털목도리 행세를 했을 때, 그때도…….
Chan被Yugan的話嚇呆了。他是什麼時候意識到這一點的,如果不是當他跳到Yugan的脖子上,裝作毛茸茸的披肩,那麼當.......。

“눈치 깠으면 재깍 말할 것이지, 새끼가……. 하……. 엿 같네.”
"如果你注意到了,你會很快告訴我,混蛋.......ha.......糟透了"。

찬은 붕대가 칭칭 감긴 손 대신 다른 손으로 벅벅 마른세수를 했다. 동작 하나하나에 착잡함이 듬뿍 묻어났다.
陳用另一只綁得緊緊的手洗臉。每個動作都帶著笨拙的感覺。

“간다.” 「開始了」

그는 건성으로 손을 들어 보이고 자리를 떴다. 방문 너머로 사라지는 그의 목덜미에 벌겋게 물이 들어 있었다.
他乾脆地舉起手,走了。當他消失在門口時,他的頸脖上滿是水痕。


* * *


결국 유건은 백팩을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 올 때와 같이 갈 때도 빈손이나 다름없었다. 짐 같지도 않은 초라한 짐을 머리맡에 두고 누웠다가, 잠이 오지 않아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最後,Yugan 只能勉強填滿他背包的一半。他離開的時候就像來的時候一樣兩手空空。他帶著寒酸的行李躺在床上,無法入睡,整晚都醒著。

알무텐이 죽고 계약에서도 해방되었는데 왜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느낌이 들까. 문득 참을 수 없이 답답해졌다. 유건은 결국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阿爾穆騰死了,解除了契約,為什麼還是感覺什麼都沒有解決?Yuugan 終於在黎明時分,太陽還未升起時起床了。

그는 3층짜리 단독 주택 형태로 된 안전 가옥의 현관을 열고 나갔다. 밤이슬이 내려앉은 새벽의 뜰이 그를 반겼다. 서늘한 안개가 저택을 둘러싼 담을 스치고, 방치되어 웃자란 잔디밭에서는 이따금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 사이즈보다 큰 슬리퍼를 신은 발을 내디뎠다. 사박사박 젖은 풀이 밟혔다. 풋풋한 풀잎 냄새가 섞인 밤공기를 마시자 머리가 조금 맑아졌다.
他打開安全屋的前門,那是一棟三層高的獨立洋房。迎接他的是晨曦中的庭院,夜露斑駁。寒冷的霧氣飄散在大宅周圍的圍牆上,偶爾有蚱蜢在荒廢的草坪上嗡嗡響。他走了出來,腳上穿著比他的尺寸還要大的拖鞋。她踏進濕漉漉的草地。她呼吸著帶有新鮮青草氣味的夜空,頭腦稍微清醒了一點。

곧 모든 게 끝이다. 날이 밝으면 바리에서 보내 준 차가 올 것이다. 유건은 거기에 타서 떠나기만 하면 된다. 아직까지 의식을 찾지 못한 신제와 희수가 죽든 말든, 그가 떠난 후 에레혼 1팀이 어떻게 되든 그가 알 바는 아니다. 유건에게 그들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듯 그들도 더는 유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어차피 원래 사는 세계가 달랐으니, 떠나고 나면 평생 다시는 마주칠 일이 없으리라.
很快一切都會結束天一亮,巴里派來的車就會到了Yuugan 要做的就是上車離開。至於昏迷中的 Shinje 和 Hee-Su 會不會死,或是他離開後 Erehorn 1 小隊會發生什麼事,都與他無關。他們不再需要他,就像他不再需要他們一樣。他們的世界是不同的,一旦他們離開,他們將永遠不會再見面。

명료한 결론이다. 더 고민할 필요도 없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을 잊어버리고 있는 느낌이 든다. 도대체 왜…….
這是顯而易見的結論但我覺得我忘記了最重要的事情。為什麼在地球上.......

잔디밭에 이름 모를 들꽃들이 피어 있었다. 사방이 어두워 정확한 모양새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 위에 기억 속의 한 장면이 겹쳐졌다.
草坪上開滿了無名的野花。四周一片漆黑,我看不清它們的確切形狀,但我記憶中的景象卻疊印在它們上面。

〈무슨 꽃인지 알아요? 백유건 가이드 위해서 일부러 가져온 건데.〉
你知道這是什麼花嗎?我特意拿來給你的向導,Yugun Baek。

〈하이포시스 오리어(Hypoxis Aurea)예요. 다른 말로는 노란별수선.〉
'It's Hypoxis Aurea, otherwise known as yellow starburst. '這是Hypoxis Aurea,又名黃星花。

꽃병에 가득한 노란 들꽃. 자신의 탄생화. 장난처럼 귓가에 꽃을 꽂고 웃던 신제. 조곤조곤한 목소리. 참담한 바깥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굳게 닫힌 문과 보드라운 이불의 감촉……. 유건은 홀린 듯 다가가 꽃을 꺾어 들었다. 하지만 꽃송이를 쥐고 자세히 들여다보자 알 수 있었다. 이 꽃은 민들레였다. 꽃잎이 노란색인 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닮지 않았다.
花瓶中的黃色野花。他自己的誕生花。神父笑著把花插進他的耳朵。他的聲音,沙啞而疲憊。緊閉的門和蓬鬆的羽絨被,隔絕了外面刺耳的世界.......。余甘走近,如痴如醉地摘下那朵花。但當他捧起花兒仔細端详時,才發現那是一朵蒲公英。這是一朵蒲公英。除了黃色的花瓣,它看起來一點也不像蒲公英。

“아니야. 이게 아니야…….” 「不,這不是它.......」

유건은 다른 꽃을 꺾었다. 역시나 그 꽃이 아니었다. 다시 꺾었다. 다른 꽃을, 또 다른 꽃을. 마당 전체를 하염없이 헤집고 다녔다. 이슬에 젖은 손에 자잘한 생채기가 나고, 꺾은 꽃들이 양손으로도 모자라 품을 가득 메울 때까지도 그가 찾는 꽃은 보이지 않았다.
Yuugan 又摘了一朵花。這花不對。他又摘了一次。又一朵,又一朵,又一朵他摘了整個院子。他沾滿露水的手感到生疼,他的手臂上也滿是摘下的花朵,但是他找不到他要找的那朵花。

유건은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야생화 다발을 끌어안고 일어섰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줄곧 느낀 초조함의 정체를 깨달았다. 신제를 이대로 두고는 떠날 수 없었다. 신제는 그를 나락으로 끌어들여 죽음까지 몰아갔다가 결국은 도로 살려 냈다. 그러니 그의 목숨 또한 유건의 손으로 매듭을 지어야 했다.
Yuugan 站了起來,血淋淋的手上緊緊攥著一束野花。他突然意識到自己緊張的根源。他不能就這樣離開他。他把他拖入泥潭,把他逼到死亡的邊緣,然後又讓他起死回生,所以他的生命將不得不和他的雙手打成死結。

〈만약에, 아주 만약에 알무텐이 죽고 모든 게 끝난 후에도 내가 아직 살아 있다면……. 그때는 백유건 가이드가 내 숨을 끊어 줘요.〉
'如果,非常如果,Almuten死了,而我還活著,當一切都結束.......'〉白裕坤導師會讓我喘不過氣來。

“죽여 달라고?” 「你要我殺了你?」

당신은 언제 내가 원하는 것을 무엇 하나라도 순순히 들어준 적이 있었던가. 그래 놓고 뻔뻔하게 부탁을 하다니. 역시나 증오스럽다. 당신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다.
你什麼時候順應過我的要求,然後還好意思請我幫忙。 我恨你,我恨你,我受不了你。

“……누구 마음대로.” "......at will."

꽃을 안은 채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섰다. 다친 다리를 질질 끌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걷던 그의 걸음에 어느덧 힘이 실렸다. 컴컴하게 불이 꺼진 거실과 복도를 뛰듯이 지나쳐, 무작정 신제의 방을 찾았다.
他緊緊抱著花,衝進屋子。他拖著受傷的腿,感覺好像隨時都會倒下。他在燈光昏暗的客廳和走廊中衝刺,尋找牧師的房間。

달빛이 쏟아지는 휑한 방에 침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유건이 멀리서 기척만 내도 곧장 ‘왔어요?’ 하며 웃어 주던 남자는 이제 없다. 이불 아래 누운 창백한 형체가 있을 뿐이다. 신제는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달빛을 받아 희게 빛나는 얼굴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속눈썹 아래 길게 드리운 그림자마저 예술 작품의 일부로 보였다.
月光下,空無一人的房間裡,一張床搖搖欲墜。那個曾對 Yoo-gan 遙遠的 「你好 」和 「歡迎回家 」的呼喊微笑的男人不見了。只有一個蒼白的身影躺在被子下。神父睡得很安祥。他的臉在月光下發白,就像一幅畫。即使是他睫毛下長長的陰影,似乎也是藝術作品的一部分。

알무텐이 죽은 후 그는 빈사 상태로 무너지는 마자로스에서 실려 나왔다. 온갖 조치를 취한 덕에 그의 부상은 점점 회복되었다. 으스러진 팔에 새살이 돋고 뻥 뚫린 가슴이 메워졌다. 뺨이나 팔에 난 작은 생채기 하나까지 나았다.
Almuthen 死後,他在茫然中被抬出破爛的 Mazaroth。他的傷口逐漸癒合,這都要歸功於所採取的一切措施。他破碎的手臂長出了新肉,被刺穿的胸膛也填平了。甚至他臉頰和手臂上的小傷口也癒合了。

하지만 몸이 나은 후에도 그는 여전히 의식을 찾지 못했다. 맥박과 호흡도 정상이고 외부의 자극에도 반사적으로나마 반응하는데, 신제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알맹이가 빠져나가고 남은 빈껍데기 같았다.
但是,即使在他恢復過來之後,他仍然昏迷不醒。他的脈搏和呼吸都很正常,對外界的刺激也有反射性的反應,但是無論過了多久,他都沒有醒來的跡象。 他就像一個缺了內核的空殼。

마당에서 침실까지 왔을 뿐인데 어쩐지 숨이 찼다. 유건은 잇새로 헐떡이며 가져온 꽃을 신제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신제가 꽃다발을 안고 유건의 병실에 찾아왔던 그날 밤처럼 조용하고 은밀하게. 흰색, 노란색, 푸른색, 붉은색, 보라색. 크기도 색도 생김새도 가지각색인 들꽃이 한가득 흐드러졌다. 규칙적으로 색색 새어 나오는 호흡에 따라 꽃들이 조금씩 움직였다.
他從庭院到臥室只走了一小段路,就氣喘吁吁了。他喘著氣,把花放在心潔的胸前。悄悄地、隱隱地,就像那晚欣芝帶著一束花來到尤金的病房一樣。白色、黃色、藍色、紅色、紫色。各種大小、顏色和形狀的野花。花朵隨著我規律而多彩的呼吸微微移動。

그는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아니면 꿈조차 꾸지 않고 푹 쉬고 있을까. 염치도 없다. 같이 죽자는 말로 유건을 마자로스에 끌고 들어가 놓고는 기어이 살려서 현실로 돌려보내 놨으면서, 자신은 편하게 쉰다고?
他現在在做什麼夢呢?或者他根本就沒有在做夢,他睡得很香,毫不在意。他把 Eugene 拖到 Mazaroth,承諾要和他一起死,把他救活了,現在他就安枕無憂了?

“듣고 계십니까, 단장님. 저는 당신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你在聽嗎,船長?我永遠不會原諒你"

유건은 당장이라도 숨통을 조를 듯 신제의 목에 손을 가져갔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제는 여전히 곱게 눈을 감고 있다. 짙푸른 밤의 음영이 그의 옆얼굴을 따라 번진다.
余甘把手伸向新知的喉嚨,好像要掐住他的脖子一下。不管他知不知道,辛志還是緊緊地閉上了眼睛。深藍色夜幕的陰影沿著他的側臉流過。

“당신이 내게 했듯이, 이번엔…….” 「就像你對我做的一樣,這次.......」

신제의 목에 그림자를 드리우던 유건의 손이 조금 비껴 나가 머리 옆을 짚었다.
余甘的手,一直在心潔的脖子上投下一片陰影,稍稍滑出一點,握住了她的頭側。

“내가 당신을 강간할 거야.” 「我要強姦你」

내 손에 죽는 것이 당신의 바람이라 했던가. 그렇다면 나는 역으로 당신을 살림으로써 복수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격이자 당신에게 건네는 최후의 애정이다.
如果你想死在我手上,那我就讓你活著報仇。這是我唯一能做的反擊,也是我對你最後的感情。

이불을 걷어 버리고 신제의 위에 올라탔다. 대놓고 기척을 냈는데도 신제는 깨지 않았다. 유건은 희고 반듯한 뺨에 손을 얹었다. 평소에는 손을 댈 생각조차 못 했던 얼굴을 마음껏 희롱했다. 색이 옅은 머리채 사이사이에 손가락을 밀어 넣어 머리채를 움켜쥐고 고개를 젖히게 했다.
我掀開被子,爬到他身上。儘管他大聲地攪拌著,卻沒有醒來。劉健把手放在他白皙圓潤的臉頰上。他撫摸著這張從來沒有想過要觸摸的臉。他的手指滑過她淺色的頭髮,牽引著她的頭髮,使她仰起頭來。

“…….” "......."

신제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입술이 소리 없이 달싹였다. 유건은 순간 숨을 멈췄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신제는 눈을 뜨지도 유건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辛澤的睫毛撲扇著。他的嘴唇無聲地張開。余甘頓了一下。但也僅此而已。他沒有睜開眼睛,也沒有跟他說話。

머리채를 쥔 손을 놓고 상체를 낮추었다. 신제의 숨결이 윗입술에 고스란히 닿을 때까지. 둘의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졌다. 보드랍게 혈색이 도는 신제의 입술에 비해 유건의 입술은 잔뜩 트고 갈라져서 피딱지가 앉았다. 겉으로만 보자면 오히려 유건이 더 환자 같았다.
他鬆開抓住她頭髮的手,並放低上半身。他們的嘴唇近到可以碰觸,直到他的呼吸拂過她的上唇。和辛澤鮮紅的嘴唇比起來,尤金的嘴唇又裂又皴,還結了血痂,但表面上看來,尤金似乎更有耐性。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집요하게 신제를 들여다보다가, 유건은 스르르 눈을 감으며 입술을 겹쳤다. 따뜻했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떼고 각도를 바꾸어 다시 입을 맞추었다. 그가 살면서 해 본 키스는 모두 신제를 만난 뒤에 한 것뿐이었다. 그 외에 다른 키스는 알지 못했다. 그래도 횟수로 따지면 꽤 되는데 유건은 여전히 서툴렀다.
夕顏一眨也不眨地緊緊盯著他,嘆了一聲閉上了眼睛,然後把他們的唇貼在了一起。 很溫暖。 他稍微拉開了一點,換了一個角度,又吻了他一下。 他這輩子所有的吻都是在遇到她之後,其他的他就不知道了。不過,他還是笨手笨腳的。

벌어진 입술에 혀를 밀어 넣었다. 따뜻하고 촉촉한 점막이 맞물렸다. 신제가 해 줬던 것처럼 안쪽을 살짝살짝 문질러도 보았다. 처음에는 소극적이다가 움직임이 점점 더 과감해졌다.
我將舌頭滑入分開的嘴唇之間,溫暖、濕潤的黏膜交會在一起。我輕輕地摩擦裡面,就像 Shinje 為我做的一樣。一開始是被動的,後來越來越主動。

“흣, 흐으…….” 「哼哼,哼哼.......」

새벽 공기에 차가워진 유건의 몸이 신제의 위에서 점차 데워졌다. 아랫배가 땅겼다. 저항할 수 없는 상대를 깔고 앉아 멋대로 입 안을 유린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도착적인 쾌감이었다.
余甘被黎明的空氣吹得發冷的身體,在心潔身上漸漸暖和起來。他的胃在蠕動。那是坐在無法抗拒的對手身上,口中被任意蹂躪的到來的快感。

입술을 아래로 내렸다. 날렵하게 빠진 턱선과 귀와 그 아래 탄탄한 목덜미에 한 번씩 입술을 내려앉혔다. 이 인간은 어떻게 된 게 귓바퀴까지 예쁘게 생겼다. 울컥하는 마음을 담아 귓바퀴를 물었다 놓았다.
嘴唇向下我的嘴唇舔過他輪廓分明的下巴、耳朵,以及耳朵下方強壯的頸部。不知怎麼的,這個人類竟然有漂亮的耳廓。我咬了一口,「嘤 」的一声松开了耳廓。

“하아, 하아, 헉.” 「哈 哈 哈 哈」

유건은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며 몸을 일으켰다. 신제의 위에 앉은 채 팔을 교차해 자신이 입은 티셔츠를 서슴없이 벗어 던지고 나머지 옷도 벗었다. 그다음엔 어떻게 해야 하더라. 인상을 쓰며 고민하던 유건이 신제의 상의를 끌어 올렸다. 굴곡진 복근이 한 뼘 정도 드러났다.
余甘用手背擦了擦濕潤的嘴唇,把自己推了起來。坐在他身上,他雙手交叉,匆忙地脫下T恤,然後是其他的衣服。接下來該做什麼。皺起眉頭,雄安拉起信傑的上衣。這讓他屈起的腹肌露出一角。

배와 허리의 중간쯤 되는 어중간한 지점에 입술을 묻고 무작정 살갗을 빨아들였다. 앞니로 골반 부근을 살살 긁어 보기도 했다. 농염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막 이가 나기 시작한 어린 동물이 깔짝이는 것 같은 애무였다. 대리석처럼 흰 살갗에 금세 잇자국이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테지만 지금 이 순간은 몹시도 자극적이었다.
我把嘴唇埋在中間,也就是肚子和腰之間的一半,吸吮著肉肉。他用門牙在骨盆部位輕輕地刮著。那是一種沒有任何毒液的愛撫,更像是一隻剛開始發牙的小動物的輕撫。他大理石般雪白的皮肉上很快就布滿了啃咬的痕跡。這些痕跡很快就會消失得無影無蹤,但目前來說,這些痕跡對它的刺激是難以置信的。

“…….” "......."

신제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환청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한숨 같은 신음을 들은 것도 같았다. 유건이 균형을 잡기 위해 손을 짚었다가 무심결에 흠칫했다. 손바닥 아래에 단단한 것이 눌렸다. 아직 절반도 발기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부피감이 대단했다. 전엔 어떻게 이런 걸 제 안에 넣었을까.
辛澤的眉頭微微一皺。他不知道自己是不是幻聽,但他好像聽到了一聲像嘆息一樣的呻吟。劉謙伸出手,想穩住自己。一個硬硬的東西壓在他的手掌下。它還沒半直立,但已經很龐大了。他不知道自己以前是怎麼把這個塞進自己的身體裡的。

신제는 매번 유건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휘저어서 정신이 완전히 날아가게 만들고, 그 틈을 타 밀어 넣었다. 크기를 가늠하며 미리부터 겁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 그저 죽을 것 같다는 생각만을 반복하며 그의 품에 매달려 헐떡이다 보면 어느새 안이 빠듯하게 차올라 있었다. 신제의 테크닉이 좋았던 건지 어쨌는지, 그렇게 눈물과 타액이 멋대로 흐르고 숨이 넘어가고 헛구역질까지 하면서도 정작 피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每一次,辛澤都會從頭抽到腳,把他的思維完全打亂,然後再插進他的身體。他甚至來不及事先衡量這一擊的大小,只來不及喘息,緊抱雙臂,以為自己就要死了。不論是不是他的技巧,淚水和唾液肆意流淌,我喘不過氣來,咽不下去,但我從來沒有真正見過血。

유건은 마른침을 삼키고 신제의 앞섶을 풀었다. 속옷에 이르러서는 한 번 더 각오를 해야 했다. 그는 속옷을 끌어 내리는 것과 동시에 고개를 약간 물렸다. 반쯤 발기한 묵직한 성기가 비스듬한 각도로 튀어 올랐다. 별생각 없이 벗겼으면 예전처럼 좆에 뺨을 맞는 불상사를 당할 뻔했다.
余乾乾吞了口唾沫,解開了睡袍的前襟。當他把內衣拉下來時,他微微咬著自己的頭。他沉重的、半勃起的陰莖以一個斜角伸出來。如果他不假思索地把它脫下來,他就會像以前一樣被他的雞巴打到臉上。

굵직한 성기가 뿌리에서부터 뻗어 올라 꺼떡였다. 연한 분홍빛 기둥을 따라 핏줄이 돋았다. 위쪽에는 두툼한 귀두가 있었다. 보기만 해도 기가 질렸다.
一條粗大的陰莖從根部向上伸展並跳動著。一條血脈沿著淡粉色的柱子萌芽。頂端是一個厚厚的龜頭。看到它,我就覺得噁心。

“하…….” "......."

낮은 한숨을 쉬고 양손으로 성기 밑동을 감싸 쥐었다. 뜨끈뜨끈한 체온이 손안에 들어찼다. 유건은 귀두를 입가에 가져가 놓고도 머뭇거렸다. 잔뜩 부르튼 자신의 입술을 혀로 훑기만 했다. 그러다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입을 벌려 귀두 끝을 물었다. 예민한 부분을 혀로 문질러 주는 기교 따윈 없었다. 정직하게 성기를 꾸역꾸역 삼키기만 했다. 단단히 부푼 끄트머리가 목구멍에 쿡, 치받아 올 때까지.
他低低地嘆了一聲,雙手環繞著他的陰莖根部,用力地捏著。他身體的溫度充滿了她的雙手。Eugene 將龜頭送到嘴邊,猶豫了一下。他的舌頭在嘴唇上滑動了很久,最後才下定決心。他深吸了一氣,張開嘴咬住龟頭頂端,沒有花俏的舌頭在敏感點上蹭來蹭去。他只是老老實實地整個吞了下去。直到堅硬、腫脹的大龜頭卡住他的喉嚨。

“컥!” 「踢!」

한순간 눈앞에 별이 보였다. 아직 한참 남았는데 도저히 더는 삼킬 수 없었다. 유건은 귀두와 기둥 위쪽을 서툴게 빨면서 손으로 밑동을 만지작거렸다. 그 와중에도 성기는 입 안에서 더욱 크기를 키웠다. 턱이 빠질 것 같았다.
有那麼一瞬間,我看到了星星。還有很長的一段路要走,但他再也咽不下去了。他笨拙地吮吸著龜頭和陰莖的頂端,用手擺弄著根部,而他的陰莖在他的口中越來越大。他的下巴感覺快要掉了。

“읍, 흐, 으…… 헉……. 흐읍.”
"Eup, huh, ugh...... huck.......흐읍"。

신제의 아래에 고개를 파묻고 있느라 유건의 앞머리가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목이 졸리는 듯한 신음 중간중간에 이따금 신제가 작게 흘리는 소리가 뒤섞였다. 성기를 입에 문 채 손을 뒤로 가져갔다. 스스로 뒤를 푸는 건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지라, 손끝으로 마른 구멍을 더듬으면서도 이게 맞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當 Eugene 把頭埋在她身下時,他的劉海一片凌亂。他絞盡腦汁的呻吟聲中,間中還夾雜著輕微的抽泣。他把他的手放回嘴邊,用嘴含住他的雞巴。他以前從未這樣做過,甚至當他的指尖探入乾燥的洞口時,他也不確定這樣做對不對。

“흐윽!” 「哼!」

기어이 손가락 하나를 억지로 욱여넣는 순간 절로 비명이 터졌다. 더럽게 아팠다. 내벽이 죄다 쓸리는 줄 알았다. 한껏 찌푸려진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물고 있던 성기를 잠시 뱉고, 대신 검지와 중지를 물었다. 뜨겁고 말캉거리는 속살을 대충 헤집다가 빼냈다. 가장 아래쪽 마디까지 흥건히 젖은 손가락으로 다시 뒤를 쑤셨다. 좀 화끈거리긴 했지만 아까보다는 한결 나았다.
當我強行插入一根手指時,我尖叫了起來。痛得要命。我以為我的內臟被捲走了。淚水在我的眼角形成。我吐出咬著的陰莖,改咬食指和中指。我粗暴地撬開灼熱、悸動的肉棒,將它拔了出來。我將濕潤的手指重新插入,直到根部。它仍然灼熱,但比以前好多了。

되는 대로 안을 넓히던 유건은 곧 그만두었다. 아픔보다는 거북함이 더 컸다. 이 짓을 계속하느니, 차라리 곧바로 성기를 집어넣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자리를 잡았다. 바짝 곤두선 좆이 젖은 구멍 위를 위협적으로 치받아 왔다. 당장이라도 들어가고 싶다고 시위하듯.
一直盡力伸展的 Yugan 很快就停了下來。不舒服的感覺大於疼痛。他寧願把陰莖直接插進去,也不願意繼續這樣做。我跪了下來,定位好自己。我的陰莖懸在半空中,氣勢洶洶地在濕潤的洞口徘徊。彷彿在抗議它現在就想插進來。

“하아……. 헉, 하아, 후…….” "哈.......哈克,哈,呼......."

유건은 거친 숨을 고르며 신제를 내려다보았다. 신제의 흰 뺨에 희미하게 홍조가 올랐다. 그 또한 숨이 가빠져 있었다. 가슴팍이 육안으로도 보일 만큼 크게 오르내렸다. 몸은 이렇게나 멀쩡한데, 정신은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신제의 무의식이 깨어나길 거부하고 있어서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유건은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어떻게든 그를 살려 내겠다고. 삶을 놓아 버리고 죽음을 택한 이에게 강제로 삶을 쥐여 주는 것만큼 처절한 복수는 없을 것이다.
余幹清了清喉嚨,低頭看著心之。他白皙的臉頰上浮現出一抹淡淡的酡紅。他也喘不過氣來。他的胸口以肉眼可見的幅度起伏著。他的身體這麼好,心智卻沒有甦醒的跡象。只能得出這樣的結論:神父的無意識拒絕醒來。余甘再次堅定了自己的意志。沒有比把生命逼回一個選擇死亡而非生命的人手中更偉大的復仇了。

“흐, 읏…….” 「嗯,.......」

아랫입술을 깨문 채 몸을 내렸다. 즈윽……. 묵직한 귀두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유건은 숨을 삼키며 고개를 젖혔다. 그의 목덜미에 핏대가 섰다. 회음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빠듯하게 부풀었다.
咬著下唇,她低下了身。嗯.......一顆重重的大龜頭探了進來。Yugan 吞了吞口水,歪了歪頭。血站在他的頸背上。他的會膜漲得緊緊的,不用看也知道。

“아, 아아…… 하으, 윽.” 「啊,啊,啊...... 哈,唉」。

내장이 느리게 벌어지는 느낌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유건은 눈을 질끈 감았다. 감은 시야 위로 각양각색의 얼룩이 번졌다. 지독한 압박감이 척추를 타고 뒷골까지 치밀어 올랐다.
當他感覺到自己的內臟慢慢裂開時,他無法呼吸。Eugene 閉上了眼睛。五顏六色的污點閃過他閉上的視線。一股可怕的壓力從他的脊椎直衝到背脊骨。

어느 지점까지 들어가자 삽입이 턱 막혔다. 아무리 체중을 실어 꾹꾹 내려앉아 봐도 골반 전체에 끔찍한 통증만 번질 뿐 더 들어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유건은 하, 짧은 숨을 간신히 내뱉고 도로 몸을 일으켰다. 덜 젖고 덜 풀려 뻑뻑한 내벽에 힘겹게 맞물려 있던 성기가 쭈우욱, 도로 뽑혔다. 아래가 뻐근했다. 이대로 장기가 모조리 딸려 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到了某一點,它卡住了。無論他如何用全身的重量往下壓,它都不肯再進一步,讓他的骨盆劇痛。他發出輕微的喘息聲,然後把自己推回來。他的陰莖沒那麼濕,也沒那麼鬆,在僵硬的內壁掙扎著,「啪 」的一聲被拉了出來。下面很僵硬,他感覺自己的器官好像隨時都會出來。

“…….” "......."

유건은 차마 소리조차 제대로 못 내고 입만 벙긋거렸다. 그의 이마와 귀밑머리는 이미 식은땀으로 척척히 젖었다. 땀 한 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려 신제의 가슴팍에 뚝 떨어졌다. 유건은 빠득 이를 갈며 다시 성기를 삼켰다.
劉健幾乎發不出聲音,嘴巴張得大大的,額頭和耳下的頭髮已經被冷汗浸濕。一滴汗珠顺着他的下巴淌了下来,滴在了申杰的胸膛上。余乾咬咬牙,又把雞巴吞了下去。

그는 신제의 위에 무릎을 꿇고 허벅지를 벌려 앉은 자세로 어설프게 몸을 들썩였다. 찌걱, 찌걱, 쩍. 고요하고 서늘한 새벽에 걸맞지 않은 음란한 소리가 연거푸 났다.
他跪在神父身上,大腿分開,摸索著坐起來。哐啷,哐啷,哐啷。一連串淫褻的聲音,與寂靜清涼的黎明格格不入。

이제껏 그는 이렇게 능동적인 형태의 가이딩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상대방은 자신이 필요할 때 먼저 유건에게 다가왔고 욕구가 채워지면 떨어져 나갔다. 다른 말로 하자면, 가득 차서 찰랑이는 유건의 수조를 찾아와서 원하는 만큼 물을 얻은 후에 떠났다.
他從未體驗過如此主動的指導方式。當他需要的時候,另一個就會先來找他,當他的需要滿足了,它就會離開。換句話說,當水滿了的時候,它就會來到 Yugan 的水箱,取了它想要的水,然後就離開了。

가이딩의 대상이 바뀌어도 그것만은 매번 같았다. 희성을 안아 줄 때도, 에레혼 1팀에게 돌아가며 범해질 때도, 신제와 한 이불 속에서 뒹굴 때도. 희성이 가져간 물이 한 컵 정도라면 다른 이들은 수영장 내지는 호수쯤 된다는 점이 달랐지만.
不管我是誰的導師,每次都是一樣的。熙成會抱著她,Erehon 1 會輪流陪著她,她會和 Shinje 睡在被褥裡。唯一不同的是,熙成的水是杯子,而其他人的水是水池或湖泊。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상대가 원한다고 한 적도 없는데 멋대로 가이딩을 하고 있었다. 허리를 흔들 때마다 성기가 내벽 여기저기를 푹, 푹, 찔러 왔다. 그는 본능적으로 골반을 이리저리 틀어 잘 느끼는 지점을 찾았다. 내벽 전체가 잔뜩 달아올라서, 기둥이 죽 긁고 지나가기만 해도 짜릿했다. 이따금 귀두가 전립선을 정통으로 찍어 올릴 때면 눈앞이 하얘졌다.
但現在不同了,他在引導她,而她從來沒有說過她希望他這樣做。隨著他臀部的每一次擺動,他的陰莖在她的內璧上戳啊戳,戳啊戳。 他本能地扭動他的骨盆來找到正確的位置。整個內壁都是熱乎乎的,陰莖刮擦著內壁讓人興奮。他的眼睛發白了,因為他的龟頭偶爾會實實在在地撞擊前列腺。

유건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성기를 쥐었다. 눈을 감았다. 안을 팽팽히 벌리고 배꼽 바로 아래까지 들어앉은 좆이 더욱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Eugene 用顫抖的手捏著自己的陰莖。他閉上了眼睛。現在他的陰莖被拉開,塞在肚臍下方,感覺更加赤裸。

“헉, 흐읏, 아…… 아, 으응…….”
"Hmph, hmph, ah...... ah, ugh......."

그는 한 손으로 성기를 쥐고 자위하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자꾸만 파들거리며 무너지려는 허리를 억지로 세웠다. 상대방이 가져가는 대로 고스란히 빼앗기는 대신, 반대로……. 상대방에게 자신이 가진 기운을 힘껏 밀어 넣었다. 막을 새도 없이 기운이 쭉 빨려 나갔다. 누군가 자신의 갈비뼈 정중앙에 보이지 않는 손을 쑤셔 넣어서, 심장을 통째로 뜯어 가는 느낌. 아니, 정확히는 스스로 가슴을 쪼개어 심장을 꺼내 주는 느낌에 가까웠다.
他用一隻手握住自己的陰莖,在自慰時抽搐著臀部。他強迫自己站直,他的腰部在不斷的抽插下有崩潰的危險。他沒有像對方一樣承受那麼多,反而在承受回.......。他全力將自己的能量推向對方。在毫無預兆的情況下,他的能量被吸走了。那種感覺就像是有人把一隻無形的手插入他的肋骨中央,把他的心挖了出來。或者,更準確的說,感覺就像是有人剖開了他的胸膛,把他的心挖了出來。

이런 식의 가이딩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황홀한 동시에 아찔했다. 이 가이딩이, 혹은 섹스가 끝나면, 그의 생명 또한 끝나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필사적으로 생명력을 신제에게 흘려보냈다.
我從沒想過可以用這種方式引導。他欣喜若狂,同時又頭暈目眩。當這種引導或者性愛結束的時候,他的生命也就結束了。但這並不重要。他拼命地將自己的生命力注入女祭司體內。

어슴푸레한 푸른빛이 눈꺼풀을 물들였다. 슬슬 날이 밝으려는 모양이다.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신제의 위에 완전히 내려앉아서 성기를 깊숙이 삼킬 때마다 내벽이 멋대로 옴쭉거렸다. 그 주기가 점차 짧아졌다. 허벅지 안쪽에 잔뜩 힘이 들어가 신제의 허리를 조였다.
昏暗的藍色為您的眼皮染上顏色。天快亮了。他的眼睛炯炯有神。他完全在她身上安頓下來,陰莖的內壁隨著他深深的吞嚥而隆起,週期越來越短。她的大腿內側緊緊箍住他的腰。

유건은 이를 악물고 허벅지와 무릎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저 깊은 곳에 틀어박혀 있던 성기가 차진 소리와 함께 빠져나왔다. 내벽이 가지 말라는 듯 절박하게 달라붙어 성기를 주물러 댔다.
Eugene 咬緊牙關,用大腿和膝蓋頂起自己。他的陰莖深陷在他的身體裡,一踢就滑了出來。裡面的人拼命地抓著它,似乎不願放手。

“흐으…….” "Hmph......."

잇새로 흐느끼는 신음이 터졌다. 그 직후, 쾅! 체중을 실어 세차게 찧었다. 배 안의 성기가 세차게 요동쳤다. 정확히 전립선 위에 꽂힌 귀두가 꿀럭꿀럭 정액을 토해 냈다. 그 자극이 유건을 절정으로 이끌었다.
接著是一連串啜泣的呻吟聲,然後,砰的一聲,他將重心狠狠地往下一壓。我腹部的陰莖猛烈地抽搐了一下。精確定位在他前列腺上的龜頭,噴出了一股前精液。這種刺激讓 Eugene 達到了高潮。

“아…… 아윽, 아, 아아!” "Ah...... ouch, ouch, ouch!"

유건은 감전된 것처럼 허벅지를 파들파들 떨면서 사정했다. 죽음 같은 쾌락이었다. 모든 감각이 아득히 멀어지고 눈앞이 핑 돌았다.
Eugene 射精了,他的大腿像被電到一樣顫抖。那是一種死亡般的快感。他所有的感官都麻木了,他的眼睛在眩暈。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두 눈에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 눈물은 그저 서서히 번지는 새벽빛에 눈이 부셔서이다. 결코 다른 이유는 아니다. 아니어야만 한다. 이제 나는 결코 다시는 당신 때문에 울지 않을 테니까…….
他緊緊地閉上了眼睛。一直積聚在眼眶中的淚水從眼角淌下。這些淚水只是因為被慢慢褪去的晨光眩暈了。不是因為其他原因。一定不是。因為現在我再也不會為你哭泣了.......。

“윽, 하아…….” 「唉,哈.......」

신제가 눈가를 파르르 떨며 신음했다.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유건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로 침대를 짚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真嗣呻吟著,他的眼睛猛地睜開,腦子裡一片空白。雄根用虛弱的手臂抓著床,低頭看著。

아까 꺾어 왔던 꽃송이들이 격한 움직임에 흩어졌다. 마구 짓이겨진 꽃잎에서 흐른 즙으로 침구와 옷과 살갗이 얼룩졌다. 그 가운데 신제가 누워 있었다. 유건이 내보낸 정액으로 배가 더럽혀진 채. 퇴폐적인 동시에 눈을 뗄 수 없이 매혹적이었다.
我早先摘下的花朵因為劇烈的運動而散落一地。碾碎的花瓣汁液沾滿了被褥、衣服和血肉。在這一切的中間,躺著神父。他的腹部沾著余甘排出的精液。這是頹廢的,同時也是令人著迷的。

쿵, 쿵, 쿵. 신제의 심장이 아까보다 확연히 또렷하게 뛰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과 간헐적으로 움찔거리는 속눈썹에 생기가 돌았다. 당장이라도 눈을 떠 유건을 부를 것만 같았다.
怦怦怦怦辛澤的心跳得比之前更清晰了。他酡紅的臉頰和間歇抖動的睫毛都活了過來。他覺得自己似乎隨時都會睜開眼睛,呼喊著您。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신제는 곧 깨어날 것이다. 마침내 긴 잠에서 강제로 깨어, 그렇게도 지긋지긋하게 여겼던 삶을 계속 살아가게 될 것이다. 신제와 몸과 마음을 모두 섞은 상대로서의 직감이자 스스로의 생명을 흘려 넣어 그를 살린 가이드로서의 직감이었다.
我的直覺告訴我神父很快就會醒過來。他終於會從漫長的睡眠中被迫醒來,繼續過著他已經厭倦了的生活。這是一種直覺,無論是身為與他身心同在的對手,或是身為將自己的生命灌注在他身上讓他活著的引導者。

동시에 유건은 깨달았다. 이제는 떠날 시간이었다. 신제에 대한 그의 의무는 지금에야말로 완전히 끝났으므로.
同時,余甘也意識到是時候離開了。他對眾神的責任暫時已完成。

“……아.” "......a."

유건이 홀린 듯 탄식했다. 그의 뺨을 타고 땀방울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흘러내렸다. 창가에서부터 들어온 빛이 그들의 실루엣을 푸르스름하게 비추었다. 어느덧 해가 뜨고 있었다.
Eugene 嘆了口氣,目瞪口呆,不知是汗水還是眼淚從臉頰滾落。窗外的光線將他們的身影投射在藍色的光芒中。太陽已經升起。


* * *


바리에서는 약속한 대로 이른 아침이 되자마자 차를 보냈다. 투박한 디자인의 군용차였다. 바리도 에레혼과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아서 보유하고 있던 차량 대부분이 망가졌는데, 그중에 운 좋게 멀쩡했던 차라고 한다.
在巴里(Bari),他們按照承諾,一大早就派來了一輛車。那是一輛設計粗糙的軍用車輛。巴里的情況和埃雷洪沒多大差別,他車隊中的大部分車輛都被摧毀了,但他很幸運,有一輛車還完好無損。

“안녕하십니까.” 「你好」

블루종을 걸친 여자가 운전석에서 내려 인사했다. 태인이 마주 고개를 숙이고, 유건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一位穿著藍色喇叭夾克的女士從駕駛座下來,向他打招呼。泰仁低頭回禮,裕君反應晚了一拍。

“안녕하십니까.” 「你好」

“그쪽이 이번에 저랑 함께 가시는 백유건 가이드님, 맞습니까?”
「你就是這次和我一起旅行的嚮導吧?」

“예.” 「是的」

“저는 바리 부단장……. 음, 이제 와서 이런 직함은 소용없죠? 임효진입니다. 우리 석 단장님 부탁 받고 왔고요. 짐은 그것만 실으면 됩니까?”
"我是巴里....... 的副經理我是林孝珍,我是應我們石大師的請求而來的。"我是林孝珍,我是應我們石大師的請求而來的,你需要帶這麼多東西嗎?

효진은 자신이 타고 온 차를 꼭 닮은 큰 덩치에 소탈한 인상이었다. 그녀는 솥뚜껑만 한 손으로 유건의 백팩을 가져가 뒷좌석에 휙 던지더니, 조수석 문을 열어 주고는 좌석을 툭툭 두드렸다.
孝珍是個大塊頭,其貌不扬,跟她來的那輛車一模一樣。 她用一隻鍋蓋大小的手抓起宥根的背包,丟進後座,打開副駕駛門,拍拍座位。

“타십쇼. 차가 좀 낡긴 했지만 승차감은 괜찮습니다.”
"上車吧車子有點舊,但坐起來還不錯"

유건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태인이 고개를 까딱했다. 어서 타지 않고 뭐 하냐는 듯.
Yugun回頭瞥了他一眼。一直叉著腰看著的泰仁搖了搖頭。好像在說,你不進來幹什麼?

저택의 대문 앞에 태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단출하다 못해 썰렁한 광경이었다. 찬은 자신의 입으로 작별 인사 따윈 하지 않겠다고 했고, 신제와 희수는 유건이 떠난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딱히 더 할 말을 찾지 못한 유건이 차에 타기 위해 발을 내디뎠다. 그때 등 뒤에서 태인이 그를 불렀다.
在大宅門口,除了泰仁,再沒有其他人。這是一個奇怪的景象。Chan說他不會說再見,Shinjae和Hee-soo甚至不知道他要離開。Yoo-gun找不到其他話可說,他走出去準備上車,Tae-in在後面叫住了他。

“백유건 가이드.” 「Backuigan指南」。

유건이 멈췄다. Eugene 停頓了一下。

“조금 전에 희수가 깨어났습니다.” 「不久之前,熙秀醒來了」

“그렇습니까.” 「是的」

“차 소리를 듣고 당신이 떠나려 한다는 것도 알았고요.”
「我聽到車聲就知道你要走了」

“…….” "......."

유건이 돌아보았다. 그의 어깨가 긴장으로 미세하게 굳었다. 희수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순순히 보내 줄 것 같지는 않은데. 유건을 죽이거나 팔다리를 잘라 곁에 두려고 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Eugene 回過頭,肩膀因緊張而微微繃緊。以 Hee-Su 的個性,他不太可能會這麼輕易放過她。 希望她不會想殺了他或砍下他的四肢來留住他。

“뭐라고 하던가요?” 「他們說什麼?」

“그러냐고 묻고, 약을 먹고, 곧 다시 잠들었습니다.”
「我問他是不是,他吃了藥 很快又睡著了」

“그것뿐입니까?” 「就這樣?」

“예.” 「是的」

이상하리만치 담백한 반응이었다. 유건의 표정이 미묘해지는 것을 알아채고 태인이 덧붙였다.
這是一個奇怪的平淡反應。Tae-in 注意到 Yoo-gun 表情的微妙,補充說。

“희수는 이별에 익숙합니다.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해 본 적이 없을 뿐이죠. 동료 헌터들과는 죽어서 이별했고, 가이드들은 들어온 지 한 달도 안 돼서 미치거나 도망쳤으니.”
"他習慣了離別「他的獵人同伴都死了」 「他的嚮導在他到達的一個月內 都瘋了或逃走了」

“…….” "......."

“어쨌든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혹시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總之,別擔心,如果以後發生了什麼事,我會想辦法的」

“단장님은요?” 「你呢?」

충동적인 물음이 불쑥 튀어 나갔다. 모든 앙금을 버리고 떠나기로 한 주제에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태인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這個問題突然冒出來,很衝動。他無法告訴自己,他剛決定離開,放下所有的恩怨,為什麼還會問這樣的問題。泰恩微皺眉頭。

“그분은…….” 「他是.......」

그때였다. 빵빵! 아침 공기를 가르고 경쾌한 경적이 울렸다. 어느새 효진은 운전석에 타서 출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就在那個時候。歡快的喇叭聲划破清晨的空氣。不知不覺間,Hyojin 已經坐在駕駛座上準備出發了。

“안 타고 뭐 하십니까! 단장님이랑 가이드 언니가 부탁해서 특별히 여기까지 온 건데. 자꾸 늑장 부리시면 저 그냥 갑니다?”
「你幹嘛不上車 我大老遠跑來是因為導演和導遊叫我來的」 「如果你再像個混蛋一樣 我就走了」

“죄송합니다.” 

유건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태인은 얕은 한숨과 함께 입을 다물었다. 유건은 몸을 돌려 차 문턱에 한 발을 올렸다. 

“백유건 가이드, 잠깐.” 

뒤에서부터 팔이 잡혔다.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몸이 반쯤 돌아갔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태인이 그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태인은 맨손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태인이 그를 더러운 것 보듯 하지도 않고, 그를 만질 때 꼭 장갑을 챙겨 끼지도 않게 된 것은. 

“안녕히…….” 

거기까지 말하고, 태인은 그답지 않게 약간의 뜸을 들였다. 유건을 곧게 응시하던 담담한 시선이 한순간 아래를 향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그는 몸을 깊이 낮추어 유건의 손등에 입술을 꾹 눌렀다. 접촉한 자리를 타고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열기가 번졌다. 입술이 아니라 불꽃에 닿은 것 같았다. 그 자리를 따라 화상을 입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열기를 품은 입술이 거짓말처럼 멀어졌다. 태인은 입술을 떼고 허리를 바로 세우고, 언제 그랬냐는 듯 무덤덤한 얼굴로 물러섰다. 그리고 대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았다. 유건이 탄 차가 골목을 벗어나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 * *


차에 탄 유건은 내내 사이드미러만 보았다. 차는 안전 가옥을 뒤로하고 큰길에 접어들었다. 이내 텅 빈 길에 홀로 우뚝 선 남자와 그 뒤로 펼쳐진 주택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어디로 갑니까?” 

정적을 깨고 유건이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효진은 핸들을 잡고 정면을 보며 대꾸했다. 

“남쪽요.” 

“남쪽?” 

“작은 도신데, 여기서 꽤 걸리긴 하지만 살기는 괜찮을 겁니다. 제 고향이거든요. 지금도 멀쩡할지는 모르겠지만.” 

차는 주택가를 지났다. 산과 접해 있는 교외 지역이라 그런지, 여기는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다. 하지만 저 앞에 희미하게 보이는 도심에서는 새까만 연기가 쉴 새 없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고향에 돌아가시는 겁니까?” 

“마자로스에 들어갈 때요. 죽을 각오하고 유서까지 써 놓고 들어가긴 했는데, 막상 후회되더라고요.” 

효진은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살던 곳에도 한 번 못 가 보고, 거기 남겨 두고 온 가족들 친구들 얼굴도 못 보고 죽으면……. 인류를 위해 비장하게 희생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 그래도 어차피 곧 죽을 테니까 눈 딱 감고 포기했는데, 웬걸. 제가 살았더라고요? 나오자마자 곧바로 사표 냈습니다.” 

“사표라니. 석 단장님께서 허락해 주셨습니까?” 

“이제 일손을 많이 줄여야 할 테니까요. 제가 첫 타자였을 뿐이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 가이드님. 아직 모르십니까? 저희들 대규모 실직 위기인 거.” 

“예?” 

유건은 의아한 기색으로 눈만 깜빡였다. 

“마자로스 공략이 끝난 뒤로 어디서도 새로운 게이트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새로 각성자나 가이드로 발현한 사람도 없고요. 기존에 있던 것들만 처리하고 나면……. 아마도.” 

차가 마침내 대로변에 들어섰다. 뽀얗게 들이친 햇살이 아스팔트에 반사되었다. 눈이 부셨다. 효진의 말을 듣느라 멍하니 넋을 팔고 있던 유건이 눈살을 찌푸렸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우리가 모르는 세상이 돌아오겠죠. 아웃브레이크 이전으로.” 

“아…….” 

그들이 탄 차는 덜컹거리며 도심을 가로질렀다. 환한 해 아래에서 보는 도시의 풍경은 그야말로 참담했다. 빽빽한 콘크리트 정글을 형성하던 고층 빌딩들이 모두 무너져 저 멀리 푸른 산이 보였다. 폐허가 된 거리에 이따금 완전 무장한 헌터나 에스퍼들이 돌아다니긴 했지만 민간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심하게 망가졌는데.” 

“당장은 어렵겠지만 언젠가는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처음 변이종이 나타났을 때도 수십억의 사람이 학살당했었는데, 지금은 어떻게든 적응해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 반대도 마찬가지겠죠. 이미 한 차례 재앙을 겪었으니 더 빠를지도 모르겠네요.” 

“그런가요.” 

“그렇죠.” 

“…….” 

유건은 조수석 쪽 창에 옆머리를 기대고 침묵했다. 할 말이 없어서, 혹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효진이 씩 웃었다. 

“도착할 때까지 한숨 푸욱 주무십시오.” 

“아닙니다. 얻어 타는 주제에 어떻게…….” 

“저야 하루 이틀쯤 안 자도 상관없지만 가이드님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도 괜찮습니다.” 

“어허. 무슨 소립니까. 얼굴은 허옇게 질려 가지고, 눈이 이렇게 다 충혈된 사람이. 제가 안 괜찮습니다. 그냥 뒷좌석에 눕혀서 데려갔어야 하나 고민 중인데.” 

“하지만.” 

유건이 뭐라 항변하려 했다. 하지만 효진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한 팔을 뻗어 그를 꾹 눌렀다. 두툼하고 거친 손에서 나오는 힘은 장난이 아니었다. 유건은 찍소리 못 하고 조수석에 처박혔다. 

“안 자면 억지로 재웁니다.” 

“…….” "......."

유건은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결국 눈을 감았다. 황폐한 도시의 풍경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눈을 감자마자 미친 듯이 잠이 쏟아졌다. 뜬눈으로 지새웠던 지난밤이, 그리고 그간 보낸 불면의 밤들이 와르르 밀려왔다. 온몸이 카 시트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내가 백수라니……. 아이고. 이제 자격증 공부라도 해야 하나.” 

희미해지는 의식 너머로 효진의 투덜거림이 들렸다. 곧 그것마저도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 * *


이 도시에 온 직후 유건은 한 차례 호되게 앓았다. 이제껏 참았던 것을 한 번에 몰아 아프기라도 하는 것처럼. 열이 끝도 없이 오르고 목이 쉬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하필 단말기 겸 휴대폰을 놔두고 온 탓에 구급차를 부를 수도 없었다. 불렀다 하더라도 재앙에 휩쓸린 더 심각한 환자들을 수습하기에 바빴겠지만. 

그의 곁에는 신경질을 내면서도 약과 물을 챙겨 줄 형도, 그를 푹신한 침대에 눕히고 의사를 불러다 줄 사람들도 없었다. 홀로 고열에 시달리며 어둑어둑한 천장을 올려다보면 갖가지 환영들이 일렁였다. 전투에서 외상을 입었을 때보다 지금이 더욱 괴로웠다. 

에레혼은 항상 급여만큼은 넉넉하다 못해 기가 질릴 정도로 퍼 주었기에, 그에게는 평생 희성과 함께 번 것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돈이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그는 이 도시에서 손꼽히는 호화로운 집에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형이 죽은 세상에서 홀로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 죄스러웠다. 유건은 임시로 얻은 초라한 단칸방에 웅크리고 누워 아픔을 삼키며 참담한 여름의 끝자락을, 자신의 생일을 흘려보냈다. 

낯선 도시에서도 시간은 똑같이 흘렀다. 지상을 지글지글 끓이는 것 같던 여름이 지나고 날이 조금씩 선선해지더니, 어느덧 칼바람이 부는 계절이 되었다. 

“오늘 A조 작업 종료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짝짝짝. 큰 박수 소리가 울렸다. 그 말에 공장 곳곳에 흩어져 작업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두꺼운 산업용 방진 마스크를 벗고 숨을 몰아쉬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어어. 잘들 들어가고. 고생 많았어.” 

“상민이 넌 나랑 잠깐 올라가야겠다. 어제 주문 들어온 거 수량 바꿔 달라는 데가 있어서.” 

“예, 부장님.” 

“교대 근무 일지 작성 빼먹지 마세요!” 

“난 먼저 갑니다.” 

“살펴 가십쇼.” 

짤막한 인사들이 오갔다. 그중에 한 청년이 있었다. 흑발에 심플한 무채색의 옷차림. 그는 장갑을 무심하게 툭 벗으며 걸어 나갔다.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사람들과 떨어져 홀로 퇴근할 채비를 하는 그는 오히려 눈에 띄었다. 

“백유건!” 

느닷없이 굵은 팔이 어깨에 턱 걸쳐졌다. 옅은 땀내가 났다. 유건이 무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왜 또 말없이 혼자 가냐? 형님들 섭섭하게.” 

중년 남자가 씩 웃었다. 처음에야 싸가지 없다, 어린놈이 애교가 없다며 투덜거렸지만 지금은 저 녀석의 딱딱한 태도에도 익숙해졌다. 생긴 건 좀 쌀쌀맞아 보여도 알고 보면 상당히 귀여운 놈이다. 

“오늘 회식 콜? 불금을 맞아서.” 

옆에서 그보다는 좀 더 젊은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곱창에 소주 어떻습니까?” 

“곱쏘 좋지.” 

“어? 쏘시는 겁니까?” 

“새끼야, 저번에도 소고기를 혼자 5인분을 처먹어 놓고. 아주 내 등골을 뽑아라, 응?” 

“그래서 유건이 너는? 저번에도 회식 너만 빠졌잖아.” 

“이 동네에 연고도 없고 혼자 사는 놈이 매일 집에만 처박혀 있는단 말이지. 집에 꿀 발라 놨냐? 어디 뭐, 예쁜 애인이라도 숨겨 놨어?” 

“그러게 말입니다. 야, 유건아. 넌 대체 무슨 낙으로 사냐?” 

큰 의미 없이 던진 질문이 상처를 헤집었다. 무슨 낙으로 사냐고? 스스로도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오히려 역으로 묻고 싶었다. 나는 대체 왜 살아 있는 거냐고. 

“저는…….” 

유건은 살짝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까만 눈동자가 바닥을 향했다. 

평소의 유건은 요령 없이 무뚝뚝하기만 했다. 키도 크고 멀끔하게 잘생긴 놈이 노는 덴 전혀 관심이 없다. 무심한 태도가 조금이나마 말랑해지는 건 그를 마냥 귀여워해 주는 어르신들이나 아기들, 동물들 앞에서뿐이다. 이래서 연애는 해 봤을까 싶다. 

하지만 그는 가끔 묘했다. 말끝을 흐릴 때나 눈을 느리게 깜빡일 때, 땀에 젖어 더 까매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한숨을 쉴 때. 그럴 때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색기가 돌았다. 이제껏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궁금해질 지경이나 본인이 입을 열지 않으니 알 도리가 없다. 

“오늘은,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눈을 반짝이며 유건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던 남자들은 일제히 김이 샜다. 

“거참 비싸게 구네. 어째 우리 사장님보다 너랑 밥 먹기가 더 어렵다. 응? 제발 참석해 주십사 하고 빌기라도 할까?” 

“하여간 재미없는 새끼.” 

실망은 곧 거친 언어가 되어 돌아왔다. 그러나 유건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가 팔목으로 목덜미를 문지르며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오늘 부모님 기일이라.” 

“…….” "......."

“…….” "......."

자신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던 유건이 처음으로 가족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런데 그게 하필 부모님 기일이다. 

“아, 어……. 유건아. 음. 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일단 미안하다.” 

“나도. 네 사정도 모르고 말실수했네.” 

“자식이 말이야, 그런 일이면 진작 말을 했어야지. 크흠, 이걸로 부모님께 술 한잔 올려 드려라. 죄송하다고도 전해 주고.” 

그들은 작업복 주머니를 뒤져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을 쥐여 주었다. 유건이 아무리 사양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유건의 어깨를 거칠게 툭툭 두드리며 주말에 푹 쉬라는 말을 남기고 먼저 자리를 떴다. 

“옆 동네 있잖아. 옛날에 폐쇄된 곳. 이제 통제 풀린다는데?” 

“어? 거기 저 어릴 때부터 폐쇄돼 있던 곳이었는데. 이제 드디어 풀리는 겁니까?” 

“게이트가 완전히 사라졌다더라고. 헌터인가 에스퍼인가 하는 사람들이 싹 다 처리했다니까 이제 별일 없겠지.”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오네요.” 

“근데 있잖아. 예전에 한참 유명했던 헌터 집단. 그, 뭐더라? 에레……. 에레혼? 에리혼? 인가 뭔가 하는 곳 말이야. 그런 놈들은 요즘 뭐 한대냐?” 

이곳에서 들을 거라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단어가 귀에 파고들었다. 유건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동료들은 두런거리는 말소리와 함께 점차 멀어져 갔다. 

“글쎄요? 그러고 보니 뉴스에서 안 본 지 한참 됐네.” 

“예전 그때 다 죽은 거 아니냐?” 

“에이, 설마요. 일거리 줄어드니까 손 털고 나갔겠죠.” 

“하기야 이제껏 번 돈만 수백억 단위일 텐데, 뭐 하러 그 위험한 짓 계속하겠나 싶다.”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건이 한숨을 쉬며 모자를 눌러썼다. 모자의 챙이 드리우는 그늘 아래 눈매가 가려졌다. 


* * *


퇴근길에 집 앞 슈퍼에 들러 장을 보았다. 장이라 해도 거창한 건 아니었다. 제사상에 올릴 술과 간단한 음식을 고르고 형이 좋아하던 연어도 한 팩 샀다. 어차피 이 술은 결국 유건이 마실 테고, 연어도 그의 저녁 겸 안주가 될 테지만. 

계산대로 걸어가던 유건의 눈이 한곳에 멎었다. 봉지에 포장된 빵 옆에 쿠키나 사탕 같은 디저트 종류가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진열대 위를 훑으며 무언가를 찾았다. 

“…….” "......."

역시나 보이지 않는다. 하기야, 이런 오래된 동네 슈퍼에서 머랭 쿠키를 팔 리가 없다. 갈 곳을 잃고 허공에 떠 있던 손이 머뭇거림 끝에 단팥빵을 집어 장바구니에 넣었다. 

에레혼을 떠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게이트니 헌터니 하는 것들이 벌써부터 다른 세상 이야기처럼 들렸다. 유니폼을 갖춰 입고 배지를 달고 그들의 곁에 있었던 것이 까마득히 멀게 느껴졌다. 에레혼의 배지는 유니폼과 함께 두고 왔고, 가이드 배지는 먼지가 쌓인 채 짐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것이다. 주변에 온통 가이딩이 먹히지 않는 일반인들뿐이니 이제는 자신이 가이드라는 것마저 종종 잊는다. 

〈먹는 거예요. 머랭 쿠키라고 디저트 종류.〉 

〈백유건 가이드는 뭘 좋아해요? 머랭 쿠키랑 단 커피를 잘 먹는 건 확인했는데, 그 외엔 통 말을 해 주질 않아서.〉 

〈그냥, 동네 슈퍼나 편의점 같은 데서 파는 거……. 단팥빵 같은 거요.〉 

하지만 이따금 불시에 튀어나오는 기억들이 비수가 되어 심장을 찌른다. 단팥빵을 먹어 본 적 없다는 신제의 말에 유건은 어떻게 대답했던가. 다음에 먹어 보자고 별생각 없이 권유했던 것 같다. 신제는 그를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으며 생긋 웃었고, 그리고, 또……. 뭐라고 했더라. 

유건은 묵직한 비닐봉투를 들고 터덜터덜 걸었다. 오늘따라 집까지 가는 길이 유독 멀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자신은 지친 것 같다. 단순히 육체의 피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이드가 없으면 각성자는 죽거나 미친다. 어쩌면 그 반대 또한 참일지도 모른다. 

지난한 삶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른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공허가 메워지지 않는다. 뿌리가 모두 썩어 사라지고 기둥과 줄기만 남은 나무가 되어, 어디에도 붙박이지 못하고 흙 위를 떠돌고 있다. 

그가 사는 집 앞 골목까지 왔을 때, 유건은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고 말았다. 시야가 한 차례 까맣게 물들었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골목길에 쓰러져 있었다. 

“아…… 으윽.” 

현기증 탓에 손도 짚지 못하고 바닥에 몸을 고스란히 들이받으며 쓰러졌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쓸린 살갗에서 피가 흐르고 있으리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유건은 후들거리는 팔로 바닥을 짚고 어떻게든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넘어지면서 접질린 건지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줄 풀린 인형처럼 도로 고꾸라졌다. 

“윽!” 

그의 시야에 비스듬하게 기운 골목이 들어왔다. 바닥을 타고 차가운 웅덩이가 번져 나갔다. 술병이 깨진 것이다. 함께 산 연어 또한 충격으로 팩에서 튕겨져 나와 바닥을 굴렀다. 연홍빛 표면에 더러운 것이 잔뜩 묻어서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손바닥이 따끔했다. 술병 파편에 베였는지 살이 갈라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유건은 술에 젖어 흥건한 바닥을 더듬거리며 몇 번 더 몸을 일으키려 애를 썼다. 애처롭고 구차한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갈수록 힘이 빠졌다. 

마자로스에 들어갔다 나온 이후로 유건의 몸은 종종 이랬다. 종종 발목이 시큰거렸고 뜬금없는 타이밍에 어지러움을 느꼈다. 귀에서 이명이 한참 들리기도 했다. 몸 곳곳에 남은 흉터는 말할 것도 없다. 그때 입은 상처들이 아직도 그를 괴롭힌다. 그때의 기억을, 우리를 잊지 말라고 시위하듯. 

검은 셔츠에 가죽 하네스를 찬 사람들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다. 살면서 다시는 마주칠 일도 떠올릴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차 앞좌석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하던 부모님과 환자복을 입은 희성까지도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 "......."

유건은 일어나려 애를 쓰던 것을 포기했다. 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와 뻣뻣한 몸을 더욱 얼어붙게 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끄윽, 힘겨운 숨이 목 너머로 넘어갔다. 

“흡. 흐, 흐윽…… 흑.” 

좁고 더러운 골목에 꼴사납게 널브러진 채로, 유건은 소리 죽여 울었다. 아무리 입술을 깨물고 숨을 참아도 새어 나가는 흐느낌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바닥에 축 늘어진 손을 움켜쥐었다. 피와 모래, 먼지로 얼룩진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그때 누군가의 발이 유건의 앞에 멈춰 섰다. 골목길을 지나는 사람이 있다면 발소리로 알아챘을 텐데,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유건에게는 구두를 신은 발과 그 위로 뻗은 발목, 그리고 주름 하나 없는 바지 자락밖에 보이지 않았다. 

유건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마디가 길고 단정한 손이 바닥에 떨어진 단팥빵을 주워 이리저리 살폈다. 이윽고 어린아이나 연인을 달래듯 사근사근 부드러운 음성이 귓가에 떨어졌다. 

“왜 울고 있어요.” 

……아. 

유건은 호흡을 잊었다. 시간마저 멈췄다. 흑백으로 빛이 바랜 세상에서 오직 남자의 목소리만이 또렷했다. 

언젠가 신제를 마주치는 상상을 한 적 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시간과 장소에서 아주 우연히. 

만약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면 뭐라 말해야 할까. 당신 없이도 잘 살았다고? 지긋지긋하던 당신이 없으니 너무도 자유롭고 행복했다고? 당신의 꿈은 가끔, 아주 가끔만 꾸었다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유건은 곧 제풀에 지쳐 그만두곤 했다. 결국은 망상에 불과하다. 그것도 지독하게 현실성 없는. 당장 내일 해야 할 출근이 그에겐 더 절실했다. 하지만 지금, 머릿속에서 하고 싶은 말이 끝도 없이 몽글몽글 솟아났다. 잿더미에서 피는 꽃처럼. 

가족을 모두 잃고 복수가 끝나면 제 삶도 끝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모든 게 끝난 뒤에도 저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새로운 곳에서 새집을 얻고 새 일을 하면서요. 물론 처음에는 힘들었습니다. 에레혼에 처음 들어갔을 때처럼요. 

그렇다고 지금이 힘들지 않다는 건 아닙니다. 사실은 매 순간이 힘듭니다. 잊느라 힘이 듭니다. 잊지 않으려 애쓰는 것보다 잊으려 애쓰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저는 처음으로 배웠습니다. 무엇을 잊으려 했냐고요? 모든 것을요. 

깨어나서 가장 먼저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제가 남기고 간 복수는 어땠습니까? 그러게 차라리 확실히 죽어 버리든가, 아니면 자리를 털고 일어나든가 할 것이지. 왜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병상에 누워 제게 빈틈을 허락했습니까? 당신 잘못입니다. 

이번에도……. 제가 이겼습니다. 

“…….” "......."

유건은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칼바람에 제멋대로 나부끼는 머리칼 아래 잿빛 눈동자가 유건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회색 니트에 코트를 걸친 차림이었다. 넥타이핀에 슬리브 가터까지 챙기던 예전의 옷차림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었다. 머리를 깔끔하게 손질해 넘기지도 않았고 가슴에 에레혼의 배지를 달지도 않았다. 몇 달의 공백이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어색하지 않았다. 신기했다. 아주 오래전 꿈에서 본 실존하지 않는 사람 같기도 했고, 바로 어제 만났던 사람 같기도 했다. 

“왜 오셨습니까?” 

상대의 질문에 질문으로 되돌려 주었다. 항상 본심은 감추고 뜻 모를 날 선 말만 주고받으며 평행선을 그리던 둘의 관계처럼. 

“갈 곳이 여기밖에 없어서.” 

신제가 얌전히 시선을 내리깐 채 손을 내밀며 대답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우리 안이었다. 눈을 뜬 첫 순간부터 비좁은 우리가 그의 세상이었다. 목과 팔다리에 족쇄가 채워지고 굵은 창살이 사방에 빼곡한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심연의 검은 물이 우리 안에 흘러들어 와 턱까지 차올라도 이상한 줄을 몰랐다. 

“내가 자는 사이에 바란 적도 없는 선물을 냉큼 떠안기고 도망쳤길래……. 돌려주러 왔죠.” 

그러나 그를 둘러싼 우리가 단숨에 사라졌다. 물 또한 익사하기 직전에 모두 빠져나갔다. 아무것도 없는 공터 한복판에서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안락사나 도축만이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라 여겼는데, 어째서? 기쁘기 이전에 혼란스러웠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우리 밖에 풀려난 짐승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네가 내게 생을 선사했으니, 나는 남은 생을 네게 모두 바치려고 하는데, 유건아. 어때? 이 정도면 수지가 맞지 않니.” 

막 신제의 손을 잡고 일어나려던 유건이 흠칫했다. 

“거부권은?” 

“으음, 없어요.” 

신제가 웃으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입매만 웃을 뿐, 눈빛은 섬뜩할 정도로 집요하게 유건을 좇았다. 

“하기야 언제는 당신이 제 의사를 고려해 준 적 있었습니까. 항상 제멋대로 하셨죠.” 

“제멋대로인 건 네가 더하지. 그렇게 뜨거운 밤을 보낸 뒤에 날 매몰차게 버리고 갔으면서.” 

“……깨어 계셨습니까? 그때.” 

“아……. 정말 너무했어. 백유건 가이드만을 위해 조신하게 지켜 온 내 정조를 엉망으로 유린해 놓고는, 책임도 안 지고 도망칠 줄이야. 그런 거친 취향인 줄은 몰랐는데. 날 강제로 범하는 게 그렇게 좋았어요?” 

저 말만 들으면 유건이 천하의 변태에 파렴치한 같다. 유건이 눈을 연달아 빠르게 깜빡이더니, 나중엔 아예 질끈 감아 버렸다. 추위 탓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 귓불이 새빨갰다.
這讓他聽起來像是世界上最變態、最肆無忌憚的人。Yuugan 快速地連續眨眼,然後緊緊地閉上了眼睛。他的耳垂因寒冷或其他原因而發紅。

“제발 좀 닥치시죠.” 「你能不能閉嘴?」

유건이 이를 갈며 신제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이제 신제는 가죽 장갑 또한 끼고 있지 않았다. 희고 큼직한 손바닥 위에 손을 얹기가 무섭게 몸이 쑥 일으켜졌다.
雄安咬著牙,拉著心芝的手站起來。他已經不戴皮手套了。他跳著站起來,不敢把手放在那只又白又大的手掌上。

“왜 이제 오셨습니까.” 「你現在為什麼在這裡?」

아까와 비슷하지만 중간에 한 단어가 더 들어간 질문이었다. 신제는 쓰게 웃었다. 하루아침에 우리에서 풀려난 짐승이 갈 곳은 한곳밖에 없다. 창살 틈으로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을 맹목적으로 찾는 수밖에.
這是一個類似 Nara 的問題,但中間多了一個字。祭司苦笑了一下。一夜之間被放出籠子的野獸只有一個去處。它只能盲目地透過鐵柵欄尋找向它伸出援手的人。

유건이 떠난 아침, 그가 강제로 밀어 넣은 가이딩을 심장 가득 품은 채 눈을 뜬 신제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꽃이었다. 머리맡에 가득 흩어진 꽃송이들이 마치 유건이 씌워 주고 간 관 같았다. 아무렇게나 꺾은 야생화들로만 이루어진, 유건을 꼭 닮은 화관.
在玉根離開的那天早上,鑫澤醒來時第一件事就是看到那些花,他的心充滿了玉根強加在他身上的指引。散落在他床邊的花朵,就像是他留下的棺木。一頂完全由隨手摘下的野花組成的皇冠,就像他一樣。

그러므로 나는 네 심신의 주인으로서 그대 머리 위에 왕관과 면류관을 씌워 주리라…….[1] 유건의 목소리로 담담히 읊는 구절이 귓가에 내내 맴돌았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건은 그의 세상을 열어 준 주인이자 신이었다. 길잡이인 동시에 목적지였다.
因此,我要在你的頭上戴上皇冠和冠冕,作為你心靈和身體的主宰.......[1] 這些話,以尤金的聲音舒緩地說出來,在我耳邊迴盪。他不得不承認這一點。尤根是他的主人,是向他敞開世界的神。他既是引導者,也是目的地。

유건은 배지와 단말기와 유니폼과 목걸이를 남겨 둔 채 사라졌다. 태인은 끝내 유건의 행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찬과 희수는 모른다고 했다. 정말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 연기를 하는 건지. 전부 죽일까 하다 그만두었다. 그럴 시간조차 아까웠다. 신제는 유건을 찾아 전국을 뒤졌다. 알무텐을 물리칠 단서를 좇던 때보다 더욱 절박하게.
他消失了,只留下警徽、終端機、制服和項鍊。Tae-in最終對Yoo-gan的下落保持沉默。Chan和Hee-soo說他們不知道。我不知道他們是真的不知道,還是裝作不知道。 我想過要把他們全殺了,但又打住了。不值得花時間。信之在全國找尋玉乾。甚至比他尋找打敗阿爾木騰的線索還要絕望。

어쨌거나 이제는 필요 없는 말들뿐이다. 신제는 비참했던 지난날들을 목 너머로 삼키고 웃어 보였다.
無論如何,這些話現在都是不必要的。神父把悲慘的過去吞進喉嚨,然後笑了。

“내 가이드……. 내 분실물. 늦어서 미안해요.”
"我的指南.......我的失物招領對不起,我遲到了。"

유건은 몇 번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말은 필요 없었다. 서로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 충분했다.
Yugan 抿了幾下嘴唇。但最後,他還是什麼都說不出來。但沒關係。他們不需要說話。只要彼此在一起就夠了。

신제는 팔을 벌렸다. 꽁꽁 얼어붙고 상처로 얼룩진 몸이 쓰러지듯 안겨 들었다. 그는 유건의 등을, 그새 더 마른 것 같은 허리를, 어깨를 신중하게 어루만졌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어둠 속을 헤매며 유일한 이정표를 찾는 것처럼.
神父張開雙臂。他小心翼翼地撫摸著余甘的背,看起來比以前更瘦的腰,還有他的肩膀。像一個盲人。像一個在黑暗中遊蕩的人,在尋找唯一的路標。

조심스레 더듬거리던 손끝이 절박해졌다. 그들은 서로의 몸이 품 안에 가득 들어차도록 힘껏 끌어안았다. 맞닿은 가슴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죽을 것 같았다. 어느덧 둘의 심장이 같은 박자로 뛰었다. 온기가 뒤섞였다. 서로가 서로의 생명을 나눠 가지고 있었다.
生疏地,他們的指尖變得絕望。他們拼命擁抱著對方,直到身體完全被對方的臂膀包圍。他們的胸膛稍有分離,就感覺像死了一樣。很快,他們的心臟跳動一致。溫暖交織在一起。他們分享彼此的生命。

“…….” "......."

유건은 신제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채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이윽고 그의 몸이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언뜻 보이는 턱과 입매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신제는 자신의 어깨가 젖어 드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는 유건을 좀 더 단단히 안고, 유건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누른 채 눈을 감았다.
余甘將頭埋在心潔的肩上,久久不願離去。然後,他的身體開始微微顫動。他的下巴和嘴明顯繃緊了。辛澤感覺自己的肩膀也濕了,但他什麼也沒說。 他把他抱得更緊了一點,把嘴唇貼在他的太陽穴上,閉上了眼睛。

마침내 만났다. 창살도 족쇄도 없는 심연 바깥에서, 우리가.
我們終於見面了在深淵之外,沒有柵欄和枷鎖,我們。



〈프로푼디스〉 끝 Profundis" 結束

외전 誘拐

Liquid Lunch 液體午餐

유건은 인적 없는 거실을 둘러보았다. 자신이 사는 집이지만 언제 봐도 너무 넓다. 이 집에 머무는 인원은 자신을 포함해 기껏해야 둘인데, 이렇게까지 넓고 호화로울 필요가 있나 싶다.
余甘環顧冷清的客廳。這是他的家,但總覺得太大了。包括他自己在內,這房子只住了兩個人,他不明白為什麼需要這麼寬敞豪華。

집안일을 해 주는 사람이 주기적으로 다녀가는 까닭에 집 전체가 먼지 한 톨 떨어진 것 없이 깔끔했다. 커튼과 침구와 세탁물에는 항상 좋은 향이 배어 있고 주방과 욕실은 반짝반짝 광이 난다. 아무리 살펴봐도 손댈 곳이 없다. 괜히 집안일을 하겠답시고 설쳤다간 이 완벽한 공간을 망치는 결과만 낳을 것 같았다.
房子一塵不染,並有定期的家務保養。窗簾、床上用品和洗好的衣服總是很香,廚房和浴室也是閃閃發光。無論我往哪裡看,都找不到可以觸摸的地方。我不覺得做任何家務會破壞這個完美的地方。

결국 할 일을 찾지 못한 그는 소파에 풀썩 걸터앉았다. 소파 앞 커피 테이블에는 유건과는 전혀 연이 없을 것 같은 원서가 몇 권 쌓여 있었다. 그는 제목조차 읽기 어려운 책 대신 옆에 놓여 있던 큐브를 집었다. 요즘 그가 새로 취미를 붙인 것이다.
最後,他找不到任何事情可做,只好瘫坐在沙發上。在他面前的茶几上放著一疊與余甘毫不相干的書,他拿起躺在旁邊的一個立方體,而不是一本連書名都看不懂的書。這是他最新的嗜好。

레이드에 나설 때 유건은 항시 권총을 지니고 다녔다. 그에게는 휴대폰이나 지갑 같은 것보다 총이 오히려 익숙했다. 묵직한 총신을 쥔 채 엄지로 안전장치를 툭, 툭, 건드리고 있자면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어떤 위험이 닥쳐도 저항할 수단 하나쯤은 있다는 데서 오는 안정감이었다.
在突擊行動中,Yugan 總是隨身攜帶手槍;對他來說,手槍比手機或錢包還要熟悉。握住沉重的槍管,用大拇指輕彈保險,有一種令人舒適的感覺,那是一種安全感,因為他知道無論面對任何危險,至少有一種方法可以抵抗。

이제 알무텐이 죽고 마자로스 공략이 끝났다. 더 이상 게이트가 생성되지도 않고 변이종이 점차 사라져 가는 시대에 총은 불필요한 흉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유건에게는 여전히 총을 다루던 습관이 남아 있었다. 장비 하나 없이 맨몸으로 거리를 걸을 때면 가끔 불안했다. 주기적으로 총을 분해하여 부품을 하나하나 손질하고 숨 쉬듯 탄창에 남은 탄환의 수를 점검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Almuthen 死了,對 Mazaroth 的攻擊也結束了。由於沒有更多的蓋茨產生出來,變種人也逐漸消失,槍是一種不必要的武器。但 Yuugan 仍有處理它們的習慣。他有時走在街上不帶槍會感到不安。如果他不定期拆卸槍支檢查零件,像呼吸一樣檢查彈匣裡的剩餘彈數,他就會覺得自己有麻煩。

그래서 새로 구한 직업도 공장에서 기계 부품을 조립하는 일이었다. 적어도 조립에 집중할 때만큼은 손에 밴 무기의 감각을 잊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일도 반년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이제 그는 총의 대용품으로 큐브를 만진다. 손끝으로 큐브 모서리를 가볍게 쳐서 돌리고 있다 보면 시간이 잘 갔다. 알록달록한 블록을 같은 색끼리 모으는 것도 은근히 재미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처럼 잔머리를 재빨리 굴리지 못하는 사람도 공식만 외우면 맞출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於是找了一份新工作,在工廠裝配機器零件。但是不到半年他就辭職了,因為至少當他專注於組裝時,他可以忘記手中武器的感覺。現在他摸著立方體,就像在摸槍的替代品。他的指尖輕彈立方體的四角,讓它們轉動,時間很快就過去了。把五顏六色的方塊拼在一起是一件偷偷摸摸的樂趣,最棒的是,即使你的腳步沒有他那麼快,也可以記住公式,把它拼對。

큐브 한 면을 파란색으로 다 맞췄을 때쯤 머리가 핑 돌았다. 순간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유건은 신음을 삼키며 미간을 꾹 눌렀다.
當我用藍色填滿立方體的一邊時,我的頭已經昏了。有那麼一瞬間,他看不見了。Eugene 嚥下了一聲呻吟,把眉心壓在一起。

“아…….” "Ah......."

손에 힘이 빠져 큐브를 놓쳐 버렸다. 맞추다 만 큐브가 소파 위를 굴렀다. 끼니를 거른 지 얼마나 됐더라. 하루, 아니, 이틀인가. 몸에 이상이 생기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뭘 입에 넣을 기분이 들지 않는다.
你的手一滑,魔方就掉了。我想抓住它,但是立方體滾到了沙發上。我意識到我有多久沒吃東西了。一天,也許是兩天,難怪我感覺不舒服。但不知道為什麼,我不想往嘴里塞任何東西。

형과 함께 살 때 유건은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챙겼다. 혹독한 전투를 치르고 돌아와 식욕은커녕 구역질만 날 때에도 의무적으로 상을 차리고 음식물을 씹어 삼켰다.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했다. 아무것도 먹기 싫다고 투덜거리는 희성이 어떻게든 숟가락을 들게 하는 것 또한 그의 일과였다.
和哥哥住在一起的時候,余幹一日三餐,即使從艱苦的戰鬥中回來,沒有胃口,只有反胃,他也會恭恭敬敬地把桌子支好,把食物細嚼慢咽。他必須吃飯才能活下去。這也是他的例行公事之一,當熙成埋怨他不想吃任何東西時,他就會以某種方式讓熙成拿起湯匙。

에레혼에 들어간 뒤로도 마찬가지였다. 스트레스로 음식물을 입에 대지 않았던 것도 처음 잠깐뿐이었다. 그에게는 언제든 가이딩이 가능하도록 스스로의 컨디션을 유지할 의무가 있었다. 자꾸 식사를 거부하면 입에 주사기를 처박고 목에 구멍을 뚫어 호스를 꽂아서라도 영양분을 주입하겠다는 소리까지 듣기도 했고.
他進入 Erechon 之後也是如此。他只是在很短的時間內因為壓力而拒絕進食;他必須讓自己保持這樣的狀態,以便隨時接受引導。他們甚至告訴他,如果他拒絕進食,他們就會把針筒塞進他的嘴里,在他的脖子上鑽一個洞,然後用軟管通過這個洞來給他營養。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이제 목표가 없었다. 그를 악착같이 살아가게 하던 원동력은 모두 사라졌다. 재앙이 휩쓸고 간 세상에 남은 자신은 이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지금 그의 곁엔……. 그를 무릎에 앉혀 꼭 끌어안고 입에 과자를 넣어 줄 사람이 없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티가 난다고 했던가. 단둘이 있던 넓은 집에서 한 사람이 떠나고 혼자만 남겨지자 사무치게 외로웠다.
但現在不一樣了,他不再有目標,所有驅使他活下去的東西都消失了。他被留在了一個被災難蹂躪的世界,他仍然不知道為什麼而活。最重要的是,他.......。沒有人坐在他的大腿上,緊緊地抱著他,往他的嘴里塞糖果。他感到非常孤獨,因為大房子裡只有他一個人。

“외롭다니, 무슨…….” 「寂寞,什麼.......」

유건은 자조했다. 아무 걱정 없이 호화로운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는 주제에, 참으로 사치스러운 감정이다. 지금껏 홀로 꿋꿋하게 잘만 살아왔으면서 고작 며칠 혼자 남겨진 걸로 무너지는가.
余幹自救。對於一個生活在豪宅中無憂無慮的對象來說,這是多麼奢侈的情感。他獨自生活了那麼久,現在才被拋棄了幾天。

신제는 처리할 일이 있어 서울에 올라갔다. 유건을 남쪽 지방의 도시에 남겨 둔 채로. 날짜로 따지면 보름도 안 됐는데, 이상하게 그를 못 본 지 너무도 오래된 것 같았다.
Shinjae去首爾處理生意,把Yugun留在了南方的一個城市。他把 Yugun 留在了南韓的一個城市,雖然以天數計算,還不到兩個星期,但奇怪的是,他似乎已經很久沒有見到他了。

〈바리〉 부단장의 차를 얻어 타고 남부의 소도시로 내려온 이후, 유건은 여전히 이곳에 살고 있다. 신제와 재회한 이후에도 쭉. 에레혼 본부가 있던 도심 한복판으로 돌아가자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신제는 아무런 권유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예 이 도시에 집을 얻어 주기까지 했다. 그것도 사치스럽다 못해 기가 질릴 정도로 호화로운 집을.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그의 금전 감각은 유건의 상식을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自從他搭乘巴里副總監的車子來到南方的小鎮,Yuugan就住在這裡。自從他和新澤重逢之後我原以為他會要求我搬回市中心,也就是Erehon的總部所在地,但出乎意料的是,他沒有提出任何建議。他甚至在市區裡為他買了一棟豪華到讓他反胃的房子。 正如他一直懷疑的,他對金錢的感覺遠遠超越了雄健的常識。

머리로는 그의 결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자로스로 통하는 게이트가 열린 곳은 수도권의 국제공항이었다. 거기에서부터 심연화 현상이 일어나 전국이 쑥대밭이 되었다. 수도권은 사태의 근원이자 피해가 가장 심한 지역이었다. 겉으로나마 거의 평화를 되찾은 이 도시와 달리, 그쪽은 아직까지도 사람이 살지 못하는 땅이 꽤 많다고 한다. 그런 위험한 곳에까지 굳이 유건을 데려갈 이유가 없다.
理智上,我可以理解他的決定。通往 Mazaroth 的大門在首都國際機場打開。從那裡開始,深淵現象展開,席捲整個國家。首都既是疫情的源頭,也是重災區。 與已基本恢復和平的城市不同,這裡仍有大片無人居住的土地。沒理由帶雄干去這麼危險的地方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은 별개다. 유건은 신제의 결정을 이해하는 동시에 그가 원망스러웠다.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의존했던 적이 없었기에, 그는 이 감정의 이름이 서운함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혼란스러울 뿐.
但用腦子知道和用心感受是兩回事。余甘理解昕澤的決定,但他也很反感,他從來沒有這麼依賴過一個人,他甚至不知道這種情緒有個名稱:苦。他只是很困惑。

그렇게 떠난 뒤 신제는 지금껏 연락 한 통 없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평소에도 그들은 전화기를 붙들고 알콩달콩 안부를 전하는 사이는 결코 아니었으니까. 그나마 가끔 용건이 있을 때 먼저 연락하는 건 항상 신제였다. 전화도 신제가 먼저 걸었고, 신제가 메시지를 보내도 유건은 읽기만 하고 따로 답장은 하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연락이 오길 바란다는 게 염치없다는 건 잘 안다. 그래도…….
他走了之後就再沒跟我說過話。這並不奇怪。通常,他們不是那種會花幾個小時在電話上寒暄的人,但難得有公事的時候,總是新杰先打電話。每次都是他先打電話,發信息的時候,劉健只看不回。 我知道這不是你想聽他說的,但是還是.......。

〈네가 내게 생을 선사했으니, 나는 남은 생을 네게 모두 바치려고 하는데, 유건아. 어때? 이 정도면 수지가 맞지 않니.〉
'你給了我生命,我也打算給你我的餘生,於堅,你覺得如何? 這對你來說還不夠好。

내게 자신의 남은 생이라는 무거운 선물을 안기고, 당신의 흔적이 가득한 집에서 당신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하게 해 놓고, 그래 놓고 떠날 거였으면 아예 나를 찾아오지 말았어야지. 불량품으로 만들어진 퍼즐 조각에도 짝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내게 알게 하지 말았어야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부정적인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가지를 뻗는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출근하는 주인을 붙들고 가지 말라고 보채는 애완동물도 아니고.
你根本就不該來找我,如果你要把你下半輩子的沉重禮物留給我,如果你不打算讓我在滿是你的痕跡的房子裡除了你之外什麼都不想,如果你不打算讓我知道即使是由有缺陷的零件組成的拼圖也可以有一個伴侶.......。負面情緒夾著尾巴失控。真是可悲。它不像寵物會跟著主人上班,求他不要離開。

이대로 있다간 자꾸 쓸데없는 생각만 하게 될 것 같다. 혼자 틀어박혀 외로움이니 뭐니 하는 낯간지러운 주제로 골머리를 썩이는 건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몸을 움직이거나, 여의치 않으면 잠이라도 자는 게 차라리 나았다.
如果我一直這樣,我就會一直什麼都不想。一個人坐著沉浸在孤獨這個陌生的話題中並不適合他的脾氣;他寧願花這些時間來運動身體,或者,如果可以的話,睡覺。

유건은 그새 좀 자란 흑발을 아무렇게나 벅벅 헝클어뜨리더니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슬리퍼도 신지 않은 맨발로 거실을 가로질러 침실로 향했다. 다리를 조금 절뚝이는 채였다. 마자로스에서 나왔을 때 그의 몸은 부상과 피로가 누적되어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그 이후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아직 완전히는 회복되지 않았다. 유건이 스스로의 건강을 돌보는 데 별 관심이 없는 것도 한몫 했다.
Eugene 從沙發上滾下來,新長出來的黑頭髮凌亂地披散著。 他光著腳,沒有穿拖鞋,橫穿客廳,走向他的臥室。他的腳有點跛。當他離開 Mazaroth 時,他的身體已因受傷和疲憊而變得粗糙,而且在那之後的一段時間內也沒有完全恢復過來。部分原因是 Eugene 對於照顧自己的健康缺乏興趣。

침대에 몸을 던지자마자 그는 곧바로 후회했다. 침실에는 신제의 흔적이 너무도 많았다. 침대와 침구부터가 신제의 취향이었다. 고개를 돌려 베개에 옆얼굴을 파묻으면 그가 쓰는 향수의 향이 어렴풋이 나는 것도 같았다. 서늘한 실크 위에 장미 꽃송이를 한 아름 올려 겨울밤 내내 곱게 말린 듯한 향기.
他一躺在床上,馬上就後悔了。臥室裏有太多申澤的痕跡。就連床和被褥都很合他的口味。當他轉過頭,把臉埋在枕頭裡的時候,他可以隱約地聞到他的香水味。那是鋪在涼絲綢上、在冬夜裡風乾的玫瑰花香。

“하…….” "......."

침대가 아니라 신제의 품에 폭 감싸여 있는 것 같다. 이불과 베개에 닿은 부분부터 살갗이 간질거렸다.
我覺得我不是在床上,而是在神父的懷裡。羽絨被和枕頭接觸的地方,我的皮膚癢癢的。

“빌어먹을.” 「該死」

그는 짜증스레 팔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사실은 신제가 자리를 비운 이후 외로움이나 원망보다도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이 있었다.
他煩躁地舉起雙臂,遮住眼睛。事實上,自牧師走後,有比孤獨或怨恨更難忍受的事。

“…….” 

눈을 감고 누워 있던 유건의 호흡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그는 불편한 듯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그래 봤자 감각을 더 자극할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사지에 힘을 뺐다.
Eugene 閉著眼睛躺在那裡,呼吸變得有點粗重,他不舒服地翻來覆去,然後放鬆四肢,因為他意識到這樣做只會進一步刺激他的感官。

〈유건아.〉 'Eugene.

나지막한 환청이 귀 바로 옆에서 이름을 부른다. 유건은 밭은 숨을 삼키며 고개를 조금 젖혔다. 형체 없는 손이 목덜미와 가슴을 어루만지고 아래로 내려갔다. 옆구리의 예민한 살을 쓸어내리는 감촉이 떠오른다. 바로 눈앞에서 느리게 깜빡이는 그의 속눈썹도. 큰 손으로 허리를 단단히 움켜잡은 채 다리를 벌리게 하고, 벌어진 허벅지 사이에…….
一個低沉的聲音叫著他的名字,就在他的耳朵旁邊。Yuugan 用力吞了吞口水,微微仰起頭。無形的手撫摸著他的頸脖、胸膛,然後向下游移,觸碰的感覺拂過他身側敏感的皮肉。他的睫毛在我眼前緩緩扇動。一隻大手緊緊抓住我的腰,強迫我張開雙腿,在我張開的大腿之間,.......。

“아…….” "Ah......."

유건은 반사적으로 허벅지를 꽉 모았다. 이불에 주름이 갔다. 역시 신제가 자신에게 뭔가를 한 게 분명하다. 입술과 눈꺼풀과 귓가에 무형의 독을 흘려 넣어 정신을 완전히 망가뜨려 버렸을 것이다. 유건을 망가뜨리고 싶다고, 그는 예전에도 몇 번이나 말했으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파블로프의 개라도 된 것처럼 그의 잔향을 맡는 것만으로 이렇게까지 될 리가 없다.
Eugene 反射性地把大腿擠在一起。被褥皺了起來。神父一定對他做了什麼。他一定是在他的嘴唇、眼皮和耳朵裡下了什麼無形的毒藥,讓他的心智徹底崩潰。他想打破尤金,他以前說過很多次,否則他不會這樣,像巴甫洛夫的狗一樣嗅著他的氣味。

이불의 감촉과 흐리게 떠도는 향기가 이성을 마비시켰다. 유건은 제 하반신에 손을 뻗었다. 몹시도 자괴감이 들었다. 하지만 욕망이 자괴감을 앞섰다.
羽絨被的觸感和模糊的香味麻痹了我的感官。Eugene 伸手摸我的下半身。我感到非常自責。但是慾望蓋過了自我懷疑。

옷 위로 만져지는 성기는 이미 잔뜩 서 있었다. 고작해야 며칠간의 금욕일 뿐인데 필요 이상으로 애가 탔다.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어쩐지 수치스러워서, 유건은 여전히 팔로 눈을 가린 채 한 손으로만 성기를 감싸 쥐었다. 때맞춰 쿠퍼액이 울컥 스며 나와 속옷을 적셨다.
他的陰莖已經隔著衣服突出來了。才禁慾幾天,他的陰莖就硬得不像樣了。儘管沒有人在看,Eugene 還是感到莫名的羞愧,他只用一隻手握住自己的陰莖,仍然用手臂遮住眼睛。 正巧,一縷精液流了出來,弄濕了他的內衣。

바지 위로 불거진 성기의 윤곽을 서툴게 몇 번 만져 보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영 성에 차지 않았다. 유건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반바지 허리 부분을 잡아당겼다. 옷 안으로 손을 넣어서 본격적으로 만질 생각이었다. 그 순간 허벅지에서부터 강한 진동이 울렸다.
我笨拙地碰了幾下他褲子裡隆起的輪廓。但這不足以喚起他的興奮。Eugene 咬著下唇,扯著短褲的腰帶,打算把手伸進去,認真地摸一摸。 就在這時,他的大腿上響起了強烈的震動。

“헉!” 「咦!」

유건이 제풀에 놀라 움찔했다. 바지 주머니에 넣어 뒀던 휴대폰에 뒤늦게 생각이 미쳤다. 그는 못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당황한 채 휴대폰을 꺼냈다. [우신제]. 이름 세 글자가 화면에 선명히 떠올랐다. 그를 어떤 호칭으로 저장해야 할지 몰라서, 휴대폰을 붙들고 한참 씨름한 결과였다.
Eugene 被大麻嚇了一跳。他的思緒又回到他留在褲子口袋裡的電話。他慌忙掏出來,就像一個被發現做了頑皮事的孩子。[吳昕澤】。]他的名字的三個字母在螢幕上閃爍,他和手機糾纏了一會兒,不知道該怎麼叫他。

신제를 떠올리며 음란한 짓을 하려던 게 들킨 것 같았다. 신제에게는 그의 생각을 읽는 능력도 있는 것일까. 아닌 걸 알면서도 괜히 찔렸다. 유건은 급하게 목을 가다듬고 상체를 일으키며 전화를 받았다.
就好像他在想她的時候被發現做了不雅的事情一樣。辛潔有能力讀懂他的想法嗎,他想知道,即使他知道她沒有,但還是刺痛了他。余甘急忙清清喉嚨,抬起上半身接電話。

“여보세요.” 「你好」

- 네. 여보예요. - 是的是蜂蜜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는 음성이 유유히 스피커를 넘어왔다. 말끝에 담긴 낮은 웃음소리가 유건의 귓가를 간질였다. 유건은 휴대폰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那毫不掩飾的聲音從揚聲器中飄出。結尾的低笑聲讓他耳朵癢癢的。Yugan用沒有拿手機的那隻手擦乾了臉。

“또 그 소리입니까.” 「又是這個聲音嗎?」

- 왜? 여보냐고 물은 거 아니었어?
- 你不是說親愛的嗎?

“아닙니다.” 「不」

- 그보다, 유건아. 

신제는 대답 대신 스피커를 톡톡 두드렸다. 목덜미를 타고 찌르르한 감각이 흘러내렸다. 

- 귀 떼고 화면 볼래? 

“화면요?” 

유건은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신제의 말에 따랐다. 자신의 체온에 데워져 따끈따끈한 휴대폰 화면에 신제의 모습이 가득 나타나 있었다. 유건과 눈이 마주치고, 그가 웃으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그의 뒤로 차 내부의 풍경이 언뜻 비쳤다. 창에 선팅이 진하게 되어 있어 바깥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 

유건이 짧은 탄성을 흘렸다. 나름대로 열심히 배운다고 배웠는데, 휴대폰에 이런 기능이 있는지는 처음 알았다. 

- 얼굴 보고 싶어서 영상 통화 걸었는데, 너무 자연스럽게 귀에 대길래. 아까부터 계속 까만 화면만 쳐다보고 있었지 뭐예요. 

“혹시, 이거. 저도 그쪽에 보이는 겁니까?” 

- 물론. 지금은 침대에 누워 있네. 낮잠이라도 자고 있었나 봐요? 

“안 잤습니다.” 

- 안 잤긴. 머리가 아주 까치집이 됐는데? 

“…….” 

유건의 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것은 그가 베개에 옆얼굴을 파묻고 비비적거렸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신제의 향을 깊이 들이마시려고. 

- 그거 알아? 잠 덜 깼을 때 너 만지면 평소보다 더 따끈따끈하고 부드러워. 좋은 향도 나고. 

유건은 맹하게 눈을 깜빡였다. 얼이 빠져서 허둥거리는 모습을 카메라를 통해 신제에게 낱낱이 보였다고 생각하니 뒤늦게 좀 부끄러워졌다. 그는 괜히 낯을 굳히고 휴대폰을 수직으로 들어 올려 노려보았다. 변이종을 상대할 때처럼 비장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영상 통화에 서툰 탓에, 그의 손가락 끝이 화면에 있는 버튼 중 하나를 잘못 건드렸다. 

- ……큭. 

신제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꾸며 낸 웃음이 아니었다. 와이셔츠를 반듯하게 차려입은 어깨가 잘게 떨렸다. 유건이 미심쩍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 아니, 그게, 유건아. 아……. 진짜 이걸 어떡하지. 

신제의 웃음이 한층 커졌다. 그에 반해 유건의 표정은 점차 사나워졌다. 휴대폰을 사 준 지가 언젠데 아직 이런 것도 모르냐고 비웃는 건가 싶었다. 

신제가 유하게 풀린 눈매로 휴대폰 화면을 보았다. 화면 속에서는 편한 차림으로 침대에 기대어 앉은 유건이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그의 머리 위로 뿅 솟아난 강아지 귀만 아니었다면. 

“비웃을 거면 차라리 말로 하시죠.” 

유건이 반쯤 이를 악물고 말했다. 억양 없이 낮게 깔린 목소리가 그의 심기가 불편함을 나타냈다. 그 와중에도 머리 위의 강아지 귀는 쫑긋쫑긋 앙증맞게 움직이고 있다. 

- 미치겠네……. 포털이라도 열어서 바로 날아가야 하나. 

신제가 잿빛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모처럼 소리 내어 한참 웃은 덕에 그의 뺨에도 발그스름한 혈색이 돌았다. 

“예?” 

유건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에 따라 보드라워 보이는 갈색 강아지 귀도 같이 기울어졌다. 까칠하게 날을 세운 표정과 애교스러운 강아지 귀의 대조가 어마어마했다. 귀여운 것도 좀 정도껏 해야지,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신제는 도로 웃음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더 이상 했다간 간만에 보는 그의 가이드가 잔뜩 부루퉁해져선 전화를 끊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니. 

- 미안해요. 너무 귀여워서 좀 웃었어. 아까 뭐 잘못 누른 것 같은데, 확인해 볼래요? 

유건은 심각하게 휴대폰 액정을 들여다본 끝에 필터 기능이 켜져 있는 것을 알아챘다. 화면 한쪽 구석에 손톱만큼 작게 보이는 자신의 머리에 웬 개새끼 귀가 달려 있다는 사실도. 

“…….” 

그는 입을 꾹 다물고 필터를 해제했다. 얼굴은 미간이 좀 찌푸려진 것 외에는 별 동요를 보이지 않는 무표정이었으나, 귓바퀴와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 잘 있었어요? 혼자 있는 거 무섭진 않고? 

신제가 옅은 웃음기를 담아 조곤조곤 물었다. 부끄러워하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일부러 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무서울 리가 있겠습니까. 이젠 변이종이 갑자기 튀어나올 일도 없는데.” 

마자로스가 소멸된 후로 세상에는 더 이상 새로운 게이트가 생겨나지 않는다. 기존에 있던 게이트 또한 각성자들이 힘을 합쳐 하나씩 없애 가는 중이다. 그와 동시에 모든 각성자와 가이드들의 능력이 점차 약해지고 있다. 조금씩이지만 확실히. 최근 F급 각성자 중에 처음으로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일반인이 된 사람이 나왔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다 보면 언젠가는 신제와 유건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 

- 글쎄요. 변이종만 무서운 게 아니라서. 

“그럼요?” 

유건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신제에게도 무서운 게 있다면 알무텐뿐일 텐데, 알무텐은 이미 죽었다. 그럼 그는 대체 뭐가 무서운 걸까. 마음만 먹으면 못 가질 게 없고 못 할 게 없는 사람이. 

- 내 가이드가 너무 귀여워서 누가 홀랑 채 가진 않을까 매일 무섭죠. 아……. 정말 걱정이야. 코트 속에 쏙 넣어서 안고 다닐 수도 없고. 

“…….” 

또 저 능구렁이 같은 말재간에 걸려들었다. 한순간이나마 진심으로 궁금해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 함부로 밖에 돌아다니지 말아요. 아니, 그냥 나 없을 땐 웬만하면 나가지 마.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사다 줄 테니까. 

신제는 일부러 과장되게 가증을 떨던 태도를 바꾸었다. 어느샌가 그의 목소리에서 농담기가 쏙 빠졌다. 하지만 유건은 여전히 심기가 불편했다. 자신이 어린아이도 아니고, 산전수전 다 겪고 총을 제 몸처럼 다루는 성인 남자에게 저런 말을 하는 건 지나친 과보호 아닌가. 

“그딴 소리만 하실 거면 끊겠습니다.” 

- 너무해. 내 마음도 몰라주고. 

어느 순간 신제는 다시 유들유들하게 웃고 있었다. 유건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용건은 더 없으십니까.” 

- 밥은 잘 먹고 있어요? 잠은? 나 없다고 몸 안 돌보는 거 아니죠? 

“잘 먹고 잘 잡니다.” 

- 아픈 발목은 좀 어때요? 

“아주 멀쩡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곧이곧대로 말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당신이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고 제 입으로 털어놓는 것 같아서. 

- 착해라. 의젓하네. 그럼 외롭진 않아요? 

이번에도 그럴 일 전혀 없으니 신경 끄라고 받아쳐야 했다. 하지만 곧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유건은 그제야 널따란 침대에 홀로 오도카니 앉아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스스로를 자각했다. 텅 빈 집을 울리는 통화음이 적막함을 부추겼다. 

“…….” 

휴대폰을 들고 있지 않은 손이 습관처럼 티셔츠 끝자락을 만지작거렸다. 화면 속에서 신제가 픽 웃었다. 

- 나는 외로운데. 

“예?” 

- 내 거 안아 본 지가 너무 오래된 것 같아. 보여요? 지금 컨디션도 엉망이잖아. 가이딩 못 받아서. 

신제가 과장되게 한숨을 쉬며 검지로 자신의 뺨을 톡톡 쳤다. 한 뼘도 안 되는 휴대폰 화면을 통해 보는 거라 확실하진 않지만, 혈색이 좀 나쁜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의 말은 싱거운 농담에 불과했다. 신제의 미모는 컨디션이 좀 저조하다고 흠집이 날 수준이 아니다. 처음 만났을 때, 흰자의 실핏줄이 죄다 터지고 피부가 피멍으로 얼룩진 모습을 보고도 유건은 그에게서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느꼈으니. 

- 우리 자기가 더 이상 나 안 예뻐해 주면 어쩌지? 

“제가 언제 그쪽을 예뻐해 줬다는…….” 

- 전에 그랬잖아요. 예쁘다고. 

“…….” 

- 그럼 안 예뻐요? 못났어요? 

빈말로라도 못났단 소리는 나오지 않아서 유건은 떨떠름하게 입을 다물었다. 신제의 페이스에 말려드는 기분이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 하여간 진짜 귀엽다니까. 

신제가 운전석 등받이에 상체를 툭 기대며 웃었다. 유건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아직도 유건은 신제가 귀엽다는 소릴 할 때마다 혼란스럽다. 도대체 어디가 귀엽다는 거지? 귀여운 정도를 수치로 나타낸다면 자신은 아마도 바위나 나무 같은 무정물, 혹은 변이종 사체와 비슷한 수준일 텐데? 

- 그런데……. 유건아. 

신제가 웃음기 어린 눈으로 화면 속의 유건을 훑었다. 

- 좆은 왜 세우고 있니. 

조곤조곤 이어지던 시답잖은 대화 가운데 갑자기 상스러울 정도로 적나라한 단어가 끼어들었다. 유건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까 한껏 피가 몰렸던 성기가 아직 덜 가라앉았는지, 얇은 반바지 위로 언뜻 윤곽이 보였다. 

- 자다 일어나서 그런 거야? 아니면, 내 전화 받기 전까지……. 침대에 누워서 자위라도 하고 있었나. 

“아닙니다. 이건, 그러니까.” 

유건은 허둥지둥 티셔츠를 끌어 내려 앞섶을 가리려 했다. 홍조가 귀와 뺨을 물들이고 목덜미까지 번졌다. 평소에 감정 표현이 별로 없는 유건에게서는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 꼴리는데 만져 줄 사람이 없어서 혼자 만졌어? 

“단장님!” 

- 단장님이라니, 자기야. 자꾸 이렇게 밀어내면 나 서운한데. 

“…….” 

티셔츠 자락이 늘어나도록 잡아당겨 가려 보아도 성기는 수그러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크게 발기했다. 이 상황에도 흥분하는 스스로의 몸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신제가 안쓰럽다는 듯 눈매를 살짝 찌푸렸다. 

- 이렇게 몸이 달았는데 옆에 아무도 없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제껏 혼자 어떻게 참았어? 

유건이 빨개진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신제에게 보이는 게 싫으면 아예 휴대폰 카메라 앵글을 돌려 버리면 될 텐데, 그런 생각까지는 하지 못하는 게 유건다웠다. 

- 젖꼭지도 예쁘게 세웠네. 옷 위로 다 보일 정도면 대체 얼마나 발정이 난 거야. 응? 나 없는 동안 매번 혼자 했어요? 

“그런 적 없습니다.” 

- 솔직하게. 거짓말하면 혼나요. 

“한 번도, 한 번도 한 적 없으니까…….” 

- ……. 

“이렇게 된 거라고는 생각 못 하십니까.” 

서러움이 무심결에 새어 나갔다. 말을 하다 말고 유건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마음 같아선 혀를 깨물고 싶었다. 이게 무슨 꼴사나운 투정이란 말인가. 

- 혼자 만지는 거 보여 줄래요? 

“카메라 앞에서요? 미쳤습니까.” 

- 예쁜 말 쓰라니까.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요. 나도 이렇게 됐거든. 

신제의 얼굴과 가슴까지만 비추던 카메라가 아래로 내려갔다. 잘 다린 셔츠 위로 상체의 윤곽이 도드라졌다. 그 아래로 정장 바지를 입은 긴 다리가 뻗었다. 탄탄한 허벅지는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 있느라 자연스레 벌어져 있었다. 차분하고 세련된 차림을 한 남자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훑기만 했을 뿐인데 묘하게 선정적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바지 앞섶, 지퍼가 있는 부분이 두툼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다. 불룩한 윤곽은 허벅지 위에까지 비스듬하게 뻗었다. 바지 원단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 

유건은 헛숨을 들이켰다. 몇 번이나 실제로 보고, 입에 물어 보고 뒤에 넣기까지 해 본 물건인데도 새삼 믿기지 않았다. 주머니에 무슨……. 핸드 마이크라도 넣고 다니는 건가? 

- 그렇게 내 좆이 먹고 싶어요? 아주 눈을 못 떼네. 

화면 너머로 유건의 시선을 느낀 신제의 성기가 한 차례 힘을 받아 꿈틀거렸다. 유건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신제의 휴대폰이 운전석의 거치대에 놓였다. 화면에 그의 얼굴부터 하반신까지가 모두 들어왔다. 그가 아래를 보지도 않고 한 손으로 능숙하게 벨트 버클을 툭 풀면서 명령했다. 

- 옷 벗고 다리 벌려요. 

유건이 홍조가 덜 가라앉아 여전히 발간 얼굴로 멍하니 신제를 쳐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정말 이 행위가 싫어서 거부했다기보다는 그저 처음 겪는 충격적인 경험에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에레혼에 있을 때 별별 짓을 다 당해 본 주제에, 이럴 때는 또 순진하게 군다. 이런 점이 귀여워서 참을 수가 없다. 

- 마침 내가 전화라도 안 걸었으면 어쩔 뻔했어. 발정 난 강아지처럼 침대 다 적셔 놓고, 모른 척 시치미 떼려고 했지? 그래서 좀 도와주겠다는데……. 싫어? 

신제가 엷게 웃는 얼굴 그대로 미간만 살짝 찌푸렸다. 그 작은 표정 변화에도 유건이 불에 덴 듯 흠칫했다. 

- 말 안 들으면 돌아가서 더 심하게 혼날 텐데. 

유건의 시선이 머뭇머뭇 제 하반신을 향했다. 이미 쿠퍼액이 잔뜩 흘러서 속옷은 물론이고 바지까지 적셨다. 바지 천을 뚫을 듯 솟아오른 꼭대기의 한 지점에 동그란 얼룩이 졌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왜 지금까지 연락 한 통 없었냐고, 언제 돌아오는지 정도는 알려 주실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쏘아붙일 생각이었다. 그러고는 신제가 뭐라 하든 휘말리지 않고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런데 왜. 

흠뻑 젖은 옷을 들키긴 싫었다. 유건은 바지와 속옷을 함께 끌어 내렸다. 화면 너머에서 아래를 세운 채 자신을 잡아먹을 듯 쳐다보는 남자를 마주 볼 용기가 없어서, 눈까지 질끈 감아 버렸다. 의도치 않은 며칠간의 금욕으로 성감이 끔찍이 예민해진 상태였다. 맨성기를 손바닥 전체로 감싸 쥐기만 했는데도 아찔했다. 귀두 끝에서 맑은 액이 방울져 흘렀다. 그는 성기를 어설프게 흔들기 시작했다. 

- 다리 더 벌려. 잘 안 보이잖아. 

“아……. 흐으! 읏.” 

- 무작정 잡고 흔들기만 하면 쓰니. 위쪽도 같이 문질러 봐. 품에 끼고 귀여워만 했더니, 내 가이드는 아직도 가르쳐야 할 게 많네……. 

휴대폰을 쥔 손에 점차 힘이 빠졌다. 고개를 숙이고 상체를 움츠린 채 몇 번 자위하다가, 유건은 결국 힘없는 신음과 함께 이부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휴대폰이 그의 손을 벗어나 구겨진 이불 더미에 기대어졌다. 침대에 한쪽 뺨을 대고 웅크려 누운 그의 모습이 카메라에 비스듬히 잡혔다. 

기울어진 시야에 화면 속의 신제가 보였다. 그는 핏줄이 불거진 굵은 성기를 꺼내 느긋하게 주무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눈에 담는 순간 머릿속에 불이 확 올랐다. 유건은 한쪽 눈가를 파르르 떨면서 손을 좀 더 빠르게 움직였다. 

- 우리 유건이는…… 무슨 생각 하면서 아래도 세우고 가슴도 세웠을까. 

“아무 생각도…….” 

- 질질 싸도록 박히고 싶은데, 내가 없으니까 뒤가 허전했어? 

신제의 말 사이사이에 거친 숨이 섞였다. 그가 귀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 같았다. 유건은 숨까지 참고 필사적으로 손놀림에만 집중했다. 엄지손가락에 물을 묻혀 귀두를 둥글리고 탁탁 소리가 나도록 위아래로 흔들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목덜미가 화끈화끈해지고 이마에 땀이 맺히도록 흔들었는데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조금만 더 하면 쌀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도 한가득 차오른 쾌감이 아랫배 안에 갇혀 찰랑거리고 있는데……. 

“헉! 흐으, 헉, 하아.” 

유건이 가쁜 숨을 터뜨렸다. 그의 손안에서 발갛게 달아오른 성기가 연신 물을 흘려 댔다. 손아귀가 번들번들하게 젖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사정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닿을 듯 닿지 않는 절정에 애가 탔다. 

- 혼자 낑낑대는 거 귀엽긴 한데, 유건아. 뒤는 내버려 두고 앞만 건드리니까 진도가 안 나가지. 너 이제 구멍 안 쑤셔 주면 못 싸잖아. 

노골적인 말이 수치심에 불을 지폈다. 유건은 성기를 쥔 채 고개를 돌려 이불에 옆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신제에게는 그의 빨개진 귀와 땀에 젖은 귀밑머리만이 보였다. 

- 하……. 

신제가 낮게 웃었다. 그도 마냥 여유롭지만은 않았다. 한숨처럼 터지는 웃음에 희미한 신음이 섞였다. 

유건은 이불에 파묻힌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시각이 차단되니 다른 감각이 더욱 예민해졌다. 나직한 신음,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마찰음, 젖은 살과 살이 스치는 소리……. 여러 소리가 뒤섞이고 재구성되었다. 

유건의 머릿속에서 신제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는 지금쯤 운전석 시트에 기대어 앉아서 눈가를 살짝 붉힌 채로 스스로의 성기를 만지고 있을 것이다. 수직으로 바짝 올라붙은 굵고 긴 성기. 그의 원래 체온보다 좀 더 뜨끈하고, 색깔도 조금 더 짙고, 도드라진 핏줄이 기둥을 감싸고 있다. 

그 물건이 자신의 뒤에 파고드는 상상을 한다. 처음에 조금 성급하게 밀어 넣었다가, 안쪽 점막이 벗겨지는 것 같은 화끈한 통증에 헛숨을 들이켜고 다시 빼낸다. 질척한 체액을 입구 주변에 묻히고 다시 진입을 시도한다. 구멍이 온통 미끄덩해진 뒤에야 귀두가 간신히 꽂혀 들어간다. 신제가 힘을 주어 허리를 쭉 민다. 뒤가 묵직하게 벌어지고 채워진다. 끄트머리를 삼켰으니 이제 기둥을 집어넣을 차례다. 좀 더, 조금 더……. 

“흐응……. 아, 아, 읏!” 

미쳤다고,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유건은 한 손으로 성기를 잡아 흔들면서 한 손을 뒤로 가져갔다. 어떻게 해야 잘 느끼는 부분을 자극할 수 있는지도 모르면서, 스스로 흘린 물로 흥건히 젖은 손가락을 들이밀어 입구를 어설프게 쑤셨다. 

- 지금, 나랑 섹스하는 상상, 읏, 하고 있어? 

신제의 외설적인 속삭임이 전율이 되어 귀에서부터 뒷덜미와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감은 눈꺼풀 안에서 불꽃이 튄다. 꼬리를 끌며 떨어지는 유성을 닮은 불꽃이다. 내벽 입구 부근을 마구잡이로 더듬던 눈먼 손가락이 민감한 곳을 푸욱, 찔렀다. 요도에서 후드득 체액이 떨어졌다. 유건이 바짝 힘이 들어간 상체를 웅크렸다. 

“아아……!” 

- 대답, 안, 하지. 

“읏, 흐윽.” 

- 내 좆 상상하면서, 뒤 쑤시고 있냐고……. 묻잖아. 응? 

유건이 가쁜 신음만 흘릴 뿐 대답이 없자 신제가 재촉했다. 그 목소리조차 유건에겐 자극이었다. 귀가 간질거려서 자꾸만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허벅지가 꼭꼭 조여졌다. 질문의 내용은 들리지도 않았다. 일단 뭐라도 대답해서 멈추게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유건이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땀에 젖은 흑발이 그 움직임에 사락사락 흔들렸다. 

검지와 중지를 두 마디쯤 삼킨 구멍이 멋대로 오물오물 조여들었다. 더 굵고 길고 사나운 것을 달라고 보채는 것처럼. 손가락에 힘을 주어 여기저기를 찔러 봤지만 모자랐다. 여전히 얕았다. 안타까움에 유건의 눈시울에 물기가 배어들었다. 

- 흐읏……. 

휴대폰 화면을 집요하게 쳐다보면서, 신제는 성기를 흔드는 손에 박차를 가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몸이 잔뜩 달았는데 해소할 방법을 몰라 손가락으로 제 뒤를 서툴게 쑤시며 우는 백유건이라니. 욕망으로 시야가 시뻘게졌다. 

애처롭게 발씬거리는 저 작은 구멍에 처박힌 게 유건의 손가락이 아니라 자신의 좆이었어야 했다. 단단한 골반을 붙잡고 성기 뿌리에 그의 엉덩이 살이 짓눌릴 때까지 깊숙이 넣어 주면, 비좁은 내벽을 억지로 비집고 철썩철썩 세차게 박아 대면……. 그 단정한 무표정이 완전히 무너져서는 등줄기가 선득해질 정도로 야한 얼굴을 보여 줄 텐데. 

- 백유건 가이드. 

“헉, 아으, 흐, 앗!” 

- 유건아, 좋아? 

“으, 으응…… 응.” 

유건은 아직도 신제에게 깍듯이 존대를 쓴다. 게다가 예전 습관을 버리지 못해 가끔 그를 단장님이라 부른다. 평소엔 그렇게 담백하고 건조한 사람이, 섹스할 때만은 흐물흐물 풀려서 귀엽게 군다. 이러니 가만히 놔두고 배기겠는가. 

- 그래도 내가 직접, 박아 주는 것보단, 못하지? 

이성이 날아간 채 쾌락에 열중하던 유건이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어깨와 팔이 화면을 통해서도 보일 정도로 파들거렸다. 

“네에…….” 

헐떡임 사이사이로 반쯤 잠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신제가 자지를 흔드는 손을 아주 잠깐 멈추었다. 

“당신이랑 하는 거, 자꾸, 생각나서…… 자꾸……. 아!” 

거기까지 듣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졌다. 신제가 빠득 이를 갈았다. 유건은 그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촉촉한 이마를 이불에 비비며 신음하다가, 성기를 쥔 손에 힘을 주어 아래에서 위로 쭈욱 밀어 올렸다. 손바닥과 발바닥이 불붙은 듯 뜨거워졌다. 

“흐윽!” 

유건은 고개를 틀고 이를 악문 채 사정했다. 향긋하고 보드라운 이부자리 위에 정액이 후드득 튀었다. 말간 목덜미에 선 핏대와 질끈 감긴 눈매, 잔뜩 힘이 들어가 뼈대가 도드라진 손등이 야릇했다. 

그는 헐렁한 티셔츠와 짧은 반바지에 맨발이었다. 티셔츠는 배 위로 끌려 올라가고, 바지와 속옷은 한쪽 종아리에 걸렸다. 세련되고 우아한 인테리어의 침실에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다. 그런 차림으로 널찍한 침대 한복판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것 또한 묘하게 배덕했다. 

유건의 모습을 낱낱이 눈에 담으며 신제 또한 끝에 달했다. 도착적인 쾌락이 음낭을 쥐어짜고 요도를 타고 올랐다. 

- 읏. 

신제가 달뜬 숨을 내뱉으며 턱을 젖혔다. 나른히 벌어져 있던 입술에 힘이 들어가고 고운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어느새 앞머리가 자연스레 흐트러져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울컥 쏟아진 정액이 스스로의 손바닥을 꾸역꾸역 메웠다. 그의 절정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잡혔다. 화보라기에는 지나치게 저속하고 포르노라기에는 어딘가 탐미적인 광경이었다. 

유건은 사정을 마친 후에도 한동안 널브러져 있었다. 신제가 보는 앞에서 욕망에 허덕이며 자위했다는 것도, 이불을 더럽혀 버렸다는 것도 아직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 우리 유건이, 어쩌나……. 잠시라도 혼자 내버려 두면 발정이 나서. 

쾌감의 여운에 젖어 느른하게 풀린 음성이 귓가에 스며들었다. 유건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느라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 돌아가면 원하는 만큼 박아 줄 테니까, 착하게 잘 기다리고 있어요. 알았죠? 

언제쯤 오는지는 끝까지 말해 주지 않으십니까……. 멍하니 카메라 쪽을 보던 유건이 입술을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지 않으면 칭얼거림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갈 것 같았다. 


* * *


다음 날 유건은 결국 집을 나섰다. 그에게는 지나치게 넓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듯 고요한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숨이 막혔다. 

일단 손에 잡히는 대로 외투를 걸치고 나오긴 했는데 그다음이 문제였다. 이 지역에 아는 사람도 없고 딱히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닌 그가 갈 곳은 마땅치 않았다. 그는 집 앞 골목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발길 닿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한차례 초토화되었다가 다시 회복하는 중인 도시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곳곳에 공사 중임을 알리는 팻말과 가벽이 설치되어 있었다. 고개를 들자 야트막한 건물들 위로 고층 빌딩의 골조를 쌓아 올리는 커다란 크레인이 보였다. 

유건은 주택가를 지나 대로변으로 나섰다. 널찍한 8차선 대로 한복판에 형광색 라인이 쳐져 있었다. 인부들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며 거대한 싱크홀이 생긴 도로를 보수했다. 공사 현장을 우회해 지나가느라 교통 체증이 생겼다. 멈춰 선 자동차 속에서 운전자들이 짜증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에 비해 길거리를 걷는 행인들의 얼굴은 한결 밝았다. 마스크를 낀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한창 심연화가 진행 중일 때는 공기 중에 퍼진 독소 때문에 일반인들은 밖에 나오지도 못했고, 나오더라도 두꺼운 방독 마스크를 착용해야 했는데. 

아직 남아 있는 게이트는 각성자 관리 본부와 현재도 활동 중인 헌팅 오더가 협력하여 처리하고 있다. 이제 진영을 나눠 세력 다툼을 하는 게 무의미해진 까닭이다. 새로 각성한 사람들의 능력을 테스트하고 랭크를 매기는 검사소는 마자로스 소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았다. 최근 국회에서는 각성자 관리 본부의 축소 혹은 해체까지 주장하는 안건이 나왔다고 한다. 

이제는 자신이 살던 동네가 하루아침에 폐쇄 구역으로 지정될지도 몰라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매일 아침 뉴스를 볼 때마다 이번엔 또 어느 지역에 게이트가 새로 발견되었을까, 어제 하루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변이종에게 당했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지금의 인류에게는 너무도 생소하지만 한때는 당연했던 세상이다. 

유건 또한 현재가 낯설다.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투쟁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 어떤지 그는 모른다. 가이드 일을 하지 않으면 뭘 하고 살아야 할지도. 그를 이 세상에 뿌리내리게 하던 것들이 이젠 모두 사라졌다는 사실도, 세상의 존망을 결정짓는 전투에 자신이 참여했다는 사실도 아직까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나 잡아 봐라!” 

“아하하하.” 

유건의 뒤에서 어린아이들이 달려왔다. 그들 또한 아무런 보호 장비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였다. 아이들은 깨지고 뒤집힌 보도블록 위를 타 넘으며 까르륵 웃었다. 망가진 길조차도 아이들에겐 놀이터처럼 느껴지는 모양이다. 

“내가 먼저 갈 거지롱!” 

아이 하나가 숨넘어갈 듯 웃으며 유건이 있는 방향으로 돌진했다. 뒤를 돌아보느라 유건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였다. 아이를 피하려 유건이 몸을 틀었다. 하지만 발밑에 갈라진 틈을 미처 못 보았다. 식사를 거르며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몸은 고작 그것만으로 휘청거렸다. 

“윽…….” 

시야가 어두워지며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이대로 넘어지는 건가 싶었다. 대낮에 큰길 한복판에서 꼴사납게. 

“형?” 

하지만 예상했던 충격은 찾아오지 않았다. 어린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이 유건을 온 힘을 다해 받치고 있었다. 유건은 신음을 삼키며 간신히 바로 섰다. 키가 고작 유건의 배 정도까지 오는 남자아이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아요?” 

아이가 둥근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유건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자신이 예전에 살던 동네가 곤충형 변이종에 잠식되었을 때, 낡은 슈퍼마켓 점포에 갇혀 있던 아이를 구한 적 있다. 그 아이가 꼭 이 정도 나이였는데. 

아수라장이 되어 불타오르는 주택가의 기억이 선명하다. 아이를 구하는 사이에 유건과 희성이 살던 집 또한 손쓸 새도 없이 화마에 휩싸여 사라졌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 결정을 후회한 적 없다. 아이를 원망한 적도 없고. 

“이 형 아픈가 봐.” 

아이가 외쳤다. 뒤따라오던 다른 아이가 혀를 쏙 내밀었다. 

“네가 밀쳐서 그렇잖아. 바보야.” 

“바보 아니다 뭐.” 

“바보, 바보, 바보야! 멍청이, 똥개!” 

“누나 미워! 엄마한테 이따 다 이를 거야.” 

누나를 향해 소리를 빼액 지르고, 남자아이는 조금 시무룩해져서 유건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유건은 창백한 무표정으로 슬쩍 인상을 썼다. 아이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작고 약하고 살가운 것들을 대하는 건 항상 어색했다. 그가 살면서 마주친 존재들은 대부분 그보다 크고 강한 데다 어떻게든 그를 찍어 누르려 하는 것들뿐이었으므로. 함부로 손을 뻗었다간 아이가 다칠 것 같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

그와 눈을 마주친 아이가 흠칫했다. 눈앞의 형은 키가 크고 잘생겼다. 멋진 옷을 입히고 잘 꾸미면 TV에 나오는 아이돌이나 모델처럼 보일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표정이 없고 말도 없었다. 입을 다물고 이쪽을 내려다보는 눈빛이 무심했다. 어린아이가 쉽게 친근감을 느낄 인상은 결코 아니었다. 

엄마가 길을 걸을 땐 주변을 잘 살피랬는데. 부모님 말 안 들었다고 저 형한테 혼나는 걸까? 엄청 무서운 형 같은데. 아이의 뺨이 서럽게 씰룩였다. 

“아냐. 형 괜찮아.” 

그때 머리 위에서 나지막한 말소리가 떨어졌다. 생김새만큼이나 무뚝뚝한 음성이었으나, 그나마 다정하게 말하려 최대한 노력한 것 같았다. 아이는 조금 전까지 겁을 먹었던 것도 잊고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유건이 몸을 숙여 눈높이를 맞추었다. 

“앞 잘 보고 다녀야지. 넘어질라. 여기 공사하는 곳도 많은데 조심해.” 

“네.” 

아이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건은 신나게 뛰어노느라 마구 흐트러진 아이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 주었다. 혹시라도 잘못 만지면 다칠까 봐, 손끝으로만 아주 조심스럽게. 

“누나 있어서 좋겠네.” 

“형은요? 형도 누나 있어요?” 

“나? 나는……. 형이 있었지.” 

희성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걷잡을 수 없이 괴롭던 때가 있었다. 그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휩쓸려 차라리 자신도 죽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유건의 입에서 형에 대한 이야기가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오래전에 지나가 버린, 이미 극복한 일을 되짚듯. 

아이가 그의 말뜻을 이해할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냥 말하고 싶어서 말했고,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아이가 한 말이 아니었다면. 

“형네 형아 천국 갔을 거예요. 우리 아빠처럼요.” 

아직까지도 유건의 손을 쥐고 있던 조그마한 손에 꼬옥 힘이 들어갔다. 

“응. 고마워.” 

유건이 픽 웃었다. 한쪽 눈꺼풀 위의 흉터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마냥 싸늘하던 인상이 그 웃음 한 번으로 바뀌었다. 그는 아이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고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뒤에서 아이의 누나가 다가왔다. 두 아이는 손을 붙잡은 채 멀어져 갔다. 

유건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바람을 타고 부서져 내리는 햇살이 눈부셨다. 종말의 문턱까지 갔다 온 후에도 날은 여전히 화창하다. 

그는 습관처럼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하도 자주 확인해서 눈에 익어 버린 홈 화면에는 아무런 알림도 떠 있지 않았다. 새로 연락이 온 게 없는 걸 알면서도 메시지 앱에 들어갔다. 대화창 제일 마지막에 집을 나서기 전 신제에게 보낸 메시지가 덩그러니 떠 있었다. 

[언제 오십니까?]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딱딱하기 짝이 없는 문장이지만, 타인을 곰살궂게 챙기는 법이 없는 유건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나름대로 용기를 내서 보낸 건데 아직까지 읽음 표시가 없다. 많이 바쁜 걸까? 마자로스 공략을 진행하느라 에레혼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으니 뒤처리를 하느라 당연히 몹시도 바쁘겠지만. 그래도……. 메시지 하나 확인할 시간까지 없는 걸까. 

지금도 신제는 중요한 일을 하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쁠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시답잖은 메시지 따윌 봐 달라고 떼를 쓰는 게 얼마나 꼴불견인지 안다. 그런데도 마음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성과 감정이 정반대로 움직인다. 

신제에 관한 일이라면 유건은 항상 이랬다. 그는 신제를 증오하는 동시에 연민했다. 매번 상처받으면서도 매번 기대했다. 신제를 누구보다도 죽이고 싶어 했기에 살려 냈다. 그에게서 영영 벗어나겠다고 그리 치를 떨며 다짐해 놓고 결국은 그의 곁으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대로변 안쪽, 한때 식당이나 상점이 즐비했던 골목에 들어섰다. 무너지고 텅 빈 상가들 사이에서도 영업하는 가게가 드문드문 있었다. 유건은 그중 하나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디저트 전문점이었다. 유리창을 통해 가게 진열장에 놓인 디저트들이 보였다. 그 가운데 예쁘게 포장된 머랭 쿠키가 있었다. 

들어가 볼까, 말까. 사 올까, 말까. 유건은 어정쩡하게 먼 거리에서 가게 안을 기웃거리며 고민했다. 아기자기한 파스텔풍의 인테리어가 그를 더욱 망설이게 했다. 저런 예쁜 곳에 자신처럼 교양 없고 투박한 사람이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용기 내서 들어간다 한들 뭘 살지도 고민이었다. 그나마 무슨 맛인지 아는 머랭 쿠키를 살까? 슈퍼나 마트 같은 데서는 찾기 힘든 걸 모처럼 발견했으니까. 하지만……. 

“…….”

유건은 손등을 덮는 후드 티 소매 끝자락을 습관처럼 만지작거렸다. 그의 표정이 한층 심각해졌다. 디저트를 고르는 사람답지 않게 묘한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머랭 쿠키는 그가 좋아하는 것이지 신제는 아니었다. 아니, 사실은 그조차 정확하지 않았다. 신제는 유건이 뭘 좋아하고 잘 먹는지 물어본 적 있지만 유건은 그에게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으므로. 

신제는 어떤 것을 좋아했던가. 요란한 장식이나 무늬는 없지만, 재질 그 자체만으로도 헉 소리가 날 정도로 고급스러운 걸 선호했던 것 같다. 에레혼의 본부 인테리어나 유니폼 디자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타인의 취향을 파악하는 눈썰미 따윈 없는 유건으로서는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그 이상 세세한 것까진 잘 몰랐다. 

입에 들어가는 거라면 뭐든 까다롭게 따져서 최고급만 먹을 듯한 이미지인데, 신제는 의외로 음식에 관해서는 호불호가 뚜렷하지 않았다. 호화롭게 차려진 코스 요리도 군말 없이 먹었고 아침에 간단하게 구운 토스트와 베이컨도 잘 먹었다. 컨디션이 나쁠 때면 아예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은 적은 있었지만 이건 싫다, 저건 좋다 하며 하나하나 가린 적은 없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을 함께했는데, 서로 볼꼴 못 볼 꼴 다 보면서 가장 밑바닥까지 드러낸 사이인데. 왜 이제껏 그의 디저트 취향조차 몰랐을까. 이상한 기분이었다. 유건이 뭘 사 가든 그 남자는 이제 이런 것도 고를 줄 아냐며, 날 위해 선물을 주다니 기쁘다며 예쁘게 웃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유건은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복구가 덜 끝나 울퉁불퉁한 거리를 비틀대며 걷던 남자가 그에게 퍽 부딪쳤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윽…….” 

다친 발목이 접질리는 것은 금방이었다. 유건은 절뚝이며 몇 발짝 물러서다 결국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발목에서부터 시큰한 통증이 올라왔다. 

“야, 이 씨발. 똑바로 보고 다녀!”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다짜고짜 고함을 질렀다. 그는 눈에 초점이 없고 흰자에 잔뜩 핏발이 서 있었다. 게다가 몸이 이상할 정도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병신 새끼가 뭐 하러 길바닥에 기어 나와? 퉤, 재수가 없으려니까.” 

유건은 저 증상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일반적인 취객이 아니었다. 부작용을 견디다 못해 마약을 하다가 결국엔 몸과 마음 모두 망가져 버린 각성자였다. 

“잠깐…….” 

제 화를 못 이겨 씨근덕대던 남자의 눈빛이 변했다. 폭언을 퍼붓느라 곧바로 알아채지 못했는데, 아까 유건에게 부딪치는 순간 몸에 무언가 변화가 생겼다. 찰나라 불러도 될 만큼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모를 수가 없었다. 눈앞의 청년은 가이드임이 틀림없었다. 돈도 없고 랭크도 낮은 자신 같은 각성자는 전속 가이드를 구하기는커녕 가이드의 손 한 번 잡아 볼 엄두조차 못 냈는데. 

“뭐야. 너 가이드였어?” 

남자가 수염이 거칠거칠하게 자란 턱을 문지르며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유건의 위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싸구려 마약에서 나는 악취가 진동했다. 

“꺼져.” 

바닥을 짚은 유건의 손등에 핏대가 섰다. 얼른 일어나야 하는데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와일드 헌트 때 크게 삐끗한 후로 틈만 나면 시큰거리더니 결국 이 꼴이 됐다. 

“세상이 좋아지긴 좋아졌네. 가이드가 겁대가리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고. 그러다 누가 끌고 가서 몹쓸 짓 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쪽 걱정이나 하지? 몸도 못 가누는 주제에.” 

“아, 혹시 네 파트너가 너 버렸냐? 다리병신은 따먹을 맛 안 난다고?” 

유건은 오랜 습관대로 허리와 허벅지 부근을 더듬다가 권총이 없는 것을 깨닫고 이를 갈았다. 이젠 변이종에게 습격당할 일이 없을 거란 생각에 무기를 따로 챙기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신경 꺼. 내가 다리가 성하든 아니든.” 

이를 악물고 발목에 힘을 주었다. 자꾸만 힘이 풀리던 다리가 간신히 섰다. 튕겨지듯 일어서자마자 옷 위로 남자의 팔을 잡아채 확 꺾었다. 

“너 같은 새끼 하나 못 이길 정도는 아니니까.” 

그는 기껏해야 희성 정도의 하급 능력자로 보였다. 몸싸움으로 완전히 제압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 기습하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전투와는 거리가 먼 가이드가 다짜고짜 기술을 걸 줄은 몰랐는지, 남자는 목이 졸린 듯한 신음과 함께 철퍼덕 엎어졌다. 

“놔. 새끼가, 안 놔?” 

남자가 잔뜩 쉰 소리로 악을 썼다. 그의 사지가 미친 듯이 버둥거렸다. 유건은 그제야 알아챘다. 자신이 잡고 있는 쪽이 아닌 다른 쪽 옷소매가 휑하게 비어 있었다. 

왜 남자가 이 꼴로 거리를 배회하게 됐는지를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원래도 어딜 가나 천대받는 최하급 헌터인 데다가 팔이 잘려서 그나마 있던 쓸모마저도 잃어버린 것이리라. 유건을 향해 내지른 병신이라는 욕설은 어쩌면 자신의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발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다고 그의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변이종이 사라지면 모든 게 다 좋아지기만 할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유건은 아니었다. 그런 순진한 기대를 품기에 그는 이미 세상의 더러운 꼴을 너무 많이 보았다. 

아웃브레이크 이전으로 완전히 돌아가기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난관이 한둘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많은 분야가 변이종과 각성자를 이용한 산업에 의존하고 있었다. 변이종 부산물을 가공하던 업체들은 벌써부터 죽는소리를 하고 있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헌터들 또한 패닉에 빠졌다. 그래도 종말을 피해 목숨을 건졌으니 되었지 않느냐고 위안하기에는 현실적인 타격이 너무 컸다. 

“너 진짜 잘못 걸린 거야. 알아?” 

남자가 한 팔로만 유건을 밀쳐 역으로 쓰러뜨렸다. 발목의 통증으로 순간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이곳이 대로변이었다면 지나가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겠지만, 여기는 큰길에서 몇 블록 들어온 골목 안이었다. 주변에는 영업 중인 가게보다 빈 가게가 더 많았다. 

“윽…….” 

“가이드 주제에.” 

남자는 유건을 온몸으로 깔아 누르고 손을 뻗었다. 유건은 남자의 손이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권총이, 아니, 나이프 한 자루만 있었어도. 

〈변이종만 무서운 게 아니라서.〉 

〈함부로 밖에 돌아다니지 말아요. 아니, 그냥 나 없을 땐 웬만하면 나가지 마.〉 

영양가 없는 능글맞은 농담을 잔뜩 늘어놓다가, 끝에 스치듯 진심을 덧붙이는 것. 신제의 화법이었다. 농담인지 진심인지 구별할 수 없도록. 유건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감았던 눈을 다시 뜨는 순간, 남자의 아래에 깔린 멀쩡한 다리를 들어 그를 힘껏 걷어찼다. 

“억!” 

남자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상체를 웅크렸다. 허벅지나 종아리를 찼다면 별 타격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필 맞은 곳이 가랑이 사이였다. 

“이, 이게 진짜…….” 

그는 시뻘게진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엉금엉금 기어 다가왔다. 그 전에 유건이 주먹을 날렸다. 쉽게 반격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잘린 팔이 있는 방향을 노렸다. 남자가 습관적으로 어깨 아래에서 뚝 잘린 팔을 들어 막으려 했다. 팔을 잃은 지 오래되진 않은 모양이다. 허공을 가른 주먹이 옆구리에 정통으로 꽂혔다. 남자가 신음을 삼키며 이를 갈았다. 

둘은 지저분한 골목에서 엎치락뒤치락 몸싸움을 벌였다. 남자가 휘두른 주먹을 유건이 간신히 피했다. 빗나간 주먹이 뒤쪽의 벽에 꽂히자 콘크리트에 작게나마 금이 갔다. 가장 흔한, 그러나 활용성도 가장 뛰어난 근력 강화계 능력자. 남자가 마약과 부작용에 찌들지 않았거나 그의 능력이 예전만큼 강했다면, 아니, 그의 팔이 성하기만 했어도 지금쯤 유건이 저 벽 꼴이 되었을 것이다. 

남자가 벽에 박힌 주먹을 회수하는 틈을 타 한 방 더 갈겼다. 퍽! 그의 턱이 돌아갔다. 

“컥! 으윽.” 

허우적거리며 중심을 잡으려 애쓰던 남자가 철퍽 엎어졌다. 유건은 경계를 풀지 않은 채 팔목으로 입가를 훔치며 물러섰다. 인적 없는 골목에 거친 숨소리가 퍼졌다. 처절하고 흉흉한 전투의 감각. 햇살 아래 뛰어노는 아이들을 마주쳤을 때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욱 현실감이 났다. 

“가이드한테 맞아 본 건 처음인가?” 

유건이 입매만 비틀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여유를 가장했지만 허세였다. 발목의 통증은 지금도 시시각각 심해지고 있다. 게다가 온몸에 먼지가 묻고 생채기가 생겼다. 이대로 디저트 전문점에 들어갔다간 기겁한 가게 주인에 의해 유건이 먼저 신고당할 지경이다. 

“씨발!” 

남자가 하나 남은 팔로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 팔조차 주체할 수 없이 부들부들 경련하고 있는 까닭에, 그는 이내 도로 고꾸라졌다. 그가 바닥을 벅벅 긁으며 울분을 토했다. 

“불공평, 하잖아, 씨발…….” 

“뭐?” 

“넌 가이딩 능력이 없어지더라도 어떻게든 먹고 살겠지. 그런데 나는 능력 빼면 그냥 약에 찌든 외팔이야. 젠장! 나 같은 놈은 이제 어디에도 쓸모없는 세상이 됐다고.” 

어쩌면 이 남자에겐 변이종이 창궐하고 사람이 죽어 나가던 예전보다 지금이 오히려 지옥일지도 모른다. 괴물을 물리친 후 세상이 평화로워지고 모두들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마무리되는 이야기라면 좋을 텐데. 

“목숨 걸고 싸웠는데. 변이종 죽이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서.” 

“뭐?” 

“그래서 어쩌라고. 징징거릴 시간에 네 살길이나 찾아. 아니면 나가 뒈지든가.” 

유건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덜 나은 몸으로 무리한 탓인지 시야가 빙빙 돌았다. 

“목숨 걸고 싸웠던 사람, 너만 있는 거 아니니까.” 

유건은 그를 내버려 둔 채 몸을 돌렸다. 남자는 이를 갈며 옆에 있던 것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가 짚은 것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쌓인 판자와 각목 더미였다. 

“크헉!” 

묵직한 자재들이 우르르 무너져 그를 덮쳤다. 유건은 힘겹게 절뚝이면서도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골목을 완전히 나온 뒤에야 참고 있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헉, 하아…….” 

잊고 있던 통증이 전신을 두드렸다. 힘을 푸는 순간 제자리에 허물어질 것 같았다. 유건은 삐걱거리는 몸을 움직여 간신히 근처 벽에 기대어 섰다. 차갑고 단단한 콘크리트 벽에 뒷머리까지 툭, 기댔다. 젖혀진 시야로 하늘이 보였다. 여전히 화창했다. 

“빌어먹을.” 

그는 착잡하게 마른세수를 했다. 그저 잠깐 산책이나 다녀오려 했을 뿐인데 예상치도 못한 봉변을 당했다. 최악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있으려니 바지 주머니에서 미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휴대폰에 전화가 걸려 오고 있었다. 유건은 주머니를 더듬어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른 휴대폰을 꺼냈다. 대체 언제부터 울려 댔던 걸까. 부재중 전화 알림이 수도 없이 쌓여 있었다. 

전에 쓰던 단말기를 에레혼 본부에 두고 떠나온 뒤로, 유건은 줄곧 휴대폰 없이 살았다. 그러다 신제와 재회한 후 드디어 다시 휴대폰이 생겼다. 그의 휴대폰에 등록된 연락처는 단 하나뿐이다. 한 명과만 연락하기 위해 이 비싼 물건을 사다니, 참으로 사치스럽기 짝이 없는 족쇄가 아닌가. 

그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귀에 댔다. 그 간단한 동작만으로도 팔이 몹시 뻐근했다. 말을 할 기운조차 없어서, 쌕쌕 숨을 몰아쉬기만 했다. 

- 유건아. 

여느 때처럼 사근사근한 어조였다. 하지만 신제의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여보 운운하는 낯간지러운 농담을 하기는커녕 목소리에 웃음기가 싹 빠져 있었으니. 

- 밖에 있어? 

신제가 되물었다. 스피커 건너편에서 넘어오는 바람 소리와 자동차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 어디야. 

“…….”

- 백유건. 

유건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신제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단장님.” 

- 응. 

평소였으면 이제 단장이 아닌데 왜 단장이라 부르냐며 한마디 했을 텐데 신제는 별말이 없었다. 

“저 좀…….” 

유건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폐에서 쇳소리가 났다. 그리고 다시 내쉬어 소리를 짜냈다. 

“찾으러 와 주세요.” 

말을 마치고, 그는 불현듯 몹시도 낭패감이 들었다. 혼자 집까지 기어가는 한이 있어도 신제에게는 도움을 청하지 말았어야 하나 싶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신제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의 위치를 물었다. 유건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이정표가 될 만한 큰 건물들을 보이는 대로 말했다. 알았다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짤막한 대답 한 마디와 함께 곧 전화가 끊겼다. 유건은 전화가 끊긴 휴대폰을 꼭 쥐고 이를 악물었다. 천근만근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팔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세웠다. 

대로변의 풍경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여기만 본다면 뒷골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누구도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저 풍경은 이 세상 전체와도 닮았다. 오랫동안 곪은 상처를 새살로 덮고, 엉망진창이 된 몸으로 어떻게든 조금씩 나아가려 한다는 점이.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도로를 가로질러 미끄러지듯 우아하게 다가온 차가 유건의 앞에 멈춰 섰다. 눈에 익은 신제의 차였다. 이윽고 운전석 문이 덜컥 열렸다. 유건은 마침내 긴장을 풀었다. 악착같이 유지하고 있던 의식이 가물가물해졌다. 

“아…….” 

그는 줄 끊어진 인형처럼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흐릿한 시야로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 * *


샤워기에서 따뜻한 물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유건은 아까 몸싸움을 벌이다 바닥에 쓸린 팔을 들어 올렸다. 살갗이 흙먼지와 피로 엉망이었다. 물줄기에 닿자마자 더러운 것이 씻겨 나가며 발간 속살이 드러났다.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읏.”

유건은 아픔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꿋꿋이 몸을 씻었다. 샴푸를 손바닥에 짜서 머리도 감았다. 팔을 움직일 때마다 시큰거렸지만 아까보단 나았다.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문지르며 거품을 내다가, 이내 손길이 점점 느려졌다.

“…….”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쏟아지는 물을 고스란히 맞았다. 머릿속이 단순히 분노나 짜증, 아픔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으로 어지러웠다.

유건이 눈을 뜬 것은 집에 거의 도착해서였다. 며칠 만에 보는 신제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멀끔한 모습이었다.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어 그런지 혈색이 파리하고 턱선이 좀 날카로워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유건에 비하면 훨씬 양호한 수준이었다. 가이딩을 못 받은 건 신제인데 오히려 가이드인 유건의 상태가 더 나빴다.

그는 정신을 못 차리는 유건을 거의 안아 들다시피 부축해 차에 태우고 집으로 향했다.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태도였다. 하지만 신제는 그에게 어쩌다 그렇게 됐냐, 어디서 무슨 일을 당했냐는 질문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표정 없는 얼굴로 앞만 보며 운전에 집중했다. 영상 통화로 밀어를 속삭이던 것이 거짓말처럼, 돌아오는 내내 그들 사이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감돌았다.

역시 신제는 그에게 화가 난 것 같다. 그것이 유건이 집까지 오는 동안 내린 결론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함부로 나가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자고 잘 지내고 있다는 거짓말까지 했으니까. 계약 위반 혹은 명령 불복종으로 처벌받아도 억울할 것 없다. 그들은 이제 계약 관계가 아니고 신제는 그의 상급자도 주인도 아니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다. 아직까지도 신제는 그에게 동등한 사람 대 사람이라기보다는 복종하고 모셔야 할 대상에 가까웠으므로.

유건이 신제에게 일방적으로 분노를 터뜨린 적은 있었어도 반대는 없었다. 그는 늘 유건에게 얄미울 정도로 유했다. 상대를 도발하려 일부러 거친 말을 퍼부어 봐도 웃으며 흘려 넘길 뿐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그가 더욱 어려웠다.

유건에게는 화가 났거나 토라진 상대를 달래는 재주가 없었다. 상대의 기분을 민감하게 파악할 눈치도 없었고. 차라리 몇 대 얻어맞거나 기합을 받는 것으로 신제의 화를 풀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런 방법은 유건이 예전에 함께 일했던 단순무식하고 폭력적인 하급 헌터들에겐 먹힐지 몰라도 신제에겐 먹히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으면 낳았지.

사실도 유건도 마냥 미안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 또한 신제가 원망스러웠다. 어느 날 훌쩍 떠났다가 멋대로 돌아오고, 기약 없는 기다림 동안 자신을 망가뜨리고. 어찌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아…….”

긴 한숨을 내쉬며 타일 벽에 이마를 툭 기댔다. 뜨뜻한 물이 정수리를 적시고 이마와 귓가와 목덜미로 흘러내렸다. 일부는 속눈썹 끝에 맺혔다가 후드득 떨어졌다. 비 오는 날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처럼.

우리는 매번 왜 이렇게 엇갈릴까. 유건은 서늘하고 습한 벽에 이마를 댄 채 생각했다. 그는 화려한 언변도 능글맞은 성격도 없었으므로, 열심히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신제와 떨어져 있는 순간마다 다짐한다. 뾰족한 감정만 앞세워 서로를 할퀴는 일은 이제 그만두자고. 아무것도 낳지 않는 소모적인 비난도, 텅 빈 총의 방아쇠를 연거푸 당기듯 되풀이되는 증오도 지쳤다. 지금에 와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가 보고 싶다고, 그래, 인정하기 싫지만 보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제를 실제로 마주하면 모든 것이 어그러진다.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대하자고 다짐했던 건 다 어디로 가고, 떼를 쓰는 철부지 어린애처럼 이기적인 투정만이 튀어 나간다. 격렬한 충동이 손끝과 발끝에서부터 걷잡을 수 없이 번진다.

아마 신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무리 둔한 유건이라도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때로 유건은 그의 유리알 같은 눈에서 어떤 감정을 읽는다. 다른 사람들 앞에선 그리도 능숙하고 우아하게 굴던 남자가 유건의 앞에서는 도무지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날것의 애정을, 절박한 살의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왜 우리는 매번 삐걱거릴까.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지낼 순 없는 걸까. 처음부터 잘못 만들어진 퍼즐 조각들. 아주 우연히 서로 들어맞게 된 불량품들…….

“…….”

세차게 쏟아지던 물줄기가 뚝 멎었다. 수도꼭지를 잠그자 삽시간에 사방이 고요해졌다. 유건은 멍하니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샤워기를 잠근 뒤에도 물방울은 계속 떨어져 발등과 타일을 적셨다.

젖은 머리에 수건을 얹고 가운을 걸친 채 욕실을 나섰다. 수건으로 머리칼을 탈탈 털어 말리다 별생각 없이 고개를 든 순간, 유건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침실의 테이블 앞에 신제가 앉아 있었다. 아까와 달리 편한 차림이었지만 그래 봤자 정장 위에 걸쳤던 코트와 장갑만 벗은 정도라 맨몸에 가운 한 장이 전부인 유건과는 대조적이었다.

“아…….”

머리를 대충 문지르던 손에 힘이 빠졌다. 신제가 그를 보지도 않고 물었다.

“왔어요?”

그는 테이블에 놓인 유리잔을 집어 들었다. 그 옆에 있는 병 라벨에 유건이 알지 못하는 외국어로 된 이름이 쓰여 있었다. 혼자 벌써 좀 마셨는지, 병에는 투명한 술이 절반 조금 넘게 남았다.

“그건 뭡니까?”

“내 점심.”

신제가 보란 듯 잔을 까딱였다. 유건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점심치고는 과한데요.”

“한잔할래요?”

신제는 유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병을 기울여 비어 있던 또 다른 잔을 채웠다. 양주를 종류별, 빈티지별로 수집하는 태인과 달리 신제는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편이었다. 기껏해야 식전주로 몇 모금 마시고 마는 정도였던 것 같은데.

“목걸이를 다시 채워 놓을 걸 그랬나…….”

가득 차오른 잔을 유건이 있는 쪽으로 밀어 주며 신제가 중얼거렸다. 그러다 고개를 기울이며 제풀에 엷게 웃는다.

“그샐 못 참고 발정이 나선.”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온 적나라한 말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느리게 다가오던 유건의 걸음이 뚝 멈췄다.

“그렇게 밖에 나가고 싶었어요?”

“그런 게 아닙니다.”

“몸이 달아서 이제까진 어떻게 참았을까.”

“아니라고 했습니다.”

“많이 심심했죠? 넷한테 돌아가면서 박히다가 나 하나만 남으니까, 아무래도 좀 성에 안 찼나 봐. 좆이 고팠으면 내게 말을 하지 그랬어.”

“그딴 식으로!”

태연하게 심장을 할퀴는 말에 속에서부터 불이 일었다. 무심코 한 차례 언성을 높였다가, 유건은 간신히 숨을 골랐다.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십시오. 아니란 걸 아시지 않습니까.”

“너도 알잖아. 너랑 눈이라도 마주치고 손끝이라도 스치는 각성자들마다 다 너한테 박고 싶어서 눈 뒤집히는 거. 그렇게 당해 놓고 아직도 몰라?”

유건은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신제를 노려보았다. 물기를 머금고 늘어진 흑발 사이로 새까만 눈동자가 보였다.

“이리 와. 나까지 도는 꼴 보기 싫으면.”

이대로 신제의 말을 무시하고 뒤돌아 나가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그들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리라.

“제 의지가, 자의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원한 게 아닙니다.”

잠깐 갈등한 끝에 유건이 그를 향해 한 발짝 내디뎠다. 침실에 깔린 러그에 물로 이루어진 발자국이 생겼다. 신제가 시선을 내리깔고 입매만 올려 빙긋 웃었다.

“그래, 그것도 알지. 그래서 집까지 고이 모셔 왔잖아. 그 새끼 네가 보는 앞에서 처리하지도 않았고.”

“잘 알면서 굳이 그따위로 말할 이유가!”

“우리 유건이가, 지금……. 화났구나. 나한테.”

분노를 터뜨리는 유건의 말 가운데 신제의 나긋한 음성이 아무렇지도 않게 끼어들었다. 신제는 어느덧 고개를 들고 유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유감을 표하듯 미간이 살짝 모아지고, 화려한 눈매가 처연한 빛을 띠었다. 애처로운 마음이 들기는커녕 가증스러웠다.

“그렇다면 어쩌실 겁니까.”

“죽여 줄까? 그놈뿐만 아니라 네게 한 번이라도 손을 대려 했던 것들 다.”

“진심이십니까?”

“물론. 말만 해. 네가 말만 하면 누구든, 몇 명이든 모조리 죽여 줄 테니까.”

유건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젖은 흑발이 흐트러져 눈매를 가렸다. 가운 소매 아래에서 그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전 당신이 죽도록 싫습니다.”

신제가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받아쳤다.

“죽도록 사랑하기도 하잖아.”

“…….”

“아니야?”

상처받은 시늉을 하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 신제는 다시 웃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눈웃음을 치는 얼굴이 섬뜩할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죽여 버리고 싶다. 정제되지 않은 충동이 솟구쳤다.

“…….”

유건은 신제의 말에 끝내 긍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는 빠득 소리가 나게 이를 갈더니, 성큼성큼 신제에게 다가갔다. 일촉즉발의 팽팽한 긴장이 이어졌다. 상대가 살기등등한 눈으로 노려보며 다가오는데도 신제는 제자리에서 미동도 않고 얌전히 웃기만 했다.

어차피 유건의 움직임이야 빤히 보인다. 그는 유건이 다가오는 짧은 순간 동안 여러 선택지를 떠올려 보았다. 멱살을 잡을까, 목을 조를까, 그렇지 않으면 주먹을 날릴까.

그의 가이드는 냉기가 풀풀 날리는 생김새와 달리 욱하는 면이 있어 손길이 제법 거칠다. 하지만 상관없다. 유건은 뭘 해도 귀여우니까. 아예 테이블에 놓아둔 소믈리에 나이프를 집어 들고 목을 찌르려 들어도 귀여울 것 같다. 유건에게라면야 동맥 몇 개쯤은 얼마든지 잘려 줄 의사가 있다. 어차피 잘린 동맥을 다시 붙이는 건 결국 유건의 가이딩일 테니.

그는 손끝으로 술잔 테두리를 덧그리며 생각했다. 자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유건에게 화가 난 건 아니었다. 그는 유건에 대한 일이라면 이상할 정도로 쉽게 충동에 빠지곤 하지만, 웬 벌레가 꼬인 걸로 유건을 탓할 정도로 치졸하진 않았다. 주제도 모르고 그의 가이드에 손을 대려 했던 놈은 지금쯤 참혹한 대가를 치르고 있을 것이다. 상처투성이가 된 유건을 옆자리에 태우고 돌아오는 동안 전화 한 통화로 지시를 끝내 놨으니. 그러면 왜? 무엇이 이리도 불쾌한 걸까.

같이 살게 된 이후로 유건은 그에게 무엇 하나 요구하는 법이 없었다. 집과 인테리어를 고르는 것부터 옷이나 간식 같은 사소한 것까지. 뭐든지 주어지면 주어지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묵묵히 받아들였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유건의 성격이 원래 그런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때처럼.

〈내가 이겼어.〉

〈이번에도……. 제가 이겼습니다.〉

유건이 승리를 선언하는 두 번의 순간을 신제는 생생히 기억한다. 그때를 떠올릴 때마다 아직까지도 짜릿한 카타르시스가 손끝을 울린다. 곧고 무던한 성품은 신제가 그를 사랑하는 많은 이유들 중 하나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까지 고집을 부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건강을 챙기지 않아 몸이 티가 나게 축나고, 욕구가 쌓여 잔뜩 달아올라 앓으면서까지. 조금 전만 해도, 신제가 타이밍 좋게 그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면 유건은 지금쯤 타박상이나 생채기 몇 개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끔찍한 짓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유건은 늘 그렇다. 당신이 없으면 안 된다고, 곁에 있어 달라고 온몸으로 열렬히 외치면서 정작 언행은 무심하기 짝이 없다. 혼자 모든 걸 꾹꾹 눌러 참고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는다. 애써 아닌 척하는 건지, 아니면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건지. 아마 높은 확률로 후자겠지만. 유건은 타인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 이상으로 스스로에게 무관심했으니까. 곧 죽어도 타인에게 어리광을 부리거나 약한 소리를 하지 않는 건 그가 살아온 척박한 삶 탓일 테고.

그 모든 것들을 머리로는 너무나 잘 아는데, 그런데도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일부러 비뚤어지고 날 선 말을 내뱉어 유건을 도발할 만큼. 이 감정의 이름은 대체 무엇일까? 신제는 실험실을 벗어난 후 배운 인간의 감정들을 하나씩 차근히 떠올려 보았다.

아……. 알 것도 같다. 서운…… 그래, 서운함이었다. 아무래도 그는 조금쯤은 유건에게 서운했던 것 같다.

마침내 유건이 코앞까지 다가섰다. 신제의 위로 그늘이 졌다. 간격이 좁혀지자 유건에게서 따끈하고 촉촉하게 데워진 보디용품 향이 확 풍겼다.

그는 신제를 공격하지도 무기를 집지도 않았다. 그는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놓인 제 몫의 잔을 거칠게 낚아챘다. 몹시 뜻밖의 행동이었다. 그러고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잔을 비우는 내내 칼날 같은 눈길이 신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미처 삼키지 못한 액체 한 줄기가 입가를 타고 날렵한 턱으로, 곧게 뻗은 목으로, 쇄골에 잠깐 고였다가 허술하게 여민 가운 자락 사이의 가슴팍으로 흘러내렸다.

엷은 흔적만 남기고 말끔히 비운 잔을 탕, 거칠게 놓았다. 신제의 시선이 한순간 잔을 향했다가 다시 유건에게로 돌아왔다. 단숨에 들이켠 술이 몸 안에 불을 지폈다. 숨결에 달콤한 열기가 실려 나왔다.

위에서 아래로 시선이 마주쳤다. 간격이 한 발짝도 안 되게 좁혀진 까닭에 유건 또한 신제에게서 풍기는 알코올 향을 맡을 수 있었다. 신제가 아래에서 유건을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나……. 취한 것 같아요. 어지러워.”

그가 고작 양주 몇 모금 따위로 취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안다. 유건은 눈을 꾹 감았다. 빠르게 번지는 취기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눈꺼풀 안쪽이 화끈거렸다. 그는 감았던 눈을 뜨며 허리춤에 손을 얹어, 느슨하게 묶여 있던 샤워 가운 매듭을 거침없이 풀어 헤쳤다. 그가 유일하게 걸치고 있던 천이 맨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가운이 종아리와 복사뼈를 스치고 바닥에 툭 떨어지는 순간…….

“안아 줄래요?”

신제가 그의 허리를 안아 확 당겼다.

“아!”

말로는 안아 달라고 하면서, 허리를 대뜸 낚아채는 움직임은 몹시도 일방적이다. 말과 행동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싶다. 탄탄한 팔에 허리가 붙들린 채 비틀거리다가, 유건은 신제가 앉은 일인용 소파의 귀퉁이에 한쪽 무릎을 싣고 등받이를 짚어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신제의 위에 올라탄 듯 아닌 듯 어정쩡한 자세가 되었다.

신제가 유건의 뒷머리를 감싸 당겼다. 촉촉이 젖은 머리칼 사이사이에 뜨겁고 건조한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얼굴이 빠르게 가까워진다 싶더니 아차 하는 사이에 입술이 맞물렸다. 난잡하게 입술을 문지르고 혀를 섞는 내내 그들의 입술에서 같은 향기가 머물렀다. 유건이 널찍한 침대에 홀로 누워 뒹굴면서 줄곧 상상했던 감촉이 바로 이것이었던가.

키스를 멈추지 않으면서, 유건의 뒤통수를 감싸고 있던 신제의 손가락이 조금씩 내려가 목덜미를 더듬었다. 목 뒤쪽에 길고 엷게 물 자국이 남았다. 제 머리칼에서 옮아 묻은 것인데도 어쩐지 생경했다. 섬세한 손끝이 목뒤의 툭 불거진 뼈를 따라 내려와 모양 좋게 벌어진 어깨를, 견갑골을, 곧은 허리를 쓸어내렸다.

겉으로는 그저 곱고 고상해 보이지만 이 손은 수없이 많은 괴물을 죽인 손이다. 손짓 하나로 수많은 사람을 부리던 손이기도 하다. 그 손이 지금 유건의 몸을 신중하게 더듬어 내리고 있다. 오싹했다.

호흡을 송두리째 앗아 가는 집요한 입맞춤 끝에 간신히 입술이 떨어졌다. 유건의 골반과 허벅지를 어루만지며 신제가 중얼거렸다.

“네게는 화내고 싶지 않았는데.”

“저도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옷 벗고 안기는 건 어디서 배웠어? 살도 빠지고 건강도 나빠지고, 못 본 새 늘어난 건 상처밖에 없네. 이런 게 안겨 드니까 화도 못 내겠잖아.”

“…….”

“그래도 잘못한 건 잘못한 거지?”

그렇게 치면 당신도 잘못했……. 유건은 거기까지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어쨌거나 그가 멋대로 나갔다가 쓸데없는 시비에 휘말리는 바람에 신제를 수고스럽게 한 건 맞았으니까. 그는 뚱한 낯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면, 유건아.”

신제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오늘…… 좀 울자. 그럼 잘못한 거 봐줄 테니까.”

그의 미소를 본 유건이 흠칫했다.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지 말 걸 그랬나.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 *


유건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소파에 비스듬히 앉은 신제의 다리 사이에.

신제 또한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셔츠는 단추를 죄다 풀었고 바지는 아예 벗었다. 소파에 반쯤 눕듯 나른하게 기대어 있는 탓에 근육이 잡힌 긴 다리가 앞으로 아무렇게나 뻗었다. 그저 자신의 집 침실 소파에 앉아 있을 뿐인데 꼭 언더웨어 화보를 찍는 모델 같다.

정장을 빈틈없이 갖춰 입고 있을 때는 티가 덜 나지만 그의 나신은 아름다운 동시에 위압적이기도 하다. 훤히 열린 셔츠 자락 사이로 가슴 근육이 보인다. 그 아래 잘 다져진 복근이 있고, 하반신에 유일하게 걸친 드로어즈가 두툼하게 불거졌다.

그리고 셔츠에서부터 연결되어 탄탄한 허벅지를 조이는 셔츠 가터가 있다. 유건은 성적인 코드에 무지했지만 이 물건이 선정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가터를 잡아당겼다. 검은 가죽이 팽팽하게 당겨져서 더 야릇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조금 헤맨 끝에 후크를 풀어 벗겨 내자 흰 살갗에 연하게 붉은 자국이 남았다. 자신보다 체격이 크고 나이도 많은 남자가 시폰과 실크, 가죽끈, 만개한 꽃과 같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소품들이 너무도 잘 어울린다. 꼭 그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그래서 괜히 더 얄미웠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까닭에 유건의 시야에는 그의 아랫도리가 정면으로 보였다. 아직 발기가 덜 됐는데도 부피가 무시무시했다. 혹시나 술기운에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자꾸만 초점이 풀리는 눈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눈앞의 물건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유건의 시선을 받고 흥분했는지 한 차례 들썩이더니 조금 더 크기를 키웠다.

한 손으로 양주잔을 든 채 손등에 삐딱하게 관자놀이를 괴고 유건을 지켜보던 신제가 픽 웃었다.

“왜 그래. 새삼 무서워?”

“아플 것 같아.”

“어디가?”

흐려진 눈동자를 느리게 깜빡이며, 유건은 대답 대신 제 입과 목의 중간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좆을 물면 목구멍이 아플 거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굳이 저렇게까지 꼴리는 제스처를 쓸 필요가 있나. 신제가 발끝을 뻗어 유건의 허벅지 사이, 벌써부터 반쯤 일어서 있는 성기를 툭 건드렸다.

“아!”

유건이 고개를 푹 숙이며 신음했다. 그 움직임에 따라 머리칼이 사르르 흐트러졌다. 평소였다면 몸에 힘을 주고 견디려 했을 텐데, 취한 상태여서 그런지 묘하게 반응이 솔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술을 좀 먹여 볼 걸 그랬다.

“네가 먼저 하겠다고 했으면서. 한 말은 지켜야지. 응? 맞아, 아니야.”

발등과 발가락으로 아직은 말랑한 기가 있는 기둥을 장난처럼 건드렸다. 성기에 피가 몰려 빠르게 모양을 갖추었다. 유건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나 없어도 밥 잘 챙겨 먹겠다고 약속했잖아. 함부로 밖에 안 나가고 몸조심할 거라고도. 그래 놓고 하나도 안 지켰지. 이것까지 안 지킬 거야?”

유건은 기계적으로 고개를 마구 젓다가, 갑자기 취기가 확 오르며 어지러워진 까닭에 비틀거렸다. 그는 신제의 허벅지에 뜨끈한 이마를 기대고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당신도 잘못했잖아.”

술기운을 빌려 원망 섞인 말이 튀어 나갔다.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언제 온다는 말 정도는……. 해 주실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당신은 늘 그래. 중요한 건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으시죠. 똥개 훈련 시키는 것도 아니고, 매번 하염없이 기다리게 만들어. 메시지도…….”

신제는 유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야기를 들었다.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터지려는 웃음을 참기에도 벅찼다. 항상 입을 꾹 닫고 자기 속내를 털어놓는 법이 없던 그의 가이드가 모처럼 서러움이 북받쳐서는 칭얼대고 있지 않은가. 그가 침묵 끝에 간신히 한마디 했다.

“……응. 메시지도.”

“내가 아까, 메시지도 보냈는데.”

“빨리 가려고 운전에만 집중하느라 바로 못 봤어. 미안해. 그래도 도착하자마자 확인했…….”

“고민하다가 보낸 건데, 흐으, 답장도 안 해 주고……. 보낸 지 한참 지났는데. 계속 답 기다렸는데…….”

“아……. 그러게. 내가 다 나빴네. 내가 진짜 잘못했네…….”

유건의 넋두리는 존댓말과 반말이 뒤섞여 뒤죽박죽이었다. 불덩이 같은 숨을 몰아쉬느라 중간에 말이 끊기기도 했다. 멀쩡하지 않은 이성으로 생각해 봐도 지금 자신은 꼴불견이었다. 신제의 허벅지에 이마를 문지르며 술기운을 쫓으려 해 봐도 소용없었다.

유건은 결론지었다. 이대로 있다간 스스로의 의지를 배반하고 입이 계속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일 것 같았다. 그러니 입에 뭐라도 물어야겠다. 그 결론 자체가 몹시 비이성적이라는 것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는 허겁지겁 신제의 앞섶에 손을 뻗었다. 따로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성기가 흉흉하게 일어서 있었다. 얇고 쫀쫀한 천 위로 귀두의 윤곽이 비쳤다. 이대로라면 일부러 벗겨 주지 않아도 드로어즈 아랫자락을 비집고 끄트머리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허리 밴드에 손가락을 걸어 끌어 내렸다. 헤맬 것도 없는 아주 간단한 동작인데도 헛손질을 몇 번 했다. 앞으로 이어질 행위에 대한 긴장, 혹은 기대로 심장의 고동이 빨라졌다. 한껏 잡아당겨 늘어난 천에 묵직한 좆이 턱 얹혔다. 머릿속에 저걸 입에 머금어야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유건은 무릎걸음으로 비틀비틀 거리를 좁혀서, 신제의 허벅지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흐읍…….”

밑동을 쥐고 입을 벌렸다. 뭉툭한 끄트머리가 혀에 닿았다. 그것만으로 혀 아래에 타액이 고였다. 그대로 고개를 숙여 조금씩, 조금씩 머금었다. 머리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엉덩이가 살짝 뜨고 바닥에 놓인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입 안 가득 뻑뻑한 좆이 들어차 막힐 때면 혀를 힘겹게 놀려 기둥을 적셨다. 숨통으로 이어지는 급소를 자의로 꿰뚫리는 감각. 한껏 예민해진 입천장이 찌릿찌릿했다.

“흡! 후읏.”

빠듯하게 밀고 들어오던 귀두가 입천장을 쿡 찔렀다. 유건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확 찌푸리며 고개를 물렸다. 귀두 끝에서부터 입술까지 투명한 실이 길게 이어졌다.

소파에 상체를 파묻고 지켜보기만 하던 신제가 유건의 턱을 들어 올렸다. 고작 자지 끄트머리를 물고 몇 번쯤 오물거렸을 뿐인데 벌써 입가가 빨개졌다.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 한 줄기가 턱을 타고 흘렀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누가 알았을까. 임무와 규율, 생존 같은 것들밖에 모를 듯한 단정한 얼굴이 이런 식으로 망가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내 가이드는 성실해서 뭐든 열심히 해. 내 것도, 아주……. 녹여 먹을 듯이 빨고. 이번엔 ‘참 잘했어요’ 도장도 안 걸었는데.”

흠뻑 젖어 더 말캉해진 입술 사이에 엄지를 밀어 넣어 눌렀다. 입이 저항 없이 벌어졌다. 유건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더 귀여워.”

그 말을 끝으로 신제는 제 성기를 길게 쑤셔 넣었다. 입술과 혓바닥을 지나 미끄덩한 점막에 덮인 저 안까지. 그 길고 묵직한 물건이, 손으로 감싸 쥐는 것만으로 버거웠던 것이 단숨에 입 안을 가득 채웠다. 턱이 빠질 것 같았다. 유건의 어깨와 등이 잘게 들썩였다. 숨통을 틀어막혀 가냘픈 호흡이 겨우 새어 나왔다.

“조금만, 더.”

신제는 좆을 머금고 부풀어 오른 유건의 뺨을 쓰다듬으며 뒷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사라지던 자지가 도중에 턱 막혔다. 유건의 입 안은 아래쪽만큼이나 축축하고 좁았다. 아직 한참 남았는데 목구멍 끝까지 닿았는지 더 들어가질 않았다. 힘을 써서 밀어붙이면 넣을 수야 있겠지만 그랬다간 유건의 기도가 찢어질 것이다.

유건은 손끝을 쫙 펴 신제의 허벅지를 긁어내렸다. 손톱이 짧게 정돈되어 있었던 터라 붉은 선만 새겨질 뿐 상처는 나지 않았다.

“더 못 먹겠어?”

“흐으으…….”

“알았어, 알았어. 더 안 넣을게……. 착하지.”

신제는 억지로 더 넣는 것을 포기하고 아래를 살살 움직였다. 위쪽 절반이 투명하게 젖은 자지가 유건의 입술 사이로 조금 빠져나왔다가, 뺨을 불룩하게 밀어 올리며 다시 파고들었다. 목젖에 이따금 귀두가 부딪쳤다. 구역질이 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동시에 묘한 쾌감이 피었다. 입천장 저 안쪽의 민감한 부분이 건드려질 때마다 혀뿌리부터 목 아래가 찡하게 울렸다. 무릎을 꿇고 앉은 허벅지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눈꺼풀 안쪽이 얼룩덜룩하게 물들고 사고가 둔해진다. 도를 넘은 자극 때문인지, 숨이 막혀 산소가 희박해져서인지 모르겠다. 유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시각이 차단되자 다른 감각이 예민해졌다. 혀에 걸리는 단단한 요철에 모든 신경이 집중되었다.

그 와중에도 유건은 어떻게든 입 안에 든 것을 빨아 보려고 서툴게 혀를 놀렸다. 요도 구멍에서 흘러나온 쿠퍼액이 혓바닥에 고였다. 그것을 삼키려다 그만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쿨럭, 컥!”

입 안에 잔뜩 힘이 들어가 조여지는 느낌에 신제가 작게 인상을 썼다. 유건은 어깨를 들썩이며 격렬하게 기침을 했다. 그의 뺨을 타고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러다가, 닫힌 목구멍이 열리는 아주 짧은 틈을 타서……. 기어이 귀두가 쑥 들어가고야 말았다.

“아, 유건아…….”

머리 위에서 신제가 신음했다. 나지막한 말에 숨소리가 섞여 몹시도 야릇하게 들렸다. 아찔해진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좁고 습한 목구멍에 붙잡혀서 통째로 삼켜지는 것 같았다.

들어와서는 안 되는 곳까지 성기가 틀어박혔다. 뜨끈한 돌덩이를 통째로 삼킨 것 같았다. 지금 턱 아래 여린 살을 만져 보면 딴딴하게 부풀어 있을지도 모른다. 유건은 턱을 한계까지 벌린 채, 목을 꿰뚫은 것을 도로 빼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바르작거렸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정상적인 행위에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우리 유건이는.”

신제가 흰 발끝을 뻗어 유건의 성기를 성의 없이 건드렸다. 흥건한 액이 신제의 발등에 후드득 떨어졌다. 유건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움찔했다. 신음은 입 안을 가득 메운 것에 막혀 둔탁하게 사그라졌다.

“갈수록 야해져. 이젠 목에 자지 꽂은 채로도 질질 흘리네. 하여간, 내 가이드는, 읏. 참 성실하다니까.”

목구멍이 말도 안 되게 깊은 곳까지 벌어진 것도, 발로 성기가 비벼지는 것도 거북했다. 유건은 바닥에 늘어져 있던 손을 들어 올렸다. 신제의 발을 치워 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어째서인지 그는 신제의 발목을 잡아당겨 제 성기에 문지르며 발정 난 개처럼 헐떡이고 있었다.

“흐읍, 끅! 헉, 흐으…….”

길고 단정한 남자의 손이 유건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강제로 머리를 내리누르는 짓은 하지 않았으나 반대로 만류하지도 않는 손길이었다.

“숨도 못 쉬고 우니까 더 꼴린다, 자기야.”

신제는 제 허벅지 사이에 처박힌 동그란 정수리를, 둥글게 말린 채 들썩이는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이따금 기둥이 앞니에 긁히는 것조차 달콤했다. 그의 숨소리가 조금씩 가빠졌다. 당장이라도 유건의 머리를 처박아 저 안까지 다 찢어 놓고 싶은 충동을 참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간헐적으로 벌렁거리는 목구멍에 성기가 빠르게 드나들었다. 잔뜩 힘이 들어간 유건의 손가락들이 신제의 허벅지를 절박하게 두드리고 긁어내렸다. 점점 더 숨이 막혀 왔다. 그 와중에도 잔뜩 흥분해서 아랫도리를 비벼 대는 스스로가 미친 것 같았다.

“읏…….”

마침내 절정이 찾아왔다. 신제가 허리를 잘게 털어 성기를 쿡, 찔러 넣었다. 목구멍에 틀어박힌 귀두에서부터 정액이 터져 나왔다. 심장이 목으로 옮겨 간 것처럼 목 전체가 불뚝거리고, 뜨뜻미지근하고 미끈거리는 액체가 식도에 곧바로 쏘아지는 감각.

“끄, 흐읍!”

충격으로 유건의 눈이 한껏 커졌다. 옅게 충혈된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정액은 몇 차례에 걸쳐 쏘아졌다. 점막을 타고 아래로 주르르 흘러내려 가 명치에 고였다.

성기를 문 채 작살에 꿰인 사냥감처럼 펄떡거리며 그 또한 실금하듯 사정해 버렸다. 이런 도착적인 행위에 흥분할 리가 없는데, 흥분해서는 안 되는데……. 아랫배가 스스로 내보낸 정액으로 흥건했다. 신제의 발등 또한 하얗게 젖어 들었다.

유건이 넋이 나간 채 뺨을 우물거렸다. 잔뜩 부푼 발간 뺨이 정액과 타액으로 엉망이었다. 들어찬 성기를 살살 빼내 주었다. 그가 뭐라 말하려 입술을 달싹였다.

“…….”

그런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쉭쉭 공기가 새는 소리만 날 뿐. 하기야 그런 짓을 했는데 목이 멀쩡할 리가 없다. 목구멍이 너덜너덜해졌을 것이다. 아니, 식도와 기도가 아예 뻥 뚫려 버렸을지도 모른다. 비이성적인 공포에 사로잡히려는 순간, 갑자기 목 안쪽이 쥐어짜듯 수축했다.

“컥! 쿨럭, 쿨럭…… 커헉.”

유건은 몸을 웅크리고 연거푸 기침을 했다. 미처 삼키지 못한 정액이 입가로 줄줄 샜다.

“아…….”

무심코 소리를 냈다가 그는 제풀에 놀랐다. 잔뜩 쉬고 갈라지긴 했지만 어쨌거나 목소리가 나왔다. 다행이었다.

“유건아.”

신제가 몸을 낮추어 팔을 벌렸다. 좁아진 시야에 오직 그만이 보였다. 유건은 무릎걸음으로 엉금엉금 다가가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안겼다. 몸이 허공에 불쑥 떠올랐다. 신제는 그를 안은 채 느릿하게 걸어 침대로 향했다. 이윽고 유건의 등이 부드러운 이불에 닿았다. 자잘한 입맞춤이 부어오른 입술과 얼얼한 턱과 뺨에 쏟아져 내렸다.

혹시나 상처가 난 건 아닌지 확인해야겠다. 유건은 어딜 다치더라도 좀처럼 먼저 말하질 않으니까. 신제는 축 늘어져 색색대기만 하는 유건의 입술 사이에 검지와 중지를 밀어 넣고 더듬었다. 안을 헤집다가 손가락을 쑥 빼내자 타액과 섞여 묽어진 정액이 조금 묻어 나왔다.

“아파? 이제 하지 말까?”

유건은 대답 대신 고개만 저었다. 독한 취기와 질식 직전까지 갔던 공포와 사정의 여운이 뒤섞였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면. 무서웠어?”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무서웠다. 몸이든 마음이든 어딘가가 고장 나서 영영 낫지 않을까 봐. 지나친 자극에 맛 들려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될까 봐.

“망가, 지는 줄, 알고…….”

“내가 널 왜 망가뜨려. 충분히 망가졌으니 이젠 아껴야지. 평생 데리고 있을 건데.”

신제가 이마를 톡 맞대며 숨죽여 웃었다. 유건은 다시금 확신했다. 역시 이 남자는 독이다. 절대 맛보아선 안 되는, 향조차 맡지 말아야 하는 독. 그러나 신제가 독이라면 알면서도 그에게서 벗어나기는커녕 그의 품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자신 또한 독일 것이다.

“이상하지. 이미 가이딩은 충분히 받았는데도 부족해. 하면 할수록 더 부족해져.”

유건을 만나기 전, 가이딩 없이 악으로 버티던 나날들이 이젠 까마득히 멀게 느껴진다. 그래서 지금의 신제는 아무런 결핍 없이 충만한가? 그것 또한 아니다. 그는 나날이 더 큰 갈증에 시달리고 있다. 욕망의 가지가 매 순간 끝을 모르고 뻗어 나간다.

“널 뼈째 씹어 삼키면 갈증이 해소될까 하는 생각도 해 봤는데, 글쎄. 그건 아닌 것 같지?”

“…….”

“어째서일까? 유건아.”

“아마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

유건은 뜸을 들이며 조금 고민했다. 시선이 아래로 내리깔렸다. 눈을 똑바로 뜨고 있을 땐 잘 보이지 않던 얇은 쌍꺼풀이 드러났다.

“가이딩이 아니라 섹스여서가 아닐까요.”

신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

“틀렸습니까?”

“아니. 정답인 것 같아. 내 길잡이가 알려 준 거니까 정답이겠지.”

그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결론지었다. 유건은 항상 그의 모든 해답이었으므로. 그가 상체를 일으키며 옆의 서랍에 손을 뻗었다.

“시간 들여서 천천히 풀어 주고 싶은데 그럴 여유가 없네.”

서랍 안에서는 반투명한 용기에 든 젤이 나왔다. 유건이 멍하니 젤을 쳐다보았다. 매일 이 침대에서 잠들고 일어나면서 바로 옆에 저런 물건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그동안 내가 널 좀 굶었잖아……. 이해하지?”

신제는 젤 뚜껑을 엄지로 툭 밀어 열면서 유건의 다리를 벌렸다. 엉덩이 사이 구멍에 젤 용기 끄트머리가 물렸다. 뒤이어 물컹하고 차가운 게 쭈욱 밀려들어 왔다.

“아흣!”

열이 올라 있던 몸에 갑자기 서늘한 것이 들어오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유건이 다리를 마구 버둥거렸다. 신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젤을 쭉쭉 짜 넣었다. 아예 한 통을 다 쓸 기세였다. 내벽이 빠르게 젖어 들었다. 유건이 제 아랫배를 끌어안고 헉헉거렸다.

“싫습니다. 이거 그만 넣……. 읏, 배, 이상, 아, 아파.”

“좀 봐주면 안 돼? 오랜만인데. 그러게 영상 통화 할 때 좆은 왜 세웠어. 혼자 구멍 쑤시면서 울긴 왜 울고.”

“그 입 좀…… 아!”

“그리고 나 예쁘잖아.”

“…….”

“봐줄 거지?”

“좀, 씨발. 닥치라고요…….”

유건이 이를 악물고 윽박질렀다. 신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깔때기처럼 길쭉한 입구를 구멍에서 뽑아내자마자 안에 가득 차 있던 젤이 철퍽 쏟아졌다. 그는 절반 이상 비어 버린 통을 아무렇게나 내던지고는 흥건해진 구멍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저항 없이 쑥 들어갔다.

“느낌이……. 너무, 이, 상, 흐윽!”

손가락이 반 바퀴 빙글 돌아 내벽을 긁으며 빠져나갔다. 젤이 또 한 움큼 샜다. 그 자리에 한껏 달아오른 귀두가 맞붙었다. 하아……. 유건에게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이어질 충격을 예감한 구멍이 한 차례 움찔거렸다.

퍼억! 아래에서부터 위로, 찍어 올리듯 거세게 삽입당했다.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젤들이 밀려 나왔다. 성기의 지름을 따라 팽팽하게 벌어진 구멍에 투명한 젤이 고였다. 그리도 갈망하던 삽입이었다. 손가락으로 어설프게 깔짝거릴 때는 결코 닿지 못했던 성감대가 단번에 푹 쑤셔졌다. 발씬거리는 속살이 성기에 들러붙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멋대로 경련하며 꽉꽉 죄어 댔다.

“흐아…… 아!”

눈알 뒤쪽에 불이 붙었다. 유건은 고개를 휙 젖혔다. 귓불과 뺨에서부터 빠르게 홍조가 번져 목덜미 아래까지 물들였다. 밀려 올라간 머리가 침대 헤드 바로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추었다. 신제가 한 손으로 그의 정수리를, 다른 팔로 허리를 감아 휙 끌어 내리며 마저 밀어 넣었다.

“하윽!”

젤을 듬뿍 뒤집어쓴 성기가 입구에서부터 내벽을 죄다 긁으며 미끄러져 들어왔다. 복식 호흡을 하듯 아랫배에 꽉꽉 힘을 줘 봤지만 삽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끄트머리가 마침내 전립선을 찍어 올리는 순간……. 억지로 참고 있던 것이 탁 풀렸다.

정전된 것처럼 눈앞이 까매졌다. 지나친 자극을 견디지 못한 몸이 시각을 차단했다. 허리가 퍽 튀었다.

“으, 흣, 아, 아아, 아!”

그의 엉덩이가 한 뼘쯤 허공에 떴다. 몹시도 어정쩡한 자세로 성기를 머금은 채 발끝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경련은 전신으로 번졌다. 그 직후, 바짝 선 성기 끝에서 투명한 물이 확 뿜어졌다.

때맞춰 신제가 아래에서 쾅 쳐올려 박았다. 허리를 슬슬 돌려 안을 뭉개는 동시에 눈앞에서 흔들리는 성기를 흔들어 주었다. 유건이 우는 소리를 내며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물줄기는 세졌다가 잦아들기를 반복하며 여러 번에 걸쳐 뿜어졌다.

“젤 받아먹은 게 뒷구멍이 아니라 이 구멍이었나. 왜 여기서 뭐가 이렇게 많이 나오지…….”

“읏, 아아, 하윽!”

“앞으로 어쩌려고 벌써 싸. 아직 한참 더 할 건데.”

아직 물줄기가 완전히 잦아들기도 전인데, 유건의 납작한 아랫배에 물이 찰랑찰랑 고여 있는데, 신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건이 위로 밀려 올라가지 못하게 단단히 붙든 채였다. 물이 두 사람의 배를 적시고 접합부로 흘러내려 철벅거렸다.

“유건아. 나 보고 싶었지? 그런데 왜……. 하아, 보고 싶단 말을 안 해.”

유건의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있어서 마음대로 건드리지도 못하겠다. 아까 그 새끼, 다른 사람을 시키지 말고 그냥 직접 처리할 걸 그랬나. 신제가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숙여 그나마 성한 유두를 물고 쪽쪽 빨았다.

“또 대답 안 하네.”

성기를 쭉 물렸다 힘차게 처박는 움직임이 조금씩 빨라졌다. 엉덩이에 단단한 하체가 부딪쳐 올 때마다 쾌감이 차곡차곡 쌓였다. 수없이 자극당한 안쪽이 찌릿하다 못해 시큰거렸다.

“나 서운했는데.”

유건은 신제의 어깨에 매달려 정신없이 신음했다. 대답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게 아니었다. 그럴 겨를이 없는 거였다. 죽을 것 같아서 신제가 뭐라고 하는지는 들리지도 않았다.

“말해 주면 안 될까?”

“그, 그만, 그만.”

유건이 허겁지겁 손을 내려 제 안에 드나드는 성기 아랫부분을 잡았다. 질척한 기둥이 손아귀에서 미끄러지자 조금 더 힘을 주어 꼬옥 붙들었다. 이성이 개입되지 않은 행동이었다. 더 박히다간 정말 미칠 것 같아서, 이 행위를 멈춰야겠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신제의 입매가 굳었다. 이건 또 무슨 깜찍한 짓일까. 유건이 갈수록 야해진다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본인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런다는 게 더 사람을 미치게 한다. 그래도 저렇게 절박하게 구니 귀엽기도 해서 일단 멈춰 주었다.

“그만, 더 하면…… 읏.”

“더 하면?”

“죽, 을지도, 흐으, 모릅니다. 제발 그만.”

신제가 땀에 젖어 조금 색이 짙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새침하게 받아쳤다.

“내가 왜? 우리 유건이는 내 말 하나도 안 들어줬는데.”

필사적으로 막는 손을 무시하고 허리를 슬쩍 밀었다. 유건이 소스라치게 놀라 성기를 고쳐 쥐었다.

“아!”

“보고 싶었다고 해 줘.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신제는 원하는 것을 한 번에 들어주는 법이 없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곧바로 솔직하게 말하지도 않는다. 유건을 저울질하고 농락하고 기만하고,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떨어뜨린 후에야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손을 내민다. 한없이 뒤틀린 사랑법. 평생 족쇄와 목줄을 차고 우리에 갇혀 살아온 탓에 신제는 이런 방식밖에 알지 못한다.

유건 또한 감정에 지독히 서툴렀다. 신제가 없는 시간 동안 그렇게 괴로워했으면서도 정작 보고 싶었다, 서운했다는 그 한 마디를 하지 못한다. 우리가 서로를 증오하면서도 지긋지긋하게 끌리는 건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재촉하듯 다시 아래에 자극이 가해졌다. 유건은 고개를 돌려 구겨진 이불에 꾸물꾸물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신제의 시야에는 잔뜩 헝클어진 흑발과 발갛게 물든 목덜미만 보였다. 잠시 후 이불 틈으로 살짝 잠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보고 싶었습니다.”

“…….”

“우신제, 당신이 없으면…… 흐윽, 안 될 것 같아. 그러니까, 빌어먹을. 이제 좀 그만…….”

신제는 이불을 걷어 냈다. 유건은 못 할 짓이라도 한 사람처럼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온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건 이불 속에 있느라 숨이 막혔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유건이 그를 밀어내려 했다. 그 순간……. 퍽! 반쯤 물려 있던 성기가 내벽을 일시에 가르고 꽂혔다. 배꼽 저 위까지 저릿저릿했다. 잠깐 멈췄던 정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시키는 대로 말, 했잖아, 아읏! 했는데, 왜에……. 아, 아, 아!”

신제는 그만두기는커녕 움직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유건이 토막 난 신음 사이로 하염없이 그를 불렀다. 욕을 했다가, 애원했다가, 목소리에 울음기가 잔뜩 섞일 때가 되어서야 신제가 눈동자만 스르르 움직여 내려다보았다. 이미 눈은 초점이 나간 지 오래인데 입가에 습관적인 미소가 걸렸다.

“응? 왜, 자기야.”

“…….”

저 인간은 자신의 처절한 애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게 분명했다. 유건의 눈에 원망이 어렸다. 온몸에 힘이 빠지지만 않았어도, 신제의 품에 갇혀 마구 흔들리는 중만 아니었어도 저 잘난 얼굴을 한 대쯤 갈겨 주고 싶었다. 그 눈빛을 받으며 신제는 더욱 흥분했다. 눈으로는 곧 죽일 것처럼 노려보면서, 정작 몸은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아래에서 할딱할딱 울기만 하는 게 못 견디게 귀여웠다.

“당신, 읏, 진짜, 죽여 버릴 거야.”

“지금도 충분히 죽여 주고 있는데, 여기서 더?”

“으응, 잠, 까안, 흐, 아, 아아! 하악……!”

유건이 어금니를 꽉 물면서 고개를 젖혔다. 하얗게 드러난 목에 핏대가 섰다. 귓가에 이명이 들리고 모든 감각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유건은 어느 순간부턴가 구깃구깃 말아서 꽉 쥐고 있던 이불을 스르르 놓았다. 시트를 마구잡이로 밀어 대던 발끝도 뚝 멈추었다. 반쯤 감긴 눈꺼풀 아래 잔뜩 흐려져 눈물이 고인 눈동자에 신제가 비쳤다.

“아, 아…….”

한숨처럼 신음하며, 유건은 성기를 품은 엉덩이를 본능적으로 위를 향해 툭 쳐올렸다. 안에 빠듯하게 삼켜진 것이 배꼽 아래를 건드렸다. 그 순간 내벽이 꾹, 꾹, 꾹, 몇 번에 걸쳐 조여졌다. 성기가 꽉 물려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 동시에 아래에서 희멀건 액체가 튀어 올랐다.

“…….”

유건은 덜덜 떨면서 손을 뻗었다. 그때까지도 완전히 벗지 않고 허술하게 걸치고 있던 신제의 셔츠 자락이 손아귀에 잡혔다. 그는 감전된 것처럼 허리를 잘게 튕겨 올리면서 사정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차마 언어가 되지 못한 소리들이 띄엄띄엄 새어 나왔다.

신제는 그를 꼭 안고 응, 응, 그래, 착하지, 하고 연신 달래며 허리를 치댔다. 말만 나긋할 뿐 성기를 퍽퍽 찍어 올리는 움직임은 무자비하기 짝이 없었다. 유건은 남은 힘을 쥐어짜 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신제가 너무도 자연스레 그 손에 깍지를 끼고 손끝에 입을 맞추는 바람에 저항이 수포로 돌아갔다. 박자를 맞춰 조이거나 허리를 흔드는 기교 따윈 부릴 생각도 못 하고 정직하게 죄어 대기만 하는 내벽에 성기를 깊숙이 박았다. 유건이 헉, 하고 새된 숨을 뱉으며 고개를 꺾었다.

“하, 흐읏…….”

신제는 하체를 살짝 뒤로 물렸다가, 힘을 주어 밀어붙였다. 저 깊은 곳에서 정액이 울컥 터졌다. 유건 또한 내벽으로 그의 사정을 느꼈는지 숨이 넘어갈 듯 헉헉대면서 다리를 바르작거렸다. 이것까지 귀여워 보이니 중증도 이런 중증이 없다.

사정하던 도중에 성기를 빼냈다. 꿈틀거리는 기둥이 속살을 길게 긁으며 뽑혀 나왔다. 정액의 절반쯤은 유건의 안에, 절반쯤은 구멍 주변과 엉덩이 골에 난잡하게 흩뿌려졌다.

유건은 절정이 잦아든 뒤에도 한참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성기가 빠져나간 구멍에서 젤과 정액이 뒤섞여 흐르는 것도 내버려 두었다. 손 하나 깜짝할 힘조차 없었다.

픽 웃으며 유건의 뺨을 손끝으로 쓸어내리고, 신제는 침대 옆에 두었던 잔을 들어 남은 술로 목을 축였다. 유건은 초점이 풀린 눈으로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아래에 느껴지는 묵직한 압박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발갛게 부어서 희뿌연 액체를 질질 흘리는 입구에 성기를 맞추다 말고 유건의 시선을 느낀 신제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응?”

“방금 갔는데, 시키는 대로 말도 했는데, 왜, 왜 또…….”

“왜냐니, 무슨 그런 서운한 말을. 당연히 널 너무 사랑해서지.”

“정말 미쳤습니까…….”

“나 미친 거 하루 이틀 일도 아니잖아. 잘 알면서.”

“저, 이러다, 배가.”

유건은 눈물범벅이 된 눈으로 신제를 올려다보며 스스로의 아랫배를 감싸 안았다. 그는 나름대로 몹시 절박하고 진지했다. 신제의 눈에는 그저 야하고 귀여운 투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게 문제였지만.

“잔뜩 불러서, 터지면 어떡하죠?”

“음……. 이거 좀 곤란한데.”

“예?”

“그런 말 하면 더 꼴리는 거 알아요, 몰라요.”

“…….”

저 인간과 대화로 해결해 보려 한 게 잘못이었다. 어떻게든 신제에게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메웠다. 유건은 잔뜩 젖고 구겨진 이부자리 위에서 힘겹게 몸을 돌려, 신제에게 등을 보이고 무작정 침대 헤드 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몸도 제대로 못 가누면서, 손끝과 발끝까지 덜덜 떨고 있으면서도 달아나려 애쓰는 꼴을 보니 안쓰러워야 정상인데……. 오히려 흥분에 더욱 불이 붙었다. 신제의 회갈색 눈동자가 동공이 한껏 좁혀져서 색이 더 옅어진 채 유건의 움직임을 좇았다.

“배가 불러서 터질 것 같아? 내가 싸지른 것 때문에? 큰일이네. 우리 유건이 배 터지면 안 되는데. 어떻게 해 줘야 하나.”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연인처럼 속삭이고, 신제는 제 아래에서 엉금엉금 기는 유건의 배 아래에 팔을 감고 상반신을 안아 올렸다. 유건의 상반신이 말썽을 부리다 붙잡힌 강아지처럼 허공에 떴다. 숨이 턱 막혀 오는 느낌에 유건이 달랑 들린 채로 허우적거렸다.

“흐, 아읏!”

“구멍에 힘 빼야지?”

신제가 태연하게 말하며 미끈거리는 구멍에 손가락을 쑤셨다. 아랫배가 신제의 팔에 눌리고 엉덩이가 아래로 향하면서 자연스레 안에 고여 있던 것들이 줄줄 새어 나왔다. 사타구니와 허벅지를 적시는 것으로 모자라서 무릎 사이로 흘러 침대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이제 됐지?”

뒤에서부터 유건의 목덜미에 뺨을 기댄 채 신제가 조곤조곤 물었다. 그 와중에도 손가락은 안을 마구잡이로 헤집고 있다. 묽은 액체가 흐르다가 가끔씩 조금 덩어리진 것들이 투둑, 툭, 떨어졌다. 너무도 수치스러웠다.

“아직 모자라? 더 해 줘?”

곧게 선 검지와 중지가 안을 푹 찔러 올렸다. 유건이 한 박자 늦게 미친 듯이 도리질을 했다. 신제는 순순히 손가락을 빼 주었다. 대신 그 자리에 굵직한 성기가 닿았다. 언제 사정했냐는 듯 기세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며칠 동안 이 안에 싸지르고 싶은 거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못 한 만큼 해야지. 나도 우리 유건이 보고 싶었고, 너도 나 보고 싶었다며. 그럼 된 거 아니니?”

“하나, 읏, 하나도 안 됐습니다!”

“매정하긴.”

꼬리뼈와 입구 부근을 쿡쿡 찔러 대던 성기가 조금 멀어졌다. 이제 정말 그만두는 건가 싶어 안심한 순간.

“그럼 네가 넣어 볼래?”

엎드려 있던 유건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신제가 왜 그러냐는 듯 웃어 보였다.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늘어지는 와중에도 속에 천불이 났다.

“진짜, 뻔뻔한 거 아십니까.”

“왜. 내가 박는 건 이제 싫다며.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저번엔 잘만 했잖아.”

“저번 언제요?”

“그때 있잖아. 네가 새벽에 꽃 들고 찾아와서 날.”

“아니, 알 것 같습니다. 안 들어도 됩…….”

“왜 이렇게 부끄러워할까. 귀엽게.”

혼자 누워 있을 땐 지나치게 넓게 느껴지던 침대 위에 지금은 둘이었다. 마냥 서늘하고 버석하기만 하던 이불이 두 사람의 체온에 데워졌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하도 쥐어짜여서 더 이상 흥분할 것도 없다 여겼던 성기에 열이 다시 몰렸다.

유건은 이를 악물고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로 간신히 침대를 짚었다. 이 지경이 되도록 사람을 혹사시켜 놓고 또 섹스를 요구하는 신제도 비정상이었지만 결국 그에게 넘어가고 마는 자신도 비정상이었다.

한 손으로 침대 헤드를 짚고, 다른 손을 뒤로 더듬더듬 뻗어 신제의 성기를 쥐었다. 기둥을 타고 흘러내린 정액이 고스란히 손아귀에 고였다. 성기의 위치를 맞춘 채 엉덩이를 뒤로 살짝 밀었다. 구멍에 뻐근한 압력이 느껴졌다. 다시, 이번엔 좀 더 힘을 실어서.

“흐윽…….”

모양 좋은 엉덩이 사이, 산호색으로 물든 구멍이 힘겹게 벌어져 귀두를 물었다. 제일 굵은 끄트머리를 넣고 나니 다음은 비교적 쉬웠다. 숨을 고르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엉덩이를 밀어붙이자 조금씩 더 들어갔다.

삽입은 몹시도 더뎠다. 울퉁불퉁하게 핏줄이 돋은 부분이 내벽에 턱 걸릴 때마다 유건은 목구멍부터 아래까지 꿰뚫린 사람처럼 괴롭게 헐떡였다. 끙끙 앓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겨우 몇 센티쯤 넣은 걸 도로 빼내기도 했다.

신제가 거들어 주자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허리를 힘주어 퍽 밀기만 하면 남은 기둥이 쑤셔 박힐 테니까.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욕망으로 짐승처럼 거칠어지는 숨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삽입되는 광경을 응시했다.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을 것 같던 좁은 내벽에 점차 끈적한 길이 났다. 좆이 타의에 의해 삼켜지는 느낌. 아찔했다.

“유건아.”

허리를 감싸 쥔 채 엄지로 골반뼈가 튀어나온 부분을 살살 문질러 주며, 신제가 흥분 섞인 웃음기를 담아 속삭였다.

“나 따먹으니까……. 좋아?”

그 말에 스위치라도 눌린 것처럼 배 속이 확 달아올랐다. 내벽이 갑자기 민감해져서, 이제 절반 이상 삽입된 성기가 몹시도 버겁게 느껴졌다. 유건은 침대 헤드를 지지대 삼아 성기를 먹다 말고 신음했다.

“으응… 하, 윽!”

“아……. 갑자기 꽉 무는 거 봐. 그렇게 좋아?”

침대 헤드를 목숨 줄처럼 움켜쥐고 있던 손에 순간 힘이 풀렸다. 깜짝 놀라 급하게 다시 힘을 주었지만 손아귀가 조금 미끄러지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뒤쪽으로 체중이 실리면서, 푹……. 성기가 깊숙이 박혔다. 엉덩이 살이 뒤에 있는 남자의 단단한 치골에 닿아 눌렸다.

“아!”

어정쩡하게 무릎을 꿇은 자세로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유건의 어깨와 등, 허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숨을 고르는 것만으로도 벅찬지 헉헉대면서 아래로 성기를 빠듯하게 물었다 놓았다.

“좋, 흐으, 좋…… 아.”

“그래? 원하는 만큼 따먹을 수 있게 얌전히 대 주고 있어야겠네.”

“그러, 는, 읏.”

“응?”

“그러는 당신은…….”

유건이 고개를 돌렸다. 감당하기 어려운 쾌락과 고통에 일그러진, 하지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신제를 곧게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

“좋아?”

한순간 신제는 호흡을 잊었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제 성기에 박힌 채 힘겹게 버티는 유건을 응시했다. 그의 침묵이 길어지자 당황한 유건이 고개를 푹 숙였다.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는 생각에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제대로 들은 적…… 없는 것, 같아서…….”

신제는 변명처럼 어물어물 새어 나오는 서툰 말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야 무표정한 얼굴에 봄이 만개하듯 화사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침대 헤드 끄트머리를 붙들고 겨우 버티는 유건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겹쳐 손깍지를 낀 채 끌어 내렸다.

“응, 자기야. 나도 좋아…… 나도, 사랑해.”

얌전히 있던 하반신을 뒤로 물렸다가 쾅 때려 박자 유건이 신음을 터뜨리며 아래를 확 조였다. 그 모습조차 귀여워서 빨개진 귓바퀴에 입을 쪽쪽 맞춰 주었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무의식적인 건지, 깍지를 낀 채 아래에 깔려 있던 유건의 손이 신제의 손가락을 마디마디 얽어 힘껏 끌어 내렸다.

음습한 무언가가 섞인 불순물투성이의 애정이 벅차게 피어올랐다. 오랜 결핍에 익숙해져 이런 식으로밖에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는 우리. 사랑하고 증오하는, 나의……. 신제는 눈을 감고 품 안 가득 온기를 끌어안았다. 환한 대낮에 어울리지 않는 짙은 술 향기와, 그 위에 얹힌 신음이 다시금 침실 안을 메웠다.



〈Liquid Lunch〉 끝

Ad Astra

유건은 이불을 고치처럼 칭칭 두르고 얼굴을 베개에 비스듬히 파묻은 자세로 자고 있었다. 자기 베개를 베는 것만으로 모자라 옆에 놓인 신제 몫의 베개를 양팔로 꼭 껴안은 채였다. 그 베개가 진짜 신제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뺨 위로 청명한 햇살이 번졌다. 감은 눈꺼풀 너머가 하얗게 물드는 느낌에 의식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잘 잤어요?”

머리 위에서 사근사근한 음성이 들렸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유건은 이불을 전신에 감은 모습 그대로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꾸물꾸물 굴러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맡에 걸터앉은 다리에 이마가 툭 부딪쳤다.

“유건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긴 한데……. 잘 모르겠고 그냥 더 자고 싶었다. 마침 바로 앞에 벨 만한 것이 있었다. 유건은 눈도 못 뜬 채 잔뜩 인상을 쓰며 허벅지에 머리를 올려놓았다. 허벅지는 베고 자기에는 좀 높고 단단해서 불편했다. 유건은 조금이라도 더 편한 자리를 찾아 안쪽으로, 더 안쪽으로 움직였다. 긴 손가락이 이불에 반쯤 가려진 그의 뺨을 톡 건드렸다.

“내 가이드는 참 적극적이네. 일어나자마자 눈도 못 뜨면서 이것부터 찾고.”

“…….”

“내 거 빠는 꿈이라도 꿨어요? 아니면 그냥 지금 빨고 싶어서 그래?”

태연하게 던지는 말에 잠이 확 깼다. 등골이 다 서늘했다. 유건은 찡그린 눈가를 손등으로 비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둘둘 말려 있던 이불이 흘러내리고, 마구 헝클어진 새까만 머리칼이 드러났다. 한껏 찌푸려져서 다소 사나워 보이는 눈매와 대조되는 허술한 모습이었다. 스스로 잠버릇이 험하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는데, 단체 생활을 할 때도 한 번도 지적받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자고 일어날 때마다 머리가 까치집이 된다.

이리저리 뻗친 머리 중에서도 정수리 부근의 머리칼 한 움큼이 유독 삐죽 솟았다. 유건은 잠을 쫓으려 고개를 흔들고 마른세수를 했다. 솟아오른 머리칼 또한 그의 움직임에 따라 사락사락 흔들렸다. 그러다 그가 침대에 걸터앉아 멍한 눈으로 허공을 보기만 하자 조금 차분해졌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상당히 웃긴 광경이었다. 아니, 본인이 전혀 모른다는 점에서 더욱 웃겼다.

“풋.”

참고 있던 웃음이 터졌다.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 유건의 이목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아직 잠이 덜 깨 멍한 정신으로 올려다보았다. 신제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그를 지켜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한 손에는 커피 잔을 든 채였다. 신제의 어깨 너머, 그가 조금 전 열어 둔 커튼 사이로 햇살이 가득 들이쳤다.

“제가 늦잠을…….”

말을 하던 중에 유건은 신제의 시선이 여전히 자신에게 머물러 있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스스로를 내려다보았다. 잠옷으로 입고 있던 티셔츠 한쪽이 구깃구깃 말려 올라가 있었다. 하필 그 아래 입은 반바지까지 좀 헐렁한 사이즈였다. 옆구리의 맨살과 속옷 밴드 일부가 조심성 없이 드러나 보였다.

“…….”

뒤늦게 부끄러워졌다. 자신은 이렇게 꼬질꼬질한데, 신제는 화보에서 갓 튀어나온 것처럼 세련된 차림이라는 사실이 더욱 수치심에 불을 지폈다. 저 인간은 잠도 안 자나. 하기야 신제는 자고 있을 때조차도 예쁘긴 했다. 천사 같은 얼굴로 눈을 감고, 그 흔한 뒤척임 한 번 없이 곱게 잤다. 애써 덤덤한 척 티셔츠 자락을 잡아 내리며 물었다.

“제가 늦잠을 잤습니까?”

“하도 귀엽게 자길래 얼마든지 더 자게 두고 싶었는데, 아침은 먹이고 재워야 할 것 같아서.”

“그 귀엽단 말 좀 안 하시면 안 됩니까? 저 같은 게 대체 어디가.”

저 귀엽다는 말은 아무리 들어도 적응할 수가 없다. 자신과는 너무도 관련이 없는 말이라 오히려 비웃는 것처럼 느껴진다. 차라리 신제가 스스로를 가리켜 귀엽다고 했으면 이보다는 덜 당황스러울 것이다. 신제는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유건은 뻑뻑한 눈가를 문질렀다. 깬 지 좀 지났는데도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욕실에 가서 찬물에 세수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신제가 그를 번쩍 들어 자신의 무릎에 올려놓더니 이불까지 둘둘 감아 주었다. 유건은 졸지에 잘 말린 김밥 같은 몰골이 되어 신제의 품에 안겼다.

“어제 언제 잤어요?”

“많이 늦진 않았습니다.”

“몇 시.”

“3시…….”

거기까지 말하고 신제의 눈치를 한 번 살폈다가 덧붙였다. 늦게 잔 게 잘못은 아닌데 어째 죄를 고하는 기분이었다.

“3시 반요.”

“나 안 들어오는 날이면 매번 이러지. 자장가라도 불러서 재워 놓고 나가야 하나.”

“잠이 안 와서.”

“오늘 나랑 약속한 것 때문에?”

“예. 부모님 찾아뵌 지가 너무 오래돼서……. 형도 그렇고요.”

희성의 시신은 결국 화장했다. 유골은 부모님을 모신 납골당에 함께 안치하기로 했다. 죽어서나마 가족끼리 만나게 해 주고 싶었던 유건의 뜻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장애물이 나타났다. 심연화 현상으로 전국 곳곳이 쑥대밭이 되면서 납골당이 있는 지역까지 출입 통제 구역으로 지정된 것이다. 그러다 며칠 전 드디어 납골당 일대의 정리 작업이 끝나고 통제가 해제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오늘은 오랜 기다림 끝에 유건이 가족들을 만나러 가는 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싱숭생숭해하는 것 같긴 했지만 잠까지 설칠 정도일 줄은 몰랐다.

죽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 신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다. 하지만 잔뜩 들뜬 유건이 귀엽다는 감정만은 생생히 알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3시 반까지 뭐 했어. 또 공부하다 늦게 잤어요?”

유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그에게는 총기 손질도 큐브 맞추기도 아닌 다른 취미가 생겼다. 신제가 보던 책 몇 권만 있던 거실 테이블에 알록달록한 새 책들이 한가득 쌓였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과정까지의 교재들이었다.

지난 새벽에도 늦게까지 책을 보다 잠들었다. 유건은 모르는 게 나왔다고 재깍 답을 찾아보는 성격이 아니었다. 미련할 정도로 같은 부분을 보고 또 봤다. 몇 시간을 꼼짝도 않고 책을 노려보는 시선이 비장하다 못해 살벌했다. 그러다 정 좀이 쑤시면 몸을 움직였다. 그 와중에도 공부는 멈추지 않았다. 신제가 그를 위해 아예 집에 운동 전용 방을 따로 만들어 줘서, 한쪽에 책을 펴 둔 채로 아령을 들거나 팔굽혀펴기를 할 수 있었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공부와는 무관하게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흥미가 생긴 건 아니었다. 공부는 자신이 아니라 형이 잘하는 분야였다. 원래도 그는 가만히 앉아서 글자만 읽는 것보다 직접 몸을 움직이는 쪽이 성미에 맞았고, 지금도 팔자에도 없는 짓을 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기초가 쌓여 있지 않으니 더 힘들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책장을 넘기는 이유는.

“이제 세상이 바뀌었으니까, 계속 공부하다 보면 대학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언젠가 희성이 했던 말이다. 세상에서 변이종이 모두 없어지고 각성자들도 원래대로 돌아오게 되면, 수능을 봐서 대학에 가고 싶다고. 그때 유건은 어떻게 반응했던가. 그런 상상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며 대충 흘려 넘겼던 것 같다. 그에게는 수능이니 대학이니 하는 뜬구름 잡는 소리보다 당장 그날그날의 전투에서 살아남는 일이 더 절박했으므로.

하지만 지금 세상은 희성의 말대로 변하고 있다. 늘 부정적인 소리를 하고 짜증만 내던 희성이 그때만은 희망으로 눈을 빛내며 꿈을 털어놓았다. 모든 게 아웃브레이크 이전으로 조금씩 돌아갈수록 그가 했던 말이 가슴 한구석에 가시처럼 박혀 빠지지 않는다.

형의 꿈을 대신 이루겠다니. 결국은 때늦은 자기 위안이다. 세상을 떠난 희성이 유건을 본다면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시도는 해 보고 싶었다.

“절 받아 주는 대학이 있어야겠지만요.”

유건은 멋쩍게 목뒤를 문질렀다. 대학이니 어쩌니 해도 성적이 따라 주지 않으면 김칫국 마시는 소리일 뿐이다.

“집에만 있는 게 심심해서 그런 거면 일을 하는 방법도 있지 않나? 우리 백유건 가이드, 어딜 가도 환영받을 텐데.”

“예?”

“인력이 부족해요. 게이트는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는데 각성자들 수가 너무 많이 줄었거든. 죽은 사람도 있고, 능력을 잃었거나 은퇴한 사람도 있고.”

마자로스가 소멸한 이후에도 신제가 하루가 멀다 하고 자리를 비우는 이유였다. 말로는 이제 자신은 에레혼의 단장이 아니고 헌터도 아니라고 하지만 세상은 아직 그를 필요로 했다.

“원한다면 레이드에 데려가 줄 수 있어요. 물론 마음 같아선 어디에도 내돌리고 싶지 않지만.”

“전 됐습니다.”

“왜?”

“이젠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아서요. 다른 사람의 가이드로 살고 싶지도 않고…….”

신제는 입을 다물고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가끔 이런 때가 있다. 평소에는 얄미울 정도로 유창한 언변을 자랑하던 남자가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침묵할 때. 저것이 아마도 가볍게 던지는 능글맞은 농담과 웃음을 모두 덜어 낸 후에 드러난 신제의 민얼굴일 것이다. 그 시선에 어쩐지 목이 탔다. 유건은 고개를 돌리며 말을 맺었다.

“제가 가이딩하는 건 당신만으로 충분합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붙어먹는 건 싫다는 뜻?”

“예?”

“나도 그래요. 예나 지금이나 나한텐 백유건 가이드밖에 없는걸? 말했잖아요, 조신한 남자라니까.”

“당신 하나 감당하기도 벅차서 다른 사람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단 뜻인데요.”

“그 뜻이 그 뜻이잖아.”

“다릅니다. 많이요.”

“솔직하지 못하긴. 내 가이드는 수줍음이 너무 많아. 그런 점이 또 귀엽지만.”

신제는 손끝으로 잔뜩 헝클어진 유건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앞머리를 살짝 쓸어 넘기고 드러난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유건은 작게 인상을 썼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우리 유건이 머리에 새싹이 났네.”

머리 위로 삐죽 솟은 머리칼을 톡톡 건드리며 일렀다.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웃음기가 스몄다. 뒤늦게 신제가 자신의 머리를 가지고 놀렸음을 알아챈 유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씻고 오겠습니다.”

유건은 이불을 걷어치우고 벌떡 일어나 욕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까치집이 된 머리를 한 손으로 거칠게 흐트러트리면서.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신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 * *


샤워를 마친 유건이 욕실에서 나왔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갈아입을 옷을 꺼내러 가다 흠칫했다. 텅 비어 있어야 할 침대에 누운 신제를 발견한 탓이다. 김이 폴폴 피어오르던 커피 잔은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채 식어 가고 있다.

“아…….”

공을 물어 왔더니 주인이 보이지 않아 당황한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다가, 유건은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걸었다.

에레혼에 있을 때는 신제가 잠든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신제뿐만 아니라 1팀의 다른 사람들도 그랬다. 게이트 공략이 길어지면 몇 주 단위로 밤을 새워 가며 싸웠다. 일반인에 비해 에너지 소모량이 어마어마한 까닭에 식사는 그나마 비교적 잘 챙겼지만, 그조차도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땐 아예 쭉 걸렀다. 어차피 부상은 자체 치유력으로 낫고 통증은 마약이나 가이딩으로 때우면 되니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모두가 당장 내일 죽어도 상관없는 것처럼 살았다.

마지막 전투 이후 신제는 잠이 늘었다. 정사 후 유건이 곯아떨어지는 것만 확인하고 자리를 뜨던 전과 달리, 이제는 그의 옆에 누워 아침까지 함께 눈을 붙였다. 할 일 없는 무료한 오후에는 유건을 안고 소파에서 뒹굴다 낮잠을 자기도 했다. 어제는 오후에 호출을 받고 나갔다가 밤을 꼬박 새우고 오늘 아침에 들어왔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깨울까, 말까. 이따 납골당에 가기로 했는데 늦을지도 모르니 깨울까? 아니, 역시 안 깨워도 될 것 같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니까. 그렇게 결론짓고 침대 귀퉁이에 슬쩍 몸을 실었다. 스스로의 팔을 베고 모로 누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어정쩡한 거리에서 신제를 관찰했다.

그는 고개를 살짝 틀고 입을 자연스레 다문 채 너무도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누워 있느라 살짝 구겨진 셔츠와 가르마를 따라 흐트러진 앞머리마저도 그림 같았다. 아침의 눈부신 햇살이 그가 입은 흰 셔츠를 더욱 희게 물들였다.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잠자는 숲속의……. 뭐였더라. 물론 저주에 걸려 긴 잠에 빠진 동화 속 주인공과 신제는 다른 점이 너무도 많았다. 일단 성별부터가 다르고, 체격이 몹시도 건장하며, 저주에 당하기는커녕 저주를 건 사람을 단번에 으스러뜨릴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그래도 키스하고 싶게 생겼다는 점에서는 닮지 않았는가.

저도 모르게 조금씩 간격을 좁혔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덧 속눈썹에 뽀얗게 내려앉은 햇살이 보이는 거리까지 다가가 있었다. 멈춰야 한다고 머리로는 생각했다. 이러다 그가 기척을 느끼고 깨기라도 하면 또 잔뜩 놀림받을 테니까.

하지만 바로 앞에 보이는 모습이 지나치게 매혹적이었다. 그의 잠든 얼굴은 늘 묘한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뜰에 야생화가 가득하던 그 저택에서도, 지금도. 유건은 마른침을 삼키고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조금만 만져 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깨지 않도록 아주 살짝만 만지면.

톡. 손끝이 신제의 뺨에 닿았다. 그는 다행히 깨지 않았다. 생긴 게 하도 도자기 인형 같아서 만지면 차갑고 단단하지 않을까 했는데, 그의 체온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신제와 수없이 눈을 마주하고 대화하고 살을 맞대 왔으면서, 그가 심장이 뛰고 더운 피가 흐르는 산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절절히 실감했으면서 유건은 아직도 종종 신기했다. 신제도 그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빛을 머금은 속눈썹이 꼭 은실로 짠 것 같았다. 그에 비해 자신의 손은 흉터와 굳은살이 있어 투박했다. 꼭 흙발로 정결한 성지를 짓밟는 무뢰한이 된 기분이었다. 저 속눈썹을 함부로 건드리는 순간 지금의 평화가 와르르 무너져 버릴 것 같아 차마 손을 댈 수 없었다.

충동이 불쑥 일었다. 저 품속으로 기어들어 가 볼까? 너른 가슴을 양팔로 껴안고 목덜미에 뺨을 비벼 볼까? 하지만 그랬다간 기척에 예민한 남자는 곧바로 깰 것이다. 그래서 손을 입가로 내렸다. 손끝이 살짝 다물린 입술을 스쳤다. 신제의 입술. 독이라도 바른 듯 잔인한 말만 속삭이던. 저 입을 틀어막아 버리고 싶다고 수도 없이 생각했는데.

“…….”

유건은 뺨을 만지던 것을 멈추고 얼굴을 가까이 했다. 새까만 눈동자에 홀린 듯 신제만을 담으면서. 자신이 어느 순간부턴가 숨을 쉬지 않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머뭇머뭇 다가간 입술이 잠든 이의 입술에 닿으려는 찰나.

지이잉, 지잉……. 진동 소리가 정적을 깼다. 유건은 필요 이상으로 놀라 고개를 확 물렸다. 진동의 근원지는 신제의 휴대폰이었다. 커피 잔 옆에 놓아둔 휴대폰에 통화 알림이 떠 있었다.

이대로라면 신제가 깰 테고, 그러면 조금 전까지 하고 있던 짓을 들킬지도 모른다.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유건은 휴대폰을 낚아채 침대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거기까진 좋았다. 손가락이 액정에 길게 문질러지는 바람에 통화 버튼을 눌러 버리지만 않았다면.

1초, 2초, 3초. 액정에 뜬 통화 시간이 늘어났다. 상대방이 신제를 찾고 있는 건지 스피커가 미세하게 웅웅거렸다. 번호가 저장되어 있지 않아서 누구에게서 온 전화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망했다. 유건의 머릿속에 세 글자가 커다랗게 떠올랐다.

“여보…… 여보세요.”

일단은 대신 받아서 뭐라도 둘러대야 할 것 같았다. 어쨌든 신제에게 직접 걸려 올 정도면 중요한 전화일 텐데, 받자마자 끊어 버리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 …….

스피커 저편에서 웅웅대던 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전화를 받은 사람이 신제가 아니어서 당황한 것일까. 유건은 목을 가다듬고 물었다.

“여보세요? 전화 대신 받았습니다. 우신제 단장님께 연락 주셨습니까?”

대답은 그로부터 조금 더 지난 후에 돌아왔다.

- ……백유건 가이드.

차분하고 무뚝뚝한 남자의 저음이, 어째서인지 꽉 잠겨 있었다. 유건 또한 잠시 말을 잃었다.

“부단장님?”

귓가에서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 오랜만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태인은 딱 한마디만을 전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유건과 평생 두 번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별로 달갑지도 깨끗하지도 않았던 우리의 악연은 여기서 끝내자고 선을 긋는 것처럼. 그랬던 사람이 스피커 너머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오랜만이라는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예.”

- 단장님께서는 부재중이십니까?

예나 지금이나 둘 다 말재주가 없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웠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유건은 덤덤함을 가장하여 짧게 답했다. 태인 또한 평정을 잃었던 게 거짓말처럼 본론으로 돌아왔다.

“아뇨. 계십니다.”

- 계신다고요.

“계시는데, 지금은 좀.”

태인은 다시금 한숨을 쉬었다. 그 뒤로 흘러나온 말은 유건이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작았다.

- 당신이 받을 줄 알았다면 애초에 걸지 말 걸 그랬어.

“부단장님?”

- 아닙니다.

“…….”

- 근처에 계시는데 통화를 못 할 사정이라면……. 단장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그게 아니라.”

말이 도중에 끊겼다. 뒤에서 뻗어 나온 팔이 그의 허리를 감싸 당긴 까닭이다. 유건은 헛숨을 삼켰다. 힘이 빠진 손에서 한창 통화 중인 휴대폰이 떨어졌다.

“네, 태인 씨. 나도 유건이도 아무 일 없으니까 태인 씨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놓쳐 버린 휴대폰을 신제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 들었다. 그는 한 팔로 유건을 안은 채 누운 것도 앉은 것도 아닌 자세로 통화를 이어 갔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좀 더 나른했다.

“아…… 그래요, 그거. 오늘 마무리하죠.”

탄탄한 팔이 허리를 빈틈없이 감고 있어 불편했다. 놔 달라는 뜻으로 꼬물거리자 힘이 더욱 강해졌다. 유건은 저항을 포기하고 신제를 올려다보았다. 눈을 내리깔고 통화에 집중하는 그의 속눈썹이 느리게 팔랑였다. 아까는 얌전히 있던 것이 움직이기까지 하니 더욱 시선을 잡아끌었다.

“다른 특이 사항은? 음, 일단 알았어요. 이따 모이면 장소만 알려 주고.”

시선을 느꼈는지 신제가 눈만 굴려 이쪽을 보았다. 그는 보란 듯이 눈웃음을 치며 윙크를 해 보였다. 유건은 못 볼 것을 봤다는 얼굴로 고개를 확 돌렸다. 그 탓에 신제가 픽 웃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유건이가 내 전화 대신 받는 일 없을 거예요. 내 가이드 목소리 누구 좋으라고 함부로 들려줘.”

몇 마디 더 오고 가다가 곧 통화가 끊겼다. 신제는 화면이 꺼진 휴대폰을 아무 데나 던지고 뒤에서부터 유건을 끌어안은 채 누웠다. 아직 살짝 물기가 남은 흑발을 코끝으로 건드리다 목덜미에 잘게 입을 맞추었다.

“샴푸 새로 사 놓은 거 썼어요? 향이 좋네.”

유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종종 샴푸와 보디워시와 폼클렌징을 헷갈린다. 샴푸가 새건지 아닌지 알아볼 턱이 없다. 그냥 있는 걸 대충 썼을 뿐.

“저, 아까는.”

“응?”

“아까 그 전화요.”

“유건아, 만세.”

얼떨결에 신제가 시키는 대로 팔을 올렸다. 입고 있던 티셔츠가 순식간에 위로 쑥 벗겨져 나갔다. 유건은 머리가 헝클어진 채로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멍하니 있기만 했다.

“무슨 일, 읏.”

이번엔 아래였다. 바지와 속옷이 동시에 끌려 내려가 한쪽 발목에 걸렸다. 유건은 신제의 손에 의해 알몸이 되는 와중에도 꿋꿋이 물었다.

“무슨 일이었습니까?”

“뭐가요?”

“중요한 일 아닙니까?”

“글쎄……. 지금 너 만지는 게 더 중요해서.”

“에레혼에 관한 일인가요? 부단장님께서 직접 연락하실 정도면.”

“에레혼? 부단장? 그게 뭐더라?”

“이따 모인다니, 그건 또 무슨…… 아.”

신제의 손이 다리 사이에 불쑥 파고들었다. 아까의 전화에 온 신경이 쏠려 있는데 신제가 자꾸 방해하니 짜증이 났다. 유건은 인상을 쓰며 고개를 이리저리 저었다. 자신도 모르게 칭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으으응.”

“왜에.”

그에 장단을 맞춰 주듯 똑같이 말끝을 늘이며, 신제는 냉큼 성기를 감싸 쥐었다. 유건 특유의 분유 같기도 하고 비누 같기도 한 체향에 보디워시 향이 섞였다. 가만히 두고 보기만 해도 향긋한데, 만지면 가이딩까지 흐른다. 마음 같아선 온종일 껴안고 놓아주고 싶지 않다.

“왜 하나도 대답 안 해 주십니까?”

“그러는 넌 왜 멋대로 그 사람이랑 얘기했어? 그쪽에서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할 게 뻔한데.”

“그건…….”

“이래서 다른 놈들한테 내보이기 싫었던 거야.”

이제껏 그는 유건이 눈치채지 못하는 선에서 그와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차단했다. 아직 서울이 완전히 안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건을 며칠씩 집에 홀로 둘지언정 절대 데리고 나가지 않았다. 휴대폰에도 자신의 번호 외에 다른 연락처는 입력해 주지 않았고, 유건의 연락처 또한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기어이 허를 찔렸다. 신제는 유건의 어깨에 입술을 묻고 피어오르는 짜증을 삼켰다.

“허락 없이 전화를 받은 건 죄송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저랑 납골당에 가기로 하셨는데.”

눈매를 찡그리며 고민하던 유건이 결국 사과했다. 옷이 다 벗겨져서 폭 안겨 있는 주제에 말투만큼은 진지하고 딱딱하기 그지없다. 말만 들으면 상관에게 보고하는 군인인 줄 알겠다.

“그렇게 궁금해? 그 일이 뭔지. 말해 줬으면 좋겠어?”

“네.”

“그러면, 유건아.”

성기를 쥔 신제의 손이 은근하게 움직였다. 다른 손은 위로 올라와 젖꼭지를 건드린다. 유건은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파악했다. 지금 이 상황, 좀 위험한 거 아닌가.

“내 좆 꽂고 있자. 내가 말해 줄 마음이 들 때까지.”

젖꼭지를 문지르고 튕기던 손을 유건의 입술에 밀어 넣었다. 따뜻하고 말캉한 안을 헤집으며 손마디를 마음껏 적셨다. 흠뻑 젖은 손가락을 빼내 엉덩이 사이로 찔러 넣었다. 다른 손으로는 성기를 주무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

“막 씻고 나와서 그런가. 입 안도 그렇고 여기도 그렇고, 평소보다 더 부드럽네. 혹시 샤워할 때 여기 안까지 풀고 왔어?”

“그럴 리가…… 아, 그, 그만!”

“그만은 무슨. 좋은가 본데? 여기 봐, 금방 섰잖아.”

몸을 이리저리 틀며 피하는 유건을 뒤에서부터 끌어안아 붙잡았다. 씰룩거리는 내벽을 쑤셔 주자 한층 몸부림이 거세졌다. 너른 침대 위에서 두 쌍의 다리가 장난치듯 뒤엉키며 시트에 주름을 만들었다. 유건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돌아보았다. 그새 눈가가 좀 붉어졌다.

“아까 그 일.”

“응, 그 일.”

“말해 준다는 거 핑계였죠?”

“글쎄?”

“다 핑계고 처음부터 이러려고…….”

“이제 알았어? 우리 유건이, 어쩌나. 총 쏘고 칼 휘두를 줄만 알았지 이런 쪽으로는 눈치가 전혀 없어서.”

신제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눈매를 늘어뜨렸다.

“……그러니까 나 같은 거한테 걸려서 인생 망쳤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뭉툭한 것이 엉덩이 골을 밀어 올렸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숨을 삼켰다. 아랫배에도 바짝 힘이 들어갔다. 숱한 경험을 통해 학습된 반응이었다.

“아윽!”

신제는 한 손을 펼쳐 유건의 아랫배를 덮은 채 성기를 조금씩 밀어 넣었다. 내벽의 반응을 성기뿐만 아니라 손바닥으로도 낱낱이 확인하겠다는 듯. 신제는 유건보다 체온이 조금 높은 편이다. 아랫배 전체가 홧홧했다.

얇은 뱃가죽과 근육을 사이에 두고 신제의 성기와 손바닥이 거의 닿아 있었다. 꾸역꾸역 밀고 올라오는 성기가 버거워 아래를 조금 움찔거리기라도 하면 손바닥에 고스란히 전해질 것이다. 그것을 의식하자 안쪽의 감각이 걷잡을 수 없이 예민해졌다. 힘을 주지 않으려 애를 쓰니 오히려 힘이 더 들어갔다.

“흐, 읍.”

유건이 고개를 젖혀 뒷머리를 신제의 목덜미에 툭 기댔다. 마른침을 삼키자 목젖이 오르내렸다. 몸 안에 난 비좁은 틈이 타인에 의해 억지로 벌려지고 메워지는 감각은 몇 번을 겪어도 적응하기 힘들다. 여기저기 쑤셔 대던 성기가 결국 내벽을 뚫고 피를 뒤집어쓴 채 몸 안 전체를 휘젓는 환각이 악몽처럼 어른거린다.

느리고 집요하게 파고들던 성기가 안쪽 어딘가에 턱 부딪혔다. 충격으로 하복부 전체가 찡하게 울렸다. 유건이 입술을 깨물며 아래를 꽉 조였다.

“아…….”

신제 또한 가만히 신음했다. 귓가를 찌르르하게 훑는 남자의 낮은 신음이 몹시도 선정적이었다. 그는 긴 숨을 내쉬고 물러섰다.

“어째 한 번에 다 박게 해 주는 법이 없네.”

“네…… 읏, 네에?”

유건이 멍하게 대답했다. 이미 눈이 다 풀렸다.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한 게 분명하다. 신제는 소리 없이 웃었다.

“네 안도 꼭 너 닮았다고.”

달래듯 유건의 성기를 쓸어 주면서 각도를 살짝 바꿔 다시 허리를 밀었다. 결코 서두르지 않고 아주, 아주 천천히. 뻐근하게 벌어진 뒤가 아니라면 섹스 중이라는 사실마저 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엉덩이에 신제의 하체가 툭 부딪쳐 왔다.

유건이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제 아랫배를 감싼 신제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얹은 채. 숨을 조금이라도 깊이 들이마실라치면 내벽이 빠듯하게 조여져서, 심호흡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이려나.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이어질 자극에 대비했다. 하지만 배꼽 위까지 비스듬하게 처박힌 성기는 다시 빠져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존재를 잊지 말라는 듯 간헐적으로 꿈틀거릴 뿐. 삽입에 익숙해질 시간을 주려는 거라 하기에도 이미 너무 오래 지났다.

뭔가 이상했다. 혼자 신제의 손을 붙들고 끙끙거리다 말고, 유건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자신의 관자놀이에 뺨을 기댄 채 너무도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는 신제를.

“…….”

맥이 탁 풀렸다. 설마 이대로 자는 건 아니겠지? 숨도 못 쉬게 깊이 박아 놓고? 미친 건가?

“저…….”

꽉 잠긴 목소리로 신제를 불렀다. 아랫배를 덮은 큼직한 손등을 툭툭 건드려 보기도 했다. 하지만 신제는 요지부동이었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집중하자 색색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아흐, 윽, 아!”

몸을 비틀어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해 보았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성기를 촘촘히 감싸고 있던 속살에 자극이 가해져서 더 괴롭기만 했다.

“주무실 거면, 이건 빼고……. 제발 좀 일어나…… 헉.”

신제가 잠들었는데도 그의 성기는 도무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리저리 들썩일수록 더욱 커지는 것 같았다. 숨이 막히다 못해 헛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도 방치된 성기에서는 투명한 액이 뚝뚝 흘렀다.

“씨발……. 흐읏, 빌어먹을 우신제.”

유건은 잠든 이의 품에 갇힌 채 이를 갈았다. 성기를 빼는 게 어렵다면 허리를 휘감은 이 팔이라도 풀고 싶은데, 신제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발뒤꿈치로 신제의 종아리와 발등을 꾹꾹 눌러 봐도 결과는 같았다. 맨등에 문질러지는 가슴 근육이 몹시도 탄탄해서 괜히 짜증이 났다.

이럴 때마다 실감한다. 신제는 유건을 다룰 때 사소한 곳에까지 하나하나 힘 조절을 하고 있었다. 유건이 떠미는 대로 밀려나고, 멱살을 쥐고 당기면 순순히 딸려 오는 것. 모두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었다.

신체 능력이 일반인과 다름없는 가이드, 그리고 S급 각성자. 둘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격차가 있었다. 신제가 그러고자 마음만 먹으면 유건쯤은 얼마든지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눈을 깜빡이는 것만큼이나 쉽게.

홀로 절박한 사투를 벌인 끝에 유건은 탈출을 포기하고 늘어졌다. 깨워도 안 일어나고 밀려도 안 밀릴 거면 절륜하지나 말던가. 이 망할 인간은 어째 정력까지 지나치게 좋았다. 굵직한 성기를 품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고 내벽이 찌릿찌릿 울렸다.

“하아…….”

유건은 몸을 둥글게 웅크린 채 열기 어린 숨을 토했다. 눈을 질끈 감고 버티는 모습이 마치 고문이라도 당하는 것 같다. 방금 감고 말려서 보송보송하던 머리칼은 땀으로 다시 젖고, 귀와 뺨이 온통 붉었다.

최대한 성감이 덜 오르는 자세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잔뜩 긴장한 내벽은 아주 작은 자극에도 화들짝 놀라서 성기를 꽉꽉 씹어 댔다. 그때마다 아랫배에서부터 시작해 손끝과 발끝까지 퍼지는 쾌감을 홀로 견뎌야 했다.

이러다간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결국 제 성기에 손을 뻗었다. 끝을 모르고 치솟는 열기만이라도 해소하면 좀 낫지 않을까 싶었다. 쿠퍼액은 한두 방울 맺히는 수준이 아니라 벌써 질질 흘러서 기둥을 죄다 적시고 있었다.

“흐, 으…… 으응.”

그는 뒤에 성기를 깊숙이 꽂은 채 자위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혹시나 이러는 꼴을 신제에게 들킨다면 몹시 수치스러울 거란 자각은 있어서 최대한 신음을 죽인 채였다. 스스로의 것을 감싸 쥐고 위아래로 탁탁 흔드는 손길이 서툴렀다.

은근한 자극이 끊임없이 주어져서 괴롭던 차에 본격적으로 성기를 흔들자 눈물이 날 만큼 좋았다. 유건은 들키면 안 된다고 다짐하던 것조차 잊고 조금씩 쾌감에 도취되었다. 신음이 점점 높아지고 꼭 모은 허벅지 사이가 땀으로 미끈거렸다. 신제의 따뜻한 손에 감싸인 아랫배에도 마찬가지로 땀이 배었다.

“읏, 아, 아아, 아!”

유건은 어느 순간부턴가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성기 뿌리에 대고 이리저리 밀어붙이고 있었다. 잔뜩 달아오른 내벽은 뭉툭한 귀두로 꾹꾹 눌러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앞뒤로 자극이 가해지자 쾌감이 빠르게 차올랐다.

이제 몇 번만 더 흔들면 쌀 것 같았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절정으로 아무것도 안 보이고 들리지 않던 차에……. 허리를 감고 있던 신제의 팔이 스르르 풀렸다. 그가 깬 건지 아닌지 확인할 여유 따윈 없었다. 지금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유건은 스스로의 성기를 놓았다. 대신 손을 앞으로 뻗어 침대를 짚었다. 시트에 주름을 잔뜩 만들어 가며 무작정 기었다. 허벅지를 후들후들 떨고 다리 사이 성기에선 물을 흘리면서. 윤활제가 모자랐던 탓에 좀 뻑뻑하게 박혀 있던 성기가 내벽을 긁으며 쭈욱 빠져나왔다. 속살이 모조리 딸려 나가는 느낌에 눈앞이 아찔했다. 마침내 가장 굵은 귀두 부분만 남았을 무렵.

“하…….”

뒤에서 숨죽여 웃는 소리가 들렸다.

“혼자 어떻게 하나 두고 보려고 했는데…… 못 참겠어.”

불쑥 뻗어 나온 팔이 허리를 힘껏 휘감았다. 숨이 막히다 못해 안에 든 성기의 형태가 낱낱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등을 통해 신제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하윽!”

아슬아슬하게 물려 있던 성기를 힘주어 끝까지 때려 박았다. 순간 유건의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아.”

참고 있던 것이 탁 풀렸다.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유건은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보았다. 뜨거운 물을 담은 물 풍선이 배 안에서 터진 것 같았다. 몸 가운데서 시작된 열기가 전신의 신경을 타고 쭉 퍼졌다. 엉덩이와 허벅지로, 더 빠르게, 마침내는 손끝과 발끝까지. 팔다리의 경련이 점점 심해졌다.

“아, 아, 아…….”

척추를 울리는 쾌감은 가장 마지막으로 뇌에 도달했다. 그는 아랫입술을 파들파들 떨며 눈을 감았다. 마침내 허공에서 흔들리던 성기가 정액을 쏘아 올렸다.

“아! 흐, 아, 아아아!”

오랫동안 괴로워한 끝에 주어진 절정은 소름 끼치게 강렬했다. 유건은 뒤로 신제의 성기를 잘라 먹을 듯 조이며 쾌락에 몸부림쳤다. 열 발가락이 쫙 펴지고 발등에 뼈대가 섰다.

신제는 몇 번 세게 처박았다 뚝 멈추고, 다시 박다가 멈췄다. 멈춘 사이사이 성기 전체가 쥐어짜이는 감각을 고스란히 즐겼다. 유건의 등줄기와 허리가 벌벌 떨리는 것, 내벽이 일정한 리듬으로 수축하는 것, 그가 목 너머로 흐느낌을 참는 것까지 아랫배 위에 올려 둔 손바닥을 통해 모두 느껴졌다. 이것만으로도 쌀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아, 하…….”

사정이 끝난 후에도 유건은 축 늘어져 한참 움직이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이제 고작 한 번 사정했을 뿐인데, 그것도 자위가 절반 이상이었고 왕복 운동은 제대로 하지도 않았는데 진이 다 빠졌다.

모로 누워 있는 탓에 유건이 흘린 정액이 요도 구멍에서부터 이불까지 수직으로 긴 궤적을 그렸다. 신제가 그의 성기를 붙잡고 아래에서부터 위로 쭉 쓸어서, 손에 정액을 가득 받아 모았다.

“많이 쌌네. 지저분하게 사방에 질질 흘리기나 하고…… 정말 귀여워.”

신제는 유건의 엉덩이를 벌리고 성기를 느리게 빼냈다. 붉게 달아오른 데다 번들거리기까지 하는 거대한 기둥이 슬슬 빠져나왔다. 이런 걸 무느라 한계까지 벌어져서 파르르 떨고 있는 구멍이 안쓰러울 지경이다.

그는 손바닥에 고인 질척한 정액을 핥으며 제 앞의 유건을 보았다. 유건은 몸을 둥글게 말고 등과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시야에선 뒤통수만 보이는데도 어쩐지 표정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끝났나 싶어 마음을 놓는 게 다 보였다. 아직 덜 다물린 젖은 구멍이 호흡에 맞춰 벌름거리는 건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걸 어떻게 밖에 내보내. 평생 침대 위에만 묶어 놔도 모자란데.”

그들은 내기를 한 적 있다. 신제가 유건을 에레혼 1팀 가운데 밀어 넣고 자신의 손을 잡으면 구해 주겠노라 종용하고, 유건은 여럿에게 돌아가며 범해지면서도 꿋꿋이 버티는……. 몹시도 저열하고 처절한 내기였다. 그 내기는 유건의 승리로 끝났다. 유건은 끝내 신제의 손을 잡겠다는 그 한 마디를 하지 않았다. 그깟 자존심이 뭐가 중요하다고. 신제는 아무리 꺾으려 해도 꺾이지 않는 유건의 심지를 증오했다. 하지만 동시에 사랑하게 되었다.

그 내기는 끝났을지언정, 이후로도 신제는 이따금 유건에게 속으로 혼자만의 내기를 건다. 내기라기보다는 시험에 가깝다. 그는 물밑에서 끊임없이 유건을 시험한다.

유건을 집에 홀로 남겨 두고 멀리 떠났다 돌아와 현관문을 열 때마다 집 안이 텅 비어 있을지 아닐지를 가늠한다. 유건의 앞에서 무방비하게 잠든 척하며 유건이 과연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숨통을 끊으려 들지 아닐지를 가늠한다. 유건이 태인과 통화하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잠든 연기를 계속한 것은 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굳이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유건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알 수도 있다. 알면서도 묵묵히 그에게 맞춰 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제만큼이나 유건의 애정 또한 어딘가 망가져 있으므로. 품 안에서 헐떡이는 유건이, 온갖 음습한 집착과 애증을 짊어지고도 여전히 올곧은 자신의 길잡이가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신제는 흐리게 웃었다.

“아니. 그래도 내보내 줄게. 내보내 줘야겠지. 뭐든 네 뜻대로…….”

그는 정액이 담긴 손바닥을 자신의 성기에 대고 기울였다. 유건이 싼 정액이 주르륵 흘러 귀두 끄트머리부터 적셨다. 몹시도 음탕한 형태의 세례다. 그리고 성기 전체를 문질러 빠짐없이 정액을 처발랐다. 이상함을 느낀 유건이 뒤를 보려 했다. 하지만 신제가 조금 더 빨랐다. 정액을 뒤집어써 미끈거리는 귀두를 구멍에 대고 눌렀다가, 각도를 맞춰 푹 쑤셔 넣었다.

“아!”

무심코 신제를 돌아보았다가, 유건은 눈을 꾹 감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신제의 눈은 이따금 이질적인 빛을 발한다. 잘 만든 미소 아래 가려져 있던 짐승의 민낯이 드러난다. 이종교배, 이럴 때면 어쩔 도리 없이 그 단어를 떠올리고 만다. 신제가 소리 없이 웃었다.

“왜 이렇게 겁을 먹었어, 유건아. 힘도 좀 풀고. 누가 보면 잡아먹는 줄 알겠어.”

신제는 유건의 귓불을 앞니로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러고는 톡 터질 듯 발갛게 익은 젖꼭지를 비비면서 허리를 쳐올렸다. 아까처럼 쉽게 가 버리면 안 되니 성기 끝을 틀어막아 주기도 했다. 성기를 감싸 쥔 손이 유독 뜨겁게 느껴졌다.

날카로운 쾌감이 요도 안에 갇혀 산산이 부서졌다. 유건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의 품에 안겨 정신없이 신음하는 것뿐이었다. 아까의 통화에 대해서 물어봐야 하는데, 잊어버리면 안 되는데. 그렇게 몇 번 속으로 되뇌다가, 결국은 그 생각조차 흐려졌다. 감은 눈꺼풀 위로 부연 빛이 쏟아졌다.


* * *


유건은 샤워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씻고 나와야 했다. 노곤한 몸을 이끌고 거실에 나서자 저 반대편 주방에 선 신제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요즘 유건에게 직접 만든 요리를 먹이는 데 재미가 붙었다. 제 손으로는 물도 직접 따라 마시지 않을 것 같은 인상과 달리 그는 의외로 간단한 요리 몇 가지는 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래 봤자 말 그대로 간단한 수준이었다. 샐러드에 베이컨, 토스트, 가끔은 계란을 얹은 볶음밥 정도.

원한다면 요리사를 집에 불러 매 끼니 호화로운 식사를 즐길 수 있을 텐데, 신제는 굳이 아침마다 조리대 앞에 섰다. 요리 자체를 즐겨서라기보다는 자신이 차린 음식을 먹는 유건을 보는 것이 마냥 신기하고 재미있어서인 것 같다.

그뿐만이 아니다. 신제는 외출하고 돌아올 때면 습관처럼 간식거리를 사 오곤 한다. 어떤 때는 머랭 쿠키고, 어떤 때는 과일이나 젤리나 초콜릿이다. 그러고는 유건을 제 무릎에 앉힌 채 포장을 까서 하나하나 먹인다. 유건에게 공부라는 취미가 생겼듯이 신제는 유건에게 뭘 먹이는 취미가 생겼다.

“도와 드릴까요?”

유건은 거실을 가로질러 곧장 그에게 다가갔다. 그와 함께 살게 된 이후로 허드렛일을 할 일이 없어서 그렇지, 사실 집안일에는 그보다는 유건이 훨씬 일가견이 있을 것이다.

여러 종류의 드레싱을 두고 고민하던 신제가 그를 돌아보았다.

“음……. 글쎄, 뭘 도와 달라고 할까.”

“뭐든지.”

신제가 기다렸다는 듯 제 뺨을 톡톡 두드렸다.

“그럼 뽀뽀해 줄래요?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은데.”

유건의 표정이 한순간 못 들을 소리를 들은 것처럼 구겨졌다.

“그냥 이제 제가 하겠습니다.”

“요리할 줄은 알아요?”

“제가 형이랑 뭘 먹고 살았겠습니까. 그러는 당신은 설거지나 해 보셨습니까? 청소랑 빨래는요?”

유건은 신제의 손을 흘긋 보았다. 남자답게 큼직큼직하고 마디가 쭉 뻗었지만, 유건과 달리 흉터도 굳은살도 없는 손이다. 주방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것보단 고급스러운 만년필을 들거나 가죽 장갑에 감싸여 있는 게 어울릴 것 같은.

“그런 손으로 무슨 요리를 한다고.”

그가 팔을 뻗어 드레싱병을 집으며 툭 던졌다. 신제는 보기 드물게 멍한 표정이 되었다. 각성자 관리 본부가 만들어 낸 최초이자 최후의 S급 실험체가, 에레혼의 단장이 이런 일로 핀잔을 들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도 자신보다 한참 어려 솜털이 보송보송한 가이드에게.

유건은 우두커니 서 있는 신제를 내버려 두고 척척 상을 차렸다. 텅 빈 대리석 테이블에 샐러드 볼과 수저 두 쌍, 유리컵, 토스트 접시가 놓였다.

“유건아. 내 손이 예뻐?”

어깨 너머에서 신제가 물었다. 애써 무시했다. 무슨 대답을 해도 놀림거리가 될 게 뻔했다.

“응?”

“…….”

“손 말고는?”

“…….”

“네가 전에 내 얼굴이 예쁘다고 했었지. 또 어디가 어떻게 예뻐?”

이건 또 무슨 짓궂은 장난이냐고,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식사나 하자 하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팔목이 잡혀 몸이 확 돌려세워졌다. 어찌 반응할 새도 없었다. ‘그런 손으로 무슨 요리를 한다고.’ 그렇게 무심히 평했던 손이 유건의 팔을 너무도 가볍게 쥐고 있었다. 그가 손에 조금만 힘을 가하면 자신의 팔목 따윈 곧바로 으스러져 버릴 것 같았다.

잿빛 눈동자가 코앞에서 유건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은 거실 창을 통해 들이친 햇살을 머금고 빛나고 있었으나 동시에 어딘가 음습했다.

“어디가 예쁘냐고 묻잖아.”

그 눈에 반쯤 홀려, 유건은 자신의 상체가 뒤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의 등이 차리다 만 식탁 위의 빈 공간에 눕혀졌다. 얇은 티셔츠 한 장만 입은 등에 차가운 대리석이 닿는 느낌에 무심코 몸서리쳤다.

이대로는 잡아먹힐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본능적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씹어 먹히기 전에 뭐라도 둘러대야 했다.

“눈…….”

떠오르는 대로 중얼거렸다. 제 위에 그늘을 드리우는 신제의 시선을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눈을 떼는 순간 아슬아슬한 균형이 깨질 것 같아서.

“눈?”

신제는 조금 더 상체를 낮추었다. 얼굴 사이의 간격이 한 뼘이 안 되게 좁혀졌다. 유건은 숫제 신제와 테이블 사이에 끼인 것 같은 자세가 되었다. 밝은 색 홍채에 비친 스스로가 보였다.

“이 눈이 마음에 들어?”

“……네.”

신제가 손을 들어 제 눈가에 가져가며 태연히 물었다.

“가질래? 한 개? 아니면 두 개 다?”

“대체 무슨…….”

“내 눈, 예쁘다며.”

“…….”

유건은 망연히 입술을 달싹였다. 신제의 얼굴 위로 페이퍼 나이프를 들어 망설임 없이 자신의 살을 긋던 예전의 모습이 겹쳐졌다. 심장이 점차 빠르게 뛰었다. 희고 단정한 손끝이 당장이라도 스스로의 안구를 후벼 팔 듯 가까워지다가…….

“농담이야.”

갑작스레 멀어졌다. 신제가 언제 그랬냐는 듯 훌쩍 몸을 일으켰다. 유건은 그가 떨어져 나간 뒤에도 대리석 식탁에 어정쩡하게 누운 자세 그대로 멍하니 그만을 응시했다.

“앞으로도 나 많이 예뻐해 줘요. 내게서 가져가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고.”

“…….”

“얼른 앉아요. 식겠다. 기껏 차린 건데.”

신제는 태연히 식탁 앞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차려진 정갈한 아침상을 내려다보다가, 결국 유건 또한 이를 악물며 의자를 빼냈다.

“아까 그 말, 무슨 뜻입니까.”

“말뜻 그대로예요.”

“눈을 뽑아 제게 주시겠다고요?”

“얼굴이든 눈이든 뭐든,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어야 날 떠나려 하지 않을 테니까.”

둘 사이를 강제로 묶어 주던 계약은 이미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건은 스스로 신제의 곁에 돌아오기를 선택했다. 영원히 침묵하는 한이 있더라도 책임지지 못할 말은 결코 하지 않는 그의 성격상, 유건은 무슨 일이 있어도 신제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알면서도 이따금 걷잡을 수 없는 음습한 충동이 치민다. 세상에는 여전히 유건을 원하는 이들이 많다. 감히 그의 것에 손을 대는 버러지들부터 에레혼 1팀원들까지. 지금이야 멀리 떨어져 있어 서로 마주칠 일이 없다지만, 그들과 유건이 다시 만나게 되면 쓸데없는 마음을 먹을지 모른다. 주태인도 윤찬도 권희수도, 마자로스를 빠져나오기 전에 다 죽여 놨어야 했다. 그때 부상만 입지 않았어도 충분히 그럴 수 있었는데. 후회스럽다.

“솔직히 말할까?”

비스듬히 턱을 괴고 주스병을 들어 유건의 컵을 채워 주며 신제가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네게 족쇄를 채워 침실에 가둬 놓고 싶어. 그때 그 목걸이처럼 귀여운 족쇄 말고, 네가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무거운 걸로. 그럼 평생 나 말고는 아무도 널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겠지. 자꾸 반항하려 들면 팔다리의 신경을 끊을 거고. 그래도 말하고 가이딩을 하고 내게 안기는 덴 문제가 없으니까 괜찮지 않나? 정 힘들면 치료계 능력자를 불러서 다시 붙여 주면 되니까.”

“…….”

“사실은 실행에 옮기려 했던 적도 몇 번 있었는데 매번 실패했어. 네가 나를 기다려 주고 반겨 주는 게 너무 귀여워서, 어쩔 수가 없더라고.”

“…….”

“그러니까 내가 잘해야지. 우리 유건이 아무 데도 안 가게. ……자, 이제 아침 먹을까? 아.”

포크로 샐러드에 올라간 과일 조각을 찍어 내밀었다. 하지만 유건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가 내민 과일을 받아먹기는커녕 그를 형형히 쏘아보고만 있다.

“아?”

채근하듯 고개를 갸웃했다. 유건은 여전히 반응하지 않는다. 신제는 설핏 웃으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놀랐어? 뭘 또 새삼스럽게. 나 미친놈인 거 알잖아.”

“그렇게, 쉽게.”

유건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렇게 쉽게 당신을 떠날 수 있었다면 벌써 떠났겠죠. 예쁘지 않아졌다든가 마음에 안 든다든가, 고작 그딴 이유로 떠날 것 같았으면 전 진작…….”

“…….”

“우신제 당신도 알잖아. 당신에게 나 외의 선택지가 없듯이 내게도 당신 외의 선택지가 없다는 걸. 다른 선택지들, 당신이 전부 다 없애 버렸으니까.”

“그래…… 그랬지.”

신제는 테이블 아래 비스듬히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상체를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백유건 가이드.”

“네?”

“키스할래요?”

“밥상머리에서요? 싫습니다.”

“난 하고 싶은데. 지금.”

“저 밥 먹을 겁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시죠.”

“아, 너무해.”

그가 한숨을 쉬며 과일을 찍은 포크를 다시 내밀었다. 유건은 이번에는 거부하지 않고 입을 벌렸다.

“조금 전 통화는.”

신제가 뜬금없이 아까의 일을 꺼냈다. 규칙적으로 수저를 놀리던 유건의 손길이 멎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 줄은 몰랐다.

“에레혼에 관한 일이 맞아요.”

“그렇습니까.”

“이따 모이게 될 것 같아요. 1팀 전원하고, 그 외에 아직도 활동 중인 단원들 몇 명 정도. 내가 마지막으로 주최하는 회의가 되겠죠.”

마지막이라니. 가볍게 꺼냈지만 결코 가벼이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이제 정말 마무리를 지으려고.”

“…….”

“오늘 전부 정리할 거예요. 지분도 넘기고, 단장직도 공식적으로 내려놓고. 사실 백유건 가이드를 납골당에 데려다주고 나 혼자 가려고 했는데…… 뭐, 같이 가죠. 기왕 들켰으니 할 수 없지.”

그는 열여덟 살에 에레혼을 만들었다. 실험실에서 태어나 평생을 병기로 키워진 탓에 최소한의 인간성조차 갖추지 못했던, 가진 거라고는 막대한 살상 능력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그때 그가 다졌을 각오가 어떠했는지, 맨땅에서 무작정 구르고 깨지며 어떤 일을 겪었을지는 유건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신제에게 에레혼은 단순한 헌팅 오더 이상이었다. 인간과 변이종, 우성연 준장과 알무텐, 각성자와 가이드……. 한없이 오염되고 뒤틀린 이 세상에 대한 모든 증오가 그곳에 응축되어 있었다. Erewhon, 혹은 Nowhere. 그는 이 세상을 어디에도 있어선 안 될 디스토피아로 규정했다. 모든 것이 끝나면 어디에도 없는 곳, 즉 죽음에 도달하길 원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스스로 에레혼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당초 목표했던 것과는 달리 살아 있는 채로, 유건의 곁에서.

“어쩌죠? 나 백수 되게 생겼는데.”

신제가 한숨을 폭 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다시 포크를 들었다. 신제가 쌓아 놓은 현금만 해도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안다. 거기다 주식이나 부동산 같은 재산까지 모두 합치면 웬만한 소도시의 1년 예산쯤 될 텐데. 그런 남자가 하는 신세 한탄만큼 같잖은 게 없다.

“조신하게 내조할 테니까, 백유건 가이드가 나 먹여 살려 줘요.”

“내조요?”

“응. 집에서 예쁘게 기다리고 있을게요.”

“제가 당신을 어떻게 먹여 살립니까. 제가 몇 푼 보태 봤자 티도 안 날 텐데요. 말이 되는 소리를…….”

“공부 열심히 하고 있잖아요. 대학도 갈 거면서.”

“그쪽 먹여 살리려고 대학 가려는 건 아닌데요.”

“내 남은 생을 모두 받아 갔으면 이 정도 각오는 했어야지.”

신제가 턱을 괸 채 생긋이 웃었다. 그에 반해 유건의 표정은 험악해졌다. 맞는 말이긴 한데 신제의 입으로 들으니 왠지 심기가 뒤틀렸다.

“반품됩니까?”

“이미 개봉했으니까 반품은 안 돼요.”

“…….”

“개봉하기만 했을까. 포장지를 잡아 뜯어서 내용물을 아주 엉망으로 유린했지. 기억나? 네가 나 강간했을 때…….”

“대체 그 얘기 언제까지 써먹으실 겁니까?”

그 뒤로는 평온한 식사가 이어졌다. 둘 다 식사를 하면서 수다를 떠는 성격은 아니었다. 달그락거리며 식기 부딪치는 소리와 컵에 주스를 더 따르는 소리만이 드문드문 났다. 식사에 집중하는 그들의 옆얼굴을 햇빛이 뽀얗게 비추었다. 일상과 비일상 사이의 어디쯤에 있는 광경이었다.


* * *


두 사람이 탄 차가 납골당 앞에 멈춰 섰다. 납골당은 도심에서 떨어진 산기슭에 있었다. 불쑥 솟은 신식 건물과 건물을 둘러싼 공원을 제외하면 주변이 온통 산이었다.

신제가 먼저 운전석에서 내려 자연스럽게 유건이 탄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그는 매번 몸에 밴 매너를 지켰다. 곧이어 유건이 걸어 나왔다. 그는 검은 정장에 흰 셔츠 차림으로 새하얀 국화 다발을 안고 있었다. 구두까지 까만 광택이 도는 새것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차려입은 가운데 오직 넥타이만이 빠져 있었다.

아침부터 한바탕 거하게 뒹굴었더니 식사를 하고 나자 벌써 정오였다. 본의 아니게 아까 먹은 게 아침이 아니라 좀 이른 점심이 되었다. 더 늦장을 부리다간 시간에 맞추지 못할 판이었다.

오늘을 위해 신제가 맞춰 준 정장을 서둘러 입은 것까진 좋았다. 꽃집에 들러 미리 주문해 둔 꽃다발도 찾았다. 하지만 넥타이가 문제였다. 격식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던 유건이 능숙하게 넥타이를 맬 수 있을 리가 없다. 시간이 없어서 일단 출발부터 했다.

그가 꽃다발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바지 주머니를 뒤적여 새까만 넥타이를 꺼냈다. 셔츠 깃 아래에 타이를 두르기만 한 채 난처해하는 유건을 보고 신제는 결국 픽 웃고 말았다.

“이리로.”

“…….”

유건이 군말 없이 신제의 앞에 섰다. 아장아장 걸어와서는 얼른 해 달라는 듯 얌전히 서 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에레혼의 유니폼을 입혔을 때도 알아봤지만 유건은 정장이 잘 어울렸다. 평소에 즐겨 입는 후드나 맨투맨도 어울리긴 했지만 역시나 이 몸매를 드러내려면 셔츠 종류가 제격이었다.

넥타이를 매느라 열어 둔 재킷 사이로 흰 와이셔츠를 입은 허리가 엿보였다. 반듯이 다린 바지에 감싸인 다리가 쭉 이어지다가, 바지 자락 아래로 검은 양말을 신은 발목이 살짝 드러났다. 속살은 조금도 노출하지 않았는데 어쩐지 야했다. 얼굴이 앳되어서인지 직장인보다는 젊은 경호원 같다. 하기야 평범한 직장인이라기에는 몸 선이 지나치게 잘 빠졌다.

“진작 부탁하지, 그러게 왜 혼자서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타이를 들어 올린 신제의 손끝이 능숙하게 매듭을 만들기 시작했다. 간격이 너무 가까워서 고개를 들면 곧바로 입술이 닿을 것 같았다. 둘 사이를 가로막은 꽃다발만 아니었다면 진작 닿았을지도 모른다. 유건은 발끝만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제가 혼자 맬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왜?”

신제는 나긋하게 대꾸하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당신은 매번 너무 쉽게 하길래, 간단해 보였는데.”

그의 가이드는 무기든 가재도구든 손재주를 필요로 하는 물건은 뭐든지 잘 다룬다. 리볼버나 컴뱃 나이프를 쓰는 솜씨는 그조차도 감탄할 정도다. 그런 사람이 고작 넥타이 하나를 못 매서 우물쭈물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했다. 유건은 그 또래 평범한 남자애들처럼 교복을 입을 일도, 사회 초년생이 되어 면접을 볼 일도 없었다. 아버지는 오래전 여의었고 형이라고 하나 있는 것까지 그 모양이었으니 이런 걸 가르쳐 줄 연상의 남자가 없었으리라.

“손에 익으면 쉬워요.”

순식간에 유건의 셔츠 깃 아래에 단정한 매듭이 생겨났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따로 멋을 부리지 않은 가장 기본적인 형태였다. 타이 아랫부분을 한 번 힘 있게 잡아당겨 매듭을 고정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유건은 완성된 타이를 어색한 듯 만지작거리다가, 그러다 모양이 흐트러진다는 신제의 말에 곧바로 손을 뗐다.

“내가 매번 매 줘도 되고.”

“아뇨. 배우겠습니다.”

“내가 매 주는 거 싫어요?”

“이런 데서까지 당신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요.”

“너랑 나 사이에 짐이니 뭐니, 그런 거 안 따졌으면 좋겠는데.”

“저희 형은 혼자서는 빗자루질도 할 줄 몰랐습니다. 제가 다 해 줬거든요.”

다소 뜬금없는 서두였다. 하지만 신제는 이어질 말을 잠자코 기다렸다. 유건이 먼저 형에 대해 말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아직 희성이 살아서 병원에 입원해 있던 무렵에도 타인이 그를 함부로 들먹일 때마다 증오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고, 죽고 나서는 그에 관한 얘기가 조금이라도 들리면 발작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그 뒤로는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 형에 대한 것은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형의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인 건가 싶다가도 때로 어딘가 아슬아슬해 보였다. 그런데 그가 먼저 형 이야기를 꺼냈다는 건……. 조금쯤은 상처를 극복했다는 뜻으로 봐도 되는 걸까.

“전 상관없었습니다. 형은 자주 아프고 전 튼튼하니까, 형은 움직이는 걸 싫어하지만 전 괜찮으니까. 그까짓 허드렛일, 할 수 있는 사람이 더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10년쯤 살다 보니 형은 저 없인 아무것도 못 하게 되더라고요.”

“…….”

“제가 조금이라도 집에 늦게 들어가면 형은 짜증을 냈습니다. 돈을 받고 다른 헌터들의 손이라도 잡은 날엔 제가 더럽다며 가까이 가지도 못하게 했고요. 당시엔 형이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화도 났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형은 그냥,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었던 겁니다.”

희성은 혹시라도 폭주를 일으킬까 봐 두려워 혼자서는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바로 앞에 있는 슈퍼에서 사고 싶은 게 있어도 유건을 기다렸다가 같이 가거나 유건에게 부탁해야 했다. 유건이 어쩌다 늦게 돌아오면 쌓인 원망과 신경질이 고스란히 그에게 쏟아졌다.

“어쩌면 형과 제가…… 서로를 더 악화시켰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형을 유건은 묵묵히 감내했다. 심지어는 희성의 잘못을 대신 사과하고 대신 얻어맞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희성은 지나치게 예민해졌고 유건은 지나치게 둔해졌다. 두 형제가 각각 각성자와 가이드라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기형적인 관계였다.

“당신과 저 사이니까 더욱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과거를 되짚는지 허공을 바라보던 유건이 쓰게 웃었다.

“짐이면 어때요. 이렇게 귀여운 짐이라면 평생 안고 다녀도 좋을 것 같은데.”

또 예상치도 못한 타이밍에 귀엽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신제가 귀여움을 느끼는 범주는 대체 어디까지일까. 자신이 변이종 멱을 따고 총탄을 갈기는 모습을 보고도 귀엽다고 하지 않을까. 본인은 모르지만 상당히 정답에 근접한 추론이었다.

“그래도 우리 유건이가 하자는 대로 해 줘야지. 사랑은 인내하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않는 거랬으니까.”

신제의 엄지가 눈꺼풀 위의 흉터를 살살 쓸었다. 유건이 간지러운지 속눈썹을 가늘게 떨었다. 그러면서도 그만두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누가 그랬는데요?”

“저 멀리 바다 건너에 사는 어떤 아저씨가.”

“혹시 그 아저씨도 사탕 사 준다고 해도 따라가면 안 되는 그런 부류입니까?”

“아니. 그 아저씨 옛날 옛적에 죽었거든. 내가…… 알무텐이랑 같이, 찢어 죽여 버렸어.”

“…….”

신제의 말은 항상 의뭉스럽고 알쏭달쏭한 구석이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언제부턴가 그가 오래된 경전이나 시의 구절을 거의 인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경도 신곡도 그가 센터에서 갓 나온 시절에 읽은 것들이었다. 교양을 쌓기 위한 우아한 독서는 물론 아니었다. 활자의 형태를 띤 탐욕스러운 포식에 가까웠다. 인간을 갈망해서, 인간이 아닌 것에서 인간이 되고 싶어서. 그러니 이제는 필요 없어졌다.

“이제 들어가 봐요.”

“같이 안 가십니까?”

신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는 고개를 숙여 유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유건은 납골당 입구로 걸어가면서도 그를 흘긋 돌아보았다. 신제가 차에 기댄 채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잘 다녀와요.”

유건은 건물 내부를 홀로 걸었다. 몹시도 오랜만에 오는 곳이었다. 게다가 전에는 늘 희성과 함께였기에 혼자 오는 건 처음이었다. 그의 곁에서 나란히 걷던 형은 지금 부모님과 함께 저 안에 있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가슴이 베인 듯 쓰렸다. 이젠 가족들의 죽음에 무뎌질 대로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변이종의 위협으로 장기간 폐쇄되었다 재개장했는데도 납골당 내부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칸칸이 나뉜 단마다 누군가의 유골함이 들어 있었다. 유건은 그중 하나에 멈춰 섰다. 유리 너머에 새하얀 도자기로 된 유골함이 세 개 있었다. 둘은 꽤 오래되어 보였고, 하나는 눈에 띄게 새것이었다.

가족사진이나 화환으로 알록달록하게 장식된 다른 칸과 달리 이곳은 다소 심플했다. 사진이라고는 유골함 표면에 고인의 간단한 신상 명세와 함께 인쇄된 것이 전부였다. 부모님도 희성도 갑작스럽게 죽은 탓에 신분증 사진을 썼다. 부모님은 주민 등록증, 희성은 각성자 등록증. 40대 초반의 부모와 스물아홉의 아들이 13년의 공백을 뛰어넘어 한자리에 있었다. 사진만 보아서는 전혀 부모 자식 사이 같지 않았다. 기껏해야 삼촌과 조카, 어떻게 보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매 같기도 했다.

“…….”

유건은 손을 내밀어 유골함과 자신의 사이를 가로막는 유리를 더듬어 보았다. 먼지 한 톨 없이 잘 닦인 유리 위에 손자국이 남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실 당시에 이렇게 젊었던가. 강아지가 그려진 옷을 입고 자동차 뒷좌석에서 게임에만 몰두하던 어린아이는 이제 어엿한 어른이 되어 정장을 차려입고 가족을 만나러 왔다.

“어머니, 아버지, 형. 저 왔어요. 이건 별거 아니지만…… 선물이에요. 휑한 곳에 셋이서만 있으면 적적하실 테니까.”

유리창을 조심스레 열어 꽃다발을 올려놓았다. 아무 장식 없이 밋밋하던 공간에 새하얗고 탐스러운 국화 한 다발이 더해졌다. 나란히 놓인 유골함들 앞에서 입을 열었다.

“아세요? 이제 세상이 바뀌었어요. 이젠 새로운 게이트가 생기지 않는대요. 길을 가다 갑자기 변이종에게 습격당할 일도 없어졌고요. 우리가 그렇게 무서워했던 것들이……. 이젠 하나둘씩 사라질 거래요.”

유건은 각성자도 변이종도 존재하지 않던 시절의 세상을 겪어 본 적 없다. 아웃브레이크 이전의 세상을 모르는 것은 가족들 또한 마찬가지다. 남아 있는 자료조차도 상당수가 소실되어서 지금은 교과서나 신문, 뉴스 자료 화면에서나 가끔 볼 수 있다.

알지 못하는 세상에 유건 홀로 남았다. 그때의 트라우마도, 곁을 떠난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도 모두 유건이 평생 안고 가야 할 것들이다.

“저는 무섭습니다. 낯선 세상에 혼자 남겨져서 무섭고…… 혼자 행복해져도 될지 모르겠어서 무서워요. 만약 부모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지금 제게 뭐라고 말씀해 주셨을까요.”

그는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다. 왜 어떤 상처는 금세 낫는 반면 어떤 상처는 흉터가 되어 남는가. 모든 죄의 결말은 벌하거나 용서하거나, 반드시 둘 중 하나여야만 하는가. 불순물이 섞인 애정도 애정이라 부를 수 있는가.

쉬이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정답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신제조차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일단은, 답을 찾을 때까지는 살아 보려고요.”

살다 보면 언젠가는 답이 보이지 않을까. 사실은 답을 찾지 못해도 좋을 것 같다. 답을 찾으려 노력했던 것만으로도 무언가 남을 테니. 그저 무의미하게 발버둥 치고만 있다 여겼던 이제까지의 삶이, 돌아보면 결국 빛을 간구하는 긴 여정이었듯이.

“다음에 또 보러 올게요. 이젠 자주 보러 올 수 있게 됐으니까.”

유건은 유리창에 대고 있던 손을 스르르 내렸다. 체온 때문에 유리에 손 모양대로 부옇게 김이 서렸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는 자세를 가다듬고 반듯이 서서 유골함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입매에 한순간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거기서는 부디 행복하세요.”

뒤돌아 나가는 발걸음은 아까와 다름없이 단정했으나, 아까보다는 다소 가벼워져 있었다.


* * *


“지금 출발하신다고 합니다.”

“가이드는?”

“예?”

“백유건 가이드도 동행하는 건가?”

“아…….”

어리둥절하게 반문한 헌터가 그제야 알았다는 표정을 했다.

“‘우리 유건이’랑 갈 거라고, 단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긴 했습니다. 그분이 전속 가이드님이셨군요.”

“……가 봐.”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이야기를 듣던 태인이 고개를 까딱였다. 헌터는 깍듯이 허리를 숙여 보인 후에 돌아갔다.

그는 짧게 한숨을 쉬고 절반 이상 비운 술잔을 내려놓았다. 좀 급하게 잡히긴 했지만 어쨌거나 회의는 회의였다. 어쩌면 에레혼의 마지막 회의가 될지도 모르는. 번듯한 건물에 가장 큰 회의실을 빌려 정식으로 하지는 못하더라도, 술을 마시지 않는 정도의 격식은 지켜야 했다.

그는 널찍한 홀의 테이블 중 하나에 앉아 있었다. 여기는 레스토랑 겸 베이커리 카페 겸 바로 운영하는 곳이다. 마카롱과 요거트 스무디와 김치볶음밥과 독한 양주를 동시에 파는 곳. 장사를 하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의심되는 수준의 메뉴 구성이지만 의외로 이곳은 항상 손님들로 붐빈다. 주인만큼이나 이곳을 찾는 손님들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다. 오늘도 여길 통째로 대관하느라 웃돈을 주고 미리 잡혀 있던 예약들을 취소해야 했다.

그는 자신 앞에 놓인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맑고 투명한 표면에 스스로의 모습이 고스란히 비쳤다. 손끝으로 잔을 툭 건드렸다. 표면에 파문이 일어 더 이상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차에 유건을 태워 먼 곳으로 떠나보낸 날, 그는 꿈을 꿨다. 죽은 어머니와 동생이 나오는 꿈이었다. 그들이 나오는 악몽이라면 지난 20년간 수도 없이 꿨다. 악몽 속에서 그들은 주로 끔찍한 시체의 형상으로 나타나 태인을 원망하고 저주했으며, 밤새도록 그의 머리맡에 들러붙어 귀가 찢어지도록 비명을 질러 댔다.

하지만 그 꿈은 달랐다. 꿈에서 태인은 식탁에 멀뚱히 앉아 있었다. 주방의 조리대 앞에서 두 모녀가 수다를 떨며 요리를 했다. 정장을 즐겨 입던 어머니는 어쩐 일로 편한 캐주얼에 앞치마를 두른 차림이었고, 태정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연신 숨넘어가는 소리로 까르르 웃었다. 보글보글 먹음직스럽게 끓는 김치찌개 냄새가 집 안을 가득 메웠다.

이유 모를 소외감이 들었다. 이대로 앉아만 있어선 안 될 것 같았다. 태인은 의자를 드르륵 밀며 반쯤 일어섰다.

〈저도 도울게요.〉

모녀가 동시에 돌아보았다. 지난 20년간 수많은 꿈을 꾸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됐어. 그냥 앉아 있으렴.〉

〈오빠는 안 도와줘도 돼.〉

〈왜요?〉

일어서지도 앉지도 않은 어정쩡한 자세로 태인이 되물었다.

〈우리 태인이, 지금까지 너무 많이 고생했잖아. 이제는 우리가 준비할게.〉

〈엄마랑 내가 참치 김치찌개 맛있게 끓여 줄게!〉

〈그래도…….〉

〈오빠, 있잖아.〉

태정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마냥 들뜬 어린애 같던 아까와 달리 눈빛이 차분해졌다.

〈이거 끓이는 데 엄청 오래 걸려. 아직 한참 남았어. 그러니까 미리 올 생각 하지 말고, 그냥 거기 있어. 오빠는 그래도 돼.〉

태정은 사망 당시 고작해야 유치원생이었다. 그런 아이가 이렇게 어른스러운 말도 할 줄 알았던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태인이 느낀 이질감이 구체화되기도 전에 어머니가 거들었다.

〈엄마가 태인이 일 잘하는 거 너무 잘 알지. 엄마가 못 챙기는 만큼 태정이 돌봐 주고, 얼마나 대견해. 그래도 우리가 너 없이 이런 거 하나 못 하겠니?〉

〈…….〉

〈엄마랑 태정인 괜찮아. 그러니까 너는, 다 될 때까지 그냥 하고 싶은 거 실컷 하고 있어. 다 되면 부를게.〉

〈……정말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어머니가 빙긋 웃었다. 태인은 그 눈에서 잔잔하게 가라앉은 슬픔을 보았다.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활기차게 소매를 걷어붙였다.

〈찌개 끓이고 밥도 새로 하고 있으니까, 이따 셋이서 같이 맛있게 먹자. 알았지?〉

〈엄마, 엄마! 나 계란말이도.〉

〈아유, 우리 공주님. 계란말이 먹고 싶었어요? 알았어. 저기 냉장고에서 계란 세 개……. 아니다, 네 개만.〉

〈응!〉

태인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쉴 새 없이 재잘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하지만 아까와 달리 외롭지도 불안하지도 않았다. 그를 둘러싼 평온함 속에서 다정한 말소리들이 조금씩 멀어져 갔다.

이상한 꿈에 불과하다. 이제껏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악몽을 꿔 봤으니, 하루쯤은 이런 꿈을 꾸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단정 지으려 했다.

그는 여전히 신제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모두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그는 단단히 중심을 잡고 에레혼을 이끌었다. 죽거나 다친 헌터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일부터, 잿더미가 된 본부 건물을 수습하고,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조직을 재정비하는 일까지.

딱히 에레혼에 각별한 애정이 있어서는 아니다. 그저 책임감 때문이었다. 오직 책임감과 죄악감만이 이제까지 그의 삶을 이끌어 온 원동력이었으니까. 늘 하던 일을 기계적으로 계속하는 것뿐이니 딱히 어려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달라진 점이 있다. 자해하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지독했던 악몽이 점차 잦아들고 있다. 그에 비례하여 마약과 술 복용량 또한 줄었다. 매 순간마다 떠오르던 죽고 싶다는 생각이 이상할 정도로 들지 않는다. 죽고자 한다면 모든 것이 얼추 마무리된 지금이야말로 죽기 딱 좋은 타이밍인데도.

유건을 보내는 마지막 순간,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춘 것을 순전히 충동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아도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는 충동. 그때 작게 달싹이던 유건의 입술과 그만을 곧게 담던 눈동자를 아직도 기억한다.

“하아…….”

태인은 습관처럼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날 그렇게 헤어지면서 이대로 유건과는 영영 마주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 사실에 안도감마저 들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재회하게 되다니. 유건이 어떤 형태로든 변했다면 괴로울 것이고,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면 그 또한 괴로울 것 같다.

“아주 땅 꺼지겠습니다, 부단장님. 없던 복도 달아나겠네.”

투덜거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태인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짜증스레 손을 내저었다. 저딴 놈의 장단에 맞춰 줄 여유가 없었다. 찬이 기가 차 헛웃음을 쳤다.

“뭔 잡상인 쫓아내듯 하십니다?”

찬은 무늬 없는 티셔츠에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흑갈색 머리를 깔끔하게 넘기고 정장에 코트까지 갖춘 차림인 태인과는 몹시도 대조되었다. 그나마 유니폼을 입고 있을 때는 에레혼이라는 소속 아래 함께 묶이기라도 했지, 지금 그들은 각각 다른 사진을 뚝 잘라 붙여 놓은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이제 좀 살갑게 굴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앞으로 봐 봤자 몇 번을 더 본다고.”

“곧 볼일 없어질 사이라 그럴 필요성을 더욱 못 느끼겠는데.”

“예, 예. 어련하시겠죠.”

“…….”

“하여간 인간들이 하나같이 정이 안 가.”

찬은 불만을 토하면서도 서슴없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와중에도 태인의 맞은편이나 옆에 앉긴 싫어서 어정쩡한 대각선 자리를 골랐다. 그는 웨이터를 불러 너무도 자연스레 흑맥주를 주문했다. 태인이 인상을 썼다.

“예의 없긴. 회의 전인 거 모르나?”

“뭐 어때요. 이 정도야 그냥 보리차잖습니까. 그러는 부단장님께서도 위스키 생으로 까고 있었으면서.”

태인과 찬의 사이는 원래도 좀 애매하고 아슬아슬한 면이 있었다. 대놓고 적대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동료로서 존중하는 것도 아닌 찝찝한 사이. 그래도 서로가 서로에게 데면데면했기에 어떻게든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낼 수 있었다. 찬이 신제에게 폭언을 들으면 참지 않고 곧바로 받아치는 것과 달리, 태인이 상대일 때는 내가 더러워서 피한다는 티를 대놓고 내며 무시하는 것이 그 예이다.

찬과 태인이 탈진한 유건을 방에 데려가 씻겼을 때 위태롭던 균형에 금이 갔다. 그리고 다음으로, 찬이 유건을 데리고 외출했다가 그를 잃어버렸을 때. 피가 튀기고 뼈가 부러지는 혈투 속에서 형식적으로나마 유지하던 관계가 박살 났다.

그 뒤로는 거리낄 것이 없어졌다. 마자로스 공략이 끝나고 에레혼이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는 지금은 더했다. 이제 서로 지위니 체면이니 하는 애매한 것으로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기에. 태인은 찬에 대한 거부감을 숨기지 않았고 찬 또한 부단장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를 집어치웠다.

찬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연거푸 울렸다. 그는 휴대폰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꺼 버렸다.

“뭐지?”

“집이요.”

찬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1팀 중에서 가족이 멀쩡히 살아 있는 유일한 케이스였다. 비록 연이 끊긴 지 꽤 됐지만.

아들이 S급으로 각성했다고 기뻐하던 것도 잠시, 그의 부모는 찬을 꺼려 하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흉악한 짐승으로 변하는 찬이 자신들이 낳고 기른 아들이 아닌 것 같아 무서웠다. 찬 또한 조직 생활을 하며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를 수행하느라 극한까지 몰려 있던 데다 부모의 냉대까지 겹쳐지자 욱하는 마음에 절연을 선언했다. 그 이후로는 10년이 넘도록 안부 인사 한 번 오가지 않았다.

그러나 마자로스 공략이 끝난 후 그는 가족에게로 돌아갔다. 이미 알무텐을 죽인다는 목적도 달성했고 창립 멤버인 신제마저 떠났으니 굳이 에레혼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처음에는 몹시도 어색했다. 생판 남을 붙여 놔도 이보다 서먹할 수는 없을 정도로. 가족들은 그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기는커녕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찬은 후회했다. 모아 둔 돈도 썩어 넘칠 정도로 많겠다, 차라리 그냥 따로 집을 사서 혼자 살 걸 그랬나 싶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찬이 각성 전까지 썼던 방의 문을 여는 순간 사라졌다. 자신의 물건들은 이미 싹 버려져서 창고로나 쓰이고 있을 거라 짐작했는데, 모든 게 그대로였다. 이불과 베개, 컴퓨터 옆에 쌓인 게임 소프트웨어, 앞의 몇 장만 새까맣고 뒤는 완전히 새 책이나 다름없는 문제집들. 심지어는 그의 교복까지 단정히 다려서 걸어 두었다. 마치 시간이 열일곱 살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

문간에 우두커니 서 있던 찬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의 뒤에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찬이 기억하는 것보다 너무도 왜소하고 나이 든 모습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사나운 눈매로 그들을 내려다보던 찬이 결국 정적을 견디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왜 그러는데! 엄마랑 아빠가 언제부터 다른 사람 눈치를 봤다고. 안 어울리게.〉

〈찬아, 우린…….〉

〈징글맞게 굴지 말고 하던 대로 좀 합시다, 예? 얼씨구. 이건 또 뭐야. 아들놈이 서른이 넘었는데 교복은 왜 아직 갖고 있어? 난 또 그새 동생 낳은 줄 알았네!〉

사실상의 화해 선언이었다.

“또 술 마시러 가냐고,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냐고 잔소리 실컷 들었습니다. 아까 얻어맞은 등짝이 아직도 아프다고요. 망할, 그 아줌마 뭔…… 못 본 동안 팔 근육만 키웠나.”

찬이 앓는 시늉을 하며 어깨 너머로 등을 툭툭 두드렸다. 어머니에게 등짝을 아무리 맞아 봤자 그에게는 티끌만큼의 타격도 가지 않을 텐데. 태인은 보일 듯 말 듯 입매를 비틀었다. 거친 언행 뒤에 진심을 숨기고 틱틱대기만 하는 찬이 우스웠다. 그러니 마지막 순간까지 유건을 그렇게 보냈지.

“우신제는요. 연락 왔습니까? 온대요?”

태인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 얼굴 한 번 보기 힘들던 단장 새끼 드디어 오늘 보겠네. 오다가 사고라도 나서 콱 뒈져 버려라.”

씹어 뱉듯 중얼거리는 말에 악감정만이 가득했다. 10여 년을 함께 동고동락한 친구에 대한 우정 따위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었다.

“백유건 가이드도 같이 온다는데. 그도 죽으라는 건가?”

“……예?”

별거 아닌 것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찬에게는 폭탄선언이나 다름없었다.

“뭐, 어, 예? 누, 누가 온다고요?”

찬이 형편없이 말을 더듬었다. 뒤늦게 이상함을 느낀 태인이 그를 돌아보았다.

“씨발, 진작 좀 말해 주시든가!”

“진작 말했으면? 그리고 예의 좀 차리지?”

“그럼 내가 안 오든가 했을 거 아닙, 아니, 안 온다는 건 아니고. 하, 좆됐네. 마지막에 그렇게 말해 놓고 뭔 낯짝으로…… 망할!”

태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찬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힘은 쓸데없이 좋아서 의자가 쿠당탕 요란하게 나뒹굴고, 테이블을 통해 태인에게까지 진동이 전해졌다. 널찍한 홀 곳곳에 흩어져 잡담을 나누고 있던 에레혼 단원들의 시선들이 한곳에 집중되었다.

태인은 목덜미를 시뻘겋게 물들인 채 어디론가 쿵쿵대며 걸어가는 찬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고작 유건의 이름에 저렇게까지 과민 반응하는 걸로 보아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저 인간이 뭔 짓을 했는지 따위는. 당장 찬이 어디 가서 죽어 버리더라도 그가 알 바는 아니다. 태인은 깔끔하게 관심을 거두었다.

그는 찬 몫의 흑맥주를 가져온 직원을 손짓 한 번으로 돌려보내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신제와 유건이 도착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 * *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입구 쪽에서부터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테이블에 삼삼오오 앉아 떠들고 있던 헌터들이 벌떡 일어섰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정중한 인사를 익숙하게 받으며 신제가 걸어 들어왔다. 다 똑같은 무채색의 유니폼을 입고 있을 때도 빛이 나던 남자는 사복을 차려입으니 더욱 눈부셨다. 술장사를 주로 하는 시간이라 어둑어둑하게 해 놓은 조명이 무색할 정도로.

최근 신제는 누가 봐도 변했다. 숨 막히는 미모는 그대로였으나 칼날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것 같던, 귀기에 가까운 광기가 사라졌다. 그 자리를 평온한 안정감이 메웠다. 오랜 방황 끝에 정착할 곳을 찾은 사람처럼.

깊은 속사정까지는 모르는 이들은 단장님께서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보이니 다행이라며 안심했다. 그러나 에레혼 1팀 멤버들은 그의 변화가 그저 가증스러울 뿐이었다. 저 안정감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알기에.

신제의 뒤를 따라 한 사람이 더 들어왔다. 유건이 온다던 소식을 미처 듣지 못했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유건은 검은 정장 차림이었다. 에레혼의 유니폼이 셔츠와 슬랙스 조합이기도 하고 입단 초기에 태인이 단정한 옷을 여러 벌 사 주기도 했지만 그래도 재킷과 타이까지 갖춘 차림은 보지 못했다. 그는 목을 조이는 옷이 불편한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넥타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그것마저도 묘하게 어울렸다.

유건은 수많은 사람들 너머로 태인과 잠깐 눈이 마주쳤다. 태인은 몇 초 동안 그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안녕, 여러분. 단장입니다.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는 건 오랜만이네요.”

신제가 자연스레 유건의 허리를 감싸 제 옆에 세웠다.

“여긴 내 가이드. 본 사람도, 못 본 사람도 있을 것 같은데. 1팀의 유일한 전속 가이드이자 마지막 레이드의 전우예요. 여기 올 자격은 충분하겠죠.”

“물론이죠! 가이드님, 안녕하십니까.”

“그때 저 치료해 주신 거 기억하십니까?”

아까 신제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우렁찬 인사가 쏟아졌다. 유건은 조금 망설이다 고개를 꾸벅 숙여 마주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사방이 어수선한 가운데 낭랑한 탄성이 끼어들었다.

“어? 이상하다?”

오븐용 장갑을 끼고 파스텔 톤의 앞치마까지 야무지게 맨 청년이 저 뒤편에 서 있었다. 그는 파스타나 피자 같은 것들이 가득 담긴 쟁반을 들고 주방에서 막 나오던 참이었다. 그는 평균 연령이 높지 않은 헌터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어렸다. 날렵한 선을 그리는 콧등에 찍힌 점이 은은한 조명을 받아 도드라졌다.

“아까 유건이 형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그러나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그의 눈이었다. 한때는 몹시도 맑고 또렷했을, 그러나 지금은 눈동자와 홍채의 경계가 탁하게 흐려져 버린 밀크초콜릿색 눈동자.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희수는 홀 중앙으로 걸어 나오며 두리번거렸다.

“분명히 들었는데. 잘못 들었나?”

“…….”

그 말에 유건은 호흡조차 잊은 채 굳어 버렸다. 목이 꽉 메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기도를 조르는 것 같았다.

신제를 따라 입구에서부터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부상을 입은 사람을 종종 보았다. 개중에는 희수보다 더 심한 사람도 있었다. 팔이나 다리가 아예 날아가거나, 폭발에 휩쓸려 얼굴의 반쪽이 망가져 버린 사람들. 랭크가 높았던 덕인지, 그에 비하면 그래도 희수는 나은 편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과 달리 희수의 부상은 명백히 그의 탓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구하려다 다치고, 그 대가로 영구적인 장애까지 얻은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괴로움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때, 마자로스에서 자신의 앞을 막아선 희수의 눈가에서 두 번의 작은 폭발이 일어나는 광경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피와 함께 사방으로 터져 나가던 안구 조각들 또한. 유건이 알무텐의 시선에 고스란히 노출되지만 않았어도, 타이밍 좋게 피하기만 했어도 희수의 눈은 지금도 멀쩡했으리라.

유건이 기억하는 희수의 마지막 모습은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누워 있는 모습이었다. 그때도 희수는 눈에 두꺼운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그 붕대 아래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끝내 알지 못한 채 떠나왔다. 의식을 되찾고 거동도 멀쩡히 할 수 있다는 말을 얼핏 전해 듣긴 했지만 눈이 저렇게 된 줄은 몰랐다.

희수는 근처 테이블에 다가가 쟁반을 더듬더듬 내려놓았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닌가…….”

유건은 희수가 다가오는데도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수많은 시선이 자신에게 꽂힌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

뭐라 말하려 입을 벌렸다. 하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희수가 유건이 있는 쪽으로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의 흐릿한 눈에 빛이 돌아왔다. 뭔가 이상하다…… 그렇게 느낀 순간.

“푸하하, 하하, 아하하하!”

희수가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유건이 주춤 물러섰다. 그런 그의 팔목을 희수가 잡아당겨, 가슴과 가슴이 맞닿도록 꽉 끌어안았다. 웃을 때마다 자잘한 떨림이 유건에게까지 전해졌다.

“아, 유건이 형. 어떡하지? 너무 귀여워!”

“뭐?”

“형은 왜 아직도 귀여워요? 이렇게까지 귀여울 일이에요? 형이 너무 귀여워서 저 미련 생기면 어떡하죠? 아니, 그러게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꼭 실수로 누구 죽인 사람처럼. 존나 꼴리게…….”

유건은 그제야 깨달았다. 희수가 모두의 앞에서 그를 놀려 먹은 것이었다. 장난을 칠 게 따로 있지, 자기 몸을 가지고.

“…….”

“왜 그러세요? 왜 갑자기, 으악!”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유건은 희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다. 커다란 소음과 함께 테이블이 밀려나고 그 위로 희수가 엎어졌다. 주변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권희수, 이 미친 새끼가.”

“악! 혀엉, 저 진짜 때리실 거예요? 오랜만에 봤는데? 그러면 저야 좋긴 한데. 앗, 잠깐, 잠깐! 옆에 음식 있단 말이에…… 와악!”

그 와중에도 실없는 소리나 지껄이는 입이 몹시도 얄미웠다. 유건은 희수의 멱살을 쥐고 올라탄 채 한 대 더 갈겼다. 퍼억! 경쾌한 타격음이 울렸다.

다짜고짜 난투전이 벌어졌는데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신제는 유건이 마냥 귀여운지 웃고만 있고 태인은 일말의 신경조차 쓰고 싶지 않다는 듯 무시했다. 나머지는 또 시작이냐는 듯 차게 식은 눈으로 보는 사람이 반, 휘파람을 불며 저속하게 응원하는 사람이 반이었다.

이 상황에서까지 주먹질을 계속하면 자신만 바보가 될 것 같았다. 김이 빠진 유건은 희수를 더러운 것 내버리듯 아무렇게나 팽개쳤다. 몹시도 허탈한 기분이었다.

“개자식. 나는 또, 네가 나 때문에, 완전히 안 보이게 된 줄 알고…….”

“저 걱정해 주신 거예요? 어떡하죠? 저 발기할 것 같아요.”

“닥쳐.”

“있잖아요, 저 이 살벌한 말투 진짜 그리웠어요. 형한테 얻어맞고 욕먹는 상상 하면서 자위도 했…….”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손해 보는 기분이다. 유건은 희수를 무시하고 몸을 돌렸다. 나사 빠진 것처럼 샐샐 웃던 희수가 앞치마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썼다. 물속에서 눈을 뜬 것처럼 뿌옇기만 하던 시야가 그제야 조금 선명해졌다.

“그래도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에요. 안구가 재생된 것만 해도 기적이래요. 저는 누구처럼 팔다리 잘려도 갖다 대면 다시 붙는 정도까진 아니라서.”

그 말에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이 떠올랐다.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유건을 끌어안고 횡설수설하던, 흑발에 그을린 피부의 남자.

〈그래, 백유건. 우리 이제 다신……. 다시는 보지 말자.〉

그 말대로 찬은 이제 다시는 유건을 보지 않기로 한 것일까. 그럴 만도 하다. 그들 사이에 팬 골은 몇 달 안 봤다고 잊힐 성질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유건은 납득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때 시야에 낯선 형체가 잡혔다. 기둥 뒤에 까맣고 커다란 덩어리가 조금 튀어나와 있었다.

“크흡.”

희수가 그것을 보고는 입을 틀어막았다. 태인이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자기 덩치도 간수 못 하면서 숨긴 뭘.”

영문 모를 말이었다. 덩치를 간수 못 해? 숨는다는 건 무슨 뜻이지?

“찬이 형. 그만하세요. 다 들켰어요.”

“찬아, 추하다.”

희수가 손나팔을 만들어 쩌렁쩌렁하게 외치고, 신제가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꼰 채 거들었다. 검은 형체가 한 차례 움찔하더니, 기둥 뒤편에서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닥치냐? 씹새끼들아.”

이윽고 찬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걸어 나왔다. 슬쩍 튀어나와 있던 검은 형체는 찬의 어깨 일부였다. 기둥 뒤에 숨는다고 숨었는데 워낙에 체격이 듬직해서 몸을 전부 감출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오는 건데…… 빌어먹을.”

찬이 고개를 돌린 채 중얼거렸다. 큼직한 손 아래 가려진 얼굴과 목덜미가 구릿빛 피부 위에서도 티가 날 정도로 붉었다. 그는 귀가 화끈화끈 달아오른 것을 느끼며 손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을 쳐다보는 유건과 눈이 마주쳤다. 찬이 불에 덴 듯 흠칫하더니 괜히 그를 향해 윽박질렀다.

“뭘 봐, 새끼야. 너도 내가 우습냐?”

“예?”

“멋진 척 존나게 해 놓고 다시 나타나니까 우습냐고! 그래, 우습겠지……. 씨발.”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우습지는 않습니다.”

“…….”

“전에 다시는 보지 말자고 했던 그 말씀 때문이라면…….”

“야!”

느닷없이 찬이 버럭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유건의 말이 도중에 끊겼다. 졸지에 호통을 들은 유건이 뚝 굳어서는 눈만 깜빡였다. 찬은 한숨을 푹 쉬며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그래, 네가 뭘 알겠냐. 눈치라곤 더럽게 없어서 걸려도 하필 우신제 같은 새끼한테 걸리고.”

아침에 신제에게도 눈치가 없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왠지 기분이 나빠졌다. 뒤에서 희수가 감탄했다.

“와, 이 형 나잇살 처먹고 진짜 구질구질하네.”

“됐고 술이나 가져와.”

“아직 회의 시작도 안 했는데요?”

“그러고 보니 아까 시킨 흑맥주는 어디 갔냐? 거, 부단장님?”

“갖다 버렸는데.”

“시발, 인성 밥 말아 처먹은 인간들 같으니라고.”

“형 오늘은 술 마시지 마세요. 마시면 유건이 형한테 진상 부릴 것 같아요. 막 질질 짜면서, 흐어엉 유건아……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어…….”

“죽고 싶어 환장했냐? 진짜 영영 앞 못 보게 만들어 줘?”

오랜만에 듣는 신랄한 대화들이 툭툭 오고 갔다. 저 목소리들이, 저들의 눈빛과 몸짓과 표정 하나하나가 소름 끼쳤던 적이 있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스스로가 신기했다. 이미 신제라는 비일상에 익숙해져서일까.

곧 회의가 시작되었다. 단원들은 여전히 너른 술집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기는 했지만 한 상 가득 차린 안주도 편히 앉은 자세도 그대로였다. 유니폼을 입고 있을 땐 그나마 최소한의 통일감이나마 있었는데, 모두가 사복 차림인 지금은 그저 느슨한 어중이떠중이들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것이 에레혼의 기조였다. 쓸데없는 예의나 형식 따윈 갖출 필요 없으니 자신의 몫을 해낼 것.

소음이 잦아들고 모두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될 때까지 신제는 소파에 기대어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손끝으로 팔걸이 끄트머리를 툭, 툭, 두드리면서. 수많은 사람을 이끄는 데 익숙한 이의 태도였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결론부터 말하죠. 영양가 없는 소리를 길게 늘어놓는 걸 좋아할 사람은 여기 아무도 없을 테니.”

신제는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등을 바로 세웠다.

“에레혼은 오늘부로 해체합니다.”

쿵. 그의 말이 무형의 바위가 되어 떨어졌다. 그 누구도 반문하지 않았다. 옆 사람을 돌아보거나 수군거리지도 않고 신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흘렀다.

“계약서에 서명하고 입단한 여러분들 모두 알고 있을 겁니다. 에레혼은 모종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고, 그 목적이 이루어지면 소멸할 예정이라는 것을.”

계약의 성질은 다르지만 유건 또한 들은 이야기였다. 에레혼 자체가 마자로스 공략을 위한 원정대였다. 각성자 관리 본부의 한계를 절절히 깨달은 신제가 우리 밖으로 뛰쳐나와서 만든.

“더 이상 새로운 적이 나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몇 년만 지나도 사람들은 변이종이니 게이트니 하는 것들을 잊기 시작하겠죠. 조만간 우리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세상이 옵니다. 알파벳으로 매긴 랭크 따위가 사람의 급을 나누던 시대는 이제 끝입니다. 우리는 옛 시대의 수치스러운 유물이 될 겁니다.”

헌팅 오더의 수장이 입에 담기에는 한없이 모진 이야기였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그의 말에 집중하던 이들 중 몇몇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명성이 자자하던 대형 오더들 상당수가 이미 해체했다. 수도권에서는 문영이 이끄는 바리가 제일 빨랐다. 그 뒤로 다른 곳이 줄줄이 뒤를 이었다. 사실 그에 비하면 에레혼은 좀 늦은 편이었다. 단장인 신제가 중상으로 의식불명이었던 데다, 레이드에 가장 주도적으로 참여한 탓에 피해도 가장 컸으므로 사태를 수습하는 데만 해도 몇 달이 걸렸기에.

“……하지만.”

거기까지 말하고 신제는 조금 뜸을 들였다.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헌터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곧 도래한다 해도, 마지막까지 헌터로 남는 건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누구를 따르든 어디로 가든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신제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던 태인을 향해 눈길을 던졌다.

“단장으로서 가지고 있던 모든 정보와 권한을 여기 계신 부단장님께 넘기겠습니다. 처리 또한 부단장님께 맡깁니다. 에레혼을 다시 세워 2대 단장이 되어도 좋고, 아예 새로운 오더를 창단해도 좋고, 제삼자에게 넘겨도 좋고…… 모두 폐기해도 좋아요.”

태인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신제의 시선을 받아쳤다. 유건을 마주할 때처럼 무뚝뚝한 태도였으나 눈빛의 질감이 확연히 달랐다. 유건은 문득 직감했다. 신제의 결정은 사전에 협의되지 않았으며, 태인 또한 이 이야기를 듣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라고.

말을 마친 신제가 분위기를 환기하듯 박수를 짝 쳤다.

“자, 에레혼의 단장으로서 할 말은 여기까지. 감사든 불만이든, 이제부턴 저기 계신 책임자께 얘기하시길.”

목석처럼 굳어 있던 태인이 뒤늦게 한숨을 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단정한 미간이 신경질적으로 찌푸려졌다.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떠넘기십니다.”

“태인 씨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거 아니었나?”

“이렇게까지 홀랑 내빼실 줄은 몰랐습니다.”

전 단장과 부단장의 대화가 오가는 중에도 다른 이들 사이에는 숨 막히는 정적만이 흘렀다. 모두들 표정이 전투를 앞둔 때처럼 굳었다. 다들 신제의 돌발 선언에 실망한 걸까. 어쩌면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우신제 이 또라이 새끼. 끝까지 진짜 골 때리네.”

침묵이 단번에 깨졌다. 이제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자리를 지키던 찬이 킬킬 웃고 있었다. 희수 또한 아까부터 웃음을 참느라 입매가 일그러져 있다가, 찬의 말이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박장대소했다. 그 직후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웃음이 터졌다.

“내가 살아서 에레혼 해체하는 것도 다 본다.”

“망할 약쟁이들이 쓸데없이 명만 질겨선. 마자로스에서 다 죽을 것처럼 말하더니 왜 이렇게 많이 살았냐? 분위기가 안 살잖아. 한 백 명쯤 더 죽었어야지.”

“오, 그래? 그럼 네가 죽을래? 지금이라도?”

모두가 옆 사람을 퍽퍽 치며 짓궂게 웃어 댔다. 신제마저도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세상 근심 걱정을 모두 떠안은 태인과 이 정신 나간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유건만이 멀뚱히 앉아 있었다. 신제가 카드를 꺼내 희수에게 내밀었다.

“오늘 발생하는 비용은 전부 내가 냅니다. 여기, 가게 사장님께 카드 맡겨 놓을 테니까 마음대로 주문해요.”

희수는 카드를 냉큼 받아 들고 모두가 볼 수 있게 높이 치켜든 채 선언했다.

“이 카드, 과연 한도가 얼마일까요? 모두들 궁금하지 않으세요? 제가 오늘 한번 시험해 보겠습니다!”

놀랄 만큼 큰 함성이 터졌다.


* * *


술이 돌면서 분위기가 빠르게 풀어졌다.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른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지나온 전투의 무용담과 다른 오더의 근황, 앞으로의 계획 같은 것들이 오갔다.

일반인의 주량을 가진 유건과 달리 각성자들의 술자리는 상식의 선을 한참 뛰어넘었다. 그들은 건배를 외칠 때마다 잔이 아닌 병을 비웠다. 저 정도면 건배(乾杯)가 아니라 건병(乾甁)이라고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테이블 위에 빈 술병이 놀라운 속도로 쌓여 갔다.

유건은 내내 신제의 옆자리에 묵묵히 앉아 있었다. 오가는 이야기들은 그가 모르는 것들이 태반이었다. 게다가 어떻게든 신제와 말 한 마디, 술 한 잔 나누어 보려는 헌터들이 끊임없이 테이블을 찾아왔다. 가만히 있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순하게 앉아 있다가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이 채워질 때마다 꼬박꼬박 마셨다. 신제가 틈틈이 먹을 것을 입가에 대어 주면 얌전히 받아먹었다. 그가 이따금 머리를 쓰다듬거나 뺨에 입을 맞추며 뭐라 속삭였지만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냥 너무 어둡고 복작복작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이 지금 이 사람들과 이 자리에 있으리라고, 몇 달 전의 자신은 상상조차 할 수 있었을까. 그는 형이 죽고 알무텐이 죽은 뒤의 미래를 그려 본 적 없었다. 닥쳐오는 하루하루를 살아 내기에도 벅찼다. 형과 자신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것이 적이었다.

그는 훈련이 잘된 군견처럼 꼼짝도 않고 몇십 분 동안 자리를 지키다가, 마침내 좀 심심해져서는 테이블 아래에서 손끝을 꼼지락거리고 발을 앞뒤로 흔들며 가벼운 장난을 쳤다. 검은 구두를 신은 유건의 발뒤꿈치가 소파 아래쪽에 툭툭 부딪혔다. 총을, 아니, 큐브라도 가져올 걸 그랬다.

어른스러운 복장에 비해 어린 티가 나는 행동이었다. 꼭 어른들의 술자리에 따라온 아이 같다. 저 앳된 청년이 죽음과 광기로 점철된 핏에서 고작 총 한 자루로 악착같이 버티던 가이드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들을 먼발치서만 본 이들은 십중팔구 유건이 신제의 충견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상관에게 몸과 마음을 바친 충성스러운 가이드.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신제의 목줄을 쥔 건 유건이다. 신제는 목줄 따위 언제든 끊어 버릴 수 있으면서 아닌 척, 크고 흉포한 주제에 애완 여우인 척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맹수쯤 될 거고.

그를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조심스레 다가갔다.

“저, 가이드님. 안녕하세요.”

유건은 술에 취해 조금 붉어진 뺨으로 돌아보았다.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하고 그의 눈이 한껏 커졌다.

“아…….”

어깨 아래로 내려오는 머리를 질끈 묶은 젊은 여자. 다시는 못 볼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눈앞에 서 있었다. 현지가 어색하게 웃었다.

“제대로 인사드려야 하는데 몸이 이래서……. 죄송해요.”

잃어버린 한쪽 다리 대신 금속으로 만들어진 목발이 그녀의 체중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녀는 목발을 짚고 있지 않은 손을 들어 컵을 쥐고 마시는 시늉을 했다.

“커피 한잔하실래요?”

유건과 현지는 가게 뒷문으로 나가 골목으로 난 벽에 기대어 섰다. 시끌벅적하고 술 냄새가 풀풀 풍기는 실내에 있다가 바깥 공기를 쐬니 좀 살 것 같았다. 둘 다 손에 김이 오르는 커피를 한 잔씩 들었다. 희수의 가게에는 취급하지 않는 메뉴가 없었고, 커피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잘 지내셨어요?”

“예. 누나는요? 아니,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왜 그러시…… 아, 제 다리 때문에요? 하하, 괜찮아요. 다음 달쯤이면 의족 맞춘 것도 나오고요.”

“다음 달요?”

“지난번에 다친 사람이 너무 많았잖아요. 그래도 저 정도면 빨리 받는 편이에요. 단장님이랑 부단장님께서 편의를 봐주셔서. 1년 넘게 기다려야 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잘됐죠.”

유건은 누군가를 위로해 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잘됐다, 안됐다. 둘 중 어느 것도 적절한 대응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말없이 커피만 홀짝였다. 희수가 눈이 완전히 멀어 버린 줄 알았을 때만큼이나 처참한 기분이었다. 시럽을 듬뿍 넣은 바닐라 라테가 쓰게 느껴졌다.

“가이드님.”

“네.”

“우리 단장님, 이젠 단장님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음, 그래도 일단 단장님이라고 할게요. 왜 그분 곁에 계속 있길 선택하신 거예요? 물론 그분께서 가이드님께 정말 잘해 주시긴 하지만요. 본인의 의사도 중요하잖아요.”

“…….”

“가이드님은……. 그분을 좋아하시는 거예요?”

유건은 한동안 아무 반응도 없었다. 무표정으로 딱딱한 벽에 기대선 채, 건물들과 늘어진 전선 너머로 보이는 야경을 응시할 뿐이었다. 도시에 내려앉은 어둠을 밀어내듯 네온사인이 요란하게 빛나고 수많은 차들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쌩쌩 달렸다. 그의 손에 들린 바닐라 라테가 밤공기에 조금씩 식어 갔다. 혹시 실례되는 질문을 한 건가? 현지는 불안해졌다. 그 순간 유건이 픽 웃었다.

“좋고 싫은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

“그 사람은 제게 갚아야 할 빚이 많습니다. 평생을 바쳐야 할 만큼요. 그걸 모두 갚기 전까진, 혹시라도 그가 저를 떠나려 해도…… 제가 용납 안 합니다. 못 합니다.”

커피 잔을 쥔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찰랑, 고요한 표면이 흔들렸다. 유건은 정면의 야경을 바라보던 시선을 내리며 스스로의 심장에 새기듯 말했다.

“제 겁니다. 제가 그의 것이듯이.”

서늘한 밤바람이 불었다. 어느새 제법 긴 앞머리가 사락사락 흔들려 눈꺼풀 위의 흉터를 간질였다. 그때 유건의 등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즐거운 송별회 시간은 끝.”

신제가 한 팔로 벽을 짚고 기대어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는 유건보다도 반 뼘 정도가 컸으니 현지에게는 까마득히 높게 느껴졌다. 그를 바라보기 위해 한껏 턱을 젖혔다가, 현지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왜 그렇게 각을 잡아요? 나 이제 그냥 민간인인데.”

신제가 빙긋 웃으며 현지를 들여보냈다. 유건은 내내 굳어 있었다. 아까 자신이 한 말이 그에게도 들렸을까.

“유건아?”

“…….”

“다른 사람이랑 실컷 놀게 해 줬잖아. 이젠 나 좀 봐 줘요.”

유건은 여전히 돌아보지 않았다. 긴장한 건지 당황한 건지, 새하얀 셔츠 깃 위로 뻗은 목덜미의 솜털이 곤두선 게 보였다. 직접 손을 댔다간 고장 난 동물처럼 파드득 놀랄 것 같으니, 능력을 써서 어루만져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의 그라면 절대 하지 않을 다분히 비이성적인 생각이었다.

신제는 평상시에는 능력을 쓰지 않았다. 멀리 있는 물건을 가져오거나 스위치를 누를 때 염력만큼 편리한 수단이 없을 텐데, 강박적이라 할 정도로 능력 사용을 삼가고 직접 몸을 움직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손끝 하나 안 대고 허공에 물건을 띄우는 짓은 ‘보통 인간’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테니까. 센터를 나온 이후 신제는 인간에 대해 공부했다. ‘보통 인간’들은 어떻게 말하고 생각하는지, 표정은 어떤지, 전신의 근육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레 익히는 것들을 그는 활자와 영상으로 하나하나 배워야 했다.

그가 전투 중도 아닌데 절제 없이 능력을 남용하는 경우는 딱 두 가지였다. 누군가 유건을 함부로 건드렸을 때, 그리고…… 가이딩을 못 받아 한계까지 몰린 그의 앞에 유건이 처음 나타났을 때. 손을 뻗으면 바로 닿을 거리에 있는 사람을 만진다는, 사소하기 짝이 없는 일에 능력을 쓴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째서?

유건의 목 뒤쪽을 향해 무형의 손을 움직였다. 하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염력이 말을 듣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기에 때로는 팔다리보다도 더 편하게 느껴지는 힘인데.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항상 눈이 아플 정도로 환하게 켜져 있던 조명이 한순간 전부 꺼진 같았다. 잠깐의 안온한 어둠 후에 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작동했다.

“……아.”

신제가 짧은 탄성을 흘렸다. 이상함을 느낀 유건이 그제야 돌아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능력을 쓸 수가 없었어요.”

“예?”

“잠깐이지만…… 사라졌어.”

“…….”

“비각성자들은 늘 이런 기분이었을까. 다들 평생토록, 이런 세상에서 살았던 걸까.”

그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어딘가 홀린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의 흰 뺨에 은은하게 붉은 기가 돌았다. 시뻘건 네온사인의 빛이 반사되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유건은 물었다.

“……취하셨습니까?”

“아, 그렇지. 나 취한 것 같아요. 맞아…… 취했어. 다른 사람들도.”

신제가 유건의 손을 잡아 올려 제 뺨에 대었다. 손바닥에 닿는 매끈한 뺨이 확연히 뜨거웠다. 각성자들은 웬만해서는 취하지 않는 걸 안다. 특히나 신제쯤 되면 독주에 마약을 통째로 털어 넣지 않는 한은 간에 기별도 안 올 텐데.

S급 각성자인 그가 평범한 술에 취했다. 그리고 잠깐 동안 그의 능력이 작동하지 않았다. 두 가지를 조합해 보면 결론은 명확하다. 신제의 능력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사명을 다한 에레혼이 소멸을 택했듯.

“그거 알아? 아까 한바탕 난리가 났어. 찬이가 취해서 갑자기 꼬리랑 발톱이 튀어나왔거든. 그걸 너도 봤어야 했는데.”

평생을 강력한 무기가 되어 준 힘이 잠깐이나마 사라졌다는데, 신제는 불안해하기는커녕 기뻐 보였다.

“술에 취해 보는 건 처음인데…… 나쁘지 않네.”

“그런가요?”

“응. 우리 유건이가 왜 술만 마시면 말랑말랑해지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그건. 하아……. 그만 좀 놀리시죠.”

“지금도, 봐. 말랑말랑.”

긴 손가락이 유건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유건의 표정이 점점 사나워졌다.

“그쪽도 술버릇이 남 말 할 처지는 못 되십니다.”

“왜?”

그 순간, 당장이라도 화를 낼 것처럼 굳어 있던 유건의 얼굴이 탁 풀렸다. 그는 시원하게 트인 눈매를 휘며 웃음을 터뜨렸다. 뺨에 보조개가 패도록 말갛게 웃는 모습이 소년 같았다. 그들이 먼 지방의 도시에서 재회한 후, 유건은 신제의 앞에서 가끔 픽 웃곤 했다. 하지만 이렇게 환하게 웃는 건 처음이었다. 신제는 숨을 멈추었다.

“솔직히 말해 꼴불견인데요.”

유건이 귓불을 만지는 신제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쳐 내리며 말했다. 아직 웃음기가 남은 음성이 평소보다 훨씬 활기 있고 부드러웠다. 그때까지 호흡을 잊고 있던 신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를 따라 웃어 버렸다.

“꼴불견이라니……. 농담도. 이런 귀여운 소릴 하는 게 누구 입일까.”

“왜 농담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난 취해도 예쁘잖아.”

“글쎄요.”

“좀 예뻐해 주면 안 돼?”

“예뻐해 줄 만한 짓을 하셔야죠.”

“으음, 자꾸 그러면 나 상처받는데.”

“그래도 쌉니다. 그리고 어차피 상처도 안 받으시면서.”

“나 네 거라며. 네 거 이렇게 다루기야?”

“……아까 얘기, 들으셨습니까.”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신제가 손을 뻗어 왔다.

“유건아…… 내 가이드.”

그는 유건을 벽과 자신 사이에 가두었다. 유건의 위로 그늘이 졌다. 뒤늦게 위기감이 엄습했다.

“넌 모르지? 네 어설픈 집착이 날 얼마나 흥분시키는지.”

“취했으면 곱게 집에나, 읏.”

넥타이를 잡혀 끌어당겨지는 바람에 말허리가 뚝 잘렸다. 열기에 젖어 바삭한 입술이 유건의 입술을 덮었다. 신제가 고개를 기울여 줬는데도 여전히 눈높이 차이가 있어서, 자연스레 턱이 젖혀지고 발끝이 들렸다. 그의 어깨에 매달려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세웠다. 머릿속에 온통 뜨거운 증기가 끼어서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했다. 자신 또한 취했다고 상대를 타박할 처지가 못 된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좁은 골목에서 뒤엉키는 그들의 위로 도시의 불빛이 만화경처럼 스쳐 지나갔다. 빌딩 틈새로 보이는 밤하늘에 별이 하나둘 떠올랐다.


* * *


자정이 넘게 흥청망청 이어지던 술자리가 끝났다. 결국 희수는 신제의 카드 한도를 확인하지 못했다. 그는 이 가게를 통째로 팔아야 되나 보다고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며 카드를 돌려주었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잘 지내세요!”

“안녕히 가십시오.”

각양각색의 인사가 오고 갔다. 1팀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도 간다. 더 늦게 들어가면 또 잔소리 들어.”

찬이 멋쩍게 뒷머리를 문질렀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부모님의 잔소리를 핑계 삼는 게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형, 이번엔 멋진 작별 인사 안 하세요? 우리…… 다신 보지 말자……. 크흐흡.”

“그 좆같은 아가리 좀 닫자, 응? 그리고 백유건 너…… 아니, 됐다. 잘 가라.”

유건에게 무슨 말을 할 것 같던 찬은 싱겁게 돌아섰다. 끝내 연락처는 물어보지 않았다. 새벽에 유건에게 ‘자냐?’ 따위의 메시지를 보내는 자신을 생각하면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태인은 저만치서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이 수많은 이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손을 맞잡았다. 썩 친근하지는 않지만 혐오감도 보이지 않는 손길이었다. 저들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영영 떠날 사람들일까, 아니면 태인의 밑에 들어가 헌터 일을 계속하기로 한 사람들일까.

“…….”

시선을 눈치챈 태인이 이쪽을 보았다. 그는 한숨을 삼키는 듯 눈을 한 차례 내리깔았다가, 이윽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신제에게 전권을 양도받았으니 책임이 무거워졌는데, 이상하게도 항상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무언가가 오히려 한층 덜어진 것 같았다.

“유건이 형. 새 연락처 좀 알려 주세요.”

희수가 유건의 곁에 달라붙어 팔짱을 끼고 소곤거렸다. 눈높이에서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키가 엇비슷했던 희수가 그를 약간이나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처참한 시간들을 겪으면서도 희수는 조금 자란 모양이다.

“연락처?”

“단장님이 계시긴 하지만, 한 명만 끼고 살면 아무래도 좀 심심하잖아요? 예쁜 마카롱도 매 끼니 먹으면 질리니까요. 형도 어린놈이랑 찐하게 뒹굴고 싶을 때가 생기실 거 아니에요. 바람피우는 스릴을 만끽하고 싶다든가. 전 언제든지 오케이거든요.”

“…….”

도대체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를 발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희수는 냉큼 유건의 휴대폰을 꺼내 제 연락처를 입력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휴대폰에 전화를 걸어 확인까지 마쳤다.

“아, 전 형 나눠 먹어도 돼요. 남이 먹던 거면 더 좋아요. 단장님이랑 할 때 저도 껴 주시…….”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유건은 구둣발로 희수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찼다. 희수가 “아야야.” 하고 엄살이 분명한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좋든 싫든 한 지붕 아래 살던 사람들이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꼭 연락 달라는 희수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유건도 걸음을 뗐다. 신제가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술에 취해 운전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핑계로 밤거리를 걸었다. 잡담조차 나누지 않고 한참을 묵묵히. 시끌벅적한 번화가와 오피스 빌딩이 밀집한 거리를 지나자 다리가 나왔다. 드넓은 강을 가로지르는 대교. 새카만 수면에 도시의 야경이 반사되어 눈부셨다.

수많은 차들이 오가는 다리 앞에 붙은 표지판이 보였다. 황안대교. 유건이 돌아보았다. 옆에서 걷던 신제와 눈이 마주쳤다. 신제가 입매를 보일 듯 말 듯 올려 웃었다.

“걸을래?”

“……예.”

차들로 가득 들어찬 도로와 달리 대교 가장자리의 보행자용 통로에는 사람이 없었다. 저 멀리서 불어온 세찬 바람이 강물 위를 스쳐 신제와 유건에게까지 닥쳤다. 정장 재킷이 깃발처럼 펄럭이고 귀가 먹먹해졌다. 어느덧 밤공기가 얼음장처럼 차게 느껴지는 계절이 되었다. 유건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유건아.”

어깨에 따뜻하고 묵직한 것이 덮였다. 신제가 셔츠 위에 입고 있던 트렌치코트였다. 유건이 곧바로 코트를 벗어 돌려주려 했다.

“전 괜찮…….”

“나만큼 괜찮을까. 그냥 걸치고 있어.”

“…….”

유건은 입을 꾹 다물며 코트 자락을 여몄다. 사이즈가 맞지 않아 어깨선이 내려오고 소매가 손등을 덮었다. 고작해야 옷 한 벌 걸쳤을 뿐인데 신제의 품에 온몸이 폭 감싸이는 기분이었다.

시야를 가득 메운 교량은 마치 거대한 생물이 죽어 남긴 뼈대 같다. 그 뒤로 펼쳐진 밤하늘에 별들이 가득하다. 한차례 재앙이 휩쓸고 간 후, 세상에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이 돌아왔다. 미세먼지 없는 맑은 하늘과 별 같은 것들. 이 또한 복구 작업이 본격화되고 새로운 공장들이 지어지면 조만간 사라지겠지만.

수많은 별들이 머리 위에 도사리고 있다. 저 아래에서는 한밤중의 강물이 물결치는 소리가 들린다. 별, 그리고 검은 물. 마자로스와 언뜻 비슷한 풍경이다.

유건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완전히 떨쳐 내지 못했다. 이따금 하늘을 메운 바닷물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악몽을 꾼다. 그 악몽 속에서는 해가 뜨지 않는다. 바다와 축축한 공기와 검고 찬 돌바닥만이 있을 뿐.

심해가 그를 부른다. 속이 보이지 않는 수면을 은은하게 일렁이며 그를 유혹한다. 모든 것이 존재하는 동시에 아무것도 없는 이곳으로 오라고. 한 걸음만 다가와서, 감미롭게 철썩이는 수면에 발만 담그면 편해질 수 있다고.

그럴 때마다 유건은 자신이 기어이 살려 낸 생명의 무게를 생각한다. 신제에게서 받아야 할 빚을 생각한다. 그리고 심장과 폐에 번지는 심해의 이끼를 몰아내듯 숨을 크게 내쉬며 눈을 뜬다.

“원래 내 목표는 알무텐만 죽이는 게 아니었어. 알무텐을 죽이고, 세상의 모든 각성자와 가이드를 죽이고, 결국은 나 자신까지 죽으려고 했지.”

신제의 머리칼이 강바람에 쉴 새 없이 나부꼈다. 그의 머리카락은 환한 빛 아래에서 은색으로 보일 정도로 색소가 옅었다. 거기다 피부까지 희어서, 그는 도시의 얼룩덜룩한 불빛들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이마와 콧대에 주황색빛이 내려앉으며 반대쪽에 푸른 음영을 드리웠다. 뺨에 드리운 속눈썹의 그림자도 푸르스름한 보랏빛이었다.

그를 보며 유건은 제단에서 본 환영을 떠올렸다. 황안대교에서 마주친 열여덟 살의 우신제. 잘 만든 인형처럼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던. 그때도 지금처럼 바람이 강했는데.

“그런데 아무리 해도 너만은 죽일 수가 없었어. 내가 어떻게 되든 너만은 살리고 싶었어. 널 살리려면 네가 살아갈 세상도 살려 둬야 할 테니까, 그래서……. 나 혼자만 죽는 걸로 끝내고 싶었는데.”

“제가 그렇게 두지 않았죠.”

유건이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복수였다.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신제를 이렇게나 뒤흔들고 비틀어 버린 이는 그 외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유건아.”

신제가 돌연 표정을 바꾸어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네?”

“휴대폰.”

“휴대폰은 왜 갑자기.”

“아까 희수한테 연락처 받았잖아.”

그의 손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코트 자락 안으로 파고들어 옆구리와 허벅지 부근을 더듬더니,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갔다. 오물을 집듯 검지와 엄지로만 든 채였다. 유건은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손을 뻗었다.

“주세요.”

“으응, 싫어요.”

“당장!”

“새로 사 줄까? 이건 더러운 게 묻었으니 버리고. 마침 잘됐네. 여기 강에 버리면 되겠다.”

“그럴 필요까진 없지 않습니까. 고작 연락처인데.”

“고작 연락처?”

신제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휴대폰을 보여 주었다. 화면에 희수가 저장해 둔 연락처가 떠 있었다. [형의 불륜남 1호 희수♥]. 야무지게 하트까지 붙여서 저장해 놨다.

“이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

빌어먹을 자식. 유건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하트도 하트지만 1호라는 말이 더욱 가관이었다. 그럼 2호, 3호도 있을 예정이란 말인가?

신제는 곧 자신의 연락처도 확인해 보았다. 담백하기 그지없는 이름 세 글자에 헛웃음이 났다. 그가 짐짓 시무룩한 척 유건을 내려다보았다.

“자기야…… 이러기예요?”

“돌려 달라고요.”

유건이 이를 악물고 팔을 뻗었다. 신제가 휴대폰을 든 손을 휙 들어 올렸다. 키 차이 때문에 아무리 손끝을 휘저어 봐도 휴대폰에 닿지 않았다. 오히려 신제의 품에 스스로 달려들어 안긴 것 같은 꼴이 되었다.

“그러는 당신은.”

“응?”

“저 뭐라고 저장해 두셨습니까?”

잠시 침묵하던 신제가 눈을 애처롭게 깜빡였다.

“……지금 그게 중요해? 자기야.”

웬만한 일은 물 흐르듯 능글맞게 흘려버리던 사람이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건. 유건은 뭔가 있음을 직감했다.

유건은 그래도 저장이라도 해 놓았지, 신제는 상대방의 연락처를 저장조차 하지 않았다. 태인에게서 전화가 걸려 올 때 봤다. 생판 남도 아니고 부단장인데 아무 이름 없이 숫자들만 덩그러니 떠 있던 화면을. 그러니 유건의 번호도 저장해 두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중요합니다. 그걸 보고 제가 당신을 한 대 때릴지 말지 결정할 거니까요.”

“내 가이드는 참 화끈하네. 침대에서도 이렇게 화끈하면 좋겠어.”

“정말 화끈하게 만들어 드릴까요?”

“응?”

“총알을 두세 방쯤 먹으면 싫어도 화끈해지실 겁니다.”

“기왕 먹일 거면 총알 말고 다른 걸 먹여 주면 안 될까? 나 싹싹 핥아서 다 삼킬 자신 있는데.”

“폰이나 얼른 내놓으시죠.”

유건은 자신이 입고 있는 신제의 트렌치코트 주머니부터 뒤졌다. 하지만 휴대폰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신제를 노려보다 불시에 달려들어 바지 주머니가 있는 곳을 노렸다. 그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하지만 그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신제가 대뜸 그의 허리를 끌어안아 들어 올린 탓이다. 정장 바지 아래 구두를 신은 유건의 발이 한 뼘쯤 떠서 버둥거렸다.

“자, 잠깐만…….”

“정장 불편하지? 유건아. 하루 종일 잘 참았어. 얼른 집 가서 옷 갈아입고 쉬자.”

“잠깐만요. 그래서 대체 뭡니까? 절 저장한 이름.”

신제는 유건의 이마에 제 이마를 콩 맞대며 속삭였다.

“비밀.”

꿋꿋이 재차 물었다. 이번엔 대답 대신 관자놀이와 눈꺼풀에 자잘한 키스가 쏟아졌다. 몇 번 더 항의하던 유건은 이내 뚱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그 탓에 신제가 차오르는 웃음을 애써 참는 건 보지 못했다.

나는 앞으로도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도 내 용서를 바라지 않음을 안다. 그리고 나 또한 당신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때로 우리는 서로를 살의로써 응시하고, 악에 받쳐 할퀴고 물어뜯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하고 있다. 별을 불사르는 마음으로. 눈먼 심해어가 꿈꾸는 지상의 풍경처럼 어딘가 비뚤어졌으나 우리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하는 사랑이다.

그들은 어느덧 긴 다리의 반대쪽 끝까지 왔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강물은 잔잔하고 차들은 바쁘게 스쳐 지나가며 바람은 세찼다. 일렁이는 물결에 고요히 춤추는 밤의 도시와 함께 황안대교의 정경이 등 뒤로 점차 멀어져 갔다.

인공의 조명조차 가리지 못한 별빛이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발치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들의 그림자는 갖은 불순물로 얼룩져 마냥 무결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그에는 긴 역정(歷程)이 녹아 있다. 심연의 밑바닥에서부터 빛을 찾아 마침내 지상에 당도하는, 길고 험난한 역정이.

심연의 바깥에서 보는 별은 찬란했다.



〈Ad Astra〉 끝

동양풍 궁중 AU

불의의 사고로 선황이 붕어하고 원래 병약했던 황태자마저 그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떴다. 제국 전체를 휩쓴 혼란 속에서 다소 갑작스럽게 2황자가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2황자 백유건은 신분 낮은 후궁에게서 난 아들이었다. 선황을 비롯한 모두가 황후 소생인 황태자 백희성이 다음 황제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그는 후계자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었다. 또한 황태자보다 여섯 살이 어려 아직 정실은커녕 측실조차 들이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는 현 상황에서 황위 계승 서열 1위가 되었고, 문무백관의 등쌀에 떠밀려 얼떨결에 옥좌에 올랐다. 어리고 뒷배 없는 황제의 등극으로 어지러운 정국을 바로잡고 권문세족과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는 혼인만 한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여러 인물들이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신황의 내명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 * *


“폐하. 예까지 온 김에 수라를 들고 가시겠습니까?”

옅은 색 머리칼을 늘어뜨린 남자가 교태 어린 눈웃음을 쳤다. 피부가 목련처럼 희고 눈가에는 붉은 화장을 했다. 황제보다 훌쩍 큰 데다 기골이 장대한 사내인데도 화려한 치장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폐하께서 좋아하시는 서역의 과자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궁인을 불러 청자로 된 함을 보여 주었다. 그 안에 희고 몽글몽글한 과자가 가득 들어 있었다. 분명 뭐랭 어쩌고 하는 이름이었던 것 같다.

“이따 후식으로 차와 곁들임이 어떠한지요.”

그가 생긋 웃었다. 말 한마디, 웃음 한 번으로도 나라를 도탄에 빠트릴 만한, 그야말로 경국지색의 미모였다. 하지만 황제를 홀리는 애첩이라는 편견을 사기에 딱 좋은 외견과 달리 사실 그는 이 나라의 황후였다. 내명부의 수장이자 황제의 유일한 정실.

게다가 그는 내로라하는 명문가의 적통으로,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을 쥔 우성연 승상의 장자였다. 어리고 힘없는 황제와 혼인하지 않아도 문무 양면으로 나라를 쥐락펴락했을 이가 왜 굳이 곱게 치장하고 궁에 들어앉았을까. 해답은 본인만이 알 일이다.

“이미 먹고 왔습니다. 과자도…… 지금은 생각이 없습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리 매정하게 대하시면 이 신제, 몹시 서럽습니다.”

“황후.”

“정말로 그냥 가실 겁니까? 이렇게 예쁜 반려가 부탁하는데도요?”

“황후의 진짜 목적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는 폐하께서 드시는 것만 봐도 기쁘답니다.”

“먹는다는 것의 의미가 다르겠지요. 잠깐, 뭘……. 헉!”

황제, 유건의 몸이 달랑 들려서는 황후의 무릎 위에 앉혀졌다. 처연한 표정과 달리 하늘하늘한 옷소매에 가려진 팔뚝은 건장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다른 걸 드셔 주시겠어요? 서방님.”

낮고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격의 없는 호칭을 속삭였다. 유건의 엉덩이 아래에서 굵직한 것이 꿈틀거렸다. 고운 자수가 놓인 비단옷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흉악한 크기였다.

이따금 신제는 부드러운 말씨에 섬뜩한 위압감을 담아 청을 올린다. 아니, 명을 내린다. 분명 명목상의 우위에 있는 것은 유건인데도. 저항하면 할수록 더 험한 꼴을 당하게 될 뿐이다.

유건은 한숨을 삼키며 몸에 힘을 풀었다. 신제가 꽃처럼 웃으며 그의 옷고름에 손을 댔다. 아무래도 오전 중에 정사를 보기는 그른 것 같다.


* * *


황제가 오전 내내 황후궁에서 머물렀다는 소식을 듣고 다른 후궁이 쳐들어왔다. 눈이 빠지도록 상소문을 보다 잠깐의 휴식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에 하나로 묶은 검은 머리, 무관들이 주로 입는 간편한 의복. 그는 후궁이라기보다는 후궁을 지키는 무사에 가까운 생김새였다.

“야, 백유…… 가 아니라, 폐하! 나랑 점심 같이 먹기로 했잖아. 왜 안 왔어!”

“약속을 못 지킨 건 미안합니다, 윤 비. 하지만.”

“우리 사이에 존대는 무슨 존대냐. 징그럽게. 찬이 형이라고 해. 아예 반말 까든가.”

“…….”

“또 우신제 그놈이 너 꼬셔서 붙잡았다면서?”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험악하게 윽박지르며 유건을 한 팔로 번쩍 안아 들었다. 큼지막한 손으로 뺨을 감싸 쥐고 한참이나 조물거린 후에야 화가 좀 풀린 듯 내려 주었다.

“폐하 넌 밸도 없냐? 그 가증스러운 놈이 살랑살랑 홀리면 매번 넘어가지? 예쁜 척 조신한 척 하는 거 다 받아 주지 말라니까?”

황제의 이름을 거침없이 부르고 반말을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멋대로 들어 올리기까지 하다니. 당장에 목이 날아갈 중죄였다. 하지만 찬이 스스럼없이 구는 건 어디까지나 단둘이 있을 때뿐, 다른 자리에서는 꼬박꼬박 극존칭을 쓰며 말을 높이니 공식적으로 징계할 수도 없다.

더군다나 찬은 유건의 후궁인 동시에 옆 제국의 황자였다. 칭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나라와 달리 그의 나라는 한때 대륙 통일을 넘볼 정도로 무척이나 강대했다.

그들은 어렸을 때 양국 간의 회담에서 종종 마주치곤 했다. 찬은 유건은 물론이고 황태자였던 희성보다도 나이가 많았기에, 그에게 있어 그때의 유건은 그냥 작고 무뚝뚝하고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를 이웃 나라 꼬맹이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사이가 될 줄이야. 인생이라는 게 참 얄궂다.

“황위 싸움 포기하고 외국에 시집가면 음흉한 능구렁이 새끼들 안 봐도 될 줄 알았는데. 근데 그런 새끼가 하필 딱 여기 있네?”

“능구렁이?”

“잘나신 황후 말이다.”

뱀을 피하려 뱀 굴에 들어간 격이다. 심지어는 그 뱀이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이를 살살 꾀어 잡아먹고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유건을 자신의 나라로 불러서 반려로 맞이할 걸 그랬다.

“그럼 거기서 계속 지내지 그랬습니까.”

“계승권에서 한참 밀려난 황자라는 게 사실 이래저래 팔자가 참 사납단 말이야. 너도 잘 알잖아. 너무 잘나도 형님들한테 밉보여서 죽고, 너무 못나도 죽고. 그래서…….”

긴 용포 자락을 들추고 슬금슬금 기어들어 온 손이 엉덩이를 콱 움켜쥐었다. 유건이 무심결에 헛숨을 들이켰다.

“난 그냥 여기서 네 종마 노릇이나 하려고.”

설마……. 설마, 또? 신제에게 시달린 지 얼마 안 됐는데? 유건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찬이 코끝이 닿을 거리까지 고개를 들이밀고 씩 웃었다.

“우리 심심한데 황손이나 만들까요, 폐하.”


* * *


“암투가 필요합니다!”

혹시나 갖고 싶거나 필요한 게 있느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답이 이거다. 유건은 잠깐의 침묵 끝에 되물었다.

“뭐?”

“본디 후궁에는 매일같이 피바람이 분다면서요? 입궁한 이래로 언제쯤 자객이 쳐들어오려나, 언제쯤 제 밥에 독이 섞이려나 하루하루 기대하며 잠드는데 아무 일도 없으니 참으로 살맛이 안 납니다. 혹시나 죽은 쥐나 저주 인형 같은 거라도 묻혀 있을까 해서 매일 앞뜰도 파 보는데.”

“권 빈. 농담이 지나치다.”

“아이, 폐하도 참. 언제까지 그런 딱딱한 호칭을 쓰시려고요. 희수라고 불러 주시어요.”

희수가 애교 있게 웃으며 바짝 다가앉아 유건에게 팔짱을 꼈다. 그 움직임에 따라 머리에 꽂힌 나비 비녀와 홍옥 뒤꽂이, 물총새의 깃털로 만든 머리 장식이 찰랑였다. 무엇 하나 눈부시지 않은 게 없다.

황후가 연배와 지위를 고려하여 우아하면서도 위엄 있는 차림을 주로 한다면, 희수는 그런 거 없고 그냥 자기 취향대로 온갖 색채와 문양을 때려 박아 생기발랄하게 치장했다. 둘 다 눈 돌아가게 비싼 건 매한가지다. 몸에 걸친 걸 다 합하면 궁 하나쯤은 너끈히 살 수 있을 것이다.

“보석이나 책은 어떤가? 침방에 명하여 새 옷도 지어다 줄 수 있는데. 요즘 달리 먹고 싶은 건 없고?”

“네? 그런 자잘한 걸 폐하께 부탁씩이나 해서 사야 하나요?”

희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는 황도에서 제일가는 거상의 금지옥엽 늦둥이 외아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보석으로 공기놀이를 하고 팽이 대신 금괴를 돌리며 놀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런 건 사가에 서신 한 통만 넣으면 얼마든지 가질 수 있사옵니다. 굳이 내탕금에 손을 댈 필요도 없지요. 그보다 폐하, 암투는 언제쯤 시작될까요? 내일? 다음 주? 다음 달?”

“그대, 궁중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것 아닌가.”

유건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어리고 귀여운 첩의 처소를 찾았으니 모름지기 모든 근심 걱정이 날아가야 하거늘, 어째 대신들과 회의를 할 때보다 더 골치가 아팠다.

“저는 폐하만의 귀여운 희수예요. 어렸을 때부터 황제 폐하의 애첩이 되는 게 목표였답니다.”

“품계가 더 높아지고 싶진 않고?”

“싫습니다! 특히나 정실은 제일 싫어요. 재미도 없고 골치만 아프잖아요. 저는 귀엽게 꾸며서 폐하께 잔뜩 예쁨받고, 심심할 때마다 다른 후궁들 머리채나 잡아 뜯으면서 꿀 빠는 삶을 살고 싶사옵니다.”

“꿀을 빤다는 게 대체 무슨 뜻…… 아니, 됐다. 알 것 같으니 굳이 설명하지 마라.”

“황후께서는 암투를 하느니 아예 모가지를 날리시는 편이고, 황귀비께서는 이러나저러나 별 관심 없으시고, 윤 비 마마는 머리보다 주먹이 앞서 나가지 않습니까. 자웅을 겨룰 호적수가 없어 몹시 심심하옵니다.”

희수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동그란 눈망울을 반짝였다.

“있잖아요, 폐하!”

“또 왜.”

“역시 후궁을 더 들이심이 어떻사옵니까? 질투 많고 잔머리 잘 굴리고 독기 넘치는 놈들로 뽑아 주셔요. 금방 죽으면 재미없으니까 명도 좀 질겼으면 좋겠고요.”

희수는 아기 새처럼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조잘거리며 유건의 품에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 말의 내용은 조금도 사랑스럽지 않았다. 심지어 폭 안겨 오는 몸은 유건 못지않게 탄탄하기까지 했다. 유건은 그의 등을 대충 토닥여 주며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

대체 자신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처첩들이 하나같이 이 모양 이 꼴일까. 눈앞이 아득했다.


* * *


그날 밤. 유건은 경사방의 내관이 패를 뒤집으라 종용하는 것을 무시하고 애써 궁을 벗어났다. 이제 시침이니 합방이니 하는 소리만 들어도 진절머리가 났다. 그나마 개중에 가장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후궁의 처소를 찾았다.

“그런 일이 있으셨습니까. 고단하시겠군요.”

유건의 파란만장한 하루 이야기를 듣고도 상대는 별 반응이 없었다. 중간중간 짤막한 대꾸와 함께 술잔에 술을 더 따라 줄 뿐이었다.

“예. 읽어야 할 서신이 산더미 같은데 하루를 통째로 빼앗기는 바람에……. 이런, 벌써 시간이.”

유건은 말을 하다 말고 창밖을 보았다. 술 한두 잔 마셨을 뿐인데 벌써 하늘이 캄캄해졌다.

“이만 일어나야겠습니다.”

“돌아가십니까?”

“예.”

“이대로 홀로 침소에 드실 겁니까?”

“당연한 걸 왜 자꾸 묻습……. 아.”

단호한 손길에 어깨가 감싸여 몸이 돌아갔다. 학자처럼 정갈하고 고요한 분위기의 남자가 그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 처소에 술은 마시러 오셔도 밤을 보내러 오신 적은 없으시지요. 저는 황후만큼 아름답지도 않고, 권 빈 같은 이에 비하면 나이도 많고, 출신도 별 볼 일 없어서 싫으십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폐하께선 제게서 황손을 볼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그럴 리가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럼……. 오늘은 제게 시간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예?”

황귀비, 태인은 유건을 말 안 듣는 고양이 들듯 한 팔로 달랑 들어 옆구리에 낀 채 침상으로 향했다. 공포감이 엄습했다.

“그, 그만. 황귀비, 나 죽습니다.”

“안 돌아가십니다.”

“역사서에 터무니없는 이유로 단명한 황제로 기록될 겁니다.”

“설마 그러시겠습니까. 이제껏 제가 올린 약주가 몇 병인데. 기력 보강과 회임에 좋은 재료를 아낌없이 넣었으니 괜찮을 겁니다.”

어쩐지 찾아갈 때마다 약재 향이 나는 술을 꼬박꼬박 먹이더라니! 유건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태인이 그를 침상에 밀어 눕히고 올라탔다. 평소에는 거친 언행을 하지 않고 차분히 있으니 잘 실감이 나지 않는데, 이렇게 그의 아래에 깔려 있을 때면 체격 차이가 확연히 느껴졌다.

그때 밖에서부터 소란스러운 발소리가 들렸다. 문이 벌컥 열리고 희수가 배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달려왔다.

“폐하! 왜 여기 계시는 거예요? 오늘은 제가 시침 들 차례였는데!”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들어오느냐! 당장 나가라.”

태인이 딱딱하게 윽박질렀다. 그가 시종을 불러 희수를 쫓아내라 명하려는 찰나 다시 문이 열렸다.

“우리 폐하께서 인사불성이 되었다 해서 모시러 왔는데?”

신제가 빙긋 웃으며 들어왔다. 자신의 침실에 들어오듯 자연스러운 걸음이었다. 분위기가 한층 흉흉해졌다.

쾅! 이번엔 문짝이 아예 떨어져 나갔다. 찬이 적진에 쳐들어온 장군 같은 기세로 대놓고 선전포고를 했다.

“폐하 내놔. 내 거야.”

유건은 그들 틈에 끼어 간절히 소망했다. 이 거지 같은 황제 자리, 아무한테나 빨리 물려주고 탈주하고 싶다고. 애초에 희성이 갑자기 세상을 뜨는 바람에 얼떨결에 떠맡은 것일 뿐 스스로는 한 번도 원한 적 없었다.

하지만 황위를 물려주기 위해서는 일단 자식이 필요했다. 자식을 만들려면 저들과 열심히……. 밤일을 해야 했다.

“폐하도 제가 제일 어리고 팔팔해서 절 제일 총애하실걸요?”

“그게 뭔 소용인데. 잘 세우기만 하면 다냐? 크기와 기술이 있어야지, 인마.”

“총애를 얻고 싶으면 일단 예쁘기부터 해야 할 것 아니니. 생기다 만 것들이 참으로 시끄럽구나.”

“그리고, 태인이 형! 술은 솔직히 반칙이죠. 누군 그런 거 못 구해서 안 쓰는 줄 아나.”

“권희수 네가 쓰는 건 술이 아니라 미약이겠지.”

그는 지체 높은 황제의 비빈들이 살벌하고 천박하게 싸워 대는 소리를 한 귀로 들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참 많았다. 그 별들 속에 언뜻 희성의 얼굴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는 피로에 찌든 무표정 아래로 생각했다.

‘형, 왜 나만 놔두고 떠났어…….’

아무래도 그의 소망이 이루어지기까지는 한참 더 걸릴 모양이다.



〈동양풍 궁중 AU〉 끝EC

주석




[1]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서상원 역, 스타북스, 2019.

이전권
다음권

사용하시는 기기에서는
미스터블루 앱으로만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