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가까운 다음 날 아침.
눈 떠지자마자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내 익숙한 자취방이... 여전히 아니었다. 어제 봤던 이재현 집 그대로, 꼭 잡고 잤던 손도 그대로. 세월을 건너뛴 으른 이재현도 그대로.
혹시나 싶어 욕실로 향해 거울부터 봤다. 낭랑 28세 커리어 우먼의 형상을 기대했으나 애석하게도 기적은 없었다. 부스스한 염색모에 꼬질꼬질 앳된 얼굴. 변함없이 16년도 스무 살에 멈춘 나였다.
"...안 돌아왔네."
내 인기척에 덩달아 깬 이재현이 그새 터덜터덜 따라왔다. 졸린 눈으로 거울 속 나를 확인하곤 쓴웃음 짓길래 힘 없이 시선을 피했다. 안 돌아온 게 내 잘못은 아니지만 미안해졌다. 어제 김영훈 커플한테 의도치 않게 민폐 끼친 것도, 이재현을 온종일 고생시킨 것도 전부 다.
"미안..."
"미안하긴 뭐가. 씻고 준비해."
"왜?"
"펜션 가야지."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다가와 내 머리카락을 장난스레 흩뜨려 놓는다. 습관적으로 내 정수리에 뽀뽀하려다 아차 그만두는 것도 거울로 다 봤는데 모른 척 했다. 비록 현재 기억은 하나도 없는 나지만 알 것 같았다. 이재현은 8년 동안 외양 뿐 아니라 내면까지 제법 성숙해졌다는 걸. 친구일 때보다 남자친구일 때 훨씬 좋은 애라는 걸.
하루아침에 뒤바뀐 현실이 영 적응 안 돼도, 오늘만큼은 정신 바짝 차리기로 다짐했다. 최대한 어른스럽게 굴어야 했다. 부지런히 씻고 나와 옷방으로 향했다. 사방에 깔린 게 내 옷이라는 사실은 아직도 안 믿겼다. 그새 취향이 바뀐 건지 무난한 오피스룩 혹은 기본템들이 대부분. 화장품도 마찬가지, 죄다 비싼 브랜드긴 한데 도무지 알록달록한 맛이 없었다.
2024년에는 이런 게 유행인가? 아님 사회에 찌든 직장인의 숙명인가. 새내기랍시고 하늘하늘 꾸미고 다니던 입장에서는 용납 안 됐다. 그나마 화사한 니트에 청바지 주워 입은 뒤 심심한 화장을 끝낼 때쯤, 준비 끝났냐며 노크해 들어오는 이재현이었다.
"나 평소에 이러고 다녀?"
"예쁘구만 왜."
"옷이 노잼이잖아."
"너네 회사 규정 빡세서 그래."
"그래도 데이트할 땐 반짝반짝한 거 입어 줘야지!"
"꾸미면 느끼해서 싫다며?"
"아니, 입술도 요즘 누가 이렇게 연한 걸 발라. 어이없어."
"니 옛날에 그 김칫국물보다 예뻐."
팩트폭격에 후려맞고 나서야 메이크업 유행이 대판 바뀐 걸 깨달았다. 나이대에 어울리는 옷차림이 있다는 것 또한. 그래도 뭐, 나름 담백한 어른으로 레벨업했다는 건 축하할 일이었다. 미래의 나에게 심심한 격려나 보내주기로 했다.
"으, 추워!"
"차에 히터 켜 놨어."
마지막으론 이재현이 직접 입혀 준 코트와 목도리에 잡아먹힌 채 집을 나섰다. 차로 향하는 그 잠깐 굽이치는 겨울바람이 매서웠다. 급히 조수석에 올라타 벨트 매는데, 와중에 익숙하게 시동 걸고 운전대 잡는 이재현한테 힐끔힐끔 시선이 갔다.
"운전 쫌 함?"
"좀이 아니라 잘 해야지. 너 태우고 다니려면."
"오..."
내가 아는 이재현은 허구한 날 빽빽대면서 따릉이 몰고 다녔는데. 성장이란 뭘까. 매끄럽기 짝이 없는 승차감을 느끼며 대놓고 구경했다. 내 불타는 시선이 민망한지 멋쩍어하던 그가 은근슬쩍 노래를 틀었다.
"처음 듣는데. 누구 노래야?"
"뉴진스."
"뉴진스가 뭔디..."
"아. 16년도 사람은 모르시겠구만."
으하학 웃으며 놀리는 꼴을 곁눈질로 째렸다. 졸지에 옛날 사람 취급 받았지만 부정할 순 없었다. 이재현은 다소 미래지향적인 걸그룹 노래를 흥얼거리며 기분 좋게 차를 몰았다. 그 옆모습이 생각보다 매력 있어서 짜증이 확 났다.
확실히 이재현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아님 여자친구 한정인지 많이 유해진 것 같았다. 그야말로 개과천선했다. 내가 차에서 과자 먹다 흘려도 호탕하게 넘겼고, 다른 차가 무지성으로 끼어들어도 쌍욕 대신 혀만 쯧쯧 차는 정도. 잠깐 정차할 때는 백미러 보면서 외모 체크 하다가 거울로 눈 마주치면 찡긋 윙크까지 날리고.
원래라면 토 나와야 정상인데 그냥 하염없이 잘생겨 보여서 문제였다. 그 지랄뽀이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스윗해진 건지, 중간 과정 몽땅 삭제된 입장에서는 미스터리가 따로 없었다.
"이재현 왜 멋있지? 거리감 느껴져."
"뭔 거리감이여."
자긴 꼬질이가 메인이라며 아기곰마냥 귀척 떠는 걸 보고 있자니, 문득 24년도의 내가 부러워졌다. 얘랑 얼마나 재밌게 연애하면서 살았을까.
"근데 우리 누가 먼저 고백했어?"
"뭐?"
"아니, 친구였다가 사귀게 된 계기가 있을 거 아냐."
"...뭐, 그냥. 운명처럼 자연스럽게 그냥."
우리 관계 발전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데, 이재현은 왠지 모르게 붉어진 낯짝으로 대강 얼버무릴 뿐이었다.
"아니, 그냥이 어딨어. 갑자기 나란히 벼락이라도 맞았나."
"원래 사랑은 벼락 맞듯 꽂히는 거야."
상당히 수상해서 다그쳐 봐도 별 성과는 없었다. 운명이니 벼락이니 빙빙 도는 헛소리 강의나 늘어놓질 않나.
"자꾸 말 피하는 거 보니까 지가 나 졸졸 따라다녔구만."
"그랴."
"제발 만나 달라고 막 미친 듯이 빌었구만?"
"바로 그거지."
말을 말자.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기로 결론 냈다.
그렇게 연신 투닥대며 도착한 목적지는 양평의 한 풀빌라 펜션. 장담컨대 내 스무 살 인생 최고 레벨의 숙소였다. 독채 구조라 우리밖에 없었고 주변의 자연 풍경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모든 게 완벽했다. 열심히 폰 들고 사진 찍으니까 그 구닥다리 작동은 하냐며 놀리는 이재현만 빼곤.
우선 근처 마트에서 장부터 본 다음, 차에 싣기 위해 트렁크를 열 때였다. 온갖 잡동사니 굴러다니는 트렁크 구석, 유독 시선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눈 아플 만큼 비비드한 색감의 핫핑크 쇼핑백. 손잡이에는 크리스마스 리본이 묶인 채였다.
"핑크? 바나나?"
"아 씨! 뭐야!"
쇼핑백에 앙큼하게 박힌 영어 폰트를 소리 내 읽자마자 이재현이 식겁해 악을 질렀다. 자기 차에 자기가 실어 놓은 거면서 뭔 귀신이라도 본 듯했다.
"뭐야는 내가 할 말이지. 핑크바나나가 뭔데?"
"야, 나도 몰라! 니가 산 거야!"
"엉?"
"차 빌린다더니 또 이거 사러 갔었냐?"
"또?"
'또'라는 건 내가, 그러니까 24년도 이여주가 이걸 산 게 처음이 아님을 의미했다. 대체 뭐길래? 옷인가? 별 생각 없이 손 뻗어 내용물을 확인하려는데, 이재현이 날아와 민첩하게 막더니 내 몸을 번쩍 들어 안아 떨궈 놨다. 한순간 거리가 멀어졌다.
"이걸, 하... 왜 숨겨 놔, 간 떨어지게."
멘탈 제대로 나갔는지 익어 터진 얼굴로 허둥지둥 트렁크에 마트 봉투를 싣기 바쁜 그였다. 덕분에 핫핑크 쇼핑백은 흔적도 없이 가려졌다.
"뭔데, 좀 보자!"
"냅둬 냅둬."
"미래의 내가 너 주려고 산 크리스마스 선물 아닐까?"
"빨리 가자, 고기 구워주께."
"말 돌리지 말지?"
대답 대신, 흘러내린 내 목도리를 얼굴 하관까지 끌어올려 칭칭 감싸 맨다. 얼핏 보면 추운 여친 걱정하는 다정충 남친 같지만 틀림없이 입막음이었다. 떠밀다시피 조수석으로 모시길래 못이기는 척 타면서도 내 모든 신경은 여전히 트렁크였다.
"아가야. 이 세상엔 몰라도 되는 것들이 있어요."
아가 드립에 토악질 할 틈도 없었다. 스물여덟 이재현과 이여주는 알지만 스무 살 이여주만 모르는 것, 몰라도 되는 것, 몰라야만 하는 것? 천년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딱 좋았다. 지가 못 보게 하면 못 볼 줄 아나. 펜션 입실하자마자 차키 어디에다 두는지 똑똑히 봐뒀다.
한편, 넓은 복층으로 구성된 펜션 내부는 화려한 조명과 크리스마스 트리로 꾸며져 있었다. 신나서 구경하는데 옆에서 연신 찰칵거리길래 돌아봤더니 사진기사마냥 혼신 불태우는 중인 이재현.
"나 찍어 주는 거야?"
"그럼 귀신 찍겠냐."
"되게 갑작스럽네."
"뇌보다 손이 먼저 움직여. 니가 나를 이렇게 교육시켰어."
자동반사적으로 카메라 들이미는 행위가 내 가스라이팅의 결과라니 의외였다. 좀 부끄러워서 뚝딱대며 대가리만 긁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재현은 트리에 장식된 산타 모자를 떼어내 친히 나한테 얹어 주더니 다시 찰칵찰칵.
"아, 기본카메라 뭐야."
"니 기카 아님 취급 안 하잖아."
"나 b612 좋아하는디?"
"지금 2024년이라고."
알 게 뭐야. 미래 세계 감성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b612가 뭐 어때서. 많이 촌스러운가? 자고로 사진이란 빈티지한 맛이 있어야 낭만 아니냐고.
속으로만 꿍얼대고 있으려니, 어떻게 눈치챘는지 손쉽게 장비 갈아치워 버리는 카메라맨.
"니 그럴 줄 알고 필카도 챙겼다, 이 오빠가."
아무래도 이재현은 난놈이었다. 감히 생각도 못 했던 필름 카메라로 2차전 개막. 별안간 레트로 감성 제대로였다. 오빠충 남자에 경기 일으키는 편이지만, 하는 꼴 보면 28살 나이 헛먹은 게 아니라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포토존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한참 열정 불태운 뒤, 이재현은 나한테 필름 카메라 건네주고 제 폰으로 결과물 감상하기에 돌입했다. 나도 어설프게나마 보답하고자 몇 장 찍어 줬다. 놈이 세상 다 산 탄식을 뱉어내기 전까지는.
"와 씨, 사진은 더 어리네."
착잡한 낯이길래 어지간히 못 나왔나 싶었는데, 예상도 못 한 딴소리. 폰 화면 속 내 얼굴을 확대하다 말고 눈 질끈 감으며 내려놓는 그였다. 뭘 또 저렇게까지 식겁하지.
"개꿀 아닌가?"
"어 아니야."
"......"
"빨리 다시 자라렴. 양심 겁나 찔리니까."
지가 지보고 도둑놈이라며 괴로워하질 않나, 또 새삼 현타 왔는지 마른세수 하며 멀어진다. 왜 저래. 딱히 알 바는 아닌지라 쟤가 두고 간 폰을 집어 들자, 방금 찍은 내 사진들이 주르륵 나왔다. 교육 제대로 받았는지 구도가 예술이긴 했다. 사진 왕창 건진 뿌듯함에 무심코 스크롤을 내리다 멈췄다.
"......"
거의 뭐 갤러리 전체가 내 사진, 혹은 나랑 찍은 사진. 정확히는 미래의 나랑.
"...예쁘긴 하네."
둘 다 세월에 다듬어져 용 된 얼굴도 얼굴이지만, 함께 있는 분위기가 예뻤다. 자연스러운 백허그나 볼 뽀뽀 갈기는 사진. 내 뺨을 다 짜부라트릴 듯 쥐어짜고 으하학 웃어대는 사진. 사이 좋게 번갈아 얼굴 몰아주는 사진. 프레임 속의 둘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내가 늘 꿈꾸던 안정감 넘치는 연애 그 자체.
이재현 나 사랑하네. 나도 이재현 사랑하네. 맨날 인성질하면서 내 치킨 뺏어 먹을 땐 언제고, 8년 지나니까 아주 좋아 죽기는. 왜 자꾸 나더러 빨리 돌아오라 칭얼대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아니, 되돌리는 방법만 안다면야 나도 그러고 싶은데. 혹시 못 되돌리고 이 상태로 평생 살아야 한다면... 이재현은 더는 날 사랑할 수 없겠지? 거울 속 내 모습이 심히 초라해 땅굴 파다, 별안간 손안에서 울리는 진동에 흠칫했다. 이재현 폰 액정에 김영훈 이름이 떴다. 전화였다.
슬쩍 건너다보니 이재현은 통유리로 분리된 조리실에서 실내 바베큐 준비하느라 바빴다. 폰 갖다주려다 말고 조심스레 수신 버튼을 눌렀다.
[야 이재현, 뒤질래? 크리스마스에 후니 엿 처먹이고 니들은 펜션을 가?]
미처 입 열기도 전에 김영훈이 우렁찬 속사포를 쏘아 댔다. 후니라는 깜찍한 3인칭마저 아찔하게 들릴 정도였다. 설마 약 올리려고 카톡으로 펜션 자랑 사진이라도 보냈나? 그런 거라면 이재현 터진 인성 여전했다. 물론 저쪽 잘 풀린 거 어련히 알고 보냈겠지만.
[여주는? 괜찮아졌냐?]
"......"
[아니, 갑자기 왜 그렇게 된 거래? 미친 줄 알았어.]
"저기... 요."
[......]
머뭇대다 목소리를 끌어내자마자 전화 너머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어색해서 입 안에 주먹을 마구 욱여넣었다. 스물여덟 이재현에 겨우 적응하자마자 더 큰 산을 만나 버렸다. 나랑 썸 타던 김영훈은 뽀둥뽀둥 말랑카우였는데, 어제 본 김영훈은 그저 싸늘한 눈깔로 날 경멸(?)해대는 어른남자였으니까. 한껏 쫄았지만 안 쫀 척 겨우 말을 이었다.
"영훈아, 난데, 아니, 전데요..."
[......]
"그... 올해 스물여덟 살이시라고 들었는데... 요."
[네, 뭐... 그쪽은 어쩌다가 어려지셨어요.]
"죄송해요, 제가 무례했어요... 진심으로 미안... 요. 꼭 사과하고 싶어서..."
[아니, 뭘 또 존댓말로 그래. 낯설게.]
"너 곤란하게 만들 의도는 없었어... 난 분명 너랑 잘되는 중이어서, 영화 보자고 약속도 잡았는데... 잠들었다가 눈 뜨니까 여기길래. 하룻밤 사이에 8년 지났을 거라곤 아예 생각 못 했어, 미안해."
입술 뜯어 가며 구구절절 늘어놓는 사과에 전화 너머로 낮은 한숨이 들렸다. 할 말 많지만 꾹 참고 마음 다스리는 김영훈 표정이 훤히 보이는 듯했다.
[사실... 많이 당황하긴 했어. 이재현도 기분 나쁠 얘기를 네가 아무렇지 않게 하길래. 애초에 너랑 나랑 정리한 이유가 재현이 배려해서 그랬던 거잖아.]
"...진짜? 나 거기까진 기억을 못 해."
[아, 마지막 기억이 우리 영화 보기 전날이라고 했나?]
"응. 미안해."
[괜찮아. 그런 거면 이해는 된다. 네 입장에선 김영훈 나쁜 새끼 맞겠네.]
"아니야, 사귀던 사이도 아닌데 내가 선 넘고 오바했지. 여자친구분이랑은... 어때? 괜찮아?"
[지옥이지 뭐.]
툭 틔워진 단답에 패닉 와서 눈앞이 하얘졌다. 평화로운 커플을 찢어버린 희대의 빌런이 바로 나였다. 어떡해! 내가 직접 뵙고 사과 드릴까? 내가 어떻게든 해결해 볼게...! 울기 직전 상태로 쩔쩔매니까 머지않아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는 그였다.
[농담이고. 지옥 갔다 돌아는 왔어, 다행히.]
"진짜? 진짜 괜찮아?"
[일단 화해는 했는데, 아직 충격이 큰가 봐. 빵떡이가 너 엄청 좋아하고 잘 따랐었거든."
"빵떡... 양에게도 죄송하다고 전해 줄래? 언니가 다음에 꼭 맛있는 거 사주겠다고..."
[그래. 어쨌든 우리보다 네 남자친구가 더 심란할 거야. 재현이 위해서라도 빨리 돌아와라.]
"그래야지. 고마워."
울컥 차오르는 감동을 겨우 눌렀다. 솔직히 김영훈 너무 잘생겨져서 싸가지도 증발했을 거란 편견이 있었는데, 여전히 다정하고 사려 깊은 남성이었다. 내 미친 짓으로 험한 꼴 당했으면서 이렇게 쿨하게 용서해 주다니. 하도 면목 없어서 사과 몇 번 더 주절대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
"어이. 남친 폰으로 딴 남자 접촉하는 버릇 누가 가르쳤는데."
"아니, 어제 일 사과하느라."
"사과고 나발이고, 통화 겁나 오래 하네."
이후론 이재현한테 폰 뺏기는 걸로 완전한 엔딩. 투덜투덜 잔소리 뱉어 가며 바베큐 세팅하는 놈 옆에 하염없이 얼쩡거렸다.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는데 약간 자존심 상해서 열심히 상 차리고 채소 씻었다.
"와... 장인 같애."
"집게 손 댈 생각도 하지 마. 나 진짜 가만 안 있는다."
음식에 진심인 이재현은 목장갑 야무지게 끼고 영혼 담아 고기를 구웠다. 때깔 좋은 고기가 접시에 착착 쌓였다. 고기 잘 굽는다는 허세가 괜히 나온 건 아닌 모양. 굽기도 잘 굽는데 먹기는 더 잘 먹었다. 전투적으로 고기와 싸우는 와중에도 내 쌈 싸주기를 게을리 않는 멀티까지.
그렇게 배 두둑이 채운 뒤엔, 본격적으로 소화시킬 타이밍이었다. 펜션의 넓은 베란다엔 겨울 수영을 위한 실내 온수풀이 있었다. 스물여덟 이여주가 미리 싸뒀던 짐가방을 뒤져 수영복을 찾아냈다.
"핫걸~"
미래의 이여주 웅니는 이런 쌔끈한 비키니를 입는단 거지. 노잼 포멀룩만 사재끼냐고 욕했던 거 용서하기로 했다. 얼른 씻고 갈아입으려고 품에 안아 욕실로 향하는데, 그런 내 앞을 당당히 막아선 이재현이 내 손에 웬 새까만 걸 쥐여줬다.
"뭐야?"
"래쉬가드랑 반바지. 위에 입고 나와라."
"싫어, 나 비키니 입을래."
"겨울에 뭔 비키니여. 얼어 죽을 일 있나."
"온수풀이잖아. 물온도 맘대로 올릴 수 있다며?"
"아, 그냥 좀... 그렇잖아."
내 품속 핫걸 비키니가 민망해 죽겠다는 양, 래쉬가드로 확 덮어 버리곤 눈길도 안 준 채 돌아선다. 왜 저래. 유교인가? 하긴, 순순히 납득하기로 했다. 쟤가 내 혼전순결 지켜주는 중이랬으니까 뭐. 손만 잡는 연인 사이에선 노출에 엄격할 수도 있지.
한껏 단정하게 껴입고 나오니, 이재현은 헐렁한 반바지 하나만 걸친 채 뒤돌아 물온도 체크 중이었다. 난 노출 안 되고 지는 되고? 갑자기 살색 너무 많아져서 하이킥 백진희마냥 눈 돌아가기 직전. 작은 움직임에도 이두 삼두며 등근육까지 빡세게 파도 타는 통에 혼미해졌다.
"거, 옷 좀 입지?"
괜히 툴툴대긴 했지만 눈은 자꾸 은근슬쩍 살색을 좇았다. 내 말 따위 깔끔하게 씹어먹은 이재현이 오리 튜브부터 건넸다. 따뜻한 물에 나란히 입수하자마자 어떤 남자 두툼한 가슴팍에 물결이 부딪쳐 출렁였다. 가슴 대따 커. 진기한 광경이었다.
"희한하네... 옛날엔 김영훈만큼 납작했는데."
"뭐가?"
"가슴."
"납작하면 납작한 거지 김영훈만큼은 뭔데. 니 김영훈 가슴 봤냐?"
딱히 보려고 본 건 아니었다. 언젠가 학교에서 김영훈 축구한다길래 구경하러 갔었고 거기에 이재현도 있었더랬다. 한창 뛰다 휴식 타임에 덥다며 둘이 나란히 윗옷 벗어던진 장면을 목격했을 뿐. 김씨나 이씨나 둘 다 깡말라서 별 볼 일 없었을 뿐.
"나도 딱히 보고 싶지 않았어."
"떡잎부터 노랬네 이거."
"그래서 가슴 어떻게 키웠냐고. 가슴이 곧 말도 할 것 같애."
"어이, 뭘 자꾸 보세요."
"안 볼라 해도 보여, 너무 커서."
"피도 안 마른 게 쳐다보니까 괜히 기분 이상하네..."
내 열렬한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두 팔로 가슴팍을 가리더니, 이내 도망치듯 헤엄쳐 멀어지는 이재현. 당연히 튜브 타고 열심히 쫓아갔다.
"또 또 까분다."
몰래 뒤에서 공격하려다 물줄기로 무참히 반격 당했다. 상대는 강한 놈이었다. 물 맞고 눈 비비는 틈에 내 오리 튜브 붙들고 악마같이 조종해 댔다. 튜브가 몇 번이나 뒤집히면서 하마마냥 물 먹는 동안 이재현도 흠뻑 젖어 곱슬머리가 피어올랐다.
"나 물 먹고 기절하면 책임질래?"
"인공호흡 정도는 해 줄게."
원하냐며 입술 쭉 내밀어 능청 떠는 낯짝 위로 복수의 물줄기를 뿌렸다. 물론 3초도 안 되어 응징 당했다. 한참 헐크처럼 공격하다가도 둥가둥가 튜브 밀면서 남친짓 하는 이재현 덕분에 수중 롤러코스터 제대로 탔다.
수심은 이재현 가슴 밑까지 올 만큼 제법 깊었고, 빠져서 허둥대면 이재현이 안아 올려 줘야만 했다. 덕분에 의도치 않은 스킨십만 여러 번. 단단한 맨살에 닿을 때마다 볼에 열이 올랐지만 물이 따뜻해 그런 거라고 정신 승리 제대로 했다.
한참 정신없이 물놀이 하다 보니 시간도 물처럼 흘렀다. 겨울이라 금방 해가 지고 어두워졌다. 잠시 쉬려고 물가에 앉아 있으니 이재현이 레드와인 한 병을 가져와 땄다. 미자 딱지 뗀 이래로 소주 맥주만 입에 대 본 풋내기 인생 첫 와인이었다. 황송하도록 고급진 크리스탈 와인잔 맞들고 때아닌 건배를 했다. 달큼한 향과 달리 영 씁쓸한 맛에 오만상을 구기자 푸하학 웃어대는 그였다.
"이거 뭔 맛으로 먹어?"
"와인은 감성이지."
"생쥐꼴로 감성 챙기면 뭔 소용."
말은 그렇게 해도 나 역시 이 그림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오붓하게 단 둘뿐인 풀빌라 펜션. 탁 트인 유리 통창으로 감상하는 자연의 야경. 온수풀에 종아리만 담그고 앉아 찰박거리며 와인 한 잔. 스무 살의 크리스마스이브 치곤 제법 근사하니까.
나름 분위기에 취해 첫 잔을 비우고 두 번째 잔을 맞부딪쳤다. 그새 맛에 적응된 건지 이젠 혀끝이 꽤 달았다. 슬슬 나른해지는 몸을 느끼며 옆에 앉은 이재현을 곁눈질했다. 물에 젖어 반질거리는 복근부터 흉곽을 지나, 목선과 옆얼굴까지 차곡차곡 눈에 담았다.
"......"
옆에서 보는 이재현은 얼핏 수채화 같았다. 내리깔린 속눈썹과 오뚝 솟은 코가 예뻤다. 몰라보게 굵어진 선에 낯 가리던 게 무색하도록, 이렇게 보니까 또 옛날 그 소년미가 겹쳐 묘했다.
연신 관찰하기 바쁜 나와 달리 정작 당사자는 별 생각 없어 보였다. 여유롭게 캔맥주나 들이키면서 물멍 때리는 시선이 나른했다. 어쩌면 좀 섹시한 것 같다는 미친 생각까지 이르렀다. 연영과 손예진 소리 듣던 와꾸 아니랄까 봐, 말도 안 되게 두근거려서 눈을 비볐다. 혹시 취했나?
"왜. 졸려?"
"아니..."
물 표면만 묵묵히 응시하던 눈동자가 별안간 내게로 향했다. 마시던 캔을 툭 내려놓은 그가 고개 돌려 빤히 나를 쳐다봤다. 졸린지 안 졸린지 검사 목적에 불과하다는 걸 알지만, 예고도 없이 덜컥 치여 버렸다. 가까이서 눈 마주치는 게 이렇게 심장 찌릿한 일인지 처음 알았다.
"이재현.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뭐."
"우리 진짜 손만 잡았어?"
그게 사실이라면, 왠지 손해란 생각이 문득 들어서 말이지. 취기 혹은 분위기가 이끌어 내는 충동은 제법 무서웠다. 뽀뽀나 함 해보고 싶다는 본능만이 뇌에 남았다. 더불어 단전에서는 이상한 용기까지 솟아 올랐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슨 짓을 저질러도 다 허락될 것만 같은.
"......"
내 뜬금없는 질문에 눈만 끔벅이던 그가 뭐라 대답하려던 순간, 눈 질끈 감아 노빠꾸로 덮쳤다. 쪽 하고 입술이 맞물린 걸 인식한 뒤로부터는 그야말로 뇌가 팽글팽글 돌았다. 이 인간과의 뽀뽀를 한평생 상상한 적이나 있던가. 스무 살 이재현이랑은 절대 불가능해도 농익은 28sexy 재현 오빠와는 충분히 가능했다.
이미 뭘 하고 있지만 뭘 더 하고 싶어서 맞댄 입술을 움찔거리던 순간, 커다란 양손이 내 뺨을 감싸 쥐었다. 본격적으로 뽀뽀해주나 기대했는데, 예상을 철저히 깬 입술이 허무하게 떨어져 나갔다. 손에 쥔 내 얼굴을 한껏 뒤로 밀어낸 그가 헛웃음을 뱉었다. 당황과 황당이 적절히 섞인 눈빛도 함께였다.
"저기요. 뭐 하세요."
뭐겠냐고요. 나이 먹고 뽀뽀 처음 하나. 못 할 짓 했다는 양 떨떠름한 반응에 머쓱하게 뺨 긁으며 딴청 피웠다. 물 안에 잠긴 발가락이 끝없이 오그라드는 중이었다.
"몰라, 미안. 취했나 보지..."
변명 웅얼거리기가 무섭게 이재현이 또 바람 빠지듯 웃었다. 이번엔 헛웃음인지 찐웃음인지 분간이 안 갔다. 피하듯 정면으로 향한 내 고개를 이내 다시 잡아 돌린 그가 두 뺨 짓누른 채로 장난스레 흔들어 댔다. 아마도 찐웃음이었다.
"그래서 뭐? 뭐 하자고."
"아니 그냥, 뭘 하잔 건 아닌데..."
"애기 되더니 키스도 애기처럼 하냐."
민망해서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누가 키스랬나, 그냥 한 번 맞대 본 것 가지고. 키스는 생각조차 안 했는데 무슨. 고작 이런 것도 키스로 치는 게 맞다면 내가 방금 한 건 명백히 첫 키스였다.
"...첫, 첫 키스니까 그렇지."
"......"
"넌 겁나 많이 해봤겠지만 난 생애 첫 키스니까!"
발에 닿는 물을 팍 걷어차면서 괜히 성질을 냈다. 닳고 닳은 28sexy 주제에 뭘 잘났다고 잘난 척. 어리다고 놀리지 말라는 모 노래 가사가 절절히 공감되는 순간이었다.
"첫 키스야?"
"......"
"그건 좋네."
문제는, 이런 내 유치한 발언이 상대에게 어떠한 깨달음을 선사한 것 같았다.
"와 봐."
쳐웃을 땐 언제고 별안간 얼굴색 싹 변한 이재현이 내 뒤통수를 능숙하게 감싸 끌어당겼다. 어느덧 날 향해 숙인 상체가 가까이 맞붙었다. 뭐, 왜, 뭐...! 숨넘어갈 기세로 기겁했지만 피하기엔 늦은 듯했다.
"오늘부터 나다. 니 첫 키스 상대."
웬 삼류 인소 대사 따윌 치면서 그 흔한 웃음기 하나 없었다. 못 박듯 단호하게 틔워진 그 말을 되새기기도 전, 이재현이 좀 더 빨랐다. 그대로 잡아 먹혔다. 엄지로 내 턱을 꾹 눌러 벌린 그가 거침없이 틈을 뚫고 들어왔다.
와인 향 듬뿍 머금은 혀끝이 치열에 스쳤다. 그 말캉함이 낯설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피하는데, 익히 예상했다는 양 태연하게 따라붙는다. 한결 깊이 파고든 혀가 끈적하게 뒤엉키며 숨결을 섞는다. 내 뒤통수를 받쳤던 손이 자연스레 타고내려가 젖은 등허리를 꽉 끌어안는다.
애기처럼 키스하냐 놀리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건 정말이지 빼도 박도 못한 어른 키스였다. 뜨거운 혀가 입안을 녹이듯 휘저을 때마다 어지러웠다. 누가 와인을 된통 들이부은 것마냥 쌉쌀하고 달콤하고 몽롱하고 다 했다.
숨 차도록 한참 괴롭히던 이재현이 살짝 고개를 틀면서 코끝이 아슬하게 스쳤다. 그 감각마저도 자극이었다. 몸은 멋대로 달아오른 지 오래였고 서로의 호흡에도 미열이 섞였다. 입술 물고 빨아당기는 소리가 너무 야해서 도망치고 싶어질 때쯤, 느릿하게 떨어져 나가는 그로 인해 비로소 현실로 돌아왔다. 머릿속에서 장엄하게 울려 대던 종 소리도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
개쩌는 키스의 여운에서 못 헤어나 한동안 멍만 때렸다. 덩달아 조용하던 이재현은, 별안간 목에 걸린 수건을 툭 끌어 내려 반바지 부근을 덮는다. 그러고도 몸 어딘가 불편한지 짧게 한숨 쉬더니, 다시 온수풀로 거침없이 입수하는 그였다.
"수영 더 하게?"
"아니."
갑자기 뭔가를 감추듯 행동하는 이유가 궁금했으나 답 찾을 여유는 없었다. 방금까지 입술 부비느라 뇌 가동 멈춘 마당에 딴생각은 사치였다. 단 애로사항이 있다면, 쟤가 밑에서 고개 들어 올려다보는 각도가 꽤 창피하다는 것 정도.
"그... 다시 올라오면 안 돼?"
"왜."
"밑에서 보지 마, 못생겼어."
"웃기네. 지는 맨날 내 얼굴 밑에서 보면서."
"지는 어차피 턱살 하나도 없으면서."
턱살 가리려고 자라처럼 수그리자, 그게 더 웃긴다며 호탕하게 웃더니 외려 대놓고 자세 잡아 올려다본다. 앉은 내 허벅지를 받침대 삼아 턱을 괸 채였다.
사람 놀리려고 저러는 거 아는데 차마 웃어 넘길 수 없었다. 이재현 팔뚝과 팔꿈치에서 흐르는 물방울이 허벅지 살갗을 연신 적셨다. 찰랑이는 물 속, 무릎에 자꾸 닿는 가슴팍은 돌처럼 딱딱했다. 그냥 지금 내 몸에 머무른 상대의 모든 체온에 신경이 바짝 곤두서는 중이었다.
"왜 눈을 피해."
"안 피했는데? 내가 언제!"
"키스 좀 했다고 되게 부끄러워하네."
"뭐래, 짜증 나..."
옆에 놓인 와인 잔을 들어 꼴깍꼴깍 원샷해 버렸다. 차라리 만취해서 정신 놓고 싶은 심정. 물론 온몸에 힘만 쭉 빠지면서 헤롱해질 뿐 그 이상은 없었다. 내 얼굴 뚫어져라 올려다보는 이재현에게서 촉촉한 입술밖에 안 보이는 부작용도 함께였다.
또 하고 싶다... 부지런히 고개 드는 욕망을 애써 억누르며 이성을 챙겼다. 혼전순결, 혼전순결! 그러다 이쯤에서 드는 의문점.
"근데, 혼전순결에 키스는 해당 안 되나?"
"모르겠는데. 난 혼전순결 딱히 관심 없어서."
"그럼, 넌... 막 하고 싶어도 나 배려해서 혼전순결 지켜준 거야? 지금까지?"
감동 먹고 진지하게 물어본 건데 어째 이재현 표정이 오묘했다. 난감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웃음을 간신히 참는 것 같기도 하고. 대답은 한참 뜸 들여졌다. 드높은 코가 짓눌리도록 쓱쓱 비비던 그가 끝끝내 헛기침을 했다.
"물어봐도 돼? 어쩌다 혼전순결을 외치게 된 거야, 스무 살 이여주는."
"나? 거창한 이유는 없고, 엄마가 주밥이한테 교육을 엄청 시켰거든. 그거 옆에서 듣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아."
"너 주밥이 알아? 이주연. 내 동생."
"처남을 모를 리가 있나."
"암튼 엄마가 그랬어.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랑만 해야 된대."
그도 그럴 것이, 엄마가 주밥이 사주 보러 갈 때마다 여자 미친 듯이 꼬이는 팔자라고 지겹도록 들었댔다. 아들놈이 문란하게 사고 치고 다닐까 불안했던 엄마는, 어릴 때부터 이주밥 기를 눌러 죽여 엄하게 키우셨다. 얼굴값 하지 마라, 몸 함부로 놀리지 마라, 결혼할 여자 아니면 손도 잡지 마라.
덕분에 좆고딩 이주밥 뇌에는 엄마가 새겨넣은 '혼전순결' 타투가 한가득 존재했다. 나도 그게 옳겠거니 주워듣고 학습했을 뿐이었다.
"그랬단 말이지."
"......"
"그랬는데도 문강우가 구워삶았다는 거네. 그 개새끼가."
"문강우가 누구셔?"
"있어. 몇 달 뒤에 니 채가는 놈."
다짜고짜 욕설 씹어뱉는 이재현을 흠칫 내려다봤다. 설마... 내가 조만간 어떤 개새끼를 사귀고 그 개새끼한테 홀라당 순결 뺏긴다는(?) 건가? 그럼 지금 혼전순결 운운하며 오바육바 떨어 봤자 다 뻘짓이라고?
- 오늘부터 나다. 니 첫 키스 상대.
아까 낯 뜨거운 인소 대사의 의미 또한 이제야 감이 잡혔다. 내가 모르는 내 연애 연대기를 28살 이재현은 훤히 다 안다는 게 새삼 창피해졌다. 내가 당연히 28살까지 무경험일 거라고, 당연히 내 처음은 이재현이 될 거라고 단단히 착각한 것도.
"뭐야, 진작 말해 주지... 할 거 다 했네 나."
"지나간 일 뭐가 중요해. 그냥 나 혼자 찌질하게 질투 좀 하고 마는 거지."
"질투 나?"
"넌 안 나냐?"
바로 꽂히는 역질문에 가만 생각해 보니 그랬다. 실제대로라면 우린 이십 대 중반부터 눈 맞은 거니까 그 틈에 쟤도 연애 제법 했을 거고, 쟤의 모든 처음도 내가 아니겠지. 나 아닌 다른 여자애랑 막 키스 조지고 다른 것도 한다? 아니, 이미 했다? 상당히 꼴 받는 팩트였다.
"맞네, 왜 나만 첫 키스야! 불공평하잖아!"
"깜짝이야."
"야, 너도 스무 살로 돌아가! 빨리!"
그래서 다시 입술 부비자고! 공평하게 둘 다 서로가 첫 키스인 걸로 하자고!
급발진하느라 냅다 풍덩 뛰어들었다. 물에 뜰 자신은 없어서 이재현 몸뚱이를 튜브 삼아 붙들고 늘어졌다. 평화롭던 온수풀에서 다시금 시작된 몸싸움. 어김없이 물보라가 일었다.
"뭐 해! 어려지라니까!"
그렇게 암만 땡깡 부려 봤자, 눈앞의 이재현은 그저 개쩌는 28살 남성이었다. 반려동물 놀아주듯 내 공격 여유롭게 받아내면서 대따 큰 가슴 근육이나 불끈거리는.
"어이, 난 어려지기 싫다니까?"
"아! 짜증 나! 첫 키스 개 억울해!"
처절한 몸부림으로 물방울 튀기는 와중, 별안간 물 속에서 내 허리를 꽉 안아 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중력에 이끌리듯 한순간에 끌려갔다. 둥둥 뜬 다리로 얼떨결에 이재현 상체를 감쌌다. 눈 깜짝할 새 빈틈없이 맞붙었다. 까만 래쉬가드가 내 피부를 막아서 망정이지, 이건 지나치게 적나라한 밀착이었다. 입은 걸 후회할 만큼.
"억울해?"
이내 태연하다 못해 능글맞은 질문. 물에 흠뻑 젖어도 잘난 얼굴이 점차 가까워지고, 더운 숨결이 보란 듯이 입가를 간지럽힌다.
"억울하면 또 해."
내 억울함과 두 번째 키스가 대체 무슨 상관관계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묻고 따질 수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슬로우 건 양 느릿하게 덮이는 입술에 저항 없이 눈 감는 것밖에는.
67개의 댓글
아.... ㄹㅇ 사귀고싶음
제발 더주세요제발요…
이 글을 보고 오랜만에 심장이뛰기시작했습니다..ㅠㅠ
제발 너무좋아서계속읽고잇음ㅁㅊ겟다
제발저요제발요
난진짜치즈밤님이너무좋다………….
핑바와핑브의세계관이이어져서오랜만에빵떡빵훈커플을볼수잇어서행복하고 그러면서다시핑브정주행start
이두커플너무좋아요너무재밌어요거짓말안하고이두커플이제인생나페스중최고의커플입니다
사랑해요치즈밤 오랫동안꾸준히연재해줘서감사해요 작가님알람뜨면심장이너무뛰고개같이달려와요 그리고제목확인하고숨을고른다음에새벽에아껴보기…<=내루틴임
이번편도몇번을돌려봤는지몰라요 아사랑한다구요
시발엄마최고에요….
저 충전해놓고 기다려요
재현이가 진도가 너무 느려요
ㄴ 뭔 헛소리? 질투하냐? 재현 진짜 영특한 연상인데
오늘 오실거여..그럴거야…
ㅁㅊ 존꼴
다음편 제발 치즈 발효되겄어요..
억울하면더해
억울하면더해
억울하면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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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w... 너무 좋아서 미쳐버리겟네
아....개재밌어!!!
하…진짜너무재밋어서…
이런시발 ㅜㅜ
다음편어디까지왓나요제발저요 저요 제발 저요 제가 아니면 안돼요 제발 저요 오직 이 날을 위해서 지금까지 살아왔어요 제발 제가 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제발 저요저요 저요 저요 제발 저요 저는 저요밖에 모르는 저요에요 저요저요 제발 저요 제가 된다면 이 순간을 캡쳐해 대대손손 물려줄거에요 이정도 정성이면 하늘도 알아 주시겠죠 제발... 저요..저요 저요 제발 저요 이것은 운명의 데스티니 영혼의 소울 불꽃의 파이어 물의 워터 신의 갓이 오직 제가 되기 위해 존재하는 이유이기 때문이에요 그니까 저요 그래도 저요 하지만 저요 언제나 저요저요저요 제발~ 저요 저요 저요 너요 쟤요 말고 오직 저요 저는 저에요 다들 비켜 주세요
제발.... ......향후 50년간 연재 부탁드립니다
읽는내내 행복해🥰 치즈밤!!!새해 복 많이 받아라!!!!!!!!!
헐 이여주 핑바의 무언가를 쓰다가 돌아오는거아님?ㅋㅋㅋㅋㅋ 아 어떻게 돌아오려나 아님 안 돌아오려나 혼전순결무새 이여주도 귀여운데 이재현 휘어잡던 이여주 그립다ㅋㅋ
그동안 선생님만 저를 제일 예뻐해 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