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이 있다는 걸 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답을 듣고 나니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자고 올 거면 연락해줘요. 드레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金旼炡은 그런 말을 남겨두고 다시 침대로 몸을 뉘였다. 刘知珉은 침실을 나서면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빨래함에 넣어뒀다.
주말이라서 차가 막힐 것을 계산하고 일찍 출발을 했지만 날을 잘 잡았는지 교통체증이 아주 심하지는 않았다. 도착 예정 시간은 늘어나거나 멈추지 않고 시간이 흐를수록 부단히 줄어들었다. 날씨도 적당히 맑았다. 신호에 걸리면 잠깐 창문을 내려 바깥을 구경하기 알맞았다.
어버이날에도 찾아가지 못했으니 집에서 얼굴을 보는 것은 최소 두 달만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刘知珉은 깔끔하게 정돈된 정원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걸어갔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가면 예상과 달리 환대는 단출했다. 할아버지는요? 할머니랑 같이 세미나 가서 내일 오후에나 오셔. 인기척을 느끼고 다가오던 해피는 그새 제 얼굴을 잊었는지 으르렁거리다 모친의 뒤로 몸을 숨겼다.
"아버지는요?"
"뒷마당에서 불 피우고 있어."
"왜요?"
"그냥 뭐 고기랑 이것저것 구워 오라고 시켰지."
"지금 화구가 4개 돌아가는데? 언니도 와?"
모친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刘知珉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손바닥만한 인형을 발견하고 복도 쪽으로 던져줬다. 쪼르르 뛰어가서 인형을 물어뜯는 해피에게 이리오라며 손을 휘적이자 마치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뛰어와서는 물고 있던 것을 내려뒀다. 물론 제가 아닌 모친에게로. 기가 찬 刘知珉이 인형을 빼앗으려 들자 해피는 지지 않고 목청 높여 짖기 시작했다. 짐 챙겨서 내려오던 중에 교수님한테 붙잡여 수술실로 끌려갔다는 첫째의 소식을 전하던 모친은 바닥에 누워 해피와 기싸움을 벌이는 막내를 바라보다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언니는 온다고?"
"못 오니까 돌아가는 길에 병원 좀 들러 네가."
"귀찮은데."
"지현이한테 일러준다."
"그러게 내과 가서 나중에 개원하라니까 굳이 서저리과를 가서 사서 고생이야."
"그래도 언니는 그 고생하면서도 하루에 한 번은 연락해. 刘知珉이만 아주 가면 갈수록 미운 짓을 골라서 하지. 엄마가 너 그렇게 키웠어?"
"아빠 혼내줘. 나 지방 안 보내줄거래."
몰래 해피 옆에 놓인 인형을 가져가려다 손가락이 물린 刘知珉은 앓는 소리를 내며 모친에게 투정을 부렸다. 모친은 아프지 않게 刘知珉의 등을 내리치고 해피를 품에 안았다.
"서울에 있어도 이렇게 몇 달만에 집에 오는데, 지방 가면 반 년에 한 번 얼굴 보여주려고? 됐네요 유 검사님."
거실 바닥에 아예 대자로 누운 刘知珉은 기어코 쟁취한 인형을 해피를 향해 흔들며 중얼거렸다. 여기에 내 편은 한 명도 없어. 할아버지 보러 갈래. 모친이 해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복도 끝 어딘가에서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넘어왔다. 刘知珉이 고개만 들고 다가오는 사람을 올려다보다 손을 휘적였다.
"일찍 왔네?"
"장관님 저 땅끝 마을 가고 싶어요."
"다음 휴가 때 다녀오세요."
"아버지 막내딸 거기 가면 금방 연애 할 것 같아요."
"누구 하나 데리고 온 다음에 그 소리 하세요. 허우대 멀끔하게 낳아줬더니 제대로 써먹지도 못 하면서 아주 입만 살았어."
철없는 투정을 가뿐히 응수한 부친은 부엌으로 유유자적 걸어갔다. 刘知珉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입술을 비죽였고, 모친은 해피를 바닥에 내려두며 刘知珉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가서 밥 먹자. 복도 중간에 있던 제 집으로 걸어가던 해피는 그 말을 용케 알아듣고 멈춰서서 刘知珉을 쳐다봤다.너 안 주고 내가 다 먹을 거야. 해피는 인형을 물고 다가오다 발로 바닥을 내리쳤다.
"해피한테 왜 그래 너는 자꾸."
"라이벌이잖아. 예쁨을 다 뺏겼어."
"집에 좀 자주 오든가 그러면."
刘知珉은 느작거리며 걷다가 뒤에서 모친을 끌어안았다. 사회생활 너무 고달파 이걸 어떻게 몇 십년이나 했어요.의자를 빼주던 모친은 제 어깨에서 얼굴을 부비작거리는 刘知珉을 살펴보다 넌지시 말했다. 그러니까 효도 해야겠어 안 해야겠어. 刘知珉이 살짝 고개를 들고 모친을 마주봤다.
"여기서 어떻게 더 잘해."
"엄마아빠가 바라는 거 딱 하나 남았어."
모친이 刘知珉의 볼을 아프지 않게 잡았다 놓았다.刘知珉은 그 손을 잡아 자신의 머리에 올려뒀다. 모친이 부드럽게 웃으며 한참동안 머리를 쓰다듬어주다 刘知珉을 의자에 앉혔다. 그릇을 내려두던 부친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냐오냐 해주지 마요 버릇 나빠져.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밥 위에 반찬을 올려주기 바빴다.식사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양친은 본인들의 밥과 국이 미지근하게 식을 때까지 刘知珉을 챙겼고, 먼저 밥그릇을 말끔히 비워낸 刘知珉은 번갈아 가며 양친에게 쌈을 싸주다가 채근에 못 이겨 새로 밥을 떠왔다. 어느 정도 배가 찼다 싶으면 이번에는 모친이 먼저 운을 떼며 刘知珉에게 물었다. 헤어진 지도 꽤 되지 않았어? 잔을 집어들려던 刘知珉의 손이 삐끗하고 미끄러지자 유리끼리 부딪히는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모친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다 잔을 쥐여줬고, 부친은 시보 때 만나던 사람 말하는 거냐며 덧붙였으며, 刘知珉은 당황스러움을 애써 감추며 물을 마셨다.
그래도 숨긴다고 숨겼는데 티가 아주 안 날 수는 없었다. 누구와 언제부터 연애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즈음에 만나던 사람과 헤어졌다는 건 가족들도 어렴풋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잔을 채우던 刘知珉이 해피 산책은 언제 시켜야 되냐며 괜히 말을 돌렸다.
"정말 그 이후로는 아무도 안 만났어?"
물론 통하지 않았지만 시도는 해봤으니까.
"유진이한테 물어봐야 하나."
"걔가 무슨 상관이에요."
"아는 눈치더만. 요전번에 같이 밥 먹을 때 소개팅 얘기 나오니까 知珉이는 그런 거 안 시켜줘도 잘 할 거라고,"
"배부르다 이거 저기다 가져다 놓으면 되죠?"
이럴 땐 피해야 한다. 괜히 말렸다가 이런저런 얘기를 다 꺼내둘 수도 있었다. 검사 아버지와 변호사 어머니라니. 刘知珉은 질색하며 그릇을 싱크대에 내려두고 식탁으로 돌아갔다. 소파에 앉아 있어 과일 가져다 줄게. 해피랑 산책하고 와도 돼요? 날 더우니까 정원에서만 놀아 또 싸우지 말고. 허락 아닌 허락을 받은 뒤에는 간식을 들고 해피에게 다가갔다. 이상하게 누구 닮은 것 같단 말이지. 쿠션에 누워 귀찮다는듯 저를 바라보는 해피에게 간식을 꺼내보이자 금방 귀를 쫑긋 세우고 걸어와서는 애교를 부리는 것이었다.
刘知珉은 한 손에 고무공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해피를 안으며 현관으로 향했다.공을 물고 오는 것도 서너 번이 전부였다. 금방 시큰둥해져서는 간식을 내놓으라고 손가락을 깨물기 바빴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공을 던지고 오는 것도, 다시 주워오는 것도 제가 하고 있었다. 刘知珉은 나무 그늘 아래에 누워 배 위에 해피를 올려놓고 하늘만 멍하니 쳐다봤다.
"나랑 우리 집 갈래?"
"……"
"거기 가면…아니다, 이제 바빠서 보지도 못하겠다."
새하얀 털을 손으로 쓸어주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할 일이 없어서 그런지 별 생각을 다했다. 刘知珉이 잔말 말고 간식이나 더 내놓으라는듯 발로 얼굴을 툭툭 건드리는 해피를 품 안에 가뒀다.가만히 안겨 있나 싶더니 참지 않고 버둥거리며 잔디로 내려갔다. 저를 쳐다보는 눈빛에는 꽤나 한심하다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집으로 쪼르르 뛰어가다가도 중간에 멈춰서서 따라오라는 것처럼 짖기도 했다.
느릿느릿 몸을 일으킨 刘知珉이 옷을 툭툭 털고 현관문을 향해 걸어갔다. 도어락에 손을 올리지도 않았는데 문이 먼저 열렸다. 그새 옷을 갈아입은 부친은 누군가와 통화 하며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刘知珉이 목소리를 낮춰 어디가냐 묻자 그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업무 관련 보고가 잡힌 모양이었다. 저러니 흰 머리가 가득이지. 해피를 붙잡아 곧장 화장실로 들어간 刘知珉은 다리를 꼼꼼하게 씻어 티슈로 물기를 닦아주고 나서야 한숨을 돌렸다.
슬쩍 들여다 본 부엌에서는 모친이 커피를 내리며 다과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언제 들어오셔요? 글쎄 저녁은 나가서 먹자고 하던데 知珉이 먹고 싶은 거 골라놔.과일을 깎는 옆에서 알짱거리자 모친은 刘知珉의 손에 잔을 하나 쥐여주고 허리를 토닥였다.
"소파 가서 앉아 있어."
"이거는 뭐에요?"
"매실청."
"나도 커피."
"주말에는 안돼. 잠 안 와."
이럴 때는 단호했다. 刘知珉은 몰래 커피로 손을 뻗다 들키고는 거의 등떠밀려 거실로 걸어가게 됐다.잔을 들고 거실로 오기 무섭게 해피는 소파 아래에 앉아서 刘知珉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너 아까 간식 거의 한 봉지는 먹었잖아. 분명 말을 알아 들으면서 무슨 소리냐는듯 다리를 긁어댔다. 이거 너 꺼 아냐. 누굴 닮아서 참을성이 없는지 다짜고짜 성질을 부리며 바지를 물어뜯기도 했다.
刘知珉은 해피를 안아 소파에 올려두고 매실청을 단번에 들이켰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라고 왕왕거리며 짖어대는 해피에게는 서랍장에서 개껌을 꺼내 물려주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해피가 봐줘 知珉이 오랜만에 왔잖아. 어깨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헛웃음을 터트린 刘知珉이 해피 옆에 몸을 내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엄마."
"한 잔 더줄까?"
"리모컨은 어디에 있어요?"
"테이블 위에 있을 텐데."
그새 개껌 하나를 해치운 해피는 刘知珉의 다리 위에 자리를 잡고 누워 하품을 했다. 덕분에 刘知珉은 아슬아슬하게 손을 뻗어 테이블에 놓인 신문을 구석으로 치워뒀다.리모컨이 모습을 나타냈으나 티비를 켜지는 못했다. 신문 사이에서 나타난 무언가 바닥으로 떨어진 덕분이었다. 刘知珉이 해피를 안아든 채로 허리를 굽혀 베이지색 봉투를 집어들었다. 빳빳한 재질이 손끝을 휘감았다. 대체로 이런 봉투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은…실링왁스가 붙여진 윗부분을제치고 안에 든 것을 꺼냈다. 아니나 다를까 구김 하나 없이 곱게 접힌 종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刘知珉이 조심스럽게 종이를 펼쳤다.
날이 좋은 어느 평범했던 오후, 운명처럼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제는 7년의 결실을 맺고 평생을 함께하며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고자 합니다. 그 시작의 한 걸음을 함께 축하해주시시고 격려해주시면 더없는 기쁨으로 간직하겠습니다.
문구를 읽어가던 刘知珉은 뭔가 잘못 봤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눈을 비벼보기도 했고, 글이 적힌 부분을 손가락으로 닦아보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러니까 이게…
차석현, 한유진
"아 그래, 유진이네 날도 잡았다더라. 청첩장은 확정된 건 아니고 샘플로 몇 개 뽑았다면서 홍대표가 줬어."
과일과 주전부리가 담긴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는 모친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그러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유진이…결혼해요?"
"약혼한지 벌써 6년이나 지났는데 늦은 감이 있지."
손에 쥐여지는 포크를 가까스로 힘을 주어 잡았다. 모친이 리모컨을 집어들고 티비를 켰다. 채널은 빠르게 돌아가다 어느 부분에서 멈춰섰지만 刘知珉은 여전히 얼 빠진 낯으로 빳빳한 종이를 바라봤다.
"하는구나 결국…"
"홍대표 말로는 중간에 한 번 엎어질 뻔도 했다는데 다행이야 그래도."
"한유진이 결혼을…하는 거죠."
"실감 안 나? 하긴 너희 고등학교 때부터 그렇게 붙어다닌 것도 벌써 몇 년이니."
"…모르겠어요."
"벌써 아쉽네. 식만 여기서 올리고 아예 영국으로 가는 모양이던데. 우리 유진이 얼굴 보는 날도 얼마 안 남았다 진짜. 결혼 준비로 바빠서 시간 맞추기도 어렵고."
포크로 찍어둔 과일은 이미 해피가 먹어 치운 지 오래였다. 刘知珉은 그저 멀거니 앞만 바라보며 종이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이따금씩 고개를 숙이고 청첩창 속 문구를 읽고 또 읽으며 속으로 되뇌었다. 평생을 함께하며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기로.
"둘이 중학교 동창이라고 했던가."
유진이 영국에서 무용했을 때 알게 됐다는 것 같아. 그러다 한국 오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는데, 대학원을 영국으로 가면서 다시 만났다고. 적힌 대로 운명은 운명이야 참. 刘知珉이 고개를 끄덕이며 청첩장을 덮었다.
"과일 더 안 먹어? 다른 거 가져다 줘?"
"아냐…먹고 있어요."
하늘이 무너져 내리지는 않았다. 땅이 꺼진 것도 아니었다. 정말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모친이 건네주는 포크를 받아서 무언가를 입에 넣고 한참동안 씹었다. 신 것도 같고, 단 것도 같고,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은 것도 같았다. 刘知珉은 배가 부른 것도 모르고 접시를 말끔히 비워냈다.
느즈막한 점심에 만나 영화를 봤다. 저녁을 먹으면서는 서로의 스케줄과 차기작에 대해 얘기를 주고 받았다. 평소와 별 다를 것 없는 데이트였다. 딱히 어색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메디컬은 처음이라서 걱정이 많다는 그에게 해왔던 대로만 하면 될 거라고 응원을 해줬다.한참 여름에 촬영을 하는 만큼 컨디션 관리 신경 써야 한다는 그의 당부에는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바로 헤어지지 않고 여느 때처럼 한강에 들렀던 것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었다. 적어도 저는 그래서 거절을 하지 않았던 거였다.
잠깐 걸을까 旼炡아. 그림자는 나란했으나 더이상손등이 스치지는 않았다. 주차장으로 되돌아 가는 길에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그였다. 연락에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金旼炡은 그저 고개만 주억일 뿐이었다.
'미안해, 그런데 아직은 나 너 놓을 자신 없어.'
'……'
'가끔 이렇게 만나서 같이 밥 먹는 건 괜찮지 않을까?'
이 역시 섣불리 대답은 못했다.
'촬영 끝날 때까지만…그때까지만 만나보자. 시간 많이 안 뺏을게.'
'…오빠.'
'정리할 기간을 줘. 그래도 우리 3년 만났잖아 旼炡아. 잠깐 오는 권태기 일 수도 있고, 떨어져 지내는 동안 누구든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어.'
갈림길이었다. 옆으로 꺾으면 주차장이보였으나 더이상 걸음을 내딛지는 않았다. 金旼炡은 그를 올려다보며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정태준을 위한 선택은 아니었다.
'나는 택시타고 들어갈게 여기에서는 우리집이 더 가깝잖아. 운전 조심히 하고 나중에 보자.'
그렇다고 金旼炡을 위한 선택이라 할 수 있었을까.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점심 이후로 멈춰 있는 대화창은 그다지 대수롭지 않았다. 문자를 보내려다가도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는 복잡한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싶어 금방 홀드버튼을 눌렀다. 마음 고생은 이쪽만큼이나 저쪽도 만만치 않게 겪고 있을 터였다. 좋아하는 건 오직 제 몫이었다. 그것까지 刘知珉이 알아줄이유는 없었다. 金旼炡이 욕심 낼수록 刘知珉은 힘들어지니까, 그러다 보면 정말 언젠가는 刘知珉이 먼저 金旼炡에게 그만하자는 말을 꺼낼 수도 있으니까.
집으로 가는 내내 창밖만 쳐다봤다. 기다리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오늘 만나지 못하면 내일 보면 되는 거라 생각했다.이럴 거면 그냥 윗층이든 아랫층이든 계약할까. 비밀번호를 누르며 실없는 상상도 잠깐 해봤다. 맑은 알림음이 들리면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며 거실이며 전부 깜깜하기만 했다. 아무래도 본가에 갔으면 자고 오겠지. 金旼炡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한 손에 쥐고 슬리퍼를 갈아신었다.
복도 끝에서 다다르면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눌렀다. 곧장 침실에 가려고 했었다. 드레스룸에서 옷을 챙겨 바로 씻으려 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시야가 환해지자마자 金旼炡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도 바닥을 나뒹굴었다. 金旼炡이 겨우 입술을 뗐다.검사님. 잘못 봤나 싶어서 눈도 몇 번이나 비벼봤으나 익숙한 인영이 홀로 우두커니 소파에 앉아 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金旼炡은 핸드폰을 주워들고 홀드키를 눌러 화면을 확인했다. 8시 49분. 주말인 걸 생각하면 아주 늦은 시간이라고는 할 수는 없었다.
"언제…왔어요?"
서서히 걸음을 옮겨소파로 다가갔다.
"저녁만 먹고 바로 온 거에요? 내일 일 있어요?"
"……"
"왜 불도 안 키고…어디 아파요? 괜찮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를 보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金旼炡은 소파를 빙돌아 刘知珉의 옆으로 걸어갔다. 다행히 테이블 위에는 술병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이마에 손을 올리니 그제야 저를 올려다봤다. 열은 없는데. 걱정을 한시름 내려두려 했었다.
"집에 가서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왔어요? 그래도 본가가 경기도여서 운전하는데 피곤하지는 않았겠다."
아침에 나갔던 그대로 옷을 입고 있는 걸 보면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도 같았다.金旼炡은 슬며시 웃으며 刘知珉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한 번, 그리고 두 번. 더이상 손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검사님."
거짓말처럼 뺨을 타고 눈물이 떨어졌다. 눈동자에는 금방 물기가 어렸다. 刘知珉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울음을 참으려는지 호흡을 불규칙적으로 내뱉으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끝내 무너졌다. 刘知珉은 숨을 헐떡이며 金旼炡의 옷을 움켜잡았다. 파들파들 떨리는 손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마른침을 겨우 삼킨 金旼炡이 刘知珉을 내려다봤다. 다른 한 손에는 새하얀 종이가형편없이 구겨진 채로 들려 있었다. 金旼炡은 소파에 앉아 조심스럽게 刘知珉을 제 품으로 가뒀다. 어깨가 점차 뜨거워졌다. 괜찮아요. 등을 쓸어주며 조용히 속삭였지만 떨림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어디서 서러움이 터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참지 않고 울음을 터트리는 刘知珉을가만히 안고 있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어떤 것도 물을 수 없었다. 섣불리 위로를 할 수도 없었다. 바닥으로 떨어진 종이를 바라보다 刘知珉의 빈 손을 맞잡았다.울지 않았으면 싶다가도, 차라리 한바탕 울어버리고 훌훌 털어버리기를 바라게 됐다. 뭐가 됐든 더는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우는 것으로 끝내기를, 누가 됐든 더는 괴롭히지 말고 눈물만 가져가기를.
주말이어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아주 늦지 않게 집에 와서 다행이었다. 혼자서 울고 있을 刘知珉을 잠깐 상상해보면 명치가 뻐근하게 조여오는 것만 같았다. 다만 바랄 뿐이었다. 집에 안 좋은 일이 있는 게 아니기를 하고, 믿지도 않는 신에게 염치 불구하고 부탁할 뿐이었다.
그 쪽은 얼마나 봤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처음이란 말이에요. 어린 애처럼 우는 刘知珉도, 숨을 헐떡이며 옷자락을 부여잡는 刘知珉도, 그렇게 울어 놓고도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刘知珉도 처음이에요. 이 다음에는 어떻게든 달래보겠지만지금은 도와줘요. 앞으로는 자기 전에 기도 할게요. 휴식기에 시간 나면 예배당이든 불당이든 찾아갈게요. 기부도 더 자주 많이 할게요. 욕심 같은 거 안 부리고 지금에 만족할 게요. 이제는 전부 정리할 테니까, 刘知珉만 바라볼 거니까 그만 좀 울려요. 바람핀 게 잘못이라면 벌은 나한테만 줘요.따지고 보면 시작한 것도 金旼炡이잖아요. 멋대로 안고, 입 맞추고, 그러다 사랑까지 해버린 것도 金旼炡이니까 刘知珉은 건드리지 마요.
창밖을 내다보던 金旼炡은 아랫입술을 말아물며 눈을 감았다. 서러운 울음은 오래도록 품 안에서 맴돌았다. 할 수만 있다면 슬픔까지 모두 가져가 버리고 싶었다.차마 힘 주지도 못하면서 가지 말라는 듯 손가락을 붙잡고 있는 작은 손이 그저 안타깝기만 했다. 金旼炡은 안타깝게 떨리는 어깨를 끌어안으며 연신 속삭였다. 여기에 있을 거에요. 내일은 스케줄도 약속도 없어요. 검사님이랑 같이 있을 거니까 그만 울자. 이러다 정말 어떻게 되는 건 아닐까 슬슬 걱정이 됐다. 괜찮은지 살펴보려고 했지만, 刘知珉은 뒤로 살짝 물러나는 그 틈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제게로 파고들었다.
金旼炡이 쓰린 한숨을 겨우 삼켜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핸드폰이 화면을 밝히며 잘게 진동했다. 엄마. 그 위에 떠오른 이름을 확인하고서는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놓았다. 전화 와요 검사님. 刘知珉이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 이따가 전화 걸어서 나 바꿔줘요. 부모님이 걱정하시겠다."
"……"
"물 안 마셔도 돼요? 잠깐만 부엌에,"
"……"
"알겠어요."
"……"
"사실 영화 보는 내내 검사님 생각했어요."
찢어지게 우는 사람을 달래봤어야 알지. 金旼炡은 결심한 것처럼 몸을 빼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刘知珉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서러운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울리려고 하는 말 아닌데…"
"……"
"있잖아요 검사님, 나한테는 진짜 미안할 거 없어요."
"……"
"나는 그냥 검사님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걸 나는 해주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으니까, 거기까지는 욕심내지 않을 거니까 오늘처럼 힘들어 하는 날은 아주 적었으면 좋겠어. 만약에 사람마다 할당량이 있다면 까짓 거 며칠 더 내가 아프고 말지. 한숨과 함께 진심을 삼킨 金旼炡은 刘知珉의 머리카락을 귀로 넘겨주며얼굴 가득한 물기를 닦아줬다. 손바닥으로 살며시 뺨을 감싼 다음에는 두어 번 입도 맞췄다.
"검사님이 하지 말아야 될 거 하나 더 생겼다."
"……"
"나 없는 곳에서 울지 마요. 혹시라도 나중에 속상한 일 생기면 바로 전화하기."
"……"
"부탁 아니에요 이것도. 그렇다고 강요는 아니고."
金旼炡은 힘이라고는 하나도 실려 있지 않은 刘知珉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그러는 동안 刘知珉은 金旼炡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불규칙한 호흡을 골랐다.
"…약속한 거에요. 다음에는 내가 늦지 않게 올 수 있게 해줘요, 응?"
뜨끈뜨끈한 목을 감싸 제게로 이끌었다.그렇게 울었으니 진이 빠지는 건 당연했다. 축 늘어지는 몸을 고쳐 안고 한참동안 유리창을 바라보던 金旼炡이 자세를 바꿔 刘知珉으로부터 살짝 떨어져 앉았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화면에 그 이름이 떠오른 것도 벌써 세 번째다.
金旼炡은 테이블로 손을뻗어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망설이는 건 잠시였다. 화면을 옆으로 밀고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인사를 하기도 전에 스피커 너머로는 다소 격양된 목소리가 넘어왔다. 손에서 미끄러질 뻔한 핸드폰을 가까스로 붙잡은 金旼炡이 마른침을 삼키고 숨을 들이마셨다. 어느덧 고개를 든 刘知珉은 서글픈눈으로 저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刘知珉 너 듣고 있어? 도대체 무슨 급한 일이길래 그렇게 나가서 아직까지 안 들어와. 엄마아빠가 몇 번이나 전화했는지 알기는 해?
"…그게 저는,"
-요즘 왜 그러는 건데. 정말 무슨 일 있는 거니? 평생 안 그러던 애가 홍대표 연락을 무시하지를 않나, 유진이랑은
"저는 金旼炡이라고 해요. 안녕…하세요."
-우리 知珉이는 어디에…설마 다쳤어요? 지금 병원,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知珉언니 화장실 갔어요 잠깐."
어쩔 방법이 없었다. 金旼炡은 자리를 벗어나 부엌으로 걸어가며 말을 이어갔다.
"죄송해요 제가 몸이 조금 안 좋아서요…"
그런데 서울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언니한테 와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텐데 저 상태로 전화를 받았다가는 정말 크게 걱정을 끼칠 수도 있었다. 이번에는 제가 핑계가 될 차례였다. 식기 건조대에서 머그잔을 꺼낸 金旼炡이 정수기 앞에 서서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많이 아파요? 지금은 좀 괜찮고요?
아무래도 다정도 유전이겠지. 보일리도 없는데 金旼炡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이상하게 콧등이 시큰거렸다. 金旼炡이 손등으로 눈가를 빠르게 훔치며 머그잔에 미온수를 받았다.
-미안해요 내가 지금 너무 정신이 없어서…
"저야 말로죄송해요…언니 오랜만에 집에 간 건데 괜히 저 때문에……"
-아니에요 몸도 안 좋은데 그런 거 신경 쓰지 말아요. 저녁 먹고 들어오는 길에 애가 갑자기 사라져서 연락이 안 되니까 우리도 놀라는 바람에…그러면 지금 우리 知珉이랑 같이 있는 거죠?
"네…저희 집에 있어요 둘이."
그제야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金旼炡은 머그잔을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거실로 걸어갔다.
-知珉이 오면 전화 왔었다고 전해줄래요? 부모님이 연락 기다리고 있다고요
"그렇게 할게요."
-그래요 몸조리 잘 하고요 먼저 끊을게요
배경화면으로 돌아온 핸드폰을 확인하고 나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그런데 왜 또 저러고 있어 속상하게.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는 刘知珉을 바라보던 金旼炡이 소파 가까이로 다가가 테이블에 잔을 내려뒀다. 내가 아파서 검사님 불렀다고 말씀드렸어요. 지금 여기 우리 집이야. 이따가 꼭 전화 드려요 걱정 많이 하셨어요. 느릿하게 머리만 위아래로 움직였다.
"물도 좀 마시고요."
"…미안해요."
"저는 먼저 들어가서 씻을게요. 옷 가져다 줄테니까 검사님도 거실 화장실에서 샤워하고 와요. 그 전에 부모님한테 꼭 전화드리고. 오늘은 일찍 자자."
어쩌면 지금은 자리를 피해줘야 할 것 같았다. 金旼炡은 곧장 침실에 가서 협탁 위에 제 핸드폰을 올려두고드레스룸에서 갈아입을 옷을 챙겼다. 하나는 침대 위에 올려두고, 나머지 하나는 손에 들고 다시 거실로 향했다. 이번에는 굳이 아는 척 하지 않았다. 물이 가득한 머그잔도, 화면에 떠오른 이름도, 잘게 떨리는 어깨도. 그저 소파 구석에 옷을 내려놓고 빠르게 침실로 걸어갈 뿐이었다.아무래도 싸운 건 부모님이 아니라…문이 기대 불 켜진 스탠드를 멍하니 쳐다보던 金旼炡이 고개를 휘저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화장실에 들어갔다.
평소보다는 오래 샤워기 아래에 서 있던 것도 같다. 마지막에는 정신을 차리라는 뜻으로 몇 번이나 찬물을 얼굴에 끼얹기도 했다.그래서 잠이 깼을 뿐이었다. 金旼炡은 침대에 앉아 침실문만 바라보다 핸드폰 화면을 두드렸다. 벌써 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刘知珉은 침실로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기다리다 못해 거실로 나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소파는 텅 비어 있었다. 저 멀리에서 물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물이 반쯤 사라진 머그잔을 들고 테이블을 벗어날 즈음이었다. 소파 아래에 놓인 구겨진 종이를 발견한 것은. 그러고 보니 내내 저걸 손에 쥐고 있었는데. 부엌으로 걸어가던 金旼炡이 그대로 되돌아와서 테이블과 소파 사이에 웅크려 앉았다.
바닥을 더듬다 보면 금방 무언가 손에 툭 하고닿았다. 金旼炡은 손가락을 움직여 끝에 걸리는 것을 조심스레 움켜쥐었다. 테이블로 잔을 내려두고서는 소파에 등을 대고 앉아 손에 든 것을 살펴봤다. 구겨진 부분을 손바닥으로 펴고, 접힌 종이를 서서히 펼쳐들었다. 카드라기에는 크리스마스나 신년이나 한참 멀었고, 새하얗고 반들반들한 재질은대부분 하객을 초대할 때 주로 쓰였다. 적어도 제가 아는 한은 그랬다. 그러니 중간에 쓰여 있는 문구를 확인하지 않아도 끝에 나란히 박힌 이름이 뜻하는 것은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金旼炡은 혀로 입술을 쓸었다.
차석현, 그리고
"…한유진."
종이를 쥔 金旼炡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이러면 이해가 되기는 했다. 본가에서 하룻밤도 보내지 않고 집으로 온 刘知珉도, 부모님의 전화를 받지 않았던 刘知珉도, 불도 켜지 않고 소파에 앉아 있던 刘知珉도, 북받쳐 오르는 서러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고 또 울던 刘知珉도. 그 刘知珉을 무너트리는 건 언제나 한 명 뿐이었다.뒤통수가 얼얼했다. 결혼을 하는구나 결국. 그래서 刘知珉이, 그러면 刘知珉은 어떻게 되는 거지.
빳빳한 청첩장의 끝부분을 만지작거리던 金旼炡이 거실 화장실로 시선을 옮겼다. 헤어지기 싫었다. 아직은 놓고 싶지 않았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刘知珉을 두고 다른 사람을선택할 수는 없었다. 刘知珉이잖아요. 심지어 당신을 사랑하는 刘知珉이잖아요. 세컨드만으로도 이렇게 좋은데, 당신은 刘知珉의 첫번째였잖아요. 金旼炡은 입술을 세게 욱여물며 청첩장을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놓았다.
이로써 더더욱 확실해지는 것이었다. 金旼炡이 정리해야 하는 사람은…새하얀 천장을 올려다보며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표정관리 하자, 티 내지 말자, 쓸데없는 말은 그냥 삼켜버리자. 그러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잔상 때문에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그러고 보면 매번 이럴 때 같이 있게 되는 구나. 식당 화장실에서도 그렇고, 백화점 앞에서도 그렇고,고시촌에서도 그렇고. 새삼스럽지만 刘知珉에게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이고, 어떤 의미였을지 깨닫게 됐다. 얼마나 사랑해야 나를 두고 바람핀 여자친구와 친구를 하고, 그러다 결국 청첩장까지 받아서 저렇게 무너질까. 金旼炡은 야트막한 실소를 내뱉으며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래도 이건너무 했지.
"……"
이렇게까지 잔인해서 뭐 하겠다고. 소파 끝을 짚고 몸을 일으킨 金旼炡은 물소리가 그친 화장실을 쳐다보다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참을 새도 없이 연거푸 한숨이 터져나왔다. 이불을 걷어내고서는 그 안으로 들어가 헤드에 기대 앉았다. 속상했다. 그러나 내색할 수는 없었다.애꿎은 스탠드만 괴롭혔다. 조도를 높였다가 낮추기를 열댓번은 반복했을 때야 刘知珉이 침실로 들어왔다. 하지만 좀처럼 다가오지 않고 문 앞에만 우두커니 서 있었다. 결국 金旼炡이 먼저 입을 열었다. 부모님한테 전화 드렸어요? 刘知珉은 한참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출근할 거에요?"
대답은 안 했다. 고개를 움직이지도 않았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앞만 바라볼 뿐이었다. 명치가 욱신거렸다.
"하지마요, 내일은 그냥 나랑 쉬어요 집에서."
"……"
"다른 생각하지 말고 이리와요. 안아줄게요."
차라리 아예 스탠드를 꺼버릴 걸 그랬나. 그랬다면 눈동자게 유독반짝이는 것까지는 보이지 않았을 텐데. 金旼炡은 이불을 살짝 치워내고 매트리스를 두드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제 옆으로 올 때까지, 그리하여 마음 놓고 안아줄 수 있을 때까지. 비타민은 잘 챙겨 먹고 있어요? 일단 아무 말이나 꺼내고 봤다. 이불이 바스락거리며 움직였다.
"짱구 극장판 개봉하나봐요, 영화관에 포스터 걸렸더라."
"……"
"다음에 같이 보러 가요. 검사님 안 바쁠 때."
"……"
"저는 카라멜 팝콘 좋아해요."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아도 괜찮았다. 몸이 뜨끈뜨끈한 건 조금 신경이 쓰이기는 했다. 이번에는 아프지 않고 무사히 넘어 갔으면 좋겠는데.제 쪽의 이불을 끌어 刘知珉에게 꼼꼼히 여매준 金旼炡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운전 진짜 배워야겠다. 그래야 검사님 데리고 드라이브도 하지. 눈꺼풀은 점차 무거워졌다.
"운전 알려주면 안…되겠다."
"……"
"아닌가…그건 부부나 애인 사이에 알려주지 말라고 하는,"
"헛소리에요 그거 다…"
자는 게 아니었구나. 金旼炡은 괜히 머쓱해져서 刘知珉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우리 아버지도 엄마한테 배웠어요 운전."
"장관님이…배우셨어요?"
"유지현도 남자친구 알려줬는데 지금까지 잘 만나고 있고요…"
"그게 누구…아, 검사님 언니."
이번에는 金旼炡이 고개를 주억였다.
"저 오빠 있거든요. 나이차이는 꽤 나요."
"…알아요. 전에 찾아봤어요."
"이건 모를 걸요."
"뭐가요…"
"오빠도 의사에요. 대학병원에 있는데…신경외과라고 했었나. 아무튼 되게 바빠요. 서울에 있으면서 얼굴도 잘 못봐."
"신기하네요, 유지현도 신경외과인데. 의학의 꽃은 써전이라나 뭐라나."
나쁘지 않은 대화의 흐름이었다. 金旼炡은 하품을 삼키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궁금하다 지현언니. 대답은 금방 돌아왔다. 역시나 이쪽도 목소리가 조금씩 늘어지고 있다.
"닮았어요 나랑."
"가운 입은 검사님이에요?"
"엇비슷해요."
"…그것도 그것대로 잘 어울리겠네."
金旼炡이 눈을 비비작거렸다.아닌 척해도 지치긴 지쳤던 모양이었다. 오후 내내 태준과 함께 있다가 집으로 들어 왔더니…길고도 짧았던 하루가 꿈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되뇌어 보다 까무룩 잠이 들었던 것도 같다. 한참 지나 눈을 떴을 때는 자세를 바뀌어 제가 刘知珉의 품에 안겨 있었다.지금이라도 숟가락을 얼려둘까 했지만 어차피 쉬는 날인데 뭐 어떠나 싶어 가지런한 눈썹만 조심스럽게 쓸어주다가 홀린 것처럼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아프지마요 검사님. 웅얼거리며 그 품으로 바짝 파고들려는 참이었다.
등 뒤에서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刘知珉은 잠결에 뒤척이다 金旼炡을세게 끌어안았다. 그럼에도 진동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검사님 잠깐만. 어디 가지 않으니 안심하라는 것처럼 刘知珉의 머리를 쓰다듬은 金旼炡이 뒤로 몸을 빼고 협탁 가까이로 다가갔다. 스탠드 근처에 나란히 놓인 핸드폰 중 화면이 밝아진 것을 집어들어 들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金旼炡이 손가락으로 화면을 옆으로 밀어내자마자 제 할 말을 꺼내뒀다.
"知珉 언니 지금 자요."
스피커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넘어오지 않았다. 분명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몇 초가 흐른 뒤에야 화면이 바뀌었다. 아랫입술을 깨물던 金旼炡은 배경화면이 점멸될 때까지 핸드폰을 바라봤다.刘知珉 자요. 그 쪽 때문에 진 빠지도록 울고 이제 겨우 잠 들었으니까 지금은 그냥 내버려둬요. 차마 전할 수 없는 말은 속으로 삼켜두는 것을 택했다. 볼륨 스위치를 아래로 내리고서도 한참동안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화면은 다시 밝아지지 않았다. 金旼炡은 두 개의 핸드폰을 아예 반대로엎어두고 몸을 돌려 刘知珉의 품에 파고들었다.
"…억울해."
누구는 혹시라도 불편해할까봐 좋아한다는 말도 함부로 못 꺼내는데, 누구는 그렇게 상처를 줬으면서 거리낌 없이 연락할 수 있다. 은연 중에 드러나는 처지가 너무도 명확했다. 같이 있는 건 나였는데, 옆에 있는 것도 나였는데.그런데 왜 항상 내가 져야할까. 내가 지고 싶은 사람은 刘知珉인데 왜 매번 엄한 사람이 이기는 걸까. 참았던 한숨이 결국 입 밖으로 새어나갔다. 金旼炡은 刘知珉의 옷자락을 세게 움켜쥐고 억지로 눈을 감았다. 知珉아. 그 목소리는 지워지지 않고 고장난 테이프처럼 새벽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알람이 울린 것도 아닌데 일찍 눈이 떠졌다. 다시금 잠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봐도 도리어 정신은 점점 또렷해지는 것이었다. 딱히 할 일은 없었다. 그래서 가만히 안겨 刘知珉의 얼굴만 구경했다. 가지런한 눈썹을 쓸어보다 유려한 곡선을 따라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얼굴만 봐도 재미있다는 걸배우도, 아이돌도 아닌 검사를 보고 생각하게 될 줄이야. 사람 일 정말 모르는 거라니까. 金旼炡은 얕은 실소를 흘리며 입술을 살짝 건드렸다. 손가락이 붙잡힌 것도 그 즈음이었다. 안경 없어도 되게 좋아하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소 형편없이 갈라져 있지만 그마저도 묘하게 설레기만 했다.
"…언제부터 일어나 있었어요?"
"눈썹 만져줄 때요."
"그러면서 왜…"
刘知珉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뒤늦게 머쓱해졌다. 마른침을 삼킨 金旼炡이 느릿하게 몸을 돌려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지만, 원하던 바를 이룰 수는 없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뒤에서 끌어안아 제 품으로 가둬둔 刘知珉으로 인해서였다. 金旼炡은 어깨에 올려온 작은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잘 잤어요 검사님? 덕분에요. 이어서 刘知珉은 金旼炡의 볼에 입을 맞추고 손깍지를 껴왔다.
"지금 몇 시에요."
"보려고 했는데 검사님이 안 놔줬잖아요."
"그랬구나."
시간 같은 건 그다지 상관 없다는 투였다. 편하게 刘知珉에게 기댄 金旼炡이 장난하듯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밥은 그냥 시켜서 먹어요."
"그래요, 냉장고에도 별 거 없을 거에요."
"이따가 같이 주문해요 그건."
"다음주부터 촬영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기억하네요."
살짝 고개를 돌리자그런 걸 묻냐는듯 빤히 바라보다 대뜸 이마를 부딪혔다. 아파요. 사실 힘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엄살을 부렸다. 그 자리에 입술을 내리는 刘知珉이 좋아서, 하지만 그것을 아주 내색할 수는 없어서. 더욱이 이제는 이렇게 함께 있을 시간도 줄어들 터였다. 촬영만 끝나면, 차기작까지는 휴식기가긴 편이니까, 그때가 되면 이 관계도 지금보다는 안정적일 테니.
한참 뒤의 미래를 벌써부터 상상하는 건 너무도 섣불렀지만, 누군가의 허락을 받고 기대를 품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金旼炡은 협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쳐다보다 속으로 몰래 한숨을 삼켰다.
"배고파요?"
刘知珉이 흘러내린 머리를 정리해주며 묻자 金旼炡은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을 감았다.
"그러면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조금이 뭐야 하루종일도 안고 있을 수 있는데.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 없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서로의 품 안에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 꿈을 꿨다.
일어났을 때는 옆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몸을 일으킨 다음에도 한동안은 멍하니 앉아 침대만 바라봤다. 그러다 침실 문이 열렸고, 못보던 안경을 쓴 刘知珉이 생수병 하나를 들고 터벅터벅 걸어 들어왔다. 밥 먹어아죠. 어디까지가 꿈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金旼炡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刘知珉은 매트리스 끝에 앉아 생수병의 마개를 열었다. 그리고는 金旼炡에게 병을 쥐여주며 협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뒤집었다.
몇 시에요? 金旼炡이 물어보면 12시가 넘었다고 대답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던 金旼炡도 이불을 걷어내고 뒤따라 침대에서 벗어나 거실로 걸어갔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刘知珉이 옆에 있던 쿠션을 치워 본인의 다리 위에 올려뒀다.
"불고기 괜찮아요?"
"…네."
"된장찌개는요?"
"네…검사님 언제 일어났어요?"
刘知珉은 내내 핸드폰 화면에 뒀던 시선을 비로소 金旼炡에로 옮겨뒀다. 3시간 됐을 걸요, 왜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이던 金旼炡이 느릿하게 소파에 몸을 내렸다. 刘知珉이 그런 金旼炡을 바라보다 핸드폰을 내려두고 리모컨을 집어들었다. 투명한 안경 렌즈 너머로 보이는 얼굴은 여느 날처럼 곱고 단정했다. 진짜 뭐지. 金旼炡은 슬며시 제 손등을 꼬집어봤다.통각은 선연했지만 여전히 현실감은 없었다. 채널을 돌리던 刘知珉이 빤한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리고 金旼炡을 쳐다봤다. 내가 깨운 거에요? 피곤하면 더 자도 돼요. 술을 마신 기억은 없다. 분명 어제 태준과 한강에서 헤어지고 집에 왔고,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펑펑 우는 刘知珉을…
결국 씻고 오겠다며 먼저 자리를 피했다. 침실로 들어가려다가 냉수라도 마셔아겠다 싶어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는 거의 제 집이나 다름이 없었다. 익숙하게 식기 건조대에서 유리잔을 꺼내 정수기 아래에 두고 버튼을 눌렀다. 뜨겁고 축축했던 기운이 아직도 생생하기만 해서 어깨죽지를 매만지다물이 반쯤 차오른 잔을 집어 그대로 들이켰다. 싱크대 안에 빈 잔을 넣어두고 뒤를 돌았던 참이었다. 아일랜드 식탁 구석의 달력 근처에서 갈기갈기 찢긴 종이를 발견하게 된 것은. 金旼炡은 눈치를 살피다 식탁으로 다가갔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종이 옆에는 구겨진 무언가가 함께 놓여 있었다. 괜히 긴장이 돼서 바지춤에 손바닥을 닦고 구겨진 필름을 집어들었다. 펼쳐 볼까 고민하다 왼쪽으로 잠시 치워두고 찢긴 종이를 하나씩 맞춰봤다. 굳이 전체를 완성시킬 필요는 없었다. 이제는 7년의 결실을 맺고 평생을. 퍼즐처럼 맞춰진 종이에 적힌 문구가 가리키는 것은 뻔했으니까.거기까지는 꿈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하는 것도 우습지. 마른침을 몇 번이나 삼켰으나 여전히 입이 썼다. 짤막한 한숨을 내뱉은 金旼炡이 애써 맞춘 종이를 도로 흩트려놓고 옆에 밀어둔 필름을 집었다. 어제 刘知珉이 쥐고 있었던, 그러다 바닥으로 떨어트린 것은 청첩장 뿐이었다.
金旼炡은 찬찬히 폴라로이드 필름을 펼쳤다. 그리하여 미처 버러지 못한 호기심은 청첩장의 주인이 제가 아는 한유진이 맞다는 사실을 기어이 확인시켜줬다.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 위로는 누구보다 서럽게 울던 刘知珉이 덧대어졌다. 그 마음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필름과 찢어진 종이를 구석으로 치워둔 金旼炡이 겨우 발걸음을 뗐다. 그대로 거실 화장실로 들어가 얼굴에 몇 번이고 찬물을 끼얹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화장실을 나서며 겨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 보던 刘知珉은 걸어오는 金旼炡을 발견하고 와서 앉으라는 듯 옆자리를 내어줬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점심은 시키지 않았어요?"
"그것도 그건데, 아까 냉장고 채워넣기로 했잖아요 같이."
이것도 꿈이 아닌건가. 金旼炡은 아예 저에게로 핸드폰을 맡기는 刘知珉을 바라보다 혀를 씹었다. 아팠다. 그럼에도 실감이 나지 않아 刘知珉의 볼을 꼬집어봤다.刘知珉은 왜 그러냐 묻지도 않고, 짜증을 내며 밀어내지도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 한 구석에서 뭉근히 치고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빈 손으로 刘知珉의 옷자락을 움켜쥔 金旼炡이 손을 고쳐 손바닥으로 뺨을 감쌌다. 그 다음에는 몸을 기울여가까이 다가갔지만, 입술이 닿기 직전에 刘知珉은 뒤로 얼굴을 뺐다.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내팽겨치듯 테이블로 던져두고는 조심스럽게 金旼炡의 뒷목을 잡아 제게로 이끌었다. 몸이 맞붙는 동시에 숨결은 금방 엉겨들었다. 각자의 손은 자연스럽게 서로의 허리로, 어깨로 안착했다.
성급하지도, 그렇다고 차분하지도 않은 키스가 이어졌다. 어느샌가 金旼炡은 刘知珉의 허벅지에 앉아 본인의 페이스대로 입 안을 헤집었고, 刘知珉은 능숙하게 움직임을 맞춰주며 金旼炡을 받아냈다. 숨 쉴 틈을 놓쳐 호흡이 무너진 쪽은 어쩌면 당연하게 金旼炡이었다. 刘知珉이 제 어깨에 기댄金旼炡을 달래듯 머리카락을 걷어내고 드러난 귓볼에 입술을 내렸다. 밥 먹어야 돼요. 배 안 고파요. 이따가는 고파질 거에요. 이어서 속삭이는 대화는 벌건 대낮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金旼炡은 제 허벅지를 타고 올라오는 손을 겹쳐 잡으며 핏대가 올라온 새하얀 목에 얼굴을 묻었다.
"서초? 회사랑 아예 반대쪽인데?"
그렇다고 저렇게 놀랄 것까지 있나. 金旼炡은 선풍기를 매니저쪽으로 돌려주며 대본집을 넘겼다. 나름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스케줄 끝나면 매니저는 金旼炡을 집까지 데려다 주고, 金旼炡은 아주 늦은 새벽이 아니면 택시를 타고 刘知珉을 보러 가고,刘知珉은 그럴 거면 차라리 본인을 부르라는 말을 하고. 이래저래 번잡스럽고 피곤한 동선이 아닐 수가 없었다. 모서리를 매만지던 金旼炡이 당장은 아니더라도 바쁜 스케줄이 마무리 되는대로 이사를 하기 위해 집을 알아 보고 있다면서 매니저에게 먼저 귀띔을 해줬다. 그래야 오해를 받지 않을터였다. 물론 남들은 저와 刘知珉과의 관계에 대해 대부분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것이었다.
검사와 어떻게 지인이 됐냐고 물어온다고 해도 피해자 조사 때문에 만나다가 밥 몇 번 먹었고, 그러다 서로 대화가 잘 통한다는 걸 느껴서 사적으로도 연락하게 됐다고 대답하면 그만이었다.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 세상 일은 어떻게 흘러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으니 굳이 언급하지 않는 거였다. 더욱이 이번에는 일반인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공인이라고 하는 것도 어딘가 과했지만 刘知珉은 메스컴에 노출된, 그 쪽 필드에서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아는 유명인이었으니.
"태준이야?"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는 문자에 답장을 보내고 있었다. 커피 너무 많이 마시지 말. 갑작스럽게 등장한 이름으로 인해 자판을 두드리던 金旼炡의 손이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매니저는 차마 입도 다물지 못하는 金旼炡을 바라보다 하루이틀이냐는 듯 핸드폰을 턱짓했다. 어째 너희는 바빠지니까 사이가 더 좋아진 것 같다. 덧붙이는 말에는 어폐가 가득했다. 金旼炡이 어색함을 애써 감추며 홀드버튼을 눌렀다. 화면은 금방 까맣게 점멸됐다.
"하긴 한참 좋을 때 걔가 군대 갔으니…3년이라고 해도 권태기 같은 건 안 오겠구나 너희는."
"아니 뭐…모르는 거지 그건."
매니저가 간식을 뒤적이는 틈을 타서 金旼炡은 잠금을 풀고 빠르게 문자를 보냈다. 저도 한 씬만 더 찍고 점심 먹으러 갈 거에요. 읽음 표시가 바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요즘에는 몇 시간 뒤에 확인하거나, 확인해놓고도 답장이 없는 건 아니었다. 金旼炡이 핸드폰을 반대로 뒤집어대본집에 올려뒀다.
"언니."
"응."
"나 지금 차 사면 좀 그래?"
이번에는 과자 포장지를 뜯던 매니저의 손이 미끄러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과자를 바라보던 金旼炡은 3초 안에 먹으면 괜찮다는 시덥잖은 말을 건넸다. 그렇게 7초가 더 지난 뒤에야 매니저는 대답했다. 너 장롱이잖아 旼炡아.金旼炡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끝을 흐렸다.
"장롱을 탈출할 때도 된 것 같아서…"
"…너 뭐 연애하니?"
"……"
"그래, 연애하잖아 너. 그런데 왜 갑자기 차를 사? 태준이가 자기만 운전하는 거 좀 그렇대?"
"그 오빠가 그럴 사람은…아니지 않을까."
"요즘 우리 旼炡이 뭔가 달라졌단 말이지…"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것처럼 빤히 저를 쳐다보는 시선을 모른척하며 대본집만 손으로 훑었다. 그러다 작은 진동이 느껴지면 빠르게 핸드폰을 뒤집어 잠금을 풀었다. 지금 찍으면 방송은 언제 해요? 별 거 아닌 질문도 제게는 한없이 특별하게 와닿았다. 金旼炡이 자판을 꾹꾹 누르며 단어를 조합했다. 아마 늦어도 겨울이 오기 전에는 볼 수 있을.
"둘이 좋아 죽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결혼은 안 된다."
커서가 맥없이 깜빡였다. 金旼炡은 핸드폰을 쥔 채로 멀거니 고개를 들어올려 매니저를 눈에 담았다. 그녀는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청첩장은 10년 뒤에 받아도 늦지 않을 것 같아."
어째서 갑자기 그 쪽으로 이야기가 튀는지 모를 일이었다. 金旼炡은 오른손으로 핸드폰을 잡고, 왼손으로는 본인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요? 물방울이 가득 맺힌 캔을 볼에 가져다 대던 매니저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선풍기를 돌렸다.
"이럴 때 보면 김 배우님은 공개연애를 해서 다행이다 싶어 참."
매니저는 그렇게 말하며 아예 아이스박스에서 이온음료를 꺼내 金旼炡의 손에 들려줬다. 서늘한 기운이 금방 손바닥을 타고 올라와 뒷목을 간질이는 것만 같았다.
"티가 은근 많이 난단 말이지."
"…내가?"
"旼炡아 이건 국룰이야."
잠깐 쉬는 시간에는 핸드폰부터 찾고, 그 핸드폰 보면서 웃고,차 사고, 그 근처로 이사 가고. 그런데 서초보다는 지금 집이 태준이네 동네랑 더 가깝지 않나. 캔커피를 홀짝이며 매니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金旼炡은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우다 팝탑을 따고 이온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딱히 갈증이 났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한 캔을 말끔히 비워냈다. 내가 언제 또 그렇게 핸드폰을 보면서 웃었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빈캔을 구겨 바닥에 내려뒀다.
"그래서 태준이는 언제 온대?"
"…응?"
"특별출연 촬영 날짜 픽스되지 않았어?"
"아…그거."
"들은 거 없어? 듣기로는 지방에서 찍는 건 아니라고 하더라. 다행이지 걔도 차기작 준비로 정신 없을텐데
연락이 끊긴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마지막 데이트 이후로는 전화는커녕 문자 한 통도 오고 가지 않았다. 시간을 가지자는 말을 저나 태준이나 착실히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매니저가 얘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그 존재를 새까맣게 잊고 지냈다. 우선순위에서 완전히 밀려난 것이다.시간을 끄는 것은 또 다른 희망고문일 뿐이었다. 서로를 위해서라도 이 관계는 정리를 해야 됐다.
金旼炡은 잠금이 풀린 핸드폰 화면을 두드리며 답장을 작성했다. 겨울 오기 전에는 방송 될 거니까 그때 같이 봐요. 실은 헤어짐을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정태준도, 金旼炡도 아니었다.하지만 그렇다고 이 선택이 刘知珉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刘知珉은 그 누구보다 지금의 관계를 지키고자 했다. 때문에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됐다. 金旼炡이 刘知珉 앞에 누군가를 세워두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버렸다는 것을, 기어코 그것을 이뤄내기 위해 정태준을 놓아버리려 한다는 것을.
"旼炡아."
"응?"
"감독님이 너 찾는 거 같다."
플라스틱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金旼炡의 곁으로 매니저와 코디가 달라붙었다. 의상을 확인해주고, 머리를 만져주고, 대본집과 핸드폰을 챙겨줬다. 金旼炡은 매니저 손에 들린 것을 쳐다보다 마음을 다잡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
아 ... 불편해 ... 마음이 불편해 ... 태준아 미안해 유진아 반성해 아 이건 아니야 ..... 엄청 메말랐는데 또 엄청 축축하고 ... 나는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가 없는거야 이제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