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시가 되기 전에 퇴근하겠다는 각서를 쓴 다음에야 압수 당했던 키보드와 마우스를 받아낼 수 있었다. 검토를 마친 서류를 한 쪽으로 치워두고 쌓여 있는 서류뭉치를 대충 세어봤다. 저거까지 끝내려면 대충 잡아도 2시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刘知珉이 발로 바닥을 가볍게 밀어냈다. 의자가 빙글 돌아갔다. 깜깜해진 창 밖을 내다보다 다시 의자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눈에 담았다. 11:38 한 시간만 더 하고 들어갈까. 너저분한 책상을 스캔하던 눈이 사무실 전화기에서 멈췄다. 집에 가서 씻고 나오면 바로 침대로 쓰러질 가능성이 최소 80%였다.
刘知珉은 서랍을 열고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자고 있을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깜빡하고 보내지 않는 것보다는 이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음 먹은 것과는 다르게 메시지에 들어가 놓고도 한참동안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정말. 관계의 경계가 점차 모호해지고 있었다. 재미로 시작했으면 그 끝도 가벼워야 하는 것이다. 괜히 세컨드니 뭐니 하겠다고 나선 게 아니었다. 만약 연애를 하고 싶었다면 이런 식으로 만나지는 않았을 거다. 刘知珉은 마치 처음 핸드폰을 사용하는 사람처럼 더듬거리며 자판을 눌렀다. 그리고는 안경을 벗어 서류 위에 올려두고 그대로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덕분에 구석에서 울리는 진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刘知珉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퇴근했어요?
"아뇨, 아직 사무실인데."
전화해도 돼요?
"…하지마요."
그러나 화면이 바뀌는 것까지 막을 재간은 없었다. 旼炡이. 그 이름을 가만히 불러보다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화면을 옆으로 밀고 바로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텅 빈 사무실에 금방 목소리가 들어찼다. 집이에요? 刘知珉은 의자를 뒤로 젖히며 몸을 기댔다.
"아직 퇴근 안 했어요."
-네? 아직도요?
"마무리 할 게 남아 있어서요."
침묵이 이어지자 刘知珉의 눈꺼풀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문자 보냈길래…집인가 했죠
"깜빡할 것 같아서 미리 보냈어요."
-저녁은 먹었어요?
"수사관님이 과자 주고 가서 그거 먹었어요."
-나보고는 간식으로 끼니 떼우지 말라고 하더니 무슨
"나는 어쩌다 한 번이고, 金旼炡씨는 틈만 나면 그러니까."
-어쩌다인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러네요."
피곤하기는 했다. 금방 잠이 쏟아질 것 같았다. 刘知珉은 손바닥으로 눈가를 가렸다.
-있잖아요 검사님
"말해요."
-수요일에 혹시…시간 돼요?
"아직 약속 잡힌 건 없어요, 왜요."
-검사님 집에 가려구요
이게 그렇게까지 뜸 들일 일이었던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刘知珉이 대답했다.
"그렇게 해요."
-그리고 또 있는데요…
이번에는 미처 참기도 전에 헛웃음이 먼저 입 밖으로 새어나갔다. 刘知珉은 스피커폰을 풀고 핸드폰을 집어들어 귀에 가져다 붙였다.
"뭐가요."
-그 날…데리러 와주면 안 돼요?
"언제요."
-수요일에요
"야근할 것 같은데."
-저도 끝나면 아마 아홉시쯤 될 걸요
刘知珉은 자세를 바로하고 컴퓨터 본체 위에 놓인 캘린더로 손을 뻗었다. 수요일. 캘린더를 책상에 눕혀 놓은 뒤에 서류더미에서 뒹굴던 펜을 집었다.
"아홉시에 가면 돼요?"
-…진짜 해줄 거에요?
"가짜로 해줄까요 그러면?"
-아니!
"……"
-요
"수요일 아홉시 맞죠?"
-네 그런데 집으로 오지 마요
메모를 남기던 刘知珉이 펜을 멈추고 金旼炡에게 되물었다. 그러면 어디로 가요.
-스케줄 끝나고 바로 가는 게 더 빠를 것 같아서요
"그래서 어디."
-코엑스
매니저가 연예인 집 주소는 뻔히 알 텐데 엄한 곳에 내려달라고 하면, 그것도 스케줄 끝나고 늦은 시간이라면. 刘知珉은 고개를 끄덕이며 펜을 움직였다. 21시 코엑스. 메모 적힌 캘린더도 제 위치로 돌아갔다.
"알겠어요 거기서 봐요."
-검사님
"왜요."
-오늘 무슨 일 있어요?
刘知珉은 텅 빈 플라스틱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수기에서 차가운 물을 채우고서는 수사관의 책상에 걸터앉아 잔을 비워냈다.
-검사님?
"……"
-刘知珉
어디까지 가나 일단 잠자코 지켜봤다.
-끊은 거야?
말도 놓고
-아닌데…뭐지
당황하고
-여보세요
의아하고
-안들려요 검사님?
짜증도 내고
-刘知珉
이름도 부르고
-知珉언니
"……"
-아픈 거…아니죠
걱정하고
-아 진짜 왜 그래요…울먹이고
"잠깐 졸았어요."
-미친 거 아니에요? 119에 전화할 뻔 했잖아요!
"그러면 재미는 있었겠다."
-하나도 재미 없거든요?!
"귀 아파요."
-아 진짜 짜증나…운전은 어떻게 할건데 그러고
刘知珉은 플라스틱을 구겨 휴지통으로 던졌다. 좌우로 목을 꺾고 어깨를 주무르며 자리로 되돌아왔다. 안경을 고쳐 쓰고 펜을 손에 쥐었다.
"커피 마시면 돼요."
-마시지마요 저녁도 과자만 먹었다며
"이것까지는 끝내고 가야 돼요, 어쩔 수 없어."
-왜 그렇게 일이 많아요? 검사는 다 그래요? 변호사는 그래도 검사님처럼 매일 야근하고 그러지는 않던데
"원래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벌 받느라고."
-왜요? 죄 지은 거 있어요?
"부장 차장 검사장 다 있는데 회식을 안 가…서."
-그랬구나. 회식을 안 가서 벌 받는 구나.
이래서 끝까지 속일 자신 없으면 거짓말 같은 거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거다. 刘知珉은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헝클였다. 오늘은 이래저래 제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한숨을 삼킨 刘知珉이 제 볼을 세게 두드렸다.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더부룩했다.
-오늘은 그래서 몇 시에 퇴근 해요?
"…한 시간만 더 하다 가려고요."
-12시도 넘네요. 안 피곤해?
"피곤해도 일은 일이니까요."
-그렇게 일만 하면 언제 쉬어요 도대체?
"…모르겠어요 저도."
-휴가는 안 가요?
"가야죠…"
-언제요? 누구랑?
"그것도 모르겠어요."
-드라마 촬영 끝날 때 쯤이면 검사님도 바쁜 거 좀 나아지려나?
"글쎄요, 인사가 어떻게 날지 몰라서…"
-아 뭐 다 모른대. 검사님이 아는 게 뭐에요 그러면.
"지방 내려가면 조금 편해진다고는 해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지 적막이 길어졌다. 刘知珉은 구석에 있던 서류를 끌어와 가운데로 뒀다.
-인사는 신청할 수도 있어요?
"희망지 적어서 내기는 하는데…잘 안 들어줘요 거의 무작위로 돌리지."
-지방으로 가요 그러면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고, 대체로 중요한 문장도 뒤에 있는데 포인트를 앞으로 정한 모양이었다.
-양산 괜찮은데
"…네?"
-부산이랑 가까워서 바다도 볼 수 있고, 적당히 한적해서 쉬러 가기에 나쁘지 않아요. 저희 부모님도 거기에 계세요.
그러니 저 역시 앞부분을 중심적으로 들으면 될 듯 하다. 숨을 잘못 삼키는 바람에 기침이 절로 터져나왔다.
-아무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그럼 아직 휴가 계획은 없는 거죠?
"네, 연차 거의 안 썼어요."
서류를 한 장 넘기려는데 별안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刘知珉은 모니터 너머로 쳐다봤다. 이내 문이 열리며 옆 방 영감님이 나타났다. 입술을 달싹이던 여자는 刘知珉이 전화를 받고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소리 없이 말했다. 퇴근 안 해? 刘知珉이 대답 대신 서류를 흔들어보였다. 여자는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더니 검지로 본인을 가리키고 엄지로는 문 밖을 찍듯이 지시했다. 나 먼저 간다. 입모양을 대강 읽어낸 刘知珉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닫고 나가려던여자가 뒤를 돌아 刘知珉에게 물었다. 누구야? 刘知珉이 알아 듣지 못했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자 친절하게 핸드폰을 꺼내 전화하는 시늉까지 해줬다.
-겨울 오기 전에 끝날 것 같거든요? 그러면 그때 시간 봐서…아니다 저 이번에는 지방촬영도 많은데 구경와요
"……"
잠시 고민하던 刘知珉은 친구라고 대답하며 여자에게 손을 휘적였다. 나가라는 뜻이라는 걸 모를 리 없을텐데 도리어 묘한 웃음을 지으며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것이었다. 꺼져요. 刘知珉이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왜 대답이 없어요…싫어요?
"아니 그게 지금은 확답을 하기는 어렵고"
친구? 이 시간에?이제는 거의 책상 앞까지 다가왔다. 의자에서 일어난 刘知珉은 핸드폰을 고쳐 잡으며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주말에 하루 정도 시간 낼 수는 있잖아요…
"그때 가봐야 알죠. 나도 스케줄 정리가 지금은 하나도 안 되어 있어서…"
아예 의자를 끌어다가 앉아서 저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다.
-빈말이라도 해줘요 보러 오겠다고
"그게 중요한가요?"
-당연하지
"갈게요, 됐죠?"
-진짜 성의 없어
"이거는 이따가 다시 얘기합시다. 지금 방에…모기가 들어왔어요."
-…네? 모기요?
"집에 가서 전화할게요 끊어요."
마지막에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刘知珉이 크게 한숨을 내쉬고뒤를 돌았다. 서류를 훑어보던 여자가 고개를 들고 刘知珉을 바라보며 웃었다.
"뭐요 또. 집에나 가요. 후배님 일하는 거 방해하지 말고.'
"그래요 이게 너지."
"뭐가, 어쩌라고."
"친구? 영시 이십칠분에?"
"영감님 동무분들은 저녁만 드시면 바로 주무시니까"
"집에 가서 전화할게요? 친구?"
쓸데없이 귀가 밝았다. 여자는 여유롭게 다리를 꼬았고, 刘知珉은 혀로 입술을 쓸었다.
"집에 가면 얼추 한 시. 그런데 또 전화를 한다."
"오랜만에 연락을 해서 할 말이"
"친구끼리 존댓말해 너?"
"저는 후배한테도 해요. 존중의 의미를 담아서."
여자의 손에 들려 있던 서류를 낚아채 책상 위에올려두고 뒤로 다가가 의자를 끌었다. 문 앞에 다다르자 여자는 느작느작 몸을 일으키며 刘知珉에게 말했다. 택시 좀 불러봐 내 핸드폰 배터리 오링나서 안 켜진다. 刘知珉이 혀를 차며 핸드폰을 들어올린 순간이었다. 화면이 밝아졌다. [旼炡이🤍] 바람 빠진 웃음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어깨를 토닥인다. 친구에요. 머리를 쓰다듬는다. 진짜 친구라니까. 볼을 두드린다.
"끊기기 전에 받아. 여자친구한테는 방해해서 미안했다고 꼭 전해주고."
그리고는 홀연히 사무실을 나갔다. 저 미친 영감 계략에 내가 놀아났구나. 刘知珉은 바닥으로 핸드폰을 내던지려는 것을 겨우 참고화면을 밀었다. 한 시간 더 일해야 집에 간다면서요 그러면 그때까지 나는 안 자고 기다리는.
"갈 거에요 지금."
-…네?
"모기한테 물렸어요."
-아파요?
"그건 아닌데 내일 에프킬라 뿌려서 죽이려고요"
의자를 끌고 자리로 돌아온 刘知珉은 서류를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보다 만 것은캐비넷에 넣어뒀으며, 건드리지 않은 것은 책상 아래로 다시 쌓아뒀다. 컴퓨터를 끄고, 창문을 닫고, 자켓을 챙겨 책상을 벗어났다. 문을 닫기 전에 사무실을 한 번 둘러보고 하나씩 스위치를 내렸다.
그러면 졸음운전 하면 안 되니까 갈 때까지 전화해요. 알겠어요. 진짜? 가짜. 시시콜콜한대화를 주고 받으며 복도를 걸어갔다. 혼자 타고 있어서 적막한 엘리베이터도, 인기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싸늘한 로비도 오늘은 어째서인지 스산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퇴근을 해서 이렇게 잠도 깼나. 주차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울 수도 있다는 걸 刘知珉은 그때 알지 못했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기는 하는 건지 8시에 청사를 나서도 밖은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요즘은 기본이 11시였고, 걸핏하면 자정을 넘어서 퇴근하곤 했으니 계절의 변화를 홀로 실감하지 못하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로비에서, 계단에서, 주차장에서 마주친 직원들은 하나같이 지금 집에 가는 거냐며 물어왔다. 아픈 게 아니라는 대답을 열댓 번은 더 한 것 같다. 시트에 앉은 刘知珉은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고 벨트를 채웠다. 도착 예정 시간 22분. 평일 저녁이니 한산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과 달리, 목적지에 다다를수록 본격적으로 도로가 막히기 시작했다. 입구를 코 앞에 두고 빙글빙글 돌다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는데, 주차장도 만석이라 지하 4층까지 내려가 겨우 구석진 자리에 차를 댔다. 주차구역과 차 번호를 문자로 보내기는 했지만 혹시라도 찾기 어려울까 싶어 조수석에서 나와 근처를 서성였다. 수요일은 가족 사랑의 날이서 다들 일찍퇴근하는 건가. 빈틈없이 꽉 찬 주차장을 둘러보며 刘知珉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知珉씨?"
그리고 뒤를 돌았다. 낯선 호칭이었다. 직업이 직업인 터라 직장 밖에서나 안에서나 대부분은 저를 검사님이라고 부르는 편이었다.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은 이름을 부를 것이니 제가 저런 호칭을 들을일은 기껏해야…
"진짜 刘知珉이네."
연애를 할 때다. 刘知珉은 제게로 다가오는 여자를 빤히 바라보다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
"한나씨야 말로 어떻게…여기를. 사람도 많은데 그렇게 다녀도 돼요?"
"이렇게가 뭐지? 아…그러고 보니 우리 만날 때는 거의 첩보물 찍었지."
어렴풋한 기억이 떠오르기라도 했는지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刘知珉도 뒤따라 헛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요? 밖에서 나 보는 건 처음이잖아. 좀 설레?"
"아뇨. 그런데 반갑기는 하네요."
"약간 반칙이다 知珉씨도. 모르는 기자들이 보면 시사회 온 줄 알겠네."
그 얘기를 들으니 조금 이해가 됐다. 코엑스 주차장에서 성한나를 만난 이유도, 스케줄이 있다던 金旼炡이 여기로 저를 부른 이유도. 두 사람이 배우라는 사실이 사뭇 실감이 났다. 성한나는 刘知珉에게 다가와 셔츠 카라를 정리해주며 물었다. 영화 보러 왔어요? 누구랑? 혼자? 향수가 제법 독했다.
"약속이 있어서요. 여기서 만나기로 했거든요."
"그러니까 누구."
"그냥 아는 사람이요."
"친구?"
떠본다기 보다는 은근히 바라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제 추측에 불과했지만. 刘知珉은 별달리 반응하지 않고 그저 웃어보였다.
"설마 시사회 온 사람 기다리는 건 아니죠?"
이건 떠보는 게 맞았다. 때마침 손 안의 핸드폰이 진동하자 刘知珉이 화면을 만지막거리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모르는 일이죠 그건."
"아까 본 것 같기도 하고…"
"네?"
"아니에요, 혼잣말. 아 맞다 번호 바꿨더라 知珉씨?"
"연례행사라니까요 그건."
"알려달라고 하면 줄 거에요?"
"아뇨."
"알려줄까요 그러면?"
"그것도 딱히."
"진짜 만나는 사람 있나보네 이렇게 선을 긋는 걸 보면."
굳이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성을 못 느꼈다. 어차피 몇 년 전에 헤어진 사이였고, 따지자면 차인 쪽은 이 쪽이었다. 문자를 확인한 刘知珉이 홀드 버튼을 누르며 그녀에게 말했다. 안 가봐도 돼요?
"누가 보면 안 되나 봐요?"
"쓸데없이 오해해서 좋을 건 없죠."
"아니 뭐 우리가 손을 잡았어, 안기를 했어, 입술을 부볐어. 남들이 봤을 때는 그냥 지인이잖아."
"그쵸, 그런데 제가 만나는 사람이 여자라면 얘기가 되게 달라지겠죠. 성한나씨도 그거 모르는 거 아니고."
그러게 갈 때 가라니까.저를 훑어보는 시선은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성한나는 짤막한 한숨을 내뱉고 刘知珉에게 물었다. 그래서 잘 된 거에요 그 사람이랑?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되물어봤자 대화만 길어질 듯해 刘知珉은 대강 고개를 주억였다.
"그럼 됐어요 그걸 어떻게 이겨."
"혹시 시사회에서 샴페인 같은 거 마셔요?"
성한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刘知珉을 쳐다봤다.
"같이 마시러 갈 거 아니면 입 다물어요."
"……"
"아 진짜 검사만 아니면 한 대 쳤는데. 갈게요, 둘이서 잘 먹고 잘 살아요 부디."
"영화 잘 볼게요."
"이거 내 영화 아니고 나도 초대 받아서 온 거거든요? 관심 없는 거봐 저거."
그녀는 장난스럽지만 아주 장난스럽지도 않게 주먹을 들어올려 보였다. 刘知珉은 어깨를 으쓱이고 차를 향해 걸어갔다. 뒷좌석에서 자켓을 꺼내 들고서는 숫자가 적힌 기둥 주변을 서성였다. 이제 슬슬 도착할 때가 됐는데. 주차 구역을 기웃거리다 아예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잠깐 멈춰서서 기둥에 적힌 숫자를 확인하는데 핸드폰 진동이 길게 울렸다. 刘知珉은 빠르게 화면을 밀고 전화를 받았다. 어디쯤이에요?
-검사님이야 말로 어디에요
"저 지금 21구역이요. 金旼炡씨는요?"
-48이요. 1117 제네시스 검사님 차 아니에요?
엘리베이터가 다른 쪽에도 있는 듯 했다.이렇게 넓은데 한 곳에만 있는 것도 이상하기는 하지. 刘知珉은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금방 도착해요. 차 안 잠겼으니까 먼저 들어가 있어요."
전화는 바로 끊겼다.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 48구역 근처에 다다른 刘知珉이 잠시 숨을 고르고 운전석 문을 열었다.맥박이 빠르게 뛰는 건 뛰듯이 걸어와서 그런 거다. 심장박동이 불규칙한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었다. 刘知珉은 조수석에 앉아 있는 金旼炡을 바라보다 마른침을 삼켰다. 연예인은 정말 연예인이구나. 한편으로는 괜한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항상 집에서만 봤고, 밖에서 만났을 때도모자를 썼거나, 마스크를 했거나, 안경을 꼈으니까. 운전석에 몸을 내린 刘知珉이 들고 있던 자켓을 옆으로 건넸다. 金旼炡은 자켓을 무릎에 덮고 벨트를 채웠다.
"바로 집으로 가면 돼요?"
"네."
"시사회 갔다 온 거죠?"
"네."
"그렇구나."
"데리러 와줘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이 정도는 뭐…"
여전히 서류는 책상 높이만큼 쌓여 있었다. 행정 전화는 아예 수사관 쪽으로 착신전환을 시켜뒀고, 점심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사무실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깝다며 커피까지 줄였으니 바쁜다라는 것을 단순히 단어로 담아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런 것까지알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출구에도 한참 늘어선 차들을 지켜보다 刘知珉은 조수석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케줄 할 때는 저런 모습이구나. 여전히 낯설기만 했다. 누구랑 연락을 하는지 연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金旼炡에게 刘知珉이 넌지시 물었다. 영화는 어땠어요? 대답은 금방 돌아왔다.재미없었어요. 핸들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멈췄다.
"감독이 누구에요?"
"최재생 감독님이요."
"제1의 묵시록?"
"네."
"주연은요?"
"김가람이랑 정태준이요."
이번에는 저도 모르게 눈치를 살폈다. 남자친구 시사회 다녀온 거구나. 괜히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다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었다. 느릿하게 차가 밀려나갔다. 그런데 내가 왜 어색해야 하지. 刘知珉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라디오를 틀었다. 미지근한 적막 위로 디제이의 목소리가 얹혀졌다. 주차요원의 안내에 따라 천천히 핸들을 돌려 앞차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지상까지 올라오게 됐다. 사람 되게 많았나 보네.빽빽히 늘어선 차들은 좀처럼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刘知珉은 창문을 살짝 열고 밖을 살펴봤다.
"시사회는 끝나고 뒤풀이 같은 거 없어요?"
"관계자들이 가겠죠."
"그렇구나."
"…네."
"스케줄 많았어요 오늘?"
"아니요…"
"머리 되게 잘 어울려요. 옷도 그렇고."
입에 발린 소리는 아니었다.잘 어울렸다, 정말로. 그런데 제가 말해놓고도 머쓱해서 창 밖에 둔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번잡한 도시의 소음이 밤공기와 함께 차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앞 차의 브레이크등이 꺼지는 것을 확인한 刘知珉은 창문을 닫고 라디오 볼륨을 조절했다. 번쩍이는 경광봉에 맞춰 오른쪽 발은 바쁘게브레이크와 엑셀을 오갔다.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건물을 빠져나오는데만 수십분이 걸렸다. 6시 퇴근길 저리가라 할 교통체증이었다.
"저녁은 먹었어요?"
"네, 매니저 언니랑."
"시사회는 보통 몇 시간이나 해요?"
"영화 시간에 따라 달라요."
"러닝타임 길었어요?"
"적당했어요."
코엑스 주변을 벗어나야니 도로가 한산해졌다. 시사회면 연예인도 많이 갈 거고, 그러면 기자들도 가득일 거고, 팬들도 구경 가나. 刘知珉은 여기저기서 터지는 플래시를 상상하다 질색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사님."
"네."
"오늘 저 말고…다른 약속 있어요 혹시?"
운전 중이라서 잠깐 조수석을쳐다보고서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없을 걸요."
"원래도 없었어요?"
핸들을 붙잡고 있던 손을 움직여 볼륨버튼을 아래로 밀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가 한없이 차분해졌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약속이 있는데 저 때문에 괜히"
"선수친 사람이 임자죠."
"…네?"
결국 갓길에 차를 세웠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金旼炡도 그제야 운전석으로 고개를 돌려 刘知珉을 바라봤다.
"혹시 봤어요?"
"…뭐를요."
"성한나요."
짚이는 걸 굳이 찾아내 보자면 그것 밖에 없었다. 우연스럽게도 길이 어긋나는 바람에 그 장면을 목격했다면 아까부터 내내 기분이 안 좋아보였던 것도 대충은 이해할 수 있었다. 비상등 깜빡이는 소리가 둘 사이를 맴돌았다. 金旼炡은 고개를 끄덕였고, 刘知珉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까지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별 사이 아니에요. 몇 년 전에 아는 사람 소개로 잠깐 만났고, 데이트 몇 번 했는데 마음이 안 맞아서 헤어졌어요."
그런데 내가 이걸 왜 얘기하고 있지.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댄 刘知珉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켓을 어설프게 움켜쥐고 있는 손을 신경 쓰고 있는 이유를 발견하는데는 실패했다. 구겨질까봐 힘은 못 주고, 그런데 여전히 기분은 좋지 않고. 잠시 고민하던 刘知珉이 비상등을 끄고방향등을 키며 기어를 변경했다. 차체는 다시 도로로 진입했다. 刘知珉은 끝만 붉은 손을 제 손으로 덮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만났던 사람 다 말해줘요?"
"…싫어요."
"싫은 걸 왜 자꾸 생각해요. 과거는 과거라고 몇 번이나"
"진짜 과거에요?"
시사회에서 정말 술을 안 주는 건가.
"나 성한나랑 아무 것도 안 했는데."
"그거는…"
"정확히 어떤 부분이 신경 쓰이는 거에요."
본인도 함부로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을 남에게 알아달라고 하면 안 됐다. 섣부른 짐작은 착각을, 어설픈 착각은 오해를, 거추장스러운 오해는 실망을 불러일으키는 거다. 신호가 바뀌며 차체가 멈추어 섰다. 刘知珉은 金旼炡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손등을 토닥였다.
"여지 같은 거 안 남겼어요. 잘 먹고 잘 살래요 둘이서."
"……"
"그런데 왜 둘이지…설마 성한나씨도 봤나?"
"……"
"아무튼 아까 그건 정말 단순한 해프닝일 뿐이에요. 거기서 만날 거라고는…아찔하네."
한유진이랑 헤어지고 스치듯 사귀었던 사람들을 얼추 세어봐도 열 손가락을 거뜬히 넘어갔다. 그나마 성한나를 마지막으로 연애를 그만뒀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거기까지 생각하다 빠르게 고개를 휘저었다. 운전 하는 내내 힐끔거리면서 조수석을 확인한 덕분에 어깨까지 뻐근했다. 그래도 어느 순간부터는 손을 만지작거렸던 걸 보면 기분이 좀 풀린 것도 같고.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운 刘知珉이 金旼炡을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도착했어요. 金旼炡은 刘知珉과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 뿐이었다. 할 말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며刘知珉을 빤히 쳐다봤다. 언제까지 주차장에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刘知珉은 본인 벨트를 풀고 조수석으로 몸을 기울였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눈에 훤히 보였지만 시트로 바짝 붙는 金旼炡을 애써 무시하고 버클 버튼을 눌렀다. 가서 해요. 붙잡힌 손을 힘주어 잡았다 놓고 운전석으로 돌아가 문을 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에는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刘知珉은 金旼炡을 제 뒤로 감춰뒀고, 金旼炡은 그런 刘知珉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문이 열리면 차례로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와 현관문을 향해 걸어갔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가 신발을 벗는데 어디선가 벨소리가 울렸다. 刘知珉은 슬리퍼를 갈아신다 멈칫하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아버지랑 한 잔 하셨나. 길게 뻗은 복도로 한걸음씩 내딛으며 전화를 받았다. 刘知珉입니다. 金旼炡이 거실에 멀뚱히 서서 刘知珉을 쳐다봤다.
-검사님 소식을 내가 한 부장한테 전해 들어야겠어요?
刘知珉은 金旼炡에게 입모양으로 엄마라고 말한 뒤에 부엌으로 걸어갔다.
"오밤 중에 그게 무슨 봉창을 두드리는"
-병원 갔다 왔다며. 몸살 크게 나서 링거까지 맞았다면서 너는 어떻게 한 마디도 없니 엄마한테는
"스파이가 너무 많다니까 내 주변은."
-또 감기야? 홍삼은 제대로 챙겨 먹는 거 맞아?
"거의 다 먹었어요."
刘知珉은 스피커폰으로 전환시킨 핸드폰을 식탁에 올려두고 냉장고에서 한약을 꺼내들었다. 생각난 김에 먹어야지 안 그러면
-내가 진짜 조만간 찾아가서 확인한다?
차라리 귀신을 속여야 했다. 비닐팩 끄트머리를 뜯어내서 입에 물고 단번에 한 포를 비워냈다.
-어째 너희는 아파도 꼭 돌아가면서 아프니
잔뜩 인상을 찌푸린 刘知珉은 아이스크림 포장지를 빠르게 벗겨내고 윗부분을 베어먹었다.
-너가 옮긴 거 아냐? 최근에 둘이 만났어?
"이건 또 무슨 봉창이지?"
-그렇지 않아도 몸 약한 애인데 조심 좀 해 너도
"유지현이 몸 약하다는 말은 또 처음"
-유지현은 아프면 지가 진찰하고 알아서 약 지어 먹겠지.
그분은 내리 사흘을 당직하고도 맑은 눈으로 라운딩을 돌아 병원에 소문이 자자하기는 하지. 刘知珉이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유진이 열나고 난리도 아니었다며, 엊그제인가 겨우 기운 차려서…몰랐니? 그럼 걔는 또 어디서 감기를 그렇게
"누구요?"
-지현이한테도 연락 못 받았어? 그 쪽 병원으로 입원했다고 들었는데.
"……"
-아무튼 건강 좀 챙겨 둘 다. 젊은 애들이 벌써부터 그렇게 골골 거리면 어떡해. 밥은 먹고 다녀? 귀찮다고 빵 같은 걸로 때우지 말고 비싸고 좋은 거 시켜 먹어.
"저는 뭐…끼니는 안 걸러요 그래도."
잔소리가 이어졌다. 1절부터 4절까지 반복됐다. 刘知珉은 흘러내린 아이스크림을 싱크대에 대충 던져두고 손을 씻었다. 바지춤에 물기를 닦으며 식탁으로 돌아와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스피커폰을 끄고 전화를 이어갔다.
"알겠어요 조만간 본가 들를게요."
-올 때 같이 와 유진이도
"뭘 또 같이야…"
-홍대표가 너 밥 사준다며, 나도 유진이 좋은 거 해먹여야지. 결혼 준비 때문에 안 그래도 스트레스 많이 받을텐데
"그걸 왜 엄마가 신경 써. 홍대표님이 어련히 잘 안 챙길까"
-그게 정이라는 거야 이것아. 홍대표랑 알고 지낸 세월이 십수 년인데
"난 몰라 그건 두 분이서 알아서 하세요."
-알아서 하면 선자리도
"결혼 안 해. 절대 안해. 죽을 때까지 혼자 살거에요. 죽어서도 혼자 묻힐 거야. 저 피곤해요 잘 거야 끊을게요 사랑해요 안녕히 주무세요."
-야 刘知珉 너 진짜로 이런 식으로
刘知珉은 종료버튼을 연달아 누르고 핸드폰은 소파에 휙하고 던졌다. 잠깐 전화한 걸로 이렇게 혼을 빼놓을 수 있는 건가. 쿠션을 치워내고 그대로 누우려던 刘知珉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보이지 않았다. 혹시 몰라 화장실로 향했으나 안에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듯 문이 훤하게 열려 있었다. 서재에 있을 확률은 더더욱이나 드물었고,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 뿐이다. 반대쪽 복도 끝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침실 문은 아슬아슬하게 닫혀 있었다. 문 틈 사이로 손을 넣고 조심스럽게 밀어내니 어두컴컴한 방 안에 차츰 불빛이 들어찼다. 刘知珉은 조심스럽게 앞으로 걸어갔다. 침대는 흐트러짐 하나 없이 판판했다.
드레스룸을 살펴보기 위해 발걸음을 떼려 할때 화장실 문이 열렸다. 옷을 안 챙겨줘서 샤워 하고 나오지 않았다기에는 오늘 처음 집에 오는 것도 아니었다. 칫솔이랑 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텐데. 刘知珉은 곰곰이 생각하다 혹시 놓친 것이 있나 싶어 화장실로 걸어갔다. 안을 둘러보고서는 서랍장에서 클렌징 티슈를 꺼내들어침실로 돌아왔다. 문 근처에 서 있는 金旼炡에게 손에 든 것을 건넸으나 金旼炡은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편한 옷 찾아서 아무 거나 입어도 되는데."
"……"
"내가 가져다 줘요?"
"……"
"들어가 있어요 그러면."
손이 붙잡혔다. 자세히는 손가락 위에 다른 손가락이 얹혀졌다.그게 전부였다. 그 이상으로는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刘知珉은 손을 고쳐잡으며 金旼炡의 앞에 섰다. 말을 해야 안다고 분명 몇 번이나 알려줬는데, 저 쪽은 좀처럼 입을 열 생각이 없어보였다. 오해가 풀린 게 아니었던가. 刘知珉이 엄지로 부드러운 손등을 한참동안 쓰다듬었다.
"내가 놓친 게…뭘까요."
"……"
"잘 모르겠는데."
"……"
"딱히 말해 줄 마음은 없어 보이고."
金旼炡은 여전히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닿는 곳은 얼굴이었다. 뭐가 묻었나 싶어 빈 손으로 양 볼을 한 번씩 만진 刘知珉이 고개를 비스듬히 옆으로 꺾었다.짐작 가는 무언가가 없었다. 성한나에 대한 얘기를 해준 이후로는 나름 분위기가 풀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얘가 나랑 지금 이럴 이유는…잡고 있는 손을 놓고 드레스룸으로 향하려던 刘知珉이 긴가민가하는 심정으로 金旼炡의 볼을 감쌌다. 그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가까이 다가가서 입술을 맞댔다.뒤로 잠시 물러났다 다가갔으나 입술이 닿기 직전에 金旼炡이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刘知珉은 볼을 감쌌던 손을 아래로 내려 턱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저와 시선을 마주하도록 얼굴을 정면으로 두고서는 金旼炡에게 바짝 붙으려 했으나 이번에는 아예 저지하듯 어깨가 밀어냈다.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지. 밀어내는대로 밀려난 刘知珉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클렌징 티슈를 주워들어 침대 위에 올려뒀다. 그리고는 드레스룸으로 가서 갈아입을 옷을 챙겨들고 침실로 돌아왔다. 티슈 옆에 옷을 내려놓며 말했다. 저는 거실 화장실에서 씻을 게요.드레스룸에서 잠옷을 꺼내던 刘知珉이 바닥에 주저앉아 손바닥으로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피곤했다. 이런 저런 생각은 그만하고 자고 싶었다. 어차피 내일도 출근하고, 야근하고, 그리고. 입술을 말아물며 몸을 일으켰다. 저만치에서는 아득하게 물소리가 들려왔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밖으로나가 스탠트를 켰다. 굳게 문이 닫힌 화장실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거실로 걸어갔다.
성한나와 쓸데없이 오래 대화를 했나. 셔츠를 정리해줄 때 피했어야 했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로 돌아갔어야 했나. 데이트 했다는 말까지는 꺼내지 말았어야 했나. 집으로 올라올 때도 손을 잡고 있어야 했나.엄마 전화를 받지 말았어야 했나. 샤워를 하는 동안에도, 머리를 말리면서도, 찬물을 몇번이나 마시면서도 주차장에서 집으로 올 때까지의 일을 내내 곱씹어봤다. 어디까지나 제 기준이기는 해도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핸드폰을 챙기고 거실 조명을 완전히 내린 刘知珉은 비척이며 침실로 들어갔다.
툭 튀어나와 있는 이불을 멀거니 지켜보다 문을 닫고 침대로 걸음을 옮겼다. 매트리스가 흔들리지 않게 앉은 다음에는 핸드폰을 충전기 위에 내려뒀다. 차라리 야근을 12시까지 하고 오는 게 덜 피곤하겠네. 어차피 내일은 그래야 되겠지만. 빈 자리에 누워 이불 속으로 들어간 刘知珉은 옆을 한번쳐다봤다. 안아주면 싫어하려나. 손을 뻗으려다 이내 관두고 이불만 정리했다. 일찍 출근해서 메일로 받은 자료 정리하고, 밀린 결재도 한 꺼번에 받고, 카페에서 점심에 먹을
"…시사회에서 봤어요."
시사회를…응? 머릿속으로 스케줄을 가다듬던 刘知珉이 이불을 아래로 끌어내렸다.힘을 주고 버티는 건지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다. 뭐하자는 거야 또. 刘知珉은 자세를 고쳐 팔로 머리를 받쳤다.
"안 잤어요?"
"잘 거에요…"
"잘자요."
다시 한번 이불을 잡아당겼으나 역시나 요지부동이었다.
"그냥 좀…기분이 이상했어요."
"나도 지금 그래요."
"…많이 좋아했어요?"
"영화요?"
"…아뇨."
"성한나?"
"한유진…"
왜 그 이름이 여기에서도 나오는 건데. 刘知珉이 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되물었다. 걔를 金旼炡씨가 어떻게 알아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金旼炡이 한유진을 알아보고, 그 이전에 연예인도 아닌 한유진이 시사회에 참석할 가능성이얼마나…
"식당에서 봤잖아요 차석현씨."
"…그런데요."
"그 영화 투자자래요."
"감독이…누구라고 했죠."
"최재생 감독님이요."
그 새끼도 알고 있구나.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刘知珉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이불 위에 손을 올렸다. 또 한 번 밀려났다. 언제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성한나가 아니라 한유진이었어요?"
"……"
"좋아…했죠. 되게 많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
"그러면 뭐해요. 어차피 헤어졌는데, 걔한테는 나보다 더 중요한 사람 생겼는데."
"……"
"너무 신경 쓰지마요. 어차피 걔는 나 아니야."
얘기가 많이 달라진다. 金旼炡이 본 게 한유진이었다면.刘知珉은 이불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다 그대로 끌어안았다. 움찔거리던 이불이 바스락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리에 감기는 팔을 확인하고 刘知珉도 옆으로 바짝 몸을 붙였다. 원래 제 자리인 양 들어 맞는 품이 신기하기는 했다. 기억력도 좋다 한 번 본 사람을 어떻게 알아챘대. 낮게 중얼거리며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흔한 이름은…아니니까요."
"그건 그러네."
"…괜히 말한 거에요?"
"아뇨, 고마워요. 둘이 영화 보러간 거 몰랐으면 약 들고 찾아갈 뻔 했거든요."
유지현이 연락하지 않은 이유도 뻔했다. 병실에 이미 죽치고 앉아 있었을 텐데 양심이 남아 있으면 말렸겠지.
"맞다, 내일 아침에 일찍 나갈 거니까 아침 준비하지 말고 자요. 출근길에 카페에서 적당한 거 사먹을 거에요."
"…네. 점심에는 밥 챙겨 먹어요."
"그리고 다음부터는 말로 해요 꼭. 나 진짜 관심법 같은 거 쓸 줄 몰라요."
"키스를 왜 해요 그러게…그냥 이렇게 안아만 주지."
"예뻐서요."
"…네?"
"못 들었으면 말아요."
작은 몸을 힘주어 안으며 한숨을 삼켰다. 이렇게라도 알았으니 다행이지…다행인건가? 혼자 인정하지 않는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내어줘야만 한다. 그 옆은 더이상 제 것이 아니다. 흔적은 지워질 것이고, 기억은 흐릿해질 것이다. 시간이 해결해주는 건 그 뿐이었다.
검사를 상대로 사기칠 생각을 하다니. 刘知珉은 대놓고 언짢다는 기색을 내비치며 제 앞으로 건네지는 와인잔을 밀어냈다. 허나 맞은편에 앉은 사람 역시 그 정도는 예상했던 반응이었다는 것처럼 대신 잔을 가져가서 보란 듯이 홀짝였다. 덕분에 별탈 없이 청문회를 패스 했으니 신세 갚을 겸 기껏 시간 빼서 왔는데 선심을 이런 식으로 이용해? 그러나 상대방이 상대방이었다. 타박도, 잔소리도, 짜증도 어느 정도 들어 먹는 이에게나 통했다. 머릿속에 펼쳐진 넓은 꽃밭에서 나비나 잡으러 다니는 애한테 말해봤자 입만 아팠다. 질린다는 눈빛 또한 남희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그새 와인을 말끔히 비워내서 빈잔을 흔들어 보였다. 진짜 안 마셔? 차 가지고 왔어. 기사 붙여줄게. 내가 지금 술 마실 기분이겠니. 잠시 고민하는 척을 하던 남희수가 서버에게 손을 까딱였다. 집어드는 잔은 아까보다 볼이 좁고 길쭉했고, 찰랑이는 황금빛 물결은 가벼운 미소와 퍽 잘 어울렸다.
"안 마실 기분은 또 뭐야."
"사고친 거 수습 좀 도와달라며."
남희수는 잔을 들지 않은 손으로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세명 고등학교 총동문회. 플래카드에 찍힌 문구를 곱씹던 刘知珉의 미간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아무리 대한민국이 혈연, 지연, 학연 빼고 굴러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저런 시답잖은 짓거리는 없어질 만 하지 않나. 刘知珉은 결린 어깨를 연신 매만지며 혀를 찼다.
"그래서 넌 얼마나 넣었어."
"뭐가."
"발전기금이요, 저거 후배님들 장학금으로 쓰인다니까 좋은 마음으로 넉넉하게"
"야 나 너희 연봉 반도 안 되는 공무원이야."
테이블에 잔을 내려둔 남희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래서 검사님이 지금 입고 있는 셔츠는 어디에서 건너 왔지? 파리? 밀라노? 집안 사정 뻔히 아는 사이끼리는 말꼬리 잡아봤자 피차일반이다.
"그리고 정작 집안 사람은 가만히 있는데 왜 너가 나서."
이번에도 남희수는 어쩌라는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샴페인을 마셨다. 서버에게 부탁한 얼음물만 연신 비워내는 刘知珉과 몹시도 상반되는 여유로움이었다.
"언니 요즘 엄청 바쁘잖아. 준비할 거 한 두개가 아냐, 나도 오빠 결혼할 때 옆에서 지켜봐서 알아."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갔다. 刘知珉은 얼음을 씹어 삼키고 자세를 고쳐 반대쪽으로 다리를 꼬았다.
"야."
"뭐."
"안 가봐도 돼?"
남희수가 잔을 구르며 건너편 테이블로 눈짓했다. 저러다 애들이 주는 술 다 받아 마실 것 같은데. 刘知珉이 남희수가 덧붙인 말을 애써 무시하며 딴청을 피웠다. 물기 어린 잔을 만지작거리고, 식탁 위에 있던 냅킨으로 종이접기를 하고.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티를 지우지 못했다. 남희수는 테이블 아래로 발을 뻗어 刘知珉을 툭툭 건드렸다. 또 싸웠냐 설마? 이래서 동창이니 동문이니 하는 연락은 최대한 받지 않았던 거다. 남의 속도 모르고 자꾸 긁어대니까. 물론 그럴 의도가 없었다는 것은 刘知珉도 익히 알고 있었다.
모르니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다. 남들 눈에는 고등학교 때부터 붙어 다녔던 친구에 불과하니까, 그러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소 멀어진 친구로 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더욱이 한 명은 대학교도 졸업하지 않고 연수원으로 갔고, 한 명은 졸업하자마자 유학길에 올랐다. 타이밍이 타이밍이었다. 곱게 접은 학은 맞은편으로 던졌다. 남희수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과자를 집어먹었다.
"언제 철 들래 知珉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한테는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
"원래 이 맘때 되게 뒤숭숭하대. 결혼 준비하면서 깨지는 커플도 되게 많다고 하잖아."
"어쩌라고 그래서."
오늘부터 물 떠다두고 깨지기를 빌어볼까? 목구멍에서 넘실거리는 비아냥은 겨우 삼켜두고 서버에게 탄산수를 부탁했다. 남희수는 제법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건너편 테이블을 지켜보다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시했다. 오히려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고싶지 않았다. 나서봤자 득되는 게 없었다.
"또 마신다. 저게 몇 잔 째야 도대체."
"지방 방송 좀 꺼라."
"유진언니도 보면 은근히 거절 잘 못 하더라. 술 마시면 말랑말랑해져 사람이."
"돈 냈으니까 나 이제 가도 돼?"
"오랜만에 애들 봐서 기분 좋은 건가."
刘知珉은 서버에게 받은 탄산수를 마시며 핸드폰으로 뉴스를 들여다봤다. 국토부에서는 전세 사기 관련 특별 단속 중간 결과를 발표했고, 식약처 조사 결과 전국 34개 하수처리장에서 필로폰이 검출 됐고, 반도체 산업에 5년간 2.8조를 지원하고, 한유진은 며칠 전에 몸이 안 좋아서 입원까지 했었다. 핸드폰을 옆으로 치워낸 刘知珉이 냅킨을 구겨 남희수에게 던졌다. 날아간 냅킨은 정확히 남희수의 얼굴로 안착했다. 쟤 취하면 아무나 붙잡고 시비 걸어. 쟤들은 다 유진언니 좋아하는 애들이라 그런 거 딱히 신경 안 쓸 걸. 그 쓸데없이 빠른 눈치는 샴페인이랑 같이 팔아 먹고 온 건가 싶다.
"남희수."
"아 뭐요."
"한유진 아팠어."
그제야 저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넌 그 좋은 머리를 나쁜 놈들 잡을 때만 쓰는 거야?"
뜬금없는 핀잔이었다. 남희수는 테이블에 떨어져 있는 냅킨을 주워 고스란히 刘知珉을 향해 내던졌다.
"그치, 언니는 이사장님 조카라서 이런 자리 올 수밖에 없겠지. 너는 그거 아니까 당연히 불참했을 거고."
"결론만 말해."
"언니가 나한테 이걸 왜 부탁했겠어?"
"좋아하잖아 너 이런 거."
"응, 그리고 굳이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너 부를 사람도 나 밖에 없거든. 이해가 되니 이제?"
깜빡했다. 남희수와 한유진이 꽤나 친하게 지냈다는 것을. 刘知珉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받치며 테이블에 기댔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는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언니 결혼한다니까 말하는 건데…"
"입 닫아."
"난 솔직히 둘이 사귀는 줄 알았어. 그래서 유학 간다고 할 때도 결국 대한민국의 속박과 굴레를 집어던지고 행복을 찾아 떠나는구나, 라고 생각 했었는데."
그게 아니면 차라리 진탕 술을 마셔서 취했어야 했다. 남희수는 테이블 구석에 있던 종이학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말을 이어갔다. 차상무님이 영국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돈만 내고 일찍 연회장을 나갔더라면, 평소처럼 술잔을 들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렸더라면 저 이름까지는 듣지 않았을 텐데. 언제나 후회는 뒤늦게 찾아왔다.
"아무튼 이거 너 때문에 언니가 굳이 만든 자리니까 자존심 그만 부리고 가서 화해하는 건 어떠니?"
"부릴 자존심이 남아 있었으면…됐다 너한테 말해봤자 뭐하겠어."
"그런데 저 새끼들은 임자 있는 거 뻔히 알면서 저렇게 치근덕 거리네. 아 몰라, 지지고 볶고 싸우든 키스하든 둘이 알아서 하시고."
미적지근해져서 탄산도 거의 다 빠진 샴페인을 단번에 들이킨 남희수가 의자를 뒤로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무언가를 찾는 것이었다. 머저리들 뚝배기를 어떻게 후려야 잘 깼다고 소문이 날까. 기어코 아이스버킷에 담긴 금색 병을 집어들려고 손을 뻗는 것이었다. 그것은 엄연한 범죄였다. 더욱이 주먹이 아니라 흉기로 친다면 특수폭행으로 가중 처벌까지 받을 수 있다. 설마 전화로 얘기했던 사고라는 게 이런 상황을 의미하는 것일까. 刘知珉은 그립감을 확인하는 남희수를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검사니까 그랬다. 하필 법을 다루는 직업이니까, 괜한 일에 휩싸이면 이래저래 곤란해지니까. 버킷이라도 챙겨가라는 남희수의 목소리는 더이상 신경 쓸 게 아니었다. 숨을 고른 刘知珉이 저만치 떨어져 있는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 거치적스럽게 둘러싼 사람들의 틈을 헤집고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손에 들린 잔을 빼앗아 대신 마시는 것도, 지저분한 추파로부터 떨어트려 놓는 것도, 아는체 하는 이들에게 대충 인사하며 은근슬쩍 뒤로 물러나는 것도 그저 익숙하기만 했다. 손목에 닿는 온기에 멈칫했지만 물러나려는 손을 낚아채 이내 단단히 고쳐 잡았다.
이 정도는, 여기까지는 괜찮은 거겠지.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변명만 되뇌이며 자리를 벗어났다. 구석진 테이블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주인 없는 의자에 한유진을 앉혀둔 刘知珉은 겨우 입을 열었다. 차가운 물 가지고 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대답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가로젓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손을 잡고 있었다. 마치 놓아버리면 다시는 닿을 수 없다는 듯이.
"알아서 적당히 끊어 냈어야지."
"……"
"계속 그렇게 주는대로 받아 마실 생각이었어?"
그제야 얼굴을 들어올려 저를 바라봤다. 피하지는 않았다. 얽히는 시선에서도 굳이 감정을 읽어내려 하지 않았다.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손에 힘을 풀었다. 입이 바짝 말라왔다.
"…그래야 너가 오잖아."
"한유진."
"내가 또 뭘 잘못했는데…"
눈동자에는 금방 물기가 아른거렸다. 刘知珉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지만, 눈가에 가까이 가기도 전에 한유진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슬아슬하게 엮인 손가락을 그저 바라만 보던 刘知珉이 마른침을 삼키고 주위를 살폈다.몇몇은 누군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연회장을 두리번 거리지만, 대부분은 저희들 끼리 웃고 떠들기에 바빠 보였다. 刘知珉은 입술을 달싹이다 한 손으로 한유진의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아픈 애가 왜 술을 마셔…"
"…다 나았어."
"유진아."
"그냥 감기였어, 약 먹고 끝냈다고."
숨기려는 걸 굳이 끄집어내고 싶지는 않았다. 刘知珉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렸다.
"지금은…괜찮아?"
"……"
"건강 좀 챙겨. 너 요즘 많이 바쁘다며."
"……"
"안 그래도 스트레스 받으면"
맞잡은 손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한유진은 刘知珉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할 말이 그것 밖에 없어?"
그러면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너는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걸까. 刘知珉은 입을 열지 못했다. 붙잡고 있던 손이 아래로 떨어져도 묵묵히 한유진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떻게 묻어 7년을."
"……"
"나는 못해. 너 안 보고 살 자신 없어."
"……"
"그건…진짜 안돼."
어떻게 말해도 듣지 않을 거다. 결국 또 제자리였다. 이래서 부모님들의 연락도 다 피했던 건데, 바쁘다는 이유로 약속을 번번이 미뤄왔던 건데. 그 모든 수고와 다짐이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고개를 끄덕일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낸 刘知珉이 빈 의자에 느릿하게 몸을 내렸다. 겨우 샴페인 한 잔에 취한 것처럼 머릿속이 흐릿하기만 했다. 제대로된 판단이 서지 않았다.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한유진은 익숙하게 팔짱을 끼며 어깨에 기대어 왔다. 집에 가자 知珉아.
도수가 높은 샴페인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속이 뜨거울 리가 없다. 그게 아니고서는 이렇게 멋대로 심장이 뛸리 없는 것이다. 刘知珉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오른손으로 바지주머니를 더듬었다.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남희수와 함께 있던 테이블에 핸드폰이며 차키며 전부 두고 왔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대검으로 가면 바쁜 거 좀 나아져?"
"인사 아직 확정 난 거 아니야."
"아빠한테 말해볼게."
"됐어, 아버지 장관으로 계실 때는 차라리 한직으로 가서 쉬다 오는 게 마음 편해."
자연스럽게 손가락이 얽히는 것은 손바닥에 찬 땀을 닦는 척 피했다. 한유진도 그것까지는 욕심 내지 않는 듯 보였다. 짤막한 숨을 내뱉은 刘知珉이 애먼 바지춤을 잡았다 놓았다. 이번에는 검지로 손가락에 무언가를 적어내려갔다. 刘知珉.
"왜."
대답하듯 검지가 움직였다. 그것을 지켜보던 刘知珉은 이내 고개를 들어 연회장을 눈에 담았다. 나름 화기애애해 보였다.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다 웃음을 터트리고, 퍽 진지한 얼굴로 설전을 벌이고. 그러다 불현듯 뺨에손바닥이 닿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힘을 주어 고개를 자신의 쪽으로 돌려뒀다. 다시금 시선이 엉켰다.
"살 내린 것 같아."
"그대로야."
"거짓말."
"너나 잘 챙겨 먹어. 오죽하면 어머님이 나한테 전화를 해."
"이번에는 진짜 다른 얘기 안 했어…"
刘知珉은 한유진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한유진은 손가락으로 턱선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빠졌다니까. 맞부딪히는 눈빛에는 차츰 감정이 섞이기 시작했다. 刘知珉은 한유진의 손을 붙잡아 허벅지로 내려놓았다.
"기사님 불러. 괜히 더 있다가 애들한테 붙잡히지 말고."
"너도 차 가지고 왔을 거 아냐."
"알아서 타고 갈게 나는."
"어차피 술 마셔서 운전 못 하잖아. 그냥 같이 타고 가."
"내일도 출근해야 돼."
"비서관한테 너희 집까지 가져다 놓으라고 할게."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刘知珉은 빠져 나갈 구멍은 찾았고, 한유진은 그 구멍을 틀어막았다. 이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늘 이 앞에만 서면 난관에 봉착하고 만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무언가를 꺼내두지는 못했다. 대답 없는 刘知珉을 지켜보던 한유진이 손을 들어올려 머리카락에 붙어 있던 먼지를 떼어냈다. 나도 잠깐 회사 나갔다 와야 돼. 덧붙인 문장에 담긴 뜻을 기어코 읽어내는 스스로가 그저 한심하기만 했다.
刘知珉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한유진은 옆으로 바짝 붙어 테이블 아래로 손을 잡았다. 희수한테 인사만 하고 가자. 刘知珉이 반질반질한 대리석 바닥만 내려다봤다. 너른 공간을 잔잔히 유영하는 이름 모를 클래식을 따라 한유진이 엄지 손가락으로 손등을 두드렸다. 술은 마시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으면 운전을 할 수 있었을 거고, 테이블에 있던 차키와 핸드폰을 챙겨 연회장을 빠져나갔을 거다. 만약 그랬다면, 그게 가능했다면 적어도 이런 꼴은 마주하지 않았을 거다. 음악이 바뀌었다. 손등을 감싸던 온기가 사라졌다. 시야로는 반듯한 구두가 들어찼다.
"知珉씨도 같이 있었네요?"
刘知珉이 서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오빠가 여기는 어떻게…"
"술 많이 마셨다는 것 같아서 데리러 왔지."
세상에서 가장 보기 싫은 사람이 제 눈 앞에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단정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서. 비로소 현실로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刘知珉은 있는 힘껏 주먹을 말아쥐었다.
"진짜 빨갛네."
볼을 쓰다듬는 손길에서는 어색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바라보는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꾸며낸 애정이 아니다 저건. 최소한 6년이었다. 어쩌면 그 이상이 됐을 수도 있다. 차석현을 올려다보던 刘知珉이 쓰린 한숨을 삼켜냈다.
"약속했던 건 다섯잔이었는데, 설마 넘긴 건가?"
"별로 안 마셨어요. 와인이 도수 높아서 그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한유진을 대신해서 대답하는 것도 刘知珉이다. 한유진을 바라보던 차석현도, 차석현을 바라보던 한유진도 그제야 刘知珉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분명한 것은 하나였다. 이 관계에서 불청객은 정해져 있다. 차석현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그러네요 知珉씨가 옆에서 잘 챙겨주셨겠죠. 속 편한 소리였다. 정말 아무 것도 모르니까 저런 얘기를 꺼내두는 거다.
"정말 조만간 식사 자리 한 번 마련해야겠어요."
"오빠 오늘 미팅 있다고 하지 않았어?"
"회의만 끝내고 바로 온 거야 너 보려고."
더 듣고 있을것도 없으며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刘知珉은 입술을 말아물며 의자를 밀어냈다.
"知珉아"
한유진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몸은 가눌 수 있을 정도로 술을 마셔야 했다. 뒤따라 일어나려다 순간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한유진을 차석현이 가뿐히 부축했다. 刘知珉의 손이 미처 닿기도 전에.
"진짜 취했네. 이건 어머님한테 비밀로 해야겠다."
"……"
"집에 가자 유진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그 자명한 사실을 이렇게 또 확인 받는다. 차석현을 쳐다보던 刘知珉이 야트막한 헛웃음을 내뱉었다. 혹시 知珉씨도 유진이랑 같이 오셨나요? 차석현이 그렇게 물으며 한유진의 허리를 감쌌다.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의 힘이 저절로 풀렸다.
"그러면 저희랑 같이"
"제가 왜요."
"오빠."
차석현이 뱉어낸 문장은 끝마쳐지지 못했다. 말허리를 잘라낸 刘知珉이 한유진을 바라보며 대답을 이어갔다. 가는 길도 다른데 뭐하러 제가 동행합니까. 차석현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刘知珉."
"나중에 또 뵙죠."
자리를 피해준 거였나, 그게 아니면 도망친 거였나. 처음 앉아 있던 테이블로 돌아온 刘知珉은 덩그러니 남겨진 핸드폰과 차키를 챙겨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명치에서부터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결국 얼마 가지 못하고 무릎을 짚은 채 숨을 골랐다.
리딩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에 잠시 짬을 내어 태준을 만났다. 무대인사는 기본이고 영화 홍보를 위해 라디오며 예능이며 각종 인터뷰며 이런저런 스케줄을 돌다보니 데이트할 시간은 부쩍이나 줄어들게 됐다. 태준의 활동이 마무리 될 때 즈음에는 제가 바톤터치 하듯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야 했다.
반사전제작인만큼 쪽대본 걱정은 없었지만 정해진 기한 내에 촬영을 마치고 후작업에 들어가야 하반기 편성에 맞게 방송될 수 있는만큼 일정은 빡빡한 편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헤어지기 직전에 정태준은 별안간 명품 로고가 박힌 종이가방을 건넸다. 요즘은 다시 향수 뿌리는 것 같길래 샀어.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받아들기는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탁한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세컨드가 자주 쓰는 향수를 남자친구에게 선물받는 기분이란…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이 비로소 확연히 실감 났다. 이제라도 브랜드를 바꿔야 하나 고민하다가도, 서로 다른 향이 섞이면 더 티 날 수 있겠다는 합리화를 하며 박스만 만지작거렸다.
스케줄이 남은 태준을 배웅하고 차에 오르자 매니저는 바로 집으로 가겠냐며 물어왔다. 金旼炡은 마지막으로 주고 받았던 문자를 떠올리다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느덧 창 밖에는 짙은 땅거미가 내려 앉아 있었다. 저녁은 먹고 일 하려나. 연락을 해보려다가도 바쁜데 방해하는 게 아닐까 싶어 핸드폰을 뒤집어놨다. 그래도 잊지 않고 하루에 세 번은 먼저 문자 보내주니까, 비록 전화는 제가 걸어야 하지만 귀찮다는 내색 없이 받아주니까. 刘知珉은 이따금씩 바라는 것도 많다고 말하지만 실상 놓고 보면 金旼炡이 원하는 건 소박했다.
시사회 이후로는 얼굴 보는 것도 어려워졌다. 출근 시간은 당겨졌고 퇴근 시간은 늦춰졌다. 혹시 작정하고 피하는 건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자정 직전에 조용히 들어와서 씻자마자 바로 침대로 쓰러지는 사람에게 괜한 말을 얹고 싶지는 않아 옆에서 대본만 넘기고 또 넘겼다. 잠든 刘知珉을 가만히 바라볼 수 있다는 현실에 만족하는 법을 익혀갔다. 첫만남 때보다 부쩍 선명해진 턱선이 눈에 밟혔으나, 바빠도 끼니는 거르지 말고 챙겨먹으라는 말을 전하는 것 말고는 마땅히 해줄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남들처럼 밖에서 같이 밥 한 끼 먹는 것도 쉽지 않았다.
지방 촬영하는 곳이 한적한 시골이던데 방 하나 따로 잡아줄까. 바람도 쐴 겸 주말에 잠깐 와서 쉬고 가면…金旼炡은 빠르게 고개를 휘저었다. 집에 와서 잠만 겨우 자고 가는 사람을 그 멀리까지 부르기도 미안했다. 그렇다고 매니저에게 부탁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아니면 진짜 눈 한번 꽉 감고 보나마나 꼴이 뻔했다. 운전석에서 저를 끌어내리면 다행이지 본인은 황천길 가기 싫다며 택시를 잡아탈 수도 있었다. 金旼炡은 시트에 다리를 올려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언니 직장인은 보통 휴가 언제쯤 내? 룸미러를 힐끔거리던 매니저가 그것도 사람마다 다르다는 대답을 전해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주차장에 도착한 차가 완전히 멈춰섰다. 오대표가 너 요즘 만나는 사람 없냐고 물어보더라. 뒷좌석에서 내리려던 金旼炡이 멈칫하고 매니저를 쳐다봤다. 내년이 재계약이잖아. 혹시라도 다른 소속사에서 찔러 보지는 않냐고 명함 같은 거 받지 않게 알아서 잘 관리하라고 난리야.
金旼炡은 매니저와 같은 표정을 지으며 종이가방을 챙겨들었다. 다른 곳에서 괜찮은 오퍼 오면 언니도 무조건 나랑 같이 가는 거야. 완전히 몸을 돌린 매니저는 金旼炡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고생했고 올라가서 푹 쉬어 우리 겨울이. 바닥으로 발을 딛은 金旼炡이 가볍게 헛웃으며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하여간 제 버릇은 개 못 줬다. 그저 돈 되는 일이면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징글징글한 인간. 金旼炡은 머릿속을 스치는 느물느물한 얼굴을 박박 지워내며 버튼을 꾹 눌렀다. 수십 초 뒤에 문이 열리면 현관문 앞에 놓인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문을 열고 신발장 근처에 종이가방을 내려둔 金旼炡은 박스를 챙겨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 박스를 하나씩 뜯으며 내용물을 테이블로 꺼내뒀다. 집에 가져다 두면 챙겨 먹기는 하겠지. 그냥 주면 안 받을 수도 있으니까 내 꺼 주문하는 김에 같이 샀다고 하면 되려나.金旼炡은 드레스룸에서 챙겨온 백팩 안에 대본과 비타민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금방 두둑해진 백팩은 옆으로 치워두고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검사님 퇴근 언제 해요? 문자를 보낸 뒤에는 너저분해진 거실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포장지는 주워서 휴지통에 넣어두고, 박스는 펼쳐서 구석으로 쌓아두고. 나갈 채비를 마치고 거실을 둘러보다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역시나 답장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서랍 안에 두지 말고 적어도 책상에는 올려 놓으라니까 말 진짜 안 들어. 金旼炡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백팩을 짊어 멨다. 知珉언니.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이름을 터치하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댔다.
바로 받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다. 연결음은 길게 이어질 거고, 고객님이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멘트가 들려올 거라고 여겼었다. 어쩌면 그게 더 나았을 수도 있다.
-…여보세요?
그런데 왜 낯선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드는 걸까. 현관문 밖으로 나가려던 金旼炡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분명 야근을 한다고 했었는데. 金旼炡은 문틈 사이로 빠져 나와 핸드폰을 고쳐잡았다.
-旼炡이?
"……"
-누구…세요?
이름을 불러놓고 누구냐 묻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그 질문은 그쪽이 아니라 이쪽에서 던져야 했다. 우두커니 서서 가방끈을 만지작거리던 金旼炡이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旼炡이가 旼炡이지 누구겠어요. 미처 가다듬지 못한 날 선 목소리가 새어나가기는 했다. 그래도 이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시간에 왜 모르는 여자랑 같이 있고, 그 여자가 전화까지 대신 받는 건데. 金旼炡은 애써 한숨을 삼키며 바닥을 툭툭 발로 찼다. 씁쓸했다. 아쉬운 건 늘상 이쪽이었다. 도어락 키패드를 두드렸다. 숫자가 떠오르면 빠르게 번호를 누르고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아니 그게요…얘가 지금 전화 받을 상태가 아니거든요
그 뿐이었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면서, 혹시 또 아픈 건가 싶어 걱정만 앞서면서.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무리를 하더니 결국 또 몸살이 왔나. 金旼炡은 현관문을 세게 닫고 뒤돌아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어디에요 거기?"
이미 빨간색 불이 들어와 있는 버튼만 연달아 눌렀다. 건너편에서는 어째서인지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핸드폰을 쥔 金旼炡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알려줘도 되나
"네?"
-야 刘知珉 안 일어나면 진짜 물 뿌린다
"…저기요."
-旼炡이 하트 이거 어떡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간 金旼炡이 1층과 닫힘버튼을 연이어 누르고 안전바를 움켜쥐었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직장동료는 아닐 거고, 친구랑 같이 있는 건가.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떠돌아다녔다. 이제는 전화를 끊고 택시를 불러야 했다.
"제가 거기로 갈게요."
-네? 잠깐…아 돌겠네 진짜
"주소 말해주세요."
-이 미친은 내일 출근도 안 하나…저기요 刘知珉씨, 刘知珉 검사님 정신 좀 차리지?
로비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양 옆으로 철문을 밀어냈다. 金旼炡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밖으로 빠져나왔다.
-여기 XX대로 41길 117번길이거든요. 간판은 없고요, 건물 들어와서 2층으로 바로 올라오시면 돼요.
"검사님은 괜찮은 거죠?"
-글쎄요…야 刘知珉 너 괜찮아? 대답을 안 하네요 완전히 뻗었어요
"그렇게 아프면 병원이라도"
-아 그건 걱정마세요 차라리 술병 나야 돼요 얘는
발걸음은 조금씩 느려졌다. 그러니까 지금 아픈 게 아니라
-안주는 손에도 안 대고 스트레이트로 마시니까 취하지 미친 검사님
"……"
-지가 건물주면 다야?
"……"
-도착하면 전화주세요 제가 나가 있을 게요
전화는 끊겼다. 金旼炡은 어플로 들어가 택시를 호출하고 건물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택시에서 내린 金旼炡이 주변을 둘러보다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출입문을 밀고 계단을 올라가며 생각했다. 내가 여기 와본 적이 있었나. 누구랑 같이 왔었지. 기억을 찬찬히 더듬으며 문 옆에 달린 버튼을 눌렀다. 딸랑이는 방울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金旼炡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장사 안 하는…뭐야 c***"
그제야 떠올랐다. 술이나 한 잔 사줘요. 둘 다 취하면 이렇게 될 것 같았으니까. 刘知珉이 데려왔던 위스키바였다. 출입문쪽으로 걸어오던 여자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다른 한손으로는 저를 가리켰다.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어떻게 귀한 분이 찾아오시는…"
金旼炡은 아무런 생각 없이 뒤를 돌아봤다. 다른 사람이랑 같이 안 왔…모자나 마스크도 하지 않고 택시를 탔다는 것도, 누가 쳐다보거나 말거나 일단 건물로 들어왔다는 것도 나중에 깨달았다. 일단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여자는 멍하니 金旼炡을 바라볼 뿐이었다. 슬쩍 옆으로 걸음을 옮긴 金旼炡이 가게 안 쪽을 둘러봤다. 길게 뻗은 바 테이블 중간에 툭 튀어 나와 있는 무언가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진짜 취했구나.
"아 그게 오늘은 사정이 있어서 손님을 받을 수 없을 뻔 했지만 만약 한 잔 하시고 싶다면 2층으로 올라가셔도 돼요."
괜찮다고 손을 내젓는 金旼炡을 바라보던 여자가 말을 이어갔다. 아니면 저기 소파 있는 쪽으로 가셔도 돼요. 메뉴판은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金旼炡은 잠시 망설이다 여자에게 대답했다. 제가 旼炡이인데요. 여자는 꽤나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던가요. 퍽 곤란해졌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입술을 달싹이던 金旼炡이 여자를 향해 핸드폰을 들어보였다.
"사진 찍어 주신다고요? 정말요?"
"아뇨 그게 아니라…제가 旼炡이라고요."
"알고 있어요."
"아니…그러니까요. 아까 전화했던 그 旼炡이…말이에요."
"아까 전화를 누구랑 하셨…"
이번에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金旼炡은 머쓱해져서 혀로 입술만 훔쳤다. 손을 내린 여자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트?"
"…네."
"旼炡이 하트?"
"네…"
"刘知珉 검사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旼炡이 하얀색 하트?"
몇 번이나 확인사살을 시켜준다. 입을 꾹 다문 金旼炡이 바 테이블을 가리켰다. 여자는 손가락 끝을 따라 고개를 돌리며 되물었다. 진짜로 쟤를 데리러 오신 거에요? 刘知珉? 金旼炡은 대답을 대신하여 안 쪽으로 차분히 걸어갔다. 도대체 얼마나 마셔야 저렇게 뻗을까 싶었다. 그것도 주량도 약하지 않은 사람이.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뒷모습은 어렴풋 눈에 익었다. 빈 의자에 백팩을 내려둔 金旼炡이 뒤따라오던 여자에게 물었다. 얼마나 마신거에요? 여자는 머뭇거리다 테이블 구석에 치워뒀던 빈 병을 들어올렸다. 한 병 다 쟤가 비워낸 건 아니고, 도수가 센 걸 빠르게 마셔서 그럴 거에요. 한숨이 저절로 터져나왔다.
어느 틈에 테이블 너머로 들어간 여자가 선반을 왔다갔다 하다 돌아와서는 金旼炡 앞에 잔을 내려뒀다. 마셔요 오미자차에요. 위스키 바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음료였다.
"저도 얘랑 같이 몇 잔 마셔서 그런데…실례지만 전화 한 번만 더 해주시면 안 될까요?"
붉은색이 맴도는 잔으로 손을 뻗던 金旼炡이 여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떠보는 건 아닌 듯하다. 말투는 정중했고, 표정은 진중했다. 핸드폰 잠금을 풀고 최근통화목록으로 들어가 맨 위에 있던 이름을 눌렀다. 연결음이 이어지며 테이블 위에 있던 또 다른 핸드폰이 밝아졌다. 여자는 그 화면과 金旼炡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리고는 의자를 끌어와 맞은편에 앉았다. 드세요 그거 知珉이네 어머니께서 직접 담그신 거에요. 金旼炡이 잔을 매만지다 안에 든 것을 홀짝였다.
"둘이 어떻게 알게 됐는지 물어봐도 돼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이니 여자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한동안은 잔잔한 피아노 소리만이 둘 사이를 맴돌았다. 金旼炡은 반쯤 흘러내린 자켓을 정리해 刘知珉의 어깨에 바로 걸쳐주며 대답했다. 악플러를 고소했는데 그 사건을 검사님이 맡게 되면서 처음 알았어요. 연주를 따라 여자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 다음은요."
"네?"
"처음은 사건 때문에. 그러면 두 번째도 있었다는 것 같은데."
설마 이쪽도 법조계에 몸을 담그고 있는 건가.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 돌아오자 金旼炡은 본인도 모르게 숨을 고쳐쉬었다. 여자는 그 또한 눈치채고 잔을 쓰윽 밀어줬다.
"묵비권 행사하셔도 돼요."
"국회의원 결혼기념일 파티에서요. 알아본 사람들이 자꾸 모여들어서 곤란했는데 검사님이 도와줬어요"
"바에 왔던 건 몇 번째였어요?"
눈썰미도 상당했다. 만만하게 볼 상대는 아니었다. 오미자차를 반쯤 비워낸 金旼炡이 잔을 내려두며 대답했다. 네 번째요. 이 근처 백화점 앞에서 만났어요. 연주하듯 유려히 움직이던 여자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정말 이번에는 제대로 해보려는 건가."
본인의 앞에 놓인 잔을 빤히 바라보던 여자는 선반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병을 하나 들고 테이블로 다가왔다. 한 잔 하실래요? 金旼炡이 고개를 가로저으면 마개를 열고 빈 잔을 채웠다. 아래에 냉장고가 있는지 허리를 숙여 얼음을 꺼내는 폼도 제법 능숙했다.
이후로는 별다른 말이 오고가지 않았다. 여자는 묵묵히 잔을 비워냈고, 金旼炡은 옆에 있는 刘知珉을 지켜봤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던 걸까.
"여덟시 조금 넘어서 왔나."
잔과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여자가 먼저 운을 뗐다. 金旼炡의 시선은 여전히 刘知珉에게 고정 되어 있었다.
"어쩐 일이냐 물어봤더니 술집에 술 마시러 오지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하냐고 도리어 따지더라고요."
"……"
"그래서 그 뒤로는 말 안 걸었어요."
"……"
"부장한테 깨졌거나, 공판에서 졌거나, 한강에서 뺨을 맞았거나. 셋 중 하나겠죠 뭐. 인맥은 넓은데 은근히 인간관계가 좁으신 검사님이라."
얼음만 남은 잔에는 다시금 호박빛의 액체가 채워졌다. 내내 刘知珉을 바라보고 있던 金旼炡은 한강에서 뺨을 맞았다는 얘기가 들려왔을 때 여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제가 얘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친구거든요."
잔을 빙글빙글 돌리던 여자가 金旼炡의 잔에 본인의 것을 부딪혀왔다. 청아한 소리와 달리 덧붙여지는 말은 다소 무거웠다.
"응원은 못 해요."
"……"
"적어도 지금은 그래요."
감추기도 전에 발각된 기분이었다. 허공에서 맞닿은 시선은 어쩐지 따끔하다. 여자는 잔에 남은 것을 전부 마시고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金旼炡은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기척 없이 다가와서는 어깨를 두드린다. 쟤 옮기는 것 좀 도와줘요. 어깨를 덮고 있던 자켓을 대충 테이블에 던져둔 여자가 刘知珉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이 쯤이면 뒤척일 만도 할 텐데 몸은 축 늘어져서 여자에게 기대졌다. 저기 안 쪽에 방 있으니까 거기에 넣어두면 돼요. 한 두 번 해 본 게 익숙하게 부축하며 刘知珉의 팔을 목에 둘렀다. 꽤나 버거워 보이기는 했지만 도와달라는 부탁이 무색할 정도였다. 金旼炡은 어쩔 줄을 몰라하며 그 뒤만 따라갔다. 구석진 곳으로 걸어 들어가다 보면 문이 하나 보였다. 저거 열어줘요. 여자와 刘知珉을 스쳐 지나간 金旼炡이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마치 작은 호텔방을 고스란히 옮겨온 것만 같았다. 멍하니 안을 둘러보던 金旼炡은 잠깐만 붙잡아 달라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이 정도까지 취할 수 있나 싶었다. 내뱉는 숨에도 독한 술냄새가 가득 배어 있었다. 여자를 거들어 刘知珉을 침대에 눕히고 매트리스 끝에 앉아 얼굴을 살폈다. 눈이 부어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볼이 달아오르지도, 입술이 터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게 정말 괜찮은 건가. 金旼炡은 저만치에 서 있는 여자를 바라봤다. 팔짱을 낀 채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여자가 金旼炡의 눈빛을 알아채고 목을 긁적였다.
"가끔 저래요. 쟤라고 뭐 살면서 속상한 일이 없겠나."
"그래도 옆에서 말리시지 그랬어요. 내일 출근도 해야 하잖아요 검사님은."
"상태 안 좋은 것 같으면 아침에 수사관님한테 연락할 거에요.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요. 아까 약국에서 사온 숙취해소제도 먹였어요."
혹시 몰라 이마를 짚어봤다. 볼을 감싸고, 목을 만져봤다. 평소보다 뜨겁기는 했지만 심한 열기는 아니었다. 어깨 너머로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金旼炡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자고 가실 건 아니죠?"
"혼자 두고 가기에는 너무 취했는데…"
"제가 있어도 되기는 해요."
"저도 괜찮아요."
묘한 대치였다. 여자는 벽에 기대 金旼炡을 바라보며 말했다. 쟤 취하면 좀 별로일텐데. 金旼炡은 망설이지 않고 받아쳤다. 알고 있어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여자가 입술을 달싹이다 말을 이어갔다.
"저는 분명 얘기했어요."
"번호 알려주세요. 검사님 아침에도 컨디션 안 좋으면 연락드릴게요."
마지 못해 걸어와서는 핸드폰을 건넸다. 키패드에 빠르게 번호를 찍은 金旼炡은 통화버튼을 누르고 여자에게 핸드폰을 돌려줬다. 벨소리가 짧게 울렸다 끊겼다. 이름은 나중에 알려드릴테니까 지금은 그냥 刘知珉 친구라고 저장해요. 적당히 선을 긋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 눈치챌 수 있었다.
"저기 냉장고에 물 있고, 속 쓰리다고 하면 서랍 안에 개비스콘 꺼내서 주면 될 거고, 바닥에서 주무실 거면 이쪽에서 이불 가져 가시고. 제가 더 알려드려야 될 게 있을까요?"
방 안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설명을 마친 여자는 고개를 가로젓는 金旼炡을 확인하고 신발을 고쳐 신었다. 문을 닫기 직전에는 무언가를 확인하기라도 하듯 되물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주어도 없는 불친절한 문장이었으나 깊게 알고 싶은 마음도 없어 대충 고개만 주억였다. 오후에 오겠다는 말을 남겨두고 이름 모를 여자는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金旼炡은 겨우 한숨을 돌리며 刘知珉의 손을 붙잡았다.
속상한 일까지 얘기해주기를 바라는 건 아무래도 욕심이겠지. 곤히 잠든 刘知珉을 내려다 보던 金旼炡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벽에 붙은 스위치 쪽으로 걸어갔다. 형광등을 끄고 침대 근처로 돌아와서는 냉장고와 서랍에서 각각 생수와 약을 꺼내들었다. 스탠드 옆에 핸드폰과 함께 가지런히 놓아둔 뒤에 이불을 살짝 걷어내며 그 안으로 들어갔다. 자세를 고쳐 나란히 누우면 刘知珉은 잠시 뒤척이다 제게로 바짝 붙어왔다. 검사님. 金旼炡이 목소리를 낮춰 刘知珉을 불렀다. 대답 없이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차라리 이대로 아침까지 깨지 않고 푹 잤으면 싶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취했는지, 야근을 하다 중간에 나온 건지, 아니면 다른 약속이라도 있었던 건지. 사소한 궁금증은 혼자서 하나씩 지워내면 그만이었다. 한참동안 刘知珉을 바라보던 金旼炡도 언젠가부터는 눈을 감고 가지런한 숨을 내쉬었다. 까무룩 잠에 들었던 것도 같고, 잠에 들기 직전이었던 것도 같다.
정확히 들리지는 않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刘知珉의 목소리였다. 金旼炡은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이불을 아래로 살짝 내렸다. 갈증 나요? 물 줘? 뭐가 불편한 건지 대답은 않고 연신 몸을 뒤척였다. 속이 쓰린건가. 등을 돌린 金旼炡이 서랍 쪽으로 손을 뻗었을 때였다. 刘知珉은 허리를 끌어안으며 金旼炡의 어깨에 기대어왔다. 그 덕분에 목소리는 아까보다 선명해지고.
"내가…먼저였어……"
"……"
"…내가 먼저였는데"
"……"
"왜 내가……"
"……"
"나는 진짜…모르겠어…"
취하면 잠꼬대까지 하는 모양이었다. 이건 정말 몰랐는데, 알고 나니 차라리 몰랐어야 되는 건가 싶은데. 이래서 괜찮겠냐고 물어본 거였나. 金旼炡은 허리에 올려진 刘知珉의 손을 쓸어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못 잊었구나. 여전히 잊지 못했구나. 헤어진 이후에도 부모님이 연락해서 건강을 걱정할 정도면 두 사람은 도대체 어떤 연애를 했던 걸까. 우습지만 이제는 그 모습마저 떠올릴 수 있었다.
잘 어울렸다. 비록 지금은 그 옆에 다른 사람이 있지만, 刘知珉과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좋아했으니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걸까. 천천히 몸을 돌려 刘知珉을 마주한 金旼炡이 얼굴을 하염없이 쳐다보다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진짜 또 한강에서 뺨 맞았나. 그건 좀 싫은데, 이제는 그만 기다렸으면 좋겠는데. 金旼炡은 刘知珉이 그랬던 것처럼 어깨 위에 제 얼굴을 올려뒀다.
"그 사람 만나지마요…"
"……"
"이렇게 힘들어할 거면 앞으로는 기다리지도마요."
"……"
"검사님이랑 사귀던 중에 약혼한 거라며…어떻게 그게 되지."
어떻게 친구를 하지. 刘知珉의 등을 토닥이던 金旼炡이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잔상을 애써 밀어냈다. 유진이. 벌써 며칠이나 지났는데 시사회에서 봤던 그 장면만큼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눈을 뜨고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여러모로 잠들 수 없었던 날이었다.
밤을 샌 건 아니었지만 새벽까지 뜬 눈으로 천장만 올려다봤다. 마지막으로 핸드폰을 확인했을 때가 세 시였다. 그 이후로도 한동안은 깨어 있었으니 다섯시간은 잤으려나. 아득히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잠에서 깬 金旼炡은 졸린 눈을 비비며 옆자리를 살폈다. 이렇게라도 쉬는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刘知珉의 얼굴을 바라보던 金旼炡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책상 위에 약봉투를 내려두던 여자가 넌지시 말했다. 수사관님한테는 연락 드셨어요. 걔는 해가 중천은 되어야 일어날 거니까 旼炡씨는 저랑 아침 먹어요. 역시나 처음 있는 일은 아닌 듯 했다. 괜찮다고 거절하려고 했지만, 여자는 마치 같이 나갈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듯 문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결국 金旼炡은 침대에서 내려와 이불을 정리해주고 여자를 따라나섰다. 잠은 잘 못 잔 것 같아 보이네요. 침대가 좁아서 둘이 자기는 아무래도 불편하죠. 金旼炡은 대답 대신 애써 웃어보였다.
바 테이블에는 그럴 듯한 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괜히 눈치가 보여 金旼炡이 망설이자, 여자는 태연하게 의자를 뒤로 빼주고 옆자리에 앉아 유리잔을 손에 쥐었다.
"맛있을 걸요. 비록 누구씨처럼 사시는 패스 못 했지만 한식조리사 자격증은 땄어요. 먹고 사는 게 중요해서 나는."
망나니 검사님 꺼는 따로 있으니까 식기 전에 먹어요. 그리고는 숟가락을 들고 국을 떠먹는다. 옆에 누가 있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본인 식사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한 칸 떨어진 빈 의자에 몸을 내린 金旼炡은 물을 반쯤 비워낸 뒤에야 젓가락을 손에 쥐었다. 잘 먹겠습니다. 어색하게 인사하고 여자를 따라 젓가락을 손에 쥐었다. 여자는 金旼炡이 힐끔거리거나 말거나 핸드폰으로 드라마 클립을 보며 본인 몫의 음식을 찬찬히 비워냈다. 입맛도 별로 없었고, 속이 허한 것도 아니었지만 金旼炡은 묵묵히 밥과 국을 퍼먹었다. 말마따나 어디서 사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맛있었다.
"법대 동기."
여전히 시선은 핸드폰 화면에 둔 채로 말을 이어갔다. 저는 과대, 걔는 과탑. 솔직히 학교 다닐 때는 인사만 나누는 정도였는데 어쩌다가 엮이는 바람에 지금까지 친구를 하네요. 金旼炡은 말없이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오해하실까봐. 저도 취향이라는 게 있어서 刘知珉은 별로거든요."
재생 중이던 영상이 끝나자 옆으로 고개를 돌려 빈 그릇을 확인했다. 다 먹은 거죠? 金旼炡이 그렇다고 대답하면 가뿐히 양 손으로 트레이를 챙겨 테이블 안쪽으로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나타난 여자의 손에는 작은 컵의 아이스크림이 들려 있었다.
"제가 초코 좋아하니까 바닐라 드세요."
포장지까지 뜯어 건넸지만 숟가락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뜻 모를 친절이 때론 불편하게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金旼炡은 고민 끝에 무거운 입을 열었다. 왜 다른 얘기는 안 하세요? 아이스크림을 크게 퍼서 입 안에 넣으려던 여자가 멈칫하고 金旼炡을 바라봤다. 마주친 눈동자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알고 계시잖아요, 저 지금 검사님이랑 바람 피고 있다는 거."
"그래서 말했잖아요 어제. 응원은 못 해준다고."
"그게…끝이에요?"
"뭘 더 해야 할까요 제가?"
거기까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보통은 이런 반응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었다. 내쫓지 않고 재워준 것도 모자라 아침밥을 챙겨주는 경우는 정말 흔하지는 않을 거다.
"가타부타 떠들고 싶지는 않거든요. 어찌됐든 刘知珉이 만나고 있는 사람인데."
"엄청 쿨하시네요…"
"안 그래도 뒤숭숭한 애들 속 뒤집는 취미도 없고."
아이스크림 바꿔줘요? 반은 먹어놓고 그런 소리나 한다. 이곳은 인테리어만 刘知珉을 닮은 게 아닌 모양이다.
"내가 아는 그 刘知珉 검사가 세컨드를 감수할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객관적으로 보면 응원 못하는 게 맞는데, 주관적으로는 판단이 안 서네요."
여자는 아이스크림을 말끔히 비워내고 金旼炡의 손에 들린 것을 가져갔다. 급하게 먹다가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고, 빈 용기를 정리했다. 손에 남은 물기를 쓸어내리던 金旼炡이 시선을 피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모르지 않을 것 같은데 본인도. 刘知珉 아직까지 지나간 사랑에 미련 남아 있다는 거. 만약에 그거 끝내고 제대로 연애를…양반은 못 되네 역시."
컵을 겹쳐 한 곳에 모아놓은 여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걸어 오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잠깐 멈춰서서 머리카락을 한 손 가득 움켜쥐었다 놓았다.
"지금 몇 시야…내 핸드폰은?"
목소리는 다 갈라졌고,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여자는 빈 아이스크림 컵을 구석의 휴지통으로 버려두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사무실에서 충전중.
"나 누구한테 연락하고 그러지는 않았지?"
"엉, 수사관님한테는 술병 나서 하루 쉰다고 말해뒀어."
"미치겠네…엄마가 알면 진짜 이번에는 쫓아올 것 같은데."
"혼나는 건 걱정이 되세요? 앉아 있어 밥 가져다줄게."
"아냐 지금 먹으면 다 게워낼 것 같아."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옆으로 비켜섰다. 인상을 찌푸린채 걸어오던 刘知珉이 의자에 앉아 있는 金旼炡을 발견한 건 그 순간이었다. 건너편으로 넘어간 여자가 한참 달그락거리다 무언가를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유리잔에서는 은은한 금색 물결이 너울쳤다.
"필름 끊겨서 기억 안 나시겠지만 전화는 내가 받았어. 이유는 너가 더 잘 알 거고."
저렇게까지 당황하는 표정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진짜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 金旼炡은 고개를 돌려 선반을 장식한 온갖 술병들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스피커를 만지작거리던 여자는 구석진 곳으로 걸어가다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잔잔한 음악이 너른 공간을 한가로이 유영했다.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金旼炡이 애매하게 놓인 잔을 제 옆으로 밀어뒀다.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刘知珉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검사님 마시라고 주고 가신 것 같아요."
아마도 그랬을 거다. 특별한 향이 맡아지지 않는 걸 보면 꿀물이려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만약이라도 잠결에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알게 되면 얼마나 더 놀라려고. 金旼炡은 짤막한 한숨을 내뱉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오후에는 리딩이 있어서 저도 이제는 슬슬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됐다. 서너 자리 떨어져 앉은 刘知珉은 말없이 유리잔을 만지작거렸다. 안 마셔요? 저를 한번 바라보고, 다시 잔을 바라보고, 그러다 고개를 끄덕인 뒤에 단번에 안에 든 것을 비워냈다.
"속은 괜찮아요?"
"…네, 미안해요."
"그게 왜요? 난 검사님 아픈 거 싫은데."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될지는 사실 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려웠다. 刘知珉도, 刘知珉의 과거도, 刘知珉과의 관계도. 어느 것 가벼운 게 없었다. 金旼炡은 조용히 숨을 고쳐쉬고 刘知珉을 쳐다봤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정리해려 손을 올렸더니 고개를 숙인 채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요. 여전히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제가 온 건데요 뭐…"
이런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머리카락 정리를 마친 金旼炡이 깨트릴듯 세게 잔을 움켜쥐고 있는 刘知珉의 손에 제 손을 올려뒀다.
"기억이 안 나서 그러는데 내가 혹시 취해서 실수 같은 거"
"안 했어요. 제가 왔을 때는 검사님 이미 뻗어서 여기에서 자고 있었어요."
방으로 옮기는 것도 사장님이 다 하셨고. 그냥 저는 혹시라도 그때처럼 아플까봐 걱정돼서 같이 잔 게 전부고.
"그냥…잔 거죠 우리?"
적잖이 황당했지만 적당히 취했을 때 刘知珉이 어땠는지 불현듯 떠올랐다. 金旼炡은 피식 웃으며 刘知珉의 뺨을 감싸고, 살짝 힘을 주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요."
"……"
"없었어요 아무 일도."
"……"
"그냥 잘 잤어요 우리. 침대가 조금 작아서 평소보다는 붙어 있었지만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았고요."
그럼에도 눈동자에는 짙은 죄책감이 일렁였다. 뺨을 두 어번 두드린 金旼炡이 손을 거두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刘知珉의 얼굴이 뒤따라 위로 올라갔다.
"이따가 리딩이 있어서요. 끝나면 연락할테니까 저녁은 검사님이 사줘요."
"…지금 가야 돼요?"
"집에 가서 씻고 일하러 갈 준비해야죠."
"데려다 줄게요."
"검사님 이대로 나가면 음주단속 걸릴 것 같은데요."
그건 본인도 부정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어디 도망 안 가요. 길어도 네다섯시간? 리딩만 끝나고 바로 봐요. 선수친 거니까 다른 약속 잡지 말고요."
"……"
"아 맞다, 저도 일하는 중에는 핸드폰 못 봐요."
테이블 끝에 있는 가방에서 대본 두 어개를 꺼낸 金旼炡이 刘知珉에게 손짓을 했다. 올 때 이것도 챙겨줘요. 刘知珉은 멀거니 金旼炡을 바라보다 뒤늦게 고개를 주억였다. 정신 못 차렸구나 아직. 공연히 입이 썼다. 金旼炡은 제 옷차림을 한 번 살펴보고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가지런히 늘어선 화분을 따라 걷다보면 금방 출입문에 다다르게 됐다. 대본을 가슴에 안고 버튼을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손이 미처 닿지 않았지만 문이 열렸다. 가요 택시만 잡아주고 들어갈게요. 이번에는 金旼炡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묘하기는 했다. 그때는 밤이었고, 둘 다 술을 마셨고, 더이상 볼 일은 없을 거라 여겼는데. 아직도 이렇게 만나고 있었다. 환한 대낮에도, 술을 마시지 않았어도. 이 관계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다면 먼저 놓지만 않으면 계속 옆에 있을 수 있는 걸까. 도로 쪽으로 몸을 기울여 손을 흔드는 刘知珉을 지켜보던 金旼炡이 조심스럽게 비어 있는 다른 손을 붙잡았다. 저기 멀리에서는 택시가 다가왔다. 刘知珉이 金旼炡을 내려다봤다.
"…좋아해요 검사님."
그러니까 이건, 실수가 아니었다.
책상 위로 소포장된 마카롱이 올라왔다. 넋을 놓고 앉아 있던 金旼炡이 고개를 들어올려 제 앞에 선 이를 바라봤다. 박 작가였다. 분명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나야 할 타이밍인데 별안간 간식까지 챙겨준다니.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건가. 金旼炡은 앓는 소리를 내며 책상으로 엎어졌다.
"어제랑 너무 다른 거 아냐?"
"저는 이쯤에서 하차할까봐요 작가님."
"김 배우 돈 많아?"
"그래도 열심히 벌어두기는 했는데…"
"위약금 물어주려면 집도 절도 다 팔아야 할 텐데."
"그럴까봐요. 이참에 그냥 머리 밀고 절로"
이제는 아예 포장을 까서 마카롱을 입에 물려줬다. 책상을 빙 돌아 옆자리에 와서는 정신 차리라는 듯 손바닥으로 친히 등을 두드려줬다. 정정한다. 내리쳤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金旼炡은 맞은 곳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세웠다.
"나 이거 쓰면서 너 말고 다른 배우 생각한 적 없다 旼炡아."
"작가님."
"왜요."
"좋아해요."
"나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의자에 기대 천장을 올려다봤다. 박 작가는 그런 金旼炡을 구경하며 하나 남은 마카롱을 씹어 먹고서는 손을 탁탁 털었다. 쉬는 시간 5분 남았어. 金旼炡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때문에 그러는데. 설마 태준이?"
일리는 없지. 금방 덧붙이는 말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나갔다. 아래로 손을 내린 金旼炡은 의자를 돌려 박 작가를 마주봤다. 작가님. 박 작가가 커피를 건네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아는 검사님 있어요?"
"내가? 왜? 소개시켜주려고?"
金旼炡은 빨대를 입에 물고 커피를 마셨다. 얼음만 남을 때까지 깔끔하게 비워내고는 잔은 테이블 구석에 치워뒀다.
"그냥요…혹시나 해서."
"그러니까 뭐가 혹시나인데요."
"저 악플러 고소했던 거 기억하세요?"
"응, 잘 끝났다고 하지 않았어?"
"그 사건 담당했던 검사님이랑 되게 닮았어요."
대본은 훑어보던 박작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키자 金旼炡은 박 작가의 손을 붙잡아 대본으로 옮겨뒀다.
"남주요. 진짜 똑같아 보면 볼수록."
"잘생겼나보네."
"…나쁘지 않죠. 아니 그게 아니라 말투가요."
순간적으로 말릴 뻔했다. 빤히 저를 쳐다보는 시선을 받아내던 金旼炡이 책상 위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나이스 타이밍이었다. 잠금을 풀고 알림을 확인한 金旼炡은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여 답장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 박 작가는 대본으로 부채질을 하며 金旼炡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물었다. 그게 문제야? 화면에 새로 떠오른 말풍선을 읽던 金旼炡이 고개를 들었다.
"네?"
"쉽네. 현이를 그 검사님으로 두고 연기해봐."
"…이미 그러고 있었는데요."
"그러면 오늘은 싸우기라도 했어?"
유구무언이었다. 오해 하게 둬야 한다. 실은 그 검사님한테 좋아한다며 고백했다는 말을 꺼내두는 것 보다는 차라리 그 편이 백배천배 더 이로웠다. 金旼炡은 어색하게 웃으며 돌아앉았다. 박 작가도 대본을 돌려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내가 대신 혼내줘? 이러다 우리 旼炡이 밥줄 끊기면 책임 지실 거냐고? 金旼炡은 펼친 대본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보양식으로는 뭐가 좋을까요?"
"…응?"
"삼계탕? 한우?"
"나는 장어도 괜찮더라. 끝나고 사주려고? 역시 우리 旼炡이 밖에 없어"
"작가님."
"말씀하세요 旼炡님."
"오늘 말고 다음에 저랑 술 마셔요. 전 아무리 생각해도 연영과 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때마침 열린 문 사이로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오기 시작했다. 박 작가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본인의 자리로 되돌아갔으며, 빈 의자는 배역에 맡게 찬찬히 채워졌다.
핸드폰을 뒤집어 놓은 金旼炡은 얼음이 담긴 테이크아웃잔을 제 볼에 가져다대며 혼잣말을 속으로 삭였다. 솔직히 받아줄 거라는 기대하고 고백한 건 아니었잖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던 얼굴을 지워내면 무감각한 목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알겠어요. 도무지 대본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나머지 공부시키려고 했는데 약속 있다니까 봐주는 거라며 박 작가는 어깨를 두드려줬다.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옆에서 짐을 챙기던 이현마저 다음번에도 국어책 읽으면 작가님 대신 내가 잔소리할 거라며 말을 거들었다. 장난인 걸 알지만 장난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서 金旼炡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죄송해요 다음 리딩 때는 준비 제대로 해서 올게요. 나란히 걷던 박 작가와 이현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손사레를 쳤다. 사람이 어떻게 매번 잘하겠어 우리가 했던 말은 신경 쓰지마 旼炡아. 맞아 솔직히 나도 오늘 대사 많이 절었는데 은근슬쩍 넘어간거야 티 안 났어?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이현이 본인 몫의 간식을 한가득 챙겨줘도, 박작가가 보내온 기프티콘을 들여다봐도 마음은 그저 뒤숭숭하기만 했다. 촬영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 알아서 컨디션 조절하라는 매니저의 걱정은 한 귀로 흘려들었다. 식당으로 가는 내내 金旼炡은 대본만 읽고 또 읽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갓길에 차를 세운 매니저는 늦게까지 데이트 하지 말고 일찍 들어가라고 말했으며, 무릎 담요를 가지런히 접어 옆좌석에 올려둔 金旼炡은 피곤해서 밥만 먹고 바로 집에 갈 거라고 대답했다. 머릿속으로 서로 다른 사람을 떠올렸을 게 뻔하지만 그것까지 신경쓸 정신은 없었다. 예약시간보다 20분은 일찌감치 도착했음에도 일행 분께서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말을 들었으니.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홀에서 가장 떨어진 룸으로 걸어가는 金旼炡의 시야에 다른 것들이 치고 들어올 틈이 있었겠냐는 말이다.
종업원과 거의 동시에 문으로 손을 뻗었던 것만 봐도 다른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터였다. 음식은 바로 가져다 드리겠다는 종업원에게 金旼炡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에 안으로 들어갔다. 이내 문이 닫혔다. 우두커니 앉아 새하얀 벽을 바라보던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덕분이었다. 평소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빈 자리로 다가가 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은 金旼炡이 맞은편을 바라보며 물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刘知珉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저도 도착한지 얼마 안 됐어요. 보통 때였다면 별생각 없이 받아들였을 그 말이 오늘은 묘하게 미심쩍기만 했다.
몸은 좀 어떠냐는 질문을 던질 찰나에는 문이 열렸다. 남들 눈에는 친구나 지인으로 보일 걸 알면서도 식탁에 접시가 올라오고, 종업원이 카트를 밀고 사라질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을 먼저 깨트린 쪽도 제가 아닌 刘知珉이었다. 일단 먹어요. 金旼炡은 말없이 고개를 주억일 뿐이었다.
일단 먹었다. 그 말을 꺼낸 장본인은 젓가락 조차 들지 않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어도, 일단은 식사를 계속했다. 맞은편 앞접시에는 하나씩 음식이 쌓여갔다. 빈 잔에 물을 따르던 金旼炡이 말을 건넸다. 검사님도 들어요. 그러자 刘知珉은 명령이 입력된 기계처럼 젓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밥 먹자고 만난 건 맞았지만 이렇게까지 목적에 충실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말끔히 비워진 그릇을 확인한 金旼炡이 빌지를 챙겨 먼저 몸을 일으켰다.
"몸은 좀 괜찮아요?"
"네, 덕분에요."
"그러면 드라이브 시켜줘요. 바람 쐬고 싶어요."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것을 원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金旼炡도 아무런 말없이 룸을 나섰다. 계산을 마친 뒤에는 刘知珉을 따라 주차장으로 향했다. 조수석 문을 열어주고 차체를 빙돌아 운전석으로 걸어가는 刘知珉을 지켜보다 시트에 몸을 내렸다. 커피 사서 한강으로 갈까요. 일방적인 제안을 刘知珉은 대꾸 한 마디 없이 그저 착실히 따랐다. 대화는 드라이브 스루에서 잠깐 나눴다. 뭐 마실래요. 이따가 잘 건데 카페인은 좀 그렇고. 저는 아메리카노 괜찮아요. 안돼요 검사님도 그냥 자몽티 먹어요. 알겠어요. 픽업을 기다릴 때는 밀린 연락을 확인해서 재빨리 답장을 보냈다. 그 중에는 물론 태준의 것이 절대다수였다.
약속 있어서 잠깐 나왔는데 금방 들어갈거야. 인터뷰 잘하고 나도 ㅅ. 커서가 깜빡였다. 金旼炡은 혀로 입술을 쓸다 문장을 고쳤다. 인터뷰 끝나면 연락해. 홀드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뒤집어놓았을 때 창문 너머로 음료수가 건네졌다. 金旼炡은 익숙하게 잔을 받아들고 홀더에 넣었다.
평일 저녁이라 그런지 그렇게까지 도로가 막히지는 않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刘知珉은 홀더에서 잔을 꺼내 金旼炡의 손에 쥐여주며 물어봤다. 자주 와요? 金旼炡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빨대로 음료를 휘젓다가 가만히 덧붙였다. 저도 그랬어요. 그 이후로는 라디오 디제이가 혼자서 떠들기 시작했다. 산책로를 따라 줄지어 선 가로등이 어둠을 밝혔다. 金旼炡은 창 밖을 내다보며 자몽티를 마셨다. 은은한 단맛이 입 안을 맴돌았다. 호흡을 고르고 입술을 열었다. 검사님.
"남자친구는 많이 바쁘죠. 요즘 티비에서 자주 보이던데."
金旼炡의 시선이 운전석으로 향했다. 刘知珉은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아니고 같이 일하는 수사관님이 봤는데, 연출이 되게 멋있고 배우분들이 연기도 잘 하신다고."
"……"
"요즘 밤에는 날씨가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적당해서 밤에 드라이브 하기 괜찮을 것 같아요. 잠깐 바람 쐬러 나오기 좋네요."
"……"
"드라마 촬영할 때는 데이트 어떻게"
거기까지였다. 金旼炡은 들고 있던 잔을 홀더에 내려두고 라디오를 완전히 꺼버렸다. 그럼에도 刘知珉과 시선을 마주할 수는 없었다. 이게 지금 뭐하자는…말도 끝마치지 못하고 허탈한 한숨을 내뱉었다. 눅진한 침묵 사이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좋아해요."
"검사님."
"저도 알고 있어요."
역시나 모를 리는 없었다. 金旼炡이 핸드폰을 움켜쥐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도 제가…첫번째는 아니잖아요."
차라리 원망을 했다면 어땠을까. 속상해하고, 서운해하는 거였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刘知珉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핸들을 만지작거리며 간신히 말을 이어갔다.
"욕심 내고 싶은 생각…없거든요. 그럴 주제도 못 되고요."
"刘知珉 검사님."
"진심이었어요, 金旼炡씨 세컨하겠다는 거."
"고백에 대한 검사님 대답이 그거에요?"
"좋아해도 돼요, 旼炡씨 하고 싶은대로 해요. 그게 뭐 문제인가요."
이로써 명백해졌다. 우린 시작부터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내내 앞만 바라보고 있던 刘知珉이 조수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공에서 부딪힌 눈빛에 무언가는 부서질 것이었다.
"내가 정태준씨한테 밀려나는 게 맞아요."
"검사님."
"부탁할게요. 가만히 내버려 두는 거 어렵지 않잖아요."
"왜 그렇게까지 해야 되는 건데요."
"그래야 우리가 계속 보죠, 이렇게."
선택지는 하나 밖에 주지 않았으면서 네가 하는대로 따르겠다니. 이보다 더 잔인한 다정함이 있을까. 金旼炡은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풀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좋아요 金旼炡씨 만나는 거."
"……"
"미안한 것도 많고, 고마운 것도 많은데…"
"……"
"덕분에 진짜…네, 그랬어요."
입꼬리에는 서글픔이 매달려 있었다. 내가 내 손으로 이걸 어떻게 놓아. 짧게 숨을 고쳐 쉰 金旼炡은 운전석으로 몸을 기울여 刘知珉을 끌어안았다. 허벅지 위에 놓인 핸드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말로 그것만 하면 우리 계속 볼 수 있어요? 刘知珉이 대답 대신 金旼炡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내어준 오른손을 마사지하듯 꾹꾹 주물렀다. 키는 저보다 반 뼘 정도 더 컸지만 손 크기는 얼추 엇비슷한 것이 신기했다. 마디를 눌러보기도 하고,깍지를 껴보기도 했다. 손톱은 가지런히 정리되었고, 손가락도 부드러운데 유독 중지에만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金旼炡은 그 부분을 살살 쓰다듬으며 물었다. 무슨 운동 했어요? 주인과 함께 산책하는 강아지들을 구경하던 刘知珉이 대수롭지게 대답했다. 태권도 잠깐 했었는데 그건 펜 오래 잡고 있어서 생긴 거에요. 金旼炡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 刘知珉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프로필을 읊어주는 강효림의 목소리가 저기 멀리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검사님."
"네."
"혹시 외동이에요?"
刘知珉은 가볍게 웃었다. 밤공기를를 쐬며 걸어서 그런지 확실히 아까보다 기분이 나아보였다. 다행스러웠다. 그 선만 넘으지 않는다면 이렇게 낫낫한 분위기로 지낼 수 있는 것 같았다. 대체로 그렇게 보더라고요. 모자를 두드리는 손길은 뺨을 스치는 바람처럼 가볍기만 했다.
"언니 한 명 있는데 저보다 다섯살 많아요."
"그러면 언니도 검사에요? 아니면 변호사?"
"왜 그렇게 생각해요?"
金旼炡은 붙잡고 있던 손을 풀고 슬며시 팔짱을 꼈다. 익숙하다는듯 팔을 벌리는 刘知珉에게 한츰 더 가까이 다가가며. 가족분들은 전부 법조계에서 일하시잖아요. 刘知珉은 金旼炡을 내려다봤다.
"어떻게 알았어요?"
"뒷조사 좀 했죠."
"검사를?"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마주하니 나직한 헛웃음을 흘리는 것이었다. 이대로 마냥 걷고 싶었다. 그저 발 맞춰 나란히 걷기만 할 뿐인데 마음이 한결 편한해졌다.
"의사에요 신경외과."
"진짜 집안이 무슨…설마 언니도 예뻐요?"
"네, 저보다 더 인기 많았어요 어렸을 때부터."
"거짓말…"
가늠이 되지 않았다. 刘知珉보다 더 인기가 많은 刘知珉의 언니. 金旼炡은 입도 다물지 못한채 刘知珉만 쳐다봤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약간…거리감이 느껴져서."
말없이 빤히 눈빛을 주고 받다가 대뜸 팔짱을 풀었다. 뭐하냐고 묻기도 전에 허리와 골반 사이를 붙잡아 제 쪽으로 살짝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이러면 돼요? 金旼炡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보니 유지현이랑 나만큼 우리 나이 차이 나네요."
"다섯살이면 뭐…적당하지 않나."
네 살이면 궁합도 안 본다는데. 그러면 다섯살도 나쁘지 않지. 허리를 감싼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金旼炡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슬쩍 옆을 힐끔거리니 刘知珉이 별다른 반응 없이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괜히 뻘쭘해져서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이래저래 들키면 안 되겠어요."
"…저 좀 그래요?"
"네."
그래도 고민하는 척은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金旼炡은 팔로 刘知珉의 어깨를 밀어내고 산책로를 걸었다. 발걸음을 뗄수록 마주치는 사람들은 조금씩 줄어갔다. 이제 슬슬 돌아갈 시간이라는 걸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金旼炡이 뒤를 돌았다. 겁도 없었다. 물론 대부분은 지나가는 행인에게 크게 관심이 없고, 눈길을 주는 몇몇도 저희를 사이 좋은 친구 쯤으로 보겠지만. 가만히 안겨 있던 金旼炡이 소리없이 웃으며 결이 좋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유지현이 알면 아마 자기도 데이트 따라오겠다고 난리일걸요. 귀찮아요 그거, 성가시고."
이럴 때 보면 꽤나 손을 타는 것 같았다. 안아주려는 건지, 안기려 드는 건지 저에게로 파고드는 刘知珉으로 인해 金旼炡의 몸은 뒤로 밀려나게 됐다. 지현언니에요? 응? 검사님네 친언니요. 응, 유지현이에요. 의사면 엄청 바쁘시겠다. 그걸 왜 金旼炡씨가 걱정해요. 손끝을 스치는 밤바람이 허파까지 들어온 모양이었다. 욕심만 안 부리면 이렇게 되는 거구나. 金旼炡은 먼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검사님은 어렸을 때부터 꿈이 검사였어요?"
"네, 보고 자란 게 그게 전부였으니까요. 큰 사건 해결하고 티비에 나오는 아버지가 좀 멋있어 보이기도 했고요."
"장관님은 그냥 멋지시던데."
다소 어이없어 하며 모자를 툭 건드린다. 인상을 찌푸리며 모자를 고쳐쓴 金旼炡이 주차장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刘知珉은 그 옆으로 다가와 어깨를 나란히했다.
"그러면 이제는 법무부 행사 가면 검사님네 아버지 볼 수 있는 거네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검사님도 와요?"
"제가 왜요?"
이내 적당한 설명이 덧붙여졌다. 평검사여서 그런 큰 행사는 거의 참석 못해요. 그리고 어지간해서는 밖에서 아버지 잘 안 만나고요 오히려 서로 피하면 피했지. 金旼炡도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불편하면 말해요. 눈치없게 식사 자리 만들지 말라고 얘기해 놓을게요."
"저는 괜찮아요."
"…그래요?"
"네."
"그렇구나."
"네, 그러니까 주말에 하루만 시간 빼줄 수 있어요?"
옆에서 걷던 刘知珉이 멈춰섰다. 얼굴에는 잘못 들었다는 글자가 대문짝만하게 적혀 있는 것 같았다. 뜬금없고 맥락없는 대화에 다소 당황한듯 보였다. 金旼炡은 刘知珉의 눈 앞에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 종종 刘知珉이 제게 그러는 것처럼 볼을 쿡 찔렀다.
"자고 올지는 모르겠지만…어쨌거나 하루면 되거든요."
"어디 멀리로 가야 해요?"
"그냥 조용한 곳이요, 사람 없는."
"많이…힘들어요?"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아주 모르는 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저희들은…金旼炡은 고민 끝에 고개를 가로젓고 刘知珉을 이끌어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앞만 보고 다가보면 주차장 근처에 다다르게 됐다. 차를 세워두었던 구역으로 걸음을 옮기며 金旼炡이 말했다. 요즘 검사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신경 쓸 일 많았잖아요 하루만 어디 산속에서 편하게 쉬고 왔으면 해서요.
일 때문에 안 된다고 해도 이번만큼은 억지를 부릴 생각이었다. 정 바쁘면 오후라도 괜찮으니까 시간 좀 내어달라고 조금 구차하게 매달려 볼까 했는데, 조수석에서 멈춰선 刘知珉은 대뜸 캠프파이어도 하는 거냐며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런 계획은 없었지만 金旼炡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의 적막을 깨트리기 위해 던진 한 마디는 지극히 刘知珉다웠다. 장작은 잘 못 패는데 어떡하죠. 金旼炡이 핸드폰의 무음 스위치를 아래로 내리며 대답했다. 요즘은 다 팔아요 쪼갠 장작도. 정말 그게 고민이었는지 표정은 한결 가벼워졌다. 刘知珉은 조수석 문을 열고 金旼炡을 안으로 이끌었다.
곧잘 말을 주고 받다가도 이따금씩 金旼炡은 넋을 놓고 刘知珉을 바라봤다. 刘知珉이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집으로 향하고 있다는 상황이 실감나지 않아 괜히 제 손등을 꼬집이 보기도 했다. 정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한적한 도로가 괜히 아쉽게 느껴졌다. 같이 있을 때는 가급적 핸드폰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무시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눈치를 살피던 金旼炡은 刘知珉이 전방을 주시하며 핸들을 돌리는 틈을 타서 빠르게 잠금을 풀어 카톡을 들여다봤다. 나도 들어가는 중이야. 답장을 보낸 뒤에는 바로 홀드버튼을 눌렀다.
이 정도 죄책감은 감수 해야 한다. 刘知珉 옆에 있으려면, 刘知珉을 계속 만나려면 어쩌면 더 한 일도 각오 해야 될 것이었다. 가령 예를 들자면 두 사람 사이에서 누군가를 골라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그리하여 마음에도 없는 선택을 해야만 할 때, 결국 저 역시 刘知珉을 두고 가야 할 때. 정태준과 함께 있으면서도 刘知珉을 떠올릴 때, 제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이 정태준이 아닌 刘知珉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 정태준을 놓을 수 없는 이유에 저보다 刘知珉이 우선이 될 때. 시동이 꺼진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면서 金旼炡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여러모로 잊지 못할 하루였다. 다만 아쉬웠던 것을 하나 꼽아보자면 기억은 온전히 머릿속에만 남겨야 했다는 점이다. 어떠한 흔적도 남겨서는 안 되기 때문에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그럴 때면 문득문득 실감을 하게 됐다. 누구에게도 떳떳하지 못하고, 누가 봐도 부적절한 관계라는 현실을.
바람 피는 사람들이 핸드폰을 따로 사용하는 이유도 그 덕분에 알게 됐다. 귀찮고 번거롭게 굳이 저래야 하나 싶었는데, 그들도 그들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는 거다. 이 모든 순간을 그저 눈으로만 담아야 한다니. 시간을 꽉 채워 체크아웃 할 때까지도 내내 붙어 있었으면서도 괜히 미련이 남아 미적거리며 짐을 챙겼던 것은 비밀로 부쳐뒀다. 그래도 낮잠을 자서 좀 괜찮지 않냐고 중얼거리다 허리를 꾹꾹 눌러주는 刘知珉도 같은 마음이었는지는 모르겠다만. 덕분에 잘 쉬었다며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남기는 刘知珉이 하루동안 어떤 생각을 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끼니에 맞춰 밥을 먹고 손 잡고 산책로를 걷고, 그러다 들어와서 영화를 보고, 눈이 맞으면 자연스럽게 침대에 누웠고, 티비를 틀어놓은 채로 잠을 잤다. 어중간한 새벽에 얼핏 깨어나면 옷을 대충 걸치고 테라스로 나갔고, 목이 아플 때까지 밤하늘을 올려다 보며 서로의 별자리를 찾았다. 추억은 그렇게 쌓여갔다.
어느덧 리딩도 막바지였다. 탁 감독은 배우들 합이 나날이 좋아져서 당장 오늘이라도 촬영에 들어가도 되겠다며 들떠했고, 박 작가는 언제나 멀지만 가까운 곳에서 응원하겠으니 대본과 관련해서 궁금한 게 있으면 주저 말고 연락달라고 말을 거들었다. 그리고 주연을 맡은 金旼炡은 본인의 대사는 물론이고 상대역의 지문까지 모두 외워 이현을 놀라게 했다. 매니저는 촬영 일정이 정리된 스케줄표를 보내주며 비타민 산 거 꼬박꼬박 챙겨먹으라는 잔소리를 덧붙였으며, 정태준은 스케줄이 일찍 끝나는 날이면 방송국까지 찾아와 퇴근을 함께 했다.
영화 홍보는 거의 마무리 되었으나 차기작으로 맡은 역할이 외과 레지던트인 터라 휴식기에도 한가롭게 지낼 수는 없었다. 작가님이 미리 보내 준 전공 관련 논문을 공부하는 건 물론이고, 몇 주 동안은 감독이 정해준 대학병원으로 출근하여 인턴을 따라다니며 의사들의 사소한 습관이나 주로 사용하는 용어 등 전반적인 생활을 직접 보고 듣고 겪으며 익혀야 한다며 본인의 근황을 늘어놓는 정태준에게 金旼炡은 괜찮다고 웃어보였다.
연락없이 불쑥 나타나서 놀란 건 사실이었지만, 전화를 했는지 안 했는지 문자를 보냈는지 안 보냈는지도 깜빡할 정도로 바쁜 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 와중에도 저를 만나기 위해 식당을 알아보고, 예약을 하고, 직접 데리러 왔다는 거니까. 혹시 선약이 있었냐며 더없이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태준을 바라보며 아니라고 대답하는 것이 연인으로 보일 수 있는 최선이라고, 金旼炡은 생각했다.
저녁 먹고 영화를 본 후에 들어간다면 집에는 얼추 자정에나 도착할 것 같았다. 직장인도 아닌 터라 출근 핑계를 대고 일찍 헤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욱이 스케줄이 고정적이지 않으니 데이트는 시간날 때 많이 해둬야 한다는 걸 3년 동안 연애하면서 배우기도 했고. 그러니까 이건 정태준이 과할 정도로 약속을 잡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고로 金旼炡은 귀찮거나 부담스럽다는 내색을 보여서는 안 된다. 스케줄을 마치자마자 집으로 가려 했던 것은 선약으로 볼 수 없으니 말이다. 작성 중인 기안만 끝마치면 야근 안 하고 바로 퇴근할 수도 있지만 당장은 확답 못 준다는 답장도 받았었고.
점멸된 핸드폰 화면을 힐끔거리며 바라보던 金旼炡은 물로 목을 축이고 나이프를 고쳐잡았다. 음식은 입에 맞아? 응, 맛있어. 여긴 다 좋은데 룸 예약 잡기가 어려워서. 괜찮아 우리 이렇게 만나는 게 처음도 아닌데 뭐. 이런 분위기의 식당에서는 오히려 모자 쓰고 마스크 한 채로 나타나는 것이 사람들의 주목을 끈다는 사실을 태준도 모를 리는 없었다. 이럴 때는 공개연애가 마음은 조금 더 편한 것 같기도 하고. 金旼炡이 에피타이저로 나온 샐러드를 입에 넣으며 맞은편을 향해 눈짓했다. 식기 전에 먹으라는 무언의 표현을 어렵지 않게 알아챈 정태준은 고개를 주억이고 식사를 이어갔다.
접시가 얼추 비워지는 것 같으면 서버는 새로운 음식을 내어왔다. 핸드폰을 아예 뒤집어 놓은 金旼炡은 정태준과 비슷한 속도로 제 몫의 음식을 비워냈다. 그러는 동안 대화는 오후에 영화의 손익분기점을 넘었다는 것을 시작으로 차기작에 대한 걱정과 기대, 드라마 특별출연을 위한 준비로 유려하게 넘어갔다.
"감독님은 그래도 한 컷 정도는 같이 나왔으면 싶던데, 작가님 생각은 조금 다르시나봐."
"대본 아직 못 받았다고?"
"일단은 기다려보라고 하시더라."
"어차피 후반부에 나오는 거니까…"
"대사 많이 받을지 말지는 너랑 합의해서 오라는데 어떻게 생각해?"
"……"
"旼炡아?"
잘못 봤다기에는 술 한 모금 마시지 않았고, 닮은 사람이라고 넘겨버리기에는 허공에서 맞닿은 눈빛을 피하지 않고 받아낸다. 포크를 쥔 金旼炡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가까이 다가오는 이는 분명히.
"내가 이런 곳을 왜 너랑 와야 되냐고요."
"바람 맞힌 애인을 탓하세요."
대각선으로 떨어져 있는 테이블에 착석한 여자는 지나칠 정도로 낯이 익었다.
"고 부장 좀 어디 멀리로 보내버리면 안돼? 너 그 정도는 할수 있잖아 유 프로. 당일 회식 이거 직장 내 괴롭힘이라니까."
"부른다고 가냐 그걸 또. 아닌 척 했으면서 도 검사님도 은근 승진 욕심 있나봐요."
커다란 손이 제 손등을 완전히 덮을 때야 金旼炡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괜찮아? 걱정스러운 얼굴도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金旼炡이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집어들었다.
"직속상사가 핸드폰으로 전화해서 찾는데 어떡해요. 가기 싫다고 안 가는 것도 刘知珉 검사님 쯤은 되어야 가능한 일이에요."
"선배도 그걸 알겠다고 보내주냐. 그냥 둘이 같이 한 번 혼나고 말지."
"저녁도 안 먹고 야근한다는 후배님이 안쓰러워서 데리고 왔는데, 갑자기 측은지심이 사라져서 이성을 되찾고 식사비 청구하기 전에 그 입은 다무실게요."
같은 지검 사람이구나. 잔에 있던 물을 모두 비워낸 金旼炡은 건너편 테이블로 넘어갔던 시선을 거두고 앞을 쳐다봤다.
"자리가 너무 훤하지."
"아냐, 그래도 이 정도면 구석이래서 사람들 눈에 잘 안보일 걸."
저희들과 근처에 있지 않다면 아마 저 남자가 정태준인지, 그 앞에 앉은 여자가 金旼炡인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적어도 몇 테이블을 건너 떨어진 곳에 앉았다면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얄궂게도 지금의 상황은 그 어떤 조건에도 부합하지 못한다. 金旼炡은 잔에 채워지는 물을 가만히 쳐다보다 마른침을 삼켰다.
"술은…난 와인 한 잔은 마실 건데 너는 운전해야 하니까"
"똑같은 걸로 주문해요."
"차는 어떻게 하시려구요."
"대리 불러야죠."
"그러면 나는 그냥 택시 타고 가야겠다."
잔에서 찰랑이던 투명한 물이 이내 잠잠해졌다.
"그래서 나 대사 많이 받아도 돼?"
"…응?"
"아니면 그냥 얼굴만 보여주고 가?"
"해야지…대사랑 얼굴이. 아무튼 오빠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나 신경 쓰지 말고."
신경이 옆으로 쏠리는 건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이내 테이블이 정리되며 새로운 접시가 서빙됐다. 金旼炡은 기계적으로 포크를 들어 접시 안에 담긴 음식을 찬찬히 해치웠다.
"영화 보고 바로 집에 가야 하지?"
"그래야 하지 않을까? 11시 넘을 것 같은데…"
"내일은 리딩 없다고?"
"응…없을 거야."
무슨 맛인지 느끼지도 않고 그저 접시만 비워냈다.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도 몰랐다.
"야 이거 한 병이 다 너 꺼세요? 이게 아주 비싼 건 알아가지고 와인만 들입다 마시네."
"카드줄게요."
"며칠 전에도 병 나서 결근하셨다면서요. 몸 챙겨라 너도 이제 서른이다 유 검."
"하나 더 주문해도 돼요?"
식기를 내려둔 金旼炡이 테이블 한 켠에 치워뒀던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잠금을 풀고 문자를 보내기까지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을 것이었다.
"촬영 일정 나왔어?"
"얼추 정리는 됐는데 픽스는 아니래."
"스케줄표로 나오면 오빠한테도 카톡으로 보내줘."
테이블로 내려두기 전에 무음모드를 풀어뒀지만 이후로 어떠한 알림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앞으로는 이렇게 같이 저녁도 못 먹겠네."
"그래도 캠퍼스에서 찍는 씬이 더 많아."
"간식차 보내도 돼? 아니면 이번에는 밥차로 할까?"
"나는…다 고맙지."
결국 金旼炡은 다시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읽음. 봤으면서도 와인을 추가로 주문했다는 거다.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검사님 잠깐만 나와요. 술은 저 쪽에서 마셨는지 속은 이 쪽이 뜨거워졌다. 한 손에는 여전히 핸드폰을 든 채로 물을 들이켰다.
"최 감독님도 旼炡이 되게 좋게 보시더라."
"그래?"
"기회 있으면 같이 작업하고 싶대."
"나도 좋지 감독님…"
어김없이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金旼炡은 아예 대놓고 고개를 돌려 건너편을 쳐다봤다. 오른손으로 핸드폰을 들고 화면을 바라보던 刘知珉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잔을 들어올렸다. 이내 붉은색 와인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빈잔을 치워두는 刘知珉의 다른 손에는 여전히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기다리는 연락이라도 있어?"
"딱히 없을 걸요."
"없으면 없는 거지 딱히 없을 건 뭐야 또."
金旼炡이 화면을 몇 번 두드리다 키패드를 눌렀다. 화장실에서 봐요. 오른손에 핸드폰을 쥐고 의자를 뒤로 밀어냈다. 몸을 일으키는 金旼炡을 따라 정태준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묻기 전에 선수를 쳤다. 잠깐 전화 좀 하고 올게. 정태준이 희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테이블을 벗어나 복도를 걷다 서버가 알려준대로 코너를 꺾었다. 표지판을 따라 안쪽으로 걸어가다 화장실 입구에 다다를 즈음이었다. 별안간 손목이 붙잡히며 몸이 반대쪽으로 당겨졌다.
놀랄 틈도 주지 않았다. 金旼炡은 저를 이끄는 손길에 따라 걸음을 옮겨야 했다. 화장실을 지나 다른 코너를 돌았더니 박스가 쌓인 또다른 복도가 나타났다. 어쩌면 실수로 들어온 건 아닌 듯 했다. 그게 아니고서는 직원들만 알 법한, 직원들이 다닐만한 구석진 통로로 저를 데리고 올리 없다. 검사님. 설명하려 했었다. 갑자기 약속이 잡혔고, 그래서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게 됐고, 그 다음에는.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오히려 숨마저 안으로 먹혀들어갔다. 입술이 포개어진 탓이었다. 金旼炡은 제 앞을 가로막은 이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방아쇠를 당긴 꼴이 되고 말았다. 벽으로 밀쳐지는 동시에 손목을 잡고 있던 손아귀에는 힘이 가득 실렸다. 턱을 붙잡는 다른 손도 마찬가지였다. 닫혀 있던 입술을 억지로 벌려내는 것이었다. 그 틈으로 파고드는 뜨거운 살덩이는 마치 와인에 담갔다가 뺀 것처럼 향이 배어 있었다.
얼굴을 옆으로 돌리면 움직이지 못하게 손가락으로 턱을 잡았다. 어깨를 밀어내면 뿌리치듯 치워내고 손목을 그러쥐고 벽에 눌렀다. 입 안을 헤집는 움직임에 배려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거칠고 투박하고 성급했다. 고개를 꺾을 때마다 달뜬 호흡이 부서졌다. 저까지 취하는 기분이었다. 뭉근히 입천장을 쓸어내리면 참을 새도 없이 입 밖으로 앓는 소리가 새어나갔다. 손목을 쥐고 있는 손이 헐렁해진 사이에 金旼炡은 刘知珉의 셔츠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어디를 어떻게 건드리고, 쓸고, 옭아야 金旼炡이 달아오르는지 刘知珉은 너무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져아 한다. 버텨봐야 소용없었다. 金旼炡은 셔츠를 잡고 있던 손을 조금씩 올려 훤히 드러난 맨살을 만지작거리다 눈을 감았다. 제멋대로 움직이던 刘知珉도 그제야 힘을 빼고 치열을 훑었다. 한 팔로는 허리를 감고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기며 혀를 툭툭 건드렸다.
한참동안 입 안을 헤집어 놓던 刘知珉은 호흡을 고르며 뒤로 물러났지만, 뒤늦게 불이 붙은 金旼炡이 다시금 셔츠를 잡아 당기며 멀어지는 입술을 따라갔다. 숨결이 엉키는 건 순식간이었다. 흥분은 한결 가라 앉았지만 두 사람 사이를 맴도는 열기는 좀처럼 사라지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후로는 달래는 듯한 키스가 이어졌다. 金旼炡의 조급한 움직임을 刘知珉은 능숙하게 받아내며 허리를 토닥였다. 그러다 먼저 입술을 떼고 金旼炡을 지그시 바라봤다. 가쁜 호흡을 겨우 가다듬으며 金旼炡은 벽에 머리를 기댔다.
"저거 다 먹고 집에 갈 거에요?"
번들거리는 입술을 손가락으로 훔쳐주며 刘知珉이 물었다. 金旼炡은 손가락에 입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쟤랑 같이?"
"…그럴까요?"
"술 안 마신 것 같던데 태워달라고 해봐?"
실소를 흘린 金旼炡이 손바닥으로 셔츠를 쓸어내리며 구김을 폈다. 刘知珉은 그 사이 金旼炡의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여기서는 우리집이 더 멀어요."
"우리 집 가요 그러면."
"있어요?"
"충분해요."
"내 차 번호 알죠? 주차장에 세워뒀으니까 먼저 들어가 있어요."
刘知珉이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金旼炡에게 쥐여줬다. 작정하고 왔구나. 金旼炡이 손끝으로 刘知珉의 입술을 닦아냈며 알겠다고 대꾸했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는 刘知珉을 지켜보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발걸음을 뗐다. 코너를 벗어나기 전에는 핸드폰 화면으로 얼굴을 확인하고 숨을 고쳐쉬었다. 잠잠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맥박은 의지와는 무관한 영역이었다. 金旼炡은 가슴에 손을 얹고 차분히 호흡을 정리하며 걸음을 옮겼다. 바닥을 보면서 걸으며 연신 손바닥으로 볼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복도에서 누군가와 부딪히면 고개도 들지 못하고 죄송하다며 사과만 남겼다.
자칫하면 테이블을 지나칠 뻔도 했다. 정신차리라는 다짐을 되뇌며 혀를 씹었다. 핸드폰을 하던 태준은 인기척을 느끼고 옆을 바라봤다. 의자에 몸을 내린 金旼炡이 의아함이 가득한 눈빛을 피하지 않고 받아내며 먼저 입을 열었다. 효림언니가 할 말이 있다고 해서. 제 접시와 마찬가지로 거의 새 것처럼 그대로 남아 있는 맞은편의 음식을 기어코 확인하게 되니, 명치에는 커다란 돌덩이가 내려앉을 수밖에 없는 거다.
정태준을 따라 나이프를 들었다. 차게 식은 고깃덩이를 잘라 입에 넣었다. 여전히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흐트러진 머릿속을 가다듬을 수 없었다.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잔에는 투명한 액체만이 담겨 있는데 입 안에는 자꾸만 와인 향이 맴돌았다. 코 앞에서 부서지던 뜨거운 숨결이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 반도 먹지 못하고 커트러리를 내려놓은 金旼炡은 얼마 남지 않은 물을 단번에 들이켰다. 그럼에도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실 이렇게까지 목이 타는 이유는.
"무슨 일 있는 거 아니"
"오빠."
"응?"
"진짜 미안한데 우리 영화는 다음에 보면 안 될까?"
빈 잔을 본인의 잔과 바꿔주던 정태준은 멈칫하고 金旼炡을 쳐다봤다. 金旼炡이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려 손가락 마디를 힘주어 꾹꾹 눌렀다.
"아까 전화…때문이지? 왜? 급한 일 생겼어?"
"저번에 고소했던 거 관련해서 할 얘기가 있다고 해서."
"악플러? 재판 다 끝났다고 하지 않았어?"
"추가로 더 할 게 남아 있나봐."
다른 의미로 심장이 뛰었다. 이건 혹시라도 거짓말을 들킬까봐 초조해하는 불안함이다. 마른침을 삼킨 金旼炡은 주먹을 움켜쥐며 정태준을 똑바로 마주봤다.
"지금 만나서 얘기하려는 거야? 강 변호사님이랑?"
"응, 자료는 전부 언니한테 있으니까."
"어디로 가야하는데? 사무실? 집?"
데려다 준 다고 할 것이다. 정태준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오늘도 그는 끝까지 착하고 다정한 남자친구로 남는 것을 택했다. 힘을 줄수록 손톱이 살을 파고 들었다. 통증은 손이 아닌 다른 곳에서 서서히 퍼져나갔다. 金旼炡이 왼손에 쥐고 있는 차키를 만지작거리다 그에게 대답했다. 언니 이 근처에 있대.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태준이 잘못 들었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언니 차 타고 가면 돼."
"아…강 변호사님이 데리러 오는 거야?"
고개를 끄덕인 金旼炡이 테이블 구석에 뒀던 핸드폰을 끌어 유리잔 바로 옆으로 옮겼다. 입술을 달싹이던 정태준은 제 잔을 도로 가져가 물을 마셨다. 그의 어깨 너머로는 테이블을 향해 다가오는 刘知珉이 보였다. 金旼炡은 핸드폰을 챙기며 그에게 말했다. 언니 이제 거의 다 도착했대. 정태준이 잔을 내려놓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디저트는 변호사님한테 사달라고 해야겠네."
"진짜 미안해 우리 다음에 제대로 데이트하자."
먼저 몸을 일으킨 金旼炡이 테이블을 빙 돌아 정태준에게로 다가갔다. 그 사이 刘知珉은 태연하게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착석했다.
"화장실에서 샤워라도 하고 오는 줄 알았네."
"택시 타고 간다고 했죠."
"너희 집이랑 반대쪽이니까."
"그럼 됐어요."
그제야 조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金旼炡은 정태준과 함께 계산대로 걸어갔다. 정태준은 포스기 앞의 종업원에게 카드를 건넸고, 金旼炡은 식사는 어떠셨냐 묻는 사장에게 맛있었다 대답하며 웃어보였다. 그 다음에는 남자가 건네는 새하얀 종이와 펜을 받아들고 나란히 사인을 휘갈겼다. 출입문을 나서 주차장으로 걷는 동안에는 金旼炡이 정태준에게 거듭 사과했고, 정태준은 괜찮다 말하고서는 金旼炡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변호사님은 어디시래? 이 앞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기다렸다가 인사하고 가야겠다. 정태준의 차를 향해 걸어가던 金旼炡은 제 어깨를 감싼 손을 살짝 잡았다 놓았다.
"좀 그래?"
"그냥…언니도 데이트 중에 불러서 미안해하니까."
"부담 안 가지셔도 되는데."
"나중에 같이 밥 먹자, 오늘은 내가 잘 얘기할게."
이러려고 연기를 배웠나 싶었다.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너끈히 소화하는 스스로가 적당히 가증스러웠다. 넌 지옥 갈 거야 旼炡아. 金旼炡은 정태준의 손을 잡고 차를 세워뒀던 주차구역으로 걸어갔다. 큰 일 아니었으면 좋겠다. 고소하는 김에 다른 악플러도 같이 넘기려는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너가 신경 쓸까봐 그게 제일 걱정이지 안 그래도 드라마 준비 때문에 바쁜데. 데이트 망쳐서 미안해. 미안하면 이리와봐요.
운전선 문을 열다 말고 그는 金旼炡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金旼炡이 잠시 고민하다 그에게 다가가 허리를 끌어안았다. 정태준이 자연스럽게 金旼炡의 어깨를 감쌌다.
"사랑하는 거 알지?"
"알지…"
"그러면 됐어."
"……"
"집에 가면 연락할게."
"응, 나도…사랑해."
이 정도는 어렵지 않다. 어설프게 옷춤을 쥐고 있던 金旼炡은 손을 내리고 살짝 뒤로 물러났다. 조심히 들어가. 애정 어린 그의 눈빛이 얼굴 곳곳을 스치고 지나갔다.
"오빠도 운전 조심히 하고."
"아무렴요. 갈게 진짜."
시트에 앉은 정태준은 안전벨트를 메고 金旼炡에게 손을 흔들었다. 金旼炡이 뒤따라 손인사를 하며 주차장에서 빠져나가는 차를 쳐다봤다. 시야에 그의 차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크게 한숨을 내쉬고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버튼을 꾹 눌렀다. 전조등이 반짝이는 차체를 찾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金旼炡은 이제는 제법 익숙한 제네시스를 발견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조수석 손잡이를 잡아당기려는 金旼炡의 손보다는, 그 손을 붙잡아 제 쪽으로 이끄는 움직임이 더 빨랐다. 조금 있으면 대리기사님 올 거에요. 刘知珉은 뒷좌석 문을 열고 金旼炡의 손에 있던 차 키를 가져갔다. 그리고는 안으로 들어가라는 듯 등을 떠밀었다. 金旼炡은 刘知珉을 바라보다 차 키를 만지작거리는 손을 붙잡았다. 저만 뒤에 타요? 刘知珉은 핸드폰을 들여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그럴리가요."
"같이 오신 분은 어떻게…"
"애도 아닌데 알아서 택시 타고 잘 가겠죠."
"직장동료에요?"
"옆방 검사님이요. 원래 애인이랑 오려고 했는데 그 분이 갑자기 회식이 생기는 바람에."
이렇게 됐네요. 설명을 듣던 金旼炡이 고개를 주억이다 刘知珉의 셔츠로 손을 뻗었다. 어깨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려고 했던 것이었다. 별다른 생각은 정말 없었다. 그럼에도 刘知珉은 그 손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지금은 좀…건드리지마요."
"……"
"와인을 과하게 마셨어요."
대리기사님이 도착할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내 바닥만 바라보던 金旼炡은 刘知珉이 이끄는대로 뒷좌석으로 들어갔고, 저를 대신하여 주소를 부르는 刘知珉에게 잠깐 고개를 돌렸다가, 좀처럼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刘知珉 때문에 집에 도착할 때까지 창 밖만 응시했다.
건물 근처에 차를 세우고 공동현관 출입문으로 걸어가며 했던 생각이라고는, 조만간 관리실에 연락해서 차량 등록을 해둬야겠다는 사소한 것들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손가락이 스칠 때면 전부 잊어버리고 혀로 입술만 쓸었다. 술은 분명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는데 비밀번호도 두 어번은 틀렸고, 엘리베이터에서는 핸드폰도 떨어트리고 말았다. 刘知珉은 그때마다 金旼炡에게 다가오려다가 멈칫하고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분탓인지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그 짙은 한숨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는 것만 같았다. 金旼炡은 문이 열리자마자 밖으로 빠져나가 현관문을 향해 걸어갔다.
도어락 키패드를 빠르게 눌렀으나 손가락이 빗나가는 바람에 듣기 싫은 알림음이 복도를 울렸다. 허리를 감싸는 팔을 붙잡으며 金旼炡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나 아쉬우라고 이렇게 향수를 묻혀왔어요?"
"검사님 안에 들어가서,"
"누가 누구 세컨드겠어. 내가 金旼炡 세컨드지."
입술로 귓볼을 물었다 놓으며 속삭였다. 괘씸해? 金旼炡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키패드에 떠오른 숫자를 눌렀다.
"왜지, 그 영감님 애인 있다니까."
"알겠으니까 이 문 좀…아……"
"그래도 다른 사람이랑 밥 먹지 말라고 하면 안 하고."
이제는 이를 내어 씹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제 오른손을 잡고 도어락 비밀번호를 차례로 눌렀다. 밝은 알림음과 함께 잠금이 해제됐다. 刘知珉은 손잡이를 잡아 당기며 뒤로 물러나는 동시에 金旼炡을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찝찝해도 그냥 참아요 씻는 거 못 기다려. 문 틈을 비집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고개가 꺾이며 곧장 입술이 부딪혔다.
벽에 머리가 부딪히나 싶었는데 그 와중에 닿기 직전에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감싼다. 진짜 미친 사람이구나. 감탄 하느라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가 밀려들어왔다. 와인향은 거의 사라졌으나 열기는 조금도 식지 않았다. 대책없이 안을 헤집는 움직임도 마찬가지였다. 숨을 고를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옷을 비집고 들어온 刘知珉의 손바닥이 맨허리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눈앞이 아득했다. 金旼炡이 몸을 비틀며 새어나가려는 신음을 간신히 삼켰다. 끙끙거리며 목을 뒤로 젖히자 刘知珉은 새하얗게 드러난 목선을 이를 세워 긁었다. 金旼炡은 다급하게 刘知珉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나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그랬듯 刘知珉은 그 손목을 붙잡아 벽으로 눌렀다. 이번에는 힘조절도 제대로 하지 않아 앓는 소리가 절로 터져나왔다. 다시금 입술이 맞붙었다. 그야말로 무자비한 키스가 이어졌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호흡은 자꾸만 무너졌다. 刘知珉이 숨을 몰아쉬며 한 손으로 제 셔츠의 단추를 푸르기 시작했다. 金旼炡은 손목을 이리저리 움직여 刘知珉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셔츠 벗는 것을 거들었다. 刘知珉이 목덜미에 얼굴을 박고 그대로 숨을 들이마셨다. 검사님 보이는 곳은 안 돼요. 金旼炡이 달래듯 쇄골 근처를 다독였다. 이내 현관에 신발이 나뒹굴었다.
마치 술에 취한 사람들 같았다. 현관을 벗어나자 또다시 입술이 닿았다. 복도에 셔츠가 떨어졌다. 바지로 밀려들어오는 손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달뜬 한숨이 터졌다. 刘知珉은 몸을 더 바싹 붙였다. 목덜미를 입술로 훑고 도드라진 쇄골을 잘근잘근 씹었다. 팔에서 빠져나온 상의가 어딘가로 던져졌다. 발끝에는 벗겨낸 옷가지가 걸렸다. 현관에서부터 침실까지 이어져 있을 터였다. 몇 번 와보지도 않았으면서 刘知珉은 제 집처럼 능숙하게 침대를 찾아갔다. 어느덧 뒤꿈치에 프레임이 닿았다. 쓰러지듯 매트리스로 몸을 내린 金旼炡의 볼을 감싸며 刘知珉이 농밀히 입술을 머금었다.
金旼炡은 한 손으로 매트리스를 짚고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입을 떼지 않고 金旼炡을 따라가던 刘知珉도 침대 위로 완전히 올라오게 됐다. 뜨거운 손바닥이 종아리에서 허벅지까지 연신 쓸어올렸다. 刘知珉이 상체를 일으키며 이불을 걷어냈다. 가쁜 숨을 고르며 金旼炡이 刘知珉을 올려다봤다.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던 刘知珉은 이내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실로 들어갔다. 金旼炡은 물소리를 들으며 서랍에서 박스를 꺼내 베개 위에 올려뒀다. 이걸 설마…안에 든 것을 세어보다 몇 개는 도로 서랍으로 넣어뒀다. 刘知珉은 침대로 다가오며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몸은 금방 포개어졌다. 刘知珉은 베개를 끌어와 허리 밑에 받쳐줬다. 그리고는 머리맡에 흩어져 있는 포장지를 툭 건드리다 피식 웃었다. 충분한 거 맞아요? 金旼炡은 대답 대신 刘知珉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이따가 보면 알겠지."
刘知珉은 金旼炡의 입에 손가락을 밀어넣고 혀를 꾹 눌렀다.
[변호사님 旼炡이 악플러 고소가 아직도 진행 중인가요?]
문자를 확인한 강효림은 눈을 비비고 다시금 화면을 들여다봤다. 여기서 旼炡이라고 하면 제가 아는 배우 金旼炡 말고 또 다른 사람이 존재하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문자를 보낸 이의 저장명이 '旼炡이 매니저님'이다.
강효림이 마시던 커피를 내려두고 키패드를 두드렸다. 아니요 그 건은 이미 판결이 나왔는데, 혹시 추가로 고소해야 하는 일이 또 벌어졌을까요. 기다려도 답장이 오지 않아 핸드폰을 옆으로 치웠는데 머그잔을 집어들자마자 벨소리가 울렸다. [旼炡이 매니저님] 화면을 밀고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강효림입니다. 실례는요 저희 사이에. 매니저님은 잘 지내시죠? 저는 다음주에 공판이 있어서 그거 준비하느라 잠깐 출근했어요. 그러게요 직장인의 서러움을 누가 알아줄까요. 매니저님은 오늘 스케줄 있으세요? 아, 旼炡이한테 들었어요 조만간 촬영 들어간다고. 그 전에 밥 먹어요 우리. 깔끔하게 끝났어요 그 건은. 걱정이요? 누가요? 태준이면…정태준씨? 旼炡이 남자친구? 그게 언젯적 일인데 지금 걱정을 하는 거지. 악플러가 또 있대요? 그걸 저한테 물어보시면…잠시만요. 자료들은 캐비넷에 넣어둬서 찾아보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旼炡이한테요? 들은 얘기가…있기는 해요. 아니요 큰 일은 아니고 그냥 잔잔바리들인데 이참에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 이거는 제가 旼炡이랑 더 얘기해보고 회사에 말씀을 드릴게요. 염려 안 하셔도 돼요. 저보다는 매니저님이 더 고생이 많으시죠. 진짜 별 거 아니라서 매니저님한테도 얘기 안 한 거에요. 旼炡이 지금은 집에 있죠? 저랑 어젯밤에 만나서…그쵸 잠깐 얘기 좀 나누다 헤어졌어요. 고민 있어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올해 소속사랑 계약이 끝나요? 그런 말은 안 했어요. 일단 알겠습니다. 아니에요 매니저님이 충분히 궁금해하실 수 있죠. 오늘은 스케줄 없는 거에요? 그렇구나. 저도 점심 먹기 전에는 퇴근하려고요. 그럼요 계약 관련해서도 그렇고, 명예훼손이나 저번 같은 악플러 고소도 그렇고 혹시라도 법률적인 자문 구하고 싶으실 때는 바로 저한테 연락주세요. 괜찮아요 밥은 旼炡이한테 얻어먹으면 돼요. 알겠습니다 들어가세요 매니저님.
매니저와 통화를 마친 강효림이 한참동안 핸드폰을 쳐다보다 널브러진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의뢰인의 개인정보가 담긴 파일철은 서랍 안에 넣어뒀고, 사건 관련 법률과 판례를 모아놓은 편철집은 책상 구석에 찬찬히 쌓아놓았다. 시간도 애매하니 이른 점심이나 같이 먹으려고 했었다. 사무실을 나서며 즐겨찾기에서 그 이름을 찾아 눌렀다. 단조로운 연결음은 길게 이어졌으며 끝은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멘트가 장식했다. 종료버튼을 누르고 최근통화목록 가장 위에 떠 있는 이름을 눌러도 마찬가지였다. 전화를 걸고 끊고를 서 너번은 더 반복했으나 이름 주인공의 목소리만큼은 들을 수 없었다. 강효림은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동안 손목 시계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아침잠이 많은 편이니, 더욱이 요즘은 새벽까지 대본을 읽다가 잔다고 했으니 이 시간에 일어나 있지는 않았을 거라고 해도. 백지장은 맞들어야 더 낫고, 박수도 합이 맞아야 소리가 나는 건데 신호도 주지 않고 연극에 저를 끌어들이는 것은 다소 곤란했다. 변명거리는 얼마든지 되어 줄 수 있었다. 이름 몇 번 팔아 먹는다고 서먹해질 사이는 아니었다. 운전석에 오른 강효림은 점멸된 화면을 빤히 바라보다 옆으로 핸드폰을 던져뒀다. 데이트 하다가 피곤하면 일찍 집에 들어가고 싶을 수도 있지. 그런 날도 있는 거지 하루 쯤은.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무겁고 복잡한 연애사는 제 취향과 거리가 멀었다. 정통멜로보다는 로코를 더 선호했다. 사는 것도 퍽퍽한데 연애까지 사람 속을 썩일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강효림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손가락으로 가볍게 핸들을 두드렸다. 가는 길에는 카페 몇 군데를 들러 집주인이 좋아할 만한 간식을 한아름 샀다. 그러고 보니 요근래에는 서로 일이 바빠 얼굴을 통 보지 못했다는 것이 문득 떠올랐다. 본인 사무실처럼 뻔질나게 드나들며 응대용 과자를 축내던 모습도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대본 읽을 때 먹으라고 사다 놓으면 또 밥 대신 이걸로 배 채울 것 같은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했던 고민도 여느 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현관문 앞에 도착한 강효림은 기억을 더듬어 도어락 비밀번호를 떠올렸다. 종이가방을 끌어안고서는 빈 손으로 차분히 하나씩 숫자를 눌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지만 그 이상으로 발걸음을 옮기지는 못했다. 현관에 내팽겨져 있는 신발을 빤히 내려다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급하게 나간 거야 아니면 급하게 들어온 거야. 강효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운동화를 벗어 한 켠으로 치워두고 집주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신발들을 그 옆으로 모아놓았다. 고요한 집 안을 둘러보다 복도를 걸어갔다. 역시나 얼마 가지 않아서 우두커니 멈춰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강효림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새하얀 천을 조심스럽게 집어들었다. 아직 촬영은 안 들어갔다고 했는데 벌써부터 이렇게 바쁜 건가. 구겨진 셔츠를 팔에 걸친 강효림이 소파에 종이가방을 내려두고 거실을 살폈다.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혼자서는 더더욱 마시지 않았다. 적어도 제가 아는 金旼炡은 그러했다. 저녁 먹으면서 정태준이랑 한 잔 했나. 내딛는 걸음은 점차 그 속도를 잃었다. 허리를 굽힌 강효림이 복도에 떨어진 옷을 주워들었다.
팔에는 이미 셔츠가 걸려 있었다. 그럼에도 제가 들고 있는 건 그 셔츠의 안에 입기에도, 밖에 걸치기에도 어울리지 않는 상의였다. 한 벌로는 볼 수 없는 옷이었다. 강효림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져갔다. 침실까지 요란하게 흩어져 있는 옷가지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보면 간섭이고 참견이었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분명한 사생활이다. 강효림은 문고리를 쥐고 망설였다. 저 셔츠가 정태준의 옷일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저는 엄청난 결례를 저지르는 것이니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현관에는 남자 사이즈의 신발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문고리를 잡고 있던 강효림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입술 사이로는 헛웃음이 절로 새어나갔다. 손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셔츠의 질감이 지나치리만큼 생경했다. 강효림은 숨을 들이마시며 침실 문을 두드렸다. 텁텁하고 싸늘한 적막만이 공간을 유유히 배회할 뿐이었다. 입이 바싹 말라왔다. 다시금 문을 노크하려던 강효림이 크게 숨을 내뱉고 오른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모든 정황이 하나의 결론을 가리켰다. 저 안에는 金旼炡이 있다. 그러나 혼자는 아니다. 강효림은 메마른 한숨을 내쉬며 뒤로 돌았다. 바닥에서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바지와 그 외의 것들을 애써 무시하고 거실로 걸어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디까지가 참견이고, 또 어디서부터가 걱정일까.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강효림은 소파에 기댄 채로 침실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러다 왼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의 잠금을 풀고 최근 통화 목록을 살폈다. 받을 때까지 해보겠다는 것처럼 전화를 걸다 소파 헤드로 핸드폰을 올려두고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여보세요?
이제서야 받으면 어쩌겠다고.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강효림은 겨우 핸드폰을 움켜쥐고 귀에 가져다 댔다.
-뭐지…잘못 걸었나
"……"
-효림 언니 할 말 없으면, 아 왜요
바로 눈앞에 보이는 침실에는 金旼炡이 있다.
-피곤하면 더 자요 오늘 출근 안 한다며
"……"
-아니 잠깐만…전화 좀 하고
정태준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미끄러질 뻔한 핸드폰을 바짝 고쳐잡은 강효림이 무거운 입술을 뗐다. 金旼炡. 대답은 한참 뒤에야 돌아왔다.
-언니 내가 이따가 다시 걸게
"旼炡아."
-안 끊었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강효림은 터져나오려는 한숨을 속으로 삼켜내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집이야?"
-응 집이지
"뭐하고 있었는데."
-나 이제 일어났어 언니한테 전화 와서
"또 새벽까지 대본 읽었어?"
-…티비도 좀 보고 그랬지
거실을 살펴보던 강효림이 혀로 입술을 축이고 말을 이어갔다. 일어났으면 잠깐 나와봐. 金旼炡은 잘못 들었다는 것처럼 되물었다. 뭐라고?
"나와보라고 旼炡아."
-지금? 아니 그것보다는 어디로?
"나 지금 너희 집이야."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만이 귓가에 울렸다.
"金旼炡 듣고 있어?"
재촉을 해도 한참 뒤에야 대꾸하는 것이었다. 머릿속으로는 침실 안의 모습이 자꾸만 그려졌다. 강효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소파에서 몸을 뗐다.
-주차장이야? 올라 오고 있어?
"旼炡아."
-연락도 없이 갑자기
"내가 들어갈까 너가 나올래."
기어코 쐐기를 박아버렸다.
당한 건 金旼炡인데 이상하게도 제 명치가 저릿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핸드폰을 쥔 손을 아래로 내리고 빈 손으로 머리카락을 잡았다 놓았다. 굳게 닫힌 문 너머로는 어떠한 소리도 넘어오지 않았다. 강효림이 마른침을 삼키고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을 거다. 문을 열고 침실 밖으로 나온 金旼炡도, 그런 金旼炡을 지켜보는 강효림도. 바로 앞에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는지 金旼炡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 모습을 마주해야 하는 심정은 말로 설명이 불가했다. 강효림이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金旼炡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자다 깬 건 맞았다. 머리카락은 부스스했고, 얼굴은 평소보다 부어 있다. 그리고 목덜미에는 머리카락으로 미처 가리지 못한.
"…언니."
"와서 앉아 있어. 물 가져다줄게."
더이상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 얘기를 하려고 했었다. 애초에 그러려고 찾아왔으니까. 머릿속에서 마구잡이로 떠돌아다니는 상념들은 잠시 미뤄두고 金旼炡과 대화를 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한 사람이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됐다. 멋대로 널뛰는 심장을, 의지의 영역을 넘어가는 감정을 걷잡을 시간이 필요했다.
강효림은 金旼炡을 등 지고 복도를 걸어갔다. 아주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게 찬찬히 걸음을 옮겼다.
"잠 다 깨워놓고 가면 어떡해요."
"……"
"그래서, 나는 세컨이에요 써드에요."
"……"
"이건 좀 지고 싶지 않은데."
거실과 부엌 그 어중간 한 사이에 우뚝 멈춰섰다. 이건 정말 아니었다.
어깨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낯설지 않았다. 뒷목에서부터 손끝까지 뻣뻣하게 굳는 기분이었다. 새까만 티비 화면에 비친 제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강효림이 가까스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리고는 주먹을 움켜쥐며 느릿하게 뒤를 돌았다. 金旼炡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보란듯이 金旼炡의 볼에 입을 맞추고 어깨로 제 얼굴을 올려뒀다. 마치 지금 네가 목격한 장면이 착각이 아니라고 일깨워 주는 것처럼, 눈앞에 있는 사람이 네가 아는 刘知珉이 맞다는 것을 확인 시켜주는 것처럼, 침실을 바라보는 동안 네 머릿속에 떠올랐던 장면들이 대부분 들어 맞았다고 알려주는 것처럼.
당황을 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刘知珉이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주먹을 쥔 강효림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정말 비웃기라도 하듯 刘知珉은 金旼炡의 새하얀 목에 입술을 붙였다. 강효림이 착각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단순히 하룻밤을 함께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여기서 이렇게 보니까 되게…별로네요."
"…刘知珉씨."
"제가 자리를 피해드려야 되는 건가요?"
뻔뻔함은 도를 넘어섰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金旼炡이 刘知珉을 밀어내도, 刘知珉은 기어이 버텨내며 金旼炡의 옆을 사수했다. 강효림이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거나 말거나 한 치도 신경 쓰지 않으며. 그러니 이제는 불청객이 누구인지 강효림마저 헷갈릴 정도였다.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刘知珉이 유유자적 걸어가 부엌으로 향했다. 강효림을 그대로 지나치고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서는 다시 거실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눈치를 보는 척도 안 했다. 그마저도 刘知珉 다웠지만. 얘기 나누세요. 그 말만 덩그러니 남겨두고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헛웃음이 그제야 터져나왔다.
"…언니."
"……"
"그러니까 이거는…"
"실수지?"
"……"
"술 마시고 그냥, 취해서 그런 거잖아 둘 다."
"……"
"못 본 걸로 할게. 그러니까 없었던 일로 하고, 유 검사한테 그렇게 전해줘."
길게 말할 것도 없었다. 서너 살 애들도 아니니 이 정도는 어련히 알아 들을 거라 생각했다. 강효림은 거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들을 가리키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비밀번호도 바꿔. 형편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더이상은 마주할 자신이 없어 먼저 등을 졌다. 거실을 벗어나 현관으로 걸어갔다.
붙잡지 말아야 했다. 해명 같은 건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거다. 적어도 지금은 그래야 하는 게 맞았다.
"실수 아니야."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를 위한 고백이었을까. 신발에 대충 발을 밀어넣던 강효림이 결국 삐끗하고 중심을 잃었다. 가까스로 벽을 짚고 고개를 돌렸다.
"나 술 안 마셨어 언니…"
솔직할 필요도 없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숨겨야 할 것은 굳이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그 정도는 아는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강효림은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수 맞아 旼炡아."
"…언니."
"실수여야 해."
아닌 건 아니었다. 정태준에 대한 마음이 식었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어긋날 관계는 분명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리해."
"……"
"갈게. 추가 고소는 일단 자료 더 검토해본 다음에 어떻게 진행할 건지 정하자. 매니저님한테도 그렇게 말해놨어. 요즘 큰 사건 맡고 있어서 조금 정신이 없다."
"……"
"촬영 얼마 안 남았다며. 건강 잘 챙기고 밥은 다음에 먹자."
강효림은 신발을 대충 구겨 신고 현관을 나섰다. 텅 빈 복도를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봤다. 차라리 정태준과 헤어지고 刘知珉을 만나는 거라면 제가 신경 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머리가 지끈거렸다.
빈 생수병을 서랍 위에 올려두고 옆에 놓인 핸드폰 화면을 두드렸다. 피곤해서 그런지 시간개념이 제대로 서지 않았다. 어제 몇 시에 들어왔는지, 잠에 들었던 것은 몇 시였는지. 주말이었으니 망정이었다. 물론 금요일이 아니었다면 술도 마시지 않았겠지만. 刘知珉은 화장실로 걸어 들어가며 뻐근한 어깨를 연신 주물렀다.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는 침대 아래 떨어져 있는 것들을 하나씩 주워 정리하기 시작했다. 역시나 그만 마시라고 할 때 알아서 적당히 끊었어야 했는데 무슨 오기로 그렇게 들이부었던 건지. 금방 반듯해진 이불을 살펴보던 刘知珉이 빈 병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오랜 단골이었지만 굳이 찾아가지는 않는 식당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월이 묻어나는 곳에는 언제나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기억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추억이라 부를 것이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미련으로 정리하기로 했다. 익숙한 골목 초입으로 들어설 때야 비싼 밥 얻어먹겠다고 운전기사를 자처한 스스로를 비웃을 수 있었다. 까탈스러운 한유진 입맛에 맞는 식당 찾아보겠다고 아예 나라별로 리스트를 짜서 핸드폰 메모장에 저장해뒀던 때도 있었지. 그런 생각이나 하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계단을 올라갔던 것 같다. 여기 예약하려면 거의 이 주는 기다려야 한다며 으스대는 여자의 옆에서 그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만 중얼거리며 출입문 안으로 들어갔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말, 종업원의 손짓을 따라 테이블 근처로 고개를 돌릴 때까지만 해도 저녁만 먹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서 야근을 하려고 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렇게 서울이 좁았을까.
공개연애 중이면 연예인이라도 저렇게 얼굴을 가리지 않고 데이트 할 수 있는 건가. 남들 다 보라고, 남들이 다 보든 말든. 헐 대박 저기 金旼炡 아니야? 여자는 꽤나 신기해하며 제 팔을 흔들었다. 같이 온 사람은 누구지 남자 같은데. 설마 정태준? 야 너무 빤히 쳐다보지마 그거 실례야. 엊그제까지만 해도 한 침대에 누워서 잠을 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낯설게 느껴졌다.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테이블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刘知珉은 金旼炡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리딩 들어간다는 문자 이후로는 다른 연락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지검을 나서기 전 핸드폰을 확인 했으니 제가 놓친 문자는 없었을 것이었다. 刘知珉은 앞에 앉은 여자가 눈치를 주거나 말거나, 테이블 아래로 제 다리를 걷어차거나 말거나 서너 자리 건너에 있는 한 쌍의 커플을 곁눈질 않고 빤히 바라봤다. 쟤가 정태준이구나. 과연 연예인답게 이목을 끄는 외모였다.
'사인이라도 받아다 드려요?'
여자는 빙긋 웃으며 잔을 부딪혀왔다.
'의외네 刘知珉이 연예인한테 관심을 다 가지고.'
'신기하니까요.'
'그래도 그만 쳐다봐. 밥 먹으러 나왔는데 주변에서 자꾸 힐끔 거리면 엄청 부담스럽겠다.'
'별로 주변 신경 안 쓰는 것 같은데…'
그러니 저렇게 대화 하는 중간중간 손을 건드리는 거 아닌가.
잔에 든 것을 물처럼 비워낸 刘知珉이 핸드폰을 집어들려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맞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자는 속이라도 채우고 술을 마시라며 잔소리 하다 刘知珉의 잔을 빼앗아갔다. 刘知珉은 여자에게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고 묵묵히 음식을 비워냈다. 말마따나 빈속에 알콜이 들어가서 그런지 평소보다 빠르게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뒷목을 주무르던 刘知珉이 짤막한 한숨을 내뱉고 맞은편에 있는 잔을 도로 가져왔다.
'대검으로 간다는 소문 돌더라.'
'언제는 내 뒤에 소문이 안 따랐던 적이 있었나.'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네.'
'저녁에 데이트 하면 밥만 먹고 헤어져요?'
여자는 저건 또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으로 刘知珉을 쳐다보다 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켰다. 刘知珉은 고개를 끄덕이며 빈 잔에 와인을 채웠다. 바쁘면 그렇겠지만 보통 금요일에는 늦게까지 같이 있는 편이지. 대답을 들어놓고도 刘知珉은 어딘가 시큰둥한 낯으로 잔을 굴렀다.
'잘 안 됐어?'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아니면 싸웠어?'
'뭐가요.'
'너 아까부터 계속 핸드폰만 쳐다보셨어요.'
그런 줄 알았었는데, 역시나 쓸데없이 눈치가 빨랐다. 刘知珉이 빤한 시선을 받아내며 와인을 들이켰다.
'후배님은 어떤 기구한 사연으로 불금에 나랑 같이 저녁을 드시고 계시는지 문득 궁금해지네.'
이럴 때면 비딱한 마음이 치고 올라온다. 엊그제 나랑 잔 애가 저기서 남자친구랑 저녁 먹고 있으니까요. 목구멍에서 넘실거리는 말은 텁텁한 와인과 함께 삼켜내고 음식을 입 안에 넣었다. 분명 맛집이었는데 몇 달 안 왔다고 그새 주방장이 바뀌었나 싶었다. 刘知珉은 던지듯 젓가락을 내려뒀다.
'애먼 곳에 화풀이를 하면 쓰나…'
'누가요.'
여자가 뭘 묻냐는듯 손가락으로 제 앞을 가리켰다. 헛웃음을 터트린 刘知珉이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잠금이 풀리면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여 문자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술 그만 마셔요. 입술을 물었다 놓고 저 멀리로 시선을 옮겼다.
취해가고 있는 듯 했다. 저 모습을 보고 차석현을 떠올렸다니. 刘知珉은 왼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 종업원을 불러 와인을 추가로 주문했다. 刘知珉의 접시에 새 것처럼 남아 있는 음식을 가져가던 여자가 다소 질색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연애할 때는 자존심 부리는 거 아니다 知珉아.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누구 앞에서 그런 잔소리를. 刘知珉이 단어 하나하나를 씹듯이 내뱉었다.
'그딴 게 남아 있었으면 여기서 이러고 있지도 않았어요.'
'그러면 뭐가 문제라서 그렇게 꼴받았는데.'
'화난 거 아니에요.'
'저기 있는 金旼炡씨한테 물어봐도 너 지금 화나 보인다고 대답할걸.'
예시를 들어도 꼭 그따위로 들어. 작게 속삭이는 여자를 바라보던 刘知珉은 와인을 단번에 비워내고 병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점멸되어 있던 핸드폰 화면이 밝아졌다. 잔에 반쯤 와인을 따르고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刘知珉이 속으로 문자를 몇 번이나 곱씹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쩌자는 거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刘知珉은 잔을 말끔히 비워냈다. 여자의 말을 한 귀로 대충 흘려 들었다. 잠깐 얼굴만 보고 오려 했었다. 저 쩍도 적잖이 당황했을 테니 신경 쓰지 말라는 얘기를 하려고 했던 것도 같다. 그런데 하필 저런 것들까지 눈에 들어오니까, 金旼炡을 올려다 보는 눈빛에서는 애정이 넘실거렸으니까, 어디선가에서 들려오는 잘 어울린다는 소리를 차마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소파에 앉아 지난밤을 떠올리던 刘知珉이 거실 화장실에서 나오는 金旼炡을 확인하고 제 옆의 쿠션을 구석으로 치웠다. 여러모로 쉽지 않았다. 연애든 세컨드든 제 뜻대로 되는 게 없었다.
"계속 그러고 서 있을 거에요?"
"…검사님."
"강 변호사님은 갔어요?"
"왜 그랬어요?"
刘知珉은 쿠션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되물었다. 뭐가요. 눈동자에 담긴 감정을 읽어내려 나름대로 애를 썼다. 원망, 후회, 체념…그리고. 확실히 골라낼 수 없었지만 대체로 부정적인 것들만 손에 집혔다. 그렇지 않아도 새하얀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刘知珉은 시큰거리는 가슴 언저리를 모른척 하고 소파 깊숙이 몸을 기댔다.
"효림언니는 그냥…친한 언니일 뿐이에요."
"몰랐네요 그건."
"몰랐어도요. 검사님은 도대체 나를…뭐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왜 거기에서 그런 말이 나와요?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화장실에 들어가려는 金旼炡을 붙잡아 복도 끝으로 데려가서 대뜸 입부터 맞춘 이유 조차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했으니까. 그런 와중에 아침부터 전화를 몇 번이나 하고, 알아서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 온 사람이 정태준 말고 또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검사님 눈에는 내가 오는 사람은 안 막을 것처럼 보여요?"
"…그런 생각 안 했어요."
"왜요, 바람 피는 거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우니까?"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펴본 애들이 계속 피니까 얘도 그러겠다 싶은 거에요?"
"아니라고 했잖아요."
"심심하면 아무나 불러서 잘 것 같아?"
"金旼炡."
뭐가 이렇게 복잡할까. 刘知珉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씁쓸한 한숨을 삼켰다.
"말을 꼭 그런 식으로 해야겠어요?"
"검사님이 아까 효림언니한테 했던 말은 괜찮고요?"
"그건 그냥…"
"사람 되게 쉽게 바보 만드는 거 알아요?"
"……"
"그런데 나는 그마저도 좋다고 이러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네가.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나랑 이러고 있어. 쿠션을 세게 움켜쥔 刘知珉이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겨우 속으로 밀어넣었다.
"부탁이니까 우습게 좀 보지마요 내 마음."
"……"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검사님도."
이 관계는 더이상 무거워져서는 안 된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걸까. 刘知珉은 다가오는 金旼炡을 바라보다 혀를 씹어냈다. 정태준이 아닌 나를 놓아야 해. 만약 그 모습을 두고 내가 느꼈던 감정의 이름이 언젠가 드러난다고 해도, 金旼炡만큼은 그걸 알지 못해야 해. 제게로 안겨드는 작은 몸을 끌어안으며 刘知珉은 서서히 눈을 감았다.
"검사님."
"……"
"刘知珉 검사님."
펜을 쥐고 조서를 읽어내려가던 刘知珉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앞을 쳐다봤다. 나란히 앉은 계장과 수사관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전화 와요 검사님. 刘知珉은 수사관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리다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빨간불이 번쩍이는 전화기에는 보기만 해도 한숨이 절로 터져나오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검사장. 刘知珉이 인상을 찌푸리며 수화기를 들어 귀에 가져다댔다.
"형사 1부 刘知珉입니다."
-잠깐 차 한잔 하지
"검사장님 죄송하지만 제가 이따가 참고인 조사를"
-손님 오셨어 잔말 말고 바로 올라와
용건은 그게 전부였다. 전화가 끊겼음을 알리는 듣기 싫은 비프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刘知珉은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개새끼가 진짜. 요즘은 정말이지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다들 작정하고 저를 괴롭히려 드는 것만 같았다. 사는 게 녹록치 않았다. 책상 구석에 내팽겨쳤던 직원증을 집어 목에 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류를 정리하던 계장과 수사관은 나란히 고개를 들고 刘知珉을 올려다봤다. 어디 가세요 검사님? 刘知珉이 손목시계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만약에 10분 지나도 저 안 오면 참고인 조사 좀 부탁드릴게요 계장님."
계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수사관은 되물었다.
"검사장님 호출?"
"조만간 다방을 차려드려야 할까봐요."
"혼나시는 건 아니시죠? 부장님 트집도 이제 겨우 풀리신 것 같던데."
확실히 다른 방에서 떠넘기는 사건이 반으로 줄어들기는 했다. 요며칠간은 업무를 쳐내느라 덩달아 바빠져서 퇴근할 때까지 숨 한 번 제대로 돌리지 못했었다. 조만간 호텔 가서 밥 먹어요 우리. 刘知珉이 자켓을 걸치며 책상을 벗어났다.
"저는 한우면 됩니다 검사님."
"저는 참치도 괜찮아요."
그나마 두 사람 덕분에 한번씩 웃을 수 있었다. 수사관은 직원증을 뒤집으라며 손을 까딱였고, 계장은 슬리퍼를 갈아신으라며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복장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刘知珉은 마지막으로 두 사람에게 확인을 받고 사무실을 나섰다. 인사 시즌이 다가오는만큼 여기저기에서 부르는 식사 자리는 최대한 멀리하고 있었다. 괜한 소문에 장작을 넣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 전부터 빽이니 뭐니 하는 뒷말들을 의도치 않게 만들어 냈다고 해도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길어 봐야 1~2년이겠지만 장관이 바뀔 때까지는 만나는 사람들을 신경 써서 관리해야 됐다. 기업 임원이니 국회의원 보좌관이니 하는 인간들이 아버지가 아니라 차라리 저를 찾아오는 걸 다행스럽게 여겨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검사장실 앞에 선 刘知珉은 숨을 고쳐쉬고 문을 두드렸다. 안으로 들어가면 전화를 받던 비서가 안쪽으로 손짓했다. 刘知珉이 어깨를 툭툭 털어낸 뒤에 다시금 문을 노크하고 몸쪽으로 손잡이를 잡아 당겼다. 내딛던 발걸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춰섰다. 문과 소파 사이의 애매한 위치였다.
"그렇게 자랑하시던 유 프로가 드디어 왔네요."
"우리 知珉이 일 잘한다고 사건 너무 많이 주시는 거 아닙니까? 같은 서울 하늘 아래에 있는데 얼굴 보기 이렇게 힘들어서 원."
"여긴 어쩔 일로…"
이것까지는 미처 예상 못했다. 익숙한 얼굴이 저를 반기자 刘知珉은 당황스러움을 애써 감추며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옆 건물에 사촌이 있어서 보러 온 김에 잠깐 들렀지. 한 판사는 知珉이도 잘 알잖아. 엄마랑 연수원 동기인가 그럴걸."
"한 부장님이 회장님 집안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아…네. 그렇다고 듣기는 했습니다."
"잘 지내? 바빠서 본가에도 잘 안 간다며."
한 회장은 자연스럽게 刘知珉의 앞으로 찻잔을 밀어줬다. 말을 붙여보려다가 실패한 검사장이 머쓱하게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일이 조금…네, 정리되면 찾아뵐려고 했어요."
"너 빼고 모였어 그래서 어제."
"어제요? 저는 연락 못 받았는…데요."
"홍대표가 약속 잡아도 계속 미뤘다며."
빈 손에 직접 잔을 쥐여준 한 회장이 부드럽게 웃으며 刘知珉의 손등을 토닥였다. 刘知珉은 차를 한 입 마시고 테이블에 잔을 내려뒀다. 검사장은 어색하게 앉아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다 말을 걸어왔다. 편하게 말씀 나누세요 저는 밖에서.
"저희도 나가볼겁니다. 딸아이가 차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刘知珉이 고개를 들고 한 회장을 쳐다봤다.
"知珉이도 선약 없으면 이따가 점심 같이 할래? 유진이 그거 한 판사가 아니라 너 보려고 따라붙은 것 같던데."
"죄송합니다 이미…약속을 잡아서요."
"아쉽네, 여기까지 왔는데."
"다음에 하시죠. 제가 조만간 날 잡을게요."
한 회장은 잠시 뜸을 들이다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刘知珉은 뒤따라 일어나 그의 옆으로 다가갔으며, 검사장도 이어 두 사람을 따라 테이블을 벗어났다.
"좋은 차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건은 저희 쪽 실무진들에게 검토 맡겨보겠씁니다."
"아래까지는 같이 가시죠."
따라 나서려는 검사장에게 한 회장이 손을 저어보였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刘知珉의 등을 두 어번 두드리며 대답했다. 知珉이가 어련히 잘 데려다줄까요. 바깥쪽으로 문을 밀어내던 刘知珉은 두 사람을 바라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 회장이 검사장실에서 나온 것을 확인한 비서관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어디론가로 전화를 걸었다. 刘知珉은 한 회장과 함께 걸어가며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았다. 대검은 정말 싫어? 지방으로 빠지려고요 이번에는. 뒷말 나올 거 생각하면 그게 낫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아쉽네. 겸사겸사 쉬고 오는 거죠. 거기 가면 더 안 만나줄 거 아닌가 몰라. 한 회장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刘知珉을 바라보다 작게 헛웃음을 지었다. 知珉이까지 없으면 적적할 것 같아서 그래.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온 刘知珉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로비를 가로지르고 보안검색대를 지나 출입문으로 걸어갔다. 조심히 들어가시라는 인사를 건네려던 참이었다. 刘知珉은 유리문 너머에서 또 한 번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계단만 내려가면 되니까 知珉이도 이만 사무실로 들어…쟤는 왜 또 저기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날도 더운데."
걱정 어린 목소리로 읊조리던 한 회장이 빠르게 출입문을 지나쳐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대로 뒤를 돌아 왔던 길을 되돌아 가면 됐다. 그건 어렵거나 복잡한 일도 아니었다. 망설이던 刘知珉이 본드를 칠한 것처럼 바닥에 붙어 있는 발을 뗐다.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미지근했으며, 한유진은 왼손으로 허벅지를 잡았다가 놓았다. 刘知珉은 거추장스러운 직원증을 벗어 주머니에 넣어뒀다.
"혼자 차에만 있기 답답해서 나왔어. 진짜 얼마 안 됐다니까 그러네."
"너 퇴원한지 한 달도 안 지났어 유진아. 큰일도 앞두고 있는데 몸조리를 잘 해야"
"알겠으니까 아빠 먼저 가. 나 刘知珉이랑 할 얘기 있어."
그 날 이후로는 아예 연락을 무시했다. 홍 대표와의 약속도 번번이 뒤로 미뤘다.
밥 한 번 먹는 건데 비싸게 굴거냐는 부모님의 채근은 한 귀로 대충 흘려들었다. 피하는 게 능사가 아니란 것은 알고 있지만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마주할 자신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서로의 부모님을 옆에 두고서. 刘知珉은 한숨을 삼켜내고 한 회장에게 말했다. 유진이 제가 데려다 줄게요. 한유진을 바라보던 한 회장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知珉이도 일 해야 하는데 괜히 우리 때문에 시간 뺏는…그가 어영부영 말끝을 흐리며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이 다음에도 약속이 있는 모양이었다. 刘知珉이 괜찮다며 대답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선수를 친 건 한유진이었다.
"너 없으면 지검이 안 돌아가?"
"유진아 무슨 말을 그렇게"
"바쁘면 뭐 얼마나 바쁘다고 연락을 그렇게 씹어 검사님."
"한유진 너 知珉이한테"
刘知珉은 소리 없이 웃으며 한 회장의 앞을 가로막았다. 시간 맞춰서 식당으로 갈게요. 먼저 들어가세요. 한 회장은 대신 사과하겠다는 말을 남겨두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가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뒤돌아 보는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한유진은 刘知珉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이럴 때도 예의 차리네 너는. 刘知珉은 그가 차에 오르고 비서관이 뒷좌석 문을 닫을 때까지 계단 아래를 응시하다 한유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기대를 했던 내가 우스워지는 거지. 언짢음이 가득한 눈빛을 마주하다 먼저 고개를 돌리고 왼쪽으로 걸어갔다. 별관과 이어지는 길목에는 앉을 만한 자리가 몇 군데 있기 때문이었다. 열발자국쯤 걷던 刘知珉이 잠깐 멈춰 숨을 골랐다. 뒤돌아 서면 처음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유진이 보였다. 핸드폰 잠금을 풀고 키패드를 빠르게 두드렸다. 미안해요 급한 약속이 생겨서 점심은 같이 못 먹을 것 같아요. 야근 안 하고 일찍 들어갈 거니까 집에서 봐요. 刘知珉은 문장을 속으로 되뇌어 보다 전송버튼을 누르고 한유진에게로 걸어갔다. 굽히고 들어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존심 따위는 이미 13년 전에 전부 줘버렸다. 그걸 아직 되돌려 받지 못해서, 어쩌면 되돌려 받을 노력 조차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서 늘상 제자리만 맴돌고 있는 거다. 사랑이 아니라 미련을 붙잡고 있는 거다. 한유진이나 刘知珉이나 그걸 알면서도 이렇게 서로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다.
"내 방 가서 얘기해."
"……"
"알겠으니까 어디든 들어가자고."
"……"
"이따가 회장님이랑 한 판사님 만나야 하잖아. 시덥잖은 일로 고집 좀 부리지말자 제발. 우리도 이제 서른이다."
그 자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차석현을 두고 한유진을 데리고 나가는 짓은 동화 속 이야기일 뿐이다. 엄연히 정해져 있는 역할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배역을 바꿔버린 일도 한유진이 이뤄냈다. 刘知珉은 답답함에 크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뭐가 문제인데. 연락 안 받는 게 그렇게 화가 나는 일이야? 너 같으면 아무 일도 없다는 것처럼 웃으면서 같이 밥 먹을 수 있어?"
"왜 못해. 하루이틀 아니잖아 우리 사이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던 거. 몇 년을 이렇게 지내왔는데 이번에는 왜 못해. 뭐가 그렇게 다른데, 뭐가 달라졌는데 刘知珉."
"정도껏 이기적으로 굴라고 말했지 분명. 너가 지금 나한테 따질 상황이야?"
"연락까지 피했던 건 너잖아!"
결국 이런 식이다.
"찾아오지 말라며, 집도 회사도 다 안 된다며 이제. 그래서 그렇게 했잖아. 나도 내 일 하면서 가만히 너 기다렸잖아, 한 번만 전화 받아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했잖아. 그런데 그것까지 피하면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없었다. 나도, 너도 더이상 할 수 있는 건 없다. 우리 사이는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져서 더는 손을 쓸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까. 刘知珉은 제 손을 붙잡아 오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지쳤다. 한유진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어쩌자고 우리는 아직까지 이러고 있을까.
"오빠랑 진짜 아무 일 없었어. 그냥 집에만 데려다 주고"
"유진아."
누군들 상처 입히고 싶었을까. 한때는 정말 모든 걸 걸고 사랑했던 사람인데. 망설이던 刘知珉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안 중요해 이제 그런 건."
"…刘知珉."
"여전히 힘든데, 너 옆에 있는 차석현 볼 때마다 정말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데. 그게 전부야."
손목을 맴돌던 미적지근한 기운이 사라졌다.
"아프지 좀 마. 나 진짜 너가…잘 지냈으면 좋겠어."
"……"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위에 가서 차 키만 가지고 올게."
刘知珉은 한유진의 어깨를 감싸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머니에 넣어뒀던 직원증을 꺼내 건물 안으로 걸어가려던 즈음이었다. 나한테는 아직 중요해. 손을 잡아채는 손길에는 빳빳한 힘이 실려 있었다. 刘知珉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한유진을 바라봤다.
"중요하다고 나는."
"…유진아."
"너무너무…중요해 너가."
다른 손으로 눈가를 거칠게 훔치는 한유진을 그저 바라만 봐야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손목만 붙잡힌채 멍하니.
"너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아니 이제는 그거 신경 안 쓸래."
"너 무슨 일 있지."
"너가 나를 미워하든, 싫어하든, 원망하든 상관없어."
"한유진 도대체 뭐 때문에 이러는"
"너가 그렇게 지내는 그 꼴 나는 못 봐."
한유진은 눈물이 떨어지기 직전 눈밑을 닦아내고 그대로 뒤를 돌았다. 그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던 刘知珉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빠른 걸음으로 한유진을 뒤쫓아갔다. 계단참에 다다르면 한유진의 손목을 붙잡아 저를 마주하게끔 돌려세웠다.
"왜 우는 건데. 나 때문에 차석현이랑 싸운 거야?"
"나한테 할 말이 그딴 거 밖에 없어?"
"제대로 얘기를 해줘야 알지."
刘知珉을 쏘아보던 한유진이 붙잡힌 손목을 뿌리치고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刘知珉은 거의 뛰듯이 한유진을 따라가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데려다 준다니까. 가면서 얘기 좀 해. 한유진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다 刘知珉이 손을 뻗기 직전 셔츠의 벌어진 틈을 옆으로 잡아끌었다.
"잤니?"
刘知珉은 말없이 한유진의 손을 치워낼 뿐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유진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미친새끼…"
"……"
"걔 남자친구 있어. 그것도 3년 만난."
"……"
"술 마시면 이제 정말 눈에 뵈는 게 없어?"
그랬나. 눈에 뵈는 게 없어서 너랑 자주 가던 식당에서 걔한테 키스했나. 그러고도 집에 가서 그렇게 뒹굴었고. 刘知珉이 뒤따라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헛웃었다.
"건드릴 사람을 건드려야지. 너 설마 전에 만났던 애들 중에도 이런 식으로"
"야 한유진."
"뭐?"
"네가 나한테 이런다고? 7년 만난 여자친구 몰래 바람 피우더니 그 새끼랑 기어코 약혼까지 한 네가?"
한유진의 미간이 보기 좋게 찌푸려졌다.
"약혼하고서도 나한테 좋아한다 사랑한다 떠드는 한유진씨 네가?"
"약혼을 했으면 했지 누구처럼 집까지 데려가서 몸은 안 섞었어."
"그래서 칭찬이라도 해줘? 네가 그 새끼랑 입술을 부볐든, 침대에서 손만 잡고 잤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고."
"내가 지금 너가 누구 만나는 거 때문에 이래? 헤어지고 나서 너 어땠는데. 나랑 같이 있을 때 여자친구한테 전화 오면 버젓이 받았어. 연애할 때 자주 갔던 식당에서 데이트 하다가 마주쳐도 우리 인사했다고 知珉아."
"그건 되는데 자는 건 싫어?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金旼炡인 게 싫어!"
셔츠 단추를 정리하던 刘知珉이 멈칫하고 한유진을 쳐다봤다. 한유진은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다 가슴에 손을 얹고 호흡을 골랐다.
"한유진 너 지금 너무"
"그래, 내가 너를 두고 약혼을 했지. 그래서 지금 이렇게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고."
"진정 좀 해."
"자격 없는 거 알아."
"한유진."
"그런데 이건 아니야. 네가 뭐가 아쉬워서 걔랑 그러고 있어."
"거기까지만 해. 너 지금 충분히 선 넘었"
"바람이잖아. 그렇지 않아도 가까운 사람들한테까지 숨겨가며 만나는데, 연애했던 거 헤어졌던 거 마음 놓고 드러내지도 못 하는데 . 그건 너 조차도 떳떳할 수 없는 거잖아!"
판사님을 보고 와서 그런가 오늘은 맞는 말만 골라서 했다. 刘知珉은 쓰게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떳떳할 수 없지 절대. 그래서 나도 세컨드 그 이상은 안 바라는 거고. 나란히 식당을 빠져 나가는 모습을 떠올리던 刘知珉이 씁쓸한 한숨을 내뱉으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계속 만날 거 아니지."
저녁은 약속 있어요. 화면에 떠 있는 미리보기를 옆으로 밀어내고 주머니 속에 핸드폰을 넣어뒀다.
"知珉아…"
"그건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서 잘 모르겠네."
"왜 그런 취급까지 받으면서 걔를"
"언제는 안 그랬어?"
식당이 어느 쯤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늦지 않게 도착하려면 택시를 타든, 차 키를 가져오든 양단간에 결정해야 됐다. 刘知珉은 정문 너머를 살펴보다 한유진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래. 한유진은 입을 꾹 다물고 주먹만 세게 움켜쥐었다.
"데려다 달라면 그렇게 하고, 싫다고 하면 택시 잡아주고."
"……"
"내 입장에서는 너나 金旼炡이나 별 다를 거 없어."
눈물을 참고 있는 거다 저건.
"…어떻게 같아."
"늦으면 회장님이 걱정하셔."
"내가 너를….얼마나 좋아하는지 다 알면서……"
"아니까 이러는 거야. 너 아닌 다른 사람이 이런 식으로 나왔으면 쳐다도 안 봤어."
사무실까지 올라갔다 오는 것보다는 차라리 같이 택시를 타는 게 속 편했다. 刘知珉은 정문으로 걸어가며 다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잠금을 풀고 자판을 빠르게 눌렀다. 점심 챙겨서 먹어요. 저는 야근하고 들어갈 것 같아요. 저장된 이름이 오늘따라 유난히 눈에 밟혔다. 한유진과 金旼炡, 굳이 저울에 올려두고 싶지는 않았다. 손 안에서 느껴지는 짧은 진동은 애써 무시했다.
[잠깐 나올 수 있어요?]
밝아진 화면을 확인하고 핸드폰을 집어든 刘知珉이 짤막한 문장을 눈으로 읽다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잠깐 나올 수 있어요. 시선을 위로 조금 올리면 문자를 보낸 이의 저장명이 보였다. 旼炡이. 刘知珉은 펜을 서류 위로 대충 던져두고 핸드폰을 바로 잡았다.잠시 망설이다 답장을 보냈다. 어디로요? 책상 구석으로 치워둘까 했지만 혹시 몰라 일단은 핸드폰을 쥔 채로 화면을 빤히 바라봤다. 예상했던 대로 읽음 표시가 금방 나타났다. 그 아래로는 텍스트를 입력 중이라는 표시가 떠올랐다.
[지검 앞이요]
이것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했지만. 刘知珉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가로등이 켜져 있기는 했지만 사방이 깜깜했다. 그런다고 보일 리가 없는데 괜히 밖을 두리번거리다 핸드폰을 쳐다봤다. 그새 문자 몇 개가 추가 되어 있었다.
[간식 받은 게 많아서 따로 챙겨뒀어요]
[별로 안 달아요]
[비싼 것도 아니고]
빠르게 답장을 보내고 사무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다가 슬리퍼가 꺾여 넘어질 뻔도 했다. 월요일이라 야근하는 사람이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니까. 문이 열리자마자 밖으로 나온 刘知珉이 고개를 빼고 유리문 너머를 살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마땅히 보이는 건 없었다. 경비실을 슬쩍 바라보다 출입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로비는 다행스럽게도 텅 비어 있었다.刘知珉은 문 옆에 붙어 있는 열림버튼을 누르고 바깥쪽으로 손잡이를 밀었다. 적당히 미지근한 밤공기가 금방 살갗을 감쌌다. 눈에 익은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刘知珉이 조심스레 그 곁으로 다가갔다.
"택시 타고 왔어요?"
두어 발자국을 남겨두고 말을 걸자 앞에 서 있던 사람이 뒤를 돌았다. 刘知珉은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서서 金旼炡을 눈에 담았다. 얼굴을 반쯤 가리던 마스크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대답은 들은 것도 같고 못 들은 것도 같지만 딱히 중요하지는 않아 다른 질문을 던졌다. 저녁은 먹었어요? 바보 같은 질문이기는 했다. 약속이 있다는 사람한테 물어볼 건 아니었는데, 괜히 어색해서 아무 말이나 꺼냈다.
"검사님은요?"
"동기랑 샌드위치 나눠 먹었어요."
"아 이거…사무실 직원분들이랑 같이 드세요. 넉넉할 거에요."
건네는 종이가방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늦게까지 해요 오늘도?"
"일단은 뭐…하던 거는 끝내고 가려고요."
"저는 내일 스케줄이 아침에 있어서요."
집에 가지 않는다는 말을 에둘러 하는 것이었다. 刘知珉은 가방 끈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할 말은 없었는지 金旼炡도 刘知珉을 힐끔 쳐다보다 청사 건물로 고개를 돌렸다. 刘知珉은 그 시선을 따라 건물을 바라봤다.
"혹시 피곤해요?"
"일찍 자기는 해야 될 것 같아요."
"그렇구나."
"검사님은 안 피곤해요?"
"저는 익숙해서 괜찮은데 잠깐 들어와서 차라도 한잔 할래요?"
뺨에 닿는 눈빛을 모른척하고 창문만 세어봤다. 사무실은 저쯤에 있으려나 싶었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지만 걷어 올린 셔츠 소매를 붙잡아 오는 것을 눈치채고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직원들이 대부분 퇴근했는지 타고 왔던 엘리베이터도 로비층에 멈춰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안에 들어가서는 옆이 아닌 앞뒤로 나란히 서서 계기판만 응시했다. 아침에 스케줄 있으면 새벽에 샵에 가서 준비하겠네요. 그걸 검사님이 어떻게…아 연예인 만난 적 있지. 말을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아서 사무실에 도착할 때까지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처음 오는 것도 아닌데 金旼炡이 묘하게 낯을 가리는 것 같아 刘知珉은 자리를 안내하며 종이가방에서 박스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뒀다.
차는 뭐로 줄까요. 아무거나요. 그런 이름을 가진 차는 없어요. 검사님 마시는 거랑 같은 걸로 마실게요. 저는 커피 마실 거에요. 안돼요. 이유는요. 일하면서 많이 마셨을 거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러면 히비스커스로 주세요. 그래요. 그게 왜 있어요? 저희 수사관님이 좋아해서 사뒀어요. 테이블을 벗어난 刘知珉은 정수기 근처 서랍을 뒤적여 티백과 종이컵을 꺼내들었다. 실은 카페인이 없는 차라며 선물 받은 거였다. 이런 것까지 챙겨줄 사람은 당연히. 머릿속에 떠오르녀는 얼굴은 구석으로 밀어두고 잔에 뜨거운 물을 받아 金旼炡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한 30분이면 되거든요."
종이컵을 밀어주며 刘知珉이 말했다. 의자에 앉아 사무실을 둘러보던 金旼炡은 앞을 올려다보다 刘知珉과 눈이 마주치면 슬쩍 시선을 피했다.
"…뭐가요?"
"마무리만 하면 돼요. 집에 데려다줄게요 같이 가요."
"괜찮아요 검사님 바쁘"
"간식 받은 값은 해야죠 저도."
박스에서 쿠키 몇 개를 꺼내 손에 쥐여준 다음에는 책상으로 돌아와 서류를 살폈다. 경찰에서 받은 파일과 진술서를 비교하고, 기록관 사이트에 접속해 비슷한 사건을 검색했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공간을 유유히 돌아다녔다. 조서를 작성하던 刘知珉이 잠시 팔짱을 끼고 모니터를 주시했다. 오탈자를 검수하고 문장호응을 살펴보다 골무를 끼고 옆에 둔 서류를 빠르게 넘겼다. 그러다 왼쪽에 쌓아뒀던 서류철에서 자료를 찾을 즈음이었다.
"왜요?"
"…뭐가요?"
기분탓인지 모르겠지만 자꾸만 눈이 마주치는 것 같았다. 혹시 할 말이 있나 싶어 물어봤더니 金旼炡은 도리어 제게 되물었다.
刘知珉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다시 서류로 관심을 돌렸다. 당장 내일 아침에 차장까지 검토를 올려야 하는 건이기 때문에 한눈 팔 시간이 없었다. 플래그가 붙은 쪽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형광펜이 그어져 있는 부분을 요약하여 한글 파일에 받아 쓰려는데…결국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몰래 헛웃었다. 어쩌려고 저러지 진짜. 뒷목을 주무르던 刘知珉이 의자를 뒤로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아니나다를까 시선은 자연스럽게 위로 따라붙었다.
파일을 저장한 뒤에는 책상에서 빠져나와 복사기 근처에 세워져 있는 간이의자를 들고 원형 테이블로 향했다. 金旼炡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刘知珉을 지켜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어요? 맞은편에 의자를 두고 자리잡은 刘知珉은 등받이에 기대 앉으며 팔짱을 꼈다.
"5분이면 돼요?"
"…네?"
"목 빠지겠어요 그러다."
나름 신경 쓰여서 와줬더니 이제는 도리어 책상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刘知珉이 상체를 테이블로 기울여 金旼炡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지난 번에 왔을 때는 나 안경 안 썼었어요?"
"…기억 안 나는데요."
"그러면 이거 때문이 아닌가."
刘知珉은 손을 들어올려 안경테를 붙잡았고, 金旼炡은 그런 刘知珉의 손으로 제 손을 겹쳐뒀다. 뭘 하지도 않았는데 볼이 달아 올라 있었다.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刘知珉이 아래로 손을 내렸다. 金旼炡은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슬쩍슬쩍 얼굴을 쳐다봤다. 포개어진채로 책상 위에 올려진 손을 바라보다 넌지시 말을 걸었다. 나도 파스 붙일 걸 그랬어요. 金旼炡이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내일은 무슨 스케줄이에요."
"…방송국 인터뷰요."
"언제 끝나요."
"오후에 감독님이랑 미팅 끝나면…같이 저녁 먹을 것도 같아요."
"그렇구나."
"당분간은…집에 못 가요. 스케줄이 들쭉날쭉해서."
"상관 없어요."
5분이 이렇게 길었던가. 刘知珉은 피아노 치듯 오른손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부터 준비할 것을 생각하면 슬슬 정리하고 데려다 줘야 할 것 같았다.
"…검사님."
"네."
"저는 상관이 많아요."
컴퓨터를 끄고, 서류를 책상에 넣어두고, 짐을 챙겨야 했다. 그래야 늦지 않게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컵을 치우던 刘知珉이 金旼炡을 내려다봤다.
"검사님 부담스러울 거 아는데요…그래서 저도 내내 고민하다가 말하는 건데요."
"뭐를요."
"보고싶을 때는 어떻게 해야 돼요?"
그러니까 이건. 이런 시간에, 이런 거리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는 건 조금 많이…하다는 거다.
"촬영 들어가면 진짜 얼굴도 잘 못 보는,"
종이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刘知珉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옆으로 대충 내던졌다. 한 손으로는 테이블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로는 金旼炡의 머리를 감쌌다. 입술이 닿자마자 뜨거운 숨결이 부셔졌다. 누가 따라오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조급해지는 기분이었다. 호흡이 자꾸만 무너지자 金旼炡은 마치 달래는 것처럼 刘知珉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드는 것만 같았다. 잠깐 입술을 떼고 숨을 고른 刘知珉은 金旼炡을 바라보다 시계를 확인했다.
"비밀번호 바꿨어요?"
"…네?"
"12시 전에는 재울게요."
동의를 구하듯 金旼炡을 내려다봤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면 다급하게 입술이 맞붙었다.
언젠가는 정리를 해야 되겠지. 손바닥에 겨우 들어오는 증명사진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던 金旼炡은 한숨을 크게 내쉬고 가방을 뒤적였다. 지갑을 꺼낸 뒤에는 카드수납칸 안으로 조심스럽게 사진을 밀어넣었다. 차에서 혼자 대기하며 쉴 때나 겨우 꺼내보겠만 그게 어디인가 싶었다.
남는 건 사진 뿐이라는 말은 그다지 공감을 못하는 편이었다. 주변에서는 직업이 직업이기 때문에 아쉬움이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당장 인터넷에 이름만 검색해도 유튜브 영상이며 기사사진이며 쏟아지는 자료가 한가득이었다. 그러니 아쉬운 건 또 金旼炡이다. 법조계에서 유명하다고 해도 어째 됐든 일반인은 일반인이었다. 임관식 때 찍힌 사진, 공무원증에 박혀 있는 사진. 핸드폰으로 볼 수 있는 건 그 두 개가 전부였다. 최소한 5년 이상은 됐다는 얘기를 듣고 최근에 찍은 건 없냐고 물었더니 책상 서랍이며 가방이며 여기저기를 뒤적이다 사진관 로고가 박힌 종이봉투를 꺼냈다. 올해 초에 주민등록증을 재발급 하면서 찍은 거라는 설명을 듣고 나서야 金旼炡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말했던 건데, 刘知珉은 의외로 흔쾌히 반명함판 사진을 건네주는 것이었다.
진짜 가져도 돼요? 정말로? 나 주는 거에요? 이렇게 쉽게 주는 것도 이상하다 싶어서 몇 번이나 되물었더니 싫음 말라면서 도로 사진을 봉투 속에 넣어버리더라. 줬다 뺏는 게 어디에 있어요. 아직 안 줬는데요. 그러면 보여주지를 말든가. 가지고 있는 사진 없냐고 했잖아요. 아 몰라 그냥 택시 타고 집에 갈래 따라오지마요.
물론 한 발자국도 못 움직였다. 오히려 刘知珉 허벅지에 앉아서 당황하다가 그대로 입술이나 내어줬다. 넘어지지 않게 허리를 받쳐주는 팔은 여전히 탄탄했다. 키스를 하다가 저도 같이 조급해져서 양 손으로 刘知珉의 얼굴을 감쌌다. 숨이 차오르면 목을 끌어안고 무너지듯 刘知珉에게 안겼다.
'간식 고마워요.'
'그러면 나중에 소원 하나만 들어줘요.'
'계좌 불러요.'
어깨를 깨물려고 했더니 귀신 같이 알아차리고 제 입에 볼펜을 물려줬다. 개새끼는 나라니까 그러네. 낮게 내리깐 목소리를 좋아한다는 건 말하지 않아야겠다 싶었다. 입에 있던 것을 빼서 펜홀더 안에 넣어두고 책상 정리를 거들었다. 일할 때는 원래 안경 써요? 컴퓨터 볼 일이 많아서요. 불편할 법도 한데 刘知珉은 비키라는 말 없이 서류를 구석에 밀어냈고, 그 중 몇몇개는 골라 서랍 안으로 치워뒀다. 책상만 훑어봐도 성격이 훤히 드러나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에 모니터 바로 아래에 있는 피규어를 발견했다. 컴퓨터 전원을 끈 刘知珉이 습관처럼 제 볼을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렸다.
'저게 뭐에요?'
'흰둥이요.'
'설마 검사님이 직접 샀어요?'
'선물 받기는 했는데…그 표정은 뭐죠.'
안 어울렸다. 刘知珉과 흰둥이라니. 강아지보다는 고양이를 더 닮았는데. 살짝 뻗친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어주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뜨는 것까지. 손을 잘 타는 건 언제 봐도 신기하기는 했다. 이따금씩 몸을 구겨가며 제게 안겨오는 것도 그렇고, 손을 멈추면 계속하라는듯 저를 지그시 바라보는 것도 그렇고. 저만큼이나 刘知珉도 달라지기는 했구나 싶었다. 원래 이런 모습인지 그게 아니면 저에게 맞춰주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 쳐다보고난 뒤에는 조심스럽게 다리에서 내려와 바닥을 딛고 섰다. 刘知珉도 뒤따라 의자를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옷걸이에서 자켓을 챙겨 책상을 벗어났고 그대로 사무실을 빠져나와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검사님. 왜요. 편의점 잠깐 들러야 해요. 집에 없어요? 그때 숨겨놨던 것도 검사님이 다 찾아서 썼잖아요. 안 충분했어요 참고로. 미쳤어요? 중간에 누가 눈물 흘리는 바람에 한 번 할 거 두 번 해서 그렇잖아요. 직장에서 못 하는 말이 없다 취향 왜 그래요 진짜. 솔직히 우는 건 좀…그래요.
刘知珉이 한 손으로 운전하는 차를 타고 오는 동안, 편의점에 들른 김에 제 몫의 아이스크림까지 사와는 걸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이 정도도 충분히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더이상 욕심 내지 말고 이렇게 만나 시간을 보내는 것에 만족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하지만 한편에서는 부질없는 의문도 피어오르게 되는 거다. 연애랑 세컨드는 얼마나, 어떻게 다를까. 이제는 제가 먹던 아이스크림을 건네줘도 거리낌 없이 받아 먹는 刘知珉을 지켜보다 보면 조수석에는 저만 앉을 수 있다는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됐다. 만약에, 아직까지는 정말 만약이지만 이 사람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다면 나는 미련 없이 놓아줘야 하는 게 맞는 건가. 그게 아니면 연애는 연애고, 세컨드는 세컨드니까 나랑 계속 만나야 된다고 억지를 부려야 할까. 애초에 우리가 시작한 이유는, 거슬러 올라가 보면 刘知珉이 제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먼저 연락한 이유는. 문득 그 날이 떠올랐다.
"…얼마나 만났길래"
"얼마 남았냐고? 5분 정도? 거의 다 도착했어."
운전석에서 넘어오는 대답에 金旼炡은 흠칫 놀라며 어깨를 떨었다. 매니저는 룸미러로 뒤를 힐끔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어제 일찍 들어가지 않았어? 태준이한테도 너 아침에 스케줄 있으니까 저녁만 먹고 들여보내라고 말해놨는데. 뜨끔했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9시 조금 넘어서 헤어졌어. 신호에 따라 차가 멈추자 매니저는 아예 고개까지 돌려서 뒷좌석을 살폈다.
"너 요즘 잠 잘 못 자니? 고민 있어?"
"고민은 무슨…그냥 촬영 앞두고 긴장해서 그렇지."
"태준이도 엄청 걱정하더라."
"…오빠가 뭐라고 했어 언니한테?"
"잘 좀 챙겨달라고. 걔도 바로 차기작 준비 들어가야 해서 바빠질 거라며."
"메디컬이 까다롭잖아 여러모로."
"아무튼 일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신경 쓰이는 거 있으면 바로 얘기해줘. 혼자서 끙끙거리다가 또 병 나지 말고."
金旼炡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최근에는 약속을 잡으면 미루거나 빼는 일 없이 최대한 태준이 하자는 대로 따르고 있었다. 하루 걸러 하루는 꼭 얼굴을 봤다. 데이트할 때는 나름 집중한다고 핸드폰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러다 보면 知珉에게서 온 문자에 대한 답장을 한참 뒤에야 보내기도 했다. 점심을 다 먹고 나서, 커피를 다 마시고, 영화가 끝난 다음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刘知珉이 밀려나는 것은 제가 가장 원하지 않았으나 당장은 가장 앞에 세워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독한 모순이었다. 텁텁한 한숨을 삼킨 金旼炡은 메이크업을 마치고 다시 차에 오를 때까지 잠잠한 핸드폰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 전화를 해보려 했지만 망설이다 타이밍을 놓쳐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다른 배우들과 함께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밤새 같이 있기는 했지만 서로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편이었다. 제가 스케줄이 없다고 해도 刘知珉이 출근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니 아쉬움은 접어두고 가만히 안긴 채로 등만 토닥였다. 여운이 가시면 피로는 금방 찾아오는 것 같았다. 촬영은 언제 들어가는지, 상대 배우는 어떤지, 방송은 올해 나오는 건지 물어보던 목소리는 조금씩 늘어지고, 돌아오는 대답은 점차 늦어지고 나중에는 아예 목소리가 들려오지도 않게 됐다.
새벽에 나가야 하면서도 잠든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그러니 12시 전에 재우겠다는 약속을 지켰는데도 지킨 게 아닌 게 되어버리는 거다. 金旼炡은 녹화장 맞은편에 걸린 커다란 전자시계를 올려다보다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집에 나온지 반나절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보고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이 정도면 정말 너도 너무한 거다 旼炡아. 정신차리라는 듯 빠르게 고개를 내젓고 뒤를 돌아 정렬된 의자를 향해 다가갔다.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이현은 金旼炡에게 질문지를 건네며 그 얘기는 빠지지 않는다며 다소 질색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래서 연애는 할 수 있는대로 최대한 숨기는 건데 저는 오히려 대놓고 드러내는 것을 택해버렸으니. 그때는 그것이 저를, 그리고 제 주변을 지키는 방법이라 여겼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金旼炡은 입 밖으로 새어나오려는 한숨을 겨우 목구멍 너머로 밀어넣고 질문지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직접적으로 이름을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주어가 분명한 질문이 서너 개 정도 적혀 있었다. 매번은 아니지만 인터뷰를 할 때마다 이따금씩, 잊혀질만 할 즈음에 언급되는 주제이기 때문에 각각의 상황별로 정리해둔 뻔한 답변 리스트까지 따로 있었다. 나름 쌓아온 3년의 노하우였다. 인터뷰 같은 걸 따로 찾아볼 리는 없겠지. 와중에도 이런 고민이나 하고 있는 스스로가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질문지를 찬찬히 읽으며 대답을 대강 추려놓은 金旼炡이 반대쪽으로 다리를 꼬아 앉으며 다시금 시간을 확인했다. 마치 외출한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가 된 기분이었다.
"맥주 두 잔인가…"
-취해서 기억을 못 하는 건 아니라고 믿을게요
"그 정도로 알쓰는 아니거든요."
식당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오묘한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던 하늘이 두어 시간 사이에 온갖 색을 덧입고 그 명도를 낮추었다. 金旼炡은 핸드폰을 고쳐잡으며 건물 끝으로 걸어갔다. 발걸음이 꼬여 살짝 휘청거렸지만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어 섰다. 첫 회식이니만큼 분위기를 맞춘다고 음료수 대신 술을 받아마신 게 화근이었다. 보나마나 얼굴이며 목이며 새빨갛게 변해 있을 거였다. 그러니 감독님 잔에 소맥을 말던 이현이 너는 바람 좀 쐬고 와야되겠다며 등을 떠밀었겠지. 金旼炡은 손바닥으로 볼을 만져보다 고개를 내저었다. 얼핏 들었지만 슬슬 마무리 하고 2차 간다는 소리도 나왔던 것은데, 술에 물 탄듯 물에 술탄듯 괜히 휩쓸렸다가는 두 발로 걸어나가지는 못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스케줄은 다 끝난 거에요?
"일단 오늘은요."
-바빠졌네요 진짜
"조만간 검사님 따라잡을걸요."
낮은 웃음소리가 스피커를 건너 넘어왔다. 운동화 앞코로 바닥을 툭툭 차던 金旼炡이 뒤따라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건 칭찬 못 해주겠는데
"그러면 뭐 하면 칭찬 해줄 건데."
-…두 잔 마신 거 맞아요?
"사실 기억 안 나기는 해요. 그냥 주는대로 먹었어."
맥주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소주였을 수도 있고. 이 정도는 맛도 거의 안 난다며 조금씩 음료수에 섞어주는 바람에 무슨 술을 어느 정도 마셨는지는 저 역시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하나였다. 刘知珉과 전화를 하고 있을 때는 이미 주량을 아슬아슬하게 넘어섰을 것이었다. 기분 좋게 취했다, 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잠시 동안은.
“오늘 저녁은 국장님이 사는 거래요.”
-아까 얘기해줬어요
“소고기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하셨어요, 명함도 주셨다?”
-그것도 얘기했던 것 같고
“음....저도 명함 주면 안 돼요? 검사님도 명함 있어요? 그거는 가지고 있어도 되지 않을까?”
한적한 골목을 걸어다니며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다. 머릿속에서는 일하고 있는 사람한테 민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과 하루 종일 못 봤는데 전화 한 통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멱살을 잡고 누가 이기네 지네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편의점에 가서 숙취해소제라도 사 먹어야 할 것 같았다.
-필요하면 줄게요
“검사님.”
-말해요
“왜 요즘은 나한테 잘해줘요?”
술기운을 구실 삼아 이런저런 말을 다 해보는 거다. 대부분이 맨정신에 꺼내지 못 하는 것들이었다. 알콜은 사람을 솔직하게 만드는 건지, 그래서 사람은 비겁해지는 건지. 불 켜진 간판을 바라보던 金旼炡은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대답을 기다렸다. 밖으로 나와 통화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핸드폰은 벌써 뜨끈뜨끈했다.
-받은 만큼은 해야죠
"……"
-물론 旼炡씨 따라가려면 멀었지만
"……"
-그래도 노력 중이에요 나름
"……"
-어렵네요 이건 나도
손끝에 달라붙는 밤공기도 더이상은 시원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되돌려 받기 위해 애를 쓴 건 아니었다. 섭섭하고 서운했던 적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 감정일 뿐이었다. 오로지 金旼炡이 감당해야 할, 마땅히 金旼炡에게 주어진 몫이었다. 공연히 속이 쓰렸다.
“늦게 끝나요 야근?”
-거기는 어떤데요
“1차는 마무리 되는 것 같고...”
-2차도 있나보네요
“아마도요.”
-갈 거에요?
나온 사람도 없는데 괜히 출입문 쪽을 쳐다봤다. 2차는 본인에게 맡기라며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들던 피디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주연은 필참이라는 말은 농담이겠지. 잠시 고민하던 金旼炡이 대답하려던 참이었다.
-안 갔으면 좋겠는데
갈 생각은 없지만 이상하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이미 많이 마신 것 같아요
“......”
-빠져나오기 곤란한 자리에요?
“.....”
-필요하면 불러요 핑계할게요 내가
이러면 정말 착각에 빠지게 되는 거다. 마치 내가 刘知珉의, 刘知珉이 나의 무언가가 되어버린 듯한.
혹시 마음이 바뀔까 싶어 주소도 모르면서 일단 내뱉고 봤다. 여기가 어디냐면요. 金旼炡은 건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취하긴 취한 모양이었다. 가게 이름마저 단번에 떠오르지 않았다. 말끝을 흐리던 金旼炡이 식당 앞에 있던 입간판을 확인하기 위해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刘知珉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리고 刘知珉이 저를 부를 때는.
“旼炡아.”
취해서 잘못 들었다고 믿고 싶었다. 취했으니 잘못 본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주먹만 세게 움켜쥐었다. 손톱이 여린 살을 파고들어도 그저 가만히, 출입구 근처에 서 있던 사람이 다가와도 가만히 지켜만 봤다. 착각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걸 고마워 해야 되는 건가 싶었다. 때론 다정함이 야속했다.
-무슨 일 있어요? 괜찮아?
“많이 마셨어? 목까지 빨갛다.”
-金旼炡씨
“집에 가자, 저기도 끝난 분위기더라.”
-누구......아...
“누군데? 아까부터 전화했는데 계속 통화중이더라”
건네는 숙취해소제를 받아들지도 못했다.
-조심히 들어가요
“이마도 뜨겁네.”
-끊을게요
후회는 언제나 뒤늦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애초에 연락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핸드폰을 쥐고 있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정리하라던 강효림의 타박이 옳다는 것이 마침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술 못한다고 얘기 했는데 저 감독님이 진짜. 내일 스케줄 있다고 하지 않았어?”
“....오빠.”
“차 바로 앞에 있어. 이러다 붙잡히면 나란히 2차 가겠다.”
잡힌 손을 뿌리치지도 못했다. 그럴 정신도, 자신도 없었다. 오늘은 집에서 쉬어요. 마지막으로 들었던 그 말이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그러다 보면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벨트도 이미 채워졌고, 차체는 어느덧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취했으니 집에서 쉬어야 하는 건 맞기는 했다. 지금 당장 서초동으로 간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미 다 들었으니까, 누군지 눈치챘을 거니까, 어떤 상황인지도 뻔했으니까.
金旼炡은 열기가 가시지 않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내일은 오후 늦게 나간다고 했지?”
“......”
“그러면 점심 같이 먹으면 되겠다.”
“......”
“아니면 스케줄 끝나고 저녁에 볼까? 인터뷰면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고...그때 못 봤던 영화 보러 가는 건 어때?”
차가 멈췄다. 신호에 걸린 듯 했다. 핸드폰을 세게 움켜쥔 金旼炡이 고개를 들고 정태준을 바라봤다. 기어코 그 마음이 죄책감마저 앞섰다.
“나 내일은 약속 있어.”
“저녁에? 그러면 점심에 만나서”
“미안해, 점심도 안 될 것 같아.”
刘知珉은 출근 할 거다. 어쩌면 야근을 할 수도 있다. 점심도, 저녁도 다른 사람과 먹을 가능성이 더 많았다. 밤 늦게야 잠깐 얼굴을 보고 말겠지만 지금처럼 엇갈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신호가 바뀌었다. 뒤에서는 연신 클락션을 울렸다. 서서히 차가 출발했다. 金旼炡도 앞을 쳐다보며 한숨을 삼켜냈다. 도착하기 직전에야 정태준은 입을 열었다. 데이트는 주말에 하자 그러면.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더더욱 망가트릴 수는 없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金旼炡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에 벨트를 풀었다. 비상등 깜빡이는 소리가 유독 크게 차 안에 울려퍼졌다.
“데려다 줘서 고마워.”
그는 말없이 앞을 바라보다 잠금을 풀었다. 金旼炡은 디스플레이 속 시간을 확인하고 핸드폰 화면을 두드렸다. 알 수 없는 침묵이 길어지고 있었다. 태준 오빠. 나지막이 그를 부르자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해왔다.
“운전 조심히 하고...도착하면”
“旼炡아.”
손잡이를 잡으려던 손이 미끄러졌다.
“바빠서 그런거지?”
“...오빠.”
“나도 영화 끝낸지 얼마 안 됐고, 너는 이제 바로 드라마 들어가야 하고.”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서운하다거나, 섭섭하다거나, 미안하다거나. 무엇 하나 콕 집어 골라낼 수 없었다. 표정과 목소리는 담담하고 차분했다. 올곧은 시선은 오늘도 변함이 없었다.
“요즘 고민 많은 거 알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없는 것 같더라.”
“......”
“시간이 필요해?”
“......”
“그렇게 할까 우리?”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었다. 단순한 술기운으로 치부하지 못할 현상이었다. 金旼炡은 야트막한 한숨을 터트렸다.
"주말까지 시간 남았으니까 생각 더 해보고 알려줘."
"…미안해."
"너가 하자는 대로 할게."
눈동자에는 오롯이 제가 담겨 있었다. 깊고 아득하고 나긋한. 누군가 아주 작고 날카로운 바늘로 가슴 한구석을 쿡쿡 찌르는 것만 같았다. 보이지 않지만 통각은 점차 번져나갔다.
"딱 하나만 빼고 旼炡아."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심히 들어가라는 인사도 그래서 꺼내지 못했다. 조수석에서 내린 金旼炡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지하주차장을 향해 걸어갔다.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서서 제 신발만 내려다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맑은 차임벨이 울렸다. 문이 열렸고, 또 문이 닫혔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어플에는 눈을 감고도 칠 수 있는 주소가 도착지로 설정되어 있었다. 속도 모르고 자꾸만 커져만 가는 감정은 이미 손아귀를 벗어난지 오래였다. 우스운 일이었다. 심장은 주먹만 하다는데, 어떻게 마음에는 사람을 담을 수 있는 걸까. 욱신거리는 통증은 애써 모른척 했다. 애써 끌어올린 입꼬리가 처량했다.
"들어가 피곤하겠다."
"오빠…"
"잘 자고, 푹 쉬고, 내일 스케줄 열심히 하고. 토요일에 보자. 식당은 내가 예약해서 알려줄게."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아주 모르고 싶었다 . 관심법 같은 건 배우지 않았는데 어째서 그 마음이 훤히 보이는걸까.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刘知珉은 굳어버린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춰섰다. 밖으로 나가지 못 하고 그저 멍하니 앞만 바라보다 문이 닫히기 직전에 열림 버튼을 꾹 눌렀다. 비밀번호를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왜. 언제부터 저렇게 기다리고 언제까지 저렇게 기다리려했던 걸까. 刘知珉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통화를 끝마쳤을 때가 지금으로부터 대략 세 시간 전이었다.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긴 刘知珉이 버튼에 있던 손을 떼고 앞으로 걸어갔다. 내딛는 발걸음은 그저 무겁기만 했다.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얘기할걸 그랬나. 당장은 내가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볼 자신이 없다고, 그러니까 오지 말라고. 그러나 생각과 행동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씁쓸한 한숨을 삼켜낸 刘知珉은 저를 올려다 보는 金旼炡에게 손을 내밀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눈시울이 그저 제 착각이기를 바라면서.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어요."
"……"
"비밀번호도 잊어버릴 정도로 취한 거에요?"
이런 모습을 마주하는 건 별로 달갑지 않았다. 刘知珉은 대답 없는 金旼炡을 지켜보다 쓰게 웃었다. 그저 착잡할 뿐이었다. 앞으로 내밀었던 손을 거두고 도어락 키패드를 빠르게 터치했다. 단조로운 알림음이 복도에 울려퍼졌다. 현관문을 환하게 열어둔 刘知珉이 다시금 아래로 손을 뻗었다.
"…미안해요."
"뭐가요."
"전부 다요…"
눈동자에는 금방 물기가 어렸다. 명치가 욱신거렸다. 刘知珉은 짧게 숨을 내쉬고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다소 억세게 힘을 실어 金旼炡을 일으켜세웠다. 더는 묻지 않았다. 도대체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그래서 어디에 있다가 온 것인지, 그러니까 무엇이 알고 싶은 것인지, 앞으로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자꾸만 왜 선을 넘으려는 것인지.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되돌아 가기에는 너무나 늦어버렸다. 예전처럼 金旼炡을 대할 수는 없었다.
분명 달라졌다. 저에게 보내는 金旼炡의 눈빛만큼이나, 金旼炡을 대하는 제 태도 역시 처음과 같지 않았다. 관계는 변해가고 있었다. 인정해야만 했다. 사람의 마음은 타인이 어찌 손을 쓸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그랬다. 스스로 조차 마음대로 다루지 못하는 것을 남이 무슨 수로. 현관으로 들어선 刘知珉이 제게 기댄 金旼炡은 능숙하게 부축하여 문을 닫았다. 바닥에 앉혀둔 다음에는 신발을 하나씩 벗겨 구석으로 정리했다. 검사님. 대답은 하지 않고 시선을 맞춘 채로 金旼炡을 바라봤다. 안아주세요. 망설임은 없었다. 무릎을 꿇고 다가가 조심스레 허리를 감았다.
"좋아해요…"
"알고 있어요."
"…여기까지만 할게요."
그러니까 밀어내지 마요. 刘知珉은 가만히 金旼炡의 등을 쓸어내렸다. 부탁인지 명령인지 모를 그 말은 번짓수를 잃고 애먼 곳으로 다다랐다. 목을 끌어 안은 채 저에게 바짝 기대려 드는 金旼炡을 달래듯 토닥이던 刘知珉이 나지막이 대답했다.알겠어요. 잠시 한 눈 팔 수는 있을 것이다. 때가 되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부드럽고 여린 살결이 입술에 느껴지자 刘知珉이 비스듬히 고개를 꺾고 눈을 감았다. 현관의 센서등은 꺼졌다 커졌다를 반복했다. 입술이 붙었더 떨어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맛 보다는 정성이라고 하지만 적어도 사람이 먹을 수는 있어야 하니까. 刘知珉은 냄비에서 끓는 해장국을 지켜보다 포장용기를 하나씩 치워 휴지통에 버렸다. 밥은 그릇에 옮겨 담아 전자레인지에 넣어뒀고, 밑반찬도 꺼내먹기 쉽게 접시에 정리했다. 아침잠이 많아도 평소에는 출근하는 저에 맞춰 일어나는 편이었는데 어제는 술을 많이 마시긴 한 모양이었다. 밤새 숙취로 끙끙거려 급하게 약국에서 숙취해소제를 사와서 먹이기도 했다. 출근 준비를 마친 刘知珉은 서재에서 포스트잇을 챙겨와 아일랜드 식탁 앞에 섰다. 잠시 고민하다 빠르게 메모를 남겨 냉장고와 전자레인지에 붙여두고서는 침실로 걸어갔다.
핸드폰 옆에 붙인 노란 메모지를 몇 번이나 눈으로 읽고 방을 나섰던 게 8시를 조금 넘겼을 때였다. 고맙다는 문자를 받았던 건 11시 20분, 야근하지 않고 들어 갈 거니까 저녁은 같이 먹자고 답장했던 게 11시 30분. 주고 받았던 연락을 훑어보던 刘知珉은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봤다. 검사님이랑 밥 한 끼 먹기 무지하게 어렵네요. 지각까지 해놓고 미안하다는 사과는 커녕 가벼운 너스레를 떠는데 입꼬리는 속절없이 위로 휘어졌다. 刘知珉은 내내 붙잡고 있던 핸드폰도 그제야 테이블에 내려두고 물을 따라 건너편으로 밀어줬다. 남자는 자켓을 벗어 의자에 걸어두고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내렸다. 나날이 희끗해지는 머리가 눈에 밟혔다.
"염색 좀 하시라니까."
"귀찮아, 어차피 나이 먹은 거 세상 사람들 다 아는데 뭐 하러 굳이"
"엄마는 아무 말 안 해요?"
"네 엄마는 아버지 얼굴이면 뭐든 좋아해서 괜찮아."
말로는 못 이겼다. 刘知珉은 작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남자의 쪽으로 그릇을 밀어줬다. 취임 직전에는 대검에서 근무를 했던만큼 어쩌다 시간이 맞으면 같이 점심이든 저녁이든 먹곤 했지만, 부친의 근무지가 과천으로 옮겨지며 따로 약속을 잡지 않는 한 얼굴을 보는 것이 어려워졌다. 오늘은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기 전에 저와 밥을 함께 먹기 위해 일부러 서초동에 들른 것이었다.
빠르게 음식을 비워내는 부친을 바라보던 刘知珉은 쓰게 웃으며 젓가락으로 밥을 헤집었다. 초임검사 때부터 든 습관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연세로만 따지면 퇴직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말년인데도 남들처럼 편히 쉬지 못하고 바쁘게 지내는 걸 보면 괜히 속상해지기도 했다. 물론 제가 그날 파티에서 남 의원에게 눈도장을 찍지 않았다고 해도 청문회는 무사히 통과 되었겠지만. 刘知珉이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두고 연신 잔을 만지작거렸다. 아침 안 드셨어요? 시계를 풀어 옆으로 치워둔 유 장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젓가락으로 刘知珉의 밥그릇을 가리켰다.
"너 그 꼴로 만났다가는 엄마 운다 진짜. 남의 여자 마음 아프게 하지 말고 잘 좀 챙겨 먹어 인마."
"유진이네랑 약속 잡혔어요 또? 저 진짜 바빠서 시간 빼기가 어려운"
"그건 우리끼리 먹고 끝냈어."
잔소리를 늘어놓을 줄 알았는데 어째서인지 별 말 없이 넘어갔다. 빈 잔에 물을 따라주던 유 장관이 刘知珉의 그릇을 확인하고서는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어가는 것이다. 지현이는 그날 당직이라서 못 온대. 刘知珉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칫하고 되물었다. 그날이요?
"엄마가 얘기 안 했어?"
"…최근에 연락을"
"이틀에 한 번은 하라니까. 하여간 자식놈들 키워봤자 하나도 소용없어요."
"그 날이 뭐에요 그래서?"
"나도 자세히는 몰라. 주말에 가서 들어. 유진이네랑 차 상무 쪽이랑 같이 잔치 연다는 것 같더라."
시계를 손목에 채우고 몸을 일으키는 유 장관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刘知珉이 핸드폰 벨소리를 듣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진이. 역시나 양반은 못 됐다. 미련없이 홀드버튼을 누른 뒤에는 뒤따라 일어나 식탁을 벗어났다. 복도를 걸어가며 유 장관이 물었다. 너는 만나는 사람 진짜 없어?
"바쁘다니까요."
"우리는 인마 딱 네 나이 때 살림 차렸어."
"외할아버지가 반대하셔서 동거부터 한 거잖아요."
"나는 네가 누구를 만나든, 외국인이든 외계인이든 무조건 찬성이니까 일단 데리고만 오라니까."
"외계인일 걸 또 뭐야…"
"백송이인지 천송이인지 나오는 드라마 몰라?"
종업원에게 카드를 받아든 刘知珉이 영수증을 구겨 휴지통에 던지고 먼저 가게를 빠져나갔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연애할 시간은 남겨 두면서 일 해. 이번에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주차장을 향해 걸어갔다. 식사를 마치고 먼저 나와 대기하고 있던 비서관이 刘知珉에게 눈인사하며 뒷좌석 문을 열었다.
주말에 늦지마. 낚시 같이 안 갈 거에요. 아 그러면 누구를 좀 소개시켜 주든가. 친구분들 많으시잖아요. 만나면 자꾸 헛소리만 해서 싫어 이 나이에 정치는 무슨 내가. 여의도에서 아직도 아버지 찾아요? 이것만 끝나면 은퇴하고 열심히 놀러다닐거야. 가기 전에 저 지방에 좀 내려주. 시끄러 자식아.
유 장관은 고생하라며 刘知珉의 어깨를 세게 두드려주고 차 안으로 들어갔다. 검은 세단이 미끄러지듯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刘知珉도 근처에 세워져 있던 본인의 차로 다가가 운전석 도어캐치를 잡아당겼다. 이내 왼손에 있던 핸드폰이 청아한 알림음을 내며 화면을 밝혔다. 운전석에 앉은 刘知珉은 시동을 걸고 핸드폰 잠금을 풀었다. 키패드를 빠르게 눌러 답장을 보낸 뒤에는 조수석으로 핸드폰을 던져뒀다. 또 다른 알림음이 울리며 디스플레이 화면이 바뀌었던 것은 주차장을 벗어난 직후였다. 刘知珉이 짤막한 숨을 내뱉으며 핸들에 달린 버튼을 눌렀다.
"통화 길게 못해. 용건만 간단"
-토요일에 시간 돼?
"선약 있어."
-일요일은
"출근해야 돼. 화요일에 공판 있어."
-그러면 그거 끝나고 봐 저녁에 내가 지검으로 갈게
"됐어 그냥 말해 뭐하러 굳이 그때까지
-얼굴 보면서 대화 하고 싶어 금방 끝날 얘기 아냐
"일단 시간은 비워둘게."
-知珉아 만약에 있잖아
"나중에 얘기하자. 나 이제 들어가 봐야 돼."
청사에는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것 같았다. 신호가 걸린 틈을 타서 핸드폰을 집어든 刘知珉은 새로운 문자를 확인하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들어오는대로 내 방으로 올라와.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먼저 끊을게. 차장이 찾아서."
종료버튼을 누르자마자 바로 연락처에서 차장의 이름을 찾았다. 그러나 전화를 걸지는 않았다. 뒤늦게야 깨달았다. 내가 먼저 한유진 말을 잘라내고, 한유진하고 전화를 하다가 이렇게 끊어버렸던 경우가 얼마나 될까. 까마득하기만 했다. 한유진이 저렇게 주저하면서 말했던 적은…있었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갈 때까지, 청사 건물을 향해 걸어가고 계단을 올라 출입문 안으로 들어서는 동안에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차장 검사실 앞에 도착했지만 좀처럼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다. 무슨 얘기를 꺼내기 위해 그렇게까지 뜸을 들였던걸까. 그 마음은 여전히 가늠이 되지 않았다.
"옷 갈아 입고 오라니까요."
"진짜로 할 거에요?"
"그러면 가짜로 하겠어요?"
소파 테이블로 핸드폰과 차키를 내려둔 刘知珉은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팔짱 낀 채로 金旼炡을 빤히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金旼炡이 뒤를 돌아섰다. 그냥 쳐다봤을 뿐인데 저 쪽은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받아치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봐요."
"검사님이야 말로 표정이 왜 그래요."
"거울이 없어서 확인을 못하겠네요."
"꽤나 못미더워하고 있는데?"
刘知珉이 왼손으로 제 얼굴을 더듬어보다 어깨를 으쓱였다. 金旼炡의 입가에서 헛웃음이 부서졌다. 결국 아쉬운 쪽이 다가가는 거다. 소매를 정리하며 刘知珉은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식탁 위에 늘어진 박스를 하나를 집어 들고서는 이리저리 살펴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金旼炡이 刘知珉의 어깨를 붙잡고 뒤로 밀어냈다. 刘知珉은 의자에 발이 걸려 엉거주춤 몸을 내리게 됐다.
"나가서 먹어도 돼요."
"집에서 먹는 게 편하잖아요."
"번거롭지 않을까요, 요리하고 치우고."
"검사님 그거 때문에 외식하자고 하는 거 아니잖아요."
아니라는 대답을 해야 되겠지만 잠시 뜸을 들이는 사이 손에 든 것을 빼앗기고 말았다. 金旼炡은 코웃음을 치고서는 싱크대로 걸어갔다. 밀키트가 잘 나오기는 했다. 그렇지만 식빵을 태우지 않고 탄 맛을 나게 하는 사람에게 설명서가 중요할까. 일단 포장지부터 뜯어내는 뒷모습을 가만히 구경하던 지켜보던 刘知珉이 의자를 밀어내고 식탁을 지나쳐 金旼炡에게로 다가갔다. 제가 도와줄 거는 없어요? 金旼炡은 입을 꾹 다문채 소포장된 재료들을 내려다봤다. 이것저것 꽤나 많이 들어있기는 했다.
"일단 면을 끓이고요…"
"그리고요."
"이거랑 이것들을 차례로 넣다가 볶은 다음에 소스를 넣어요."
"다 익은 면은 그 소스에 넣고 버무리면 되겠네요."
"네…그것까지만 해주세요."
그러면 내가 만드는 거 아닌가. 刘知珉은 서랍장에서 프라이팬을 꺼내 인덕션 위에 올려뒀다. 물을 받은 냄비는 그 옆으로 옮겼다. 어느덧 자리는 뒤바뀌었고, 포장지에 적힌 레시피를 외워둔 刘知珉은 순서에 따라 프라이팬 안으로 재료를 대충 넣어뒀다. 그 사이 물이 끓기 시작했다.
"360까지 세고 나한테 알려줘요."
면을 냄비에 넣은 다음에는 프라이팬을 올려둔 인덕션의 세기를 낮췄다. 먹기 좋은 냄새가 맡아지자 金旼炡은 신기한 눈빛으로 인덕션과 刘知珉을 번갈아 바라봤다.
"스테이크까지 먹을까요?"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 입으로는 숫자를 세고 있다. 刘知珉이 뒤돌아 식탁으로 향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또다른 박스를 뜯어 안에 든 것을 하나씩 꺼냈다. 레시피를 읽다가 핸드폰을 가지러 갈까 했지만 바로 옆에 썩 괜찮은 타이머가 있었다. 刘知珉은 화구에 새로운 프라이팬을 올려놓고 金旼炡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것 좀 입혀줘요. 초를 세던 金旼炡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刘知珉을 쳐다봤다.
피식 웃은 刘知珉이 등 뒤로 손을 뻗자, 金旼炡은 마치 안기듯 제 품으로 들어왔다. 아직 해 안 떨어졌어요. 刘知珉은 金旼炡의 귓가에 속삭이며 앞치마 끈을 풀었다. 살짝 드러난 목덜미에 입을 맞추는 건은 놓치지 않고 앞치마를 벗겨냈다. 숫자는 300 언저리에서 멈추었다. 刘知珉이 앞치마를 대강 목에 걸고 인덕션 앞에 섰다. 얼추 이 정도면 됐다 싶어 냄비에서 면을 꺼내 소스가 담긴 프라이팬으로 옮겼다. 젓가락으로 몇 번 휘적이며 골고루 섞으면서 다른 프라이팬에서는 스테이크를 익혔다.
"180초 두 번 세면 돼요."
이러면 나름 같이 요리한 거니까. 먼저 완성한 파스타는 접시에 담아 식탁에 내려둔 刘知珉은 옆에 서 있는 金旼炡의 등을 떠밀어 의자에 앉혔다. 앞접시와 포크를 꺼내 식탁에 셋팅하는 행동에는 별다른 어색함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아주 드물지만 이따금씩 비슷한 메뉴를 해먹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집이 아니라 아예 레스토랑을 빌렸다는 게 차이점이기는 했다. 먹기 좋게 썰어 놓은 스테이크도 정갈히 옮겨 담은 뒤에야 刘知珉이 金旼炡의 맞은편에 자리잡았다. 金旼炡이 멀뚱히 저만 바라보고 있길래 음식을 덜어 앞접시에 놓아줬다. 맛있게 먹어요. 퇴근하고 오자마자 요리를 한 덕분에 꽤나 허기가 돌았다.
刘知珉은 셀러에서 와인을 꺼내올까 잠시 고민하다 아쉬움을 접고 묵묵히 음식을 비워냈다. 제 입에는 맞았는데 저 쪽은 어떨까 싶어 金旼炡을 슬쩍 바라봤더니, 어째서인지 건너편에서는 못마땅한 눈빛이 되돌아왔다. 다시금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하나씩 맛 본 刘知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맛있는데.
"왜 맛있어요?"
이게 무슨 홍시맛이 나서 홍시라고 했는데 어째서 홍시냐 대답했냐고 물어보는 상황이지. 접시 위에 조심스럽게 포크를 내려놓은 刘知珉은 괜히 金旼炡의 눈치를 살피며 되물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건가요? 그러나 金旼炡은 대답 하지 않고 덜어준 음식만 먹는 것이었다. 일단 맛은 있다니 다행이었다. 刘知珉이 다시 포크를 쥐고 식사를 이어갔다. 한동안은 식기 부딪히는 소리만 부엌을 채웠다. 냉장고에서 탄산수를 꺼내온 刘知珉은 잔에 반쯤 따라서 金旼炡에게로 쓰윽 밀어줬다.
"솔직히요."
그리고는 계속하라고 가만히 고개만 끄덕인다. 金旼炡이 입술을 달싹였다. 刘知珉은 다음 말을 기다리며 병에 담긴 탄산수를 마셨다. 거의 바닥을 드러낼 쯤에야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사람한테도 이렇게…잘 해주겠죠?"
"누가요?"
"……"
"아, 나요. 연애할 때는 다 그렇죠 뭐."
"연애하면…많이 달라져요 검사님?"
"글쎄요, 金旼炡씨는 어떤데요."
"잘 모르겠어요 저는."
자연스럽게 덧붙여지는 얼굴은 구석으로 치워버렸다. 실은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어서 되물어 봤을 뿐이었다. 페트병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던 刘知珉은 빈 접시를 한 곳에 모아 식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검사님. 유리잔에도 탄산수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주말에는 뭐해요?"
"본가 다녀올 거에요."
"…자고 와요?"
"그럴 수도 있고요."
"그렇구나."
"일찍 와요?"
대답 대신 고개만 가로저었다. 刘知珉은 자리에서 일어나 접시를 챙겨들고 싱크대로 걸어갔다. 치우는 건 제가 할게요. 뒤따라온 金旼炡이 제 옆에 서서 고무장갑을 가져갔다. 원래 요리한 사람이 마무리까지 하는 거라며 刘知珉은 스펀지에 주방세제를 짜내 거품을 만들었다. 그러면 헹구는 건 저한테 줘요. 굳이 이럴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거절하지 않고 거품이 묻은 접시를 옆으로 건넸다. 어쩌면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던 것도 같다.
이대로 지내는 것도, 가끔은 일찍 퇴근하는 것도, 집에서 밥을 해먹는 것도,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도, 퇴근하고 나서는 핸드폰을 확인하지 않는 것도, 철지난 예능을 보는 것도. 그렇게 金旼炡을 계속 만나는 것도. 刘知珉은 옆을 힐끔 바라보다 리모컨을 쥔 손에 조심스레 제 손을 올려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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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T it got me craz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