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구겨진지 오래인 컨버스 뒤축이 오늘은 웬일로 빳빳하게 펴져 있다. 그래도 나름 격식 차린다고 차렸나보지. 찬희는 식장 들어오자 마자 눈에 들어온 선우의 차림새에 비싯 웃는다. 결혼식장에 누가 저렇게 장례식처럼 올블랙으로 입고 오냐만은. 그 어려운 걸 해내는 게 선우다. 검은색 셔츠에 와이드 팬츠, 컨버스. 반면 찬희는 선우에게서 색을 다 빼앗아 온 사람마냥 화려한 차림새다. 사진 찍는 날이니 바짝 좀 꾸며봤다.
今天不知道为什么,早已皱巴巴的匡威鞋后跟竟然挺直了。看来他还是想稍微正式一点。찬희一进婚礼现场,就看到선우的装扮,忍不住笑了。谁会穿得像参加葬礼一样全黑来婚礼啊?但선우就做到了。黑色衬衫、宽松裤子、匡威鞋。相反,찬희则像是从선우那里抢走了所有颜色一样,穿得非常华丽。毕竟今天要拍照,所以特意打扮了一下。
"어, 형." “哦,哥。”
선우도 찬희를 발견했는지 손을 흔들며 다가온다. 찬희는 애써 웃음을 감춘다.
善宇也发现了灿熙,挥手走了过来。灿熙努力掩饰住笑容。
"좀 꾸몄네?" “有点打扮过头了吧?”
"아, 하지 마요." “啊,别这样。”
셔츠만 입으면 꾸몄다고 그래. 투덜거리 듯 말하는 선우에게 찬희는 모르는 척 묻는다.
只穿衬衫就说打扮过了。伞有些抱怨地说,灿熙装作不知道地问道。
"축의금 냈어?" “你交礼金了吗?”
"냈죠." “냈죠。”
"들어가자, 그럼." “那我们进去吧。”
식장은 인산인해다. 5월의 주말, 식장은 결혼하려는 예비부부들과 그 하객들로 발 디딜 틈 없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은비는 발이 넓었다. 찬희는 새삼 지난 세월을 실감한다. 찬희가 스무 살, 은비가 스물 두 살일 때 처음 만났었는데. 이제 은비는 서른 둘이 되어 드레스를 입고 5월의 신부가 된다.
婚礼现场人山人海。五月的周末,婚礼现场挤满了准备结婚的准新人和他们的宾客。当然,即使不是这样,恩妃的交际也很广。灿熙不禁感叹过去的岁月。灿熙二十岁,恩妃二十二岁时他们第一次见面。现在恩妃已经三十二岁,穿上婚纱成为五月的新娘。
워낙 인기 있는 달이라 은비의 전후로도 식이 빼곡했다. 덕분에 본식 역시 몰아치듯 치뤄졌다. 그래도 제법 재미있는 결혼이었다. 요즘 유행 대로 신부 행진과 주례는 빼고, 직접 만든 영상을 틀고, 친구들이 축가를 율동 같은 안무와 함께 직접 불렀다. 나란히 손 잡고 등장하는 은비와 그의 신랑을 보며, 이십대 초반 앳된 얼굴부터 현재까지 영화처럼 차르르 펼쳐지는 세월 묻은 사진들의 향연을 보며. 찬희는 덩달아 제 세월을 더듬어 본다. 그러면 어쩐지 까마득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由于是非常受欢迎的月份,所以在银妃的婚礼前后也排满了其他婚礼。因此,正式婚礼也像赶场一样进行。不过,这还是一场相当有趣的婚礼。按照最近的流行趋势,没有新娘入场和主婚人,而是播放了自己制作的视频,朋友们也亲自伴着舞蹈表演了祝歌。看着手牵手登场的银妃和她的新郎,看着从二十岁出头稚嫩的脸庞到现在如电影般展开的岁月沉淀的照片盛宴。灿熙也不由得回顾起自己的岁月。这样一来,总觉得有些遥远。
찬희는 은비의 신랑 될 사람을 안다. 찬희가 은비를 처음 만났을 때도 은비는 그 사람과 연애하고 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공연 때마다 은비를 찾아 왔으니 얼굴도 꽤 자주 본 편이다. 기껏해야 학교 내 동아리 밴드이니 부르는 곳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여기저기 얼굴 비추며 공연하러 다닌 편이었는데, 그때마다 그는 꼬박꼬박 은비를 위해 꽃다발을 들고 공연에 왔었다. 싫다 쪽팔린다 말은 그렇게 해도 꽃다발을 들 때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환히 웃던 은비의 얼굴을 기억한다. 냉정하고 사리분별에 밝은 은비보다 훨씬 감성적이고 로멘틱했던 사람. 그 김은비가 수줍은 얼굴을 하도록 만들던 대단한 남자. 그 남자의 옆에서 현재의 은비가 웃고 있다. 눈물 한 방울 없이 환하게.
찬희知道银比的未婚夫。第一次见到银比时,她已经在和那个人交往了。每次演出时,银比都会来找他,除非有特别的事情,所以他也算是经常见到她的脸。虽然只是学校里的社团乐队,邀请的地方不多,但他们还是到处演出,每次他都会带着花束来为银比加油。虽然银比总是说讨厌和尴尬,但每次拿到花束时,她的脸上总是露出无法掩饰的灿烂笑容。比起冷静和明辨是非的银比,他更感性和浪漫。那个让金银比露出害羞表情的了不起的男人。现在,银比在那个男人的身边笑得灿烂,没有一滴眼泪。
결혼할 수 있었으면 무언가 좀 달랐을까?
如果我们能结婚,会有什么不同吗?
그런 생각은 종종 불가항력처럼 찾아온다. 덩달아 까마득하게 떠오른 세월 속에는 은비의 남편만큼이나 빼곡하게 선우가 자리잡고 있다. 찬희는 저도 모르게 옆에 앉은 선우를 본다. 시선을 느낀 선우가 찬희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왜요. 입 모양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찬희는 고개를 젓고 다시 앞을 보려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선우에게 묻는다.
那样的想法常常像不可抗力一样找上门来。在漫长的岁月里,和银比的丈夫一样,善宇也占据了重要的位置。灿熙不由自主地看向坐在旁边的善宇。感受到视线的善宇转头看向灿熙。怎么了。嘴型是这么说的。灿熙摇摇头,正要重新看向前方,突然像是想起了什么似的问善宇。
"여자친구랑은 잘 지내?" “和女朋友相处得好吗?”
마침 축가가 끝나고 박수갈채와 함께 환호성이 터졌다. 찬희는 반사적으로 함께 박수를 친다. 우레와 같은 소음 속에서 선우가 대답한다.
正好祝歌结束,伴随着掌声和欢呼声响起。灿熙反射性地一起鼓掌。在雷鸣般的噪音中,善宇回答道。
"끝났어요." “结束了。”
아, 글쿠낭. 찬희는 박수 칠 때처럼 대답도 반사적으로 한다. 어쩐지 좀 머쓱하다. 연애한지 얼마 안 되지 않았나. 뻘하게 그런 생각이나 든다. 이제 선우는 먼저 제 연애사를 일일이 고해 바치지 않는다. 헤어진지 반년이 다 되어가니 그럴 법도 한데. 찬희는 여전히 이런 쪽에 있어서는 적응이 잘 안 된다. 그러니까, 내가 모르는 김선우, 같은 명제가.
啊,是这样啊。像鼓掌一样,灿熙也反射性地回答。总觉得有点尴尬。不是才刚开始恋爱吗?莫名其妙地有了这样的想法。现在善宇不再一一告白他的恋爱史了。分手已经快半年了,这也是理所当然的。灿熙在这方面还是不太适应。就是说,我不知道的金善宇,像这样的命题。
식이 끝나고 우르르 몰려가 사진을 찍었다. 그리곤 또 우르르 나와 밥을 먹으러 간다. 그제야 아는 얼굴들과 인사할 수 있었다. 식사 중인 선우와 찬희를 향해 재현과 상연이 다가왔다.
仪式结束后,大家蜂拥而上拍照。然后又蜂拥而出去吃饭。直到那时,我才有机会和熟悉的面孔打招呼。正在吃饭的善宇和灿熙,宰贤和尚延走了过来。
"어, 김선우. 오랜만이다?" “哦,金善宇。好久不见?”
재현의 말에 선우가 고개를 꾸벅 숙인다. 형, 나는 안 보여? 너는 자주 보잖아. 재현이 실없이 대꾸했다. 찬희도 딱히 뭘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기에 익숙하게 고기를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상연이 사람 좋게 웃었다.
在在玹的话语下,善宇低下了头。哥,我看不见吗?你不是经常看见吗。再玹无奈地回应道。灿熙也并没有特别期待什么,所以习惯性地把肉塞进了嘴里。尚延笑得很和善。
"선우 요새 어때? 잘 지내?"
“善宇,最近怎么样?过得好吗?”
"저야, 뭐." “我嘛,没什么。”
"하긴, 늘 잘 나가더라." “确实,一直很顺利。”
모르고 싶어도 돌아다니면 네 노래 다 들려. 우리 중에 제일 성공한 거 같아. 상연이 선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뭐 그 정도는 아니구요. 선우가 고기를 주워 먹으며 가볍게 말한다. 재현은 손목시계를 한 번 보더니 상연에게 고갯짓을 했다.
即使不想知道,但到处走动时还是能听到你的歌。你看起来是我们中最成功的。上渊拍了拍善宇的肩膀。也没那么夸张啦。善宇一边捡起肉吃,一边轻松地说道。再贤看了一眼手表,然后向上渊点了点头。
"형, 가자. 시간 얼마 없다."
“哥,走吧。时间不多了。”
"어, 그래. 우리 먼저 갈게."
“哦,好吧。我们先走了。”
"벌써 가? 어디?" “벌써 가? 어디?”
찬희의 물음에 재현이 대꾸했다. 찬희的提问,宰贤回答了。
"연습실." “练习室。”
"연습은 내일 아냐?" “练习不是明天吗?”
"따로 연습 좀 더 하게. 주중에 악기 한 번도 못 만졌어."
“单独再练习一下吧。这周一次都没碰过乐器。”
너는 곡 다 외워 와라. 재현이 찬희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아, 하지 마. 찬희가 짜증스러운 손길로 머리를 정리한다.
你把所有的歌都背下来吧。再贤弄乱了灿熙的头发。啊,别这样。灿熙烦躁地整理着头发。
"얼른 가, 그럼." “那就快走吧。”
"말 안 해도 갈 거다."
“不用说我也会去的。”
"선우 다음에 술 한잔 하자. 찬희는 내일 보고."
"伞,下一次一起喝一杯吧。灿熙明天见。"
상연이 넉살 좋게 손을 흔들었다. 선우는 이번에도 예의 바르게 꾸벅 인사한다. 예전부터 선우는 상연을 좀 어려워했다. 같이 지낸 시간이 얼마 안 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찬희는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둘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선우가 물었다.
상연笑着挥了挥手。 선우这次也礼貌地鞠躬问好。 从以前开始, 선우就有点怕상연。 可能是因为他们在一起的时间不长。 찬희也挥手回应了。 两人消失在视线中后, 선우才问道。
"요새 밴드 뭐 있어?" “最近有什么乐队吗?”
"음반 작업." “专辑制作。”
"아, 맞다." “啊,对了。”
찬희와 재현, 상연은 밴드를 한다. 본격적이라면 본격적이고, 아니라 하면 아니다. 셋 모두 직장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밴드를 계속 하는 건 셋 뿐이다. 선우마저 졸업하곤 미련 없이 밴드를 떠났다. 찬희는 그때 많이 서운해 했었는데, 어쨌든 둘이 처음 만난 곳이 그 동아리, 그 밴드였기 때문이었다. 선우는 단호했다. 그가 하고 싶은 곡 작업은 훨씬 폭이 넓었다. 그래서 더 말릴 수 없었다. 당시엔 조금 싸우긴 했었지만.
찬熙和在贤、尚延组成了一个乐队。说是正式的也算正式的,说不是也不是。因为他们三个人都有各自的工作。不过,大学毕业后还继续玩乐队的只有他们三个。连善宇毕业后也毫不留恋地离开了乐队。那时候,찬熙很失落,毕竟他们俩第一次见面的地方就是那个社团,那个乐队。善宇很坚定,他想要创作的音乐范围更广。所以也无法再劝阻他。虽然当时有点争吵。
유튜브에 영상 찔끔찔끔 올리고 가끔 인맥으로 불려져 클럽에서 간단하게 두세 곡 정도 부르는 게 전부인 밴드인데, 최근 한 기획사에서 연락이 왔다. 정식 계약 요청이었다. 작긴 해도 인디 쪽에선 나름 이름 있는 레이블이었다. 상연과 재현이 쌍수 들고 환영한 거에 비해 찬희는 좀 망설였다. 지금도 남은 여유 시간을 다 털어 움직이고 있는 밴드였다. 이 이상은 자신이 없었다. 그런 찬희를 상연이 차분히 설득했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더 고생하는 게 낫지 않겠냐. 그리고 우리, 잘 될 거야. 너도 회사 때려치고 음악만 하고 싶다며. 늘 허허실실인 줄 알았던 사람이 찬희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마냥 정곡을 콕콕 찔렀다. 옆에서 재현이 호들갑 떨며 거들었다. 그래, 이 참에 나도 회사 때려치고 저작권료로 먹고 살아보자. 둘이 그렇게 나오니 찬희로선 방법이 없었다. 여전히 의심과 불안이 컸지만 그들과 같이 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그리고 우리가, 꼭 피터팬 콤플렉스에 단체로 감염된 것 같아 좀 즐겁기도 했고.
在 YouTube 上零零碎碎地上传视频,偶尔通过人脉在俱乐部里简单地唱两三首歌的乐队,最近接到了一个企划公司的联系。是正式签约的请求。虽然小,但在独立音乐界也算是有名的厂牌。相比于尚延和在贤的双手欢迎,灿熙有些犹豫。现在已经把所有空闲时间都用在乐队上了,自己没有更多的精力了。尚延冷静地说服了灿熙。趁着年轻多吃点苦不是更好吗?而且我们会成功的。你不是也想辞掉公司专心做音乐吗?一直以为是嘻嘻哈哈的人,像是进入了灿熙的脑海里一样,戳中了他的要害。在旁边的在贤也大惊小怪地附和道。对啊,这次我也辞掉公司,靠版权费生活吧。两个人这么一说,灿熙也没办法了。虽然依然充满了怀疑和不安,但和他们在一起的话,总觉得会有办法。想到这些的自己,还有我们,仿佛集体感染了彼得潘综合症一样,有点开心。
"그럼 오늘 바빠?" “那你今天忙吗?”
세 번째 그릇을 반쯤 비웠을 때였다. 배가 불러 더는 못 먹겠다 싶어 깨작이고 있는 찬희에게 불쑥 선우가 물었다. 찬희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当第三碗吃到一半时。因为肚子饱了,觉得再也吃不下去的灿熙正慢吞吞地吃着,善宇突然问道。灿熙睁大了眼睛。
"아니?" “不是吗?”
내일 합주할 곡이야 진작 다 외웠다. 그보단 제가 만든 곡이 더 걱정이었다. 재현과 상연, 찬희 셋 모두 곡을 쓰는 사람이니 작업량 자체는 부담이 아니었지만, 그만큼 퀄리티에 대한 부담은 있었다.
明天合奏的曲子早就都背下来了。比起这个,我更担心的是我自己创作的曲子。再现、尚演和灿熙三个人都是写歌的人,所以工作量本身并不是负担,但正因为如此,对质量的要求也更高。
"그럼 술 한잔 하자." “那我们喝一杯吧。”
찬희의 눈이 깜빡, 감겼다 뜨인다. 이게 무슨 신호인지 찬희는 경험으로 안다.
찬熙的眼睛眨了眨,闭上又睁开。凭经验,찬熙知道这是什么意思。
"어디서?" “哪里?”
"글쎄, 형 집?" “글쎄, 형 집?”
추측은 확신으로 변한다. 둘 다 술을 못 해 기껏해야 편의점에서 수입맥주 네 캔 만원 같은 거나 사서 들어갈 테지만. 찬희는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인다.
猜测变成了确信。两个人都不会喝酒,顶多是去便利店买四罐进口啤酒一万韩元之类的。灿熙假装不知道地点了点头。
"오는 김에 곡이나 좀 봐줘."
"来的时候顺便看看曲子吧。"
"그래." “好。”
가자, 다 먹었으면. 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디저트 먹을 건데? 찬희는 접시를 가로 밀며 새침하게 대꾸했다. 선우가 어처구니 없다는 눈으로 찬희를 바라봤다. 앉아 있어. 찬희는 그렇게 말하곤 선우를 내버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선우가 오늘 내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 정도는 만나자 마자 알아챘지만. 찬희는 그마저도 모르는 척 하기로 한다. 짐작 가는 이유를 뱉어봤자 돌아오는 게 무엇일지 뻔했으므로.
走吧,都吃完了。善宇站了起来。要吃甜点吗?灿熙推开盘子,冷冷地回应。善宇用不可思议的眼神看着灿熙。坐下。灿熙说完就起身离开了。善宇今天一整天心情不好,这一点一见面就能察觉到。但灿熙决定装作不知道。因为即使猜到了原因,说出来也知道不会有什么好结果。
케이크를 담다 슬쩍 자리를 바라보니 잔뜩 인상을 쓰면서도 자리에 도로 앉아 있는 선우가 보였다. 그제야 찬희는 몰래 조금 웃는다. 그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굴 때, 찬희는 안심한다. 나쁜 습관인 건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把蛋糕放好后,偷偷看了一眼座位,看到伞满脸不高兴地又坐回了座位上。直到那时,灿熙才偷偷笑了笑。当他像听话的小狗一样乖乖听话时,灿熙感到安心。虽然他自己也知道这是个坏习惯,但...
스무 살, 찬희는 대학에 입학하자 마자 동아리 홍보 포스터들 속에서 밴드부부터 찾았다. 그리고 다짜고짜 가입했다. 노래는 자신 있었다. 아니, 사실 완전 자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노래를 부르고 싶은 마음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 있었다. 간단한 오디션 끝에 결국 합격했을 때는 너무 기뻐서 길 한복판에 주저앉아 우는 것처럼 웃었다. 코피 터지게 공부해서 서울 오길 잘했어. 그렇게 생각하면서.
二十岁,찬희一进大学就从社团宣传海报中找到了乐队部。然后毫不犹豫地加入了。对唱歌他很有自信。其实,也不是完全有自信……但至少他有一颗想唱歌的心,这一点他有信心不输给任何人。经过简单的面试后,最终合格的那一刻,他高兴得像在大街中央坐下来哭一样笑了起来。拼命学习来到首尔真是太好了。他这样想着。
기껏해야 서브 보컬이었지만 찬희는 행복했다. 무대야 어릴 때도 서 본 적 있었지만, 교회나 학교 대강당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과 서울, 학교 밖에서 노래를 하는 건 차원이 달랐다. 무작정 홍대로 가 바람과 싸우며 버스킹을 해도 그저 즐거웠다. 집에서 부쳐주는 생활비로는 한계가 있어 그 와중에 부지런히 아르바이트를 해 보컬 학원에 다녔다. 상연과 은비에게 작곡하는 법을 조금씩 배웠고, 밥 굶어가며 장비도 사 모았다. 찬희는 필사적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랬나 싶을 정도로 바쁘게 살았다. 그땐 그랬다. 노래하는 게, 무대에 서는 게 인생의 전부 같았다.
선우는 찬희가 군대 가 있는 동안 들어온 신입 부원이었다. 얼굴은 제대한지 얼마 안 된 찬희가 비니며 캡모자로 머리를 꼭꼭 가리고 다닐 때 처음 봤다. 오랜만에 간 동아리 방에 있던 낯선 사람이 바로 선우였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첫인상은 조금 무서웠다. 온통 까만 옷에 어딘가 껄렁한 말투가 그를 다가가기 어렵게 보이도록 했다. 하다못해 튜닝 중이던 기타마저 까만색이었다.
"여기 부원인데요."
괜히 쫄았단 티를 내고 싶지 않았던 찬희가 덩달아 차갑게 대꾸했다. 아. 그 말에 선우가 알겠다는 듯 작게 입소리를 냈다.
"찬희 선배님이시구나." “原来是灿熙前辈啊。”
"저를 알아요?" “你认识我吗?”
"얘기 많이 들었어요." “听说了很多。”
저는 김선우. 기타 쳐요. 선우가 들고 있던 일렉기타를 살짝 들어올려 보였다. 그러고보니 기타 치는 선배가 졸업하면서 신입 부원이 하나 들어왔다 했다. 찬희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저보다 어릴 것이란 판단이 드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我是金善宇。我弹吉他。善宇稍微举起了他拿着的电吉他。说起来,弹吉他的学长毕业后,有一个新成员加入了。灿熙这才点了点头。不管怎样,觉得他比自己小,心里稍微放松了一些。
"다른 선배들은?"
"몰라요. 아직 안 오셨네요."
곧 튜닝을 끝냈는지 선우가 가볍게 피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앰프 볼륨이 작아 시끄럽진 않았다. 익숙해 보이네. 찬희는 맞은 편 소파에 앉아 그런 생각이나 했다.
"형은 노래 하신다면서요."
아무리 생각해도 영 시건방진 말투였다.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 찬희가 선우를 바라보았다. 선우가 어깨를 으쓱 했다.
"아니, 은비 누나도 있는데 보컬이 또 있다길래 신기했거든요. 은비 누나 노래 잘하잖아요."
얘 좀 봐라. 찬희는 좀 어처구니가 없어진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저도 모르게 말이 뾰족하게 나갔다. 아니, 별 건 아니고. 선우는 태연하다.
看看这家伙。찬희有点无语。你到底想说什么?话不由自主地尖锐起来。啊,不是什么大事。선우显得很淡定。
"우리 앞으로 팀으로 지낼 건데, 서로 너무 모르고 있는 거 아닌가 싶어서."
“我们以后要作为一个团队相处,我觉得我们彼此了解得还不够。”
"그럼 뭐. 노래라도 부르라고?"
"뭐, 좀 그러면 제가 먼저 할까요?"
찬희가 황당해 하든 말든 선우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이내 그을린 듯 까만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만든 음이 빠르지 않은 박자로 울려퍼졌다. 찬희도 아는, 밴드 음악 듣는 사람이라면 다 알만큼 유명한 노래였다. 이쯤 되니 뭐라 더 할 말도 없었다. 그래, 어디까지 하나 보자. 찬희는 팔짱을 끼고 선우가 연주하는 걸 지켜보았다. 전주를 끝낸 선우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하는 목소리는 말하는 목소리와 또 달랐다. 휴일을 앞둔 밤에 아무도 없는 새벽. 도로를 질주했어 바닷가에... 아는 노래라 더 잘 들렸다. 그러니까, 기타 연주나 노래 같은 것들이.
제법 하네. 挺不错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좀 풀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좀 놀랐다. 잘 치는 건 둘째치고, 그냥 대담하게 바로바로 연주며 노래를 뽑아내는 용기가 대단해서.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렇게는 못 할 것 같았다.
不得不承认。这样一想,心情似乎稍微放松了一些。而且有点惊讶。弹得好是其次,单是那种大胆地立刻演奏和唱歌的勇气就很了不起。我觉得即使我死而复生也做不到这样。
문득 선우가 픽 웃었다. 본인이 생각해도 좀 웃긴 모양이었다. 그대로 멈출 줄 알았는데 연주는 계속 됐다. 한쪽 입꼬리만 삐뚜름하게 올린 채로. 그 모습이 좀...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순수한 감상이었다. 찬희는 조금 망설이다 결국 입을 천천히 열었다. 찬희가 노래하자 선우가 노래를 멈추고 연주에만 몰두했다. 기다릴게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도록. 항상 엔진을 켜둘게. 돌아오지 않더라도 난 여기 서 있겠지. 아마 엔진을 켜둔 채...
突然,善宇笑了。他自己也觉得有点好笑。原以为会就此停下,但演奏继续了。他的嘴角微微翘起。那样子有点...帅气。那是纯粹的感叹。灿熙犹豫了一下,最终慢慢开口。灿熙开始唱歌后,善宇停止了歌唱,专注于演奏。我会等你,随时准备出发。总是会启动引擎。即使你不回来,我也会站在这里。大概会一直启动着引擎...
"와, 재밌다." “哇,好有趣。”
연주를 마친 선우가 크게 웃었다. 찬희도 덩달아 좀 웃는다. 그냥 이 상황이 웃기기도 했고, 저렇게 웃는 얼굴을 보니 좀 즐거워져서 그런 것도 있었다.
演奏结束后,善宇大笑起来。灿熙也跟着笑了笑。只是觉得这种情况有点好笑,看到他那样笑的脸,也觉得有点开心。
"형 음색 진짜 좋네요. 왜 굳이 형 뽑았는지 알겠다."
“哥,你的音色真的很好。我明白为什么他们非要选你了。”
찬희는 기가 막힌다. 아무튼 골 때리는 애였다. 그런데 그게 그리 싫지는 않았다. 너도 좀 치네. 그래서 그렇게 대꾸했다. 뭐, 그렇죠. 선우가 대답하며 콧잔등을 가볍게 훑었다. 얘 진짜 웃긴다. 찬희는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비호감이란 생각이 안 들었다. 아까 받은 좋지 않은 인상도 이미 싹 날아간 후였다. 그냥 신기했다. 저와 너무 다른 사람 같았다. 저라고 자신감이 부족하단 생각은 안 해봤었는데. 얘는 진짜 대단했다. 무엇보다 그런 점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아무튼 첫인상은 그랬다. 달라도 너무 다른 애. 그래서 문득,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애한테 빠지면 답도 없다는 걸 찬희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찬熙简直无语了。总之,他是个让人头疼的家伙。不过,这并不让人讨厌。你也挺厉害的。所以他这样回应道。嗯,是啊。善宇回答着,轻轻地摸了摸鼻梁。这个家伙真搞笑。찬熙这样想着。但奇怪的是,他并不觉得反感。刚才的不良印象早已烟消云散。只是觉得很神奇。感觉像是和自己完全不同的人。自己从未觉得缺乏自信。但这个家伙真的很了不起。最重要的是,这一点让他觉得非常有魅力。总之,第一印象就是这样。完全不同的家伙。所以突然间,他觉得要小心。찬熙非常清楚,如果对这样的人动心,是没有答案的。
"앞으로 잘 지내봐요." “以后好好相处吧。”
기타를 정리한 선우가 불쑥 일어나 찬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여전히 소파에 앉은 채라 악수하기엔 거리가 좀 멀었다. 찬희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손을 맞잡으려다가...
吉他收拾好的善宇突然站起来,向灿熙伸出了手。因为灿熙仍然坐在沙发上,所以握手的距离有点远。灿熙反射性地站了起来。慢慢地想要握住他的手...
"너 웃어 봐." “你笑一个。”
"네?" “嗯?”
"웃어 보라고." “笑一个。”
"왜요." “为什么。”
"무표정한 거 너무 시건방져." “无表情的样子太傲慢了。”
"허 참..." “哎呀……”
저 원래 잘 못 웃어요. 선우가 금세 뚱한 얼굴을 했다. 아, 웃어 보라면 웃어 봐. 얼른. 그러다 찬희의 채근에 마지못해 양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다. 잘 못 웃는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찬희는 웃음이 터지고 만다. 선우가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을 했다. 아 왜 웃는데요. 말하는 목소리마저 퉁명스럽다. 찬희는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웃었다. 하도 오래 웃었더니 선우도 결국 픽 웃고 말았다. 아. 찬희는 그제야 웃음을 그친다. 아까 그 얼굴이다. 기타 치며 노래 부를 때 지었던 그 얼굴.
我本来就不太会笑。善宇立刻露出了一张臭脸。啊,笑一个给我看看。快点。然后在灿熙的催促下,他勉强地扬起了嘴角。说自己不太会笑果然不是假的,笑得非常僵硬。灿熙忍不住笑了出来。善宇露出了一副无奈的表情。啊,为什么笑啊。他的声音甚至带着几分生硬。灿熙笑得连回答都说不出来了。笑了太久,善宇最终也忍不住笑了出来。啊。灿熙这才停下笑声。刚才那张脸,就是弹吉他唱歌时露出的那张脸。
"잘 지내보자." “好好相处吧。”
찬희가 손을 내밀었다. 선우가 한 번 더 웃었다. 아까처럼, 꽤 근사하게. 잡은 손은 놀라울 정도로 뜨거웠다. 데일 것처럼. 데인 것처럼.
찬희伸出了手。선우再次笑了。就像刚才一样,非常帅气。握住的手出奇地热。像要被烫伤一样。像被烫伤了一样。
그의 손은 여전히 데일 것처럼 뜨겁다.
他的手依然像要烫伤人一样炙热。
찬희는 숨을 삼킨다. 찬희의 골반을 꽉 붙잡고 있는 선우의 손에서 땀이 배어나온다. 그만, 이제 그만.. 찬희는 애원한다. 선우는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속도를 높인다. 하지만 그게 곧 끝이 다가온다는 신호임을 찬희는 안다. 몸을 뒤틀며 울던 찬희가 기어이 사정했다. 앞을 만지지 않아도 갈 수 있게 된 건 선우와 사귀고도 시간이 좀 지나서다. 이제는 한참 됐다. 그만큼 서로가 서로의 몸에 익숙했다.
찬希屏住了呼吸。抓紧찬希臀部的선우的手上渗出了汗水。停下,求你停下..찬希哀求道。선우像没听见一样加快了速度。但찬希知道,这意味着结束即将到来。扭动着身体哭泣的찬希终于达到了高潮。即使不碰前面也能到达高潮,是和선우交往了一段时间后才做到的。现在已经很久了。他们彼此的身体已经非常熟悉。
수축하는 찬희의 안에 선우가 낮게 신음했다. 아. 곧 그가 짧은 소리와 함께 고개를 젖혔다. 찬희는 정신 없는 와중에도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본다. 늘 생각한다. 섹시한 얼굴이라고. 사정하는 중에도 새로 오르가즘을 느낄 만큼. 찬희는 이를 꽉 물고 제 앞에 손을 가져간다. 빠르게 훑는 손에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 짜이고 나서야 길고 긴 오르가즘이 끝났다. 곧 선우의 손이 떨어져나간다. 찬희의 다리가 아무렇게나 벌어졌다.
收缩的灿熙体内,善宇低声呻吟。啊。很快,他伴随着短促的声音仰起了头。灿熙在神志不清的情况下,呆呆地看着那张脸。总是这样想。真是性感的脸。即使在高潮中也能感受到新的快感。灿熙咬紧牙关,把手伸到自己面前。快速的手掌扫过,直到最后一滴被挤出来,漫长的高潮才结束。不久,善宇的手离开了。灿熙的双腿随意地张开。
날이 더워지긴 한 건지 온몸이 땀투성이였다. 특히 선우는 비라도 맞은 마냥 쫄딱 젖었다. 콘돔을 벗겨낸 선우가 익숙하게 물티슈를 꺼내 찬희의 몸을 몇 번 닦아주고는 제 얼굴과 몸을 닦아냈다. 에어컨 틀어줘? 찬희가 물었다. 선우는 조금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天变热了,全身都是汗。特别是善宇,像是淋了雨一样,浑身湿透了。善宇熟练地取下避孕套,拿出湿巾擦了几下灿熙的身体,然后擦了擦自己的脸和身体。要开空调吗?灿熙问道。善宇稍微犹豫了一下,摇了摇头。
"형 춥잖아." “哥,很冷啊。”
"옷 입으면 되지." “穿上衣服就行了。”
찬희가 팔만 뻗어 협탁 서랍을 열었다. 에어컨 리모콘이 간신히 잡혔다. 내가 켤게. 선우가 찬희의 손에서 리모콘을 빼앗아 갔다. 찬희는 순순히 늘어진다. 곧 찬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올해 첫 에어컨이었다.
찬희伸出手臂打开了床头柜的抽屉。空调遥控器勉强被抓住了。我来开吧。선우从찬희手中抢走了遥控器。찬희顺从地放松下来。不久,冷风开始吹来。仔细想想,这是今年第一次开空调。
으아. 선우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찬희의 옆으로 떨어져 뻗었다. 찬희는 가물가물한 정신 속에서도 픽 웃었다. 왜 웃어. 선우가 불퉁한 소리를 냈다. 아니, 너도 나이 들었다 싶어서. 찬희의 말에 선우가 잔뜩 인상을 쓴다.
"무슨 쌍욕이야 그게."
"쌍욕까지야."
그냥 예전 생각이 갑자기 났다. 취업 후 이사오기 전까지 살았던 작은 자취방엔 영 신통찮은 낡은 에어컨이 하나 달려 있었다. 본래 더위를 많이 안 타는 찬희는 그럭저럭 지낼만 했는데 선우가 문제였다. 도통 몸에 열이 많아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땀이 났다. 그런 열대야 아닌 열대야 속에서도 몇 번씩 섹스했다. 그땐 어떻게 그랬지. 역시 젊어서 가능했나. 아님 한창 때라 그랬나. 사랑이 불타오를 때여서. 찬희는 괜히 좀 심란해진다.
"여친이랑 왜 헤어졌어?"
몸을 뒤척여 선우를 향해 돌아 누우며 찬희가 물었다. 이번이 두 번째인가? 왤케 연애가 오래 못 가. 괜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선우는 뚱한 얼굴로 휴대폰을 보고 있다. 그냥, 재미없어서. 대답조차 무성의하다. 와, 나쁜 남자네. 찬희도 의미 없이 대답한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속으론 어느 정도 수긍하고 있다.
"형은?"
"나 뭐."
"연애 안 하냐고."
밀린 알림을 다 훑은 선우가 찬희를 향해 눈을 돌렸다. 찬희는 조금 뜨끔한다. 하지만 대답은 정해져 있다.
"난 이제 연애 안 할 거야. 연애로 해 볼 만한 거 다 했는데, 뭐."
너랑. 마지막 말은 속으로 삼킨다. 아무튼 진심이다. 적어도 찬희는 그렇게 믿고 있다.
你。最后的话吞进了心里。不管怎样,这是真心的。至少灿熙是这么相信的。
7년을 사귀었다. 스무 살, 스물 두 살. 아직 솜털도 채 안 떨어졌을 때 만나 서른을 목전에 두고 헤어졌으니 이십대를 통째로 선우와 보낸 거나 마찬가지다. 찬희의 이십대 어느 페이지를 뒤져도 선우가 있었다. 돈 없고 바쁜 학생 시절부터 돈 벌고 안정되어 어른 연애가 가능해진 나이까지 만났다. 자연스레 서로가 서로의 처음인 것도 많았다. 그 말은, 그 뒤론 누구와 무얼 해도 두 번째라는 얘기가 된다. 원래 처음이 제일 재밌는 거 아닌가? 좋아해서 몇 번씩 같은 영화를 봐도 처음 같은 감동은 다시 오지 않는 것처럼. 아는 맛이라 먹는 거지, 그냥. 그런 무의미한 일을 굳이 해야 하는지 찬희는 잘 모르겠다.
7 年了。二十岁,二十二岁。还没完全长大时相遇,快到三十岁时分手,所以整个二十多岁几乎都是和善宇一起度过的。无论翻开灿熙二十多岁的哪一页,善宇都在其中。从没钱又忙碌的学生时代,到赚钱后稳定下来可以谈成熟恋爱的年纪,他们一直在一起。自然地,彼此的第一次有很多都是对方。那意味着,之后无论和谁做什么,都是第二次。原本第一次是最有趣的,不是吗?就像因为喜欢而看了几遍同样的电影,但第一次的感动再也不会回来。只是因为知道味道才吃的,仅此而已。灿熙不太明白为什么非要做这种无意义的事。
몸을 일으킨 찬희가 주섬주섬 잠옷을 주워 입고는 다시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조금 추웠다. 하지만 맞닿은 선우의 살은 여전히 뜨거워서. 살갗을 조금 더 붙이고 이불을 단단히 덮는다. 천천히 졸음이 밀려온다. 그러다 선우가 몸을 일으켜서 잠들기 직전에 깼다. 침대에서 나온 선우가 제 옷을 하나씩 주워 입기 시작했다. 찬희는 누운 채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본다. 안 자고 가게? 찬희의 물음에도 선우는 대답이 없다. 그러다 옷을 다 입고 나서는 찬희를 향해 몸을 돌린다. 형.
身体刚刚起身的灿熙胡乱地捡起睡衣穿上,然后又钻回了被窝里。有点冷。但是接触到善宇的皮肤依然是热的。再贴近一点皮肤,把被子盖紧。慢慢地,困意袭来。就在快要睡着的时候,善宇起身了。善宇从床上下来,开始一件一件地捡起自己的衣服穿上。灿熙躺在那里,呆呆地看着他。你不睡觉就走吗?灿熙问道,但善宇没有回答。等到穿好衣服后,善宇转身面对灿熙。哥。
"행복해?" “幸福吗?”
"...갑자기?"
정신이 확 든다. 찬희가 몸을 일으켰다. 선우는 여전히 덤덤한 얼굴이다.
"뭐 그런 걸 묻고 그래."
"그냥. 궁금해서."
"글쎄..."
질문을 들었으니 대답을 해줘야겠는데 영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행복한가? 애초에 행복이 뭐지? 너무 오래 잊고 있던 단어라 입에 담는 것부터가 낯설었다. 선우는 오래 기다려주지 않았다. 대신 입을 열었다.
"나 드라마 오에스티 작업 하나가 들어왔거든."
"아, 엉. 잘 됐네."
"근데 보컬 추천해달래서, 형 추천했어."
찬희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나?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키며 묻자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돼? 곡은 거의 나왔어."
"갑자기?"
"바빠서 미리 말 못 했어. 어차피 오늘 만날 거였으니까."
"지금 갖고 있어?"
선우가 휴대폰을 뒤적였다. 곧 노래가 흘러나왔다. 가이드 너야? 찬희의 물음에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성 처리 된 곳 많은데 형이 녹음하면 다 진성으로 불러야 해. 찬희는 선우의 말을 새기며 유심히 노래를 듣는다. 키가 높아 쉽게 부를만한 노래는 아니었다. 좀 낯설기도 했다. 선우가 만든 노래들 중 이만큼 조용하고 서글픈 노래는 처음이었다.
"슬픈 노래네."
"형 그런 거 잘하잖아."
"난 다 잘하지."
"그럼 하는 거?"
농담처럼 다 잘한다고 했지만, 사실 확답하기는 어려웠다. 당연히 욕심은 났다. 평소라면 뒤도 안 보고 한다고 했을 것이었다. 그런데 당장 밴드 앨범 작업이 한창이었다. 기획사 투자금 받고 처음 내는 앨범인데 유독 찬희만 속도가 지지부진했다. 지금도 이런데 선우랑 하는 작업이라고 잘 풀릴 것 같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재현과 상연의 반응이 좀 걱정되었다. 그들이라고 딱히 반대하지는 않겠지만 눈치가 보이는 것도 사실이어서...
"해 봐."
그런 찬희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선우가 훅 들어왔다.
"이거 형 말고 다른 사람 못 줘."
"왜?" “为什么?”
"형 생각하면서 썼으니까."
"........."
덜컥 말문이 막혔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랬다. 동그랗게 뜨인 찬희의 눈이 느리게 깜빡, 했다. 선우는 덤덤한 얼굴이었다.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해 줄 거지?" “会帮我的吧?”
그리곤 찬희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틀였다 놨다. 곧 그가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짜 안 자고 가? 찬희가 다시금 물었다. 어. 선우가 신발을 신으며 대답했다. 그새 다시 구겨진 컨버스 뒤축. 찬희는 어쩐지 그런 게 눈에 들어온다. 이상하다. 저런 걸 보면 평소의 선우와 다름없는데. 오늘따라 그가 낯설게 느껴지는 건 무슨 이유 때문일까.
"에어컨 끄고 자."
간다. 선우가 찬희를 향해 손을 한 번 흔들었다. 곧 느릿느릿, 하지만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나간다. 찬희는 어쩐지 얼이 빠져 닫힌 문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꼭 폭풍이라도 들이닥쳤다 사라진 것처럼.
去吧。善宇朝灿熙挥了挥手。不久,他慢慢地,但毫不犹豫地打开门走了出去。灿熙不知为何呆呆地望着关上的门,仿佛一场风暴刚刚袭来又消失了一样。
"한 번 만져봐도 돼?" “可以摸一下吗?”
금요일 저녁엔 늘 합주를 했다. 끝나고 나면 녹초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들 피곤한 몸으로 악기를 정리하며 집에 갈 준비를 할 때 찬희는 늘 소파에 앉아 그런 그들을 구경했다. 그만이 따로 다루는 악기가 없었다.
星期五晚上总是排练。结束后筋疲力尽是理所当然的事。大家都疲惫地整理乐器,准备回家时,灿熙总是坐在沙发上看着他们。他没有单独处理的乐器。
"기타요? 만져 봐요." “吉他吗?摸摸看。”
앰프를 정리하던 선우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찬희가 기다렸다는 듯 소파에 기대어 있던 선우의 기타를 들었다.
"칠 줄 알아요?"
"아니?" “不是吗?”
"그래 보이네요."
누가 보아도 찬희가 기타를 잡은 폼은 단 한 번도 악기를 만져보지 않은 사람의 그것이었다. 어떻게 쳐야 해? 찬희가 아무렇게나 코드 짚는 흉내를 내며 물었다. 찬희가 앉은 소파 뒤로 선우가 다가왔다. 그리곤 손을 겹쳐 손가락을 하나씩 잡아주었다.
"이게 A코드."
찬희가 어설프게 오른손을 움직였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피크 써요. 선우가 피크를 꺼내 건넸다. 그냥 긁으면 돼? 물어보면서 동시에 피크 든 손을 움직였다. 아까보단 그래도 나은 소리가 났다.
"소리가 안 나네."
"앰프 뺐으니까."
그리고 형이 힘이 좀 없기도 하네요. 그 말에 찬희는 좀 오기가 생긴다. 코드를 짚은 손가락에 힘을 주고 다시 피크를 움직였다. 소리가 점차 선명해졌다.
"재밌다."
"뭘 했다고요."
"그래도. 나도 기타 배울까."
찬희가 기타를 정리해 선우에게 건넸다. 기타요? 선우가 받아들며 의아하다는 얼굴을 한다. 찬희는 어깨를 으쓱 했다.
"그냥, 음악 계속 하려면 악기 하나 정도는 배워두는 게 좋지 않을까."
당시 찬희는 좀 초조한 상태였다. 은비는 노래도 기타도 수준급이었다. 어느 밴드의 공연을 보아도 보컬들이 대부분 기타 하나 정도는 연주할 줄 알았다. 반면 찬희는 노래 부르는 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이렇게 다들 악기 정리하며 부산할 때 혼자 덩그러니 남겨지는 것도 싫었다. 찬희는 속으로 여윳돈이 얼마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보컬 학원을 그만두고 기타 학원을 다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둘 다 다니기엔 돈도 시간도 각이 안 나왔다.
"가르쳐줘요?"
찬희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진짜?" “真的吗?”
"빼지도 않네."
"해 본 말이야?"
"아뇨, 그건 아닌데. 맨입에?"
선우가 가볍게 웃었다. 한 쪽 입꼬리만 살짝 올린 채로. 고작 스무 살짜리 애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저렇게 웃는 건 역시 꽤 근사하다고, 찬희는 새삼 생각한다.
"돈 필요해?"
"그냥 해 본 말이에요."
가끔 밥이나 사 줘요. 선우가 찬희의 어깨를 툭 쳤다. 어, 기타 배우게? 마침 상연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배우면 좋지 않을까요?"
"기타는 둘이나 있잖아. 베이스 배우는 건?"
"아, 난 싫음."
뭐라 말하기도 전에 재현이 선수 쳐서 말을 잘랐다. 가르쳐 달라고도 안 했거든요. 찬희는 괜히 발끈한다. 상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앞으로 더 시끄러워지겠네." “以后会更吵了。”
너희 둘 같이 있으면 정말 시끄럽더라. 웃음기 어린 상연의 말에 은비도 맞장구를 쳤다. 역시 애들이라 그런가, 금방 친해지네. 선우와 찬희가 눈을 마주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가. 저는 형이랑 더 친한데."
"와, 그럼 내가 뭐가 돼요."
투닥거리면서도 가장 나중에 나와 문을 잠그는 건 둘의 몫이었다. 정리와 열쇠는 막내 담당이었다. 본래는 찬희 혼자 하던 것이었고, 이제는 선우가 혼자 하면 되었지만. 언제부턴가 선우를 기다려주는 게 습관이 됐다. 상연과 은비가 괜한 말을 한 건 아닌 셈이다. 둘은 빠르게 친해졌다. 조금 어색할 때도 분명 있었을 텐데 기억이 안 났다. 첫만남의 선우에게 좀 감화된 것도 있었다. 망설임 없이 기타를 들고 노래를 들려주던 선우가, 솔직히 멋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인지 그와 함께 있으면 늘 즐거웠다. 꼭 같이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코드가 잘 맞아 편했다. 소모적으로 다투는 것마저 즐거웠다.
"기타는 우선 제꺼 써요?"
"글쎄. 하나 살까?"
가을이어도 해 떨어지기 전까지 아직은 더운 날씨가 이어졌다. 그만큼 해도 길었다. 밤 여덟 시를 넘긴 시각이었지만 아직 하늘이 밝았다. 둘은 천천히 걸었다. 찬희의 자취방 가는 길이 선우가 타는 버스 정류장과 같은 방향이라 언젠가부터 늘 같이 가게 됐다. 걸으면서는 쉴 틈 없이 떠들었다. 가끔 이야기가 길어지면 찬희의 방에서 좀 더 놀다 갈 때도 있었다. 또 어떨 때는 찬희가 버스정류장까지 가 선우의 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리며 남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대학 들어온 후 누군가와 이렇게 오래 붙어 다닌 적은 처음이었다. 꼭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기분이다.
"여유 있으면 하나 사는 것도 나쁘지 않죠."
"나 근데 기타 잘 몰라."
"나 아는 악기상 있는데 같이 가줘요? 얼마까지 쓸 수 있는데?"
"얼마 정도 써야 해?"
이것저것 물어보며 찬희는 어쩐지 좀 들뜬다. 그런 찬희를 향해 선우가 픽 웃었다.
"일단 좀 배워 보고 생각해요, 그럼. 계속 할 것 같으면 좋은 거 사는 거고."
그것도 맞는 말이다. 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다. 진짜 사고 싶으면 밥 굶어야 하니까."
"뭐 그렇게까지?"
"그럴 가치가 있잖아."
찬희가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런 찬희를 선우가 빤히 바라본다. 왜 그렇게 봐? 그 말에 선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형 신기해서요."
"뭐가?" “什么?”
"뭐든 싫어, 됐어, 이런 말만 할 것처럼 생겼는데 다 필사적이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말랐나. 선우가 찬희의 손목을 쥐고 가볍게 흔들었다. 살 한 점 없이 마르기만 한 손목이 선우의 한손에 쉽게 잡혔다.
"이거 봐. 커피만 마시니까 이러지."
"헛소리야. 나 밥 잘 먹어."
찬희는 조금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선우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곤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얘 뭐야. 왜 자꾸... 훅 들어오는데. 좀 더 뭐라고 하려다가, 찬희는 그냥 입을 다물고 만다. 살이 좀 빠지긴 했다. 요새 생활비 아끼려고 부실하게 먹고 있는 건 사실이어서.
아무튼 그렇게 기타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없는 시간을 쪼개어 못해도 주에 세 번씩은 기타를 잡았다. 찬희는 정말 바쁘게 살았다. 아침부터 학교에 가 수업을 들었고 수업이 끝나면 곧장 알바를 뛰거나 보컬학원에 가거나 선우에게 기타 레슨을 받았다. 자는 시간을 쪼개 과제 및 학원 숙제를 했고, 그도 아니면 연습을 했다.
无论如何,就这样开始了吉他课。即使没有时间,他也每周至少三次拿起吉他。灿熙真的过得很忙。从早上开始,他去学校上课,下课后直接去打工,或者去声乐学院,或者接受善宇的吉他课。他挤出睡觉的时间来完成作业和学院的作业,如果不是这样,他就在练习。
주중 주말 가리지 않고 그렇게 몸을 혹사시키니 병이 안 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도무지 쉴 틈이 안 났다. 알바를 마친 찬희가 기어이 무거운 몸을 끌고 꾸역꾸역 동방에 출석했다. 선우와의 기타 레슨이 있는 날이었다. 먼저 와 있던 선우가 동방 문을 열고 들어오는 찬희를 보며 의아한 얼굴을 했다.
"형 얼굴이 왜케 빨게요."
"감기."
밥 먹을 시간도 없어 아침 점심을 내리 굶은 날이었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찬희는 피곤한 얼굴로 소파에 늘어졌다. 그런 찬희를 향해 다가온 선우가 찬희의 이마에 제 손을 턱 얹었다. 그러더니 심각한 얼굴을 했다.
吃饭的时间都没有,早饭和午饭都没吃的日子。全身一点力气都没有。灿熙疲惫地瘫倒在沙发上。向灿熙走来的善宇把手放在灿熙的额头上。然后他露出了严肃的表情。
"뜨거운 거 같은데." “好像很热。”
그리곤 곧장 고개를 숙여 제 이마를 찬희의 이마에 맞댔다. 갑작스런 접촉에 놀란 찬희가 숨을 삼켰다. 다행히 선우를 밀어내는 것보다 선우가 뒤로 물러나는 게 빨랐다.
然后立刻低下头,把我的额头贴在灿熙的额头上。突然的接触让灿熙吓了一跳,倒吸了一口气。幸好,善宇后退的速度比灿熙推开他还要快。
"열 나는 거 맞네. 오늘은 그냥 집 가요."
“你真的发烧了。今天就回家吧。”
"쫌만 하다 갈래." “稍微待一会儿再走吧。”
"고집 부리지 말고."
"여기까지 겨우 왔단 말야. 아까워."
오늘 아니면 적어도 2주는 기타 만져 볼 시간이 없었다. 곧 시험 기간이었고, 선우도 전공 실기 준비로 당분간 다른 거 하기 힘들다 했다. 찬희는 고집스럽게 선우가 튜닝을 마쳐둔 기타를 잡아 들었다. 선우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연습이 잘 될 리 없었다. 결국 삼십분을 넘기지 못하고 찬희가 휘청거리며 피크를 떨어트렸다. 둔한 머리는 그러고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해 멍하니 굳는 게 전부였다. 결국 선우가 바닥에서 피크를 주웠다. 그리곤 찬희의 손에서 기타를 빼앗았다. 그제야 찬희가 고개를 들었다.
"더 할 수 있어."
"말 좀 들어요. 형 더 못 해요."
선우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리곤 기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앰프 케이블을 돌돌 마는 선우를 찬희는 가만히 지켜본다. 사실은 더 고집 부릴 힘이 없었다. 막상 기타를 빼앗기니 잊고 있던 열이 쏟아질 듯 몰려와 찬희의 눈을 가렸다. 발은 커녕 손가락 하나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찬희는 소파에 기대듯 누웠다. 머리가 무겁게 아팠고 열로 눈까지 뻑뻑했다. 팔을 들어 눈을 가리는 찬희를 보며 선우가 혀를 찼다.
"많이 힘들어요?"
"먼저 가. 쫌만 쉬다 갈래.."
곧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선우가 찬희의 옆에 앉았다. 그러더니 찬희를 끌어 제 허벅지에 눕혔다. 이렇게 누워요. 좀 편할 거야. 낮은 목소리엔 다정이 묻어 있었다. 머리를 댔더니 어지러움이 물밀듯 밀려왔다. 그래도 머리를 대고 누우니 아까보단 나았다. 찬희는 순순히 선우의 허벅지를 베고 눈을 감았다. 선우의 손이 찬희의 머리를 천천히 쓸었다. 손길이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답지 않게.
"형은 노래가 왜 좋아요?"
그러다 불쑥 선우가 물었다. 갑자기? 찬희가 조금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몸이 늘어지기 시작해서인지 목소리도 잠기고 있었다. 그냥, 전부터 궁금했어요. 선우는 여상했다. 찬희는 눈을 감은 채로 기억을 되짚어 보기 시작한다.
"어릴 때 교회에서 성가대를 했거든."
하루는 노래 잘한다고 뽑혀서 예배 시간에 솔로를 하라는 거야. 너무 떨렸지. 그래서 눈에 아무 것도 안 보였는데. 연습한 대로 노래 다 부르고 나니까 사람들이 막 박수를 쳐주더라고. 그때 처음 눈 앞에 사람들을 봤는데, 다 웃고 있는 거야.
말하다 말고 찬희가 피식 웃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애가 열심히 하니까 그냥 잘했다고 해준 거였는데. 그땐 그게 너무 좋더라고."
"...되게 신실한 이유네요. 막 전도하고 싶고 그런 거예요?"
"그랬으면 이러고 있겠어? 그냥 교회에서 CCM 부르고 말았겠지."
"그런가."
"응. 그냥 나 행복하려고 하는 거야. 노래 부르면 행복해지니까. 파블로프의 개처럼."
말할수록 목이 잠겨갔다. 찬희는 가볍게 기침을 한다. 자꾸 잠이 왔다. 찬희는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들어올린다. 몸을 뒤척여 선우를 올려다보았다. 선우도 찬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엔 저 눈이 무섭다고 생각했었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그저 강아지 같았다. 커다란 눈망울, 올곧은 시선.
"계속 음악할 거예요?"
선우가 다시금 묻는다. 글쎄... 찬희는 말을 흐린다.
善宇再次问道。嗯……灿熙含糊其辞。
"그러면 좋겠지만... 결국 취직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부모님 반대가 심했다. 고등학교 때는 한달을 밤낮 가리지 않고 노래 부르게 해 달라 떼를 썼다. 결국 성적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겨우 보컬 학원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벅차서 찬희는 필사적으로 공부했다. 잠을 줄여가며 공부하고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좋아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냥 열심히 공부하다 가끔 노래방 가서 스트레스 풀고 오면 되는 거 아니니. 엄마도 아빠도 늘 찬희를 타일렀다. 찬희는 그걸로 부족했다. 그래서 서울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자유롭게 마음껏 노래해 보고 싶었다. 계속 노래 부를 수 있는 환경에 가고 싶었다.
"그런 것치곤 너무 열심히 살잖아요. 학원 다니고 기타 배우고 밴드 하고."
"그건... 그렇게라도 해야 불안하지 않으니까."
“那样做……至少能让我不那么不安。”
막상 밴드에 들어오니 부러운 것도 부족한 것도 너무 많았다. 은비는 욕심 내기 힘들만큼 노래를 잘했고, 기타도 수준급이었다. 모두들 각자의 일이 있음에도 밴드 활동을 대충 하지 않았다. 그저 노래 부를 수만 있으면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욕심이 자꾸 커졌다. 더 많이 노래 부르고 싶었다. 그러려면 더 잘해야 했다. 그게 무엇이든지 간에.
"너는? 계속 음악할 거지? 실음과잖아."
찬희가 선우에게로 이야기를 돌렸다. 선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 그러겠죠."
"부모님이 서포트 해주시나 보네. 부럽다."
"그건 그런데... 잘 모르겠어요."
"뭐가?" “什么?”
으음... 선우가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인다. 찬희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그런 선우를 지켜본다. 앳된 얼굴에 비해 고민하는 모습은 나이 답지않게 진중했다.
"너무 어릴 때 꿈을 정했나봐요. 끝내주는 노래 만들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거든요."
"........."
"그런데 막상 대학 와서 이것저것 배우다 보니까, 뭐랄까...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게 이거 맞나 싶더라고요."
"........."
"갖고 있던 환상이 자꾸 살금살금 깨져서. 차라리 환상 속에서 살았던 때가 더 나았던 거 같기도 하고."
선우의 손이 찬희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넘겼다. 생각하는 중에 습관적으로 그러는 것 같았다.
"그래서 형 보면 기분이 이상해져요. 형 너무 열심히 사니까."
"........."
"이렇게까지 음악 하려는 사람이 있는데, 나도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닐까.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음. 아무래도 저 형 보면 자극 받나봐요. 말을 마친 선우가 픽 웃었다. 제가 말하고도 쑥스러워서 그러는 것 같았다. 찬희는 어쩐지 넋이 나가 그런 선우를 본다. 늘 생각하지만, 저렇게 웃는 선우는 나이답지 않게 정말로, 근사하고... 그 근사함은 쑥스러운 얼굴 밑에 깔린 그의 무거운 진심에서 나오는 것일 테다. 그런 생각이 드니 찬희는 덩달아 좀 쑥스러워진다. 그래서 괜히 우스갯소리를 한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까불긴."
원래 스무 살 땐 그래. 맨날 왜 듣는지 모르겠는 교양만 뺑이치잖아. 나이 좀 더 들면 그런 생각 안 들 걸. 찬희가 생각나는 대로 주절주절 말했다. 그런데.
"찬희야."
선우가 무표정한 얼굴로 찬희의 이름을 부른다. 찬희는 순간 심장이 쿵. 발끝까지 내려앉는 기분이 된다.
"우리 겨우 두 살 차이야."
그리고 곧,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찬희는 놀란 얼굴을 잠깐 숨기지 못하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곤 한 마디 쏘아붙인다.
"말이 짧다?"
"...꼰대."
"뭐?" “什么?”
"형 좋다고요."
선우가 다시금 찬희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아, 왜 이래. 기운이 없어 피하진 못한 찬희가 조금 짜증을 냈다. 사실은 당황스러워서 그랬다. 얘 또 흘리네. 속으론 그렇게 생각했다. 헤테로들은 다 이런다니까. 남의 속도 모르고.
"아무튼 너무 불안해 하지 말란 거예요. 은비누나 곧 졸업하면 어차피 형이 다 노래할 건데."
찬희는 뜨끔한다. 선우는 아랑곳 없이 조근조근 말을 이어간다.
"그리고 저는 형 노래 진짜 좋아요. 자신감을 가져요."
헝클어트린 머리카락을 다시 쓸어넘겨 주면서, 선우가 찬희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부드러웠다. 따뜻했던 것도 같다. 찬희는 대답 못 하고 눈만 느리게 깜빡인다. 시선을 피하고 싶진 않았다. 정확히는, 계속 보고 싶었다. 새삼 신기했다.
"...고마워."
"하여간. 사람 신경 쓰이게 하고."
얘는 어떻게 늘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까.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
눈이 오래 마주친다. 열 때문일까. 이성보다 본능이 앞선다. 그냥, 얘 앞에서는 조금 솔직해지고 싶어진다. 그렇게 만드는 힘이 선우에게는 있다.
"뭔 말이요." “什么话。”
"그냥, 그런 말." “就是,那样的话。”
오해하기 딱 좋으니까... 찬희가 말을 흐리며 눈을 감는다. 선우의 손은 여전히 끝없이 찬희를 쓸어주고 있다. 정신 없고 힘든 와중에도 기분이 좋았다.
误会起来正好……灿熙含糊其辞地闭上了眼睛。善宇的手依然不停地抚摸着灿熙。在精神恍惚和疲惫之中,心情却很好。
"오해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침묵을 가르고 들려오는 선우의 목소리에 다시금 눈을 떴다. 선우는 미동도 없이 찬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더없이 진지한 앳된 얼굴. 순간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른다. 감정의 정체는 찬희도 모르겠다.
"무슨 뜻인지 알고 말하는 거야?"
"저 바보 아니에요."
선우의 손이 천천히 내려왔다. 곧 뺨 위로 뜨거운 기운이 닿았다. 굳은살 잔뜩 잡힌 손가락이 이내 찬희의 코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린다. 뭔데... 이 분위기는. 찬희는 멍한 머리로 상황파악을 하려 노력한다.
"사실 좀 헷갈리는데..." "其实有点困惑..."
"........."
"형 보면 자꾸 어려지는 기분이에요."
"........."
"기타 처음 잡았을 때 생각나는... 그런 거 있잖아요."
선우의 손가락이 찬희의 콧등을 지나 인중에 닿았다. 윗입술에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
"...너 어려, 지금도."
"그러니까요. 좀 헷갈려도 이해해 줄 수 있죠."
"........."
선우가 손가락을 거뒀다. 입술 위를 가볍게 스치며. 찬희가 그런 선우를 빤히 올려다본다. 평소라면 뭐라고 반응했을까. 하지만 열에 들뜬 지금의 찬희는...
"끝이야?"
몸을 일으킨다. 세상이 핑글 돈다. 그래도 눈을 감지 않고 선우에게 바짝 다가간다. 눈이 마주친다. 제가 이만큼 열이 나야 선우와 체온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찬희는 한다. 언제나 열기로 빛나는 까만 눈동자.
"...아프지나 말아요."
"........."
"진짜 신경 쓰이니까."
둔한 감각 속에서도 닿은 입술만은 선명할 정도로 뜨겁다.
퇴근하고 바로 연습실에 갔다. 당연히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문을 열자마자 등을 구부리고 노트북을 들여다 보는 재현이 보였다. 찬희는 조금 놀라 두 눈을 꿈뻑거렸다.
"웬일이야?"
"퇴근 잘하고 왔는데 그 무슨 경우 없는 말이냐."
재현이 찬희를 힐긋 보더니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평소에 퇴근 잘 못 하는 사람이니까 그러지. 찬희는 조금 민망해져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재현도 크게 의미를 두고 한 말은 아닌지 그 이상의 대꾸는 없다.
"저녁은 먹었어?"
"대충."
"에구. 먹고 살자고 돈 버는 건데."
"불쌍하면 좀 사주든가."
노트북에서는 계속 노래가 나왔다 끊겼다 하고 있었다. 작업 중인 모양이었다. 얼굴은 푸석하고 눈은 퀭한데도 눈빛만은 진지하다. 셋 중 가장 바쁜, 즉 야근과 회식을 달고 사는 사람이지만 단 한 번도 연습량을 못 채우거나 신곡을 미룬 적은 없는 사람이었다. 죽겠어, 힘들어, 장난처럼 말해도 진짜 약한 모습은 한 번도 보여주지 않는다. 찬희는 어쩐지 재현이 좀 측은해진다. 다음에 진짜 회사 앞으로 가 밥이라도 한 번 사줘야겠다.
"신곡?"
"엉. 들어볼래?"
"구랭."
재현이 작업 중이던 노래를 처음부터 재생시켰다. 찬희는 테이블에 기대어 꽤 진지한 얼굴로 노래를 듣는다. 각자의 노래에 큰 터치 않는 건 암묵적인 약속 같은 거였지만. 밴드 이름을 걸고 처음 나오는 음반인 만큼 각각의 의견도 중요해 근래엔 전보다 훨씬 많이 곡에 대한 얘기를 나누곤 했다.
"나는 좋은 거 같아. 힘 좀 들어갔는데?"
"나 요새 세 시간도 못 자. 잘 돼야 회사 때려치지."
"고생하네."
"너는?"
재현의 눈이 찬희를 향한다. 찬희는 순간 가슴 서늘해진다. 덜컥, 뭔가 고장난 것마냥 움츠러든다.
"나는... 잘 모르겠어."
"뭐가 또."
"그냥 다 안 돼."
"얼마나 했는데. 들어나 보자."
재현이 엄한 얼굴을 했다. 찬희는 이럴 때의 재현이 좀 무섭다. 매사 장난만 치는 것처럼 굴어도 잘 보면 뭐든 대충 하는 법이 없다.
"다음에 보여주면 안 돼?"
"다음 언제."
"다음."
"혼날래."
집중해, 인마. 너 요새 무슨 생각 하면서 다니냐. 이어지는 재현의 말에 찬희가 입을 꾹 다문다. 변명할 말이 없어서다. 미안. 그래서 순순히 사과했다. 잔소리를 길게 하는 편은 아닌지라 재현도 그 이상은 뭐라 않는다.
"잘해라. 믿는다."
재현이 찬희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트렸다 놨다. 평소라면 대뜸 짜증냈겠지만 오늘은 영 껄끄러워 찬희는 그냥 흐트러진 머리를 조용히 정리한다.
"기타 꺼내. 온 김에 같이 좀 맞춰보자."
그렇게 말하며 재현이 제 베이스를 꺼냈다. 찬희는 순순히 소파에 앉아 기타를 꺼내 튜닝을 시작했다. 어차피 기타 연습하러 온 거였다. 그러나 튜닝하는 내내 속이 시끄럽다. 기획사 미팅은 2주 뒤. 그때 음반 진행 상황 브리핑이 있을 터였다. 신곡을 끼워 하기로 한 공연은 그로부터 또 1주 뒤. 이 중 어느 것도 제대로 되고 있는 것이 없었다. 게다가.
"형."
"왜." “为什么。”
"나 선우랑 작업 하나 하기로 했어."
결국 찔리는 마음에 찬희가 불쑥 먼저 얘기를 꺼냈다. 베이스 튜닝에 여념 없던 재현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뭔 작업."
"드라마 오에스티. 선우가 나 추천했대."
"보컬? 시간은 되고?"
"뭐, 노래는 다 나왔으니까. 녹음은 평일 저녁에 나눠 하기로 했고..."
안 그래도 바쁘고 제대로 끝난 일 없는데 새 개인 작업까지 들어간다는 게 재현 입장에서 달가울 리 없다. 그걸 알아서 찬희도 미리 고백하는 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재현이 심각한 얼굴을 했다. 방금까지 작업 중인 곡에 진척이 없는 게 까발려진 뒤라 더 그렇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너 그거에만 정신 팔려 있는 건 아니지?"
역시나. 재고 따지는 것도, 돌려 묻는 법도 모르는 건 나이를 먹어도 바뀌질 않는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찬희는 그냥 그렇게만 대답한다. 제가 생각해도 자신은 없어서다. 역시 안 한다고 할 걸 그랬나. 안 그래도 선우가 가고 내내 속이 시끄러웠다. 그가 준 곡을 보면 볼수록 영 좋지 않은 기분이 자꾸 밀려왔다. 이건 걱정인지, 아니면 예감인지. 아무튼 제가 생각해도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거 없이 쫓기기만 하는 것 같았다. 자꾸 그런 생각이 드니 기분 좋은 날이 있을 리가 없었다.
"찬희야."
기타를 들고 일어나 자리를 잡는데, 재현이 찬희를 불렀다. 어. 찬희는 괜히 딴청을 피우며 재현의 시선을 피한다. 그래도 재현은 봐주는 법이 없다.
"잘하자. 너 노래 많이 하고 싶어 했잖아."
"........."
속에서 무언가가,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랬었지. 그랬던 적도 있었다.
"언제적 얘기를 하고 그래."
동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찬희는 괜히 퉁명스레 대꾸한다.
"지금은 아냐?"
"........."
글쎄. 지금은 어떤가. 찬희는 잘 모르겠다. 무언가를 열렬히 바라본 지 너무 오래 된 기분이다. 다 관성이 되었다. 꿈을 쫓으며 산 적도 있었던 거 같은데. 지금은 뒤를 쫓아오는 미진한 물에 옷 적시지 않기 위해 간신히 도망 다니고 있는 것 같다. 불어만 나는 해야 하는 일들을 꾸역꾸역 해치우며, 폐는 끼치지 않을 정도로만.
"그냥... 적당히 잘하고 싶어. 그게 뭐든."
말할수록 수렁에 빠지는 것 같다. 그게 무엇이든 지금과는 완전히 상반된 말이다. 찬희는 자꾸 작아진다. 불현듯 이 연습실을 처음 구했을 때가 떠오른다. 찬희는 아직 취준생이던 시절이다. 먼저 돈을 벌고 있던 상연과 재현이 발품 팔아 구했던 곳이 바로 여기다. 상연에게 계속 밴드 할 생각 없냐고 먼저 연락이 왔을 때. 취직 후 이곳 월세를 같이 낼 수 있게 되었을 때. 처음 새 밴드 이름으로 공연했을 때. 그런 조그마한 기억들이 틈틈이 찬희의 속을 파고든다. 그때 얼마나 기뻤는지. 얼마나 어른이 된 기분이었는지. 잘해보자고. 취미 이상이 되어서, 진짜 잘 되어 보자고. 술 마시면서 그런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던 게 몇 년 전이더라.
"최찬희."
다시금, 재현이 찬희를 부른다. 이제 찬희는 더 숨을 곳도 없다. 찬희는 체념한 얼굴로 재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 찬희를 재현이 빤히, 오래 바라본다.
"너 선우랑..."
선우.
그 이름에 더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다, 됐다."
그러나 재현 쪽에서 먼저 말을 말아서. 찬희는 어쩐지 안도와 불안이 동시에 들고 마는 것이었다.
"뭐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아냐. 그냥 잘 지내라고."
"뭐야. 싱겁게."
"불만이냐."
"내가 애야?"
"니가 애지, 그럼 어른이냐."
"형. 나 서른이야."
"어우, 징그럽다."
서른한 살의 재현이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린다. 형, 우리 두 살 차이밖에 안 나. 그런 말을 하던 선우가 딱 이런 기분이었을까. 찬희는 어쩐지 대답할 기운도 잃어버린다. 그래도 아까보다 분위기가 좀 풀어졌다는 건 느끼고 있다. 이런 게 이재현 식 화해 방법이라는 건 이제 찬희도 안다. 연습이나 하지? 찬희는 톡 쏘아붙이듯 말하며 피크를 든다. 우리가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나. 잠깐 들었던 생각은 피크를 움직이는 동시에 어딘가로 사라져버린다.
三十一岁的在贤尽可能地皱起了脸。哥,我们只差两岁。说这种话的善宇当时也是这种感觉吗?灿熙不知为何失去了回答的力气。不过他感觉到气氛比刚才稍微缓和了一些。灿熙现在也知道,这就是李在贤式的和解方法。要不要练习一下?灿熙尖锐地说着,拿起了拨片。我们什么时候变得这么老了?刚刚闪过的念头在拨片移动的同时消失在某处。
사귀자는 말도, 좋아한다는 고백 비슷한 말도 없었다. 찬희는 이미 충분히 바빴다.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어 살고 있었다. 그런 찬희를 아는 선우가 제 시간을 쪼개 찬희를 만나러 왔다. 합주가 끝나면 같이 귀가했고, 찬희의 아르바이트나 학원이 끝나면 그 앞으로 데리러 왔다.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으면 따라 도서관에 와 책상 밑으로 손을 잡았고 찬희가 집에서 과제 중이면 옆에서 뒹굴거리며 놀다 불현듯 키스를 했다. 어디서든 사람이 없으면 손을 잡고 가끔은 뽀뽀하고, 또 가끔은 키스하고. 바빠서 정신 없는 와중에 그런 건 또 어떻게 됐다. 다만 찬희는 늘, 너무 깊게 빠지지 않을 것, 하고 다짐했는데, 정신 없는 와중에 상처까지 받으면 회복할 시간조차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것치곤 너무 많은 영역을 선우에게 내어주고 있었지만.
섹스한지 오래 되어 삽입까지 순탄치 않았다. 얼마 안 남은, 유통기한이 언제인지 모를 젤을 끝내 다 썼다. 너 섹스 처음이야? 남자랑은 처음이에요. 잔뜩 긴장한 어린 얼굴에서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찬희는 선우를 리드해야 한다는 생각에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다. 그래도 좋았다. 추워지기 시작한 늦가을인데도 선우의 몸에서는 땀이 계속 났다. 그래서 팔에 매달리는 족족 미끄러져 놓쳤다. 나중엔 선우가 찬희의 팔을 붙잡아 제 목에 두르게 했다. 그 사소한 순간이 이상하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그때부터 흥분했던 것 같다, 아마. 방음 안 되는 집이라 간신히 신음을 참다가 그때부터는 못 참고 선우의 귓가에 소리를 쏟아냈다.
그 해 여름 가을 겨울을 모두 선우와 보냈다. 따지고 보면 몇 개월 안 됐는데 세 계절을 함께 보내서인지 아주 오래 알고 지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해가 바뀌는 날엔 같이 맥주를 마시다 섹스했다. 그게 별스럽게 좋았다. 익숙한 자취방, 싸구려 콘돔이 널부러져 있고, 조명을 다 켜둬 사방이 환했고, 티비가 없어 제야의 종소리가 언제 들리다 언제 끝났는지 몰랐는데도 그랬다. 그렇게 새해를 맞았다. 섹스가 다 끝나고 나서야 도중에 해가 바뀌었다는 걸 알았다.
그대로 지쳐 곯아 떨어졌다 목이 말라 잠깐 일어났을 때였다. 물을 마시고 돌아보니 선우가 팔을 뻗은 채 널부러져 자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왜 저러고 자는 거지, 생각하다 제가 베개 대신 선우의 팔을 베고 잠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팔 아팠겠다. 뒤늦게 좀 미안해졌다. 침대로 다시 기어 들어가니 선우가 작게 뒤척였다. 미안, 깼어? 찬희가 속삭였다. 선우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상황을 살피다 다시 찬희를 제 팔 베고 눕게 하더니 꽉 끌어안았다. 더 자요. 웅얼거리는 낮은 목소리. 단단한 팔 근육과 뜨거운 가슴팍. 얼결에 안긴 채 한참을 잠 못 이루며 그런 것들을 더듬어 보다가. 찬희는 불현듯, 제가 없어도 팔을 제 쪽으로 뻗고 있는 것. 사랑은 사실 그런 모양인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이상하고 우스꽝스럽고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우리가 하는 게 사랑인지 아닌지 물어 본 적은 없었지만... 그날 문득 받아들였던 것 같다. 일상에 소리소문 없이 침투하여 제 마음의 모양을 바꾸어 가던 모든 것들을. 그 다음 날 처음으로 곡 다운 곡을 썼다. 베갯머리 송사나 다름없었다.
그 해는 윤년이었다. 2월 29일, 찬희는 선우와 함께 악기상에 가 일렉기타를 하나 샀다. 당장 쳐보고 싶어 연습실에 갈까 했는데, 그러기엔 날씨가 유독 좋았다. 이상기온이랬다. 그새 봄처럼 따뜻해져 곳곳에는 개나리마저 피었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한강에 갔다. 막상 강바람을 맞으니 좀 추워서 새우깡과 소주를 사 먹고 마시며 몸을 덥혔다. 그러고 해가 질 때까지 언 손으로 엉망진창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앰프가 없으니 기타에서는 틱, 틱, 막힌 듯한 소리만 났는데, 술 기운 탓인지 그마저도 즐거웠다. 아이유라도 된 마냥 아무렇게나 놀다가 손 시려, 한 마디 했더니 선우가 기타를 건네 받았다. 그리곤 찬희의 목에 둘려 있던 목도리를 단단히 잡아주었다. 낯간지러워 괜히 웃음을 터트렸다. 뭐하는 거야. 아, 춥다면서요.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바람 따라 작게 흩어졌다. 곧 선우가 피크 든 손을 움직였다. 틱, 틱, 틱. 꽉 막혀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그래도 음은 다 들렸다. 처음 듣는 노래였다.
"뭐야, 노래 좋다. 누구 노래야?"
"제가 만들었어요. 전에 과제로."
"이야. 멋있는데."
순수하게 감탄했다. 제가 끄적였던 노래들이 생각나 좀 부끄럽기도 했다. 찬희는 잘 모르면서도 연주를 따라 작게 허밍했다. 똑같이 앰프 없이 연주하는 건데도 제가 연주하는 것과는 수준이 달랐다. 그래서일까. 틱, 틱, 틱... 둔탁하게 끊기는 소리마저 어딘가 서정적으로 들렸다. 연주하다 말고 선우가 가볍게 웃었다. 나중에 내가 노래 만들고 형이 노래 부르고 하면 재밌겠다. 그쵸. 찬희는 허밍하다 말고 크게 웃었다. 너무 까마득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왜 또 웃는데요. 선우가 좀 토라진 듯 물었다. 찬희는 불퉁해 보이는 선우의 볼을 콕 찔렀다.
"그냥. 즐거워서."
너랑 있으면 즐거워서 좋아.
술이 들어가니 평소엔 하기 힘들었던 말이 꽤나 뻔뻔하게 흘러나왔다. 진심이었다. 힘들고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날에도 선우와 함께 한 후론 한 번도 외롭지 않았다. 갓 상경해 홀로 자취방에 누워 지친 몸을 짐처럼 이고 외로움에 시달리던 날들을 떠올려 본다. 어쩐지 지금 이 순간이 꿈 같았다.
"어, 술 떨어졌다."
둘 다 술을 잘 못 하는 편인데도 소주 한 병이 금방 동났다. 좀 더 사올까요? 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우깡도. 찬희가 덧붙였다.
선우가 자리를 비운 동안 조금 남은 새우깡을 오물거리며 멍하니 해 지는 강가를 구경했다. 소주를 만들어 오나. 슬슬 그런 생각이 들 때 즈음 선우가 돌아왔다. 검은 비닐봉투를 들고 걸어오는 폼이 어딘가 껄렁했다.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그냥 그런 것들도 다 웃겼다. 왜 이제 왔어. 찬희가 웃으며 투정했다. 선우가 찬희의 옆에 앉더니 대뜸 손을 내밀었다.
"손 줘 봐요."
"손?"
찬희가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 손 말고, 반대 손. 선우가 내민 손을 흔들며 채근했다. 반대 손? 찬희는 순순히 왼손을 내밀었다. 선우가 제 손 위에 올라온 찬희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그러더니 반대 손으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게 무엇인지 눈치챈 찬희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야, 이게 뭐야. 초딩이야?"
어디서 났는지 모를 하얀 풀꽃이 돌돌 감겨 원을 그리고 있었다. 아, 좀 조용히 해 봐요. 선우의 귀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피부가 까매도 그런 건 지나치게 잘 보였다. 곧 찬희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졌다. 찬희는 숫제 깔깔 웃기 시작했다.
"뭐야, 진짜. 이거 막 뜯어도 돼?"
"몰라요. 신고하지 마요."
찬희의 웃음 소리에 선우가 점점 부루퉁한 얼굴을 했다. 그 와중에도 맞잡은 손은 떨어지질 않아서. 찬희의 눈엔 눈물까지 맺힌다. 하도 몸을 떨며 웃어서인지 꽃잎이 톡톡 떨어져 나갔다. 귀엽다, 너. 찬희는 겨우 웃음을 그치고 솔직하게 말했다. 애는 애구나 싶었다. 그치만 싫지 않았다. 술 탓일까. 마음이 포르르 풀어졌다. 그 잠깐 사이에도 제 생각을 했다는 게, 오가는 길에 핀 때 이른 풀꽃을 꺾어 반지로 만들어 저를 줄 생각을 했다는 게, 생각할수록 사랑스러웠다.
"찬희야."
...고 생각하는데. 불쑥 선우가 찬희의 이름을 불렀다. 순간 심장이 쿵. 바닥으로 떨어진다. 대답을 못 하고 눈만 깜빡였다. 선우의 얼굴이 더없이 진지했다. 깨닫는 동시에, 밑으로 떨어진 줄 알았던 심장이 제자리를 찾아 뛰기 시작한다. 빠르게, 아주 빠르게.
"우리 사귈까?"
찬희는 눈을 깜빡인다. 사실 놀라서 그랬다. 이런 식으로 고백 받는 상상은 해 본 적 없었다. 찬희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선우의 얼굴도 점점 발갛게 물들어갔다. 노을도 붉고, 선우의 얼굴도 붉었다. 찬희는 뒤늦게 조금 웃고 말았다.
"야 너는... 무슨 고백을 꽃반지 주면서 그렇게 비장하게 하냐."
누가 보면 다이아라도 해 온 줄 알겠네. 민망한 마음에 자꾸 입이 먼저 움직였다. 그래서 대답은? 선우가 다급하게 묻는다. 찬희는 자꾸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억지로 참는다.
"우리 이미 사귀는 거 아니었어? 나는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 그건 맞는데. 그래도."
선우의 얼굴이며 목소리가 점점 퉁명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사실 잔뜩 창피해 하는 게 다 보였다. 아, 귀여워. 찬희는 목구멍을 타고 올라올 뻔한 말을 애써 삼킨다. 대신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겨울의 강가엔 사람이 별반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찬희가 불쑥 선우를 향해 고개를 가까이 댔다. 쪽,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선우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떨어질 것처럼 커다래진 선우의 눈을 코 앞에서 바라보며, 찬희가 씩 웃었다.
"다음엔 다이아 해 와."
선우는 얼어 붙은 그대로 별 반응이 없다. 이젠 찬희 쪽에서 자꾸만 쑥스러워졌다. 아, 춥다. 찬희는 괜히 뺨을 비비며 생각나는 대로 말을 늘어놓는다. 근데 우리 오늘부터 사귀는 거야? 오늘 2월 29일인데? 그럼 기념일이 4년에 한 번이야? 와, 이거 가성비 대박 아냐? 조잘조잘 떠드는 찬희를 보며, 그제야 선우가 픽 웃었다. 이번엔 찬희가 말을 멈췄다. 한쪽 뺨으로 노을을 받는 선우의 얼굴이, 처음부터 근사하다고 생각했던 그 웃음과 퍽 잘 어울려서. 그러니까, 아름다워서.
선宇依然僵在那里,没有什么反应。现在倒是灿熙开始觉得有些尴尬了。啊,好冷。灿熙无意识地揉了揉脸,随口说起了想到的事情。我们今天开始交往吗?今天是 2 月 29 日?那我们的纪念日每四年才有一次?哇,这性价比也太高了吧?看着喋喋不休的灿熙,终于,선宇笑了。这次轮到灿熙停下了话语。夕阳照在선宇的一侧脸颊上,他的笑容从一开始就很迷人,现在看起来更是如此。所以说,真的很美。
"다이아는 못 해 줘도... 4년 뒤엔 더 좋은 거 해 줄게요."
“钻石虽然不能给你……但四年后我会给你更好的。”
어딘가 자신감 넘치는 말투. 그 비장한 얼굴에, 찬희는 저도 모르게 웃어버린다.
某种自信满满的语气。看到那张庄重的脸,灿熙不由自主地笑了。
"어, 웃어? 내 말 안 믿죠?"
“哦,笑了?你不相信我的话,对吧?”
"그럼 믿겠냐."
당연히 안 믿겼다. 4년이라니. 너무 길고 까마득했다. 당장 선우가 군대만 가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인데. 뭘 믿고 4년 앞을 턱턱 약속하는 거야. 찬희는 그 순간 선우가 정말 애 같다는 생각을 문득 하고 만다. 그래도 싫진 않았다. 4년 뒤에도 이 감정이 계속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냥 이 순간만큼은 4년 뒤를 확신하는 이 연하가 사랑스러웠다. 깜빡 속아주고 싶을 정도로. 그가 말하는 4년 뒤를 정말 믿고 싶어질 정도로.
"두고 봐. 4년 뒤에도 형 옆에 있을 거니까."
선우가 잔뜩 삐친 얼굴로 투덜거린다. 그래, 두고 보자. 찬희는 그냥 그렇게 말하며 선우의 입술에 한 번 더, 쪽, 가벼운 키스를 내렸다. 반지를 낀 왼손으론 선우의 뺨을 붙잡은 채. 차가운 겨울 노을과 열로 붉어진 뺨과 이파리 떨어진 하얀 풀꽃반지, 그리고, 강아지처럼 까맣고 커다란 두 눈동자. 헤어지더라도 이런 것들은 아마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고... 제 입술로 답가처럼 다가오는 뜨거운 입술을 순응하듯 삼키면서. 찬희는 불현듯 그런 생각을 한다. 지금의 내 마음을 꺼내어 내려 놓으면, 아마 이런 모양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붉게 물든 뺨과 잎 떨어진 흰 꽃 같은, 작고 서툰데도 미래를 믿고 싶게 만드는, 그런 소박하고 이상한...
녹음 당일엔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전날 밤부터 체한 것처럼 속이 쓰렸던 탓이었다. 너무 힘이 없어서 점심 시간에 억지로 밥 한 술 입에 넣었는데, 그 순간부터 속이 꽉 막힌 것처럼 아파서 바로 식사를 포기했다. 커피 대신 굳이 매실차를 사 꾸역꾸역 마셨지만 나중엔 그것마저도 토했다. 보다 못한 주위에서 반차를 권했고, 결국 부장이 찬희를 두 시간 먼저 퇴근시켰다. 덕분에 녹음 들어가기 전 병원에 가 수액이라도 맞을 수 있었다. 수액을 다 맞으니 그래도 아까보단 좀 나았다. 찬희는 집에 들러 편한 옷으로 갈아 입을까 하다가, 러쉬아워가 곧이라는 생각에 마음을 바꿔 약속보다 좀 일찍 선우의 작업실로 향했다. 작업실에 들어오는 찬희를 보며 선우가 놀란 얼굴을 했다.
"왜 벌써 와요."
"좀 일찍 퇴근했어."
선우는 이른 저녁 식사 중이었다. 되도록 오늘 안에 녹음을 다 끝내는 게 둘의 목표였다. 저녁 먹었어요? 먹을래? 선우가 제가 먹던 피자를 들어올려 보였다. 찬희는 소파에 늘어져 앉아 고개를 저었다. 웬일이야. 선우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체해서 병원 갔다 왔어."
"헐. 뭘 먹었길래."
"몰라. 물밖에 안 마셨는데, 오늘."
"녹음할 수 있겠어요?"
"해야지."
선우가 식사를 하는 동안 찬희는 악보를 꺼내 마지막 연습을 했다. 악보 보며 노래하는 게 익숙한 찬희를 위해 선우가 특별히 찍어준 것이었다. 그동안 시간이 영 안 맞아 전화로만 대강 맞춰봤다. 그래도 악보 가득 꼼꼼하게 메모한 흔적이 가득했다.
"준비 되면 바로 들어갈게요."
피자 한 조각을 더 들며 선우가 말했다. 너 다 먹으면 바로 들어가. 뻑뻑한 눈을 비비며 찬희가 대꾸했다. 아까 링겔을 다 맞았을 땐 그래도 컨디션이 꽤 괜찮았던 것 같은데. 악보를 들여다 보기 시작하니 다시금 속이 아파오는 것 같다. 사실 이 노래를 받아 연습하는 내내 그랬다. 형 생각하면서 썼으니까. 선우가 그랬다. 찬희는 모르는 척 하고만 싶다.
"진짜 괜찮겠어요?"
부스에 들어가 헤드폰을 쓰자마자 선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 그러고 보니 여기서 녹음은 처음 해 봐. 찬희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애써 무시하며 딴소리를 했다. 오기라면 오기였다. 컨디션 조절 못 한 티를 내는 것도, 제가 그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걸 티 내는 것도 다 싫었다. 찬희는 부러 웃으며 부스 유리벽 너머 선우를 바라보았다. 마이크와 헤드폰을 타고 대화가 오갔다.
"신기하다. 너 처음엔 막 30만원짜리 홈레코딩 마이크 쓰고 그랬잖아."
"언제적 얘기예요."
"그냥, 언제 이렇게 컸나 싶어서."
"헛소리 그만하고. 준비 됐으면 들어갈게요."
첫소절부터 갑니다. 선우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한다. 찬희는 고개를 끄덕인다.
녹음은 난항이었다. 속이 엉망이어도 목은 괜찮으니 어떻게든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조절이 잘 안 됐다. 무엇보다 먹은 게 없어 몸에 힘이 안 들어갔다. 설상가상 찬희는 녹음 경험도 거의 없었다. 이런 본격적인 작업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평소처럼 한다고 해도 자꾸 몸이 굳었다. 몇 번씩 끊으며 디렉팅을 내리던 선우가 결국 한숨을 쉬었다.
"형, 힘 좀 빼요. 평소처럼 해요."
헤드폰 안에서 반주가 끊기고 선우의 목소리가 대신 들려왔다. 이쯤 되니 찬희도 짜증이 밀려온다. 선우 때문이 아니라,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제 몸에 대한 짜증이다. 화살이 자기에게 돌아가니 잊고 있던 속쓰림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너 좀 잡는 스타일이구나?"
그래도 농담 한답시고 한 말인데, 대뜸 선우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저 지금 되게 상냥하게 하는 거예요."
집중해요. 선우가 단호하게 대화를 끊는다. 찬희는 조금 머쓱해져 헤드폰을 고쳐 쓰고 가사를 내려다본다. 이런 노래를 써 놓고, 그런 말을 해 놓고. 그래놓고 어떻게 집중을 하라는 건데. 저도 모르게 그런 원망이 든다. 형 생각하면서 썼으니까. 그 말이 자꾸 머릿속 한 켠에 맴맴 돈다. 무슨 이런 가사를 쓰는데. 헤어진 사이에, 이제 와서.
녹음은 반도 못 가서 끊겼다. 형, 그냥 나와요. 선우가 마른 세수를 하며 말했다. 목소리가 헤드폰으로 들려오니 부스 밖에서 그러고 있는 선우가 꼭 연극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찬희는 조금 고집 부려볼까 하다가, 선우가 하도 단호하게 굴어서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제가 생각해도 오늘은 엉망이었다.
고집 부린 게 무색하도록, 부스 밖으로 나오자마자 긴장이 탁 풀렸다. 동시에 속이 물밀듯이 쓰려왔다. 찬희는 저도 모르게 명치께를 붙잡고 주저앉았다. 그럴 줄 알았다, 내가. 선우가 혀를 차며 찬희에게 다가왔다.
"괜찮아요?"
그제야 찬희는 순순히 고개를 젓는다.
"또 체한 거 같아..."
"물밖에 안 마셨다면서요."
"그러니까."
"하루종일 그랬어요?"
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가 다시금 한숨 쉬었다. 일단 좀 누워요. 선우가 찬희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찬희는 순순히 선우를 따라 소파에 누웠다. 선우의 손이 찬희의 배에 닿았다. 옷 너머로 따뜻한 기운이 밀려왔다.
"긴장했어요? 무슨 물 체를 하고 그래."
그럼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잖아. 이내 선우의 손이 찬희의 두 손을 붙잡아 주무르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손은 언제나 그랬듯 뜨끈했다. 익숙한 체온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좋았다. 천천히 몸에서 긴장이 풀렸다.
"잘 체하지도 않는 사람이."
"그러니까."
생각해 보니 마지막으로 체한 게 언제인지도 까마득했다. 형 그때도 물 체 했었는데. 선우도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언제? 찬희의 물음에 선우가 덤덤히 대답했다.
想起来最后一次消化不良是什么时候也记不清了。哥哥那时候也喝水噎到了。善宇似乎也有类似的想法。什么时候?在灿熙的问话下,善宇淡淡地回答道。
"그때. 은비 누나 나가고 처음 공연했을 때."
"아."
정말 옛날이다. 그게 언제더라. 경기도 어디서 열렸던 아마추어 밴드 페스티벌 때였을 것이다. 예선에서 통과하면 일산의 큰 야외무대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었다. 그 예선 당일날 찬희는 살면서 처음으로 물만 마시고도 체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은비 없이 무대에서 혼자 노래를 부른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 부담 탓인지 전날부터 체해서 몇 번이고 멀건 위액만 게워냈었다. 그때도 선우가 웅크리고 있는 찬희의 손을 내내 주물러 주었다. 형 진짜 잘하니까 걱정하지 마요. 그런 말들을 위로처럼 끝없이 내뱉으며.
형 기억나요? 우리 처음 같이 노래 불렀을 때. 내가 그랬잖아. 형 왜 뽑았는지 알겠다고.
아마 무대 뒤에서 순서를 기다릴 때였을 것이다. 긴장으로 빳빳하게 굳은 찬희의 손을 주무르며, 선우가 불쑥 말을 꺼냈다. 그때를 떠올린 찬희가 저도 모르게 조금 웃었다. 건방졌지, 너. 찬희의 대답에 선우도 피식 웃었다. 무대가 시끄러워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찬희가 근사하다고 생각하는 그 얼굴만큼은 그대로였다.
근데 그 말 진심이었어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형이 우리한테 진짜 필요한 존재라고.
진위여부가 어떻든 간에, 그 말이 이상하게 찬희에게 용기가 되었다. 감화 되었던 것 같다. 그런 말을 그렇게 툭툭 내뱉을 수 있는 선우의 용기에. 그때부터 지금까지 죽 찬희에게 선우는 신기한 사람이었다. 여리고 겁 많아 보여도 사실 누구보다 용감한, 마른 갈대 밭에 붙은 불꽃 같은 사람.
그날 몸에 익은 대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나는 이 팀에 필요한 존재라고, 내가 지금 무너져서는 안 되는 거라고, 그러니, 용기를 내야 한다고 되뇌면서. 노래를 부르며 점점 깨끗하게 비워지는 머리와 몸을 시시각각 느끼면서. 환희처럼 터져나오는 소리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찬희는 새삼스레 다시금 생각하고 만 것이었다. 계속 노래 부르고 싶다고. 나로서 이 자리에 있고 싶다고. 이 밴드에서, 이 무대에서. 그래서 처음으로, 노래를 다 부르고 울었다. 무대를 내려오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기껏해야 심사위원들과 몇 안 되는 관객들을 앞에 두고 부른 노래였는데도 꼭 어디 경선에서 1위라도 한 마냥 울었다. 잘 해낸 스스로가 너무 대견했고, 옆에서 언제나처럼 든든하게 최선을 다해준 멤버들이 너무 고마웠고, 그리고...
형 정말 고생했어. 우리 진짜 잘했어.
저를 끌어안으며 세상 다 가진마냥 기뻐해 주는 선우가 너무 사랑스러웠고.
그날 예선에 붙었단 소식을 듣고는 모두 둥글게 끌어안고 소리를 질렀다. 인생 가장 흥분했던 순간이었다. 악을 내듯 소리를 지르며 서로서로 자축했다. 우리 잘했어. 진짜 잘했어. 아마 다들 그때 생각했을 것이었다. 이 밴드를 계속 해야겠다고. 아무도 입밖으로 꺼낸 적 없는 말이지만 적어도 찬희는 그렇게 느꼈다. 그래서 상연이 먼저 연락을 해 왔을 때 그만큼 기뻤던 거고, 선우가 더는 밴드를 안 하겠다고 했을 때 그만큼 배신감을 느꼈던 거다. 제가 그린 제 노래의 미래에 선우가 없다는 게, 선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아무튼 아프지 마요. 이제 나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손을 주물러주는 익숙한 온기. 여상하기 그지없는 차분한 말투.
찬희는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온다. 내리깐 선우의 눈동자는 더없이 고요하다.
"왜 그런 말을 해."
저도 모르게 그렇게 대꾸했다. 선우는 대답하는 대신 묵묵히 찬희의 손을 주무르기만 했다. 그 순간, 찬희는 덜컥 겁이 난다. 그의 노래를 받아 든 순간부터 들었던 예감이 자꾸만 크기를 키워 찬희의 속을 꽉 짓누른다.
찬희는 제 손을 주무르던 선우의 손을 있는 힘껏 붙잡았다. 그제야 선우가 찬희를 바라보았다. 심연처럼 까만 눈동자. 찬희는 처음으로, 그 속을 모르겠다고, 아무리 파헤쳐도 닿을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런 생각을 한다.
"어디 안 갈 거지."
그럴 순 없는 거지. 내가 무슨 마음으로 너와 헤어졌는지 네가 안다면.
"........."
선우는 오래도록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한참 찬희를 내려다 볼 뿐이었다. 그 시선이 너무 침착해서. 찬희는 자꾸 불안해진다. 그러나 그의 불안이 저와는 상관 없다는 듯.. 선우가 찬희의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쉬고. 괜찮아지면 일찍 들어가요."
녹음은 다음에 이어서 해요. 그리곤 찬희의 곁을 떠나 책상 앞에 가 앉았다. 이제 찬희에게 보이는 건 선우의 등 뿐이다. 검은 후드 안에 가려진 커다란 등.
찬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인기척에도 선우는 뒤돌지 않아서. 찬희는 오래도록 그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속을 닥닥 긁는 검은 불안이 꼭 그 등 같았다. 크고 두텁고 단단하고, 찬희를 봐주지 않는. 모르겠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더 솔직하게는... 알고 싶지 않았다. 영원히 모르고 싶었다. 그래서...
찬희는 불현듯 사무치게 외로워진다. 발치 밑에서 다 삼켜버릴 것처럼 입을 벌리는 끝을 알 수 없는 블랙홀. 오랜만에 느끼는 거대한 감각이었다.
물 흐르듯 순탄한 연애였다. 자주 투닥거리긴 해도 큰 싸움은 없었다. 너흰 맨날 싸우냐. 다들 그렇게 말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별로 싸운다는 생각도 안 했다. 암묵적인 비밀 연애는 그렇게 흘렀다. 찬희가 보컬 학원을 그만두고 나서는 전보다 시간적 여유도 생겼다. 그만큼 베갯머리 송사가 늘어갔다. 그래서 상연과 재현이 밴드를 만든다고 했을 때. 난 졸업하면 밴드 그만할 거야. 단호한 선우의 거절에 찬희는 큰 충격을 받았다. 선우는 차분하게 찬희를 설득했다. 난 원래 곡 만드는 사람이고. 밴드에 인생 전부를 올인할 생각은 없어요. 밴드 음악이 나랑 잘 맞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찬희는 납득이 힘들었다.
"뭐가 너랑 안 맞아. 너 잘하잖아. 둘 다 하면 되잖아."
"이미 마음 정했어요, 난."
알고 보니 선우는 졸업 후 친구와 함께 쓸 작업실까지 이미 구해 놓은 상태였다.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자꾸 따지고 드는 찬희에 선우도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보였다.
"형이 흘려 들었겠죠."
"아니, 작업실 구한다는 게 그런 뜻이란 말 안 했잖아."
"재현이 형까지 졸업하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거라 생각했어요."
"내가 노래를 그만 둘 것 같았단 소리야?"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소모적인 싸움이 계속 되었다. 끝내 찬희가 먼저 입을 다물었다. 본래 찬희는 싸움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걷잡을 수 없어지기 직전에 싸움은 종료되었다. 물론 표면적으로만 그랬다. 찬희는 여전히 납득할 수 없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됐다. 선우의 본래 진로가 작곡이었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서운한 마음이 도무지 풀리지 않았다. 이런 적은 찬희도 처음이었다. 싸우기 싫어하는 성정 탓에 평소라면 뭐든 이해하고 넘어가려 노력했을 텐데. 이번에는 도무지 마음이 안 풀렸다. 제가 그리는 음악에 선우가 없다는 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나만 그랬던 것 같아서. 나만 내 미래에 당연하다는 듯 선우를 끼워 넣고 있었어서. 찬희는 꼭 선우가 저와의 과거를 모두 버리고 가는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수록 억울하고 서운한 마음이 자꾸 밀려왔다. 나중엔 슬퍼져서 선우의 연락을 본 척도 안 했다. 그럴 기운이 없어서 그랬던 게 컸지만.
냉전 상태가 지속되던 어느 날이었다. 이른 새벽 무작정 선우가 찬희의 집에 들이닥쳤다. 한쪽 어깨엔 기타 케이스를 맨 채였다. 뭐야... 비몽사몽 웅얼거리는 찬희를 선우가 억지로 깨워 일으켰다.
冷战状态持续的某一天。清晨,善宇突然闯进了灿熙的家。他肩上背着一个吉他盒。什么啊……半梦半醒的灿熙被善宇强行叫醒。
"바다 가자."
"지금?"
"어, 지금."
그리고는 정말로 무작정 떠났다. 인천에라도 가는 건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선우는 찬희를 고속버스 터미널로 데리고 갔다. 터미널까지 와서야 찬희는 선우가 예매한 버스가 강릉 행임을 알게 되었다. 그쯤 되니 슬슬 정신이 들었다. 그냥 다 어처구니 없었다. 이 한 겨울에 강릉 가겠다고 무대뽀로 밀고 나오는 선우도 어이없었고, 그런 그에게 얼결에 여기까지 끌려온 제 스스로도 어이없었다. 평소라면 이게 뭐냐고 짜증이라도 냈을 텐데 애매한 냉전 중이라 그러기도 뭐했다. 먼저 말 걸기 싫다는 치졸한 마음이 찬희를 그렇게 만들었다. 찬희는 버스 탄 내내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자는 척 했다. 그러다 중간엔 진짜로 잠깐 잠들었다.
한겨울의 동해 바다는 거대하고, 조금 무시무시했다. 바람이 물을 쓸고 갈 때마다 파도가 사납게 쳤다. 선우는 목적지를 아는 사람처럼 찬희를 이끌고 무작정 뚜벅뚜벅 걸었다. 편의점에 들러 데운 캔커피와 핫팩 같은 걸 사더니 바다가 보이는 정자에 자리 잡았다. 찬희는 추워서 한껏 몸을 웅크렸다. 날이 제법 풀렸다곤 해도 바닷바람은 무시할만한 게 못 됐다. 선우가 그런 찬희에게 핫팩 하나를 꺼내 던져주었다. 이거 붙여요. 찬희는 순순히 핫팩을 껴입은 티셔츠 위로 붙였다. 반항하기에는 추위를 너무 많이 탔다. 고분고분 핫팩을 다 붙인 찬희의 손에 이번엔 선우가 캔커피를 쥐어주었다. 온장고에서 꺼낸지 얼마 안 된 만큼 핫팩마냥 따뜻했다.
찬희가 그러는 동안 선우는 기타를 꺼냈다. 늘 보던 일렉 기타가 아니였다. 너 통기타가 있었어? 찬희의 물음에 선우가 덤덤히 대답했다. 싸구려야. 안 쓴지 좀 됐어요. 그러면서 피크 쥔 손을 한 번 움직였다. 제법 아름다운 소리가 났다.
"부르고 싶은 노래 있어요?"
"갑자기?"
얘가 왜 이래? 찬희가 의아함과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선우를 바라보았다. 선우는 태연했다.
"없어?"
"딱히?"
찬희는 괜히 새침하게 굴었다. 아무튼 찬희는 이 모든 상황이 다 황당했다. 캔커피를 꼭 쥐고 뺨에 갖다 대는데, 선우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난 있어요."
그러더니 다짜고짜 연주를 시작했다. 늘 듣던 일렉 기타 소리가 아니라 생소하고 어울리지 않아 어딘가 이상했지만. 연주 소리도 바람에 반쯤 묻혔지만... 그래도 찬희는 바로 그 노래가 무엇인지 알아챘다. 동시에 선우가 무슨 생각으로 굳이 여기까지 기타를 들고 왔는지도 알 수 있었다. 웃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 입꼬리가 올라갔다.
휴일을 앞둔 밤에 아무도 없는 새벽 도로를 질주해서 바닷가에..
지금 둘의 상황과 영 어울리지 않는 노래 같았다. 원곡과 달리 느리고 잔잔했는데도 어딘지 경쾌했다. 찬희는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자연스레 기억은 차곡차곡 쌓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선우와 처음 만났던 그 동아리 방으로 찬희를 데려갔다. 손에 닿은 캔커피 덕에 손끝도 점점 따뜻해졌다. 찬희는 결국 모르는 척 입을 연다. 기다릴게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도록. 항상 엔진을 켜 둘게...
노래를 부르는데 자꾸 웃음이 나왔다. 찬희는 노래를 부르다가, 중간에 웃다가, 다시 부르다가, 또 웃기를 반복했다. 아, 그만해. 결국 노래가 다 끝나기 전에 웃음이 터졌다. 쑥스럽고 간지러웠다. 손끝이 따뜻해진 게 꼭 캔커피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선우는 찬희를 따라 웃으면서도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밤에 생각나서 다시 듣는데. 형 데리고 바다 가야겠다, 갑자기 그 생각이 들더라고요."
언제 끝났는지도 모르게 연주가 끝났다. 잠깐의 정적 끝에 선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요?"
"오늘?"
오늘이 무슨 날이야... 개강 직전이지... 아무 생각 없이 그런 말을 하던 찬희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아. 찬희는 말을 하다 말고 휴대폰을 꺼냈다. 액정 위에 선명하게 날짜가 찍혀 있었다. 2월 29일.
찬희가 천천히 입술을 깨물었다. 선우가 기타를 한 번 튕겼다. 그리곤 씩 웃었다.
찬희慢慢地咬了咬嘴唇。선우弹了一下吉他。然后他笑了。
"4년 빠르죠?"
"........."
그 순간 울컥,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강렬한 감각이 찬희의 목울대를 치고 지나갔다. 그런 거대한 감정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노래를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올 때와는 또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고였는데, 그런 스스로가 당황스러워서 찬희는 아무 것도 못하고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바다 위로 늦겨울의 한강이 그려졌다. 처음 샀던 기타. 새우깡과 참이슬. 틱틱 탁한 소리를 내며 말려들어가던 기타음. 잎이 떨어진 풀꽃 반지.
那一瞬间,一种强烈的感觉猛然袭击了灿熙的喉咙,连他自己都感到惊讶。这种巨大的情感是他出生以来第一次经历的。与演唱结束后从舞台上走下来时的感觉完全不同。眼泪瞬间涌上了眼眶,这让灿熙感到措手不及,他僵硬地站在那里,什么也做不了。晚冬的汉江映入眼帘。第一次买的吉他。虾条和真露。发出嘀嗒嘀嗒声的吉他音。落叶的草花戒指。
두고 봐. 4년 뒤에도 형 옆에 있을 거니까.
자신에 차 말하던 선우의 낮은 목소리.
"나 성공하면... 그땐 진짜 다이아 해 줄게."
4년을 건넌 선우가 찬희의 왼손을 잡아 끌었다.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심플한 링이 찬희의 약지에 천천히 끼워졌다. 유치하다고. 낯간지럽다고. 오글거린다고. 그게 아니더라도 무슨 말이든 꺼내 타박하고 싶었는데. 눈물이 자꾸 올라와서 아무 말 못했다. 나중엔 이런 데 말고 어디 해외 가자. 고장난 것처럼 멈춘 찬희에게 선우가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소리는 작아도 머뭇거림은 없었다. 찬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선우가 찬희를 향해 턱을 까딱였다. 찬희는 안다. 저 얼굴은, 저 행동은.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부리는 선우만의 허세라는 걸.
"어디 갈까요? 말만해." “我们去哪儿?你说吧。”
찬희는 결국 울음과 웃음이 동시에 터진다. 눈물이 쏟아지는데 동시에 웃음이 났다. 선우도 같이 웃었다.
찬희最终又哭又笑。眼泪涌出,但同时也笑了。善宇也跟着笑了。
"어, 울다가 웃으면..." “呃,哭着哭着笑了……”
"아 그만해애." “啊,别这样。”
찬희가 선우의 팔을 찰싹 때렸다. 아,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미안해. 선우가 다급하게 몸을 피했다. 그래도 얼굴은 웃고 있었다. 찬희는 그냥 이 순간이 현실감 없다. 다 꿈이라고 해도 아 그렇구나,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손가락에 걸리는 감각만큼은 진짜여서. 이내 제 손을 끌어 꽉 붙잡는 선우의 체온이 늘 그랬듯 뜨거워서. 제가 자각하지 못한 사이 정말로 4년이 흘렀는데 이 손만큼은 그의 말대로 제 옆에 그대로 있어서.
"4년 뒤에도 곁에 있을게요."
4년만큼 더 어른이 된 선우가 찬희를 보며 웃었다. 피식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어른이 된 만큼 더 근사해진 얼굴로.
"그러니까 불안해 하지 마요. 밴드 안 한다고 옆에 없는 거 아니잖아."
난 형밖에 없어.
결국 찬희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만다. 이런 기분은, 이런 마음은 처음이었다. 동시에 알았다. 또한 마지막이라는 것을. 이런 충격이 두 번일리가 없다. 처음이라 달콤하고 마지막이라 벅찬 것이다. 이상하지. 처음 4년을 말했을 때는 전혀 믿기지 않아 코웃음 쳤었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선우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믿어도 될 것 같았다. 다음 2월 29일도 함께 할 거라는 말도 안 되는 미래를.
"앞으로 불안하면 오늘을 생각해요."
알겠죠? 우리가 부른 노래를 생각하는 거야.
찬희는 흐린 시야로 선우를 바라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는 한결 같이 대단하다고. 어떻게 이런 말을 이렇게 스스럼없이, 확신에 차 할 수 있을까.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가질 것 같은 그런 것들을, 그는 어떻게 그리 간단하게 믿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단단하고 꽉 차서 결국 믿고 싶어지게 만드는 그런 말들을.
선우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온다. 찬희는 천천히 입술을 벌린다. 입 안으로 따뜻한 혀가 밀려들어왔다. 아무도 없는 평일 겨울 바다. 손 끝에 닿는 다 식은 캔커피. 맞닿은 입술은 바다처럼 짜고 태양처럼 뜨거워서. 앞으로 얼마나 더 긴 인생을 살지언정 이 기분은 오늘, 이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거여서. 그런 확신 아닌 확신, 예감 아닌 예감이 들어서... 찬희는 다시금 속수무책으로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사랑은 찬 바람 위로 내리쬐는 볕 같은 것. 결국엔 헐벗게 된 나그네처럼 꽁꽁 싸맨 마음들이 남김없이 까발려지는 것...
그래도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다음, 그리고 또 다음의 2월 29일을 생각하면. 찬희는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날도, 그 후로도, 계속.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최찬희, 집중 안 하지."
어른이란 뭘까. 찬희는 제게 쏟아지는 질책에 두 눈을 꾹 감았다 뜬다.
成年人到底是什么呢。灿熙在面对扑面而来的责备时,紧闭双眼又睁开。
결국 연주가 끊겼다. 재현은 평소 장난스러운 만큼 한 번 화내면 무섭다. 하지만 신경이 곤두서 있는 건 찬희도 마찬가지다. 찬희는 신경질적으로 피크를 거두고 재현을 쳐다본다.
"너 연습 안 했어?"
"했어."
"근데 왜 이 모양이야. 가사 절고 연주 다 틀리고."
"나라고 알겠어?"
"야. 말 그 따위로 할래?"
날 선 분위기에 결국 상연이 중재에 나섰다. 야야, 싸우지 마. 부드러운 목소리에도 재현의 화는 풀어질 줄 모른다.
"아, 싸우는 게 아니라, 쟤가 열받게 하잖아. 형도 한 마디 해."
공연 얼마 남지도 않았고, 우리는 주말 말고는 제대로 맞춰보지도 못하는데. 지금 쟤 꼴이 저게 뭔데. 당장 다음 주에 브리핑 해야 하는데 곡도 안 나왔다 그러고. 재현이 불 같이 화를 쏟아냈다. 그러다 찬희를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말해 봐, 최찬희. 너 할 마음 있는 거 맞냐?"
찬희는 할 말이 없다. 재현의 말에 틀린 부분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모든 말들이 비수처럼 찬희의 속을 쿡쿡 찌르고 들어왔다.
"솔직히 말해. 너 김선우 노래 부르는 거에만 정신 팔려 있는 거 아냐?"
어? 그래서 이 모양인 거냐고. 재현이 사납게 말을 덧붙였다. 김선우. 그 이름 석자에 찬희는 반사적으로 눈을 날카롭게 뜬다.
"무슨 말이야."
"맞잖아. 그거 하느라 우리한테 소홀한 거냐고."
순간 속에서 천불이 인다. 그 이름만 나와도 예민해지는 건 둘째 치고, 선우와의 작업 역시 제대로 진척이 없다는 점에서 찬희는 억울해 미칠 것 같다. 그래서 한 마디 하려 입을 열었다가. 제가 무슨 말을 하든 어차피 다 변명이란 생각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재현의 말처럼 그거에만 목 매고 있어서 그런 건 아니지만, 어쨌든 김선우 생각에 신경이 온통 쏠려 있어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 건 사실인 것 같았다. 요즘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는 것도 맞았다. 꼭 음악 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회사에서도 자꾸 아프고 실수하는 통에 조용히 불려가 한소리 들은 후였다. 아무튼 문제는 저가 맞았다. 한심할 정도로 귀책이 명확했다.
"됐어. 그런 걸로 해."
그래도 자존심이란 게 뭔지 말이 곱게 나가질 않았다. 그 말에 더 열이 받은 듯 재현이 도끼눈을 떴다.
"뭘 그런 걸로 해. 왜, 무슨 말 하려고 했는데. 너 이럴 때마다 성자 코스프레 하면서 아무 말 안 하는 거 얼마나 열받는 줄 알어?"
재현아, 말 심하다. 더 말을 이으려는 재현을 상연이 바로 끊어냈다. 에이, 씨발. 재현은 제풀에 못이겨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더니 베이스를 놓고 쿵쾅거리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찬희는 꼭 버려진 것마냥 서서 재현의 베이스만 노려본다. 재현이 미워서는 아니었다. 그냥, 다 싫었다. 지금 이런 상황을 만든 제 자신이. 재현 말대로 아무 것도 제대로 하는 것 없는 지금의 내가.
"재현이도 다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알지?"
어느 새 다가온 상연이 찬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찬희는 그제야 고개를 푹 숙인다. 죄송해요. 목소리가 기어들어갈 것처럼 작았다.
"찬희야." “灿熙呀。”
그런 찬희를 상연이 다시금 부른다. 찬희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상연이 웃었다. 언제나처럼 다정한 낯으로.
"나 아직도 기억한다. 너 처음 밴드부 들어왔을 때."
너가 막 그랬잖아. 노래 부르는 게 좋은 최찬희입니다. 그 말에 찬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르륵 달아올랐다. 아, 그때 얘길 왜 해요. 다급한 목소리가 나왔다. 상연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냥, 그때 난 바로 니가 좋았거든."
"........."
"내가 당분간 서브만 해도 괜찮냐고 했을 때 니가 그랬잖아. 노래만 할 수 있으면 뭐든 다 하겠다고. 그게 되게 좋았어. 무슨 만화 주인공 같고."
"........."
"다들 멋처럼 담배 뻑뻑 피우는데 너는 꿋꿋하게 담배 입에도 안 댔잖아. 노래 불러야 한다고. 그런 게 되게 멋있다고 생각했어."
"........."
"그래서 재현이랑 밴드 계속 하잔 얘기 나왔을 때 제일 먼저 니가 떠올랐어. 재현이도 그런 부분에선 좀 낭만적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게 좀 있어서. 잘 맞을 것 같았거든."
"........."
"너나 재현이나 늘 열심이잖아. 그래서 부딪히는 거라고 생각해."
찬희는 어쩐지 자꾸 작아지는 기분이다. 상연의 입에서 나오는 과거의 제가 지나치게 생소했다. 내가 그랬던가. 그랬던 것도 같은데. 그런데 지금의 나는 어떻지. 옛날의 저와 비교하면 지금의 제가 너무 초라했다. 그때 꿈꿨던 어른은 분명 이런 모습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그저, 도망가고 싶어도 도망갈 구석 없는 막다른 골목까지 몰렸다가 결국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나서야 꾸역꾸역 숙제 하듯 하는 사람 같다. 이걸 어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튼 우린 잘 될 거야. 진짜로."
상연이 찬희의 등을 툭툭 다독였다. 오늘은 튼 거 같지, 아무래도? 그러더니 쭉 기지개를 키곤 찬희를 향해 시원하게 웃었다.
"내일은 진짜 열심히 하자, 우리."
먼저 가 봐. 재현이한텐 내가 잘 말해 놓을게. 그리곤 멍하니 서 있는 찬희를 토닥이듯 말했다. 무슨 일 있는진 모르겠지만 잘 추스르고.
찬희는 괜히 울컥할 것 같은 마음을 애써 누른다. 아무튼 다방면으로 폐였다, 지금의 저는. 그런데도 상연이 아무 것도 묻지 않아서, 그래서 고마웠다. 물어봤자 스스로도 설명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찬희는 조금 망설이다 결국 꾸벅 고개를 숙이곤 기타를 챙겨 연습실을 나왔다.
"어..."
문을 나서는데 마침 들어오는 재현과 딱 마주쳤다. 담배 냄새가 훅 났다. 몇 대 피우고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찬희는 시선 돌릴 타이밍을 놓쳐 어색한 얼굴을 했다. 그새 차분해진 듯 재현은 평상시와 같은 얼굴로 돌아와 있다. 가냐? 재현의 물음에 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올 거지?"
"당연하지."
약간 울컥해서 바락 대답했더니.
"그래, 정리 좀 하고 와."
재현이 찬희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아이씨, 진짜, 또. 찬희가 괜히 짜증을 내며 헝클어진 머리를 주섬주섬 정리했다. 그대로 자리를 뜨려는데,
"야, 찬희야." “喂,灿熙啊。”
"왜, 또." “为什么,又怎么了。”
"너, 선우랑."
재현이 다시, 선우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찬희는 이번에도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아니다, 됐다."
찬희가 그러든 말든 재현은 이번에도 말을 하다 말고 그냥 입을 다문다.
不管灿熙怎么说,在这次,宰贤还是说到一半就闭上了嘴。
"전부터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从之前开始你到底想说什么。”
"그냥.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
계속 느꼈지만 꼭 다 아는 사람처럼 자꾸 말을 해서. 찬희는 어쩐지 기분이 묘해진다. 가라. 재현은 찬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곧바로 문이 닫혔다. 재현이 얼굴도 안 보여주고 인사해서, 찬희는 뭘 더 물어보지도, 무슨 표정으로 재현이 그런 얘기를 했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찬희는 뒤돌아 나와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걸으면서 끊임없이 생각했다. 상연의 말 때문인지 계속 속이 시끄러웠다. 옛날의 제가 자꾸만 떠올랐다. 공부하고 돈 벌고 레슨 받으면서도 조금이라도 더 노래 부르고 싶어 안달복달 했던 어린 시절. 시간을 쪼개 음악 공부하고 노래를 불렀던 지난 날들. 막연히 오래, 더 많이 노래 부르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때. 생각할수록 창피했다. 그 시절의 내가 아니라, 지금, 이 핑계 저 핑계로 아무 것도 제대로 하는 것 없이 되는 대로 살고 있는 지금의 내가.
찬희는 문득 휴대폰을 꺼내 선우에게 전화를 건다. 어, 형. 얼마 안 있어 선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찬희는 대뜸 물었다.
"지금 녹음 가능해?"
―지금? 갑자기?
오늘 뭐 없긴 한데. 이어지는 선우의 말에 찬희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나 지금 그리로 갈게.
작업실 문을 열자 찬기운이 훅 밀려왔다. 그제야 날이 덥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가볍게 땀이 났다는 것을 깨닫는다. 찬희는 가디건을 벗고 소파 옆에 기타를 내려놓았다.
"뭐야, 무슨 일인데. 주말엔 합주 있는 거 아니었어요?"
선우가 물 한 통을 들고 찬희 곁으로 다가왔다. 바로 들어가면 돼? 찬희는 대답 대신 묻는다. 선우가 찬희에게 물을 건넸다.
"숨 좀 골라요. 물 좀 마시고. 뭐가 그렇게 급해."
"그냥. 지금 하면 잘할 수 있을 거 같았어."
"미루고 싶어하는 줄 알았는데."
"그러고 싶었는데. 그러면 안 될 거 같아서."
선우는 그 이상 묻지 않는다. 다만 찬희가 물을 한 번에 반쯤 비우는 걸 지켜보며 말했다. 형 준비 다 되면 들어가요.
막상 부스에 들어가니 어쩔 수 없이 긴장감이 밀려왔다. 찬희는 호흡을 고른다. 헤드폰을 쓰자 바로 선우의 목소리가 들린다.
"무슨 생각해요?"
찬희는 할 수 있는 한 침착하게 대꾸했다.
"잘해야겠다는 생각."
"편하게 해요."
"싫어, 네 노래잖아."
사실 그게 본심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잘하고 싶었다. 나중에 내가 노래 만들고 형이 노래 부르고 하면 재밌겠다. 그쵸. 그런 말을 하며 순진하게 웃던 어린 선우를 생각한다. 다시금 각오를 다진다.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그렇게 하면, 어쩌면...
녹음은 놀라울 정도로 쉽게 풀렸다. 500ml 물을 세 통 가까이 비워가며 한 번도 쉬지 않고 녹음을 마쳤다. 끝, 수고하셨습니다. 헤드폰을 통해 선우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찬희는 거의 주저앉을 뻔 했다. 긴장이 탁 풀렸다. 간신히 헤드폰을 내려놓고 부스 밖으로 나오자 선우가 물을 한 통 더 내밀었다. 마시고 좀 누워요. 찬희는 순순히 그 말에 따른다. 있는 기운을 다 끌어모아 썼더니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쓰러지듯 소파에 눕는 찬희를 보며 선우가 조금 웃었다.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뭐가."
"손 많이 간다고요."
"나 그런 소리 처음 듣는데."
"다른 사람들은 형이랑 사귀어 본 게 아니잖아."
혼자 야무지게 다 하는 거 같은데, 자꾸 신경 쓰이게 만들어, 형은. 선우가 찬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새 웃음기를 낯에서 지운 채로. 그건 너라서 그런 거 아니야? 그렇게 말하려다가. 찬희는 결국 못 들은 척 눈 감는 쪽을 택한다. 그냥, 그 모든 게 다 저를 향한 선우의 마음 같았다. 처음엔 분명 헷갈린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사귀는 내내 선우는 한 번도 찬희를 헷갈리게 한 적 없었다. 올곧게 마음을 꺼내 서툴지언정 예쁘게 보여주었다. 그렇게 찬희를 안심시켰다. 내일도, 그 다음 내일도 같이 있을 거라는 확신을 주었었다.
그래서 헤어지잔 말이 더 충격이었고.
잠깐 자리를 뜨나 싶더니, 어디선가 손수건을 들고 나타난 선우가 누운 찬희의 얼굴을 간단하게 닦아주기 시작했다. 그제야 얼굴에 땀이 맺혀 있었다는 걸 찬희는 깨닫는다. 손수건 너머로 익숙한 열기가 느껴졌다. 언제나, 그의 손길이 좋았다. 다정하고, 뜨겁고. 그래서 찬희는 이번에도 가만히 누워 있는다. 얼마나 눈을 감고 있었을까. 조금 잠들었던 것도 같은데.
"찬희야."
제 이름을 부르는 선우의 목소리에, 찬희가 눈을 반짝 뜬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심장이 쿵, 발끝까지 내려앉는다. 반사적으로 밀려드는 불안감이 찬희를 순식간에 잡아먹는다. 언제나 맞먹을 것처럼 구는 선우지만, 정작 제 이름을 그런 식으로 부른 건 몇 번 없었다. 처음 사귀자고 했을 때. 그리고.
"그렇게 부르지 마."
처음 헤어지자고 했을 때.
찬희가 선우의 손을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갈래. 입 밖으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어디로든 도망가야 했다. 찬희의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할 말 있어."
"하지 마."
"들어 봐. 중요한 거야."
기타를 잡아 들려는 찬희의 팔을 선우가 꽉 붙잡았다. 찬희가 신경질적으로 선우의 팔을 뿌리쳤다.
"나중에."
"나중에 언제."
"아무튼 나중에."
"나중에 언제."
선우가 찬희를 돌려세웠다. 찬희는 진정이 안 된다. 미친듯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애써 침착한 얼굴을 해 보지만 잘 되고 있는지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다.
"뭔데."
"알잖아."
"뭘."
"노래 부르면서 무슨 생각했어?"
"........."
찬희는 말문을 잃는다. 더 생각할 틈도 없이, 선우가 입을 연다.
"그게 내 마지막 고백이야."
기어이, 선고 같은 말이 떨어진다.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선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찬희는 무의식에 양손으로 제 귀를 막는다. 말하지 마. 선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곧 선우의 두 손이 사납게 찬희의 손을 밑으로 끌어내렸다.
"그럼 언제 말할 수 있는데!"
격양된 목소리. 찬희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꼭 처음 보고 듣는 마냥 자꾸 놀랐다. 그때마다 걷잡을 수 없이 고통 받았기 때문에.
"언제까지 나 상처 입힐 거야."
"........."
"다 알잖아. 나 아직 형 사랑하는 거."
"........."
"이건... 고문이야. 난 더 못 하겠어."
목소리마다, 말 마디마다 열이 뚝뚝 떨어졌다. 선우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형 말대로 친구로 지내보려고 노력했어. 나도 형 없이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 안 나니까. 형 말대로, 형 하라는 대로 다른 사람도 만나 보고 다 해 봤어."
"........."
"근데 안 되겠어. 형이 옆에 있으면 다 불가능해."
"........."
"그러니까 선택해. 나랑 다시 연애 하든가, 그냥 영영 보지 말든가."
기어코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 선우의 입에서 나왔다. 그런 게 어딨어. 왜 다 니 맘대로야. 찬희의 말에도 선우는 태연했다.
"그럼 형은 왜 다 형 맘대론데. 사귀는 것도 싫고 헤어지는 것도 싫으면 뭐 어쩌자는 거야."
"누가 헤어지는 게 싫대? 우리 헤어졌어."
"이게 뭐가 헤어진 거야. 사귀는 거 빼고 다 하고 있는데 그게 헤어진 거야? 이게 친구야?"
"........."
"난 형이랑 친구 못 해. 어떻게 친구가 돼? 이게 친구냐고."
"지금처럼만 지내면 되는 거잖아."
"지금처럼만? 하."
기가 차다는 듯 선우가 웃었다. 끝내 화가 난 듯 목소리가 격양되기 시작했다.
"지금처럼만이 뭔데."
"........."
"형이 열 번, 백 번씩 선 그을 때마다 속이 벅벅 긁히는데 참고 옆에 있는 거? 언제고 다시 형이 새 사랑 시작할까 전전긍긍하면서 뭐 마려운 개처럼 형 쫓아다니는 거? 의미 없이 아무나 만나서 형 닮은 부분 찾다가 뺨 맞고 혀 깨물고 싶어지는 거?"
"........."
"형이 뭘 알어. 형이 내 지금에 대해 뭘 아냐고!"
더는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찬희의 입에서도 큰소리가 나갔다.
"니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잖아!"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잖아!"
아오, 진짜. 선우가 짜증스럽게 제 머리를 쓸어넘겼다. 곧 잔뜩 열이 오른 눈이 찬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어디까지 빌어야 해? 내가 잘못 생각했다고 했잖아. 떨어져보니 알겠다고, 나 형 없인 못 산다고. 빌고 애원했잖아."
"........."
"어이없는 얘기 하면서 친구로 지내자고 나 떨군 건 형이잖아."
어이없는 얘기란 말에 찬희가 울컥한다. 어이없는 얘기라니. 내가 그 말을 하려고 얼마나... 그런 생각을 하며 입을 열던 찬희는, 목끝까지 차오른 분과 슬픔을 뱉어내려다가, 불현듯 습관처럼 전부 삼켜버리고 만다. 말 해봤자 의미 없단 생각이 들었다. 더 싸우기만 할 것 같았다. 아니, 됐다. 그래서 말을 돌리려는데, 그러자마자 선우가 더 크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또, 또 화 참지. 무슨 애기 하려고 했는데."
"선우야, 나 피곤해. 더 싸우기 싫어."
"여기까지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한데!"
"........."
"나 없으면 못 살겠다며. 나도 그래. 나도 그렇다고."
"........."
"근데 왜 우리가 친구로 지내야 하는 건데..."
기어이 선우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지치고 상처 받은 얼굴. 찬희는 숨이 턱 막힌다. 가슴 한 켠이 무너질 것처럼 아팠다. 아무 말도 못 하겠는 스스로가 답답했다. 답답한데, 이 많은 감정과 생각을 어떻게 입 밖으로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잃고 싶지 않았다. 자꾸 막연히 그런 생각만 했다. 잃고 싶지 않아. 계속 사귀면 언젠간 헤어질 텐데. 그러면. 그렇게 되면.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4주년이 행복했어서. 더 없이 행복했어서. 찬희는 8주년을 의심해 본 적 없었다. 자주 다투고 서로 말 없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져도 헤어진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찬희야. 우리 헤어질까.
그래서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찬희는 발 밑이 까마득하게 무너진다는 게 무슨 뜻인지 온몸으로 깨달았다. 일주일만의 만남이었다. 싸우면 찬희는 말을 안 했다. 화 내는 게 싫었고 불편해지는 게 싫었다. 저만 참으면 되는 걸 굳이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때는 선우가 그걸 물고 늘어졌었다. 왜 자꾸 말을 하다 말어. 형이 이럴 때마다 난 그냥 죽고 싶어져. 알어? 형한테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거 같아서 자꾸 작아진다고. 왜 사람을 초라하게 만들어.
선우야, 나 피곤해. 찬희는 그때도 그렇게 말했다. 찬희의 말에 선우가 더없이 상처 받은 얼굴을 했다. 그 후로 일주일이 흐른 것이었다. 찬희는 부러 평소대로 조잘거렸다.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공연이 잡혔고, 형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고.. 그런 얘기를 하는 찬희의 말을 끊고 선우가 그랬다. 우리 헤어질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형의 친구 이상이라는 게 이젠 안 믿겨. 형도 잘 생각해 봐. 나를 진짜 사랑하는 건지, 그냥 친구랑 비슷한 건지.
그 말만 남기고 선우가 자리를 떴다. 그러는 동안 찬희는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꽉 차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카페 문 닫을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이게 뭐지. 무슨 일이지. 처음엔 황당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럴 순 없다고 생각했다. 당장 나가서 선우를 붙잡아야 한다고.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4년 뒤에도, 그리고 그 뒤에도 곁에 있을 거라고 그러지 않았냐고. 붙잡고 따지고 싶었다. 니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그런데 막상 자리를 뜨려고 일어나는 순간. 불현듯 찬희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러다 정말 끝나면? 서로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하다 얼굴도 못 보는 사이가 되면?
그 생각이 찬희의 발목을 잡았다. 지나간 시간들이 순서 없이 엉망으로 찬희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스물 둘부터 서른을 목전에 둔 지금까지. 찬희의 시간은 전부 선우와 함께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십대를 전부 그와 보냈다. 찬희의 이십대는 선우 그 자체였다. 너무 거대했고 절대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선우가 없는 앞이 전혀 상상이 안 됐다. 찬희는 천천히 주저앉았다. 황망했다. 선우가 없는 세상. 선우가 없는 시간. 말도 안 됐다. 도무지 말이 안 됐다.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찬희는 생각했다. 분명 반복될 거라고. 다시 사귀게 된다 하더라도 반드시 같은 문제로 또 싸울 것이라고. 그런 생각이 드니 그대로 나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잃을 자신은 더욱 없었다. 그럼 엉망이 되어 수습 불가능해지기 전에 끝내는 게 낫지 않을까? 친구로 지내면 얼굴은 볼 수 있잖아. 같이 지낼 수 있잖아. 싸우지 않고 화내지 않고 잃지 않을 수 있잖아.
"내가 미안해."
선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새 흐른 눈물을 거칠게 손으로 훔치면서.
"헤어지자고 말했던 거 미안해. 형이 그런 사람인 거 알고 있었는데, 괜히 투정 부렸었어. 미안해."
카페가 문을 닫고 쫓겨나듯 나와서 정신 없이 선우의 집을 찾아갔다. 익히 알고 있는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러 열고 현관 앞에서 신발도 안 벗고 소리쳤다. 나 너 없이 못 살아.
그때마저도 울지 않았다.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니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무슨 정신으로 거기까지 갔는지도 생각 안 났다. 그저 그렇게 말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우리 친구로 지내자. 4년 뒤에도, 8년 뒤에도 그냥 내 곁에만 있어. 두서도 없고 경우도 없던 고백 아닌 고백. 차라리 다짐에 가까웠던 말들.
"근데 나 할만큼 했어. 형 다시 잡으려고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꼭 한 달을 친구처럼 지냈다. 잘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평소처럼 일상을 공유하고 가끔은 미래를 고민하고.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막상 지내다 보니 이게 당연한 것 같았다.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했다. 난 이제 연애 안 해도 될 거 같아. 연애로 해 볼 수 있는 건 다 한 거 같아, 너랑. 그래서 선우가 술 마시고 찾아와 어영부영 섹스했을 때. 선우가 저를 원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크게 흥분해서 서로 짐승처럼 엉겨 붙었으면서도. 우리 그냥 다시 만날까? 그렇게 말하는 선우에게 그랬다. 말도 안 돼, 너랑 어떻게 연애를 또 해. 난 못 해. 처음엔 당황했고 중간엔 타이르다 나중엔 화를 내고 결국엔 비는 선우에게 앵무새처럼 그 말만 반복했다. 너랑 어떻게 연애를 또 해. 난 이제 그런 거 못 해.
"지난 반년 간... 평생 받을 벌 다 받는 기분이었어."
선우의 목소리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이제 더는 못 하겠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찬희는 멍하니 선우의 얼굴을 바라본다. 세월과 함께 근사하게 익어간 얼굴. 그 얼굴 위로 툭, 눈물이 떨어졌다.
"4년 뒤에도... 곁에 있을 거라며."
현실감이 사라진다. 그저 마지막 보루와 같았던 말을 던져본다.
"기다릴게."
그러나 결과는 조용한 차단. 그리고, 암전.
일요일 밤인데도 고깃집엔 사람으로 바글바글했다. 찬희는 가만히 앉아 고기 굽기에 여념없는 재현을 바라보고 있다. 평소라면 제가 구웠을 텐데. 지금의 찬희는 제가 뭘 하다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 넋 나가 기계처럼 연주하다가, 기어이 중간부턴 노래를 못 부르는 찬희 덕에 결국 연습은 거기서 끝났다. 오늘의 재현은 찬희에게 화내지 않았다. 대신 찬희를 끌고 고깃집에 데려갔다.
"술 시켜줘?"
"........."
찬희가 멍하니 재현을 바라보았다. 쯧, 혀 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재현이 손을 들어 크게 외쳤다. 사장님, 여기 참이슬 한 병이요.
잘 익은 고기가 찬희의 앞접시에 쌓였다. 얼른 먹어라. 형 고기 굽느라 팔 빠지는 줄 알았으니까. 재현이 집게로 앞접시를 찬희 쪽으로 밀었다. 그제야 찬희가 젓가락을 들었다. 그러나 계속 잔을 부딪혀 오는 재현 덕에 고기 먹는 것보다 술 마시는 게 빨랐다. 기어이 찬희의 얼굴이 발갛게 익어가기 시작했다. 재현이 술을 털어 넣으며 던지듯 물었다.
"선우랑 헤어졌냐?"
"...뭐?"
"뭐 그런 얼굴이야. 천년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말하는 얼굴은 태연하기 그지없다. 추측이 아닌 확신이라는 게 빤히 보였다. 평소라면 부정하는 시늉이라도 했을까. 모르겠다. 지금의 찬희는 무언가를 더 꾸며낼 기운이 없었다. 이제 와서 그럴 필요도 없고. 찬희는 대답 대신 제 앞의 소주잔을 단숨에 비운다. 재현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왜 헤어졌는데."
아니다, 그래서 어쩌고 싶은데, 넌.
찬희는 아무 생각도 안 든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뭘 몰라. 다 알잖아."
"뭘 아는데."
"헤어지기 싫으니까 지금 이 염병 떠는 거 아니야?"
모르겠다. 헤어지기 싫은 건가? 그동안의 일을 말로 다 하자니 새삼 복잡하고 구질구질했다. 다시 못 만나는 게 싫어. 계속 같이 있고 싶어. 그런데 사귀는 것도 싫어. 제가 생각해도 염병이었다.
"다시 사귈 자신이 없어."
"........."
"근데 다시 못 보는 건 싫어."
"어휴. 진짜."
다 큰 줄 알았는데 애네, 애야. 재현이 영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재현 같은 사람은 이런 마음을 이해 못 할 것이다. 아니, 사실 선우도 결국 이해 못 하고 놔버렸는데, 누구라고 알아줄까. 이쯤 되면 모든 잘못은 제가 저지른 게 맞다는 생각도 든다.
我以为他们已经长大了,但他们还是孩子。宰贤无奈地摇了摇头。像宰贤这样的人是不会理解这种心情的。其实,连善宇最后也没能理解并放弃了,谁会明白呢?到了这个地步,我觉得所有的错误都是我犯的。
"뭐든 너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순 없어. 인생이 다 그래."
“什么都按照你想做的去做是不可能的。人生就是这样。”
재현이 빈 잔에 술을 채워 넣으며 말했다. 시원시원한 말에 찬희는 주눅이 든다. 뭐 내가 너희에 대해 뭘 알겠냐만은... 재현이 말을 덧붙였다.
"나 같으면 한 번 찾아가 보기라도 하겠다. 납득은 해야지, 나도."
"...그러다 나한테 완전히 질리면 어떡해."
"야, 헤어진 마당에 그게 뭔 소용이야."
재현이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똑쟁인 줄 알았더니 완전 헛똑똑이였구만. 그리고는 잔을 들었다. 야, 얼른 짠해. 찬희는 마지못해 잔을 든다. 잔이 부딪쳤다. 둘 모두 한 번에 술을 털어넣었다. 크. 인상을 잔뜩 쓴 재현이 빈잔을 까딱이며 찬희에게 말했다.
"아무튼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 그래야 미련도 없어."
"........."
"추해지더라도 가서 물어보고 매달려도 보고 하라고."
"........."
"할 수 있는 거 다 하고, 그 다음에 슬퍼하든 폐인처럼 지내든 하라고. 어?"
"...형은 그래 봤어?"
"나?"
"어." “哦。”
"날 뭘로 보냐, 너는."
난 애초에 그런 짓 안 해. 뭐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재현이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근 있지."
그건 좀 많이 의외여서. 찬희가 고개를 들어 재현을 바라본다. 뭐라 묻기도 전에 재현이 술을 따르며 선수를 쳤다.
"그때 지은 죄 아직까지도 갚고 있어, 나는."
"...형 연애 해?"
"너는 진짜..."
평소엔 눈치 빠르면서, 꼭 이럴 때 이렇게 눈치가 없냐. 재현이 가볍게 혀를 찼다. 찬희는 여전히 얼떨떨하다. 언제부터? 그게 중요하냐. 재현이 무심히 대꾸했다.
"암튼 빨리 정신 차리라고. 할 일 많은데 언제까지 넋 놓고 살래."
"...미안."
"알면 됐다."
기어이 소주 한 병을 다 비우고 가게를 나섰다. 완연한 여름이었다. 데려다 줘? 담배를 태우며 재현이 물었다. 찬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럼. 재현은 그 이상 권하지 않았다. 다만 담배를 다 태우고 헤어지기 전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다음 주엔 개운하게 와라."
간다. 재현은 뒤도 안 돌아보고 걸어갔다. 찬희는 재현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 천천히 제 갈 길로 걸음을 옮겼다. 술로 모든 감각이 둔한 와중에도 속이 복잡했다. 뭐든 너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순 없어. 인생이 그래. 재현이 한 말을 떠올린다. 영감 같은 말이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러다 불쑥 억울해졌다. 나만 그래? 김선우는? 둘 다 고집 부리고 있는 거 아닌가, 지금. 그런 생각이 드니 속이 바짝바짝 탔다. 눈 앞에 어제의 선우가 그려진다. 더는 못 하겠다며 화 내고 울던 선우. 뭐가 그렇게 상처였을까, 걔는.
그러다 불쑥 억울해졌다. 나만 그래? 김선우는? 둘 다 고집 부리고 있는 거 아닌가, 지금. 그런 생각이 드니 속이 바짝바짝 탔다. 눈 앞에 어제의 선우가 그려진다. 더는 못 하겠다며 화 내고 울던 선우. 뭐가 그렇게 상처였을까, 걔는.
然后突然感到委屈。只有我这样吗?金善宇呢?现在不是我们两个都在固执吗?一想到这,心里就焦急起来。眼前浮现出昨天的善宇。说再也做不到了,生气地哭泣的善宇。到底是什么让他那么受伤呢?
정신 차리고 보니 발이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찬희는 집으로 가려다 말고 택시를 불러 세웠다. 기어이 선우의 집 앞까지 오니 크게 무서운 것도 없어졌다. 술 기운일 수도 있다. 아무튼 찬희는 추해질 작정이었다. 재현이 말한 대로, 해 볼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이르든, 고집 부리든, 화를 내든 울든 아무튼 선우를 봐야 할 것 같았다. 찬희는 거침없이 계단을 올라 선우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익히 아는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런데.
精神一清醒过来,发现自己的脚已经不由自主地动了起来。灿熙本来打算回家,但他叫了一辆出租车。终于到了善宇家门口,他也不再那么害怕了。也许是酒劲在作祟。不管怎样,灿熙决定不顾一切地去做。正如在宪所说的,能做的都要试一试。他觉得无论是劝说、固执、发火还是哭泣,都必须见到善宇。灿熙毫不犹豫地上了楼,走向善宇的家门,然后输入了他熟悉的密码。但是。
"........."
문이 열리지 않았다. 삑, 삑. 경고음과 함께 도어락이 꺼졌다. 찬희는 당황한다. 다시 손을 대 비밀번호를 눌러도 마찬가지였다. 빠르게 누르든 천천히 누르든 도어락은 경고음과 함께 찬희를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그걸 대여섯 번쯤 반복하고 나서야 겨우 받아들일 수 있었다.
门没有打开。嘀,嘀。伴随着警告音,电子锁熄灭了。灿熙慌了。不管他再怎么按密码,结果都是一样的。无论是快速按还是慢慢按,电子锁都伴随着警告音,不让灿熙进去。大概重复了五六次之后,他才勉强接受了这个事实。
비밀번호가 바뀌었다. 지난 몇 년 동안 한 번도 바뀐 적 없는 숫자였는데.
뒤늦게 충격이 찬희를 덮쳤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래서 정작 문이 열렸을 때. 그리고, 선우가 문을 열고 나왔을 때. 아무 말도 못 했다. 그저 선우를 멍하니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왜 왔어."
선우는 태연했다. 침착하고 조용한 얼굴이었다. 찬희는 덜컥 겁이 났다. 화를 내는 것보다 이게 더 무서웠다.
"아니다, 됐다."
"........."
"집 앞 카페 가 있어요. 금방 나갈게."
그리고, 다시 문이 닫혔다.
찬희는 황망해진다. 고작 문 하나인데, 꼭 세상과 영원히 단절된 것처럼 앞이 까마득했다. 하다못해 집에 들어오라고 하지도 않았다, 선우가. 이런 식의 거부는 처음이었다. 닳도록 드나든 집이었는데 꼭 다른 차원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뭐야, 뭔데. 왜 이러는 건데. 그제야 찬희는 깨닫는다. 선우가 진심이라는 것을. 진심으로, 그와 찬희를 분리하려고 한다는 것을.
선우가 다시 나올 때까지 그러고 서 있었다. 아무 것도 못하고, 아무 사고도 못하고. 문을 열고 나온 선우가 한숨을 쉬었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카페 가 있으랬잖아. 조용한 목소리가 찬희를 채근한다. 곧 술 냄새를 맡았는지 선우가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술 마셨어요? 형들이 뭐라 안 해?"
"그건 뭐야."
선우의 손에 커다란 종이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아. 선우가 작게 입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찬희에게 쇼핑백을 건넸다.
"형 물건 정리했어요. 가져가."
"........."
완벽한 거부. 말하는 목소리가 태연했다. 찬희는 점점 더 수렁으로 빠진다. 선우는 찬희가 받아들 때까지 그러고 있을 작정인 듯 쇼핑백을 내밀고 있다.
"넌... 넌 나 없이 살 수 있어?"
결국 먼저 말이 나갔다. 차마 시선을 마주할 수 없어 쇼핑백만 내려다보았다. 저 안에 뭐가 얼마나 있을지 가늠도 채 안 갔다.
"아뇨."
"........."
"그래서 기다리면서 살려고요."
"왜. 왜 그러는 건데."
"........."
"연애하면 어차피 헤어지는 것밖에 없는데. 끝이 그거 하나 뿐인데.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건데."
"지금 고집을 누가 부리는 건데."
선우가 한숨을 쉰다. 그가 뱉는 모든 말, 모든 숨,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찬희를 겁먹게 만든다.
"그리고 난 그렇게 생각 안 해요."
"........."
"끝이 그거 하나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 안 한다고."
"...니가 어떻게 알어."
"그러는 형은 뭘 그렇게 잘 알아서 이러는데요."
한 발자국, 선우가 다가왔다. 찬희는 뒤로 물러날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선우의 손만 바라본다. 선우가 기어이 쇼핑백을 찬희의 손에 억지로 들려주었다. 묵직한 무게가 찬희의 손 안으로 떨어졌다.
"이따 비 온대요. 안에 우산 있으니까 비 오면 써요."
"........."
"늦었는데 얼른 가요."
"........."
특별히 날 선 것도 아니고, 내용 자체는 걱정이나 다름없는데. 질릴 정도로 정돈되어 있어 오히려 더 차갑게 느껴졌다. 손에 들린 쇼핑백의 무게가 갑자기 너무 벅찼다. 찬희는 다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선우는 무표정했다. 정말 아무 감정도 못 느끼는 사람처럼. 빛이 없어 눈동자마저 그저 새까맣게 보였다. 아무 것도 읽을 수 없었다. 아무 것도.
"먼저 들어갈게요."
결국 선우가 먼저 뒤돌아 섰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찬희는 완벽한 이방인이 되어 멀거니 문을 바라본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차마 발을 뗄 수 없었다. 그러다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이 안 됐다. 찬희는 쇼핑백을 들고 천천히 밖을 나섰다.
현관을 나서자 마자 빗방울이 찬희의 몸을 세차게 때리기 시작했다. 그냥 잠깐 내렸다 지나갈 비가 아닌 것 같았다. 쇼핑백 안에 우산이 있다고 했는데. 차마 이걸 열어볼 용기가 안 났다. 그래서 그냥 비를 다 맞으며 걸었다. 그러다 불현듯 울컥 화가 났다. 정리했다고 했다, 선우가. 그게 꼭 저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아서.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속이 문드러질 것처럼 아파오기 시작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찬희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들고 있던 쇼핑백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우산 하나가 쇼핑백 안에서 굴러 떨어졌다. 보라색 우산. 저거 내가 사준 건데. 맨날 까만색 옷만 입고 다니니까 우산이라도 예쁜 거 들으라고 사준 거였는데. 너무 화려하다고 툴툴거리면서도 잘 쓰고 다녔었는데, 선우가.
그렇게 생각하니 쇼핑백 안에 뭐가 들었을지 안 봐도 뻔했다. 머릿속으로 온갖 순간들이 아무렇게나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저 존재하는 자체만으로도 빛나는 아름다웠던 순간들이, 해일처럼, 꼭 뒤늦게 찾아온 이별처럼..
진짜 헤어졌구나, 우리.
찬희는 그대로 주저앉는다. 비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희를 적셨다. 그런데도 도무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서. 다 버리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찬희를 너무 슬프게 해서. 찬희는 몸을 웅크린 채 그대로 한참 울었다. 비처럼 쏟아지는 슬픔을 견디며, 비를 맞고 있다는 감각마저 사라질 때까지, 오래도록.
꼬박 나흘을 앓아누웠다. 월급쟁이의 도리를 지키기 위해 사흘 째엔 어떻게 출근은 했는데, 상태를 본 부장이 안 되겠다며 찬희를 억지로 퇴근시켰다. 그대로 남은 휴가를 다 끌어모아 그 주 통으로 휴가를 냈다. 그리곤 밤낮을 앓았다. 병원도 안 가고 밥도 안 먹고 앓다 자는 걸 반복했다. 꿈에 자주 선우가 나왔다. 익히 알고 있던 일상처럼 시간을 보내다가 손을 잡으면, 차갑게 뿌리치거나 멀리 가버리거나... 그랬다. 나중엔 선우만 보이면 아, 또 꿈이구나, 했다. 그때부턴 멀리서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꿈인데도, 그가 저를 버리는 그 순간만큼은 너무 선명하게 아파서.
나흘 째 되는 날 밤이었다. 꿈 속의 찬희는 바다에 가 있었다. 이번에도 멀리서 선우가 보였다. 기타를 치며 선우가 익히 아는 노래를 불렀다. 기다릴게,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도록. 온몸이 아파 정신 없는 와중에도 그 꿈이 언제를 가리키는지만은 똑똑하게 알 수 있었다. 찬희는 노래를 따라부르다 기어이 조금 울었다. 닿지 않는 거리에서 선우는 계속 노래를 불렀다. 찬희가 우는지 웃는지 따위엔 관심 없는 것처럼.
그러다 꿈에서 깼다. 시야가 밝았다. 한낮의 볕이 방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찬희는 퍽퍽하게 마른 얼굴을 닦을 생각도 못하고 오래도록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처음 아팠을 때보단 많이 나은 것 같았다. 열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정신이 드는 게 어디인가 싶었다. 찬희는 오랜만에 휴대폰을 확인했다.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가 꽤 쌓여 있었다. 개중 선우의 것은 어디에도 없다. 속이 쓰렸다. 애초에 기대도 안 했지만. 아니, 했나. 이만큼 아프고 나니 이젠 뭐가 뭔지도 잘 모르겠다.
然后他从梦中醒来。视野变得明亮。正午的阳光把房间照得通亮。灿熙呆呆地望着天花板,连擦干干燥的脸的念头都没有。尽管如此,比起刚开始生病的时候,似乎好多了。虽然还有点发烧……但至少意识清醒了。灿熙好久没看手机了。他发现有很多未读消息和未接来电。但其中没有一条是善宇的。这让他心里一阵刺痛。虽然一开始就没抱什么希望。或者说,其实是有点期待的。病得这么重,现在他也搞不清楚什么是什么了。
천천히 밀린 연락들을 눈으로 확인하던 찬희는 부재중 전화 목록에 재현의 이름이 몇 번씩 찍혀 있는 것을 그제야 보았다. 전화에 비해 카톡은 달랑 하나 와 있었다. 죽었냐? 찬희는 피식 웃었다. 아주 죽길 바라는 것 같지.
慢慢查看积压的消息时,灿熙才注意到未接来电列表上在贤的名字出现了好几次。相比之下,KakaoTalk 只收到了一条消息:你死了吗?灿熙轻笑了一下。看起来他真的希望我死掉。
그래도 살아 있다는 연락은 해야 도리일 것 같아서 재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 후에 재현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평소보다 점잖은 목소리였다. 그제야 찬희는 아차 싶어 시계를 본다. 오후 두 시. 한창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어, 미안. 전화 받을 수 있어?"
―너 목소리가 왜 그래.
다짜고짜 재현이 대답도 않고 그렇게 물었다. 찬희는 순간 눈물이 핑 돈다. 누군가의 다정을 받아 본 게 아주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형. 나 아파."
그래서 답지 않은 소리가 나왔다. 처음으로 입을 여는 애처럼 말이 떠듬떠듬 나왔다.
―괜찮냐?
"아니. 죽을 거 같아."
―병원은.
"못 가겠어.."
―너는 진짜...
수화기 너머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찬희는 그새 흘러내린 눈물을 벅벅 닦아냈다. 기다려. 곧 갈 테니까.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뭐야. 어떻게 오겠다는 거야, 회사면서. 퇴근하면 온다는 뜻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잠들 요량으로 눈을 감았는데, 오래 지나지 않아 쾅쾅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여니 재현이 눈 앞에 서 있었다.
"일어났냐? 병원 가자."
"뭐야... 회사는?"
"그게 궁금하긴 하냐?"
옷 입어. 차 시동 안 껐어. 말을 마친 재현이 먼저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찬희는 좀 얼이 빠져서 멍하니 있다가. 빨리 나와라! 멀리서 소리치는 재현에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곤 황급히 아무 옷이나 꿰어 입었다.
병원에선 몸살이라 했다. 주사를 맞고 약을 탔고 죽 집에 가 재현이 보는 앞에서 꾸역꾸역 죽과 약을 삼켰다. 한 번 더 아프면 아주 죽이기라도 할 듯한 눈빛이라 찬희는 쫄아서 얌전히 재현이 하라는 대로 했다. 예상 외로 재현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찬희를 노려보기만 할 뿐 잔소리라곤 일절 안 했다. 근데 그게 더 무서웠다. 찬희는 재현의 눈치를 보며 환자 코스를 돌고 집에 가 얌전히 누웠다. 재현은 찬희를 집에 데려다 주고, 찬희가 침대에 눕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입을 뗐다.
"자라. 먼저 간다."
자는 것까진 안 봐줘도 되지? 재현이 묻는다. 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좀 미안해진다. 컨디션 조절 하나 제대로 못하는 저 때문에 애꿎은 재현에게 반차까지 내고 뒤치다꺼리를 하게 했다. 미안해... 찬희는 기어들어갈 듯 사과했다. 재현은 웃지도 않고 대꾸했다.
"미안하면 얼른 나아라."
끝내 선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뒤늦게 그게 너무 미안하고 고마웠다. 약을 먹고 열이 떨어지니 그제야 그런 사고가 됐다. 그날은 재현 덕에 선우 생각을 하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다. 그리고 습관처럼 아침 일찍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얼추 출근 시간이었다. 그동안 하도 잠만 자서인지 딱히 더 잠도 안 왔다. 찬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멍한 머리로 창문 너머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볕이 눈부셨고 나무는 빛났고 매미 소리는 맴맴 가차없이 울렸다. 좋은 날이었다. 이번 주는 출근도 안 했다.
불현듯 정리하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대로 책상으로 가 노트북을 열었다. 오래된 맥북이 소음을 내며 돌아갔다. 찬희는 폴더를 열어 그동안 제가 마구잡이로 만들어 뒀던 노래들을 하나씩 열어보았다. 가장 처음 만들었던 노래부터 최근에 작업한 노래까지, 순서 없이 생각나는 대로 틀어 들었다. 그리고 조금 울었다. 아주 조금. 어디에도 선우가 있었다. 담배 냄새 밴 동아리 방에서부터 이제는 이사 간 학교 앞 자취방, 지금 사는 집, 선우의 방과 두 번을 거쳐 이사한 작업실들, 한강부터 강릉 바다까지... 방방곡곡 없는 곳이 없었다. 그냥 이 모든 노래가 다 그에 대한 고백 같았다. 들을수록 울컥하는 마음이 차올랐지만.. 가까스로 더 울진 않았다. 대신 다 끄고 기타를 가져왔다. 앰프에 연결하고는 헤드폰을 썼다. 그리고 생각나는 대로 쏟아내듯 음을 찍었다. 선우는 그 노래가 제 마지막 고백이라 했다. 그러니 저도 답가를 써야 할 차례였다.
시간도 잊고 곡 작업에 몰두했다. 언제 해가 지고 또 떴는지 알 수 없었다. 때 맞춰 재현이 전화할 때만 빼면 계속 작업을 했다. 밥 먹었냐? 약 먹었냐? 재현마저도 그 두 질문 외엔 일절 아무 말 안 했다. 그래서 찬희도 아무 말 않고 재현의 연락을 알림 삼아 꾸역꾸역 밥을 먹고 약을 삼키면서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잠을 못 자 다 쉰 목소리로 끝내 가이드까지 녹음했다. 그리곤 완성된 곡을 확인도 못하고 재현과 상연에게 보냈다. 그러고 나서야 쓰러지듯 잠들 수 있었다.
"일주일 새 반쪽이 됐냐."
사흘만에 보는 재현이 인사 대신 그렇게 말했다. 찬희는 어깨를 으쓱 했다. 곡 들어 봤어? 찬희가 물었다. 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던데. 일단 나는 좋았어."
"나 그거 무대에서 부르고 싶어."
"무대? 다음 주?"
"어." “哦。”
재현이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얘가 돌았나?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반면 찬희는 덤덤했다. 예상한 반응이었다.
"상연이 형 설득시키는 것 좀 도와줘."
"저기, 날 설득시킬 생각은?"
"형은 금방 외우잖아."
기어이 재현의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버럭하지 않는 거 보니 할 수 있는 걸 못 하겠다고는 차마 못 말하겠는 모양이었다. 마침맞게 상연이 도착했다. 부탁해. 찬희가 재현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미팅은 순조롭게 끝났다. 어차피 말은 거의 상연이 했다. 그대로 점심도 안 먹고 연습실로 향했다. 조금 걱정하면서 말을 꺼냈는데, 상연은 생각보다 쿨하게 그러자고 했다. 재현만 입에 모터라도 달린 마냥 투덜거렸다. 그래도 휴대폰 꺼내서 남은 휴가 계산하고 있는 거 보니 더 반대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상연이 클럽에 플레이 리스트 바뀐다고 연락하는 동안 찬희는 선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라도 해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스스로도 어쩌고 싶은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일주일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주말 내내 밤 늦게까지 맞춰 보았고, 주중에도 퇴근 후엔 무조건 모여 연습을 했다. 찬희는 새삼 상연과 재현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연습하는 동안 몇 번씩 곡이 수정되었는데도 다들 큰 불평 없이 찬희의 말을 따라주었다. 마치 찬희가 무언가를 내려놓았다는 걸 아는 사람들처럼.
쫓기듯이 연습했지만, 그만큼 쉼없이 연습했던 터라 막상 공연 당일이 되니 마음은 편안했다. 아무런 기분도 생각도 들지 않았다. 리허설마저 무탈했다. 총 세 개의 밴드가 공연하기로 되어 있었고, 그들의 순서는 두 번째였다. 가볍게 화이팅을 한 번 외치고 무대에 올랐다. 찬희가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세요."
아름다운 밤이에요. 그 말에 다들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찬희는 클럽 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정말 아무 기대도, 생각도 안 했는데. 이상하게 그 순간만큼은 조금 떨렸다. 그러나 아는 얼굴은 없어 보였다. 그제야 맥이 좀 풀렸다. 안 왔구나, 정말로.
"바로 첫 곡 들어갈게요."
상관 없다. 사실 노래는 늘 나를 위해 불러왔다.
이런 생각을 한 게 얼마만이더라.
두 곡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제 마지막 곡만 남았어요. 찬희의 말에 어디선가 짧게 한숨이 터졌다. 어, 감사합니다. 아쉬워해주셔서. 찬희가 웃으며 말했다.
"이 노래는 사실, 제가 일주일 전에 만들었거든요. 엄청 고집 부려서 오늘 바로 부르게 됐어요. 힘들었을 텐데, 형들한테 이 자리를 빌어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가볍게 박수가 나왔다. 찬희가 콧잔등을 찡긋 하며 웃었다.
"뭔가 재밌는 이야기를 해야 할 거 같은데. 저희가 이 곡 준비하느라 기운을 다 써서 할 말이 없네요."
근데 정말 열심히 준비했거든요. 그러니까... 조근조근 말을 잇던 찬희가 문득 말을 멈췄다.
맨 뒤에 검은 모자를 쓴 남자가 있었다. 그림자에 가려 눈도 코도 제대로 안 보였지만. 보이는 거라곤 두툼한 입술과 날카롭게 떨어지는 하관 뿐이지만.
이십 대를 꽉 채워 사랑했던 얼굴이다. 모를 수가 없었다.
큼, 재현이 헛기침을 한 번 했다. 그제야 찬희는 시간을 건너 현실로 돌아온다.
嗯,宰贤轻咳了一声。这时,灿熙才从时间的长河中回到现实。
"아, 죄송해요. 그러니까... 마지막까지 즐겨주세요. 제목은. 사실 없었는데. 방금 지었어요."
“啊,对不起。所以……请尽情享受直到最后。标题是。其实没有。刚刚才取的。”
나의 이십 대. 빛나던 시간들. 꿈과 사랑을 노래하며 달려온 지난 날들을 생각하며.
"제목은, 사적인 낭만에 대하여."
말을 마친 찬희가 피크를 움직였다. 기타 솔로로 이어지다 전주 중간부터 음이 쌓이기 시작했다. 찬희는 선우를 바라본다. 눈이 마주쳤던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찬희는 그렇다고 확신한다. 그 순간, 시간은 순식간에 스물두 살로 돌아간다. 처음 함께 노래를 불렀던 동아리 방. 피크 쥐는 법을 가르쳐주던 따뜻한 손. 코드 짚는 법을 가르쳐주던 커다란 품.
네가 가르쳐준 것들이 지금 여기에 이렇게 쌓여 서 있는 거라고. 보여주고 싶었다.
옛날에 살았던 작은 방은
지금은 누군가 살고 있어
너에게 들은 심한 말도
쓸데없다는 생각을 했던 매일도
잃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사람 하나 없었어서. 멈춰 있었다, 오래도록. 그러려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그 말 한 마디 해 주는 사람이 없었어서.
그 겨울 식은 캔커피
무지개색 머플러
다 놓치고서야 남은 낭만을 끌어안고 멈춰 서 있다.
이제야, 되찾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이별도 좋을 거야
어디선가 잘 지내
안녕 나도 앞으로 갈 테니까
안녕 그렇게 할 거니까..
노래가 끝나고 나서야 찬희는 제 얼굴을 적신 게 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갔다. 곧 천천히, 박수가 쏟아졌다. 찬희는 눈물도 땀도 닦을 생각 못 하고 황급하게 앞을 보았다. 선우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박수를 치지도 않고, 나가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재현과 상연이 찬희의 곁으로 다가왔다. 곧 찬희의 양손을 하나씩 잡았다. 찬희는 허리를 굽힌다. 박수 소리를 들으며 오래도록 그렇게 멈춰 있었다.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것들이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선우는 그 자리에 없었다.
"아.."
그제야 찬희는 깨닫는다. 끝이라는 것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십 대가 정말로 끝났다는 것을.
무대에서 내려오자 마자 상연이 찬희의 뺨을 닦아주었다. 왜 울어. 그만 울어. 그리곤 가볍게 찬희를 끌어안아 주었다. 찬희는 상연의 어깨에 기대 고개를 저으며 애써 눈물을 닦아냈다. 무대하고 운 게 얼마만이더라. 처음 솔로로 무대에 섰던 날. 그 날 이후 처음인 것 같았다. 다 끝났는데, 동시에 다 되찾은 기분이었다. 그게 찬희를 벅차게 했다.
"고생했다."
겨우 눈물을 그쳤다 싶었는데. 재현이 찬희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그렇게 말해서. 그 말에 또 울컥해서. 그친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울면서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지. 최찬희 정말 열심히 살았다. 열심히 노래했고 열심히 사랑했다. 그런 생각이 드니 무너질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나 열심히 할게."
찬희는 처음으로 다짐하듯 말한다.
"우리 진짜 잘 되자."
그 말에 상연과 재현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찬희는 눈물을 닦으며 마주 따라 웃었다. 오랜만에, 그 어느 때보다 후련한 기분으로.
집 가는 길이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뒤풀이는 간단하게 끝났다. 셋 모두 일주일 내내 잠도 못 자고 고생했기 때문이었다. 너무 피곤해서 뭘 먹고 마셨는지 기억도 잘 안 났다. 끝내는 이야기하다 말고 조는 찬희를 보며 상연과 재현이 먼저 집에 들어가라 그랬다. 찬희는 사양하지 않고 술집을 나와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에서 졸다가 내릴 곳을 지나칠 뻔 했지만 다행히 문이 닫히기 직전 내릴 수 있었다.
식당에서부터 버스에서까지 내내 졸았어서 그런지 걸으면서는 잠이 좀 깼다. 여름 벌레가 쉼없이 울었다. 더위를 잘 안 타는 편이었지만 걷다 보니 좀 더웠다. 그런 날씨였다. 찬희는 기타를 바투 맸다. 걸음을 더 빨리 할 기운은 없었고, 그저 안전하게 집에나 잘 도착하는 게 목표였다.
정신이 들기 시작하니 천천히 오늘 했던 공연이 떠올랐다. 솔직히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뭘 했는지 기억도 잘 안 났다. 다만 멀리서 저를 지켜보던 검은 모자, 그 밑의 얼굴. 그거 하나만은 기억났다. 잘 들었을까. 무슨 생각 했을까. 그게 내 답가라는 건 알았을까. 찬희는 가사를 곱씹어 본다. 그러다 픽 웃는다. 딱히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쓰다 보니 누가 봐도 이별 노래 같은 게 나왔다. 누굴 붙잡기엔 너무 힘없는 노래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찬희에겐 그게 최선이었다. 그래서 후회가 없었다. 재현의 말이 맞았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생각하니 미련도 안 남았다. 어딘가 속 시원하기도 했다. 새로 시작하든, 다시 시작하든. 뭐든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무엇이든지 간에.
精神逐渐恢复后,今天的演出慢慢浮现在脑海中。说实话,因为精神恍惚,几乎不记得自己做了什么。只是远处那个戴着黑帽子的人,那张脸,我记得很清楚。他听得清楚吗?他在想什么呢?他知道那是我的回应吗?伞反复咀嚼着歌词,然后轻笑出声。其实并没有特别的想法,只是写着写着就变成了谁看了都觉得是离别的歌。觉得这首歌太无力,无法挽留任何人。但对伞来说,这已经是最好的了,所以他没有后悔。再现的话是对的,想到自己已经尽力了,也就没有遗憾了。心里某处也感到轻松了。不管是重新开始,还是再次开始,觉得自己都能做好。不管那是什么。
걷다 보니 금세 집이 가까워졌다. 골목에서 꺾어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찬희가 사는 빌라가 나왔다. 얼른 들어가서 씻고 자고 싶었다. 그동안 제대로 잔 기억이 거의 없었다. 찬희는 힘을 내서 전보다 걸음을 빨리한다. 조금만 더 힘내면 집이었다. 그런데.
走着走着,很快就接近家了。从巷子拐进去右转,就到了灿熙住的公寓。他迫不及待地想进去洗个澡然后睡觉。最近几乎没有好好睡过觉。灿熙鼓起劲儿,比之前走得更快了一些。再坚持一下就到家了。但是。
"........."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위로 허옇게 피어오르는 담배연기와 함께.
그가 고개를 돌리더니 몸을 폈다. 아까와 같은 차림새였다. 검은 모자, 검은 후드와 바지. 발목 아래로는 해를 덜 봐 비교적 하얀 뒤꿈치가 보였다. 그제야 그가 컨버스를 아무렇게나 구겨 신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깨달은 순간, 울컥, 무언가가 찬희의 목울대를 세게 치고 지나갔다.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거예요."
얼마나 서 있었을까. 결국 선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찬희는 이를 악물고 눈에 고인 눈물이 들어갈 때까지 미동 없이 선우를 노려보았다. 기어이 눈물이 좀 마르고 나서야 선우를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선우가 커다래졌다. 더는 비교할 수조차 없게끔.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렇게 커 보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새 얼마나 자란 건지 가늠도 안 됐다. 아마 그만큼 나도 자랐을 텐데, 이상하게 실감이 안 났다. 찬희는 선우의 앞까지 바짝 다가갔다. 가로등은 언제나처럼 희미하게 빛났고 빛이 번지는 곳 외엔 전부 깜깜했으며 모자가 만든 그림자가 눈을 가리고 있는 건 아까와 같았지만. 그래도 이만큼 다가오니 그림자 속에서도 그의 눈이 보였다. 붉고, 조금 부어 있는.
"울었어?"
"형도 울었잖아요."
선우가 모자를 더 깊게 눌러 썼다. 찬희는 얼굴을 숨길 모자도 없다. 그래서 혼자만 팅팅 부은 얼굴을 그대로 내놓고 있는 꼴이 됐다. 하긴, 이제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한가 싶지만.
"무슨 생각했어?"
찬희는 기어이 묻는다. 계속 묻고 싶었다. 이 노래를 만드는 순간부터 연주가 끝나고 나서까지, 줄곧 궁금했다. 선우가 노래를 듣고 뭐라고 할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기분을 느낄지. 무엇에 대한 물음인지도 말하지 않았지만, 찬희는 선우가 당연하게 알 거라고 생각한다. 곧 선우가 입술을 달싹였다. 몇 번씩 고민하듯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입술을, 찬희는 끈질기게 바라본다.
"내가 진짜 구질구질하다는 생각."
그러나 기다림 끝에 나온 대답은 좀 의외다. 찬희는 저도 모르게 가볍게 인상을 쓴다.
"뭐야, 그건."
"그냥..."
에이씨. 선우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황급히 손으로 제 뺨을 훔쳐 닦았다. 눈물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때문에 찬희는 그가 또 울기 시작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눈물이 참 많았다. 나이를 먹어도 잘 우는 건 변하지 않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 것마저도 너는 여전히 사랑스러워서.
"형은 이별 준비를 다 한 거 같은데. 노래가 그렇게 말하는 거 같은데."
“哥好像已经做好了分手的准备。歌里好像是这么说的。”
"........."
"나는... 나는 왜 형이 날 붙잡는 거 같지?"
선우가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온다. 이제 코 앞에서 선우의 얼굴이 보였다. 커다란 눈 가득 그렁그렁 매달린 눈물. 찬희는 어쩐지 벅차오른다. 감정동기화 된 아이마냥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善宇向前迈了一步。现在他就在眼前,善宇的脸清晰可见。大大的眼睛里满是泪水。灿熙不知为何感到一阵激动,像情绪同步的孩子一样,眼里也开始泛起泪花。
"내가 맞게 들은 거야?"
그 눈을 보면. 찬희는 언제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어린 찬희가 되어 처음부터 하나씩 다 되새기며 잃고 싶지 않은 것들을 헤아려 보게 된다. 오래된 기억은 언제나 시간과 공간을 함께 가지고 있어서. 규칙 없이 뒤섞여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떠오른다. 그러니까, 둘만의 시간, 둘만의 공간, 둘만의 감정과 둘만의 사랑... 같은 것들이. 둘만 알아볼 수 있는 모양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은, 아무도 몰라줄 그것이 꼭 이 세상의 전부인 것만 같고.
"...니가 그랬잖아."
찬희도 한 발자국, 선우를 향해 다가간다. 이마가 맞닿을 듯 가까운 거리였다. 내쉬는 선우의 숨결마저 느껴질 정도로.
"우리가 부른 노래를 생각하라고."
기다릴게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도록 항상 엔진을 켜둘게..
널 떠올리면 항상 그 노래가 먼저 생각나. 깜빡 믿고 있던 순간들이 떠올라. 되짚어 깨끗하게 비우고 왔더니 이젠 알겠다. 우리 정말 열심히 사랑했다고. 너의 노래도 나의 노래도 모두 서로를 가리키고 있었다고. 나를 위해 노래 불렀지만 또한 너를 생각하며 노래 부른 거라고. 그게 이 세상에 남은 내 마지막 낭만이라고.
말하는 대신, 찬희는 노래를 부른다. 속삭이듯 작게.
"아직 켜 뒀어?"
찬희가 멋쩍게 웃는다. 사실 울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대답은 듣지 못했다. 입술이 다가오는 게 빨랐기 때문에.
누가 오는지도 모를 정도로 급하게 키스했다. 선우의 두 팔이 찬희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찬희는 선우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매달리듯 그를 붙잡았다. 그러다 숨이 막힐 즈음. 잠깐, 잠깐.. 겨우 입술을 떼어내고 선우를 밀어냈다. 빌라 현관에 등이 닿았다. 다시 선우가 입술을 붙여왔다. 찬희는 간신히 뒤를 더듬어 문을 열었다. 그제야 입술을 뗀 선우가 찬희의 손목을 붙잡아 무작정 찬희의 집으로 향했다. 몰아치듯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간 선우가 찬희를 안에 밀어넣고는 다시금 급하게 달려들었다. 찬희는 비틀거리다 신발도 못 벗고 결국 문 앞에 주저앉았다. 선우가 그 위에 덮치듯 마주 앉았다. 잡아 먹을 듯한 키스가 이어졌다. 두 손이 찬희의 가디건을 벗기고, 곧 셔츠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닿는 체온이 뜨거웠다. 아주 더웠고, 또 너무 익숙해서. 그리웠어서. 찬희는 결국 속수무책으로 울기 시작한다. 울고 싶지 않은데 자꾸 눈물이 났다.
"왜 울어."
선우의 손이 찬희의 뺨에 닿았다. 볼을 문지르는 손길은 따뜻하고 부드럽다.
善宇的手碰到了灿熙的脸颊。揉搓脸颊的手温暖而柔软。
"잘 울지도 않는 사람이 오늘 왜 이렇게 우는데."
“平时不怎么哭的人,今天怎么哭成这样。”
아직 숨이 모자라 조금은 거친 목소리가 찬희의 귓가를 파고든다. 너 때문이잖아. 그렇게 말하는 대신, 찬희가 고개를 든다. 어느 새 센서등도 꺼져 사방이 어두운데도. 선우의 커다란 눈만큼은 똑똑히 알아볼 수 있다.
还没来得及喘口气,略显粗糙的声音钻进了灿熙的耳朵里。都是因为你。灿熙没有说出口,而是抬起了头。不知何时,感应灯也熄灭了,四周一片漆黑。但他依然能清楚地看到善宇那双大眼睛。
"사랑해." “我爱你。”
불 하나 없는 방. 신발로 가득한 비좁은 현관. 땀과 눈물로 범벅되어 엉망진창인 두 얼굴. 무드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이지만.
没有一盏灯的房间。挤满鞋子的狭窄玄关。被汗水和泪水弄得一团糟的两张脸。虽然时间和空间里找不到任何氛围。
"사랑해, 선우야."
너와 함께 하는 순간이 나에겐 모두 사랑 그 자체여서. 그 자체로 아름다워서.
"...나도."
"........."
"나도 사랑해, 최찬희."
선우가 이마를 맞대어 온다. 곧 입술을 가르고 뜨거운 혀가 밀려든다. 그 열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찬희는 끝내 인정하기로 한다. 이것만이 내가 아는 사랑이라고. 그 외엔 알고 싶지 않다고. 모르고 살고 싶었다. 이대로 둘이 빚은 세계 속에 갇혀 죽고 싶었다. 다시는,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당장 숨이 끊어지더라도 행복할 것 같았고...
찬희는 천천히 선우의 목에 팔을 감는다. 눈을 감지 않아도 어두운 세상 속에서, 유일한 빛처럼 쏟아지는 선우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그것만이 지금 이 순간, 찬희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깜빡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일어나니 이불 속이었다. 찬희는 느리게 눈을 깜빡인다. 방은 어두웠고, 협탁 옆의 취침등 하나만이 주위를 은은히 밝히고 있었다.
"깼어?"
젖은 머리를 한 선우가 욕실에서 나오며 물었다. 그제야 찬희는 천천히 밀려오는 기억을 되짚어 본다. 그 지저분한 신발장에서 대책 없이 물고 빨다가, 기어이 침대로 와 본격적으로 섹스했다. 말이 섹스지 거의 잡아 먹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제야 온몸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간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말도 안 되는 피곤이 몰려왔다.
그래도 속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개운했다. 찬희는 대답 대신 상체를 일으켜 두 팔을 벌렸다. 선우가 순순히 그런 찬희를 향해 다가왔다. 이내 두 몸이 마주 안겼다. 가벼운 키스가 찬희의 입술에 떨어졌다.
"형 기절해서 내가 대충 닦아놨어. 피곤하면 내일 씻어."
정말이다. 정신이 날아가도록 섹스를 했는데. 몇번을 사정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몸은 산뜻하다 싶을 정도로 깨끗했다. 몇 시야? 찬희가 물었다. 한 시. 선우가 선풍기를 틀며 대답했다. 그리곤 선풍기 앞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털기 시작했다. 언제 꺼냈는지 늘 찬희의 집에 오면 입는 트레이닝 복을 입은 채였다. 그새 살이 좀 빠져 평소보다 티셔츠 품이 넉넉했다. 자주 입던 옷이라 그런 게 바로 보였다. 찬희는 새삼 허탈하다. 얘나 나나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그 난리를 치며 헤어져 놓고 결국 이러고 있는지.
真的是这样。我们做爱做得神魂颠倒。我甚至不记得射了几次。身体却干净得像新的一样。现在几点了?灿熙问道。一点。善宇打开电风扇回答道。然后他坐在电风扇前,用毛巾擦头发。不知道什么时候,他已经穿上了每次来灿熙家都会穿的运动服。最近他瘦了一些,T 恤显得比平时宽松。这是他经常穿的衣服,所以一眼就能看出来。灿熙突然感到一阵空虚。我们两个到底是有多累,才会闹得分手,最后又这样在一起。
"뭘 그렇게 봐."
뒤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선우가 말한다. 평소와 같은, 조금 툴툴거리는 듯한 말투. 하지만 저게 쑥스러워서 그러는 거라는 걸 찬희는 잘 알고 있다. 덩달아 찬희도 좀 멋쩍어진다. 세상 뒤집힌 것처럼 굴어놓고 결국 이렇게 같이 있다는 사실이 그를 그렇게 만든다. 동시에 안도감도 든다. 선우가 결국 다시 제 세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에.
"비밀번호 바꿔." “把密码改了。”
찬희가 툭 던지듯 말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싶었는데 잘 됐는지는 의문이다. 뭔 비밀번호? 아.. 선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찬희는 괜히 심통을 부리고 싶어진다.
"왜 바꿨어."
"그냥."
"나 그러고 엄청 아팠어. 알어?"
"어쩐지 얼굴이 반쪽이더라. 왤케 자꾸 말라. 더 마를 것도 없는데."
"니가 속 썩이니까 그러지."
불쑥 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찬희의 곁으로 다가와 앉아 이마에 내려앉은 앞머리를 쓸어넘겨주었다.
"많이 아팠어?"
어디가 아팠어. 감기?
선우의 손이 찬희의 볼을 가볍게 문질렀다. 그 순간, 심장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아무튼 섹스만 하면 말 짧아지는 것도 바뀌질 않는다. 거기에 이렇게 반응하는 저도 참 답 없지만.
"그냥 몸살."
분위기 깨기 싫으니까. 찬희는 그렇게 합리화 하며 애써 태연하게 대답한다. 그래도 아직 들키기는 싫다, 이런 건.
因为不想破坏气氛。灿熙这样合理化自己的行为,努力装作若无其事地回答。即便如此,他还是不想被发现,这种事情。
"우산 안 썼어?"
"쓰라고 준 거 맞아? 어떻게 써, 그걸."
"쓰지, 그래도. 노래 부르는 사람이 하여간."
선우가 손등으로 찬희의 이마를 짚었다. 이젠 안 아파. 찬희는 부러 새침하게 대꾸한다. 선우가 픽 웃었다.
善宇用手背摸了摸灿熙的额头。“现在不疼了。”灿熙故意冷淡地回答。善宇轻笑了一声。
"그래. 아프지 마."
곧 찬희의 뺨에 선우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찰나였지만 꽤 오래 따뜻한 기운이 찬희의 피부에 달라붙는다. 찬희는 새삼 생각한다. 그리웠다고, 이 온기가. 잃을 수 없어서 그 난리를 쳤는데. 결국 다 잃을 준비를 하고 나서야 되찾았다.
"우리 하와이 갈까?"
선우가 불쑥 찬희를 보며 물었다. 정말로 뜬금 없는 소리였다. 찬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언제?"
"글쎄. 내년 2월 29일?"
선우의 대답에 찬희가 입을 다문다. 잠시 잊고 있었다. 철저하게 믿었고 끝내 잃을 뻔 했던 그 날을. 다시 찾았다는 게 아직도 찬희는 영 믿기지 않는다.
"형, 하와이가 미국인 거 알아?"
그런데 선우가 또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이쯤 되면 좀 기가 찬다. 찬희는 어이없다는 듯 대꾸한다.
"내가 바본 줄 아냐?" “你以为我是傻子吗?”
"아니, 난 처음 알았거든." “不,我是第一次知道。”
"바보야?"
"그럼 미국 가면 우리 결혼할 수 있는 것도 알아?"
"........."
찬희는 순간 할 말을 잃는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다.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선우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그렇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목이 콱 메기 시작했다.
찬희瞬间失语了。脑子一片空白。这家伙在说什么啊。过了好一会儿才有了这样的想法。선우的表情很认真。到底想说什么呢。想着要这么说。突然喉咙哽住了。
선우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반짝이는 작은 것. 여전히 상자도 무엇도 없이 그저 반지 하나만 덜렁 손에 든 채로.
선우가 찬희의 손을 붙잡아 당겼다. 조심스럽게.
"나랑 연애 더 못 하겠다며."
반지는 맞춘 것처럼 약지에 딱 들어맞는다.
"그럼 남은 거 하나 뿐이잖아."
"........."
"다이아는 맞추려면 열흘은 걸린다더라고. 그러니까 그건 하와이 가서 줄게."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게 조심스러웠다. 찬희와 눈을 맞추는 얼굴 역시 더없이 진지하다.
声音和平时不一样,小心翼翼的。和灿熙对视的脸也是无比认真。
"결혼하자, 최찬희."
무게감 있게 떨어지는 그의 사랑스러운 말들.
찬희는 제 손의 반지를 오래도록 바라본다. 사실은 또 눈물이 날 것 같아서.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 뜨며 참느라 그랬다. 그러다 결국은 웃었다.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떨어졌다.
찬희盯着自己手上的戒指看了很久。其实是因为他觉得自己快要哭了。他拼命睁大眼睛忍住眼泪。最后,他笑了,眼泪还是从眼中滑落。
"넌 무슨 프로포즈를 다 벗고 있는데 해.."
“你怎么求婚的时候什么都不穿呢...”
찬희가 몸을 웅크리며 웃기 시작했다. 좀 별론가? 선우는 머쓱한 얼굴로 뒷목을 문지른다. 찬희는 두 다리를 모아 안고 무릎에 고개를 기댄 채 선우를 바라본다. 낡은 티셔츠, 젖은 머리카락, 강아지 같은 눈동자와 언제인지 모르게 자리 잡고 있는 왼손 약지의 반지까지. 그냥, 모든 게 다 사랑스러웠다. 지나간 시간마다 묻어 있는 그의 흔적들이 몽땅 그랬다. 한 번 헤어져 보니 더 뼈저리게 와닿는다.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하든, 무엇을 하든. 그와 함께 한 순간들은 다 예쁘고 찬란했어서.
찬희开始蜷缩着身体笑了起来。“有点糟糕吗?”善宇尴尬地挠了挠后颈。찬희抱着双腿,把头靠在膝盖上看着善宇。旧 T 恤,湿漉漉的头发,像小狗一样的眼睛,以及不知何时戴上的左手无名指上的戒指。就是,一切都那么可爱。过去的每一刻都留下了他的痕迹,全部都是如此。分开一次后,更加深刻地感受到了。不管在哪里说什么,做什么。和他在一起的每一刻都那么美丽和灿烂。
"나도 단단히 꿰였나보다, 진짜."
"뭔 소리야."
"사랑한다고."
찬희가 배우고 겪고 만든 모든 사랑은 다 김선우 그 자체여서.
찬희는 온전히 환하게 웃는다. 함께 한다면 어떤 것도 무서울 것 없다는, 그 진부한 말이 왜 나왔는지 처음으로 벅차게 느낀다. 이 나이 먹어도 처음 배우는 게 있다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내가 더 사랑해."
곧 선우도 찬희를 따라 웃었다. 그 얼굴을 보며 찬희는... 삶의 모든 처음을 그와 함께 하는 것도 괜찮을 거라고. 아니, 사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고. 홀로 작은 다짐을 한다. 맞닿은 입술이 따뜻했다. 늘 그랬듯, 영원히 타오를 것처럼.
很快,善宇也跟着灿熙笑了起来。看着他的脸,灿熙觉得……和他一起经历人生的所有第一次也不错。其实,如果能一直这样的话,什么都可以做到。灿熙在心里默默下了一个小小的决心。相触的嘴唇是温暖的。就像一直以来那样,仿佛会永远燃烧下去。
선뉴가 동아리 방에서 부른 노래: 델리스파이스 - 항상 엔진을 켜둘게
선우가 만들고 찬희가 부른 드라마 OST: 아이유 - 이름에게
선우制作,찬희演唱的电视剧 OST:IU - 给名字
찬희가 만든 답가: Rotti - ソラニン (영화 소라닌 삽입곡)
델리 스파이스 노래를 제외하곤 가사는 다 다르다는 설정입니다. 아이유 노래는 그냥 모티브 정도로 생각해 주시고... 소라닌은 약간 개사했어요. 대충 이런 느낌이다~ 정도로만 봐주세용.. 낯부끄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