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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꽃과 짐승 ...

잿빛 눈동자가 리시의 목덜미를 더듬었다. ...

그는 당장이라도 목을 물어뜯고 싶다는 듯 입술을 살짝 벌렸다가 닫았다. ...

음습하게 가라앉은 시선이 리시의 목을 더듬고 내려가 가슴으로, 복부로 내려갔다. ...

날카로운 시선이 드레스를 뚫고 들어와 온몸을 샅샅이 애무하는 기분이 들었다. ...

도망치고 싶었다. ...

역시 이 남자를 찾아온 건 잘못이었다. ...

반듯하게 자란 성유물의 수호자로 알려진 그가, 사실은 얼마나 포악한지 알고 있었다. ...

포악하기에 나를 지켜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건 오류였다. ...

짐승을 피해, 짐승의 소굴로 들어온 꼴이었다. ...

그러나 리시는 도망치지 않았다. 예전의 리시라면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았을 테지만, 이번에는 주저앉지도 않았다. ...

리시는 동요를 드러내지 않고 턱을 살짝 들어 그를 오시했다. ...

흔들림 없는 리시의 눈빛에, 그가 한쪽 입술을 비틀었다. ...

하지만 그의 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

피처럼 붉은 입술 사이로, 낮고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 지금 나한테 프러포즈를 한 건가? 그것도 제 발로 찾아와서?” ...

“그래요. 나랑 결혼해요,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님.” ...

케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

재미있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

리시의 속셈을 알아내겠다는 예리한 눈빛이었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은.” ...

케이가 성큼 다가와 리시의 앞에 바짝 붙어섰다. ...

케이에게서는 마치 숲을 담은 듯, 시원한 향기가 났다. ...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은데.” ...

그의 손이 슬며시 올라와 리시의 목덜미로 향했다. ...

커다란 손이 리시의 가느다란 목을 움켜쥐듯 다가오다가 살갗에 닿기 전에 멈췄다. ...

“결혼이라는 게 뭔지는 알고 있나?” ...

“알아요.” ...

아주 잘 알지. ...

“그렇다면…….” ...

멈춰 있던 손이 움직여 리시의 목에 닿았다. ...

차가운 손바닥이 목덜미를 쓸고 내려가 가녀린 어깨에서 멈췄다. ...

리시는 움찔, 몸을 떨었지만 그를 향해 고정한 시선을 떨구지는 않았다. ...

“부부끼리 뭘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겠군.” ...

알다마다. ...

너무 잘 알아서 깜짝 놀랄걸. ...

속에 있는 말을 하는 대신, 리시는 검지를 들어 제 어깨에 머물러 있는 케이의 손목을 밀어냈다. 케이의 손은 쉽게 떨어졌다. ...

“우리 지금은 결혼한 사이가 아니잖아요.” ...

케이가 싱긋 웃으며 두 손을 살짝 들어 항복 표시를 하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

여전히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아서, 리시는 조금 섬뜩하기까지 했다. ...

“레이디 위틀로.” ...

그가 손바닥을 위로 올려 문을 가리켰다. ...

“꺼져.” ...

무례하고 명백한 거절이었다. ...

다른 레이디였다면 창피해서 고개도 들지 못했을 것이다. ...

하지만 리시는 그렇지 않았다. ...

이 정도의 창피함은 아무것도 아니다. ...

그 집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제대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

리시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케이를 똑바로 응시했다. ...

“후치스 대상단의 주인인 알포드는 날 갖기 위해, 위틀로 공작에게 라벤트의 금광을 약속했어. 위틀로 공작은 그 금광을 받고 날 알포드에게 넘길 예정이야.” ...

“말이 짧아졌군.” ...

“당신이 먼저 짧게 했잖아. 존댓말이 좋으면, 당신이 먼저 써. 그럼 나도 그에 맞는 예의를 보여줄 테니까.” ...

케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

이번에는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

그는 말없이 리시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휙 돌아서서 소파로 걸어갔다. ...

소파에 털썩 앉아 다리를 꼰 그가, 턱으로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

앉으라는 의미겠지만 리시는 그러지 않았다. ...

이제 누구도 내게 명령하지 못한다. ...

내 인생은 내 마음대로. ...

누구도 내 삶을 멋대로 쥐고 흔들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

“당신이 가진 베노트의 금광을 준다면, 위틀로 공작은 분명 당신에게 날 넘기겠지. 베노트의 금광이 라벤트의 금광보다 훨씬 크니까.” ...

“레이디 위틀로는 본인이 베노트의 금광만큼이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내 생각에는 아닌데.” ...

“금방 망할 금광 따위보다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 낫지 않겠어? 적어도 아직 시들지는 않았으니까.” ...

케이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

그는 베노트의 금광이 금방 망하리라는 걸, 공작가의 꽃이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하고 있을 것이다. ...

하지만 리시는 그 의문을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

케이는 의문을 입 밖에 내는 대신, 손으로 방문을 가리켰다. ...

“다시 한번 말하지만, 레이디 위틀로. 꺼져.” ...

리시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자, 케이가 팔짱을 끼었다. ...

“나는 공작가의 꽃이 화사하게 피었든, 시들어가든 관심 없어. 곧 망해버릴 광산씩이나 주고 사 와야 할 만큼, 당신이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란 뜻이야.” ...

케이는 흥미가 떨어진 듯 나른한 눈으로 리시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

“그러니까 레이디 위틀로, 꺼져. 그 예쁜 목을 부러뜨리기 전에.” ...

케이가 공작가의 꽃 따위를 관심에 둘 리 없다는 건, 리시도 이미 알고 있었다. ...

다만 가진 패를 드러내기 전에 찔러봤을 뿐이다. ...

‘이제 꺼내는 수밖에 없나.’ ...

리시는 조용히 심호흡했다. ...

이 패를 꺼낸다는 건, 이 목도 같이 내놓는다는 의미다. ...

이 패를 꺼냈을 때, 케이가 리시를 살려둘지, 죽일지 알 수 없었다. ...

리시가 그린 백작 가에 방문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고, 그 사실을 케이도 알고 있었다. ...

어쩌면 케이는 리시를 죽임으로써 모든 것을 덮어두려 할지도 몰랐다. ...

‘여기서 죽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상관없어.’ ...

리시는 앞으로 자신에게 벌어질 일을 알았다. ...

그런 삶을 사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낫다. ...

마음을 견고히 다지고 입을 열었다. ...

“수인들의 왕.” ...

작게 읊조린 소리에, 케이의 눈이 커졌다. ...

견고했던 잿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

“당신이 뭘 하려는지 알아, 케이브란트.” ...

케이가 천천히 일어났다. ...

그의 뒤로 어두운 살기가 넘실거렸다. ...

살기가 흘러와 리시의 육체를 집어삼켰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은 피어보지도 못하고 떨어지겠군.” ...

케이의 손이 리시의 목을 움켜쥐었다. ...

핏빛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보였지만, 리시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

“꽃이 떨어지면 당신의 목도 떨어질 거야.” ...

목이 죄이는 순간에도 담담하게 흘러나오는 리시의 음성에, 케이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

잿빛 눈동자를 채운 살기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호기심이 채웠다. ...

“당신의 계획을 알아. 그 계획은 실패하고, 당신은 죽을 거야.” ...

“또 뭘 알지?” ...

“이제 당신이 나랑 결혼할 수밖에 없다는 거.” ...

케이가 눈을 크게 떴다가 곧 빙그레 웃었다. ...

“그 모든 걸 어떻게 아느냐고 물어도 답해주지 않겠군.” ...

“그래.” ...

“결혼하지 않는다고 하면 나가서 내가 수인이라는 걸 알릴 거고.” ...

“맞아.” ...

“여기서 죽인다고 해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을 거고.” ...

“응.” ...

“그런데 여기서 널 죽이면 나도 죽는 거고.” ...

“영리하네.” ...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

“이미 믿고 있잖아.” ...

리시는 거의 노래처럼 들릴 만큼 즐거운 어조로 말했다. ...

케이는 말없이 제 앞에 있는 겁 없는 여자를 내려다봤다. ...

핏줄이 비칠 만큼 하얀 피부와 가늘고 긴 목, 쭉 뻗은 예쁜 쇄골 아래의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

사내들이라면 군침을 흘릴 만한 여자였고, 실제로도 그렇다는 소문을 들었다. ...

온실 속에서 곱게 자란 위틀로 공작가의 꽃 아이리스를 손에 넣고 싶어 하는 남자가 수도 없이 많았다. ...

이 육체를 안고 싶어서 전전긍긍하는 사내들이 넘치겠지만, 케이에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

낭창낭창한 육체나 꽃처럼 아름답다는 얼굴 따위에, 케이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

케이의 관심을 끈 건, 리시의 태도였다. ...

케이의 살기는 물질감을 갖고 있었다. ...

보이지 않지만, 형체가 있어서, 실제로 상대의 육체를 짓눌러 공포에 질리게 했다. ...

평범한 여자, 아니, 제대로 훈련받은 병사라도 케이의 살기를 이기지 못해 오줌을 지리는 게 정상이었다. ...

하지만 리시는 그러지 않았다. ...

겁에 질린 눈빛조차 하지 않았다. ...

그것이 케이의 흥미를 끌었다. ...

게다가 리시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

리시의 눈빛에는 그녀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

“앉아서 얘기하지.” ...

케이가 리시의 목을 놔주고 소파로 걸어갔다. ...

리시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고고하게 서 있었다. ...

케이는 인상을 찌푸리다가 아까 리시가 한 말을 떠올렸다. ...

케이가 소파 맞은편을 정중하게 가리키며 말했다. ...

“부디 앉아주시겠습니까, 레이디 위틀로.” ...

리시가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

“좋아요.” ...

소파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그녀를 보자, 케이는 사람들이 리시를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

허리와 목을 똑바로 편 꼿꼿한 자세, 머리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흐르는 기품, 느릿하고 우아한 태도, 겁에 질린 작은 새처럼 가냘파 보이는데도 흔들림 없는 강인한 눈빛. ...

이윽고 소파에 앉은 리시가 두 손을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올리고 케이를 주시했다. ...

리시는 고고한 표정으로 케이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내가 수인이라는 거. 내가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는 거. 그게 실패해서 내가 죽으리라는 거. 당신이 그런 것들을 안다는 건, 이유를 묻지 않고 믿어드리죠.” ...

“…….”

“하지만 실패하고 죽을 수인 따위에게 결혼을 청하는 의도 정도는 알고 싶은데.” ...

흔들림 없던 보라색 눈동자에 술렁, 파문이 일었다. ...

끔찍한 걸 떠올리는 듯, 리시의 표정이 잠시 허물어졌다. ...

옆으로 떨어졌던 리시의 눈동자가 다시 케이에게로 향했다. ...

“그 빌어먹을 공작가에서 벗어나고 싶거든요.” ...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

“온실 속의 꽃인 줄 알았는데.” ...

“온실?” ...

리시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

어째서인지 케이는, 지금의 리시가 이 방에 들어온 어느 순간보다도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

“거긴 온실이 아니에요. 나도 꽃이 아니고. 나는 지옥의 불길에서 아등바등 살아남은 잡초에요.” ...

리시를 마주한 지 1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리시는 계속 케이를 놀라게 했다. ...

케이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

“그린 백작가도 따뜻한 온실은 아닐 겁니다, 레이디 위틀로.” ...

“따뜻한 온실이 될 거예요, 그린 백작님.” ...

리시가 단호하게 말했다. ...

“이 세상에서 제일 견고하고 따뜻한 온실. 누구도 허락 없이는 발을 디디지 못하는, 권력의 정점에 선 온실.” ...

권력의 정점. ...

이 여자는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고 말하는 걸까? ...

“그 온실에서 나는 온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해.” ...

리시의 입가에 달콤한 미소가 피었다. ...

“게으르게 살 거예요.” ...

케이는 단숨에 리시가 좋아졌다. ...

(2) 지는 꽃, 피는 꽃. ...

끈적거리는 손이 리시의 목을 졸랐다. ...

목을 조르는 손길이 평소보다 강했다. ...

아마도 오늘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보다. ...

알포드는 기분이 나쁘면 언제나 리시에게 손찌검을 했다. ...

“큭…….” ...

벌어진 입술 사이로 괴로운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알포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

“X팔. X팔.” ...

욕설을 내뱉으며 손에 더 힘을 줬을 뿐이다. ...

‘아, 그렇구나.’ ...

오늘 나는 죽겠구나. ...

리시를 보는 알포드의 눈빛이 달라진 걸 느낀 지는 꽤 오래됐다. ...

리시는 벌써 마흔을 앞두고 있었다. ...

돈 많은 알포드의 후처로 들어오고 싶어 하는 여자들은 많았다. ...

알포드에게 있어, 공작가에서 데려와 아내로 삼은 리시는 이제 버리지 못할 쓰레기일 뿐이었다. ...

오랫동안 산소를 받지 못한 폐가 비명을 질렀다. 눈앞이 흐릿해졌다. ...

늘 죽고 싶었지만 죽을 용기가 없었다. 그래, 이렇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싫은 남자의 손에 죽는 것이야말로, 이 한심하고 비참한 인생의 말로에 어울렸다. ...

그런 와중에도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

‘나는 왜 이렇게 살아왔을까?’ ...

이렇게 죽을 줄 알았다면 뭐라도 해볼걸. 죽음을 무릅쓰고 무엇이라도 해볼걸. ...

왜 목소리 한번 내지 못한 채, 그들이 하라는 대로, 네가 하라는 대로, 당신들이 하라는 대로, 그리 살아왔을까? ...

얼마 전 보았던 브리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

이제는 황후가 된 그녀는, 몹시도 행복해 보였다. ...

브리트니는 모든 걸 가졌다. ...

권력의 최정점에 선 남편과 건강하고 귀여운 아이들, 그리고 그녀의 애인이었던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까지. ...

똑같이 공작의 딸로 태어났건만, 브리트니와 리시의 삶은 이토록 달랐다. ...

‘넌 항상 주인공이었지.’ ...

아이리스는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 불렸지만, 단 한 순간도 꽃인 적이 없었다. ...

위틀로 공작가의 진짜 꽃은 브리트니였다. ...

브리트니는 리시가 꽃이 될 수 없도록 몇 번이나 짓밟고 꺾었다. ...

그럼에도 리시는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한 채, 밟히면 밟히는 대로, 꺾이면 꺾이는 대로 그리 살아왔다. ...

그 결과가 이거다. ...

흐릿했던 시야조차 이제는 사라졌다. 어둠에 잠식되자 덜컥 겁이 났다. ...

‘정말로 이게 끝이야?’ ...

후회 따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소망을 품는 건 사치였으니까. ...

하지만 침잠하는 죽음에 질식하면서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

‘이렇게는 싫어.’ ...

단 한 번도 행복한 순간이 없었다. ...

‘이런 식으로 죽고 싶진 않아.’ ...

행복의 한 조각 맛보지 못한 채 떠나야만 하는 건 너무도 처절한 일이었다. ...

‘다시 한번…….’ ...

새롭게. ...

‘딱 한 번만 더…….’ ...

뜨겁게. ...

‘오롯이 한 번…….’ ...

행복하게. ...

그리 살아보고 싶었다. ...

귓불이 뜨거웠다. 이제 끝난 줄 알았는데 통증이 느껴지는 게 이상했다. ...

-정말이야? ...

뜨거움 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

-정말 또 살아보고 싶어? ...

작은 새가 재잘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

응, 이라고 대답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

무언가 끊어지는 느낌과 함께, 리시는 자신이 완전히 죽었음을 깨달았다. ...

죽음이라는 건 이토록 쉽고 허무한 것이구나. ...

죽음을 자각하자마자 눈앞에 많은 것들이 흘러갔다. ...

‘이게 주마등이라는 걸까?’ ...

그것은 리시가 겪은 일이기도 하고, 겪지 못한 일이기도 했다. 과거이기도 하고, 현재이기도 하고, 미래이기도 했다. ...

‘주마등은 내가 과거에 겪은 일들만 흘러가는 줄 알았는데…….’ ...

그렇지 않은가 보다. 정보가 해일처럼 밀어닥쳐 리시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죽었는데도 두통이 느껴져서 덜컥 겁이 났다. ...

죽으면 다 끝인 줄 알았는데 아닌 걸까? ...

새로운 고통의 시작인 걸까? ...

죽음조차 내게 안식을 주지 못하는 걸까? ...

나는 영원한 지옥을 살아가야만 하는 걸까? ...

-살아봐. ...

또다시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그리고. ...

아이리스는 눈을 떴다. ...

+++

리시는 눈을 깜빡거렸다. ...

죽었다가 시간을 돌아와 되살아난 지 벌써 한 달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그때의 꿈을 꾼다. ...

잠에서 깰 때마다 몸에 소름이 돋는다. 악몽이 현실이고, 현실이 악몽일까 봐서. ...

처음에 시간을 돌아왔을 때는, 무척이나 긴 악몽을 꿨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꿈에서 있었던 일들이 되풀이되자, 그것이 평범한 악몽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

믿을 수 없지만, 리시는 악몽과도 같은 삶을 살았고, 죽었고, 시간을 돌아 되살아난 것이다. ...

눈에 익은 천장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천장 구석에 있는 곰팡이를 발견했다. ...

요 며칠 비가 내린다 싶더니, 역시나 곰팡이가 피었다. ...

벌컥-! ...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고, 하녀가 들어왔다. ...

“아가씨. 아직도 누워 있어요?” ...

하녀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 불리는 아이리스가, 저택에서 이런 취급을 받는 줄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

위틀로 공작가에서 리시의 위치는 하녀들보다도 낮았다. ...

“일어나려고 했어요.” ...

리시는 고분고분 침대에서 내려왔다. ...

“일찍, 일찍 좀 일어나요. 오늘 귀한 손님이 오셔서 바쁘다고요.” ...

하녀가 리시에게 걸레를 던졌다. ...

리시가 슬쩍 몸을 피하는 바람에, 걸레는 침대 끝을 맞추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

“나와서 복도 창문 좀 닦아요. 드레스는 그 후에 갈아입고.” ...

“알겠어요.” ...

“하, 진짜. 뭐 하나 나서서 하는 일이 없다니까. 지가 진짜로 공작님의 딸이라도 되는 줄 아나.” ...

하녀가 투덜거리며 방에서 나갔다. ...

리시는 바닥에 떨어진 걸레를 집어 들고 서늘하게 웃었다. ...

“공작의 딸 자리 따위, 내 쪽에서 거절해주지.” ...

 

글로번 위틀로 공작에게는 딸이 두 명 있었다. ...

장녀 브리트니와 막내 아이리스. ...

그중에서도 특히 아이리스의 외모가 아름답고 몸가짐이 발라, 사람들은 아이리스를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고 불렀다. ...

위틀로 공작 역시 막내 아이리스를 더없이 아껴서, 누구에게도 주지 않고 평생 데리고 살고 싶다고, 공공연하게 말해왔다. ...

어디까지나 공공연하게, 대외적으로만. ...

사실 아이리스는 위틀로 공작과 하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 ...

귀족이 애인을 두고 그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나는 일은 많았지만, 그 자식들은 귀족의 친자식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

하물며 하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말할 것도 없었다. ...

위틀로 공작부인은 자신의 남편이 하녀 따위와 정을 통해 아이를 낳았다는 끔찍한 사건을, 없는 일로 하려 했다. ...

둘 다 죽이기 위해 찾아간 허름한 방에서, 하녀의 품에 안겨 있는 갓난아기를 보는 순간, 위틀로 공작부인은 생각을 바꿨다. ...

“하녀는 죽이고 그 아이는 내 아이로 하겠어요.” ...

공작의 앞에서 공작부인은 말했다. ...

“그 아이를…… 키우겠다고?” ...

“그래요. 그 아이, 아주 예쁘게 자라겠더군요.” ...

“우리한테도 예쁜 딸이 있지 않소. 아들도 아닌 걸 굳이 키울 필요가…….” ...

“내 딸은 아무한테나 주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 계집의 딸은 다르죠.” ...

공작부인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맺혔다. ...

“곱게, 예쁘게, 잘 키우도록 해요. 중요한 순간에 팔아치우게.” ...

그리하여 아이리스는 위틀로 공작부인이 낳은 딸이 되었다. ...

아이리스는 위틀로 공작이 아끼는 막내딸로서 수많은 교육을 받으며 ‘팔아치우기 좋은 상품’으로 자랐다. ...

그렇다고 해서 공작 일가가 리시를 정말로 아껴준 건 아니었다. ...

그들은 리시를 하녀보다 못하게 대하고, 학대하고, 때리고, 굶겼다. ...

공작 일가가 리시를 대하는 분위기는 고용인들 사이에도 전해졌다. ...

공작 일가의 눈을 피해 리시에게 행하던 작은 괴롭힘이 조금씩 커졌고, 심지어 브리트니는 일부러 하녀들에게 시켜 리시를 발로 걷어차게 하거나, 리시가 하녀들 앞에 엎드리게 하기도 했다. ...

리시가 굴욕감을 느끼게 하는 걸, 브리트니는 무척이나 좋아했다. ...

-뭐라도 시켜. 쟤도 집안일을 잘해야 남편에게 사랑받지. ...

괴롭힘이라는 게 그랬다. ...

처음에 누군가는 리시를 불쌍히 여겼을지도 모른다. ...

또 어느 누군가는 ‘그래도 어떻게 공작님의 딸에게…….’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

하지만 한 명이 주도해서 ‘그래도 돼. 더 해도 돼.’라며 등을 떠밀자, 모두의 마음에 잔혹함이 깃들었다. ...

위틀로 공작가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리시는, 무슨 짓을 해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

청소를 끝내고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

‘귀한 손님’이 오는 자리라서, 하녀들이 최고급 드레스를 가져와 시중을 들어줬다. ...

코르셋을 꽉 죄고 있는데,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

“아이리스!” ...

브리트니가 경쾌하게 외치며 들어왔다. ...

하녀들은 리시를 대할 때와 달리 브리트니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

“괜찮아, 괜찮아. 얼른 아이리스 옷이나 갈아 입혀줘. 남편 될 사람을 처음 보는 자리인데, 예쁘게 하고 나가야지.” ...

브리트니는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

“아이리스, 넌 좋겠다. 그 커다란 상단의 주인인 알포드랑 결혼하다니. 다들 엄청 부러워할 거야.” ...

알포드. ...

‘역시 나는 시간을 돌아왔어.’ ...

쭉 평범한 일상이었기에, 회귀한 것이 사실인지 긴가민가하기도 했다. ...

하지만 오늘 알포드의 방문으로 확신했다. ...

나는 마흔에 가까울 때까지 살다가, 내 남편이었던 알포드의 손에 죽었고, 죽음 속에서 아주 많은 것들을 본 후, 20살 때로 되돌아왔다. ...

‘그때 곧장 케이를 찾아가길 잘했어.’ ...

한 달 전, 되살아났을 때 리시는 곧장 케이를 찾아갔다. ...

지난 삶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

새로 얻은 인생을, 끔찍한 핏빛으로 물들이고 싶지 않았다. ...

죽음 속을 유영하며 알게 된 정보를 가지고, 케이와 협상했다. ...

집에 돌아온 후, 며칠이나 저택에서 사라졌다는 이유로 많이 맞기는 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

그리고 오늘. ...

알포드가 온다. ...

지난 삶에서도 이런 날에 알포드가 찾아왔었다. ...

‘그리고 위틀로 공작의 뜻에 따라서 순순히 결혼했지. 작은 항변조차 하지 않고.’ ...

이번 삶에서 리시는 그렇게 한심하게 살다가 죽을 생각이 없었다. ...

‘이번에는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내가 정할 거야.’ ...

  휙-! ...

브리트니가 갑자기 리시의 머리채를 잡아 세게 잡아당겼다. ...

“야, 내가 지금 말하잖아. 집중 안 해?” ...

리시가 눈동자만 움직여 브리트니를 쳐다봤다. ...

브리트니가 인상을 찌푸렸다. ...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고 봐?” ...

“언니한테 집중하라고…….” ...

퍼억-! ...

브리트니가 주먹으로 리시의 머리를 때렸다. ...

“누가 네 언니야? 아가씨라고 부르랬지?” ...

“네, 아가씨.” ...

리시가 고분고분 대답하자, 브리트니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놔줬다. ...

“하여간 그 아저씨, 저번에 파티에 갔다가 봤거든. 엄청 배불뚝이야. 얼굴에 기름이 줄줄 흐르더라. 그걸 보니까 너, 그 집 가서 잘 먹고 잘살기는 하겠더라. 너도 그렇게 배 나오고 기름 줄줄 흐르게 될까 봐 좀 걱정되네.” ...

“…….”

“그래도 너 같은 애를 아내로 삼고 싶다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감사한 마음으로 그 아저씨를 잘 모시고 살아. 알겠지?” ...

“네, 그럴게요.” ...

“우리 집안에 먹칠하는 행동은 하지 말고. 뭐, 네 깜냥에 뭘 할 수나 있겠나 싶다만은…… 또 생각해보면…….” ...

브리트니가 리시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

그리고 하녀들이 듣지 못하도록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너희 엄마가 헤픈 여자였잖아. 너도 그러고 다닐까 봐 걱정이야. 핏줄, 어디 안 가더라고.” ...

수백 번을 들은 말이기에 타격도 없었다. ...

지금까지는 이런 말을 들어도 묵묵히 넘어갔지만, 이제는 그래 줄 생각이 없었다. ...

세상에서 제일 멋진 말을 했다는 듯 미소 지으며 떨어지는 브리트니에게, 이번에는 리시가 다가갔다. ...

그리고 브리트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

“그렇게 따지자면 너희 아빠도 마찬가지야.” ...

“뭐……?” ...

브리트니가 방금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

브리트니가 너무 충격을 받아서 화를 낼 생각도 잊은 듯 입술을 뻐끔거리는데, 밖에서 시녀가 뛰어 들어왔다. ...

“아가씨, 아가씨! 큰일 났어요!” ...

“뭐야?” ...

브리트니가 시녀에게 짜증을 냈지만, 시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

“그린 백작님이,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님이 찾아오셨어요!” ...

리시는 미소 지었다. ...

케이브란트 그린. ...

거래를 받아들이기로 했구나. ...

(3) 탐나는 남자. ...

“케이브란트 그린? 정말로 그 그린 백작이야? 성유물의 수호자?” ...

브리트니의 눈이 번쩍 뜨였다. ...

리시에게 너희 아빠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은 일은, 케이브란트 그린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

“그렇다니까요. 좀 전에 오셔서 지금 공작님이랑 응접실에 계세요.” ...

“무슨 일로 온 거래?” ...

“제가 살짝 엿들었는데 공작님의 영애 어쩌고,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응접실로 들어가시더라고요. 목소리가 낮아서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

“공작님의 영애? 나? 내 얘기겠지?” ...

“당연하죠. 달리 누가 있겠어요?” ...

브리트니의 얼굴이 발그레 물들었다. ...

케이는 지금 사교계에서 제일 인기가 많은 남자였다. ...

성유물의 수호자 가문은 신성국의 가호를 받기에, 황제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직함이 백작이어도 공작과 맞먹는 권력을 갖고 있었다. ...

하지만 가문은 둘째 문제. 중요한 건 케이의 외모였다. ...

그는 말 그대로 아름다웠다. 넓은 어깨와 잘록한 허리, 큰 키에 긴 다리를 가진 그는, 신이 최선을 다해서 만든 조각상이란 평을 받았다. ...

손질하지 않은 듯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과 짙은 눈썹 아래에 자리 잡은 청회색 눈동자는, 그저 닿기만 해도 숨이 벅찰 만큼 근사했다. ...

완벽한 모양의 코 아래의 붉은 입술은 촉촉하고 유혹적이라서, 수많은 여자가 그 입술이 자신의 살갗을 더듬는 상상을 했다. ...

귀족 가 아가씨들은 케이의 아내가 되고 싶어 했고, 귀부인들은 케이를 애인으로 삼고 싶어 군침을 흘렸다. ...

그러나 신성국의 백작인 케이는, 퇴폐적인 외모와 달리 몸가짐이 발라서, 여자와 염문설이 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

“사실 말이야. 저번에 파티에 갔을 때, 그린 백작이 나한테 춤을 청해서 같이 춤춘 적이 있거든.” ...

춤을 춘 건 사실이지만, 케이가 춤을 청해오지는 않았다. ...

브리트니가 조심스레 다가가 춤을 청했고, 레이디의 춤을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기에 케이가 받아줬을 뿐이었다. ...

하지만 브리트니의 기억 속에서 그 일은 미화되어, 케이가 자신에게 간절히 춤을 청한 것으로 바뀌었다. ...

“그때 춤추면서 대화를 많이 나눴는데…….” ...

“그건가 봐요, 아가씨. 그때 아가씨한테 반하셨나 봐요.” ...

시녀가 얼른 브리트니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줬다. ...

“역시 그런 거겠지?” ...

“아무렴요. 아가씨가 얼마나 아름다우신데요. 거기다 춤 실력도 뛰어나시고. 어느 남자가 안 반하겠어요?” ...

“나한테 결혼하자고 하면 어떡하지?” ...

“아가씨 마음은 어떠신데요? 그린 백작님이 마음에 드세요?” ...

“잘 모르겠어.” ...

사실은 좋아 죽겠다. ...

“대화한 것도 그때가 처음이니까…… 그래도 여기까지 찾아왔으니까 좋게 만나서 얘기는 좀 더 해봐야지.” ...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니에요. 어서 가셔서 드레스를 갈아입으셔야죠.” ...

“맞다, 맞다. 그래야겠다.” ...

브리트니는 리시의 존재 자체를 잊은 듯, 시녀와 리시의 시중을 들던 하녀들을 데리고 방에서 나가버렸다. ...

리시는 떨어진 코르셋을 집어 들어 가만히 응시하다가 옆으로 휙 던져버렸다. ...

알포드에게 선보이기 위해 입어야 했던 드레스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벗어서 의자에 걸쳐놨던 옷을 집어 들었다. ...

하녀들이 입는 것보다는 조금 나은 수준의 낡은 원피스. ...

리시는 원피스를 입은 후, 거울 앞에 섰다. ...

드레스 차림에 맞게 꾸며서 고정한 머리가 원피스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

리시는 머리를 고정한 핀을 하나, 하나 빼냈다. ...

붉은 기가 돌아 분홍색으로 보이는 은발이 사르락, 사르락 목덜미를 타고 떨어져 내렸다. ...

리시는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대충 빗은 후, 빙그레 웃었다. ...

자신의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도 근사했다. ...

+++

글로번 위틀로 공작은 난처한 표정으로 케이를 쳐다봤다. ...

“그 애를 말입니까?” ...

“그 애라니요. 장녀인 브리트니 양 이야기를 할 때는 우리 딸이라고 하시더니, 막내인 아이리스 양은 우리 딸이 아니신가 봅니다.” ...

마치 위틀로 가의 사정을 안다는 듯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말에, 글로번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

케이가, ...

“위틀로 가문과 연을 맺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

라고 말했을 때만 해도, 군사적이나 경제적 동맹을 말하는 줄 알았다. ...

“위틀로 공작님의 영애께서 그리 아름다우시다던데…….” ...

케이가 그렇게 말을 흘렸을 때는, 당연히 브리트니를 말하는 줄 알았다. ...

얼마 전 파티에 다녀온 브리트니가, 그린 백작이 자신에게 춤을 청했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떠들어댔기 때문이었다. ...

공작가라는 이름이 붙긴 했어도 쇠퇴의 길을 걷는 위틀로 가문에, 성유물의 수호자인 그린 가문의 케이브란트는 몹시 탐나는 사내였다. ...

하지만 성유물을 찾는 것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고 들어서, 시도해볼 생각조차 못 하고 포기한 터였다. ...

그런 케이가 제 발로 찾아와 영애 운운했을 땐, 이걸 기회라고 생각했다. ...

“아이리스 양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

케이가 그리 말하기 전까지는. ...

케이가 찾아온 게 아이리스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

아이리스는 ‘곱게 키워 내보이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딸’이라는 명목으로, 파티에도 보내지 않았다. ...

위틀로 가문의 돈줄이 되어줄 만한 사내들에게만 한 번씩 보여줬고, 그들의 입을 통해 아이리스는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 되었다. ...

모두가 아이리스를 궁금해하는데도 사교계에 데뷔시키지 않았더니, 아이리스를 한번 보고 싶어서 몸 단 사내들이 많아졌다. ...

그렇게 아이리스의 몸값은 높아져 갔고, 얼마 전 알포드가 라벤트에 있는 광산을 언급해서 오늘 알포드와 계약서를 작성할 예정이었다. ...

그런데 찾아오기로 한 알포드는 안 오고, 느닷없이 케이가 방문을 하더니 아이리스를 내놓으란다. ...

난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아, 그…… 음…… 아직 장녀가 결혼하기 전이라서…….” ...

힘겹게 꺼낸 변명에 케이의 입술이 비틀려 올라갔다. ...

서늘한 미소에, 글로번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

“요새 누가 그런 것을 따집니까? 로드번 백작 가도, 프룬타 후작 가도 둘째나 막내부터 결혼시킨 것을 아실 텐데요. 심지어 가비자르 제국의 3황자님과 5황자님도 황태자님보다 먼저 결혼하셨지요.” ...

케이가 느릿하게 말했다. ...

“혹시 공작님께서는 이 케이브란트 그린이 위틀로 공작가문의 사위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

“그, 그럴 리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위틀로 백작님. 다만…… 우리 아이리스가 부끄러움이 많고 연약해서…… 아직은 결혼할 마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사교계에 나가는 것도 두려워해서요.” ...

“호오, 그래요.” ...

케이가 입술을 끝을 비쭉 들어 올렸다. ...

웃음기 전혀 없는 눈으로 짓는 미소가 무섭다는 걸, 글로번은 처음 알게 되었다. ...

“그렇다 들으니 더욱 탐나는군요.” ...

낭패다. ...

글로번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 다른 이유를 찾아냈다. ...

“아시다시피 요새는 연애결혼이 유행이지 않습니까. 우리 아이리스는 전부터 자신은 연애결혼이 하고 싶다고 몇 번이나 말해와서…….” ...

“베노트에 금광이 하나 있습니다.” ...

케이가 글로번의 말을 끊었다. ...

베노트의 금광이란 말에, 글로번의 귀가 번쩍 뜨였다. ...

그린 가 소유의 베노트 금광은 풍부한 금이 매장되어 있고,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수십 개나 발견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금광이었다. ...

알포드가 주기로 약속한 라벤트의 금광과 비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큰 금광이었다. ...

“결혼지참금으로 베노트의 금광을 드리려 했는데…….” ...

꿀꺽- ...

글로번이 군침을 삼켰다. ...

“아이리스 양이 연애결혼을 원한다고 하니, 아쉽게 됐군요.” ...

케이가 더는 볼일이 없다는 듯 일어났다. ...

“자, 자, 잠깐만요, 백작님!” ...

이제 몸이 단 쪽은 글로번이었다. ...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 아이리스를 키웠다. ...

베노트의 금광. 거기에 그린 가문의 명성까지. ...

아내의 말대로 아이리스를 죽이지 않고 키우기를 잘했다. ...

“더 대화할 것이 남았습니까?” ...

아이리스를 포기한 케이는 냉정했다. ...

글로번은 이대로 케이가 떠나버릴까 봐 불안했다. ...

“이, 일단, 일단 좀 앉으시지요, 백작님. 참으로 오랜만에 얼굴을 뵙는 거 아닙니까?” ...

“흐음.” ...

“거기다…… 가만 생각해보니, 우리 아이리스가 연애하는 게 부끄럽고 두렵다면서, 제가 정해준 남자와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한 적이 있다는 게 생각났습니다. 그러니까…… 좀 앉으십시오. 예?” ...

글로번이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

케이는 천천히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

한참 어린 애송이가 예의 없는 행동을 하는데도, 글로번은 화가 나지 않았다. ...

글로번의 머릿속은 ‘베노트의 금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

“그…… 베노트의 금광을 지참금으로 주신다고요.” ...

“이렇게.” ...

케이가 품에서 서류를 하나 꺼냈다. ...

“서류까지 준비해 왔습니다. 공작님은 그저 사인만 하시면 되지요.” ...

“그, 그렇군요.” ...

서류를 보는 글로번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

“그렇다면…… 어…… 아무래도 그린 백작님이 우리 아이리스를 많이 아껴주실 것 같으니…….” ...

똑똑- ...

노크 소리가 글로번의 말을 끊었다. ...

중요한 순간을 앞둔 글로번은 방해를 받아서 짜증이 치밀었다. ...

“뭐냐!” ...

“아버지, 저예요.” ...

브리트니의 목소리를 듣자, 글로번은 다른 생각이 들었다. ...

역시 그린 백작의 부인 자리를 아이리스 따위에게 넘기는 건 아까웠다. ...

목석같은 케이가 브리트니에게 춤을 청할 정도였으니, 브리트니를 다시 보면 마음이 바뀌지 않을까? ...

“들어와라.” ...

케이에게 묻지도 않고 대답했다. ...

문이 열리고 여느 때보다도 화사하게 꾸민 브리트니가 사뿐사뿐 안으로 들어왔다. ...

브리트니는 눈부신 금발을 살짝 묶어 몇 가닥 흘러내리게 하고, 어깨가 드러나지만 야하다기보다는 기품 있어 보이는 분홍 드레스를 입었다. ...

작은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 덕분에 가느다란 목선이 돋보였다. ...

브리트니는 인형처럼 예뻤다. ...

브리트니가 케이를 향해 치마를 살짝 잡고 무릎을 살며시 굽혀 인사했다. ...

“오랜만이에요, 그린 백작님.” ...

“그렇군요.” ...

“지난 파티 때 이후로 처음 뵙네요.” ...

“그렇군요.” ...

글로번은 흘끔 케이의 표정을 살폈다. ...

하지만 케이의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

“이, 일단 앉아라, 브린.” ...

“네, 아버지.” ...

브리트니가 글로번의 옆에 살포시 앉았다. ...

여전히 케이의 눈빛은 서늘했다. ...

“그, 그러고 보니, 지난 파티 때 우리 브리트니에게 춤을 청하셨다고……. 참으로 아름다운 한 쌍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린 백작님.” ...

“호오.” ...

케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

“그래요? 누가 그러던가요?” ...

“예? 아, 그게…….” ...

당연히 브리트니에게 들었다. ...

“그때, 저랑 춤추셨잖아요, 백작님. 기억 안 나세요?” ...

브리트니가 해맑게 물었다. ...

그런 브리트니를 보며 케이가 무심히 말했다. ...

“브리트니 양은 머리가 매우 나쁘신가 봅니다.” ...

“예?” ...

“그때 춤을 청한 것은 내가 아니라 브리트니 양이었는데요. 제발 한 번만 춤을 춰달라고 간절히 청하셨지요. 아, 마지막에 부디, 라는 말도 덧붙였던가요.” ...

브리트니의 얼굴이 빨개졌다. ...

브리트니의 성격상 이럴 때 빽 고함이라도 쳐야 하는데, 상대가 그린 가의 백작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

브리트니는 치마를 꽉 움켜쥐고 헐떡거렸다. ...

이럴 때 아버지가 나서주면 좋겠는데, 글로번은 안절부절못하며 케이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 ...

똑똑- ...

무겁고 민망한 공기를 깨고,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

이쪽에서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문이 열렸다. ...

문 뒤에 서 있는 건 리시였다. ...

“아이리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

화 풀 곳이 생겼다. ...

리시를 데리고 나가는 척 이 방을 나가서 리시에게 화풀이를 해야겠다. ...

그런 생각으로 브리트니가 벌떡 일어났는데, 그보다 먼저 일어난 케이가 아이리스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허름한 원피스를 입은 리시는,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고 케이가 자신의 앞까지 걸어오는 걸 지켜봤다. ...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 ...

리시의 앞에 멈춘 케이가 배에 손바닥을 얹고,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

“처음 뵙습니다, 아이리스 양. 그리고 간절히 청합니다. 저와 결혼해주십시오, 부디.” ...

(4) 짐승입니다. ...

브리트니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믿을 수 없었다. ...

‘이건 꿈이야. 그래, 이건 꿈일 거야. 현실이라면 그린 백작이 저 초라한 계집애한테 청혼할 리가 없잖아! 거기다…… 저 멍청한 계집애가 저렇게 당당하게 청혼을 받고 있을 리도 없고.’ ...

케이의 갑작스러운 청혼에도 리시는 당황하지 않았다. ...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오만한 눈으로 케이의 머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

“고개를 드세요, 백작님.” ...

“아이리스 양이 제 청혼을 받아주실 때까지, 이 머리는 이곳에 있을 겁니다.” ...

“제가 받아주지 않으면 평생 그리 계실 건가요?” ...

“이 자세로 석상이 되겠지요.” ...

리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

‘저게 뭔 짓이야? 남들 보는 앞에서? 왜 저래!’ ...

브리트니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

원래대로라면 리시의 자리에 자신이 있어야만 했다. ...

그런데 왜 저 계집애가 저 자리에서 케이와 농을 주고받는 걸까? ...

“그린 백작님이 이렇다 하시는데…….” ...

리시의 보라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움직여 글로번에게 닿았다. ...

“어찌해야 할까요, 아버지.” ...

브리트니도 휙 고개를 돌려 글로번을 쳐다봤다. ...

브리트니는 글로번이 화를 내며 리시를 쫓아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흠, 흠. 그…… 흠흠. 그린 백작님이 그렇게까지 네가 마음에 드신다는데, 받아드리는 게 어떻겠느냐?.” ...

“그게 무슨……!” ...

브리트니가 벌떡 일어났다. ...

글로번이 브리트니의 손목을 잡고 엄한 시선을 보냈다. ...

“넌 그만 나가라, 브리트니.” ...

“하지만 아버지. 저는…….” ...

저는, 다음에 뭐라고 해야 할까? ...

제가 갖고 싶었던 남자를, 모두가 탐내는 저 남자를 아이리스 따위에게 주고 싶지 않다고? ...

내가 저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

아이리스는 알포드 같은 기름진 늙은이와 결혼하는 게 어울린다고? ...

한 가닥 남은 이성으로 케이의 앞에서 추태를 부리지 않을 수 있었다. ...

“브리트니, 그만 나가.” ...

글로번이 단호하게 말했다. ...

브리트니는 글로번을 향해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을 던졌지만, 글로번은 브리트니의 시선을 피했다. ...

브리트니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

여기 남아 있어 봐야 브리트니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브리트니는 빠르게 방을 나가다가 케이를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

“후회할 거예요, 그린 백작님.” ...

“글쎄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

“흥.” ...

브리트니가 나간 후, 글로번이 말했다. ...

“그린 백작님. 아이리스와의 결혼을 허락하겠으니, 어서 이리 와서 앉으시지요.” ...

“아직 레이디 아이리스의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

“아이리스, 뭐 하느냐, 얼른 대답하지 않고.” ...

“네, 아버지. 그린 백작님, 청혼을 받아들이겠습니다.” ...

그제야 케이가 허리를 폈다. ...

“아이리스, 나는 백작님과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너는 나가보도록 해라.” ...

글로번이 상냥하게 말했다. ...

“아니요, 공작님. 저는 아이리스 양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 ...

케이가 반대했다. ...

“예?” ...

“앞으로 모든 것을 함께할 부부인데, 지금부터 함께해야지요.” ...

“아…….” ...

글로번은 당혹스러웠다. ...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가 정말 그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이 맞는 걸까? ...

글로번이 아는 케이브란트 그린은 여자에게 상냥한 사내가 아니었다. ...

“저와 함께 계시겠습니까, 레이디 아이리스?” ...

케이의 청에 리시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

케이가 리시를 향해 팔을 올리자, 리시가 그 팔에 살며시 제 손을 걸쳤다. ...

둘은 오랜 연애를 한 것처럼 친밀한 모습으로 소파에 와서 나란히 앉았다. ...

“이제 금광에 관해 이야기하도록 하죠, 공작님.” ...

의심스러운 눈으로 케이를 지켜보던 글로번은 금광 이야기에 눈빛을 바꿨다. ...

그래, 금광. ...

그것만 얻을 수 있다면 케이의 상태가 어떻든 아무래도 좋았다. ...

“이 계약서에 사인하면 금광은 위틀로 공작님의 것입니다.” ...

케이가 서류를 펼쳤다. ...

“그리고 여기에 계신 아이리스 양은 제 것이 되는 거고요.” ...

“그, 그렇죠.” ...

글로번이 성급히 깃펜을 들고 서류를 끌어오려 하는데, 케이가 서류를 슬쩍 뒤로 물렸다. ...

“난 오늘 아이리스 양과 함께 내 영지로 돌아갈 겁니다.” ...

“예? 오늘 당장이요?” ...

“네.” ...

“하지만 결혼을 준비해야 하고…… 우리 아이리스한테 가르칠 것도 많아서…….” ...

“아이리스 양이 생각보다 훨씬 곱고 고운 분이라서, 공작님이 갑자기 생각이 바뀌어 딸을 주지 않겠다고 할까 봐 걱정입니다.” ...

“아니요,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백작님.” ...

“그리고 이렇게 손을 잡으니…….” ...

케이가 제 팔에 걸쳐진 리시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포갰다. ...

“놓고 싶지 않군요.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공작님.” ...

글로번의 눈이 흔들렸다. ...

원래 오늘 알포드가 오면 아이리스를 보낼 생각이긴 했다. ...

아직도 그린 백작의 아내 자리에 브리트니를 앉히고 싶은 마음이 있긴 했지만. ...

‘아니, 아이리스를 보내도 상관없겠지. 어차피 저 애는 내 말이라면 고분고분 다 들을 거고, 그린 백작이 저토록 저 애한테 빠졌으니 잘 이용할 수 있을 거야.’ ...

글로번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요, 그럼 그리하시지요.” ...

+++

알포드는 위틀로 공작가의 꽃 아이리스를 만나러 가는 길에, 복면을 쓴 수상쩍은 이들에게 습격을 당했다. ...

겁많은 알포드는 평소에도 큰돈을 치르고 강한 용병들을 고용해서 다니곤 했다. ...

용병 길드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용병을 전부 고용했는데, 그들은 복면인 세 명을 당해내지 못했다. ...

벌써 몇 시간째 마차에 갇혀 있던 알포드는, 마차의 작은 창문으로 슬쩍 밖을 내다봤다. ...

복면인은 두 명이었는데, 지금 보니 한 명이 더 추가됐다. ...

“볼일은 끝나셨대?” ...

귀를 기울이자 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

“어. 보내.” ...

복면인 한 명이 마차로 저벅저벅 다가와서, 알포드는 얼른 의자에 쓰러져 기절한 척했다. ...

벌컥-! ...

복면인이 마차 문을 거칠게 열고, 검집으로 알포드의 허벅지를 쿡 찔렀다. ...

“으아아아악!” ...

검에 다리를 찔린 줄 알고, 알포드가 비명을 질렀다. ...

“왜 그래?” ...

소란을 듣고 다른 복면인이 다가왔다. ...

“살짝 찔렀는데 이 지랄이잖아. 겁 많은 새끼.” ...

“아, 얼른 가자고.” ...

“알겠어, 알겠어. 야, 우린 갈 테니까 앞으로 착하게 살아라, 착하게. 여자 너무 밝히지 말고.” ...

복면인들이 키득거리며 떠나고도 한참 후까지 알포드는 마차 안에 틀어박혀서 덜덜 떨고 있었다. ...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도망치듯 위틀로 공작저에 도착한 알포드는, 아이리스가 이미 다른 남자의 부인이 되었다는, 경악할 만한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

+++

마차에 타자마자 리시는 케이의 팔에 걸쳤던 손을 내렸다. ...

케이는 리시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잘해주었다. ...

케이가 리시에게 청혼하는 순간, 구겨지는 브리트니의 얼굴을 아주 즐겁게 감상했다. ...

인형처럼 예쁜 얼굴 덕분에 어디에 가도 주인공이었던 브리트니는, 오늘 처음으로 엑스트라의 기분을 느꼈을 터였다. ...

‘이제 시작이야, 브리트니 위틀로.’ ...

지난 삶에서 위틀로 공작가는 리시를 팔아넘긴 대가로 받은 라벤트의 금광을 기반으로 삼아, 승승장구하게 된다. ...

리시가 죽지 못해 처절한 삶을 이어가고 있을 때, 브리트니는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죽을 때까지 리시를 괴롭혔다. ...

‘이번에는 네 손에 쥘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거야.’ ...

 

+++

그린 백작 저에 도착할 때까지, 케이는 말이 없었다. ...

리시 역시 생각할 것이 많았기에, 마차 안에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이 고마웠다. ...

“레이디 위틀로.” ...

그의 음성에 정신을 차렸을 때, 리시는 그의 방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

등진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 때문에 그림자가 져서, 케이는 마치 거대한 짐승처럼 보였다. ...

“리시라고 불러도 돼요.” ...

“좋아요, 리시. 당신도 날 케이라 불러도 좋습니다.” ...

“알겠어요, 케이.” ...

“오늘부터 당신은 이 방에서 나와 함께 잘 겁니다. 같은 침대에서.” ...

케이의 손이 커다란 침대를 가리켰다. ...

“알겠어요.” ...

“그게 끝입니까?” ...

“뭐가 더 필요하죠?” ...

그가 성큼 다가왔다. ...

역시 그에게서는 숲속 향기가 났다. ...

“같은 침대를 쓴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알 텐데요. 아, 위틀로 공작가의 꽃으로 순진하게 자라서 그런 것은 모르시나?” ...

리시가 피식 웃었다. ...

“난 바보가 아니에요, 케이.” ...

남자와 여자가 동침하는 것이 무엇인지, 리시는 알아도 너무 잘 알았다. ...

어떤 여자들은 그 행위를 참으로 귀하게 여긴다지만, 리시는 그렇지 않았다. ...

지난 삶에서도, 이번 삶에서도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

“다행이군요.” ...

케이의 손바닥이 리시의 목덜미에 닿았다. 뜨거운 체온에 리시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

“멍청한 여자에게 일일이 가르치는 건 취향이 아니라서.” ...

케이가 고개를 숙였다. ...

그의 숨결이 리시의 귓불과 볼을 스치고 내려갔다. ...

“아직 해가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

리시가 중얼거렸다. ...

“아시다시피 짐승 같은 놈이라서.” ...

“아, 짐승이라고 하니 생각났는데…….” ...

리시는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목에 닿아 있는 케이의 얼굴을 밀어냈다. ...

그 담백한 거절에, 케이는 도리어 재미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

“보여줄 수 있나요?” ...

“뭘요?” ...

“짐승.” ...

“후회할 텐데.” ...

“후회 같은 건 안 해요.” ...

“그래요. 금광씩이나 주고 데려온 부인이 보여달라 하시는데, 보여드려야지. 저쪽으로 물러나요.” ...

리시는 뒷걸음질을 쳐서 구석으로 향했다. 앞으로 눈앞에 펼쳐질 광경에 대한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었다. ...

해를 등진 케이의 그림자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등이 구부정하게 변하고, 조각 같던 얼굴이 형태를 바꿨다. ...

투둑- ...

옷이 뜯기는 소리가 들렸다. ...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케이가 있던 그 자리에 거대한 검은 늑대가 얌전히 앉아 있었다. ...

앉아 있는데도 리시의 키만큼이나 커다란 늑대였다. ...

늑대는 리시가 겁먹을까 걱정이라는 듯, 훈련을 잘 받은 개처럼 앉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

죽음의 어둠을 유영할 때, 리시는 이 늑대의 마지막을 목도했다. ...

배신당한 큰 짐승은, 마지막까지 처절하게 몸부림치다가 끔찍하게 죽었다. ...

리시는 천천히 늑대를 향해 다가갔다. ...

전에 봤을 때는 몰랐는데, 늑대의 눈썹이 있는 부분에는 은빛 털이 나 있었다. ...

리시가 조심스럽게 늑대의 주둥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

늑대도 느리게 리시의 손바닥에 자신의 주둥이를 비볐다. ...

“크군요.” ...

“무섭지 않습니까?” ...

늑대로 변한 케이의 목소리는, 인간일 때보다 낮고 굵었다. ...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울림이 섞여 있었다. ...

“귀엽네요. 특히 이 동그란 눈썹이.” ...

케이의 콧등에 주름이 생기며 길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

화가 난 게 아니라 웃는 것 같았다. ...

“당신은 겁이 없군요.” ...

“무서울 게 없거든요.” ...

어차피 한 번 죽어 봐서. ...

케이가 귀를 쫑긋하더니 갑자기 스륵, 하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

인간의 모습을 되찾은 케이의 모습에, 리시의 눈이 커졌다. ...

얼어붙은 리시를 내려다보며, 케이가 씩 웃었다. ...

“말했잖아요, 후회할 거라고.” ...

옷이 뜯기는 소리가 났을 때 예상했어야 했다. ...

늑대로 변할 때 뜯겨나간 그의 옷이, 인간으로 돌아온다고 해서 복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

(5) 먹고 싶은 당신. ...

수인. ...

‘짐승의 저주를 받은 인간’이라고 불리지만, 사실 수인이 왜 태어나는지에 관한 정확한 정보는 없었다. ...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수인이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수인과 수인 사이에서 수인이 태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

어디까지나 랜덤이었다. ...

보통 성인이 될 때쯤인 18살쯤에 변신을 하게 되며 본인이 수인이라는 걸 알게 되는데, 수인이 오래 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

변신하자마자 관청에 신고가 들어가고,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

오래전에는 수인도 인간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고 한다. ...

오히려 수인이라는 게 하나의 재능으로 인정받아, 마법사와 같은 대우를 받았던 적도 있다고 한다. ...

몇백 년 전 신성국이 수인을 ‘악마의 자식’이라고 칭하며 수인 말살 전쟁을 일으킨 후, 사람들의 머릿속에 수인은 ‘악마의 자식’ 혹은 ‘짐승의 저주를 받은 인간’으로 각인되었다. ...

수인은 차별받을 뿐 아니라, 살아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

그 신성국의 가호를 받는 그린 가문의 케이브란트가 수인이라는 아이러니한 진실은, 케이의 가족들만 알고 있었다. ...

지금까지는 그랬다. ...

케이는 자신을 보며 얼어붙은 자그마하고 하얀 여인을 즐거운 기분으로 응시했다. ...

무슨 일이 벌어져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을 것 같았던 리시가, 경악한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굳어 있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

이윽고 리시의 하얀 볼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

리시는 자신이 놀랐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은 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

리시는 평소처럼 고고한 표정으로 돌아갔지만, 얼굴은 여전히 새빨갰다. ...

“……당황스럽군요.” ...

리시가 중얼거렸다. ...

케이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내려다봤다. ...

“무엇이?” ...

“이…… 상황이요.” ...

“그런 편이지요. 마음에 듭니까?” ...

“마음에 들어야 하나요?” ...

“앞으로 당신이 매일 봐야 할 몸이니까.” ...

“매일…….” ...

리시가 꼴깍, 침을 삼켰다. 이제는 리시의 목덜미까지 빨갰다. ...

이 여자는 알까? 자기가 지금 얼마나 새빨개졌는지? ...

모르겠지. 그러니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고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겠지. ...

케이는 점점 리시가 마음에 들었다. ...

“짐승 같군요.” ...

“같은 게 아니라…….” ...

케이가 성큼 다가가자, 리시가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

곧 정신을 차린 듯, 리시가 다시 고개를 들고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

하지만 케이는 리시가 숨도 쉬지 않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짐승입니다, 리시.” ...

“아…… 그렇군요. 일단 옷을 좀…….” ...

“입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리시? 난 이대로 당신과 침대에 들어갈 예정인데.” ...

자수정 같은 리시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

그걸 보자 케이는 점점 더 리시를 놀리고 싶어졌다. ...

“침대가 싫다면 이 자리에서도 좋고.” ...

케이가 리시의 목덜미를 향해 허리를 굽히자, 리시의 작은 손이 치마를 꽉 움켜쥐는 게 눈에 들어왔다. ...

‘이제 그만 놀려야겠군.’ ...

케이가 그리 생각했을 때. ...

벌컥-! ...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며. ...

“대장! 대장! 형수님 되실 분…… 끄어어억! 뭐, 뭐 하는 거예요, 미쳤나 봐!” ...

월라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케이는 한숨을 삼키며 자세를 바로 했다. ...

“노크.” ...

“아, 맞다.” ...

월라스가 뒷걸음질을 쳐서 방문으로 가더니 손으로 문을 똑똑 두드렸다. ...

“들어가겠습니다, 대장. 끄아아악! 대장, 왜 그러고 있어요?” ...

“대장이 왜?” ...

굵직한 음성과 함께 나단이 들어왔다. ...

“헐…… 대장, 왜…… 헐…….” ...

뒷걸음질 치는 나단을 밀어내고 들어온 유진이, 묵묵히 옷장으로 가서 검은색 가운을 꺼내와 케이에게 건넸다. ...

케이가 가운을 입는 걸 보며, 유진이 말했다. ...

“시키신 일은 잘 끝냈습니다. 그리고 대장. 레이디 앞에서 첫날부터 이런 모습을 보이시는 건 실례되는 행동입니다. 자제하십시오.” ...

유진이 리시를 돌아봤다. ...

“레이디 아이리스. 대장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

“알겠습니다.” ...

어느새 리시의 얼굴에서 붉은 기가 사라졌다. ...

케이는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냉랭할 정도로 고고한 리시도 좋지만, 얼굴이 빨개져서 허둥거리는 리시도 상당히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

“저기, 형수님. 오늘부터 저희 형수님이 된 거 맞죠?” ...

월라스가 리시를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리시는 험상궂은 외모에 커다란 덩치를 가진 월라스를 겁 없이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리시라고 불러도 돼요.” ...

“아니, 아니. 제가 어떻게 감히 대장의 부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겠습니까. 우리 대장이 결혼할 줄은 정말 몰랐는데…… 크흡. 형수님. 잘 부탁드려요. 저희 대장, 부족한 게 정말 산더미처럼 많지만, 버리지 말고 오래오래 아껴주십쇼.” ...

월라스는 눈물도 훔치고, 리시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고 위아래로 흔들기도 하느라 바빴다. ...

“야, 레이디 손을 그렇게 함부로 붙잡으면 어떡해? 하여간 예의라고는 쥐뿔도 없는 자식이…… 저리 가봐.” ...

나단이 윌라스를 밀어내고 리시의 앞에 섰다. ...

나단은 차려 자세를 취하고 절도 있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

“잘 부탁드립니다, 형수님! 나단이라고 합니다.” ...

“나도 잘 부탁해요.” ...

“형수님, 지내시다가 부족한 게 있으면 이 나단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주무시다가도 뭔가 필요한 게 있으시다 싶으면, 그저 저기에 있는 종을 울리시면 됩니다.” ...

리시는 조금 놀라웠다. ...

케이가 수인이라는 비밀을 안다는 걸 빌미 삼아, 협박하듯 그와 정략결혼을 하기로 했다. ...

이 저택에서 리시를 환영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줄 알았다. ...

그런데 이렇게나 환대해주다니. ...

이 새로운 인생이, 예상보다 좀 더 즐거워질 것 같았다. ...

+++

브리트니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

“바로 데려갔다고요?” ...

“그래, 내 생각이 바뀌어서 걔를 안 보낼까 봐 걱정된다고 하더라.” ...

“말도 안 돼. 그린 백작이 정말 그런 말을 했다고요?” ...

“그렇다니까. 아이리스한테 아주 푹 빠진 모양이야.” ...

“아니, 진짜 말도 안 되잖아요. 그린 백작이 왜 그런 애한테…… 아니, 아니. 진짜 아니야.” ...

브리트니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

“아빠. 어떻게 좀 해봐요. 난 걔가 그린 백작이랑 결혼하는 거 정말 싫단 말이에요. 그린 백작이 얼마나 인기가 많은 줄 아세요? 걔가 그린 백작 부인이라면서 그린 백작이랑 팔짱 끼고 나타나는 꼴은 죽어도 못 보겠어요.” ...

“그 정도는 그냥 둬라. 걔가 아무리 그린 가로 갔어도, 우리 위틀로 가에 연이 있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거야.” ...

“아, 도움은 무슨……. 그런 거 다 필요 없다고!” ...

“필요 없긴. 걜 팔아치운 덕에 오늘 뭘 얻었는지나 알아? 베노트의 금광을 얻었다고, 그 큰 금광을!” ...

“아, 금광이 뭔 소용이에요.” ...

“금광뿐인 줄 알아? 그린 백작, 그 멍청이가 하둔 지역까지 사 갔다고.” ...

“하둔 지역을요? 거기 뭐 없지 않아요?” ...

“그렇다니까. 그 황무지를 어마어마하게 큰돈을 주고 사 갔어. 아이리스가 보는 앞이라서 돈 자랑 좀 하고 싶었겠지. 여보, 당신이 옳았어. 걜 곱게 키워서 팔아치우길 잘했어.” ...

글로번이 아내인 데니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

찻잔을 응시하던 데니스가 말했다. ...

“그래도 그린 백작 부인 자리는 조금 아깝긴 하네요.” ...

“아까울 거 없어. 황태자님 측근에게 줄을 대놨으니까, 우리 브리트니는 백작 부인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거야.” ...

황태자라는 말이 나오자 브리트니가 눈을 빛냈다. ...

“정말요?” ...

“그렇대도. 그러니까 넌 그린 백작 부인 자리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몸가짐이나 바르게 하고 있어. 여보, 우리 돈 생겼으니까 저택이나 좀 고칠까? 당신, 드레스도 사고 싶다고 했지?” ...

“안 그래도 봐둔 드레스가 있는데…….” ...

글로번과 데니스가 살 것 목록을 작성하는 동안, 브리트니는 황태자를 떠올렸다. ...

케이보다는 못하지만, 황태자도 잘생기긴 잘생겼다. ...

게다가 백작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는 황태자였다. ...

‘내가 황태자비가 되다니……!’ ...

브리트니는 벌써 황태자비가 된 기분이었다. ...

‘그래, 백작 부인 따위 너나 가져. 나는 황태자비가 돼서 매일매일 너랑 그린 백작을 부를 거야. 그리고 네가 보는 앞에서, 그린 백작을 내 걸로 만들어주겠어.’ ...

그러면 리시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

또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마디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겠지. ...

리시에게는 그런 게 어울렸다. ...

‘사랑받는 역할은 내 거잖아, 아이리스. 넌 걸레질할 때가 제일 예뻐.’ ...

 

+++

하녀들이 방으로 가져온 저녁을 먹으며, 케이와 리시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 긴 대화를 나눴다. ...

그러다 보니 어느덧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 ...

“잠옷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어요. 당신이 챙겨올 줄 알고.” ...

케이가 말했다. ...

“그 집에 내 것은 이 옷 한 벌이었거든요. 난 이걸 입고 자도 상관없어요.” ...

“그럴 수는 없지.” ...

케이가 옷장에서 자신의 가운을 하나 꺼내 가져왔다. ...

“오늘은 이거라도 입어요.” ...

“고마워요.” ...

리시가 가운을 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지만, 케이는 가운을 건네주지 않았다. ...

리시가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자, 케이가 말했다. ...

“첫날밤인데 내 아내의 옷 정도는 내가 갈아입혀 주고 싶군요.” ...

“아.” ...

리시는 아까 본 케이의 알몸이 떠올라 얼굴을 붉혔다. ...

사내의 몸 따위에 당황할 일은 없을 줄 알았다. ...

지난 삶, 지독한 꼴을 잔뜩 당하며 굳어진 심장이기에, 어지간한 일로는 뛰지 않을 줄 알았다. ...

하지만 케이의 몸을 보는 순간,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완벽한 육체를 눈에 담는 순간. ...

심장이 뛰었다. ...

그저 눈으로 본 것만으로도 이러한 감정을 느낄 수 있구나, 신기할 만큼 심장이 뛰었다. ...

“그렇게 해요, 그럼.” ...

리시는 애써 담담하게 말하며 제 옷에 손을 가져갔다. ...

리시는 자신의 안온한 삶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결심했다. 사내의 앞에서 옷을 벗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었다. ...

리시의 손이 천천히 움직여 원피스의 끈과 단추를 풀었다. ...

옷을 벗는 내내 케이의 시선은 리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

그럴 리 없는데도, 그의 눈빛이 리시의 전신을 샅샅이 쓰다듬는 느낌이 들었다. ...

원피스를 위로 올려 벗자, 코르셋과 함께 투명하리만큼 흰 피부가 드러났다. ...

맨살에 닿는 공기가 서늘했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

케이가 곧장 가운으로 리시의 몸을 덮어준 덕분이었다. ...

케이의 옷은 무척이나 커서, 리시는 마치 담요를 두른 꼴이 되었다. ...

“작군요.” ...

“네. 당신은 크고요.” ...

케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

즐거움을 담은 그의 눈웃음을 보자, 왜인지 리시도 즐거워졌기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

리시의 미소에 케이가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엄지와 검지로 리시의 작은 턱을 잡아 살며시 당겨 올렸다. ...

케이는 청회색 눈동자로 리시를 응시하며 속삭였다. ...

“웃으니 예쁘군요, 아이리스. 단숨에 삼켜버리고 싶을 만큼.” ...

(6) 안심하고 피어도 돼. ...

깊고 맑은 눈동자에 오롯이 리시만이 담겼다. ...

그의 눈동자 속에서 길을 잃을 것만 같았다. ...

리시의 코끝에 뜨거운 숨이 닿았다. ...

제 숨도 그의 코에 닿을까 봐, 숨을 멈추고 그를 응시했다. ...

심장 부근에서 술렁, 하고 파문이 일었다. 잔잔하게 인 파문이 부드럽게 번져 심장을 자극했다. ...

지난 삶, 리시에게 사내의 눈빛이란 그저 두려움과 역겨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

때문에 리시는 그의 회청빛 눈동자를 마주하며 느끼는 이 묘한 감정이 당혹스러웠다. ...

“하아.” ...

저도 모르게 숨을 내뱉었다. ...

붉고 촉촉한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숨이 가까이에 있는 그의 입술을 간질인 듯, 그의 얇은 입술이 살짝 움직였다. ...

그의 입술이 닿지 않았는데도 온기가 전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 ...

리시는 당장이라도 덮쳐올 것만 같은 그의 핏빛 입술로부터 멀어지고 싶었지만, 곧게 서서 그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

“단숨에 삼키기엔 내가 너무 크지 않나요?” ...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

“그건 두고 봐야겠지요.” ...

나직한 음성과 함께 흘러나온 숨결이 리시의 입술을 스쳤다. ...

리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

이번 삶, 새로운 인생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각오했다. ...

좋은 기회가 되어준 케이브란트 그린과 잠자리에 드는 것 정도는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

풍성한 속눈썹 너머로,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그의 얼굴이 보였다. ...

반듯한 이마와 끝이 살짝 올라간 짙은 눈썹. ...

깊이 자리 잡은 눈은 마치 리시를 시험하는 것처럼 고요히 빛나고 있었다. ...

이윽고 리시는 입을 열었다. ...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

대답이 끝나자마자 그의 굵은 팔이 리시의 잘록한 허리를 감아 끌어당겼다. ...

리시의 육체가 그의 몸에 밀착되었다. ...

얇은 가운 너머로 그의 뜨거운 체온이 전해졌다. ...

그는 리시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

붉은 기가 도는 긴 은발이 침대 위에 꽃처럼 흐트러졌다. ...

리시는 등에는 푹신한 침대를, 배에는 그의 단단한 육체를 느꼈다. ...

리시의 몸을 감싸고 있던 큰 가운이 벌어지면서 둥글고 마른 어깨가 드러났다. ...

그가 고개를 숙여 리시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 ...

마치 낙인처럼 눌리는 뜨거운 입술에, 리시는 움찔 긴장했다. ...

저도 모르게 들어 올린 손목을 케이가 살며시 붙잡았다. ...

커다란 손이 가느다란 손목을 쥐어 리시의 얼굴 옆으로 살짝 내리눌렀다. ...

어깨를 지분거리던 그의 입술이 어깨선을 따라 올라와 목덜미에서 멈췄다. ...

그의 뜨거운 숨이 족쇄처럼 목을 타고 흐르는 순간, 리시는 지난 삶을 떠올렸다. ...

지난 삶, 리시를 짓누르던 알포드의 무게. ...

리시는 비명을 삼켰다. ...

‘견뎌야 해.’ ...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도로 번쩍 떴다. ...

이 상황을 오롯이 받아들여야만 한다. ...

눈을 감고 피해버리는 건, 지난 삶의 멍청하고 유약한 아이리스 후치스로 족하다. ...

이번 삶의 아이리스 그린은 그 어떤 두려움 앞에서도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

그렇기에 리시는 공포를 억누르고 이를 악문 채 천장을 노려봤다. ...

목덜미를 뜨겁게 스치던 그의 숨결이 멀어진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

“목석같은 여자로군요, 리시.” ...

그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을 때에야, 리시는 눈동자를 움직일 수 있었다. ...

리시의 목 부근에 있었던 그의 얼굴이 어느새 리시의 얼굴과 같은 위치까지 올라와 있었다. ...

“침대 위에서 여인이 목석이 될지, 꽃잎을 펼치는 꽃이 될지는 사내에게 달린 일이 아니겠어요?” ...

케이는 가만히 리시를 내려다봤다. ...

어쩌면 케이가 화났을지도 모르겠다. 침대 위에서 사내를 탓하는 건, 그의 자존심을 완전히 뭉개버리는 일이니까. ...

하지만 리시는 자신의 말을 번복할 생각이 없었다. ...

이걸로 자존심 상한 케이가 보일 행동은 둘 중 하나였다. ...

홧김에 리시를 강제로 취하거나, 자존심이 상해서 두 번 다시는 리시를 건드리지 않거나. ...

둘 중 어느 것이라도 상관없었다. ...

케이가 엄지로 리시의 눈가를 살며시 쓸었다. ...

그 손길이 다정해서, 리시는 조금 놀랐다. ...

화났을 줄 알았는데. ...

침대 위에 흐트러진 리시의 머리를 조심스레 정리해준 케이는, 조용히 리시의 옆에 누웠다. ...

리시는 케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이걸로 끝인가요?” ...

리시의 질문에 케이가 머리를 돌려 리시를 마주 봤다. ...

“나는 뜨거울 때 먹는 걸 좋아해서.” ...

“어머, 까다롭기도 하셔라. 그런데 어쩌죠? 나는 쉽게 뜨거워지지 않는데.” ...

“글쎄요.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요, 리시.” ...

여상히 들려오는 그의 음성이 듣기 좋았다. ...

어깨에서 긴장이 빠져나갔다. 눈을 감자마자 고단함이 몰려왔다. ...

오늘 하루, 많은 일이 있었다. ...

그가 리시의 가운을 잘 여며주는 느낌이 있었지만, 손을 움직이기도 힘들 만큼 묵직한 수마가 덮쳐왔다. ...

“자요, 리시.” ...

까무룩 잠에 빠져드는데,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

“좋은 꿈을 꿀 겁니다.” ...

글쎄, 과연 그럴까? ...

리시는 좋은 꿈을 꾼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

그래도 잠들기 전에 듣는 그의 목소리가 다정해서 좋다고, 리시는 생각했다. ...

+++

리시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케이는 조용히 침대를 빠져나왔다. ...

선대 그린 백작이 케이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고 은퇴한 후, 가문을 이끌어야 하는 케이에게는 할 일이 많았다. ...

당연히 여자에게 신경 쓸 시간조차 없었고 앞으로도 쭉 그러리라 생각했다. ...

그런데……. ...

‘신기한 여자야.’ ...

케이는 침대 옆에 서서 잠시 리시를 내려다봤다. ...

위틀로 가문의 꽃 아이리스에 대한 소문은, 여자에 관심 없는 케이의 귀에 들어올 정도였다. ...

위틀로 공작 가의 아이리스는 너무도 곱고 아름다워, 위틀로 공작이 애지중지 키워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더라. ...

아이리스의 손가락 끝에 작은 상처만 나도, 위틀로 공작이 눈물을 글썽인다더라. ...

하지만 다른 소문도 있었다. ...

위틀로 공작 가의 아이리스는 사실 하녀가 낳은 아이라더라. ...

아이리스는 위틀로 공작 가에서 하녀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다더라. ...

그런 소문은 미미해서, 남을 깎아내리기 좋아하는 자들이 흘린 헛소문으로 치부되었다. ...

‘이제 보니 그 헛소문이 사실은 헛소문이 아니었나 보군.’ ...

리시는 묘한 여자였다. ...

오만하고 강한 듯한데,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 연약해 보이기도 했다. 때로는 그녀의 말대로 지옥의 불길 속에서 아등바등 살아남은 잡초 같은 눈빛을 짓기도 했다. ...

곱게 자란 귀족의 영애는 결코 가질 수 없는 무언가가, 리시에게는 있었다. 평범한 여자와는 다른, 그런 점들이 자꾸 케이의 마음을 잡아챘다. ...

그녀를 안으면 어떤 느낌일지,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고 싶어서, 리시를 침대에 눕혔다. ...

리시는 케이의 예상과 다른 반응을 보였다. ...

그녀는 여전히 고고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타인의 감정에 민감한 케이는 그녀가 겁에 질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무엇이 당신을 무섭게 하는 거지, 아이리스?” ...

케이는 이불을 끌어 올려 리시에게 덮어줬다. ...

“설마 위틀로 공작이 당신에게 몹쓸 짓을 한 건 아니겠지?” ...

욕심 가득한 글로번 위틀로 공작의 얼굴이 떠올랐다. ...

“만약 그런 거라면 내가 그놈에게 지옥을 보여주지.” ...

리시를 위해 그렇게까지 해줄 의리는 없었다. 리시는 케이의 약점을 잡고 케이에게 거래를 해온, 동맹 관계일 뿐이었다. ...

이 결혼 역시 서로의 이익을 위한 결혼일 뿐. ...

그러나 케이는 리시가 마음에 들었다. ...

리시의 전신에 흐르는 오만한 강함도, 때때로 새어 나오는 애절한 약함도. ...

그녀 자신도 모르게 내보이는 수줍음과 가끔 보여주는 즐거운 듯한 미소도. ...

애정의 형태가 꼭 남녀 사이의 애정만 있는 건 아니다. 동맹 관계에서 생기는 애정도 있다. ...

리시와 정략결혼을 했다고 해서, 그녀를 함부로 대할 생각은 없었다. ...

이 결혼의 이유가 무엇이든, 리시는 그린 백작 부인이다. ...

“이제 당신은 그린 가문의 꽃이야, 아이리스. 그러니…….” ...

안심하고 피어도 돼. ...

그린 가문의 모든 것이 당신을 위해 움직일 테니까. ...

케이가 방에서 나와 복도를 걷는데, 누군가 케이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

케이의 시중을 드는 시녀, 질레트 메르디였다. ...

질레트는 메르디 자작의 딸로, 3년 전부터 케이의 시녀가 되어 시중을 들고 있었다. ...

“백작님. 차를 올릴까요?” ...

“아니. 필요 없으니 쉬어라.” ...

케이가 냉랭하게 말하고 서재로 걸어갔다. ...

서재에서는 케이의 부하들이 케이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

질레트가 케이의 뒤를 따라 걸었다. ...

케이는 걸음을 멈추고 질레트를 돌아봤다. ...

“내게 할 말이 있나?” ...

“네, 저기…….” ...

질레트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케이를 바라봤다. ...

“정말로…… 결혼하시는 건가요?” ...

“결혼하는 게 아니라 이미 했지.” ...

“식은…….” ...

“그런 게 필요한가?” ...

“아…….” ...

왜인지 질레트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

“정략결혼인 거군요. 안 그래도 너무 갑작스러워서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

“할 말은 그게 다인가?” ...

“저기…… 부인께서는 위틀로 가문의…….” ...

“내 결혼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거라면 그만두지.” ...

케이는 차갑게 말하고 몸을 휙 돌려 서재로 걸어갔다. ...

질레트는 더 이상 케이의 뒤를 따라가지 않았다. ...

질레트는 케이의 듬직한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응시하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

케이브란트 그린. ...

어릴 때 그를 처음 본 이후로 쭉 흠모해왔다. 질레트는 아빠를 졸라 케이의 시중을 드는 시녀로 그린 백작 가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

미혼인 귀족의 시중을 들던 시녀가 눈에 띄어 연애하다가 결혼까지 하는 일이 왕왕 있었다. ...

질레트는 케이가 언젠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질레트는 어릴 때부터 예쁘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청혼을 해오는 남자들도 심심치 않게 있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케이의 옆에서 수족처럼 시중을 든 지도 3년. ...

케이는 질레트에게 조금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

그렇다고 다른 여자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기에, 그저 바빠서 아직은 여유가 없는 것뿐이라고, 언젠가는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할 거라고 믿었다. ...

그런데 갑자기 케이가 위틀로 공작 가의 꽃 아이리스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

엘프와 견줄 정도로 아름답다는 소문이 도는 아이리스. ...

수많은 사내가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서 안달복달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케이가 그런 사내 중 한 명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

‘하지만 아니었어. 정략결혼일 뿐인 거야.’ ...

그 증거로 케이는 결혼식조차 올리지 않았다. ...

아무리 정략결혼이라도 결혼식만큼은 성대하게 여는데, 케이는 아이리스를 위해 그 정도도 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

케이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드리웠던 먹구름이 가셨다. ...

질레트는 빙그레 웃으며 몸을 돌렸다. ...

(7) 평생 단 하나 ...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리시의 얼굴 위에 자리 잡았다. ...

리시는 눈을 뜨고 낯선 천장을 응시했다. ...

‘여긴 어디지?’ ...

답은 금방 나왔다. ...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의 침실. ...

이제는 그린 백작 부부의 침실. ...

케이가 누워 있던 자리는 비어 있었지만, 그의 향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

-좋은 꿈을 꿀 겁니다. ...

꿈결처럼 들었던 음성이 떠올랐다. 그 말대로 좋은 꿈을 꾼 것 같다. ...

리시는 느릿하게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로 향했다. ...

커튼을 치자마자 쨍한 햇살이 두 눈으로 달려들었다. 살짝 찡그린 채 창문을 여니, 더운 기를 품은 바람이 훅 밀려들어 왔다. ...

‘셔벗이 먹고 싶은 날씨네.’ ...

라고 생각하며, 시선을 내리자 그린 저택의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

성유물의 수호자인 그린 가문은 명예가 드높기는 해도, 돈이 많은 가문은 아니었다. 그래서 큰 기대가 없었는데, 넓지는 않아도 잘 관리한, 훌륭한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

리시는 양산을 들고 나가서 정원 중간에 있는 분수 앞 벤치에 앉아 셔벗을 먹는 상상을 했다. ...

지난 삶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었던, 소소하지만 즐거운 일상. ...

심지어 위틀로 가문을 떠나 후치스 자작부인이 된 후에도, 그러한 일상을 즐길 수는 없었다. ...

지난 삶, 아이리스 후치스 자작부인은 그저 알포드를 빛나게 해주는 장신구이자 장난감일 뿐이었다. ...

즐겁지 않았던 지난 삶을 떠올리고 있는데, 남자 두 명이 나란히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

짙은 회색 머리카락에 덩치가 큰 사내가 어제 인사를 나눈 월라스라는 건 알겠는데, 그 옆에 있는 호리호리한 체구의 남자는 처음 본다. ...

어깨까지 내려오는 길이의 금빛 머리칼을 뒤로 묶은 남자였다. ...

그때 리시를 발견한 월라스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크게 흔들더니, 검지로 리시를 가리키며 금발의 남자에게 뭐라고 이야기했다. ...

무심코 고개를 돌린 금발 사내가 리시를 보고는 깜짝 놀라, 월라스의 검지를 잡아 꺾듯이 아래로 내렸다. ...

“아아악! 아프잖아, 제이미!” ...

월라스가 버럭 외치는 소리가 리시의 귀에까지 들렸다. ...

월라스의 흉흉한 기세에도, 제이미라고 불린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리시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

잠시 후, 그 두 사람이 리시의 방문을 노크했다. ...

리시는 자신이 아직 케이의 커다란 가운을 입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

원래 입고 온 옷으로라도 갈아입을까 싶어 방 안을 둘러봤지만, 세탁이라도 보낸 건지 찾을 수가 없었다. ...

어쩔 수 없이 가운을 여미고 방문을 열었다. ...

“형수님, 잘 주무셨습니까?” ...

월라스가 유쾌한 목소리로 물었다. ...

“덕분에요.” ...

리시의 대답에 월라스가 제이미를 돌아봤다. ...

“들었지? 내 덕분이시래. 내 덕분.” ...

제이미는 월라스에게 대꾸도 하지 않고 리시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

이제 보니 제이미는 무척 단정하고 곱상한 생김새였다. ...

하얀 피부에 살짝 내려간 눈매, 그 안에 담긴 새파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

제이미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맺혀 있었다. ...

이윽고 제이미가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입을 열었다. ...

“대장…… 백작님께 미리 이야기를 듣지 못해, 백작 부인께서 오시는 줄도 몰라서 어제는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

“형수님, 얘가요. 자기만 형수님이 오시는 걸 몰랐다고 엄청 삐쳤다니까요. 그래서 밤새도록 대장을 어찌나 괴롭혔는지……. 얘가 이렇게 헤실헤실 웃는 것처럼 보여도 속은 아주 좁아터져서…….” ...

퍼억-! ...

주절주절 떠들어대는 월라스의 명치를, 제이미가 팔꿈치로 세게 찍었다. ...

호리호리해도 힘은 보통이 아닌지, 월라스가 쿨럭, 마른기침을 내뱉으며 뒤로 물러났다. ...

“너, 방금 진짜로 날 죽이려고 한 것 같은데?” ...

월라스가 항의했지만, 이번에도 제이미는 월라스에게 신경 쓰지 않고 리시에게 말했다. ...

“이제야 인사드리는 결례를 용서해주세요, 백작 부인.” ...

“용서라니요. 잘못한 것도 없는걸요. 갑작스러운 결혼이기도 했고요.” ...

“저는 제이미라고 합니다. 이 저택의 집사로, 앞으로 백작 부인께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제게 말씀해주세요.” ...

“그래요. 그럼 우선…… 그 백작 부인이라는 호칭부터 바꿔주겠어요?” ...

“호칭을요?” ...

월라스를 대하는 제이미의 태도를 보면, 제이미 역시 케이와 끈끈한 관계인 듯했다. ...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도 돼요.” ...

“어, 그럼 저도…….” ...

퍼억-! ...

끼어들려는 월라스의 옆구리를, 제이미가 말없이 가격했다. ...

“감히 편하게 이름을 부를 수는 없습니다. 백작 부인이라는 호칭이 부담스러우시다면 아이리스 님이라고 부르도록 하지요.” ...

“그래요.” ...

“또 필요하신 것은 없으신가요?” ...

“옷이 필요해요.” ...

“재단사를 부르도록 하지요.” ...

“아니, 지금 당장 입을 수 있는 옷으로요. 어제 보니, 나단이라는 분이 저랑 체구가 비슷한 것 같던데…….” ...

“나단이 계집애처럼 보이기는 해도 사실 사내놈인데요, 형수님.” ...

월라스가 설명했다. ...

“괜찮아요. 내 집에서 내가 뭘 입든, 누가 뭐라 하겠어요? 편하면 그만이지.” ...

리시의 대답에 월라스가 씩 웃었다. ...

“맞아요, 편하면 그만이죠. 제가 가서 나단 옷을 싹 빼앗아 오겠슴다!” ...

월라스는 리시가 한 벌이면 된다고 말하기도 전에 후다닥 달려가 버렸다. ...

“설마 월라스가 정말로 나단 옷을 다 뺏어오지는 않겠죠?” ...

“다 뺏어 올 거예요, 아이리스 님. 월라스는 한다면 하는 바보라서요.” ...

“나단에게 미안하게 됐네요.” ...

“괜찮아요. 누가 감히 아이리스 님께서 하시는 일에 입을 대겠습니까? 또 필요하신 것은 없나요?” ...

“셔벗이 필요해요. 그리고 양산도.” ...

“준비하지요.” ...

제이미는 왜 그런 것이 필요하냐고 묻지도 않았다. ...

리시가 가만히 제이미를 응시하자, 제이미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

금빛 머리칼 몇 올이 차르르 흘러, 제이미의 고운 얼굴을 가로질렀다. ...

“하실 말씀이라도?” ...

“내가 이 집에서 어디까지 내 멋대로 굴어도 되는 거죠?” ...

제이미가 미소 지었다. ...

“방금 아이리스 님께서 ‘내 집’이라고 하셨지요. 아이리스 님의 집에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는, 아이리스 님이 결정하실 일입니다.” ...

 

+++

월라스는 정말로 나단의 옷을 싸그리 다 가져온 것 같았다. ...

월라스가 나단의 방에 쳐들어가서 옷장을 열고 옷을 챙겨나갈 때, 나단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돼서 웃음이 나왔다. ...

리시는 월라스가 소파 위에 수북하게 쌓아두고 간 옷을 한 벌, 한 벌 확인하며 입을 옷을 골랐다. ...

다리에 착 붙는 검은색 일자 바지에, 소매가 넓은 하얀 셔츠, 그리고 진한 갈색 가죽조끼를 선택했다. ...

지난 삶에서는 한 번도 입어본 적 없는 스타일이었다. ...

나단이 아무리 체구가 작다 해도 남자는 남자였다. ...

그의 옷은 리시가 입기에 조금 컸지만, 그래도 케이의 가운을 걸쳤을 때보다는 나았다. ...

거울 앞에서 제 모습을 확인한 리시는,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방에서 나왔다. ...

제이미가 현관문 앞에서 양산과 셔벗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

리시를 본 제이미의 눈이 커졌다가 즐겁게 가늘어졌다. ...

“근사하십니다, 아이리스 님.” ...

“고마워요.” ...

“정원을 안내해드릴까요?” ...

“아니, 혼자서도 괜찮아요.” ...

리시는 양산과 셔벗이 든 유리그릇을 가지고 정원에 난 자갈길을 걸었다. ...

자갈을 밟을 때마다 자르락, 자르락 울리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

마침내 분수가 있는 중앙에 도착한 리시는, 벤치에 앉아 양산을 펼쳤다. ...

양산으로 햇빛을 가리고 우아하게 셔벗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한 손으로 양산을 들고 한 손에 유리그릇을 들었더니, 스푼을 잡을 손이 없었다. ...

이렇게도 저렇게도 모양이 안 나와서, 결국 양산을 포기했다. ...

얼굴 좀 타면 어때. ...

리시는 양산을 옆에 내려놓고 스푼을 들었다. ...

레몬 과즙과 꿀을 넣은 셔벗은 새콤달콤하고 시원했다. ...

한참 셔벗을 먹고 있는데 머리 위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

누군가가 옆에 놓여 있던 양산을 들어 리시의 머리 위에 씌워준 것이다. ...

고개를 돌리니 케이가 있었다. ...

“제이미를 만났다고 들었어요, 리시.” ...

“예의 바른 사람이더군요.” ...

“으흠?” ...

케이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고 리시의 옆에 앉았다. ...

“아침부터 셔벗인가요?” ...

“더워서요.” ...

“맛있어요?” ...

“먹어볼래요?” ...

리시가 셔벗을 한 스푼 떠서 케이의 입 앞에 내밀었다. ...

케이의 눈이 짓궂게 빛났다. ...

“이렇게 먹는 것보다는…….” ...

케이의 얼굴이 리시의 눈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

“그 예쁜 입술로 먹여줬으면 하는데.” ...

어젯밤이었다면 당황했을 것이다. 어쩌면 깜짝 놀라서 몸을 뒤로 뺐을지도 모르겠다. ...

하지만 리시는 이제 케이의 성격을 파악했다. ...

그래서 얼굴을 붉히고 머리를 뒤로 빼는 대신, 스푼을 떨어뜨리고 그 손으로 케이의 뒤통수를 잡아 끌어당겼다. ...

설마 이럴 줄은 몰라 무방비하던 케이의 머리가, 리시의 작은 힘에 끌려왔다. ...

살짝 떨어져 있던 입술과 입술이 겹쳐진 건 순식간이었다. ...

생각지 못한 상황에 놀란 케이가 굳어 있는 동안, 리시의 입술이 벌어졌다. ...

리시의 입안에 남아 있던 새콤달콤한 액체가 케이의 입안으로 넘어왔다. ...

목적을 달성한 리시가 입술을 떼어낸 후에도, 케이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멈춰 있었다. ...

어제 내내 리시를 놀렸던 케이가 이번에는 반대로 당해서 놀란 걸 보니 즐거웠다. ...

리시는 엄지로 그의 입술을 쓰윽 문질러 닦아주며 말했다. ...

“어떤가요? 맛있나요?” ...

그제야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

“달군요, 리시. 더없이 달아요.” ...

“그거 다행이네요.” ...

리시가 웃으며 바닥에 떨어진 스푼을 집어 들려 했는데 그의 손이 리시의 손 위에 겹쳐졌다. ...

케이는 리시의 손을 살며시 감싸 쥐고 들어 올려, 리시가 자신을 보게 했다. ...

“그 옷은 나단의 옷이군요.” ...

“입을 옷이 없어서요. 하녀들이 입는 옷은 입고 싶지 않고요.” ...

“내 옷을 입어도 됐을 텐데.” ...

“당신 옷은 너무 크거든요.” ...

“당신은 너무 작고.” ...

어젯밤의 대화를 떠올리며 리시가 빙긋 웃었지만, 케이는 웃지 않았다. ...

“내 아내가 다른 사내의 옷을 입은 걸 보는 건, 썩 유쾌하지 않군요.” ...

“어머, 그린 백작님이 질투라는 것도 할 줄은 몰랐는데요.” ...

“나도 몰랐어요, 리시. 그런데 그거 알아요?” ...

그의 입술이 리시의 입술 옆을 스치고 지나가 귓가에 머물렀다. ...

그가 리시의 귓불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

순간, 달콤한 전율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

“늑대는 평생 단 하나의 암컷만을 곁에 둬요, 리시.” ...

발가락 끝까지 퍼진 기묘한 감각에 섞여, 그의 음성이 흘러들어왔다. ...

농밀한 음성이 귓불을 타고 내려와 전신을 쓰다듬는 것만 같았다. ...

“그러니 당신 몸에 체취를 남길 수 있는 수컷도 나 하나여야만 해요.” ...

(8) 고집 세고 욕심 많은 여자. ...

  케이브란트 그린은 냉정하고 서늘한 사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

분노와 절망에 찬 그의 마지막 모습만 제외하면, 리시가 아는 지난 삶의 케이브란트는 북쪽 얼음 지대의 바람 같은 사내였다. ...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리시의 앞에 있는 케이는 여름 햇살보다 뜨거웠다. ...

케이가 갑자기 리시를 번쩍 안아 올렸다. ...

“핫!” ...

그에게 공주님처럼 안긴 리시는, 저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지르며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안긴 게 처음이라, 높은 위치가 무서웠다. ...

“적극적이군요, 리시.” ...

“장난이 많으시네요, 케이. 내려줘요.” ...

“싫어요.” ...

케이는 그렇게 리시를 안은 채 본채를 향해 걸어갔다. ...

“누가 보면 어떡해요.” ...

“내 저택에서 내가 무엇을 하든, 수상하게 여길 사람은 없으니 안심해요, 리시.” ...

“그런 말이 아니라…….” ...

“부끄러워서 그래요?” ...

부끄럽다고 하면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리시는 입을 꾹 다물었다. ...

“창피하고 부끄럽다고 하면 내려줄게요, 리시.” ...

“내 저택에서 내가 무엇을 하든, 창피하고 부끄러울 것이 뭐가 있겠어요?” ...

케이는 즐거운 듯 소리 내서 웃었다. ...

“옳은 말이에요, 리시.” ...

케이는 리시가 이 저택을 ‘내 저택’이라고 한 부분을 지적하지 않았다. ...

그제야 리시의 몸에서 긴장이 풀렸다. ...

케이의 키가 커서 안긴 위치가 높긴 하지만, 그의 가슴은 넓고 두 팔은 단단했다. 케이가 리시를 떨어뜨릴 일은 없을 것이다. ...

케이는 리시를 안은 채로 침실에 들어와, 리시를 소파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소파 위는 아직도 나단의 옷으로 가득했다. ...

“내 가운으로 갈아입어요, 리시. 재단사를 부를 테니, 내일까지는 내 가운을 입고 이 방에 있는 게 좋겠어요.” ...

“케이, 나는……!” ...

“나도 그렇게 할게요.” ...

나는 온실 속 화초가 아니에요. 당신 원하는 대로 날 다룰 생각하지 마요. ...

하려던 말이 케이의 말에 막혔다. ...

“나도 가운을 입고 오늘은 온종일 이 방에 있도록 하죠. 그럼 공평하겠죠?” ...

리시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그를 올려다봤다. ...

“왜 그렇게 봐요?” ...

“의외라서요.” ...

“무엇이?” ...

“우리, 서로의 입장이 있어서 정략결혼을 한 줄 알았는데.” ...

“그 앞에 무엇이 붙든 결혼은 결혼이고, 당신이 내 아내가 되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죠. 사무적인 관계를 원했다면 그 소망은 접어둬요, 리시. 나는 이런 사람이니까.” ...

사실 케이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

케이야말로, 리시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에 놀라워하는 중이었다. ...

평생 단 하나의 암컷이네, 내 체취만 남겨야 하네. ...

이런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

부하들이 들었다면 배를 잡고 웃었을 것이고, 5년 정도 놀림감으로 삼았을 것이다. ...

‘하지만…….’ ...

케이는 약간은 불만스러운 듯, 약간은 즐거운 듯 묘한 표정을 짓고 앉아 있는 리시를 내려다봤다. ...

허리까지 길게 늘어진 은빛 머리카락이 탐스러웠다. 위틀로 공작 가의 꽃이면서도, 사내의 옷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다니는 그녀의 행동거지가 케이를 즐겁게 했다. ...

저 옷이 케이의 옷이라면 더 즐거웠겠지만. ...

‘재미있는 여자야.’ ...

케이는 재미있는 게 좋았다. 리시는 케이가 아주 오랜만에 만난 재미있는 상대였다. 리시의 앞에서 자신답지 않게 변하는 자신이 싫지 않았다. ...

“옷을…… 갈아입을게요.” ...

이윽고 리시가 말했다. ...

“그래요.” ...

“보지 말아요.” ...

“우린 부부인데?” ...

리시가 지그시 케이를 노려봤다. ...

케이는 그 모습마저 귀여워 보였다. ...

“알겠어요, 안 볼게요.” ...

케이가 돌아서자 사락, 사락 옷 벗는 소리가, 남들보다 몇 배는 뛰어난 케이의 청각을 자극했다. ...

묘하게 뜨거운 감각이 아랫배 부근에 뭉쳤다. 케이는 괜히 흠흠, 헛기침해서 옷 벗는 소리를 떨쳐냈다. ...

“다 갈아입었어요.” ...

“그래요.” ...

“당신도 갈아입어요.” ...

“그러죠. 아, 내가 갈아입는 모습은 봐도 돼요.” ...

“안 볼 거예요.” ...

리시가 고집스럽게 말하고 돌아서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

“내 전속 시녀가 필요해요.” ...

케이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리시가 말했다. ...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양질의 교육을 받고, 입이 무거운 사람이면 좋겠어요.” ...

“제이미에게 말해두죠.” ...

“그리고 며칠 후에 아마도 알포드 후치스 자작이 찾아올 거예요.” ...

알포드 후치스 자작? 그게 누구지? ...

뒤늦게 리시와 결혼하려고 했던 남자라는 걸 떠올렸다. ...

“그 남자가 나를?” ...

“혹은 나를.” ...

가운을 다 갈아입은 케이가 돌아섰을 때도, 리시는 여전히 등을 보인 채였다. ...

“난 다 갈아입었어요, 리시.” ...

리시는 케이가 거짓말을 한 줄 알았는지 살짝 고개를 돌려 옷을 제대로 입었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몸을 돌렸다. ...

그녀는 두 손을 허벅지 앞에 가지런히 모으고 있었는데, 정중한 그 자세가 신기하게도 리시가 하면 오만해 보였다. ...

“알포드 후치스가 왜 나를, 혹은 당신을 찾아오는 거죠?” ...

“아마 우리 결혼을 인정 못 한다고, 날 내놓으라고 할 거예요. 어쩌면 날 내놓기 전에는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무례하게 행동할지도 몰라요.” ...

“흐음. 그 남자를 본 적도 없으면서 잘 아는 것 같군요.” ...

“나는 아는 게 많거든요.” ...

리시가 소파를 가리키자, 케이가 무의식적으로 소파에 수북이 쌓인 나단의 옷을 옆으로 밀어내 앉을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

리시는 케이가 그녀를 위해 그런 일을 해주는 게 당연하다는 듯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고 빈자리에 앉았다. ...

“내가 그 남자를 어떻게 해줄까요, 리시? 다시는 당신 눈앞에 띄지 않게 그 목을 따버릴까?” ...

리시가 고요히 미소 지었다. ...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저 그 남자에게서 라벤트의 금광을 양도받도록 해요. 그리고 그 금광을, 내게 결혼 선물로 줘요.” ...

리시는 알포드를 잘 알았다. ...

리시가 케이와 결혼했다고 해도, 알포드는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지금쯤 공작 저택에 머물며, 리시를 데려오라고 무례하게 행동하고 있지 않을까. ...

또한, 리시는 브리트니를 잘 알았다. ...

브리트니는 리시가 그린 백작을 가졌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아마 지금쯤 질투로 잠도 못 자며, 리시와 케이의 사이를 멀어지게 할 간계를 꾸미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으리라. ...

리시는 알포드와 브리트니에 대해 너무도 잘 알기에, 그들의 수준 역시 알고 있었다. ...

알포드는 반드시 이곳으로 찾아올 것이다. ...

“결혼 선물이라…….” ...

케이의 음성이 냉랭했다. 리시는 흔들림 없이 케이를 올려다봤다. ...

“뭔가 오해하는 모양인데, 리시. 내가 당신에게 결혼 선물을 줘야 할 의무는 없어요. 당신은 내가 수인이라는 걸 알리지 않기로 했고, 나는 당신을 위틀로 가에서 데려와 그린 백작 부인으로 만들어주기로 했죠. 그걸로 우리 사이의 계산은 끝났다고 보는데.” ...

“그린 백작은 계산이 정확하지 않네요. 내가 잡은 건 당신 목숨줄인데, 우리의 이 결혼, 한쪽으로 많이 기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리시.” ...

케이가 테이블 너머로 성큼 다가와 리시의 턱을 검지로 들어 올렸다. 그의 회청빛 눈동자에 음산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

“내가 잡은 것 또한 당신의 목숨줄이니까.”   이번에도 리시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목을 뜯어낼 것 같은 살기를, 리시는 조금도 겁내지 않고 흘려보냈다. ...

케이는 리시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었지만 살기를 거두지 않았다. 목을 죄는 이 살기 속에서, 리시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

“옹졸한 남자 같으니…….” ...

리시의 도톰한 입술 사이로 생각지 못한 말이 흘러나오는 바람에, 케이의 살기가 무너졌다. 리시의 입꼬리가 살풋 올라갔다. ...

“그 대단한 그린 백작이 고집 세고 욕심 많은 아내를 위해 라벤트의 금광 하나 선물도 못 해주는 남자라는 건 몰랐네요.” ...

리시가 여상히 중얼거렸다. 케이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날 너무 능력 없는 남자로 만들지 말아요, 리시.” ...

“하는 거 봐서요.” ...

“고집 세고 욕심이 많은 데다가 까다롭기까지 하군요.” ...

“익숙해져야 할 거예요.” ...

케이의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접혔다. 그는 한동안 리시를 빤히 응시하다가 물었다. ...

“라벤트의 금광을 받아서 뭘 하고 싶은 거예요?” ...

“살아보니, 세상은 돈이 많아야 하더군요.” ...

“뭘 얼마나 사셨다고.” ...

“당신이 놀랄 만큼은 살았어요.” ...

리시가 일어나 창문을 향해 걸어갔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리시의 은빛 머리칼이 눈부시게 빛났다. ...

리시가 걸을 때마다 낭창낭창 흔들리는 가운 끝을, 케이는 넋을 놓고 지켜봤다. ...

자그마한 여자가 걸어갈 뿐인데, 세상의 중력이 그녀에게 모인 것처럼 빨려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그린 가문은 무척이나 명예가 드높은 가문이라, 돈이 없어도 모두의 존경을 받죠. 하지만 존경만으로는 부족해요.” ...

리시가 창문 밖으로 시선을 둔 채 말했다. ...

그녀는 햇빛에 둘러싸여, 케이가 잡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

케이는 리시의 곁으로 다가갔다. ...

“리시, 당신은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죠?” ...

“처음에는 무더운 남부. 다음에는 험난한 서부에서 추운 북부, 그리고 마지막에는 풍요로운 동부까지.” ...

리시가 케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전부 내 발아래에 둘 거예요.” ...

케이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

“꿈이 크군요, 리시. 가비자르 제국의 황제들도 그 염원을 이루지 못했어요.” ...

가비자르 제국은 엘레론드 대륙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였다. 가비자르 제국의 역대 황제들은 엘레론드 대륙을 발아래에 두고 싶어서 여러 방법으로 노력해왔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

케이는 위틀로 공작 저택에서 조용히 살아온 리시가 세상을 알지 못해서 터무니없는 꿈을 꾼다고 생각했다. ...

“글쎄요. 라벤트의 금광이 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지갑이 될지, 이 대륙을 내 발아래에 둘 포석이 될지는 두고 봐야겠죠.” ...

리시의 검지가 케이의 가슴을 콕 찔렀다. 케이를 올려다보는 리시의 연한 보라색 눈동자가 조금은 장난스럽게 빛났다. ...

“당신도 배포가 있는 사내라면 내게 투자해봐요.” ...

사실 케이는 라벤트의 금광 따위, 얼마든지 리시에게 선물로 줄 수 있었다. 리시가 그 금광에서 얻은 이익으로 드레스를 사든, 목걸이를 사든, 아무래도 좋았다. ...

다만 리시와 이렇게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게 즐거웠을 뿐이다. ...

케이는 리시가 이 대륙을 발아래 두겠다는 포부를 믿지 않았다. ...

만약 리시가 라벤트의 금광으로 사치를 즐긴다 해도, 오늘의 대화를 거론하며 조금 놀리고 나서, 그래도 괜찮다고 웃어줘야지. ...

그런 생각을 하며 케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어요, 그린 백작 부인. 당신에게 라벤트의 금광을 선물하도록 하죠.” ...

(9) 내 남자의 정부?! ...

“아아악!” ...

브리트니는 들고 있던 찻잔을 집어 던졌다. ...

쨍그랑- ...

시녀들이 화들짝 놀라 깨진 찻잔을 치우는 동안, 브리트니는 씩씩거리며 창문 밖을 노려봤다. ...

며칠 전, 케이가 찾아왔을 때의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

아버지가 황궁 쪽에 줄을 대놨다는 말에 잠깐 기분이 좋긴 했지만, 황태자비가 되고 싶어 하는 여자들이 수십, 수백 명이다. ...

그 경쟁률을 뚫고 황태자비가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

하지만 케이브란트 그린의 아내가 되고 싶어 하는 여자들도 수십, 수백 명이었는데, 리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의 아내가 되어버렸다. ...

그날 느낀 모멸감이 사라지질 않았다. ...

-그렇게 따지자면 너희 아빠도 마찬가지야. ...

리시가 속삭인 말도. ...

응접실에 찾아온 리시가 브리트니를 오시하던 눈동자도. ...

‘아이리스, 그년…… 착하고 고분고분한 척하더니, 사실은 뱀 같은 계집애였어. 그린 백작이 그년의 본성을 알아야 하는데…….’ ...

케이가 브리트니를 조롱했던 일은, 브리트니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브리트니가 기억하는 일은 오직 리시가 보였던, 오만하고 뻔뻔한 행동뿐이었다. ...

‘아이리스, 그 계집애는 항상 내걸 뺏어가. 우리 아빠부터 시작해서…… 라포드…… 그래, 라포드까지.’ ...

브리트니는 자신을 향해 선량하고 따뜻한 미소를 지어줬던, 하늘색 머리칼의 소년을 떠올렸다. ...

브리트니가 처음으로 사랑했던, 다정하고 상냥한 라포드. ...

-미안해, 브린. 나는……. ...

브리트니의 고백을 거절하던 라포드의 시선은, 아이리스를 향해 있었다. ...

창문을 닦던 아이리스가 고개를 돌리다가 라포드와 눈이 마주쳤고, 라포드는 아이리스를 향해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브리트니에게는 보여준 적 없는 종류의 미소였다. ...

아이리스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사내를 홀리는, 헤픈 미소를 지었겠지. ...

라포드 이후에도 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 ...

그렇게 헤프게 살았으면서 성유물의 수호자인 그린 가문에 들어가다니. ...

케이는 아이리스가 얼마나 헤픈 여자인지 모를 것이다. 아이리스는 그린 가문의 명성에 먹칠할 게 분명했다. ...

‘모른다면…….’ ...

브리트니의 눈에 알포드 후치스 자작의 모습이 들어왔다. ...

며칠 전, 어째서인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위틀로 공작 저택에 찾아온 알포드는, 아이리스가 이미 케이브란트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데도, 아이리스를 내놓으라며 공작 저택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

아이리스를 내놓지 못한다면 브리트니라도 내놓으라는 망발까지 해댔다. ...

알포드는 자작에 불과했지만, 후치스 대상단의 주인이기도 했다. 작위보다 재산이 더 가치 있기 시작한 시대이기에, 위틀로 공작도 알포드를 함부로 쫓아내지 못했다. ...

‘가르쳐주면 그만이지.’ ...

브리트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알포드도 쫓아내고, 행복해하고 있을 아이리스에게 찬물을 끼얹을,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계획을 세우자마자 브리트니는 얼른 방에서 나와 알포드에게 달려갔다. ...

알포드는 다디단 초콜릿 쿠키를 먹으며, 옆에 있는 하녀에게 자신이 얼마나 돈이 많은지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었다. ...

“후치스 자작.” ...

“오, 브리트니 양. 알포드라고 불러요.” ...

알포드가 기름진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알포드는 브리트니가 조만간 자신의 아내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

“어찌 그러겠어요. 후치스 자작은 내 사랑하는 동생, 아이리스의 남자인데.” ...

알포드의 얼굴이 구겨졌다. ...

“공작님이 그 아이리스를 그린 백작에게 줘버렸지 않습니까?” ...

“줘버리다니…… 무슨 그런 말씀을…….” ...

“그럼 아닙니까? 약속대로라면 난 이미 아이리스 양을 데리고 내 영지로 돌아갔을 거예요.” ...

“알아요, 알아요. 아이리스도 그럴 수 있기를 얼마나 고대했다고요.” ...

“……그래요?” ...

“그럼요. 케이브란트 그린. 그 작자가 성유물의 수호자인 걸 내세워서 아이리스를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리는 바람에…… 우리 아이리스가…….” ...

브리트니는 그날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물론 슬퍼서가 아니라 화가 치밀었기 때문에 샘솟는 눈물이었다. ...

“그린 백작의 마차에 탄 아이리스가 얼마나 눈물을 흘리던지……. 아직도 그것만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져요.” ...

브리트니의 볼을 타고 또르르 흐르는 눈물에, 알포드가 안됐다는 시선을 보냈다. ...

“하지만…… 하지만 어쩌겠어요? 위틀로 공작님도 어쩌지 못하는 그린 백작에게서, 내가 어떻게 아이리스를 뺏어올 수 있겠어요? 그러니 브리트니 양, 저랑…….” ...

“아이리스가 정말 아름답다는 거, 알아요? 초상화를 보셨을 텐데…….” ...

“그, 그거야 물론…….” ...

“그렇게 예쁜 우리 아이리스가 후치스 자작을 그리워하면서 울었는데……. 그렇지 않니?” ...

옆에 있는 하녀에게 묻자, 하녀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

“마, 맞아요. 아이리스 아가씨께서, 정말 많이 우셨죠.” ...

알포드가 꿀꺽 침을 삼켰다. ...

“저, 저도 원래 아이리스 양과 결혼하기로 했으니, 당연히 아이리스 양과 결혼하면 좋죠. 하지만 방법이 없잖습니까, 방법이…….” ...

“없긴요. 사내가 되어서는…….” ...

“아니, 여기서 제가 사내인 게 왜 튀어나와요?” ...

“후치스 자작, 정말 모르겠어요? 사내들이 왜 우리 아이리스에게 열광했는지…….” ...

“그거야 아름다우시니…….” ...

“물론 그것도 있지만, 우리 아이리스가 때 묻지 않은, 아주 순수한 아이라서 그런 거잖아요. 사내들의 손길도, 입김도 전혀 닿지 않은, 호수 한가운데의 꽃.” ...

알포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

“그야 그렇죠…….” ...

“아마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도 아이리스의 그런 면 때문에 갖고 싶었던 걸 거예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죠?” ...

알포드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자였다. ...

“하지만 그걸 누가 믿어주겠습니까?” ...

“걱정하지 말아요, 후치스 자작. 당신 뒤에는 우리 위틀로 공작 가문이 있고, 우리가 당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진실로 만들어줄 거니까요.” ...

 

+++

그린 백작 저택이 있는 다코트 시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디자이너와 재봉사가 찾아왔다. 리시는 디자이너가 가져온 디자인 북을 펼쳐, 원하는 디자인을 몇 개 골랐다. ...

화려한 드레스 두 벌, 우아한 드레스 한 벌, 원피스 세 벌과 평상복 몇 벌, 그리고 잠옷. 옷감은 가장 비싼 것보다 몇 단계 아래의 것으로 선택했다. 아직은 그린 가문의 돈을 아껴야 할 때였다. ...

“평상복은…… 정말 이걸로 괜찮겠습니까?” ...

디자이너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리시가 선택한 평상복 디자인은 귀부인이 입을 만한 디자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그걸로 괜찮아요.” ...

디자이너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백작님께서 일단 입을 수 있는 드레스를 가져오라 하셔서 몇 벌 가져왔는데 입어보시겠습니까?” ...

“그러죠.” ...

리시는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몇 벌의 드레스를 입어본 후, 당분간 입을 드레스를 몇 벌 선택했다. 디자이너가 가져온 장신구 함에서도 몇 개 골랐다. ...

“안목이 뛰어나시네요.” ...

디자이너의 말에 리시가 미소 지었다. ...

안목이 뛰어날 수밖에. 어쨌든 지난 삶에서는 대상단의 안주인으로 한참을 살았으니. ...

디자이너와 재봉사가 돌아간 후, 리시는 녹색 드레스를 집어 들었다. 가슴 부분은 거의 하얗게 보일 정도로 연한 녹색이지만,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색이 짙어지는 드레스였다. ...

이번에도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서 드레스를 갈아입었다. ...

‘시녀는 언제쯤 오려나?’ ...

하녀들은 귀부인의 드레스를 갈아입혀 주는 일을 해본 적이 없기에, 눈치껏 도와주면서도 허둥거렸다. ...

하녀 중에 머리를 만질 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이번에도 리시는 긴 머리를 흘러내리게 놔뒀다. ...

방 밖으로 나간 리시의 눈에 복도를 걸어오는 여자가 보였다. 갈색 머리카락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였는데 며칠 전부터 눈에 띄었다. ...

그녀는 리시를 보자 언제나처럼 고개만 건성으로 까딱하고는 스쳐 지나갔다. ...

하녀 중에는 새 안주인을 받아들이지 못해 질투하는 하녀가 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

‘거슬리네.’ ...

리시는 아직 백작 가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이 집안의 사람들에게 적응할 시간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저런 태도는 좋지 않다. ...

“백작님, 저 왔어요.” ...

뒤에서 여자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는 케이의 방 앞에 서 있었다. ...

케이와 리시는 침실을 같이 쓰지만, 개인 방은 침실을 사이에 두고 양옆에 따로 있었다. ...

리시도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 케이의 방 앞에서, 여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도 않고 ‘저 왔어요.’라며 문을 열어주길 요청하는 것이다. ...

케이가 들어오라고 했는지, 여자가 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

‘평범한 하녀는 아니었군.’ ...

어쩌면 케이의 정부일지도 모르겠다. ...

귀족이 하녀나 시녀를 자신의 정부로 삼고 저택에 두는 일은 흔하니까. ...

케이도 젊은 남성이니 정부 한둘쯤 가진 건 이해했다. ...

하지만 정부가 저택의 안주인인 리시에게 저런 태도를 보이는 건 잘못됐다. ...

“저 여자는 누구지?” ...

리시의 질문에 하녀가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백작님의…… 전속 시녀인데요.” ...

“이름은?” ...

“질레트 메르디 님이세요. 메르디 자작님의 따님이시라고…….” ...

“자작의 영애라고?” ...

“예.” ...

대답한 하녀도 질레트를 케이의 정부라고 생각하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

‘자작의 딸이 백작의 시녀를 하고 있다니…….’ ...

후작 이상 가문에 그보다 낮은 가문 영애들이 시녀로 들어가는 일은 있지만, 백작 가문에 자작 가문 영애가 시녀로 들어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

‘역시 케이의 정부였군.’ ...

리시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

질레트가 평민이라도 저런 태도는 골치가 아픈데, 자작 가문 영애라면 더 골치 아플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

리시의 목적은 평온하고 고요한 삶이었기에, 누군가 자신의 둥지를 건드리는 걸 원치 않았다. ...

‘눈앞에서 치워야겠어. 아니면 내 앞에서 고개도 못 들게 만들든가.’ ...

케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안주인에게 저런 태도를 보이는 여자를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

“아이리스 님.” ...

제이미의 부름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

“시녀들을 데려왔습니다. 지금 응접실에 있는데, 가서 만나보시겠어요?” ...

“그래요.” ...

응접실로 향하며, 제이미가 말했다. ...

“급하게 구하느라 이번에는 두 명밖에 구하지 못했어요. 대장…… 백작님께서 결혼 사실을 미리 알려주셨더라면 이렇게 허둥거릴 일이 없었을 텐데 말이에요.” ...

아무래도 케이에게 결혼 이야기를 미리 못 들은 것에 대한 서운함이 아직도 안 풀렸나 보다. ...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제이미는 굳이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닌 듯, 계속해서 말했다. ...

“하지만 저는 실력이 좋으니 이런 상황에서도 제대로 일을 해내지요. 백작님이 저 같은 부하를 둔 게 참으로 다행이지요?” ...

“그러게요. 다행이네요.” ...

이번에는 적당히 대답할 수 있었다. ...

제이미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음, 음, 하고 웃는 동안, 응접실 앞에 도착했다. ...

문을 열기 전, 제이미가 안에서 기다리는 두 명의 시녀에 관해 설명했다. ...

루테크 가문의 에르웰과 페르니 가문의 크리시나. ...

루테크도, 페르니도 평민이지만 준 귀족에 대우를 받을 정도로 명성이 있는 가문이었다. ...

응접실 안에 들어가기 전, 리시는 제이미에게 말했다. ...

“이 저택 사람 중, 한 명 더 내 시녀로 두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

“네, 말씀하세요.” ...

“질레트 메르디. 그녀에게 내 방에서 기다리라 일러두세요.” ...

(10) 백작 부인 뜻대로. ...

유명한 학자를 많이 배출한 루테크 가문의 에르웰. ...

예술가 집안으로 명망 높은 페르니 가문의 크리시나. ...

리시는 그 두 사람이 마음에 들었다. ...

에르웰은 리시와 비슷한 또래로, 빨간 머리에 녹색 눈동자, 콧등의 주근깨가 귀여운 아가씨였다. ...

크리시나는 아이가 있는 유부녀로 칠흑처럼 검은 머리칼에 새파란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

에르웰은 그린 저택에서 머물러도 괜찮다고 했고, 크리시나는 아이 때문에 일주일에 두세 번은 집에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

“명망 있는 가문의 영애들인데 이렇게 와줘서 고마워요.” ...

“아닙니다, 백작 부인. 저야말로 이름난 위틀로 공작 가의 꽃을 실제로 뵐 수 있고, 곁에서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이에요.” ...

크리시나의 말에 에르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위틀로 공작 가의 꽃? 헉, 진짜로 그 아이리스였던 거예요?” ...

크리시나가 에르웰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

“엘.” ...

“아! 죄송합니다, 백작 부인. 너무 놀라서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

에르웰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

진짜 그 아이리스냐고 물어볼 때와는 사뭇 다르게 차분해진 목소리였다. ...

“둘은 아는 사이였나 보네요.” ...

“네, 루테크 가문과는 평소 인연이 있어서, 이 아이가 어릴 때부터 쭉 교류를 해왔어요.” ...

에르웰은 입을 꾹 다물고 있고, 크리시나가 대신 대답했다. ...

“에르웰은 말이 없는 편이라서, 혹시 가끔 제가 대신 대답하게 되더라도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어요, 백작 부인.” ...

크리시나가 덧붙인 말이 의아했다. ...

말이 없는 편이라고? ...

리시의 눈에 에르웰은 이런저런 걸 묻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좀이 쑤신 것처럼 보였다. ...

하지만 굳이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았다. ...

첫날이기에 간단한 인사만 나누고 응접실에서 나왔다. 응접실 앞에서 기다리던 제이미가 얼른 리시에게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

“질레트 양은 아이리스 님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

리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이제 시녀가 된 둘에게 방을 안내해주라고 일렀다. ...

자신의 방으로 걸어가는 리시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

+++

제이미는 에르웰과 크리시나에게 방을 안내해준 후, 리시에게서 별도의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방에서 쉬어도 좋다고 했다. ...

제이미가 나가자마자 에르웰이 크리시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

“와, 대박. 개쩐다. 와, 시니. 대박.” ...

“엘…….” ...

“아니, 진짜 개쩔잖아. 와. 위틀로 공작 가의 꽃 아이리스. 과장된 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와, 진짜 예쁘시더라. 깜짝 놀랐네. 나한테 웃어주시는 거 봤어? 와, 진짜. 녹을 뻔. 심장 멈출 뻔.” ...

크리시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

“엘, 제발 말투 좀 바꿔. 벌써 스물다섯이나 된 여자애가 말투가 그게 뭐니? 그러니까 널 데려가겠다는 남자가 안 나타나지.” ...

“아, 됐어. 날 데려가겠다는 남자 없어도 된다니까. 난 고상한 척하면서 사는 건 죽어도 못 하겠어.” ...

에르웰이 소파에 털썩 앉아 테이블에 발을 올리는 모습에, 크리시나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

예쁜 드레스를 입고도 저런 행동거지라니. ...

우아한 백작 부인께서 에르웰의 저런 모습을 봤다가는 기절할지도 몰랐다. ...

“에르웰, 내가 딴 건 몰라도 딱 하나만 부탁할게.” ...

“뭔데?” ...

에르웰이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

“제발 그 드레스 속에 감춰둔 흉측한 암기들, 그것 좀 갖다 버려!” ...

 

+++

리시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소파에 편하게 앉아 있는 질레트를 발견했다. ...

질레트가 마치 이 방의 주인인 것처럼 보였다. ...

리시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질레트는 일어나지 않았다. 고개만 돌려 리시를 빤히 올려다봤을 뿐이다. ...

리시는 별말 없이 걸어가 소파 맞은편에 앉아서 질레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 커다란 눈과 녹색 눈동자. 자그마한 얼굴에 오밀조밀 들어찬 이목구비는 조화로웠다. ...

브리트니와 견줄 만큼 예쁘게 생긴 얼굴이라서, 리시는 질레트가 뭘 믿고 이렇게 오만방자하게 구는지 알 수 있었다. ...

질레트는 처음에 비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리시의 시선을 받아들였지만, 리시가 입을 열지 않자 견디기 힘들어졌는지 손가락을 꼼실거렸다. ...

결국, 침묵을 깬 건 질레트였다. ...

“왜 불렀어요?” ...

“메르디 가문은 돈이 없어 시장 비렁뱅이에게 가정교육을 맡겼나 봅니다.” ...

“예?” ...

질레트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

질레트는 뒤늦게 자신을 비난하는 말이라는 걸 눈치채고 얼굴을 붉혔다. ...

리시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질레트는 리시의 말에 반박하고 싶은 듯했지만, 할말을 찾기 힘들 것이다. 이 저택의 안주인에게 버릇없이 군 건 사실이니까. ...

질레트는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깨물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여유롭게 허벅지 위에 올려져 있던 질레트의 두 손이 하얗게 될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

‘날 한 대 때리고 싶겠지.’ ...

리시는 이미 질레트에 대한 파악을 끝냈다. ...

만약 질레트가 지혜로운 자였다면, 저택의 안주인에게 예를 표하며 뒤에서 살금살금 케이의 마음을 홀렸을 것이다. ...

하지만 질레트는 자신의 감정을 전부 내보이고 있었다. 이런 상대를 다루는 건 쉽다. ...

“그런 말을 하려고 부른 거라면 가겠어요!” ...

이윽고 질레트가 벌떡 일어났다. ...

리시는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한 채 나직하지만 강하게 말했다. ...

“앉아, 질레트 메르디.” ...

질레트가 움찔했다. ...

리시는 여전히 질레트를 올려다보지 않고, 고고하게 앉아 정면을 오시하고 있었다. ...

질레트가 아무리 내 세상처럼 굴었더라도, 리시는 그린 백작 부인이다. ...

‘시녀’의 자격으로 들어온 이 저택에 있는 한, 리시의 말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었다. ...

질레트는 도로 자리에 앉았다. ...

이번에도 리시는 입을 열지 않고, 질레트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

“할 말 있으면 빨리하세요.” ...

“질레트. 그대는 오늘부터 내 시녀예요.” ...

질레트의 눈이 커졌다. ...

“무슨…… 난 백작님의 전속 시녀예요!” ...

“오늘부터는 아니에요. 내 전속 시녀예요.” ...

“하! 말도 안 돼. 나는 당신의 시중을 들려고 이 저택에 들어온 게 아니에요. 내가, 우리 메르디 가문이 백작 부인 시중이나 들 가문인 줄 아세요?” ...

“그렇다면 백작 시중을 들 가문인가요?” ...

“그거랑 그건 다르죠.” ...

“다르지 않아요. 부부는 한 몸이라고들 하니까.” ...

“하지만……! 정략결혼이잖아요. 다 알아요.” ...

리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

“정략결혼이든, 연애결혼이든, 결혼은 결혼이라는 걸 알 만한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

질레트가 이를 악물었다가 말했다. ...

“백작님께서 허락하지 않을걸요.” ...

“글쎄요. 내 생각은 다른데.” ...

질레트가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갔다. ...

리시는 이번에는 그녀를 붙잡지 않고 내버려뒀다. ...

질레트는 신경질적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가슴에 분이 차올라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

‘짜증 나!’ ...

질레트를 아래 것 보듯 내려다보는 리시의 눈동자가 싫었다. ...

흔들림 없는 차분한 태도도, 높낮이 없이 이어지는 말투도, 위틀로 공작 가의 꽃이라는 칭송조차 모자란 것 같은 그 아름다운 외모도, 전부 다 싫었다. ...

‘백작님이 저 여자에게 날 시녀로 보낼 리 없어.’ ...

질레트는 케이의 유일한 전속 시녀였다. 질레트는 이 저택에서 케이의 서재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여성이었다. ...

케이는 자신이 없을 때라면 언제든 편하게 서재에 들어와 책을 읽어도 좋다고 말해줬다. 케이가 서재에 있는 걸 알면서 모르는 척 벌컥 문을 열어도, 케이는 화낸 적이 없었다. ...

‘백작님은 나한테만 관대해. 정략결혼을 했을 뿐인 저 여자랑 나는 달라.’ ...

케이가 질레트를 리시의 전속 시녀로 보내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질레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이번에는 모르는 척 문을 벌컥 열 수 없었다. 케이에게 리시의 만행을 알리려고 찾아온 것이기 때문이다. ...

질레트는 표정을 갈무리하고 크게 심호흡한 후, 서재 문을 노크했다. ...

“누구냐?” ...

“백작님, 저 질레트인데요.” ...

“일하는 중이다.” ...

“긴히 드릴 말씀이…….” ...

“일하는 중이라 했다.” ...

케이의 단호한 거절에, 질레트는 차마 서재 문을 열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

그때, 언제 따라온 건지 리시가 질레트의 옆에 섰다. ...

“케이.” ...

“백작님은 일하는 중이에요.” ...

질레트가 지적하는 것과 동시에 서재 문이 열렸다. ...

질레트에게는 일하는 중이라고 거절했던 케이가, 리시의 부름 한 번에 손수 문을 열어준 것이다. ...

질레트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어서 눈을 홉뜨고 케이를 올려다봤다. ...

케이의 회청빛 눈동자는 이 자리에 질레트가 없는 것처럼 오롯이 리시만을 향해 있었다. ...

케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질레트에게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미소였다. ...

“드레스를 자랑하러 온 건가요, 리시?” ...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케이의 음성은 잔잔하고 달콤했다. 이 또한 질레트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

“그래 보이나요?” ...

“그리 근사한 모습이라면 자랑하고 싶을 것 같아서.” ...

케이가 손을 뻗어 리시의 머리카락 끝을 살짝 손가락에 감았다가 풀었다. ...

“녹색 드레스를 입으니, 마치 수풀 사이에 서 있는 엘프 같군요.” ...

“엘프가 정말 있나요?” ...

“방금 말했잖아요. 내 눈앞에 있다고.” ...

케이와 리시는 이보다 더 재미있는 농담은 없을 거라는 듯,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

질레트는 두 사람이 자신을 옆에 두고도 둘만 있는 것처럼 농을 주고받는 모습에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도저히 끼어들 수가 없는 분위기라서 아랫입술만 깨물 뿐이었다. ...

‘이 남자 누구야?’ ...

케이는 질레트가 아는 케이브란트 그린 같지가 않았다. ...

케이는 북극의 얼음 성처럼 감정 표현을 거의 하지 않는 냉정한 남자였다. 부하들과 함께 있을 때는 가끔 웃기도 하지만, 평소에는 과묵하고 표정 변화도 거의 없었다. ...

그런 케이가 리시를 상대로는 마치 봄바람 맞은 강아지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리시?” ...

“제이미가 데려온 시녀들이 아주 마음에 들어요. 루테크 가문의 에르웰과 페르니 가문의 크리시나라니. 상상도 못 했어요.” ...

루테크 가문과 페르니 가문은 질레트도 알고 있었다. ...

학자와 예술가를 수없이 배출해서, 메르디 자작 가문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집안이었다. ...

“하지만 시녀 두 명으로는 부족해서요.” ...

“그래요. 시간을 준다면 루테크와 페르니 정도로 좋은 가문의 영애를 찾아보죠.” ...

“아니요. 그렇게 좋은 가문의 영애까지는 필요 없어요.” ...

드디어 리시의 눈동자가 질레트에게로 향했다. ...

케이는 그제야 질레트의 존재를 눈치챘다는 듯 질레트를 돌아봤다. ...

“이 정도면 돼요.” ...

케이의 앞이 아니었다면 질레트는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

리시는 메르디 가문을 루테크와 페르니 가문 이하로 만드는 동시에, 질레트 또한 두 시녀보다 격이 낮은 존재로 떨어뜨렸다. ...

케이의 대답이 질레트의 마지막 지푸라기였다. ...

질레트는 케이가 거절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케이의 입술만 응시했다. ...

질레트를 흘끗 돌아본 케이가 무심히 대답했다. ...

“원하는 대로 해요, 리시.” ...

(11) 버릇없는 늑대 ...

  시녀를 구했으니 이제는 평생 놀고먹기 위한 기반을 다지기 위해 노력해야 할 때다. ...

리시는 제이미에게 부탁해서 백작령에 발간되는 모든 신문과 잡지를 매일 사다 달라고 했고, 그린 가문의 여러 부서 책임자를 직접 만나서 이것저것 배우느라 늦은 시간에야 침실에 들어갔다. ...

하지만 케이는 더 바쁜지, 리시보다도 늦게 침실에 들어왔다가 일찍 나가거나 아예 들어오지 않기 일쑤였기에, 서로 얼굴을 마주할 새가 거의 없었다. ...

“백작님께서는 아주 바쁘신가 봐요.” ...

날씨 좋은 어느 날, 리시의 방 거실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크리시나가 허브차를 내오며 말했다. ...

크리시나가 시녀로 들어온 후, 케이의 얼굴을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마음이 쓰인 모양이었다. ...

“당연하죠. 백작님은 여러 가지 계획이 있으셔서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으시거든요.” ...

리시는 아무 말 하지 않았는데, 질레트가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조용히 서 있던 에르웰이 표정을 구기더니, 드레스 허리춤으로 슬그머니 손을 가져갔다. 크리시나가 무시무시하게 노려보자 곧 입술을 비쭉거리며 도로 손을 빼냈지만. ...

세 명밖에 없는 시녀인데도 관계가 썩 좋지 않았다. ...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에르웰과 크리시나는 질레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

질레트가 리시의 앞에서 무례하게 행동하는 데다가, 에르웰과 크리시나에게도 자신이 귀족 가의 영애라는 걸 내세우기 때문이었다. ...

크리시나는 질레트의 무례한 행동도 조용히 넘어가곤 했지만, 에르웰은 그럴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고 드레스 어딘가로 손을 넣으려 하곤 했다. ...

뭘 꺼내려는 것 같은데, 리시는 에르웰이 뭘 꺼내려고 하는 건지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매번 크리시나가 에르웰이 노려보는 바람에, 에르웰이 꺼내려는 걸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

“그러고 보니 아이리스 님. 아이리스 님은 결혼반지가 없네요. 설마 백작님한테 반지도 못 받은 거예요?” ...

질레트가 ‘난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거예요.’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

리시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드레스에 어울리는 팔찌는 차고 있지만, 반지는 끼지 않았다. ...

지금껏 결혼반지에 대해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

“하긴. 정략결혼이다 보니 그런 번거로운 절차는 생략했겠어요. 결혼식도 안 올렸으니까. 그래도 다른 정략결혼 하는 사람들은 결혼식 정도는 올리던데…… 백작님 너무하신다. 내가 다 속상하네.” ...

말과 달리 질레트는 즐거워 보였다. ...

“질레트 양. 백작 부인 앞에서는 언행을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

에르웰이 꼼짝 못 하게 노려보던 크리시나가 결국 참지 못하고 한소리했다. ...

질레트가 어이없다는 듯 크리시나를 쏘아봤다. ...

“지금 날 나무라는 거야? 우리가 같은 시녀이긴 해도, 나 메르디 자작님의 딸이야.” ...

크리시나가 질레트를 응시하느라 에르웰을 말리지 못하는 바람에, 에르웰이 허리춤에서 꺼내려던 게 언뜻 보였다. ...

은빛으로 빛나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기 전 노크 소리가 방 안의 긴장된 분위기를 깨뜨렸다. ...

“리시. 들어가도 돼요?” ...

케이였다. ...

질레트는 아직 케이를 포기하지 못한 듯, 얼른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머리를 손질했다. ...

에르웰과 크리시나가 기가 막힌다는 듯 질레트를 쳐다봤다. ...

“들어와요.” ...

리시의 허락이 떨어지자 케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

그는 멀리 나갔다가 온 듯 제대로 된 정장 차림이었다. ...

흰색에 금테를 두른 정장을 입은 그는, 마치 남신처럼 아름다웠다. ...

“하아앙.” ...

질레트가 저도 모르게 감탄의 한숨을 뱉어냈다. 에르웰이 토하는 시늉을 하는 걸 본 사람은, 크리시나뿐이었다. ...

크리시나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에르웰이 몸가짐을 바르게 하게 시키는 동안, 케이는 즐거운 표정으로 리시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

“오랜만에 시간이 났어요. 저택 구경은 끝났어요?” ...

“아직 전부 돌아보지는 못했어요.” ...

“잘됐네요.” ...

케이가 리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

리시는 뭘 하라는 건지 몰라 그의 커다란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

그의 손가락은 길고 마디가 굵었는데, 검을 많이 쥐어 손바닥 곳곳에 굳은살이 있었다. 리시는 이렇게나 싸움에 능숙한 자의 손을 처음 보기에, 넋을 잃고 그의 손바닥을 감상했다. ...

“리시?” ...

그의 부름에 멍하게 올려다봤다. ...

“뭐해요? 손 줘요.” ...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바닥 위에 손을 얹었다. ...

그가 씩 웃었다. ...

“달란다고 주다니, 훈련을 잘 받은 강아지 같군요, 리시.” ...

“당신은 버릇없는 늑대고요.” ...

두 주인이 주고받는 밀담에, 눈치 빠른 크리시나가 다른 시녀들에게 눈짓하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질레트는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두 눈을 부릅뜨고 리시와 케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

결국, 크리시나가 질레트의 드레스 자락을 붙잡아 끌었다. 질레트는 짜증스럽게 크리시나의 손을 쳐내고 자기 스스로 방을 나갔다. ...

시녀들이 나가자, 케이가 리시의 손을 잡고 소파에서 일으켰다. ...

“시녀 중에 이빨을 드러내는 시녀가 있는 것 같은데.” ...

“당신이 버릇없이 키워서 그렇겠죠.” ...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뭔가를 키우는 거예요, 리시. 화초 하나도 제대로 못 키우죠.” ...

“질레트의 말로는, 당신의 시중을 들었다고 하던데.” ...

“내 시중을? 아……!” ...

케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

“리시, 혹시 질레트가 내 밤일을 도와줬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바쁜 척하며 날 피했고?” ...

“첫 번째는 맞고, 두 번째는 틀려요.” ...

“이런, 리시.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무나 이 케이브란트 그린의 몸에 손을 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

리시는 케이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그의 가슴 위에 올리고 도발적으로 그를 응시했다. ...

“이렇게 쉽게 손댈 수 있는데.” ...

그러자 케이가 고개를 숙여 리시의 귓불을 잘근 깨물었다. ...

“당신은 아무나가 아니잖아.” ...

그의 숨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영문 모를 저릿한 감각이 귀에서부터 척추를 쓰다듬으며 발가락 끝까지 쭉 퍼졌다. ...

리시가 움찔하자 그가 키득키득 웃었다. ...

웃을 때마다 그 숨결이 귀를 간질여, 리시는 숨도 쉴 수 없었다. ...

리시는 자신이 사내와 여인의 은밀한 행위에 대해서 닳고 닳을 정도로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케이의 작은 접촉, 작은 숨결에 자꾸만 긴장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리시는 케이에게서 살짝 떨어져 그를 올려다봤다. 지금 느끼는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그에게 물었다. ...

“그렇다면 질레트가 왜 저리도 제멋대로 굴게 내버려둔 거죠?” ...

“메르디 가문은 쓸만하거든.” ...

“상단의 주인이라서요?” ...

“응.” ...

“버려요. 쓸모없으니.” ...

“그러지.” ...

케이는 어떻게 아느냐고 묻지도 않고 순순히 대답했다. ...

리시는 그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

“말이 짧아지네, 케이.” ...

케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

“아, 미안, 미안. 가끔 당신이 나한테 반말하던 모습이 떠올라서. 다시 봐도 오싹할 정도로 매력적이네요, 리시.” ...

“칭찬인가요?” ...

“물론.” ...

케이는 리시의 손을 이끌어 복도로 나갔다. ...

“어딜 가는 거죠?” ...

“시간이 났으니 저택 안내를 해줄게요. 듣자 하니 그린 가문에 대해서 이것저것 배우는 것 같던데, 눈으로 보는 것만큼 정확한 게 없잖아요.” ...

 

+++

케이가 저택 부지 안에 있는 본채와 별채, 기사 숙소 등 여러 곳을 구경시켜준 후 마지막으로 데려간 곳은, 어느 새까만 건물이었다. ...

마치 창고처럼 창문조차 없는, 까만 건물. ...

건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딱 하나였는데, 쉽게 부수기 힘든 육중한 철문으로 되어 있었다. ...

그 건물이 보이기 시작하자, 케이가 말했다. ...

“여기서부터는 내가 밟은 곳만 밟으면서 따라와야 해요.” ...

“함정이 있나요?” ...

“영리하군요, 리시.” ...

리시는 케이가 밟은 곳만 밟으려고 집중하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

케이는 혹시라도 리시가 실수할까 봐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

리시는 집중한 듯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는데, 그게 귀여워 보였다. ...

최근에 너무 바빠서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동안, 케이의 머릿속에는 항상 리시가 있었다. ...

케이는 시간 낭비하는 걸 싫어하는데, 이상하게도 리시와 무의미하게 농담을 주고받는 게 즐거웠다. ...

“여기서부터는 편하게 움직여도 괜찮아요. 아, 문에 손을 대지는 말고요.” ...

건물 앞에서 케이가 말했다. ...

“무시무시한 곳이군요.” ...

“귀한 것이 있어서. 잠시 실례.” ...

리시가 눈 깜빡할 사이에, 케이가 커다란 늑대로 모습을 바꿨다. ...

오랜만에 보는 늑대의 모습. ...

리시는 무심코 그에게 다가가 그의 콧등을 쓰다듬었다. ...

부드러운 털결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

리시가 콧등을 쓰다듬자 그는 잠깐 긴장했지만, 곧 기분 좋은 듯 눈을 가늘게 떴다. ...

“이 모습일 때 누가 날 쓰다듬는 건 처음이에요, 리시.” ...

“불쾌한가요?” ...

“아니, 계속해요.” ...

케이는 발라당 뒤집어서 배라도 보여줄 기세였다. ...

리시는 자기보다 훨씬 큰 늑대가 눈을 반쯤 감고 손길을 받아들이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

특히 눈썹처럼 보이는, 눈 위의 회색 털이 움찔움찔 움직이는 게 귀여웠다. ...

“강아지나 한 마리 키울까 봐요.” ...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케이가 번쩍 눈을 떴다. ...

“그런 건 나 하나로 족하잖아요.” ...

“당신은 너무 크니까.” ...

“후회할 텐데.” ...

지난번에도 케이가 후회할 거라고 말한 걸 무시했다가 봉변을 당한 적이 있기에, 이번에는 흘려듣지 않았다. ...

“왜 후회하죠?” ...

“강아지는 날 무서워해서, 내 근처에만 있어도 오줌을 지리거든요.” ...

“저런…….” ...

케이가 웃는 듯 입을 길게 찢어 올려서, 크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

리시는 겁 없이 그의 송곳니에 손을 댔다. ...

“무섭네요.” ...

“전혀 무서워하는 표정이 아닌데요, 리시.” ...

케이가 입을 벌려 리시의 손바닥을 할 짝 핥는 바람에, 리시는 깜짝 놀라 손을 거뒀다. ...

검은 늑대의 목에서 크르릉,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

웃는 소리인가 보다. ...

케이는 리시에게서 몸을 돌려 건물 문 앞으로 걸어가 앞발을 들었다. 커다란 앞발에 있는 날카로운 발톱을 세워, 문에 있는 네 개의 틈에 끼워 넣었다. ...

철컹- ...

문이 열렸다. ...

“이 문은 내 발톱으로만 열 수 있죠.” ...

케이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서 옷을 입는 동안, 리시는 이 검은 건물 안에 들어 있는 게 뭔지 추측해냈다. ...

‘성유물이 있는 곳이구나.’ ...

 

+++

알포드는 눈앞에 있는 그린 백작 저택을 노려봤다. ...

그동안 자신을 제일 돋보이게 할 옷을 제작하고, 이런저런 포석을 깔아두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

준비하는 동안에도 ‘나의 아이리스’가 무뢰배인 케이브란트에게 끔찍한 일을 당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속이 탔는지 모른다. ...

알포드의 머릿속에서 아이리스는, 원치도 않는데 그린 백작에게 끌려가 알포드를 그리워하는, 안쓰럽고도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

알포드는 고개를 바짝 치켜들고 정문을 지키는 병사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

“알포드 후치스 자작이 그린 백작과 만남을 청한다고 알려라.” ...

(12) 백작 부인은 과거가 있다. ...

어두운 건물 안을 천장에 있는 희미한 빛이 밝히고 있었다. ...

리시는 고개를 들어 빛의 근원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

“영구 마법을 걸어둔 마석인가요?” ...

“그래요.” ...

“값이 어마어마했을 텐데.” ...

마법이 사라지는 시대. ...

마법사를 고용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고, 마법 물품의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었다. ...

“당연히 신성국에서 지원해줬죠. 마석 가격이 이렇게까지 비싸지 않았을 때 만든 건물이기도 하고.” ...

건물 안에는 따로 방이 없는, 넓은 공간이었다. 그 중앙에 황금색으로 빛나는 여러 개의 진열대가 놓여 있었다. ...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 길에도 함정이 설치되어 있는지, 케이가 앞서 걸어가며 함정을 해제했다. ...

이윽고 황금 진열대 앞에 도착한 리시는, 그 위에 놓인 네 개의 물건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

술잔. 검. 지팡이. 로브. ...

그냥 봤을 때는 특별한 것이 하나도 없는, 오히려 낡고 쓸모없어 보이는 물건들이었다. ...

“절대로 만지면 안 돼요, 리시.” ...

케이가 경고하지 않았더라도, 리시는 그것을 만질 생각이 없었다. ...

성유물은 평범한 사람이 잘못 만지면 죽거나,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상황에 빠지게 된다. 성유물이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험한 일이 벌어지는 일도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성유물에 대한 기록은 많아요. 예전에는 성유물을 트레저라고 하면서 찾아다니는 전문 직업도 있을 정도였죠. 평민 중에서도 성유물을 가진 사람이 있을 정도였어요.” ...

성유물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신성국이 성유물을 모아서 관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날 벌어진 전쟁으로, 수많은 성유물이 파괴되거나 사라졌다. ...

지금 케이가 가진 네 개의 성유물은, 그 혼란 속에서도 신성국이 힘겹게 지켜낸 것들이었다. ...

“성유물에는 각각 능력이 있어요. 오래전에는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도 있었다고 하는데…….” ...

“지금은 전혀 없나요?” ...

“없어요. 있을 수도 있지만, 워낙 위험해서 시도조차 못 해보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

“만지기만 해도 죽는 건가요?” ...

“죽으면 차라리 다행인데……. 육체 안에 갇히는 경우가 있어요.” ...

“육체 안에 갇힌다?” ...

“정신은 멀쩡한데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거죠. 눈동자조차도. 한마디로 육체가 감옥이 되는 거예요.” ...

리시는 그런 상황을 상상해보았다. 정신은 멀쩡하지만, 눈동자조차 움직일 수 없는 상황. ...

“끔찍하군요.” ...

“물론 모든 성유물이 그렇게 위험한 건 아니고, 만져도 괜찮은 경우가 있긴 하지만, 혹시 모르는 거니까요.” ...

케이는 네 개의 성유물에 대해 설명해줬다. ...

곡식이 끊임없이 흘러나온다는 황금 술잔. ...

심장에 찔러넣으면, 소생할 수 없을 정도로 다치거나 병든 자를 완벽하게 치료해준다는 죽음의 검. ...

짐승이 명령을 따르게 해주는 와일즈 지팡이. ...

몸을 투명하게 만드는 제리어스 로브. ...

나직해서 듣기 좋은 목소리로 설명하던 케이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

리시도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

“기다리던 손님이 온 것 같군요, 리시.” ...

“응?” ...

“알포드 후치스 자작.” ...

“아…… 그걸 어떻게……?” ...

케이가 자기 귀를 톡톡 두드렸다. ...

“늑대는 청각이 뛰어나거든.” ...

케이가 리시의 손을 잡았다. ...

“같이 갈래요? 우리의 다정한 모습도 보여줄 겸.” ...

“아니요.” ...

리시가 고요히 미소 지었다. ...

“혼자 가요, 케이. 내 도움 없이 후치스 자작에게서 금광을 뺏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

+++

알포드는 응접실에 들어가지 않고 그 앞 복도에 서서, 집사와 근처를 지나가는 하녀들에게, 아이리스가 자신과 얼마나 뜨거운 연애를 했는지에 대해 떠들어댔다. ...

아직 아이리스를 많이 경험하지 못한 하녀들은 “어머. 어머.” 하면서 흥미롭게 알포드의 이야기를 들었다. ...

그중에는 질레트도 있었다. ...

“그 호수 앞이었지. 우리가 첫 키스를 나눈 건……. 그때 파르스름하게 떨리던 우리 아이리스의 속눈썹이 아직도 생생해. 나는 그때 결심했어. 아이리스와 결혼하겠다고! 아이리스 역시 내 마음과 같다고 대답했고 말이야.” ...

알포드가 떠들어대는 걸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귀부인이 숨기고 싶은 과거는, 하녀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깃거리였다. ...

알포드가 평범한 집사일 뿐이라고 생각한 제이미도 옆에 서서 알포드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

제이미는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예리한 눈빛으로 그 자리에 있는 하녀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있었다. ...

“헉……. 야, 얼른 가자.” ...

복도 멀리서 걸어오는 케이의 모습에, 하녀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

알포드의 옆에 남은 건 제이미뿐이었다. ...

알포드는 당당하게 서서 케이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지 않고.” ...

이윽고 알포드의 앞에 도착한 케이가 먼저 응접실에 들어가며 중얼거렸다. ...

어째 말이 짧다 싶었지만, 알포드는 일단 케이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

알포드는 소파에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

“아이리스에 대해 할 말이 있어서…….” ...

“라벤트의 금광을 나한테 팔도록 해, 후치스 자작.” ...

말이 끊기는 바람에, 알포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

한참 어려 보이는 케이가 자신에게 반말을 사용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아무리 케이의 작위가 더 높다지만, 요새는 같은 귀족이라면 상대의 나이가 많을 땐 서로 존댓말을 하는 것이 예의였다. ...

“이봐요, 그린 백작님. 나는…….” ...

“좋은 값을 쳐주지.” ...

“내 말 좀…….” ...

“나는.” ...

케이가 우아하게 다리를 꼬았다. ...

“금광 얘기가 아니면 하고 싶지 않은데.” ...

“아이리스는 내 여자예요!” ...

케이가 말한 것과 알포드가 외친 것은 동시였다. ...

소리높여 외친 알포드는 씩씩거렸지만, 케이는 눈썹 한번 꿈틀하지 않고 여유롭게 말했다. ...

“금광 시세보다 10프로 정도 더 쳐줄 수도 있어, 자작.” ...

“백작님! 난 지금 아이리스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서 뺏어간, 불쌍한 아이리스 이야기요!” ...

“그런 것 같군. 그런데 어쩌나. 나는 금광 얘기가 더 끌리는데.” ...

“애초에 금광 얘기는 꺼낼 생각도 없었다고요!” ...

“나는 금광 생각뿐이었는데.” ...

농담하는 건가 싶어서 쳐다봤지만, 케이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

그는 느른한 표정으로 금광 얘기만 반복할 뿐이었다. ...

이러다가는 끝이 없겠다 싶어서, 알포드는 말했다. ...

“라벤트의 금광은 안 팝니다. 천만 골드를 준다고 해도 안 팔아요.” ...

“듣기로는 위틀로 공작에게 주려고 했다던데.” ...

“그거야……!” ...

아이리스를 사 오는 대가지, 라는 말을 덧붙일 수 없었다. ...

“앞으로 장인어른이 될 분이니까…….” ...

“흐응.” ...

“아무튼, 금광 얘기는 여기서 끝내고 아이리스 얘기를 합시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리스는 오래전부터 나랑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어요. 우리가 만난 건,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인데…….” ...

알포드가 아까 하녀들 앞에서 했던 이야기를 반복했다. ...

케이는 이번에는 알포드를 방해하지 않고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

원래 알포드에게서 라벤트의 금광을 양도받기 위한 계획을 여러 개 세워뒀다. 알포드가 운영하는 후치스 대상단의 각종 비리도 조사했다. 여차하면 그것들을 가지고 알포드를 회유할 작정이었다. ...

하지만 응접실에 걸어오면서 알포드가 아이리스를 두고 지껄이는 소리를 듣는 순간, 계획을 바꿨다. ...

알포드에게는 좀 더 험한 맛을 보여주는 게 좋겠다. 저 입으로 아이리스에 대해 두 번 다시는 떠들어대지 못하도록. ...

“이제 아시겠죠, 그린 백작님? 아이리스는 나랑 같이 있어야만 행복하게 웃을 수 있어요.” ...

“내 앞에서도 잘 웃던데.” ...

“그거야 백작님이 강압적으로 아이리스를 취하는 바람에 무서워서 그런 거겠죠. 아이리스는 겁이 많고 여리거든요.” ...

겁이 많다고? 아이리스가? ...

정말 이 남자는 리시에 대해 조금도 모르는군. ...

“아무리 백작님이라도 한 여자를 강제로 데려갈 수는 없는 거예요. 성유물의 수호자가 그 명예를 이런 식으로 이용했다는 걸 알면, 사람들이 욕할 겁니다. 신성국에서 알게 되면 성유물의 수호자 자격을 박탈당할지도 모르고요!” ...

케이가 별말 하지 않자, 기세등등해진 알포드는 이제 케이를 은근히 협박하기 시작했다. ...

케이는 천천히 일어났다. ...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 자작. 따라와.” ...

“일단 아이리스 문제부터 해결하고…….” ...

“따라와, 자작.” ...

케이가 응접실을 떠나는 바람에, 알포드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

케이는 복도를 걸어가며 제이미에게 눈짓했다. 제이미가 고개를 끄덕이고 모습을 감췄다. ...

알포드는 케이를 따라잡기에 바빠서, 케이와 제이미가 눈빛을 교환하는 걸 보지 못했다. ...

케이는 느긋하게 걷는 것 같은데, 알포드가 뛰듯이 그 뒤를 쫓아도 가까워지질 않았다. ...

둘은 한참을 걸었다. ...

‘저택이 이렇게 넓었나?’ ...

계단을 오르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했다. 복도 오른쪽으로 가기도 하고 왼쪽으로 가기도 했다. ...

밖에서 봤을 때는 이렇게까지 넓어 보이지 않는데, 마치 거대한 미로를 걷는 것 같았다. ...

이윽고 도착한 곳은, 두꺼운 철문으로 된 어느 방이었다. ...

혼자서는 열기 힘들 것 같은 그 문을, 케이는 어렵지 않게 열고 들어갔다. ...

알포드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

쿵-! ...

육중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는 바람에, 알포드가 펄쩍 뛰었다. ...

케이는 알포드를 향해 속을 알 수 없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

“여, 여긴 뭡니까?” ...

어두워서 주위가 잘 보이지 않았다. ...

케이가 벽에 있는 버튼을 누르자, 방 안이 환해지며 그 안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

“헉!” ...

알포드가 숨을 들이마셨다. ...

“고문실이라고 하지. 내가 아주 좋아하는 곳이다.” ...

케이가 여상히 말하며 어느 끔찍한 모양의 의자 앞으로 걸어갔다. 의자에 이상한 장비가 설치되어 있었다. ...

“이걸 머리에 씌우고 이건 목에 고정하지. 이 버튼을 누르면 머리가 죄고, 이 버튼을 누르면 목에 낀 이 고리가 위로 서서히 올라가.” ...

케이가 즐겁다는 듯 설명하는 걸 들으며, 알포드는 그 광경이 상상돼서 오싹해졌다. ...

“자작은 목이 짧으니 이 고리로 목을 좀 늘리는 것도 좋겠군.” ...

“무, 무슨 그런 농담을…… 하하하하.” ...

“농담 아닌데.” ...

케이가 작게 중얼거린 말을, 알포드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

“여기 이 동상은 유명하지. 평범한 동상으로 보이지만 안에는 날카로운 바늘이…….” ...

“이 둥근 통에는 사람을 가둬. 안에 넣고 아래에 불을 지피면…….” ...

“여기 이 도구는 이빨을…….” ...

“이건 손톱을…….” ...

케이는 방 안 곳곳에 있는 장치와 도구를 일일이 설명했다. ...

알포드는 참지 못하고 외쳤다. ...

“대체 내게 이런 걸 보여주는 저의가 뭡니까? 날 협박이라도 하려는 겁니까?” ...

“오!” ...

날카로운 도구를 들고 만지작거리던 케이가 눈을 크게 떴다. ...

“다행이군. 그걸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아서.” ...

케이가 성큼 다가왔다. ...

케이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알포드를 물끄러미 응시했을 뿐이다. ...

그런데 이상하게도 알포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에 짓눌려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

그런 알포드를 지그시 응시하며, 케이가 속삭였다. ...

“기름 흐르는 사내랑 밀폐된 공간에서,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거든.” ...

(13) 강아지는 털발 ...

  케이가 시선을 돌리자마자 알포드는 정신을 차렸다. ...

그제야 수치심이 찾아왔다. 남의 앞에서 오줌을 지리다니. ...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

위틀로 공작에게 주려고 했던 라벤트의 금광은, 사실 곧 폐광할 금광이었다. 매장된 금을 거의 다 캐냈기 때문이었다. ...

그런 금광 따위, 남에게 줘도 상관없긴 하지만, ‘나의 아이리스’를 빼앗아 간 케이에게만큼은 절대로 주고 싶지 않았다. ...

“이, 이런다고 해서…… 이런다고 해서 내 금광을 줄 수는 없어요! 이 문제는 신성국에 가서 교황님께 정식으로 항의할 겁니다!” ...

알포드는 자신이 가진 모든 용기를 짜내서 외친 후, 휙 돌아섰다. ...

그대로 도망칠 생각이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언제 들어온 건지, 복면을 쓴 사내 세 명이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

그들을 보자, 며칠 전 위틀로 공작 저로 향할 때, 마차를 습격한 괴한들이 떠올라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

“뭐, 뭐 하는 거냐? 저리 비켜!” ...

알포드는 그들에게 차마 가까이 가지 못하고 외쳤다. ...

그들은 알포드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정면만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

알포드는 뒤를 돌아서 케이에게 항의하고 싶었지만, 무서웠다. 왜인지 악마 같은 것이 등 뒤에 있는 것 같아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

검은 공포가 발등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알포드를 잠식했다. 왠지 자기가 서 있는 곳이 이 세상이 아닌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이……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습니까, 그린 백작님?” ...

알포드는 다리를 후들후들 떨면서 말했다. ...

“아, 아무리 협박해도…… 나는…… 나는 이 문제를 반드시 교황님께 전할 겁니다. 아니, 기자들에게도 알릴 거예요.” ...

일단 말을 시작하자 두려움이 좀 가셨다. 그제야 알포드는 케이를 돌아볼 수 있었다. ...

“백작님은 나랑 결혼하기로 약속한 아이리스를 억지로 데려갔고, 그에 대해 항의하려고 찾아온 나를 고문실에 가두고 욕보였습니다. 그 성실한 성유물의 수호자가 사는 저택에 이런 고문실이 있는 것 자체도 알려지면 큰일인데, 거기에 날 가두고 협박한 건 아주 큰 문제가 될 거예요.” ...

케이가 씩 웃었다. 문 앞을 지키는 복면인들도 키득거렸다. ...

알포드는 그들이 왜 웃는지 알 수 없어서 불안했다. ...

“자작. 고마워. 날 웃게 해줘서.” ...

말과 달리, 케이의 눈빛은 서늘해졌다. ...

“자작이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서 교황님을 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니. 정말 재미있네.” ...

뒤늦게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알포드가 놀라서 펄쩍 뛰며 돌아서서 문을 향해 달려갔지만, 복면인들이 막고 있어서 문에 닿을 수 없었다. ...

복면인 중 덩치가 큰 사내가 알포드의 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

“컥!” ...

알포드가 숨 빠지는 소리를 냈다. 복면인이 알포드의 목을 잡은 채 들어 올렸다. ...

알포드가 다리를 버둥거렸지만, 복면 사이로 보이는 갈색 눈동자는 냉혹했다. ...

“커…… 크헉……!” ...

알포드는 복면인이 적당히 겁을 준 후에 내려 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복면인의 손에서는 힘이 빠지지 않았고, 반대로 알포드의 육체에서는 점점 힘이 빠졌다. ...

세상이 까맣게 변했다. ...

“으헉!” ...

찬물을 뒤집어쓴 알포드가 깨어났을 때, 눈앞에는 케이가 있었다. ...

알포드는 자신이 기절하기 전에 경험한 죽음의 공포를 잊지 않았다. 죽음 앞에서 수치심이나 모멸감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감정이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

알포드는 벌떡 일어나 케이의 앞에 무릎 꿇었다. ...

“드, 드리겠습니다.” ...

케이가 느른한 시선을 보냈다. ...

“무엇을?” ...

“그, 금광이요. 라벤트의 금광, 그거. 드리겠습니다. 네, 드려야죠.” ...

“아쉬운걸.” ...

“예?” ...

“이걸 써보고 싶었는데.” ...

케이는 뭐에 쓰는 건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무시무시한 기구를 손에 들고 있었다. ...

가시가 잔뜩 달린 기구를 보며, 알포드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

케이가 눈짓을 하자, 복면인이 얼른 서류를 가져왔다. ...

라벤트의 금광을 아이리스 그린에게 양도한다는 계약서였다. ...

“아, 아이리스…….” ...

계약서에 적힌 이름을 보고, 알포드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자작.” ...

케이가 무시무시한 기구로 알포드를 겨눴다. ...

“남의 아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 백작 부인이라는 좋은 호칭이 있잖아.” ...

“죄, 죄송합니다.” ...

알포드는 더 이상 케이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그저 얼른 이 고문실을 빠져나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

‘내가 나가기만 해봐라. 가만 안 있을 테니까.’ ...

알포드는 금광을 넘긴다는 계약서에 사인하고, 지장을 찍고, 도장까지 찍은 후에야, 고문실을 나올 수 있었다. ...

케이는 알포드를 저택 대문까지 배웅해줬다. ...

알포드는 이대로 달려가서 대형 신문사의 기자를 만나 이 일에 대해 전부 이야기하고, 신성국으로 향할 계획이었다. ...

“자작. 내가 자작을 위해 영양가 풍부한 이야기를 하나 해주지.” ...

이야기고, 뭐고, 알포드는 얼른 떠나고 싶었지만, 꾹 참고 케이를 올려다봤다. ...

“자작은 욕심 많은 상단 주인이고, 나는 성유물의 수호자야. 자작이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면 나도 대응하게 될 텐데…… 과연 사람들은 누구 말을 믿을까? 상단 주인? 아니면 성유물의 수호자?” ...

“……!”

“자작이 개소리를 지껄인 순간, 아까 본 내 그림자들이 자작을 찾아갈 거야. 과연 뭐가 빠를까? 내 그림자들이 자작을 찾아내는 거? 아니면 자작이 신성국의 교황님을 뵙는 거?” ...

알포드는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

“착하게 굴어, 자작. 내가 지켜볼 건데, 그냥 지켜보게만 해줘. 그럴 수 있지?” ...

 

+++

“아까 찾아온 사내 때문에 하녀들 사이에서 안 좋은 소문이 돌고 있어요.” ...

리시는 창밖을 내다보면서 크리시나의 보고를 들었다. ...

“아무래도 하녀들은 그 남자 말을 믿는 것 같아요. 게다가…… 질레트 양까지 나서서 그런 이야기에 동참하는 바람에…….” ...

크리시나가 말끝을 흐리는데, 작게 속삭이는 듯한 욕설이 겹쳐졌다. ...

“미친년…….” ...

아무래도 에르웰의 목소리 같지만, 리시는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아이리스 님, 질레트 그…….” ...

과묵한 에르웰이 모처럼 입을 열었는데, 퍽 소리가 났다. ...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에르웰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옆구리를 움켜쥔 채 크리시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에르웰?” ...

“질레트 양을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아요, 아이리스 님.” ...

크리시나가 말했다. ...

에르웰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옆구리를 잡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뭔가 불만족스러운 듯 입술을 비쭉거리기는 했지만. ...

“아이리스 님의 전속 시녀인 질레트 양이 그런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니면, 하녀들은 그 헛소문을 더 믿게 될 거예요.” ...

크리시나의 말에 에르웰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

“에르웰, 내게 할 말 있어요?” ...

“아, 에르웰은 말수가 적어서…….” ...

크리시나가 대신 대답했다. ...

아닌데. 할 말 진짜 많은 것 같은데. ...

“질레트는 그냥 둬도 돼요.” ...

리시의 말에 에르웰이 인상을 구겼다. 말수는 적지만 표정은 다양한 사람이라고, 리시는 생각했다. ...

질레트의 문제는 조금 더 시간을 들여서 해결하기로 했다. ...

지금 당장은 나름대로 성실하게 일하는 질레트를 백작 가에서 쫓아낼 명분이 없었다. ...

이유도 없이 질레트를 쫓아내면, 사람들은 새로 온 백작 부인이 백작 곁에 있는 시녀를 질투해서 쫓아냈다고 생각할 것이다. ...

리시에게 무례하게 굴었다는 이야기를 해도, 다들 믿어주지 않으리라. 사람들은 강자보다 약자가 당한 부조리를 편드는 걸 더 좋아하니까. ...

창밖을 내다보던 리시의 눈에, 알포드가 케이와 함께 저택 정문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

알포드는 마치 도망치는 것처럼 발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

잠시 후, 케이가 리시를 찾아왔다. ...

리시가 눈짓하자 시녀들이 방에서 나갔다. ...

케이가 리시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

“라벤트의 금광을 얻었어요, 리시.” ...

계약서에는 분명하게 아이리스 그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

아이리스 그린. ...

지난 삶, 리시는 아이리스 위틀로로, 결혼한 후에는 내내 아이리스 후치스로 살다가 죽었다. ...

요새는 그린 백작 부인이라고 불리지만, ‘아이리스 그린’이라고 적힌 문서를 보니 새삼스럽게 가슴이 뭉클했다. ...

“잘했어요, 케이.” ...

“그게 끝이에요?” ...

“뭐가 더 필요해요?” ...

“날 우쭐하게 해줄 칭찬, 혹은 보상.” ...

우쭐하게 해줄 칭찬이라니. ...

아무리 궁리해도 ‘잘했어요.’ 이상의 칭찬을 찾을 수가 없었다. ...

“털이라도 빗겨줄까요?” ...

농담 삼아서 한 말인데, 케이가 “오!” 하더니, 얼른 늑대로 변했다. ...

리시는 당황했다. ...

정말로 케이의 털을 빗겨줄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

케이는 늑대로 변하면 원래 입고 있던 옷이 벗겨졌다. ...

그렇다는 건 케이가 알몸이라는 건데……. ...

알몸인 사내의 몸을 빗질하라고? ...

하지만 리시가 뭐라 하기도 전에, 케이는 이미 리시의 화장대에서 큼지막한 빗을 물고 왔다. ...

케이는 빗을 내려놓고 리시의 앞에 얌전하게 엎드렸다. ...

훈련을 잘 받은 커다란 강아지 같은 모습에, 왜인지 가슴 한 부분이 간질거렸다. ...

‘그래, 뭐…… 강아지들한테는 털이 옷이나 마찬가지니까.’ ...

귀족들은 자신이 키우는 강아지의 털을 완벽하게 관리해준다. ...

강아지의 털을 관리해주는 애견 미용사가 떠오르는 직업 중 하나가 되었을 정도였다. ...

리시는 빗을 들어서 케이의 옆에 살포시 앉아, 그의 등에 난 털을 빗겨줬다. ...

늑대의 털은 뻣뻣하지만, 윤기가 흘러서 만지다 보면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 ...

털을 빗겨주다 보니 머릿속에 가득했던 생각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다. ...

‘강아지 털을 빗겨주는 건, 빗겨주는 쪽도 힐링 받는 일이구나.’ ...

리시가 자신을 ‘강아지’라고 생각하는 걸 꿈에도 모르는 케이는, 그르르, 그르르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눈을 감고 있었다. ...

+++

케이의 여동생인 제레시엔은, 오랜만에 참석한 친구의 조촐한 티파티에서 상상도 못 한 이야기를 들었다. ...

끝이 살짝 올라간 제레시엔의 날카로운 눈이 더 날카로워졌다. ...

“뭐라고?” ...

“그러니까, 그린 백작 부인. 네 새언니 되는 사람이 네 오빠를 두고 불륜 행위를 하고 있다고.” ...

“그게 무슨…….” ...

제레시엔의 청회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

그 소식을 전해준 친구가 안쓰럽다는 듯 제레시엔의 어깨를 토닥였다. ...

“진짜 말도 안 되지? 네 오빠를 두고 딴 남자를 만나다니……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소문으로는 네 새언니가 결혼하기 전부터 그 남자랑 연애했다고 하더라. 그 남자가 너희 오빠 저택에도 찾아갔었대.” ...

“하…… 말도 안 돼.” ...

“그럼, 그럼. 말도 안 되지. 젠, 그러니까 너도 저택에만 틀어박혀 있지 말고, 나와서 좀 사람들 얘기도 듣고 그래. 이 이야기, 너만 몰라. 저번에는 잡지에도 실렸어. 믿을 만한 사람이 제보했대.” ...

“와, 진짜 말도 안 돼.” ...

제레시엔이 두 손으로 자신의 짧은 단발을 거머쥐었다. ...

“우리 오빠, 대체…….” ...

티파티에 참석한 제레시엔, 젠의 친구들이 그녀를 향해 안쓰럽다는 시선을 보냈다. ...

그런 친구들을 쳐다보며, 젠이 물었다. ...

“언제 결혼한 거야?” ...

(14) 내 오빠의 아내. ...

젠이 그린 백작 저택을 방문했을 때, 케이와 리시는 금광 문제로 집에 없었다. ...

응접실에서 젠은 유진과 나단, 월라스, 제이미를 한 명, 한 명, 돌아본 후 입을 열었다. ...

“사자, 표범, 독수리, 사슴.” ...

젠의 부름에 케이가 자신의 그림자라고 부르는 부하들이 어깨를 움찔했다. ...

케이의 그림자들 역시 케이와 같은 수인이었고, 케이의 가족들은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

젠은 화가 날 때면 그들을 이름이 아닌, 그들이 변신하는 동물로 부르곤 했다. ...

눈치 빠른 제이미가 입을 열었다. ...

“젠. 나도 너랑 같은 상황이지요.” ...

“……뭐가?” ...

“나도 대장이 결혼했다는 걸, 위틀로 공작 가에서 돌아오는 길에 관청에 혼인계약서까지 내버렸다는 걸, 한참 나중에야 알았지요.” ...

제이미를 향해 있던 젠의 눈동자가 유진에게로 향했다. ...

젠이 화가 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 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항변하기 위해 입술을 움직였다. ...

“나는 그 일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

“맞아, 전혀 모른다고!” ...

나단이 얼른 끼어들었다. ...

“난 그냥 말 타고 있는데, 대장이 갑자기 불러서 그랬단 말이야.” ...

-나, 결혼하려는데 너희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

나단이 케이의 표정과 말투를 따라 했지만, 젠은 웃지 않았다. ...

“대장이 왜 갑자기 결혼하려고 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하겠다는데 어떻게 해? 우리가 그 고집쟁이를 어떻게 말려?” ...

나단이 항의하는 동안, 월라스는 옆에서 머리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

그들의 앞에 선 젠은 팔짱을 낀 채, 표정의 변화 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

그럴 때의 젠은 누가 봐도 케이의 동생이라는 걸 알 정도로, 케이와 닮았다. ...

“하여간 우리는 아는 거 없어, 젠. 대장이 형수님이랑 어디서 만났는지,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그런 거, 하나도 몰라. 왜 갑자기 결혼하기로 했는지도 모르고. 아, 왜 결혼하려고 했는지는 알겠다. 우리 형수님, 진짜 깜짝 놀랄 정도로 예쁘다?” ...

월라스가 자기 누이동생을 자랑하듯 말하자, 젠의 한쪽 눈썹이 쓰윽 치켜 올라갔다. ...

젠의 기분을 눈치챈 제이미가 월라스의 옆구리를 쿡 찔렀지만, 월라스는 계속해서 말했다. ...

“너도 보면 놀랄걸? 아, 너도 들어봤지? 위틀로 공작 가의 꽃. 진짜 꽃 같으셔.” ...

“꽃 같다…….” ...

젠이 중얼거렸다. ...

어째 욕처럼 들리는 말투였다. ...

“응, 정말로. 대장도 어쨌든 남자니까, 형수님이 너무 예뻐서 홀딱 반하신 거 아닐까? 어? 젠, 표정이 왜 그래? 아, 너 말고 다른 분 예쁘다고 해서 그래? 너도 예뻐, 예뻐.” ...

월라스를 제외한 부하들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저 눈치 없는 자식을 어떡해야 하지? ...

“오빠랑 결혼한 그 여자가 위틀로 공작 가의 꽃인지, 똥인지는 아무 관심 없어.” ...

젠이 싸늘하게 말했을 때야, 월라스가 입을 다물었다. ...

“내가 놀라운 건. 이 중에서 우리 오빠의 결혼 사실을 우리 가족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거야.” ...

  +++

리시와 케이는 마차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는 중이었다. ...

케이는 리시의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

살짝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과 그 아래로 쭉 뻗은 콧날과 입술 선이 마치 그림처럼 완벽했다. ...

마침 불어온 바람에 케이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

케이는 성가신 듯 머리칼을 뒤로 넘기다가, 리시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

“왜 그렇게 봐요, 리시?” ...

“같이 가지 않아도 되는데. 당신, 바쁘잖아요.” ...

“부인이 멀리 가는데 혼자 가게 둘 수는 없죠.” ...

“월라스가 나단과 함께 가주겠다고 했는데.” ...

“그 녀석들보다는 내가 더 강합니다, 리시.” ...

“그건 알아요. 하지만 바쁜데 괜히 자리를 비우게 한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하네요.” ...

“결혼해본 게 처음이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부인이 가는 길에 남편이 동행하는 경우, 보통은 부인이 남편한테 폐를 끼친다고 생각하나요?” ...

“……그렇지는 않겠죠?” ...

“그럼 됐어요, 리시. 이유가 뭐든 우리는 부부니까. 그나저나 그 차림, 근사하다고 내가 말했던가요?” ...

리시는 마치 사내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

늘씬한 다리를 돋보이게 해주는 딱 붙는 검은색 바지와 짙은 갈색 셔츠, 그리고 딱 맞는 조끼. ...

긴 머리는 뒤로 질끈 묶고, 검은색 페도라를 썼다. ...

언뜻 보면 호리호리한 체구의 남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

“오늘은 처음 말하네요.” ...

“근사해요, 리시. 어떻게 그런 옷을 주문할 생각을 했죠? 레이디들은 즐겨 입지 않는 옷인데.” ...

“밖에 돌아다닐 때, 너무 눈에 띄고 싶지 않거든요. 내가 하는 일들이 여기저기 퍼지는 것도 싫고.” ...

“그런 거라면 실패했어요, 리시.” ...

케이가 리시의 손가락 끝을 잡아 올렸다. ...

그는 리시의 손가락 마디에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마치 낙인을 찍는 듯 눌려오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리시는 움찔했다. ...

눈만 올려 리시를 응시하며, 케이는 리시의 손가락 마디 하나, 하나에 전부 입을 맞추고, 갑자기 리시를 끌어당겼다. ...

리시는 그의 힘을 이기지 못해 훌쩍 딸려가, 그의 품에 안기듯 허벅지 위에 앉았다. ...

케이가 리시의 손목 안쪽에 입을 맞추며, 가죽조끼 안으로 손을 넣어 리시의 등을 쓰다듬었다. ...

얇은 셔츠 너머로 전해진 열기가 척추를 타고 흘러내려 갔다. ...

“지금도 눈을 뗄 수 없거든.” ...

“으흥……?” ...

등과 손목에 닿는 자극에 신경 쓰느라, 그와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 잊었다. ...

리시의 붉고 도톰한 입술 사이로 신음과 비슷한 소리가 흘러나오자,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리시를 마차 안의 긴 의자에 눕혔다. ...

그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 ...

“여기…… 마차 안이에요.” ...

“짐승이 그런 걸 신경 쓸 것 같아요?” ...

케이의 무게가 배와 허벅지를 묵직하게 눌러왔다. ...

리시는 눈을 질끈 감았다. ...

그의 입술이 귓가를 지분거리고, 그의 손가락이 리시의 두피를 긁듯이 머리칼 안으로 깊이 들어왔다. ...

그의 입술과 손이 닿는 곳마다, 그의 무게가 눌러오는 곳마다, 안에서 전기가 터지듯 저릿해졌다. ...

심장이 뛰고 호흡이 가빠지는 걸, 리시도 느낄 수 있었다. ...

그가 귓불을 깨물었을 때, 목덜미를 빨아들였을 때, 몇 번이나 신음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간신히 삼켰다. ...

케이와 결혼하고 나면 당연히 따라오는 이 행위를, 리시는 거부할 생각이 없었다. ...

케이가 무엇을 원하든, 몇 번을 원하든, 얼마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

다만. ...

‘어떡해야 하지?’ ...

리시는 혼란스러웠다. ...

‘어떻게 반응해야 해?’ ...

지난 삶에서는 이러지 않았다. ...

알포드의 아래에 있을 때도, 심장이 뛰고 호흡이 가빠지기는 했다. 신음을 흘리기도 했다. ...

하지만 그건 무섭고 역겹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

이렇게 달콤하고 간질거리면서도 저릿하고 끈적이는 느낌은 처음이기에, 이 때문에 터져 나올 자신의 반응이 어떨지 두렵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자꾸 알포드와의 일이 겹쳐져서 속이 울렁거리기도 했다. ...

케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었다. ...

케이는 그 남자처럼 거칠지도 않고, 역겹지도 않은데. 오히려 정략결혼임에도 부부라는 이유로, 먼 곳까지 함께해주는 배려를 보여주는데. ...

“긴장 풀어요, 리시.” ...

너무 긴장해서 케이가 어느새 떨어졌다는 것도 몰랐다. ...

케이는 리시의 손목을 잡아, 아프지 않게 일으켜 앉혀주면서 말했다. ...

“전에도 말했지만, 난 뜨거운 걸 좋아하거든.” ...

“그래요.” ...

리시는 간신히 대답하며 옷매무새를 정돈하는 척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화끈거렸기 때문이다. ...

“뜨겁게 만들려고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는 것 정도는 이해해줘요.” ...

“뭐든 해도 돼요.” ...

“그렇게 대답하면 안 돼, 리시.” ...

좋아할 줄 알았는데, 케이는 짐짓 엄하게 말하며 검지로 리시의 턱을 들어 자신을 보게 했다. ...

케이는 미간을 살짝 좁히고 어두운 눈으로 리시를 응시하고 있었다. ...

“싫을 땐 거부해야지.” ...

어째서인지, 리시는 그 짧은 문장에서 애정을 느꼈다. ...

누구도 리시에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 ...

문득 리시를 괄시했던 여러 목소리가 떠올랐다. ...

-싫어도 해. 네까짓 게 싫으면 어쩔 건데? ...

-싫어? 지금 그 입으로 싫다는 말을 한 거야? ...

-하라면 해! 먹여주고 재워줬는데 그 정도는 해야지! 밥벌레 같으니라고. ...

리시의 지난 삶을 상처 입히고 짓이긴 그 말들이, 케이의 한 마디에 흐릿하게 지워졌다. ...

리시는 눈가가 시큰해져서, 고개를 슬그머니 옆으로 돌렸다. ...

“알겠어요.” ...

 

+++

리시는 움막처럼 보일 정도로 허름한 집 앞에 서 있었다. ...

지난 삶의 기억을 더듬어서 찾아온 집이었다. ...

‘가우저…….’ ...

한때는 위틀로 가문의 재산 관리인으로서 위엄 있던 그가, 이런 곳에서 살고 있다니. 가슴 아픈 일이었다. ...

“여긴 누가 살죠?” ...

케이는 마차로 한참을 달려서 도착한 목적지가, 빈민가 근처에 있는 집이라는 사실이 신기한 듯 물었다. ...

“가우저. 예전에 위틀로 가문의 재산 관리인이었죠.” ...

위틀로 공작 가에도 리시를 안쓰럽게 여기는 사람은 있었다. 가우저가 그 대표적인 예였다. ...

가우저는 하녀들이 리시를 하대하거나 조롱할 때, 시녀들이 리시를 부려먹을 때, 브리트니가 심할 정도로 리시를 때리거나 욕보일 때, 리시의 편을 들어주곤 했다. ...

“어느 날, 위틀로 공작에게 내 처우를 개선해줘야 한다고 항변했어요. 그 결과, 쫓겨났죠. 쫓겨난 후에는 아내에게 이혼도 당했고요.” ...

“그렇군요.” ...

“나는 가우저를 라벤트 금광의 관리인으로 고용할 거예요.” ...

“그럴 수는 없어요, 리시. 나는 위틀로의 사람이었던 자를 내 저택에 들이고 싶지 않아요.” ...

케이의 반대가 있을 것은 예상했다. ...

“저택에 들이는 게 아니에요. 내 금광에 고용하는 거지. 내 이름으로.” ...

리시가 단호하게 말하자, 케이가 검지로 리시의 턱을 받쳤다. ...

“리시, 당신 참 신기한 거 알아요? 가끔 보면 순종적인 것 같은데, 또 가끔 보면 되게 무섭단 말이야.” ...

리시도 눈을 반으로 접으며, 그의 손가락을 살며시 잡아 아래로 내렸다. ...

“그런 건 별로 알고 싶지도 않네요.” ...

“금광을 맡기는 건, 정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해야 해요. 그리고 내게는 신뢰할 만한 부하들이 여럿 있고.” ...

“하지만 내 부하는 아니죠.” ...

“이제 내 부하가 당신의 부하이기도 해요.” ...

“그들이 날 위해 당신을 죽일까요?” ...

“그러진 않겠죠.” ...

“하지만 그들은 당신을 위해 날 죽일 수 있을 거예요.” ...

이 말에 케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

리시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가슴을 톡톡 두드렸다. ...

“아내가 하는 일에 너무 끼어드는 남자는 매력 없어요, 케이.” ...

“입 닥치고 구경이나 해라?” ...

“그래요.” ...

케이가 고른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리시는 케이가 저렇게 웃을 때가 좋았다. ...

“알아모시겠습니다, 부인. 원하는 대로 하시지요.” ...

케이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선 후에야, 리시는 문을 두드렸다. ...

똑똑- ...

잠시 기다렸지만, 반응이 없었다. ...

똑똑- ...

안은 조용했다. ...

보다 못한 케이가 나서서 발로 문을 걷어찼다. ...

쾅쾅-! ...

그제야 안쪽에서 우당탕, 하고 뭔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이런, 시부럴!” 하는 욕설이 들려왔다. ...

하지만 리시는 고고하게 서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

가우저. ...

후에 황제의 인정을 받아 황실의 재정을 관리하고, 특유의 공격적이면서도 영리한 투자로 황실의 재산을 불려주게 될 인재 중의 인재. ...

리시는 반드시 가우저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

(15) 백작 부인을 위해. ...

술이 덜 깨서 불퉁한 얼굴로 나온 가우저는, 리시의 기억과 다른 모습이었다. ...

공작 가에 있을 때, 가우저는 언제나 정장을 입었고, 포마드로 고정한 머리칼은 단 한 올도 빠져나오지 않아서, 예리하고 단정한 느낌이었다. ...

하지만 지금 리시의 눈앞에 있는 가우저는, 오랫동안 자르지 않은 머리카락이 헝클어졌고 수염이 덥수룩한 데다가, 이리저리 구겨지고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

가우저 특유의 호박색 눈동자가 아니었다면, 사람을 잘못 찾아온 줄 알고 돌아섰을지도 모르겠다. ...

“뭐요?” ...

말투도 바뀌었다. ...

가우저는 리시가 아닌 케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케이는 대답 없이 손바닥을 위쪽으로 해서 리시를 가리켰다. ...

그제야 가우저의 시선이 리시에게로 향했다. ...

흐리멍덩하던 눈동자에 경악이 깃들었다. ...

“아, 아가씨……?” ...

가우저는 리시를 아가씨라고 불러주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

고지식한 표정으로 언제나 아가씨라고 불러준 가우저가 떠올라서, 리시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지난 삶, 가우저가 황실의 재정 관리인이 됐을 때만 알지, 그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알지 못했다. ...

‘이렇게 살았군요. 아내와 자식이 떠나고 외로워하고, 괴로워하면서, 이리 살다가 정신을 차리고 훌륭하게 그 자리에 앉았던 거군요.’ ...

“저, 정말로…… 정말로 아이리스 님입니까?” ...

리시가 대답하지 않자, 가우저가 다시 물었다. ...

공작 가에 있을 때와는 사뭇 달라진 모습에, 알아보지 못하는 건 가우저도 마찬가지였다. ...

“그래요. 아이리스예요. 이제는 아가씨가 아니지만.” ...

“예? 결국…… 결국 그자들이 아가씨를 쫓아낸 겁니까? 아니, 아니. 어쩌면 그런 취급을 받느니 쫓겨나는 게 나을지도…….” ...

술이 덜 깬 가우저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주절주절 내뱉었다. ...

“쫓겨난 게 아니라 내 발로 나왔어요. 결혼했거든요. 여기, 이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님과.” ...

가우저는 눈이 튀어나올 만큼 크게 뜨고 케이를 올려다봤다. ...

“그린 백작님……. 허…….” ...

입술을 벌린 채 한참 케이의 얼굴을 살펴보던 가우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

가우저는 코를 훌쩍거리며 리시의 손을 덥석 잡았다. ...

“다행…… 다행입니다, 아가씨. 이리 근사하고 멋진 분과 결혼했다니…… 정말 다행…… 크흡…… 훌쩍…….” ...

가우저에게 잡힌 리시의 손을 노려보던 케이는, ‘이리 근사하고 멋진 분’이라는 말에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

“아, 죄송합니다. 너무 감격스러워서 그만…… 저는 그 빌어 처먹을 놈들이, 아, 실례. 하여간 그 집안 놈들이 아가씨를……. 아니, 아닙니다.” ...

리시는 가우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았다. ...

그 집안 놈들이 아가씨를 알포드 같은 놈에게 팔아치울 줄 알았거든요. ...

그리 말하려다가, 케이가 있어서 멈춘 거겠지. ...

“일단, 일단 들어오세요. 아…… 집을 치우지 못해서…… 잠시…….” ...

“가우저. 기다려요.” ...

리시는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 가우저를 불러세웠다. ...

“그대와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어요. 우선 술이 좀 깬 후, 저쪽 중앙 광장 옆에 있는 술집으로 와요.” ...

+++

지난 삶, 대륙에서 가장 큰 상단을 운영하게 된 알포드는 술집을 좋아했다. ...

술도 술이지만, 온갖 소문을 들을 수 있는 곳인데, 그 소문을 잘만 걸러서 들으면 사업에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

리시도 알포드가 술집에 가는 게 좋았다. ...

알포드는 술집에 가면 하루, 이틀 정도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

알포드가 술집에서 무엇을 하는지, 어떤 여자를 만나는지, 리시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

리시와 케이가 들어가자, 여기저기에 앉아서 떠들던 사람들이 일순 말을 멈추고 귀티 나는 두 사람을 돌아봤다. ...

리시는 반사적으로 페도라의 앞을 꾹 눌러 얼굴을 가리며, 케이의 뒤를 따라 구석에 있는 자리로 걸어갔다. ...

“봐요, 눈에 띈다고 했죠?” ...

의자에 앉으며 케이가 말했다. ...

“당신 때문이에요. 당신이 너무 크니까.” ...

“아닐 텐데.” ...

“그럼 이 머리카락 색깔 때문이겠죠. 독특하니까.” ...

리시가 붉은 기 도는 은발의 끝을 검지로 돌돌 말면서 말했다. ...

“눈에 띄고 싶지 않다면 후드 달린 로브를 입는 게 좋아요, 리시. 당신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계속 보고 있고 싶어지는 외모거든.” ...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케이의 눈동자는 리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

이상하게도 리시는 케이가 저런 눈빛으로 지그시 응시해올 때마다 안절부절못하는 기분을 느꼈다. 가슴 쪽이 간질거리기도 하고, 허리에 힘이 들어가기도 하고, 발가락을 꼼질거리기도 했다. ...

“그나저나.” ...

다행히 케이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

“당신과 알포드 후치스 자작과의 은밀한 관계에 대한 소문이 점점 진실이 되어 가고 있다는 건 알아요, 리시?” ...

“알고 있어요. 얼마 전에는 기사로도 났더라고요.” ...

“소문의 근원을 모르는 건 아닐 테고……. 언제까지 두고 볼 거죠?” ...

“혹시 이 소문 때문에 당신이 직접 피해를 본 게 있나요?” ...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앞으로는 모를 일이죠.” ...

“그렇다면 좀 더 지켜보죠. 무르익어야 더 맛있는 법이니까.” ...

아직 끼니 전이었기에, 간단하게 식사를 할 생각으로 메뉴판을 확인했다. ...

“소금에 절인 양고기와 치즈, 호밀빵, 채소스튜에 말린 버섯을 구운 거, 어때요? 아, 그리고 난 맥주 한 잔을 할 생각인데, 당신은?” ...

케이가 물었다. ...

“난 술을 안 마셔봐서요.” ...

“오, 그래요?” ...

왜인지 케이가 즐거운 듯 눈을 빛냈다. ...

“왜 그런 눈빛이죠?” ...

“내 눈빛이 어떤데?” ...

“뭔가 꾸미는 눈빛인데.” ...

“꾸미다니요. 그저 내 아내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을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뿐인데.” ...

“아, 그래요.” ...

리시는 케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

술을 마셔본 적 없는 데다가, 리시의 이미지를 봐서, 술이 약할 거라고 확신한 모양이다. ...

아마도 리시가 술을 마셔서 취하면, 술주정을 즐겁게 감상하려는 거겠지. ...

리시가 케이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

리시는 이번 삶에서는 술을 마셔본 적이 없지만, 지난 삶에서는 마셔보았다. ...

그것도 아주 많이. ...

리시는 자신이 술을 마시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

“오늘은 그만두죠. 곧 가우저가 올 테니까.” ...

 

식사를 거의 끝내갈 때, 가우저가 술집에 들어왔다. ...

“오, 이게 누구야? 가우저? 몰라보겠는데!” ...

“오늘 아침까지 퍼마시더니, 또 마시러 온 거야? 자넨 그러다 죽을 거야.” ...

“그런데 왜 그렇게 차려입고 왔어? 젤린이라도 꼬시게?” ...

가우저는 이 술집의 유명인인지, 다들 그를 알아보고 낄낄거렸다. ...

가우저는 그들에게 건성으로 대꾸하고 리시와 케이 쪽으로 걸어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가우저를 따라왔기에, 리시는 이곳을 약속 장소로 잡은 걸 후회했다. ...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가씨.” ...

가우저가 정중하게 말했다. ...

“인기가 좋네요, 가우저.” ...

가우저가 얼굴을 붉혔다. ...

“아, 제가 좀…… 충격을 잊느라 술을 마시다 보니…….” ...

“앉아요.” ...

가우저가 앉자마자 리시는 본론으로 꺼냈다. ...

“가우저. 날 위해 일해줘요.” ...

“예?” ...

“라…….” ...

말을 꺼내려던 리시는, 주위 사람들이 모두 리시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걸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

“아무래도 여긴 안 되겠네요.” ...

계산하고 나와서 사람이 많은 시장으로 향했다. ...

비밀 이야기를 하기에는 차라리 이렇게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이 나았다. ...

가우저와 케이의 사이에서 걸어가며, 리시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라벤트에 금광이 있어요.” ...

“네, 후치스 자작의 것이죠.” ...

“이제 내 거예요.” ...

“예에?” ...

“그대가 그곳을 관리해줬으면 해요.” ...

“아…….” ...

가우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리시를 쳐다봤다. ...

“아가씨는 계속 절 놀라게 하시는군요. 라벤트의 금광이 아가씨 것이 되었다고요?” ...

“그래요.” ...

“그리고 제게 그 금광을 맡기신다고요?” ...

“그래요. 인부들을 고용하는 것부터, 거기서 캐낸 광물의 관리까지. 전부 그대에게 맡길 거예요.” ...

“이런…….” ...

가우저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턱을 문질렀다. 그는 기쁜 한편 난처한 기색이었다. ...

“아가씨께서 절 믿어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아가씨, 저는 그런 막중한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이제 전 그저 술주정뱅이예요.” ...

“그대가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치 않아요.” ...

“예에?” ...

“중요한 건.” ...

리시는 걸음을 멈추고 가우저를 올려다봤다. ...

“내가 그대에게 내가 가진 유일한 재산을 맡기고 싶다는 것뿐이에요. 그 금광은, 가우저, 그대가 맡아야겠어요.”   부드러운 어조지만 명령이었다. ...

어떤 사람은 그걸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가우저는 그러지 않았다. ...

가우저는 공작 가에서 어둡게 지내던 아이리스 위틀로를 기억했다. ...

위틀로이지만, 위틀로가 아니었던, 안타깝고 안쓰러운 아이. ...

고개를 들어 하늘 한 번 쳐다보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한 아이. ...

바람에 치여, 어둠에 싸여, 그리 부서지고 흩어질 것만 같았던 아이. ...

그런 아이가 어느덧 당당한 백작 부인이 되어, 가우저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

그것이 무척이나 사무쳐서, 가우저는 또다시 눈물을 글썽거렸다. ...

“많이 변하셨습니다, 아가씨. 아니, 백작 부인.” ...

리시가 미소 지었다. ...

“보기 좋지요?” ...

“무척이나.” ...

가우저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

아이리스의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고 공작에게 항변했다가, 이런저런 누명을 뒤집어쓰고 공작가에서 쫓겨났다. ...

위틀로 공작이 뒤집어씌운 누명 때문에, 가우저를 고용하려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

아내는 가난에 지쳐서 아이를 데리고 떠났다. ...

엄마의 손을 잡고 떠나던 아이는 그에게 모멸감과 원망이 담긴 시선을 보냈다. ...

아무것도 남지 않은 가우저는 고통과 외로움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며,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때 이 세상이 끝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

하지만 세상은 끝나지 않았고, 계속되는 세상에서 안쓰럽던 작은 아이가 당당한 여인이 되어 가우저를 찾아왔다. ...

하녀조차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던 아이는, 당당한 눈으로 가우저를 오시하며 말했다. ...

내 모든 것을 맡길 만큼 널 신뢰하니, 나를 위해 살아라. ...

대답은 하나였다. ...

“백작 부인을 위해 살겠습니다.” ...

(16) 내 아들은 안 그래. ...

브리트니는 시녀가 가져온 잡지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

알포드는 리시를 케이의 손에서 뺏지는 못했고, 브리트니 역시 거기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

그저 케이와 사람들의 머릿속에, 리시가 얼마나 문란한 여자인지를 심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

리시에 관한 기사가 실린 잡지는, 유령이나 흡혈귀 같은 것들을 다루는, 신뢰도가 부족한 잡지이기는 했다. ...

하지만 귀족 가의 염문설이 실리면 너도나도 사서 읽으니, 이 기사가 멀리 퍼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터였다. ...

‘아이리스는 곧 쫓겨날 거야. 성유물의 수호자 가문에서, 더럽고 문란한 계집애를 품어줄 리 없으니까.’ ...

아이리스가 케이브란트와 결혼식을 올린다는 얘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 ...

그린 가족들의 반대를 받는 게 분명했다. ...

‘아니면 그린 백작이 충동적으로 아이리스를 데려갔다가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 계집애는 성격도 어둡고 재미없으니까. 얼굴 좀 예쁜 게 다잖아?’ ...

리시가 쫓겨나서 공작가로 기어들어 올 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만큼 즐거웠다. ...

“아가씨. 레이디 먼디스께서 찾아오셨어요.” ...

킬킬거리며 잡지를 보던 브리트니는, 시녀의 말에 벌떡 일어났다. ...

“캐트리나가? 들어오라고 해.” ...

브리트니와 동갑내기 친구인 캐트리나는 먼디스 후작의 영애로, 브리트니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였다. ...

적당히 멍청해서 시녀처럼 다루기에 딱 좋았기 때문이다. ...

“브린, 브린, 브린! 이거 봤어?” ...

캐트리나는 언제나처럼 호들갑스러웠다. ...

그녀의 손에는 방금 브리트니가 읽고 있던 것과 같은 잡지가 들려 있었다. ...

브리트니는 잡지를 슬그머니 쿠션 뒤로 감추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

“그게 뭔데?” ...

“이것 봐, 이것 봐. 아무것도 모를 줄 알았어. 하여간, 넌 너무 사교계 일에 무심해서 탈이야.” ...

안쓰럽다는 듯 말하는 캐트리나를 보며, 브리트니는 순진한 척 눈을 깜빡거렸다. ...

캐트리나가 잡지를 펼쳤다. ...

“이 기사!” ...

잡지 한쪽에 실린 짧지만 강렬한 기사였다. ...

[모 백작 부인의 은밀한 사생활] ...

잡지에서는 실명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기사 내내 ‘신성한 가문’, ‘신성국의 가호를 받는 가문’, ‘성유물을 지키는 가문’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누가 봐도 그린 가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여기 이 ‘엘레론드 대륙 전역이 아는 모 공작가의 꽃’이 아이리스를 말하는 거지? 신성한 가문은 그린 가문을 말하는 거고.” ...

“아…….” ...

“정말이야? 정말 아이리스, 그 애가 그린 백작이랑 결혼한 거야? 그, 그린 백작이랑?” ...

“으응…….” ...

“웬일이야? 원래 후치스 자작이랑 결혼할 예정이었던 거 아냐? 아이리스가 후치스 자작을 너무 좋아해서, 졸졸 따라다녔다면서?” ...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어쩌다 보니…….” ...

케이가 직접 찾아와서 아이리스에게 청혼했다는 말은 죽어도 할 수 없었다. ...

“아무래도 자작보다는 백작이 낫기도 하고…… 아이리스가 그린 백작의 약점을 잡고 협박했다는 얘기를 들었어. 자기랑 결혼하자고.” ...

“진짜? 그린 백작 약점이 뭔데?” ...

“그건 나도 모르지. 아니, 뭐. 이게 꼭 진짜인 건 아니고…… 그런 뉘앙스가 있었을 뿐이야.” ...

브리트니는 캐트리나와 대화할 때면 ‘이건 진짜가 아니야. 나도 잘은 몰라. 추측일 뿐이야.’라는 말을 반드시 덧붙였다. ...

그래야 나중에 문제가 됐을 때 빠져나갈 구멍이 생기니까. ...

“헐, 어쩜 그래? 아이리스 걔,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무서운 애다.” ...

“아냐, 아이리스, 착해. 그냥 헛소문이겠지.” ...

“그럴 리가 있어? 갑자기 그린 백작이 아이리스한테 결혼하자고 한 것부터가 너무 이상하잖아. 게다가…… 그린 백작이랑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바람을 피워? 아니지, 아니지. 원래 후치스 자작이랑 그런 관계였으니까, 그린 백작이랑 바람을 피운 게 되나?” ...

“에이, 아니야. 바람은 무슨…… 그래도…… 후치스 자작이 상처를 많이 받은 것 같아. 얼마 전에 여기 찾아와서 많이 울다 갔거든.” ...

“안 그래도 후치스 자작이 너희 저택에 머문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많이 울었구나.” ...

“그러게. 안쓰럽더라. 미안하기도 하고.” ...

“진짜 그렇겠다. 그런데 좀 이상하네.” ...

캐트리나가 턱에 검지를 대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

“그린 백작이랑 아이리스, 왜 결혼식을 안 올린 거지?” ...

“흐음…… 글쎄.” ...

“아, 혹시 가족들이 반대하는 거 아냐? 그린 노백작 성격이 진짜 깐깐하다잖아. 노백작 부인 성격은 말할 것도 없고.” ...

“그럴지도 모르고…….” ...

“그럴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확실해. 내가 저번에 티파티에 갔다가 제레시엔 그린을 본 적 있거든.” ...

“제레시엔 그린이라면…… 그린 백작 여동생? 그 여자는 파티 같은 데 잘 안 간다고 들었는데.” ...

“친한 친구 파티에는 종종 참석하나 봐. 하여간 그때 한 번 봤는데 무섭더라. 진짜 까칠해.” ...

“그래?” ...

브리트니는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

이거면 됐다. ...

말 많고 친구 많은 캐트리나는 이 일에 살을 붙여서 여기저기 퍼뜨리고 다닐 것이다. ...

후작 영애가 하는 이야기는 그린 백작가 시녀나 하녀들이 하는 이야기보다 강하게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힐 것이다. ...

+++

일찌감치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준 와이번 그린 노백작은 햇빛이 찬란하게 내리비치는 정원에 앉아, 자신의 부인인 헤레이나와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

노부부의 느긋한 시간은 황급히 찾아온 보좌관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졌다. ...

“이걸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보좌관이 가져온 건, 신문이었다. ...

와이번이 구독하는 신문은 아니었다. ...

보좌관이 가리킨 기사를 묵묵히 읽은 와이번이, 헤레이나에게 신문을 넘겼다. ...

기사를 쭉 읽던 헤레이나가 입을 열었다. ...

“우리가…… 케이의 결혼을 반대한 적이 있던가요?” ...

“내가 노망이 들어서 기억 못 하는 게 아니라면, 없을 거요.” ...

“그렇겠죠? 당신이랑 내가 동시에 노망이 들 리는 없으니…….” ...

헤레이나가 신문을 접어서 보좌관에게 돌려줬다. ...

보좌관이 난처한 표정으로 물었다. ...

“신문사 쪽에 항의할까요?” ...

“항의를? 무슨 이유로?” ...

헤레이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

“그거야…… 이런 헛소문을 사실인 듯이 실었으니까요.” ...

“놔둬요. 헛소문에 대응해봐야 그것이 진실이라 여겨질 뿐이니.” ...

“하지만…… 지금도 사람들이 진짜일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

“믿는 자들의 목소리가 클 뿐, 믿지 않는 자들이 더 많을 거예요.” ...

“그거야 그렇지만 걱정입니다. 혹여 여기 실린 기사가 진실이라면…….” ...

헤레이나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는 바람에, 보좌관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

“나는 우리 아들이 부모에게 말도 없이 멋대로 결혼하는 아이는 아닐 거라고 믿어요. 그렇죠, 여보?” ...

보좌관은 ‘두 분의 아들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습니다.’라고 생각했지만, 당연히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

+++

젠의 인내심이 서서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

하루 이틀이면 돌아올 줄 알았던 케이가 돌아오지 않는 데다가, 그린 백작 부인의 불륜 기사가 신문에까지 났기 때문이다. ...

신문에 실린다는 건, 잡지에 실리는 것과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

아무나 만들어서 운영할 수 있는 잡지사와 달리, 신문사는 왕실이나 황실, 혹은 연합 등, 정부의 허락이 있어야만 설립할 수 있었다. ...

그만큼 신뢰도 측면에서, 잡지를 월등히 뛰어넘었다. ...

안 그래도 폭발 직전인 젠을 더욱 거슬리게 하는 건, 한때 케이의 전속 시녀였다가 리시의 전속 시녀가 되었다는 질레트 메르디의 존재였다. ...

케이도, 리시도 없는 그린 백작저에서, 질레트는 마치 안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활개를 치며 다녔다. ...

“다들 뭐 하는 거야? 늦어도 오늘 저녁 전에는 백작님이 돌아오신다는데, 청소 상태가 이래서야 되겠어?” ...

하녀들을 나무라는 질레트를 계속 지켜보다가는 욕설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젠은 정원으로 나왔다. ...

마침 나단이 총 하나를 손가락에 걸고 휙휙 돌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

“나단. 대체 저 안에서 안주인 행세를 하는 여자는 뭐야?” ...

“하, 진짜. 몇 번을 말해야 해? 질레트 메르디. 형수님의 전속 시녀!” ...

벌써 17번째 같은 질문을 받은 나단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

“그런 의미가 아닌 거 알잖아. 대체 왜 저러는 걸 그냥 놔두는 거야?” ...

“그럼 어쩌는데? 저래 봬도 형수님 시녀인데, 저 엉덩이를 걷어차 주기라도 해?” ...

“걷어차는 거, 잘하잖아.” ...

“아무리 나라도 아무나 걷어차고 그러진 않거든?” ...

“어릴 때는 우리 아빠도 걷어차려고 했으면서…….” ...

“너도 어릴 땐 노백작님 걷어차고 그랬잖아. 지금도 막 걷어차고. 아, 이것 봐, 이것 봐. 또 걷어차려고 하네.” ...

나단이 재빠르게 젠의 발길질을 피했다. ...

“야, 대장 오신다!” ...

그때, 월라스가 정문을 향해 달려가며 외쳤다. ...

제이미와 유진, 그 외의 저택 사람들도 백작 내외를 맞이하기 위해 대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

젠은 달려가려는 나단의 소매를 잡았다. ...

“야, 왜?” ...

“숨어!” ...

“뭐?” ...

젠은 나단을 끌고 정원 목 사이에 몸을 감췄다. ...

“이거 놔, 젠. 나도 가서 대장이랑 형수님한테 인사할 거라고.” ...

“가만히 있어, 좀!” ...

“하, 진짜 영문을 모르겠네!” ...

젠은 리시의 꾸밈없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

일단 남편의 가족이라고 하면 잘 보이고 싶어서 내숭 떠는 여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 ...

사교계에 관심 없는 젠의 귀에까지 들렸던 그 명성이 얼마나 진짜인지, 그 주인공이 얼마나 가녀린 꽃인지, 조용히 관찰하고 싶었다. ...

이윽고 케이와 리시의 모습이 젠의 눈에 들어왔다. ...

리시의 얼굴보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신문이 먼저 보였다. ...

문득 리시가 정원의 넓은 공터에서 걸음을 멈췄다. ...

마중 나온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그녀를 쳐다봤다. ...

케이의 그림자들을 제외하고는, 리시에게 고운 시선을 보내는 이가 별로 없었다. ...

그도 그럴 것이, 리시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자기들이 경외하는 주인과 가문의 명성에 흠집을 냈으니,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

리시도 당연히 고용인들의 시선에 담긴 분위기를 느낄 것이다. ...

하지만 리시는 고개를 숙이지도 않고, 눈을 돌리지도 않았다. ...

그녀는 우아한 미소를 띤 채 고용인들을 쭉 둘러보더니, 신문을 들어서 살짝 흔들었다. ...

“재미있는 기사를 봤어요.” ...

몇몇 고용인들이 움찔했다. ...

젠은 리시가 기사에 대해 어떻게 변명할지 궁금했다. ...

“나는.” ...

리시의 시선이 질레트에게서 멈췄다. ...

“이 기사의 출처가 우리 집안 사람이 아닐 거라고 믿어요.” ...

거기까지 말하고, 리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걷기 시작했다. ...

기사 내용에 대한 변명은 없었다. ...

하지만 젠은 그녀의 태도를 보고 알 수 있었다. ...

‘기사는 거짓이구나.’ ...

아마 그 자리에 있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들 역시 눈치챘을 것이다. ...

‘그리고 기사는 이 집안의 사람 중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왔구나.’ ...

누구의 입에서 흘러나왔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

적어도 멀리 떨어져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젠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

그제야 젠은 리시의 얼굴을 제대로 눈에 담았다. ...

하얗고 자그마한 얼굴, 완벽하게 자리 잡은 이목구비와 보석처럼 맑은 연보라색 눈동자. ...

사내 같은 차림을 하고, 흔들림 없이 정면을 오시하며 천천히 걷는 그녀의 당당한 모습이, 젠의 눈에 새겨졌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는 칭송조차 모자랄 만큼, 그녀는 밝은 빛을 뿜어냈다. ...

“대체…….” ...

그들이 멀어진 후, 젠이 입을 열었다. ...

“저런 여자가 왜 우리 오빠 같은 거랑 결혼한 거지?” ...

나단이 인상을 찌푸리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

(17) 내 남편의 여동생. ...

“백작님의 가족이 찾아왔다고요?” ...

리시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크리시나가 젠의 방문 사실을 알렸다. ...

리시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

남편의 가족. ...

지난 삶, 후치스 자작의 가족들과의 관계는 끔찍했다. 시부모와는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차라리 위틀로 공작가가 더 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

그들은 리시가 주제도 안 되는데, 자신의 대단하고 잘난 아들을 홀려서 결혼했다고 믿는 듯했다. ...

알포드의 누나인 줄리안느는 발터 백작의 아내였는데, 밖에서와 안에서의 행동이 완전히 다른 여자였다. 밖에서는 고상하고 상냥한 발터 백작 부인이었지만, 안에서는 신경질적이고 잔인한 면이 있었다. ...

줄리안느는 알포드의 저택에 방문할 때마다 집안 상태를 점검했다. 줄리안느가 구석구석 살펴보는 동안, 시녀처럼 얌전히 그녀의 뒤를 따라다녀야만 했다. ...

저택 청소는 리시가 해야 할 일이 아니었음에도, 창틀에 먼지 한 톨이라도 발견되면 리시의 탓으로 돌렸다. ...

-너는 안주인이 돼서 하는 일도 없이 이런 거 하나 제대로 관리 못 하니? 위틀로 공작가에서 꽃으로만 사느라, 이런 건 하나도 못 배운 거야? 기본이 안 됐어, 기본이. ...

그러면서 시녀에게 회초리를 가져오라 했다. ...

-잘못했으면 매를 맞아야지. ...

짜악, 짜악, 날카롭게 종아리를 내리치던 가느다란 회초리의 통증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기억났다. ...

연약한 흰 피부에 붉은 줄이 생기고, 가끔 피가 터질 때도 있었다. ...

종아리를 타고 주르륵 흐르는 피. ...

줄리안느는 그걸 보며 당황하기는커녕,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러기를 바랐다는 듯이. ...

리시의 종아리가 부르튼 걸 보고도 알포드는 줄리안느의 편을 들었다. ...

-누님은 예의범절을 중요시해. 넌 배운 게 별로 없잖아. 말만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지…… 네가 그 집안에서 그런 취급을 받는 줄 알았으면 너랑 결혼 같은 거 안 했을 텐데. 감사한 줄 알아, 너 같은 걸 버리지 않고 옆에 두는 거. ...

시부모도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

리시는 눈을 감고 가빠지려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

‘다 지나간 일이야. 이번에는 그럴 일 없어.’ ...

케이에게도 가족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

성유물의 수호자인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이 유명한 만큼, 그의 가족들 또한 유명했다. ...

선대 백작인 와이번 그린과 그의 아내 헤레이나. ...

그린 가문의 차남이자 신성국 소속 성기사단의 부단장인 엘드허트. ...

그리고 막내 제레시엔. ...

리시가 알기로 제레시엔은 사교 모임에는 잘 참석하지 않지만, 모두가 친해지고 싶어 하는 인물이었다. ...

‘제레시엔…….’ ...

지난 삶에서, 리시는 파티에 참석했다가 제레시엔을 본 적이 두어 번 있었다. ...

하지만 멀리에서 봤을 뿐, 대화를 나눈 적은 없다. ...

‘차가운 느낌이었는데…….’ ...

‘지난 삶’이라고는 해도, 리시에게는 고작 한 달 전의 일이었다. ...

죽기 직전에도 줄리안느에게 아이를 못 낳는 문제로 매를 맞았던 터라, ‘남편의 가족’에 대한 트라우마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심장이 얼마나 쿵쿵 뛰는지, 관자놀이까지 두근거릴 지경이었다. ...

“아이리스 님, 괜찮으세요? 낯빛이 많이 안 좋으신데…….” ...

리시는 꿈에서 깬 것 같은 표정으로 멍하게 크리시나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

‘그래, 난 아이리스 위틀로도, 아이리스 후치스도 아니야. 아이리스 그린이지.’ ...

아이리스 위틀로와 아이리스 후치스는 부당하게 매를 맞아도 꾹 참았지만, 아이리스 그린은 다르다. ...

“아무래도 여독 때문에 몸이 안 좋으신가 봐요. 의원을 부를까요?” ...

크리시나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

크리시나의 어깨너머로, 질레트가 입술을 비쭉거리는 게 보였다. ...

‘의원은 무슨. 약한 척 되게 하네.’라는 표정이었다. ...

에르웰은 ‘저걸 그냥 죽여버릴까?’라는 눈빛으로 질레트를 쏘아보고 있었지만, 리시는 자신이 오해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유명한 루테크 가문의 영애가 그런 험한 생각을 할 리는 없으니까. ...

“괜찮아요. 날이 조금 더워서.” ...

“무리하지 않으시는 게 좋아요, 아이리스 님. 오늘 저녁에 제레시엔 님과 함께 식사하게 되실 텐데……. 제레시엔 님이 조금…….” ...

크리시나가 말끝을 흐리다가 덧붙였다. ...

“백작님의 가드들이 제레시엔 님 앞에서 쩔쩔매더라고요.” ...

에르웰이 동감한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

리시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

하지만 케이의 가족들을 평생 피하면서 살 수는 없었다. ...

‘게다가…….’ ...

죽음을 유영할 때에, 리시는 케이의 가족들이 죽는 광경을 보았다. ...

케이의 부모도, 남동생도, 여동생도, 여생을 편안하게 살다가 죽는 게 아니었다. ...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지만…….’ ...

죽음 속에서 본 광경이 정말로 벌어질 미래라면, 바꿀 수 있는 부분은 바꿔야만 한다. ...

‘일단.’ ...

리시는 두려움을 버리고 평정심을 되찾았다. ...

‘내가 그들을 판단하고 나서.’   ...

+++

결혼이라는 것이, 혼자 멋대로 진행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케이도 알고 있었다. ...

연애결혼이 유행한다지만, 아직은 가문과 가문 간의 중요한 일이라는 것쯤은 케이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다만. ...

“새까맣게 잊었다.” ...

노백작 내외에게도 결혼 사실을 알리지 않은 거냐고 묻는 제이미에게, 케이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

제이미가 기가 막혀서 케이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말했다. ...

“대장이 그렇게 정신이 빠져 있으면, 제가 더 힘들어지겠지요?” ...

“미안, 미안. 그런데 정말…… 새까맣게 잊었어.” ...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

“그러게…….” ...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케이도 알 수 없었다. ...

리시가 후드를 뒤집어쓰고 찾아온 그날부터, 케이의 머릿속에는 대부분 리시 생각뿐이었다. ...

리시의 정체는 뭘까? ...

왜 그렇게 이상할 정도로 신비롭게 느껴질까? ...

그렇게 오만하고 강한 모습을 보이는데도, 가끔씩 부서질 듯 위태롭게 보이는 걸까? ...

언제쯤에야 마음을 열어줄까? ...

뜨거워진 리시는 어떤 모습일까? ...

침대 위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까? ...

우리의 첫날밤은 어떨까? ...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꽉 채워서, 가족들에게 결혼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

“젠도 젠이지만…… 노백작님과 노부인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가만히 계실 것 같아요?” ...

“흐음. 난감하군.” ...

“난감한 정도가 아니겠지요?” ...

제이미가 미소를 띤 채,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

“일단 젠이랑 얘기 좀 해야겠군.” ...

자신의 여동생이 얼마나 드센 성격인지는 케이도 잘 알기에, 젠부터 달랠 요량이었다. ...

“소용없으니 앉아요, 대장.” ...

제이미가 검지로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

“난 가끔 네가 대장인지, 내가 대장인지 헷갈리더라. 젠이 뭐래?” ...

“장식으로 대가리를 달고 다니는 오빠 따위는 길게 보고 싶지도 않으니, 저녁 먹을 때나 불러!” ...

“…….”

“……라고 하셨지요.” ...

“걔는 나이도 찼는데 말투가 왜…….” ...

“그럴 만도 하겠지요?” ...

케이는 입을 다물었다. ...

케이가 없는 동안 젠이 그림자들을 얼마나 닦달했을지 안 봐도 훤했다. ...

변명할 말이 있을 리가 없다. ...

“저녁 식사 시간이 될 때까지, 노백작님께 편지나 쓰세요, 대장. 지금이라도 결혼에 대해 말씀드려야 착한 아들이겠지요?” ...

 

+++

“예고도 없이 내 동생이랑 저녁을 함께하게 돼서 미안해요, 리시. 아, 그 드레스. 잘 어울리네요.” ...

만찬 전, 리시를 데리러 온 케이가 말했다. ...

리시는 화려하지 않지만 우아한 느낌을 주는, 짙은 와인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

“미안할 거 없어요. 당신도 몰랐던 일이니까.” ...

리시는 케이의 팔에 살짝 손을 걸치고 복도를 걸었다. ...

“그…… 미리 말해둘 게 있어요.” ...

“말해요.” ...

“내 동생이, 음. 두 명인데, 오늘 온 애는 여동생으로, 우리 집 막내예요.” ...

“그렇군요.” ...

“그래서 애가 철딱서니가 없기도 하고…… 성격이 아주 좀…… 뭐라고 말해야 하나…….” ...

“지랄 맞죠.” ...

라는 대답은, 뒤에서 들려왔다. ...

언제 온 건지, 나단이 둘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

리시는 나단을 볼 때마다, 여자라고 착각하곤 했다. ...

리시와 비슷한 체구와 희고 예쁜 얼굴, 약간 긴 연한 금색 머리칼. ...

나단이 한 손으로 성가신 듯 머리를 쓸어넘기며 덧붙였다. ...

“저도 저녁 같이 먹을래요, 대장. 그 지랄 맞은 계집애가 형수님한테 무슨 소리를 할지 모르니까.” ...

나단이 제 여동생을 ‘지랄 맞은 계집애’라고 하는데도, 케이는 지적하지 않았다. ...

케이와 그림자들의 관계가 평범한 귀족과 기사의 관계가 아니었다는 게 떠올랐다. ...

리시가 알기로, 케이의 그림자들은 케이의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

“그게 좋겠군.” ...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

리시는 간신히 떨쳐낸 불안감이 다시 차오르기 시작했다. ...

제레시엔이 대체 어떤 성격이기에, 다들 이렇게 그녀가 범할 무례를 걱정하는 걸까? ...

“형수님.” ...

나단이 얼른 리시의 옆으로 와서 말했다. ...

“제레시엔이 무슨 소리를 하든, 그냥 흘려서 들으세요. 딱히 귀담아들을 내용은 없을 거예요.” ...

“그런가요?” ...

“네. 걔는 진짜…… 속에 있는 말을 돌려서 말할 줄 모르는 애거든요.” ...

리시가 옅게 웃자 나단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

“왜 웃으세요?” ...

“나단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서.” ...

나단이 고른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형수님도 만만찮은데요.” ...

나단은 웃으니까 더 여자처럼 보였다. ...

“아무튼, 형수님. 듣기 싫은 얘기는 그냥 흘려들으시고, 듣기 좋은 소리만 제대로 들으세요. 젠도 그런 성격이라서, 형수님이 그런다고 뭐라고 못 할 거예요. 뭐라고 하면 제가 걷어차 줄게요.” ...

“걷어차다니…… 레이디인데.” ...

“레이디요? 제레시엔이요?” ...

나단이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우리 형수님 말하는 것 좀 보세요.’ 하듯이 케이를 쳐다봤다. ...

케이가 말했다. ...

“리시. 제레시엔은 레이디라기보다…… 대장부입니다.” ...

+++

저녁 만찬을 갖기로 한 식당에는, 젠이 먼저 와 있었다. ...

긴 테이블에서 긴 쪽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젠이,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

리시는 케이의 팔에 손을 걸치고, 천천히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

리시의 왼쪽 옆에는 나단이 있었다. ...

젠은 나단이 함께 온 걸 보고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

케이가 상석으로 향하고, 리시는 젠의 맞은편에서 멈췄다. ...

젠이 리시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케이를 돌아봤다. ...

“자리 바꾸지?” ...

“뭐?” ...

“오빠가 뭐나 된다고 상석이야? 오늘은 오빠 아내가 주인공 아니야?” ...

생각지 못한 말에, 리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

케이도 마찬가지였다. ...

“아, 그렇군.” ...

케이가 순순히 대답하더니 리시와 자리를 바꿨다. ...

리시는 상석에 앉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어색한 기분으로 상석으로 향했다. ...

리시가 의자를 앞에 두고 서자, 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이쪽은…….” ...

케이가 소개를 하려는데, 젠이 검지를 올려 케이의 말을 끊었다. ...

“오빠 말고, 오빠 아내 목소리를 듣고 싶은데.” ...

리시는 당황스러웠다. ...

젠이 뭘 원하는 걸까? ...

저건 신종 괴롭힘인가? ...

젠이 리시를 보며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

어서 네 입으로 자기소개를 해보라는 듯이. ...

리시는 손해 볼 것도 없으니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

“반가워요. 나는 아이리스 그린. 얼마 전에 제레시엔 양의 오라버니인 케이브란트 그린과 혼인신고를 했어요. 그전에는 아이리스 위틀로였고요.” ...

“나는 제레시엔 그린이에요. 젠이라고, 편하게 불러요.” ...

젠이 표정 없이 말했다. ...

그리고 덧붙였다. ...

“새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

이번에는 젠에게 표정이 생겼다. ...

리시보다 나이가 많은 시누이는, 공 던져주기를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

(18) 좋아서. ...

새언니라고 부르고 싶다는 젠의 표정을 보니,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진심인 것 같았다. ...

상석에 앉힌 것도 정말로 리시를 주인공이라고 생각해서이고, 오빠 아내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한 것도, 정말 리시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이고. ...

‘내가 너무 앞서나가는 걸까?’ ...

리시는 표정을 허물어뜨리지 않기 위해 애쓰며 말했다. ...

“네, 좋아요. 새언니라고 불러도.” ...

젠이 언제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었냐는 듯, 싸늘한 무표정으로 되돌아갔다. ...

‘네까짓 게 감히 내 오빠랑 결혼하다니!’라는 분위기로, 젠이 물었다. ...

“새언니는 왜 우리 오빠 같은 거랑 결혼한 거죠?” ...

“젠.” ...

“오빠는 조용히 해봐. 나, 지금 새언니랑 얘기하잖아.” ...

“일단 식사라도 하면서…….” ...

“누가 하지 말래? 식사 내오라고 해. 아, 새언니도 드시면서 얘기하셔도 돼요. 새언니, 대체 왜 우리 오빠 같은 거랑 결혼했어요?” ...

“그게…….” ...

당신의 오빠가 지난 삶에서 얼마나 큰 노력을 했고, 얼마나 처절하게 죽어갔는지 알아서. ...

당신의 오빠가 지난 삶에서 딱 한 번 나와 마주쳤을 때, 내게 베풀어준 선행을 잊을 수 없어서. ...

당신의 오빠와 함께라면 내 삶이 지난 삶과 달라질 것 같아서. ...

또한, 당신의 오빠의 마지막 또한, 그토록 잔혹하고 처절하지 않게 만들어주려고. ...

그런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

리시는 흘끔 케이를 쳐다봤다. ...

케이는 리시가 뭐라 대답할지 궁금하다는 듯, 흥미로운 표정으로 리시를 관찰하고 있었다. ...

“좋아서.” ...

리시가 케이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

“구름 낀 하늘 같은 저 눈동자가. 그림을 그린 듯한 눈썹이. 잘 빚은 것 같은 턱이.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바람 부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

리시는 그동안 케이를 보면서 좋았다고 생각한 것들을 열거했다. ...

리시의 말이 계속되는 동안, 왜인지 케이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케이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

내 눈의 착각일까? ...

케이의 귓불이 빨개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케이가 슬그머니 손을 올려 자신의 입가를 가리는 걸 보며, 리시가 말을 맺었다. ...

“그런 것들이 참으로 좋아서요. 평생 보고 싶어서요.” ...

리시가 젠을 돌아봤을 때, 젠의 눈동자는 리시가 아닌 케이를 향해 있었다. ...

젠은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표정이었고, 그건 나단도 마찬가지였다. ...

리시는 저들이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다. ...

내가 무슨 말을 잘못한 걸까? ...

“젠?” ...

“아…… 예에. 어…… 예에에…… 그렇군요…… 음, 새언니. 그래요. 어, 음. 사람마다 보는 눈도, 취향도 다르니까요. 네, 그럴 수 있죠. 아무렴요, 그럴 수 있고말고요.” ...

여유를 되찾은 젠이 케이를 보며 놀리듯 웃었다. ...

“좋겠네, 오빠. 구름 낀 하늘 같은 눈동자에 그림을 그린 듯한 눈썹, 잘 빚은 턱이랑…….” ...

“젠.” ...

나단이 젠의 말을 끊었다. ...

“나, 속이 좀 안 좋은데…….” ...

“아, 미안. 그만할게. 식사를 앞에 두고, 내가 너무했네. 인정.” ...

그들이 영문을 알 수 없는 반응을 보이는 동안, 리시는 눈동자만 또르르 굴리며 그들의 얼굴을 쳐다봤다. ...

그러다가 케이와 눈이 마주쳐서, 입 모양으로만 물었다. ...

‘내가 뭐 잘못 얘기했어요?’ ...

케이가 싱긋 웃으며, 식탁 아래쪽으로 슬며시 엄지를 들어 보였다. ...

기가 막히게 그 장면을 놓치지 않은 젠이 외쳤다. ...

“뭐야, 그 엄지? 아, 그거구나? 오빠가 새언니한테 그렇게 대답하라고 강요했지? 외우게 한 거지?” ...

“아! 그럼 그렇지!” ...

나단이 이제야 이해된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

“와, 미쳤나 봐. 본인 자랑을 아내에게 외우게 시키고…… 와, 진짜 역겹네.” ...

그런 게 아닌데. ...

리시가 케이를 위해 변명해주려 했지만, 케이가 눈짓으로 말렸다. ...

‘그냥 둬요, 괜찮으니까.’ ...

젠은 ‘아내에게 제 자랑을 읊어대는 남자’가 얼마나 매력 없고 끔찍한지에 대해 한참을 떠들어댔고, 나단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젠의 말에 찬사를 표했다. ...

케이가 자기 얘기가 아니라는 듯 수프를 먹기 시작했기에, 리시도 스푼을 들었다. ...

오늘 저녁은 제대로 먹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

리시를 대하는 젠의 태도는, 리시가 아는 ‘남편의 가족’과 완전히 달랐다. ...

오히려 리시를 좋아하는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했다. ...

‘남편의 가족’과 있는 시간이 불편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오히려 편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

이런 가족도 있을 수 있구나. ...

제레시엔도 줄리엔느처럼 밖에서와 안에서의 모습이 달랐지만, 좋은 쪽으로 달랐다. ...

입을 다물면 찾아오는 싸늘한 표정도, 화가 나서가 아닌 평범한 무표정일 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그런데 오빠.” ...

한동안 말없이 식사하던 젠이 침묵을 깨뜨렸다. ...

“아무리 결혼식을 작게 올렸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가족들을 초대 안 해? 누구누구 초대했어? 설마 둘만의 결혼식이었어?” ...

“……결혼식, 안 했는데.” ...

“어? 뭘 안 해?” ...

“결혼식.” ...

“어?” ...

젠이 어리둥절하게 케이를 쳐다봤다. ...

큼지막한 스테이크를 썰던 나이프가 허공에서 멈췄다. ...

케이는 그 나이프가 자기 목에 날아와 꽂힐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듯, 나이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여상히 대꾸했다. ...

“혼인신고만 했다.” ...

젠이 리시를 돌아봤다. ...

정말이냐는 눈빛이기에, 리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타앙-! ...

젠이 나이프와 포크를 거칠게 내려놓으며 벌떡 일어났다. ...

케이가 미간을 좁혔다. ...

“젠, 제발 예의를…….” ...

“예의를 지키지 않은 건 오빠야! 어떻게 결혼식을 안 하고 혼인신고만 해?” ...

“그게 그렇게까지 흥분할 일은 아니잖아, 젠.” ...

“이건 이렇게까지 흥분할 일이야, 뚱땡이 개.” ...

“너, 언제의 별명을…….” ...

케이가 얼굴을 붉혔다. ...

뚱땡이 개라는 별명이 있었다니. ...

리시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

“결혼식은 여자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문제야. 생략해서는 안 되는 거라고.” ...

케이와 나단이 정말이냐는 듯 리시를 돌아봤다. ...

“자꾸 새언니 쳐다보지 마! 오빠가 그 모양이니까, 새언니도 결혼식 하자고 말을 못 한 거겠지.” ...

“아니요, 젠. 나는 결혼식 같은 거 하지 않아도 돼요.” ...

“새언니. 그러면 안 돼요.” ...

젠은 단호했다. ...

“이 세상에는 취향이 특이하고, 보는 눈이 무척이나 낮은 여자들이 굉장히 많아요. 아, 새언니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요. 아무튼, 그런 여자들이 무수히 많아서, 우리 오빠가 인기가 많거든요.” ...

그제야 리시는 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다. ...

“그 여자들은 새언니를 질투할 거고, 결혼식조차 올리지 못한 일로 새언니가 우리 오빠에게 괄시받는다고 떠들어댈 거예요.” ...

“아…… 그렇군.” ...

“아, 그렇군이 아니야, 오빠. 백작 노릇을 한 지 몇 년이나 됐는데, 그 정도는 그 머리로 생각했어야지. 그 머리통을 장식으로 달고 있다는 걸, 새언니도 눈치채면 어쩌려고.” ...

성유물의 수호자, 명예가 드높아 높은 신분의 귀족들조차 함부로 말을 걸지 못하는 케이브란트 그린. ...

그가 집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이미 리시도 알아버렸다. ...

뚱땡이 개. ...

장식품인 머리통. ...

한참 케이의 어깨 위에 달린, 아무 쓸모없는 장식품에 대해 한참 떠들던 젠이 리시를 휙 돌아봤다. ...

“새언니, 나한테 맡겨요.” ...

“무엇을?” ...

젠이 해사하게 웃었다. ...

지난 삶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젠의 미소. ...

참으로 눈부시다고 생각하는데, 젠이 대답했다. ...

“꽃 중의 꽃 아이리스와 뚱땡이 개의 결혼식 준비.” ...

 

+++

저녁 식사가 끝난 후에야, 케이는 젠과 독대를 할 수 있었다. ...

케이의 방에 불려간 젠은, 건방지게 다리를 테이블에 올리고 소파에 늘어지듯 앉아 케이를 쏘아봤다. ...

“젠. 리시를 처음 보는 자리에서, 무례했다.” ...

“새언니한테?” ...

“나한테.” ...

“……그게 뭐?” ...

“네 새언니가 날 어떻게 생각하겠냐?” ...

“하긴. 오빠의 그 머리가 장식품이라는 걸 눈치채서 도망칠지도 모르겠네.” ...

“……젠. 리시 앞에서 날 뚱땡이 개라고 부르는 건 그만둬.” ...

“뭐, 어때? 그렇게 부른다고 오빠가 수인일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 할 텐데.” ...

리시는 이미 케이가 수인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케이는 젠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다. ...

리시가 그 사실을 안다는 이유로, 젠이 그녀를 경계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

“그런 문제가 아니야.” ...

“아, 오빠가 어릴 때 뚱땡이였다는 거 들킬까 봐?” ...

화살촉처럼 찔러오는 말에, 케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잠시 그런 적이 있었다. ...

케이는 태어난 순간부터 변신할 수 있었다. ...

그게 이상한 줄 모르고 살다가, 머리가 좀 크고 나서야 수인이 배척받는다는 걸, 그 사실을 들키면 죽임을 당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

자신이 이 세상이 용납하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에, 케이는 낙담하고 절망에 빠졌다. ...

그때부터 늑대의 모습을 한 채 집에 틀어박혀, “나 같은 건 인간이 아니야.”라며 먹고 자기만 했다. ...

당연히 살이 쪘고, 동생들은, 아니, 젠은 그런 케이를 놀려댔다. ...

뚱땡이 개라고. ...

젠에게는 악의가 없었지만, 오히려 애정을 듬뿍 담은 놀림이었지만, 어릴 때의 케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

‘그래, 뚱땡이 개 따위는 죽어야지, 살아서 뭐해.’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

“괜찮아, 오빠. 오히려 지금보다는 뚱땡이 개일 때가 훨씬 귀여웠어. 동글동글하고, 굴러다니고…….” ...

“그 정도는 아니었다.” ...

케이가 으르렁거리듯 말했지만, 젠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

“결혼식 준비는 못 해도 한 달 정도는 걸릴 거야. 이 저택에는 사내놈들만 득실거려서 뭐가 없거든. 여기저기 사람을 보내서 사 와야 할 게 많아. 인부를 부르기도 해야 하고.” ...

“넌 티파티에도 안 가는 애가 그런 걸 할 수나 있겠냐?” ...

“이래 봬도 안목은 좋거든. 그런 걸 아주 좋아하는 친구한테 도움을 받기도 할 거고.” ...

“그래, 멋대로 해.” ...

케이는 반성하는 중이었다. ...

자신이 사교계에 관심이 없기에,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리시가 귀부인들에게 어떤 소리를 들을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

“돈은 얼마나 써?” ...

“원하는 대로.” ...

“엄청 쓸 건데?” ...

“다 써버려도 돼.” ...

“이야, 우리 오빠. 다 컸네. 자기 여자를 위해서 빈털터리가 될 각오도 하고.” ...

“아니, 빈털터리가 될 생각은……!” ...

젠이 한 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는 걸 깨달은 케이가 젠을 말리려 했지만, 젠은 이미 방을 나간 후였다. ...

+++

젠이 케이를 빈털터리로 만들겠다고 선언한 후로부터 며칠 뒤. ...

신성국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

세간에 떠도는 그린 백작 부인의 과거와 불륜에 관한 조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

(19) 이혼하겠다. ...

브리트니는 영애들끼리 모인 티파티에서, 제레시엔이 뒤늦게 케이의 결혼을 알고는 몹시 분노하여 그린 백작가로 찾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

“제레시엔 양이 내 동생한테 해코지라도 하면 어떡하죠?” ...

걱정하는 척했지만 웃음을 참으라 힘들었다. ...

“일이 터져도 크게 터질 거예요. 제레시엔이 정말로 화가 났거든요. 제레시엔은 한번 화가 나면 정말 무서워져서…….” ...

그 자리에 있었던 영애가 말했다. ...

“그나저나 그린 백작 부인도 안됐네요.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채, 몰래 혼인신고만 했다니……. 그거 완전히 정부 취급 아닌가요?” ...

“차라리 정부가 낫죠. 정부는 사랑이라도 받으니까. 그건 뭐, 아무리 정략결혼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그린 백작님은 아내에게 그리 모지신지…….” ...

그렇게 말하는 어느 백작의 영애는, 내용과 달리 고소해서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

“아, 브리트니 양 앞에서 미안해요. 동생 일인데…….” ...

“아니에요. 나도 동생이 걱정돼서……. 허구한 날 울고 있지나 않을지……. 애가 좀 어두운 편이거든요. 말도 없고. 그래서 그린 백작님이 영 마음에 안 차시나?” ...

“그럴지도 모르죠.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는 얘기에 결혼은 했는데, 애교도 없고 음침하면 실망스러울 법도 하죠. 자고로 남자들은 침대 위에서는 뜨겁고, 평소에는 달콤말랑한 여인을 좋아하지 않겠어요?” ...

“그래도 알포드 자작에게는 달콤말랑한 여인인가 보던데?” ...

영애들이 까르르 웃었다. ...

이 자리에 모인 영애들 대부분이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에게 눈독을 들여왔기에, 느닷없이 그린 백작 부인 자리를 꿰찬 아이리스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

“이 자리에 넬라니커스 제널 백작 부인도 있었더라면 좋을 뻔했어요.” ...

어느 영애의 말에 브리트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제널 백작 부인은 왜요?” ...

사교계의 여신, 넬라니커스 제널 백작 부인. ...

그녀는 모든 영애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

어린 나이에 백작 부인이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교계를 단단히 틀어쥐었다. ...

황후조차 넬라니커스의 사교 모임에 초대를 받고 싶어 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

제널 백작 부인의 이름을 꺼낸 영애가 말했다. ...

“제널 백작 부인이 결혼 전에 그린 백작님을 굉장히 좋아했잖아요. 얼마 전, 파티에 그린 백작님이 참석했을 때도 열렬한 시선을 보내시더라고요.” ...

+++

영애들이 티파티에서 신나게 아이리스에 관한 험담을 나누고 있을 때, 넬라니커스 제널 백작 부인은 자기 앞에 얌전하게 앉아 있는 제레시엔 그린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

“제레시엔 양이 내게 그런 청을 해올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님의 결혼식 준비를 도와달라니.” ...

이윽고 넬라니커스가 서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

젠이 우아하게 찻잔을 들었다. ...

“그야 그린 가문의 명성이 있으니, 중요한 파티를 열 때 사교계의 여신인 제널 백작 부인께 청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

“그린 가문의 파티를 돕는 건, 우리 제널 가문에게도 영광이겠지만…….” ...

넬라니커스도 찻잔을 들었다. ...

“내가 여는 파티는 명성만 있을 뿐, 돈은 없는 그린 가문과는 어울리지 않을 거예요.” ...

“어머나, 무슨 그런 망발을. 제널 백작 부인이 모르셔서 하는 소리예요. 오라버니께서 통 크게도 결혼식 준비에 전 재산을 털어도 좋다고 하셨답니다.” ...

“어머…… 그 옹졸한 구두쇠 그린 백작님께서요?” ...

“네, 그 옹졸한 구두쇠 그린 백작님께서요.” ...

동시에 찻잔을 입술에 댄 두 여자가 눈을 맞추더니, 키득키득 웃었다. ...

넬라니커스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

“아, 진짜 못 하겠어, 젠. 우리 그냥 아카데미에 있을 때처럼 하자.” ...

“그래, 넬스. 네가 고상 떠는 거 보면서 차 마시는 거, 쉽지 않네.” ...

젠과 넬스는 아카데미 시절 같은 전공을 한 동기인 데다가,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부터 친구이기도 했다. ...

“안 그래도 케이의 결혼 소문을 듣고 궁금한 게 많았어. 정말로 케이가 결혼한 거야?” ...

“그렇대. 결혼식은 안 올리고 관청에 혼인신고만 홀딱 해버렸다더라.” ...

“웬일이니. 너희 오빠는 진짜 변함이 없네. 여자 마음을 하나도 모르고, 머리를…….” ...

“장식으로 달았지.” ...

넬스가 이제 백작 부인인지라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젠이 대신해주었다. ...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야? 하필이면 상대가 위틀로 공작가의 꽃 아이리스라니. 정말이야? 정말 위틀로의 꽃이랑 결혼한 거야?” ...

“응. 정말로. 진짜로.” ...

“예쁘니?” ...

“초상화 봤으면 알잖아.” ...

“초상화는 미화시키는 경우가 많잖아.” ...

“초상화가 우리 새언니의 미모를 못 담아. 반의반도 못 담았어.” ...

“웬일. 진짜? 초상화만 봐도 어마어마하던데.” ...

“더 어마어마해. 빛나. 번쩍번쩍.” ...

“어머나. 그런 분이 왜…… 케이랑 결혼했대? 설마…… 강압? 납치? 강요?” ...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넬스는 케이를 끔찍이 싫어했다. ...

어릴 때부터 그린 백작가에 드나들며 자주 마주친 케이는, 넬스만 보면 끔찍한 것을 본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

케이가 한창 자신이 수인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서, 그 사실이 들킬까 봐 외부인이 드나드는 걸 두려워할 때의 일이었다. ...

그 사실을 모르는 넬스로서는, 눈만 마주치면 인사도 하지 않고 휙 돌아서는 케이가 싫을 수밖에 없었다. ...

자신이 보기만 해도 눈살 찌푸릴 만큼 못생겼나, 라는 자격지심이 생길 지경이었다. ...

나이가 들면서는 괜찮아졌지만, 케이가 서글서글하게 인사를 해올 때마다 어릴 때가 떠올라,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노려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나도 그런 쪽으로 생각하긴 하는데, 우리 새언니가 또 착하기는 얼마나 착한지…… 자기가 우리 오빠를 대단히 좋아해서 결혼했다더라. 그렇게 우리 오빠 기를 살려주려는 거겠지.” ...

“그래?” ...

“구름 낀 하늘 같은 눈동자랑 그림을 그린 듯한 눈썹, 잘 빚은 것 같은 턱선이랑…….” ...

“아니. 그만.” ...

넬스가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

“안 들을래.” ...

“응, 나도 끝까지 하고 싶진 않았어. 하여간, 넬라니커스 제널 백작 부인. 잘 부탁해요. 영애들도, 귀부인들도, 입 벙긋 못 하게. 기가 죽어서 우리 새언니를 감히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게.” ...

사교계를 휘어잡는 넬스는, 젠이 뭘 원하는지 알았다. ...

넬스가 화려한 부채를 펼치며 말했다. ...

“놀랄 준비나 하시라고 전해요, 제레시엔 양.” ...

 

+++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가의 응접실. ...

케이는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젊은 신관을 느른하게 응시했다. ...

이제 막 수습에서 벗어나 신관이 된 햇병아리인 게 분명한 그는, 케이가 응접실로 들어오는데도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

케이가 신성국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

“교황 폐하께서는 최근 그린 가문을 둘러싼 소문으로 무척 심기가 불편하시오.” ...

신관이 케이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

“그린 백작도 알다시피 성유물의 수호자 가문은 신성국의 가호를 받는 만큼, 그 행실과 명성이 반듯해야 하오. 그린 가문에 대한 평가가 신성국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그린 백작도 잘 알 거라 믿소.” ...

그린 가문을 향한 예의도 모르는 새내기 신관을 보낸 걸 보면, 교황은 이 일에 큰 관심이 없는 게 분명했다. ...

아마 신관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서, 귀찮은 마음에 애송이 신관이라도 보낸 거겠지. ...

“안 그래도 교황 폐하의 허가도 받지 않고 혼인을 치러, 교황 폐하께서 근심이 가득하신데, 이런 좋지 않은 소문들이 대륙 전역으로 퍼져가는 사태를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소.” ...

“결혼은 개인사인데, 일일이 교황 폐하의 허가를 받아야 할 줄은 몰랐는걸.” ...

케이가 중얼거린 말에 신관이 눈썹을 추어올렸다. ...

“그게 무슨 말씀이오, 알 만한 사람이! 그린 가문이 이토록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이 누구 덕분이라 생각하는 거요? 당연히 우리 교황 폐하께서 어여삐 여기신 덕분 아니오. 그린 가문에 교황 폐하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는 걸 잊은 거요?” ...

교황이 어여삐 여긴다라. ...

이 신관은 수습 시절 시험 성적이 아주 안 좋았을 게 분명하다. ...

교황은 그린 가문을 어여삐 여기는 게 아니었다. ...

그린 가문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 ...

잘못 만졌다가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성유물을 만져도 아무 영향 없는 유일한 혈통. ...

위험한 성유물을 찾아내서 보관할 수 있는 유일한 가문이, 바로 성유물의 수호자 그린 가문이었다. ...

이 건방진 신관은 그린 가문이 성유물의 수호자가 된 게, 교황의 예쁨을 받아서라고 생각하나 보다. ...

“물론 교황 폐하는 내게 아버지 같은 존재지. 그런데 어쩌나. 내 친아버지조차 내 결혼 소식을 모르셨거든.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

생각지 못한 말에 신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그, 그런…… 하지만 그것과 이건 다르오. 백작은 친부보다 교황 폐하께 더 예의를 차려야 마땅하오.” ...

“그래서? 신성국에서는 내가 뭘 어쩌길 바라는 거지?” ...

“그린 백작 부인은 정통한 부인이 아니라는 판단이오. 교황 폐하의 허락도 없이 결혼한 데다,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더러운 소문으로 그린 가문을 비롯하여 신성국의 명예까지도 흔들리게 만들고 있소. 이에, 교황 폐하께서는 그린 백작 부인과 이혼하고 교황 폐하께서 직접 간택하신 신성국 출신의 여인과 재혼하라 명하셨소.” ...

“호오.” ...

케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

“그래? 그걸 교황 폐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고?” ...

“그렇소!” ...

그럴 리 없다는 걸, 케이는 알고 있었다. ...

아마도 대신관 중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

이 신관은 교황의 명을 거짓으로 전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르는 걸까? ...

케이는 그 부분을 지적하는 대신, 느긋하게 다리를 꼬며 말했다. ...

“세간에 내 아내와 관련해서 떠도는 소문이 진실이 아니라면?” ...

“위틀로 백작가의 꽃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여인에게 홀려, 그녀를 믿고 싶어 하는 백작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오. 하지만 백작, 진실을 봐야 하오. 삼류 잡지뿐 아니라 공인된 신문사에도 백작 부인과 관련된 기사가 실리고 있소.” ...

“기사가 항상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지. 그 소문의 시작이 삼류 잡지였다. 어떤 신문사들은 일단 잘 팔리겠다 싶으면 진위를 판단하지 않고 기사로 내보내기도 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

신관은 말이 통하지 않아서 답답했다. ...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그린 백작 부인의 만행으로 신성국의 명성이 더럽혀지게 생겼다. ...

왜 이 백작은 그걸 모르는 걸까? ...

‘그린 백작, 그린 백작 해서 어떤 자인지 궁금했는데, 대단할 것도 없는 자였군. 여자에게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차라리 동생인 엘드허트 경이 백작 작위를 물려받았다면, 이런 일은 안 생겼을 텐데…….’ ...

“나는 내 아내가 세간에 떠도는, 그런 짓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내 가정의 일이고, 아무리 교황 폐하라도 내 집안일에 손을 대실 수는 없다. 돌아가라, 신관. 그럼 오늘의 일은 없었던 일로 해줄 테니.” ...

“하!” ...

신관은 케이의 오만한 태도에 기가 막혔다. ...

이 상황에서 신관의 비위를 맞춰주며 교황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라 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오늘의 일 운운하다니. ...

“이보시오, 그린 백작. 뭔가 잘못 생각하는 모양인데, 지금 이것은 교황 폐하의 뜻이고, 명령이오. 그렇게 쉽게 거부할 수 있는 게…….” ...

신관은 말을 끝낼 수 없었다. ...

케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

케이의 뒤로 검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

그 검은 기운은 물질감을 가지고 있어서, 차갑게 신관을 집어삼켜 아작아작 씹어버릴 것만 같았다. ...

“혼인은 신성국이나 교황 폐하가 아닌, 신께 맹세하는 일이다, 신관.” ...

나직하게 들려오는 케이의 음성이, 이상하게도 신관의 고막을 터뜨릴 듯 쩌렁쩌렁 울리는 것 같았다. ...

“신께 맹세 드린 일을 교황 폐하의 명으로 끊어내라고? 이유도 없이 신과의 약속을 파기하라는 것이, 진정 교황 폐하의 명이란 말인가?” ...

냉혹하게 빛나는 회청빛 눈동자가 신관을 내리눌렀다. ...

신관은 숨도 쉬지 못하고 케이를 올려다봤다. ...

케이와 눈을 맞추고 있는 게 두려웠다. ...

하지만 피할 수 없었다. ...

피하는 순간, 저 무시무시한 눈이 자신을 부숴버릴 것 같아서. ...

죽는 줄도 모르고 죽게 될 것만 같았다. ...

“이, 이, 이유도, 이유도 없는 게…… 아, 아니잖소.” ...

“건방지군, 신관!” ...

“읏!” ...

신관은 오줌을 지릴 것만 같았다. ...

다행히 그 순간, 신관의 어깨를 짓누르던 검은 힘이 깨끗이 사라지고, 케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도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

신관은 악몽을 꾼 것만 같았다. ...

케이의 뒤에는 검은 기운이 없고, 케이의 눈동자 역시 아까처럼 나른했다. ...

“좋아, 신관. 교황 폐하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이혼하도록 하지.” ...

(20) 당신 입술이 달아서. ...

신관의 표정이 밝아졌다. ...

그걸 보며 케이가 빙그레 웃었다. ...

“하지만 그건 소문의 진위를 판단하고 나서다. 거짓 소문에 휘둘려 교황 폐하께서 그린 백작 부인을 험담하고, 결혼을 깼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것이 더 신성국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 될 테니까.” ...

케이가 조건을 붙였지만, 신관은 자신만만했다. ...

공신력 있는 신문사가 그린 백작 부인의 염문설을 1면에 냈다. ...

그린 백작 부인의 외모에 홀려, 아내를 단속하지도 못하는 그린 백작을 조롱하고, 나아가 그런 그린 백작을 보호하는 신성국에 유감을 표했다. ...

그린 백작 부인이 방탕한 여자라는 게, 그저 소문일 리는 없었다. ...

“이제야 말이 통하니 다행입니다, 백작님.” ...

지금껏 고자세를 유지하던 신관이, 저도 모르게 존댓말을 사용했다. ...

신관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

아까처럼 무서운 일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어쨌든 목적은 달성했으니, 케이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얼른 이곳을 떠나 안전한 신성국의 신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

“잠깐.” ...

신관이 일어서려는데 케이가 불러 세웠다. ...

“아직 내 얘기 안 끝났는데.” ...

“무, 무슨 얘기를 더……?” ...

“만약 그 소문이 거짓이라면? 그땐 거짓 소문에 휘둘려 내 아내와 그린 가문, 그리고 날 무시한 대가는 어떻게 치를 거지?” ...

“대, 대가라니…….” ...

“설마…… 거짓 소문으로 교황 폐하께서 직접 내 이혼을 조장한 걸, 그냥 넘어가려는 건 아니겠지?” ...

신관은 마른침을 삼켰다. ...

거기까지는 생각해본 적도 없고, 대신관도 어떻게 대응할지 알려 주지 않았다. ...

하지만 케이가 이런 요청을 하는 건 마땅한 일이었다. ...

“무, 무엇을 바라십니까?” ...

적당히 들어보고 대신관에게 전하면 되겠지. ...

“조만간 내가 결혼식을 올릴 건데 말이야.” ...

케이가 느긋하게 다리를 꼬며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

“교황 폐하께서 직접 참석하셔서 결혼을 축복해주시고, 내 아내에게 정식으로 사과해야, 이 모멸감이 사라지겠어.” ...

말도 안 되는 요청에, 신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교황은 그렇게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

대륙에서 가장 큰 제국 황제의 결혼식조차 교황은 참석하지 않았다. ...

멀리서 축하와 축복의 전언을 보냈고, 그것만으로도 모두가 감지덕지했다. ...

그런데 직접 와서 축복해줄 뿐 아니라, 사과까지 하라니. ...

하지만 신관은 ‘안 된다.’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

케이는 미소짓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아까처럼 음산해졌고, 그의 등 뒤에서 묵직한 검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듯한 착시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

‘상관없겠지. 소문이 거짓일 리도 없고, 설령 그렇다 해도 나중에 가서 이유를 붙여 교황 폐하께서 축복의 전언만 보내셔도 감사해할 테니까.’ ...

그렇게 생각한 신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습니다. 그 조건, 받아들이죠.” ...

케이가 싱긋 웃으며, 재킷 주머니에서 작은 기계를 하나 꺼냈다. ...

신관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계였다. ...

“오래전에 대화를 기록했다가 똑같이 재생할 수 있는 마법이 있었다는 거 알아?” ...

물론 알고 있지만, 신관은 케이가 왜 이런 엉뚱한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

“얼마 전에 마탑에서 재미있는 기계를 하나 발명했어. 기계공학자들이랑 손을 잡고서. 언제나 그렇듯 명예가 드높은 그린 백작에게도 쓸만한지 확인해달라고 보내왔고.” ...

달칵- ...

케이가 기계의 버튼을 누르자, 지금까지 케이와 신관이 나눴던 대화가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울려 퍼졌다. ...

거기에는 신관이 케이가 내민 조건을 받아들이겠다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도 녹음되어 있었다. ...

숨도 못 쉬는 신관을 보며, 케이가 빙그레 웃었다. ...

“쓸만한 것 같네.” ...

 

+++

케이는 조만간 소문의 진상을 판별할 테니, 백작가에 머물며 기다리다가 돌아가라고 했다. ...

제안이 아닌 명령에 가까웠기에, 신관은 그린 백작저의 손님용 건물인 서채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

‘어떡하지……?’ ...

인제 와서야 케이의 앞에서 오만하게 굴었던 게 후회가 됐다. ...

‘만약 그 소문이 다 거짓이었다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

 

+++

리시는 서재에서 가져온 책을 읽고 있었다. ...

신성국의 역사에 관한 책으로, 오래전 신성국이 수인을 배척하게 된 과정이 적힌 부분이었다. ...

[차기 교황이라 촉망받던 베네데르템이 수인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

다만 그가 어떤 종으로 변화하는지는 뒤늦게 알려졌는데, 그것이 알려진 게 바로 ‘1차 수인의 난’이 벌어진 시발점이었다. ...

당시 수인은 인간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으나, 무엇으로 변하는지에 따라 조롱을 받기도, 경외를 받기도 하였다. ...

베네데르템은 생쥐로 변하는 수인이었다. ...

차기 교황이 될지도 모르는 자가 전염병을 일으키는 생쥐로 변한다는 사실은 신성국을 비롯해 대륙 전체를 술렁이게 했다. ...

신의 뜻을 받드는 자가, 더럽고 작은 생쥐라니. ...

게다가 그 사실을 감추고 명예로운 대신관이 되어, 차기 교황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니. ...

베네데르템은 올바르고 정직한 자였으며 신심이 깊었다. ...

생쥐로 변화한다고 하여 그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대중의 인식에 박힌 생쥐란 짐승에 대한 평가를 억누를 수는 없었다. ...

베네데르템은 손바닥 뒤집듯 그에 대한 대우가 달라진 신관들과 대중, 그리고 교황의 태도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

그는 삿된 마음을 품고 은밀히 비슷한 처지의 수인들을 모아, 신성국을 상대로 ‘1차 수인의 난을 일으켰다.] ...

거기까지 읽었을 때, 케이가 찾아왔다. ...

“리시, 방해해서 미안해요.” ...

“아니에요. 오늘은 조금 한가해서 책을 읽고 있었던 것뿐이니.” ...

리시는 책을 덮고 케이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났다. ...

“잠깐 걸을래요? 둘이서.” ...

“좋아요.” ...

시녀들을 방에 남기고 케이와 둘이 밖으로 나왔다. ...

중앙 정원을 걷는 줄 알았는데, 케이가 향한 곳은 서채쪽이었다. ...

“귀한 손님이 온 것 같던데.” ...

“귀하다면 귀하겠지. 우리의 결혼식을 더욱 찬란하게 만들어줄 손님이니.” ...

“우리 결혼식을?” ...

케이가 신관과 어떤 약속을 했는지 모르는 리시가 의아한 듯 되물었지만, 케이는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

이윽고 서채 앞 정원에 도착했다. ...

중앙 정원보다는 작지만, 향긋하고 달콤한 향기로 가득한 곳이었다. ...

정원수 대부분이 과실나무였다. ...

케이는 눈앞에 보이는 나무로 손을 뻗어 복숭아를 하나 따서 리시에게 건넸다. ...

“우리 저택의 복숭아는 달기로 유명하죠.” ...

“이런 게 있는 줄은 몰랐어요.” ...

리시가 탐스러운 복숭아를 한입 깨물었다. ...

단 과즙이 입가를 촉촉하게 적셨다. ...

“와, 정말…….” ...

맛있네요, 라는 말은 케이의 입술에 삼켜졌다. ...

과즙 묻은 리시의 입술을 조심히 맛본 케이가 리시에게 이마를 대고 속삭였다. ...

“미안. 당신 입술이 복숭아보다 달아 보여서.” ...

“그리 달던가요?” ...

“더욱 달더군요.” ...

케이가 한 번 더 리시의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

조금 전에는 놀라서 멈췄던 심장이, 이번에는 달큰하게 뛰는 게 느껴졌다. ...

이상하게도 케이가 은밀하고 끈적하게 리시를 만져오는 것보다, 이 짧고 가벼운 입맞춤이 더 두근거렸다. ...

이상하게 빨라진 이 심장 소리가 케이에게까지 들리지 않을지 걱정하는데, 입술을 뗀 케이가 엄지로 리시의 입술을 닦아주며 말했다. ...

“신관에게 소문이 거짓이라는 걸 증명하기로 했어요.” ...

“그렇군요.” ...

“언제 할 거죠, 리시?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 같은데.” ...

“신관이 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토니의 동굴을 예약해뒀어요.” ...

주점 ’토니의 동굴‘은 그린 백작령의 수도인 론데리반 시 대광장 옆에 있었다. ...

론데리반 시에서 가장 크고 넓은 가게라, 평민들이 파티를 열 때 종종 이용하는 곳이었다. ...

“내일, 그곳에서 평민들을 위한 파티를 열 거예요.” ...

“난 뭘 준비해야 할까요?” ...

리시는 턱에 검지를 대고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며 생각하는 척하다가, 그 검지로 케이의 코끝을 가볍게 찍었다. ...

“웃을 준비.” ...

 

+++

소문의 그린 백작 부인이 평민을 위해 여는 깜짝 파티. ...

주점 ’토니의 동굴‘ 옆 대광장에는, 파티 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간부터 사람들이 잔뜩 모여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었다. ...

따로 초대장을 보낸 것은 아니기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

그린 백작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사람. ...

소문의 그린 백작 부인을 구경하고 싶은 사람. ...

문란한 그린 백작 부인에게 곱지 않은 마음을 품은 사람. ...

맛있는 거나 실컷 먹고 돌아갈 각오인 사람. ...

그린 백작의 눈에 띄어서 신분 상승을 하고 싶은 사람. ...

가까운 곳에 사는 귀족들. ...

그리고, 소문의 주인공을 취재하기 위해 몰려온 기자들. ...

그들이 이 파티를 두고, ...

“교황 폐하까지 움직이시니, 백작 부인이 발등에 불이 떨어지긴 했나 봐. 이런 파티도 열고.” ...

“이렇게 한다고 해서 백작 부인이 한 짓이 없던 일이 되겠어?” ...

“꼭 그렇게만 생각할 건 아니지. 백작 부인이 파티를 좋아해서, 우리에게도 베풀어주고 싶어 하는 걸지도 모르잖아.” ...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리시는 드레스로 갈아입고 있었다. ...

우아하지만 너무 화려하지는 않게. ...

꾸미지만 너무 꾸민 것처럼은 보이지 않게. ...

그러면서도 리시의 외모를 가장 빛나 보이게. ...

연한 붉은 빛이 도는 긴 은발을 틀어 올려 동그랗게 말아 고정하고, 몇 가닥을 빼내어 우아한 곡선을 지닌 어깨로 늘어뜨렸다. ...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진주가 박힌 머리핀을 딱 하나만 꽂아 장식하고, 작은 크기의 진주알 귀걸이와 목걸이를 착용했다. ...

드레스는 아주 연한 하늘색. ...

어깨가 드러낸, 넓고 찰랑거리는 소매가 손등까지 내려오는 드레스였다. ...

레이스나 장식이 하나도 없어서 수수해 보이는 드레스지만, 리시가 입었더니 우아하고 기품 있어 보였다. ...

“아무에게나 어울리는 드레스가 아니라서 걱정했는데…… 정말 아름다우세요, 아이리스 님.” ...

시중을 들던 크리시나가 감탄했다. ...

에르웰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

질레트는 자리에 없었다. ...

오늘 파티 이야기를 들은 질레트가, 자신도 자작 영애로서 참석하고 싶다며 휴가계를 냈기 때문이었다. ...

마침 리시가 바라던 바였기에 군말 없이 허락했지만, 크리시나는 본분을 잊은 질레트가 마뜩잖은 듯했다. ...

시녀도 아름답게 꾸미고 파티에 참석할 자격은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자신이 모시는 귀부인의 시중을 드는 걸 우선으로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

“나는 이 정도면 됐으니, 크리시나랑 에르웰도 가서 파티 준비를 하도록 해요.” ...

“저는 파티…….” ...

“네, 백작 부인. 얼른 가서 준비하고 돌아올게요.” ...

에르웰이 무어라 말하려는데, 크리시나가 에르웰의 말을 끊었다. ...

에르웰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크리시나를 노려보다가, 그녀의 손에 붙잡혀 끌려나갔다. ...

복도로 나가자마자 에르웰이 크리시나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

“시니, 제발 나도 백작 부인이랑 대화 좀 하자.” ...

“뭐라고 하려고 했는데?” ...

“그거야…… 파티에 참석하면 두드러기가 나는 체질이라고…….” ...

“그게 아닐 텐데, 에르웰.” ...

“아, 씨. 나는 파티랑 옘병나게 안 어울린다고 하려고 했다, 왜?” ...

크리시나가 에르웰을 가만히 노려봤다. ...

“나도 알아. 안다고. 하지만 어릴 때부터…… 에이씨.” ...

에르웰이 자기도 이런 자신이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북북 긁었다. ...

“그런데 제레시엔도 마찬가지잖아. 제레시엔도 지가 하고 싶은 대로 말하는데…….” ...

“제레시엔 양이라고 해야지. 레이디 그린이라고 하든가.” ...

“레이디는 옘병…….” ...

에르웰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케이가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다. ...

둘은 얼른 말을 멈추고 케이를 돌아봤다. ...

왜인지 케이는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크리시나는 순간 케이가 자신들의 대화를 들었나 싶었지만,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

둘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으니까. ...

‘아이리스 님을 볼 생각에 기분이 좋으신 거겠지. 이 방에 들어가실 때면 항상 웃고 계시니까.’ ...

(21) 소문의 백작 부인 ...

방에 들어온 케이가, 거울 앞에 서 있는 리시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

그는 곧 옅은 미소를 지으며 리시의 뒤로 다가와,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한쪽 팔로 끌어안았다. ...

그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리시의 목덜미에 닿았다. ...

뜨거운 입김이 리시의 쇄골까지 번졌다. ...

이 자연스러운 스킨십이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닿을 때마다 긴장되고 뜨거워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케이는 리시의 어깨에 턱을 괴고, 거울에 비친 리시를 응시했다. ...

그의 회청빛 눈동자가 거울 속의 리시를 은근하게 훑어 내려갔다. ...

“아름답군요, 리시.” ...

“당신도.” ...

거짓이 아니었다. ...

파티용 정장을 차려입은 케이는, 깜짝 놀랄 정도로 근사했다. ...

평소에는 흐트러뜨리고 다니는 머리칼도, 이번에는 포마드를 이용해 단정하게 뒤로 넘겨서 고정했다. ...

반듯한 이마 아래의 짙은 눈썹이 평소보다 인상적이었다. ...

“제이미에게 뭔가 시켰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그게 뭔지는 말해주지 않더군요. 내 부하를 어떻게 구워삶은 거죠?” ...

“굽지도, 삶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날개를 접던걸요. 주인에게 잘 배운 덕이겠죠.” ...

농담 삼아서 한 말인데, 케이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

케이가 리시를 돌려세워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 ...

“어떻게 안 거죠? 제이미가 뭐로 변하는지.” ...

아차, 싶었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

앞으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할 것이다. ...

아무도 몰라야만 하는데, 리시가 아는 일들. ...

“그게 중요해요?” ...

리시가 담담히 물었다. ...

“중요해요. 하지만 말해주지 않을 테죠.” ...

“아직은.” ...

“언젠가는 말해줄 건가요?” ...

그건 리시 자신도 알 수 없었다. ...

한 번을 살았고, 한 번을 죽었다. ...

그렇게 끝난 줄 알았는데, 두 번을 살게 되었다. ...

그걸 순순히 믿어줄 사람이 있을까? ...

설령 믿는다고 해도, 시간을 되돌아와 다시 살아가게 된 사람을 마녀로 여기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

시간을 돌아 되살아났다고 해서 특별한 능력이 생긴 건 아니었다. ...

’내 한 몸 지킬 만한 힘도 없지. 그래서 이 남자에게 의탁한 거고.‘ ...

리시는 케이의 눈을 바라봤다. ...

그의 눈동자는 몹시도 깊고 차가워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이 시간을 되돌아왔다는 걸 알게 되면, 이 남자가 어떻게 행동할지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

지난 삶,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조금도 아물지 않았기에, 리시는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호의적이라도,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 ...

리시는 검지로 케이의 단단한 가슴을 쿡 찔렀다. ...

“당신 하는 거 봐서.” ...

케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냉기가 사라지고 다정한 온기가 그 자리를 채웠다. ...

“더욱더 잘해야겠군요. 나는 궁금한 건 반드시 알아내야만 하는 성격이라서.” ...

“기대할게요.” ...

“긴장해야 할 겁니다. 깜짝 놀라게 잘할 테니까.” ...

+++

주점 ’토니의 동굴‘은 상당히 넓은 가게인데도 그곳에 모두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였다. ...

토니의 동굴 옆 대광장에도 뷔페와 식탁이 마련되었기에, 주점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대광장에 모여서 그린 백작 부인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이윽고 그린 백작 가문의 마차가 들어서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길 주위로 모였다. ...

마차 창문에는 커튼이 있어서, 그 안에 탄 백작 부인을 볼 수 없는데도, 다들 목을 쭉 빼 밀고 뭐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 기웃거렸다. ...

마차가 토니의 주점 앞에 멈추자, 시끄러웠던 대광장이 조용해졌다. ...

달칵- ...

마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크게 울릴 정도의 고요. ...

먼저 내린 건 케이였다. ...

마치 남신 같은 그의 모습에, 몇몇 여성들이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

케이가 마차 안쪽으로 손을 내밀자, 곱고 작은 손이 케이의 커다란 손바닥 위에 놓였다. ...

단지 손만 나왔을 뿐인데도, 사람들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

아이리스 그린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

사람들은 마른침조차 삼키지 못하고 홀린 듯 그녀의 모습을 바라봤다. ...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은빛 머리카락, 희고 고운 피부와 잘 어울리는 연한 하늘색의 우아한 드레스. 자그마한 얼굴에 자리 잡은 큼직한 이목구비는 신이 온 힘을 다해 만든 것처럼 완벽했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 ...

그녀를 표현하는 수식어조차 무색할 만큼, 아이리스 그린 백작 부인은 눈부셨다. ...

그녀는 청초하게도, 우아하게도, 오만하게도 보였다.마차에서 내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는 그녀의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아름다웠다. ...

사람들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서 정신없이 리시를 바라봤다. ...

도톰하고 붉은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

“어머나.” ...

작게 흘러나온 감탄사. ...

그리고 리시의 얼굴에 부드럽게 번지는 미소. ...

“이렇게 많이 와주실 줄은 몰랐는데. 기쁘네요.” ...

그 순간 사람들은 자신이 그녀를 기쁘게 해줬다는 사실이 감개무량했다. ...

그 황홀한 정적을 깬 건, 마차가 다가오는 소리였다. ...

그제야 사람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

천상의 구름을 밟는 것 같았던 황홀경에서 벗어나, 짜증스럽게 이쪽으로 다가오는 마차를 노려봤다. ...

리시도 고개를 돌려 마차를 응시했다. ...

메르디 자작가의 마차였다. ...

마차에서 내린 질레트의 모습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

그녀의 화려한 차림 때문이었다. ...

풍성하게 퍼지는 빨간색 드레스의 가장자리는 금실로 수를 놓았고, 어깨 부분은 다이아 가루를 뿌려서 만든 실로 마감했다. ...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목걸이와 귀걸이. 긴 머리를 틀어 올려서 꽂은 수십 개의 보석 머리핀. ...

’저 하늘에 태양이 있다면, 이 땅의 태양은 나다!’라고 주장하는 듯한 질레트는, 아름답기는 했다. ...

원래 예쁘장한 얼굴인데, 드레스에 지지 않도록 걸맞은 화장을 해서 더욱 아름다웠다. ...

만약 이곳이 평범한 귀족 파티였다면, 그녀의 차림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

대부분이 질레트만큼 화사하게 꾸미고 올 테니까. ...

하지만 이곳은 평민을 위한 파티. ...

주최자가 ’평민을 위해서.’라는 주제를 건 이상, 귀족이 참석한다 해도 그에 걸맞는 복장을 하는 것이 예의였다. ...

이 자리에 있는 귀족들은 소재는 고급이지만 수수해 보여서 평민들과 섞여 있어도 위화감이 크지 않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

그건 질레트의 부모인 메르니 자작 내외도 마찬가지였다. ...

질레트보다 먼저 파티 장소에 와 있던 메르디 자작 내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딸을 쳐다보고 있었다. ...

질레트는 모두가 자신을 주목하자 기분이 좋은 듯, 생긋 웃으며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했다. ...

그러고는 고개를 바짝 들고 리시를 향해 또각또각 걸어왔다. ...

리시는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 자세로 질레트가 오는 것을 지켜봤다. ...

모두가 숨을 죽이고 리시와 질레트를 쳐다봤다. ...

질레트의 눈이 빠르게 리시의 차림을 훑더니, 자기가 이겼다는 듯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

“백작 부인. 오늘 이렇게 파티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해요.” ...

“따로 초대한 기억은 없는데.” ...

“예?” ...

“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 파티이니 감사할 것 없어요, 질레트 양.” ...

“네, 뭐. 그래도요.” ...

질레트는 흥, 하고는 휙 돌아서서 귀족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

아는 영애들을 발견한 질레트가 환하게 웃으며 그들 무리에 섞였다. ...

리시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미소지었다. ...

“오늘 이렇게 파티에 참석해줘서 고마워요. 부디 즐겁게 지내세요.” ...

“백작 부인께서는 요새 백작 부인을 둘러싼 소문을 아십니까?” ...

리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날카로운 질문이 들려왔다. ...

이 예의 없는 행동에 모두가 숨을 삼키며, 소리가 난 쪽을 돌아봤다. ...

예리한 눈매를 가진 남자가 리시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

리시는 자신의 손을 잡은 케이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

엄지로 그의 손등을 톡톡 쳐서 가만히 있으라고 한 후, 남자에게 말했다. ...

“무례하군요.” ...

“압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파티, 그 소문에 대한 진상을 해명하기 위해 연 것 아닙니까?” ...

모인 사람들의 반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반은 ’그런 거였어?‘라는 표정이었다. ...

리시는 그를 응시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

“내가 왜 그 소문에 대해 해명을 해야 할까요?” ...

“예?” ...

리시가 이런 태도를 보일 줄은 몰랐는지, 남자의 예리한 눈빛이 잠시 허물어졌다. ...

“해명한다 해도 믿고 싶은 것만 믿을 테고. 내 사적인 문제이니 그저 내 남편과 가족들만 그 소문이 그저 악의적인 헛소문일 뿐이라는 걸 알아주면 되지 않나요?” ...

리시는 케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

케이도 리시와 눈을 마주치고, 더없이 행복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

마차에서 내릴 때부터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이 세상에 둘밖에 없다는 듯 서로를 응시하는 리시와 케이. ...

둘은 누가 봐도 아무 문제 없이 사랑에 푹 빠진 신혼부부였다. ...

“하지만 신성국에서 소문의 진상을 알기 위해 사람을 보낸 이상, 그런 말로 넘어갈 문제는 아니게 되지 않았습니까?” ...

남자는 지지 않았다. ...

리시는 남자의 고집이 고마웠다. 바로 이런 상황을 원했기 때문이다. ...

시선을 돌려 그 사내를 응시했다. 리시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

사건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그가 이 자리에 올 거라는 짐작도 하고 있었다. ...

리시의 예상대로 그는 이 자리에 왔고, 리시가 예상한 행동을 했다. ...

“누구죠?” ...

모르는 척 묻자, 그가 당당하게 답했다. ...

“엘레르보의 위팅크입니다.” ...

엘레르보. 엘레론드 대륙 대부분의 나라에 지점을 둔, 가장 크고 가장 공신력 있는 신문사. ...

그 신문사의 기자인 위팅크는 무례한 취재로 욕을 먹기는 해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기사를 쓰는 자였다. ...

그리고 지난 삶, 케이가 수인이라는 이유로 죽임당한 후, 케이를 죽인 것이 얼마나 큰 손실이며, 잔혹한 짓인지에 대한 기사를 썼다가, 황제의 분노를 사서 사형당했다. ...

목이 매달려 죽는 순간까지, 그는 “이 세상은 미쳤어! 다들 미쳤다고!”라고 외쳤던 걸, 리시는 죽음의 어둠 속에서 보았다. 리시는 천천히 사람들을 둘러봤다. ...

주점 안에 있던 사람들까지도 슬금슬금 밖으로 나와, 그동안 자신들을 즐겁게 했던 소문의 진상을 알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

대부분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었지만, 몇몇 사람들은 ’꼴 좋다.‘라는 눈빛을 짓고 있었다. ...

리시는 아직 앳된 외모의 그들이, 평소에 케이를 흠모하던 귀족 영애들일 거라고 확신했다. ...

“좋아요.” ...

리시의 여상한 음성이 크게 울릴 정도로, 광장은 조용했다. ...

“모두 내 사사로운 부분까지 캐내고 싶어 할 만큼 내게 애정을 보여주니, 그에 응해야 하겠군요.” ...

리시의 시선이 질레트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위팅크에게로 향했다. ...

“그럼 이제부터 진상이 무엇인지 알아볼까요?” ...

(22) 내가 그런 게 아니에요. ...

리시와 케이의 뒤에서 기척을 감추고 있던 제이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리시의 옆에 섰다. ...

다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등장한 제이미를 얼떨떨하게 쳐다봤다. ...

“모두 알겠지만 내 소개를 해야, 이 자리가 더욱 즐거워지겠지요? 나는 창천의 기사이자 전장의 불꽃, 타오르는 화염……이 되고 싶은 제이미 러셀 남작이에요.” ...

제이미의 명랑한 소개에 작은 웃음소리가 퍼졌다. ...

창천의 기사, 전장의 불꽃, 타오르는 화염. ...

제이미는 그렇게 되고 싶다고 했지만, 사실은 이미 그렇게 불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리고 또한 여기 계신 두 분의 충성스러운 집사장이기도 하지요. 사사로운 부분까지도 관리하는 집사장.” ...

제이미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 케이와 리시 앞에 섰다. ...

“우리 곱고 귀한 백작 부인께서 구태여 나설 일도 아닌지라, 내가 한번 이 소문의 진상을 알아볼까 해요. 괜찮겠지요?” ...

누가 안 된다고 할까. ...

저렇게 무시무시한 눈빛을 하고 있는데. ...

제이미는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모두를 찢어버릴 듯 날카로웠다. ...

“자, 이 자리에 온 신문과 잡지 기자들. 손들어볼까요?” ...

십수 명 되는 기자들이 와 있을 텐데, 손을 든 건 위팅크뿐이었다. ...

아마 일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해서, 불똥이 튀기 싫어 몸을 사리는 것이리라. ...

제이미가 싱긋 웃었다. ...

“누가 기자인지 다 아는데…….” ...

그제야 기자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

제이미는 어느 기자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고, 사람들은 썰물처럼 길을 내주었다. ...

“제일 처음에 그린 백작 부인에 관한 기사를 쓴 잡지사의 기자지요?” ...

“예, 그렇긴 한데…….” ...

“그 내용은 누구에게 듣고 썼을까요?” ...

“아, 그건…… 누구에게 들었다기보다는…… 소문이…….” ...

“소문!” ...

짝-! ...

제미이가 손바닥을 마주치는 소리에, 사람들은 화들짝 놀랐다. ...

“진실 여부는 가리지 않고 떠도는 소문만으로 기사를 썼다. 이 얘기가 맞나요?” ...

“아, 아니…… 그게 아니라…….” ...

“그게 아니라?” ...

“그…….” ...

기자가 마른침을 삼키며 도와달라는 듯 사람들을 돌아봤지만,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결국, 기자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

“진실 여부는 가리지 못했습니다.” ...

“좋아요.” ...

제이미가 전혀 좋지 않다는 눈빛으로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

다른 기자 앞에 선 제이미가 말했다. ...

“신문사의 기자. 이 소문에 관한 기사를 실은 첫 신문사였지요. 신문사이니만큼 그저 떠도는 소문만으로 기사를 싣지는 않았을 거라고 믿고 싶은데…….” ...

“네, 저는 인터뷰를 했습니다.” ...

“이 자리에 있어요?” ...

“네, 저기…….” ...

기자가 누군가를 가리켰다. ...

턱이 뾰족한 평민 여자였다. ...

제이미는 겁에 질린 그녀에게로 가서 물었다. ...

“그린 백작 부인께서 알포드 후치스 자작과 몰래 만나는 장면을 직접 봤나요?” ...

제이미의 질문에, 강 건너 불구경하듯 쳐다보던 사람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

제이미가 이런 식으로 한 명, 한 명, 소문의 진상을 조사하려고 할 줄은 몰랐다. ...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이 그 소문을 입에 올린 적 있었다. ...

“아, 아니요. 저도 들은 거라서…….” ...

“누구에게 들었죠?” ...

“그게…….” ...

평민 여자가 누군가를 가리켰다. ...

제이미는 그녀에게로 다가가 같은 질문을 반복했고, 같은 대답을 들었다. ...

그렇게 한 명, 한 명, 그래야만 한다면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심문하겠다는 듯. ...

질레트는 이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숨을 멈췄다. ...

제이미가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

이윽고 제이미가 누군가에게 지적당한, 질레트 옆에 있는 귀족 영애에게 물었다. ...

“그린 백작 부인이 알포드 후치스 자작과 몰래 만나는 장면을 직접 봤나요?” ...

“아니요…….” ...

귀족 영애가 질레트를 힐끔거렸다. ...

질레트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

어떻게든 여길 빠져나가고 싶은데, 너무 화려한 차림이라서 몰래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

‘아, 아니야. 당황할 거 없어. 나도 그냥 남한테 들었다고 하면 돼.’ ...

“그럼 누구에게 들었죠?” ...

질레트의 친구인 귀족 영애는 잠깐 망설이다가 질레트를 가리켰다. ...

질레트는 자신을 배신한 그녀의 뺨을 치고 싶었지만, 꾹 참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

“질레트 메르디 양. 그린 백작 부인의 시녀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자신이 모시는 백작 부인의 소문을 입에 담았다니, 내가 너무 실망스럽겠지요?” ...

제이미의 지적에 질레트는 주먹을 꽉 쥐었다. ...

질레트가 소문의 근원이든 아니든, 리시의 시녀이면서 리시의 소문을 입에 담았다는 것만으로도, 질레트의 명예가 떨어지는 일이었다. ...

질레트의 부모는 숨도 못 쉬고 자신의 딸을 지켜보고 있었다. ...

질레트는 제이미가 누구한테 들었냐는 질문을 해주길 바랐지만, 제이미는 아무 말도 없이 질레트를 응시하고 있었다. ...

제이미뿐만이 아니었다. ...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질레트에게 향해 있었다. ...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질레트는, 결국 자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저도 들은 거예요.” ...

“누구에게?” ...

“하녀들에게.” ...

“그럴 리는 없어요, 질레트 양.” ...

“정말이에요. 하녀들이 직접 보고서 얘기해줬어요. 백작 부인이…… 서쪽 정원 나무 아래에서 알포드 후치스 자작이랑 몰래 만나는 걸 봤댔어요.” ...

“정말로 그럴 리는 없어요, 질레트 양.” ...

“왜…… 왜 제 말은 안 믿어줘요? 정말이라니까요.” ...

“질레트 양. 내가 안 믿을 때는 이유가 있겠지요?” ...

이쯤 되니 질레트도 슬슬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

왜 다들 나한테만 이래? ...

“백작 부인이 날 싫어해서요? 내가 백작님이랑 친밀해서, 백작 부인이 날 범인으로 몰아붙이라고 명령했어요?” ...

질레트의 어머니인 메르디 자작 부인은 거의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

제 딸의 입을 막고 싶은 듯했지만, 모두가 주목하는 상황에서 그럴 수도 없었다. ...

“아니요, 질레트 양. 그런 게 아니에요. 백작 부인은 아무도 싫어하지 않아요.” ...

“뭘 안 싫어해요? 싫어해요. 처음부터 날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요! 난 아니에요. 난 아무 짓도 안 했어요. 나도 들은 거라고요.” ...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하고 잘못을 빌면, 백작 부인께서는 용서해주실 거예요.” ...

“난 아니라니까요! 나도 하녀들에게 들었다고요!” ...

“그러니까, 그게 그럴 리 없어요, 질레트 양. 내가 오늘 아침에 하녀들에게 전부 물어보고 왔거든요. 모두 질레트 양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더군요.” ...

“……그…… 거, 거짓말이에요. 걔들은…… 걔들은 원래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잖아요. 게다가 날 질투해서…….” ...

“아무도 질레트 양을 질투하지 않아요.” ...

“아니요, 질투해요. 난 정말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진짜라니까요.” ...

질레트의 주위에 있던 귀족 영애들은 이 상황에서 질레트를 구할 방법이 없음을 깨달았다. ...

그들은 슬금슬금 질레트로부터 멀어졌다. ...

메르디 자작 가문의 질레트. ...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자, 지금은 그린 백작 부인인 아이리스. ...

누구 편에 서야 할지는 정해져 있었다. ...

“네가 직접 봤다면서…….” ...

귀족 영애 한 명이 중얼거리자, 질레트가 두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노려봤다. ...

“아니, 왜 그렇게 봐? 네가 그랬잖아. 직접 봤다고. 그래서 너무 놀랐다고. 안 그래?” ...

“맞아요. 언니가 직접 보셨다면서……. 저희는 그 말을 믿었는데.” ...

“우리가 안 믿으니까 정말이라면서 몇 번이나 말해줬잖아. 후치스 자작이랑 그린 백작 부인이 어떤 표정을 지었고,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도…….” ...

질레트가 빠져나갈 구멍이 사라졌다. ...

하지만 질레트는 여기서 무너질 수 없었다. ...

만약 이걸 인정하면, 메르디 자작 가문은 이곳에서 살 수 없게 된다. ...

자리에는 기자들이 많았다. ...

이 일은 여러 신문에 실려, 대륙 곳곳에 퍼져나가리라. ...

상대는 다른 사람도 아닌, 신성국의 가호를 받는 그린 백작 가문이었다. ...

그린 백작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은, 신성국에게 도전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

메르디 가문은 이곳만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도 살기 힘들 것이다. ...

“나…… 나는…… 나도…… 나도 후치스 자작에게 들은 거예요!” ...

질레트는 마지막 남은 지푸라기를 잡기로 했다. ...

“후치스 자작이 그랬어요. 원래 백작 부인이랑 그런 관계였다고. 그런데 백작 부인이 명예를 원해서 후치스 자작을 버리고 그린 백작님이랑 결혼한…….” ...

질레트는 말을 멈췄다. ...

제이미의 미소가 짙어졌기 때문이다. ...

“그렇군요, 질레트. 그래서 내가 직접 후치스 자작을 불러왔지요.” ...

거짓말일 거라고, 겁을 주려고 하는 말일 거라고 생각했다. ...

아니었다. ...

알포드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

알포드의 양쪽에는 유진과 월라스가 있었다. ...

질레트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

알포드가 옆에 서자, 제이미가 입을 열었다. ...

“알포드 후치스 자작. 방금 들었지요?” ...

“예? 아, 예에…… 예.” ...

“후치스 자작이 그린 백작 부인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고 얘기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니에요. 내가 어떻게 감히 그런 소리를…… 아닙니다.” ...

“맞잖아요!” ...

질레트가 빽 외쳤다. ...

“당신이 저번에 그린 백작님을 찾아온 날, 그린 백작 부인이랑 얼마나 뜨겁게 연애했는지 계속 얘기했잖아요.” ...

“그게 뭔 소리요? 난 그런 말 한 적 없소! 정말로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러셀 자작. 내가 미쳤다고 그린 백작 저택에서 그런 소리를 떠들겠습니까? 저 여자가 날 모함하는 거예요.” ...

“모함이라니……! 제이미. 난 정말로 저 사람한테 들었어요. 아, 그날 하녀들도 다 들었을 거예요. 하녀들에게 물어보세요.” ...

“하녀들에게는 이미 물어봤지요.” ...

질레트와 알포드가 서로 악을 쓰는 가운데, 제이미가 담담히 말했다. ...

“하녀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질레트 양.” ...

“그, 그런…….” ...

질레트가 비틀거렸다. ...

이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이 전혀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

도움을 청할 사람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다가, 멀찍이 서 있는 리시와 눈이 딱 마주쳤다. ...

리시는 고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저 여자 때문이야. 저 여자가 날……!’ ...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리시의 머리를 잡아 뜯고 싶었다. ...

저 고고하고 오만한 표정이 엉망으로 일그러지는 걸 보고 싶었다. ...

하지만 한 가닥 남은 이성이 질레트의 발목을 붙잡았다. ...

그때였다. 누군가 그린 백작 내외를 향해 달려간 것은. ...

질레트는 그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걸, 뒤늦게 눈치챘다. ...

케이의 앞까지 달려간 메르디 자작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

귀족이 평민들이 보는 앞에서 다른 귀족에게 무릎을 꿇는 건, 거의 없는 일이라도 봐도 무방했다. ...

“어머머.” ...

“저런…….” ...

귀족들이 혀를 차거나 신음을 삼키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

메르디 자작은 자기 자식뻘인 케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

“그린 백작님. 제가 딸을 잘못 키웠습니다. 부디 넓은 마음으로 용서를 해주십시오. 그렇다면 그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

“자작이 용서를 빌어야 할 대상은 내가 아니라 내 아내인 듯한데.” ...

그러자 메르디 자작은 리시를 향해 몸을 돌렸다. ...

“백작 부인. 제 딸이 큰 죄를 범했습니다. 아직 어려서 그런 거니, 부디 넓은 아량으로 용서를…….” ...

서늘한 눈으로 메르디 자작을 오시하던 리시가 입을 열었다. ...

(23) 와인 향기는 아찔했다. ...

“질레트 양이 아직 어리다는 소리를 들을 나이는 아니지 않은가요?” ...

메르디 자작의 얼굴이 빨개졌다. ...

“부디…… 부디…….” ...

질레트는 자신의 아버지가 리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

저 여자가 뭔데? 남편 잘 만나서 ’그린 가문‘의 명예를 얻고 있는 것뿐이잖아. ...

방탕하게 산 주제에, 남편을 잘 만나서 날 이런 꼴로 만드는 거잖아. ...

하지만 질레트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여기서 자신이 움직여봐야 상황이 더 악화될 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

게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메르디 자작 부인이, 질레트의 손목을 부러뜨릴 듯 잡고 있기도 했다. ...

그제야 질레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

세상에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가문이 있었다. ...

신성국의 가호를 받는, 그린 가문이 그랬다. 그린 가문은 황제조차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가문. ...

질레트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

다만, 리시가 케이와 결혼하는 순간부터 그린 가문이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이다. ...

질레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끔찍이 싫지만 어쩔 수 없었다. ...

이 순간, 리시가 원하는 건 명백했다. ...

질레트의 사과. ...

질레트의 굴복. ...

질레트가 리시를 향해 걸어가려 하자, 자작 부인이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는 듯 질레트를 노려봤다. ...

질레트는 “괜찮아.” 하고 작게 속삭인 후, 리시의 앞으로 향했다. ...

모두의 시선이 질레트를 따라서 움직였다. ...

이윽고 리시 앞에 선 질레트는, 메르디 자작 옆에 차분하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

“제가 헛소문을 퍼뜨렸습니다.” ...

실제로 그 이야기를 꺼낸 건 알포드였다. 하지만 알포드는 절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그 자리에 있던 하녀들 또한 사실을 고하지 않을 것이다. ...

“잘못했습니다, 그린 백작 부인. 제가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벌을 내려주세요.” ...

이제 사람들의 눈동자는 리시의 입술로 향했다. ...

귀부인의 추문을 만들어내, 다른 나라에까지 소문을 낸 죄는 컸다. 그것도 평범한 귀부인이 아닌, 그린 가문의 귀부인이자 위틀로 공작의 영애의 추문이었다. 다들 리시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벌을 내릴지 궁금한 표정이었다. ...

‘못 해도 추방이겠지.’ ...

하지만 리시는 모두의 예상에서 벗어나는 말은 했다. ...

“벌은 없어요.” ...

리시가 담백하게 말했다. ...

“솔직하게 말하고 사과했으니 용서하도록 하죠. 이 일은 여기서 끝이에요.” ...

그 자리에 있는 평민과 귀족 대부분은, ...

‘마음도 넓으시네. 공작가의 꽃이라더니, 너무 곱게만 자라서 저러시나?’ ...

라고 생각했고, 그 자리에 있는 귀족 중 몇몇은, ...

‘공작가의 꽃이라고 순진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조심해야겠군.’ ...

이라고 생각했다. ...

리시는 질레트를 용서했고, 이 사실은 이 자리에 있는 기자들이 기사로 써서 널리 퍼뜨릴 것이다. ...

추문을 거짓으로 만들어내 퍼뜨린 자작 영애를 용서한, 마음 넓은 그린 백작 부인. ...

하지만 실상은 용서가 아니라는 걸, 이 자리에 있는 몇몇은 알고 있었다. 진짜 용서할 생각이었다면, 이런 자리에서 진실을 파헤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뒤에서 조용히 알아낸 후, 둘이서 얘기하고 용서했겠지. ...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이 드러난 이상, 질레트도, 메르디 자작 가문도, 거짓 소문으로 그린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려 했다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

메르디 가문은 귀족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하게 될 것이고, 어디를 가도 손가락질받으며 웃음거리가 되리라. 메르디 가문이 하는 모든 사업에 이 사건이 따라붙을 것이고, 머지않아 메르디 가문의 이름으로 벌인 사업들은 망하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

그러나 리시는 질레트를 용서했으니, 메르디 가문이 앞으로 어떤 취급을 받든, 리시와는 관계없는 일. ...

리시가 너무했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

엘레르보의 위팅크 기자 역시 리시가 질레트를 용서한 이유를 눈치챘다. ...

평소라면 위팅크는 ’위틀로 공작 가의 꽃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있었다.‘라고 기사의 서문을 썼겠지만, 이번에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

‘그린 백작 부인. 재미있는 분이네.’ ...

케이를 찾아온 신관 역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

일이 진행될수록 신관의 얼굴은 점점 파래졌다. ...

이윽고 질레트가 리시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신관이야말로 무릎을 꿇고 싶은 심정이었다. ...

‘신이여.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

+++

리시는 따뜻하고 향긋한 물이 가득 찬 욕조에 몸을 담그고 신문을 읽는 중이었다. ...

오늘 아침 발간된 엘레르보의 신문. ...

1면에 리시와 관련된 기사가 실려 있었다. ...

위팅크가 쓴 기사는 리시에게 호의적이었다. ...

‘위팅크라면 내가 무슨 생각으로 질레트를 용서했는지 눈치챘을 거야.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어.’ ...

그렇다는 건, 위팅크가 리시에게 호감을 느꼈다는 의미다. ...

예전처럼 귀족의 힘이 절대적이지 않은 이 시기에, 기자의 호감을 사두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

‘다만…….’ ...

  [위틀로 공작가의 꽃은 여전히 화사한 꽃잎을 지니고 있었다.] ...

리시는 기사의 마지막 부분을 노려봤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 ...

리시를 표현할 때는 언제나 따라붙는 칭호. ...

리시는 그 칭호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

‘쉽지 않겠지.’ ...

지난 삶에서는 죽을 때까지 그 칭호가 따라왔다. ...

달칵- ...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케이가 쟁반을 들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

리시는 반사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

욕조 안에 가득 띄운, 새빨간 장미 꽃잎. ...

무수히 많은 장미 꽃잎 사이로 리시의 하얀 살결이 언뜻 드러났다. ...

이런 모습을 케이에게 보이는 게 창피했지만, 이런 거로 창피해한다는 걸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

그 어떤 일에도 당황하지 않고 여유로운 아이리스. ...

리시는 이번 삶에서 그런 여자가 되고 싶었다. ...

당당하게 턱을 살짝 치켜들었지만, 몸이 스르륵 욕조 깊이 들어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

“무슨 일이죠?” ...

“내 아내의 목욕 시중을 들고 싶어서. 겸사겸사 축배도 들고 싶고.” ...

케이가 가져온 쟁반 위에는 신선한 청포도와 치즈, 와인과 잔이 놓여 있었다. ...

케이는 쟁반을 욕조 옆 테이블에 내려놓고,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

그가 손가락 끝으로 욕조 안의 물을 길게 쓸었다. ...

그의 예쁜 손가락에 빨간 장미 꽃잎 몇 장이 붙었다. ...

그가 느른하게 장미 꽃잎을 한 장, 한 장 떼어 욕조에 도로 떨어뜨리는 걸, 리시는 멍하니 지켜봤다. ...

그는 마치 무대 위의 배우처럼 움직였는데, 그것이 몹시도 강렬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장미 꽃잎을 다 떼어낸 그는 젖은 손으로 머리를 뒤로 쓱 쓸어올리고, 리시를 보며 싱긋 웃었다. ...

“내 얼굴 뚫리겠어요, 리시.” ...

“아…….” ...

리시는 얼굴을 붉히며 와인 병으로 눈동자를 움직였다. ...

“배우처럼 행동하기에, 봐줬으면 하는 줄 알고.” ...

“배우처럼 행동한 적은 없는데, 당신 눈에 그렇게 보였다니 기쁘군요.” ...

“딱히…….” ...

“쉿.” ...

그의 검지가 리시의 입술을 가만히 눌렀다. ...

입술에 닿는 젖은 손길이 뜨거웠다. ...

그는 회청빛 눈동자로 리시를 지그시 응시하며 말했다. ...

“그만 말해요, 리시. 착각일지라도, 내가 좀 더 기뻐할 수 있게.” ...

리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손가락을 떼어냈다. ...

케이는 능숙하게 와인을 따라, 잔을 리시에게 건넸다. ...

잔을 받으려고 물에 잠겨 있던 팔을 올리는 바람에, 찰방, 하고 물결이 생겨났다. ...

리시의 상체 쪽을 가리고 있던 장미 꽃잎들이 사라락 퍼져나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

짧은 틈에 드러난 살결에 그의 시선이 잠깐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

리시는 와인이고 뭐고, 얼굴이 욕조 안에 푹 잠기게 하고 싶었지만, 우아하게 잔을 받아들었다. ...

“뭐로 건배를 하죠?” ...

리시가 잔을 살살 굴려 와인 향기를 맡으며 물었다. ...

“당신의 오명이 풀린 것. 유례없을 정도로 근사할 우리의 결혼식. 엘레르보의 위팅크 기자의 호감을 얻은 것. 어떤 게 좋을까요?” ...

역시 케이는 예리했다. ...

그 역시 엘레르보에 실린 기사만 읽고도, 위팅크가 리시에게 호의를 표현한 것을 눈치챘다. ...

“셋 전부.” ...

리시가 대답하며 잔을 내밀자, 케이가 가볍게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

챙- ...

고운 소리가 욕실 안에 퍼졌다. ...

리시는 입안에 감미롭게 번지는 와인 향을 즐겼다. ...

따뜻한 욕조 안, 주위에 가득한 장미 향기, 그리고 입안을 즐겁게 해주는 와인. ...

이미 모든 걸 다 이룬 기분이 들었다. ...

케이가 접시에 작게 자른 치즈 하나를 집어 리시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 ...

“결혼식에 가본 적 있어요, 리시?” ...

지난 삶에서는 몇 번 가본 적 있었지만, 이번 삶에서는 아니었기에 고개를 저었다. ...

케이가 포도 한 알을 따서 리시의 입에 넣어주며 말했다. ...

“피곤할 거예요. 참석자도, 주최자도, 아주 피곤해요.” ...

“파티를 좋아하지 않나 봐요.” ...

“무척. 그럴 시간에 밖에 나가서 성유물을 찾고, 야만족을 토벌하는 게 더 유익하잖아요.” ...

“나는 당신이랑 파티에 자주 참석하고 싶었는데.” ...

“그렇다면 앞으로 파티를 좋아해야겠네요.” ...

케이가 담담히 대꾸하며 또 포도 한 알을 따서 리시의 입에 넣어줬다. ...

별생각 없이 포도를 받아먹던 리시는, 누군가 이렇게 음식을 먹여주는 게 처음이라는 걸 떠올렸다. ...

이게 사랑받는 기분일까? ...

이 남자는 날 사랑하는 게 아닌데. ...

케이의 감정이야 어떠하든, 그가 리시를 소중하게 대해주는 것만은 분명했다. ...

‘지난 삶에서도…… 그랬지. 아주 잠깐이었지만.’ ...

리시는 지난 삶, 케이와의 짧은 만남을 떠올리며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

리시의 시선을 느낀 그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상체를 숙여 리시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

리시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벌어지며 그를 받아들였다. ...

그의 손이 리시의 머리칼을 파고들고, 그의 숨결이 리시를 뜨겁게 물들였다. ...

따뜻한 물이 차게 느껴질 정도로, 그의 입술이 뜨거웠다. ...

“당신이 그런 식으로 날 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리시.” ...

그가 입술을 겹친 채 나직하게 속삭였다. ...

“모르는 것 치고는 아주 잘하는데요.” ...

그가 키득거렸다. ...

“당신한테서 포도 맛이 나요.” ...

“당신도요.” ...

“그거 알아요, 리시? 요새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

그가 와인병을 가져와 욕조 위에 기울였다. ...

값비싼 와인이 콸콸 쏟아져 욕조를 붉게 물들였다. ...

“와인으로 목욕하는 게 유행이래요.” ...

와인이 튀어 리시의 목덜미와 쇄골 위에 피처럼 떨어졌다. ...

진한 와인 향 때문일까? ...

아니면 리시에게 고정되어 흔들리지 않는 저 청회색 눈동자 때문일까? ...

리시는 취한 듯 몽롱해졌다. ...

다시 다가오는 그의 입술을 받아들이려 고개를 들었는데, 그는 리시의 얼굴을 지나쳐 리시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

그의 입술이 목선을 따라 움직였다. ...

그의 젖은 입술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와 리시의 입술 위에 겹쳐졌다. ...

이번에는 리시도 그에게서 포도 맛을 느꼈다. ...

그와 같은 맛을 공유한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그만 아찔해졌다. ...

이성이 아득히 멀어지고, 그에게 겹쳐져 그의 안으로 녹아내리고 싶다는 욕망이 빈자리를 채웠다. ...

그의 손이 리시의 목선을 타고 내려가 둥근 어깨를 쥐었다. ...

문득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케이는 리시의 어깨를 꽉 쥐었다가, 끄응, 소리를 내며 얼굴을 멀찌감치 떨어뜨렸다. ...

리시가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

그가 엄지로 리시의 눈가를 가볍게 쓸며 말했다. ...

“청첩장이 나왔어요, 리시.” ...

기분 탓일까? ...

리시의 귀에는 케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처럼 들렸다. ...

수인의 왕, 성유물의 수호자인 케이브란트 그린이 떨 리 없는데도. ...

(24) 첫 번째 이혼남. ...

케이는 도망치듯 욕실을 나왔다. ...

리시의 방 응접실에 앉아 있던 에르웰과 크리시나가 벌떡 일어났다. ...

그들의 눈에도 케이의 모습이 이상해 보였나 보다. ...

“백작님. 괜찮으세요?” ...

크리시나의 질문에, 케이는 한 손을 가볍게 들어 보인 후 그대로 리시의 방을 빠져나왔다. ...

복도로 나온 후에야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

“미치겠군.” ...

신음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

이상하게도 리시와 함께 있으면 이성을 잃게 된다. ...

그녀의 연한 보라색 눈동자가 케이를 가만히 응시하면, 이름을 붙이기 힘든 감정이 아랫배부터 차올라 명치를 콱 짓눌렀다. ...

그저 와인을 마시며 오늘의 일로 농담이나 주고받으려고 들어간 건데, 케이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하는 리시의 얼굴이나 보려고 들어간 건데. ...

‘이쪽이 더 당황해버렸군.’ ...

“대장.” ...

뒤에서 들려오는 월라스의 목소리에, 케이는 총 맞은 사람처럼 놀라서 휙 돌아섰다. 월라스와 제이미가 나란히 서서 수상하다는 듯 이쪽을 보고 있었다. ...

“왜 형수님 방 앞에서 그러고 있어요? 형수님이 못 들어오게…… 어? 대장, 얼굴이 왜 그렇게 벌게요? 어디 아파요?” ...

월라스가 걱정스러운 듯 성큼성큼 걸어왔다. ...

케이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한 손을 앞으로 뻗었다. ...

“멈춰, 월라스.” ...

“왜요? 전염병이라도 걸렸어요? 얼굴, 너무 빨간데. 그렇지, 제이미?” ...

제이미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케이를 보고 있었다. 케이가 왜 저러는지 알 것 같다는 눈빛이었다. ...

케이는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

“가라. 얘기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

“왜 그래요, 대장? 광견병 같은 거 걸렸어요?” ...

“……월라스…….” ...

“그럼 큰일이잖아요. 그거 걸리면 답이 없다던데. 저번에 에오르트 어느 마을인가? 거기서 광견병 걸린 개한테 물린 사람이 미쳐 발광했다더라고요. 아, 그러고 보니 광견병 걸리면 물을 무서워한다는 얘기가 있던데…… 물 좀 뿌려볼까, 제이미?” ...

케이는 월라스를 한 대 때릴지, 못 들은 척 서재로 들어갈지 고민했다. ...

“괜찮아요, 월라스. 대장은 그냥 성인 남자라면 누구나 겪는, 격동의 시기에 들어간 것뿐이지요.” ...

역시 제이미는 눈치챘다. ...

“격동? 뭔 격동?” ...

월라스가 못 알아듣고 제이미와 케이를 번갈아 봤다. ...

제이미가 월라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

“대장은 말이죠. 아이리스 님이…….” ...

“제이미. 그만하고.” ...

케이가 제이미의 말을 끊고 복도 반대쪽을 가리켰다. ...

입 닥치고 꺼지라는 의미였고, 제이미는 잘 알아들었다. ...

싱긋 미소를 지은 제이미가 월라스에게 속삭였다. ...

“저쪽에 가서 자세하게 설명해주죠.” ...

“제이미…….” ...

“아, 대장. 청첩장 건으로 노백작님께서 연락하셨어요. 무척이나 언짢으신 것 같던데…… 대장이 직접 연락해보시는 게 좋겠지요?” ...

“알겠다.” ...

제이미가 월라스와 함께 복도 반대쪽으로 걸어가며, 뭐라고 속삭였다. ...

아마도 케이의 상태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리라. ...

케이는 골치가 아팠다. ...

‘그림자’라고 부르는 최측근들에게 케이는 위엄 있는 대장이라기보다는 믿을 만한 동료였다. ...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케이 본인도 모를 수상쩍은 감정을 다 드러내고 싶은 건 아니었다. ...

‘정신 좀 차려야겠어.’ ...

케이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통신실로 향했다. ...

십수 년 전, 마법사와 기계공학자들이 통신기를 발명했다. ...

번호만 알면 여기서 저기로 쉽게 연락할 수 있는 기계였다. ...

악용할 수 있다는 이유로 아무나 소유할 수는 없고, 도시나 큰 마을의 관청 소속 통신소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

단, 나라에서 허가를 내주면 개인도 가질 수 있는데, 조건이 까다로워서 통신기를 가진 개인은 몇 명 되지 않았다. ...

당연히 성유물의 수호자인 그린 가문은 쉽게 허가를 받아 통신기를 갖고 있었다. ...

통신실에 들어간 케이는 커다란 통신기 앞에 서서, 그린 노백작의 저택으로 연결되는 버튼을 눌렀다. ...

이윽고 노백작의 집사와 연결됐고, 집사가 와이번 그린 노백작을 불러왔다. ...

“아버지.” ...

[케이브란트 그린.] ...

와이번이 낮은 음성으로 케이의 이름을 정식으로 읊조렸다. ...

무척 화가 났다는 의미다. ...

“사정이 있습니다.” ...

[나랑 네 엄마는 신문에서 아무리 떠들어대도 믿지 않았다. 왜냐. 우리는 신문쪼가리보다 널 더 믿으니까.] ...

“압니다. 하지만 사정이…….” ...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지? 듣자 하니 위틀로 공작이 제 딸은 아무나 보여주기 싫다며 꽁꽁 싸매고 있었다 하더구나.] ...

[케이, 엄마다.] ...

어머니인 헤레이나 그린이 와이번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

“어머니…….” ...

[사내가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 이해한다. 그래, 영웅은 미인을 좋아한다고 하지. 하지만 케이, 엄마는 영 마음이 그렇구나. 다 큰 자식이 자기 결혼할 여자를 스스로 정하고, 부모님에게 말도 없이 결혼한 거? 그래서 우리가 제일 늦게 결혼 소식을 알게 된 거? 그거 다 이해해.] ...

이해하지 못한다는 목소리였다. ...

[하지만 케이. 위틀로 공작은 욕심이 많은 자야. 그런 자가 첫째 딸인 브리트니는 일찌감치 사교계에 데뷔시켰으면서, 둘째이자 그렇게 눈부시게 예쁘다는 아이리스를 감춰둔 이유가 뭐겠니?] ...

“그건…….” ...

[팔아먹기 위해서야. 예쁘장한 브리트니를 보면서, 다들 궁금해하게 했겠지. 저 예쁜 브리트니도 내보내는데, 아깝다고 못 내보내는 아이리스는 대체 얼마나 예쁘기에. 그런 기대감을 품게 만들기 위해서겠지.] ...

케이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일찍 모든 걸 내려놓고 조용한 시골에 가서 지내는 부모님이 이토록 예리하게 정세를 살피고 있을 줄은 몰랐다. ...

“어머니, 그것도 사정이 있습니다.” ...

[뭘 주고 그 아이를 데려온 거니?] ...

노백작 내외는 케이에게 변명할 틈을 주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없던 일이었다. ...

케이는 자신의 부모님이 얼마나 분노했는지 알 수 있었다. ...

“아무것도요.” ...

[이제는 여자 때문에 엄마에게 거짓말까지 하는구나. 그 아이를 데려오던 날, 그린 소유의 광산 하나가 위틀로 쪽으로 넘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

“대체 그 소식통은 누굽니까? 그런 좋은 소식통이 있으면 저 좀 주세요.” ...

[지금 너랑 농담하는 거 아니다, 케이브란트 그린. 나는 네가 미인을 좋아하고, 멋대로 결혼하려고 하는 거, 다 이해해. 하지만 뭔가를 주고 여성을 사 오는 건, 옳지 못한 짓이야. 레이디 위틀로도 네 뜻에 동의한 거니?] ...

케이는 한숨 놓았다. ...

부모님이 화난 이유가 단순히 케이가 멋대로 결혼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부모님은 싫어하는 리시를 억지로 사 온 걸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

“레이디 위틀로가 아니라 그린 백작 부인입니다, 어머니. 결혼식은 안 했어도……” ...

[내가 그런 걸 질문한 게 아닐 텐데.] ...

“리시, 아이리스도 동의했습니다.” ...

잠시 대화가 끊겼다. ...

하지만 유독 상태가 좋은 통신기는, 저 너머의 노백작 내외의 대화를 고스란히 전해줬다. ...

[여보, 어떡해요? 우리 케이가 거짓말이 늘었어요.] ...

[다 내가 잘못 키운 탓이오. 울지 말아요, 헤라.] ...

[하지만…… 우리 아들이 여자를 돈 주고 사 오는 놈으로 커서…….] ...

케이는 한숨을 삼켰다. ...

물론 광산 하나를 주고 데려오긴 했다. 하지만 그건 리시의 뜻이었다. ...

그렇다고 부모님에게 “리시가 광산을 주고 자기를 사랬어요.”라며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차라리 자신이 돈 주고 여자를 사 온 나쁜 놈이 되는 게 나았다. ...

이윽고 와이번이 말했다. ...

[케이브란트 그린. 오늘 출발하마. 제일 빠른 마차를 타고 갈 테니, 2, 3일 후면 도착할 거다.] ...

헤레이나가 덧붙였다. ...

[만약 레이디 위틀로가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한 거라면, 넌 우리 가문에서 첫 번째 이혼남이 될 거야.] ...

 

+++

브리트니는 정원 온실에서 티파티를 열었다. ...

케이가 리시를 데려가는 대가로 준 베노트의 금광에서 상당량의 금이 나오고 있었기에, 정원과 온실을 새로 꾸몄고, 그걸 다른 영애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

“그래도 다행이네요. 그린 백작 부인이 오해를 풀어서. 브리트니 양도 한숨 돌렸겠어요.” ...

그 말을 한 영애는 딱히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브리트니도 마찬가지였지만, 애써 미소지었다. ...

“그러게. 정말 다행이지. 아이리스가 누명을 써서 울고 있을까 봐 잠도 제대로 못 잤거든.” ...

“어쩜. 동생 생각하는 마음이 깊기도 하셔라.” ...

깊긴 깊었다. ...

이 자리의 영애들이 아는 쪽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

질레트라는 여자가 한 짓이 드러나면서, 그동안 리시를 욕하고 조롱하던 신문사들이 황급히 태도를 바꿨다. ...

그들은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자, 성유물의 수호자인 그린 가문의 아이리스를 욕보였다. ...

진짜도 아닌 일로 귀족 부인의 명예를 더럽힌 일은, 큰 벌을 받아 마땅했다. ...

자칫 잘못하면 신문사가 폐업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

하지만 리시는 신문사를 상대로는 아무 소송도 걸지 않았고, 한 번쯤 리시를 욕한 적 있는 신문사들은 너도나도 앞다퉈 리시의 넓은 아량과 아름다움을 칭찬하는 기사를 냈다. ...

“요새 기자들은 그린 백작 부인을 칭찬하느라 몸이 달았던데…… 나는 생각이 좀 달라요. 남들 앞에서 그렇게 질레트 양을 몰아붙이다니. 그건 그냥 목메고 죽으라는 소리 아니겠어요?” ...

어느 영애의 말에, 브리트니는 박수를 쳐주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

“그런 의미는 아니었을 거예요. 물론 아이리스가 자기한테 잘못한 사람을 끝까지 용서하지 못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설마 목메고 죽으라고 그랬겠어요? 나름대로 용서한 거겠죠.” ...

브리트니가 두둔 아닌 두둔을 했다. ...

“글쎄요. 듣자 하니 그 여자가 그린 백작님의 밤 시중을 들던 여자라는 얘기가 있던데…… 질투 나서 그런 거 아니겠어요?” ...

“물론 질투는 좀 했겠죠. 하지만…….” ...

브리트니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난처한 척 입술을 달싹거렸다. ...

얘기를 꺼낸 영애가 부채를 살랑살랑 부쳤다. ...

“미안해요. 브리트니 양을 몰아붙이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

브리트니의 시녀가 찾아온 건, 그때였다. ...

시녀는 브리트니의 옆에 조용히 서서, 봉투를 하나 건넸다. ...

“이게 뭐지?” ...

금띠를 두른 하얀 봉투 중간에는 멋진 글씨체로 [청첩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

“누가 결혼하나?” ...

영애들을 둘러봤지만 다들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

브리트니는 봉투 안에서 청첩장을 꺼냈다. ...

진짜 금을 가장자리에 두른, 호화로우면서도 우아한 청첩장이었다. ...

청첩장을 확인한 브리트니의 눈이 커졌다. ...

[케이브란트 그린과 아이리스 위틀로의 결혼식에 초대합니다.] ...

시작은 그러했다. ...

“누구 결혼이래?” ...

옆에 있던 캐트리나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

“그린 백작이랑…… 아이리스…….” ...

“어머나. 그 애, 몸 좀 달았나 보네.” ...

캐트리나가 그렇게 말하며 귀족 영애들을 돌아봤다. ...

귀족 영애들이 조롱 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자기를 둘러싸고 어떤 소문이 도는지 알았나 보네요. 필시 그린 백작님을 닦달해서 결혼식을 열자고 했겠죠.” ...

“어쩜, 그렇게 창피한 짓을 하지? 난 죽어도 나 싫다는 사람한테 억지로 결혼하자는 말은 못 할 것 같아요.” ...

“그러게 말이에요. 사교계에 나와본 적이 없으니, 레이디로서의 기품을 알기나 하겠어요?” ...

브리트니는 평소라면 그들의 말을 즐거워하며 들었을 것이다. ...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목소리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

청첩장 제일 말미에 쓰인 이름 때문이었다. ...

브리트니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듯, 캐트리나가 조심스럽게 청첩장을 넘겨다 봤다. ...

뚱한 표정으로 청첩장을 보던 캐트리나의 눈이, 브리트니가 읽고 있는 그곳에서 멈췄다. ...

“이게 뭐야……?” ...

“왜 그래요?” ...

“뭐죠?” ...

영애들이 관심을 보였다. ...

캐트리나는 저도 모르게 브리트니의 손에서 청첩장을 빼앗듯 가져와 흔들면서 말했다. ...

“파티 주최자가…… 넬라니커스 제널 백작 부인이에요!” ...

(25) 내 남편의 부모님 ...

리시는 침대에 앉아, 전에 읽던 역사서를 계속해서 읽었다. ...

‘1차 수인의 난’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베네데르템은 포기하지 않았다. 간신히 살아남은 그는 음지에 숨어, 조용히 자신을 도울 사람을 모았다. ...

베네데르템은 말했다. ...

“수인 역시 인간이며, 짐승으로 변신하는 것은, 신의 저주가 아닌 타고난 재능일 뿐이다. 교황은 신이 내린 선물을 자신이 받지 못한 열등감으로 수인을 박해하는 것이다.” ...

그리고 또 베네데르템은 말했다. ...

“신의 선물은 수인만이 아닌 마법사 역시 받았다. 처음에는 수인. 수인이 멸종하면 교황의 시선은 어디로 향할까? 교황 역시 마법적 재능이 없으니, 마법사의 멸망 역시 예정된 미래일 것이다.” ...

마법사 대부분은 코웃음 쳤으나, 믿음 없는 마법사들이 베네데르템의 뜻에 동조했다. ...

그런 삿된 거짓말로 재능 있는 자들을 선동한 베네데르템은, ‘2차 수인의 난’을 일으켰다. ...

동쪽의 아마스 해가 핏빛으로 물든, 죽음의 전쟁이었다. ...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리시는 책을 접어서, 침대 옆 협탁에 내려놨다. ...

“계속 읽어도 돼요, 리시.” ...

케이가 그렇게 말하며 옷장 앞에서 옷을 벗었다. ...

그의 탄탄한 등 근육이 드러나자, 리시는 얼른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

가운으로 갈아입은 그가 성큼성큼 걸어와서 리시의 옆에 앉았다. ...

그는 자연스럽게 리시의 머리카락 끝을 잡아올려 입을 맞췄다. ...

“향이 좋군요.” ...

“덕분에요.” ...

왜인지 케이는 조금 난처한 표정이었다. ...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꺼내기 어려운 듯,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

“나한테 할 말 있어요?” ...

“곤란한 일이 생겼어요.” ...

기다렸다는 듯, 케이가 말했다. ...

“말해봐요.” ...

“부모님이 화가 잔뜩 나셨어요.” ...

척추에 찬 기운이 싹 훑고 내려갔다. 리시는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

“당연히 그러실 거예요. 두 분께 말도 없이 결혼했으니.” ...

“터치하지도 않으시고, 내가 하는 일에 관심도 없어 보이셔서, 이렇게까지 노하실 줄은 몰랐어요. 아무래도 이틀 후쯤 이곳에 오실 것 같아요.” ...

“그렇군요.” ...

“여자를 만나본 적도, 두 분께 소개해드린 적도 없어서, 두 분이 어떻게 나오실지 예측할 수가 없어요.” ...

리시는 그를 빤히 응시했다. ...

케이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

“왜 그렇게 봐요?” ...

“정말로 여자를 만나본 적이 없어요?” ...

“없어요. 왜 그런 거로 거짓말을 하겠어요?” ...

“하지만…….” ...

리시는 저도 모르게 그의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부드러운 뺨과 수염 때문에 까끌한 턱을 가만히 쓸면서 말했다. ...

“이렇게 잘생겼는데.” ...

케이의 눈이 커졌다. 그는 그대로 리시를 응시하다가, 리시의 손목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

“내가 잘생겼어요?” ...

“아무도 그런 말을 안 해주던가요?” ...

“아니. 당신 눈에도 내가 잘생겨 보여요?” ...

리시는 어이가 없었다. ...

당연히 잘생겨 보이지. 이렇게나 완벽한데. ...

말문이 막혀서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그의 귓불이 빨개 보이는 건, 아마도 착각일 거라고, 리시는 생각했다. ...

다시 시선을 돌려 눈을 맞춘 케이가 말했다. ...

“키스하고 싶어요. 키스해도 돼요?” ...

어딘지 모르게 열띤 눈동자와 음성이 리시의 청각뿐 아니라 촉각까지도 자극했다. ...

민망함에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며 대꾸했다. ...

“지금까지는 묻지도 않고 했으…….” ...

마지막 말은 그가 삼켰다. ...

그의 입술이 약간은 거칠다 싶게 리시를 탐했다. ...

그의 무게가 리시를 뒤로 넘어뜨리고, 그의 체취가 리시를 취하게 했다.   침대 위에서 이불과 그와 리시가 뒤엉켰다. ...

격렬한 입맞춤에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도, 케이가 왜 갑자기 이렇게 흥분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설마…… 잘생겼다고 해서? 아니겠지. 그런 말은 자주 들었을 텐데…….’ ...

입맞춤이 길어질수록 숨이 가빠졌다. 터질 것처럼 뛰는 심장박동이 거슬리지 않는 건, 그의 심장박동과 겹쳐졌기 때문이었다. 밀착한 가슴의 울림이 내 것인지, 그의 것인지조차 가늠할 수가 없었다. ...

살결이 부딪치는 느낌이 아찔했다. 그의 등에 손톱을 박아넣으며 잘은 숨을 흘렸다. ...

그의 근육이 단단하게 경직되는 게 느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입술을 뗀 그가 리시를 꽉 끌어안았다. ...

그의 가슴에 얼굴이 짓눌려 숨을 쉬기 힘들어졌지만, 리시는 이토록 거세게 안기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그의 품이 안전하게 느껴졌다. ...

“나는 최대한 막을 거지만, 어쩌면 내 부모님 때문에 당신이 상처받는 일이 생길지도 몰라요, 리시.” ...

갑자기 원래의 주제로 돌아갔다. ...

리시는 이런 와중에도 담담히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는 케이가 신기하기만 했다. ...

케이가 얼마나 힘겹게 이성을 붙들고 있는지, 리시는 전혀 몰랐다. ...

“케이. 난 유리로 만든 꽃이 아니에요. 말 몇 마디, 손찌검 몇 번이 날 아프게 하지는 못해요.” ...

리시가 속삭이듯 뱉은 말에, 케이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

케이는 리시의 정수리에 얼굴을 묻었다. ...

“그러면 안 돼요, 리시. 나는 내 아내가 그런 것들에 익숙해지는 게 싫어요.” ...

“하지만 익숙한걸.” ...

“새살은 돋아요, 리시.” ...

그의 손바닥이 리시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

“새로 돋은 그 부드러운 살에는, 아주 작은 상처 하나 나지 않게 할 거예요.” ...

말뿐이라도 좋았다. ...

그래서 리시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키득거렸다. ...

“내가 연약해져서 징징 울기나 하는 레이디가 되길 바라요?” ...

케이에게는 왜인지 지금 리시의 웃음소리가 울음처럼 들렸다. ...

그녀에게 자신의 온기를 전부 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

“원한다면요. 당신이 원한다면, 리시.” ...

 

+++

브리트니는 청첩장을 구겨서 집어던졌다가, 다시 주워와서 읽기를 반복했다. ...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주최자 명단 제일 위에 있는 ‘넬라커니스 제널 백작 부인’이라는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

그 아래에 있는 ‘제레시엔 그린’이라는 이름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

넬라커니스 제널 백작 부인. ...

황후도 친해지고 싶어 할 정도로 유명한 사교계의 여신. ...

그녀가 아이리스의 결혼식 주최자라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

‘어째서? 왜 그런 애 결혼식을?’ ...

넬라커니스 제널 백작 부인의 속을 알 수 없었다. ...

그녀는 딱히 그린 가문에 잘 보이지 않아도, 그녀 자체의 명성만으로 빛나는 여자였다. 그런데 어째서 안 좋은 소문으로 가득한 아이리스의 결혼식에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걸까? ...

브리트니는 다시 청첩장을 집어던진 후, 씩씩거리며 데니스 위틀로 공작부인의 방으로 향했다. 데니스는 유명 디자이너를 불러, 그의 디자인화가 실린 카탈로그를 보는 중이었다. ...

데니스가 눈짓하자, 디자이너가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

“엄마. 나, 아이리스를 만나러 가야겠어.” ...

“뭐?” ...

“아이리스 청첩장 받았지? 어차피 결혼식에 갈 텐데, 좀 일찍 가려고.” ...

브리트니는 그린 백작 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아이리스가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

만약 케이브란트가 아이리스에게 속아서 귀하게 대접해주고 있다면, 그가 정신을 차리게 도와줘야만 했다. ...

결혼식을 올린 후에는 늦는다. ...

“거길 왜 일찍 가? 뭐 좋은 일이라고.” ...

“좋은 일이 아니니까 먼저 가서 확인해야지. 걔가 그린 백작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도 알아보고.” ...

“브린. 괜히 건드릴 것 없어. 그린 백작이 주고 간 금광 덕분에 요새 살맛 나잖니. 그러다가 그린 백작이 결혼을 취소한다면서 금광을 돌려달라고 하면 어쩔 거야?” ...

“설마 그런 치사한 짓을 하겠어? 오히려 나중에 가서 아이리스가 얼마나 헤프고 멍청한지 알게 되면, 우리 탓을 할 수도 있다고.” ...

“흐음.” ...

브리트니는 마뜩잖아 보이는 데니스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

“그러니까 엄마. 얼른 가자. 우린 아이리스 가족이니까, 며칠 일찍 간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도 없을 거 아냐? 이번 기회에 그린 백작 저택 구경도 좀 하고.” ...

 

+++

그린 노백작 내외가 그린 백작 저에 도착했다. ...

한때 이 저택의 안주인이었던 헤레이나 그린은 매서운 눈으로 주위를 살펴봤다. ...

헤레이나가 이곳에서 살 때와 달라진 점은 거의 없었다. ...

다음에 헤레이나의 시선이 향한 곳은, 자신들을 마중 나온 리시와 케이에게였다. ...

처음에 눈에 들어온 건, 당연히 덩치가 큰 케이였다. ...

케이는 난감한 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는데, 헤레이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

부모님을 앞에 두고 저런 미소를 짓다니. ...

뭔가 잘못해도 한참 잘못한 일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

그다음에 헤레이나는 리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리시는 두 손을 앞에 가지런히 모은, 우아하지만 정중한 자세로 노백작 내외를 바라보고 있었다. ...

표정 없는 얼굴은 마치 인형, 아니, 신이 공들여 만든 조각상 같았다. ...

반만 묶어서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연분홍빛으로 보이는 은발, 그린 듯한 눈썹 아래에 자리 잡은 큰 눈과 연보라색 눈동자. 오뚝한 코와 잘 어울리는 도톰하고 붉은 입술. 자그마한 얼굴에서 곱게 떨어지는 목선과 부드럽게 이어지는 어깨선. ...

수수한 드레스를 입었음에도, 빛이 발했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더니…….’ ...

과연 그런 칭호가 붙을 만했다. ...

외모만큼은 그 어느 한구석도 지적할 곳이 없었다. 궂은일 한번 해보지 않고, 귀한 대우를 받으며 자란 여인처럼 보였다. ...

어쩌면 위틀로 공작이 정말로 막내딸을 너무 아껴서, 세상에 내보이지 않은 게 진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인사를 나눈 후, 그들은 본채로 이동했다. ...

응접실 앞에서, 헤레이나는 케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

“우리는 레이디 위틀로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구나. 너는 가서 할 일이나 하렴.” ...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 ...

케이가 단호하게 거절하며 리시의 손을 잡았다. ...

헤레이나는 손이 잡힌 리시가 어떤 기분일지 궁금해서 표정을 살폈지만, 그녀의 조각 같은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

“케이브란트 그린. 부모에게 말도 없이 결혼했으면서, 이 정도도 양보 못 하겠다는 거니?” ...

“말씀도 드리지 않고 결혼한 것은, 제 잘못입니다. 하지만 이건 다른 문제입니다. 어머니가 제 아내를 레이디 위틀로라고 부르시는데, 제가 어떻게 제 아내만 들여보내겠습니까?” ...

헤레이나는 화가 치밀었다. ...

케이가 금광을 주고 억지로 리시를 데려왔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

리시에게 푹 빠진 듯한 케이와 달리, 리시의 기분이 어떤지는 도통 읽어낼 수가 없었다. ...

“케이브란트 그린.” ...

“여보.” ...

헤레이나의 노기 띤 음성을, 와이번이 막았다. ...

아까부터 조용히 리시를 관찰하던 와이번은, 헤레이나의 팔에 가볍게 손을 얹으며 말했다. ...

“케이 말에도 일리가 있으니, 같이 들어가는 게 좋겠소.” ...

“하지만…….” ...

항변하려는 헤레이나를 보며, 와이번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

헤레이나는 리시가 와이번의 마음에 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

단지 저 예쁜 외모 때문은 아닐 것이다. ...

헤레이나는 자신의 남편이 상대를 외모로 판단하는 자가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다. ...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든 거지?’ ...

헤레이나도 리시가 싫은 건 아니었다. 그저 케이가 리시를 억지로 사 왔을지도 모른다는, 이 상황이 싫을 뿐. ...

와이번이 먼저 응접실로 들어갔고, 헤레이나는 그 뒤를 따라서 들어갔다. ...

응접실 소파에 그린 노백작 내외와 그린 백작 내외가 마주 보고 앉았다. ...

“레이디 위틀로.” ...

헤레이나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

그런 헤레이나를 가만히 응시하던 리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

“그린 노백작 부인. 아이리스라고 불러주세요. 리시라고 부르셔도 되고요.” ...

정중하지만 단호한 말투였다. ...

헤레이나는 리시가 그저 온실 속에서 귀하게 자란 꽃이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

리시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

“그리고 편하게 대해주세요.” ...

그 미소가 어찌나 해사하고 상냥한지, 헤레이나는 리시 같은 딸이 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

제레시엔 그린은 너무 우악스러우니까. ...

(26) 신의 앞이라 할지라도. ...

  리시는 한껏 긴장한 상태였다. ...

지난 삶, 리시가 겪은 시부모는 정말이지 끔찍했다. ...

리시가 숨을 쉬는 것조차 싫다는 듯, 리시를 멸시하고 학대했다. ...

그린 노백작 내외가 후치스 일가와 같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지만,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위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하지만 리시는 온 힘을 다해 표정을 갈무리하고 그린 노백작 내외의 시선을 받아냈다. ...

“그래, 리시. 편하게 대하마.” ...

헤레이나의 음성은 차가웠다. ...

“이제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가 널 불쾌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은 미리 사과하마.” ...

“어머니.” ...

헤레이나가 눈치도 없이 끼어든 케이에게 한소리 하려는데, 리시가 케이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

“케이.” ...

리시가 지그시 노려보자, 케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

헤레이나는 내심 놀랐다. ...

‘우리 아들을 저렇게 조련하다니.’ ...

케이는 고집이 쇠심줄 같아서, 부모 말에 잘 따르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제멋대로 행동하는 아들이었다. ...

“케이브란트와는 어떻게 만난 거니?” ...

“제가 그린 백작님을 찾아왔습니다. 제가 그린 백작님에게 청혼했고요.” ...

상상도 못 한 대답에 헤레이나뿐 아니라, 와이번과 케이의 눈까지 휘둥그레졌다. ...

“리시!” ...

케이와는 얘기가 안 된 일인지, 케이가 리시의 손을 잡았다. ...

리시는 조심스럽게 그 손을 빼냈다. ...

리시의 시선은 여전히 헤레이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

“네가 먼저…… 우리 아들을 찾아와서 청혼했다고?” ...

“네.” ...

이번에도 리시는 담담히 대답했다. ...

헤레이나는 이 대화의 방향을 종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

레이디가 먼저 청혼하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고, 설령 있다고 해도 대외적으로는 남자 쪽에서 먼저 청혼을 한 것처럼 말하곤 했다. ...

레이디가 사내에게 들러붙는 건, 레이디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

하지만 이런 순간에도 리시의 품격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고고하고 우아한 빛을 흘리고 있었다. ...

정신 차린 헤레이나가 간신히 물었다. ...

“이유는?” ...

“도망치고 싶어서요. 저는 위틀로 공작가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

위틀로 공작이 리시로 장사를 하려는 걸지도 모른다는 예상은 했었다. ...

하지만 그만큼 귀하게 자랐을 줄 알았는데, 왜 도망치고 싶었다는 걸까? ...

헤레이나는 쉽게 건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어떤 식으로 돌려서 질문해야 할지 고민했다. ...

하지도 않아도 될 고민이었다. 리시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

“저는 사생아입니다. 위틀로 공작과 하녀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

순간,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늘한 공기가 응접실을 채웠다. ...

다들 숨조차 쉬지 못한 채, 상상도 못 한 진실을 담담하게 내뱉은 리시의 입술을 응시했다. ...

이건 리시가 던진 승부수였다. ...

‘내가 공작의 사생아라는 사실은 언젠가 내 발목을 잡을 거야. 그렇다면 내 쪽에서 먼저 진실을 밝히는 편이 나아.’ ...

그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

설령 케이가 실망해서 리시를 내쫓더라도. ...

나중에 가서 사생아라는 사실이 밝혀져,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

헤레이나 역시 리시의 의도를 간파했다. ...

‘영리하구나.’ ...

헤레이나는 영리한 아이를 좋아했다. ...

“위틀로 공작은 제 어머니를 죽이고, 저만 살려뒀습니다. 저를 잘 키워서 팔아치우기 위해서요. 하지만 위틀로 공작 내외는 아이를 키우는 데는 소질이 없었죠. 너무 오냐오냐하거나, 너무 학대하거나.” ...

리시의 얼굴에 잠시 쓴웃음이 번졌다가 사라졌다. ...

“심한 학대를 당했어요. 맞고, 경멸당하고, 조롱당했죠. 저는 하녀처럼 일해야만 했고, 하녀들 역시 절 공녀로 대우해주지 않았습니다. 하녀 모두의 입을 막을 수가 없어서, 종종 저에 관한 이야기가 밖에도 흘러나가는 듯했지만…….” ...

리시는 한숨을 삼켰다. ...

“이야기를 흘린 자도, 그 이야기를 들은 자도, 죽었어요. 저에 대한 진실은 잠시 피어올랐다가 사라졌고, 가짜 소문만이 무성해졌죠. 위틀로 공작가의 꽃. 위틀로 공작이 더없이 아끼는 막내딸.” ...

리시는 잠시 말을 멈추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

머리칼과 같은 색의 풍성한 속눈썹이, 리시의 눈동자에 담긴 감정을 감췄다. ...

“위틀로 공작은 후치스 자작에게 금광을 받고 절 넘겨주기로 했습니다. 저는 싫었어요. 그래서 그린 백작님을 찾아왔고요.” ...

“왜…… 하필이면?” ...

“그린 백작님이라면 절 도와주실 것 같아서요.” ...

“왜 그런 생각을 했지? 케이는 여자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애인데.” ...

“제가 백작님의…….” ...

“편지를 썼습니다.” ...

케이가 리시의 말을 끊었다. ...

케이는 리시가 솔직하게 ‘백작의 약점을 안다!’라고 말하리라는 걸 눈치챘다. ...

그것까지는 안 된다. 부모님은 그 부분에 몹시 예민했다. ...

“제가 몇 번이나 리시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위틀로 공작의 약점을 알려달라고.” ...

다행히 부모님은 케이에게 입 다물고 있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

“위틀로 공작의 약점?” ...

“네. 브리트니 위틀로가 저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더군요. 제가 춤을 청했고, 그녀에게 반했다고. 성가셔서 약간 장난을 쳐줄 계획이었습니다.” ...

헤레이나가 미간을 좁혔다. ...

와이번은 흐음, 하며 재미있다는 듯 소파에 등을 기댔다. ...

“저는 그 집안의 정보가 필요했고, 겸사겸사 그 집안의 꽃이라고 불리는 아이리스라는 영애와 교류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보냈죠.” ...

“그러니?” ...

헤레이나가 전혀 믿지 않는 표정으로 리시를 돌아봤다. ...

입술을 살짝 벌리고 케이를 보던 리시가,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

“네.” ...

“내가 그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하니?” ...

“아니요.” ...

리시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

헤레이나는 그 모습에 그만 미소를 짓고 말았다. ...

리시가 부모님에게 혼나는 어린 여자아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

“묻지 않으마. 아무리 자식 일이라도, 남녀 관계에 대해 깊이 캐묻는 것은 실례겠지. 하나, 이것만은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구나. 이 집은, 위틀로 공작가보다 살기 괜찮니?” ...

그 질문에 처음으로 리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연보라색 눈동자가 일렁, 물결을 만들어냈다가 잠잠히 가라앉았다. ...

리시는 미소 지었지만, 헤레이나는 리시가 우는 것처럼 보였다. ...

“저는 살면서.” ...

리시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리시도 그걸 깨달았는지 잠시 말을 멈췄다. ...

살짝 숨을 들이마신 리시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이렇게나 행복한 적이 처음이에요.” ...

케이가 리시의 손을 꽉 잡았다. ...

“앞으로 더 행복해질 텐데.” ...

리시가 케이를 마주 봤다. ...

“기대되네요.” ...

서로를 보며 은은한 미소를 짓는 둘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연인이었다. ...

그제야 헤레이나는 안도했다. 아들이 억지로 레이디를 데려와 부인 자리에 앉힌 게 아니었다. ...

“그래, 잘 알겠다. 그런 거면 됐지. 더는 너희 결혼에 관해 언급하지 않으마.” ...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

“그건 네가 죄송할 일이 아니지.” ...

헤레이나가 케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

케이가 씩 웃었다. ...

“죄송해요, 어머니. 아버지.” ...

“우리는 좀 더 이따가 나가마. 너희 먼저 나가렴.” ...

“네, 그럼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그린 노백작 부인.” ...

“리시.” ...

“네?” ...

“그린 노백작 부인이 아니다.” ...

“그럼……?” ...

“혼인신고는 벌써 했다던데, 어머니라고 불러도 되지 않겠니?” ...

눈을 크게 뜬 리시가 곧 환하게 웃었다. ...

“네, 어머니.” ...

 

리시와 케이가 나가자마자, 헤레이나는 자신의 남편을 돌아봤다. ...

“당신, 리시를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 한 이유가 뭐예요?” ...

“리시는 누가 봐도 청초하고 가녀린 레이디 같아 보이는데…….” ...

와이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전사의 눈빛을 하고 있더군.” ...

 

+++

케이와 리시는 응접실에서 나와 정원으로 향했다. ...

탁 트인 곳으로 나가서야, 리시는 편하게 숨 쉴 수 있었다. ...

“너무 긴장했어요.” ...

“그렇게 보이지 않던걸.” ...

“미안해요.” ...

“뭐가요?” ...

“내가 사생아라는 걸 숨겨서.” ...

“예상은 하고 있었어요.” ...

“그래요?” ...

케이가 리시의 머리카락 끝을 살며시 잡아 검지에 감았다. 그리고 그 감긴 부분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

“이렇게나 예쁜데 학대를 당했다면,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

예쁘다는 말은 참 많이도 들었다. ...

하지만 케이가 이렇게 똑바로 응시하며 예쁘다는 말을 해줄 때는, 심장 부근이 간질거리며 케이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

리시는 슬그머니 시선을 옆으로 피하며 말했다. ...

“당신의 부모님이 절 받아주셔서 다행이에요.” ...

“내 부모님이 아니에요, 리시. 이제 당신의 부모님이기도 해요.” ...

“하지만…….” ...

“믿어요. 당신에게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한 순간부터, 어머니는 당신을 우리 가족으로 받아들인 거니까.” ...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

지난 삶, 알포드의 어머니 역시 처음에는 그런 말을 했었다. ...

-이제부터 어머니라고 부르렴. 나도 널 딸처럼 대할 테니. ...

위틀로 공작가에서와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

위틀로 공작이 브리트니를 아끼듯, 알포드의 어머니 역시 자신을 아껴줄 거라는, 바보 같은 기대를 품었었다. ...

하지만 상황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

아니, 오히려 더 괴로워졌다. ...

“리시?” ...

케이의 부름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

케이의 청회색 눈동자에 담긴 걱정이, 리시의 답답한 가슴을 부드럽게 풀어줬다. ...

“당신이 가끔 무척이나 괴로운 표정을 짓는 거 알아요?” ...

“그런가요?” ...

조심해야겠다. ...

“내가 무엇을 해야 내 아내가 괴로워하지 않을까?” ...

“케이, 난 괴롭지 않아요.” ...

케이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

“어떻게 해야 내 아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을까?” ...

“난 거짓말쟁이 아니에요, 케이. 정말 괴롭지 않아요.” ...

그저 지난 삶의 기억이 남아 있어서, 때때로 이 가슴을 짓눌러서, 그게 조금 싫을 뿐. 케이와의 생활에는 더없이 만족했다. ...

“아, 좋은 게 떠올랐어요.” ...

케이가 갑자기 리시를 꽉 끌어안았다. ...

숨이 막힐 정도로 단단한 포옹. ...

케이에게 이런 식으로 안길 때면,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새로운 긴장이 찾아왔다. ...

검고 무거운 긴장과는 완전히 다른, 분홍빛의 달콤한 긴장감. ...

“내가 수인이 평범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돼서 괴로워할 때. 내가 울적해하면 가족들이 이런 식으로 날 안아주곤 했죠. 그러면 기분이 나아지더군요.” ...

“나아지는 정도가 아닌데요.” ...

케이의 가슴에 얼굴이 파묻힌 리시가 웅얼웅얼 중얼거렸다. ...

케이가 웃으며 리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좋아졌어요?” ...

“무척이요.” ...

“다행이에요. 그럼 리시, 당신이 괴로워 보일 때마다 이렇게 안아줄게요.” ...

“어디서든?” ...

“그 언제든, 그 어떤 곳에서든.” ...

“황제 앞에서도?” ...

케이가 작게 웃으며 리시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

머리칼을 파고드는 그의 입김이 따뜻하고 야릇했다. 그가 입술을 댄 채 속삭였다. ...

“신의 앞이라 할지라도.” ...

 

+++

위틀로 공작 가문의 마차가 저택을 나섰다. ...

목적지는 그린 백작 저택이었다. ...

(27) 나는 훔치지 않았어요. ...

리시는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는 중이었다. ...

공작의 딸임에도, 리시의 앞에서 더러운 그릇을 치워주는 사람은 없었다. ...

철들기 전부터 이렇게 살아왔기에, 리시는 이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

위틀로 공작 부부를 엄마, 아빠라고 부르는 건 손님들 앞에서만. ...

예쁜 옷을 입고 귀하게 자란 티를 내는 것 또한 손님들 앞에서만. ...

“엄마아아아!” ...

밖에서 브리트니가 징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나, 목걸이가 사라졌어!” ...

그 말을 듣는 순간, 등골이 싸하게 식으며 식은땀이 맺혔다. ...

최근 브리트니는 시녀인 에바의 조언으로, 재미있는 놀잇거리를 알게 되었다. ...

뭔가를 도둑맞은 것처럼 꾸민 후, 범인을 찾는 놀이였다. ...

그 범인은 보통 리시인 경우가 많았다. ...

“또? 아이리스 어디에 있어?” ...

데니스 위틀로 공작부인이 빽 외치는 소리에, 리시는 숨이 막혔다. ...

데니스가 매번 물건이 사라진다는 브리트니의 말을 믿는지, 믿지 않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데니스는 자기 남편이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에게, 해코지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

꽁꽁 얼어붙어 있던, 비쩍 마르고 작은 소녀는 건장한 하인에게 우악스럽게 잡혀 끌려나갔다. ...

브리트니는 데니스 옆에 딱 붙어서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

그러다가 리시와 눈이 마주치자, 무섭다는 듯 데니스의 치마를 잡고 그 뒤로 숨었다. ...

“쟤가 째려봐……. 무서워, 엄마.” ...

브리트니가 칭얼거리자, 데니스가 들고 있던 부채로 리시의 머리를 후려쳤다. ...

“남의 걸 훔친 주제에 어디서 두 눈을 똑바로 떠?” ...

리시는 아직 7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 자리에서 자신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았다. ...

자신에게 피를 반 나눠준 위틀로 공작이 이 자리에 있었다 해도, 그가 리시를 외면하리라는 걸 알았다. ...

“제가 훔치지 않았어요.” ...

그래도 리시는 항변했다. ...

아직은 리시에게 희망이 있었다. ...

이렇게 말하다 보면, 언젠가는 이 말을 믿어줄 사람이 나타나리라는 희망. ...

처연한 희망의 불꽃이 아직은 남아 있을 때였다. ...

“저는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어요.” ...

흐느끼듯 말하는 리시를, 모두가 지켜보고 있었다. ...

그중에는 동정의 눈빛을 한 사람도, 꼴 좋다는 눈빛을 한 사람도 있었다. ...

“데니스 님!” ...

그때, 브리트니의 시녀인 에바가 달려왔다. ...

에바의 손에는 목걸이가 들려 있었다. ...

“찾았어요.” ...

“어디서 찾았지?” ...

리시는 대답을 알 수 있었다. ...

“아이리스의 방에요. 베개 속에 감춰져 있었어요.” ...

리시는 처음 보는 목걸이였다. ...

“저는 그런 걸 본 적 없어요.” ...

통하지 않을 항변이라는 걸 알면서도, 리시는 외쳤다. ...

“저는 훔치지 않았어요.” ...

비쩍 마른, 작은 소녀의 목소리는 누구의 귀에도 닿지 않았다. ...

리시는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창고에 갇혔고, 지독한 어둠보다도 굶주림에 괴로워 훌쩍거리다가, 3일 후에나 풀려날 수 있었다. ...

. .

“헉!” ...

리시는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

창고 안의 곰팡내 섞인 퀴퀴한 공기. 작은 짐승이 움직이듯 바스락거리는 소리. 며칠간 먹지 못했던 굶주림. ...

몹시도 생생한 감각이 리시를 덮쳐왔다. ...

무서운 밤이었다. ...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창고에 갇혀, 열어달라고 부르짖어도, 잘못했다고 빌지 않아도 될 용서를 빌어도, 응해주는 이 한 명 없는 그 시간은. ...

어린아이가 견디기에는 몹시도 무서운 시간이었다. ...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몸을 웅크리려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

그제야 묵직한 팔이 자신을 끌어안고 있음을, 자신의 얼굴이 누군가의 가슴에 묻혀 있음을 깨달았다. ...

꿈에서부터 따라온 곰팡내가 사라지며, 익숙한 향기가 리시의 코끝을 간질였다. ...

숲과 들판, 밤하늘과 별빛을 담은 향기. ...

케이브란트 그린의 체취. ...

두려움에 헐떡이며 튀어 오르던 심장이 제자리를 되찾았다. 차게 식은 손가락 끝에 온기가 돌아왔다. ...

그래도 아직 추워서, 리시는 꼬물꼬물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

그가 잠결에 리시를 보듬어 안으며,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

“추워, 리시?” ...

“조금.” ...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

그는 리시의 어느 곳 하나 그냥 두지 않겠다는 듯, 두 팔과 단단한 허벅지로 리시를 옭아매듯 안았다. ...

그의 체온이 리시에게로 스며들었다. ...

“괜찮아, 리시.” ...

케이가 속삭이며 리시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

“괜찮아.” ...

괜찮긴. 아무것도 모르면서. ...

그래도 그의 속삭임이 듣기 좋았다. ...

리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손길이 점점 느른해지다가 멈췄다. ...

케이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리시는 잠들 수가 없었다. ...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그의 체온에 녹아들며, 그렇게 밤을 지새웠다. ...

이윽고 커튼 사이로 새벽빛이 새어 들어올 때야, 리시는 눈을 감았다. 잠이 오기 때문이 아니라, 케이가 잠에서 깬 듯 작은 신음을 흘렸기 때문이다. ...

리시는 또 악몽을 꿀까 봐 무서워서 잠들지 못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

케이는 잠시 리시를 끌어안은 채 가만히 있다가, 리시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

한 번 쪽. ...

그리고 잠시 지나서 한 번 더 쪽. ...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는 듯, 이번에는 두 번 더 쪽, 쪽. ...

그러더니 “흐음.” 하고 뭔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신음을 흘렸다. ...

리시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팔을 빼낸 케이는, 상체를 일으키고 한동안 리시를 내려다봤다. ...

눈을 감고 있는데도 그의 시선이 느껴져서 볼이 화끈거렸다. 리시는 자신이 깨어 있는 걸, 그가 눈치챈 게 아닌가 싶었다. ...

슬슬 일어난 척할까? ...

그런 생각을 하는데, 케이가 리시의 머리카락 끝을 살짝 붙잡고 말했다. ...

“자는 얼굴도 예쁘구려, 부인.” ...

생각지도 못한 말에 굳어 있는데. ...

“내가 뭔 소리를 하는 건지…….” ...

케이가 중얼거리며 침대에서 내려갔다. ...

리시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

항상 케이가 먼저 일어나기에, 그가 잠에서 깨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

‘설마…… 매일 이러는 건 아니겠지?’ ...

그가 침대에서 멀어진 것 같아서 작게 실눈을 떴다. ...

케이가 있어야 할 자리에, 검은 늑대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

어느새 늑대로 변한 그는, 침실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요리조리 돌아보고 있었다. ...

반듯한 자세로 앉아서도 보고, 앞발을 들어도 보고, 고개를 돌려 옆모습을 살펴보는 모습에, 리시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리시는 꼬물꼬물 이불을 머리 꼭대기까지 뒤집어썼다. ...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는데, 다시 사람으로 변한 케이가 가운을 걸치고 다가와서, 슬그머니 이불을 들췄다. ...

“언제 깼어요, 리시?” ...

“방금…….” ...

케이는 리시의 입가에 남은 미소를 발견했다. ...

케이의 얼굴이 붉어졌다. ...

“언제부터 봤어요, 리시?” ...

“커다란 늑대가 거울 앞에서 몸단장하고 있을 때부터요.” ...

케이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

케이는 그 일에 대해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몇 번이나 입술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

“그렇게 창피해하지 않아도 돼요, 케이. 침실에서 나가기 전에 몸단장하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물론…… 늑대가…… 풉…… 아니, 미안해요. 그냥…… 늑대가 몸단장하면서 뽐내는 표정을 짓는 건 처음…… 큭…….” ...

“뽐내지 않았어요.” ...

“하지만…… 턱 살짝 들고 반듯하게 앉아 있는 게…… 되게 뽐내는 것처럼…… 크큭…… 아, 미안해요. 진짜로 비웃는 게 아니라…… 신기해서…….” ...

“됐어요. 웃으려면 그냥 크게 웃어요. 참지 말고.” ...

그래서 리시는 마음껏 웃기로 했다. ...

“아하하하하.” ...

불만스럽게 팔짱을 끼고 있던 케이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

“그게 그렇게 웃겼어요?” ...

“다시 한번 말하지만 신기해서요.” ...

“내 아내는 신기하면 웃나 보네요. 그렇다면 앞으로 신기한 걸 잔뜩 보여줘야겠어요.” ...

케이는 삐친 것처럼 말했지만 눈은 웃고 있었다. ...

이제 리시의 머릿속에서는 지난 밤에 꾼 악몽이 완전히 지워졌다. ...

“기대할게요.” ...

“그렇다면 말 나온 김에.” ...

케이가 리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리시는 자연스럽게 그의 커다란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

그가 리시의 손을 거머쥐고 살며시 힘줘서 끌어당겼다. ...

“나가죠. 정원에서 가볍게 요기하고 신기한 걸 보여줄게요.” ...

 

+++

구름 한 점 없이 좋은 날씨였다. ...

크리시나가 가져다준 양산을 쓰고, 정원을 걸었다. ...

이른 시간이라, 풀잎에는 아직 이슬이 맺혀 있었다. ...

리시는 손을 뻗어 풀잎을 사르륵 쓸었다. ...

손가락 끝에 맺히는 찬 이슬이 기분 좋았다. ...

“감기 걸려요, 리시.” ...

옆에서 걷던 케이가 말했다. ...

“손가락 끝에 물 좀 닿았다고 감기 걸릴 만큼 약하진 않아요.” ...

“내 눈에는 그만큼 약해 보여요. 당신은 너무 작고 말랐거든.” ...

“당신이 너무 큰 거죠.” ...

정원의 한 공간에 이미 테이블과 아침이 마련되어 있었다. ...

테이블 옆에는 단정한 복장의 제이미가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정말 부지런하네.’ ...

리시가 알기로, 제이미는 새벽까지 케이와 함께 일한다. 제이미도, 케이도, 잠을 거의 자지 않는 것 같았다. ...

제이미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의자에 앉았다. 케이가 제이미에게 무언가 속삭이자, 제이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

갑자기 차린 식사인데도 훌륭했다. 신선한 샐러드와 고소한 향이 나는 수프, 쫄깃한 빵과 부드러운 치즈, 갓 구운 베이컨. ...

케이는 빵을 반으로 잘라서 치즈와 베이컨을 끼워 리시의 접시에 놔주었다. 그리고 자기 몫의 빵을 반으로 자르며 물었다. ...

“잘 때 악몽 꿔요?” ...

“조금요.” ...

“조금이 아닌 것 같던데.” ...

“그냥 조금요.” ...

악몽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 악몽이 현실만 아니라면, 리시는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다. ...

케이는 리시를 빤히 응시하다가, 들고 있는 빵으로 시선을 내렸다. ...

“성유물 중에 슬리브 스톤이라는 게 있어요.” ...

“슬리브 스톤!” ...

리시는 그 성유물을 알고 있었다. ...

지난 삶, 그 성유물 때문에 케이의 남동생인 엘드허트가 영원한 잠에 빠졌다. ...

케이는 엘드허트를 깨우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

“들어봤어요?” ...

리시의 반응 때문에, 케이가 미심쩍다는 듯 물었다. ...

“아뇨. 이런 반응을 해야 말하는 쪽에서도 신나지 않을까 싶어서.” ...

케이는 리시의 변명을 믿는 듯 작게 웃었다. ...

“말하는 맛이 나는 청중이네요. 좋아요. 슬리브 스톤은 잘만 사용하면 좋은 꿈을 꾸게 해주는 돌이에요. 요만한 크기의 파란색 돌이죠.” ...

케이가 엄지 한마디를 들어서 보여줬다. ...

“다만 잘못 사용하면 영원한 잠에 빠지는 경우가 있어요. 현실보다 꿈이 좋아서, 돌아오지 않게 되는 거죠. 난 그 돌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

지난 삶, 엘드허트는 현실이 괴로워 꿈으로 도망쳤다. ...

케이는 엘드허트가 그토록 괴로워하는 줄은 몰랐을 것이다. ...

아니, 어쩌면 알기에, 엘드허트가 몰래 그 돌을 사용하는 걸 모르는 척했을지도. ...

‘견디기 힘들었겠지. 부모님과 여동생의 죽음을.’ ...

앞으로 3년 후. ...

와이번과 헤레이나, 제레시엔은 죽는다. ...

그로부터 1년 후, 엘드허트는 영원한 잠에 빠진다. ...

가족을 잃은 케이는, 그의 그림자들 덕분에 살아가지만, 마치 껍데기 같았다. ...

“신성국에는 보고하지 않은 성유물이 몇 개 있어요. 굳이 건드릴 필요 없는 성유물은 그냥 놔뒀죠. 내 힘이 조금 더 강해지면 수거하려고.” ...

성유물의 힘이 주위에 피해를 주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수호자의 힘이 필요했다. ...

케이는 아직 그 모든 성유물을 다 억제할 만한 힘이 없었다. ...

“돌 하나쯤 더 있어도 괜찮거든. 당신이 원한다면 슬리브 스톤을 가져다주죠. 몇 번 정도는 그 힘을 억제해서 당신이 좋은 꿈을 꾸게 해줄 수 있어요.” ...

고작 악몽을 꿨을 뿐인데, 성유물까지 가져다가 리시를 편안하게 해주려는 케이의 마음 씀씀이에 가슴이 저릿했다. ...

리시는 지난 삶, 가족을 잃은 케이가 어떤 눈빛을 지니게 되는지 알았다. ...

텅 빈 눈동자. ...

그 무엇에도 요동치지 않는, 마치 영원한 허공과도 같은 눈동자. ...

리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

“가져다줘요.” ...

그 빌어먹을 돌을 부숴버려야겠으니까. ...

(28) 작고 하얗고 사나운 생물 ...

식사가 끝날 무렵, 제이미가 돌아왔다. ...

“준비됐어요, 대장.” ...

“리시, 가죠. 신기한 걸 보러.” ...

슬리브 스톤을 생각하느라, 케이가 신기한 걸 보여주겠다고 했던 걸 잊고 있었다. ...

리시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

그들이 향한 곳은 저택 구석에 있는 마구간이었다. ...

마구간 앞의 넓은 평지에는, 튼튼해 보이는 말들이 편안하게 쉬거나 뛰놀고 있었다. ...

말들을 전부 풀어놓은 듯, 마구간 안은 비어 있었다. ...

마구간 가운데의 길을 따라 걸어가자, 닫힌 문이 하나 있었다. ...

제이미가 문을 열었다. ...

제일 먼저 보인 건 유진이었다. ...

평소에는 차가울 정도로 무표정한 유진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이 열린 걸 깨닫고는 얼른 표정을 갈무리했다. ...

“대장. 형수님.” ...

“오랜만에 보네요, 유진. 잘 지냈어요?” ...

명랑하게 말을 건네는데, 케이가 리시의 턱을 살짝 잡아서 돌렸다. ...

“리시가 봐야 할 건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에요.” ...

무심코 시선을 돌린 리시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

“어머나!” ...

하얀색의 작은 말이, 똑같이 하얀색의 어미 말 옆에 꼭 붙어서 서 있었다. ...

놀라운 건. ...

“뿔이…….” ...

작은 말에 뿔이 있었다. ...

금빛이 감도는 긴 뿔. ...

리시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

긴 뿔을 가진 하얀 말을, 리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전설 속에나 나오는 생물이었다. ...

“유니콘…….” ...

유니콘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그래요, 유니콘이죠.” ...

“하지만…… 어미는 뿔이 없는데.” ...

어미는 평범한 흰색 말처럼 보였다. ...

“이 녀석들은 성체가 되면 뿔을 보이지 않게 할 수 있어요. 살아남기 위해 진화한 거죠.” ...

케이가 리시의 손을 끌어서 어미 말의 머리 쪽으로 가져갔다. ...

리시는 말이 손을 물까 봐 걱정했지만, 말은 얌전하게 서 있었다. ...

분명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딱딱한 뭔가가 만져졌다. ...

“뭔가…… 있네요.” ...

“뭔가가 있죠. 화이트.” ...

화이트가 유니콘의 이름인가 보다. ...

케이가 이름을 부르자 보이지 않았던 뿔이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

새끼보다 훨씬 화려하게 빛나는 금빛 뿔. ...

리시는 전설이 현실이 되는, 그 경이로운 광경을 숨죽이고 눈에 담았다. ...

“유니콘은 영리하고 강해요. 말을 잘 알아듣고,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충성을 바치죠. 성체가 된 후에는 하늘을 날기도 해요.” ...

“전설이랑 똑같네요…….” ...

“전설이 아니에요, 리시. 인간들은 자신들이 멸종시킨 생물에 전설이라는 근사한 이름을 붙여줬을 뿐이에요.” ...

화이트의 뿔이 다시 사라졌다. ...

케이는 새끼 유니콘을 내려다봤다. ...

“이 아이는 아직 이름도 없어요.” ...

“그렇군요. 당신이 붙여주는 건 안 될 것 같아요.” ...

“음? 왜요?” ...

“작명 센스가 좀……. 하얗다고 화이트라니…….” ...

조용히 서 있던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

화이트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보였다. ...

“하얀 걸 블랙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

“하여간 이 아이의 이름은 다른 사람이 붙여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당신이 붙여요.” ...

“네?” ...

“이제 이 아이는 당신 거예요.” ...

리시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케이를 쳐다봤다. ...

진심일까? ...

유니콘이 진짜로 존재한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데, 그 유니콘을 결혼 선물로 주다니. ...

만약 유니콘이 하늘을 날기까지 한다면, 케이의 그림자들이 가져야 하는 거 아닐까? ...

리시는 유진을 돌아봤다. 유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

그래서 이번에는 제이미를 돌아봤다. 제이미가 싱긋 웃었다. ...

“아이리스 님이 가지세요. 저희는 육아에 소질이 없어서…….” ...

“육아요?” ...

“음, 뭐라고 해야 할까요. 사실 저희는 이 녀석을 아이리스 님께 선물로 드리겠다는 의견에 반대했어요.” ...

당연히 그렇겠지. ...

이런 귀한걸. ...

“이건 선물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형수님.” ...

묵묵히 서 있던 유진이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끼어들었다. ...

“예?” ...

“유니콘들은 귀엽죠. 정말 아름답고 우아합니다. 하지만…….” ...

유진이 새끼 유니콘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

그리고. ...

덥석-! ...

물렸다. ...

“보세요.” ...

유진은 손을 빼내지 않고 말했다. ...

“주인이 없는 유니콘은 사납습니다. 제멋대로죠. 대장이 화이트를 길들이는 데는 정말로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

이제 유진이 손을 빼내려 했지만, 새끼 유니콘은 유진의 손을 놔주지 않았다. ...

“가정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3, 4살짜리 어린애를 키우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형수님. 그런 어린애들이 어떤지 아십니까?” ...

쏴아아아- ...

비 오는 소리가 들렸다. ...

새끼 유니콘이 유진의 손을 문 채 오줌을 싸고 있었다. ...

유진이 이것 보라는 듯, 왼손으로 새끼 유니콘을 가리켰다. ...

“가르치고 길들이고 주인으로 인정받아야만 합니다. 사람 할 짓이 아닙니다, 형수님. 제가 보기에 대장은 자기가 해야 할 육아를 형수님에게 떠넘기려는 것 같습니다.” ...

리시는 케이를 돌아봤다. ...

케이는 즐거운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유진 말이 정말이에요?” ...

“어떨 것 같아요?” ...

“조금은 사실. 그리고 조금은.” ...

리시는 그녀를 바라보는 케이의 눈빛으로, 그의 속내를 알 것도 같았다. ...

“기대하는군요. 내가 이 아이를 길들이기를.” ...

“기대뿐만이 아니리라 믿어요. 당신이 이 아이를 길들일 수 있을 거라고.” ...

“글쎄요. 육아는 해본 적이 없는데.” ...

지난 삶, 아이들을 대하는 게 힘들었다. 어릴 때부터 아이 취급을 받아본 적이 없기에,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유니콘은 빨라서 그 어떤 말도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

케이가 리시의 손을 잡았다. ...

“당신이랑 같이 이 아이들을 타고 달리고 싶어요.” ...

리시는 눈부신 유니콘을 타고 케이와 함께 달리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려 했다. ...

하지만 상상이 되질 않았다. 승마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

앞으로 리시 혼자서 말을 타고 나가야 할 일들이 생길지도 모른다. ...

유니콘이 있다면 유용할 것이다. ...

“좋아요.” ...

리시는 대답했다. ...

“내가 이 아이의 주인이 되어보죠.” ...

 

+++

리시는 서재에서 책을 잔뜩 가지고 방으로 돌아왔다. ...

[재밌다! 환상 동물 사전], [세계의 전설], [전설의 생물], [실제로 존재하는 환상 동물], [초보 사냥꾼을 위한 전설의 생물 사전] ...

대부분 재미 삼아서 읽고 버리는, 삼류 잡지 수준의 책이었다. ...

매력적인 소재인 유니콘은 책마다 실려 있었다. ...

하지만 짧게 몇 줄이라든가, 그 외모에 관해서만 서술해둔 것이 대부분이라서, 유니콘의 습성이나 취향 같은 것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

그중에서도 리시를 끔찍하게 만든 정보는, ...

[유니콘의 주식은 살아 있는 생쥐다.] ...

라는 것이었다. ...

‘설마…… 진짜로 생쥐를 먹는 건 아니겠지?’ ...

고 작고 귀여운 생명체가 생쥐를 우득우득 씹는 장면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

“아이리스 님. 뭘 그렇게 열심히 읽으세요?” ...

아까부터 가만히 앉아 있는 게 힘들어서 꼼질거리던 에르웰이, 잠시 크리시나가 자리를 비운 틈에 물었다. ...

“전설의 생물에 대해서 아는 것 좀 있어요?” ...

“아카데미에 다닐 때 교양 과목으로 배우긴 했는데…….” ...

“유니콘은 어때요? 뭘 좋아하는지도 배웠나요?” ...

“유니콘이요? 어우, 그 새끼…… 아니, 걔들은 별로예요. 커다란 애벌레를 즐겨 먹는대요.” ...

“아…….” ...

이번에는 애벌레다. ...

리시는 유니콘이 애벌레를 먹는 광경 또한 보고 싶지 않았다. ...

“유니콘은 옛날에 진짜로 있었다고 하던데, 성격이 지랄…… 아니, 별로 좋지 않은 데다가 유니콘 고기가 몸에 좋대요. 특히 유니콘 뿔. 그걸 먹으면 죽은 사람도 살아난다고…… 그래서 무차별로 사냥당하다가 결국 멸종했대요.” ...

“그렇군요.” ...

“그런데 유니콘은 왜요?” ...

리시는 에르웰에게 유니콘에 대해 말해도 좋을지 망설였다. ...

유니콘의 존재는 케이와 그의 그림자들 정도만 알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

“백작님에게 망아지를 한 마리 선물 받았어요. 말을 보다 보니까 유니콘에게 관심이 생겨서.” ...

결국, 거짓말을 했다. ...

에르웰은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망아지. 망아지는 순하죠. 목덜미 좀 긁어주고 눈도 좀 맞춰주고 당근 좀 먹여주면 금방 따를 거예요.” ...

그럴 것 같지 않아서 문제란 말이지. ...

“그런데 말 이름은 지으셨어요?” ...

“아직.” ...

“이름부터 지어주는 게 좋아요. 뭐든 이름을 지어줘야 친해지거든요.” ...

리시는 생물에게 이름을 지어준 적이 없었다. ...

그래서 그 작고 예쁜 유니콘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

“하얀색 말인데, 어떤 이름이 좋을까요?” ...

“하얀색 말이요? 그럼 흰둥이죠. 흰둥이.” ...

“……아, 그래요.” ...

에르웰도 케이보다 작명 센스가 낫지는 않았다. ...

리시는 책을 덮고 일어나 방을 나섰다. 책을 읽는다고 해서 유니콘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것 같지도 않았다. ...

계단을 내려가다가 후다닥 올라오는 나단과 마주쳤다. ...

“어, 형수님! 좋은 아침입니다.” ...

나단이 우뚝 멈춰서 꾸벅 인사했다. ...

“좋은 아침이에요, 나단. 어디 가요?” ...

“대장이 뭐 할 게 있다고 불러서요. 아, 맞다. 형수님, 유니콘 받으셨다면서요?” ...

“네, 그렇게 됐어요. 혹시 조언해줄 게 있나요?” ...

“음. 조언, 조언이라…….” ...

나단이 팔짱을 끼고 미간을 모았다. ...

예쁜 얼굴을 찡그리고 한참 고민하던 나단이, 리시를 진지하게 응시하며 말했다. ...

“물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좀 크고 나면 뒷발질을 하게 될 텐데, 뒤에 서 계시면 안 돼요. 걷어차여요. 그렇다고 앞에 서서 계시는 것도 좋지 않아요. 뿔로 박아 버릴지도 모르거든요. 그냥 멀찌감치 떨어져서 신선한 당근 하나 던져주고, 구경만 하시는 편이 좋을 거예요.” ...

“아주 유용한 조언이네요.” ...

나단이 해사하게 웃었다. ...

“조심하세요, 형수님. 형수님 다치면, 젠이 대장을 걷어찰 테니까요.” ...

“내가 다치는데 왜 케이를……?” ...

“대장이 형수님에게 그런 위험하고 무시무시한 선물을 준 거니까요.” ...

위험하고 무시무시한 선물. ...

점점 자신감이 사라진다. ...

그 하얗고 작은 아이를 길들일 수 있을까? ...

생각에 잠겨서 본채를 빠져나가 정원을 걷던 리시는, 도란도란 들려오는 음성에 걸음을 멈췄다. ...

정원 목 사이로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보였다. 노백작 부부가 정원을 걷고 있었다. ...

노백작 부부가 이 저택에 와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

아차 싶었다. 문안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

지난 삶, 알포드의 부모는 리시가 미리 방 앞에 와서 대기하다가, 아침 인사를 올리지 않으면 크게 화냈다. ...

배운 게 없어서, 아는 게 없어서, 주변머리가 없어서, 저런 게 어쩌다가 우리 집안에……. ...

리시는 황급히 노백작 부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

“오, 리시. 잘 잤니?” ...

다행히 헤레이나는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

“네, 어머님. 죄송해요, 문안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

“음? 문안 인사? 아, 문안 인사……. 여보, 문안 인사래요.” ...

“허허…….” ...

와이번이 신기하다는 듯 웃었다. ...

리시는 둘의 반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웃는 것도 아니고. ...

“참 예의가 바르구나, 리시. 우리 애들한테는 문안 인사라는 걸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래, 그런 게 존재하는구나.” ...

헤레이나는 정말로 놀라워하는 것 같았다. ...

그제야 리시도 긴장을 풀었다. 지난 삶과는 다른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했는데, 아직도 지난 삶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그린 가문은 위틀로 가문과도, 후치스 가문과도 다르다. ...

“그나저나 마침 잘 만났다, 리시. 네게 묻고 싶은 게 있었거든.” ...

헤레이나가 호박색 눈동자로 리시를 가만히 응시하며 물었다. ...

“우리가 위틀로 공작 부부를 어떻게 대하는 게 좋겠니?” ...

(29) 질투 많은 짐승. ...

헤레이나가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리시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

헤레이나와 와이번은 조용히 서서 리시가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

“어머님, 아버님께서 편하신 대로요.” ...

“정말 그래도 되겠니? 내가 편해지면 한없이 편해질 텐데.” ...

“얼마든지요. 하지만 어머님, 저를 위해 대신 싸워주시지는 않아도 괜찮아요. 싸움은 제가 할게요.” ...

“그럼 나는 무엇을 해줄까?” ...

“그냥…….” ...

리시는 지난 삶, 이 금실 좋은 노부부가 끔찍한 사건에 휘말려 죽어간 것을 떠올렸다. ...

이들이 죽은 후, 두 아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도. ...

“이대로 건강하게, 이렇게 계셔주세요.” ...

리시가 헤레이나와 와이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

어떻게 들으면 입에 발린 소리로도 들릴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헤레이나는 왜인지 가슴이 뭉클해지는 걸 느꼈다. 리시의 연보라색 눈동자에 담긴 진심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

그런 사람이 있다. ...

아무리 오래 보고 만나도 정을 줄 수 없는 사람. ...

그리고 또 그런 사람이 있다. ...

보자마자 끌리고 대화 몇 번 나누지 않았는데도 정이 가는 사람. ...

헤레이나에게 리시는 후자였다. ...

청초하고 연약해 보이는데 은근히 강단 있고, 쓸쓸한 눈빛을 하고 있는데 웃으면 더없이 밝아지는 리시가 마음에 들었다. ...

와이번이 리시에게서 ‘전사의 눈빛’을 봤다면, 헤레이나는 ‘상처 입었지만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작은 짐승’을 발견했다. ...

그게 헤레이나의 모성본능을 자극했다. ...

“리시, 유니콘을 선물 받았다면서?” ...

와이번이 헤레이나와 리시 사이에 머문 침묵을 깨뜨렸다. ...

“네, 그런데 어떻게 길들여야 할지…….” ...

“이름을 붙여주거라, 리시. 무엇이든 이름을 붙여야 존재하는 것이 되는 법이니까.” ...

+++

리시는 마구간으로 향했다. ...

‘이름. 이름을 뭐라고 지어야 하지?’ ...

와이번의 조언에 따라 이름을 지어보려고 했는데, 리시에게 생각나는 이름도 결국 ‘화이트’밖에 없었다. ...

‘케이의 작명 센스를 놀릴 게 아니었어.’ ...

리시가 유니콘 우리에 들어가려 하자, 마구간지기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

“백작 부인. 위험할 겁니다.” ...

“괜찮아요. 가까이 가지는 않을게요.” ...

“절대로 울타리 너머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아셨죠?” ...

몇 번이나 주의를 받은 끝에야 유니콘 우리에 들어갈 수 있었다. ...

우리 안에는 가슴 높이의 울타리가 있었는데, 아침에는 열려 있던 울타리의 문이 단단히 닫혀 있었다. ...

리시가 들어가자 화이트가 귀를 쫑긋거렸고, 새끼 유니콘이 울타리 가까이 다가왔다. ...

새끼 유니콘은 초롱초롱한 까만 눈으로 리시를 빤히 올려다봤다. ...

그게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

탁-! ...

다행히 유니콘이 리시의 손을 물기 전에 손을 치웠다. ...

‘깜짝이야.’ ...

큰일 날 뻔했다. ...

“아가야. 나는 널 해치지 않아.” ...

“힝!” ...

새끼 유니콘이 콧방귀를 뀌었다. 영리하다더니, 말을 알아듣기는 하는 모양이다. ...

새끼 유니콘은 돌아서서 뒷발로 바닥을 탁탁 쳤다. ...

바닥에 깔려 있던 지푸라기와 모래가 리시의 원피스까지 날아왔다. ...

“너, 정말 못됐구나.” ...

“히힝!” ...

새끼 유니콘은 뒷발질을 멈추지 않았다. ...

보다 못한 화이트가 코로 새끼 유니콘의 허리를 툭툭 밀었다. ...

그제야 뒷발질을 멈춘 새끼 유니콘이 화이트의 품에 파고들었다. ...

못됐지만 귀엽다. ...

“네 이름을 지어야 하는데, 어떤 이름이 좋을 것 같니?” ...

대답이 돌아올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물었다. ...

“흰둥이 어때요?” ...

뒤에서 들려온 음성에, 리시는 자신이 미소짓는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미소 지으며 뒤를 돌아봤다. ...

어느새 케이가 리시의 뒤에 와 있었다. ...

“이미 기각한 이름이에요.” ...

“누가 이런 센스 있는 이름을 제시한 거죠?” ...

“에르웰.” ...

“아, 에르웰 양.” ...

케이가 뭔가 떠오르는 게 있는지 키득키득 웃었다. ...

“왜 그렇게 웃어요?” ...

“그냥 에르웰 양이……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

에르웰을 떠올리면서 웃었구나. ...

그렇게 생각하니 왜인지 기분이 나빠졌다. ...

“요기에.” ...

케이가 검지로 리시의 미간을 콕 눌렀다. ...

“왜 힘을 주는 거죠, 리시?” ...

“난 원래 요기에 힘을 주는 걸 좋아하거든요.” ...

“아닐 텐데.” ...

케이가 한쪽 팔로 리시의 허리를 감아 바짝 끌어당겼다. 그는 단단한 허벅지를 리시에게 밀착시키고, 은근하게 물었다. ...

“내가 다른 여자를 생각하면서 웃는 게 싫은 거 아니에요?” ...

“그게 왜 싫겠어요? 당신이 생각하고 웃는 건 당신 마음인데.” ...

고집스럽게 말하며 케이의 가슴을 밀어내려 했지만, 케이는 리시를 놔주지 않았다. ...

“그런 것 치고는 입술이 비쭉 나와 있는데?” ...

리시가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넣고 오므리자 케이가 웃었다. ...

“일부러 그러는 거예요?” ...

“모고요?” ...

입술을 안으로 넣고 말하는 바람에, 발음이 요상해졌다. ...

“이렇게 귀여운 거. 내가 못 참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냐고.” ...

“그럴 리가요.” ...

“일부러 귀여운 거 같은데.” ...

“귀여운 게 일부러도 될 수 있나요? 정말 그런 거 아니니까…….” ...

다시 케이의 가슴을 밀어내려 했지만, 케이의 입술이 더 빨랐다. ...

그는 리시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겹치고, 리시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

그의 입술이 닿을 때면 언제나 그랬듯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

달콤한 아찔함이 빈자리를 채웠지만, 리시는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고 두 손으로 케이의 가슴을 밀었다. ...

입술을 뗀 케이가 이마를 붙인 채 말했다. ...

“오늘따라 왜 이렇게 거부해요?” ...

“애가 보잖아요.” ...

“애?” ...

리시가 꼬물꼬물 손을 움직여 새끼 유니콘을 가리켰다. ...

“하하하. 애, 그래요. 애가 맞긴 맞네요. 애 앞에서 이러면 안 되겠죠. 하하하.” ...

케이가 웃으며 리시를 놔줬다. ...

“애가 본다니…….” ...

케이는 뭐가 그리 웃긴지 리시의 말을 되풀이하며 웃었다. ...

신기했다. ...

이렇게 잘 웃는 사람이었구나. ...

지난 삶, 리시가 본 케이는 웃음이 없는 남자였다. 예의상 짓는 미소조차 어찌나 차갑고 예리한지, 그 앞에 있다가는 온몸에 상처가 나 피를 흘리게 될 것 같았다. ...

“그렇게 보지 말아요, 리시.” ...

리시의 시선을 느낀 케이가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말했다. ...

“또 애 앞에서 키스할 것 같거든.” ...

“그런 건 됐고요. 이 아이 이름을 먼저 지어야 할 것 같은데, 이름 잘 짓는 사람 없나요?” ...

“그런 건 됐다니. 내 감정보다 이 애가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

“설마 이 애를 질투하는 건 아니죠?” ...

“왜 아니겠어요, 리시.” ...

케이가 리시와 새끼 유니콘 사이를 가로막았다. ...

“당신이 내내 저 애만 쳐다보는데.” ...

“당신도 봐줬잖아요.” ...

“부족해요. 그 예쁜 눈동자에 나만 담겼으면 좋겠거든.” ...

“욕심도 많으셔라.” ...

케이가 리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자연스럽게 그녀를 돌려세워, 유니콘 우리에서 데리고 나갔다. ...

“며칠 집을 비울 것 같아요. 길면 일주일, 빠르면 나흘. 결혼식 전까지는 돌아올 테니 안심하시고.” ...

어디에 가는 거냐고 물어보려는데, 마침 불어온 바람이 리시의 머리칼을 스쳤다. ...

동시에 새끼 유니콘에게 지어줄 이름이 떠올랐다. ...

“윈디.” ...

“응?” ...

“저 아이 이름은 윈디가 좋겠어요. 바람처럼 빠르고 자유롭게 달리라고. 어때요?” ...

좋은 이름인 것 같아서 환하게 웃으며 케이를 돌아봤는데, 케이는 뚱한 표정이었다. ...

“마음에 안 들어요?” ...

“들겠어요? 남편이 멀리 떠난다는데, 그 예쁜 머릿속에는 저 유니콘 생각뿐이잖아요.” ...

“당신이 준 선물이거든요.” ...

“내내 저 애 생각만 하라고 준 건 아니에요, 리시. 저 애를 보면서 내 생각을 하라고 준 거지.” ...

케이가 정말로 질투하는 것처럼 보여서, 리시는 기분이 이상했다. 평범한 부부라면 이상하지 않을 일이지만, 케이와 리시는 평범하지 않았다. ...

그린 백작 부인이 된 이상, 케이가 리시를 자신의 부인으로 대해주기로 한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케이는 마치 사랑에 빠진 남자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

묻고 싶었다. ...

‘케이, 혹시 정말로 날 좋아해요?’ ...

하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

리시가 케이에게 원한 건 신뢰와 동료애였지,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었다. ...

남녀의 사랑처럼 부질없는 것은 없다. 서로를 위해 목숨도 줄 것 같은 사랑이 끝난 자리에는, 새까만 상처만이 남는다. ...

지난 삶에서, 그리고 죽음 속에서, 그러한 광경을 수없이 목격했다. 사랑보다는 차라리 우정이 믿을 만했고, 리시는 케이에게 우정을 원했다. ...

나 역시 그만한 우정을 케이에게 줄 것이고. ...

“어디에 가는 거예요?” ...

리시는 다른 질문을 했다. ...

케이도 삐친 듯한 표정을 지우고 답했다. ...

“슬리브 스톤을 가지러요.” ...

“그리 급할 건 없는데.” ...

“급해요. 당신이 좋은 꿈을 꿨으면 하거든.” ...

케이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

리시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고 그의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

“나는 이미 좋은 꿈을 꾸는 기분이에요, 케이. 무리하지 말아요.” ...

 

+++

케이와 함께 슬리브 스톤을 찾으러 가던 나단이,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

“대장, 형수님한테 뺨이라도 맞았어요?” ...

케이는 아까부터 계속 자신의 왼쪽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

“아니, 그보다 더 강렬한 걸 받았지.” ...

“걷어차였어요?” ...

“……나단.” ...

“그럴 만해요, 대장. 결혼 선물로 새끼 유니콘이라니…… 형수님처럼 연약한 레이디에게 그런 걸 선물로 주면 안 된다는 건, 월라스도 알 걸요.” ...

나단이 투덜거렸지만, 케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 ...

유니콘을 길들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리시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

리시가 무엇을 하려는지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유니콘은 리시에게 좋은 친구이자 동료가 되어줄 것이다. ...

-나는 이미 좋은 꿈을 꾸는 기분이에요, 케이. ...

아까 들었던 리시의 음성이, 나단의 투덜거림을 밀어냈다. ...

달콤한 음성, 진심이 담긴 눈빛. 그리고 부드러운 손길. ...

오롯이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이 감정에, 성급하게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했다. ...

상처 입은 짐승에서 섣불리 다가가면 도망치기 마련이니까. ...

+++

신성국 테세이 성기사단의 부단장 숙소. ...

토벌을 나갔다가 오랜만에 돌아온 엘드허트는, 자신의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신문과 잡지를 발견했다. ...

그걸 읽어내려가는 엘드허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

“엘디!” ...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며 오손이 뛰어 들어온 건, 엘드허트가 제일 아래에 깔려 있던 청첩장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님이 결혼하셨다던데. 알고 있었어?” ...

엘디가 청첩장을 흔들었다. ...

“방금 초대받았다.” ...

“초대받았다고? 이미 결혼하셨다던데.” ...

“관청에 신고를 먼저 한 모양이야.” ...

“히야. 그 대단한 그린 백작님도, 위틀로 공작가의 꽃을 놓치고 싶진 않으셨나 보다. 식을 올리기도 전에 혼인신고를 먼저 하다니……. 하긴, 위틀로 공작 가의 꽃쯤 되면…….” ...

거기까지 말한 오손이 말을 멈췄다. ...

청첩장을 응시하는 엘디의 눈빛이 몹시 싸늘했기 때문이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 ...

엘디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

“위틀로 공작이 저택에 숨겨두고 곱게 키워서, 좋은 집안에 팔아치우려고 키운 여자겠지.” ...

“에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해서 조심하며 키우느라 밖에 내보내질 못했다던데.” ...

“글쎄.” ...

엘디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

“형님한테는 실망이야. 꽃 따위에 홀려서, 그런 여자를 우리 가문에 들이다니…….” ...

엘디의 손에서 청첩장이 구겨졌다. ...

“그래서…… 결혼식, 안 가게?” ...

엘디가 청첩장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

“가야지. 겸사겸사 이 결혼도 깨버리고.” ...

(30) 예의를 가르쳐주지. ...

  제이미가 리시에게 찾아온 건, 케이가 저택을 비운 지 이틀이 지났을 때였다. ...

아침부터 유니콘 축사에 가서 지푸라기와 흙을 맞아 더러워진 리시는, 마침 옷을 갈아입으려던 참이었다. ...

방문 앞에서 기다리던 제이미가 리시의 옷을 보고 싱긋 웃었다. ...

“육아가 보통 일이 아니지요?” ...

“그러네요. 육아라고 하기에는 그 애를 만져보지도 못했지만.” ...

“위험하니까 무리하지는 마세요. 아,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

“손님이요? 내게?” ...

“위틀로 공작 일가.” ...

“아.” ...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

예상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도 예상한 대로 행동해서. ...

청첩장이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브리트니에게 보냈다. ...

브리트니가 결혼식 하루, 이틀 전에 와서 돌발행동을 하는 것보다는, 미리 불러들여서 기를 죽여놓고 결혼식 당일에는 아무 짓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

‘어쩌면 결혼식 일정에 맞춰서 올지도 몰라. 이미 집을 떠나버린 내게서 신경을 끊었을지도.’ ...

라는 기대를 품었다. ...

역시나 헛된 기대였다. ...

“그들은 어디에 있죠?” ...

“아직 정문 앞에 있지요. 그들을 초대한 기억이 없어서.” ...

제이미가 담담히 대답했다. ...

어찌 되었든 위틀로 공작 일가는 리시에게는 친정이었다. ...

그런데 밖에 세워두다니. ...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

그들의 방문을 알리는 제이미의 어조에는 묘하게 가시가 있었다. ...

어쩌면 제이미는 리시가 그 집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

“어찌할까요, 아이리스 님?” ...

케이는 저택에 없었다. 결정권은 리시에게 있었다. ...

“오늘은 몹시 바쁘니 내일 다시 찾아오라고 하세요.” ...

제이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방에서 나갔다. ...

한숨을 삼키며 돌아서자, 크리시나와 에르웰이 의아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게 보였다. ...

가족들이 찾아왔는데 냉정하게 내치는 리시의 모습에 당황한 것 같았다. ...

리시는 여상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거든요.” ...

크리시나와 에르웰의 얼굴에서 의아함이 사라졌다. 대신 무엇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각오가 그들의 눈동자에 깃들었다. ...

리시가 다시 방으로 걸어가는데,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

“나쁜 새끼들이라는 말씀이시지?” ...

에르웰의 목소리 같았지만, 리시는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

“뭐가 어쩌고 어째?” ...

글로번 위틀로 공작이 두 눈을 부릅떴다. ...

저택 부지에 마차도 못 들이게 하고 밖에서 기다리라고 한 것도 속이 부글부글 끓을 일이지만 참았다. ...

그런데 바빠서 내일 다시 찾아오라니. ...

물론 초대장에 적힌 날짜는 한참 후니까, 저택 주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

하지만 아이리스는 그래서는 안 됐다. 감히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

“아이리스가 그렇게 말했다고?” ...

“네, 공작님. 백작부인께서는 몹시 바쁘셔서 오늘은 손님을 맞이할 시간이 안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

제이미가 은은하게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

“그럴 리가 없어. 우리가 찾아온 거라고 정확하게 전달한 거예요?” ...

데니스 위틀로 공작부인이 도끼 눈을 하고 물었다. ...

“위틀로 공작님과 공작부인, 그리고 브리트니 양이 찾아왔다고 정확하게 전달했습니다.” ...

“그런데도 바쁘다고 했다고?” ...

“네, 공작부인.” ...

“말도 안 돼! 그 애가 그럴 리가 없어.” ...

“그런가요? 왜 그럴 리가 없을까요?” ...

“뭐……?” ...

“우리 그린 백작 부인께서는 그린 백작 가의 안주인이 되셨지요. 안주인께서는 무척이나 공사다망하십니다.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

제이미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

리시는 이제 위틀로 공작의 딸이 아닌, 그린 백작가의 안주인이었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

“나는 그 애 아버지라네.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문전박대하는 게 어느 경우에 있는 일인가?” ...

“초대한 날짜보다도 너무 이르게, 연락도 없이 방문하는 경우에는 있을 수도 있는 일이지요.” ...

제이미가 담담하게 말했다. ...

글로번은 화가 치밀었다. ...

감히 백작의 개 따위가. ...

하지만 창천의 기사인 제이미를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다. 글로번도 제이미의 명성 정도는 알고 있었다. ...

“아이리스가 바쁘다면 당장 그 애 얼굴을 보지는 못해도 좋네. 일단 손님용 방이라도 내어주게.” ...

“그것 또한 힘듭니다, 공작님. 손님용 방이 준비되지 않아서요.” ...

“그럴 리가 있나! 대체 어느 집이 손님용 방도 준비해두지 않는단 말인가?” ...

“아시다시피 성유물의 수호자인 그린 백작님께서는 무척이나 바쁘셔서 손님을 초대할 기회가 많지 않지요. 갑작스럽게 찾아올 손님을 위해 마련된 방이 없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

글로번은 제이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지적할 수는 없었다. ...

없다는데 방을 내어달라고 애원하고 싶지도 않았다. ...

“아이리스에게 한 번 더 얘기해봐요. 우리가 왔다고 하면 분명…….” ...

“그만해.” ...

글로번이 데니스의 말을 끊었다. 데니스가 왜 그러냐는 듯 글로번을 노려봤다. ...

“묵을 곳이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오늘은 아이리스가 바쁘다고 하니 내일 다시 찾아오지.” ...

“하지만 여보. 우리가 아무 데서나 잘 수는 없잖아요. 게다가 아이리스, 걔가 이렇게 버릇없이 나오는데……” ...

“여보!” ...

글로번은 제이미가 듣는 곳에서 아이리스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데니스도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

마차에 오르자마자 브리트니가 달려들 듯 물었다. ...

“아빠, 걔 미친 거 아니에요? 지가 바쁘다고 우리를 들여보내지도 않아?” ...

“미친 게 분명하지. 그것이 집 떠나 있더니,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

데니스가 이를 갈았다. ...

“왜 그냥 들어왔어요? 아무리 우리가 연락 없이 왔어도 손님인데, 이런 식으로 보내는 건 예의가 없는 거잖아요.” ...

“그만해라, 브리트니. 그리고 당신도. 그린 백작은 성유물의 수호자야.” ...

“아무리 성유물의 수호자라도 그렇지. 우리는 공작 가문이잖아요.” ...

“브리트니. 너, 남들 듣는 데서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마라.” ...

대대로 성유물의 수호자인 그린 가문과 몰락해 가는 위틀로 공작 가문. ...

어느 쪽이 위인지는 명백했다. ...

케이의 눈 밖에 나서 좋을 건 없었다. 하지만 아이리스의 무례한 태도도 용서할 수 없었다. ...

“내일 다시 찾아가자. 그린 백작은 자리를 비웠다더구나. 일단 그 저택에만 발을 들이면…….” ...

그 계집의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줘야지. ...

+++

글로번이 단단히 벼른 ‘아이리스의 버르장머리 고치기’는 그다음 날에도 시행할 수 없었다. ...

“백작 부인께서는 오늘 몸이 좀 안 좋으셔서요. 내일 다시 오셔야겠습니다.” ...

그다음 날에도. ...

“백작 부인께서는 오늘 바쁘셔서요. 내일 다시 오셔야겠습니다.” ...

문 앞까지 찾아갔다가 쫓겨날 때마다 글로번의 얼굴은 점점 붉어지고, 언성도 높아졌다. ...

나중에는 삿대질까지 했지만, 제이미는 처음과 똑같이 은근한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었다. ...

제이미가 들어가고도 한참 동안 저택 앞에 머물며 욕설을 퍼붓던 공작 일가가 돌아가는 걸 확인한 후, 제이미는 온실로 향했다. ...

리시는 사과나무 아래에서 잘 익은 사과를 하나 따는 중이었다. ...

“위틀로 공작 일가는 돌아갔습니다, 아이리스 님.” ...

“그렇군요.” ...

“오늘은 정말로 영지를 떠날지도 모르겠어요.” ...

“그러지는 않을 거예요. 알량한 자존심을 놓지 못하는 인간이라서. 수확도 없이 돌아가지는 않겠죠. 발도 못 디디고 돌아갔다는 소문이 퍼지면 얼굴을 들기 힘들 테니.” ...

리시가 냉랭하게 말했다. ...

제이미는 리시가 케이의 앞에 있을 때와 위틀로 공작에 대해 말할 때의 표정과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게 신기했다. ...

“내일은 뭐라 하면서 쫓아낼까요?” ...

제이미가 물었다. ...

“백작님은 아직 소식이 없나요?” ...

“네, 아무래도 일주일 안에 다녀오기도 힘든 곳이라서…….” ...

“제레시엔은요?” ...

“젠은 2, 3일 후에 올 거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

“그렇다면.” ...

리시는 사과를 하나 따서 바구니에 넣고 제이미를 응시했다. ...

“젠이 오기 전까지는 위틀로 공작에게 예의를 가르쳐둬야겠네요. 그렇죠?” ...

제이미는 리시가 이렇게 웃을 때 좋았다. ...

오만하면서도 장난기가 담긴 미소. ...

여자에게 전혀 관심 없던 케이가 왜 그리도 리시에게 홀렸는지 알 것 같은 미소. ...

제이미도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많은 가르침을 주시면 좋겠네요.” ...

 

+++

브리트니는 짜증이 나서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

벌써 세 번이나 문전박대를 당했다. ...

아무리 전보다 권력이 낮아졌다고는 해도, 위틀로 공작 가문이었다. ...

백작 따위가 문전박대해도 좋을 집안이 아니라는 말이다. ...

그런데 세 번. ...

직접 찾아가서 청하는데도, 저택 안에 발도 디디지 못했다. ...

그것도 케이 때문이 아니라 리시 때문에. ...

“이건 진짜 말도 안 돼!” ...

네 번째로 그린 백작 저를 찾아가는 길. ...

브리트니는 마차 안에서 빽 외쳤다. ...

“자기들이 아무리 성유물의 수호자라고 해도 그렇지, 우리를 이렇게 대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요!” ...

“브리트니 말이 맞아요, 여보. 이건 정식으로 항의해야 해요.” ...

“맞아요, 신성국에도 알리고…… 그리고 그린 백작한테도 직접 말해야 해요. 그린 백작이 집을 비운 틈에, 아이리스가 제멋대로 행동하는 거잖아요!” ...

“걱정하지 마라. 오늘도 쫓아내면 신성국은 물론, 황제 폐하께도 그린 백작가의 무례에 대해 고할 테니까.” ...

글로번이 가비자르 제국의 황제를 찾아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늘은 순순히 문이 열리고, 정문 안으로 마차가 들어갈 수 있었다. ...

위틀로는 아이리스를 보자마자 그 뺨을 한 대 올려 붙여줘야겠다고 결심했다. ...

하지만 그럴 기회는 오지 않았다. ...

“응접실에서 잠시 기다리시지요.” ...

분명 ‘잠시’라고 했는데, 한 시간이 지나도 두 시간이 지나도, 아이리스는 응접실로 찾아오지 않았다. ...

기다림에 지쳐 제이미를 불렀지만 오지 않았고, 지나가는 하녀들에게 물어봐도, “잠시 더 기다리세요.”라는 대답뿐이었다. ...

심지어 그들은 차 한 잔 대접하지도 않았다. ...

이른 아침에 찾아왔는데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제이미가 돌아왔다. ...

글로번은 벌떡 일어났다. ...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

“네? 뭐가요?” ...

제이미가 전혀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

“잠시 기다리라더니, 이게 몇 시간째냔 말이야! 게다가 차 한 잔, 식사 한 끼도 대접하지 않고!” ...

“아, 배고프세요? 갑작스러운 방문이시라 손님용 식사를 준비하지 못해서. 죄송하게 됐습니다.” ...

제이미는 전혀 죄송하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

“너……!” ...

글로번이 참지 못하고 제이미를 향해 위협적으로 걸어가는데, 브리트니가 얼른 다가와서 글로번의 팔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

브리트니는 글로번에게 살짝 눈짓한 후,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제이미에게 물었다. ...

“아이리스가 시켰나요?” ...

“무엇을요?” ...

“우리 가족을 이렇게 모질게 대하라고요.” ...

“그럴 리가요. 정중하게 모시라고 하셨지요.” ...

“그린 백작가에서는 이게 정중한 대접인가요?” ...

“상대에 따라서는요.” ...

“상대? 우리 위틀로 가문이 차 한 잔의 대접도 못 받을 정도의 상대인가요?” ...

브리트니가 차분하게 물었다. ...

제이미가 빙그레 웃으며, 리시에게 지시받은 대로 말했다. ...

“위틀로 가문이 우리 백작 부인께 한 짓을 생각하면, 이 정도도 몹시 정중한 대접이라고 생각하지요.” ...

(31) 배운 게 없어서. ...

잠시 침묵이 흘렀다. ...

위틀로 공작 일가는 제이미가 한 말의 뜻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

뒤늦게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글로번이 버럭 외쳤다. ...

“그게 무슨 소리야!” ...

“무슨 소리인지는 공작님이 더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

“아, 아이리스가 또 거짓말을 늘어놨나 보네요, 여보.” ...

데니스가 얼른 글로번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

글로번도 정신을 차리고 큼큼, 헛기침했다. ...

“제이미 경. 그대가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사실 우리 아이리스는 허언증이 있다네.” ...

글로번이 태도를 바꿨다. ...

“맞아요. 우리도 그 부분을 걱정했는데…… 아휴. 여기에 와서도 그 습관을 못 버렸나 보네요. 결혼하면 나아질 줄 알았더니.” ...

브리트니도 글로번을 거들었다. ...

“그래도 우리 아이리스, 너무 미워하진 마세요. 걔도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 거라서 어쩔 수가 없을 거예요. 고치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기도 하고요.” ...

브리트니가 동생을 걱정하는 언니의 눈빛을 지으며 말했다. ...

제이미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

“아는지 모르겠는데, 사실 우리 아이리스가 아직은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했거든요. 그런 와중에 그린 백작님이 강압적으로, 아, 실례해요. 제이미 경의 주인인데.” ...

브리트니가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

“아닙니다. 계속하시지요. 저도 몰랐던 일이라서.” ...

“음. 하여간 내 동생이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돼서 우리에게 많이 화났나 봐요. 그래서 우리를 피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알잖아요. 위틀로 공작가의 꽃. 우리가 걔를 얼마나 곱게 키웠는데요.” ...

“너무 오냐오냐하면서 키운 게 문제겠지.” ...

데니스가 덧붙였다. ...

“막상 우리 얼굴을 보면 좋아하겠지. 마음도 풀릴 거고. 제이미 경. 가서 우리가 기다린다고 잘 좀 말해두게.” ...

글로번이 말했다. ...

제이미는 놀라웠다. ...

위틀로 공작 일가는 리시가 언질을 준 대로 말하고 행동했다. ...

-아마 그들은 내게 허언증이 있다고 할 거예요. 브리트니는 좋은 언니인 척, 날 걱정하는 척하겠죠. ...

-그럼 전 어떻게 반응할까요? ...

-믿는 척해요. 그리고 서채로 안내해준다고 하고요. ...

-그들이 순순히 서채로 갈까요? ...

-아니요. 날 찾으려고 하겠죠. ...

정말로 그랬다. ...

손님용 방이 있는 서채로 안내해줄 테니, 내일 다시 아이리스를 만나라는 말에, 글로번은 태도를 바꿔서 당장 아이리스를 만나야겠다며 응접실을 뛰쳐나갔다. ...

데니스와 브리트니도 글로번을 말리는 척하면서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

제이미는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

-내버려두세요. 거기까지가 제이미가 할 일이에요. ...

제이미가 할 일은 끝났다. ...

이제부터는 리시의 일이다. ...

그 현장을 직접 볼 수 없는 게 아쉬웠다. ...

+++

하녀들에게 물어서 찾아간 리시의 방문 앞을, 두 남자가 지키고 있었다. ...

짙은 잿빛 머리칼에 수염이 있어서 야성적인 느낌을 주는 남자가 한 명. ...

서늘한 눈빛에 갈색 머리칼을 가진, 무표정한 남자가 한 명. ...

다른 분위기지만 둘 다 훤칠하게 잘생겼다. ...

브리트니는 예전에 파티에서 케이를 호위하던 그들을 본 적이 있었다. 야성적인 느낌의 남자는 월라스, 서늘한 눈빛을 가진 남자는 유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

위틀로 공작 일가가 다가가자, 그들이 허리에 찬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이유도 묻지 않고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위틀로 공작가의 호위 기사들도 바짝 긴장했다. ...

위틀로 공작가의 호위 기사들은 유진과 월라스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덤벼도 유진과 월라스에게는 작은 상처 하나 입힐 수 없을 것이다. ...

“여기가 아이리스의 방인가?” ...

글로번이 짐짓 위엄 있게 물었다. ...

“그린 백작 부인의 방입니다.” ...

유진이 대꾸했다. ...

“내가 누군지는 경들도 알고 있겠지? 나는 딸을 만나러 왔네.” ...

“그린 백작 부인께서는 바쁘십니다.” ...

“바쁘다, 바쁘다, 바쁘다! 그놈의 바쁘단 소리를 며칠 전부터 들었는 줄 알아? 계집애가 할 일이 뭐가 있다고!” ...

글로번의 인내심이 한계에 부딪혔다. 버럭 외치는 말에, 월라스가 인상을 구겼다. ...

“도대체 부모가 자식을 만나겠다는데 이렇게 막는 건, 어느 나라 예법인가? 당장 비켜! 나는 오늘 딸을 만나야겠으니까!” ...

글로번이 한 걸음 앞으로 나갔지만, 월라스와 유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

브리트니가 얼른 글로번의 팔을 잡았다. ...

“아버지, 진정하세요.” ...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다들…… 우리 아이리스에게 몹쓸 짓이라도 하는 거 아니야? 그래서 아이리스가 바쁘다는 말로, 우리를 피하는 척하게 만드는 거 아니냐고?” ...

“그래요. 혹시 그린 백작이 우리 아이리스를 때리기라도 했나요? 우리 아이리스 얼굴에 흉을 남겨서, 아이리스가 우리를 피하는 거예요?” ...

데니스가 글로번을 거들었다. ...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유진과 달리, 월라스의 표정은 점점 무시무시해지고 있었다. ...

위틀로 가문의 기사들의 등에 식은땀이 맺혔다. ...

달칵- ...

그때, 방문이 열리고 시녀로 보이는 여자가 나왔다. 기품 있어 보이는, 검은 머리의 시녀가 유진에게 말했다. ...

“백작 부인께서 밖이 너무 시끄러운데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하셨어요.” ...

글로번은 방문이 열린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던졌다. ...

하지만 유진과 월라스의 예리한 감각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유진과 월라스는 글로번의 양쪽 팔을 하나씩 잡고, 거의 내동댕이치듯 복도로 밀어버렸다. ...

“이익!” ...

글로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

아무리 신성국의 가호를 받는 그린 가문이라고 해도, 공작인 자신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건 말도 안 된다. ...

이게 전부 능력이 있으면 신분 상승을 시켜주는 정부의 방침 때문이다. 개나 소나 귀족 작위를 얻으면서 신분 체계가 무너지니, 이렇게 경우 없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

“감히……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

글로번이 부들부들 떨면서 유진과 월라스를 노려봤다. ...

“나는…… 나는……!” ...

‘공작이야!’라는 말이 이들에게 통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

그래서 글로번은 외쳤다. ...

“아이리스의 아빠야!” ...

그 순간, 표정 없던 유진에게도, 찡그리고 있던 월라스에게도, 비웃음과 비슷한 조소가 입가에 맺혔다. ...

그걸 본 브리트니는 섬뜩해졌다. ...

‘왜 이런 표정이지? 아까 제이미도 그렇고…… 설마 진짜야? 진짜로 아이리스가 우리한테 당한 일을, 이 저택 사람들에게 다 말한 거야?’ ...

그럴 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

브리트니가 아는 아이리스는 그럴 만한 주변머리가 없는 인물이었다. 설령 있다고 해도, 집에서 하녀 취급을 받았다는 창피한 소리를 여기저기 떠들 리 없다. 대체 어느 누가 자신의 치부를 떠들고 다니겠는가? ...

‘하지만…….’ ...

그린 가문 고용인들의 태도는 명백히 이상했다. ...

위틀로 일가는 아이리스가 그린 가문과 연을 맺었다 해도, 여전히 자신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다. 결코, 자신들을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결혼 전처럼 부르면 오고, 엎드리라면 엎드리는 개처럼 살 거라고 여겼다. ...

‘아이리스…….’ ...

브리트니는 주먹을 꽉 쥐고 반쯤 열린 방문을 노려봤다. ...

‘그렇게는 안 될 거야. 너는 언제까지라도 위틀로 공작가의 꽃으로 살아가야 해. 그린 백작 부인이라니, 말도 안 되잖아. 나도 갖지 못한 걸, 네가 갖게 할 수는 없어.’ ...

신성국의 가호를 받는, 성유물의 수호자 그린 가문의 명예. ...

그린 가문이기에 누릴 수 있는 온갖 특혜. ...

그리고 모든 기사가 선망하는 기사인 케이의 부하들까지. ...

브리트니는 리시가 어느 하나도 갖지 못하기를 바랐다. ...

그때, 드디어 리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

리시는 마치 사내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날씬한 다리를 돋보이게 하는 검은색 바지와 흰색 셔츠. 그 위에 걸친 검은색 조끼와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짙은 갈색 부츠. ...

레이디가 할 법한 차림이 아닌데, 그 어떤 레이디보다도 우아하고 섹시한 모습에, 브리트니는 숨을 삼켰다. ...

‘저게 아이리스라고? 말도 안 돼…….’ ...

모르는 사람 같았다. ...

위틀로 일가를 오시하는 차가운 눈빛과 자신감 넘치는 미소, 턱을 살짝 든 오만한 자세의 아이리스는, 브리트니가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보게 될 거라 상상해본 적도 없는, 아이리스였다. ...

글로번과 데니스 역시 아이리스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기에, 처음에는 멍하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

뒤늦게 그녀가 아이리스라는 걸 알아본 글로번이 크게 외쳤다. ...

“아이리스! 그 꼴이 뭐냐?” ...

예전이었다면, 글로번의 꾸짖음에 리시는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겁에 질린 짐승처럼 바들바들 떨었을 것이다. ...

하지만 지금의 리시는 글로번의 고함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도리어 옅은 미소를 지었다. ...

“어머나. 다들, 오셨으면 말씀을 하시지.” ...

느른하게 흘러나오는 음성에, 위틀로 일가는 기가 막혔다. ...

“벌써 몇 번을 찾아오고, 몇 번이나 얘기했는데! 너, 지금 우리를…….” ...

“아버지.” ...

브리트니는 침착하지 못하게 성질내는 글로번의 팔을 잡았다. ...

이곳은 보는 눈이 많다. 모두의 앞에서 아이리스에게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그제야 글로번도 브리트니의 뜻을 눈치채고 성질을 억눌렀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시가 입을 열었다. ...

“결혼 준비로 바빠서, 사소한 일은 보고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

“사소? 사소한 일이라고? 우리가 이곳까지 몸소 찾아왔는데, 이게 너한테는 사소한 일이란 말이냐?” ...

글로번이 이를 으득 갈면서도, 아까보다는 작아진 목소리로 책망했다. ...

브리트니는 이 분위기를 바꿔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

“미안해, 아이리스.” ...

브리트니의 사과에 리시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

“네가 결혼하기 싫어하는데 이렇게 되어버려서…… 우리한테 많이 화가 난 거지? 그래서…… 우릴 보고 싶어 하지도 않고, 우리한테 안 좋은 일을 당했다고 거짓말도 하고……. 미안해. 네가 이렇게까지 그린 백작님을 싫어할 줄은 몰랐어.” ...

브리트니는 리시가 ‘그렇지 않아요. 난 거짓말 같은 거 하지 않았어요.’라며 반박하기를 바랐다. 사람 한 명을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는 건, 누명을 푸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

하지만 리시는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저 브리트니를 보며 은은한 미소를 짓다가 말했다. ...

“들어와요.” ...

 

+++

드디어 리시의 방에 들어온 브리트니는, 빠르게 방 안을 살펴봤다. ...

리시의 방은 깨끗하지만 화려하지는 않았다. ...

‘내 방보다는 별로네.’ ...

다행이다. ...

자신의 방보다 호화로운 방이었다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을 것이다. ...

글로번과 데니스는 자신들이 이 방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저벅저벅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 방을 둘러보던 브리트니도 얼른 자신의 부모 옆에 앉았다. ...

리시는 그들의 맞은편 소파에 앉더니 다리를 꼬았다.   건방진 태도에 데니스가 미간을 좁혔다. ...

“아이리스, 너. 지금 그게 무슨 태도니? 어른들 앞에서 예의 없이.” ...

“무례한 건 이해하세요. 가정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

리시가 발끝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

“하!” ...

글로번과 데니스가 헛숨을 내뱉었다. ...

사람이 너무 화가 나면 오히려 화낼 기운을 잃게 되는데, 그들의 상황이 딱 그랬다. ...

(32) 좋은 가족이 되어줄게. ...

“아, 제 시녀들을 소개해야겠네요. 이쪽은 페르니 가문의 크리시나. 그리고 이쪽은 루테크 가문의 에르웰이에요.” ...

리시가 소파 뒤에 나란히 서 있는 여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

화가 나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페르니와 루테크라는 가문 이름은 정확하게 들렸다. ...

둘 다 내로라하는 명성을 가진 가문이었다. ...

그런 가문의 여자들이 리시의 시녀를 하다니. ...

물론 공녀인 브리트니의 시녀 중에도 자작이나 남작 가문의 딸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페르니와 루테크 가문은 자작, 남작 정도의 작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명예가 있는 가문이었다. ...

그린 백작 가문이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 슬슬 실감이 되기 시작했다. ...

글로번과 데니스도 긴장했다. 일단 방에만 들어오면 리시를 호되게 혼내줄 생각이었는데, 명망 있는 가문의 시녀들 때문에 그럴 수 없게 됐다. ...

“그나저나 초대장에 날짜를 확실하게 적어뒀는데, 이렇게 이른 방문을 한 이유가 뭘까요? 내가 보고 싶어서는 아닐 테고.” ...

“그, 그거야…… 우리는 네가 걱정돼서…….” ...

데니스의 말에 리시가 빙긋 웃었다. ...

“무엇이 그리 걱정됐을까요?” ...

“걱정이 안 되겠니? 그린 백작이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너랑 결혼하겠다며 납치하듯이 데려갔는데…… 결혼식 소식은 들리지도 않고.” ...

“그래. 게다가 너, 안 좋은 소문도 났었잖아. 신문이고 잡지고 야단이더라. 결혼하자마자 네 치부가 다 드러나는 거 같아서, 내가 얼마나 걱정했다고.” ...

브리트니가 얼른 끼어들었다. ...

리시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

“왜…… 왜 그렇게 웃어?” ...

“재미있어서. 네가 걱정했다는 게.” ...

“내가 동생 걱정하는 게 재미있는 일이야?” ...

“아무래도 그렇지. 네가 후치스 자작을 부추겨서 여기로 보냈고, 그것 때문에 내가 곤란한 상황이 됐던 건데. 너도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거 아냐?” ...

“그게 무슨…… 내가 후치스 자작을 왜 여기로 보내? 미쳤니? 아, 그리고…… 너, 왜 말이 짧아?” ...

“네가 먼저 짧게 했잖아.” ...

“나는 네 언니야, 아이리스.” ...

“브리트니. 내가 아직도 아이리스 위틀로인 것 같니?” ...

리시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

“나는 아이리스 그린 백작 부인. 그린 백작가의 안주인에게 마땅한 예의를 보이면, 나도 예의를 보이도록 하지.” ...

“정말이지, 더는 못 봐주겠구나, 아이리스!” ...

데니스가 쨍하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

“집 떠나서 그린 백작 부인이 되었다고, 네가 위틀로 가문의 핏줄을 이었다는 게 없었던 일이 될 것 같니? 아무리 이번 결혼으로 마음이 상했다고 해도, 가족에게 그렇게 대하는 건 레이디가 할 짓이 아니지 않니?” ...

데니스는 분노를 참기 위해 잠시 말을 끊었다. ...

남편이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하녀와 정을 통해 낳은 아이. ...

마음 같아서는 그 자리에서 죽이고 싶었지만, 꾹 참고 길렀다.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는 별칭까지 붙여주며, 20년을 키웠다. ...

그런데 돌아오는 게 이런 태도라니. 몇 시간도 못 살고 죽을 것을, 이제껏 살려줬더니! ...

“우리가 지금껏 너에게 어떻게 대했는데…… 잘 먹이고, 잘 키워줬으면 응당 그 은혜를 갚아야 하는 것이야.” ...

“은혜.” ...

리시는 그 단어가 생전 처음 듣는 단어라는 듯, 생경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

“은혜. 그래요. 그래서 갚고 있지 않나요, 공작부인. 당신들이 내게 한 것보다 더 상냥하고 다정하게 대해주는데…… 이것으로는 부족한가요? 아, 당신들이 내게 한 것과 똑같이 해주기를 바라는 거라면…….” ...

리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브리트니는 섬뜩함을 느꼈다. ...

“설거지를 시켜드릴까요? 아니면 창문을 닦게 하거나. 훔치지도 않았는데 누명을 뒤집어씌워 창문도 없는 창고에 밥도 주지 않고 가둬둘까요? 하지도 않은 일로 혼내며 매를 때릴까요? 당신들이 내게 한 그대로, 내가 해드리기를 바라는 건가요? 진정?” ...

리시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담담한 진실에, 위틀로 일가는 숨도 쉴 수 없었다. ...

리시가 자신의 치부를 시녀들 앞에서 고스란히 드러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

“헐…… 미친 새끼들이었네…….” ...

리시의 뒤쪽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리시는 뒤를 흘끗 돌아봤다가, 다시 위틀로 일가를 마주 보며 말했다. ...

“왜들 그런 표정이죠? 혹시 내가 시녀들 앞이라서 이런 이야기를 하지 못할 줄 알았나요?” ...

리시가 재미있다는 듯 두 다리를 테이블에 올리고 팔짱을 끼었다.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은 자세로, 말을 이었다. ...

“왜 그렇게 생각하셨을까? 맞고, 학대당하고, 누명을 뒤집어쓰고, 툭하면 굶고, 갇히고, 그래서 울었던 건 내 잘못도, 내가 부끄러워할 일도 아닌데.” ...

“아, 아이리스…….” ...

글로번이 간신히 입술을 달싹거렸다. ...

“잠시…… 우리끼리 이야기 좀 하자.” ...

“글쎄요.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네요. 그쪽도 셋, 이쪽도 셋. 이게 공평하잖아요.” ...

“우, 우리 가족끼리 얘기 좀 하자는 거야.” ...

“머리가 나쁘시네.” ...

리시가 미간을 좁혔다. ...

“뭐, 뭐라고!” ...

“지금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나, 당신들 가족 아니라고 말하는 거야.” ...

“아이리스!” ...

글로번이 더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당장이라도 리시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다는 듯 노려봤다. 꽉 쥔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

예전의 리시였다면 글로번의 언성이 조금 높아지기만 해도 고개를 푹 숙이고 바들바들 떨었을 것이다. ...

하지만 지금 그들 앞의 리시는, 여전히 오만한 자세로 소파에 몸을 파묻고 앉아 글로번을 흘끔 올려다볼 뿐이었다. ...

“앉아요, 위틀로 공작님. 여기는 위틀로 저택이 아니고, 나는 아이리스 위틀로가 아니니까. 위틀로 저택에서처럼 그 주먹이 내 머리를 치면, 여기서는 큰일이 벌어질 거예요.” ...

“내가…… 내가 언제 널 때렸다고!” ...

“아, 그걸 하려는 거군요. 날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이는 거.” ...

물론 그럴 생각이었다. ...

글로번도, 데니스와 브리트니도, 어떻게든 리시가 지금 내뱉은 모든 말을 거짓말로 만들어버릴 궁리를 하고 있었다. ...

“얼마든지 해도 좋아요. 하지만 이건 기억하세요. 당신들이 내게 해코지를 시작하는 순간, 나는 관청에 달려가서 나와 위틀로 공작가의 연을 끊어달라고 신청할 거예요. 그들은 이유를 묻겠죠. 그러면 나는 당신들에게 당한 일을 솔직하게 고백할 거예요.” ...

데니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리시가 검지를 들어 멈추게 하고 계속해서 말했다. ...

“물론 당신들은 그 자리에서도 날 거짓말쟁이로 만들려고 하겠죠. 하지만 내가 위틀로 저택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아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걸 잊지 마세요.” ...

글로번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

“이번에는 그들을 죽여 입을 다물게 할 수도 없을 거예요. 앞으로 나는 위틀로 공작가 고용인들의 움직임을 주시할 거고, 전처럼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거나 원인 모를 죽임을 당한 채 발견되면, 고발할 거예요. 관청에, 황실에, 그리고 신성국에. 아이리스 위틀로에게는 그럴 힘이 없었지만.” ...

리시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어찌나 달콤한 미소를 짓는지,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연인을 향한 미소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

리시는 미소를 띤 채 천천히 일어나 위틀로 일가를 내려다봤다. ...

“아이리스 그린 백작 부인에게는 그럴 힘이 있으니까.” ...

리시가 검지를 뻗어 방문을 가리켰다. ...

“그만 나가요. 피곤하니까.” ...

 

+++

쫓겨나듯 리시의 방에서 나와 서채로 돌아오는 내내, 위틀로 일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서채의 손님용 방에 들어가자마자, 데니스와 브리트니가 분통을 터뜨렸다. ...

악다구니를 쓰는 두 여자 사이에서, 글로번은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

‘시리엘…….’ ...

아주 오랜만에 그 이름을 떠올렸다. ...

오래전, 글로번이 억지로 굴복시켜 자신의 것으로 만든, 예쁘고 당찬 하녀. ...

-날 여기서 죽이는 게 좋을 거야, 글로번. 살려두면 반드시 네놈을 죽여버릴 거니까. ...

막 태어난 아이리스를 품에 안고, 글로번을 노려보던 섬뜩한 눈동자. ...

지금껏 아이리스를 보면서 제 어미와 닮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린 백작 부인이 된 아이리스는, 그녀의 어머니와 눈빛도, 성격도, 닮아 있었다. ...

그걸 깨닫는 순간, 글로번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아이리스는 위틀로 공작 가문이 만든 새장을 벗어났다. 앞으로 그 무슨 짓을 해도 아이리스가 새장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

그나마 아직 아이리스가 위틀로 가문과 정식으로 절연하지 않았다는 것이 위안이었다. ...

차라리 이대로 아이리스의 기분을 맞춰주면서 그린 가문과 연을 맺어두는 편이 나았다. 언젠가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

“돌아가자.” ...

지금은 돌아가는 게 낫다. 아이리스가 자신들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지금, 백작 저에 오래 머물러서 좋을 게 없었다. 결혼식 당일에 찾아와서 얼굴만 비출 생각이었다. ...

“돌아가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대로 물러나자는 거예요? 저 계집애가 저렇게 본 데 없이 구는데?” ...

데니스는 글로번과 생각이 달랐다. ...

어떻게든 아이리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줄 계획이었다. ...

“저 애가 싫다잖소. 저 애 말대로 여긴 그린 백작 저택이고, 저 애는 이 저택의 안주인이야. 안주인이 싫다는데 계속 머물러봐야…….” ...

“하! 저 애가 뭐라 하든, 저 애는 아이리스 위틀로예요. 우리가 먹여주고 재워주고 이때까지 키워준, 아이리스 위틀로라고!” ...

“맞아요, 아빠. 이대로 돌아가는 건 진짜 아닌 것 같아요.” ...

브리트니가 데니스를 거들었다. ...

“쟤가 우리 가족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떠들어대면 어떡해요? 차라리 여기 머물면서, 우리가 좋은 사람들이라는 걸 보여주는 편이 나아요.” ...

“그래요, 여보. 내가 여기서 아이리스를 괴롭히겠다는 게 아니에요. 우리 이미지도 관리해야지. 우리가 여기서 돌아가면, 저 애의 헛소리를 전부 진짜라고 생각할 거 아니에요.” ...

글로번은 과연 자신의 아내와 딸이 이곳에 남아 있는다고 해서, 이미지가 바뀔지 의문이었다. ...

하지만 데니스와 브리트니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

글로번은 끄응,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굴렸다. ...

그린 가문의 결혼식이니 분명 각 나라의 황실과 왕실에서도 사람을 보낼 것이다. 황제까지는 아니더라도 황태자나 황자, 왕자들은 참석하리라. ...

글로번은 가비자르 제국의 이오벳 황태자를 사윗감을 노리며, 뒤에서 여러 가지 공작을 펼치고 있었다. ...

‘황태자는 이런 자리에 참석을 안 하는 편이니 올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

만약 아이리스가 결혼식에서까지 쓸데없는 소리를 떠들어대서, 황실 측 사람의 귀에 들어가면 큰일이었다. 이곳에 머물며 아이리스의 비위를 맞춰주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

위틀로 일가는 결혼식까지 그린 백작 저택에 머물기로 했다. ...

+++

“위틀로 일가는 결혼식까지 머물 거라고 합니다.” ...

제이미의 보고를 들으며 리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

리시가 예상한 대로였다. ...

앞으로 위틀로 일가가 어떻게 나올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

‘내게 잘 대해주겠지. 결혼식에는 황실 측에서도 사람을 보낼 테니, 그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주고 싶을 거야.’ ...

그렇다면 그들이 해주는 거짓 대우를, 잘 받아줄 생각이었다. ...

‘얼마나 좋은 부모, 좋은 언니 역할을 하는지 지켜봐주지. 큰 노력이 필요할 거야.’ ...

(33) 좋은 꿈. ...

제이미는 앞으로 위틀로 일가를 어떻게 대하는 게 좋겠냐고 물었다. ...

“잘 대해줘요. 평범한 손님을 대하듯이.” ...

내가 이제 아이리스 위틀로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건, 이 정도면 됐다. 앞으로의 무례는 오히려 그린 가문에 해가 될 것이다. ...

“아, 그리고 아이리스 님. 대장이 내일쯤 도착할 거라고 합니다.” ...

“그렇군요.” ...

제이미가 나간 후, 리시는 시녀들을 물리고 혼자 방 응접실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

케이가 돌아온다. ...

그리고 이 저택에는 브리트니가 있다. ...

지난 삶, 황태자와 결혼한 브리트니는 케이를 자신의 애인으로 뒀다. 물론 애정이 아닌, 필요에 의한 계약 연애였다. ...

브리트니 쪽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케이는 확실했다. 가족을 잃고 엘드허트마저 영원한 잠에 빠지게 되자, 케이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

케이에게는 더욱 강한 권력이 필요했고, 브리트니에게는 사교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자를 곁에 두는 게 필요했다. 둘은 손을 잡았고, 그들의 동맹은 잘 유지되는 것처럼 보였다. ...

적어도 케이가 수인이라는 게 들통나기 전까지는. ...

‘이번 삶에서는 어떨까?’ ...

리시는 소파에 비스듬히 드러누웠다. ...

‘이번에도 케이가 브리트니를 필요로 하게 될까?’ ...

리시는 그린 가문의 누구도 죽게 놔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

하지만 미래를 바꾸는 것이, 시간의 흐름에 어떤 영향을 가져올지 알 수 없었다. ...

[운명은 반드시 이뤄진다.] ...

언젠가 읽었던 책에서 그런 글귀를 보았다. ...

만약 운명이 반드시 이뤄진다면, 리시가 후에 있을 사건에서 그린 노백작 부부와 젠을 살려도, 또 다른 죽음의 운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

새로운 운명은 리시가 알 수 없기에, 다시 덮쳐오는 죽음으로부터 그들을 구할 수 있을지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리시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

‘아니,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로 두려워할 이유는 없어. 나는 그냥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돼.’ ...

지금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려고 했는데, 생각의 초점이 다시 브리트니와 케이에게로 맞춰졌다. ...

지난 삶, 어느 파티에 참석했을 때, 브리트니가 30분 후에 정원에서 보자고, 할 얘기가 있다고 말했다. ...

약속 시각에 맞춰 정원에 간 리시는, 브리트니와 케이가 입 맞추는 장면을 목격했다. 브리트니는 케이의 목에 두 팔을 두르고 입을 맞추며, 리시를 응시했다. ...

‘이것 봐. 이렇게 멋진 남자가 내 연인이야. 나는 앞으로 곧 황제가 될 남편을 가졌고,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연인을 가졌지. 부럽지 않니?’ ...

브리트니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리시는 브리트니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리시는 알포드의 부인이었고, 케이처럼 굉장한 남자를 마음에 품을 주제도 되지 않았다. ...

리시에게 그린 백작은 얼굴 한번 보기 힘든, 멀고도 높은 존재였다. 리시는 브리트니가 가진 걸 뺏으려고 한 적도 없고, 브리트니는 리시가 결코 손에 넣지 못할 것들을 전부 가졌다. ...

그런데 왜 굳이 그런 장면까지 보여주며 우쭐해했던 걸까? ...

그러지 않아도 리시의 삶은 어둡고 절망적이었는데. ...

내버려둬도 진탕 속에서 살다가 죽었을 텐데. ...

‘그러고 보니…… 입을 맞췄지. 케이랑 브리트니…….’ ...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고 넘겼던 그 장면이, 유독 생생하게 떠올랐다. ...

‘그때 케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브리트니는 예쁘니까 아무리 계약 때문에 하는 연애라고 해도, 좋긴 좋았겠지?’ ...

남자라면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법이니까. ...

‘브리트니는 남자 앞에서 애교도 많으니까…… 어쩌면 정말로 브리트니에게 끌렸을지도 몰라.’ ...

케이가 브리트니를 어떻게 대했을지 궁금했다. ...

‘지금의 날 대하는 것처럼 대했을까?’ ...

리시의 앞에서 케이는 달았다. 몹시도 달아서 녹아버릴 것 같을 때가 종종 있었다. ...

울컥, 하고 아랫배 부근에서 명치까지, 기묘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리시는 가만히 자신의 명치에 손바닥을 댔다. ...

‘뭐야, 이건…….’ ...

왜인지 짜증이 난다. ...

지난 삶에서 벌어진 일이고, 이번 삶에서는 벌어지지 않을 일인데. ...

아니, 걱정된다. ...

이번 삶에서도 브리트니와 케이가 그렇게 키스하는 일이 벌어질까 봐. ...

케이가 브리트니를 유용하다고 여기고, 리시 몰래 계약 연애를 시작할까 봐. ...

리시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

벌어지지도 않은 일로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은데, 왜 자꾸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건지 모르겠다. ...

위틀로 일가가 이 저택에 머무는 걸 허락한 게 후회됐다. 케이와 브리트니가 만나는 일이 없었으면 했다. ...

리시는 두 다리를 올려 허공을 걷어찼다. 그래도 기분이 안 풀려서 몇 번이나 더 허공을 걷어차다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다리를 내렸다. ...

“적당히 해, 아이리스. 적당히.” ...

리시는 눈을 감았다. ...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좀 나아지겠지. ...

잠결에 머리를 스치는 손길을 느꼈다. ...

머리칼을 헤집고 들어온 손가락이 두피를 기분 좋게 자극했다. ...

‘누구지?’ ...

답은 금방 나왔다. ...

‘케이가 돌아왔구나.’ ...

그렇다면 일어나서 인사를 해야겠다. ...

그런데 무언가 딱딱하고 따뜻한 것이 리시의 볼에 닿았다. ...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나른하고 기분 좋은 온기에, 리시는 다시금 잠에 빠져들었다. ...

+++

어젯밤, 리시는 알포드를 늦은 시간까지 기다리다가 잠깐 졸고 말았다. ...

그사이에 술에 취해 들어온 알포드는, ...

“감히 남편이 들어오기도 전에 잠을 자?” ...

라며, 리시를 때렸다. 단단한 매로 종아리를 몇십 대나 맞았다. 희고 연한 피부에 쫙쫙 붉은 줄이 새겨지다가, 결국 피가 흐르고 말았다. ...

그런데도 알포드는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

그렇게 한참 때리던 알포드는, ...

“앞으로 잘하란 말이야. 응?” ...

하고 삿대질을 하더니,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

리시는 잘 수 없었다. 맞은 곳이 너무 쓰리고 아팠다. ...

이제 몇 년 후면 마흔 살인데도, 여전히 매질을 당하는 자신의 신세가 한심했다. ...

변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여러 번인데, 막상 그런 상황이 닥치면 얼어붙었다. 잘못해도, 하지 않아도, 수시로 폭행을 당해온 리시의 육체는, 상대의 눈빛이 조금만 험악해져도 움직임을 잃곤 했다. ...

리시는 멍하게 앉아, 즐거운 표정으로 파티를 즐기는 남녀를 지켜봤다. ...

어젯밤 맞은 종아리가 욱신욱신 쑤셨다.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서 곪고 있나 보다. ...

더는 미소지으며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절뚝거리며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리시가 사라진 걸 알면 알포드가 화를 내겠지만, 지금은 그런 나중의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

‘아파…….’ ...

리시는 울고 싶었지만 울지 않았다. 눈물을 흘린다고 이 통증이 가라앉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

아무도 오지 않는 정원 구석의 벤치에 앉아, 치마를 살짝 걷어 올렸다. 시원한 공기가 치마 안쪽으로 들어와서, 통증이 아주 조금은 가셨다. ...

“대장, 피아몬도의 움직임이 수상해요. 잘 지켜봐야 합니다.” ...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이 파티에 온 거다. 그나저나 그 귀걸이는 가져왔나?” ...

“네, 갖고 오긴 했는데…… 이건 성유물이 아닌 것 같아요. 뭐, 반짝거리고 예쁘긴 하네요.” ...

“일단 살펴보도록 하지.” ...

“피아몬도 잘 살펴보시고요. 먼저 가볼게요.” ...

누군가 자리를 뜨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또 누군가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소리. ...

리시는 숨을 멈추고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관목 사이로 나온 그에게서 모습을 숨길 수는 없었다. ...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 ...

브리트니의 연인. ...

리시를 발견한 케이는 무척 당황한 듯했지만 허둥대지는 않았다. ...

“후치스 자작 부인.” ...

케이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

리시는 케이가 자신을 안다는 게 놀라웠다. ...

리시도 일어나서 그의 인사를 받아줘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종아리가 찌르는 듯 아팠기 때문이다. ...

“어디 아프십니까?” ...

케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누군가 이토록 다정하게 리시의 상태를 걱정해준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

리시는 입을 꾹 다물고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

“아프신 것 같은데…… 식은땀이…….” ...

케이가 리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

리시는 자신이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

치맛자락 사이로 리시의 종아리를 본 케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

“대체 누가 이런…….” ...

리시는 황급히 치마를 내렸다. ...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린 백작님.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

리시의 절박한 말에 케이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그는 한동안 리시를 응시하다가 말했다. ...

“참고 감추는 것이 모든 일을 해결해주지는 않습니다.” ...

“알아요. 하지만…… 참고 감춰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도 있답니다.” ...

케이는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곧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일어났다. ...

“알겠습니다, 자작 부인. 상처에 연고를 발라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안 그러면 그 예쁜 종아리에 흉터가 남을 테니.” ...

“고마워요.” ...

리시는 케이가 얼른 가줬으면 했다. 이런 모습을 들킨 것도 창피하고, 아프지 않은 척하는 것도 괴로웠다. ...

다행히 케이는 관목 사이로 떠나갔다. ...

리시가 크게 한숨을 뱉어내려는데, 케이가 다시 돌아왔다. ...

리시는 한숨을 쉬기 위해 입술을 벌린 상태로 굳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케이를 올려다봤다. ...

케이는 리시를 향해 주먹을 내밀었다. 리시는 뭘 하라는 건가 싶어서 가만히 그의 주먹을 내려다봤다. ...

“받으세요.” ...

“무엇을?” ...

케이가 답답한 듯 리시의 손목을 잡아올려, 리시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줬다. 파랗고 작은 보석이 달린 귀걸이였다. ...

리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

“트리사의 귀걸이라고, 지니고 있으면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귀걸이입니다.” ...

“아…….” ...

“부디 후치스 자작 부인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 ...

 

+++

리시는 눈을 떴다. ...

-부디 후치스 자작 부인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 ...

따스한 음성이 귓가에 머물렀다. ...

‘지난 삶의 꿈을 꿨네.’ ...

리시가 처음으로 받아본 다정한 온기, 고마운 배려. ...

지난 삶, 대화 한번 제대로 나눠보지 못한 케이가 자신을 안다는 것도 신기한데, 그는 리시를 불쌍히 여겨 귀걸이까지 선물해줬다. ...

행운을 준다는 트리사의 귀걸이. ...

그 귀걸이는 리시에게 아무 행운도 가져다주지 않았지만, 그것을 낄 때마다 케이의 다정한 위로가 느껴져서, 알포드 몰래 종종 끼곤 했었다. ...

죽던 날 밤에도, 리시는 그 귀걸이를 차고 있었다. ...

그날의 일을 떠올리자, 리시는 가슴이 따뜻해졌다. ...

‘그러고 보니, 케이는 그때도 내 종아리를 보면서 예쁜 종아리라고 했구나. 그게 말버릇인가?’ ...

지난 삶 케이를 봤을 때 리시가 느꼈던 감정과 지금 케이를 볼 때 리시가 느끼는 감정이 겹쳐져서 웃음이 나왔다. ...

지난 삶에서 케이는 정말 어렵고 위대하고 머나먼 존재였는데. ...

이번 삶에서 케이는 뚱땡이 개라고 불리고, 리시에게 털을 빗겨달라고 하는, 귀여운 늑대였다. ...

“기분 좋은 꿈 꿨어요?” ...

문득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

고개를 돌려보니, 케이가 손에 머리를 괴고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

“왜 그렇게 놀라요? 남편 몰래 나쁜 짓이라도 한 것처럼.” ...

“언제 왔어요?” ...

“늦은 밤. 소파에서 자고 있기에, 침대로 옮겼어요. 옮긴 줄도 모르고 자던데요.” ...

그러고 보니, 리시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

어제 입은 차림 그대로. ...

부츠는 케이가 벗겨준 듯했다. ...

“깨우지.” ...

“곤히 자는데, 굳이 깨울 필요가 뭐가 있어요? 잘 잤어요?” ...

“응, 무척이나.” ...

“좋은 꿈 꿨어요?” ...

케이가 다시 물었다. ...

그제야 리시는 케이가 자신에게 슬리브 스톤을 사용했다는 걸 깨달았다. ...

“무척이나.” ...

당신이 나오는 꿈을 꿨어요. ...

당신이 내게 다정한 온기를 나눠주는 꿈. ...

“행복한 꿈을 꿨어요.” ...

(34) 사교계의 여신 ...

“그거 다행이네요. 무슨 꿈 꿨어요?” ...

당신 꿈을 꿨어요, 라고 말하기 민망했다. ...

리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

“윈디를 타는 꿈을 꿨어요.” ...

“그거 실망인걸.” ...

“응?” ...

“내 꿈을 꿨으면 했거든.” ...

케이가 손등으로 리시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의 손등이 닿은 부위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

새삼스럽게 이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이 내 앞에서 제 꿈을 꾸지 않았다고 투덜거리다니. ...

이게 정말 현실일까? ...

어쩌면 이거야말로 행복한 꿈인 것이 아닐까? ...

죽음 속에서 내가 원하는 환상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 ...

문득 두려워져,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바닥을 그의 뺨에 대고 그의 체온을 확인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손을 움직여 그의 단단한 팔을, 가슴을, 허리를……. ...

“리시. 그만.” ...

그가 리시의 손목을 잡았다. ...

“날 그만 자극해. 지금도 간신히 참고 있는 거니까.” ...

“아…… 미안해요.” ...

자기가 무슨 행동을 했는지 깨달은 리시가 얼굴을 붉히자,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

“미안할 건 없고. 아내가 아침부터 이렇게 적극적으로 내 몸을 더듬어주는 것도 썩 나쁘지 않군요. 만약 내가 참지 않아도 되는 거라면…….” ...

케이가 자세를 바꿔, 리시의 위로 올라탔다. 그는 팔꿈치로 자신의 상체를 지탱하고 리시를 내려다봤다.   그의 단단한 허벅지가 리시의 허벅지에 부딪혔다. 그와 밀착된 배가 신경 쓰여서, 리시는 숨을 멈췄다. ...

“감사한 마음으로 먹어치우고 싶은데.” ...

그의 음성이 은밀한 부분을 자극했다. ...

리시는 사내의 무게가 두려웠다. 그러나 지금 리시를 짓누르는 그의 무게는 두렵지 않았다. ...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알고 싶었다. 평소보다 열띤 그의 눈동자가 얼마나 더 뜨거워질 수 있는지. ...

문득 지난 삶에서 브리트니와 입맞춤하던 케이가 떠올랐다. ...

그때 케이는 어떤 눈빛이었을까? ...

이렇게 관능적인 열기를 띠고 있었을까? ...

“그렇게 무서워하지 말아요, 리시. 농담이니까.” ...

리시의 눈빛을 오해한 듯, 케이가 싱긋 웃으며 리시에게서 내려와 도로 옆에 누웠다. ...

리시는 아쉽다는 마음이 드는 게 당혹스러워서,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

케이는 나른하게 누워서 리시를 올려다봤다. ...

“그래서 윈디랑은 어때요? 내가 없는 동안, 꿈까지 꿀 정도로 많이 친해진 거예요?” ...

“음. 그 애에게 사과를 주면 내 손을 먹으려고 해요. 유니콘이 육식하는 줄은 몰랐어요.” ...

케이가 키득키득 웃었다. ...

“유니콘은 뭐든 먹죠. 잡아먹히지 않게 조심해요, 리시. 뭐든 당신의 처음은 나였으면 하거든.” ...

“늑대의 먹거리가 되는 편이 나을 것 같진 않은데요.” ...

“그건 두고 보자고요.” ...

케이가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리시의 허벅지에 제 머리를 올렸다. ...

리시는 망설이다가 그의 머리칼에 손을 올렸다. 그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헤집었다. 손가락 끝이 그의 두피에 닿았다. 리시는 부드럽게 그의 두피를 자극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

“내게 슬리브 스톤을 사용한 거예요?” ...

케이는 대답 대신 품에서 팔찌를 꺼냈다. 중앙에 파란색의 작은 진주 같은 것이 박힌 팔찌였다. ...

“쿼튼 족 족장이 팔찌로 예쁘게 가공해뒀더군요.” ...

“순순히 주던가요?” ...

“약간의 마찰이 있었지만, 대화로 해결했죠.” ...

과연 대화로 해결했을까? ...

리시가 슬리브 스톤을 만져보려고 손을 뻗자, 케이가 얼른 그것을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

“막 만지는 건 안 돼요, 리시. 그렇게 위험한 건 아니지만, 가끔 불행하거나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만지면 위험해질 수도 있거든요. 내가 옆에 있으니 그렇게까지 큰 문제는 안 생기겠지만.” ...

“내가 죽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여요?” ...

리시의 질문에 케이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

“흩어질 것처럼 보일 때가 있어요.” ...

몰랐다. ...

리시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자신이 그렇게 위태로워 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

오만해 보일 정도로 당당하게, 그렇게 살아가려고 했는데. ...

‘아직 멀었구나.’ ...

마음을 다잡으며 케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

“나는 흩어지지 않아요, 케이.” ...

“그래요. 그래도 이걸 막 만지는 건 안 돼요.” ...

“그것도 성유물 보관소에 넣어둘 건가요?” ...

“아니. 신성국에는 아직 비밀이거든요. 내 아내가 스스로 좋은 꿈을 꿀 때까지는 잘 사용해주려고요.” ...

“그렇게 막 사용해도 되는 거예요?” ...

“괜찮아요. 내가 수호자인데, 누가 뭐라 하겠어요?” ...

케이는 지난 삶에 보았을 때와 이미지가 달랐다. ...

좀 더 우직하고 융통성 없는 성격인 줄 알았는데, 자신의 아내를 위해 신성국의 눈을 속이는 면도 있을 줄은 몰랐다. ...

“잘 관리해야 해요, 케이. 잃어버리지 말고, 아무나 줍게 하지 말고.” ...

케이가 고른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왜 그렇게 웃어요?” ...

“아니, 그냥. 아내에게 잔소리를 듣는 것도 꽤 괜찮구나 싶어서.” ...

“잔소리가 아니라 걱정하는 거거든요.” ...

“네, 네. 알겠습니다, 부인.” ...

싱글싱글 웃는 케이가 얄미워서, 그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

그는 입가에 미소를 묻힌 채 눈을 감았다. ...

“당신이랑 이러고 있으니 잠이 솔솔 오네요.” ...

그러고 보니 케이는 피곤해 보였다. ...

“좀 자요.” ...

“응. 아, 위틀로 일가가 방문했다던데.” ...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잠이나 자요.” ...

“난 당신이 그런 말투로 말할 때가 좋더라.” ...

“어휴, 좀.” ...

손바닥으로 케이의 입술을 살짝 눌렀다. ...

케이가 작게 웃었다. ...

잠시 후, 케이의 입가에서 힘이 빠지고 그의 얼굴 근육이 나른하게 풀어졌다. ...

그가 잠든 후에야, 리시는 자신이 웃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

리시는 웃음을 거두고, 슬리브 스톤을 넣어둔 케이의 주머니로 시선을 옮겼다. ...

‘괜찮을까? 저걸 없애지 않아도?’ ...

리시는 케이의 가족에게 벌어질 일을 막을 계획이었다. ...

하지만 만약 그게 잘못된다면, 혹은 막았는데도 그만한 불행이 닥쳐온다면. 저것이 엘드허트를 영원한 잠에 빠지게 해서, 케이를 더 불행하게 만들지는 않을까? ...

‘하지만…… 케이가 저걸 가져온 것만으로도 지난 삶보다는 안전해졌어.’ ...

성유물이 뿜어내는 힘을 억누를 수 있는, 수호자의 힘. ...

케이가 가진 한, 누군가 저걸 건드려서 영원한 잠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

‘그래, 어차피 내가 저걸 부술 방법도 없고.’ ...

망치로 때리거나 높은 곳에서 던져보려고 했지만, 그런 거로 성유물이 부서질 것 같진 않았다. ...

마지막 방법은 저걸 깊은 호수에 던져버리는 건데, 케이는 리시에게 슬리브 스톤을 선물해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

‘남편 걸 훔칠 수는 없지.’ ...

리시는 변화가 생기기 전까지, 슬리브 스톤을 케이에게 맡겨두기로 했다. ...

+++

케이는 딱 한 시간만 자고 일어나, 처리할 업무가 있다며 서재로 가버렸다. ...

리시는 따뜻한 물에 씻고 나와서 수수한 원피스로 갈아입고 식당으로 향했다. ...

식당에는 나단과 월라스가 있었다. 리시가 들어가자,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

“형수님, 대장은 일이 많아서 조금 늦게 오신대요. 먼저 드시라고 하셨어요.” ...

나단이 보고했다. ...

리시가 의자에 앉자 나단과 월라스도 앉았다. 요리사가 와서 오늘 마련한 요리를 읊었다. 리시는 수프와 생선구이를 선택했고, 나단과 월라스는 고기와 고기, 그리고 또 고기를 선택했다. ...

덩치가 큰 월라스야 그렇다 쳐도, 호리호리하고 작은 체구의 나단이 저렇게 많이 먹는다는 게 신기했다. ...

“형수님, 윈디랑은 좀 친해지셨어요? 그 녀석, 이름이 마음에 든다고 하더라고요.” ...

월라스의 말에, 리시가 포크를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윈디랑 대화가 가능해요?” ...

월라스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

“예? 아…… 아아…… 니요. 그게…… 어…… 느낌상, 그렇다고요.” ...

월라스의 태도가 수상쩍었다. 나단은 뭔가 아는 게 있는 듯 웃음을 참고 있었다. ...

“그래요? 내가 보기엔 싫어하는 것 같던데. 어제 윈디라고 불렀더니 뒷발질을 하더라고요.” ...

“그거 괜히 그러는 걸 거예요. 관심 끌려고.” ...

“윈디에 대해 잘 아네요, 월라스.” ...

“아뇨, 전혀요. 저는 아는 게 전혀 없어요. 제가 뭘 알겠어요.” ...

월라스가 두 손을 저으며 말했다. ...

월라스가 케이를 배신할 일은 없겠구나. 저렇게 거짓말을 못하는 걸 보면. ...

리시는 월라스가 뭘 저렇게 숨기고 싶어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

리시가 빤히 쳐다보자, 안절부절못하던 월라스가 빵을 반으로 잘라서 내밀었다. ...

“드실래요?” ...

“야, 네가 먹던 걸 드리고 그래?” ...

나단이 월라스의 손목을 탁, 쳐서 빵을 떨어뜨렸을 때, 식당 문이 활짝 열리며 젠이 들어왔다. ...

“리시! 내 새언니!” ...

젠이 두 팔을 벌리고 리시를 향해 걸어왔다. 격렬한 환호에 당황스러웠지만, 리시는 침착하게 일어나 젠을 맞이했다. 젠이 리시를 꽉 끌어안았다가 놔줬다. ...

“나 없는 동안 잘 지냈어요?” ...

“덕분에요. 젠은 잘 지낸 것 같네요.” ...

“돈을 흥청망청 쓰는 건 즐거운 일이거든요. 이 집안 재산을 거덜 낼 각오를 했더니, 절로 행복해지더라고요.” ...

이 집안 재산을 거덜 낼 정도의 파티라니. ...

농담이겠지. ...

“아, 소개할게요. 넬라니커스 제널 백작 부인이에요. 내 아카데미 동기죠.” ...

젠이 문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

그제야 문가에 서 있던 우아한 여성이 천천히 걸어와 리시의 앞에 섰다. ...

“인사드려요, 그린 백작 부인. 젠에게 말씀 많이 들었어요. 그전에도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요.” ...

넬라니커스 제널. ...

젠에게 청첩장을 받아서 확인했을 때, 그 이름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

사교계의 여신 넬라니커스 제널 백작 부인. ...

지난 삶, 사교계를 휘어잡은 그녀의 권력은 황후가 된 브리트니보다도 커지게 된다. 브리트니가 아무리 호화로운 파티를 열어도, 넬라가 참석하지 않으면 그 파티는 빛을 잃었다. ...

브리트니는 넬라와 친해지려고 노력했지만, 왜인지 넬라는 브리트니를 멀리했고, 브리트니가 여는 파티에도 잘 참석하지 않았다. ...

지난 삶, 리시는 딱 한 번 넬라의 파티에 초대를 받아서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 파티에서 넬라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몇 번이나 넬라와 눈이 마주쳤다. 넬라는 리시를 관찰하는 것 같았다. ...

그때, 넬라가 아무 친분도 없는 리시를 파티에 초대했는지, 어째서 그렇게 관찰하는 듯한 시선을 보낸 건지는 끝까지 알 수 없었다. ...

그 이후로 넬라의 파티에 초대되는 일도, 다른 파티에서 넬라와 마주치는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지난 삶의 일은 지난 삶의 일일 뿐. 이번 삶에서의 관계는 달라질 것이다. ...

“나야말로 제널 백작 부인의 명성을 익히 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날 수 있어서 기쁘네요. 리시라고 편하게 불러줘요.” ...

“나도 넬라라고 편하게 불러주세요.” ...

리시와 넬라가 서로를 탐색하는 듯한 시선을 교환했다. ...

젠이 리시의 팔에 팔짱을 끼며 말했다. ...

“어때? 우리 새언니, 소문보다 예쁘지?” ...

확실히 소문보다 예쁘다고, 넬라는 생각했다. ...

게다가 리시에게는 뭐라 표현하기 힘든 분위기가 있었다. ...

많은 것을 아는 듯한 깊은 눈빛, 여린 듯한데 결코 흔들릴 것 같지 않고, 상냥한 듯하지만 단호한 일면이 느껴졌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 그리고 브리트니의 동생.’ ...

넬라는 브리트니를 싫어했다. ...

순진한 척, 착한 척하면서 남을 욕하고 다니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그래서 리시에게도 큰 기대는 없었다. 브리트니의 여동생이니, 귀하게 자란 여우일 거라고 생각했다. ...

경계심 많은 젠이 ‘우리 새언니, 우리 새언니’ 하며 자랑을 할 때부터 ‘내 생각이 틀린 건가?’ 싶었는데, 실제로 보니 알겠다. ...

리시는 브리트니와 다르다. 리시의 눈동자에 담긴 것은, 브리트니처럼 가볍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전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거지?’ ...

리시는 저택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공작의 보호를 받으며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을 텐데. ...

그때, 식당 문이 벌컥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식당 문으로 향했다. ...

막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는, 식당 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을 줄 몰랐다는 듯 얼어붙었다. ...

리시가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

“브리트니.” ...

(35) 지옥 같은 시간. ...

브리트니는 얼어붙은 채 식당 안을 돌아봤다. ...

조금 전, 그린 가의 시종이 오찬을 어떻게 할 건지 물어보러 왔다. 케이가 돌아왔다는 걸 모르는 브리트니는, 당연히 리시 혼자서 아침을 먹을 거라고 생각했다. ...

위틀로 공작 부부는 방에서 먹겠다고 했지만, 브리트니는 기어코 본채의 식당으로 향했다. 리시와 단둘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식당에는 리시 혼자가 아니었다. ...

월라스와 나단, 그리고 젠과 넬라. ...

“브리트니.” ...

리시의 부름에 브리트니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

리시의 미소를 보자 왈칵 화가 치밀었다. ...

‘이것 봐, 브리트니. 네가 어려워하는 제레시엔과 넬라니커스가 나랑 이렇게 친밀하게 지내고 있어. 부럽지 않니? 너, 이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어 했지만, 제대로 대화도 못 해봤잖아.’ ...

리시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

‘네까짓 게!’ ...

전처럼 리시의 머리채를 잡고, 어디서 그런 식으로 웃느냐고 혼쭐을 내주고 싶었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나대는 리시에게 버르장머리를 가르쳐주고 싶었다. ...

하지만 브리트니는 젠과 넬라의 앞에서 악다구니를 쓰지 않을 이성이 남아 있었다. ...

“응, 리시.” ...

잘 부르지 않는 애칭을, 상냥하게 불러주며 미소 지었다. ...

동생을 더없이 사랑하는 언니처럼. ...

“같이 아침을 먹고 싶어서 왔는데, 내가 오면 안 되는 자리였을까?” ...

“아니야. 소개할게. 이쪽은 넬라니커스 제널 백작 부인이고, 이쪽은 내 남편의 여동생인 제레시엔 그린이야. 아, 언니는 파티에 자주 나갔으니 안면이 있겠구나.” ...

물론 안면이 있다. 대화해본 적이 없어서 문제지. ...

브리트니는 리시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기 전에, 저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

넬라와 젠은 고개를 살짝 끄덕했을 뿐, 스스로 자신을 소개하며 인사하지는 않았다. ...

“그러고 보니, 언니는 파티에만 나가면 인기가 대단하다고 했지. 넬라만큼 아는 사람도 많고, 다들 언니랑 친해지고 싶어 한다고 했잖아. 그럼 넬라와도 친하겠네.” ...

브리트니는 입을 꾹 다물고 리시를 노려봤다. ...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

“내게 나도 모르는 친구가 있었군요.” ...

넬라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

명백한 거절과 조롱이 담긴 그 말에, 브리트니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

“아…… 하하하……. 내가 언제 그런 소리를 했다고…… 또 그렇게 허풍을 떠네. 아무래도 바쁜 것 같으니까 돌아갈게.” ...

브리트니는 이 자리에 앉아서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변해버린 리시를 상대할 자신도 없었다. ...

넬라와 젠에게 둘러싸인 리시는, 아무리 봐도 예전의 리시와 달랐다. 눈빛도, 자세도, 말투와 행동도, 전부. 리시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다른 사람 같았다. ...

브리트니가 몸을 돌리려는데, 리시가 말했다. ...

“어디 가? 같이 밥 먹으려고 왔다면서? 앉아.” ...

부드러운 음성이지만 명령조였다. ...

브리트니는 주먹을 꽉 쥐며 애써 미소 지었다. ...

“아니야. 결혼 준비랑 바쁠 텐데, 내가 괜히 여기까지 찾아온 것 같아서……. 동생 보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네 사정을 생각하지 못했어.” ...

“생각 안 해도 돼. 거기 앉아서 내 얼굴 실컷 봐.” ...

리시의 입가에 우아한 미소가 번졌다. ...

브리트니는 분노 때문에 거칠어지는 호흡을 간신히 억눌렀다. 리시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그냥 돌아가면, 패배한 개처럼 보일 것이다. 브리트니가 자리를 비운 후, 리시가 저들에게 무슨 말을 떠들어댈지 모른다. ...

어쩔 수 없이 리시가 가리킨 곳, 리시의 옆자리에 앉았다. ...

이 식당에는 리시와 젠, 넬라, 월라스와 나단, 그리고 브리트니, 이렇게 여섯 명이 있었다. ...

세 명씩 마주 보고 앉으면 될 텐데, 젠과 넬라는 월라스와 나단 옆에 가서 앉았다. ...

위틀로 가의 두 딸을, 그린 집안 사람들이 관찰하는 모양새였다. ...

브리트니는 얼굴을 들고 있기 힘들었다. ...

‘분명 아이리스랑 내 얼굴을 비교하고 있을 거야.’ ...

어릴 때부터 그런 일을 자주 당했다. 유모나 하녀들이 ‘그래도 외모는 브리트니 님이 아이리스를 따라가지 못하지.’라는 소리를, 뒤에서 수군거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

‘그래서 라포드도……. 아니, 라포드 생각은 이제 그만하자.’ ...

브리트니는 자신의 앞에 놓인 포크를 집어 들고, 먹는 데에 집중하기로 했다. ...

리시는 갖지 못할, 위틀로 공작가의 진짜 공녀의 품위를 보여줘야지. ...

‘리시, 네가 그린 백작이랑 결혼하더니 아주 하늘 높은 줄을 모르는 모양인데, 결국 네가 얼마나 천한 핏줄인지 다 드러날 거야.’ ...

리시가 저렇게 기세등등한 건 지금뿐이리라. ...

케이도 리시의 외모에 홀려서 잠시 넋이 나간 것일 뿐, 리시와 살다 보면 1년도 지나지 않아서 질릴 게 분명했다. ...

리시는 젠, 넬라와 즐겁게 담소를 나누며 식사했다. 간간이 월라스와 나단이 대화에 참여했고, 그들의 말투에서는 리시를 향한 존중이 느껴졌다. ...

까르르, 들려오는 리시의 웃음소리에, 간신히 억누른 짜증이 또 치밀어올랐다. ...

‘거긴 네 자리가 아니야, 아이리스! 원래는 내 자리라고!’ ...

아이리스만 아니라면, 케이와 결혼하는 것은 자신이었을 거라고, 브리트니는 생각했다. ...

케이가 원하는 건 분명 위틀로 공작가의 명성일 것이고, 그에게 그 명성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은 진짜 공녀인 브리트니뿐이었다. ...

‘그린 백작은 리시가 천한 핏줄이라는 걸 모르니까, 얼떨결에 리시를 선택한 거겠지. 소문의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는 여자가 궁금하기도 했을 거고.’ ...

브리트니는 아무리 생각해도, 리시가 자기 자리를 빼앗은 것만 같았다. ...

“브리트니.” ...

리시의 부름에 브리트니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

“말이 별로 없네. 불편해?” ...

걱정하는 듯한 말투, 그렇지 않은 눈빛. ...

“아니, 불편할 리가. 내가 입 열면 너한테 별로 좋지 않잖아.” ...

브리트니는 경고를 담아서 말했다. ...

그 말에 대꾸한 건 브리트니가 아닌 젠이었다. ...

“왜 브리트니 양이 입을 열면, 내 새언니에게 안 좋다는 거죠? 동생을 아끼는 언니인 줄 알았는데, 내 새언니의 약점이라도 쥐고 있나 봐요?” ...

브리트니는 아차 싶었다. 너무 짜증이 나서 그만 안 해도 될 말을 하고 말았다. ...

젠과 넬라, 그리고 월라스와 나단의 서늘한 시선이 브리트니에게 꽂혔다. 그들은 ‘어디 한번, 우리 아이리스에 대해 지껄여봐.’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

이 자리에서 리시에 대해 아무리 떠들어봐야 브리트니의 편을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

“아니, 그냥…… 농담한 거예요.” ...

“그렇군요. 별로 재미는 없네요.” ...

브리트니는 살면서 이렇게까지 모멸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

젠과 넬라는 다시 다정한 눈빛으로 돌아가, 리시와 결혼식에 입을 드레스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

‘내 자리여야만 했어!’ ...

젠에게 ‘새언니’라고 불리는 것도, 넬라에게 드레스에 대한 조언을 듣는 것도, 기사들이 경외하는 월라스와 나단에게 존중을 받는 것도. ...

전부 내 것이어야만 했다. ...

‘아이리스, 넌 또 내 걸 뺏었어! 넌 항상 그래!’ ...

브리트니는 분노 때문에 차오르는 눈물을 꿀꺽 삼키고, 음식이 반쯤 남은 자신의 접시를 노려봤다. ...

‘그래, 그 거지 같은 그린 백작 부인 자리는 네가 가져. 나는 황태후가 될 거니까.’ ...

가비자르 제국의 황태자인 이오벳은, 왜인지 아직까지 황태후를 두지 않았다. 좋은 가문의 황태후는, 앞으로 황제가 될 황태자에게 있어야만 하는 존재였다. ...

대부분의 황자들이 20살이 되기도 전에, 연을 맺을 가문을 선택하고 그 가문의 힘을 빌려 황태자 자리를 노린다. ...

이오벳은 그의 출중한 재능과 인덕만으로 지금껏 버텨왔으나, 요새는 꽤 위험해져서 황태후로 앉힐 가문의 여자를 물색하고 있었다. ...

브리트니가 알기로, 공작 가문이지만 외척 세력이 아주 크지는 않은 위틀로 공작가가 물망에 올라 있었다. ...

‘내가 황태후가 되기만 하면, 오늘 이 수모를 반드시 돌려주겠어. 제레시엔, 그리고 넬라니커스. 너희들에게도.’ ...

 

+++

아침 식사가 끝나갈 무렵, 케이가 식당에 왔다. ...

브리트니는 자세를 바로 하고 표정 관리를 했지만, 케이는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고 리시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

“리시.” ...

리시의 옆에 선 케이가 허리를 굽혀, 리시의 뺨에 가볍게 입 맞췄다. ...

그 모습에 브리트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

“식사 끝났어요?” ...

“이제 슬슬 끝나가는 참이에요. 당신은 아침 안 먹어요?” ...

“서류 처리하면서 샌드위치를 먹었어요. 다 먹고 나서 나랑 같이 좀 나가요.” ...

“저기요, 오빠. 여기 우리도 있거든?” ...

젠이 손을 흔들어, 케이의 시선을 끌었다. 그제야 젠을 돌아본 케이가 싱긋 웃었다. ...

“젠, 제널 백작 부인. 실례했어. 내 아내가 너무 빛나서 주위가 눈에 안 들어왔거든.” ...

“엑.” ...

넬라가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

젠과 월라스, 나단은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은 안색이었다. ...

그리고 브리트니는 눈앞에 보이는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

‘미친 거 아냐? 이게 정말 케이브란트 그린이라고?’ ...

저번에 공작가에 찾아와서 아이리스에게 청혼할 때도 이러긴 했지만, 그건 아이리스와 결혼하기 위해 꾸며낸 태도라고 생각했다. ...

분명 지금은 파티에서 봤을 때처럼 냉랭할 거라고, 후치스 자작과의 염문설에 휘말렸던 아이리스를 곱게 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

“저것 봐, 늘 저런다니까.” ...

젠이 지겹다는 듯 말했다. ...

‘늘 저러다니……. 정말 늘 아이리스에게 저렇게 행동한다고? 말도 안 돼.’ ...

심지어 케이는 리시의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브리트니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

‘아니, 차라리 눈에 안 띄는 게 낫겠어. 저건 내가 아는 그린 백작이 아니야.’ ...

라고 생각하는데, 리시가 브리트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

“케이. 내 언니예요. 브리트니.” ...

“아.” ...

리시가 일부러 소개했는데도, 케이는 딱 그 한마디만 했다. 눈인사도, 고개를 가볍게 까딱이는 인사도 없었다. ...

아주 잠깐 브리트니에게 머물렀던 시선이, 그 짧은 시간도 아깝다는 듯 다시 리시에게로 돌아갔다. ...

‘어쩜 저렇게 무례할 수가!’ ...

브리트니의 기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케이는 리시에게 말했다. ...

“리시, 얼른 식사 끝내요. 당신이랑 가고 싶은 곳이 있어.” ...

“어딘데요?” ...

“비밀.” ...

“음…… 그럼…….” ...

리시가 젠과 넬라 쪽을 돌아봤다. ...

넬라는 ‘저 역겨운 꼴은 보고 싶지도 않아.’라는 듯 다른 쪽을 응시하고 있었고, 젠은 얼른 가버리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

리시가 웃으며 일어났다. ...

“먼저 가볼게요.” ...

리시가 떠나자, 젠이 넬라에게 말했다. ...

“봐봐, 저런다니까?” ...

“그린 백작님이 저런 말도 할 줄 아는 분인 줄은 몰랐는데…… 끔찍하네요.” ...

“맞아요, 가끔 온몸에 소름이 돋아요. 대장은 업무를 보면서도 백작 부인께 달려가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들썩하신다니까요.” ...

나단이 거들었다. ...

브리트니는 불편한 기분으로 앉아 있었다. ...

그 자리에서 브리트니를 신경 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데, 말없이 나갈 수도 없어서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나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

울고 싶었다. ...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해? 아이리스, 대체 이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한 거야? 왜 다들 날 이런 식으로 대해?’ ...

저들이 차라리 리시에게 왜 그런 짓을 했냐며 쏘아붙이기라도 하면, 그런 일은 절대 없었다고 항변하며 리시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어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

하지만 그들은 브리트니에게 그 어떤 지적도 하지 않았다. ...

괴롭힘보다 무관심이 더 무섭다는 걸, 브리트니는 알고 있었다. ...

자신이 당해본 것은 처음이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좋을지는 알 수 없었다. ...

결국, 브리트니는 젠이 먼저 “그만 일어나죠.”라고 말한 후에야 지옥 같은 식당을 벗어날 수 있었다. ...

(36) 그대를 볼 때마다. ...

제이미가 본채 앞에 말을 준비해두었다. ...

윤기가 흐르는 흑마로, 케이의 유니콘인 화이트보다 체구가 컸다. ...

투레질하던 흑마는, 케이가 가까이 가자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

“타볼래요?” ...

케이가 리시를 돌아보며 말했다. ...

리시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

“괜찮아요.” ...

승마를 해본 적 없는 리시가 도전하기에, 흑마는 너무 크고 험상궂어 보였다. ...

케이가 짓궂게 물었다. ...

“무서워요?” ...

리시가 고집스럽게 대꾸했다. ...

“무서운 게 아니라, 나는 걷는 걸 좋아해요.” ...

“이 녀석은 유니콘에 비하면 온순해요.” ...

“내 손을 먹으려고 하는 윈디보다 온순하다면, 적어도 날 먹지는 않겠군요.” ...

“그래요. 아주 점잖은 녀석이죠.” ...

케이가 리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리시는 망설이다가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

“그거 알아요? 내가 손 내밀 때마다 당신이 자연스럽게 손을 주는 게 좋아요.” ...

케이의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묵묵히 서 있던 제이미가 흠흠, 헛기침하더니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

제이미는 월라스나 나단과 달리 토할 것 같다는 기분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자제력이 있었다. 하지만 탁탁탁, 신경질적인 발소리는, ‘적어도 제 앞에서는 적당히 좀 하시라고요, 대장!’이라고 주장하는 것만 같았다. ...

리시는 민망했지만, 제이미를 쫓아 보낸 장본인인 케이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

“이리 와요, 리시. 이 녀석의 눈을 좀 봐요.” ...

케이는 리시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지 않고, 그녀가 스스로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

리시는 크게 심호흡한 후, 흑마를 향해 다가갔다. ...

전쟁터를 누비는 검은 죽음처럼 크고 위협적인 생김새의 흑마는, 털만큼이나 새까만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커다란 눈동자는 무척이나 맑고 깊었다. ...

리시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흑마에게 내밀었다. 흑마가 리시의 손바닥에 자신의 볼을 가만히 가져다 댔다. ...

케이의 말대로 유니콘보다는 온순했다. ...

“이 아이의 이름은 블랙인가요?” ...

“오, 어떻게 알았어요?” ...

“뻔하잖아요. 당신 작명 센스.” ...

“나에 대해 뻔하다고 할 만큼 잘 알다니. 역시 그린 백작 부인은 경이로우십니다.” ...

케이가 배에 손을 대고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

호들갑스러운 칭찬에, 리시는 웃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

“좀 그런 편이죠.” ...

케이는 리시를 뒤로 조금 물러서게 했다. ...

흑마의 등에 손바닥을 대고, 그대로 바닥을 차서 몸을 띄워 흑마에 타는 그의 모습이 눈부셨다. ...

백마 탄 왕자라는 말이 있는데, 흑마 탄 백작도 썩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

케이가 리시를 향해 손을 뻗었다. ...

“이리 와요, 리시.” ...

“난 걸을게요.” ...

“그러지 말고. 내가 단단히 잡아줄 테니까. 응?” ...

어린아이를 어르는 듯한 그의 음성이 듣기 좋아서, 리시는 홀린 듯 그를 향해 걸어가 손을 뻗었다. ...

케이가 리시를 향해 허리를 굽혀, 리시가 뻗은 팔을 잡아당기는 것과 동시에, 다른 쪽 팔로 리시의 허리를 살짝 받쳐 올렸다. ...

“으악!” ...

몸이 허공에 붕 떠오르자, 리시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다음 순간, 리시는 케이의 앞에 앉아 있었다. ...

“봐요, 리시.” ...

케이가 손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

“높은 곳에서 보는 광경은 꽤 근사하죠?” ...

정말 그랬다. ...

불어오는 바람의 농도도, 들어오는 경치의 색조도, 아래에서 볼 때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엉덩이가 말 등에 붙어 있는데도,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

케이의 팔이 리시의 허리를 단단히 감았다. 다른 쪽 손으로 고삐를 잡은 케이가 속삭이듯 말했다. ...

“달릴게요.” ...

“아니, 잠깐……!” ...

블랙이 정원에 난 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달린다기보다는 조금 빠른 속도로 걷고 있을 뿐이었지만, 리시에게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

리시는 뭐든 잡고 싶어서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의 배를 감고 있는 그의 팔을 꽉 붙잡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눈을 감았기 때문일까? ...

다그닥다그닥- ...

말발굽 소리가 점점 빨라지고, 머리칼을 스치는 바람이 점점 세지는 것 같았다. ...

그래서 더 눈을 뜰 수 없었다. ...

“리시.” ...

케이가 어깨에 턱을 괴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

“리시, 긴장 풀어도 돼요.” ...

이 남자가 진심으로 하는 소리일까? 긴장을 푸는 순간, 저 멀리 날아갈 것만 같은데. ...

“내가 잘 잡고 있으니까.” ...

그제야 리시는 제 등에 느껴지는 그의 온기를 느꼈다. 리시는 그의 허벅지 사이에 꼭 끼운 듯 앉아서, 그에게 등을 딱 붙이고 있었다. ...

“눈 떠봐, 리시.” ...

그의 체온을 느낀 후에야 조금 긴장이 풀렸다. 리시는 살그머니 눈을 떴다. ...

“와아!” ...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정경에,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뱉어냈다. ...

언제 여기까지 온 걸까? ...

그들은 넓고 깨끗한 호수 주위를 달리고 있었다. 호수 둘레길에는 잔디가 깔려 있고, 그 너머에는 여러 종류의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맑은 물 위에 햇빛이 떨어져, 호수는 마치 금가루를 뿌린 것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

블랙이 조금씩 속도를 줄이더니,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완전히 멈췄다. ...

케이가 먼저 내려서, 리시가 내릴 수 있게 도와줬다. ...

“근사한 곳이네요. 여기를 보여주고 싶었던 거예요?” ...

“브리트니 양이 함께 있다고 하기에, 거기서 꺼내주고 싶기도 했고요. 내가 괜한 짓을 한 건가?” ...

“아니, 잘했어요.” ...

리시의 칭찬에, 케이가 고른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기분 좋아하는 그의 모습이, 주인의 칭찬을 받고 즐거워하는 강아지 같아서 귀여웠다. ...

어떻게 나보다 훨씬 큰 사람이 귀여워 보일 수 있을까? ...

게다가 상대는 그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인데. ...

리시는 저도 모르게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줄 생각이었는데, 어떻게 눈치챘는지, 그가 쓰다듬기 편하도록 고개를 숙였다. ...

리시는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살살 긁듯이 쓰다듬어주었다. ...

“당신이 이렇게 만져주는 게 좋아.” ...

“음, 나도.” ...

“그래?” ...

케이가 고개를 들더니 리시의 머리에 두 손을 올렸다. ...

케이의 손은 크고, 리시의 머리는 작아서 그의 손이 완전히 리시의 머리를 덮어버렸다. ...

그는 갈퀴처럼 손가락을 구부려, 리시의 머리를 마구 긁는 것처럼 쓰다듬었다. 연분홍빛을 띤 은발이, 그의 손가락에 걸려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

‘날 만지는 게 좋다는 게 아니라, 당신을 만지는 게 좋다는 거였는데.’ ...

하지만 리시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 끝이 두피를 자극하는 느낌이 좋았기 때문이다. ...

머리 전체를 쿡쿡 누르고 긁는 것이 이렇게 긴장 풀리고 나른해지는 일인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그저 노곤해질 뿐이었는데, 자극이 계속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

아주 작은 전기 자극이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 척추를 따라 흘렀다. 자극을 받는 건 머리인데, 이상하게도 꼬리뼈 부근이 간질거리고 오금이 저릿했다. ...

뭉근하게 번진 열기가 복부 부근에 모였다. 야릇한 기분에 감싸여 이대로 그의 가슴으로 허물어질 것만 같았다. ...

“케이.” ...

흘러나온 음성이 자신의 것 같지가 않았다. ...

“언제까지 할 거예요?” ...

“아. 그만하라는 말이 없어서.” ...

케이가 손을 떼어냈다. 리시의 머리칼은 완전히 헝클어져서 얼굴에도 몇 가닥이나 흘러내렸다. ...

머리칼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고개만 들어서 그를 쳐다봤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는 즐거워 보였다. ...

“그리해도 예쁘군요.” ...

“가리는 게 예쁘다고요?” ...

“왜 그걸 꼬아서 들으실까.” ...

케이가 두 손으로 리시의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

“가려도, 보여도 예쁜 얼굴이라는 거 알면서.” ...

그의 회청빛 눈동자에 리시의 얼굴이 비쳤다. ...

리시는 자신이 예쁜 얼굴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모두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

하지만 그 케이브란트 그린의 눈에도 자신이 예뻐 보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

리시가 아는 케이는 여자를 그야말로 돌처럼 보는 남자였다. ...

“내가 정말 예뻐 보여요?” ...

리시의 질문에 케이는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

“리시, 당신도 알잖아요. 당신이 얼마나 예쁜지.” ...

“물론 알아요. 하지만 당신은…… 여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잖아요.” ...

“오해할 만한 소리 하지 말아요, 리시. 난 여자를 좋아해요. 다만 이 눈에 차는 여자가 없었을 뿐이지.” ...

“나는 당신 눈에 차요?” ...

“넘쳐요.” ...

케이가 엄지로 리시의 귀밑머리부터 귓바퀴를 부드럽게 쓸었다. ...

“넘쳐요, 리시.” ...

여기서 만족해야 한다. 이보다 더 깊이 들어가면 헤어나올 수 없게 될지도, 이 삶의 목적이 방향을 틀지도 모른다. ...

하지만 리시는 알고 싶었다. ...

나를 향한 그의 마음의 색채가 나와 비슷한지. ...

내가 그에게 좀 더 확신을 가져도 괜찮을지. ...

그와 함께 살아갈 이번 삶을 좀 더 기대해도 되는지. ...

알고 싶었다. ...

“내가 당신 아내라서?” ...

“아니. 내 아내가 되기 전부터 예쁘다고는 생각했어.” ...

“그럼 지금은?” ...

“예전에 유진이랑 야만족 토벌을 나갔다가, 어느 협곡을 지나간 적이 있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어. 당신도 알겠지만, 유진은 어지간해서는 웃지 않는 녀석인데, 웃더군. 큰소리로.” ...

케이가 갑자기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리시는 어리둥절해졌다. ...

“물었지. 왜 그렇게 웃느냐고. 유진이 그러더군. 아름다운 걸 보면 웃음이 나올 때가 있지 않습니까, 라고.” ...

“…….”

“나를 봐, 리시.” ...

케이가 엄지와 검지로 리시의 턱을 잡아 올렸다. 그는 진중한 눈으로 리시를 응시하며 말했다. ...

“나는 당신을 볼 때마다 웃어.” ...

꽃이 피었다. ...

리시의 가슴 깊은 곳에, 처음으로 꽃이 피었다. ...

그 꽃은 아주 달콤하고 부드러운 연분홍 꽃잎을 가지고 있었다. ...

수줍게 고개를 들고 자랑스럽게 꽃잎을 펼친 그 꽃은,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 아니었다. 두근두근, 다정한 울림을 가진 그 꽃을, 리시는 그저 아이리스라고 부르기로 했다. ...

애정이 담긴 그의 눈동자 아래에서, 아이리스가 피어난 순간이었다. ...

+++

케이는 리시에게, ‘당신은 어때?’라고 묻지 않았다. ...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만으로도 그녀의 감정이 조금은 전해졌다. ...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게 이런 걸 말하는 건가?’ ...

그림자들이 들었다면 오만상을 찌푸릴 생각을 하며, 케이는 동그스름한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

리시가 놀란 토끼처럼 눈을 깜빡거렸다. ...

케이는 복부 아래에 뭉근한 열기가 번지는 걸 느꼈지만, 꾹 참았다. ...

“좀 걷죠, 리시. 당분간 여기에 오기 힘들 테니까.” ...

“왜요?” ...

“젠은 우리 결혼식을 이곳에서 할 거라고 하더군요. 내일부터 공사에 들어갈 거래요.” ...

“어머. 공사까지요? 그럼 돈이 많이 들 텐데.” ...

“돈 문제는 당신이 신경 쓸 거 없어요.” ...

“당신은 신경 쓸 거잖아요.” ...

“별로요. 교황청이 성유물의 수호자가 굶어 죽게 내버려두지는 않을걸요. 다만 당분간 당신에게 드레스나 구두, 장신구를 선물해주기는 힘들 수도 있겠네요.” ...

“그런 건 지금도 충분히 많아요. 그리고 걱정 마요. 교황청에 갈 것도 없이, 당신은 내가 먹여 살릴 테니까.” ...

리시의 당찬 포부에, 케이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요 작고 연약한 여인이 뭘 할 수 있다고. ...

“리시, 난 그렇게 능력 없는 남자 아니에요.” ...

“당신이 능력 없다는 게 아니에요. 당신보다 내가 좀 더 능력이 있을 뿐이지.” ...

“호오, 그래요?” ...

“그래요, 케이.” ...

리시가 케이의 팔뚝을 톡톡 두드렸다. ...

“조금만 기다려봐요. 내가 예쁜 정장에 구두, 그리고 장신구를 사줄 테니까.” ...

(37) 못 말리는 여자. ...

케이는 당차게 말하는 리시가 귀여워서 견딜 수 없었다. ...

어떻게 이렇게 귀여운 생물이 있을 수 있을까? ...

귓불부터 목덜미, 손가락과 발가락까지 잘근잘근 씹어주고 싶었다. ...

“왜 그렇게 웃어요?” ...

리시가 미간을 모으고 말했다. ...

케이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입가를 가렸다. ...

“내가 어떻게 웃는데?” ...

“내 말이 우습다는 것처럼.” ...

“우습지 않아요. 음…… 예전에 유진이…….” ...

“귀여운 걸 보면서 웃은 적이 있나 보죠?” ...

“오, 딱 맞췄어요. 귀여운 걸 보면 웃음이 나오죠.” ...

리시는 불만스럽다는 듯 입술을 내밀었지만, 그녀의 입가 역시 실룩거리고 있었다. ...

“당신도 내가 귀여워서 웃고 싶으면 그냥 웃어도 돼요.” ...

“웃고 싶은 기분이 아니거든요.” ...

“아닌데. 요 입가는 웃음이 터져 나오기 직전인데.” ...

케이가 검지로 리시의 입가를 쿡 눌렀다. ...

결국, 리시가 졌다. 그녀가 작은 웃음소리를 내며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

“맙소사. 그렇게까지 크게 웃다니. 당신 눈에 내가 그렇게나 귀여워 보일 줄은 몰랐어요, 리시.” ...

“당신은 청각에 문제가 있나 봐요. 나, 그렇게 크게 안 웃었는데.” ...

“알다시피, 늑대는 청각이 좋거든.” ...

리시가 까르르 웃었다. ...

그녀의 청량한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

케이는, 이 상황에서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호수에 풍덩 빠뜨리면,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

리시가 검지로 케이의 눈가를 두드렸다. ...

“못된 생각을 하는 눈빛이에요, 케이.” ...

“이런. 부인을 속일 수는 없군요. 다음부터 못된 생각을 할 땐 눈을 가리고 해야겠어요.” ...

“어떤 못된 생각을 했는데요?” ...

“당신을 저 호수에 풍덩 빠뜨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 ...

리시가 호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잠시 호수를 바라보던 리시가 구두를 벗고 드레스 자락을 잡아 올리더니, 호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

케이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리시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리시가 호수에 발을 담근 후에야 “리시!” 하고 외쳤다. ...

어느새 무릎까지 물에 담근 리시가 환하게 웃으며 케이를 돌아봤다. ...

“나도 궁금했어요, 케이. 내가 갑자기 호수에 첨벙, 들어가면 당신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들어와요, 케이. 무서워하지 말고.” ...

“당신은 정말 못 이기겠네요.” ...

케이도 신발을 벗고 호수로 들어갔다. ...

“날 이길 생각이었어요?” ...

“도전 정도는 해볼 수 있잖아요.” ...

“실패할 때마다 울지 말아요.” ...

“난 울보 아니에요, 리시.” ...

“젠의 얘기로는 울보였다던데.” ...

“하아, 제레시엔 그린…….” ...

리시가 키득거리며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

“조심해요, 리시. 갑자기 깊어지니까.” ...

케이는 황급히 리시를 따라갔다. ...

문득 자신이 평생 이렇게 리시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싫지 않은 예감이었다. ...

리시는 허리까지 오는 깊이에서 멈춰, 그 너머의 깊은 물을 응시했다. ...

“물이 정말 맑네요.” ...

“당신 눈동자처럼?” ...

“별소리를 다 해, 진짜. 아까 당신이 이런 식으로 말할 때,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알아요?” ...

“걔들 표정은 아무래도 좋아요, 리시. 당신 표정이 중요하지.” ...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데요?” ...

“좋아 죽겠다는 표정.” ...

리시가 키득거렸다. ...

“당신은 정말 내 표정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어요.” ...

“아닐걸요. 내가 정말 제멋대로 해석했다면, 다른 쪽으로 해석했겠지.” ...

“어떻게?” ...

“나랑 입 맞추고 싶어 하는 표정이라고.” ...

케이는 리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촉촉하게 부푼 그녀의 입술이, 아까부터 신경에 거슬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

갑작스러운 입맞춤에도, 그녀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벌어져 케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았다. ...

입술의 온도가 같아지고, 맞붙은 체온이 섞였다. 그녀의 허리를 꽉 안아 밀착시켰는데도 부족하게 느껴졌다. ...

좀 더 가까이, 좀 더 깊이. ...

키스하는데도 갈증이 생긴다. ...

리시와 입 맞추지 못했을 때는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

잠시 입술을 떼고 그녀와 이마를 맞댔다. ...

거칠어진 호흡이 얽혔다. ...

“리시, 당신 때문에 미치겠어.” ...

“미치면 안 돼, 케이. 광견병이라는 게 있는데…….” ...

“아하핫!” ...

생각지도 못한 대꾸에 케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

“나를 개 취급하다니. 이러기예요, 리시?” ...

케이가 리시에게서 조금 떨어져, 그녀에게 물을 끼얹었다. ...

맑은 물이 그녀의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

“어머나. 걱정해주는 아내에게 물을 끼얹다니. 이러면 못 써요, 케이.” ...

리시도 두 손 한가득 물을 퍼 올려 케이를 향해 끼얹었지만, 케이는 움직임이 빨랐다. ...

원하는 대로 물을 맞추지 못하자, 리시가 볼을 부풀리더니 다시 물을 퍼서 끼얹었다. ...

이번에도 케이는 요령 좋게 피하며, 한 손으로 물을 떠 올려 리시에게 던졌다. ...

촤악- ...

실수다. ...

이렇게 많이 끼얹으려는 게 아니었는데. ...

리시의 머리 꼭대기에 떨어진 물이 리시의 얼굴과 목덜미, 그리고 앞가슴 쪽을 전부 적셨다. ...

“미안해요, 리시. 이렇게까지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

케이가 사과하며 다가가는 순간, 리시가 갑작스럽게 공격했다. ...

물론 케이는 피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못 피한 척 그녀가 끼얹은 물을 맞아주었다. ...

공격에 성공한 리시가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

케이는 그런 리시가 말도 못 하게 귀여워서, 확 깨물어버리고 싶었다. ...

아니, 깨물어야겠다. ...

더는 못 참겠다. ...

어디를 깨물어야 잘 깨문 느낌이 날지 가늠하고 있을 때였다. ...

“한창 즐거운 물놀이 중에 죄송하지만.” ...

호숫가에서 제이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리시와 케이는 동시에 그쪽을 돌아봤다. ...

제이미가 말 위에 앉아, ...

‘저분들은 체통 머리 없이 뭘 하고 계신 걸까?’ ...

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

“누구지?” ...

케이가 리시의 손을 잡고 호수를 첨벙첨벙 벗어나며 물었다. ...

제이미는 케이가 자신에게도 물을 튈까 겁나는지, 말을 뒤로 물리며 말했다. ...

“대장 말고, 아이리스 님께요.” ...

 

+++

방에 들어가자 크리시나가 깜짝 놀라 다가왔다. ...

“어머나. 왜 이렇게 다 젖으셨어요? 감기 걸리시면 어쩌려고.” ...

에르웰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

“적의 습격입니까?” ...

“아니, 호수에서 조금…….” ...

“적이 조금 공격한 겁니까?” ...

“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서 수건이나 가져와.” ...

“쓸데없는 소리라니. 브리트니, 그 못된 녀…….” ...

  퍼억-! ...

이번에는 리시도 분명하게 목격했다. ...

크리시나의 팔꿈치가 에르웰의 날씬한 배를 사정없이 찍어 버리는걸. ...

리시는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는데, 정작 에르웰은 많이 아프지는 않은 것처럼 배를 문질렀다. ...

“나보다는 네가 더 조심해야 할 것 같은데……. 아이리스 님 놀라신 것 봐.” ...

에르웰이 투덜거리며 욕실로 향했다. ...

크리시나가 리시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

“아이리스 님 앞에서 죄송해요. 에르웰, 저 아이가 가끔 귀부인 앞에서 좋지 못한 언행을 할 때가 있어서요.” ...

“괜찮아요, 크리시나. 욕설 몇 번 정도로 놀랄 만큼 심장이 나쁘진 않아요.” ...

“물론 그러시겠죠. 하지만 욕설 몇 번 정도가…… 아, 아무튼 왜 이렇게 젖으신 거예요?” ...

“백작님이랑 같이 호수에서 좀 놀았거든요.” ...

“어머나. 사이도 좋으셔라. 그린 백작님은 무뚝뚝한 분이신 줄 알았는데, 아이리스 님과 함께 있는 때는 소년 같은 모습도 보이시나 봐요.” ...

소년 같은 모습. ...

듣고 보니, 호수에서의 케이는 정말 그랬다. 싱그럽게 웃던 그의 미소가 떠올라 가슴이 따뜻해졌다. ...

이윽고 에르웰이 수건을 가져왔다. 젖은 몸을 닦고, 새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중요한 손님이 찾아왔기에,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

머리가 아직 젖어 있어서 핀으로만 살짝 고정하고, 손님이 기다리는 응접실로 향했다. ...

케이가 응접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

“같이 들어가도 돼요, 리시?” ...

리시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좋아요.” ...

제이미가 응접실 문을 열었다. ...

소파에 앉아 있던 사내가 벌떡 일어났다. ...

라벤트의 금광 관리를 맡겨뒀던 가우저였다. ...

+++

인사를 나눈 후에도, 가우저는 곧장 본론을 꺼내지 않았다. ...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한참을 앉아 있었다. ...

리시는 그가 찾아온 이유를 알고 있기에, 묵묵히 그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쉰 끝에, 가우저가 입을 열었다. ...

“시간을 끌어서 죄송합니다, 아이리스 님. 아무래도 좋지 않은 소식이라서…….” ...

“괜찮으니 이야기해봐요.” ...

“금광이…… 막혔습니다.” ...

“금광이 막혔다.” ...

“죽은 금광입니다. 이쪽으로 가도, 저쪽으로 가도, 바위로 막혀서 더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

“그렇군요.” ...

지난 삶에서도 라벤트의 금광은 금방 막혔다. ...

리시를 팔아 라벤트 금광을 받은 글로번 위틀로는, 후치스가 자신을 속였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

글로번 위틀로가 후치스 자작 저택을 찾아왔을 때, 알포드는 일 때문에 집을 비운 상황이었다. ...

어쩌면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자리를 피했는지도 모른다. ...

알포드를 만날 수 없게 되자, 글로번은 모든 화살을 리시에게 돌렸다. ...

-네년이 되먹지 못한 탓이야! 그나마 우리 가문에 도움이라도 되라고 잘 키워줬더니, 그 빌어먹을 금광은 뭐 하나 꺼내기도 전에 끝이 났다고! ...

라벤트의 금광을 선택한 것도, 리시를 알포드에게 보낸 것도 전부 글로번의 결정이었는데, 어째서인지 리시의 탓이 되어버렸다. ...

한참 리시에게 욕설을 퍼붓던 글로번은 그대로 라벤트 금광을 찾아가, 금광 관리인과 광부들에게 채굴을 계속하라고 외쳐댔다. ...

그러다가는 모두 죽을지도 모른다고 항변해도 소용없었다. 광부들은 하늘처럼 높은 공작의 말을 듣는 수밖에 없었다. ...

그리고 기적이 벌어졌다. ...

위틀로 공작가에 벌어진 기적. ...

이번 삶에서 리시는 그것을 아이리스의 기적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

“가우저. 북쪽 벽을 봤나요?” ...

“네, 제가 직접 들어가서 확인했습니다. 단단하고 거대한 바위라서, 어떻게 할 수가 없더군요. 기술 좋은 광부들이 부수려고 해봤지만, 곡괭이가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

“폭탄은요?” ...

리시의 질문에 가우저가 숨을 멈췄다. 가우저는 자기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

“예?” ...

“폭탄이요. 사용해봤어요?” ...

“아이리스 님. 폭탄은…… 거기에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너무 깊은 곳이에요. 폭탄을 터뜨리려면 일정 거리 내에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거기서 폭탄을 터뜨리면 바위뿐만 아니라 광산 전체가 부서질 수도 있습니다.” ...

리시가 사정을 몰라서 그런다고 생각한 듯, 가우저가 설명했다. ...

“안 부서질 거예요.” ...

리시가 단호하게 말했다. ...

“누구도 죽지 않을 거고.” ...

“아니요, 아이리스 님. 아이리스 님도 거기에 들어가 보시면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실 겁니다.” ...

“이해해요. 하지만 부서지지 않아요. 북쪽을 막은 바위, 오른쪽 아래에 하나, 왼쪽 위에 하나. 폭탄을 설치하고 터뜨리세요. 바위는 부서질 거고, 다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

가우저가 말려달라는 듯 케이를 돌아봤다. ...

리시의 단호한 언사에 의아한 듯한 시선을 보내던 케이는, 가우저의 시선을 눈치채고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못 말려.’라는 행동이었다. ...

“아이리스 님, 희생자가 발생한 후에는 늦습니다.” ...

“희생자는 없어요. 하지만 생긴다면, 내가 책임질게요.” ...

“아니요, 책임지는 건 접니다. 제가 그곳 관리인이니까요. 다만…… 저는 아무리 평민이라도, 사람 생명은 금보다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

가우저의 올곧은 말에, 리시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

이래서 가우저가 좋았다. ...

“나도 마찬가지예요, 가우저. 내가 사람 생명을 귀히 여기지 않을 것 같나요?” ...

잠시 침묵이 흘렀다. ...

한동안 리시와 눈을 맞추던 가우저의 눈동자에 결의가 깃들었다. ...

“아이리스 님을 따르기로 했죠. 따르겠습니다.” ...

“그렇게 해요, 가우저.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 ...

(38) 하나가 되고 싶어. ...

리시의 태도 때문에 어젯밤부터 끙끙 앓는 시늉을 하던 데니스 위틀로 공작부인은,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점심시간에는 식당으로 향했다. ...

서채의 식당은 많은 손님이 왔을 때를 위해 넓은 공간에, 여러 개의 테이블이 띄엄띄엄 놓여 있었다. ...

오늘의 점심은 버섯 수프와 치즈를 올린 샐러드, 부드럽게 다진 고기를 넣어 만든 파이와 생선 살을 넣은 파스타, 후식은 우유 푸딩이었다. ...

공작 저택에 있을 때 먹는 것보다 종류가 많지는 않지만, 맛은 있었다. ...

“이 저택의 요리사는 솜씨가 좋은 것 같네요.” ...

데니스의 말에 브리트니가 인상을 찌푸렸다. ...

“요리사가 솜씨 좋은 게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아빠, 그때 말했던 황태자 건은 잘 진행되고 있는 거죠?” ...

“그래, 브리트니. 황실 측 사람이 말하기를, 황태자의 측근들이 우리 가문을 제일 마음에 들어 한다고 하더구나.” ...

“그거, 정말이에요?” ...

“그렇대도. 지금 2황자의 움직임 때문에 황태자 쪽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 서둘러 혼인을 하려고 할 거야. 안 그래도 결혼이 늦은 편이고, 황제 폐하께서도 채근한다고 하시니 곧 소식이 있을 거다.” ...

브리트니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

그 소식이 당장 들려오면 좋겠다. ...

황태자와 결혼을 하게 되면, 리시가 여는 결혼식보다 훨씬 호화로운 결혼식을 열어 리시를 초대할 것이다. ...

리시보다 멋진 드레스, 리시보다 높은 신분의 하객들. ...

모두의 축복을 받는 결혼식에서, 리시의 얼굴이 질투로 일그러지는 꼴을 보고 싶었다. ...

“황태자 전하께서 이 결혼식에 오실까요?” ...

“안 오시겠지. 공사가 다망한 분이시니. 황실 측에서는 3황자나 4황자를 보내지 않을까?” ...

“역시 그렇겠죠?” ...

하지만 내 결혼식은 달라. ...

이 대륙에서 제일 큰 가비아르 제국 황태자의 결혼식이니까, 누구도 초대를 거부하지 못할 거야. ...

브리트니가 황태자의 옆에 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을 때, 식당 문이 열리고 그린 노백작 부부가 들어왔다. 이곳에 그린 노백작 부부가 와 있는 줄 몰랐던 글로번과 데니스는 깜짝 놀라 두 사람을 돌아봤다. ...

위틀로 일가를 발견한 노백작 부부가 천천히 걸어오자, 글로번과 데니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의 신분이 더 높긴 하지만, 상대는 ‘그린 노백작’이었다. ...

“그린 노백작님. 노백작 부인.” ...

“위틀로 공작님.” ...

양가 부모는 가볍게 눈인사를 나눴다. ...

그린 노백작 내외는 위틀로 일가의 옆 테이블에 앉았다. ...

“와 계신 줄 몰랐습니다.” ...

“아들이 결혼한다는데 미리 와서 지켜봐야지요. 공작님의 방문을 알았다면 진즉에 가서 인사를 드렸을 텐데.” ...

“아, 아닙니다. 이렇게 뵀으면 됐지요.”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

이윽고 시종이 들어와 노백작의 식탁에도 식사를 차렸다. ...

“그나저나…… 부족한 우리 아이리스가 두 분 눈에는 차시는지…….” ...

데니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헤레이나가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

“부족하긴요. 우리 아들에게는 차고도 넘치는 며느리지요. 어찌나 사랑스럽고 영리한 아이인지. 딸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공작부인께서는 염려를 놓으셔도 됩니다.” ...

‘거짓말.’ ...

이라고, 브리트니는 생각했다. 리시가 노백작 부부의 마음에 들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

‘그냥 말만 저러는 거겠지. 우리 가족 앞이니까.’ ...

브리트니는 입술이 근질거렸다. ...

걔, 거짓말쟁이예요. 아주 못됐어요. 걔 옷차림은 보셨어요? 우리 앞에서 얼마나 건방지게 행동하는지를 보셨어야 했는데. 수많은 말들이 입안에 맴돌았다. ...

“아무래도 우리 딸이 집안에서 보호만 받으며 살다 보니,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아요. 어쩌면 노백작 부인 앞에서 예의 없이 행동할지도 모르는데, 너그러운 마음으로 많은 가르침을 주시면 좋겠어요.” ...

“부족한 점이 없다고 말씀드렸는데, 뭘 또 그리 부족한 점을 부각하려 하시는지……. 공작부인께서는 제가 아이리스의 행동 하나하나를 꼬투리 잡는 시어미가 되었으면 하시나 봅니다.” ...

헤레이나의 날카로운 지적에, 데니스는 말문이 막혔다. ...

데니스와 헤레이나는 비슷한 또래였지만, 알로르 왕국의 공주였던 헤레이나와 가비자르 제국 백작의 딸이었던 데니스 사이에는 접점이 거의 없었다. ...

데니스는 헤레이나의 성격을 잘 알지 못했다. ...

“그나저나 그 가르침이라는 것은, 매를 드는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공작부인?” ...

헤레이나가 덧붙인 질문에, 데니스는 입을 꾹 다물고 글로번을 돌아봤다. ...

“허, 허허허. 매라니요. 우리가 아이리스를 얼마나 곱게 키웠는데…… 손에 물 한 방울 못 묻히게 하고, 그저 오냐오냐하며 키웠지요. 위틀로 공작가의 꽃. 소문을 들으셨을 텐데요.” ...

글로번의 변명에도 헤레이나의 차가운 입매는 풀어지지 않았다. ...

“그 아이 손을 잡아봤는데,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손은 아니더군요. 오히려 매일 집안일을 하는 하녀들보다 거칠어서, 위틀로 공작가의 꽃은 사실 잡초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었던 참이었습니다.” ...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

데니스의 눈동자가 또르르 굴렀다. ...

“우리 아이리스가 그리 말하던가요?” ...

“아이리스는 그리 말하지 않았어요. 내가 미루어 짐작했을 뿐이지.” ...

“너무하시군요, 백작 부인. 우리 딸을 그리 평가하는 건, 우리 가문을 모욕하는 일이에요.” ...

“눈에 들어온 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사실이 아니라면 죄송하네요.” ...

헤레이나의 서늘한 눈동자에는 미안한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

글로번이 흠흠, 헛기침했다. ...

“백작 부인, 우리는 그저 아이리스가 그린 백작가의 명성에 누를 끼치는 일이 생길까 봐 걱정되는 것뿐입니다. 그린 가에 들어오자마자 안 좋은 소문에도 휘말렸고…….” ...

“소문일 뿐이었지요.” ...

“예, 물론 그렇지요. 우리 아이리스가 그런 짓을 하고 다닐 리는 없으니까요. 다만 걱정되는 점은…… 우리 아이리스의 단점을 말하는 것 같아서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좀 그렇지만…… 아이리스가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점을 잘 고쳐서 보냈어야 했는데…….” ...

“아이리스는 부모님과 언니에 대해 좋은 말만 했는데, 여러분은 아이리스를 험담하고 싶어 하는 것 같군요.” ...

“허, 험담이라니…… 우리는 그저 죄송스러워서…….” ...

“죄송할 것 없습니다. 이제 아이리스는 내 딸이나 마찬가지지요. 그 애가 사고를 쳐도, 거짓말을 해도, 이 어미가 책임질 일. 앞으로 누구든 그 애의 험담을 한다면, 이 그린 가문을 향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

위틀로 일가는 눈을 홉뜨고 헤레이나를 쳐다봤다. ...

다들 헤레이나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아들이 제멋대로 결혼해버린 상대를 고깝게 생각할 줄 알았는데, 지금 헤레이나의 태도는 마치 친딸을 감싸주는 것처럼 보였다. ...

하지만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아끼겠다는데, 그걸 지적할 수는 없었다. 친정 입장에서는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

“우, 우리 딸을 그리 아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

글로번의 말에 헤레이나가 미소 지었다. ...

이곳에 들어와서 처음 짓는 미소인데, 위틀로 일가는 그 미소가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상대를 베어 죽일 듯, 날카롭고 차가운 미소였기 때문이다. ...

“그런 표정들이 아니신데, 내 착각이겠지요. 특히 브리트니 양은 화가 치밀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군요. 여동생이 사랑받는 게 그리 싫은가요, 레이디 위틀로?” ...

브리트니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얼른 표정을 갈무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을 깜빡거렸다. ...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노백작 부인. 제가 아이리스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

“맞아요. 이 애는 아이리스가 저택을 떠난 후로, 매일 아이리스를 보고 싶다면서 운다고요.” ...

데니스가 거들었다. ...

헤레이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

“그렇군요. 내가 늙어서 눈이 안 좋아졌나 봅니다. 어서 식사들 하시지요.” ...

+++

늦은 밤 리시는 슬립으로 갈아입고, 창가에 서서 어두운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금광에서는 결혼식이 끝날 무렵에 소식이 들려오겠지.’ ...

금광에서 들려올 소식은 시작일 뿐이었다. ...

‘할 일이 많아. 내가 미래를 바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정보에 밝은 사람이 필요해. 그리고 탈레하 왕국 쪽과 교역도 터야 하고.’ ...

섬나라인 탈레하 왕국과 교역을 트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

‘내 계획에 동참해줄 사람이 있어야 해.’ ...

생각에 잠겨 있어서 케이가 들어오는 줄도 몰랐다. 그의 두꺼운 팔이 리시의 허리에 감긴 후에야 눈치챘다. ...

그의 입술이 리시의 귓바퀴와 목덜미에 한 번씩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주 짧은 접촉일 뿐인데도, 닿은 부위가 화끈거렸다. ...

“케이. 오늘은 일찍 왔네요.” ...

“일이 일찍 끝났거든요. 무슨 생각을 하느라 내가 들어오는 줄도 몰라요?” ...

“음. 내 남편에게 이것저것 사줄 생각?” ...

케이가 리시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 쿡쿡 웃었다. ...

그의 웃음소리는 듣기 좋지만, 목덜미에 그의 숨결이 스칠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어서 난처했다. ...

리시는 슬그머니 돌아서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침대로 향했다. ...

케이가 리시의 옆에 앉았다. ...

“리시, 오늘 일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

“하세요.” ...

“일단 당신이랑 호수에서 데이트한 건 무척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가죠. 그때는 도시락도 싸서.” ...

“좋아요.” ...

“그리고 윈디 말인데……” ...

“케이. 말 돌리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을 해요.” ...

“미래를 봐요?” ...

“음?” ...

“아까 금광 일 말이에요. 당신은 금광이 막혔다는 말을 듣고도 당황하지 않았고, 폭탄을 터뜨리라고 할 때는 확신에 차 있었어요. 금광 뒤에 뭔가 있을 거고, 그 과정에서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는 확신.” ...

케이가 이 부분을 의심할 줄 알았다. ...

“미래를 봐요? 그러니까…… 예언의 힘, 이런 게 있어요?” ...

“예언 같은 건 하지 못해요.” ...

앞으로 미래는 변할 것이다. 케이가 리시에게 예언의 힘이 있다고 믿고, 그녀에게 기대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

“그럼 어떻게 알았죠?” ...

“계산했어요.” ...

“계산…….” ...

“과거와 현재를 알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 있죠.” ...

“짐작 정도가 아니었는데.” ...

“짐작이에요. 다만 내가 날 믿기에 확신할 뿐이지.” ...

이런 변명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케이가 더 깊이 캐묻지 않으리라는 것 또한 알았다. ...

케이는 리시가 어떻게 그의 정체를 눈치챘는지에 대한 의문도 풀리지 않았지만, 그에 관해 캐묻지 않기로 했다. ...

“당신은 정말 신비로운 여자야, 리시.” ...

케이가 리시의 머리칼을 검지에 감아, 그 끝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

“내가 당신 변명을 믿지 않는다는 거 알지?” ...

“알아.” ...

“언젠가 진실을 얘기해줄 거야?” ...

이 질문에는 곧장 대답할 수 없었다. ...

내가 겪은 그 모든 일을 말할 날이 올까? ...

그 말을 한들, 이 남자가 믿어줄까? ...

“봐서.” ...

리시의 딱딱한 대답에, 케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

“아, 정말. 리시, 아이리스. 당신은 날 들었다 놨다 하는군.” ...

“그래서 싫어?” ...

“아니.” ...

케이가 리시의 등을 받쳐, 침대에 눕히고 그녀의 위에 올라왔다. ...

“너무 좋아.” ...

케이는 마치 커다란 강아지처럼 리시의 가슴 윗부분에 얼굴을 파묻었다. ...

그의 검은 머리칼이 리시의 턱을 간질였다. ...

리시는 미소지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나도 그래. 나도 당신의 이, 개 같은 점이 좋아.” ...

“개 같다니. 늑대와 개는 엄연히 달라, 리시.” ...

“하지만 지금 당신은 꼬리를 흔드는 개 같은걸.” ...

“적어도 강아지라고 해줘, 리시.” ...

가슴 윗부분에서 시작된 그의 숨결이, 얇은 슬립을 타고 내려왔다. ...

보이지 않는 숨결이 마치 쓰다듬듯이 리시의 가슴을 쓸어내려, 그의 입술이 닿았을 때처럼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

그가 말을 할 때마다, 숨을 내쉴 때마다, 뭉근한 열기가 퍼져나갔다. 그는 그저 강아지처럼 굴면서 즐거워할 뿐인데, 나는 왜 이렇게나 야릇한 감각에 휩싸이는 걸까? ...

리시는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

지난 삶에서 사내와의 접촉은, 리시에게 그저 끔찍한 경험일 뿐이었다. ...

케이와 부부가 되었으니 그런 짓을 해도 받아들일 각오는 되어 있었지만, 자신이 먼저 그를 원하게 될 줄은 몰랐다. ...

‘그래, 나는 이 남자를 원하는 거야.’ ...

화살처럼, 깨달음이 리시의 머리에 꽂혔다. ...

‘나는 케이랑…….’ ...

하나가 되고 싶다. ...

연결되고 싶다. ...

그 어느 부분 하나 빼놓지 않고, 그에게 스며들고 싶다. ...

(39) 여자의 마음을 얻는 방법 (1) ...

  깨달음을 얻는 것과 동시에 밀려드는 욕망이, 리시는 당혹스러웠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기에, 리시는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

저도 모르게 케이의 머리를 두 손으로 쭉 밀어냈다. 케이의 머리가 뒤로 완전히 젖혀질 만큼. ...

아차, 싶었다. ...

이렇게 거부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

다행히 케이는 기분 나쁜 기색 없이, 몸을 빙글 돌려 리시에게서 내려가 옆에 누웠다. 한쪽 팔을 리시 쪽으로 쭉 뻗은 케이가, 뭐 하냐는 듯 눈동자로 자신의 팔에 흘끗 시선을 줬다가 리시와 눈을 맞췄다. ...

케이가 뭘 하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멀뚱멀뚱 쳐다보는데, 케이가 자신의 팔을 툭툭 치며 말했다. ...

“뭐해요, 눕지 않고.” ...

하지만 케이의 팔이 리시의 자리를 넘어와서, 리시가 누울 만한 공간이 없었다. ...

리시는 어디에 누워야 할지 가늠해보다가, 그의 팔이 닿지 않은 구석으로 가서 누웠다. ...

리시를 지켜보던 케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

“리시, 당신은 가끔 되게 엉뚱한 거 알아요?” ...

리시는 그가 왜 웃는지도 알 수 없어서,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

케이는 리시에게 바짝 다가오더니, 리시의 머리 아래에 팔을 넣고는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

“이렇게 누우라는 뜻이었어요, 리시. 팔베개 몰라요, 팔베개?” ...

물론 안다. ...

하지만 그런 달콤한 것을, 멀쩡한 정신으로 해본 기억은 없었다. ...

그의 가슴에 얼굴이 눌려, 그의 체취가 강하게 후각을 자극했다. ...

숲과 풀과 흙냄새. ...

맑은 호수가 떠오르는 상쾌한 향기. ...

“당신한테서 흙냄새가 나요, 케이.” ...

“몰랐어요? 나, 자기 전에 늑대로 돌아가서 흙바닥에 뒹굴다가 오는데.” ...

“정말요? 그렇다면 한번 보고 싶네요.” ...

“농담이에요, 리시.” ...

그가 리시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

리시를 보듬어 안은 그의 팔은 충분히 단단했지만, 리시는 좀 더 그에게 꽉 끌어안기고 싶었다. 이보다 더 세게 안기면 숨이 막힐지도 모르는데, 뭔가 부족한 기분이 들었다. ...

“어서 자요, 리시.” ...

“잠이 안 와요.” ...

“그렇다면…….” ...

그가 주머니에서 슬리브 스톤을 꺼냈다. ...

리시는 아직 잠들고 싶지 않았다. 조금 더 그의 품에 안긴, 이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

하지만 리시가 그리 말하기 전, 슬리브 스톤이 리시의 관자놀이를 스쳤다. 순식간에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

케이는 슬리브 스톤을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은 후, 자신의 품에서 무방비하게 잠든 리시를 가만히 응시했다. ...

그녀를 안고 있는데도 자꾸만 부족한 기분이 들었다. ...

원하는 만큼 세게 끌어안으면 이 갈증이 해소될까? ...

‘아니, 리시가 부서지겠지.’ ...

그녀의 살은 부드럽고 연해서, 조금만 세게 안아도 푸딩처럼 몽글몽글 부서질 것 같았다. 이렇게 여린 존재를 품에 안는 건 처음이라서, 어느 정도까지 해도 가능한지 알 수 없었다. ...

마음 같아서는 이보다 더 세게 끌어안고 싶은데, 그러다가 부서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

리시는 좋은 꿈을 꾸는지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

그저 자는 모습을 지켜볼 뿐인데 즐거워서, 케이는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그녀를 내려다봤다. ...

그림자들이 케이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침대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

“대장은 왜 안 오시지?” ...

“형수님이랑 같이 잠드신 거 아냐?” ...

“에이, 설마. 대장이 우리한테는 자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으면서, 자기 혼자 늘어지게 자는 무뢰한일 리가 없잖아.” ...

케이의 밝은 귀에, 그림자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

‘진짜로 일어나야겠군.’ ...

케이는 리시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팔을 빼내고 침대에서 벗어났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침대 옆에 서서 잠시 리시를 내려다보다가 돌아서는데. ...

“아힝…….” ...

애교스러운 콧소리가 케이의 발목을 잡았다. ...

‘아힝?’ ...

케이는 고개를 휙 돌렸다. ...

리시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는데, 아까보다 깊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아잉, 이러지 마아.” ...

리시의 붉고 도톰한 입술이 옹알옹알 움직였다. ...

케이에게는 한 번도 들려주지 않은, 애교 넘치는 목소리. ...

“이러면 안 돼애, 흐응.” ...

  꿀꺽- ...

케이는 침을 삼켰다. ...

대체 무슨 꿈을 꾸기에 내 아내가 저토록 애교 넘치는 소리를 내는 걸까? ...

‘당연히 내 꿈이겠지.’ ...

케이는 자신 있었다. ...

꿈은 무의식의 산물. ...

리시가 꽁꽁 감춰둔 애교를, 마음껏 드러내 보일 상대는 케이브란트 그린, 자신뿐이라고 믿었다. ...

언젠가 리시는 현실에서도 케이에게 저토록 달콤해지리라. ...

‘머지않아 그리되도록 해주겠어.’ ...

케이가 결심하며 돌아설 때였다. ...

“으응, 너무 귀여워, 윈디.” ...

 

+++

성유물의 수호자인 케이에게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

전대 수호자였던 와이번 그린 노백작은, 성유물을 찾아내서 수거하는 일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

-이런 위험한 물건을 한군데 모아두면, 반드시 사달이 생기지. ...

성유물의 위치를 알게 되어도, 그게 크게 위험하지 않은 이상은 내버려뒀다. ...

케이 역시 비슷한 방침이었지만, 성유물의 위치를 찾아내는 데는 적극적이었다. ...

수인의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할 때, 성유물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성유물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을 찾지는 못했지만, 전 대륙을 오가다 보면 한 명쯤, 아주 조금이라도 성유물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

그렇게만 된다면, 마법사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이때, 케이에게 큰 힘이 되어줄 터였다. ...

대륙에서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는 곳을 찾아내고, 성유물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밤늦도록 회의를 하는 게, 케이의 그림자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

오늘 밤, 회의가 열리는 회의실에서 당연하지 않은 게 하나 있었다. ...

울적한 표정의 케이였다. ...

그림자들을 한껏 기다리게 만들고 늦게야 회의실에 들어온 케이는, 들어오는 순간부터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왜 저러셔?’ ...

나단이 제이미에게 눈빛으로 물었다. ...

‘네가 모르는 걸, 내가 알겠어요?’ ...

제이미도 눈빛으로 대답했다. ...

유진은 언제나처럼 묵묵히 앉아, 케이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그리고 월라스는. ...

“대장. 형수님한테 까였어요?” ...

언제나처럼 눈치가 없었다. ...

케이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

나단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월라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월라스는 그걸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

“뭔데 그래요? 우리한테 말해보세요. 형수님이 대장 별로래요? 아니면 억지로 형수님한테 뭐라도 하다가…….” ...

“월라스. 넌 그 입 좀 닥쳐야겠어요.” ...

케이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자, 제이미가 월라스의 말을 끊었다. ...

월라스가 ‘왜? 뭐? 내가 뭐 잘못했어?’라는 눈으로 모두를 돌아봤다. ...

“대장. 대체 무슨 일이시죠?” ...

제이미가 케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

어두운 눈으로 탁자를 노려보던 케이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

“윈디에게 졌다.” ...

“예?” ...

“리시에게 슬리브 스톤을 사용했는데, 윈디 꿈을 꾸더군.” ...

“……예에?” ...

“아주 즐거워 보였어. 나에게는 들려주지도 않는 목소리를 내던데…….” ...

케이는 테이블을 노려보느라, 그림자들의 표정이 험악해지는 걸 깨닫지 못했다. ...

“내 아내가 나보다 유니콘 따위를 더 좋아하는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

“한 대 후려치고 싶다고 생각해요, 대장.” ...

제이미의 말에, 케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

“제이미, 아무리 그래도 리시를 후려치고 싶다는 말은……!” ...

“아이리스 님 말고요, 대장. 대장, 널 말하는 거예요. 네놈의 뒤통수!” ...

제이미의 푸른 눈동자가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제야 케이는 다른 그림자들의 눈빛도 제이미와 다를 게 없다는 걸 눈치챘다. ...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당장 무기를 꺼내 케이를 후려치고 싶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

“이 늦은 시간까지 기다리게 하더니…… 뭐요? 아이리스 님이 윈디 꿈을 꿔서 토라지셨어요? 어이구, 그러셨어요? 아내가 유니콘 꿈을 꾸면서 즐거워하는 게 그렇게나 서운하셨어요? 응?” ...

“아니, 그게…… 정말 나한테는 한 번도 들려주지 않은 목소리라서…….” ...

“어휴, 그러셨구나. 우리 대장이 빌어 처먹게 매력이 없어서 아내 꿈에 나타나지도 못하는 게 그렇게나 서운하셨구나아.” ...

“제이미. 말이 좀 심해.” ...

“내 말이 심해요?” ...

제이미가 그림자들을 돌아봤다. ...

그림자들이 고개를 저었다. ...

“안 심하다고 하네요, 대장.” ...

다른 그림자들이야 그럴 수 있다 쳐도, 평소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유진마저 케이를 향해 ‘저런 한심한 작자.’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

케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미안.” ...

제이미가 품에서 반쯤 꺼냈던 단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

“제이미, 정말로 날 벨 생각이었나?” ...

“왜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

“……그래. 미안. 이번 건 내가 잘못했다.” ...

“알면 됐어요.” ...

“푸하하하하하하!” ...

갑자기 월라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

“넌 또 왜 웃어요?” ...

“크하하하하. 대장이…… 대장이, 유니콘을 질투하잖아. 대장이…… 하하하하하. 진짜…… 하하하하. 진짜 멍청해 보인다, 우리 대장. 하하하하하. 아, 웃겨 죽겠네.” ...

나단과 유진의 입술도 실룩거렸다. ...

졸지에 웃음거리가 된 케이는, 얼른 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대륙 전도를 펼쳤다. ...

“이번에 들어온 정보로는…….” ...

“풉…… 크크크큭. 형수님이 유니콘 꿈을 꿨대…… 큭……. 아, 웃겨……” ...

“월라스, 그만 좀 웃지?” ...

“푸하하하하. 위엄 있는 척해도 소용없어요, 대장. 유니콘…… 푸하하하. 그 어린 윈디를 질투하다니…… 하하하하. 내일 젠한테 말해줘야지.” ...

“월라스! 회의실에서 벌어진 일에 관해 밖에서 떠드는 건 안 된다 했을 텐데.” ...

케이가 위엄 있게 꾸짖었다. ...

“대장, 인제 와서 뭔 위엄 있는 척이에요? 어린 유니콘 질투하는 거, 다 들통났는데.” ...

나단이 월라스의 편을 들어줬다. ...

묵묵히 앉아서 웃음을 참던 유진이 입을 열었다. ...

“저는 내일 노백작님 내외를 만나 뵐 생각입니다.” ...

“넌 또 왜……?” ...

“두 분의 아드님께서 어떻게 성장하셨는지를 알아야 하니까요.” ...

“하아.” ...

케이는 두 손으로 머리를 거머쥐었다. ...

“너희들, 날 놀릴 거리 하나 잡으면, 그걸로 평생 놀릴 계획만 하고 살지?” ...

“에이, 대장. 평생이라니, 아니에요. 이번 건…… 음. 나단, 이번 건 얼마나 갈까?” ...

월라스가 케이를 달래듯 말하며 나단을 돌아봤다. ...

“이런 건 5년 정도? 하지만 젠이라면 10년은 놀리겠지.” ...

“10년까지는 가지 않을 거예요.” ...

제이미가 단호하게 말했다. ...

“대장은 앞으로 이보다 멍청한 짓을 더 많이 할 것 같으니.” ...

제이미의 말대로였다. 케이는 놀림을 받는 이 와중에도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어떻게 해야 리시가 내 꿈을 꿔줄까?’ ...

케이는 자신을 놀리느라 여념 없는 그림자들을 돌아봤다. ...

케이의 그림자들은 앞으로의 계획 때문에 가정을 꾸리지 않았지만,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

그래, 어차피 오늘 회의는 글렀다. ...

지금 당장 중요한 일은 성유물의 위치를 찾는 게 아니다. ...

케이는 두 손으로 테이블을 쾅, 내려쳤다. ...

“다들 그만!” ...

키득거리던 그림자들이 웃음을 멈추고 케이를 돌아봤다. ...

케이는 자신의 소중하고 믿음직스러운 부하들을 쭉 둘러본 후, 입을 열었다. ...

“여자는 뭘 해줘야 좋아하지?” ...

(40) 여자의 마음을 얻는 방법 (2) ...

‘여자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논의는, 새벽빛이 밝아올 때쯤에야 끝났다. ...

부하들의 조언을 머리에 담고, 케이는 방으로 돌아왔다. ...

리시는 여전히 푹 잠들어 있었다. ...

케이는 그녀의 옆에 앉아, 리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형수님이 윈디의 꿈을 꿨다면, 아무래도 동물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좋아하는 걸 선물로 주는 게 확실하죠. 요새 예쁜 강아지들 많던데, 작고 귀여운 녀석으로 한 마리 선물하시는 게 어때요? ...

그렇게 말한 건 나단이었다. ...

작고 귀여운 강아지라니. ...

리시에게 귀여운 동물은 나 하나면 충분하다. ...

케이는 늑대의 모습으로 변한 후, 그녀의 머리맡에 감싸듯 몸을 둥글게 말고 눈을 감았다. ...

+++

굉장히 좋은 꿈을 꿨다. ...

윈디가 리시의 손 대신, 리시가 주는 사과를 받아먹고 나서 안겨 오는 꿈이었다. ...

기분 좋게 잠에서 깨어났는데, 볼 근처가 간질거렸다. 무심코 손을 올렸는데 북슬북슬한 것이 만져졌다. ...

‘뭐지?’ ...

고개를 돌리자, 두툼한 꼬리가 눈에 들어왔다. ...

새까맣고 털결이 좋은 두툼한 꼬리. ...

‘케이?’ ...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니, 검은 늑대의 커다란 얼굴이 보였다. ...

늑대는 세상모르고 자는 중이었다. ...

입술 사이로 살짝 나온 송곳니와 으르르, 으르르 작은 울림을 가진 숨소리. ...

리시는 다시 꼬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북슬북슬한 꼬리에 얼굴을 파묻으면 기분 좋을 것 같았다. 꼬리를 살며시 잡고 얼굴을 비볐더니, 늑대가 “크르…….”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꿈틀거렸다. ...

깨라고 한 건 아닌데. ...

리시는 얼른 꼬리를 잡고 있던 손을 떼었다. 꼬리 쪽에 있는 뒷다리가 바둥거리는가 싶더니, 늑대가 빙글 몸을 뒤집었다. ...

리시는 상체를 일으켜 늑대를 내려다봤다. ...

깨어 있을 때는 위협적으로만 보이는 검은 늑대가 네 다리를 위로 올린 자세로 배를 드러내고 자는 모습은, 웃음이 나올 만큼 귀여웠다. ...

‘잘도 자네.’ ...

커다란 앞발 두 개가 꼬물꼬물 움직였다. ...

평원을 달리는 꿈이라도 꾸는 걸까? ...

평소에는 위협적으로 보일 게 분명한 커다란 앞발이, 일정한 리듬에 맞춰 까딱까딱 움직이는 게 말도 못 하게 귀여웠다. ...

리시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꿈꾸는 늑대를 지켜봤다. ...

이번에는 공격이라도 당했는지 끄응끄응, 하던 늑대가 “컹!” 하고 짖으며 눈을 떴다. ...

검고 깊은 눈동자가 허공을 헤매다가 리시에게서 멈췄다. ...

“리시.” ...

늑대일 때의 케이의 음성은 인간일 때보다 엄숙했다. ...

하지만 인제 와서 엄숙하면 뭐해? ...

지금껏 꿈꾸느라 발라당 뒤집혀서 앞발을 까딱까딱하고, 끙끙거리는 걸 다 봤는데. ...

“왜 내 아내가 아침부터 조롱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는 거죠?” ...

“조롱이라니요, 케이. 이건 그냥…… 음, 미소예요.” ...

“아닌 것 같은데.” ...

  할짝- ...

늑대가 리시의 입가를 핥았다. ...

“내가 잠꼬대라도 했어요, 리시?” ...

“아니요. 조용히 잘 자던데요.” ...

끙끙거리고 까딱까딱했다고 말하면, 다시는 늑대의 모습으로 옆에서 잠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

“흐응…….” ...

케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리시를 응시하다가 침대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

눈앞에 어떤 광경이 펼쳐질지 짐작한 리시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

이윽고 인간 케이의 음성이, 리시의 귀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

“리시, 왜 고개 돌리고 있어요?” ...

“얼른 옷이나 입어요.” ...

“이미 봤으면서 새삼스럽게.” ...

“본 적 없어요. 놀라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거든.” ...

“거짓말. 깜짝 놀라는 눈빛, 내가 다 봤는데?” ...

“얼른 옷이나 입으라니까, 케이.” ...

리시가 꾸짖듯 말하자 케이가 키득거렸다. ...

사락, 사락, 옷 입는 소리가 들려왔다. ...

“리시, 오늘 나랑 어디 좀 가요.” ...

“어디?” ...

“가보면 알아요.” ...

어젯밤 케이가 부하들과 날이 샐 때까지 ‘여자가 좋아하는 것’에 관해 논의했다는 걸 모르는 리시는, 공사다망한 케이가 어딜 그렇게 쏘다니려고 하는 건지 의아했다. ...

옷을 다 입었는지 사락거리는 소리가 사라졌지만, 리시는 그대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

케이가 침대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그의 손가락이 리시의 등에 닿았다. ...

그의 손가락이 척추를 따라 내려가는 게, 얇은 슬립 한 장 너머로 분명하게 느껴졌다. ...

“옷은 이렇게 야한 거 말고.” ...

그의 검지가 꼬리뼈 부근에 멈췄다가 떨어졌다. ...

“평민 복장을 해요. 편하게 다니고 싶으니까.” ...

 

+++

“평민 복장이요?” ...

응접실에 있던 시녀들에게 오늘의 옷차림을 알리자, 크리시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

“어머나. 데이트를 나가시려나 봐요.” ...

“데이트요? 그럴 리가요.” ...

“왜 그럴 리예요?” ...

“우리는 이미 결혼한걸요.” ...

“그게 무슨 상관이래요. 하고 싶으면 하는 게 데이트지.” ...

데이트. ...

서로 호감이 있는 남녀가 만나 좋은 시간을 보내는 일. ...

지난 삶, 리시는 데이트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다. ...

물론 들어본 적은 많다. 브리트니가 항상 자랑하듯 떠들어댔으니까. 어느 잘생긴 기사의 청으로 연극을 봤고, 어느 잘생긴 자작의 청으로 전시회를 다녀왔고……. 브리트니에게는 항상 ‘잘생긴’ 남자가 있었다. ...

호감이 있는 사내와 데이트를 하는 건, 리시에게 먼 세상의 일이었다. ...

결혼 전에는 위틀로 가에서, 결혼 후에는 후치스 가에서. ...

리시는 그저 살아남는 데만도 벅찼다. ...

크리시나는 신이 나서 옷장을 열고 어떤 옷으로 할지 고르는데, 에르웰은 할 말이 있는 듯 자꾸 리시를 쳐다봤다. ...

“에르웰, 뭐 할 말 있어요?” ...

“아이리스 님. 저도 동행할게요.” ...

“예?” ...

“백작님이 어디를 가실지 모르겠지만, 저택 밖은 위험해요. 제가 동행해야 할 것 같아요.” ...

저택 밖이 위험한데, 왜 에르웰이 동행하려는 걸까? ...

연약한 여인이기는 에르웰도 마찬가지인데. ...

“어머, 엘. 무슨 그런 미친 소리를…….” ...

옷을 한 아름 들고 온 크리시나가 엉덩이로 에르웰을 툭 밀어냈다. 그리 세게 친 것도 아닌데, 에르웰은 휘청거리며 옆으로 밀려났다. ...

‘저리 연약하면서…….’ ...

“아이리스 님은 백작님께서 자알 지키실 테니, 눈치 없이 데이트에 끼어들 생각은 하지도 마.” ...

“하지만 시니. 아이리스 님은…… 아이리스 님은 너무 예쁘잖아! 누가 홀딱 집어가면 어쩌려고?” ...

“어머나.” ...

에르웰의 외침에 리시는 얼굴을 붉혔다. ...

예쁘다는 칭찬은 많이 들어왔지만, 이렇게 직선적이고 꾸밈없는 칭찬을 들으면 몸 둘 바를 모르게 된다. ...

“그건 백작님이 알아서 하실 문제야, 엘. 남의 데이트에 따라가려는 멍청이가 어디 있나 했는데, 여기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

크리시나가 리시의 앞에 옷을 한 벌씩 대보면서 중얼거렸다. 함께 지낸 시간이 길어지면서 크리시나도 리시가 편해진 모양인지, 평소보다 과격한 언사였다. ...

리시는 그 점이 싫지 않았다. 이 두 사람과는 편하게 지내고 싶었다. ...

크리시나는 리시의 미소를 오해한 듯 얼른 말투를 바꿨다. ...

“죄송해요, 아이리스 님. 에르웰이 너무 바보 같은 소리를 해서 저도 모르게 그만. 호호호.” ...

“아니에요. 그냥 편하게 해도 돼요.” ...

“크리시나가 편하게 하면 아이리스 님은 숨넘어가실걸요.” ...

에르웰이 툴툴거렸다. ...

여차여차 옷을 갈아입고 나갔더니, 케이가 복도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

“이런. 평민 복장을 하라고 했더니, 너무 눈부시게 하고 나왔는데. 누가 당신을 평민으로 보겠어요?” ...

“하지만 이게 내가 가진 옷 중에 가장 평범한 옷인걸.” ...

“흠. 후드 없어요?” ...

케이의 말에, 크리시나가 얼른 들어와서 긴 후드 망토를 한 벌 챙겨 나왔다. ...

케이는 직접 망토를 리시에게 둘러주고, 모자를 깊이 씌워줬다. ...

그러고 나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팔짱을 끼고 리시의 모습을 살펴본 후 말했다. ...

“음. 그렇게 해도 아름다운데.” ...

리시는 어젯밤 케이의 부하들이 ‘여자는 칭찬에 약하다.’라는 조언을 해줬다는 걸 몰랐기에, 이 남자가 오늘따라 왜 이러나 싶었다. ...

리시의 뒤에 서 있던 에르웰이 팔뚝에 소름이 돋는지 팔을 쓰다듬었다. ...

“어쩔 수 없어요. 진흙을 발라도 아름다울 테니까.” ...

리시의 말에 케이가 웃었다. ...

“정답이에요. 어쩔 수 없겠군요. 이대로 나가는 수밖에.” ...

저택 앞에서 마차를 타고 길을 따라 내려간 후, 번화가에 들어가기 전에 마차에서 내렸다. ...

케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며, 리시는 열심히 도시의 정경을 눈에 담았다. ...

리시는 이렇게 나와서 도시를 걸어보는 게 처음이었다. ...

지난 삶, 위틀로 공작가에 갇혀 있다가 후치스 자작가로 옮긴 후로도, 이렇게 바깥을 구경할 기회가 없었다. ...

저택을 벗어나는 건, 파티에 참석할 때뿐. 항상 마차로 이동했기에, 이렇게 생생한 현장에 발을 디뎌보지 못했다. 지난번에 알포드 사건으로 토니의 동굴에 향할 때 역시 마차를 타고 이동했었다. ...

수많은 사람이 바삐 오가며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

어깨에 짐을 짊어지고 다니며 “굴뚝 청소합니다, 굴뚝!” 하고 외치는 청년, 나란히 줄지어 앉아 구두를 닦는 구두닦이들, 바구니를 갖고 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 ...

다양한 사람들을 정신없이 구경하면서 지나가다 보니, 어느새 깨끗하고 넓은 거리에 접어들었다. ...

“여기는 조용하네요.” ...

상점은 많아도 호객꾼이나 행상인, 가판대에서 물건을 파는 이가 없었다. ...

“여긴 잡상인 금지 구역이거든요. 상점을 가져야만 물건을 팔 수 있죠. 귀족이나 돈 많은 평민이 자주 찾는 곳이에요.” ...

케이의 설명을 들으며 상점가를 쭉 걸어갔다. ...

케이가 멈춘 곳은, 연분홍색과 하늘색으로 꾸민, 눈에 띄는 건물이었다. [아르헨의 찻집]이라는 간판이 입구 위에 붙어 있었다. ...

“여기에 갈 거예요, 리시.” ...

케이가 손바닥을 위쪽으로 하고 입구 쪽을 가리켰다. 케이는 ‘이것 봐. 감동했지? 놀랐지?’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리시는 입구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

“나는 이런 곳보다는 아까 여기로 오던 거리를 더 구경하고 싶은데.” ...

리시의 중얼거림에 케이는 무릎이 꺾이는 기분이었다. ...

-아르헨의 찻집이라고 있는데요. 요새 거기가 유행인가 봐요. 가격은 엄청 비싼데, 여자들이 딱 좋아할 분위기래요. ...

-아, 나도 거기 들어봤어. 하녀들이 누가 자기 좀 데리고 거기에 가줬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사랑에 빠질 거라고 하더라고. ...

어제 부하들의 조언에 따르면, ‘아르헨의 찻집’은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대단한 곳이었다. ...

방문객에게는 아르헨의 찻집에서만 볼 수 있는 작은 티스푼을 선물로 주는데, 이 티스푼을 가진 여자들은 모두의 부러움을 산다고 했다. ...

“여기에 가면 티스푼을 선물로 준대요.” ...

리시가 모르나 싶어서 말해줬더니, 리시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

“티스푼은 이미 많잖아요.” ...

“아니, 그게 아니라…… 여기서 주는 티스푼이 아주 특별한 건데…….” ...

“알아요. 하지만 나는 아까 그 거리에서 팔던 빗을 더 갖고 싶어요.” ...

“빗?” ...

“응, 윈디의 털을 빗겨주고 싶어서요.” ...

또 윈디다. ...

그놈의 윈디! ...

하지만 리시에게 윈디를 질투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

-대장, 데이트에서 제일 중요한 건, 아이리스 님이 즐거워야 하는 거예요. ...

제이미의 조언이 떠올랐다. ...

그래, 윈디의 빗을 사는 게 리시가 즐거워할 일이라면 따르는 수밖에. ...

“알겠어요, 그럼. 거기로 가죠.” ...

케이가 몸을 휙 돌려 걷기 시작했다. 리시가 얼른 케이를 따라오며 말했다. ...

“케이, 화났어요?” ...

“내가 왜 화나요?” ...

“화난 것 같아서. 아! 아르헨의 찻집에 꼭 가고 싶었던 거예요?” ...

“아니에요.” ...

“그런 것 같은데. 티스푼이 필요했어요? 그럼 아르헨의 찻집으로 가요. 난 거기도 좋아요.” ...

“아니에요, 리시. 티스푼 같은 건 필요 없어요.” ...

“그럼?” ...

“뭐가요?” ...

“왜 삐쳤는데?” ...

“안 삐쳤다니까.” ...

툴툴거리는 케이의 앞을, 리시가 가로막았다. ...

리시는 고개를 바짝 들고 케이를 올려다봤다. 리시의 검지가 케이의 입술에 닿았다. ...

“삐쳐서 입 나왔네, 뭐.” ...

케이가 입술을 오므렸다. ...

“안 나아꺼등여.” ...

입술을 오므리고서도 항변하는 케이의 모습에, 리시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

(41) 생각 깊은 언니. (1) ...

“정말 아르헨의 찻집에 안 가도 되겠어요?” ...

“리시, 내가 아르헨의 찻집에 가고 싶었던 건……!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 진짜로 안 삐쳤으니까, 가서 윈디의 털을 뽑아버릴…… 아니, 빗겨줄 빗을 사자고요.” ...

삐친 것 같은데. ...

리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케이를 올려다봤다. ...

‘설마 윈디를 질투하는 건 아니겠지?’ ...

그럴 리 없겠지. 그 대단한 그린 백작이 어린 유니콘을 질투해서 툴툴거리다니. ...

리시가 케이의 손을 잡자, 케이의 표정이 풀어졌다. ...

“케이, 정말로 아르헨의 찻집에 가도 좋아요. 나도 티스푼 갖고 싶어.” ...

“됐어요, 리시. 당신 의외로 거짓말 못하는 거 알아요? 거짓말하면 콧구멍이 벌렁거려요.” ...

리시가 깜짝 놀라 케이의 손을 놓고,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

케이가 키득거렸다. ...

“농담이에요.” ...

“케이…….” ...

“자, 가죠. 윈디의 털을 뽑…… 아니, 빗겨줄 만한 빗이 있나 구경하러.” ...

케이는 아까 ‘아르헨의 찻집’에 갈 생각뿐이라, 시장 거리를 걸어올 때 리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

시끄러운 시장 거리로 돌아간 리시는,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

리시는 길을 따라 늘어선 노점상을 구경하기도 하고, 바구니를 들고 가는 여자를 불러 약초를 살펴보기도 했다. ...

‘그래, 리시가 즐거우면 됐지.’ ...

한참 구경하던 리시가 생필품을 늘어놓고 파는 판매대 앞에서 멈췄다. ...

리시는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빗을 하나 들어서 손바닥에 쓰윽 문질렀다. ...

케이도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

빗을 하나씩 확인해보는 리시의 옆모습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가지런한 눈썹이 살짝 아래로 내려갔고, 눈꼬리가 휘어져 있었다. ...

저토록 달콤한 표정으로 윈디의 털을 빗겨줄 생각을 하다니. ...

“케이, 손 좀 내밀어봐요.” ...

케이가 손을 내밀자, 리시가 케이의 손바닥을 빗질하듯 쭈욱 긁었다. ...

“느낌 어때요?” ...

“내 느낌이 중요해요? 윈디가 좋아해야지.” ...

“하지만 이건 당신 빗겨줄 빗인걸.” ...

생각지 못한 말에, 케이의 눈이 커졌다. ...

방금 그 달콤한 표정이, 날 빗겨줄 생각에 흘러나온 거였다고? ...

“윈디 걸 사는 줄 알았는데.” ...

“당연히 당신이 먼저죠. 윈디는 두 번째.” ...

리시가 케이의 코를 콕 찍었다. ...

케이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윈디를 질투한 자신이 한심해서. 자신을 들었다 놨다 하는 이 여자가 사랑스러워서. ...

“당신 때문에 못 살겠어, 리시.” ...

“그래도 살아봐, 케이.” ...

리시가 빗으로 케이의 머리를 쓰윽 빗어 넘기고 눈을 맞췄다. ...

“앞으로 더 좋은 일이 많아질 테니까.” ...

+++

어제 리시와 데이트를 하고 돌아온 후, 케이는 계속 싱글싱글 웃으며 돌아다녔다. ...

응접실 근처에서 딱 마주친 젠과 넬라에게, 케이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

“아름다운 아침이야, 젠. 넬라. 날씨가 참 좋아.” ...

오늘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

젠과 넬라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

“왜 그렇게 재수 없는 표정으로 다녀? 사람들 놀라게.” ...

“난 앞으로 더 좋은 일이 많아질 거거든.” ...

넬라가 젠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

미친놈 상대하지 말고 그냥 가자는 표현이었다. ...

그러거나 말거나, 케이는 창밖을 향해 아련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

“하, 진짜 날씨 좋네.”   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넬라의 팔짱을 끼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

“저 인간, 왜 저래?” ...

넬라가 경악한 표정으로 물었다. ...

“어제 새언니랑 데이트했대.” ...

“데이트 좀 했다고 저렇게까지 미쳐? 대체 리시가 뭘 해줬기에?” ...

“몰라.” ...

“와, 믿을 수가 없네. 저게 진짜 케이브란트야?” ...

“아니었으면 좋겠어. 저런 징그러운 게 내 오빠라니…….” ...

“으아! 대장, 표정이 왜 그래요? 미쳤어요? 입 좀 다물어요.” ...

뒤에서 나단의 외침이 들려왔다. ...

젠과 넬라는 황급히 계단을 올라가 리시의 방에 들어갔다. 리시는 시녀들과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

“리시, 어제 우리 오빠랑…… 아니, 아니다. 알고 싶지 않아. 아무튼, 리시, 오늘은 결혼식 때 입을 드레스를 고를 거예요.” ...

“드레스라면 많은데.” ...

리시의 대답에, 넬라가 고개를 저었다. ...

“그런 거로는 안 돼요, 리시. 자비자르에서 유명한 디자이너가 올 거예요. 드레스는 전야제 때 입을 드레스 세 벌과 웨딩드레스 한 벌, 그리고 후야제 때 입을 드레스 두 벌. 그리고 식사 때 입을 드레스 네 벌. 총 열 벌을 맞출 예정이에요.” ...

“그렇게 많이요?” ...

“이것도 줄이고 줄인 거예요. 마음 같아서는 시간마다 갈아 입혀주고 싶은데. 리시는 드레스 입힐 맛이 날 것 같거든요.” ...

넬라가 리시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군침을 삼켰다. ...

“전야제는 이틀간 진행될 거예요, 리시. 그전부터 손님이 와서 가끔 식사를 함께하게 될 텐데, 그에 맞는 의상을 입어야 해요. 그렇게 입지 말고.” ...

젠이 지적했다. 지금 리시는 평민들이 입는, 평범하고 편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

“전야제 파티는 이틀, 그리고 결혼식, 다음 날 후야제. 이렇게 네 번의 파티가 있어요. 후야제는 배웅하는 의미라서 아주 성대하지는 않지만, 댄스 요청을 많이 받을 거예요.” ...

넬라가 설명했다. ...

결혼식 전야제 때는 예비 신부, 결혼식 당일에는 신부이기에, 오롯이 남편의 여인으로 대우한다는 의미에서 댄스 신청을 하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

물론 신분이 아주 높은 자는 ‘내 축하를 받으시오.’라는 의미로 댄스 신청을 해도 괜찮았다. 신분 높은 이의 댄스 요청을 받는 건, 신부에게 영광이니까. ...

결혼한 후의 댄스 요청은, ‘당신을 누구누구의 부인으로 인정한다.’라는 의미였다. ...

결혼 후 댄스 요청 예절이 생긴 건, 귀족과 평민 사이의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워진 최근의 일이다. 귀족가의 영애가 평민 사내와 결혼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반대의 경우는 종종 있어서 이런 예의가 생겼다. ...

하지만 평민 여자가 귀족가의 영식과 결혼한 경우, 후야제 때도 댄스 신청을 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직은 평민을 귀족 사회로 받아들이는데, 거리낌을 가진 자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

“리시, 댄스 실력은 어때요?” ...

넬라의 질문에 리시가 빙그레 웃었다. ...

“내 입으로 잘 춘다고 말하기는 좀 그럴 것 같은데.” ...

“아하하. 그도 그러네요. 그럼 댄스 부분은 우리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거죠?” ...

“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

알포드 후치스는 자신의 아내인 리시가, 파티에서 바보처럼 보이는 걸 원치 않았다. ...

그는 자신이 데리고 다니는 액세서리가 최고로 빛나기를 바랐다. 알포드와 결혼 후, 춤을 배운 적 없는 리시는 알포드와 그의 누나 줄리안느에게 맞아가며 춤을 배워야만 했다. ...

어떤 식으로 파티를 진행할지 대화를 나누는 중에, 디자이너와 재봉사들이 도착했다. ...

그들은 우선 리시의 치수를 재고 나서, 카탈로그를 펼쳤다. ...

화려하고 아름다운 드레스 디자인이 잔뜩 담긴 카탈로그. ...

리시의 눈에는 전부 비슷하게 아름다웠는데, 젠과 넬라의 눈에는 전부 다 다른 모양이다. ...

“이건 좀 칙칙한 느낌이야. 리시 얼굴이 죽어 보일걸.” ...

“이걸 입으면 리시가 너무 파묻힌 느낌이 들 것 같아.” ...

“오, 이건 예쁘네.” ...

리시는 그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드레스들이, 어디가 어떻게 다른 건지 알 수 없었다. ...

“샘플 몇 벌 가져왔죠? 일단 한번 입은 걸 보고 싶은데.” ...

젠의 질문에 디자이너의 조수가 얼른 일어나서 커다란 가방들을 여러 개 끌고 왔다. ...

저게 뭔가 싶었는데, 샘플 드레스를 넣은 가방인가 보다. ...

가방을 열자, 이미 완벽한 드레스들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

젠은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치마 끝부분만 연한 분홍색이 들어간, 화려하다 못해 눈부신 드레스를 꺼냈다. ...

“리시, 이거 입어봐요.” ...

조용히 서 있던 크리시나와 에르웰이 도와주기 위해 다가왔을 때였다. ...

“리시.” ...

케이가 리시를 부르며 방문을 열었다. ...

그 순간, 젠의 움직임에 리시는 깜짝 놀랐다. ...

소파 근처에 있던 젠이 총알처럼 날아가 방문을 쾅 닫아버린 것이다. ...

“악!” ...

방문에 얼굴이 찍힌 듯, 케이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

“뭐 하는 짓이야, 젠?” ...

“이 미친 인간아. 내가 오늘 드레스 고를 거라고 했지?” ...

“그래서 온 거야. 내 아내가 입는 드레스, 나도 같이 고르려고.” ...

젠과 넬라가 ‘이건 또 무슨 미친 짓이래?’라는 시선을 교환했다. ...

“케이. 제발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바보 같은 소리 좀 지껄이지 마. 나, 많이 창피해.” ...

“아니, 대체 왜? 뭐가 문제인데?” ...

“신랑은 결혼식 때까지 신부 웨딩드레스를 보면 안 된다는 규칙도 몰라?” ...

“그건 또 뭔 규칙이야? 법으로 정해지기라도 한 거야?” ...

“그래! 어기면 사형!” ...

“무시무시하네. 결혼식이 잘못하면 사형까지 당하는 일이었다니. 그래서 한 번만 하려고 하는 건가?” ...

“그러니까 얼른 꺼…… 가버려요, 오라버니.” ...

뒤늦게 이 안에 있는 디자이너 일행을 의식한 듯, 젠이 고상하게 말했다. ...

“풉…….” ...

에르웰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

젠이 휙 고개를 돌리고 에르웰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디자이너 일행은 그 위대한 그린 백작이 여동생에게 당하는 취급에 놀란 듯, 얼어붙어 있었다. ...

젠은 그들을 향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자, 어서 하던 일 계속할까요?” ...

 

+++

“티오렛? 아이리스의 드레스를 맞추러 티오렛이 왔다고?” ...

브리트니가 벌떡 일어나, 소식을 가져다준 시녀를 노려봤다. ...

“네, 아까 본채로 들어가는 걸 봤어요.” ...

“하! 티오렛이라니. 확실해?” ...

“확실해요. 파란색 단발머리에, 빨간색 뿔테 안경.” ...

티오렛은 가비자르 제국에서, 아니, 전 대륙에서 가장 인기 좋은 디자이너였다. ...

어찌나 인기가 좋은지, 타국의 왕실에서 드레스 제작을 요청해도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하기 일쑤였다. 티오렛의 드레스는 귀를 의심할 정도로 비싸지만, 그 가치는 톡톡히 했다. ...

입는 사람을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드레스. ...

거기에 티오렛이라는 브랜드 평가까지. ...

사교계에서 티오렛의 드레스를 입고 파티에 등장한 레이디는, 그날의 영웅 대우를 받았다. ...

브리트니는 티오렛에게 드레스를 의뢰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다. ...

“말도 안 돼. 그린 백작가에 돈이 어디 있다고…… 아이리스, 걘 벌써 너무 낭비하는 거 아냐?” ...

“그러게 말이에요.” ...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내가 가서 한소리 해줘야지.” ...

그런 것보다는 정말 티오렛이 온 건지, 티오렛의 드레스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싶었다. ...

그리고 그 자리에 그린 가 사람들이 있다면, 지금 리시가 하는 행동이 얼마나 허영심 가득한 행위인지, 명예를 중시하는 그린 가문의 이름에 얼마나 먹칠을 할지도 알려주고 싶었다. ...

더불어 내가 이렇게나 동생을 걱정하는, 생각 깊은 언니라는 것도 알려줘야지. ...

(42) 생각 깊은 언니. (2) ...

브리트니가 리시의 방문 앞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 방문 앞을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

하지만 브리트니는 쉽게 문을 열 수가 없었다. ...

방안에서 들려오는 화기애애한 대화가 방벽처럼 브리트니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

“와, 리시. 너무 예쁘다.” ...

“이게요?” ...

“예뻐요, 예뻐. 특히 이 어깨에서 등 라인이…….” ...

“아핫, 간지러워요, 넬라.” ...

“오빠가 보면 넘어가겠네, 진짜.” ...

브리트니는 이를 으득 갈았다. 식당에서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브리트니를 없는 사람 취급하던 젠과 넬라는, 리시의 방에서 마치 리시의 친한 친구 같은 분위기로 대화하고 있었다. ...

‘돌아갈까?’ ...

하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로 티오렛이 왔는지. ...

브리트니는 크게 심호흡한 후 표정을 갈무리했다. ...

어디까지나 동생을 사랑하고 걱정하고 아끼는 언니의 표정. ...

식당에서는 실패했지만, 오늘은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

똑똑- ...

노크 소리에 안에서 들려오던 대화가 뚝 끊겼다. ...

문이 열리고 크리시나가 얼굴을 내밀었다. ...

“리시를 만나러 왔어.” ...

“아, 잠시만요.” ...

크리시나가 문을 닫았다. ...

브리트니는 닫힌 방문을 노려봤다. ...

감히 내 앞에서 방문을 닫다니. ...

잠시 후 문이 열렸을 때, 브리트니는 우아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

“들어오시랍니다.” ...

크리시나가 문을 열고 옆으로 비켜섰다. ...

브리트니는 안에 들어가며, 방 거실에 펼쳐진 광경을 눈에 담았다. ...

여기저기 널려 있는 수많은 드레스. ...

그리고 파란색 단발에 빨간 뿔테 안경을 쓴, 작은 체구의 여자. ...

정말로 티오렛이었다. ...

브리트니는 흐읍, 숨을 들이마시고 리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리시는 하늘하늘한 소재의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거의 안 입은 것처럼 보이는 얇은 소재의 드레스였다. ...

드레스의 등 쪽이 파여서 하얗고 고운 등이 고스란히 드러났고, 검은색 옷감은 리시의 흰 피부를 더 돋보이게 했다. ...

“무슨 일?” ...

리시의 옆에 시녀처럼 드레스를 들고 서 있던 젠이, 거의 반말처럼 물었지만, 브리트니는 우아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

“동생이랑 담소를 나누고 싶어서 왔는데, 이렇게 바쁜 줄 몰랐네요.” ...

“아. 보다시피 바빠요.” ...

젠이 알면 꺼져, 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브리트니는 모르는 척 말했다. ...

“결혼식 때 입을 드레스를 맞추는 중인가 봐요. 그런데 그 드레스는 결혼식에서 입기에는 조금 야한 편인 것 같은데. 리시, 아직도 그런 드레스만 고집하는 거야?” ...

리시는 그저 옅은 미소만 지었다. ...

‘내가 언제 이런 드레스를 고집했어?’라는 항변을 하는 것보다, 저런 미소를 짓는 게 더 속이 뒤집혔다. ...

언제 고집했냐고 주장하면, ‘항상 그랬잖니.’ 하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만들어냈을 텐데. ...

“이 드레스가 어때서요? 리시랑 잘 어울리지 않나요? 내 눈에는 무척 아름다운데.” ...

넬라가 말했다. ...

“물론 아름다워요. 우리 리시는 뭘 입어도 잘 어울리거든요. 워낙 얼굴이 보물이라서.” ...

“그러게 말이에요. 티오렛이 가져온 드레스를 다 입혀봤는데, 뭐 하나 안 어울리는 게 없더라고요.” ...

“제가 오늘처럼 옷 만든 보람을 느낀 게 처음이에요. 마음 같아서는 여기 있는 드레스를 전부 선물로 드리고 싶다니까요. 아이리스 님께서 입어주시면 어마어마하게 홍보가 될 거예요.” ...

티오렛의 말에 브리트니는 갈비뼈가 죄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

“어머, 티오렛은 이미 유명하면서. 하지만 선물로 주시면 우리 리시에게는 정말 좋은 일이겠네요. 리시가 이렇게 값비싼 드레스를 참 좋아하거든요. 덕분에 나도 리시에게 많이 물려받아서 입었죠.” ...

이번에도 리시는 미소만 지었다. ...

‘그래,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는 태도였다. ...

젠과 넬라, 그리고 티오렛과 그녀의 일행은 여인들 간의 묘한 신경전에 관해 알 만큼 알았다. 그 때문에 브리트니의 말에 담긴 가시를 눈치챘지만, 브리트니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

“그래도 좀…… 나는 걱정돼, 리시. 결혼식이 호화로우면 좋긴 하지만 너도 이제 그린 가문의 안주인이잖아. 처녀일 때처럼 낭비하는 건 좋지 않아. 그래서 말인데…….” ...

브리트니가 젠과 넬라를 돌아봤다. ...

“우리 리시가 결혼식에 쓰는 비용은, 우리 위틀로 공작가에서 지불하도록 할게요.” ...

빈말이었다. ...

결혼식 비용은 남자 쪽에서 내는 게 당연했고, 그린 가문에서 처가에 손을 벌리는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

아마도 ‘에이, 어떻게 그래요? 마음이라도 감사해요.’라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 ...

“좋은 생각이에요, 언니.” ...

지금껏 한마디도 하지 않던 리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

상상도 못 한 대답에, 브리트니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

리시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

“안 그래도 남편이 돈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아서 걱정이었는데, 우리 가족이 날 위해 결혼식 비용을 책임진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죠. 어머니, 아버지께 감사하다고 전해줘요.” ...

예상한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자, 브리트니는 당황했다. ...

‘그래, 그렇게 할게. 그래도 결혼했으니까 앞으로는 너무 낭비하지 마.’라고 말하는 게 최선인데, 그런 말을 할 수도 없었다. ...

지금 이 방에 있는 드레스만 수십 벌이다. ...

티오렛의 드레스 한 벌은, 귀족가의 몇 달 치 생활비를 오갈 정도로 비쌌다. 위틀로 공작가에 금광이 있다고 해도, 이 드레스의 가격을 전부 내는 건 무리한 일이었다. ...

꿀꺽- ...

브리트니는 마른침을 삼켰다. ...

‘어떡하지?’ ...

우아하게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자기가 한 말인데, 인제 와서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리시의 호화로운 결혼식에 돈을 내주는 일 따위,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

리시가 ‘농담이에요.’라고 말해주거나, 젠이 ‘아니에요. 결혼식 비용은 당연히 우리 쪽에서 책임져야죠.’라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

하지만 그들은 입을 꾹 다문 채 브리트니를 응시할 뿐. 누구 하나 브리트니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

심장이 죄여들었다. ...

‘어떡해…….’ ...

울고 싶었다. ...

침묵 속에서 머리를 굴리던 브리트니는 간신히 할 말을 찾아냈다. ...

“겨, 결혼식 비용을 우리 쪽에서 내면…… 어…… 괜찮겠어요? 아무래도 남자 쪽에서 담당하는 게 당연하다 보니, 말이 나올 텐데요.” ...

“괜찮아요. 브리트니 양이 먼저 제안해준 일이기도 하고, 이런 일로 뒤에서 우리 그린 가문에 관해 떠들어댈 사람은 없으니까.” ...

젠이 담담히 대꾸했다. ...

이제 정말로 빠져나갈 구멍이 사라졌다. 브리트니는 표정을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잊었다. ...

흔들리는 눈동자로, 이 방 안에 가득한 드레스 더미를 돌아봤다. ...

이 드레스만 해도 생활비 몇 년 치일까? ...

결혼식 비용이 드레스 가격만은 아니었다. 넬라가 주최하는 파티는, 준비 금액이 어마어마할 터였다. ...

“저는…….” ...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해야 하는데. 지금이라도 농담이었다고 할까 싶었지만,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

심지어 이 자리에는 티오렛과 그녀의 조수들까지 있었다. ...

“그럼…… 그렇게 해요.” ...

브리트니는 핏기 가신 얼굴로 휙 돌아서서, 도망치듯 리시의 방을 빠져나왔다. ...

복도를 달리는 브리트니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

‘어떡하지? 어떡해?’ ...

 

+++

“그게 무슨 미친 소리야!” ...

글로번의 외침에 브리트니는 움찔 고개를 숙였다. ...

글로번이 브리트니에게 이렇게 화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브리트니야말로 악을 쓰고 싶은 기분이었으니까. ...

“결혼식 비용을 우리가 대다니……. 우리가 왜! 그 돈이 다 얼만데? 듣자 하니 마탑에 청해 건축용 기계들까지 빌렸다더라. 마탑에서 기계를 빌리는 비용이 얼마나 되는지, 알기나 해?” ...

“하, 하지만…… 리시가…… 우리가 낼 거라고 고집을 부려서…….” ...

“그럼 말렸어야지! 그런 일 없다고 말했어야지! 넌 거기 앉아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

“거기서 어떻게 말려? 리시가 우리 부모님이 결혼 비용 낼 거라고 하는데.” ...

“왜 못 말려? 결혼 비용을 여자 쪽에서 내는 경우는 없다고, 차분하게 얘기하면 되지. 제레시엔 그린이랑 제널 백작 부인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들도 아닌데, 그렇게만 말해도 잘 알아들었겠지!” ...

물론 그랬을 것이다. ...

문제는 그 얘기를 먼저 꺼낸 게 브리트니라는 점이었다. ...

하지만 브리트니는 머리 꼭대기까지 분노한 글로번 앞에서, 차마 진실을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

“아이고, 머리야. 리시, 그 계집애가 아주 미쳐서는…….” ...

데니스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

“하여간 안 돼! 이 결혼식 비용은 절대 안 내. 아니, 못 내!” ...

“하지만…… 아빠. 우리 가문 명예도 걸린 일인데…….” ...

“명예는 무슨! 먼저 명예를 더럽힌 건 저쪽이야. 결혼식 비용을 신부 쪽에서 내라니…… 무슨 그런 미친 소리를……. 아이리스가 그런 소리를 하면, 그 집 딸이라도 말렸어야지. 제레시엔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서?” ...

“으응…….” ...

“돈 한두 푼도 아니고. 내가 이 부분은 정식으로 항의하고 와야겠다!” ...

“누, 누구한테? 아이리스한테?” ...

“그린 백작에게!” ...

 

+++

기다릴 것도 없이 케이에게 항의하러 간 글로번은, 케이의 말에 얼어붙었다. ...

“뭐, 뭐라고요?” ...

“브리트니 양이 먼저 좋은 제안을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위틀로 공작님.” ...

“그, 그게 무슨……?” ...

“아, 못 들으셨습니까? 브리트니 양이 일부러 아이리스의 방에 찾아와서, 거기 있는 드레스와 결혼식 비용 전부를 위틀로 공작 가에서 부담하겠다고 말했다던데.” ...

글로번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

“우, 우리 브리트니가 그랬을 리가…….” ...

“왜 없겠습니까. 브리트니 양이 동생을 그리 아끼는데, 결혼식 비용 정도는 내주고 싶었겠지요. 참으로 다정한 딸을 두셨습니다, 공작님.” ...

글로번은 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

“그린 백작님. 혹시 우리 딸이 순진한 걸 이용하는 것 아닙니까?” ...

“공작님의 딸이라면 브리트니 양이요, 아니면 아이리스요?” ...

“당연히 브리트니를 말하는 겁니다!” ...

“아. 그렇군요. 전혀 몰랐습니다. 짐작조차 못 했네요.” ...

글로번은 울컥했다. ...

“우리 브리트니는…….” ...

브리트니의 순수함에 관해 이야기하려다가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떠올렸다. ...

“아, 아무튼 우리 브리트니가 그런 소리를 할 리도 없고, 여자 쪽에서 비용을 지불해야 그린 가문만 안 좋은 소리를 듣게 되니, 이건 없었던 일로 하죠.” ...

“음. 공작님, 뭔가 잘못 생각하고 계시네요. 우선, 브리트니 양이 먼저 결혼식 비용을 꼭 내주고 싶다고 말한 자리에, 증인들이 많습니다. 우리 제레시엔과 넬라니커스 제널 백작 부인, 디자이너 티오렛과 그녀의 일행들.” ...

글로번이 숨을 삼켰다. 그렇게 사람이 많은 자리였을 줄은 몰랐다. ...

“만약 여기서 말이 바뀌면 위틀로 가문이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

글로번이 뭐라 말하려 했지만, 케이가 검지를 들어서 막았다. ...

“두 번째. 우리 그린 가문과 결혼하는 건, 위틀로 가문에 큰 영광이겠지요. 그래서 위틀로 가문이 결혼 비용을 일체 감당해도,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 가문과 연을 맺고 싶어 하는 이들이 널리고 널렸으니까요.” ...

옳은 말이었다. 결혼식 규칙 같은 걸 좀 어겼다고 해서 뒷이야기를 들을 그린 가문이 아니었다. 아니, 다들 그럴 만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

글로번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무래도 브리트니가 무슨 짓을 하긴 한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자존심을 내세우며, ‘우리만 믿고 맡기세요.’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

금광에서 나온 돈은 대부분 황태자 측근들의 마음을 얻는 것과 사치하는 데에 썼다. 앞으로 쭉 돈이 들어오겠지만, 지금은 수중에 있는 돈이 그리 많지 않았다. ...

그런 상황에서 누가 봐도 어마어마할 것 같은 결혼식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니. ...

케이는 다리를 꼬고 앉아, 미소를 머금고 글로번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

(43) 사랑해. ...

글로번은 선택해야만 했다. ...

뱉은 말을 취소해 굴욕을 당하든, 빚을 져서라도 명예를 지키든. ...

케이의 표정을 보니 반씩 하자는 말은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

‘어차피 우리 브리트니는 황태자와 결혼할 거야.’ ...

다행히 글로번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

브리트니가 황태자비가 되면, 결혼식 비용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

위틀로 가문과 연을 맺고 싶어서 돈과 선물을 보내올 이들이 넘치고 넘칠 테니까. ...

글로번은 표정을 바꾸고, 케이만큼이나 느긋하게 앉아 미소 지었다. ...

“좋습니다, 그린 백작님. 당연히 내 사랑하는 딸을 위해, 결혼식 비용 정도는 낼 수 있지요.” ...

“오, 그럴 줄 알았습니다.” ...

케이가 만면에 미소를 띠며 품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마탑에서 빌린 장비, 티오렛에게 의뢰한 드레스와 장신구, 하객을 위한 파티와 요리 등의 청구서였다. ...

청구서에 적힌 금액은 눈이 돌아갈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

“사인해주시지요.” ...

글로번은 케이가 내민 펜을 그의 얼굴에 집어 던지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청구서에 서명했다. ...

케이는 글로번의 이름이 적힌 청구서를 착착 접어서 품에 넣었다. ...

“감사합니다. 위틀로 공작님이 우리의 결혼식을 위해 애써주신 것은 잊지 않겠습니다.” ...

케이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

“그럼 나는 할 일이 많아 먼저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

글로번의 대답도 듣지 않고 나가는 케이를 보며, 글로번은 케이가 자신을 한 번도 ‘장인어른’이라 불러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

+++

케이는 복도를 걸어가며 품에 넣어둔 청구서를 꺼냈다. ...

어마어마한 금액 아래에 적힌 글로번 위틀로의 사인. ...

케이가 알기로 글로번의 재정 상태는 이 정도 금액을 당장 운용할 상황이 아니었다. 보유한 저택 몇 채를 팔거나 은행에서 빚을 져야 할 것이다. ...

케이는 아까의 일을 떠올렸다. ...

드레스를 고르는 중이라고 젠에게 쫓겨났는데, 다시 부르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황급히 달려갔다. ...

어느새 방 안은 깨끗이 치워졌고, 리시와 젠만 남아서 케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

리시는 젠에게 말했다. ...

-젠, 케이에게 지금까지 결혼식 때문에 사용한 청구서를 줘요. ...

그러고 나서 케이를 보며 말했다. ...

-위틀로 공작이 당신에게 항의할 거예요. ...

갑자기 무슨 항의, 라고 생각하는데, 젠이 브리트니와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놨다. ...

-위틀로 공작은 명예를 지키는 쪽을 택할 거예요. 황태자와 브리트니를 연결해주려는 상황에서, 이런 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건 좋지 않을 거거든. ...

리시의 말대로였다. ...

‘영리한 여자야.’ ...

리시는 무언가를 진행할 때, ‘그럴지도 몰라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투와 눈빛은 언제나 확신에 차 있었다. ...

케이의 앞에서 얼굴을 붉히는 리시도 좋지만, 확신에 차서 일을 진행하는 리시도 좋았다. ...

싫은 구석이 한 군데도 없는 여자였다. ...

케이는 싱글거리며 리시의 방에 들어갔다. ...

“리시. 가져왔어요.” ...

케이가 청구서를 팔락거리며 우쭐한 미소를 지었다. ...

리시의 눈에는 케이가 뼈다귀를 물고 와서 칭찬받고 싶어 하는 강아지처럼 보였다. ...

그렇다면 아낌없이 칭찬해줘야지. ...

“잘했어요, 케이.” ...

“정말 잘했어요?” ...

“가짜로 잘한 것도 있어요?” ...

“보상이 없어서.” ...

“뭘 해줄까요?” ...

케이는 리시의 옆에 앉아 볼을 내밀었다. ...

리시는 뭘 하라는 건지 몰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매끄러운 볼을 응시했다. ...

“얼른.” ...

케이가 채근했다. ...

리시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가 “아!” 하고는, 손바닥으로 케이의 볼을 가볍게 두드렸다. ...

“잘했어요, 케이.” ...

이번에는 케이의 눈이 커졌다. ...

“이게 뭐예요, 리시?” ...

“응?” ...

“보상이 너무 짜잖아. 너무 짜서 고기를 찍어 먹어도 되겠어.” ...

케이가 투덜거리며 리시의 어깨를 눌러 소파에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타 입을 맞췄다. ...

케이의 입술이 떨어지자 리시가 말했다. ...

“키스를 원한 거였다면 입술을 내밀어야죠.” ...

“키스가 아니라 볼 뽀뽀를 원한 거였어요. 키스를 한 건 이자가 붙어서 그런 거고.” ...

볼 뽀뽀. ...

생각도 못 했다. 지금껏 리시에게 볼 뽀뽀를 해달라며 뺨을 내미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

“짠 건 당신이야. 몇 초 만에 이렇게 어마어마한 이자를 붙이고.” ...

“그러니까 긴장 풀지 마, 리시. 아차 하는 순간, 이보다 더한 이자가 붙을 수도 있거든.” ...

키스보다 더한 이자가 뭘지 궁금했다. ...

그 이자, 지금 보여줘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케이가 리시의 허리를 감아 도로 소파에 앉혀줬다. ...

“당신이 말한 대로 위틀로에게 돈을 뜯어내긴 했지만, 걱정되는 부분이 있어요.” ...

케이는 순식간에 야릇한 분위기를 벗어던지고, 일 얘기로 돌아갔다. 리시는 아쉬운 마음이 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위틀로가 황태자비 자리를 노린다면, 이번 일로 자기 재산을 처분하지는 않겠죠. 은행에서 빌릴 텐데, 그걸 위틀로가 갚는다면 다행이지만 갚지 못하면, 우리 쪽에서 감당해야 할지도 몰라요.” ...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내가 알아서 할게.” ...

“어떻게 하려는지 알려주면 안 돼요?” ...

“음, 어쩔까? 예쁜 짓 하면 알려줄 수 있을지도.” ...

“예쁜 짓. 어떻게 해야 내가 당신 눈에 예뻐 보일까?” ...

농담 삼아서 한 말인데, 케이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

그래서 리시는 그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소망을 하나 이뤄보기로 했다. ...

“예쁜 짓은 늑대로 변해서 해야 할 것 같은데.” ...

“그러죠.” ...

케이가 순식간에 늑대로 변했다. ...

리시는 일어나 소파 옆으로 갔다. ...

늑대도 리시를 따라 움직였다. ...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일 때문에 당신이 화낼지도 몰라요.” ...

“나는 당신한테 화 안 내, 리시.” ...

“음, 좋아요. 그럼 우선. 앉아.” ...

“응?” ...

“앉아, 케이.” ...

검은 늑대의 입이 벌어졌다. 늑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리시를 쳐다보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 ...

“하하하하하.” ...

늑대의 웃음소리는 인간일 때와 조금 달랐다. ...

웃음소리에 섞인, 약간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

“아, 리시. 당신은 항상 날 놀라게 해.” ...

그리 말하며, 케이가 얌전하게 앉았다. ...

리시가 케이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

“손.” ...

늑대가 커다란 앞발을 리시의 손바닥 위에 턱 얹었다.   늑대의 앞발은 리시의 손을 전부 덮고도 남을 정도로 컸다. ...

리시는 경이로운 기분으로, 긴 발톱을 쓰다듬었다. ...

“이제 말해줄 거야?” ...

늑대가 꼬리로 바닥을 탁탁 치며 물었다. ...

“아니, 엎드려.” ...

늑대가 납작 엎드렸다. ...

“굴러.” ...

“오, 리시.” ...

“굴러, 케이.” ...

케이가 엎드린 자세로 빙글, 구르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리시를 덮쳐왔다. ...

거대한 늑대가 덮쳐오는데도, 리시는 무섭지 않았다. 그의 송곳니와 발톱이 자신을 해칠 일은 결코 없으리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

리시의 예상대로, 늑대는 일어나서 두 앞발을 리시의 어깨에 얹을 뿐이었다. ...

늑대의 커다란 코가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

“리시. 지금까지 나한테 이런 명령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

“젠도?” ...

“……걔는 빼고.” ...

“어머님, 아버님도?” ...

“……두 분도 빼고.” ...

“당신의 남동생도?” ...

“……걔도 빼자.” ...

리시가 까르르 웃었다. ...

케이가 얄밉다는 듯 리시의 얼굴을 할짝 핥았다. ...

“꺅!” ...

하면서 얼굴을 뒤로 빼다가 휘청 넘어가려는데, 다시 인간으로 돌아온 케이가 리시의 허리를 팔로 감았다. ...

열기를 띤 청회색 눈동자 속에 리시가 담겨 있었다. ...

리시는 그의 눈동자 안에 오롯이 담긴 제 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더없이 행복하게 미소 짓고 있음을 깨달았다. ...

‘나는 이런 표정으로 웃게 됐구나.’ ...

엄지로 그의 눈가를 쓸었다. ...

“리시.” ...

중저음의 음성이 그녀의 이름을 부른 후에야, 리시는 늑대에서 인간으로 돌아온 직후의 케이가 어떤 모습인지 떠올렸다. ...

그런 케이에게 안겨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

하지만 그를 밀어내고 싶지는 않았다. ...

이렇게 그와 밀착해 있는 게 좋았다. ...

이런 눈빛을 할 때의 케이는 리시에게 입을 맞추고, 뜨거운 숨을 뱉어내곤 했다. ...

야한 농담을 하고, 리시의 목덜미를 지분거리며 야릇한 기분에 감싸이게 만들었다. ...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는데. ...

“돌아서요. 옷 입을 테니.” ...

케이는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옷을 입었다. ...

화끈거리던 열기가 순식간에 식으며, 가슴에 싸한 바람이 불었다. ...

‘왜 저러지? 내가 그런 걸 시켜서 화났나?’ ...

아무래도 선을 넘은 것 같아서 걱정하는데, 옷을 다 입은 케이가 뒤에 서서 리시를 끌어안았다. 케이의 입술이 리시의 목덜미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

“위틀로의 빚을 어떻게 감당할지는 나중에 들을게요. 할 일이 생각나서.” ...

케이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이고 휙 돌아섰다. ...

리시도 몸을 돌려,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

“케이.” ...

“응?” ...

“화났어요?” ...

케이가 도로 리시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리시를 향한 그의 눈빛은 여전히 다정했다. ...

“리시, 난 당신에게 화 안 내요.” ...

케이는 리시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 방을 나갔다. ...

+++

케이는 연무장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가슴에 이는 열기를 식히려면 몸을 좀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

‘미치겠군.’ ...

리시가 늑대인 케이에게 말도 안 되는 명령을 했을 때. ...

케이는 화나지 않았다. ...

오히려 리시가 즐거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며 명령하는 게 재미있었다. ...

까르르 웃는 리시의 모습에 가슴이 뜨거워졌고, 홀린 듯 케이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리시 때문에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는 표현을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성이 끊어져, 그녀가 두려워해도 강제로 취할 뻔했다. ...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그녀의 고운 피부를 전부 자신으로 물들일 뻔했다. ...

‘내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

이런 격정적인 충동에 휩싸인 건 처음이었다. ...

리시와 침대 위에서 뒹굴 때마다 뭉근한 열기가 퍼지기는 해도, 자제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리시가 두려워하면 언제든지 멈출 자신이 있었다. ...

하지만 지금은 그럴 자신이 없다. 한번 시작되면 멈추지 못하고 그녀를 집어삼켜야만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녀의 눈동자가 나 때문에 두려움에 물드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장난처럼 그녀와 엉켜서 섞이는 행동조차 조심스러워졌다. ...

연무장에 들어가자마자 목검을 들고, 수련용 나무를 미친 듯이 내리쳤다. ...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

“대장. 목검이 부러졌습니다.” ...

뒤에서 들려오는 유진의 음성에, 케이는 정신을 차렸다. ...

목검이 부러져서 덜렁거리고 있었다. ...

케이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목검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중얼거렸다. ...

“유진. 아무래도 사랑 같다.” ...

리시를 향한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건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폭발할 것 같고, 리시가 그 폭발에 휘말려 더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으니까. ...

그래서 이름을 붙이지 않았더니, 이번에는 케이의 심장이 폭발할 지경이었다. ...

“아니, 같은 게 아니야. 내가 아이리스를 사랑해.” ...

(44) 내 남편의 남동생. (1) ...

유진은 아이리스를 향한 마음을 고백하는 케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

내 대장이 느닷없이 부인을 향한 사랑을 고백해올 때, 부하로서 어떤 대답을 해야 좋은 걸까? ...

그나저나 내 대장은, 왜 다들 아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말하는 걸까? ...

“압니다.” ...

“어떻게?” ...

“어떻게……냐고 물으시면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

“아는 대로 대답해봐.” ...

“아는 대로…… 음.” ...

말 잘하는 제이미라면 근사한 대답을 해줬을 테지만, 유진은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

“대장은 형수님을 향한 사랑을 티 내고 다니십니다.” ...

“내가? 그럴 리가.” ...

케이는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

“왜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

“나는 표정에 내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 ...

“물론 지금까지는 그러셨지만…….” ...

“요샌 안 그랬다는 거야?” ...

“네.” ...

“어떤 부분에서?” ...

“나단이 그러는데, 대장이 바보처럼 웃을 때는 형수님과 좋은 일이 있었을 때라고 했습니다. 제이미는 대장이 멍청하게 헤실거리고 다닐 땐 형수님과 그렇고 그런 걸 해서 그런 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

“아니, 아니. 그만해도 돼.” ...

케이가 손을 저었다. ...

“그럼 검 연습을 하러 가도 되겠습니까?” ...

“넌 대장이 사랑에 빠졌다는데, 그게 다야?” ...

유진은 케이가 뭘 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

사내가 여인을 사랑하는 건 이상한 일도,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

본인에게는 특별하겠지만, 타인에게는 아무 감흥도 없는 일이었다. ...

물론 그동안 여자에게 관심 없던 케이가 사랑을 하고, 바보가 되었다는 게 조금 신기하긴 해도 그뿐이었다. ...

“혹시 축하 파티를 열어주길 바라십니까?” ...

“……아니다, 됐다. 가봐. 연습해.” ...

“네.” ...

더는 관심 없다는 듯 목검을 휘두르는 유진을 보다가, 케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연무장을 나왔다. ...

사랑에 빠졌다. ...

아이리스를 사랑한다. ...

처음부터 그녀를 향한 감정이 특별하다고는 생각했다. ...

리시가 당신의 정체를 아니, 나랑 결혼하자고 청했을 때. ...

그 가느다랗고 예쁜 목을 물어뜯어 죽여버리면 그만인데도 그녀의 청을 받아들였을 때. ...

그녀가 특별하다고는 생각했다. ...

함께 지내면 지낼수록 그녀가 빛나 보일 때도, 이 감정이 더 뜨거워지리라는 걸 예감했다. ...

그런데 이렇게 빨리 폭발할 줄이야. ...

‘큰일이군.’ ...

마음을 자각하고 나니, 리시가 더 애틋하고 더 그립고 더 탐스럽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리시만 보면 뭉클뭉클 올라오던 열기가, 참기 어려운 수준으로 뜨거워졌다. ...

사랑해본 것이 처음이기에, 케이는 궁금했다. ...

사랑에 빠진 남자들은, 당장 달려가서 상대를 안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참는 거지? ...

+++

이오벳 옥보시더스 황태자는 호화로운 청첩장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

“이게 정말 그린 백작이 보낸 청첩장이란 말이야?” ...

“그렇습니다, 전하.” ...

보좌관 세트니가 대답했다. ...

“못 본 사이에 그린 백작의 취향이 바뀐 건가? 원래 이렇게 화려한 걸 좋아하지 않는 거로 아는데.” ...

이오벳은 청첩장을 팔락거렸다. ...

“아이리스 위틀로의 취향인가?” ...

케이가 위틀로 공작가의 꽃과 결혼했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다. ...

이오벳은 케이를 알기에, 단지 그녀의 미모 때문에 결혼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분명 위틀로 공작가와 그린 백작 가 사이에 오간 것이 있을 것이다. ...

하지만 이렇게 화려한 청첩장은 케이가 할 만한 짓이 아니다. ...

“공작가의 꽃으로 자랐다더니, 허영심이 많은가 보군.” ...

“그런 소문이 있더군요.” ...

“그에 비해 그녀의 언니인 브리트니 양은 검소하고 생각이 깊다지?” ...

“그렇다고들 합니다. 동생 걱정을 많이 한다고 하더군요.” ...

“흐음. 이번 파티에는 브리트니 양도 오겠군. 그 대단한 아이리스 위틀로는 당연히 있을 거고.” ...

“그렇습니다, 전하. 하지만 브리트니 양을 보러 꼭 거기까지 발길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황실로 불러들이면 그만이지요.” ...

“아니, 그럴 수는 없지. 오랜 친구가 결혼한다는데.” ...

이오벳이 세트니에게 청첩장을 건넸다. ...

“참석한다고 해.” ...

 

+++

이제 결혼식까지 일주일 남았다. ...

그 남자가 리시의 앞에 나타난 건, 리시가 윈디에게 줄 과일을 따고 있을 때였다. ...

“아이리스 위틀로.” ...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음성에 리시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

그리고 그 얼굴을 확인한 후, 더 놀랐다. ...

깊은 눈, 황금 테를 두른 듯한 녹색 눈동자와 검은 머리칼, 어딘지 모르게 퇴폐적으로 보이는 이목구비. ...

엘드허트 그린. ...

케이의 동생이었다. ...

“누구신지?” ...

알면서도 물었다. ...

“엘드허트 그린. 곧 네 남편이 될 남자의 동생이지.” ...

“아하.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

“너한테 볼일이 있어서.” ...

“볼일이 뭔데?” ...

엘드허트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

“예의가 없군, 아이리스 위틀로.” ...

“예의는 그쪽이 없는 것 같은데. 결혼식은 아직 올리지 않았지만, 내가 네 형이랑 혼인신고를 했다는 건 알고 있지 않아?” ...

“그래,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

엘드허트가 위협적인 눈빛으로 리시를 노려보며 성큼 다가왔다. ...

엘드허트는 엄지와 검지로 리시의 턱을 잡아 올리고, 관찰하듯 리시의 얼굴을 뜯어봤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 ...

“아니, 엘드허트.” ...

리시는 엘드허트의 손목을 '탁' 쳐서 떼어냈다. ...

“그린 백작 부인이겠지. 네가 네 형의 선택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면.” ...

리시는 케이의 가족이 전부 자신을 좋아해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기에, 엘드허트의 태도가 당혹스럽지 않았다. ...

어찌 보면 이런 태도가 당연할지도 모른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에게는 여러 가지 소문이 있었다. 좋은 소문도, 나쁜 소문도, 리시가 수습할 수 없기에 발 빠르게 퍼져나갔다. ...

그런 소문의 여자가 그린 백작과 연을 맺는다는데, 그걸 두 팔 벌려서 환영하는 게 이상한 일이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례한 태도를 참아줄 생각도 없었다. ...

상대가 날 싫어한다면, 나도 있는 힘껏 싫어해주기로 했다. 날 싫어하는 사람의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기로 했다. ...

“기분이 좋은 모양이네. 그린 백작의 부인 자리를 꿰차서.” ...

“싫을 필요는 없잖아?” ...

“케이에게 뭘 제시했지? 아무 이유도 없이 케이가 너 같은 거랑 결혼할 리가 없는데.” ...

리시가 미소 지었다. ...

“나랑 케이 사이에 뭔가 오갔더라도, 그건 부부 사이의 일. 네가 끼어들 공간은 없어, 엘드허트.” ...

“케이는 내 형이야.” ...

“형 뺏긴 기분이 들어서 속상하니?” ...

리시의 비아냥에, 엘드허트의 눈빛이 차게 가라앉았다. ...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어오르는군. 케이가 많이 봐줬나 봐?” ...

“어머나. 본인이 하늘이라고 생각할 줄은 꿈에도 몰랐네.” ...

“나는 여자도 때려, 아이리스. 그린가의 망나니라고 못 들어봤나?” ...

“네가 그렇게까지 소문을 몰고 다니는 남자는 아니야, 엘드허트.” ...

순간, 예리하게 빛나던 엘드허트의 눈빛이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

하지만 곧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리시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처럼. ...

엘드허트가 손을 들어 올렸다. 커다란 손이 리시의 뺨을 향해 다가올 때였다. ...

“거기까지 해요, 엘디.” ...

제이미의 음성이 엘디의 움직임을 끊었다. ...

제이미가 저벅저벅 걸어와 리시와 엘디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

“제이미, 오랜만이군. 더 예뻐졌네.” ...

리시를 상대할 때와 다르게, 엘디는 제이미를 향해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

“언제 온 거죠? 오는 줄 알았다면 미리 문을 걸어 잠갔을 텐데.” ...

“잠근다고 해서 못 들어올 내가 아니지. 성기사단의 부단장을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냐?” ...

“우습게 보지는 않아요, 엘디. 네가 그렇게까지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

“화가 났군, 제이미.” ...

엘디가 검지로 제이미의 미간을 눌렀다. ...

“설마 내가 저 여자에게 무례를 범했다는 이유로 화를 내는 건 아니겠지?” ...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궁금하군요, 엘디.” ...

“기가 막히는군. 설마 너까지 저 여자한테 홀린 거야?” ...

제이미는 대답 없이 자신의 가슴 쪽으로 손을 움직였다. ...

엘디가 황급히 제이미의 손목을 잡았다. ...

“검을 꺼내려고 하는 게 아니라고 믿고 싶어, 제이미.” ...

“웬 사내가 몰래 기어들어 와서 백작 부인께 무례를 범하는데, 내가 가만히 있어서야 면이 살지 않겠지요, 엘디?” ...

“웬 사내라니……. 나 엘드허트 그린이야.” ...

“그리고 네가 무례하게 군 상대는 아이리스 그린이지요, 엘디.” ...

제이미의 눈빛이 점점 무거워지자, 엘디가 살짝 두 손을 들었다. ...

“알겠어, 내가 졌어. 하지만.” ...

엘디가 제이미의 뒤에 서 있는 리시를 노려봤다. ...

“결혼은 가문의 일. 나는 저 여자가 우리 가문에 들어오는 걸 인정 못 해. 위틀로 공작가의 꽃? 글쎄. 정말 꽃일지, 독초일지, 알 게 뭐야?” ...

 

+++

엘디는 인상을 찌푸리고 복도를 걸었다. ...

엘디의 눈에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였다. ...

‘영혼’이라고 이름을 붙이긴 했지만, 그보다는 원념이나 집념, 집착, 각오 같은 것이었다. ...

그 힘으로 엘디는 성유물의 진위를 판별할 수 있었다. ...

신성국은 성유물을 ‘신의 선물’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인간의 집념 같은 것이 남아서 만들어진 물건이니까. ...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고 불리는 리시는, 청초하고 연약한 척하거나, 우아한 척하거나, 사랑스러운 척하는 여자일 거라고 예상했다. 사내들에게 먹히는 태도로, 케이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

아니었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고 불렀을 때, 화마처럼 붉게 빛나던 그녀의 영혼은, 저택에 틀어박혀 곱게 자란 여인이 가질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

엘디는 그런 종류의 영혼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

-네가 그렇게까지 소문을 몰고 다니는 남자는 아니야, 엘드허트. ...

리시가 그리 말했을 때는, 조금 재미있는 여자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케이가 이런 부분에 반했을지도 모른다고, 마음을 열 뻔했는데. ...

‘그건 뭐였지?’ ...

그 순간, 리시의 영혼에 또 다른 영혼이 겹치는 듯 보였다. ...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그걸 잡아보려고 하는데, 제이미가 등장했다. 그리고 리시의 얼굴 근처에서 어른거리던 색다른 영혼도 자취를 감췄다. ...

‘그런 건 처음 봐.’ ...

엘디는 나이가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릴 때부터 성기사단에 있으면서 많은 경험을 하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

하지만 리시에게 벌어진 것 같은 증상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성유물의 영향을 받은 건가?’ ...

간혹 성유물에 지배된 사람에게 성유물에 남겨진 원념이 겹쳐지는 일은 있었다. 하지만 리시와 같은 방식은 아니다. ...

성유물의 원념은 떼려면 얼마든지 뗄 수 있을 것처럼 또렷한 모양으로 들러붙는다. ...

리시의 ‘그것’은 리시의 영혼과 동화된 듯 보였다. 그 무슨 짓을 해도 떼어낼 수 없을 듯, 마치 리시의 영혼 그 자체인 듯. ...

‘문제는 그게 아주 매혹적이라는 거야.’ ...

언뜻 보였을 뿐인데도, 한눈에 홀릴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

‘어쩌면 케이랑 제이미가 그 여자에게 홀린 게, 그 영혼 탓인지도 몰라.’ ...

케이도 케이지만 제이미는 경계심이 강했다. 단순히 자기 대장이 선택한 여자라는 이유로 호의를 베푸는 사내가 아니었다. ...

그런 제이미가 리시를 지키기 위해, 엘디에게 검을 겨누려 했다는 건, 홀려도 단단히 홀렸다는 의미다. ...

‘아이리스 위틀로는 내 예상보다 더 위험한 여자일지도 모르겠군.’ ...

(45) 내 남편의 남동생. (2) ...

가족들을 만나면서, 엘디는 자기 생각에 점점 확신을 품게 됐다. ...

가족으로 받아들인 이상 ‘내 딸’이라고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야 그렇다 쳐도, 젠은 정상이 아니었다. ...

“우리 새언니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지 마, 엘디. 그리고 아이리스 위틀로라니,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야?” ...

젠은 홀려도 단단히 홀렸다. ...

엘디가 아는 젠은 누구보다도 리시를 의심하고, 둘의 결혼을 반대해야 옳았다. 하지만 젠은 리시를 의심하긴커녕, 주인을 따르는 개처럼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

“대체 그 여자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

“나한테 무슨 짓을 하긴 뭘 해? 난 네가 그렇게 뾰족하게 구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리시가 우리한테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니고, 케이를 괴롭히는 것도 아니고. 다들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는데, 왜 끼어들어서 분탕질을 하고 지랄이야?” ...

“넌 오빠한테 무슨 말투가……!” ...

“오빠는 개뿔. 우린 바쁘니까 꺼져.” ...

한창 예식장을 꾸미는 중이었던 젠이,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

엘디는 옆에 있던 넬라를 향해, ‘얘, 이상하지 않아?’라는 시선을 보냈지만, 넬라는 ‘그럴 만도 하지.’라는 미소로 응해줄 뿐이었다. ...

‘이 저택에 정상인 건 나밖에 없군. 아니, 케이라면…….’ ...

마지막으로 믿을 사람은 케이뿐이었다. ...

어쩌면 케이는 리시에게 이상한 부분이 있다는 걸 먼저 알아채서, 곁에 두고 관찰하기 위해 결혼을 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

케이는 영혼을 볼 수 없지만, 사람 보는 눈은 밝았다. ...

엘디는 자신의 형을 믿어보기로 했다. ...

“케이!” ...

노크도 없이 서재 문을 열고 들어간 엘디는, 먼저 케이의 영혼을 살펴봤다. ...

케이의 영혼은 언제나처럼 고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

“엘디.” ...

케이가 의자에 앉은 채 눈만 들어 엘디를 노려봤다. 기분이 안 좋아 보였지만, 엘디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

“그 여자, 뭔가 이상해.” ...

“네가 그 여자라고 부르는 사람이 내 아내는 아니기를 바란다.” ...

“솔직하게 말할게. 그래, 처음에는 형이 그 위틀로 공작의 딸이랑 결혼한다고 해서 미쳤나 싶었고, 그냥 그 여자가 마음에 안 들었어.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니. 우습잖아, 그런 거.” ...

케이가 계속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경계했고, 싫은 기분으로 그 여자를 상대했지. 그런데 그 순간, 그 여자 영혼이 묘하게 움직였어. 하마터면 거기에 홀릴 뻔했지. 이 엘드허트 그린이 홀릴 뻔했다고.” ...

“흐음.” ...

“수상쩍은 영혼을 가졌어, 형. 난 그런 걸 한 번도 본 적 없어. 마치…… 뭔가 다른 영혼이 그 여자 영혼에 섞인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뭔가가 그 여자에게 붙어 있어. 그 여자는 평범하지 않아, 형.” ...

“알아.” ...

역시! ...

엘디는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케이라면 눈치챘을 줄 알았다. ...

“리시는 아주 특별한 여자야.” ...

그런데 어째 케이의 표정이 묘하다. ...

“보면 볼수록 새로워. 언제나 날 놀라게 하지.” ...

케이는 몹시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엘디는 케이가 저런 식으로 미소짓는 걸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

리시에게서 수상쩍은 영혼을 봤을 때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경악했다. ...

“지금 그게 뭐 하는 거야, 케이?” ...

“내가 뭘?” ...

“왜 그렇게 멍청하게 웃어? 미쳤어?” ...

“내가 그랬나?” ...

케이가 한 손으로 제 입가를 문질렀다. ...

“뭐, 사랑하면 바보가 된다고들 하지. 내가 바보가 됐나 보군.” ...

엘디는 말문이 막혔다. 입술을 벌린 채 케이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

“다들 미쳤어.” ...

“미친 건 네 쪽이다, 엘디.” ...

케이가 미소를 지우고 천천히 일어나 엘디의 앞으로 걸어왔다. 엘디를 노려보는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나는 아이리스를 선택했고, 아이리스는 내 아내가 되었지. 그런데 오늘 아이리스를 위틀로라고 부르며 무례를 범했다더군.” ...

“제이미, 그 자식…….” ...

“엘드허트 그린. 내 아내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

케이가 엘디의 어깨를 세게 잡았다.   어깨뼈가 으스러질 것처럼 강한 힘이었다. ...

엘디는 케이가 얼마나 화났는지, 그리고 앞으로 그의 청을 무시하면 얼마나 더 화를 낼지 알 수 있었다. ...

엘디는 케이를 좋아하고 존경했기에, 케이의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상황을 믿고 싶지 않았다. ...

“케이, 설마…… 여자 한 명 때문에 동생을 버리는 거야?” ...

“여자 한 명이 아니라, 내 아내다. 만약 리시가 먼저 네게 무례를 범하고 네게 해를 끼치려 한다면, 나는 널 위해 리시와 싸우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 반대의 상황인 것 같은데, 엘드허트.” ...

옳은 말씀이었다. ...

“형이랑 싸우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내가 이러는 이유를 이해해야 해. 그 여자…… 아니, 아이리스의 영혼은 분명 정상이 아니야. 형도 내 눈에 보이는 걸 믿잖아.” ...

“믿어.” ...

“그런데도 그 여자, 아이리스를 위해 날 이런 식으로 내친다고?” ...

“아이리스의 영혼이 어떤 형태이든, 난 지금까지 내가 보고 경험한 아이리스를 믿어. 그리고 엘디. 난 널 내치는 게 아니라, 형수님에게 무례한 너를 혼내고 있는 거다.” ...

어깨를 잡은 케이의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

엘디는 케이의 눈동자를 살펴봤다. 그의 눈동자는 리시를 향한 신뢰로 견고하게 빛났다. ...

케이가 리시를 믿는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엘디는 케이가 리시의 기묘한 영혼에 홀릴 남자가 아니라고 믿었다. ...

“형의 선택이 옳기를 바랄게. 하지만 형의 선택이 틀렸더라도.” ...

엘디는 케이의 손을 쳐냈다. ...

“나는 형이 지금 나에게 한 것처럼 형을 대하지는 않을 거야.” ...

 

+++

케이는 엘디가 상처받았다는 걸 알았지만, 그를 달래줄 생각은 없었다. ...

리시를 수상하게 여기는 엘디의 마음은 이해했다. ...

엘디 입장에서는 여자에게 관심 없던 케이가 갑자기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랑 결혼한다고 하니,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

그래서 공들여 리시를 관찰했고, 그녀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겠지. ...

그렇다 해도 리시는 케이의 아내였다. 케이의 앞에서는 뭐라 떠들어대든, 리시의 앞에서 무례하게 행동한 것은 잘못이었다. ...

‘두 개의 영혼이라…….’ ...

엘디가 나간 후, 케이는 청첩장에 대한 답장 받은 것들을 가지고 방으로 가며 엘디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

‘엘디가 잘못 봤을 리는 없겠지. 리시의 영혼에 특별한 구석이 있는 게 분명해.’ ...

엘디는 ‘그런 건 처음 봤다.’라고 단언했다. ...

‘혹시 그게 리시가 미래를 아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관계있는 건가?’ ...

하지만 그건 리시를 의심할 이유가 되지 않았다. ...

모두 특별한 능력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

케이에게는 성유물의 힘을 억누를 수 있었고, 엘디에게는 원념, 집착 같은 것을 보는 힘이 있었다. ...

리시가 가진 힘의 정체는 알 수 없지만, 그것으로 케이에게 해를 입히지만 않는다면 아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케이는 리시가 자신에게 해를 입힐 리 없다고 확신했다. ...

리시는 침실 소파에 엎드려서 책을 읽고 있었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케이가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

케이는 잠시 방문 앞에 서서 리시를 살펴봤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엘디가 말하는 ‘영혼’이라는 걸 볼 수 없었다. ...

엘디의 눈에는 리시가 어떻게 보이는 걸까? ...

내 눈에는 그저 예쁘기만 한데. ...

“언제까지 그렇게 보고만 있을 거예요?” ...

리시가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

그녀의 음성을 듣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케이는 리시의 발치에 가서 앉으며 물었다. ...

“내가 온 줄은 언제부터 알았어요?” ...

“들어왔을 때부터.” ...

“책에 집중한 줄 알았더니.” ...

“집중력이 좋은 편은 아니에요.” ...

리시가 솔직하게 말하며, 빙글 몸을 돌려 누웠다. ...

리시의 작고 고운 발이 시야에 아른거렸다. 케이는 그녀의 가느다란 발목을 잡아서 끌어당겼다. ...

그녀의 몸이 쭉 끌려 왔고, 작은 발이 케이의 허벅지 위에 놓였다. ...

어떻게 이런 작은 발로 걸을 수 있는 걸까? ...

케이는 리시의 엄지발가락을 엄지와 검지로 꾹 눌렀다. ...

“아…….” ...

리시의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신음이 야릇했다. ...

사탕을 핥듯 그녀의 동그란 엄지발가락을 핥으면,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

하지만 지금은 은근히 달아오르는 욕망에 불을 지필 때가 아니었다. ...

“엘드허트가 당신에게 무례를 범했다고 들었어요.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리시.” ...

왜인지 리시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

놀라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표정. ...

리시는 때때로 이런 표정을 짓곤 했다. ...

“내가 뭔가 잘못 말했나요?” ...

“아, 아니요. 이런 일로 사과를 받을 줄은 몰라서. 괜찮아요. 엘드허트의 의심은 합당하니까.” ...

“합당하긴요. 당신은 내가 선택했고, 결혼식은 안 했어도 이미 내 아내예요.” ...

“케이, 선택을 한 건 나예요. 실제로 당신을 좀 협박해서 결혼하기도 했고. 잊었어요?” ...

잊고 있었다. 리시의 지적을 받은 후에야,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

“오히려 어머님, 아버님과 젠이 아무 의심도 없이 내게 잘해주시는 게 이상한 일이죠.” ...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리시. 두 분과 젠은 날 믿고 사랑하기에, 내가 선택한 여자 또한 믿고 사랑하는 거예요. 그게 당연하잖아요.” ...

이 당연한 일을, 리시는 몰랐나 보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

케이의 짐작대로 리시는, ...

‘그게 당연한 거라고? 단지 아들이 믿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가 선택한 여자까지 믿고 사랑해주는 게?’ ...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지난 삶, 알포드의 가족들은 그 당연한 걸 해주지 않았으니까. ...

‘아니, 애초에 알포드가 날 사랑한 것도 아니었지.’ ...

리시는 케이와 좋은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알포드가 떠오르는 게 끔찍이 싫었다. ...

얼마나 지나야 그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

“엘드허트에게 잘 말해두긴 했지만, 어쩌면 또 당신에게 무례를 범할 수 있어요. 그럴 때는 그 녀석의 뺨을 날려주도록 해요, 리시.” ...

케이는 엘디 때문에 불안한 듯했지만, 리시는 엘디의 문제가 그리 신경 쓰이지 않았다. ...

모든 사람이 자신을 좋아해주기를 바라는 건 오만이다. 날 싫어하더라도 내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

리시는 케이에게 미소로 답해준 후, 케이가 아까 테이블 위에 내려둔 청첩장 답장을 확인했다. ...

그린 가문의 결혼식이니만큼 답장을 보낸 이들도 호화로웠다. ...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

이오벳 옥보시더스 황태자. ...

‘황태자가 오다니…….’ ...

황제와 황태자는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황궁 밖으로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특히 황태자의 경우, 그 자리를 노리는 이들이 많기에 황제 자리에 오르기까지 몸을 사리는 경우가 많았다. ...

리시가 황태자의 답장을 빤히 보고 있자, 케이가 설명했다. ...

“이오벳 황태자와는 예전부터 아는 사이예요. 어릴 때, 아카데미에서 잠깐 같이 공부한 적이 있거든요.” ...

“아, 그렇군요.” ...

리시는 건성으로 대꾸하며, 지난 삶의 이 시기쯤에 황태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리려고 애썼다. ...

‘황태자가 무슨 사업 같은 걸 벌리려고 했던 것 같은데…… 정확하게 뭐였지?’ ...

기억을 더듬느라, 케이가 어깨를 감싸서 끌어당기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

“리시.” ...

중저음의 음성이 귓바퀴를 훑었을 때야, 아직 케이와 함께 있다는 걸 떠올렸다. 케이가 엄지와 검지로 리시의 작은 턱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

“날 너무 질투 나게 만들지 말아요.” ...

(46) 내 남편의 남동생. (3) ...

“질투?” ...

예상치 못한 단어에, 리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그래요, 질투.” ...

“음, 갑자기?” ...

“갑자기가 아니에요.” ...

케이가 리시의 손에서 살며시 황태자의 답장을 빼내, 그것을 팔락거리며 말했다. ...

“이오벳의 답장을 너무 심각하게 보고 있잖아요.” ...

“아……. 아아.” ...

리시는 어리둥절했다. ...

이오벳의 얼굴을 빤히 본 것도 아니고, 그저 그의 답장을 보고 있었을 뿐인데, 이 남자는 대체 어느 부분에서 질투하는 걸까? ...

리시가 당황해서 보내는 시선을 어떻게 오해한 건지, 케이가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

“너무 그렇게 보지는 말고. 나도 지금 내 행동 때문에 당황하는 중이니까.” ...

“아, 그래요?” ...

“그래요. 이런 건 처음이라…….” ...

케이가 리시를 똑바로 볼 수 없다는 듯 시선을 옆으로 움직였다. ...

리시는 왜인지 그런 케이가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뻗어 그의 양쪽 뺨을 감쌌다. ...

옆으로 도망쳤던 그의 회청빛 눈동자가 다시 리시에게로 향했다. ...

“알겠어요, 리시. 이런 거로 질투 안 할게. 이번 건 내가 좀 바보 같았다는 거, 나도 알아요.” ...

“아니, 그게 아니라…….” ...

케이의 질투가 싫지 않았다. ...

이게 질투할 일인가 싶어서 당황하긴 했지만, 싫은 건 아니었다. ...

“케이, 내 말 잘 들어요.” ...

“그 부분은 걱정 안 해도 돼요. 늑대는 청각이…….” ...

리시는 케이의 양 볼을 감싼 채, 엄지만 움직여 쫑알거리는 케이의 입술을 막았다. ...

엄지에 닿는 그의 입술이 보드라워서 기분 좋았다. ...

“나는 앞으로도 당신이 아닌 다른 사내의 이름을 되뇔 수 있고, 또 다른 사내를 뚫어지게 쳐다볼 수도 있고, 당신이 아닌 다른 사내에게 미소 지을 수도 있어요.” ...

케이가 미간을 좁혔다. ...

“하지만 케이. 이걸 알아야 해요.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오롯이 당신을 위한 것이라는 걸. 그리고 내가 그린 백작 부인으로서 기품과 명예를 잃을 만한 행동은 하지 않으리라는 걸.” ...

케이의 미간에 새겨진 주름이 서서히 펴졌다. ...

“어때요? 알아줄 수 있겠어요?” ...

케이가 입술을 벌려, 아직도 그의 입술을 막고 있는 리시의 엄지를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

그의 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

“좋아요. 하지만 당신도 알아줄 게 하나 있어요.” ...

“뭔데요?” ...

“내가 내 예상보다 더 질투 많은 남자라는 거.” ...

“그런 건 이미 눈치챘어요.” ...

“역시 내 아내는 눈치가 빨라.” ...

케이가 리시의 잘록한 허리를 두 팔로 감아 끌어당겼다. 그의 입술이 서서히 다가와 리시의 입술에 겹쳐지는 순간. 리시는 이 시기에 황태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떠올렸다. ...

“아!” ...

하고, 탄성을 내뱉은 리시가 두 손으로 케이의 가슴을 밀어냈다. ...

그리고 키스를 거부당해서 당황하는 케이에게 말했다. ...

“케이, 황태자에게 나를 자랑하도록 해요.” ...

“응? 아니, 물론 자랑할 생각이긴 한데…….” ...

“당신이 생각하는, 그 정도로는 안 돼요. 이렇게까지 자랑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자랑해요. 이 녀석, 머리가 약간 이상해진 거 아냐,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날 자랑해야 해요.” ...

“아…….” ...

케이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멍하게 리시를 쳐다봤다. ...

알 수 없는 여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지만, 지금처럼 알 수 없는 건 처음이었다. ...

타인에게 내 자랑 좀 해달라고 이렇게 강하게 요청하다니. ...

리시가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가리켰다. ...

“특히 이 부분에 대해 자랑해줘요.” ...

“당신이 예쁘다는 건 따로 자랑하지 않아도 알 만큼 알 텐데.” ...

“아니, 그게 아니고, 내 머리요.” ...

“머리? 요 예쁜 머리가 가끔 좀 이상하다는 걸 자랑하라고?” ...

자기 자랑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진지하던 리시가 키득 웃었다. ...

“아, 미안해요, 케이. 내가 지금 좀 미친 것처럼 보였겠네요.” ...

“아니, 미친 것까지는 아니고 살짝?” ...

케이가 검지로 관자놀이 주위를 빙글빙글 돌렸다. ...

리시가 까르륵 웃었다. ...

별로 웃긴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그녀가 경쾌하게 웃어주는 게 좋았다. ...

“황태자에게 내가 아주 영리하고 선견지명이 있는 여자라는 부분을 자랑해줘요.” ...

“난 당신이 자신을 영리하고 선견지명이 있다고 표현하는 게 좋아요. 아주 자신만만해, 내 아내는.” ...

“놀리지 말고.” ...

리시가 주먹으로 케이의 가슴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

“알겠어요. 그걸로 뭘 하려는 건지는, 이번에도 말해주지 않을 거죠?” ...

“말해줄게요.” ...

놀랍게도 리시는 케이의 귀에 대고 소곤소곤 자신의 계획을 털어놨다. ...

리시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케이의 눈이 점점 커졌고, 이야기가 끝났을 때 케이는 말했다. ...

“당신, 정말…… 영리하고 선견지명이 있네요. 거기다 사람 볼 줄도 알고.” ...

리시가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

“그래요. 그러니까 황태자에게 거짓 없이, 그저 진실만 전해요. 아이리스 그린이라는 여자에 대해서.” ...

 

+++

엘드허트는 창문으로 정원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

케이와 리시가 손을 잡고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케이는 때때로 리시의 머리를 넘겨주기도 하고, 키득키득 웃으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

케이가 저런 행동을 하는 건 처음 봤다. 리시 옆의 케이는 정말로 다른 사람 같았다. ...

“질투는 적당히 해, 엘디. 그래서 네가 브라더 콤플렉스가 있다는 소리를 듣는 거야.” ...

언제 왔는지, 옆에 서 있던 젠이 말했다. ...

“아무도 나에게 브라더 콤플렉스라는 소리를 하지 않아, 젠.” ...

“내가 했네. 계속 그딴 눈으로 리시를 노려보면, 다른 사람들도 하게 될 거고.” ...

“저 여자의 영혼은 이상해.” ...

“저 여자가 아니라 형수님이겠지. 그리고 네가 본 적 없다고 해서, 그게 잘못된 일인 건 아니야. 네 견문이 짧은 거겠지.” ...

“넌 대체 왜 그렇게까지 저 여자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거야?” ...

젠이 엘디를 돌아봤다. ...

“케이가 좋아하는 사람이잖아.” ...

“형이 잘못된 사람을 좋아하면, 그걸 말려야 하는 게 가족이야.” ...

“리시는 잘못된 사람이 아니야.” ...

“저 여자의 영혼은…….” ...

“수인은?” ...

엘디가 눈을 부릅떴다. ...

“모두 수인을 잘못됐다고 하지. 신의 저주를 받은 존재라고. 그럼 케이도, 유진이나 제이미 같은 애들도, 전부 잘못된 거야?” ...

“그거랑은 달라!” ...

“같아, 엘디. 같아.” ...

“아니, 그건…….” ...

“리시는 그저 독특한 영혼을 지녔을 뿐이야. 수인이 특별한 존재이듯, 리시도 조금 특별할 뿐이지, 잘못된 건 없어.” ...

엘디는 대응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젠이 다시 정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리시는 공작가에 있을 때 학대를 당한 모양이야.” ...

“뭐?” ...

“처음에는 케이가 좋아하는 여자고, 소문보다 더 예쁘고, 똑똑해 보여서 좋았어.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학대를 당했는데도, 그 사실을 창피해하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는 당당함이 좋아.” ...

글로번 위틀로 공작이 제 딸로 장사를 하려고 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리시가 그들에게 학대를 당하면서 살았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

엘디는 신성국의 성기사로서 여러 곳을 다니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보았다. 그중에는 가족에게 학대를 당한 아이들도 있었다. ...

그 아이들은 전부 죽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영혼은 어둡고 질척거리거나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흐릿한 색상이었다. ...

리시의 영혼에는 그런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눈이 아플 정도로 밝게 빛나는 영혼을 가졌다. ...

“그렇다고 해서 학대당한 아픔이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 ...

젠이 엘디의 팔을 툭 치며 덧붙였다. ...

“우리 가족까지 리시에게 아픔을 주지는 말자, 엘디.” ...

 

+++

윈디는 언제나처럼 제 어미 옆에 딱 붙어서 푸릉, 푸릉, 콧김을 내뱉었다. ...

리시를 향한 새까만 눈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

윈디의 어미인 화이트가 리시를 향해 안쓰럽다는 시선을 보냈지만, 리시는 그걸 깨닫지 못할 정도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

결혼식에 이오벳 황태자가 온다는 건, 리시에게 아주 좋은 일이었다. 시간을 돌아온 후, 이 세상이 리시를 위해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

‘그래도 자만해서는 안 돼.’ ...

윈디를 향해 사과를 내민 채, 이오벳을 어떤 식으로 끌어들일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

“딴생각을 하는군.” ...

뒤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딴 식으로 대하니, 저 꼬맹이가 마음을 안 열지.” ...

엘디가 리시의 옆으로 걸어와서, 리시가 들고 있던 사과를 빼앗듯 가져갔다. ...

엘디는 사과를 처음 보는 것처럼 가만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

“케이가 유니콘을 선물했다지? 넌 유니콘을 선물 받는 게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알고 있긴 해?” ...

리시는 대답 없이 사과를 빼앗으려 했지만, 엘디는 손을 쓱 움직여 리시의 손을 피했다. ...

“유니콘을 앞에 두고 딴생각이나 하는 걸 보면, 유니콘의 가치를 모르는 것 같은데…… 케이가 왜 너 같은 여자에게 이 귀한 생물을 선물했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

“내가 이 집안에 안 어울린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라면, 네 형에게 가서 해. 울면서 매달리면 나랑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해줄지도 모르잖아.” ...

리시가 비아냥거리는데도 엘디는 기분 나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

“케이한테도 그런 식으로 대하나?” ...

“그럴 리가. 애교 많고 사랑스럽고 연약한 척하지.” ...

엘디가 작게 웃었다. ...

“그런 것 같지는 않던데. 애교 많고 사랑스럽고 연약한 척하는 여자들은 널리고 널렸거든. 그 여자 중 반 이상이 케이를 가지고 싶어 하는데, 그동안 케이는 눈길 한번 준 적 없단 말이지.” ...

엘디가 리시를 향해 성큼 다가왔지만, 리시는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서서 엘디를 올려다봤다. ...

“아주 묘한 방법을 써서 우리 가족의 마음을 손에 넣은 것 같은데, 내 마음을 손에 넣는 건 쉽지 않을 거야, 아이리스.” ...

리시는 엘디가 이제 리시를 부를 때, ‘아이리스 위틀로’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

“엘드허트.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난 네 마음 같은 거, 줘도 안 가져.” ...

이번에도 엘디는 기분 나빠하지 않고 씩 웃기만 했다. ...

“어찌 되었든, 그린 가문에 들어왔으니 남들이 보는 앞에서 가족으로 대해주기는 하겠어. 하지만 널 신뢰한다는 뜻은 아냐. 난 네가 평범한 여자가 아니라고 확신하거든.” ...

“남들 앞에서라도 예의를 차려주겠다니 다행이네. 네 망나니 같은 행동으로 내 남편의 명예에 작은 흠집이 생길까 봐 걱정했거든.” ...

엘디는 콧등을 살짝 찌푸려 준 후, 윈디를 향해 돌아섰다. 엘디가 사과를 위로 던졌다가 받으며 말했다. ...

“좋으나 싫으나 내 형수인데, 새끼 유니콘 한 마리 길들이지 못한다고 하면 가문의 수치겠지. 너 때문에 수치를 당하고 싶지 않으니, 유니콘 다루는 방법 정도는 알려줄게.” ...

예상치 못한 배려였다. ...

‘그래, 엘드허트는 케이가 유니콘을 어떻게 길들였는지 알겠지.’ ...

케이조차 도와주지 않는 상황이기에, 엘디의 오지랖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

“유니콘은 영리한 생물이라서, 진심으로 대해야 해. 딴생각을 하면서 주는 사과 따위, 받아먹지 않는 게 당연하잖아.” ...

그렇구나! ...

“게다가 저 녀석은 어린애야. 애정을 가지고 저 꼬맹이에게 집중한다는 걸 알려줘야 해. 나는 너를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한단다, 라는 느낌을 전해줘야 하지.” ...

엘디가 윈디를 향해 다정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놀랍게도, 제 어미 옆에 붙어 있던 윈디가 엘디를 향해 조금씩 다가왔다. ...

엘디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윈디를 향해 사과를 내밀었다. 엘디를 향한 윈디의 까만 눈동자가 리시를 볼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빛났다. ...

“먹어, 꼬맹이. 그 옹골찬 주둥이를 움직여봐.” ...

윈디가 프힝, 하고 애교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다. ...

그리고. ...

콰직-! ...

엘디의 손을 대차게 물어버렸다. ...

(47) 내 남편의 남동생. (4) ...

“훗.” ...

엘디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웃음을 흘렸다. ...

‘분명 뼈가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는데.’ ...

리시는 걱정스럽게 엘디를 쳐다봤지만, 엘디는 이런 일을 예상했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윈디를 향해 내민 오른손은 여전히 윈디의 입에 물려 있는 상태였다. ...

“영리한 녀석이군.” ...

영리하다고? 사과가 아니라 네 손을 물어뜯었는데? ...

“꼬맹이. 내 손이 사과같이 탐스럽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이건 먹는 게 아니야. 착하지?” ...

엘디가 왼손으로 윈디의 턱을 쓰다듬어주려 했지만, 윈디가 힝, 하며 고개를 털어냈다. 물론 엘디를 문 입에서 힘을 빼지는 않았다. ...

“엘드허트, 괜찮아?” ...

이쯤 되니 리시도 걱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

엘디가 별일 아니라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

“나한테 묻는 거야? 내가 누군지 몰라?” ...

알지. 바보잖아. 손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데, 자존심 때문에 괜찮은 척하는 바보. ...

“난 테세이 성기사단의 부단장 엘드허트 그린이야. 유니콘 꼬맹이가 문 정도는 비명을 지를 일도 아니라고.” ...

엘디의 목덜미에 혈관이 툭 불거져 나왔다. ...

아무래도 엄청 아픈 걸 참는 것처럼 보이는데. ...

“야, 꼬맹이. 오빠가 좋은 말 할 때 이거 놓자. 응?” ...

  콰직-! ...

윈디가 더 세게 물었다. ...

이번에는 엘디도 못 참겠는지 눈을 부릅떴다. ...

“왜 또 화가 난 건데?” ...

“걔, 남자애거든.” ...

“하!” ...

엘디는 진퇴양난에 빠진 듯했다. ...

리시의 앞에서 그렇게 잘난 척을 다 해놨는데, 여기서 아프다고 길길이 날뛸 수도 없는 노릇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 통증을 계속 참는 것도 힘들 거고. ...

리시는 엘디를 도와주기로 했다. ...

“윈디.” ...

리시가 부드럽게 윈디를 불렀다. ...

엘디의 조언대로, 윈디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소중한 생물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윈디를 바라봤다. ...

“그 아저씨 손 놔주자.” ...

“아저씨라니……!” ...

“응? 윈디. 그 못된 아저씨 손 놔주고 이리 와.” ...

윈디가 까만 눈동자를 또로록 굴려 엘디를 한 번 쳐다보더니, 킁,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

콧물이 분무해 엘디의 얼굴에 쏟아졌다. ...

“야, 콧물! 드러운 자식.” ...

얼굴에 묻은 콧물 때문에 엘디는 자신의 오른손이 자유로워졌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

엘디가 얼굴을 닦는 동안, 윈디는 차박차박 걸어와 리시의 앞에 멈췄다. 작고 사랑스러운 생물은, 고개를 바짝 들고 얌전히 리시를 응시했다. ...

그 순간, 리시의 가슴에 무언가 몽글몽글한 것이 가득 차올랐다. 이 작고 영리하고 짓궂은 생명체가 몹시도 사랑스러웠다. ...

애정 담긴 미소가 저절로 흘러나와 리시의 입가를 적셨다. 리시가 살며시 두 팔을 들어 올리자, 윈디는 리시가 뿔에 다치지 않도록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리시의 배에 머리를 비볐다. ...

“너, 정말 착하구나.” ...

리시가 윈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

“착하긴. 그건 악마야.” ...

엘디가 욱신거리는 오른손을 문지르며 으르렁거렸다. ...

“정말 예쁘다, 윈디. 털도 부드럽고…… 귀여워.” ...

리시는 엘디를 깨끗이 무시했다.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윈디와 눈높이를 맞췄다. ...

“윈디, 내가 부족한 게 많을 거야. 나는 어떻게 아껴주고 예뻐해주고 소중하게 여겨줘야 하는지, 아직 잘 모르거든. 하지만 지금 네가 몹시 소중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아. 앞으로 더 잘 알게 될 테니까, 부족한 게 있어도 이해해줘. 알겠지?” ...

윈디가 괜찮다고 말하듯 뿔 옆면으로 리시의 목덜미를 비볐다. ...

엘디는 아픈 손을 문지르며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봤다. ...

예민하고 경계심 강한 윈디가 리시에게 마음을 여는 순간, 리시의 영혼이 이상하게 빛나는 느낌은 없었다. ...

‘저렇게 보면 평범한 여자로 보이기도 하는데. 아니지, 평범한 여자의 영혼은 저렇게 무시무시하게 빛나지는 않지.’ ...

이런 순간에도 리시의 영혼은 눈이 시리게 빛나고 있었다. ...

엘디의 시선을 눈치챈 리시가 왜 그러냐는 듯 엘디를 올려다봤다. 엘디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리시가 말했다. ...

“손, 많이 아픈 것 같은데.” ...

엘디는 인상을 찌푸렸다. ...

“날 도와줬다고 생각하지 마, 아이리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니까.” ...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도와준 쪽에서 해야 하는 말 아냐? 내가 아니었다면 네 사과 같은 손, 사과처럼 반쪽으로 툭 잘렸을걸.” ...

리시가 엘디의 발 근처에 떨어져 있는 사과를 가리켰다. 아까 엘디가 들고 있던 사과는, 윈디의 이빨에 반으로 쪼개진 상태였다. ...

“오늘 일은 잊어도 좋아, 아이리스.” ...

“그 말도 내가 해야 하는 말 같은데.” ...

하여간 저 여자는 한마디도 안 진다. ...

그 점이 싫은 건 아니었다. 연약한 척하면서 살짝만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어도 울음을 터뜨리는 여자보다는 낫다. ...

“아무튼, 나는 널 여전히 의심하니까 지켜보겠어, 아이리스.” ...

그 말에 리시가 피식 웃더니, 몸을 일으켜 엘디에게 다가왔다. 엘디의 앞에 선 리시가 손바닥으로 엘디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

생각지도 못한 행동이라서, 아무리 엘디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굳어버린 엘디를 향해, 리시가 말했다. ...

“난 널 경계하지 않을 거야, 엘드허트. 고집쟁이에 자존심이 강한 아이를 귀엽게 여기는 편이거든.” ...

애 취급을 당했다. ...

엘디는 리시가 자신보다 6살은 어리다는 걸 알고 있었다. ...

경악해서 입술만 뻐끔거리는 엘디를 보며 리시가 덧붙였다. ...

“꼭 윈디 같아.” ...

 

+++

“아이리스가 몇 살인 줄 알아? 고작 20살이라고! 그런데 나한테 아이래. 이게 말이 돼?” ...

“흐응.” ...

“한 주먹이면 날아가게 생겨서는, 어디서 감히 날 애 취급해?” ...

“관둬. 한 주먹으로 형수님을 날려버리면, 넌 내 총에 죽어, 엘디.” ...

엘디가 아무리 떠들어대도 총만 만지작거리던 나단이, 한 주먹에 날릴 거라는 말에 반응했다. ...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진짜로 때리겠냐?” ...

“모를 일이지. 네 성질머리에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알아?” ...

“하여간 그 여자는 이상해.” ...

리시의 어린애 취급에 화가 나야 마땅했다. ...

하지만 그 순간, 엘디는 정말로 한참 나이가 많은 여성에게 꾸중을 듣는 기분을 느꼈다. ...

그런 기분을 느꼈다는 건, 당연히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 ...

“이상할 거 없어. 다른 사람들 눈에는, 네가 더 이상해 보일 테니까. 형수님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너 한 명, 널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수천, 아니, 수만, 수백만 명. 그럼 진짜로 이상한 쪽은 누굴까?” ...

나단이 총구로 엘디를 가리켰다. 엘디는 검지로 총구를 옆으로 치우며 대꾸했다. ...

“나는 정당한 의심을 할 뿐이야.” ...

“그게 이상하다는 거지. 형수님이 이 저택에 들어온 후로 아무 문제도 없었고, 대장은 굉장히 즐거워 보여. 뭐, 우리도 예쁜 형수님 얼굴 보면 기분 좋고.” ...

“얼굴에 홀리지 마, 나단. 넌 여자 얼굴 따위에 홀리는 녀석이 아니잖아.” ...

“대장이 좋아하는데 얼굴까지 예쁘니까 더 좋은 거지. 대장은 우리를 위해서 가족도 만들지 않으려고 했던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누구 좋다고 저러고 다니는 걸 보니까 안심이 된다고 해야 하나?” ...

“…….”

“노백작님 부부도, 젠도, 다 비슷한 마음이겠지. 케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아시니까, 케이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걸 기뻐하시는 거잖아. 그에 비해 넌.” ...

나단의 고운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

“징그러워. 자기 형 뺏겼다고 형수님을 질투하는 것처럼 보여서. 아주 역겨워.” ...

“질투하는 게 아니야. 케이를 걱정하는 거지.” ...

“걱정도, 경계도, 대장이 알아서 할 일이고. 네가 우려하는 일이 벌어지면 우리도 나설 거고. 벌써부터 네가 형수님한테 ‘우리 형 뺏어가지 마, 우리 형 데려가면 싫어, 싫어.’ 같은 짓을 할 건 없어.” ...

“난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아, 나단.” ...

“내 눈엔 그렇게 보이는데?” ...

나단의 방에 오기 전에 방문한 어머니와 젠에게도 비슷한 말을 들은 터라, 엘디는 반박할 말이 없었다. ...

“그나저나 넌 그새 취향이 바뀌었냐? 총에 보석을 왜 그렇게 박아넣었어?” ...

나단이 만지는 총은 손잡이 부근에 연분홍색 보석이 박혀서 화려하게 빛났다. ...

“아, 이거. 결혼 선물로 형수님께 드리려고. 형수님도 여차할 때 자기 몸을 지킬 무기가 필요하잖아.” ...

엘디는 오전에 유진과 윌리스가 결혼 선물로 뭘 준비할지를 두고 심각하게 논의하는 현장을 목격했었다. ...

“다들 정신이 나갔어! 그 여자가 뭐나 된다고!” ...

엘디가 분통을 터뜨렸지만, 나단은 깨끗이 무시하고 질문을 던졌다. ...

“그래서, 넌 결혼 선물로 뭘 드릴 건데?” ...

엘디가 씩씩거리다가 되물었다. ...

“여자들이 결혼 선물로 제일 가지고 싶어 하는 게 뭐지?” ...

 

+++

하객들이 그린 백작 저택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

결혼식까지 서채에 묵는 이들도 있었고, 근처에 숙소를 잡거나 자신의 별장에 머물기로 한 이들도 있었다. ...

리시는 손님을 맞이하는 현장에 나가지 않았다. 신부는 결혼식 전야제 파티가 열리기 전까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

“브리트니 양이 자기가 안주인이라도 된 듯이 손님을 맞이하는 모양이에요. 조금 유명한 가문이다 싶으면 나서서 이 저택 안내까지 해준다던데, 괜찮을까요?” ...

리시의 머리를 빗겨주던 크리시나가 말했다. ...

“응, 괜찮아요.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내버려둬요.” ...

어차피 브리트니가 할 짓이야 뻔했다. 브리트니가 뭘 하든, 그 행동은 앞으로 그녀의 발목을 잡아 진탕에 끌어들이게 될 것이다. ...

리시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저 멀리 보이는 저택 정문 앞이 유독 북적거렸다. 정문 앞에 황실 마차가 서 있었다. ...

‘황태자가 왔군.’ ...

결혼식 첫 번째 전야제 파티는 내일. ...

파티가 열리기 전까지는 황태자가 리시라는 인물에 대해 호기심을 가져야만 한다. ...

‘케이가 알아서 잘해주겠지.’ ...

 

+++

브리트니는 신이 났다. ...

신부인 리시가 아무 데나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기에, 저택은 브리트니의 세상이나 마찬가지였다. ...

남자 귀족이 올 때마다 브리트니는 그들에게 주의하라고 경고했다. ...

“그린 백작님은 질투가 얼마나 많은지…… 만약 후야제 때 내 동생에게 춤을 청하면 그린 백작님의 미움을 사게 될 거예요.” ...

후야제 때 아무에게도 댄스 신청을 받지 못한 신부는 조롱을 당했다. 젊은 귀족들은 다들 케이의 환심을 사고 싶어 하니, 리시에게 춤을 청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신부를 위한 자리에 조용히 앉아만 있을 리시의 모습을 상상하자, 묵은 체증이 쭉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

‘황태자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화가 났는데, 생각해보면 나에게는 좋은 기회야. 아마 황태자도 아이리스가 아닌 날 보려고 온 거겠지.’ ...

브리트니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

‘얼른 후야제를 했으면 좋겠네.’ ...

황태자가 위틀로 공작가의 브리트니를 황태자비로 염두에 두고 있다는 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

황태자는 브리트니에게 춤을 청할 것이고, 그러면 다른 귀족들 역시 너도나도 브리트니에게 춤을 청하리라. ...

리시는 모두에게 외면당할 것이고. ...

‘나는 모두가 원하게 될 거야. 알겠어, 아이리스? 이번 파티의 주인공은 나야.’ ...

브리트니는 마차에서 내리는 황태자를 향해 더없이 우아하고 선량한 미소를 지었다. ...

(48) 늑대의 털갈이 ...

마차에서 내린 이오벳은 모두가 고개를 숙인 가운데, 유일하게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자신을 마주 보는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

‘브리트니 위틀로.’ ...

브리트니는 눈이 마주칠 줄 몰랐다는 듯 깜짝 놀라더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

‘인형처럼 생겼군.’ ...

위틀로 공작이 잘생겨서 그런지, 그 딸인 브리트니도 상당한 미모였다. ...

황태자비야 누구를 들이든 상관없지만, 이왕이면 예쁜 편이 좋겠지. ...

‘하지만 그보다는…….’ ...

이오벳은 고개를 들었다. ...

저택 건물 2층의 커튼이 사락, 흔들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까지 누군가 그 뒤에 서서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처럼. ...

‘위틀로 공작가의 꽃인가?’ ...

아이리스의 초상화를 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위틀로 공작은 저 예쁜 브리트니도 사교계에 내보내는데, 너무 어여쁘다며 꽁꽁 감춰둔 아이리스가 어떤 생김새일지 몹시 궁금했다. ...

손님은 손님용 별채인 서채에 머무는 것이 보통이지만, 황태자는 귀빈이기에 본채의 특별실로 안내받았다. ...

저택의 주인인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이 몸소 안내했다. ...

“방은 마음에 드십니까?” ...

“훌륭하군.” ...

“부디 편히 머무십시오.” ...

케이가 그냥 나가려고 하기에, 이오벳은 케이의 손목을 붙잡았다. ...

“그린 백작. 그냥 나갈 셈인가?” ...

“제게 명하실 것이 있습니까, 황태자 전하?” ...

이오벳은 보좌관인 세트니에게 나가보라고 눈짓했다. ...

세트니가 나가자, 이오벳이 케이를 노려봤다. ...

“한 번만 더 그 징그러운 말투를 사용하면, 엉덩이를 걷어차주지.” ...

“저런. 그 빌어먹을 성질머리는 여전하십니다, 황태자 전하.” ...

“케이브란트 그린. 자꾸 이러면, 그냥 간다?” ...

이오벳이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리듯 말하자, 케이가 싱긋 웃었다. ...

“성질 급한 건 여전하네, 황태자 전하.” ...

어릴 적, 황태자가 되기 전 잠시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다. ...

케이는 황자인 이오벳을 모두가 어려워할 때, 유일하게 스스럼없이 대해줬다. 황자로 태어나 황실의 온갖 모략에서 살아남아야만 했던 이오벳에게, 케이는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

“설명해.” ...

“뭘?” ...

“이 결혼에 대해.” ...

“내 나이가 벌써 27살이야, 전하. 이 나이에 결혼하지 않은 게 더 이상한 거였어.” ...

“더 이상한 게 뭔지 알려줄까? 너는 메어리 공주가 그렇게 따라다니는데도 무시했었어. 그런데 난데없이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고?” ...

미나스아릭 왕국의 메어리 케트벤 공주. ...

엘레론드 대륙의 아름다운 여성을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이름이었다. ...

메어리가 케이브란트 그린을 좋아하고, 결혼하고 싶다며 따라다녔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

몇 년 전에는 아예 짐을 싸 들고 케이의 저택에 찾아왔다가, 케이가 저택에 없다는 걸 알고는 그린 노백작 부부가 사는 저택으로 가서 한참을 머물다가 떠났다. ...

그때 귀족들 사이에서는, 메어리가 그린 노백작 부부를 졸라서 케이와의 결혼을 승낙받았을 거라는 소문이 돌았었다. ...

그 후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자 소문도 서서히 사라지긴 했지만. ...

“이오.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 아니라 그린 백작가의 꽃이야. 관청에 이미 혼인신고를 했다는 거 알잖아.” ...

“위틀로 공작은 형편없는 놈이야.” ...

“그리고 전하는 황태자비 자리에 위틀로 공작의 장녀를 염두에 두고 있지.” ...

“당연히 그래야지. 외척은 형편없는 편이 낫거든. 그러면서도 적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하지만 넌 달라, 케이. 위틀로의 막내딸보다는 메어리 공주가 그린 가문에는 더 도움이 됐을 거야.” ...

“글쎄. 내 아내는 이미 우리 가문에 큰 도움이 되고 있어서. 물론 도움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결혼한 건 아니지만.” ...

“위틀로의 꽃이 네게 도움이 된다는 말을 하려면, 적어도 네가 금광을 주고 그녀를 사 왔다는 소문은 돌지 않게 했어야지. 사람들이 네 결혼에 대해 뭐라고 떠들어대는 줄 알아?” ...

“알아. 그린 백작도 결국은 별수 없는 남자입네, 어쩌네 떠들어대겠지.” ...

“그럴 가치가 있어?” ...

“넘쳐, 이오. 넘쳐흘러.” ...

순간, 이오벳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

케이의 입가에 번지는 감미로운 미소. ...

이오벳은 케이가 저런 미소를 짓는 걸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

케이의 미소는 나타날 때만큼이나 순식간에 사라졌다. ...

“이오. 내가 단지 외모에 홀려서 아내를 선택했다고 생각하면 서운해.” ...

다른 게 있구나. ...

이오벳은 케이가 그렇고 그런 사내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

“그리고 이오. 내가 선택한 게 아니야.” ...

케이가 이오벳에게 가까이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

“그녀가 날 선택해준 거지.” ...

 

+++

그저 예쁠 준비만 해야 하는 신부와 달리, 신랑은 할 일이 많았다. ...

젠과 넬라에게 잡혀 내일 입을 드레스를 입어보고 헤어스타일과 장신구를 점검받고 나니 할 일이 별로 없었다. ...

책을 조금 읽고 있노라니, ...

“아이리스 님. 일찍 주무셔야 합니다.” ...

크리시나가 피부 상태를 위해 일찍 자야 한다고 잔소리했다. ...

어쩔 수 없이 침대에 누웠는데 의외로 금방 잠이 들었다. ...

스륵, 이마를 스치는 손길에 눈을 뜨니 케이가 보였다. 잔잔한 회청빛 눈동자가 이쪽을 향해 있는 게 좋았다. ...

“깨워서 미안해요.” ...

중저음의 목소리도 듣기 좋았다. ...

“아니. 일은 끝났어요?” ...

“응.” ...

케이가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한 이불 아래로 그의 따스한 체온이 전해져서, 잠결에도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

그는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 누운 채 리시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

‘전에는 더 가까이에서 잤던 것 같은데.’ ...

언젠가부터 케이가 필요 이상으로 리시에게 가까이 오지 않게 되었다. ...

‘언제부터였더라?’ ...

떠올리다가 귀찮아져서 그만뒀다. 그보다는 케이를 끌어안고 싶었다. ...

오랜만에 그의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의 체취를 마음껏 들이마시고 싶었다. ...

이런 기분이 드는 게 당혹스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다. ...

‘나, 왜 이러지?’ ...

케이는 바른 자세로 누워서 눈을 감고 있었다. 두 손은 그의 가슴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

마디가 굵은 그의 손가락이 예뻤다. 그 손가락에 깍지 끼고 싶었다. ...

‘정말 왜 이래?’ ...

리시는 눈을 질끈 감았다. ...

‘잠이나 자자.’ ...

그럼에도 아쉬운 기분을 전부 거두기 힘들어, 웅얼거리듯 내뱉었다. ...

“멍멍이가 좋은데.” ...

그가 늑대 모습이라면, 털이 보드랍다는 핑계로 끌어안을 수 있으니까. ...

슬쩍 눈을 떴더니, 그가 눈을 감은 채 싱긋 웃는 게 보였다. ...

눈을 한 번 깜빡이자, 그가 있던 자리에 거대한 검은 늑대가 얌전히 엎드려 있었다. 늑대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리시는 이 사랑스러운 검은 늑대가 자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

그래도 모르는 척 꼬물꼬물 다가가, 늑대의 허리 위에 제 팔을 올렸다. ...

늑대가 꿈틀 긴장하는 게 전해졌다. ...

리시는 늑대의 보드라운 털에 얼굴을 묻었다. ...

이제야 제 자리를 찾은 기분이 드는 연유는 무엇일까? ...

의문에 대한 고민은 길지 않았다. 리시는 늑대를 끌어안은 채,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크리시나와 에르웰이 왔을 때, 리시는 방 거실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

그 옆에는 케이가 올려보낸 빵과 수프, 과일잼과 버터, 샐러드와 고기조림이 담긴 트롤리가 놓여 있었다. ...

“일찍 왔네요.” ...

리시가 가볍게 인사하며 빵을 향해 손을 뻗는데, 크리시나가 얼른 달려와 트롤리를 옆으로 밀어냈다. ...

리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크리시나를 올려다봤다. ...

음식을 갑자기 치운 것도 놀랍지만, 크리시나의 움직임이 엄청나게 빨랐기 때문이다. ...

“아침을 얼마나 드셨나요, 아이리스 님?” ...

“빵 하나에, 오렌지 하나?” ...

“그럼 충분해요.” ...

“날 굶겨 죽일 셈이에요, 크리시나?” ...

“어쩔 수 없어요. 파티의 시작은 오후 4시. 가장 아름답게 드레스를 입으시려면 오늘은 아무것도 드시지 말았어야 해요. 이미 드셨으니 어쩔 수 없지만…….” ...

리시는 한숨을 삼켰다. ...

드레스를 입기 전에는 굶어야 한다는 걸 깜빡했다. ...

그래서 리시는 지난 삶, 파티에 참석하는 걸 싫어했었다. ...

“그런 표정을 지으셔도 어쩔 수 없어요. 오늘의 주인공은 아이리스 님이시니, 누구보다도 빛나셔야죠.” ...

“늑대 털…….” ...

그때, 에르웰이 바닥에서 집어 든 검은 털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

리시는 깜짝 놀라서 에르웰을 돌아봤다. ...

에르웰의 눈동자가 전에 없이 날카롭게 빛났다. ...

“아이리스 님. 간밤에 이 방에 늑대가 드나든 것 같습니다. 검은 늑대인 듯한데, 어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

“예? 아…… 늑대가 드나든 적은…….” ...

“또 늑대 털.” ...

에르웰이 바닥에서 털 하나를 더 집어 올렸다. ...

리시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

“길이로 봐서는 큰 놈인 것 같은데…….” ...

“늑대라니. 이 저택에 늑대가 함부로 들어오는 게 말이 되니?” ...

크리시나가 나무랐지만, 에르웰의 눈빛은 여전히 흉흉했다. ...

“봐, 시니. 이거 늑대 털이라고. 잘 봐봐.” ...

에르웰이 크리시나의 눈앞에 털 두 개를 내밀었다. ...

눈을 가늘게 뜨고 털 모양을 확인한 크리시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

“정말이네. 아이리스 님, 혹시 다치신 곳은…… 간밤에 뭔가 침입한다거나 그런 느낌은 못 받으셨어요?” ...

“아…… 전혀요. 아무것도…….” ...

“어쩌면 여기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잠시 기다리세요, 아이리스 님.” ...

리시가 말리기도 전에 에르웰이 움직였다. ...

에르웰은 늑대가 몸을 감출 만한 곳을 찾아 샅샅이 뒤졌다. ...

리시는 난처했다. ...

저게 케이의 털이라는 걸 알릴 수도 없고. ...

한참 방을 뒤진 에르웰이 의아함 가득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

“침실로 향하는 문 근처에 털이 많이 떨어져 있던데……. 아이리스 님, 침실에 들어가서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

“아니, 안 돼요.” ...

리시가 단호하게 말했다. ...

“하지만…… 늑대가 드나드는 거라면 큰일입니다. 특히 굶주린 늑대는 위험해요. 이건 백작님께 알려야 하는 문제예요.” ...

리시는 이 사실을 알렸을 때 케이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

리시가 에르웰의 움직임을 쫓는 동안, 어딘가로 사라졌던 크리시나가 제이미와 함께 돌아왔다. ...

“실례하겠습니다, 아이리스 님. 뭔가 큰일이 벌어졌다고 들었는데요.” ...

“이것 봐요, 제이미.” ...

에르웰이 제이미의 눈앞에 늑대 털 몇 개를 내밀었다. ...

“늑대 털입니다. 늑대가 아이리스 님의 침실에 드나드는 것 같아요. 검은 놈일 거고요.” ...

“아.” ...

제이미는 입술을 살짝 벌린 채 굳었다. 웃음이 터져 나오는데 웃을 수 없어서 움직임을 멈춘 듯했다. ...

“굶주린 놈인 게 분명합니다. 이 근처에 먹을 게 없나 어슬렁거리다가 들어온 거겠죠. 이놈이 아이리스 님을 덮치기라도 하면, 연약한 아이리스 님의 목은 그대로 부러질 거예요.” ...

“아…… 덮치면, 그거…… 큰 문제죠.” ...

“경계를 강화해야 합니다. 침실에 숨어 있을지도 몰라요. 가서 찾아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침실이라서. 적어도 백작님께 알려서 침실을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그렇지요. 살펴봐야겠지요. 백작님께는 잘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

“그리고, 여기 보세요. 이 침실 문 앞에 털이 상당히 많은 거로 봐서는 침실에 들어가기 전에 문 앞에서 막 뒹군 것 같아요.” ...

에르웰이 침실 문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

제이미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웃음을 참느라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

“털갈이하는 걸까요?” ...

에르웰이 심각하게 묻는 말에, 제이미가 웃음을 참다가 꾸룩, 하고 이상한 목 울림을 냈다. ...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한동안 표정을 갈무리하던 제이미가, 간신히 대꾸했다. ...

“뭐, 애교가 많은 늑대일지도요.” ...

(49) 황태자 이오벳 (1) ...

제이미가 경계를 강화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돌아갔지만, 에르웰은 침실 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그러는 동안 크리시나는 바삐 움직였다. 하녀들에게 시켜 욕조의 물을 채우고 향료와 꽃잎, 과일을 넣고, 리시가 목욕하는 동안 얼굴에 팩도 해줬다. 목욕을 끝낸 후에는 머리를 말리고 한참 동안 빗질했다. ...

그쯤에는 에르웰도 크리시나가 시킨 일을 하느라, 늑대 생각에서는 벗어난 듯했다. ...

화장하고 머리를 하고 드레스까지 입었더니 거의 4시였다. ...

“시간이 많은 줄 알았는데…….” ...

리시는 파티에 간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꾸며본 적이 없었다. ...

“신부가 꾸밀 땐,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부족해요.” ...

크리시나가 심각하게 보석함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

“검은 드레스니까 목걸이는 하얀색이 좋을 것 같은데. 이런 느낌은 어떠세요?” ...

크리시나가 화려한 목걸이 하나를 꺼내 리시의 목에 대보며 말했다. ...

“마음에 들어요.” ...

“아니, 이건 헤어스타일이랑 안 어울리네요. 이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

크리시나가 다른 목걸이를 꺼냈다. ...

리시는 첫 번째 목걸이와 두 번째 목걸이의 차이를 알 수 없었다. 거울 구석에 비친 에르웰도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음, 이것보다는 이게 나으려나?” ...

“다 비슷한 것 같은데.” ...

“다 비슷하긴요.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지는데.” ...

크리시나는 예술가 집안이다 보니, 보는 눈이 남다른가 보다. ...

“이 목걸이가 나은 것 같기도 하네요. 여기에 이 귀걸이를 하면…… 아니, 아니야. 이 귀걸이는 색이 좀 죽어요. 차라리 이 귀걸이가 낫겠어요.” ...

장신구를 고르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

귀걸이를 착용하고 있을 때, 음악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

파티가 시작한 모양이다. ...

전야제 첫 번째 파티는 본채에 있는 연회장에서 열린다. ...

“어머, 어머. 큰일이네. 아직 머리핀도 고르지 못했는데.” ...

“크리시나. 난 이 머리핀도 괜찮은 것 같아요.” ...

“아니요, 아이리스 님. 이 머리핀은 아이리스 님의 머리카락 색깔을 못 살려요. 귀걸이가 흰색이니, 머리핀은 드레스에 맞추는 게 좋겠어요. 음, 이거…… 아니, 이게 낫겠네요.” ...

틀어 올려서 고정한 머리에, 검은색 진주가 박힌 머리핀을 꽂고 나서야 리시는 숨을 돌릴 수 있었다. ...

똑똑- ...

힐을 신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

“이제 슬슬 내려가야 해요.” ...

케이가 기다리다 못해 노크한 듯했다. ...

크리시나는 힐까지 신은 리시를 아래위로 쭉 살펴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리시는 안도했다. ...

크리시나가 ‘아직 안 돼요.’라고 말할 수도 있어서 긴장하던 참이었다. ...

“아름다우세요, 아이리스 님.” ...

“맞아요. 지금까지 전 아이리스 님만큼 아름다운 여자는 본 적이 없어요. 우와, 진짜 쩔어…….” ...

퍽-! ...

크리시나가 에르웰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

에르웰이 크리시나를 향해 눈을 부라리는 걸 보며, 리시는 작게 웃었다. ...

“그 아름다운 여자, 나도 좀 보고 싶은데.” ...

밖에서 케이가 채근했다. ...

리시는 방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

크리시나가 방문을 열었다. ...

초조하게 기다리던 케이는 리시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는 한동안 말없이 리시를 쳐다보기만 했다. ...

“백작님?” ...

크리시나가 작게 불렀다. ...

“아, 이런.” ...

케이가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

“상상도 못 한 모습이라서…….” ...

“아름다우시죠?” ...

“말도 못 해요, 크리시나. 정말 말도 못 해요.” ...

크리시나는 마치 자신이 칭찬받은 것처럼 우쭐해하며 말했다. ...

“오늘의 그린 백작 부인께서는 두고두고 회자되실 거예요. 결혼식 전야제 때 이런 드레스를 입은 첫 번째 여인이실 테니까요.” ...

+++

브리트니는 약간 수수해 보일 수도 있는 연분홍색 드레스를 입었다. ...

처음에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어서 리시의 코를 콱 눌러줄까 했지만, 황태자가 온 걸 보고 생각을 바꿨다. ...

리시와 경쟁하는 것보다는, 리시를 위해 수수한 드레스를 입은, 마음 넓은 언니로 보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수수한 드레스는 아니었다. 고급 원단을 사용했고, 드레스가 수수한 대신 화려한 액세서리와 머리핀을 착용했다. ...

다이아몬드 수십 개가 박힌 목걸이가 얼마나 화려한지, 브리트니의 얼굴색이 어두워 보일 정도였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

“브리트니, 너 이 파티에서는 쓸데없는 행동하지 마라. 알겠지?” ...

글로번 위틀로 공작은 파티장에 들어가기 전 몇 번이나 브리트니에게 주의를 시켰다. ...

“알겠다니까요.” ...

이미 쓸데없는 짓으로 이 결혼식에 드는 비용 전부를 책임져야만 했기에, 브리트니는 순순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

“황태자님 앞에서 일부러 잘 보이려고 할 것도 없어. 네가 그쪽에 잘 얘기해뒀으니, 황태자님께서는 제일 먼저 네게 춤을 청하실 거다. 그때까지는 그냥 모르는 척하고 있어. 알겠지?” ...

“알겠어요.” ...

지금 브리트니는 리시보다는 황태자 쪽이 더 신경 쓰였다. ...

어차피 황태자가 신부인 리시에게 춤을 청할 리는 없으니까, 황태자의 첫 댄스 상대는 자신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그의 손을 잡고 홀에 서는 순간, 귀족가의 영애들이 보낼 질투의 시선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부풀었다. ...

넬라니커스 제널 백작 부인이 주도한 파티니만큼, 파티장은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

하지만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아이리스는 아직 안 왔네. 주인공이니까 좀 나중에 들어오겠지. 하지만 상관없어. 언제 들어오든, 황태자 전하의 첫 댄스 상대는 내가 될 테니까.’ ...

아는 얼굴이 몇 명 있었다. ...

브리트니를 알아본 이들이 다가와서, 잠시 담소를 나눴다. ...

“황태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

입구를 지키던 시종의 말과 함께, 조용히 오가던 대화가 멈췄다. 악단이 연주하는 은은한 곡만이 홀 안에 흐르고 있었다. ...

문이 열리고 이오벳이 모습을 드러냈다. ...

브리트니는 숨을 멈추고 이오벳을 응시했다. ...

어제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참으로 잘생긴 사내였다. ...

케이가 어둠 속의 달과 같다면, 이오벳은 밝은 날의 태양 같았다. ...

화사한 금발과 새하얀 피부, 하늘보다 맑은 파란 눈동자. 키가 크고 어깨가 넓어서, 그 자체가 빛을 흩뿌리는 것처럼 보였다. ...

위용 있는 자태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온 이오벳이 해사하게 웃었다. ...

“내가 주인공인 파티도 아닌데, 너무 긴장들 하지 말고 즐기시오.” ...

그 말을 시작으로 황태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이들이 눈치를 보다가 그에게 접근했다. ...

브리트니는 계속 황태자를 관찰하고 싶었지만, 모르는 척하라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리고 영애들과 어울렸다. ...

“황태자 전하께서 황태자비로 브리트니 양을 염두에 두고 있단 이야기가 있던데, 그게 정말인가요?” ...

누군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

“그냥 소문일 뿐이에요.” ...

브리트니가 겸손한 척 말했다. ...

“그린 백작님이 결혼하시는 바람에, 황태자 전하의 인기가 더 높아졌대요. 그린 백작 부인 자리를 노리던 가문들이 이제 황태자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더라고요.” ...

“위틀로 공작님은 뿌듯하시겠어요. 차녀는 그린 백작 부인이 됐고, 장녀는 황태자비가 될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 ...

“소문은 소문일 뿐이죠.” ...

질투 담긴 시선을 보내는 영애에게, 브리트니는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

“그런 소문보다, 오늘은 내 동생을 축하하러 온 자리잖아요. 난 오늘 내 동생이 얼마나 예쁠지 기대하는 중이랍니다.” ...

“얘기를 들어보니 그린 백작님이 백작 부인 미모에 홀려서 정신을 못 차리신다던데.” ...

누군가의 말에 브리트니는 짜증이 왈칵 솟았지만, 애써 미소 지었다. ...

“그럼요. 우리 아이리스가 예쁘긴 정말 예쁘죠.” ...

“기대되네요. 얼마나 예쁘기에 그 그린 백작님이 정신을 못 차리시는지.” ...

리시에 대해 말하는 그들의 목소리에는 고까움이 담겨 있었다. ...

브리트니는 그들이 더욱더 기대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이니까. ...

모두 ‘그린 가문’의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제일 좋은 드레스를 입고 제일 멋지게 꾸미고 왔다. ...

리시가 아무리 유명한 디자이너의 드레스를 입고 나와봐야, 이곳에 모인 영애들보다 훨씬 아름답지는 않을 것이다. ...

“그린 백작 내외께서 드십니다.” ...

시종의 알림에, 이번에는 음악도 멈췄다. 그것이 파티 주최자에 대한 예의였다. ...

황태자와 그 근처에 있던 무리도 입구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

파티장 문이 열리고 그린 백작 내외의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

“아!” ...

“와아.” ...

“어머나.” ...

“우와.” ...

저도 모르게 터뜨린 감탄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

그럴 수밖에 없었다. ...

결혼식 전야제 파티에서, 신부는 청초하게 흰색이나 그 비슷한 색의 드레스를 입는 게 보통이었다. ...

하지만 아이리스가 입은 드레스는, 옆에 선 케이브란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강렬했다. ...

한쪽 어깨를 드러내며 허리에서 둔부로 이어지는 굴곡을 드러내며, 종아리 부근에서 화려하게 퍼지는 검은색 드레스. ...

드레스를 수놓은 금실은 과하지 않게 빛났지만, 리시의 하얀 피부가 검은 드레스와 대조적으로 더 희게 빛나서 눈부셨다. ...

진주 팔찌와 목걸이, 귀걸이가 야하게 보일 수도 있는 드레스를 우아해 보이게 했고, 붉은 기가 도는 은발에 꽂힌 까만 진주 머리핀이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

아무에게나 어울리는 드레스가 아니었다. ...

그 자리의 귀부인과 영애들은, 아이리스이기에 저 드레스를 소화해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 ...

모두가 궁금해했던 그녀는 꽃이라는 말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

작고 하얀 얼굴을 가득 채운 이목구비는, 하나하나 뜯어봐도 하나로 합쳐 봐도 완벽했다. 커다란 눈 안에 담긴 연한 보라색 눈동자조차, 그 어떤 장신구보다 예쁜 빛깔이었다. ...

완벽하게 빚어낸 코 아래에 자리 잡은 도톰하고 붉은 입술은, 금방이라도 상큼한 과즙을 흘릴 듯 촉촉했다. ...

리시가 케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홀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동안, 모두 숨조차 쉬지 못하고 리시를 쳐다봤다. ...

하늘하늘 흔들리는 드레스 자락도 하객들의 시선을 잡아채지 못했다. ...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리시의 얼굴에서, 악단의 연주자들조차도 눈을 떼지 못했다. ...

주최자 내외가 파티장에 들어온 순간부터 다시 연주해야 하는데, 그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

하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

아이리스 그린. ...

그 순간 그 파티장에서는, 그녀가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

“이렇게 자리를 빛내주셔서 감사합니다.” ...

케이가 입을 열었을 때야, 악단이 다시 연주를 시작하고 사람들도 멈췄던 숨을 쉴 수 있었다. ...

여인들은 자신들이 리시의 외모에 홀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는 것에 수치심을 느꼈고, 사내들은 저 아름다운 여인을 손에 넣은 그린 백작에게 질투를 느꼈다. ...

케이의 인사말이 끝난 후 파티가 재개되었지만, 아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

“그린 백작님이 대단하니 어쩌니 해도, 결국 남자는 남자였네. 여자 얼굴에 홀려서 결혼했다는 소문, 정말 믿고 싶지 않았는데.” ...

“그러게 말이에요. 그래도 진짜…… 와, 소문보다 예쁘네요. 아니, 예쁘다기보다는 강렬해요.” ...

“아무리 그래도 저런 드레스를 입을 생각을 하다니…… 자기가 신부라는 자각이 없는 건가?” ...

“법으로 정해진 건 아니니까요. 잘 어울리면 그만이지 않아요?” ...

“하긴, 뭐. 잘 어울리면 그만이긴 하지.” ...

여자들은 리시를 흘끔흘끔 쳐다보며 여러 가지 평가를 했다. ...

브리트니는 아까보다 리시에 대한 좋은 평가가 많아진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

원래 첫 댄스는 파티 주최자가 시작하지만, 그보다 높은 신분의 황태자가 와 있으니 황태자가 첫 춤을 시작해야만 했다. ...

결혼식 전에 신부인 리시에게 댄스 신청을 할 수 있는 건, 황제의 피가 흐르는 황태자뿐. 하지만 브리트니는 황태자가 리시에게 춤 신청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

높은 신분의 사내가 결혼식 전에 신부에게 춤을 청하는 건, 그녀를 향한 자기 가문의 가호를 약속하는 것과 같았다. 황실의 가호는 아무에게나 내려주는 것이 아니다. ...

그 대단한 넬라니커스 제널 백작 부인조차 황실의 가호를 받지 못했다. ...

“아!” ...

“헉!” ...

그때, 리시가 입장할 때보다 더 큰 탄성이 울렸다. ...

황태자가 리시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

(50) 황태자 이오벳 (2) ...

‘아니, 아닐 거야. 절대 아니어야 해.’ ...

브리트니는 숨을 멈추고 이오벳의 등을 응시했다. ...

‘그냥 그린 백작에게 말을 걸려고 가는 걸 거야.’ ...

이오벳이 그린 백작 내외 앞에 멈췄다. ...

‘아이리스에게 댄스 신청 같은 걸 하지 마!’ ...

브리트니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 자리에 있는 몇몇 영애들도 브리트니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

하지만 그들의 생각이 이오벳의 행동을 멈출 수는 없었다. ...

“아이리스 그린 백작 부인.” ...

이오벳이 아이리스의 전체 이름을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

‘그린 백작 부인’이 아닌 아이리스의 전체 이름을 불렀다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했다. ...

그린 가문만이 아닌, ‘아이리스’에게 황태자의 호의를 보이겠다는 의미였다. ...

“부디 첫 춤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또 여기저기서 탄성과 헛숨을 마시는 소리가 울렸다. ...

하지만 이오벳은 신경 쓰지 않고 리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

이오벳은 리시의 태도가 놀라웠다. ...

황태자의 첫 댄스의 상대가 되는 영광은, 레이디가 졸도할 정도의 영광이었다. 그런 영광을 받았음에도 리시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응당 벌어질 일이었다는 듯, 리시의 입가에 우아한 미소가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

리시의 눈빛은 정중하면서도 오만했다. 이오벳은 어쩐지 자신이 리시보다 낮은 신분인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

이오벳의 손바닥 위에 작고 따스한 것이 겹쳐졌다. ...

이 상황은 분명 리시에게 영광이어야 할 텐데, 오히려 이오벳이 영광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

“잘 부탁드립니다, 황태자 전하.” ...

리시가 작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듣기 좋은 음성이었다. ...

브리트니가 눈물을 글썽이며 파티장을 벗어난 것도, 귀족들 사이에 소곤소곤 여러 대화가 오가는 것도, 이오벳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

이 순간 이오벳은 리시와 단둘이 파티장에 남겨진 것 같았다. ...

‘하!’ ...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고?’ ...

말도 안 되는 별명이다. ...

‘이 여자는 꽃 같은 게 아니야.’ ...

그저 짧게 눈빛을 나눴을 뿐인데도 알 수 있었다. ...

‘모든 걸 집어삼킬 수 있는 맹수지.’ ...

케이가 리시에게 홀린 이유를 알겠다. ...

메어리 공주 따위는 이름도 못 내밀 외모도 외모지만, 리시의 분위기와 눈빛, 자태, 그 모든 것이 남달랐다. ...

‘평범한 여자는 아니군. 대체 어떻게 위틀로 저택에 틀어박혀 있었으면서 이런 눈빛을 가질 수 있는 거지?’ ...

수많은 전쟁과 죽음을 헤치고 나온 전사의 눈빛. ...

‘뭐가 어찌 됐든 탐나는 여자야. 케이가 먼저 발견한 게 아쉽군.’ ...

외척으로 위틀로 가문이 거론되었을 때, 브리트니가 아닌 아이리스로 하겠다고 선포할 걸 그랬다. 그러면 이 신비로운 눈빛을 가진 여자를 황태자비 자리에 앉힐 수 있었을 텐데. ...

‘케이, 이 자식. 모두가 탐낼까 봐, 결혼식을 하기도 전에 혼인신고부터 해버렸군.’ ...

이제 황명으로도 아이리스를 빼앗을 수 없게 되었다. 황실의 권력으로도, 누군가의 아내를 빼앗을 수는 없었다. ...

물론 빼앗을 수 있다 해도, 이오벳은 케이가 먼저 손에 넣은 여자를 빼앗지는 않았을 것이다. ...

케이는 유일한 친구니까. ...

‘눈빛뿐이 아니야. 댄스 실력도 훌륭하군. 날 이끌고 있어.’ ...

리시가 유려하게 춤춰서, 이오벳은 자신이 춤을 추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

리시는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실력으로, 마치 물 흐르는 듯 춤을 주도하고 있었다. ...

“황태자 전하.” ...

문득 리시가 입을 열었다. 꽤 빠른 속도의 춤인데도 숨찬 기색이 없었다. ...

“워번은 좋지 않습니다.” ...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나오는 바람에, 이오벳은 우뚝 멈추고 말았다. ...

리시가 다정한 미소를 보내며 속삭였다. ...

“춤 주셔야지요, 전하.” ...

“아, 실례.” ...

이오벳은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리시의 움직임에 따라 다리를 움직였다. 하지만 머릿속은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

워번 상단. ...

최근 이오벳이 투자하려고 하는 상단이었다. 주로 메르티움을 다루는 상단으로, 이 상단을 손에 넣으면 황태자 자리를 견고히 하는 데에 상당한 도움이 될 터였다. ...

문제는 2황자도 워번 상단에 눈독을 들인다는 점이었다. 2황자가 손을 댈 수 없도록 워번 상단을 온전히 손에 넣을 방법을 궁리하는 중이기는 했는데. ...

‘이 여자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지? 내가 잘못 들었나?’ ...

리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춤에 집중하고 있었다. ...

그러는 동안 한 곡이 끝났다. ...

이제 그녀의 손을 놔주고 다른 영애에게 댄스를 신청해야 할 때였다. ...

하지만 황태자는 그럴 수가 없었다. ...

“한 곡 더 부탁드립니다, 그린 백작 부인.” ...

황태자가 연속으로 춤을 청하는 건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

표정을 수습하고 돌아와서 댄스 신청을 받을 준비를 하던 브리트니도, 자기에게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준비하던 영애들도, 모두 벌어진 입술을 다물지 못했다. ...

“다른 영애들께도 기회를 드려야지요, 전하.” ...

리시가 어린애 달래듯 말하는 소리에,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

“나는 백작 부인과 한 곡 더 춰야겠습니다. 부디 한 곡 더 부탁드립니다.” ...

리시를 무례한 거절을 꾸짖기는커녕, 매달리듯 춤을 청하는 황태자 때문에 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보좌관인 세트니조차 기절할 지경이었다. ...

리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황태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

“전하, 두 곡이나 제게 청하시면 곤란합니다. 다른 영애들이 전하와 춤을 출 영광을 기다리는데요.” ...

“워번에 대해 어떻게 아는 겁니까?” ...

“제게는 좋은 정보원이 있답니다. 아, 정보원에 관해 알려달라 하시면 곤란해요.” ...

리시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

이오벳은 타인의 정보원을 알려달라고 하는 게 무례한 행동이라는 걸 알았다. 춤 두 곡은 연속으로 신청했어도, 정보원까지 알려달라는 무례를 범할 생각은 없었다. ...

“정보원의 출처는 아무래도 좋아요. 하지만 황태자인 내 뒤를 캔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는 압니까?” ...

“전하의 뒤를 캔 것이 아닙니다. 워번을 캐다 보니 전하의 존함이 나온 것이지요.” ...

“워번이 좋지 않다는 이유는?” ...

“세 곡이나 함께할 수는 없습니다, 전하.” ...

여기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

“케이, 그린 백작이 당신은 평범한 여자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

“특별할 것은 없어요. 그이가 절 너무 좋게 봐주는 거죠.” ...

“나도 그런 줄 알았어요, 백작 부인. 그런데 아닌 것 같군요. 파티가 끝난 후에 내게 차 한 잔을 대접해줘요.” ...

“부디.” ...

리시가 살풋 미소 지었다. 그녀의 미소에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

두 번째 곡을 끝낸 이오벳은 더는 춤을 추지 않았다. 구석에 가만히 서서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

이오벳의 시선이 간간이 리시에게 향하는 걸, 그 자리에 있던 귀족들은 놓치지 않았다. ...

그들은 ‘황태자님께서 그린 백작 부인에게 홀린 건 아니겠지?’라는 생각을 했지만, 감히 그 말을 꺼낼 배짱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

그리고 브리트니는. ...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왜 아이리스랑만 춤추고 나랑은 안 추는 건데?’ ...

속이 타들어가는 걸 견디지 못하고. ...

“황태자 전하. 저와 한 곡 함께해주시겠어요?” ...

두고두고 뒷얘기가 나올 행동을 하고 말았다. ...

레이디가 먼저 춤을 청하면, 아무리 싫어도 응해주는 것이 예의. ...

하지만 생각할 거리가 많은 이오벳은, 그 예의조차 보이지 않았다. ...

“피곤해서 먼저 실례하지.” ...

이오벳은 눈앞에 브리트니가 없다는 듯,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하고 그대로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

브리트니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아주 볼만했어요.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 같더라니까요. 뒤에서 영애들이 얼마나 소곤거리는지, 그 계집…… 아니, 브리트니는 알런가 몰라.” ...

리시가 나간 후 드레스로 갈아입고 파티에 참석했던 에르웰이 신나서 떠들어댔다. ...

크리시나가 리시의 드레스를 벗겨주며 말했다. ...

“전에 그린 백작님께도 춤을 청한 적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백작님은 응해주시기는 한 것 같던데, 이번에는 거절당해서 웃음거리가 됐어요. 아마 모이기만 하면 브리트니 양 얘기를 하겠죠.” ...

이번 파티에서 브리트니를 곯려줄 생각은 없었는데, 브리트니가 스스로 제 발을 걸고 말았다. ...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갔을 텐데. ...

크리시나의 말대로 이 일은 사교계에서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브리트니는 이보다 더한 짓들을 해왔으니까. ...

“아니, 그 옷 말고 저 드레스로 할게요.” ...

“잠자리에 드시는 거 아니세요?” ...

“갈 데가 있거든요.” ...

크리시나는 의아해하면서도 리시가 고른 드레스로 갈아입혀 줬다. ...

“오늘 고생 많았어요. 인제 그만 쉬도록 해요.” ...

시녀들을 내보낸 후 챙겨야 할 것을 챙겨 케이의 방으로 향했다. ...

황태자의 청이라 해도 그와 단둘이 만나는 건 피하는 게 좋았다. 필요 이상의 구설에 오르내리고 싶진 않았다. ...

이오벳은 방에서 혼자 리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케이가 함께 올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

“그린 백작 부인.” ...

“아이리스라고 불러주세요.” ...

“좋아요, 아이리스.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워번이 좋지 않은 이유가 뭡니까?” ...

“사기꾼이에요.” ...

“사기꾼이라고?” ...

“그들이 취급하는 건 메르티움이 아니에요. 메르티움으로 위장한 보통의 광석이지.” ...

“그럴 리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어요. 그걸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죠.” ...

“이걸로도.” ...

리시는 오늘을 위해 준비해둔 광석을 하나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

“마법은 사용할 수 있어요.” ...

리시가 광석을 톡톡 두드리자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다. ...

“이것도 메르티움이잖아요.” ...

“아니요. 이건 작은 메르티움을 박아넣은 평범한 검은 돌이에요. 잠시 시간이 흐르면.” ...

돌이 빛을 잃었다. ...

“마법이 끝나죠.” ...

“하!” ...

이오벳이 헛웃음을 흘렸다. ...

“그놈들이 내게 사기를 쳤단 겁니까?” ...

“네.” ...

“감히 내게?” ...

“뒤에 2황자가 있었죠. 2황자는 자기가 뒤를 봐주겠다고 했을 거예요.” ...

“이런. 나는 라코젠도 워번에 투자하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

라코젠은 2황자의 이름이었다. ...

“그것 또한 사실이에요.” ...

리시의 단호한 말에 이오벳이 미간을 좁혔다. ...

“라코젠이 워번에 투자하려는 게 사실이라고?” ...

“네. 워번 상단은 1상단과 2상단이 광석과 비단, 두 개로 나눠서 운영하고 있어요. 광석 쪽인 1상단이 잘되다 보니 다들 그쪽에 투자하고 싶어 하죠. 전하께서도 그러려고 하셨고요.” ...

“그랬죠.” ...

“2황자는 2상단에 투자할 거예요.” ...

“비단 쪽은 아무리 잘돼봐야 한계가 있는데.” ...

“워번은 2황자께 2상단에서 진짜 메르티움을 거래할 거라고 말했어요. 2황자에게 진짜 메르티움을 보여줬죠. 1상단은 곧 버릴 패고, 2상단만 키울 거라고 했죠. 상단이 여러 개를 운영하다가 하나를 버리는 건 으레 일어나는 일이니까.” ...

“하지만 그 말이 거짓이다?” ...

“거짓말이에요. 2황자에게 보여준 메르티움은 진짜였지만.” ...

이오벳은 리시의 말을 믿기 어려웠다. ...

리시는 마치 바로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

“아이리스. 워번이 황실을 상대로 사기를 쳐서 얻을 수 있는 게 뭘까요? 내가 듣기에는 오히려 그대가 내게 거짓을 고하는 것 같은데.” ...

“워번이 사기 쳐서 얻는 건, 역시 돈이죠. 막대한 투자금.” ...

“돈을 얻어도 그 목숨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지.” ...

리시는 챙겨온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대륙을 벗어나 바다 어딘가에 있는 섬을 가리켰다. ...

“워번은 망명 신청을 해뒀어요. 투자금을 받고 나면 이 섬나라, 카보라스 왕국으로 떠날 예정이죠. 대가로 지급하는 건 투자금의 반. 알다시피 카보라스는 대륙 진입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황실에서 투자한 어마어마한 돈은 카보라스 왕국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

이오벳은 할 말을 잃었다. ...

섬나라인 카보라스 왕국이 대륙 진출을 위해 수군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

“황태자 전하께서는 두 개의 길을 선택하실 수 있어요. 혼자서만 발을 빼시거나, 2황자께도 언질 줘서 함께 발을 빼시거나.” ...

“내가 그대의 말을 믿지 않는 선택지는 없나 보군요.” ...

리시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

“믿고 계시잖아요.” ...

당돌한 태도에 기가 막히면서도 놀라웠다. ...

케이를 돌아보니, 케이가 ‘이것 봐. 놀라운 여자라고 했잖아.’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51) 황태자 이오벳 (3) ...

이오벳은 케이의 부인인 리시가 자신의 뒤통수를 칠 일은 없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워번 상단의 일을 함부로 처리할 수도 없었다. ...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오벳의 위치는 확고했다. 3년 전, 황후인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이오벳의 위치 역시 전처럼 견고하지는 않게 되었다. ...

이오벳은 황제와 1후궁의 아들인 라코젠보다 조금 늦게 태어났다. 이오벳 개인의 능력이 뛰어난 것도 있지만, 황제와 황후 사이의 아들이기에 어렵지 않게 황태자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

하지만 황후가 죽자, 1후궁이 제 아들을 위해 빈틈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1후궁과 2황자인 라코젠이 적극적으로 움직이자, 신하들의 움직임도 전과 달라졌다. ...

이오벳은 제 곁에 머물던 신하들이 어느새 라코젠의 곁에 서게 된 것을 몇 번이나 목격했다. 이오벳이 아무리 영리하고 제왕의 품격을 지녔다 해도, 황제 자리에 앉는 것은 결국 등 뒤를 받쳐주는 사람이 많은 자였다. ...

그리하여 이오벳은 돈이 필요했고, 최근 이름을 날리는 워번 상단에 투자하여 위치를 견고히 다질 만한 자금을 손에 넣을 작정이었다. ...

리시가 ‘그놈들은 사기꾼.’이라고 한다 해서, 그 말만 믿고 워번과의 연을 끊을 수는 없었다. ...

“내게 또 다른 조언을 해줄 것은 없습니까?” ...

“워번 상단의 일을 당장 처리하기는 힘드실 거예요. 당장 문제가 생기지도 않을 테고. 워번 상단에 대해 잘 알아보시고, 제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부터 확인해보세요.” ...

리시가 차분하게 말했다. ...

이오벳은 리시가 말할 때 자신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다는 걸 깨달았다. ...

그녀의 연보라색 눈동자에는, 한번 마주하면 시선을 돌리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었다. ...

“제 말이 진실이라는 걸 확인하시면, 지금보다는 절 신뢰하실 수 있겠죠. 그때 제게 조언을 구하신다면, 좋은 조언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이오벳은 다른 것보다도 리시의 배짱에 혀를 내둘렀다. ...

황태자인 이오벳 앞에서, 이렇게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아니, 케이가 있으니 두 번째로 봤다고 해야 하나? ...

하지만 지금 리시는 케이와 다른 대담함을 보였다. ...

리시의 말에는 가정이 없었다.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반드시 벌어질 예언을 말하는 듯, 정확하고 분명하게 말했다. ...

“하지만 시간이 많지는 않습니다, 전하. 한 달 이내에 결론을 내리고 말씀해주세요. 그러면 전하께서는 워번 상단에 투자할 때와는 비할 수 없는 재력을 손에 넣으실 겁니다.” ...

“내가 뭘 필요로 하는지 아는군요. 왜 필요로 하는지도 알고.” ...

“네.” ...

“알겠어요, 아이리스. 워번을 제대로 조사해보죠. 하지만 만약 그대의 말이 틀렸다면, 그대가 아무리 내 친구의 아내라도 날 기만한 벌을 받게 될 겁니다.” ...

“물론이죠.” ...

리시는 겁에 질린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이오벳은 아주 강한 상대를 앞에 두고 게임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

“그 외에 또 조언해줄 것은 없어요? 가볍게라도.” ...

“가벼운 조언이라…….” ...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고 생각하던 리시가 곧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브리트니는 좋은 여자가 아니에요. 황태자 전하께 도움이 되는, 더 좋은 여성이 나타날 겁니다.” ...

+++

리시는 “두 분께서 나누실 말씀이 있을 테니 먼저 나가보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

리시가 나간 후, 방에는 한동안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오벳은 팔짱을 끼고 검지로 팔뚝을 톡톡 두드리며, 자신의 오랜 친구를 가만히 응시했다. ...

케이가 2황자의 편으로 돌아서서, 제 아내를 사주해 워번 상단과 황태자의 거래를 끊어버릴 확률은 얼마나 될까? ...

모르겠다. 오른팔인 부하가 여러 가지 이유로 주인을 배신하는 일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

“케이. 날 배신하려는 건 아니겠지?” ...

“전하. 설마 내가 2황자의 편에 설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나랑 2황자는 체질적으로 안 맞아.” ...

“그건 알아. 알지만…… 네 아내는, 모르겠어. 놀랍도록 신뢰가 가. 그런데 그게 이상해. 너도 알다시피 나는 그렇게 쉽게 누군가를 믿지 않아.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커왔어.” ...

“으흠.” ...

“네 아내, 마법이라도 써?” ...

“아직도 남의 신뢰를 얻게 해주는 마법이 남아 있던가?” ...

이오벳은 고개를 저었다. ...

“굉장한 여자를 손에 넣었군, 케이. 만약 아이리스가 말한 대로 워번 상단이 내 뒤통수를 칠 준비를 하고 있다면…… 난 널 평생 부러워할 거야.” ...

케이가 우쭐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얄미워서 옆에 있던 쿠션을 집어 케이에게 던졌다. ...

케이는 가볍게 고개를 틀어 쿠션을 피하며 말했다. ...

“전하가 의심하는 건 당연해. 내가 전하 입장이었어도 리시 이야기를 한 번에 믿지는 못했을 거야. 그러니 알아봐. 워번 상단이 전하 몰래 뭘 하고 있는지.” ...

“안 그래도 당장 그럴 생각이야. 그건 그렇고, 브리트니가 좋은 여자가 아니라는 건 무슨 의미지? 브리트니가 내 아내가 되면, 그녀의 동생인 아이리스에게도 좋은 일 아닌가?” ...

“그 부분은, 음. 이오벳.” ...

케이가 이오벳과 눈을 맞췄다. ...

“리시는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 아니야. 지금까지는 그래왔어도 앞으로는 결코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 아닐 거야.” ...

케이가 평소보다 낮은 음성으로 힘 있게 말했다. 이오벳은 그것만으로도 케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들었다. ...

‘위틀로 공작가와 연을 끊으려는 거군.’ ...

리시가 자신의 가문과 연을 끊으려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그것이야말로 개인사였기에 묻지 않기로 했다. 그린 가문이 위틀로 가문과 연을 끊으려 한다는 걸 안 것만으로 충분했다. ...

둘 중 한 가문을 선택해야만 한다면, 당연히 그린 가문이었다. 이오벳이 케이의 친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라도 그런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

“알겠어, 케이. 그린 백작 부인께 조언 감사하다고 전해줘.” ...

 

+++

방에 돌아온 리시는 제 손에 쥐고 있는 검은색 돌을 내려다봤다. ...

검은색 돌은 어디서나 주울 수 있는 평범한 돌이었다. ...

중요한 건 검은색 돌 틈 사이에서, 마치 빛을 흡수하듯 더 검게 빛나는 검은색 작은 광석. ...

이것이 메르티움이다. ...

메르티움은 마나를 아주 오랫동안 잡아둘 수 있는 광석으로, 마석의 재료로 쓰였다. 메르티움을 쓰지 않아도 마석을 만들 수는 있지만, 평범한 광석에 마나를 담아두면 쉽게 부서지거나 망가진다. ...

반면에 메르티움을 넣어 가공한 마석은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

문제는 메르티움이 잘 발견되지 않고, 매장량이 많지 않아서 그 가격이 어마어마하다는 점이었다. ...

지금 이 돌에 박아넣은, 손톱보다도 작은 메르티움만 해도 10골드나 주고 어렵게 구했다. ...

리시는 검은색 돌을 테이블 위에 또르르 굴렸다. ...

‘황태자는 몸이 달 거야.’ ...

리시에게도 상단이 필요했다. 좋은 상단을 알고 있지만, 당장 그 상단과 거래를 트기에는 돈이 부족했다. 이런 상황에서 황태자는 그 상단과의 거래를 트는 데 유용할 것이다. ...

오늘 그 상단의 이름을 언급할 수도 있었지만, 다음으로 미뤘다. 기다렸다는 듯 상단의 이름을 말해줘봐야, 이쪽의 패를 내놓는 꼴만 된다. ...

나는 필요 없지만, 널 위해 알려줄게. ...

딱 이 정도의 위치에서 조언을 해주는 편이 좋았다. ...

‘황태자가 뭘 조사해야 할지 알았으니, 워번 상단의 문제는 금방 드러나겠지. 황태자로서는 2황자를 돕고 싶지 않을 테니, 혼자서만 발을 빼고 찾아올 거야.’ ...

한 달 안에, 황태자가 필요하다. ...

리시는 굳이 기일을 정하지 않았더라도 황태자가 금방 찾아오리라고 확신했다. ...

리시는 창가에 비스듬히 앉아 창틀에 등을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

청빛 하늘에 보름달이 밝은 밤이었다. 별이 촘촘히 수놓은 밤하늘이 유독 아름다웠다. ...

‘지난 삶에서는 이렇게 느긋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도 거의 없었지.’ ...

크리시나가 알면 일찍 주무셔야 내일 피부 상태가 좋아진다고 채근하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

‘나, 좀 들떴구나.’ ...

회귀했다는 걸 알게 된 후, 머릿속에 큰 그림을 하나 그렸다. ...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그림을 현실의 그림으로 바꾸는 건 어려운 과정이 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수월했다. ...

보이지 않는 힘이 리시를 도와주는 것만 같았다. ...

달칵- ...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케이가 방에 들어왔다. ...

“이오벳이 조언 감사하다고 전해달래요.” ...

케이가 리시를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 리시의 옆에 선 케이가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

“벌써 보름인가. 어쩐지…….” ...

라고 중얼거렸다. ...

“리시, 나랑 같이 좀 나갈래요? 아, 내일을 위해 일찍 자야 하나?” ...

“괜찮아요.” ...

케이가 어디에 가려는 건지 궁금했다. 케이의 손을 잡고 창틀에서 내려왔다.   “이오벳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모습이 멋졌어요. 이오벳이 날 부러워하더군요.” ...

“나 같은 아내가 있어서?” ...

“응. 아주 우쭐했어요. 내 능력이 아니라 내 아내로 인해 어깨가 으쓱한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는데.” ...

둘은 손을 꼭 잡고 본채를 벗어났다. ...

리시는 마디가 굵은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손가락에 빈틈없이 깍지낀, 이 느낌이 좋았다. ...

언제 어디서 넘어져도, 그가 단단히 지탱해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그런데 우리, 어디에 가는 거예요?” ...

“사람이 없는 곳.” ...

“그런 곳은 왜?” ...

케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케이도 고개를 돌려 리시와 눈을 맞췄다. ...

기분 탓일까? 그의 회청빛 눈동자가 평소보다 농밀하게 빛나고 있었다. ...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은밀한 행위를 하려고요.” ...

중저음의 음성이 야릇하게 리시의 귓바퀴를 훑고 지나갔다. ...

리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

“은밀한 행위라니…….” ...

“일단 가요, 리시.” ...

케이가 걸음을 서둘렀다. ...

은밀한 행위라는 말에 여러 가지 피부색 그림이 떠올라, 리시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남녀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하는, 그 행위들은 리시를 두렵게 만들었다. ...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달콤한 기대감이 몽글몽글 피어올라, 혈관을 타고 흘러 온몸을 따뜻하게 데웠다. 심장이 콩, 콩, 콩,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입안이 바싹 말라서 괜히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

케이는 저택의 정문이 아닌 작은 문으로 나가서, 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향했다. 호수와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낮에도 어두울 만큼 나무와 갖가지 식물이 무성한 곳이었다. ...

쏴아아아, 불어오는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가 달큰하게 청각을 자극했다. ...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높아져서 가슴 높이까지 올라온 수풀. 수풀을 헤치고 들어갈수록, 리시의 심장은 더 빠르게 뛰었다. ...

대체 무얼 하려는 걸까? ...

어디까지 들어가려는 거지? ...

여기서 하려는 걸까? ...

갑자기 케이가 걸음을 멈추더니 리시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케이는 기우뚱 끌려간 리시의 허리를 감아, 자세를 낮추게 했다. ...

“소리 내지 마요, 리시.” ...

물론 소리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다. ...

하지만 정말로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있을까? ...

볼에 닿는 그의 숨결만으로도 반사적으로 신음이 흘러나오려 하는데. ...

그림자 진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숨이 가빠오는데. ...

(52) 당신의 취향 ...

케이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리시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눈은 감지 말고.” ...

케이의 속삭임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

“저길 봐요.” ...

‘저길 보라고?’ ...

뭔가 좀 이상하다. ...

아무래도 상상과는 다른 일이 벌어지는 것 같아서, 리시는 살그머니 눈을 떴다. ...

케이의 얼굴은 리시를 향해 있지 않았다. 그는 리시의 볼에 자신의 볼을 붙이듯이 대고 수풀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

리시도 천천히 시선을 돌려 그쪽을 응시했다. ...

수풀 너머에는 너른 공터가 있었는데, 그 공터 중앙에. ...

“사슴……?” ...

사슴 한 마리가 껑충껑충 춤을 추듯이 뛰고 있었다. ...

길고 멋진 뿔을 가진 사슴은, 오늘 하루 무척이나 좋은 일이 있었던 것처럼, 가늘고 긴 다리로 껑충껑충 즐겁게 공터를 뛰어다녔다. ...

리시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

“어때요?” ...

케이가 물었다. ...

“무엇이……?” ...

“귀엽지 않아요?” ...

“귀엽긴 한데…….” ...

새삼스럽게 얼굴이 확 달아오른 이유는, 자기 혼자 멋대로 야릇한 망상을 했던 것이 창피했기 때문이다. ...

‘나, 진짜…… 왜 이러니?’ ...

무섭고 싫어서 피하고 싶었던 행위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얼어붙어, 목석같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

앞으로도 쭉, 평생 그럴 줄 알았다. 언젠가 케이와 동침하더라도, 원해서가 아닌 의무이기에 해야만 하는, 그런 행위로 남게 될 줄 알았다. ...

‘그런데 이게 뭐람. 이 남자는 생각도 없는데, 나 혼자서…….’ ...

생각해보면 좋은 침대 놔두고, 굳이 숲에 들어가서 그런 걸 할 이유가 없다. ...

그런데도 혼자 망상에 젖어 얼굴이 빨개지고, 두근거리고, 긴장하고, 눈을 감고……. ...

얼마나 멍청해 보였을까? ...

‘케이가 내 속마음을 읽지 못해서 다행이야.’ ...

정말로 다행이다. 들켰으면 한동안 케이 얼굴을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

“리시?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개요?” ...

케이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리시는 입술을 꼭 여미고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케이의 눈이 재미있다는 듯 가늘어졌다. 리시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

“설마 여기서 뭔가 할 줄 알았던 거야, 리시?” ...

“아, 아니거든.” ...

말을 더듬고 말았다. ...

케이의 눈이 커졌다가 다시 가늘어졌다. ...

“당신이 말 더듬는 건 처음 봐. 아무래도 내 추측이 맞는 것 같은데.” ...

“아니라니까, 케이.” ...

짐짓 엄한 척 말하며 그의 가슴을 밀어내려는데, 그가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을 줬다. 그 바람에 그의 손가락 끝이 허리를 파고들어서 간지러웠다. ...

“아흣!” ...

간지러움을 참느라 소리를 죽여야 한다는 걸 잊었다. 괴상한 소리가 어둡고 고요한 숲에 울려 퍼졌다. ...

껑충껑충 뛰던 사슴이 우뚝 멈추더니 이쪽을 응시했다. ...

“이런. 들켰네요.” ...

케이가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

사슴이 한쪽 귀를 팔락거리다가 케이를 향해 걸어왔다. 반가운 듯 차박차박 걸어오던 사슴은, 케이의 옆에서 일어나는 리시를 보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

잠시 그렇게 굳어 있던 사슴이 휙 돌아서서 나무 사이로 도망쳤다. ...

“저런, 도망가버렸네.” ...

“왜 도망치는 거죠?” ...

“글쎄요. 당신이 무서워서?” ...

“하지만 월라스는 내가 그를 해칠 리 없다는 걸 알잖아요.” ...

케이가 키득거렸다. ...

“월라스는 자기가 사슴이라는 걸 창피해하거든요. 그 덩치에 저렇게 귀여운 사슴이라는 걸 감추고 싶어 하죠.” ...

“하지만 근사한 뿔이던데.” ...

“맞아요. 나중에 녀석에게 그렇게 말해주면 좋아할 거예요.” ...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케이가 늑대로 변했다. ...

“우리는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피가 들끓어요. 그래서 한 달에 두 번, 보름달이 뜰 때마다 참지 못하고 변신하죠.” ...

그건 리시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

지금까지는 수인이라도 평생 짐승으로 변하지만 않으면, 아무에게도 걸리지 않을 텐데 왜 굳이 변신하는 장면을 들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

“견디지 못하나요? 막 죽을 것 같고 그래요?” ...

리시의 질문에 케이가 크르릉, 하는 소리를 냈다. ...

웃음소리다. ...

“아니, 죽을 것 같은 건 아닌데……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

케이가 리시를 흘긋 쳐다보더니 갑자기 두 앞발을 리시의 어깨에 얹었다. ...

묵직한 무게감에 리시의 무릎이 휘청 꺾였다. ...

간신히 버티고 선 리시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케이가, 리시의 볼을 핥았다. ...

“당신을 앞에 두고도 못 먹는 거랑 비슷해, 리시.” ...

“식욕?” ...

케이가 크르릉, 하고 또 웃었다. ...

“아니, 리시. 좀 전에 당신 머릿속을 가득 채워서, 당신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그거 말이야. 그런 거랑 비슷하지.” ...

리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케이를 노려봤다. ...

“그런 거 아니라니까.” ...

“그런 게 뭔데?” ...

그리 되물으니 할 말이 없다. 성욕, 이라고 대답하면 내 머릿속이 그런 거로 가득했다는 걸 인정하는 꼴만 되니. ...

케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히죽 웃었다. 늑대 모습인데도 리시를 놀리는 게 확연히 느껴지는 표정이라서 얄미웠다. ...

리시는 얼굴 앞에 있는 케이의 커다란 코를, 이마로 콩 받았다. ...

“놀리지 마, 케이. 버릇없는 멍멍이는 엉덩이를 때려줄 거니까.” ...

“어이구, 무서워라.” ...

케이가 앞발을 내리고, 리시를 향해 등을 보이며 앉았다. ...

“뭐야, 때려달라는 거야?” ...

“그게 당신 취향이라면 뭐, 몇 대쯤 맞아줄 수 있어.” ...

“난 그런 취향 아니야.” ...

“그럼 타.” ...

“응?” ...

“타, 리시.” ...

“당신 등에?” ...

“그래, 내 등에.” ...

케이가 엎드렸다. ...

리시는 타기에 딱 좋게 엎드린 검은 늑대의 등을 응시했다. 늑대를 타는 건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

“그러다 당신 허리 부러지면…….” ...

늑대가 엎드린 채 크르르르 웃었다. ...

“내가 밤에 당신을 안아주지 못할까 봐 걱정돼?” ...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알면서.” ...

늑대의 꼬리가 강아지 꼬리처럼 휙휙 움직였다. ...

“얼른 타, 리시. 난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튼튼한 허리를 갖고 있으니까.” ...

리시는 불안한 마음으로 살며시 케이의 등에 올라갔다. 허리 가운데쯤에 굴곡이 있어서, 의외로 편했다. ...

리시가 자리를 잡자 케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꺅!” ...

리시가 작게 비명을 지르며 케이의 목덜미 털을 세게 잡았다. ...

“잘 잡아, 리시.” ...

케이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리시는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며, 케이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케이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

“저기, 케이.” ...

“달릴게, 리시.” ...

잠깐, 이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거대한 검은 늑대는 바람을 갈랐다. ...

말을 탈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

엉덩이에 닿은 그의 튼튼한 허리 근육이 날뛰고, 술렁술렁 부드럽고도 빠르게 전신이 움직였다. ...

숲에 빼곡한 나무들 사이를, 케이는 요령 좋게 요리조리 몸을 비틀며 나아갔다. ...

나무가 단숨에 다가올 때마다 부딪칠 것 같아서, 리시는 몇 번이나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얼마쯤 시간이 흐르자, 그가 나무에 부딪힐 리 없다는 걸 믿게 되었다. ...

그를 믿고 그의 목을 꽉 끌어안은 채, 빠르게 흘러가는 경치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

환상적이었다. ...

끝내주는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

한참 후 둘은 출발했던 곳에 돌아와 있었다. 리시는 케이에게서 내려, 그를 마주 보고 섰다. 그렇게 달렸으면서도 케이는 지친 기색이 전혀 없었다. ...

리시는 검은 늑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는 즐거운 듯 눈을 감고 리시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

“굉장했어요, 케이.” ...

“앞으로도 얼마든지.” ...

당연한 듯 여상히 들려오는 그의 대꾸가, 참으로 따뜻했다. ...

오늘 밤은 슬리브 스톤이 없어도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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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가 리시를 등에 태우고 달리던 그 시각. ...

사슴 한 마리가 커다란 사자 앞에 우울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

사슴 정도는 한입에 먹어치울 것처럼 거대한 사자는, 지루한 듯 앞발에 턱을 괴고 누워서 하품했다. ...

“하품할 때가 아니라니까, 나단!” ...

“월라스, 나는 형수님이 네 꼴을 비웃든 말든 아무 관심이 없어.” ...

“넌 사자니까 그렇게 팔자 좋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거야. 사자는 들켜도 멋지잖아.” ...

“넌 형수님이 우리가 수인이라는 걸 아는 것보다, 네가 사슴이라는 걸 아는 게 더 큰일이냐?” ...

“우리가 수인이라는 거야, 뭐. 대장이 자기가 늑대라는 걸 이미 밝힌 마당에 눈치채시는 게 당연하지. 똑똑한 분이잖아. 아, 진짜. 하품 좀 그만하라고.” ...

“졸린다고, 나는.” ...

나단이 눈을 감았다. ...

월라스는 백수의 왕인 사자로 변하는 나단이 부럽기만 했다. ...

인간일 때는 조그만 계집애 같은 게, 사자처럼 근사한 짐승으로 변신하다니. ...

월라스는 길고 근사한 뿔로 잠들려는 사자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

“크아아앙! 아프잖아!” ...

사자가 벌떡 일어나 아가리를 벌렸다. ...

크고 무시무시한 송곳니가 드러났지만, 사슴은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이 앞발로 바닥을 탁탁 찼다. ...

“형수님이 아까 그 사슴이 나라고 생각하진 않으시겠지?” ...

“대체 그 소리를 몇 번째 하는 거야? 너라고 생각하시든 말든 나랑은 아무 상관 없다니까 그러네. 그 가늘고 연약한 목을 물어뜯기 전에 꺼져!” ...

사자가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듯 으르렁거렸지만, 사슴은 뿔로 땅을 파며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

“하아. 형수님이 내가 사슴이라는 걸 눈치채면 안 되는데…….” ...

“하, 진짜 집요한 사슴 새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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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야제 두 번째 파티에, 황태자는 참석하지 않았다. ...

귀부인들은 아직도 어제 황태자가 리시에게 춤을 청한 일을 주제로 소곤거리느라 바빴다. ...

브리트니는 그들 모두가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서 속이 끓었다. ...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아이리스가 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어.’ ...

어쩌면 황태자에게 큰돈을 주면서 자신과 춤을 춰달라고 부탁했을지도 모른다. ...

물론 황태자가 돈을 받는다고 신부에게 춤을 청하는, 격 떨어지는 행위를 할 리 없지만, 브리트니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

황태자에게 직접 춤을 청했다가 거절당했다. 레이디가 먼저 댄스 신청을 하는 것도 이례적인 일인데, 거절까지 당했으니 이 일은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다. ...

모멸감에 얼굴을 들 수 없지만, 파티에 참석하지 않으면 더 떠들어댈 것 같아서 기어코 참석했다. 어제보다 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더 당당하게 행동하기 위해 애썼다. ...

하지만 브리트니가 애쓴다고 해서, 어제의 일이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

“브리트니 양 좀 봐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데, 안쓰럽네요.” ...

“먼저 댄스 신청을 했는데 거절당하다니…… 그때 브리트니 양 표정 봤어요?” ...

“아, 나 같으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거야. 그런데 또 파티에 참석하다니, 뻔뻔하기도 해라.” ...

“그린 백작 부인도 안됐어요. 자기 언니가 저래서 똑같은 취급을 당할 거 아니에요. 얼마나 창피할까?” ...

실제로 들리는 건 아니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오갈 게 분명했다. ...

‘이건 다 아이리스 때문이야. 쟤가 수작을 부려서…….’ ...

브리트니는 리시를 쏘아봤다. 리시는 어제와 다른, 우아한 분위기의 드레스를 입고 케이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

눈이 마주쳤다. 리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날 조롱하고 있어!’ ...

어제의 충격으로 머릿속이 엉망으로 헝클어져서, 정상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저 계집애의 머리를 쥐어뜯어 줘야, 터질 듯 부글거리는 속이 잠잠해질 것 같았다. ...

브리트니는 손톱을 세우고 리시를 향해 달려들었다. ...

(53) 브리트니의 매너 ...

브리트니는 리시의 근처에도 갈 수 없었다. ...

그녀의 앞을, 건장한 사내가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

브리트니가 한참 고개를 들고 나서야, 사내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케이의 동생인 엘드허트 그린이었다. ...

기사단 제복을 입은 엘디는, 서늘한 눈으로 브리트니를 내려다봤다. ...

파티장 안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두 사람을 쳐다봤다. ...

“내 형수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레이디 위틀로?” ...

브리트니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을 차렸다. 모두가 이쪽을 보고 있다. ...

“무슨…… 짓이라니……? 내가, 뭘…….” ...

“뻔뻔하군, 레이디 위틀로. 레이디답지 못한 눈으로 내 형수를 노려보던데.” ...

“나, 나는…….” ...

브리트니는 도와줄 사람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시선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시선을 돌리는 순간, 경멸 어린 시선들과 마주칠 것 같았다. ...

아버지도, 어머니도 오늘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 창피해서 도저히 파티에 갈 수가 없다며 방에 틀어박혔다. 이 자리에 브리트니의 편은 없었다. ...

“그린 경. 뭔가 오해하는 모양인데, 나는 그저 내 동생에게 예쁘다는 말을 해주려고 했을 뿐이에요.” ...

브리트니는 머리를 차게 식혔다. 어차피 증거도 없으니 흥분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리시의 머리를 쥐어뜯기 전, 엘디가 말려줘서 고마울 따름이었다. ...

“그래? 예쁘다고 해주려는 눈빛은 아니던데. 혹시 어제의 모멸감의 원인이 내 형수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엘디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

브리트니는 뜨끔했지만 뻔뻔하게 미소 지었다. ...

“어제, 내가 모멸감 느낄 만한 일이 있었던가요? 나는 그저 평소 동경하던 황태자 전하께 댄스를 신청했고, 전하께서 바쁘신 일이 있어 거절당한 것뿐인데요.” ...

“그렇지. 하지만 거절당한 직후의 표정은 가관이던걸. 이런 말로 포장할 거였다면, 거절당한 직후부터 표정 관리를 했어야지.” ...

브리트니는 엘디의 뺨을 날려주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 ...

엘디가 그린 가문의 망나니라고 불린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

누구에게나 무례한 남자, 그러나 그 실력과 가문이 대단하여 아무도 뭐라고 하지 못하는 남자. ...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그린 경. 비켜줄래요, 내 동생에게 할 이야기가 있으니.” ...

“그럴 순 없어, 레이디 위틀로. 너 때문에 내 형수까지 창피를 당하는 건, 어제 한 번으로 족해.” ...

“나는 내 동생을 창피하게 만든 적 없어요, 그린 경. 오히려 경의 행동이 그린 백작님을 창피하게 만드는 것 같은데요.” ...

“아, 상관없어. 난 반쯤 내놓은 자식이라서. 봐봐, 내 부모님도 모르는 척하시잖아.” ...

엘디가 그린 노백작 부부 쪽을 가리켰다. ...

그린 노백작 부부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는 듯, 옆에 있는 다른 공작 부부와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

“자, 레이디 위틀로. 얘기가 길어질수록 네 입장만 난처해져. 자존심도 좋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지 그래?” ...

이만 돌아가는 게 낫다는 걸, 브리트니도 알았다. ...

하지만 지금 돌아간다면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개 취급을 당할 것이다. ...

브리트니는 이 상황을 모면할 방법을 찾아 머리를 굴렸다. 마땅히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화가 나고 분통 터지고 서러워서, 눈물을 참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

‘왜 다들 나한테만 이러는 거야? 내가 뭘 어쨌다고? 나쁜 건 아이리스라고! 쟤가 뒤에서 다 조종하는 건데, 왜 아무도 몰라주는 거야?’ ...

브리트니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아이리스의 만행을 낱낱이 고하고 싶었다. ...

하지만 그래 봐야 위틀로 가문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할 정도의 이성은 남아 있었다. ...

브리트니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고 엘디를 노려보다가 말했다. ...

“그린 가문이 이토록 무례한 행위를 눈감아주는 가문일 줄은 몰랐네요. 내 동생에게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

내 동생은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해요, 라는 뒷말을 끝낼 수 없었다. 엘디가 말을 끊었기 때문이다. ...

“형수에게는 아무 말도 못 들었어. 나, 형수랑 별로 안 친하거든. 말했잖아, 내놓은 자식이라고.” ...

평소의 이미지라는 게 그렇다. ...

망나니로 소문난 엘디가 파티장에서 하지 말아야 할 행위를 하며 무례하게 행동하는 건, 다들 그러려니 했다. ...

엘드허트 그린은 원래 저러니까. 오히려 평소보다는 매너가 있네. 그래도 자기 형 결혼식 전야제라 예의를 지키는 모양이야. ...

엘디와 달리 브리트니는 동생을 아끼고 걱정하는, 좋은 언니의 이미지를 쌓으며 살아왔다. 그러니 브리트니가 하는 작은 실수조차도 크게 부풀려져, 사람들 사이에 뒷얘기를 오가게 했다. ...

미친개와 싸우면 이겨도 욕을 먹고, 져도 욕을 먹는다는 말이 있다. 애초에 미친놈과는 싸우지도 말라는 뜻이다. ...

브리트니는 자신이 결코 이길 수 없는 남자를 상대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끌어 모두에게 얘깃거리를 만들어주느니, 꼬리 말고 도망치는 개가 되는 편이 나았다. ...

브리트니는 휙 돌아섰다. ...

하지만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다. 턱을 바짝 들었다. ...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무례한 사내 때문에 기분이 상해 나가는 것처럼 보이도록, 우아하고도 느릿하게 걸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

복도로 나가는 순간, 브리트니는 달렸다. 눈물이 흘렀지만, 그조차 깨닫지 못했다. 분했다. ...

제 언니가 당하는데도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앉아만 있던 아이리스를 용서할 수 없었다. ...

‘두고 봐. 내가 황태자비만 되면, 너도, 엘드허트 그린도, 전부 다 없애버릴 거야!’ ...

 

+++

브리트니가 나간 후, 엘디는 리시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

“이걸로 윈디 일은 갚아준 거야. 앞으로 내가 도와줄 거란 기대는 하지 마.” ...

“도움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딱히 윈디 일을 도와줬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데.” ...

“그때 너, 아니, 형수는 은혜를 베풀었다는 표정이었다고. 얼마나 우쭐한 표정이었는지 알아?” ...

리시가 키득 웃었다. ...

“마음에 담아뒀었구나, 엘드허트. 착하기도 하지.” ...

“젠장. 애 취급하지 마. 기분 나쁜 여자 같으니.” ...

엘디가 툴툴거리며 멀어졌다. ...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귀족들은 생각했다. ...

‘별로 안 친하다더니, 굉장히 친해 보이는걸. 그린 백작 부인은 그린 가문 사람들에게 되게 사랑받나 보네. 앞으로 함부로 대하면 안 되겠어. 저 그린 가문의 망나니를 적으로 돌리지 않으려면.’ ...

 

+++

눈이 벌게져서 돌아온 브리트니의 모습에, 글로번은 속이 타들어 갔다. ...

펑펑 우는 브리트니가 안쓰러운 한편, 가만히 있으라 해도 말을 듣지 않는 브리트니에게 화가 치밀었다. ...

‘아이리스라면 잠자코 내 말을 들었을 텐데.’ ...

고분고분한 아이리스와 비교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하지만 이제는 아이리스도…….’ ...

글로번은 바보가 아니었다. ...

그린 가문에 들어온 후, 리시는 변했다. 그린 가문을 주도해 위틀로 가문을 멸시하고 밀어냈다. 리시를 이용해서 그린 가문을 쥐고 흔들 계획이었는데, 그 계획은 시도조차 해볼 수 없었다. ...

이제 리시는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 아닌, 그린 가문의 안주인이다. 글로번이 고함을 지르면 찔끔해서 고개를 숙이고, 잘못했다는 말을 웅얼거리던 아이리스는 사라졌다. ...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왜 아이리스가 그렇게까지 변한 거지?’ ...

엎드리라 하면 엎드리고, 기라고 하면 기는, 말 잘 듣는 강아지로 키웠는데, 결혼 좀 했다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다니. ...

‘그린 백작이 무슨 짓을 한 건가?’ ...

아니, 생각해보면 결혼 전부터 그랬다. 케이가 리시와 결혼하고 싶다고 찾아온 날부터. ...

그날은 금광에 눈이 멀어 리시를 제대로 살피지 않았는데, 인제 와서 생각해보면 응접실에 들어온 리시는 평소와 조금 달랐다. ...

겁에 질린 눈빛도, 울적한 입매도, 축 늘어진 어깨도 없었다. 리시는 어깨를 폈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고, 당당한 눈빛으로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케이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

‘호랑이 새끼가 발톱을 감추고 있었어.’ ...

위틀로 공작저에 있을 때의 행동은, 전부 꾸며낸 것이 틀림없다. ...

‘제 어미의 복수라도 할 셈인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낳기만 한 년이 뭐가 좋다고. 나는 키워주고 먹여주고 아껴줬는데!’ ...

글로번은 리시가 괘씸했다. ...

하녀에게서 태어나 하녀 취급을 받으며 살 것을 공작의 막내딸로 잘 키워줬는데, 그래서 그린 백작과 결혼까지 할 수 있었는데, 은혜를 갚기는커녕 이빨을 드러낸다. ...

‘아이리스도 그렇고, 그린 백작도 그렇고…… 우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생각은 없다고 봐야겠지. 그렇다면…….’ ...

황태자밖에 없다. ...

초조함을 드러내지 않고 느긋한 척 공들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

글로번은 곧장 서채에 있는 황태자 보좌관들의 방으로 찾아갔다. 황태자의 수석 보좌관인 세트니는 황태자의 옆방을 쓰지만, 다른 보좌관들은 서채의 방을 사용했고, 파티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

보좌관의 방 앞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글로번이 줄을 대고 있던 차석 보좌관 쿠리언이 복도를 걸어오는 중이었다. ...

수석 보좌관인 세트니와 손을 잡는 편이 좋았겠지만, 세트니는 고지식하고 충심이 가득해서 돈에 흔들리지 않는 자였다. ...

차석 보좌관인 쿠리언은 머리가 좋지만 돈 욕심이 많기로 유명했다. ...

글로번에게 큰돈을 받은 쿠리언은 브리트니를 황태자비로 강력하게 밀었고, 세트니 역시 위틀로 가문 정도면 괜찮겠다 싶었는지 쿠리언의 의견에 찬성하고 있었다. ...

황태자도 수석과 차석 보좌관의 말을 크게 반대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쿠리언!” ...

글로번의 외침에 복도에 있던 고용인들이 깜짝 놀라서 돌아봤다. ...

쿠리언이 인상을 찌푸리고 빠르게 걸어와 글로번의 팔에 손을 얹었다. ...

“이거, 이거. 왜 얼굴을 보자마자 고함을 치고 그러십니까, 공작님.” ...

“황태자 전하께서 우리 브리트니와 춤을 추지 않았다는 걸 들었을 텐데!” ...

“이런. 공작님, 보는 눈도, 듣는 귀도 많은 곳에서 브리트니 양의 치부를 낱낱이 고할 셈이십니까? 자리를 옮기시지요.” ...

쿠리언이 달래듯 말했다. 그제야 글로번도 큼큼 헛기침하며 쿠리언과 함께 테라스로 나갔다. ...

“브리트니 양에게 벌어진 안타까운 일은 저도 이미 들었습니다.” ...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쿠리언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

“하지만 공작님. 황태자 전하께서 황태자비 후보에게 춤을 청해야 한다는 법도는 없습니다. 아실 텐데요.” ...

“법도는 없지만, 매너라는 게 있지 않소. 보통 파티가 열리면 전하께서는 황태자비 후보들에게 춤을 청하시는 법이오. 후보 중에서도 1순위 후보에게 제일 먼저 춤을 청하시지. 이것은 황제 폐하께서 황태자이실 때도 마찬가지였소.” ...

“물론 그렇지요.” ...

“그런데 이건 뭐요? 황태자 전하께서는 뜬금없이 아이리스에게 춤을 청하시고는, 그 후로 아무와도 춤추지 않고 돌아가시지 않았소? 오늘은 파티에 참석조차 안 하셨다지?” ...

“하아.” ...

쿠리언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표정을 굳혔다. ...

“공작님. 이상하네요. 그린 백작 부인께서도 공작님의 영애 아니십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결혼식을 올리기 전의 신부에게 춤을 청하신 것은, 황실의 가호를 내린다는 크나큰 영광인데, 왜 그리 화가 나셨는지요?” ...

글로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와 반대로 쿠리언의 표정은 점점 사라졌다. ...

“그리고 공작님. 그리 매너를 따지시는데, 브리트니 양의 매너부터 어떻게 좀 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

(54) 널 사랑하나 봐. ...

“무, 무엇이?” ...

“그렇잖습니까? 감히 황태자 전하께 먼저 나서서 춤을 청하시다니. 상대가 황태자 전하가 아니라도, 레이디가 먼저 춤을 청하는 건 민망한 일인데, 하물며 황태자 전하께 그러시는 것은…….” ...

“그, 그건…….” ...

글로번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

“듣자 하니 예전에 브리트니 양이 그린 백작에게도 먼저 춤을 청했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그 얘기를 들었을 때야 당찬 여성이라고 생각했는데, 황태자 전하께까지 그러는 것은 좀…….” ...

쿠리언이 경멸 어린 표정을 지으며,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

글로번은 브리트니가 옆에 있다면 뺨을 한 대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브리트니에게 화가 났다. 그러게,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거늘. ...

무슨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글로번은 주절주절 내뱉었다. ...

“우리 사이의 약속이 있지 않소. 황태자 전하께서 당연히 우리 브리트니에게 춤을 청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러지 않으시니, 브리트니도 애가 닳아서 그런 거 아니겠소?” ...

“그러니까 그게 문제란 말입니다, 공작님. 소문에 브리트니 양은 어른스럽고 차분하다고 해서 믿었는데. 그렇게 애 닳은 기분을 겉으로 드러내서야, 황태자비라는 어렵고 귀한 자리에서 버틸 수나 있을지…….” ...

글로번은 아차 싶었다. 얘기가 어째 점점 안 좋게 돌아간다. ...

“내게, 내게 돈을 받지 않았소! 돈값은 하셔야지.” ...

“저런. 공작님, 그리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을 텐데요. 공작님께 받은 자금은 전부 브리트니 양을 황태자비로 만들기 위한 준비로 쓰일 것이라고. 그 돈 중에 제가 개인적으로 쓴 돈은 하나도 없습니다.” ...

글로번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지적하지 않았다. ...

브리트니를 황태자비로 만들기 위해 믿을 사람은 쿠리언밖에 없었다. 쿠리언와 틀어지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허사가 된다. ...

“쿠리언, 내가 답답해서 그러네, 답답해서.” ...

“압니다, 공작님. 알고말고요. 하지만 이번에 브리트니 양이 너무 큰 실수를 하셔서…… 어렵게 됐습니다. 가만히만 계셨어도 돌아가는 대로 황태자비 발탁을 하셨을 텐데요.” ...

“뭔가 방법이 없겠소?” ...

“글쎄요. 어제의 일로 귀부인들은 물론이거니와 귀족들 사이에서도 말이 나와서요. 아시지요? 사교계에서 너무 언급되는 여인은 황태자비가 되기 힘들다는 거…….” ...

“어음을 끊어주지. 필요한 금액을 말해보시오.” ...

쿠리언이 고개를 저었다. ...

“아시다시피 어음은 받지 않습니다, 공작님. 현물이어야 곧바로 자금을 융통해서 브리트니 양을 위해 쓸 수 있죠.” ...

“끄응…….” ...

글로번은 골치가 아팠다. ...

그동안 쿠리언에게 준 돈만 해도 1만 골드가 넘었다. 리시의 결혼식 비용으로 나갈 돈이 적어도 3천 골드는 될 터였다. ...

아무리 금광이 있다 해도, 2, 3년은 쉬지 않고 캐내야 벌 수 있는 돈이다. 황실에서 공작에게 매년 지급하는 연급이 1천 골드는, 다 쓴 지 오래였다. ...

“내 금광의 권리 중 10프로를…….” ...

“말씀드렸잖아요, 공작님.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자금이 필요하다고.” ...

쿠리언이 딱 잘라 거절했다. ...

“좋소. 그렇다면 내 지금 당장 은행에 가서 자금을 빌려오지. 지금까지 드린 돈이 있으니 한 5백 골드면 되겠지?” ...

“아니요, 공작님. 2천 골드는 필요합니다. 지금 노리시는 자리가 그냥 왕비 자리 정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 대륙에서 가장 부강한 제국의 황태자비가 되시려면, 배포가 크셔야지요.” ...

+++

브리트니는 어딘가에 나갔다가 돌아온 글로번에게 크게 혼났다. ...

“아무 짓도 하지 마, 브리트니! 제발 아무 짓도 하지 말라고!” ...

글로번은 거의 절규했다. ...

“네가 한 짓 때문에 안 써도 되는 돈을 얼마나 쓴 줄 알아? 자그마치 5천이 넘는다고, 5천이!” ...

“5천이라니…… 설마, 5천 실버?” ...

“실버? 실버어?” ...

“설마…… 골드야? 5천 골드? 아이리스 결혼식 비용이 5천 골드나 돼요?” ...

“아이리스 결혼식 비용뿐만이 아니야! 널 황태자비로 만들기 위해서도 돈이 들어. 그런데 네가, 네가 괜한 짓을 해서!” ...

브리트니의 표정이 밝아졌다. ...

“나 아직 황태자비 될 수 있는 거 맞죠?” ...

철없이 웃는 브리트니의 모습에, 글로번은 억장이 무너졌다. ...

“네가 아무 짓도 하지 않으면! 황태자가 춤을 청하지 않는다고 먼저 춤을 청하고, 아이리스에 대해 괜한 말을 떠들어대지만 않으면!” ...

“아니, 여보. 왜 애한테 자꾸 소리를 질러요?” ...

데니스 위틀로 공작부인이 볼멘소리를 냈다. ...

글로번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

“지금 소리를 안 지르게 생겼어? 브리트니가 황태자비가 된다고 해서 곧바로 돈을 벌어다 줄 것도 아니고, 황후가 될 때까지는 몸 사려야 하는데…… 빚이 잔뜩이라서 당장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아야 한다고!” ...

“허리띠가 문제예요, 지금? 우리 브리트니가 황태자비가 되는데?” ...

“하이고야, 하이고야.” ...

글로번이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

브리트니는 아버지 속도 모르고 생글생글 웃으며 꿈꾸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브리트니,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무 짓도 하지 마라. 만약 내일 결혼식을 망칠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거 절대로 하지 마. 네가 뭐 하나 하면, 황태자비의 길에서 멀어질 뿐이니까.” ...

브리트니는 내일 리시의 결혼식을 망치기 위한, 수십 개의 계획을 세워둔 터였다. 리시가 행복한 얼굴로 결혼식을 무사히 마치는 것만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하지만 황태자비가 되려면 어쩔 수 없지.’ ...

속은 좀 뒤집히겠지만, 내일은 웃는 얼굴로 아이리스를 축하해주는 수밖에. ...

+++

파티가 끝난 후, 방에 돌아온 리시는 곧장 화장을 지우고 따뜻한 물이 담긴 욕조에 몸을 담갔다. ...

아직 힐에 익숙하지 않은 발에는 물집이 생겼고, 종아리는 퉁퉁 부었다. 드레스를 입어야 해서 밥도 제대로 먹지 않아, 졸도할 것만 같았다. ...

크리시나는 꿀과 허브, 과일을 적절하게 섞은 팩을 리시의 얼굴에 붙여줬다. ...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참으세요, 아이리스 님. 이제 곧 끝이에요.” ...

“이틀이나 남았잖아요. 하, 정말 괴롭네요. 결혼식.” ...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신부가 되셔야 하는데 괴로우시다니요. 내일 아이리스 님은 정말 아름다우실 거예요.” ...

“물론 그렇기야 하겠지만.” ...

크리시나는 리시가 괜한 겸양을 떨지 않는 부분이 좋았다. ...

“배가 많이 고프실 텐데, 샐러드를 준비해뒀으니 나오시면 드세요.” ...

“여기서 먹을래요.” ...

“잠시만요.” ...

크리시나가 가져온 접시에는 샐러드가 반만 들어 있었다. ...

“으, 또 풀떼기.” ...

리시가 진저리를 치자 크리시나가 쿡쿡 웃으며 욕조 덮개를 설치하고, 그 위에 샐러드 접시를 내려놨다. ...

“맛있게 드세요, 아이리스 님. 앞에 있을 테니 필요하면 부르시고요.” ...

리시는 포크를 들었다. 너무 굶주려서 드레싱을 치지 않은 샐러드마저 맛있어 보였다. ...

쓴맛이 나는 샐러드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데, 욕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에르웰이 들어왔다. ...

“에르웰, 무슨……?” ...

에르웰이 검지를 입에 대기에, 리시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

바깥을 살피며 다가온 에르웰이, 욕조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

“시니는 잠깐 졸고 있어요.” ...

조는 걸 일러바치러 온 걸까? 늘어지게 자도 상관없는데. ...

“시니는 좀…… 가혹해요. 시니는 드레스 입을 일이 많아서 굶는 게 익숙하거든요.” ...

아, 뒷말을 하러 온 거구나. ...

그러고 보니, 크리시나와 있을 때 에르웰은 항상 당하는 처지였다. ...

“하지만 아이리스 님은 그렇지 않으시겠죠.” ...

에르웰이 소곤거리며 품에서 뭔가를 꺼내 쓱 내밀었다. 그것은 냅킨에 싸여서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냄새만으로도 뭔지 알 수 있었다. ...

리시는 떨리는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들었다. ...

포장을 벗기자, 그 존재만으로도 찬란하게 빛나는……. ...

“고기 샌드위치라니……. 거기에 고기가 두 장이나…….” ...

“어서 드세요, 아이리스 님. 파티 전날 그것 좀 드신다고 못생겨지실 분도 아닌데…….” ...

“에르웰…… 나, 나 몰랐는데, 에르웰을 사랑하나 봐요.” ...

에르웰이 얼굴을 붉혔다. ...

“저야 무척이나 영광이긴 한데, 그렇게 홀딱 벗으신 채로 말씀하시면 너무 진심이신 것 같아서, 입맞춤이라도 해드려야 하나 싶기도 하고…….” ...

에르웰이 횡설수설하는 동안, 리시는 이미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고 있었다. ...

입에 넣자마자 퍼지는 진한 고기 향과 달콤짭짤한 소스의 맛. ...

리시의 가슴에 에르웰을 향한 애정도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높아졌다. ...

“에으에. 어마로…….” ...

“네, 네. 알겠으니까 드시는 데 집중하세요. 크리시나가 뺏으러 오기 전에요.” ...

입에 샌드위치를 가득 넣고 우물우물 사랑 고백을 하던 리시는, 크리시나가 올지도 모른다는 말에 결의에 찬 눈으로 샌드위치를 먹는 데 집중했다. ...

에르웰은 욕조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열심히 샌드위치를 먹는 리시를 지켜봤다. ...

처음에 그린 백작 부인의 시녀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땐, 솔직히 좀 기분 나빴다. ...

물론 다른 곳도 아닌 ‘그린 가문’의 시녀 자리이니, 누구나 원하는 자리인 건 분명했지만, 에르웰은 단지 시녀 같은 걸 할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

그럼에도 수락한 이유는 크리시나 때문이었다. ...

-궁금하지 않아? 그 그린 백작이 선택한 여자가 어떤 여자일지. ...

처음에는 리시가 예뻐서 마음에 들었다.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는 별명조차 아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

다음에는 다른 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

버릇없는 질레트를 대하는 태도, 그린 백작을 다루는 솜씨, 당혹스러울 상황에서도 잃지 않는 미소와 품격. ...

자그마한 체구를 가진 리시가 때때로 그 누구보다도 거대하게 느껴지곤 했다. ...

그래서 에르웰은, 리시가 마음에 들었을 뿐 아니라, 이 작고 영리하고 강한 듯하지만 약한 부분도 있는 백작 부인을, 온 힘을 다해 지키고 싶어졌다. ...

‘아, 가끔 귀엽기도 하시지.’ ...

리시는 샌드위치를 다 먹고 나서, 손가락에 묻은 소스를 쪽쪽 빨아먹는 중이었다. ...

다른 사람이 하면 더러워 보일 행동인데, 리시가 하면 순수한 소녀가 하는 행동처럼 보여서 귀여웠다. ...

에르웰은 리시의 이런 행동을 볼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알았다. ...

리시가 이렇게 허물없는 행동을 한다는 건. ...

‘날 신뢰하신다는 거겠지.’ ...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

“굉장했어요, 에르웰. 방금 건 정말, 굉장했어요.” ...

“그렇죠?” ...

“하, 정말…… 에르웰, 이 은혜는 꼭 갚을게요. 언제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반드시 내게 말해줘요. 이건, 음. 열 번.” ...

리시가 손가락 열 개를 쫙 펼쳤다. ...

“열 번쯤은 에르웰을 도울 수 있을 만한 일이야.” ...

에르웰이 키득키득 웃었다. ...

“즐거워 보이는군요.” ...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에르웰은 벌떡 일어나 반사적으로 옆구리에 손을 가져갔다. ...

언제 들어온 건지, 문에 등을 기대고 있던 케이가 두 손을 살짝 들었다. ...

“워어. 나야, 에르웰.” ...

에르웰이 허리에서 손을 떼고 케이를 노려봤다. ...

“노크하셔야지요, 백작님.” ...

“리시를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살금살금 들어왔는데, 네가 있을 줄은 몰랐지.” ...

에르웰은 자신이 케이가 들어오는 기척을 전혀 알아챘지 못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

그러고 보면 항상 그랬다. 케이는 언제나 갑작스럽게 등장했다. ...

“리시랑 좋은 시간을 보내는 중에 미안한데, 그만 가서 쉬어. 나머지 시중은 내가 들 테니까.” ...

(55) 당연히 치료만 ...

  에르웰이 나간 후, 케이가 욕조 옆으로 다가왔다. ...

리시는 욕조 위에 욕조 덮개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에르웰이 뭔가 굉장한 걸 해줬나 봐요.” ...

“응, 해줬어요. 어마어마했죠.” ...

“뭘 해준 거예요?” ...

“비밀이에요.” ...

“나한테도?” ...

“당신한테도.” ...

“그거 너무하네. 나도 당신한테 굉장한 걸 잔뜩 해줄 수 있는데.” ...

“에르웰만큼은 아닐걸요. 에르웰,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에르웰 같은 사람을 시녀로 영입해줘서 고마워요, 케이.” ...

“흐음.” ...

케이가 욕조 끝에 걸터앉아 미간을 좁혔다. ...

“나보다 에르웰이 더 좋아요?” ...

“또 질투해요, 케이?” ...

“말했잖아요. 난 질투가 많다고.” ...

리시는 물을 조금 퍼 올려서 케이의 얼굴에 뿌렸다. ...

“이상한 질투는 하지 말아요. 에르웰은 여자잖아요.” ...

“보통 여자가 아니지. 어마어마한 여자거든요, 에르웰은.” ...

“어마어마하다고요?” ...

“아, 그런 게 있어요.” ...

케이가 싱긋 웃으며 욕조 덮개에 놓인 샐러드를 가리켰다. ...

“안 먹어요?” ...

“괜찮아요.” ...

“듣자 하니 요새 끼니를 거르고 있다던데. 샌드위치 하나로는 배고프잖아요.” ...

“새, 샌드위치라니요?” ...

리시가 모르는 척하자 케이가 쿡쿡 웃었다. ...

“리시, 늑대는 후각이 좋아요.” ...

“늑대는 참 좋은 것도 많네요.” ...

“뭘 먹었다고 나무라려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꽉 죄는 드레스를 입는 것보다는 굶주리지 않는 게 우선이에요. 누구도 내 아내를 굶주리게 만들 순 없어요.” ...

“크리시나가 굶주리게 하던데.” ...

“혼내줄까요?” ...

“이길 수나 있겠어요?” ...

“하긴. 크리시나도 어마어마한 여자라서…….” ...

어마어마하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크리시나의 말발이 케이보다는 셀 거라고 말한 거였는데. ...

“풀떼기만 먹는다는 말을 들어서 요리를 좀 준비했어요. 욕조 안에서도 먹을 수 있는 것들인데.” ...

“됐어요. 샌드위치 하나면 충분해요. 내일이 진짜인데, 드레스를 잘 소화해내고 싶어요.” ...

“저런, 리시. 아직도 몰라요?” ...

케이가 눈을 부릅떴다. ...

모두가 아는 사실을 리시만 모른다는 게, 하늘이 떨어질 정도로 놀라운 일이라는 표정이었다. ...

내가 놓친 게 있는 걸까? ...

“응? 뭘요?” ...

“거적때기를 입고 나가도, 내일 당신이 제일 예쁠걸요.” ...

“하…….” ...

저 주접을 어찌해야 하나. ...

리시가 기막히단 한숨을 내뱉자 케이가 웃었다. ...

“왜, 당신도 알잖아. 당신이 얼마나 예쁜지.” ...

“알아요. 하지만 거적을 걸쳐도 제일 예쁠 정도는 아니야.” ...

“그렇다면 당신이 잘못 알고 있는 거야. 당신은 홀딱 벗고 있어도 세상에서 제일 예쁘거든. 솔직히 말하자면…….” ...

케이의 음성이 은밀하게 낮아졌다. ...

몇 번이나 속았으면서도, 리시는 또 속았다. 혹시 다른 말이 나올까 싶어, 덩달아 진지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

“좀 곤란해. 당신이 너무 눈부셔서 시력이 떨어지고 있어.” ...

“……케이.” ...

“그러니까 리시.” ...

케이가 벌떡 일어나서 욕실을 나가더니, 트롤리를 밀고 들어왔다. ...

“마음껏 먹어. 지금보다 두 배 더 살이 쪄도, 세상에서 제일 예쁠 거야.” ...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

리시가 고개를 저었지만, 케이는 트롤리에서 맛있어 보이는 카나페를 들어 올려 리시의 입 앞으로 가져왔다. ...

리시는 거의 넘어갈 뻔했다. ...

살짝 벌어진 입술로, 엄청 맛있을 것이 분명한 카나페를 품으려 했다. 입술이 짭조름한 크래커에 닿는 순간, 리시는 정신을 차렸다. ...

한번 먹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 게 분명하다. ...

“안 돼요, 케이.” ...

리시가 손등으로 카나페를 밀어냈다. ...

“흐음. 이렇게 맛있는데.” ...

케이가 카나페를 한입에 쏙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

얄미운 남자 같으니. ...

“이것도 맛있어요, 리시. 한입만이라도 먹어봐요.” ...

케이가 얇게 저며서 살짝 익힌 소고기를 손가락으로 집어서 리시의 입술 앞에 가져왔다. ...

리시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고, 그 고기는 케이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

우물우물- ...

케이는 세상에서 이보다 더 맛있는 음식이 없다는 표정으로 야무지게 씹어서 꿀꺽 삼켰다. ...

“와, 맛있네. 그거 알아요? 우리 저택 요리사는 대륙에서 이름을 날리는 요리사라는 거. 황실 파티에 초청을 받아서 요리를 만든 적도 있죠.” ...

“…….”

“아, 이건 어때요? 해산물은 살 안 쪄요.” ...

케이가 조개 위에 치즈를 올려서 구운 요리를 내밀었다. ...

“치즈는 살쪄요. 짠 거 먹으면 얼굴 붓고.” ...

“얼굴 부으면 동글동글해서 엄청 예쁠 텐데.” ...

“당신 심미안은 좀 이상해.” ...

“와, 이거 정말 맛있네. 짭짤한 맛에 치즈의 고소한 풍미가 교묘하게 어우러져서 혀에 닿는 맛이…….” ...

찰방-! ...

리시는 참지 못하고 물을 한 아름 퍼서 케이의 얼굴에 뿌렸다. ...

“이 밉살맞은 남자 같으니.” ...

케이가 킬킬 웃으며 트롤리를 쭉 밀어 구석으로 보냈다. ...

“이해해줘요, 리시. 내 아내가 굶다가 쓰러지는 걸 보고 싶지 않거든.” ...

“이 정도 굶었다고 쓰러지진 않아요.” ...

리시는 이보다 더 많은 날을 굶은 적이 있었다. ...

“배고픈 것보다는 발이 문제예요. 내 발은 높은 힐을 견딘 적이 별로 없거든요.” ...

그저 케이가 리시의 배고픔에서 관심을 꺼주기를 바라며, 다른 주제를 꺼냈을 뿐이었다. ...

리시는 케이가 곧장 욕조 덮개를 걷어 올리고, 리시의 발을 살펴볼 줄은 몰랐다. ...

케이는 심각한 눈으로, 물속에 잠겨 있는 리시의 발을 확인했다. ...

그의 눈앞에 훤히 드러난 맨발과 종아리, 허벅지가 민망했다. ...

“괜찮으니까 그거 덮어줘요.” ...

“문제라면서요. 이런. 발가락에 물집이 생겼네요.” ...

케이가 욕조에 손을 넣어 리시의 발목을 잡아 살짝 들어 올렸다. ...

“뒤꿈치는 까졌고, 종아리도 부었어. 이렇게 아프면 진작 말했어야지, 리시.” ...

“견딜 만했어요.” ...

“하.” ...

케이가 난처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

내가 그를 성가시게 한 걸까 싶어서 덜컥 걱정됐다. ...

“알겠어, 리시. 이제 어쩔 수 없겠네.” ...

“뭘……?” ...

“당신 발을 관리할 영광을 주겠다니, 황송하게 받아주지.” ...

케이가 미간을 좁힌 채 진지하게 말하는 바람에, 무슨 의미인지를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

그가 커다란 수건을 가져와서 리시에게 나오라고 한 후에야, 그가 뭘 하려는지 깨달았다. ...

“케이, 내 발은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

“알아서 못 하니까 그렇게 엉망이 된 거잖아.” ...

“엉망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야.” ...

“엉망이야. 그 예쁜 발에 물집이라니. 나와, 리시.” ...

“난 당신에게 내 발을 관리할 영광을 주지 않았어.” ...

리시는 케이에게 자신의 발을 맡기고, 그가 신중하게 그 말을 꼼꼼히 살펴볼 때 느끼게 될 감정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

그건 너무 창피하다. 사내에게 맨발을 관찰당하다니. 지금도 창피해 죽겠는데. ...

“영광도 주지 않을 만큼 옹졸한 여자인 줄은 몰랐는데.” ...

“그럼 이제부터 알도록 해. 나, 굉장히 옹졸해. 그린 백작가의 옹졸이라고 불릴지도 몰라. 아니면 레이디 옹졸이라거나.” ...

찌푸리고 있던 케이의 미간이 펴졌다. 케이의 입가 근육이 실룩거렸다. 그는 웃음을 참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

“아하하하. 레이디 옹졸이라니. 그거 근사한걸. 내 부하들이 들으면 좋아하겠어.” ...

“당신이 그렇게 좋아해주니 기쁘네. 앞으로 당신과 그림자들의 기쁨을 위해, 더욱더 옹졸해지려고 노력할게.” ...

“하하하. 알겠어, 리시. 당신이 이겼어. 하지만 당신 발은 정말 걱정이야. 지금이야 따뜻한 물 안에 있으니 괜찮겠지만, 내일은 걸을 수 없을 정도일 거라고. 그냥 치료만 해줄게. 응?” ...

케이가 간절히 말하며 눈썹 끝을 늘어뜨렸다. ...

리시는 자신이 저 표정에 약하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케이가 저토록 원하는데, 민망함 같은 건 한 번쯤 참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알겠어. 치료만 하는 거야.” ...

리시가 욕조에서 나오자마자, 케이가 커다란 수건으로 리시의 몸을 감쌌다. ...

그가 리시의 귀를 살짝 깨물고 속삭였다. ...

“당연히 치료만 하지. 뭘 기대하는 거야, 리시.” ...

+++

리시는 발이 이렇게까지 야릇한 부위가 될 수도 있다는 걸 꿈에도 몰랐다. ...

리시를 소파에 앉힌 케이는,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리시의 종아리를 세운 무릎 위에 얹었다. ...

그는 부드러운 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물기를 닦아내고, 작은 발을 요리조리 돌려 상태를 확인했다. ...

“오늘 밤에는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감아두죠. 효과가 좋은 연고니까 내일이면 가라앉을 거예요.” ...

케이가 약통에 든 연고를 듬뿍 퍼서, 리시의 발에 발랐다. 그의 손가락이 발가락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문질렀다. ...

연고로 미끌거리는 손가락이 발가락의 신경을 야릇하게 자극했다. 리시는 손이 하얗게 될 정도로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발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어째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뭉글뭉글 들어찼다. ...

연고를 바른 부위가 금세 시원해지며 통증이 가라앉았지만, 이상하게도 리시는 뜨겁게 느껴졌다. ...

‘저 연고, 굉장히 비쌀 텐데. 저걸 저렇게 많이 쓰다니.’ ...

다른 생각을 하면서 묘한 기분을 털어내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

신중한 눈으로 리시의 발을 응시하는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청각이 좋은 케이가 이 소리를 듣고, 이 기분을 눈치챌까 봐 걱정이었다. ...

리시의 양쪽 발에 전부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감아준 케이가 말했다. ...

“리시.” ...

“헛?” ...

너무 긴장하고 있어서 바보 같은 대답을 하고 말았다. 케이는 그 부분을 놀리지 않고 말했다. ...

“종아리 좀 주무를게.” ...

“아, 아니. 아니, 괜찮아.” ...

리시가 황급히 발을 빼내려 했지만, 케이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버둥거리다가 슬립이 말려 올라가, 하얀 허벅지가 드러나는 걸 보고서야 버둥거리는 걸 멈췄다. ...

케이의 눈동자가 리시의 허벅지를 향했다. 리시가 움찔하며 손을 뻗기 전에, 케이의 손이 슬립을 끌어 내려 허벅지를 덮어줬다. ...

“날 유혹하려고 그런 거라면 성공했어. 이성이 날아갈 뻔했거든.” ...

케이가 단조롭게 말했다. 이런 농담은 종종 나눴기에, 리시는 당황하지 않고 대꾸했다. ...

“아쉽네. 완전히 날아가진 않아서. 내가 좀 더 야해져야 하나 봐?” ...

“안 그래도 돼, 리시. 당신이 숨만 쉬어도 내 이성이 왔다 갔다 하니까.” ...

농담하는 게 아니었나? ...

리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케이의 표정을 살폈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

그러는 동안, 그의 손이 리시의 종아리에 닿았다. 그는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서, 리시의 종아리를 요령 좋게 주물렀다. ...

높은 힐을 신어서 뭉친 근육을 자극하는 손길. 아파서 야릇한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

“으…… 아…… 앗…… 으…….” ...

케이의 손가락 끝이 꾹 누를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에, 리시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

처음에는 그저 아프기만 했는데, 뭉친 근육이 좀 풀리고 나니 시원했다. ...

“하아…… 음…… 아…….” ...

리시는 졸린 고양이처럼 눈을 반쯤 감고, 종아리 마사지를 즐겼다. ...

그래서 케이의 눈동자가 관능적 어둠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

(56) 그린 백작 가문의 결혼식 (1) ...

꿀꺽- ...

케이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

케이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

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

이 순진한 여자는, 지금 자기가 어떤 소리를 내고 있는지 모른다. ...

저런 소리를 들은 사내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상상도 못 하겠지. ...

리시가 마음의 준비를 할 때까지, 그녀를 취하지 않으려 한 것과는 별개로, 오늘은 결혼식 전날 밤이다. ...

신부는 충분히 쉬고, 최고의 상태로 결혼식을 치러야만 했다. ...

‘참자. 참아야 한다, 케이브란트 그린. 잘하잖아, 참는 거.’ ...

아니, 모르겠다. 지금까지 참아야만 하는 순간이 많지는 않았다. ...

“아핫…… 음…….” ...

아, 못 참겠다. ...

아무래도 나는 인내심이 전혀 없는 것 같다. ...

“리시.” ...

“응?” ...

“그…… 뭐라고 해야 하나.” ...

한 가닥 남은 아주 가느다란 이성의 끈을 의지해서, 케이는 힘겹게 말했다. ...

“그 소리 좀…….” ...

“소리? 아!” ...

리시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이 발그레 물드는 걸 전부 가리진 못했다. ...

‘그냥 종아리나 보고 있을걸.’ ...

리시의 얼굴을 보는 바람에, 더 참을 수 없게 되었다. ...

이성의 끈은, 발그레 물든 리시의 얼굴을 버텨줄 만큼 강하지 못했다. ...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리시의 위에 올라타 입을 맞추고 있었다. ...

달큰한 타액을 삼켜도 갈증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다. ...

간신히 입술을 떼어내고 내려다보니, 리시가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케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성이 끊긴 와중에도 그녀를 두렵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

케이는 엄지로 리시의 눈가를 쓸었다. ...

“울어요?” ...

“내가? 왜?” ...

“무서워서.” ...

리시의 눈이 가늘어졌다. ...

“난 당신이 무섭지 않아요, 케이.” ...

“하지만 눈가가 젖어 있어.” ...

리시가 손을 뻗어, 케이가 한 것처럼 엄지로 케이의 눈가를 쓸었다. ...

아주 짧게 스친 손길이 뜨거웠다. 눈가에서 시작된 열기가 전신으로 퍼졌다. ...

“당신 눈가도 젖어 있어, 케이.” ...

그녀의 대꾸로 깨달았다. ...

리시가 더는 케이를 거부하지 않는다는 걸. ...

앞으로 벌어질 행위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케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걸. ...

“아이리스. 당신, 뜨거워졌군.” ...

리시가 살짝 웃었다. ...

“당신은 전부터 뜨거웠고.” ...

케이는 당장 그녀의 모든 것을 이 안에 가두고 싶었다. 구석구석 남김없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녀에게 제 냄새를 묻혀, 내 것이라 증명하고 싶었다. ...

하지만 오늘은 참기로 했다. ...

내일, 리시는 주인공이다. ...

주인공인 그녀가 아픔을 참으며 절뚝거리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

“리시, 젠은 눈치가 빨라요.” ...

리시는 검지로 케이의 입술을 눌렀다. ...

영리한 리시는 케이가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 금방 알아들었다. 젠이 넬라와 함께 주도한 결혼식을 망칠 수는 없다는 의미이리라. 망친 이유를, 젠은 한 번에 알아챌 거고. ...

리시 역시 최상의 상태로 결혼식을 진행하고 싶었다. ...

“걱정 마요, 케이. 내일도 나는 뜨거울 것 같으니까.” ...

 

+++

그의 잠긴 음성이 듣기 좋았다. ...

그가 얼마나 리시를 원하는지, 그러면서도 얼마나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지, 그의 쉰 음성으로 알 수 있었다. ...

그걸 알고 나니, 사랑스러웠다. 안타까울 정도로 그가 사랑스러워서, 더는 두렵지 않았다. ...

아니, 오히려 그를 원했다. 그와 나의 향기가 같아지기를 바랐다. ...

그에게 거친 입맞춤을 당할 때도, 지난 삶의 생각은 나지 않았다. 두려움도, 긴장도 없었다. 그가 날 다치게 하는 일은 절대 없으리라는 걸 믿었다. ...

그리하여 리시는 알았다. ...

‘아아, 그렇구나. 내가 이 남자를 사랑하는구나. 어느새 그리되어버렸구나.’ ...

수줍게 고개를 내민 아이리스라는 꽃이, 모르는 사이에 활짝 피었나 보다. ...

이 감정이 사랑이라는 걸 알았음에도 두렵지 않을 만큼. ...

그의 감정은 다를지도 모르는데 무섭지 않을 만큼. ...

리시의 심장에 핀 꽃은 다부지고 단단했다. ...

+++

결혼식은 정오, 햇살이 밝을 때 열린다. ...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르렀다. ...

리시는 새벽부터 치장해야 했다. ...

디자이너인 티오렛까지도 조수들을 이끌고 찾아왔다. ...

“제 인생 최고의 작품을 눈에 담고 싶어서요.” ...

전야제 파티 때보다 더 오랜 시간이 들었다. ...

디자이너인 티오렛과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감각을 타고 난 크리시나. ...

둘의 도움으로 완벽한 드레스에 어울리는 완벽한 헤어스타일과 장신구를 작용할 수 있었다. ...

“하, 이럴 수가.” ...

모든 준비를 마치고 선 리시를 보며, 티오렛은 눈물을 흘렸다. ...

“저 드레스를 내가 만들었다니…… 백작 부인, 정말…… 그 드레스를 훌륭하게 소화해내실 수 있는 사람은 백작 부인뿐일 거예요. 완벽해요. 역시 제 인생 최고의 작품이에요.” ...

티오렛이 호들갑스럽게 칭찬했고, 조수들도 그럼, 그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이제 슬슬…… 으아, 깜짝이야!” ...

리시를 부르기 위해 찾아온 젠이, 숨을 들이마셨다. ...

“뭐야, 리시. 왜 이렇게 예쁘지? 이건 좀…… 와, 말도 안 되잖아요, 리시.” ...

“과찬이에요, 젠. 너무 그러면 민망해요.” ...

“아니, 아니. 이것도 부족하죠. 아니, 예쁠 줄은 알았거든요. 정말 알았는데…… 아니, 좀…… 와, 너무 예쁘다. 음, 이거 좀 큰일인데.” ...

“왜요?” ...

“리시가 너무 눈부셔서 다들 리시를 제대로 못 볼 거 아니에요.” ...

남매가 똑같구나. ...

리시는 어이가 없었다. ...

예쁘기로 따지자면 젠도 마찬가지였다. 형제의 결혼식에 어울리는, 우아하고 차분하면서도 약간은 섹시한 느낌을 풍기는 드레스를, 젠은 훌륭하게 소화했다. ...

그런 젠이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

“아무튼! 이제 출발해야 해요. 마차를 대기시켜뒀어요.” ...

본채 앞에서 기다리는 마차의 선두를 이끄는 말은, 케이의 흑마인 블랙이었다. ...

블랙은 위용 있는 자태로 푸르르거리다가, 리시를 알아봤는지 힝힝, 애교스러운 소리를 냈다. ...

리시가 블랙을 쓰다듬어주려고 다가가려는 걸, 젠이 막았다. ...

“지금은 안 돼요, 리시. 얼른 마차에 타요. 너도 그만 풍풍거리고.” ...

젠이 블랙을 꾸짖으며 리시를 마차에 태웠다. ...

드레스 치맛자락이 넓게 퍼져서 마차에 타기 위해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내릴 때도 도와줄 사람들이 몇 명 같이 마차에 올랐다. ...

마차 창문은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밖에서는 절대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구조였다. ...

“순서는 이미 설명했지만, 다시 얘기해줄게요.” ...

젠이 벌써 열 번쯤 알려준 진행 순서를 되풀이해서 말하는 동안, 마차는 쉬지 않고 결혼식이 열리는 호수를 향해 달렸다. ...

+++

넬라니커스 제널 백작 부인이 주도해서 진행하는 결혼식이니만큼 화려할 거라는 건, 다들 짐작하는 바였다. ...

그러나 이 결혼식은 화려함을 넘어섰다고, 그 자리에 모인 귀족들은 한마음으로 생각했다. ...

넓은 호수, 호수 주위의 둘레길과 넓은 공터, 그리고 둘레길 너머로 자라는 빼곡한 나무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화려하게 꾸몄다. ...

무슨 수를 쓴 건지, 호수를 둘러싼 나무들은 이파리도, 줄기도 흰색이었고, 이파리 사이사이에 갖가지 색의 보석이 반짝거렸다. ...

호수 둘레를 따라서 깔린 잔디 길을 걸어가면, 식이 열리는 넓은 공터가 나온다. ...

하얀색 아치는 자세히 보면 여러 종류의 보석이 박혔고, 양쪽에 연한 분홍색 꽃을 늘어뜨려서 화려하면서도 우아했다. ...

공터에 만들어진 연회장 아래는 하얀 돌이 깔려 있었다. 완전히 하얗지는 않고 파스텔 톤의 모래를 섞어 만들어서 달콤한 느낌을 내는 벽돌이었다. ...

하객석과 테이블도 흰색이지만, 테이블보는 하늘색이라서 바닥에 깔린 벽돌과 잘 어울렸다. ...

하객석은 호수를 정면으로 둘 수 있게 놓여 있었고, 그곳에는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주례석이 놓여 있었다. ...

하객들을 가장 감탄하게 한 건, 주례석 뒤로 보이는 호수였다. 호수 안에 있던 돌들을 전부 아름다운 색의 돌로 바꿔서, 호수가 햇빛을 받아 다채로운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

두 번은 볼 수 없을 것 같은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

‘그나저나 저기에는 누가 타고 있는 거지?’ ...

호수에 한참 감탄한 하객들은 마지막으로, 주례석 근처에 서 있는 마차에 의문을 품었다. ...

하얀색과 하늘색이 섞인 커다란 마차에는 가문의 문장이 없었다. ...

신부가 타고 있을 리는 없었다. 신부가 탄 마차는 웨딩로드의 끝, 신랑의 뒤에서 대기하는 법이니까. ...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아이리스는 전야제 파티 때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오는 등,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

어쩌면 저 하얀 마차에서 짠, 하고 등장할지도 모른다. ...

‘그렇다면 정말 형편없어 보이겠어. 전야제 때의 드레스야 잘 어울리니 그만이라 쳐도, 결혼식 때까지 기이한 만행을 보이는 건 좋지 않잖아.’ ...

‘호수가 너무 빛나서 신부가 좀 묻힐 것 같은데.’ ...

‘나도 이런 데서 결혼하고 싶다. 빌려주지 않으려나?’ ...

제각각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가운데, 하객석은 빈틈없이 채워지고 결혼식 시간이 다가왔다. ...

황태자는 가장 앞자리에 앉았다. 황태자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는 위틀로 공작 일가, 왼쪽에는 그린 백작 일가의 자리였다. ...

모두 조용히 앉아서 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

처음에 결혼식장에 들어선 브리트니는, 리시의 결혼식장이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하다는 사실에 짜증이 치밀었다. ...

하지만 황태자의 옆자리에 앉게 되자, 리시에 관한 생각은 깨끗이 사라지고, 저 웨딩로드를 황태자와 함께 걷는 상상으로 가득 찼다. ...

‘내 결혼식은 이보다 훨씬 더 화려할 거야. 더 많은 돈을 쓸 거고, 더 유명한 디자이너한테, 더 비싼 드레스를 의뢰할 거야. 더 굉장한 하객들만 초대할 거고. 아이리스, 너는 나한테 안 돼.’ ...

브리트니는 황태자가 자신을 돌아볼 것에 대비해 고개를 살짝 들고 우아한 미소를 지었지만, 황태자는 묵묵히 주례석만 응시하고 있었다. ...

‘대체 주례는 누가 보는 거지? 나한테 부탁할 줄 알았는데.’ ...

동갑이기는 해도 황태자의 신분은 케이보다 훨씬 높아서, 이오벳이 주례를 서준다면 그린 백작 가문의 영광일 것이다. ...

하지만 케이는 주례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

주례에 대해 생각하는 건 이오벳만이 아니었다. ...

몇몇 하객들도, ...

‘황태자 전하께서 주례를 서시겠지. 그린 백작 부인에게 춤을 신청하실 정도였으니.’ ...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신랑인 케이가 웨딩로드의 시작인 아치 아래에 섰고, 그 뒤로 신부인 리시가 탄 마차가 멈췄다. ...

정장을 완벽하게 차려입은 제이미가 주례석 옆에 서서 큰 소리로 식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

그린 백작가에서는 집사로 일하는 제이미가 사회를 보는 걸,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제이미 러셀은 황제도 탐내는 ‘창천의 기사’니까. ...

“오늘은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님과 아이리스 그린 백작 부인이 하나가 되시는 날입니다.” ...

보통 이럴 때는 ‘그린 가문과 위틀로 가문이 하나가 되는 날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기에,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

하지만 그 의아함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

“두 분의 아름다운 결혼식을 축복해주실 주례를 모시겠습니다.” ...

제이미의 눈이 주례석 근처에 있던 건물로 향했다. 모두 제이미를 따라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누군가 안쪽에서 문을 열었다. 문 너머에서 붉은 망토가 어른거렸다. ...

‘설마……!’ ...

사람들은 숨을 삼켰다. ...

‘아니, 아니겠지.’ ...

방금 그들이 상상한 인물은 너무 터무니없었다. ...

그 인물은 황제의 결혼식조차 직접 찾아와서 축복해주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

그때, 제이미가 그들의 짧은 상상 속에 등장한 인물의 이름을 말했다. ...

“안드리제 고델름 교황 폐하이십니다.” ...

(57) 그린 백작 가문의 결혼식 (2) ...

금실로 장식한 붉은 망토, 머리 위에 쓴 신성국의 왕관, 끝에 붉은 보석이 박힌 긴 지팡이. ...

교황이었다. ...

황제조차 모실 수 없는 교황이, 그린 백작의 결혼을 축하해주기 위해 주례석으로 향하고 있었다. ...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다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 하객들은 자신들이 꿈을 꾼다고 생각했다. ...

하얀 수염을 길게 기른 교황은 천천히 걸어가 주례석 앞에 섰다. ...

교황이 인자한 눈으로 하객들을 돌아봤다. ...

“오늘 이렇게…….” ...

거기까지 말했을 때, 이오벳이 벌떡 일어났다. 이오벳을 시작으로, 다른 하객들도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교황 폐하.” ...

“교황 폐하!” ...

모두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

교황이 난처한 듯 미소 지었다. ...

“오늘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네. 다들 편히 앉으시게.” ...

교황의 음성은 큰 것도 아닌데 멀리 있는 사람들의 귀에까지 콕콕 박혔다. ...

다들 어쩔 줄 몰라 하며 서로를 쳐다봤다. ...

하객 중에는 교황의 얼굴을 처음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황태자인 이오벳조차 교황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

“자, 자. 어서 앉으시게. 식을 진행할 수 없지 않은가.” ...

교황이 한 번 더 말한 후에야, 하나둘씩 자리에 앉았다. ...

그러는 동안에도 브리트니는 꼼짝 않고 앉아서 교황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

‘이게 뭐야?’ ...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

‘교황이…… 교황이 왜 여기 있어?’ ...

교황이 주례를 서다니. ...

황실의 결혼식도 오지 않으면서, 고작해야 아이리스의 결혼식 따위에 몸소 발길 하다니. 정말이지,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

브리트니가 황태자와 결혼식을 해서 대륙에 존재하는 국가의 왕족 모두를 초대한다 해도, 교황 한 사람을 이길 수 없었다. ...

아이리스의 결혼을 축복하러 교황이 직접 찾아왔다는 이야기는, 순식간에 대륙 전역에 퍼질 것이다. ...

그리고 모두 한 마음으로 생각하겠지. ...

‘교황의 가호를 받다니. 그린 백작 부인 앞에서는 몸을 사려야겠어.’ ...

싫었다. ...

리시가 그런 대우를 받는 건 끔찍이 싫었다. ...

하지만 교황이 주례를 서는 결혼식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

브리트니는 그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간신히 숨만 쉴 뿐이었다. ...

브리트니의 기분이야 어떠하든, 결혼식은 아무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

“오늘 이렇게 그린 백작과 백작 부인의 결혼식에 와주신 그대들에게 신의 축복이 있으리.” ...

교황이 결혼식 하객들에게까지 축복을 내리다니. 하객들은 감동을 받아 정신이 없었다. ...

교황이 제이미에게 눈짓하자, 제이미가 외쳤다. ...

“신랑 입장하십니다.” ...

악단이 경쾌한 곡을 연주했다. ...

하객석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파란색 웨딩로드를 따라, 케이가 성큼성큼 걸어와 주례석 앞에 섰다. ...

하지만 아무도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다들 뵙기 힘든 교황 폐하의 용안을 눈에 담느라 정신없었기 때문이다. ...

그건 신부 입장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

신랑 입장 때와는 다른, 좀 더 부드럽고 은은한 음악이 시작되고, 리시가 마차에서 내렸음에도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이는 없었다. 그린 가문 사람들만 리시를 돌아봤을 뿐이다. ...

원래대로라면 신부가 아무리 못생겨도 다들 신부에게 주목하고, 신부가 웨딩로드를 따라서 반쯤 걸어오면 일어나서 아름다움에 감격한 듯 박수를 쳐야 했다. ...

모두가 교황에게 정신이 팔린 지금, 리시는 박수를 받을 수 없을 것 같았다. ...

브리트니는 ‘꼴좋다.’라고 생각하며, 리시를 돌아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

리시가 어떤 드레스를 입었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

그래서 브리트니는 못 봤지만, 리시의 입가에 번진 행복한 미소는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

마차에서 내린 리시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아치 앞에 섰다. 그렇게 서서 잠시 기다렸다. ...

교황이 리시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보냈다. 교황은 손바닥을 위로 올려 리시를 가리켰다. ...

“보시게. 참으로 아름다운 신부가 아닌가.” ...

그 말에 모두가 교황의 손을 따라 리시를 돌아봤다. ...

“아!” ...

“와아!” ...

“헉!” ...

여기저기서 숨죽인 탄성이 흘러나왔다. ...

하얀 아치 아래에 서 있는 신부는 교황을 잊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때, 아치 위에 숨겨져 있던 장치가 파팡, 하고 터지며 연하늘과 연분홍 꽃잎이 눈처럼 흩날렸다. ...

그제야 리시는 웨딩로드를 걸었다. ...

턱을 살짝 들고 천천히, 앞으로 이 웨딩로드의 끝에 펼쳐질 미래를 기대하며, 걸었다. ...

웨딩로드 중간에 다다를 때쯤, 주례석 앞에 서 있던 케이가 성큼성큼 걸어와 리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

리시는 케이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케이가 리시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나서, 주례석을 향해 몸을 돌렸다. ...

나란히 걷는 신랑과 신부가 꿈처럼 아름다워서, 하객들은 아버지인 글로번이 리시의 손을 잡고 웨딩로드를 함께 걸어주지 않은 걸 이상하게 생각할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

케이와 리시가 주례석 앞에 멈추자, 교황이 둘을 축복하고 주례를 시작했다. ...

+++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유일무이한 결혼식.]이라는 제목을 붙여야 할까? [신이 허락한 사랑]이라는 제목은 너무 구리고.’ ...

하객석 중 하나에 앉아 있던 위팅크는, 상상한 것과 재미있는 교황의 주례사를 들으며 생각했다. ...

‘영리한 분이야. 그린 백작 부인.’ ...

청첩장을 받았을 때는 의아했다. ...

귀족들은 결코 기자들에게 청첩장을 보내지 않았다. 평민은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화려한 결혼식. 평민 기자들이 그런 걸 좋게 써줄 리 없기 때문이었다. ...

주변에 알아보니, 청첩장을 받은 기자는 위팅크뿐이었다. ...

‘이건 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의도겠지. 난, 이 정도로 쉽게 움직이지는 않는데 말이야.’ ...

물론 리시가 싫은 건 아니었다. 재미있는 귀부인이라고 생각한다. ...

하지만 리시가 잘못된 일을 하면 가차 없이 비난하는 기사를 쓸 수 있었다. ...

‘오늘은 좋은 기사를 쓸 수밖에 없네.’ ...

주례가 교황인 결혼식을, 어느 누가 안 좋게 쓸 수 있을까? ...

온갖 미사여구를 덧붙여 칭송해야 마땅한 결혼식이었다. ...

행여나 이 결혼식에서 큰 문제가 벌어지더라도, 교황의 주례라는 것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무마할 수 있었다. ...

그래서 리시는 위팅크를 초대했을 것이다. 이 결혼식을 알리라고. 내가 교황에게 어떤 가호를 받았는지, 대륙 전역에 퍼뜨리라고. 당신의 글솜씨라면, 이 결혼식의 황홀한 순간을 열 배쯤 부풀릴 수 있을 거라고. ...

하여간 영리하고 재미있는 백작 부인이시다. 앞으로 재미있는 기삿거리를 잔뜩 가져다줄 것 같다. ...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지요, 백작 부인. 더불어 그 기사를 처음으로 내보낼 내 가치도 올라갈 것 같으니.’ ...

 

+++

두고두고 기억될 완벽한 결혼식이었다. ...

교황은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하객들이 인사할 틈도 없이 저택을 떠났다. ...

교황이 마차에 오르기 전 케이에게 입 모양으로, ...

‘조만간 찾아오거라.’ ...

라는 말을 남기는 건, 아무도 보지 못했다. ...

지난번, 신성국의 신관이 리시의 만행을 넘겨짚고 떠들어대는 바람에 이런 상황이 만들어졌다는 걸 아는 건, 케이와 리시뿐이었다. ...

신랑과 신부는 같은 마차를 타고 본채로 이동했다. ...

두 사람이 피로연 파티 복장으로 갈아입고 오는 동안, 하객들은 연회장에 남아서 그린 노백작 부부와 위틀로 공작 부부에게, 멋진 결혼식과 멋진 자녀들을 칭찬했다. ...

그러는 동안에도 브리트니는 꼼짝 않고 앉아서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질투가 나서 표정 관리를 하는 게 힘들었다. ...

‘교황이라니. 교황의 주례라니!’ ...

옆에 있던 이오벳이 자리를 떠난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

이오벳이 옆자리라는 걸 알았을 때만 해도, 지난 파티 때 망친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이것저것 노력해볼 계획이었다. ...

하지만 교황을 보는 순간, 황태자의 존재는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졌다. 너무 분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간신히 참고 있는데, 안면이 있는 영애가 다가와서 건넨 말이 불을 붙였다. ...

“브리트니 양은 정말 좋겠어요. 아이리스 위틀로, 아니, 그린 백작 부인께서 이렇게나 영광스러운 결혼식을 올리다니. 얼마나 보기 좋으세요.” ...

보기 좋아? 영광스러워? ...

브리트니는 울화통이 터졌지만 애써 미소 지었다. ...

“그러게요. 할 줄 아는 게 없는 동생이라, 결혼은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다행이에요.” ...

“어머, 할 줄 아는 게 없으면 어때요? 여자로 태어나 저리 아름다우면 그만이지요.” ...

브리트니는 어이가 없었다. ...

이 영애는 평소에 브리트니의 앞에서 아이리스를 욕하는 데 앞장섰다. 요새는 예쁘기만 해서 되는 세상이 아니라는 둥, 여자도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둥, 너무 보호만 받고 자라는 여자는 매력 없다는 둥. ...

그런 말을 열심히 떠들어댄 주제에, 이제는 아름답기만 하면 그만이라니. ...

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앞으로 한동안 사교계에서 그린 백작 부인에 관한 안 좋은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을 것이다. ...

리시가 그 어떤 포장을 해도 용납받기 힘들 정도로 나쁜 짓을 하지 않는 이상, 리시는 황후만큼이나 조심스러운 대우를 받을 것이다. ...

아이리스의 가족으로서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건 알지만,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

드레스를 갈아입고 돌아온 리시에게 알랑방귀를 뀌어댈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끓었다. 그 꼴을 보면 정말로 비명을 지를지도 모른다. ...

브리트니는 휙 돌아서서 도망치듯 발을 옮겼다. ...

“브린.” ...

그런 브리트니를 잡은 건, 어머니인 데니스였다. ...

“어디 가니?” ...

“갈 거야. 더는 여기에 있을 수 없어요. 우리, 집으로 돌아가요.” ...

“네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럴 수는 없다는 거 알잖니. 좋으나 싫으나 우리는 아이리스의 가족이야. 아이리스가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자리를 뜨면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겠어? 분명 뒷말이 나올 거다.” ...

“뒷말이 중요한 게 아니야. 나, 이대로 계속 여기에 있다가는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그래. 갈 거예요. 가야겠어요.” ...

데니스와 브리트니가 속닥거리며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곁눈질하고 있었다. ...

브리트니는 그들이 자신에 대해 뒷담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브리트니도 안됐어. 동생이 먼저 결혼한 것도 그렇고, 그 결혼식의 주례를 교황 폐하께서 서주신 것도 그렇고. 뭘 해도 동생보다 못하다는 말을 들을 거 아냐.” ...

라는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을까? ...

‘내가 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걔는 하녀한테서 태어난 애라고! 진짜로 공녀도 아니란 말이야! 걔가 그렇게 천한 핏줄인 줄 알았다면 교황도 주례 같은 거 서주지 않았을걸?’ ...

브리트니는 리시의 출생에 대해 알리고 싶었다. ...

당신들이 대단하다고 우러러보게 된 그린 백작 부인이, 사실은 어떤 여자에게서 태어난 아이인지 모두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

피로연 드레스로 갈아입은 리시와 케이가 돌아온 건, 브리트니가 기어코 연회장을 떠나기 위해 데니스의 손을 뿌리칠 때였다. ...

“와아!” ...

“어머, 아름다워라.” ...

다시 등장한 신혼부부를 보며, 하객들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

브리트니는 그조차 어이가 없었다. ...

리시는 아까보다 특별히 더 아름답지도 않았다. 아까는 고까운 시선을 보낸 주제에, 이제는 일부러 리시에게 들리라는 듯 칭찬해대는 꼴이라니. ...

저래서야 먹이를 든 사람 앞에서 꼬리를 흔드는 개와 다를 게 뭐란 말인가. ...

‘치졸한 것들. 저렇게 알량한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드니, 꼬리를 치는 거겠지. 저렇게 태도를 바꾸면 바꿀수록 자기들이 얼마나 없어 보이는지도 모를 거야.’ ...

브리트니가 고까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욕하고 있을 때였다. ...

“이렇게 갑자기 들이닥치시면 안 됩니다, 대공.” ...

“이거 놔! 나는 자격이 있으니!” ...

“자격이라니…… 초대장도 없으시면서…….” ...

제이미의 난처한 음성과 함께, 한 사내가 파티장에 난입했다. 훤칠한 키에 불처럼 새빨간 머리카락과 새빨간 눈동자를 가진 사내였다. ...

그는 모두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지팡이를 휘두르며 성큼성큼 걸었다. 이 세상에 자기 자신만이 존재한다는 듯한 태도였다. ...

그렇게 걸어가 케이의 앞에 선 그는 지팡이를 휙 들어 올려 케이를 가리키며 외쳤다. ...

“케이브란트 그린!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지? 날 결혼식에 초대하지 않았다니!” ...

(58) 그린 백작 가문의 결혼식 (3) ...

리시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갑자기 난입한 사내를 응시했다. ...

그는 붉은 머리칼과 눈동자, 그리고 그 기세 때문에 마치 불타는 것처럼 보였다. ...

케이만큼이나 키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져서 덩치가 좋은데, 위압감은 들지 않았다. 콧등에 주근깨가 그를 장난스럽고 선량한 소년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

‘이 남자, 누구지?’ ...

새빨간 머리카락과 새빨간 눈동자를 가진 사내라면 짚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다만 지난 삶에서 리시가 본 그는, 이런 잘생긴 외모를 가진 화사한 분위기의 사내는 아니었다. ...

“이런, 밀란시스 피아몬도 대공. 이런 식으로 난입하면 곤란한데.” ...

케이가 당혹한 기색 없이 느른하게 중얼거리는 말에, 리시는 숨을 멈췄다. ...

‘이 남자가 밀란시스 피아몬도라고? 정말?’ ...

지난 삶, 밀란시스 피아몬도는 적과 싸우다가 크게 당해서 얼굴의 반 이상이 화상으로 뭉개지고, 한쪽 눈을 잃었다. 성대도 다쳐서 지금처럼 맑은 목소리가 아닌, 잔뜩 쉬고 뭉그러진 목소리에, 음산한 분위기를 몰고 다녔다. ...

기묘한 사술에 심취한 그를,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피했었다. ...

하지만 지금의 밀란시스는 모두가 호감을 느낄 만한, 해사한 느낌의 사내였다. ...

“곤란한 건 나라네, 케이. 내가 아주 곤란하게 됐어. 어떻게 자네의 결혼식에 날…… 음? 여기 이 아름다운 레이디는 누구시지? 처음 뵙는 분이신데.” ...

케이에게 큰소리로 외치던 밀란시스가 갑자기 리시에게 관심을 보였다. ...

리시는 황당했다. ...

이 상황에서 케이의 옆에 서 있는 레이디가 케이와 결혼한 그린 백작 부인 외에 누가 있겠는가. ...

농담인가 싶어서 밀란시스의 표정을 살펴봤지만, 밀란시스는 정말로 리시의 정체가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

리시의 눈빛을 어떻게 오해한 건지, 밀란시스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

“이런, 레이디 아무개. 그런 눈으로 절 보시면 안 됩니다. 현재 임자는 없지만, 연애는 자제하려는 중이라서…….” ...

몇몇 레이디들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

그제야 리시는 밀란시스가 크게 다치기 전, 레이디들 사이에서 어떤 평가를 받았었는지 떠올렸다. ...

-잠깐 만나는 연애 상대로는 괜찮지만, 남편으로는 좀……. ...

일찍 결혼했던 밀란시스가 2년도 지나지 않아서 이혼당했다는 것도 떠올랐다. ...

조용하고 어른스럽기로 유명했던 그의 전 부인이 그에게 마지막으로 외친 말도. ...

-이 지긋지긋한 인간! ...

밀란시스에 관한 여러 가지 평가들은, 그가 크게 다쳐 성격이 변하면서 사라졌었다. ...

그러니까 이번 삶에서 아직 다치지 않은 밀란시스는 ‘잠깐 만나는 연애 상대로는 괜찮아도 남편감으로는 별로인, 지긋지긋한 인간’이라는 뜻이다. ...

“미르.” ...

케이는 밀란시스, 미르의 이런 태도가 익숙한 듯 차분하게 말했다. ...

“지금, 이 상황에서 딱 보면, 내 곁에 있는 여인이 누구인지는 답이 나오지 않나?” ...

“음? 그래? 내가 이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맞혀야 하는 상황인가?” ...

미르가 중얼거리며 슬며시 제 보좌관을 돌아봤다. 묵묵히 미르의 곁을 지키던 그의 보좌관 레인게일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그린 백작님과 오늘 결혼식을 올린, 그린 백작 부인입니다, 대공.” ...

“아! 그렇지. 하하하. 이미 알고 있었네. 조크였어, 조크. 알지, 케이? 내가 조크 좋아하는 거.” ...

“……자네의 개그 감각은 항상 나를 놀라게 해, 미르.” ...

“그나저나 참으로 아름다우십니다, 그린 백작 부인.” ...

미르는 리시가 손을 내밀지 않았는데도, 막무가내로 리시의 손을 잡아 올려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

이 무자비한 무례에 대해 리시가 반응하기도 전에, 미르는 리시를 위해 자기가 할 일을 다 끝냈다는 듯 손을 놔주고 케이를 돌아봤다. ...

“하여간 케이, 나는 몹시 실망했네. 아주 충격이라고. 어떻게 날 자네의 결혼식에 초대하지 않았지? 내가 누군가? 나야, 밀란시스 피아몬도. 자네의 절친한 친구!” ...

“2년 전에 자네가 내게, 꼴도 보기 싫으니 두 번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도 말라고,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보이면 목을 베어버릴 거라고 악을 쓰고 가버린 일을 기억 못 하나?” ...

케이의 응대에 미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슬며시 레인게일을 돌아봤다. ...

레인게일이 차분하게 답했다. ...

“사실입니다, 대공.” ...

“이럴 수가, 케이! 조크였네, 조크! 그 조크를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건가? 자네는 정말이지, 조크가 안 통하는 친구야.” ...

미르가 껄껄 웃으며 케이의 팔을 두드렸다. ...

퍽-! 퍽-! 퍽-! ...

어찌나 세게 두드리는지, 리시는 케이가 아픈 내색을 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

“조크에 강한 자네가 내 결혼식에 올 줄은 몰랐지만, 이왕 이렇게 왔으니 즐기다 가게.” ...

“그래? 식은 언제 시작하나?” ...

“……이미 끝났네, 미르.” ...

“아니, 그게 말이 되나? 내가 없이 결혼식을 진행하다니. 나는 자네의 들러리를 해주려고 결혼반지도 들고 왔다고!” ...

미르가 오른손을 올리자, 레인게일이 그의 손 위에 반지 케이스를 올렸다. ...

미르는 마치 청혼하는 것처럼, 케이의 앞에서 반지 케이스를 열었다. ...

안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들어 있었다. 케이가 리시에게 준 것보다 훨씬 크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반지였다. ...

“아무리 그래도 늦었어, 미르. 결혼식은 신랑과 신부만 있으면 충분하거든. 그래도 반지는 고맙게 받지.” ...

케이가 케이스 안에서 반지만 꺼내 가져갔다. ...

미르는 기분 나쁜 기색 없이 빈 케이스를 레인게일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

“이걸로 끝은 아니겠지, 케이? 날 위해 한 번 더 결혼식을 올릴 수는 없는 건가?” ...

케이는 조용히 레인게일을 응시했다. 레인게일이 고개를 숙였다. ...

“죄송합니다, 백작님. 백작 부인.” ...

“아니, 레인. 왜 네가 사과를 해?” ...

“대공, 제발 그만하시지요. 그만 가보십시오, 백작님.” ...

“고생이 많군, 남작.” ...

케이가 레인게일에게 눈인사를 한 뒤, 리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뜨려 했다. ...

돌아서는 케이를 노려보던 미르는, 케이의 바지 주머니에 튀어나온 끈을 발견하고는, 무심코 손을 뻗어 그 끈을 잡아당겼다. ...

케이의 바지 주머니 안에 담겨 있던 것이 쏙 빠져나왔다. 하얀 천으로 만든 작은 파우치였다. ...

케이는 몸을 돌린 상태였지만, 리시는 아직 미르 쪽을 향해 있었다. 리시는 미르가 케이의 주머니에서 빼낸 파우치가 무엇인지 금방 알아봤다. ...

슬리브 스톤이 담긴 파우치였다. ...

케이가 슬리브 스톤을 항상 지니고 다닌다는 건 알지만, 이렇게 아무렇게나 주머니에 넣고 다닐 줄은 몰랐다. ...

‘안 돼!’ ...

리시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파우치를 잡아 끌어당겼다. 미르가 끈을 세게 잡고 있던 건 아닌지, 파우치는 쉽게 리시의 손에 들어왔다. ...

“밀란시스 피아몬도.” ...

바지에서 파우치가 빠져나가는 감각에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 케이가, 으르렁거리듯 미르의 이름을 불렀다. ...

“남의 것을 함부로 가져가면 안 된다는 걸 아직도 모르나?” ...

“바지 주머니에서 끈이 빠져나와서 보기 안 좋기에 처리해주려고……. 아니, 이게 뭐 그렇게 화낼 일인가? 그래 봐야 작은 파우치인데!” ...

“하아. 밀란시스, 자네는 정말…….” ...

케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왜 나한테만 뭐라고 하나? 지금 그건 자네 부인 손에 있네. 자네 부인이 가져가는 건 괜찮고, 절친한 친구인 내가 가져가는 건 안 되는 건가?” ...

“부부는 일심동체야, 미르. 내 아내가 내게서 뭘 가져가든, 그건 문제 될 게 없네. 하지만 자네가 가져가는 건 문제가 돼.” ...

“나보다 자네 부인이 더 소중하다는 건가?” ...

“……미르. 그것도 조크라고 하는 건가?” ...

“난 조크를 즐기지 않네! 아주 고지식하지!” ...

“…….”

케이와 미르가 티격태격하는 동안, 리시는 처음으로 제 손에 들어온 슬리브 스톤의 파우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이건 내게 좋은 꿈을 꾸게 해줘. 하지만…….’ ...

리시는 고개를 돌려,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는 엘디를 봤다. ...

‘지난 삶에서 엘디는 이 돌 때문에 영원한 잠에 빠졌었지. 케이는 이 돌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모르고 있어. 그러니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주머니에 넣어서 가지고 다니겠지.’ ...

리시는 이 돌이 두려웠다. 물론 이번 삶에서는 엘디가 영원히 잠들고 싶을 만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할 생각이었다. ...

하지만 만약 엘디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지난 삶의 엘디와 같은 이유로 이 돌을 사용한다면? ...

그 누군가가 리시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면? ...

혹은 이 돌의 힘이 날뛰어서 케이조차 돌의 힘을 억누르지 못해 많은 사람이 영원한 잠에 빠진다면? ...

‘이건 단순히 좋은 꿈을 꾸게 해주는 편리한 돌이 아니야. 재앙이 될 수도 있는 물건이야.’ ...

리시는 슬리브 스톤 같은 게 세상에 없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리시에게는 슬리브 스톤을 부술 만한 힘이 없었다. 그저 하릴없이 파우치를 꽉 쥐는 수밖에는. ...

기묘한 느낌을 받은 건, 바로 그때였다. ...

사아아아-! ...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리시는 몸 안에서 굉음이 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

리시의 몸 안에 흐르던 기운이 모조리 손바닥을 향해 모여들면서 내는 소리. ...

순식간에 전신에 퍼진 기운이 손바닥에 모였다가, 손바닥 밖으로 빠져나갔다. ...

목적지는 슬리브 스톤. ...

리시는 슬리브 스톤이 리시의 힘을 모조리 흡수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

등골이 서늘했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건 영원한 잠이었다. ...

‘싫어!’ ...

리시는 영원한 잠 따위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

던지듯 파우치를 떨어뜨렸다. 힘이 전부 빠져나가 무릎이 꺾였다. 호흡조차 힘들 정도로 남은 힘이 없지만, 다행히 정신은 또렷했다. 잠이 오는 기색은 없었다. ...

하지만 안도한 것도 잠시. ...

풀썩-! ...

쓰러졌다. ...

리시가 아닌 밀란시스 피아몬도가. ...

그뿐만이 아니었다. ...

풀썩- 풀썩- ...

가까이에 있던 미르를 시작으로, 그의 보좌관인 레인게일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까지도 바닥에 쓰러지고 있었다. 한참 동안, 여기저기서 풀썩풀썩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만 들려왔다. ...

리시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쓰러지는 사람들을 응시했다. ...

모든 것이 순식간에 벌어졌지만, 리시에게는 그 시간이 아주 길게 늘어져 영원처럼 느껴졌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기 넘치던 결혼식장에, 보이지 않는 죽음이 내려앉은 듯 불길하고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

여기저기서 간간이 들리던 새나 곤충이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작은 들짐승이 내는 바스락 소리도 없었다. ...

소리가 사라진 세계. ...

‘아니, 이건 생명이 사라진 세계야.’ ...

리시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소리를 내는 순간, 이 악몽 같은 상황이 현실이 될 것 같아 두려웠기 때문이다. ...

‘대체 무슨 일이……?’ ...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

슬리브 스톤의 힘일까? ...

하지만 그렇다면 나는 왜 멀쩡한 거지? ...

성유물의 수호자 그린 가문의 케이조차……. ...

‘케이!’ ...

그제야 케이에게 생각이 미쳤다. ...

케이 역시 쓰러져 있었다. ...

죽은 듯 쓰러진 그의 모습에, 리시는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

절망이 리시를 짓눌렀다. ...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공포가 리시를 덮쳤다. ...

(59) 그린 백작 가문의 결혼식 (4) ...

공포에 짓눌려 숨을 쉬는 법을 잊었다. ...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천천히 호흡을 시도했다. ...

들이마시고, 내쉬고. 들이마시고, 내쉬고. ...

울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울어봐야 바뀌는 것은 없다는 걸 안다. 울 때가 아니라 생각할 때였다. ...

‘정신 차려, 아이리스. 정신을 똑바로 붙들어야 해. 공포에 질려서 덜덜 떨고만 있을 때가 아니야.’ ...

이 현상의 원인을 알아내고 사람들을 깨울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게 우선이다. ...

리시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

“으…….” ...

작게 들려오는 신음. 잘못 들은 줄 알았다. ...

“제길…….” ...

잠에서 막 깬 것처럼 잔뜩 쉰 목소리이긴 해도, 케이의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리시는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주저앉은 채 케이를 쳐다봤다. ...

케이는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

“갑자기 왜…….” ...

간신히 앉는 데 성공한 케이가 고개를 돌리다가, 리시를 발견하고 입을 쩍 벌렸다. ...

그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목격한 사람처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얼어붙었다. ...

“케이…… 괜찮은 거예요?” ...

리시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 후에야, 케이가 흐읍,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

“리시, 대체 어떻게…….” ...

혼란스럽게 중얼거리던 케이의 시선이, 리시의 앞에 떨어져 있는 하얀 파우치로 향했다. ...

케이는 파우치를 한 번, 리시를 한 번 쳐다본 후, 주위를 쭉 둘러보더니, 앞에 누워 있는 미르의 코 아래에 손을 댔다가 떼었다. ...

수많은 전장을 경험해온 사람답게, 그는 모두가 쓰러진 상황을 목격했으면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

케이는 생각을 정리하는 듯 한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

리시는 불안함을 안은 채 케이를 지켜봤다. ...

이게 다 무슨 일일까? ...

마지막으로 슬리브 스톤을 들고 있던 게 나니까, 내 탓인 걸까? ...

내가 슬리브 스톤을 없애버리고 싶어 해서, 슬리브 스톤이 이런 짓을 벌인 건가? ...

내게 화를 내려나? ...

다시 눈을 뜬 케이가 물었다. ...

“다친 곳은 없어요?” ...

리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

“좋아요, 리시.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아봅시다. 나도 이런 건 처음이라서.” ...

케이가 담백하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

그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지만, 손을 들어 그의 손을 잡을 힘조차 없었다. ...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요.” ...

리시의 말에 케이가 미간을 좁혔다. ...

그는 잠시 뭔가 생각하다가 리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

“리시. 무슨 일이 있었죠?” ...

“피아몬도 대공에게서 파우치를 빼앗았어요. 그리고…… 슬리브 스톤을 꽉 쥐었죠. 그랬더니 뭔가……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요. 내 안에 있던 기운이 모조리 슬리브 스톤에게 흡수당하는 것만 같았어요.” ...

케이가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

좀체 흔들리는 일 없는 그의 청회색 눈동자가, 일렁, 움직임을 보였다. ...

그는 큰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한동안 숨도 쉬지 않고 리시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

그의 태도에 리시는 점점 초조해졌다. ...

역시 내 잘못인 걸까? ...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 ...

황태자를 비롯해 모든 귀족이 잠든 이 사건을 수습하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

“리시, 당신은…… 아니,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

케이는 혼란에 빠진 사람처럼 허둥거리다가, 고개를 휘휘 젓더니 리시의 양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

“리시, 괜찮아요.” ...

괜찮다는 그 말이, 참으로 따스했다. ...

이 황당무계한 상황 속에서도, 케이는 리시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주었다. ...

케이가 리시를 번쩍 안아서, 잠든 사람들 사이를 걸어갔다. ...

여기저기 쓰러진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보니, 이게 얼마나 큰일인지 다시금 느껴졌다. ...

케이는 리시를 의자에 앉혀주고 말했다. ...

“우선 시간이 더 가기 전에, 이 일을 수습해봅시다.” ...

“내가 뭘 해야 할까요?” ...

“당신은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

“하지만…….” ...

“그냥 있어요, 리시. 괜찮아요.” ...

리시는 두 손을 꼭 맞잡았다. 이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한심했다. ...

케이는 저벅저벅 걸어가 제이미의 옆에 앉았다. ...

케이가 제이미의 이마에 손을 대고 힘을 불어넣자, 제이미에게 씐 성유물의 힘이 조용히 지워지기 시작했다. ...

제이미를 덮친 성유물의 힘이 가시는 건 느껴지는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

케이는 성유물의 힘이 이토록 많은 사람에게, 이토록 진하게 영향을 주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아마 선대 수호자인 노백작도 본 적 없을 것이다. ...

‘선선대도, 선선선대도 보신 적이 없겠지.’ ...

이윽고 제이미가 번쩍 눈을 떴다. 흔들리던 파란 눈동자가 케이에게서 멈췄다. ...

“좋은 꿈을 꿨어요, 대장.” ...

“일어나, 제이미. 큰일이 생겼어.” ...

몸을 일으킨 제이미가 주위를 둘러봤다. ...

“그런 것 같군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

“슬리브 스톤이야.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해.” ...

제이미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냐고 묻지 않았다. 빠르게 머리를 굴린 제이미가 말했다. ...

“엘디도 깨우는 게 좋겠습니다, 대장.” ...

“그래.” ...

케이는 엘디에게로 가서, 제이미에게 했던 것과 같이 성유물의 힘을 중화시켰다. ...

엘디가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

“왜 깨우는데? 난 좋은 꿈을…… 어라? 이게 무슨……? 하! 뭐야,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

“슬리브 스톤 때문이야.” ...

“슬리브 스톤? 그게 왜? 그거, 형이 갖고 있던 거 아냐?” ...

“이유가 있어. 지금은 이 일을 수습하는 게 우선이야.” ...

엘디는 제이미와 달랐다. 그는 이 상황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

“아니, 그린 백작. 그런 말로 은근슬쩍 넘어가면서 내 도움을 청할 수는 없어. 이래 봬도 성기사단의 부단장이고, 형에게 성유물을 관리할 능력이 없다면 짚고 넘어가야 해.” ...

옳은 말이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이 모든 상황을 그저 덮어달라고 청할 수는 없었다. ...

케이는 갈등했다. ...

솔직하게 말할 것인지, 거짓을 섞을 것인지. ...

결론은 빨랐다. 지금 당장 엘디를 속여도, 엘디는 금방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

“아까 작은 사건이 하나 있었어.” ...

케이는 밀란시스 피아몬도와 리시에게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서 케이의 설명을 들은 엘디가, 의자에 앉아 있는 리시를 흘긋 보고 나서 고개를 저었다. ...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케이. 지금 형이 하는 말은 마치 형수가 성유물을 다룰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잖아. 안 그래, 제이미?” ...

지금 제이미는 대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

좀처럼 놀라는 일이 없는 제이미는, 숨도 쉬지 못한 채 리시를 멍하게 쳐다보는 중이었다. ...

엘디가 제이미의 어깨를 툭툭 쳤다. ...

“야, 제이미. 왜 그런 표정을 짓고 그래? 네가 그런 반응이면 꼭 케이가 한 소리가 진짜인 것 같잖아.” ...

“대장, 아이리스 님이…… 정말로 이걸…… 성유물을 다루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것도 이 정도로?” ...

“그래, 제이미. 그게 아니면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없어.” ...

“이럴 수가…….” ...

제이미가 비틀거렸다. ...

엘디가 인상을 찌푸렸다. ...

“저 말을 믿어, 제이미? 말도 안 되잖아. 형이 형수를 좋게 포장하고 싶은 건 알겠어. 능력 있는 여자인 것처럼 만들어주고 싶은 것도 알겠고. 하지만 이건 너무 갔어. 성유물을 다룬다는 게 말이나 돼? 그것도 이 수준으로? 그냥 저 망할 성유물이 제 성질을 못 이기고 힘을 내보낸 거겠지.” ...

“리시는 잠들지 않았었다, 엘디.” ...

“……!”

“그리고 잠깐이긴 해도, 난 잠들었지.” ...

“설마……!” ...

“그래, 엘디. 난 수호자야. 내가 성유물의 힘을 중화시키지 못했다. 성유물이 자연적으로 폭발적인 힘을 뿜어낸다 해도, 내 힘을 이길 수는 없어.” ...

성유물은 수호자가 가진 중화시키는 힘을 이기지 못했다. 성유물의 힘이 수호자의 중화력을 이기기 위해서는, 성유물을 다루는 사람의 힘을 빌려야 했다. 그것도 아주 강한 힘을 빌려야만 했다. ...

리시가 슬리브 스톤을 사용했고, 그 힘이 수호자인 케이까지 잠들게 했다는 건, 성유물을 다루는 리시의 힘이 케이를 능가한다는 의미였다. ...

엘디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

“하, 말도 안 돼.” ...

“말이 되든 안 되든, 상황 설명은 끝났다. 이제 이 상황을 수습하는 데 집중한다.” ...

케이가 단호하게 말하자마자 제이미가 입을 열었다. ...

“람바족의 짓으로 돌리죠.” ...

람바족은 남서쪽 정글 깊은 곳에 사는 야만족이었다. 야만족치고는 상당히 세력이 큰 편으로, 작은 국가 수준의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

“람바족, 괜찮네. 요새 알츠레키 왕국이랑 손을 잡고 북진하는 중이거든. 남부 정글이랑 접한 도시는 람바족 때문에 피해가 크지. 요새는 제국 측에서도 람바족을 신경 쓰게 됐고.” ...

엘디도 혼란에서 벗어나 자신이 아는 정보를 읊었다. ...

제이미가 거들었다. ...

“알츠레키 왕국이 칭제하고 싶어 하는 상황이라서, 가비자르 제국 황제도 촉이 곤두섰을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가비자르 제국에도 살짝 발을 걸친 그린 가문이 람바족의 공격을 받은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요.” ...

“우리가 토벌하겠다고 하면 되겠군.” ...

케이의 말에 제이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지요, 대장. 황제로서는 눈에 거슬리는 람바족을 치워주겠다고 하니, 앓던 이를 뺀 것처럼 속이 시원할 겁니다. 이 수면 사건에 대해 께름칙한 기분이 들어도 모르는 척하겠지요. 여기 모인 귀족들도 그렇고요.” ...

“거기에 성기사단 부단장인 내가 ‘내 가족을 습격한 죄’를 물어서 토벌에 동참한다고 하면, 황제도 일말의 의심조차 거두겠지. 감히 신성국에 몸담은 나를 의심할 수는 없을 테니.” ...

“좋아. 이번 사건은 람바족이 벌인 짓이다. 제이미, 하객들에게 알릴 말은 생각해뒀겠지?” ...

“물론이지요, 대장.” ...

“하객들을 깨우기 전에, 슬리브 스톤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쳤는지 알아봐야겠다. 제이미.” ...

제이미가 고개를 끄덕하더니, 순식간에 커다란 독수리로 변했다. ...

제이미가 날아오르는 걸 지켜보며, 엘디가 물었다. ...

“형수도 다 아는 거야?” ...

“그래. 부부간에는 비밀이 없다고 하지.” ...

“그 뒷말은 덧붙이지 않아도 돼. 징그러우니까.” ...

케이가 피식 웃었다. ...

이윽고 제이미가 돌아와 케이의 앞에 날개를 접고 앉았다. 제이미가 고개를 들어 케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

“이 도시, 론데리반 시 전체가 잠들었어요. 사람뿐 아니라 짐승까지도.” ...

케이는 한숨을 삼켰다. ...

도시 전체에 슬리브 스톤의 영향력이 닿았을 줄은 몰랐다. ...

대체 리시가 가진 힘은 어느 정도나 되는 걸까? ...

아니, 이 정도의 힘을 사용했는데도 몸에서 힘만 빠졌을 뿐, 큰 이상은 없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일까? ...

안 그래도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리시의 앞에서, 동요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

가까스로 표정을 갈무리하는 케이에게, 제이미가 말했다. ...

“우린 망해버렸지요, 대장?” ...

(60) 유일한 유물술사 (1) ...

리시는 이미 큰 힘을 써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상태였다. ...

하지만 이 상황은 케이 혼자서 수습할 수가 없었다. ...

케이는 어쩔 수 없이 리시에게로 돌아갔다. ...

시종일관 불안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리시가 벌떡 일어났다. 약간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힘이 좀 돌아온 듯했다. ...

‘벌써 힘이 돌아오고 있다니…….’ ...

케이는 놀라웠다. ...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성유물을 사용할 줄 아는 이를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의 아내였고, 심지어 도시 전역에 영향력을 미칠 만큼 강한 힘의 소유자였다. ...

이건 꿈일까? ...

“내가 할 일은 없어요, 케이?” ...

리시의 질문에 케이는 정신을 수습하고 말했다. ...

“힘든 건 알지만 도와줘야겠어요, 리시.” ...

“돕다니요. 내가 벌인 짓인 것 같은데, 내가 해결하는 게 당연하죠.” ...

“그 부분에 관해서는 나중에 제대로 대화해요. 일단 이걸 수습하는 게 우선이니까요.” ...

리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

케이는 들고 있던 파우치에서 슬리브 스톤을 꺼냈다. ...

“당신의 힘으로 퍼뜨린 거라, 당신의 힘으로 거둘 수 있어요.” ...

“하지만 나는 이걸 사용할 줄 몰라요. 어떤 식으로 사용했는지…….” ...

“할 수 있어요. 원래 유물술사는…… 그러니까, 오래전에 트레저 헌터라고 불렸던 이들은 성유물로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거두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그러니 당신도 할 수 있을 거예요.” ...

리시는 자신이 정말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

하지만 징징거릴 때가 아니었다. 내가 한 일이니 내가 수습해야 한다. 안 돼도 되게 만들어야만 한다. ...

리시는 케이의 손에서 슬리브 스톤을 가져왔다. ...

“할게요. 할 수 있어요.” ...

“좋아요. 너무 힘들다 싶으면 말해요. 죽을 것 같은데 억지로 할 건 없어요.” ...

“걱정하지 말아요, 케이.” ...

리시는 아까처럼 슬리브 스톤을 꽉 쥐었다. ...

‘힘을 줬었어. 이걸 부수고 싶어서. 내가 힘주는 걸 슬리브 스톤은 다르게 받아들인 거야. 내가 힘을 건네준다고 생각하고 흡수한 걸지도 몰라. 그렇다면 이번에는 내가 이 돌로부터 힘을 흡수하면 되는 걸까?’ ...

리시는 슬리브 스톤의 힘을 빼앗으려는 느낌을 내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뭔가를 흡수해본 적이 없으니, 어떤 감각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

‘손바닥으로 물을 마신다고 생각하면 되는 걸까? 하지만 그게 어떤 느낌인데? 아니, 아니야. 그런 게 아닐 거야. 이미 내 힘은 전역으로 퍼져나갔어. 그걸 다시 흡수하는 게 아니라…….’ ...

트레저 헌터. ...

오래전, 성유물을 수집하고 사용했다던 그들이 성유물에서 힘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거뒀을 것 같지는 않았다. ...

‘사용하는 거지. 그렇다면 다시 한번 힘을 써서 명령을 내리면 되는 거야.’ ...

리시는 슬리브 스톤을 꽉 쥐고, 온 힘을 밀어 넣으며 명령했다. ...

‘방금 네가 한 짓을 끝내!’ ...

또다시 그 감각이 시작되었다. ...

스아아아아- ...

슬리브 스톤이 리시의 전신에서 기운을 빼앗아가는 그 감각. ...

리시의 힘이 전부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슬리브 스톤이 가져가는 힘은 아까와 똑같았기에, 리시는 기절할 것만 같았다. ...

그래도 버텼다. ...

무언가 달라질 때까지는 버텨야만 했다. ...

하지만. ...

핏-! ...

머릿속에서 뭔가 끊기는 소리와 함께, 리시의 몸이 무너져내렸다. ...

+++

결혼식 날, 과한 힘을 사용해서 기절했던 리시는 일주일 만에 깨어났다. ...

리시가 깨어났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게 케이의 얼굴이었다. ...

마치 자신이 기절했던 것처럼, 케이의 눈가는 거뭇하게 물들어 있었다. ...

“제길. 리시. 난 당신이 두 번 다시는 안 깨어나는 줄 알았어. 잘못 사용해서 영원한 잠에 빠진 줄 알았다고.” ...

케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안아주는 순간, 리시는 그를 향한 사랑이 터질 듯 부푸는 걸 느꼈다. ...

리시가 감당키 힘든 짓을 벌였는데도, 케이는 한 번도 리시를 탓하지 않고 수습하기 위해 애써주었다. ...

“미안해, 케이.” ...

“그런 말 하지 마, 리시. 수프를 좀 가져올게. 먹고 나서 좀 더 쉬어.” ...

“아니,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 ...

“그래도 수프는 먹어야 해. 당신, 일주일 동안 기절해 있느라 아무것도 못 먹었다고.” ...

“그럼 먹으면서 들을게.” ...

하지만 수프를 먹으며 케이의 설명을 들을 수는 없었다. 케이의 가족들과 부하들, 시녀들이 한 번씩 리시를 보러 와서 괜찮은 걸 확인하고, 한참을 머물다가 돌아갔기 때문이다. ...

케이와 느긋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건 늦은 밤이 되어서였다. 그때쯤에는 리시도 기력을 많이 회복했지만, 케이는 리시가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

“사람들에게는 람바족이 벌인 짓이라고 해뒀어요, 리시. 슬립 마법이 걸린 마석을 다량 사용해서, 도시 전체를 잠재우고 침략하려다가, 나랑 내 그림자들, 그리고 엘디에게 그 마법이 통하지 않은 덕에 막아낼 수 있었다고 했죠.” ...

“그 허무맹랑한 말을 믿어요?” ...

“다들 얼떨떨한 상황인 데다가, 람바족의 악명이 워낙 드높거든요. 겁에 질려서 도망치듯이 이 도시를 떠났죠. 그들이 뭔가 눈치채기 전에, 황실에 사람을 보내서 황제에게 보고했어요. 우리가 람바족을 치겠다고 하니, 수락하더군요.” ...

“끝까지 믿어줄까요?” ...

“람바족만 깨끗이 정리하면 문제 삼는 이는 없을 거예요, 리시. 거기다 미르가…….” ...

케이의 말로는 미르가 깨어나서 람바족에 관한 이야기를 듣더니, ...

“감히 이 몸이 여기에 계시는데 그런 짓을 하다니! 용서할 수가 없다! 우리 피아몬도 가문은 람바족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

라고 길길이 날뛰었다고 했다. ...

“그래 봬도 대공이라, 그 친구가 소란을 피우니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됐어요. 람바족의 침략은 기정사실이 되어버렸고. 아까도 봐서 알겠지만, 미르는 좀 눈에 띄는 녀석이라, 그 친구가 나서서 움직이면 다들 그 친구를 구경하느라 이 저택에서 벌어진 일은 뒷전이 될 거예요.” ...

“그럼 람바족 토벌은…….” ...

“신경 쓰지 마요, 리시.” ...

“케이, 난 인형이 아니에요. 온실 속에서 키워진 꽃도 아니고. 말해줘요.” ...

리시가 단호하게 말하자, 케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

“제이미는 이미 기사단을 꾸려서 유진과 함께 토벌을 나갔어요. 거기에 엘드허트가 있는 테세이 성기사단과 피아몬도 대공, 그리고 그의 기사단과 병사들까지 합세했죠. 미르 덕분에 위험도가 더 낮아졌어요. 토벌은 희생 없이 끝날 거예요. 걱정할 거 없어요.” ...

“하지만 만약 람바족이 자기들이 한 짓이 아니라고 하면…….” ...

“그래서 엘디를 포함 시킨 거예요. 엘디는…… 음, 특별한 능력이 있거든요. 뭐라고 해야 하나. 정신 지배 같은 거?” ...

“정신 지배?” ...

“상대를 혼란에 빠뜨려서 이쪽의 명령을 수행하게 할 수 있어요. 모두를 혼란에 빠뜨릴 정도로 강하진 않지만, 한두 놈만 잡아서 그린 백작가의 일에 대해 떠들어대게 만들면 문제없겠죠.” ...

케이는 설명하는 내내 아무 문제 없다는 듯 무심히 말했다. 그게 오히려 리시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

“미안해요, 케이. 나 때문에 다들 고생이에요.” ...

“말했잖아요,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말라고. 이건 리시의 잘못이 아니에요.” ...

“내가 한 짓이에요.” ...

“실수죠.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고.” ...

“실수 정도로 취급할 일이 아니었잖아요. 하마터면…….” ...

케이가 검지로 리시의 입술을 막았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

“내가 누구죠, 리시” ...

“……응?” ...

“나, 케이브란트 그린이야. 나한테 이 정도 일은 내 아내가 벌인 자그마한 실수일 뿐이라고. 자기 아내가 유리 컵 좀 깼다고 일일이 화내는 남편은 없잖아. 안 그래?” ...

케이가 우쭐해하며 하는 말에 리시는 웃음이 나왔다. ...

케이가 미소 지었다. ...

“그래, 리시. 당신은 그냥 그렇게 웃어. 그거면 유리컵 하나 깬 실수에 대한 보답으로 충분해.” ...

“고마워, 케이.” ...

“그래, 미안하다는 말보다는 낫네. 어때? 썩 능력 있는 남편이지? 뭐, 당신이 성유물을 사용하는 힘을 이길 수는 없었지만. 남편이 굳이 아내를 이겨야 할 필요는 없잖아.” ...

리시의 죄책감을 거둬주기 위해서인지, 케이는 오늘따라 말이 많았다. ...

그를 향한 마음이 부풀 대로 부풀어서, 더는 커질 공간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

자꾸만 커진다. ...

그를 위해 무엇이든 해주고 싶다. ...

“케이, 그 힘 말인데.” ...

입을 열자마자 케이가 불쑥 다가와 리시에게 입을 맞췄다. ...

“당신이 기절해 있는 동안, 키스를 천만 번쯤 했는데. 알고 있어?” ...

리시는 케이가 말을 돌리려고 이런다는 걸 알았다. ...

“케이, 들어봐. 내가 가진 그 힘 말이야.” ...

“리시. 그만 자.” ...

케이가 억지로 리시의 어깨를 밀어 침대에 눕혔다. ...

“나도 자야겠어.” ...

“케이, 그러지 말고.” ...

“잘 거야.” ...

“내가 가진 힘을…….” ...

리시가 고집스럽게 말을 잇자, 케이가 순식간에 늑대로 변했다. 그러더니 두 앞발로 귀를 막고 눈을 감는 시늉을 했다. ...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

검은 늑대가 한쪽 눈만 살짝 뜨고 리시의 웃는 얼굴을 확인한 후, 다시 눈을 감았다. ...

웃음을 멈춘 리시가 말했다. ...

“케이, 들리는 거 알아. 늑대는 청각이 좋잖아. 나는 그 힘을…….” ...

“멍!” ...

“늑대도 멍멍하고 우는 줄은 몰랐는데?” ...

“웡!” ...

“케이.” ...

“크르르르.” ...

“안 무서워.” ...

“꾸우웅.” ...

“……그건 좀 귀엽네.” ...

검은 늑대가 발라당 몸을 뒤집고 배를 드러냈다. ...

이 정도로 나오니 어쩔 수 없다. 발라당 늑대는 귀여워도 너무 귀여워서, 도저히 모르는 척할 수가 없다. ...

리시는 어쩔 수 없이 늑대의 가슴과 배털을 쓰다듬어주며 생각했다. ...

‘나중에라도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 ...

 

+++

케이와 얘기할 기회는 금방 찾아오지 않았다. ...

슬리브 스톤 사건, 세간에는 ‘람바족 침략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리시를 피하는 건지, 케이를 만나기 힘들었다. ...

케이는 리시가 잠들었을 때 살그머니 침실에 왔다가 리시가 깨어나기 전에 살그머니 침실을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

며칠이 지나 노백작 내외와 젠도 돌아가고, 저택에 남은 건 백작 가 사람들뿐이었다. ...

리시는 더 늦기 전에 케이와 그 능력 문제로 대화를 좀 나누고 싶었다. ...

결국, 케이의 서재에 찾아갔지만, 서재는 비어 있었다. ...

‘이 남자는 대체 어디에 간 거야?’ ...

리시는 서재에 있는 회의용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서재 문을 노려봤다. ...

팔짱을 끼고 문을 노려본 지 얼마나 지났을까. ...

달칵- ...

문을 열고 들어오던 월라스가 리시를 보고 펄쩍 뛰었다. ...

“으악! 형수님? 여기서 뭐 하세요?” ...

“월라스. 케이가 대체 어디를 그렇게 다니는 거죠?” ...

“예? 대, 대장이요……. 아, 음…… 하하, 그러게요. 어디를 다니실까요?” ...

월라스는 케이가 숲속에서 빈둥거리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

리시가 일어나서 월라스를 향해 걸어왔다. ...

“케이, 정말 바쁜 거 맞아요?” ...

“예? 아, 그럼요. 대장은 항상, 뭐…… 바쁘셔서…… 공사가 망했다고 해야 하나?” ...

“다망한 거겠죠. 그리고 월라스는 본인이 거짓말을 잘 못하는 거 알아요?” ...

“아, 아니요. 저, 거짓말 되게 잘하는데요. 아니, 아니. 잘 못하지만 지금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의미였어요.” ...

“월라스. 말해요. 케이가 어디에 있는지.” ...

리시가 가까이 다가오는 바람에 월라스는 뒷걸음질을 쳤지만, 결국 문에 등이 닿아서 도망칠 곳이 없어졌다. ...

리시의 체구는 월라스의 반도 되지 않았지만, 월라스는 바짝 다가와 노려보는 리시가 무서워서 견딜 수 없었다. ...

이 쪼꼬만 형수님은 무슨 이렇게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는 걸까? ...

‘전쟁터에 나가시면 기세만으로 싹 다 죽이시겠어.’ ...

월라스는 리시의 눈을 피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턱 아래에서, 리시가 낮게 읊조리는 소리가 기어 올라왔다. ...

“당장 날 케이에게 데려다줘요, 월라스.” ...

작은 맹수 같은 리시의 기척에, 월라스는 생각했다. ...

‘대장, 나 좀 도와줘요. 나는 연약한 사슴이라고요. 초식동물이란 말이에요.’ ...

(61) 유일한 유물술사 (2) ...

케이는 결혼식 전날 리시와 함께 갔던 숲의 공터 한복판에 누워 있었다. ...

팔을 베고 누워 깊이 잠든 케이는 혼자가 아니었다. 유니콘 화이트와 윈디가 케이의 배에 턱을 얹은 자세로 함께 잠들어 있었다. ...

새근새근 잘 자는 그들의 모습에, 리시는 기가 막혀 월라스를 돌아봤다. ...

월라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

“그…… 뭐라고 해야 할까…… 대장은 꿈에서도 일을 하시는 분이라…….” ...

“저 인간을 위해 변명해줄 것 없어요, 월라스.” ...

“하하하하. 그, 그럼 저는 바빠서 이만.” ...

월라스는 맹수로부터 도망치는 초식동물처럼 날쌔게 달려가 버렸다. ...

리시가 다가가자, 화이트가 반짝 눈을 떴다. 영리해 보이는 까만 눈동자가 리시를 가만히 응시했다. ...

리시는 조용히 케이의 옆에 앉았다. 그제야 윈디가 깜짝 놀라 눈을 뜨고 리시를 돌아보더니, 안심한 듯 다시 케이의 배에 턱을 얹었다. ...

새파란 하늘과 선선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 따가운 햇볕을 가려주는 커다란 나무 그림자. ...

문득 찾아온 평화로움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잠시 그대로 앉아서 그의 얼굴을 감상했다. ...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 아래로 보이는 짙은 눈썹과 길게 뻗어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속눈썹, 칼로 깎은 듯 높고 예리한 콧날과 선이 또렷한 붉은 입술. ...

신이 가장 공들여 만든 작품 같은 그 얼굴은,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

“으음…….” ...

그의 붉은 입술 사이로 잠꼬대처럼 신음이 흘러나왔다. ...

“리시. 키스…….” ...

낮게 가라앉은 그의 음성을 들으며 리시는 빙그레 웃었다. ...

천천히 그를 향해 머리를 기울였다. 그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고 코끝에 그의 숨결이 스쳤다. 리시는 입술의 온도가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움직임을 멈추고 속삭였다. ...

“안 자는 거 알아요, 케이.” ...

케이는 눈을 뜨지 않았다. ...

리시는 엄지와 검지로 케이의 코를 꽉 잡았다. 그래도 케이는 고집스럽게 눈을 감고 있었다. 리시가 키스해주기 전까지는 깨지 않겠다고 다짐한 듯했다. ...

그냥 키스를 해줘도 괜찮겠지만, 그동안 리시를 피해 다닌 전적이 있는 남자다. 쉽게 입 맞춰주고 싶진 않기에, 윈디의 턱을 살짝 잡아서 케이의 입술로 이끌었다. ...

윈디의 입술이 케이의 입술에 닿자, 윈디가 “푸릉!” 하고 기겁하며 벌떡 일어났다. ...

케이도 번쩍 눈을 뜨더니 리시를 보며 눈썹 끝을 늘어뜨렸다. ...

“내 입술을 다른 여자가 훔쳐도 괜찮은 거예요?” ...

“얘는 여자가 아니라 아기잖아요.” ...

“아기는 무슨. 당신보다 훨씬 큰데.” ...

작았던 윈디는 그동안 리시를 태울 수 있을 만큼 커져 있었다. ...

윈디는 케이와 입맞춤을 한 게 영 못마땅한 듯, 주둥이를 땅에 비비고 푸웃, 풋, 침을 뱉고 있었다. ...

“윈디, 너무한 거 아냐? 난 네 침이 묻었는데도 참고 있다고.” ...

케이가 볼멘소리를 냈지만, 윈디는 풋, 하고 한 번 더 침을 뱉더니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쳐서 멀어졌다. ...

급기야 윈디는 케이가 벌떡 몸을 일으키자 휙 돌아서서 저 멀리 달려가 버렸다. ...

화이트도 제 자식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

“저런. 잡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

“영리한 녀석들이라 알아서 집에 갈 거예요. 그런 것보다는 우선.” ...

케이가 리시를 빙글 돌려세우더니, 엄지와 검지로 작은 턱을 잡아서 살며시 들어 올렸다. ...

“나한테 해줘야 할 게 있지 않아요?” ...

“글쎄요…….” ...

그가 뭘 원하는지 알았지만, 모르는 척 말을 끌었다. ...

케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

“모르면 됐어요. 당신이 모른다 해도.” ...

그의 입술이 순식간에 다가와 리시의 입술을 점령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관능적으로 움직였다. ...

강한 입맞춤에 리시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오랜 갈증 끝에 물을 만난 사람처럼 탐해오는 그의 키스가 리시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

그를 만난 목적조차 잊고, 매달리듯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알 수 없는 열기가 맞닿은 육체를 달구고, 그것이 퍼져나가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

등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야릇한 감각을 끌어냈다. 온몸의 감각이 평소보다 예민해져서, 턱을 살살 쓰다듬는 그의 엄지의 움직임조차 리시를 강렬하게 흔들었다. ...

서서히 가빠지는 호흡이 조금은 창피해서 멈춰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두근두근 빠르게 뛰는 심장이 호흡을 이끌었다. ...

이윽고 입술을 떼어낸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뜨거워졌군, 리시.” ...

정말 그랬다. 이곳이 침실이 아니라는 걸 잊을 정도로. ...

“우리 결혼식 전날 밤 못 한 게 있지.” ...

그런 게 있었나? ...

야릇한 열기로 흐릿해진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

-걱정 마요, 케이. 내일도 나는 뜨거울 것 같으니까. ...

결혼식 때문에 내일로 미룬 일. ...

그러나 그 ‘내일’이 되자, 어떤 사건이 벌어져서 그와 나눈 대화를 잊었다. ...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

그의 입맞춤에 뜨겁게 달아오를 때가 아니었다. ...

케이는 고개를 숙여 리시의 목덜미에 입술을 지분거리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여전히 뜨겁고 부드러웠지만, 닿는 감촉은 여전히 야릇했지만, 이제 리시는 거기에 말려들지 않았다. ...

“케이. 나랑 얘기 좀 해.” ...

“말해, 리시. 듣고 있어.” ...

그가 리시의 목에서 입을 떼지 않은 채 웅얼거렸다. ...

리시는 뒤로 물러서며,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었다. 순순히 떨어져 나간 그가 의아하다는 시선을 던졌다. ...

“진지한 얘기야.” ...

“나도 진지해. 그 어느 때보다도.” ...

그의 잿빛 눈동자는 여전히 관능적인 열기를 띠고 있었다. ...

“성유물에 관한 얘기를 하고 싶어.” ...

리시가 그 말을 꺼내는 순간, 그의 눈동자를 지배했던 열기가 사라졌다. 그는 난처한 듯 살짝 미간을 좁혔다. ...

“그 얘기를 꼭 지금 해야 해요?” ...

“진즉에 했더라면 지금 얘기할 필요도 없었겠죠, 케이. 하지만 당신이 내내 도망 다녔잖아요.” ...

“도망 다니긴요. 나는 여러 가지로 바빴어요. 눈코 뜰 새 없이.” ...

“아, 그래서 눈도, 코도 막고 여기서 유니콘들이랑 자고 있었던 건가요?” ...

“……그래요. 유니콘들과 한숨 자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거든요.” ...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죠?” ...

케이가 시선을 돌렸다. ...

“모르겠는데.” ...

“이해할 수가 없어요. 당신에게 나쁜 일을 얘기하려는 것도 아닌데, 왜 피하는 거죠? 오히려 두 손 들고 환영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

“당신과 입맞춤을 말하는 거라면…….” ...

리시는 또 말을 돌리며 두 팔을 뻗는 케이를 피해 뒤로 물러섰다. ...

“내가 성유물을 다룰 수 있어요, 케이. 유물술사, 라고 했죠?” ...

리시가 고집스럽게 말하자, 케이는 이 이상 말을 돌리는 건 포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요. 성유물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을 유물술사라고 하죠.” ...

“역사서에 보면 오래전에는 유물술사가 많았더라고요. 국가 인증을 받은 유물술사들.” ...

“맞아요. 하지만 지금은 없죠. 뭐, 몇 명쯤은 있을 수도 있지만, 드러내놓고 활동하는 사람은 없어요.” ...

마법이 사라져가면서 유물술사 역시 사라져갔다. 과학이라는 것이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면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은 조금씩 그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

“내가 당신의 힘이 될 수 있어요.” ...

“지금도 당신은 힘이 되고 있어요, 리시. 당신이 그냥 내 옆에 있기만 해도…….” ...

리시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요, 케이. 날 옆에 두고 감상하는 장식품으로 생각하지 말아요.” ...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

“당신의 계획에 날 끼워줘요.” ...

“당신과 평생 행복하게 사는 게 내 계획이에요. 물론 당신을 끼워줄 수밖에 없죠.” ...

리시가 미간을 좁히고 케이를 노려봤다. ...

“자꾸 말 돌리지 말아요, 케이. 당신이 수인족을 위해 많은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거 알아요.” ...

케이는 몰래 사는 수인족에 관한 정보를 모았다. 어딘가에 수인족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몸소 달려갔고, 어딘가에서 노예로 사는 수인족이 있으면 구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

케이의 큰 목표가 수인족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땅을 마련하는 것이라는 걸, 리시는 알고 있었다. ...

그리고 그 땅은, 대륙 남쪽에 있는 황무지, 짐승의 땅이라 불리는 곳이라는 것도 알았다. ...

또한. ...

‘실패하지.’ ...

지난 삶, 케이는 그 땅을 얻는 데 실패했다. ...

아주 오래전, 말살 정책으로부터 도망치던 수인족들이 마지막으로 도달한 땅이라고 알려진 짐승의 땅은, 평범한 사람이 드나들기에는 몹시도 위험한 곳이었다. ...

케이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

“당신도 여러 계획을 세우고 있죠. 그중에는 아마 날 위한 게 있을 거고. 난 그거면 충분해요, 리시.” ...

“나도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제 내가 성유물을 다룰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이건, 우리의 계획에 큰 힘이 될 거예요. 당신이 가는 곳에 나도 데려가 줘요. 당신이 하려는 일을, 나도 하게 해주고.” ...

“그건 안 돼요, 리시. 위험하거든.” ...

“내가 위험하다는 건 당신에게도 위험한 일이라는 거잖아요.” ...

“난 괜찮아요. 익숙하니까. 죽지 않을 자신이 있고.” ...

“나도 그래요.” ...

케이가 고개를 저었다. ...

“아니, 당신은 아니에요. 전쟁터에 나가본 적 있어요?” ...

물론 없었다. ...

하지만 본 적은 있다. ...

죽음 후에 스쳐 가는 많은 영상 가운데, 전쟁터도 있었다. ...

팔과 다리가 잘려 울부짖는 사람들, 엄마를 찾는 어린아이들, 자식의 시체를 끌어안고 우는 사람들. ...

그 처참한 광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해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매 순간 내가 당신을 지켜줄 수도 없죠.” ...

“당신에게 보호받을 생각은 없어요, 케이.” ...

“그런 말 말아요, 리시. 그런 곳에 가게 되면, 나는 당연히 당신만 신경 쓰게 돼요. 그건 당신도, 나도 위험하게 만드는 일이고.” ...

“난 유물술사잖아요.” ...

케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

“리시, 유물술사가 만능은 아니에요. 유물술사도 죽을 땐 죽어요. 아니, 오히려 당신이 유물술사라는 걸 알게 되면, 적들은 제일 먼저 당신을 죽이려고 할 거예요.” ...

“안 들키면 되죠. 멀리서 몰래 사용하면 되잖아요. 그리고…… 당신이 신성국에 보고하지 않은 성유물들. 그것들의 쓰임새를 알아내면, 그래서 그걸 제대로 사용하면, 이 도시가 더 부흥하게 될 거예요. 당신이 손에 넣는 모든 땅이 다른 도시보다 발전한 곳이 될 거고요.” ...

“성유물을 사용할 생각은 관둬요, 리시. 나는 당신이 성유물을 쓰게 놔두지 않을 테니까.” ...

“대체 왜요? 있는 힘이라면, 잘 사용하는 게 좋은 거 아니에요?” ...

“성유물을 사용하는 데 어떤 힘이 필요한지, 성유물을 자주 사용했을 때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지, 알려진 바가 많지 않아요. 만약 당신 몸에 문제라도 생긴다면…….” ...

“문제 안 생겨요. 지금 날 봐요. 멀쩡하잖아.” ...

“하지만 사용했던 순간엔 멀쩡하지 않았죠. 당신은 며칠간 깨어나지 못했어요.” ...

리시는 답답했다. ...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걸까? ...

케이는 어려운 길을 가려 하고 있었다. ...

신성국을 비롯해 대륙에 있는 모든 나라를 적으로 돌리는 길. ...

그런 험한 길을 걸으려는 이때, 작은 힘 한 조각이라도 아쉬워야 마땅했다. ...

그런데 리시가 가진 힘은 작은 힘이 아니었다. ...

성유물을 다루는 힘. ...

그것은 케이가 가려는 길에 무척이나 힘이 될 것이다. 어쩌면 험한 길을 반듯하게 닦아,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도록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

이 좋은 기회를 한사코 거절하는 케이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

“우리, 서로 이용하기 위해 결혼한 거 아니었어요?” ...

그래서 안 해도 될 말을 하고 말았다. ...

“날 이용해요, 케이. 내가 당신을 이용하는 것처럼.” ...

(62) 다툼. ...

그의 잿빛 눈동자가 일렁, 흔들릴 때도, 리시는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

“이용하라니…… 그런 건 못 해요, 리시.” ...

케이가 한 톤 낮아진 음성으로 중얼거리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

“못 할 게 어디 있어요? 우리, 그걸 위해 결혼한 건데.” ...

“리시…….” ...

“당신이 가진 그 성유물들. 그래, 황금 술잔. 그것만 제대로 사용해도, 이 도시에 있는 사람들이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거예요.” ...

“리시.” ...

“시민들이 농사짓는 일에서 벗어나, 다른 생산성 있는 일을 하게 해줄 수도 있어요. 그리고 그 죽음의 검. 그건…….” ...

“아이리스!” ...

케이가 언성을 높였다. ...

리시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케이를 올려다봤다. ...

그제야 리시는 케이의 눈빛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어디가 어떻게 다른지는 설명하기 힘들지만, 달랐다. ...

“난 당신에게 성유물을 쓰게 할 생각이 없어. 그러니 날 설득하는 건 관둬.” ...

“대체 왜? 내가 나 좋자고 이러는 게 아니잖아. 당신을 위해…….” ...

“날 위한다면 그만두라고!” ...

“어떻게 그래? 내게는 힘이 있어.” ...

힘이 있다. 지난 삶과는 다르다. ...

힘도, 자신도 없어서 움츠리고만 살았던 지난 삶과는, 쓸모없다는 소리만 들어온 지난 삶과는 다르다. ...

이제 내 소중한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해줄 힘이 생겼다. 리시는, 이 힘을 잘 사용하고 싶었다. ...

다른 것도 아닌 케이를 위해, 그의 부하들을 위해, 그들이 자유롭게 살아갈 세상을 위해 사용하고 싶었다. ...

“이 힘, 잘만 사용하면 당신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어. 당신 부하들도 그렇고. 정체를 숨기고 전전긍긍하면서 사는 삶, 그거 빨리 끝낼 수 있어.” ...

“그러기 전에 당신이 죽을지도 몰라.” ...

“내가 왜 죽어?” ...

“모르겠어, 리시? 슬리브 스톤을 두 번 연속으로 사용하고 나서, 당신은 죽을 뻔했어! 그냥 기절한 수준이 아니었다고!” ...

몰랐다. ...

리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케이가 리시의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

“숨을 쉬지 않더군.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입술은 파래지기 시작했어.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

“…….”

“리시, 잘 들어. 당신이 그렇게 쓰러졌을 때, 나는 아무것도 못 했어. 당황해서, 놀라서, 심장이 떨어져 내려서, 그냥 우두커니 서서 떨고만 있었지. 제이미랑 엘디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당신은 거기서 죽었을지도 몰라.” ...

케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리시는 케이가 이런 표정을 짓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

“알겠어, 리시? 난 이렇게 한심하고 도움이 안 되는 남자라고.” ...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슬리브 스톤으로 벌인 짓을, 당신이 수습해주고 있지 않으냐고, 그게 얼마나 큰 도움인 줄 아느냐고 말해주고 싶었다. ...

하지만 그의 잿빛 눈동자에서 흘러넘치는 고통스러운 감정에 눌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당신을 데리고 다니다가 당신이 공격을 받기라도 하면, 나는 또 그렇게 놀라고 당황해서 허둥거리겠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당신이 죽어버린 후일 거야. 성유물을 사용하겠다고?” ...

케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러다 슬리브 스톤 때 같은 일이 벌어지면? 아니, 그보다 더 심각한 일이 벌어지면?” ...

“…….”

“안 돼, 리시. 당신이 성유물을 사용할 때마다 기절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그걸 사용했을 때 기절한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니야. 반복적으로 기절하다가 잘못되는 순간도 올 거고. 절대 안 돼.” ...

“케이. 날 걱정하는 건 알지만.” ...

“아니, 당신은 몰라. 알면 내게 고집스럽게 조르지 않겠지.” ...

“조르다니. 이건 당신을 위해서야.” ...

“날 위한다면 그냥 가만히 있어. 안전한 곳에서 예쁜 드레스를 입고 맛있는 걸 먹으면서 지내라고.” ...

울컥, 화가 치밀었다. 두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밀쳤다. ...

“말했지? 난 인형도, 장식품도 아니라고. 단지 당신이 불안하다고 해서 날 저택에만 가둬둘 수는 없어.” ...

“저택에만 있으라는 뜻이 아니야. 나가고 싶으면 나가. 저 밖에서 열리는 파티에도 가고, 공연도 보러 다녀. 어디든 다녀도 돼. 다만, 성유물 근처에 올 생각은 하지도 마. 두 번 다시는 당신 앞에 성유물을 꺼내지 않을 거니까.” ...

“왜 날 이용하지 않는 거야?” ...

“그 빌어먹을 이용한다는 소리 좀 그만해!” ...

케이가 크게 외쳤다. ...

리시는 뻣뻣하게 굳어서 그를 올려다봤지만, 그의 노한 표정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케이는 상처받은 눈빛으로 리시를 내려다보다가 휙 돌아섰다. ...

리시는 멍하니 그의 등을 응시했다. ...

그는 평소처럼 돌아보며 리시에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다.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지는 그의 등을,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

“형수님.” ...

나직하게 부르는 음성에 정신 차렸다. ...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오렌지빛으로 물든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그 하늘 아래에 나단이 있었다. ...

천천히 눈꺼풀을 깜빡거리는 리시를 보며, 나단이 한 번 더 불렀다. ...

“형수님.” ...

“나단.” ...

“대장이 형수님 혼자 계시다고 모시고 오라고 하셨어요.” ...

그리 화를 내고 가버렸으면서도 걱정이 되기는 했나 보다. ...

신기하다고, 리시는 생각했다. 그가 그렇게 화를 낸 이유도 알 수 없고, 그런 식으로 가버렸는데도, 그가 밉지 않았다. ...

“케이가 많이 화났나요?” ...

“대장은 화나지 않았어요.” ...

“하지만 소리를 지르던걸.” ...

“레이디에게 소리를 지르다니, 대장도 덜 컸네요. 이해해주세요.” ...

“내가 뭔가 잘못한 것 같아요.” ...

“형수님은 잘못한 거 없어요. 대장도 잘못한 거 없고.” ...

“우리가 왜 싸웠는지 알아요?” ...

나단이 자신의 귀를 톡톡 두드렸다. ...

“저도 귀가 좋거든요.” ...

“아.” ...

리시는 얼굴을 붉혔다. ...

나단이 케이만큼 귀가 좋다면, 케이와 나누는 은밀한 이야기도 다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

그런 리시의 생각을 눈치챈 듯, 나단이 말했다. ...

“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 저는 대장만큼 강하진 않거든요. 대장은 인간일 때도 짐승일 때의 능력이 영향을 미칠 정도로 강하지만, 저는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서 무슨 소린가 싶어서 집중했더니……. 훔쳐 들을 생각은 없었어요. 죄송합니다.” ...

“아니에요. 이런 데서 시끄럽게 떠든 게 잘못이죠.” ...

리시는 나단과 함께 저택을 향해 걸었다. ...

“결혼식 날, 제가 잠에서 깨어나서 제일 처음 본 건, 형수님 옆에서 하얗게 질린 대장이었어요. 대장이랑 무시무시한 곳도 자주 다니고, 죽을 뻔한 적도 여러 번 있었거든요. 그런데 대장이 그런 표정 짓는 건 처음 봤어요.” ...

나단이 리시를 보며 싱긋 웃었다. ...

“형수님이 아니라 대장이 뒈질, 아니, 죽을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

“…….”

“형수님이 깨어나실 때까지, 대장은 잠도 안 잤어요. 형수님 곁에 붙어서 형수님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깜짝 놀라서 사람들을 부르고, 의원을 부르고…… 난리였죠.” ...

그런 줄은 몰랐다. 깨어났을 때, 케이는 리시에게 그런 내색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가슴이 뭉클했다. 케이는 언제나 이러한 뭉클함을 느끼게 해준다. ...

“형수님이 성유물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만약 그 힘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좀 더 편하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죠.” ...

“그러니까요.” ...

“하지만 형수님. 걱정하는 대장의 마음도 이해하셔야 해요. 성유물을 사용하는 사람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는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았어요. 성유물을 사용하는 건 굉장한 일인 만큼, 치러야 할 대가 또한 어마어마할지도 몰라요. 어쩌면 형수님의 목숨을 갉아먹을지도 모르죠.” ...

두렵지 않았다. 리시가 두려운 건, 이번 삶에서조차 지난 삶처럼 쓸모없이 살아가는 것이었다. ...

“내 목숨을 걸어서 내 남편을 돕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

리시가 중얼거린 말에, 나단이 걸음을 멈췄다. ...

고양이 같은 나단의 눈이 리시를 빤히 응시했다. ...

“형수님, 목숨을 건다는 말은 그렇게 쉽게 하시면 안 돼요.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게 어떤 건지 모르세요?” ...

그런 건 모른다. 리시는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적이 없었다. ...

지난 삶에서는 소중한 사람이 있었던 적도 없으니까. ...

“대장도, 우리도, 형수님의 목숨으로 세워진 도시를 살아가고 싶진 않아요. 형수님이라면 그럴 수 있겠어요?” ...

그럴 수 있을까? ...

케이가 날 위해 죽는다면, 그가 지켜준 삶이라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

대답은 곧바로 나왔다. ...

“아니요.” ...

이제야 케이가 왜 그리 화냈는지 알 것도 같았다. ...

‘나는 한 번을 살다가 죽었는데도 미숙하구나.’ ...

그저 인형으로만 살았기에, 가지고 다니기 좋은 장식품으로만 살았기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마음을 잘 알지 못했다. ...

케이에게 받는 온기가 좋아서, 그에게도 내 마음의 온기를 전해주고 싶은데, 내 마음의 온기는 남에게 전해주기에는 아직 부족한 모양이다. ...

방으로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고 침실로 향했다. ...

케이는 없었다. 침대에 누워 한참을 기다려도 케이는 들어오지 않았다. ...

리시를 피할 때도 잠은 침실에 와서 잤는데. ...

그의 빈자리가 서늘하게 느껴졌다. ...

나단은 케이가 화난 게 아니라고 했고, 리시는 그 말을 믿었다. ...

화나지는 않았어도 마음은 상했나 보다. 그의 상한 마음을 풀어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

지금 그를 찾아가서 미안하다고 말하면, 그가 웃어줄까? ...

귀찮게 여기지는 않을까? ...

그의 노한 눈빛과 냉랭한 뒷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려서, 가슴이 답답했다. ...

결국, 한숨도 자지 못하고 다음 날이 되었지만, 그날도 역시 케이를 볼 수 없었다. ...

+++

케이는 손님용 별채인 서채의 응접실에 있었다. ...

지금은 손님이 없어서 서채를 드나드는 사람은 청소하는 하녀들뿐이었다. ...

응접실 소파에 묵묵히 앉아 있는데, 나단과 유진이 찾아왔다. ...

“람바족 토벌을 나간 제이미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일은 무사히 끝냈고 곧 돌아온다고 합니다. 아군의 피해는 없었고, 람바족 몇 명을 사로잡아서 정신 지배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곧장 가비자르 제국과 신성국에 가서 보고한 후 돌아오겠다고 했습니다.” ...

유진의 보고에 케이는 울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맞은편 소파에 앉은 나단이 인상을 찌푸리고 두 다리를 테이블에 턱 올렸다. ...

“대장, 대체 언제까지 여기서 그 지랄을 떨 거예요? 벌써 나흘째라고요.” ...

“서채에 오는 게 힘든가?” ...

“그 말이 아니잖아요. 나흘이나 형수님을 내버려뒀잖아요.” ...

“아무리 싸워도 잠은 한 침대에서 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장.” ...

“봐요, 유진, 이 목석같은 놈도 아는 걸, 대장은 몰라요?” ...

케이는 미간을 좁히고 테이블 위에 놓인 나단의 발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

“내가 리시에게 소리를 질렀어.” ...

“그랬죠.” ...

“리시 얼굴을 어떻게 봐야 좋을지 모르겠다.” ...

나단이 기가 막힌다는 듯 입술을 벌렸다. ...

“대장, 설마…… 형수님한테 소리 지른 걸 어떻게 사과해야 좋을지 몰라서 이렇게 도망 다니는 건 아니죠?” ...

(63) 그 남자가 사과하는 법. ...

  케이가 대답하지 않자 나단이 눈을 부릅떴다. ...

“대장, 진짜예요? 정말 사과할 방법을 몰라서 여기서 이 지랄 떨고 있는 거예요?” ...

“나단, 대장에게 말이 심하다.” ...

“아뇨, 대장. 존댓말을 사용해드리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세요. 와씨, 유진. 말이 돼? 우리가 저런 걸 대장으로 받들어 모신다는 게?” ...

“나단, 넌 나를 받들어 모신 적 없어. 그리고 유진, 제발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 네가 그런 눈으로 보면 내가 진짜 한심한 놈 같잖아.” ...

말 없고 신중한 유진이 한심함을 가득 담은 눈으로 케이를 보고 있었다. ...

“리시는 너무 작고 연약해. 살짝만 건드려도 부서질 것 같아서 불안하지.” ...

케이의 말에 유진과 나단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

리시는 작지만 연약한 느낌은 아니었다. ...

물론 겉보기에는 마르고 작아서 불안한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언성 좀 높인 정도로 다른 레이디들처럼 기절할 것 같은 분위기는 없었다. ...

오히려 케이까지도 단숨에 집어삼킬 것 같은 위압감이, 리시에게는 있었다. 그 때문에 케이의 그림자들도 그녀를 쉽게 형수님으로 받아들이고 존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

‘대체 우리 대장 눈에는 형수님이 어떻게 비치는 거지?’ ...

나단과 유진이 한마음으로 의아해하는 동안, 케이는 계속해서 말했다. ...

“그런 여자에게 소리를 지른 거야. 그때 리시가 얼마나 겁먹은 표정이었는지, 너희가 봤어야 해. 하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

케이가 괴로운 듯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

“리시는 잘못한 게 없는데, 내가 왜 그렇게 소리를 질러댔을까?” ...

“대장. 대장이 소리를 지른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자괴감을 느낄 정도로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어요. 그냥 좀 살짝 언성을 높였다, 그 정도?” ...

둘이 싸울 때 그 소리를 들었던 나단이 위로하듯 말했지만, 케이의 울적한 표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

“아니, 난 미친놈처럼 소리를 질러댔어. 아마 리시는 내게 정이 떨어졌을 거야.” ...

“전 지금 대장에게 정이 떨어집니다.” ...

유진이 중얼거렸다. ...

“뭐라고?” ...

제대로 못 들은 케이가 되물었지만, 굳게 닫힌 유진의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유진을 대신해서, 나단이 말했다. ...

“정떨어진다고요. 지금의 대장, 진짜 정떨어져요.” ...

“하, 너희는 아무래도 좋아.” ...

“우리만이 아닐걸요. 형수님도 그나마 남은 정이 뚝뚝 떨어지고 있을 거예요. 사과 하나 제대로 못 해서 피해 다니는 남자라니. 우와, 진짜 싫다. 안 그래, 유진?” ...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

케이가 엄지와 검지로 미간을 주물렀다. ...

“내가 언제까지고 리시를 피하려는 건 아니야. 다만…… 알다시피 나는 레이디에게 사과라는 걸 해본 적이 없어.” ...

“그러시겠죠.” ...

“확실하게 리시의 기분을 풀어줄 만한 게 필요해.” ...

“형수님은 대장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화가 나지 않았을 거예요. 그냥 가서 가볍게 미안하다고만 해도…….” ...

“아니, 나단. 그건 네가 여자를 몰라서 하는 말이야.” ...

나단이 어이없다는 듯 케이를 노려봤다. ...

“대장, 지금 그거 나한테 하는 소리예요? 여자를 모르는 건 내가 아니라 대장이거든요. 난 이래 보여도…….” ...

“엎드려 비십시오.” ...

유진이 나단의 말을 끊었다. 유진은 이렇게 쓸데없는 일로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

리시는 남편이 언성을 좀 높였다고 해서 꽁해 있을 여자가 아니었고, 케이도 그 사실을 알 텐데 왜 저렇게 전전긍긍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하지만 그 부분을 지적하느니, 사랑에 빠져서 바보가 된 대장이 이해할 만한 말을 해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

“납작 엎드려서 비는 것이 답입니다, 대장.” ...

“그게 답인가?” ...

“네, 대장. 레이디에게 언성을 높이다니. 그건 아주 무례하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엎드려 비시는 게 좋습니다.” ...

“역시 그렇군.” ...

둘의 대화에 나단은 기가 막혔다. ...

“엎드려서 빌 만한 일은 아니었어, 유진. 대장은 형수님을 걱정했고, 아주 조금 언성이 높아진 것뿐이야.” ...

“아니, 나는 미친놈 같았지.” ...

나단이 보기에는 지금의 케이가 미친놈 같았다. ...

부부끼리 잠깐 말다툼을 한 것뿐이다. 그것도 서로를 걱정하고 위하느라고 생긴 다툼이다. ...

그런데 케이는 마치 리시를 칼로 찌르기라도 한 것처럼 굴고 있었다. ...

이 멍청한 남자가 검을 쥐고 선두에 서서 전장을 누비는 그 남자와 동일인물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한마디 더 하려는데, 유진이 나단의 팔을 툭 치고 눈짓을 보냈다. ...

‘제발 그만해. 난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 ...

눈치 빠른 나단은 유진의 눈동자에 담긴 간절함을 읽어냈다. ...

여기서 벗어나고 싶은 건 나단도 마찬가지였기에, 하고 싶은 말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

“대장, 유진 말이 맞아요. 당장 형수님께 달려가서 납작 자빠지세요. 그 방법밖에 없겠네요.” ...

 

+++

물론 케이는 부하들의 말만 믿고 리시의 앞에 납작 엎드릴 만큼 귀가 얇은 남자는 아니었다. ...

케이는 통신실에 들어가 와이번 그린 노백작에게 연락을 넣었다. ...

“아버지는 어머니와 다투셨을 때,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

“납작 엎드리지.” ...

“납작…… 엎드리신다고요?” ...

“그래. 엎드리지.” ...

“아.” ...

“아내와 다퉜을 때는 이유 불문하고 납작 엎드리라는 말, 못 들어봤느냐?” ...

“네, 못 들어봤습니다.” ...

“그럼 이제부터 마음 깊이 새겨두는 것이 좋을 게다. 아내와 다퉜을 때는 그저 납작 엎드려라.” ...

리시에 관한 생각 때문에 머리가 꽉 찬 케이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담긴 장난기를 눈치채지 못했다. ...

+++

지난 삶, 리시에게 있어서 홀로 잠드는 건 전혀 힘든 일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알포드가 돌아오지 않아서 혼자 밤을 보내는 날이 더 좋았다. ...

“가끔은 남편이 안 들어오는 게 편하다니까요.” ...

“그러게 말이에요.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매일 붙어 있는 것도 좀…….” ...

어느 파티에서 귀부인들이 속닥속닥 나누는 대화가 들려온 적이 있었다. 홀로 밤을 보내는 건 누구나 원하는 일인가 보다고, 리시는 생각했었다. ...

하지만 이번 삶. ...

그가 며칠 침실을 비웠다고 이리도 가슴이 서늘하게 식는 연유는 무엇일까? ...

나는 이렇게나 외로움이 많고 의존적인 성격이었던 걸까? ...

‘싫다…….’ ...

라고, 리시는 생각했다. ...

의존적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남편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귀부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

혼자서도 당당하게 걸어가는, 그런 여인으로 살고 싶었다. ...

화내고 떠난 남편의 뒷모습만 떠올리며 전전긍긍하는, 가련한 여자로 살기는 싫었다. ...

한 번 죽은 후,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만 해도, 그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마음으로 살아가겠다고 각오했다. ...

그런데 고작 몇 달 만에 이토록 물러지다니. ...

리시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진청빛 하늘을 바라보다가 방에서 나왔다. 1층에 있는 주방에 들어갔더니, 쉬고 있던 주방 하녀들이 깜짝 놀라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

리시는 아직도 이런 반응이 신기했다. ...

위틀로 공작가에서도, 지난 삶의 알포드 후치스 자작가에서도, 하녀들은 리시에게 이런 정중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었다. ...

“술을 좀 마시고 싶은데.” ...

“종만 울리시면 방으로 가져다드릴 텐데요.” ...

“아니, 정원에서 마시려고요. 와인을 좀 가져다주겠어요?” ...

하녀는 술 한 병과 와인 잔, 그리고 예쁘게 깎은 과일을 가져왔다. ...

“제가 옮겨다 드릴게요.” ...

“괜찮아요. 과일은 여러분이 들도록 해요. 나는 술만 있으면 되니까.” ...

“아, 이건 주인님께서 주인마님께만 드리라고 한 귀한 과일인데…….” ...

“그럼 맛있겠네요. 맛있게들 들어요.” ...

생각지 못한 호의에 주방 하녀들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후, 리시는 술병만 들고 정원으로 나갔다. ...

어두운 정원을 천천히 걷다가, 흘러나오는 희미한 빛을 따라갔더니 분수대가 있었다. 작은 분수대 안에는 마석이 박혀 있어서, 뿜어져 나오는 물보라에 은은한 빛이 실려 아름다웠다. ...

분수대 옆에 있는 하얀 벤치에 앉아서 술병을 입술로 가져갔다. ...

옛날부터 이런 식으로 술을 마셔보고 싶었다. 귀부인들이 본다면 레이디답지 못하다며 혀를 찰 행동이지만, 이곳에서 리시가 병나발을 불든, 병을 깨뜨리든,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

술병을 기울여 술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뒤로 젖혀 회청빛 하늘을 응시했다. 결혼식 때 둥글던 달이 많이 기울었다 싶었는데, 다시 둥근 모양을 되찾고 있었다. ...

이제 곧 수인들이 힘을 자제하기 힘들어하는 보름달이 뜬다. ...

‘어떤 기분일까?’ ...

케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수인으로 변할 수 있었다고 들었다. ...

그렇다면 그 어린 나이 때부터, 이루 말할 수 없는 충동이 몸을 지배해 괴로워했던 걸까? ...

그렇다면 너무도 가혹하다. ...

‘난 또 케이 생각을 하고 있구나.’ ...

곱게 접어서 상자 안에 잠시 넣어두려 했는데, 머릿속에 가득 찬 케이에 관한 생각은 순순히 접혀주지 않았다. ...

그것은 리시에게 있어서 몹시도 생경한 감정이었다. ...

지난 삶, 그 어떤 날에도 어느 한 존재가 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흘러넘친 적은 없었다. ...

저 스스로 다루기 힘들 정도로 부푸는 생각과 감정이 조금은 두렵기도 했다. 생명을 가진 듯 제멋대로 움직여 농밀해지는 이 감정을 그냥 내버려두어도 괜찮은 걸까? ...

‘아니, 인제 그만.’ ...

리시는 고개를 저으며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

‘여기서 아무리 고민한다고 해도 케이의 기분이 풀리는 건 아니야. 내가 직접 가서 풀어줘야 해.’ ...

아주 쉬운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리시에게는 무척이나 어렵게 느껴졌다. ...

만약 그를 찾아가서 미안하다고, 기분 풀라고 했는데도 그가 여전히 냉랭하면 어떡해야 할까? ...

그가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돌아서면, 그 차가운 뒷모습을 또다시 보게 되면, 그 울적함을 견딜 수 있을까? ...

해보지도 않고 무서워하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지 알면서도, 실행에 옮기는 게 그 어떤 일보다 어려웠다. 차라리 전쟁터에 나가는 게 더 쉬울 것 같았다. ...

‘찾아가서 미안하다고 말하지도 못할 거라면, 생각도 하지 마.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많이 있잖아.’ ...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쌓여 있는데, 케이의 기분을 풀어주는 게 가장 중요한 문제처럼 여겨졌다. ...

‘안 되겠어. 역시 케이를 찾아가 보는 게 좋겠어.’ ...

그의 서늘한 눈빛이 더 차게 굳더라도, 그가 침묵을 지키며 돌아서더라도, 해볼 수 있는 건 해봐야겠다. ...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

리시는 벌떡 일어나다가 치맛자락을 밟고 비틀, 쓰러질 뻔했다. 넘어질 뻔한 리시의 팔을, 누군가 단단히 잡아서 고정했다. ...

케이였다. ...

달빛을 받아 그림자를 드리운 회청빛 눈동자는, 조금도 서늘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다정한 따스함을 띈 맑은 눈동자 안에, 놀란 표정의 리시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

전과 다름없는 그의 눈빛을 보는 순간 안도감이 찾아왔다. 다리에 힘이 빠져서 다시 비틀거렸지만, 그가 단단히 잡고 있어서 넘어지지 않았다. ...

“병나발을 불면 쉽게 취해요, 리시. 게다가 안주도 없고.” ...

그의 음성도 여전히 살가웠다. ...

순간, 이름 붙이기 힘든 감정이 리시의 가슴을 가득 채워서, 하마터면 그를 끌어안고 그의 뺨에 볼을 비빌 뻔했다. ...

“케이, 나는…….” ...

“쉿.” ...

케이의 검지가 리시의 도톰한 입술을 살며시 눌렀다. ...

“내가 먼저 말할게요, 리시.” ...

그가 낮게 속삭였다. ...

리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리시에게 시선을 맞추고 진지하게 말했다. ...

“이제부터 난 당신 앞에 납작 엎드릴 거예요.” ...

(64) 침대에 핀 열꽃. ...

상상도 못 한 말에 리시는 웃음을 터뜨렸다. ...

“그게 무슨 말이에요, 케이?” ...

“아내를 화나게 했을 땐 납작 엎드리라는 조언을 받았거든요.” ...

“대체 누가 그런 조언을……. 아니, 아니. 케이, 난 화나지 않았어요.” ...

“화났을 거예요. 내가 소리를 질렀으니까.” ...

“아…….” ...

케이가 언성을 높인 부분은 이미 잊었다. 그건 그저 말다툼하다가 약간 언성이 높아지는 정도였지, 리시가 공포를 느낄 만큼 악을 써댄 게 아니었다. 케이가 그런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

“그러니 이제부터 엎드릴게요.” ...

“아뇨, 케이.” ...

당장 엎드리려고 하는 케이의 팔을 얼른 붙잡았다. ...

“하지 말아요.” ...

“해야 해요.” ...

“괜찮아요. 나는 화나지도 않았고, 당신이 언성을 높인 것 때문에 기분이 상하지도 않았어요.” ...

“상했을 거예요.” ...

“상하지 않았다니까.” ...

“정말요?” ...

“정말로요.” ...

“늑대는 눈치가 빨라요, 리시.” ...

“그렇다면 당신은 늑대가 아닌가 봐요.” ...

케이는 리시의 생각을 읽어내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

“화난 것 같은데.” ...

“아니라니까, 이 사람아.” ...

“흐음. 그래도 한 번쯤 엎드려두는 게 낫지 않겠어요?” ...

“아니, 정말 괜찮아요.” ...

“나중에 가서 그때 한번 엎드리라고 할 걸 그랬다고 후회해도 소용없어요.” ...

“벌써 후회돼서 잠도 못 자겠네요.” ...

케이가 씩 웃었다. ...

하얗고 고른 이가 드러나는 미소는, 언제나처럼 근사했다. ...

이 상황이 신기했다. ...

케이 때문에 울적해서 잠 못 이룬 날이 마치 꿈결처럼 흐릿해졌다. 그와 다툰 적도, 그 때문에 속이 상한 적도 없었다는 듯, 평소처럼 그를 대할 수 있었다. ...

“그날은 미안했어요, 리시. 어떻게 사과해야 좋을지 몰라서 당신 얼굴을 보기도 힘들었어요. 한심한 놈이죠.” ...

“그렇다면 나도 한심한 여자네요. 나도 당신에게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당신을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거든.” ...

“잘됐네요. 우리 둘 다 한심한 연놈이라서.” ...

리시가 웃음을 터뜨렸다. ...

“부부는 닮는다잖아요.” ...

“이런. 난 당신처럼 예뻐질 수는 없을 것 같은데.” ...

케이가 리시의 허리를 감고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입맞춤이었다. ...

입술을 댄 채 그가 속삭였다. ...

“와인 맛이 좋군요.” ...

“비싼 와인인가 봐요.” ...

“좀 더 맛보고 싶은데.” ...

리시가 스르륵 눈을 감자 다시 그가 리시의 안으로 침범해왔다. ...

조금 전보다 강하고 농밀한 키스. ...

리시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

한 손에 술병을 들고 있다는 걸 잊었다. 술병 안에 담겨 있던 진한 와인이 그의 목 뒤를 타고 흘러내려, 리시의 얼굴에까지 떨어졌다. ...

“아, 미안해요.” ...

“미안하면 이건 당신이 먹어줘요.” ...

그의 속삭임이 뜨겁고 야릇하게 리시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 허스키한 음성만으로도 저릿한 감각이 리시의 전신을 타고 흘렀다. 어깨와 복부에 힘이 들어갔다. ...

그는 리시가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한 듯 평소보다 깊어진 눈으로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가 빤히 쳐다보는데 입술을 벌리는 게 민망했지만, 그렇다고 수줍은 척 얼굴을 붉히며 그를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

리시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지고 싶었고,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그를 원했다. ...

리시는 그의 팔뚝을 잡고 발끝을 세웠다. 그가 고개를 숙여 리시와 키를 맞췄다. ...

벌어진 입술이 그의 목덜미에 닿았다. 목덜미를 타고 흐르던 액체가 리시의 입술을 적혔다. 그 적빛 액체는 포도 향과 그의 체취가 섞여 있었다. ...

그의 숨이 리시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의 호흡이 거칠어진 걸까? 단지 그의 목덜미를 지분거릴 뿐인데. ...

그의 반응이 귀여워서, 적극적으로 이런저런 시도를 하게 되었다. ...

이리저리 만져대는 동안, 케이는 석상이라도 된 듯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는 걸, 리시는 깨닫지 못했다. ...

느닷없이 케이가 손목을 잡아챈 후에야, 리시는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그의 몸을 만져댔는지 깨달았다. ...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

“안 되겠어, 리시.” ...

그가 리시의 어깨를 눌러 벤치에 눕혔다. 그의 회청빛 눈동자가 음습하게 빛났다. ...

“오늘은…….” ...

그가 쉰 음성으로 속삭이며 리시를 덮치듯 허리를 굽히다가, 뭔가 떠올린 듯 고개를 저었다. ...

“아니, 기념할 만한 첫날 밤을 여기서 보내는 건 안 될 일이겠지.” ...

리시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그가 리시를 번쩍 안아 들었다. ...

그는 성미가 급한 사람처럼 본채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복도에 있던 하녀들이 둘을 보고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

리시는 하녀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게 민망해서 견딜 수 없었지만, 그에게 내려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만큼 케이에게서는 형형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

리시는 그가 자신의 손길 때문에 이토록 뜨거워졌다는 게 싫지 않았다. ...

침실로 들어간 그는, 리시를 침대에 눕혔다. 그의 열띤 눈동자와 평소보다 빠른 호흡이 두렵지 않았다. ...

그는 성마르게 굴었지만, 리시를 만지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그의 손가락이 닿는 곳마다 열꽃이 피었다. 그것은 뜨겁지만 달콤하게 리시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

그의 입술과 손이 만들어내는 음악이 아름다웠다. 체온과 체온이 섞이고, 체취와 체취가 어우러졌다. 숨과 숨이 얽혀, 감미로운 하모니를 만들어냈다. 그날 밤, 리시는 오롯이 케이와 하나가 되었다. ...

+++

케이의 팔을 베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

가빠졌던 호흡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지만, 심장은 여전히 쿵, 쿵, 쿵, 아프도록 빠르게 뛰고 있었다. ...

그와 함께 한순간이 하나하나 생생하게 떠올랐다. ...

그의 입술이 닿은 곳, 그의 손이 스친 곳, 그럴 때마다 흘러나오던 신음. ...

창피하면서도 행복했다. ...

한 남자와 하나가 되는 것이, 이토록 달콤하고 멋진 일인 줄은 몰랐다. 조금 아프긴 했지만, 그조차 잊을 정도로 그는 모든 순간에서 다정했다. ...

리시의 머리를 쓰다듬던 케이가 그녀의 정수리에 깊숙이 입을 맞추고 나른하게 속삭였다. ...

“당신은 정말 멋진 여자야, 리시.” ...

“당신도.” ...

요 며칠 제대로 못 잔 데다가 격렬한 행위까지 하는 바람에, 눈꺼풀이 무거웠다. ...

하지만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리시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데, 졸려.” ...

케이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

“나도 졸려, 케이.” ...

“자기 전에 하나만 말할게.” ...

“응.” ...

“사랑해.” ...

리시는 눈을 감았다. ...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듣는 건 그 느낌이 달랐다. ...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때 어떤 기분일지 상상해본 적은 있는데, 그 모든 상상 속에서도 이런 기분을 느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컥, 치밀어오른 무언가가 가슴을 가득 채웠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

하지만 우는 대신, 리시는 답했다. ...

“나도. 사랑해, 케이.”   ...

+++

리시의 숨이 고르게 바뀌었다. ...

리시와 말다툼을 한 후, 잠을 못 잔 건 케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

그녀와 함께한 모든 순간이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날뛰고 있었다.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고, 그녀를 향한 갈증은 여전했다. ...

조금 더, 아니, 아주 많이 더, 그녀를 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힘들었다는 걸, 리시는 절대 모를 것이다. ...

-나도. 사랑해, 케이. ...

그녀가 잠들기 전,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인 그 말이, 간신히 억누른 충동을 다시금 폭발시켰다. ...

그 상황에서 그녀를 안으면 부서질 것만 같아, 허벅지를 꼬집으면서 견뎌냈다. ...

‘내 마음도 모르고 잘 자는군, 리시.’ ...

새근새근 자는 리시가 얄밉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했다. ...

‘날 사랑한다고?’ ...

리시가 그리 말해줄 줄은 몰랐다. 내게 호감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그것이 사랑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

‘당신은 정말 항상 날 놀라게 해.’ ...

이 마음이 일방통행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앞으로 리시와 함께하고 싶은 수많은 일이 떠올랐다. ...

케이는 리시를 보듬어 안고 속삭였다. ...

“고마워, 리시. 그 저택을 빠져나오기 위해 날 선택해줘서.” ...

첫 시작에 서로가 서로에게 품은 감정은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순간의 감정이었다. ...

앞으로도 이어질 이 감정. ...

“당신이 그저 꽃이 되고 싶지 않았다면, 그리하도록 해. 당신이 무엇으로 살든, 내가 그 곁을 지킬 테니까.” ...

 

+++

슬리브 스톤을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좋은 꿈을 꿨다. 깨고 싶지 않을 만큼 좋은 꿈이었던 것 같은데, 깨고 나니 현실이 더 좋았다. ...

리시는 여전히 케이의 품에 안겨 있었고, 그녀를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는 어젯밤보다 더 달콤해서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

“잘 잤어, 리시?” ...

“응. 좋은 꿈을 꿨어.” ...

“나도 그래.” ...

그가 리시의 작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더니, 온 얼굴에 키스를 퍼붓고 나서 눈을 맞췄다. ...

“지금도 꿈꾸는 기분이야.” ...

“나도.” ...

그와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게 좋았다. ...

그의 손이 슬금슬금 어깨를 쓰다듬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제야 리시는 그의 눈동자에 담긴 열기를 읽어냈다. ...

“지금 아침이야.” ...

“상관없잖아. 우리는 신혼부부인데.” ...

“그래도. 어젯밤에 하녀들이 우리를 봤어. 분명 우리가 뭘 했는지에 대해서 소곤거리고 있을걸.” ...

“그것도 상관없잖아. 사실인데.” ...

그가 리시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

“사실이긴 해도……. 나, 못 움직이겠어. 어젯밤에 당신이 너무…….” ...

“움직이지 않아도 돼, 리시. 내가 알아서 할게.” ...

뭘 알아서 하겠다는 건지 이해한 리시가 얼굴을 붉혔다. ...

“케이.” ...

그가 이불 속으로 사라졌다. 그를 덮은 이불이 꿈실꿈실 움직일 때마다, 리시의 어깨도 야릇하게 떨렸다. ...

나른하고 무거운 육체에 또다시 열꽃이 피었다. 리시는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거머쥐고 잘은 숨을 내뱉었다. ...

침대가 또다시 뜨거워졌다. ...

+++

아침 식사는 침실에서 했다. ...

뜨거운 티와 샌드위치. ...

가볍게 요기를 했는데도 묵직한 근육통이 사라지지 않아서 침대를 벗어나기 힘들었다. ...

“리시, 오늘은 쉬도록 해요. 일 끝나는 대로 와서 마사지 좀 해줄게.” ...

“으음…….” ...

리시는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잠결에 대답했다. 그가 리시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 침실에서 나가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을 때는 정오가 지나 있었다. 한숨 푹 잤더니 아까보다는 상태가 좀 나아져서, 리시는 가운을 걸치고 일어났다. ...

리시는 침실에 연결된 자신의 방으로 나가려다가 우뚝 멈췄다. 방문 너머에서 시녀들이 담소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

‘어떡하지?’ ...

좀 씻고 싶은데, 욕실에 가기 위해서는 방을 지나가야만 했다. ...

에르웰은 몰라서, 눈치 빠른 크리시나는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 번에 알아볼 것이다. ...

그렇다고 이런 상태로 그냥 침대에 누워 있고 싶진 않았다. 어젯밤 흘린 땀으로 몸이 끈적거리고,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

손가락으로 대충 머리를 빗은 후,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

내 시녀들은 어찌나 예민한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문을 열었다고 생각했는데, 둘 다 동시에 이쪽을 돌아봤다. ...

“안녕히 주무셨어요?” ...

두 시녀가 다가왔다. ...

리시는 저도 모르게 외쳤다. ...

“거기서 꼼짝 마!” ...

(65) 침대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

  에르웰과 크리시나가 얼어붙었다. ...

지금껏 리시는 두 사람에게 이런 말투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항상 부지런히 일어나는 리시가 늦게까지 침실에서 나오지 않아서 걱정하던 차에, 나오자마자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니 걱정이 폭발했다. ...

“아이리스 님, 괜찮으세요?” ...

“나는 괜찮아요, 크리시나. 일단 둘 다 뒤로 돌아서요.” ...

“무슨 일이세요? 뭔가 위험한 일이라도…….” ...

“협박을 당하고 계십니까?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

에르웰이 허벅지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

“아니, 에르웰. 아무도 날 협박하지 않아요. 그냥 아무것도 묻지 말고 돌아서요.” ...

에르웰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크리시나는 뭔가를 눈치챘다. 리시의 가운 위로 보이는 불긋한 흔적, 상기된 리시의 뺨과 헝클어진 머리칼. ...

‘어머나.’ ...

크리시나는 웃음이 터져 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당당하고 야무진 백작 부인께서는, 아무래도 초야를 치른 것을 들키는 게 창피하신 모양이다. ...

그렇다면 모르는 척해드려야지. ...

“아이리스 님. 제가 지금 곧장 욕실에 들어가서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둘 거예요. 그동안 잠시 침실에서 쉬시다가 나오시겠어요?” ...

“아, 그렇게 해줄래요?” ...

크리시나가 인자한 미소를 짓자 리시는 안도한 듯 침실 문을 닫았다. 에르웰이 크리시나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눈을 부라렸다. ...

“무슨 짓이야, 시니? 아이리스 님의 상태가 이상하시다고. 방 안을 한번 확인해보지도 않고 돌려보내면 어떡해?” ...

크리시나는 침실이 어떤 광경일지 안 봐도 눈에 그려졌다. ...

“아이리스 님은 아무 문제 없어, 엘. 얼른 욕조에 물이나 받자고.” ...

“하지만…….” ...

“얼른 가자니까.” ...

크리시나와 에르웰이 티격태격하면서 욕실에 물을 받는 동안, 리시는 침대에 도로 드러누워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

잠시 후, 크리시나가 침실 앞에서 말했다. ...

“아이리스 님, 욕조에 물을 채워뒀어요. 저희는 다른 일이 있어서 잠시 나가봐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

물론 괜찮고말고. ...

두 시녀가 나가는 소리를 확인한 후에야, 리시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

그래도 혹시 몰라 가운을 여미고 살금살금 욕실에 들어갔다. 김이 가득 찬 욕실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크리시나가 리시를 위해 욕조에 향수를 뿌려뒀나 보다. ...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에 긴장이 풀렸다. 리시는 가운을 벗어 던지고 따뜻한 욕조로 쏙 들어갔다. ...

평소보다 조금 뜨거운 온도였지만 딱 좋았다. 오늘처럼 근육이 뭉친 날에는 이렇게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게 좋다. 풀과 꽃이 어우러진 듯한 이 향기도 참 좋고. ...

모든 것이 완벽했다. ...

‘설마…… 크리시나가 눈치챈 건 아니겠지?’ ...

하지만 눈치채면 어떻단 말인가. ...

‘남편이랑 한 침대를 쓰는 건 당연한 거지. 응. 창피해할 거 하나도 없어.’ ...

그래도 역시 민망하긴 하다. ...

지난 삶에서도 충분히 경험한 일이지만, 그것과 이것은 완전히 달랐다. 마음이 통한 사람과 하나가 되는 행위가 이토록 감미로운 일인 줄은 몰랐다. ...

이제 지난 삶의 끔찍한 기억은 지워지고, 그 자리를 케이와의 기억이 채웠다. 이렇듯 하나, 하나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들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될 것이다. ...

따뜻한 물 안에 한참 있었더니 몸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이제 슬슬 나가볼까 싶던 차에, 밖에서 크리시나가 알렸다. ...

“아이리스 님.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

“손님이? 내게?” ...

“네. 가우저라는 분이…….” ...

드디어 왔구나! ...

리시는 욕조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현기증을 느끼고 비틀거리며 다시 주저앉았다. 찰방거리는 소리가 문밖에까지 들렸는지, 크리시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

“괜찮으세요?” ...

“네, 괜찮아요. 잠시 기다리라고 해주시겠어요?” ...

“몸이 안 좋으시면…….” ...

“괜찮아요, 크리시나.” ...

가우저가 금광 소식을 들고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첫날밤을 치러 찌뿌드드한 몸 상태는 중요하지 않았다. ...

리시는 보송보송한 수건으로 몸을 닦고 나왔다. 온몸에 불긋한 꽃잎 같은 낙인이 찍혀 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

수건으로 미처 못 가린 부위를 본 에르웰이 입을 쩍 벌렸을 때야, 자신의 몸이 어떤 상태인지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

“드레스를 준비해뒀어요.” ...

크리시나가 드레스를 들고 다가왔다. ...

이런 상황을 예측했다는 듯, 목덜미까지 가리는 드레스였다. ...

‘역시 눈치챘구나.’ ...

새삼스레 민망해서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끄덕이자, 크리시나가 다 이해한다는 듯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

드레스로 갈아입고 나서 가우저가 기다리는 응접실로 향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는지, 응접실 안을 초조하게 오가던 가우저가 대뜸 다가왔다. ...

“아이리스 님 말씀대로였습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게다가……!” ...

“진정해요, 가우저.” ...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가우저에게, 리시가 부드럽게 말했다. 가우저는 눈을 꿈뻑거리다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

“인사드립니다, 아이리스 님.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

리시가 웃음을 터뜨렸다. ...

“난 건강했어요. 가우저는요?” ...

가우저는 대답하지 않고 리시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리떴다. ...

“정말 좋아 보이십니다. 아이리스 님께서 그렇게 즐겁게 웃으시는 건 처음 보는 것 같군요. 행복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

진심이 담긴 말에 가슴이 찡했다. ...

리시는 소파로 향하며 말했다. ...

“일단 앉아서 얘기해요.” ...

하녀가 차와 쿠키를 가져왔다. 뜨거운 차를, 가우저는 벌컥벌컥 마셨다. ...

“아이리스 님. 저는 정말…… 뭐라고 해야 할지. 정말 놀랐습니다. 사실 금광으로 돌아갈 때만 해도, 광부들이 많이 다칠 것 같아서 미리 의원까지 불러뒀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폭탄을 사용해 터뜨렸는데도 아무도 죽지 않았어요. 금광은 무너지지 않았죠.” ...

“그렇군요.” ...

“게다가…… 그 뒤에서 무엇이 발견됐는지 아십니까?” ...

알았는지만 모르는 척 물었다. ...

“뭘 발견했나요?” ...

“깜짝 놀라실 겁니다.” ...

“말씀해보세요.” ...

“메르티움.” ...

“어머나.” ...

리시는 나름대로 놀람을 표현했는데, 가우저에게는 부족했나 보다. ...

가우저가 다시 한번 비장한 음성으로 말했다. ...

“마석에 사용되는, 그 메르티움이 나왔습니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많이요.” ...

“어머나.” ...

리시도 다시 한번 놀란 척했다. ...

“별로 안 놀라시네요.” ...

“어마어마하게 놀라고 있어요. 지금 숨도 못 쉴 지경인데…….” ...

리시가 손을 올려 입가를 가렸다. 가우저의 눈이 가늘어졌다. ...

“그러세요?” ...

“네, 그렇답니다.” ...

“흐음. 왜인지 아이리스 님께서 이 모든 상황을 미리 알고 계셨다는 생각이 드는 건, 제 착각이겠죠?” ...

“그럼요. 제가 예언가도 아닌데 거기서 메르티움이 나올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

“하긴…….” ...

마법이 사라지는 시대였다. 마법이 세계를 지배할 때도, 진짜 예언가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런 시대에 진짜 예언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

“우선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상당합니다. 우선 깊이 파서 매장량을 확인해봐야 어느 정도나 나올지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메르티움의 매장량이 무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리시가 앞으로 벌일 사업의 자금이 되기에는 충분한 양이 묻혀 있을 터였다. ...

“광부들에게 입단속은 시켰나요?” ...

“물론이죠. 다들 이게 얼마나 큰일인지 자각하고 있어서 입을 조심하고 있습니다.” ...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메르티움이 매장되었다는 게 알려지면 약탈자들이 금광을 노릴 게 틀림없었다. 그 무법자들은 금광을 노린다고 금광만 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광부들도 알기에, 한동안은 입을 다물고 있으리라. ...

‘그 기간이 길지는 않겠지. 가족에게 말하고 싶은 걸 참지 못할 거야. 술 마시면 말이 헛나올 수도 있고.’ ...

그전에 금광을 지킬 병사들을 보내둬야 했다. ...

“일단 병사들을 보낼게요. 그리고 내가 따로 얘기하기 전까지는 메르티움에 관한 얘기는 새어나가지 않게 해줘요.” ...

“알겠습니다.” ...

“메르티움을 캐는 걸 최우선으로 해주고, 음, 또 뭐가 필요하지?” ...

“메르티움 전용 저장고를 만들어둬야 합니다. 누가 함부로 열 수 없도록.” ...

“그렇겠네요.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으니. 광부들이 몰래 메르티움을 빼돌리지 못하게 잘 지켜보세요.” ...

“당연하죠.” ...

“그리고 돌아가는 대로 광부들을 위해 파티를 열어주도록 해요. 필요한 돈은……. 잠시 기다려보세요.” ...

리시는 제이미를 부르려다가 그가 저택에 없다는 걸 상기하고는 나단을 불렀다. 제이미가 토벌을 떠난 지금, 나단이 대신 집사 역할을 하고 있었다. ...

“형수님이 운용할 수 있는 돈이야 당연히 전부 다죠.” ...

“그 전부가 얼마나 되나요?” ...

“음…… 이런 건 제이미가 관리해서 확실하지는 않은데, 어디 쓰시게요?” ...

“파티를 열려고요. 광부들을 위해서.” ...

“아, 그럼…… 10골드 정도면 충분하겠네요.” ...

“20골드 줘요.” ...

“알겠습니다.” ...

나단은 왜 그렇게까지 필요하냐 묻지 않았다. ...

돈을 받아서 돌아온 리시가 가우저에게 20골드를 내밀었다. 가우저의 눈이 커졌다. ...

“이렇게 많이요?” ...

1골드면 평민 4인 가족의 한 달 생활비를 훌쩍 넘기는 돈이었다. ...

“좋은 가게를 빌려요. 고급 요리, 고급술을 대접하도록 해요. 무희도 부르고 악단도 부르세요. 옷도, 신발도 사주고요. 어떻게든 다 쓰도록 하세요.” ...

 

+++

가우저가 돌아간 후, 리시는 케이를 만나러 서재로 향했다. ...

케이는 나단, 월라스, 유진과 함께 긴 테이블에 지도를 펼쳐두고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

“아니요, 여기 있는 숲은 데이트하기에는 썩 좋지 않아요. 위험한 짐승이 많거든요.” ...

“이쪽은 늪지가 있어서 공기가 텁텁합니다.” ...

“숲에 가는 것보다는 극장에 연극 보러 가는 거로 시작하는 게 어떠세요? 하녀들이 그러는데 요새 기사가 하녀랑 사랑에 빠져서 사랑도피를 하는 연극이 유행이래요.” ...

어디 토벌이라도 나갈 의논을 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그들은 리시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대화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

“그러다가 리시가 기사랑 사랑에 빠져서 도망치면 어떡해?” ...

“아, 대장. 제발 그렇게 지질하게 굴지 좀 마요.” ...

“나단, 너 요새 점점 버릇없어진다?” ...

“아, 네에. 가서 무릎 꿇고 손 들고 있을까요?” ...

나단이 문 쪽을 가리키다가 리시를 발견했다. ...

“아, 형수님! 얘기는 끝나셨어요?” ...

“리시.” ...

케이가 일어나서 성큼성큼 다가와 리시를 끌어안았다. ...

“보고 싶었어요.” ...

부하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기에, 리시는 얼굴을 붉혔다. ...

“하, 진짜…….” ...

나단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케이, 다들 보잖아요.” ...

“보면 좀 어때요? 내 그림자들은 이런 일에 익숙해요.” ...

“어머. 여인들에게 이런 짓을 많이 해왔나 봐요?” ...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

“나랑은 익숙해질 만큼 이런 일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

“아니, 아니. 리시. 그런 의미가 아니고요.” ...

케이의 그림자들은 자신들의 대장이 난처해하는 걸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

“알잖아요, 리시. 나한테는 당신밖에 없다는 거. 나는 살면서 한 번도 다른 여자들에게…….” ...

“됐어요, 케이.” ...

리시가 검지로 그의 가슴을 쿡 찔러서 밀어냈다. ...

“난 아직 안 됐어요, 리시. 내 마음을 의심하는 거라면 당장 이 마음이 어떤지 보여주죠. 가요.” ...

“어딜요?” ...

“침대 말고 또 어디가 있겠어요?” ...

“케이!” ...

리시가 얼굴을 붉히며 외치자 케이가 씩 웃었다. ...

의기양양한 표정을 보니, 리시가 난감해할 줄 알고 한 소리인가 보다. ...

이 얄미운 남자 같으니. ...

리시가 콧등을 찡그리자 케이가 키득거리며 리시의 이마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

“왜요? 침대 말고 달리 생각나는 곳이 있어요?” ...

리시는 고민했다. ...

침대까지 갈 필요가 있나요, 라고 대답하면 이 남자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

(66) 너 같은 건 필요 없어. ...

  리시는 케이에게 뭐라 말하든 그가 얼굴을 붉히는 일은 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를 놀리는 걸 포기하고, 리시는 이곳에 온 목적을 밝혔다. ...

“라벤트의 금광을 지킬, 믿을 만한 병사들이 필요해요.” ...

“금광을 지키는 병사들이 있는 거로 아는데.” ...

“조금 더 필요해요. 라벤트의 금광에서 메르티움을 발견했거든요.” ...

리시의 어조가 담담했기에, 다들 그 말의 의미를 곧장 파악하지 못했다. 멍하게 리시의 입술을 바라보던 케이의 눈이 점점 커지고, 부하들이 벌떡 일어났다. ...

“메르티움?” ...

“메르티움이 나온다고요?” ...

이 방 안의 모든 사내를 놀라게 한 리시는 표정의 변화 없이 단조롭게 말했다. ...

“그래요.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양이래요. 그곳을 지킬 병사들이 필요하겠죠?” ...

“하, 메르티움이라니…… 말도 안 돼. 정말 그게 그렇게 막 나온다고요?” ...

나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들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단과 비슷한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

리시는 잠시 그들이 놀라움을 마음껏 누리도록 기다려주었다. ...

이윽고 정신을 차린 케이가 말했다. ...

“리시, 당신…… 알고 있었군요. 거기에 메르티움이 매장되어 있다는 거. 그래서 내게 베노트의 금광을 포기하고…….” ...

거기까지 말한 케이가 입을 다물었다. 부하들이 이 자리에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

리시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그렇다 아니다 답해주지 않았다. 케이는 리시에게 더 캐묻는 대신, 부하들에게 물었다. ...

“지금 놀고 있는 녀석이 누구지?” ...

“란다요. 걔 요새 할 일 없다고 엄청 징징거리던데요.” ...

“걔는 돈 욕심이 많아서 안 돼. 또 누가 있지?” ...

리시가 끼어들었다. ...

“돈 욕심 없고 사람 잘 관리하고 이왕이면 섬세한 부분이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

“아, 그런 거라면 레이크는 어때요, 대장?” ...

“오, 레이크. 그 녀석을 잊고 있었군. 잘했어, 월라스.” ...

케이가 칭찬하자 월라스가 환하게 웃으며 나단과 유진을 돌아봤다. ...

‘봤지? 난 잘한다고.’ ...

라는 눈빛이었지만, 아무도 부러워하는 표정을 지어주지 않았다. ...

“부하 중에 레이크라는 녀석이 있어요, 리시. 성실한 녀석이니 금광을 잘 지킬 겁니다.” ...

“좋아요. 최대한 빠르게 보내주면 좋겠어요.” ...

“레이크에게 전언을 보내죠. 믿을 만한 녀석들로 꾸려서 라벤트로 향하라고.” ...

 

+++

미나스아릭 왕국. ...

메어리 케트벤 공주는 조용히 신문을 읽었다. 가비자르 제국에서 발행된 신문이었다. ...

메어리가 신문을 내려놓고 보좌관을 돌아봤다. 초조한 낯빛으로 서 있던 보좌관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

“내가 이걸 왜 지금 읽고 있을까요?” ...

메어리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커다란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지만, 애써 참는 듯한 모습이 어찌나 가녀린지. 보좌관은 손수건을 꺼내 메어리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 충동을 꾹 억눌렀다. ...

“전하께서…….” ...

“아니, 그런 변명은 듣고 싶지 않아요.” ...

“변명이 아닙니다, 공주님. 전하께서 공주님께는 당분간 알리지 말라고…….” ...

“왜요? 내가 충격받아서 식음이라도 전폐할까 봐요?” ...

보좌관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

“온 나라가 케이의 결혼 얘기로 떠들썩한데, 나만 몰랐네요. 그래놓고 케이와 곧 결혼할 거라고 떠들고 다녔으니, 얼마나 바보 같아 보였을까?” ...

맺혀 있던 눈물이 결국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또르르 떨어졌다. 희고 고운 볼에 남은 눈물 자국을, 메어리는 닦지 않았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녀는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 연약해 보였다. ...

“바보 같다니…… 공주님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

“과연 그럴까요? 나조차도 내 자신이 이렇게나 바보 같은데.” ...

“공주님…….” ...

안쓰러운 듯 부르는 보좌관의 음성은 메어리에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

메어리에게 필요한 건, 케이브란트 그린이었다. 곁에 있는 보좌관과 시녀들만 아니라면, 메어리는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

케이가 결혼을 하다니. 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교황의 축복을 받으면서 결혼하다니. ...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

‘어떻게 날 두고……? 난 지금껏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고 당신만 기다렸는데.’ ...

어릴 적, 케이를 보는 순간 이 마음에 케이를 담았다.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온갖 남자에게 유혹을 당했지만 단 한순간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

메어리의 심장은 케이브란트의 것이었다. ...

케이도 그런 줄 알았다. ...

결혼할 나이가 되었음에도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건, 성유물의 수호자로서 제대로 인정을 받아야 하기에, 잠시 미뤄두는 것뿐이라고 여겼다. ...

그린 노백작에게 물려받은 성유물의 수호자라는 자리가 견고해지면, 그때야말로 프러포즈를 해줄 거라 믿었다. ...

지난번, 노백작 내외의 저택에 가서 한동안 머물 때, 노백작 부인에게 이 일에 대해 언급했었다. ...

-아들 결혼에 우리가 입을 댈 수는 없지만, 아들이 나이가 차도 결혼하지 않으면 그 상대가 공주여도 괜찮겠지. ...

노백작 부인은 돌려서 말했지만, 그 의미는 명백했다. ...

우리 케이의 상대는 너밖에 없단다. ...

그런데 난데없이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니. ...

인정할 수 없었다. ...

‘분명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

사랑에 빠져서 결혼했을 리는 없다. 케이가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은 이 메어리 공주, 나뿐이다. 오래전, 그의 목숨을 구한 나만이 그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 ...

“그린 백작령으로 갈 준비를 해줘요.” ...

“그건 안 됩니다, 공주님. 그린 백작은 이미 결혼했고…….” ...

“어릴 적부터의 인연인데, 결혼했다 하여 못 만날 것은 없겠죠. 지금 당장 떠날 채비를 해요.” ...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전하께서 공주님이 당분간 그린 백작령에는 가지 못하도록 하라 이르셨습니다.” ...

메어리의 호박색 눈동자가 가만히 보좌관을 쏘아봤다. 보좌관은 안절부절 못했지만 말을 번복하지는 않았다. ...

이윽고 메어리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

“알겠어요. 아바마마 뜻이 그러하다면 그리해야겠죠.” ...

보좌관은 눈에 띄게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

“그만 나가보도록 해요. 너희들도 모두 나가렴. 난 혼자 있고 싶구나. 아, 제인만 남고.” ...

보좌관과 시녀들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이제 메어리의 방에는 메어리의 수석 시녀인 제인만 남아 있었다. ...

“제인, 너는 내가 얼마나 상심했는지 알지?” ...

제인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

“마음이 괴로워. 케이가 다른 여자랑 결혼한 것도, 내 보좌관이 내가 아닌 아바마마의 뜻만 따르는 것도.” ...

“…….”

“난 아바마마에게만 충성을 바치는 개는 필요 없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

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가보렴.” ...

제인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

수석 시녀라고 하며 곁에 두긴 했지만, 사실 제인은 실력이 뛰어난 암살자였다. 그녀의 날카로운 단도는 머지않아 보좌관의 목에 닿을 것이다. 보좌관은 내일의 태양을 볼 수 없으리라. ...

몇 년이나 곁에 둔 보좌관이지만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게 아쉽지는 않았다. 내 뜻을 하나도 따르지 않는 보좌관 따위는 필요 없다. ...

메어리는 신문을 집어 들고, 결혼식 기사에 수록된 리시의 초상화를 노려봤다. ...

“너도 마찬가지야, 아이리스. 너 같은 것도 내 인생에는 필요 없어.” ...

 

+++

이제는 한낮에도 서늘한 바람이 부는 날씨가 되었다. 푸르렀던 나뭇잎들이 노랗고 빨간색으로 변했다. ...

케이는 정원 벤치에 앉아 가만히 단풍을 올려다보는 리시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라벤트의 금광에서 메르티움이 나온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지 하루가 지났다. 어제는 라벤트로 병사를 보내느라 정신이 없어서 아무것도 묻지 못했는데, 오늘도 역시 리시에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

‘리시, 당신은 그 모든 걸 어떻게 아는 거지? 정말 예언의 능력이라도 갖고 있는 건가?’ ...

질문을 던지면 리시는 아마도 옅은 미소만 지어줄 것이다. 케이가 원하는 답을 들려주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

‘그러면 난 마음이 상하겠지.’ ...

언젠가 그녀가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해줄 날이 올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초조해하지 않고 기다리기로 결심했지만, 이렇게 놀라운 일이 생길 때마다 그녀의 정체가 궁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당신의 정체가 뭐든, 이 마음은 변하지 않겠지만.’ ...

리시는 케이가 수인이라는 걸 알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짐승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 수인을 사랑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케이는 알고 있었다. ...

수인의 자유를 위해 살겠노라고 결심한 순간부터, 무사히 살아남아서 숨어 있는 수인을 찾아다녔다. ...

수인들에게는 항상 사연이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가족에게, 연인에게,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버림받았다. ...

어떤 이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또 어떤 이는 남편이나 연인이, 친구가, 수인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관청에 고발해서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

한 수인에게는 남편과 아들이 있었는데,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수인이라는 걸 알자마자 그녀를 관청에 고발했고, 그녀가 낳은 자식조차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며 집에서 내쫓았다고 했다. ...

사람들은 수인을 징그러워하고, 혐오스러워하고, 경멸하면서도 두려워했다. ...

케이는 그런 존재였다. ...

태어나는 순간부터 늑대의 모습이었던 케이를 받아주는 가족을 만난 건,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행운이었다. ...

-얼마나 작고 귀여운지, 깜짝 놀랐지 뭐냐. 나는 강아지를 좋아하거든. ...

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케이가 태어났을 때의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

-네가 예정일보다 한 달이나 일찍 태어나는 바람에, 의원을 부르지도 못한 게 다행이었어. ...

어머니는 아이를 낳을 때까지 한 달이나 남아서, 아버지와 짧은 여행 중에 마차 안에서 케이를 낳았다. ...

만약 의원이나 산파가 있는 자리에서 케이가 태어났다면, 세상의 빛을 제대로 눈에 담기도 전에 이 목숨은 사라졌을 것이다. ...

그렇게나 운이 좋았는데, 이제는 이런 자신을 사랑해주는 여자까지 곁에 있었다. 심지어 그 여자는 세상에서 제일 끝내주는 여자다. ...

그녀에게 비밀이 좀 있다고 해서 뭐가 어떻단 말인가. ...

“케이. 내 얼굴 뚫어지겠어요.” ...

“좀 뚫어볼까 했어요. 지금은 너무 완벽해서.” ...

“완벽한 건 싫어요?” ...

“누가 탐낼까 봐.” ...

리시가 작게 웃었다. ...

“누가 날 탐내겠어요?” ...

“누가 탐내긴요. 다들 탐낼걸.” ...

케이는 리시의 매끄러운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입술에 눌려오는 보들보들한 살결이 기분 좋아서, 두 번 더 쪽쪽 소리가 날 정도로 뽀뽀했다. ...

리시가 콧등을 살짝 찡그리고 웃었다. ...

“간지러워요, 케이.” ...

“내일 우리 연극이나 보러 갈래요? 극장에 갔다가 찻집에 가서 차 한잔하고, 거리 좀 걷다 돌아오죠.” ...

“아까 그렇게 열심히 의논하던 데이트 코스예요?” ...

“데이트에 일가견이 없는 네 남자가 모여서 짠 코스니까, 대단하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즐길 만할 거예요.” ...

그럭저럭 즐길 만한 데이트는 나중으로 미뤄졌다. ...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날, 나갈 준비를 하는데 황태자가 다코트 시에 들어서는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

“이오가 왜……?” ...

의아해하는 케이에게, 리시가 담담히 말했다. ...

“날 만나러 왔을 거예요. 오늘은 황태자와 단둘이 의논해야 할 일이 있으니 자리를 피해줘요, 케이.” ...

(67) 말하지 못할 비밀 ...

그린 백작 저에 들어선 이오벳은 곧장 응접실로 안내를 받았다. 이오벳이 올 줄 알았다는 듯, 리시가 응접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케이는 없었다. ...

‘눈치 빠른 여자로군.’ ...

이 문제에 관해 리시와 단둘이 대화하고 싶었다. 자신이 상단 주인 따위에게 뒤통수를 맞을 뻔했다는 이야기를, 오랜 친구인 케이의 앞에서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

리시는 오늘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딱히 화려한 드레스를 입지도 않았는데, 흘러내리는 연붉은 은빛 머리카락만으로도 빛을 뿜어내는 것 같았다. ...

‘결혼식 때도 아름다웠지.’ ...

황궁으로 돌아간 후에도, 가끔, 아니, 자주 리시를 생각했다. ...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여신처럼 아름다워서, 자신이 그녀를 너무 미화하고 있다고 여겼는데, 아니었다. 다시 만난 리시는 상상으로 그리는 모습보다 훨씬 더 눈부셨다. ...

“전하.” ...

리시가 살며시 고개를 숙이자, 반만 묶은 머리카락이 곧은 쇄골에 장신구처럼 흘러내렸다. 일자로 뻗은 쇄골에서 눈을 떼기 힘들었다. ...

이오벳은 간신히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

“이오라고 불러요, 아이리스.” ...

“제가 어찌 감히 황태자 전하의 애칭을 입에 담겠어요? 이대로도 충분합니다.” ...

이오벳은 두 번 권하지 않았다. 다른 여자들에 비해 약간 나직하고 허스키한 그녀의 목소리가 ‘이오’라는 이름을 입에 담으면, 품어서는 안 될 감정을 품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케이가 있는 편이 나을 뻔했군.’ ...

케이와 셋이 한 자리에 있을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리시와 단둘이 있으니 자꾸 묘한 기분이 들었다. ...

“그대의 말이 옳았어요.” ...

이오벳은 소파에 앉으며 본론을 꺼냈다. ...

“워번이 내 뒤통수를 치려고 했더군요. 메르티움은 가짜였어요.” ...

“그렇군요.” ...

“내가 워번을 조사하고 오면 조언을 해주겠다고 했죠. 이제 그 조언을 들어봅시다.” ...

“그전에 여쭐 것이 있습니다, 전하. 실례라는 것은 알지만…… 혹시 위틀로 공작가의 브리트니와 혼인을 염두에 두고 계시나요?” ...

위틀로 공작가의 브리트니. ...

쉽게 말하면 그저 ‘언니’라고 하면 되는데도, 리시는 그렇게 표현했다. ...

“그대가 가볍게 조언해주지 않았습니까? 브리트니는 좋은 여자가 아니고, 곧 내게 어울리는 여자가 나타날 거라고.” ...

이제 슬슬 황태자비를 두지 않으면 곤란할 상황이긴 했지만, 이오벳은 리시를 믿어보기로 했다. ...

리시는 잠시 침묵을 지키며 찻잔을 손에 들었다. ...

살짝 내린 시선, 눈 아래에 그늘을 만들어낼 정도로 길고 풍성한 은빛 속눈썹. ...

이오벳은 반짝거리는 속눈썹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황제 다음으로 높고 귀한 신분을 가진 사내로서, 여인 앞에서 긴장한 적이 없는 이오벳이었다. 리시의 앞에서는 숨 쉬는 속도조차 신경 쓰일 정도로 긴장하게 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쟈메트라는 여자가 운영하는 상단이 있어요.” ...

리시의 도톰하고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그제야 이오벳은 자신이 손에 힘을 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

“탈레하 왕국 사람으로, 영리하고 믿을 만한 여자죠.” ...

이오벳은 리시의 입술에서 눈을 떼고 ‘쟈메트’라는 이름을 들어봤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한 번쯤 지나가는 말로 들어본 이름 같기도 했다. ...

“큰 상단은 아닌 것 같은데.” ...

이오벳은 자신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서 나오는 걸 리시가 눈치챘을까 봐 걱정스러웠다. ...

“지금은 큰 상단이 아니지만, 쟈메트는 똑똑하고 신의가 있으니 금방 큰 상단으로 키우게 될 거예요. 주요 교역품은 아마도 커피가 되겠죠.” ...

“커피……. 그 쓴맛 나는 차 말입니까? 그거, 굉장히 역겹던데.” ...

“일부 매니아층이 있어요. 조만간 더 유행할 것 같기도 하고요.” ...

“그게요? 그대는 커피를 좋아해요?” ...

리시가 콧등을 살짝 찡그리며 웃었는데, 그게 참 귀여워 보였다. ...

“아니요. 하지만 우유를 타서 먹으면 괜찮더라고요.” ...

“흐음. 해괴한 조합이로군요.” ...

이오벳은 리시를 믿었지만 ‘커피’라는 차가 유행하게 될 거라는 말은 인정할 수가 없었다. 커피는 정말이지 끔찍한 음료였다. ...

“커피는 아무래도 좋아요, 아이리스. 내가 원하는 건 차를 주된 교역품으로 삼는, 섬나라의 작은 상단이 아니에요.” ...

탈레하 왕국은 대륙에서 꽤 떨어진 곳에 있는 섬나라였다. ...

“나는 내가 투자한 것 이상의 가치를 보여줄 수 있는 상단을 원해요.” ...

한마디로 돈을 많이 벌어다 줄 상단을 원한다는 뜻이었다. ...

리시는 이번에도 곧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의 고운 손가락이 찻잔 둘레를 따라 스륵 움직였다.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리시가 시선을 들었다. ...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당황했다. 설마 내가 그녀의 손가락을 집중해서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챈 건 아니겠지? ...

“쟈메트 상단은 전하께서 기대하는 것 이상의 가치를 보여줄 거예요.” ...

“글쎄요, 아이리스. 커피 교역 정도로는…….” ...

중얼거리는 이오벳 앞에, 리시가 검은 돌 하나를 꺼내서 내밀었다. 주먹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돌이었다. ...

무심코 돌을 들어서 살펴본 이오벳은, 그 돌의 정체를 깨닫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

“이건……?” ...

“메르티움이에요. 진짜 메르티움이죠.” ...

“이걸 어디서? 이만한 크기는 구하기 힘들 텐데.” ...

“라벤트의 금광에서 나왔어요. 앞으로도 한동안 나올 예정이고요.” ...

“설마……!” ...

이오벳은 벌떡 일어나서 창가로 걸어갔다. ...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검은 돌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진짜 메르티움처럼 보였다. ...

“저는 쟈메트 상단과 메르티움 거래를 틀 거예요. 쟈메트 상단은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이겠죠. 그 돈의 일부는 투자한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가게 될 거고요.” ...

리시도 일어나서 이오벳의 옆으로 다가갔다. ...

“현재 쟈메트 상단은 너무 작고 이름이 없어서, 아무도 그 상단에 투자하지 않았어요. 만약 전하께서 쟈메트 상단이 대륙에서 활동할 투자금을 전부 지불하는 대가로 이익의 일부를 요구하신다면, 이 메르티움으로 얻는 수익이 꾸준히 전하의 창고에 쌓일 거예요.” ...

이오벳이 몸을 돌려 리시를 마주 보고 섰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강렬하게 빛났다. ...

“그거 정말 유혹적인 제안이군요. 하지만 아이리스. 날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아요. 메르티움의 매장량은 무한하지 않다는 걸 아니까.” ...

리시가 눈을 가늘게 떴다. ...

“물론 메르티움은 무한하지 않아요. 하지만 쟈메트 상단을 키우기에는 충분할 거고, 쟈메트 상단은 그 자금으로 대륙에서 가장 큰 상단으로 성장할 거예요.” ...

“과연 그럴까요? 아무리 성실한 상인이라 해도, 쌓이는 돈 앞에서까지 성실할 거라는 법은 없죠. 돈이 많아지면 사람은 변하게 되어 있어요, 아이리스.” ...

“변하지 않을 거예요, 전하. 쟈메트 상단이 어느 정도 커지면, 그 주인이 바뀔 거거든요.” ...

리시의 연보라색 눈동자가 찬란하게 빛났다. 그녀의 입가에 부드럽게 번지는 미소가 이오벳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이 순간, 이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이리스 단 한 사람뿐인 것처럼 느껴졌다. ...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이오벳은 리시에게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 끝을 움켜쥐었다. ...

리시가 놀란 듯 눈을 부릅 떴지만, 이오벳은 그조차 깨닫지 못하고 머리카락을 올려 그 끝에 입을 맞췄다. ...

“탐나는군요, 리시.” ...

리시가 입을 꾹 다물었다. ...

이오벳이 리시와 눈을 맞췄다. ...

“그대를 내 곁에 두고 싶어요.” ...

리시는 조심스레 손을 들어 무례하지 않게 그의 손에 잡힌 자신의 머리카락을 빼냈다. ...

“아이리스입니다, 전하.” ...

리시가 말했다. ...

“아이리스 그린이에요.” ...

그린. ...

그 성을 듣는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오벳은 얼굴을 확 붉히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

‘내가 무슨 짓을……?’ ...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말았다. 다른 이의 부인에게, 그것도 내 소중한 친구의 부인에게 손을 대다니. ...

머릿속이 엉망으로 헝클어진 것만 같았다. 알 수 없는 힘이 심장을 움켜쥐고 제멋대로 뒤흔드는 것만 같았다. ...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리시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중대사를 의논하는 순간에 이성을 잃다니. 리시가 유혹 마법이라도 쓴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

“무례를…….” ...

쉰 음성이 제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

“부디 용서해주시길, 그린 백작 부인.” ...

간신히 내뱉은 말에, 리시는 예의상의 미소조차 지어주지 않았다. ...

경계심 어린 그녀의 눈빛에, 이오벳은 가슴이 아팠다. ...

이럴 생각이 아니었다. 리시를 손에 넣은 케이가 부럽기는 했어도, 난잡한 사내처럼 남의 부인을 꾀려는 생각 따위는 해본 적도 없었다. ...

“쟈메트 상단에 투자하는 대가로 저를 원하시는 거라면, 이 일은 없던 걸로…….” ...

“아니요, 아이리스. 아닙니다.” ...

금방이라도 응접실을 나가버릴 것 같아서, 이오벳은 황급히 리시의 앞을 가로막았다. ...

“정말 미안합니다. 내가 실수했어요.” ...

“알겠습니다.” ...

리시는 용서해주겠다는 말도, 이 일을 없었던 일로 해주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

이오벳은 이제 그녀가 그의 약점을 잡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좀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위치는 황태자와 백작 부인이었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

이오벳은 더 이상 황태자라는 신분을 내세울 수 없게 되었다. 적어도 리시의 앞에서는. ...

물론 이오벳이 뻔뻔하고 오만한 성격이었다면 이런 일은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이오벳은 케이를 아꼈고 그와의 우정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

이오벳은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

“쟈메트 투자 건에 대해 더 자세하게 들어보고 싶습니다, 아이리스.” ...

 

+++

황태자가 돌아간 후에도, 리시는 굳은 표정으로 응접실에 남아 있었다. 쟈메트 상단을 둔 황태자와의 협상은 리시가 원하는 대로 흘러갔지만,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

‘아까 그건 뭐였지?’ ...

황태자가 응접실에 들어올 때부터 묘한 눈빛이라는 생각은 했었다. 처음에는 그걸 그저 조언을 들을 생각에 들뜬 것일 뿐이라고 해석했다. ...

아니었다. ...

황태자는 명백히 사내의 눈으로 리시를 탐하고 있었다. ...

‘대체 왜……?’ ...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

리시가 아는 이오벳 황태자는 아무 여자에게나 음습한 마음을 품는 사내가 아니었다. ...

그는 살아생전 단 한 여자만을 사랑했다. 물론 지난 삶에서 그의 부인이었던 브리트니는 아니다. ...

황태자는 너무 늦게 자신의 사랑을 만났고, 부인에게 의리를 지키느라 그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고, 그렇듯 가슴에 불타는 사랑을 품은 채 쓸쓸히 죽었다. ...

‘그런데 왜 나한테……?’ ...

황태자는 그저 예쁘다는 이유로 여인을 탐할 남자가 아니었다. 지난 삶, 황태자가 사랑에 빠진 여자도 눈에 띄게 예쁜 여자는 아니었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은 향기가 없는 꽃이라네. ...

지난 삶, 리시는 예쁠지언정, 매력 있는 여자는 아니었다. 거리의 아이들이 향기 없는 꽃 운운하는 노래를 부르고 다닌다는 걸, 리시는 알고 있었다. ...

아마도 귀족들 사이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평민 아이들에게까지 전해진 것이리라. ...

위틀로 공작가의 꽃은 향기가 없는 꽃. ...

예쁘게 피어도 벌은 모이지 않지.   ...

하지만 그것은 지난 삶의 일일 뿐, 지금은 다르다는 걸 리시는 깨닫지 못했다. 황태자는 지혜롭고 영리한 여자를 좋아했고, 리시는 황태자의 마음을 잡아끌 요소가 넘치도록 있었다. ...

‘황태자가 그녀를 만나서 사랑에 빠질 때까지, 황태자와 둘이 만나는 건 피하는 게 좋겠어.’ ...

황태자의 기이한 행동에 대해 고민하느라, 케이가 들어온 줄도 몰랐다. 맞은편 소파에 앉아서 가만히 지켜보던 케이가 입을 열었다. ...

“왜 그렇게 찡그리고 있어요? 이오랑 제대로 협상이 안 됐어요?” ...

퍼뜩 정신을 차린 리시는 미소를 지으려고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

“괜찮아요, 리시.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봐요. 이오가 해주지 못한 거, 내가 해줄 테니까.” ...

뭔가 오해한 듯, 케이가 상냥하게 말했다. ...

황태자가 해주지 못한 것은 없었다.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해서 문제였지. ...

하지만 그 말을 케이에게 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케이에게 말 못 할 비밀이 하나 더 생겼다. ...

(68) 위틀로 가의 위기 ...

문득 그의 귀가 밝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자리를 피해주기는 했어도 응접실 안에서의 대화를 들었을지도 몰랐다. ...

“우리 대화를 듣지 못했나요?” ...

넌지시 물었더니 그가 눈썹 끝을 내렸다. ...

“물론 나는 귀가 밝지만, 내내 남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어서야 변태밖에 더 되겠어요? 눈으로 보는 거랑 비슷해요. 우리가 어딘가를 본다고 해서 그 주위의 모든 것을 눈에 담는 건 아니죠.” ...

그렇구나. ...

리시가 안도하는 걸 본 케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

“왜요? 이오벳이 당신에게 사랑 고백이라도 했어요?” ...

리시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리시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오므리고 그의 표정을 살폈다. 의외로 케이는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니었다. ...

“고백까지는 아니고, 비슷하게…….” ...

“그 녀석, 그럴 줄 알았어.” ...

“알았어요?” ...

“당연히 알죠. 당신처럼 예쁜 여자한테 안 반하는 게 이상하니까. 결혼식 전날 당신을 봤을 때 그 녀석이 눈빛이 묘하기도 했고.” ...

“그런데도 용케 단둘이 대화를 하게 해줬네요.” ...

“당신을 믿으니까. 그리고 이오벳도 믿고.” ...

케이가 리시의 턱을 살며시 잡아서 올렸다. ...

“그래도 역시 불안하긴 하네. 온몸에 내 거라는 표시를 해두고 싶어.” ...

그의 입술이 리시의 뺨과 귀, 목과 어깨를 타고 내려갔다.   낙인을 찍듯 뜨겁고 느리게 눌려오는 느낌에 야릇한 전율이 흘렀다. 자연스럽게 눈을 감고 그가 만들어내는 감각을 오롯이 받아들였다. ...

그와 몸이 겹쳐질 때면 항상 그렇듯, 하얗게 빈 머릿속에 케이만이 담겼다. 조용한 응접실에, 두 남녀의 숨소리만이 가득 찼다. ...

+++

황궁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이오벳은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뱉었다. ...

-아이리스입니다, 전하. 아이리스 그린이에요. ...

리시의 단호한 어조가 떠올랐다. ...

정신을 차린 후에 눈에 들어온, 그 냉랭한 눈빛도. 이오벳을 향한 온화한 신뢰감은 사라지고, 의문과 경악, 약간의 성가심과 놀라움만이 그녀의 연보라색 눈동자를 채웠다. 눈빛만으로도 명백한 거절을 알 수 있었다. ...

가슴이 답답했다. ...

‘내가 왜 이러지?’ ...

황실에 있다 보면 여러 가지 소문들이 들려왔다. 그중에는 귀족들 사이의 온갖 불륜과 염문설도 있었다. ...

어느 백작이 하녀와 정을 통하다가 들켜서 아내에게 꼼짝도 못 하게 됐네, 어느 공작부인이 기사와 몰래 만나다가 남편에게 들켜 목숨을 잃었네……. ...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

모든 감정은 이성으로 통제가 가능하고, 설령 통제가 안 된다 해도 행동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야말로 인간과 짐승의 차이라고 생각했다. ...

하지만 오늘 이오벳은 이성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고, 그걸 행동으로 드러내고 말았다. 그것도 유일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케이의 부인에게. ...

이오벳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

리시의 얼굴 같은 건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 캄캄해진 눈앞을 밝히는 건 결국 리시의 얼굴이었다. ...

잡티 하나 없는 하얀 피부와 동그스름한 이마, 예쁜 모양의 눈썹과 커다란 눈, 맑은 눈동자를 살짝 덮는 긴 속눈썹과 오뚝한 코, 작고 도톰한 입술과……. ...

“제길…….” ...

이오벳의 입술 사이로 괴로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

“미치겠군.” ...

 

+++

리시는 황궁으로 돌아간 이오벳이 협상한 대로 행동하지 않을까 봐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이오벳의 오묘한 태도와는 무관하게, 그는 공적인 일을 제대로 해결해주었다. ...

며칠 후 찾아온 쟈메트 상단의 주인 쟈메트는, 까만 머리에 텔레하 왕국 국민 특유의 갈색 피부를 가진, 안경을 쓴 여자였다. ...

“가비자르 제국의 황태자 전하께서 투자 조건으로 그린 백작 부인을 만나보라고 하셨습니다.” ...

쟈메트는 탈레하 왕국 특유의 억양이 섞인 말투를 사용했다. ...

안경 너머의 분홍색 눈동자가 리시를 판단하려는 듯 꼼꼼히 살펴보는 게 느껴졌다. 아마도 황태자가 백작 부인 따위와 거래를 트는 것으로, 투자를 할지말지 정하겠다는 걸 이상하게 여기는 것이리라. ...

리시는 이것저것 떠보는 대신 분명하게 말했다. ...

“다코트 시 시장 거리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쟈메트 상단의 이름을 걸고 도매상을 하나 내줄게요. 커피와 로메르 직물을 들여와서 쌓아둘 수 있는 커다란 창고도 하나 마련해줄 거고, 전용으로 사용할 상선도 한 척 마련해주죠.” ...

쟈메트의 눈이 커졌다가 다시 가늘어졌다. 장사꾼답게 이 모든 호의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

“그 대가로 무엇을 원하시는 거죠?” ...

“상단 경영권의 반.” ...

“하!” ...

쟈메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

“백작 부인. 물론 제 상단이 아직 작기는 하지만, 경영권의 반을 드린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

“경영권과 지분의 반을 가져가더라도, 상단 이름은 바꾸지 않을 거예요.” ...

“물론 그래야죠. 그렇다 하더라도 경영권의 반을 드릴 수는 없고요. 죄송합니다만 그게 조건이라면 거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황태자 님의 투자가 아깝기는 해도…….” ...

“메르티움 거래에 관해 생각해본 적 있어요?” ...

리시도 쟈메트가 쉽게 수긍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메르티움 이야기를 꺼내자 쟈메트가 고개를 저었다. ...

“메르티움은 거래량이 너무 적어서, 그걸 가지고 마탑을 오가는 건 오히려 손해예요. 메르티움을 가지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노리는 도적들도 많아져서 용병을 따로 고용해야 하고……. 골치 아프죠.” ...

“만약 그 메르티움의 거래량이 너무 많다면?” ...

“그럴 리가요. 현재 메르티움은…….” ...

“우선 50킬로그램으로 시작하죠.” ...

“예?” ...

“메르티움 50킬로그램.” ...

쟈메트가 숨을 멈추고 리시의 입술을 빤히 응시했다. ‘이 여자가 제정신인가?’라는 눈빛이, 쟈메트의 눈동자에 고스란히 떠올라 있었다. ...

이 넓은 엘레론드 대륙에서도 메르티움 광산은 그리 많지 않았고, 매장량 또한 적었다. 그 어느 광산에서도 10킬로그램 이상의 메르티움을 한 번에 거래하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

그런데 갑자기 50킬로그램이라니. ...

국제정세를 세세하게 파악하고 다니는 쟈메트는, 그린 백작 소유의 메르티움 광산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

“백작 부인. 제가 일개 상인이기는 하지만 그렇다 해서 백작 부인께 놀림을 받으며 시간 낭비를 해도 괜찮다는 의미는 아니랍니다.” ...

“내가 그대를 놀리는 것처럼 보이나요?” ...

“메르티움 50킬로그램이라니요. 누가 듣더라도 놀리는 것으로 들을 거예요.” ...

“내게 메르티움 50킬로그램이 없다면, 황태자께서는 왜 그대에게 날 만나보라 했을까요? 그대를 놀리려고?” ...

그제야 쟈메트의 머리에 황태자가 떠올랐다. 황태자가 리시를 만나보라고 한 것이 의문이긴 했었다. ...

“설마…… 정말이세요?” ...

“그래요, 쟈메트. 나는 농담을 잘 할 줄 모르거든요.” ...

“하지만 제가 알기로 그린 가문 소유의 메르티움 광산은 없다고…….” ...

“그대가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잖아요.” ...

쟈메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

생각해보면, 성유물의 수호자 가문인 그린 백작가의 아이리스가 굳이 작은 상단의 주인인 쟈메트를 불러서 농담 따먹기를 할 이유가 없었다. 거기에 황태자까지 가세할 리는 더더욱 없고. ...

교황이 케이와 리시의 결혼식에 직접 참여해서 축복해줬다는 건, 탈레하 왕국까지 알려진 사실이었다. 교황의 축복을 받은 리시가 대놓고 나쁜 짓을 할 리는 없을 것이다. ...

“50킬로그램이 끝인가요?” ...

“설마 그러겠어요?” ...

리시의 태도는 자신만만했다. ...

쟈메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

성급하게 굴 수는 없었다. ...

“왜…… 왜 하필이면 전가요? 저희 상단보다 훨씬 크고 유명한 곳이 많은데.” ...

“그대가 가장 믿을 만해서요.” ...

담백한 대답이라서 오히려 진심이 느껴졌다. ...

“그대가 가장 잘 팔 수 있을 것 같고.” ...

리시가 덧붙인 말에, 쟈메트는 자긍심이 샘솟는 걸 느꼈다. ...

리시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좋은 가격에 메르티움을 팔아서, 리시를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어졌다. ...

“한 번에 푸는 것보다는 적은 양을 조심스럽게 거래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마탑이 가장 좋은 가격을 쳐주겠지만, 마탑 이외의 다른 거래처를 트면 마탑 쪽도 몸이 달아서 금액을 올릴 거고요.” ...

쟈메트가 어떤 식으로 거래할지 설명하는 동안, 리시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이야기를 들었다. 모든 것을 믿고 맡기겠다는 듯한 미소였다. ...

한참을 떠들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쟈메트가 말했다. ...

“좋습니다, 백작 부인. 경영권의 반을 넘기도록 할게요.” ...

리시가 우아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

“아이리스라고 불러요, 쟈메트.” ...

 

+++

쟈메트는 리시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일을 잘해주었다. ...

2주도 지나지 않아서, 메르티움 1킬로그램당 마탑에서 지불할 금액을 협상한 보고서를 보내왔다. ...

1킬로그램에 2골드바. ...

골드바는 20골드로, 브리크 단위로는 2천만 브리크에 해당했다. ...

한마디로 메르티움 1킬로그램에 4천만 브리크를 받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

‘역시 쟈메트를 선택한 건 정답이었어.’ ...

지난 삶, 위틀로 공작은 메르티움을 1킬로그램당 1골드바 정도에 팔았었다. ...

그나마도 마탑에만 거래를 트다 보니,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마탑 쪽에서 거래 금액을 낮춰서 나중에는 10골드 정도로 협상을 봤던 걸로 기억한다. ...

리시는 한 번에 많은 양의 메르티움을 거래할 생각이 없었고, 쟈메트 또한 같은 생각일 터였다. ...

일단 계획한 사업을 벌이기에 충분한 금액만 확보한 후, 당분간은 메르티움을 창고에 쌓아두기만 할 예정이었다. ...

결혼식을 올린 지도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간다. ...

며칠 전, 디자이너인 티오렛이 결혼식 때 장만한 드레스들의 청구서를 보냈다. ...

[위틀로 공작가에서 지불하는 것으로 알고는 있지만, 백작 부인께서도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보내드립니다. ...

위틀로 공작가에도 같은 내용의 청구서를 보내두었습니다.] ...

청구서에 적힌 금액은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어마어마한 것은 결혼식장을 꾸미고 파티를 여는 데 사용한 금액이었다. ...

그 청구서들이 위틀로 공작가로 날아가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벌써 받았을지도 모르고. ...

‘슬슬 몸이 달겠네.’ ...

글로번 위틀로가 리시를 팔아치운 대가로 케이에게 받은 베노트의 금광은 지금쯤 동이 났을 것이다. 글로번은 큰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라서, 돈 나올 구석이 거의 없었다. ...

리시는 서늘한 눈으로 청구서를 내려다봤다. ...

‘자, 글로번 위틀로. 이제 어떻게 할 거지?’ ...

 

+++

글로번은 테이블에 쌓인 청구서를 멍하니 내려다봤다. ...

리시의 결혼식이 끝난 후, 람바족이 습격해서 모두를 잠재우는 바람에 다들 혼이 나간 상태로 그린 백작가를 떠났다. ...

그래서 청구서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

드레스, 마탑 기계 대여, 장식, 식자재, 인부 고용……. ...

모두 합친 금액은 55골드바가 조금 넘었다. ...

11억 브리크를 훌쩍 넘긴 돈이다. ...

가비자르 제국의 공작이라서 나라로부터 일 년에 한 번씩 받는 급여가 5골드바. 물론 공작령에서 들어오는 세금이 있기는 하지만, 그걸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

여기저기서 긁어모은다 해도, 글로번 가족이 일 년에 사용할 수 있는 돈은 간신히 50골드바 정도. ...

금광이나 작게 벌인 사업에서 들어오는 부수입도 대부분 브리트니를 황태자비로 만들기 위해 써버려서, 수중에 남은 돈이 별로 없었다. 글로번은 해가 바뀌어 급여와 세금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

그런 상황에서 독촉장을 받았다. ...

설상가상으로 지금 글로번의 맞은편에 앉은 금광 관리인이 충격적인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

“공작님. 금광에 더는 매장된 금이 없습니다.” ...

(69) 연을 끊다. ...

  씩씩거리며 찾아온 글로번을 응시하는 케이의 눈빛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

-곧 글로번 위틀로가 찾아올 거예요. 난 만나고 싶지 않으니 잘 상대해봐요. ...

며칠 전, 리시의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긴가민가했는데, 진짜로 글로번이 찾아왔다. 그것도 리시가 말한 이유 때문에. ...

“백작, 넌 알고 있었던 거지? 응? 베노트의 금광이 곧 동나리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

글로번은 응접실로 들어오는 케이에게 성큼성큼 다가와서 외쳤다. ...

화가 나서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글로번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케이는 그저 리시의 선견지명, 아니, 그 예언과도 같은 능력이 놀라울 뿐이었다. ...

‘이제 내 아내가 늑대를 보고 고양이라고 해도 믿어야겠군.’ ...

케이는 손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

“무슨 말씀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앉아서 얘기하지요, 공작님.” ...

“지금 앉게 생겼어? 네놈은 사기꾼이야! 그것도 장인을 속여먹는, 천하의 빌어먹을 사기꾼이라고!” ...

케이는 글로번을 장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구태여 그 부분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침을 튀기며 외치는 글로번을 피해 소파에 가서 앉았을 뿐. ...

케이가 소파에 앉자, 글로번도 어쩔 수 없이 턱턱 소리를 내며 걸어와 소파에 앉았다. ...

글로번의 눈에 핏발이 선 걸 보니, 청구서를 받은 데다가 금광 일까지 겹쳐서 한동안 잠을 설친 것 같았다. ...

“자, 이제 말씀해보시죠. 무슨 일이신지.” ...

“무슨 일? 그걸 몰라서 물어? 이 야비한 사기꾼 자식! 이런 식으로 사람을 속여먹다니. 교황청은 알고 있나? 어? 너 같은 놈이 성유물의 수호자라니. 이건 공개적으로 항의할 일이야!” ...

“대체 내가 왜 사기꾼이라는 겁니까? 나는 그쪽을 속인 적 없습니다, 공작님.” ...

“속인 적이 없다고? 다 망한 베노트의 금광을 주고 아이리스를 사 갔잖아!” ...

“이런.” ...

케이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나는 아이리스를 사 온 적이 없는데, 아이리스의 아버지인 공작님은 아이리시를 내게 팔았나 봅니다. 내가 사기꾼인지, 뭔지 알아보지도 않고.” ...

“그건……!” ...

글로번은 말문이 막히는지 입술을 달싹거렸다. ...

“충격이군요.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공작님이 밖에서 아이리스를 얼마나 아끼는지 떠들어대서 귀하게 키운 소중한 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

“그런 뜻이 아니라…… 어쨌든 네놈, 아니, 백작님이 결혼 지참금으로 준 거 아닙니까?” ...

글로번은 이성을 좀 되찾은 듯, 말투를 누그러뜨렸다. ...

“결혼 지참금으로 드렸죠. 하지만 그 당시에는 나도 그 금광에 금이 얼마나 매장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실제로 공작님이 그 금광을 운영한 후에도 상당량의 금이 나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

“하지만 지금은…….” ...

“공작님. 베노트의 금광이든, 라벤트의 금광이든, 매장량이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설마 영원히 금이 나올 거라고 생각한 겁니까?” ...

“물론 그건 아니죠. 하지만…… 너무 빠르잖습니까? 고작 3, 4개월 만에 폐광해야 하는 상황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

“내가 그걸 돈 받고 팔았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혼 지참금이었습니다. 공작님이 아이리스를 가지고 돈 벌 생각이 아니었다면, 그게 특별히 분노할 이유가 됩니까?” ...

글로번은 말문이 막혔다. ...

케이의 말이 옳았다. 글로번이 베노트의 금광 때문에 피해를 입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 금광 덕분에 황태자와 줄을 대기 위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

문제는 금의 매장량이 생각보다 적었다는 점과 갚아야 할 돈이 터무니없이 많다는 점이었다. ...

“그나저나 공작님. 공작님께서 내주시기로 한 결혼식 준비 비용을 아직 지불하지 않으셨나 봅니다. 이쪽으로도 청구서가 오기 시작했는데, 이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

케이가 은행과 각 상점, 마탑 등에서 받은 청구서를 꺼냈다. 베노트의 금광에 대해 항의하러 왔는데, 오히려 항의를 받을 상황이 되었다. ...

“위틀로 공작님이 기한 내에 갚지 못할 경우, 이자가 붙기 시작할 거고, 사위인 내게도 갚아야 할 책임이 생긴다고 하는군요. 설마 아직도 이걸 해결하지 못했을 줄은 몰랐습니다.” ...

케이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

글로번은 입안이 바싹 말랐다. 내기로 한 돈을 내지 못한 것은, 명예롭지 못한 행동이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글로번은 청구서에 사인했고, 그렇다면 반드시 글로번이 갚아야만 했다. ...

이걸 갚지 못해 케이에게까지 누를 끼치게 되면, 위틀로 공작 가문의 이름은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될 터였다. ...

“아주 난처합니다. 공작님에게도 명예가 있으니, 내가 대신 갚을 수도 없고.” ...

케이가 중얼거린 말에서, 글로번은 희망의 빛을 발견했다. ...

“내, 내가 괜찮다고 하면 대신 갚아줄 수 있겠습니까?” ...

“저런. 공작님. 사위가 대신 빚을 갚았다고 하면 그걸로 뒤에서 떠들어대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

“누, 누가 감히 성유물의 수호자 집안의 사돈을 대놓고 욕하겠습니까?” ...

“글쎄요. 대놓고는 못 해도 뒤에서는 할 것이고, 그리된다면 우리 가문에도 큰 모욕이 되겠지요.” ...

아무래도 케이는 쉽게 갚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

글로번은 조금 세게 나가기로 했다. ...

“하지만 사실 이 돈은 내가 쓴 게 아니라 그쪽 결혼식에 쓴 거 아닙니까?” ...

“그쪽이 아니라 공작님 따님의 결혼식에 쓴 겁니다. 게다가 그 비용을 전부 공작님께서 지불한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많이 듣지 않았습니까? 칭찬은 다 들어놓고 이제 와서 발을 빼겠다는 건 아니겠죠?” ...

케이의 강경한 태도에 글로번은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머리를 굴렸다. ...

내년에 봉급이 나오고 세금을 걷는다 해도, 이 빚을 다 갚기에는 부족했다. 게다가 글로번의 빚은 결혼식 비용뿐이 아니었다. 황태자와 연을 맺기 위해 진 빚도 상당했다. ...

빚을 갚는 데 돈을 다 써버리면, 일 년간 사용할 생활비가 없는 상황. 돈이 없어도 비웃음을 받는 건 마찬가지다. 돈 앞에서 명예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

“아무래도 내가 그 비용을 전부 감당하는 건 무리입니다. 나는 파산 신청을 할 겁니다.” ...

위틀로 가문이 파산 신청을 하면, 그 책임은 사위인 그린 백작에게 돌아간다. 글로번은 자존심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기에 반쯤은 협박하는 것이었다. ...

하지만 케이의 표정은 어두워지지 않았다. 글로번이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입가에 온화한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

“파산 신청을 하면 공작 작위도 내려놔야 할 텐데요.” ...

“빚을 갚지 못해도 공작 작위를 빼앗기는 건 마찬가지지.” ...

“그래 봐야 백작 정도로 내려가는 거겠지만, 파산 신청은 아예 귀족이라는 신분을 버리는 꼴이 되는 겁니다.” ...

“어차피 먹고살 길 없는데, 귀족이라는 신분이 밥 먹여주겠는가? 듣자 하니 신분을 사는 졸부들이 있다는데, 그놈들에게 돈 받고 팔아도 되고.” ...

이제 글로번은 말투까지 바꿔서 뻗댔다. ...

케이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

“그래도 오랜 공작 가문이었는데, 그리 쉽게 졸부들에게 작위를 넘기려 한다는 걸 알면, 가비자르의 황제께서 참으로 기뻐하시겠습니다?” ...

“흥. 뭐라 협박해도 소용없네. 나는 파산 신청을 할 거야!” ...

“나야 공작님이 파산 신청을 하든, 어디 가서 빌어먹고 죽든 상관없지만, 내 아내는 그렇지 않은 듯하더군요.” ...

글로번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왔다. ...

“여, 역시 그렇지? 우리 아이리스는 효심이 깊지?” ...

“완벽한 여자죠. 문제는 내가 그렇지 못하다는 데에 있지만.” ...

“서, 설마. 아이리스가 우리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고 하는데, 자네가 못 하게 하는 건가?” ...

“속이 좁은 편이라서요. 욕심도 많고. 내 돈 나가는 꼴을 보질 못하죠.” ...

“사내가 마음을 그리 좁게 가지면 못 쓰네. 자고로 레이디들은 배포가 큰 사내를…….” ...

이제는 잔소리까지 하려 들었다. ...

케이는 검지를 들어 글로번의 말을 막았다. ...

“우리 그린 가문은 갚을 능력도 없는 빚을 만들고,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걸 어려워하지 않는 이를 가족으로 두지 않습니다, 위틀로 공작.” ...

“이 빚은 내 빚이 아니야!” ...

“어느 누구도 공작에게 결혼 자금을 대라고 협박하지 않았습니다. 아닙니까?” ...

“그건 우리 브리트니가 지나가는 말처럼…….” ...

케이가 다시 검지를 들었다. ...

딱히 표정을 차게 굳힌 것도 아닌데,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위압감이 글로번의 숨통을 조였다. ...

글로번은 입을 다물고, 케이의 깊고 어두운 눈을 응시했다. ...

“이미 끝난 이야기를 다시 하는 취미는 없습니다, 공작. 공작이 진 빚은 우리 그린 가문이 갚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

“그, 그게 뭔가?” ...

“아이리스 그린과 연을 끊는 것.” ...

“뭐?” ...

“관청에 가서 정식으로 아이리스 그린과 연을 끊는 것이 조건입니다. 아이리스 그린은 아이리스 위틀로인 적도, 공작의 딸인 적도, 브리트니의 언니인 적도 없는 겁니다. 또한 위틀로 가문은 그린 가문과 그 어떤 연도 없어야 합니다.” ...

글로번은 교황까지 직접 와서 축복해주는 그린 가문과 연을 맺어두는 게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알고 있었다. 앞으로 그린 가문의 사돈이라는 입장을 내세워서 시작할 사업 구상도 몇 개 해둔 터였다. ...

하지만. ...

‘돈을 갚는 게 우선이야. 내년에 돈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면 이자가 붙어서 갚기 더 힘들어지겠지. 앞으로 돈 나갈 곳도 많은데…….’ ...

글로번은 아직도 브리트니를 황태자비로 만들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

“알겠네.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하지.” ...

 

+++

관청 직원들에게 입조심을 시킨다 해도, 소문의 그린 백작 부인이 자신의 아버지와 연을 끊었다는 사실을 새어나가지 않게 막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

대놓고 퍼뜨릴 말은 아니기에, 다들 뒤에서 수군거렸지만 연을 끊은 이유는 아직 아는 사람이 없었다. ...

“당신에게 좋지 않은 소문이 돌지도 몰라요.” ...

케이가 걱정했지만 리시는 괜찮았다. ...

“아마도 그렇겠죠. 그러지 않으면 더 좋겠지만.” ...

지난 삶에서 위틀로 공작가와 완전히 연을 끊은 적이 없기에, 그 가문 사람들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확신할 수 없었다. ...

하지만 예상은 가능했다. ...

‘한동안은 조용하겠지. 우리 쪽에서 어떻게 나올지 모를 테니까. 상대가 그린 가문이기도 하고.’ ...

소문이 무성해지면 위틀로 가문도 가만히 있기는 힘들어질 것이다. ...

그럴 때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따라서, 리시도 그들을 상대할 방법을 바꿀 예정이었다. ...

‘이 삶에서 나는 당신들에게 기회를 한 번 주기로 했어.’ ...

만약 그들이 위틀로 가문을 둘러싼 소문을 조용히 받아들이면, 굳이 그들을 더는 건드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

리시는 지금 케이를 만나서 충분히 행복했고, 위틀로 가문을 향한 복수보다는 케이의 목적을 이뤄주는 것에 집중하고 싶어졌다. ...

케이를 사랑하게 되었기에, 이제 리시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케이와의 미래가 되었다. ...

‘기회를 잘 잡도록 해. 내가 든 검 끝이 당신들에게 향하지 않도록.’ ...

 

며칠 후. ...

미나스아릭 왕국의 메어리 공주가 탄 마차가 그린 백작저에 도착했다. ...

(70) 만만치 않은 여자. ...

한 해의 마지막 달. ...

기온이 많이 낮아져서 대낮에도 쌀쌀한 바람이 부는 날씨가 되었다. ...

리시의 방에서 보이는 정원은 낙엽이 다 떨어져 황량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그건 그것대로 운치가 있었다. ...

‘이제 슬슬 제이미가 돌아올 때가 됐네.’ ...

람바족 토벌을 나갔던 제이미 일행은 가비자르 제국 황제를 만나고 신성국의 교황청까지 들르느라,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

그러는 동안 메르티움의 첫 판매 금액이 들어왔다. ...

총 10킬로그램을 9억 2천 브리크에 팔았고, 그 중 10퍼센트를 쟈메트 상단에 수고비로 주고 나서도, 8억 브리크 정도가 남았다. ...

리시는 자신의 힘으로 이렇게 많은 돈을 벌어본 게 처음이었다. ...

이번 삶에서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긴 했지만, 실제로 수중에 막대한 돈이 들어오니 가슴이 뛰었다. ...

‘아직 멀었어. 이걸로 만족해서는 안 돼.’ ...

아껴서 쓴다면 몇 년은 먹고살 수 있는 돈이지만, 리시는 그렇게 알뜰살뜰하게 살아갈 생각이 없었다. ...

위틀로 공작가에서 한 해에 사용하는 돈이 거의 10억 브리크. 철마다 옷과 장신구를 사고, 파티를 열고, 정원을 가꾸는 데만 그 정도가 든다. 더 부유한 귀족 집안은 10억 브리크 이상의 돈을 사용했다. ...

이번에 들어온 돈은 우선 믿을 만한 은행에 넣어두었다. ...

메르티움 50킬로그램을 전부 팔아서 모은 돈으로, 첫 번째 사업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

제이미가 돌아오는 대로 그 계획에 대해 의논할 생각을 하며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케이가 허둥지둥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

‘어딜 가는 거지?’ ...

눈으로 그를 좇다가, 그의 맞은편에서 어른거리는 인영이 시야에 잡혔다. ...

인파에 둘러싸인 누군가가 정원의 길을 따라 케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시녀들과 시종들, 그리고 중장비로 무장한 기사들. 그 사이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인물이 있었다. ...

하늘하늘한 연분홍색 청초한 드레스를 입은, 인형처럼 예쁜 여자. 길게 늘어뜨린 새까만 머리카락과 대조적인 하얀 피부가 유독 청순해 보이는 여자. ...

‘메어리 케트벤?’ ...

지난 삶에서는 연이 없어 멀리서밖에 본 적 없지만, 대륙에 소문난 그녀의 예쁜 얼굴은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온 거지? 설마…….’ ...

떠오르는 소문이 하나 있었다. ...

미나스아릭 왕국의 공주 메어리 케트벤이 케이브란트 그린을 몹시도 사랑한다는 이야기. ...

지난 삶에서는 떠돌다가 사라진 소문이라서, 기억에 남지 않았나 보다. 애초에 남의 연애를 신경 쓸 만한 상황도 아니었고. ...

하지만 케이의 부인이 된 지금, 그 소문은 더 이상 듣고 흘려버릴 소문이 아니게 되었다. ...

리시는 제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케이에게 바짝 다가가서 멈춘 메어리를 응시했다. ...

아주 잠깐 메어리와 눈이 마주친 것 같은데, 두 팔을 뻗어 케이의 목을 끌어안는 걸 보면 아무래도 착각이었나 보다. 부인이 빤히 보는 앞에서, 저렇게 연인처럼 포옹할 리는 없으니까. ...

‘만약 내가 보는 걸 알면서도 그런 거라면…….’ ...

리시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지.’   ...

+++

“메어리 케트벤이 찾아왔어요, 대장. 막무가내로 문을 열어달라고 야단이라서 문을 열긴 했는데…… 어쩔까요? 지금은 유진이 상대하고 있거든요.” ...

서재에 있던 케이는 나단의 보고를 받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

“메어리가 왔다고?” ...

“네, 와버렸네요.” ...

“제길.” ...

케이는 욕설을 내뱉으며 서재 창문으로 밖을 내다봤다. 저 멀리 정문으로 들어오는 메어리의 일행이 보였다. 언제나처럼 화려한 인파를 이끌고 등장했다. ...

“어쩔까요? 어쨌든 한 나라의 공주라서 예의를 차리기는 했지만, 명령만 하시면 가서 싹 다 죽여버릴게요. 다 뒈지면 어디 가서 내 손에 죽었다는 말도 못 할 테니까.” ...

케이는 나단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메어리를 그런 식으로 대할 수는 없었다. ...

“관둬. 내가 가서 만나 보지.” ...

“괜찮으시겠어요? 대장은 저 공주한테 약하잖아요.” ...

나단의 말이 사실이었다. ...

케이가 아직 어릴 때, 메어리는 케이의 목숨을 구한 적이 있었다. 만약 그때 메어리가 나서지 않았다면, 케이는 지금처럼 살 수 없었을 것이다. ...

그나마 다행인 건, 메어리가 생명의 은인이라는 점을 내세워서 케이를 쥐고 흔들려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

리시를 만나기 전까지 결혼할 생각이 없었던 케이는, 메어리가 자신에게 원하는 걸 알면서도 은근슬쩍 넘어가곤 했다. ...

메어리는 한 나라의 공주이니, 나이가 차면 왕이 정해주는 좋은 혼처로 시집가게 될 테고, 그때가 되면 메어리도 알아서 마음을 정리할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

“어떻게든 해야지.” ...

솔직히 말하면 지금까지 메어리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리시에게 푹 빠져서, 다른 여자를 떠올릴 여유 같은 건 없었다. ...

메어리를 어떻게 돌려보내야 할지 고민하며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

화려하게 차려입은 시녀와 시종들 사이에서도, 유독 빛나는 여인이 케이를 향해 사뿐사뿐 걸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인형 같은 얼굴이 케이를 향해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

“케이.” ...

그녀는 다가와 두 팔을 벌려 케이의 목을 끌어안았다. 달콤한 향수 냄새가 케이의 후각을 자극했다. ...

“오랜만이에요. 보고 싶었어요. 정말로.” ...

금방이라도 흐트러질 듯 가녀린 목소리가 케이의 귀를 간질였다. 케이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팔을 잡아서 떼어냈다. ...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주님.” ...

“어머나. 왜 그렇게 예의를 차리고 그래요? 거리감 느껴지게.” ...

“미나스아릭 왕국의 공주님이신데 당연히 예의를 차려야지요. 이제 우리가 어린 나이도 아니고요.” ...

메어리가 눈썹을 살짝 늘어뜨리고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커다란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울먹울먹 빛났다. ...

그래도 꿋꿋이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메어리의 모습에, 시종과 시녀, 기사들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

케이는 저 표정이 메어리의 큰 무기라는 것을 알았다. ...

“그렇게 어색하게 대하지 말아요, 케이. 그대와 나의 연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걸.” ...

그대와 나의 연. ...

메어리는 그렇게 어릴 적 자신이 베푼 은혜를 언급해서, 케이를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

“공주님. 우리가 어릴 적 친하게 지내기는 했으나, 이제는 경거망동해서는 안 되는 성인입니다. 이렇듯 소식도 없이 찾아오시다니요.” ...

“내 소중한 이의 집에 방문하는데 굳이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그대와 내가 그럴 만한 사이는 아니잖아요.” ...

“이제는 그럴 만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제게는 이제 부인이 있습니다.” ...

“어머나.” ...

메어리가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

“그대의 부인은 오랜 친구의 방문조차 허락하지 않을 만큼 질투심이 많은 건가요?” ...

메어리의 사람들이 ‘쯧쯧.’ 하고 혀를 차는 표정을 지었다. ...

케이는 슬슬 불쾌해지기 시작했지만, 인내심을 발휘해 미소 지었다. ...

“그럴 리가요. 세상에서 제일 아량이 넓고 사랑스러운 여인입니다.” ...

메어리의 눈이 커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이번에도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

“그리 아량이 넓은 부인이라면 그대의 오랜 친구인 내가 이 저택에 한동안 머무는 것도 기쁘게 받아주겠군요.” ...

케이는 아차 싶었다. 메어리를 밀어내려고 한 말이 이런 식으로 되돌아올 줄은 몰랐다. ...

“그대의 부인과도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내가 그대를 아끼듯, 그대의 부인 역시 아껴주고 싶거든요.” ...

“공주님, 그건…….” ...

“저는 좋아요.” ...

난감해하는 케이의 말을 끊고, 뒤에서 리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케이는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언제 나온 건지, 리시가 우아한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

검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그 여느 때보다도 강인해 보였다. ...

“메어리 케트벤 공주님. 아이리스 그린이 인사드립니다. 공주님의 아름다움에 관한 소문은 언제나 들어왔지만, 이렇게 뵈오니 소문은 비할 바 없이 아름다우십니다.” ...

리시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평온했다. 살며시 고개를 숙이기는 했지만 비굴해 보이지는 않았고, 오히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오만한 느낌마저 풍겼다. ...

메어리도 그걸 느낀 듯 미간을 좁혔지만, 누군가 보기 전 얼른 표정을 풀고 생긋 웃었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 아이리스 위틀로에 관한 소문 역시 많이 들어왔어요. 실제로 보니 꽃이라 불릴 만하군요.” ...

메어리 공주도 위틀로 공작가와 리시가 연을 끊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

그럼에도 굳이 그 얘기를 언급한 건, 리시의 표정을 살피려는 의도였지만, 리시의 우아한 미소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

“과찬이십니다. 곧 공주님께서 머무실 방을 마련하도록 할게요. 서채에…….” ...

“아니요, 나는 본채에 머물 거예요. 레이디 위틀로. 본채에 방을 준비해줘요.” ...

하녀를 부리는 듯한 말투였다. 게다가 그린 백작 부인이 아닌 레이디 위틀로라고 불렀다. ...

‘네가 그린 백작 부인이라는 걸 인정 못 해.’라는 의미라는 걸,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눈치챘다. ...

다들 리시가 당황하거나 기분 나쁜 기색을 감추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리시를 잘 아는 케이조차도, 리시의 표정이 허물어질 줄 알았다. ...

리시는 모두의 예상을 깨뜨렸다. ...

“공주님.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하셨나 봅니다. 저는 아이리스 그린. 그린 백작 부인이라고 불러주세요.” ...

부드럽지만 단호한 말투였다. 마치 예의를 모르는 어린아이를 꾸짖는 것만 같은 태도였다. ...

메어리의 표정이 굳었고, 이번에는 그걸 감추지 못했다. ...

메어리의 호박색 눈동자가 노기를 띠고 리시를 노려봤다. 리시는 담담히 그녀의 시선을 받아냈다. ...

이윽고 정신을 차린 메어리가 표정을 수습했다. ...

“어머나. 그대가 그런 호칭에 얽매이는 여인인 줄은 미처 몰랐어요. 미안해요. 그대가 원하는 대로 그린 백작 부인이라고 불러주죠.” ...

찔러오는 말에도 리시는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웃으며 케이의 팔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

“감사합니다, 공주님. 제가 이이에게 레이디 옹졸이라고 불릴 만큼 속이 좁은 여자라서요.” ...

리시가 지금까지 한 말 중에, 지금 이 말이 가장 메어리의 속을 긁었다. 케이와 그런 호칭을 농담으로 주고받을 만큼 긴밀한 사이라는 걸 드러내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

게다가 케이의 팔을 잡은 저 손. 이 남자는 내 남자라는 걸 알리는, 자연스럽고도 확고한 저 손의 위치가 메어리의 뱃속을 부글부글 끓게 만들었다. ...

하지만 메어리는 그 심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

‘시간은 많아.’ ...

메어리는 쉽게 이 저택을 나가줄 생각이 없었다. ...

‘어차피 만만찮은 여자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어.’ ...

그동안 리시에 관한 기사가 실린 신문을 전부 구해서 읽었다. 그저 온실에서 자란 꽃이 아니라는 것쯤은, 기사만 봐도 알 수 있었다. ...

‘하지만 아이리스 위틀로. 나도 만만치 않은 여자야.’ ...

리시가 등장한 순간부터 케이의 눈동자는 리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

리시가 서 있는 바로 저 자리야말로, 메어리가 평생 원하던 그 자리였다. ...

‘난 내가 갖고 싶은 걸 갖지 못한 적이 한 번도 없어. 그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든, 그 자리는 내 것이 될 거야.’ ...

(71) 만만치 않은 여자 (2) ...

리시가 방에 들어가자, 크리시나가 걱정스러워하며 다가왔다. ...

“괜찮으세요, 아이리스 님?” ...

“괜찮아요.” ...

괜찮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

케이가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건 알고 있었다. 결혼하더라도 이런 문제에 몇 번쯤 부딪칠 거라는 예상은 했었다. ...

그 상대가 한 왕국의 공주가 될 줄은 몰랐지만. ...

미나스아릭 왕국은 꽤 힘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 물론 먼저 나서서 건드릴 생각도 없었지만. ...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건 죄가 아니다. 메어리가 그저 케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벅차, 약간 훼방만 놓고 리시를 자극하러 온 거라면, 굳이 온 힘을 다해 상대할 생각이 없었다. ...

하지만 선을 넘는다면, 그때는 리시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

“크리시나. 메어리 공주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요?” ...

하녀가 가져온 쿠키와 차를 마시며, 리시가 물었다. ...

크리시나가 찻잔을 내려놓고 으음, 하고 미간을 모았다. ...

“어떤 사람이긴요. 부인 있는 남자를 쫓아다니는 뻔뻔한 녀…….” ...

투덜거리듯 말하는 에르웰은, 언제나처럼 크리시나에게 옆구리를 찔려 말을 끝내지 못했다. ...

“조용한 성격에 마음이 여리고 음악과 그림, 그리고 동물을 좋아한다고 알고 있어요.” ...

“그렇군요.” ...

“차분하고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성격이라서, 레이디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아요. 거기에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는 칭찬까지 받으니, 모두 메어리 공주와 친해지고 싶어 하죠. 메어리 공주가 여는 파티는 제널 백작 부인이 여는 파티만큼 인기가 좋아요.” ...

그 후에도 칭찬은 계속되었다. ...

크리시나의 말에 따르면, 메어리는 모든 남성이 원할 만한 티 하나 없는 여인이었다. 리시도 지난 삶에서 메어리에 관한 평가가 그랬다는 걸 떠올렸다. ...

“다만.” ...

크리시나가 덧붙였다. ...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이리스 님의 사람으로서 한 가지 알려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 ...

“말해주세요.” ...

“메어리 공주의 보좌관과 시녀가 자주 바뀐다고 합니다.” ...

크리시나의 말에 따르면, 시녀나 보좌관이 스스로 일을 그만두고 왕실을 떠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

“문제는 그들이 후에 모두 죽었다는 점입니다. 왕실을 떠나고 나서 빠르게는 며칠 후, 늦게는 몇 달 후. 그들은 전부 사망했다고 해요. 혹은 사망해서 보좌관과 시녀를 바꿔야 하는 경우도 있었고요.” ...

“사망 원인은요?” ...

“다양해요. 병, 사고사, 혹은 살해당한 경우도 있죠.” ...

“거기에 메어리 공주가 관련된 건가요?” ...

“거기까지는 제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아이리스 님. 하지만 그렇게 사망한 사람의 수가 서른을 넘는다는 건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

크리시나는 확실하게 말해주지 않았지만, 의미는 명백했다. 메어리를 조심하라는 뜻이었다. ...

아무리 왕족이라도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면 처벌을 면치 못하는 세상이다. 메어리 공주의 보좌관이나 시녀였던 자들이 서른 명 넘게 죽었는데도, 그 일이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

‘곁에 뛰어난 자를 뒀나 보군.’ ...

리시는 아까 메어리 곁에 있던 사람 중에, 특별해 보이는 이가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다들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어서, 특별하게 눈에 들어온 이가 없었다. 메어리에게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기도 했고. ...

“리시, 좀 들어갈게요.” ...

케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크리시나와 에르웰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

“그냥 앉아 있어요.” ...

리시는 시녀들을 말리고 대답했다. ...

“들어와요.” ...

케이는 무척 난처하고 미안한 표정으로 리시의 방에 들어왔다. 리시는 소파에 앉은 채로 가만히 케이를 올려다봤다. ...

막무가내인 공주님이 저택에 쳐들어온 건 케이의 잘못이 아니지만, 결혼하기 전에 연이 있는 여자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건 케이의 잘못이었다. ...

케이에게 크게 화가 난 건 아니어도, 이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

“리시, 둘이서 얘기 좀 하고 싶은데.” ...

“저희는…….” ...

다시 일어나려는 시녀들에게 말했다. ...

“그냥 있어요.” ...

시녀들이 도로 소파에 앉았다. ...

“무슨 일이죠?” ...

리시가 도발적으로 눈동자만 올려 케이를 응시하자, 케이가 쓰게 웃었다. ...

“지금은 나랑 대화하고 싶지 않군요?” ...

“…….”

“알겠어요, 리시. 다음에 다시 올게요.” ...

케이는 리시가 잡아주기를 바라는 듯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하지만 리시는 입을 열지 않았고, 케이는 꽁지를 만 강아지처럼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

+++

본채에 있는 방 중 하나를 사용하게 된 메어리는, 흠잡을 곳이 없는지 둘러봤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건 없었다. 있지도 않은 흠을 잡을 생각은 없었다. ...

“그린 백작 부인은 소문이랑 좀 다른 것 같아요.” ...

시녀 중 한 명인 에메라가 입을 비쭉거리며 말했다. ...

“그러게 말이에요. 신문기사에서 봤을 땐 굉장히 우아하고 조용하다고 했는데…… 그 드레스 보셨어요? 정말 천박하더라고요.” ...

캐롤라인이 얼른 에메라를 거들었다. ...

메어리는 리시가 입은 드레스를 떠올렸다. ...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에서 엉덩이로 이어지는 곡선을 잘 살리는 검은색 드레스. 화려하지 않지만, 리시의 연분홍으로 빛나는 은빛 머리칼과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

길고 가느다란 팔다리와 부러질 듯 잘록한 목을 보면서, ...

‘저 팔다리를 하나씩 부러뜨리고 목을 움켜쥐면, 저 여자는 어떤 표정으로 내게 살려달라 빌까?’ ...

라는 생각을 했었다. ...

메어리는 차분하게 말했다. ...

“그래 보여도 아주 고급 드레스였어요. 굉장히 값비싼 직물을 썼더군요. 아마 유명한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것 같고. 그린 가문은 사치와는 연이 먼 가문인데, 걱정이네요.” ...

“맞아요. 그렇게 사치를 하면 그린 가문에 먹칠을 하게 된다는 걸, 백작 부인은 모르는 걸까요? 그러고 보니, 위틀로 공작가와 연을 끊는 이유도 돈 문제가 얽혀 있다고 하던데…… 딸이 너무 사치를 해서 위틀로 공작도 더는 견딜 수 없게 된 거 아닐까요?” ...

“설마요. 하지만 만약 그런 거라면…… 케이가 많이 힘들겠어요. 천성이 다정해서 모질게 꾸짖지 못하는 남자인데.” ...

메어리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

캐롤라인이 안쓰러워하며 말했다. ...

“그린 백작이 성유물의 수호자로 사시느라, 여자 문제에는 순수하셔서 보는 눈이 없으셨던 걸 거예요. 공주님처럼 속 깊은 분을 두고 그런 여자를 선택하다니…….” ...

“아니요, 캐롤라인. 케이가 선택한 게 아니에요.” ...

메어리가 차갑게 말하자 캐롤라인이 얼른 대꾸했다. ...

“그럼요. 그린 백작 같은 남자가 그런 여자를 스스로 선택했을 리 없죠. 역시…… 그 여자가 매달린 거겠죠?” ...

메어리는 나서서 그럴 거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에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

“분명 그럴걸요. 어디서 그린 백작을 보고 마음에 들어서 매달렸겠죠. 아무래도 공녀니까 그린 백작이 냉정하게 거절하지 못하신 걸 테고요.” ...

“하긴. 그런 게 아니라면 그린 백작이 그런 여자랑 결혼할 리가 없었을 거예요. 그렇게 졸라서 될 문제였으면, 공주님도 그러시지 그랬어요?” ...

“맞아요, 공주님. 공주님께서는 그린 백작을 생각해서 마음도 표현하지 않으시고 그저 기다리셨는데…….” ...

메어리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

방 안에 있는 이들은, 메어리의 허물어질 것 같은 미소에 가슴이 미어졌다. ...

우리 공주님은 너무 착하셔서, 언제나 이렇게 손해를 보시지. ...

+++

케이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

성유물을 다루는 문제로 리시와 다퉜다가 화해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리시를 화나게 만들 일이 생겼다. ...

‘제이미도 없는 상황에서 난감하게 됐군.’ ...

제이미라면 적당한 조언을 해주었을 것이다. 나단이나 유진, 월라스는 이럴 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

그런 와중에 월라스가 새로운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

“대장, 주방이 시끌시끌해요. 형수님이 메어리 공주를 위해 만찬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던데요.” ...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

물론 손님이 왔을 때 저녁 만찬을 열어서 환영해주는 것이 예의이기는 했으니, 메어리는 평범한 손님이 아니었다. ...

굳이 리시가 나서서 메어리를 대접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

메어리는 그녀가 데려온 사람들과 식사할 수 있도록, 다른 식당을 하나 내어주면 될 일이었다. ...

“어떡할까, 월라스.” ...

“뭘요?” ...

“이 만찬이 조용히 지나갈까?” ...

“음.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법이니까, 다들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요? 우리 요리사는 실력이 좋잖아요.” ...

역시 월라스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케이 역시 여자들의 알력 다툼에 대해서는 무지하지만, 아까 리시와 메어리 사이에 오가는 기싸움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

케이는 다시 리시의 방으로 향했다. ...

똑똑- ...

정중하게 노크하고, 크리시나가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렸다. ...

크리시나가 케이를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던졌다. ...

메어리 때문에 리시의 시녀들도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

“크리시나. 리시와 대화를 좀 하고 싶은데.” ...

“잠시만요.” ...

탁- ...

케이의 면전에서 문이 닫혔다. ...

케이는 한참을 기다린 끝에야,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

리시는 와인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

육체의 고운 선이 드러나는 드레스가 무척이나 눈부셔서, 케이는 저도 모르게 다가가 그녀에게 입 맞출 뻔했다. ...

“거기서 얘기해요.” ...

리시의 차가운 목소리가 케이를 얼어붙게 했다. ...

“리시…….” ...

“무슨 일이죠?” ...

리시의 눈빛이 냉랭했다. ...

크리시나와 에르웰이 눈빛을 주고받더니 조용히 방을 나갔다. ...

“리시, 미안해요.” ...

“그래요.” ...

“정말 미안해요. 이건 내가 의도한 일이 아니었어요. 메어리가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줄도 몰랐고.” ...

“다정하네요, 케이.” ...

“응?” ...

“미나스아릭 공주의 이름을 그토록 다정하게 부르다니. 그렇게 친밀한 관계일 줄은 몰랐어요.” ...

케이는 아차 싶었다. 자신의 주둥이를 주먹으로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

제이미가 있었다면 말려줬을 텐데. ...

“리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녀와 나 사이에는 사정이 있어요. 우리는 어릴 때…….” ...

리시가 손을 올려 케이의 말을 끊었다. ...

“지금은 당신이 공주님을 ‘우리’라고 묶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데. 이해를 못 하겠나요?” ...

리시의 목소리는 온화했지만, 케이는 이 순간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

내 상냥하고 다정하고 예쁜 아내가 몹시 화가 났는데, 그 화를 어떻게 풀어줘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

무수한 전장을 헤치고 살아왔으며, 수많은 암살 시도를 받아오며 살아왔지만, 지금처럼 긴장되고 무서운 건 처음이었다. ...

이럴 때는 이해를 못 하겠다고 해야 할까, 이해한다고 해야 할까? ...

그조차도 알 수 없어서, 케이는 입술만 벙긋거렸다. ...

(72) 만만치 않은 여자 (3) ...

몇 년 전이었던가. ...

케이는 어느 나라의 재상과 성유물을 두고 다툰 적이 있었다. ...

그 재상은 손에 넣은 성유물을 케이에게 넘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무척이나 교활하고 잔인한 남자라서, 은밀히 케이의 목숨을 끊어버리려 했었다. ...

그 능구렁이 같은 남자를 상대할 때도, 결국 그 남자의 목숨을 끊고 그 나라의 왕과 대적하게 되었을 때도. ...

케이는 뻔뻔하게 웃을 수 있었다. ...

하지만 지금 케이는 입안이 바싹 마르고 목이 타고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에 빠져 있었다. ...

지금껏 본 적 없는 리시의 냉정한 눈빛과 말투에, 심장이 몇 번이나 툭툭 떨어지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

어렵다. ...

아내의 화를 풀어주는 건, 한 나라의 왕과 싸우는 것보다 더 어렵다. ...

“나는…….” ...

그래도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아서 입술을 움직였다. ...

“당신밖에 없어요.” ...

“아까 공주에게 안겼을 때를 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던데.” ...

숨통이 턱 막혔다. ...

그걸 봤구나! ...

케이는 제이미가 간절했다. 제이미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케이를 한껏 조롱하거나 핍박해서 리시의 마음을 풀어줬을 것이다. ...

“난 죽일 놈이에요. 나처럼 나쁜 놈은 없을 거예요.” ...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

“화를 내는 거, 이해해요.” ...

“그렇겠죠.” ...

“하지만…… 난 정말로 당신밖에 없어요, 리시.” ...

“당연히 그래야죠.” ...

화가 좀 풀린 걸까, 싶어서 그녀의 얼굴을 살펴봤지만, 예쁜 얼굴에는 여전히 냉기가 남아 있었다. ...

“내가 어떻게 해야 화를 풀겠어요?” ...

“그 방법을 내가 알려주기까지 해야 해요?” ...

“아, 물론 아니죠. 지금 당장 가서 메어리 공주를 쫓아낼까요?” ...

“그러든지요.” ...

“알겠어요, 리시.” ...

리시의 화를 풀어줄 수만 있다면, 케이는 뭐든 할 수 있었다. ...

어릴 적 메어리가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한 마음의 짐이 남아 있긴 해도, 리시가 더 소중했다. ...

메어리를 하루도 묵지 못하게 하고 쫓아내면 미나스아릭의 왕과 사이가 나빠질지도 모르지만, 그 역시 아무래도 좋았다. 케이는 다시 리시의 미소를 보고 싶을 뿐이었다. ...

당장 메어리의 방에 찾아가려고 몸을 돌린 케이를, 리시가 불렀다. ...

“잠깐만요, 케이. 그럴 거 없어요. 그녀를 쫓아내면 미나스아릭의 국왕과도 관계가 안 좋아지잖아요.” ...

“내가 미나스아릭의 국왕이랑 입 맞추고 싶어 할 것 같아요?” ...

리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

케이는 가슴을 짓누르던 답답함이 조금은 가시는 걸 느꼈지만, 긴장을 풀지는 않았다. ...

중요한 건 지금부터다. ...

“메어리 공주와는?” ...

“리시, 내가 지금까지 말해준 적이 없나 보네요. 내 평생 살면서 먼저 키스하고 싶어진 여자는 당신이 처음이에요. 앞으로도 당신뿐일 거고.” ...

“그렇군요.” ...

“그럼 이제 키스해도 돼요?” ...

“아직이요.” ...

케이가 눈썹 끝을 내렸다. ...

“그런 표정 지어도 소용없어요. 아, 그렇다고 늑대로 변신하는 건 반칙이고.” ...

마침 케이는 늑대로 변신하려던 참이었다. 리시는 늑대 케이에게는 약하니까. ...

“오늘 저녁 식사를 잘 끝내고 돌아와서 한숨 자고 일어나면, 그때는 키스해도 좋아요.” ...

“그럼 키스 말고 다른 건?” ...

케이가 리시의 가슴 쪽으로 시선을 내리자, 리시가 얼굴을 붉혔다. ...

“이 음탕한 늑대 같으니.” ...

“왜요? 어깨를 주무른다거나 손 마사지를 해준다거나…… 그걸 물어본 거였는데. 무슨 생각을 한 거예요, 리시?” ...

리시가 콧등을 찡그리며, 소파에 있던 쿠션을 들어서 케이에게 던졌다. ...

케이는 싱긋 웃으며 쿠션을 잡았다. ...

“내 아내 머릿속이 야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좋군요.” ...

“야한 생각 같은 거, 한 적 없어요!” ...

“그렇게 얼굴이 빨개져서 그런 말을 해봐야 아무도 안 믿어요, 리시. 그럼 만찬 시간에 맞춰서 모시러 오죠.” ...

케이가 쿠션을 소파에 내려놓았다. ...

방에서 나가려던 케이가 생각난 듯 돌아섰다. ...

“키스를 날리는 건 괜찮죠?” ...

리시가 대답하기도 전에, 케이가 손바닥을 입술에 댔다가 리시를 향해 훅 불 듯이 날렸다. ...

그의 넉살 좋은 행동에, 리시는 간신히 웃음을 참고 돌아섰다. ...

+++

저녁 식사 자리는 무난하게 흘러갔다. ...

메어리는 무례한 언사를 하지 않았고, 케이에게만 말을 걸어서 리시를 따돌리려는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다. 리시가 말을 걸면 제대로 답해주고, 먼저 리시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

오히려 그런 점이 리시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

만약 지금 메어리의 행동이 쭉 이어진다면 다행이지만, 다른 속셈을 가지고 저렇게 행동하는 거라면 상대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차라리 브리트니처럼 생각이 짧고 직진으로 달려드는 사람을 상대하는 게 쉬웠다. ...

저녁 식사를 끝내고 일어서는데, 메어리가 케이를 불렀다. ...

“케이, 할 얘기가 있어요.” ...

“네, 하세요.” ...

“여기서 말고. 둘이서. 이해해주겠죠, 그린 백작 부인?” ...

메어리가 리시에게 고운 미소를 지었다. ...

리시도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케이가 먼저 말했다. ...

“제 부인 앞에서 못할 이야기라면 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공주님. 저는 제 아내에게 비밀이 없어서요.” ...

정중한 거절에 메어리가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다. ...

메어리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걸 보며, 리시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

만약 저게 연기를 하는 거라면 정말 대단한 여자다. 저렇게 자유자재로 낯빛과 눈물을 다룰 수 있다니. ...

메어리의 작은 손이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눈물은 고였을 뿐 흐르지는 않았다. ...

물기 젖은 눈으로 애써 미소 짓는 메어리는, 그야말로 사랑하는 이에게 배신당했지만 꾹 참는, 가녀리고 안타까운 여성처럼 보였다. ...

“그렇군요. 실례했어요. 나는 그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서, 그간의 일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인데.” ...

“그러시군요.” ...

케이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

메어리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뱉어냈다. ...

“케이, 그대가 결혼했다 해서 오랜 친구가 적이 되는 건 아니지 않나요?” ...

“물론 그렇습니다, 공주님. 하지만 공주님께서 절 그린 백작이 아닌 케이라고 부르는 한은 잠시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메어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저 흔들림은 진짜라는 걸, 리시는 알 수 있었다. 리시 역시 케이의 단호한 태도에 놀라는 중이었으니까. ...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부디 편안한 밤 되시길.” ...

케이가 리시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올리고 돌아섰다. ...

케이에게 이끌려 걸어가는 내내, 리시는 등에 닿는 메어리의 시선을 느꼈다. ...

돌아보지 않고도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예상할 수 있었다. ...

+++

미나스아릭의 공주로 태어나 이런 모멸감을 느낀 건, 엘디를 상대할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

메어리는 시녀들을 다 내쫓고 씩씩거리며 방을 오갔다. ...

치밀어오는 분노를 다스릴 수가 없었다. ...

하마터면 식당에서 옆에 있던 접시를 들어 리시에게 집어던질 뻔했다. ...

‘그 계집이 케이를 쥐고 흔드는 거겠지. 그게 아니라면 케이가 날 그렇게 차갑게 대할 리가 없어.’ ...

어릴 적 케이의 목숨을 구했다. ...

메어리가 없었다면 케이는 분명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고, 케이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

모든 여자에게 냉랭할 정도로 무심한 케이였지만, 메어리에게만큼은 차갑게 굴지 않았다. ...

평생 그럴 줄 알았는데. ...

메어리는 침대 옆 협탁에 올려둔 커다란 유리 상자로 다가갔다. 그 안에는 두꺼비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

“론. 너는 내 마음 알지?” ...

두꺼비가 깩, 하고 울었다. ...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두꺼비이지만, 사실은 독을 지닌 돌연변이 두꺼비. ...

메어리는 두꺼비 론을 사랑스럽게 응시하며 속삭였다. ...

“내가 널 사용하는 일이 없으면 좋을 텐데. 그렇지?” ...

 

+++

다음 날, 제이미와 엘디가 돌아왔다. ...

그들만이 아니었다. ...

“자네가…… 왜 여길 온 거지?” ...

“으하하하하! 오랜 숙원이던 람바족 토벌에 성공했으니, 축배를 들어야하지 않겠는가!” ...

미르도 함께였다. ...

“람바족 토벌이 자네의 오랜 숙원인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

“자네는 나한테 관심이 너무 없어. 때로는 친구에게도 관심을 좀 주는 게 어떤가? 그나저나 아름다운 그린 백작 부인은 어디 있나?” ...

“자네가 왜 원정에서 돌아오자마자 남의 아내를 찾는 거지?” ...

“그거야 어마어마한 미인이지 않나? 영웅은 응당 미인을 좋아하는 법이지. 미인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말이야. 하하하!” ...

너무 당당하게 말하니 대꾸할 말이 없었다. ...

“그렇게 미인이 좋으면 가서 메어리 공주나 보는 게 어때?” ...

“메어리 공주? 아, 미나스아릭 왕국의 메어리 공주 말인가? 어마어마하게 예쁘다는 얘기는 들었지. 지금껏 볼 기회는 없었지만.” ...

“그거 잘됐네. 지금 여기 와 있거든.” ...

“오, 그래? 당장 가봐야겠군!” ...

미르가 본채 쪽으로 사라지는 걸 보며, 케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미르는 성격이 저래도 외모는 출중한 자였다. ...

메어리가 미르를 보고 한눈에 반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좋을 텐데. ...

“메어리 공주가 여기 와 있다고요?” ...

미르의 기세에 눌려 조용히 서 있던 제이미가 물었다. 언제나 제이미의 입가에 은은하게 번진 미소가 보이지 않았다. ...

“그래, 어제 막무가내로 쳐들어왔어.” ...

“그것참 큰일이군요. 아이리스 님은 괜찮으시고요?” ...

“괜찮아. 메어리가 잠깐 무례하게 행동하긴 했지만, 그 후에는 별문제가 없었거든.” ...

“그래요……?” ...

제이미는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보고를 들어야지, 케이.” ...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삐딱하게 서 있던 엘디의 말에, 그들은 서재로 향했다. ...

서재로 들어가자마자 엘디가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

“교황 폐하가 빠른 시일 내에 한번 찾아오래. 아무래도 람바족에 관한 이야기를 믿는 눈치가 아니었어.” ...

“그렇군.” ...

케이도 예상한 바였다. ...

황제는 몰라도 교황은 성유물에 관해 아는 것이 많았다. 슬리브 스톤에 관해서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

“이번 결혼식 건도 있고…… 웬만하면 오늘, 내일 중에는 출발하는 게 좋을 거야. 교황 폐하 성질머리, 형님도 알잖아.” ...

“그래야겠지.” ...

메어리만 아니었다면 당장 오늘에라도 출발했을 것이다. ...

메어리 문제만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

“어떡할래? 난 오늘에라도 떠날 수 있는데.” ...

성기사단 부단장인 엘디는 이제 슬슬 신성국으로 돌아가야 할 터였다. ...

“엘디, 부탁이 있다.” ...

“뭔데?” ...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 남아서, 리시에게 마법을 좀 가르쳐줘.” ...

“형수한테 마법적인 재능까지 있었어?” ...

“그런 건 아니고. 마나의 흐름을 읽는 방법을 배우면, 성유물을 다루는 방법도 어느 정도는 감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

엘디의 눈이 가늘어졌다. ...

“그리고 겸사겸사 메어리의 마수로부터 형수를 보호하기도 하고 말이지?” ...

“메어리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거야.” ...

“글쎄. 그 부분에 대해 형님을 설득할 생각은 없고. 만약 메어리가 선을 넘으면, 내가 대응할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야? 죽여도 돼?” ...

엘디는 전부터 메어리를 불편해했다. ...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도, 엘디가 가차 없이 메어리를 죽일 수 있다는 걸 케이는 알고 있었다. ...

“먼저 네 형수에게 물어봐.” ...

“형수에게 떠넘기라고?” ...

“아니. 리시가 원하는 걸 우선으로 하라고. 하지만 네가 봤을 때 그게 사망에 이를 만한 일이라면.” ...

케이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

“죽여도 좋아.” ...

영혼의 색을 볼 줄 아는 엘디가 누군가를 불편해하는 데는 항상 이유가 있었다. ...

그래도 케이는 생명의 은인이기에, 강대한 왕국인 미나스아릭의 공주이기에, 메어리를 좋게 대하려고 노력해왔다. ...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

어느 누구도 리시를 함부로 대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

그게 설령 미나스아릭 왕국과 적대 관계로 돌아설 만한 일이라 해도, 케이는 적당히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 ...

(73) 만만치 않은 여자 (4) ...

“공주님. 밀란시스 피아몬도 대공이 찾아왔어요.” ...

시녀의 알림에 메어리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

“피아몬도 대공이?” ...

“네. 공주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대요. 소문처럼 잘생겼더라고요.” ...

“그래?” ...

젊은 나이에 대공 자리를 물려받은 밀란시스 피아몬도에 대해서는, 메어리도 들은 소문이 있었다. ...

연인으로는 좋지만 결혼 상대로는 영 아닌 남자. ...

하지만 레이디들의 평가는 아무래도 좋았다. ...

‘대공이 직접 날 보러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

메어리는 미르가 람바족 문제로 토벌을 갔다가 제이미 일행과 함께 돌아온 걸 몰랐다. ...

‘나한테 관심이 있나 보네.’ ...

그래서 미르가 메어리를 보러 일부러 찾아왔다고 착각했다. ...

가비아르 제국의 대공은 미나스아릭 왕국의 왕만큼 권력이 있었다. ...

‘잘 이용해볼 수도 있겠어.’ ...

메어리는 미르에게 본채 응접실에서 기다리라고 이르라 명했다. ...

방에 들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첫 만남부터 쉽게 방에 들이는 여자로 보이고 싶진 않았다. ...

애를 좀 태우는 게 좋겠지. ...

메어리는 자신의 미모를 돋보이게 하는 드레스를 선택하고, 공들여 꾸몄다. 살짝 화장도 하고, 너무 화려하지 않지만 값비싼 장신구를 착용했다. 향수까지 뿌려서 준비를 끝내고 나니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

‘초조해하면서 날 기다리고 있겠지.’ ...

메어리는 좀 더 애태울까 하다가 관두고, 1층에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

대공이 있는 곳이라면 으레 앞에서 지켜야 할 보좌관이나 기사가 보이지 않았다. ...

‘나랑 둘이 보고 싶어서 모두 물린 건가?’ ...

메어리가 눈짓하자 시녀가 응접실 문을 노크했다. 응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

시녀가 좀 더 세게 문을 두드렸다. ...

“피아몬도 대공. 메어리 케트벤 공주님께서 오셨습니다.” ...

시녀가 소리를 높여 말했다. ...

그때, 지나가던 그린 가의 시종이 걸음을 멈추더니 의아한 듯 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

“피아몬도 대공께서는 아까 5분 정도 기다리시다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다면서 돌아가셨습니다.” ...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

메어리는 머리가 띵했다. ...

‘5분? 5분을 기다렸다고?’ ...

사내가 레이디를 기다리는 건 미덕이었다. 1시간이고, 2시간이고 불평 없이 기다려야 마땅했다. ...

상대가 평범한 레이디도 아닌 미나스아릭의 공주라면, 몇 시간의 기다림도 마다하지 말아야만 했다. ...

그런데 5분이라니. ...

메어리는 너무 당황해서 낯빛을 갈무리해야 한다는 것도 잊었다. ...

메어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걸 본 시종은, 살짝 고개를 숙인 후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

시녀들이 안절부절못하며 메어리의 표정을 살폈다. ...

그들은 자신의 주인이 이런 대우를 받는 것도, 이런 표정을 짓는 것도 처음 봤다. ...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메어리가 시녀에게 명령했다. ...

“지금 피아몬도 대공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봐요.” ...

시녀는 금방 답을 가지고 돌아왔다. ...

“그린 백작 부인과 함께 마구간에 있다고 합니다.” ...

메어리의 눈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

아이리스와 함께 있다니. ...

날 바람맞히고 아이리스를 만나다니. ...

메어리는 자신이 미르를 오래 기다리게 했다는 점은 잊었다. 이 모든 게 리시가 수작을 부려서 벌어진 일 같았다. ...

“그린 백작 부인이 아주 고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내게 창피를 주는군요. 구태여 대공까지 보내서 날 바람맞히도록 시키다니.” ...

메어리의 가녀린 목소리는 근처에 있는 그린 가의 고용인들에게 들릴 정도로 컸다. ...

그린 가의 고용인들이 흘끔 쳐다보는 걸 느끼며, 메어리는 말했다. ...

“그저 친해지고 싶을 뿐인데, 그린 백작 부인은 내가 몹시도 미운가 봅니다.” ...

 

+++

윈디는 아직 뿔을 감추지 못하기에, 리시는 갑자기 찾아온 미르가 유니콘용 별실에 관심을 보이지 않도록 막아야 했다. ...

다행히 미르는 케이의 흑마인 블랙에게 관심이 많은 듯했다. ...

“전에 케이가 이 녀석을 타고 전장을 달리는 걸 본 적이 있죠. 그걸 그린 백작 부인도 봐야 했는데.” ...

“그리 멋있었나요?” ...

“나보다는 아니지만.” ...

“아하.” ...

농담인가 싶어서 미르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몹시 진지했다. ...

“그나저나 백작 부인은 여전히 아름답군요. 케이를 만나기 전에 날 만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

“……미르. 지금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잊은 모양인데.” ...

미르의 옆에 서 있던 케이가 말했다. ...

미르가 하하하 웃었다. ...

“이런, 이런. 백작 부인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서 자네가 눈에 들어와야 말이지.” ...

“눈이 너무 약한 거 아닌가? 의원을 찾아가서 눈에 좋은 약이라도 지어 먹지그래?” ...

“자네는 자네 부인의 미모가 눈이 멀 정도로 눈부시지는 않다는 말인가?” ...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

리시는 케이가 이렇게까지 난처해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케이가 미르를 이길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

“하여간 미르. 메어리 공주를 보겠다고 가더니, 벌써 보고 돌아온 건가?” ...

“아, 메어리 공주. 이 몸이 몸소 방까지 찾아갔는데, 응접실에 가서 기다리라더군. 그래서 한참을 기다렸는데 오지 않아서 관뒀네.” ...

“얼마나 한참 기다렸는데?” ...

“5분 정도.” ...

“……아, 그래. 영원처럼 긴 시간을 기다렸군. 자네는 참 인내심이 대단해.” ...

“자네는 정말 사람 볼 줄 알아. 내가 그래서 자네를 좋아해.” ...

“그래. 난 항상 자네의 뜨거운 사랑 때문에 타죽을 것만 같았어. 그러니 내가 타죽지 않게 좀 가줄래?” ...

“그게 무슨 서운한 소리인가, 케이. 자네가 곧 저택을 비우는데 내가 그냥 돌아갈 수는 없지. 자네 없는 동안 람바족 잔당이 습격이라도 하면 어쩔 텐가?” ...

“미르. 내 부하들은 솜씨가 좋아.” ...

“나만큼은 아니겠지.” ...

미르의 우쭐한 표정을 보며 케이는 한숨을 삼켰다. ...

“자네 마음은 고맙지만…….” ...

“어려워할 거 없네, 케이. 자네가 돌아올 때까지 내가 이 집 주인처럼 여길 지킬 테니.” ...

“난 자네가 너무 어려워.” ...

“하하하하. 우리 사이에 뭘 그리 어려워하나. 편히 생각하게. 자네를 위해 저택을 지키는 개 노릇을 하는 것쯤은, 내게 별것도 아닌 일이라네.” ...

리시는 슬슬 자기 듣고 싶은 대로만 듣는 미르가 좋아지고 있었다. ...

“그나저나 백작 부인. 아까 오는 길에 내 보좌관에게 들었는데, 메어리 공주가 케이와 약혼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었다더군요. 헛소문이든, 진짜든 불쾌한 건 마찬가지일 텐데……. 이 녀석 뺨 좀 때려줬습니까?” ...

리시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

다들 쉬쉬하는 문제를 이렇게 대놓고 꺼내니, 별문제가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

케이는 그렇지도 않은지 얼굴이 파랗게 질렸지만. ...

“아껴뒀다가 나중에 모아서 때릴까 해요.” ...

“아, 현명하네요. 백작 부인의 작은 손으로 때려봐야 타격이 크지 않을 테니, 한 번에 같은 곳을 여러 대 때리는 게 그나마 나을 겁니다.” ...

“그렇겠죠?” ...

“미르, 제발 좀 가주겠어? 내 아내랑 단둘이 대화 좀 하고 싶은데.” ...

“아, 그렇지. 먼길 떠나기 전에 아내와 단둘이 하고 싶은 일이 많을 텐데, 실례했네. 백작 부인, 그럼 앞으로 필요한 일이 있을 때는 언제든 망설이지 말고 이 밀란시스를 불러주시길.” ...

미르가 리시의 손을 잡아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돌아섰다. ...

미르가 떠난 후에도 케이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마구간 문 쪽을 확인했다. ...

미르 성격에 한 번쯤은 더 돌아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케이의 예상대로였다. ...

벌컥- ...

문이 열리고 미르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

“아, 백작 부인. 그동안 말할 기회가 없었는데, 앞으로는 부디 미르라고 불러주세요.” ...

리시가 미소 지었다. ...

“알겠어요, 미르. 저도 리시라고 불러줘요.” ...

미르가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마구간 문을 닫았다. ...

그 후에도 잠시 마구간 문을 노려보던 케이는, 미르가 충분히 멀어진 후에야 리시를 돌아봤다. ...

“미안해요, 리시.” ...

“뭐가요?” ...

“미르는 좀…….” ...

“좋은 분이에요.” ...

“그래요?” ...

“응. 정말 좋은 분이에요.” ...

“뭐, 좋은 녀석이긴 하죠.” ...

“그런데 신성국에 간다고요? 별문제는 없겠어요?” ...

“아무래도 교황이 이번 일을 좀 의심하는 것 같아요. 잘 얘기를 해봐야죠.” ...

“만약 내가 성유물을 다룰 수 있다는 게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요?” ...

케이는 잠시 입을 다물고 리시를 가만히 응시했다. ...

“만약 당신이 유물술사라는 게 알려지면, 신성국으로 가야 할 거예요. 신성국에서는 당신을 내게 보내주려고 하지 않겠죠.” ...

“역시 그렇군요.” ...

“그리고 당신을 노리는 무리들이 많아질 거예요. 당신을 두고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고.” ...

“그렇군요.” ...

“충분히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성유물을 만질 생각하지 말아요, 리시. 당신을 잃고 싶지 않으니까.” ...

“어차피 당신 없이는 성유물 창고에 들어갈 수도 없잖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케이. 경거망동하지 않을게.” ...

“이 저택에 당신만 두고 가는 게 걱정이에요.” ...

“매번 저택을 떠날 때마다 그렇게 걱정할 거라면, 차라리 날 데리고 가지 그래요?” ...

“그것도 좋은 생각이지만.” ...

케이가 리시의 볼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졌다. ...

“내가 가는 곳은 더 위험해서.” ...

 

다음 날, 이른 아침. ...

케이는 월라스만 데리고 조용히 길을 떠났다. ...

리시와 제이미만 저택 정문까지 나가서 배웅했고, 메어리는 방 창문에서 케이가 떠나는 걸 지켜봤다. ...

제이미와 함께 본채로 돌아오는 리시를, 메어리는 한참 응시하다가 돌아섰다. ...

메어리는 곧장 리시의 방으로 향했다. ...

메어리가 눈짓하자, 시녀인 에메라가 얼른 방문을 노크했다. ...

“메어리 공주님께서 그린 백작 부인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

문이 열리고 크리시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

메어리는 이미 리시의 시녀들에 대해 조사를 해둔 터였다. ...

크리시나 페르니. ...

유명한 예술가를 많이 배출한 페르니 가문 출신. 기혼에 8살짜리 아들이 있었다. ...

그 뒤로 보이는 에르웰은 루테크 가문 출신으로, 가비자르 황립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

둘 다 평민이기는 해도, 친하게 지내서 나쁠 게 없는 가문이었다. ...

“백작 부인께선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

“어머나. 그래요?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

메어리가 모르는 척 물었다. ...

“네, 공주님. 돌아오시면 공주님께서 찾아오셨다고 전달하겠습니다.” ...

“음. 그래도 되겠지만…… 준비해둔 차가 아쉬운데. 아, 이건 어때요? 여러분이 내 방에 와서 차와 간식을 즐기는 건?” ...

“예?” ...

“우리나라의 산자락에서 나는 좋은 찻잎으로 우려낸 차인데, 향이 참 좋아요. 식기 전에 마시고 싶은데 혼자 마시는 건 좀 외로워서요. 타지이기도 하고.” ...

“아…….” ...

“같이 가서 함께해요.” ...

아무리 유명한 가문이라도 평민은 평민. ...

한 나라의 공주가 청하는 건 요청이 아닌, 명령에 가까웠다. ...

크리시나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감히 시녀 신분에 한 나라 공주의 청을 무시했다가, 그 일이 리시나 케이에게 불똥 튈 것이 걱정되었다. ...

“예, 알겠습니다.” ...

크리시나가 나와서 문을 닫으려는데, 메어리가 안쪽을 보며 말했다. ...

“거기 그쪽도요.” ...

크리시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

에르웰은 끌어들이지 않기를 바랐는데. ...

에르웰은 메어리가 이 저택에 막무가내로 들이닥쳤을 때부터 메어리를 끔찍이 싫어하기 시작했다. 에르웰 성격에 메어리가 공주라고 해서 참아줄지는 미지수였다. ...

“저 애는 백작 부인이 돌아오시면 해야 할 일이 있어서…….” ...

크리시나가 변명하려 했지만, 메어리가 말을 끊었다. ...

“백작 부인에게는 돌아오는 대로 내 방에 오라고 일러둘게요. 그러니 안심해요. 자, 다들 내 방으로 가죠.” ...

(74) 위험한 방법 (1) ...

크리시나가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

메어리는 시종일관 상냥하고 정중했다. 페르니와 루테크 가문의 사람들과 만나서 무척이나 기쁘다며, 예술에 관련된 다양한 지식을 나누었다. ...

은근슬쩍 리시를 욕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발그레 상기된 메어리의 뺨을 보면, 정말 두 사람을 만난 걸 순수하게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

크리시나와 에르웰은 두 시간 정도 메어리에게 붙들려 있었다. ...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그만 돌아가야 하죠? 백작 부인이 많이 기다리겠어요. 이리 오라고 전했는데 오지 않는 걸 보니, 아직은 내가 불편한가 봐요.” ...

크리시나는 그 말에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에르웰이 한소리할까 봐 걱정했는데, 의외로 에르웰도 조용했다. ...

“갑자기 이렇게 청해서 미안하다고 전해줘요. 아, 가끔 이렇게 여러분과 그림에 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도 전하고요.” ...

“네, 그러겠습니다.” ...

크리시나와 에르웰은 복도로 나와서 묵묵히 걸었다. 리시의 방이 있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온 후에야, 크리시나가 입을 열었다. ...

“엘, 왜 그렇게 조용해?” ...

“평소에는 닥치고 있으라고 숨도 못 쉬게 하더니, 왜? 이제 와서 미안해졌나 보지?” ...

“그게 아니라, 네 성격에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았거든.” ...

“그래도 가만히 있어야지 어쩌겠어? 미나스아릭 왕국 공주를 잘못 건드렸다가 그린 가문에 폐라도 끼치면, 난 우리 아버지한테 죽어.” ...

“그래, 너한테 그 정도의 생각은 있다는 게 다행이다.” ...

“잘해도 뭐라고 하네.” ...

“칭찬하는 거야.” ...

“칭찬은 옘병.” ...

툴툴거리며 걷던 에르웰이, 리시의 방에 들어가기 전에 걸음을 멈췄다. ...

“시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

“뭐가?” ...

“넌 못 느꼈어? 그년…… 아니, 공주 옆에 붙어 있는 시녀.” ...

크리시나는 메어리의 시녀들을 떠올렸다. ...

여러 명의 시녀 중, 유독 메어리와 가까이 붙어 있던 갈색 피부의 시녀가 한 명 있었다. 메어리는 그녀를 자신의 수석 시녀라고 소개했다. ...

“수석 시녀를 말하는 거야? 이름이…….” ...

“제인.” ...

크리시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에르웰은 남의 이름을 귀담아듣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

“그 여자, 평범한 시녀가 아닐 거야.” ...

“그래?” ...

크리시나는 메어리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시녀를 신경 쓸 틈이 없었다. ...

“만약 공주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많이 죽어 나갔다면, 그 뒤에는 그 여자가 있을 게 틀림없어.” ...

에르웰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크리시나는 에르웰의 눈을 믿었다. ...

“백작도 없는 상황이니, 우리가 백작 부인을 지켜야 해. 정신 똑바로 차려, 시니.” ...

 

+++

오찬을 하는 자리에는 엘디와 리시, 메어리가 있었다. ...

일국의 공주인 메어리가 상석에 앉아야 마땅했지만, 그녀는 엘디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

메어리는 엘디와 어릴 때부터 친한 사이라는 걸 과시하려는 듯, 엘디의 팔에 가볍게 손을 얹고 웃기도 하고, 둘만 하는 과거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

엘디도, 메어리도 먼저 리시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리시 역시 그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

리시가 담담히 식사를 끝내고 일어서는데, 엘디가 처음으로 리시를 쳐다봤다. ...

“형수. 이따 좀 봐.” ...

“그러든가.” ...

리시는 툭 내뱉듯 말하고 먼저 식당에서 나갔다. ...

메어리가 눈썹 끝을 내렸다. ...

“어머나. 무례해라…….” ...

“내가 무례한 게 하루이틀 일은 아니잖아.” ...

“아니, 그대 말고요. 백작 부인이 그대에게 왜 저렇게 말하는 거죠? 그대가 케이의 동생이라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

“그거야 형수 마음이지. 나도 내 마음대로 하니까.” ...

“그러면 안 돼요, 엘디. 서로 예의를 지켜야죠.” ...

“가족 간에 예의는 무슨.” ...

‘가족’이라는 말에 메어리가 잠깐 미간을 좁혔다가 얼른 표정을 풀었다. ...

“아무리 가족이라도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겠어요?” ...

“흐음.” ...

“그리고 엘디. 백작 부인 앞에서는 말할 수 없었지만, 솔직히 난 굉장히 놀랐어요.” ...

“뭘?” ...

“그대라면 케이가 그저 외모에 홀려 결혼하는 걸 반대할 줄 알았는데. 혹시 그대의 반대에도 케이가 무리하게 결혼을 강행한 건가요?” ...

“뭐, 비슷해.” ...

“역시 그렇군요. 아무리 봐도 백작 부인은 그린 가문에 어울리지 않거든요. 노백작님과 노백작 부인께서도 몹시 싫어하셨겠죠? 제레시엔 양은 말할 것도 없을 테고.” ...

“놀랍게도 말이야. 우리 부모님이랑 젠은 형수에게 꽂혔어.” ...

“예?” ...

“꽂혔다고. 케이보다 더 잘해주거든. 우리 가족은 형수라면 환장해.” ...

메어리의 낯빛이 굳는 걸, 엘디는 즐겁게 지켜봤다. ...

“하, 하지만……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결혼이었는데…….” ...

“그러게. 이렇게 갑작스러웠는데도 환장들을 하더라고. 믿을 수가 없지.” ...

그린 가문을 잘 아는 메어리로서는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 그 깐깐한 노백작 내외가, 그리고 어느 누구보다도 경계심이 많은 제레시엔이 리시를 좋아한다니. ...

“정말 짜증 나는 일이지. 형수가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다니까.” ...

다행히 엘디는 리시에게 홀리지 않은 듯했다. ...

“차라리 확 쫓겨날 짓을 하면 좋을 텐데, 묘하게 선을 지킨단 말이야. 신문에 날 만한 짓도 많이 했는데, 아주 잘 덮더라고.” ...

“나도 신문이라면 봤어요. 그걸 두고 노백작님께서는 아무 말씀 없으시던가요?” ...

“말했잖아. 홀렸다고. 다들 홀렸어.” ...

“그거 큰일이네요.” ...

“큰일이지.” ...

“뭔가 해야 하지 않겠어요? 케이와 그린 가문을 위해.” ...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뭘 하겠어?” ...

“만약 내가 힘을 보탠다면?” ...

“글쎄.” ...

엘디가 어깨를 으쓱했다. ...

“그래도 형수가 이미 우리 가족이라서. 미우나 고우나 가족을 건드릴 순 없지.” ...

메어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

“만약 누군가 그대의 형수를 건드린다면? 지킬 건가요?” ...

엘디가 씩 웃었다. ...

“그때그때 달라.”   ...

+++

리시는 서재에 있었다. ...

언제나 케이가 있던 서재가 오늘따라 황량하게 느껴졌다. 그가 저택을 떠나고 고작 몇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벌써 그리워지는 게 신기했다. ...

잠시 후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고 엘디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

“형수, 삐쳤어?” ...

“들어오자마자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

“내가 메어리 공주에게만 잘해줘서 삐쳤을까 봐.” ...

리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공주를 너무 긁지 마.” ...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형수는 형수가 할 일이나 해.” ...

“왜 만나자고 한 거야?” ...

“케이가 나한테 부탁했거든. 형수한테 마법을 가르치라고.” ...

“나는 마법에 재능이 없는데.” ...

마법은 노력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진 재능이 있어야만 그것을 성장시킬 수 있었다. 재능이 없는 자가 아무리 노력해봐야, 자연에 존재하는 마나를 느끼는 것 정도가 최선이었다. ...

“형수에게 재능이 없는 건 알아. 내가 가르치는 건 이론이야. 마법학 이론.” ...

“그걸 배우면?” ...

“케이는 그걸 배우면 성유물을 다루는 데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나 봐. 난 잘 모르겠지만.” ...

엘디의 설명에 따르면, 마법은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했다. ...

마나를 느끼고, 가두고, 가공시켜 내보내는 것. ...

“마나는 아주 예민하고 세심하게 다뤄야 하거든. 이 공기 중에 퍼져 있는 마나를 끌어들여서 그걸 응축시켜서 실처럼 만들어, 아주 작은 바늘구멍에 들여보내는 것 같은 걸 해내야 하는 거야. 그 과정의 이론이라도 익히면, 다른 힘도 그런 식으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

일리가 있었다. ...

“마나를 느끼는 것까지는, 평범한 사람도 노력만 하면 할 수 있어. 케이 말로는 형수가 상당히 영리하다고 하니까, 일주일 정도면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

“그렇게 빨리?” ...

“내가 말하는 건 마나의 전체를 느끼는 게 아니라, 그 편린이라도 느낀다는 거야. 긴가민가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이게 뭐지, 싶은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어느 순간 뭔가 다르다, 라는 느낌이 올 건데. 거기까지는 웬만한 사람은 다해. 아카데미 필수과정이라서 어린애들도 하는 건데, 뭐.” ...

그런 줄은 몰랐다. ...

리시는 마법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힘껏 배우기로 했다. 잘만 배워두면 나중에 성유물을 다룰 때 도움이 될 테니까. ...

어쩌면 의외로 마법에 재능이 있어서, 작은 마법이라도 하나쯤은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다. ...

엘디는 의외로 성실하게 가르쳤고, 리시 역시 밥 먹는 것조차 거르고 열심히 공부했다. ...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 때, 엘디가 외쳤다. ...

“이런 멍충이를 봤나!” ...

 

+++

“엘디가…… 그린 백작 부인에게 소리를 질렀다고요?” ...

“네.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멍충이를 봤냐며 고함을 쳤어요.” ...

시녀의 보고에 메어리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

지난번 엘디가 메어리 편인 것처럼 말하기는 했어도, 메어리는 몸을 사렸다. 혹시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

하지만 엘디가 멍청이라고 소리를 질러대는 걸 보면, 두 사람 사이가 나쁜 건 확실한가 보다. ...

이제 슬슬 움직여도 되겠다. ...

메어리는 시녀들을 물리고 제인만 남겼다. ...

“제인, 저택은 다 둘러봤니?” ...

“네.” ...

“어때?” ...

“명만 내려주시면 됩니다.” ...

“케이의 그림자들은 쉬이 볼 사내들이 아니야.” ...

“맞설 생각도 없습니다.” ...

“알겠어. 아직은 그냥 있어도 돼.” ...

메어리는 두꺼비 론이 들어 있는 유리 상자를 매만지며 미소 지었다. ...

“아직은.” ...

 

+++

리시는 울적했다. ...

엘디에게 ‘멍충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

문제는 거기에 대응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

‘맞아, 난 멍충이야.’ ...

일주일 전, 엘디에게 마법을 배우기 시작한 날, ‘어쩌면 작은 마법이라도 사용할 수 있게 될지도 몰라.’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

마법을 사용하다니. ...

마나를 느끼지도 못하는데. ...

엘디가 가르치는 방식에는 문제가 없었다. ...

엘디는 투박하지만 세세하게 가르쳤고, 의외로 인내심도 있어서 리시가 모르는 부분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알려주었다. ...

그래도 못 하겠어서, 혹시 엘디가 잘못 가르쳐주나 싶어, 젠에게까지 통신을 넣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젠이라면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젠의 설명 또한 엘디와 같았다. ...

결국 리시가 문제였다. ...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아이리스 님. 마나를 읽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이상한 일도 아니에요.” ...

리시가 요새 뭘 하는지 아는 크리시나가 안쓰러운 듯 말했다. ...

“크리시나도 마나를 느낄 줄 모르나요?” ...

크리시나가 입술을 오므렸다. 난처한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마나를 느낄 줄 아는 모양이다. ...

“에르웰은요? 에르웰은 마나를 느낄 줄 알아요?” ...

에르웰이 먼 산을 응시하듯 시선을 허공에 던졌다. ...

“나만 못 하네요.” ...

리시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

크리시나와 에르웰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크리시나가 고개를 휘휘 저었고, 에르웰이 ‘왜?’ 하듯 눈을 부릅떴다. ...

마침 고개를 들다가 그 장면을 본 리시가 말했다. ...

“혹시 두 사람, 다른 방법을 아는 게 있는 거예요?” ...

“아니, 그게 아니라…….” ...

“하나 있어요.” ...

크리시나의 말을 끊으며 에르웰이 말했다. ...

퍼억-! ...

크리시나가 에르웰의 옆구리를 세게 때렸지만, 이번만큼은 에르웰도 물러서지 않았다. ...

“다만 아주 위험한 방법이에요. 일명, 죽다 살아나기라고 하죠.” ...

(75) 위험한 방법 (2) ...

  저녁 식사가 끝난 후의 늦은 밤. ...

백작가 근처 숲의 공터에는 네 명이 은밀하게 모여 있었다. 리시와 그녀의 두 시녀, 그리고 미르였다. ...

그들은 후드를 깊이 뒤집어쓰고 둥글게 서서 서로를 마주 봤다. ...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미르였다. ...

“이러고 있으니 마치 사랑의 도피라도 하려고 모인 것 같군요.” ...

“그럴 리가요, 미르. 우리 둘만 있는 것도 아닌데.” ...

“사랑의 도피에 레이디의 시녀가 동행하는 건 흔한 일이죠.” ...

리시가 정말이냐고 크리시나를 돌아봤다. 크리시나는 전혀 못 들어본 말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

“그런 건 됐고요, 미르. 아까 편지에 일러둔 대로, 나는 오늘 죽다 살아나는 방법을 써보려고 해요.” ...

“흐음. 글쎄요, 리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은데.” ...

미르가 지팡이로 바닥을 툭툭 쳤다. ...

“우선 부인이 굳이 마법을 배우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르나 본데, 케이의 그림자들은 질투 날 정도로 강하거든요. 그들이 리시를 지킬 겁니다.” ...

“내 몸은 내가 지키고 싶어요.” ...

마나를 느끼려는 건 그런 이유가 아니었지만, 미르에게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

“그리고…… 마나를 느끼는 정도라면 어렵지도 않아요.” ...

그러면서 미르는 리시가 지금껏 엘디와 젠, 그리고 에르웰에게까지 들은 설명을 다시 한번 되풀이했다. ...

그 방법으로 안 돼서 이걸 하려는 건데. ...

“뭐, 나야 태어날 때부터 느낄 수 있었으니 이론만 알지만, 어쨌든요. 내가 아카데미 학생일 때, 동기 중에서 끝까지 마나를 느끼지 못한 건 제일 멍청한 녀석 한 명밖에 없었어요. 그 녀석은 바보로 유명했죠. 부인은 영리하니까 정식으로 공부하면 금방 마나를 느끼게 될 겁니다.” ...

‘아니요, 난 멍충이예요. 아카데미에 다녔다면, 마지막까지 마나를 느끼지 못한 멍청이가 내가 됐겠죠. 바보로 유명해지기도 할 거고.’ ...

라는 말을 삼키고 리시가 말했다. ...

“지금 당장 마나를 느끼고 싶어요. 진짜로 죽는 것도 아니고, 그 직전까지만 하는 거잖아요. 대공은 마법을 쓸 수 있으니, 만약 위험하다 싶으면 날 구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해줘요.” ...

“이런, 이런.” ...

미르가 연극배우처럼 과장되게 고개를 저었다. ...

“이렇게나 날 신뢰하다니. 그렇게 아름다운 눈으로 날 보면서 부탁하면 거절할 수 없다는 건 어찌 알고.” ...

“……미르?” ...

“좋습니다, 리시. 케이가 돌아왔을 때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그런 거죠? 그런 거라면 도와주죠. 나도 그 녀석이 깜짝 놀라는 얼굴을 보는 게 좋으니까. 도통 놀라지 않는 녀석이거든요.” ...

케이는 미르를 볼 때마다 놀라는데, 정작 미르는 그걸 모르는 듯했다. ...

어쨌든 마법사인 미르의 도움까지 얻게 됐다. ...

리시는 미루지 않고 곧장 호수로 향했다. ...

에르웰이 알려준 ‘죽다 살아나기’라는 방법은 이랬다. ...

마나는 물속에서 더 쉽게 느낄 수 있는데, 다만 그게 느껴질 때까지 물속에 잠수해야만 한다. ...

숨을 멈추고 물의 흐름을 느끼다가 딱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순간에, 오감이 예민해지고 시간의 흐름이 느리게 느껴지면서, 마나를 느낄 수 있게 된다고 한다. ...

이 방법을 쓰다가 숨이 막혀서 죽는 상황도 몇 번 발생했기에, 마탑에서 금지시켰다. ...

호수에 도착한 후, 미르는 리시에게 몇 번이나 연습시켰다. ...

리시는 호수에 얼굴을 담그고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수십 번을 확인한 후에야, 물에 들어갈 수 있었다. ...

“리시, 다시 말하지만 2분입니다. 정확하게 2분 후에 건져낼 거예요. 하지만 도저히 못 버티겠다면 중간에 포기해야 합니다.” ...

“알겠어요.” ...

“아이리스 님, 다시 생각해보세요. 아무래도 이 방법은 관두시는 게…….” ...

크리시나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

리시는 그저 미소를 지어주고는 씩씩하게 호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

물이 가슴 높이로 올라오는 곳에 다다른 후, 리시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물속 깊이 잠수했다. ...

들어오기 전, 커다란 돌을 다리와 허리에 묶어뒀다. ...

몸은 뜨지 않고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았다. ...

처음에는 숨을 참을 수 있었다. 모두에게 배운 대로 물속에서 마나의 흐름을 느껴보려고 노력했다. ...

시간이 지나자 폐가 공기를 원하며 비명을 질러댔다. 심장이 쿵쿵 뛰고 폐가 터질 듯 아파졌다. 입을 벌리자 차가운 물이 벌컥벌컥 들어왔다. 보골보골 폐에 남아 있던 공기가 터져 나왔다. ...

이런 상황이 될 거라고 주의를 받긴 했지만,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

죽는다! ...

두려움에 팔다리를 저었지만, 돌이 묶인 몸은 위로 올라가지지 않았다. ...

온몸을 지배하는 차가운 물과 고통 속에서, 리시는 마지막 숨을 내뱉었다. ...

+++

어둠이었다. ...

어디를 둘러봐도 어둠이었다. ...

리시는 이곳이 어딘지 알고 있었다. ...

서 있는 건지, 누워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공간. ...

그 허무 속에서, 리시는 멍하니 어둠을 응시했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언젠가 오게 되더라도 아주 먼 훗날일 줄 알았다. ...

‘죽은 건가? 정말로? 그렇게 멍청하게?’ ...

지난번에 이곳에 왔을 때처럼 영상이 흘러가지는 않았다. ...

그저 어둠만이 존재했다. ...

‘아니, 아닐 거야. 죽다 살아나기라고 했으니까 분명 되살아날 수 있을 거야. 곧 모두가 날 건져낼 거고, 미르가 날 치료해주겠지. 물에 빠진 사람도 빨리 구조하면 살아날 수 있잖아.’ ...

미르는 2분 후에 건져낼 거라고 했다. 하지만 2분은 한참 후에 지났다는 걸, 리시는 알고 있었다. ...

10분, 20분…… 어쩌면 하루, 이틀. ...

소름이 끼칠 정도로 긴 시간 속에 파묻혀 있는 것만 같았다. ...

그 시간 속에서, 리시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질책했다. ...

케이를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무리한 짓을 하고 말았다. 뭐든 살아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인데, 제 스스로 죽음에 발을 들여놓고 말았다. ...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

어렵게 잡은 기회를, 이런 식으로 바보처럼 날려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

-행복해? ...

긴 시간을 지나,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환청인 줄 알았다. ...

-행복해? ...

또 한 번 들려왔을 때야, 리시는 이 목소리 역시 들어본 적 있다는 걸 깨달았다. ...

지난번 죽었을 때, 죽음 속에서 들었던, 새가 지저귀는 듯한 목소리. ...

“아직.” ...

리시는 말했다. ...

“아직 부족해.” ...

절박함을 담지 않기 위해 애쓰며 말했다. ...

“좀 더 행복해지고 싶어. 내가 원한 건 이 정도의 행복이 아니야.” ...

까르르, 하고 웃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수많은 아이가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성인 여성이 혼자서 웃는 것 같기도 한 소리였다. ...

-걱정하지 마. 이건 진짜 죽음이 아니야. 여긴 시간의 속도가 다르거든. ...

꿈속의 존재 같았던 목소리와 대화가 가능하다는 게 신기했다. ...

“내가 되살아난 건 네 힘이야?” ...

-응. ...

“넌 대체 뭐야?” ...

-유일한……. ...

“……리스!” ...

재잘거리는 소리가, 커다란 음성에 겹쳐서 사라졌다. ...

가슴을 압박하는 손길이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는 괜찮았던 폐에 불타는 것 같은 통증이 돌아왔다. ...

“콜록! 콜록!” ...

리시는 격하게 기침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

“고개만 돌려요, 리시.” ...

미르의 손이 리시의 턱을 잡아 옆으로 돌렸다. ...

리시가 물을 왈칵 토해냈다. ...

통증이 좀 줄었지만, 어마어마한 두통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

“윽!” ...

리시가 힘없이 손을 올려 머리를 짚자, 미르가 말했다. ...

“물에 빠진 후에는 심각한 두통에 시달리게 되죠. 크리시나, 이제 그만해도 돼요.” ...

리시의 가슴을 일정한 속도로 압박하는 건 크리시나의 손이었다. ...

리시가 정말 죽은 줄 알았는지, 크리시나의 눈가가 발갰다. ...

“괜찮으세요, 아이리스 님?” ...

리시는 대답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고개만 끄덕였다. ...

그랬더니 또 찌잉, 하고 머리가 아팠다. ...

“자, 일단 이걸 좀 마시고.” ...

미르가 건넨 작은 병을 크리시나가 받아서 조심스럽게 리시의 입술에 흘려넣어주었다. ...

따뜻한 기운이 퍼지며 두통이 조금씩 가셨다. ...

“어때요? 좀 낫습니까?” ...

“좀…… 낫네요.” ...

“그래요. 성과는요?” ...

“아. 잠시…… 시간이 필요해요. 아직 힘들어서…….” ...

“부인이 연약한 레이디라는 걸 깜빡했네요. 일단 방에 돌아가서 쉬는 게 좋겠어요.” ...

미르가 일어나더니, 생각지도 못한 일을 했다. 리시를 번쩍 안아 든 것이다.   미르가 별생각 없이 한 일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남편이 아닌 사내에게 이런 식으로 안겨서 방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

리시의 생각을 눈치챈 듯, 크리시나가 말했다. ...

“대공. 제가 들겠습니다.” ...

“그대도 레이디인데 무거운 짐을 맡길 수는 없지.” ...

무거운 짐이라니……. ...

리시는 요새 너무 많이 먹어서 살이 쪘나 싶어, 자신을 반성했다. ...

“제가 옮길 수 있습니다, 대공.” ...

크리시나가 거의 빼앗듯 리시를 안았다. ...

놀랍게도 크리시나는 힘든 내색 없이 리시를 안아 들고 척척 걸었다. ...

여자에게 이런 식으로 안기는 날이 올 줄은 몰랐기에, 리시는 미르에게 안겼을 때보다 더 당황했다. ...

“크리시나. 스스로 걸을 수 있어요.” ...

“안 돼요, 아이리스 님. 지금은 그냥 이대로 계세요.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

크리시나는 리시를 안고 빠르게 걸으면서도 숨을 헐떡거리지 않았다. ...

리시는 그제야 자신의 시녀에게 남다른 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

“내가 오랜 시간 깨어나지 못했나요?” ...

“그렇지는 않아요. 5분 정도?” ...

5분이라니. ...

리시는 그 어둠 속에 몇 달은 머물다가 온 기분이었다. 위아래도 느낄 수 없는 어둠의 공간에서 느낀 그 고독감은, 두 번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

보는 눈이 있어서 미르와는 중간에 헤어졌고, 리시는 크리시나의 품에 안긴 채 침실로 돌아왔다. ...

리시를 침대에 눕힌 크리시나가 말했다. ...

“더는 무리하지 마세요, 아이리스 님. 푹 주무시고요.” ...

“그래요. 나 때문에 늦게까지 저택에 머물게 해서 미안해요.” ...

“그런 거로 미안해하지 마세요. 내일 봬요. 좋은 꿈 꾸시고요.” ...

크리시나가 상냥하게 미소를 지어준 후, 침실에서 나왔다. ...

에르웰이 기다리고 있었다. 크리시나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

크리시나가 리시를 침대에 눕히다가 그 위에서 발견한 검은색 머리카락을 에르웰의 눈앞에 내밀었다. ...

케이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긴 길이의 머리카락. ...

“어떡할래? 네가 남을래, 내가 남을까?” ...

에르웰이 머리카락을 가져가서 킁킁 냄새를 맡은 후 씩 웃었다. ...

“애엄마는 함부로 외박하는 거 아니야, 시니. 내가 여기로 거처를 옮길게.” ...

 

+++

잠들 때까지도 약간의 두통이 사라지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여느 때보다도 개운했다. ...

미르가 준 약 덕분이었다. ...

리시는 깨자마자 눈을 감고 공기 중에 흐르는 마나를 느껴보려 했다. ...

엘디가 알려준 대로 몸의 긴장을 풀고 영혼을 자유롭게 풀어놓는 듯한 느낌으로……. ...

‘영혼을 자유롭게 풀어놓는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이지? 어떻게 다들 그 방법을 아는 거야?’ ...

문득 의문이 들었지만,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

죽음의 어둠 속, 리시는 존재했지만 육체는 없었다. ...

‘그런 기분인가? 둥둥 떠 있는지, 누워 있는지, 서 있는지 알 수 없는, 그런 거?’ ...

예상이 맞았나 보다. 그때의 기분을 떠올리며 노력하자, 아주 희미하지만 새로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

그것은 따뜻하기도 하고, 잘못 만지면 차가울 것 같기도 한, 아주 이질적인 흐름이었다. ...

‘이거구나.’ ...

생전 처음 느껴보는 것이지만, 그것이 마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한번 느끼자, 그 흐름을 따라가는 게 쉬워졌다. ...

손가락을 들어 그 흐름을 만져보려 할 때였다. ...

방문 밖에서 크리시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이리스 님, 일어나셨나요? 메어리 공주께서 찾아오셨습니다.” ...

(76) 환영 파티 (1) ...

리시가 이제 막 일어났기에, 메어리는 리시가 준비하고 나올 때까지 잠시 기다려야 했다. ...

메어리는 리시가 화려하게 꾸미고 나올 거라 예상했다. ...

원래 자기 연적을 마주할 때는 누구보다도 화려하고 예쁘게 치장하는 법이니까. ...

하지만 침실에서 나온 리시는 메어리의 예상을 한참 벗어난 복장을 하고 있었다. ...

흰색 셔츠에 카키색 조끼, 그리고 조끼와 비슷한 색상의 통이 넓은 바지와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부츠. ...

메어리는 깜짝 놀라 부채로 입을 가렸다. ...

“어머나. 그 꼴이……. 어머, 미안해요. 시장 거리를 떠도는 잡배인 줄 알고.” ...

일부러 속을 긁을 만한 말을 했지만, 리시는 싱긋 미소만 지을 뿐 별말 없이 메어리의 맞은편에 앉았다. ...

“그렇게 입고 다녀도 케이가 별말 안 하나요?” ...

“눈부시다는 말은 해주던데, 이게 공주님이 말씀하시는 ‘별말’일까요?” ...

“……아무리 그래도 신분에 어울리는 복장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

“상황에 따라 어울리는 복장을 하니, 공주님께서는 염려를 놓으셔도 됩니다.” ...

네가 딱 이 정도 가치야, 라는 의미를 담았다는 걸, 메어리는 간파했다. ...

짜증이 치솟았지만, 간신히 참았다. ...

여기서 감정을 드러내 봐야 리시의 말을 인정하는 꼴만 된다. ...

“어젯밤 어느 남성분께 안겨서 침실로 들어갔다 하던데, 어디 몸이라도 안 좋은가 걱정돼서 찾아왔어요.” ...

리시의 눈이 가늘어졌다. ...

메어리가 이런 시간부터 무슨 일로 찾아왔나 싶었는데, 이런 얕은 수작을 부리러 온 거였다니. ...

성가시다. ...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었답니다, 공주님. 여기 있는 제 시녀 크리시나가 절 안고 들어왔지요.” ...

“풉. 그럴 리가요. 여인이 그리 힘이 셀 리가 없잖아요. 백작 부인에게 뭐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케이가 없다고 해서 사내의 품에 안겨 침실에 들어가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하죠.” ...

리시가 평온하게 중얼거린 말에, 메어리가 눈을 부릅떴다. ...

“공주님께 무례합니다, 백작 부인.” ...

메어리의 시녀 캐롤라인이 엄하게 꾸짖었지만, 리시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

“먼저 무례한 건 어느 쪽이었을까요, 러벨 백작 부인?” ...

“공주님께서는 그린 백작 부인을 걱정하셔서…….” ...

“그만해요, 캐롤. 아무래도 그린 백작 부인은 온실 속의 꽃으로 지내느라 사교계를 몰라서, 선을 지킬 줄 모르는 모양이에요.” ...

메어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캐롤라인을 달랬다. 메어리의 시녀들이 키득, 하고 작게 웃었다. ...

그러는 와중에도, 메어리의 수석 시녀라는 제인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아무 표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묵묵히 서 있었다. ...

리시 뒤에 서 있는 에르웰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제인을 노려보는 중이었지만, 리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

“오늘 찾아온 건, 내 환영 파티 문제로 의논할 게 있어서예요.” ...

리시는 메어리의 뻔뻔함에 기가 막힌 걸 넘어서서 재미있어지기까지 했다. ...

물론 귀한 손님이 방문하면 환영의 의미로 파티를 열기는 한다. ...

하지만 메어리는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이었다. 그런 주제에 케이도 없는 상황에 자신의 환영 파티를 여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몰염치가 놀라웠다. ...

“결혼식을 치르느라 무리했을 테니, 너무 화려하지는 않아도 돼요. 그린 가문은 검소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백작 부인이 들어오고 나서부터 씀씀이가 헤퍼졌다는 말을 들으면 안 되겠죠.” ...

리시는 미소를 머금고 메어리의 요구를 들었다. ...

“내가 초대하고 싶은 사람은 오늘 중으로 목록을 작성해서 넘기도록 할게요. 그 외에 백작 부인이 초대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초대해도 좋아요.” ...

“…….”

“준비 기간이 필요할 테니, 2주 후가 어떨까 싶은데.” ...

“…….”

“내 말 듣고 있나요, 백작 부인?” ...

“그럼요. 말씀하신 대로 준비하도록 할게요.” ...

몇 시간 후, 메어리가 초대객 명단을 보냈다. ...

눈에 익은 이름이 몇 개 보였다. ...

그중에는 브리트니와 알포드의 이름도 있었다. ...

‘내가 위틀로 가문과 연을 끊었다는 소리를 들었나 보네.’ ...

초대객 명단만 봐도 메어리의 검은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였다. 평화로운 파티는 아니리라는 걸 예상했지만, 지금은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

메르티움은 꾸준히 쌓이고, 상단에서 메르티움의 두 번째 판매 대금이 들어왔다. 쟈메트는 리시의 예상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

리시의 은행 계좌에는 40억 브리크가 있었다. 리시는 자신의 첫 번째 사업에만 40억 브리크를 전부 쓸 생각이 없었다. ...

‘내가 회귀하면서 건드리는 일들 때문에 상황이 바뀔지도 몰라. 보험을 들어둬야 해.’ ...

리시는 가우저에게 보유한 금액의 반을 맡길 테니, 원하는 대로 투자해보라고 전언을 보냈다. 가우저라면 빠른 시일 안에 큰 성과를 보여줄 것이다. ...

통신실에서 나온 리시는 제이미를 서재로 불렀다. 서재에 들어오자마자 제이미가 말했다. ...

“형수님. 메어리 공주의 초대객 명단에 관해 드릴 말씀이 있는데…….” ...

“아, 그거라면 나도 확인했어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

리시가 단호하게 말하자, 제이미는 더 이상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

“사업을 하나 시작하려고 해요.” ...

“사업이요?” ...

예상치 못한 말에 제이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케이는 리시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라고 했지만, 사업을 벌이는 건 다른 문제였다. ...

‘작은 찻집이라도 열려고 하시나? 아니면 살롱이라든가…….’ ...

그 정도라면 괜찮겠다고 생각하는데, 리시가 상상도 못 한 사업을 내밀었다. ...

“온천과 목욕탕 사업을 할 거예요.” ...

“예?” ...

온천. ...

제이미는 예전에 어느 나라에서 ‘온천’이라는 곳에 가본 적이 있었다. 일종의 목욕탕 같은 것인데, 땅 아래에 흐르는 뜨거운 물을 바로 파내서 사용하는 목욕탕이었다. ...

호화롭게 꾸민 온천은 귀족의 전유물이었지만, 저택이나 별장에 더 호화로운 욕실이 있는 귀족들은, 굳이 온천을 찾는 경우가 없었다. ...

특이한 걸 좋아하는 귀족들이나 가끔 방문할까? 투자한 비용에 비해 잘되는 사업은 아니었다. ...

“형수님. 목욕탕 사업은 좀…… 어려울 거예요. 일단 사업을 벌이려면 귀족이나 돈 많은 평민을 대상으로 해야 하는데, 그들은 이미 집에 목욕탕을 가지고 있어요. 만약 평민을 노리시는 거라면, 평민들은 그렇게까지 잘 씻는 편이 아니에요. 게다가…… 초기 비용이…….” ...

“돈이라면 있어요.” ...

리시가 통장을 내밀었다. ...

“그만큼씩 더 들어올 예정이고.” ...

통장 명세를 확인한 제이미의 눈이 아까보다 더 커졌다. ...

“메르티움을 파셨군요. 그것도 아주 좋은 값으로.” ...

“그래요.” ...

“하지만…… 그래도 잘될 사업에 투자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의상실이라든가…….” ...

“제이미.” ...

리시가 검지를 까딱까딱 움직이고 탁자 위로 몸을 숙였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제이미도 덩달아 리시 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

“계획이 있어요.” ...

리시는 목소리를 낮춰 소곤소곤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

제이미는 음, 음, 하며 열심히 리시의 계획을 끝까지 듣고 나서 말했다. ...

“확실히 좋은 계획이기는 하지만, 그게 잘될까요? 귀족들의 반발이 있을 거예요.” ...

“제이미, 이 세상에 더 많은 쪽이 어디죠? 평민인가요, 귀족인가요?” ...

생각할 것도 없었다. ...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뭘 해야 할까요?” ...

“온천과 목욕탕을 지을 대지를 사야 해요. 그린 백작령은 물론이고, 가비자르 제국과 스티무어 제국, 알레츠키 왕국의 주요 도시들까지 다 둘러보고, 적당한 땅을 섭외해두세요. 특히 여기.” ...

리시가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스티무어 제국의 웨번이라는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빈 땅이었다. ...

“여기는 스티무어 제국에서도 딱히 신경 쓰지 않은 땅이니, 저렴하게 팔 거예요. 모조리 사들이세요. 그리고 일 처리가 빠른 건축업자를 섭외해두고요.” ...

 

+++

“신년 파티에 가는데 이딴 걸 입으란 거야? 그웨니 후작 영애의 파티라고. 카멜린, 그 계집애가 주제도 모르고 날 라이벌로 생각하는데, 이딴 걸 어떻게 입어? 응?” ...

브리트니가 시녀들에게 빽 고함을 질렀다. 브리트니는 요새 짜증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 있었다. ...

요새 위틀로 공작가의 재정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그동안 베노트의 금광만 믿고 사치를 부린 것이, 몇 배나 큰 빚이 되어 되돌아왔다. ...

봉급과 영지에서 들어오는 세금, 이것저것 벌인 작은 사업들로 생기는 돈은 아직 한두 달을 기다려야만 수중에 들어왔다. 그때까지는 돈을 아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

브리트니는 살면서 돈을 아껴본 역사가 없었다. ...

아버지에게 철없이, ...

“그웨니 후작가 신년 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가 필요해요.” ...

라고 말했다가, 욕만 잔뜩 먹고 돌아온 터였다. ...

죄 없는 시녀와 하녀들에게 화풀이해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리시가 케이와 결혼한 후,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

‘걔는 다 잘되는데, 난 왜 이래?’ ...

작년 이맘때만 해도, 상황은 완전히 반대였다. ...

‘아니, 반대 정도가 아니었지.’ ...

리시는 청소를 하다가 시종과 잠시 대화를 나눈 벌로, 한 달 내내 골방에 갇혀 있었다. 몸가짐을 바르게 하지 않았으니 반성하라고, 하루에 한 끼 물과 마른 빵만 넣어줬다. ...

그랬던 리시가 이제는 그린 백작 부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사람들 앞에서 고고하게 웃는 꼴을 떠올리니 배알이 꼴렸다. ...

‘게다가 나는…….’ ...

신년 파티를 열 수도 없고, 새 드레스 한 벌 사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

부자는 망해도 3년이라고, 특별히 생활 수준이 떨어진 건 아니다. 하지만 시즌에 맞춰 의상을 구하지 못한다는 건, 브리트니에게 큰 충격이었다. ...

거기에 황태자비가 되는 일도 지지부진해지고 있었다. ...

‘이게 전부 아이리스, 그 계집애 때문이야.’ ...

리시가 정식으로 위틀로 공작가와 연을 끊었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다들 뒤에서 자기들끼리 멋대로 수군거리고 있었다. ...

성유물의 수호자 가문의 안주인이 된 리시에게 문제가 있을 리는 없으니, 위틀로 가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많았다. ...

브리트니가 황태자비가 되기 위해 뒷돈을 쓰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

“돈 문제겠죠. 금광이 생겼다고 사치를 어마어마하게 부렸잖아요. 거기에 황태자비가 되려고 돈도 얼마나 썼겠어요? 분명 돈 문제일 거예요.” ...

저번에 갔던 파티에서, 한 부인이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

어떤 영애는 걱정 가득한 눈으로, ...

“브리트니 양은 이런 파티에 와도 괜찮은 거예요?” ...

라고 묻기까지 했다. ...

걱정을 가장한 비웃음이었다. ...

그런 와중에 늘 열던 신년 파티도 열지 못하고, 남의 파티에 새 드레스도 입고 가지 못하면, 돈 때문에 리시와 연을 끊게 되었다는 게 기정사실이 될 것이다. ...

“아가씨. 이 드레스는 어떠세요? 3년 전에 딱 한 번 입으셨던 건데…….” ...

시녀가 푸른 빛이 도는 화려한 드레스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

“3년 전에 입었던 걸 또 어떻게 입어? 유행이 다르잖아, 유행이! 넌 그것도 몰라?” ...

브리트니가 시녀 루지나의 정강이를 발로 찼다. ...

루지나가 윽, 신음을 내며 뒤로 물러서서, 원망스러운 눈으로 브리트니를 쳐다봤다. 그 눈빛이 리시를 떠오르게 했다. ...

브리트니는 짜증이 솟구쳐서 시녀의 머리채를 잡았다. ...

“너, 그 눈빛 뭐야?” ...

“제, 제가 무슨 눈빛을 지었다고…….” ...

“그 눈빛 뭐냐고? 왜 그런 식으로 쳐다봐? 네가 감히 나한테 눈 맞출 주제나 돼? 망해서 돼지라도 치지 않으면 먹고살지도 못할 자작 가문 출신 주제에! 데려와서 좋은 옷 입고 내 시녀로 살게 해줬으면 감사할 줄을 알아야지.” ...

리시가 이 저택에 있을 때, 브리트니가 짜증 나면 받아주는 역할은 리시의 것이었다. 하지만 리시가 없는 지금, 브리트니의 짜증은 고스란히 시녀와 하녀들을 향했다. ...

루지나의 눈에서 눈물이 툭툭 흘렀지만, 브리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 욕설을 내뱉었다. ...

그때, 시종이 찾아와서 파티 초대장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

“하, 또 누구야?” ...

짜증스럽게 초대장을 받은 브리트니는, 초대장에 찍힌 그린 가문의 인장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

“아이리스…….” ...

보지도 않고 구겨버리려다가 생각이 바뀌어서 초대장 내용을 확인한 브리트니의 표정이 밝아졌다. ...

“메어리 케트벤 공주? 미나스아릭 왕국의 그 메어리 케트벤 공주를 말하는 걸까?” ...

브리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루지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

루지나는 얼른 눈물을 닦아내며 대답했다. ...

“네, 그 메어리 공주님이신 것 같아요.” ...

“아하. 메어리 공주.” ...

브리트니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한때 케이와 메어리 사이에 염분설이 돌았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어쩐지 이번 파티에 참여하면, 리시를 끌어내릴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만 같다. ...

(77) 환영 파티 (2) ...

  메어리의 환영 파티를 며칠 앞두었을 때, 케이는 신성국의 교황청에 도착했다. ...

케이는 접견실이 아닌, 교황의 응접실로 안내받았다. ...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교황 폐하.” ...

“결혼식 주례를 선 후, 무슨 일이 있을 만큼 오래 지나지도 않았다, 이 녀석아.” ...

안드리제 고델름 교황이 몸소 일어나 케이를 한 번 안아 주고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

“그래, 내 주례로 원하는 효과는 얻었느냐?” ...

“제가 뭐, 효과를 얻고 싶어서 그랬겠습니까? 존경하는 교황 폐하께서 친히 축복해주시기를 바랐을 뿐이지요.” ...

“여우 같은 녀석.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하면 되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사제를 이용해?” ...

“누가 위인 줄도 모르고 입을 나불거리는 녀석은 곁에 둬서 좋을 게 없습니다, 교황 폐하. 그런 녀석을 수족처럼 부리면서 이리저리 찌르고 다니는 놈을 곁에 두는 건, 더더욱 좋을 게 없고요.” ...

대신관 중 한 명인 산티아노 기푸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안드리제는 곧바로 알아들었다. ...

산티아노는 야욕이 있는 자로, 교황 자리를 탐냈다. ...

신성국의 교황은 전대 교황이 죽고 나면, 대신관 중 한 명이 물려받게 된다. 보통 교황은 죽기 전에 다음 교황을 지정하는데, 교황이 되기 위해서는 성유물의 수호자 가문의 지지가 필요했다. ...

산티아노는 케이와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기에, 케이의 약점이라도 잡아서 자기 편에 서게 하려는 중이었다. ...

“말씀만 주시면 치겠습니다, 교황 폐하.” ...

“산티아노는 재능이 뛰어난 아이다. 그 아이가 고친 병자들만 수백이지. 본질이 나쁜 아이는 아니니, 일단은 그냥 두어라. 젊은 치기에 욕심이 좀 생긴 것뿐일 테니.” ...

케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교황의 말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

교황청의 집안 문제는, 케이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은. ...

“그래서 여기에 부르신 이유는……?” ...

“람바족 토벌은 무사히 끝났느냐?” ...

“네, 걱정해주신 덕에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

“그래, 네 거짓말을 사람들이 믿어는 주고?” ...

안드리제의 지적에 케이는 적잖게 놀랐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

“교황 폐하. 저는 신을 섬기고 성유물을 수호하는 자로서 거짓말을 남발하지는 않습니다.” ...

“또 거짓말이로구나. 에잉, 쯧쯧.” ...

“…….”

“교황으로 지낸 나날만 수십 년이다. 내가 성유물의 힘조차 깨닫지 못할 것 같았느냐?” ...

안드리제가 엘디를 재촉해서 여기까지 부른 이유가, 단지 교황을 결혼식에 불러 사람들을 숨죽이게 하는 용도로 사용한 것에 대해 꾸짖기 위함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

‘영향권 아래에 계셨군.’ ...

리시가 슬리브 스톤을 사용한 것은 후야제 때라서, 교황은 이미 도시를 벗어나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을 줄 알았다. ...

슬리브 스톤의 영향력이 거기까지 미쳤을 줄은 몰랐다. ...

“내 종자 두 명과 성기사 세 명이 순식간에 잠들더구나. 하마터면 나도 잠들 뻔했지.” ...

“……제가 슬리브 스톤을 좀 과하게 사용했습니다. 염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

안드리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

“네 아내가 관계되었구나.” ...

“여기서 왜 제 아내가 나오는지 모르겠군요.” ...

“케이, 너는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 아이지. 그런데 슬리브 스톤과 관계해서 벌써 여러 번 거짓말하는구나.” ...

“교황 폐하, 저는…….” ...

“유물술사는 신성국에 들어와 특별한 세례를 받고, 신관이 되어야만 한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 ...

케이의 앞에서는 언제나 온화하던 안드리제의 눈빛이 냉정하게 빛났다. 그걸 보자 오히려 케이는 머리가 차게 식으며 이성이 돌아왔다. ...

케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

“교황 폐하께서 뭔가 오해하시는 모양입니다. 그 일은 람바족이 벌인 일이고, 제 아내는 그 일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

“케이브란트 그린.” ...

“풀네임을 부르셔도 소용없습니다, 교황 폐하. 이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제 목을 따더라도요.” ...

그 어떤 고문을 해도 내 입에서 ‘내 아내는 유물술사다.’라는 말이 나올 리는 없다는 의미였다. ...

안드리제의 눈빛이 누그러졌다. ...

“내가 어찌 네 목을 따겠느냐. 다만…… 눈에 띄는 짓은 하지 말거라, 케이. 나는 말년을 조용히 보내고 싶구나.” ...

“조용히 보내실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

“그래. 머물다 갈 게냐?” ...

“아직 신혼이라서요.” ...

안드리제가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그만 가보거라.” ...

“평온하십시오.” ...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선 케이가 응접실 문을 잡았다가, 뭔가를 떠올리고 안드리제를 돌아봤다. ...

“교황 폐하. 조만간 미나스아릭 왕국과 제 이름을 걸고 전쟁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소식이 들려와도 부디 모르는 척해주시길.” ...

“이 녀석아! 조용히 보내게 해준다면서!” ...

“모르는 척하시면 더없이 조용하실 겁니다. 그럼 정말로 이만.” ...

 

+++

미나스아릭 왕국 메어리 공주의 환영 파티에 참가하기 위해,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브리트니였다. ...

‘만약 날 문전박대하면 나도 할 말이 있어. 어머나, 백작 부인께서는 남자에게 홀려 연을 끊으시더니, 언니 볼 낯이 없으신가 봅니다, 라든가. 어머, 아이리스. 넌 예전부터 주인공이 되고 싶어 했지. 내가 있으면 그게 안 될 것 같니? 라든가.’ ...

브리트니는 이곳에 오는 내내, 리시가 문전박대할 경우를 대비한 말을 상상했다. ...

하지만 그린 백작 저택 정문에서 브리트니를 막아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문지기가 초대장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문을 열어준 것이다. 중간에는 시종까지 나와서 정중하게 브리트니를 서채로 안내했다. ...

“이봐. 케트벤 공주님은 어디에 머물지?” ...

“공주님께서는 본채에 머물고 계십니다.” ...

“아, 그래? 그럼 나 좀 거기로 안내해줘. 아니지, 아니지.” ...

공주를 멋대로 만나러 가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

“서신을 좀 전해줘.” ...

“알겠습니다.” ...

시종이 기다리는 동안, 브리트니는 메어리에게 줄 편지를 썼다. ...

시종은 브리트니의 편지를 가지고 메어리의 방으로 향했다. ...

브리트니의 편지를 확인한 메어리가 빙그레 웃었다. ...

‘역시 내 생각대로야.’ ...

이곳에 오기 전, 메어리는 리시에 관해 아주 세세하게 조사했다. 당연히 위틀로 공작 가문도 조사 범위에 포함되어 있었다. ...

‘두 딸 중, 어느 한쪽이 너무 우월하면 다른 한쪽은 질투하는 법이지. 거기에 아이리스가 위틀로 공작가와 연을 끊었다는 건, 남들이 모르는 여러 문제가 있었다는 거고.’ ...

메어리는 우선 브리트니를 만나보기로 했다. 쓸모가 있을지, 없을지는 만나보고 나서 결정할 일이었다. ...

+++

브리트니의 편지를 메어리에게 전한 시종은, 그 길로 리시에게 와서 그 사실을 알렸다. ...

리시는 브리트니가 메어리의 초대객 명단에 있을 때부터, 제일 먼저 이 저택에 오리라는 걸 예상했었다. ...

‘나는 기회를 주고 있어, 브리트니. 이번이 네 마지막 기회가 될 거야.’ ...

리시가 브리트니에게 기회를 주는 이유는, 아주 어릴 적의 기억 때문이었다. ...

브리트니가 처음부터 리시를 괴롭혔던 건 아니었다. 브리트니도 동생이 생겼다면서 기뻐하며 리시에게 잘해준 적이 있었다. ...

아주 잠깐이기는 해도, 브리트니에게 따뜻한 애정을 받은 기억이 있기에 주는 마지막 기회였다. ...

만약 브리트니가 이번에도 리시에게 헛수작을 부리려 한다면, 그때는 더 이상 봐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

“괜찮으시겠어요, 아이리스 님? 레이디 위틀로는 아이리스 님께 쌓인 게 많을 텐데요.” ...

크리시나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

“아이리스 님이 허락만 해주신다면 제가 가서 그 대가리…….” ...

퍼억-! ...

에르웰은 이번에도 무시무시한 소리를 하려다가 크리시나에게 옆구리를 세게 찔렸다. ...

리시가 담담히 말했다. ...

“남을 해하려 묶은 밧줄은 결국 자기 발목을 잡게 되죠. 브리트니가 조용히 파티만 즐기고 간다면 아무 문제 없겠지만, 문제를 일으키려 한다면 그 문제가 브리트니의 발목을 잡게 될 거예요.” ...

 

+++

미나스아릭 왕국의 공주를 위한 파티의 초대장은, 가비아르 제국 황실에까지 전해졌다. ...

이오벳은 주최자인 아이리스의 이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저 종이에 적힌 이름일 뿐인데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이리스. ...

‘그린 백작 부인이지.’ ...

리시는 단호하고 명료하게 말했다. ...

“아이리스입니다, 전하. 아이리스 그린이에요.” ...

그 거절은 ‘전 이미 남편이 있어요.’라든가, ‘이러시면 안 돼요, 전하.’라는 거절보다 날카로웠다. ...

‘나는 그린 백작 부인이야, 이오벳. 그린 백작은 네 친구 아니니?’ ...

부드럽지만 차가운 거절을 떠올리면 민망하고 한심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

이오벳은 초대장을 책상에 내려놨다. ...

아이리스의 이름을 보는 순간, 케이가 떠오르는 게 아닌 이상 그린 백작저에는 드나들지 않는 편이 나았다. ...

적어도 아이리스의 이름 하나에 심장이 내려앉지는 않을 때까지. ...

+++

이오벳이 그렇게 결정을 내렸을 때, 2황자인 라코젠도 초대장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

“메어리 케트벤이라…….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는 소문이 있지?” ...

“라코젠 님, 미나스아릭과는 척을 져서는 안 됩니다.” ...

보좌관 애덤의 말에 라코젠이 미간을 좁혔다. ...

“아니, 여기서 왜 미나스아릭과 척을 지는 얘기가 나와? 난 그냥 케트벤 공주가 예쁘지 않냐고 묻는 거잖아. 물어보지도 못해?” ...

애덤은 속이 끓었다. ...

그냥 묻는 거야 괜찮지만, 라코젠이 관심을 보이는 건 좋지 않았다. 라코젠은 다 좋은데 여자에게 너무 약했다. ...

“이 초대는 거절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라코젠 님. 그린 백작 가에서는 결혼식 때에 라코젠 님을 초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린 가문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들르시는 것은, 우습게 보일 여지가 있습니다.” ...

“뭐, 원래 결혼식 초대는 황궁에 잘 안 들어오잖아. 이오벳이야 그린 백작이랑 친구니까 초대를 받았던 거고. 게다가 이건 그린 가문에서 열리긴 해도, 케트벤 공주가 날 초대한 거라고. 나를 콕 집어서 말이야.” ...

“황태자 님도 초대장을 받으셨을 겁니다.” ...

라코젠의 눈빛이 차게 식었다. ...

애덤은 아차 싶었다. ...

여기서 황태자 얘기를 꺼내는 게 아니었다. ...

“그래, 내가 받은 초대장을 이오벳이 받지 못했을 리가 없겠지. 무엇이든 이오벳이 최우선이니까 말이야.” ...

“그런 의미가…….” ...

퍼억-! ...

쨍그랑-! ...

라코젠이 집어던진 컵이 애덤의 이마에 맞고 떨어졌다. ...

애덤의 이마가 찢겨 피가 흘렀지만, 라코젠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애덤 역시 손을 올려 이마에 흐르는 피를 닦는, 간 큰 행동을 하지 않았다. ...

“그린 백작저로 향할 준비를 해라.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메어리 케트벤 공주와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 있는 곳인데, 내가 가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안 그래?” ...

 

+++

브리트니는 서채에 마련된 손님용 방 창문 밖을 내다보며, 메어리를 만나서 어떤 얘기를 할지 고민하다가, 저 멀리 걸어가는 리시를 보았다. ...

리시는 엘디와 함께였다. ...

엘드허트 그린. ...

어린 나이에 성기사 작위를 받고, 빠르게 승진해 테세이 성기사단의 부단장이 된 엘드허트는,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남자 중 한 명이었다. ...

-“늑대처럼 거칠지만, 그 거친 면이 매력적이지 않아요?” ...

-“그 차가운 눈으로 날 쏘아보면서 이름을 불러주면 어떤 기분일까요?” ...

-“무례하게 행동하는데 미묘하게 선을 넘을 듯, 말 듯 하는 게 멋지더라고요.” ...

귀부인과 영애들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엘디는 지금 리시의 옆에 딱 붙어서, 뭔가를 진지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

하지만 리시는 성가시다는 듯 엘디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

‘자기가 뭐라고 저렇게 고고한 척을 해?’ ...

브리트니는 리시의 결혼식 전야제 파티에서 엘디에게 당했던 수모를 벌써 잊었다. 아니, 그 수모조차 리시의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원래 저 자리는 내 것이어야만 한다. ...

내가 저 자리에서 케이의 사랑을 받고, 엘디의 보호를 받고, 케이의 그림자들에게 대우를 받으며 도도하게 살았어야만 한다. ...

그런데 리시가 다 뺏어갔다. 내가 가져야 할 것들을 모조리 강탈했다. ...

‘하녀한테서 태어난 주제에…….’ ...

리시에게 주제를 알게 해주고 싶었다. ...

위틀로 저택에서 떠나기 전, 아버지가 백번쯤 “조용히 파티만 참석하고 와라. 응? 제발 조용히 파티만 참석하고 와!”라고 말했던 건 이미 잊었다. ...

브리트니는 창문을 열고 외쳤다. ...

“아이리스! 나, 지금 내려갈게. 잠깐만 기다려.” ...

(78) 예상을 뛰어넘는 여자 ...

  리시는 엘디의 잔소리를 듣는 중이었다. ...

“형수, 사업 투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형수가 영리한 건 알아. 메르티움이 발견된 덕에 돈이 많아진 것도 알고. 하지만 그런 식으로 공격적인 투자는 안 하는 게 좋아. 내 주위에만 해도 함부로 투자했다가 빚만 남은 놈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

“…….”

“형수는 위틀로 가에 갇혀 있다가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좀 더 세상을 알아보고 나서 시작하도록 해. 그전까지는 잘 모아두고. 아니면 작은 것부터 투자해보든가.” ...

“엘디. 너, 생각보다 말이 많다?” ...

“안 많게 생겼어, 지금? 버려진 땅을 전부 사들인다는데, 거기서 말이 없으면 그게 벙어리지.” ...

“나도 다 생각이 있…….” ...

“아이리스!” ...

그때, 리시의 말을 끊고 브리트니의 외침이 들려왔다. ...

리시는 고개를 돌려, 손님용 방 창문에 매달린 브리트니를 보았다. ...

브리트니는 세상에서 제일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는 듯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

“나, 지금 내려갈게. 잠깐만 기다려.” ...

기다려줄 의리는 없지만,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래서 걸음을 멈췄더니, 엘디가 말했다. ...

“못된 생각을 하는 표정이네.” ...

특별한 능력 때문인지, 엘디는 종종 리시의 속마음을 읽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

리시는 엘디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

“내가 얼마나 못된 생각을 하는지 알면 깜짝 놀랄 거야, 엘디.” ...

브리트니가 서채 건물을 나와서 이쪽으로 달려왔다. ...

브리트니는 달려오는 중에도 엘디의 시선을 신경 쓰는 듯, 예쁘게도 달렸다. 황금빛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며 달리는 브리트니는, 인형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

이윽고 리시의 앞에 멈춘 브리트니가 예쁘게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

“하아, 하아. 아이리스. 보고 싶었어. 어머, 그린 경도 있었네요.” ...

브리트니가 이제야 엘디를 발견한 척, 드레스 자락을 잡고 살짝 무릎을 굽히며 인사했다. ...

엘디는 고개만 까딱이는 거로 인사를 대신했지만, 브리트니는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생글생글 웃으며 리시에게 팔짱을 끼었다. ...

“아이리스. 그린 백작님은 어디에 두고 그린 경이랑 데이트를 하는 거야?” ...

“그린 백작님은 교황 폐하를 만나러 갔어.” ...

“아, 그렇구나. 난 또 네가 저번에 시종이랑 그랬던 것처럼…… 아, 아니다. 아니다. 미안. 그린 경이 있는 데서 할 말은 아니지.” ...

브리트니가 자기 입을 톡톡 두드리며 귀여운 표정을 지었다. ...

리시는 살며시 브리트니에게 잡힌 팔을 빼내고 말했다. ...

“아니, 그린 경이 있는 데서 말해도 돼. 그러니까 끝까지 말해봐.” ...

“어?” ...

“네가 하려던 말, 끝까지 해보라고.” ...

“아니, 그게…….” ...

브리트니는 리시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기에 당황했다. ...

하지만 곧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

“네가 전에 우리 시종인 드와프랑 제른을 동시에 유혹하는 바람에, 그 둘이 결투를 해서 네 마음을 갖겠다고 난리가 났었잖아. 그 때문에 드와프는 많이 다치고…… 제른도 널 보기 괴롭다면서 일을 그만두고.” ...

물론 그런 일이 있었다. ...

하지만 그 일을 벌인 건, 리시가 아니라 주방 하녀 중 유독 예쁘장하게 생긴 하녀가 벌인 일이었다. ...

하지만 엘디가 그걸 알아낼 방도는 없을 테니, 브리트니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떠들었다. ...

“아버지는 네가 자꾸 남자들 사이에서 그러니까…… 혹시 그린 백작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이 많으셔. 나도 그렇고…….” ...

브리트니는 리시가 해명할 줄 알고, 그에 대응할 말을 다 생각해뒀다. ...

하지만 리시는 해명하지 않았다. ...

“걱정할 거 없어. 이제 너랑 나, 아무 관계도 아니잖아?” ...

“그, 그거야 그렇지만…….” ...

중얼거리면서 슬쩍 엘디의 표정을 살폈다. ...

이런 얘기를 들었으니, 리시를 보는 눈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

하지만 엘디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 나무 위에 푸르르 내려앉은 독수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

엘디가 고갯짓하자, 독수리가 푸르르 날아올랐다. ...

리시가 걷자 엘디도 따라서 걸었다. 그 자리에 브리트니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

무시당한 브리트니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얼른 리시를 따라잡았다. ...

“그런데 둘이서 어디 가는 거야?” ...

“마구간.” ...

“마구간? 아아.” ...

브리트니는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그래서 짐짓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꾹 다물고 리시의 곁을 따라 걸었다. ...

이윽고 마구간에 당도했을 때, 브리트니가 풀썩 주저앉았다. ...

“하! 미안해, 아이리스!” ...

리시와 엘디가 걸음을 멈추고 브리트니를 돌아봤다. ...

“아무래도…… 나, 마구간에는 못 들어가겠어.” ...

트라우마라도 있는 것처럼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하며, 슬쩍 엘디를 올려다봤다. 이쯤에서 왜 그러냐고 물어봐 줘야 하는데. ...

“그래, 그럼.” ...

하지만 이유를 물어봐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저앉은 브리트니를 향해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도 없었다. ...

브리트니는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이대로 멈출 수는 없었다. ...

혼자서 주저앉았다가 스스로 일어나는 꼴이 우스울 거란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든 그린 가문에서 리시의 이미지를 안 좋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

브리트니는 자신을 내버려두고 마구간에 들어가는 엘디와 리시의 뒤를 따라 마구간 안으로 들어갔다. ...

수십 마리의 말들이 사는 마구간은 냄새가 지독했다. ...

“돼지우리 같은 냄새가 나…….” ...

브리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리시와 엘디는 유독 커다란 흑마를 살펴보고 있었다. ...

“나, 그 일이 떠올라. 우리 마구간 근처에 돼지우리 있었잖아. 그때 네가 한 짓 때문에, 난 아직도 돼지우리랑 마구간이 무서워…….” ...

이렇게까지 말했으면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겠지? ...

하지만 엘디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흑마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리시에게 말했다. ...

“그러니까 형수가 이 말을 혼자서 제대로 타야, 윈디도 탈 수 있을 거라고.” ...

“대단한 전문가 납셨네. 윈디를 볼 때마다 손을 깨물리는 주제에.” ...

“후. 그 녀석은 어린 녀석이 참 야물딱져. 아주 야물딱지게 물어뜯더라고. 제 주인 닮아서.” ...

마구간에 자기들 둘만 있다는 듯 행동하는 리시와 엘디의 태도에, 브리트니는 슬슬 수치심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

사람을 무시해도 어떻게 저렇게까지 무시할 수 있을까? ...

하지만 한번 시작한 일을 중간에 끝내면 더 민망해질 것 같았다. 들어주는 사람도 없건만, 브리트니는 말했다. ...

“아이리스. 네가 나한테 했던 말 기억나? 내가 네 옷 좀 입어봤다고 날 돼지우리로 끌고 가서 했던 말.” ...

그제야 리시와 엘디의 시선이 브리트니에게로 향했다. ...

‘됐어!’ ...

브리트니는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

“나한테서 돼지 냄새난다고…… 날 발로 차서 돼지우리에 집어넣었잖아. 그것 때문에 나는 똥독이 올라서 며칠을 앓았고…….” ...

브리트니는 마치 그날이 바로 어제의 일이라는 것처럼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

뽀얀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보며, 리시는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

. .

“돼지 같은 년.” ...

리시는 브리트니가 왜 이렇게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었다. ...

그저 복도를 지나가다가 마주쳤고, 고개를 숙이고 비켜서다가 브리트니의 치마에 살짝 몸이 닿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브리트니는 경악하며 몸을 부르르 떨더니, 리시의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

“야, 미쳤어? 왜 남의 드레스를 만지고 야단이야?” ...

“아가씨, 저는…….” ...

“아, 씨. 더러워 죽겠네. 야, 너 따라와!” ...

머리채를 잡힌 채 질질 끌려갔다. 본채에서 돼지우리까지 가는 그 긴 거리를,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브리트니에게 끌려갔다. ...

끌려가는 도중에, 하녀들 몇 명이 키득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

그들은 똑같은 하녀 출신인 리시가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고 불리는 걸 고까워했다. ...

돼지우리 앞까지 리시를 끌고 간 브리트니는, 리시를 돼지우리에 확 던져넣었다. ...

리시가 넘어지지 않고 버티자, 두 손으로 리시의 가슴팍을 밀었다. ...

털썩- ...

주저앉은 리시를 내려다보며, 브리트니가 말했다. ...

“너희 엄마랑 너는 저것들이랑 똑같아. 돼지라고, 돼지. 남의 남자 함부로 유혹한 너희 엄마도 돼지고, 돼지한테 태어난 너도 돼지야.” ...

브리트니의 발이 리시의 머리를 밟았다. 리시는 똥으로 더러운 바닥에 얼굴이 짓이겨졌다. ...

“돼지를 데려다가 옷도 입혀주고 먹여주면 감사한 줄 알고 몸을 사려야지, 어디서 남의 옷에 손을 대?” ...

“죄송해요. 제가 앞으로 더 조심할게요.” ...

“뭐야, 이 돼지. 왜 이렇게 꿀꿀대? 방금 이 돼지가 꿀꿀거리는 거 들었어?” ...

브리트니가 시녀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시녀들이 어머, 어머, 하고 웃으며 답했다. ...

“브리트니 님 말씀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 같네요.” ...

“어쩌면 조금 영리한 돼지일지도 모르겠어요.” ...

브리트니가 웃었다. ...

“영리해봐야 돼지지, 뭐. 너, 오늘은 여기서 자. 아무도 문 열어주지 마. 돼지우리 청소도 하지 말고.” ...

. .

그때 리시는 3일을 돼지우리에 갇혀 있었다. ...

똥독이 올라, 한 달 넘게 앓은 것도, 아무도 치료해주지 않아 죽을 뻔한 것도, 그럼에도 아픈 몸을 이끌고 청소를 하러 나가야만 했던 것도, 전부 리시였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 아이리스. ...

리시는 눈을 감았다가 뜨고 브리트니를 응시했다. ...

브리트니의 눈에서는 여전히 서러운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

리시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

“똥독이 올라서 앓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기는 하니?” ...

“응? 그거야 당연히 알지. 그때도 앓았으니까.” ...

“그래? 어땠는데?” ...

“그, 그건…… 어, 쓰라리고…… 좀…… 따갑고, 기침도 나고…….” ...

“달라, 브리트니.” ...

“응?” ...

리시가 브리트니를 향해 다가갔다. ...

브리트니는 리시가 자신의 뺨을 때리려고 하는 줄 알았다. ...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

리시가 얼마나 폭력적인 줄 알면……. ...

퍼억-! ...

하지만 리시는 브리트니의 뺨을 때리지 않았다. ...

그 대신 다리를 올려, 브리트니의 복부를 걷어찼다. ...

예상치 못한 공격에, 브리트니는 뒤로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

그게 하필이면 열려 있던 우리였고, 그 안에는 아직 치우지 않은 말똥이 널려 있었다. ...

철푸덕- ...

브리트니가 말똥 위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

처음에 브리트니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지 모르고, 눈만 꿈뻑거리며 리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철퍽- ...

하지만 바닥에 짚은 손이 질척거리는 무언가를 만졌다는 걸 깨닫고 정신을 차렸다. ...

“꺄아아아아아!” ...

자신이 무엇을 깔고 앉았는지 깨달은 브리트니는 비명을 질렀다. 허둥거리며 일어나려 했지만, 마음만 급해서 치마를 밟고 미끄러져 다시 넘어졌다. ...

그러는 동안, 리시도 엘디로 묵묵히 브리트니를 지켜보기만 했다. ...

이윽고 브리트니가 벌떡 일어났다. ...

“이게 뭐 하는 짓이야?” ...

“어머나. 말똥이 말을 하네.” ...

리시가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엘디를 돌아봤다. ...

“방금 들었어, 엘디? 말똥이 인간의 말을 해.” ...

“푸하하하하. 하하하하. 아, 미치겠네, 형수. 형수는 정말 항상 내 예상을 넘어. 하하하하하.” ...

브리트니의 절망적인 기분과 상관없이, 리시와 엘디는 즐거워 보였다. ...

브리트니는 이 모든 게 악몽처럼 느껴졌다. ...

‘나는 위틀로 공작가의 공녀야. 그런데 둘 다 내 앞에서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이게 무슨 짓이야?’ ...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

리시는 우아하게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

언젠가 이 반대의 상황이 있었다는 걸, 브리트니는 떠올리지 못했다. 그저 리시가 자신에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렀는지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

‘죽여버릴 거야.’ ...

브리트니는 손톱을 세웠다. ...

‘저걸 죽여버릴 거야.’ ...

누가 봐도 상관없었다. ...

지금 이 자리에서 리시를 죽이지 못하면, 밤에 잠도 못 잘 것이다. 적어도 내 몸에 묻은 오물을 리시도 뒤집어쓰게 해줘야만 한다. ...

브리트니는 리시를 향해 달려들었다. ...

(79) 브리트니의 수치 ...

탁- ...

브리트니는 리시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

막대 같은 것이 브리트니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

엘디가 대걸레를 가로로 들어 브리트니의 앞을 막고 있었다. ...

“이런, 레이디 위틀로. 그 꼴로 내 형수를 건드리는 건 안 되지.” ...

“날 이 꼴로 만든 건 당신 형수예요!” ...

“그래? 난 못 봤는데.” ...

“봤잖아!” ...

리시가 브리트니를 걷어찼을 때, 엘디는 분명히 눈을 똑바로 뜨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

“글쎄. 전혀 못 봤는데. 내가 눈이 좀 어두운 편이라서.” ...

“거짓말하지 마! 봤잖아! 아이리스가 날 걷어찼다고!” ...

브리트니는 다시 리시를 향해 달려들려 했지만, 엘디의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 ...

“레이디 위틀로. 관둬, 한 번 더 저 똥 밭을 구르고 싶지 않으면.” ...

엘디가 손에 쥔 대걸레 자루에 힘을 주며 말했다. ...

브리트니가 이를 으득 갈면서 엘디를 째려보고, 다시 리시를 노려봤다. ...

리시는 무심히 브리트니를 응시하고 있었다. ...

그 어떤 감정도 리시의 눈동자에 드러나지 않았는데, 브리트니는 그게 더 꼴 보기 싫었다. ...

‘네까짓 게 감히……!’ ...

지금 저 자리에 서 있는 건 자신이고, 여기서 수치를 당하는 건 아이리스여야만 했다. ...

항상 그래왔으니까. ...

리시는 그러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

그런데 왜 지금 내가 여기서 이 꼴을 하고 창피를 당해야 하는 거지? ...

울분이 차서 눈물이 흘렀다. ...

아까와는 다른 진짜 눈물이었지만, 그 자리에 그걸 안쓰럽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옆 우리에 있던 말 한 마리가 히힝 투레질을 하더니, 브리트니의 머리카락을 덥석 물었다. ...

“아악!” ...

브리트니가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았다. ...

리시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

“어디 가, 아이리스! 이걸 좀 어떻게 해봐!” ...

말이 브리트니의 머리카락을 우물우물 씹어댔다. ...

리시는 고개만 살짝 돌려 브리트니를 내려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

“너는 날 3일간 돼지우리에 가뒀지. 돼지들에게 밥도 주지 않아서 사나워진 돼지들이 날 공격했어. 나는 소리 지르고 빌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더라.” ...

“내가 언제…….” ...

“걱정 마. 난 널 가두지 않을 거야.” ...

리시의 얼굴에 더없이 달콤한 미소가 떠올랐다. ...

“너와 비교하면, 나는 정말이지 아량이 넓지 않니?” ...

“야!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 왜 사람을 모함해? 가지 마. 이걸 좀 어떻게 해보란 말이야! 너, 진짜 문제 일으키고 싶어서 그래? 우리 아빠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

브리트니가 악을 썼지만, 자기 할 말을 끝낸 리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구간을 나갔다. 엘디 역시 리시의 충실한 시종이라도 되는 것처럼, 리시의 뒤를 졸졸 따라 나갔다. ...

잠시 후에 들어온 마구간지기가 깜짝 놀라서 말을 밀어내고 브리트니를 풀어주었다. 마구간지기가 오물이 묻어서 엉망이 된 브리트니와 닿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에, 브리트니는 더 울화통이 터졌다. ...

씩씩거리며 방으로 돌아가는 브리트니를 보며, 하녀들이 소곤거렸다. ...

브리트니는 복도의 장식장에 놓여 있던 것을 아무거나 집어 들어 하녀들에게 마구 던졌다. ...

쨍강-! ...

쨍그랑-! ...

“꺅!” ...

“엄마야.” ...

하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흩어졌다. ...

“다 저리 꺼져!” ...

발을 동동 구르며 외친 브리트니는 복도에 아무도 남지 않게 된 후에야, 울음을 터뜨리며 방으로 돌아갔다. ...

문이 열리는 소리에 다가온 시녀들이 브리트니의 몰골을 보고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

브리트니는 오열하는 와중에도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

“감히 주인이 이 꼴이 돼서 왔는데 몸을 사려? 응?” ...

풀지 못한 분노는 고스란히 시녀들의 몫이 되었다. ...

브리트니는 오물이 묻은 손으로 시녀들을 때리고 잡아당겼다. 한참 시녀들에게 분을 푼 후에야, 브리트니는 씻으러 들어갔다. ...

시녀들의 시중을 받아 씻으면서, 브리트니는 이를 으득으득 갈았다. ...

‘아이리스, 정말로 죽여버릴 거야. 가만히 안 둘 거야.’ ...

브리트니는 아이리스를 죽일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기분이었다. ...

+++

엘디는 흘끔흘끔 리시의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

“저기, 형수. 그…… 맛있는 거 사줄까?” ...

마구간에서 나올 때부터 계속 눈치를 보던 엘디가 꺼낸 말에, 리시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갑자기?” ...

“아니, 그게…… 어, 뭐라도 좀 사줄까? 아니다, 레이디는 장신구를 받는 게 더 좋으려나?” ...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해? 소름 끼치게.” ...

“돼지우리에 3일간 갇혀 있었다는 게 정말이야?” ...

“아, 그거.” ...

리시는 그날의 일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

배가 고파서 점점 거칠어지는 돼지들. ...

그 지독한 냄새와 울음소리. ...

“응, 정말이야.” ...

“아…… 그거참…….” ...

엘디는 리시가 공작가에서 좋지 않은 대우를 받았다는 건 알았지만, 그 정도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

사람을 돼지우리에 가두다니. ...

“내가 9살 때 일인데,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네.” ...

“뭐? 9살? 그렇게 어릴 때 그런 짓을 당했다고?” ...

“내가 무슨 짓을 당했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 ...

“하!” ...

헛웃음을 터뜨리며 안절부절못하는 엘디의 모습에, 리시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

어차피 타인의 일이니 ‘다 지난 일이잖아. 잊어버려.’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텐데, 안 하던 말까지 해가며 리시를 위로해주려는 엘디의 다정함이 따스했다. ...

그래서 오히려 리시가 말할 수 있었다. ...

“다 지난 일인데, 뭐. 잊어버려.” ...

“그걸 어떻게 잊어? 그게 잊을 수 있는 일이야? 난 못 잊어.” ...

“네가 당한 것도 아니면서 뭘 그래?” ...

“형수, 이제 가족인데 그렇게 말하면 섭하지. 두고 봐, 형수. 난 이 일을 평생 안 잊을 거니까.” ...

“그래, 그래. 네가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 ...

리시가 건성으로 대꾸하며 걸어갔다. ...

고개를 살짝 들고 흔들림이 거의 없이 걸어가는 리시의 뒷모습을, 엘디는 묘한 기분으로 지켜봤다. ...

‘뭐지?’ ...

리시는 엘디보다 한참 어렸고, 엘디보다 한참 작았다. ...

그런데도 가끔 리시가 형인 케이보다 더 어른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

‘왜 내가 철없는 아들내미가 된 기분이지?’ ...

 

+++

늦은 오후, 브리트니의 시녀인 루지나가 리시의 방에 찾아왔다. ...

루지나의 팔에 멍이 들어 있는 걸 보고, 리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브리트니가 화풀이 대상으로 루지나를 선택한 모양이었다. ...

시녀 중에서 가문이 가장 좋지 않고, 지켜줄 사람도, 갈 곳도 없는 루지나. ...

하지만 리시는 루지나가 불쌍하지 않았다. 지난 삶, 브리트니의 시녀 중에서 리시를 가장 괴롭히고 조롱하던 인물이 루지나였다. ...

루지나는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괴롭히던 인물에게 고개를 숙이는 게 싫은 듯,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리시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

“브리트니 님께서 아까 있었던 일을 똑바로 사과하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했어……요.” ...

루지나는 위틀로 저택에서의 버릇이 나온 듯 반말을 쓰려다가, 에르웰과 크리시나의 눈치를 보며 ‘요.’를 덧붙였다. ...

리시는 하녀들에게도 정중한 어투를 사용했지만, 루지나에게는 그래 줄 생각이 없었다. ...

“내가 뭘 사과해야 하지?” ...

리시의 오만한 말투에 루지나는 눈을 부릅뜨고 리시를 노려봤다. ...

원래 이쯤 하면 고개를 숙여야 하는 리시는, 차가운 눈으로 루지나의 눈빛을 받아내고 있었다. ...

루지나의 눈동자가 흔들리다가 아래로 내리깔렸다. ...

“그게…… 그쪽이 우리 브리트니 님께 몹쓸 짓을 했다던데…….” ...

“무례하네요. 그린 백작 부인입니다. 위틀로 공작가의 고용인들은 예의를 배우지 않는가 봅니다.” ...

크리시나가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나무라자, 루지나가 찔끔 어깨를 떨었다. ...

“재수 없는 계집애. 주둥이를 콱 여물게 해버릴라…….” ...

에르웰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는, 루지나의 귀에까지 들렸다. ...

루지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

“무례한 거로 따지자면 그쪽도…….” ...

“루지나. 지금 내 사람들이랑 말다툼을 하러 온 거니?” ...

“아니, 그게 아니라…… 그쪽이 먼저…….” ...

“위틀로 공작가의 시녀가 그린 백작가 안주인의 앞에서 그리 행동하는 것이 알려지면, 욕을 먹는 건 어느 쪽일까? 내가 이 문제로 레이디 위틀로를 찾아가길 원하는 거니?” ...

“그, 그건 아니고…….” ...

“존댓말을 똑바로 사용하는 게 좋겠네. 네 행동 때문에 위틀로 공작가에 허물을 하나 더 씌우지 않으려면.” ...

루지나가 입안의 살을 씹었다. ...

리시의 태도가 고까웠지만, 여기서 행동을 잘못한 게 알려지면 결국 시녀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브리트니가 욕을 먹게 된다. ...

브리트니가 욕먹는 건 상관없지만, 그걸 루지나에게 푸는 게 문제였다. ...

“죄송합니다, 그린 백작 부인.” ...

“고개는?” ...

“어? 아니, 예?” ...

“고개도 숙여야지, 루지나. 사과하는 태도가 좋지 않네.” ...

루지나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

“그래, 이제 말해봐. 무슨 일 때문에 찾아왔지?” ...

“그쪽…… 아니, 그린 백작 부인이 우리 아가씨에게 한 일 때문에 아가씨가 몹시 화가 나셨어요. 사과를 원하십니다.” ...

“내가 무슨 짓을 했기에?” ...

“마구간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

“마구간에서? 정확하게 무슨 일인데?” ...

“말똥에…… 풉…… 아, 죄송해요. 말똥에 처박으셨다고 그러시던데…….” ...

리시 때문에 고까운 와중에도, 리시가 브리트니에게 한 짓은 루지나의 속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온몸에 오물을 묻히고 와서 오열하는 브리트니를 보는 게 얼마나 고소하던지. ...

물론 그 때문에 분풀이 대상이 되어야 해서 고통스럽기는 했지만. ...

“말똥…… 레이디 위틀로가 정말 그런 말을 했니?” ...

“네…….” ...

“나는 그런 기억이 없는데.” ...

“하지만 브리트니 님은 정말로 말똥을 온몸에 묻히고…… 풉…… 아, 아무튼 온몸에 말똥…… 풉…… 큭…… 아, 죄송해요. 아무튼 그랬어요.” ...

“흐음. 브리트니 양이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네. 나는 오늘 마구간에 간 적이 없거든.” ...

“그렇다면 브리트니 님을 그렇게 만든 건 누구죠?” ...

“그건 나도 모르지.” ...

“브리트니 님은 백작 부인이 하신 일이라고 했는데요.” ...

“증거가 있니? 목격자는 있고?” ...

“……그것까지는 저도 잘…….” ...

“내가 한 짓이 아니야, 루지나. 너도 알다시피 브리트니는 내게 누명을 씌우려고 거짓말을 하는 일이 많았잖아. 이번에는 마구간에서 구르고 내가 한 짓으로 몰아붙이려고 한 모양이지.” ...

리시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법도 했다. ...

리시가 위틀로 공작가에 있을 때, 브리트니가 시녀들을 시켜서 리시를 도둑으로도 만들고, 나쁜 년으로도 만들고……. 그런 일이 비일비재 했었다. ...

루지나는 바보가 아니었기에, 이 방에 와서 리시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리시가 더는 위틀로 공작가의 천덕꾸러기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

말투도, 눈빛도, 표정도, 그린 백작가의 안주인 그 자체였다. ...

‘위틀로 가문은 요새 돈도 없고…… 브리트니의 악다구니를 받아주는 것도 지쳤어.’ ...

루지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

‘차라리…… 아이리스에게 잘 보여두면, 나중에 쫓겨나도 갈 곳이 생길지도 몰라. 아이리스도 나랑 그간의 정이 있으니 날 내치지는 못하겠지.’ ...

계산을 끝낸 루지나는 자세를 더욱 예의 바르게 하고 말했다. ...

“역시 브리트니 님이 누명을 씌우려고 하신 것 같아요.” ...

“그래, 그럼 가서 잘 말해둬. 있지도 않은 일로 모함을 하면 이쪽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

“네.” ...

“그리고 아까 서채에서 부순 장식품들의 총금액은 5천만 브리크고, 위틀로 공작가에 청구하겠다고도 말해두고.” ...

“헉.” ...

루지나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

5천만 브리크라니. ...

요새 브리트니뿐만 아니라, 공작과 공작부인까지 돈에 아주 민감했다. 브리트니는 이번 파티를 위해 온종일 위틀로 공작을 졸랐지만, 드레스 한 벌도 얻어내지 못했다. ...

“그게…… 그렇게 비싼 거였나요?” ...

“알다시피 그린 가문은 신성국 소속이라, 교황청에서 귀한 장식품을 많이 보내주시거든.” ...

교황청에서 보내준 장식품이라면 더 큰 일이다. 그걸 부순 것만으로도 교황에 대한 반심을 품었다는 오해를 살지도 몰랐다. ...

“왜? 설마 위틀로 공작가에 고작 5천만 브리크가 없어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

“예? 아, 아니요. 아니요. 브리트니 님이 그런 짓을 하셨다는 것에 놀라서요. 저, 그럼 이만 가볼게요.” ...

루지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도망치듯 리시의 방을 빠져나왔다. ...

아직 리시가 루지나를 받아주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위틀로 공작가의 재정 사정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

‘하, 또 나한테 화풀이할 텐데…… 어떡하지?’ ...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돌아가던 루지나는 결정을 내렸다. ...

‘그냥…… 못 들은 거로 해야겠다.’ ...

(80) 복수하고 싶어. ...

서채에 묵는 브리트니가 하녀와 시녀들을 상대로 악다구니를 쓴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

“시녀들 몸에 멍이 들었더라고요.” ...

“하녀들은 또 어떻고요. 무서워서 서채 근처도 못 가겠어요.” ...

“서채 담당 시종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던데.” ...

“우리가 그린 백작가 하녀라서 정말 다행이야.” ...

“그러게 말이야. 아무리 공작가라도, 그런 대우를 받아서야…….” ...

“만약 백작님이 그 여자랑 결혼했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

“으아,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마. 꿈꿀까 봐 무섭다, 얘.” ...

리시는 시녀들에게 하녀들 사이에 퍼지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

‘브리트니가 폭주했네. 생각보다 빠른걸.’ ...

지난 삶, 브리트니는 무척이나 영악하게 행동했다. ...

리시를 괴롭히는 걸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고, 그 속에 가득한 욕심과 욕망 역시 잘 갈무리해서 숨겨두었다. ...

황태자비가 된 것은 가문 덕분이었지만, 황후 자리에 오른 후로는 그녀 자신의 힘으로 사람을 모으고 부리고, 그 결과 케이가 수인이라는 것까지 알아내서, 수인 말살에 앞장섰다. ...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

지난 삶의 브리트니는 언제나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서 마음에 여유가 있었고, 그 덕에 자신의 어두운 부분을 잘 감출 수 있었다. ...

하지만 이번 삶의 브리트니는 자기가 원하는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자, 그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 보였다. ...

‘게다가 지난 삶에서는 기분 나쁠 때 화풀이할 수 있는 상대가 정해져 있었지.’ ...

아직도 눈을 감으면, 후치스 저택까지 찾아와서 리시를 꼬집고 때리던 브리트니가 떠올랐다. ...

새롭게 얻은 삶을 지난 일로 물들여 복수에 미쳐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

그래서 위틀로 가문과는 연을 끊는 것 정도로 마무리를 지으려 했다. ...

‘하지만 이렇게 자꾸 찾아와서 눈에 띄면…….’ ...

복수하고 싶어지잖아. ...

+++

메어리는 웃음을 삼키고 브리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

‘내 상상보다 더 멍청한 계집애였네.’ ...

속내와는 달리, 메어리의 얼굴에는 걱정과 안쓰러움만 가득했다. ...

브리트니는 아까 마구간에서 벌어진 일을 털어놓는 중이었다. ...

“그렇게 갑자기 발로 차는데,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실 거예요. 거기다가 자기는 그런 적 없다고 발뺌하고…….” ...

“정말 속상하겠어요.” ...

메어리는 브리트니의 말을 하나도 믿지 않았다. ...

아무리 브리트니가 몹쓸 짓을 했다 해도, 리시가 브리트니의 배를 발로 차서 오물 위에 넘어뜨렸을 것 같지는 않았다. ...

“그린 경이 도와주려고 했는데, 그것도 못 하게 막더라고요.” ...

이걸로 거짓말 확정. ...

엘디가 아무 이유도 없이 여자를 도와주려고 한다고? ...

그런 일은 절대 없다. ...

‘엘디가 얼마나 못돼먹었는데.’ ...

브리트니가 거짓말쟁이인 건, 메어리에게 아무 타격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멍청한 거짓말쟁이는 써먹기 좋으니, 브리트니를 불러들이길 잘했다는 생각뿐이었다. ...

메어리는 브리트니를 위로하고 다독이며, 미나스아릭에서 가져온 고급 차를 대접했다. ...

아무도 브리트니의 편을 들어주지 않던 차에 메어리가 위로해주니, 브리트니는 감동에 겨워 눈물까지 맺혔다. ...

메어리는 슬쩍 입을 열었다. ...

“사실은 나도 백작 부인에게 수모를 좀……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못 들은 거로 하세요.” ...

“네? 무슨 일이신데요?” ...

“아니에요, 정말로. 그래도 레이디 위틀로의 동생인데…….” ...

“동생은요. 연을 끊은 지 오래예요. 이제 저랑은 아무 관계도 아닌걸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설마 아이리스가 공주님께도 못된 짓을 한 건 아니겠죠?” ...

“못된 짓까지는 아니고요……. 아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케이와 좀…… 소문이 있었잖아요.” ...

“네, 네. 그렇죠.” ...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기도 하고, 노백작 부인께서 내 이모님이나 마찬가지이기도 하니, 아무래도 사이좋게 지낼 수밖에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오해한 건지, 날 많이 경계하더라고요. 내가 케이를 뺏을 리 없는데, 뺏길까 봐 염려되는 건지…….” ...

“걔가 좀…… 그렇게 남을 질투하는 구석이 있어요. 자격지심 같은 것도 있고요.” ...

“어머나. 곱게 자란 줄로만 알았는데…….” ...

“사실 걔가…….” ...

거기까지 말하고 브리트니는 입을 다물었다. ...

아무리 그래도 리시가 하녀에게서 태어난 사생아라는 것까지 밝힐 수는 없었다. 그건 위틀로 공작가의 이름에까지 먹칠을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었다. ...

브리트니의 한 가닥 남은 이성이, 이 사실을 공표하면 좋지 않으리라고 경고했다. ...

메어리는 미소 띤 얼굴로 브리트니가 말을 잇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사실 걔가 어릴 때부터 좀 질투도 많고, 욕심도 많고 그랬어요.” ...

“그렇군요.” ...

“이제 아이리스랑 저랑 아무 관계도 아니긴 하지만, 무례를 범했다면 대신 사과드릴게요.” ...

“친절하기도 하셔라.” ...

브리트니는 슬슬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

아무래도 메어리는 브리트니가 생각한 만큼 리시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

‘나 혼자 떠들어대고 있었잖아. 이건 좋지 않아.’ ...

브리트니도 아주 바보는 아니었기에,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상대에게 모든 걸 터놔서 좋을 게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

“공주님께서는 할 일도 많으실 텐데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은 것 같아요. 이만 가볼게요.” ...

“어머, 벌써요? 나는 아직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있는데…….” ...

“아, 그러세요? 어떤……?” ...

“음…… 알포드 후치스 자작에 관한 것을 좀…….” ...

브리트니의 눈이 반짝 빛났다. ...

“아, 리시의 전 남자친구요?” ...

“그게 정말인가요? 처음에는 그렇게 소문이 나기도 했는데, 나중에는 아니라고 기사까지 떴잖아요.” ...

“그린 가문에서 힘을 좀 쓴 거 아닐까요? 사실 그 두 사람, 정말 뜨거웠거든요.” ...

브리트니는 있지도 않은 알포드와 아이리스의 사랑 이야기를 꾸며냈다. ...

심각한 표정으로 듣던 메이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

“나는 그것도 모르고 이번 파티 때 후치스 자작을 초대했네요. 상단 문제로 물어볼 것이 있어서 초대했는데, 나중에 가서야 후치스 자작과 백작 부인 간의 과거 이야기를 알게 됐거든요.” ...

“후치스 자작도 이번 파티에 와요?” ...

“네. 어떡하죠? 그린 백작 부인이 또 날 미워하면…….” ...

“에이, 설마요. 옛날에 그렇게 좋아하던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됐으니, 겉으로는 난처한 척해도 속으로는 좋아하겠죠.” ...

“그럼 다행이지만…….” ...

메어리는 여기서 승부수를 던지기로 했다. ...

지금껏 브리트니와 대화를 나눈 결과, 브리트니는 리시가 미워서 죽을 것 같은 지경에 이른 듯했다. ...

아직 한 가닥 남은 이성은 있는 듯해도. ...

‘살짝만 찔러주면 이성의 끈도 끊어지겠지.’ ...

메어리가 가짜 눈물을 흘리자, 브리트니가 허둥거리며 손수건을 꺼냈다. ...

“왜, 왜 그렇게 우세요, 공주님?” ...

“사실은…… 브리트니 양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나, 그린 백작 부인이 너무 미워요.” ...

“아…….” ...

“케이는 내 오라버니 같은 존재인데, 결혼했다는 이유로 말 한마디 못 붙이게 하고, 날 쫓아낼 수 없으니까 케이를 멀리 보내고…….” ...

“아, 그래서 그린 백작님이 지금 저택에 없는 거군요.” ...

“정말 무서워 죽겠어요. 얼마 전에는 날 계단에서 밀려고 했다니까요.” ...

“어머나, 어떻게 그런…….” ...

“죽여버리고 싶어…….” ...

작게 덧붙인 말을 브리트니는 놓치지 않았다. ...

“저도 그래요, 공주님.” ...

“네?” ...

“저도 아이리스를 죽여버리고 싶어요.” ...

바로 그 말을 기다렸다. ...

메어리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아무리 미움을 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참고 견뎌야죠. 그린 가문의 안주인인데,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잖아요.” ...

“물론 그렇죠. 하지만…… 만약 아이리스가 그린 가문의 안주인 자리에서 쫓겨난다면요?” ...

“그게 가능하겠어요? 그린 백작 부인, 보통이 아닌 것 같던데.” ...

“쫓겨날 만한 상황을 만들면 되죠.” ...

브리트니는 허리를 굽히고 소곤소곤 그 방법을 이야기했다. ...

여기까지 들었으니, 메어리도 브리트니가 발 벗고 나서게 하려면 하나를 던져줘야만 했다. ...

“사실은 브리트니 양, 나도 하나 생각해둔 방법이 있기는 해요.” ...

메어리도 소곤거리며 브리트니에게 자신의 계획을 전했다. ...

“이 두 개가 동시에 벌어지면 아이리스는 절대 그린 백작가에 남을 수 없겠네요.” ...

“그래요.” ...

두 여자는 서로 눈을 맞추고 은밀한 미소를 지었다. ...

메어리는 거기서 끝내지 않고, 보석함을 열어 미나스아릭 왕국의 인장이 새겨진 반지를 브리트니에게 건넸다. ...

“약속의 증표예요. 브리트니 양이 내 사람이라는 약속의 증표.” ...

브리트니가 환하게 웃으며 반지를 받아들었다. ...

“브리트니 양은 이제부터 내 친구예요. 브리트니 양은 아직 혼처가 정해지지 않았죠?” ...

“네? 아…… 네.” ...

사실 황태자비 자리를 노리고 있지만, 왠지 좋은 예감이 들어서 브리트니는 얼른 거짓말을 했다. ...

“내 동생도 아직 혼처가 정해지지 않았어요.” ...

메어리의 동생은 미나스아릭 왕국의 왕세자였다. ...

브리트니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

황태자비 자리를 놓치게 되더라도, 꽤 괜찮은 기회가 주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

메어리가 결연한 눈빛으로 브리트니를 응시하며 말했다. ...

“이 일만 잘 끝나면 내가 동생에게 언질을 해둘게요. 내 동생, 내 말이라면 껌뻑 죽거든요.” ...

 

+++

알포드는 메어리의 환영 파티 초대장을 받고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미나스아릭의 공주와 연을 틀 기회를 놓칠 수는 없기에, 다코트 시에 있는 고급 여관에 와서 묵고 있었다. ...

저번에 그린 백작저에 찾아갔다가 케이에게 몹쓸 짓을 당한 기억은 흐릿해졌다. ...

‘생각해보면 그놈은 그냥 협박했을 뿐이야. 나는 너무 깜짝 놀라서 그랬던 거고…….’ ...

오줌을 지릴 정도로 공포에 질렸었지만, 인제 와서 생각해보면 분위기에 눌려 그렇게까지 겁을 집어먹었던 것 같다. ...

이번에는 케이와 독대하는 게 아니니,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겸사겸사 그날의 일에 대해 사과를 받으면 더 좋고. ...

그런 마음으로 얼른 파티 날짜가 되기를 기다리는데, 늦은 밤에 후드를 뒤집어쓴 방문객이 있었다. ...

브리트니였다. ...

브리트니에게는 따질 것이 많았다. ...

하지만 그런 것들을 따지기 전, 브리트니가 미나스아릭 왕국의 인장이 찍힌 반지를 내보이며 말했다. ...

“후치스 자작. 우리를 위해, 해줄 게 있어요. 자작에게도 좋은 일일 거예요. 자작 뒤에는 미나스아릭 왕국이 있으니, 뒷일은 걱정하지 말고 우리와 함께해요.” ...

다음 날, 알포드는 당당하게 그린 백작 저택을 방문해 서채로 안내받았다. ...

+++

파티 이틀 전. ...

케이는 그린 백작 저택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 도시의 여관에 머무는 중이었다. ...

가장 빠른 말로 바꿔 타며 달리는데도, 저택에 돌아가는 길이 더디게만 느껴졌다. ...

“그거 알아, 월라스? 옛날에는 마법사들이 순간이동 같은 걸 할 수 있었대.” ...

케이가 열린 창문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검을 닦던 월라스가 건성으로 대꾸했다. ...

“그렇군요.” ...

“지금도 그 기술이 남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그걸 사용해서 당장 리시 곁으로 갈 텐데.” ...

“그렇군요.” ...

“고작 며칠 떨어져 있을 뿐인데 백만 년은 못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네가 리시였다면 좋았을 거야.” ...

“그렇군요.” ...

“월라스.” ...

“그렇군…… 아, 네.” ...

“너, 내 얘기 안 듣고 있지?” ...

“들어요. 다른 쪽 귀로 내보내고 있긴 하지만.” ...

“넌 내가 생전 처음으로 사랑에 빠져서 괴로워하는데, 그걸 공감해주지는 못할망정.” ...

“대장, 보통은 말이에요. 사랑에 빠져도 그걸 그냥 속으로만 생각하고, 그러거든요. 대장은 너무 나불거려요.” ...

“그게 대장한테 할 말이냐?” ...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

커다란 독수리 한 마리가 열린 창문으로 날아 들어왔다. ...

독수리를 알아본 케이가 얼른 창문을 닫았고, 월라스가 벌떡 일어나 가운을 가져왔다. ...

인간으로 변한 제이미가 가운을 걸치며 말했다. ...

“대장, 이틀 후에 저택에서 메어리 케트벤 공주의 환영 파티가 열려요.” ...

케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메어리가 열자고 했나 보군.” ...

“네. 초대객 명단을 확인했는데, 뭔가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하더라고요. 위틀로 가 공녀에 후치스 자작, 거기에 2황자까지.” ...

“라코젠을 불렀다고? 하, 이런.” ...

케이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

라코젠은 여성 편력이 화려한 자였다. ...

유부녀고 뭐고 가리지 않고 건드렸고, 상대가 거부하면 부끄러움도 모르고 날뛰어서, 보좌관은 그 일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하느라 전전긍긍해야 했다. ...

“리시는 뭐래?” ...

“별말씀 없으셨어요. 원하는 대로 해주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서채에 잉크와 편지지를 전부 바꾸셨어요.” ...

“잉크와 편지지를?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고?” ...

“네. 이번 파티 초대 손님이 오기 전에 싹 바꾸시더라고요.” ...

“그래, 리시가 뭔가 하고 있다면 문제는 없겠지만…….” ...

다른 것보다는 라코젠이 문제였다. ...

“라코젠을 잘 지켜봐. 그 미친놈은 귀부인 방에 몰래 숨어들기도 하는 놈이니까.” ...

(81) 반할 거라면 홀딱. ...

사실 리시는 알포드가 저택에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 자리에서 쫓아내고 싶었다. ...

알포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역겨웠다. 지난 삶, 그와 함께했던 모든 나날이 돼지우리보다 더 지독하고 끔찍했다. ...

그럼에도 쫓아내지 않은 이유는, 그를 피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고, 메어리와 브리트니가 알포드를 이용해서 뭔가를 하려고 하는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

그리고 브리트니의 수준으로 봤을 때, 뭘 하려는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

리시가 예상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브리트니는 물론 알포드까지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

브리트니와 알포드의 문제는 거슬리기는 해도 큰 걱정거리까지는 아니었다. ...

“2황자가 오고 있다고요?” ...

방금 제이미가 전해준 사실이, 리시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

“네, 방금 백작령에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5, 6시간 후면 도착하겠지요.” ...

“그렇군요…….” ...

메어리가 황태자와 그 아래의 황자들에게 초대장을 보낸 건, 한 나라의 공주로서 예의상 보낸 것이었다. ...

황족이 황실을 나와서 이동하는 건 큰일이기에, 보통 이럴 때는 사절을 통해 좋은 선물과 함께 환영 인사를 하는 것 정도로 그친다. ...

똑같이 초대장을 받은 황태자와 다른 황자들은 그렇게 했기에, 리시는 황족을 접대해야 한다는 건 염두에도 두지 않고 있었다. ...

게다가 다른 황자도 아닌 2황자 라코젠 옥보시더스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리시는 2황자 라코젠이 얼마나 방탕하고 무례한 사이코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리시가 미간을 좁히고 제이미를 올려다봤다. ...

“파티는 내일모레니까, 파티 당일까지는 마주치지 않도록 해야겠어요.” ...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

“몸살로 아파서 누워 있다고 해줘요.” ...

“그게 통해야 할 텐데요.” ...

“라코젠이 메어리와 브리트니의 미모에 푹 빠지기를 바라야겠죠.” ...

“차라리 그러면 다행일 텐데…….” ...

제이미는 자신의 아름다운 형수님을 응시했다. ...

미모로 치자면 메어리와 비슷하지만, 메어리에게는 없는 분위기가 리시에게는 있었다. ...

또래답지 않은 성숙함과 냉랭한 듯하면서도 따스한 느낌, 연약해서 바스러질 것 같은 외모 뒤에 숨어 있는 날카로움. ...

보는 눈이 없는 자도 느낄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리시를 남달라 보이게 했다. ...

수많은 여성을 만난 라코젠이 이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

“참 성가시네요.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위치에 있으면 이런 고민은 안 해도 될 텐데.” ...

리시의 음성에 짜증이 담긴 건 처음 들었다. ...

살짝 찡그린 눈으로 한숨을 내쉬는 리시의 눈동자에, 결연한 빛이 머물다 사라졌다. ...

“제이미,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좀 번거롭고 피곤한 부탁일 텐데.” ...

“얼마든지요.” ...

리시가 제이미에게 한 부탁은, 제이미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제이미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답했다. ...

“명대로 하겠습니다, 백작 부인.”   ...

+++

라코젠은 그린 백작가에 들어오자마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

황자의 방문에 미나스아릭의 공주까지 정문 앞에 나와서 환영을 해주는데, ‘위틀로 공작가의 꽃’일 것 같은 인물이 보이지 않았다. ...

마차 안에서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며 환영 인파를 살펴본 라코젠이 말했다. ...

“여기, 위틀로의 꽃은 없나?” ...

“여기 있습니다, 전하.” ...

사람들 사이에서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

길고 풍성한 금발을 반만 묶어서 고정하고, 인형 같은 얼굴을 가진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

“그대가 아이리스 위틀로인가?” ...

여자의 얼굴이 굳었다가 곧 부드럽게 펴졌다. ...

“브리트니 위틀로입니다, 전하. 아이리스는 이제 위틀로 가문이 아닙니다.” ...

“아, 그렇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하지만 그대는 꽃이 아니잖아.” ...

“예?” ...

“내가 보고 싶은 건 위틀로의 꽃이지, 그대가 아니야.” ...

브리트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지만, 라코젠의 관심은 메어리에게로 옮겨갔다. ...

“오, 케트벤 공주. 그대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 정말 예쁘군.” ...

메어리는 라코젠의 무례한 언사에 황당함을 금할 수 없었다. ...

황태자가 한 나라의 공주에게 이런 식으로 말해도 욕을 먹을 판에, 황태자 자리에 오르지도 못한 2황자 따위가 이런 무례를 범하다니. ...

하지만 힘없는 국가는 힘 있는 국가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얼굴에는 미소를 띠었다. ...

“감사합니다, 2황자님.” ...

“그런데 향이 없어.” ...

“예?” ...

“향이 없는 꽃은 매력이 없지. 기대했는데 실망이야, 공주.” ...

메어리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

‘뭐, 저딴 자식이 다 있어?’ ...

순식간에 두 여자를 분노하게 만든 라코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

“그래서, 위틀로의 꽃, 아니, 그린의 꽃이라고 해야 하나? 그린 가의 안주인은 어디 있지? 이 몸이 오시는데 안 나왔다고 하지는 않겠지?” ...

“2황자님.” ...

사람들 사이에서 제이미가 앞으로 나섰다. ...

라코젠이 반갑게 제이미를 불렀다. ...

“오, 러셀 경.” ...

“그린 백작 부인은 몸살이 심해 침대에서 일어나실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직접 나와 인사를 드리지 못해 사죄드린다고 하셨습니다.” ...

“아프다고?” ...

“네. 어젯밤부터 심하게 아파서 생사를 오가시는 상황이라…….” ...

“아파서 침대에 누워 있단 말이지?” ...

“네.” ...

“하! 기가 막히는군. 날 초대했으면서 아프다는 이유로 나와보지도 않아? 황족이 비루한 파티에 몸소 발길을 하면, 기어서라도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

“그렇지는 않습니다, 2황자님.” ...

보좌관 애덤이 작게 속삭이듯 말하자, 라코젠이 손으로 애덤의 뺨을 날렸다. ...

철썩-! ...

마차 안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날카로운 울림이 밖까지 퍼졌다. ...

모두가 찔끔 어깨를 떨었지만, 제이미만이 담담하게 고개를 들고 라코젠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

“내가 2황자라고 무시하는군. 황태자가 왔을 때도 이따위로 대우했나?” ...

“2황자님…….” ...

“당장 그린 백작 부인을 끌어내서 여기로 데려와! 데려오지 않으면 난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

 

+++

“역시 그렇게 됐군요.” ...

제이미의 보고를 들은 리시가 한숨을 내쉬었다. ...

슬쩍 창밖을 보니, 정문 앞에 선 황실 마차와 그 주위를 에워싼 사람들이 보였다. ...

미르와 엘디는 거기에 끼어 있지 않았다. 대공인 미르는 굳이 황실에 고개를 숙여야 할 입장이 아니었고, 신성국 소속인 엘디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

그린 백작가 역시 신성국 소속이기에, 가비자르 제국의 황자에게 쩔쩔맬 이유는 없지만, 아직은 강대국 황자의 심기를 거슬려서 좋을 것이 없었다. ...

만약 라코젠이 성질을 부리며 앞에 대령하라는 사람이 엘디였다면, 엘디는 순순히 라코젠에게 인사하기 위해 정문으로 향했을 것이다. ...

“어때요, 제이미?” ...

리시가 고개를 들어 제이미를 응시했다. ...

“무엇이요?” ...

“2황자가 내게 반할 것 같아요?” ...

“아……!” ...

제이미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

리시가 농담 같은 말을 너무 진지하게 물었기 때문이다. ...

“비웃지 말고요.” ...

“전 원래 웃는 상이에요, 형수님. 그리고…… 반할 거예요. 형수님은 정말 예쁘시거든요.” ...

“아무래도 그렇겠죠?” ...

“네. 아무래도 그래요.” ...

“어떡하죠?” ...

“그러게요. 못나게 만들 수도 없고…….” ...

“그런 종류의 마법 같은 건 없겠죠?” ...

“옛날에는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딘가에는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우리 저택에는 없어요. 밀란시스 공도 그 정도 마법은 사용 못 하고요.” ...

리시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

“내가 신성국의 가호를 받는 그린 백작가의 안주인이니, 2황자가 내게 무례를 범하지 않을 가능성은?” ...

“없어요.” ...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네요.” ...

리시가 크게 심호흡하고 꼿꼿하게 허리를 폈다. ...

“아, 형수님. 지금 그 자태는 너무 매력적이신데.” ...

제이미의 지적에, 리시가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

“어차피 반할 거라면 홀딱 반하게 만들어주는 게 낫지 않겠어요? 적당히 반해서 날 휘두르게 하느니, 푹 빠져서 내게 휘둘리게 하는 편이 낫겠죠.” ...

리시의 자신만만한 말에, 제이미는 고개를 숙였다. ...

“옳으신 말씀입니다.” ...

 

+++

라코젠은 못마땅한 기분으로 리시가 오기를 기다렸다. ...

만약 이곳에 온 게 황태자였다면, 리시가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내가 2황자라고 무시하다니…… 가만 놔두지 않겠어.’ ...

사람의 급을 나눠서 행동하는 여자에게는 아주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 아무리 신성국의 가호를 받는 집안이라도, 넘으면 안 되는 선이 있다는 걸 알려줘야 한다. ...

라코젠은 자기가 아래 사람들에게 하는 행동은 생각도 하지 않고, 리시에게 엄벌을 내릴 궁리만 하고 있었다. ...

그때, 본채 쪽에서 리시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게 보였다. ...

리시의 뒤로 시녀 두 명이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

꽁한 마음으로 리시를 기다리던 라코젠은, 그녀가 가까워질수록 머리를 그쪽으로 뺐다. 몸이 마차 창문 밖으로 튀어 나갈 정도였다. ...

묶지 않아서 겨울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은 햇빛을 받아서 달처럼 반짝였고, 그 아래의 작은 얼굴은 완벽한 이목구비가 알차게 채웠다. ...

예쁜 선을 그린 눈썹 아래의 커다란 눈을 채운 연보라색 눈동자와 붉고 도톰한 입술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찬 바람을 막느라 걸친 두툼한 털코트는 그녀를 마치 토끼처럼 보이게 했다. ...

그녀가 정원에 들어서는 순간, 찬바람에 마른 정원수가 푸른 잎을 내밀고, 흔적도 없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흩날리는 것만 같았다.   달칵- ...

라코젠이 마차의 문을 열고 나간 건, 거의 무의식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

저벅- 저벅- ...

라코젠은 꿈을 꾸는 사람처럼 몽롱한 표정으로 리시를 향해 걸어갔다. ...

추운 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지루하게 이 상황이 끝나던 사람들이 당황해서 양쪽으로 갈라졌다. ...

그 길을 따라, 라코젠은 걸어가 리시와 마주 섰다. ...

리시가 치맛자락을 잡고 무릎을 살짝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사라락, 흘러내리는 연분홍빛 머리카락에 눈이 시렸다. ...

“아이리스 그린이 2황자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

리시의 음성은 사막에 부는 바람처럼 건조했지만, 라코젠의 귀에는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들렸다. ...

“아이리스…….” ...

첫 만남에 이름을 부르는 것이 무례라는 생각 따위는 없었다. 생각이 있었어도 라코젠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

“아름답군. 명성보다 훨씬 아름다워.” ...

“감사합니다, 전하.” ...

“내 타입이야.” ...

라코젠이 고개를 들라고 명하지 않았는데도, 리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라코젠과 눈을 맞췄다. ...

보통 라코젠이 이런 말을 하면 여자들은 두 개의 반응을 보였다. ...

수줍어하거나 당황해하거나. ...

하지만 리시는 그 둘 중 어느 것과도 다르게 대처했다. ...

“그린 백작 부인입니다, 전하. 마지막 말씀은 거두어주십시오.” ...

옅은 미소를 띠고 있지만, 눈빛은 냉랭했다. ...

서늘하게 꽂히는 눈빛에 라코젠은 퍼뜩 정신 차렸다. 하마터면 저 미모에 홀려, ‘미안하다.’라고 말할 뻔했다. ...

“감히 내 말을 지적하는 건가? 감히?” ...

“그렇다 하면 어찌하시겠습니까?” ...

리시가 도발적으로 되물었다. ...

평소였다면 보는 눈이 있든 없든 손을 들어 그 뺨을 후려쳤을 것이다. 그 누구도 감히 이 몸에 대거리하게 둬서는 안 되니까. ...

하지만 지금 라코젠은 손을 움찔거릴 뿐 차마 리시의 작은 얼굴에 손을 날리지는 못했다. ...

라코젠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그린 백작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전하. 몸이 좋지 않아 늦게 나와 인사드린 것을 용서해주세요.” ...

“……몸이 좋지 않았다면 어쩔 수 없지.” ...

“서채로…… 콜록…….” ...

리시가 기침하는 모습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

한 번도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이 없었기에, 라코젠은 눈만 꿈뻑거리며 리시를 응시했다. ...

그러고 보니 리시는 너무 마르고 작았다. 겨울의 찬바람은 리시의 몸에 좋지 않을 듯했다. ...

“죄송합니다, 전하.” ...

“아니…….” ...

“서채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

“아니, 그…… 안내는 러셀 경에게 받아도 될 것 같군. 그대는 몸이 좋지 않아 보이니 그만 들어가.” ...

“하지만…….” ...

“어서.” ...

마음과 달리 성가시다는 듯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

이 말투 때문에 리시가 상처를 받았을까 봐 슬쩍 눈치를 봤지만, 리시의 평온한 눈빛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

리시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이토록 마음 넓게 신경을 써주시니, 2황자 전하께서 아량이 넓으시단 소문이 그저 소문만은 아닌 듯합니다.” ...

라코젠은 리시의 칭찬에 마음이 흐뭇해졌다. ...

그래, 내가 아량이 좀 넓긴 하지. ...

(82) 아이리스 그린의 삶 ...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

2황자의 아량이 넓다고? ...

그건 어느 세계의 이야기지? ...

특히 2황자를 곁에서 모시는 보좌관 애덤과 기사들, 시종들은 황당함이 얼굴에 드러날 정도로 경악하고 있었다. ...

애덤은 라코젠이 보는 눈도 신경 쓰지 않고 리시를 때리거나, 마음에 든다며 끌어안거나, 시중을 들라고 할까 봐 조마조마해하고 있었기에,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

라코젠에게 잡아먹힐 것만 같았던 작고 아름다운 여인은, 거대하고 잔혹한 맹수의 손아귀에서 풀려나 우아한 걸음걸이로 멀어지는 중이었다. ...

‘조련사……. 그린 백작 부인은 맹수 조련사야.’ ...

애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브리트니는 화가 치밀어 기절할 것만 같은 지경에 빠져 있었다. ...

브리트니에게, 아니, 메어리에게까지 그토록 무례하게 대했던 라코젠이 리시의 앞에서는 한 마리의 순한 양처럼 굴었다. ...

‘순한 양이 아니야. 애완견 같았지.’ ...

요새 귀부인들이 키우는 곱슬곱슬한 털을 강아지도, 리시 앞의 라코젠처럼 순종적으로 굴지는 않을 터였다. ...

‘도대체 왜? 왜 아이리스한테만 다들 잘해주는 거야? 쟤가 뭐라고? 쟤는 그래봐야 우리 집에서 하녀보다도 못하게 살았던 사생아라고. 더러운 핏줄이란 말이야.’ ...

옆을 흘끔 보니, 메어리도 분노에 찬 눈으로 라코젠을 쏘아보고 있었다. ...

‘그래, 차라리 잘된 일이야. 이걸로 메어리 공주도 아이리스가 더 싫어졌겠지.’ ...

리시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지만, 브리트니는 이 모든 게 리시 때문에 벌어진 일인 것만 같았다. ...

‘아이리스, 네가 그렇게 의기양양 해하는 것도 오늘까지만이야. 오늘 밤이면 너는…….’ ...

브리트니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

+++

라코젠은 서채에서 가장 넓고 좋은 방으로 안내를 받았지만, 방을 둘러볼 여유는 없었다. ...

라코젠은 넓은 응접실을 왔다 갔다 하며 리시를 떠올렸다. ...

2황자의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기품과 오만하게 느껴질 정도의 자신감, 그러면서도 금방 허물어질 것만 같은 위태로움. ...

예쁘다는 여자들은 다 만나봤지만, 리시 같은 여자는 처음이었다. ...

그녀에게는 다른 여자들이, 아니,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

그것을 손에 넣고 싶었다. 오롯이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

이토록 강렬한 충동은 처음이었다. ...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어떻게든 손에 넣어 왔지만, 리시에게는 그렇게 대할 수가 없었다. ...

여인을 안고 싶다는 충동과는 완전히 다른 감정이 있는데, 그 감정의 이름을 ‘경외’라 한다는 걸, 라코젠은 알지 못했다. ...

지금껏 누군가에게 경외심을 품은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황제에게조차도. ...

‘지금 당장 아이리스를 내 방으로 데려와!’라는 명령을 내릴까 봐 불안했던 애덤은, 라코젠이 말없이 방 안만 오가는 모습이 이상해 보였지만, 내심 안도했다. ...

‘당분간은 별문제를 일으키지 않으시겠지?’ ...

 

+++

알포드는 어둠 속에서 후욱, 후욱,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

앞으로 몇 시간 후에 벌어질 일만 생각하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들떠서 참을 수가 없었다. ...

-“억지로라도 아이리스를 손에 넣어요. 더럽혀진 아이리스를, 그린 가문은 더 이상 보호해주지 않을 거예요. 게다가 전부터 염분설이 있던 자작과 그렇고 그런 일이 벌어진 거니까, 그때는 그냥 넘어갔어도 이번에는 의심하겠죠.” ...

며칠 전 늦은 밤에 찾아온 브리트니는, 편지 한 장을 내밀면서 은밀하게 속삭였다. ...

-“파티 준비도 하고 귀한 손님들도 오니, 본채가 조용해지는 순간이 올 거예요. 그 순간을 노리도록 해요. 그리고 만약 아이리스가 소리라도 질러서 들킨다면, 이 편지를 증거로 내밀도록 하세요.” ...

알포드는 편지 내용을 확인했다. ...

-“아이리스가 써서 보냈다고 하면 돼요.” ...

-“하지만 글씨체가 다르다는 걸 금방 들킬 텐데…….” ...

-“어머, 왜 글씨체가 다를 거라고 생각해요?” ...

알포드는 그 편지를 소중하게 넣어서 가지고 다녔다. ...

그린 백작저에 들어온 후, 귀한 손님이 와서 떠들썩해지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

알포드는 반드시 아이리스를 손에 넣고 싶었다. ...

처음에는 그저 ‘위틀로 공작가의 꽃’에게 흥미가 끌렸을 뿐이다. ...

하지만 저번에 케이에게 수모를 당한 후에는 리시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케이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리시가 자신의 것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된 케이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

브리트니의 말대로 2황자가 온 덕에, 모두 2황자를 맞이하러 나가느라 본채가 조용해지는 순간이 왔다. 알포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본채로 들어왔다. ...

하녀와 하인들 몇 명은 본채에 남아 있었지만, 2황자를 대접할 준비에 바쁜 그들은 알포드를 신경 쓰지 않았다. ...

알포드는 브리트니가 알려준 대로 계단을 올라가, 리시의 방으로 향했다. ...

혹시 몰라서 노크했지만, 답은 없었다. ...

조심히 문을 열고 주인 없는 방에 들어가, 안쪽에 있는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

좋은 향기가 나는 침실. ...

구석에는 커다란 옷장이 두 개 있었다. ...

침대가 아주 잘 보이는 곳이었다. ...

알포드는 옷장을 열어보고, 케이의 옷이 걸린 옷장에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

문틈으로 침대가 보였다. ...

‘이제 몇 시간 후면…….’ ...

저 침대 위에 눕게 될 것이다. ...

아이리스와 함께. ...

+++

리시가 이런저런 볼일을 끝내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늦은 밤이었다. ...

내일은 이른 아침부터 파티 준비를 해야 하기에, 시녀들을 일찍 돌려보내고 욕실에 들어가 목욕을 마친 후 안에서 잠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

침실에 들어가 창문을 열고 잠시 밖을 내다보다가, 창문을 살짝만 닫은 후 침대에 누웠다. ...

달칵- ...

누운 지 얼마 안 돼서 뭔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잠든 척했다. ...

검은 그림자가 침대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

커다란 손이 리시의 입을 막았고, 거친 숨이 귓가에 울렸다. ...

크고 육중한 몸이 리시의 몸을 눌렀다. ...

“아이리스…….” ...

지난 삶, 끔찍이도 많이 들었던 목소리가 리시의 귀를 파고들었다. ...

이 무게감도, 숨결도, 냄새도, 목소리도, 리시는 전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했다. ...

알포드가 파티에 참석한다는 걸 알았을 때, 브리트니가 할 만한 일은 딱 이 정도 수준이었다. ...

어떻게든 리시의 인간성을 무너뜨리려는 수작. ...

예상하였다 해도 끔찍하고 무서운 건 마찬가지였다. ...

지난 삶에 가졌던 트라우마가 고스란히 몰려와, 리시는 어두운 공포 속에 밀어 넣었다. ...

-“이 멍청한 계집! 할 줄 아는 게 진짜 하나도 없네! 그거 하나 똑바로 못 해?” ...

알포드는 일이 잘 안 풀리면 리시에게 화를 풀었다. 온몸에 쏟아지는 발길질. ...

-“그러게 네가 잘했어야지. 쟤가 오죽하면 그러겠니?” ...

알포드의 어머니는 문가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알포드를 말리지 않았다. ...

-“어떻게 자기 언니랑 닮은 점이 하나도 없어? 브리트니, 아니, 황태후 전하의 반만이라도 따라 할 수는 없는 거야?” ...

그렇게 리시의 자존감을 깎아 먹었던 목소리가, 지금 리시의 귀에 속삭이고 있었다. ...

“내가 만나러 왔어. 나야, 알포드 후치스. 네 정당한 남편감.” ...

“읍……!” ...

“조용히 해!” ...

알포드의 손이 거칠게 리시의 잠옷을 뜯어내려 할 때였다. ...

“워우, 거기까지.” ...

흥분한 알포드는, 창문으로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와,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뭔지 알겠어요, 대공?” ...

“내 눈에는 커다란 돼지가 그린 백작 부인을 덮치는 광경으로 보이네만.” ...

“역시 그렇죠?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죠?” ...

리시의 입을 막은 알포드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

리시는 두 손으로 힘껏 알포드의 가슴팍을 밀어내고,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가렸다. ...

그리고 외쳤다. ...

“살려줘요.” ...

연기가 아니었다. ...

“제발…… 살려줘…….” ...

지난 삶, 그 끔찍했던 기억으로부터 나 좀 건져줘. ...

리시의 절박한 음성에 엘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엘디가 황급히 달려와 알포드의 멱살을 잡아서 던지듯 침대에서 끌어 내렸다. ...

“형수, 괜찮아?” ...

“아니. 아니, 아니. 아니.” ...

“형수…….” ...

엘디는 당황했다. ...

지금 리시는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

이 모든 건 리시의 계획이었다. ...

리시가 제이미에게 부탁해서, 알포드가 저택을 떠날 때까지 창밖을 지켜봐달라고 했다. 무슨 일인가 벌어질 거라고, 엘디와 미르에게도 따로 부탁해달라고 했단다. ...

그래서 엘디와 미르는 며칠간, 옆 테라스에서 리시의 창문을 지켜봐 왔다. ...

그렇다는 건, 리시의 오늘의 일을 예상했다는 의미일 텐데. ...

‘형수가 왜 이렇게 겁에 질린 거지?’ ...

리시가 이토록 무너진 모습은 처음이기에, 엘디는 너무 당황해서 어째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그런 와중에 알포드는 조용히 도망치려다가, 미르에게 딱 걸렸다. ...

미르는 지팡이로 알포드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

“어딜 도망쳐? 무뢰한 주제에.” ...

“아, 아니. 나는…….” ...

“백작 부인. 정신 차려야지요. 백작 부인에게 벌어진 일입니다.” ...

형수의 애처로운 모습에 당황해서 전전긍긍하는 엘디와 달리, 미르는 냉정했다. ...

그제야 뿌옇게 흐려졌던 리시의 눈동자에 다시 빛이 돌아왔다. 끊어질 듯 불안하던 리시의 호흡이 제 속도를 되찾았다. ...

“이 자가 변명할 말이 많은 듯한데, 어찌할까요?” ...

“가두세요.” ...

리시가 단호하게 말했다. ...

깜짝 놀란 알포드가 외쳤다. ...

“아니, 나도 할 말이……! 내 말 좀……!” ...

“지금은 아무 변명도 듣지 않겠습니다. 엘디, 저자를 지하 감옥에 가둬버려.” ...

 

+++

증인이 필요했기에 미르까지 이 일에 끌어들였다. ...

모든 것은 리시가 예상한 대로 흘러갔지만, 차게 식은 손에 체온이 돌아오지 않았다. ...

알포드를 끌고 나갔던 엘디가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제이미와 함께였다. ...

아무리 가족이라도 리시와 한 방에 단둘이 있다가 안 좋은 소문이 돌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

“형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미친 돼지 놈을 지하 감옥에 가둬뒀는데, 그냥 그대로 두면 될까요? 원하신다면 가볍게 손을 봐줄 수도 있는데요.” ...

엘디는 제이미가 말하는 ‘가볍게’가 어느 수준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제이미가 가볍게 손을 봐주면, 알포드는 공포와 고통 때문에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미쳐버릴 것이다. ...

제이미는 언제나처럼 미소 띤 얼굴이지만, 낮게 울리는 음산한 음성으로 그가 얼마나 화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

“손은…… 봐주지 않아도 돼요. 그냥 두면 쓸 데가 있을 거예요.” ...

리시의 목소리는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

“형수, 괜찮아?” ...

“응, 나는…… 이런 건…… 아직 무섭네.” ...

“아직이라니. 이런 건 평생 무서울 일이지.” ...

“그래?” ...

“당연하지. 무서운 게 당연해. 나라도 자고 있는데 저런 게 덮치면 무서워서 굳어 버릴걸.” ...

“그렇구나.” ...

리시가 힘없이 웃었다. ...

“형수가 뭔가 준비하는 건 알았지만, 이런 방식인 줄 알았다면 반대했을 거야. 아무리 시도만으로 끝났더라도, 이런 일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고.” ...

엘디가 평소보다 격하게 걱정하는 모습에, 제이미가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

“넌 왜 또 그런 표정이야?” ...

“네가 그런 식으로 레이디를 걱정하는 건 처음 봐서요.” ...

“당연히 걱정하지. 형수는 여자가 아니라 가족이잖아.” ...

“그렇게 따지자면, 어느 백작이 겁도 없이 제레시엔 엉덩이를 만졌다가 처맞았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왜 그렇게 신나게 웃어댔죠?” ...

“제이미, 나는…… 젠을 여동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 걔는 누가 봐도 아주 근사한 남자야.” ...

“아.” ...

둘의 만담을 듣던 리시가 키득 웃었다. 바보 같은 소리를 해대는 두 남자 덕분에, 현실로 돌아왔다. ...

그래, 지금 이것이 내 삶이다. ...

알포드에게 맞고 브리트니에게 쓴소리를 들으면서도 참고 견뎌야만 했던 나날은 지나갔다. ...

내게 벌어진 작은 일에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불같이 화내주는 사람들이 있는, 바로 이것이 아이리스 그린의 삶이다. ...

여유를 되찾은 리시는, 다시 온기가 돌아온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

‘브리트니. 너는 내가 준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렸어. 이제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

(83) 결혼은 안 되는 남자. ...

브리트니는 소란이 일어나기를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

아까 복도에 숨어 있다가, 리시의 방에서 알포드가 끌려 나오는 걸 봤다. ...

미르와 엘디가 굳은 표정으로 알포드의 팔을 하나씩 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알포드는 계속 자기 말을 들어보라며 떠들어댔지만, 미르와 엘디는 알포드의 항의를 무시했다. ...

브리트니의 계획대로라면, 알포드가 편지를 꺼내서 보여주고, 그걸 읽은 사람들이 리시가 얼마나 가벼운 여자인지 알게 되는 과정이 있어야 했다. ...

하지만 저택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했다. ...

‘왜지?’ ...

브리트니는 소파에 앉아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

‘아, 일단 집안일이니까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하려는 건가?’ ...

그럴 수도 있겠다. ...

그린 백작 부인이 떠들썩한 소문을 불러일으켰던 후치스 자작과 몰래 편지를 주고받으며 만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린 가문의 이름이 더럽혀지니까. ...

‘뭐, 어차피 이 사실이 여기저기 알려질 필요는 없어. 그린 가 사람들만 알게 돼도 충분하지. 거기다 내일 파티에서 그 일까지 벌어지면, 아이리스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을 거야.’ ...

+++

빛 한 조각 들어오지 않는 지하 감옥에 갇힌 알포드는, 지난번 고문실에 들어갔던 일을 떠올렸다. ...

-“자작이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서 교황님을 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니. 정말 재미있네.” ...

귓속을 파고들던 케이의 음산한 음성. ...

-“착하게 굴어, 자작. 내가 지켜볼 건데, 그냥 지켜보게만 해줘. 그럴 수 있지?” ...

케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느낀 그 거대한 공포. ...

그것을 왜 잊고 있었을까? ...

브리트니가 준 편지와 반지만 있으면, 그 어떤 일이 벌어져도 무사할 줄 알았다. 그린 가 사람들도 알포드의 말을 귀담아듣고, 공감해주고, 리시를 비난할 줄 알았다. ...

하지만 편지와 반지를 꺼낼 틈도 없었다. 그들은 알포드가 내뱉는 말이 짐승의 울음소리라도 된다는 듯 전혀 들어주지 않았다. 묵묵히 알포드를 이곳으로 끌고 와서 밀어 넣고 나가버렸을 뿐이다. ...

언제 열어주겠다, 무엇을 하겠다는 경고도 없었다. ...

그게 오히려 알포드를 두렵게 했다. ...

‘설마…… 날 평생 여기에 가둬두고 굶겨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게다가 브리트니라면 내가 없어진 줄 알 테니까, 날 구해주겠지.’ ...

영겁처럼 긴 시간이 흘렀다. ...

사실 몇 시간 지나지 않았지만, 알포드에게는 며칠이나 지난 기분이었다. ...

도움의 손길은 오지 않았다. 정말로 이곳에 평생 갇혀 있다가 죽을지도 모른다. ...

마른 빵 한 조각이라도, 물 한 모금이라도 마시고 싶었다. ...

이런 식으로 죽고 싶지는 않았다. ...

‘이게 다 브리트니, 그년 때문이야.’ ...

생각해보면, 저번에 그린 백작가에 찾아왔다가 수모를 당한 것도, 브리트니가 등을 떠밀었기 때문이다. ...

이번에도 브리트니의 말만 믿었다가 이 지경에 빠졌다. ...

브리트니만 아니었어도 조용히 파티에 참석했다가, 메어리와 안면을 트고 돌아갔을 것이다. ...

‘두고 봐.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네년 혼자 빠져나갈 수는 없을 거야.’ ...

 

+++

파티가 열리는 연회장으로 향하기 전, 메어리는 자신의 수석 시녀인 제인에게 작은 병을 건넸다. ...

“이걸 어디에 써야 하는지 알겠지?” ...

“네.” ...

“어떻게 말하라고 했지?” ...

“공주님께서 이 저택에 들어온 후,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준비해두라고 한 해독제입니다.” ...

“좋아. 거기서 살짝 아이리스를 언급하면 좋을 텐데, 좀 이상할까?” ...

“뒤에 ‘그린 백작 부인이 공주님을 좀……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덧붙일까요?” ...

“응, 너무 좋다.” ...

메어리가 손바닥을 마주치며 웃었다. ...

“자, 그럼 가자.” ...

메어리가 거실로 나가자, 다른 시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

메어리는 시녀들을 이끌고 복도로 나왔다. ...

복도를 쭉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누군가 달려왔다. 그 인물은 메어리 일행을 보지 못한 듯 바닥을 보며 달리다가, 메어리와 부딪칠 뻔했다. ...

그전에 제인이 메어리를 막아섰다. ...

탁- ...

상대와 제인의 어깨가 부딪쳤다. ...

그제야 달리기를 멈춘 그녀가 고개를 들고 메어리를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

“공주님, 죄송해요. 급하게 화장실을 가느라…….” ...

에르웰이었다. ...

에르웰은 파티에 참여하는 복장이 아니었다. ...

“어머나. 파티에는 안 가나요?” ...

“네, 배탈이 나서 오늘은 좀…….” ...

에르웰이 배를 살살 문지르며 말했다. ...

에르웰의 레이디답지 못한 태도에, 메어리는 속으로 혀를 찼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상냥하게 말했다. ...

“많이 안 좋은가요? 내가 좋은 의원을 불러줄까요?” ...

“아뇨, 괜찮습니다. 오늘 공주님의 환영 파티이니 즐겁게 보내세요.” ...

에르웰이 멀어진 후, 메어리가 부채로 입을 가렸다. ...

“어쩜 저렇게 경박스러울까요?” ...

“그러게요. 루테크 가문의 레이디라고 해서 기대가 컸는데, 아무래도 내놓은 자식인가 봅니다.” ...

메어리의 시녀가 거들었다. ...

“그린 백작 부인의 수준이 딱 그 정도라는 거겠지요. 파티는 어떻게 준비했을지 궁금하네요.” ...

 

+++

리시의 방 거실로 들어가서 문을 닫은 에르웰은, 품에서 병 하나를 꺼냈다. 아까 제인과 부딪치면서 훔친 병이었다. ...

사실 에르웰은 최근에 조용히 메어리를 염탐하고 있었다. ...

아까도 메어리의 침실 테라스에 웅크리고 앉아,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전부 들었다. ...

“해독제란 말이지.” ...

그들의 대화를 들은 후, 곧장 복도 창문으로 들어와서 달려가는 척 메어리와 부딪치려 했다. 그러면 제인이 메어리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던질 것이 분명하니까. ...

제인은 에르웰의 예상대로 행동해줬다. ...

에르웰은 병을 요리조리 살펴보다가 도로 드레스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

“이제 슬슬 아이리스 님께도 내 정체를 밝혀야 하나?” ...

 

+++

리시에게 ‘너무 화려한 파티는 아니어도 돼요.’라고 말했지만, 연회장은 무척이나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메어리가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

넓은 연회장을 꾸민 고급스러운 장식품과 실력이 좋은 악단, 값비싼 재료로 만든 음식들. ...

‘그래,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겠지.’ ...

아무리 메어리가 검소하게 하라고 했다 해도, 정말 그렇게 했다가는 욕을 먹기에 십상이었다. ...

안 그래도 메어리와 케이의 관계에 관한 소문이 도는 와중에, 리시가 주최하는 메어리 환영 파티가 형편없으면, ...

‘그린 백작 부인이 질투에 미쳐서 한 나라의 공주 대접을 그런 식으로 했다네요. 공과 사를 그렇게 구분 못 하니, 그린 백작도 힘들겠어요.’ ...

라는 소리가 나올 게 분명했다. ...

메어리는 먼저 이렇게 멋진 파티를 마련해준 것에 대해 리시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

그 태도가 어찌나 상냥하고 달콤한지, 사람들 눈에는 메어리가 리시를 몹시 따르고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

귀족들이 메어리에게 인사하기 위해 다가왔고, 리시는 조용히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

“이렇게 화려한 파티는 아니어도 된다고 했는데, 그린 백작 부인이 신경을 많이 써주셨어요.” ...

걸어가는 리시의 귀에, 메어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리시는 피식 웃었다. ...

저 말을 꺼내는 메어리의 속내가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

“그러게요. 하나하나 신경 쓴 티가 나네요.” ...

아, 저 백작 부인의 말은 메어리가 원한 게 아닐 텐데. ...

“공주님께선 걱정되는 거겠지요. 아무래도 화려한 결혼식을 올린 지 얼마 안 된 터라…….” ...

메어리의 시녀인 캐롤라인 러벨 백작 부인이, 메어리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었다. ...

“하긴…… 결혼식이 정말 화려하긴 했죠.” ...

“그린 백작가가 그렇게까지 돈이 많지는 않을 텐데.” ...

“그린 백작 부인 취향이겠죠?” ...

“그럴 거예요. 그린 백작님이 결혼 전에는 검소하게 살았잖아요. 파티를 여는 건 물론, 참가하는 일도 거의 없었고.” ...

공주인 메어리가 있어서 든든한지, 평소 리시를 질투하던 귀부인은 금방 태도를 바꿨다. ...

‘그나저나 브리트니는 웬일로 저 무리에 안 끼어 있지? 누구보다도 나서서 내 욕을 하고 싶을 텐데.’ ...

브리트니는 메어리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영애, 영식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가끔 리시 쪽을 흘끔거리기는 했지만, 수상할 정도는 아니었다. ...

이 자리의 모두가 소문의 ‘그린 백작 부인’의 얼굴을 흘끔거렸기 때문이다. ...

“파티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

화통한 목소리에, 모두 그쪽을 돌아봤다. ...

미르가 지팡이를 빙글빙글 휘두르며 메어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

이 저택에 밀란시스 피아몬도 대공이 머문다는 걸 몰랐던 파티 참가자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미르를 쳐다봤다. ...

“아니, 마음에 안 든다는 게 아니라…… 너무 화려한 거 같아서.” ...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메어리가 말했다. ...

메어리는 미르가 이 저택에 머무는 건 알았지만, 파티에 참여할 줄은 모르고 있었다. ...

“화려하다고? 고작 이 정도가? 호오, 미나스아릭의 공주님은 참으로 검소합니다. 나한테 이 정도는 보통인데요.” ...

“무, 물론 대공께는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린 백작님은 검소해서…….” ...

“음? 이 자리에도 없는 그린 백작 이야기는 왜 나오죠? 애초에 이 파티를 열어달라고 그린 백작 부인에게 조른 건, 공주 아니었습니까?” ...

“조, 조르다니요. 나는 그런 적 없어요.” ...

“뭐, 아무튼 공주가 열어달라고 한 건 사실이잖습니까?” ...

“아니요, 나는 괜찮다고 했는데…… 그린 백작 부인이 예의가 아니라면서 꼭 열고 싶다고…….” ...

“아, 그래요.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고요.” ...

메어리는 미르의 태도에 기가 막혔다. ...

어쩜 이렇게 막무가내일 수 있는 거지? ...

하지만 메어리도 미르에 대한 소문은 들은 터였다. ...

막으면 막으려고 할수록 더더욱 수렁으로 빠뜨리는 인물. 그러니 상대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 인물. ...

실제로 그랬다. ...

메어리가 한마디 할 때마다, 미르가 격 없이 꺼내는 말은 메어리를 점점 난처하게 만들었다. ...

“이 파티의 주최자는 그린 백작 부인이지만, 내가 후원했습니다.” ...

“예?” ...

“내 친구의 집에 공주가 찾아와서, 내 친구 아내에게 파티를 열어달라고 조르며 난감하게 만드는데, 친구 된 도리로 도울 수밖에 없잖습니까. 안 그런가? 하하하하.” ...

아무도 함께 웃어주는 사람이 없건만, 미르는 이보다 더 재미있는 농담이 없다는 듯 유쾌하게 웃었다. ...

메어리는 미르의 머리통을 한 대 갈기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

“그렇게 됐으니 이 화려함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즐기세요, 공주.” ...

자기 할 말을 끝낸 미르는, 지팡이를 휘두르며 다른 무리에게로 가버렸다. ...

메어리는 빨개진 얼굴로 미르의 뒷모습을 쏘아보다가 중얼거렸다. ...

“어쩜…… 그린 백작 부인이 대체 대공께 어떻게 말을 전했기에…….” ...

“그린 백작 부인 탓은 아닐 거예요, 공주님. 피아몬도 대공은 원래 좀 저렇게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 편이라…….” ...

지금껏 신나게 리시의 화려한 결혼식에 대해 뒷담화를 하던 백작 부인이 속삭였다. 다른 귀부인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

“맞아요. 그린 백작 부인도 곤란할걸요.” ...

“저기 표정 보세요. 어쩔 줄을 모르고 있네.” ...

“피아몬도 대공이랑 이런 식으로 엮인 게 좀 안쓰럽기도 하고…….” ...

“진짜 연애하기에는 좋아도, 결혼은 안 되는 남자라는 별명이 딱이라니까요.” ...

“어휴, 나는 연애도 하고 싶지 않아요.” ...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리시보다 미르의 평가가 더 바닥이었다. ...

파랗게 질려 표정을 갈무리하려고 노력하는 메어리를, 리시는 먼 곳에서 조용히 지켜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

사실 미르는 이 파티를 후원하지 않았다. ...

파티를 준비하기 전, 리시가 미르를 찾아가서 부탁했다. ...

-“미르. 대공께서 이 파티를 후원한 거로 해줄 수 있을까요?” ...

미르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

-“아, 좋아요. 아름다운 레이디를 위해서 못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

미르는 뭐 하나 빠진 것처럼 굴지만, 사실은 영리한 남자였다. ...

리시가 왜 이런 부탁을 하는지 간파하고,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하면서 리시를 보호했다. ...

이제 메어리는 리시의 검소함에 대해 떠들어댈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

‘파티를 열라고 한 이유가 저걸로 끝이 아닐 텐데…….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

리시가 다가오는 사람들을 적당히 상대해주며, 메어리가 어떻게 공격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

“2황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

문을 지키던 시종이 라코젠의 등장을 알렸다. ...

(84) 독살 ...

리시는 라코젠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

서채에 머물게 된 후, 라코젠은 그만큼이나 조용히 있었다. ...

이번 파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아, 나는 신경 쓰지 말고.” ...

모두 인사하러 다가가자, 라코젠은 그렇게만 말하고 연회장 구석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

그러더니 조용히 리시를 응시하기만 했다. ...

리시의 주위에서 재잘거리던 영애들과 귀부인들은, 라코젠의 등장 이후 뿔뿔이 흩어졌다. 아마 라코젠이 리시를 너무 노려봐서, 불똥이 튈까 봐 걱정한 것이리라. ...

리시도 라코젠의 이글이글 타는 눈빛이 신경 쓰여서, 브리트니가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

“아이리스. 정말 멋진 파티야.” ...

“그래.” ...

브리트니가 팔짱을 끼었다. ...

“네가 주최자인데 왜 이렇게 구석에 가만히 있어? 너도 가서 좀 즐겨야지.” ...

리시는 브리트니의 팔을 떼어내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았다. ...

아무리 연을 끊었다 해도, 브리트니가 특별한 잘못을 하지도 않았는데 거칠게 대할 수는 없었다. ...

‘무슨 꿍꿍이일까?’ ...

가서 좀 즐기라고 했으면서, 브리트니는 리시를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데려갔다. ...

마침 리시의 뒤로 시종이 술을 들고 지나가자, 브리트니가 말했다. ...

“아이리스. 나, 그 술 좀.” ...

무심코 쟁반 위에서 술잔을 집어 브리트니에게 건넸다. ...

브리트니가 생긋 웃는 걸 보는 순간, 리시는 아차 싶었다. ...

‘이거구나!’ ...

+++

파티에 참석한 귀족들은 다들 별생각이 없었다. ...

메어리 공주를 환영하는 파티 겸 신년 파티. ...

덤으로 소문의 ‘그린 백작 부인’을 볼 기회까지. ...

메어리와 케이 사이에 있던 소문을 아는 귀족들은 재미있는 볼거리가 생길지도 모르겠다고 기대했고, 그런 이야기에 흥미가 없는 사람들은 이 기회에 미나스아릭의 공주와 연이나 맺자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

그렇게 여느 때와 다름없는 파티 분위기는, 밀란시스 피아몬도 대공의 등장으로 한 번, 라코젠 옥보시더스의 등장으로 또 한 번, 망가지기 시작하더니. ...

“메어리 케트벤 공주님. 아이리스가 공주님께 술을 올리고 싶대요.” ...

브리트니의 목소리로 정점을 찍었다. ...

“어머, 고마워요.” ...

메어리는 상냥하게 웃으며 술잔을 받아들었다. ...

그 순간 리시 쪽을 돌아본 몇 명은, 리시가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분명하게 보았다. ...

그리고 그 일이 벌어졌다. ...

“날 위해 이런 멋진 파티를 열어준 그린 백작 부인께 건배할게요.” ...

잔을 들고 맑은 목소리로 리시를 치하한 메어리가 술잔에 담긴 술을 쭉 마셨다. ...

몇몇 귀족들도 잔을 들어 건배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

그들은 술을 마시느라 리시의 시선이, 수사청 청장인 카론 비르첸 백작에게서 귀족 신문사의 사장인 딕슨 카이런 자작에게 머물렀다가 떨어지는 걸 보지 못했다. ...

그리고. ...

“우욱……! 쿨럭…….” ...

메어리가 피를 토했다. ...

+++

수사청 청장과 신문사 사장이 초대객 명단에 있을 때부터, 리시는 메어리가 신문에 날 만한 짓을 벌이려 한다고 예상하기는 했다. ...

브리트니가 술잔을 들고 미소짓는 순간, ‘독 탄 음료를 마시고 쓰러지려는구나.’라는 생각도 했다. ...

하지만 메어리 본인이 술을 마시고 쓰러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

“공주님!” ...

시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메어리를 부축했다. ...

“무슨 일입니까?” ...

“어머, 어머. 공주님, 어떡해요?” ...

“꺄아아아아! 도, 독인가 봐요!” ...

“공주님이 독을 마셨어!” ...

“누, 누가 이런 끔찍한 짓을……?” ...

“공주님, 얼굴이…….” ...

그 모든 소동을, 리시는 조용히 서서 지켜봤다. ...

앞으로 나선 어느 백작에게 안긴 메어리는 축 늘어져서 죽은 것처럼 보였다. ...

입가에는 피가 흐르고, 하얗던 피부에는 울긋불긋한 반점과 뾰루지가 여기저기 돋아서 마치 두꺼비 같았다. ...

“케트벤 공주님의 시녀들과 지르본 백작만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자리를 떠나지 마십시오! 이 자리를 떠나면 범인으로 간주하겠습니다.” ...

수사청 청장인 딕슨 카이런 백작이 외쳤다. ...

메어리의 뒤를 졸졸 따라 나가려던 사람들이 우뚝 멈췄다. 가만히 서서 모든 걸 눈에 담던 리시는, 에르웰을 발견했다. ...

언제 들어온 걸까? ...

에르웰은 엘디에게 뭐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

“아무래도 공주님이 마신 술에 독이 들어 있던 것 같습니다.” ...

딕슨이 브리트니를 보며 말했다. 브리트니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

“그, 그 술은 아이리스가…… 아이리스가 저한테 준 거예요.” ...

딕슨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리시에게로 향했다. ...

리시는 고개를 숙이지 않고 담담히 그들의 시선을 받아냈다. ...

“정말입니까, 백작 부인?” ...

“아닙니다.” ...

“하지만 나는 분명 위틀로 양이 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린 백작 부인이 공주님께 술을 올리고 싶다고 했다고요.” ...

“그런 적 없습니다.” ...

“네가 그랬잖아. 그 술을 집어서 나한테 주고, 그걸 공주님께 가져다드리라고.” ...

브리트니의 말에, 근처에 있던 영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

“저도 봤어요. 분명 그린 백작 부인이 술을 집어서 브리트니에게 건넸어요.” ...

“맞아요. 저도 봤어요.” ...

“저도요.” ...

리시는 문득 지난 삶을 떠올렸다. ...

위틀로 공작가에 있을 때, 리시는 언제나 하지도 않은 일의 범인이 되어 혼나고 맞고 감금당하곤 했다. ...

그때는 제 몸을 지킬 무엇 하나 없어서 울기만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

리시는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자신을 향한 비난의 시선을 오롯이 받아들였다. ...

여기저기서 목격했다는 말이 나오자, 딕슨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

“이래도 부정하십니까?” ...

“부정합니다.” ...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일단 수사청으로 동행하시지요.” ...

“거부하겠습니다.” ...

“뭐라고요? 그린 백작 부인은 지금 이게 얼마나 중요한 사안인지 모릅니까? 아무리 공주님의 개인적인 방문이었다고 해도, 한 나라 왕족이 방문했다가 벌어진 일입니다. 이건 우리 가비자르 제국과 미나스아릭 왕국 사이에 국제 문제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

“그건 염려 놔도 되겠네요. 나는 가비자르 제국의 소속이 아니니까.” ...

“출생은 가비자르 제국 소속이지 않습니까? 하여간 사람을 죽이려고 했으니, 아무리 그린 가문의 안주인이어도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을 겁니다.” ...

딕슨이 근처에 있던 사내들에게 눈짓했다. 아마도 수사청에서 근무하는 귀족들이리라. ...

“그린 가문의 명예를 위해 요청하고 있는 겁니다. 따르지 않으시면 체포해서 끌어내겠습니다.” ...

“아니, 그건…….” ...

“안 되지, 안 돼!” ...

엘디와 미르가 동시에 말했다. ...

미르가 엘디를 돌아보자, 엘디가 양보하겠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까딱하며 뒤로 빠졌다. ...

미르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딕슨의 부하들과 리시 사이를 가로막았다. ...

“우리 그린 백작 부인이 독을 탔다는 증거가 있나?” ...

“대공, 대공께서 끼어드실 일이 아닙니다.” ...

“아니, 난 끼어들어도 돼. 그린 백작 부인의 친구거든.” ...

“대공.” ...

“부당한 일로부터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 나서지 않으면 그건 사람도 아니지. 내가 사람도 아니게 살 수는 없잖아, 안 그런가? 하하하하.” ...

“……대공. 이건 부당한 일이 아닙니다. 목격자들이 이렇게 많지 않습니까?” ...

“그린 백작 부인이 술잔을 집어 드는 건, 나도 봤지. 그런데 다들 그전에 있었던 일은 못 본 모양이야. 본 사람 있는가?” ...

미르가 돌아보자, 사람들은 미르의 시선을 피했다. ...

“오, 다들 못 보고 나만 봤나 보네. 위틀로 양이 그린 백작 부인에게 말했어. 아이리스, 나, 그 술 좀.” ...

미르가 브리트니의 목소리를 따라 하는 듯 간드러지게 말하자, 몇몇 사람들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

하지만 브리트니는 웃을 수 없었다. ...

“아니거든요! 대공, 있지도 않은 일로 모함하시면 안 되죠. 아무리 대공이시라도 그래서는 안 돼요.” ...

“왜 있지도 않은 일이라고 하는가? 나는 분명히 보고 들었는데.” ...

“거짓말 마세요. 대공께서는 멀리 계셨잖아요.” ...

“멀리 있어도 보고 있었지. 우리 그린 백작 부인께서는 너무 아름다우셔서 눈을 뗄 수가 없거든. 그렇지 않은가? 하하하하.” ...

“하!” ...

브리트니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잖아요, 대공.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이에요. 국빈인 메어리 케트벤 공주님이 독을 마시고 쓰러졌다고요. 아이리스가 준 술잔의 술을 마셨고요!” ...

“국빈은 아니지.” ...

느른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

“가비자르 제국에서 정식으로 미나스아릭의 공주를 초대하지는 않았으니까.” ...

라코젠이었다. ...

사람들이 갈라져 라코젠에게 길을 터줬다. ...

라코젠이 천천히 걸어와 미르의 옆에 섰다. ...

“그리고 나도 보고 들었어. 그대가 그린 백작 부인에게 술 좀 달라고 하는 거.” ...

아무리 2황자라도 황족이었다. 게다가 라코젠이 연회장에 들어온 순간부터 리시만을 노려보고 있었다는 걸,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

딕슨이 마른침을 삼키며 뒤로 물러섰고, 브리트니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

라코젠이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딕슨을 노려봤다. ...

“그린 가문쯤 되는 집안의 귀부인에게 이런 식으로 동행을 요청하는 건 처음 봤는데. 누구한테 돈 좀 받았나, 비르첸 백작?” ...

“그, 그게 무슨…… 아니, 아닙니다, 전하. 돈을 받다니…… 절대 아닙니다.” ...

“그래? 황족에게 거짓말을 하는 자가 어떤 형벌을 받는지는 아주 잘 알겠지. 그대가 메어리 케트벤 공주에게 돈을 비롯한 그 무엇도 받은 적이 없다는 그 말, 믿겠어.” ...

딕슨이 숨을 멈췄다. ...

그 모습에, 눈치 빠른 사람들은 생각했다. ...

‘돈 이외의 다른 걸 받았구나!’ ...

라코젠이 돌아서서 리시를 마주 봤다. ...

“그대가 연 파티에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많이 놀랐겠군. 그대는 그만 돌아가서 쉬지.” ...

“하지만, 전하……!” ...

딕슨이 끼어들려 했지만, 라코젠이 버럭 외쳤다. ...

“닥쳐! 눈도 귀도 먼 수사관 따위는 이 일을 수사할 자격이 없어. 이 일은 내가 직접 그 진위를 파악할 테니, 다들 오늘은 이 저택을 떠날 생각하지 마!” ...

 

+++

그린 백작가에서 흥미진진한 사건이 벌어졌다. ...

파티에 참여했던 귀족들은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린 백작 저택이 있는 다코트 시에 머물렀다. ...

덕분에 다코트 시의 여관과 상점은 때아닌 호황을 누렸다. ...

파티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

아이리스 그린 백작 부인이 메어리 케트벤 공주에게 독을 먹였다. ...

브리트니 위틀로가 메어리 케트벤 공주에게 독을 먹이고, 아이리스 그린 백작 부인이 그런 것처럼 위장했다. ...

라코벤 옥보시더스 황자가 아이리스 그린 백작 부인을 감싸주는 걸 보니, 둘 사이에 뭔가 있는 게 분명하다. ...

밀란시스 피아몬도 대공과 아이리스 그린 백작 부인 사이에도 묘한 감정이 흐르는 것 같다. ...

여러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성급한 기자들은 파티에서 벌어진 일을 기사로 써서 신문사에 보냈고, 신문사는 확인도 없이 신문을 발행했다. ...

[모 백작 부인의 질투로 인해 벌어진 참사] ...

[메어리 케트벤 공주의 위기] ...

[한 여자의 질투가 불러일으킨 전쟁의 바람] ...

[모 왕국의 공주와 모 백작의 말할 수 없는 관계] ...

[모 공작 가문의 자매 싸움?!] ...

자극적인 기사들이 쏟아져나오는 가운데, 엘레르보 신문사의 위팅크 기자는 조용히 흘러가는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

위팅크는 며칠 전에 리시에게 파티 초대장을 받았다. 초대장에는 리시가 직접 쓴 편지가 동봉되어 있었다. ...

[무슨 일이 벌어지든 끝까지 지켜보고 기사를 쓰도록 해요.] ...

물론 그럴 생각이었다. ...

위팅크는 다코타 시의 여관에 머물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귀족들이 뭐라고 떠들어대는지 열심히 들었다. ...

“질투 때문에 그런 짓을 하다니, 정말 무섭지 않아요?” ...

“하지만 난 좀 이해가 되기도 해요. 내 남편의 전 애인이 나타나면 속이 시커메질 거예요.” ...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상대를 독살하려고 하진 않죠.” ...

“그건 그래요. 그린 백작 부인도 보통이 아니긴 하네요.” ...

귀부인들은 리시에게 좋은 소리를 하지 않았고. ...

“백작 부인이 정말 그런 짓을 했을까? 아무리 봐도 그런 짓을 할 것 같진 않던데.” ...

“그러게 말입니다. 피 한 방울만 봐도 기절할 것처럼 생겼던데요.” ...

“뭔가 오해가 있는 거겠죠.” ...

남자 귀족들은 대체로 리시에게 호의적이었다. ...

위팅크가 그렇게 정보를 수집하느라 바쁠 때, 메어리와 브리트니는 아주 곤란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

(85) 자극이 너무 커 ...

브리트니는 덜덜 떨면서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

‘어떡하지……? 설마 내가 범인으로 몰리는 건 아니겠지?’ ...

파티에서의 일은 메어리와 함께 꾸민 일이었다. 아니, 메어리의 머리에서 나온 계략이었다. ...

메어리는 파티에서 어떻게든 리시가 술잔을 들어서 브리트니에게 건네주는 상황을 만들라고 했다. 그리고 그 술잔을 자신에게 달라고 말했다. ...

-“무슨 일이 생겨도 놀라지 말아요. 모든 건 그린 백작 부인이 한 짓이 될 테니까요.” ...

메어리가 그렇게 말했을 때부터, 메어리가 독을 마신 상황이 될 거라고는 짐작했다. ...

다만, 거기에 2황자와 대공이 목격자로 나설 줄은 꿈에도 몰랐다. ...

‘아니, 아무 문제도 없을 거야. 나는 독을 타지 않았고, 공주님도 내 편이니까.’ ...

제대로 수사에 들어간다고 해도, 브리트니가 술잔에 독을 탄 증거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브리트니에게는 이번 일을 함께하자는 약속의 증표로 받은 메어리의 반지가 있었다. ...

미나스아릭 왕국의 인장이 새겨진 반지. ...

그 반지만 있으면 메어리가 브리트니를 배신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그런데 이 인간은 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거야?’ ...

문제는 그 반지를 알포드에게 줬다는 점이었다. ...

알포드는 자신이 그런 위험을 무릅썼을 경우, 뒤를 봐주겠다는 확신이 필요하다고 했다. ...

그래서 메어리의 반지를 넘겼다. ...

‘설마…… 반지만 가지고 튄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 반지는 어디 팔아먹지도 못할 텐데.’ ...

왕가의 인장이 찍힌 반지를 함부로 팔다가는 사형에 처해질지도 모른다. ...

알포드가 아무리 바보라도 그런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

‘아, 진짜 어떡하지? 그냥 도망칠까? 지금이라면 도망칠 수 있지 않을까?’ ...

사실은 아까도 한 번 도망치려고 했다. ...

도망친다기보다는 ‘마음이 어지러워서 집에 돌아가려고 해요.’라며 그린 저택을 벗어나려 했지만, 경비병들이 브리트니를 막았다. ...

-“모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주요 참고인은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하라는 2황자님의 명령입니다.” ...

평범한 경비병이 아니라 2황자의 기사들이었다. ...

2황자라고는 해도 황족이었다. ...

그의 명령을 무시할 수는 없는 처지기에, 브리트니는 순순히 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

‘아, 진짜로 어떡해. 알포드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그 반지를 찾아야 공주님이 발뺌하지 못한다고!’ ...

+++

난처한 상황에 빠진 건 브리트니만이 아니었다. ...

독을 마시고 쓰러진 메어리는 방으로 옮겨져, 훌륭한 의원들의 간호를 받아서 간신히 눈을 떴다. ...

하지만 완전히 해독되지 않아서, 얼굴에 울긋불긋하게 돋은 뾰루지와 열꽃은 사라지지 않았다. ...

의원들은, ...

“생전 처음 보는 종류의 독입니다.” ...

라고 말하며 난색을 보였다. ...

“괜찮아요. 깨어난 것만 해도 감사해요. 모두 수고했어요.” ...

좋은 말로 의원들을 달래고 내보낸 메어리는, 곧바로 시녀인 제인을 불러서 말했다. ...

“해독제를 줘.” ...

준비한 독의 해독제 정도는 당연히 준비해뒀다. ...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듯한 통증과 얼굴을 엉망으로 만든 열은, 해독제를 마시면 가라앉을 것이다. ...

메어리는 리시에게 오물을 묻히기 위해, 먼저 자신에게 오물을 묻혔다. ...

‘내 오물은 깨끗이 닦을 수 있지만, 네게 묻은 오물은 닦을 수 없을 거야.’ ...

독을 마시고 기절한 터라 그 후에 벌어진 일을 알지 못하는 메어리는, 아픈 와중에도 우아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

그런데. ...

“저기…… 공주님…….” ...

제인이 난처한 표정으로 메어리를 불렀다. ...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했다. ...

“저…… 해독제가…….” ...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

“설마…… 해독제를 잃어버렸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

제인이 메어리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

“죄송합니다, 공주님.” ...

“죄송? 죄송이라니……! 그 해독제는 한 병뿐이라고! 이 독을 해독할 수 있는 해독제는 그거 한 병뿐이란 말이야!” ...

두꺼비 론의 피부의 점액질을 긁어내서 만든 독은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무서운 독이었다. ...

하지만 그 독을 자주 다뤄온 메어리는 독의 적정량을 알았다. 죽지는 않아도 남들이 보기에 끔찍한 기분이 들 정도의 독을 사용했다. ...

해독제가 없어도 죽지는 않겠지만, 제대로 해독하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

그때까지 느낄 통증도 통증이지만, 얼굴에 난 뾰루지가 걱정이었다. ...

이 뾰루지들은 오랫동안 놔두면 고름이 생기다가 터져서 심한 흉터를 남긴다. ...

“어디 떨어뜨린 거 아냐? 한번 잘 찾아봐!” ...

메어리가 악을 쓰자, 제인은 열심히 방을 뒤졌다. ...

하지만 방에서는 해독제가 담긴 병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

그 사실을 알리자마자 메어리는 침대에서 내려와 제인을 발길질했다. ...

“야! 그걸 잃어버리면 어떡해? 나는 어떡하라고? 해독제는 미나스아릭에 돌아가서야 만들 수 있단 말이야! 그때까지 이 꼴로 살란 말이야? 그때 해독제를 먹어도 이 흉터는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

 

+++

케이는 말을 멈췄다. ...

커다란 독수리가 공중을 한 번 선회하고 내려와 말 앞에 앉았다. ...

제이미는 독수리인 상태로 보고했다. ...

“리시가 누명을 썼다고?” ...

“네. 케트벤 공주가 독을 마시고 쓰러졌어요. 2황자와 대공 덕에 그 자리에서 잡혀가는 건 막았지만, 아직 혼란스러운 상황이지요.” ...

“그 자리에서 잡아가려는 놈이 있었다고? 대체 누가 감히 그린 백작 부인을 잡아가?” ...

“비르첸 백작이요.” ...

“욕심 많은 놈에게 공주가 돈맛 좀 보여줬나 보군.” ...

“아무튼, 일이 그렇게 됐으니…….” ...

제이미의 말이 끝나기 전 케이가 말에서 휙 뛰어내렸다. ...

뛰어내리는 것과 동시에, 케이는 거대한 검은 늑대가 되어 있었다. ...

크르르르르- ...

위협적인 울림에 말들이 히이잉, 비명을 지르며 앞발을 들어 올렸다. ...

“아, 대장! 전 아직 말 타고 있는데 그러시면…….” ...

월라스가 볼멘소리를 냈지만, 케이는 이미 자취를 감춘 후였다. ...

독수리 제이미가 월라스의 정수리 위에 앉아 뾰족한 발로 월리스의 머리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

그 다정한 위로에, 월라스가 말했다. ...

“아프다고, 그 발톱!” ...

 

+++

리시는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서 한숨을 내쉬었다. ...

‘공주가 스스로 독을 마실 줄은 꿈에도 몰랐네. 나도 아직 순진하구나.’ ...

메어리가 쓰러졌을 때는 오랜만에 깜짝 놀랐다. ...

하지만 당황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라코젠이 리시를 도와주려고 나선 점이 더 놀라웠다. ...

‘2황자가 날 도우려고 할 줄은 정말 더더욱 몰랐는데…….’ ...

지난 삶, 라코젠은 이오벳이 황제가 되자 암살을 꾀하다가 들켜서 결국 사형당했다. ...

이오벳에 대한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비겁하고 옹졸한 사람. ...

갖지 못할 것을 욕심내다가 죽은 탐욕스러운 사람. ...

그게 라코젠에 대한 리시의 평가였다. 그래서 라코젠이 참가하기 위해 찾아왔을 때는 그저 성가시기만 했었다. ...

‘황태자가 황제가 되고 나서 곧 죽을 사람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감사 인사를 해둬야겠지.’ ...

라코젠의 일로, 지난 삶의 사건만 가지고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

‘그나저나 이 일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

알포드를 잡아뒀으니, 브리트니를 해결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

하지만 메어리는 발뺌할 것이 분명했다. ...

‘어떻게든 공주가 이 일에 엮였다는 증거를 찾아야 해. 그래야 앞으로 내게 발톱을 드러내지 않을 테니까.’ ...

똑똑- ...

“들어와요.” ...

노크 소리에 무심코 대답했다. ...

문이 열리고 나단이 빼꼼 얼굴을 들이밀었다. ...

“형수님.” ...

“아, 나단.” ...

“유진도 같이 있는데, 들어가도 돼요?” ...

“들어와요.” ...

나단과 유진이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나단은 커다란 나무 상자를 들고 있었다. ...

“무슨 일이에요?” ...

“아까 좀 안 좋은 일이 있었잖아요. 대장도 없는데, 마음이 싱숭생숭하실까 봐……. 어, 같이 게임이라도 하면 기분전환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

나단이 테이블 위에 나무 상자를 내려놨다. 작은 나무 병정들을 가지고 서로의 땅을 빼앗는 게임이었다. ...

리시는 나무 상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왜인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지난 삶에서는 리시가 누명을 써도, 리시의 기분을 생각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리시가 한 짓이 아니라는 걸 아는 사람들조차도 리시를 외면했다.누명을 쓴 답답함도, 속상함도, 서글픔도, 전부 리시 혼자 감내해야만 했다. ...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

이렇게 눈치를 보며 마음을 달래주러 오는 이들이 있다. ...

이제는 지난 삶과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훅 들어오는 온기에는 새삼스럽게 가슴이 뜨거워졌다. ...

“형수님. 자신 없으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

리시의 표정을 살피던 유진이 담담히 말했다. ...

나단이 유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

“야, 지금은 형수님 도발하지 마. 우리가 져드리기로 했잖아.” ...

“아뿔싸.” ...

“아뿔싸는 개뿔. 하여간 게임판만 앞에 두면 눈이 돌아가서는.” ...

모든 일에 무덤덤한 유진에게 그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다. ...

리시는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

“져줄 것 없어요. 온 힘을 다해서 덤벼봐요.” ...

“형수님. 유진은 게임이라면 환장하는 놈이에요. 특히 이 게임으로는 대장도 유진을 이긴 적이 없어요.” ...

“그럼 내 남편을 대신해서 내가 이기면 되겠네요.” ...

나단은 작고 연약하고 자신만만한 형수님이 사랑스러웠지만, 게임은 게임이었다. ...

리시가 도발을 해왔으니, 봐주는 것 없는 승부에 임해야만 했다. ...

‘형수님이 져서 울음을 터뜨리시면 어떡하지? 대장도 안 계시는데 누가 위로해드리지?’ ...

그런 나단의 걱정은 기우였다. ...

첫 번째 판, 리시는 쉽게 이겼고. ...

“다시 합시다, 형수님.” ...

유진이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재도전을 신청한 두 번째 판도 리시가 이겼다. ...

“자, 잠깐만요! 형수님, 다시 해요.” ...

나단이 믿을 수가 없어서 또 재도전한 세 번째 판 역시 승자는 리시였다. ...

장난감 병정으로 모두의 땅을 빼앗은 리시가 의기양양하게 다리를 꼬며 팔짱을 끼었다. ...

“아까 그 말 다시 말해봐요. 누가 누구한테 져주겠다고요?” ...

리시의 오만한 말에 유진이 벌떡 일어났다. ...

나단은 게임이면 눈이 돌아가는 유진이 리시를 한 대 때릴까 봐 깜짝 놀라서 말리려고 했다. ...

그때, 유진이 리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

“평생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형수님.” ...

“왜 내 부하가 내 아내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지?” ...

대답은 뒤에서 들려왔다. ...

언제 온 건지 케이가 방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

케이의 가쁜 호흡과 몸에서 흘러나오는 열기, 그리고 그가 입은 옷. ...

나단은 케이가 늑대로 변해서 여기까지 달려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케이가 입은 옷은,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저택 주변의 숲 여기저기에 숨겨둔 옷이었다. ...

“대장.” ...

케이를 배신하고 리시에게 충성을 맹세한 유진은 담담하게 케이를 보며 말했다. ...

“형수님은 승부사입니다.” ...

“유진, 너는 게임에서 널 이기는 사람한테 충성을 맹세하는 습관을 버려야 해.” ...

“어머나. 유진이 또 이렇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이 있어요?” ...

“있어요. 내 어머니한테요.” ...

케이가 리시의 말에 대답하며 가까이 다가가, 리시의 뺨에 입을 맞췄다. ...

“즐거워 보이는군요. 걱정돼서 숨도 못 쉬고 달려왔는데.” ...

“덕분에요.” ...

“내 덕은 아닌 것 같은데.” ...

“설마 또 질투하는 건 아니죠?” ...

“그럴 리가. 나는 하해와 같이 아량이 넓은 사내예요, 리시. 내 아내가 외간 남자 두 놈을 방에 끌어들여서 즐겁게 게임을 하며 예쁘게 웃는다고 질투하거나 하지는 않아요.” ...

“그거참 다행이네요. 하여간 마음 넓은 남자라니까.” ...

리시가 콧등을 살짝 찡그리며 케이의 가슴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

유진과 나단이 눈치를 보더니 주섬주섬 게임판을 챙겨서 방을 나갔다. ...

“이렇게 서둘러서 돌아오지 않아도 됐어요, 케이.” ...

“내 아내가 누명을 썼다는데 어슬렁어슬렁 돌아올 수는 없었거든. 자초지종은 제이미에게 들었어요. 해결 방법은 생각해뒀어요?” ...

리시는 케이가 이 문제들을 리시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줘서 기뻤다. ...

그런 한편 언제든 도와주겠다는 눈빛을 보여줘서 고마웠다. ...

리시는 케이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그의 귓가에 소곤소곤 자신이 생각한 해결 방법을 말했다. ...

“문제는…….”   목소리를 더 낮추느라 그의 귀에 입술이 더 가까워졌다. 입술이 그의 귓바퀴를 살짝 스쳤다. ...

케이가 갑자기 리시의 손목을 잡았다. 케이의 눈동자가 어둡게 빛났다. ...

“리시…….” ...

그의 낮은 음성이 리시를 파고들었다. ...

“지금 이거, 너무 자극이 큰데.” ...

(86) 그거 정말 근사하네. ...

“케이…….” ...

리시가 밉지 않게 미간을 좁히며 그의 가슴을 가볍게 때렸다. ...

케이는 키득 웃으며 리시의 볼에 입을 맞췄다. ...

볼을 뭉근하게 눌러오는 그의 부드러운 입술이 야릇한 기분을 자아냈다. ...

“우리, 너무 오래 못 봤잖아.” ...

낮게 속삭이는 입술이 볼에서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 목덜미를 지분거렸다. 손목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이 어느새 리시의 허리를 지나 등에 닿아 있었다. ...

리시는 눈을 감고 그가 만들어내는 자극을 받아들였다. ...

그는 리시의 등을 쓰다듬으며, 이로 드레스의 목 부분을 깨물어 당겼다. ...

리시의 하얀 어깨가 드러나자, 그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

“그가 알아? 당신 어깨는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는 거.” ...

“몰랐는데.” ...

“정말이야. 정말 예뻐, 리시.” ...

오랜만에 듣는 그의 음성도, 체온도 녹아내릴 듯 달콤했다. ...

“지금 이럴 때 아니야.” ...

리시는 자신의 목소리가 앙탈을 부리는 것처럼 들려서 깜짝 놀랐다. ...

“응.” ...

그는 대답하면서도 리시의 어깨에서 입술을 떼지 않았다. ...

따뜻하고 촉촉한 입술이 닿는 곳에서 시작된 열기가 아래로, 아래로 흘러 내려갔다. ...

그가 리시에게 몸을 밀착시키며 리시를 소파에 눕혔다. 리시의 도톰한 입술 위에 그의 입술이 겹쳐졌다. ...

리시는 눈을 감고, 능숙하게 움직이는 그의 손길을 즐겼다. ...

이 순간에는 브리트니도, 메어리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

오롯이 케이의 향기에 취하고 싶었다. ...

+++

소파에서도, 침대에서도 뜨거운 시간을 가진 리시는, 완전히 축 늘어졌다. ...

가쁜 숨을 몰아쉬는 리시와 달리, 케이의 호흡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

먼 곳에서 여기까지 쉴 새 없이 달려온 것 같은데, 이 지치지 않는 체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

리시의 시선을 느낀 케이가 싱긋 웃었다. ...

“왜? 아직 모자라요?” ...

그의 짓궂은 질문에 리시는 콧등을 찡그리고 그의 맨가슴을 주먹으로 살짝 때렸다. ...

케이가 웃으며 검지로 리시의 콧등을 쿡 눌렀다. ...

“그거 알아요, 리시? 이 콧등의 주름, 진짜 예쁘다는 거.” ...

“예쁘다는 말을 너무 자주 하는 거 아니에요?” ...

“듣기 싫어요?” ...

“아니. 내가 정말 세상에서 제일 예쁜 줄 알고 우쭐해질까 봐.” ...

“우쭐해져도 돼요. 세상에서 제일 예쁜 건 사실이니까.” ...

케이가 리시를 보듬어 안았다. ...

리시의 그의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

오랜만에 맡는 그의 체취에 여전히 심장이 뛰었다. ...

‘내가 이 남자를 보고 싶어 했구나.’ ...

이런저런 사건이 많아서 몰랐는데, 이 품이 몹시 그리웠던 모양이다. ...

그와 함께 산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그의 팔을 베고 누운 이곳이야말로 내가 있을 자리라는 생각이 드는 게 신기했다. ...

“자, 이제 말해봐요. 문제가 뭐죠?” ...

케이는 아까 리시가 하다가 멈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

오히려 리시가 그와 무슨 대화를 하다가 멈췄는지 기억나지 않아서 잠시 뜸을 들였다. ...

“문제는 당신이 케트벤 공주에게 목숨을 빚졌다는 거예요.” ...

“그 부분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 문제는 그게 다예요?” ...

“하나 더 있어요. 공주를 엮어 넣을 증거가 없어요. 브리트니와 공주가 손을 잡았더라도, 공주는 발뺌하겠죠.” ...

“음…… 공주가 마신 독의 정체를 의원들도 모른다고 했죠?” ...

“네.” ...

“좋아요. 그럼 이럴 때를 위해서 고용한 시녀의 힘을 좀 빌려봅시다.” ...

리시는 영문 모를 표정으로 케이를 응시했다. ...

이럴 때를 위해 고용한 시녀라니. 내가 모르는 시녀가 있었던가? ...

+++

학자 가문으로 유명한 루테크 집안에서, 에르웰은 돌연변이 같은 존재였다. ...

루테크 가문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에르웰 역시 천재적인 두뇌를 갖고 있어서, 말을 떼기도 전에 글을 읽고, 아카데미에 들어가기도 전에 어지간한 교수들보다 많은 지식을 습득했다. ...

여기까지는 다른 루테크 가문 사람들과 다를 게 없지만, 에르웰은 또 다른 면에서 천재성을 드러냈다. ...

검술. ...

걷기도 전에 검에 관심을 보였고, 아카데미에 입학하기도 전에 기사와 1대1 결투가 가능할 정도의 실력을 지니게 되었다. ...

방랑하는 학자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는 동안 에르웰이 한 것은, 방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게 아니었다. 함께 여행하는 용병들에게 전투 기술을 배우고, 간혹 마주치는 암살자들에게 암살 기술을 배웠다. ...

그리하여 아카데미를 남들보다 몇 년 빨리 졸업할 무렵, 에르웰은 훌륭한 전쟁 무기가 되었다. 검에 검기까지 담을 수 있는 그녀는, 원하기만 하면 황제의 기사단 단장도 될 수 있을 실력의 소유자였다. ...

문제는 그녀가 루테크 가문이라는 점이었다. ...

루테크 가문에서는 지금껏 ‘싸움꾼’을 배출한 적이 없었다. ...

에르웰이 기사가 되고 싶다, 아니면 용병단에 들어가고 싶다, 고 말하자, 아버지는 기절하고 어머니는 앓아누웠다. ...

그나마 허락해준 것이 검술학 교수가 되는 것이었지만……. ...

‘교수는 옘병. 애 녀석들 가르치는 건 취미가 없다고.’ ...

에르웰은 침대에 누워서 작은 병을 던졌다가 받았다. ...

연보라색 병 안에는 메어리가 마신 독의 해독약이 들어 있었다. ...

파티 시작 전, 메어리의 시녀인 제인과 부딪쳤을 때 훔쳤다. ...

‘그 두꺼비를 봤을 때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네.’ ...

메어리가 그린 저택에 들어온 후, 리시의 방에서 침입자의 흔적을 발견했다. 메어리의 시녀랍시고 곁에 있던 제인이 리시의 방에 침입했던 게 틀림없었다. ...

그때부터 에르웰은 집에 돌아가지 않고 고용인의 방에 머물며, 시간이 될 때마다 메어리를 염탐했다. ...

메어리는 방을 비울 때마다 문단속을 꼼꼼히 했지만, 여러 기술을 습득한 에르웰에게 잠긴 문을 따는 건 일도 아니었다. 물론 제인처럼 머리카락을 떨어뜨리는 어설픈 짓도 하지 않았다. ...

‘이걸 아이리스 님에게 드려야 하는데, 어떻게 얻었다고 해야 하나…….’ ...

에르웰은 그린 가문 사람들에게 자신의 실력을 완벽하게 감추고 있었다. 적어도 에르웰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

-“너, 거기서까지 네 성질 다 드러내면서 다니면 아주 연을 끊을 줄 알아라!” ...

아버지의 엄명이 있었기에, 어떻게든 이 실력과 성격을 감추는 수밖에 없었다. ...

그린 가문의 시녀로 들어온 건, 부모님이 ...

“신부 수업을 하든, 수녀원에 들어가서 봉사를 하든, 백작 부인 시녀를 하든, 셋 중 하나를 선택해!” ...

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

신부 수업이라니. ...

‘그런 걸 하느니 죽는 게 낫지.’ ...

수녀원에서 봉사하는 건 나쁘지 않지만, 수녀복을 입어야 하는 게 문제였다. 목을 꽉 죄는 수녀복 따위는 죽어도 입고 싶지 않다. ...

그래서 선택한 것이 그린 백작 부인의 전속 시녀 역할이었다. ...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기에, 처음에는 고까운 마음이 있었다. ...

게다가 그린 백작 부인이 누군가. 성질 더러운 제르시엔의 오빠의 부인이 아닌가. ...

좋은 마음이 생길 수가 없었다. ...

하지만 그린 백작 부인을 처음 보는 순간. ...

‘진짜 아름다우셨지. 와, 깜짝 놀랐어.’ ...

외모도 외모지만 눈빛이 놀라웠다. ...

리시는 가녀린 육체에 드래곤이 깃든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

첫눈에 리시가 마음에 들었다. 리시를 위해 시녀 노릇 좀 제대로 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

‘하지만 내가 시녀 노릇을 해봤어야 말이지…….’ ...

다행히 리시는 그런 면에서 깐깐하지 않았다. ...

어느 귀부인은 자기 시녀가 조금만 실수해도 발로 차거나 욕을 한다던데, 리시는 에르웰이 무슨 짓을 하든 다 용서해줄 것 같았다. ...

감시역으로 함께 온 크리시나가 있는 한, 이 성격을 다 드러내는 일은 없겠지만. ...

‘은근슬쩍 그 독두꺼비에 대해 알릴 방법이 없나?’ ...

에르웰이 고민하고 있을 때. ...

똑똑- ...

노크소리가 울렸다. ...

이런 늦은 시간에 고용인의 방까지 에르웰을 찾아올 사람이 없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허벅지의 단도에 손을 대며 대답했다. ...

“네.” ...

“에르웰 양. 나야.” ...

케이의 목소리였다. ...

‘저 양반은 또 언제 저택에 왔대?’ ...

에르웰은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열었다. ...

케이는 리시와 함께였다. ...

“아이리스 님, 무슨 일 있으세요?” ...

“에르웰. 나, 되게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

케이가 끼어들었다. ...

“저한테 인사 받고 싶으셔서 일부러 찾아오신 거예요?” ...

에르웰이 기가 막힌다는 듯 묻자, 케이가 싱긋 웃었다. ...

“뭐, 그런 것도 있고…… 공주가 마신 독에 대해 뭔가 아는 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리고 에르웰 양이라면 지금쯤 좋은 증거를 잡아두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고.” ...

에르웰은 한숨을 삼켰다. ...

그동안 잘 감췄다고 생각했는데. ...

“양은 빼시고, 그냥 엘이라고 불러주세요. 소름 끼치니까. 그리고…… 언제부터 아셨어요?” ...

“애초에 널 고용한 이유가 그거거든. 내 아내의 곁에서 수족처럼 지켜줄 사람이 필요했지.” ...

“끝내주는 안목이시네요.” ...

케이와 달리 리시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

눈을 동그랗게 뜨고 케이와 에르웰을 번갈아 보는 리시가 귀엽다고, 에르웰은 생각했다. ...

“들어오세요. 아, 누추한 곳이라 좀 그런가?” ...

“이 누추한 곳이 내 집이야, 엘. 들어갈게.” ...

하녀들은 방 하나에 여러 명이 함께 자지만, 백작 부인의 전속 시녀인 에르웰은 방을 혼자서 사용하고 있었다. ...

원래는 출퇴근을 하는데, 메어리가 저택에 있는 동안만 잠시 머무는 방이라서 의자도 하나 없었다. ...

셋은 방문을 닫고 둥글게 서서 대화를 나눴다. ...

“바우레아라는 이름의 두꺼비가 있어요. 따뜻한 지역 늪지에서 사는 두꺼비거든요.” ...

리시는 에르웰이 왜 갑자기 두꺼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잠자코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

“바우레아 두꺼비는 원래 평범한 두꺼비예요. 그냥 곤충이랑 늪지에 사는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으면서 평화롭게 사는 녀석이죠. 파리를 잡아먹으려고 폴짝 뛸 때는 좀 귀엽기까지 해요. 파리나 모기를 잘 잡는 녀석이라서, 남부 어느 지방에서는 바우레아 두꺼비를 그런 용도로 키우기도 해요.” ...

에르웰은 담담히 바우레아 두꺼비의 생태를 읊어나갔다. ...

리시는 점점 더 영문을 알 수 없어졌지만, 케이가 진지하게 에르웰의 이야기를 듣고 있어서 방해할 수가 없었다. ...

“그런데 말이죠. 정말 아주 드물게. 거의 백만분의 일의 확률로 돌연변이가 태어나요. 돌연변이 바우레아 두꺼비는,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적인 바우레아 두꺼비랑 똑같아 보이는데, 위험한 녀석이에요. 점액질에 독이 있거든요.” ...

독. ...

리시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

“바우레아 두꺼비 자체가 이 지역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데다가, 딱히 연구하는 것도 아니라서 돌연변이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

“하지만 너는 알지.” ...

‘그렇죠. 전 머리가 끝내주잖아요. 하여간, 이 독을 섭취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은 발열, 구토, 피부 발진 등이 있어요. 그리고 과다 섭취할 경우, 피를 토하다가 사망에 이르죠.” ...

“케트벤 공주가 마신 게 그 독인 게 확실한가?” ...

“확실해요. 제가 한때 바우레아 두꺼비에 푹 빠져서 연구하다가, 그 독을 한 번 먹어본 적이 있거든요. 딱 그렇더라고요.” ...

에르웰은 담담히 말했지만, 리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

“에르웰! 그런 건 위험해요.” ...

에르웰이 씩 웃었다. ...

“죽을 뻔하긴 했어요. 해독제를 미리 만들어두지 않았다면 죽었겠죠.” ...

“해독제가 있어요?” ...

“있어요, 아이리스 님.” ...

에르웰은 품에서 해독제를 꺼냈다. ...

“지금도 있고요.” ...

“그건……?” ...

“훔쳤어요. 공주의 시녀, 제인이라는 여자가 갖고 있더라고요.” ...

“훔치다니…….” ...

리시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에르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

리시의 시녀 노릇도 여기서 끝이구나. ...

그렇게 생각하는데, 리시가 덧붙였다. ...

“그거 정말 근사하네요.” ...

리시의 눈을 빛내며 에르웰의 손에 들린 해독제를 받아갔다. ...

에르웰은 웃음을 터뜨렸다. ...

역시 에르웰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이 백작 부인이 좋았다. ...

“이걸로는 대단한 증거가 되지 않을 거예요. 이 해독제는 그 두꺼비 독뿐만이 아니라, 다른 독에도 쓰이는 해독제거든요. 공주가 혹시나 싶어서 들고 다니는 거라고 발뺌하면 소용없겠죠. 그래서 말인데요, 백작님.” ...

(87) 폭로 ...

제인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디서 해독제를 떨어뜨렸는지 알 수 없었다. ...

‘내가 내 몸에 있는 걸 떨어뜨리다니……. 그런 일이 과연 가능할까?’ ...

불가능했다. 자신이 저지를 만한 실수가 아니었다. ...

그러자 번뜩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

리시의 시녀인 에르웰. ...

첫 만남부터 곱지 않은 시선으로 제인을 째려보던 여자. ...

파티 전에 그녀와 부딪쳤던 게 떠올랐다. ...

싸악- ...

혈관의 피가 전부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

‘아니, 그럴 리 없어. 내 몸에서 뭔가를 훔치다니……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이 있을 리가…….’ ...

하지만 만약 정말로 에르웰이 그 짧은 순간에 해독제를 훔친 거라면 대응이 필요했다. ...

“공주님.” ...

메어리는 아직도 침대에서 발버둥을 치며 악다구니를 쓰다가 토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

처음에는 그저 빨갛기만 했던 뾰루지에 고름이 차고 있었다. ...

온 얼굴이 엉망진창이라서 예전의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

“왜! 이제야 해독제를 찾았나 보지?” ...

“짐작 가는 곳이 있습니다.” ...

“그러면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얼른 가져오란 말이야!” ...

“그게…… 어쩌면 누군가가 훔쳤을지도 모릅니다.” ...

“뭐? 훔친다고? 대체 누가 너한테서 해독제를 훔쳐?” ...

“그게…….” ...

제인은 자신의 짐작을 이야기했다. ...

악쓰는 걸 멈추고 심각하게 듣던 메어리가 물었다. ...

“그게 가능해? 그 여자, 그냥 아이리스의 시녀일 뿐이잖아.” ...

“저도 공주님의 시녀일 뿐이죠.” ...

“아아아악!” ...

메어리는 두 손으로 머리를 마구 쥐어뜯었다. 메어리가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상대는 제인뿐이었다. ...

제인은 묵묵히 메어리가 정신을 가다듬기를 기다렸다. ...

“그 여자가 그 병 안에 담긴 게 뭔지나 알까?” ...

“루테크 가문의 여식이라면…….” ...

“아, 그래. 루테크. 루테크였지.” ...

메어리가 이를 으득 갈았다. ...

메어리는 언제나 모든 것을 손에 넣어왔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 이룰 수 있었다. ...

하지만 이 그린 저택에 온 후, 메어리의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로 인한 초조함과 불안함, 짜증이 메어리를 성급하게 만들었다. ...

“론을…… 론을 버려야 해. 죽여서 멀리 갖다버려.” ...

“네!” ...

제인이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을 때였다. ...

콰앙-! ...

거칠게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메어리와 제인은 눈을 마주쳤다. ...

대체 어느 누가 감히 미나스아릭 왕국의 공주 방에 노크도 없이 들어온단 말인가. ...

“서둘러.” ...

메어리가 본능적으로 제인에게 명령했다. ...

제인이 빠르게 몸을 날려, 침대 옆 협탁에서 두꺼비 어항으로 다가갔다. ...

콰앙-! ...

이번에는 침실 문이 부서질 것처럼 열렸다. ...

열린 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케이였다. ...

“동작 그만.” ...

케이가 제인에게 서늘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

하지만 제인은 멈추지 않았다. 제인에게는 메어리의 명령이 최우선이었다. ...

두꺼비를 갖다 버리지는 못하더라도 죽이기는 해야 한다. ...

제인이 어항 안으로 손을 넣으려는 순간. ...

쌔액-! ...

빠르게 날아온 단도가 정확하게 제인의 손목에 꽂혔다. ...

“윽!” ...

제인은 작게 신음을 흘리면서도, 다른 쪽 손을 뻗었다. ...

“내 대장이 동작 그만이라고 했는데, 몸은 빨라도 귀는 안 좋은 봐?” ...

어느새 제인의 옆에 선 나단이, 제인의 손목을 세게 비틀어 쥐며 말했다. ...

제인은 자신보다 키가 작고 호리호리한 나단의 힘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

나단이 제인에게 다리를 걸어 엎어뜨린 후, 등을 발로 꾹 밟았다. ...

“케, 케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메어리가 벌떡 일어나서 물었다. ...

메어리는 처음에 케이를 봤을 때만 해도, 케이가 자신을 걱정해서 온 줄 알았다. ...

메어리가 독에 당했다는 말에, 노크할 겨를도 없이 문을 박차고 들어온 거라는, 행복한 망상을 했다. ...

하지만 지금 케이의 표정과 그 부하들의 태도를 보니,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

“내가 있는 방을 노크도 없이 함부로 들어오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

“나는 이래도 돼.” ...

케이의 음성은 음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

“에르웰.” ...

케이가 부르자, 뒤에 있던 에르웰이 사박사박 걸어가 두꺼비 어항 안을 들여다봤다. ...

“두꺼비는 자고 있네요. 잠이 많은 녀석이거든요.” ...

“거기서 그 더러운 손 치워! 그 애는 내 애완동물이야!” ...

메어리는 어떻게든 두꺼비의 비밀을 들키지 않기 위해, 에르웰을 향해 달려들었다. ...

하지만 에르웰은 가볍게 몸을 틀어 메어리의 손을 피했다. ...

“그거 내려놓으라니까!” ...

메어리가 에르웰을 잡으려고 이리저리 날뛰고 있을 때, 케이가 말했다. ...

“자, 여기서 일어난 일은 다 봤을 겁니다. 메어리 케트벤 공주는 저 두꺼비가 자기 애완동물이라는 걸 인정했습니다.” ...

악을 쓰며 돌아다니던 메어리의 귀에도, 케이의 낮고 단호한 음성이 들려왔다. ...

메어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움직임을 멈췄다. 두꺼비를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당황해서, 케이의 뒤쪽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

아니, 어쩌면 그들은 케이보다 한발 늦게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

2황자 라코젠, 밀란시스 피아몬도 대공, 수사청장 비르첸 백작과 몇몇 상급 귀족, 귀부인들……. ...

메어리가 파티에 초대했던 인물들이 그곳에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메어리를 보고 있었다. 언제나 고상하고 품격 있게 행동해오던 메어리이기에, 그들은 자기가 본 것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

게다가 그들은 메어리가 왜 두꺼비 하나 때문에 저 난리를 치는지도 알지 못했다. ...

그저 그린 백작이 ‘재미있는 걸 보여줄 테니, 저택에 들러달라.’고 전언을 보내서 왔을 뿐. ...

어쩌면 파티 때 있었던 독살 미수 사건과 관련된 일이 아닐까 싶어서 흥미진진한 마음을 품었을 뿐. ...

메어리가 미치광이처럼 날뛰는 장면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어머나……. 무례해라.” ...

메어리가 에르웰을 향해 휘젓던 손을 내리고 우아하게 말했지만, 이미 늦었다. ...

볼 사람은 다 봤다. ...

“다들 이런 시간에 미리 알리지도 않고 내 방에는 어쩐 일이죠? 이게 가비자르 제국식 손님 대접인가요?” ...

“어제 파티에서 내 아내가 레이디 위틀로에게 술잔을 건넸고, 레이디 위틀로가 그 술잔을 케트벤 공주님에게 전달했는데 그 술에 독이 들어 있었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케이는 메어리가 아닌,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

“그 일로 비르첸 백작은 진상을 조사하기도 전에 내 아내를 끌고 가려 했고, 기자들은 제멋대로 사건에 대해 써댔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내 아내가 범죄자라도 되는 것처럼 수군거렸죠.” ...

케이가 언급한 사람들이 민망한 듯 시선을 돌렸다. ...

케이는 천천히 돌아서서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

“이제 무대가 준비됐으니, 이 사건의 진짜 진상을 알아보도록 하죠. 그리고, 거기.” ...

케이가 살금살금 방에서 나가려는 브리트니를 검지로 가리켰다. ...

방 안의 모두가 뒤를 돌아서 브리트니를 쳐다봤다. 주목을 받은 브리트니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우뚝 멈춰 섰다. ...

“레이디 위틀로 역시 이 사건의 주요 참고인이니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말아요.” ...

+++

리시는 화장대 앞에 가만히 앉아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

브리트니가 조용히 살면, 더는 그녀를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

위틀로 공작가에서 있었던 그 무수한 괴롭힘. ...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브리트니는 리시를 질투한 것일지도 몰랐다. ...

아버지의 불륜으로 태어난 하녀의 딸. ...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보다 예뻐서 더 시선을 받는 딸. ...

지난 삶, 브리트니의 악행은 브리트니가 황후가 된 후에 더욱더 심해졌다. ...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짓까지 저질렀지만, 이번 삶에서는 벌어지지 않은 일. ...

그러니 공작가에서의 괴롭힘 정도는, 지금까지 손봐준 것 정도로 끝내려 했다. ...

하지만 브리트니는 선을 넘었다. ...

‘이제 끝이야, 브리트니. 적어도 위틀로 가문에서는 절대 황후가 나올 수 없을 거야.’ ...

“아이리스 님. 준비됐어요.” ...

케이와 함께 메어리의 방에 쳐들어갔던 에르웰이 돌아왔다. ...

리시는 천천히 일어나서 에르웰과 함께 사람들이 모여 있는 메어리의 방으로 향했다. ...

리시가 들어가자, 모두가 숨을 멈추고 리시를 주목했다. ...

리시는 크게 심호흡한 후 입을 열었다. ...

“묻어두고 싶었어요. 딱히 좋을 게 없는 일이라서 그냥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다들 진실을 알고 싶어 하며, 거짓을 진실인 것처럼 떠들어대니……. 하아. 이제는 밝힐 수밖에 없겠네요.” ...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어도 메어리의 표정은 당당했다. ...

하지만 메어리 근처에 앉아 있는 브리트니는 그리 상황이 좋지 않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보였다. ...

“내가 위틀로 공작 가문과 연을 끊은 이유는, 위틀로 공작 가문 분들이 날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기 때문이었어요. 특히 브리트니가 그랬죠.” ...

수십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브리트니에게로 향했다. ...

“내, 내가 언제……. 왜 없는 소리를 지어내고 그래……?” ...

브리트니의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

이런 상황에 빠져본 게 처음이라서 잔뜩 겁에 질려, 평소처럼 뻔뻔하게 나올 여력이 없는 듯했다. ...

리시는 그런 브리트니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다시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

“며칠 전. 그러니까 파티 전날 밤. 한 남자가 내 침실에 몰래 숨어들어왔어요.” ...

“흡!” ...

급히 숨을 들이켜는 소리는 브리트니에게서 나왔다. ...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브리트니에게로 돌아갔다. ...

브리트니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저었지만, 그 모습이 어찌나 수상쩍은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

‘뭔가 저지르긴 저질렀구만.’ ...

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엘드허트.” ...

리시가 엘디를 쳐다보자, 엘디가 고개를 끄덕이고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제이미가 알포드를 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

며칠간 먹지도 못하고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알포드는 상태가 엉망이었다. ...

초췌한 얼굴에 부스스한 머리카락, 지저분한 옷. ...

알포드는 등 뒤로 두 손목이 묶이고, 입에 재갈을 물고 있었다. ...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등장인물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

“아, 저 남자……!” ...

알포드를 알아본 귀부인이 소리를 치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

근처에 있던 귀부인들이 설명을 요구하듯 쳐다보자, 그 귀부인이 작게 속삭였다. ...

“그, 왜…… 있잖아. 예전에 그린 백작 부인이랑……. 알포드 후치스 자작이라고…….” ...

“아아…….” ...

소문에 빠른 귀부인들은 그 이름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케이와 눈이 마주치자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

귀부인들의 속삭임을 분명히 들었을 텐데도, 리시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

“남편은 집을 비우고 나 혼자 침실에 있는데, 이 남자가 옷장에서 튀어나왔어요.” ...

“어머!” ...

“저런…….” ...

귀부인들이 깜짝 놀라 작게 비명을 질렀다. ...

“읍! 으으읍! 읍!” ...

알포드는 뭔가 항변하고 싶은 듯했지만, 재갈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다. ...

알포드의 눈이 브리트니에게서 멈췄고, 브리트니의 얼굴이 더 하얘졌다. ...

브리트니는 바들바들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꽉 잡았지만, 왼손 역시 마찬가지로 떨리고 있었다. ...

“이 남자가 침대에서 날…….” ...

거기까지 말하고 리시는 더 이상 말하기 힘들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

자연스럽게 엘디가 리시의 말을 이었다. ...

“다행히도 나랑 여기 계신 피아몬도 대공께서 복도 앞을 지나가던 길에, 이변을 눈치채고 들어가서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 막을 수 있었습니다. 운이 좋았죠. 안 좋았다면 내 형수님은 이 더러운 놈에게…….” ...

엘디가 이를 으득 갈았다. ...

모두 홀린 듯 리시가 큰일을 당할 뻔한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머릿속을 차지한 의문을 거둘 수는 없었다. ...

대체 아까 메어리의 미치광이 같은 행각은 무엇이며, 브리트니와 리시의 관계가 안 좋다는 이야기는 왜 하는 거며, 후치스 자작은 왜 여기에 데려온 걸까? ...

저런 더러운 놈은 그냥 잘라내고 갖다버리면 그만일 텐데. ...

그런 의문을 알고 있다는 듯, 리시가 입을 열었다. ...

“내가 왜 이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지 궁금할 거예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거든요.” ...

(88) 나 혼자는 안 죽어. ...

이 모든 게 연결되어 있다고? ...

미나스아릭 왕국의 메어리 케트벤 공주와 위틀로 가문의 공녀와 후치스 자작이 대체 어떻게 연결되는 거지? ...

“후치스 자작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거예요. 그렇죠, 후치스 자작?” ...

리시의 질문에 알포드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

“진실만 말해야 할 거예요. 그러지 않으면…….” ...

리시의 눈이 잠시 케이에게 머물렀다가 다시 알포드에게로 향했다. ...

알포드는 리시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충분히 알았다. ...

“엘드허트. 그 남자의 재갈을 풀어줘요.” ...

엘드허트가 재갈을 풀어주자마자, 알포드가 외쳤다. ...

“이건 전부 저 녀…… 아니, 저기, 저 브리트니가 시킨 겁니다! 나는 싫다고 했는데 전부 저 여자가 시켰다고요!” ...

“뭐? 그게 무슨 소리야?” ...

“위틀로 양이 시키긴 뭘 시켜? 설마…… 자기 동생한테 몹쓸 짓을 하라고 시켰다는 건 아니겠지?” ...

“설마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런 짓을…… 아무리 미워도 하면 안 되는 짓이잖아요.” ...

“진짜 그랬으면 인간이기를 포기한 거지.” ...

“저 자가 상황을 모면하려고 괜히 브리트니 양의 발목을 잡는 게 분명해.” ...

사람들 사이에 소란이 일었다. ...

리시는 잠시 서서 소란이 가라앉기를 기다렸지만, 브리트니는 그러지 못했다. ...

“그게 무슨 소리예요, 후치스 자작! 우리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잖아요!” ...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 아이리…… 아니, 그린 백작 부인이 백작님과 결혼했을 때, 그걸 훼방 놓으라고 날 여기에 보낸 것도, 이번에 날 찾아와서 나한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린 것도 너잖아!” ...

“무례하네요, 자작. 지금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따위로 말하는 거죠?” ...

“하! 무례? 너 때문에 두 번이나 죽을 뻔했어. 나도 이판사판이라 이거야. 나 혼자 죽을 줄 알아?” ...

“대체 왜 나 때문이라는 거예요? 자작이 아랫도리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인데. 나한테 이러는 거, 우리 아버지가 알면 가만히 계실 것 같아요?” ...

“가만히 안 있으면 어쩔 건데? 네 애비는 네가 이러고 다니는 걸 알기나 해?” ...

알포드는 먼 곳에 있는 공작보다 가까운 곳에 있는 케이가 훨씬 더 무서웠다. ...

아니, 위틀로 공작이 바로 옆에 있더라도, 케이보다 무섭지는 않았을 것이다. ...

알포드는 조용히 이쪽을 노려보는 케이 쪽으로 눈도 돌릴 수가 없었다. ...

“아이리스. 내가 한 게 아니야. 너, 설마 후치스 자작이랑 짜고서 나한테 누명을 씌우는 거 아니니?” ...

브리트니가 화살을 리시에게 돌렸다. ...

리시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엘디를 돌아봤다. ...

엘디가 알포드의 품에서 편지를 끄집어내더니, 달콤한 목소리로 낭독했다. ...

“후치스 자작. 당신이 이번 파티에 참가하기 위해 다코트 시에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가슴이 설렜는지 몰라요. 지금 내 남편은 멀리 떠나 있답니다. 밤이 너무나 외로우니, 당신이 내 곁을 지켜주었으면 해요. 아이리스.” ...

꿀꺽- ...

누군가 침 삼키는 소리가 울릴 만큼, 방 안은 조용했다. ...

‘저게 뭐야? 저거, 결국 그린 백작 부인이 후치스 자작을 끌어들였다는 거 아냐?’ ...

‘미쳤네…… 그린 백작 부인은 진상을 밝히겠다더니, 결국 자기가 불륜을 저지르려는 것만 들켰네.’ ...

‘어쩜 좋아. 너무 민망하겠다.’ ...

‘와, 저 돼지 같은 놈의 어디가 좋다고. 차라리 나 같은 남자나 만날 것이지.’ ...

제각각 다른 생각을 하는 가운데, 브리트니가 엘디에게 달려들어 그 손에 들린 편지를 빼앗았다. ...

브리트니는 편지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

“이거, 아이리스 글씨체가 맞는데…… 아이리스, 너…… 후치스 자작한테 편지까지 보내서 끌어들인 거니? 그린 백작님이 잠시 집을 비운 틈에……? 결혼하고 나서는 그러지 말라니까.” ...

브리트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

리시가 미소 지었다. ...

“여러분이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그린 백작 저택의 잉크는 방마다 색상도, 만든 재료도 조금씩 다르답니다. 얼마 전 상점에서 각기 다른 잉크를 딱 한 병씩만 구입했고, 방마다 하나씩 넣어뒀지요.” ...

리시는 브리트니에게 천천히 걸어가서 그녀의 손에 있는 편지지를 가져왔다. ...

“이 잉크 색상은…… 제이미?” ...

제이미가 다가와서 편지지를 확인하더니 말했다. ...

“이건 서채 2층 끝에서 두 번째 방에 놔둔 잉크군요.” ...

“지금 서채 2층 끝에서 두 번째 방에 누가 묵고 있죠?” ...

“레이디 위틀로가 묵고 있습니다, 그린 백작 부인.” ...

사람들은 멍한 표정이었다. ...

눈치 빠른 몇 명은 깨달았지만, 대부분 리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

브리트니도 마찬가지였다. ...

“그, 그게 무슨……?” ...

“글씨체야 따라하면 되지만, 이 잉크는? 왜 이 편지를 쓰는 데 네 방에 있는 잉크가 사용된 걸까?” ...

“아!” ...

“어머나!” ...

그제야 깨달은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

반대로 브리트니의 낯빛은 창백해졌다. ...

“그, 그건…… 그건 나도 모르지. 네 방에도 이 잉크가 있는 거 아냐?” ...

“아니야. 지금 가서 확인시켜줄 수도 있어.” ...

“지금은 바꿨겠지.” ...

“그것도 아니야. 나는 잉크를 종류별로 한 병씩만 샀고, 그 영수증도 보여줄 수 있어. 못 믿겠으면 상점 주인에게 증언을 하라고 할 수도 있고.” ...

브리트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너…… 너, 날 함정에 빠뜨리려고……!” ...

“함정? 내가 왜 널 함정에 빠뜨리지? 후치스 자작에게 아이리스 이름으로 전해진 편지의 잉크가 네 방에 있는 잉크라면, 함정에 빠뜨리려는 쪽은 누굴까? 네 방 잉크를 사용한 너? 아니면 보낸 적도 없는 편지 때문에 몹쓸 짓을 당할 뻔한 나?” ...

브리트니는 눈을 굴려 자신을 편들어줄 사람을 찾아보려 했다. ...

하지만 브리트니를 향한 수십 개의 눈동자에는 경악과 혐오만 담겼을 뿐, 동정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

“네, 네가 몰래 내 방에 들어와서…….” ...

“네 방에는 언제나 네 호위기사나 시녀가 머무르지 않았니?” ...

“나, 나는…… 나는…….” ...

브리트니는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

이건 좋지 않다. ...

모두가 있는 앞에서 이런 일이 밝혀지는 건, 브리트니 한 명만 수치를 당하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

이리저리 떠돌던 브리트니의 눈에 메어리가 들어왔다. ...

‘아!’ ...

너무 당황스러워서 든든한 조력자가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

브리트니는 메어리에게 간청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메어리는 모르는 척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

‘미친……!’ ...

브리트니의 안에서 뭔가 폭발했다. ...

이성의 끈이 뚝 끊어졌다. ...

‘날 배신해?’ ...

이대로 혼자 죽을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공주라도 날 이용만 하고 내칠 수는 없다. ...

알포드는 여전히 씩씩거리며 브리트니를 노려보고 있었다. ...

이 상황에서 브리트니가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시도라도 하면 얼마든지 물어뜯겠다는 눈빛이었다. ...

브리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

메어리가 자기만 무사히 이 상황을 빠져나가려고 한다면, 그녀가 한 왕국의 공주라도 가만 놔둘 생각이 없었다. ...

‘알포드는 여기 갇혀 있었어.’ ...

그날 밤, 리시에게 몹쓸 짓을 하려다가 붙잡혀서 끌려나가는 것까지 목격했다. 그 후로 소식이 없기에 멀리 쫓겨났을 줄로만 알았다. ...

하지만 지금 이렇게 이 자리에 있다는 건, 그날 밤 이후로 내내 이 저택 어딘가에 갇혀 있었다는 뜻이 된다. ...

‘분명 메어리 공주의 반지를 갖고 있을 거야.’ ...

그 반지를 찾아내서, 이 일에 메어리가 관계되어 있다는 걸 증명해야만 한다. ...

공주가 관련되었다는 걸 알면 미나스아릭 왕국과의 관계도 있으니, 케이도 이 사건을 크게 부풀리지는 못할 것이다. ...

“그래요.” ...

빠져나갈 구멍을 찾고 나니, 엉망으로 헝클어졌던 머릿속이 조금은 차분해졌다. ...

“그 편지는 내가 쓴 게 맞아요.” ...

“헉!” ...

“어머나.” ...

“어쩜…….” ...

여기저기서 경악에 찬 탄식이 흘러나왔지만, 브리트니는 당황하지 않았다. ...

“하지만 내게 그 편지를 쓰라고 지시를 내린 사람이 있어요. 그게 아니라면 내가 왜 그런 편지까지 써서, 아이리스를 위험에 처하게 하겠어요? 내게 지시를 내린 사람이 너무 높은 분이라서, 나도 어쩔 수가 없었던 거예요.” ...

거기까지 말하고 브리트니는 메어리를 흘끔 쳐다봤다. ...

이 정도 했으면 당황해서 상황을 수습하려고 나설 줄 알았는데, 메어리는 조금도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

‘흥. 내가 끝까지 말 못 할 거라고 생각하나 보지? 날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어, 메어리 케트벤.’ ...

모든 사람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브리트니의 입술만 쳐다봤다. ...

위틀로 가의 ‘공녀’에게 지시를 내릴 정도로 높은 분이라니. ...

도대체 누구인 걸까? ...

이 자리에 있는 인물로만 따지자면 공주인 메어리와 2황자인 라코젠, 대공인 미르 정도가 공녀에게 지시를 내릴 만한 ‘높은 분’이었다. ...

‘공주는 아니겠지. 독을 마셨잖아. 설마 자기 얼굴이 저렇게 끔찍하게 될 만한 독을 스스로 마시겠어? 게다가 그런 짓을 할 이유도 없고 말이야.’ ...

하지만 그럴 이유가 없는 건, 2황자나 대공도 마찬가지였다. ...

심지어 그 두 사람은 독살 미수 사건이 벌어졌을 때, 내내 리시의 편을 들어주었다. ...

한동안 뜸을 들이던 브리트니가 메어리를 돌아보며 물었다. ...

“공주님. 제 뒤를 봐주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

잠깐의 침묵. ...

그 후에 술렁임이 일었다. ...

“저게 무슨 소리야?” ...

“정말이야? 정말 케트벤 공주님이 위틀로 양에게 지시를 내린 거야?” ...

“그럴 리가…… 공주님이 뭐가 모자라서, 백작 부인에게 해코지를 하려고 하겠어요?” ...

“아무래도 레이디 위틀로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데…….” ...

“그렇겠죠. 이렇게 누구에게라도 덮어씌우려고 하는 거 아니겠어요?” ...

귀족들은 메어리와 브리트니를 번갈아 보며, 소곤소곤 의견을 나눴다. ...

메어리는 부채로 얼굴을 반 이상 가려서 눈만 살짝 드러난 상태였다. 메어리의 차분한 눈동자에서는 이 일과 관련이 있다는 기미를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

이쯤에서 반박해야 하는 메어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브리트니가 다시 한번 말했다. ...

“공주님. 이 모든 걸, 공주님께서 시키신 거잖아요. 아이리스를 죽여버리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전 어쩔 수 없이 공주님을 도와드린 거고요.” ...

“…….”

“뭐라고 말 좀 해보세요, 공주님!” ...

“레이디 위틀로. 난 도대체 그대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

“모르다니요. 발뺌하지 마세요!” ...

“발뺌이라니요, 레이디 위틀로. 다급한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린 백작 부인을 죽이고 싶었다면, 왜 내가 독을 마셨겠어요? 나는 아직도 해독을 못 해서…….” ...

메어리가 부채를 내리자, 고름 가득한 종기로 뒤덮인 얼굴이 드러났다. ...

귀부인 몇 명이 작게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입을 막았고, 몇몇 사람들은 보기 힘든 듯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

메어리의 오른쪽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

그녀는 다시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

“이 지경이 됐는데…….” ...

“그것도 우리 계획이었잖아요. 대놓고 아이리스에게 독을 먹이기도 힘들고, 성공한다고 해도 우리가 의심을 받을 수 있으니, 차라리 공주님이 독을 마시겠다고. 그 범인을 아이리스로 몰아가자고 했잖아요.” ...

“그만해요, 레이디 위틀로. 공주님은 아직 많이 편찮으십니다.” ...

메어리의 시녀 중 한 명이 외쳤다. ...

“그래요, 브리트니 양. 아무리 당황해도 그렇지, 아픈 사람을 끌어들이는 법이 어디 있어요?” ...

“케트벤 공주님을 끌어들이는 건 미친 짓이에요. 우리 가비자르와 미나스아릭 사이에 분란을 만들 작정이에요?” ...

“황제 폐하께서 아시면 그냥 넘어가지 않으실 겁니다.” ...

여기저기서 메어리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

브리트니는 숨이 콱 막혔다. 사람들의 시선과 목소리가 날카로운 칼이 되어 브리트니의 전신을 찔러대는 것만 같았다. ...

파리해진 브리트니를 보며, 리시는 속으로 생각했다. ...

‘무섭지, 브리트니? 깊은 늪 한가운데에 빠진 기분일 거야. 나도 네가 누명을 씌울 때마다 그런 기분을 느꼈거든. 하지만 브리트니, 여기서 무너지지 마. 좀 더 발버둥을 쳐봐. 아둔하고 멍청했던 나는 발버둥 한번 쳐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너는 나처럼 멍청하지 않잖아.’ ...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던 브리트니는 곧 정신을 차렸다. ...

메어리가 발뺌하리라는 건 예상했다. 이런 순간을 위해서 약속의 증표를 받아뒀던 거다. ...

브리트니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나는 공주님께서 벌인 일을 수습할 기회를 드렸어요. 공주님께서 그리 나오신다면, 이젠 나도 어쩔 수 없어요.” ...

(89) 죄의 대가 (1) ...

척- ...

브리트니가 손가락을 들어 알포드를 가리켰다. ...

“후치스 자작의 몸수색을 요청할게요.” ...

“또 나한테 뭘 떠넘기려는 거야!” ...

“시끄러워요, 자작! 어서 후치스 자작의 몸수색을 해줘요.” ...

브리트니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요청했다. ...

한 발 떨어진 곳에서 즐거운 듯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엘디가 앞으로 나섰다. ...

“뭘 찾으려는 거지, 레이디 위틀로?” ...

“반지요.” ...

“반지라…….” ...

“미나스아릭 왕국의 문장이 새겨진 반지, 그 반지를 저 남자가 갖고 있을 거예요.” ...

“그 반지라면, 이걸 말하는 건가?” ...

엘디가 바지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냈다. ...

브리트니가 반색했다. ...

“맞아요, 그 반지. 이미 후치스 자작의 몸수색을 했군요. 그걸 봤다면 알겠네요. 공주님이 나에게 지시하면서 그 반지를 줬어요. 나는 그 반지를 후치스 자작에게 맡겨뒀고요.” ...

또다시 분위기가 바뀌었다. ...

왕가의 문장을 새긴 반지는 절대 위조해서는 안 된다. 위조를 부탁한 자도, 위조를 도운 자도 큰 처벌을 면할 수 없다. ...

만약 저 반지를 알포드가 갖고 있었다면, 브리트니의 말이 진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

“확실히 이 반지를 후치스 자작이 갖고 있긴 했지.” ...

엘디의 대답에, 모두의 시선이 메어리를 향했다. ...

부채 위로 드러난 눈만 봐서는, 메어리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

“그, 그래요. 나, 나도 마찬가집니다. 브리트니 양이 찾아와서 미나스아릭의 공주님에게 지시를 받았다며 내게 백작 부인을 덮치라고 했어요. 뒤를 봐주겠다고 약속으로 그 반지를 넘겼고요.” ...

어떻게든 죄를 덜기 위해 머리를 굴린 알포드가 얼른 끼어들었다. ...

이 모든 게 ‘미나스아릭의 공주가 시킨 짓’이 된다면, 큰 처벌 없이 넘어갈 가능성이 높았다. ...

“자, 공주님. 이제 한번 말씀해보시죠. 이 반지가 왜 후치스 자작에게 있는지.” ...

브리트니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

메어리는 어깨가 살짝 움직일 정도로 한숨을 내쉬었다. ...

“레이디 위틀로. 그 반지를 가져간 게 그대였군요. 그대가 내 방에 다녀간 후, 반지가 사라져서 한참 찾았었는데…….” ...

“그게 무슨 소리예요? 공주님이 줬잖아요.” ...

“왕가의 문장이 새겨진 반지를, 내가 직접 그대에게 줬다고 말하는 건가요? 그대와 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다고……. 나는 이곳에서 그대를 처음 만났어요.” ...

“물론 우리는 처음 만났죠. 하지만 공주님이…….” ...

“레이디 위틀로. 설령 내가 그대의 말대로 그린 백작 부인을 죽이고 싶어 했다 해도…… 그런 무섭고 은밀한 일을, 처음 만나는 그대와 도모했을까요? 내가 그리 어리석어 보이나요?” ...

“그, 그건……! 하, 하지만 정말이잖아요. 공주님이 나한테 준 거잖아요.” ...

브리트니는 다시 여유를 잃었다. ...

브리트니의 말은 마치 어린애가 떼쓰는 것 같아서,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없었다. ...

브리트니는 메어리를 향했던 의심의 시선이 다시 자신에게로 모여드는 걸 깨달았다. ...

“하아. 정말…… 너무들 하네요. 나는 그저 그린 백작의 결혼을 축하해주고 싶어서 이곳에 왔을 뿐인데…… 독에 당하고, 회복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누명까지 씌우려 하다니…… 정말 너무해요.” ...

메어리가 처량하게 말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

브리트니는 사람들이 메어리에게 안타까운 시선을 던지는 모습에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

아니, 실제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

“어디서 발뺌이야! 나한테 반지를 주면서 시켰잖아! 그 독도 네가 스스로 마신 거잖아! 아아아악! 내가 한 게 아니라고! 나는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전부 다 공주가 시킨 거라고!” ...

리시는 절규하듯 부르짖는 브리트니를 묵묵히 지켜봤다. ...

브리트니는 잘해줬다. ...

이걸로 모든 것이 준비됐다. ...

짜악-! ...

손뼉을 치는 소리에, 사람들은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봤다. ...

브리트니도 절규를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

케이와 엘디 사이에 서 있던 리시가 어느새 두 걸음 앞으로 나와 있었다. ...

“자, 여기까지 하죠. 이걸로 여러분은 파티에서의 독살 미수 사건이 ‘누군가’ 내게 누명을 씌우려고 한 것이고, 또 ‘누군가’ 후치스 자작의 등을 떠밀어 내게 몹쓸 짓을 하라고 시켰다는 걸 알았을 거예요. 만약 후치스 자작이 성공했다면, 그린 백작 부인이 딴 남자와 그렇고 그런 짓을 했다더라, 라는 소문이 떠돌았겠죠. 그리고…….” ...

리시의 눈이 비르첸 백작을 향했다. ...

“파티장에서 2황자 전하와 피아몬도 대공이 절 도와주지 않았다면, 항변할 기회도 없이 수사청에 잡혀가서, 그린 백작 부인이 케트벤 공주를 독살하려다가 실패했다더라, 라는 소문이 떠돌았을 거고요. 그렇다면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요? 정말로 브리트니의 말대로 케트벤 공주님이 한 짓일까요, 아니면 브리트니가 남에게 떠넘기려고 거짓말을 하는 걸까요?” ...

“아이리스, 나는…….” ...

“쉿, 브리트니. 내가 지금 얘기하잖니.” ...

리시가 검지를 입가에 대고 우아하게 말했다.   브리트니는 이런 상황에서도 기품 있는 리시의 얼굴에 침을 뱉어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여기서 더 이미지가 안 좋아지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일에 누가 관련되었든, 나는 조용히 넘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이 사건은 나를 비롯하여 그린 가문 전체를, 나아가 그린 가문에게 가호를 내려준 교황 폐하의 명예를 더럽히는 행위니까요.”

교황 폐하까지 언급되었다.

사람들은 이 문제가 그저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떠들,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우선, 브리트니가 후치스 자작에게 지시를 한 건 사실이에요. 후치스 자작이 내게 몹쓸 짓을 하려고 한 것도 사실이고요. 그렇다면 풀리지 않은 건, 독살 사건이네요.”

리시는 메어리를 응시했다.

메어리 역시 부채 너머로 이글이글 타는 시선을 보냈다.

“공주님이 당한 저 독은 의원들도 무슨 독인지 알 수 없다고 했어요. 의원들이 이런저런 해독제를 써봤지만 통하지 않아서, 지금 저런 모습이신 거죠. 그렇다는 건, 잘 알려진 독이 아니라는 건데…….”

메어리가 부채를 세게 움켜쥐었다.

리시는 그런 메어리를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어주며 말했다.

“여러분, 혹시 바우레아라는 이름을 가진 두꺼비를 아시나요?”

두꺼비?

사람들은 이 긴장되는 순간에 왜 느닷없이 두꺼비 얘기가 나오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누군가가, 아까 메어리의 침실에서 벌어진 소동을 떠올리고, “아!” 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혹시 저거…….”

“아, 그러고 보니…….”

사람들의 시선이 에르웰이 들고 있는 두꺼비 어항으로 향했다.

“맞아요. 이게 바우레아 두꺼비입니다.”

에르웰이 모두가 볼 수 있게 어항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돌연변이 바우레아 두꺼비죠.”

메어리의 부채가 파르르 떨렸지만, 그걸 본 사람은 없었다.

다들 두꺼비를 보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돌연변이 바우레아 두꺼비의 피부에는 독이 있어요.”

에르웰은 아까 케이와 리시에게 했던 설명을, 사람들 앞에서 다시 한번 반복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덧붙였다.

“제 말을 못 믿겠다 싶으실 수도 있어서 덧붙이자면, 제 이름은 에르웰 루테크입니다.”

루테크.

그 성이 가진 의미는 컸다.

루테크 가문 사람이 돌연변이 바우레아 두꺼비에게 독이 있다고 한다면, 독이 있는 거다.

“그럼 이제 다들 아시겠죠. 이 모든 사건의 뒤에 누가 있는지.”

리시의 말에 사람들이 숨을 멈췄다.

그들은 눈을 부릅뜨고 메어리를 응시했다.

메어리는 여전히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있었다.

부채 너머의 눈동자가 흔들리긴 했지만, 그래도 공주인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지는 못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비르첸 백작님. 뒤에서 백작 부인을 해코지하라고 사주한 사람은 어떤 처벌을 받게 되나요?”

비르첸 백작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사람들의 시선은 비르첸 백작에게로 향했다.

비르첸 백작은 화살을 자신에게 돌린 리시가 원망스러웠지만, 파티 때 한 일이 있으니 모르는 척 얼버무릴 수도 없었다.

이건 정말이지 큰 사건이었다.

메어리에게 돈을 받고 죄 없는 백작 부인을 끌고 가려고 했다는 게 알려지면, 비르첸 백작도 처벌을 면치 못할 터였다.

“두 번 다시는…… 편지를 쓰지 못하도록 양손을 자르고, 지시를 내리지 못하도록 혀를…… 자르는 처벌을…….”

마음 약한 귀부인들이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작게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리시는 서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럼 그리하도록 하지요. 제이미, 나단.”

리시가 부르자마자 제이미와 나단이 메어리를 향해 다가갔다.

제인이 메어리의 앞을 막아섰다.

나단이 싱긋 웃었다.

“너, 나한테 못 이기잖아. 부상도 입었는데 모르는 척 비키지 그래?”

제인은 미동도 하지 않고 나단을 노려봤다.

휙-!

퍼억-!

쿠웅-!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제인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나단이 바닥에 넘어진 그녀의 가슴을 무릎으로 눌러 제압하고 있었다.

제인의 손 옆에 단도가 떨어져 있었다.

제이미는 우아하게 제인의 옆을 돌아가 메어리를 침대에서 끌어내리려 했다.

“내게서 더러운 손 치워!”

메어리가 날카롭게 외치며, 접힌 부채로 제이미의 손등을 탁 쳤다.

그러고는 스스로 침대에서 내려와 턱을 살짝 들고 모두를 오시했다.

“나는 미나스아릭 왕국의 메어리 케트벤 공주. 이 나라의 법으로 날 처벌할 수 있을 것 같은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공주. 남의 나라에 들어와서 범죄를 저지르면, 그 나라의 법으로 처리할 수 있어. 뭐, 협상을 통해서 처벌을 좀 완화시켜줄 수도 있지만…….”

엘디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메어리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웃기는 소리. 그거야 너희 같은 것들이나 그렇겠지. 나는 왕족이야. 이 자리에서 감히 누가 날 처벌할 수 있다는 거지?”

“나.”

사람들 뒤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동안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라코젠이었다.

반으로 쫙 갈라진 사람들 사이로, 라코젠이 천천히 걸어왔다.

“나는 그럴 수 있지, 공주.”

“2황자…….”

메어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자리에 라코젠이 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여, 여기가 그린 백작 영지라는 걸 잊은 모양이군요, 2황자 전하. 그린 가문은 가비자르 제국 소속이 아닌 걸로 압니다.”

“그래, 맞아. 그 얘기를 하려고 왔어. 이곳은 가비자르 제국 소속이 아니니, 가비자르 제국은 이 일에서 손을 떼겠어. 그린 백작령의 법이 외국 왕족이라도 마땅한 처벌을 받게 하는 거라면, 그러라고 하는 수밖에.”

“…….”

“하지만 이건 기억해둬. 이 문제로 미나스아릭 왕국이 그린 백작에게 검을 겨눈다면, 이 2황자 라코젠 옥보시더스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야.”

“라코젠 님!”

미나스아릭 왕국과 그린 백작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 그린 백작의 편에 서겠다는 말에, 보좌관 애덤이 비명처럼 외쳤지만, 라코젠은 그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그대를 처음 봤을 때 말했지. 향기가 없는 꽃이라고. 내 말이 틀렸다는 걸 인정할게.”

라코젠이 검지로 메어리의 턱을 살짝 들어올렸다.

“그대는 냄새가 나. 썩은 내.”

메어리의 무릎이 꺾였다.

하지만 그녀를 부축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지. 그대들도 다 돌아가도록 해. 뭐 좋은 일이라고 엉덩이 무겁게 여기를 지키고들 앉았어? 다들 나가!”

라코젠의 외침에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발을 옮겼다.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지만, 어쩌겠는가. 저 성격 더러운 2황자가 내쫓는데, 나가는 수밖에.

가장 마지막으로 방을 나가던 라코젠이 잠깐 뒤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친 리시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왜인지 아주 좋은 일을 한 것만 같아서 가슴이 뜨거워졌지만, 그 옆에 있는 케이와 눈이 마주치자, 가슴이 싸늘하게 식었다.

“흥.”

라코젠은 콧방귀를 뀌고 밖으로 나가, 방문을 거세게 닫았다.

콰앙-!

부서질 듯 문이 닫힌 후, 케이가 입을 열었다.

“공주와 브리트니 위틀로, 알포드 후치스를 전부 지하 감옥에 가둬라.”

(90) 죄의 대가 (2)

미나스아릭 왕국의 공주가 그린 저택의 지하 감옥에 갇혔다.

그냥 겁을 주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케이의 부하들은 무자비하게 메어리를 끌고 나갔고, 한참이 지나도 메어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메어리의 시녀들은 혼란에 빠졌다.

설상가상으로 시녀장인 제인도 어디론가 모습을 감춰서, 시녀들에게 지시를 내릴 만한 사람이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얘기를 해봐야겠어.”

캐롤라인이 발 벗고 나서기로 했다.

케이를 찾아갔더니 의외로 순순히 만나주었다.

“일국의 공주를 재판도 없이 가두다니요. 그 어디에도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백작.”

캐롤라인의 항의를 느른한 표정으로 듣던 케이가 입을 열었다.

“일국의 공주가 성유물 수호자의 아내에게 몹쓸 짓을 하려고 한 경우 역시 없었죠, 러벨 백작 부인.”

“그건……! 그, 그건 아직 진실이라고 밝혀진 게…….”

“본인이 모시는 공주를 편들고 싶은 마음은 알지만, 그게 진실이라는 걸 이미 알지 않습니까, 러벨 백작 부인.”

“……지, 진실이라 해도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정당한 재판을 통해 처벌을 내리는 게 옳아요. 그린 백작이 이런 짓을 했다는 걸 디에로프 전하께서 아시면, 그린 백작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글쎄…….”

케이가 싱긋 웃었다.

잘생긴 얼굴이 만들어낸 매력적인 미소였지만, 캐롤라인은 오싹 소름이 끼쳤다.

“무사하지 못한 쪽은 어느 쪽일까…….”

“그게 무슨 소리죠, 백작?”

“더 할 말이 있습니까, 백작 부인?”

“더 할 말이 뭐가 있겠습니까? 백작이 마음 상한 건 이해하지만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경우가 아니에요. 공주님께 잘 말씀드려서 없었던 일로 할 테니, 공주님을 풀어주도록 하세요. 분풀이는 이 정도면…….”

캐롤라인은 말을 끝낼 수 없었다.

말이 이어질수록 케이의 청회색 눈동자가 점점 어두워지더니, 그 어둠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캐롤라인의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캐롤라인을 잠식시키려는 듯 목을 움켜쥔 어둠.

캐롤라인은 공포에 질려 기절할 것만 같았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만 나가요, 백작 부인. 공주 문제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뭐하면 디에로프 전하께 일러바쳐도 좋고.”

공포에서 풀려나자마자 캐롤라인은 도망치듯 케이의 앞을 벗어났다.

서재 밖으로 나온 캐롤라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한 손을 목에 댔다. 분명 뭔가가 목을 움켜쥔 것 같았는데…….

지독히도 예리하고 서늘했던 감각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케이브란트 그린…….’

케이는 성유물의 수호자이고, 수많은 전장을 해쳐나온 기사이기도 했다.

젊은 기사들이 왜 케이의 이름에 그토록 열광하는지 알 것 같았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이렇게 만들다니…….

‘대체…… 우리 공주님은 어떻게 되는 거지?’

+++

알포드 혼자였던 지하 감옥의 손님이 이제는 세 명이 되었지만, 알포드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이게 다 그대 때문이에요, 브리트니 양. 그대가 거기서 입을 다물고 있었으면 나중에 알아서 손을 써줬을 텐데…… 이래서 멍청한 것과 어울리지 말라는 말이 있나 봐요.”

“내가 정말 멍청이였다면 네 말을 믿고 거기서 가만히 있었겠지. 만약 여기에 나랑 저 남자, 둘이서만 갇혔더라면…… 글쎄. 네가 날 도와줬을까?”

“어머, 우리가 같은 곳에 갇혔다고 해서 신분이 같다고 착각하나 보네요. 망해가는 위틀로 가의 공녀 주제에, 말버릇이 왜 그렇게 더럽죠?”

“더러워? 더러운 건 지금 네 얼굴이겠지. 거울은 봤어? 그 얼굴, 어떡하니? 신성국의 대신관도 그 얼굴은 어떻게 못 할걸.”

두 여자의 싸움은 갇힌 순간부터 밤이 깊은 지금까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며칠간 갇혀 있느라 힘들었던 알포드는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지만, 두 여자의 깩깩거리는 소리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감히 너 따위가 내 얼굴을 지적해? 못생긴 주제에!”

아무래도 브리트니의 공격이 메어리의 급소를 찌른 듯했다.

“너 같은 거 죽여버릴 거야.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도 죽여버릴 수 있어!”

물론 그럴 수는 없었다.

세 사람 다 두 손목이 뒤로 꽁꽁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달칵-

그때, 지하 감옥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입을 다물고 들어온 사람을 확인했다.

메어리의 표정이 밝아졌다.

“제인!”

“쉿.”

제인이 검지를 입에 대며 속삭였다.

메어리가 응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어서 이 철창을 부수고 날 좀 이 무서운 곳에서 꺼내줘.”

“저, 저도요. 저도 데리고 나가주세요, 공주님.”

“저도 부디…….”

브리트니와 알포드가 태도를 바꿔서 매달렸다.

메어리가 한쪽 입꼬리를 비릿하게 끌어올렸다.

“내 얼굴 보고 뭐라고 한 것 같은데…….”

“그, 그건…… 그건 걱정돼서 그런 거예요. 공주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데…… 그 지경이…… 아니, 그렇게 되셨는데도 아름다우세요. 그깟 종기 따위는 금방 고칠걸요.”

“저는 처음 뵀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공주님을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메어리가 비굴하게 매달려오는 둘을 내려다보는 동안, 제인은 철창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파직-

손을 대는 순간, 퍼런 전기가 튀었다.

“윽!”

통증에 익숙한 제인조차 신음을 참지 못하고 손을 떼었다.

손을 떼었는데도 저릿저릿한 감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공주님, 죄송합니다. 이런 마법 종류는 제가 다룰 수가 없습니다.”

“뭐? 그럼 난 어쩌라고? 아니, 아니야. 어차피 여기서 도망친다고 해도 금방 잡히겠지.”

메어리는 철창을 두 손으로 잡았다.

신기하게도 안쪽에서 잡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어차피 케이는 내게 무슨 짓을 하지는 못할 거야. 그냥 좀 삐쳐서 나한테 본때를 보여주려고 가둬둔 거겠지. 내일이면 여기서 나가게 될걸.”

“…….”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런 짓은 용서가 안 돼. 그러니까 제인, 죽여버려.”

“그린 백작을 말씀입니까?”

“아니, 케이를 왜 죽여? 케이 말고, 아이리스. 오늘 밤에 죽여버리면, 내가 여기 갇혀 있을 때 벌어진 일이니 내게 죄를 물을 수 없겠지.”

“알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너는 도망치렴. 여차하면 내가 네게 죄를 떠넘길 수도 있거든. 하지만 알지?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거.”

“네, 압니다.”

제인은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들어올 때처럼 소리 없이 지하 감옥을 나갔다.

+++

지하감옥에서 나온 제인은 곧장 본채를 벗어나 나무 그림자에 몸을 감췄다.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벗어버리자, 그 안에 입고 있던 까만색 옷이 나타났다. 몸에 딱 밀착된 검은 옷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기기에 좋았다.

제인은 검은색 마스크를 꺼내 입가를 가리고, 무기를 점검했다.

아까 복도에 숨어 있을 때, 케이가 리시에게,

“오늘은 먼저 자요. 난 공주 일 때문에 의논을 좀 할 게 있어서.”

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지금 침실에는 리시 혼자뿐일 것이다.

제인은 고개를 들어 리시의 방 창문을 확인했다.

‘잠겨 있겠지.’

소리를 내지 않고 유리를 깨는 법 정도는 알고 있다.

다만 아까 지하 감옥의 철창에 걸린 마법이 신경 쓰였다. 저 창문에 비슷한 마법이 걸려 있다면, 창문으로 들어가기는 힘들 것이다.

‘일단 시도해보고,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지.’

창문으로 사람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이윽고 침실의 불이 꺼졌다.

제인은 잠시 기다렸다. 리시가 까무룩 잠들 때까지만.

지금이다.

휘익-!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테라스에 가볍게 착지했다.

곧장 움직이지 않고 안의 동태를 살폈다. 제인의 침입을 알아챈 기색은 없었다.

제인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창문에 손바닥을 댔다. 아무 느낌이 없는 걸 보니, 마법적 장치 같은 건 없는 듯했다.

제인은 주머니에서 병을 꺼내, 그 안에 담긴 투명한 액체를 창문에 뿌렸다. 끈적거리는 액체가 유리창에 붙어서 금방 굳었다.

퍼석-

주먹으로 그 부분을 치자 작은 소리와 함께 유리가 깨졌다. 손을 안으로 넣어서 창문의 잠금쇠를 푼 후, 창문을 열었다.

제인은 조용히 침실 안에 발을 내디뎠다. 침실 전체에 깔린 양탄자 덕분에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커다란 침대 한쪽 이불이 부풀어 있었다.

‘아이리스…….’

메어리가 당한 수모를 떠올리자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메어리의 명령이 아니었더라도, 리시 한 명은 죽이고 이 저택을 떠났을 것이다.

제인은 메어리가 자신에게 베풀어준 은혜를 여전히 가슴에 담고 있었다.

‘넌 공주님을 위해 죽어야 해.’

제인이 단도의 날 쪽을 손목에 붙이고, 이불 끝을 잡아 휙 젖혔다.

베개 위에 흐트러진 새빨간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응? 빨간 머리카락?’

상대의 감긴 눈이 떠지며 녹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침대 위에 누워 있던 그녀는, 주근깨 가득한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싱긋 웃었다.

“안녕, 우리 또 보네.”

에르웰이었다.

“너!”

제인이 단도를 휘릭 돌려 에르웰의 목을 향해 내리 찔렀다.

제인의 대처는 빨랐다.

다만 에르웰보다 빠르지 않았을 뿐.

휘익-

가볍게 몸을 굴려 단도를 피한 에르웰은, 두 손으로 침대를 집고 두 다리로 제인을 걷어찼다.

퍼억-!

가슴팍을 세게 맞은 제인이 쿨럭, 숨을 터뜨리며 비틀거렸다.

하지만 비틀거린 건 위장일 뿐, 제인은 다음 무기를 꺼내 들고 공격을 준비했다.

에르웰이 달려들자, 제인은 단도를 사선으로 그어 올렸다.

충분히 닿을 만한 거리였는데, 가까이에 있던 에르웰이 어느새 옆으로 물러서 있었다.

“안녕. 내 인사를 안 받아주네.”

퍽-!

싱긋 웃으며 날린 주먹이, 그대로 제인의 턱을 강타했다.

뇌가 지잉, 울렸다. 제인의 무릎이 꺾였다.

에르웰이 제인의 머리칼을 잡아 뒤로 휙 젖혔다.

“인사도 안 받아주고 죽이려 드는 건, 어느 나라 예법이야? 미나스아릭 예법이 그래?”

“너…….”

제인이 아직 쥐고 있는 단도로 에르웰의 발등을 찌르려 했지만.

타악-!

에르웰이 손날로 제인의 목을 세게 쳤다.

“컥! 쿨럭…… 쿨럭…… 케엑…….”

목이 뒤로 젖혀진 상태에서 제대로 맞은 바람에, 제인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암살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후, 이런 식으로 당한 건 처음이었다.

에르웰이 바닥에 떨어진 단도를 발로 쳐서 멀리 차버리며 말했다.

“이 세상에 싸움 잘하는 시녀가 너뿐인 줄 알았어?”

  +++

메어리의 방에서 폭로전이 벌어진 다음 날.

대륙에서 가장 큰 신문사인 엘레르보 신문에, 놀라운 기사가 실렸다.

[일국 공주의 만행을 폭로한다!]

그 기사에는 실명이 나오지 않았다.

‘대륙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난 어느 왕국의 공주’와 ‘한때 어느 공작가의 꽃으로 소문났던 어느 백작 부인’ 사이에 벌어진 사건에 관한 진실이 담겨 있었다.

공주가 백작 부인을 질투해서, 그녀를 모함하기 위해 벌인 끔찍한 만행들.

그에 동참한 어느 공녀와 어느 자작의 이야기가 가감 없이 담겨 있었다.

이름은 나오지 않아도 그게 누굴 말하는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그날 엘레르보 신문은 끊임없이 신문을 찍어내야만 했다.

위팅크는 직접 찾아온 신문사 사장의 감사 인사를 들으며, 씩 웃었다.

‘이러시면 안 되죠, 백작 부인. 제가 앞으로 계속 백작 부인 편을 드는 기사를 쓰게 될 것 같잖아요.’

  +++

메어리는 하루만 지나면 나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틀이 지날 때까지 지하 감옥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메어리는 태어나서 이토록 오랫동안 햇빛을 못 본 것도, 굶은 것도 처음이었다.

그건 브리트니도 마찬가지였기에, 두 사람은 이제 싸울 기력도 잃고 하염없이 울기만 하고 있었다.

달칵-

오랜만에 지하 감옥의 문이 열렸다.

케이가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왔다.

“케이!”

메어리가 두 손으로 철창을 잡고 매달렸다.

“케이, 케이. 케이, 나랑 얘기 좀 해. 케이.”

케이는 메어리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케이의 뒤를 따라 들어온 제이미가 철창문을 열었다.

브리트니와 메어리, 알포드가 동시에 열린 철창문으로 달려나가려 했지만.

스릉-

제이미의 검이 그들의 움직임을 막았다.

“지, 지금 나한테 검을 들이대는 거야? 내가 누군지 몰라?”

제이미 역시 메어리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메어리는 잠시 자신이 사실은 죽은 게 아닐까, 나는 영혼이라서 이들이 내 목소리를 못 듣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제이미가 손을 뻗어 알포드의 멱살을 잡아 끌어낸 후, 철창문을 닫았다.

그대로 나가려는 그들을 향해, 메어리가 외쳤다.

“케이! 너, 이런 짓을 해도 무사할 것 같아? 우리 아버지가 아시면 널 가만히 놔둘 것 같아?”

그 말에 케이가 걸음을 멈췄다.

케이는 제이미에게 나가보라고 턱짓을 한 후, 메어리를 돌아봤다.

메어리는 케이의 눈동자가 얼마나 어둡게 빛나는지 깨달았다.

제인이 암살에 성공했나 보다.

“혹시…… 그린 백작 부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케이가 싱긋 웃었다.

‘뭐, 뭐야, 저 웃음은……?’

케이가 성큼성큼 걸어와서 철창을 한 손으로 잡았다.

제인이 잡았을 때와 달리, 전기는 튀지 않았다.

메어리를 똑바로 응시하며, 케이가 입을 열었다.

(91) 죄의 대가 (3)

“후치스 자작에게 인사는 해뒀나?”

“……뭐?”

“이제 앞으로 평생 후치스 자작을 볼 수 없을 텐데……. 그래도 며칠간 한 방에 살았으니 인사라도 해두지 그랬어?”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똑똑하잖아, 공주.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미 알았을 텐데. 아, 레이디 위틀로는 이미 눈치챘나 보군.”

브리트니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설마…… 후치스 자작을…….”

“백작 부인을 건드리려고 한 죄는 커, 공주. 그 백작 부인이 성유물 수호자 가문의 안주인이라면 더더욱. 증거도, 증인도 있지. 그 무뢰한을 사형시킨다고 해서 내게 뭐라 할 사람이 있을까?”

없다.

그린 백작 가문은 어느 나라의 소속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신성국 소속이지만, 신성국은 각 영지의 경영에 크게 관여하지 않기에, 거의 독립적인 국가나 마찬가지였다.

원래대로라면 후치스 자작이 소속된 가비자르 제국에 먼저 사건에 관해 알리고, 공동으로 수사를 진행한 후 처벌을 의논해야 한다.

하지만 후치스 자작 가문은 명망 있는 귀족이 아니기에, 그런 절차를 생략한다고 해서 가비자르 제국이 나설 일도 없었다.

오히려 가비자르 제국 쪽에서는, 자기 국민이 백작 부인에게 해를 입히려 한 일을 가비자르 쪽에 항의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할 터였다.

상대는 다름 아닌 그린 가문이니까.

심지어 교황이 직접 결혼식 주례를 서고, 축복해준 그린 백작 내외의 일이니까.

“사, 살려줘요, 백작님. 제발 살려주세요.”

브리트니가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제발…… 살려주세요. 나, 나는 그러려던 게 아니었어요. 난 그저…… 그저 조금 놀려주고 싶어서.”

“레이디 위틀로는 놀려주려고 그런 짓을 하나?”

“그, 그런 게 아니라…… 제발…… 살려줘요. 두 번 다시는 눈에 띄지 않을게요. 아, 돈…… 돈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드릴게요. 제발 우리 아빠한테 연락만 한번 해주세요. 그러면 아빠는 뭐든 드릴 거예요.”

“이 대륙 전체를 줄 수도 있나?”

“물론…… 네? 뭐라고요?”

“이 대륙 전체를 줄 수도 있냐고.”

“그, 그런 걸 어떻게…….”

“대륙 전체를 줄 게 아니라면 말도 꺼내지 마. 나한테 내 아내는 이 대륙보다 소중한데, 너희는 그렇게 소중한 존재를 더럽히려고 한 거거든. 그 대가는 돈 몇 푼으로 치를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리고.”

케이의 눈동자가 메어리를 차갑게 쏘아봤다.

“왕족이라고 해서 넘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

알포드 후치스 자작이 브리트니 위틀로 공녀의 사주를 받아서, 아이리스 그린 백작 부인의 침실에 숨어 들어간 사건은, 재판부터 처형까지 빠르게 이루어졌다.

평화로운 그린 백작 영지에 살던 다코트 시 주민들은, 오랜만에 열리는 재판을 구경하기 위해 달려왔다가 처형 장면만 보게 되었다.

음험한 계획을 들었으니, 귀를.

흉측한 계획을 주고받았으니, 혀를.

음심을 품고 담을 타고 넘었으니, 두 손목과 발목을.

간사한 마음을 품었으니, 심장 또한 꺼내야 했지만, 그린 백작은 넓은 마음으로 거기까지는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사람들은 나쁜 마음을 품고 백작 부인을 욕보이려 한 알포드를 동정하지 않았지만, 항상 그렇듯 너무 잔혹한 게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왔다.

후에 그 부분을 인터뷰하러 온 기자에게, 그린 백작은 말했다.

“여인을 강제로 욕보이는 것은 여인의 마음을 살해한 것과 마찬가지인데, 살인과 같은 처벌을 내리는 마땅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린 백작의 인터뷰는 상급 귀족들에게 몹쓸 짓을 당해도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귀부인과 영애들에게 지지를 얻었고, 몇몇 나라들은 성폭행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게 되었다.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고 떠난 알포드 후치스 자작은, 상처 부위가 감염되어 오랫동안 앓아누웠고, 설상가상으로 가비자르 제국의 황제는 후안무치한 짓을 저지른 후치스 자작의 작위를 박탈했다.

알포드는 열이 내린 후에도 일어나지 못했다. 뇌까지 감염이 진행되어 말도, 생각도 못 하는 육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알포드의 어머니는 이 가혹한 형벌과 그린 백작의 잔인함에 대해 항의했지만, 그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알포드가 처형을 당하고 그린 영지에서 쫓겨난 날 저녁.

메어리와 브리트니는 식사를 가져온 시종에게 알포드의 처형 사실을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 진짜겠어?’라고 생각하던 메어리는 케이가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죄를 범했다 해도 왕족을 이토록 오래 가둬두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린 가문과 친밀하기에, 케이의 작위가 ‘백작’이기에, 신성국 공인 성유물 수호자 가문의 권력을 얕봤다.

그린 가문이 ‘백작’ 작위 정도로 만족하는 이유는, 백작 작위만 있어도 함부로 대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난 죽을 거야……. 죽기 싫어…… 살려줘, 살려줘……. 죽기 싫어, 죽기 싫어, 죽기 싫어.”

브리트니는 알포드가 어떻게 됐는지 들은 후,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알포드는 죽지 않았지만, 혀와 손발을 잃은 알포드의 미래가 어떨지는 안 봐도 뻔했다.

브리트니는 미쳐가는 것 같았고, 메어리는 그런 브리트니 때문에 더 미칠 것만 같았다.

“좀 조용히 해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브리트니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공주님!”

브리트니가 무릎으로 기어왔다.

“공주님,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그린 백작이 공주님을 죽이지는 않을 거잖아요. 그렇죠? 그냥 겁만 주려고 이렇게 가둬둔 거죠? 그러니까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인제 와서는 메어리도 알 수 없었다.

정말로 케이가 겁만 주려고 날 가둬둔 걸까?

생전 처음 느끼는 공포 때문에 오장육부가 뒤틀렸다.

지하 감옥에 케이가 다시 찾아온 건, 나흘 후 늦은 오후였다.

+++

글로번 위틀로 공작은 브리트니가 개입한 사건을 신문으로 알게 되었다.

메어리, 알포드와 손을 잡고 아이리스에게 해를 가하려다가, 그린 백작 저택의 지하 감옥에 갇힌 브리트니 위틀로.

짧은 재판과 동시에 처형당한 알포드 후치스.

그 내용을 읽는 순간, 위틀로 공작부인은 흰자를 드러내며 까무러쳤다.

글로번이야말로 기절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브리트니, 브리트니, 브리트니!”

여기에 브리트니가 있었다면 뺨을 한 대 올려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미우나 고우나 브리트니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다.

알포드가 당한 처벌을 보면, 브리트니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케이는 위틀로 공작 가문을 좋아하지 않았고, 리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어떻게든 케이와 리시의 기분을 풀어주고, 브리트니를 그곳에서 데려와야만 했다.

가장 빠른 말을 구해서 기사들과 함께 그린 백작령으로 달려갔다.

위협으로 받아들일까 봐, 다코트 시에 도착하자마자 기사들을 멈추게 하고 혼자서 그린 백작 저택으로 향했다.

문전박대할 줄 알았는데 다행히 문이 열리고, 쉽게 응접실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소파에 앉지도 못하고 서성거리며 기다린 지 10분 정도 지나서 케이가 들어왔다.

리시도 함께였다.

“아이리스…….”

그래도 아버지이니 동정을 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간절하게 리시의 이름을 불렀다.

리시의 연보라색 눈동자는 냉기를 잃지 않고 글로번을 향했다.

글로번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20년 가까이 리시와 같은 저택에서 지냈건만, 눈앞의 리시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도대체 리시가 이렇게까지 변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앉으시지요, 공작님.”

케이가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린 백작님. 우리 브리트니는…….”

“앉아서 얘기하시지요.”

케이가 다시 한번 말했다.

요청이 아니라 명령에 가까운 어투였지만, 글로번은 그걸 지적할 생각도 못 하고 순순히 소파에 앉았다.

케이와 리시도 맞은편 소파에 나란히 앉은 후에야, 글로번이 다시 말했다.

“우, 우리 브리트니는 어디 있습니까? 무사한 겁니까?”

“저택 감옥에 가둬뒀습니다. 아무래도 위험해서요.”

“위험하다니…… 우리 브리트니는 그럴 애가 아닙니다. 분명 오해가 있었…….”

글로번은 말을 끝낼 수 없었다.

순간 번뜩이는 케이의 회청빛 눈동자에서, 검고 커다란 어둠이 달려들어 목을 움켜쥐는 것 같은 환각을 봤기 때문이었다.

환각일 게 분명한데, 이상하게도 진짜 목이 잡힌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증거와 증언이 나왔고, 가비자르 제국 소속 수사청장인 비르첸 백작 역시 위틀로 양이 관계자라는 걸 인정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증인이 필요하다면 불러드리도록 하지요.”

“즈, 증인이 대체 누굽니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물었다. 그저 하급 귀족이나 이 집안의 하녀들이라면, 어떻게든 구워삶아서 증언을 바꾸도록 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케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름들이, 글로번의 숨통을 조였다.

“2황자이신 라코젠 옥보시더스 전하. 밀란시스 피아몬도 대공.”

“……!”

“또 필요합니까?”

글로번은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

“서, 설마…… 우리 브리트니에게도 후치스 자작 같은 처벌을 내리려는 건 아니겠지요?”

“왜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우리 브리트니는 위틀로 공작 가문의 공녀입니다. 아무리 신분의 고저가 흔들리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우리 위틀로 가문은 대대로 명망 있는 공작 가문이고!”

“그리고 나는 성유물의 수호자 케이브란트 그린입니다, 공작님. 공녀님이 해를 입히려고 한 건, 교황 폐하께서 직접 주례를 서서 가호를 내려주신 그린 백작 부인이고요.”

말문이 막혔다.

글로번도 위틀로 가문이 그린 가문보다 못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비자르 제국의 황제조차 둘 중 한 가문을 적대시해야 한다면, 위틀로 가문을 버릴 것이다.

성유물의 수호자와 적대 관계가 된다는 건, 곧 신성국을 적대시한다는 의미고, 그것은 신에게서 등을 돌린다는 뜻이니까.

게다가 영지 내에서 성유물로 인한 피해가 생겼을 때, 그린 가문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된다.

성유물이 여기저기서 쉽게 발견되는 물건은 아니라지만, 몇 년에 한 번씩은 한 마을을 멸망시킬 만한 재앙을 일으키며 발견될 때가 있었다.

그럴 때 성유물의 수호자가 성유물을 파괴하지 않으면, 그 힘이 더 넓게 퍼져나가 결국은 한 도시를, 나라를 멸망시킬지도 모를 일이었다.

실제로 오래전에 그렇게 멸망한 나라가 있었다.

“아이리스. 브리트니는 네 언니다. 우리가 연을 끊었어도 그간의 정이 있잖니.”

글로번은 무서운 케이 대신, 리시에게 애원하기로 했다.

지금 저렇게 냉랭한 눈빛을 하고 있어도, 정에 호소하면 마음 착한 리시는 옳은 선택을 해줄지도 몰랐다.

“위틀로 공작님. 설마 그거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인가요?”

“응?”

“공작님께서도 아실 텐데요. 제가 그 저택에 있을 때, 브리트니가 제게 무슨 짓을 했는지.”

“그, 그건…… 그건 그저…… 그래, 브리트니가 널 질투해서 그런 거야. 네가 참 예쁘고 곱잖니. 브리트니는 어린 마음에…….”

“죽을 뻔한 적이 있어요, 공작님.”

리시가 자신의 머리카락 끝을 검지로 감아서 들어 올렸다.

“브리트니가 제 머리카락 색깔 때문에 눈이 아프다면서, 머리카락에 불을 붙였죠. 불은 빠르게 번졌고, 지나가던 시종이 달려들어서 꺼주지 않았다면 전 온몸에 화상을 입었을 거예요. 아, 그리고 또 죽을 뻔한 적이 있거든요. 한…… 서른두 번 정도? 전부 하나씩 들어보시겠어요?”

글로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공작님. 단 한 순간도 브리트니는 제게 언니인 적이 없어요. 그리고 공작님도, 공작부인도 제 부모님인 적이 없죠. 저는 그 저택에서 위틀로라는 성을 가진 잡초였을 뿐, 키우는 돼지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어요. 그런 제게 인정을 바라시는 건가요? 진심으로?”

“미, 미안하다, 아이리스. 정말 미안해. 나는 네가 그렇게 힘든 줄 몰랐구나.”

글로번의 말에 리시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하지만 치마를 움켜쥐고 눈을 꽉 감는 것으로 간신히 터져 나오는 분노를 참았다.

저런 식의 사과는 차라리 듣지 않는 게 나았다.

힘든 줄 몰랐다고? 그저 어린 마음에 질투했을 뿐이라고?

나는 매일매일 지옥 불에 타는 것만 같았는데, 어떻게 당신들에게는 그게 그렇게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어?

하루에도 수십 번 죽고 싶었는데, 어떻게 그게 그렇게 모르고 넘어갈 일일 수 있어?

리시는 천천히 호흡하며 술렁이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을 떴다.

글로번은 여전히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브리트니에게도 알포드와 같은 처벌을 내릴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글로번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리시는 그러지 않았다.

가장 괴로운 건, 희망을 맛보았다가 시커먼 절망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달콤한 사탕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쓰디쓴 독배인 것.

브리트니가 ‘아이리스 위틀로’에게 수도 없이 해온 그것.

사랑받고 싶었던 ‘아이리스 위틀로’는, 브리트니가 조금만 잘해줘도 기대를 품고 꼬리를 흔들었다.

쉽게 꼬리를 흔들며 달려간 개에게 쏟아진 건, 아프디아픈 몽둥이찜질뿐이었다.

이제 위틀로 공작의 가족들도 그 기분을 알 때가 되었다.

(92) 왜 좋아할 것 같아?

 

“걱정하지 마세요, 위틀로 공작님. 브리트니에게는 후치스 자작과 같은 형벌을 내리지 않을 거예요. 오늘이라도 브리트니를 데리고 영지로 돌아가실 수 있어요.”

리시의 달콤한 음성에, 글로번의 표정이 밝아졌다.

“여, 역시 그렇지? 그래, 그래. 아이리스, 너라면 그럴 줄 알았다. 네가 좀 착하니. 넌 항상 그렇게 착했지.”

리시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만 이 건에 관해 신성국의 교황청과 가비자르 제국 황실에 정식으로 공문을 넣을 거예요.”

글로번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아직 리시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그린 백작가는 브리트니의 처벌에서 손을 떼겠습니다. 교황청과 가비자르 제국의 황제께서 어떤 처벌을 내리실지 모르겠지만, 부디 그 처벌이 가볍기를 바랄게요.”

“아이리스!”

그제야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글로번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분노에 찬 눈으로 리시를 노려봤다.

“꼬,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냐? 응? 난 네 아버지야! 네 아버지라고!”

글로번이 이렇게 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교황청과 가비자르 제국 황제에게 처벌을 맡긴다는 건, 브리트니 한 명의 문제가 아니라 가문 전체의 문제로 끌고 가겠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케이를 어여삐 여기는 교황청과 신성국의 눈치를 보는 제국 황제의 처벌은 절대 가볍지 않을 것이다.

“글쎄요.”

리시가 느른하게 말했다.

“보통 아버지라고 하면, 딸이 돼지우리에 며칠씩 갇혔을 때 얼른 꺼내주지 않나요? 심한 독감에 걸려서 기절할 지경이 된 딸이 부엌일을 하는 걸 보면서 모르는 척하지도 않겠죠.”

“…….”

“전 공작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서요. 이 얘기는 이걸로 끝내죠. 아, 참.”

리시가 품에서 서류를 하나 꺼냈다.

“아무래도 브리트니가 공작님께는 숨길 것 같아서 제가 미리 드리는 거예요. 이번에 브리트니가 깨부순 그린 가문 장식품에 대한 청구서예요.”

글로번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서류에 적힌 금액을 확인했다.

“헉!”

글로번의 목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울렸다.

“아시죠? 지급 기한을 넘기면 이자가 붙는다는 거. 감사하지 않나요? 이렇게 미리 알려드린 덕에 이자를 내지 않아도 되잖아요.”

“브리트니……. 브리트니…….”

“정말 보고 싶으신가 봐요. 브리트니는 나가시는 대로 만날 수 있을 테니, 감동적인 모녀 상봉하시고 조용히 돌아가세요.”

어마어마한 청구 금액에 넋이 나간 글로번은, 리시와 케이가 나간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글로번은 청구서를 구기며 외쳤다.

“브리트니이이이이이이!”

+++

“괜찮아, 리시?”

복도를 걸어가며 케이가 물었다.

“응.”

대답하고 나서 잠시 생각한 후, 리시가 말을 바꿨다.

“아니, 안 괜찮은 것 같아.”

“그럼 우리 어디 좀 갈까?”

“어디?”

“시장에 나가서 거리를 구경해도 되고, 살롱에 가서 술 한잔해도 되고. 뭐든 기분 전환할 만한 걸 해보자고. 아니면, 저번에 나단, 유진이랑 같이했던 게임이나 할래?”

리시가 작게 웃었다.

“당신은 날 못 이겨, 케이.”

“글쎄. 그건 두고 봐야겠지. 당장 게임판 가져오라고 할까?”

글로번 앞에서는 어마어마한 기세를 내뿜던 케이가, 리시와 단둘이 있을 때는 순한 양처럼 리시의 안색을 살피는 게 좋았다. 그저 그것만으로도 좋아서, 리시는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런 것보다는 미나스아릭 쪽의 일을 해결하는 게 우선 아니에요? 정말로 미나스아릭이랑 전쟁을 하려는 건 아니겠죠?”

“리시, 난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능력 있는 남자예요. 미나스아릭 왕이 나랑 싸우려고 할 것 같아요?”

물론 대부분의 나라가 케이와 적대시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건 알았다.

성유물의 힘을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이 케이만 있는 건 아니지만, 케이만큼 강하고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케이는 한 나라를 멸망시킬 정도로 강한 성유물을 파괴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물론 외부적으로만 파괴했다고 알려졌을 뿐, 케이는 그 성유물들을 전부 무력화시킨 후 안전한 곳에 보관해뒀다.

“당신의 능력이 특별하다는 건 알아요, 케이. 하지만 디에로프가 과연 자기 딸이 이런 대우를 받는다는 걸 알고도 모르는 척 넘어갈까요? 미나스아릭 왕실의 명예가 꺾일 수도 있는 상황인데?”

“다른 때라면 디에로프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죠.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미나스아릭은 백작 따위와 전쟁을 벌일 상황이 아니거든.”

케이의 확신에 찬 어조에, 리시는 지난 삶의 지금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혹시…… 샤크란 때문인가요?”

케이가 환하게 웃었다.

“아, 리시. 역시 당신은 머리가 좋아.”

샤크란 왕국은 미나스아릭 왕국 북쪽에 있는 나라로, 험준한 산을 끼고 있어서 비옥한 토지가 별로 없는 왕국이었다.

산에서 나오는 광물을 팔아서 자금을 만들기는 하지만, 그리 부강한 축에 속하는 나라는 아니었다.

그런 만큼 조용히 다른 나라의 기분을 맞춰주며 사는 나라였는데, 이번에 왕위에 오른 자로프 샤크란 7세가 대단한 남자였다.

왕세자일 때부터 두각을 나타낸 자로프는, 안전한 왕궁에서 머물지 않고 늘 선두에 서서 군사를 이끌어 주위 야만족을 토벌했다.

유명무실하던 샤크란의 군사들은 점점 강해졌고, 현재 샤크란은 다른 나라들과 당당히 어깨를 마주할 정도의 병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니 바로 근처에 있는 미나스아릭 왕국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샤크란이 언제 남침을 해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 그린 백작과 전쟁이라도 하면, 샤크란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미나스아릭에 검을 겨눌 터였다.

“공주는 선을 넘었어요, 리시. 꼭 샤크란 때문이 아니라도, 디에로프는 이 건을 쉽게 다룰 수 없을 거예요. 쉽게 다룬다 해도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고. 그러니까.”

케이가 리시의 허리에 팔을 감아, 자기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데이트나 하러 가자, 리시.”

  +++

리시와 케이는 오랜만에 평민 복장으로 갈아입고 저택을 나섰다.

광장에 들어서기 직전에 말에서 내려, 케이와 손을 잡고 거리를 걸었다.

리시는 하얀 셔츠에 갈색 가죽조끼와 바지를 입고, 머리를 뒤에서 하나로 질끈 묶은 후 챙이 넓은 검은색 가죽 모자를 썼다.

하지만 그 아래에 자리 잡은 작고 예쁜 얼굴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광장을 오가는 평민들은 모자 아래로 흩날리는 연분홍 머리칼을 보고 리시라는 걸 눈치챘지만, 다들 모르는 척 백작 부부를 스쳐 지나갔다.

가끔 멈춰서 리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젊은 청년들이 있긴 했지만, 케이가 눈을 부라리면 화들짝 놀라 자기 갈 길을 떠났다.

한 무리의 행상인들이 와서, 시장은 여느 때보다 북적거렸다.

리시는 바구니를 들고 지나가는 소년에게서, 말 꼬리털로 만든 가짜 콧수염을 샀다.

“어때요? 이거 붙이고 다니면 나인 줄 모르겠죠?”

리시가 끝을 날카롭게 다듬은 수염을 자기 코 아래에 대고 묻자, 케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깜짝 놀랐어요. 모르는 남자가 내 손을 잡고 있나 해서.”

“……뭘 또 그렇게까지.”

“하마터면 손을 뿌리칠 뻔했네. 아주 근사한 사내놈 같아요, 리시.”

“아, 네에.”

아무래도 안 어울리나 보다.

리시는 가짜 콧수염을 케이의 코 아래에 붙였다.

‘이 남자는 왜 이런 것까지 잘 어울려?’

다른 사람이 붙이면 간신배처럼 보일 수도 있는 수염이, 케이에게는 아주 잘 어울렸다. 평소에는 좀 어려 보이는 얼굴인데, 콧 수염이 있으니 중후한 매력이 풍겼다.

리시가 가만히 쳐다보고 있노라니, 케이가 미간을 좁히고 말했다.

“알아요. 이런 거 붙이고 놀려주려고 했는데, 너무 잘생겨서 당황한 거.”

“당신, 진짜 얄밉네요.”

“그런데도 멋있어서 화낼 수가 없죠?”

“웬일이야, 정말.”

리시가 웃으며 케이의 가슴을 툭 쳤다.

리시는 깨닫지 못했지만, 주위의 평민들이 흐뭇한 표정으로 사랑스러운 백작 커플을 지켜보고 있었다.

케이는 콧수염을 매단 채로 리시와 함께 고급 살롱에 들어갔다.

부자 평민이나 중인, 귀족들을 상대로 한 살롱 레리테.

흰색과 검은색만 사용해서 깨끗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실내 장식과 주인 레리테가 직접 고용한 악단이 연주하는 곡이 잔잔하게 흐르는 곳이었다.

출입문을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긴 바에서는 바텐더가 칵테일을 만드는 묘기를 보이고 있었고, 주인 레리테는 살롱 한가운데에 있는 그랜드 피아노 옆에 서서 악단의 연주를 듣고 있었다.

케이와 리시가 들어가자, 연주에 맞춰 흥얼거리던 레리테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달려왔다.

“백작님. 백작 부인.”

“아, 레리테. 그럼 안 돼. 지금 내 아내는 평민으로 위장하고 나온 거라고. 본인이 굉장히 평민처럼 보인다고 생각하는 중이란 말이야.”

“오…….”

레리테는 모자 아래에 감춰진 리시의 얼굴을 살짝 훔쳐봤다.

먼 곳에서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리시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자그마한 얼굴을 가득 채운 이목구비가 어찌나 완벽한지, 수많은 귀부인을 상대해왔는데도 리시를 똑바로 보기가 힘들었다.

모자와 허름한 옷으로 감춰도, 리시가 가진 기품은 사라지지 않았기에,

‘백작 부인께서는 정말 자기가 평민처럼 보인다고 생각하시나?’

라는 의문을 품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몰라뵀습니다, 백작 부인. 평민인 줄로만 알고 쫓아낼 뻔했네요.”

리시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케이를 째려봤다.

“요새 날 놀리는 게 즐거운가 봐요, 케이.”

“무슨 말이에요, 리시. 내가 온종일 무슨 생각을 하는 줄이나 알아요?”

“날 놀릴 생각을 하겠죠.”

“나는 어떻게 해야 당신이 기뻐할지 생각하느라 24시간도 모자라요.”

“당신의 하루는 100시간쯤 되는 것 같네요. 어떻게 해야 날 놀릴지 생각하느라 70시간은 보내는 것 같거든.”

“나머지 6시간은? 설마 더하기 빼기를 잘 못 하는 건 아니죠?”

“당신도 잠은 자잖아.”

리시가 톡 쏘듯 대꾸하고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레리테가 말했다.

“백작 부인은 정말…….”

“말도 못 하지. 말도 못 하게 귀여워.”

“예?”

레리테는 케이의 눈이 어떻게 됐나 싶었다.

귀엽다니.

리시는 귀엽다기보다는 아름답고 우아했다.

케이와 말장난을 하는 순간에도 또래답지 않은 기품이 넘치는 게 신기했다.

레리테에게 케이는 대단하고 경이로운 백작님이신데, 리시와 함께 있는 케이는 그녀보다 한참은 늦게 태어난 어린애처럼 보였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레리테?”

“예? 제가 어떤 눈을 했다고…….”

“내가 무슨 철딱서니 없는 애라도 된다는 듯이 보고 있잖아.”

우리 백작님은 눈치도 빠르시지.

“그럴 리가요. 그저 그린 백작 부인과 참으로 사이가 좋아 보이셔서 부러워한 것뿐입니다.”

“그렇겠지.”

레리테는 케이가 왜 이렇게까지 우쭐해하나 싶었지만, 모르는 척 그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귀족들이 이용하는 고급 살롱이니만큼,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룸도 여러 개 마련되어 있었다.

케이와 리시는 가장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고, 곧 레리테가 직접 와인과 얇게 썬 빵, 신선한 치즈와 햄을 서빙해주고 나갔다.

살롱의 룸은 한쪽에 길고 푹신한 소파 겸 침대가 있고, 그 옆에 긴 테이블이, 그 맞은편에 의자가 여러 개 놓인 형태였다.

리시는 고급 살롱에 처음 와보기에, 신기한 기분으로 룸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케이는 침대에 편하게 앉아서 말했다.

“난 여길 좋아해요.”

“그래요? 왜요?”

케이가 손을 뻗어 리시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케이의 힘에 끌려간 리시가 그의 허벅지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는 두 팔로 리시의 허리를 단단히 조이고, 리시의 목에 입을 맞췄다.

“글쎄…….”

그의 숨이 리시의 목 뒤를 타고 흘러내려 가 척추를 자극했다.

“왜 좋아할 것 같아요?”

(93) 부부는 일심동체

리시는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여, 목덜미를 지분거리는 그의 이마를 밀어냈다.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그가 키득키득 웃으며 리시의 목에서 입술을 떼었다.

“안 걸려드네요, 리시.”

“당신이 이런 곳에 드나들면서 그런 짓을 해왔을 것 같지는 않거든요.”

리시는 사뿐 일어나서 그의 옆에 앉았다.

그는 감동한 표정으로 자기 가슴에 손을 얹었다.

“당신이 날 그렇게까지 믿어주다니. 나, 좀 울 것 같아요.”

“그런 것 치고는 눈가가 굉장히 메말라 있는데요.”

“말이 그렇다는 거죠. 문학적 표현 몰라요?”

“그런 거 잘 몰라요. 배운 게 없어서. 하지만 이게 굉장히 맛있을 거라는 건 알죠.”

리시가 얇게 썬 빵 위에 치즈와 햄을 얹어서 케이의 입에 넣어주었다.

케이는 우물우물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맛있네. 역시 당신은 선견지명이 있어.”

리시가 웃음을 터뜨렸다.

케이는 리시의 청량한 웃음소리를 듣는 게 좋았다.

“여긴 힘 좀 있다 싶은 사람들이 자주 모이는 곳이죠. 가끔 여기에 와서 귀를 기울이면, 이런저런 정보를 얻게 돼요. 뭐, 대부분이 쓸모없는 정보이기는 하지만.”

“어떤 정보인데요?”

“음…… 피아몬도 대공이 어느 자작 영애에게 차였다더라든가, 나다니크 기넵트는 드레스를 입히면 정말 잘 어울릴 거라든가, 제레시엔 그린이 파티에서 추근거리는 백작의 거시기를 걷어찼다든가…… 하는 것들?”

“아하하하. 정말 쓸모없네요. 하지만 나단은 드레스를 입으면 진짜 예쁘긴 할 거예요.”

“그 말, 나단 앞에서는 하지 말아요. 내가 그 말 한번 했다가 걔한테 총 맞을 뻔했거든요.”

그와 쓸모없는 대화를 나누는 이 시간이, 리시에게는 더없이 행복했다.

브리트니와 메어리의 악행을 폭로하고, 그들이 절규하며 끌려나가는 모습을 볼 때보다 훨씬 더.

아니, 비할 바 없이 행복했다.

지난 삶에서는 연인들이 왜 항상 함께 있고 싶어 하는지, 저 오랜 시간 동안 무엇을 하는 건지, 지겹지는 않은지, 왜 저렇게 계속 웃고 있는 건지, 의아했었다.

더는 할 말이 없어서 침묵이 흐르는 동안에도, 손을 꼭 잡고 앉아 미소 짓는 연인이 신기했었다.

이제 리시는 그 의문을 풀었다.

‘좋구나, 이런 거.’

꼭 해야만 하는 대화가 아니어도, 주제가 없는 대화여도, 또한 더는 할 이야기가 없어 대화가 끊겨도, 무언가 벅찬 것이 가슴을 채웠다.

그냥 좋았다.

그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그저 좋았다.

“고마워요, 케이.”

“응? 뭐가요?”

“나랑 결혼해줘서.”

리시의 말에 케이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 하는 소리를 냈다.

내가 놀랄 만한 말이라도 했나 싶어서 당황하는데, 케이가 말했다.

“깜짝 놀랐어요, 리시. 나도 방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케이. 나야말로 놀랐잖아요. 내가 못 할 말이라도 했나 해서.”

케이가 키득키득 웃으며 리시의 볼에 쪽, 입을 맞추더니, 부족한 듯 쪽쪽쪽 세 번 연달아 뽀뽀하고 나서 말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더니, 진짜 그런가 봐요.”

리시는 이 팔불출 같은 남자가 정말 케이브란트 그린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지난 삶, 케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웃는 일이 거의 없었다.

연인인 브리트니와 함께 있을 때조차, 케이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리시는 지난 삶의 케이보다 지금 이렇게 조금은 바보 같은 케이가 더 좋았다.

그의 볼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케이, 내가 늘 당신을 웃게 해줄게요.”

“어!”

“……방금 또 나랑 같은 생각 했군요.”

“이제 내 마음까지 읽나 봐요?”

“당신이 뻔하지, 뭐.”

케이가 리시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붙였다.

“역시 부부는 일심동체예요, 리시. 나도 늘 당신을 웃게 해줄 거야.”

  +++

미나나스아릭 왕궁.

신년을 맞이하여 축제를 열고 새롭게 시작되는 해를 축하해야 하는 이때, 미나스아릭 왕궁은 초상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처음에 그린 저택에서 벌어진 ‘메어리 케트벤 공주 독살 미수 사건’이 알려졌을 때만 해도, 미나스아릭의 왕 디에로프 케트벤은 얼굴이 벌게져서 길길이 날뛰었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우리 딸에게!

고작해야 위틀로의 딸년이!

그린 백작은 집안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지?

이건 우리 미나스아릭을 무시한 처사다. 이대로 조용히 넘어가서는 안 돼!

아이리스 그린은 우리 미나스아릭의 법으로 처리한다! 그린 백작이 거부한다고 해도 소용없어! 당장 가서 아이리스 그린, 그년을 끌어다 내 앞에 무릎 꿇게 해!

분노한 것은 디에로프뿐만이 아니었다.

신하들 역시 곱고 사랑스러운 공주가 먼 곳에서 그런 끔찍한 일을 당했다는 것에 충격받고 분노하고 날뛰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뀌었다.

[일국 공주의 만행을 폭로한다!]

기사에 따르면, 그린 저택에서 벌어진 모든 일의 흑막은 메어리 케트벤이며, 메어리는 아이리스의 명예에 흠집을 내기 위해 스스로 독을 마셨고, 위틀로의 공녀와 후치스 자작이라는 남자를 시켜 아이리스의 침실에 몰래 숨어들게 했단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다른 신문도 아니고 ‘엘레르보 신문’에 실린 기사였다.

엘레르보 신문은 엘레론드 대륙에서 가장 크고, 가장 많고, 가장 공신력 있는 신문사였다.

이윽고 다른 신문사들도 그린 저택에서 벌어진 사건의 진상에 대해 끊임없이 기사를 뱉어냈다.

보면 볼수록 믿을 수 없는 내용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가비자르 제국의 2황자의 증언에 따르면…….]

[밀란시스 피아몬도 대공의 대처가 없었더라면…….]

그 사건에는 감히 손대기 힘든 인물들이 끼어 있었다.

제국 2황자와 대공이라니.

피아몬도 대공의 권력은 미나스아릭의 왕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메어리 케트벤 공주의 끊임없는 시도]

이제 신문은 가명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마지막에 엘레르보 신문에 실린 기사는, 메어리의 시녀인 제인이 아이리스를 암살하려고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다는 기사였다.

그린 백작에게 항의하기 위해 떠날 준비를 했던 사절단은 움직임을 멈췄고, 미나스아릭 왕궁의 분위기는 점점 가라앉았다.

첫 신문 기사가 나오고 며칠이 지난 지금, 디에로프 케트벤은 중신들을 불러모았다.

“아직도 그린 백작 쪽에서는 소식이 없는가?”

“네, 전하.”

“우리 메어리가 그린 저를 떠났다는 얘기도 없는가?”

“네, 전하.”

콰앙-!

디에로프가 두 주먹으로 긴 회의용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린 백작이 어찌 내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메어리가 아무리 옳지 못한 행동을 했다 해도, 가장 먼저 내게 알리고 의논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응?”

“물론 그렇습니다, 전하. 아무래도 그린 백작이 요새 여러 공을 세워서 다들 추켜세워주니,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말한 건 보웰 백작이었다.

디에로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놈이 성유물 수호자라는 중책을 맡으니 고개가 빳빳해지는 것도 당연하겠지. 하지만 이건 젊은 치기라고 용서해주기 힘든 일이야! 백작은 지금 우리 미나스아릭 왕국 전체를 무시하고 있어.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전하.”

“아닙니다, 전하.”

보웰 백작과 캘로우 후작이 동시에 말했다.

디에로프가 인상을 구기고 캘로우 후작을 노려봤다.

“지금 뭐라고 했나, 캘로우 후작?”

“전하. 공주님께서 저지르신 일은 황족이라 하여도 조용히 넘어가기 힘든 일입니다.”

“지금…… 우리 공주가 황족이 아닌 왕족이라서 문제가 된다는 말을 하는 건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전하. 그린 백작은 신성국의 가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린 백작 부인은 교황 폐하께서 직접 발길 하시어 축복을 내려주시기도 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공주님의 사건이 신성국을 모독하는 행위로 비칠 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디에로프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아무리 신성국의 가호를 받는다고 해도 고작해야 백작이다! 작은 땅 쪼가리 하나 가진 백작 놈이라고!”

“몇 년 전, 지방 도시에서 벌어진 일을 잊으셨습니까?”

캘로우 후작의 지적에, 디에로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물론 잊지 않았다.

성유물이 어느 지방 도시에서 벌인 참혹한 사건.

케이가 그 성유물을 파괴하지 않았더라면, 그 근방 촌락과 도시들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공주의 처벌을 그린 백작에게 맡기자고?”

“그건 안 될 일입니다, 전하!”

보웰 백작이 얼른 끼어들었다.

“고작 백작에게 왕족의 처벌을 맡긴다는 건, 이 미나스아릭 왕국 전체의 국격이 떨어지는 일입니다. 성유물을 다룰 수 있는 자가 그린 백작 한 명도 아니니, 그런 자를 수소문해서 높은 작위를 내려주고 곁에 두시면 될 일입니다.”

“보웰 백작의 말이 옳습니다, 전하.”

“결코, 백작에게 고개를 숙이시면 안 됩니다.”

몇몇 중신들이 보웰 백작의 편을 들었다.

듣고 싶은 말을 들은 디에로프의 표정도 밝아졌다.

하지만 또다시 캘로우 후작이 분위기를 깨뜨렸다.

“전하, 성유물의 힘을 억누를 수 있는 사람이 간혹 있다고는 하지만, 그런 사람을 찾는 것도 힘들뿐더러, 그린 혈통만큼 강하게 제압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전에 신성국에서 그런 사람들을 모아 시험해봤지만, 여러 명이 달라붙어도 성유물 하나를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유명한 이야기였다.

신성국이 새로운 수호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노력한 그 일이, 오히려 그린 가문의 명예를 더욱 드높였다.

“게다가 지금은 샤크란이 호시탐탐 남침할 기회만 노리고 있습니다. 이럴 때 그린 가문과 척을 지어 좋을 것이 없습니다, 전하.”

캘로우 후작의 말이 옳았다.

하지만 디에로프는 백작에게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붙잡듯 왕세자인 피에르를 돌아봤다.

“피에르, 넌 어찌 생각하느냐?”

“……저도 캘로우 후작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에잉, 유약한 녀석!”

샤크란 왕국의 현왕이 왕세자 시절에 그랬듯이, 든든하고 호기롭게 “이 나라는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해주면 좋을 텐데.

디에로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캘로우 후작은 사사건건 디에로프의 말에 반대하고 들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의 말을 들어서 손해 볼 것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몇 년 전, 샤크란 왕국에서 오그어 토벌의 도움을 청했을 때, 캘로우 후작은 도와줘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했지만, 디에로프는 그 말을 무시했다.

그때 도와줬다면 지금 샤크란 왕이 이렇게 미나스아릭을 칠 기회만 노리는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꼽고 짜증이 나도, 당장은 어쩔 수 없었다.

일단 메어리를 이 나라로 데려와야만 한다.

“사절단을 준비시켜라.”

+++

미나스아릭의 사절단이 그린 백작 저택에 도착한 건, 1월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사절단의 대표는 캘로우 후작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가 케이의 앞에서 말실수라도 할까 봐, 캘로우 후작이 직접 가겠다고 청한 것이다.

캘로우 후작은 전에도 케이를 본 적이 몇 번 있긴 하지만, 지금 눈앞에 둔 케이는 지금까지와 다른 느낌이었다.

짙은 눈썹 아래의 잿빛 눈동자가 내뿜는 냉랭한 기운에 허파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케이가 잘 안 웃기는 해도 이토록 서늘한 기운을 드러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인사말을 나눈 후, 캘로우 후작이 물었다.

“그린 백작 부인은 괜찮으시오?”

메어리보다 리시의 안부를 먼저 묻는 캘로우 후작의 태도에, 케이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리 괜찮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사태가 사태인지라…….”

당연히 괜찮다는 말을 할 줄 알았던 캘로우 후작은 당황했다.

“그, 그렇소?”

“그럴 수밖에 없지요. 한 나라의 공주를 독살 시도했다는 누명을 쓸 뻔했고, 사내에게 몹쓸 짓까지 당할 뻔한 데다가, 공주가 보낸 암살자에게 살해당할 뻔했는데, 괜찮은 게 더 이상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 그건 그렇지.”

“게다가 그런 짓을 하려고 한 흑막이 공주와 한때 언니였던 위틀로 양이라는 점 때문에, 아주 상심이 큽니다.”

캘로우 후작은 케이가 몇 마디 사과로 쉽게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전하께서는 이번 일에 대해 진심으로 유감을 표현하셨소.”

케이의 한쪽 입꼬리가 서늘하게 올라갔다.

“유감?”

(94) 나라 망하게 한 죄인

케이의 찬 음성에, 캘로우 후작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보통 한 나라의 국왕이 ‘유감’을 표현하면, 백작 정도의 작위를 가진 사람은 감개무량해하며 받아들여야 마땅했다.

하지만 케이는 아니었다.

케이는 현재 메어리의 명줄, 나아가 미나스아릭 왕국 전체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었다.

만약 케이가 미나스아릭을 치고 올라온다면, 샤크란 왕국은 신이 나서 전력을 다해 미나스아릭을 침략할 것이다.

그린 백작가의 군사력은 미나스아릭 왕국에 한참 미치지 못하겠지만, 샤크란 왕국이 끼어들면 미나스아릭은 결국 샤크란 왕국의 손에 떨어질 것이다.

케이 역시 미나스아릭 왕국이 처한 상황을 알고 있으리라.

이 정도의 사건으로 전쟁을 일으킨다면, 아무리 그린 백작 가문이라도 세상의 손가락질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케이는 그걸 각오한 듯 보였다.

“미나스아릭의 국왕께서는 내 아내를 비롯해 그린 백작 가문과 신성국 전체를 모독하려고 한 짓을, 그저 유감으로 넘어가려고 하시는 겁니까?”

“물론 아니오, 백작. 내가 실수했소.”

“긴장하셔야 할 겁니다, 후작님. 긴장하셔야 해요.”

케이의 음성은 낮고 부드러웠지만, 위협이 담겨 있었다.

캘로우 후작은 마른침을 삼키고 말했다.

“국왕 전하께서는 이번 사태에 대해 깊은 사과를 드린다고 하셨소.”

“그렇군요.”

“공주님은 어디에 계시오? 아직 저택에 계신 거요?”

“저택에 계십니다.”

“공주님을 뵙고 싶소.”

“후작님. 저는 미나스아릭 국왕 전하의 사과를 받지 않았습니다.”

“음?”

“국왕께서 깊은 사과의 말을 전했다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그 사과는 받지 않을 거고, 공주님이 이곳에서 하신 일 역시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캘로우 후작의 등에 식은땀이 맺혔다.

“준비해오신 선물은 위로 명목으로만 받겠습니다. 사과의 말은 잘 들었으니, 이제 돌아가십시오.”

“그린 백작!”

“케트벤 공주는 합당한 처벌을 받을 겁니다.”

“공주님이 살아는 계신 겁니까?”

“당연히 살아 있습니다, 후작님.”

“끄응…….”

캘로우 후작이 신음을 삼켰다.

케이가 원하는 것은 명백했다.

하지만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디에로프 케트벤이 이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입을 다문다면 난 이대로 쫓겨나겠지.’

캘로우 후작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케이는 여전히 느른한 표정으로 캘로우 후작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주님께는 미나스아릭 왕국의 법률에 따라, 합당한 처벌을 내리도록 하겠소.”

“그것은 국왕 전하의 생각입니까?”

“……물론 그렇소.”

“그러셔야 할 겁니다.”

케이가 엄지와 중지를 튕기자,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제례복을 입은 신성국의 신관이 들어왔다.

생각지 못한 인물의 등장에, 캘로우 후작의 눈이 커졌다.

신성국의 신관이라니.

케이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신관님의 앞에서 한 번 더 약속해주시지요.”

+++

“아버지, 어머니…….”

디에로프는 울먹거리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딸을 냉랭한 눈으로 응시했다.

메어리를 만나기 전, 캘로우 후작에게 그린 저택에서의 일을 전해 들은 터였다.

신성국에서 신관을 보냈다는 건, 단지 케이를 어여삐 여기기 때문이 아니었다. 신성국에서도 이 문제를 진지하게 지켜보고 있다는 의미였다.

평소에는 그저 예쁘고 자랑스러운 딸이, 이제는 지긋지긋했다.

샤크란 왕국 때문에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하는 상황에서, 그린 백작 가문뿐 아니라, 신성국에게까지 찍혔다.

메어리 한 명이 벌인 일이, 미나스아릭의 국격을 하락시켰다.

이 일로 얼마나 많은 나라가 미나스아릭을 비웃을지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지끈 울려왔다.

“아버지, 저는 정말…….”

“닥쳐라!”

디에로프의 외침에, 메어리가 깜짝 놀라서 멈췄다. 디에로프가 메어리에게 고함을 지른 건 처음이었다.

디에로프는 메어리 옆에 있는 시녀를 날카롭게 노려봤다.

갈색 피부를 가진, 매서운 눈빛의 시녀.

제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저 시녀가 간혹 메어리를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때 제인을 쳐냈어야만 했다. 메어리를 너무 오냐오냐하지 말았어야 했다.

후회가 너무 늦었다.

“그런 짓을 벌여서 갇혔으면 반성을 해야지, 저 계집을 보내서 암살 시도까지 해?”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버지! 제가 시킨 게 아니에요.”

“닥치라 했지!”

“정말이에요, 아버지. 독살도……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제인이, 제인이 절 안타깝게 여겨서 제멋대로……. 아버지, 정말이에요. 그런데 케이는 내 말을 들어줄 생각도 하지 않고…… 여자한테 단단히 홀려서…….”

메어리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예전이었다면 그 모습에 가슴이 저며서 메어리를 용서해줬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딸을 향한 디에로프의 심장은 차갑게 얼었다.

디에로프는 크게 한숨을 내쉰 후, 제인에게 말했다.

“너는 공주의 시녀로서 공주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면 말려야 함에도, 오히려 공주의 등을 떠밀어 오물에 손을 대게 했다. 또한, 공주의 명을 받고 그린 백작 부인을 암살하려 했지. 네 죄는 네가 알 것이다.”

제인은 고개를 조아렸다.

자신의 죄를 덜기 위해 항변할 생각은 없었다.

“맞아요, 아버지. 제인이…… 제인이 제 등을 떠밀었어요. 저는 그저 아주 조금 그린 백작 부인이 미웠을 뿐인데, 제인이 저에게 속삭였어요.”

메어리는 어떻게든 왕의 분노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것을 제인의 탓으로 돌렸다.

그래도 제인은 괜찮았다.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받고 이리저리 치이며 살아온 삶.

꿈도 희망도 없는 빈민가에서, 메어리는 제인에게 손을 내밀어주었다. 더러운 손을 잡고 왕궁에 데려와 씻기고 먹이고 좋은 옷을 입혀주었다.

그날, 그 빈민가에서 메어리의 미소를 보는 순간, 그녀를 위해 이 한목숨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기에 제인은 메어리가 모든 죄를 제인의 것이라 외쳐도 괜찮았다.

메어리만 무사할 수 있다면, 나의 사랑스러운 공주님만 평온할 수 있다면, 이 목숨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제인, 너는 재판까지 받을 자격도 되지 않는다. 당장 이 여자를 끌고 나가서 사형에 처하라.”

제인은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조아리는 제인의 팔을, 왕의 기사들이 양쪽에서 거칠게 붙잡았다.

끌려나가며 잠시 고개를 들었다.

날 그 진탕에서 구해준 공주님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싶었다.

왕의 분노가 제인에게 향했기 때문인지, 메어리는 안도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인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메어리가 미안하다는 듯 입술을 오므렸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제인은 생각했다.

‘이 목숨 공주님이 구해주신 것이니, 이제 저에 대한 미안함은 잊고 행복하십니오.’

제인이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메어리는 디에로프를 돌아봤다.

“아버지,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시녀들도 전부 바꿀게요. 저한테 도움이 될 만한 좋은 가문의 영애들을 시녀로 두고, 조용히 지낼게요. 제가 제인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마음이 흐려졌었어요.”

애원하는 메어리를, 디에로프는 묵묵히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메어리, 너는 공주로서 몸가짐을 바로 하여 국민에게 모범을 보여야 함에도, 질투와 사욕에 미쳐 미나스아릭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려 했다.”

“아버지, 전 그저…….”

“공주를 서탑에 가두고, 하루에 두 번 빵과 물만 넣어줘라.”

“전하!”

옆에 서 있던 왕비와 왕세자가 동시에 외쳤다.

메어리는 디에로프의 입에서 나온 말을 믿을 수 없어서, 멍한 표정으로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서탑은 왕궁 가장 끄트머리 숲 중앙에 있는 탑으로, 반역에 다다르는 큰 죄를 범한 왕족을 가두는 곳이었다.

좁은 원형의 건물은, 계단을 빙글빙글 돌아서 한참 올라가면 꼭대기에 방이 딱 하나 있었다.

창문이 없는 그 방은, 왕명이 없는 이상 열리지 않는다. 문 아래에 있는 작은 구멍으로 식사가 들어올 때가 아니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수도 없는 곳이었다.

보통 서탑에 갇힌 죄인들은, 고독과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자결하곤 했다.

그런 곳에 메어리를 가두겠다고 하니, 지금껏 침묵을 지키던 왕비와 왕세자가 비명처럼 외칠 수밖에 없었다.

“아, 아버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메어리가 디에로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전하. 전하,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저는 그냥 제인의 말을 듣고……. 자, 잘못했어요. 두 번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 제가 잘할게요. 수도원에 들어갈게요. 거기 가서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게요.”

“전하, 제발 명을 거둬주세요. 서탑에서 지내기에 공주는 너무 연약합니다.”

“전하, 누님께서도 반성하고 계십니다. 통촉하여 주십시오.”

왕비와 왕세자가 메어리를 거들었지만, 디에로프의 굳은 입매는 풀리지 않았다.

“전하, 전하. 제발…… 제발 용서해주세요. 제발……. 제발 절 서탑에 가두지 마세요. 그것만 아니면 뭐든 다 할게요. 아버지, 제발. 뭐든 다 할게요.”

“뭐든 다 하겠다고? 그렇다면 그린 백작가로 돌아가서, 그린 백작에게 처벌을 받을 테냐?”

메어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서탑도 무섭지만, 케이는 더 무서웠다.

자신의 아내를 건드린 상대를 대하는 케이는, 메어리가 아는 그 케이가 아니었다.

“그린 백작이 그러더군. 어릴 적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으니, 그 보답으로 널 돌려보내 주는 거라고. 이걸로 그린 백작가와 우리 미나스아릭 왕국의 연도 끊겼다.”

“아버지…….”

“너는 우리 왕국을 위험에 빠뜨렸어! 서탑에 가두는 정도로 끝나는 걸 감사히 받아들여라.”

“아버지, 제발…….”

“뭣들 하느냐?! 이 나라 망하게 한 죄인을 끌어내지 않고!”

왕비가 기절했다.

왕세자가 얼른 자신의 어머니를 부축했다.

그제야 메어리는 자신이 아무리 빌어도, 이 처벌을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호박색 눈동자가 절망의 어둠에 침잠되어갔다.

그 어둠 속에서, 메어리는 리시를 발견했다.

리시는 평소처럼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 자세로, 오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크리드 2016년 2월.

미나스아릭 왕국의 메어리 케트벤 공주가 서탑에 갇혔다.

메어리는 몇 날 며칠 꺼내 달라고 절규하고 욕을 하기도 하고 저주를 퍼붓기도 했으나, 며칠이 지나자 기운이 다했는지 조용해졌다.

식사를 가져다주는 기사의 말로는,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 가끔 흐느끼거나 뭔가를 중얼거린다고 했다.

왕비와 왕세자, 그리고 몇몇 신하가 끊임없이 공주의 용서를 대신 구했지만, 디에로프 케트벤 왕은

“공주가 앞으로 빛을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다시 내게 공주 이야기를 꺼내는 자는, 그 자리에서 처단하겠다!”

라며 차갑게 내쳤고, 그 이후로 공적인 자리에서 메어리 케트벤 공주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었다.

크리드 2016년 4월.

가비자르 제국 위틀로 공작가에 황명이 내려왔다.

브리트니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크게 혼나기는 했어도 큰 처벌을 피해서 한숨 돌리고 있던 차였다.

황명을 전하러 온 시종은 글로번과도 아는 사이였으나, 눈인사 한번 주고받지 않고 곧장 황제의 친서를 읽어내렸다.

브리트니 위틀로는 외국의 공주와 내통하여 신성국 소속이자, 가비자르 제국에 큰 도움을 주는 그린 백작 가문에 해를 입히려 하였다. 또한, 글로번 위틀로 공작은 황태자의 수석 보좌관 쿠리언과 은밀히 재물을 주고받으며 황실의 대소사에 관여하려 하였다.

이는 국가의 바탕을 흔드는 행위로 사형에 처해야 마땅하나, 위틀로 가문이 대대로 가비자르 제국에 보여온 충성이 있기에 사형은 면하도록 한다.

단, 글로번 위틀로의 공작 작위를 폐하고 자작에 봉하며, 영토를 회수하고 서쪽 지방의 작은 땅을 수여한다. 한 달 이내로 영지를 정리하고 떠나지 않으면 황명에 불복하는 것으로 판단하여, 그에 합당한 처벌을 내리도록 하겠다.

공작의 작위를 빼앗다니.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이상,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힘 있는 공작이라면 황명을 거부하고 군사를 일으키겠지만, 위틀로 공작가에는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폐하께서는 아주 많이 노하셨습니다, 글로번 공작. 감사한 마음으로 명을 받드는 것이 좋으실 겁니다.”

대답하지 않는 글로번을 향해, 시종이 차갑게 말한 후 저택을 떠났다.

글로번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시종이 남기고 간 황제의 친서를 계속해서 읽었다.

“여보, 대체 무슨 일로 황실에서 사람이 찾아온 거래요?”

데니스 위틀로 공작부인이 응접실에 들어오며 묻는 순간.

“브리트…… 크헉!”

글로번이 목덜미를 잡고 부들부들 떨다가,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허물어졌다.

지난 삶, 자신의 아이를 평생 모르는 체하다가 팔아치우고, 그 아이가 고통만 받다가 죽어가게 만든 글로번 위틀로의 최후였다.

(95) 공작부인

  리시는 제이미에게 글로번 위틀로의 최후를 전해 들었다.

한때는 아버지였던 자의 죽음을 들으면서도, 리시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죽었구나, 글로번 위틀로.’

글로번은 리시를 태어나게 했고, 절망스러운 어둠을 허우적거리며 살아가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지난 삶, 리시의 눈에는 그가 몹시도 크고 무서운 악마처럼 보였었다.

그 무슨 짓을 해도 죽지 않고 리시를 지옥에 끌어들일 악마.

그랬던 자가 고작 영토와 작위를 잃은 충격으로 죽었다는 게 어이없었다.

이토록 나약한 남자를, 지난 삶에서는 왜 그리도 두려워했던 걸까?

데니스와 브리트니는 글로번의 죽음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장례식만 겨우 치르고 공작 저택을 떠났다고 했다.

“떠났다기보다는 쫓겨난 거였지요. 사람들 말로는 브리트니 위틀로가 끝까지 못 떠난다고, 여기가 내 집이라고 버티다가 끌려나갔다고 하더군요.”

브리트니가 어떻게 행동했을지는 안 봐도 훤했다.

“그들이 하사받은 영지는 가비자르 제국 끄트머리에 있는 시골이지요. 도시는 없고 마을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촌락이라고 합니다.”

위틀로 모녀가 앞으로 살게 될 저택은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아서 엉망이었지만, 저택을 정리할 고용인이 더는 없었다.

그들이 가진 걸 모두 팔아도 은행 빚을 갚지 못한 상황이라서, 고용인을 고용할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저택을 청소해야 했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발품을 팔아야만 했다.

몰락한 귀족의 삶이 그랬다.

데니스와 브리트니가 그토록 멸시하는 몰락 귀족.

평민보다 돈이 없어서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몰락 귀족의 삶을, 이제 그들이 살아가게 되었다.

“데니스와 브리트리로서는 죽음보다 끔찍한 삶일 거예요.”

스스로 움직여서 일하고, 일한 만큼만 먹고 마실 수 있는 삶.

“그렇겠지요. 할 줄 아는 일이 없어서, 일하는 곳마다 욕을 얻어먹는다고 하더군요.”

데니스와 브리트니는 반성하지 않았다.

먹고살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일하기는 하지만, ‘나는 너희와 다르다.’라는 태도를 고수했다.

그럼에도 할 줄 아는 것은 없어서, 쉬운 일 하나 해내지 못하는 위틀로 모녀 때문에 평민들은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폭발하는 것도 시간문제겠네요.”

평민들이 지금이야 어찌 되었든 귀족이니 참아주려고 노력하겠지만, 그게 얼마나 갈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가 되면 그들도 리시가 위틀로 저택에서 받던 취급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위틀로의 소식은 이만하면 됐어요. 이제 즐거운 소식을 전해줘요.”

리시의 말에 제이미가 싱긋 웃었다.

“내일이면 그린 공작님께서 돌아오십니다.”

그린 공작.

리시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올해 1월에 메어리를 미나스아릭으로 돌려보낸 케이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리시. 작위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더니 갑자기 병력을 확인하고 정예병을 꾸려 가비자르 제국 서남쪽에 횡횡하는 오그어를 토벌하러 떠났다.

오그어는 오래전 대륙에 존재했던 몬스터 오크와 오거, 그리고 인간의 피가 흐르는 종족으로, 인간보다는 몬스터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들은 인간보다 덩치가 크고 피부가 단단한 데다가 지능까지 있어서, 완전히 말살시키는 것이 불가능했다.

오그어들은 대륙 곳곳에 무리를 지어서 살면서, 때때로 인간의 지역을 침범하기도 하고, 자기들만의 나라를 세우기도 했다.

오그어의 우두머리 중 유독 영리한 자들은 간혹 신성국에 사절을 보내서 자기들을 ‘인간’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신성국은 매번 거절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을 인간으로 받아들인다면 ‘수인’ 역시 인간으로 인정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케이와 나단, 월라스, 유진, 그리고 정예기사 서른 명과 병사 백여 명으로 구성된 케이의 군사는, 백 마리에 달하는 오그어 집단을 몰살시켰다.

안 그래도 오그어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가비자르 제국의 황제는, 케이를 치하하며 가비자르 제국의 백작 작위를 선사했고, 신성국에서는 케이를 공작으로 승격했다.

전쟁을 끝낸 후 잠시 돌아와서 리시에게 안부를 전한 케이는, 신성국에서 내려주는 작위를 받기 위해 부랴부랴 길을 떠났던 터였다.

“이제 공작부인이시군요.”

리시가 케이와 처음 만난 것이 크리드 2015년 8월.

그 후로 일 년이 지난 지금, 위틀로 공작가는 몰락하고 아이리스는 그린 공작부인이 되었다.

“그러게요. 고작 1년 걸렸네요.”

사실 케이가 신성국으로부터 공작 작위를 받는 건,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다음 단계였다.

공작이 힘을 키워서 왕과 비슷한 권력을 갖게 된다고 해도, 한 나라를 세우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명분과 지지가 필요했다.

리시는 이제부터 그것을 위한 발판을 만들어갈 예정이었다.

‘돈은 충분해.’

그동안 메르티움을 판매한 수익과 가우저의 관리로 불린 자산은 어마어마하게 불어났고, 그중 대부분을 목욕탕 사업에 투자했다.

제이미에게 부탁해둔 목욕탕 문제는 거의 완성 단계였다.

그동안 리시는 몇몇 나라의 변두리, 혹은 주요 도시, 마을 등 곳곳에 ‘포레스트’라는 브랜드 이름을 건 목욕탕을 지어두었다.

온천이 나오는 곳에는, 목욕탕과 조금 다른 느낌의 온천 건물을 지었다.

물론 그린 백작, 아니, 공작저가 있는 다코트 시의 광장 근처에도 커다란 목욕탕 건물이 들어섰다.

“목욕탕은 동시에 오픈할 거예요. 관리할 사람들은 뽑아뒀나요?”

“제가 직접 면접을 봐서 믿음직한 사람들로 골라뒀지요.”

“좋아요. 오픈하는 날에는 모든 목욕탕에서 파티를 열 거예요. 각각 예산을 2억으로 잡고 요리와 선물을 준비하도록 하세요.”

“각각 2억이요? 아이리스 님, 현재 오픈을 앞둔 목욕탕만 21곳인데요.”

“2억이 적나요?”

“아니요. 너무 많아요.”

청렴결백한 그린 백작가에서, 허리띠를 졸라매며 살아온 제이미에게 42억이라는 돈은 눈이 돌아갈 정도로 큰돈이었다.

물론 목욕탕을 위한 땅을 사고 건물을 짓는 데는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돈이 들었다.

하지만 땅과 건물이 남는 것에 돈을 쓰는 것과 파티에 42억을 쓰는 건 다른 문제였다.

리시와 케이를 위한 파티라면 42억이 아깝지 않아도, 누구인지 모를 다수의 사람을 위해 42억을 써야 한다니.

“제이미. 돈은 모아두기만 한다고 능사가 아니에요. 쓸 때 써야 더 큰 것이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정말 괜찮은 걸까?

제이미는 리시가 큰돈을 투자한 목욕탕 사업이 잘될지도 아직 의문이었다.

리시가 운영할 목욕탕은 다른 목욕탕과 완전히 다른 느낌이기는 하지만, 과연 사람들이 그런 것에 돈을 쓸까?

“아니, 아닙니다, 아이리스 님. 아이리스 님께서 버신 돈이니 제가 입을 댈 수는 없지요.”

“괜찮아요, 제이미. 제이미의 조언이라면 언제나 귀담아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요. 다만, 이번만큼은 날 믿어줘요.”

 

+++

디에로프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 지독한 불면증은 메어리가 미나스아릭으로 돌아온 후부터 시작되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잘 수가 없고, 잠깐 잠이 들면 악몽을 꿨다. 거대한 들짐승이 디에로프를 덮치는 악몽이었다.

커다란 앞발이 디에로프의 가슴을 짓밟고, 날카로운 이빨이 목을 물어뜯을 듯 예리하게 빛났다. 빠져나오려고 끙끙 앓다가 눈을 돌리면, 그곳에는 이미 목이 물어뜯긴 메어리의 시신이 있었다.

그러면 디에로프는 비명을 지르다가 잠에서 깨어나, 또다시 잠 못 드는 긴 밤을 보내야만 했다.

‘케이브란트 그린.’

신성국에서 케이에게 공작 작위를 내려줄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아마 지금쯤 케이는 백작이 아닌 공작이 되었을 것이다.

옛날이었다면 진심으로 케이를 축하해줬겠지만, 지금은 뱃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케이브란트 그린!’

메어리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메어리는 어리석은 행동을 했고, 미나스아릭 왕국의 격을 떨어뜨렸다.

자식이 메어리 하나뿐만은 아니지만, 어여쁘고 고운 딸이라 칭송이 자자하기에 더욱 아끼는 마음이 들었을 뿐.

디에로프가 온갖 진귀한 선물을 가진 사절단을 케이에게 보내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었을 때부터, 메어리에 대한 애정은 식었다.

이 분노는 메어리와는 관계없었다.

‘감히 네놈이……!’

케이는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됐다.

그린 노백작과 노백작 부인 역시, 그런 식으로 케이의 행동을 눈감아줘서는 안 됐다.

헤레이나 그린 노백작 부인은 미나스아릭 선왕 후궁의 언니의 딸이었다. 아무리 결혼하여 그린 가문의 사람이 되었다 해도, 헤레이나의 조국은 미나스아릭이었다.

케이의 몸에는 미나스아릭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건 반역이야!’

디에로프는 이 건을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샤크란 왕국이 언제까지나 미나스아릭을 노리지는 않으리라.

샤크란 왕국과 화해하고 동맹을 맺는 순간, 가장 먼저 케이를 치겠다고, 디에로프는 결심했다.

+++

스티무어 제국의 황태자 드웨인 애시워스는 사냥하다가 하얀 사슴을 발견했다.

신하들과 기사들의 부름도 듣지 않고 흰 사슴을 따라 달리던 드웨인은 산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험준한 산에서 하룻밤을 보낸 드웨인은, 말을 타고 정처 없이 달리다가 어느 촌락을 발견했다.

‘어느새 가비자르 제국 영토까지 들어온 건가?’

스티무어 제국과 가비자르 제국은 국경이 닿아 있었고, 서로 사이가 나쁘지 않기에 국경을 넘었다고 해서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다만 황태자인 드웨인이 말도 없이 가비자르의 시골 마을에 들렀다는 게 알려지면, 괜한 의심을 살지도 몰랐다.

다행히 드웨인은 사냥 중이라서 화려한 차림은 아니었다.

드웨인은 말을 나무에 묶어둔 후,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물이라도 한잔 얻어 마시고 다시 스티무어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마을 밖에 넓게 펼쳐진 밭 사이의 길을 따라 걷던 중에, 한 여인이 길 가장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길고 풍성한 금발과 자그마한 얼굴, 오밀조밀하고 완벽한 이목구비의 그녀는, 새파란 눈동자를 가진 인형 같았다.

마치 전설 속의 엘프, 혹은 요정 같은 그녀의 모습에 드웨인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어제의 흰 사슴이 사람으로 변신한 건가?’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는 현실감 없이 아름다웠다.

드웨인은 조용히 그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자칫 잘못하다가 겁을 먹은 그녀가 하얀 사슴처럼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듯,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새파란 눈동자가 드웨인의 얼굴을 향했다가, 아주 잠깐 드웨인의 어깨에 머물렀다.

드웨인은 자신의 어깨에 스티무어 황가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는 걸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곧 그녀가 일어나 두 손을 앞에서 모으고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그녀의 금빛 머리칼을 살랑 흔들고 지나가는 장면이 꿈결처럼 다가왔다.

그녀는 드웨인을 향해 설탕처럼 달콤한 미소를 지어준 후, 돌아서려 했다.

드웨인은 저도 모르게 성큼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가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는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드웨인은 이 여인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그대는……?”

“이 손을 좀…….”

“그대는 누구요? 설마 흰 사슴이오?”

드웨인의 바보 같은 질문에 그녀가 풉,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그녀가 드웨인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브린. 브린이라고 해요.”

 

+++

케이브란트 그린 공작이 저택에 돌아왔다.

모두가 정문까지 나가서 그린 공작의 귀환을 환영했다.

케이는 한 손을 들었다가 명치 쪽에 대며 우아하게 인사하는 시늉을 해서 고용인들을 즐겁게 해주고는, 리시를 향해 다가가 두 팔로 끌어안았다.

“아이리스 그린 공작부인.”

리시가 빙그레 미소지으며 케이의 허리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잘했어요, 공작님.”

“그거 알아요, 리시? 난 당신이 가끔 내 주인님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어머, 그걸 이제 깨달은 건가요?”

케이와 리시는 키득키득 웃었고, 금실 좋은 부부의 모습에 고용인들도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린 영지가 공작령으로 승격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축제 준비를 해뒀어요. 다코트 시 전체에서 3일 밤낮으로 축제를 할 거예요.”

“다들 좋아하겠군요. 아, 그전에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

그때까지 리시를 끌어안고 있던 케이가 리시에게서 떨어져서 뒤를 돌아봤다.

리시도 케이가 보는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앞으로 우리를 노리는 놈들이 좀 많아질 것 같아서, 다른 곳에 있던 내 부하들을 더 데려왔어요. 왼쪽부터 순서대로 랜디, 란다, 이반, 클로이예요.”

케이가 새로 데려온 사람들을 순서대로 소개했지만, 리시는 가장 처음에 소개해준 랜디라는 사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늘색 머리카락에 새까만 눈동자, 가느다랗고 날카로운 눈매와 우직하게 다문 얇은 입술.

리시의 기억 속에 있는 얼굴이었다.

(96) 그 남자의 첫사랑

랜디는 조용히 리시의 시선을 받아냈다.

리시를 보자마자 왈칵 울음을 터뜨릴 뻔했지만,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연한 분홍빛을 띤 은발과 선이 고운 눈썹, 커다란 눈과 완벽한 콧날, 달콤한 향기가 날 것 같은 붉은 입술.

리시는 그때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어린 시절, 몹시도 사랑했던, 그 이후로도 쭉 사랑해온 그녀는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조금 변하셨나?’

위틀로 공작가에 있을 때, 리시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연약한 꽃처럼 보였다.

언제나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숙인 채,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도록 노력했었다.

하지만 지금 케이의 옆에 선 리시는 누구보다도 ‘공작부인’이라는 호칭이 잘 어울리는 여인이 되어 있었다.

쭉 편 어깨와 허리, 당당하게 든 얼굴과 약간은 오만하게 들 정도로 빛나는 눈동자.

‘다행이십니다, 아이리스 님.’

랜디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 다행이십니다.’

그린 저택으로 오는 내내 결심했다.

리시를 보더라도 드러내지 않겠다고.

리시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서운해하지 않겠다고.

리시의 모습에서 과거를 추억하지 않겠다고.

과거의 그 소년은 죽었고, 이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건 랜디라는 이름으로 새로 태어난 사내일 뿐이라고.

몇 번이나 다짐했건만, 리시를 보는 순간 결심이 허물어졌다.

10여 년 전의 기억.

라포드 휘튼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그 아릿하고도 서글픈, 그러나 아이리스가 있었기에 행복했던 그 시간으로 속절없이 끌려 들어갔다.

. .

휘튼 가문은 대대로 위틀로 공작 가문을 섬기는 기사 가문이었다.

라포드의 증조 할아버지 때부터 쭉 위틀로 가문을 위해 일한 공로를 인정받아서, 라포드의 아버지 때에는 공작 저택 부지에 마련된 건물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라포드의 아버지는 위틀로 공작이 가진 여러 개의 기사단 중 하나인 피벳 기사단의 부단장이었다.

라포드는 그런 아버지가 몹시 자랑스러웠다.

기사를 위한 건물은 본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아버지는 수시로 본채에 드나들었지만, 라포드는 위틀로 저택으로 이사한 후에도 한동안 위틀로 공작의 가족을 본 적이 없었다.

“도련님은 브리트니 아가씨와 비슷한 또래라서, 브리트니 아가씨 마음에 드시면 좋은 놀이 친구가 될 수도 있겠네요.”

기사 숙소에 드나드는 하녀들은 언제나 브리트니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라포드는 아버지인 휘튼 경에게 위틀로 가에는 딸이 두 명 있다고 들었던 터였다.

“브리트니 아가씨는 정말 어여쁘시거든요. 혹시라도 반하시면 안 돼요. 공작님께서 크게 혼내실 거예요.”

“그런 일을 없을 겁니다.”

“글쎄요. 우리 브리트니 아가씨는 아직 어린데도, 여기저기서 연을 맺고 싶다는 청이 들어오고 있거든요.”

“아이리스 님은요?”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물었더니, 하녀는 입을 다물었다.

신나서 브리트니에 대해 떠들던 하녀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

“음, 청소가 다 끝났네요. 빨래할 건 더 없나요?”

하녀는 티가 날 정도로 말을 돌렸다.

그런 하녀의 태도가 이상하긴 했지만, 딱히 공작의 둘째 딸인 아이리스에 대해 알고 싶은 것도 아니었기에, 그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공작 저택에서 지낸 지 몇 달이 흘렀을 때, 본채에서 시종이 찾아왔다.

라포드는 시종을 따라서 본채의 응접실로 향했다.

그곳에 잠시 앉아서 기다리자, 응접실 문이 열리고 한 소녀가 들어왔다.

풍성한 금발을 늘어뜨리고, 분홍색의 고운 드레스를 입은, 인형처럼 예쁜 소녀였다.

“라포드 휘튼?”

소녀는 새가 지저귀는 듯 말했다.

소녀는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지만, 라포드는 소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얼른 소파에서 일어나 한팔을 배에 대고 고개를 숙여서 예를 표했다.

“라포드 휘튼입니다.”

“반가워. 나는 브리트니 위틀로야.”

“반갑습니다, 공녀님.”

“공녀님이라니…… 그냥 브리트니라고 불러. 브린이라고 불러도 되고.”

“제가 어찌 감히…….”

“내가 허락했잖아. 브린이라고 불러도 돼.”

“네, 브린 님.”

브리트니는 까르르 웃으며 소파에 탈싹 앉아서, 라포드에게도 앉으라고 했다.

“휘튼 경이 아들 칭찬을 얼마나 하는지, 한번 만나보고 싶었어.”

라포드는 얼굴을 붉혔다.

무뚝뚝한 아버지가 다른 곳에서 아들 칭찬을 하고 다니시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머리카락 색깔이 정말 예쁘네.”

“감사합니다.”

“저택에 들어오기 전에는 근처에서 살았다면서? 도시에서 생활하는 건 어땠어? 나는 아직 데뷔탕트를 치르지 못해서, 혼자 나갈 수가 없거든. 그래서 어딜 가든 부모님이랑 같이 가야 해서 성가셔.”

브리트니는 라포드가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혼자서 재잘재잘 떠들었다.

성격이 참 좋고 명랑한 공녀님이라고, 라포드는 생각했다.

한 시간쯤 브리트니와 대화를 나눴다.

응접실에서 함께 나오며, 브리트니가 말했다.

“내일도 만나자. 맛있는 초콜릿을 줄게. 안에 크림이 들어 있는 건데, 먹어본 적 없지?”

초콜릿은 귀한 간식이었다.

게다가 안에 크림이 들어 있는 초콜릿이라니.

어떤 건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라포드도 10살밖에 안 된 어린 소년인지라, 예쁜 공녀님과 맛있는 초콜릿을 먹을 생각에 들뜰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일주일에 두세 번씩 본채에 가서 브리트니와 간식을 먹고 함께 정원을 거닐거나 책을 읽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둘째 공녀님은 왜 안 보이시는 걸까?

아버지의 얘기로 둘째 공녀님은 라포드보다 두 살 어리다고 했다.

라포드 또래의 여자아이들을 보면 자매끼리 붙어다니는 경우가 많았는데, 브리트니는 아이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담은 적이 없었다.

마치 아이리스 위틀로라는 존재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혹시…… 돌아가신 걸까? 그러고 보니, 아버지도 저택에 들어온 후로는 아이리스 님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하셨지.’

저택에서 살기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종종 둘째 공녀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참으로 어여쁘신 분이라고, 사람들은 둘째 공녀님을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고 부른다고, 딱 한 번 뵌 적이 있는데 요정처럼 예뻤다고.

-“그런 딸을 갖고 싶었어…….”

아버지가 꿈꾸듯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공녀님이 있다면, 고용인들도 다들 자랑스럽게 아이리스에 대해 얘기할 법도 한데, 아무도 그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라포드가 저택에 들어오기 전, 병이나 사고로 죽은 걸지도 모르겠다고, 라포드는 생각했다.

+++

그 소녀를 본 건, 라포드가 위틀로 공작 저택에 들어오고 나서 1년하고도 몇 개월이 더 지났을 때였다.

위틀로 공작과 공작부인, 브리트니는 황실에서 열리는 신년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저택을 비웠다.

라포드의 아버지인 휘튼 경도 호위 기사로 따라갔지만, 어머니와 라포드는 저택에 남아 있었다.

“우리는 우리끼리 파티를 할 거야.”

저택에 남은 사람들끼리 파티를 하기로 해서, 어른들은 분주했다.

라포드는 북적거리고 시끄러운 게 싫어서, 저택 북쪽으로 향했다.

넓은 공작 저택 부지의 북쪽은 숲처럼 울창한 곳이 있었는데, 종종 사슴이나 토끼 같은 게 나와서, 라포드는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했다.

날이 추워서 두툼한 털코트를 입고 숲을 걷던 라포드의 눈에,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 들어왔다.

한 소녀가 커다란 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햇빛을 받아서 찬란하게 빛나는 은빛 머리카락, 눈처럼 하얀 피부와 커다란 눈, 오뚝한 코와 과즙이 흐를 것처럼 붉은 입술을 가진 소녀.

이런 추운 겨울날, 하녀들이 입는 원피스 하나만 입은 소녀의 주위에 사슴 두 마리와 토끼 네 마리가 모여 있었다.

사슴과 토끼들은 마치 소녀에게 온기를 나눠주겠다는 듯, 소녀에게 바짝 몸을 붙이고 있었다.

‘요정…….’

요정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전설에 나오는 숲의 엘프라는 종족일지도 모른다.

라포드는 뻣뻣하게 굳어서, 이 환상적인 광경을 눈에 담았다.

경계심 많은 초식동물들은 소녀의 손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소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사슴의 목덜미를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에, 토끼가 귀를 팔랑 움직였다.

소녀를 둘러싸고 있던 동물들이 후다닥 도망쳤다.

졸지에 혼자 남겨진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리번거리다가, 라포드를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라포드는 커다랗고 뜨거운 무언가가 심장에 콱 박히는 걸 느꼈다.

라포드에게는 눈이 마주친 그 시간이 몹시 길게 느껴졌지만, 소녀에게는 아니었다.

소녀는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달렸다.

스쳐 지나가려는 소녀를, 라포드는 저도 모르게 붙잡았다.

오랫동안 찬바람을 맞은 소녀의 손목은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가웠다.

“저기…….”

이름을 물어보려다가 말문이 막혔다.

고개를 든 소녀의 눈동자에, 어린 라포드조차 알아낼 정도의 두려움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저기…… 나는…… 해치지 않아…….”

소녀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 그…… 추울 것 같은데…….”

라포드는 얼른 자신의 코트를 벗어서 소녀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소녀는 굉장히 놀란 표정이었지만, 곧 고개를 살짝 숙여서 감사를 표시했다.

라포드는 소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이름이…… 뭐야? 아, 나는 라포드야. 라포드 휘튼.”

“…….”

“이름을 알고 싶어. 알려주면 안 될까?”

라포드는 자신이 왜 이렇게 끈질기게 구는지 알 수 없었다.

소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이리스. 아이리스 위틀로.”

 

+++

위틀로 공작가의 둘째 딸 아이리스 위틀로는 죽은 게 아니었다.

다만, 공작의 영애 취급을 받지 못할 뿐이었다.

아이리스를 숲에서 만난 날 이후, 라포드는 아이리스가 이 저택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알게 되었다.

“이건 절대 남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

라포드가 끈질기게 질문을 퍼붓자, 휘튼 경은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라면서, 아이리스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이리스는 공작의 딸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얘기였다.

“여러 가지 짐작되는 건 있지만…….”

아버지는 말을 아꼈다.

아직 어린 라포드에게 말할 만한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한 듯했다.

아이리스가 이 저택에서 어떤 대접을 받든, 라포드에게 아이리스는 숲의 요정이었다.

브리트니를 만나러 갈 때마다, 라포드의 눈은 언제나 아이리스를 찾아 헤맸다.

그러다가 운 좋게 아이리스를 발견하는 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간혹 마주쳐서 짧은 대화라도 나눈 날 밤에는 설레서 잠도 못 잤다.

그렇게 소년의 가슴에 품은 감정은 크게 부풀어, 주위 사람들까지 눈치챌 정도가 되었다.

물론 언제나 라포드만을 보는 브리트니가 가장 먼저 눈치챘다.

“네가 좋아, 라포드.”

12살이 된 브리트니는, 먼저 고백을 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네가 기사가 되고 공을 세워서 작위를 얻어서, 나한테 프러포즈를 하면 좋겠어. 난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

아직 어린 영애들이 고용인의 자식이나 평민과 사랑에 빠지는 건 종종 벌어지는 일이었다.

대부분은 그걸 어린아이들의 풋사랑 정도로만 생각하며 웃어넘겼고, 당사자들도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자신들의 입장을 자각하고 자연스럽게 마음과 관계를 정리했다.

브리트니와 라포드도 그렇게 좋게 넘어갈 수 있는 관계였다.

만약 라포드가,

“죄송합니다, 공녀님. 저는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습니다.”

냉정하게 거절하지 않았다면.

만약 브리트니가 글로번 위틀로 공작 앞에서,

“난 죽어버릴 거야. 라포드는 나보다 아이리스가 더 좋대. 이게 말이 돼? 난 죽어버릴 거야!”

칭얼거리지 않았다면.

만약 글로번 위틀로 공작이,

‘이러다가 브리트니가 진짜로 기사 자식새끼와 결혼이라도 하겠다고 하면 어쩌지? 내 딸을 기사 자식 놈에게 줄 수는 없어!’

옹졸하고 생각이 좁지만 않았다면.

둘의 감정은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정리되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못했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 .

랜디의 눈앞을 커다란 손이 가렸다.

랜디는 퍼뜩 상념에서 벗어났다.

케이의 손이 랜디의 눈 앞을 가리고 있었다.

“랜디. 내 아내를 너무 뜨겁게 쳐다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97) 늑대의 목욕

  랜디가 피식 웃었다.

“제가 설마 백, 아니, 공작부인을 태우기라도 하겠습니까?”

“그만큼 뜨거워서.”

“그럴 일은 없습니다, 대장.”

정말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케이는 랜디의 목숨을 구했다.

그날, 그곳에서 케이가 구해주지 않았다면, 이 목숨도 없다.

그러니 이 삶은 케이의 것.

랜디는 그렇게 정했다.

“대장, 질투 심하다는 말은 들었는데 진짜였네요. 나, 진짜로 그 말 안 믿었는데. 아니, 어떻게 랜디를 질투해요? 얘는 나한테도 안 넘어오는 애라고요.”

클로이가 끼어들자, 옆에 있던 월라스가 말했다.

“넌 우리 형수님보다 안 예쁘잖아. 우리 형수님은 진짜 끝내준다고.”

퍼억-!

클로이가 월라스의 정강이를 발로 찼다.

“넌 닥쳐, 월라스. 그리고 내가 뭐 어때서? 나 정도면…….”

클로이는 리시를 흘끔 쳐다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공작부인, 진짜 끝내주게 생기셨네요. 뭐 특별한 거 드시는 거 있으세요?”

리시가 빙그레 웃자, 클로이가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으윽! 눈부셔.”

“적당히 해, 인마.”

이반이 클로이의 어깨를 툭 친 후, 리시에게 고개를 숙였다.

“인사드립니다, 공작부인. 이반이라고 합니다.”

“저는 란다예요. 잘 부탁드려요.”

“저는 클로이고요, 공작부인께서 따로 하시는 미용법이 있다면 살짝 알려주시면 엄청 감사하고요.”

유쾌한 사람들이라고, 리시는 생각했다.

“저는 랜디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공작부인.”

리시는 마지막으로 인사하는 랜디를 오랫동안 쳐다보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잠시 인사를 나눈 후, 그들은 숙소로 향하고 리시와 케이는 본채를 향해 걸어갔다.

‘어째서……?’

케이를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도, 리시의 머릿속은 랜디로 꽉 채워져 있었다.

‘어째서 라포드가……?’

라포드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부터 거의 10년이 지났다.

이제 ‘랜디’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그는, 오래전 위틀로 공작 저택에서 봤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눈빛도, 표정도, 온몸에서 번지는 기운도.

어린 시절의 순수하고 청량한 소년은 사라지고, 수많은 풍파와 절망을 해치고 걸어온 전사가 되었다.

그때와 같은 것이라고는 연한 하늘색 머리카락뿐이지만, 리시는 그가 라포드라는 걸 확신했다.

‘란다와 이반, 클로이는 전부 수인들이야. 저들과 함께 왔다면 라포드도 수인이라는 건데……. 저택을 나간 후에 수인이라는 걸 알게 된 건가? 하지만…….’

지난 삶에서는 라포드를 보지 못했다.

‘아니, 내가 케이의 부하들을 전부 다 아는 건 아니니까, 내가 몰랐을 뿐일 거야. 하지만…….’

가슴이 지끈거렸다.

아이리스는 브리트니의 애정표현을 밀어낸 라포드 때문에, 휘튼 일가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이, 휘튼 경과 그의 부인이 전염병 때문에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라포드도 전염병 때문에 죽어간다더라. 아니, 지금쯤 죽었겠네. 이 소식을 들은 게 꽤 오래 전이거든. 어때? 너 때문에 사람이 죽은 기분?”

브리트니는 라포드의 소식을 전해주면서 비아냥거렸다.

그때 리시는 브리트니가 왜 그들의 죽음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난 후에야, 브리트니가 라포드를 좋아했고, 라포드가 그 고백을 거절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후부터였지. 브리트니가 뭔가에 씌인 것처럼 날 괴롭히기 시작한 게…….’

브리트니는 그 전에도 종종 리시를 괴롭히긴 했지만, 라포드가 저택을 떠난 후로는 괴롭힘의 수준이 달라졌다.

“리시.”

케이의 음성이 리시의 상념을 깨뜨렸다.

리시는 케이가 함께라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리시의 방에 들어와 있었다.

“언제까지 딴생각할 거예요?”

“아……. 미안해요.”

“흐음.”

케이는 팔짱을 끼고 리시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리시는 슬그머니 그의 시선을 피했다.

랜디에 대해 케이에게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랜디는 ‘라포드’라는 이름을 버렸다.

리시에게 따로 아는 척을 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가 과거에 리시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든, 그건 어릴 때의 일이었다.

그런 이야기로 랜디와 케이의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공작이 된 걸 축하해요, 케이.”

리시의 말에 케이가 미간을 좁혔다.

그는 기분이 상한 듯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가, 리시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내가 지금 당신에게 듣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닌데.”

“그럼……?”

“이 눈에.”

케이가 손등으로 리시의 눈가를 스쳤다.

“나만 보인다고 말해.”

“당연히 당신만 보여, 케이.”

“여기에.”

그의 손등이 리시의 가슴에 닿았다.

“나만 담겼다고 말해.”

“당연히 당신만 담겼어, 케이.”

“믿어도 돼?”

“솔직히 말해줘?”

“응.”

리시는 그의 손을 잡아서 자신의 가슴 위에 단단히 고정시키고 그와 눈을 맞췄다.

“당신을 담기에도 모자라. 그래서 더 담을 만한 공간이 없나 찾아보는 중이야.”

케이가 싱긋 웃었다.

그가 허리를 굽혀 리시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

“나 한 명 담기에도 모자랄 정도의 크기라니. 역시 당신은 레이디 옹졸이었어.”

리시는 키득거리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케이.”

“나도 그래. 신기할 정도야. 지금 이렇게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어. 나, 어디가 좀 이상해졌나 봐.”

“그럼 나도 이상해진 거네.”

밀착한 가슴에 두근, 두근, 울림이 겹쳐졌다.

그의 것인지, 내 것인지 모를 심장소리가 설렜다.

그와 매번 몸을 겹쳐도 늘 새롭게 설레는 기분이 드는 게 신기했다.

지난 삶, 타인과 몸이 닿을 때 느꼈던 공포는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이 육체에 이런 뜨거운 체온을 전할 수 있는 남자는 케이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리라.

그의 뜨거운 입술이 리시의 입술 위에 겹쳐졌다.

팔뚝을 따라 내려온 그의 손이 리시의 허리를 감쌌다가 간질이듯 위로 올라왔다.

그의 손길과 축축한 숨결이 리시를 아찔하게 자극했다.

리시는 눈을 감고, 온몸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한꺼풀 옷이 흘러내리고, 살결이 스쳤다.

가빠진 숨이 민망해서 참아보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그가 뜨거워진 만큼 리시도 뜨거워졌고, 그만큼 호흡이 거칠어졌다.

수백 마리의 나비가 파드닥거리는 듯한 감각을 몇 번이나 느끼는 동안, 리시의 머릿속에서는 랜디가 사라졌다.

한참 후 둘은 이불에 감싸여 침대에 꼭 붙어서 누워 있었다.

케이가 리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리시. 내가 공작이 된 기념으로, 날 위해 선물을 하나 해줘요.”

“응, 뭘 갖고 싶어요?”

온몸이 노곤해서 리시는 나른하게 물었다.

케이가 리시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같이 목욕하자, 리시.”

잠이 깨버렸다.

+++

케이는 아침 내내 뚱한 표정이었다.

오늘부터 사흘간, 케이가 공작이 된 걸 축하하는 축제가 열린다. 케이가 돌아오는 날짜에 맞춰서 준비한 축제였다.

이미 초대장을 받은 손님들이 다코트 시에 와 있었고, 노백작 내외와 젠, 엘디도 오늘 도착한다고 알렸다.

가비자르 제국의 황태자 이오벳과 2황자 라코젠뿐만 아니라, 에오르트 왕국과 샤크란 왕국, 알로르 왕국 등 각 나라에서도 사절단과 왕족이 찾아왔다.

고용인들까지 신나서 분주하게 돌아다니는데, 케이만이 뚱해 있었다.

케이의 파티용 제복을 골라주던 제이미가 입을 열었다.

“대장. 오늘 같은 날에 그렇게 울상이면, 오늘을 위해 열심히 준비한 고용인을 비롯해 손님들과 공작부인, 그리고 나까지 짜증이 치밀겠지요?”

“맞아요, 대장. 표정이 왜 그따위예요?”

테이블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서 구경하던 나단도 제이미를 거들었다.

“나단, 그 앞에 의자가 있는데 꼭 거기에 앉아야겠나?”

“괜히 나한테 화살 돌리지 말고요. 공작도 되셨겠다, 가비자르 제국에서도 백작 작위를 받으셨겠다, 좋은 일밖에 없는데 대장 표정은 왜 그따윈데요? 자다가 벌레라도 먹었어요?”

“리시가 나랑 목욕을 같이…….”

퍼억-!

케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제미이가 주먹으로 케이의 팔을 후려쳤다.

“제이미, 난 네 대장이야!”

“안 해도 될 말을 나불거리는 대장은 필요 없겠지요?”

“……큰 문제야.”

“멍청이한테나 그렇겠지요.”

“나한테는 큰 문제라고.”

“나단. 나는 멍청이의 옷 시중을 들어주고 싶지 않으니 네가 옷 시중을 들어야겠네요.”

제이미는 나단이 잡을 새도 없이 휙 돌아서서 방을 나가버렸다.

나단이 오만상을 찌푸리고 케이를 노려봤다.

“나도 대장 옷 시중 들기 싫다고요. 스스로 입어요. 손 없어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케이가 툴툴거리며 옷을 입었다.

“대장, 그런 말이 있잖아요. 사랑을 하면 바보가 된다는 말.”

“어.”

“그런데 그거 알아요? 대장은 사랑하기 전부터 좀 바보였어요.”

“……나단.”

“귀족 영애들은 대장이 엄청 과묵하고 근엄하고 멋지고 냉랭하고…… 뭐, 그렇다고 알고 있을 텐데. 그 여자들이 대장의 이런 모습을 못 봐서 다행이에요. 대장, 형수님한테 평생 감사해하세요. 대장이 바보인 걸 알면서도 대장이랑 살아주시잖아요.”

“나단, 너 그냥 나가라.”

“아, 진짜요? 전 대장이랑 형수님이 같이 목욕할, 좋은 방법을 하나 알고 있는데.”

재킷을 걸치던 케이가 움직임을 멈췄다.

“뭔데?”

“총 사줘요. 좋은 마석이 박힌 걸로.”

“알겠으니까 말해봐.”

나단이 씩 웃으며 검지를 들었다.

“대장한테는 그게 있잖아요.”

“뭐?”

“늑대.”

 

+++

다코트 시는 축제를 위해 찾아온 인파로 북적거렸다.

꽤 넓은 편인 다코트 시 전체가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어느 식당을 들어가도 무료로 식사가 제공되었고, 광장에는 뷔페가 차려졌다.

음유시인이 노래를 하고, 광대가 공연을 했다.

행상인들은 꽃이나 동물, 몬스터 장난감을 아이들에게 무료로 나눠줬고, 어른들은 과일이나 빵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받았다.

축제에 드는 모든 비용은 그린 공작이 지불한다.

가난한 평민들은 이렇게 호화로운 축제도, 이렇게 대접을 받는 것도 처음이라서 한껏 들떠 그린 공작 가문을 칭송했다.

저녁에는 그린 공작 내외가 몸소 도시로 나와서, 평민들과 함께 축제를 즐겼다.

늦은 밤이 되자 마석과 화약을 적절히 섞어서 만든 폭죽이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평민들은 하늘에 피는 불꽃을 황홀하게 응시하며, 평생 그린 공작 내외에게 충성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모두가 행복에 젖어서 잠든, 축제 첫날 밤.

늑대로 변한 케이가 리시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리시. 늑대는 목욕이 필요해요.”

 

+++

케이는 설명했다.

“늑대의 모습일 때도 따로 목욕을 해야 하죠. 하지만 혼자 하기 힘들어서 도움이 필요해요.”

열심히 설명하는 케이를, 리시는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응시했다.

“정말이에요.”

리시는 케이가 늑대로 변해서 말하는 걸 볼 때마다 신기했다.

저 늑대 주둥이로 어쩌면 저렇게 유창하게 말할까.

“정말이라니까, 리시?”

리시가 대꾸하지 않자, 케이가 채근하듯 말했다.

“좋아요. 엘디를 불러주죠.”

“……엘디를 왜 불러요, 리시?”

“저번에 보니까 짐승을 잘 다루는 것 같더라고요. 윈디도 그렇고.”

엘디가 윈디에게 야무지게 손을 물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녀석은 글렀어요. 털을 다 뽑아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죠.”

“그럼 젠은요?”

“젠한테 내 알몸을 보여주라고?”

“왜 알몸이에요? 털이 있는데. 늑대로 변한 모습, 젠도 자주 보지 않았어요?”

“난 그 흉포한 녀석한테 내 털을 맡기고 싶지 않아요.”

“알겠어요, 그럼 제이미를 부르죠.”

리시가 당장이라도 나갈 듯 몸을 돌리자, 케이가 얼른 달려와서 리시의 앞을 막았다.

케이가 벌떡 일어서서 두 앞발을 리시의 어깨에 올렸다.

“리시. 제이미는 포악해요.”

“그래요? 내게는 상냥하던데.”

“포악해요. 빗질 솜씨도 좋지 않죠. 저번에 나단의 털을 빗질해주다가 반 이상을 뽑아버렸어요. 무서운 녀석이죠.”

“그럼 안 되겠네요. 당신이 대머리가 되면 안 되니까.”

검은 늑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요. 그럼 내가 해줄 수밖에 없겠네요.”

검은 늑대의 입이 히죽 벌어졌다.

리시는 검지로 늑대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톡톡 쳤다.

“저택 목욕탕에서는 안 돼요.”

“응?”

“털이 빠져서 하수구를 막으면 안 되잖아요.”

“……리시. 나 그렇게 털 많이 안 빠지는데…….”

“안 빠지긴요. 매번 털 떨어뜨리고 다녀서 에르웰이 의심하는걸요.”

“아니, 나는…….”

“나가죠. 호수에 가서 구석구석 깨끗이 씻겨줄게요.”

리시의 말에 케이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구석구석이라……. 나쁘지 않네.”

라고 중얼거리고, 리시의 어깨에서 두 앞발을 내렸다.

리시가 달칵, 방문을 열었다.

우선 인간 모습으로 바꿔서 나가려고 했던 케이가 “잠깐만.”이라고 말하는 순간, 리시의 방문 앞에 있던 사람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98) 못된 강아지

방문 앞에 서 있던 사람은 젠이었다.

사실 축제가 끝난 후, 젠이 리시의 방에 찾아오기로 했었다.

케이의 꿍꿍이속을 눈치챈 리시는, 지금쯤 젠이 오지 않을까 싶어서 다짜고짜 방문을 연 것이었다.

“케이, 왜 그러고 있어? 지금 저택에 다른 손님들도 와 있는데…….”

젠이 늑대 모습인 케이를 보며 물었다.

“아니, 그냥 좀…….”

“케이가 목욕을 시켜달라고 해서요.”

“리시!”

케이가 나무라듯 리시를 불렀지만, 리시는 계속해서 말했다.

“늑대 모습일 때도 따로 관리가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욕실에서 목욕을 하면 털 때문에 하수구가 막힐 것 같아서, 호수에 나가볼까 했죠.”

“아…….”

젠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케이를 응시했다.

케이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바보가 된 줄은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바보인 줄은 몰랐다.

‘어떡하지? 그린 공작이 바보라는 소문이 퍼지면 안 될 텐데…….’

젠은 잠시 망설이다가 케이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고는 손바닥으로 검은 늑대의 궁둥이를 찰싹찰싹 때리며 말했다.

“이 못된 강아지! 못된 강아지! 어디서 주인을 속여? 이 못된 강아지!”

+++

케이는 심통이 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젠은 오랜만에 만난 리시와 수다 삼매경이었다.

“사실은 메어리가 여기 찾아왔다는 걸 들었을 때, 나도 오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부모님이 말리셔서 못 왔어요. 내가 끼면 더 난장판이 된다면서.”

정말로 그럴 것 같기에, 리시는 노백작 내외의 선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번 일에 에르웰 도움이 컸다면서요?”

“네, 정말로요. 에르웰이 그러는데, 젠이랑 같은 아카데미에서 공부했었다고 하더라고요.”

“뭐, 그쪽은 날 라이벌로 생각하는 듯하지만, 나한테는 상대도 안 됐죠.”

“에르웰은 젠이 자기를 라이벌로 생각한다고 하던데.”

“그 계집애는 항상 그런 식이라니까!”

분통을 터뜨리는 젠을 보며 리시는 빙그레 웃었다.

흘끔 옆을 보니, 케이는 여전히 심술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그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역시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목욕을 같이하자니.

그런 걸 어떻게 같이해?

“그나저나 리시. 곧 목욕탕을 연다면서요?”

젠이 따로 찾아오겠다고 한 이유가 있었나 보다.

리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언니가 뭘 하는 걸 방해하려는 건 아닌데, 정말 괜찮겠어요? 귀족들 사이에서 여론이 좀 좋지 않아요.”

“아마 앞으로 더 안 좋아질 거예요.”

리시의 말에 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론이 안 좋을 거라는 거 알고 있었군요.”

“지금이야 그냥 내가 멍청하다는 얘기뿐이겠죠.”

“맞아요, 리시. 그냥 멍청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린 백작, 아니, 이제 공작이구나. 그린 공작가의 유일한 흠, 이라고 부를 정도예요.”

“누가 감히 그런 소리를 해!”

내내 뚱하던 케이가 끼어들었다.

“못된 강아지는 반성이나 하고 계셔. 주인님들 얘기하는 데 끼지 말고.”

“주인님은 누가 내 주인님이야? 리시는 맞는다 쳐도, 넌 아냐. 넌 빠져.”

“젠. 그런 별칭은 괜찮아요.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고 불렸던 적도 있는걸.”

리시는 위틀로 공작가의 꽃보다, 그린 공작가의 유일한 흠으로 불리는 게 차라리 나았다.

젠도 그 기분을 이해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새언니가 멍청이라고 불리고 싶다면 반대하지는 않을게요. 남편도 멍청이인데, 새언니 혼자 똑똑하긴 힘들겠지.”

“젠, 나한테 막말을 하는 건 괜찮지만…….”

“하여간, 리시. 나는 리시가 똑똑하든, 멍청하든 새언니 편이니까, 만약 그 사업 때문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나한테 얘기해요.”

“얘기하면 돈이라도 빌려줄 거예요?”

“내가 돈이 어디 있어요? 그냥 언제 얘기하든 달려와서 잠깐 놀려주고, 그다음에 한참 위로해줄게요.”

리시가 환하게 웃었다.

“그거면 돼요.”

진심이었다.

사업이 망해도, 큰일을 저질러도, 잠깐 놀려주고 한참 위로해줄 사람이 있다는 건 든든한 일이었다.

+++

제레시엔이 당장 달려와서 잠깐 놀려주고, 한참 위로해줄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축제가 끝나자마자 각 신문사가 호외 기사를 냈다.

그린 공작부인이 ‘포레스트’라는 이름을 붙인 목욕탕들이 일시에 개장한다는 기사였다.

목욕탕이 개장하는 건 호외가 될 만한 일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의아해하며 [포레스트, 드디어 베일을 벗다!]라는 제목의 신문 1면 기사를 주의 깊게 읽었다.

‘포레스트 목욕탕’, ‘포레스트 온천’은 놀라운 곳이었다.

기존의 목욕탕이라고 하면, 좁은 건물에 커다란 통 하나를 놓고, 그 안에 담긴 따뜻한 물을 바가지로 떠서 씻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포레스트 목욕탕’들은 입구에 들어선 순간,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안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넓은 정원, 정원에 놓인 자갈길을 걸어가면 건물에 들어갈 수 있었다.

건물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건, 탈의실이 아닌 작은 축제 거리였다.

엘레르보 신문 위팅크 기자의 표현 ‘작은 축제 거리’보다 포레스트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건물 안에는 여러 음식, 여러 장난감이나 생필품 등을 파는 노점상이 늘어서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실내에서 잘 자라는 나무와 풀, 꽃을 심은 화분과 화단으로 꾸며놔서, 마치 축제에 온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곳을 잠시 즐긴 후, 안으로 들어가면 남녀 탈의실이 나뉘어 있었고, 옷을 벗고 나가면 어마어마하게 넓은 욕조 여러 개가 있는 대욕탕이 반겨주었다.

욕탕 역시 여러 종류의 식물로 장식해서 마치 숲속에서 목욕을 즐기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이미 포레스트에 방문해본 위팅크 기자는, 포레스트 목욕탕의 장점을 황홀하게 늘어놓았고, 그것은 평민들을 황홀경에 몰아넣었다.

[포레스트 목욕탕의 가격은 5천 브리크. 평민들이 식당에서 한 끼 식사를 하는 비용이 2~3천 브리크라고 했을 때, 저렴한 가격은 아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축제가 있고, 숲의 신선함이 있고, 꿈이 있다.

특히 일품은 아이들이 즐겁게 놀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노점상 공간 한쪽에 마련된 모래밭에는 갖가지 장난감이 준비되어 있으며,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여러 종류의 게임도 마련되어 있다.

7세 이상 15세 이하 아이들의 입장료는 2천 브리크. 7세 미만 아이들은 무료로 목욕탕을 이용할 수 있다.

아이를 가진 부모라면, 한 번쯤 큰마음을 먹고 방문해서 아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위팅크 기자는 거의 광고라고 해도 좋을 수준의 기사를 썼다.

깐깐하기로 유명한 위팅크 기자가 이렇게까지 장점만 늘어놓는 일은 거의 없기에, 사람들의 기대치는 점점 더 올라갔다.

물론 호평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린 공작부인은 귀족을 버리기로 했는가.]

귀족 신문사는 리시가 처음으로 벌인 사업을 두고 설왕설래했다.

어떤 신문사는 ‘그린 공작부인은 선견지명이 있다.’면서, 민심을 먼저 얻으려는 리시를 칭찬했다.

또 어떤 신문사는 ‘그린 공작부인은 평민의 눈치를 너무 보는 것 같다. 위틀로 가문이 그런 식으로 망했기 때문에, 기댈 곳은 평민뿐이라고 판단한 것인가?’라며 혹평을 날렸다.

대부분의 귀족들이,

“나는 그런 목욕탕 따위에 갈 일이 없지.”

라고 말했다.

“우리 저택에는 이미 근사한 목욕탕이 있거든.”

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평민들은 은혜를 몰라. 좀 잘해줘도 그때뿐, 시간이 지나면 포레스트가 누구 건지도 모르게 될걸.”

그렇게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포레스트 목욕탕’은 동시에 오픈했고, 오픈 첫날 모든 지역의 포레스트 목욕탕에는 수많은 사람이 몰렸다.

대부분 평민이었으며, 신분을 감춘 귀족도 몇 명 있었다.

포레스트 목욕탕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나온 사람들의 손에는, 잡지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포레스트의 잡다한 이야기]

잡지 안에는 여러 정보가 담겨 있었다.

어느 지역의 무엇이 맛있는지, 무엇이 저렴한지, 또는 어떤 드레스가 유행이고, 어떤 색상과 어떤 색상을 조합해야 잘 어울리는지…….

굳이 알 필요는 없지만, 알아둬서 나쁠 게 없는 정보들.

한동안 대륙 곳곳은 ‘포레스트의 잡다한 이야기’에서 얻은 정보로 지식을 뽐내는 게 유행이 되었다.

“아직은 적자입니다, 아이리스 님.”

포레스트 목욕탕의 문을 열고 딱 한 달이 지났을 때, 가우저가 찾아왔다.

가우저는 금광 관리뿐 아니라, 리시의 자산 관리, 거기에 이제는 포레스트 목욕탕의 운영 관리까지 맡고 있었다.

제대로 잠을 잘 시간도 없어서, 몇 달 전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리시는 그를 걱정스럽게 살펴보며 말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큰 적자는 아니죠.”

“네.”

“어차피 사업은 초반에 적자를 감안해야 해요. 이 정도면 예상보다 훨씬 적어요. 앞으로 손님은 더 많아질 거고, 노점상에서 돈을 쓰는 사람도 늘어날 거예요.”

노점상에서 번 돈의 일부는 리시에게로 들어온다.

“차근차근 포레스트 목욕탕에서만 살 수 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추가할 거예요. 피부에 좋은 약품을 알아보고 나서 판매할 거고, 미용에 관한 조언을 해주는 직원도 고용하려고 해요.”

“평민들은 그런 데에 돈을 쓰지 않습니다.”

“조만간 돈이 많은 평민들이 방문하게 될 거고, 또 시간이 흐르면 귀족들도 드나들게 될 거예요.”

가우저는 미간을 모으고 잠시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벌써부터 신분을 감추고 드나드는 귀족들도 있다고 하더군요.”

“앞으로 점점 더 많아질 테니, 목욕탕 쪽 사업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아, 그리고 쟈메트 상단을 인수했어요.”

“쟈메트 양이 수락을 하던가요?”

리시는 쟈메트와 상단 경영권을 반씩 나눠 가졌었다.

하지만 메르티움 거래로 상단이 커지자, 상단을 노리는 적들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럴 때에 리시가 쟈메트에게 제안했다.

-“내가 상단을 사죠.”

물론 쟈메트가 쉽게 승낙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리시는 쟈메트에게 아주 달콤한 제안을 했다.

“물론 쉽게 수락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쟈메트에게 좋은 제안을 하나 했죠.”

“어떤……?”

“상단의 운영을 두 개로 나눴어요. 메르티움 거래와 교역. 쟈메트는 교역 쪽의 전권을 담당하는 실무자가 되기로 했죠.”

“그걸로 만족했습니까?”

“쟈메트가 원한 건 그저 상단을 키우는 것만이 아니었어요.”

쟈메트는 자신의 나라인 탈레하 왕국을 부강하게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섬나라인 탈레하 왕국은 교역을 하지 않으면 힘든 처지에 놓여 있었기에, 언제나 대륙의 나라들에 굽실거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럴 때에 리시가 제안한 것이다.

탈레하에서 나오는 모든 교역품을 책임지고 팔아주겠다고.

“탈레하 왕국에서는 커피가 나오죠. 아직까지 커피 생산지는 탈레하 왕국이 유일해요.”

“커피…… 그 맛없는 차 말입니까?”

“그 맛없는 차가 곧 없어서 못 마시는 차가 될 거예요.”

“……글쎄요, 아이리스 님. 그걸 마시느니 차라리 몸에 좋기라도 한 약을 마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두고 보자고요.”

리시가 매력있게 웃는 얼굴을 보며, 가우저는 하품을 하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죄송합니다, 아이리스 님.”

“아니에요. 피곤하죠?”

“아닙니다, 그동안 할 일도 없었는데 아이리스 님 덕에 요새 사는 기분이 듭니다.”

“그래도 몸 상하면 큰일이에요. 이제 슬슬 믿을 만한 후임들을 선택해서 일을 나눠주도록 하세요.”

“제가 그래도 됩니까?”

“당연하죠, 가우저. 가우저는 우리 그린 가문의 재정관이잖아요.”

가우저는 멍한 눈으로 리시를 응시하다가 벌떡 일어났다.

“재정관이라니요, 아이리스 님. 저는 그런 중책을 맡을 자격이 안 됩니다.”

재정관은 그 가문의 재정 전반을 관리하는, 재정관리인 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앉은 사람을 칭했다.

보통 귀족 가문은 재정관을 두지 않고, 여러 재정관리인에게 나눠서 재정 관리를 시켰다.

한 사람에게 맡겼다가 딴마음이라도 품으면, 가문 전체의 재정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최근에는 ‘재정관’이라는 직급은 거의 사라지고 있었고, 누군가 ‘재정관’이 되면 어마어마한 신뢰를 받는다는 의미이기에, 영예로운 일이었다.

“가우저가 아니라면 과연 누가 내 재정관이 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아이리스 님. 공작님도 이 사실을 아십니까?”

“알아요. 어젯밤에 알렸고, 동의를 얻었어요.”

“하지만 저는…….”

“가우저.”

리시가 눈을 들어 가우저를 응시했다.

“날 위해 살기로 하지 않았나요?”

약간 즐거워하는 것 같은 그녀의 음성에, 가우저는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졌다.

우리 작은 아가씨가 언제 이렇게 크셨는지. 한때 인생을 포기했던 가우저에게 리시의 신뢰는 큰 감동이었다.

가우저는 깊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겠습니다, 아이리스 님.”

(99) 아이리스의 후회

리시도 바빴지만 케이도 케이대로 바빴다.

최근 오그어들이 도시나 마을을 공격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었다.

오거, 오크와 인간의 혼혈인 오그어.

오래전에 존재했던 몬스터들은 대부분 소멸의 길을 걸었지만, 지능이 있는 몬스터들은 인간과 피를 섞어 살아남는 길을 택했다.

한때 몬스터들이 인간 여자를 너무 납치해가서, 여자의 수가 턱없이 줄어들었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태어난 혼종이 전부 부흥하지는 못했다.

나가나 님프처럼 마법을 주축으로 사용하는 몬스터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종은, 마법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자연스럽게 도태되었다.

고블린이나 코볼트 같은 몬스터와의 혼종은, 특별한 능력이 없기에 큰 무리를 짓기 전에 토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거나 오크 사이에서 태어난 혼종, 오그어들은 달랐다.

그들은 피부가 단단하고 덩치가 크며, 힘이 어마어마하게 강했다.

거기에 인간의 지능까지 갖게 되었으니, 인간 기사 몇 명이 달라붙는다고 해도 이기기 힘들었다.

오그어들은 대륙 여기저기에 흩어져서, 수가 많아질 때까지는 조용히 지냈다.

몇십 년 전부터 오그어들이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했고, 인간들은 그들을 ‘괴물’ 혹은 ‘야만족’이라고 불렀다.

“가비자르 근처를 정리했더니, 이제 이 근처가 난리군.”

그린 공작령에서 서쪽에 있는 가비자르 제국과의 사이에는 험준한 산맥이 있었다.

최근 그 산에 접한 도시에, 괴물이 출현한다는 보고가 있었다.

“움직임이 재빨라서 잡을 수 없다는 걸 보면, 오그어는 아닌 것 같은데. 게다가 목격자들 말에 따르면, 덩치가 작다고 했어.”

“오그어의 아이들은 덩치가 작고 재빠른 편이기는 합니다.”

유진의 대답에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한데…… 오그어들이 어린애를 시켜서 마을을 습격하게 할까? 습격당한 마을이 케틸 타운이라고 했지? 케틸 타운 정도의 크기라면, 오그어 열 명 정도만 있어도 충분히 짓밟을 수 있을 텐데.”

“케틸 타운이 작은 마을이기는 해도, 산에 접해 있는 곳이라서 실력 좋은 병사들을 배치해뒀습니다.”

“그런데도 잡지 못한 데다가 정체도 파악하지 못했다는 건, 범상치 않은 존재라는 의미겠군. 수인일 가능성도 있을까?”

“글쎄요. 목격자 얘기로는 인간의 형체라고는 했습니다.”

“흐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직접 가서 확인해야겠다. 큰일은 아닌 것 같으니, 우리 둘이 후딱 다녀오자.”

“준비하겠습니다.”

케틸 타운까지는 빠른 말을 타고 가면 사흘쯤 걸리는 거리였다.

유진이 떠날 채비를 하는 동안, 케이는 리시의 방을 찾아갔다.

리시는 시녀들과 과일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리시, 일주일 정도 자리를 비울 거예요. 내가 보고 싶다고 울지 말고 기다려줘요.”

“벌써 눈물이 나려고 하는데.”

“저런.”

“어디 가는데요?”

“케틸 타운에 수상쩍은 생물의 목격담이 있어서요. 그 근처 체리 밭을 다 망치고 가축을 여러 마리 죽였다더군요.”

“케틸 타운…….”

리시는 검지를 입가에 대고 뭔가 고민하는 듯 미간을 좁혔다.

케이는 리시가 왜 저렇게 심각하게 고민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역시 내가 또 저택을 비우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건가? 하루 종일 나랑 붙어 있어도 잠깐 떨어지는 게 아쉬운 모양이군.’

케이가 그렇게 행복한 망상을 하고 있을 때, 리시가 말했다.

“케틸 타운은 산체리가 유명하죠.”

“기가 막히죠.”

“나도 갈래요.”

“음?”

“산체리는 금방 상해서 그 근처에 가야만 먹을 수 있잖아요. 신선한 산체리를 먹고 싶어요.”

케이는 거절하려고 했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크게 위험한 일은 아닐 것 같으니, 기분 전환도 할겸 여행하는 기분으로 다녀오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만약 정체불명의 습격자가 오그어라 해도, 오그어 몇 명쯤은 케이 혼자서도 상대가 가능했다.

“그럼 마차를 준비해야겠군요.”

“마차가 뭐가 필요하겠어요? 윈디가 있는데.”

윈디는 이제 훌륭한 성체 유니콘이 되어서, 뿔도 잘 감출 수 있었다.

“케틸 타운까지는 아무리 서둘러도 3일은 걸려요. 잠깐 승마를 하는 거와는 다를걸요.”

“내가 지쳐서 드러누울까 봐 걱정돼요?”

“아니, 당신의 예쁜 엉덩이가 아플까 봐 걱정이죠.”

그러면서 슬그머니 리시의 엉덩이를 향해 손을 뻗는데.

“흠흠.”

크리시나가 헛기침을 했다.

케이는 시녀들의 존재를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리시를 앞에 두면 뭔가에 홀린 듯 머릿속이 리시로만 가득 찬다.

케이가 민망해서 시선을 돌리다가,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에르웰과 눈이 딱 마주쳤다.

“좋아요, 그럼 준비해요. 준비가 끝나는 대로 바로 출발할 테니까.”  

+++

스티무어 제국 황궁의 서별채.

귀한 손님을 위한 건물들이 모여 있는 서별채의 정원은, 가을을 물씬 머금어서 아름다웠다.

화단에 핀 꽃에 둘러싸인 분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보라가 마치 보석처럼 빛을 뿌렸다.

분수 앞 벤치에, 풍성한 금발을 늘어뜨린 여자가 청초한 분위기의 드레스를 입고 앉아 있었다.

브리트니였다.

‘아, 날씨 좋다.’

새파란 하늘에 동동 떠다니는 뭉게구름이 이토록 아름답다는 걸 처음 알았다.

브리트니는 요새 황홀할 정도의 행복감에 감싸여 있었다.

나락으로 떨어져 있다가 건져 올려진 곳이 천국이니, 행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땐 정말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저택에서 쫓겨난 후 몇 달.

브리트니는 그야말로 지옥에 있는 것 같았다.

돈도 없고, 시중을 들어주는 이도 없었다.

물 한 모금 마시려고 해도 직접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와야 했고, 간신히 돈을 긁어모아도 직접 밥을 먹으러 나가야만 했다.

그 돈도 얼마 되지 않아서 일을 해야만 했는데, 집안일 한번 해본 적 없는 브리트니와 데니스가 제대로 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예전이었다면 눈도 못 마주칠 평민 나부랭이들이, 일을 제대로 못 한다며 한숨을 쉬다가 급기야 욕설까지 내뱉었을 때는.

‘정말 죽어버리려고 했지.’

그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겠다 싶었다.

평민들의 멸시와 조롱을 받으면서는 살고 싶지 않았다.

고운 손은 부르텄고, 피부도 거칠어졌다.

푸석푸석해진 머리카락을 보며, ‘그래, 오늘은 그냥 죽자. 어떻게 죽을까?’라고 결심한 그날.

운명처럼 드웨인을 만났다.

그의 어깨에 새겨진 스티무어 제국 황실의 문장을 봤을 때만 해도, 그가 황태자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잘해봐야 황실 기사 정도의 인물인 줄 알았는데.

‘황태자였어. 나는 황후가 될 운명인 거야.’

위틀로 공작가의 소식은 스티무어 제국에까지 퍼졌을 것이란 생각에, 신분을 감췄다.

드웨인은 아직도 브리트니를, 아무 신분도 없는 평민 ‘브린’이라고 알고 있었다.

아픈 어머니 때문에 열심히 일하며 씩씩하게 살아온, 평민 브린.

그날 드웨인과 함께 떠나기로 하면서, 어머니 데니스에게는 잘 말해두었다.

-“엄마. 이 저택 정리하고 어디 작은 집이라도 빌려서 살고 있어. 내가 꼭 황태자비 자리를 차지한 후에 데리러 올게.”

드웨인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었다.

스티무어 제국 테일러 후작 가문의 영애, 에버렛 테일러.

‘그 여자는 문제도 안 돼.’

아직 정식으로 만난 적은 없지만, 얼마 전에 멀리서 한 번 봤다.

차분해 보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봐도 예쁜 얼굴은 아니었다.

잘 봐줘야 귀엽다 싶을 정도의 외모.

브리트니는 드웨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자신이 있었다.

‘아니, 황태자는 이미 나한테 푹 빠졌어.’

드웨인은 매일 밤 브리트니를 찾아왔다.

브리트니가 황궁에 들어온 후, 황태자비의 처소인 동궁에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고 들었다.

황후가 바뀌는 건 어렵지만, 황태자비가 바뀌는 건 종종 있는 일이었다.

‘고급스러운 방, 드레스, 장신구…… 이런 걸로는 부족해.’

브리트니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었다.

예를 들자면, 그린 백작도 감히 넘어다볼 수 없는, 그런 위치.

‘아니, 이제 백작이 아니라 공작이랬나?’

브리트니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이리스, 지금을 충분히 즐기도록 해. 넌 내가 절대 그 진탕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줄 알았겠지만, 아니야. 나는 아득바득 기어 올라가서 네 목을 물어뜯을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너는 그 화려한 드레스보다 하녀 복장을 입은 게 더 잘 어울리거든.’

 

+++

‘난 바보야…….’

저택을 떠난 지 이틀째.

리시는 자신의 오만한 선택을 후회했다.

좋은 안장을 얹은 윈디는 타는 사람이 불편하지 않도록 빠르지만 안전하게 달렸다.

그래서 처음에는 윈디를 타고 빠르게 달리는 게 무척 기분 좋았다.

붉고 노란 옷을 입은 나무들을 스치고 지나온 바람은 신선했고, 승마장에서 달리는 것보다 빠른 속도가 생경하면서도 흥분되었다.

하지만 그 좋은 기분은 딱 첫날까지였다.

날이 저물 무렵에 들른 마을의 작은 여관에서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이변을 느꼈다.

‘엉덩이가 아파!’

엉덩이뿐이 아니었다.

허벅지도, 허리도, 등도, 팔도…….

온몸이 근육통으로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그동안 승마장에서 하루에 한두 시간씩 말을 타는 건, 애들 놀이나 다름없었다.

말을 타고 온종일 달리는 건, 여유를 부리며 승마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특히 엉덩이와 허벅지는 살짝만 건드려도 비명이 나올 정도로 아파서, 걷는 것도 힘들었다.

“리시, 말 탈 수 있겠어요?”

오늘 아침, 케이는 리시가 아플 걸 예상했다는 듯 물었다.

“그럼요.”

리시는 괜히 오기를 부렸고, 마을을 떠난 지 한 시간도 안 된 지금, 깊은 후회에 잠겨 있었다.

슬쩍 앞을 보니,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달리고 있었다.

리시를 보호해야 한다고 우겨서 따라온 에르웰과 크리시나 역시 멀쩡해 보였다.

흘금 뒤를 보니, 유진은 심지어 꾸벅꾸벅 졸고 있기까지 했다.

‘케이랑 유진이야 원래 말을 자주 타는 사람들이니 그렇다 쳐도…… 에르웰이랑 크리시나는 어쩜 저렇게 멀쩡한 거지? 역시 체력의 문제인 걸까?’

에르웰도 크리시나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

윈디는 마치 바람을 타고 나는 듯 부드럽게 달렸지만, 근육통으로 예민해진 리시의 엉덩이는 여전히 지끈지끈 아팠다.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안 되겠다고 말할까? 하지만…… 케틸 타운에는 꼭 가고 싶은데.’

케일 타운에 가려는 이유는, 산체리 때문이 아니었다.

리시가 이번 생에서 꼭 만나고 싶은 인물이 있는데, 그 인물이 이 시기쯤에 케틸 타운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인물에 관한 정보는 많지 않아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직접 가서 확인하고 싶었다.

그때, 윈디가 갑자기 달리기를 멈췄다.

뒤에서 따라오던 유진이 “헛! 깜빡 잠들었군.”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빡 잠든 게 아니라 푹 잔 것 같은데…….’

리시는 그렇게 생각하며 윈디의 목을 쓰다듬었다.

“윈디, 왜 그래?”

“힝!”

“응?”

“히힝! 푸르르.”

윈디가 푸레질을 하며 앞발로 땅을 탁탁 긁었다.

앞서서 달리던 케이와 시녀들도 말을 돌려서 돌아왔다.

유진이 말에서 내려 다가오며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형수님?”

“이 애가 갑자기 멈춰서요.”

“음. 무슨 문제지?”

유진이 윈디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자, 윈디가 퉷, 하고 침을 뱉었다.

유진이 미간을 좁혔다.

“이 버릇없는 조랑말의 턱을 한 대 날려도 되겠습니까, 형수님?”

“퉷!”

윈디가 또 침을 뱉었다.

리시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으며 윈디를 달랬다.

“윈디, 정말로 왜 그래?”

“대장, 이 버릇없는 당나귀의 턱을 한 대 갈기고 싶습니다.”

유진이 케이에게 간절하게 요청했지만, 케이는 무시하고 윈디의 콧등을 쓰다듬었다.

“왜 그러냐, 윈디. 뭐에 삐친 거야?”

“히잉. 푸르륵.”

윈디가 리시 쪽을 돌아보며 케이에게 뭔가 전하려 했다.

묵묵히 윈디를 응시하던 케이의 눈동자가, 아직 윈디의 등에 타고 있는 리시에게로 향했다.

케이가 리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려와봐요, 리시.”

“……싫은데요.”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지금 윈디에게서 내리려고 하면 허벅지와 허리, 등과 목이 어마어마하게 아플 것이다.

그리고 다시 탈 때도 어마어마한 통증을 느끼리라.

지금 이 상태가 편한 건 아니지만, 윈디를 타고내릴 때보다는 나았다.

“왜 싫어요?”

“난 원래 높은 곳에서 모두를 내려다보는 게 좋거든요.”

케이의 입가 근육이 꿈틀거렸다.

케이는 웃음을 참으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리시는 자기 생각을 간파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입술을 꼭 여미고 시선을 옆으로 돌렸더니, 케이가 윈디의 목덜미를 툭툭 쳤다.

윈디는 유진을 대할 때와는 달리, 얌전하게 앞다리를 굽히고 자세를 낮췄다.

이제 리시는 편하게 내려올 수 있는 상태가 되었지만, 그래도 몸을 움직이는 게 무서웠다.

그러자 크리시나가 저벅저벅 다가오더니, 두 손으로 리시의 양쪽 허리를 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아아아악!”

벼락을 맞은 것 같은 격통에, 리시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100) 어디가 제일 예뻐?

“아프시죠, 아이리스 님?”

크리시나의 질문에 에르웰이 대꾸했다.

“보면 모르냐? 그렇게 무식하게 들어 올리면 어떡해?”

“아이리스 님이 고집을 부리시니까. 아이리스 님, 초보자가 말을 타고 근육통 때문에 고생하는 건 창피한 일이 아니에요.”

크리시나가 어린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리시는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괜히 고집부렸네요. 나 때문에 가는 길이 늦어질까 봐…….”

“리시. 내가 힘들면 말하라고 했잖아요. 가는 길이 좀 늦어지는 건 괜찮아요.”

“하지만 케이, 나는 폐가 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뭘 해도 폐라고 생각하는 사람 없어요. 여기, 폐라고 생각하는 사람?”

유진이 손을 들었다.

“형수님은 괜찮은데, 이 망아지는 큰 폐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버리고 갑시다.”

유진은 윈디가 침을 뱉어서 단단히 삐친 모양이다.

“윈디는 예민한 녀석이에요, 리시. 당신이 힘들어하는 걸 느꼈을 거예요.”

“이제 날 태우고 달리지 않을까요?”

“자기 때문에 당신이 아파한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어린 생물의 마음씀씀이에, 리시는 뭉클해져서 윈디를 안아주려고 팔을 들어 올리다가, “으윽!” 신음을 흘리며 도로 내렸다.

“리시, 아플 땐 아프다고 솔직하게 말해줘야 해요. 나는 눈치가 없어서 놓치는 게 있을 수도 있어요.”

“알겠어요.”

이제 아플 때 아프다고 한다고, 하려던 걸 취소한다고,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도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면 분노를 사고,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직은 리시의 가슴 깊은 곳에 남아 있었다.

에르웰이 가방에서 꺼낸 약통을 들고 다가왔다.

“아이리스 님. 이럴 것 같아서 근육통에 좋은 약을 챙겨왔어요. 아픈 곳에 바르고 30분쯤 지나면 통증이 많이 가라앉을 거예요. 제가 발라드릴게요.”

“내가 할게.”

케이가 손을 내밀자, 에르웰이 약통을 품에 끌어안았다.

“제가 갖고 온 건데요, 공작님.”

“내 아내야.”

“제 공작부인이신데요?”

“내 아내 몸은 내가 더 잘 알아.”

“저는 아이리스 님의 목욕 시중도 들었는데요.”

“부럽군.”

“케이!”

리시가 케이의 팔뚝을 때리려다가, “윽!” 하며 도로 팔을 내렸다.

“이리 오세요, 아이리스 님.”

리시는 에르웰의 손에 이끌려 풀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지 확인한 후, 리시는 셔츠를 올렸다.

약은 박하와 라벤터 향기가 났다.

에르웰은 이런 경우 어디가 아픈지 확실하게 알고 있기에, 근육통이 생긴 부분에 꼼꼼하게 약을 발라줬다.

30분쯤 지나서 통증이 가라앉는다고 했지만, 리시는 벌써 몸이 좀 편해지는 걸 느꼈다.

모두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니, 유진이 지도를 펼쳐서 확인하고 있었다.

“여기서 두 시간쯤 더 가면 어블 시가 나옵니다.”

“그럼 오늘은 거기서 머물지.”

“케이, 나 때문에 굳이 쉬지 않아도 돼요. 벌써 아픈 게 가라앉고 있거든요.”

리시가 끼어들자, 유진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형수님. 어블 시에 뭐가 있는지 아십니까?”

“……뭐가 있는데요?”

“카지노가 있습니다. 한 판 하러 가시죠.”

“유진…….”

“그렇게 해요, 리시. 나도 오랜만에 카지노에서 좀 놀고 싶거든. 여러분은 어때요?”

케이의 질문에 에르웰과 크리시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카드 게임에 일가견이 있어요, 아이리스 님.”

“일가견이 있긴. 그때 네가 돈 딴 건 요행이었고, 그 후로 다 잃었잖아.”

“그건 그 새끼…… 아니, 그 자식…… 아니, 그 인간이 사기를 친 거라고!”

“사기 친 게 아니라 그냥 네가 진 거라니까?”

카지노를 두고 설왕설래하는 동안, 리시의 통증도 많이 가라앉았다.

그들은 말을 타고 달려서, 어블 시에 도착했다.

+++

카지노는 재미있었고, 식당에서 먹은 저녁은 맛있었다.

어블 시는 카지노로 꽤 유명한 도시라서, 여행자를 위한 좋은 여관이 많았다.

그중 한 곳을 골라서 묵기로 했다.

여관 복도를 걷는 내내, 유진이 말했다.

“형수님. 제발 절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카지노에서 리시는 돈을 쓸어모았다.

카드 게임부터 구슬 게임까지, 실패가 없었다.

나중에는 사람들이 자기 게임을 하지 않고 리시 주위에 몰려와서 구경을 할 정도였다.

“유진, 그만 네 방으로 가라.”

“대장, 내 방이 문제가 아닙니다. 형수님은 오늘 한 번도 돈을 잃지 않았다고요.”

“유진.”

케이가 미간을 좁히자, 유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형수님. 절 제자로 들이시는 걸 진지하게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저는 최고의 제자가 될 자신이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유진을 밀어내고, 케이는 리시와 함께 방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

“나도 궁금해요, 리시. 대체 어떻게 한 번도 돈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거죠?”

“그러게요.”

담담하게 대꾸했지만, 리시야말로 궁금했다.

리시는 특별히 도박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해본 적도 거의 없었다.

저번에 유진과 했던 게임은 지난 삶에서 종종 해봤다고 쳐도, 도박에서까지 돈을 잃지 않는 건.

‘뭔가 이상해. 어떻게 돈을 한 번도 안 잃은 거지?’

운이 따라줘야만 하는 구슬 게임에서조차, 리시는 계속 1등을 차지했다.

카드 게임은 잘하지 못해서 대충했는데도, 계속 리시가 이겼다.

-“트리사의 귀걸이라고, 지니고 있으면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귀걸이입니다.”

문득 지난 삶, 케이가 준 귀걸이가 떠올랐다.

트리사의 귀걸이.

지니고 있으면 행운을 가져다주는 귀걸이.

‘내가 시간을 되돌아온 것도, 지금 이 행운들도, 전부 그 귀걸이 덕분인 걸까? 하지만…… 지금 내게는 그 귀걸이가 없는걸.’

어쩌다가 회귀를 한 건지 생각해볼 때마다 그 귀걸이를 떠올렸다.

불행했던 지난 삶, 리시에게 찾아온 유일한 행운.

케이의 위로와 작은 선물.

그걸로 ‘트리사의 귀걸이’는 자신이 할 몫을 다했다고, 리시는 생각했었다.

처음 회귀했을 때는 그저 신이 실수를 했거나, 그 비슷한 이유 때문일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성유물을 다룰 수 있는 자신의 힘을 깨달은 후, 시간을 돌아온 게 트리사의 귀걸이 덕분이라고 확신했다.

‘지난 삶에도 내게는 성유물을 다루는 힘이 있었을 거야. 다만 성유물을 다룰 기회가 없어서 몰랐던 거지. 그러다가 죽는 순간…….’

리시는 간절히 소망했다.

이런 식으로 죽고 싶지 않다고,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다고.

‘그 간절한 마음이 내 힘을 끌어냈고, 트리사의 귀걸이가 작동해서 시간을 되돌린 거라고 하면…… 지금 내 상황이 말이 돼. 하지만 이 행운은…….’

지금 리시에게는 트리사의 귀걸이가 없다.

그럼에도 이상할 정도의 행운이 계속되고 있었다.

‘아직도 그 귀걸이의 영향력이 남아 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운인 걸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익숙한 향기가 리시의 후각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 보니, 케이가 에르웰의 약통 뚜껑을 열고 있었다.

“……결국 받아 왔군요.”

“내가 못 하는 건 없죠, 리시.”

케이가 싱긋 웃으며 침대를 가리켰다.

“옷 벗고 누워요. 구석구석 섬세하게 발라줄 테니까.”

“내가 바를 수 있어요.”

“말을 타면 말이죠. 목, 등, 허리와 둔부부터 허벅지에 팔뚝까지. 전부 아파요. 혼자서는 못 발라요.”

“혼자서 바를 수 있는 곳은 내가 바르고, 손이 안 닿는 곳만 부탁할게요.”

“그건 안 돼요, 리시.”

“왜 안 돼요?”

케이가 성큼 다가왔다.

“내가 에르웰을 질투하게 될 것 같거든. 에르웰은 당신의 목욕 시중까지 든다면서요.”

“……케이.”

“그렇게 말 안 듣는 아들 쳐다보는 눈빛 하지 말아요.”

“틀렸어요. 이건 말 안 듣는 강아지 보는 눈빛이에요. 엉덩이 맞고 싶어요?”

“하, 제레시엔. 몹쓸 짓만 가르쳐주고 떠났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케이를 보며, 리시는 작게 웃으며 침대로 향했다.

케이가 말한 대로 침대에 엎드리자, 그가 침대 옆에 서서 내려다보며 말했다.

“근사한 광경이라서 잠깐 감상 좀 할게요.”

“얼른 약이나 발라요, 케이.”

“네, 네.”

케이가 웃으며 약을 떠서 리시의 등에 발랐다.

미끌거리는 약과 그의 체온이 겹쳐져서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리시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흘러나오는 신음을 삼켰다.

“리시, 그거 알아? 당신은 등이 정말 예뻐.”

“그런가요.”

“아, 그리고 어깨에서 팔로 떨어지는 선이 정말 예뻐. 좀 말도 안 되게 예뻐서, 사람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

“그렇군요.”

“그런데 허리 라인도 예쁘거든. 그래서 셋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어.”

“……꼭 하나를 골라야 하는 문제인가요?”

“만약 누군가가 나한테 당신 아내의 가장 예쁜 부분은 어디냐고 물어볼 수도 있잖아.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를 상황일 수도 있고.”

“……아, 그렇군요. 정말 있을 법하네요.”

“그러니까. 아주 곤란해, 리시.”

리시가 키득키득 웃었다.

“나도 당신이 바보라서 곤란해요, 케이.”

“어디가 제일 잘생겼는지 고를 수 없어서가 아니고?”

“난 딱 고를 수 있는데.”

“그래? 어딘데?”

그의 얼굴을 보지 않고도, 그가 얼마나 눈을 빛내며 대답을 기다리는지 알 수 있었다.

리시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대답했다.

“늑대로 변했을 때, 회색 눈썹이요.”

“…….”

 

+++

말을 타고 달리며, 케이는 옆에서 달리는 에르웰에게 물었다.

“에르웰. 나, 잘생기지 않았어?”

“……제가 제일 뒤에서 달릴게요. 유진, 자리 바꿔요.”

에르웰이 도망쳤다.

에르웰 대신 자리를 채운 크리시나에게 물었다.

“크리시나, 나, 잘생기지 않았어요?”

“잘생기셨지요.”

크리시나가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크리시나? 나, 공작인데요.”

“네, 실례했어요, 공작님. 공작님은 정말 너무 잘생기셔서 보고 있노라면 눈이 부시고, 눈이 부시면 눈물이 나오고, 눈물이 나오면 하품도 같이 나오거든요.”

“보통 하품이 나오면 눈물이 나오는 거 아닙니까?”

“유진, 나랑도 자리 바꿔요.”

크리시나도 도망쳤다.

“유진.”

“제 타입은 아닙니다.”

옆에서 다 듣고 있던 유진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이제 주접은 그만 떠십시오, 대장.”

“유진, 내가 대장이라는 걸 염두에 좀…….”

“형수님. 저랑 자리 바꿔주십시오.”

유진이 뒤를 돌아보며 외치자, 리시가 곧바로 대답했다.

“싫어요.”

 

+++

드디어 케틸 타운에 도착했을 때는 한낮이었다.

케이 일행이 도착하자마자 경비대장과 촌장이 달려와서 환영해주었다.

조용히 찾아온 것이기에, 마을 사람들에게는 공작이 방문한다는 걸 알리지 않았다.

그들은 경비초소로 자리를 옮겼다.

“어제도 그놈이 소 한 마리를 죽였습니다, 공작님. 이러다가는 마을의 소가 남아나지를 않을 거예요.”

마을 촌장이 우는소리를 했다.

“병사들은 그 현장을 못 봤나?”

“축사를 지키던 병사가 두 명 있었는데, 둘 다 소가 비명 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눈치챘다고 합니다. 병사들이 달려갔을 때는, 놈이 소 다리를 뜯어서 도망친 후였습니다.”

“무리가 있는 것 같나?”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목격자들 얘기로는 늘 혼자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매번 습격하는 놈이 다른 놈일 확률은?”

“……그럴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그렇게 무리를 지은 놈들이라면 저희도 금방 발견할 수 있었을 겁니다.”

원래 무리 지은 놈들을 발견하는 게 더 쉽다.

케이가 초소에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리시는 에르웰, 크리시나와 함께 마을을 거닐고 있었다.

산체리 산지라서 그런지, 마을 곳곳에 산체리를 파는 노점상이 있었다.

리시는 산체리를 한 상자씩 사서 에르웰과 크리시나에게 나눠주고, 그녀도 상자 안에 담긴 산체리를 꺼내서 입에 넣었다.

달고 상큼한 향기가 입안에 퍼졌다.

“이거 정말 맛있네요. 체리랑은 다른 맛이에요.”

“맞아요, 아이리스 님. 뭔가 더 달고 진한 것 같아요. 향기도 조금 다르고.”

리시와 크리시나가 산체리를 한 알씩 입에 넣고 음미하는 동안, 에르웰은 상자를 입에 대고 산체리를 탈탈 털어 넣은 후 우물우물 씹었다.

그러고서 주위를 둘러보던 에르웰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101) 되찾은 낭만

  에르웰은 빈 상자를 크리시나에게 건네더니, 후다닥 달려가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놀라운 도약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오오!” 하며 에르웰을 구경했다.

에르웰은 그대로 간이 지붕을 밟고 한 번 더 뛰어올라, 건물의 지붕까지 올라갔다.

지붕 끄트머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에르웰은, 검지로 지붕을 쓱 문질렀다.

검붉은 것이 검지 끝에 묻어나왔다.

에르웰은 냄새를 맡아보고 나서 중얼거렸다.

“소의 피…….”

에르웰이 몸을 일으키고 주위를 쭉 둘러본 후, 다른 건물 지붕으로 뛰어넘어갔다.

그곳에서도 에르웰은 핏자국을 발견했다.

다시 아래로 내려온 에르웰이 말했다.

“아이리스 님. 놈의 흔적을 찾았어요. 공작님께 말씀드리죠.”

 

+++

마을 습격자를 잡기 위한 인원이 꾸려졌다.

케이 일행과 경비대장, 몸놀림이 날랜 몇 명의 병사들이었다.

리시도 함께 가고 싶었지만, 케이는 단호했다.

“당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지켜주기 힘들어요. 적이 어떤 놈인지 파악하지도 못한 상황이라서.”

“사로잡아올 거죠?”

“물론이죠.”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이면 안 돼요. 알겠죠? 반드시 사로잡아야 해요.”

케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리시의 얼굴을 살폈다.

“리시, 뭔가 아는 게 있어요?”

“그건 아니지만…… 혹시나 해서요.”

“이 수상쩍은 행태를 보면, 숨어서 사는 수인일지도 모른다?”

리시가 고개를 끄덕이자, 케이가 싱긋 웃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에요, 리시. 반드시 살려서 데려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

케틸 타운과 접한 산자락에는 넓은 산체리 밭이 있었다.

이 산에서만 자라는 특산품이었다.

밭 주위는 울타리를 쳐서 경계를 만들어놨는데, 울타리 곳곳이 부서진 상태였다.

경비대장이 설명했다.

“저것도 다 그놈 때문입니다. 밭의 일부가 망가졌습니다.”

산체리 밭을 지나서도 한참을 더 안으로 들어갔다.

나무가 점점 많아지고, 억센 풀이 무성해서 걷기 힘들었다.

“흔적을 놓쳤어요.”

앞장 서서 걷던 에르웰이 말했다.

눈으로 흔적을 좇던 에르웰과 다르게, 케이는 후각과 청각에 힘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예민해진 후각에 아까 마을에서 맡았던 냄새가 잡혔다.

소의 피 냄새와 산체리 냄새.

놈이 소의 다리를 가지고 산체리 밭을 휘젓고 다니며 냄새를 묻혀 온 게 분명했다.

소뿐만 아니라 돼지나 말, 닭 등 다른 가축의 냄새도 있었다.

썩어가는 냄새인 걸 보니, 오래전에 잡아와서 먹고 남은 것들인가 보다.

‘자고 있나 보군.’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멀지는 않았다.

‘저 나무 덩굴 뒤가 은거지인가?’

적은 한 명뿐인 듯했다.

케이가 오른손을 들자, 뒤따라오던 일행이 걸음을 멈췄다.

병사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키며 무기를 거머쥐었다.

케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절대 죽여서는 안 된다. 생포해야 해.”

“하, 하지만…… 오그어 족이나 혼종이면 생포하려다가 오히려 저희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데…… 그럴 때는 죽여도 됩니까?”

경비대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위험해지는 일은 없을 거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자리를 제대로 지키도록 해.”

“아, 알겠습니다.”

생포를 위해 그물과 올가미를 든 병사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옆의 동료에게 엄호를 부탁하는 눈빛을 보냈다.

케이는 유진에게 눈짓한 후, 무성한 나무덩굴을 향해 조용히 걸어갔다.

바닥에 흩어진 나뭇가지를 피해서 걷는 두 사람의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유진은 조용히 나무덩굴을 한 뭉텅이 잡고, 검으로 베어냈다.

나무덩굴이 잘리며 생긴 공간을 조용히 벌려서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바스락-

놈이 깨어났다.

케이와 유진은 놈이 나갈 수 없도록 나란히 서서 통로를 막았다.

당연히 정면에서 달려올 거라고 예상했지만, 아니었다.

휘릭-!

동굴 천장을 타고 달려온 놈이 케이의 머리 위로 뚝 떨어져 내렸다.

날카로운 손톱이 케이의 얼굴을 할퀴려 했지만, 유진이 더 빨랐다.

유진은 놈의 손목을 붙잡아서 패대기치듯 바닥에 내려놨다.

쿠웅-!

상당히 아프게 떨어졌음에도, 놈은 벌떡 일어났다.

“크흐으으으으!”

놈이 맹수의 울음 같은 소리를 내며, 자세를 바짝 낮추고 케이와 유진을 노려봤다.

처음에 케이와 유진은 놈이 짐승으로 변신한 수인이거나, 어린 오그어일 거라고 예상했다.

둘 다 아니었다.

케이의 입술이 벌어졌다.

“저건…….”

“인간이군요. 인간 꼬마.”

“크아아아앙!”

소년이 이를 드러내고 케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움직임이 마치 고양잇과의 맹수 같았다.

상체를 낮추고 경계하다가 뒷다리의 힘으로 훌쩍 뛰어서 목을 물려고 하는 공격.

인간 소년치고는 빠른 속도였지만, 케이와 유진의 눈에는 다 보이는 공격이었다.

케이가 소년의 목을 덥썩 움켜쥐었다.

소년은 손톱으로 케이의 팔뚝을 휘두르며 발버둥쳤지만, 케이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크아아아! 크르르르!”

“이 녀석…… 수인 아닌 거 맞지?”

“누가 봐도 인간입니다.”

“그런데 왜…….”

“크으으으으! 크아앙!”

“이런 소리를 내는 거지?”

“글쎄요. 그보다는 팔 괜찮으십니까?”

케이의 팔뚝은 소년이 할퀴어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케이가 손에 좀 더 힘을 주자, 소년이 눈을 부릅뜨고 크윽, 크윽, 괴로운 소리를 내다가 축 늘어졌다.

“죽이셨습니까?”

“그럴 리가. 리시가 살려서 데려오랬어.”

유진이 소년을 묶는 동안, 케이는 동굴 안쪽을 살펴봤다.

인간이 살던 곳이라기보다는, 맹수가 살던 곳처럼 보였다.

나뭇잎을 대충 모아서 만든 잠자리와 여기저기 널린 짐승 뼈.

다른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아무래도 소년 혼자 이곳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것 같았다.

케이는 잠자리 옆에서, 다른 짐승 뼈와 달리 형체를 갖춘 짐승 뼈를 발견했다.

“호랑이 뼈군. 흐음. 아무래도 어릴 때 버려진 걸, 호랑이가 주워서 키운 것 같다.”

“그게 가능합니까?”

“에전에 어디에서는 늑대가 키운 애도 발견되고 그랬잖아.”

“그건 삼류 잡지에 실린, 거짓 기사로 밝혀졌는데요.”

“네가 제일 믿었던 것 같은데. 당장 보러 가자고 난리쳤었지.”

“…….”

케이가 호랑이 뼈를 자세히 살폈다.

“뼈에는 특별한 상처가 없는 걸 보니, 병에 걸렸거나 늙어서 죽은 것 같군. 그 후로 그 애 혼자서 살아온 거겠지. 호랑이에게 배웠으니 날렵했을 거고…….”

케이는 상처가 잔뜩 난 자신의 팔뚝을 내려다봤다.

“어릴 때부터 산에서 생활을 해서인지 힘도 세. 수인이 아니라도 잘 키우면 쓸모 있겠어.”

“저기, 공작님. 괜찮으십니까? 살아 계시는 거죠?”

밖에서 경비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슬 나가지. 애가 도망치지 않게 잘 붙잡고.”

 

+++

소년은 공포에 질려서, 자신을 둘러싼 인간들을 노려봤다.

정신을 차리니 호랑이와 함께 살고 있었던 소년은 자신도 호랑이라고 믿었다.

인간들은 호랑이나 다른 짐승들을 죽이려고 하는, 무섭고도 나쁜 놈들이었다.

호랑이는 죽기 전에 소년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조용히 사냥하는 법, 인간의 마을에서 맛좋은 가축을 잡아 오는 법, 인간의 눈에 띄면 도망치는 법, 마셔도 되는 물과 과일을 찾는 법…….

호랑이가 죽은 후, 소년은 호랑이에게 물려받은 지혜를 가지고 살아남았다.

외로움이나 슬픔 같은 감정을, 소년은 몰랐다.

그저 점점 썩어가는 호랑이의 흔적을 볼 때마다, 가슴 한 켠이 송곳니에 물리는 것처럼 욱신, 욱신 아팠을 뿐이었다.

“저게 우리 마을에서 가축을 죽인 놈이라고요? 너무 작은데?”

“호랑이가 키운 것 같대요.”

“그게 가능해? 호랑이가 인간의 애를 키운다고?”

“대체 몇 살일까요? 한 5, 6살쯤 됐을까요? 우리 애랑 비슷한 나이 같은데…….”

한 인간 여자가 소년을 향해 손을 뻗었다.

“크아앙!”

소년은 여자의 손을 물어뜯으려 했다.

그전에 다른 남자가 얼른 여자를 끌어냈다.

“위험해! 저건 그냥 짐승이라고.”

“사람 말도 못 알아듣나? 얘, 너 이름이 뭐니? 엄마가 누군지는 몰라?”

소년은 인간들이 뭐라고 짖어대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저런 게 있다니…… 불길하네요. 설마 수인인 건 아니겠죠? 수인이 짐승이랑 인간이 정을 통해서 낳은 거라는 얘기가 있던데…….”

“에이, 그런 건 아닐걸. 수인은 그냥 태어나는 거랬어.”

“하여간 저거, 신고해야 하지 않을까요?”

“신고는 무슨. 그냥 죽이면 되지. 신고했다가 우리 마을 근처에서 저런 불길한 게 태어났다고 배척받으면 어떡해?”

“그, 그래. 그냥 죽이는 게 나아! 저런 건 빨리 죽여서 후환을 없애야 해!”

“죽여라! 죽여!”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들 사이에 번진 살의는 느낄 수 있었다.

“크르르르.”

소년은 몸을 떨면서도, 계속해서 놈들을 노려봤다.

그때였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반으로 쫙 갈라지며, 그 사이에 생긴 길로 한 여자가 걸어왔다.

사람들과 달리, 그녀에게서는 살의를 느낄 수 없었다.

좋은 향기가 난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위, 위험합니다, 공작부인. 가까이 가시면 안 돼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괜찮아요.”

그녀는 계속 걸어왔다.

그녀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좋은 향기가 짙어졌다.

하지만 소년은 호랑이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화려하고 아름답고 좋은 향기가 날수록 위험한 거라고, 호랑이는 가르쳐주었다.

“리시, 여기까지야. 더 가까이는 안 돼.”

“괜찮아요, 케이.”

“물려.”

“그렇겠죠.”

“내 눈앞에서 그런 꼴 못 봐.”

“그럼 눈을 감고 있도록 해요.”

계속 걸어온 그녀에게, 소년은 위협적으로 이를 드러냈다.

그녀는 소년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괜찮아.”

소년은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듣기 좋은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괜찮아, 아가야.”

그녀가 소녀를 끌어안으려는 듯 두 팔을 벌렸다.

소년은 거의 반사적으로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물었다.

“리시!”

소년을 붙잡은, 증오스러운 남자가 외쳤다.

하지만 그녀는 소년에게 물린 채, 소년을 꼭 끌어안았다.

“정말로 괜찮아, 아가야. 그동안 고생했어. 정말 고생했어.”

그녀는 물리지 않은 손으로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년은 아주 오래 전, 호랑이가 소년을 핥아줬던 그 기억이 떠올랐다.

“이제 내가 지켜줄게.”

두근. 두근. 두근.

그녀의 심장 소리가 듣기 좋았다.

상냥하게 전해지는 그녀의 체온에, 어째서인지 긴장이 풀리며 잠이 왔다.

자면 안 되는데. 적들 앞에서 자면 안 되는데.

호랑이의 가르침이 희미해졌다.

“어느 누구도 널 죽이지 못할 거야. 이제는.”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를 들으며, 소년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

+++

리시는 품에서 잠든 소년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회녹색 머리카락과 황금빛 눈동자, 새하얀 피부를 가진 야생의 소년.

리시는 아이를 품에 끌어안은 채, 지난 삶을 떠올렸다.

마법과 몬스터가 사라져가고, 엘프와 드래곤의 존재가 그저 전설이 되어버린 낭만이 사라진 시대.

드래곤을 잡겠다는 로망을 버리지 못하고 세계를 누비던 한 기사는 결국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었다.

기사의 긴 창이 거대한 드래곤의 심장을 꿰뚫던 순간을, 리시는 죽음의 어둠 속에서 보았다.

회녹색 피부의 아름다운 드래곤은, 창이 살갗을 뚫고 들어오는 순간에도 작은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그저 그 아름다운 황금빛 눈동자에, 쓸쓸히 하늘을 담았을 뿐.

그 광경은 리시의 머릿속에 아주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리시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찾았다, 내 드래곤.’

(102) 이길 수 없는 여자

케이가 야생 소년을 슬리브 스톤으로 재운 덕분에, 그린 저택까지는 순조롭게 소년을 데려올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소년은 더 흉폭해져서, 리시가 조금만 가까이 가려고 하면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다.

케이는 케이대로, 한 번 물린 리시를 절대 소년과 가까워지게 놔두지 않았다.

“저 애를 저렇게 둘 수는 없어요.”

리시가 소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소년은 마구간 근처의 창고 안에 있는, 단단한 우리에 갇혀 있었다.

“그럼 어떻게 두고 싶은데요? 그냥 놔두면 도망칠 거예요. 이번에 도망치면 이 도시를 난장판으로 만들겠죠.”

“그렇다고 저런 식으로 가둬요? 짐승도 아닌데?”

“겉모습만 사람일 뿐, 호랑이에게 배우고 자란 녀석이에요. 거기 예쁜 손목에 이빨 자국, 아직도 남아 있잖아요. 저 애는 짐승이에요.”

“당신만 할까요?”

소년을 구경하러 나온 케이의 부하들은, 안 듣는 척하면서도 그린 부부의 대화를 들었다.

이번에 저택에 들어오게 된 이반이 월라스에게 물었다.

“공작부인은 우리가 수인이라는 걸 아셔?”

“아마도? 내색하지는 않으시는데, 아실 거야.”

“그래? 그럼 위험한 거 아냐?”

“왜 위험해?”

“만약 공작부인이 대장 때문에 화가 나면, 우리 정체를 고발할 수도 있는 거잖아. 일단 우리에 대해 아는 사람은 죽여두는 편이…….”

“죽고 싶냐?”

“죽고 싶으십니까?”

이반의 말에 대꾸한 건, 월라스뿐이 아니었다.

조용히 소년을 응시하던 랜디도 월라스와 동시에 입을 열었던 것이다.

“워우, 무서워라. 랜디, 네가 그러면 정말로 날 죽일 것 같거든? 거기, 그 검에서 손 좀 뗄래? 농담도 못 해? 응?”

이반이 두 손을 살짝 들고 투덜거리자, 랜디가 살짝 꺼냈던 검을 도로 검집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농담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있고, 없는 말이 있는 겁니다. 대장의 반려자에 대해서 그런 식의 농담은 좋지 않습니다.”

“글쎄, 정말 대장의 반려자라서 그럴까? 저번에 공작부인 처음 뵀을 때도 그렇고…… 둘이 분위기가 묘하던데. 너, 공작부인이랑……. 헉!”

이반은 말을 마칠 수가 없었다.

어느새 이반의 뒤로 다가온 케이가 팔로 그의 목을 죄었기 때문이었다.

“대, 대장…….”

“이반. 내가 내 아내의 예쁜 목소리를 듣는 중이라고 해서, 네 목소리를 못 들을 줄 알았나?”

“아니요……. 들으시겠죠. 압니다, 들으신다는 거.”

“그런 걸 아는 똑똑한 머리가, 내 아내에 대해 쓸데없는 소리를 나불거리면 어떻게 되는지는 안 가르쳐주던가?”

“그 수준까지 똑똑한 건 아니라…… 크윽!”

“이반. 내가 지금 농담하는 것 같은가?”

케이의 음성이 마치 형체를 가진 것처럼 스멀스멀 이반의 귀를 파고 들어왔다.

그제야 이반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죄, 죄송합니다, 대장.”

“규칙이 있어. 너희도 들어두는 게 좋을 거다.”

케이가 이반의 목을 조른 채,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에 대한 농담은 괜찮아. 내 앞에서 내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도, 짓궂은 장난질을 해대는 것도 괜찮아. 하지만 그린 공작부인 앞에서는 아니야. 나는 적어도 내 부하들 입에서, 내 아내에 대한 짓궂은 농담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내가 많은 걸 바라나?”

“그, 그럴 리가요. 제 주둥이가 워낙 가벼운 거 아시잖습니까. 헛소리를 지껄인 거예요. 제가 죽일 놈이죠.”

이반이 얼른 대답했다.

케이의 눈이 다른 부하들에게 향했다.

란다가 말했다.

“그렇게 째려보지 좀 마세요. 전 공작부인한테 예의 있게 행동하고 있거든요.”

“저도요, 대장. 하지만 가끔 어떤 화장수를 쓰시는지는 여쭤봐도 되는 거죠? 그것까지 안 된다고는 하지 마세요.”

클로이도 얼른 란다의 말에 동참했다.

그제야 케이가 이반을 놔주었다.

이반은 목을 문지르며, 리시에게 말했다.

“공작부인,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리시는 창고 끝에 있어서, 이반과 랜디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듣지 못했다. 때문에 케이가 왜 갑자기 저렇게 분위기를 잡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반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케이의 기분을 상하게 할 만한 농담을 한 모양이다.

“용서해드리죠.”

여기서 못 들었다고 하면, 케이의 면이 서지 않을 것 같아서 가볍게 대답했다.

그러자 이반이 후다닥 리시의 앞으로 달려와서 말했다.

“감사함다, 공작부인. 사실 제가요, 공작부인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했다기보다는…… 어, 음. 제가 뇌를 거치고 말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어, 뭐라고 해야 하지? 한마디로 말하자면.”

“생각이 짧죠. 이 녀석 생각의 깊이는 한, 요 정도 돼요, 형수님.”

월라스가 오른손으로 이반의 머리를 꾹 누르며, 왼손으로 손톱 반 정도 되는 크기를 만들어 보였다.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닌데,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지금 형수님한테 사과를 드려도, 분명 또 이럴 텐데, 그럴 때마다 그냥 엉덩이를 걷어차주시면 됩니다.”

“네, 공작부인. 월라스 말대로, 기분 나쁘시면 그냥 제 엉덩이를 무자비하게 걷어차주세요.”

이반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리며 말했다.

리시는 한 손을 볼에 대고 머리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내가 걷어차는 건 아프지 않을 텐데…….”

“그럼 다른 사람을 시키셔도 되고요.”

“그래요? 그럼 내 시녀 중에 에르웰이라고 있는데, 그녀에게 시키도록 할게요.”

“네, 좋습니다!”

에르웰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이반은, 시녀의 힘도 공작부인의 힘과 비슷할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에르웰을 잘 아는 케이와 월라스는 생각했다.

‘이반, 저 자식. 곧 죽겠구만.’

 

+++

“그 애를 가둔 우리를 내 방에라도 가져다 놓을래요.”

“나는 내 저택의 본채에, 정체도 알 수 없는 위험한 녀석을 들이고 싶지 않아요, 리시.”

벌써 몇 시간째, 리시와 케이는 소년의 처우를 두고 다투는 중이었다.

“내 방이잖아요. 내 방에 무엇을 들이든, 당신이 상관할 일은 아니지 않아요?”

“물론 내가 상관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그래서 부탁하는 거예요. 나는 당신이 좀 더 자기 몸을 아끼면 좋겠어요.”

“저렇게 단단한 철창에 들어 있는 애가 무슨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리시. 저 애가 진짜로 야생 소년이 아닐 가능성도 생각해야 해요. 만약 이 저택에 들어오기 위해, 말을 못 하는 척, 호랑이에게 키워진 척하는 거라면 어쩔 거예요?”

리시는 케이가 뭘 걱정하는지 알았다.

그저 케이에게 ‘저 애는 드래곤 수인이에요.’라고 말해주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다.

수인이 그저 무엇으로 변신하는지만 가지고 힘을 재단할 수는 없다.

작은 동물로 변하는 수인이라도, 얼마나 어린 나이부터 변신이 가능했는지에 따라서 가진 힘이 달라진다.

그 안에 잠들어 있던 힘이 처음 동물로 변신한 날부터 점차 개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신하는 동물이 가진 본연의 힘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드래곤.

지상 최강의 생물.

지금껏 드래곤 수인은 발견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드래곤이라는 생물조차, 이제는 그저 전설 속의 생물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문제는…….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지?’

꿈에서 봤다는 말은 통하지 않으리라.

리시 역시 직접 본 것은 아니었다.

죽음의 어둠을 유영할 때 스쳐 지나간 수많은 영상 중 하나일 뿐이었다.

리시의 대답이 없는 걸 다르게 오해한 듯, 케이가 목소리를 부드럽게 바꿨다.

“리시, 화내지 마요. 당신이 하고 싶은 걸 못 하게 하려는 게 아니에요. 걱정돼서 그래요.”

“알아요, 케이. 화난 것도 아니고. 그저…… 나는 저 애가 안쓰러워요.”

“만약 저 애가 정말 어릴 때 버림받고 호랑이에게 키워진 거라면, 그래요. 그게 사실이라면 나도 저 애가 안쓰러워요. 하지만 안쓰럽다고 해서 당신 손목을 무는 건 용납할 수 없어요.”

“내가 잘 가르칠게요.”

“호랑이는 길들이기 어려운 녀석이에요. 저 애가 호랑이에게 키워졌다면, 습성 또한 호랑이와 같겠죠. 그걸 길들일 수 있겠어요?”

“윈디도 길들였는걸. 아, 그리고…… 그게 있잖아요.”

리시의 머리에 퍼뜩 떠오르는 성유물이 하나 있었다.

“와일즈 지팡이.”

짐승을 길들일 수 있는 지팡이.

그 지팡이의 힘이면, 수많은 짐승과 몬스터를 무릎 꿇게 만들 수 있다고 들었다.

케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건 안 돼요. 그 애를 길들이는 문제로 성유물을 쓰게 할 수는 없어요.”

“그럼 대체 성유물은 언제 쓸 수 있는데요?”

“평생 못 써요. 당신이 위험할 수도 있는데, 내가 그걸 쓰게 할 것 같아요?”

“나는 이제 마나도 느낄 수 있게 됐어요.”

“그래도 안 돼요. 우린 위험하지 않고, 그런 상황에서 굳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는 물건을 사용할 필요는 없어요.”

“다 안 된다는 소리뿐이네요.”

“리시…….”

걱정해주는 케이의 마음은 알지만, 과보호는 오히려 리시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내가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고집을 부리는 것도, 케이 마음을 답답하게 하겠지.’

리시는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그럼 당분간 내가 그 창고에 가서 잘게요, 케이.”

 

+++

늦은 밤.

케이와 제이미, 나단은 창고에서 야생 소년이 들어 있는 우리를 짐수레에 싣는 중이었다.

소년은 우리 안에서 크르르, 크르르, 위협적인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단이 말했다.

“용케 이 애를 형수님 방에 두는 걸 허락하셨네요.”

“허락 안 하면 어쩌겠어? 리시가 여기 와서 자겠다는데.”

“형수님도 참 생긴 것답지 않게 터프하시다니까.”

“말도 마. 그냥 날 협박하려는 게 아니라, 진짜로 이불을 챙기더라고.”

“대장은 평생 형수님을 못 이길 거예요.”

“이겨볼 생각도 없었어.”

케이가 툴툴거리며 철창을 잡았다가 얼른 손을 빼냈다.

소년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케이의 손을 물려고 했기 때문이다.

“리시가 이 녀석을 길들일 수 있을까? 너무 사나운데.”

“형수님 말씀대로 와일즈 지팡이를…….”

“안 돼, 제이미. 저번에 슬리브 스톤 사건을 잊었어?”

“하지만 형수님은 노력하셨어요, 대장. 마나를 다룰 수 있게 되면 생각해본다고 하셨다면서요?”

“생각해본다는 건, 정말 위험한 상황에 어쩔 수 없이 써야만 할 때를 말한 거야.”

셋은 간신히 우리를 짐수레에 실었다.

수레를 끌고 가며, 나단이 말했다.

“대장은 곧 형수님한테 버림받을 거예요.”

“뭐? 갑자기 왠 저주야?”

“형수님처럼 독립적인 사람은 사사건건 방해만 하고 간섭하고 못 하게 하고…… 그런 남자 싫어할걸요.”

나단의 말에 제이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조만간 정이 똑 떨어지겠지요.”

“너희는 내가 잘되는 꼴을 보기 싫지?”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야 항상 대장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잠도 못 자고 늘 신께 기도만 드리는데.”

“제이미, 너 저번에 발 삐끗해서 넘어졌을 때, 신 따위 엿이나 먹으라고 욕하지 않았어?”

세 남자는 티격태격하며 본채에 도착했다.

세 남자가 철로 만들어서 무거운 우리를 들려고 끙끙거리고 있을 때, 마침 퇴근 중이던 크리시나가 그들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어머나. 그 애를 본채로 들이시는 건가요?”

“그래요, 크리시나.”

“이렇게 보니 귀엽네요. 여전히 지저분하지만.”

“리시 좀 말려봐요. 이 지저분하고 위험한 걸, 방에 두겠대요.”

“글쎄요. 공작님도 못 하신 걸 제가 할 수 있을지…… 아, 좀 도와드릴까요?”

“그럼 고맙죠.”

크리시나가 두 팔을 걷어붙이고 다가오더니,

“조금 떨어져 계실래요?”

라며 남자들을 떼어냈다.

“이거 혼자서는 못 들어요.”

나단의 말에, 크리시나는 싱긋 미소를 지어준 후 우리의 아랫부분을 잡고 끄응, 힘을 썼다.

그러자 셋이 달라붙어도 들기 힘들었던 철 우리가 가뿐하게 들려 올라갔다.

크리시나의 힘이 센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다들 입을 벌린 채, 커다란 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들고 있는 크리시나를 멍하니 쳐다봤다.

그런 세 남자를 돌아보며, 크리시나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공작부인 방으로 가져가면 되는 거죠?”

(103) 나도 모르는 외로움

  아직 씻기지 않은 소년은 좋지 않은 냄새가 났다.

리시의 방에 소년을 들여놓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리시의 방은 지독한 냄새로 가득 찼다.

하지만 리시는 그런 기색 없이 철 우리 가까이에 앉아 있었다.

“밤이 깊었어, 리시.”

케이가 리시의 어깨에 담요를 둘러주며 말했다.

“응, 조금만 더.”

“왜 그렇게 이 애를 신경 쓰는 거야?”

“만약에 말이야. 내가 태어났을 때, 우리 엄마가 날 데리고 도망쳤다면. 날 키울 수 없어서 버렸다면. 그렇게 버림받은 나를 들짐승이 데려다가 키웠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케이가 리시의 옆에 앉아서, 그녀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겼다.

“당신이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더는 뭐라고 할 수가 없잖아요.”

리시가 작게 웃으며 케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고집부려서 미안해요, 케이. 내 고집을 들어줘서 고맙고요.”

“별말씀을. 그저 당신이 상처받을까 봐 걱정이에요. 들짐승을 길들이는 건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많거든. 정을 줬다가 이 애가 끝까지 마음을 열지 않으면, 슬프지 않겠어요?”

“그때 위로해줄 거죠?”

“그건 당연하죠.”

“그럼 됐어요.”

“하, 당신은 정말 날 꼼짝 못 하게 만들어.”

케이가 리시의 머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난 잘 거예요.”

“응.”

“만약 아침에 일어났을 때, 당신 몸에 상처가 하나라도 더 생긴다면, 알죠?”

“알겠어요, 케이. 위험한 짓은 하지 않을게요.”

그러고 나서도 안심이 안 되는지, 케이는 한참 옆에서 서성거리다가 침실로 들어갔다.

리시는 철창 가까이에 쭈그리고 앉아서 소년을 가만히 응시했다.

으르렁거리던 소년도 이제 지친 듯, 아까처럼 포악하게 굴지 않았다.

저택에 오는 길에, 잠들어 있던 소년에게 입힌 옷은 벌써 다 찢겨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아가야.”

리시가 불렀지만, 소년은 반응하지 않았다.

“많이 힘들었지? 어린아이가 산에서 사는 건 참 힘들었을 텐데…….”

소년은 비쩍 말라 있었다.

간간이 훔쳐 먹는 가축 생고기로는 충분한 영양을 섭취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창고에 있을 때 먹을 걸 접시에 담아서 넣어줬지만, 소년은 손으로 후려쳐서 날려버렸다.

잡힌 순간부터 지금까지, 소년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짐승에게 자랐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나조차 깨닫지 못하는 외로움이, 때로는 더 고통스러울 때가 있어. 나도 그랬거든.”

리시는 느릿하게 말했다.

“엄마에게 안겨본 기억이 없어서, 안기는 게 어떤 건지도 모르고 살았어. 그 기분을 전혀 모르면서도, 공작부인이 브리트니를 안아줄 때는 참 부럽더라. 나도 그렇게 안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더라. 아플 때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게 어떤 기분인지 모르지만, 브리트니가 작게 기침이라도 하면 공작이랑 공작부인이 야단을 떨었거든.”

리시는 위틀로 가에서의 나날을 떠올렸다.

가슴에 서린 차고도 저릿한 감정이 고독인 줄도 모르고 고독했던 그 나날.

“그게 참 부럽더라. 정말 참 부럽더라고. 뭔지도 모르면서.”

경계하듯 앉아 있던 소년이 슬금슬금 자세를 바꿨다.

소년은 두 팔에 턱을 괴고 엎드렸다.

“너도 그렇겠지. 인간이라면 아무리 배우지 못했어도, 받아본 적 없어도,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정이니까. 네게 어미였던 호랑이가 죽었을 때, 많이 슬펐겠지. 하지만 그게 슬픔인지도 몰랐을 거야.”

소년은 리시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어미 호랑이가 크르르, 크르르, 잠들기 전에 내주던 소리만큼 듣기 좋았다.

“언젠가 네가 인간의 말을 이해하고, 감정이라는 걸 배우게 된다면, 그때 과거의 고통이 휘몰아칠지도 몰라. 하지만 약속할게. 그 순간에, 내가 곁에 있을 거야. 넌 이제 혼자가 아니야.”

소년의 눈이 감겼다.

“토미.”

소년이 다시 눈을 뜨고 리시를 응시했다.

“네 이름은 토미가 좋겠다. 나는 리시야, 토미. 앞으로 잘 지내보자.”

리시의 손이 철창 가까이 다가왔지만, 소년은 경계하지도, 공격하지도 않았다.

그 작고 여려 보이는 손을 그저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눈을 감았다.

“잘 자, 토미.”

 

+++

케이는 눈을 감은 채, 밖에서 들려오는 리시의 음성을 들었다.

리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알지만, 가끔 그녀의 입에서 과거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가슴이 저몄다.

만약 기적적으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리시가 아직 어렸던 그 날로 돌리고 싶었다.

이제 막 외로움이라는 걸 알게 될 그때로 돌아가, 리시의 앞에 백마 탄 왕자처럼 나타나 그 지독한 저택에서 그녀를 데리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리하여 아이리스가 고독과 외로움이라는 걸 전혀 모르고 지낼 수 있게, 어느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겠지.’

시간이 돌아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남은 평생 옆에 있어주면 돼.’

리시가 살아온 나날보다 훨씬 긴 시간을, 그녀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그 어떤 순간에도 외롭지 않도록, 언제나 리시 곁을 지킬 것이다.

+++

남들은 신년 파티 준비로 한창인 12월.

리시는 다른 일로 바빴다.

“지금까지 온천에서 벌어들인 수익은 전부 기부할 거예요. 가비자르 제국과 신성국의 보육원에 반을, 그리고 그린 영지의 보육원에 4분의 1을 지원하도록 하세요. 남은 돈으로는 빈민 구제 기구를 설립하도록 하고요.”

리시는 토미의 우리 앞에 앉아서, 가우저와 제이미에게 지시를 내렸다.

“가우저, 상단 쪽은요?”

“곧 항구로 커피와 로메르 직물을 실은 배가 들어옵니다. 다만 항구가 있는 알로르 왕국에 관세를 내야 하고, 스티무어 제국을 통과해서 올라오려면 통행세도 내야 합니다. 대략 3억 브리크 정도를 예상합니다.”

“알겠어요. 오는 길에 도적이 있을 테니, 용병을 고용해서 상단을 지키도록 해줘요. 제이미, 괜찮은 용병이 있겠죠?”

“그럼요.”

리시가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항구에서 상단이 여기까지 오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요?”

“서두르면 보름 정도 걸릴 거예요. 하지만 형수님, 그전에 신년 파티 준비를 하셔야 해요. 올해 공작 작위를 받으신 만큼, 신년 파티도 좀 화려해야 할 텐데요.”

“아, 신년 파티…….”

리시가 미간을 좁혔다.

지금 파티 같은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만, 권력이라는 건 남편의 힘에만 의지해서는 얻을 수가 없었다.

사교계 귀부인들의 힘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가비자르 제국의 신년 파티에 초대를 받았으니, 거기를 다녀와야겠죠.”

가비자르 제국의 황제는 브리트니 위틀로가 벌인 짓에 큰 유감을 표하며, 강한 처벌로 그린 가문을 위로하고 백작 작위까지 내려주었다.

그러니 올해는 파티 초대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파티가 끝나는 대로 돌아오면, 1월 10일경에는 저택에 도착할 거예요. 다른 귀족들의 일정도 있을 테니, 1월 말에 여는 게 좋겠네요. 이번 파티는 젠한테 좀 부탁할 수 있을까요?”

“물어볼게요.”

그 외에도 처리해야 할 문제들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일 문제로 이야기가 끝난 후, 가우저는 돌아가고 제이미만 리시의 곁에 남았다.

“토미가 좀 얌전해졌네요.”

“엄청요. 조만간 목욕도 시킬 수 있을 것 같아요.”

토미가 이 저택에 들어온 지 2주가 지났다.

그동안 리시는 토미의 곁에서 먹고 일하고 잠들었다.

저택에 들어오고 이틀이 지난 후, 토미는 리시가 준 음식을 먹기 시작했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는 리시가 가까이 가도 으르렁거리지 않았다.

이틀 전에는 리시가 손을 집어넣어도 물지 않고, 만지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이름을 알아듣는 것 같아요. 그렇지, 토미?”

그러자 토미가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했다.

“얌전해진 걸 보니, 귀엽네요. 역시 형수님이라면 해내실 줄 알았어요.”

“정말요? 토미를 내 방에 데리고 왔을 때, 세 시간쯤 잔소리를 하다가 돌아가지 않았었나요?”

리시의 지적에 제이미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이제 곧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힐 수 있을 텐데…… 옷을 좀 사둘까요?”

“그래요. 그리고 내 옆방에 이 아이가 머물 곳을 마련해줘요.”

“음, 형수님.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아. 그렇죠.”

리시의 방은 공작부부가 머무는 층이었다.

토미가 아무리 특별하다 해도, 저택의 룰을 깰 수는 없었다.

리시는 그렇게까지 제멋대로 행동할 생각은 없었다.

“그럼 여러분이 머무는 층에 방을 마련해줄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요. 아이가 좋아할 만한 방을 꾸며보겠습니다.”

제이미까지 나간 후에야, 리시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리시는 토미가 밥을 다 먹었는지 확인했다.

구운 고기는 다 먹었지만, 샐러드는 전부 남겼다.

“그러면 안 돼, 토미. 골고루 먹어야지.”

그러자 토미가 손으로 샐러드 접시를 탁 쳐버렸다.

챙강-!

날아간 접시가 철창에 부딪혀서 깨졌다.

리시는 팔짱을 끼고 토미를 노려봤지만, 토미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제이미에게는 전부 잘되어가는 듯 말했지만, 사실은 토미에게 어떤 교육을 시켜야 할지, 앞날이 캄캄하기만 했다.

+++

스티무어 제국의 황태자비 처소인 동궁은 울적한 기운에 잠겨 있었다.

황태자인 드웨인이 어디서 데려온 여자와 지내느라, 몇 달간 동궁에는 발도 디디지 않은 상황에서,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가비자리 제국의 파티에…… 누구를 데려간다고요?”

황태자비 에버렛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소식을 가져온 시녀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대답했다.

“브린을 데려가신다고 해요.”

“그게 무슨…….”

에버렛은 벌떡 일어났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서 풀썩 주저앉았다.

에버렛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브린을 데려가신다니…… 그 무슨……?”

“명목으로는 시중을 드는 시녀로 데려가신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되네요. 정말 말도 안 돼요. 그렇게 화려하게 치장하고 다니는 시녀가 어디에 있다고.”

다른 시녀가 발끈해서 외쳤다.

“그러게 말이에요. 그 여자가 요새 에버렛 님보다 훨씬 화려하게 꾸미고 다니는 거 아시죠?”

“황태자 전하는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뒤에서 다들 뭐라고 떠드는지도…….”

너도나도 떠들던 시녀들은, 에버렛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무, 물론 전하께서는 에버렛 님도 동행하신다고 하셨어요. 황태자비는 에버렛 님이신걸요.”

“맞아요, 에버렛 님. 정체도 알 수 없는 그런 여자가 에버렛 님을 대신할 수는 없을 거예요.”

시녀들의 위로를 들으며, 에버렛은 치마를 꽉 움켜쥐었다.

그러지 않으면 비명이 나올 것만 같았다.

후작 가문의 딸로 태어나자마자 황태자비 후보로 정해졌다.

황실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을 거듭했고, 자연스럽게 황태자비가 되었다.

드웨인을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어울린 정이 있었다.

드웨인 역시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둘은 서로에게 예의를 지켰고, 가끔은 은밀한 스킨십도 나누었다.

그렇게 별탈 없이 황후가 되어 살아가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브린이 내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을 거야.’

소문에 의하면, 브린은 가비자르 제국과 스티무어 제국의 국경이 맞닿은 시골 마을에서 데려왔다고 한다.

병든 어머니를 모시며 씩씩하게 살아온 여자라고 했다.

-“불쌍한 여인이야. 어릴 때부터 혼자 일하고 어머니까지 돌보느라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야. 브린에게 편하게 사는 게 뭔지 알려주고 싶어.”

드웨인은 그렇게 말했다.

-“질투할 거 없어, 에버렛. 알잖아. 황태자비는 너뿐이라는 거.”

아주 잘 알았다.

또한 황태자가 애인을 여럿 둔다고 해서 무어라 할 자격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황제나 황태자가 후궁을 들이는 건 심심치 않게 있는 일이고, 후궁에게 질투해봐야 좋지 않은 소리만 들었다.

후궁과도 사이좋게 지내는 황후여야만 했다.

드웨인의 어머니인 현 황후 역시 여러 후궁과 친자매처럼 잘 지내고 있었다.

‘나도 그래야 해. 하지만…….’

황제는 중요한 자리에 후궁을 동반하지 않았다. 후궁의 방에 틀어박혀 있으라 황후를 내버려두는 짓 또한 하지 않았다.

황실의 안주인은 황후라는 걸 확실히 지켰다.

그에 비해 드웨인은 몇 개월간 브린의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있었다.

그 좋아하는 사냥도 나가지 않은 채, 브린의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에버렛 님.”

시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브린의 뒷조사를 좀 해볼까요?”

그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드웨인이 브린을 사랑한다면, 에버렛 역시 브린을 아껴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드웨인과 브린의 태도는 옳지 않다.

현명한 여자라면, 황태자가 잠시 눈이 멀어 제 곁에 붙어 있는다 해도, 좋은 말로 달래서 돌려보내야 마땅했다.

에버렛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대답했다.

“조사해보도록 해요.”

(104) 사라진 위틀로 모녀

  브리트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비자르 제국의 신년 파티에…… 절 데려가신다고요?”

브리트니의 음성이 떨리는 걸, 드웨인은 감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브린. 그대도 가비자르의 황궁에 함께 가는 거야.”

“아…….”

브리트니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브리트니에게 푹 빠진 드웨인은 브리트니의 말을 의심 없이 믿었다.

브리트니의 정체가 무엇인지 조금만 조사해보면 알 수 있을 텐데, 아직 모르는 걸 보면 뒷조사조차 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신년 파티라니…… 분명 아이리스도 오겠지? 공작부인도 됐고, 케이브란트가 가비자르 제국에서 백작 작위까지 받았다고 하니까.’

아이리스뿐만 아니라 다른 귀족들도 문제였다.

그 귀족들이 드웨인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법은 없었다.

‘어떡하지?’

쉽게 거절할 수 없는 문제였다.

드웨인은 지금 많은 귀족 앞에서 브리트니를 선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이번에 동행하면 브리트니의 위치는 좀 더 견고해져서, 스티무어 황실에서도 브리트니를 함부로 대할 사람이 적어질 것이다.

“스티무어 제국은 따로 신년 파티를 열지 않나요?”

“우리는 2년마다 한 번씩 열어. 브린, 함께 가비자르에 가는 게 기쁘지 않아?”

“네? 아, 아뇨. 당연히 기쁘죠. 전하께서 저를 이렇게 생각하고 아껴주셔서 얼마나 행복한지…… 하지만…….”

툭, 투둑-

브리트니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는 바람에, 드웨인은 깜짝 놀라 브리트니를 끌어안았다.

“왜 울어, 브린?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거야?”

“그런 게 아니에요, 전하. 전하는 제게 무슨 짓을 해도 괜찮아요. 저는…… 저는 이제 전하를 위해서 사는걸요.”

“그럼 왜 울고 그래? 집에 혼자 계신 어머니가 마음에 걸려?”

“어머니도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브리트니는 두 손으로 드웨인의 가슴을 살며시 밀어냈다.

“제가 왜 우는지 아시면, 전하는 절 싫어하게 될 거예요.”

“브린!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그대를 왜 싫어해?”

드웨인이 브리트니의 손을 꼭 잡았다.

“브린, 내 평생에 그대 같은 여인은 처음이야. 내가 그대를 싫어하게 될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하지만…… 정말 싫어하시게 될 거예요. 모두들 절 미워하는걸요. 제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걸요.”

“나는 그대가 무슨 말을 하든 믿어. 내 마음 알잖아.”

그 후에도 브리트니는 조금 더 울었다.

드웨인은 서럽게 우는 브리트니를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봤다.

이윽고 브리트니가 훌쩍거리며 말했다.

“저는…… 너무도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 때문에 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병드셨죠. 저는 그 사람이 너무너무 무서워요, 전하.”

 

+++

그린 노백작 내외와 젠이 그린 저택에 방문했다.

그들은 오자마자 리시의 방으로 향했다.

“어머나. 어머, 어머.”

“허어, 이거 참…….”

노백작 내외는 토미를 보며, 알 수 없는 감탄사를 중얼거렸고, 젠은 팔짱을 낀 채 매서운 눈으로 토미를 노려봤다.

최근 경계심이 약해졌던 토미는, 젠을 보자 등을 곧추세우고 으르렁거렸다.

만약 털이 있었다면 빳빳하게 섰을 거라고, 리시는 생각했다.

젠이 토미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물었다.

“요게 그거예요, 리시?”

“네, 이 애가 토미예요.”

“흐음. 아직 인간의 말을 못 한다고 했죠?”

“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아, 어머니. 위험해요.”

리시가 말렸지만 헤레이나의 손은 이미 철창 안에 들어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토미가 이를 드러내며 헤레이나의 손으로 달려들었다.

그때였다.

철썩-!

토미의 이가 헤레이나의 손을 깨물기 전, 젠의 손바닥이 토미의 정수리를 아플 정도로 세게 때렸다.

“크아앙!”

토미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펄쩍 뒤로 물러났다.

꼬리가 있었다면 다리 아래로 말려 들어갔을 거라고, 리시는 생각했다.

“젠…….”

“리시, 얘가 말을 알아듣는 평범한 애라면, 나도 안 때렸을 거예요. 하지만 얘가 아직 짐승이라면, 이렇게 가르쳐야 해요.”

“하지만…….”

“얘는 자기가 누굴 물었을 때, 상대가 얼마나 아플지 몰라요. 물면 아프다는 걸 가르쳐야죠. 얘도 남한테 공격당했을 때 얼마나 아픈지 알아야 해요.”

“그럴까요……?”

“그냥 강아지도 아니고 호랑이한테서 배우고 자란 애예요. 마음이 좀 아프겠지만 초반에는 단호하게 가르쳐야, 얘도 앞으로 편해질 거예요.”

토미는 머리를 감싸쥔 채로, 구석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풀죽은 토미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따끔따끔 아팠다.

하지만 젠의 말에 반박할 수도 없었다.

지금껏 토미에게 물린 사람이 여러 명이었다.

만약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토미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지 못할 것이다.

“리시, 이 애도, 우리 신년 파티도 걱정하지 말고 가비자르에 다녀와요. 내가 얘를 사람 만들어놓을게요.”

“그러렴, 리시. 젠은 이래봬도 아이를 아주 잘 가르친단다. 정말 의외지?”

헤레이나의 말에 와이번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주 의외지. 걱정 말고 다녀오거라, 아가. 우리는 이 사나운 제레시엔도 키웠으니, 저 애도 잘 돌볼 수 있을 게다.”

 

+++

리시는 젠과 둘이서 시내로 나왔다.

토미를 데려온 후 오랜만에 저택을 떠나는 거지만, 즐겁지는 않았다.

토미가 걱정이었다.

혼자 놔둬도 괜찮을까? 노백작 내외에게 몹쓸 짓을 하지는 않을까? 잘못해서 철창이 열려 도망치면 어떡하지?

리시의 뒤숭숭한 마음을 눈치챈 듯, 젠이 말했다.

“우리 부모님은 아이를 잘 돌보시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평범한 아이가 아니라서 공격이라도 할까 봐 걱정이에요.”

“리시. 우리 아버지도 그린 백작이었어요.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한 손에 쥐고 계시는 분이고요.”

그제야 리시도 마음을 좀 놓을 수 있었다.

케이가 가문을 물려받기 전에는, 와이번 그린이 성유물의 수호자였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아직도 이 카페에서 주는 티스푼이 유행이라면서요?”

젠이 아르헨의 찻집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렇다더라고요. 티스푼 끝부분을 여러 가지 꽃이나 동물 모양으로 만들어서, 그 세트를 전부 모으는 게 유행인 모양이에요.”

“내 친구도 여기서 꽃 모양을 전부 모은 기념으로 티파티를 열더라고요. 새언니도 여기 티스푼을 모아요?”

“그건 아닌데, 확인 좀 해볼 게 있어서요.”

젠과 리시는 아르헨의 찻집에 들어갔다.

찻집 안은 마치 숲속처럼 녹색과 연두색, 흰색으로 꾸며져 있어서 상쾌한 느낌이 났다.

겨울이라서 안쪽의 벽난로에 불이 들어와 있었고, 벽난로 주위에도 푹신한 소파가 놓여 있었다.

찻집을 쭉 둘러보던 리시는 예전에 케이와 있었던 일이 떠올라서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 즐거운 일이라도 떠올랐어요?”

“아, 그게…… 예전에 케이가 데이트 코스로 이곳을 넣은 적이 있거든요. 아마도 날 놀라게 해줄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내가 놀라지 않았더니 잔뜩 삐치더라고요.”

“아, 아. 징그럽네요. 다 큰 놈이 삐치다니.”

“얼마나 귀여웠다고요.”

“아, 리시. 아무리 새언니가 하는 말이라도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아요. 봐봐요, 여기 소름 돋은 거.”

리시와 젠은 키득키득 웃으며 안쪽에 있는 자리로 이동했다.

잠시 기다리자, 예쁘게 차려입은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져왔다.

“젠, 미안한데 오늘은 내가 골라도 될까요?”

“그렇게 해요.”

“그럼 우유랑 밀크티, 커피, 치즈케이크, 샌드위치, 버터, 스콘을 종류별로, 허브티도 종류별로 부탁할게요.”

리시의 주문에 종업원과 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정말 그렇게 가져오면 될까요?”

“그래요.”

종업원이 돌아간 후, 젠이 테이블 너머로 상체를 기울였다.

“리시. 혹시…… 임신했어요?”

“아니에요. 임신이라니…….”

“그럼 왜 그렇게……?”

“맛을 좀 확인해보고 싶어서요.”

“아…… 그래요?”

젠은 미심쩍은 눈빛을 거두지 못했다.

그때, 주문을 받은 종업원이 아닌 찻집 주인인 아르헨이 직접 리시와 젠의 테이블로 찾아왔다.

갈색 머리카락을 뒤로 묶은, 상냥한 인상의 30대 여인이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그린 공작부인. 레이디 제레시엔 그린. 이 찻집의 주인인 아르헨 비테입니다.”

“반가워요, 비테 자작부인.”

“어머나.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부인.”

아르헨이 살짝 허리를 굽혀, 자신의 가문을 알아준 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했다.

“오늘 이렇게 저희 가게에 찾아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많은 주문을 해주신 것도 너무나 감사드리고요. 그런데 죄송하게도, 공작부인께서 주문하신 것 중 커피를 준비해드릴 수가 없답니다.”

“그런가요?”

“네. 시험적으로 커피를 들여봤는데, 생각보다 판매가 저조해서 이제 납품을 받지 않거든요. 메뉴판을 바꿨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공작부인.”

“괜찮아요, 자작부인. 커피만 빼고 주세요.”

“양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 후, 리시가 주문한 차와 디저트가 나오기 시작했다.

작은 테이블이 아닌데도, 접시들이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리시는 먹기 전에 디저트들을 반씩 덜어서 다른 테이블에 나눠주라고 했다.

여기저기서 감사 인사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시와 젠은 남은 차와 디저트를 천천히 음미했다.

“아 참, 리시. 내가 흥미로운 소식을 하나 가지고 왔어요.”

젠이 가져온 소식은 리시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소식이었다.

“위틀로 모녀가 사라졌다고요?”

“그래요. 몇 달 됐다고 해요. 목격담에 따르면, 어떤 잘 차려입은 남자가 브리트니를 말에 태워서 데려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공작부인, 아니, 위틀로 자작부인은요?”

“그것도 이상한 것이…… 브리트니가 낯선 사내와 사라진 다음 날, 위틀로 자작부인도 어딘가로 떠났다고 해요. 얼마 없는 짐을 싹 챙겨서 사라졌대요.”

“그래요…….”

리시는 미간을 좁히고 접시 위에 놓인 스콘을 노려봤다.

언젠가 위틀로 공작 저택에서 복도를 걷다가, 스콘이 담긴 접시를 들고 브리트니의 방으로 향하던 하녀들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하녀는 실수인 척 스콘을 떨어뜨리더니, 리시에게 말했다.

-“이거 주워서 먹어요. 버리면 아까우니까.”

옆에 있던 다른 하녀가 말렸지만, 그 하녀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왜? 이렇게 하면 브리트니 님이 좋아하셔. 저 스콘을 밟아서 먹였다고 하면 더 좋아하실걸. 내기할래?”

그때 리시는 못 들은 척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몇 분 후, 브리트니가 하녀들과 함께 리시의 방에 찾아왔다.

브리트니는 하녀가 들고 있던 스콘을 빼앗아 리시의 앞에 던졌다.

-“너, 아주 배가 불렀나 보다? 요새 매끼니 챙겨 먹으니까 음식 귀한 줄을 모르지?”

브리트니는 바닥에 떨어진 스콘을 발로 밟아 뭉갰다.

-“먹어, 리시. 제대로 안 먹으면 넌 앞으로 밥 못 먹을 줄 알아.”

정말로 그렇게 되리라는 걸, 리시는 알았다.

그 굶주림이 얼마나 끔찍한지도, 리시는 아주 잘 알았다.

그래서 하녀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뭉게진 스콘을 들어서 입에 꾸역꾸역 밀어넣는 수밖에 없었다.

“리시? 괜찮아요?”

젠의 부름에, 리시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괜찮아요. 다만,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라서…….”

정말로 상상도 못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브리트니가 붙잡을 지푸라기를 찾아낼 줄은 몰랐다.

브리트니를 데려갔다는 남자는 아마도 브리트니의 신분을 상승시켜줄 정도의 위치에 있는 남자일 것이다.

위틀로 가문의 일은 유명하고, 가비자르 제국의 귀족 중 브리트니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 아마 외국 귀족일 가능성이 컸다.

“브리트니를 데려간 사내가 누군지는 모르나요?”

“거기까지는 조사를 못 했어요. 알아보라고는 했는데, 들려오는 얘기가 없네요.”

“그렇군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리시. 그 여자가 이제 와서 뭐라도 할 수 있겠어요?”

물론 이제 와서 브리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위틀로 가문이 벌인 짓은 귀족뿐 아니라 평민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그래, 괜찮아.’

지난 삶, 브리트니는 언제나 운이 좋았다.

순조롭게 황태자비가 된 후, 황후 자리에 앉은 다음에도 모든 것이 브리트니에게 좋은 쪽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이번 삶에서는 아니야.’

지난 삶, 브리트니가 운이 좋을 수 있었던 것은, 리시의 힘이 컸다.

브리트니는 리시를 아주 잘 이용했고, 브리트니를 돕느라 리시는 점점 나락에 빠져들어갔다.

하지만 이제 브리트니의 곁에는, 그녀를 도와줄, 멍청한 아이리스가 없다.

‘어차피 브리트니의 수준은 한계가 있어. 브리트니를 데려간 게 누구든, 내가 감당할 수 있어.’

(105) 두 사람의 과거

  리시의 표정이 어두웠나 보다.

“미안해요, 리시. 내가 괜한 소식을 전했네. 그 여자를 데려간 게 누군지 확실하게 확인하고 알려줄 걸 그랬어요.”

“아니에요, 젠. 알려줘서 고마워요.”

리시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지만, 젠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듯 리시의 표정을 살폈다.

“리시, 만약 브리트니가 성가시면, 이번에는 없애버리는 쪽으로 생각해 봐요. 새언니한테는 에르웰이 있잖아요.”

“에르웰이 그런 것도 할 수 있어요?”

“말도 마요. 걔는 아마 케이의 그림자들보다도 더 강할걸요. 여자 한 명 죽이는 건 일도 아니죠.”

“일단 브리트니가 어떻게 나오는지 봐야겠어요.”

만약 브리트니가 조용히 산다면, 리시도 굳이 나서서 그녀를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

브리트니가 가난하고 끔찍한 나날을 좀 더 길게 보내지 않은 게 아쉽긴 하지만, 그녀의 문제로 지금의 행복한 생활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해요. 나는 나대로 브리트니를 데려간 게 누군지 조사해볼게요.”

“고마워요, 젠.”

“에이, 가족끼리 무슨…….”

“아무리 가족이라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죠. 신년 파티 준비하는 것도 힘든 일인데 이렇게 와서 도와주고…… 늘 고마워요.”

“어휴, 무슨…….”

젠이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런 말 너무 많이 하지 말아요. 엘디나 케이한테는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라서 민망하단 말이에요.”

“그래요? 엘디는 몰라도 케이는 고맙다는 말을 잘하는데…….”

“그거야 새언니한테만 그러겠죠. 내가 뭘 해주면 그 인간은 그냥, 흐음, 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요. 재수없지 않아요?”

“그러게요. 엉덩이를 때려주지 그랬어요?”

“이젠 다 커서, 좀…….”

“얼마 전에 굉장히 찰지게 잘 때리던데.”

“그땐 맞을 짓을 했으니까.”

둘은 눈을 맞추고 까르르 웃었다.

찻집에서 나오기 전, 리시는 아르헨에게 요청해 사무실에서 면담을 나눴다.

리시가 아르헨의 찻집에서 온갖 메뉴를 다 먹어본 이유는, 커피를 유통하기 위한 가게로 적합한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모든 차와 디저트의 수준이 아주 훌륭해서, 커피를 대륙에 퍼뜨릴 시작점으로 삼기에 좋을 것 같았다.

리시의 제안을 들은 아르헨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공작부인.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커피는 그리 평이 좋지가 않아서요.”

물론 지금은 그럴 것이다.

커피 생산지인 탈레하 왕국은 커피를 대륙에 유통하기 위해 여러모로 애썼지만, 쓰기만 하고 향이 그리 좋지도 않은 커피는 그리 인기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몇 년 후, 커피는 아주 대중적인 음료가 되어서 귀족부터 평민들까지 즐겨 마시게 될 것이다.

놀랍게도 그 유행을 만들어낸 건, 브리트니였다.

지난 삶, 황후가 된 브리트니에게 쟈메트는 커피 유통에 투자를 해달라며 온갖 귀한 선물과 잘생긴 남자 노예를 보냈다.

매번 비슷한 파티 생활에도 질린 브리트니는, 기분 전환이나 할 생각으로 남는 돈을 쟈메트 상단에 투자했다.

하지만 황실에 들어온 커피를 마신 브리트니는, 찻잔을 집어 던지며 외쳤다.

-“이런 구정물 같은 걸 누가 먹어! 이걸 탄 요리사가 누구지?”

황실 요리사는 브리트니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커피로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음료와 디저트를 개발했다.

브리트니는 흡족해하며 파티에 온 귀족들에게 커피를 대접했고, 귀족들 사이에서 커피가 유행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루테크 가문의 학자가 조사한 바, 커피에는 약간의 각성 효과가 있어서 피로를 풀어준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며, 평민들 사이에서도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충동적으로 쟈메트 상단에 투자한 브리트니는, 커피 사업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돈을 벌게 되었고, 황실에서의 위치도 견고해졌다.

그 유행을, 이번 삶에서는 리시가 만들어낼 예정이었다.

“강요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 제안을 들어보겠어요?”

“네, 공작부인. 말씀해주세요.”

“몇 주 후에, 탈레하 왕국에서 커피 10킬로그램짜리 50포대가 들어올 거예요.”

“그렇게 많이요?”

“많지 않아요. 난 그걸 전부 팔아치울 자신이 있거든요.”

리시는 이곳에 가져온 양피지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리시의 유려한 글씨체로, 다양한 레시피가 쓰여 있었다.

“이건……. 커피로 이런 걸 만드는 게 가능하다고요?”

“그래요, 그리고 무척 맛있을 거예요.”

“아……. 그럴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저희 가게에서 그만한 양을 다 판매할 수는 없어요.”

“투자를 할게요, 자작부인. 여러 도시에 아르헨의 찻집 분점을 열 수 있도록, 내가 자금을 댈게요. 이미 있는 건물을 사거나 빌려서 찻집을 여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자작부인은 인테리어와 각 지점의 관리인을 뽑고 운영해줘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분점을 내는 데 투자를 하겠다니.

아르헨이 손해 볼 것은 하나도 없었다.

“우선 들어오는 커피로 이 레시피에 적힌 요리를 만들어줘요. 우리 그린 영지의 신년 파티 때, 귀족들에게 선보일 거예요. 그다음부터 가게에서도 판매하도록 하고요. 처음에는 귀족을 대상으로, 비싼 가격에 팔도록 해요.”

리시가 정한 가격에, 아르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가격에…… 사드실까요?”

“그럴 거예요. 커피는 쟈메트 상단으로만 들여올 수 있고, 판매는 아르헨의 찻집에서만 할 거니까. 귀족들은 유행에 민감하죠. 반년 정도 지나면 유행도 식겠죠. 그때부터 조금씩 가격을 내려서 평민들도 편하게 사 먹을 수 있게 하면 돼요. 그러는 동안에도, 곳곳에 분점은 계속해서 낼 거예요.”

더없이 달콤한 제안이었다.

자신의 이름이 걸린 찻집이 곳곳에 생긴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제가 공작부인께 해드려야 하는 것은 뭔가요?”

“모든 가게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해줘요. 그리고 수익의 10프로와 향후 모든 커피는 쟈메트 상단에서만 구입할 것. 어때요?”

 

+++

이오벳은 이번 달에 쟈메트 상단으로부터 들어온 수입을 확인했다.

이제는 이름만 쟈메트 상단일 뿐, 실질적인 주인은 리시라는 걸 알고 있었다.

상단을 손에 넣는 대로 이오벳이 투자한 금액을 돌려주고 연을 끊을 줄 알았건만, 리시에게서 투자금을 돌려주겠다는 얘기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오벳은 그런 걸로 안심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이렇게라도 아이리스와 연결되고 싶어 하는군. 미련하게도.’

지금도 이오벳에게는 수많은 청혼 서신이 들어오고 있었다.

중신들과 보좌관들도 이오벳을 채근했다.

이제 진짜로 황태자비를 들여야 할 때가 왔다는 걸, 이오벳도 알고 있었다.

최근 2황자 라코젠은 무슨 생각이 든 건지, 황제 옆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라코젠은 이오벳보다 먼저 태어났지만, 후궁의 아들이기에 황태자 순위에서 밀렸다.

하지만 황제에게 라코젠은 처음 얻은 아들.

첫 자식이니만큼 더 애정이 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런 라코젠이 매일 황제의 처소에 드나드니, 황제의 마음이 점점 더 라코젠에게 기울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버지의 건강이 안 좋으시니, 이제 본격적으로 황태자 자리를 노려볼 생각인 거겠지.’

쟈메트 상단의 투자 성공으로, 이오벳의 개인 재산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재산만 많다고 해서 황태자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좋은 아내와 좋은 신하가 필요했다.

보좌관 쿠리언처럼 남에게 돈을 받아먹고 황태자비 자리를 팔아넘기려고 하는 놈이 아닌, 이오벳을 위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을 사람이 있어야 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황태자의 위치를 견고하게 다지기에는 부족했다.

‘케이라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내 편에 서주겠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쓴웃음을 지었다.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게 된 주제에, 여차하면 친구가 도와주기를 바라다니.

자신의 치졸함에 기가 막혔다.

이오벳은 수석 보좌관이 가져온 황태자비 후보 목록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황태자비부터 골라야겠군.’

 

+++

리시는 저택을 떠나기 전에, 윈디와 인사를 해두고 싶었다.

케이는 이런저런 준비로 바빠서, 리시 혼자 마구간으로 향했다.

마구간에 들어간 리시는, 그 안에 있는 랜디의 모습에 걸음을 멈췄다.

흑마 블랙의 갈기를 빗질해주던 랜디도, 리시의 등장에 얼어붙었다.

둘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서로를 가만히 응시했다.

리시는 이 묘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리시와 랜디는 과거에 아무 관계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 침묵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건 위험하다.

“라포…….”

“실례했습니다, 공작부인.”

랜디는 리시가 예전 이름을 부르기 전에, 그녀의 말을 끊었다.

“무엇이……?”

“오시는 줄을 몰라서. 나가보겠습니다.”

“아니, 라…….”

“랜디입니다, 공작부인. 공작부인께서 그린 공작부인이시듯.”

“미안해요.”

“아닙니다. 그럼.”

랜디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도망치듯 마구간을 나갔다.

리시의 심장이 두근두근 불안한 울림을 자아냈다.

이런 건 좋지 않다.

케이의 부하들과 그렇듯, 랜디와도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무슨 말이든 해보려고 한 건데, 저렇게 도망쳐 버리다니.

‘너무 수상해 보이잖아.’

제멋대로 리시와의 관계를 꾸며서 떠들어대던 알포드보다 더 의심받기 좋은 행동이었다.

그런 리시의 마음을 모르는 랜디는, 거의 뛰듯이 마구간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리시를 볼 때마다 심장이 쿵 내려앉으며 표정 관리를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리시를 사랑했던 그 짧고도 행복했던 나날로, 하염없이 끌려들어가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리시는 여전히 아이리스 위틀로이고, 자신은 여전히 라포드 휘튼이라고 여기며, 마음껏 그녀를 사랑하고 싶다는 욕심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

리시는 다른 사람도 아닌 케이의 아내다.

처참하게 죽었을지도 모르는 랜디를 구해준 은인.

“라포드?”

그때, 누군가 랜디의 원래 이름을 불렀다.

“라포드 군…… 맞나?”

랜디는 고개를 들어서, 자신의 이름을 부른 사람이 누군지 확인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데, 누군지 확실하게 기억나지는 않았다.

“라포드 군 맞지? 나, 가우저라네. 기억하나?”

“아!”

기억한다.

랜디가 쫓겨나기 전에 쫓겨난, 위틀로 공작가의 자산관리인.

아이리스를 두둔하는 얘기를 하다가, 위틀로 공작의 미움을 사서 누명을 쓰고 쫓겨났다고 들었다.

버리고 싶은 과거지만, 리시를 돕다가 쫓겨났던 사람을 만나니 반가움이 샘솟았다.

“가우저 아저씨.”

“그래, 그래. 라포드 군이 맞군. 그래, 그 하늘색 머리카락은 쉽게 볼 수가 없지. 깜짝 놀랐네. 이거, 정말 근사한 청년이 됐구만. 부모님은 안녕하신가?”

“저희 부모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아, 저런…… 미안하네. 내가 몰랐어. 부끄럽지만 위틀로 가에서 쫓겨난 후에 한동안 폐인처럼 살았거든.”

“아닙니다. 저도 마찬가지 상황이었으니까요.”

랜디는 그때의 상황을 가볍게 설명했다.

“가우저 아저씨처럼 저희 아버지도 누명을 쓰셨습니다. 그렇게 쫓겨난 아버지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죠. 재산도 몰수당하고 쫓겨난 거라서 여기저기 떠돌다가, 작은 헛간 같은 곳을 빌려서 살았는데…… 전염병을 이기지 못하셨어요.”

“그랬구나, 그랬어. 어린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꼬.”

랜디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아저씨가 건강하신 걸 보니 좋네요.”

“아이리스 님 덕이지. 폐인처럼 살고 있는 나를 일부러 찾아오셔서, 이렇게 좋은 일을 주셨거든.”

“아……. 그러시군요.”

“아이리스 님께는 정말 감사하고 있어. 위틀로 공작가가 어떻게 됐는지 들었는가?”

“네, 들었습니다.”

그린 저택에 들어오기 전에, 수인들과 지내던 황무지에서 위틀로 공작가의 소식을 들었다.

어찌나 속이 시원하고 통쾌하던지.

아이리스에게 속으로 백번쯤 감사하다는 말을 했었다.

지금도 위틀로 가문을 생각하면, 리시에게 고마운 마음은 여전했다.

“남이 안 된 일에 이런 소리를 해서는 안 되지만, 아주 꼴좋다 싶더군.”

랜디가 웃었다.

“저도 그래요, 아저씨. 아, 그런데 제 이름은 이제 랜디입니다. 옛 이름은 버렸거든요.”

“그래, 그래. 그러고 싶을 때가 있지. 이렇게 오랜만에 보니 정말 반가운데,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같이 차라도 한잔하겠는가?”

“네, 좋습니다.”

가우저는 랜디를 데리고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본채 서채 창문으로, 그런 두 사람을 내려다보는 이가 있었다.

케이였다.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가우저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들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평범한 사람들의 귀에도 들릴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케이의 귀에는 ‘아이리스’라는 이름이 쏙 들어와서 박히는 바람에 듣고 말았다.

케이는 랜디가 저택에 오던 날, 아이리스를 보던 눈빛을 떠올렸다.

케이도 같은 남자고, 사랑을 하기에 알 수 있었다.

그 눈빛은 주군의 아내가 아닌, 사랑하는 여인을 보는 눈빛이었다.

‘역시 둘 사이에 뭔가 있었군.’

(106) 은빛 여우

  물론 둘 사이에 과거가 있다고 해서, 그걸 케이에게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을 의무는 없었다.

하지만 리시나 랜디에게 직접 들은 게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알게 된 게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케이는 정원을 노려보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별로군.’

여기서 더 청각에 힘을 집중하면, 가우저의 처소에서 나누는 대화까지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케이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별로야.’

. .

케이가 랜디를 구한 건, 4년 전인 크리드 2012년이었다.

성유물 사건이 터져서 알로르 왕국에 방문했던 케이는, 어느 작은 마을에서 노예상 일행을 마주쳤다.

케이를 알아본 노예상은, “우린 허가받은 상단입니다.”라며 허가증을 내밀었고, 케이도 더는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마을에 머물면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까지 듣지 않기는 힘들었다.

“신성국에 고발하는 건 좀 아깝지 않아?”

“하지만 고발하지 않으면 큰 벌을 받을 거예요, 단주님.”

“그거야 그렇지만…… 그럼 비밀 살롱 같은 곳에 데려가는 건 어때? 거기서 입이 무거운 귀족들이랑 부자 평민들에게 돈을 받고 선보이는 거지. 그러다가 큰돈을 주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팔고.”

“수인을 사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수인이라는 단어에 케이의 귀가 번쩍 뜨였다.

케이는 청각에 온힘을 집중하고, 한마디도 놓치지 않았다.

“요새는 남몰래 수인을 키우는 귀족들이 있대. 요상한 짓을 시키면서 좋아한다던데…… 게다가 저놈은 끝내주게 생겼잖아.”

“끝내주게 생기긴 했죠. 머리카락 색깔도 쉽게 보기 힘든 색이고…….”

“아주 잘생긴 놈이야. 게다가 은빛 여우라니…… 귀부인들이 아주 좋아할걸. 뭐, 귀족놈들도 좋아할 거고.”

“그럼 저놈 팔면서 다른 것들도 대충 끼워 팔까요? 아무래도 불법적으로 납치한 애들은 대놓고 팔기가 좀…….”

케이는 유진과 월라스, 나단을 불러서,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노예상 7명에, 용병 12명을 처리해야 할 텐데. 용병들은 호위한 죄밖에 없으니 목숨은 살려주고, 상단 놈들은 싹 다 죽여. 마을이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으니, 조용히 해결하고. 얼마나 걸리겠어?”

“한 시간이요.”

유진의 대답과 달리, 그림자들은 40분 만에 일을 처리했다.

여관에 있던 노예상과 상단원들은 모두 죽었고, 노예들을 가둔 창고를 지키던 용병들은 전부 기절해 있었다.

케이는 창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러 개의 철우리에, 40명 가량 되는 노예들이 갇혀 있었다.

케이는 단번에 노예상들이 얘기한 수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하늘색 머리카락을 가진 잘생긴 청년.

노예들은 전부 풀어주고, 하늘색 머리의 청년만 남도록 했다.

그는 다른 노예들처럼 공포에 질려 있지는 않았지만, 자포자기한 듯 눈빛이 죽어 있었다.

“수인이라고 하던데.”

케이가 말을 걸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은빛 여우라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보여줄래?”

“…….”

“아, 혹시 변신을 하게 된 지 얼마 안 됐나? 어떤 식으로 변신하는지 몰라?”

“압니다.”

“그럼 해봐.”

스르르-

청년의 모습이 순식간에 변했다.

어슴프레한 빛만으로도 은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은빛 여우.

여우의 풍성한 꼬리털을 보며, 월라스가 중얼거렸다.

“여우는 귀엽네요.”

“그렇군.”

“진짜 귀엽네요.”

“그렇군.”

“대장은 안 귀여운데.”

“……시커먼 사내놈에게 귀여움받고 싶지도 않았어.”

그들의 대화를, 여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들었다.

케이가 철창을 붙잡았다.

“그래, 맞아. 나도 수인이야. 이 녀석들도 수인이고.”

여우가 다시 청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약간의 생기를 되찾은 청년은, 처음 봤을 때보다 더 어려 보였다.

“내 이름은 케이브란트 그린. 네가 아는 그 성유물의 수호자야.”

“아…….”

“같이 가자. 네가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줄 테니.”

. .

그날, 케이를 따르기로 한 청년은 자신의 이름을 ‘랜디’라고 밝혔다.

그리고 황무지의 은둔지에 머물며, 수인으로서 힘을 키우다가 이번에 그린 저택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대장, 우리 아직 중요한 문제로 대화를 나누는 중인데요.”

회의를 하던 케이가 갑자기 창가로 가서 돌아오지 않자, 기다리다 못한 월라스가 말했다.

“내가 지금 기분이 안 좋아.”

“네, 그러시겠죠. 그럼 일단 이 오그어 토벌은 누구를 보낼지 정해주세요.”

“기분이 많이 안 좋아.”

“그럼 토벌은 저랑 나단이 갈게요. 기사단 하나를 데리고 가려는데, 괜찮죠?”

“이 기분을 어떻게 해야 할까?”

유진이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대장, 신년파티 때는 이쪽 길에 도적이 횡횡할 겁니다. 병사를 여럿 보내두려는데, 괜찮겠습니까?”

“내가 옹졸한 건가?”

“병사 백 명 정도를 꾸려서, 기사단과 함께 보내겠습니다.”

케이가 없어도 회의는 문제없이 진행되었다.

자기들끼리 알아서 일정을 체크한 부하들이 나가려는데, 케이가 성큼성큼 다가와 두 손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말해봐.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부하들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대장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제이미가 말했다.

“대장이 대체 뭘 가지고 그러시는지 전혀 모르겠는데, 성가시니까 나가서 정원이라도 열 바퀴 뛰고 들어오지 그러세요?”

 

+++

스티무어 황실에서 떠난 두 대의 황족 마차 중 한 대에는 드웨인과 브리트니가 타고 있었다.

황태자가 황태자비를 놔두고 다른 여인과 한 마차를 타는 건 유례 없는 일이었다.

뒤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드웨인은 전부 무시했다.

지금 드웨인의 머릿속은 브리트니로 가득 차 있었다.

드웨인은 브리트니의 말을 전부 믿었다.

아이리스 그린 공작부인이 제 언니를 질투해서 결국 위틀로 공작 가문을 파멸에 이르게 만들었다는 이야기.

드웨인도 위틀로 가문과 그린 가문 사이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신문으로 그 기사를 보았을 때만 해도, 브리트니 위틀로는 수습이 불가능한 바보라고, 마땅한 처벌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브리트니의 잘못은 하나도 없었다.

사람들은 아이리스 그린에게 놀아났다.

아이리스 그린은 성유물의 수호자라는 그린 가문을 배경으로 삼아서, 사정없이 브리트니에게 누명을 씌우고 몰아붙이고 따돌렸다.

그린 가문의 눈치를 보는 가비자르의 황제와 귀족들도, 브리트니의 누명을 벗겨줄 생각은 하지도 않고 처벌을 내려서, 그녀의 아버지를 죽게 만들었다.

실로 안타까운 사정이 아닐 수 없었다.

브리트니는 진실을 알게 되면 드웨인이 자신을 싫어할까 봐 걱정했지만, 안 해도 될 걱정이었다.

사정을 알고 나니, 그 모든 걸 겪고도 아픈 어머니를 위해서 열심히 살아온 브리트니가 더욱 사랑스럽고 애처롭게 느껴졌다.

브리트니가 미소 지을 수만 있다면, 그 무엇이든 해줄 수 있는 기분이었다.

스티무어 제국을 떠날 때만 해도, 오랜만의 나들이에 신나 있던 브리트니는 가비자르 황실이 가까워질수록 표정이 어두워졌다.

“브린, 왜 그렇게 울적해? 파티가 기대되지 않아?”

“무서워요, 전하.”

“둘만 있을 때는 드웨인이라고 부르라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습관처럼 그리 부르게 될까 봐…….”

“그대는 정말 속이 깊어.”

드웨인은 브리트니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내 이름을 부른다고 누가 뭐라 하겠어?”

“저 때문에 전하의 명예도 더럽혀질지 몰라요. 사람들은 제가 그린 공작부인에게 못된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걸요.”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어, 브린. 걱정하지 마. 누가 뭐라고 하면 내가 상대해줄 테니까.”

“전하께서 위험에 처하는 것도, 저 때문에 곤란해지는 것도 싫어요.”

“그대는 정말 착하군. 어떻게 이렇게 착한 여인을 그렇게 몰아붙일 수 있는 거지? 아이리스 그린이라는 여자는 심장이 얼음으로 되어 있는 걸까?”

“그냥…… 전부 제가 잘못한 거겠죠.”

착한 브리트니는 아이리스가 그렇게 변한 것도 자신의 탓이라고 말했다.

드웨인은 답답할 정도로 착한 브리트니가 걱정이었다.

“전하, 저는 아무래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왜? 그 자리에서 내 여인이라는 게 알려지면, 그대에게 뭐라 할 사람도 없을 텐데.”

“하지만 아이리스가…….”

“하! 공작부인 따위가 내 여인에게 해를 가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린 공작님은 아이리스에게 단단히 빠지셔서, 미나스아릭의 공주님도 지하 감옥에 가뒀었어요.”

“아주 야만적인 놈이야. 어떻게 그런 야만인이 성유물의 수호자랍시고 공작 작위까지 받은 건지 모르겠어. 하지만 브린, 난 미나스아릭의 공주와 달라. 나는 스티무어 제국의 황태자야.”

브리트니는 스티무어보다 부강한 가비자르 제국의 황태자가 케이의 절친한 친구라는 걸 알았지만,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았다.

사내가 자기 자랑을 하고 싶어 할 때는 가만히 들어주는 게 좋았다.

“그래서 정말 든든해요, 전하.”

“그래, 그러니까 그대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내 옆에 붙어 다녀.”

“그래도…… 얼굴은 좀 가리고 싶어요.”

아직 탄탄한 기반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스티무어 제국 황태자에게 붙었다는 이야기가 새어나가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숨긴다 해도 언젠가는 알려지겠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 당당하게 정체를 밝히고 싶진 않았다.

“하긴, 나도 다른 사내놈들이 그대 얼굴을 열심히 바라보는 게 싫을 것 같기는 하니……. 하지만 가면무도회도 아닌데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 이상하게 보일 거야.”

“드레스에 잘 어울리는 베일을 준비했어요. 황실에 있는 동안에는 그걸 쓰고 다닐게요.”

“나랑 둘이 있을 때는 얼굴을 보여주겠지?”

브리트니가 애교스럽게 웃으며 드웨인의 품에 파고들었다.

“전하께만요.”

 

+++

제이미를 제외한 케이의 그림자들에게 각자 할 일이 있기에, 이번에 저택에 들어온 부하 중 두 명을 선별해서 데려가기로 했다.

케이는 직접 부하들의 처소에 찾아가서, 클로이와 랜디를 불렀다.

평소 화려한 걸 좋아하는 클로이는 처음으로 황궁에 들어갈 기회에 두 팔을 벌려서 환영했지만, 랜디는 아니었다.

“저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대장. 이반을 데려가시는 게 더 안전하실 겁니다.”

“야, 랜디. 왜 그래? 네가 이반보다 강하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클로이! 내가 랜디를 못 이길 것 같아?”

이반이 발끈해서 일어났다.

케이가 랜디에게 따라 나오라고 손짓한 후, 먼저 숙소 건물을 나왔다.

뒤를 따라서 나온 랜디에게, 케이가 물었다.

“나한테 할 말 없나, 랜디?”

“네, 없습니다.”

“정말?”

“네.”

“그런데 이반이 너보다 강해서 신년 파티에 가는 걸 양보하겠다고?”

“네. 그리고 전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랜디는 찌르는 듯한 케이의 시선을 느꼈다.

케이가 자신의 말을 조금도 믿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모든 걸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오래전 대장의 부인을 사랑했고, 그 때문에 쫓겨났으며, 위틀로 가문의 방해로 정착하지 못한 내 부모님은 병들어 죽었고,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대장의 부인을 사랑합니다.

그런 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못 한다.

랜디뿐 아니라, 아이리스의 명예가 걸린 일이었다.

더하여 케이브란트 그린의 명예도.

만약 랜디가 그런 말을 했을 경우, 케이가 랜디를 어떻게 대하든 뒤에서 안 좋은 소리가 나올 것이다.

못 들은 척 잘해주면 잘해주는 대로,

“무슨 생각이래? 아무리 과거의 일이라지만 자기 부인을 사랑했던 남자를 곁에 두는 게 말이 돼?”

라는 말이 나올 거고, 못 해주면 못 해주는 대로

“그린 공작은 배포가 작네. 질투 때문에 충성스러운 부하를 함부로 대해?”

라는 말이 나올 게 분명했다.

랜디는 자기 때문에 케이와 리시가 구설수에 휘말리는 걸 막고 싶었다.

케이는 팔짱을 낀 채 묵묵히 랜디를 응시하다가 돌아섰다.

“대장.”

“싫다는데 억지를 부릴 수는 없지. 이반을 데려가겠다.”

“대장, 저는 대장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알아.”

(107) 나의 가장 좋은.

  신년 파티를 며칠 앞둔 어느 밤.

라코젠은 침대에 누워 리시를 떠올리는 중이었다.

‘이상해.’

그린 저택에서의 자신의 태도는 정말 이상했다.

‘왜 그랬던 거지?

라코젠은 마음에 드는 여자라면 기혼이든, 미혼이든 상관하지 않고 건드리긴 하지만, 건드리지 말아야 할 상대만큼은 알고 있었다.

이오벳이 황태자가 되긴 했어도, 라코젠은 아직 그 자리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 자리를 뺏기 위해서는 그린 가문의 힘이 절실했다.

설령 이오벳과 케이가 절친한 사이라 해도, 라코젠이 선을 넘지 않는 이상 케이가 황태자 다툼에 끼어들 리가 없었다.

하지만 리시를 보는 순간, 라코젠은 선을 넘을 뻔했다.

‘그 여자, 어딘가 이상해.’

라코젠은 손짓 한 번만 해도 침실에 들어온 여인이 널리고 널렸다.

그중에는 리시만큼이나 예쁜 여자도 있었고, 그녀보다 몸매가 좋은 여자도 있었으며, 그녀보다 훨씬 애교가 많은 여자도 있었다.

지금 옆에 누워 있는 여자 또한 리시보다 나은 점이 많은 여자인데, 이런 와중에도 리시가 떠오르는 건…….

‘사랑 같은 게 아니야.’

뭔가가 라코젠의 뇌를 멋대로 주물러, 그 속에 리시를 향한 호감을 억지로 집어넣은 것만 같았다.

‘아니, 그럴 리 없지.’

대체 이 세상 무엇이 사람의 감정과 생각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단 말인가.

오래전, 마법이 성행했을 당시에는 그런 마법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군!”

라코젠이 벌떡 일어나자, 선잠에 빠져 있던 여자가 라코젠을 올려다봤다.

“전하?”

“그만 나가봐.”

“아이, 전하. 오늘 밤은 저와 함께 보내신다고 했으면서…….”

“나가!”

라코젠의 외침에 여자는 움찔 떨더니 침대를 내려와 옷을 입었다.

라코젠은 여자가 나가기를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가운을 걸친 후 밖으로 나왔다.

‘마법사일지도 몰라. 이런 세상이라도 아주 가끔은 강력한 힘을 가진 마법사가 태어나기도 하니까. 그렇다면 여자에게 관심 없던 그린 백작, 아니, 이제 공작이지. 그린 공작이 왜 그렇게 서둘러서 위틀로의 꽃과 결혼했는지도 설명이 돼.’

만약 리시가 마법으로 감히 이 몸에게 수작을 부린 거라면 용서할 수 없다.

그게 설령 케이와 척을 지는 일이라 해도, 라코젠은 자신의 정신을 지배하려고 한 오만방자한 여자를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었다.

황족인 이 몸에게 그런 짓을 했다면 마땅한 벌을 받아야만 하고, 그린 가문 전체가 나선다 해도 용서해주지 않을 것이다.

리시가 그런 짓을 했는지 알아볼 방법이 있었다.

황태자 이오벳의 동향을 조사하던 라코젠은, 이오벳이 자신보다 먼저 리시와 만난 적이 있다는 걸 알아냈다.

늦은 밤, 라코젠의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이오벳은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차를 한잔 마실까 하던 참이었는데, 너도 같이 마실래?”

라코젠은 이오벳의 저런 면이 싫었다.

속내를 감추고 친절한 척, 좋은 형제인 척하는 면.

단지 황후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이오벳은 너무도 쉽게 황태자 자리를 차지했다.

가비자르 제국은 후궁을 인정하고, 후궁의 자식 또한 인정해주었지만, 후궁의 자식은 황후의 자식보다 우선이 될 수 없었다.

라코젠이 이오벳보다 몇 달 먼저 태어났음에도, 라코젠은 꼬박꼬박 이오벳에게 존댓말을 사용해야만 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라코젠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는 동안, 이오벳은 그렇게까지 예의를 차릴 필요 없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선을 긋는 것이다.

이오벳의 저 오만한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라코젠은 반드시 저 자리를 차지해서, 이오벳이 자신에게 고개 숙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후궁의 자식도 능력이 출중하고 황제와 신하들에게 인정받으면 얼마든지 황제가 될 수 있지.’

가비자르 제국의 역사에도 후궁의 자식이 황제가 된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황태자 자리를 두고 다툼을 하려고 찾아온 게 아니다.

“질문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전하.”

“질문? 나에게?”

“네, 전하. 이번 신년 파티 때, 아이리스 그린이 참석합니까?”

일부러 공작부인이 아닌 ‘아이리스 그린’이라고 정확하게 말했다.

이오벳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리고, 목울대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것은 아주 잠시의 변화였다.

이오벳은 순식간에 원래의 표정을 되찾았지만, 그것이면 충분했다.

“참석한다고 들었는데. 그린 공작부인의 참석 여부는 왜 묻는 거지?”

“그린 저에 있을 때 워낙 좋은 대접을 받아서, 저 또한 그리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입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전하.”

라코젠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오벳의 방에서 나오는 라코젠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감히…….’

이오벳의 태도로 결정 났다.

라코젠도 라코젠이지만, 이오벳 역시 아무 여자에게나 흔들리는 남자가 아니었다.

이오벳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하는 수많은 영애가 넘쳐나는데, 하필이면 친구의 부인이라니.

‘아무나 자기에게 반하게 만드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거라면 그 자리에 있던 귀족들이 아이리스에게 홀딱 빠졌을 테니…….’

이오벳이 리시에게 반함으로써 리시는 쟈메트 상단의 투자자를 얻을 수 있었고, 라코젠이 리시에게 반함으로써 메어리 공주와의 사건 때에 지지자를 얻을 수 있었다.

리시가 마법을 썼든, 아니면 다른 무엇을 이용했든, 황태자와 2황자의 마음을 멋대로 조종하려고 한 것은 큰 죄였다.

하지만 증거가 없다.

‘증거가 없어도 상관없어, 아이리스 그린. 감히 내게 무슨 짓을 했다면, 나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내가 개인적으로 처리할 테니까.’

 

+++

가비자르 제국 황궁을 향하는 마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케이는 케이대로, 리시는 리시대로 생각할 것이 많았다.

둘은 넓은 마차에 마주 보고 앉았지만, 시선은 서로 다른 곳에 두고 있었다.

케이는 차창 밖에, 리시는 케이의 어깨 뒤쪽에.

‘라포드, 아니, 랜디를 어떻게 해야 하지?

며칠 전, 마구간에서 보인 랜디의 행동은 좋지 않았다.

랜디가 과거를 버렸다면 리시를 대하는 태도 또한 마땅히 달라져야만 했다.

하지만 리시의 눈에 랜디는 여전히 위틀로 공작가에 있던 그 어린 소년으로만 보였다.

라포드 휘튼.

휘튼 일가의 사정은 안타까웠다.

아마 그들이 쫓겨난 데는 브리트니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다.

단지 브리트니의 마음에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그녀의 마음에 같은 마음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일가 전체가 그런 일을 당하다니.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과거에 어떤 사정이 있었든, 현재의 랜디는 케이의 부하다.

케이의 부하가 케이의 아내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게 알려지면, 이번에는 알포드 때처럼 적당히 마무리 짓기 힘들 것이다.

알포드와의 소문이 헛소문에 불과하다는 게 알려지긴 했어도, 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 여러모로 좋지 않았다.

이번 삶에서는 그저 목표를 향해서만 걸어가고 싶었는데, 곁가지처럼 나타나는 장애물이 골치 아팠다.

앞으로 몇 가지 큰 사건들이 벌어지게 되고, 리시는 아직 그에 대한 대비책을 만들어두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랜디 건은 일단 두고 보는 게 좋겠어. 시간을 두고 지켜보다가 계속 그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그때 가서 생각해봐야지.’

지금 당장 어찌할 수 없는 문제를 고민하는 건 시간낭비였다.

마음을 정하고 상념에서 벗어났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마차가 멈췄다.

앞쪽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이윽고 클로이가 마차 창문으로 케이에게 말했다.

“통행세를 요구하는데요. 보아하니 이 근방 산적 놈들이 길 좀 닦아두고 길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어쩔까요? 소탕할까요?”

산적이라고 하면 여행자들에게는 재난이라고 할 만큼 무서운 존재였지만, 클로이의 말투에서는 긴장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적당히 쥐여주고 넘어가.”

케이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이윽고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가 제 속도를 되찾은 후, 케이가 입을 열었다.

“안 물어봐요?”

그의 시선이 여전히 창밖을 향해 있기에, 처음에는 그가 자신에게 말을 건 줄 몰랐다.

리시가 한 박자 늦게 “음?” 하고 되물었더니, 그가 말했다.

“왜 소탕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느냐고.”

“저 일당이 전부 이곳에 나와 있는 게 아닐 테니까요. 남은 일당은 통행세 거두는 걸 관두고 산적짓을 다시 시작하겠죠. 그러면 통행인들이 더 위험해질 거고. 관청에서 나서서 길을 재정비하기 전까지는 내버려두는 편이 안전하겠죠.”

리시가 술술 대답하자, 케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리시와 눈을 맞췄다.

“정답이에요, 리시. 당신은 항상 답을 잘 아네요.”

왜일까?

지금의 칭찬은 평소처럼 다정한 놀라움을 띄고 있지 않았다.

그제야 리시는 케이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케이?”

조심스럽게 부르자, 케이의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유쾌하지 않은 미소였다.

“부럽군요, 리시. 나는 당신처럼 쉽게 답을 알아내지 못하거든.”

그의 청회색 눈동자에 언뜻 짜증이 스치는 걸 보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케이가 리시에게 화를 낸 건, 리시가 성유물을 다루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을 때뿐이었다. 그때도 이렇게 짜증 섞인 눈빛을 짓지는 않았었다.

이번 삶에서는 사랑받고 싶어서 아등바등 노력하던 지난 삶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오롯이 내 자신의 감정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그러나 케이에게만큼은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리시에게 케이는 더 이상 타인이 아니었다.

그를 받아들이고 그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순간부터, 그는 리시의 일부가 되었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연인이자, 가족.

그가 있기에 리시는 당당하게 앞을 보며 걸어갈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케이. 나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조심스레 묻는 말에, 회청빛 눈동자가 스르륵 옆으로 돌아갔다.

케이는 다시 창밖을 응시하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아니요.”

창밖을 보면서도, 리시의 시선이 이쪽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내내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딴생각만 하던 리시는, 이제야 비로소 케이를 봐주고 있었다.

케이는 묻고 싶었다.

‘당신, 요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 예쁜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게 내가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누구를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내 머릿속에는 당신 생각뿐인데, 지금 당신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당신 머릿속을 채운 건 왜 내가 아니지?

한심할 정도의 집착이었다.

리시가 무슨 생각을 하든, 그것은 리시의 자유였다.

그걸 알면서도 짜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랜디와 리시.

라포드 휘튼과 아이리스 위틀로.

도대체 둘 사이에 어떤 과거가 있었던 걸까?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는 것도, 둘 사이에 세상을 들썩이게 만들 만큼 대단한 과거는 없을 거라는 것도, 전부 알았다.

알면서도 질투한다.

혼자 상상하고 질투하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아는데, 대체 어떤 식으로 둘의 관계를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다.

‘랜디가 당신을 보는 눈빛이 뜨겁더군. 둘 사이에 뭔가 있는 거 아냐?

‘랜디에 대해 해줄 말 없어?

‘당신, 랜디 생각해?

모든 질문이 형편없었다.

케이는 수인이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허락받지 못한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언제나 수인의 해방과 자유를 위한 것만 생각하면서 살았다.

오로지 어딘가에 있을 수인을 찾아내 세력을 확장하고, 도움을 줄 만한 권력자들과 손을 잡은 후, 신성국에 당당하게 수인의 해방을 요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최근 케이의 머릿속은 온통 아이리스 그린뿐이었다.

랜디가 리시를 향해 뜨거운 눈빛을 보내던 걸 목격한 순간 이후로는 더 그랬다.

이 머릿속에 리시가 넘쳐 흐르는데, 그게 평소처럼 달콤하고 평화롭지 않은 게 문제였다.

‘죽여버릴까?’

그런 생각까지 했다.

랜디를 죽이면 더 이상 리시에게 뜨거운 눈빛을 보내는 사내는 없을 것이다.

만약 또 그런 사내가 생긴다면, 또 죽이면 그만이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죽이다 보면 언젠가는 어느 누구도 감히 내 아내에게 시선을 주지 못하리라.

‘내가 미쳤군.’

케이가 흘러내린 머리를 성가신 듯 쓸어넘길 때였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리시가 케이의 옆자리로 와서 풀썩 앉았다.

(108) 아이리스 그린처럼.

케이의 옆으로 이동한 리시는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었다.

케이는 입술을 오므리고 앉아 있는 리시를 흘긋 살펴본 후, 다시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창밖으로 이어지는 숲길은 하나도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들이 넘친다는 듯 고집스럽게 바깥만 내다봤다.

그때 손등 위에 따뜻하고 작은 것이 놓이는 게 느껴졌다.

리시의 손이었다.

“케이.”

“응.”

“미안해요.”

“뭐가요?”

“당신은 내가 뭐든 다 잘 안다고 하지만, 사실 아니에요.”

“아, 그래요.”

“나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요.”

그제야 케이는 재미도 없는 창밖 풍경에서 눈을 떼고 리시를 돌아봤다.

리시는 여전히 정면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볼이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내 남편이 나한테 뭔가 화가 난 것 같은데, 이럴 때 어떻게 해야 내 남편 기분이 풀릴까요?”

“……글쎄요.”

케이는 이미 기분이 풀려가는 걸 느꼈지만,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리시는 난처한 듯 미간을 모으고 볼을 부풀렸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한동안 그렇게 앉아 있던 리시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고개를 휙 돌려 케이를 올려다봤다.

뭔가 하려는 듯 눈을 빛내기에 케이도 잔뜩 기대했는데, 리시는 그걸 도저히 할 수 없다는 듯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래도 케이는 기다렸다.

기분은 완전히 풀렸다.

아마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 기분이 나빠질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리시가 뭘 하려고 하는 건지 궁금하기만 했다.

또 볼을 부풀리고 앉아 있던 리시가 새롭게 다짐한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방금 전처럼 고개를 돌려 케이를 올려다봤다.

케이의 손등 위에 있던 리시의 손이 슬금슬금 위로 올라와, 케이의 가슴 위에서 멈췄다.

촉촉하게 젖은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평소보다 한 톤 높은 음성이 흘러나았다.

“여보.”

순간, 케이는 아찔해졌다.

어떡하지? 이 귀여운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냥 먹어치워 버릴까?

“나한테 화난 거 있어?”

“……아니.”

“거짓말.”

리시의 눈썹 끝이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아래로 내려갔다.

“왜 그렇게 화가 났어?”

“당신에게 화가 난 게 아니야.”

“이것 봐, 이유가 뭐든 화난 게 있네.”

“……이건 그냥 내 기분의 문제야. 당신이 신경 쓸 거 없어.”

다시 창 밖을 향해 돌아가려는 케이의 머리를, 리시가 두 손으로 감싸서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남자가 기분이 상해 있는데. 당신도 내가 입술 내밀고 창밖만 내다보면 신경 쓸 거잖아.”

다른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남자.

그 말만 케이의 귓가를 몇 번이나 울렸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남자.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남자.

실룩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을 수 없었다.

그래, 리시는 나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지.

조금 전까지 진득거리는 불쾌감을 느꼈던 게 아주 오래전의 일 같았다.

“키스를 해주면.”

케이는 이미 기분이 풀렸지만, 조금 더 고집을 부리고 싶어졌다.

리시가 빙긋 웃더니 목을 쭉 뻗어 케이의 입술이 가볍게 입맞춤을 하고 떨어졌다.

케이는 리시의 허리를 감아 바짝 밀착시키며, 그녀의 입술을 단숨에 머금었다.

잘 익은 과즙이 입안에 흘러들어오는 듯 감미로웠다.

케이의 긴 손가락이 리시의 머리칼을 헤집으며, 갈증난다는 듯 리시의 머리를 단단히 고정시켰다.

뜨겁게 파고드는 입맞춤에, 리시의 호흡이 가빠졌다.

두피를 자극하는 그의 손가락과 거침없이 움직이는 그의 입술이 달큰한 전율을 자아냈다.

그의 손이 목덜미를 쓸어내리는 순간, 리시는 이곳이 마차라는 것도 잊고 작은 신음을 흘렸다.

“하앗.”

열기 띤 신음을 들은 그의 회청빛 눈동자가 습하게 가라앉았다.

리시의 숨결만큼이나 뜨거운 손이 그녀의 목을 더듬고 어깨를 지나 더 아래로 내려갔다.

덜컹-

돌에 걸린 듯 마차가 움직이는 바람에, 리시는 정신을 차렸다.

“여긴 마차야, 케이.”

“둘밖에 없어, 리시.”

“밖이 다 보여, 케이.”

“커튼을 치면 돼.”

케이가 손만 뻗어 창문의 커튼을 내렸다.

리시는 마른침을 삼키며 가라앉지 않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소리가…… 새어나갈 거야.”

“참으면 돼. 그럴 수 있지, 리시?”

그가 리시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축축한 입술이 뽀얀 피부에 낙인을 만들고 싶다는 듯 움직였다.

리시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그의 팔뚝을 세게 잡았다.

그가 리시의 귀를 가볍게 깨무는 순간.   “아.”

리시는 또 이곳이 마차 안이라는 걸 잊었다.

깜짝 놀라 두 손으로 제 입술을 막는 그녀를 보며, 케이가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와중에도 여유로운 케이가 얄미워서 흘겨봤지만, 케이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손은 원했던 곳을 향해 움직였고, 그럴수록 리시가 이곳이 마차라는 걸 잊는 일도 잦아졌다.

한참 후 케이는 축 늘어진 리시를 품에 안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체력 부족이야, 리시.”

“당신은 얄미움 과다고.”

리시는 완전히 지친 와중에도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언제 마차가 멈추고 누군가 안을 들여다볼지 모를 일이다.

아까는 그의 향기에 취해 머릿속이 새하얬지만, 이성이 돌아오니 여러 걱정거리가 생겼다.

마차가 너무 흔들리지는 않았을지. 이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간 건 아닐지.

그런 리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케이는 여전히 느긋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우리가 갑자기 왜 불타올랐더라?’

그 이유조차 생각나지 않아서, 그의 잘생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리시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케이, 왜 화가 난 거예요?”

“아, 맞다. 우리 그 얘기하고 있었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당신에게 화난 게 아니에요. 이건 전부 내 마음의 문제고…….”

“케이, 말해줘요.”

“질투했어요.”

상상도 못 한 말에, 리시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어버렸다.

케이는 자신의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아까까지는 세상이 무너질 정도로 큰일처럼 여겨졌는데, 이렇게 입 밖으로 꺼내고 보니 너무 유치했다.

“질투…….”

다행히 리시는 케이를 놀리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그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케이를 말끄러미 응시할 뿐이었다.

그제야 케이는 리시와 랜디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랜디는 어떨지 몰라도, 리시만큼은 그에게 아무 감정도 품고 있지 않은 게 분명했다.

‘분명한 건 알겠는데, 이제 와서 아까의 그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케이는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무슨 말을 해도 리시의 비웃음만 살 것 같았다.

사랑을 하면 바보가 되고 유치해진다고들 하는데, 자신은 그 수준을 넘어섰다는 자괴감이 찾아왔다.

좀 더 성숙하게 이런 상황에 대처할 수는 없었던 걸까?

케이가 자신의 미숙함을 탓하고 있을 때, 리시가 케이의 손을 잡았다.

“질투라니, 케이. 대체 무엇을?”

“그게…….”

케이는 리시에게 잡히지 않은 왼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랜디를.”

“아, 랜디.”

순간, 리시의 눈동자에 성가심이 스치고 지나갔다.

케이의 손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랜디……. 하아.”

리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케이를 잡은 손을 놓치는 않았다.

케이는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의 손이 떨어지지 않는 게 좋았다.

“안 그래도 고민했어요.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지만 그는 과거를 버렸고, 이제 당신의 부하가 됐죠. 그래서 언급하지 않는 게 낫겠다 싶었는데.”

“과거에 둘 사이에 뭔가 있었어요?”

케이는 질문을 던져놓고 아차 싶었다.

집요한 질문에 리시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다행히 리시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다만…… 몇 가지.”

그러면서 리시는 자신이 라포드 휘튼에 대해 아는 것을 말해주었다.

브리트니가 그에게 품은 감정, 그가 리시에게 품은 감정, 그리고 그 때문에 휘튼 일가에 당해야만 했던 부당한 일.

“그 후로는 소식을 몰랐어요. 그의 감정에 대해 짐작하게 된 것도 상당히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고요. 알다시피 나는 그곳에서 남의 애정 같은 걸 신경 쓸 만한 여력이 없었거든요.”

“알아요, 리시.”

“지금 랜디가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는 몰라요. 그저 오랜만에 만나서 잠시 흔들리는 것일 뿐일 수도 있고요.”

“그래요.”

케이는 랜디를 저택에 불러들인 걸 후회했다.

가까이에 있기에, 눈을 마주쳤기에, 대화를 나누었기에 커지는 마음이 있었다.

만약 랜디가 품은 마음이 그런 종류라면, 랜디가 저택에 있어서 좋을 게 없었다.

“랜디가 저택을 떠나고 싶다는 말을 하지는 않던가요?”

“아직은요.”

“케이, 나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케이가 미소 지었다.

“당신도 모르는 게 있군요.”

“모르는 게 얼마나 많은지 알면 깜짝 놀랄걸요.”

“걱정 마요. 당신이 모르는 부분은 내가 아니까.”

주군의 아내에게 마음을 품은 부하는 내쳐야만 한다.

하지만 랜디는 수인이었고, 또 다른 수인들에 대한 정보를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랜디가 케이를 벗어나는 방법은 죽음뿐이지만, 케이는 랜디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는 대로 랜디를 내보낼게요. 다른 곳에서의 일을 맡기면 되니까.”

 

+++

스티무어 제국의 마차가 가비자르 제국의 황궁에 들어섰다.

브리트니는 커튼을 살짝 걷어내고 창밖으로 보이는 황궁을 눈에 담았다.

이곳에 다시 들어오는 날이 있을 줄은 몰랐다.

두려움과 기대로 가슴이 부풀었다.

뒤에서 나를 욕하고 비웃던 귀족들. 그들이 내가 스티무어 제국 황태자의 정부가 되었다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좋은 표정은 아니겠지. 아직은 아닐 거야. 하지만…….’

황태자비가 되기만 한다면, 브리트니를 향해 대놓고 멸시하는 시선을 던질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브리트니는 커튼을 내린 후 자신의 드레스를 내려다봤다.

브리트니 위틀로인 시절에 입었던 화려한 드레스가 아닌, 청초한 느낌을 자아내는 드레스.

수수해 보이지만 옷감은 고급이고, 어깨 부근을 장식한 몇 안 되는 보석은 고급 세공 기술로 만든 값비싼 보석이었다.

‘나도 변할 거야, 아이리스.’

케이와 결혼한 리시는 변했다.

사람이 바뀐 것처럼 완전히 변해버렸다.

리시도 한 걸 자신이 못할 리 없다고, 브리트니는 생각했다.

‘가족에게 사랑을 듬뿍 받고, 원하는 걸 다 손에 넣으면서 살아온 브리트니 위틀로는 이제 없어. 나는 이제…….’

지금 브리트니가 입은 옷은, 언젠가 신문에 실린 사진 속의 리시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네가 될 거야, 아이리스.’

리시처럼 되고 싶다는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건 무척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어렵게 잡은 이 기회마저 놓칠 수는 없었다.

리시는 그 대단한 케이브란트를 사로잡았고, 그린 가문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으며, 심지어 피아몬도 대공과 2황자 라코젠의 마음까지 빼앗았다.

리시에게 브리트니가 이해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리시를 따라 하다 보면, 리시처럼 많은 사람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브리트니는 확신했다.

‘우선 한 놈은 얻었지만…….’

드웨인은 아까부터 브린의 손을 잡고, 걱정하지 말라는 둥, 그대 곁엔 내가 있다는 둥, 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드웨인 한 명으로는 부족해.’

리시가 그린 가문의 모두에게 사랑받듯, 브리트니도 스티무어 황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황제와 황후, 거기에 수많은 중신들을 비롯해 비천한 하인, 하녀들에게까지.

모두가 자신을 좋아하고 떠받들어주기를 원했다.

아이리스 그린이 그런 것처럼.

‘물론 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겠지.’

외모만 따라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이제 브리트니는 알게 되었다.

위틀로 공작가의 멸문과 그로 인해 받아야만 했던 핍박은, 그리 길진 않았지만 브리트니를 아주 조금 성장하게 했다.

브리트니는 이제 타인에게 사랑을 받는 게 오직 외모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안다.

그 부분을 알아내기 위해, 이곳으로 오기 전에 누군가를 만나 몇 가지 장치를 해두었다.

‘이제는 너한테 고맙기까지 해, 아이리스. 나는 네가 될 거고, 드웨인은 내게서 벗어나지 못할 만큼 날 사랑하게 될 거야. 나는 황태자비가 될 거고, 너는 고작해야 공작부인이야. 케이브란트가 제아무리 성유물의 수호자라고 해도, 한 나라를 건립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거든.’

리시를 넘어서는 미래가 그려져서, 브리트니는 저도 모르고 웃고 말았다.

“역시 당신은 웃는 게 예뻐. 내가 평생 당신을 웃게 해줄게.”

그렇게 말하는 드웨인을 보며, 브리트니는 생각했다.

‘얘는 좀 멍청한 것 같은데…….’

(109) 사랑하지 않는 척.

  그린 공작 내외가 가비자르 황궁에 도착하자, 많은 손님들이 일부러 나와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리시가 ‘포레스트 스파’ 사업으로 평민들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는 걸 귀족들은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그렇다 해서 이제 공작이 된 케이를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귀족들에게는 자신의 영지에 성유물이 피해를 입히면, 달려와서 도와줄 수호자와 좋은 관계를 맺어둬야 할 필요가 있었다.

리시는 몇몇 귀족이 보내는 적의에 찬 시선을 느꼈지만, 일부러 더 우아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래, 초조하겠지.’

세상은 변하고 있었다.

마법이 거의 사라지면서 귀족을 단단히 지탱해주던 마법사 세력이 사라졌다.

기계가 발달하면서 기계를 다룰 사람이 필요해졌는데, 귀족들은 그런 저급한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기계 기술도, 마법을 기계에 접목하는 기술도, 전부 평민들의 것이었다.

귀족보다 존경 받거나 부유한 평민들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귀족이 평민의 눈치를 보게 된 나라들도 생겨났다.

어느 나라는 평민들이 혁명에 성공해서 왕궁을 부수고, 평민 대표를 주축으로 한 의회를 세웠다.

평민과 귀족 사이에는 긴장감이 돌 수밖에 없었고, 귀족들은 평민들 앞에서 더욱 콧대를 높이는 방식으로 그들과 자신들 사이의 신분 차이를 분명히 하려고 했다.

그런 시기에 리시가 평민을 배려하는 듯한 사업을 벌이니, 귀족들의 심기가 불편해지는 건 당연했다.

‘당신들 생각은 아무래도 좋아.’

앞으로 이 대륙에는 더 많은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게 된다.

황권이 강한 제국은 쉽게 변하지 않겠지만, 작은 나라들은 그들이 깨닫지 못할 뿐 변화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세상을 발아래에 두는 방법이, 단지 제국을 세우고 황제가 되는 것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리시는 변화의 바람에 편승해, 그린 가문을 가장 높은 곳에 올려둘 방법을 생각해두었다.

황궁의 시종들이 그린 공작 부부를 손님용 별채가 있는 동궁으로 안내했다.

가비자르 제국의 신년 축하 파티를 위해 많은 귀족이 찾아왔으나, 황궁 안에서 머물 자격이 주어진 귀족은 그리 많지 않았다.

황족이나 왕족, 공작이나 후작 정도일까.

때문에 리시는 동궁까지 들어와보는 게 처음이었다.

“어머나.”

아치 안쪽의 길을 지나 동궁에 들어서는 순간, 리시는 순수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멋진 곳이네요.”

동궁은 그린 공작 저택만큼이나 넓었고, 마치 숲을 재현한 듯한 정원이 있었다.

인공 폭포와 잘 꾸민 화단과 길, 곳곳에 놓인 화려한 장식품들.

겨울인데도 이렇게 아름다우니, 꽃이 만발하는 봄이 되면 더욱 눈부실 것이다.

리시의 감탄이 진심이라는 게 전해진 건지, 시종이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황제 폐하께서는 황궁에 드시는 손님들이 불편함이 없도록 동궁에 많은 신경을 쓰고 계십니다. 공작부인의 마음에 들었다니 기쁘군요.”

리시는 시종과 정원을 꾸민 나무나 꽃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별채 건물까지 걸어갔다.

별채도 여러 채가 있었는데, 모두 비슷한 크기이지만 각기 다른 색의 각지 다른 재료를 사용하여 꾸몄다.

어느 별채는 동쪽 나라의 건물 같았고, 또 어느 별채는 남쪽 나라의 건물 같았다.

이국에 와서 여러 건물을 구경하는 기분이었다.

문득 리시의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아주 희미한 생각이라서 아직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지는 않지만, 좋은 사업 아이템이 될 것 같았다.

지금까지 리시의 사업은 지난 삶의 기억에 의존해서 벌인 것이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는 편이 안전하리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언젠가 돈이 쌓이고 쌓여서 더는 쓸 곳이 없을 때, 내가 직접 구상한 사업을 벌여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즐거운 상상에 젖어 있는 동안, 붉은 지붕이 인상적인 건물 안에 들어와 있었다.

손님이 데려온 가까운 고용인들이 머물 방까지 준비된 건물이었다.

잠시 한숨 돌릴 새도 없이, 황태자의 보좌관이 찾아왔다.

“바쁜 일이 없다면 그린 공작과 공작부인을 만찬에 초대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아, 황태자 전하만 계시는 만찬이니 편하게 오셔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편하게 오라고 해도, 황태자에게 직접 초대를 받았는데 아무 옷이나 입고 갈 수는 없었다.

마차를 타고 오느라 리시의 드레스는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

크리시나와 에르웰이 와서 상자에 담아온 드레스를 꺼내고 입혀주었다.

“제가 아이리스 님 덕분에 황궁엘 다 들어와보네요.”

크리시나가 리시의 머리를 빗겨주며 말했다.

“저는 한 번 와본 적 있어요. 용병들이랑 다닐 때였는데, 우리가 쫓던 놈이 여기로 도망쳐서 담을 넘었거든요. 황궁 경비병도 별 거 없더라고요. 아둔한 새끼들…….”

“엘! 여기는 황궁이야. 보는 눈도, 듣는 귀도 많아.”

“지금은 없어, 시니. 놀랍지 않아? 지금이야말로 이곳에 모인 귀족들을 염탐해서 정보를 쏙쏙 빼내기 좋을 때인데. 그래서 말인데요, 아이리스 님. 자리 비우신 동안, 제가 좀 돌아다녀도 될까요?”

“그러세요.”

에르웰은 거칠지만, 리시는 그녀가 문제를 일으킬 리 없다는 걸 알았다.

평소에 아무리 거칠어도 그녀는 루테크 가문의 혈통.

황궁의 예의범절 정도는 리시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게다가 여차하면 도망칠 수 있는 재주도 가지고 있고.

“그럼 저도…….”

평소라면 에르웰을 말렸을 크리시나도 황궁 구경만큼은 놓치기 싫은 모양이었다.

“편하게 보내요, 둘 다.”

시녀들에게 자유를 준 후, 리시는 케이와 함께 황태자가 마련한 만찬 장소로 향했다.

만찬이라고 하기에 식당에서 만나는 줄 알았는데, 황태자가 머무는 이락궁으로 안내받았다.

이락궁은 제국의 황태자가 되었을 때부터 황제가 되기 전까지 머무는 곳으로, 서궁 못지않게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락궁의 식당 중 하나에 들어가서 잠시 기다리자, 이오벳이 혼자서 식당으로 들어왔다.

케이와 리시가 일어나자, 이오벳이 싱그럽게 웃었다.

“그러지 마, 케이. 우리끼리 있는데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배, 아니, 공작부인께서도 부디 편한 시간을 보내도록 해요.”

케이와 이오벳이 오랜만에 만나 인사를 나누는 동안, 리시는 몰래 이오벳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케이와 함께일 때의 이오벳은 전처럼 묘한 분위기를 흘리지 않았다.

황태자와 공작부부 간의 예의와 친구로서의 친밀감이 적당히 섞인 만찬은 훌륭했다.

편안한 저녁 식사를 끝낸 후 디저트를 먹으면서 이오벳이 말했다.

“요새 시녀들이 스티무어의 황태자 얘기로 야단이야.”

“스티무어의 황태자? 애시워스 말인가?”

“그래, 드웨인 애시워스. 옛날부터 멍청한 놈이라는 생각은 했는데…… 아, 공작부인 앞에서 실례했습니다. 이 얘기는 그만두죠.”

“아니요, 듣고 싶어요.”

“내가 너무 사교계 얘기에 열광하는 못난이처럼 보일까 봐 걱정인데…….”

“어차피 여기서 들은 얘기는 나중에 방에 돌아가면 아내에게 전부 해줄 거고, 그러면 자네는 어차피 사교계에 열광하는 못난이가 될 거야.”

케이가 끼어들자, 이오벳이 빙그레 웃었다.

“결국 멍청이가 되는 건 시간문제라는 거군.”

“그래, 그러니까 얘기해봐.”

이오벳이 리시에게 허락을 구하듯 눈빛을 보냈다.

“편히 말씀하세요. 식물처럼 있을게요.”

“아, 그렇군요. 꽃이셨지요. 그린 공작가의.”

이오벳이 다정하게 말한 후, 다시 케이를 돌아봤다.

“그 바보가 여기에 정부를 데려왔어.”

“허어.”

“그것도 같은 마차를 타고 들어왔지.”

“저런. 드웨인 애시워스는 황태자비가 있지 않나?”

“있지. 황태자비와는 다른 마차를 타고 왔더군.”

아무리 황족이나 왕족의 정부를 인정해준다 해도, 이렇게 공식적으로 정부를 옆에 끼고 다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물며 본부인을 놔두고 정부와 한 마차를 타다니.

사람들 사이에서 시끄러운 얘기가 나올 만한 일이었다.

“정부가 상급 귀족의 영애라도 되나?”

“아직은 정보가 없어. 나도 알아보는 중이야.”

“알아볼 가치가…… 아, 상단이 스티무어를 지나서 들어오지.”

쟈메트 상단은 탈레하 왕국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섬나라인 탈레하 왕국은 대륙 동쪽의 바다에 있었다.

탈레하 왕국과 가장 가까운 항구가 알로르 왕국의 것이고, 알로르 왕국에서 그린 공작령으로 들어오는 가장 빠른 길이 스티무어 제국을 가로지르는 길이었다.

“어때요, 공작부인. 스티무어의 황태자가 바보인 점이, 우리의 사업에 문제가 될까요?”

“글쎄요.”

황태자가 바보라 해도,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스티무어의 황제와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

스티무어의 황태자가 황태자비를 버려두고 정부와 노닥거리는 일은, 지난 삶에서는 없었던 일이다.

스티무어의 황태자비 에버렛 테일러는 지혜로운 여자였고, 나중에 황후 자리에 올라서 황실의 내정을 잘 다루어 칭송받았던 기억이 있다.

드웨인은 에버렛에게 잡혀 산다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한철의 바람이라는 생각에 다들 쉬쉬하고는 있지만, 만약 애시워스가 계속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내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요. 테일러 후작가는 명문가이고, 황제도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기반이 탄탄하거든요. 게다가 오늘 드웨인의 행동이 테일러 후작에게 명분까지 만들어줬어요. 지금 당장 테일러 후작이 들고일어난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은 없겠죠.”

“그렇겠네요.”

“어떻게 할까요, 공작부인. 그린 공작이 움직인다면, 내가 힘을 보탤 수 있는데.”

내분이 일어날 때를 노려서 스티무어를 치라는 의미였다.

내분이 일어난 나라를 지켜보다가 뒤를 쳐서 그 나라를 빼앗는 건, 종종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스티무어는 평범한 왕국이 아닌 거대 제국이고, 리시는 그런 식으로 평화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리시에게는 리시의 방법이 있었다.

“조언은 감사하지만, 전쟁은 하고 싶지 않아요. 황태자가 의외로 금방 정신 차릴 수도 있는 거고요.”

“알겠어요, 부인. 아, 그리고 하나 더 해줄 이야기가 있는데…… 혹시 라코젠이 그린 공작가에서 무례를 범하지는 않았습니까?”

이오벳의 입에서 라코젠의 이름이 나오자, 리시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린 저택에서의 라코젠의 행동은 하나의 해프닝 정도로만 생각하고 넘어가고 싶었다.

어느 정로 리시에게 도움이 되기도 했으니, 그것에 대해 고마운 마음 정도만 품고 있기로 했다.

그런데 황궁의 이오벳의 입에서 라코젠 이야기가 나온다는 건,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의미였다.

“2황자님은…… 잘 계시다가 돌아갔어요.”

“그래요.”

이오벳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라코젠이 내게 공작부인에 대해 언급하더군요. 아이리스 그린이라고 부르면서.”

“아…….”

“좋은 눈빛이 아니었습니다, 공작부인.”

“좋은 눈빛이 아니라는 말씀은……?”

“공작부인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것 같더군요. 짧은 대화만 나눠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오벳의 대답에, 리시는 안도했다.

적의.

차라리 그것이 나았다.

사랑 비슷한 감정인 줄 알고 고민했는데…….

‘하, 내가 요새 사랑만 받았더니, 착각에 빠져도 단단히 빠졌었나 봐.’

아마도 이오벳이 본 게 옳을 것이다.

이오벳은 영리하고, 라코젠에 대해서만큼은 리시보다 더 잘 알았다.

긴장이 풀려서 저도 모르게 웃고 있었나 보다.

“부인? 그…… 좋으십니까?”

“예?”

“라코젠이 부인에게 적의를 품었다는 걸 즐거워하는 것 같아서요.”

“아, 아니요. 그저…….”

라코젠이 날 좋아하는 게 아니라 증오하는 거라니. 정말 다행이에요!

……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디저트가 참 맛있어서요.”

라코젠이 날 싫어한다.

그건 무척 성가시고 위험한 일이지만, 황족의 사랑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하지만 여전히 이상한 구석이 남아 있었다.

그때 라코젠은 직접 나서서 리시를 도와줬다.

미나스아릭의 공주에게까지 적의를 드러낼 정도로 리시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때는 왜 그랬던 거지?’

침착하게 생각하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느다란 실이 어느 방향을 가리키는데, 그게 어느 쪽인지 확실하게 판단할 수가 없었다.

+++

그린 공작 부부가 돌아간 후, 이오벳은 방에 돌아올 때까지 상냥한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는 순간, 이오벳의 입가에 머물러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이오벳은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들여다봤다.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는, 형편없는 남자가 암울한 눈빛을 하고 거울 안에 갇혀 있었다.

‘잘해냈겠지.’

이제 마음을 정리한 척, 그녀가 그저 친구의 아내로만 보이는 척.

‘그래, 잘해냈을 거야.’

(110) 미친 건가?

한번 시작된 불길함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방에 돌아온 후로도 리시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라코젠이 내게 적의를 품고 있었다면, 그때는 왜 그렇게까지 날 도와준 걸까? 그때 날 보는 눈빛이 어땠지?

애정이 담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의는 없었다고 기억한다.

“2황자가 걱정돼요, 리시?”

케이의 느른한 음성에 정신이 들었다.

신기하게도 케이의 침착한 눈동자를 마주보자 술렁이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조금요. 2황자가 왜 내게 적의를 품은 걸까요?”

“글쎄…… 아리따운 여인을 손에 넣고 싶은데, 성유물 수호자의 아내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어서?”

“설마요.”

“설마가 아니에요, 리시. 2황자는 그런 놈이거든.”

물론 그런 놈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런 이유로 적의를 품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라코젠은 아직 리시를 손에 넣기 위해 그 어떤 수단도 써보지 않았다.

지난 삶, 라코젠은 이미 황제가 된 이오벳에게까지 반감을 가지고 암살 시도를 했다가 사형당한 자였다.

그런 남자가 단지 성유물 수호자의 아내라는 이유로,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포기한다고?

그게 짜증 나서 적의를 품는다고?

아니, 그럴 리는 없다.

뭔가 더 근원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2황자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까요?”

“황태자 자리를 뺏는 게 시급한 상황이니, 섣불리 내게 반기를 들지는 않겠죠. 하지만 직접 나서지 않아도 부릴 수 있는 자들이 많으니…… 흠, 하지만 우선 2황자의 적의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

“내가 좀 떠볼까요?”

케이가 어이없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리시, 설마 내가 당신에게 그런 위험한 짓을 시킬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죠?”

“위험하긴요. 그저 차 한잔하면서…….”

“기각.”

“내 말 좀 끝까지 들어보는 게 어때요?”

“안 돼요. 그쪽에서 나서지 않는데 굳이 이쪽에서 찔러볼 필요는 없어요. 일단 월라스와 유진에게 당신을 밀착 보호하라고 말해둘게요. 뭐, 에르웰과 크리시나까지 있으니, 당장 위험한 일은 없을 거예요.”

“알겠어요, 케이. 그런데……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케이는 리시의 드레스 끈을 풀고 있었다.

“평소에 편한 옷을 즐겨 입는 부인이 답답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데 그 손이 왜 먼저 들어와 있는 거죠?”

“혹시 2황자가 두려워서 식은땀이라도 흘리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리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자, 케이가 키득키득 웃으며 리시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그거 알아요, 리시? 당신은 그렇게 눈을 가늘게 뜰 때가 정말 예뻐요. 아, 삐친 척하면서 입술을 오므릴 때도 진짜 예쁘고.”

“그래요. 일단 이 손 좀 멈추고 말해줄래요?”

“나는 어때요, 리시? 난 언제가 제일 예뻐요?”

“전에도 말했지만, 역시 늑대일 때 그 회색 눈썹이…….”

“나, 삐칠 거예요, 리시.”

리시가 흐흐흥, 하고 웃자, 케이도 따라서 웃었다.

“당신이 가끔 그렇게 콧소리로 웃을 때, 정말 듣기 좋은 거 알아요?”

“나는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당신 덕분에 하나씩 알게 되네요.”

“다행이에요. 내가 제일 먼저 알려줄 수 있어서.”

케이가 고개를 숙여 리시에게 입을 맞추려 하는데, 케이를 빤히 응시하던 리시가 입을 열었다.

“짙은 눈썹이 예뻐요. 그 아래에 있는 날카로운 눈매도 예쁜데, 그 안에 담긴 회색 섞인 푸른색 눈동자가 정말 말도 안 되게 예쁜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거 알아요, 케이? 거기서 이어지는 콧날이 어찌나 예쁜지 눈을 뗄 수가 없어요. 입술은 또 어떻고요. 어쩜 이렇게 모양이 완벽한 입술이 있나 싶어요.”

갑자기 시작된 칭찬에, 케이는 눈을 크게 떴다.

처음에는 듣고 싶은 말을 들어서 기쁜 내색이 역력했지만, 칭찬이 끝나지 않고 쏟아지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시선을 옆으로 움직였다.

얼굴이 화끈거리는지 손을 올려 입가를 가리려 하기에, 리시는 케이의 양쪽 손목을 꽉 잡아서 내리고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의 턱선이 정말 예뻐요. 그 턱선에서 쭉 이어지는 곧은 목도 예쁘고, 넓은 어깨랑 탄탄한 가슴도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어요. 그리고…….”

“내가 잘못했어요, 리시.”

케이가 고개를 돌린 채로 말했다.

“이제 그만해도 돼요.”

“왜요? 진심으로 얘기하는 건데.”

“아니, 정말로…… 충분해요. 충분하다 못해서 넘쳐.”

“부족할 것 같은데.”

“내가 예쁘다는 칭찬을 해줄 때마다 당신이 입술을 비쭉거리는 이유를 알겠어요. 이거 진짜 몸 둘 바를 모르겠네.”

리시가 키득키득 웃으며 발끝을 세우고, 케이의 입술에 입을 맞추려 했다.

하지만 키가 부족해서 간신히 그의 턱에만 입술이 닿았다.

“내 남편, 정말 예쁘지 않은 곳이 없어.”

“정말?”

“정말.”

“내가 당신보다 예쁠까?”

생각지 못한 질문에 리시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케이도 즐거운 눈빛으로 리시가 웃는 걸 지켜봤다.

“당신은 정말 엉뚱해요, 케이.”

“당신만 할까.”

케이가 리시의 관자놀이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춘 후, 리시를 번쩍 안아 올렸다.

리시의 드레스가 사르륵 흘러내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

브리트니는 동궁의 별채 중 스티무어 제국에서 온 손님을 위해 마련된 별채에 머물고 있었다.

드웨인과 같은 마차를 타고 오긴 했어도, 가장 좋은 방을 차지할 수는 없었다.

가장 좋은 방 두 개는 드웨인과 에버렛이 사용했고, 브리트니는 그보다 한 단계 낮은 방을 받았지만 그 방에 머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내내 드웨인의 방에서 머무는 중이었다.

-“당신만 놔두고 가고 싶지 않은데…….”

드웨인은 여러 일로 나가야 할 일이 있을 때마다 미안한 듯 말했지만, 브리트니로서는 드웨인이 나가주는 편이 편했다.

계속 드웨인이 마음에 들어할 만한 여자의 모습으로 보이기 위해 연기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브리트니는 별채에 들어온 후, 단 한 번도 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 유명한 동궁의 정원을 구경하고 싶지만, 그러다가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 봐 무서웠다.

베일로 얼굴을 가린다고 해도, 알아보는 이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이리스는 어제 도착했다고 했지.’

이제 공작부인이 되어 케이의 손을 잡고 마음껏 황궁을 돌아다닐 리시를 떠올리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이렇게 숨어 지내야 하는데, 왜 너만 그렇게 자유로운 거지?

너는 그저 우리 집 하녀였잖아!

-“좋은 소식이 있어, 브린. 가비자르의 귀족 사이에서, 그린 공작부인은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더군.”

어젯밤, 드웨인은 밖에서 듣고 온 소식을 전해주었다.

리시가 포레스트 스파라는 걸 만들었는데, 그게 평민들에게 귀족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게 해주는 사업이라서 귀족들이 못마땅해하고 있다고 했다.

꼴 좋다고 생각했다.

그 사업, 콱 망해버려라.

“다들 브린 님을 무척 궁금해하세요.”

시녀인 마틸다의 목소리에, 브린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마틸다는 드웨인이 붙여준 시녀로, 평민 하녀 출신이었다.

-“평민이기는 해도 좋은 집안의 여자야.”

드웨인은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 드웨인의 정부인 브리트니의 시녀를 하고 싶어 하는 시녀들이 없었을 것이다.

황실의 시녀들은 다들 귀족이니 억지로 싫어하는 일을 시킬 수도 없어서, 황태자의 명을 거부할 수 없는 평민 하녀를 붙여준 것이리라.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리시의 시녀들도 전부 평민들이니까.

브리트니는 리시처럼, 평민 출신 시녀에게도 예의를 갖춰주기로 했다.

“그저 궁금해할 뿐인가요?”

“네, 아무래도…….”

마틸다가 말끝을 흐렸다.

브린은 귀족들이 자신에 대해 뭐라고 떠들어댈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린 공작부인은 무엇을 하고 있던가요? 귀부인들과 어울리고 있나요?”

“아니요. 아직 별채에서 나오지 않으셨어요.”

“그린 공작은요?”

“공작님도 나오지 않으신 걸로 알아요.”

둘이서 별채에 틀어박혀 뭘 하고 있을지 상상만 해도 배알이 꼴렸다.

물론 브리트니도 드웨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지만, 드웨인은 남자다운 매력이 전혀 없었다.

그에 비해 케이는…….

‘아니, 아니야. 아이리스라면 이런 생각 안 할 거야. 전심을 다해서 드웨인을 사랑해야 해. 그래야 나도 사랑받을 수 있지.’

브리트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찬을 해야겠어요.”

브리트니는 마틸다와 함께 드웨인의 방에서 나와 아래층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 들어간 브리트니는 이미 먼저 와서 식사 중인 에버렛과 그녀의 시녀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드웨인이 밖에 나가서 당연히 에버렛도 같이 나갔을 줄 알았던 것이다.

에버렛과 시녀들의 시선이 브리트니에게로 향했다.

그 경멸 어린 시선들을 보자, 그린 저택에서의 일이 떠올라 심장이 얼어붙었다.

그때도 다들 저런 눈으로 브리트니를 쳐다봤었다.

브리트니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몸을 돌리려는 순간,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아이리스라면…….’

이런 상황에서 도망치지 않았을 것이다.

턱을 살짝 들고 오만한 표정으로 아무 일 없다는 듯 말했겠지.

“황태자비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저도 함께 오찬을 즐길 수 있을까요?”

  +++

가비자르의 황궁에 도착한 후, 국빈으로서 드웨인과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할 일들이 많았다.

이미 브린에 대한 소문이 쫙 퍼졌는지, 귀부인들은 에버렛에게 안쓰럽다는 시선을 던졌다.

그 동정 어린 눈빛이 에버렛의 목을 움켜쥐는 것만 같았다.

테일러 후작의 영애로 태어나 귀하게 자라온 에버렛이었다.

동정의 시선을 받아본 건 처음이었고, 그 때문에 비명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에버렛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황태자비로서 지어야 할 미소와 기품을 잃지 않았다.

오늘은 다행히 에버렛이 함께 다녀야 할 일과가 없었다.

그런 때에, 시녀들이 그린 공작 부부가 어제 도착했다는 소식을 알려줬다.

‘그린 공작부인.’

한때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고 불렸던 여인.

그리고 자신의 가문을 멸문시킨 인물.

아이리스의 언니인 브리트니는 아이리스를 끔찍이 미워했다.

미나스아릭의 메어리 케트벤 공주와 손을 잡고 아이리스를 끌어내리려다가 역풍을 맞아, 가비자르 귀족계에 얼굴을 내밀 수 없게 되었다.

시골의 자그마한 저택에서 살게 된 브리트니는 스스로 나가서 돈을 벌어야만 했고, 그렇게 일을 하다가 운이 좋게도 한 남자의 눈에 띄었다.

그녀에게 반한 멍청한 남자.

드웨인 애시워스.

‘브린이 그 브리트니 위틀로일 줄이야.’

미나스아릭 공주 독살 사건은 워낙 유명했기에, 스티무어 제국의 황실에까지 알려졌다.

그 일의 주범 중 하나인 브리트니가 스티무어 황실에 들어오게 되다니.

이 사실이 알려지면 스티무어 황실의 명예도 바닥에 떨어질 것이다.

‘황태자는 알고 있을까? 알고 있겠지. 그러니 이곳에 온 뒤로 브린이 계속 베일을 쓰고 다니는 거겠지.’

브린의 뒷조사로 그녀가 브리트니 위틀로라는 걸 알게 된 후, 그녀와 관계된 일들을 전부 조사했다.

그 과정에서 아이리스 그린이 위틀로 가문을 철저하게 짓밟아 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에버렛은 고민이었다.

‘그린 공작부인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 좋을까? 하지만 공작부인은 보통이 아닌 것 같은데, 이 일이 내 약점만 되지 않을까? 역시 그냥 내버려두는 게 좋을까?’

사랑이라는 감정은 영원하지 않다.

조사 결과 알게 된 브리트니는 철이 덜 든 어린애 같았다.

드웨인도 언젠가 브리트니에게 질리는 날이 올 것이다.

‘그래, 내가 남편의 정부 때문에 전전긍긍한다는 게 남에게 알려져서 좋을 게 없어. 역시 그린 공작부인은 만나지 않는 편이 좋겠어. 브리트니가 선만 넘지 않는다면, 그냥 이대로 황태자가 깨닫기를 기다리는 편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식당 문이 열리고 브리트니가 들어왔다.

별채 안이라서 안심한 건지, 브리트니는 베일을 쓰고 있지 않았다.

인형처럼 예쁜 얼굴이, 에버렛을 보자 깜짝 놀라 일그러졌다.

그 얼굴에 살짝 두려움이 떠오른 걸 보고, 에버렛은 만족했다.

브리트니가 자신의 위치만 잘 지킨다면, 에버렛은 굳이 브리트니를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

에버렛은 브리트니가 식당에서 도망치듯 나가기를 기다렸고, 잠시 브리트니는 그렇게 행동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황태자비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지금 저게 무슨 짓이지?

“저도 함께 오찬을 즐길 수 있을까요?”

미친 건가?

(111) 살려둘 수 없다.

파티를 하루 앞둔 오늘, 에른스 후작 부인이 고급 살롱에 귀부인들을 불러 조촐한 티파티를 열었지만, 리시는 초대받지 못했다.

에른스 후작 부인은 결혼식 때 왔을 뿐 아니라 결혼 선물까지 호화로운 것으로 준비해줬었는데, 포레스트 스파 사업 때문에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것이다.

“정말이지, 그린 공작부인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요. 그런 사업을 벌이다니…… 그린 노백작, 아니, 노공작 내외께서는 며느리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알고 계시는 걸까요?”

“모르시겠지요. 은퇴하신 후, 시골에서 지내고 계시니 소식을 늦게 알게 되시는 게 분명해요.”

“참 안되셨어요. 그린 가문에 어울리는 며느리를 보실 자격이 충분히 되시는데.”

“그러게 말이에요. 뭐, 위틀로 공작 가문이니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셨겠죠. 위틀로 공작가가 그렇게 무너지리라는 걸, 누가 알았겠어요? 권력이 아무리 예전 같지 않았다 해도, 그래도 공작이었는데…….”

위틀로 공작가가 무너진 것은 몇 달이 흐른 지금도 즐거운 이야깃거리였다.

“그린 공작부인도 참 모질지 않아요? 아무리 잘못을 저질렀어도 자기 언니고, 자기 부모인데 그런 식으로 내치다니……. 저라면 절대 그러지 못할 거예요.”

“초조했겠죠. 자칫 잘못하다가는 한데 묶여서 같은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니, 그렇게 냉정하게 싹둑 잘라낸 거겠죠.”

“그렇다고 해서 피가 어딜 가겠어요? 요새 행보를 보면 졸부와 다를 게 없다니까요.”

“그러게 말이에요. 명망 있는 그린 가문이 장사꾼 집안이 된 것 같아서 속상해요.”

“아, 그러고 보니…… 넬라니커스 제널 부인이 제레시엔 그린 양과 친했었죠?”

에른스 후작 부인의 말에, 귀부인들이 넬라를 돌아봤다.

넬라는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친한 편이죠.”

“그린 양은 뭐라던가요? 그린 백작부인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했을 것 같던데.”

“글쎄요. 제레시엔은 내게 집안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 성격이 아니라서.”

“아, 그린 양이 좀 그런 부분이 있죠. 그래도 여러 가지로 심란할 텐데, 백작부인이 위로가 되어주면 좋겠네요.”

“그럴 필요는 없을 거예요. 그린 공작부인은 영리한 분이라서 제레시엔의 마음에 들었을 테니까요.”

그 자리에 있던 귀부인들은 “그럴 리가요.” 하고 웃었지만, 에른스 후작부인은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귀부인이나 영애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 제레시엔이 아이리스는 ‘영리해서’ 마음에 들어 했다는 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영리하지 못하다.’는 의미였다.

샤린트 백작 부인이 말했다.

“최근 그린 공작부인의 행보를 보면 그리 영리한 것 같지도 않던데요. 목욕탕에 그렇게 큰돈을 투자해서 화려하게 꾸민다고, 우리 중 누가 그런 곳에 가겠어요. 고작해야 평민들이나 이용할 텐데, 그게 돈이 되겠어요?”

“맞아요. 제 주위에서는 거기에 가볼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린 가문도 큰일이에요. 그런 식으로 사업을 했다가는 크게 망할 텐데…….”

“그린 공작부인은 지금쯤 자기만 이 티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이유를 깨달았을까요?”

“깨닫지는 못하고, 그저 따돌림당한다면서 그린 공작님 품에 안겨 엉엉 울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다시 시작된 귀부인들의 뒷담화를 들으며, 넬라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아까 동궁을 나오면서, 리시에게 한마디라도 건넬까 하여 그녀가 머무는 별채로 가다가 그녀를 발견했다.

리시는 귀부인들의 티파티 따위 아무래도 좋다는 듯, 동궁 정원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노공작 내외께서 공작부인의 행보를 아시느냐고?’

알다마다.

그분들이 시골에 계신다 해도 정보가 얼마나 빠르신데.

‘젠의 마음이 상했느냐고?’

상하기는커녕, 자기 새언니가 좋아서 죽던데.

여기서 백날 뒷담화를 해봐라.

그린 공작부인이 눈썹 하나 꿈쩍하나.

+++

넬라의 예상대로 리시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고, 이반, 클로이, 그리고 시녀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동궁의 정원은 보면 볼수록 아름다웠다.

특히 겨울꽃이 만발한 장소에 접어들었을 때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리시는 손가락 끝으로 꽃을 살짝 만지며 말했다.

“언젠가 우리 저택에도 이런 정원을 꾸밀 수 있으면 좋겠어요.”

“대장은 공작부인이 원하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이런 정원을 만들어줄 거예요.”

클로이의 말에 리시가 빙그레 웃었다.

“그렇겠죠. 하지만 지금 당장은 괜찮아요.”

아직은 사치를 할 때가 아니었다.

리시의 금고에는 이런 정원 두, 세 개쯤 만들 수 있는 금괴가 쌓여 있었지만, 그것들은 전부 쓰일 곳이 있었다.

리시는 앞으로 이 세계에 벌어질 여러 가지 큰 사건을 알았고, 그것들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큰돈이 필요했다.

그렇게 담소를 나누며 정원을 걷던 도중에, 이반이 갑자기 리시의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다음에야 리시는 무언가 날아오는 소리를 들었다.

리시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온 그것을, 이반은 아주 쉽게 잡아챘다.

화살이었다.

리시가 이반의 손에 잡힌 게 화살이라는 걸 확인하기도 전에.

쌔액-

두 번째 화살이 날아왔다.

이번 화살은 에르웰에게 잡혔다.   그제야 리시는 누군가가 자신을 노리고 활을 쏜다는 걸 깨달았다.

리시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고, 커다란 눈에 공포가 떠올랐다.

사람들이 말로 하는 공격은 두렵지 않았지만, 물리적인 공격은 다른 문제였다.

리시는 물리적 공격을 막을 만한 힘이 전혀 없었다.

다행히 더 이상 화살은 날아오지 않았다.

“이런, 이런.”

대신에 활을 손에 든 라코젠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원에 숨어든 사슴인 줄 알았는데, 공작부인이셨군.”

라코젠은 자기 실수로 리시를 죽일 뻔한 것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당황한 눈치도 아닌 걸로 보아서, 일부러 그런 게 틀림없었다.

“위험했습니다.”

이반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 이반. 오랜만이야. 우리 예전에 한번 본 적 있지?”

“2황자님.”

“그런데 정말로 공작부인이 위험했던 것 맞나? 내가 보기엔 별로…….”

그렇게 말하며 리시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던 라코젠이, 왜인지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눈동자가 당혹감에 감싸여 흔들리는 것을, 리시는 똑똑히 목격했다.

으득-

그는 당황한 와중에도 무언가에 분노한 듯 이를 갈며, 리시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이반과 클로이가 슬쩍 움직여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

라코젠이 휘두르는 활을 피하며, 이반이 말했다.

“전하, 저희에게는 공작부인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공작부인에게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다는 건가?”

“공작부인께서는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많이 놀라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반이 리시에게 흘긋 눈짓했다.

리시는 관자놀이에 손을 올리고, “으음.” 하며 기절하는 시늉을 했다.

쓰러지는 리시를, 크리시나가 얼른 받아들었다.

“공작부인!”

놀랍게도 라코젠이 걱정 담긴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태도에, 그 자리에 있는 모두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활을 쏴서 죽이려고 해놓고 뻔뻔하게 군 주제에, 기절 좀 했다고 왠 걱정이람?

하지만 그들을 더 놀라게 만든 건, 라코젠의 다음 행동이었다.

“제길! 빌어먹을! 가만 안 두겠어, 아이리스 그린!”

한껏 걱정하던 라코젠이 또다시 태도를 바꿔서, 활을 집어던지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다들 멍한 눈으로 라코젠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이윽고 크리시나가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요?”

 

+++

동궁을 나서는 라코젠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이리스 그린!’

실수인 척 화살을 날려, 리시의 힘을 확인할 계획이었다.

만약 그 자리에 리시만 있었다면, 아무리 무모한 라코젠이라도 활을 쏘지는 않았을 것이다.

리시의 곁에 케이의 부하들이 있기에, 그 화살이 리시에게 꽂힐 리 없으리란 판단을 내렸다.

만약 리시가 마법사라면, 위험한 순간에 무의식적으로 마법을 사용할 것이다.

설령 사용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마법을 구동하는 행위라도 할 것이다.

그러면 리시가 마법으로 라코젠의 머릿속에 무언가를 집어넣는 걸 증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리시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겁에 질린 듯 얼어붙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라코젠은 자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 아이리스 그린이 마법사일 리 없지. 그것도 정신을 조정하는 마법이라니. 그 정도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가 아직도 남아 있을 리 없잖아.’

어쩌면 그때는 그저 소문의 ‘위틀로 공작가의 꽃’을 처음 보는 자리라서, 이 마음이 조금 흔들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생각은 리시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순간 바뀌었다.

맑고 깊은 리시의 연보라색 눈동자는 마치 라코젠을 단숨에 잡아채 삼켜버릴 것처럼 빛났다.

그 눈동자를 가까이서 보는 순간, 라코젠은 속절없이 리시에게 빨려들어갔다.

리시에게 화살을 날린 자신을 용서할 수 없고, 리시를 겁먹게 만든 게 미안해서 견딜 수 없어졌다.

용서를 빌어야 해.

무릎을 꿇어야 해.

하마터면 정말로 그럴 뻔했다.

간신히 충동에서 벗어난 라코젠은, 지금 당장 리시를 죽여야만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지 않으면 언젠가는 이 정체 모를 감정에 휩싸여, 리시가 짖으라면 짖고, 기라면 기는 개가 될 것 같다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리시가 기절하는 순간, 허물어지는 그녀가 안타까워서, 그녀를 품에 안고 괜찮으냐 묻고 싶어서, 그 마음을 도저히 거둘 수가 없어서.

라코젠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리시가 보이지 않는 지금도, 파리한 얼굴로 쓰러지는 그녀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녀를 안아 든 게, 시녀가 아닌 자신의 두 팔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 감정은 역시 정상이 아니다.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이 라코젠을 미쳐가게 만들었다.

‘아이리스 그린. 그 여자는 역시 위험해.’

방금 전의 일로 확실해졌다.

리시는 위험하다.

‘이오벳도 그렇고…… 그래, 생각해 보면 케이브란트 그린도 마찬가지야.’

아이리스가 아름다운 여자인 것은 확실했지만, 이오벳도, 케이도, 그리고 라코젠 자신도, 그저 여자의 외모만으로 사랑에 빠지는 바보들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사랑이나 여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존재했고, 실제로 케이는 그 예쁘다는 미나스아릭의 공주가 거침없이 구애를 하는 데도 그동안 꿈쩍하지 않은 전적이 있었다.

그런 케이가 갑자기 ‘위틀로 공작가의 꽃’과 결혼하더니, 부인에게 홀려서 부인 말이라면 꼼짝 못 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이건 좋지 않아.’

리시가 가진 힘의 비밀이 뭔지 알고 싶지만, 그러기 전에 리시에게 홀려 이성조차 유지할 수 없게 될 것이 분명했다.

‘케이브란트 그린처럼 될 수는 없지.’

리시에게 푹 빠져서 그녀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전에, 리시를 처리해야만 한다.

만약 그로 인해 그린 가문과 척을 지게 되더라도, 리시처럼 위험한 여자를 살려둘 수는 없다.

(112) 행운의 귀걸이

  케이가 일을 끝내고 돌아오자마자, 이반과 클로이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라코젠의 만행을 고해바쳤다.

라코젠이 리시에게 적의를 품고 있다고 해도, 정식 초대장을 받아 동궁에 머무는 리시를 죽이려 한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라코젠이 망나니 소리를 듣는다 해도,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대놓고 귀부인을 죽이려 하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알고 있을 터였다.

“활을 쏘았다……. 게다가 가만 안 두겠다고 하면서 가버렸다고?”

“네, 완전 미친놈 같았다니까요? 지가 활을 쏴서 공작부인을 죽이려고 해놓고, 공작부인이 기절하는 시늉을 하니까 또 깜짝 놀라서 부르더라고요.”

이반은 화가 나서 얼굴까지 시뻘겋게 물들었다.

“아주 또라이도 그런 또라이가……. 아, 실례했습니다, 공작부인.”

실컷 욕을 해대던 이반이 뒤늦게 리시가 이 자리에 있다는 걸 떠올리고 얼른 사과했다.

창가에 조용히 서 있던 리시는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케이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온한 리시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이오벳에게 라코젠의 적의에 대해 들었을 때만 해도, ‘라코젠이 리시를 마음에 들어 하는데 손에 넣을 수가 없어서 싫어하게 되었다.’ 정도의 가벼운 추측을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 있었던 일을 들으니,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보는 눈이 있는 곳에서 리시를 쏴 죽이려 하고, 큰소리로 선전포고까지 한 뒤에 떠나다니.

케이는 부하들을 돌려보낸 후, 리시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옆에 서서 그녀가 보는 곳을 함께 보려 했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는 어두운 정원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리시. 괜찮아요?”

“괜찮아요.”

“많이 놀랐을 텐데.”

“좀 놀라기는 했는데, 월라스는 대단하더라고요. 날아오는 화살을 손으로 잡다니.”

“죽을 뻔했어요, 리시.”

“그러게 말이에요.”

황족의 분노를 산 사람답지 않게, 리시는 침착했다.

“혹시 2황자가 왜 그러는지 짐작되는 점이 있어요?”

이번에는 곧바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리시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혀 모르겠어요.”

“그래요. 그렇다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은 두 개예요. 모르는 척 넘어가든가, 황실에 정식으로 항의를 하든가.”

“황실에 정식으로 항의하면 가비자르와 좋지 않은 관계가 되겠죠. 황제가 쉽게 인정하지 않을 테니.”

“그래요. 분명 2황자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랬을 거라고 변호할 거예요. 그리고 2황자파는 그럴 만한 이유를 만들어낼 거고.”

“모르는 척 넘어가면 계속해서 날 죽이려고 하겠죠.”

“그러겠죠. 아무래도 아직 2황자를 황태자 자리에 올리고 싶어 하는 세력이 많은 만큼, 부릴 수 있는 인물도 많을 거예요. 그들이 당신의 목숨을 노릴 거고, 잡힌다 해도 입을 열지 않겠죠.”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번만큼은 리시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라코젠과의 사건이 벌어진 후, 리시는 내내 라코젠이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할 만큼 죽이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뭔지 고민했다.

그린 저택에 방문했을 때 무례를 범한 걸까?

아니면 케이의 말대로 내가 마음에 들었는데 케이의 아내라서 가질 수 없으니 죽이자고 마음먹은 걸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일차원적인 이유는 아닌 듯했다.

“하아…….”

리시의 입술이 벌어지며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직은 가비자르와 적대적인 관계가 될 수는 없어요.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는 게 좋겠어요.”

“미안해요, 리시.”

리시는 케이가 사과할 줄은 몰랐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내게 좀 더 강한 권력이 있었다면, 당신이 이런 일을 겪게 놔두지 않았을 텐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케이. 당신은 신성국에서 인정한 공작이잖아요.”

“하지만 당신을 죽이려 한 놈에게 항의조차 하지 못하는 공작이죠.”

“그런 생각하지 말아요.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건, 당신 덕분이니까. 난 그거면 충분해요.”

케이는 리시의 말을, 실력 좋은 부하들을 붙여줘서 화살에 맞지 않을 수 있었다, 라고 이해했다.

하지만 리시는 이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지난 삶, 케이가 리시에게 트리사의 귀걸이를 주지 않았다면, 다시 살아갈 기회 같은 건 얻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이 삶은 케이가 준 것이나 다름없다.

케이에게는 그게 그저 지나가는 변덕 같은 것이었을지라도, 그 덕분에 리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삶이지. 모두가 날 좋아하고…… 아!’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리시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충격적인 생각이라서,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모두가 날 좋아해.’

그건 정말로 이상한 일이다.

‘다들 날 의심 없이 받아들였어. 이렇게 수상한데도.’

케이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수인이라는 걸 안다는 것으로 거래를 시도한 건 거의 도박이었다.

그가 거래를 받아들이거나 죽이거나.

죽을 가능성이 더 높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케이는 순순히 거래를 받아들였다.

심지어 수상한 면이 많은 리시를 자신의 부인으로 받아들이고, 넘치도록 많은 것을 베풀었다.

케이의 가족들과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케이가 느닷없이 데려온 그녀를 모두 따스하게 받아줬을 뿐 아니라, 애정까지 주었다.

케이의 아내로 인정해줄 수는 있어도, 모두가 이렇게 넘치는 애정까지 주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게다가…….

‘황태자도…….’

리시에게 호감을 품었다.

친구의 아내라는 사실을 잊고 그 마음을 드러낼 정도였다.

‘만약 그린 저택에서 날 처음 봤을 때, 2황자가 날 좋아하게 된 거라면…… 그런 거라면…….’

“리시?”

충격적인 진실을 떠올리느라, 옆에 케이가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리시는 숨도 쉬지 못한 채 자신의 생각에 몰입해 있었다.

케이의 걱정스러운 눈동자를 보자, 울컥 눈물이 날 뻔했다.

‘만약 이 남자가 느끼는 감정이 진짜가 아니라, 트리사의 귀걸이가 만들어낸 감정이라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리시, 괜찮아요? 역시 2황자가 신경 쓰이는 거죠? 암살 시도가 무서운 거라면, 그냥 황제에게 항의하는 쪽으로 가죠. 그러면 2황자도 쉽게 움직이지 못할 거예요.”

당장이라도 황제에게 찾아갈 것 같은 케이의 팔을 잡았다.

수많은 생각이 몰려 들어와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리시는 구역질을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케이. 그냥…… 조금 피곤해서요. 긴장해서 그런가 봐요.”

“정말요? 나에게까지 숨길 필요는 없어요. 이 일로 가비자르와 관계가 안 좋아지더라도 오래가지는 않을 거고…….”

“아니, 정말로요. 나는 그저…… 조금 쉬고 싶어요. 혼자서.”

머릿속에서 휘몰아치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혼자서, 라는 말에 케이가 미간을 좁혔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당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어쩌면 트리사의 귀걸이가 만들어냈을지도 모르는 그의 애정, 그의 걱정, 그의 다정함 같은 것을 온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용기가 없었다.

“그래요, 리시. 쉬어요. 무슨 일이 있으면 부르고.”

케이는 끝까지 다정했다.

볼에 닿는 그의 입술이 평소보다 뜨겁게 느껴져서 가슴 아팠다.

그가 나간 후에야, 리시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케이도 이 손가락이 떨리는 걸 봤을까?

‘케이는 트리사의 귀걸이가 가짜인 줄 알고 내게 줬어. 하지만 진짜라서 내가 되살아난 거야. 나는 유물술사의 힘을 갖고 있었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시간을 돌아온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지금 내게 트리사의 귀걸이는 없지만, 만약 그 힘이 아직 남아 있는 거라면……?’

지난 삶, 케이는 리시에게 트리사의 귀걸이를 주면서 ‘행운을 주는 귀걸이’라고 말했다.

‘이번 삶에서 모두가 날 좋아하는 게 트리사의 귀걸이가 주는 행운이라면? 아니, 아니지. 모두가 날 좋아하는 게 아니야.’

이번 삶에서도 분명 리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리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내게 필요한 사람들.’

찬 기운이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황태자가 내게 반했고, 덕분에 나는 좋은 조건으로 쟈메트 상단과의 거래를 유도할 수 있었어. 라코젠이 나에게 반했기에, 메어리 케트벤과의 사건에서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

아직 황태자는 필요하지만, 라코젠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라코젠에게서 리시를 향한 감정이 사라진 거라면?

그 감정의 변화를 라코젠이 의심스럽게 여긴 거라면?

그리하여 리시가 자신에게 무슨 짓인가를 했다고 여기고, 리시에게 적대감을 품게 된 거라면?

‘아까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어. 라코젠은 날 죽이려고 한 게 아니라, 내가 무슨 힘을 사용할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한 거야. 케이의 부하들이 있는데, 화살 정도로 날 죽일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테니까. 아마도…… 내가 마법 같은 걸 사용한다고 생각한 거겠지.’

그 순간, 라코젠은 다시 리시에게 반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리시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테니까.

그리하여 라코젠이 리시를 빤히 응시했을 때, 트리사의 귀걸이가 힘을 썼다.

그 힘은 통했으나, 이미 리시에 대한 의심을 품은 라코젠은 자신의 감정이 또 한 번 기묘하게 움직인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귀걸이의 힘 때문에 기절하는 리시를 저도 모르게 걱정했지만, 그 걱정조차 자신의 진짜 감정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토록 증오에 찬 음성으로 가만두지 않겠다며 떠나간 것이리라.

‘물론 이 모든 건 내 추측일 뿐이야. 그렇지만…….’

이 가설이 아니면, 지금껏 벌어지는 행운들을 설명할 수 없었다.

심지어 리시는 카지노에서 한 번도 돈을 잃지 않았다.

‘귀걸이의 힘이 여전히 내 몸에 남아 있는 거야.’

행운이 따른다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걸 그저 좋게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케이를 사랑하게 되어버렸다.

케이 역시 나를 사랑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 사랑조차 트리사의 귀걸이가 만들어낸 거라면?

만약 언젠가 귀걸이의 힘이 사라졌을 때, 그것이 만들어낸 감정 또한 사라진다면?

그리하여 그의 청회색 눈동자가 더 이상 따뜻하게 빛나지 않게 된다면?

라코젠이 그랬듯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깨닫고 적대감을 품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복수하고 싶었다.

나를 지옥 같은 삶에 밀어 넣고 죽음에 이르게 한 자들을 벌주고 싶었다.

그러는 한편, 자그마한 온기를 나눠줬던 사내가 자유롭게 살아갈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단지 그뿐이었는데, 더 소중한 것이 생기고 말았다.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생기고 말았다.

리시는 두 눈을 꾹 감았다.

‘괜찮아, 아이리스. 괜찮아. 당황할 일이 아니야.’

있는 힘을 다해, 술렁이는 머릿속을 잠재우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해야 할 건, 이미 벌어진 일을 가지고 전전긍긍하는 것도,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두려움에 빠지는 것도 아니야. 잘 살기로 했잖아. 지난 삶과는 다르게 살기로 결심했잖아.’

그래, 그러기로 했다.

한 번만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리 살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단단히 버티고 서서, 가기로 한 곳을 향해 걸어가야 해. 만약 케이가 2황자처럼 날 증오하게 된다면…….’

리시는 눈을 뜨고 크게 심호흡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야. 지금부터 고민해봐야 아무 소용없어.’

+++

이반과 클로이가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공작부인은 괜찮으세요?”

클로이의 질문에 케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래도 충격이 큰 것 같아.”

“그렇겠죠. 그런 대낮에 죽을 뻔하셨으니…… 어떡할까요, 대장?”

“클로이, 2황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겠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 일일 거야. 한동안 라코젠 주위에 머물러야 하고. 싫다면 오스카를 불러도 돼.”

“뭐 하러 황무지에 있는 놈을 불러들여요? 제가 할 수 있어요.”

대답을 끝내자마자 클로이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더니, 검은 고양이로 변했다.

날씬한 검은 고양이는 자기만 믿으라는 듯, 케이를 흘끔 쳐다보고는 우아한 동작으로 창문을 넘어갔다.

(113) 당신의 언니가 내 남편을.

  가비자르 제국의 신년 파티는 그 명성에 걸맞게 화려했다.

흠잡을 곳 하나 없이 완벽하게 꾸민 연회장과 잘 차려입은 고용인들, 황실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이 어우러져, 황실 파티에 처음 참석하는 사람이라면 황홀경을 느낄 만큼 근사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파티가 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가비자르 제국의 케너마나이 옥보시더스 황제가 황후와 함께 입장했다.

신년을 축하하는 황제의 인사가 끝난 후,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담소를 즐기거나, 파트너와 함께 댄스를 췄다.

많은 사람이 케이에게 인사하러 왔지만, 리시에게 아는 척을 하는 귀부인은 없었다.

심지어 남자 귀족들조차 리시를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던졌지만, 케이 때문인지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의 태도야 어떻든, 리시는 우아한 미소를 띤 채 인형처럼 케이의 곁을 지켰다.

어차피 이번 파티 때, 호감을 표현하는 이가 없으리라는 건 예상하던 바였고, 지금 시점에서 귀족들의 평가는 아무래도 좋았다.

게다가 지금으로써는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는 게, 리시에게는 좋았다.

리시는 아직도 ‘트리사의 귀걸이’에 대한 생각을 완벽하게 정리하지 못했다.

이 모든 행운과 나를 향한 모든 애정이 귀걸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걸 떠올리기만 하면 가슴이 답답했다.

“어머, 저 둘…… 사이가 괜찮아 보이는데요.”

문득 근처에 있던 귀부인의 음성이 들려와서, 리시는 정신을 차렸다.

귀부인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춤을 추는 남녀가 있었다.

드웨인과 에버렛이었다.

“스티무어의 황태자가 정부에게 홀딱 빠졌다고 해서 오늘 파티에 데려올 줄 알았는데, 그 정도로 미치지는 않았나 봐요.”

“이런 자리에 황태자비가 아닌 정부를 데려온다는 건, 황제 폐하께도 큰 실례가 된다는 걸 알 테니까요.”

“그런 걸 아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곳에 정부를 데려온담.”

“그래도 얼마나 미인이라 한 제국의 황태자를 사로잡은 건지 궁금했는데, 아쉽게 됐네요.”

리시는 귀부인들이 속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드웨인과 에버렛을 지켜보다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연회장 한쪽에서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있는 라코젠이 차가운 눈으로 리시를 노려보고 있었다.

리시는 한숨을 삼키며 시선을 거뒀다.

여기서 라코젠이 무슨 일을 벌이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 대놓고 노려보는 걸 다른 사람이 눈치채는 것도 곤란했다.

리시가 케이의 팔을 살짝 누르자, 케이가 말했다.

“몸이 많이 안 좋은가 보군요.”

“네, 조금. 하지만 괜찮아요.”

“아니요, 리시. 그만 들어가죠. 파티는 충분히 즐겼으니.”

파티에 참석하기 전에 케이와는 미리 얘기해두었다.

라코젠이 리시에게 적대감을 품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많아져서 좋을 게 없으니, 수상하다 싶으면 일찍 자리를 뜨자고.

단 리시 혼자서.

케이는 이곳에 남아서 라코젠의 동태를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아니에요. 혼자서 가도 괜찮아요. 들어가 볼게요.”

리시는 아픈 사람처럼 힘없이 말하고 연회장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도망치나 봐요.”

“하긴, 아무도 아는 척을 안 해주니까……. 공작부인 신분에 먼저 인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버틸 수가 없겠죠.”

“불쌍해라…….”

리시가 파티장을 떠나려는 모습을 보며, 귀부인들이 즐거운 듯 속닥거렸다.

그때, 호화롭게 차려입은 귀부인이 리시를 향해 다가갔다.

사교계의 여왕, 넬라니커스 제널 백작부인이었다.

“공작부인, 몸이 안 좋으신가요?”

“네, 좀 그러네요.”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아니, 괜찮아요.”

“부디.”

넬라가 살짝 무릎을 굽히며 청하자, 리시는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넬라와 리시의 관계를 모르는 귀부인들은, 사교계의 여왕이 직접 리시를 파티장에서 데려나가는 모습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지켜봤다.

그들이 파티장을 나가고 한참 지난 후에야 정신을 차린 귀부인들이 속닥거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왜 제널 백작부인이 그린 공작부인을 챙기는 거지?”

“저 둘, 원래 아는 사이였나요?”

“레이디 그린이랑 제널 백작부인이 친한 줄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백작부인이 공작부인을 챙겨야 하는 건 아니지 않아요?”

“제널 백작부인이 그린 공작부인을 마음에 들어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 그린 공작 결혼식 때도 주최자가 제널 백작부인이었잖아요.”

“어머, 어쩜 좋아.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어제 신나서 그린 공작부인에 대한 얘기를 해댔는데…….”

“저도요. 이러다가 제널 백작부인 눈 밖에 나면 어떡해요.”

사교계에서만큼은 황후보다 힘이 있는 사람이 넬라니커스 제널 백작부인이었다.

사교계는 남자들의 사회와 또 다른 권력과 규칙이 존재했기에, 그곳의 지배자의 눈 밖에 나서 좋을 것이 없었다.

특히 어제의 티파티를 연 에른스 후작부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제 넬라의 앞에서 신나게 리시를 씹어드셨던 귀부인들이 술렁거리는 동안, 넬라와 리시는 담담한 표정으로 정원을 가로질러 동궁을 향해 걸어가는 길이었다.

그들의 옆에는 호위 임무를 맡은 이반과 리시의 시녀인 에르웰, 크리시나가 함께였다.

“이렇게까지 안 해줘도 괜찮은데,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제가 여기로 출발하기 전에 제레시엔이 직접 찾아와서 자기 새언니를 지켜줘야 한다고 얼마나 당부를 하고 갔는데요.”

“아……!”

그런 줄은 몰랐다.

리시는 기쁘고, 슬펐다.

깐깐하고 차갑우며 경계심 강하기로 유명한 제레시엔 그린.

그녀는 갑자기 케이와 결혼한 리시를 거부감없이 받아들이고, 심지어 새언니라고 부르며 좋아하기까지 했다.

그 역시 트리사의 귀걸이가 만들어낸 감정일 것이다.

만약 젠이 그 모든 것이 만들어진 감정이라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할까?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기뻐 보이지 않네요, 공작부인.”

넬라는 눈치가 빨랐다.

“아니요, 기뻐요. 다만…… 요새 조금 심란한 일이 많아서.”

“2황자님 때문인가요?”

리시가 깜짝 놀라서 쳐다보자, 넬라가 미소 지었다.

“사교계에 있다 보면 들려오는 소식이 아주 많답니다. 가끔은 사내들보다도 더 빠르게 정보를 얻곤 하지요.”

“아, 그렇군요.”

“그러니 공작부인. 큰 뜻을 품으셨다면 사교계 역시 공작부인의 발아래에 두셔야 해요. 결코 등한시하시면 안 됩니다.”

리시도 그래야 한다는 걸 알았다.

다만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었다.

“공작부인께서 뜻이 있으시다면 제가 물심양면으로 도울 테니, 언제든 말씀만 하세요.”

넬라는 과하게 친절했다.

이 또한 트리사의 귀걸이 덕분인 걸까?

“왜 내게 그렇게까지 해주는 거죠? 백작부인에게 아주 귀찮은 일이 될 텐데요.”

리시의 질문에 넬라가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 웃었다.

“저는 젠을 좋아하고, 젠이 좋아하는 걸 덩달아 좋아해요. 그리고 이제 와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저는 브리트니 위틀로 양을 썩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렇군요.”

“위틀로 양이 공작부인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공작부인이 그에 어떻게 대응하셨는지 들었답니다. 그리고 저는 똑똑한 사람을 좋아하지요. 그래서입니다, 공작부인.”

넬라의 대답이 리시의 머리에 낀 먹구름을 걷어주었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약한 햇살이 스며들 정도로는 걷혔다.

‘그래, 모두가 트리사의 귀걸이 때문에 날 좋아하는 건 아니야.’

리시는 이 새로운 인생에서 리시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행동하는 중이었다.

그런 리시 자체를 좋아해주는 사람도 분명 있을 터였다.

리시는 모든 것을 트리사의 귀걸이 덕분이라고 의심하다가는, 많은 것을 놓치게 되리라는 걸 깨달았다.

그제야 리시는 미소를 되찾을 수 있었다.

“고마워요, 백작부인. 오늘 일은 기억해둘게요.”

 

+++

리시는 방에 돌아와서 장신구를 하나씩 빼고, 머리를 고정했던 핀을 빼냈다.

드레스를 갈아입으려고 하는데, 방 밖에서 크리시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리스 님.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손님? 누구죠?”

아직 파티가 한창일 시간이었다.

이런 시간에 누가 찾아온 걸까?

라코젠이 찾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죄여왔다.

“그게…… 스티무어 제국의 황태자비께서…….”

예상치 못한 대답에 리시는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황태자비는 응접실에서 기다리는지, 방문 앞에는 크리시나뿐이었다.

“스티무어 제국의 황태자비께서 날 찾아왔다고요?”

“네, 지금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혼자 오셨던가요?”

“네. 시녀도 없이.”

“……알겠어요. 잠시 누워 있던 차라, 금방 준비하고 찾아뵙겠다고 전해줘요.”

리시는 방문을 닫고 화장대 앞에 앉았다.

머리핀을 하나만 빼서 다행이었다.

살짝 흘러내린 머리를 꼬아서 다시 고정시키며, 리시는 에버렛이 찾아온 이유를 생각해봤다.

‘스티무어의 황태자비가 날 찾아올 이유가 뭐지? 그것도 시녀조차 동반하지 않고 왔다는 건, 비밀리에 할 이야기가 있다는 건데…….’

다른 때라면 인사를 나눌 일도 없는 상대였다.

돌발상황이 당혹스럽기는 해도, 거울에 비치는 리시의 얼굴에서는 동요를 찾아볼 수 없었다.

리시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습을 점검해본 후, 천천히 일어나 방을 나섰다.

+++

에버렛은 초조하게 리시를 기다렸다.

며칠 전, 브리트니가 식사를 함께하자고 청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순간, 리시를 만나서 브리트니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아까 리시가 먼저 떠나는 것을 본 후에, 에버렛도 몸이 안 좋다고 하고 파티장을 떠났다.

드웨인은 에버렛을 잡지 않았고, 덕분에 몰래 리시를 만나러 올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이곳에 오니 괜히 만나러 온 것은 아닌지 후회가 됐다.

남편의 정부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걸, 타국의 공작부인에게 보이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옳은 일이 아니야. 이건 분명 내 약점이 될 거야. 역시 돌아가야겠어.’

에버렛이 일어서려 할 때, 밖에서 시녀가 말했다.

“그린 공작부인이 오셨습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직 브리트니의 동생을 만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리시가 위틀로 공작가에 무슨 짓을 했든, 리시도 위틀로의 혈통인 건 마찬가지였다.

만약 브리트니 같은 여자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까 파티장에서 잠깐 본 정도로는 리시가 어떤 인물인지 파악할 길이 없었다.

케이의 옆에 서 있던 리시는 그저 예쁜 인형처럼만 보였다.

“들어오세요.”

하지만 지금까지 기다려놓고 됐다고 말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기에, 에버렛은 어쩔 수 없이 리시를 안으로 들였다.

적당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가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스티무어 제국의 황태자비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아이리스 그린입니다, 전하.”

그러나 방에 들어와 예를 표하는 리시를 보는 순간, 에버렛은 리시와 브리트니가 절대 비슷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반가워요, 그린 공작부인. 갑작스러운 청인데 흔쾌히 만나줘서 고맙고요.”

“별말씀을요.”

에버렛은 인사를 끝내고 맞은편에 앉은 리시를 조심스레 살펴봤다.

리시는 기품 있게 앉아 있었으나, 오만해 보이지는 않았다.

에버렛을 향한 눈빛은 상냥하면서도 자신감에 차 있었고, 입가의 은은한 미소는 이 갑작스러운 자리를 전혀 불쾌해하지 않는다는 마음을 전해주는 듯했다.

‘정보가 잘못된 걸까? 아무리 봐도 브리트니의 친동생일 것 같지는 않은데. 외모도 닮은 곳이 없고.’

그런 의심이 들 정도로, 브리트니와 리시는 완전히 달랐다.

리시는 에버렛의 탐색하는 시선을 느끼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담담히 그녀의 눈빛을 받아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슨 얘기를 하러 온 걸까?’

에버렛의 눈빛을 보면 수다나 떨면서 친분을 맺자고 찾아온 것 같지는 않았다.

방문 이유가 궁금하지만, 먼저 묻진 않았다.

에버렛에게 아쉬운 사정이 있다면, 그쪽에서 먼저 입을 열게 만드는 편이 나았다.

한참 탐색의 시간이 흐른 후, 에버렛이 드디어 이곳에 온 목적을 이야기했다.

“그린 공작부인. 혹시 우리 황태자님에 대한 소문을 들으셨나요?”

“어떤 소문을 말씀하시는지요.”

“……스티무어 제국의 황태자가 출생 모를 여인에게 푹 빠져서, 이곳에까지 한 마차를 타고 왔다는 소문이 쫙 퍼졌을 텐데요.”

“제가 사교계와는 연이 깊지 않아서, 소문에 늦습니다.”

리시의 말을, 에버렛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까 파티장에서 리시에게 말을 거는 귀부인이 없던 걸 봤기 때문이다.

“그래요. 그렇다면 솔직하게 이야기할게요. 여기서의 대화가 밖에 나가지 않으면 좋겠어요.”

“물론 그럴 겁니다, 전하.”

에버렛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소문이 사실이에요. 황태자 전하가 한 여인을 데려왔어요. 그리고 그 여인에게 홀려, 해서는 안 될 짓들을 하고 계시죠.”

“그렇군요.”

아직까지도 리시는 에버렛이 그런 이야기를 자신에게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저런 이야기를 남에게 해봐야 에버렛의 약점이 될 뿐이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말에, 리시는 숨도 못 쉴 정도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여인의 이름은 브린이에요.”

사라진 위틀로 모녀.

“브리트니 위틀로. 당신의 언니가 내 남편의 정부예요.”

(114) 할 만큼 했다.

  에버렛은 빠르게 리시의 표정을 관찰했다.

리시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시의 담담한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물론 리시는 말도 못할 정도로 놀란 상태였지만, 가까스로 표정 관리를 하는 중이었다.

‘브리트니가……!’

이곳에 오기 전에 위틀로 모녀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곳에 온 후에 스티무어 제국의 황태자에게 정부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 연관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럴 수가, 브리트니.’

놀라움에 실소가 나올 뻔했다.

‘너, 어떻게든 황태자비가 되려는 거구나? 그렇게 황후 자리에 올라 결국 황태후까지. 반드시 해내려는 거구나?’

지난 삶, 황후가 된 브리트니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거 알아, 아이리스? 나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아. 황후 자리는 아직 불안하거든. 황제가 후궁이라도 들여서 그 후궁에게 더 마음을 주면 어쩔 거야? 나는 있지, 황태후가 될 거야. 그것도 아주 젊은 나이에.”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아들을 낳아 황태자 자리에 앉힌 후, 황제를 죽이고 자신의 아들을 어린 황제로 만들어, 섭정을 하겠다는 무서운 말이었다.

이오벳에게서 브리트니를 떨어뜨려 놓은 것으로, 그녀의 꿈을 짓밟았다고 생각했는데.

브리트니는 기어코 또 다른 기회를 붙잡았다.

그 점만큼은 자신보다 낫다고, 리시는 생각했다.

지난 삶의 리시는 브리트니가 밟으면 밟는 대로 밟힐 뿐, 일어나서 브리트니를 떠밀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브리트니는 달랐다.

위틀로 공작가가 그렇게 무너지고, 위틀로 가문의 평판이 바닥에 떨어졌음에도, 기회를 붙잡았다.

그것도 한 제국의 황태자라는 거대한 기회를.

‘너, 참 굉장하다, 브리트니. 난 다시 죽었다가 깨어나도 너같이는 못 할 거야.’

“그린 공작부인.”

에버렛의 부름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에 언뜻 불안함이 엿보였다.

“혹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아니요, 전하.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 당황스럽네요.”

에버렛의 눈이 가늘어졌다.

리시가 당황스러워하는 중이라는 말을 믿기 어려웠다.

만약 정말 당황했는데도 저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는 거라면, 쉽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어쩌면 브리트니보다 더 위험할지도 몰라.’

하지만 에버렛은 브리트니의 일로 달리 상담할 곳이 없었다.

안 그래도 브리트니의 등장 이후로 속을 끓는 부모님에게 말할 수도 없고, 결혼 전의 친구들에게는 더더욱 말할 수 없었다.

겉으로는 위로해주는 척해도, 속으로는 잘됐다고 생각할 테니까.

차라리 아무 인연이 없었던 리시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지만.

‘정말 믿어도 될까?’

리시의 생각을 알 수 없어서 불안했다.

게다가 아직도 리시는 ‘왜 찾아왔느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은 걸까, 궁금한데도 주도권을 잡기 위해 묻지 않는 걸까?

에버렛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으려 했지만, 아쉬운 쪽은 에버렛이었다.

“브린, 아니, 레이디 위틀로와 그린 공작부인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기사로도 접했고, 주위에서 듣기도 했어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 사실인가요?”

“무엇을 알고 계신지…….”

“그린 공작부인이 사실은 공작의 사생아이고, 공작가에서 학대받으며 자라왔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그래서 그렇게 복수심에 불타, 위틀로 공작가를 멸문시킨 거라고 들었어요. 그게 진짜인가요?”

사실 이건 뜬구름 잡는 소문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리시가 왜 공작가를 그렇게 철저하게 파멸로 몰고 갔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여러 이유를 짐작해서 떠들어댔고, 에버렛이 말한 건 그런 소문 중 하나에 불과했다.

공작부인의 명예가 떨어질 만한 이야기를 꺼냈는데도, 리시는 기분 나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눈을 빛내며 되물었다.

“만약 진짜라면 어쩌시겠어요?”

그 순간, 에버렛은 리시를 믿어보기로 결심했다.

타국의 황태자비가 찔러보듯 던지는 말에도 흐트러짐이 없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자신이 꺼낸 이야기가 진짜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리시의 약점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도.

파티장에서도 느꼈지만, 리시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공작부인의 조언을 듣고 싶어요. 내가 앞으로 위틀로 양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황태자비께서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니요. 공작부인은 파멸시키려고 했던 위틀로 양이 황태자의 정부가 되었다는 데도 그리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어요. 그녀가 나를 밀어내고 황태자비가 되면, 공작부인의 입장도 곤란해질 텐데 전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네요. 위틀로 양이 무엇이 되든 쉽게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요?”

리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정말로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십니다. 아무리 저라도 스티무어 제국의 황태자께서 마음에 두신 여자를 어떻게 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하지만, 황태자비 전하. 전하라면 다르시겠지요.”

에버렛이 허리를 세웠다.

그런 에버렛을 지그시 응시하며, 리시가 물었다.

“전하께서는 무엇을 하고 싶으신가요? 오롯이 사내의 사랑을 받는 인생을 원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그 자리를 지키고 싶으신 건가요?”

“나는…….”

에버렛의 눈동자가 차게 빛났다.

“황후가 되어야 합니다.”

침묵이 흘렀다.

리시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에버렛은 불안해졌다.

견디다 못해 다시 입을 열려는데, 리시가 말했다.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인내심도 필요하고요. 어쩌면 그 과정에서 마음이 상할 만한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실지도 모릅니다.”

“그런 건 각오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앞으로 브리트니가 황태자의 정부라는 것을 인정하시고, 그녀가 무엇을 하든 내버려두세요. 아니, 그녀를 마음에 들어하는 척하시고, 그녀에게 지금보다 더 많은 권한을 주시는 것도 좋을 거예요.”

“그건…….”

“전하. 브리트니는 무엇을 하든, 실패할 겁니다.”

리시가 단호하게 덧붙였다.

“제가 그리 만들겠습니다.”

 

+++

리시와 에버렛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한창 파티 중인 연회장에서도 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가비자르 제국의 황태자 이오벳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오벳은 조금 지루한 기분으로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리시가 연회장에 있을 때는 긴장하고 있었는데, 리시 때문이 아니라 라코젠 때문이었다.

라코젠이 금방이라도 리시를 죽일 것처럼 노려보는 것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시가 나가자 라코젠은 지루한 표정으로 돌아갔고, 이오벳 또한 긴장을 늦출 수 있었다.

인사하러 오는 이들과 담소를 나누며, 언제 연회장을 빠져나가야 적당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그 일이 벌어졌다.

“제 딸인 이트리아입니다, 전하.”

에오르트 왕국의 베기스 공작이 그의 딸을 소개시켜주는 순간.

칠흑처럼 까만 머리칼에 현명한 녹색 눈동자를 가진 그녀를 보는 순간.

“제국의 별을 뵙습니다. 이트리아 베기스입니다.”

새가 지저귀는 것 같은 그녀의 음성을 듣는 순간.

이오벳의 머릿속을 물들였던 검은 먹구름이 깨끗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이트리아가 들어왔다.

이 변화를, 이오벳은 라코젠과 다르게 받아들였다.

‘그래, 역시 나는 정상이야.’

리시에게 품었던 그 감정이, 마치 꿈결처럼 희미했다.

-“그린 백작부인입니다, 전하.”

떠올릴 때마다 심장을 찔러대던 그 목소리도, 더는 날카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 빠른 감정의 변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이오벳은 하지 못했다.

그저 벗어나고 싶었던 그 감정.

소중한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그 절망적인 감정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리하여 이오벳은 웃었고, 그걸 보는 이트리아의 입가에도 수줍은 미소가 번졌다.

+++

에버렛이 돌아간 후, 리시는 무언가가 들어 있는 가방을 가지고 주방으로 향했다.

무어라도 하면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주방 하녀들이 리시를 보고 깜짝 놀라 허리를 굽혔다.

그들은 공작부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자신들이 뭔가 실수한 게 있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 분위기가, 리시에게는 익숙했다.

리시도 지난 삶에서 주방 일을 할 때, 갑자기 공작부인이나 브리트니가 들이닥치면 저렇게 얼어붙었으니까.

“여기에 혹시 우유와 크림이 있나요?”

“네, 마님. 오늘 아침에 황실 하녀들이 가져다준 것이 있어요.”

“그래요. 그걸 좀 쓸게요.”

리시가 팔을 걷어붙이고 창고로 들어가자, 하녀들이 얼른 따라왔다.

“저희가 할게요, 마님.”

“네, 말씀만 해주세요.”

리시가 무슨 말을 해도 하녀들이 긴장을 풀 것 같지 않았다.

그런 그들의 마음도, 리시는 이해했다.

“그렇다면 우유와 크림을 좀 가져다줘요. 식수도 끓이고.”

파티에 참가한다고 나갔던 공작부인이 갑자기 돌아와서 이상한 일을 시키는 게 의아하긴 했지만, 하녀들은 시키는 대로 했다.

하녀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크리시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리스 님, 드시고 싶은 게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이래봬도 제가 한 요리하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크리시나의 뒤에서, 에르웰이 온힘을 다 해 두 팔을 X자 모양으로 만들고, 고개를 휘휘 젓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빛나는 에르웰의 녹색 눈동자가,

‘안 돼요, 아이리스 님. 드시면 죽어요.’

라고 말하는 듯했다.

리시는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그저 뭔가 새로운 걸 좀 만들어보고 싶어서요.”

하녀가 물을 끓이는 동안, 리시는 가방 안에서 커피 원두와 그라인더를 꺼냈다.

그라인더는 커피 생산국인 탈레하 왕국에서만 사용하는 물건으로, 지난번 쟈메트에게서 받아둔 것이었다.

대륙에서도 커피를 취급하는 찻집이 몇 군데 있기는 하지만, 다들 절구를 이용해 원두를 빻아서 사용했다.

크리시나는 그라인더를 처음 보는 듯했지만, 에르웰은 역시 아는 게 많았다.

“이건 그라인더네요. 탈레하 왕국에서는 이걸 집마다 하나씩 가지고 있대요.”

“그라인더가 뭔데?”

“커피 원두를 가는 기계야. 10년 전쯤에 탈레하 왕궁의 기술자가 직접 개발했다더라. 탈레하에서는 이걸 수출해서 돈 좀 벌어보려고 한 모양인데, 대륙에는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없잖아? 수집가들 몇 명 빼고는 여기에 관심을 보인 사람이 없어서 쫄딱 망했을걸.”

에르웰의 말대로였다.

탈레하 왕국은 그라인더가 잘 팔릴 거라고 예상하고 아낌없이 투자했지만, 탈레하 국민 빼고는 찾는 이가 없어서 수출할 길이 막히고 말았다.

탈레하 왕국 창고에 쌓인 그라인더를, 리시가 전부 반값에 사들였다.

이번에 쟈메트 상단이 커피를 싣고 올 때, 다량의 그라인더도 함께 가지고 들어올 예정이었다.

크리시나와 에르웰이 수다를 떠는 동안, 리시는 그라인더에 원두를 집어넣고 도로록도로록 돌리기 시작했다.

크리시나가 깜짝 놀라 다가왔다.

“아이리스 님, 제가 할게요.”

“괜찮아요, 크리시나.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요.”

크리시니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리시의 부러질 것처럼 가느다란 손목을 쳐다봤다.

크리시나는 리시가 곧 후회할 거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이 맞아떨어졌다.

절구에 원두를 넣고 빻는 것보다는 편했지만, 손잡이를 계속 돌리는 건 생각보다 힘든 작업이었다.

리시의 입가에서 점점 미소가 사라졌고, 동그스름한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기가 한 말이 있는 터라, 리시는 고집스럽게 입술을 오므리고 그라인더의 손잡이를 돌렸다.

리시가 준비하라는 것을 준비하고 돌아온 하녀들은, 공작부인의 심상찮은 분위기에 숨도 쉬지 못했다.

상냥한 공작부인이 저토록 굳은 표정을 지은 건 처음 보기 때문이었다.

리시가 ‘이러다가는 내 팔이 먼저 부러질 거야!’라는 생각을 할 때, 에르웰이 비장하게 말했다.

“아이리스 님은 할 만큼 하셨어요. 이제 그만하셔도 돼요.”

+++

케이는 소파에 앉아서, 이트리아와 춤을 추는 이오벳을 지켜봤다.

이오벳의 푸른 눈동자는 이트리아에게서 떨어질 줄을 모르고 있었다.

‘이상하군.’

정말 이상했다.

이오벳은 숨기려고 노력했겠지만, 케이는 리시를 향한 이오벳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내 친구가 내 아내에게 뜨거운 눈빛을 보낸다.

내 친구가 내 아내의 말 한 마디에 눈빛이 이리저리 술렁거린다.

그걸 눈치채지 못하는 게 바보다.

그럼에도 모르는 척한 이유는, 사람 마음이라는 게 이성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이오벳이 사랑 때문에 선을 넘는 짓을 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벌써?’

황궁에 와서 이오벳을 만났을 때만 해도, 리시를 향한 이오벳의 눈동자는 여전히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오벳의 푸른 눈동자는, 이트리아를 향해 빛났다.

‘그렇게 쉽게 변하는 감정이 아닐 텐데…….’

이오벳이 마음 정리를 한 건 다행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그것을 이오벳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도 수상쩍었다.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진 것 같았다.

‘내가 너무 깊이 생각하는 거겠지. 한 남자가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다가, 다른 여자를 보고 첫눈에 반하는 일쯤이야……. 아니.’

아무리 좋게 포장하려 해도 쉽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진짜로 이상하군.’

(115)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드웨인이 돌아오지 않자, 브리트니는 답답한 마음에 복도로 나왔다.

‘이 인간은 왜 안 들어오는 거야? 일찍 끝내고 돌아오겠다더니…… 설마, 거기서 괜찮은 여자라도 발견한 건 아니겠지?’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브리트니의 생각은 그런 쪽으로만 돌아갔다.

‘나도 그냥 파티에 참석할 걸 그랬나?’

오늘 아침까지 고민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아직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정체를 밝히는 건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리시였다면 이렇게 섣불리 자신을 밝히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도 있었다.

초조한 마음에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복도를 거니는데,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드웨인인 줄 알고 계단으로 걸어간 브리트니는, 에버렛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저번에 에버렛에게 함께 오찬을 들자고 요청했을 때, 에버렛이 차갑게 거절한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니, 에버렛이 아닌 그녀의 시녀들이 브리트니를 쫓아냈었다.

에버렛이 무서운 건 아니지만, 에버렛 따위에게 그런 취급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리시처럼 행동해야 하는데,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눈빛을 또 마주하게 되면 인내심을 발휘하기 힘들 것 같았다.

“브린.”

브리트니가 자리를 뜨려는데, 에버렛이 다정하게 브리트니를 불러 세웠다.

“혼자 있으려니 심심하지요?”

하, 왜? 파티에 참석도 못 하는 나를 놀려주려고?

“아닙니다, 전하. 이렇게 멋진 곳에 머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인걸요.”

“그런가요? 욕심이 없군요. 나는 욕심이 없는 사람을 좋아한답니다.”

얘가 왜 이러지?

브리트니는 갑자기 바뀐 에버렛의 태도가 당황스러웠다.

“아, 저번 오찬 때는 미안했어요. 그때 내가 몸이 좋지 않아서…….”

“아, 예에. 그러셨군요. 이제는 좀 괜찮으신가요?”

“덕분에요. 그래서 말인데, 내일 오찬을 함께하겠어요?”

이제야 에버렛이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드웨인에게 한 소리 들은 것이리라.

어젯밤 드웨인을 붙잡고 황태자비 때문에 얼마나 모멸감을 느꼈는지, 눈물을 또르르 흘리며 털어놨으니까.

-“저 같은 것을 싫어하시는 게 당연하지요.”

그렇게 리시가 할 법한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었다.

드웨인은 아주 분개해하며 ‘속 좁은 황태자비!’라고 에버렛을 욕해댔다.

그러니 단둘이 파티에 가는 길에 가만히 있었을 리 없다.

브리트니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영광입니다, 전하.”

불쌍한 여자 같으니.

박색으로 태어나 남자 마음을 못 얻으니, 정부인 나에게라도 잘 보여서 황태자비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겠지.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얼굴로 황후 자리에까지 오르는 건, 국민에게 좀 미안하지 않니?

국민도 예쁘고 아름다운 황후를 원할 테니까.

+++

케이가 파티에서 돌아왔을 때, 리시는 방에서 커피를 마시며 시녀들과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이거 정말 맛있네요, 아이리스 님. 이건 잘될 것 같아요.”

“저는 이게 더 맛있는 것 같아요.”

“크리시나의 미각은 믿지 않는 편이 좋아요. 입맛이 진짜 이상하거든요.”

시녀들의 목소리 사이에 간간히 섞여서 들려오는 리시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케이는 잠시 더 그녀의 웃음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레이디들의 수다를 엿듣는 것은 옳지 않기에 방문을 노크했다.

케이가 들어가자 크리시나와 에르웰이 조용히 방을 나갔다.

테이블 위에는 열 개도 넘는 찻잔이 놓여 있었다.

“파티라도 열었어요?”

“이것저것 맛보느라. 당신도 마셔볼래요? 내가 직접 만들 건데.”

“당신이 직접 만든 거라면 마셔봐야죠.”

케이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리시가 커피를 만드는 모습을 지켜봤다.

조금 크다 싶은 잔에 커피를 따르고, 거기에 우유를 부은 후 설탕을 한 스푼 넣고 젓다가, 그 위에 크림을 듬뿍 얹었다.

케이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리시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건네는 잔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살짝 입술만 축일 생각이었는데, 고소한 우유와 달달한 설탕, 그리고 쌉쌀한 커피가 어우러진 맛이 의외로 괜찮았다.

아니, 상당히 맛있어서 두 모금이나 마셨다.

“맛있네요.”

“정말?”

“굉장히…… 아, 이걸 하려는 거군요. 찻집에서.”

“맞아요. 잘될 것 같아요?”

“무척.”

케이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런 케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리시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케이가 왜 그러냐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자, 리시가 검지로 자신의 윗입술을 쭉 문질렀다.

그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리시, 그건 새로운 애교예요?”

“음. 애교는 당신이 부리는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리시가 일어나더니 테이블 너머로 허리를 굽히고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그녀의 검지가 케이의 윗입술을 훑었다.

입술에서 떨어진 그녀의 검지에 하얀 크림이 묻어 있었다.

그제야 무슨 일인지 깨닫고, 케이는 얼굴을 붉혔다.

리시는 크림이 묻은 손가락을 입술 사이에 넣어 쪽 빨며 말했다.

“괜찮아요. 귀여웠어요.”

귀엽기는 리시가 더 귀엽다고 생각하며, 케이가 말했다.

“당신이 떠나고 파티에서 재미있는 일이 하나 있었어요.”

“어떤 일?”

“가비자르에 곧 황태자비가 생길 것 같아요.”

“어머, 좋은 소식이네요.”

케이는 리시도 이오벳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었을 거라 확신했기에, 소식을 전하면서 리시의 표정을 관찰했지만 딱히 이상한 부분은 없었다.

아쉬워하는 것 같지도, 크게 놀라워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관심 없는 지인의 결혼 소식을 들은 것 같은 반응.

리시가 이오벳에게 딴마음을 품고 있을 리 없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새삼스럽게 리시의 표정을 관찰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정식으로 발표한 건가요?”

“그건 아니고…… 아까 파티에서 첫눈에 반한 것 같더군요.”

“상대는 누군가요?”

“에오르트 왕국의 베기스 공작의 영애예요. 이트리아 베기스.”

“그렇군요. 나도 하나 전할 소식이 있어요.”

리시는 이오벳의 사랑 소식보다 더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스티무어 황태자의 정부가 브리트니 위틀로라는 소식에, 케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브리트니 위틀로는 정말…….”

“굉장한 여자죠.”

“하, 이제야 아까 그 행동이 이해되네요. 드웨인 애시워스랑 몇 번 눈이 마주쳤는데, 아주 무시무시한 눈으로 날 노려봤거든요.”

“어머, 무서웠겠어요.”

“오들오들 떨다가 도망치듯 돌아온 거랍니다, 부인. 위로해주겠어요?”

“물론이죠.”

케이와 리시는 키득키득 웃으며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누워서도 둘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조잘조잘 오늘의 일과 내일의 일과 너와 나의 일에 대해 떠들어대다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잠이 들었다.

한참 후 케이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했을 때, 리시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리시의 입가에는 더 이상 미소가 없었고, 케이의 앞에서 생기 있게 빛나던 눈은 암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리시는 슬픈 눈으로 케이를 돌아봤다.

-“아까 파티에서 첫눈에 반한 것 같거든요.”

이오벳에게 첫눈에 반한 여자가 생겼다.

‘이제 황태자의 애정도 내게 필요 없는 것이 된 걸까?’

이오벳은 그렇게 쉽게 여자에게 마음을 주는 사내가 아니었다.

지난 삶, 브리트니가 그렇게 애정공세를 펼쳤는데도, 이오벳은 자신의 아내인 브리트니를 향해 애정 어린 눈빛 한번 주지 않았었다.

그런 이오벳이 며칠 만에 또 다른 여자에게 반한다는 건, 역시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했다는 의미였다.

리시에게 있어서 이오벳의 가치는 ‘라코젠이 적의를 품고 있다.’라는 걸 가르쳐주는 것까지였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지, 케이? 귀걸이가 내게 더 이상 당신의 애정이 필요 없다고 판단을 내려서, 당신의 애정조차 걷어가면. 난 어떻게 해야 해?’

날 보면 저절로 떠오르는 당신의 미소가.

언제나 따뜻한 당신의 눈빛이.

내게 감미롭게 속삭이는 당신의 음성이.

내게 편안함을 주는 당신의 가슴이.

그 모든 것이 내가 아닌 다른 여인을 향하게 된다면.

귀걸이가 걷어간 감정의 빈 자리를 채우는 게, 내가 아닌 다른 여인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회귀해서 다시 시작하게 된 이번 삶에서, 리시는 언제나 문제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무엇도 리시를 두렵게 만들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리시는 답 없는 문제를 앞에 두었고, 그것은 아주 무겁고 거대한 공포가 되어 리시의 어깨를 짓눌렀다.

+++

가비자르 신년 파티는 나흘간 계속되었다.

리시는 이오벳이 라코젠처럼 뭔가를 깨닫고 항의하러 올 줄 알았지만, 새로운 사랑에 푹 빠진 이오벳은 리시에 대한 일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넬라 덕분에 귀부인들이 대놓고 리시에게 적대감 섞인 시선을 보내지 않게 된 데다가, 라코젠이 두 번째 파티부터는 참석하지 않아서, 리시는 조금 편한 상태로 파티를 지켜볼 수 있었다.

에버렛과 드웨인은 첫 파티에서 본 것보다 사이가 좋아 보였다.

아마 에버렛이 리시의 말대로 브리트니에게 잘 대해주었고, 그 때문에 드웨인의 마음이 풀린 것이리라.

‘좋지 않은 건 없어. 다 잘되고 있어.’

하지만 체증이 생긴 듯 가슴이 답답한 게 풀리지 않았다.

이오벳은 이제 리시가 안중에도 없었다.

그의 모습이 자꾸만 케이와 겹쳐졌다.

케이도 저렇게 되면 어떡하지?

더는 케이의 힘이 필요하지 않게 되어서, 케이의 마음이 날 떠나면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아는데, 이오벳의 변화로 귀걸이의 힘을 확신하게 되자, 불안함을 거두기 힘들었다.

리시가 답을 찾을 수 없는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 황궁 근처의 호수에서, 그린 공작가의 하녀가 한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

여자는 앳된 얼굴의 하녀에게 금화를 하나 쥐여주며 말했다.

“하녀장에게 날 네 친구라고 소개시켜줘. 네 부모가 아파서 떠나야 하니 날 대신 써달라고. 잘만 되면, 금화를 열 개 더 줄게. 너는 그 금화를 들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되는 거야.”

금화 열 개라는 말에 하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녀의 뒤를 따라가며, 루지나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이 하녀가 고향 땅을 밟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녀의 일은 하녀장이 담당하기에, 리시는 하녀들이 탄 마차에 새로운 인물이 섞여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루지나.

한때 브리트니의 시녀였던 그녀를 태우고, 그린 가문의 마차는 황궁을 떠났다.

같은 시간, 라코젠은 자신의 방에서 며칠 전부터 제멋대로 드나드는 검은 고양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봐? 그렇게 봐도 생선 같은 거 안 줘. 털 날리니까 나가!”

  +++

황궁을 떠나는 스티무어 황실의 마차에서, 드웨인은 미안한 듯 브리트니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결국 파티에 한 번도 참석하지 못했군. 나는 빠질 수가 없는 자리라서 본의 아니게 혼자 남겨두었어.”

“괜찮아요, 전하. 전하께서는 큰일을 하셔야 하는 분이시니, 제게만 신경 쓰실 수 없는 게 당연하죠.”

“그대는 정말 마음이 넓어. 황태자비와는 다르게……. 그녀가 그대를 또 괴롭히지는 않았나? 들어보니 요새 오찬을 함께했다던데.”

그 계집애가 벌써 자기가 나에게 얼마나 잘해주는지 미주알고주알 털어놨구나!

브리트니는 에버렛의 속이 빤히 보여서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고 표정을 굳혔다.

“네에, 뭐……. 괜찮아요.”

누가 봐도 괜찮지 않은 목소리였기에, 드웨인이 걱정스레 물었다.

“혹시 오찬에 초대해놓고 그대를 또 괴롭힌 건가?”

“아니요. 아니에요, 전하. 황태자비께서는 제게 아무 짓도 하지 않으셨어요. 그저 시녀들이……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황태자비의 시녀들이 그대를 괴롭히는가? 주제도 모르고?”

“당연히 제가 미울 수밖에 없지요. 그들은 죄가 없으니 나무라지 말아주세요.”

눈물을 또르륵 흘리며 말하는 브리트니의 모습에, 드웨인은 가슴이 미어졌다.

여인들은 어찌 그리 질투가 심하고 가혹하단 말인가.

누명을 뒤집어쓰고 갈 곳이 없어진 이 여인을 불쌍히 여기지는 못할망정.

드웨인은 브리트니의 손을 꽉 쥐었다.

“걱정하지 마, 브린. 그대를 모질게 대하는 이들은, 내가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116) 새로운 이야기

  그린 가문의 마차가 저택으로 향하는 길을 달리는 동안, 리시는 이제 익숙해진 거리를 내다보았다.

정문까지 이어지는 숲길 가장자리로 이어지는 겨울 나무들이 시리게 다가왔다.

저택 정문을 들어서기도 전에 그들을 발견했다.

가족들.

처음으로 ‘내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게 해준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따뜻하고 아늑한 곳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이들이 알려주었다.

욕심이 생겼다.

나도 이 사람들의 가족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그 무엇을 해도 내 곁을 지켜주는 내 편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그런 욕심이 생기고 말았다.

‘하지만…… 그조차 귀걸이의 힘이겠지……?’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많았다.

가족에게 말도 없이 진행한 결혼.

그렇게 들어온 새 가족이 마음에 들 리 없는데도, 누구 하나 그 점을 가지고 리시를 괴롭히지 않았다.

케이를 나무라더라도 리시에게만큼은 다정했다.

그러기 힘든 상황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온기가 좋아서 이상한 점들은 무시해버렸다.

하지만 끝까지 무시한다고 해서 없는 일이 되지는 않는다.

이제 리시는 ‘트리사의 귀걸이‘가 무언가 했다는 걸 알아버렸다.

알게 된 이상, 케이 가족들의 호의를 전처럼 기쁘게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마차에서 내리는 리시를 향해, 시어머니인 헤레이나가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

“멀리 다녀오느라 고생했구나.”

따스한 음성에 울컥 눈물이 나올 뻔했다.

모두에게 미안했다.

이 사람들은 ‘트리사의 귀걸이‘가 자신들의 감정을 멋대로 조종하고 있다는 걸 모르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이런 나를 예뻐해주시는 거겠지.

목이 메어서 대답을 하기 힘들었다.

“어머니, 저도 고생했습니다.”

케이가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격해진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해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을 것이다.

헤레이나와 케이가 티격태격하는 동안, 리시는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리시, 파티는 어땠어요? 말 많은 귀부인들이 괴롭히지는 않았어요?”

본채를 향해 걸어가며, 젠이 물었다.

“네, 덕분에요. 제널 백작부인이 많이 도와줬어요. 젠이 미리 말해뒀다면서요? 고마워요.”

“에이, 뭘 그런 걸 가지고.”

젠은 리시가 고맙다고 할 때마다 안절부절못했다.

감사 인사에 익숙하지 않다더니, 정말로 그런 모양이다.

옆에서 걷던 케이가 그런 젠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안 어울리게 왜 부끄러워하고 그러지? 컨셉인가?”

“시끄러, 케이. 새언니는 오빠랑 다르게 친절을 베풀면 고맙다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거든. 내가 내 형제들한테서는 받아본 적이 없는 거라, 너무 생경해서 이래.”

“내 아내가 좀 하지.”

“본인이 좀 해볼 생각은 없어?”

케이와 젠의 애정 어린 말다툼도 듣기 좋았다.

내 것인 줄 알았던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게 서글펐다.

우울감에 빠져 걱정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슴이 지끈거리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이래서야 지난 삶의 아이리스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앞만 보고 걷기로 했으면서.

그 무엇이 발목을 붙잡아도 머뭇거리지 않기로 했으면서.

그렇게 당당하게, 나 혼자서라도 걸어가기로 했으면서.

‘알아버린 게 문제야.’

손을 잡고 걷는 게 얼마나 편한지.

함께 걷는 이가 있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혼자가 아닌 둘, 셋, 넷…… 그렇게 여럿이라는 게 얼마나 든든한지.

알아버린 이상, 몰랐던 때로 돌아가기는 힘들었다.

“새아가. 많이 힘드냐?”

시아버지 와이번의 질문에, 리시는 애써 미소 지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어머님, 아버님은 이곳에 계시는 동안 불편하지는 않으셨나요?”

“우리야 뭐, 불편한 게 뭐가 있을꼬. 아, 그래. 네가 우리에게 맡긴 일은 성실하게 해냈단다.”

“제가 맡긴…… 아! 토미.”

가비자르 황궁에서 여러 사건을 겪는 바람에, 토미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

“토미는 어떤가요?”

“깜짝 놀랄게다. 어서 보러 가자꾸나.”

언제나 침착했던 와이번의 눈이 즐거운 듯 빛나서, 리시의 기분도 조금 나아졌다.

‘그래, 이분들이 느끼는 모든 감정을 귀걸이가 조종하는 건 아니잖아. 내가 하는 모든 것이 귀걸이의 힘은 아닐 거야.’

리시가 저택을 떠날 때만 해도, 토미는 리시의 방 응접실에 있는 철우리 안에 갇혀 있었다.

복도에서도 토미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곤 했는데, 왠일인지 복도가 조용했다.

게다가 노공작 내외가 리시를 데려간 곳은 리시의 방이 아닌, 그 옆방이었다.

“여기로 옮겼나요?”

“주인 없는 방에 함부로 들어가기도 그렇고 해서요.”

젠이 대답하며 똑똑 노크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웅!”

힘찬 목소리에 리시의 눈이 동그래지자, 헤레이나가 웃으며 리시의 팔에 손을 얹었다.

“아직 놀라기는 이르단다.”

헤레이나의 말대로였다.

방문을 열고 안을 확인한 리시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완전히 달라진 토미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토미는 제대로 씻기지도 못해서 엉망이었다.

옷을 입히면 잡아 뜯어서 얼굴과 몸에 상처가 가득했고, 긴 머리는 떡지고 엉켜 있었다.

그런데 지금 방 안에 있는 토미는, 비록 한쪽 발목에 족쇄를 채워서 묶어놓긴 했어도, 얌전히 침대에 앉아 있었고, 무엇보다 깨끗했다.

얼굴의 상처는 거의 사라지고, 길었던 머리는 깔끔하게 잘라서 다듬었다.

하얀 셔츠에 까만 조끼, 나비 모양 타이를 매고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양말에, 구두까지 신은 모습은, 영락 없는 귀족가 영식이었다.

그동안 잘 먹으면서 지냈는지 얼굴에 통통하게 살이 올라서, 처음에 봤을 때보다 훨씬 귀여웠다.

“어머나. 토미?”

리시가 이름을 부르자, 토미가 고개를 들어 리시를 빤히 응시했다.

리시는 토미의 고요한 황금빛 눈동자를 마주하자, 가슴을 꽉 누르고 있던 바윗덩이가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저 이 아이가 사랑스러워서, 지난 삶 처절하고도 고고하게 죽어갔던 이 아이가 살아 있는 게 다행스러워서. 기뻤다.

토미가 천천히 손을 올리더니, 검지로 리시를 가리켰다.

“아이리수.”

“아니지, 토미. 내가 뭐라고 부르라 했지?”

토미를 보느라, 그 뒤에 엘디가 있는 것도 몰랐다.

침대 뒤의 벽에 기대서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엘디의 지적에, 토미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가 해사하게 웃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리시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뉴님!”

“…….”

리시가 기가 막혀서 엘디를 노려보자, 엘디가 어깨를 으쓱했다.

“왜? 아줌마라고 불리는 것보다는 누님이 낫지 않아?”

“미안하구나, 리시. 이상하게 토미가 저 애를 잘 따라서, 저 애가 시키는 대로만 하더라고.”

헤레이나가 혀를 차며 설명했다.

리시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짐승은 짐승을 알아본다더니…… 아, 죄송해요.”

시부모님 앞이라는 걸 잊었다.

헤레이나와 와이번이 놀란 눈으로 리시를 보고 있었다.

리시는 말실수를 했다는 생각에 얼굴을 붉혔다.

엘디와 단둘이 있을 때는 멋대로 행동하더라도, 엘디의 부모님 앞에서는 조심해야 했는데.

“그렇구나.”

헤레이나가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래, 똑같이 짐승 같은 놈들이라서 통하는 게 있는 거였어. 안 그래요, 여보?”

“그렇군. 의문이 풀렸소.”

와이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디가 어이 없다는 듯 노공작 부부를 노려봤다.

“어머니, 아버지. 지금 남의 딸이 두 분 아들을 욕한 거거든요?”

“어머,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리시가 내 딸이 된 지가 언젠데. 안 그래요, 여보?”

헤레이나가 리시의 팔에 팔짱을 끼며 말하자, 와이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딸 농사에는 성공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지.”

“왜 막내딸 농사에만 성공해요? 첫째 딸은?”

젠이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지만, 와이번은 먼 산을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따뜻함과 아릿함이 동시에 리시의 가슴을 채웠다.

이 다정함이 내 것이면 정말 좋을 텐데.

오롯이 내가 만들어내서 갖게 된 거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텐데.

“말을 어느 정도 알아듣기는 하는데, 완벽하지는 않아요. 아는 단어가 많지도 않아서 쉽게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해줘야 하고. 예의범절은 거의 익히지 못해서, 아직 식사 매너도 몰라요. 한 3, 4살 아이라고 생각하고 천천히 가르쳐야 할 거예요.”

젠이 설명했다.

“자해는 하지 않나요?”

“그걸 해봐야 원하는 걸 얻지는 못하고 아프기만 하다는 걸 알려줬거든요. 그래도 몇 주 만에 이렇게 성장한 걸 보면 영리한 녀석이에요. 잘 가르치면 크게 되겠어요.”

리시는 천천히 토미를 향해 다가갔다.

토미는 다시 침대 끝에 걸터앉아서 리시를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토미의 앞에 선 리시는 잠시 망설이다가 아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토미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 리시의 손을 내려다봤다.

리시는 기다렸다.

이 아이가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아준다면, 더는 우울해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이 아이만큼은 내가 건진 거니까, 이 아이만큼은 내가 찾아낸 거니까.

그러니까 이 아이가 내 손만 잡아준다면, 귀걸이의 행운이 없이도 스스로 내 행운을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리시의 각오가 느껴진 건지, 아무도 토미를 재촉하지 않았다.

한참 리시의 손을 내려다보던 토미가 다시 고개를 들어서 리시와 눈을 맞췄다.

토미가 눈을 반짝 빛내더니 환하게 웃으며 벌떡 일어나 리시를 향해 달려들었다.

“앗!”

젠이 작게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가 걱정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토미가 두 팔을 벌려서 리시를 끌어안은 것이다.

토미를 처음 만났을 때, 리시가 그래주었듯이.

자그마한 소년이 스스럼없이 리시를 끌어안으며 온기를 나눠주는 순간, 리시의 어둠이 갰다.

+++

7년 전, 누구도 모르는 이야기가 하나 탄생했다.

한 도망 노예가 빈 창고에 숨어들어 아기를 낳았다.

도망 노예는 첫 출산이었지만, 아이와 함께 살아갈 날을 기대했다.

원치 않는 임신이었지만, 열 달간 뱃속에서 함께해온 아이를 미워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 아이와 함께라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 도망 노예는 공포와 절망에 비명을 질렸다.

인간의 아기가 아니었다.

작고 꼬물거리는 회녹색 파충류.

작은 날개가 달린 그것이 어린 드래곤이라는 걸, 도망 노예는 알지 못했다.

삐이, 삐이, 울음소리를 내는 ‘그것’을, 도망 노예는 겁에 질린 눈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이윽고 그것이 인간으로 변하자, 도망 노예는 더욱 겁에 질렸다.

배운 거 없는 노예라도, 그것이 수인이라는 걸 알았다.

수인과 그의 가족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도 알았다.

심지어 그녀는 노예였다. 도망친 노예.

수인을 낳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아이와 함께 죽임을 당할 것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파충류로 변하는 징그러운 것과 함께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끔찍했다.

그녀는 도망쳤고, 아기는 혼자 남았다.

아기는 자신이 수인이라는 것도, 버려졌다는 것도, 제 어미가 얼마 도망치지 못해 얼어서 죽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아기가 아는 것은 배고픔과 추위뿐.

하지만 그조차 길지 않았다.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은 호랑이가 창고에 들어와, 아기를 물고 간 것이다.

아기는 자신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그렇게 자라나 리시를 만났고, 인간의 품이 얼마나 따뜻한지 알았고, 토미라는 이름이 생겼다.

리시가 오래 떠나 있었지만, 토미는 기억했다.

리시의 다정한 품을, 고요한 눈동자를, 그리고 그녀의 음성을.

그녀의 음성은 숲에 부는 바람 같기도 했고, 냇가에 흐르는 물소리 같기도 했고, 저 하늘에서 지저귀는 새소리 같기도 했다.

토미는 ‘잠깐 멀리 갔어. 곧 돌아올 거야.’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기에, 두 번 다시는 리시를 볼 수 없을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돌아왔고, 토미는 가슴에 무언가 몽글몽글한 꽃 같은 것이 피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지만, 토미는 그녀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걸 해주고 싶었다.

그녀가 토미를 안아줬을 때, 무척이나 기분 좋았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리시를 끌어안자, 리시도 토미를 안아주었다.

그 순간, 누구도 몰랐던 이야기는 끝이 나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117) 후회할 거야.

케이의 가족들은 리시와 토미를 지켜봤다.

눈썰미가 좋은 헤레이나는, 토미를 안고 있는 리시에게서 왜인지 모를 절박함을 느꼈다.

그래서 리시와 토미에게 둘만 있을 시간을 주기 위해, 가족들을 데리고 나왔다.

“케이. 혹시 황궁에서 무슨 일 있었니?”

응접실로 걸어가면서, 헤레이나가 물었다.

“리시 표정이 좀 안 좋죠?”

“그러네. 울적해 보이는데…… 너, 무슨 짓을 한 거니?”

“왜 제가 무슨 짓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저 때문에 아니라 2황자 때문일 겁니다.”

“2황자가 왜?”

케이는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와이번이 인상을 찌푸렸다.

“2황자가 그런 짓을 했는데 그냥 돌아왔다고?”

“남들 다 보는 데서 죽일 수는 없으니까요. 리시도 그냥 놔두라고 했고.”

“이 멍충아! 그게 진짜로 그냥 놔뒀으면 해서 그냥 놔두라고 한 거겠어? 오빠한테 폐가 될까 봐 그냥 놔두라고 한 걸 거 아냐.”

“젠, 넌 아무것도 모르면 끼지 마.”

“내가 뭘 모른다고 해도 오빠보다 모르겠어? 엘디, 오빠라면 어쨌겠어? 케이처럼 두고 봤겠어?”

엘디가 싱긋 웃었다.

“발가락 끝부터 세밀하고 다정하게 썰어줬겠지. 저번에 그렇게 해주지 못한 게 후회되는걸.”

젠이 ‘그것 봐.’라는 눈빛으로 케이를 쳐다봤지만, 케이는 무시했다.

“일단 클로이를 2황자 곁에 붙여두고 왔으니, 조만간 이유를 알게 될 겁니다. 그때 가서 대응해야겠죠.”

“뭘 그때까지 기다려? 클로이를 붙여뒀다면서? 화근은 피기 전에 잘라버리는 게 나아, 케이.”

엘디의 말에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차하면 그래야겠지.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야. 2황자가 황궁에서 암살을 당하고, 그전부터 갑자기 드나들던 검은 고양이가 있었다, 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사람이 생기면, 수인의 짓이라는 게 금방 드러날 테니까.”

“그럼 나단을 시키지 그래? 나단은 황궁 밖에서도 2황자 이마에 총알을 박아넣을 수 있을 텐데.”

엘디가 2황자를 암살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제시하는 동안, 리시는 토미와 침대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젠의 말대로 토미는 할 줄 아는 말이 많지 않았다.

“토미, 그동안 뭐 하고 지냈어?”

“뉴님.”

“옷이 불편하지는 않아?”

“뉴님.”

“좋아하는 음식은 있니? 음식. 요리. 먹을 거.”

“뉴님.”

엘디의 교육 덕분에 ‘뉴님’이라는 말만큼은 누구보다도 잘하게 된 것 같다.

리시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토미는 기분 좋은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내일은 같이 숲에 나가 보자. 겨울이라서 식물이 많지는 않지만, 네 호랑이랑 함께 지냈던 곳이랑 비슷한 기분은 느낄 수 있을 거야.”

“뉴님.”

성실하게 대답한 토미가 갑자기 발을 흔들더니, 신발을 벗어던졌다. 신발이 불편하긴 했나 보다.

양말만 신을 발을 보니, 발목에 채워진 족쇄가 마음이 쓰였다.

“잠깐만 기다려.”

리시는 시종을 불러, 족쇄 열쇠를 누가 갖고 있는지 물었다.

엘디가 갖고 있다고 하기에 받아다 달라고 부탁했더니, 엘디가 직접 찾아왔다.

“족쇄를 풀어주려고? 후회할 텐데.”

“아직, 좀 그래?”

“하고 싶으면 해보든가.”

엘디가 열쇠를 꺼내 놀리듯이 살살 흔들었다.

리시는 엘디를 한 번 째려봐주고, 얼른 열쇠를 빼앗아와서 토미의 족쇄를 풀었다.

철컹-

족쇄가 풀리자, 토미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자기 발을 내려다보다가 환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폴짝 침대 위로 뛰어올라서 방방 뛰기 시작했다.

즐거워 보이는 아이의 모습에, 리시도 덩달아 즐거워졌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다.

토미가 갑자기 창문 밖으로 뛰어내린 것이다.

“토미!”

깜짝 놀라서 창가로 달려가 내려다보니, 토미는 멀쩡하게 달리고 있었다.

두 다리로 달리는 게 아니라, 두 손과 두 발을 이용해서 짐승처럼 달렸다.

한참 갇혀 있다가 자유를 얻은 야생동물처럼 신나서 달리던 토미가 근처에 있는 건물 지붕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토미!”

토미는 지붕 위에 호랑이처럼 앉아서, 리시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웃어주기는 해도 돌아올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리시가 엘디를 돌아보자, 엘디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몰라. 쟤 한 번 저렇게 나가면 이틀 내내 저러고 다닐 때도 있거든.”

“왜 진작 말 안 했어?”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제대로 설명해주면 입술이 부푸는 병이라도 걸렸어?”

“어떻게 알았지?”

리시는 엘디를 흘겨본 후, 밖으로 뛰어나갔다.

다행히 토미는 아까 그 지붕 위에 앉아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불어오는 겨울바람이 춥지도 않은지, 토미는 무척 즐거워 보였다.

단정하게 빗어서 고정시켜뒀던 회녹색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한동안 그렇게 바람을 느끼던 토미가 상체를 낮추고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아무래도 맞은편 건물 지붕으로 뛰어넘으려는 듯했다.

토미가 다칠까 봐 걱정이었다.

“토미!”

거리를 가늠해보던 토미가 리시를 내려다봤다.

리시는 두 팔을 벌렸다.

“이리 와, 토미.”

“뉴님!”

그러자 토미가 방향을 바꿔 리시를 향해 뛰어내렸다.   토미가 리시에게 닿기 전, 엘디가 리시의 팔을 끌어당기고 자기가 대신 토미를 한팔로 받아냈다.

가볍게 토미를 끌어안은 엘디가 리시를 향해 두 눈을 부라렸다.

“미쳤어, 형수? 저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을 받아주면 크게 다쳐!”

“아…… 미안.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어. 토미가 떨어져서 다칠까 봐…….”

“얘 움직이는 거 봤잖아. 얘는 저기서 뛰어내려도 안 다쳐. 그런데 자기 때문에 형수가 다칠 거라는 생각을 못 한다고.”

“으응…… 미안.”

“하여간 이래서. 어휴, 진짜. 형수는 진짜…… 어휴. 멍충이.”

리시는 할 말이 없었다. 이건 리시의 실수였다.

“뉴님, 뉴님!”

그러는 동안에도 엘디에게 잡힌 토미는 버둥거리며 빠져나오려 하고 있었다.

엘디는 성가시다는 듯 토미의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리더니, 리시에게 말했다.

“형수, 우리 부모님이 진짜로 화났을 때를 본 적이 있어?”

“없는데.”

“정말 무서워. 특히 어머니는…… 하, 말도 마. 눈빛으로 사람 죽인다고 해도 믿어질 정도로 무서워.”

“으응.”

“형수가 나랑 있다가 다치면, 내가 곤란해진다고. 제레시엔도 그렇고, 부모님도 그렇고, 날 가만히 놔두겠어?”

“응, 미안해. 그리고…… 고맙고.”

“뭐? 아, 됐어.”

잔소리를 퍼붓던 엘디가 시선을 피했다.

고맙다는 말을 들으면 허둥거리는 건, 젠과 똑같았다.

리시가 빙그레 웃자, 엘디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 웃어? 지금 이 상황이 웃겨?”

“아니, 젠이랑 참 닮았구나 싶어서.”

“뭐? 미쳤어? 고맙다더니, 그런 망발을 해? 빨리 나한테 사과해. 사과하라고.”

투덜거리는 엘디와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엘디가 다시 토미의 발목에 족쇄를 채우자, 토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리시는 토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눈높이를 맞추고 말했다.

“잘 들어, 토미. 아까 그건 위험해. 정말 위험해. 하지 않으면 좋겠어.”

리시는 토미가 잘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아서,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토미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말했다.

“때찌?”

“그래, 때찌.”

“웅.”

“창문 넘어가서 뛰어다니면 때찌.”

“웅.”

“나랑 같이 다니자. 내 손 잡고.”

리시가 토미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이렇게 손잡고 같이 다니는 거야.”

“때찌?”

“아니, 이건 때찌 아니야.”

“뉴님?”

“손잡는다는 거야. 손.”

“손.”

“응. 손. 이렇게 다녀야 해.”

“뉴님?”

리시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엘디를 올려다봤다.

엘디가 어깨를 으쓱했다.

“난 거기까지였어. 더는 못 해. 애들, 안 좋아하거든. 짐승 같은 건 더 안 좋아하고.”

아까 짐승 같다고 한 걸 마음에 두고 있었나 보다.

“아, 힌트는 하나 줄게. 그림을 그리면서 설명하면 좀 더 이해시키기 편할 거야.”

그동안 그런 방법으로 교육을 시켜왔는지, 엘디가 서랍에서 종이와 펜을 가져다주었다.

리시는 펜을 들고 묵묵히 종이를 내려다보다가 펜촉을 종이에 댔다.

손을 잡고 걷는 리시와 토미, 두 사람의 행복한 표정을 그려서, 이렇게 다니자는 걸 표현할 생각이었다.

리시는 최선을 다했다.

그 최선을 다한 결과물을 보며, 엘디가 물었다.

“그게 뭐야?”

토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때찌?”

 

+++

“이건 나 혼자 볼 수 없지!”

그렇게 말한 엘디가 그림을 빼앗아 도망치는 걸 잡기 위해 달렸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리시가 응접실에 들어갔을 때, 그림은 이미 벽에 걸려 있었고, 그린 일가가 그 앞에 모여 그림을 감상하는 중이었다.

다들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다는 묘한 표정이었다.

리시가 새빨갛게 물든 얼굴로 말했다.

“그게 아니라요…….”

“괜찮다, 리시. 괜찮아. 요새는 이런 그림이 유행이라더구나.”

와이번의 상냥한 음성이 리시를 오히려 부끄럽게 만들었다.

리시는 사람들이 부끄러울 때 왜 쥐구멍을 찾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정말 괜찮아요, 리시. 정 안 되면 새언니가 이걸 유행시키면 되죠.”

젠이 리시를 위로하듯 말했다.

리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유행 같은 거…….”

“액자를 가져와.”

언제 시종을 부른 건지, 케이가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케이! 아니에요, 액자 가져오지 말아요.”

“왜? 이런 그림은 액자에 넣어서 응접실에 걸어두고, 이곳을 방문하는 모두가 감상하도록 해줘야지. 안 그래?”

“옳으신 말씀.”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인 엘디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시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엘디를 쏘아봤지만, 엘디는 ‘뭐가 문젠데? 좋잖아?’라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

얼굴이 빨개진 채 한참을 설득한 끝에야 간신히 그림을 가져올 수 있었다.

토미의 방에서, 케이는 한참을 웃었다.

“그만 좀 웃어요, 케이. 더 웃으면 진짜로 삐칠 거예요.”

“알겠어요, 리시. 하지만 이건 알아줬으면 해요.”

“모르고 싶은데.”

“뭔지 듣지도 않았잖아.”

“알 것 같아서.”

“알 것 같다니 다행이야. 당신 그림은 정말 대단했어. 나는 평생 아버지가 웃음을 참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하시는 걸 본 적이 없거든.”

“……아버님이 즐거우셨다니 다행이네.”

알콩달콩 대화를 나누는 둘을, 토미가 눈을 또록또록 굴리며 지켜봤다.

케이가 토미를 보며 싱긋 웃자, 토미가 콧등을 찡그리고 이를 드러냈다.

“얘는 왜 나한테는 안 웃어주는 거죠?”

“엘디 말로는 보통은 잘 안 웃는다더라고요. 아까 날 보고 웃어서 깜짝 놀랐대요.”

“호오. 밀당을 아는 녀석이군요. 도전 정신이 불타게 만드네요.”

“당신을 보면서 웃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예뻐하는 녀석이니, 나한테도 예쁜 녀석이거든.”

케이가 손을 뻗었다.

리시는 토미가 전처럼 손을 깨물려고 할 줄 알았지만,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다.

토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케이가 물었다.

“이 녀석이 그림으로 설명해줘야 잘 알아듣는다는 거죠?”

“그렇대요. 그림 잘 그려요?”

“기본은 하죠. 어릴 때 잠깐 배웠거든요.”

“그럼 당신이 나 대신 좀…… 아, 당신은 바쁘죠.”

“흐음.”

케이는 리시와 토미를 번갈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케이가 입을 열었다.

“이럴 때 쓸만한 성유물이 하나 있기는 한데…….”

“정말요? 그럼 내가…….”

“잠깐, 잠깐. 그렇게 달려들지 마, 리시. 애도 있는데.”

“케이이.”

“키스해달라고 이렇게 조르는 거면 좋겠는데.”

“그런 소리 좀 하지 마, 애도 있는데.”

케이와 리시는 토미에게 잘 자라고 인사한 후, 둘의 침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케이는 쓸만한 성유물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하이르신의 깃펜이라는 건데…… 사실 이게 얼마나 유용한지는 몰라요. 사용하지 않은 지 꽤 오래돼서, 전설로만 남아 있거든.”

위대한 화가 하이르신이 쓰던 깃펜.

하이르신은 굉장히 오래전에 살던 사람이라서, 그가 그린 그림은 딱 한 점만 남아 있었다.

“하이르신의 사후 제자가 물려받았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서 전해지게 된 거예요. 처음에는 큰 문제가 없었어요. 그 깃펜을 사용하면 그림이 더 잘 그려진다거나, 영감이 잘 떠오른다거나, 그 수준이었는데…… 갈수록 위험해진 거죠.”

며칠 밤낮을 먹지도, 자지도 않고 그림만 그리는 상태가 된다.

“나중에는 그 깃펜이 근처에만 있어도,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구를 참지 못하게 된 거예요. 그 깃펜이 있던 마을의 사람들이 광기에 젖어서 그림을 그려대는 모습이, 정말 공포스러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요.”

“지금도 그렇게 위험한 건 아니죠?”

위험하다면 케이가 말을 꺼냈을 리 없었다.

“내 증조부께서 제압해두셨죠. 문제는 우리 증조부께서 술을 조금 좋아하셨는데…….”

“그런데요?”

“술김에 그걸 술친구한테 선물로 줘버렸다는 거죠.”

“……그 술친구가 누군데요?”

케이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피아몬도 대공.”

(118) 깃펜의 영광

물론 밀란시스 피아몬도가 아닌, 그의 증조부 피아몬도 대공을 이야기하는 거였다.

“그게 성유물이라는 걸 대공도 아나요?”

“그건 잘 알려진 성유물 중 하나예요. 신성국 쪽에서도 알고는 있는데, 모르는 척해주고 있죠. 딱히 위험한 것도 아니고, 쓸모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뭐, 대신전에 벽화가 필요하면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지만.”

“대공이 빌려줄까요?”

“음…… 지금 그게 피아몬도 가의 가보라서요. 그 녀석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네요.”

케이가 먼저 성유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건, 요새 리시가 너무 울적해 보이기 때문이었다.

리시가 성유물을 사용하는 일은 절대 없게 하려고 했는데, 리시를 잠시라도 울적함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수만 있다면,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리시의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보니, 얘기를 꺼내보길 잘했다.

“대공이 이번 파티에 오죠?”

“그렇더라고요. 그 녀석은 자기 영지에서나 파티를 열 것이지.”

“좋은 사람이에요.”

“뭐, 그렇긴 하죠.”

“내가 대공께 부탁해볼게요.”

“내가 해도 돼요, 리시.”

“아니, 내가 할게요. 내게 필요한 거니까.”

파티는 닷새 후였다.

젠이 이미 모든 준비를 해놨지만, 리시는 리시대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아르헨을 만나서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했고, 무사히 도착한 쟈메트 상단의 물건을 일일이 확인했으며, 파티 때 그 물건들을 선보일 준비를 했다.

그러는 틈틈이 토미를 찾아가서 시간을 보내고, 가우저에게 투자처에 대한 설명을 듣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케이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토벌을 위장해서 성유물이 있을 만한 곳에 확인을 보낸 부하들에게 보고를 받고, 아직 찾아내지 못한 수인이 있을 만한 곳을 알아봐야 했다.

그러는 중에, 2황자 곁에 남은 클로이에게서 전신이 왔다.

[생선 얻어먹음. 다행히 구운 생선.]

2황자가 딱히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나 보다.

이번 파티 때는 암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렇게 그린 공작 부부가 바쁘게 지내는 와중에, 하녀 한 명이 살금살금 돌아다녔지만, 그걸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파티 하루 전.

리시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밀란시스 피아몬도 대공이 그린 저택에 도착했다.

 

+++

“기다렸어, 미르.”

케이와 리시는 저택 앞까지 나가서 미르를 맞이했다.

마차에서 내린 미르가 환하게 웃으며 케이를 끌어안았다.

“자네가 날 이렇게까지 환대해주다니. 우리의 우정이 전보다 뜨거워진 것 같아서 기쁘군!”

케이는 다른 때라면 매몰차게 미르를 밀어냈겠지만, 부탁할 것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미르가 원하는 만큼 안겨 있었다.

한참 케이의 등을 두드리며, 이 뜨거운 환대에 대해 기쁨을 표현한 미르가 이번에는 리시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볼 때마다 아름다워지십니다, 공작부인.”

“감사해요, 대공.”

그들은 천천히 걸어서 본채로 향했다.

케이는 미르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그가 하는 헛소리를 열심히 귀담아들었다.

미르가 하는 이야기는 보통 이랬다.

백조를 스무 마리 정도 나란히 호수에 띄우면, 그 위에 누워서 뱃놀이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까마귀는 반짝이는 걸 좋아해서 보석을 자주 훔쳐 가는데, 까마귀를 백 마리쯤 훈련시키면 세상 보석을 다 가져오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요새 작은 케이크 안에 반지를 넣어서 청혼하는 게 유행이라던데, 여자가 모르고 먹어버려서 목에 걸려 죽으면 그건 살인인가, 아닌가.

미르가 꺼낸 주제를 두고 격조 높은 토론을 하며, 드디어 응접실에 도착했다.

응접실 문이 닫히자마자, 미르가 지팡이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그래서? 내게 부탁할 것이 뭔가, 케이?”

“……다행이야. 내가 호의를 보여줄 때 부탁할 게 있기 때문이라는 걸 짐작할 만한 머리는 있어서.”

“하하하하. 그게 무슨 서운한 소린가, 케이. 이래봬도 아카데미에서 늘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네.”

“그리고 교수들을 미치게 만들었지. 지금 나도 미칠 것 같고.”

케이가 리시에게 눈짓했다.

리시는 이제 자신이 나설 차례라는 걸 깨닫고 미르의 앞에 공손히 섰다.

“피아몬도 대공.”

“오, 리시. 케이가 아니라 공작부인이 내게 부탁이 있었던 거군요. 괜찮으니 편히 말씀하세요. 우리는 친구 아닙니까, 친구.”

“네, 그렇다면 미르. 제게 피아몬도 가의 가보를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미르의 눈이 커지는 걸 보며 리시는 긴장했다.

역시 너무 무례한 부탁을 한 걸까?

미르가 케이를 돌아보며 작게 속삭였다.

“케이, 우리 집 가보가 뭐지?”

“……미르. 그거 있잖아. 그…… 깃펜.”

“깃펜……? 아! 이거 말인가?”

미르가 품에서 깃펜을 꺼내자, 이번에는 케이의 눈이 커졌다.

“미르! 그건 성유물이야. 그런 식으로 막 가지고 다니면 안 돼.”

“벌써 몇 년째 가지고 다니는데도 별문제가 없던데. 아무래도 자네 증조부 실력이 너무 좋아서, 힘이 완전히 사라진 모양이야. 아, 그래도 필감이 좋기는 하더군. 그래서 사인할 때 주로 이용하고 있지.”

성유물을 사인할 때 사용하다니.

케이와 리시는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었다.

“이걸로 사인하면 평소보다 멋진 사인이 가능해. 보겠나? 종이 가져와보게.”

“아니, 됐어. 보고 싶지 않아.”

케이가 왼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내놔.”

“내 거야.”

“그런 식으로 쓸 거면 내놔.”

“그런 식이라니. 이 몸의 사인을 할 때 쓰는 건데, 깃펜으로서 그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내가 그 깃펜에게 더한 영광을 줄 거니까, 내놔.”

“대체 어디에 쓰려고 그러나?”

케이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미르의 시선을 받으며 한참 입술을 달싹거리던 케이가 결국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애 가르칠 때 쓰게.”

미르는 ‘애 가르칠 때 쓴다.’는 점을 비웃지 않았다.

오히려 무척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이를 가르치는 건 중요한 문제지. 아이는 국가의 미래니까.”

“……응.”

“좋아! 주겠네!”

“아뇨, 빌려주시기만 해도…….”

묘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리시가 끼어들자, 미르가 사람 좋게 웃었다.

“리시, 부인이 직접 아이를 가르칩니까?”

“네, 해보려고요.”

“그거 정말 좋은 일입니다. 잘 배운 아이가 성장해서 나라를 끌어갈 인재가 되는 거지요. 이 깃펜도 더욱 영광이라 여길 겁니다.”

미르가 리시에게 깃펜을 내밀었다.

리시는 깃펜도 고마웠지만, 그보다 더 고마운 점이 있었다.

방금 미르의 말이, 리시가 해야 할 일을 하나 더 알려줬기 때문이었다.

“고마워요, 미르.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미르와 잠시 시간을 보낸 후, 리시는 케이와 방으로 돌아가면서 말했다.

“미르 덕분에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어요.”

“어떤 생각?”

“아카데미를 설립해야겠어요.”

리시가 복도를 걸어가면서 케이에게 전하는 말을, 창문을 닦던 루지나는 귀담아들었다.

루지나는 그날 일과가 끝나자마자 시내로 나가서, 스티무어 제국 어느 저택을 목적지로 편지를 보냈다.

황태자 드웨인이 비밀리에 마련한 그 저택에는 데니슨 위틀로가 살고 있었다.

데니슨 위틀로의 손에 들어간 편지는, 안전하게 브리트니에게 전해질 것이다.

지금까지 루지나가 보낸 편지가 모두 그랬듯이.

+++

곧 파티가 열리기에, 깃펜을 사용해볼 시간은 없었다.

손님들이 온 상황에서 깃펜을 사용했다가, 슬리브 스톤 때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린 공작가에서 열리는 신년 축하 파티에는, 의외로 많은 귀족이 참석했다.

초대장을 받은 귀족 대부분이 참석한 것이다.

넬라니커스 제널 백작 부인 덕분이었다.

제널 백작 부인이 그린 공작 가의 파티에 참석 의사를 밝혔기에, 그녀의 눈에 들고 싶어 하는 귀부인들은 파티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귀부인들의 남편들도 케이와 척을 져서 좋을 게 없기에, 순순히 아내의 말을 따라서 파티에 참석했다.

그 파티에서, 귀족들은 새로운 음료를 맛보았다.

우유가 듬뿍 들어가고 생크림을 잔뜩 올린 음료.

그것은 쌉쌀하면서도 달콤하고 고소한 맛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서, 아무리 마셔도 질리지 않았다.

게다가 케이크 같은 달콤한 디저트와 함께 먹으면 그 깊은 풍미가 더 진해졌다.

귀부인들은 리시에게 도대체 이 맛있는 음료가 무엇이냐고 물었고, 그것이 ‘커피’라는 놀라운 대답을 들었다.

“커피가 이렇게 맛있다고요? 제가 들었을 때는 무슨 구정물 들이키는 맛이라고 했었는데.”

“저는 실제로 마셔봤어요. 정말…… 그 맛이 다음 날까지도 남더라고요. 끔찍한 맛이었거든요.”

“이게 우유랑 크림을 넣어서 이렇게 맛있어진 건가요? 다른 건 넣지 않아도 되고요?”

그린 공작부인께서는 상냥하게도, 모두에게 ‘맛있는 커피’의 레시피를 알려주었다.

아르헨 찻집의 주인인 아르헨이 직접 나와서 만드는 법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커피 원두를 그라인더에 넣고 도로록도로록 가는 모습을, 파티에 참석한 귀족들은 오페라라도 감상하듯 지켜봤다.

“향이 좋네요.”

“그러네요.”

원두가 갈리면서 나는 향기에, 귀족들은 흡족해했고, 투명한 잔에 담긴 까만 액체에 우유를 부어서 몽글몽글한 느낌의 갈색으로 변할 때는 감탄사까지 내뱉었다.

“공작부인. 커피 말고 또 새로운 요리는 없나요?”

미식가로 알려진 백작 부인의 질문에, 리시는 새로운 디저트를 내왔다.

홍차 잎을 갈아서 넣고, 여러 특별한 재료를 넣어서 만든 부드러운 쿠키였다.

“이 레시피는 알려드리기가 힘들어요. 하지만 구입할 수 있는 곳을 안답니다. 늘 신선한 쿠키와 케이크를 판매하죠. 조금 비싸고, 하루에 정해진 양만 팔아서 구하기 조금 힘들긴 하지만요.”

비싸고 구하기 힘든 것.

한마디로 특별한 것.

그것이야말로 귀족들이 원하는 것이었다.

그날 파티에 참석한 귀족들은, 그린 공작부인이 직접 준비한 선물을 한 아름씩 들고 돌아갔다.

커피 원두와 그라인더, ‘맛있는 커피’의 레시피와 특별한 디저트를 구할 수 있는 ‘아르헨의 찻집’이라는 정보까지.

커피 원두를 담은 예쁜 봉투에는 ‘아르헨의 찻집 : 포레스트 상회’라는 글씨가 찍혀 있었다.

돌아가는 마차에서, 귀부인들은 남편에게 말했다.

“그린 공작부인은 배포도 좋으시네. 그런 특별한 레시피를 모두에게 알려주시고.”

“다른 사람 같으면 디저트 파는 곳을 혼자만 알고 있을 텐데, 모두에게 알려줘서 깜짝 놀랐지 뭐예요.”

“다음 파티에는 아르헨의 찻집이라는 데서 디저트를 준비해야겠어요. 분명 유행이 될 텐데,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죠.”

“오늘 파티에 참석하길 잘한 거 있죠. 얼른 티파티를 열어야겠어요.”

 

+++

피아몬도 령으로 돌아가는 미르의 마차에는 보좌관 레인게일도 함께 타고 있었다.

보통 보좌관이 주인의 마차에 함께 타는 일은 거의 없지만, 미르는 그런 면에서 자유로운 편이었다.

물론 레인게일에게는 전혀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

고용인 마차를 타고 가는 편이 훨씬 편하고 자유롭고 조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왠일인지 미르가 조용하다.

미르는 마차 창문에 팔꿈치를 대고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계속 조용하실 분이 아니야. 곧 뭔가 이상한 걸로 토론을 시작하시겠지.’

레인게일의 예상대로, 미르가 입가에 미소를 띠고 레인게일을 돌아봤다.

“그린 공작부인은 아주 영리해.”

미르의 마차에는 리시에게 받은 선물이 실려 있었다.

‘아르헨의 찻집 : 포레스트 상회’가 찍힌 봉투와 그라인더.

“케이가 정말로 대단한 아내를 얻었어.”

“……그런가요?”

“그래. 내가 예언 하나 할까, 레인?”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전하.”

“아이리스 그린은 머지않아 세상을 자기 발아래에 두게 될 거야.”

“헉!”

레인게일이 헛숨을 들이켰다.

우리 대공 전하께서 오늘은 어쩐 일로 조용하신가 했다.

그린 공작부인이 황제에게 반역할 거란 소리를 이렇게 쉽게 하시다니.

하얗게 질린 레인게일을 보며, 미르가 말했다.

“흐름이 바뀔 거야. 우리도 준비해두는 게 좋겠어.”

(119) 먹고 싶어?

근래 가장 크게 준비했던 파티가 끝나고, 케이의 가족들까지 돌아가고 난 후에야, 그린 공작 저는 평소의 조용한 분위기를 되찾았다.

그럴 때에 케이는 랜디를 불렀다.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케이를 보며, 랜디는 마른침을 삼켰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저택에 들어온 후, 랜디는 온 힘을 다해 리시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나 보다.

한편으로는 자포자기하는 심정도 있었다.

그래,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사랑한 게 죄라면 죄겠지.

리시를 사랑하게 되어서 위틀로 공작가를 쫓겨나 그 모진 수모를 당했고, 이제는 케이의 곁에도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케이에게 항변하고 싶었다.

사랑했었다고.

어린 마음에 주제도 모르고, 한 여인을 사랑하고 말았노라고.

그 이유로 쫓겨나 부모님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어도, 그 마음 지울 수 없어서, 나 역시도 괴로웠노라고.

그러나 나를 절망에서 구해준 당신을 향한 이 충심만은 진심이라고.

그리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을 말해도 이 상황이 변치 않으리라는 걸, 랜디는 알았다.

나였어도 그랬을 테니까.

내가 구해준 놈이 내 아내를 사랑하고, 연심 가득한 눈으로 지켜본다면, 나 역시도 배신감을 느껴, 곁에 두기 싫었을 테니까.

오랜 침묵에 숨이 막혔다.

케이는 랜디를 지그시 응시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랜디는 이 침묵을 깨뜨리고 싶었지만, 입을 여는 순간 변명의 말들이 흘러나올 것 같아서 참았다.

허벅지 위에 놓인 주먹에 힘이 들어간 채로, 케이의 입술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렸다.

묵직한 고요의 시간이 한참 흐른 후, 케이가 입을 열었다.

“랜디, 할 이야기기가 있어.”   그날, 랜디와 케이가 대화를 나누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그린 저택의 고용인들 사이에는 묘한 소문이 돌았다.

케이가 데려온 랜디라는 부하가 리시에게 묘한 눈빛을 보낸다더라.

리시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다가 눈이 마주치면 흠칫 놀라 도망친다더라.

리시를 붙잡고 싶은 듯 손을 올렸다가 내리기를 반복한다더라.

랜디와 리시가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였다더라.

랜디의 이름이 사실은 라포드 휘튼이라고 하더라.

그런 소문이 무르익었을 때, 케이는 랜디를 저택에서 내보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루지나의 편지에 곱게 적혀, 브리트니의 손에 들어갔다.

+++

요새 브리트니는 살판났다.

시녀와 시종들 사이에서 황태자비 에버렛이 브리트니의 눈치를 본다는 소문이 돌아, 그들의 대우가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브리트리를 향해 멸시의 시선을 보내던 귀족 중에서도, 이제는 브리트니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접근하는 자들이 생겼다.

브리트니가 스티무어 황궁에 들어온 지 반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새로운 여자에게 금방 질릴 줄 알았던 드웨인은 여전히 브리트니의 방만 찾았고, 에버렛은 그에 대해 항의조차 못 하는 상황이었다.

드웨인이 쉽게 이혼하지는 못하겠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황태자비가 유명무실하게 그 자리만 지키고, 실제 권력은 브리트니가 쥐게 될지도 모르기에, 발 빠른 자들은 조용히 브리트니 쪽으로 밑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덕분에 브리트니는 각종 진귀한 선물을 받아서 금고를 채워 넣을 수 있었다.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돈을 더 이상 사치하는 데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이리스라면 이 돈으로 드레스 같은 걸 사지 않았겠지.’

그래서 드웨인에게 선물 받은 드레스만 입으며 지냈더니, 어느 날 드웨인이 물었다.

“요새 선물이 많이 들어온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그중 마음에 드는 게 없나?”

“왜 없겠어요. 모두 마음에 들지만, 잘 두었다가 언젠가 전하께 필요한 일이 생기면 쓰려고 하죠. 더 좋은 일에 쓰고 싶기도 하고요.”

드웨인은 브리트니의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대는 사치를 모르는군. 정말 현명한 여인이야. 어떻게 가비자르 사람들은 이렇게 현명한 여인을 몰라보고 그런 누명을 믿은 거지?”

브리트니가 리시를 따라 하면 따라 할수록, 드웨인은 점점 더 브리트니에게 빠져드는 듯했다.

역시 리시처럼 살기로 한 게 정답이었다.

브리트니의 서랍에는 루지나에게 받은 편지들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오늘 또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브리트니는 편지에 적힌 이름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라포드 휘튼? 라포드 휘튼이 살아 있었다고? 그것도 아이리스 옆에 뻔뻔하게? 하!”

오랜만에 짜증이 치밀었다.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 그 모멸감이 떠올라 속이 끓었다.

최근에는 ‘아무것도 안 하고 이대로 사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어려운 일은 황태자비한테 맡겨두고, 나는 그냥 사랑이나 받으면서 살아도 되잖아.’라는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하지만 라포드 휘튼의 이름을 보는 순간, 리시를 향한 증오심이 다시 불타올랐다.

역시 아이리스만큼은 이대로 놔두고 싶지 않다.

내가 느낀 모멸감과 절망을, 아이리스도 똑같이 느꼈으면 좋겠다.

예전이었다면 이 내용을 여기저기 떠벌리며 소문을 한껏 부풀렸을 테지만, 이제 브리트니는 그런 짓을 해봐야 큰 타격을 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리스라면 이런 정보를 알았다고 해서 곧바로 사용하지는 않았을 거야. 분명 쓸만한 때가 오기를 기다렸겠지.’

입이 근질근질하지만 참아야 한다.

브리트니는 그 편지도 서랍 속에 넣은 후, 자물쇠를 잠갔다.

+++

“이제 마음의 준비가 됐어요.”

2월이 시작되는 날, 케이가 큰 결심을 했다.

“이 깃펜을 써보도록 하죠.”

깃펜을 쓰는 건 리시인데, 왜 케이가 저렇게까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나 싶었다.

사실 파티가 끝나자마자 깃펜을 사용해보고 싶었는데, 케이가 자꾸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됐어요, 리시.”라고 말하는 통에, 미루고 또 미뤄왔던 것이다.

그 자리에는 케이와 리시뿐 아니라, 만약의 사태가 벌어질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 케이의 그림자들도 함께였다.

그들은 회의용 긴 테이블을 앞에 두고 서서, 테이블 위에 덩그마니 놓여 있는 깃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들이 하나 같이 얼마나 비장한지, 리시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동안 마나를 다루는 법, 많이 연습했어요. 잘할 수 있어요.”

리시의 말에 유진이 입을 열었다.

“엘디에게 형수님에 대해 들은 게 하나 있습니다.”

“……멍충이라던가요?”

“네.”

“하아.”

리시가 한숨을 내쉬자, 유진이 덧붙였다.

“괜찮습니다, 형수님. 대장도 멍충이니까.”

케이가 유진을 노려봤지만, 유진은 무시했다.

“형수님이 애 가르치는 것 때문에 성유물을 사용하게 만들다니…… 저는 역시 반대입니다. 성유물이 유용하기는 해도 그걸 과용해서 좋은 꼴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괜찮아 보여도 나중에는 미치거나 기력이 쇠해서 죽죠. 경우에 따라서는 주변 사람들을 휘말리게 하기도 하고. 저는 형수님이 걱정됩니다.”

리시는 유진의 마음을 이해했다.

하지만 이 부분만큼은 고집을 좀 부리고 싶었다.

앞으로 벌어지는 여러 사건 중, 성유물을 사용하면 더욱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사건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사건들이 벌어지는 시기가 오기 전에, 유물술사로서의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고 싶었다.

“한 번만 날 믿어봐요, 유진.”

“물론 형수님을 믿습니다. 이건 걱정입니다.”

“걱정도 결국 믿지 못하는 마음에서 생기는 거죠.”

“아니요, 형수님. 애정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아.”

리시는 얼굴을 붉혔다.

케이의 부하들까지도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애정을 보여주는 게 기뻤다.

너무 기뻐서, 미안하고 창피했다.

저 감정들도 귀걸이가 만들어낸 것일 텐데.

저들이 원하지도 않는 감정을 느끼게 해놓고 기뻐하다니.

“고마워요, 유진. 하지만…… 해보고 싶어요.”

“형수님이 실패해도 형수님 탓은 아닙니다. 원래 성유물은 다루기 힘든 거니까.”

어쩜 저렇게 케이와 똑같은 말을 하는지.

어쩜 행운의 귀걸이라는 그 귀걸이는 이토록 강렬한지.

리시는 애써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할게요.”

리시가 깃펜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다들 숨을 멈추고, 리시의 작은 손이 깃펜을 잡는 걸 지켜봤다.

리시는 그들이 말리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있다는 걸 알았다.

‘잘할 수 있어.’

리시는 깃펜을 종이 위에 대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잘할 수 있어.’

미르는 깃펜이 힘을 잃은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리시는 깃펜을 손에 쥐는 순간, 그 안에서 조용히 숨 쉬는 예술가의 혼을 느꼈다.

혼, 혹은 상념, 기억. 그 무엇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았다.

분명한 것은, 깃펜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점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

깃펜이 속삭이는 듯했다.

‘그림을 그려. 네 혼을 불태워서.’

깃펜 안으로 무언가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슬리브 스톤 때처럼 격렬하게 끌려들어가는 느낌.

‘아니.’

하지만 리시는 썰물처럼 빠져나가려는 자신의 힘을 붙잡았다.

‘내 혼을 불태우지는 않을 거야. 내가 원하는 만큼. 내가 원하는 대로.’

깃펜이 움직였다.

‘딱 그 정도만 그릴 거야.’

사삭- 사삭- 사삭-

하얀 종이 위를 깃펜이 춤추듯 움직였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깃펜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봤다.

특히 케이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힘이 거의 안 느껴져.’

성유물이 힘을 발휘하면, 케이는 그 힘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자연스러운 것과는 사뭇 다른, 이질적인 힘.

지금 깃펜은 분명히 자신의 힘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종이 위에 그려지는 그림이 저토록 근사할 리 없으니까.

하지만 집중하지 않으면 깃펜의 힘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흘렀다.

성유물을 잘 다룰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던 리시가 그 일에 성공한 것이다.

이윽고 깃펜이 움직임을 멈췄다.

리시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리시는 완성된 그림을 테이블 가운데로 쭉 내밀었다.

하얗던 종이 안에 그린 저택이 담겨 있었다.

흑백인데도 색이 느껴질 정도로 생동감 넘치는 그림.

“어때요? 나, 좀 괜찮죠?”

 

+++

리시가 깃펜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토미의 예절 교육이 더 쉬워졌다.

엘디의 말대로 그림을 그려서 설명하니, 토미는 잘 알아들었다.

사물이나 행동을 가리키는 단어도 전부 그림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가우저가 이번 달 수입과 투자 관련 사항을 보고하러 왔을 때, 리시는 토미에게 ‘좋아해.’라는 감정을 설명해주는 중이었다. 가우저는 토미를 흘끔거리며 포레스트 상회의 수입에 대해 보고했다.

“아이리스 님 예상대로 아르헨의 찻집에서 상당한 수익을 내고 있습니다. 커피와 그라인더가 아주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어요.”

파티에서 커피를 마시고 돌아간 귀족들은, 티파티를 열어 리시에게 받은 선물과 레시피로 커피를 만들어서 대접했다.

커피 맛을 알게 된 다른 귀족들이 커피 원두와 그라인더를 구하려고 했지만, 평범한 상점에서는 판매하지 않았다.

취급하는 행상인이나 상단도 없었다.

오로지 ‘아르헨의 찻집’에서만 구할 수 있었다.

‘아르헨의 찻집’ 본점이 있는 다코트 시와 분점을 오픈한 몇 개의 도시에 귀족의 심부름꾼들이 드나들면서, 그 도시에 있는 여관과 식당이 호황을 이뤘다.

물론 아르헨의 찻집에서 커피 원두를 다량 구매해, 귀족들을 방문하며 더 비싼 가격에 판매하려는 중간업자가 생겨났지만.

“커피 원두는 오래 묵혔다가 드시면 향이 옅어지고 맛이 떨어진답니다.”

아르헨의 설명을 들은 심부름꾼이 제 주인에게 그대로 전하고, 그 주인들이 다른 귀족들에게 알리면서, 다들 최대한 빠르게 커피 원두를 구하고 싶어 했다.

여러 귀족이 영지의 땅을 저렴하게 빌려줄 테니, 아르헨의 찻집 분점을 내달라고 요청해왔고, 아르헨은 리시의 허락을 받은 후 요청을 수락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생겼는데, 스티무어에서 통행세를 올렸다고 합니다. 두 배로요.”

“흐음.”

놀랍지는 않았다.

브리트니가 스티무어에 있으니, 스티무어 쪽에서 뭔가 행동에 들어올 거라고 예상했다.

“두 배 정도는 괜찮아요. 세 배까지 올리면, 그때 다시 보고해줘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목욕탕 쪽 사업은 아직 적자이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쉽게 흑자로 돌아설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요.”

“또 저번에 말씀하셔서 투자한 제므리크 상단 쪽에서, 상당한 배당금이 들어왔습니다. 이 덕분에 목욕탕 쪽 적자는 메울 수 있었고요.”

“음…… 그래요. 그럼 같은 금액을 더 투자하도록 하세요. 아카데미 쪽은 어떤가요?”

“일단 주요 과목 교수들은 섭외해뒀습니다. 교양 과목 교수들도 어느 정도 구성이 되긴 했는데, 더 찾아봐야 할 듯하고요. 부지는 정리하는 중이니, 조만간 건축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아무리 빨라도 반년 이상이 걸릴 듯하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반년. 음…… 일단 건축만 해두고 개교 일자는 좀 더 고민해보죠.”

리시와 가우저가 대화하는 동안, 토미는 눈을 또록또록 굴리며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벌인 사업이 많아서 가우저가 고생이 많아요.”

“아닙니다, 아이리스 님. 곁에서 보좌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마주 보고 미소 짓는 둘을 보며, 토미가 물었다.

“뉴님. 가우저, 좋아해?”

“응, 좋아하지.”

그러자 토미는 리시가 그려준 그림들을 쭉 확인했다.

그 그림 중에는, 토미가 사과를 먹는 그림이 있었다.

리시는 토미가 사과를 자주 먹고 싶어 하는 게 ‘좋아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고개를 든 토미가 물었다.

“뉴님. 가우저 먹고 싶어?”

(120) 너무 미워하지 마.

 

“그때 마침 공작님이 딱 들어오시는 바람에 어찌나 식은땀이 나던지…… 수명이 반은 줄어든 것 같다니까.”

가우저의 말을 들으며, 랜디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저택에서 쫓겨난 랜디는 공작령 경계의 초소를 담당하게 되었다.

험준한 산에 있는 초소라서 위험한 일은 거의 없지만, 찬바람이 매서운 곳이었다.

랜디는 바쁠 텐데도 간간이 찾아와서 소식을 전해주는 가우저에게 고마웠다.

“그래, 여기서는 지낼 만한가?”

“네, 좋습니다. 이보다 더한 곳에서도 살았었는데요.”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게. 내가 힘닿는 데까지 도와줄 테니.”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가우저는 섧게 미소 짓는 랜디가 안쓰러웠다.

위틀로 저택에서 쫓겨난 휘튼 일가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기에, 더욱 그랬다.

그렇다고 케이를 원망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부하가 자신의 아내에게 정을 품었다는 소문이 도는데 그대로 저택에 남겨둬봐야, 케이에게도 리시에게도 좋을 것이 없었다.

돌아가는 가우저를 배웅하기 위해 나온 랜디는, 고개를 들었다가 하늘을 나는 독수리를 발견했다.

다른 독수리보다 조금 더 커다란 크기의 독수리.

그 독수리가 허공을 크게 선회해 그린 공작 저택 쪽으로 향하는 것을, 랜디는 한참 지켜보다가 돌아섰다.

+++

라코젠은 허벅지에 누운 검은 고양이를 쓰다듬어주며 샤린트 백작의 보고를 받았다.

“황태자가 에오르트 왕국의 베기스 후작의 영애랑 약혼할 것 같단 말이지…….”

“네, 전하. 전하께서도 이제 얼른…….”

라코젠이 손을 들어 샤린트 백작의 말을 막았다.

라코젠은 검은 고양이의 머리를 손끝으로 긁어주며 생각에 잠겼다.

이오벳은 분명 리시에게 어떠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자신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속절없이 빠져들어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황.

보이지 않는 힘이 뇌를 주물러서, 이성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

‘결혼으로 도망치려는 건가, 이오벳?’

생각해 보면, 이오벳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다.

결혼해서 아내를 옆에 두고, 리시에 대한 마음을 접기 위해 노력하는 것.

하지만 라코젠은 이오벳처럼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리시가 황족의 뇌에 수작질을 부린 죗값을 톡톡히 치르는 걸 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황태자 쪽에 내 사람이 얼마나 있지?”

“전하께서 명하시는 걸 실행에 옮길 수 있을 정도는 됩니다.”

“이번에 그린 령으로 가는 인원에 포함시킬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전하. 그런데 왜 그러시는지……?”

“그린 공작부인을 죽여야겠어.”

“예?”

상상도 못 한 말에 샤린트 백작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우리 2황자 전하께서 가끔 미친 행동을 하기는 하시지만, 지금은 선을 넘는 말씀을 하셨다.

“저, 전하. 그린 공작부인을 죽이신다니……. 왜 그러시는지……?”

“그 여자, 아주 위험하거든.”

“아…… 어떤 부분이……?”

“그런 게 있어.”

샤린트 백작은 당혹스러웠다.

케이가 리시와 결혼한 후, 여러 이야기의 중심에 리시가 있었던 적이 많기는 했다.

게다가 요새는 리시가 운영한다는 ‘포레스트’인지, 뭔지 하는 것이 대륙 곳곳에 바퀴벌레처럼 생겨나고 있기도 했다.

‘아르헨의 찻집’이 성공한 덕에, 귀부인들 사이에서 리시의 평가가 바뀌기는 했지만, 아직도 몇몇 귀족들은 리시를 ‘돈독 오른 여자’라고 표현했다.

샤린트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리시는 위험할 것도, 주의할 것도 없는, 그저 돈독 오른 여자일 뿐이었다.

리시를 경계해야 하는 쪽은 오히려 그린 가문이었다.

성유물의 수호자로서 명망 있는 가문에 독돈 오른 여자가 들어오는 바람에, 그린 가문 전체의 명예가 떨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난데없이 라코젠이 리시를 죽이고 싶어 한단 말인가.

“하지만 전하. 그린 공작이 자기 부인을 얼마나 아끼는지 못 들으셨습니까? 공작부인을 건드렸다가는 그린 가문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될 겁니다.”

“샤린트 백작. 지금 이 몸이 그린 공작의 눈치를 봐야 한다고 말하는 건가?”

“그, 그런 것이 아니라…… 나중에 전하께서 높은 자리에 앉으신다 해도, 그린 가문의 힘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유물의 힘을 억누를 수 있는 게 그린 가문뿐만은 아니야.”

“그린 가문만 한 곳이 없습니다, 전하.”

라코젠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분노를 참는 듯했다.

하지만 고양이를 쓰다듬는 손길만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샤린트 백작은 자신이 저 고양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이제부터 폭발할 라코젠의 분노를 고스란히 뒤집어쓰지 않아도 될 테니까.

“샤린트 백작.”

라코젠이 눈을 감은 채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의 딸이 황궁에 시녀로 들어와 있던가?”

샤린트 백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명을 따르지 않으면 딸을 가만히 놔두지 않겠다는 협박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2황자 라인에 서는 게 아니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전하?”

“해독제를 쓸 시간도 없는 독을 준비해.”

라코젠의 명을 받고 나온 샤린트 백작의 눈에, 보좌관 애덤의 초조한 얼굴이 들어왔다.

“전하께서 뭐라시나?”

“전하께서 왜 자네를 쫓아낸 거지?”

애덤과 샤린트 백작이 동시에 물었다.

애덤이 먼저 대답했다.

“내가 전하 명령을 듣지 않으니, 요새는 날 멀리하시더군.”

“전하께서는 대체 뭐가 문제신가?”

“그린 공작부인을 죽이라고 하시나?”

“자네, 뭔가 아는 게 있나? 대체 무슨 일인 거야?”

애덤은 짚이는 게 있는지 한참 망설이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전하께서 그린 공작부인을 마음에 품으신 것 같네.”

“뭣이라?”

“소리 죽이게. 자네도 저번에 그린 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알 거야. 미나스아릭 공주와의 사건.”

“아……! 그때 그게……“

“그래. 아무래도 가질 수가 없으니 부숴버리시려는 것 같은데…….”

“그게 말이 되나? 상대는 그린 가문이라고. 그러다가 그린 공작의 분노라도 사면…….”

거기까지 말하던 샤린트 백작이 입을 다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샤린트 백작이 말했다.

“아니, 전하 생각이 옳을 수도 있네. 사람 마음을 숨기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 그린 공작부인을 향한 전하의 마음도 언젠가 들통나게 될 거야. 이러나저러나 그린 공작과 적이 되는 건 마찬가지라는 거지.”

“자네까지 왜 이러나?”

“들어보게, 애덤. 그린 공작이 공작부인에게 푹 빠져 있다는 소문이 있어. 공작부인이 죽으면 제정신이 아니겠지. 그럴 때 그린 공작을 쳐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그린 공작은 황태자 쪽이니까.”

“미쳤나? 그린 공작이 누구의 가호 아래에 있는지 몰라서 그래?”

“알지, 알다마다. 그러니 그린 공작을 치기 전에, 교황청 쪽에도 손을 써둬야지.”

“뭐?”

“자네, 모르나?”

샤린트 백작이 애덤에게 속닥거렸다.

애덤의 눈이 커졌다.

“그게 정말인가?”

“그래, 믿을 만한…… 으헉!”

샤린트 백작이 말하다 말고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언제 나온 건지, 라코젠의 검은 고양이가 샤린트 백작의 종아리에 스윽 몸을 문지르고 있었다.

“이, 이건 대체 뭔가? 전하께서는 왜 이런 걸 들이신 거야?”

샤린트 백작이 고양이를 가리키며 짜증스럽게 묻자, 애덤이 대답했다.

“전하 말씀으로는 아무리 쫓아내려도 해도 나가질 않는 성가신 생명체라고 하시더군.”

 

+++

따뜻한 봄바람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잠이 오는 계절이 되었다.

리시는 여전히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바빴는데, 케이가 오랜만에 데이트나 하자는 말에 공작가 근처의 숲으로 놀러 나왔다. 리시의 토미도 함께였다.

토미는 이제 족쇄를 채우지 않아도 위험하게 지붕을 뛰어넘는 짓을 하지 않게 되었다.

리시와 케이는 돗자리에 앉아, 토미가 즐거운 듯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는 모습을 지켜봤다.

“리시. 요번 달 말에, 스티무어 지마튼 시에 위틀로 아카데미가 개교한다더군요.”

케이의 말에 리시는 빙그레 웃었다.

위틀로 아카데미.

그동안 브리트니는 황태후가 되고자 하는 그녀의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몇 달 전, 스티무어의 황제가 서거했고, 황태자였던 드웨인은 문제없이 황제 자리에 앉았다.

문제는 황비 때문에 벌어졌다.

드웨인은 황좌에 앉자마자 황비를 들이겠다고 선언했다.

다들 예상한 바였지만, 드웨인의 다음 말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황비 자리에는 한때 가비자르 제국의 공작이었던 위틀로 가문의 영애, 브리트니 위틀로를 앉힐 것이오.”

브린이 브리트리 위틀로라는 게 알려지는 순간, 스티무어의 황궁은 들썩거렸다.

신하들은 드웨인의 어리석은 선택을 말리기 위해 온 힘을 다했으나, 드웨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린 가문은 내 황비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가비자르 제국은 그 말만 믿은 채 위틀로 가문을 내쳤으니, 앞으로 우리 스티무어가 우호를 표할 수는 없을 것이오! 허나, 황비에게 정식으로 사과한다면, 받아주겠소.”라는 도발까지 하는 바람에, 신하들은 뒤로 넘어갈 지경이 되었다.

나이 지긋한 어느 공작은, 그린 가문과 가비자르 제국을 향한 적대감 표현을 듣고 돌아가서 앓아누웠다는 얘기도 있었다.

하지만 선황이 서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그린 가문과 가비자르 제국까지 도발했는데, 내란이 벌어지는 것은 좋지 않았다.

스티무어의 귀족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드웨인의 편을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스티무어의 도발에 가비자르 제국 황제는 코웃음을 쳤다.

-“멍청한 놈이 황제가 됐으니, 스티무어도 곧 멸망하겠군.”

그린 가문 역시 평온했다.

노공작 내외는 다른 나라를 여행 중이고, 젠은 즐거운 백수 생활을 즐기고 있었으며, 엘디는 신성국에서 아무 생각 없이 기사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교수진이 어마어마하다고 들었어요. 유명한 교수들을 전부 섭외했다던데, 우리 아카데미 쪽은 괜찮은가요?”

“응, 괜찮아요. 내가 섭외하는 교수들과는 조금 다르니까.”

브리트니가 설립한 아카데미는 귀족 자제가 대상이었다.

눈이 돌아가게 호화로운 건물과 기숙사, 그리고 수많은 고용인을 고용해 귀족 가 영식과 영애를 불편함 없이 모실 거라고 광고했다.

리시는 이 모든 사실을 기사에 접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에버렛이 꾸준히 소식을 전해준 덕분이었다.

“브리트니는 잘하고 있는 것 같아요. 루지나가 전해준 정보로 번 돈을 열심히 모으고, 황후에게도 황실 운영비를 투자받았죠. 은행 돈도 조금 빌리고.”

리시는 이미 루지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안 건 아니었는데, 어느 날 나단이 “형수님, 몰래 염탐하는 쥐새끼가 한 마리 있는데, 어떡할까요? 죽일까요?” 하며 알려준 것이다.

그게 루지나라는 걸 알게 되자, 브리트니의 속이 빤히 보였다.

케이가 말했다.

“들려오는 얘기에 따르면, 스티무어의 황비께서 투자하는 족족 돈을 벌어들여, 황비를 마음에 들어하는 신하들도 생겼다고 하더군요.”

리시는 고개를 돌려 케이를 응시했다.

지난 삶, 그런 브리트니를 이용하기 위해 연인이 되었다가 도리어 배신당해 죽어간 남자를 바라봤다.

문득 지난 삶의 케이에게 묻고 싶어졌다.

그렇게 연인이 된 브리트니에게, 잠깐이라도 마음을 품었던 적이 있나요?

계획의 실패보다 그녀의 배신이 당신을 더 상처 입히지는 않았나요?

이제는 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다가 사라졌다.

“브리트니는 항상, 어디서나, 자기 편을 만들어요.”

“당신도 그렇잖아요.”

“아니, 나는…….”

귀걸이의 힘이 아니었다면 내 편을 가질 수 있었을까?

“나는 당신뿐이에요.”

“오, 그 말 좋은데.”

케이가 싱긋 웃는 모습에 가슴이 아렸다.

트리사의 귀걸이가 사람의 감정까지도 조종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리시는 흔들리는 마음을 가까스로 부여잡았다.

모든 것이 귀걸이의 힘 덕분은 아닐 거라고, 그 힘이 끝나도 내 손에 남는 게 있을 거라고, 머리가 아플 정도로 되뇌었다.

그러나 케이를 향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자신을 둘러싼 애정에 익숙해질수록, 두려움이 커졌다.

이번 삶에서 하고 싶었던 건 사랑이 아닌데, 그저 나를 고통에 몰아넣은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 목적을 잘 이뤄가고 있는데.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아버렸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버렸다.

그랬더니 잃고 싶지 않아서, 잃는 것이 두려워서, 매일 밤 악몽을 꿨다.

귀걸이의 힘이 끝나, 케이의 눈동자가 차게 가라앉는 꿈.

손을 내밀어도 잡아주지 않고, 리시가 웃어도 마주 웃어주지 않는 꿈.

케이의 가족들이 등을 돌리고, 케이의 부하들이 비난 섞인 시선을 던지는 꿈.

“케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말이 흘러나왔다.

“언젠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시종이 와서 황태자 일행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리시는 케이와 토미의 손을 잡고 걸어가며, 끝내 하지 못한 말을 삼켰다.

‘케이, 언젠가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무언가를 알게 되더라도, 나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줘요.’

(121) 첫눈에 반해버려서.

며칠 전, 이오벳에게 그린 저택을 방문해도 괜찮겠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리시는 라코젠과 비슷한 이유로 찾아오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저번 신년 파티에서 이오벳은 이트리아를 만났고, 사람이 변한 것처럼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영리한 사람이니까, 자기 머릿속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다는 걸 깨달았을지도 몰라. 라코젠처럼…….’

라코젠은 리시에게 무슨 짓을 했느냐고 묻는 대신 적의를 품고 공격을 감행했지만, 이오벳은 그렇게 대책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이오벳이 이 감정의 변화에 대해 아는 게 있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이오벳에게 방문해도 좋다는 대답을 한 이후로 내내 고민했지만,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 채 그를 상대해야 할 시간이 왔다.

케이와 리시가 응접실에 들어가자, 둘을 기다리던 이오벳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다가왔다.

“케이. 공작부인.”

예상과 달리 그의 말투가 경쾌해서, 그의 눈빛이 상냥해서, 리시는 조금 당황했다.

라코젠처럼 적대감에 찬 눈빛이거나, 경계하는 눈빛일 거라고 예상했었기 때문이다.

이오벳은 무척 즐거워 보였고, 그 모습에서 리시를 향한 의심 같은 건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른 문제로 찾아온 걸까?’

그래도 리시는 긴장을 풀지 못한 채, 케이의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잠깐의 담소가 오간 후, 이오벳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케이, 공작부인과 사업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자리를 피해줄 수 있겠나?”

“얼마든지, 전하.”

케이가 의심 없이 응접실을 나간 후, 리시는 조용히 심호흡했다.

올 것이 왔다.

“공작부인.”

이오벳의 파란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우선 쟈메트 상단 투자 건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덕분에 아무 문제 없이 상단으로 큰 수익을 보고 있죠. 부인이 아니었다면 큰 손해를 봤을 겁니다.”

실제로 라코젠이 투자한 워번 상단은 아무 성과도 내지 않은 채, 투자금만 받고 카보라스 왕국으로 도망쳤다.

카보라스 왕국과 대륙 사이에는 험한 바다인 하비라스 해가 자리 잡고 있기에, 도망친 워번 상단을 쉽게 쫓아갈 수도 없었다.

이 사건으로 2황자의 기반이 크게 흔들렸다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 자리를 지킬 겁니다.”

“네, 그러실 거예요.”

“그리고 또 하나 더. 공작 부인에게 감사하게 여기는 일이 있어요.”

내 감정을 어떻게 쥐고 흔든 거냐고 따질 줄 알았던 이오벳은 자꾸 감사 인사만 했다.

“레이디 위틀로.”

이오벳이 거기까지만 말했기에, 리시는 자기를 부르는 줄 알았다.

그린 공작부인이 아닌 레이디 위틀로.

그렇게 불러서 나와 그 사이의 선을 그으려는 걸까?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리시를 놀라게 했다.

“부인은 내게 레이디 위틀로가 좋지 않다고 했죠. 그리고 위틀로 가문이 그렇게 되어버렸어요. 공작부인이 아니었다면, 나도 여러 가지로 곤란한 처지에 놓였을 겁니다.”

“아……!”

다정하게 빛나는 이오벳의 푸른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진심이었다.

“약속하죠, 그린 공작부인. 내가 무엇이 되든, 어느 자리에 오르든, 나는 공작부인이 나를 도와준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겁니다.”

따지기는커녕, 오히려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겠다고 약속하는 이오벳을, 리시는 멍하게 응시했다.

이오벳이 고른 이를 드러내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 공작부인.”

“네에…….”

“나를 위해 한 가지만 더 조언해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 힘이 닿는 데까지는요.”

“내가…….”

거기까지 말한 이오벳이 얼굴을 붉혔다.

쉽게 말할 수 없는 내용인 듯, 푸른 눈동자가 잠시 허공을 헤매다가 다시 리시에게로 향했다.

“음, 공작 부인에게 이런 얘기를 하기 좀 민망하긴 한데…….”

“무슨 말씀이시기에…….”

“우선…… 아, 흠…… 그게, 아, 음. 그래요. 일단, 그래. 일단…… 사과드리죠. 그래, 그게 우선이겠네요. 민망하긴 해도…….”

“예?”

“예전에…… 내가 공작 부인에게 보였던 행동은, 미안합니다. 그땐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제야 리시는 이오벳이 예전에 그녀에게 감정을 드러냈던 것에 대해 사과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오벳이 그 일에 대해 정확하게 짚고 넘어갈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리시의 얼굴도 빨갛게 달아올랐다.

민망할 정도로 고지식하게 그 사건에 대해 사과를 해올 줄이야.

이오벳은 리시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곧고 정직한 사내였다.

“정말 미안합니다. 나 때문에 마음이 많이 복잡했을 겁니다.”

한 번 사과의 말을 꺼내고 나니 그다음은 쉬운지, 이오벳이 거침없이 말했다.

“그때는 정말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제력이 완전히 사라진 기분이라서……. 아, 인제 와서 이런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것도 실례겠네요. 미안합니다, 공작부인.”

“아, 아니요.”

그 모든 게 당신 탓이 아니라 트리사의 귀걸이라는 성유물 때문일 거예요, 라는 말 따위는 할 수 없었다.

이오벳이 솔직하게 사과를 해오니, 오히려 리시가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정말 괜찮습니다, 전하. 정말로요. 저는 다 잊었는걸요. 정말이에요.”

리시가 몇 번이나 괜찮다고 한 후에야, 민망한 사과와 용서의 자리가 끝났다.

“그래서 조언을 듣고 싶으신 부분은……?”

“아, 그게…… 미리 말하자면 공작부인의 조언이 내 선택을 좌우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래도 알고 싶어서요.”

“네, 말씀하세요.”

“어떤가요, 레이디 베기스는?”

레이디 베기스.

에오르트 왕국의 베기스 공작의 영애 이트리아 베기스.

최근 황태자와 묘한 관계가 되었다는 소문의 주인공.

리시가 지난 삶 이트리아의 행적을 떠올리며 이오벳을 가만히 응시하자, 이오벳의 뺨이 붉어졌다.

“아니, 그…… 첫눈에 반해버려서.”

“아, 네에.”

입가를 가리고 시선을 피하는 이오벳이 귀엽기까지 했다.

“내가 진짜 한심해 보이겠네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공작 부인에게 그런 짓을 하더니, 인제 와서…….”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전하. 정말로요.”

한심해 보이기는커녕 고마울 뿐이었다.

어쩌면 이오벳도 자신의 감정 변화가 수상하다는 걸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이오벳은 리시를 경계하고 몰아붙이는 대신, 리시와의 묵은 감정을 해소하고 손을 잡는 쪽을 택했다.

“레이디 베기스는 전하의 좋은 배필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요.”

지난 삶, 이트리아는 황후가 되지는 못했어도, 꽤 괜찮은 삶을 살았던 기억이 났다.

약하게나마 치유의 힘을 가진 그녀는, 신성국의 대신관 중 한 명인 미네르바를 도와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을 돕다가 전염병에 걸려, 조금 일찍 생을 마감했다.

베기스 공작은 딸의 죽음을 애도했고, 신성국은 그녀의 공적을 칭찬하며 성인의 반열에 올려, 그녀는 사후 ‘세인트 이트리아’로 칭송받게 되었다.

“그렇군요. 그래요, 그럴 것 같았어요. 딱 보는 순간 운명 같은 느낌이 들어서…….”

신나서 떠들려던 이오벳은, 자기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리시에게 열광했던 걸 떠올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리시가 경멸이 아닌, 진심으로 축하하는 미소를 짓고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리시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이제는 그녀를 봐도 가슴 한쪽이 지끈거리는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이토록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라는 사실에 자괴감이 느껴지는 한편, 이상하기도 했다.

원래 사랑이라는 감정이 이렇게까지 쉽게 변할 수 있는 건가?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그 깊은 절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그동안 케이와 리시를 향한 죄책감 때문에, 한숨 짓지 않는 날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야 악몽을 꾸지 않는 밤을 보낼 수 있겠다고, 이오벳은 생각했다.

+++

케이가 부하들과 업무 관련 이야기를 나누고, 리시가 한창 이오벳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그린 공작 저택의 은밀한 곳에서, 하녀 한 명이 죽어가고 있었다.

황태자 일행에 섞여서 따라온 라코젠의 첩자는, 하녀를 한 명 유인해서 죽인 후, 수많은 창고 중 하나에 던져넣고 하녀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어두운 창고에서 하녀와 비슷하게 화장까지 한 다음 밖으로 나와서, 사람들과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그녀가 기다리던 때가 왔다.

“주인마님께 차를 올려야 해. 어떤 차가 좋을까?”

주방 하녀들이 고르고 골라 마련한 차가 쟁반 위에 놓였다.

그녀는 얼른 다가가 쟁반을 들고, 공작부인의 방으로 향했다.

+++

이오벳과의 만남이 끝난 후 방에 돌아온 리시는 한결 마음이 편안했다.

언제나 리시의 마음 한편을 괴롭혀오던 이오벳의 문제가 말끔하게 해결된 덕분이었다.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을 텐데도 모르는 척 넘어가 준 황태자에게 고마웠다.

“뉴님! 뉴님! 시러. 나 시러어어!”

토미의 소란도, 리시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데 한몫했다.

씻기 싫어서 바둥거리는 토미를 어떻게든 씻기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다른 일은 머릿속에서 깨끗이 사라지곤 했다.

“싫어도 어쩔 수 없어. 내가 말했지.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거라고.”

“몬데! 그게 몬데!”

영리한 토미는,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면 모르는 척하는 법을 배웠다.

“어휴, 힘이 왜 이렇게 세대. 가만히 좀 있어!”

토미는 어린데도 힘이 무지막지하게 세서, 크리시나가 없었다면 토미를 씻길 방법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크리시나가 버둥거리는 토미를 간신히 붙잡아서 번쩍 들어 올렸다.

“뉴님! 시러어어! 시러어!”

“토미, 예쁘게 씻고 나오면 오늘은 나랑 같이 자자.”

토미가 발버둥 치는 걸 멈췄다.

“같이 자? 뉴님이랑?”

“응, 나랑.”

“같이 자, 는 죠아 해!”

“응, 나도 그래.”

엄마의 품을 느껴보지 못해서인지, 토미는 누군가에게 안겨서 잠드는 걸 좋아했다.

특히 리시의 품에 안기는 걸 좋아했기에, 토미는 종종 리시와 케이 사이에서 잠들곤 했다.

리시와 둘만의 밤을 보낼 수 없는 케이가 툴툴거리기는 했지만, 막상 같이 자다 보면 케이가 토미를 꽉 끌어안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 얼른 씻기고 나올게요.”

크리시나가 토미를 데리고 욕실로 들어가는 걸 보며, 에르웰이 중얼거렸다.

“어휴, 애새끼들이란…….”

리시가 키득키득 웃자, 에르웰이 얼른 말을 고쳤다.

“죄송해요, 아이리스 님. 애새끼가 아니라 아이들, 이라고 해야 했는데…….”

“아니, 괜찮아요. 내 앞에서 말 편하게 해도 된다니까.”

“에이, 그랬다가는 크리시나한테 죽어요. 쟤가 얼마나 힘이 세다고요.”

에르웰은 소파 맞은편에 앉아서, 리시가 자신에게 부탁했던 일에 대해 보고했다.

리시는 앞으로 설립할 아카데미의 교수진을 섭외하는 일을, 에르웰과 크리시나에게 부탁해둔 터였다.

“일단 설립 취지를 설명했더니, 다들 좋다고는 했어요. 다만 아이리스 님이 아셔야 할 게 있는데요. 그 사람들, 자기 세계에 푹 빠져 있는 사람들이라서, 가끔 보면 약간 미치광이 같을 때가 있거든요. 그 점은 이해해주셔야 해요.”

에르웰이 섭외한 교수들은 리시도 그 이름을 들어봤을 정도로, 각 분야에서 유명한 학자들이었다.

황립, 왕립 아카데미에서도 섭외하기 힘든 학자들.

리시의 아카데미가 문을 열면, 교수진 이름만 듣고도 많은 귀족 가에서 자식을 입학시키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설립 의도를 알게 되면, 싹 빠져나가겠지.’

상관없었다.

앞으로 세계는 변화할 것이고, 그 변화를 따라잡기 위해서라면 귀족과 척을 지는 걸 두려워해서는 안 됐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하녀가 차를 가져왔음을 알렸다.

에르웰이 문을 열었다.

하녀에게 쟁반을 건네받으며, 에르웰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건 아주 작은 느낌에 불과했기에 무시했다.

문을 닫고 돌아온 에르웰이 쟁반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찻주전자에 있는 차를, 리시와 자신의 잔에 따랐다.

리시가 찻잔을 들어서 입술에 대는 순간, 욕실에서 크리시나의 외침이 들려왔다.

“에르웰! 나 좀 도와줘야겠어.”

“어, 그래. 아이리스 님, 잠시…….”

“응, 다녀와요.”

리시의 미소를 뒤로하고 걸어가던 에르웰의 귀에, 리시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오늘따라 차가 비리네…….”

그 말에 에르웰이 우뚝 멈췄다.

찬 기운이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에르웰은 휙 돌아서서 리시를 향해 몸을 날렸다.

(122) 날 두고 가지 마.

평범한 허브티인데 너무 비리게 느껴졌다.

기분 탓인가 싶어서 한 번 더 마시려는데, 갑자기 달려온 에르웰이 리시의 손에 들린 찻잔을 쳐냈다.

리시가 놀라기도 전에, 에르웰이 리시를 잡아 일으키더니 그녀의 입술을 억지로 벌려 손을 밀어 넣었다.

“토해요, 부인. 토해야 해요!”

에르웰의 절박한 목소리에, 리시는 큰일 났구나 싶었다.

에르웰의 손가락이 목구멍 깊은 곳을 찔러와 구역질이 났다.

“우욱!”

비릿한 차가 식도를 타고 넘어와, 에르웰의 손목을 타고 흘러내려 갔다.

“더요, 부인. 더 토해야 해요.”

손목에 흐르는 액체의 냄새를 맡은 에르웰의 목소리가 더 절박해졌다.

계속 구역질하는 리시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가 흘러내렸다.

한참 토해내서 더는 토할 것이 없어지자, 에르웰이 리시를 소파에 앉히고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때요? 어떤 느낌이에요?”

“나는, 그냥, 그저…….”

아무렇지도 않아요.

괜찮아요.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목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위액까지 토해내서일까?

아니, 그런 게 아니다.

타들어 가는 느낌이 빠른 속도로 깊은 곳까지 퍼져나갔다.

두 손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배를 감쌌다는 걸, 리시는 깨닫지 못했다.

안구에 촛농을 떨어뜨린 듯한 격통을 느꼈다.

눈앞이 뿌옜다.

“제길!”

에르웰의 목소리가 떨렸다.

박학다식한 에르웰은 비릿한 맛을 내는 독을 수없이 많이 알았다.

그중 가장 위험한 독이 아니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곧바로 토하게 했는데도 리시는 고통 때문에 말을 못 하고 있었다.

이런 증상을 유발하는 독은 딱 한 종류였다.

“무슨 일이야, 엘?”

소란 때문에 나온 크리시나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 옆에 토미가 물을 뚝뚝 흘리며 서 있었다.

“키룻사야.”

“뭐?”

키룻사.

음독하자마자 내장을 태워서, 손을 쓸 수도 없는 맹독.

“공작님을 불러.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

“뉴님. 뉴님, 아파? 뉴님, 시러해? 뉴님?”

눈앞이 보이지 않는 고통 속에서, 리시는 토미의 목소리를 들었다.

괜찮아, 하고 대답해주고 싶은데, 너무 아파서 신음을 참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오장육부가 뒤틀린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인 걸까?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지난 삶에서도, 이런 통증을 느낀 적은 없었다.

몸속 구석구석을 불로 지지고, 바늘로 찌르고, 칼로 써는 것 같은 통증.

울고 싶지 않은데 눈물이 줄줄 흐르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콰앙-!

거칠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리시!”

케이의 외침도.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그의 음성을 듣자, 좋았다.

그저 좋았다.

그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죽는 순간,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그 두려운 순간에도 그의 음성이 들려온다면, 그리 무서워하지 않으면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제야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이었는지 알겠다.

그의 음성을 듣자, 더 죽고 싶지 않아졌다.

그를 놔두고 가기 싫었다.

그의 감정이 트리사의 귀걸이가 만들어낸 거든, 아니든, 이제는 상관없다.

내가 그를 이만큼 사랑한다는 게 중요하지.

죽기 싫을 만큼, 그를 혼자 내버려두기 싫을 만큼.

그만큼 그를 사랑한다는 것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겠어.

눈물이 흘러내리는 부위가 너무 아팠다.

마치 눈물이 용암이라도 되는 듯 뜨겁게 느껴졌다.

온몸의 감각이 엉망진창이 된 모양이다.

케이가 잡아준 손도 뼈가 부서지는 것처럼 아픈 걸 보면.

그래도 참았다.

그의 손길을 계속 느끼고 싶었다.

그가 손을 잡아주는 한, 이 삶을 이토록 허무하게 끝내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허윽!”

더는 고통을 견딜 수 없어서.

“흡!”

뇌가 녹는 것만 같아서.

“케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리시는 정신을 놓았다.

+++

리시가 축 늘어지자, 케이는 얼어붙었다.

창백한 얼굴,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가운 체온.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자, 머릿속이 텅 비어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돌아가시지 않았어요. 하지만 굉장히 고통스러우실 거예요.”

에르웰의 말이 아니었다면, 케이는 그대로 자신의 심장도 멎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뭔가를 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뭔가를, 이런 상황에 어울리는 어떤 행동이든 해야 하는데,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평소에는 팽팽 돌아가는 머릿속에는, 오롯이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죽으면 안 돼. 너 죽으면 난 어떻게 살라고? 나, 못 살아. 죽으면 안 돼. 죽지 마.

이런 상황에서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생각.

“뉴님, 주거? 뉴님? 뉴님, 주거?”

토미가 리시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그러지 마, 토미. 살짝만 만져도 많이 아프실 거야.”

에르웰의 말에, 케이는 잡고 있던 리시의 손을 내려놓았다.

살짝만 만져도 아프다고?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뉴님? 뉴님, 주거? 뉴님, 뉴님…….”

토미는 에르웰을 떼어내려고 몸부림쳤다.

케이는 그 작은 소년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의원은?”

“곧…….”

올 거예요, 라는 말을, 크리시나는 끝내지 못했다.

“뉴니이이이임!”

에르웰의 품에 안긴 토미가 울부짖더니, 갑자기 그 형태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리시의 옆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케이 대신, 크리시나가 달려가 방문을 쾅 닫았다.

에르웰은 튀어나올 듯 커진 눈으로, 제 품에 안긴 날개 달린 도마뱀을 내려다봤다.

한 품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도마뱀은, 날개를 파드닥거리며 여전히 외치고 있었다.

“뉴니이이임! 뉴님!”

“수인…….”

에르웰의 중얼거림에, 크리시나가 달려가 리시의 옷장 문을 열고 코트를 꺼내 토미를 감쌌다.

“걱정하지 마세요, 공작님. 이 애는 아무도 보지 않게 잘 챙길게요.”

케이가 기계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하고, 크리시나는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의원들이 들어와서 리시의 상태를 살폈다.

그들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자, 케이는 점점 숨을 쉬기 힘들어졌다.

세상의 공기가 사라지고 있다.

“죄송해요, 공작님.”

옆에 있던 에르웰이 말했다.

케이는 그녀가 왜 사과하는지 몰랐다.

멍하게 그녀를 돌아보자, 에르웰이 붉어진 눈으로 말했다.

“하녀가…… 차를 가져왔을 때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어요. 뭔가 이상했는데, 신경 쓸 정도는 아니라서……. 그런데 그게, 하녀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는 걸, 아이리스 님이 차가 비리다고 말한 후에야 깨달아서…….”

케이는 눈을 감았다.

에르웰의 탓이 아니다.

“사과할 필요 없어, 에르웰 양.”

사과하면 진짜로 리시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잖아.

“대장.”

제이미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들어와서 케이의 옆에 섰다.

“도망친 하녀를 잡았어요.”

지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데 저희한테 잡히자마자 독을 마셔서……. 아무것도 묻지 못했어요.”

정말이지, 아무래도 좋았다.

케이는 의원들에게 둘러싸인 저 자그마한 육체가 평소처럼 일어나 자신을 향해 나풀나풀 다가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 기적적인 일이 벌어지기만 한다면, 이 세상에서 사라진 공기도 다시 돌아오고, 숨도 다시 쉴 수 있을 거고.

그러면 리시, 너와 나는 괜찮을 텐데. 그렇지?

그래, 괜찮을 거야. 당신은 늘 괜찮았잖아.

돌아선 의원들의 표정은 괜찮지 않았다.

“키룻사 독은 해독약이 없습니다. 보통은 마시자마자 죽는 독이라서……. 공작부인께서는 바로 토해내셔서 이 정도이지만…… 죄송합니다, 공작님.”

“아니. 뭔가 할 수 있을 거야.”

“죄송합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아니, 있을 거야.”

“공작부인의 장기가 심하게 손상됐습니다. 안구는 녹아내렸고, 지금도 계속 독이 퍼지고 있을 겁니다.”

“아니, 아니. 뭔가 분명히 할 수 있는 게 있어.”

“죄송합니다.”

“그 빌어먹을 죄송하다는 소리 좀 집어치워!”

슬픔이 분노가 되어 터져 나왔다.

“죄송하다는 소리를 할 시간에 치료를 하라고! 그러려고 의원이 된 거 아닌가? 어서, 내 아내를 살려내!”

의원들이 어쩔 줄 몰라 하자, 제이미가 케이의 팔뚝에 손을 얹었다.

“대장, 저들 잘못이 아니에요.”

“누가 저들 잘못이래? 하지만 의원이라면……!”

“대장. 지금 소리를 질러댄다고 해서 공작부인이 낫는 것은 아니지요?”

“그럼 내가 뭘 해야 하지? 내가 뭘 해야 하는데, 제이미. 내 아내를 살리기 위해서, 내 피라도…… 아, 그래. 내 피를 뽑아서 리시에게 넣어주면 되겠군. 독에 당한 리시의 피를 뽑아내고, 내 피를 넣어주면…….”

“대장.”

제이미가 한숨을 삼켰다.

케이는 제정신이 아닌 듯했고, 제이미는 케이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었다.

제이미는 우선 의원들을 방에서 내보낸 후, 케이의 양어깨를 잡았다.

“정신 차려요. 이 저택에 첩자가 들어왔고…….”

“그따위 건 아무래도 좋아.”

케이가 제이미를 쳐내고 리시를 향해 달려갔다.

침대 옆에 선 케이는 리시를 끌어안으려던 손을 멈췄다.

살짝만 닿아도 아프다는 에르웰의 말이 떠올랐다.

리시는 마치 죽은 것처럼 보였다.

핏기가 없는 얼굴, 파랗게 질린 입술.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생기 넘쳤던 리시가, 곧 죽을 사람처럼 꼼짝도 안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건 꿈일까?

그래, 꿈일지도 모르겠다. 지독한 악몽.

철썩-!

케이는 자신의 뺨을 때렸다.

거침없는 손길에, 에르웰의 눈이 커졌다.

철썩-! 철썩-!

이 빌어먹을 악몽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리시가 죽는다니.

그것도 독에 당해서, 안구가 녹고 장기가 타들어 가 죽는다니.

리시는 그런 식으로 죽어서는 안 된다.

앞으로 한 100년쯤 행복하게 살다가, 자는 듯이 편안하게 죽어야 한다.

이런 식의 죽음은 옳지 않다.

철썩, 철썩, 사정없이 제 뺨을 내리치는데, 제이미가 케이의 손목을 세게 잡았다.

“케이브란트 그린!”

“이거 놔, 제이미!”

“네가 멍청한 짓을 하는데 어떻게 놔요? 네 뺨이 터질 때까지 때린다고 형수님이 살아날 것 같아요? 그런 거라면 내가 그 대가리 떨어질 때까지 때려주죠!”

제이미가 전에 없이 거칠게 말하는 통에, 케이의 이성이 아주 약간은 돌아왔다.

케이는 눈을 꿈뻑거리며, 제 앞에 선 부하를 응시했다.

전쟁터에서도 미소를 거두지 않는 제이미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케이의 앞에 서 있었다.

그걸 보자, 덜컥 겁이 났다.

이제야 리시가 진짜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현실로 다가왔다.

케이가 비틀거리며 리시의 침대 옆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몸에 손이 닿으면 아플까 봐, 차마 닿지 못한 손을 침대 위에 내려놓고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에게서 생명으로 이어질 가능성 하나라도 찾아보기 위해, 숨도 쉬지 않고 그녀를 살펴봤다.

그런데 왜지? 왜 가능성이 하나도 안 보이는 거지?

왜 넌 정말로 죽을 것처럼 그러고 있는 거야?

우리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즐거웠잖아. 아무 문제 없었잖아.

“리시…….”

케이는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리시, 제발…….”

이런 식으로 잃을 수는 없다.

“제발 날 두고 가지 마. 그러면 안 돼. 정말 그러면 안 된다고…….”

 

+++

끔찍한 밤이 지났다.

리시는 죽지 않았지만 살지도 못한 상태였다.

또다시 불려온 의원들이 리시의 상태를 살펴봤지만,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다.

의원들은 리시가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느낄지 짐작했고, 이럴 때 환자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케이에게 전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리시, 이건 안 돼. 이건 옳지 않아.”라고 중얼거리는 케이는, 거의 미친 것처럼 보였다.

그의 눈에는 이 방에 들어온 의원들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의원들이 할 일을 끝내고 나간 후에는, 이오벳이 들어왔다.

이오벳은 자신이 데려온 하녀가 리시의 차에 독을 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얼굴이 파랗게 질린 상태였다.

“케이, 나는…….”

“그만, 이오벳.”

케이가 이오벳의 말을 끊었다.

“지금은 아니야. 나가.”

“케이……”

“하지만 이 저택에서 벗어나지는 마. 내 아내가 정말로 잘못되면, 자네도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야.”

(123) 그만하게 해줘.

에르웰은 울었다.

살면서 이렇게 울어보는 건 처음이었다.

‘내가 좀 더 주의했어야 했어.’

에르웰은 자신의 불찰로 소중한 이를 잃어본 경험이 없었다.

리시가 허물어지는 광경이, 그녀가 고통을 참지 못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되풀이됐다.

하녀가 이상하다 싶었을 때 왜 이상한 건지 고민했더라면, 차를 따르기 전에 그 냄새를 확인해봤더라면, 그렇게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이런 끔찍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에르웰은 리시가 좋았다.

처음에 아버지에게 그린 백작 부인의 시녀가 되라는 엄명을 받았을 때만 해도 불만이 가득했지만, 리시를 처음 보는 순간 마음에 들었다.

자그마한 백작 부인은 평민 출신인 에르웰과 크리시나에게도 언제나 정중했고, 화가 날 만한 상황에서도 미소를 짓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에르웰은 도무지 가질 수 없는 그런 부분들이 마음에 들어서 지켜보다 보니, 은근히 귀여운 부분이 있었고, 공작부인이 된 후에도 에르웰을 대하는 태도가 전혀 달라지지 않아서 더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공작부인을 지켜주자고, 평생 이 사람의 시녀로 살아보자고 결심했는데.

‘어떡하지? 어떡해야 해.’

리시는 죽을 것이다.

키룻사는 그런 독이다.

지금껏 키룻사를 마시고 살아남은 사람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아니, 방법이 있을 거야. 분명히 방법이 있을 거야. 이런 식은 안 돼.’

에르웰은 이 지독한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머릿속에 밀어 넣었던 모든 지식을 뒤져봤지만, 키룻사 독의 해독 방법은 나오지 않았다.

이런 순간에 쓸 만한 지식이 없다면, 그동안 무엇 하러 공부를 해온 건가 싶어 자괴감이 들었다.

에르웰이 침대에서 머리를 거머쥐고 자책과 고민을 하는 동안, 크리시나는 회녹색 작은 드래곤을 품에 안고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크리시나는 수인이 변신하는 모습을 본 게 처음이지만, 수인이기에 사형당한 사람을 본 적은 두 번 있었다.

두 번 모두 재판소 옆 사형장에서 사형을 당했는데, 구경꾼들은 참혹하게 목이 잘려 죽는 수인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가족조차도 그와 가족이라는 걸 창피하게 여기는 듯, 오히려 더 큰 목소리로 그를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죽여라! 신의 저주를 받은 존재는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해!”

크리시나가 태어날 때부터 이 대륙에서 수인이란 그런 존재였다.

때문에 크리시나도 수인이 사형당하는 걸 보며, 약간 불쌍하다는 마음은 가졌지만 그게 나쁘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하지만 막상 정을 준 아이가 수인이라는 걸 알고 나니, 이 아이가 수인이라는 것이, 이 세상이 수인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부당하게 느껴졌다.

리시가 걱정되고 그녀 때문에 슬픈 만큼, 토미가 걱정되었다.

리시는 토미를 아꼈다.

리시라면 이런 상황에서 그녀의 침대 옆에 붙어 서서 엉엉 우는 것보다, 이 아이를 지키는 걸 더 중요하게 여길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크리시나는 토미를 지키기로 했다.

‘다행히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나랑 에르웰, 공작부인이랑 공작님뿐이야.’

에르웰은 토미가 수인이든, 뭐든 전혀 관심도 없는 듯 슬픔에 잠겨 있었다.

에르웰은 토미에 대해 떠벌리고 다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공작님은 어떨까? 지금이야 아이리스 님 때문에 정신이 없으시다 해도, 나중에 정신이 드시면…… 이 애 때문에 모든 일이 벌어졌다고 여기지는 않으실까?’

수인은 그런 존재였다.

신의 저주를 받은, 불길한 존재.

모든 악운을 만들어내는,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

똑똑-

크리시나가 흐느끼다 잠든 드래곤을 끌어안고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리시나는 총성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들어가겠습니다.”

유진의 목소리였다.

“아니요, 들어오지 마세요.”

“들어가겠습니다.”

유진의 목소리는 강압적이었다.

크리시나가 일어나서 문고리를 잡기 전에, 방문이 열렸다.

크리시나는 유진이 드래곤을 볼 수 없도록 몸을 휙 돌렸다.

“에르웰.”

유진의 부름에 에르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에르웰 양 탓이 아닙니다.”

“아니, 내 탓이에요. 내가 좀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해요.”

“아니요, 에르웰 양 탓이 아닙니다.”

유진의 손에는 비둘기가 들려 있었다.

전서구로 쓰는 표식이 붙은 비둘기였다.

“이 녀석이 늦게 도착했습니다.”

불운이 겹쳐졌다.

평소라면 황태자 일행보다 일찍 도착했을 클로이의 전서구가 독수리에게 쫓기는 바람에 늦게 도착했다.

비둘기의 발목에 묶인 편지에는 정확하게 오늘의 사건에 대한 경고가 쓰여 있었다.

[황태자 일행 중에 2황자 첩자 있음. 독 조심할 것.]

전서구가 조금만 더 일찍 도착했더라도 막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에르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 녀석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내가 충분히 주의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2황자가 아이리스 님을 노린다는 걸 알면서도, 황실 사람들이 이곳에 왔는데 경계를 게을리했어요. 내 탓이에요.”

“그렇게 따지자면 내 탓이기도 합니다. 나 역시 황궁에서 있었던 일을 들었는데, 충분히 살펴보지 않았죠.”

“아니요, 아니요, 유진. 아이리스 님을 지키는 건 나예요. 그런데도, 내가 미련하게…….”

이미 벌어진 일을 두고 누구의 탓인지 겨루어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슬픔에 침잠해 헤어나지 못할 것 같기에, 그들은 이 모든 일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유진은 월라스와 나단이 거의 정신이 나간 것처럼 이 모든 일을 자기들 탓으로 돌리고 있다는 말을 전하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듯 다시 두 손에 얼굴을 묻는 에르웰을 지켜보다가, 아직도 유진에게 등을 보이는 크리시나 쪽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크리시나.”

“네.”

“토미를…….”

“토미는 여기 없어요.”

유진이 작게 한숨을 삼켰다.

“내가 그 아이를 관청에 넘길 것 같습니까?”

“토미는, 여기에, 없어요.”

“그 아이가 무엇이든, 형수님이 아끼는 아이라면 우리가 지킵니다. 설령 신성국과 적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형수님이 아끼는 아이를 죽게 놔두지는 않을 겁니다.”

그제야 크리시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유진을 올려다봤다.

크리시나의 품에 안긴 작은 드래곤을 본 유진이 미간을 좁혔다.

“드래곤이라니…….”

“아이리스 님이 이 애를 아주 많이 좋아하세요.”

“압니다.”

유진이 두 팔을 내밀자, 크리시나가 조심스럽게 드래곤을 넘겼다.

유진이 모포로 가린 토미를 데리고 나간 후에야, 크리시나는 허물어졌다.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긴장이 사라지자, 리시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슬픔이 몰아닥쳤다.

+++

가비자르의 황제 케너마나이 옥보시더스는 자신의 첫째 아들인 라코젠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황제의 장남이지만, 후궁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황태자 자리에 앉을 수 없었던 라코젠.

다른 황자들이 제각각 영지와 작위를 받아 황궁을 떠났음에도, 라코젠은 끝까지 황궁에 남아 황태자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걸, 황제도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했다.

후궁의 자식이 황제가 된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닌 데다가, 라이벌이 있으면 황태자가 더욱 성장할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만약 라코젠이 더 낫다면, 그때 가서 황태자를 바꿔도 되는 일이고.

그랬던 라코젠이 갑자기 레리소로 가겠다고 자청해왔다.

가비자르 제국의 변경에서도 가장 위험한 지역인 레리소.

갑자기 안전한 황궁을 버리고 레리소로 가겠다는 라코젠의 청을, 황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레리소로 가겠다……. 이렇게 갑자기?”

“전부터 쭉 생각해왔습니다, 폐하.”

“흐음. 나는 네가 더 큰 것을 바란다고 생각했는데.”

“물론 그런 욕심이 있었지만…… 갖지 못할 것을 탐내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영웅이 되고 싶습니다, 폐하.”

“영웅이라…….”

레리소를 자꾸 침범하는 오그어를 섬멸하기만 한다면, 확실히 영웅이 될 수 있기는 할 것이다.

전쟁터만큼 영웅이 되기 쉬운 곳이 없었다.

다만 그것도 살아남았을 때의 이야기다.

“그곳은 위험하다, 라코젠. 좀 더 안전한 땅도 있지 않으냐.”

“폐하, 저는 늘 이 가비자르를 위해 무언가 하고 싶었습니다.”

라코젠은 자신이 이 가비자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저 황궁에서 시간을 때우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레리소를 지키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에 대해 한참 떠들어댔다.

하지만 라코젠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레리소는 위험한 지역이니만큼 군사력이 강했다.

그 지역을 받으면, 레리소의 군사력도 함께 가져올 수 있다.

‘그린 공작은 자기 아내를 죽인 게 누군지 금방 파악하겠지.’

첩자가 누구의 수하인지 금방 밝혀지리라는 건 염두에 둔 바였다.

‘그놈은 아이리스에게 미쳐 있으니, 황제고, 황궁이고 할 것 없이 쳐들어올 거야.’

만약 리시의 죽음이 2황자 탓이라는 게 확실해지면, 황제는 신성국의 눈치를 봐서라도 라코젠을 케이에게 넘길 게 분명했다.

하지만 라코젠에게 자신의 군사가 있을 때는 달라진다.

라코젠은 전부터 레리소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황궁에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황제의 인정을 받아 황태자가 되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레리소를 차지하고 황태자를 쳐서라도 이 나라를 가질 생각이었다.

레리소에도 이미 라코젠의 사람이 많이 있었다.

거기다 레리소는 신성국과 가까워서, 신성국 내에서 라코젠을 도와줄 대신관 산티아노 기푸와 소통하기도 편할 터였다.

“네 뜻이 그러하다면 그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겠지.”

이윽고 황제가 말했다.

라코젠은 황제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황제는 최근 이오벳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고, 더는 황태자 자리를 변경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황태자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라코젠이 황궁을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가시처럼 걸려 있었을 터였다.

“감사합니다, 폐하.”

라코젠은 깊이 허리를 굽혔다.

‘오래오래 사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가 버린 장남이 이 나라를 먹는 건 보고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

아프다.

고통은 점점 심해졌다.

장기가 전부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 기절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움직일 수가 없어서, 자신이 깨어 있다는 표현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육체의 감옥에 갇힌 기분이었다.

외부의 소리는 전부 들려오고, 정신은 멀쩡한데,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 상태로 눈이 타고, 뇌가 녹고, 장기가 찢기는 통증을 전부 느껴야 했다.

만약 이게 케이의 곁에서 살아가기 위한 조건이라면, 이제는 포기하고 싶었다.

살고 싶었는데, 어떻게든 그와 함께하는 시간을 더 늘리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런 마음도 들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리시, 리시, 제발…… 제발 조금만 더 견뎌줘. 반드시 방법을 찾을게. 다들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어.”

케이는 쉴 새 없이 속삭였다.

이제는 그 속삭임조차 저주였다.

‘아니, 노력하지 마, 케이. 나는 그냥 죽는 게 낫겠어. 이건 정말 너무 아파서, 너무 고통스러워서, 너무 무서워서, 미안해. 미안해, 케이. 내가 못 견디겠어.’

저주 같은 삶을 살았고, 학대만 받다가 죽었고, 새로운 삶을 받았고, 이제야 비로소 행복이 어떤 건지 알게 되었다.

노력하지 않아도 웃는다는 게, 눈을 뜰 때 맞을까 봐 두렵지 않다는 게, 실수해도 욕먹을까 봐 걱정되지 않는다는 게, 어떤 건지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었다.

더 많이 알고 싶었는데, 더 오래 알고 싶었는데, 너무 많은 욕심을 부렸나 보다.

“미안해…… 미안해, 리시…….”

케이는 자꾸만 사과했다.

네 탓이 아니라고,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린 탓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너는 내 지난 삶에서도, 내 이번 삶에서도, 그저 나의 따스함이었다고, 네가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라고, 이 잠시라도 네 덕에 다정함을 알았다고.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입술을 벌릴 수도 없었다.

-“상처에 연고를 발라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안 그러면 그 예쁜 종아리에 흉터가 남을 테니.”

왜 이럴 때 떠오르는 게, 지난 삶의 그 짧은 만남인지 모르겠다.

이번 삶에서 케이에게 받은 사랑이 그토록 많은데,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이 순간에 떠오르는 건, 지난 삶의 그 온기였다.

예쁜 종아리.

그리고 인제 와서야 깨달았다.

예쁜 종아리.

케이는 그런 식으로 말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지난 삶에서도, 이번 삶에서도, 케이가 ‘예쁘다.’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존재는 단 한 명이었다.

아이리스.

예쁜 종아리를 가진 아이리스.

지난 삶에서도 케이에게 아이리스는 그랬다.

이번 삶에서 케이에게 아이리스가 그런 것처럼.

그의 마음은 트리사의 귀걸이가 만들어낸 행운 따위가 아니었다.

아이리스가 위틀로이든, 후치스이든, 그린이든, 케이에게 아이리스는 유일한 ‘예쁨’이었던 것이다.

후회가 가슴을 채웠다.

좀 더 그의 마음을 믿었어야 했는데.

그 귀한 시간, 그의 마음을 의심하면서 낭비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의 사랑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좀 더 많이 행복해하고, 더 많이 기뻐하고, 더 많이 표현했어야 했는데.

나는 왜 그리 숨길 게 많았고, 의심할 게 많았던 걸까?

나 자신을 의심해도, 당신의 마음은 의심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래서, 내가 미안해, 케이.’

독을 마시고 쓰러지기 전,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품은 감정이 의심이라서 미안해.

당신의 사랑을 오롯이 믿지 못해서 미안해.

더 많이 표현하지 못해서 미안해.

그리고…… 이렇게 떠나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이제는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저 눈물일 뿐인데도 흐르는 부위가 너무 아팠지만, 지금은 반쯤 녹아서 멎어가는 심장 부근이 더 아팠다.

“공작님.”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공작부인께서 아주 고통스러우신 것 같습니다.”

의원의 목소리이리라.

“공작님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제…… 보내셔야 합니다.”

아니야,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만약 말을 할 수 있다 해도, “아니야. 더 버텨볼게.”라는 말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통증은 무지막지하게 리시를 좀먹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앞도 보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이런 통증을 견디며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케이에게 정말로 미안했지만, 아직 더 하고 싶은 일이 많았지만.

‘미안해, 케이. 이제 그만할래. 그만하게 해줘.’

(124) 한 번만 더

  케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연명 치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위독한 환자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안구가 녹아내린 리시는 두 눈이 푹 꺼졌고, 입술은 말라서 갈라진 데다가 피부는 점점 검게 변하고 있었다.

마치 죽은 자의 육체가 썩어가는 것처럼.

어제 케이는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의원들이 하는 이야기는 전부 귀에 담고 있었다.

지금 사람들이 움직이면서 만들어낸 공기의 움직임조차 리시에게 큰 통증을 유발할 거라고 했다.

“공작부인께서는 노력하셨습니다.”

알고 있다.

키룻사 독이 얼마나 지독한 독인지.

구하기 힘들뿐더러, 너무 끔찍한 독이라서 이 독을 사용한 사람마저 비난을 면치 못하기에, 암살자들조차 사용을 꺼리는 독이었다.

리시는 노력했다.

케이를 위해 무참한 고통을 견디며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케이는 아무래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리시가 죽어? 내 아내가 죽는다고? 아니, 그런 일은 벌어질 수 없어.’

리시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었다.

리시와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았는데, 그녀는 이미 케이의 전부가 되었다.

따라서 케이는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그녀를 보내야만 하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신성국에서 대신관이 올 거다. 마탑에서도 치료사를 보내줄 거고.”

어젯밤, 제이미는 통신실에서 신성국과 마탑에 치료사를 요청했다.

몇백 년 전에는 죽기 직전의 사람도 살릴 수 있는 치유 마법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치유사의 명맥은 끊기고, 치유 마법이라고 할 만한 걸 사용하는 사람은 신성국의 대신관들 정도였다.

대신관들이 사용하는 치유 마법도 이제는 작은 상처, 배탈 수준의 가벼운 병 정도만 치료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인간은 마법을 잃어가는 중이었고, 온전한 지식과 기술로 마법이 해냈던 자리를 채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만약 몇백 년 전이였다면, 혹은 몇백 년 후였다면, 리시를 치료할 방법이 분명 존재했을 터였다.

그러나 마법이 기술로 넘어가는 과도기인 지금, 리시를 치료할 만한 마법이나 기술을 가진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케이의 뒤에 서 있는 의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케이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았다.

대신관이 와도, 치료사가 와도, 뾰족한 수가 없다는 말을 하려는 거겠지.

리시가 그들이 올 때까지 버티지 못할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겠지.

그래, 알아. 나도 안다고.

하지만 뭐라도 붙잡아봐야지. 혹시 모를 일이라는 게, 기적이라는 게 있잖아.

거기에라도 매달려봐야지.

콰앙-!

그때, 리시의 방문이 거칠게 열리고 에르웰이 뛰어 들어왔다.

“공작님! 나랑 얘기 좀 해요.”

의원이 눈치 빠르게 방에서 나갔다.

리시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우두커니 앉아 있는 케이에게, 에르웰이 성큼성큼 다가갔다.

“중요한 얘기예요, 공작님.”

그제야 케이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말해봐.”

“성유물 중에, 거의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치료가 가능한 물건이 있을 거예요. 제가 예전에 역사 관련 책에서 본 기억이 있어요. 그는 놀라운 치유력으로 죽어가는 자를 치료했으나, 그 힘은 마법이 아니었다. 그런 문장.”

케이는 한숨을 삼켰다.

물론 케이도 그 책을 본 적이 있다.

몇 년 전, 그 책을 읽은 후 그 힘이 성유물과 관련된 힘일 거라고 예상했고, 그와 관련된 문헌을 전부 찾아서 읽었고, 성유물을 찾으러 다녔고, 결국 찾아냈다.

하지만 그 성유물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서 힘을 잃은 후였다.

아니, 애초에 그런 힘을 가진 적이 있었는지도 의심스러운 상태였다.

보석은 부서지고 흠집이 많은 반지.

문헌에 따르면 그 반지를 끼는 순간, 반지가 사용자의 손가락에 맞는 크기로 변한다고 했는데, 그럴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었다.

게다가 성유물의 수호자가 느낄 수 있는, 성유물 특유의 기운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성유물이 생긴 지는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흘렀고, 그 힘 또한 무한한 것이 아니기에, 마법보다 오래 버티기는 했어도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그 반지 또한 그러하리라.

게다가 그 반지는 아주 오랜 세월,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묻혀 있었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성유물은, 언젠가 그 힘을 잃게 된다.

“그 반지를 찾으면 아이리스 님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몰라요.”

기대에 찬 에르웰의 음성이 가슴 아팠다.

“그 반지는 이미 찾았어, 에르웰 양.”

“그렇다면……!”

“하지만 그 반지는 힘을 잃었어. 내가 찾아냈을 때는 부서지기 직전이었지.”

에르웰의 눈동자가 탁하게 흐려졌다.

성유물 수호자인 케이가 힘을 잃었다고 하면 힘을 잃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그 반지는…… 이제 없어요?”

“……있어.”

“그러면 해봐야죠. 해볼 수 있는 건 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케이는 말없이 리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런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도, 리시는 죽어가고 있었다.

케이의 침묵이 길어지자, 에르웰이 케이의 어깨를 잡아 자기 쪽으로 돌렸다.

“해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공작님.”

“그 반지는 힘을 잃었어, 에르웰 양.”

“무서우세요?”

“뭐?”

“그 반지조차 쓸모가 없을까 봐, 그러면 정말로 희망이 사라질까 봐 무서워서 그러세요? 그래서 대신관이랑 치료사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사람들도 치료를 못 하면 그때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사용해보시려고요?”

에르웰의 한마디, 한마디가 케이의 심장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아, 그런가. 나는 그런 이유로 그 반지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그 반지를 최후의 희망으로 남겨두고, 그 일말의 희망조차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서, 그때는 정말로 리시를 보내야만 할 것 같아서.

그래서 이렇게 바보처럼, 리시를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채, 도움을 줄 사람들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걸까?

그들조차 그 무엇도 해주지 못하리라는 걸 알면서?

에르웰이 케이와 눈을 똑바로 맞추고 말했다.

“그때가 되면 늦어요, 공작님. 아이리스 님은 대신관이 오기 전에 돌아가실 거예요.”

“그 반지는 아무것도 못 할 거야.”

“해볼 수 있는 건 해봐야 해요, 공작님. 무서우신 거 알아요. 저도 무서워요. 성유물조차 아이리스 님을 살리지 못하면, 대신관이나 치료사들이 와도 아무것도 못 하겠죠. 그래도요, 공작님. 할 수 있는 건 해봐야 해요.”

수백의 오그어를 앞에 둔 전쟁터에서도 이렇게 두렵지는 않았다.

감정이 마비된 건가 싶을 정도로, 두려움을 모르고 살았다.

공포가 케이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그 반지가 아무 소용없으면 어떡하지?

그때는 정말로 리시를 보내주어야 하나?

사실은 시간을 끌고 싶었다.

치료사가 올 때까지, 대신관이 도착할 때까지, 리시를 이 세상에 붙들어두고 싶었다.

버텨보라고, 희망이 있다고, 나을 수 있다고, 그런 부질없는 속삭임을 들려주며, 리시를 곁에 두고 싶었다.

“리시는 유물술사야, 에르웰 양.”

케이의 고백에 에르웰의 눈이 커졌다.

에르웰은 거의 숨도 못 쉬고 케이의 입술을 응시했다.

“부서진 성유물에서도 힘을 끌어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해.”

“그, 그렇다면 더더욱…….”

“하지만 그 힘을 아직 제대로 다루지 못해. 그런 상황에서 그 반지를 사용하면 리시의 육체에 더 심한 타격을 줄지도 몰라. 그 반지에 남은 힘이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리시의 힘만 소진하고 끝날 수도 있어.”

그 반지를 쓰면 둘 중 하나야. 죽음, 혹은 삶.

그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영리한 에르웰은 알아들었다.

그 반지를 쓰는 순간, 대신관과 치료사를 기다리는 게 의미가 없다.

리시는 완벽하게 낫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까.

이제야 비로소 케이가 왜 그것을 사용해볼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그래도…….”

에르웰의 입술 사이로 쉰 음성이 흘러나왔다.

“해야 해요.”

에르웰은 침대에 누워 있는 리시의 모습을 확인했다.

리시는 치료사와 대신관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지 못한다.

“해야 해요, 공작님.”

케이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 제이미를 불러 명령했다.

“솔리르에 가서 랜디에게 반지를 받아와.”

공작령의 변경인 솔리르는 아무리 빠른 말을 타고 달려도 하루가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에르웰은 그 반지가 이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리시가 살아 있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제이미는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반지를 가지고 돌아왔다.

케이는 모두를 내보내고, 혼자서 리시의 곁에 남았다.

“리시, 미안해.”

케이는 부서질 것처럼 검게 변한 그녀의 손가락을 차마 만지지 못하고 속삭였다.

“미안해, 리시.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당신이 죽어가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이 반지를 끼워주는 것뿐이야. 진짜 한심하지?”

성유물의 수호자면 뭐해.

당신을 위해 이 생명을 나눠주는 것조차 못하는데.

“당신이 힘내야 해. 당신이, 이 반지를 사용해야 해. 정말 미안해. 내가 대신해줄 수 없어서, 정말 미안해.”

케이는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는 것뿐인데, 손이 떨려서 자꾸만 엇나갔다.

눈물로 뿌예진 눈, 덜덜 떨리는 손 때문에 몇 번이나 실패한 끝에야,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는 데 성공했다.

반지는 그녀의 손가락보다 굵었고, 그 반지에 힘이 남아 있다면 그녀의 손가락 둘레에 맞춰서 점점 줄어들어야 할 터였다.

하지만 반지의 크기는 바뀌지 않았다.

+++

리시는 케이의 절박한 애원을 듣지 못했다.

그녀는 이제 통증을 느끼지 않는 곳에 와 있었다.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는 고요하고 아늑한 어둠.

리시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나는 또 죽었구나. 아니면 죽기 직전이든가.’

아픔이 느껴졌을 때만 해도, 죽고 싶었다.

전부 다 포기하고, 더는 아프지 않은 안식에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통증이 사라지자마자, 그런 생각을 했던 걸 후회했다.

죽고 싶지 않다. 아직은 아니다. 좀 더 케이의 곁에, 좋은 사람들의 곁에 머물고 싶다.

호수에서 빠졌을 때 그랬듯, 목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다렸다.

아이의 것 같기도 하고, 성인 여성의 것 같기도 한 그 음성.

그러면 애원해야지.

살려달라고,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무릎이라도 꿇어야지.

아무리 기다려도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부탁이야.”

그래서 리시는 먼저 입을 열었다.

“제발 부탁이야.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제발 한 번만 더 내가 살아가게 해줘.”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리시는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할게. 충분히 조심할게. 나는 아직 행복하지 않아. 내가 원하는 걸 이루지 못했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살게 해줘. 부탁해.”

애원했고.

“내가, 내가 정말 잘해보려고 했어. 나, 진짜로 노력했어. 나 혼자만 잘되려는 게 아니야. 더 많은 사람을, 더 좋게 살아가게 도와줄 수 있어. 그저 내 행복만 바라는 게 아니야.”

설득했고.

“이건 너무해. 나는, 나는, 알잖아. 정말 힘들게 살았어. 지난 삶, 그 40년이라는 시간을 정말로…… 단 한 번도 웃지 못하고 살았어. 맞았고, 경멸당했고, 미움받았고, 이용만 당했어. 인제 와서 처음으로 행복이라는 게 뭔지 알게 됐는데, 사랑받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게 됐는데…… 그걸 1년도 못 누리고 죽는 건, 정말 너무하잖아. 응?”

동정에 호소했다.

그래도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긴 시간이 흘렀다.

체감상으로는 1년도 넘는 시간처럼 느껴졌지만, 그보다 짧을지도 몰랐다.

지난번, 목소리는 이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은 좀 다르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무슨 소용일까?

이곳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저 바깥의 시간이 백 년이 흘렀든, 천 년이 흘렀든, 마찬가지일 텐데.

리시는 그 긴 시간, 쉬지 않고 되풀이했다.

제발 좀 살려달라고,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그렇게 몇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때, 응답이 있었다.

“지독하구나, 아이리스. 정말 지독해.”

엎드려서 살려달라고 중얼거리던 리시는, 명랑한 음성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눈앞은 여전히 어둠이었으나, 이제 더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살려줘, 부탁이야. 한 번만 더, 정말 한 번만 더 부탁해.”

“아니, 너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거야.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내게 살려달라고 빌겠지.”

“조심할 거야. 죽지 않도록, 정말 조심할 거야.”

“그럴 수는 없어, 아이리스. 네가 조심하는 건, 아무 소용없어.”

어둠에 희미한 빛이 생기기 시작했다.

빛은 주먹만 한 크기가 되자, 더는 커지지 않았다.

“네가 살아가는 한, 너는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거야.”

(125) 세계의 적

  조심할게, 정말 조심할 거야.

그런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빛은 일렁거리기만 할 뿐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이대로 빛이 사라질까 봐 덜컥 겁이 나, 무릎으로 기어 가까이 다가가자, 빛은 그만큼 더 멀어져서 리시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아이리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니? 너는 누리지 못할 행복을 누렸고, 받지 못할 사랑을 받았어. 네 인생을 통틀어 생각하면 짧은 시간이겠지만, 그래도 너는 좋은 경험을 한 거야.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니?”

리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충분하지 않아. 나는……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

“네 복수는 끝났어, 아이리스. 브리트니가 마음에 걸린다면 걱정하지 마. 내가 마지막으로 널 위해 브리트니에게 최악의 불행을 내려줄 테니까.”

“아니,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야.”

그럴 리 없는데도, 빛이 한숨을 쉬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조용히 살아갈래? 살려줄 테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케이브란트의 아내로 그리 살아갈래?”

리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케이브란트와 정을 통해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보듬어 키우며, 그렇게 조용히, 한 남자의 아내로, 한 아이의 엄마로, 그렇게 살아갈래? 그렇다면 살려줄게.”

리시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물론 그렇게라도 살고 싶었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리시가 꿈꾸는 삶이었다.

그 무엇도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내 가족에게만 집중하는 삶.

리시가 행하는 모든 일이, 그런 삶을 위한 포석이었다.

되살아나서 빛이 말하는 대로 행동한다면, 아주 잠깐은 무척이나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케이가 죽을 거야.”

“그래, 그러겠지.”

빛은 순순히 인정했다.

“케이가 죽고 나서,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

“물론이야, 아이리스. 너에게는 케이브란트가 남긴 아이가 남을 테니까.”

“아니. 아니, 아니.”

리시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생기지도 않은 아이보다, 케이가 소중했다.

“그건 안 돼. 나는 케이가 필요해.”

그저 새로 얻은 삶을 당당하게 살아갈 생각뿐이었지만, 케이를 사랑하게 되면서 궁극적인 목표가 바뀌었다.

“산티아노는 이 시점에서 이미 케이가 수인이라는 걸 의심하고 있어. 언젠가 무슨 일이 생기면, 그 부분을 물고 늘어지겠지. 그러면 케이는 죽을 거고. 지난 삶처럼.”

지난 삶, 산티아노는 교황 자리에 앉자마자, 평소 싫어하던 케이를 제거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신성국의 교황이 케이를 수인이라고 선포하는 순간, 케이는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야만족을 제외한 모든 국가가 유일신 에렌을 믿는 상황에서, 교황의 선포는 절대적이었다.

리시는 바로 그런 상황을 뒤틀어버릴 계획이었다.

신성국의 교황이 케이를 수인이라고 선포해도, 굳건히 케이의 편에 설 절대다수의 사람들.

“내가 바꿀 수 있어.”

대륙에는 10%도 안 되는 귀족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평민 아니면 빈민이나 노예였다.

게다가 지금은 실력이 출중한 평민들이 하급 귀족보다 나은 대우를 받게 된 세상이다.

신심을 없앨 수는 없지만, 민심을 그린 가문으로 향하게 할 수는 있었다.

“내가 바꿀 거야.”

결의에 찬 리시의 말에, 빛이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알아, 아이리스. 그게 문제인 거야. 그거 알아? 케이브란트는 치유의 반지를 네 손가락에 끼워줬어. 너의 지난 삶에서는 사장된 치유의 반지가, 이번에는 유물술사인 네 손에 들어간 거야. 너는 앞으로 그 반지를 정말로 잘 사용하겠지.”

리시는 모르는 이야기였다.

치유의 반지? 그런 게 있었나?

“지금까지도 너는 죽을 사람을 살리고, 살 사람을 죽였어. 인과율을 위배하는 건, 재앙과도 같은 일이지. 아주 많은 것이 뒤틀리고, 어쩌면 멸망에 가까운 재난이 닥칠지도 모르는 일이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가 왜 지난 삶과 변함없이, 네가 아는 대로 흘러가는 거라고 생각해?”

“……네 덕분이구나?”

“그래, 아이리스. 내가 그렇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야. 내가 정말로 노력하고 있다는 걸, 너는 알아야 해.”

“고마워. 정말로 고맙게……“

“아니, 고맙다는 말을 들으려고 하는 게 아니야, 아이리스. 너는 날 사용했고, 나는 네 덕에 오랜만에 깨어났으니 널 위해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어. 다만, 아이리스. 내가 무적은 아니야. 내가 아무리 막고, 또 막아도 도무지 막을 수 없는 것들이 있어.”

빛이 리시와 조금 가까워졌다.

“원래대로라면 이오벳이 그린 저택에 도착하기 전, 클로이가 보낸 비둘기가 무사히 저택에 도착해, 케이브란트가 클로이의 전언을 읽고 이오벳의 고용인들을 조사했어야 했어. 케이브란트는 후각이 좋으니, 어렵지 않게 라코젠의 첩자를 발견했을 거야. 하지만 리시, 비둘기는 독수리에게 쫓기느라 제때 도착하지 못했지. 그건 나도 막을 수 없는 일이었어.”

리시는 빛이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말은 알아들었다.

“아이리스. 이 세계가 널 죽이려 해.”

육체를 벗어난 상태인데도, 등에 찬 기운이 서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계가 눈치챈 거야. 정상적인 흐름을 방해하는 존재가 있다는 걸. 세계는 인과율을 배반한 존재를 없애려 하겠지. 그래서 너는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빛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막으려고 노력하겠지만, 세계는 널 죽이려 하겠지. 지금과 같은 일이 빈번하게 생길지도 몰라. 평소라면 당하지 않을 상황에, 어이없이 당하는 거지. 사과나무에서 떨어진 사과에 맞아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고, 발이 걸려 앞으로 넘어졌는데 뒤통수가 깨질 수도 있어. 인과에서 벗어난다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야.”

이제야 리시는 세상을 바꾼다는 게, 이미 벌어졌던 일을 없던 일로 만든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깨달았다.

“하지만 아이리스. 네가 그저 조용히 케이브란트의 아내로 살아간다면, 세계도 자연스럽게 네 존재를 받아들일 거야.”

“……그러면 케이는 죽겠지.”

“몇 년 후의 일이야.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죽지.”

“잘못한 것도 없고, 병도 없는데, 그저 수인이라는 이유로 죽는 건…… 안 돼. 그런 이유로는 안 돼.”

“그래도 너는 살 수 있어, 아이리스. 케이브란트를 포기하면, 네가 원했던 삶을 살아갈 수 있어. 네 아이는 널 사랑할 거고, 케이브란트의 가족들도 네 곁에 남아 널 사랑해줄 거야.”

리시는 고개를 들었다.

“그 사랑도, 네가 만든 거 아냐?”

빛이 까르르 웃었다.

“인간의 감정을 만지는 건, 아무리 나라도 어려운 일이야. 나는 널 위해 딱 한 번 인간의 감정을 조작했고, 그 이후로는 네가 비틀어버린 세계의 결과를 지난 삶과 같은 흐름으로 바꾸느라 정신이 없었어.”

“누…… 누구의 감정을 만졌는데?”

케이만큼은 아니기를 바랐다.

다행히 빛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댔다.

“이오벳 옥보시더스.”

“그렇다면…… 라코젠은?”

“내가 만진 건 이오벳뿐이야. 그때는 그게 쓸모 있을 것 같아서 만졌고, 이제는 필요 없을 것 같아서 없앴지.”

“케이의 가족들과 부하들은? 내 시녀들은?”

“그 애들의 감정은 네가 이룬 거야, 아이리스. 너는 좀 더 너 자신을 믿을 필요가 있겠다.”

이런 와중에도, 그들의 감정이 진짜라는 사실에 안도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리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케이도, 다른 이들의 감정도 모두 진짜였다.

이오벳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보상은 충분히 할 생각이었다.

그러자면 다시 한번 살아갈 기회를 얻어야만 했다.

“살려줘.”

“조용히 살아갈 거야?”

“부탁해.”

“케이브란트를 포기하지 않을 거구나.”

“수인을 배척하는 건 잘못됐어. 수인도 사람이야.”

“그래, 맞아. 하지만 너는 평생 죽음과 동행해야 할 거야. 세계의 모든 것이 널 죽이고 싶어 하게 될 거야.”

“살려줘.”

빛이 작게 웃었다.

“정말 욕심쟁이구나.”

“응, 맞아. 나는 욕심쟁이였어.”

“불쌍하고 어리석은 아이리스. 케이브란트 하나만 포기하면,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텐데.”

빛은 이제 거의 리시의 얼굴과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또 만날 일 없으면 좋겠다. 여기는 인간이 오기에 너무 고독하지 않니?”

 

+++

반지는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리시의 상태가 더 나빠지지도 않았다.

점점 거뭇해지던 피부가 반지를 리시의 손에 끼워준 이후로 더는 검어지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마탑의 치료사가 도착해, 한참 리시를 살펴보더니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공작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공작부인을 위해서라도 이제 결정을 내리시는 게 좋을 겁니다.”

치료사는 그런 말을 남기고 그린 저택을 떠났다.

치유의 반지가 소용없는 상황에서, 리시를 더 붙잡아봐야 그녀의 고통을 길게 이어갈 뿐이라는 걸 알았다.

머리로는 아는데, 도저히 행동에 옮길 수가 없었다.

그다음 날, 교황청에서 보내준 대신관 미네르바가 도착했다.

마치 소년처럼 짧은 머리의 미네르바는, 케이를 보자 미간을 좁혔다.

리시가 독에 당한 후 한숨도 자지 않고 리시의 곁에 붙어 있던 케이는,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수척해져 있었다.

“케이브란트.”

“미네르바. 부탁할게. 이제 믿을 게 너뿐이야.”

“……믿지 마. 키룻사를 마셨는데 지금까지 숨이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니까.”

“제발, 부탁할게.”

미네르바는 신성국에서 가장 강한 치유의 힘을 가진 대신관이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고 한들 의원들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치유력일 뿐이었다.

늘 여유만만해서 얄밉기까지 한 케이가 이렇게까지 무너진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기에, 미네르바는 무거운 마음으로 리시의 침대 옆에 섰다.

한때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고 불렸던 여인은, 죽은 지 한참 지난 시신처럼 보여서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미네르바는 마른침을 삼켰다.

만약 기적적으로 낫는다 해도,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걸 원할까?

안구는 사라진 지 오래고, 혈관이 썩어서 피부도 괴사하는 중이었다.

미네르바가 가진 힘을 모두 쏟아부어도, 세상에 좋다는 약을 다 가져다가 먹여도, 리시의 외모는 전처럼 돌아오지 않을 터였다.

“케이브란트. 무엇이 공작부인을 위한 건지…….”

“제발, 미네르바. 너까지 그런 말 하지 마.”

그래, 연명을 관두고 그만 보내주라는 말은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겠지.

미네르바는 한숨을 쉬며 리시의 가슴 위에 살며시 손을 얹고 집중했다.

‘이런…… 심장이 이만큼이나 썩었는데, 대체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리시의 장기 상태는 겉모습보다 더 심각했다.

아직까지 살아서 숨 쉬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위는 아예 형체도 없어졌고…… 이건 뭐야, 폐가 반 이상이 녹아내렸는데…… 아니, 대체 이 상태로 어떻게 살아있는 거야? 이게 가능해?’

미네르바는 리시에게서 손을 떼고 케이를 돌아봤지만, 절박한 그의 눈동자를 보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많이 고통스럽겠네. 내 힘으로 조금 고친다 해서 나을 수준이 아닌데…….’

대화 한번 해본 적 없는 리시가 불쌍했다.

미네르바는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아주 많이 만나봤다.

그중 반은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반은 죽여달라고 부탁했다.

리시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죽여달라고 할 것이 분명하다고, 미네르바는 확신했다.

이런 통증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운 좋게 살아난다 해도 평생 통증을 느끼며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썩어가는 외모를 걱정할 수준이 아니었다.

미네르바는 크게 심호흡한 후, 다시 케이를 돌아봤다.

“케이브란트. 미안해.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네 부인을 위한 건지 모르겠어.”

“미네르바…….”

“네 욕심이야, 케이브란트. 이건 정말로 네 욕심이야. 공작부인이 살아난다 해도, 평생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어. 차라리 죽는 게 나은 고통이 이어질 거야.”

케이의 손이 천천히 올라가 그의 눈을 가렸다.

그는 비명을 삼키려는 듯 아주 천천히 호흡했다.

미네르바는 자신의 오랜 친구가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케이브란트.”

“뭐라도, 할 수, 있을, 거야. 그렇다고 말해줘, 미네르바.”

“없어, 케이브란트.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제발, 뭐라도. 내 생명을 사용해서라도…… 어떻게든……. 내가, 내가 리시 없이는 못 살 것 같아서 그래.”

“그래. 그런 마법이 아직도 이어져 왔다면 해줬을 거야. 그런데 케이브란트. 이제 그런 건 못해. 네 부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그녀가 더는 고통받지 않도록 보내주는 것뿐이야.”

케이의 어깨가 떨렸다.

소리 없는 울음이 더 가슴 아팠다.

눈가를 가린 손 너머로 흐르는 눈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내게, 약이 있어. 고통 없이, 단숨에, 안식에 들어가게, 해줄 수 있어.”

미네르바는 어렵게 말했다.

“마치 잠든 것 같을 거야.”

케이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케이는 천천히 손을 내리고, 젖은 눈으로 미네르바를 응시했다.

“내가 결정하라고?”

“그래, 케이브란트. 네가 남편이잖아.”

“가혹하군.”

“가족이 해야 할 일이야.”

케이는 다시 손을 올려 자신의 눈가를 가렸다.

그러느라 보지 못했다.

치유의 반지가 리시의 손가락 굵기에 맞춰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126) 조금만 쉴게.

  미네르바는 조용히 케이를 응시하며, 그가 결정 내리기를 기다렸다.

그의 어깨가 떨리고, 미처 막지 못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미네르바는 그런 케이를 차마 지켜볼 수 없어서 눈을 감았다.

절망적인 흐느낌이 한참을 흘러나오다가 멈췄다.

“부탁해.”

울음 담긴 음성에, 미네르바는 눈을 떴다.

케이는 여전히 눈을 가린 채, 입술만 살짝 움직였다.

“부디, 아프지 않게.”

“응.”

미네르바는 가져온 가방을 열어서 작은 병을 꺼냈다.

빠르게 심장을 멎게 해주는 약이었다.

“케이브란트. 부인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해.”

“없어.”

단호한 목소리 뒤로, 자조적인 말이 이어졌다.

“제 부인 지키지도 못한 놈이, 무슨 할 말이 있겠어?”

“그래도 네 부인은 듣고 싶을지도 몰라.”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겠지만, 미네르바는 케이가 마지막 후회를 남기지 않기를 원했다.

그제야 케이는 눈가에서 손을 내리고 리시의 옆에 섰다.

그는 리시를 향해 손을 뻗다가, 혹시 아플까 걱정이라는 듯 다시 손을 거뒀다.

반쯤 썩어가는 모습이어도 사랑스럽다는 듯, 케이는 애절한 눈으로 리시의 마지막을 확인했다.

그녀의 얼굴을, 가슴을, 어깨와 머리칼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못 하겠어, 미네르바.”

“케이브란트…….”

“정말로 안 되겠어. 내가 어떻게, 어떻게 리시를 죽이라고 해? 아니, 못해. 안 돼. 리시는…….”

거기까지 말한 케이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미네르바는 케이가 말하던 도중에 심장이 멈춘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끔 가족을 잃은 사람 중에,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해 기절하거나 심장이 멎는 사람이 있었다.

“저기, 케이브란트…… 괜찮은 거지?”

다행히 케이는 쓰러지지 않았기에, 미네르바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의 상태를 살피려고 얼굴을 확인하다가, 그의 표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

케이의 얼굴은 환희로 가득 차 있었다.

‘뭐야……?’

소름이 끼쳤다.

제 부인이 죽을 상황에서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미쳤나?’

그럴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황에서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린 사람을, 미네르바는 심심치 않게 봐왔다.

“케이브란트 그린, 정신 차려. 이대로 정신을 놓으면…….”

케이가 손을 들어 미네르바의 말을 막았다.

“기다려봐, 미네르바.”

말투는 멀쩡했다.

“기다려봐. 기적이 일어날 것 같으니까.”

멀쩡한 건 말투뿐인 듯, 내용은 미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적이라니.

케이의 눈은 리시의 얼굴이 아닌 더 아래쪽으로 향해 있었다.

케이의 시선을 따라간 미네르바는, 그가 리시의 손을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리시의 손가락에는, 공작부인과 아주 어울리지 않는 낡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저 반지는 뭘까?

그런 의문을 품자마자, 그 반지에서 흘러나오는 푸른 빛을 눈치챘다.

그 빛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들 만큼 희미했다.

희미한 푸른 빛이 리시의 육체에 천천히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이 머무는 자리마다, 분명히 나아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거뭇했던 피부색이 서서히 제 색을 되찾고, 곪은 부위가 나았으며, 꺼져버린 눈꺼풀이 부풀었다.

‘안구가…… 어떻게?’

미네르바의 심장이 격하게 뛰었다.

미네르바는 이 놀라운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물건이 단 하나뿐이라는 걸 알았다.

‘설마…… 성유물의 힘인가? 하지만…… 대체 뭐가? 이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성유물이 있었나?’

리시의 육체가 나아가는 속도는 아주 느렸지만, 미네르바는 시간의 흐름도 잊고 그녀가 나아지는 것을 지켜봤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

“하아.”

리시가 처음으로 크게 숨을 내뱉었다.

독에 당한 후로 내내 감겨 있던 눈꺼풀이 움찔, 떨리다가 천천히 위로 올라가며 그 아름다운 연보라색 눈동자를 드러냈다.

허공을 헤매던 눈동자가 케이에게서 멈추는 놀라운 광경을, 미네르바는 멍하니 눈에 담았다.

깜빡, 깜빡,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가 뜬 리시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 이제.”

“리시…….”

“울지 마, 케이.”

“리시…….”

“조금만, 쉴게.”

 

+++

케이는 방을 오가다가 리시의 옆에 멈춰서 그 얼굴을 들여다보고, 또 방을 오가다가 다시 리시의 얼굴을 들여다보기를 반복했다.

리시가 나았다는 걸 믿기 힘든 듯, 리시가 또다시 죽어갈까 봐 걱정이라는 듯, 어수선하게 굴었다.

“케이브란트. 네 부인은 이제 괜찮다니까!”

리시가 잠든 후, 미네르바는 다시 리시의 상태를 확인했다.

리시의 심장도, 위장도, 폐도, 전부 제자리에 있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하게, 제 기능을 하고 있었다.

기적이었다.

성유물이든가.

“알아. 알아, 미네르바.”

“너도 좀 쉬어. 네가 먼저 죽겠다.”

“아니, 난 안 죽어.”

“죽어. 너 며칠이나 못 잔 거야?”

“그런 건 문제가 안 돼. 말해봐, 미네르바. 리시는 나은 거지?”

“깨끗이 나았어. 아무 문제 없어. 아주 건강해.”

미네르바는 벌써 열 번이나 되풀이한 말을, 열한 번째로 또 되풀이했다.

“그래, 그래, 좋아. 좋았어.”

그리고 케이도 벌써 열한 번째로 저 짓거리를 하고 있다.

“말해봐, 케이브란트.”

“뭘?”

“성유물이지?”

“그래. 반지야. 저 반지가 치유의 반지야.”

“저 반지, 아까 봤을 때는 낡아서 곧 부서질 것처럼 보였어.”

“응.”

“하지만 지금은 새것처럼 반짝거리네?”

“응.”

“공작부인이 유물술사였어?”

“그래.”

케이는 부정하지 않았다.

미네르바는 한숨을 삼켰다.

“케이브란트. 유물술사는 교황청에 가서 등록해야 해. 교황청의 관리를 받으며 살아야 하고.”

케이가 우뚝 멈춰서 미네르바를 응시했다.

“그래서, 이르게?”

아이고, 골치야.

미네르바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너 때문에 미치겠다, 케이브란트. 오랜만에 교황청에 갔더니, 네가 결혼을 했다고 하고, 네 부인이 죽을 것 같다고 해서 왔더니, 네 부인은 유물술사라서 스스로 나았고, 이제는 그걸 교황청에 보고도 하지 말라고?”

미네르바는 사람들을 치료하러 다니느라, 케이가 결혼한 줄도 모르고 있었다.

“리시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야. 누구도 리시를 가둘 수 없어.”

“가두는 게 아니라…….”

“리시는 리시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 거야, 미네르바. 그렇게 살게 해주기로 약속했어.”

“하이고.”

미네르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케이브란트. 네 부인을 잘 지켜. 산티아노는 널 지켜보고 있고, 네 부인이 유물술사라는 비밀은 오래 가지 않을 거야. 그리고 이 세상에서 유물술사를 갖고 싶어 하는 곳이 교황청만은 아니지.”

“알아.”

미네르바는 자신이 아직도 죽음의 약을 손에 쥐고 있다는 걸 깨닫고 오싹해졌다.

치유의 반지가 힘을 발휘하기 전에 이 약을 리시에게 먹였더라면.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그 약을 얼른 가방에 집어넣고, 다른 약들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공작부인이 다 낫긴 했어도 체력은 많이 떨어질 상태야. 이거 전부 체력 회복하는 약들이니, 잘 챙겨서 먹여.”

“그래.”

“잘 지켜, 뺏기지 않게.”

“고맙다, 미네르바.”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창피하게.”

밖으로 나온 미네르바는, 울상을 하고 걸어오는 제이미와 마주쳤다.

“미네르바, 공작부인은……?”

미네르바는 놀라웠다.

제이미는 자기 복부에 검이 박혀도 싱글싱글 미소를 짓는 소름 끼치는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제이미까지 리시를 걱정하느라 울상을 하게 만들다니.

케이도 그렇게 만들고, 제이미도 이렇게 만들고.

리시가 대단하긴 대단한 여자인가 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제이미가 울음을 터뜨릴 것 같기에, 미네르바는 얼른 덧붙였다.

“공작부인은 스스로 나았죠.”

“네?”

어리둥절해하는 제이미를 향해, 미네르바는 미소 지었다.

“기적이 일어난 것 같아요.”

 

+++

리시가 무사하다는 소식은 이오벳에게도 전해졌다.

이오벳은 곧바로 리시를 만나러 갔지만, 방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아직 회복하지 못한 상태라며, 케이가 모든 만남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리시의 상태가 어땠었는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멀쩡한 모습을 보이면, 다들 이상하게 여기고 그 원인을 찾으려 할 터였다.

리시는 나았지만,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고, 케이는 리시가 유물술사라는 사실이 너무 빨리 퍼져나가기를 원치 않았다.

“전하. 공작부인이 무사하니, 인제 그만 황궁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방에 돌아오자마자, 세트니가 말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어.”

수척하기는 이오벳도 마찬가지였다.

자기가 데려온 사람이 리시의 차에 독을 탔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잠도 못 자고 리시를 걱정했다.

아무리 라코젠의 첩자가 한 짓이라 해도, 그걸 파악하지 못하고 그린 공작 저에 데려온 건, 이오벳의 불찰이었다.

“전하. 그린 공작과의 친분은 알지만, 전하께서 너무 몸을 낮추시면 안 됩니다. 그린 공작이 이 사건을 빌미 삼아 전하를 쥐고 흔들려 하면…….”

“세트니. 그만해.”

“전하, 이건 가비자르 황실 전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린 공작이 이 사건으로 약점을 쥐었다고 생각하게 두셔서는 안 됩니다.”

물론 세트니의 말이 옳았다.

어차피 라코젠이 한 짓이고, 이오벳은 뻔뻔하게 내 탓이 아니라며, 공작부인이 당한 일은 참으로 유감이라고 전하고 돌아가는 게, 가비자르 황실 입장에서는 나은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오벳은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죄책감이 가슴을 짓눌렀고, 케이와 리시를 볼 낯이 없었다.

어떻게든 케이나 리시를 만나서, 직접 사과의 말을 전해야만 했다.

“세트니, 이건 명백히 우리 쪽 잘못이야.”

“2황자의 잘못입니다, 전하.”

“2황자도 황족이지.”

“황족이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전하의 탓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전하께서는 언제나 그들보다 더 높은 곳에 계셔야 합니다.”

“세트니. 그린 공작은 내 친구야.”

“그전에 황태자 전하이시지요.”

“……황태자도 사람이야. 사람이라면 잘못한 것이 있을 때 응당 사과하고 용서를 받아야 하지.”

“전하. 전하께서는 사람 위에 계십니다.”

이오벳은 한숨을 삼켰다.

세트니는 충성스러운 보좌관이지만, 생각이 너무 고루했다.

물론 황제와 황족이 모든 사람 위에 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세상은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오벳과 세트니가 황궁으로 돌아가는 문제를 두고 실랑이하고 있을 때, 제이미가 찾아왔다.

제이미는 그동안 잃었던 미소를 되찾았지만, 그의 새파란 눈동자에는 냉기가 서려 있었다.

“전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고용인들의 짐을 조사하려고 합니다.”

올 것이 왔다.

세트니는 이오벳이 입을 열기 전, 얼른 앞으로 나섰다.

“러셀 남작. 그 사건은 황태자 전하와 아무 관련이 없소.”

“글쎄요. 그것은 조사해봐야 알 일이지요, 세트니 백작.”

도망치던 하녀가 자결하는 바람에, 케이 측에는 그 하녀가 이오벳이 데려온 하녀라는 물질적 증거가 없었다.

케이가 이 사실을 가지고 황실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증거나 증인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세트니는 리시가 독을 마시고 깨어나지 못해 그린 가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동안, 빠르게 고용인들의 입단속을 시킨 터였다.

“무례하오, 러셀 남작. 감히 황태자 전하의 고용인들을 조사하겠다고 하다니. 이 건에 대해서는…….”

“전하께서도 같은 생각이신지요.”

제이미가 세트니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이오벳에게 물었다.

“뜻대로 하게.”

“전하!”

세트니의 외침에도, 이오벳은 꿈쩍하지 않았다.

제이미는 고개를 살짝 숙인 후, 이오벳의 방에서 나갔다.

한 시간 후, 이오벳이 데려온 기사들과 시녀, 시종들, 그리고 하녀들이 자신의 짐을 가지고 한 곳에 모였다.

제이미는 에르웰과 풍성한 털을 가진 하얀 개 한 마리를 데려왔는데, 눈과 코가 새까만 그 개의 정체는 이반이었다.

이반은 사람들을 누비며 킁킁 냄새를 맡았고, 어느 한 하녀의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웡!” 하고 크게 짖었다.

하녀의 짐에서 라코젠의 체취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저번에 황궁에 갔을 때, 이반은 라코젠의 냄새를 기억해뒀었다.

하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네 짐을 내놔요.”

제이미의 말에, 하녀는 우물쭈물하며 세트니를 돌아봤지만, 세트니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서 있을 뿐이었다.

하녀는 어쩔 수 없이 제이미에게 자신이 들고 온 낡은 가방을 내밀었다.

제이미는 가방을 뒤졌고, 그 안에서 빨간 분갑을 찾아냈다.

그것은 하녀가 다른 하녀에게 선물로 받은 것이었는데, 바로 그 분갑에 라코젠의 냄새가 남아 있었다.

하녀는 거의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제이미는 무심히 분갑을 열고 내용물을 바닥에 쏟아냈다.

분갑의 크기에 비해 내용물이 턱없이 적었다.

분갑에 다른 장치가 있었다.

내용물 아래에 감춰져 있던 뚜껑을 열자, 그 안에서 새까맣게 마른 잎사귀가 나왔다.

뒷다리로 서서 잎사귀의 냄새를 맡은 하얀 개가 “웡!” 하고 짖자, 제이미가 서리 낀 미소를 지으며 세트니를 돌아봤다.

“이 하녀의 짐에서 키룻사가 나온 이유를 설명해볼까요, 세트니 백작?”

(127)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내가 그걸 어찌 알겠소?”

세트니의 말에, 하녀는 창백해졌다.

“그게 키룻사인지 확실하지도 않고.”

“확실해요.”

대답한 건, 에르웰이었다.

“제가 본 적이 있어요. 그리고 피비린내 같은 이 냄새도 맡아본 적 있고요.”

리시의 시녀 중 한 명인 에르웰이 루테크 가문이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루테크가 그렇다 하면 그런 것이었다.

세트니는 속으로 신음하며 말했다.

“그 하녀가 키룻사를 사용했다는 증거는 있소?”

이쯤 되면 인정하는 게 낫다는 걸 알지만, 세트니는 어떻게든 독살 미수 사건을 황실과 관련 없는 일로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것이 대대로 황족을 모셔온 세트니 가문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 세상에 벌어지는 불미스러운 사건이 황실과 연결되는 일은 없어야만 했다.

증거가 없으면, 도망치다가 자결한 하녀가 황실과 관계있다는 사실도 증명할 수 없었다.

세트니는 이 일을 어디서 몰래 숨어든 하녀, 혹은 케이의 다른 적이 보낸 하녀 정도로 해서 마무리 지을 계획이었다.

“증거는…….”

제이미가 싱긋 웃으며 덜덜 떠는 하녀를 돌아봤다.

“이 하녀에게 친히 물어보면 되겠지요. 이 하녀가 황태자 전하의 하녀인 것은 확실하겠지요?”

세트니는 갈등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이 하녀조차 모르는 사람이라고 우기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렇다면 자리를 이동할까요?”

제이미가 하녀를 향해 상냥하게 말했다.

세트니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면, 하녀의 충성심이 세트니만큼 강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제이미 러셀에 대한 소문은 널리 퍼져 있었고, 황실에서 일하는 하녀 또한 그 소문을 알고 있었다.

화가 나면 화가 날수록 상냥해지는 남자.

미소 띤 얼굴로 사람을 썰어 죽이는 남자.

“그, 그건 제 것이 아니에요!”

하녀가 넙죽 무릎을 꿇고 외쳤다.

세트니가 두 눈을 부릅떴지만, 하녀는 더 이상 세트니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건, 그건 해밀이 제 짐에 넣어둔 거예요. 해밀 거예요. 해밀이 저한테 잠깐 가지고 있어 달라면서……. 저, 저는,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어요. 정말이에요.”

“해밀.”

제이미가 싱긋 웃으며 다른 하녀들을 돌아봤다.

“해밀이 누구지요?”

하녀들은 어쩔 줄 모르겠단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다가, 마지막에는 세트니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세트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제이미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서는 냉기가 철철 넘쳐 흘렀다.

“조사할 거예요. 너희들이 가지고 온 짐을 뒤질 거고, 너희의 가족에게도 사람을 보낼 거지요.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혹은 짐에서, 해밀에 관한 것이 하나도 나오지 않을 것 같은가요? 만약 누구에게서든 해밀이라는 여자에 대해 안다는 증거가 하나라도 나온다면.”

일순, 제이미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신성국의 가호를 받으며, 성유물의 수호자인 케이브란트 그린 공작의 부인을 암살하려 한 암살자를 숨겨주고 모르는 척해준 죗값을 치르게 될 겁니다. 너희들뿐만이 아니라, 너희들의 가족까지. 모조리.”

 

+++

리시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케이의 머리칼이었다.

처음에 눈을 떴을 때도 케이의 얼굴이 보였던 게 떠올랐다.

그게 참 좋았다.

내가 아플 때, 나를 걱정하는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거.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거.

케이는 침대 옆에 앉아, 침대에 얼굴을 대고 잠들어 있었다.

리시는 그를 향해 손을 뻗다가, 격한 통증이 느껴져서 멈칫했다.

낫기는 나았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닌 듯했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자 왼손 검지에서 빛나는 반지가 보였다.

은색 링에 투명한 보석.

처음 보는 반지이지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게 치유의 반지구나.’

죽음의 공간에서 만난 ‘빛’은, 이 반지가 지난 삶에서는 쓰임 없이 사장되었었다고 했다.

리시는 치유의 반지로 할 수 있는 일들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심하게 앓은 후라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 지금은 이런 것보다는…….’

리시는 케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리시의 손가락이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살짝 건드리자마자, 케이가 번쩍 눈을 떴다.

“리시.”

그의 음성은 전에 없이 쉬어 있었다.

갈라진 그의 음성과 거뭇하게 자란 수염, 퀭한 눈가를 보니 가슴이 아렸다.

그가 나를 얼마나 걱정했는지, 그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리시, 이제 괜찮은 거야? 살아난 거 맞지? 아픈 건 어때? 아직 많이 아파?”

질문을 쏟아내면서도, 케이는 차마 리시의 몸에 손을 대지 못했다.

건드리면 리시가 아파할까 봐 걱정하는 것이리라.

실제로도 리시는 아직 통증이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그의 손길을 느끼고 싶어서 머뭇거리는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케이, 많이 울었어?”

케이의 눈썹 끝이 아래로 내려가며, 그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맺힌 눈물을 삼키려는 듯, 그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 말했다.

“당신이 죽었으면 더 많이 울었을 거고, 그렇게 울다가 바싹 말라서 죽어버렸을 거야.”

“곤란하네. 나는 당신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 좋겠는데.”

“그래, 그러니까 당신도 오래오래 살아. 그래야 내가 살지.”

그 말이 참 듣기 좋았다.

‘빛’은 케이의 감정을 건드린 적이 없다고 했다.

‘빛’의 말을 듣기 전부터, 리시는 그 사실을 알았다.

지난 삶에서도 그의 눈에 리시는 예쁜 사람이었다.

리시의 눈에 그가 예쁜 사람이듯이.

“당신이 정말로 내 곁을 떠날까 봐, 무서워서 죽을 뻔했어, 리시. 정말…… 내가 살면서…… 그렇게 무서운 건…….”

감정이 북받치는 듯,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렇게나 날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 참 행복한 일이구나.

“울지 마, 케이.”

“당신이 아프면 울 거야. 당신이 죽어도 울 거고. 내가 우는 거 보기 싫으면, 당신이 건강하게 내 곁에 있어야 해.”

“나 좀 안아줘, 케이.”

“그래도 돼? 안 아프겠어?”

“아파도. 당신 품이 필요해.”

케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침대 위로 올라와 조심스레 리시의 곁에 누웠다.

리시를 보듬어 안는 그의 몸짓이 어찌나 세심한지.

리시는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참 좋아서.

그의 살이 닿는 곳마다, 이불이 스치는 곳마다, 칼로 베는 것 같은 통증이 일었지만, 리시는 신음을 참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의 체취가 새삼스럽게 소중하고 또 소중해서, 한껏 숨을 들이마시며 그를 가슴에 채웠다.

혹여 리시가 아플까 봐 안은 자세 그대로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그의 다정함이 달콤했다.

‘여기가 내 자리야.’

죽을 뻔했고, 무척 아팠지만, 그렇기에 도리어 단단해졌다.

그를 향한 믿음도, 나에 대한 신뢰도.

“케이, 다들 괜찮아?”

“응, 괜찮아.”

“다행이다. 내가 독을 마시고 나서 얼마나 지났어?”

“열흘이 지났어.”

“그렇게나……? 황태자님은 황궁으로 돌아가셨어?”

“리시, 지금은 그런 걸 걱정할 때가 아니야. 당신은 좀 더 쉬어야 해.”

그의 굳은 목소리에서, 이오벳이 아직 이 저택에 남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케이는 리시의 일이라면 평소보다 냉혹해졌다.

첩자가 있는지도 모르고 이 저택을 방문해 사건을 일으킨 이오벳 측에도 책임을 물으려는 게 분명했다.

“케이, 말해줘. 어떻게 됐어?”

케이는 끄응, 하고 신음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그동안의 일을 설명했다.

리시의 차에 독을 탄 해밀이라는 하녀는 자결했고, 며칠 전 창고에서 그린 가 하녀의 시신을 발견했다고 했다.

“해밀이 우리 하녀를 죽이고 옷을 갈아입은 후에 차를 가져온 거야. 에르웰 양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지만, 하녀들이 워낙 많다 보니 처음 본 얼굴이라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거고.”

이오벳의 보좌관인 세트니는 이 사건을 조용히 덮으려 했지만, 제이미가 해밀이 이오벳 측과 관련 있다는 증거와 증언을 찾아냈다고 했다.

“세트니 백작은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이오벳은 당신을 보고 사과한 후에 돌아가겠다면서 남아 있어.”

“황태자님을 만날래, 케이.”

“그러지 마, 리시. 조금 더 쉬고 나중에 만나도 돼.”

“황태자님이 황궁을 오래 비워서 좋을 게 없어. 이 불미스러운 사건도 금방 소문이 날 거고.”

“그건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야.”

물론 다른 때라면 리시도 케이의 말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리시는 트리사의 귀걸이가 이오벳의 감정을 건드렸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렇게 이용당한 이오벳을 더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리시가 고집을 부리자, 케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시종을 불러 이오벳에게 보냈다.

리시는 케이의 부축을 받고 침대에서 내려와 거울 앞에 서서 모습을 점검했다.

“나, 꼴이 정말 엉망이네.”

“유독 예뻐.”

케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칭찬하자 리시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직 폐가 다 낫지 않아서, 웃음과 기침이 함께 터져 나오자 케이가 얼른 리시를 부축했다.

“이것 봐, 아직 누굴 만날 상황이 아니야.”

“괜찮아, 케이. 괜찮아.”

리시가 빗을 집어 들자, 케이가 얼른 빗을 가져가서 대신 리시의 머리를 빗겨주었다.

리시는 그의 털을 빗겨주던 때를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때 참 좋았는데.

몸이 좀 괜찮아지면 또 늑대 케이에게 빗질을 해줘야겠다.

이윽고 이오벳이 도착했다.

그는 걱정과 미안함이 가득한 눈으로 리시를 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그린 공작부인. 내 불찰입니다.”

“아니요, 전하. 그렇지 않아요.”

‘빛’은 세계가 리시를 죽이려 한다고 했다.

이오벳이 저택에 오기 전 몇 번이나 점검하고 살폈더라도, 이 일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모든 건 결국 세계의 흐름을 바꾸려고 한 리시의 탓이었다.

“2황자가 그린 공작 부인에게 적의를 품고 있다는 걸 아는 상황인데, 내가 제대로 확인했어야 했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이 사건에 대한 보상은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또한, 이 사건에 대해 황실에 항변하더라도 반박 없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오벳의 성실한 사과에, 리시는 감동마저 느꼈다.

‘빛’이 마음을 건드린 유일한 사람.

분명 이오벳도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오벳은 리시를 향한 적의는커녕, 케이만큼이나 수척해질 정도로 리시를 걱정하고 있었다.

“전하, 사과를 받겠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2황자가 일으킨 것. 그뿐입니다. 전하의 탓은 없으니, 그 부분은 불문에 부치겠습니다.”

케이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렸고, 이오벳은 정말 그래도 괜찮을지 의문이라는 표정이었다.

용서를 해주겠다는데도 마냥 기뻐하지 않는 이오벳의 태도에, 리시는 점점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 되었다.

용서를 받아야 할 쪽은 이쪽이었다.

귀걸이가 멋대로 한 짓이라 해도, 어쨌든 귀걸이는 리시를 위해 이오벳의 감정을 조작했다.

“그래도 공작부인. 내가 이 사건의 보답으로 공작부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겁니다.”

아무래도 이오벳은 리시에게 뭐라도 하나 해줘야, 진심으로 용서받았다는 기분을 느낄 것 같았다.

리시가 이오벳에게 원하는 건 딱 하나였다.

“그렇다면, 언젠가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리시는 옆에 앉아 있는 케이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이이의 편이 되어주세요.”

“그거야 당연히…….”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요, 전하.”

친구의 편을 드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던 이오벳은, 리시의 신중한 눈빛을 보고서야 그녀가 말하는 ‘무슨 일’이라는 게 그리 쉽게 받아들일 문제가 아닐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렇다 해도 이오벳의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그럴 겁니다. 그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

황태자가 떠난 후에는 에르웰과 크리시나, 그리고 케이의 부하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자기들이 이 문제를 막지 못한 부분을 자꾸만 사과했다.

리시는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여러분 탓이 아니에요. 앞으로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그 또한 여러분 탓이 아니에요.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말을 삼키고, 리시는 말했다.

“우리, 서로 미안해하는 건 오늘까지만 해요. 내일부터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범한 나날로 돌아갔으면 좋겠어. 그럴 수 있죠?”

그렇다면 오늘 좀 더 죄송해할 거라는 사람들을 간신히 내보낸 후에야, 리시는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아까 깨어났을 때보다 통증이 많이 사라졌다.

내일이면 이 통증도 완전히 가실 것이다.

리시는 제 옆에 누운 케이의 품에 파고들었다.

“자야겠어, 케이.”

“그래, 리시.”

“자고 일어나서.”

거기까지 말하고 리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판단이 옳은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결국 옳고 그름은 행동으로 옮겨야만 알 수 있을 것이기에, 리시는 마음을 정했다.

“할 이야기가 있어.”

(128) 경이롭고 위대한 존재

월라스는 회녹색의 작은 드래곤을 응시했다.

리시가 독을 마셔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된 토미는 그 충격으로 드래곤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토미가 드래곤으로 변하는 모습을 본 사람은 케이와 크리시나, 에르웰뿐이었다.

“크리시나랑 에르웰이 정말로 이 애를 고발하지 않을까?”

나단은 아직도 걱정스러운 듯했다.

“그 둘은 대장이 직접 선택해서 데려온 시녀들이야. 믿을 만하겠지.”

월라스의 말에 나단이 한숨을 내쉬었다.

“뭐, 다른 부분에서야 그럴 수도 있지만.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잖아. 수인을 숨겨줬다는 게 들통나도 사형이라고. 게다가 이 녀석은 스스로 인간으로 돌아올 줄도 모르는 것 같고.”

드래곤은 둥글게 웅크린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아서, 마치 그 자세 그대로 죽은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토미, 형수님은, 아이리스 님은, 아니, 아니. 누님은 무사해. 살아 있어. 죽지 않아.”

리시가 나은 후, 월라스는 몇 번이나 토미에게 설명해줬지만, 토미는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아무래도 리시에게 토미를 데려가서 보여줘야 할 것 같은데, 이제 막 나은 리시가 토미의 이런 모습을 보고 충격받아서 앓아누울까 봐 걱정이었다.

“형수님은 우리가 수인이라는 거 알지 않아? 그럼 뭐, 토미가 수인이라고 새삼스럽게 놀라시지는 않겠지.”

“그야 그렇겠지만, 혹시 모를 일이잖아. 충격받아서 기절이라도 하시면…… 대장이 또 울 거야.”

“아, 그건 진짜 못 봐주겠더라.”

월라스와 나단이 토미를 어떻게 해야 할지 한참 고민하고 있는데, 케이가 들어왔다.

그동안 수염도 못 깎아서 엉망이었던 케이의 말끔해진 모습에, 나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장, 이제야 좀 사람 같네요. 그래도 좀 주무시지 그러세요? 눈 밑은 아직도 퀭한데.”

“토미는?”

“여전해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케이는 침대 한쪽에 웅크리고 있는 작은 드래곤에게 다가갔다.

그가 드래곤의 등을 쓰다듬었지만, 드래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토미. 네 누님을 보러 가자.”

그렇게 말하며 케이가 토미를 안아 드는 순간, 토미가 갑자기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시러! 안 대! 시러어어어!”

“토미?”

“시러어어. 나, 시러해. 뉴님이 나 시러해! 시러어어!”

그제야 케이는 토미가 왜 이러는지 깨달았다.

“너, 버림받았구나?”

“시러어어. 시러어! 뉴님 나 시러!”

어쩌면 토미는 케이처럼 태어나는 순간부터 수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놀란 토미의 모친이 토미를 버렸고, 호랑이가 토미를 주워서 키운 것이리라.

토미는 자기가 이런 모습일 때 모친에게 버림받은 기억이 있어서, 리시에게까지 버림을 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 분명했다.

케이에게 단단히 붙잡힌 드래곤의 작은 날개가 애처롭게 파드닥거렸다.

드래곤이 이빨을 드러내고 케이의 팔뚝을 깨물었지만, 케이는 드래곤을 놓지 않았다.

“토미. 누님은 너 안 싫어해.”

“시러어어어!”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아이의 귀에, 케이의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케이는 어쩔 수 없이 나단에게 눈짓했다.

나단은 끄응, 하고 일어나 문이 잠긴 걸 확인하고는 몸을 웅크렸다.

나단의 작은 육체가 점점 부풀어 오르는가 싶더니, 그가 있던 자리에 거대하고 위엄 있는 사자가 나타났다.

풍성한 갈기를 가진 사자를 보자, 드래곤이 몸부림을 멈췄다.

“봐, 토미.”

케이가 얌전해진 드래곤을 안고 사자에게 다가가, 사자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나단도 너와 같아. 그래도 누님은 나단을 싫어하지 않아. 버리지도 않았고.”

“뉴님, 나당 조아해?”

“그래, 토미. 아주 좋아해.”

“그러먼 나도 조아해?”

“그래, 토미. 아주 좋아할 거야.”

케이의 부하들은 리시가 충격받을까 봐, 토미가 수인이라는 걸 나중에 알리려 했지만, 케이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리시는 이미 토미가 수인이라는 걸 알고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걸 알게 된 이유는, 아마도 케이가 수인이라는 걸 알아낸 것과 비슷하리라.

리시가 독에서 회복하지 못했을 때는 정신이 없어서 토미를 챙기지 못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케이는 겁에 질린 어린 수인을 조금이라도 빨리 안심하게 해주고 싶었다.

토미가 안정을 되찾아야 인간으로 돌아오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다.

케이는 작은 드래곤을 모포에 둘러싸서 침실로 데려갔다.

침대 옆에서 곤히 잠든 리시를 내려다보며, 케이가 드래곤에게 작게 속삭였다.

“저것 봐, 토미. 네 누님은 이제 괜찮아 보이지?”

작은 드래곤의 몸에서 긴장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토미, 푹 자야 해. 푹 쉬고 건강하게 있어야 네 누님이 안심할 거야. 너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고.”

“케이?”

작게 말한다고 말한 건데, 리시의 잠을 깨웠나 보다.

“……토미?”

케이의 예상대로, 리시는 어린 드래곤이 토미라는 걸 곧바로 알아봤다.

이미 토미가 드래곤 수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리시가 이름을 부르자, 드래곤이 다시 몸을 움츠렸다.

버림받을까 봐 겁에 질린 드래곤을 향해, 리시는 미소 지었다.

리시가 이불 밖으로 두 팔을 꺼내 드래곤을 향해 뻗었다.

“이리 와, 토미.”

나른한 음성이 토미를 부르자마자, 어린 드래곤은 몸부림을 쳐서 케이의 품을 빠져나왔다.

바닥에 툭 떨어진 드래곤이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침대 위에 올라가려고 애쓰는 걸, 케이는 가만히 지켜봤다.

‘저 날개로 날 수 있을까? 드래곤이라면 가능한가?’

전설의 생물 드래곤.

케이는 물론이거니와 케이의 조부조차도 드래곤을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오래전에 이 대륙에 살았던 적이 있다는 기록이 곳곳에 남아 있으니 존재했던 생물이 분명하기는 하지만, 드래곤 수인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처음에 토미가 드래곤으로 바뀌는 걸 봤을 땐, 리시를 신경 쓰느라 토미를 살펴볼 겨를이 없어서 큰 도마뱀인 줄로만 알았다.

나중에 제이미에게 토미가 ‘드래곤’이라는 보고를 받고 나서도, 리시를 걱정하느라 건성으로 들었다.

인제 와서야 토미가 드래곤 수인이라는 게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알겠다.

기록은 드래곤을 표현할 때 언제나 그 앞에 수식어를 붙였다.

위대한. 경이로운. 지혜로운. 거룩한.

마법적 생물이 많았던 시대에도 드래곤은 그토록 놀라운 존재였다.

그리고 지금 그 경이롭고 위대한 존재가.

파닥- 파닥- 툭-

침대에 올라가지 못해서 방방 뛰다가 도로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통통하고 짧은 꼬리를 휘두르고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침대에 올라가려고 버둥거리는 모습은, 위대하고 거룩하다기보다는.

‘귀엽군.’

한참 그렇게 노력하는 토미를 지켜보는데, 리시가 케이를 향해 나무라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그제야 케이는 정신을 차리고 토미를 번쩍 들어 침대 위에 올려줬다.

어린 드래곤은 뽈뽈뽈 달려가 리시의 품에 안겼다.

“뉴님…….”

“응, 토미. 괜찮아. 내가 말했잖아. 내가 곁에 있을 거라고.”

“뉴님, 뉴님, 나 안 시러?”

“아주 좋아해, 토미.”

리시는 어미에게 버림받은 상처를 위로받지 못했던 작은 생물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힝얼거리던 드래곤이 잠들었고, 리시의 눈도 스르륵 감겼다.

케이는 이 모든 광경이 그저 기적처럼만 느껴졌다.

리시는 살아 있고, 드래곤이 눈앞에 있다.

이게 기적이 아니라면 무엇이 기적일까.

리시가 독을 마신 후, 케이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몹시 피곤했지만, 이날 밤은 이 경이로운 장면을 눈에 담느라 쉬이 잠들 수 없었다.

+++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리시의 품에서 잠든 드래곤은 어느새 토미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리시는 새근새근 자는 토미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다가, 옆에 모로 누워서 이쪽을 보는 케이와 눈이 마주쳤다.

리시가 미소 짓자, 케이도 미소 지었다.

이 느낌이 참 좋아서, 리시는 자꾸 눈가가 시큰거렸다.

둘은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 짓기도 하고, 토미가 깨지 않도록 입 모양만으로 대화를 주고받기도 하며, 오전을 보냈다.

이윽고 토미가 깨어났을 때, 리시는 토미를 앉혀놓고 단호하게 말했다.

“토미, 너는 수인이야.”

“슈인.”

“그래, 수인. 그리고 여기 이 아저씨도 수인이야.”

토미의 눈동자가 리시의 손가락을 따라가다가 케이에게서 멈췄다.

“아져씨도 슈인.”

“그래.”

케이가 “왜 당신은 누님이고 나는 아저씨야?”라며 툴툴거렸지만, 리시는 무시했다.

“수인은 나쁜 게 아니야.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수인을 조금 두려워해.”

이 말은 아직 토미에게 조금 어려웠나 보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어린 소년의 볼을 감싸고, 리시는 눈을 맞췄다.

“나는 네가 좋아. 이 아저씨도 널 좋아하고, 아저씨 부하들도 널 참 많이 좋아해.”

“나당?”

“그래, 나단 같은 아저씨 부하들.”

좋아한다는 말은 제대로 아는 토미가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토미. 그 사람들 말고 다른 사람들은 아니야. 다른 사람들은 무서워해.”

“시러해? 나, 시러해?”

“너뿐 아니라, 다른 수인들도. 전부 싫어해.”

지금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토미가 울적해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너는 배워야 해. 인간으로 있는 법을, 갑자기 수인으로 변하지 않는 법을.”

그 후로도 리시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열심히 설명했다.

영리한 토미는 자기가 또 드래곤으로 변하면, 리시가 많이 난처해지리라는 걸 알게 되었다.

리시는 제이미를 불러, 토미에게 힘을 조절하는 법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그래야지요. 이 애를 가르칠 방법을 찾기 위해, 저희는 어젯밤 내내 회의를 했어요.”

“방법을 찾았나요?”

“물론이지요.”

제이미가 무척이나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리시는 이제 제이미가 저렇게 상대를 녹일 것 같은 미소를 지을 때는, 거짓말을 할 때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든든하네요.”

“저희만 믿으세요, 형수님.”

제이미는 달콤한 미소와 함께, 토미를 데리고 나갔다.

케이가 속삭였다.

“제이미에게는 무척 힘든 도전이 될 거야, 리시.”

“그러게요.”

리시가 키득키득 웃자, 케이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 멍하게 리시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또 울어, 케이?”

“몰랐어? 사실 난 울보야.”

“이제 알았네.”

“울보는 매력 없다고 도망쳐도 소용없어. 당신 치맛자락 붙잡고 매달릴 거니까.”

“쓸데없는 걱정을 하네.”

리시는 케이의 눈가를 엄지로 쓱 쓸어주며 말했다.

“나는 울보를 엄청나게 좋아하는데.”

“그래? 그럼 분발할게.”

케이는 전과 다름없이 리시와 실없는 대화를 나누는 이 모든 장면이 그저 감동이었다.

리시가 웃을 때마다, 그녀가 죽은 사람처럼 침대에 누워 있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나왔다.

자신이 이토록 감정 많은 인간이었는지, 이제야 처음 알게 되었다.

“케이, 할 이야기가 있어.”

리시가 그렇게 말했을 때야, 어젯밤 그녀가 할 얘기가 있다는 말을 남기고 잠들었던 게 떠올랐다.

“일단 식사부터 하자, 리시. 당신, 너무 오랫동안 앓았었어.”

아무래도 중요한 이야기일 것 같아서, 케이는 그전에 리시의 체력을 조금이라도 더 회복시켜두고 싶었다.

하지만 리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전에 해야 할 이야기야.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라서…….”

리시는 이 시간이 지나면 결심이 흔들릴 것 같았다.

단호한 그녀의 눈빛에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콰앙-!

거칠게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젠! 노크해야지!”

헤레이나의 외침이 침실까지 들려왔다.

리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케이를 쳐다봤다.

케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부모님은 상당히 실력 좋은 정보원들이 있어서…….”

“리시가 죽어간다는데, 지금 노크가 문제야?”

젠이 바락 외치는 소리가, 케이의 목소리를 끊었다.

“아무래도 그 정보원의 정보, 좀 느린 것 같은데.”

리시가 중얼거릴 때, 침실 문이 열렸다.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매달고 문을 활짝 연 젠, 그 뒤에서 젠을 말리려 하는 헤레이나와 근심 가득한 와이번이 리시의 눈에 들어왔다.

젠은 리시가 마치 오래전에 죽은 사람 같아 보인다는 정보까지만 들었었는지, 멀쩡한 얼굴로 케이와 마주 앉아 있는 걸 보자 그대로 굳어버렸다.

자기가 보는 게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깜빡거리는 젠을 밀어내고 헤레이나가 다가왔다.

냉정한 인상의 노부인은, 웃음기 없이 리시의 얼굴을 꼼꼼히 살피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감은 눈에서 소리 없는 눈물이 흘러내려 볼을 적셨다.

헤레이나는 그렇게 눈을 감은 채, 딱 한마디만 했다.

“다행이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리시는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걱정했는지, 이곳으로 오면서 그녀의 속이 얼마나 새까맣게 탔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러한 감정은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렇듯 커다란 애정을 받은 적이 없었던 리시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네.”

목소리가 떨렸다.

“네, 어머니. 네. 정말. 다행이에요.”

(129) 다른 남자의 아내

젠은 울지 않았지만, 한동안 리시를 끌어안고 감정을 억누르는 듯 리시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이윽고 리시에게서 떨어진 젠은 발갛게 부은 눈으로 리시를 보며 말했다.

“살아 있는 거 맞죠?”

“그래요.”

“키룻사 독을 먹었다고 들어서…… 난 정말 새언니가 어떻게 된 줄 알고…… 아, 진짜. 왜 얘기를 안 해준 거야?”

그동안의 걱정이, 아무 소식도 전하지 않은 케이를 향한 분노로 표출되었다.

팔을 퍽 얻어맞은 케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정신이 없었어.”

“정신이 없었다고 해도!”

버럭 외친 건, 놀랍게도 젠이 아닌 와이번이었다.

아버지가 언성 높이는 걸 본 적이 거의 없는 케이와 젠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와이번을 돌아봤다.

와이번은 전에 없이 분노한 표정이었다.

“말을 해야지! 말을! 네 부모가 걱정하는 건 생각도 안 하는 거냐? 우리가 리시 소식을 듣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와이번은 목소리가 너무 크다는 걸 깨닫고 말을 멈췄다.

그의 눈동자가 리시에게로 향했을 때, 그 자리에 분노는 사라지고 애틋함과 걱정만이 남았다.

“아픈 곳은 없니?”

“네, 아버님.”

“그래. 그러면 됐다.”

와이번이 소리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모습에, 리시는 또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참 좋은데, 참 행복한데, 왜 자꾸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다들 감격스러운 순간이라는 건 알겠는데, 침실 문을 너무 활짝 열어둔 거 아냐?”

언제 온 건지, 엘디가 문가에 서 있었다.

엘디는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침대 옆에 서서 리시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형수가 그렇게 조심성 없이 행동할 때부터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어. 멍청하게 독이나 마시고.”

“엘디! 그게 지금 죽다 살아난 사람한테 할 소리야?”

젠이 엘디의 옆구리를 때리려 했지만, 엘디는 쉽게 피하며 계속해서 말했다.

“형수는 지금 형수한테 적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야 해. 형 때문에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형수가 벌이는 사업 가지고도 뒷말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알아? 분명 형수를 죽이고 싶은 사람들도 여럿 있을 거라고. 게다가 브리트니, 그 여자. 스티무어 제국 황비가 됐는데, 가만히 있겠어? 기회는 이때다 싶어서 형수를 죽이려 들 거라고.”

“응, 그러게. 걱정 끼쳐서 미안해.”

“걱정? 하! 내가 걱정을 했을 것 같아? 아주 톡톡히 대가를 치르는구나, 하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 그렇게 나대니 그런 꼴을…….”

“엘디.”

젠이 엘디의 말을 끊었다.

젠은 엘디가 문가에 놓고 들어온 꾸러미를 들고 있었는데, 뭔가 잔뜩 담긴 것 같은 꾸러미는 한 개가 아니었다.

“이게 뭐야?”

젠이 꾸러미를 펼치려 하자, 엘디가 얼굴을 붉히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젠이 더 빨랐다.

“와, 이게 다 뭐야? 이건 약초고…… 어, 이건 이번에 마탑 연금술사들이 개발했다는 체력회복제네. 자양강장제라든가? 아, 이 고기찜은 몸에 좋다는 약초가 다 들어가 있는 것 같고…….”

젠이 짐 안에서 물건을 하나, 하나 꺼내다가 고개를 들고 엘디를 올려다봤다.

엘디는 얼굴이 빨갛다 못해 터질 지경이었다.

“설마, 리시가 먹을 것들 사 온 거야?”

“이리 내!”

“아니, 리시 말고는 이런 게 필요한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

“아, 이리 내라고.”

사실 엘디는 가족들보다 좀 더 일찍 저택에 도착했지만, 문지기에게서 리시가 나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내에 가서 몸에 좋다는 것들을 다 사 온 터였다.

당연히 리시와 케이만 있을 줄 알았는데, 가족들이 다 와 있기에, 이 많은 것들을 주는 것도 민망해서 나중에 다른 사람을 통해 전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젠. 이 밉살맞은 여동생은 사람을 안 도와준다.

“고마워, 엘디.”

리시의 말에 엘디가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형수 먹으라고 사 온 거 아냐. 내가 다 먹을 거야.”

“아, 그래? 그럼 먹어.”

젠이 체력회복제 한 병을 엘디에게 들이밀었다.

엘디는 언젠가 젠이 울고불고하며 자신에게 매달려 “오빠, 오빠밖에 없어. 나 좀 도와줘.”라고 애원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왜 그렇게 노려봐? 먹으려고 산 거라며? 먹으라고.”

“나중에 먹을 거야.”

엘디가 으르렁거리듯 말했지만, 젠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왜 나중에 먹어? 좋은 건 지금도 먹고, 이따가도 먹고, 계속 먹어야지. 자, 이 고기찜도 따끈따끈 맛있겠네. 아, 그런데 그거 알아? 여기 들어 있는 이 구불거리는 약초, 이거 남자가 먹으면 좀 안 좋은 건데.”

“어머, 그러니?”

헤레이나가 관심을 보였다.

“응, 이거 여자한테 좋은 약초예요.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피를 잘 돌게 해주는 약초. 남자가 먹으면 열이 너무 심하게 올라서 한참을 앓아요. 엘디, 나한테 고맙지? 내가 아니었으면 모르고 이걸 먹을 뻔했잖아.”

엘디는 주먹을 꽉 쥐었다.

엘디의 마음을 이해하는 케이가, 남동생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알아, 엘디. 언젠가 젠은 마땅한 응징을 받게 될 거다.”

+++

가족들과 편하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엘디가 챙겨온 음식과 여러 약 덕분에, 리시의 상태는 한결 좋아졌다.

리시를 많이 걱정했던 가족들은 좀 더 리시 곁에 머물고 싶어 했지만, 케이가 이 저택에 드래곤 수인이 있다는 말을 전하자, 모두 토미를 보기 위해 침실을 떠났다.

“미안해, 리시. 아직 피곤할 텐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

“아니, 즐거웠어. 정말로.”

“이제, 얘기할래? 아니면 좀 더 잘래?”

가족들과의 만남은 오히려 리시의 결심은 단단하게 만들었다.

리시는 눈앞에 있는 이 남자를 믿었고, 이 남자의 가족들과 부하들을 믿었다.

세계가 리시를 죽이려 하는 위험한 상황에서, 믿어야 할 사람을 믿지 않으면 위험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용기를 내야만 한다.

“케이, 지금부터 내가 할 얘기는 믿기 어려운 얘기일 거야. 하지만 전부 진실이고,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걸 믿어줘야 해.”

“나는 당신을 믿어, 리시.”

“이건 정말로, 정말로 있을 수도 없고, 믿어지지도 않을…….”

“리시.”

케이가 리시의 손을 잡았다.

“당신을 믿어. 그 무슨 말을 해도.”

“그 무슨 말을 해도, 날 미워하지도 않을 거야?”

“나는 그냥, 당신이 여기 이렇게 앉아서 숨도 쉬고 웃기도 한다는 게, 그저…… 그저, 감사해. 내가 어떻게 당신을 미워할 수 있겠어?”

“내가 하는 이야기가…….”

“리시.”

케이의 회청빛 눈동자가 조금은 나무라듯 빛났다.

내가 그렇게 신뢰할 수 없는 남편이야?

그래서 리시는 그동안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케이, 트리사의 귀걸이라고 들어봤어?”

 

+++

이오벳은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까 한 도시에 멈춰서 잠시 쉬는 동안, 세트니가 했던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린 공작부인은 키룻사의 독을 마셨고, 정말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침실에 드나드는 의원들 표정이 갈수록 어두워졌는데, 갑자기 나아졌어요.”

-“미네르바 루키치 대신관이 다녀갔어. 루키치 대신관은 신성국에서도 가장 강한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고.”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세트니는 떨떠름한 표정이었고, 그것이 이오벳의 머리에도 작은 의심을 심었다.

‘대신관이 키룻사 독을 해독할 정도의 힘을 갖고 있나?’

아니다.

만약 미네르바가 그만한 능력을 갖췄다면, 이미 차기 교황 후보로 발탁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신성국은 미네르바 파와 산티아노 파로 나뉜 상황이었고, 산티아노 측이 확실하게 득세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오벳은 지금껏 미네르바의 행적을 조사해왔다.

그녀는 병자들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치료해주었고, 그 과정에서 낫지 못해 죽는 사람도 많이 있다고 들었다.

‘루키치 대신관이 공작부인을 치료한 것 같진 않아. 그렇다면 성유물의 힘인가? 케이가 보고하지 않은 성유물을 사용했나?’

케이가 찾아낸 모든 성유물을 신성국 쪽에 보고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주는 사람이 몇 명 있었다.

이오벳도 그중 한 명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성유물을 개인적으로 몰래 사용했다는 게 산티아노에게 알려지면 좋을 게 없을 텐데…….’

이오벳은 리시가 유물술사일 거라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일단 돌아가는 대로 루키치 대신관에게 황실 이름으로 상을 내려야겠어. 그러면 당분간은 공작부인을 치료한 게 루키치 대신관이라고 알려지겠지. 케이가 그전까지 산티아노에게 맞설 만한 힘을 키워둬야 할 텐데.’

 

+++

트리사의 귀걸이.

케이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케이가 고개를 젓자, 리시가 말했다.

“성유물이야. 행운의 귀걸이라고 알려져 있어. 착용한 사람에게 행운을 가져다준대.”

“그런 얘기를 어디에서 들었어? 나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리시의 연보라색 눈동자가 일렁, 흔들렸다.

묘한 표정으로 케이를 올려다보던 리시가 말했다.

“당신이 알려줬어.”

“내가? 언제? 왜? 갑자기? 자다가 잠꼬대 같은 거로?”

리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케이. 당신이 직접, 내게 그 귀걸이를 주면서 말했어. 행운을 주는 귀걸이라고.”

“음?”

케이는 리시와 결혼하기 전에 그녀를 본 적 있는지 고민했다.

어쩌면 귀찮은 파티에 참여했다가 봤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리 떠올려봐도 리시의 얼굴을 본 기억이 없었다.

만약 그녀의 얼굴을 봤다면, 절대 잊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트리사의 귀걸이라니.

케이는 행운을 주는 귀걸이라는 말 따위로 여자를 유혹한 적이 없었다.

“그 행운의 귀걸이가, 정말로 내게 행운을 안겨줬어.”

리시는 계속해서 말했고, 케이는 리시의 상태가 걱정스러웠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겠다고 했지만, 지금은 좀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리시는 크게 앓다가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참으로 불행한 삶을 살았고, 단 한순간도 진심으로 웃어보지 못했고, 그렇게 이용만 당하다가 죽었어.”

“어?”

“나는 간절히 바랐어.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이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르게 살아보겠다고.”

케이는 리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랬더니, 귀걸이가 말했어. 살아보라고. 한 번 더 살아보라고.”

“……리시?”

“케이. 나는 한 번 죽었고, 시간을 돌아서 되살아났어. 지금 이건 불쌍하게 살다가 40살에 죽은 아이리스라는 여자의 두 번째 삶이야.”

 

+++

리시는 케이가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이미 시작한 이야기니, 끝을 맺어야만 했다.

리시는 담담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지난 내 삶을 정말로 끔찍했어, 케이. 위틀로 공작에게, 그리고 브리트니에게, 이용당할 만큼 이용만 당했지.”

후치스와 결혼까지 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말만큼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날도 나는 브리트니에게 불려가서 파티에 참석했어. 브리트니는 내게 어느 백작을 유혹해 정보를 하나 알아 오라고 했고, 나는 그 일을 끝낸 후 너무 지쳐서, 너무 아파서, 정원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어. 그곳에서 당신이 날 발견했어.”

리시는 케이와 케이의 부하가 나누던 대화를 이야기했다.

“아마 가짜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당신은 내게 행운이 있기를 바란다며 그 귀걸이를 줬고. 나는 정말. 정말로. 처음이었어. 그런 온기가. 정말. 어찌나. 정말로. 얼마나. 뜨거운지.”

담담히 말할 생각이었는데 감정이 술렁거렸다.

조용히 흐른 눈물이 이불 위에 툭 떨어졌다.

리시는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그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몇 년 후, 나는 죽어. 목이 졸려서.”

“누가……?”

그제야 케이가 반응을 보였다.

쉰 음성으로 묻는 케이를 향해, 리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내가 죽어가면서 간 간절한 소망이, 트리사의 귀걸이에 닿았다는 거야. 내가 유물술사라고 했지? 지난 삶, 그 힘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는데, 그 간절한 순간에 발휘됐었나 봐.”

리시는 잠시 죽음의 공간에 머물 때, 아주 많은 것들을 보았다고 설명했다.

죽기 전의 일도, 죽은 후의 일도, 마치 경험했던 일인 것처럼 눈앞을 흘러갔다고 말했다.

“그리고 난 어째서인지, 알포드 후치스 자작과…….”

‘결혼하기 전으로 돌아가 있었어.’

라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알포드와 결혼했다는 걸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리시는 조심스레 그의 표정을 살폈다.

케이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케이…….”

“후치스와 결혼했었군. 그 지난 삶이라는 시간에서.”

(130) 날 도와줘.

  냉랭하게 잠긴 그의 음성에, 리시는 숨을 멈췄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참았다.

여기서 눈물을 흘리면 케이가 깜짝 놀라서 안아주고 위로해주리라는 걸 알았다.

그런 식으로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지 않았다.

“응, 맞아. 나는 아이리스 위틀로였고, 그날 이후 아이리스 후치스로 살았어. 지난 삶의 당신은 나를 후치스 자작 부인이라고 불렀지.”

리시는 떨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솔직하게 말했다.

당신을 만난 날 밤, 그 남자에게 맞아서 많이 아팠어.

그런 말을 할 수도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케이가 동정심으로 이 진실을 받아들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케이는 찌푸린 얼굴로 리시를 응시하다가 물었다.

“그 남자가 당신을 죽였어?”

“……응.”

“목을 졸랐어?”

“응…….”

케이가 듣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리시는 그가 지금 중요하게 여기는 게 ‘후치스 자작 부인’이었다는 사실이 아닌, 지난 삶 리시의 죽음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걸 깨닫는 순간, 그를 향한 사랑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그를 끌어안고 싶지만, 이번에도 참았다.

“……아팠지?”

케이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견딜 만했어.”

“당신은 늘 그래. 다 괜찮고, 다 견딜 만하대. 그래서 내가 정말 미치겠어.”

“미안해, 케이.”

“그런 줄 알았으면 후치스 자작, 그 자식을 좀 더…… 하. 그렇게 편하게 죽게 해주는 게 아니었어.”

알포드는 충분히 고통받다가 죽었지만, 케이는 그게 부족하게 생각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리시?”

리시는 시간을 돌아온 후의 일을 이야기했다.

“날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어. 떠오르는 게 당신뿐이더라.”

케이를 찾아간 일.

떨리는 마음으로 그와 거래를 한 일.

그런 것들을 조용히 설명했다.

리시가 잠시 말을 멈추자, 케이가 말했다.

“당신이 날 떠올려서 다행이야. 지난 삶의 나를 칭찬해주고 싶군. 썩 괜찮은 녀석이었겠어.”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이던 리시는, 케이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날 믿어, 케이?”

“믿을 거라고 했잖아. 하지만, 트리사의 귀걸이. 그건 정말 모르겠어. 행운을 주는 것. 치료해주는 것. 그런 좋은 성유물들은 언제나 소문이 돌기 마련이거든. 그런데 나는 행운을 주는 귀걸이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어.”

“……그래?”

“다시 한번 알아봐야겠네.”

“응, 그건 나중에. 아직 할 이야기가 더 남았어.”

진실을 고백한 건, 지금부터 할 이야기 때문이었다.

“케이, 나는 이번 삶에 와서 많은 걸 바꿨어. 지난 삶에서 죽어야 할 사람을 살리고, 살아야 할 사람을 죽이기도 했거든. 그게, 정말 위험한 일이래.”

리시는 이번에 죽을 뻔했을 때, 그 죽음 속에서 트리사의 귀걸이와 대화를 나눴던 걸 요약해서 설명했다.

“트리사의 귀걸이라는 게 말을 한다고? 대화가 통한다고?”

“응. 그게 이상한 거야?”

“아니, 신기해서. 나는 유물술사가 아니니까, 성유물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모르거든. 하여간, 당신이 하는 일이 세계의 흐름을 뒤틀고 있다는 거지?”

“응. 응당 흘러가야 할 흐름을 바꾸고 있고, 그렇다면 많은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귀걸이가 그 흐름이 바뀌지 않게 도와주는 거야. 그래야 내가 하려는 일을 해낼 수 있으니까.”

케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검지로 이불 위를 톡톡 치다가 말했다.

“그건 정말 위험하겠군.”

“응. 그래서, 세계가 날 미워한대.”

“응?”

“사실은 이번에도 클로이가 보낸 비둘기가 무사히 도착했어야 했는데, 세계가 날 죽이려 해서 그러질 못한 거래.”

리시는 잠시 말을 멈추고, 케이가 이 사실을 받아들일 시간을 줬다.

“떨어지는 사과에도 머리를 맞아 죽을 수 있겠군. 식중독으로도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고.”

케이는 판단이 빨랐다.

“응, 그런가 봐.”

“평생 그래?”

“내가 이 세계를 바꾸려는 한은.”

“바꾸지 않으면? 그럼 세계가 당신을 놔줘?”

“그런가 봐.”

“그렇다면 다 그만둬, 리시. 당신이 부유하길 원한다면,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게. 당신이 황제가 되고 싶은 거라면, 내가 그것도 해줄게.”

“케이.”

“당신이 복수를 원하는 거라면, 그것도 내가 대신해줄게. 위틀로도, 후치스도 갔으니, 브리트니만 없애면 되는 거잖아.”

“케이.”

리시가 케이의 손을 잡고 그와 눈을 맞췄다.

걱정에 잠겨 새까맣게 보이는 그의 눈동자를 지그시 응시했다.

“케이. 내가 복수하고 싶은 사람은 브리트니뿐만이 아니야.”

리시는 이 부분만큼은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알포드와의 결혼 사실보다 더 알릴 수 없는 진실.

당신은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어. 가족을 다 잃고 처참하게 죽지.

나는 당신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천수를 다할 수 있는, 늑대의 검은 털이 희게 셀 때까지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은 거야.

이런 이야기를 하면, 케이는 말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어. 나도 죽지. 그뿐이야.

귀걸이의 말대로 해. 우리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가 당신을 지켜줄 거야.

나도 안심하고 떠날 수 있을 거고.

그러니까, 리시. 귀걸이가 하라는 대로 그저 조용히, 아무 위험도 무릅쓰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 응?

그 말에 거짓은 없으리라.

케이는 리시를 위해, 그 무엇도 할 수 있을 테니까.

이제는 그것을 알기에, 리시는 거짓을 말했다.

“지난 삶에, 내게 모진 짓을 한 사람은 무척이나 많고, 나는 그들에게 전부 복수하고 싶어.”

“목록을 말해줘, 리시. 내가 대신해줄게.”

“아니, 케이. 그런 식으로 복수할 수 없는 사람들이야.”

“내가 그렇게 능력이 없어 보여?”

“안 돼, 케이. 정말로 당신의 방식으로는 복수할 수 없어.”

“그래서…… 그 많은 사업을 벌이는 거야? 복수에 그런 것들이 필요한 거야? 그렇게 대단한 상대야?”

“응, 케이.”

대단한 상대지.

신을 상대하는 거니까.

“꼭 해야 해? 그냥 행복하게 살 수는 없어? 정말 안 되겠어?”

“미안해, 케이. 나는…… 나는 옹졸하잖아. 여기에 들어찬 미움을 거둘 수가 없어. 그들이 이 대륙에서 나와 같은 공기를 마시며 숨 쉰다는 것조차 끔찍하고 싫어서, 가끔 악몽도 꿔.”

케이는 리시가 종종 악몽을 꾼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너무너무 싫어, 케이. 제발 내가 그 사람들에게 복수할 수 있게 도와줘.”

“물론 그럴 거야, 리시.”

“내가 세계에게 죽지 않게, 날 지켜줘.”

“당연히 그럴 거야, 리시.”

케이는 리시의 각오에 대해 지적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리시의 절박한 애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 내 아내가 싫다는데, 끔찍하다는데, 복수하게 해줘야지.

그런 식으로 죽었었는데, 얼마나 잊기 힘들겠어.

여전히 트리사의 귀걸이와 시간을 돌아 되살아났다는 이야기는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게 진실이라면, 그동안 케이가 품고 있던 의문 중 여러 개가 해결되었다.

애초에 위틀로 공작가에 갇혀만 있던 리시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케이의 정체를 안다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긴 했다.

게다가 지금까지 리시는 마치 미래를 아는 사람처럼 행동해왔다.

케이는 리시가 어쩌면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하는 예언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했지, 이런 기적과도 같은 일을 경험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죽었다가 되살아서 시간을 돌아오다니…… 아무리 성유물이라도 그런 힘을 낼 수 있는 건가? 그게 가능해?’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리시의 말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케이는 이런 걸 경험해본 적은 없지만, 세계가 흘러가야 할 방향을 바꾼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리시가 뭔가를 바꾸면 바뀐 대로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걸 트리사의 귀걸이라는 게 막고 있다는 거군. 지난 역사와 똑같도록. 대체 누가 사용하던 귀걸이기에, 그런 걸 해낼 수 있는 거지?’

성유물이라고 해서 무적은 아니고, 성유물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 것들을 트리사의 귀걸이가 해내고 있었다.

‘아니,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야.’

달리 생각해야 할 것들이 있는데, 자꾸 트리사의 귀걸이로 생각이 돌아갔다.

그만큼이나 이 모든 게 믿기 어려웠다.

“리시. 만약 당신이 세계의 흐름을 바꿔서 세계가 당신을 제거하려고 하는 거라면, 나 혼자서 당신을 지킬 수는 없어.”

“응, 케이. 그럴 거야.”

“당신은 이제부터 성유물을 사용하는 연습을 더 많이 해야 해. 그걸로 다른 사람을 도울 생각하지 말고, 당신 몸을 지키기 위해서 연습해야 해.”

“……응.”

“대답이 늦었어, 리시.”

“조금은 도울 수도 있잖아.”

“하아. 그래, 알겠어. 아무튼, 당신이 성유물을 제대로 다룰 수 있어야 해. 그렇게 되면 당신이 유물술사라는 게 금방 알려질 거야. 당신은 다른 문제로 또다시 위험해질 수 있어.”

“각오했어.”

리시는 전혀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시간을 돌아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40살까지 살아봤기 때문일까.

문득 케이는 리시의 눈에 자신이 얼마나 어린애처럼 보였을지 걱정됐다.

“나, 어린애 같지 않았어?”

“응?”

리시는 갑자기 케이가 무슨 말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40살까지 살다가 죽었다면서. 그러면…… 당신 눈에 내가 너무 애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아니, 사람이 진지하게 물어보는데, 왜 그렇게 웃어? 민망하게.”

리시는 배를 잡고 깔깔 웃고 있었다.

세계를 적으로 돌리는 이 위험한 상황에서, 너무도 느닷없는 케이의 고민이 황당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기 때문이다.

“미안. 아하하하. 아니, 정말 미안. 웃으려는…… 하하하하. 아, 미안해. 정말. 잠깐만. 잠까…… 크……흡…… 조금만 웃을게.”

리시는 실컷 웃은 뒤에야, 간신히 표정을 갈무리할 수 있었다.

“케이. 삐쳤구나?”

“그래. 왜? 애 같아 보여?”

“아니, 케이. 안 그래.”

사실은 애 같아 보였지만, 리시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팩 토라져 몸을 돌린 케이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나는 마흔까지 살았지만,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 지옥에 갇힌 그런 잡초였어. 그런 나한테 이 삶은 놀라운 경험의 연속이고, 이제야 비로소 많은 것들을 하나하나 배워가는 중이야. 사람의 마음도, 생각도, 이제야 알아가고 있어.”

“……그래?”

“응. 그래. 당신과 함께하는 모든 게, 내게는 전부 처음이야. 나도 당신이랑 똑같아. 첫사랑이고, 첫 감정이고, 첫 가족이고, 그래.”

“그럼 지금은? 내가 애 같아 보이진 않고?”

“여기서 더 등 돌리고 있으면 애 같아 보일 것 같은데.”

그제야 케이가 몸을 돌려 리시를 마주 봤다.

“위엄 있게 행동할게, 리시.”

“지금도 충분히 위엄 있어 보여.”

“당신 표정은 그렇지 않은데?”

“내가 원래 웃는 상이잖아.”

“그건 또 몰랐네.”

케이가 리시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넘겨 주며 말했다.

“앞으로도 내가 좀 애처럼 보일 수 있어. 그렇다고 날 버리면 안 돼. 그런 건 반칙이야.”

“알겠어.”

“내가 좀 못나 보여도 모르는 척해줘야 해. 아니다, 지적해줘. 고칠 테니까.”

“알겠어.”

“좋아. 그럼 안심하고, 지금은 능력 있는 남편 행세를 좀 하겠어.”

“응, 기대할게.”

케이가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신성국은 당신을 원할 거야. 그 외에도 당신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겠지. 하지만 당신은 내 곁에 있을 거고.”

“응.”

“세상에는 갖지 못하면 부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어. 당신을 손에 넣지 못하는 놈 중에, 당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생길 거야.”

“응.”

“지금의 교황께서 계속 그 자리에 계신다면 위험은 덜하겠지만, 교황은 연세가 많으셔.”

“응. 조만간 서거하시겠지.”

“그렇군…….”

케이는 리시의 말에 담긴 무게를, 이제는 알게 되었다.

“일단 부모님께는 당신이 유물술사라는 걸 알려야겠어. 아버지는 은퇴하셨지만, 아직 아버지의 사람이 많아.”

그래서 케이는 노공작 내외를 찾아갔다.

그들은 제이미의 방에서, 토미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좋은 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하지만.”

케이는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 어머니. 리시는 유물술사입니다.”

젠은 무척이나 놀란 듯했지만, 헤레이나와 와이번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는지 담담한 표정이었다.

이미 알고 있던 엘디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알고 계셨군요.”

“그래, 결혼식 때 그 사건이 그저 람바족이 벌인 사건이라는 말을 내가 믿었을 것 같으냐?”

“그렇다면 얘기가 빠르겠네요.”

케이는 앞으로 리시가 유물술사로서 활동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신성국에 등록하지 않을 겁니다.”

“위험해지겠구나.”

“도와주세요.”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알아보마.”

대화가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젠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모두가 그녀를 돌아보자, 젠이 말했다.

“여기서 리시가 유물술사라는 사실 때문에 깜짝 놀란 게 나뿐인 이유를 아는 사람?”

(131) 너 닮았어요.

“네가 유독 멍청해서.”

라는 이유를 대는 엘디를 향해 길길이 날뛰는 딸을 보며, 와이번과 헤레이나는 한숨을 삼켰다.

저 드센 첫째 딸과 비교하면, 우리의 막내딸은 얼마나 차분하고 얌전한지.

젠과 엘디보다 몇 살이나 어린 리시가 침착하게 둘을 응시하는 모습은 무척이나 어른스러워 보였다.

시끌벅적한 엘디와 젠이 있어 봐야 리시의 회복에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우리는 곧 떠나겠다고 말했더니, 리시가 붙잡았다.

“조금 더 머물다 가시면 안 될까요? 어머님, 아버님이랑 좀 더 같이 있고 싶어요. 곁에 계셔주시는 것만으로도 안심도 되고.”

어쩌면 말도 이렇게 예쁘게 하는지.

젠이었다면 “아, 얼른들 돌아가셔. 다 큰딸 걱정 좀 적당히 하시고.”라며 노부부를 내쫓듯 돌려보냈을 것이다.

그러니 리시의 상냥하고도 약한 모습에 노공작 내외의 마음이 녹아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런 딸을 갖고 싶었다.

노공작 내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장남과 어딜 가서도 망나니라고 불리는 차남과 수틀리면 제 가족에게도 가차 없는 장녀를 돌아본 후, 마지막으로 리시를 보며 꿀 떨어지는 미소를 지었다.

리시는 리시대로 시부모님의 다정한 눈빛이 좋았다.

저분들의 감정은 트리사의 귀걸이가 만들어낸 가짜가 아니다.

날 향한 진짜 감정.

물론 케이가 리시에게 넘치는 사랑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남편의 가족에게서 받는 애정은 지금껏 알지 못했던 간질거림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린 일가는 한동안 그린 저택에 머물기로 했다.

리시의 상태는 빠르게 나아졌고, 리시가 독에 당했지만 무사하다는 소식 역시 빠르게 퍼져나갔다.

가비자르 제국의 변방 레리소의 라코젠에게는 그 소식이 좀 더 자세하게 전해졌다.

라코젠은 허벅지 위에 앉아 있는 검은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다코트 시에 보냈던 첩자의 보고를 받았다.

“깨끗이 나았다…….”

“네, 전하. 의원의 말로는 온몸이 검게 변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는데, 갑자기 상태가 호전되었다고 했습니다.”

라코젠은 한 번의 시도로 리시를 죽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리시에게 독을 마시게 하는 것부터 실패할 줄 알았다.

하지만 리시는 독을 마셨고, 나았다.

첩자를 내보낸 후, 라코젠은 중얼거렸다.

“키룻사의 독을 마셨는데, 나았다고? 그게 가능한가?”

라코젠이 알기로 키룻사 독의 해독제는 없었다.

키룻사 독은 마시는 순간 내장을 녹이고 혈관으로 퍼져나가 모든 장기를 손상시키는 무서운 독이었다.

그런 극독을 마시고도 리시가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머지않아 밝혀졌다.

신성국의 대신관 중 한 명인 미네르바.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병자를 치료하는 그녀가 리시를 치료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그 소문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가비자르 황실에서는 미네르바에게 그린 공작부인을 치료해준 것에 대해 감사를 전하며 큰 상을 내렸다.

비슷한 시기에 황제가 라코젠에게 황명을 보냈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그린 공작부인을 독살하려 한 것이 라코젠이라는 걸 눈치챈 것이다. 아마도 이오벳이 하녀 중에 라코젠의 사람이 섞여 있었다고 고해바친 것이리라. 황제는 이오벳을 아끼니, 그 말을 의심 없이 믿었을 것이고.

라코젠은 짜증이 치밀었지만, 인내심을 발휘해서 황제에게 답을 보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오그어를 상대하느라 정신없는 상황입니다.]

만약 또 나무라는 듯한 답신이 온다면, 뒤에서 황제를 조종하고 있을 이오벳부터 처리할 계획이었지만, 다행히 더 이상의 답신은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라코젠은 차분하게 키룻사의 독을 해독한 미네르바라는 대신관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정말로 이상하지 않아? 미네르바 루키치 대신관이 키룻사를 해독할 만한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왜 교황은 그녀를 차기 교황으로 밀어주지 않는 거지? 그 정도의 힘을 가졌다는 거, 하나만으로도 교황이 되기에 충분한데 말이야.”

테이블에 앉아서 라코젠의 이야기를 들으며 황금색 눈동자를 빛내던 검은 고양이는 크게 하품을 했고, 라코젠이

“졸리냐?”

라고 묻는 것과 동시에, 앞발로 찻잔을 쳐서 떨어뜨렸다.

쨍그랑-

벌써 23번째 찻잔이 바닥에 떨어져서 깨지는 걸 보며, 라코젠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는 진짜 귀엽지 않으면 100년 전에 멸종했을 거다.”

 

+++

그린 공작부인 독살 미수 사건 소식은 스티무어 제국 황실에도 전해졌다.

브리트니는 어느 자작 부인이 가져온 정보를 듣는 동안, 미소를 감추느라 힘들었다.

‘누가 널 그렇게 죽이고 싶어 할까, 아이리스?’

요새 그린 공작부인을 향한 귀족 가의 평가는 반반이었다.

돈독 오른 여자. 훌륭한 사업가.

아니, 돈독 오른 여자라는 평가가 좀 더 많았다.

그에 비해 브리트니는 스티무어 황실에서 자신의 입지를 탄탄하게 다져가고 있었다.

그린 저택에 숨어든 루지나가 보내주는 정보로 리시가 투자하는 곳에 투자해서 큰 수익을 냈고,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리시와 같은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돈만으로는 부족해서 황후에게 말해 황실 운영비의 일부를 빌려야 하긴 했지만, 황후 에버렛은 드웨인의 신뢰를 받는 브리트니의 요청을 무시하지 못하고 언제나 순순히 돈을 빌려주었다.

황후가 황비 브리트니에게 꼼짝 못 하고, 브리트니가 하는 사업마다 잘된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스티무어 제국의 귀족 중 일부는 황후 에버렛보다 황비 브리트니에게 줄을 대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대로만 흘러간다면, 브리트니가 에버렛을 몰아내고 황후 자리를 차지하는 건 일도 아니게 될 것이다.

‘내가 아들만 먼저 낳으면…….’

하지만 왜인지 그렇게 노력하는데도 드웨인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에버렛이 먼저 아이를 갖게 될까 봐 불안한 상황이었는데, 리시의 소식을 들으니 오랜만에 속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황태자의 하녀들 사이에 섞여서 들어온 거라면, 황실 측 사람이라는 건데…… 좀 알아봐야겠네.’

브리트니는 리시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가비자르의 황족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린 가문도 감히 어쩌지 못할 위치에 있는 사람.

그래야 리시를 이 세상에서 없애버리기 쉬울 테니까.

+++

바깥의 사정이 어떻게 흘러가든, 리시는 몇 달간 편안하게 보냈다.

세계가 리시를 죽이려 하지만, 와이번과 헤레이나, 젠과 엘디가 그린 저택에 있는 것만으로도 세계의 검 끝이 리시를 찌르지 못할 것 같은 안정감이 있었다.

유독 날이 좋아서 젠과 리시가 함께 정원을 거닐고 있을 때, 둘의 뒤를 노리는 무리가 있었다.

토미와 엘디였다.

“내 말 잘 들어, 토미.”

“웅.”

“아니지. 다른 사람한테는 다 반말해도 위대하신 엘디 형님한테는 어떻게 하라고 했지?”

“종댄말.”

“음. 뉘앙스가 좀 별로긴 하지만, 맞아. 존댓말.”

“웅, 종댄말. 너한테는 종댄말 쓰께요.”

토미가 엘디의 얼굴을 검지로 가리켰다.

“이상해. 이상하게 네 존댓말이 제이미를 닮아가는 것 같아. 내 오해지? 너는 잘하고 싶은데 아직 능숙하지 않은 것뿐이지?”

“웅. 너한테는 종댄말. 다른 사람한테는 반말 쓰께요.”

“역시 이상해. 굉장히 말을 잘할 수 있으면서도 일부러 못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내가 너무 예민하기 때문이겠지? 넌 아직 덜 배우고 잘 몰라서 멍청한 것뿐인 거야. 그렇지?”

“웅. 너 닮아써요.”

“너, 이 녀석……!”

엘디가 토미에게 손을 뻗자, 토미가 까르르 웃으며 훌쩍 뛰어올랐다.

자그마한 육체는 가볍게 공중에 떠올랐고, 작은 손이 높은 곳에 있는 나뭇가지를 꽉 붙잡았다.

날다람쥐처럼 나무 사이를 이리저리 오가는 토미를 잡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나무 아래에서 토미를 따라 이리저리로 달리는 엘디를 흘끗 돌아본 리시가 말했다.

“저 두 사람은 뭘 하는 걸까요?”

“뻔하죠. 엘디가 토미 시켜서 날 놀래주게 하려고 했을걸요.”

“에이, 설마요. 그래도 성기사단의 부단장인데, 그런 유치한 짓을 할까…….”

“저 인간이 얼마나 유치해질 수 있는지 알면 깜짝 놀랄 거예요. 난 저 인간이 다른 기사들 앞에서 부단장이랍시고 위엄 있는 척하는 모습이 더 어색하다니까요.”

젠은 엘디가 성인이 된 후에도, 집에 돌아올 때마다 얼마나 유치하게 굴었는지 열심히 설명했다.

그러는 동안 내내 토미를 잡으러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엘디는, 결국 포기하고 리시와 젠에게 다가왔다.

“형수. 할 얘기가 있어.”

“토미한테 못된 짓 시키려는 건 관뒀나 봐?”

젠이 비아냥거리자 엘디가 서늘하게 자신의 여동생을 노려보며 말했다.

“어른들 얘기하실 땐 빠져, 제레시엔.”

“아, 새 쫓는 개처럼 어린애 붙잡으려고 바둥거리는 게 어른이라면…… 알겠어. 난 그런 어른이 되고 싶지 않거든. 빠질게.”

“내가 언제……!”

평소처럼 버럭 화내려던 엘디는, 리시가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표정을 바꿨다.

신성국 테세이 성기사단의 부단장이자, 그린 가 차남의 모습으로 돌아간 엘디가 말했다.

“형수. 난 이제 신성국으로 돌아가.”

“응. 내 고집 때문에 여기서 한참 머물러줘서 고마워.”

“아니, 뭐…… 꼭 형수 때문에 머물렀던 건 아니고…… 2황자가 형수를 노리는 건 우리 가문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니까…… 뭐, 그렇게까지 고마워할 건 없고…….”

그린 일가가 ‘고맙다.’라는 말에 허둥지둥하는 건 여전했다.

“아, 그만 부끄러워하고 할 말이나 해!”

보다 못한 젠이 엘디의 팔뚝을 치며 말하자, 엘디가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언제 부끄러워했다고……! 하. 아무튼, 형수. 교황 폐하께서 몸이 좀 안 좋으신가 봐. 위독하신 건 아닌데, 아무래도 연세가 많으시니 신관들이 차기 교황을 서둘러 결정하고 싶어 할 거야. 거의 산티아노 기푸로 결정이 나긴 했는데, 문제는…….”

산티아노가 최근 레리소에 있는 2황자 라코젠과 은밀하게 서신을 주고받는다는 전달을 받았다며, 엘디는 덧붙였다.

“산티아노 기푸는 케이를 싫어해. 그런 와중에 형수를 죽이려 하는 2황자와 산티아노의 교류가 시작됐다는 건, 그리 좋은 일 때문은 아닐 거야.”

“산티아노가 케이를 싫어하는 이유가 뭐야?”

지난 삶, 교황 자리에 오른 산티아노는 어떻게든 케이를 끌어내리기 위해 애썼고, 결국 성공했다.

그 결과 케이는 그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죽게 되는데, 리시는 산티아노가 그렇게까지 해서 케이를 끌어내리려 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케이에게 모든 것을 고백한 후, 산티아노가 왜 당신을 그리 미워하는 거냐고 물었지만, 케이는 떨떠름하게 “그러게.”라고 중얼거릴 뿐, 이렇다 할 답을 주지 않았다.

“음, 그게 상당히 오래 묵은 원한 때문인데…….”

엘디는 순순히 산티아노와 케이의 문제에 대해 말해주었다.

“산티아노는 그래 봬도 어릴 때부터 상당히 두각을 나타낸 대신관의 재목이었거든.”

신에게 쓰임을 받고 싶은 사람들은 신전에 들어가서 수습 사제로 봉사하며 교리에 대한 교육을 받는다.

수습 사제에서 사제까지는 성실하게 봉사하면 누구나 올라갈 수 있지만, 사제에서 수습 신관이 되기 위해서는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만 했다.

치유의 힘.

산티아노는 머리가 좋은 데다가 치유의 힘까지 가지고 있기에, 어린 나이에 신관이 되었다.

“성인이 되기 전에 신관이 된 건, 대단한 일이야. 그래서 다들 산티아노를 추켜세워줬고, 산티아노의 콧대는 하늘을 모르고 치솟았지. 그런 산티아노에게 거슬리는 존재가 한 명 있었어.”

리시는 그게 케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이름이 나왔다.

“미네르바 루키치.”

당시 사제였던 미네르바는 신성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산티아노를 추앙하지 않았다.

“못되게 군 건 아니고, 그냥 평범하게 친구 대하듯이 대했을 뿐인데, 산티아노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야.”

산티아노는 어떻게든 미네르바를 굴복시키기 위해, 그녀의 자존심을 깔아뭉개는 소리를 지껄이기도 하고, 사제들을 선동해 미네르바를 따돌리기도 했다.

어느 날, 그 괴롭힘이 유독 심해서 미네르바가 울음을 터뜨리는 광경을, 큰 행사 때문에 신성국에 들렀던 케이가 보고 말았다.

“산티아노는…… 들키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 그런 모습을 들키고 만 거야.”

(132) 비굴해지지 말자.

그날, 신성국에서 열린 행사는 각국의 귀빈과 대신관들을 모신 커다란 행사였다.

여러 행사 일정 중에는, 곧 대신관이 될 산티아노가 교리를 설파하는 일정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산티아노는 멋지게 설교를 하고, 많은 사람에게 인정을 받은 후, 아무 이의 없이 대신관으로 임명되어야 했거든. 그러면 산티아노는 신성국이 생긴 이래 최연소의 나이로 대신관이 되었다는 영예를 누렸을 거야. 그런데 그걸.”

케이가 방해했다.

산티아노가 설교를 끝내자마자, 케이가 손을 들고 설교 내용에서 발견된 의문점과 오류를 하나하나 지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누구나 완벽한 설교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오류가 몇 개 있다고 해도 보통은 눈치채지 못하거나 모르는 척 넘어가 주곤 했다.

하지만 케이는 그러지 않았고, 산티아노는 자신도 깨닫지 못한 오류를 설명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그 논쟁에서, 케이가 이겼지. 케이는 시종일관 여유로웠고, 산티아노는 점점 얼굴이 붉어지면서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어.”

당시 산티아노는 어린 나이였다.

조금만 더 살았더라도 그런 상황에서 흥분하는 모습을 보여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알았을 테지만, 어렸던 산티아노는 창피함과 모멸감을 이기지 못하고 케이를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그 길로 최연소 대신관의 영예는 날아갔어. 산티아노는 5년은 더 지난 후에야 대신관이 될 수 있었지.”

“단지 그 이유로 케이를 그렇게 미워한다고?”

“응, 뭐. 그게 시작이고…… 그 후로 산티아노가 자꾸 케이를 건드리거든. 그러면 케이는 그걸 상대해주고, 그러다 보면 보통은 케이가 이겨. 그냥 안 건드리면 더 기분 나쁠 일도 없을 텐데, 산티아노는 어떻게든 케이를 굴복시키고 싶은가 봐.”

단지 그 정도의 이유로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건 이해할 수 없지만, 때로는 그런 사람도 존재한다는 걸 리시는 알고 있었다.

브리트니가 그러니까.

이제라도 브리트니가 마음을 고쳐먹고 스티무어의 황비로 조용히 살아간다면, 그녀는 여생을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리시는 브리트니가 지금쯤 독을 먹일 정도로 리시를 미워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려 하고 있으리라는 데에 전재산을 걸 수도 있었다.

엘디는 산티아노의 움직임을 가까운 곳에서 지켜봐야 한다며 신성국으로 떠났고, 며칠 후 노공작 내외도 교황의 병문안을 하러 가야 한다면서 젠과 함께 저택을 떠났다.

북적거리던 저택이 텅 빈 것 같은 허전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리시는 토미의 교육에 힘쓰는 한편,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점검하고 성유물을 다루는 연습을 하며 정신없이 한 계절을 보냈다.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시작되던 어느 날.

한 무리의 귀부인이 그린 공작 저택을 방문했다.

+++

12월의 바람이 차게 부는 날.

그린 저택이 있는 다코트 시의 고급 살롱 레리테에는 여러 명의 귀부인이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모두 리시의 티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온 귀부인들로, 리시를 만나기 전에 리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정하기 위해 미리 만난 것이다.

레리테의 종업원이 와인과 안주를 두고 가자마자, 그웨니 후작 부인이 입을 열었다.

“한 달 전에 브리트니에게 초대를 받아서 스티무어에 다녀왔어요.”

“혹시 위틀로 아카데미에 데려가던가요?”

에른스 후작 부인의 말에 그웨니 후작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른스 후작 부인도?”

“그래요. 날 굳이 모시고 싶다고 사정을 하기에 가봤더니, 위틀로 아카데미에 데려가더군요. 아카데미를 구경시켜주면서 아이를 입학시키는 게 어떻겠냐고 묻는데…… 그런 곳에 누가 아이를 입학시키겠어요?”

브리트니의 초청을 받아서 위틀로 아카데미를 구경하고 온 가비자르의 귀부인이 상당히 많았다.

“그러게 말이에요. 기숙사도 좋고, 식당과 휴게실에 도서관도 훌륭하긴 한데…… 그 정도야 집에서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거잖아요?”

“나한테는 장학금을 지원해준다고 하더군요. 그곳에서 생활할 때 필요한 생활비도 전부.”

“나한테도 그랬어요. 와이론 백작 부인에게도 그랬다던데…… 아무래도 모두에게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나 보네요.”

위틀로 아카데미는 이 대륙 내에 존재하는 그 어떤 아카데미보다 넓고 멋진 건물을 가진, 화려한 아카데미였다.

브리트니는 위틀로 아카데미에 상급 귀족들을 입학시켜서, 기부금을 받아 비용을 충당하려 했지만, 완전히 실패했다.

상급 귀족들이 아이의 교육을 그저 화려한 곳에서 시키려 하지 않으리라는 걸, 브리트니는 몰랐던 것이다.

귀족들에게 화려한 것은 집에서도 충분했다.

이미 이 대륙에 존재하는 명문 아카데미를 다 놔두고, 하필이면 ‘위틀로’의 이름이 붙은 신생 아카데미에 아이를 입학시킬 이유가 전혀 없었다.

“듣자 하니 돈이 많지 않은 귀족들 몇 명이 거기에 아이를 보냈다더군요.”

“아카데미 학비는 비싸니, 그렇게라도 아이를 가르치고 싶겠죠. 그들도 안 됐어요. 위틀로가 어떤 의미인지 알 텐데.”

위틀로 가문은 이제 이 대륙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브리트니가 한 짓과 더불어 여러 문제 때문에 작위를 빼앗기고 자작 가문이 되어버린 위틀로.

그때만 해도 그런 일에 관심 없는 사람들의 귀에까지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렇게 쫓겨나듯 시골로 떠났던 브리트니가 스티무어 제국의 황비가 되면서 ‘위틀로 가문 사건’이 다시 한번 회자되었다.

그런 ‘위틀로’의 이름이 붙은 아카데미에, 아이를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지만, 평민보다도 돈이 없는 귀족들에게는 아이를 가르칠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브리트니의 의도에서 한참 벗어난 흐름이었다.

돈 없는 사람들 아이만 받아서는 기부금도 기대할 수 없고, 아카데미를 아무리 멋지게 꾸몄어도 ‘명문’ 아카데미의 반열에 오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브리트니 말이에요. 이번에 만났을 때 뭔가 좀 달라졌다 싶었는데…… 에른스 후작 부인은 못 느꼈나요?”

그웨니 후작 부인의 질문에 에른스 후작 부인이 재미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어머. 부인도 눈치챘나요?”

“부인이라면 눈치챌 줄 알았어요. 정말 웃기죠?”

“안쓰러울 지경이더라고요.”

둘만 나누는 얘기에 다른 귀부인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웨니 후작 부인은 웃음을 참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브리트니랑 옛날에 오래 알고 지냈었잖아요. 그렇게 행동하는 애가 아닌데, 행동이며 말투 같은 게 많이 변했더라고요. 눈빛도 그렇고…… 뭔가 좀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해서 생각해보니, 누굴 따라 하는 건데, 그게 누군지 알겠어요?”

“설마…… 그린 공작부인을 따라 하던가요?”

“맞아요, 헤븐 백작 부인. 브리트니가 그린 공작부인의 행동이나 말투를 따라 하더라고요. 얼마나 애처롭던지……. 그런다고 자기가 그린 공작부인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정말 안쓰럽네요. 불쌍하기도 해라…….”

말과는 다르게 귀부인들의 표정에는 재미있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몹쓸 짓을 반복해서 작위를 박탈당한 주제에, 스티무어의 황비 자리를 꿰찬 브리트니를 무척이나 고까워하고 있었다.

“그걸 보니, 황비가 되자마자 위틀로 아카데미를 세운 게, 그린 공작부인을 따라 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더라고요.”

“하지만 위틀로 아카데미가 먼저 개교했잖아요.”

“공작부인 옆에 첩자라도 심어뒀을 수도 있죠.”

“어머, 그렇다면 큰일이네요. 내일 공작부인을 만나면 언질 줘야겠어요.”

첩자 이야기를 꺼낸 그웨니 후작 부인이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가 얼른 감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첩자 얘기는 숨겨뒀다가, 내일 리시를 만나서 몰래 말해줬어야 했던 건데. 자기가 알아낸 걸 다른 사람이 이용하려 하는 게 싫었다.

그웨니 후작 부인은, 아니,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내일 리시에게 잘 보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요새 사교계에서 리시의 위치는 거의 정상급이었다.

리시가 사교계를 휩쓸고 다니는 건 아니지만, 리시가 운영하는 포레스트의 모든 것이 사교계의 유행을 선도했다.

“저번 달 파티에 황후 폐하께서 하고 나오신 목걸이 봤나요? 알고 보니, 그게 포레스트 잡지에 실린 목걸이더라고요.”

포레스트 스파에 가면 볼 수 있는 ‘포레스트의 잡다한 이야기’라는 잡지에 실린, 여러 패션 정보들.

황후와 황녀, 그리고 사교계의 여왕이라 불리는 넬라니커스 제널 백작 부인까지, 그 잡지에 실린 드레스나 액세서리를 하고 다닌다는 걸, 귀부인들이 알게 되었다.

황후와 황녀들이 그 액세서리들을 하고 다니게 된 데는, 이오벳의 힘이 컸다.

독살 사건으로 리시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던 이오벳을, 리시를 위해 무엇을 해줄지 고민하다가 포레스트 상회에서 나오는 물건을 구해 가족들에게 선물했고, 가족들은 아들, 오빠의 선물을 아주 기쁘게 착용하고 다녔다.

황족과 사교계의 여왕이 주로 이용하는 아이템이 귀족 가에 유행의 바람을 불어 일으키는 건 당연한 일.

포레스트 상회의 인증이 찍힌 액세서리와 드레스, 모자, 신발 같은 것들은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몇몇 가게들이 비슷한 모양을 만들어서 팔게 되었지만, 거기에는 포레스트의 마크가 찍혀 있지 않아서 가짜라는 걸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구하기가 너무 어려워요. 하나하나 장인이 공들여 만드는 거라서, 나오는 물건이 그리 많지 않더라고요.”

“몇 달 후까지 예약이 밀려 있대요. 그렇다고 가짜를 구해서 하고 다닐 수도 없고.”

“저번에 피버 백작 부인이 팔찌를 하고 왔는데, 거기는 나무 세 그루가 찍혀 있더군요.”

포레스트의 마크는 나무 두 그루였다.

“그런 가짜를 하느니 안 하는 게 나을 텐데…….”

“피버 백작 부인도 몰랐나 봐요. 남편한테 선물 받은 거라고 하더라고요. 은근히 알려줬더니 어찌나 창피해하던지.”

“피버 백작이 곤욕 좀 치렀겠어요.”

“그러게 말이에요. 호호호.”

피버 백작 부인이 가짜를 사다 준 남편을 얼마나 들들 볶았을지 얘기하며 웃던 귀부인들은, 자신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를 상기하고 웃음을 거뒀다.

“아무튼, 내일은 여러 가지로 힘들어지겠어요. 전에 우리랑 그린 공작부인이 좀 안 좋았었잖아요.”

에른스 후작 부인의 말에 그웨니 후작 부인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빼줘요. 난 그린 공작부인과 안 좋은 적이 없으니까.”

“부인도 뒤에서 공작부인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떠들어댔잖아요.”

“어머나. 모함하지 마세요. 나는 브리트니를 싫어했던 거지, 그린 공작부인이랑은 아무 감정 없어요. 브리트니 얘기를 하다가 가끔 공작부인 얘기가 섞이긴 했어도, 그뿐인걸요. 공작부인을 대놓고 따돌린 적도 없고.”

대놓고 따돌린 적 있는 다른 귀부인들은, 그웨니 후작 부인의 말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우리끼리 여기서 이럴 문제가 아니에요. 내일, 어떻게든 그린 공작부인의 마음에 들어야 해요.”

헤븐 백작 부인이 날카로워지는 분위기를 무마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저는 반드시 제 아이를 그린 아카데미에 넣을 거예요.”

그린 아카데미.

한 달 전에 개교한 그린 아카데미는, 개교 전부터 위틀로 아카데미와 비교되며 말이 많았다.

저렴한 학비, 아카데미 안에서는 신분의 차이가 없이 모두 ‘학생’으로만 대우한다는 교칙, 기부금이나 신분으로 대우와 평가가 바뀌지 않을 거란 방침.

누가 봐도 평민을 위한 아카데미이기에, 귀족 사회에서는 그린 아카데미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대륙에 여러 아카데미가 있고, 학생은 그저 학생일 뿐이라는 교칙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 해서 진짜로 신분의 차이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기부금에 따라, 신분에 따라, 교수가 학생을 대하는 태도와 성적이 달라졌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신분의 차이는 분명하게 존재해서, 제레시엔처럼 성격이 특이한 경우가 아니면 평민 학생이 자신에게 반말하는 걸 허락하는 귀족 학생은 없었다.

애초에 학비가 비싸서 평민 학생이 입학하는 경우가 드물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그린 가문에서 평민도 쉽게 입학할 수 있을 만큼 저렴한 학비의 아카데미를 연 것이다.

게다가 좋은 성적만 받는다면, 장학금과 생활비 일부를 지원받을 수도 있었다.

평민 아이가 교육을 받고 성장할 기회였기에, 개교 전부터 평민의 지원이 많았지만, 귀족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개교 후, 상황이 달라졌다.

“누가 알았겠어요? 교수진이 그렇게 대단할 줄이야……. 그런 교수들에게 평민 애들이나 교육을 받는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요?”

그린 아카데미의 교수진은 귀족 사회를 들썩이게 할 정도로 대단한 인물들이었다.

황족이나 왕족도 쉽게 모시기 힘든, 각 분야의 유명한 학자들.

그저 그들에게 배웠다는 것만으로도 영예가 될 만큼 훌륭한 학자들.

“우리 그이가 평소에 리하타 교수를 흠모해왔나 봐요. 그분이 그린 아카데미에서 역사를 가르친다는 걸 알더니, 어떻게든 우리 애를 입학시키라고 하는데, 어쩌겠어요. 그린 공작 부인에게 잘 좀 말해봐야지.”

다들 헤븐 백작 부인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귀부인들은 그동안 좋지 않은 관계였던 리시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두운 표정으로 찻잔을 응시하던 에른스 후작 부인이 말했다.

“그래도 우리, 품격을 잊지 말도록 해요. 세상에 명문 아카데미가 그린 아카데미만 있는 것도 아니고, 가비자르 황립 아카데미에도 좋은 교수가 많잖아요. 그린 공작부인 앞에서 너무 비굴하게 굴지 말자고요, 우리.”

(133) 먹을 거야?

 

‘어쩜 저렇게 비굴할 수가!’

모임을 한 다음 날.

그린 공작 저택의 온실에서 티파티를 즐기던 귀부인들은, 에른스 후작 부인을 보며 한마음으로 생각했다.

‘자기가 비굴해지지 말자고 하더니!’

다른 아카데미도 많으니 리시 앞에서 너무 비굴해지지 말자고 말했던 에른스 후작 부인은, 그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비굴해졌다.

“머릿결이 어쩌면 그렇게 부드러우세요? 혹시 다른 관리를 하시나요? 피부는 또 어떻고요. 우유도 공작부인만큼 하얗지는 않겠어요.”

“제가 전부터 공작부인 눈동자 색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해왔거든요. 정말 별빛 같아요.”

“손목이 어떻게 이렇게 가느다라실까. 드레스가 참 잘 어울리는 손목이에요.”

“발이 자그마해서 뭘 신어도 예쁘시겠어요.”

이 모든 칭찬이 에른스 후작 부인의 입에서 나왔다.

에른스 후작 부인은 리시와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마자, 열심히 칭찬 거리를 찾아내서 리시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얼떨떨하게 에른스 후작 부인을 작태를 지켜보던 다른 귀부인들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리시를 칭찬할 만한 걸 찾아냈다.

리시는 미소 띤 얼굴로 가만히 앉아서, 귀부인들이 과하게 내뱉는 칭찬을 들었다.

그린 아카데미를 개교한 후, 귀부인들의 태도가 달라질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

그린 아카데미의 교수진은 에르웰과 크리시나가 함께 일일이 찾아가서 섭외한, 화려한 성과를 내는 유명한 학자들이었다.

귀족들은 대단한 학자들이 평민 아이들에게만 가르침을 주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을 터였다.

쏟아지는 칭찬에도 리시가 딱히 기쁜 내색을 하지 않자, 귀부인들은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브리트니가 말이에요.”

이제는 브리트니에 대한 뒷말이 시작되었다.

귀부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브리트니의 소식은 리시도 다 아는 것이기에, 리시는 대꾸 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나저나 공작부인께서 조심하셔야겠어요. 브리트니가 공작부인 곁에 첩자를 심어둔 게 아닌지 의심되거든요.”

에른스 후작 부인의 말에 그웨니 후작 부인이 눈을 부릅떴다.

에른스 부인을 노려보는 눈빛을 보니, 아무래도 그웨니 부인이 하고 싶은 말을 에른스 부인이 가로챈 모양이다.

“그렇군요. 경고해줘서 고마워요.”

리시가 처음으로 고맙다는 말을 꺼내자, 그웨니 부인의 표정이 더 날카로워졌다.

에른스 부인은 모르는 척 찻잔을 들었다.

“향이 좋네요. 이것도 아르헨의 찻집에서 판매하는 차인가요?”

“이번에 새로 시작하려는 차랍니다. 다음 주부터 개시할 거예요.”

“어쩐지…… 제가 마셔보지 못한 맛이더라고요. 매주 아르헨에 들러서 새로 나온 차와 커피를 사거든요. 아르헨에서 나온 티스푼도 전부 가지고 있어요.”

아르헨의 찻집에서는 일정 금액 이상 구매한 고객에게 티스푼을 하나씩 선물로 줬는데, 티스푼의 손잡이 부분에 새겨진 그림이 동물이나 식물, 계절 표현 등 세트로 되어 있어서 티스푼 세트를 모으는 취미를 가진 귀족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공작부인. 저희 후작령에도 포레스트 상회를 오픈할 생각은 없으신가요? 괜찮은 부지가 하나 있는데…….”

“글쎄요. 전에 공작님이 에른스 후작에게 얘기를 꺼내봤는데, 달가워하지 않더란 얘기를 해줬어요. 부군께 먼저 말해봐야 하지 않겠어요?”

리시의 대답에 에른스 부인이 얼굴을 붉혔다.

케이가 그 말을 꺼냈을 때만 해도, 귀족 대부분이 리시를 고깝게 여기던 시기였다.

에른스 후작이 얼마나 비아냥거리며 케이의 제안을 거절했을지, 안 봐도 훤했다.

에른스 부인의 표정을 본 그웨니 부인이 얼른 끼어들었다.

“우리 영지에도 자리가 있어요. 시내 한복판, 광장 바로 옆이라서 사람도 많이 다니는 곳이고. 포레스트 상회를 들이고 싶어서, 우리 그이가 비워둔 곳이거든요. 상회를 열어주기만 한다면, 따로 세를 받을 생각도 없는데…… 어떠세요?”

자신의 영지에 포레스트 상회를 들일 수만 있다면, 앞으로 유행할 아이템을 빠르게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귀부인들은 질세라 자기들의 영지에도 좋은 자리가 있다며,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

리시는 고마운 마음으로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내친김에 그 자리에 담당자까지 불러서 계약서를 작성했다.

귀족들의 마음은 갈대와도 같아서, 언제 또 마음이 변할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정오에 시작한 티파티는 그러한 이유로 해 질 무렵까지 이어졌고, 슬슬 티파티를 마무리할 때가 되어서야 리시는 귀부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린 아카데미에 아직 자리가 좀 남아 있는데, 추천서가 필요한가요?”

 

+++

와지끈-!

큰소리와 함께 리시의 머리 위로 나뭇조각이 떨어진 건, 다행히 귀부인들이 전부 돌아간 후였다.

파앗-!

나뭇조각은 리시의 머리에 닿기 전, 크리시나의 주먹에 맞아서 부서졌다.

리시의 머리카락 위로 조각난 나무가 파스스 떨어져 내렸다.

리시가 제 머리에 붙은 나뭇조각을 하나하나 떼어내는 걸 보며, 에르웰이 말했다.

“요새 좀 이상하지 않아요? 아이리스 님께만 자꾸 이런 위험한 일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러게 말이에요. 온실을 손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왜 멀쩡한 나무가 떨어진 거지?”

크리시나가 고개를 바짝 들어, 온실 상태를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리시가 세계로부터 위협을 받는다는 걸 아는 사람은 케이뿐이었기에, 시녀들의 의문에 답해줄 수가 없었다.

케이는 부하들과 시녀들에게, “위험한 사람이 아이리스를 노리고 있다.”라는 정도로만 설명해두었다.

덕분에 갑작스러운 사고가 발생해도, 리시가 크게 다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손님들이 있을 때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만약 온실 천장에서 나뭇조각이 떨어진 걸 목격하면, 돌아가는 길에 얼마나 수군거렸겠어요.”

크리시나의 말에 리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집어 들었다.

찻잔에 담긴 차에도 나뭇조각이 동동 떠 있었다.

“두 사람 덕에 좋은 조건으로 상회를 확장할 수 있게 됐어요. 보상하고 싶은데, 뭔가 필요한 것 없나요?”

귀부인들이 혹할 만큼 유명한 학자들을 교수로 초빙할 수 있었던 건, 전부 에르웰과 크리시나 덕분이었다.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루테크와 페르니 가문의 힘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좋은 교수들을 섭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휴, 그런 말씀 마세요. 이번에 모신 교수님들이 전부 평민 출신이잖아요. 그런데 아이리스 님이 평민을 위한 아카데미를 설립한다고 하니, 다들 뜻을 모아주신 거죠.”

“맞아요. 널리고 널린 귀족 위주 아카데미였다면, 아무리 크리시나랑 제가 힘을 썼어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예요.”

시녀들과 대화를 나누며 온실을 나왔다.

온실 앞에서, 케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느긋하게 나무에 기대어 서 있는 케이는 마치 그림 같았다.

유독 하늘이 맑아 쏟아지는 달빛이, 케이의 검은 머리카락에 찬란하게 부서졌다.

살짝 고개를 들고 밤하늘을 응시하던 케이가, 인기척을 느낀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리시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좋은 시간 보냈어요?”

“무척.”

“웬걸요. 온실 천장이 잘못 만들어졌는지, 커다란 나뭇조각 하나가 떨어졌어요. 온실을 손봐야 할 것 같아요.”

에르웰의 말에 케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런. 얘기해두도록 하죠. 좋은 밤 보내요, 레이디 에르웰, 레이디 크리시나.”

에르웰은 케이가 ‘레이디’라고 부를 때마다 닭살이 돋는다는 표정을 짓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몸을 부르르 떠는 에르웰의 모습에, 리시는 웃음이 나왔다.

세계가 나를 적으로 생각하고 제거하려는 이때에도, 평소처럼 웃을 수 있는 건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어 준 덕분이리라.

시녀들이 자리를 뜬 후, 케이는 리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좀 걸을까?”

“응.”

그의 커다란 손에 리시의 작은 손이 쏙 들어갔다.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나뭇조각 때문에 놀랐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온실에서 나뭇조각이 떨어졌다고?”

“응. 크리시나가 아니었으면 조금 다쳤을 거야.”

“조금이 아니라…….”

케이가 걸음을 멈추더니, 아직 리시의 머리카락에 붙어 있는 작은 나뭇조각을 떼어냈다.

“크게 다쳤겠네. 당신은 본인한테 닥치는 위험을 좀 더 크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어.”

“그래봤자 겁날 뿐인걸.”

“용감한 아내를 둬서, 나는 늘 불안해.”

“그건 좀 미안하네. 나는 당신을 남편으로 둬서 늘 든든한데.”

리시의 칭찬에 케이의 입술 끝이 비쭉거렸다.

웃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리시가 이 위험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까 봐 참는 것이리라.

그런 그가 사랑스러워서, 가슴이 간질거렸다.

“물론 나는 온 힘을 다해서 당신을 지킬 거야. 하지만 내 눈이 미치지 않을 때가 있어. 오늘 같은 때.”

“오늘 같은 때는 에르웰이, 크리시나가, 그리고 당신의 부하들이 날 지켜주잖아.”

“하지만 나는.”

갑자기 그의 가슴이 가까워졌다.

그의 두 팔이 리시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의 가슴에 귀가 닿아, 그의 박동이 고스란히 리시에게로 전해졌다.

두근두근.

걱정만 가득한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그의 심장 박동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리시는 편안해졌다.

사랑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나보다 그대를 더 걱정하는 것.

리시는 자신에게 닥친 위협보다, 미래에 케이에게 닥칠지도 모를 위협이 더 걱정이었다.

산티아노 기푸. 신성국. 수인이라는 것이 들통나는 것.

리시가 하는 모든 일이 미래에 케이를 향해 겨눠질 칼날을 거두기 위한 것임을, 케이는 알지 못하리라.

“당신한테 문제가 생기면, 난 죽어.”

이어지는 그의 음성에 리시는 미소 지었다.

“울다가?”

“그래. 펑펑 울다가 말라비틀어져서 죽겠지.”

“그거 큰일이네. 그럼 내가 더 열심히 강해져야겠다.”

“당신은 강해질 필요 없이 내 옆에만 있어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해.”

“나랑 취향이 좀 다른가 보네. 나는 당신이 그저 멋진데.”

케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 리시는, 보지 않고도 그가 입술을 실룩거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잠시 그렇게, 아무런 말 없이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은 차가운데도 그와 함께라서 뜨거웠다.

리시는 두 팔에 힘을 줘서 그의 허리를 꽉 조였다.

이렇게 꽉 조이다 보면 어느새 그의 몸에 녹아 들어가지 않을까?

이미 폭 감싸여 그의 체온을 한껏 누리는데도 갈증이 느껴졌다.

조금 더, 조금 더.

새끼고양이처럼 꼬물꼬물 그의 품에 파고든다는 자각도 없었다.

“아이리스.”

그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불렀을 때야, 리시는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지금 날 유혹하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적극적이군. 이런 야외에서…….”

깜짝 놀라서 떨어지려는 리시의 허리를, 그가 한쪽 팔로 능숙하게 감아서 잡아당겼다.

밀착된 몸에 뜨거운 체온이 전해져, 야릇하게 달아올랐다.

부드러운 입술이 강하게 덮쳐왔다.

격정적인 입맞춤에 리시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그의 손이 리시의 코트 안으로 들어와 목덜미와 등을, 등에서 그 아래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움직였다.

느른하게 움직이는 그의 손길에, 흘러나온 리시의 숨이 그에게 삼켜졌다.

케이가 천천히 앞으로 걷는 대로, 리시는 밀려서 뒤로 움직였다.

단단한 것에 등이 부딪친 후에야, 나무에 기댔다는 걸 깨달았다.

떨어지지 않을 듯 붙어 있던 그의 입술이 움직여, 리시의 입술 가장자리를 훑고 아래로 내려갔다.

스미듯 퍼지는 달콤한 전율에, 리시는 이곳이 밖이라는 것도 잊고 눈을 감았다.

촉촉하게 지분거리는 그의 움직임에 따라, 리시의 숨도 조금씩 거칠어졌다.

가느다란 두 팔이 그의 목을 끌어안고, 젖은 입술이 격정 어린 숨을 토해냈다.

그의 손이 리시의 치마를 잡았을 때.

“아저씨, 뉴님 머그꺼야?”

나무 위에서 토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34) 전쟁의 바람

“으헉!”

리시는 케이가 이렇게 깜짝 놀라서 이상한 소리까지 내며 펄쩍 뛰는 걸 처음 봤다.

스르륵 올라갔던 치마가 툭 떨어져 내리고, 주위를 감쌌던 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리시는 눈을 깜빡거리며, 어느새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선 케이를 멍하니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던 건지.

굵은 나뭇가지에 토미가 앉아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토미.”

“뉴님, 안녕요. 아저씨, 안녕요.”

이 와중에도 리시와 케이를 보면 정중하게 인사하라는 말을 떠올린 건지, 토미가 나뭇가지에 앉은 채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 그래. 토미. 안녕.”

케이가 한 손을 살짝 들고 인사를 받아줬다.

케이는 조금 전의 상황을 없었던 일로 할 셈이었지만, 토미는 맑은 눈으로 케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아저씨. 뉴님 안 머거?”

“……안 먹어.”

“왜? 뉴님 안 조아해?”

“좋아해.”

“그럼 머거.”

케이가 리시를 돌아봤다.

“토미가 당신을 먹으라고 압박하는데, 어쩌지?”

“……케이.”

“생각해보면 우리 너무 오래…….”

“케이!”

리시가 얼른 달려들어 손으로 케이의 입을 막았다.

“애 앞에서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야?”

“에이아 우어어아오.”

“응?”

리시에게 입이 막힌 채 항변하던 케이가, 리시의 손을 조심스레 떼어내며 말했다.

“엘디가 그러더라고. 토미가 순진한 척하는데 알 거 다 아는 녀석이라고.”

“그 말을 믿어?”

“믿어. 나는 내 동생 말이라면 돌로 금을 만든다고 해도 믿어.”

“둘 사이에 그렇게 견고한 우애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네.”

“다들 눈치채지 못하지만, 어딘가에 있긴 있어.”

케이와 리시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토미는 열심히 지켜봤다.

호랑이에게 키워져서 생존 이외의 것은 배우지 못했던 어린 소년은,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전부 재미있고 경이롭기만 했다.

“토미, 추운데 왜 거기에 그러고 있어?”

“뉴님 위험해. 내가 지켜.”

토미의 의젓한 말에 리시와 케이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리시가 두 팔을 벌리자, 토미가 뛰어내려서 달려와 안겼다.

이제 토미는 높은 곳에서 곧바로 리시에게 뛰어내리면 안 된다는 걸 배웠다.

이렇게 하나하나 안 되는 것과 되는 것을 배워가는 토미가 사랑스러웠다.

두 팔을 벌리면 안겨드는 작은 온기도, 리시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토미를 볼 때마다, ‘빛’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케이와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라고. 그렇게 조용히 행복하게 살면, 세계도 널 잊을 거라고.

-“우리에게 아이가 태어나면 토미가 잘 돌봐주겠지?”

최근 케이도 간간이 둘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부부 대부분이 그렇듯, 리시도 염려 없이 둘의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딸일까. 아들일까.

딸이면 이름은 이렇게, 아들이면 이렇게.

부부 사이에 오가는 평범한 대화를 나누며, 걱정 없이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

세계가 리시를 제거하려는 지금, 아이를 가지면 아이까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을 그만둘 수도 없다.

그만두는 순간부터, 미래는 케이를 죽이려는 쪽으로 움직일 테니까. 지난 삶처럼.

리시는 몸이 차게 식은 토미를 안아 들었다.

그린 저택에 살게 된 후, 영양가 있는 음식을 골고루 먹고 잘 놀고 잘 자는 토미는, 부쩍부쩍 자라고 있었다.

“토미, 이렇게 추울 때는 옷을 따뜻하게 입고 다녀야 해.”

리시를 만나기 전까지 헐벗고 다녔던 토미는, 아직도 몸에 뭘 걸치는 걸 버거워했다.

홀딱 벗고 다니면 안 된다는 걸 알게 되어서 기본적인 옷까지는 입지만, 이렇게 추운 날씨에도 코트를 걸치지 않고 돌아다녔다.

“갠차나여.”

토미는 자기가 싫은 일을 시키려 할 때만 존댓말을 썼다.

“그러다 감기 걸리면, 내가 많이 슬플 텐데.”

“슬프면 주거?”

“……아니, 죽기까지는 하지 않고.”

“아저씨는 뉴님 아프면 울보라서 울다가 주거.”

“누가 그런 말을 해?”

“나당.”

요새 케이의 부하들은 토미에게 이것저것 가르치는 데에 재미가 들렸다.

영리한 토미는 부하들에게 배운 걸 빠르게 흡수할 뿐 아니라, 그걸 응용해서 적절하게 써먹는 재주까지 있었다.

“나단, 그 녀석은 애한테 뭘 가르치는 거야.”

케이가 투덜거렸다.

“왜? 나한테도 아까 그렇게 말했으면서.”

“내가 당신한테 말하는 거랑 나단이 애한테 말해주는 건 다르지. 나는 토미에게 좀 더 위엄 있는 대장으로 보일 필요가 있어.”

케이와 부하들, 특히 케이의 그림자라고 불리는 사인방과의 관계는 주군과 신하의 관계가 아닌, 동료, 혹은 가족 같은 관계였다.

어릴 때부터 수인의 자유를 꿈꾸던 케이가 그들을 찾아냈고, 그들은 케이의 뜻에 동참하기로 했다.

남들 앞에서는 그 관계를 설명할 수 없기에, 주군과 신하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은 그저 같은 목적을 위해 싸우는 동료일 뿐이었다.

다만 케이가 그들 중에 가장 강하고, 가장 먼저 수인의 자유를 위해 움직였기에, ‘대장’이라고 불리며 존중받는 것이다.

리시는 ‘대장’이면서도 부하들에게 위엄보다 친근함을 보여주는 케이가 좋았다.

“토미는 이미 당신을 위엄 있는 대장으로 생각할 거야.”

“그래? 그래서 지금 이렇게 말 타듯이 내 어깨에 올라온 건가?”

토미는 어느새 케이의 목마를 타고 있었다.

“아무래도 위엄 있는 대장 어깨에 타는 게 제일 재미있잖아.”

“역시 그런 면이 없잖아 있겠지?”

케이가 상체를 이리저리 흔들자, 토미가 까르르 웃었다.

어둔 밤을 밝게 만들어주는 청명한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딱 지금만 같으면 좋겠다고, 리시는 생각했다.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딱 지금만 같기를.

+++

에버렛은 조용히 브리트니를 응시했다.

브리트니는 돈을 빌리러 온 주제에 당당했다.

꼿꼿이 편 허리와 꺾이지 않는 목, 오만한 느낌이 들 정도의 눈빛까지.

리시를 만난 적 있는 에버렛은, 지금 이 브리트니의 자태가 리시를 따라 한 것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브리트니는 한참 잘못 따라 하고 있었다.

리시는 고개를 숙여야 할 때와 숙이지 않아야 할 때를 구분했다.

“황후 폐하?”

에버렛의 침묵이 길어지자, 브리트니가 채근하듯 불렀다.

말만 ‘황후 폐하’지, 브리트니의 표정이나 말투는 황후를 앞에 둔 황비답지 않았다.

몇 달 전이었다면, 브리트니의 이런 모습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작년 초, 리시에게 ‘브리트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둬라.’라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정말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지, 그런 식으로 브리트니를 쫓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선 황제가 서거한 후, 황비가 된 브리트니가 콧대를 세우고 다닐 때는 더더욱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묵묵히 받아들일 수 있다.

모든 것이 리시의 말대로 흘러가는 지금은, 브리트니의 건방짐조차도 즐거운 구경거리에 불과했다.

“20억 브리크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네, 폐하. 아시다시피 아카데미를 운영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서요.”

브리트니가 설립한 위틀로 아카데미는 이미 망한 지 오래였다.

황제인 드웨인이 황후보다 황비를 더 어여삐 여겨서, 황비 라인을 타던 귀족들조차도 자신의 아이를 위틀로 아카데미에 입학시키는 건 꺼렸다.

신분 높은 귀족이자 이름 높은 학자인 교수들, 귀족의 자녀를 불편함 없이 모시기 위해 고용한 고용인들, 주방장들…….

한 달에 나가는 그들의 급여만 해도 10억 브리크에 가까웠고, 그 외의 운영비만 몇억 브리크가 또 나가는 상황이었다.

에버렛은 얼마 전에 리시에게 받은 편지를 떠올렸다.

[조만간 브리트니가 또 돈을 빌리려 할 거예요. 이번에는 거절하세요. 그러면 황제께서 움직이실 겁니다.]

에버렛은 드디어 기다리던 순간이 다가온다는 걸 깨달았다.

“안됐지만, 그 청은 거절해야겠네.”

에버렛의 냉정한 거절에, 브리트니가 눈을 부릅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네. 그 청은 거절해야겠어.”

순간, 브리트니는 리시를 따라 해야 한다는 걸 잊었다.

브리트니는 그만큼 돈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왜, 왜요? 고작 20억이에요.”

“고작이라니. 20억 브리크는 적은 돈이 아니네.”

“이건 전부 우리 스티무어를 위해 필요한 거예요. 국민을 위해 쓰는 돈인데, 20억은 적은 편인 것 아닌가요?”

“황비, 지금껏 자네가 빌려 간 돈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빌리다니요. 폐하, 그리 말씀하시면 서운해요. 저는 그저 나라를 위해, 국민을 위해, 우리 황실을 위해, 투자 자금을 받았을 뿐이에요.”

리시는 브리트니가 이렇게 나올 거라고 언질 줬었다.

그러니 반드시 차용증을 쓰라는 조언도 해주었고, 에버렛은 리시의 말을 따랐다.

브리트니는 언제나 순순히 차용증에 지장을 찍었다.

황비인 자신에게 돈을 갚으란 말을 할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자네가 그것을 무어라 여기든, 이번 청은 거절해야겠네. 돌아가게.”

에버렛이 완고하게 말하자, 브리트니는 에버렛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휙 몸을 돌렸다.

나풀나풀한 치맛자락을 흩날리며 복도로 나온 브리트니는 이를 아득 갈았다.

‘못생긴 주제에 황후라고 콧대를 세우는 꼴이라니…… 제까짓 게 감히 내 부탁을 거절해?’

마음 같아서는 에버렛 앞에서 욕을 해주고 싶지만, 아직은 그러지 않을 이성이 남아 있었다.

‘하, 진짜 어떡하지?’

브리트니는 초조했다.

아카데미는 망했고, 브리트니가 큰돈을 투자한 상단은 몇 번이나 폭풍을 만나는 바람에 배가 침몰해서 큰 빚이 생겨, 원금 회수도 못 할 판이었다.

사업체 몇 군데도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왜 이러는 거야? 아이리스가 투자한 곳에 투자한 건데!’

루지나는 리시의 사업 계획을 훔쳐 들을 때마다 브리트니에게 밀서를 보냈다.

브리트니는 시험 삼아서 몇 군데 투자해봤는데, 기대 이상의 이익을 거뒀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투자하는 데에 아낌없이 돈을 쏟아부었다.

브리트니가 황실 창고를 채우자, 드웨인은 더더욱 브리트니를 아꼈다.

예쁜데 영리하기까지 하다며, 당신 같은 여자는 처음이라고, 경이롭기까지 하다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그건 단 몇 개월뿐이었다.

아카데미는 망하고, 브리트니가 투자한 곳마다 파산했다.

브리트니가 채웠던 창고는 점점 비어갔고, 드웨인이 브리트니의 방을 찾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루지나, 이년이 날 배신한 거 아냐?’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아이리스가 결탁해서 거짓 정보를 흘리는 걸지도.

‘앞으로는 루지나 정보를 믿지 말아야겠어. 나도 지금까지 투자를 해봤으니까, 내가 찾아낸 곳에 투자하는 편이 나을 거야.’

어떻게든 드웨인의 마음을 돌려야만 했다.

그러자면 돈이 필요했다.

브리트니는 곧바로 드웨인을 찾아갈까 하다가 생각을 바꿨다.

드웨인이 집무실에서 일하고 있을 때, 제집인 듯 드나드는 건 좋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드웨인이 내 것이라는 걸 주장하기 위해 보란 듯이 집무실에 들어갔었는데, 드웨인도 난처한 표정을 짓고 신하들도 불쾌한 듯 헛기침을 해댔다.

‘그래, 정숙한 아내라면 방에서 조용히 남편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야 하는 법이지. 분명 아이리스도 그럴 거야.’

 

+++

그린 저택 회의실의 둥근 테이블에, 케이와 그의 그림자들, 그리고 리시가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 앞에 펼쳐진 커다란 지도에는, 파랗고 빨간 점이 찍혀 있었는데, 파란 점은 포레스트 치료소, 빨간 점은 포레스트 구제소의 위치를 표시한 점이었다.

그 점들은 그린 공작령뿐 아니라 대륙 곳곳에 산발적으로 퍼져 있었다.

케이가 검지로 미나스아릭 왕국을 가리키며 말했다.

“미나스아릭에 있는 걸 철수해야 하지 않을까요?”

미나스아릭 변경 근처의 도시에도, 포레스트 치료소와 구제소가 하나씩 있었다.

“아니, 그냥 두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우리에게 악심을 품은 건 국왕이지, 국민은 아니니까.”

최근 미나스아릭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미나스아릭의 왕 디에로프가 라코젠과 서신을 주고받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아직도 라코젠의 성가시고 귀여운 고양이 노릇을 하는 클로이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2황자가 미나스아릭 국왕의 등을 떠미는 중. 방패로 사용하려는 듯.]

리시를 독살 시도한 이후, 라코젠은 개인적인 암살시도를 하지 않았다.

대신, 신성국의 산티아노와 미나스아릭 국왕, 그리고 스티무어 황제와 결탁해서 그린 가문을 상대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라코젠으로서는 은밀히 움직이고 있겠지만, 클로이 덕분에 케이는 라코젠의 움직임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

크리드 2018년 봄.

눈치챈 자가 적은 전쟁의 바람이 조용히 불어오고 있었다.

(135) 드러나는 본성

  한동안 지도를 살피며 생각에 잠겨 있던 케이가 입을 열었다.

“교황 폐하께서 요새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시는 바람에, 산티아노 기푸가 교황청을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어. 그리고 새로운 수호자로 하렌트 미어 백작을 점찍어뒀지.”

“하렌트 미어는 거의 힘이 없지 않아요?”

나단의 질문에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없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날 버려도 성유물을 수호해줄 사람이 있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게 중요한 거지. 미어도 집중해서 힘을 쓰면 성유물 하나 정도는 확실하게 무력화시킬 수 있으니, 검증시험 때 그 장면만 정확하게 보여주면 사람들은 미어 백작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거다.”

“여러 가지로 좋지 않은 상황이군요.”

“그래, 유진. 아주 좋지 않아.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회이기도 해.”

케이가 미나스아릭과 스티무어를 가리켰다.

“만약 2황자가 이 둘을 제대로 꾀었다면, 이 둘은 양쪽에서 우리를 공격하려 하겠지.”

미나스아릭은 그린 백작령의 서쪽에, 스티무어는 남쪽에 있었다.

“미나스아릭은 아직 샤크란 쪽의 일을 해결하지 못했어. 2황자는 아마 자기가 샤크란을 막아줄 테니, 안심하고 진격해도 된다고 했을 거야. 그리고 스티무어. 이놈들은 요새 우리 쪽 무역상에게 말도 안 되는 관세를 내게 해서, 무역상이 우리 영지로 들어오려면 알레츠키까지 갔다가 가비자르를 지나오는 먼 길을 돌아와야 하는 상황이야.”

“미나스아릭을 막고, 스티무어를 쳐야겠군요.”

제이미가 재빨리 케이의 뜻을 헤아렸다.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기회에 스티무어를 갖는 편이 낫겠어. 그러면 항구가 있는 알로르 왕국과 직통으로 연결되지. 황무지와도 가까워지고.”

“황제가 되시려고요?”

나단의 질문에 케이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리시를 돌아봤다.

“어쩔까요, 부인? 황후가 되고 싶으십니까?”

“아니요. 그 자리는 해야 할 것도, 책임져야 할 것도 너무 많은 것 같아서.”

케이가 다시 부하들을 돌아봤다.

“너희는 황제의 신하가 되고 싶으냐?”

“아뇨. 대장이 황제가 되면, 저는 떠나렵니다. 방랑 기사 생활이나 할래요.”

나단이 재빨리 대답했고.

“저도요.”

“저도.”

월라스와 제이미가 나단의 뜻에 동참했고.

“전 황실 문지기 정도까지는 해드릴 수 있습니다, 대장.”

유진은 신의를 지키겠노라 말했다.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끝까지 내 옆에 남아주는 건 유진밖에 없군.”

“하, 대장. 유진 믿지 마세요. 쟤가 황실 문지기 역할을 얼마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엄청 근엄한 척하면서 종일 정자세로 서 있어야 하는데, 그걸 버티겠어요? 쟤는 생긴 것만 저렇지, 끈기라고는 토미만큼도 없는 놈이라고요.”

나단의 모함에 유진이 어른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단을 지그시 응시했다.

나단이 콧등을 찡그렸다.

“나는 네놈이 그렇게 나보다 어른이라는 눈빛을 짓는 게 정말 싫어.”

“실제로 어른이지.”

“도박중독자 주제에.”

“어른의 여유로 게임을 즐기는 것뿐이지.”

“아악! 대장, 나 이 자식 싫어요!”

“후후. 말싸움에 진 어린애들이란…….”

나단이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노려봤지만, 유진은 어른스러운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나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케이를 돌아봤다.

“그래서, 황제, 할 거예요?”

“아니. 다만 신성국의 이름으로 스티무어를 칠 거다. 스티무어 쪽에서 우리에게 악의를 품고 있다는 걸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그 와중에 스티무어가 먼저 우리를 공격해온다면, 신성국에게 반기를 드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겠지.”

“스티무어 황제가 교황께 먼저 전쟁 허가를 받을 수도 있지요.”

제이미의 지적에 케이가 피식 웃었다.

“드웨인, 그 멍청이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할 거야. 가비자르의 2황자가 자기편이니까, 신성국 허가까지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겠지.”

아무리 성유물의 수호자라도 불가침의 존재는 아니었다.

성유물의 수호자가 실수, 혹은 고의로 피해를 줬다면, 그 부분에 대해 교황청에 정식으로 항의할 수 있었고, 허가만 해준다면 신성국의 개입이 없는 전쟁도 가능했다.

성유물의 수호자에게 해를 입혀도, 신성국이 아무 처벌도 내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전쟁.

하지만 신성국의 허가 없이 성유물의 수호자를 건드린다면.

“스티무어 제국을 왕국으로 격하시킬 거야. 그리고 그 왕이 무슨 일을 하든 내 결재를 받아야만 할 거고.”

신성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모를까, 그러지 못하는 이상, 성유물의 수호자를 건드린 나라는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라코젠은 자신을 도울 상대로 적당한 사람들을 찾아냈다.

“하나는 복수심에 불타고, 하나는 바보인 게 차라리 다행이야. 이것저것 따지고 생각할 정신이 없겠지. 2황자도 그런 걸 생각할 틈을 가질 수 없게 몰아붙이고 있을 거고.”

스티무어를 치며, 동시에 미나스아릭을 막는다.

그린을 공격하다가 실패한 미나스아릭은 아마도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할 것이다.

“2황자는 이 전쟁으로 날 이길 생각이 없어. 모두에게 타격을 주고, 미나스아릭을 먹어치우려는 거지.”

미나스아릭이 그린을 상대하는 동안, 2황자는 샤크란 왕국을 막는다는 이유로 군사를 끌고 미나스아릭에 진입할 게 뻔했다.

그 군사는 샤크란을 막는 것이 아닌, 왕궁을 지배하는 데 쓰이리라.

“만약 2황자가 미나스아릭을 먹는 데 성공하면, 가비자르의 황제는 기꺼워할 거야.”

자기 땅이 넓어지는데 싫어할 황제는 없었다.

최근 신성국이 전쟁을 지양하기에 서로의 땅을 뺏고 먹는 전쟁은 거의 하지 않게 되었지만, 한다고 해서 신성국의 처벌을 받는 건 아니었다.

눈치는 좀 보일 수 있어도.

게다가 신성국에서 압박이 들어오면 ‘변경으로 쫓아낸 2황자가 멋대로 벌인 일이다.’라며, 책임을 미룰 수도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나무라더라도, 뒤에서는 2황자를 도와주게 되겠지. 2황자도 그걸 노리는 걸 거고.”

“황제가 뒤를 봐주면 2황자도 날개 달린 것처럼 형수님을 노리게 되겠군요.”

유진의 말에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전에 제거해야 해. 이번 기회를 통해서 제거하면, 가비자르의 황제도 조용히 넘어갈 수밖에 없어지겠지. 랜디는 어쩌고 있지?”

“변경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 좋아. 미나스아릭에서 넘어올 수 있는 길목이 많지는 않으니, 그쪽만 확실하게 막아도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야.”

그 후로도 병력 편성 등의 문제로 한동안 회의가 이어졌다.

케이는 라코젠의 계획 실행 시기를 황태자 이오벳의 국혼이 진행될 무렵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이오벳은 에오르트 왕국의 이트리아 베기스 공녀와 올해 5월에 결혼한다.

‘그리고…… 6월에 대륙 전역에 큰 문제가 생기지.’

리시는 회의 내용을 머리에 담으며, 6월에 벌어질 큰 재앙에 대해 생각했다.

지난 삶에서는 재앙을 막지 못해,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번엔 다를 거야.’

리시는 그 재앙을 막기 위해, 케이와 결혼한 이후로 많은 준비를 해왔다.

그리고 이 재앙을 훌륭하게 막아내기만 한다면, 그린 가문의 가치도 상당히 올라갈 것이다.

성유물의 수호자일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대장. 노공작께서 지원해주시는 방랑기사들과 용병단들을 다 합쳐도, 미나스아릭과 스티무어를 동시에 치는 건 힘듭니다. 스티무어가 워낙 커서, 제대로 굴복시키려면 이쪽과 이쪽. 양쪽으로 파고 들어가야 하거든요. 공격해오는 걸 뚫은 후에 그대로 치고 들어가려면, 지금 있는 병력을 최대한으로 투입해야 합니다.”

유진의 말에, 리시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케이가 심각하게 말했다.

“황무지에 있는 녀석들을 다 데려와도 무리인가?”

“네, 대장. 전투 특화인 녀석들이 많지도 않고, 많다 해도 그 힘을 다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곳곳에서 자기 병사를 가진 녀석들을 다 모은다 해도…… 글쎄요. 스티무어가 최대일 것 같은데.”

리시가 조용히 손을 들었지만, 케이와 부하들은 무시했다.

“음. 그럼 내가 좀 더 알아보도록 하지.”

“그게 좋겠습니다. 저도 예전에 알고 지내던 녀석들에게 도와줄 수 있는지 물어보도록 하죠.”

“분명 도우려고 할 녀석들이 있을 거예요. 돈만 좀 쥐여주면 뭐든 하는 놈들도 있고요.”

“저기요.”

아무도 리시에게 관심을 주지 않기에, 리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는 발언권이 없나요?”

“없어요.”

“케이…….”

“당신이 성유물을 훌륭하게 다룰 수 있게 된 건 알아요. 당신이 큰 전력이 될 거라는 것도 알고요. 하지만 안 돼요.”

“저도 대장 말씀에 동의합니다, 형수님. 형수님이 못 할 거라는 게 아니라, 전장의 한복판으로 형수님을 모시고 갈 수는 없습니다.”

케이와 유진의 단호한 말에, 리시가 다른 부하들을 돌아봤다.

다들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리시는 그동안 노력해왔고, 몇 번이나 죽을 뻔하면서 결국 유물술사로서의 힘을 거의 완벽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전쟁에서 성유물을 사용한다면 큰 도움이 되겠지만, 그들은 아무리 봐도 톡 치면 쓰러질 것 같은 리시를 전쟁터로 데려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요새 리시는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좋지 않은 일에 자주 휘말렸다.

저번에는 정원의 커다란 연못에 있는 다리를 건너려는데, 리시가 발을 딛는 순간 다리 기둥이 부서져서 리시가 크게 다칠 뻔했다.

독살 사건 이후, 케이가 “앞으로 내 아내에게 좋지 않은 일이 자주 생길 거다. 2황자가 틈틈이 노릴 테니.”라고 말해두긴 했지만, 최근 리시에게 벌어지는 일들은 그저 암살 시도로 치부하기에는 이상한 면이 많았다.

세계가 미래를 바꾸려는 리시를 제거하려 한다는 걸 꿈에도 모르는 부하들은 ‘2황자가 어디서 저주술사 같은 걸 찾아내 저주라도 걸었나?’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리시가 다른 사람보다 자주 위험에 처하는 상황인데, 총알과 화살이 난무하는 전쟁터에 데려갔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재수가 없으면 아군이 쏜 화살에 맞아서 죽을지도 모른다.

리시는 케이와 부하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았다.

때문에 그들의 완고한 태도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여러분은 내가 광산에서 나온 메르티움을, 그저 내 재산 불리는 데만 썼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마나를 담을 수 있는 돌, 메르티움.

과학과 기계가 점점 발전하는 세상에서, 마나를 담은 메르티움은 마법사가 없이도 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게 된다.

지난 삶에서는 몇 년 후에.

이번 삶에서는 바로 지금.

“조만간 마탑에서 여러분을 위한 선물이 도착할 거랍니다.”

 

+++

늦은 저녁이 되었지만, 역시나 드웨인에게서는 아무 기별이 없었다.

브리트니는 시녀를 시켜 드웨인에게 오늘 침소에 드실 거냐는 전갈을 넣으라고 했다.

시녀는 어두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황비 전하. 폐하께서는 피곤하셔서 오늘은…….”

짜악-!

시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브리트니의 손바닥이 매섭게 움직였다.

시녀들이 깜짝 놀라 비명을 삼켰고, 맞은 시녀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브리트니를 쳐다봤다.

시녀라고는 해도 황실의 시녀는 다들 괜찮은 귀족가의 영애, 혹은 귀부인들이었다. 아무리 황비라고 해서 함부로 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뺨을 때리다니.

하지만 브리트니는 이대로 가다가는 모든 걸 망치고 다시 길바닥에 내앉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시녀들의 마음을 헤아릴 겨를이 없었다.

리시를 따라 하는 것도 여유가 있을 때의 일이다.

마음이 급해지자 슬금슬금 본성이 기어 나왔다.

“나는 지금 폐하가 필요해. 그렇다면 너는 가서 폐하가 좋은 답을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그런데 폐하가 싫다 한다고 그냥 돌아와? 그게 시녀가 할 짓이야?”

그게 바로 시녀가 할 행동이지만, 까랑까랑하게 외치는 브리트니 앞에서 시녀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브리트니가 황비가 된 후에도 드웨인이 일편단심처럼 브리트니만 찾자, 좋은 마음으로 브리트니의 시녀가 된 사람들이었다.

차분하고 조용하게 행동하는 브리트니를 보며, 그녀의 말대로 그린 공작부인과의 일들은 누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 브리트니는 점점 나쁜 방향으로 변하고 있고, 오늘은 급기야 시녀에게 손을 대기까지 했다.

시녀들의 마음에 불만이 싹트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브리트니에게 내쫓기듯 복도로 나온 시녀들은, 맞아서 우는 시녀를 달래며 황제 드웨인의 처소로 향했다.

처소 근처에 있던 시종장은 펑펑 우는 시녀를 보며 무슨 일이냐 물었고, 시녀들은 브리트니와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았다.

(136) 세기의 사랑? 세기의 동정.

시종장은 침음을 흘리며 드웨인을 찾아갔다.

기사단장과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던 드웨인이 무슨 일이냐는 듯 시종장을 응시하자, 시종장이 기사단장을 흘끔 눈짓했다.

“이 문제는 내일 다시 의논하도록 하지.”

“네, 폐하. 너무 심려 마십시오. 스티무어의 군사들은 누구보다도 강합니다.”

“그래, 제후들은 반대가 크겠지만, 로브토 변경백은 호전적인 성품이니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야. 라코젠이 말한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은밀하면서도 신속하게 움직여야 하네.”

“알겠습니다.”

기사단장이 나간 후, 드웨인이 시종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이지? 내가 바쁘다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폐하. 황비 전하의 일로…….”

황비 이야기가 나오자 드웨인이 인상을 찡그렸다.

“황비가 또 무엇을……?”

“황비 전하의 시녀들이 울고 있기에 무슨 일이냐 물었더니, 황비 전하가 시녀들에게 손을 올리셨다 합니다.”

‘시녀들’이 아닌, 시녀 한 명의 일이었지만, 평소 황비를 싫어하던 시종장은 조금 과장해서 말했다.

드웨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시녀들에게 손을 대다니…… 황비가 그런 짓을 할 리 없잖은가.”

“물론 저도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시녀의 뺨에 손자국이 벌겋게 난 것이 거짓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아.”

드웨인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슨 일로 손을 댔다 하던가?”

“참으로 민망한 이유라…….”

“시종장. 내가 지금 시종장이랑 문답을 길게 할 기분이 아닌데.”

“폐하께서 황비 전하의 처소에 들지 않으시는 게 속상해, 좋은 답을 들을 때까지 돌아오지 말라며 손을 올리셨다 합니다.”

드웨인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몇 달 전이었다면 믿지 않았겠지만, 최근 브리트니에 대해 들려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있을 법도 한 일이었다.

게다가 선황제 때부터 황제를 섬겨온 충성스러운 시종장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드웨인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안 그래도 생각할 거리가 많은 와중에, 브리트니까지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남의 마음도 모르고.

“시녀들에게는 내가 대신 사과한다 전하고, 보석이나 몇 개 쥐여주게. 한 시간 후에 황비의 처소에 들겠다 이르고.”

“네, 폐하.”

시종장이 나간 후, 드웨인은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

세기의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 다시는 만나지 못할, 그리하여 더욱 애절한 사랑.

지금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조금.

‘성가시군.’

떠오른 생각을 서둘러 지웠다.

브리트니는 불쌍한 여자다.

아이리스 그린의 모함으로 누명을 뒤집어썼다.

그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었고, 해명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시골로 쫓겨나 고생을 하다가, 어머니까지 병들고 말았다.

‘그래서겠지…….’

요새 브리트니는 종종 브리트니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곤 했다.

성급하고 어린애 같고 고집 세고 허세를 부렸다.

그녀답지 않게 변한 이유는, 큰 고생을 하다가 갑자기 황비가 되는 바람에 들떠서일 거라고, 드웨인은 생각했다.

맞지 않는 왕관을 쓴 자가 좋지 않은 방향으로 변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

하지만 브리트니라면, 현명하고 성숙한 브리트니라면 조만간 정신을 차리고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드웨인은 그리 믿었다.

믿기에, 지금 이 전쟁도 벌이려 하는 것이다.

오로지 브리트니를 위해.

브리트니만 없으면, 드웨인은 그린 가문에 아무 감정이 없었다.

단지 성유물의 수호자라는 이유로 교황의 지지를 받는 그린 가문이 가끔 고까울 때가 있긴 했지만, 그 가문을 멸문시키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케이는 신성국의 가호를 받는다는 점을 내세워서, 그의 아내인 리시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고, 멋대로 구는 걸 눈감아줬다.

‘그러니 나도 내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어야지. 나는 다름 아닌 스티무어 제국의 황제니까.’

아무리 세상이 바뀌는 중이고, 그린 가문이 신성국의 가호를 받는다고 해도, 일개 공작 따위가 황제의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는 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심지어 케이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백작 나부랭이였다.

그런데도 마치 한 나라의 황제라도 되는 것처럼 굴고 있지 않은가.

이제 성유물은 잘 발견되지도 않는데, 다들 그린 가문에게 너무 무르다.

‘가비자르의 2황자도 그린 공작에게 감정이 있는 것 같으니…… 이참에 본때를 보여주는 편이 좋겠지.’

죽이지는 않더라도, 그 높은 콧대를 확 꺾어줄 생각이다.

물론 리시가 브리트니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며 사죄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리시는 그 욕심 때문에 자신의 가족을 고통에 빠뜨린 죗값을 치러야만 한다.

문득 브리트니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마치 세상이 변하는 것 같았던, 그 기분도.

그러자 성가셨던 마음이 사라지고, 어떻게든 브리트니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각오만이 남았다.

드웨인은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브리트니의 처소로 향했다.

황비궁에서는 늘 좋은 향기가 났다.

이제는 브리트니의 향이 되어버린 그 향을 맡자, 기분이 좀 더 괜찮아졌다.

마치 브리트니를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것 같은 설렘은, 방문을 여는 순간 깨끗이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고운 드레스를 입고 소파에 앉아 있던 브리트니가, 드웨인을 보자마자 울상을 지으며 달려와서 안긴 것이다.

“드웨인…… 드웨인, 저 좀 위로해줘요.”

드웨인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차분하던 브리트니를 만나고 싶었지, 어린애처럼 징징거리는 브리트니를 보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드웨인의 가슴에 얼굴을 파고드는 브리트니를 밀어내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브리트니는 불쌍한 여인이다. 나까지 버릴 수는 없다. 나는 브리트니를 버린, 가비자르의 오만방자한 귀족들과 다르다.

세뇌에 가까운 생각을 하며, 브리트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무슨 일이야, 황비?”

“그게요…… 황후가 제게 어찌나 모질게 구시던지. 종종 그러셔도 참아왔는데 오늘따라 아버지가 너무 그립고, 어머니가 보고 싶어져서……. 흑…… 흐윽. 죄송해요. 폐하께서도 바쁘신 걸 아는데, 제가 이렇게…… 죄송해요.”

브리트니의 흐느낌을 듣자 가슴이 아릿해졌다.

그래, 브리트니는 불쌍하다.

“울지 마, 황비. 황후도 나쁜 뜻으로 모질게 군 건 아닐 거야.”

드웨인의 말에 브리트니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펑펑 우는 줄 알았던 브리트니의 눈가는 바짝 말라 있었다.

하지만 브리트니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듯,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그럼 제가 잘못해서 제게 모질게 굴었다는 말씀이신가요? 좋은 뜻으로 모질게 구는 경우도 있던가요? 폐하께서는 이제 황후의 편을 들기로 하신 건가요?”

드웨인은 기가 막혔다.

어떻게 해야 저런 식으로 사고가 돌아가는 거지?

짜증이 확 솟구쳤지만 애써 눌렀다.

브리트니는 모두의 반대를 받으면서도, 드웨인이 고집을 부려서 황비 자리에 앉힌 여인이었다.

자신의 선택과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이 성가신 태도는…….

‘그래, 황후 때문이겠지. 그동안 조용하다 싶었는데, 요새 황비에 대해 안 좋은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니, 슬슬 황비를 압박하려는 걸 거야.’

드웨인은 이 모든 걸, 황후 에버렛 탓으로 돌렸다.

그래야 자신이 잘못된 여인을 선택했다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황후가 그대에게 무슨 짓을 했지?”

한결 누그러진 드웨인의 말투에, 브리트니의 표정도 달라졌다.

전처럼 아련하고 애틋한 눈빛으로 돌아가, 서러움을 감추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폐하께서도 아실 거예요. 사업이라는 게, 항상 잘될 수만은 없다는 걸요. 때로는 손해를 보기도 하고, 때로는 수익을 내기도 하는 건데…… 이번에 정말 좋은 투자처가 있어서 투자하려고 황후에게 자금을 융통하러 갔더니, 더는 제게 줄 돈이 없다면서 화를 내셨어요.”

“흐음…….”

황실의 내정은 황후에게 맡겨두었기에, 드웨인은 브리트니가 가져다 쓴 돈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했다.

브리트니가 시작한 사업과 투자한 사업이 좋지 않은 결과를 낸다는 얘기를 듣긴 했어도, 자세한 상황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동안 2황자와 밀서를 주고받으며, 그린 공작을 칠 계획을 짜느라 정신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황후에게 얘기해보지.”

“저도 같이…….”

“아니, 황비는 여기서 기다리는 게 좋겠어.”

브리트니는 에버렛이 쓸데없는 말까지 할까 봐 불안했지만, 드웨인이 단호하게 거절하는데 끼어들 수는 없었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브리트니를 놔두고, 드웨인은 황후궁으로 향했다.

에버렛은 잘 준비를 끝낸 후였지만, 사실은 그런 척한 것뿐이었다.

리시는 황제가 움직일 거라고 했고, 에버렛은 성미 급한 드웨인이 금방 찾아올 거라고 예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늦은 시간인데도 드웨인이 기별 없이 황후궁을 찾았다.

에버렛에게 언질을 듣지 못한 시녀들은 깜짝 놀라서 드웨인을 맞이했고, 드웨인은 시녀들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으며 에버렛의 침실로 향했다.

기세등등하게 들어온 드웨인을 보며, 에버렛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표정을 보니, 브리트니가 또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알 만했다.

인제 와서는 그가 갑자기 정신 차리고 후회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이대로 끝까지 멍청하게 굴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나중에 그 패배감도 더 크게 느낄 거고, 두 번 다시는 에버렛에게 맞서려고 하지도 않을 테니까.

“시간이 늦었는데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에버렛이 가운을 입으며 묻자, 드웨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황후를 찾아오는 데, 이유가 필요합니까?”

“오랫동안 찾지 않으셔서, 놀랐을 뿐입니다.”

“그래서 질투한 겁니까?”

“제가, 무엇을요?”

“황비를.”

“아. 황비가 그리 전하던가요?”

“그게 아니라면 왜 황비가 하는 일을 지원해주지 않는 겁니까? 내가 분명 황비가 하고 싶어 하는 걸, 최대한으로 지원해주라고 말했을 텐데.”

가까이 오지도 않고 멀찌감치에 서서 말하는 드웨인에게, 에버렛은 천천히 걸어가며 말했다.

“물론 최대한으로 지원했습니다, 폐하. 하나, 황비가 융통한 자금이 황실의 한 해 운영비를 넘어설 지경이 되어, 더 융통해줬다가는 내년에 파산하게 생겼습니다.”

드웨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럴 리가……. 황비가 투자했던 제므리크 상단이 큰 수익을 냈다 들었습니다.”

“제므리크 상단.”

에버렛이 한숨을 내쉬었다.

“작년의 일입니다, 폐하. 작년 말에 제므리크 상단에서 운영하는 배 17척이 폭풍을 만나서 모두 수몰되었고, 그다음에 출발한 배 13척이 또 폭풍을 만났습니다. 제므리크 상단은 큰 빚만 떠안고 파산한 지 오래입니다, 전하.”

에버렛은 드웨인을 스쳐 지나가 침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드웨인은 홀린 듯 에버렛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어, 어딜 가는 겁니까?”

“집무실이요.”

“내정은 그대에게 맡겼습니다. 내가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도망치지 말고, 직접 확인하셔야 합니다, 폐하.”

도망치지 말라는 말에 짜증이 치솟았지만, 드웨인은 그걸로 화를 낼 겨를이 없었다.

브리트니가 가져다 쓴 돈이 황실 1년 운영비를 넘어설 지경이라는 말에 큰 충격을 받은 터였다.

황실 1년 운영비가 도대체 얼만데!

“이것을 보시면.”

집무실에 도착한 에버렛이, 장부를 꺼냈다.

브리트니에게 빌려준 금액만 따로 적어둔 장부였다.

그 목록이 어찌나 길고, 그 단위가 어찌나 큰지, 드웨인은 할 말을 잃었다.

“그냥 적힌 것은 아직 운영 중인 사업체이고, 빨간색 선을 그은 것은 망해서 자금을 회수할 수 없는 사업체입니다.”

빨간색 선이 무수히 많았다.

“저는 오늘 위틀로 아카데미에도 붉은 선을 그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많이 망설였지만, 황비를 믿기에 긋지 않았습니다, 폐하.”

사실이었다.

몇 안 되는 평범한 글자 중에 ‘위틀로 아카데미’가 보였다.

다만 아카데미에 투자한 금액은 터무니없이 많았고, 회수한 금액은 전혀 없었다.

“그, 그대가…… 그대가 황비를 모함하려고 금액을 부풀린 건 아닙니까?”

드웨인이 누명을 씌우려 했지만, 에버렛은 당황하지 않았다.

에버렛은 대답 없이 다른 서류뭉치를 꺼냈다.

브리트니가 빌려 갈 때마다 작성한, 대출 서류였다.

드웨인은 굳은 표정으로 대출 서류를 한 장, 한 장 확인하다가 결국 끝까지 보지 못하고 내려놨다.

그런 드웨인을 보며, 에버렛이 입을 열었다.

“묻겠습니다, 폐하. 제가 이 상황에서 황비를 더 지원해줘야 옳았습니까?”

(137) 아이리스의 방에 드나드는 것

드웨인은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전쟁을 앞둔 지금, 전쟁을 위해서도 큰 자금이 필요했다.

에버렛이 황실 운영을 살뜰히 챙기고 있으니, 운영비 일부를 전쟁 자금으로 가져올 계획이었는데, 남은 운영비를 보니 올해나 무사히 넘기면 다행인 수준이었다.

“나, 나는 그대가 알아서 잘 생각하고. 음. 황비가 설령 조금 미숙한 면이 있어서 실수하더라도, 그대가 잘 돌봐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폐하께서 황비를 책봉하시며 하셨던 말씀을 잊으셨습니까?”

드웨인은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드웨인의 칼 조각 같은 말을 들은 에버렛은 분명히 기억했다.

“제게 황비가 하는 일을 절대 방해하지 말라고, 황비는 성숙하고 지혜로운 여자이니 알아서 잘할 거라고, 만약 황비를 방해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면 투기심 많은 저를 폐후시킬 수밖에 없다고 하셨지요.”

듣고 보니 그랬던 것도 같다.

드웨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몇 번인가 큰일이 생기겠다 싶어서 황비에게 조금 더 기다렸다가 상황을 보고 투자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다음 날, 폐하께서 찾아와 한참 분노를 터뜨리다 가셨지요. 황비를 질투하는 것 좀 그만두라고.”

담담하게 말하던 에버렛이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이러니 제가 어찌 황비를 말리겠습니까. 폐하께서 또 저를 욕하실 텐데.”

“그, 그건…… 무, 무슨 그런 일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습니까? 황후라면 황후답게 아량을 넓게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 보십시오. 또 제 탓이 되는군요.”

드웨인은 휙 돌아섰다.

에버렛을 마주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나는 모르겠습니다. 황실 내정은 그대의 담당이니 그대가 알아서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럼 저와 황비 사이의 일에 끼지 않으실 겁니까?”

“……끼지 않겠습니다.”

드웨인이 내뱉듯 대꾸하고 밖으로 나가자, 에버렛은 피식 웃으며 서류를 챙겨 금고 안에 차곡차곡 쌓아 넣었다.

+++

드웨인은 성난 표정으로 브리트니의 방에 들어갔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브리트니가 벌떡 일어나,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드웨인을 부르며 다가왔다.

“드웨인, 기다렸어요.”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예?”

“그대가 가져다 쓴 돈이 1년 황실 운영비를 넘어서게 생겼더군.”

“화, 황후가 그리 말하던가요?”

“황후가 아니라 황후 폐하겠지!”

브리트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지금까지 드웨인은 브리트니가 에버렛을 황후라고 부르는 걸 지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드웨인…….”

“드웨인이 아니라 황제 폐하야. 그대는 그 예의부터 좀 어떻게 할 필요가 있어.”

브리트니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지만, 드웨인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저, 저는…… 저는 그렇게까지 많은 돈을 쓰지 않았어요, 폐하. 아시잖아요. 황후가…… 황후 폐하께서 절 모함하려고…….”

“대출 서류를 봤어! 그대의 지장이 아주 잘 찍혀 있더군.”

“그, 그걸 그대로 두고 왔어요?”

“황비!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럼 내가 그걸 훔쳐 오기라도 해야 했다는 건가?”

“그런 뜻이 아니라…….”

“내가 아무래도 그대를 잘못 본 것 같아.”

드웨인이 중얼리는 말에, 브리트니는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드웨인. 폐하. 제발 그런 말씀 마세요. 저는 그저…… 그저 두려워서……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제가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좀 더 깊이 생각했어야 했던 건데. 하지만 폐하, 저는…… 저는 정말로 스티무어를 위하는 마음뿐이었어요. 아시잖아요. 제가 개인적으로 사용한 돈은 하나도 없다는 거.”

브리트니의 애절한 간청에, 드웨인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그녀의 말대로 브리트니는 자신을 위해 돈을 쓴 적이 거의 없었다.

드웨인은 몸소 허리를 굽혀 브리트니를 일으켜주고, 그녀의 눈가를 적신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보니, 가슴이 아팠다.

나밖에 없는 불쌍한 여자인데, 내가 무슨 짓을.

“그대가 잘해보려 했다는 건 알아.”

“흡…… 알아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감사해요.”

“그대가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그대를 사랑해.”

“저도요, 폐하. 저도 폐하를 사랑해요.”

“그대를 위해 많은 계획을 세우고 있어. 그러니 황비, 당분간은 자중하도록 해.”

“자중이라 하심은……?”

“앞으로 내정은 황후 혼자서 하게 될 거야. 그대는 조용히 황후가 시키는 대로 해.”

“폐하!”

그럴 수는 없다고 하려던 브리트니는, 드웨인의 눈빛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브리트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드웨인의 눈동자는, 마치 낯선 타인을 향한 것처럼 냉랭했다.

“그대가 잘못한 게 너무 많아. 더는 그대가 실수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황비.”

 

+++

브리트니가 에버렛에게 꼼짝 못 하는 삶을 살게 되어 이를 갈고 있을 때, 리시는 저택을 떠나 샤크란 왕국의 포르가톤 시에 와 있었다.

샤크란에서 제2의 수도라고 불릴 만큼 크고 번화한 포르가톤 시는 시내의 화려함과 시외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케이가 전쟁 문제로 샤크란의 왕 자로프와 밀담을 나누기 위해 샤크란의 수도에 갈 일이 있었기에, 겸사겸사 리시도 동행한 것이다.

리시는 에르웰과 크리시나, 그리고 가드로 따라온 나단도 함께였다.

“형수님, 이 총, 진짜 좋아요.”

총을 주 무기로 사용하는 나단은, 이번에 리시가 마탑에 의뢰해서 만든 총이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듯했다.

다른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마탑에서 도착한 기상천외한 무기를 보며 연신 감탄을 터뜨렸고, 몇 번이나 리시를 향해 고개를 숙였으며, 나중에는 케이가 아닌 리시를 ‘대장’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는 논의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에 대해 케이도 삐칠 수가 없는 것이, 그만큼이나 마탑에서 온 무기는 이 세상의 발전 속도를 벗어나 있었다.

케이는 리시가 미래를 살았기에 이 모든 걸 준비할 수 있었다는 걸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굉장한 건 굉장한 거였다.

신무기를 개발하는 데는 무수한 마석이 필요했는데, 그 모든 마석과 비용을 리시가 지급한 것이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에요.”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니에요. 이렇게 정확성이 뛰어나고 소음도 적은 총은 처음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위력이 약한 것도 아니고…… 게다가 마석이 작동하면 총알 없이 연발이 가능하다니. 파이어볼을 실제로 사용하는 것 같아요.”

마법과 과학이 합심해서 만들어낸 신무기는 그랬다.

기계이지만, 마석을 이용해 마치 마법 같은 공격력을 보여줬다.

지금까지 대륙에 존재하는 총은 아직 개발 단계이기에 적중력이 한참 떨어지는 데다가, 종종 폭발까지 해서, 애용하는 무기는 아니었다.

때문에 나단은 총을 구하면 직접 개조해서 쓸 만하게 만들어야만 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형수님이 아니라 대장이라고 불러야 하는데…….”

“맞아요. 아이리스 님이야말로 대장이라고 불리시기에 충분하죠.”

에르웰이 나단의 말에 동의했다.

에르웰 역시 새 무기를 받아서 신난 상황이었다.

에르웰은 단도를 주로 사용했는데, 이번에 리시에게 받은 단도는 마석으로 그 길이를 늘였다 줄이는 게 가능했다.

크리시나만이 리시에게서 무기를 받지 않았다.

-“저는 주먹으로 충분해요.”

정말로 그랬다.

이곳에 오는 길에, 리시의 마차 위로 멀쩡하던 나무가 갑자기 쓰러질 뻔한 일이 있었다.

말을 타고 마차 옆을 달리던 크리시나가 몸을 날려서, 주먹으로 나무를 쳐내지 않았다면 리시는 크게 다쳤을 터였다.

“그나저나 포르가톤 시는 정말 멋진 곳이네요.”

리시는 여행지로 유명한 포르가톤에 와보는 게 처음이었다.

포르가톤의 경치를 구경하고 싶어서, 목적지까지 마차를 이용하지 않고 말 두 마리만 끌고 왔다.

그들은 말에는 짐만 싣고, 걸어서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다.

“정말 멋지죠? 사람들은 여기를 대륙의 천상이라고 부른대요. 특히 저 만년설이 일품이죠.”

크리시나가 북쪽 먼 곳에 보이는 산을 가리켰다.

산꼭대기는 하얀 눈에 덮여 있어서, 맑은 날씨에도 구름이 낀 것처럼 보였다.

“도넛에 설탕 가루 뿌린 것 같은데.”

“에르웰, 너는 낭만이 없어.”

“있어. 자, 이걸 봐.”

에르웰이 단검을 쭉 내밀고 힘을 불어넣자, 푸른 검기가 쭉 뻗어 나왔다.

“검기야, 시니. 이렇게 쉽게 검기를 뽑아낼 수 있다니. 이게 낭만이 아니면 뭐겠어?”

“하긴. 옛날에는 그런 검기를 쉽게 뽑아내는 기사들이 엄청 많았다던데.”

“그러니까. 나도 검기를 다룰 수 있긴 하지만, 엄청 집중해야 하고, 한 번 쓰고 나면 힘도 쭉 빠지고 그랬는데…… 이것 봐. 계속 이렇게 휘둘러도 힘이 안 들어. 낭만이야, 낭만.”

대화하며 걷는 동안, 북적거리는 시내를 벗어나 넓은 호수에 다다랐다.

마치 사파이어처럼 푸르게 빛나는 맑은 호수는 이 세상의 정경 같지 않았다.

그들은 잠시 멈춰서, 그 아름다운 광경을 눈에 담았다.

“옛날에는 이런 데서 요정이 뛰놀고 그랬대요. 그 많던 요정들은 다 어디로 간 건지…….”

에르웰의 말을 들으며, 리시는 눈을 감고 호수 위에서 작은 요정들이 노니는 모습을 상상했다.

꼭 한 번쯤 보고 싶은 아름다운 광경이지만, 아마도 이제 그런 황홀한 광경을 목격할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이종족과 몬스터가 전설이 되어가는, 낭만이 사라진 시대니까.

“토미도 데려와서 이 광경을 보여주면 좋았을 텐데.”

“그러게요. 하지만 아직 토미는 가끔 너무 흥분했을 때, 변신을 자제하지 못해서 안 될 거예요. 한 살은 더 먹어야 여기저기 데리고 다닐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아쉬워하는 리시에게 나단이 설명했다.

“그래도 토미가 아주 의젓해졌어요. 이제 발음도 정확하고, 존댓말도 잘 쓰고. 이번에도 아이리스 님이 한참 떠나계신다는데 울지도 않고 의젓하게 인사했죠?”

크리시나의 말에 리시는 저택 대문까지 배웅 나왔던 토미를 떠올렸다.

-“누님. 다녀오세요. 몸, 조심하시고요. 아저씨, 누님을, 지켜주세요. 아저씨를 믿습니다.”

말도 잘하고, 예의도 많이 배웠지만, 리시를 누님으로, 케이를 아저씨로 부르는 습관은 고치지 않았다.

언젠가 케이가 “리시를 누님으로 부를 거라면, 날 형님이라고 불러.”라고 말하자, 토미는 어른스럽게 대꾸했다.

-“아저씨. 그건 도둑놈, 심보입니다. 아저씨와 누님의, 나이 차이가 7살. 그만큼 아저씨와, 제 나이 차이도, 어마어마합니다. 호칭은 아저씨로, 족합니다.”

-“너, 그거 어디서 주워들은 말이냐?”

-“엘디 형님이, 아저씨가, 분명, 형님 소리를, 듣고 싶어 할 거라고, 조언해주셨습니다.”

아직 말하는 데 완전히 익숙하지는 않아서 느리고 몇 번 끊어 말하기는 해도, 또박또박 대답하는 토미를 보며, 케이는 말했다.

-“이놈은 크게 될 놈이야.”

정말로 그럴 거라고, 리시는 확신했다.

호수를 지나서 잘 닦인 숲길에 접어들었다.

나무가 무성한 곳을 지나게 되자, 시녀들과 나단의 눈빛이 예리하게 바뀌었다.

리시에게 생길지도 모를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리시는 자신 때문에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 그들에게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케이를 위해, 수인을 위해, 모두가 좀 더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이 위험은 감내해야만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했다.

‘미안해요, 모두. 이 모든 것이 끝나면 충분히 보상할게요.’

나무가 무성하다고는 해도, 길이 넓은 편이었기에 큰 위험은 닥치지 않았다.

중간에 한 번 굶주린 늑대 무리가 나타났는데, 푸른 검기를 빛내는 단도와 백발백중의 총과 주먹을 꺼내 드는 일행의 모습에 늑대들이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게다가 리시는 늑대를 보면 케이가 떠올랐기에, 당장이라도 늑대들을 몰살시킬 것 같은 일행을 말리고, 늑대들에게 다가갔다.

신기하게도 늑대들은 리시를 보자 꼬리를 말고 낑낑거렸는데, 아마도 리시의 몸에 남아 있는 케이의 체취 때문일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에르웰이 중얼거렸다.

“저것 봐, 시니. 분명 아이리스 님 방에 몰래 드나드는, 커다란 늑대가 있는 거라니까.”

(138) 무서워요.

굶주린 늑대들에게, 짐가방에 들어 있던 음식을 나눠주고 나서 조금 더 걸은 후에야 목적지가 눈에 들어왔다.

시내에서 한참 벗어난, 도시 외곽에 있는 그곳은 ‘포레스트 치료소’였다.

아치형의 입구에 치료소의 이름이 진한 녹색으로 크게 쓰여 있었다.

샤크란 왕국에도 버려지다시피 한 빈 땅을 사서, 큰 규모의 치료소를 세웠다.

그 이유는, 바로 샤크란 왕국이 첫 번째 재앙이 시작되는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재앙.

전염병.

원인 모를 전염병은 샤크란 왕국에서 시작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륙 곳곳에 퍼지게 된다.

빠른 전염성과 높은 치명률 때문에,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간다.

뜻 있는 의원들과 신관들이 전염병을 치료하기 위해 돌아다니지만, 그들도 감염에서 안전한 건 아니었다.

그 후로 1년, 저명한 학자가 전염병의 원인을 밝혀내고, 또 1년 후, 전염병 치료제를 만들어내기 전까지,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운 좋게 살아나더라도 불구가 된다.

지난 삶에서는 그랬다.

하지만 이제 리시는 전염병의 원인을 알고, 치료제에 들어가는 재료가 무엇인지도 알았다.

배합을 잘해야겠지만, 재료만 알더라도 마탑의 연금술사들은 머지않아 약을 만들어낼 것이다.

다만 치료제가 만들어지는 시기를 전염병 유행 시기에 맞출 수가 없었다.

아직 마탑 연금술사들은 어떤 약을 만들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고, 리시는 어떤 병인지 자세하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리시가 기억하는 전염병 증상은, 열과 오한, 구토와 복통을 동반하고, 발진이 생기며 눈이 충혈되고 귀와 코에서 피를 흘리다가 사망에 이른다는 것과 전염병의 원인이 모기라는 것뿐.

지난 삶에서 전염병이 유행하던 당시, 걱정 많은 알포드의 어머니는 빠르게 움직였다.

‘정말 재빨랐지. 어떻게 보면,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나는 그때 전염병으로 죽었을지도 몰라.’

알포드의 어머니는 곧바로 재산을 정리해서,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곳에 있는 별장으로 피신했다.

딱 자기 가족들만 데리고.

고용인들도 챙겼더라면 전부 살릴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알포드의 어머니는 몇 년은 먹고살 수 있는 식량을 사들여서 창고에 저장해뒀고, 전염병 치료제가 나올 때까지 별장에 숨어서 지냈다.

알포드의 어머니 덕분에 살아남기는 했지만, 그 시기가 리시에게는 지옥 중의 불지옥이었다.

알포드 후치스의 가족들은 나가지 못하는 지루함과 짜증을 전부 리시에게 풀었다.

마치 전염병이 리시 탓이라는 듯이.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다시 저택으로 돌아간 후에 전염병에 대해 더 많이 알아보는 건데 그랬어.’

죽음 속에서도 전염병에 대한 부분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다른 장면을 보느라 정신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전염병 예방과 치료제 재료라도 기억해서 다행이야. 전염병이 창궐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게 아쉽긴 하지만.’

전염병은 빠르게 퍼지기에, 치료제가 완성될 때까지 많은 희생이 있을 터였다.

모두를 구할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까웠지만, 그런 생각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나는 그냥 한 명의 인간일 뿐이야. 내가 신도 아닌데, 이 세상 사람들 전부를 구할 수는 없어. 일부라도 구할 수 있게 된 걸 감사해해야지.’

이번 전염병으로 죽어야 할 수많은 사람을 살리면, 세계는 리시를 제거하기 위해 더 큰 힘을 발휘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구할 수 있는데 모르는 척 눈을 감고 싶진 않았다.

‘포레스트 치료소’는 여러 개의 건물로 나뉘어 있었다.

그중 중증 전염병 환자를 위한 건물은, 다른 건물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 건물에도 불이 들어와 있어서, 리시는 한숨을 삼켰다.

‘역시 벌써 시작됐구나.’

후에 ‘광혈병’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는 전염병이 심각하게 다뤄지는 것은 6월 말이지만, 그전부터 샤크란 왕국 곳곳을 조용히 침식시키고 있었다.

리시가 중증 환자를 위한 건물로 다가가려는데, 나단이 리시의 앞을 막았다.

“안 돼요, 형수님. 저긴 위험해요. 형수님은 지금 안전한 곳에 계셔도 안 좋은 일이 생기는 상황이에요. 병자들이 있는 곳에 가시는 건 좋지 않아요.”

아직 리시의 일행은 이 치료소가 무엇을 위해 세워졌는지 알지 못했다.

“나단, 나는 지금 치유의 반지가 있어요.”

“그래도요. 일부러 위험한 곳에 갈 필요는 없잖아요. 안 돼요.”

나단의 걱정을 이해하기에, 리시는 고집을 꺾었다.

리시는 면회객과 의원들을 위해 마련된 건물로 향했다.

이 치료소를 세운 리시의 등장에, 휴게실에서 쉬고 있던 의원들은 깜짝 놀라서 달려왔다.

단지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능력에 맞는 대접을 받지 못하던 의원들에게, 큰 급여를 지급해주며 고용한 그린 공작부인은 감사해야 마땅한 대상이었다.

“공작부인. 오시는 줄 알았더라면 이렇게 누추한 곳으로 모시지 않았을 텐데요.”

나이 지긋한 의원의 말에 리시가 미소 지었다.

“내가 세운 치료소인데…….”

“아…… 죄, 죄송합니다. 이 늙은이가 나이가 드니 주책이 많아져서…….”

“농담이에요.”

의원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리시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들이 아는 그린 공작부인은 한없이 고고하고 다가서기 어려워, 귀족들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이미지였다.

실제로 보니 더 그렇게 보여서 긴장하고 있었는데, 평민인 자신들의 실수도 농담으로 받아넘기는 아량이 있을 줄이야.

“그런데 무슨 일로 이 먼 곳까지 오셨는지요.”

“진료소 상황이 어떤지 알고 싶어서요. 상태가 심각한 병자가 있다면 좀 살피고 싶기도 하고.”

리시의 말에 의원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들은 눈빛을 주고받다가 말했다.

“사실 요새 좀 이상한 병에 걸린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고열에 오한, 구토에 복통까지 한꺼번에 증상이 나타나는데, 이런 경우는 본 적이 없어서 난처하던 참입니다.”

“그래도 다행히 신성국에서 대신관님이 한 분 오신 덕에, 증상이 더 나빠지는 건 막고 있어요.”

“대신관이요?”

“네. 아마 공작부인께서도 아실 겁니다. 미네르바 루키치라고.”

+++

미네르바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병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중증 환자용 건물의 병실 한 칸은 총 20명의 병자를 수용할 수 있었는데, 오늘 침상 20개가 전부 채워졌다.

‘미친……. 고작 나흘 만에.’

미네르바가 진료소에 온 지는 열흘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비슷한 증상의 환자들이 실려 왔고, 미네르바가 치유의 힘을 사용해서 치료하려고 노력했지만, 악화를 조금 늦출 뿐, 결국 중증 병실로 이동시킬 수밖에 없었다.

‘안구의 혈관이 다 터졌어. 이게 대체 무슨 병인 거지? 아무래도 전염병 같은데…….’

순식간에 퍼지는 거로 봐서는 전염병 같긴 하지만, 쉽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신성국이 전염병을 선포하면, 모든 나라가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 때문에 전염병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만 했다.

‘빠르게 퍼진다고 해서 다 전염병은 아니야. 전에도 이런 식으로 병이 퍼지다가 갑자기 사라진 일도 있었고, 알고 보니 대수롭지 않은 병인 경우도 있었어. 전염병이라는 걸 교황청에 보고하려면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고작 이 치료소를 채운 환자들만으로는 전염병을 인정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때, 젊은 남자 의원이 찾아와서 미네르바에게 공작부인의 방문 소식을 알렸다.

‘그린 공작부인이?’

환자 문제가 시급하기는 했지만, 리시를 한 번 더 만나보고 싶었던 터였다.

그 이후로 상태가 괜찮은지, 치유의 반지는 계속 사용할 수 있는 건지 묻고 싶었다.

치유의 반지만 있다면 이 병을 낫게 하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환자에게 너무 가까이 가지는 말고, 반드시 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있어야 해요.”

의원에게 주의하라고 한 후, 미네르바는 서둘러 휴게실로 향했다.

의원들은 전부 할 일을 찾아 떠나서, 리시와 그녀의 일행만이 미네르바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작부인,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덕분에요. 절 위해 대신관님께서 많이 고생하셨다고 들었어요.”

교황청의 대신관은 공작보다 직급이 높았다.

리시의 정중한 태도에 미네르바가 손을 저었다.

“대신관님은 무슨. 편하게 말해도 되고, 미네르바라고 불러도 돼요.”

“그럼 대신관님께서도 절 편하게 불러주실 건가요?”

리시는 생긴 것과 다르게 호쾌한 구석이 있었다.

미네르바는 단숨에 이 자그마하고 어린 공작부인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 좋아. 케이한테 하듯이 해도 되지?”

“네.”

“너도 내가 하듯이 해. 난 그게 편하니까. 대신관이랍시고 예의 차리고 말 곱게 하는 거, 딱 질색이거든.”

미네르바의 말에, 에르웰이 깊이 동감한 듯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그럼…… 언니, 라고 불러도……?”

“오, 좋네. 언니. 너 같은 여동생을 갖고 싶었어. 젠은 너무 억세니까.”

도대체 젠은 어디서 뭘 어떻게 행동하고 다니는 걸까?

리시가 의문을 품는 것과 달리, 에르웰은 이번에도 아주 깊은 공감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이렇게 먼 길까지 움직여도 되는 거야? 케이는 왜 같이 안 오고?”

“케이는 샤크란의 왕을 만나러 갔어요. 돌아가는 길에 합류할 거예요. 일이 일찍 끝나면 이쪽으로 올 거고.”

“용하네. 걔가 네 걱정하느라 쭉정이처럼 네 곁에만 붙어 있을 줄 알았거든.”

쭉정이라니.

케이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다니기에 ‘쭉정이’라는 평가를 받는 걸까?

의아해하는 리시와 달리, 에르웰과 크리시나, 그리고 나단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 상황은 좀 들었어?”

“네. 이상한 병에 걸린 환자들이 실려 오고 있다고…….”

“말도 마. 심각해. 이런 종류의 병을 본 적이 없어.”

미네르바는 병의 증상을 설명하며, 리시의 표정을 살폈다.

왜인지 리시가 이 병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그 생각을 지웠다.

안전한 그린 공작 저택에만 있던 리시가 이 오지의 병에 대해 어떻게 알겠는가.

“벌써 스무 명이나…….”

“내일이면 다른 병실을 열어야겠지. 혹시 몰라서 의원들에게 환자를 대할 때는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리라고는 말해뒀는데…… 어제 나이가 좀 있는 의원 한 명이 비슷한 증상을 보였어. 아직은 고열뿐인데,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겠어.”

이 병은 그런 식으로 막을 수 없다는 걸, 리시는 알았지만 말해줄 수가 없었다.

“언니, 일단 내가 병자를 좀 볼 수 있을까요?”

“안 돼요.”

미네르바가 대답하기 전, 나단이 얼른 끼어들었다.

“말씀드렸잖아요, 형수님. 위험해요.”

미네르바의 앞이기에, 나단은 ‘형수님은 저주를 받은 것 같은 상태’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때문에 미네르바는 제 사람만 아끼는 나단의 태도에 분노했다.

“나다니크. 아이리스는…….”

미네르바가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문 이유는, 케이가 다른 사람들에게 리시의 힘을 알렸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알아요, 미네르바 님. 형수님은 치유의 반지가 있죠. 그걸 다룰 수도 있고.”

“그걸 알면서도!”

“하지만 형수님은 전에 독에 당한 이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어요.”

“정말이야, 아이리스?”

미네르바가 완전히 건강해 보이는 리시를 보며 물었다.

리시는 난처한 듯 미소 지었다.

“나는 나았어요. 하지만 우리 가문 사람들에게 나는 아직 낫지 않은 상태라는 걸, 언니는 이해해줘야 해요.”

내 사람들은 아직 나를 병자처럼 대하고 걱정하는 중이다, 라는 의미였다.

미네르바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분노를 삭였다.

이건 화낼 일이 아니다.

병자들은 안쓰럽지만, 리시가 그녀의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탓할 일도 아니었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힘을 자기가 쓰고 싶을 때 쓸 자유가 있다.

“그래, 미안. 내가 너무 나댔어. 성격이 좀 지랄 맞은 편이라서 흥분하면 앞뒤를 못 가려. 주의할게.”

일국의 왕과도 같은 위치의 대신관은 솔직하게 사과했다.

“심각한 상황이야. 만약 이게 전염병이라면, 서둘러 증거를 찾아야 하는데…… 이 정도의 환자로는 전염병의 증거를 찾기 힘들어. 보통 한 나라에 다 퍼진 후에야 전염병으로 인정되곤 하지. 그때가 되면 치료제가 나오기 전까지는 멈출 수 없을 지경이 되고.”

“큰일이네요.”

리시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나단을 올려다봤다.

“그렇죠, 나다니크 기넵트 경?”

나단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게 월라스가 말했던 거구나.’

언젠가 월라스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형수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빤히 응시하면, 너무 무서워.”

그때는 덩칫값도 못 하는 놈이라며 비웃었었다.

비웃지 말걸 그랬다.

진짜로 꼼짝도 못 하겠다.

그래도 리시를 병자들, 그것도 위험한 전염병에 걸렸을지도 모르는 환자들이 가득한 곳에 보낼 수는 없었다.

그게 알려졌다가는 케이뿐 아니라, 다른 그림자들, 그리고 젠, 엘디, 노공작 부부까지 나단을 닦달할 것이다.

나단은 크게 심호흡하며 입을 열었다.

“형수님, 아무래도…….”

(139) 루테크는 루테크

  나단은 말을 끝낼 수 없었다.

휴게실 문이 벌컥 열리며 의원이 뛰어 들어온 것이다.

“죄송합니다. 상황이 급해서…….”

미네르바가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대신관님. 조앤의 상태가 급변했어요.”

“젠장. 젠장. 젠장!”

조앤은 어제부터 상태가 안 좋은 의원이었다.

미네르바가 뛰어나가자, 리시도 일어나서 뒤를 따르려 했다.

나단이 그 앞을 막았다.

“형수님…….”

“나단. 보내줘요.”

“안 돼요, 형수님. 제가 어지간하면 다 들어드릴 텐데요. 형수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단. 내가 왜 여기 있어요?”

“예?”

“내가 어떻게 여기 있어요?”

“그게 무슨……?”

리시가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내가 지금 살아서 여기 있는 건, 날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서예요. 나는 위험에 빠져도 죽지 않을 수 있었어요. 항상 날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서. 내가 혼자 잘나서 살아 있는 게 아니에요.”

“형수님…….”

“치유의 반지가 있어요. 이게 있는 한, 내가 병에 걸리는 일은 없어요. 그리고 이걸로 남을 도울 수 있죠. 구할 수 있는 생명이에요. 단지 내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생명을 놓쳐야 하나요? 그렇게 이기적으로 살아서, 내게 남는 게 뭐죠?”

리시의 음성은 절박했다.

“나단. 내가 모두를 구할 수 없다는 거 알아요. 여러분이 날 얼마나 걱정하는지도 알아요. 다 아는데, 그런데,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구할 수 있잖아. 그걸 나단도 알고, 나도 알잖아요. 그런데도 내가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내가 걱정되니까, 모르는 척 눈 감아요? 그러고 무사히 돌아가면, 내가 악몽을 꾸지 않고 잘 수 있을까요?”

나단은 이렇게까지 남을 구하고 싶어 하는 사람을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런 사람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아니, 오히려 아주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나단.”

에르웰이 나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보내드려요.”

“에르웰. 형수님이 병에 걸리시기라도 하면…….”

“왜 그렇게 아이리스 님을 못 믿어요?”

“못 믿다니, 나는……!”

반박할 수 없었다.

그제야 나단은 자신이 리시를 전혀 믿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리시가 언제나 놀라운 일을 해내기는 하지만, 그녀가 정말로 치유의 반지를 제대로 사용할 거라고, 정말로 성유물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인제 와서야 깨달았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리시가 케이도, 그림자들도 해내지 못한 일들을 수없이 해왔다는 걸 알면서도, 겉보기에 여리여리한 여인이기에 믿지 않았다.

‘나도 외모 때문에 무시당하면 화가 나는데…….’

아마 리시는 나단이 어떤 마음인지 눈치챘을 것이다.

그런데도 화내지 않고 오히려 나단을 설득하기 위해 애원하고 있다.

‘만약 나였다면…… 내가 약해 보이니 전쟁에 보낼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면…….’

화가 치밀었을 것이다.

질펀하게 욕을 퍼부어주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죄송합니다, 형수님. 제가…….”

“고마워요, 나단.”

리시는 담백하게 감사 인사를 한 후, 테이블 위에 얹어뒀던 가방 하나를 들고 뛰어나갔다.

나단이 고개를 푹 숙였다.

“형수님이 왜 내게 고맙다고 하는 거지?”

“나단이 아이리스 님을 걱정해서 말렸다는 걸 아니까요.”

창피했다.

나단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나는 앞으로 형수님이 하고 싶으신 게 있으면, 최선을 다해서 지지해드릴 거야.”

 

+++

리시가 병실에 들어가자, 의원들이 깜짝 놀라서 리시를 만류했다.

“공작부인. 안 됩니다. 전염병일지도 몰라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여러분.”

그래도 의원들은 고집스럽게 리시를 막았다.

조앤의 상태를 살피던 미네르바가 말했다.

“괜찮으니까 들여보내. 공작부인의 도움이 필요해.”

의원들은 리시가 훌륭한 치료소를 세워준 건 감사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대신관께서 저리 말씀하시니 더는 만류할 수 없었다.

리시는 병에 걸릴 것이 무섭지도 않은지, 사박사박 걸어가서 미네르바 옆에 섰다.

“다른 의원들은 나가는 게 좋겠어요.”

리시의 말에 미네르바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들었지? 나가서들 기다려.”

의원들은 초조한 낯빛으로 미네르바와 아이리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무거운 발을 움직였다.

병실의 문이 닫힌 후에야, 미네르바가 물었다.

“치유의 반지로, 가능하겠어?”

“오늘 중에 몇 명이나 치료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치유의 반지처럼 강렬한 건, 오래 사용하기가 힘들거든요. 일단 증상을 좀 가라앉히고 힘이 돌아오면 다 치료하는 방법을 써야, 모두를 살릴 수 있을 거예요.”

미네르바가 리시를 돌아봤다.

“고마워. 어려운 부탁이었는데.”

“유물술사가 하는 일이 이런 일 아닌가요?”

“보통은 자기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쓰거든.”

조앤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사람마다 차이가 좀 있는데, 조앤의 병은 빠르게 진행됐나 봐. 보통 코피는 증상이 나타나고 이틀쯤 더 지나야 흐르거든.”

“이때부터 중증인 건가요?”

“응. 그리고 귀에서까지 피가 흐르면 끝이야. 뇌가 녹아 나오는 거라서.”

“일단 좀 해볼게요.”

리시는 조앤의 가슴 위에 왼손을 얹었다.

검지의 반지가 순식간에 푸른 빛을 만들어내고 조앤의 전신을 채우는 것을, 미네르바는 경이로운 심정으로 지켜봤다.

이윽고 코피가 멎고, 얼굴 여기저기에 습진처럼 퍼졌던 발진이 사라졌다.

고열은 여전하지만, 위기는 넘긴 것이다.

“괜찮아?”

“아직은요. 서둘러서 중증 병실에 가보죠. 아, 그전에.”

리시는 아까 챙겨서 나온 가방에서 병을 꺼냈다.

병 안에는 정체 모를 녹색 액체가 담겨 있었다.

“이걸 몸에 좀 바르세요.”

“이게 뭐야?”

“여러 병을 예방해주는 약인데, 얼마 전에 아는 연금술사에게 받았어요. 이게 어쩌면 이 병도 막아줄지도 모르니까요.”

“나보다는 다른 의원들에게…….”

“충분히 가져왔어요, 언니. 언니가 쓰러지면 안 돼요.”

미네르바는 이 약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느 연금술사가 줬는지 묻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환자들을 치료하는 거였다.

리시가 준 액체를 몸 여기저기에 쓱쓱 바른 미네르바는, 리시와 함께 중증 병동으로 향했다.

리시는 그들 모두에게 치유의 힘을 사용했다.

열 명 정도 치료한 다음부터, 리시의 안색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창백해지고, 이마에서 쉴 새 없이 땀이 흘러내렸다.

“리시, 여기까지만 하는 게…….”

“아뇨, 더 할 수 있어요.”

고집스럽게 말하는 리시를, 미네르바는 말리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리시가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환자들을 중증에서는 벗어날 수 있게 치료해줬으면 했다.

‘케이가 알면 날 죽이려 들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믿을 건 리시뿐이니까.

18명째에서, 리시가 쓰러졌다.

“리시!”

달려가 리시를 받아들려는 순간, 문이 열리며 에르웰이 뛰어 들어왔다.

에르웰은 미네르바에게서 빼앗듯이 리시를 데려가 안아 들었다.   “이제는 안 됩니다, 대신관님.”

“그래, 알아. 내가 무리를 시켰어.”

“아니, 더 할 수 있어요.”

에르웰의 품에 안긴 채, 리시가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 리시. 더는 안 돼. 날 더 이상 창피하게 만들지 마.”

“언니가 왜 창피해요. 내가 더 할 수 있어요. 에르웰, 날 내려줘요.”

“안 됩니다, 아이리스 님. 이제는 정말 안 돼요.”

“난 정말 괜찮…….”

리시가 축 늘어졌다.

에르웰이 한숨을 내쉬며 미네르바에게 말했다.

“대신관님. 모시고 가겠습니다.”

“미안해.”

“아닙니다. 대신관님도 좋은 일 하시느라 그러신 건데요.”

 

+++

몇 시간 후, 상태가 조금 회복된 리시는 곧장 중증 병실에 가서 남은 환자들을 마저 치료했다.

남은 힘으로 이미 한 번 치료한 환자들을 완벽하게 고치겠다고 했지만, 이번에는 미네르바가 강하게 말렸다.

“오늘은 안 돼. 잘 먹고 잘 자는 게 우선이야.”

대신관까지 그렇게 나오니, 리시도 더는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미네르바가 나가기 전에 리시에게 물었다.

“의원들은 환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나아진 건지 궁금해할 거야.”

“유물술사가 치유의 반지를 사용했다고 말해주세요.”

“누구냐고 물으면? 아마 너라는 걸 짐작하겠지만, 그래도 물어보면?”

리시가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누구게? 라고 말해주세요.”

미네르바가 호탕하게 웃으며 나간 후에야, 리시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

12시간이 꼬박 지나서야, 리시는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나서 보니, 테이블 위에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일어나셨어요? 몸은 좀 어떠세요?”

소파에 앉아 있던 크리시나가 얼른 다가오며 물었다.

“이제 괜찮아요.”

“지금쯤 깨어나실 것 같아서, 음식을 준비해뒀어요.”

그동안 리시는 성유물을 사용하면서, 자신이 어디까지 힘을 쓸 수 있는지도 확인을 끝냈다.

기절할 정도로 무리하게 힘을 사용하면, 12시간에서 15시간 정도 잠을 자곤 했다.

리시는 식사를 하면서 물었다.

“환자들은 어떻죠?”

“다행히 중증 환자들은 경증이 됐는데, 오늘 또 병에 걸린 사람이 실려 왔어요.”

“몇 명이나?”

“세 명이요.”

리시는 한숨을 삼켰다.

이 전염병을 예방하는 방법은 무척 쉬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세상에 알리기 힘든 상황이다.

아무 연구도 없이 “내가 예방 방법을 알아요.”라고 말하면, 리시를 수상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세계뿐 아니라 사람들마저 리시의 적이 된다면, 앞으로의 길이 더 고달파진다.

재앙은 이 전염병 한 번으로 끝이 아니기에, 두 번째 재앙을 막을 때까지는 의심받는 걸 줄여야 했다.

게다가 예방 방법을 안다고 말한다 한들, 믿어주는 사람이 있을 리도 없었다.

아직 전염병이 창궐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포레스트 스파에 와서 목욕하면 전염병에 걸리지 않는답니다.’라는 말을 해봐야, 돈독 오른 공작부인이라는 소리만 들을 것이다.

전염병이라는 걸 인정받은 후, 고명한 학자의 발표가 있어야만 예방법과 치료제를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

‘이 전염병이 지난 삶처럼 빠르게 퍼지지는 않을 거야.’

리시는 이때를 위해 포레스트 스파를 대륙 곳곳에 만들었다.

처음에는 돈 많은 평민이, 그다음에는 돈이 많지 않은 평민이 이용했지만, 최근에는 귀족들도 신분을 감추고 포레스트 스파를 이용하게 되었다.

포레스트 스파에서 목욕을 하고 나오기만 한다면, 적어도 2주 정도는 전염병으로부터 안전하리라.

‘전염병이라는 걸 빠르게 인정받아야 해.’

전염병이 퍼지기를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었다.

이곳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전염병은 소리 없이 시작되고 있을 터였다.

‘좀 말이 안 되기는 해도…… 어쩔 수 없겠어. 미네르바를 설득하는 수밖에.’

리시는 포크를 내려놓고 에르웰을 응시했다.

버터 바른 빵을 크게 베어 물던 에르웰이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제가 너무 고상하지 못하게 처먹고 있나요?”

“에르웰!”

“아, 왜? 아이리스 님이 아이리스 님 앞에서는 편하게 말해도 된다고 하셨단 말이야. 그쵸, 아이리스 님?”

“그래요, 크리시나. 정말 괜찮아요.”

“하지만…… 얘가 밖에서도 이러면 어떡해요.”

“안 그래. 난 밖에서는 제대로 행동한다고.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말이 되게 미네르바를 설득할 만한 사람은 에르웰뿐이었다.

루테크 가문의 에르웰.

그녀의 말이 리시의 말보다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에르웰.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줄 수 있나요?”

 

+++

그날, 힘을 회복한 리시가 다시 환자들을 치료하는 동안, 에르웰은 그 옆에 바짝 붙어 서서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환자들의 상태를 꼼꼼히 확인했다.

환자의 이마를 만져도 보고, 눈을 뒤집어도 보고, 팔다리를 주물러도 보면서, 뭔가 굉장한 걸 알아내려는 듯 분주하게 굴었다.

에르웰이 루테크 가문이라는 걸 아는 미네르바는, 그녀의 태도에서 묘한 기대감을 품었다.

혈족 대부분이 천재로 태어나, 빠르게 지식을 습득하고, 성인이 되기도 전부터 학자의 길을 걷는 루테크 가문.

연구보다 검과 몸 쓰는 일을 더 좋아하는 에르웰이 루테크의 이단아 같은 존재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루테크는 루테크였다.

“혹시 뭔가 알아낸 게 있어?”

드디어 미네르바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질문을 던졌다.

에르웰은 심각한 표정으로 살펴보던 환자의 손을 내려놓으며 미네르바를 돌아봤다.

(140) 오래오래 살고 싶어.

 

“대신관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어릴 때 아버지랑 같이 대륙 온갖 곳을 다 다녔거든요. 그런 곳을 다니면서 제가 보인 천재성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했죠. 그 당시에 제 이름으로 논문까지 발표했어요. 그야말로 센세이션, 전무후무한 천재의 등장이었죠.”

에르웰이 그녀답지 않게 검술이 아닌 다른 것으로 자기 자랑을 해댔지만, 미네르바는 거기까지 파악하지는 못했다.

“그렇군. 그래서?”

“저기, 저쪽에 어느 작은 나라……라고 하기도 좀 그러네요. 어느 부족이 사는 마을에 갔을 때의 일이에요.”

에르웰이 아무 데나 가리키며 말했지만, 미네르바는 심각한 눈으로 그녀의 손가락 끝을 따라갔다.

“거기서 이런 증상을 본 적이 있어요.”

미네르바가 눈을 흡떴다.

“어떤 병이지?”

“이름은 몰라요. 그들도 모른대요. 다만, 이 병은 전염병이에요.”

“전염병……이라고? 하지만 지금껏 이런 병이 발표된 적이 없는데.”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죠. 그 부족 마을과 그 근처에서 유명한 전염병인데, 치료제도 없고 원인도 모르니 마을 몇 개가 전염병에 당해서 사라졌나 봐요. 그 후로, 증상을 보이면 바로 죽이고 태워서 묻어버린다고 하더라고요.”

“저런…… 끔찍한…….”

“그래도 그 덕에 이 전염병이 이쪽까지 오는 데 시간이 걸린 거예요. 잘 막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전염병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끝났다 싶으면 다시 창궐해서 사람들을 엿…… 아니, 고통에 빠뜨리죠.”

미네르바가 엄지로 턱을 문질렀다.

“이게 정말 전염병이라고?”

“네, 확실해요. 똑같은 증상이거든요. 고열, 구토, 발진, 복통, 코피에 귀에서 피가 흐르기까지.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사망하죠.”

마지막의 심한 경련에 대해서는, 리시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일부러 숨긴 게 아니라, 그냥 죽는다고만 말해도 충분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르웰은 이 병이 죽기 전에 경련을 일으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의원들이 말한 적 있는지는 따로 불러서 물어보면 될 일이고, 만약 의원들도 말한 적 없다면, 에르웰이 준 정보가 옳을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아무리 그럴싸해도 믿어주지 않았겠지만, 에르웰은 루테크였다.

“전염병이라니……. 그 부족이 어디에 사는지 정확하게 알려줄 수 있어? 지도를 가져올 테니…….”

“대신관님. 그 부족이 잘 막던 전염병이 어떻게 여기까지 퍼졌다고 생각하세요?”

“……설마 궤멸한 건가?”

“처음부터 이 병 때문에 수가 많지도 않았어요. 제가 알기로 그 부족 마을은 사라진 지 오래예요. 간신히 살아남은 부족민이 떠돌다가 병을 옮겼을지도 모르죠. 병을 옮기는 무언가를 가지고 나왔을지도 모르고.”

“그렇다 해도…….”

“대신관님.”

일개 평민 시녀가 대신관의 말을 끊는 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미네르바는 나무라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그 마을을 찾는 게 아니에요. 저도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아서, 그 마을을 찾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거예요. 그동안, 이 전염병은 더 많이 퍼질 거고, 결국 많은 희생자가 나오겠죠.”

미네르바는 머리가 꽉 막힌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교황청에 전염병을 보고하고 전염병 창궐을 선포해야 하는군. 그래야 치료제 연구가 시작될 테니.”

“네. 최대한 빠르게.”

 

+++

리시의 작전이 통한 이유는, 오로지 미네르바가 사람 구할 생각으로 가득 찬 대신관인 덕분이었다.

다른 대신관이였다면 전염병이 확실해질 때까지 함구했을 것이다.

잘못된 판단은 대신관의 명예를 떨어뜨리니까.

하지만 미네르바에게 중요한 건, 명예보다 목숨이었다.

미네르바는 시간을 끌지 않았다.

미네르바가 신성국으로 돌아가겠다며 치료소를 떠난 후에도, 리시는 잠시 남아서 의원들에게 녹색 액체가 담긴 병을 나눠주며 말했다.

“여러 가지 병으로부터 지켜주는 약이에요. 여러분도 바르고, 근처 사람들에게도 발라주도록 해요. 이미 병에 걸린 사람에게는 소용없으니, 병자는 치료에 전념하고요.”

의원들은 이런 정체 모를 약이 유용할까 싶었지만, 공작부인이 그리 말씀하신다면 뜻대로 해드리기로 했다.

고마운 분이시고, 공작부인이면서도 자신들에게 예의를 갖춰주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가는 분이시니까.

‘그래, 공작부인이 이런 미신을 믿으신다면, 같이 믿는 척해드리지, 뭐. 어려운 일도 아니고.’

리시는 의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치료소를 떠났다.

“대장도 이쪽으로 오고 계실 테니, 길이 엇갈리지 않게 시내의 여관에서 하루 머무는 게 좋겠어요.”

나단의 제안대로 하기로 했다.

“그러면 좀 걸어서 가도 되겠네요. 오늘도 날이 좋아요.”

“이러다가 갑자기 추워지기도 하더라고요. 감기 안 걸리시게 조심하세요.”

리시는 그녀에게 치유의 반지가 있는 걸 알면서도, 감기에 걸릴까 걱정해주는 나단의 마음씀씀이가 고마웠다.

오는 길에 잠깐 들렀던 호숫가에서, 오늘은 잠시 쉬었다가 가기로 했다.

크리시나가 떠나기 전에 싸둔 도시락을 꺼냈다.

샌드위치와 커피.

가져간 식량과 전염병 예방제는 전부 치료소에 두고 왔다.

풀밭에 앉아서 호수를 보며 샌드위치를 먹는 동안, 나단은 샌드위치 하나를 들고 숲으로 들어갔다.

위험한 게 있는지, 쓸 만한 게 있는지 돌아보고 오겠다고 했다.

“에르웰, 크리시나. 내가 이상한 걸 부탁하는데도 아무것도 묻지 않아서 고마워요.”

“별로요. 아이리스 님이 나쁜 일을 할 리도 없고,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그래도. 내가 무엇인지 궁금할 텐데.”

리시의 시녀들은 둘 다 영리했다.

그런 두 사람이 리시에게 이상한 면이 너무 많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묻지 않았고, 언제나 가녀린 공작부인을 대하듯 리시를 대해주었다.

“시녀의 덕목 중에 이런 것이 있죠. 섬기는 주인이 무엇이든, 그저 최선을 다해서 섬기라.”

크리시나가 리시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아이리스 님은 공녀에서 그 대단한 그린 가문의 안주인이 되셨죠. 그런데도 저희를 처음 보는 날, 저희가 평민이라는 걸 아시면서도 정중하게 대해주셨어요.”

“맞아요, 그때 시니가 돌아가는 길에 아이리스 님 칭찬을 얼마나 많이 했다고요.”

“그 후로도 아이리스 님의 태도는 바뀌지 않으셨어요. 항상 한결같이 저희를 믿어주시고 대우해주셨죠. 그게 저 같은 사람에게는 얼마나 감동적인 일인지 모르실 거예요.”

크리시나와 에르웰의 다정한 시선에 가슴이 따뜻해지려던 찰나.

에르웰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리시의 뒤를 향해 팔을 뻗었다.

탁-!

부딪치는 소리에 놀라서 돌아본 리시의 눈에, 더 놀라운 광경이 들어왔다.

케이가 리시를 향해 뻗던 손을, 에르웰이 쳐낸 것이다.

“레이디 에르웰.”

“공작 전하.”

“전하는 빼시고.”

“그린 공작님. 레이디도 빼시죠.”

“그런 게 있어, 에르웰 양.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가끔씩 하고 싶은 유치한 일.”

“그렇군요.”

“그중 하나가 바로 지금 하려던 거야. 사랑하는 부인 뒤로 살금살금 다가가서 확 끌어안아 주는 것.”

“그러다가 공작부인의 심장이 멎으면, 공작님께서 책임지십니까?”

“내 아내의 심장은 그렇게 유약하지 않아.”

“그런 것 치고는 공작부인이 깨질 유리라도 되는 것처럼 지켜보시던데요.”

케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에르웰 양. 솔직하게 말할게.”

“하세요.”

“나는 루테크를 말싸움으로는 못 이겨.”

“압니다.”

“하지만 내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이기고도 남지.”

“글쎄요.”

아무래도 말싸움이 길어질 것 같기에, 리시가 일어나서 케이에게 다가갔다.

“케이, 언제 왔어요?”

“방금. 그리고 에르웰 양에게 말했다시피, 당신을 향한 애정을 표현하려던 차에 막혔지요.”

“그거 아쉽네요.”

리시의 말에 케이가 에르웰에게 ‘이것 봐.’라는 눈빛을 보냈다.

에르웰이 “쳇.” 하고 혀를 차며 팔을 거뒀다.

케이와 리시는 손을 잡고 호숫가를 걸었다.

“근사한 곳에 있었네.”

“응. 정말 멋진 곳이야.”

“여기가 샤크란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지. 이 호수는 신의 눈물이라고 불려.”

“이름도 멋지네.”

“아까 숲에서 나단에게 들었어. 쓰러질 정도로 환자들을 치료했다며?”

“응. 그래서 살렸어. 세계는 날 더 미워하겠지. 혼낼 거야?”

“아니.”

케이가 리시의 어깨를 감쌌다.

“내가 왜 혼내? 당신은 그게 옳다고 생각한 거잖아.”

“응.”

“나단이 당신에게 미안해하고 있어. 당신을 믿지 못했다고.”

“음? 나를?”

“그래서 당신이 아무것도 못 하게 말렸던 거라고, 미안하고 창피하대.”

“아…….”

리시는 치료소에서 미네르바를 따라 나가기 전, 나단이 미안하다고 사과했던 걸 떠올렸다.

그때는 상황이 급해서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정말로 사과를 했던 모양이다.

“나는 고맙던데. 날 그렇게나 걱정해줘서.”

“나단은 완전히 당신 편으로 돌아섰어. 당신을 믿고, 당신이 뭘 하든 지지할 거래. 자기를 말릴 수 없을 거래.”

“우와, 엄청 든든하다. 나단은 세잖아.”

“세지. 하지만 내가 더 세, 리시.”

“말릴 거야?”

“그럴 만한 상황이면 그럴 수밖에 없어. 하지만…… 나단의 얘기를 들었더니 나도 생각이 좀 바뀌더군.”

케이가 걸음을 멈추고 호수를 응시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신을 나만 볼 수 있는 유리병에 가둬서 안전한 곳에 놔두고 싶어. 당신도 내게 그런 감정을 느끼겠지.”

“……아니, 난 별로.”

“아, 지금은 그냥 그렇다고 해줘.”

“응, 그럼 그런 거로 하자.”

“만약 당신이 날 약하게만 보고 가둬두고 당신만 보려고 하면 어떨까, 상상해봤는데…… 우와, 그거 진짜 근사하겠더라. 끝내줘. 최고야.”

리시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호숫가에 울려 퍼지는 리시의 웃음소리를, 케이는 즐겁게 귀에 담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답답하겠지. 나도 당신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많은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응.”

“전쟁터에 나가고 싶지?”

“내 힘은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그린 가문의 가치가 더 올라가겠지.”

케이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리시는 조용한 호수를 응시하며 케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건 약속해줘. 일부러 위험에 뛰어들지 않기. 위험할 것 같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기. 무리하지 않기.”

리시는 케이의 앞으로 가서 그를 올려다봤다.

“케이. 나는 당신이랑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어. 정말로.”

모든 일이 끝나고 세계가 날 미워하지 않게 되면, 아이도 낳을 수 있겠지.

당신과 나를 반씩 닮은, 놀랍도록 사랑스러운 아이.

그 아이와 토미를 데리고 이 호수에 한 번 더 오고 싶어.

우리는 들판에 앉아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뛰노는 아이들을 지켜볼 거야.

지난 삶의 나는 꿈조차 꾸지 못했던, 그런 행복한 광경을 내 눈에 담고 싶어.

이게 바로 내 삶의 목표야.

리시는 케이에게 할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속삭였다.

바람이 불어와 리시의 은발을 헝클이고 지나갔다.

케이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그녀의 귀 뒤로 살짝 넘겨주며 말했다.

“나도 그래, 리시. 정말로.”

+++

브리트니는 가비자르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에서 엄지손톱을 깨물고 있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최근 브리트니의 삶은 엉망이 되었다.

에버렛은 사사건건 브리트니가 하는 일에 간섭했고, 시녀들은 전처럼 브리트니를 대우해주지 않았다.

브리트니가 지지 않고 에버렛에게 대거리하면, 에버렛은 드웨인에게 쪼르르 달려가 일러바쳤다.

그러면 그날 밤, 드웨인은 브리트니를 찾아와 호통을 쳤다.

-“황비! 제발 체통을 좀 지켜! 이게 다 그대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버렛이 당하던 대우를, 이제는 브리트니가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아이리스는 아주 잘살고 있었다.

전에는 아이리스를 욕하던 귀족들이, 이제는 아이리스를 칭송하며 파티에 초대하려고 애쓴다고 했다.

어디 그뿐인가?

아이리스가 설립한 그린 아카데미는, 개교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어마어마한 성과를 거뒀다.

많은 평민과 귀족의 자녀들이 입학했으며, 물밀 듯 입학 문의가 쏟아진다고 했다.

게다가 밀란시스 피아몬도 대공이 아카데미에 어마어마한 기부금을 냈다고 들었다.

‘대체 왜? 내가 한 거랑 아이리스가 하는 게 뭐가 다른데?’

리시처럼 행동했고, 리시가 투자한 곳에 투자했고, 리시가 하는 사업을 따라 했다.

그런데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

왜 내 상황은 점점 나빠져서, 간신히 붙잡은 기회조차 날아가려고 하는 거지?

이대로 가다가는 이름뿐인 황비로 살게 생겼다.

아니, 황비면 차라리 다행이다.

황궁에서 쫓겨나 오도 가도 못 할 처지가 될지도 모른다.

‘그건 싫어.’

두 번 다시는 그런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시중들어주지 않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밭일을 해야 하는, 그런 삶으로 돌아가느니 죽는 게 나았다.

“아얏!”

손톱을 너무 깨물다가 살까지 깨물고 말았다.

찢어진 살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피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브리트니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아, 그래. 2황자가 있었지!’

(141) 세인트 이트리아

2황자 라코젠.

그를 잊고 있었다.

‘그래, 그놈이라면 내 정보를 비싸게 사줄 거야.’

라코젠이 공작부인을 독살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다.

브리트니 역시 그 보고를 받았지만, 당장은 필요하지도 않고, 만나러 가기도 힘들어서 묻어두고 있었다. 자신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리시를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도움이 필요하다.

리시를, 나아가 케이를 죽이고 싶어 하는 라코젠이라면 브리트니의 정보를 비싼 값에 사줄 것이다.

‘그거면 숨통이 좀 트일 거야. 물론 내가 따로 모아둔 돈이 있긴 하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니, 그 돈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어. 드웨인도 예전 같지 않고.’

만약 가능하기만 하다면 라코젠을 유혹해볼 생각도 있었다.

‘예쁜 여자라면 환장하는 놈이니, 내가 작정하고 유혹하는 데 안 넘어올 리 없지.’

브리트니의 머릿속에서, 전에 라코젠에게 당했던 수모는 지워지고 없었다.

브리트니는 그렇게 잊고 싶은 기억을 지워버리며, 편리하게 살아왔다.

‘이번 가비자르 행에 따라오기를 잘했어. 끝까지 고집부리지 않길 잘했네.’

브리트니는 원래 에버렛이 가비자르의 국혼을 축하해주기 위해 떠나면, 황궁에 남아 있다가 에버렛의 집무실을 뒤져서 대출 서류를 훔칠 계획이었다.

하지만 드웨인이 강하게 명령했다.

황후와 함께 가비자르에 가서 황태자의 혼인을 축하해주고 오라고.

싫다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드웨인의 강압적인 태도에, 어쩔 수 없이 마차에 오른 터였다.

‘라코젠은 황태자와 사이가 좋지 않으니 축하해주러 오지 않겠지. 레리소에 있을 거야. 황궁에서 레리소까지는 빠른 말로 쉬지 않고 달리면 나흘 정도 걸리니까, 충분해.’

한 달 정도 머무는 여정이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드웨인은 한동안 가비자르에 머물다가 돌아오라고 했다.

‘내가 결혼식에 참가하지 않는다고 해도, 수상하게 여길 사람은 없을 거야.’

가비자르에서 브리트니를 어떻게 취급하는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몸이 안 좋다고 해두고 몰래 빠져나와서 레리소로 향하면 돼. 그전에 전서구를 보내서 내가 고용한 암살자를 데려가야지. 라코젠이 몹쓸 짓을 하려고 하면, 단숨에 죽여버리게.’

 

+++

브리트니가 한창 가비자르로 향하고 있을 때, 케이와 리시는 이미 가비자르 황궁에서 이오벳을 만나고 있었다.

결혼식에 불참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들은 이오벳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라코젠이 그런 걸 준비하고 있었다니……. 어째서 그 사실이 내게 전해지지 않은 거지?”

라코젠은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현재 라코젠이 주둔 중인 레리소는 변경이기에, 군사를 훈련시키고 잠깐 움직인다고 해서 경계의 시선을 받을 만한 곳은 아니었다.

군사를 이끌고 멀리 나간다 해도, ‘오그어 토벌’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 된다.

케이가 말했다.

“내 예상에 2황자는 그린령까지 밀고 들어오지 않을 거야. 미나스아릭이 우리 쪽으로 군대를 보낸 틈에, 미나스아릭을 차지하려는 속셈이겠지.”

“설마 미나스아릭 왕이 그걸 보고만 있을까? 그린령에 병력 전부를 보내는 건 아닐 텐데.”

“미나스아릭과 샤크란이 지금 어떤 관계인지 알잖아.”

“아. 설마 군사를 내보낸 틈에, 샤크란으로부터 보호해주겠다는 명목으로 진입하려는 건가?”

“그래. 그렇게 얘기가 된 것 같아.”

이오벳이 가늘게 뜬 눈으로 케이의 얼굴을 살폈다.

“자네는 그런 걸 다 어떻게 아는 거지?”

황실에서도 눈치채지 못한 일이었다.

미나스아릭과 스티무어 쪽의 움직임이 조금 수상하다는 보고는 받았지만, 라코젠의 움직임까지는 황실에 전해지지 않았다.

“믿을 만한 첩자가 있거든.”

“자네도 여러 가지로 마음이 복잡하겠군. 내가 도와줄 건 없나?”

“자네는 결혼식이나 제대로 올리고 즐거운 신혼 생활을 즐겨. 문제는 그다음이니까.”

“문제?”

“나는 2황자가 미나스아릭을 손에 넣는 것까지 막을 전력이 없어.”

“그렇다면 내가…….”

케이가 검지를 들어서 이오벳의 말을 막았다.

케이의 회청빛 눈동자가 신중하게 빛났다.

“자네가 개인적으로 쓸 수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되지?”

이오벳은 케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황제께 말씀드리면…….”

“과연 황제께서 군사를 내주실까?”

이번에도 이오벳은 케이의 말에 내포된 의미를 깨달았다.

“모르는 척하시겠지. 잘되면 미나스아릭을 가비자르에 포함할 수 있을 테니.”

“그래. 그러니까 자네는 내 문제에서 신경 쓰지 말고 결혼이나 해. 다만, 미나스아릭을 손에 넣은 2황자가 어떻게 움직일지 몰라. 나를 공격할 수도, 혹은 자네를 공격할 수도 있지. 그러니 자네도 자네 나름의 준비를 해두는 게 좋을 거야.”

+++

리시는 이오벳을 만나는 자리에 함께하지 않았다.

황후와 곧 황태자비가 될 이트리아가 리시를 만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리시는 황후의 성격이 무척 까다롭고 냉정하다는 걸 알기에 조금 긴장했지만, 우려했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이오벳에게 포레스트와 관련된 선물을 받아온 황후는 리시에게 호의를 품고 있었고, 그린 아카데미의 음악 교수인 피르소와 오랜 친구 사이이기도 했다.

리시가 선물로 가져온 차를 마시며 길지 않은 담소를 나눈 후,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어 자리를 파했는데, 이트리아가 리시를 따라 나왔다.

“그린 공작부인. 나가는 길에 함께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전하.”

“전하라니…… 아직은 아니에요. 그냥 이트리아라고 불러줘요.”

“제가 어떻게 감히 황태자비 전하의 존함을 함부로 입에 담겠습니까.”

“내가 허락할게요.”

이트리아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계속 그 청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알겠어요, 이트리아. 저도 아이리스라고 불러주세요.”

이트리아는 새까만 머리카락에 부드러운 녹색 눈동자를 가진, 약간은 차가운 인상의 미녀였다.

지난 삶, 이트리아는 리시가 따라 할 수 없는 근사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공녀로서 대우를 받으며 편하고 풍족하게 살 수도 있었는데, 전염병이 창궐하자 병자들을 돕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안전한 저택을 떠났다.

리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한 이트리아가 좋았다.

지난 삶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이번 삶에서도 이제야 막 인사를 나눈 사이가 되었지만, 차가워 보이는 저 표정 뒤에 얼마나 뜨거운 열정이 숨어 있는지 알기에, 호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아이리스. 얼마 전에 우리 에오르트 왕국에도 포레스트 치료소가 완성됐다고 하더군요.”

“베기스 공작님이 여러모로 살펴주신 덕에 좋은 땅에 치료소를 세울 수 있었어요. 이트리아가 공작님께 따로 부탁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해요.”

“아니에요. 좋은 일을 하는 건데,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거기서 잠깐 대화가 끊겼다.

이트리아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걷다가, 리시를 돌아봤다.

“아이리스. 혹시 치료소를 그렇게 곳곳에 세워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는 건가요?”

리시는 조금 놀랐다.

귀족 대부분은 리시가 치료소와 구제소를 곳곳에 세우는 이유를, 그저 평민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서라고 여기고 있었다.

리시는 처음부터 귀족가에서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고, 위틀로 가문까지 그렇게 되면서 뒷말이 나오기 딱 좋은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귀족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면 평민의 지지라도 받자.

귀족 신문사는, 리시가 하는 모든 사업을 그런 식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이트리아는 달랐다.

“이오르트에 있을 때도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가비자르에 오니 가만히 앉아 있어도 아이리스가 뭘 하는지 들려오더군요.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면, 아이리스가 하는 일에는 항상 이유가 있는 것 같았어요. 치료소도 그런 건가요?”

“아니요, 이트리아. 그저 적절한 시기에 치료만 받아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그저 돈이 없어서, 치료받을 곳이 없어서 죽어간다는 게 안타까웠을 뿐이에요.”

“그래요…….”

이트리아는 리시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 같지 않았다.

“만약, 만약에 말이에요.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꼭 말해줘요.”

이트리아가 주위를 둘러본 후,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는 약간이기는 하지만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거든요.”

리시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난 삶, 이트리아는 전염병이 퍼지자마자 베기스 공작가를 떠나 미네르바와 합류했었다.

쉽게 공녀 자리를 버렸던 이트리아는, 쉽게 황태자비의 자리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빛나는 녹색 눈동자에서, 자신의 힘을 옳은 곳에 사용하고 싶어 하는 각오를 읽을 수 있었다.

만약 전염병의 존재가 알려지면, 치료제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이트리아는 황궁을 떠나 사선으로 향할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지금까지도 너는 죽을 사람을 살리고, 살 사람을 죽였어. 인과율을 위배하는 건, 재앙과도 같은 일이지.”

문득 ‘빛’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이트리아는 죽어야 하는 운명이다.

그녀가 공녀라도, 황태자비라도, 전염병에 걸려 죽을 운명은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내가 설득한다고 해서 들을 사람이 아니야. 아마 치료소에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 곧바로 황궁을 나와 치료소로 향하겠지.’

이오벳은 이트리아를 막지 못할 것이다.

이트리아에게 홀딱 빠진 그는, 케이가 리시에게 그렇듯 이트리아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을 터였다.

그것이 아무리 이트리아의 목숨을 위험하게 하는 일이라도.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이트리아,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포레스트 스파에 한번 들러주시지 않겠어요?”

 

+++

미나스아릭의 왕 디에로프는 전쟁을 앞두고, 메어리가 갇힌 서탑으로 향했다.

2년 전, 메어리는 질투 때문에 아이리스에게 몹쓸 짓을 하려다가 들통나서 큰 창피를 당하고 돌아왔다.

전 대륙의 귀족사회가 그 일로 떠들썩해졌고, 모든 신문사에서 그 일을 다루는 바람에, 디에로프는 아주 곤란한 상황에 빠졌었다.

타국의 왕이나 귀족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이 그 사건을 은근히 언급해도 대응할 수가 없었다.

누명이나 부풀린 이야기라고 하기엔, 그 사건이 너무도 확실하게 결론지어졌기 때문이다.

한때 황제와도 같은 대우를 받았던 디에로프는, 타국 왕과 귀족들의 조롱 섞인 미소를 견뎌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가끔은 신하들도 그 일을 언급하며 디에로프가 하려는 일에 제동을 걸기도 했다.

-“공주님 사건이 아직 회자되는 와중에, 그런 결정을 내리시는 것은 좀…….”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메어리의 일도 점점 잊혀갔다.

메어리를 향한 디에로프의 실망과 분노 역시 점점 가라앉았다.

하지만 케이와 리시를 향한 증오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더 큰 증오가 디에로프의 가슴을 시커멓게 채웠다.

디에로프는 인제 그만 메어리를 용서하고 서탑에서 꺼내주고 싶었지만, 언제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린 공작이 먼저 공주님을 용서해달라고 청하지 않는 이상, 공주님을 꺼내드리면 다시금 그 일이 수면으로 떠 오를 것입니다.”

옳은 말이기는 했다.

미나스아릭의 명예가 이 이상 떨어지지 않은 건, 디에로프가 메어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서탑에 가두는 벌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딸에게 가혹한 벌을 내려야만 했던 아버지의 마음은 어떻겠는가.’라는 여론도 있었다.

디에로프와 메어리에게는 길고도 긴 2년이라는 시간은, 다른 이들에게 ‘고작 2년’일 뿐이었다.

물의 없이 메어리를 꺼내주기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했고, 그 명분을 세울 수 있는 건 케이뿐이었다.

메어리를 용서했으니 인제 그만 서탑에서 꺼내주라고 말하거나, 메어리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르거나.

디에로프는 벌써 여러 번 케이에게 메어리의 용서를 구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단 한 번도 답장을 받지 못했다.

‘애송이 놈이……!’

디에로프는 케이를 씹어서라도 죽일 수 있을 만큼 증오했다.

때로는 격렬한 증오가 터져 나와 몇 날 며칠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했다.

그럴 때, 라코젠에게서 동맹 요청을 받은 것이다.

“메어리…….”

서탑 꼭대기, 허름한 방에 들어가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침대에 힘없이 누워 있는 메어리였다.

오랫동안 빛을 받지 못해 푸석푸석해진 피부와 갈라진 입술, 손톱, 퀭한 눈을 보자 가슴이 아렸다.

“아버지…….”

“누워 있거라.”

“아니에요, 아버지.”

메어리가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비틀거리는 메어리를 부축해서 의자에 앉힌 디에로프는, 거칠어진 딸의 손등을 연신 쓰다듬었다.

“아버지. 케이에게서는 아직도 답장이 없나요?”

메어리도 디에로프가 케이에게 서신을 보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디에로프가 고개를 젓자, 메어리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메어리의 입술 사이로 비명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버지, 아버지. 제가 뭘 그리 잘못했나요? 이렇게까지 벌을 받아야 할 만큼 큰 잘못을 한 건가요? 제가…… 제가 한 짓이 그렇게나 심한 짓이었나요? 네? 저 때문에 죽은 사람도, 다친 사람도 없는데…… 저만 이렇게…… 이런 몰골이 되었는데……!”

(142) 무릎 꿇게 해줄게.

  두꺼비 독 때문에 엉망이 되었던 피부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디에로프의 화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때 의원을 들여보냈지만, 의원은 “치료하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라는 결론만 내놓았다.

대신관의 힘이라면 어느 정도는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신성국의 그린 가문을 건드린 메어리의 치료를 부탁한다고 한들, 대신관을 보내줄 리 없었다.

만약 디에로프가 분노를 가라앉히고 메어리를 치료부터 해준 후 서탑에만 가뒀어도, 메어리의 상태가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디에로프는 이조차 전부 케이의 탓으로 돌렸다.

가장 예쁘다고 소문났던 내 자랑스러운 딸의 얼굴이 이렇게 괴물처럼 변한 건, 전부 케이브란트 그린, 그리고 아이리스 그린, 그 두 연놈 때문이다.

“그래, 그래. 메어리. 너는 그렇게 큰 잘못을 하지 않았지.”

“그저…… 그저 사랑했을 뿐이라고요! 케, 케, 케이는…… 케이는 원래, 워, 원래 나랑 결혼했어야 했으니까……!”

메어리는 흥분하면 말을 더듬는 증상이 생겼다.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어흑…… 죽여버리고 싶어…… 아이리스…… 그년을 죽여버릴 거야…… 바, 바, 반드시, 반드시 죽일 거야.”

“그래, 그렇게 하게 해주마.”

디에로프가 평소와 다른 대답을 하자, 메어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말요?”

“그래, 메어리. 내 반드시, 그 두 연놈을 데려다가 네 앞에 무릎 꿇게 해주마.”

 

+++

디에로프가 나간 후, 메어리는 오랜만에 씻고 머리를 빗었다.

메어리는 때 묻은 거울 앞에 앉아 히죽 웃었다.

‘얼굴은 고칠 수 있어. 여기서 나가기면 하면, 대신관이 날 고쳐줄 거야.’

단 한순간도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케이는 내 거야. 처음부터 그랬어. 아이리스, 넌 내 걸 가로챈 거야. 나쁜 년. 도둑년.’

그런 주제에 피해자인 척, 메어리를 몰아붙여 이토록 끔찍한 곳에 밀어 넣었다.

아이리스만 없었다면, 지금쯤 케이와 결혼해서 그와 나를 반씩 닮은 아이를 낳아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 행복을 빼앗아간 건 아이리스다.

아이리스 위틀로.

‘케이, 너는 용서해줄게.’

전쟁에 패배하고 끌려와서 무릎 꿇은 케이를 보며 할 말도 생각해뒀다.

살려줄게, 케이. 나는 또 한 번 네 목숨을 구한 거야.

아이리스 앞에서 그렇게 말하며, 너그럽게 케이를 용서해줘야지.

그러면 케이는 울면서 사죄하겠지.

나에게는 너뿐이다, 항상 그랬다, 그리 말해주겠지.

그런 케이를 보며 리시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기대됐다.

서탑에 갇힌 후 처음으로, 메어리의 가슴에 희망이 피었다.

+++

미네르바는 포레스트 치료소를 떠나자마자, 가지고 있던 돈을 전부 꺼내서 속도 마법이 걸린 마석을 샀다.

말에게 부착하면 신속하게 움직이게 해줄 수 있는 마석인데, 그 가격이 어마어마해서 어지간히 급한 일이 아니면 잘 이용하지 않는 마석이었다.

미네르바를 태운 말은 지치지도 않고 빠르게 달려, 평소라면 2주일은 걸렸을 거리를 1주일로 단축해주었다.

말이 지치지 않고 빠르게 달린다 해도, 그 말에 탄 사람이 지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전염병을 막아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미네르바는 신성국에 도착할 때까지 거의 쉬지 않았다.

교황청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기절하기 직전이었는데, 그런 미네르바의 노력이 아무 소용 없게 되었다.

교황청에 도착하자마자 관련 부서에 가서 대신관들을 모아달라고 요청했지만, 대부분의 대신관이 답을 주지 않았다.

교황이 노환으로 힘들어하는 이때, 대신관들은 차기 교황 자리를 두고 조용한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어린 나이에 대신관이 된 산티아노.

가장 강한 치유의 힘을 가진 미네르바.

원래대로라면 미네르바가 차기 교황 후보로 유일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네르바는 신성국에 거의 머물지 않고 치료소를 찾아다니며 병자를 치료했고, 산티아노는 신성국에 남아서 대신관과 신관들의 환심을 사는 데 열중했다.

그 결과, 차기 교황을 선출하는 데에 발언권이 있는 대신관 중 대부분이 산티아노의 편이 되었다.

“멍청한 새끼들.”

24시간이 지났는데도 대신관들로부터 답이 없자, 미네르바는 욕설을 뇌까리며 교황을 만나러 갔다.

안드리제 교황은 요새 체력이 좀 회복되어서, 집무실에 앉아 그동안 쌓인 서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산티아노가 기립해 있었다.

“미네르바. 언제 왔누?”

“폐하.”

미네르바는 한쪽 무릎을 꿇고, 교황을 향한 예를 표한 후 일어났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버릇이 없군요, 미네르바 루키치 대신관. 교황 폐하와 독대하기 위해서는 절차를 밟아 허가가 떨어진 후에 들어와야 한다는 걸 알 텐데요.”

“그러는 네놈은……! 그러는 산티아노 대신관도 허락 없이 교황 폐하의 집무실에 드나들지 않습니까?”

교황의 앞이라서 성질을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콧등을 찡그리고 존대하는 미네르바를 보며, 산티아노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알다시피 교황 폐하께서 최근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이 몸이 부족한 도움이나마 드리던 차였지요. 미네르바 대신관이 나돌아다니는 사이에, 이 몸은 신성국 안팎의 문제를 돌보느라 바빴단 말입니다.”

“하! 개소리…… 재미있는 소리를 하시는군요, 산티아노 대신관. 현재 신성국에는 안팎의 문제라고 할 만한 일이 없다고 아는데요.”

“그거야 미네르바 대신관 생각이고요.”

미네르바는 산티아노의 반들반들한 얼굴을 주먹으로 한 대 갈기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폐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묵묵히 둘을 지켜보던 교황이 미간을 좁혔다.

“미네르바. 어서 산티아노에게 사과하거라.”

생각지 못한 말에, 미네르바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산티아노와 미네르바가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는 건, 교황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교황은 단 한 번도 그들의 싸움에서 누군가의 편을 들어준 적이 없었다.

언제나 자식을 보는 듯 너그러운 시선으로 지켜봤을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과하라니? 그것도 먼저 산티아노가 시비를 건 상황에서?

‘폐하께서 산티아노를 차기 교황으로 인정하기로 하신 건가? 아니, 아니. 설령 그렇다 해도 이상해. 산티아노가 차기 교황이 된다고 해서, 이런 문제로 산티아노의 편을 들어주실 분이 아니야.’

미네르바가 한 걸음 다가가려 하자, 산티아노가 매섭게 외쳤다.

“거기 멈춰요, 미네르바 대신관! 교황 폐하께서 미네르바 대신관이 가까이 오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교황 폐하의 건강은 괜찮으신지 걱정돼서 그렇습니다, 산티아노 대신관.”

“교황 폐하께서는 아주 건강하시니, 미네르바 대신관은 밖에 나가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나 치료해주고 다니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래, 미네르바. 그게 좋겠구나.”

교황이 산티아노의 말을 거드는 바람에, 미네르바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할 일이 많으니, 그만 나가보거라.”

결국, 미네르바는 교황과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도 못한 채, 쫓겨나듯 집무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불길하게 뛰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

미나스아릭과 스티무어가 양동 작전을 펼쳐 그린 공작령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을 때, 각 나라의 왕과 귀족들은 가비자르의 황궁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두 나라가 그린 공작을 치려 한다는 사실이 알려질 때는, 이미 전쟁이 시작된 후일 것이다.

두 나라의 군대는 인적이 드문 산이나 숲을 통해,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주의하며 그린 공작령을 향해 나아갔다.

그들은 몰랐다.

커다란 독수리나 부엉이 같은 새들이 그들을 지켜보듯 공중을 선회하다가 그린 공작령으로 향했다는 것을.

그럴 때 그린 공작저에 불길한 내용을 담은 서신이 도착했다.

스티무어를 상대하기 위해 서남쪽 관문으로 향할 준비를 하던 케이는, 미네르바에게서 온 편지를 어두운 표정으로 읽어내려갔다.

[케이. 교황 폐하께서 조금 이상하셔.]

급한 마음으로 썼는지, 편지는 인사도 없이 시작됐다.

미네르바가 교황청에서 머무는 며칠간 보고 들은, 교황의 이상한 행동이 편지에 빼곡히 적혀 있었다.

[성유물의 힘이 아닐까 의심돼. 산티아노가 남몰래 성유물 수호자와 유물술사를 찾아내서 키우려고 하는 거 알지?

어쩌면 그들을 시켜서 성유물을 몇 개 찾아냈을지도 몰라.

교황 폐하의 행동이 갈수록 이상해지고 있어. 이제는 표정도 바뀌어서 가끔 교황 폐하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야.

한시바삐 와서 확인해주면 좋겠어.]

케이는 편지를 가져온 제이미를 돌아봤다.

“제이미. 내가 지금 당장 교황청에 다녀오면…….”

“안 되지요. 머리가 없는데 몸통과 꼬리가 제대로 움직이겠습니까?”

만약 그린 가의 군사로만 이뤄진 병력이라면, 굳이 케이가 전쟁에 나갈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 전쟁은 급하게 모은 병력이 반 이상이었다.

그들은 케이가 전쟁에 직접 참여한다고 했기에 힘을 보태기로 한 것이다.

오로지 ‘성유물의 수호자’인 그린 공작과 함께 싸워보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그런 상황에서 케이가 빠진다면, 그들이 그대로 손을 놓지는 않겠지만 사기가 떨어질 것은 분명했다.

몇몇 용병단이나 방랑기사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쳐버릴지도 모른다.

케이는 편지를 손에 쥐고 집무실을 이리저리 오갔다.

전에 없이 초조해 보이는 모습에, 제이미가 물었다.

“무슨 일이신지요?”

“제이미. 20년 전, 가브릭 왕국 사건, 기억해?”

“당연하지요. 하지만 자세한 사정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20년 전 가브릭 왕국에서 벌어진 일은, 어린아이들조차 알 만큼 끔찍했다.

가브릭 왕국은 현재 그린 저택이 있는 다코트 시보다 조금 더 큰 규모의 작은 나라였다.

그 나라에 재앙이 닥친 건, 과거 대신전이 있었던 폐허를 개발하기 위해 파헤치면서였다.

그 폐허 안에, 무언가 있었다.

“아버지는 그곳에 있었던 게, 아부틴의 빗일 거라고 생각하셔.”

그때는 와이번이 성유물의 수호자였다.

“폐허의 공사 인부 중 한 명이 그걸 발견했고, 아내에게 선물로 줬겠지.”

이상 현상을 보인 건, 공사 인부의 아내였다.

밭일하며 평범한 삶을 살던 그녀가 갑자기 신의 부름을 받았다며, 전쟁에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날카롭게 벼린 검과 갑옷을 준비하는 그녀를 보며, 사람들은 미쳤다고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다.

그다음에는 공사 인부가, 그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그보다 조금 더 멀리 사는 사람들이, 다들 신의 부름을 받았다면서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적은 없었어. 하지만 그들에게는 적이 존재했지.”

그 나라 사람들의 적은, 바로 이웃이었다.

생존자의 증언으로는, 그들의 눈에는 친구가, 가족이, 애인이, 눈에 보이는 모두가, 오래전 사라진 몬스터처럼 보였다고 했다.

“그들은 몬스터가 자기들을 해치려 하는 환각을 봤어.”

그들은 서로를 죽였다.

내 가족을, 친구를, 연인을, 혹은 지나가는 나그네를.

피해자가 내지르는 비명은 몬스터의 고함으로, 피해자가 방어하기 위해 뻗는 팔은 몬스터의 발톱이나 이빨로 보였다.

평민, 귀족, 왕족. 모두에게 벌어진 일이었다.

왕국 전역에 피 안개가 퍼진 후에야, 살아남은 사람들은 정신을 차렸다.

“생존자는 얼마 안 돼. 거의 다 죽었지. 그나마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상태도 좋지 않았어.”

크게 다친 채 살아남은 자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닫자 그 충격으로 죽거나 미쳤다.

“아버지가 도착했을 때, 멀쩡한 정신을 가지고 생존한 사람은 딱 한 명. 열 살 남짓한 어린 소년뿐이었지. 내가 방금 말한 건, 전부 그 소년의 증언으로부터 추측한 것들이야.”

“그 소년이……?”

“그래, 맞아. 산티아노가 성유물 수호자로 키우고 있는, 하렌트 미어 백작이야.”

당시 성유물의 수호자였던 와이번은, 한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힘이 성유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확신했다.

성유물의 수호자는 역사서 등을 통해 성유물이 있음 직한 곳을 먼저 파악하기도 하는데, 가브릭 왕국 근방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 중이었던 성유물이 하나 있었다.

아부틴의 빗.

“하지만 아부틴의 빗은 정신과 행동을 지배하는 성유물 아니었나요? 전에 대장이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가브릭 왕국에서 벌어진 일은 정신지배보다는 환각을 보여준 것 같은데요.”

“발견하지 못한 성유물은 결국 과거의 흔적을 통해서 그 힘을 짐작할 뿐이야. 하지만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야. 리시를 만나러 가야겠어.”

(143) 도망치자.

  리시는 솔리르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는, 작은 도시의 별장에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리시가 가진 힘으로 미나스아릭 군대의 옆구리를 칠 계획이었다.

그걸 위해 가져온 몇 개의 성유물을 점검하고 있을 때, 반대쪽으로 갔어야 할 케이가 찾아와서 놀랐다.

“뭐가 잘못된 거야, 케이?”

불안한 표정으로 묻는 리시를 향해, 케이는 애써 미소 지었다.

“조금.”

케이는 자신의 자그마한 아내를 응시했다.

하얀 피부와 은빛 머리칼, 연한 보라색 눈동자.

전체적으로 색이 옅은 그녀는, 투명한 유리로 만든 인형처럼 보였다.

이제는 그녀가 회귀했다는 걸, 지난 삶 끔찍한 고통을 겪다가 죽었다는 걸, 그리하여 이번 삶에서는 마치 전사처럼 살아가기로 했다는 걸 알지만.

‘안다고 해서 안심이 되는 건 아니지.’

케이는 지금부터 그녀에게 부탁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케이가 부탁하면, 리시는 망설이지 않고 그러겠다 대답할 것이다.

케이가 예상하기에, 성공 가능성은 충분히 높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된다면? 그래서 그녀가 크게 다치거나 혹은 죽는다면?

그러면 나는 버틸 수 있을까?

‘없겠지.’

잘못된 판단으로 그녀를 잃게 된다면, 살아가는 게 지옥이리라.

샤크란의 그 아름다운 호수 앞에서 그녀를 믿겠다고 말했지만, 그렇다 해서 그녀를 사지에 밀어 넣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었다.

“아니, 별로. 떠나기 전에 당신 얼굴 좀 보고 싶어서.”

케이는 마음을 바꿨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계획은 위험하다.

“케이.”

리시가 케이의 팔에 살짝 손을 얹었다.

보석 같은 눈동자가 신중하게 케이를 살폈다.

“무슨 일이야?”

“별일 아니야.”

“별일 맞는 것 같은데. 나한테 부탁할 거라도 있어? 혹시 그게 내가 위험해질 일이야?”

“당신은 정말…… 못 속이겠네.”

“당신은 나보다 한참 어린애잖아.”

리시는 이제 지난 삶을 가지고 농담을 할 여유가 생겼다.

케이가 옅게 웃으며 리시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피부는 몹시 부드러워서, 마치 막 구운 빵의 속살을 만지는 것 같았다.

핥으면 빵처럼 달콤할까?

이런 와중에도 그녀의 볼을 보며 야릇한 생각을 하다가 정신을 다잡았다.

“리시. 할 얘기가 있어.”

케이는 아까 제이미에게 했던, 가브릭 왕국 이야기를 다시 한번 말했다.

“혹시 이 사건에 대해 아는 게 있어? 당신이 죽었을 때, 죽음 속에서 여러 가지를 봤다고 했지? 가브릭 왕국의 멸망에 대한 일은 못 봤어?”

리시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못 봤어.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가브릭 왕국에 대한 것도 얼마 전에 책으로 읽어서야 알게 됐어.”

“그렇군.”

케이는 한숨을 삼켰다.

이제 더는 도망칠 곳이 없다.

미네르바는 교황이 이상하다고 말했고, 그걸 일부러 케이에게 전할 정도라면 ‘약간 이상한데?’라고 넘어갈 수준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날, 아버지는 하렌트를 발견한 후에 그 나라 곳곳을 다 확인했지만, 결국 수상한 물건을 발견하지 못했어. 결국, 그 일은 ‘어떤 성유물’이 힘을 발휘하고 부서졌다는 거로 결론이 났지. 하지만 아버지는 그 후로도 종종 그 사건에 대해 언급하셨어. 내게 수호자 지위를 넘겨주실 때, 할 수만 있다면 그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 달라고 하셨지만,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바빴지. 잠시 미뤄뒀었어.”

솔직히 말하면 잊고 있었다.

세상에는 유용할 것 같은 성유물이 많았고, 케이는 언젠가 사용할 날이 오기를 바라며 그런 성유물의 흔적을 찾느라 바빴다.

“아버지는 아무에게나 말할 수 없는 의심을 품고 계셨어.”

신성국은 가브릭 왕국 사건을 종결지었지만, 와이번은 계속해서 그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 고민했다.

“어쩌면 하렌트 미어가 아부틴의 빗을 손에 넣었고, 모종의 이유로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해서 서로 싸우게 했다는 의심.”

“……당시 하렌트 미어는 10살도 안 된 나이 아니었어?”

“맞아. 하지만 그런 짓에, 나이는 중요하지 않지.”

“하렌트 미어는 유물술사가 아닌, 수호자의 힘을 가졌다고 알고 있는데.”

“만약, 만약에 말이야. 하렌트 미어가 가진 게 수호자의 힘이 아닌 유물술사의 힘이라면?”

리시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럼…… 그 나라 전체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강한 유물술사라는 거야?”

케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닐 거야. 하렌트 미어는 자의식이 강한 놈이야. 그런 놈이 그런 힘을 갖고 있는데, 지금껏 숨기고 사용하지 않았을 리 없어.”

“그럼?”

“성유물은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발견되면,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힘을 낼 때가 있어. 쓰임당하고 싶다는 열망이라도 있는 건지, 한바탕 날뛰다가 잠잠해지지.”

“아부틴의 빗이 발견됐고, 폭발적인 힘을 내게 됐다는 거야?”

“그래. 그 빗을 손에 넣은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정신을 지배하고, 서로를 죽이게 만든 거지. 아버지가 도착할 무렵, 그 힘이 다해서 사람들이 정신을 차린 거고.”

“하지만 그 빗은 공사 인부 아내가…… 아, 이것도 하렌트 미어의 증언이지?”

“그래.”

요약하자면, 당시 가브릭 왕국 백작가의 영식이었던 하렌트 미어가 모종의 이유로 모두를 죽이고 싶어 했고, 그럴 때 아부틴의 빗을 손에 넣었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아부틴의 빗은, 하렌트 미어가 가진 유물술사의 힘에 반응해 그가 원하는 대로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했다.

“그런데 케이. 성유물은 굳이 유물술사가 아니어도 사용할 수 있는 예도 있지 않아?”

“그래, 하지만 그런 거였다면, 하렌트 미어는 성유물에 휘둘리다가 일찌감치 죽었을 거야. 유물술사가 아닌 사람이 성유물을 사용하면, 결국 성유물에 지배당하고 말거든. 하지만 하렌트 미어는 아주 정상적으로 생활하고 있지.”

잠시 대화가 끊겼다.

케이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생각을 정리했다.

리시는 그가 자신에게 위험한 일을 부탁하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 작은 손을 올려 그의 머리칼을 살짝 헤집었다.

“케이. 할게.”

“……뭘?”

“뭐든.”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내가 아내를 노예처럼 부려먹는, 못된 놈 같잖아.”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케이.”

“다른 때라면 이런 부탁을 할 일 없었을 거야. 하지만…… 교황 폐하께서 위험하신 것 같아.”

“산티아노가 하렌트 미어를 지원해주고 있지? 하렌트 미어가 산티아노를 위해 그 빗을 사용했을 거라고 생각해?”

케이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렌트 미어의 움직임은 파악하고 있어. 그놈은 지금 신성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거든. 아마 산티아노가 그 빗을 가지고 있겠지. 잠깐 노출되는 정도로는 크게 위험하지 않을 테니.”

“……산티아노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교황 폐하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다는 거야?”

“그게 위험한 거야, 리시. 산티아노는 성유물의 위험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거든. 지금 당장은 그 빗이 산티아노가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만 교황 폐하의 정신을 흩어놓을 거야. 하지만…… 산티아노도 모르는 사이에 그 빗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하겠지.”

그래서 유물술사가 아닌 사람이 성유물을 다루는 건 위험하다.

“교황 폐하는 건강이 안 좋은 상태라서, 아부틴의 빗이 폭주하면 버티지 못하실 거야.”

“알겠어, 케이.”

“뭘?”

“그 빗을 훔쳐서 교황 폐하를 원래대로 되돌려드리면 되는 거잖아.”

“……아.”

케이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 없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리시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아니야?”

“어…… 난 그냥 가서 교황 폐하를 치유의 반지로 좀 회복시켜달라고 하려고 한 건데.”

“아……!”

이번에는 리시가 놀랐다.

“그런 방법도 있구나.”

“그래, 리시. 하지만 위험할 거야. 거기는 산티아노의 소굴이야. 미네르바가 있을 거고, 아버지께도 말씀드려놨으니 동행해주시겠지만…… 그놈이 당신의 힘을 알게 되면, 순순히 보내주려 하지 않을 거야.”

“그 빗을 훔칠게. 산티아노가 교황 폐하 곁에 붙어 있다고 하는 걸 보니, 그 빗은 분명 산티아노가 갖고 있을 거야. 가까이에 있지 않으면 영향력을 발휘하기 힘든 거겠지.”

“리시, 일부러 위험한 길을 갈 필요는 없어. 전쟁이 끝나고, 내가 신성국에 도착할 때까지만 교황 폐하를 살펴주면 돼. 그리고 아버지도 수호자의 힘이 있으니, 어느 정도는 영향력을 무효화시킬 수 있을 거야.”

고집스럽게 다문 리시의 입술을 보며, 케이는 리시가 자신이 말한 대로 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케이. 만약 산티아노가 아부틴의 빗을 갖고 있다면, 그는 앞으로도 계속 그 빗을 사용할 거야. 아주 잘 사용하겠지.”

리시는 지난 삶의 산티아노를 떠올렸다.

지난 삶의 이 무렵, 산티아노는 케이가 수인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케이가 수인인 것 같다고 떠들어대고 다니지 않았다.

산티아노가 케이를 수인이라고 밝힌 건, 지금으로부터 10년이 넘게 흐른 후. 수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최악으로 치달았을 때였다.

“케이. 최근에는 수인들에 대한 인식이 옛날만큼 나쁘지는 않아. 나쁘기는 나쁜데, 일부는 수인을 불쌍하게 여기고 있어. 평범한 사람만큼은 아니라더라도, 노예 같은 거로라도 살게 해주자는 움직임도 있고.”

“그래.”

“지금 이 상황에서 당신이 수인이라는 게 밝혀지면, 대부분은 경악하고 두려워하고 경멸하고…… 그러겠지만, 일부는 눈감아주자고도 하겠지. 당신은 성유물의 수호자니까.”

“……그래.”

“당신은 계획이 있었겠지. 성유물을 잔뜩 모아서, 그 성유물로 문제를 일으키고, 당신은 계속 그걸 해결해주는 거야. 당신의 가치가 점점 올라가도록. 그러면 사람들은 이 세상에 성유물의 수호자가 필요하다고 여기게 될 테니까.”

그게 지난 삶, 케이의 계획이었다.

“그 방법으로는 안 돼. 산티아노는 앞으로 사람들이 수인을 역겨워하고 증오할 만한 사건을 자꾸 일으킬 거야. 그래서 10년쯤 지나면, 사람들은 수인을 증오하고, 이 땅에서 멸살시키고 싶어 하게 되지.”

“……그래?”

“응.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몰랐거든. 그런데 이제 알겠어. 산티아노가 아부틴의 빗을 갖고 있다면, 그걸로 수인들의 정신을 지배해서 사람들에게 몹쓸 짓을 하게 만든 거 아닐까?”

“그렇게 오랜 시간을 사용하면…….”

“산티아노에게는 하렌트 미어가 있어. 당신 말대로 그자가 유물술사라면 가능했겠지. 강하게 지배하지는 못해도, 수인이 사람들을 괴롭히게 만드는 정도는 시킬 수 있었을 거야.”

케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거머쥐었다.

“당신의 지난 삶에서, 나는 실패하나?”

그에게 모든 것을 고백할 때, 그의 실패를 말해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말해야 할 때라는 걸, 리시는 알았다.

“그래. 실패해.”

“언제……? 아니, 이건 중요하지 않겠지. 그래, 나는 실패하는군. 하, 그래…….”

그의 음성에 담긴 절망이 가슴 아팠다.

지금껏 그가 노력해온 모든 것을 부정당하는 기분일 것이다.

“케이, 이번에는 아니야. 아직 그 시기는 오지 않았어.”

리시는 케이의 옆에 가서 앉아, 그의 허벅지 위에 손을 얹었다.

“에르웰을 데려갈 거야. 아부틴의 빗을 훔칠게. 공공연하게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산티아노도 항의하지 못하겠지.”

“잘못되면…….”

“케이, 모든 일에는 실패할 가능성이 존재해. 그렇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을 시도도 안 할 수는 없는 거야. 당신도 알잖아.”

케이는 리시의 일이라면, 몰랐다.

케이가 아는 건 그저 리시를 위험한 상황에 몰아넣고 싶지 않다는 것뿐.

리시에게 실패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2황자가 날 미워해서 죽이고 싶어 하고, 메어리 케트벤 공주가 날 질투하다가 그렇게 되어서 미나스아릭의 왕이 2황자의 계획에 동참했지. 브리트니가 날 미워하기에, 스티무어도 이번 전쟁에 낀 거고.”

“당신 때문이 아니야.”

“그래, 케이. 하지만 결국 나로 인한 일이야. 그리고 당신은 날 지키기 위해 전쟁의 선두에 서잖아.”

케이는 리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그는 슬픈 눈으로 리시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리시. 우리 그냥 다 버리고 도망칠까?”

(144) 내가 뭘 잘못했을까?

  그의 절박한 음성에 마음이 흔들렸다.

“당신도 복수를 그만두고, 나도 수인들을 위해 싸우는 걸 그만두는 거야. 그리고 도망치는 거지. 아무도 오지 않는 곳으로, 누구도 찾지 않는 곳으로.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 둘이 재미있게 사는 거야.”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마음이 더 허물어졌다.

리시가 죽음까지 각오하며 싸우려는 이유는, 오롯이 케이 때문이었다.

케이는 리시가 그녀의 복수를 위해 싸운다고 알지만, 단지 케이 때문이었다.

케이가 수인을 위해 싸우는 한, 케이의 죽음은 결정되어 있었다.

리시가 모든 것을 내려놓더라도, 그는 지난 삶처럼 처참한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케이도 모든 걸 내려놓는다면? 수인과 싸우는 걸 포기한다면? 그래서 우리 둘이 아무도 찾지 않는 곳으로 도망친다면? 아이리스 그린도, 케이브란트 그린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차츰 잊힌다면?

세계는 리시를 죽이려 드는 걸 그만둘 것이고, 케이 역시 적들에게 수인이라는 게 알려져 죽임을 당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당신과 함께라면 어디든 좋아. 당신은 어때?”

조심스레 묻는 그의 눈동자에는, 각오와 진심이 서려 있었다.

그는 정말로 모든 것을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었고, 그 각오가 리시를 기쁘게도, 슬프게도 했다.

손을 뻗어, 그의 매끄러운 볼을 쓰다듬었다.

“나도 그래. 나도 당신과 함께라면 어디든 좋아.”

“그렇다면…….”

“하지만 싫어.”

케이는 지금 리시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하려고 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리시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리시를 사랑하게 되지 않았다면, 수인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건, 여전히 그의 유일한 숙원일 터였다.

리시를 사랑하게 되었기에, 리시에게 자꾸만 위험한 일이 생기기에, 그는 자신의 소망을 포기하려 한다.

그가 나를 사랑하기에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하듯, 나 역시 그를 사랑하기에 그의 소망을 이뤄주고 싶었다.

“우리가 도망치면 당신을 따르는 수인들은 어떡하고?”

“……그 녀석들은 각자 알아서 잘 살 거야.”

“토미는 어쩌고?”

“토미는 우리랑 같이 살면 돼. 내가 토미까지 버릴 줄 알았어?”

“만약 우리가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도 수인이면?”

“부모가 수인이라고 해서 아이도 수인으로 태어나는 건 아니야. 우리 아이는 평범한 인간일 거야.”

처음에는 단단했던 그의 목소리가, 갈수록 작아졌다.

그는 아마도 리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챈 것이리라.

“케이. 앞으로도 수인은 계속 태어날 거야. 당신은 그 아이들이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고 싶은 거 아니었어?”

“나는 당신이랑 행복하게 살 수만 있으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리시는 옅은 미소를 띠며 그를 잠깐 안았다가 놔줬다.

“거짓말쟁이.”

“정말이야.”

“봐봐, 케이. 우리는 지금 잘하고 있어. 이번 전쟁은 승리할 거고, 당신의 가장 큰 적이었던 산티아노는 악수를 뒀어. 지난 삶에서는 이런 전쟁이 벌어지지 않아. 하지만 전쟁은 시작됐고, 산티아노는 그 전쟁에 힘을 보탰지. 내 지난 삶과는 조금 다르게 흘러가려고 하는 거야.”

그의 손을 힘줘서 잡고, 그와 시선을 맞췄다.

“지난 삶에서는 가능성이 없었어도, 이번 삶에서는 가능성이 있어. 승산이 있는 일인데, 단지 날 위험한 곳에 보내기 싫다는 이유로 포기해서는 안 돼.”

“그러다가 당신이 죽기라도 하면 난 어떻게 살라고.”

“꼭 이런 일이 아니라도, 사람은 누구나 죽어. 언제, 어떻게 죽게 될지, 아무도 모르잖아. 당신이랑 아무도 오지 않는 곳으로 도망친다고 해서, 내가 100살까지 살 거라는 확신이 있어?”

“……120살까지는 살지 않을까, 하고 예상 중인데.”

농담하는 걸 보니, 이제 그는 결정을 내린 것 같다.

리시는 그에게 손깍지를 끼고 말했다.

“당신이랑 같이 120살까지 살 거야. 하지만 숨어서는 살고 싶지 않아. 나는 언젠가 내 남편이 엄청 멋진 흑늑대라는 걸 당당하게 얘기하고 싶어. 그럴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어.”

케이는 고개를 숙여 리시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의 숨결이 목덜미를 간질이는 느낌이 좋았다.

“하아.”

그가 내뱉은 한숨이 리시의 가느다란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 진짜 매력 없어 보이겠다. 약한 소리나 하고.”

“당신은 조금 매력 없을 필요가 있어. 너무 매력적이라서 여자들이 당신만 보면 눈이 돌아가잖아.”

“당신 눈도 돌아갔어?”

“보면 알겠지?”

그 말에 케이가 고개를 들어 리시의 눈을 마주 봤다.

이윽고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무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한 바퀴 돌아서 온 거야.”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리시는 나직하게 울리는 그 웃음소리가 참으로 좋았다.

그가 리시의 미소를 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듯, 리시 또한 그랬다.

“리시, 신성국에 갈 때는 윈디를 타고 가도록 해. 윈디는 빠르니까, 날아서 가면 마석을 쓴 말보다 금방 도착할 거야. 다만 눈에 띄어서 좋을 건 없으니 최대한 높이 날고, 사람이 없는 숲에 내려서 거기서부터는 달려서 가.”

“응. 그럼 그린 저택에 먼저 가야겠네.”

“윈디는 데려왔어. 화이트도. 에르웰도 함께 갈 거라면 화이트를 타면 될 거야.”

“뭐야, 케이. 어차피 보내줄 거였으면서 왜 그렇게 시간을 끌었어?”

“당신 얼굴을 보면 결심이 흔들리니까 그렇지. 당신이 좀 예뻐?”

“내가 예쁜 거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네.”

“상관있지. 당신이 예쁜 건 아주 중요한 문제야.”

그가 언제나 예쁘다고 말해주는데도, 그 말을 들으면 새삼스레 가슴이 간질거렸다.

지난 삶, 그가 리시에게 해줬던 ‘예쁜 종아리’라는 말이 떠올라서.

리시를 사랑하지 않았던 순간에도, 리시를 예쁘다 해줬던 그때가 떠올라서.

“아버지는 지금 신성국으로 향하고 계실 거야. 하지만 당신보다는 늦게 도착하겠지. 일단 신성국에 진입하면, 여관에 가서 좀 쉬어. 교황청에 들어갈 때는 아버지와 함께 들어가는 게 좋아.”

“응, 그럴게.”

“만약 산티아노가 진짜로 아부틴의 빗을 갖고 있다면, 그걸 훔친다고 해서 곧바로 교황 폐하의 상태가 나아지지는 않을 거야. 아버지가 그 힘을 무력화시켜야 해.”

“응.”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건 정말 중요한 문제인데.”

케이가 목소리를 낮추기에, 리시도 덩달아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입술을 응시했다.

“신성국 시내에 ‘고블린 밥’이라는 식당이 있어. 이름은 별로지만, 거기 주방장 요리가 정말 끝내줘.”

“……응?”

“신성국에 도착하는 대로 꼭 한번 가보도록 해.”

“케이, 난 진짜 중요한 얘기를 하는 줄 알고……!”

“중요한 얘기지. 식사가 얼마나 중요한데. 가서 잘 챙겨 먹고, 잠도 잘 자야 해. 나 없다고 울지 말고.”

리시가 웃으며 그의 어깨를 톡 때렸다.

“당신이나 나 없다고 울지 마. 울보 공작님.”

 

+++

“저는 남을게요, 아이리스 님.”

크리시나는 전쟁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린 노공작님까지 함께 계신다면, 굳이 저는 필요 없을 거예요.”

리시도 그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에르웰은 생전 처음 보는 유니콘을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얘가 유니콘이었을 줄이야……. 마구간에 그렇게 드나들면서도 전혀 몰랐어요. 우와, 유니콘…… 우와, 살아 있는 유니콘을 보게 되다니…….”

에르웰이 연신 감탄을 터뜨리며 손을 뻗자, 윈디가 볼을 살짝 그녀의 손에 비볐다.

윈디는 에르웰이 마음에 드나 보다.

“유, 유니콘을 만지고 있어! 진짜 신기하다. 시니, 믿어져? 유니콘이야. 이럴 수가…… 얘가 유니콘이었다니…… 유독 영리하다 싶기는 했는데…… 우와.”

에르웰이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케이를 돌아봤다.

지금껏 케이를 마주한 에르웰의 표정이 이토록 상기된 적은 없었다.

그녀는 흡사 사랑하는 남자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케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공작 전하. 정말로 제게 이 귀하고 경이로운 유니콘을 탈 기회를 주시는 건가요?”

“물론, 레이디 에르웰.”

“말도 안 돼. 공작님, 그거 아세요? 저는 평소에도 공작님의 멋진 자태와 지혜로움을 동경해왔고, 그야말로 아이리스 님의 남편으로 걸맞은 분이라고 생각해왔답니다.”

“그건 몰랐군. 전혀 몰랐어.”

“그러실 거예요. 제가 원래 티를 내지 않는 성격이라…….”

“가끔은 내도록 해. 이것 봐, 얼마나 좋아.”

“그러게요. 하, 정말…… 유니콘이라니.”

에르웰이 격한 감격의 순간에서 좀 벗어나자, 케이가 말했다.

“에르웰 양, 리시를 잘 부탁해.”

“맡겨주세요, 공작님.”

케이의 눈동자가 리시에게로 향했다.

“리시, 내가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알지?”

“사랑한다는 말?”

“그것도 그렇고.”

케이가 리시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조심해. 당신 없으면 나도 없는 거, 알지?”

“알아. 무사히 돌아올게.”

리시는 윈디에, 에르웰은 화이트에 탔다.

케이가 나란히 서 있는 윈디와 화이트의 목덜미를 동시에 두드려주며 말했다.

“너희도 알지? 잘 부탁한다.”

히힝, 하고 대답한 윈디와 화이트가 앞발을 들어 올렸다.

“으앗!”

리시가 가볍게 비명을 지르며 윈디의 목을 끌어안았다.

놀랍게도 윈디의 앞발은 다시 땅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마치 공기를 밟는 듯, 그대로 날아올랐다.

깜짝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바람이 리시의 볼을 스치고, 뒤로 꽉 묶은 머리카락이 사정없이 나부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후에야, 케이가 어느새 손톱만큼 작아졌다는 걸 깨달았다.

덜컥 겁이 났다. 리시는 하늘을 날아보는 게 처음이었다.

윈디의 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두려움에 심장이 쿵, 쿵, 쿵, 격하게 뛰었다.

‘무서워!’

케이가 지금 이 표정을 보지 못해서 다행이다.

겁에 질려 파래진 얼굴을 봤다면, 리시를 윈디에게 태우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리시는 윈디의 목에 얼굴을 묻다시피하고, 두려움을 견뎌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다가 옆에서 날고 있는 화이트와 에르웰을 목격했다.

에르웰은 신나서 두 팔을 높이 들고 외치는 중이었다.

“난다! 날아!”

에르웰은 무섭지도 않은 걸까? 저러다 떨어지면 어쩌려고.

화이트는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느라 상체가 위쪽으로 향해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에르웰은 엉덩이가 화이트의 등에 붙은 듯 뒤로 밀려 떨어지지 않았다.

그제야 리시는 케이가 그녀에게 위험한 일을 쉽게 시키지 않는다는 걸 떠올렸다.

만약 윈디를 타고 날아서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면, 케이는 그 부분에 대해 100번쯤 주의사항을 말해줬을 것이다.

‘설마…….’

리시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윈디의 목을 끌어안은 두 팔에서 아주 조금 힘을 뺐다.

괜찮은 것 같아서 조금 더, 조금 더. 그렇게 힘을 빼다 보니, 완전히 윈디의 목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안정적이었다.

흔들림이 거의 없고, 엉덩이가 딱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 날아오는 새를 피해서 윈디가 방향을 틀었는데도, 리시의 몸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 이게 유니콘이구나. 굉장하다.’

경이로운 감동이 리시의 가슴을 채웠다.

리시는 윈디의 목을 살짝 끌어안고 속삭였다.

“안전하게 날아줘서 고마워, 윈디. 신성국까지 잘 부탁해.”

+++

“아아아아아!”

브리트니는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악!”

속도 마석을 사용한 말은, 빨라도 너무 빨랐다.

엉덩이와 허벅지는 찢어질 듯 아프고, 허리가 끊어질 것만 같았다.

자칫 잘못하면 떨어질 수도 있어서, 고삐를 꽉 잡고 있느라 손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혹시나 말이 안 달릴 경우를 생각해서 챙겨온 채찍은 써보지도 못했다.

빠른 속도 때문에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스치는 나뭇잎 때문에 얼굴에 자잘한 상처까지 생겼다.

“멈춰! 멈춰, 멈추라고!”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고삐를 세게 당기자, 말이 갑자기 뚝 멈췄다.

빠르게 달리던 말이 갑자기 멈추면 어떻게 되는지, 브리트니는 몰랐다.

그녀의 몸이 붕 뜨며 앞으로 날아가, 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아아아악!”

하필이면 물웅덩이가 있는 곳에 떨어져서, 온몸에 진흙이 튀었다.

연한 분홍색으로 맞춰서 입은 승마복은 누더기처럼 얼룩덜룩했고, 늘 부드럽고 매끄럽게 관리해오던 머리카락도 진흙이 덕지덕지 묻었다.

머리에 묻은 진흙을 닦아보려 했지만, 손에도 진흙이 묻어 있어서 머리카락은 더 엉망이 되었다.

브리트니는 결국 주저앉은 채로 울음을 터뜨렸다.

“흐아아아앙! 왜, 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왜!”

(145) 내가 왜?

말을 타고 달리면 며칠이나 걸릴 거리를, 단 이틀 만에 도착했다.

신성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숲에서 땅으로 착륙해, 거기서부터는 달려서 신성국 관문으로 향했다.

신성국은 높은 벽으로 나라 전체가 둘러싸여 있었고, 진입할 수 있는 관문은 딱 한군데였다.

육중한 철문으로 막힌 관문 앞을, 성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신성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전이나 교황청에서 발행해준 허가증이 있어야 하는데, 리시는 그린 가문이기에 따로 허가증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케이가 미리 말해둔 건지, 엘디가 관문 앞에 있다가 리시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형수. 형한테 얘기 들었어.”

엘디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마음 같아서는 도와주고 싶은데, 이 안에서는 내가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어. 산티아노의 사람들이 날 지켜보거든.”

그린 가문인 엘디도, 산티아노에게는 주의 대상이었다.

“괜찮아, 엘디. 아버님도 오신다면서?”

“아버지도 이제 연세가 있어서 힘이 예전 같지 않아. 게다가 산티아노가 요새 좀 이상하거든. 아무래도 성유물의 힘에 잠식당하는 것 같은데…… 어쩌면 평소에는 안 할 행동을 할지도 몰라. 악에 받쳐서 형수를 때린다든가.”

“어머, 무서워라.”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형수. 계획대로 하는 건 좋은데, 일부러 산티아노랑 대치하지는 마. 형수는 가끔 사람 속을 박박 긁는 면이 있거든.”

“이제야 좀 엘디답네. 너무 걱정만 해줘서 정신지배를 당한 건 아닌지 의심할 뻔했어.”

엘디가 콧등을 찌푸렸다.

“이것 봐, 아주 밉살스럽다니까.”

관문을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간 리시의 눈앞에 장관이 펼쳐졌다.

온통 새하얀 건물과 투명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새파란 지붕. 심지어 길거리조차 흰색 벽돌이 깔려 있어서, 마치 천상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신성국이 무척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신성국의 정경을 그린 그림을 본 적도 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완전히 다른 기분이었다.

“형수도 놀랄 때가 다 있네.”

리시가 입술을 벌리고 신성국의 정경을 구경하는 모습에, 엘디가 즐거운 듯 말했다.

그제야 리시는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멋진 곳이네.”

“응. 멋지지. 점심은 먹었어?”

“아직.”

“그렇다면 시내에 있는 고블린 밥이라는 식당에 가봐. 거기 음식이 아주 끝내주거든.”

케이도 그러더니, 엘디까지 고블린 밥이라는 식당을 추천해줬다.

대체 얼마나 맛있기에.

윈디와 화이트는 엘디가 성기사단 마구간에 데려가서 돌봐주겠다고 했다.

리시는 에르웰과 함께 시내로 향했다.

“대체 고블린 밥이라는 식당이 얼마나 맛있기에, 다들 이렇게 추천하는 걸까요?”

“어마어마하게 맛있어요.”

“에르웰은 가본 적 있어요?”

“네. 어릴 때 아버지랑 돌아다닐 때 한 번 신성국에 온 적이 있거든요. 그때 아버지가 신성국에 오면 꼭 들러야 하는 식당이라면서 데려갔었어요.”

이쯤 되니, 정말로 그 식당에 가보고 싶어졌다.

“그럼 우리 여관을 잡기 전에 식당에 먼저 갈까요?”

“좋아요!”

시내는 관문에서 한참 더 걸어가야 있었고, 고블린 밥은 명성과 달리 시내의 골목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가게의 간판은 파란색에 하얀 글씨.

[고블린 밥]

아무 정보도 없이 왔다면, ‘특이한 이름이네.’라고만 생각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오래전에 산에 살면서 사람들을 습격했다는 자그마한 몬스터는 좋은 이미지가 아니니까.

의외로 건물 안은 하얀색과 파란색 실내장식이 아니었다.

“여기는 꼭 동굴 같네요.”

회색과 검은색 실내장식, 약간 어둡게 느껴지는 조명과 나무로 만든 식탁과 의자.

입맛이 돌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옛날에 고블린이라는 몬스터가 동굴에 살았었대요.”

종업원이 두 사람을 안내하는 동안, 에르웰은 고블린에 관해 설명했다.

자리에 앉은 에르웰은, 주방장 추천 요리가 제일 맛있을 거라고 했다.

“주방장 기분이랑 그날 들어온 재료에 따라서 메뉴가 달라진대요.”

그래서 리시도 주방장 추천 요리를 시켰다.

제일 먼저 나온 건 버섯 수프였는데, 특이하게도 국물이 하얗고 걸쭉했다.

지금껏 리시가 먹어온 수프는 맑은 국물의 수프였기에, 신기한 마음으로 한 스푼 떠서 입에 넣었다.

우유와 생크림, 그 외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곡물이 들어간 듯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에, 잘게 썰어 넣은 버섯이 씹혀서 맛이 좋았다.

다음에 나온 고기도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다.

뼈에 붙어서 나온 연한 고기는, 짭짤하면서도 달콤한 양념에 절여 익혀서 자꾸만 손이 갔다.

함께 나온 갓 구운 빵과 같이 먹으면 두 배로 맛있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순서대로 나오는 요리를 맛보고 즐기며, 리시는 의문이 생겼다.

‘맛있기는 정말 맛있지만…… 케이와 엘디, 거기에 에르웰까지 극찬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분명 새로 먹어보는 음식도 있지만, 맛본 적 있는 음식도 있었다.

맛은 훌륭하지만, 그린 저택의 주방장도 이 정도 수준의 요리는 할 수 있었다.

“막 생각처럼 눈이 돌아가게 맛있지는 않죠?”

리시의 의문을 간파한 걸까?

에르웰이 식탁으로 상체를 기울이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엄청 맛있기는 한데, 꼭 가보라고 할 정도인가…… 싶네요.”

에르웰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씩 웃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요, 밥을 제대로 챙겨 먹기가 힘들어요. 그나마 마을이나 도시에 들어가면 식당에서 먹을 수 있는데, 그 식당 음식이 괜찮으리란 법이 없죠. 보통은 그냥 끼니 때우려고 먹는 수준이에요.”

그럴 때, 가끔씩 기적처럼 맛있는 식당을 발견할 때가 있단다.

“저렴한 가격에 귀족들이나 먹을 수 있는 수준의 요리를 제공해주는 식당. 바로 이 식당 같은 곳. 힘든 여행 중에 이런 식당을 발견하는 것도 여행의 묘미 중 하나예요. 전속 요리사를 데리고 다니지 않는, 우리 같은 평민에게는 더더욱이요.”

제대로 여행을 다녀본 적 없는 리시는, 생각도 못 해본 부분이었다.

에르웰의 말을 듣고 떠올려보니, 저택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 중에 먹었던 음식은 대부분 수준이 떨어졌던 것 같다.

귀족인 리시도 그랬는데, 고급 식당을 이용하기 어려운 평민들이라면 더할 것이다.

“그렇구나. 이게 여행의 묘미구나.”

지난 삶에서는 알 수 없었던 걸, 이렇게 또 하나 배웠다.

만약 모든 위험이 사라진다면, 리시는 케이와 함께 세계를 돌아다녀 보고 싶었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작은 마을에도, 어쩌면 이렇게 맛있는 요리를 제공하는 식당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곳을 스스로 발견하게 되면 어떤 기분일까?

“좋네요, 이런 것도.”

 

+++

브리트니는 냄새나는 창고에 누워서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어제는 그래도 꽤 큰 마을을 발견해서 여관에 방을 잡을 수 있었다.

허름한 방에 딱딱한 침대. 욕실도 없는 방이라서 씻지도 못했지만, 차라리 그때가 천국이었다.

오늘 도착한 마을은 작은 데다가 마을 주민이 전부 폐쇄적이고 경계심이 많아서, 낯선 이를 환영해주지 않았다.

여행자가 찾지 않는 곳이라 여관도 없었다.

건장한 남자들은 브리트니를 쫓아내려 했지만, 브리트니는 거의 애원하다시피 해서, 그녀를 동정한 노인의 집 창고에 머물 수 있었다.

창고에 들어오자마자 너무 배가 고파서, 가비자르를 떠나기 전에 챙겨둔 식량을 꺼냈는데 전부 곰팡이가 슬었다.

빵과 반건조 육포, 소스에 버무려둔 샐러드와 병에 넣어온 수프.

전부 다 먹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창고 밖으로 나가서 노인의 집 문을 두드리고 먹을 걸 좀 달라 했더니, 재워주는 걸 고마워하지 못할망정 밥까지 내놓으라는 도둑놈이란 소리를 들었다.

가져온 은화 하나를 건네준 후에야, 딱딱하게 굳은 빵을 몇 개 얻을 수 있었다.

“흐…… 흐흑…… 흑…….”

혼자 하는 여행이 이렇게 고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뭐든 남에게 시킬 줄이나 알지, 자기 스스로 무언가를 해본 적 없는 브리트니는, 따뜻한 날씨에 음식을 오래 밖에 두면 상한다는 것도, 모든 도시나 마을에 편히 쉴 만한 곳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몰랐다.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시작된 여행은 그녀를 궁지로 몰아붙였다.

속도 마석을 사용한 말만 있으면, 레리소까지 가는 데 아무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너무 많은 문제가 있어서 레리소에 도착이나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사람들이랑 같이 움직일걸…….”

은밀하게 고용한 암살자들이 있었다.

보는 눈이 있기에 가비자르 근처에서 만나지 않고, 레리소 근처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인제 와서는 그들에게 서신을 보낼 방법도 없었다.

통신소가 있을 만한 도시는 이제 없을 것이고, 설령 있다 해도 그들에게는 통신기가 없었다.

통신기는 일반인이 갖기엔 너무 비쌌다.

“내가…… 흑.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해? 내가 뭘…… 뭘 잘못했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될 일이다.

리시를 따라 하려고도 하지 않고, 리시를 괴롭히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살아가면 될 일인데, 브리트니는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았다.

그저 이 모든 게 리시 때문이라는 생각만 들어서, 그녀를 향한 미움이 점점 커질 뿐이었다.

리시만 아니었다면, 리시만 없었다면, 지금쯤 위틀로 공작 저택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을 텐데.

아니, 황태자비가 되어 더 높은 자리를 꿈꾸며 노력하고 있을 텐데.

리시가 모든 걸 망쳤다.

“그냥…… 돌아갈까?”

레리소까지는 한참이 남았고, 앞으로는 쭉 산길이 이어져서 노숙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돌아간다면 금방 가비자르 수도에 도착해서 더러운 오물을 씻어내고 시녀들에게 대우받으며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안 돼.”

시녀들은 더 이상 브리트니를 대우해주지 않았다.

황후 에버렛이 드웨인에게 브리트니가 가져다 쓴 돈에 대해 알린 후, 브리트니는 에버렛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시녀들은 눈치 빠르게 브리트니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알고는, 전과 다른 태도를 보였다.

“돈이 필요해. 2황자라면 반드시 내 정보를 살 거고, 그 돈만 있으면 나는 다시 내 자리를 되찾을 수 있어.”

 

+++

와이번이 도착할 때까지, 리시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케이는 전쟁이 한창 중일 텐데, 이렇게 좋은 시간을 보내도 될지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신성국에 머문 지 3일째 되던 날, 리시와 에르웰은 대신전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만나자는 미네르바의 서신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신전으로 향하며, 에르웰이 설명했다.

“신성국에 있는 도메르토 대신전은 엘레론드 대륙에서 가장 큰 신전이에요. 초대 교황인 도메르토 교황이 세웠고,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후에 위대한 화가 하이르신이 벽화를 그렸다고 하죠.”

하이르신의 이름을 이런 곳에서 들을 줄은 몰랐다.

에르웰은 하이르신이 사용하던 깃펜을 지금 토미를 가르치는 데 사용하고 있다는 걸 몰랐다.

“대신전에 들어갈 때 규칙 같은 게 있나요?”

리시는 신전에 가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새삼스럽게 자신의 지난 삶이 얼마나 무가치했는지 실감했다.

지난 삶에서는 40년을 살았는데도, 이번 삶으로 돌아와서 보낸 3년보다 가본 곳도, 해본 것도 적었다.

적은 것이 아니라 거의 없는 수준이다.

“신성국에 진입할 때만 어렵지, 대신전의 규칙 자체는 다른 신전이랑 같아요.”

에르웰은 리시가 신전에 가본 적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리시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나는 신전에 가본 적이 없어요.”

“아.”

야만족이나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신성국에서 섬기는 신, ‘에렌’을 믿었다.

가비자르도 마찬가지이기에, 에르웰은 가비자르 제국 출신인 리시가 신전에 가보지 않았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듯했다.

에르웰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고스란히 떠오르는 바람에, 리시는 얼굴을 붉혔다.

“내가 좀…… 경험이 없어요.”

“그럴 수 있죠, 아이리스 님. 그럴 수 있어요.”

에르웰이 얼른 표정을 갈무리하고 쾌활하게 말했다.

그때, 뒤에서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뭐가 그럴 수 있다는 거죠?”

(146) 물의를 일으킬 행동

리시와 에르웰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얼굴이, 리시의 눈에 각인되었다.

살아생전에는 이 얼굴을 본 게 처음이지만, 오래전 죽음 속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졌지만, 관자놀이 쪽은 회색 머리카락이었다.

갸름한 눈매 안의 눈동자는 파란색인데, 가만히 보면 테두리가 금빛으로 빛났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에 조금 신경질적일 것 같은 외모이지만, 미소를 짓는다면 상당히 호감 갈 것 같은 인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리시를 앞에 둔 그는, 전혀 미소 짓고 있지 않았다.

산티아노 기푸.

신관들이 입는 것과 같은 모양의 하얀 신관복이지만, 소매 끝을 장식한 하늘색 옷감이 그가 대신관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에르웰이 가슴에 오른손을 대고 고개를 숙여, 대신관에게 하는 예를 갖췄다.

“대신관님.”

에르웰의 인사를 받은 산티아노가 리시를 돌아봤다.

‘너는 안 하고 뭐 해?’라는 눈빛이지만, 공작 이상의 작위를 가진 사람은 예를 갖추지 않아도 괜찮았다.

공작, 왕족, 그리고 황족.

“아이리스 그린 공작부인이십니다, 대신관님.”

에르웰이 눈치 빠르게 리시를 소개하자, 산티아노가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전혀 유쾌하지 않은 미소였다.

“그린 공작부인.”

“대신관님의 존함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아, 내 소개를 안 했군요. 날 모르는 사람이 없어서 깜빡했습니다. 기푸입니다. 산티아노 기푸.”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기푸 대신관님.”

“그럴 겁니다. 이 몸을 영접할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네에.”

죽음 속에서 볼 때는 단편적인 모습들만 봐서 몰랐는데, 아무래도 범상치 않은 성격을 가진 것 같다.

“그런데 방금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었나요?”

“대신관님께는 모든 것을 털어놔야만 하는 것이, 신성국의 규칙인가요?”

산티아노의 눈이 가늘어지는가 싶더니, 그의 얼굴이 갑자기 가까워졌다.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리시는 숨을 멈추고 눈을 부릅떴다.

“대신관님!”

에르웰이 낮게 외쳤지만, 산티아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리시는 가까워진 그의 눈동자 안에서, 이성 잃은 광기를 읽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사라지고, 산티아노의 얼굴도 원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그린 공작부인. 이 몸에게 일일이 말대꾸하는 건 좋지 않은 일입니다. 신성국의 규칙은 아니지만, 공공연한 관행이라는 게 있지요.”

“그렇군요. 신성국은 처음이라서 잘 몰랐습니다.”

리시는 지금 당장은 산티아노와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안 그래도 미나스아릭과 스티무어 때문에 소란스러운 와중에, 산티아노의 성질까지 건드려봐야 좋을 것은 없었다.

“자, 그럼 말해봐요. 뭐가 그럴 수 있다는 거죠?”

산티아노는 이상할 정도로 집요했다.

‘설마 성유물에 잠식당하고 있어서 그런 걸까?’

제정신과 광기의 중간 어디쯤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 해도 완전히 미친 건 아닌 것 같기에, 신전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다는 말을 솔직하게 할 수는 없었다.

가비자르 제국 출신인데도 신전에 가본 적 없다는 건, 신을 향한 믿음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산티아노가 어디부터 들었는지 알 수 없기에, 리시는 적당한 부분부터 시작해보기로 했다.

“경험. 무엇에 대한 경험 말입니까?”

“고블린 밥…….”

“고블린 밥?”

산티아노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진 걸 보니, 아무래도 처음부터 대화를 듣지는 못한 것 같다.

“네. 그렇게 몬스터 이름을 붙인 식당은 처음이라서…… 여행도 하고 볼 일이고, 식당도 들어가고 볼 일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고블린 밥. 시내 구석에 있는 식당 말입니까? 이 몸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데.”

“어머나. 유명한 곳이던데…….”

산티아노는 그 유명한 곳에 자기만 가보지 않은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고블린 밥…….”

산티아노가 검지로 턱을 문지르고 있을 때였다.

“산티아노, 여기서 뭘 하고 있나?”

리시의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정말로 처음 보는 대신관이었다.

“죠르프 대신관. 고블린 밥에 가본 적 있습니까?”

“당연하지. 이 신성국에서 거길 안 가본 사람도 있다던가?”

“……그런가요?”

“괜찮은 곳이야. 거기는 선대 주인장부터 신심이 강해서, 신성국에 찾아오는 여행객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최고의 요리를 제공한다는 걸 모토로 삼고 있거든. 귀족가 주방장들도 그만큼 맛있는 음식을 만들지는 못할 거야.”

안 그래도 하얀 산티아노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고블린 밥에 안 가본 사람이 정말 자기뿐이라는 걸 깨달은 듯했다.

“그런데……?”

죠르프 대신관이 리시와 에르웰을 돌아봤다.

에르웰이 대신관에게 예를 표하고, 리시는 살짝 고개만 숙여서 인사했다.

“아이리스 그린입니다.”

“아, 그린 공작부인?”

산티아노와 달리 죠르프는 케이에게 사적인 감정이 없는 듯, 리시를 정중하게 대하고 케이의 안부를 물었다.

죠프르와 잠시 담소를 나누는 내내, 산티아노는 계속 턱을 문지르며 ‘고블린 밥’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산티아노가 애완동물로 고블린을 키우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곧 예배가 시작된다며 대신관들이 대신전 안으로 사라진 후, 에르웰이 말했다.

“기푸 대신관 말이에요. 약간…….”

에르웰이 말을 끝맺는 대신, 검지를 자기 관자놀이 옆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리시는 풉,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거 성유물에 당해서 그런 걸까요?”

“죠르프 대신관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걸 보면, 원래 성격이 좀 이상한 것 같기도 하네요.”

“아, 대신전 규칙 말인데요. 너무 시끄럽거나 물의를 일으킬 행동만 하지 않으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거예요.”

“물의를 일으킬 행동이 어떤 거죠?”

“음…… 그린 공작님이 아이리스 님을 볼 때마다 하는, 그런 짓들?”

그게 뭘까, 라고 생각하다가 떠오르는 게 있어서, 리시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에르웰이 고른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다행이죠. 공작님이 안 계시니, 아이리스 님이 물의를 일으킬 일도 없을 거예요.”

+++

대신전 내부는 온통 하얀색이지만,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오른쪽 벽에는 커다란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숲의 정경을 그린 벽화는 위대한 화가 하이르신의 작품으로, 그쪽만 보고 있으면 마치 숲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생동감이 넘쳤다.

안쪽에는 5명이 앉을 수 있는 길고 하얀 의자 수십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맨 앞에 하얀색 단상이 놓여 있었다.

온통 하얀색이라서, 오른쪽의 벽화가 없다면 정신이 이상해지는 기분이 들 것만 같았다.

바닥은 반들반들한 하얀색 대리석이 깔려 있었는데, 얼마나 청소를 열심히 하는지 먼지 한 톨 찾기 힘들었다.

리시와 에르웰은 끄트머리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하얀 옷을 입은 사제와 신관들이었지만, 귀족으로 보이는 사람도 몇 명 섞여 있었다.

오르간 연주자가 연주를 시작하자, 성스러운 음악이 신전 안을 채웠다.

맨 앞줄에 앉아 있던 대신관들이 일어나 앞으로 나가고, 산티아노가 단상 뒤에 서서 예배를 시작했다.

기도, 찬양, 또 기도, 그리고 말씀.

산티아노가 말씀을 전하는 동안, 리시는 산티아노의 뒤에 묵묵히 서 있는 미네르바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미네르바는 근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가, 화가 치민다는 듯 산티아노의 뒤통수를 노려보기를 반복했다.

말씀이 끝나고 기도, 그리고 찬양, 또 기도, 그다음에 대신관들이 사제나 신관이 아닌 방문객들을 일일이 찾아가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의 말을 읊어주는 시간이 되었다.

리시는 미네르바가 이쪽으로 올 줄 알았지만, 그녀는 앞줄에 있는 한 귀부인의 옆에 서서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리시를 축복해주러 온 건 머리가 하얗게 센, 나이 지긋한 남자 대신관이었다.

그는 리시의 머리에 손을 얹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네르바의 전언입니다. 남아서 기도를 드리다가 산티아노가 신전을 나가고 나면 정원으로 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리시는 그렇게 했다.

왼쪽에 있는 문으로 나가자, 꽤 넓고 근사한 정원이 있었다.

미네르바는 그곳에 있는 분수 앞 벤치에 지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언니.”

리시가 부르자, 미네르바가 일어나서 다가왔다.

“미안해. 전쟁 얘기를, 서신을 보낸 후에야 들었어. 너희 상황도 지금 말이 아닐 텐데.”

“괜찮아요. 그쪽은 문제없을 거예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미네르바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치료소에서 봤을 때보다 수척해졌다.

치료소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을 텐데, 그때보다 더 힘들어 보이는 모습에 걱정이 앞섰다.

“언니, 건강은 괜찮은 거예요?”

“응. 단지 요새 잠을 좀 못 자서…….”

리시가 치유의 반지로 조금이나마 피곤을 덜어주기 위해 손을 올리자, 미네르바가 리시의 손목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괜찮아. 힘을 아껴둬, 아이리스.”

“그래도…….”

“아이리스. 네가 가진 그 힘은 네 것이지만, 지금 이 시대에서는 네가 개인적으로 써서 좋을 게 없어. 아직 유물술사라고 정식 등록도 안 했는데 마음대로 쓰면, 분명 어디선가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올 거야.”

“알겠어요.”

리시가 쉽게 수긍하자, 미네르바가 쓴웃음을 지었다.

“엿 같은 일이지. 자기가 가진 힘을 마음대로 쓰는 것조차 할 수 없다니. 자기들도 자기가 가진 재산, 남을 위해서 쓰는 것도 아니면서.”

“그러게 말이에요. 교황 폐하의 상태는 좀 어떠세요?”

미네르바가 깊은 한숨을 쉬며,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아주 좋지 않아. 어젯밤에는 대신전 예배 시간 때, 사랑에 관한 시를 읊으셨어.”

“예?”

“그래서 오늘 예배를 산티아노가 주관하게 된 거야. 그 새끼…… 아니, 산티아노, 오늘을 위해서 준비라도 한 듯이 아주 근사한 설교를 하더군.”

리시는 여러 생각을 하느라 설교를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에르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나 신관들은 기푸 대신관이 아주 대단하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래, 에르웰. 그게 산티아노가 노리는 거야. 교황 폐하께서 치매에 걸린 것처럼 만들어놓고, 자기는 이런 당혹스러운 상황을 아주 잘 수습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거지.”

그래서 중립을 지키던 대신관들도 은근히 산티아노를 두둔하게 되었다.

“아이리스. 그린 노공작께서는 언제 오시지?”

“나흘 후에나 도착하실 것 같아요. 많이 걱정스러우시면 제가 어떻게든…….”

“아니, 아이리스. 그건 너무 위험해.”

미네르바가 단호하게 리시의 말을 끊었다.

“노공작께서 도착할 때까지는 기다리는 게 좋겠어. 교황 폐하께서 저리 되신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니, 며칠 더 그러신다고 해서 큰일이 생기지는 않겠지.”

“미네르바, 이참에 언니도 언니 나름대로 움직여서 편을 늘릴 생각은 없으세요? 만약 그렇다면 제가 힘이 되어드릴 수 있어요.”

미네르바는 조금 놀란 듯 리시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 말은…… 교황이 되라는 거야? 내가?”

“네.”

“아니, 됐어. 나는 그런 답답한 자리는 안 어울려. 게다가…… 지금은 그저 교황 폐하께서 회복하시기만을 바랄 뿐이야.”

물론 리시는 안드리제 교황을 치유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노환으로 인한 병이라면, 아무리 치유의 반지를 사용한다 해도 잠깐 기력을 회복할 뿐일 것이다.

산티아노에 대한 적당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한 상황에서 안드리제 교황이 사망하고, 산티아노가 교황 자리에 앉는다면 여러 가지로 복잡해진다.

지난 삶보다 과격하게 행동하기 시작한 산티아노가, 보는 눈을 신경 쓰지 않고 그린 가문을 향한 신성국의 가호를 거둘 수도 있다.

몇 년 후라면 모를까, 지금 당장 신성국의 가호가 사라지는 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이왕이면 케이에게 호의적인 미네르바가 차기 교황이 되기를 바랐는데, 미네르바는 무척 완고했다.

‘물론 교황 폐하께서 완전히 회복하시는 게 제일 좋긴 하지만…….’

리시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치유의 반지가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

교황청 앞을 지키던 엘디는, 예배를 끝낸 산티아노가 부랴부랴 걸어오는 모습을 지켜봤다.

‘뭔가 좀…….’

이상하다.

엘디는 저도 모르게 산티아노의 앞을 가로막았다.

산티아노가 천천히 눈을 들어서 엘디를 응시했다.

그의 미간에 짜증 섞인 주름이 생겼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엘드허트 경?”

(147) 죽여버려.

  산티아노의 적색 영혼 주위로 검붉은 색의 무언가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희미하기는 해도, 잡으려고만 하면 잡힐 것 같은 그것은.

‘역시 위험한 성유물을 갖고 있군.’

케이는 산티아노가 성유물로 교황에게 위험한 짓을 하려고 하는 것 같아서 리시를 보낼 거라고 했다.

케이의 예상대로 산티아노는 성유물을 가진 것 같지만.

‘케이, 이 미친 작자. 이렇게 위험한 성유물 처리에 형수랑 에르웰만 달랑 보냈다고?’

엘디는 와이번도 도우러 온다는 것까지는 몰랐다.

“엘드허트 경. 내 말이 안 들립니까?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물었습니다.”

산티아노의 목소리에 노기가 담겼다.

그가 꾸욱 주먹을 쥐자, 그에게 붙은 검붉은 무언가가 점점 진해졌다.

그것이 술렁, 움직여 엘디를 향해 쭉 뻗어왔다.

저것에 닿는 건 위험하다.

판단을 내리자마자 엘디는 옆으로 훌쩍 물러섰다.

산티아노는 엘디가 보는 것을 볼 수 없기에, 엘디를 향해 미심쩍다는 시선을 던졌다.

“뭘 한 거죠?”

“벌레가…….”

“벌레?”

“네, 대신관님. 근처에 자꾸 달려드는 벌레가 있어서 피하느라 그랬습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벌레를 좀 무서워하잖아요.”

물론 엘디는 벌레 따위를 무서워하지 않았지만, 산티아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벌레, 해로운 벌레는 좋지 않죠.”

“맞아요. 특히 나방이나 그런 건…….”

“아, 나도 나방은 무척 싫어합니다.”

그렇게 말한 산티아노가 주위를 휙 둘러봤다.

“혹시 지금 말한 벌레가 나방입니까?”

“네, 제 손바닥보다 더 큰 나방이었어요.”

“이런…… 사람을 불러서 살충 작업을 좀 하라고 해야겠군요.”

도망치듯 자리를 뜨는 산티아노의 뒷모습을 보며, 엘디는 생각했다.

‘저 성유물이 산티아노를 특별히 똑똑하게 만들어주진 않아서 다행이군.’

 

+++

와이번은 예정일보다 며칠 더 늦게 도착했다.

라코젠이 미나스아릭을 치는 바람에 길 여러 군데가 막혀서, 멀리 돌아와야만 했던 것이다.

“미안하구나, 리시. 낯선 곳에서 긴장했을 텐데, 내가 너무 늦게 도착했지?”

리시를 보자마자 미안함과 걱정이 한껏 담긴 표정으로 사과하는 와이번의 태도에, 리시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사실 리시는 그동안 ‘고블린 밥’ 식당에서 갖가지 요리를 즐기고, 종교적 색채가 가득한 연극을 보고, 미술관이나 전시관을 돌아다니는 등, 신성국을 즐기느라 바빴었다.

“그렇지 않아요, 아버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요.”

리시는 솔직하게 말했지만, 와이번은 자신이 미안해하지 않도록 리시가 배려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집 며느리는 어쩌면 이렇게 속이 깊을까?

우리 애들이었다면 왜 이렇게 늦었느냐, 얼마나 기다린 줄 아느냐, 늦은 것에 대한 보상은 무엇으로 할 것이냐고 떠들어댔을 텐데.

아, 그래. 리시도 이제 우리 집 아이지.

그래, 그래. 내가 막내딸은 참 잘 뒀어.

흐뭇하게 미소 짓는 와이번을 보며, 리시도 해사하게 웃었다.

자그마한 얼굴에 가득 찬 햇살 같은 미소가, 와이번의 가슴을 무너뜨렸다.

우리 막내딸은 어떻게 저렇게 상냥한 미소를 지을 줄 알까?

우리 집 애들이 날 보면 짓는 표정이라고는 인상을 찌푸리든가, 무표정하든가, 귀찮고 성가시다는 느낌이 가득한 눈빛뿐인데.

그래, 그래. 내가 막내딸은 참 잘 뒀어.

급박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도, 와이번은 얼마 전 아내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여보. 저번에 말이에요. 저녁 식사할 때 디저트로 셔벗이 나왔는데, 리시가 그러더라고요. 어머니, 오렌지 좋아하시죠? 신선한 오렌지에 꿀을 넣어서 만든 셔벗이에요. 신기하지 않아요? 내 자식 중에 내가 오렌지 좋아하는 걸 눈치챈 사람이 리시뿐이에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헤레이나는, 리시 이야기를 하는 내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번에 신성국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도, 헤레이나는 몇 번이나 말했다.

-“여보. 무엇보다 중요한 건 리시의 안전이에요. 알겠죠? 무슨 일이 생겨도 제일 먼저 리시를 지켜야 해요.”

그린 노공작 부부는 자식이 성인이 되면 자기 앞가림 정도는 알아서 해야 한다는 방침이었고, 실제로 자식들이 품을 떠난 후에는 전쟁터에 나간다 해도 신경 쓰지 않고 지냈다.

하지만 리시의 일이라면 달랐다.

팔불출처럼 구는 헤레이나의 마음을, 와이번은 이해했다.

“그래, 고블린 밥 식당에는 가봤고?”

“네, 거기 정말 맛있더라고요. 매번 갈 때마다 추천 메뉴를 먹는데, 항상 신선한 재료를 쓰는 데다가 새로운 걸 맛볼 수 있어서 입이 아주 즐거웠어요.”

이렇게 긴 대답이 돌아오다니.

무뚝뚝한 자식들만 가진 와이번에게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와이번은 리시가 신성국에 있는 동안 머무는 방을 둘러봤다.

응접실과 침실로 나뉘어 있기는 하지만, 그린 저택에 있는 방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좁았다.

시중을 들어줄 시녀도 에르웰 한 명뿐이라서 여러모로 불편했을 텐데도, 리시는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구김 없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사랑받고 자란 아이는 다 이런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그 생각을 지웠다.

리시가 위틀로 공작가에서 끔찍한 학대를 당하며 자랐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리시는 가끔 그 사실을 잊게 할 정도로 담담해서, 그런 리시가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아버님, 미나스아릭과 스티무어 쪽 소식은 들으신 게 있나요?”

“2황자가 미나스아릭을 손에 넣었다더구나.”

와이번은 신성국에 들어오기 전에 정보원에게 들은 소식을 리시에게 전해줬다.

“디에로프가 멍청하게 굴었지. 아무리 그래도 군사를 가진 놈이 수도에 들어오려고 하면 막아야 마땅한 것을.”

디에로프는 자신이 운용할 수 있는 군사를 전부 그린령으로 보냈다.

케이와 전쟁을 하는 동안 라코젠이 샤크란 왕국을 막아주기로 했기에, 군사를 이끌고 수도에 진입하는 라코젠을 두 팔 벌려 환대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라코젠이 군사를 이끌고 미나스아릭의 수도에 진입한 건 이상한 일이었다.

샤크란 왕국을 막으려면, 샤크란과 맞닿아 있는 국경으로 가야만 했다.

디에로프는 케이를 향한 증오에 눈이 어두워져서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라코젠은 수도에 진입하자마자 무기를 들고 왕궁으로 향했고, 기사단 둘과 몇 명의 군사만 남겨두었던 왕궁은 무엇 하나 해보지 못한 채 라코젠의 손에 들어갔다.

“그렇게 되기까지 왕을 말리는 신하가 아무도 없었던 건가요?”

“왜 없었겠니. 중신들이 한사코 말렸다는데, 디에로프 이 멍청이가 노망이라도 났는지 옳은 소리를 하는 신하를 베어 죽였다더구나. 그러니 신하들이 뭘 할 수 있었겠느냐.”

디에로프의 신하 대부분은 이 왕국에 답이 없다는 걸 깨닫고, 조용히 짐을 꾸려 수도를 떠났다.

“2황자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까요?”

“디에로프를 왕좌에서 끌어내리지는 않을 게다. 하지만 그 뒤에서 미나스아릭을 통치하려 들겠지. 그래야 가비자르 제국을 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역시 가비자르를 치려고 하는군요. 황제도 그걸 알까요?”

“황제는 모를 거다. 그저 제 아들이 나라 하나 손에 넣었다고 좋아하고 있겠지. 2황자도 충분히 힘을 키울 때까지는 가비자르에 충성을 바치는 척할 거고.”

“가비자르를 치기 전에 그린령을 치겠죠.”

“그래. 그조차 황제는 모르는 척하겠지. 아니, 어쩌면 힘을 빌려줄지도…….”

성유물의 수호자라는 이유로 신성국의 가호를 받으며 한 나라의 왕과도 같은 권력을 쥔 그린 가문은, 많은 나라에게 있어서 필요한 존재이기도 했으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기도 했다.

“스티무어 쪽은 어떤가요?”

“일단 그린의 병력은 양쪽으로 나뉘어서, 미나스아릭에서 온 군대와 스티무어에서 온 군대를 상대로 잘 싸우고 있다고만 들었다. 지금쯤 미나스아릭 쪽은 무너졌겠지. 자기들 나라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소식을 들었을 테니.”

“그러면 그쪽에 있던 군사들도 전부 스티무어 쪽으로 돌릴 수 있겠네요.”

“그래. 2황자가 생각보다 빨리 미나스아릭을 손에 넣은 덕분에, 우리에게는 오히려 쉽게 되었구나. 네가 마탑에 의뢰해서 만든 무기 덕이기도 하고.”

와이번은 새로 생긴 막내딸이 새삼스레 자랑스러웠다.

메르티움을 판매한 돈으로 예쁜 드레스와 장신구, 장식품을 한껏 사들이고, 저택을 더 화려하게 꾸민다 해도 뭐라 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리시는 그 귀한 광석으로 새로운 무기들을 만들어냈다.

어디 그뿐이랴.

대륙 곳곳에 치료소와 빈민 구제소를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원래는 한 나라의 왕이, 영주가 해야 하는 일을, 리시가 하고 있었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예? 제가요?”

리시의 뺨이 발그레 물들었다.

“아니에요. 저는 여기서 정말 편하고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걸요. 이러라고 그이가 절 여기로 보낸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요.”

와이번이 껄껄 웃었다.

“걱정 말거라, 리시. 그 애는 그렇게까지 생각이 깊지 않으니까.”

 

+++

“쉽군.”

케이의 말에, 유진이 대답했다.

“대장. 제가 형수님을 대장보다 존경하게 됐다고 해도, 대장은 뭐라고 하시면 안 됩니다.”

“알았어.”

리시가 마탑에 의뢰해서 만든 무기의 위력은, 케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강했다.

이제는 거의 없는 마법이 다시 부흥하게 된 것 같았다.

파이어볼이 난무하고 불붙은 돌 수백 개가 공중에서 떨어지는 이런 전쟁을 이 시대에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걸,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옛날에는 기사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요?”

제이미가 중얼거렸다.

대포에서 날아간 폭탄이 공중에서 터지며, 수십 개의 불덩어리가 적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검, 혹은 적중력 떨어지는 총밖에 없는 적들은, 방패로 불덩어리를 막아보려 했지만, 방패를 위로 드는 순간 앞에서 쏘아지는 파이어볼 같은 총탄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져나갔다.

물론 마석에 담긴 마나가 무한한 것은 아니었기에, 검을 든 기사들도 싸우기는 해야 했지만, 전쟁이 상당히 쉬워진 건 사실이었다.

아군의 피해는 적고, 적군의 피해는 컸다.

불덩어리가 전부 떨어지자, 제이미가 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경이롭군요. 마법이라는 거.”

 

+++

라코젠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디에로프가 앉아 있던, 미나스아릭의 왕좌에 홀로 앉아 있었다.

디에로프의 몇 안 되는 충신들은 그들의 저택에서 근신하는 중이었고, 디에로프는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

두 팔을 벌리고 라코젠을 환영하던 디에로프의 표정이 절망으로 일그러지던 꼴을 떠올리면, 아직도 웃음이 나왔다.

“멍청한 놈이지.”

라코젠이 검은 고양이의 턱을 살살 긁어주며 말했다.

“수도에 군사를 끌고 진입하는데, 복수심에 눈이 멀어서 그걸 이상히 여기지도 않고 두 팔 벌려 환영하다니. 안 그러냐? 멍청한 놈.”

검은 고양이의 황금색 눈동자가 라코젠을 빤히 응시했다.

‘너도 마찬가지잖아.’라는 눈빛이라서 라코젠은 변명하듯 말했다.

“난 달라. 아이리스 그린, 그 여자는 이상한 힘을 가졌어. 타인의 감정을 조종하는 건, 마계의 힘을 얻은 흑마법사들이나 사용할 수 있는 거야. 그 여자는 죽어 마땅해. 암, 죽어 마땅하고말고.”

아직도 눈을 감으면 리시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마치 눈앞에 있는 듯 생동감 있는 그 환영이 라코젠을 괴롭혔다.

자그마한 얼굴, 가지런한 눈썹, 그 아래에 자리 잡은 커다란 눈과 맑은 눈동자, 오뚝하고 작은 코, 도톰하고 붉은 입술.

리시의 입술은 살짝 베어 물면 과즙이 흘러나올 것처럼 촉촉했다.

맛보고 싶다.

그 입술을 마음껏 탐하고 싶다.

이 감정이 리시의 묘한 술수 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쉬이 걷어낼 수가 없었다.

“지독한 여자야.”

라코젠이 쉰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지독한 여자야. 반드시 죽여야 해.”

세상을 위해서다.

남의 마음을 제멋대로 갖고 노는 여자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건 위험하다.

더불어 그런 여자를 손에 넣은 케이도 제거해야 한다.

리시의 힘을 이용해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렇게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왕궁을 확인하라 시켜뒀던 기사 중 한 명이 찾아와서 보고했다.

“전하, 서탑 꼭대기에서 메어리 케트벤 공주를 발견했습니다. 반쯤 미쳐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메어리 케트벤.

아이리스 그린에게 몹쓸 짓을 하려고 했던 천인공노할 여자.

리시가 자기를 독살하려고 한다는 죄를 덮어씌우기 위해 스스로 독을 마시고 쓰러진 여자.

범인으로 몰린 순간, 리시의 그 난처하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어제의 일처럼 떠올릴 수 있었다.

리시에게 그런 표정을 짓게 하는 건 옳지 않다.

리시를 궁지에 몰아붙여도 되는 상대는, 그녀의 묘한 술수에 걸린 나, 라코젠뿐이다.

라코젠은 검은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느른하게 말했다.

“죽여버려.”

(148) 우리 막내딸

브리트니가 라코젠이 있다는 레리소에 도착했을 때, 그녀를 기다리는 건 라코젠이 미나스아릭으로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절망에 기절할 뻔했지만, 그나마 만나기로 했던 암살자들과 합류한 덕에 브리트니는 버틸 수 있었다.

이제 가드들이 생겼으니 미나스아릭까지 가는 길은 어렵지 않을 거라고, 브리트니는 생각했다.

아니었다.

암살자들은 브리트니를 ‘2황자로부터 보호해주겠다.’고만 했지, 시중을 들어주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브리트니가 배고프다 하면 그들은 산짐승을 잡아 왔지만, 그것을 돈 주고 팔았다.

손질하고 굽는 것도 돈을 줘야만 해줬다. 그것도 상당히 많은 돈을.

돈. 돈. 돈.

꽤 많은 돈을 챙겨서 나왔는데, 이러다가는 미나스아릭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 쓰게 생겼다.

‘큰일이네. 돌아갈 때 쓸 마석을 사야 하는데.’

돌아갈 때 말에게 사용할 속력증가 마석은, 레리소에서 미나스아릭으로 가는 길에 사용했다.

이미 일정이 많이 늦은 상황에서 속력 마석도 쓰지 못하면, 제때 가비자르 황궁에 도착하지 못할 터였다.

그래서 르만과 르덴이란 이름을 가진 쌍둥이 암살자들에게, 나중에 돈을 주겠다고 제안해봤지만, 그들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당신을 뭘 믿고?”

게다가 그들은 사람들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며 마을이나 도시를 피해 다녀서, 적당한 가격으로 파는 음식을 구할 수도, 편안한 잠자리에서 쉴 수도 없었다.

차라리 혼자 다닐 때가 편했다고, 브리트니는 생각했다.

결국, 가진 돈이 다 떨어져서 이틀을 굶었다.

르만과 르덴은 굶주려서 쓰러지려는 브리트니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

자기들끼리 먹고 마시고 웃었다.

하지만 이제 이 고난도 끝이다.

저 멀리 미나스아릭 수도로 들어가는 성문이 보인다.

브리트니는 라코젠의 잔혹한 명령 때문에 메어리가 발악하다가 죽어가는 중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드디어……!’

미나스아릭으로 향하는 내내 죽어 있던 브리트니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

“전하. 웬 거지꼴을 한 여자가 전하를 뵙고 싶다고 합니다.”

긴 줄 끝에 매달린 생쥐 인형으로 고양이와 놀아주던 라코젠이 인상을 찌푸렸다.

“쫓아내.”

“그런데…… 그 여자 말이, 자기가 스티무어 제국의 황비라고 하는데요.”

“스티무어 제국의 황비.”

라코젠은 브리트니 위틀로를 떠올리고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응접실로 모셔.”

라코젠이 응접실에 갔을 때, 브리트니는 이미 소파에 앉아서 쿠키 한 접시를 다 먹어치운 후였다.

라코젠은 잠시 멈춰서 브리트니의 몰골을 감상했다.

엉키고 엉겨 붙은 머리와 원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한 승마복, 낡은 부츠와 푸석푸석한 피부.

자신이 아는 브리트니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브리트니는 메어리를 도와서 리시를 함정에 빠뜨리려 했었기에, 메어리와 똑같이 취급해줄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이 사라질 정도로, 브리트니의 꼴은 엉망이었다.

“이거 한 접시 더 가져다줘.”

브리트니는 막 들어온 라코젠이 시종이라고 생각했는지, 돌아보지도 않고 접시를 가리켰다.

라코젠이 대답하지 않자, 브리트니가 인상을 구기고 돌아봤다.

“뭐해! 이거 한 접시…… 아……!”

브리트니가 벌떡 일어났다.

살짝 벌어진 입술 옆에 쿠키 부스러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멍청한 표정으로 라코젠을 쳐다보던 브리트니가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살짝 들고 오만한 자세를 취했다.

“2황자. 스티무어 제국의 황비인 브리트니 애시워스입니다. 우리, 한 번 본 적 있죠?”

라코젠은 팔짱을 낀 채 브리트니가 앉아 있던 소파 뒤에 기립해 있는 두 사람을 돌아봤다.

그들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브리트니와 달리 멀끔한 모습이었다.

“아, 내 가드들이에요. 내게 해코지를 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이 말에도 라코젠은 대답하지 않았다.

라코젠의 침묵이 길어지자 브리트니는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먼저 본론을 꺼냈다.

“정보를 팔려고 왔어요.”

“정보.”

“그래요. 2황자가 아주 혹할 만한 정보예요.”

“글쎄. 딱히 알고 싶은 정보는 없는데.”

“이게 아이리스와 관련된 거라 해도?”

라코젠의 눈동자가 번뜩 빛났다.

그걸 본 브리트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브리트니가 소파를 벗어나 라코젠에게 한 걸음 다가서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 정보를 사면, 아이리스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거예요.”

 

+++

교황청으로 향하며, 와이번이 말했다.

“만약 산티아노가 가진 빗을 훔친다 해도, 산티아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는 힘들 거다.”

“역시 본인도 성유물에 지배당한 것뿐이라고 나올까요?”

“그래. 예전에도 성유물로 악행을 저지른 후에 그런 식으로 발뺌하는 자들이 많았지.”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처리하나요?”

“성유물만 회수한 후 놓아주는 수밖에 없었단다.”

결국, 이 일이 산티아노에게는 아무 흠이 되지 않을 거라는 의미였다.

와이번이 걱정스럽게 에르웰을 돌아봤다.

에르웰은 동그란 물건을 들고 있었는데, 포레스트 상회에서만 파는 ‘유리병 꽃’라는 것이었다.

마석을 갈아 넣은 유리로 만든 투명하고 속이 빈 구슬 안에는 꽃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마석의 힘 덕분에 유리가 깨지지도 않고, 안에 든 꽃이 오랫동안 생생하게 살아 있을 수 있는 이 ‘유리병 꽃’은 최근 귀족들 사이에서 병문안 선물로 유행이었다.

“에르웰. 정말 할 수 있겠니? 네가 실패하면 신성국에서 대신관의 물건을 훔치려고 했다는 이유로 루테크 가문마저 위험해질 수도 있어.”

“걱정하지 마세요. 어디에 넣어뒀는지 알고 있으니, 훔치는 건 어렵지 않아요.”

와이번을 기다리는 며칠간, 리시와 에르웰이 그저 신성국을 즐기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그들은 꼬박꼬박 대신전의 예배에 참석했고, 에르웰은 매번 산티아노를 만나서 대화를 나누며 그를 관찰했다.

사람은 중요한 물건을 지니고 있으면 거기에 신경을 쓰게 되고, 산티아노 역시 그랬다.

산티아노는 가운처럼 생긴 신관복 안에 입은 상의 주머니에 빗을 넣어서 가지고 다녔다.

교황청을 지키는 성기사는 선대 성유물 수호자인 와이번을 막지 않았다.

와이번과 리시, 에르웰은 쉽게 교황청에 진입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복도를 걸었다.

뒤늦게 그들의 방문을 보고받은 산티아노가 황급히 복도를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산티아노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에르웰이 유리병 꽃을 떨어뜨렸다.

유리병 꽃이 데구르르 굴러서 산티아노의 발치를 스치고 지나갔다.

“앗!”

에르웰이 낮게 비명을 지르며 유리병 꽃을 잡으러 달려갔다.

그렇게 산티아노를 스치는 순간을 노려서 ‘아부틴의 빗’을 훔칠 계획이었다.

하지만 산티아노의 옷자락을 향해 슬쩍 손을 움직였을 때, 무언가 강렬하고 예리한 것이 에르웰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에르웰은 뇌가 휘저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허벅지에 부근에 숨겨두고 다니는 단도를 빼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려 리시를 향해 단검을 뻗었다.

날카롭게 빛나는 단검은 정확하게 리시의 목을 노렸다.

리시는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단검을 응시했다.

단검은 빠르고 정확했지만, 목적한 표적에 꽂히지는 못했다.

채앵-!

챙-!

두 개의 검이 단검을 막고, 걷어냈다.

와이번과 엘디의 검.

엘디는 단검을 쳐올리는 동시에 달려가 에르웰의 어깨를 밀쳐 쓰러뜨렸고, 와이번은 도망치려는 산티아노의 목 뒤를 후려쳐서 그를 기절시켰다.

그리고 그의 품을 뒤져 아부틴의 빗을 찾아내, 성유물 수호자의 힘으로 빗의 영향력을 내리눌렀다.

광기로 번들거리던 에르웰의 눈동자가 차분해지자, 엘디는 에르웰의 어깨를 꽉 누르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제가 무슨 짓을…….”

“네 탓이 아니야. 우리 아버지가 약해진 탓이지. 아버지, 벌써 노환이 오셨수?”

엘디의 지적에 와이번은 한숨을 삼켰다.

“아버님, 괜찮으세요? 에르웰, 괜찮아요?”

자기도 죽을 뻔했으면서, 리시는 에르웰과 와이번을 걱정해주었다.

와이번은 생각했다.

역시 내 자식 중 막내딸만 한 자식이 없다.

“저는 괜찮아요, 아이리스 님. 정말 죄송해요. 갑자기 머릿속이 뭔가…… 휘저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내 힘이 부족했다. 확실하게 성유물의 힘을 억눌렀어야 했는데…….”

와이번의 실수가 아니었다.

세계가 리시를 죽이려 하기에 벌어진 일.

원래대로라면 와이번은 무사히 빗의 힘을 막고, 에르웰은 산티아노에게서 빗을 훔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와이번은, 위험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런 건 나중에 따지고, 누가 오기 전에 이것부터 처리하죠.”

엘디가 바닥에 엎어져 있는 산티아노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렇게 되는 상황을 막으려고 그 계획을 세운 거였는데.

그들은 빈방을 찾아서 산티아노를 집어넣고 문을 닫았다.

“그나저나 너는 여기 어쩐 일이냐?”

와이번이 엘디에게 물었다.

“며칠 전에 산티아노를 봤을 때, 영 예감이 안 좋더라고요. 오늘내일하시는 아버지랑 여자 둘이서 상대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걱정스러운 마음에 와봤죠. 아니나 다를까…….”

와이번이 엘디의 뒤통수를 가볍게 때렸다.

“하여간 너는 말하는 본새가 틀려먹었어.”

“아, 갑자기 왜요? 우와, 진짜 아프게도 때리시네. 오늘내일하신다고 해서 삐치셨어요?”

“쯧쯧.”

와이번은 볼멘소리를 내는 차남을 보며 혀를 찼다.

리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희…… 이제 어쩌죠?”

와이번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아직 손에 들고 있는 아부틴의 빗을 내려다봤다.

아부틴의 빗은 나무로 만든 평범한 빗으로만 보였다.

지금은 와이번이 수호자의 힘을 사용해서 진짜로 평범한 빗이 되긴 했지만, 언제 또 성유물의 힘이 흘러나올지 알 수 없었다.

“리시, 아가. 내 힘으로 잠시 성유물의 힘을 눌러놓긴 했지만 언제 또 이 힘이 발산될지 모르겠구나. 산티아노의 마음에 동조해서 사용되는 바람에, 이것의 힘이 더 강해졌을 수도 있어.”

와이번은 케이보다 먼저 리시의 안에 숨겨진 강인함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리시가 아무리 강한 마음을 지녔어도, 최근에는 찾아보기 힘든 실력의 유물술사라도, 어여쁜 막내딸이 걱정되는 마음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런 와이번의 심정을 느낀 듯, 리시가 미소 지었다.

“아버님. 제가 잘할 수 있어요.”

달래는 것 같기도 하고, 각오하는 것 같기도 한 음성이 와이번의 가슴을 간질였다.

정말이지, 우리 막내딸은.

리시를 만난 후 몇 번이나 되풀이한 생각을 하며, 와이번은 아부틴의 빗을 내밀었다.

“산티아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해결하마. 교황 폐하를 잘 부탁한다.”

“네, 아버님.”

“엘디. 리시를 교황 폐하가 계신 곳으로 좀 안내해다오.”

“네. 하지만 오늘 이렇게 절 부려먹은 대가는 톡톡히 치르셔야 할 겁니다.”

저 망나니 같은 녀석.

에르웰은 와이번과 함께 남았다.

리시와 엘디의 모습이 멀어지자, 와이번이 에르웰을 돌아봤다.

“에르웰.”

“걱정 마세요, 노공작님.”

에르웰이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누군지 아시잖아요.”

 

+++

안드리제 교황이 있는 집무실 앞에 도착하자, 어딘가에 숨어 있던 미네르바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네르바는 엘디에게 눈짓으로 인사한 후, 리시에게 물었다.

“산티아노는…… 잘 해결된 거야?”

“조금 문제가 있긴 했지만.”

리시는 아부틴의 빗을 들어 보였다.

“물건은 무사히 빼돌렸어요.”

“문제라는 건……?”

“일단 교황 폐하부터 치료해야 할 듯해요. 교황 폐하는 어떠세요?”

“산티아노가 내내 붙어 있다가 그린 노공작이 오셨다는 말에 뛰어나갔거든. 그사이에 내가 들어가 보려고 했는데 호통을 치면서 쫓아내셨어.”

“아버님께서 빗의 힘을 눌러놓으셨으니, 이제 좀 괜찮으실 거예요.”

미네르바는 고개를 끄덕인 후, 집무실의 문을 노크했다.

한참이 지났는데도 답이 들려오지 않아서, 한 번 더 노크했지만, 여전히 답은 없었다.

미네르바가 리시를 흘끔 쳐다본 후,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넓은 집무실 한복판에 안드리제 교황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치 영혼 없는 인형처럼 무표정하게, 유리알 같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서 있는 그의 모습에, 리시는 가슴이 아릿해졌다.

교황은 리시와 케이의 결혼식을 축복해주기 위해 왔을 때보다 몇 년은 더 늙은 것처럼 보였다.

“교황 폐하.”

미네르바가 불러보았지만, 교황은 반응이 없었다.

엘디가 성큼성큼 걸어가서 안드리제의 팔을 가볍게 잡는 순간.

교황이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149) 며느리 자랑

교황이 바닥에 쓰러지기 전, 엘디가 그를 부축해 안아 올렸다.

“호흡이 거의 없어.”

엘디의 말에 미네르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리시는 달려가서 교황의 팔에 오른손을 얹었다.

왼손에는 아부틴의 빗을 꽉 쥐고 있었다.

와이번은 빗의 힘을 눌러놓았지만, 리시는 그 안에 웅크린 힘을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다들 걱정할까 봐 말하지 않았을 뿐.

교황에게서도 빗과 비슷한 성질의 힘이 느껴졌다.

‘이거구나.’

실처럼 교황의 육체 곳곳으로 뻗어 나가 교황의 뇌를 잠식한 성유물의 힘.

리시는 손가락에 실을 감듯이, 교황의 몸에 퍼져 있는 성유믈의 힘을 살살 끌어당겨서 가져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왜인지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형수?”

리시가 눈을 감고 손가락만 살살 움직이는 게 이상한지, 엘디가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쉿.”

리시는 작게 대꾸해주고, 계속해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가락에 감긴 실타래 같은 힘이 길게 늘어져, 왼손에 든 아부틴의 빗으로 돌아가는 게 느껴졌다.

리시도 이런 걸 해보는 건 처음이기에, 자신이 해내는 일이 무척이나 경이로웠다.

유물술사의 능력은 성유물을 사용하는 데에 있지, 이미 사용된 힘을 거두는 데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리시는 교황의 몸에 퍼져 있던 빗의 힘을 모조리 거둬들였다.

눈을 뜬 리시가 미네르바를 돌아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교황 폐하를 침대에 눕혀드려야겠어요.”

+++

산티아노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에르웰의 걱정스러운 눈동자였다.

“헉!”

깜짝 놀라서 헛숨을 삼키는데, 에르웰이 외쳤다.

“대신관님! 무사하시네요. 다행이에요, 다행이에요.”

에르웰이 산티아노의 가슴에 퍼억, 엎어져서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산티아노는 잔기침을 터뜨렸다.

“콜록, 콜록.”

“괜찮습니까, 대신관님?”

그때, 옆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산티아노는 다시 기절하고 싶어졌다.

와이번 그린.

선대 성유물의 수호자.

산티아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뻘의 와이번이 몹시 불편했었다.

“네, 뭐…… 저는…… 아니, 이 몸은 괜찮습니다.”

“갑자기 쓰러지셔서 놀랐습니다.”

“제가요? 그랬나요?”

쓰러지기 전의 기억이 희미했다.

교황 옆에 붙어 있다가 와이번이 교황청에 들어왔다는 소리에, 그를 쫓아내기 위해 달려왔던 기억은 있다.

분명 리시를 봤던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이 자리에 리시는 없다.

“그린 공작부인은 어디에……?”

“제 며느리가 어디에 있는지는 왜 궁금해하시는지요?”

“그, 그거야…… 공작부인의 시녀는 여기에 있는데, 공작부인만 안 보이니 걱정이 돼서 그렇습니다.”

“아, 그렇죠. 우리 며느리가 워낙 연약해서 눈에 안 띄면 걱정되고, 눈에 보여도 걱정되고…… 그렇기는 하지요. 이해합니다.”

와이번의 이런 점이, 산티아노는 정말이지 너무나 불편했다.

“그렇게나 말랐는데 먹기는 또 얼마나 새 모이처럼 먹는지…… 몸에 좋다는 걸 사서 보내는데, 아무래도 우리 아들만 실컷 먹지, 며느리는 제대로 챙겨 먹질 않는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와이번의 걱정 따위, 산티아노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날을 세워 대꾸하기도 어려웠다.

와이번은 항상 이런 식으로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곤 했다.

결코 먼저 본론을 꺼내지 않고, 본론을 꺼낸다 해도 능구렁이처럼 피해버린다.

와이번의 며느리 걱정을 들으며, 산티아노는 은밀히 손을 움직여 아부틴의 빗을 확인했다.

빗이 없다.

“아니!”

버럭 외치는 산티아노를, 에르웰과 와이번이 깜짝 놀라서 쳐다봤다.

“무슨 일이세요? 어디 안 좋으세요? 역시 어딘가가 안 좋으신 거죠? 저 때문인가요? 죄송해요. 안 그래도 산티아노 대신관님께서 무척 심약하신 분이라는 얘기는 들었는데…… 제가 실수로 유리병 꽃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깜짝 놀라서 경기를 일으키신 것 맞죠?”

에르웰이 우다다 쏟아내는 말에, 산티아노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뭐? 내가 심약해? 유리병 꽃 좀 떨어졌다고 경기를 일으켜? 그나저나 유리병 꽃은 또 뭔데?

“아니, 대체…… 그게 무슨……?”

“제가요. 대신관님께서 위용 있게 걸어오시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느라, 저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유리병 꽃을 떨어뜨렸거든요. 심약하신 대신관님께서 그 소리에 놀라셨는지 도망치시다가 기절하시는 바람에…… 제가 정말 놀라서…… 저 때문에 위대하신 대신관님이 돌아가시면 어쩌나 두려워서…….”

칭찬인지, 조롱인지 모를 말이었지만, 산티아노는 그 부분을 지적할 수 없었다.

에르웰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디가 울면서 걱정을 해주는데, 사소한 부분을 지적하면 옹졸한 사내라는 소리나 듣는다.

‘게다가…….’

산티아노는 와이번을 노려봤다.

걱정 가득한 와이번의 연녹색 눈동자를 보자 속이 뒤틀렸다.

‘능구렁이 같은 자식.’

와이번이 아부틴의 빗을 훔쳤을 것이다.

미네르바는 그린 가문과 친밀하니, 교황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보고 도움을 청했으리라.

성유물이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에 와이번이 몸소 여기까지 온 것일 테고.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고, 물증이 있다 해도 공공연히 떠벌릴 수 없는 문제였다.

‘성유물을 개인적으로 갖고 있었는데, 선대 성유물의 수호자인 와이번 그린이 훔쳤다.’라고 하면, 비난의 화살은 산티아노를 향하게 된다.

아부틴의 빗은 그린에게 넘어갔다.

‘제길.’

산티아노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나는 가봐야겠습니다. 바쁜 몸이라…….”

“안 돼요. 대신관님, 더 쉬셔야 해요. 유리병 꽃 떨어지는 소리에 많이 놀라셨을 텐데, 그렇게 막 움직이시다가 또 기절이라도 하시면 어떡해요?”

빌어먹을 유리병 꽃. 대체 유리병 꽃이 뭐야!

산티아노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고, 자신의 팔에 매달린 에르웰을 정중하게 떼어냈다.

“교황 폐하께서 많이 편찮으셔서 가봐야 합니다. 놀라 기절할 만큼 심약하지는 않으니,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아,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번에는 와이번이 산티아노의 앞을 막았다.

“우리 며느리가 교황 폐하를 치료하고 있을 테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교황 폐하는 허락 없이 아무나 만나 뵐 수 있는 분이 아닌 거 모릅니까?”

“괜찮을 겁니다. 우리 며느리는 치유의 반지를 가지고 있고, 그걸 아주 잘 다루는 유물술사니까요.”

산티아노가 숨을 멈추는 걸 보며, 와이번이 싱긋 웃었다.

“우리 며느리는 그걸 보고하기 위해 신성국에 찾아온 거였는데, 모르셨나 봅니다.”

 

+++

산티아노는 와이번의 말을 믿지 않았다.

유물술사라니. 심지어 성유물을 아주 잘 다루는 유물술사라니.

이제 그런 유물술사는 없다.

산티아노는 그런 힘을 가진 유물술사를 찾고, 만들어내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퍼부었지만, 간신히 발견한 사람이 하렌트 미어, 딱 한 명뿐이었다.

되다 만 유물술사.

유물의 힘을 반의 반의 반도 못 끌어내는 팔푼이.

그런데 하필이면 성유물의 수호자 가문에 유물을 잘 다루는 유물술사가 존재한다고?

그럴 리 없다.

산티아노는 와이번이 제 며느리 아끼는 마음에 눈이 먼 거라고 판단했기에, 대신관들을 전부 소집해 그들을 이끌고 교황의 침실로 향했다.

이 기회에 와이번과 그린 가문의 명예에 흠집을 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교황의 침실에서 보게 된 것은, 정말이지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며칠 사이에 눈에 보일 정도로 늙은 교황의 전신을 덮은 푸른 빛.

그 빛은 교황의 팔에 얹은 리시의 손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빛에 둘러싸인 교황의 그늘진 주름이 서서히 펴지고, 혈색 없는 얼굴에 핏기가 돌았으며, 꺼져가던 호흡이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대신관들은 숨을 쉬는 것도 잊고 지켜봤다.

이윽고 영원히 뜨이지 않을 듯 감겨 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가며, 검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요 며칠 사이에 보이던 빛 잃은 눈동자가 아닌, 예전처럼 생기가 넘치는 눈동자였다.

천장을 향해 있던 검은 눈동자가 느릿하게 움직이다가, 리시에게서 멈췄다.

교황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손녀를 향해 짓는 듯한 미소였다.

“아이리스, 아가야.”

“네, 교황 폐하.”

“성유물을 사용하는 건 익숙해졌누?”

이미 리시가 유물술사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한 질문에, 그 자리에 있던 대신관들, 특히 산티아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네, 걱정해주신 덕분에요.”

“그래, 그래. 장하구나.”

그다음 교황의 눈은 오밀조밀 모여 있는 대신관들에게 향했다.

“다들 거기서 뭣들 하는가? 가서 일들 보지 않고?”

 

+++

모두가 나간 후, 교황의 방에는 리시와 교황만이 남았다.

안드리제 교황은 인자한 눈으로 가만히 리시의 얼굴을 살폈다.

“내가 성유물에 당했었느냐?”

“네, 폐하. 아부틴의 빗이라고 합니다. 정신을 지배하는 빗이라고 하네요.”

“그래, 그렇구나. 산티아노가 한 짓이고?”

“네.”

교황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슬픔과 회한이 느껴지는 그의 표정에, 리시는 가슴이 아팠다.

이윽고 눈을 뜬 그가 리시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물었다.

“성유물을 사용하는 데 힘든 점은 없고?”

“제가 유물술사라는 걸 알고 계셨나요?”

“결혼식 때부터 알았지. 케이, 그 녀석이 제 아내를 신성국에 넘기지 않을 거라며 떼를 써서 모르는 척해줬지만.”

옅은 미소를 짓는 교황은, 사랑스러운 손자를 떠올리는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그걸 보자, 리시는 이 사람을 살리고 싶어졌다.

빗의 영향력은 거뒀지만, 교황은 조만간 건강이 악화하여 죽게 된다.

하지만 리시는 케이에 관해 이야기를 하며 이토록 다정한 미소를 짓는 사람을, 죽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반지의 힘이 세월의 힘으로 죽어가는 사람도 살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리시는 왜인지 할 수 있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교황 폐하. 아직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시지 않은 것 같으니, 제가 한 번 더 치유의 반지를 사용해야 할 듯해요.”

리시의 말에 교황은 한동안 그녀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물었다.

“아가는 무슨 무거운 짐을 그리 어깨에 지고 있누?”

애정과 걱정이 담긴 질문에, 리시는 그만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리시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의 격돌이 일어난 탓이었다.

“저는…… 아무것도 지고 있지 않아요. 무척 행복한걸요.”

교황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안쓰럽단 미소만 지었다.

리시는 교황의 눈빛을 애써 무시하고 손을 뻗으며 말했다.

“폐하. 그럼 한 번 더 치유를…….”

“아가. 성유물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느냐?”

“……네. 조금은요. 옛날에는 트레저라고 불리고, 신이 아닌 인간의 원념, 혹은 집념 같은 것이 남은 물건들이 이런 힘을 발휘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 우리가 아는 건 거기까지란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느냐?”

“잘 모르겠어요.”

“아이리스. 나는 내 상태를 잘 안단다. 내 나이쯤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지. 나는 죽을 날이 머지않았고, 이건 내게 주어진 수명이란다. 대신관도, 교황도, 성유물의 수호자나 황제도 벗어날 수 없는 수명.”

리시는 허벅지 위에 내려놓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치유의 반지는 참으로 근사한 힘을 지녔지만, 나는 무엇이든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단다. 병자를 치료해주는 건, 그래. 그 반지의 주인이 원했던 게 그런 거라면 무리 없이 치료해줄 수 있겠지. 하지만…… 노쇠하여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건?”

리시는 교황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반지가 제 수명을 가져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아마 그럴 게다. 성유물들은 항상 그랬지. 그 쓰임 이상의 것을 사용한 인간들은 미치거나 기력이 쇠해져서 죽었어.”

“저는 괜찮아요, 폐하. 저는 폐하께서 오래오래 사시면 좋겠어요.”

진심이었다.

교황도 그걸 느낀 듯 리시를 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아가. 내가 어린 네 수명을 가져와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 할 만큼 못된 늙은이로 보이느냐?”

“그런 의미가 아니라…….”

“나는 네가 케이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구나. 그러라고 축복도 해준 거고.”

“폐하께서 계셔야…….”

“걱정 말거라, 아가야.”

교황이 손을 뻗어 리시의 팔을 토닥였다.

“차기 교황은 미네르바가 될 게다. 미네르바는 결코 케이를 등지지 않을 것이야.”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리시는 교황이 케이의 정체를 안다는 걸 깨달았다.

숨을 멈춘 리시를 보며 교황이 부드럽게 말했다.

“물론 네가 그 때문에 날 살리고 싶어 한 게 아니라는 것도 안다.”

리시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교황이 리시의 팔을 다정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행복해야 한다, 아가야. 네가 무슨 짐을 지고 있든, 나중에 그 짐을 내려놓았을 때는 온 힘을 다해서 행복해야 해.”

(150) 치워버려라.

  신성국에서의 일을 끝내고 그린 저택으로 돌아온 리시는, 다리에 큰 부상을 입어서 저택에 돌아와 요양하고 있던 월라스에게 여러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린령 서쪽을 치고 들어온 미나스아릭의 군사들은 잘 싸웠으나 마탑에서 개발한 무기를 버티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미나스아릭이 라코젠의 손에 떨어졌다는 소식에 무너졌다.

“게다가 라코젠이 미나스아릭의 왕과 왕비를 지하 감옥에 가두고 메어리 케트벤 공주를 죽였대요. 그 소식을 들은 왕비는 자결하고, 왕은 반쯤 미쳤다고 하네요.”

“저런…….”

라코젠이 그렇게 끔찍한 짓을 저지를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심장이 철렁했다.

미나스아릭 왕국과 가비자르 제국의 관계는 그리 나쁘지 않았고, 이건 라코젠이 중간에서 술수를 벌여 멋대로 벌인 전쟁이다.

전쟁 포로를 그렇게 가혹하게 대할 이유가 없는데, 왜 그렇게까지 가혹한 짓을 한 걸까?

“우리는 라코젠이 미나스아릭을 점령한 후, 가비자르 쪽에 유리한 조약을 맺는 정도로만 끝낼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라코젠은 미나스아릭의 왕이 될 생각인가 봐요.”

리시는 월라스의 부상을 치료해준 후, 엘레르보의 위팅크 기자를 불러와 달라고 부탁했다.

가비자르 제국의 황태자 이오벳의 결혼식이 끝나고 며칠이 지난 후에야 미나스아릭 왕국과 스티무어 제국이 그린 가문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는 소식을 듣게 된 귀족들은, 도대체 왜 그들이 그런 미친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없어서 이유를 알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럴 때 엘레르보 신문에서 호외를 냈다.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라는 제목으로 시작된 기사에는, 위팅크 기자가 알아낸 전쟁의 이유가 담겨 있었다.

미나스아릭 왕국의 왕 디에로프는 몇 년 전 공주와 그린 공작부인 사이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왕실의 명예가 손상되자, 그것을 그린 가문 탓으로 돌리며 복수심을 불태웠다.

스티무어 제국의 황제 드웨인은 황비 브리트니 때문에 그린 가문에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요약하자면 ‘복수심’ 때문에 전쟁을 시작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각 나라의 왕들과 귀족들은 이 터무니없는 이유에 실소를 흘리며, 공개적으로 ‘그린 공작’을 지지한다고 표명했고, 아직 계속되고 있는 스티무어 제국과의 전쟁에서 그린 공작의 편을 들어주었다.

생각보다 강한 스티무어의 군사들 때문에 대치 상태에 있던 전쟁의 승기가 그린 가문 쪽으로 기울었다.

크리드 2018년 7월 말, 그린 공작의 군사들은 황제 드웨인을 포로로 잡았으며, 8월에 스티무어의 수도에 진입해 황궁을 점령했다.

전쟁이 끝났다.

+++

드웨인은 그린 공작령의 동쪽 변경 에버자이에 포로로 잡혀 있었다.

케이는 스티무어의 황실을 점령했음에도, 스티무어 사람들을 가혹하게 대하지 않았다.

“나는 스티무어에 아무 감정이 없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시작되었고, 우리 쪽에 큰 피해를 당하였으니, 황제를 돌려받고 싶다면 그에 맞는 보상이 있어야 할 겁니다.”

케이의 말에 제후들과 중신들이 모여 회의를 진행했다.

회의는 길지 않았다.

그들은 전부 이 전쟁을 반대해왔기에, 나라를 망하게 할 뻔한 황제는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의견이었다.

반대의 목소리는 없었고, 누구를 다음 황제로 삼을지에 대한 회의가 길게 이어졌다.

아직 황제와 황후 사이에 아이가 없는 탓이었다.

신하들이 황후를 끼워주지 않고 자신에게 이득이 될 만한 의견을 내며 다투고 있을 때, 황후 에버렛은 은밀히 움직였다.

그동안 리시의 조언을 받아서 투자한 후 벌어들여 모아뒀던 돈과 친정의 도움을 받아, 케이가 원하는 정도의 보상을 준비했으며, 케이가 원하는 조건으로 조약을 체결했다.

먼 타지의 감옥에서 신하들이 새 황제를 세우려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절망에 빠졌던 드웨인은, 황후 에버렛의 도움으로 다시 황제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드웨인도, 그리고 황후의 선택에 못마땅해하는 제후와 귀족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드웨인은 이제 이름뿐인 황제가 되었다는 걸.

이 스티무어 제국 황실의 주도권은, 황후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는 걸.

+++

브리트니는 드웨인이 다시 황궁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웨인이 그대로 죽게 될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그래, 아무리 그린 공작이라도 한 나라의 황제를 죽일 수는 없겠지.’

브리트니는 드웨인이 무사히 황궁에 돌아갔다는 소식만 신문으로 확인했을 뿐,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다.

그 고생을 해서 만난 라코젠은, 브리트니의 정보를 그리 유용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린 공작부인의 옛 남자가 그린 공작의 부하라고? 그게 뭐? 내가 왜 그 얘기에 관심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코웃음을 치는 라코젠에게 매달려, 간신히 정보에 대한 대가를 받았다.

아니, 정보에 대한 대가라기보다는 거지에게 주는 적선에 가까웠다.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에 브리트니가 부당하다고 악다구니를 쓰자, 라코젠은 사람을 시켜 브리트니를 죽이려 했다.

브리트니는 자신의 가드로 데려간 암살자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시선을 보냈으나, 묵묵히 지켜보던 그들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

-“염문설 따위에 그 정도 금액이면 충분하잖아요. 그냥 좀 갑시다.”

브리트니는 고작해야 2골드바. 약 4천만 브리크 정도만 되는 돈을 가지고 미나스아릭을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4천만 브리크는 드레스 몇 벌 사면 끝나는 수준의 돈이었다.

이번 여정에서 암살자 두 명에게 주기로 한 수고비만 일 인당 1천만 브리크였다.

그들에게 그 금액을 제시했을 때만 해도, 라코젠이 이렇게 적은 돈을 주고 쫓아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가비자르에 진입해서 들어간 첫 번째 도시에서, 브리트니는 스티무어의 전쟁 소식을 듣게 되었다.

‘드웨인이 요새 왜 그렇게 바쁜가 했더니, 날 위해 그린 공작과의 전쟁을 준비했던 거구나.’

그런 로맨틱한 감정은 며칠 지나지 않아서 산산조각이 났다.

대부분의 나라가 그린 공작을 지지하며, 그에게 군사를 보내준다는 기사가 실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브리트니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몸을 숨기고 있기로 했다.

드웨인이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심장이 철렁했는데, 다행이다.

돌아갈 곳이 생겼다.

‘돈도 다 떨어졌는데, 다행이야.’

라코젠에게 받은 돈은 이제 거의 남지 않았다.

그래도 마차를 빌려서 스티무어에 돌아갈 돈은 될 것이다.

남은 돈을 탈탈 털어서 스티무어 황궁에 도착했지만, 브리트니는 황궁에 발도 들일 수 없었다.

“황후 폐하께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으니 잠시 기다리라 하십니다.”

황궁의 문지기는 황제가 아닌 황후의 명령을 들었다.

“나는 이곳에 사는 황비야. 지금 날 못 들어가게 하는 거야?”

“황후 폐하께서 기다리라 하십니다.”

문지기는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그때까지도 브리트니는 자신이 처할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다.

황궁 정문 앞에 서서 몇 시간을 기다린 후에야, 브리트니는 정문 안으로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황궁 안을 다닐 때 쓰는 마차도 준비해주지 않았고, 시종이나 시녀도 없어서 제 발로 황궁 건물까지 한참을 걸어가야만 했다. 건물에 들어서자 시종이 브리트니를 알현실로 안내해주었다.

“나는 방에 가고 싶어. 좀 쉬어야 해.”

“황후 폐하께서 알현실로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이번에도 황후의 명령이다.

그제야 브리트니는 뭔가 좀 이상하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시종을 따라 알현실로 향했다.

넓은 알현실에서 기다리는 건 황제와 황후뿐이 아니었다.

신하들도 있었다.

하지만 브리트니의 눈에 보이는 건, 높은 황좌에 앉아 있는 황제의 위용 있는 자태뿐이었다.

“폐하!”

브리트니가 종종 달려가 드웨인에게 안기려 했지만.

“멈추게.”

황후가 나직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하지만 브리트니는 늘 그렇듯 황후 에버렛의 명령을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멈춰라, 황비!”

그때, 드웨인이 차갑게 외쳤다.

그제야 브리트니는 우뚝 멈춰서, 크게 뜬 눈으로 드웨인을 올려다봤다.

“폐하……?”

드웨인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질문을 한 사람은 에버렛이었다.

‘쟤는 왜 저렇게 나대?’

브리트니는 에버렛을 한 번 쏘아본 후, 드웨인을 향해 애절한 시선을 보내며, 이곳에 오는 내내 생각해둔 변명을 끄집어냈다.

“폐하. 제가 가비자르 황궁에 가 있는 동안, 누군가가 저를 납치하여…….”

“황비. 그대가 스스로 말을 빌려 떠나는 것을 보았네.”

에버렛이 브리트니의 말을 끊었다.

“아, 아니에요. 아닙니다, 폐하. 저는 그런 적 없어요. 황후 폐하께서 절 모함하시려고…….”

“시끄럽다!”

드웨인이 버럭 외쳤다.

“황비! 아니, 브리트니 위틀로!”

위틀로.

드웨인을 만난 후, 처음으로 불린 결혼 전의 성 때문에, 브리트니는 다리에서 힘이 쭉 빠졌다.

털썩, 엉덩방아를 찧었으나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안쓰럽다는 시선조차 보내지 않았다.

“나는 너를 믿고 아주 많은 것을 맡겼다. 하지만 너는 그동안 내내 내게 거짓말을 했던 것도 모자라, 아직까지도 날 기만하려고 한다. 한 나라의 황제를 기만하다니…… 그게 얼마나 큰 죄인지 모르는 건가?”

“거, 거짓말이라니…… 저는 그런……. 아니에요. 아니에요, 폐하. 어디서 무슨 말씀을 어떻게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 정말 아니에요.”

브리트니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외쳤으나, 드웨인의 냉랭한 눈동자에 온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드웨인은 협탁에 있던 서류 뭉치를 들어서 브리트니에게 내던졌다.

거기에는 그동안 브리트니가 한 짓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예전에 브리트니와 위틀로 가문이 리시에게 한 짓들.

리시에게 빚진 것들.

스티무어 황실에 들어온 후, 리시의 옆에 몰래 붙여둔 하녀.

그리고…….

‘어떻게 내가 라코젠을 만나서 돈을 받았다는 걸 아는 거지?’

브리트니의 손이 덜덜 떨리는 걸 보며, 드웨인이 입을 열었다.

“도대체 라코젠, 그 작자를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고 어떤 정보를 넘기고 돈을 받은 거지?”

“예? 폐하,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라, 라코젠을 제가 왜……?”

“네가 마석과 말을 사고 빌린 증거들까지 가져와서 보여줘야 하나?”

브리트니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이제야 비로소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드웨인이 들어줄 생각이 없다는 걸,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

‘어째서? 내가 뭘 어떻게 잘못한 거지? 나는 아이리스랑 똑같이 행동했는데, 왜 이렇게 된 거지?’

리시는 이번 전쟁에서 승리한 남편과 희희낙락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어쩌고 있나.

수많은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은가.

누구도 편들어주지 않고 비난과 조롱의 시선만 던지고 있지 않은가.

“폐하…… 폐하, 제가 잘못했어요.”

브리트니는 그 무슨 말을 해도 변명처럼만 들리리라는 걸 깨달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차라리 동정심에 호소하는 게 낫다.

드웨인은 날 사랑하니까, 내게 푹 빠졌으니까, 엉엉 울면 마음이 약해져서 안아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정말 잘못했어요. 저는 잘하려고…… 흑…… 그런 건데…… 어디서 잘못된 건지…… 정말…… 정말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그러면…… 그러면 정말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잘할게요.”

펑펑 울면서 애원하는 브리트니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에버렛이 입을 열었다.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에버렛의 대답을 기다린 건 아니었지만, 브리트니는 그녀의 환심이라도 사고 싶어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황후 폐하. 뭐든 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마음먹었다니 다행이군.”

에버렛의 다정한 음성에, 브리트니의 가슴에 희망이 싹텄다.

황실에만 남아 있을 수 있으면 된다.

이름뿐인 황비라도, 드웨인이 더는 찾지 않더라도, 이 황실에만 남을 수 있다면 앞으로 뭐든 할 수 있다.

기회는 언제나 찾아오는 법이니까.

그렇게 안도하는 브리트니의 귀에, 에버렛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명령이 들려왔다.

“황비를 폐비하겠네. 그간의 정이 있으니 그대가 가져다 쓴 돈에 책임을 묻지는 않겠지만, 이 황실에 있는 그 무엇 하나 가지고 나갈 수 없을 것이야. 또한, 그대의 어머니가 살던 저택은 정리한 지 오래이니, 모녀가 다정히 살 곳을 찾아보는 게 좋겠네.”

브리트니는 멍하게 에버렛을 올려다봤다.

자기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에버렛은 친절하게 한 번 더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드웨인을 돌아봤지만, 드웨인의 입술 역시 굳게 닫혀 있었다.

“예?”

그래서 멍청하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걸 신경 쓰지 않고 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는지……?”

에버렛은 브리트니의 의문을 풀어주는 대신, 근위대를 돌아보며 말했다.

“브리트니 위틀로를 황궁에서 치워버려라.”

(151) 잠 못 드는 밤

  에버렛의 예상대로 브리트니는 쉽게 나가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존심도 버리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외쳤다.

“제, 제발 용서해주세요. 용서해주세요, 폐하.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쫓아내지 마세요.”

브리트니가 울부짖는 모습에, 드웨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다른 신하들도 마찬가지였다.

한때 흠잡을 곳 없이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황실을 누비던 황비 브리트니.

그녀가 몸을 낮추고 애원하는 모습은, 저지른 죄와 관계없이 몹시 처절하고 비천해 보였기 때문이다.

어디서 급히 구해 입은 듯한 드레스에, 거칠어진 머리칼과 피부.

그런 몰골로 브리트니는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잘못을 빌었다.

차마 못 볼 꼴이라 다들 시선을 돌리는 가운데, 에버렛만이 고요히 브리트니를 지켜봤다.

-“어머나, 폐하. 그 드레스 입고 오셨네요. 제가 황제 폐하께 말씀드려서 폐하께 선물로 드리라고 청했거든요. 너무 저만 선물을 받는 것 같아서…….”

-“황제 폐하께서 자꾸 제 방에만 오시니, 황후 폐하를 뵐 면목이 없어요. 황제 폐하께 그러지 마시라고 말씀은 드리고 있는데…… 저 때문에 죄송해요.”

귀부인들을 앞에 둔 브리트니가 눈웃음을 살살 치면서 했던 말들이 귓가에 선했다.

드웨인의 사랑 따위 받고 싶지도 않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자존심을 긁어대는 브리트니의 태도 때문에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날이 여러 번이었다.

그럴 때마다 리시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참았다.

-“눈을 감고 귀를 닫으세요. 브리트니는 전하께서 참으면 참을수록 제가 누울 무덤을 깊이 팔 것입니다.”

정말로 그랬다.

또한 리시는 말했다.

-“황실 운영비와는 별도로 전하께서도 개인 자금을 충분히 가지고 계시는 게 좋겠어요. 언젠가 긴히 쓰일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날이 언제죠?”

-“그건 전하께서 스스로 알게 되실 겁니다.”

리시가 ‘그 날’을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은 이유를, ‘그날’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케이가 포로로 잡은 드웨인을 스티무어로 데려오기 위한 대가.

리시는 에버렛에게 선택권을 준 것이다.

그 돈으로 드웨인을 데리고 올지, 모르는 척할지.

마음 같아서는 드웨인을 그냥 내버려두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에버렛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 황제 자리에 오를 터였다.

황후가 되기 위해 살아온 에버렛의 인생이 무가치해진다는 의미였다.

‘드웨인도 지옥이겠지.’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의 손에 구해져서 살아가는 삶.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만 하는 삶.

황제임에도 황제다운 권력을 누릴 수 없는 삶.

드웨인에게는 모든 순간이 후회이고, 모든 순간이 절망일 터였다.

그거면 된다.

그리하여 에버렛은 드웨인을 구했고, 드웨인은 에버렛에게 꼼짝도 못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제 세상인 듯 황실을 누비던 브리트니는, 사람들 앞에서 납작 엎드려 추접스럽게 울부짖고 있었다.

에버렛은 근위병들에게 말했다.

“뭣들 하지? 치워버리라 했을 텐데.”

근위병들이 냉엄한 표정으로 브리트리를 향해 다가갔다.

“아, 안 돼요! 저한테 이러시면 안 돼요! 안 된다고요!”

근위병 두 명이 브리트니의 팔을 양쪽에서 하나씩 잡아 거칠게 일으켜세웠다.

“이러지 마세요. 이러시면 안 돼요. 제발 용서해주세요. 폐하, 드웨인. 드웨인, 날 사랑한다면서요? 날 위해 목숨도 주실 수 있다고 했잖아요. 살려줘요. 날 쫓아내지 마요. 제발, 제발 이러지 마요. 제가 잘할게요.”

근위병에게 끌려가면서도 브리트니는 애원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드웨인은 브리트니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고, 그 자리에 있는 귀족들은 경멸의 시선만 던질 뿐이었다.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내가 누군지 알고 감히! 내 몸에서 손 떼!”

브리트니가 발버둥치며 패악질을 부렸으나, 근위병들은 묵묵히 제 임무를 수행했다.

브리트니는 저주의 말 한번 읊조리지 못한 채, 궁 밖으로 쫓겨났다.

+++

가을 햇살을 받은 호수가 찬란하게 빛났다.

맑은 물에 비친 나무 그림자는 마치 호수 안에 또 다른 숲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어제 한차례 비가 와서 그런지, 하늘이 유독 맑았다.

리시는 저택 뒤쪽에 있는 숲의 호숫가에 돗자리를 펴놓고 앉아 있었다.

평화로운 정경에 감싸여 있지만, 마음은 그리 평화롭지 않았다.

‘벌써 9월…….’

전염병은 이제 샤크란 왕국을 떠나 대륙 곳곳으로 퍼지고 있을 터였다.

‘그래도 지난 삶보다는 진행이 느려.’

여기저기서 ‘걸리면 죽는 병’에 대한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고, 각 신문사들도 그 병에 대해 다루기 시작한 상황. 하지만 확실히 지난 삶보다는 진행이 느리다.

‘스파가 나름대로 도움이 됐나 봐. 다행이야.’

전염병은 깨끗한 저택에서 잘 씻고 잘 먹는 귀족들보다 빈민과 평민들 사이에서 더 빨리 퍼졌다.

리시가 운영하는 포레스트 스파의 모든 물은, 바챠라는 약초를 끓여서 섞은 물이었다.

그 물로 목욕을 하면 전염병을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었다.

지난번에 치료소에서 미네르바와 의원들에게 건네준 물도, 바챠를 끓인 물이었다.

바챠는 탈레하 왕국 근처의 무인도에서만 자라는 식물로, 현재는 그저 잡초 취급을 받고 있다.

리시는 탈레하의 왕과 교섭해서 무인도를 사들이고, 쟈메트에게 의뢰해서, 그 잡초를 뿌리가 상하지 않게, 최대한 많이 가져다 달라고 했다.

저택 뒤쪽 숲에 만들어놓은 커다란 온실들에서는, 그렇게 가져온 바챠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지난 삶에서는 바챠가 전염병 예방에 좋다는 게 너무 늦게 알려졌어.’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지난 삶과 같은 속도였다면, 지금쯤 샤크란 왕국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전염병이 번졌으리라.

‘그래도 완전히 예방하지는 못한 상태야. 신성국에서 얼른 결단을 내려야 할 텐데.’

안드리제 교황의 상태가 많이 나아지기는 했으나, 아직 공사를 살펴볼 정도로 회복한 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네르바는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각지에서 괴병이 등장한다는 소식은 신성국에도 전해졌지만, 산티아노는 계속 “별일 아닐 겁니다. 괜히 전염병이라고 떠들어봐야 민심만 혼란스러워질 뿐이에요. 안 그래도 그린 공작이 전쟁을 일으켜서 대륙 전체가 술렁이는 마당에, 경거망동해서는 안 됩니다.”라며 반대를 하는 모양이었다.

산티아노는 미네르바의 의견에 반대하는 한편 케이가 일으킨 전쟁이 아닌데도, 은근슬쩍 케이의 탓으로 모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산티아노가 반대하는 이유는 뻔해. 미네르바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지 않아서겠지.’

신성국 안에서만 있는 산티아노와 달리, 미네르바가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병자들을 치료한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 와중에 미네르바가 전염병까지 미리 알아냈다는 게 알려진다면, 많은 사람이 미네르바에게 존경의 시선을 보낼 것이 뻔했다.

그래서 산티아노는 기다리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이 병들고 죽을 때까지.

‘그러면 미네르바가 빠르게 전염병의 존재를 알아냈다는 사실이 더는 중요하지 않게 될 테니까.’

리시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나쁜…….’

“누님!”

쾌활한 음성이 어두운 생각을 몰아냈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리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호숫가에서 놀던 토미가 손을 붕붕 흔들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찰랑찰랑 흔들리는 회녹색 머리칼이 눈부셨다.

리시가 두 팔을 벌렸지만, 토미는 옛날처럼 리시의 품에 폭 안기는 대신 그 앞에 멈췄다.

“요새는 왜 안 안겨?”

“누님. 저는 이제 어른입니다. 어른 남자는 여인의 품에 함부로 안기는 것이 아닙니다.”

“……아, 그러니?”

리시는 또래보다 작은 토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저택에 온 후 잘 먹어서 통통하게 살이 오른 볼과 발그레한 뺨, 크고 둥근 눈과 작고 붉은 입술.

어디를 봐도 어른 같은 구석이 없지만, 그걸로 토미가 우쭐해질 수 있다면 어른 취급을 해주기로 했다.

“그럼 토미 경은 무슨 일로 그리 황급히 달려오셨나요?”

“이것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토미가 작은 손에 꼭 쥐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호숫가에서 발견한 조개껍질이었다.

하얀 껍질이 햇빛을 받으면 무지개처럼 찬란하게 빛나서, 마치 보석 같았다.

“어머나. 경의 배려에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남편이 있어서 남편이 아닌 어른 남자에는 사적인 선물을 받을 수 없답니다.”

리시의 거절에 토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진짜요?”

“그렇답니다.”

토미가 리시와 함께 있던 에르웰과 크리시나를 돌아봤다.

“진짜요?”

웃음을 참고 있던 크리시나가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예요, 토미 경.”

“그럼 난 경 안 할래요!”

토미가 리시의 품에 폭 안기며 외쳤다.

리시는 작게 웃으며 토미를 끌어안고, 아이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었다.

토미에게서는 햇살 냄새가 나서, 그 향기를 맡다 보면 술렁이는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누님. 나 어른 아니에요.”

“응, 그래. 다행이네. 나도 네가 아직은 어른이 아니면 좋겠거든.”

“그럼 이거 받아줄 거예요?”

“그럼. 받아서 평생 간직할 거야.”

아이가 찾아낸 보물이 리시의 손 위에 놓여, 가슴을 따스하게 물들였다.

리시는 귀한 보석을 받았을 때보다도 즐거운 마음으로, 조개껍데기를 소중하게 감싸 쥐었다.

토미는 제 볼에 와서 닿는 리시의 머리카락이 간지러운지 까르르 웃었다.

“아이리스.”

바람에 실려 들려오는 음성이 환청인 줄로만 알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리시의 얼굴에 달처럼 고운 미소가 번졌다.

우거진 나무 앞에 서 있는 훤칠한 사내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으나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고작 몇 개월 못 봤을 뿐인데, 몹시도 그리웠다는 걸 자각했다.

그의 검은 머리칼, 스치는 바람결에 드러나는 반듯한 이마와 짙은 눈썹, 깊고 신중한 청회색 눈동자, 그리고 리시를 앞에 두면 어김없이 풀리는 입매.

이제는 당연해진 그의 모든 것이, 새삼스럽게 좋아서, 행복해서, 괜히 눈가가 시큰거렸다.

리시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토미가 리시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아저씨!”

두 팔을 들어올리고 달려가는 토미와 두 팔을 양쪽으로 벌리고 기다리는 케이가, 지난 삶에서는 상상조차 못 했던 그 광경이, 리시의 시야를 따뜻하게 채웠다.

“어이쿠!”

자그마한 토미가 무거울 리 없건만, 케이는 엄청 무거운 것을 안아올리듯 끄응, 신음하며 토미를 안았다.

“언제 이렇게 큰 거야, 토미? 내일쯤에는 이렇게 안아주지도 못하겠어.”

“나 아직 작아요. 월라스가 토미는 손톱만 하댔어요.”

케이에게 안기지 못하는 게 싫은지, 토미가 얼른 항변했다.

“그래? 아직 작은가? 너무 큰 것 같은데.”

“아니에요. 아직 작아요. 손톱만 해요.”

케이가 웃으며 토미를 번쩍 올려 목말을 태웠다.

그러는 동안 그들에게 다가간 리시가, 그의 앞에 멈춰 고개를 들었다.

연보라색 눈동자와 청회색 눈동자가 애틋하게 마주쳤다.

“다녀왔어, 리시.”

이 말이 참 좋았다.

내가 그의 돌아올 곳이 된 것 같아서.

+++

아내와 오랜만에 재회하는 거라서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을 텐데도, 케이는 토미에게 할애하는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초조한 기색 없이 호숫가에서 토미가 잠들 때까지 놀아주었다.

저택까지 토미를 안고 돌아온 케이는, 토미를 크리시나에게 넘겨주면서 말했다.

“크리시나. 저녁은 알아서 먹을 테니, 아무도 방해하지 말라고 일러줘.”

크리시나의 옆에 있던 에르웰은 ‘꼭 저리 티를 내셔야 하나?’ 싶었지만, 오늘만큼은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그동안 리시를 실컷 독점했으니, 하루쯤은 양보하지, 뭐.

케이는 리시의 손을 꼭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가던 하녀와 하인들이 둘의 다정한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 주인님들은 금슬도 좋으시지.’

‘공작님은 전쟁 치르고 막 돌아오셨는데도 참…… 대단하시네.’

‘공작부인께서 저리 아름다우시니, 몇 달 간 얼마나 그리우셨을까?’

그린 가의 고용인들은 그런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배려를 보이며, 아무것도 못 보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흩어졌다.

케이는 온힘을 다해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침실이 있는 층에 접어들자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저기, 케이?”

리시는 침실 문을 거침없이 여는 케이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케이는 대답하는 대신, 리시를 닫힌 문에 밀어붙이고 그녀의 허리를 감아 고정시키며, 동시에 작고 도톰한 입술을 삼켰다.

리시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벌어지며 그를 받아들였다.

그는 오랫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사막을 헤맨 사람처럼, 그러다가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처럼, 갈급하게 리시를 탐했다.

그동안 그가 느낀 갈증이 선연하게 전해져왔다.

그는 리시와 닿은 곳에 전해지는 모든 것을 제게 각인시키겠다는 듯, 빠르면서도 신중하게 움직였다.

닿는 곳곳에 전율이 일었다.

이쯤 하면 되었는데 싶을 때까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 진짜로 숨이 넘어가겠다 싶을 때쯤에,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헐떡거리는 그녀를 향한 그의 눈동자는 음습하게 젖어 있었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오늘은 잘 생각하지 마, 리시.”

(152) 그거면 됐어.

그가 다시 입술을 눌러왔다.

리시의 모든 부분이 시원한 샘물이라도 된다는 듯, 그리도 달다는 듯, 그는 모든 것을 맛볼 때까지 입술을 떼지 않았다.

가빠오는 호흡이 턱 끝에 차올랐다.

달콤한 전율이 몇 번이나 리시의 육체를 치고 지나갔다.

작은 손가락이 그의 넓은 어깨를 움켜쥐고, 손톱이 그의 살결에 작은 상처를 냈지만, 그래도 그는 리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전신에 제 체취를 묻히겠다는 듯이.

침실 문에서 침대까지 이동하는 시간이 몹시도 오래 걸렸다.

리시가 침대에 눕기도 전에, 케이는 그녀의 전신에 불긋한 낙인을 새겼다.

리시는 제 몸 위에 느껴지는 그의 무게감에 안도했다.

묵직하게 전해지는 그의 무게가 이 침실을 온전하게 만들었다.

케이는 팔꿈치로 상체를 지탱하고 리시에게 깊은 입맞춤을 하다가 입술을 떼었다.

오롯이 리시를 볼 때만 다정하게 풀리는 청회색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제 아내를 가득 담았다.

그의 엄지가 리시의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 귀 뒤로 넘겼다.

그는 제 앞에 있는 여인이 이 세상에서 가장 얻기 힘든 보물이라도 된다는 듯, 경이롭게 응시하며 이마나 볼, 귀를 쓰다듬었다.

아무 대화도 오가지 않았으나, 리시는 아주 많은 감정을 전해 받았다.

리시가 눈을 감자, 그의 숨결이 가까워졌다.

종아리에 얽히는 이불, 사락사락 흔들리는 침대보, 그 위를 적시는 뜨거운 숨.

+++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가슴을 누르는 무거운 느낌에 눈을 떴더니, 케이에게 안긴 채 잠들어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땀에 젖은 그의 탄탄한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반질반질한 그의 가슴에 저도 모르게 손을 가져갔다.

손가락 끝에 착 달라붙는 살갗의 느낌이 야릇했다.

“내 아내는 지치지도 않는군.”

정수리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라 손가락을 떼었다.

“나 때문에 깼어?”

“아니.”

그가 리시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안 잤어.”

“피곤하잖아. 좀 자지.”

“너무 보고 싶었거든. 아까워서 못 자겠어.”

그가 리시를 안은 팔에 힘을 줘 바짝 끌어안았다.

“저런. 정말 보고 싶었나 보네.”

“뭐라고 해야 할까? 이 정도면 좀 심각한 거 아닌가, 어쩌면 병일지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보고 싶었어.”

그가 그리움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리시의 귀와 목덜미에 꼼꼼히 입을 맞췄다.   잠들기 전까지 그를 받아들이느라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는데도, 그의 입술이 닿자 또다시 몸이 뜨거워졌다.

리시는 두 팔을 뻗어 그의 허리를 꽉 죄듯이 안았다.

“케이, 그만. 더 하면 난 한 달간 꼼짝도 못 하고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할지도 몰라.”

“놀랍게도 내 아내는 치유의 반지를 가진 유물술사라서, 피곤함과 근육통 따위는 깨끗이 없앨 수 있지.”

“그런 데 쓰려고 치유의 반지를 끼고 있는 게 아니거든.”

케이가 키득거리며 리시를 놔주고 얌전히 옆에 누웠다.

그는 엎드려서 팔에 얼굴을 괴고 리시를 응시했다.

느른하게 엎드려 있는 케이는 인간의 모습인데도 커다란 검은 늑대처럼 보였다.

리시는 그의 머리를 헤집듯이 살살 쓰다듬었다.

“오늘쯤에는 좀 적당히 예쁠 줄 알았는데, 어떻게 더 예뻐진 거야? 나 몰래 뭐라도 해?”

“바보 같은 소리 좀 하지 마, 케이.”

“바보 같은 소리라니. 당신을 볼 때마다 예쁨의 정점을 찍었구나 싶은데, 다음 날 보면 어제보다 더 예뻐지더라? 아무래도 나 몰래 뭔가 하는 것 같은데.”

케이의 실없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리시는 그와 조금 더 빈둥거리다가 이불을 끌어안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아직은 그에게 모든 모습을 당당하게 보여주는 게 민망했다.

그보다 더한 모습을, 몇 번이나 보여주었는데도 그랬다.

리시와 달리 케이는 당당하게 침대에서 내려와, 리시의 앞을 막아섰다.

리시가 일부러 그의 몸을 꼼꼼히 살펴보는 시늉을 했는데도, 그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자기는 민망함이라는 게 없나 봐?”

“오.”

케이가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리시를 이불 채로 번쩍 들어 올리는 바람에, 리시는 작게 비명을 질렀다.

“방금 그거 좋은데?”

“응?”

“자기, 라는 말.”

“아…….”

리시의 볼이 발그레 물들었다.

나흘 전. 혼자 있을 리시가 걱정된 젠이 찾아왔었다.

멀리서 고생하는 케이가 걱정이라는 리시의 말에, 젠은 한동안 망설이더니 말했다.

-“케이가 좋아하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지만…… 좋아요, 새언니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한 가지 조언을 해줄게요.”

젠은 케이를 ‘자기’라고 불러보라고 했다. 아니면 ‘여보’도 좋고.

-“젠. 케이는 목숨을 걸고 전쟁을 한 건데, 고작 호칭 좀 바꾼 걸로 보상이 될까요?”

-“한번 해보기나 해요. 좋아하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말고.”

그렇게 말하는 젠이 몹시 자신만만해 보였기에, 리시는 연습했다.

아무래도 ‘여보’는 너무 간지러워서, ‘자기’를 연습했다.

지금껏 리시가 한 번도 입에 담아본 적 없는 호칭이었다.

케이를 보자마자 ‘자기야.’라고 불러보려 했는데, 보는 사람도 많고 어색하기도 해서 관뒀다.

앞으로도 케이를 ‘자기’라고 부를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방금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케이가 이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연습하길 잘했네.’

케이는 리시를 높이 안아 올리고,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주인에게 칭찬받은 커다란 강아지 같았다.

“한 번 더 해줘, 리시.”

“글쎄, 너무 자주 하는 건 좀…….”

“어서.”

케이가 채근하며 눈을 감았다.

‘자기’라는 호칭을 한껏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듯.

이렇게까지 기다리는데 안 해줄 수도 없었다.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면서 하는 건 좀 민망해서, 목을 기울여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자기야.”

“아, 진짜 좋다. 한 번 더.”

“자기.”

“한 번 더.”

“……케이.”

케이가 웃으며 눈을 뜨고 리시를 내려주더니, 리시의 이마와 볼과 콧등에 쪽쪽쪽 입을 맞췄다.

이윽고 감격에서 벗어난 그가 짐짓 엄하게 물었다.

“그런데 내 자기는 지금 안 자고 어딜 가려는 거지?”

“당신의 자기는 슬슬 씻고 옷을 좀 입은 후에 남편이랑 단둘이 축배를 들려고 하는데…… 내 자기가 별로 안 좋아할까?”

“둘만의 축배? 싫어할 리가 없지.”

리시는 제 방의 욕실에서, 케이는 그의 방의 욕실에서 씻었다.

젖은 머리를 대충 말리고 편한 원피스를 입은 후, 외투를 걸치고 나왔더니 케이가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손을 잡고 내려와 주방으로 향하자, 하녀 한 명이 꾸벅꾸벅 졸고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주인님, 주인마님. 식사하러 오셨나요?”

주방 카운터 위에는 돔디쉬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저녁을 들고 올라왔다가, 케이와 리시를 방해할 수가 없어서 도로 가지고 내려왔나 보다.

“우리가 알아서 할게. 그만 가서 자도록 해.”

“아니에요, 주인님. 필요하신 게 있으면 챙겨드릴게요. 요리를 다시 해드릴까요?”

“정말 괜찮아, 르잔.”

하녀는 공작인 케이가 한낱 하녀인 자신의 이름을 알아줄지 몰랐는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허둥거렸다.

“네, 예. 아, 저기…… 그럼…… 필요하시면 언제든 종을 울리세요.”

하녀가 케이와 리시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총총총 사라졌다.

그녀가 떠난 후, 케이와 리시는 함께 안주와 술을 챙겼다.

그들은 챙긴 것을 들고 정원으로 나갔다.

가을꽃이 흐드러지게 핀 화단 사이를 지나, 작게 만들어놓은 온실 앞에 도착했다.

투명한 유리 온실 안을, 은은한 조명이 비추고 있었다.

온실을 앞에 두고, 그들은 나란히 앉았다.

들고 온 안주는 케이의 옆에, 술병과 잔은 리시의 옆에 내려놓았다.

리시는 고급스러운 잔에 술을 따라 케이에게 건네고, 자신의 잔도 채웠다.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아주 많이 고생했어, 케이.”

“당신도.”

케이가 잔을 내밀었다.

두 개의 잔이 부딪치며 우아한 소리를 흘렸다.

향 좋은 술을 한 모금 마신 케이가 말했다.

“이런 것도 좋네. 격식 없이, 술을 마시는 거.”

“응, 그러게. 우리가 이렇게 테이블도 없이, 새벽부터 술을 마시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하겠어?”

케이가 접시에서 카나페를 하나 들어 리시의 입에 넣어주었다.

리시가 반만 베어 먹은 카나페의 남은 부분은 케이의 입안으로 사라졌다.

“이제 스티무어 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쟈메트 상단 한정으로 통행세를 받지 않기로 했고, 포레스트 상회에서 파는 모든 물건에 세금이 부과되지 않을 거야.”

“응. 이제 바챠초를 아무 문제 없이 들여올 수 있겠어.”

바챠는 더운 곳에서만 자라는 풀이었다.

저택 부지 곳곳에 온실을 만들어서 재배하고 있긴 하지만, 그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탈레하 왕국으로부터 사들인 무인도에 이미 인부를 보내서 땅을 개간하고 바챠를 잔뜩 심어서 재배했지만, 스티무어 왕국이 너무 높은 세금을 부과한 데다가 이런저런 사유를 붙여서 통행을 제한했기에, 바챠를 들여올 수가 없었다.

무인도에 간 관리인의 말로는, 커다란 창고 여러 개가 바챠로 가득 차서 썩어가고 있다고 했다.

“그래도 당신이 예상한 것보다 전염병 확산이 느려서 다행이야. 스파 덕분이겠지.”

리시를 보는 케이의 눈에 경이로움이 담겨 있었다.

“당신이 스파 사업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만 해도, 이런 데 쓰려고 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어. 언질 좀 해주지.”

“내가 너무 많은 걸 바꿔서, 벌어지지 않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스파 사업으로 돈을 벌려고 한 것도 사실이고.”

“앞으로 스파에 바챠로 끓인 물이 있다는 걸 알면, 어마어마하게 손님이 늘겠군.”

“응. 하지만 초반에는 이익을 좀 포기할 생각이야. 신성국이 전염병을 인정하는 대로, 에르웰이랑 크리시나가 섭외해준 학자들이 전염병의 원인을 발표할 거야. 곧바로 예방에 좋은 약초에 대해서도 발표할 거고. 마탑도 치료약 개발에 들어가겠지.”

리시가 케이를 돌아봤다.

“나는 바챠도, 치료약도 전부 신성국에 기부할 거야. 미네르바 앞으로.”

케이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리시라면 그렇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물었다.

“손해가 클 텐데 괜찮겠어?”

“평생은 아니야. 적어도 전염병이 크게 위험해지지 않을 때까지만 기부할 거야. 그 후에는 스파 안의 상점에서 적당한 가격을 받고 팔 거고.”

“다들 한번 전염병의 무서움을 겪어봤으니, 스파에 드나드는 걸 멈추지 않겠군.”

“응. 바챠를 직접 사서 사용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이미 포레스트 스파가 무시무시한 전염병을 예방했다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은, 또 다른 병을 예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고 스파에 방문하게 될 것이다.

“우리 영지는 관리들이 나서서 포레스트 스파의 이용을 권장하고, 다른 지역에 비해 스파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벌써 치료소 쪽에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이 입원하고 있어. 케이, 나는 내일부터 매일 치료소에 가서 사람들을 치료해줄 생각이야.”

리시의 각오에 케이는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그래, 내가 도와줄 건?”

“이쪽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당신은 그동안 고생한 부하들이랑 병사들에게 포상 좀 해주고, 전쟁으로 죽은 사람들의 가족들에게도 위로를 전하도록 해. 필요한 돈은 가우저에게 얘기하면 될 거야.”

“당신이 힘들게 모은 돈인데…….”

리시가 자신의 술잔으로 케이의 입술을 꾹 눌렀다.

“케이. 우리 가족이잖아.”

“구애도…….”

케이가 웅얼웅얼 항변하자, 리시가 저택 쪽을 쭉 돌아본 후 다시 케이와 눈을 맞췄다.

“그렇게 따지면 이 저택은 당신 거지. 나, 당신한테 숙박비 줘야겠네?”

케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썹 끝을 늘어뜨리더니, 검지로 잔을 살짝 밀어냈다.

“알겠어. 당신 뜻이 정 그렇다면, 그냥 집에 눌러앉아서 능력 좋은 아내 돈이나 펑펑 쓰는 기둥서방으로 살지, 뭐.”

“그래, 원래 반려동물은 굳이 돈이 어디서 나오는지, 밥이 어디서 나오는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법이야. 그냥 귀엽기만 하면 돼. 당신은 충분히 귀여운 늑대니까, 그거면 됐어.”

“와, 늑대인 게 이렇게 좋은 건 줄 몰랐네.”

오랜만에 만난 부부가 알콩달콩 속삭이듯 나누는 대화를, 어둠 속에 숨어 있던 한 남자가 조용히 듣고 있었다.

(153) 버리지 마세요.

‘어떡하지?’

월라스는 생각했다.

‘나, 진짜 어떡하면 좋지?’

온실 앞 벤치에 앉아 있는 케이와 리시가 너무 꽁냥꽁냥 행복해 보여서, 월라스는 도저히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케이는 귀가 좋으니, 월라스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기척을 눈치챌 것이다.

그나마 리시에게 집중한 상태라서, 아직까지 월라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리라.

‘왜 하필이면 여기로 오셔서……!’

따지고 보면, 케이와 리시가 불청객이었다.

리시는 온실 옆에 있는 크고 무성한 나뭇가지 위에서 달을 감상하며 누워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었다.

속살거리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내 대장과 형수가 저러고 있다.

‘대장의 저런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았어!’

케이가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건, 아주 좋았다.

리시가 옆에 있으면 평소보다 바보 같고 멍청해 보이기는 해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기둥서방 운운하고, 반려동물이란 소리에 기뻐하는 대장은 정말이지 보고 싶지 않다.

너무 멍청해 보인다.

‘난 이제 대장을 보면 커다란 강아지만 생각날 거야.’

결혼 전에 부하들에게 케이는 위용 있는 흑늑대였다.

사자나 호랑이보다도 강렬한 눈빛과 위엄을 비산하는, 아름다운 흑늑대.

하지만 리시 앞의 케이는 그저 멍멍이였다.

‘강아지도 아니야. 멍멍이야……. 어떡하지?’

그나마 저 꼴을 본 게 자신이라서 다행이다.

제이미나 나단이 보았다면, 아니, 만약 젠이 저 꼴을 보았다면, 저 광경은 한 권의 책으로 쓰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큰돈 들여서 찍어낸 후, 여기저기 뿌려댔겠지.

‘대장은 저한테 감사해야 해요. 저는 그런 파렴치한은 아니잖아요.’

월라스가 어떻게 해야 이 지옥을 탈출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케이와 리시가 갑자기 입맞춤을 시작했다.

“헙!”

저도 모르게 숨 들이마시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큰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케이는 리시에게서 입술을 떼고, 월라스가 있는 방향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스레한 불빛 속에서, 케이의 눈동자는 남색으로 빛났다.

그 눈동자가 정확하게 월라스가 앉아 있는 나무 위에서 멈췄다.

월라스는 숨을 죽였다. 날짐승이라 여기고 넘어갈 수도 있으니까.

“월라스.”

망했다.

월라스는 이를 악물고 잠시 마음을 추스른 후, 나뭇가지 위에서 뛰어내렸다.

“제가 먼저 왔어요, 대장.”

몇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월라스는 곧바로 말했다.

“전 자고 있었다고요. 제 잠을 방해한 건 대장이에요.”

항변하면서 보니, 리시의 얼굴이 발그레 물들어 있었다.

형수님이 수줍어하는 모습을 보자, 월라스도 민망해서 얼굴이 홧홧했다.

“형수님.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월라스. 나한테는 대거리를 하더니, 왜 리시한테는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사과하는 거야?”

“형수님은…… 좀 그렇잖아요. 뭐라고 해야 할까……?”

월라스는 적당한 단어를 찾아서, 자신의 짧은 지식을 전부 뒤져보다가 덧붙였다.

“영웅.”

“아, 그렇긴 하지.”

케이까지 동의하자 리시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영웅이라니……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요, 형수님. 형수님이 안 계셨으면 이번 전쟁은 정말 어려웠을 거예요. 많은 사상자가 나왔겠죠. 형수님은 제 영웅이세요.”

월라스는 리시처럼 모든 것을 어렵지 않게 해내는 위대한 형수님께서 칭찬 몇 마디에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아, 저래서 우리 대장이 형수님만 앞에 두면 정신을 못 차리는구나.

“형수님. 앞으로도 저희 대장을 잘 부탁드립니다. 버리지 마시고, 잘 키워주세요.”

 

+++

던져지듯 궁 밖으로 쫓겨난 후에도, 브리트니는 포기하지 않고 한참을 매달렸다.

굳게 닫힌 황궁의 문을 잡고, 제발 들여보내 달라고, 잘못했다고 애원했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고, 브리트니의 애원을 들어주는 이도 없었다.

“흐으으…… 흐으으으…….”

엎드려서 한참을 울던 브리트니의 머릿속에 어머니인 데니스가 떠올랐다.

에버렛은 데니스가 살던 저택도 정리했다고 했다.

“엄마…….”

브리트니는 비틀거리며 데니스가 살던 저택을 향해 걸었다.

황궁에 돌아오는 길에 산 싸구려 구두 때문에, 오래 걸은 것도 아닌데 발이 찢어질 듯 아팠다.

스티무어 황궁이 있는 수도에서, 이런저런 소문이 무성했던 황비 브리트니는 얼굴이 알려져 있었다.

초췌한 몰골의 브리트니가 눈물 범벅이 되어 비틀비틀 걷는 모습을, 시내에 있던 사람들이 흘끔흘끔 쳐다봤다.

“황비가 왜 저러고 있지?”

“못 들었어? 이번 전쟁으로 황제가 폐위될 뻔했었잖아. 그걸 황후가 큰돈 들여 데려온 거고. 황제가 고집을 부려서 황비 자리에 앉힌 여자니까, 황후가 쫓아냈겠지.”

“그렇다고 저렇게까지 비참한 몰골이 돼? 그래도 황비였는데?”

“황비 되기 전에는 그거였잖아. 위틀로…….”

“아, 깜빡했네.”

사람들이 소곤거리는 소리는 브리트니의 귀에 닿지 못했다.

브리트니의 머릿속도, 가슴도, 절망으로 새까맣게 타버려서, 보는 눈과 들리는 소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데니스의 저택의 대문은 닫혀 있고, 그 앞은 처음 보는 문지기가 지키고 있었다.

브리트니가 들어가려고 했지만, 문지기는 차가운 표정으로 브리트니를 막았다.

“이 저택은 황후 폐하께서 직접 관리하시는 별장이다.”

문지기의 예의 없는 말투에, 브리트니는 조금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꼿꼿하게 든 브리트니가 서릿발 같은 눈으로 문지기를 노려봤다.

“내가 누군지 모르느냐! 나는 황비…….”

“황비는 X랄. 쫓겨난 주제에.”

“뭐라고? 이게……!”

브리트니가 손톱을 세우고 달려들었지만, 문지기는 슬쩍 옆으로 피했다.

브리트니는 제가 낸 속력을 이기지 못하고 대문에 쿵 부딪쳐 나가떨어졌다.

문지기가 경멸 어린 눈으로 브리트니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냥 폐비 된 정도가 아니라, 황실 돈을 다 가져다가 쓰고 빚까지 졌다지? 자애로우신 황후 폐하께서 그걸 용서하고 쫓아낸 정도로 끝내셨으면, 감사한 마음으로 먹고살 길이나 찾아.”

“자애로워? 그 악독한 계집이 자애롭다고?”

문지기가 브리트니의 손목을 거세게 틀어쥐었다.

사내의 강한 힘에 브리트니는 덜컥 겁에 질렸다.

지금은 브리트니를 보호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그제야 떠올린 탓이었다.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은 철저히 방관자의 입장에서, 재미있는 연극이라도 보듯 구경만 하고 있었다.

“지금 한 번은 못 들은 척해주지. 하지만 한 번 더 황후 폐하를 욕되게 하는 소리를 하면, 그에 맞는 벌을 받아야 할 거야.”

브리트니는 이를 아득 씹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황궁에 다시 돌아가지도 못할 것이다. 돌아간다 해도 예전과 같은 대우를 받지는 못할 테고.

‘살길을 찾아야 해.’

문지기의 무례한 태도에 도리어 머리가 차게 식었다.

‘우선 엄마를 찾고…… 살길을 찾아야 해. 할 수 있어. 나는 할 수 있어.’

드웨인을 만났을 때처럼, 멋지고 좋은 남자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시골 구석에서 형편없는 옷을 입고 주저앉아 있는데도, 드웨인은 브리트니에게 홀딱 빠져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려 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할 수 있으리라.

‘난 여전히 예뻐. 지금은 이렇지만…… 조금만 꾸미면…… 그래, 황비는 이제 됐어. 황후에게 휘둘리는 황제 따위는 필요 없어. 나는 좀 더 강하고, 명예가 있는…….’

케이가 떠올랐다.

‘그런 남자…….’

브리트니는 문지기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일어나 허리를 꼿꼿이 폈다.

오만한 눈으로 문지기를 노려보며 물었다.

“내 어머니는 어디 계시지?”

“모르지. 며칠 전에 쫓겨나면서 너처럼 징징 짜다가 어딘가로 가버리던데?”

“……나쁜 새끼. 내 어머니에 대해 그따위로 말하지 마!”

문지기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데니스가 이 저택에 사는 동안, 고용인들을 얼마나 모질게 대했는지 다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고운 말이 나올 수가 없었다.

문지기가 콧방귀를 뀌자, 브리트니는 더 알아낼 것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구경꾼들을 향해 물었다.

“어머니가 어디로 가셨는지 알아요?”

다들 눈치만 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내 어머니가 어디로 갔는지 아느냐고!”

브리트니가 빽 외치자, 나이 지긋한 노인이 성문 쪽을 가리켰다.

“성 밖으로 나가는 걸 본 사람이 있다더군.”

브리트니는 자비를 보여준 노인에게 감사 인사도 하지 않고 성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또각또각 걷다가 발이 너무 아파서, 결국 구두를 벗어버렸다.

맨발로 걸어가는 브리트니를 동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일부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꼴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황제를 구해서 돌아오자마자, 황실에서는 ‘황비가 개인적으로 황실 운영비를 탕진하여 구휼 활동이 힘든 상황이다.’라는 발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린 공작이 자비롭게도 군인 이외의 사람들을 해치지 않고 진격하기는 했으나, 피해가 아주 없을 수는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최근에는 위험한 병에 걸린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황실에서 국민을 굽어살펴야 하는 상황에 황실 운영비가 모자라서 도와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전부 브리트니가 위틀로 아카데미 따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스티무어 변경을 조금 벗어난 곳에 포레스트 치료소가 있다는 점이었다.

드웨인과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포레스트 치료소는 병자를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고, 전쟁이 끝난 지금은 치료소의 의원들이 몸소 각 도시를 돌아다니며 병에 걸린 사람들을 아주 저렴한 가격에 치료해주고 있었다.

전쟁을 했음에도, 스티무어 국민들의 마음속에는 그린 가문을 향한 존경심이 싹텄다.

그러니 몇 년 전 그린 공작부인에게 몹쓸 짓을 하다가 쫓겨난 브리트니가 곱게 보일 리 없다.

그 사실을 모르는 브리트니는 냉랭한 시선을 받으며 성문을 빠져나왔다.

성 밖에서도 한참을 헤맨 끝에야, 목장에 의탁하고 있는 데니스와 재회했다.

창고처럼 보이는 방을 간신히 얻어서 지내던 데니스의 처참한 모습에, 브리트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데니스가 달려와 브리트니를 끌어안고 울었다.

“이게 웬일이래니? 응? 이게 웬일이래?”

“어, 엄마…… 엄마, 엄마. 우리 이제 어떡하지? 어떡하지? 우리 정말 어떡해?”

“황제는…… 황제는 뭐래? 정말로 널 그대로 내치신다니? 네가 그렇게 잘했는데도?”

브리트니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 새끼는 틀려먹었어. 황후한테 콱 붙잡혔어. 돌아가봐야 내가 있을 자리도 없을 거야.”

“그래도 돌아가야지. 잠시 고개를 숙이더라도 황실에 있어야지.”

“싫어. 황후한테 고개를 숙이고 사느니, 밖에서 양이나 치는 게 나아.”

어차피 황실로 돌아갈 방법도 없었지만, 한 조각 남은 자존심으로 브리트니는 자신이 그 자리를 거부하는 것처럼 말했다.

한참 브리트니를 설득하던 데니스는 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데니스는 한참 고민하다가 결심하고 말했다.

“브리트니. 우리, 아이리스한테 가자.”

“뭐? 미쳤어? 우리가 거길 왜 가? 또 무슨 꼴을 당하려고!”

“이번에는 잘 지내보면 되지. 아무리 그래도 가족이고…… 그래, 나야 남이라 해도, 너는 그 애와 아버지가 같잖니. 네 아버지 그렇게 되고 나서, 분명 그 애도 후회했을 거다. 그러니 가서 그 애가 사과할 기회도 주고, 이번에는 그 애랑 잘 지내보는 거야.”

데니스의 설득에 브리트니의 눈이 흔들렸다.

‘아이리스랑 잘 지내라고?’

한때는 그러고 싶을 때도 있었다.

아주 오래전, 이제는 기억도 희미해질 만큼 어릴 적.

예쁜 여동생이 생겨서 좋았고, 언니, 언니, 하며 따라다니는 동생이 귀엽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아이리스가 싫다. 이렇게 된 건 전부 아이리스 때문이다.

“싫어. 난 걔랑 웃으면서 수다 떨고 그러는 거, 상상도 못 하겠어. 끔찍해.”

“이리 와, 내 불쌍한 딸.”

데니스가 브리트니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네 마음은 알아. 나도 그래. 하지만 어쩌겠어? 너, 이런 곳에서 소여물 주며 살 수 있겠어? 정말 그걸 할 수 있겠어?”

“…….”

“여기 며칠 살았을 뿐인데도 정말 죽을 것 같아, 브린. 가서 진짜로 잘 지내라는 것도 아니야. 우리가 평범하게 살 수 있을 정도로만 도움을 받자는 거지. 그 애도 우리를 모르는 척하지는 않을 거다.”

브리트니는 창고 안을 둘러봤다.

데니스가 덮고 잤을 게 분명한, 냄새 나는 모포. 여기저기 쌓인 농기구들. 구석구석을 점령한 곰팡이.

브리트니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이리스가…… 우리를 도와줄까?”

“최대한 불쌍해 보이면, 그 애도 냉정하게 내치지는 않겠지.”

데니스가 모포를 들추더니, 그 안에서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그 안에는 장신구 몇 개가 들어 있었다.

“쫓겨나기 전에 좀 챙겨서 나왔어. 이걸 팔면, 그린 저택까지는 갈 수 있을 거야.”

(154) 그 지옥

  리시는 이른 아침부터 다코트 시에 있는 치료소로 향했다.

에르웰과 크리시나도 함께였다.

전염병에 감염될 수도 있으니 혼자 가도 괜찮다고 했지만, 리시의 충성스러운 시녀들은 굳이 리시를 따라왔다.

치료소에서 일하던 의원들은 공작부인의 방문에 크게 놀라 허둥거렸다.

“고, 공작부인. 지금 여기는 위험합니다. 병자들이 밀려 들어오는데 아무래도 전염병인 것 같아서…….”

“의원. 나는 도우러 온 거예요. 내게 예의를 차릴 시간에 얼른 병자들을 치료하도록 하죠.”

리시가 두 팔을 걷어붙이고 병실로 향하는 걸, 의원들은 막을 수 없었다.

감히 공작부인의 몸에 손을 댈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리시의 뒤를 따라간 의원들은, 그 병실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거의 죽어가는 병자의 옆에 선 리시는, 겁도 없이 병자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아, 안 됩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의원의 외침에도, 리시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일이 벌어졌다.

리시의 손에서 퍼져나오는 푸른 빛.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성스러운 푸른 빛이 잔잔하게 병자의 몸을 감싼 것이다.

그러자 병자의 호흡이 서서히 안정되고, 창백했던 몸에 혈색이 돌아왔으며, 끊임없이 터져 나오던 피 섞인 기침이 멈췄다.

리시가 유물술사라는 것은, 신성국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신성국 밖에서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때문에 그 자리에 있는 의원들과 병자들의 눈에는, 그 모습이 위대하고 자애로운 신 에렌이 보내준 천사로만 보였다.

“서…… 성녀님…….”

방금 전까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던 병자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리시는 그의 어깨를 지그시 눌러서 눕혔다.

“좀 더 쉬도록 해요.”

“서, 성녀님이시다! 성녀님!”

“성녀님, 저, 저도…… 쿨럭…… 쿨럭…… 제발…… 제발 살려…… 쿨럭…….”

“성녀님…… 쿨럭…….”

기적을 목격한 병자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리시가 몸을 돌려 그들을 향해 다정한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위급한 사람부터 한 명씩 치료할 거예요. 다들 얌전히 기다려요.”

그래서 병자들은 그렇게 했다.

리시가 병자들을 치료하는 동안, 에르웰과 크리시나는 의원들의 일을 도왔다.

리시의 치료를 받고 나은 병자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몸을 닦아주고, 피 묻은 시트를 걷어다가 빨았다.

그렇게 몇 개의 병실을 돌고 나온 리시는, 복도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에 에르웰이 깜짝 놀라서 다가와 리시를 부축했다.

“아이리스 님, 괜찮으세요?”

“응, 좀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야겠어요.”

“그러세요. 너무 무리하지 않기로 하셨잖아요. 공작님 눈 돌아가실걸요.”

리시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긴 한데…… 한 병실은 다 돌아야 할 것 같아서…… 중간에 그만두면 같은 병실에 있는 병자들이…….”

“아, 반발하겠네요. 자기는 왜 안 치료해주냐면서.”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생사가 오가는 상황이니 이기적인 속내를 감출 수 없는 사람들도 있을 터였다.

백번을 잘해도 한 번을 못 하면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리시는 자신의 힘으로 모두를 구할 수 없다는 걸 인정했기에, 우려하는 상황이 오는 걸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어서 전염병 발표가 나야 할 텐데…….’

 

+++

거지꼴을 한 모녀를 앞에 두고, 제이미는 감탄했다.

‘대체 형수님은 이런 걸 다 어떻게 예측하시는 거지?’

며칠 전, 리시가 제이미를 불러서 언질해둔 이야기가 있었다.

-“브리트니가 찾아올지도 몰라요. 만약 온다면 아주 불쌍한 몰골이겠죠.”

-“설마 스티무어에서 쫓겨났다고 여길 올까요? 그런 일이 있었는데…….”

-“아마도 올 거예요. 안 오면 좋겠지만…….”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되지요?”

-“응접실로 안내하고 먹을 걸 좀 챙겨주도록 하세요.”

그 대화를 나눴을 때만 해도, 이번만큼은 리시가 틀릴 거라고 예상했다.

위틀로 공작가문은 리시 때문에 무너졌다. 글로번 위틀로는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아무리 힘든 처지가 되었다고 해도 리시에게 도움을 청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까?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생각 따위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리시가 옳았다.

브리트니와 데니스는 찾아왔다. 그들은 불쌍한 몰골이었지만, 예리한 제이미의 눈까지 속이지는 못했다.

‘신발 상태를 보니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군. 옷도 일부러 찢어서 허름해 보이게 만들었고. 동정심에 호소할 생각인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케이의 부하들 사이에서 거의 ‘신’처럼 여겨지는 리시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계획해두신 일이 있을 것이다.

제이미는 리시가 말한 대로 그들을 응접실로 안내한 후, 배를 채울 만한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제이미가 나간 후, 데니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 봐. 불쌍한 모습으로 찾아오면 잘 대해줄 거라고 했지?”

“으응…….”

쉽게 들어올 수 없을 줄 알았던 저택에 별 노력 없이 들어와서, 근사한 요리까지 대접받았지만, 브리트니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앞으로 리시 앞에서 굽실거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따뜻한 곳에 들어와서 고급스러운 소파에 앉아, 고급 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으니 마음이 조금씩 풀어졌다.

치료소에 나가 있던 리시가 돌아온 건, 브리트니의 가슴에 새로운 희망이 싹트기 시작할 때였다.

본채 앞에서 리시를 기다리던 제이미는, 리시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브리트니의 방문을 알리려고 다가갔다가, 리시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형수님. 너무 안 좋아보이시는군요. 심하게 무리하셨습니까?”

“좀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런데…… 제이미가 여기 나와 있는 걸 보니, 휴식을 가질 여유가 없을 만한 일이 생긴 모양이네요.”

리시가 어느 정도 쉴 때까지, 브리트니의 방문을 숨기려 했던 제이미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좀 기다려도 되지요. 좀 쉬세요, 형수님.”

“아니에요. 귀찮은 일은 빨리 끝내는 게 낫죠.”

리시는 얼굴을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걷어내며 서늘하게 말했다.

“두 번 다시는 날 찾아올 생각이 들지 않게 치워버려야겠어요.”

 

+++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브리트니는 벌떡 일어날 뻔했지만, 가까스로 앉아 있는 자세를 유지하고 고개만 돌렸다.

리시가 들어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기는 하지만, 리시에게 너무 비굴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데니스의 생각은 다른지, 일어나서 리시를 향해 다가갔다.

“아이리스, 오, 얘야. 건강해 보이는구나.”

리시는 치료소에서 막 돌아온 참이라서 힘을 회복하지 못해 병색이 완연했지만, 데니스의 눈에 그런 건 들어오지 않았다.

리시는 다가오는 데니스를 무시하고, 그들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데니스도 민망한 듯 웃으며 브리트니의 옆에 돌아와서 앉았다.

“무슨 일이죠?”

리시가 차게 물었다.

“얘야. 얘기를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사정이 많이 안 좋아졌단다. 스티무어의 황제가…… 그자가 우리 브리트니를 사랑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우리 애를 내쳤어. 전쟁도 지가 하고 싶어서 한 주제에, 전부 우리 애 탓으로 돌린 거야. 그 때문에 우리는 스티무어에서도 살 수가 없게 됐어.”

“그래서요?”

“알잖니. 그이도 그렇게 되고 나서, 우리가 있을 곳이 없어진 거…… 우리도 네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지만, 조금만…… 정말 조금만 도와준다면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고 우리끼리 어떻게든 살아가 보마.”

“그래요? 어떤 도움을 바라시는데요?”

리시의 질문에 데니스의 눈이 반짝 빛났다.

리시가 자기들을 도와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저택을 하나 마련해다오. 이렇게까지 큰 저택은…… 마련해주면 좋겠지만, 이것보다 작아도 괜찮아. 시내 쪽이면 좋겠지만, 시내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어도 좋고…… 고용인은 열…… 아니, 다섯 명 정도만…… 그리고…… 생활비는 한 달에 3천만…… 아니, 천만 브리크 정도라도 좀 지원해줄 수 있겠니?”

리시가 빙그레 웃었다.

데니스도 마주 미소 지었다.

리시는 데니스가 그녀에게 했던 온갖 악담과 매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더러운 년. 제 애미랑 똑같지. 너도 어디서 그렇게 몸 함부로 굴리다가 거리에서 얼어 죽을 거야.”

-“헛간에서 얼어 죽게 내버려둬도 될 걸 걷어다 키웠더니, 감히 내 딸한테 누명을 씌워? 하여간, 이래서 피가 더러운 것들은…….”

-“아이리스, 네 엄마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니? 너 한 명 살리겠다고 그렇게 매달리다가, 하인들 발에 채여서 피를 토하고 죽었단다. 그렇게 얻은 목숨인데 너도 열심히 살아야지?”

귓가에 맴도는 악의에 찬 목소리를 걷어내고, 리시는 말했다.

“욕심이 과하네요, 부인. 시내 식당에서 식사를 해본 적이 있나요? 저렴한 곳을 찾아서 먹으면 한 끼에 2천 브리크 정도밖에 안 한답니다. 세 끼를 다 챙겨 먹어도 한 달에 20만 브리크도 안 들어요.”

“그, 그런 건…… 돈 없는 평민들이나 그런 거고. 우리가 그런 식당에서 그런 걸 먹으며 살 수는 없잖니.”

“어머나. 아직 배가 부르셨네요. 그 처지에 밥 한 끼 빌어먹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일 텐데.”

“뭐?”

“다코트 시에 좋은 자리가 하나 있어요.”

리시의 말에, 데니스의 표정이 환해졌다.

좋은 저택을 구해준다는 말로 알아들은 것이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말에, 데니스의 희망이 산산조각났다.

“시내 안쪽 상점가 근처인데, 거기서 구걸을 하면 운 좋은 날에는 1천 브리크도 벌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 가끔 경비병들이 돌아다닐 때는 얼른 도망쳐야 해요. 상점가에서 구걸은 금지거든요.”

“그, 그게 무슨…….”

“부인. 제 애미랑 똑같아서 몸 함부로 굴리다가 얼어 죽을 나한테 구걸하지 말고, 나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구걸하세요. 나는 얼어 죽을 게 무서워서 벽난로를 구입하느라 적선할 돈이 없거든요.”

“대체, 대체 그게 무슨 소리니, 아이리스?”

데니스는 자기가 리시에게 퍼부었던 악담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그럴 줄 알았다.

원래 상처를 주는 쪽은 자기가 타인의 심장에 꽂은 칼날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법이니까.

“창피하지도 않나요? 그렇게 때리고 욕을 퍼붓던 계집한테 와서 구걸하는 거. 나 같으면 얼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는 못 할 텐데…… 정말…….”

리시는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비굴하네요.”

“야, 아이리스!”

자존심 상할 일은 데니스에게 맡겨두고 묵묵히 앉아 있던 브리트니가 더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네가 뭔데 감히 우리 엄마한테 그따위 말을 지껄여!”

“내가 뭐냐고? 나는 그린 공작부인인데…… 너는 뭐니? 뭔데 내 앞에서 감히 혀를 함부로 놀려?”

“이게 진짜!”

브리트니가 손톱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그때, 응접실 문이 벌컥 열리고 에르웰이 뛰어들어와, 뻗은 팔로 브리트니의 목을 쳐서 넘어뜨렸다.

“컥!”

주저앉은 브리트니가 목을 잡고 컥컥거리는 것을, 리시는 냉랭하게 내려다봤다.   데니스는 제 딸이 그렇게 되었는데도, 리시를 나무라지 않았다.

“아이리스, 얘야. 우리가 그간의 정이 있잖니. 그래, 내가 네게 가혹하게 군 건 인정하마. 내 남편이 하녀 따위…… 아니, 다른 여자와 정분이 난 게 속이 상해서 그랬어. 너도 나랑 같은 여자니까 알지 않니? 만약 그린 공작이 딴 여자와 침대에서 뒹굴고 그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너 같으면 어떻겠니? 응? 넌 나를 이해해줘야 해.”

“…….”

“그래, 그래. 날 용서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으마. 그래도 브린은…… 브리트니는 네 언니잖니. 너랑 아버지가 같은 언니야. 같은 피가 흐르고 있어. 그런 애가 밖에서 굶어 죽어도…… 네가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니?”

“그러고 보니, 내가 잠을 좀 못 자요.”

“그래, 그래. 그러니까…….”

“하지만 당신들이 밖에서 덜덜 떨다가 굶어 죽으면 잠이 잘 올 것 같네요. 내 수면을 방해하는 건, 그 저택에서 내가 경험한, 그 지옥 때문이니까.”

(155) 갖다 버려.

연보라색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리시에게서 흘러나오는 안광이 데니스와 브리트니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제야 모녀는 자신들의 처지와 리시의 위치를 실감했다.

“어느 날, 브리트니가 날 호수에 밀어 넣었어. 사람이 숨을 안 쉬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서. 나는 죽을 뻔했지만, 발버둥 치면서 브리트니의 팔에 작은 생채기 하나 냈다고, 당신에게 종아리에서 피가 날 때까지 맞았지.”

에르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감기가 걸려서 너무 아팠던 날, 그래도 어떻게든 밥값을 하려고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어지러워서 살짝 몸이 스쳤다고 내 뺨을 때렸지. 아, 이건 너무 자주 있던 일이라서 언제였는지 헷갈리겠네. 내가 6살 때 일이야.”

혹시나 하는 상황에 문가에 있던 크리시나의 표정도 굳었다.

“언제였더라? 아, 그래. 글로번. 당신 남편이 밖에서 여자를 꾀다가 잘 안 됐던 날. 그날, 글로번은 날 걷어찼어. 내 얼굴만 보면 내 어머니가 떠오른다면서. 나는 그날, 맞아서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는데…… 이 목숨 얼마나 질긴지 살긴 살아지더라. 그런데 그날 밤에 어땠는지 알아? 글로번이 바람피우려고 했다는 걸 알게 된 당신이 내 방에 찾아와서, 날 때려댔지.”

“…….”

“나는 이미 엉망이었는데, 내 머리채를 잡고 끌어내려서 걷어차고 뺨을 때리고 쥐어박았어. 어디가 잘못됐는지 며칠이나 피를 토했는데, 당신들은 내가 밥값을 안 했다면서 굶겼지. 이것도 내가 6살 때 일이야.”

어린아이에게 가해진 끔찍한 학대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제게 가해진 잔혹한 폭력을 이야기하면서도, 리시의 목소리는 단조로웠다.

“내게 물었지? 내 남편이 딴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아오면 어떨 것 같냐고. 그래, 속이 상하고 아플 거야. 하지만…… 적어도 그 어린아이에게, 당신들이 한 그런 짓은 못 해. 인간이 할 짓이 아니잖아. 사람이라면 그래서는 안 되잖아.”

“아, 아…… 아이리스…… 네, 네가 그 일을 그렇게 마음에 두고 있는 줄은…….”

“에르웰. 크리시나.”

리시가 데니스의 말을 끊었다.

“갖다 버려요. 지독한 악취 때문에 숨을 못 쉬겠어.”

에르웰과 크리시나는 아까부터 그러고 싶었기에, 기꺼이 리시의 명령을 따랐다.

모두가 떠난 응접실에서, 리시는 털썩 주저앉아서 눈을 감았다.

내색하지 않았으나, 오랜만에 떠올린 과거가 속을 까맣게 문드러뜨렸다.

이러한 순간을 기다려왔지만, 그들이 남긴 상처는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감긴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자그마한 누군가가 도도도 달려와 리시의 무릎 위에 앉는 느낌이 들었다.

작은 손이 리시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누님. 울지 마요.”

걱정이 넘치는 음성에, 리시의 입가가 풀어졌다.

깊이 팬 상처 위에 보드랍고 따스한 것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쌓이고 또 쌓이다 보면, 영원할 것만 같은 상처도 언젠가는 나아지리라.

리시는 천천히 눈을 뜨고, 슬픈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작은 아이를 향해 미소 지었다.

“응, 토미. 네 덕에 울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

철컹-!

육중한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브리트니의 귀를 파고들었다.

데니스는 아직도 포기하지 못하고, 네가 우리한테 이럴 수는 없다며 악다구니를 썼지만, 브리트니는 멍하게 닫힌 철문을 바라보았다.

굳게 닫힌 철문.

굳게 닫힌 아이리스의 마음.

나갈 구멍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어둠.

브리트니는 깨달았다.

아아. 이제 정말로 끝이구나.

+++

크리드 2018년 7월.

엘레론드 대륙 전역에 전염병이 창궐했다.

많은 사람이 ‘이거…… 전염병 아닐까?’라는 의심을 하기 시작할 무렵, 신성국에서 전염병을 인정하고 그 이름을 광혈병이라 칭했다.

신성국의 때늦은 발표에, 몇몇 나라는 유감을 표했으나 그 여파가 크지는 않았다.

다들 전염병을 막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나라에 하나씩 들어선 포레스트 치료소와 치료소에서 고용한 수많은 의사들의 노력이 조금씩 알려지던 차에, 의학계에서 유명한 학자가 전염병의 원인을 발표했다.

“광혈병은 기생충에 감염된 모기가 옮기는 병입니다.”

기생충에 감염된 모기는 기온의 영향을 받지 않고 대륙 전역을 날아다니거나, 대륙을 횡단하는 상단이나 여행자들의 짐 속에 들어가 이동했다.

광혈병에 걸린 사람이 기침을 하거나 피를 토했을 때, 타액에 노출된 사람 역시 감염되는 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학자는 또 한 번 발표했다.

“바챠라는 식물을 끓인 물로 꾸준히 목욕을 하면 전염병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바챠는 기생충이 싫어하는 식물이었다.

기생충의 뜻대로 움직이는 모기는 자연스럽게 바챠초의 냄새가 나는 생물을 피하게 되고, 그 결과 전염병을 예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바챠’라는 생소한 이름의 식물을 찾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그럴 때, 엘레르보 1면에 기사가 하나 실렸다.

[포레스트 스파의 목욕물은 전부 바챠초를 끓인 물이다.]

포레스트 스파에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스파 따위는 평민들이나 다니는 곳이라며 무시하던 귀족들도, 체면을 차리지 않고 매일 같이 스파에 드나들었다.

이미 병에 걸린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아직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은 포레스트 스파를 여기저기에 만든 그린 공작부인을 칭송했으며, 여러 나라의 왕실에서 친히 서신을 보내, 아낌없이 지원할 테니 더 많은 스파를 만들어달라고 청했다.

사람들은 이 기회에 그린 공작부인이 한 몫 단단히 잡을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린 공작부인은 예상에서 벗어난 행각을 보였다.

엘리르보 1면에 또 기사가 실렸다.

[그린 공작부인은 그동안 사들이고 재배한 바챠초를 전부 신성국에 기부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또.

[루테크 가문의 파브릴이 마탑과 머리를 모아 광혈병 치료약을 개발하였다. 파브릴과 마탑의 마법사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그린 공작부인의 아낌없는 지원이 없다면 치료약 개발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라고.]

또.

[그린 공작부인은 어마어마한 금액을 투자하여 만들어낸 치료약을 전부 신성국에 기부하였다.]

전염병 창궐로부터 전염병의 위험성이 극도로 낮아지기까지 5개월.

그동안 아이리스 그린의 이름은 신보다도 더 자주 언급되고, 더 많은 칭송을 받았다.

때문에 안드리제 교황이 아이리스 그린을 정식 유물술사라고 선포했을 때에도, 다들 ‘그럴 줄 알았다.’며 받아들였다.

그린 가문이 신성국에 등록하지 않은 성유물을 몇 개 가지고 있다는 기사가 어딘가에서 흘러나왔지만, 그조차 빛을 발하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아이리스 그린 공작부인이 치유의 반지라는 성유물을 지니고 몸소 치료소를 찾아다니며, 쓰러질 때까지 병자들을 고쳤다는 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전염병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은, 아이리스 그린을 ‘성녀’로 모셔야 한다며 소리를 높였고, 신성국에서도 그들의 뜻을 받아 아이리스에게 성녀 칭호를 내려주려고 하였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그조차 겸손하게 거절해서,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크리드 2019년의 가을이 시작될 무렵에는, 대륙 전역에 아이리스와 포레스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

안드리제 교황이 그린 공작 저택을 방문한 건,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교황은 산티아노와 미네르바를 대동하고 찾아왔는데, 싱글벙글인 미네르바와 달리 산티아노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케이가 교황과 인사를 끝낸 후, 미네르바와도 인사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산티아노에게 말했다.

“대신관님은 갈수록 흰머리가 느십니다? 노화가 너무 빨리 찾아오는 것 아닙니까?”

“이건, 원래, 이 색깔, 입니다.”

산티아노가 이를 아득아득 갈며 말했다.

교황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어째 이 녀석들은 이리도 철이 안 드누.

교황의 눈치를 살핀 미네르바가 얼른 끼어들었다.

“케이, 아이리스는?”

“치료소에 갔을 거야. 병세가 심했던 사람들은 치료약만 먹는다고 낫는 게 아니라서…….”

“흥. 그래봐야 보여주기 식이겠죠. 오늘 교황 폐하께서 오신다는 걸 알면서도 자리를 비운 걸 보면, 그 속내가 안 봐도 뻔하지 않습니까?”

“저런. 산티아노 대신관님. 질투가 나다 못해 아주 부글부글 끓으시나 봅니다.”

“내가 왜 질투를 합니까?”

“질투를 할 만하죠. 대신관님이 못 한 일을 우리 아이리스가 해냈으니까요. 게다가…… 대신관님은 저처럼 아이리스 같은 아내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평생 없지 않습니까?”

산티아노의 콧등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산티아노는 케이를 지그시 노려보다가 말했다.

“유감이지만 나는 그대처럼 아내에게 꼬리를 흔드는 개처럼 살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아, 개가 아니라 늑대던가요?”

케이가 늑대 수인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걸 은근히 흘리는 말이었지만, 케이는 조금도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개보다는 늑대겠지요. 딱 봐도 위엄 있지 않습니까? 유리병 꽃 때문에 기절까지 하는 대신관님과는 달리.”

산티아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입 가벼운 여자들 같으니!

‘그나저나…… 수인이 아닌가?’

산티아노는 케이가 수인이라는 의심은 하고 있지만, 확신하는 건 아니었다.

의심할 만한 정황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드러낼 만한 증거를 찾지는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근슬쩍 떠보려고 했는데, 케이의 태도를 보면 걸리는 구석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여기 머무는 동안 좀 알아봐야겠어. 가까이서 살펴보면 한 번쯤 실수를 하겠지.’

산티아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케이를 노려봤지만, 케이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교황에게 말했다.

“다른 손님들이 전부 도착하려면 이틀 정도는 더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본채에 좋은 방을 마련해뒀으니 부디 편하게 지내십시오.”

교황이 몸소 공작 저를 찾아온 이유는, 이번 전염병 사태에 큰 도움을 준 리시에게 상을 내리기 위해서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다른 나라들도 리시에게 감사를 표하고, 교황께 안부를 전하고 싶다며 방문을 허락해주기를 청했다.

여러 나라의 왕과 귀족들은 이번 사태에서 큰 활약을 한 그린 가문, 특히 리시에게 눈도장을 찍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리시는 그들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미네르바와 산티아노는 각자의 방으로 향했고, 케이는 교황과 함께 교황이 머물 방으로 들어갔다.

“케이. 산티아노를 너무 자극하지 마라.”

“저는 폐하께서 왜 저 자를 가까이 두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위험한 짐승은 곁에 두어야 다른 이들이 안전한 법이야.”

“파문하십시오.”

“대신관 하나를 파문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이라면 진즉에 파문했겠지. 너도 알다시피 저 아이는 아직 그럴 만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

산티아노가 아부틴의 빗으로 교황의 정신을 지배한 건 파문당해 마땅한 일이었지만, 그 사실을 공표하지는 않았기에 유야무야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럴 만한 짓을 저질렀다는 증거를 찾아내겠습니다.”

“그럴 수 있겠누?”

“제 아내라면 할 수 있겠죠.”

“……케이. 너, 그렇게 아내에게 모든 걸 맡겨두는 한심한 녀석이었느냐?”

“어쩌겠습니까? 제 아내가 너무 뛰어나서 넘어설 수가 없는데. 부러우시죠?”

교황이 끌끌 혀를 찼다.

“네 녀석은 안 부러운데, 리시 같은 아이를 둔 네 부모는 부럽구나.”

“저도요. 저도 딱 리시 같은 딸을 하나 갖고 싶긴 해요. 진짜 똘똘하고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겠죠?”

교황이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냈지만 케이는 당당했다.

“폐하도 저 같은 입장이 돼보세요. 자랑을 안 하고는 견딜 수가 없다니까요?”

“그래. 저번에 와이번도 하루 종일 ‘막내딸’ 칭찬만 하더구나. 아주 귀에 못이 박일 지경이었어.”

“아버지에 비하면, 전 진짜 인내심이 강한 편이죠. 적어도 침대에 누워서 병마와 싸우시는 폐하 앞에서는 아내 자랑을 안 했을 테니…….”

“에잉. 내가 보기에는 네놈도 똑같아. 그날 온 게 네놈이었으면 너도 와이번만큼이나 자랑을 해댔을 게다.”

교황과 케이가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을 때, 치료소와 빈민 구제소를 한 바퀴 돌아본 리시가 돌아왔다.

교황이 도착했다는 말에, 쉬지도 않고 방으로 찾아온 리시는 교황의 건강해 보이는 모습에 눈물을 글썽이며 달려와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교황 폐하. 건강해 보이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156) 네가 왜 여기에?

교황은 깜짝 놀라서 일어나 리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왜 아가가 무릎을 꿇고 그러누. 무릎을 꿇어야 할 사람은 내 쪽인데. 리시, 아가야. 네 덕에 참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구했구나.”

리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저는 그저…… 폐하께서 건강해 보이시는 게…… 정말 다행이에요. 정말로요.”

커다란 눈 가득 눈물을 담고 진심 어린 어조로 말하는 리시의 모습을 보며, 교황은 생각했다.

‘와이번이 제 며느리를 왜 그리 아끼는지 알겠구먼.’

딱 봐도 치료소에서 지칠 만큼 힘을 쓰다가 온 것 같은데, 그런 몸으로 그저 교황 걱정만을 하는 리시의 모습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척 죽는시늉은 다 했는데 이렇게 펄펄 날아다니니, 네 얼굴 보기가 민망하구나.”

“정말 좋아요, 교황 폐하. 정말로요.”

“내가 네 목숨을…….”

“아니요, 교황 폐하.”

리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저…… 반지의 힘일 뿐이에요, 폐하. 제가 그 힘을 잘 끌어낸 거고요.”

교황은 리시가 그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하는 말이라는 걸 알았지만, 더는 그 부분을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교황은 리시의 손을 꼭 잡고 그녀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몸소 리시를 일으켜 세우고 소파에 앉혔다.

“아가, 아직도 짐을 짊어지고 있누?”

“반만요. 반은…….”

리시가 케이를 돌아봤다.

“이이가 대신 들어주고 있거든요.”

“그리 쓸모 있는 녀석은 아닐 텐데.”

“의외로 제게는 무척 쓸모가 있어요.”

“그거 다행이구나.”

교황은 쓸모 운운하는데도 그저 기분 좋게 리시를 응시하는 케이를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진 짐이 많은 건 리시뿐만이 아니었다.

교황은 케이도 어깨에 지고 있던 짐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서로의 짐을 나누어 들고 있으면서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 교황은 흐뭇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담소를 나누던 중에 문득 교황이 물었다.

“케이, 아부틴의 빗은 어떻게 했누?”

케이의 시선이 슬쩍 리시를 향했다가 다시 교황에게서 멈췄다.

그가 무어라 대답하기 전, 교황이 단호하게 말했다.

“거짓말할 생각은 하지 말고.”

거짓말할 생각이었던 케이가 입술을 살짝 닫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제가 잘 챙겨뒀습니다, 폐하.”

교황이 나무라는 시선을 보냈지만, 케이는 뻔뻔하게 덧붙였다.

“수호자이니, 수호해야지요.”

끌끌 혀를 찬 교황이 말했다.

“사실 그 빗에 얽힌 이야기는 그리 무서운 것이 아닌데, 산티아노, 그 아이가 참으로 무서운 방식으로 사용했구나.”

“그 빗에 얽힌 이야기가 뭔가요?”

리시가 관심을 보이자 교황이 느릿하게 말했다.

“아주 오래전에 아부틴이라는 마법사가 살았지.”

그에게는 어린 딸이 한 명 있었다.

어느 날, 아내가 병으로 죽자 아이는 엄마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았다.

네 엄마는 좋은 곳에 갔을 거야. 네가 씩씩하고 건강하게 살기를 바라실 거야. 잘 먹고 잘 지내야, 저 하늘에 계신 엄마가 안심할 거야.

그런 상투적인 말로는 아이의 슬픔을 위로할 수 없었다.

아부틴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딸아이를 씻겨주고 헝클어진 머리칼을 빗겨주는 것뿐.

“그렇게 아부틴은 죽어가는 딸을 안고 머리를 빗겨주며, 이 빗에 슬픔 한 자락, 그리움 한 자락, 괴로움 한 자락, 엉켜 사라지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지.”

아부틴의 소망이 이루어졌다.

어느 날, 아이는 눈물을 멈췄고, 그다음 날 아이는 밥을 먹었고, 또 그다음 날 아이는 아빠를 향해 미소도 지어주었다.

“아이는 마치 엄마라는 존재를 잊은 듯이 행동했지만, 아부틴은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어. 부모라는 존재는, 자식에게 잊히는 한이 있더라도 자식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법이니까.”

“그렇게 아부틴의 빗이라는 성유물이 만들어진 건가요? 아부틴이라는 사람도 그 빗에 그런 힘이 깃들었다는 걸 알았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거야.”

리시의 질문에 대답한 건 케이였다.

“평범한 물건이 성유물이 되는 순간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어. 그저 그 물건의 소유자가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사용한 물건이 그 소망을 받아들여, 어느 순간 서서히 능력을 개화하게 된다고만 알려져 있어. 소유자의 살아생전에 그 능력을 각성하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지.”

“그럼…… 만약 이 전설이 사실이라면, 아부틴의 빗은 정신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그저 기억을 지우는 물건일지도 모르겠네?”

“혹은 아이의 기억을 앗아간 게 아니라, 아부틴이 저도 모르는 새에 아이의 기억을 지배해서 어머니에 관한 생각을 못 하게 만든 것일지도 모르지.”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렇다면…… 아부틴의 빗이 그저 정신을 지배해서 이상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뿐만이 아니라,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고, 기억에 없는 것을 기억하게 할 수도 있겠네.”

“그래. 그런 방식으로 사용하는 게 가능할 수도 있어.”

성유물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는 두 사람을, 교황이 흐뭇하게 지켜봤다.

+++

교황과의 자리를 마무리하고 방으로 돌아온 후에도, 성유물에 관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성유물의 쓰임을 좀 더 제대로 파악해야 해. 성유물을 만들어낸 소유자의 사념을 제대로 읽어내면, 알려진 것과 다른 방식으로도 성유물을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몰라.’

리시는 왼손 검지에 끼고 있는 치유의 반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전염병 때문에 시끄러울 때, 리시는 수시로 치료소를 드나들며 반지의 힘을 사용했다.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반지를 다루는 능력이 정교해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무식하게 힘을 불어넣어야 했지만, 이제는 치료가 필요한 곳을 간파하고 그 부위에 집중적으로 힘을 보내, 적은 힘으로도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치유의 반지는 노쇠하여 죽어가는 것까지 살릴 수 없다고 알려져 있는데…….’

교황은 건강해 보였다.

‘그렇다는 건…… 교황 폐하를 치료하는 날, 내가 반지를 올바르게 사용했다는 거겠지. 알려진 것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어떤 방식으로 힘을 썼는지 떠올려 봤지만,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교황이 무사하면 좋겠다고, 건강해지면 좋겠다고, 털고 일어나 오래오래 사시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성유물에 얽힌 전설이나 쓰임이 정확하리라는 법은 없어.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세월과 함께 흐릿해지거나 변형됐겠지.’

이 힘을 연습해야만 한다.

더 제대로, 더 옳은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앞으로 엘레론드 대륙에는 큰 재앙이 들이닥칠 터였다.

리시가 하는 모든 사업은 그 재앙을 막기 위한 대비책의 일부였다.

‘막을 수 있어. 전염병도 그랬으니까…….’

전염병의 예방책을 세우고 치료약을 빨리 개발해서 뿌린 덕에, 수많은 생명이 목숨을 구했다.

그렇다는 건, 세계가 점점 더 리시를 죽이고 싶어 할 거란 의미였다.

실제로 며칠 전 리시는 잠을 자다가 베개에 들어 있던 깃털이 입안에 들어가 숨이 막혀 죽을 뻔했었다.

하필이면 케이가 늦은 시간까지 일하느라 서재에 있을 때 벌어진 일.

아무리 입안에 손을 넣어서 꺼내려 해도 잡히지 않는 깃털을 빼내 준 건, 마침 지나가던 하녀였다.

-“복도 끝 창문을 닫았는지 너무 신경 쓰여서 올라 왔다가, 괴로워하시는 소리를 듣고…….”

아마 이 하녀가 잠을 못 이루면서까지 창문을 신경 쓴 건, 아직 리시의 몸에 남아 있는 트리사의 귀걸이의 힘일 것이다.

세계는 리시를 죽이려 하고, 트리사의 귀걸이는 리시를 살리려 하니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세계에 흐르는 힘도 날 잊을 거라고 했지. 어차피 당분간은 큰일이 없으니, 조용히 준비만 하다 보면 나도 안전해질 거야. 문제는…….’

재앙을 막은 후다.

대륙의 반 이상이 죽어 나간, 끔찍한 재앙.

그 재앙을 막았을 때, 세계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리시는 다시 치유의 반지를 내려다봤다.

‘성유물을 더 제대로 다룰 수 있어야 해. 여차하는 순간에도 내 몸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

다음 날, 스티무어 황실의 마차가 그린 저택에 들어왔다.

여자 한 명 때문에 그린 가문과 전쟁까지 벌인 주제에 뻔뻔하게 저택을 찾아온 스티무어 황제를 구경하기 위해,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던 왕족과 귀족들 몇 명이 목을 길게 뺐다.

“그린 공작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자리에 스티무어를 초대한 거지?”

“스티무어 황후의 면을 세워주려는 거겠지요. 황후는 죄가 없으니까.”

“하긴. 오히려 불쌍하지. 남편이 딴 여자 때문에 전쟁까지 일으키고, 완전히 패배해서 포로로 잡히고……. 얼마나 창피하겠어?”

“앞으로 스티무어는 뭘 하든 그린 가 눈치를 봐야겠죠? 미련한 황제 때문에 애시워스 가문은 황족이면서도 공작에게 꼼짝 못 하게 됐네요.”

“황후가 똑똑하니 명예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겠지. 멍청한 황제가 그걸 또 망쳐버리지만 않는다면, 적어도 죽기 전에는 허명을 거둘 수 있지 않겠어?”

구경꾼들이 소곤거리는 가운데, 마차의 문이 열렸다.

어두운 안색일 거라는 모두의 예상과 달리, 마차에서 먼저 내린 에버렛은 당당하고 밝았다.

하지만 그 뒤를 따라 내린 드웨인은 죽상이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스티무어 제국의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환영합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중하게 인사하는 케이를, 드웨인은 차갑게 노려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에버렛이 드웨인의 팔을 톡 치자, 드웨인이 콧등을 찡그리며 씹어뱉듯 말했다.

“초대해줘서 고맙군.”

“편히 계시다 가십시오.”

“흥.”

드웨인이 콧방귀를 뀌며 무시하려 했지만, 이번에도 에버렛이 드웨인의 팔을 툭 쳤다.

고개를 돌린 드웨인은 에버렛이 눈에 힘을 주고 있는 걸 보고는 표정을 바꾸고 케이에게 말했다.

“환대에 감사하네.”

에버렛에게 꽉 잡혀 있는 드웨인의 모습에, 리시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안내하기 위해 찾아온 시종의 뒤를 따라가며, 에버렛이 슬쩍 뒤를 돌아봤다.

리시와 눈이 마주친 에버렛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리시가 그녀의 감사 인사에 미소로 화답하고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또 다른 마차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가장 앞에 있는 마차는 가비자르 황실의 마차. 아마도 황제가 타고 있을 것이고, 그 뒤의 마차에는 황후가, 또 그 뒤의 마차에는 황태자 내외가 타고 있을 터였다.

문제는 가장 마지막에 있는 마차였다.

‘저건…….’

미간을 좁히는 리시의 귀에, 케이가 작게 속삭였다.

“미나스아릭 왕실 마차야.”

“설마…… 2황자가?”

케이의 눈이 차게 빛났다.

“조심해야겠군.”

리시는 이곳에 온 라코젠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전쟁의 뒤에 라코젠이 있다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라코젠이 ‘미나스아릭 왕국을 손에 넣고 싶어서, 왕을 상대로 계략을 사용했다.’라는 정도로만 알려졌지만, 케이와 리시는 라코젠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알았다.

리시를 죽이고 싶어서.

라코젠 또한 케이와 리시가 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런데도 적진에 일부러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먼저 내린 황제와 황후에게 인사를 하는 동안, 황태자 이오벳이 이트리아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이오벳은 어두운 표정으로 그린 공작 부부를 응시하다가, 인사할 차례가 되자 케이를 안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미안해, 케이. 황제 폐하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어.”

이제야 케이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가비자르 제국의 황제인 케너마나이에게 있어서 2황자는, 큰 피해 없이 미나스아릭 왕국을 손에 넣은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황제가 먼저 같이 가자고 했을 것 같지는 않고…….’

아마 라코젠이 먼저 동행을 청했을 것이다.

이제 2황자를 기꺼워하게 된 황제는 그 청을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데 2황자는 무슨 생각이지? 또 암살 시도를 하려는 건가?’

그때, 미나스아릭 왕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라코젠이 천천히, 아주 우아하게 마차에서 내렸다.

라코젠은 품에 검은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검은 고양이의 호박색 눈동자와 케이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잠깐 마주쳤다가 떨어졌다.

(157) 덜 사랑할 수 있어?

라코젠은 잠시 마차 옆에 서서, 리시를 응시했다.

리시의 분홍빛 띤 은발이 가을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마치 산을 헤매다가 지쳐 쓰러지기 직전에 발견한, 은빛 폭포 같았다.

눈이 부시다고, 라코젠은 생각했다.

머리칼 한 올, 한 올 보석이 박힌 듯 다채로운 빛깔이 라코젠의 심장에 깊이 각인되었다.

많은 사람이 있었으나 라코젠의 눈에 들어오는 건 오롯이 아이리스 한 사람뿐이었다. 이 세상에 그녀와 나, 단둘만이 남은 것만 같았다.

‘그래, 정말로 그렇다면 좋을 텐데.’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황급히 털어냈다.

리시를 앞에 두면 늘 그렇듯, 한번 떠오른 생각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 세상에 아이리스와 나, 우리 둘만이 남는다면 더는 바랄 게 없을 텐데.’

라코젠 자신도 놀랄 크기의 욕망이 숨통을 죄였다.

라코젠은 주먹을 꽉 쥐고, 어떻게든 이성의 끈을 붙들기 위해 노력했다.

‘역시 오는 게 아니었어.’는 후회와 ‘와서 직접 보니 좋군.’이라는 기쁨이 공존했다.

손톱이 손바닥을 아플 정도로 파고들었지만, 라코젠은 그조차 깨닫지 못하고 리시를 바라봤다.

그동안 라코젠은 미나스아릭 왕궁에 있었다.

미나스아릭은 전염병이 시작된 샤크란 왕국과 가까웠기에, 꽤 이르게 전염병의 피해가 덮쳐왔다.

전염병은 평민과 귀족, 왕족을 가리지 않았다.

왕궁 안에서도 괴병으로 앓다가 죽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라코젠 또한 심한 병에 걸려서 이렇게 죽는가 싶었을 때.

왕궁 주치의가 치료약을 가져왔다.

병마를 이기고 일어난 라코젠은, 전염병 치료약을 개발하는 데 큰 지원을 아끼지 않은 사람이 아이리스 그린이라고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역시 아이리스는 대단해.’

죽다 살아난 탓일까?

아주 잠깐 미움을 잊었다.

리시에게 이상한 힘이 있어서, 감히 내 심장을 쥐고 흔들어댄다는 사실을 잊었다.

삿된 힘으로 남의 마음을 멋대로 주무르는 그녀를 죽여야만 한다는 각오 또한,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리하여 그리웠다.

전염병 때문에 죽음을 각오했던 그 순간에도 그리웠던,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볼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았던, 그녀를 보고 싶었다.

미나스아릭에서 그린 공작령으로 오는 내내, 가슴에 뜨겁고도 간질거리는 것이 가득 차 있었다.

그 감정의 이름이 ‘설렘’이라는 걸, 라코젠은 몰랐다.

마차가 그린 저택에 들어서고, 마차에 내려 리시를 보는 순간,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한 케이를 보는 순간.

심장이 차게 식었다.

흘러넘치도록 담겨 있던 감정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그 자리를 북부의 눈보라 같은 냉기가 채웠다.

가슴이 얼어붙을 것 같은 와중에도, 리시가 여전히 눈부시게 보여서 짜증이 치밀었다.

역시 저 여자는 기묘한 술수를 사용한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저 여자의 힘이 약해지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강해지기만 한다.

고양이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니이…….”

고양이가 작게 우는 소리에 놀라서 팔에 힘을 풀다가, 케이와 눈이 마주쳤다.

살짝 찌푸린 미간과 굳은 입매를 보자, 자신이 케이에게 거슬리는 존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기뻤다.

케이의 신경을 건드릴 수 있어서, 리시가 온전히 제 것인 양 여유롭게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한 사내의 속을 긁어놓을 수 있어서.

“그린 공작. 왜 내게는 인사를 하지 않지? 내 방문이 별로 기쁘지 않은가?”

라코젠은 일부러 케이를 도발했다.

케이가 빙그레 미소 지었으나, 그의 매서운 눈매에는 웃음기가 머물지 않았다.

“방문에 기뻐할 만한 관계는 아닌 듯싶습니다만.”

케이의 냉랭한 대꾸에 반응한 건, 가비자르의 황제였다.

“그린 공작. 내 아들이 오랫동안 앓았다가 간신히 일어나, 그대 아내의 공을 치하해주기 위해 일부러 찾아왔는데 왜 그리 모질게 말하는가?”

예전이었다면 황제가 라코젠을 두둔해주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라코젠이 미나스아릭을 손에 넣은 지금, 그는 황제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케이는 미소 띤 얼굴로 잠시 황제를 응시하다가, 다시 라코젠에게 시선을 돌렸다.

“미나스아릭의 왕좌를 손에 넣으셨다지요. 거기에 귀여운 고양이까지 키우고 계시는군요. 세상을 다 얻으신 기분이겠습니다.”

빈말로라도 환영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 케이의 태도에 황제가 미간을 좁혔지만, 라코젠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고양이의 턱을 살살 긁어주며 말했다.

“성가신 녀석이지. 내가 잠시만 안 보여도 목 놓아 울어대서, 여기까지 데려올 수밖에 없었어.”

“그렇군요. 고양이용으로 신선한 날생선을 준비해두도록 하지요.”

케이의 말에 고양이가 항변한 듯 냐아, 하고 울었다.

라코젠이 고개를 저었다.

“이 녀석은 입맛이 까다로워서 날것은 안 먹어. 나와 같은 걸 먹으니 이 녀석이 먹을 것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아하, 정말 까탈스럽군요. 알겠습니다.”

의뭉스럽게 대답하는 케이를, 검은 고양이가 째려봤다.

케이는 고양이를 향해 싱긋 웃어주고는, 시종들을 불러 가비자르에서 온 손님들을 안내하라 일렀다.

가비자르 황족들이 손님용 별관으로 향한 후, 케이가 리시의 손을 꽉 잡았다.

케이의 손바닥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를 고수하던 케이가 이토록 긴장했었는지 몰랐기에, 리시가 걱정스레 그를 올려다봤다.

“케이, 왜 그렇게 긴장했어?”

케이가 리시의 손을 잡고 빠르게 걸어가며 말했다.

“2황자가 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 이게 뭘 뜻하는지 알아?”

리시가 고개를 젓자, 케이의 눈동자에 서린 어둠이 깊어졌다.

“클로이는 라코젠이 이곳에 오기로 결정했을 때, 내게 전서구를 보냈을 거야. 지난번 사건도 있으니 이번에는 혹시나 하는 사태에 대비해서 여러 마리를 보냈겠지. 시간차를 두고 도착할 수 있도록.”

“한 마리도 도착하지 않았구나?”

“그래. 우리 가문의 전서구는 영리하고 빨라. 그런데 녀석 중 한 마리도 제 몫을 해내지 못했다는 건…….”

케이는 거기까지만 말했으나, 리시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알 수 있었다.

세계가 당신을 죽이려 하는 힘이 더 강해지고 있어.

“2황자가 이런 상황에서 내 목숨을 노릴 거란 생각은 안 들어, 케이.”

“2황자는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세계는? 당신은 이번 전염병 때, 죽어야 할 사람들을 아주 많이 구했어.”

어느새 둘은 케이의 서재에 들어와 있었다.

타악-

서재 문을 닫은 케이가 리시를 문에 기대 세우고, 두 팔 안에 그녀를 가뒀다.

“내가 모르는 척하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아? 며칠 전에 당신 목에 깃털이 걸려서 죽을 뻔한 걸 알고 있어.”

“저런…….”

하녀의 입단속을 했는데, 아무래도 걱정스러운 마음에 케이에게 알린 모양이다. 어쩌면 제이미나 지나가던 다른 시종들에게 알렸을지도 모르고.

“그렇게 무심하게 반응할 일이 아니야, 리시. 당신의 죽음에 대한 문제야. 베개에 잘 들어 있던 깃털이 하필이면 당신 입속으로 들어가고, 하필이면 당신 숨통을 조이고, 하필이면 당신이 꺼내려고 하는데도 꺼낼 수 없는, 그 상황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

“케이…….”

“당신은 정말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 거야. 내가 솔직하게 말해볼까? 난 다른 사람들이 죽어 나가든, 말든 상관없어. 당신만 살아있으면 다른 사람들 따위는…….”

“어머님, 아버님도?”

“…….”

“젠이랑 엘디도? 당신 부하들은? 그들이 전부 죽어도, 나만 당신 곁에 있으면 돼?”

케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리시는 그의 절박한 마음을 알았다.

만약 반대 입장이라면, 리시도 케이와 똑같이 행동했으리라.

작은 손이 단단한 가슴 위를 살포시 덮었다.

리시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케이. 분명 어떻게든 날 죽이려는 힘이 존재하는 건 맞아. 하지만 잊었어? 날 지키려는 힘도 존재해.”

“그 귀걸이를 말하는 거라면, 난 모르겠어. 그게 과연 수천, 수백만 명을 살린 인과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하필이면 그날 밤에 하녀가 창문이 신경 쓰여서 내 침실 근처까지 왔겠지. 하필이면 내 목소리를 들었고, 하필이면 용기를 내서 내 방 침실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고.”

케이가 제 가슴에 놓인 리시의 손을 잡았다.

“당신이 놀라운 여자라는 거 알아. 내가 가늠하기 힘든 일을 해내는 것도 알고. 나는 당신처럼 놀라운 남자가 아니라서, 불안하고 두려워. 차라리 내가 좀 더 제대로 된 놈이면 당신이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내가 지켜주겠다고 말할 텐데…… 난 그럴 수가 없어. 도움도 안 되는 주제에, 위험한 길로 가지 말라고 징징거리기나 하지.”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케이.”

리시가 웃으며 그에게 잡힌 손을 끌어당겨, 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내가 당신을 찾아온 그날, 당신은 날 죽일 수도 있는데 살려줬고, 날 내칠 수도 있는데 받아들였지. 그뿐 아니라…… 사랑까지 줬어. 나는 당신이랑 그린의 가족들에게 받는 사랑이 처음이라서. 그렇게 사랑받는 삶이 정말 찬란해서. 그래서 용기를 낼 수 있어.”

케이가 쓰게 웃었다.

“내 사랑 때문에 용기를 내는 거라면, 사랑을 덜 해야겠군. 그래야 당신도 조금쯤 겁을 먹을 테니.”

리시가 콧등을 찡그렸다.

“날 덜 사랑할 수 있겠어?”

“그게 불가능하니까 문제지.”

리시는 케이의 허리를 두 팔로 끌어안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두근, 두근, 전해지는 박동 소리가 듣기 좋았다.

케이는 모르리라.

이 심장 소리가 내게 얼마나 힘을 주는지.

회귀했다는 걸 알았을 땐, 그저 새로운 삶을 살아가며 복수를 하고 싶을 뿐이었다.

다시 기회를 얻었지만, 리시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여전히 잿빛이었다.

리시의 세상에 색채가 돌아오기 시작한 것은, 케이의 사랑을 받고부터였다.

케이, 그리고 그의 가족과 부하들.

지난 삶에서는 연이 없던 그들이 이번 삶에서는 넘치는 애정을 주었고, 그 애정이 차곡차곡 쌓여 무채색 세상을 찬란하게 물들였다.

리시는 할 수만 있다면 케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로 인해 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워졌는지.

그토록 눈부시기에, 리시는 케이에게도 그런 세상을 살아가게 해주고 싶었다.

+++

라코젠은 방을 오가다가 창밖을 흘끔흘끔 내다보기를 반복했다.

손님용 별채는 리시가 머무는 본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우연이라도 리시를 보기 힘들 텐데도 그랬다.

멀찌감치라도, 혹은 우연이라도 창밖으로 그녀를 볼 수 있을까 봐.

검은 고양이의 모습을 한 클로이는 테이블 위에 늘어져서 그 모습을 보며 하품을 했다.

‘한심한 남자……. 자기가 왜 저렇게 초조해하는지도 모르겠지.’

언젠가 라코젠이 클로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을 떠올렸다.

-“아이리스 그린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 목숨을 왜 남을 위해 바쳐야 하지? 이건 그 여자가 여차하면 날 방패로 써먹으려고 묘한 술수를 부린 게 분명해. 가비자르 제국의 2황자처럼 방패로 써먹기 좋은 건 없을 테니까. 안 그래?”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제일 중요한 라코젠은, 제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리시를 향해 품은 그 모든 감정이, 라코젠에게는 ‘삿된 주술’이었다.

클로이는 테이블에서 내려와, 열린 창문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라코젠은 다른 창문 앞에 서 있느라 클로이가 창문을 넘어가는 걸 보지 못했다.

정원에 내려선 클로이는 그린 저택의 정경을 쭉 둘러보며 기지개를 켰다.

‘하, 오랜만이네.’

라코젠 곁에 머무는 기간이 상당히 길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길어질 줄은 몰랐다.

클로이는 본채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부하들이 머무는 별채로 향했다.

능숙하게 창문을 넘는 클로이를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저건 아까 가비자르의 2황자가 데려온 고양이가 아닌가?’

산티아노였다.

가비자르 황실 마차가 도착했을 때, 산티아노도 정원에 나와 있었다.

그 후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케이의 약점이 될 만한 걸 찾던 차에, 클로이를 발견한 것이다.

산티아노는 고양이를 좋아했기에, 별생각 없이 별채를 향해 걸어갔다. 운이 좋으면 고양이가 등을 쓰다듬게 해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들여다본 창문 너머의 커튼 사이로, 그런 장면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58) 우아하고 순종적인 딸

검고 작은 고양이의 육체가 점점 커지더니, 어느 순간 인간 여인으로 변해 있었다.

고양이처럼 날씬한 몸매와 검은색 머리칼을 가진, 고양이와 똑같은 황금색 눈동자의 인간 여자.

산티아노는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핏발이 설 정도로 부릅뜬 눈으로, 산티아노는 창문 안의 광경을 주시했다.

여자는 두 팔을 쭉 뻗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더니, 옆에 떨어져 있던 모포를 몸에 둘렀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케이의 부하들이 들어왔다.

“오, 클로이. 아까 2황자랑 같이 오는 거 봤는데. 고생 많네.”

“뭐, 생각보다 괜찮아. 2황자는 미식가거든. 덕분에 내 입도 즐겁지.”

“그래, 아까 보니까 사랑받는 것 같더라. 나도 고양이였으면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을 정도야.”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산티아노는 눈을 굴렸다.

‘수인. 수인. 수인. 수인. 다들 수인인가 보군. 그래, 수인이었던 거야.’

산티아노는 기쁨의 탄성을 지르고 싶은 걸 가까스로 삼켰다.

‘당장…… 당장 가서…… 아니, 아니지. 일단 내 사람들을 시켜서 저 계집 한 명만 잡아 오도록 한 후에 고문해야 해.’

수인들은 심한 고문을 받으면 변신을 반복한다.

통증 때문에 힘을 제대로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 앞에서 변신하는 모습을 보인 수인은 특별한 증명 없이 사형을 당했지만, 지인의 고발로 잡힌 수인은 사람들 앞에서 고문을 당해 변신하는 모습을 보며 수인으로 인정받은 후에 죽이는 것이 관례였다.

산티아노는 드디어 케이의 부하 중 한 명을 잡아서, 그녀를 실컷 고문할 생각에 들떴다.

울부짖고 애원하게 해주리라. 그러다 보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제 대장이 수인이라는 것도 밝히겠지.

산티아노가 싱글벙글 웃으며 몸을 돌렸을 때였다.

퍼억-!

아까부터 산티아노의 뒤에 서 있던 사내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산티아노의 머리를 후려쳤다.

고생 한번 한 적 없이 자란 산티아노는 상대가 누군지 확인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털썩 쓰러졌다.

바닥에 구겨진 듯 쓰러진 산티아노를, 엘디는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커튼 안쪽을 들여다봤다.

살짝 열린 커튼 사이로, 모포를 두른 클로이가 보였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것 같았다.

‘하, 이거 큰일이네. 어떡하지?’

+++

“커튼을 제대로 쳤어야지! 아니면 2층에서 변신을 하든가.”

엘디는 케이의 부하들 사이에, 기절한 산티아노를 던지듯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세한 설명이 없었는데도, 클로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들킨 겁니까?”

“그래. 아주 싱글벙글하더라.”

엘디가 산티아노의 옆구리를 발로 툭 찬 후, 이반을 돌아봤다.

“가서 형 좀 불러와.”

이반이 나가려는데, 엘디가 붙잡았다.

“형수도 같이.”

잠시 후, 케이와 리시도 부하들의 숙소에 와서 기절한 산티아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표정으로 산티아노를 내려다보던 케이는, 천천히 클로이를 돌아봤다.

안절부절못하던 클로이가 말했다.

“죄송해요, 대장. 너무 오랜만이라서…….”

케이가 한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아니야. 여긴 내가 알아서 수습할 테니, 넌 일단 2황자에게 돌아가.”

“네.”

클로이는 고양이의 모습으로 변해서 창문을 뛰어넘었다.

“저택에 손님이 드나드는 일이 많지 않았으니, 경계가 느슨해진 것뿐이야. 앞으로 다들 주의하는 게 좋겠다.”

케이는 누구도 탓하지 않았지만, 케이의 부하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죽였겠지만, 산티아노는 대신관이였다.

그린 저택에서 대신관이 목숨을 잃는 일이 벌어지면 큰 문제가 생긴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산티아노를 내려다보던 엘디가 리시를 돌아봤다.

“형수, 좋은 생각 없어?”

케이의 부하들은, 엘디가 케이가 아닌 리시에게 방법을 묻는 이유를 알았다.

우리의 작고 사랑스러운 공작부인은 언제나 놀라운 일을 해내니까.

아니나 다를까.

이 소동에도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리시가 담담하게 말했다.

“시도해볼 만한 건 하나 있어.”

“그럼 해봐. 내가 지원할게.”

엘디의 말에 리시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고맙지만 지원까지 필요한 일은 아니야. 케이, 아부틴의 빗을 가져다줘. 그리고 에르웰에게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어 달라고 하고. 방을 하나 비워줘. 산티아노를 그 방 침대에 눕히는 게 좋겠어.”

모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리시는 가만히 서서 모든 게 준비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준비가 끝났을 때, 리시는 아부틴의 빗을 손에 들고 산티아노가 누운 침대로 다가갔다.

다들 숨을 죽이고 리시를 지켜봤다.

리시는 눈을 감고 빗에 담긴 힘을 읽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오래전, 이 빗을 사용했던 이의 간절한 바람과 접속하기 위해 마음을 열었다.

엄마를 잃고 슬픔에 빠진 아이를 위한 아버지의 마음.

기억을 지워서라도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랐던 부모의 마음.

-아닌데.

문득 뇌리를 울리는 소리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난 그냥 내 아이가 내가 원하는 대로 자라기를 바랐을 뿐인데.

남자가 머릿속에 들어온 듯, 뇌로 직접 전해지는 목소리가 강렬했다.

그 음성이 족쇄가 되어, 리시의 영혼을 옭아매려 했다.

그동안 리시가 성유물을 사용하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힘의 근원을 향해 마음을 열어서일까?

속수무책으로 흘러드는 아부틴의 상념을 막을 수가 없었다.

-예쁘고 어른스러운 딸이 되기를 바랐지.

-우아하고 순종적인 딸이 되기를 바랐어.

-이제는 뒈져버린 제 어미 때문이 아니라!

-내 말을 잘 들어야지. 이제 부모는 아빠인 나뿐이잖아. 안 그래?

-착한 딸. 울지도 않고 하라는 대로 하는 예쁜 딸.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목소리에 담긴 악의가 폐부에 넘치도록 들어차서 숨을 쉬기 힘들었다.

-내 딸이니, 내가 원하는 대로 커야지.

-날 자랑스럽게 만들어줄 딸. 그런 게 아니라면 필요 없어.

-울기만 하는 멍청한 계집은 숨 쉴 가치도 없어.

-잘 키워서 좋은 가문의 남자를 만나야 해. 그래야 내 명성에 도움이 될 테니.

-마법적 재능도 없는, 글러 먹은 계집이니 좋은 남자라도 만나야지.

악의가 점점 짙어졌다.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어, 리시는 눈을 떠보려 했지만, 그조차 쉽지 않았다.

두려움에 발밑이 술렁거리는 착각이 들었다.

온 대지에 아부틴의 악의가 전염되어, 리시를 집어삼키려는 것만 같았다.

그럴 때 떠오른 건, 케이의 음성이 아니었다.

-“미안하구나, 리시. 낯선 곳에서 긴장했을 텐데, 내가 너무 늦게 도착했지?”

애정 어린 와이번의 목소리.

리시를 막내딸이라고 하는, 다정한 아버지의 목소리.

‘낯선 곳.’

낯선 악의 속에, 아주 작은 빛이 발화했다.

그 빛을 보고서야 리시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 어디에 있는지, 무엇에 사로잡혔는지 깨달았다.

리시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예리해진 감각과 정신이, 리시를 지배하기 위해 넘어 들어온 아부틴의 상념을 밀어냈다.

‘그것참 안됐네. 나는 우아하고 순종적인 딸이 될 생각이 없거든. 내 멋대로,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살 거야.’

-웃기지 마! 너는 날 이길 수 없어. 나는 네 아빠니까,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따라야 해!

‘싫어. 이 글러 먹은 아저씨야!’

리시의 생각이 검처럼 날카롭게 변해, 술렁거리는 어둠을 내리찍었다.

넓게 펼쳐졌던 어둠이 고통스럽다는 듯 꿈틀거리며 응축되기 시작했다.

점점 작아지는 어둠을, 리시는 한 번 더 깊숙이 찔렀다.

‘내가 하자는 대로 해, 이 못난 아저씨야. 네 쓸모를 증명하지 않으면 없애버릴 테니까.’

리시의 손이 어느새 작아진 어둠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천천히 눈을 뜬 리시는, 제 손에 꽉 쥐어진 아부틴의 빗을 내려다보다가 산티아노의 머리를 향해 가져갔다.

아부틴의 빗에 얽힌 전설은 아이를 위한 아버지의 마음이었지만, 실상은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알려진 대로, 정신을 지배하는 빗이었다.

다만 그 정신지배가 그저 기묘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단편적인 부분만 가능한 것이 아닐 뿐.

‘이 빗질에 네 기억을 하나.’

리시는 산티아노의 머리칼을 빗겨주면서, 속으로 노래하듯 생각했다.

‘네가 본 그 놀라운 광경을 하나.’

‘고양이를 하나.’

‘여자를 하나.’

‘들은 대화를 하나.’

‘하나씩 제거하도록 해.’

산티아노의 정신이 스스로 움직여, 기억 일부를 지우고 또 일부를 수정했다.

‘기억하지 마. 이 저택에서 목격한 경악할 만한 진실 따위, 네게는 아무 가치가 없으니 깨끗이 잊도록 해.’

이윽고 리시가 빗질을 멈췄다.

확인하지 않아도 자신이 해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리시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자신을 지켜보던 이들을 향해 말했다.

“에르웰을 불러줘요.”

 

+++

기분 좋은 꿈을 꿨다고, 산티아노는 생각했다.

무언가 아주 즐거운 꿈을 꾼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눈을 떴을 때, 언젠가 본 적 있는 광경이 보였다.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걱정 가득한 녹색 눈동자.

“대, 대신관님! 깨어나셨군요!”

언젠가 들었던 목소리.

“어흑!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가슴팍에 느껴지는 고통.

“쿨럭. 쿨럭.”

녹색 눈동자의 주인이 산티아노의 가슴을 내리치듯 얼굴을 묻은 바람에, 산티아노는 거세게 기침했다.

그제야 산티아노는 이런 비슷한 걸 언제 경험했었는지 깨달았다.

전에 신성국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다행이에요, 대신관님.”

잠깐 몸을 폈던 에르웰이 다시 산티아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려 해서, 산티아노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자, 잠깐! 멈춰요, 루테크 양.”

“부디 에르웰이라고 불러주세요.”

“……좋아요, 에르웰. 멈춰요. 난 괜찮으니까 일일이 그렇게 울어댈 거 없습니다.”

“어떻게 그러겠어요? 저는 정말로 대신관님이 이대로 돌아가시는 줄로만 알고…… 주머니쥐 때문에 놀라서 돌아가시는 건, 대신관님의 명예에도 좀 그렇잖아요. 나중에 비석에 ‘주머니쥐 때문에 놀란 대신관, 여기 잠들다.’ 이렇게 쓰일지도 모르니까요.”

에르웰이 우다다 퍼부어대는 말을, 산티아노는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주머니쥐? 그게 무슨 말입니까?”

산티아노는 질문을 하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그린 저택에서 배정받은 그의 방이 아니었다.

좀 덜 화려하지만 깨끗하고 넓은 방.

침대가 4개 놓여 있는 거로 봐서, 4명이 사용하는 방인 듯했다.

“여긴 어디고?”

“기억 안 나세요? 역시…… 어딘가 문제가 생기신 거 아니에요?”

“아니, 아니. 가까이 오지 마세요, 에르웰. 제발.”

에르웰이 얼굴을 불쑥 내미는 통에, 산티아노는 경악하며 몸을 뒤로 뺐다.

걱정해주는 마음은 알겠는데, 에르웰은 너무 우악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에르웰이 걱정하면 할수록 몸 어딘가가 아프다.

지금은 에르웰이 꽉 잡은 팔뚝이 아팠다.

산티아노는 조심스럽게 팔을 빼내려 했지만, 에르웰의 힘이 어찌나 센지, 뼈에 금이 간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이 팔 좀 놓으십시오.”

“아! 죄송해요. 걱정되는 마음에.”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하나도 기억 안 나세요?”

산티아노는 기억을 더듬어봤다.

뭔가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떠오르는 게 없었다.

“대신관님이 이 앞에 지나가시는데, 주머니쥐 한 마리가 휙 지나갔거든요. 꽤 큰 녀석이었어요.”

듣고 보니, 검은 생물을 본 것도 같았다.

딱 주머니쥐 정도 크기의.

산티아노는 동물을 썩 좋아하는 편이지만, 쥣과의 동물은 끔찍이도 싫어했다.

“대신관님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셨어요. ‘깩!’ 하고.”

“내가…… 깩, 하고 비명을 질렀다고요?”

에르웰이 안쓰럽다는 듯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산티아노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무리 주머니쥐를 봤다지만, 그린 저택에서 그런 비명을 질렀다니. 만약 그 꼴을 케이가 봤다면 평생 두고두고 놀려댈 것이다.

“다행히 저만 목격했어요.”

에르웰이 말했다.

“대신관님이 깩, 하신 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고, 평생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고요.”

그 순간, 산티아노의 눈에는 에르웰이 성녀처럼 보였다.

(159) 인정하면 편해.

“대신관님 눈이 휙 돌아가면서 툭 쓰러지시는데…… 제가 정말 너무 놀라서…… 막 비명을 질렀더니 이 건물에서 공작님의 기사님들이 뛰어나와서 여기로 옮겨주셨어요. 아, 안심하세요. 그분들에게도 대신관님이 주머니쥐 때문에 기절했다는 건 말하지 않았으니까요.”

에르웰의 말을 들으며, 산티아노는 생각을 더듬었다.

분명 검은 생물을 봤고, 여자를 봤던 것도 같다.

기억이 희미한 이유는, 너무 놀라서 기절했기 때문인가 보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신 거 맞죠? 아직도 약간 정신이 오락가락하신 것 같은데.”

에르웰이 또 팔을 잡으려 하기에, 산티아노는 기겁하고 뒤로 물러나서 손을 쭉 뻗었다.

“더는 가까이 다가오지 마십시오, 에르웰.”

“왜죠? 제가 불경하기 때문인가요? 저는 정말 신심이 깊은데…… 그저 대신관님 걱정뿐인데.”

에르웰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에, 산티아노는 당황했다.

울리려던 건 아닌데.

물론 대신관인 이 몸을 구했다는 건, 에르웰에게 큰 영광이 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도와준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하기는커녕 울게 했다는 게 알려지면, 산티아노를 향한 시선도 달라질 터였다.

게다가 에르웰이 속상한 마음에 ‘대신관님은 주머니쥐 때문에 깩, 하면서 기절했어요.’라고 떠들고 다니면 큰일이다.

산티아노는 최대한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에르웰. 나는 고블린 밥에 다녀왔습니다.”

다행히 에르웰이 눈물을 거두고 반응을 보였다.

“오, 정말이세요? 드디어 대신관님께서도 고밥사 사람이 되셨군요.”

산티아노는 미간을 좁혔다.

고블린 밥도 그렇고, 유리병 꽃도 그렇고.

에르웰과 마주칠 때마다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고블린 밥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고밥사. 모르세요?”

“……들어는, 봤습니다. 딱히, 관심이, 없어서.”

“하긴. 대신관님은 여러모로 바쁘시니까요. 아, 고블린 밥에 가셨다면 혹시 농어찜은 드셔보셨나요?”

“당연하지요. 그날 신선한 농어가 들어왔다고 하더군요. 맛이 썩 괜찮았습니다.”

“그럼 다음에는 메뉴에 있는 농어 튀김을 드셔보세요. 정말 부드럽고 맛있거든요. 특히 주인장 특제 소스가 기가 막혀요.”

“그런가요? 달리 추천해줄 요리는 또 없습니까?”

고블린 밥에 대해 이야기를 하느라, 산티아노는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있는지를 잊었다.

문밖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던 케이가 리시에게 작게 속삭였다.

“지난 삶에서 내 계획이 저런 놈 때문에 망쳐졌다고?”

리시도 의문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왜…… 그랬어, 케이?”

“그건 나도 모르지. 믿을 수가 없군. 내 일생일대의 계획이 저런 놈 때문에 끝장나다니.”

믿을 수 없는 건 리시도 마찬가지였다.

신성국에서 만난 산티아노는 기괴한 분위기를 흘렸지만, 아마도 아부틴의 빗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부틴의 빗이 없는 산티아노는 그냥 평범한 대신관, 아니, 약간 모자란 대신관에 지나지 않았다.

리시는 까치발을 하고 케이의 귀에 속삭였다.

“아무래도 내가 없던 당신은 산티아노보다 더 바보였나 봐.”

 

+++

클로이는 울적한 마음으로 라코젠이 머무는 방에 도착했다.

여전히 방을 오가던 라코젠은 자신의 검은 고양이가 창문을 넘어 들어오는 걸 보고 다가가,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라코젠의 커다란 손이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어딜 다녀왔기에 이렇게 힘이 없어?”

“냐아…….”

“낯선 곳에 와서 힘들어? 아빠랑 집에 돌아갈까?”

“냥!”

클로이가 얼른 대답했다.

클로이의 변신 장면을 목격한 산티아노가 이곳에 있는 한,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케이와 리시가 산티아노의 문제를 잘 해결했을지도 의문이었다.

‘나 때문에 다들 곤란하게 됐어.’

클로이는 사라지고 싶었다.

‘내가 좀 더 주의했어야 했는데…….’

수인은 기본적으로 인간이기 때문에, 짐승의 모습으로 한참을 지내는 건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사람과 대화를 나눈 지도 오래돼서, 동료들을 만나 신나게 수다를 떨고 싶었다.

‘멍청했어. 해야 할 일이 우선인데…….’

라코젠이 고민에 빠진 검은 고양이의 정수리를 살살 긁었다.

“나도 그러고 싶긴 한데…….”

그가 중얼거린 말에, 집에 돌아가는 문제로 대화하는 중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만 더 참아봐. 조금만 더…….”

라코젠이 검은 고양이를 들어서 눈을 맞췄다.

“그래 줄 수 있지?”

라코젠의 눈빛을 보는 순간, 클로이는 그가 왜 이곳에 더 머물고 싶어 하는지 깨달았다.

리시를 보고 싶기 때문이리라.

‘바보 같은 작자…… 그 감정을 인정하면 슬프기는 해도, 마음은 편할 텐데.’

 

+++

연회를 이틀 앞두고, 소연회장에서 여자들끼리 만찬을 즐기는 시간을 가졌다.

그린 저택에 머무는 후작 이상 가문의 귀부인과 영애들이 전부 참석했다.

각 나라의 왕비와 공주들도 있었다.

상석에는 가비자르의 황후가 앉았다.

황후는 리시가 주최했으니 리시가 앉아야 한다고 했으나, 리시는 “가장 귀하시니, 황후 폐하께서 자리하시는 것이 옳습니다.”라는 말로 황후를 기쁘게 했다.

담소를 나누며, 리시는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서른 명 남짓한 여인들의 면면을 살폈다.

아는 얼굴도 있고,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이들도 있었다.

대부분은 리시를 향해 호의적인 시선을 보냈지만, 언제나 그렇듯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도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카리브네 왕국의 왕비인 로잘린이었다.

사람들이 리시가 작년에 전염병 해결에 큰 도움을 준 것을 이야기하며 칭찬할 때마다, 로잘린은 입술을 비쭉거렸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다들 칭찬을 해대니 어쩔 수 없이 참아준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공작부인이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낼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일이라서 얼마나 놀랐는지…….”

그렇게 말한 사람은 이트리아였다.

소연회장에 들어올 때부터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리시를 바라보던 이트리아는, 내내 리시 칭찬만 했다.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해냈는데, 교황청에서 성녀 칭호를 내려주신다 하는 것도 거절하고…… 겸손하기까지 하죠.”

이트리아가 리시를 칭찬할 때마다, 에버렛이 추임새를 넣었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쪽은 피해가 꽤 컸는데, 공작부인이 보내준 의원들 덕에 전염병이 수도까지 올라오지는 않았어요. 거기에 포레스트 스파까지 있어서…… 나는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거든요. 공작부인이 우리 땅에 스파를 만들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는지…….”

어느 나라 왕비의 말에, 어느 후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영지에도 스파가 있었답니다. 저도 올해 초에 한 번 가보았지요. 상상이랑 다르게 정말 멋진 곳이었어요.”

그녀는 리시를 보며 말했다.

“남편이 스파와 포레스트 상회를 우리 영지에 몇 개 더 만들어줄 수 있는지 궁금해하더군요. 땅은 우리 쪽에서 마련해주는 걸로 하고요.”

“어머, 우리도요. 주요 도시 몇 군데에 하나씩 들어서면 좋을 것 같은데…… 아,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아르헨의 찻집이 없거든요. 우리 수도에 좋은 자리를 하나 내줄 테니, 아르헨의 찻집을 열어줄 수 있을까요?”

어느 나라 왕비도 후작 부인의 부탁에 편승했다.

그러자 그런 목적도 가지고 찾아온 이들이, 너도나도 끼어들어서 리시에게 부탁했다.

땅을 공짜로 주겠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리시는 특별히 기쁘고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정중한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의 부탁을 듣던 리시가 천천히 말했다.

“떠나시기 전에 관련 서류를 드릴게요. 천천히 검토해보시고 의논도 해보시고 서신을 보내주시면, 진행하도록 할게요.”

사업 이야기가 한 차례 마무리된 후, 이번에는 그린 아카데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린 아카데미의 훌륭한 교수진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와중에, 어느 나라의 공주가 말했다.

“어제 정원에서 녹회색 머리카락의 귀여운 소년을 보았는데, 그 아이는 누군가요? 친척인가요?”

“아, 제가 거두어 키우는 아이랍니다. 남편의 먼 친척이지요.”

토미에 대해서는 그렇게 설명해두기로 했다.

“그 애 부모는 어떻게 됐는데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 건, 로잘린이었다.

“불행한 사고를 당해서…….”

“아, 그래서 입양하기로 한 건가요? 자식처럼 키우기로?”

“아직 입양은 하지 않았지만, 자식처럼 키우고 있어요.”

“그럼 공작과 공작부인 사이의 아이는요?”

“예?”

“결혼한 지 상당히 오래된 거로 아는데요. 벌써 몇 년째인데, 아직도 아이가 없는 게 좀 이상해서요.”

로잘린은 임신 중이었다. 그녀는 볼록하게 올라온 자신의 배 위에 손을 얹고 덧붙였다.

“결혼하면 무엇보다 건강하고 튼튼한 아이를 낳는 게 중요한 일인데…… 똑똑하신 공작부인이 그걸 모를 리도 없고.”

“…….”

“듣기로는 공작과 금슬도 무척이나 좋다던데…… 아직까지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는 건, 공작부인 몸에 문제가 좀 있는 거…….”

“왕비!”

듣다 못한 황후가 나무라듯 로잘린의 말을 끊었다.

로잘린은 흥, 하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리시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어린 왕비를 지그시 응시했다.

카리브네의 왕은 교황만큼이나 나이가 많았다.

왕은 첫 왕비가 병으로 죽은 후 쭉 혼자였다가, 얼마 전에 로잘린과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왕비가 되기 전에 로잘린은 체스턴 왕국의 공주 중 한 명이었는데, 카리브네의 침략을 두려워한 체스턴의 왕이 공물처럼 로잘린을 카리브네의 왕에게 바쳤다.

힘이 약한 체스턴의 왕실에서 공주는 대부분 그런 취급을 받았다.

그나마 왕비 자리에 오른 로잘린은 다른 공주들에 비해 잘된 편이었지만, 할아버지뻘의 남편을 갖게 된 게 그리 즐겁지는 않을 터였다.

좋은 값에 팔아넘기기 위해 길러진 리시는, 로잘린의 기분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기에, 그녀의 무례한 태도에 화가 나지 않았다.

다만.

‘케이랑 결혼한 지 벌써 4년이나 지났구나……. 그러고 보니, 정말 애가 안 생기네.’

로잘린의 지적에, 염두에 두지 않았던 문제가 리시의 머릿속을 채웠다.

로잘린의 말대로 케이와 리시는 금실이 좋아, 거의 매일 밤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죽음이 따라다니는 와중에 아이를 갖는 게 걱정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피하지도 않았다.

‘나는 정말로 아이를 갖지 못하는 몸인 걸까?’

“아이리스.”

작은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옆자리에 있던 에버렛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리시를 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리시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네, 괜찮아요.”

“공작부인은 왕비의 말을 너무 염두에 두지 마시게. 아무래도 왕비가 임신 중이라 감정이 격해서 실언을 한 것 같으니.”

황후가 다정하게 말했다.

로잘린은 다들 리시 편을 들자 기분이 안 좋은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입술을 실룩거리고 있었다.

리시는 그런 로잘린이 안쓰러웠다.

약간의 소동이 있기는 했지만, 큰 문제 없이 만찬이 끝났다.

돌아가는 길에, 리시와 함께 걷던 황후가 말했다.

“아이 문제는 너무 걱정하지 말게. 때가 되면 다 생길 테니.”

“네, 폐하.”

“황실 의원 중에 여인의 몸에 좋은 약을 짓는 이가 있는데, 필요하면 말하게.”

아마도 임신하기 좋은 몸으로 만들어주는 약을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리시는 자신이 지금 당장 임신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황후에게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방에 돌아온 리시는, 제 배를 내려다봤다.

‘임신…….’

지금 당장 임신하는 건 곤란하다.

전염병을 막은 탓에, 리시를 따라다니는 죽음이 더 강력해졌다.

잠시 숨을 돌리며 세계가 리시에게서 눈을 떼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 후에도 해야 할 일이 많아. 대재앙을 막고 나면, 전염병을 막은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해지겠지.’

만약 아이를 낳는다면, 대재앙을 막기 전, 혹은 막고 나서 모든 죽음을 이겨낸 후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인제 와서 불안해졌다.

‘난…… 임신할 수 없는 몸인 거 아닐까?’

(160) 나도 모르는 감정

  지난 삶에서도 임신한 적이 없다.

알포드의 어머니는, 그 점을 가지고 리시를 더욱 압박했다.

-“쓸모도 없는 년이 애도 못 낳네! 저런 걸 집에 들여서 우리 후치스의 혈통이 끊기게 생겼어!”

-“안 되겠다, 알포드. 밖에서라도 애를 낳아와. 저런 미련퉁이랑 애를 갖는 것보다 낫겠지.”

알포드 어머니의 아이 타령은, 리시가 알포드와 결혼하고 반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시작됐었다.

그때 들었던 모진 말들이 떠올라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리시는 소파에 드러눕듯이 앉아서, 뇌를 휘젓는 기억들을 털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럴 때 케이가 찾아왔다.

“들어갈게.” 하고 들어온 케이는, 소파에 늘어져 있는 리시를 보더니 옆에 와서 조용히 앉았다.

잠시 리시를 지켜보던 케이가 리시의 다리를 잡아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리고, 종아리를 꼭꼭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듯, 손의 힘을 조절하며 신중하게 마사지해주는 케이를, 리시는 물끄러미 응시했다.

“케이.”

“응.”

“우리 결혼한 지 4년째야.”

“맞아. 4년 기념 호화 파티라도 열까? 아니면 멋진 성이 있는 곳으로 여행이나 갈까?”

“우리 아직도 아이가 없어.”

케이가 리시를 돌아봤다.

“어머님, 아버님이 우리 아이 문제로 뭐라고 하시지 않아?”

“우리 아이 문제인데, 내 부모님이 어떤 부분에 대해서 뭐라고 하셔야 하지?”

“그린 가문의 혈통을 이어야 하는데, 벌써 4년이나 지났는데도 애가 없어서.”

“아.”

케이는 그런 부분에 대해 부모님이 지적할 수 있다는 걸 전혀 몰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잠시 고민하던 케이가 물었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 지적받고 싶어? 부모님께 지적 좀 해달라고 넌지시 부탁드릴까?”

“……케이. 나 농담하는 거 아닌데.”

“아니, 진짜로. 당신이 그린 가문의 혈통을 이으려고 나랑 결혼한 것도 아니고, 아이는 당신이랑 나 사이의 문제잖아. 부모님이 끼어들 부분이 없는데.”

“부모님은 당신이랑 생각이 다를지도 몰라.”

“글쎄. 우리 부모님은 요새 귀여운 막내딸이 생긴 것 때문에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니시느라, 우리 아이 문제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으실걸.”

케이의 표정을 보니, 리시를 위로하기 위한 게 아니라 진짜인 듯했다.

리시는 그저 애정만 듬뿍 담긴 와이번과 헤레이나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들이 케이나 엘디, 젠을 볼 때는 ‘어휴, 저런 것들이 내 자식이라니…….’라는 눈빛이지만, 리시를 볼 때만큼은 꿀이 뚝뚝 떨어졌다.

케이의 말대로 노공작 부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리시는 몸을 일으켜, 케이의 허벅지에 손을 얹고 그를 올려다봤다.

“당신은?”

“응?”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내가 애를 낳지 못하는 몸이면 어떡할 거야?”

“우리는 이미 애가 있잖아. 토미.”

“……나, 아이를 가진 적이 없어.”

“그거야 당연히…… 아, 지난 삶을 말하는 거군.”

케이가 씩 웃더니 리시를 꽉 끌어안았다.

“당신이 지난 삶에서 아이를 가진 적 없어서 다행이야. 만약 아이가 있었다면 회귀한 후에도 계속 그 아이가 떠올랐을 거 아냐.”

리시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구나. 아이가 있었다면, 그 아이 생각을 떨칠 수 없었겠구나.

토미를 키우기 전이었다면, 그 기분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토미를 키우게 된 지금은, 케이가 말하는 게 어떤 건지 알겠다.

“리시, 나는 아이를 가질 생각 없었어. 아니, 애초에 결혼이라는 걸 할 생각도 없었지. 당신을 만나서 결혼을 했고, 당신이랑 결혼해서 우리의 아이에 대해 상상해보기도 하게 됐어.”

케이가 리시를 조금 떨어뜨린 후,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

“…….”

“당신을 사랑하니까 이것저것 상상하게 되는 거야. 우리의 아이가 생기면 좋겠지. 당신을 사랑하니까. 그런데 없어도 상관없어. 당신만 곁에 있으면. 당신은 어때? 내가 애 못 낳는 몸이라서 정떨어져?”

엉뚱한 질문에 리시가 웃음을 터뜨렸다.

케이도 웃으며 다시 리시를 끌어안았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리시의 등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당신이 이렇게 웃는 걸 보는 게 제일 좋아.”

“응. 나도 내가 이렇게 웃는 게 좋아.”

케이가 리시의 목에 얼굴을 묻고 키득거리다가, 그녀의 여린 살을 살짝 깨물었다.

“뭐, 일단. 당신이 신경 쓰인다면.”

그의 입술이 리시의 목을 타고 올라왔다.

“열심히 애 만드는 노력이나 해볼까?”

뜨거운 숨이 리시의 귓불에 머물렀다.

부드러운 살에 낙인을 찍으려는 듯 잘근잘근 깨무는 느낌이 야릇한 전율을 자아냈다.

리시는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밀착된 몸에 그의 체온이 전해졌다.

소파 옆으로 하나, 하나 떨어지는 옷.

녹아드는 향기.

합쳐지는 숨결.

+++

깊은 밤, 리시는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잠이 들지는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고른 숨을 쉬며 잠든 케이를 응시했다.

‘내가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났을까?’

케이는 언제나 리시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해주었다.

케이를 만난 후, 리시의 삶은 언제나 가장 필요한 것들로 가득 채워져서 풍요로웠다.

그래서 속상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아이를 갖고 싶으리라.

케이가 토미를 대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토미를 키우기 전까지는, 케이가 그렇게 아이를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리시는 작게 한숨을 내쉬다가 침대를 빠져나왔다.

잠시 정원을 걸으며 복잡한 머릿속을 차게 식힐 생각이었다.

그 정원에 누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양쪽으로 길게 이어진 화단 끝, 분수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리시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라코젠…….’

그를 보는 순간, 아이에 대한 생각은 깨끗이 사라지고 ‘죽음’이 리시의 머릿속을 채웠다.

라코젠은 리시를 독살하려 했고, 거의 성공할 뻔했다.

그때의 그 끔찍한 고통을, 리시는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라코젠은 말없이 리시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두워서 그의 눈빛에 무엇이 담겼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그렇다고 휙 돌아서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등을 보이는 순간 그가 달려들어 등에 검을 꽂아 넣을 것 같아서.

리시를 죽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미나스아릭과 스티무어를 흔들어 전쟁까지 일으킨 라코젠이, 뒤는 생각하지 않고 암살을 시도할 것 같아서.

그때, 라코젠이 한 걸음 앞으로 걸어왔다.

리시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리시를 보는 라코젠의 눈이 술렁, 흔들렸다.

‘왜?’

라코젠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지금 나는 여기 있지?’

늦은 밤, 손님용 별관이 있는 서채를 떠나 본채 앞의 정원에 온 이유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쩌면 오다가다 창문에 비치는 리시의 그림자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왜 저 여자는 날 피하지?’

해코지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리웠던 이를 봐서 놀랍고 즐거웠다.

화단 사이로 그녀가 나타났을 때만 해도, 환각을 보는 줄 알았다.

혹시 움직이면 환각이 사라질까 두려워 가만히 서 있다가, 환각이라면 마음껏 만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가가려 했다.

환각이니 손에 닿지는 않겠지만, 시늉이라도 하고 싶었다.

현실에서는 언제나 그녀의 곁을 지키는 케이가 그렇듯, 그녀의 손을 잡고 얼굴을 쓰다듬고 싶었다.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리시가 뒷걸음질을 쳤다.

우습게도, 그녀가 겁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치는 걸 보자마자 이것이 환각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하여 의문이 생겼다.

‘왜 이리도 가슴이 아픈가? 이 감정이 전부 저 마녀 같은 여자의 주술 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라코젠을 앞에 둔 리시는 언제나 저런 표정이었다.

긴장, 두려움, 거리감, 성가심.

저 예쁜 눈동자가 라코젠을 향할 때면 언제나 부정적인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케이를 향할 때는 그러지 않으면서.

더없이 달아 녹아내릴 것처럼 응시하면서.

끔찍한 질투가 뱃속에서 소용돌이쳤다.

끈적거리는 감정이 응축되어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요동쳤다.

라코젠은 제 속을 채운 이 감정이 질투라는 것도 몰랐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 감정은 다 저 여자가 만들어낸 것이니.

내가 그 무슨 수를 써도 가질 수 없는, 저 여자가 만들어낸 불쾌한 주술 때문이니.

“내가 그대에게 무슨 짓을 한다고, 그리 피하는 거지?”

해일처럼 밀려드는 불쾌감과 달리, 라코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은 다정하고 씁쓸했다.

리시는 입술을 꾹 다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아쉬웠다.

목소리 한번 들어보고 싶었는데.

라코젠이 한 걸음 더 다가가자, 리시는 세 걸음 더 물러섰다.

물러서는 중에도 라코젠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라코젠이 돌발행위를 할까 두려워서 그러는 거겠지만, 그조차 라코젠은 기뻤다.

지금은 오롯이 나만 봐주니까. 내게만 신경을 써주니까.

“나는 그저 산책을 하고 있었을 뿐인데. 그대는 이런 시간에 어쩐 일이지?”

이번에도 리시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내가 두렵나?”

들려오지 않는 목소리에 대한 애타는 마음이, 분노로 바뀌었다.

라코젠은 리시의 가느다란 목을 쥐어 부러뜨려도, 그녀가 아무 소리 내지 않을지 궁금했다.

한 조각 남은 이성이 라코젠의 발목을 붙들었다.

“그래, 내가 그대를 불편하게 한다면 당장 이곳에서 떠나주지.”

라코젠은 휙 돌아서서 신경질적으로 걸었다.

걸어가면서도 혹여 뒤에서 그를 붙잡는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을까 집중했지만,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

클로이는 침대에 엎드려서 라코젠을 지켜봤다.

늦은 시간에 나갔던 라코젠이 왜인지 분노와 슬픔에 젖은 표정으로 돌아와서 짐을 챙기고 있었다.

팟, 팟, 팟, 커다란 짐가방에 신경질적으로 물건을 쑤셔 넣던 라코젠이 성질을 못 이기고 보좌관을 깨우러 갔다.

잠결에 깜짝 놀라서 따라온 보좌관은, 내일 그린 공작에게 인사는 하고 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청했다가 뺨을 얻어맞았다.

보좌관과 시종들이 짐을 챙기는 동안, 라코젠은 고양이를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랜디라는 놈을 만나봐야겠어.”

 

+++

공작령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험준한 산의 정상 부근이 국경지대 ‘솔리르’였다.

랜디는 솔리르의 초소에서 국경을 지키고 있었다.

솔리르에 도착한 라코젠은 랜디가 머무는 초소가 무척 초라한 곳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케이는 분명 랜디가 리시의 옛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서, 랜디를 이런 곳에 보냈을 터였다.

‘내색하지 않아도 속으로는 불만이 생기겠지. 단지 옛 남자라는 이유로 이런 대우를 받으면.’

케이의 부하라면 케이와 라코젠의 관계를 잘 알 텐데도, 랜디는 쉽게 라코젠과의 만남을 수락했다.

라코젠은 아무 문제 없이 솔리르에 들어와서 랜디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것만 봐도 랜디가 케이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알만했다.

“전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닙니다. 이런 곳에 있다고 해서 그린 공작의 부하이고…….”

보좌관 애덤이 초조하게 설득했지만, 라코젠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애덤. 나가.”

“전하!”

“나가서 기다려. 지금은 보좌관이 앵앵거리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군.”

라코젠의 차가운 말에 애덤은 한숨을 삼키더니, 무거운 발을 이끌고 응접실을 나갔다.

그와 동시에 랜디가 들어왔다.

라코젠은 랜디를 훑어봤다.

눈썹 아래로 내려오는 길이의 하늘색 머리칼과 갸름한 얼굴, 선이 고운 눈썹 아래에 자리 잡은 가느다란 눈매와 새까만 눈동자.

웃음기가 없어서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 어두워 보이는 인상의 사내였다.

미소를 짓는다면 여자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좋을 외모였다.

랜디는 라코젠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인 후, 앉으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랜디의 눈동자가 라코젠의 품에 안겨 있는 고양이에게 잠시 머물렀다.

“내가 누군지 모르나?”

라코젠의 질문에 랜디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압니다.”

“흐음. 황족에 대한 예우를 모르나?”

“부모 없이 자란 놈이라서요.”

“그래? 내가 듣기로는 아니던데.”

랜디가 눈을 들어 라코젠을 똑바로 응시했다.

라코젠이 비릿하게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161) 저게 뭐지?

“라포드 휘튼.”

랜디의 이름이 꿈틀 움직였다.

라코젠이 미소를 띤 채 느긋하게 말했다.

“예전에 부친이 위틀로 공작가의 기사였다지? 불미스러운 일로 공작가에서 쫓겨나, 안 좋은 소문에 휘말려 다른 곳에서 일할 수도 없게 되어…….”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아이리스에게 마음이 있지? 그것 때문에 아무것도 없이 쓸쓸한 이곳으로 쫓겨난 거고.”

랜디가 쓰게 웃었다.

“상당히 직접적이시군요.”

“내가 돌려 말하는 법이 없어서.”

“내 감정을 공작님께 알리겠다고 협박하려는 거라면…….”

라코젠이 오른손을 들어서 랜디의 말을 막았다.

“난 협박 따위는 하지 않아.”

“그럼 대체 왜 여기까지 와서 그런 말들을 늘어놓으시는 겁니까?”

“아이리스를 갖고 싶지 않나?”

라코젠의 질문에 랜디의 눈이 기묘한 광채를 띄었다.

라코젠은 랜디의 눈빛을 주시하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갖게 해주지. 나와 손을 잡는다면.”

 

+++

마차에 오른 라코젠은 검은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차갑게 웃었다.

‘멍청한 놈.’

던진 미끼를, 랜디는 너무도 쉽게 물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아이리스를 갖게 해주겠다는 말에 눈빛이 돌변한 랜디를 떠올리면 웃음만 나왔다.

“사랑에 미친 놈을 다루는 것만큼 쉬운 게 없어. 안 그러냐?”

“냐아.”

고양이가 나른하게 울더니, 제 등을 쓰다듬는 라코젠의 팔뚝을 확 할퀴었다.

“왜 그래? 뭐가 또 문제인데?”

“냥.”

“까탈스러운 것. 갖다 버릴 수도 없고.”

라코젠은 툴툴거리며 팔뚝에 맺힌 피를 슥 문질러 닦았다.

그런 라코젠을 보며, 검은 고양이는 한숨을 삼켰다.

+++

그린 저택의 주방은 전에 없이 분주했다.

각 나라의 왕족과 상급 귀족들, 거기에 교황과 대신관들까지 참석하는 파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파티의 이유가 우리의 공작부인께서 전염병을 종식한 것을 치하하기 위해서니, 들뜨고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주인마님께서 잘해내신 건데, 왜 파티도 우리 쪽에서 준비해야 하는 거지? 다른 나라에서 성대하게 파티를 열고 초대해야 하는 거 아냐?”

“전염병 여파로 다른 나라들은 사정이 좀 좋지 않은가 봐.”

“안 좋아도 우리 같은 평민들이나 안 좋겠지. 귀족들은 여전히 사치스럽게 지내더만.”

“하긴. 우리 주인마님 같은 분이 또 없지. 뭐 하나 바라시지도 않고 의원들을 풀어서 우리 같은 평민들까지 다 돌보게 해주셨잖아. 정말 대단하셔.”

“맞아요. 주인마님 아니었으면 평민들은 전염병을 이기지 못했을 거예요.”

전염병이 창궐하면 죽어 나가는 건 대부분은 평민과 빈민이었다.

의료 혜택을 거의 못 받기 때문이다.

포레스트 치료소, 그리고 리시가 기부한 바챠와 치료약 덕분에, 돈이 없는 자들도 전염병을 이겨낼 수 있었다.

최근 신문사들은 리시를 찬양하는 기사를 싣느라 바빴다.

주방 하녀들과 주방장들이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며 요리를 하는 동안, 주방 한쪽에는 유진이 팔짱을 끼고 서서 무시무시한 눈으로 주방 안의 광경을 눈에 담고 있었다.

“그런데 유진 님은 왜 저러고 계시는 거래요?”

“그러게 말이야. 배가 고프신가?”

유진이 이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온다는 말도 없이 왔던 라코젠이, 간다는 말도 없이 떠났다.

2년 전, 라코젠은 황태자의 하녀들 사이에 자기 사람을 심어 넣고 리시를 독살하려 했었다.

이번에도 그런 수작을 부렸을지도 모르기에, 들뜬 고용인과 달리 케이의 부하들은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케이의 부하들은 주방뿐 아니라 저택 곳곳에서 라코젠이 남겨뒀을지도 모르는 함정을 찾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파티가 시작될 때까지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해.”

연회장으로 향하며, 케이는 열 번도 넘게 한 말을 반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놈이 그렇게 조용히 떠난 게 이상해.”

리시도 그렇게 생각했다.

아이리스 그린이 주인공이기에, 그린 공작 부부가 마지막으로 입장했다.

연회장에서 삼삼오오 모여 있던 사람들은, 그린 공작 내외가 입장한다는 알림에 말을 멈추고 문을 응시했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그린 공작 내외가 연회장 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짝짝짝-!

박수 소리가 울렸다.

누군가의 박수를 시작으로, 다른 사람들도 얼떨결에 손뼉을 쳤다.

이윽고 커다란 박수 소리가 연회장 안을 가득 채웠다.

귀족의 파티, 그것도 후작 이상의 귀족과 왕족만 참여한 파티에서 박수를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리시는 조금 당황했다.

“혹시…… 피아몬도 대공이 왔어?”

리시의 작은 속삭임에, 케이가 대답했다.

“그런가 봐.”

이런 짓을 시작할 만한 사람은, 미르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호화롭게 꾸민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호화로운 차림의 미르가 환하게 웃으며 누구보다도 열심히 박수를 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미르는 제일 처음에 박수를 시작해서, 가장 마지막에 박수를 끝냈다.

“케이, 아이리스!”

미르는 언제나 그렇듯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두 사람을 부르며 다가왔다.

케이가 물었다.

“대체 언제 왔나? 소식이 없어서 안 오는 줄 알았는데.”

“와야지. 우리 그린 공작부인께서 좋은 일을 하시고 그 상을 받는 자리인데, 당연히 와야지.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내 방문을 알리지 말라고 일렀네.”

“대체 왜 그런 걸로 우리를 놀래주려고 하는 거지?”

케이와 미르가 티격태격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도 다가와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감사를 표했다.

그린 공작 부부의 등장으로 시끄러워졌던 연회장은 교황이 미네르바와 산티아노의 부축을 받으며 연단에 올라가자 다시 조용해졌다.

잔잔하게 흐르던 음악이 멈췄다.

교황은 연단 위에 서서, 모두를 향해 자애로운 시선을 보내다가 리시를 지그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많은 것을 손에 쥐고 있어도 남을 위해 그것을 아낌없이 베푸는 것은 힘든 일이지. 지금 이 앞에 타인을 위해 자신이 쥔 것을 아낌없이 베푼 자가 있도다.”

교황을 향했던 시선들이 리시에게로 향했다.

리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이리스 그린. 이리로 올라오시게.”

리시는 케이의 손을 놓고 천천히 계단을 밟아, 연단 위로 올라가 교황 옆에 섰다.

교황에 대한 예우로 한쪽 무릎을 굽히려 했지만, 교황이 얼른 리시의 팔을 잡아서 멈추게 했다.

“이 늙은이가 교황청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 이 작은 아이가 얼마나 많은 것을 해냈는가.”

교황이 자신을 낮추고 리시를 높였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신의 대리인인 교황은 그 자체로 신과 같기에, 타인보다 자신을 낮추는 법이 없었다.

그런 일이 가능한 건, 세계를 구한 영웅을 축복할 때뿐.

최근 백여 년 동안 벌어지지 않은 일이었다.

“오래전, 유물술사들은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성유물을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교황의 말에, 산티아노의 표정이 구겨졌다.

교황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아이리스에게 감사와 선망의 시선을 보내는 이때, 교황을 말릴 수도 없었다.

“아이리스 그린은 유물술사의 힘으로 지쳐 쓰러질 때까지 수많은 생명을 구해, 그 힘을 허투루 사용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눈치 빠른 사람들 역시 교황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이에 교황청은 신의 이름으로, 유물술사 아이리스 그린이 성유물을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허하노라.”

 

+++

성유물을 개인적으로 사용해도 된다는 것은, 성유물의 개인적인 소유를 허락한다는 말과 같았다.

그것이 얼마나 파격적인 권한인지, 그 자리에 있는 모두는 알고 있었다.

성유물을 개인적으로 다룰 수 있는 자.

그것은 대신관에 준하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과 같았다.

리시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교황을 돌아봤다.

교황이 이런 선언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교황은 리시를 다정히 보며, 리시의 손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아가. 잘 사용할 수 있겠누?”

“물론…….”

리시가 무릎을 굽히려 했지만, 이번에도 교황은 리시의 손을 꼭 잡고 그녀가 가만히 서 있게 했다.

“물론입니다, 폐하.”

“그래, 그래. 그래야지. 자, 다들 뭣들 하고 있는가?”

교황이 리시에게서 시선을 떼고 말했다.

“이제 음악도 연주하고 파티도 즐겨야지. 그러지 않으면 이 호화로운 공간이 아깝지 않겠는가.”

성유물을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유물술사의 등장에 얼이 빠져 있던 악단이 황급히 연주를 시작했다.

리시는 교황과 함께 연단에서 내려왔다.

미네르바가 싱글벙글 웃으며 리시에게 눈짓한 후 교황을 부축했고, 산티아노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리시를 노려보다가 말했다.

“지켜보는 눈이 많을 겁니다, 그린 공작부인. 조심히, 좋은 곳에만 사용해야 할 겁니다.”

리시는 미소 지었다.

“기푸 대신관님처럼 사용하지는 않을 테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산티아노는 얼굴을 붉혔지만, 더는 뭐라 하지 않고 신경질적으로 돌아섰다.

교황과 대신관들이 리시의 곁을 떠난 그 순간. 리시의 곁에 아무도 없는 그 순간에, 그 일이 벌어졌다.

“안 돼!”

날카로운 외침.

퍼억-!

리시를 밀친 누군가.

그리고.

와장창-!

리시가 서 있던 자리로 떨어진 샹들리에.

“꺄아아아악!”

“으헉!”

“으아아!”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비명.

리시는 얼어붙었다.

부릅뜬 눈에 비치는 광경이 현실적이지 않았다.

악몽을 꾸는 중인 게 분명하다고, 리시는 생각했다.

바닥에 흩어진 샹들리에의 유리 조각,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천장에서 찬란한 빛을 뿌리고 있었던 육중한 샹들리에.

‘왜 저기에 저런 게 있지? 그리고…….’

부서진 샹들리에 아래,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

‘저게 대체…… 뭐지?’

넓게 퍼지기 시작한 붉은 선혈.

‘왜……? 왜 저런 게……?’

제대로 사고할 수가 없었다.

뇌가 휘저어져 곤죽이 된 것만 같았다.

쿵……쾅……쿵……쾅……

마치 지진이 난 듯 울리는 소리가 제 심장박동 소리라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사람들이 무어라 떠들어대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때.

“이트리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외침과 함께, 이오벳이 사람들을 헤치고 달려와 ‘그것’의 옆에 멈췄다.

‘이트리아…….’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무언가가 쨍, 하고 깨지며, 현실이 리시를 짓눌렀다.

“흡.”

리시는 숨을 들이마셨다.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이트리아. 이런 식으로 날 떠나는 건 안 돼. 안 돼.”

이오벳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묵직한 샹들리에를 들어 올리려고 애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오벳! 위험하다!”

황제가 버럭 외치는 소리와 함께, 황제의 호위가 달려가 이오벳을 끌어내려 했다.

“이거 놔!”

이오벳이 절규하며 호위들을 떼어내려고 몸부림쳤다.

샹들리에로 향하는 케이와 크리시나가 리시의 눈에 들어왔다.

케이가 허리를 굽혀 샹들리에의 아랫부분을 잡으려는데, 크리시나가 더 빨랐다.

쭈그리고 앉았던 크리시나는 제 손이 유리에 베이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샹들리에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아!”

“어, 어떡해?”

“흐아아……“

육중한 흉기를 치웠으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끔찍한 광경이 그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와 원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는 드레스, 그리고 원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얼굴.

‘세인트 이트리아.’

순간, 리시의 머릿속에 지난 삶의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안전한 저택을 떠났다가, 결국 병에 걸려 죽고 만 세인트 이트리아.

이번 삶, 리시는 그녀를 살렸지만, 그녀는 리시를 구하다가…….

터억-

누군가 리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리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제 옆에 서 있는 사람을 올려다봤다.

(162) 내가 바로 죽음.

미르가 리시를 향해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리시는 미르의 입가에 묻어 나오는 미소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이런 상황에서 웃는 거지?

“리시. 여기서 뭘 하고 있습니까?”

미르가 리시의 왼손을 잡아, 그녀의 검지 부근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입맞춤을 위해 허리를 굽힌 자세 그대로 고개만 들어, 리시와 시선을 맞추고 말했다.

“능력을 보여줘야지요.”   멍하게 미르를 보던 리시는, 그의 입술 아래에서 반짝거리는 반지를 발견했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돌아왔다.

“고마워요, 미르.”

리시는 서둘러 아비규환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호위들에게 붙들려서 이트리아에게 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황태자. 황태자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라고 외치는 황제. 또 샹들리에가 떨어질까 봐 자리를 뜨려는 사람들. 엉망이 된 이트리아를 보며 공포에 질려 얼어붙은 사람들.

그들은 자그마한 공작부인이 핏물을 밟고 이트리아에게 다가가, 그 옆에 살며시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을 보았다.

공작부인의 작은 손이 엉망이 된 이트리아의 머리 위로 향하는 것도 보았다.

그녀의 손에서 시작된 연푸른 빛이 서서히 번져 이트리아를 포근하게 감싸는 것을, 흐르던 피가 멈추는 것을, 반쯤 찢기고 부서진 머리가 원래의 형태로 돌아오는 것을,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목격했다.

유물술사에 대해서도 알고, 리시가 치료소를 돌아다니며 행한 치료에 대해서도 알지만, 그 광경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옅었던 푸른 빛이 강렬한 파랑으로 변화하는 광경은, 마치 동트는 하늘을 보는 것처럼 경이로웠다.

끝을 가늠하기 힘든 푸름이 완전히 이트리아를 감쌌다.

푸름에 먹힌 듯 사라졌던 이트리아는, 빛이 옅어지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다.

“이트리아…….”

황태자가 자기를 붙들고 있던 호위를 뿌리쳤다.

눈앞에서 벌어진 기적에 넋을 잃은 호위는 황태자를 붙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호위에게서 벗어난 황태자가 이트리아에게 달려가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트리아의 볼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의 손끝에 분명하게 전해지는 온기, 생명, 그리고 숨결.

“하아.”

이오벳이 안도의 숨을 뱉어내며 허리를 굽혀 이트리아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댔다.

“이트리아.”

 

+++

그린 저택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 다코트 시 북부의 성벽 너머 높은 나무 위에서, 저택 쪽을 예리하게 응시하는 녹색 눈동자가 있었다.

은빛 머리칼을 가진 그는 활 하나를 손에 든 채, 멀리 보이는 그린 저택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눈빛이 차게 가라앉았다.

“역시 이런 걸로는 죽이기 힘든가? 저 여자를 지켜주는 사람이 너무 많아.”

그가 손을 위로 올리자, 잠시 후 화살 하나가 날아왔다.

그는 가볍게 화살을 잡아 허리춤에 달고 다니는 활통에 넣고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린 저택은 멀리 있으니, 이쪽으로 오려면 한참이 걸릴 것이다.

‘온다 해도 내가 한 짓이라는 건 모르겠지.’

그는 성유물 덕분에 밝아진 눈으로, 멀리서도 저택 안의 광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리스 그린.’

그녀가 치유의 반지를 사용하는 방식은 놀라웠다.

보통은 힘을 자제하지 못해 치유력이 멀리까지 퍼지기 마련인데, 그녀는 오롯이 다친 여자에게만 통하도록 힘을 응축시켰다.

‘내 예상보다 더 실력이 좋군. 내 편으로 끌어들일까? 아니, 아니지.’

그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세상에 유물술사는 나 한 명으로 충분해. 나는 선택 받은 인간이니까.’

운명의 날이 왔을 때, 모두가 자신을 경외하고 자신의 앞에 무릎 꿇게 만들려면, 비슷한 힘을 가진 유물술사 따위는 없는 편이 나았다.

‘역시 죽여두는 게 좋겠지.’

 

+++

모두가 떠나서 을씨년스러운 연회장 안에, 케이와 제이미만 남아 있었다.

이트리아가 리시를 대신해서 샹들리에에 깔린 흔적은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케이는 샹들리에의 줄을 확인했다.

“역시 낡아서 끊어진 게 아니야.”

“그렇군요.”

“내가 그걸 잘못 들은 게 아닌 것 같군.”

케이는 샹들리에가 달려 있던 천장을 확인한 후, 창문의 반대쪽 벽을 올려다봤다.

“저기, 저거 보여?”

천장과 벽이 이어지는 곳 부근에 작은 흔적이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긁힘.

“보입니다.”

“창문에서 날아와서.”

케이가 창문을 가리킨 손가락을 그대로 그어 그 흔적까지 이어갔다.

“저기에 꽂혔다면, 정확하게 샹들리에의 줄을 지나갔겠지.”

“뭔가가 샹들리에를 고정했던 줄을 끊었군요.”

“그래. 하필이면 리시가 그 아래에 있을 때.”

“2황자가 한 짓일까요?”

“아니. 그건 아닐 거다. 애들한테 저택 안을 확인하라고 말했나?”

“네.”

“그럼 관두라고 해. 이건 저택 안에서 날린 게 아니야.”

라코젠이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기에, 케이는 파티 내내 경계하고 있었다.

청각과 후각에 모든 힘을 집중해서, 저택 부근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냄새는 거의 맡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무언가 날아 들어오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럼 어디서 날아온 거지요?”

“뭔가 날아왔는데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어. 뭔가 날아오는 소리를 들었는데 내가 대처할 수도 없었지. 평범한 건 아니야. 확인을 좀 해봐야겠어.”

 

+++

이트리아를 위해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고 방에 돌아온 리시는, 창백해진 얼굴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던 에르웰은, 교황에게 상을 받기 위해 나갔던 리시가 어두운 표정으로 돌아오자, 질문도 못 하고 눈치만 봤다.

‘이트리아가 죽을 뻔했어.’

이번 삶에서는 그녀를 살린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또 누군가를 구하려다가 죽을 뻔했다.

마침 그 자리에 있던 미르가 리시를 정신 차리게 돕지 않았다면, 치유의 반지를 사용하더라도 살리지 못했을 것이다.

‘대공에게는 따로 감사 인사를 해야겠지.’

소름이 가라앉지 않았다.

부서진 샹들리에 아래에서 퍼지던 붉은 선혈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때, 크리시나가 돌아왔다.

“아이리스 님. 황태자비님께 의원들을 보내고, 다른 손님 중에도 필요하신 분께는 의원을 보냈습니다. 떠나신다고 하시는 분들께는 도울 사람을 보냈고요.”

“응, 고생했어요.”

“좀 괜찮으세요?”

리시는 걱정스럽게 묻는 크리시나를 돌아봤다.

아까 샹들리에를 맨손으로 들어 올린 크리시나의 손은 아직도 치료하지 못해서 엉망으로 찢겨 있었다.

“나보다는…….”

리시가 일어나서 크리시나의 손을 잡았다.

“크리시나의 손을 걱정해야죠.”

“아, 저는 괜찮아요.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니고……. 힘을 많이 사용하셔서 지치셨을 텐데 안 그러셔도 돼요. 그냥 약 바르면…….”

크리시나가 손을 빼내려 했지만, 리시는 이미 힘을 사용한 후였다.

푸른 빛이 크리시나의 손을 감쌌다가 사라지자, 엉망이었던 손이 깨끗이 나아 있었다.

크리시나는 리시가 치유의 힘을 사용하는 걸 자주 봐오긴 했지만, 직접 그 힘을 받아보니 역시 기적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눈을 굴리며 상황을 파악하려던 에르웰이 결국 포기하고 물었다.

지쳐서 도로 소파에 앉은 리시를 대신해서 크리시나가 아까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리시는 눈을 감았다.

다시 그 현장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아팠겠지. 끔찍하게 아팠을 거야.’

리시는 키룻사의 독을 마시고 죽어가던 순간에 겪었던 고통을 아직도 어제의 일처럼 떠올릴 수 있었다.

리시를 대신해서 죽을 뻔한 이트리아도 그런 통증을 느꼈을 것이다.

리시를 천사 보듯이 바라보던 이트리아의 생기 넘치는 눈동자가 떠올라서 가슴이 미어졌다.

‘나는 성녀 따위가 아니야.’

죽음이 리시를 따라 다닌다.

그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다친다.

그럼 나는 무엇일까?

‘내가 바로 죽음, 그 자체인 거야.’

 

+++

케이는 서재에서 예전에 확인하고 구석에 처박아뒀던 책과 서류들을 끄집어내 빠르게 읽어내려갔다.

제이미는 그 옆에 조용히 서서 케이가 분주히 움직이는 걸 지켜봤다.

몇 시간 후, 책과 서류를 내려놓은 케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이미. 혹시 7년 전에 우리가 황무지 아래의 해변에 있는 동굴에 찾아갔던 거 기억나?”

“기억하지요. 오그어 부락과 마주쳐서 죽을 뻔한 것도 기억납니다.”

“그때 거기에 갔던 이유도?”

“흐음.”

제이미는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말했다.

“성유물을 찾으러 갔었지요. 아마…… 그래요. 겐스트였지요. 영웅 겐스트의 활.”

“맞아. 광분한 몬스터들의 습격으로부터 세상을 구한 겐스트가 노년에 해변에 살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는 문헌을 찾아냈지. 그게 황무지 아래의 남부 해변이라는 걸 알아내서 찾으러 갔었고.”

“하지만 못 찾았죠. 그 어디에도 활의 흔적은 없었습니다.”

“만약 있었다면 어떨까?”

케이가 책 하나를 펼쳐서 내밀었다.

밑줄이 그어진 문장을, 제이미는 소리 내서 읽었다.

“겐스트의 활 솜씨는 백발백중이라서, 아무리 먼 곳에 있는 적도 그의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케이는 다른 책을 펼쳐서 내밀었다. 거기도 밑줄이 그어진 문장이 있었다.

“그는 적중의 활을 당겼다. 활을 떠난 화살은 도시 너머에 있는 그의 동료 옆의 나무에 정확하게 꽂혔다. 그의 동료는 화살에 묶인 쪽지를 확인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주 오래전에 활동한 유물술사의 연대기에 적힌 내용이었다.

“난 이 적중의 활이, 영웅 겐스트가 사용하던 활일 거라고 확신했어. 그리고 지금, 다시 한번 확신해. 누군가 이 활을 갖고 있어.”

“저런…….”

제이미가 미간을 좁혔다.

“갖고 있다 해서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그래. 아마 유물술사의 손에 들어간 거겠지. 그것도 아이리스의 죽음을 원하는 유물술사.”

“……하렌트 미어 백작일까요?”

“글쎄. 일단 미어 백작이 어디서 뭘 하는지 알아봐. 그리고 우리가 찾으려다가 실패한 성유물 목록을 작성해줘.”

 

+++

파티 다음 날.

귀빈으로 가득했던 서쪽의 별관들 대부분이 비었다.

파티 중에 벌어진 끔찍한 사고.

그 사고로 다친 게 하필이면 가비자르 제국의 황태자비라서, 자기들에게 불똥이 튈까 두려워 서둘러 떠난 것이다.

교황은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그린 저택에 머물겠다고 했지만, 케이가 거절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폐하께서도 떠나시는 게 좋겠습니다. 나중에 찾아뵙겠습니다.”

교황을 따라온 성기사 중 엘디도 함께 떠났다.

엘디는 떠나기 전에 리시에게 백번쯤 말했다.

“형수. 절대로, 제발,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먼저 살펴. 내 목숨과 내 이익이 우선이라는, 아주 이기적인 마음가짐을 가지라고. 알겠어?”

케이는 엘디의 말에 깊은 동의를 표시했다.

그렇게 교황 일행도 떠난 후에야, 케이와 리시는 가비자르 제국의 귀빈들이 묵는 서채 별관 중 하나로 향했다.

서채의 별관 중에서도 가장 넓고 호화로운 건물.

그 앞을 지키는 건 황제의 호위기사였다.

황제의 명을 받은 건지, 그들은 그린 공작 부부를 안으로 들이지 않으려 했다.

“폐하께서는 황태자비님이 회복하실 때까지, 그 누구도 들이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그린 가문의 의원은 어젯밤에 케이와 리시에게, 이트리아의 상태가 아주 좋다고 보고했다.

심지어 이트리아는 “평소보다 훨씬 개운해요. 늘 허리와 어깨가 아팠는데 그 통증도 사라졌고요. 다시 태어난 기분이네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황제가 이걸 빌미로 우리 가문 목줄을 쥐고 흔들 생각인가 보군.”

황제의 명이니 억지를 부릴 수도 없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케이가 작은 목소리로 하는 말에 리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몇 번 더 방문하는 걸 막은 후에야 우리를 들여 보내주겠네.”

황제는 그들의 예상대로 행동했다.

그린 저택에서 벌어진 사고. 심지어 황태자비가 공작부인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다가 죽을 뻔한 상황이었다.

이트리아에게 목숨을 빚진 상황에서, 황제가 문을 좀 막았다고 모르는 척할 수는 없는 노릇.

그린 공작 내외는 몇 시간마다 한 번씩 별채를 방문해 황태자비를 뵙기를 청했지만, 별채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163) 유물술사 공작부인

  다음 날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별채의 문이 열렸다.

리시는 무거운 마음으로 이트리아의 방에 들어갔다.

예상과 달리 이트리아는 환하게 웃으며 리시를 맞이했다.

“공작부인!”

이트리아가 말릴 새도 없이 침대에서 내려와 리시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두 손으로 리시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내 목숨을 구했다면서요? 그, 치유의 반지로요.”

“전하께서 제 목숨을 구하신 겁니다.”

“내가 그대의 목숨을 구하고, 그대가 내 목숨을 구한 거죠. 고마워요, 공작부인.”

이트리아의 진심 어린 감사에, 리시는 몸 둘 바를 몰랐다.

만약 그때 이트리아가 리시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지 않았다면, 샹들리에에 깔린 건 리시였을 것이다.

머리가 반쯤 부서질 정도로 위험한 상황에서, 치유의 반지를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했으리라.

어쩌면 즉사했을 수도 있다.

“그대가 유물술사이고, 치유의 반지로 병자들을 고치러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에, 나도 그 기적을 한번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내가 바로 그 기적 덕분에 목숨을 구했네요.”

순수하게 말하는 이트리아를 보며, 리시는 생각했다.

아무 힘도 없는데 안전한 저택을 벗어나 병에 걸린 이들을 도우러 다닌 당신의 지난 삶이야말로 기적이라고.

성유물의 힘으로 남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남을 구한 당신이야말로 기적이라고.

하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키며 고개를 숙이는데, 황제의 꼬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숨을 구한 것은 공작부인이지. 황태자비는 너무 그리 자세를 낮출 것 없다!”

“폐하.”

그제야 리시는 이 방에 있는 사람이 이트리아만이 아니라는 걸 떠올렸다.

황제와 황후, 그리고 이오벳도 함께 있었다.

황제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리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옆에 있던 이오벳이 안절부절못하며 황제를 말리려 했지만, 황제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대가 전염병으로부터 사람을 구하기 위해 노력한 것도 알고, 그 일은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에 몸소 이곳까지 찾아와 그 노고를 칭찬해주려 했건만, 그대 때문에 내 며느리가 죽을 뻔했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정말 죄송합니다.”

케이가 나서서 사과했지만, 황제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황제는 자신의 며느리인 황태자비 이트리아보다, 리시의 명성이 훨씬 드높은 것이 마음에 안 들던 차였다.

이트리아가 리시를 구하려다가 죽을 뻔한 사건은, 앞으로 그린 공작의 기세를 조금쯤 눌러줄 기회가 될 것이다.

“도대체 저택 관리를 어찌하기에 모두가 모인 그 연회장에서 샹들리에가 떨어지는 사고가 벌어지는가? 만약 그 샹들리에에 맞은 것이 교황 폐하였으면 어쩔 생각이었는가?”

“제가 좀 더 살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습니다. 심려 끼쳐 죄송합니다.”

리시가 정중하게 말했지만, 황제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그대 때문에 내 며느리가 평생 앓는 몸이 된다면 그걸 어찌 책임질 텐가?”

“폐하.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다치기 전보다 훨씬 좋아졌어요.”

이트리아가 끼어들자, 황제가 인상을 찌푸렸다.

“넌 가만히 있거라. 마음만 고와서는.”

“폐하. 이건 그저 사고일 뿐입니다. 그리고 공작부인이 치료해준 덕에 이트리아도…….”

“너도 입 닥치고 있고! 심약한 녀석.”

황제가 이오벳에게 버럭 고함을 쳤다.

그동안 조용히 서 있던 황후가 입을 열었다.

“내게도 입 닥치라 하실 겁니까?”

“뭐요?”

“황제께서 왜 이리 노하셨는지 모르겠군요. 사고가 일어났고, 황태자비가 공작부인을 구하려다 크게 다쳤습니다. 그리고 공작부인은 황태자비를 훌륭하게 치료해냈지요. 두 아이가 서로 목숨을 구해주었는데,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리 분노를 풀지 못하시는 겁니까?”

“황후는 아무것도 모르면 끼어들지 마시오.”

“내 며느리이기도 합니다. 내 눈으로 보았으니, 모를 것도 없고요.”

황제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황후를 노려봤지만, 황후는 은은한 미소를 띠고 그의 시선을 받아냈다.

리시는 황후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라코젠 때문이구나.’

2황자인 라코젠은 후궁의 아들이었다.

리시가 알기로 황후와 라코젠의 어머니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라코젠이 미나스아릭을 손에 넣자, 황제는 전과 달리 라코젠을 향한 애정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오벳이 아직 황제 자리에 오르지 못했으니, 황후는 혹시라도 황제가 마음을 바꿔 황태자 자리를 갈아치울까 봐 걱정될 것이다.

그러니 황제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안 들 테고, 한편으로는 이오벳과 절친한 그린 공작에게 힘을 실어줘야겠다고 판단했으리라.

‘나는 이제 교황 폐하의 인정을 받은 유물술사라서 황제도 날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지. 지금은 황제가 그 사실을 깜빡한 것 같지만…….’

굳이 그 사실을 상기시켜줄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 재앙을 막기 위해 해야 할 것이 많은 데다가, 죽음까지 따라다니는 마당에, 제국의 미움까지 사서 좋을 게 없었다.

당분간은 가비자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낫다.

그 때문에 리시는 황후의 호의가 기꺼웠다.

“황후는 며느리를 아끼는 마음이 없는가 보오.”

황제의 지적에 황후가 빙그레 웃었다.

“왜 없겠습니까? 어여쁘고 사랑스러우나, 그 마음은 공작 부인에게도 동일하답니다. 다름 아닌 가비자르를 전염병의 위험에서 구해준 이가 아닙니까? 게다가 교황 폐하께서 직접 공작부인을 유물술사로 인정하시며, 개인적으로 사용할 권한을 주셨지요.”

황후는 리시가 딱 필요로 하는 말을 해주었다.

저 말이 리시의 입에서 나오면 문제가 됐겠지만, 황후의 입에서 나왔으니 황제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터였다.

그제야 황제는 리시가 대신관에 버금가는 지위를 갖게 되었다는 걸 상기해낸 듯,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만약 또 전염병 같은 문제가 터졌을 때, 리시가 가비자르 제국을 모르는 척하면 곤란해질 테니까.

이성이 돌아온 황제는 민망한 듯 흠흠 헛기침을 하더니, 아까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며느리가 크게 다쳐 상심한 마음에 그런 것이니, 공작부인은 너무 서운해하지 마시게.”

“네. 물론입니다, 폐하.”

 

+++

사람들은 황태자비가 죽을 뻔한 사건 때문에 한동안 시끄러워질 거라고 예상했지만, 가비자르에서 온 귀빈들은 조용히 그린 저택을 떠났으며 따로 문제가 벌어지지도 않았다.

‘하긴. 전염병 때 그린 가문이 그동안 한 게 있는데, 아무리 황제라 해도 문제 삼기 어렵겠지. 게다가 공작부인이 그 능력으로 황태자비를 완전히 고쳐주기도 했고.’

며칠간 신문들은 ‘그린 공작 저택에서 벌어진 기적’이라는 주제로, 공작부인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몸을 던진 황태자비의 고결한 마음과 그런 황태자비를 말끔하게 치료한 공작부인의 경이로운 능력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또한, 몸소 그린 저택에 방문한 교황이 공작부인을 유물술사로 인정했으며, 개인적으로 성유물을 사용하는 걸 허락했다는 사실도 대륙을 들썩이게 했다.

꽤 오랫동안 ‘유물술사 공작부인’에 대한 건, 재미난 이야깃거리였다.

술집이고, 음식점이고 할 것 없이,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유물술사 공작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 그린 가문에 들어온 지 4년.

이제 아이리스를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고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샹들리에 사건으로부터 한 달이나 지났지만, 유물술사 공작부인에 대한 열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하지만 그린 저택은 언제나처럼 조용했다.

“토! 미! 너, 내가 그런 꼴로 돌아다니지 말랬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기억하는 거 다 알거든! 너, 이 자식! 너, 이리 와! 아, 쬐끄만 게 왜 저렇게 잽싸?”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리시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조용하지는 않구나.’

창문을 열자, 초겨울의 서늘한 바람이 훅 밀려들어 와 리시의 머리칼을 헤집고 지나갔다.

정원수를 타고 이리저리 도망치는 토미와 토미를 잡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나단이 들어왔다.

나단이 왜 저러나 싶었는데, 토미가 바지만 입고 상의는 입지 않은 상태였다.

나단이 잡으려고 할 때마다 토미가 까르르 웃으며 다른 나무로 훌쩍 넘어가는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단은 충분히 토미를 잡을 수 있으면서도, 토미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못 잡는 척하는 게 분명했다.

‘속이 참 시끄러웠었는데…….’

그저 저택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일부를 보았을 뿐인데, 복잡했던 머릿속이 한결 편안해졌다.

‘요새는 케이도 많이 바쁜 것 같고.’

리시는 평화로운 정경을 내려다보며 다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작년에 노공작 내외와 제레시엔이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을 돕다가, 혼란을 틈타 돈을 노린 강도들에게 당해 죽어야 했다.

살아남은 엘디는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올해 슬리브 스톤을 사용해 영원한 잠에 빠졌을 것이고.

하지만 둘 다 벌어지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케이에게 부탁해 그들에게 붙여둔 부하들이 있었는데, 특별히 위험한 일은 없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올해가 무사히 지나가고 있어.’

케이를 어둠에 밀어 넣을 사건은 무사히 피했다.

‘이제 남은 건…….’

약 1년 후, 크리드 2021년에 전 대륙을 강타할 재앙.

‘그걸 막고 나면, 그린 가문은 이 대륙에서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가문이 될 거야. 그때, 케이가 수인이라는 걸 밝히고 수인의 해방을 주장하면…… 다 끝나겠지.’

문제는 대재앙을 대비하기 위해 마탑에 의뢰한 것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제 고작 1년 남짓 남았으니, 지금쯤 만들어내서 제작에 들어가야만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원래 있던 걸 좀 더 강하게 개조할 뿐인데,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유가 뭐지?’

리시는 마탑의 연구자들이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광산에서 나오는 메르티움의 절반을 마탑에 보내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직접 가서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아.’

 

+++

케이는 제이미가 가져온 성유물 목록을 확인했다.

그동안 찾으러 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온 성유물 목록을 확인한 케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서른 개가 넘는군.”

“그렇지요. 대장은 그날 활을 쏜 자가 이 성유물들을 전부 갖고 있으리라고 보십니까?”

“전부는 아니야. 하지만 몇 개쯤은 갖고 있을 것 같아. 이 중 몇 개는 정말 위험한 것들이라서, 찾아내는 대로 힘을 제압하고 부숴버릴 예정이었거든. 만약 놈이 위험한 걸 손에 넣었으면 여러모로 곤란해져.”

“……유물술사일까요?”

“글쎄. 운 좋게 성유물을 손에 넣은 놈일지도 모르고. 만약 그런 놈이라면 지금쯤 성유물에 잠식당해서 제정신이 아니겠지. 죽어가고 있으면 더 좋고.”

“하지만 자기가 유물술사라는 걸 숨기고 있는 유물술사일 수도 있지요. 어쩌면 형수님만큼이나 강한 힘을 가진 유물술사.”

케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문제야. 하지만 놈이 유물술사라면 대체 왜 리시를 죽이려는 거지? 죽여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세상에는 자신이 유일무이한 존재이기를 원하는 자들이 있지요.”

“아니면 산티아노가 키우는 놈일지도…… 아니, 그건 아니겠군. 그날, 샹들리에가 떨어졌을 때 산티아노는 누구보다도 놀란 것 같았거든.”

“제 눈에도 그래 보였습니다.”

“하렌트 미어 쪽은 어때? 찾아냈나?”

제이미가 고개를 저었다.

“두문불출한 자라 찾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신성국 쪽에도 사람을 보내서 감시하고 있지만,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눈에 띄는 놈이니 나타났다면 쉽게 찾아낼 수 있었겠지. 일단 계속 찾아보라고 하고, 황무지 쪽에 전언을 보내. 할 일이 생겼으니, 준비하고 있으라고.”

(164) 살려줄까, 말까?

  제이미에게 명령을 내린 후, 케이는 리시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건, 창문 앞에 서 있는 리시의 뒷모습.

햇빛을 받아서 찬란하게 반짝이는 그녀의 머리칼은 마치 엘프의 성지에 떨어지는 폭포수 같았다.

기척을 느낀 듯 돌아서는 리시의 움직임이, 케이의 눈에는 아주 느릿하게 비췄다.

그녀의 움직임 하나, 하나가 명화처럼 케이의 눈동자에 각인되었다.

리시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지자, 무거웠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케이가 두 팔을 벌리자, 리시가 찡긋거리며 웃었다. 케이가 재촉하듯 팔을 흔들자, 리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달려와서 안겼다.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자그마하고 부드러운 생명체가 더없이 사랑스럽고 달콤해서, 케이는 잠시 자신을 둘러싼 여러 가지 문제를 잊었다.

리시를 볼 때면 늘 그랬다.

이래서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는 모양이라고, 결혼 4년 차의 케이는 여전히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리시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검지로 살살 꼬아서 흘러내리며, 케이가 말했다.

“데이트를 청합니다, 공작부인.”

“어머나.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오늘은 마음이 통했네요.”

“평소에는 안 통하나 봅니다?”

“요새 얼굴 보기 힘들어서, 안 통하나 했지요. 매일, 매일, 보고 싶었거든요.”

“나도 그래, 리시. 할 수만 있으면 당신을 작게 만들어서…….”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다고?”

“아니. 주머니에 넣으면 보이지 않으니, 유리병에 넣어서 목에 걸고 다니고 싶어.”

“어머나. 나도 당신을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또 마음이 통했네?”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둘은 밖으로 나왔다.

마차를 타는 대신 윈디와 화이트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전염병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다코트 시는 벌써 일상을 회복해서 전과 달라진 점이 없었다.

시내는 여전히 사람이 많고 활기가 넘쳤다.

케이와 리시는 평범한 연인처럼 식사하고 연극을 한 편 본 후, 찻집에 들어갔다.

“요새는 오렌지 파이가 잘나가요.”

아르헨의 추천을 받아서 오렌지 파이와 허브티를 시켰다.

상큼하고 달콤한 오렌지 잼이 듬뿍 들어간 파이 한 조각을 단숨에 먹은 케이가 말했다.

“할 얘기가 있어.”

“응. 해줘.”

“지난달에 샹들리에가 떨어진 건, 사고가 아니었어.”

생각지 못한 말에 리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리시는 들고 있던 파이를 내려놓은 후, 두 손을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올려놨다.

“누군가 당신을 죽이려 해, 리시.”

“2황자나 산티아노 말고?”

“아마도.”

케이는 리시에게 자신이 알아낸 것을 알렸다.

차분하게 이야기를 듣던 리시가 물었다.

“우리 쪽이 갖고 있는 성유물은 얼마나 돼?”

“얼추…… 20개 정도?”

“그중에서 내가 내 몸을 지키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건?”

“안타깝게도 많지 않아. 보통 공격용으로 쓸 만한 것들만 찾아냈거든.”

“그거면 돼.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잖아.”

“리시, 공격력이 있는 성유물은…….”

리시가 검지를 들어서 케이의 말을 막았다.

그동안 꾸준히 성유물에 관해 공부해온 리시도, 이제 케이만큼은 성유물에 대해 알았다.

공격 쪽으로 특화된 성유물은 한마디로 남에게 해를 끼치는 위험한 성유물이라는 뜻. 자칫 잘못하다가는 사용자까지도 위험에 처하게 만들 수 있다.

“케이. 선택해. 내가 내 몸 하나 지킬 무기도 없이 샹들리에 같은 것에 짓눌려서 죽는 것. 좀 위험하기는 해도 나 자신을 지킬 만한 무기를 갖고 다니다가 위험을 피하는 것. 어느 쪽이 낫겠어?”

케이가 쓰게 웃었다.

“선택의 폭이 너무 좁잖아.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기도 했고.”

“내가 매번 이런 문제로 당신을 설득해야겠어?”

케이가 양손을 살짝 들었다.

“알겠어, 리시.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응. 케이, 나 마탑에 갈 거야.”

케이가 입을 떡 벌렸다.

원하는 대로 하라는 말을 이런 식으로 이용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리시는 담담하게 아까 내려놨던 파이를 한 입 베어 물고 있었다.

“리시? 내가 지금 뭘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리시가 파이를 오물오물 공들여 씹고 삼킨 후에 말했다.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케이. 나, 마탑에 갈 거야.”

“왜?”

“아무래도 마탑의 마법사들이 농땡이를 피우는 것 같거든.”

“……유진이나 나단을 보내서 감시하라고 할게.”

“그걸로는 안 돼. 에르웰을 데려가서 충분히 닦달하고, 올해가 다 끝나기 전에 완성품을 받아내야 해. 안 그러면 시간에 못 맞춰.”

케이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자신이 뱉은 말이 있기에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말았다.

따지고 보면, 리시가 마탑에 가겠다는데 막을 권리는 없었다.

케이 역시 당분간 저택을 떠날 예정이었는데, 리시가 그걸 막을 리 없는 것처럼, 케이 또한 그러해야 했다.

“나도 당분간 저택을 비우게 될 거야. 성유물을 찾으러 가야 하거든.”

“응.”

역시나 리시는 케이를 말리지 않았다.

케이는 자신처럼 리시가 ‘걱정되니까 가지 마. 내 옆에 붙어 있어.’라고 간절히 말하면 어떤 기분일지 떠올려 봤다.

‘기분 끝내주겠군.’

하지만 자신은 리시처럼 예쁘지 않으니, 콧소리를 내며 애원한다고 리시의 마음이 흔들릴 리가 없었다.

케이는 매달리는 걸 빠르게 포기하고 말했다.

“유진이랑 나단, 그리고 기사단 하나를 데려가.”

“알겠어.”

리시도 제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호위기사들을 데려가라는 것까지 반대하지는 않았다.

“언제 떠날 거야?”

“최대한 빨리. 3, 4일 정도 후에는 출발하고 싶어.”

“그래. 그럼 그전에 쓸 만한 성유물을 좀 추려서 가져오라고 할게.”

 

+++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케이는 그동안 찾으려고 계획만 해뒀던 성유물을 찾기 위해 대륙 남부로, 리시는 북서쪽에 있는 마탑으로 향해야 했다.

하지만 떠나기 직전에 받은 보고가 케이의 발목을 붙들었다.

케이는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제 앞에 서 있는 쌍둥이 형제를 응시했다.

르만과 르덴.

예전에 브리트니가 자기를 도와줄 암살자를 찾을 때, 은밀하게 보냈던 케이의 부하들이었다.

“랜디가?”

“네, 대장. 전서구가 날렸습니다. 미나스아릭 쪽으로요.”

미나스아릭에는 라코젠이 있었다.

“하필이면 이럴 때…….”

“저희도 공작부인을 호위할까요?”

“아무래도 저희가 유진이랑 나단보다는 낫죠.”

“여차할 때 변신하면 저희가 최강이라고요.”

“맞아요. 저희도 공작부인을 가까이에서 호위하고 싶기도 하고.”

똑같은 얼굴로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르만과 르덴을 무시하고, 케이는 생각에 잠겼다.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정체불명의, 어쩌면 유물술사인지도 모르는 자가 리시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

그러니 리시를 성가시게 만드는 존재 한 명쯤은 세상에서 없애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리시는 가비자르 제국과의 관계를 걱정하는 듯하지만…….’

케이는 리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가비자르와 적이 되어도 상관없었다.

케이는 제이미를 불러 계획 변경을 알렸다.

“쌍둥이 녀석들도 데려가라. 아버지께 연락해놓을 테니, 가는 길에 아버지 모시고 가라고 하고, 너는 달리 할 일이 있으니 월라스에게 맡겨두고 넌 대기해.”

와이번은 은퇴하긴 했어도 여전히 수호자의 능력을 갖고 있었다.

성유물이 폭발적인 힘을 발휘해서 잠식하려고 든다면, 와이번이 어떻게든 막아줄 것이다.

출발 당일이 되어서야 케이가 마탑 여정에 동행한다는 걸 알게 된 리시는 조금 놀랐지만,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린 저택에서 리시 일행이 마탑을 향해 출발했을 때, 미나스아릭에서도 한 무리의 정예기사가 라코젠을 선두로 하여 성문을 빠져나왔다.

목적지는 케런 협곡, 일명 죽은 자의 협곡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

라코젠은 랜디에게 받은 서신을 떠올리며 차게 웃었다.

[그린령에서 마탑에 가기 위해서는 케런 협곡을 지나가야 합니다. 산세가 험한 곳이니만큼 은신하다가 기습하기도 좋을 것입니다.

협곡 가장 깊은 곳을 지날 때 기습한다면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겁니다.

협곡에서 유진을 상대하기는 어렵지 않을 터이나, 나단은 마탑에서 개조한 총을 사용해서 성가실 테니 주의하시는 게 좋습니다.

나단은 근거리 전투에 약하니, 멀리서 원거리 무기로 공격하는 것보다는 일순간에 치고 들어가 공격해서 전투 불능으로 만들고, 그 후에 유진을 처리하십시오.]

그저 리시가 저택을 멀리 떠나는 날이 오면 알려달라고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사랑에 빠진 멍청이는 리시를 손에 넣고 싶은 욕심에, 제 동료들을 해치울 전략까지 세세하게 알려주었다.

[약속을 잊으셔서는 안 됩니다, 전하. 그린 공작부인이 다치지 않도록, 주의, 또 주의하십시오.]

거기다 바보 같은 신뢰까지 보인다.

‘미안하지만 랜디. 너의 공작부인은 그 협곡에서 죽을 거야.’

라코젠은 리시를 죽이려는 이 마음이, 어차피 내 손에 들어올 리 없는 존재에 대한 파괴 욕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저 바랄 뿐이었다.

그 협곡에서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진 리시가 자신의 무릎에 매달려 목숨을 구걸하기를, 당신의 여자가 될 테니 죽이지 말아달라고 애원하기를.

그러면 살려주는 것도 고민해봐야지.

+++

선두는 표범 기사단 단장인 베인츠 루빅과 유진, 그리고 몇몇 기사들이었고, 나단은 후방을 지켰다.

윈디와 화이트를 탄 리시와 케이는 일행의 중간쯤에 있었다.

그린 령을 벗어나고도 일주일이 지났을 때, 그들은 산맥의 중간쯤에 있는 ‘케런 협곡’에 접어들었다.

양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고, 가운데로 좁은 길이 길게 이어지는 지역이었다.

“여기는 죽은 자의 협곡이라는 별명이 있어요.”

리시의 옆을 지키던 에르웰이 말했다.

“굉장히 오래전에, 저기 보이는 저 산. 저 산이 폭발했을 때, 저 근처에 살던 사람들이 도망치다가, 여기까지 흐른 용암을 벗어나지 못하고 전부 죽었대요.”

“무서운 곳이네요.”

“안심하셔도 돼요. 저 화산은 죽은 화산이니까. 마지막으로 폭발한 게 800년 전이라는 기록이 있어요.”

리시는 고개를 들어, 까마득히 먼 곳에 보이는 화산을 응시했다.

화산이 폭발했을 때 두려움에 빠져 여기까지 도망친 사람들의 심정을 떠올리니, 팔에 소름이 돋았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때 죽은 사람들이 이 아래에 파묻혀 있을까요?”

리시의 질문에 에르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예요. 그 후에 발굴했다는 기록은 없는 걸 보니.”

죽은 자들이 묻힌 땅을 밟고 지나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에르웰과 리시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케이는 침묵을 지키며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리시는 그린 령을 벗어난 후에 케이가 해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쩌면 케런 협곡에서 기습이 있을지도 몰라. 만약 문제가 생긴다 싶으면, 당신은 뒤도 돌아보지 말고 그 자리를 벗어나. 어디로든 도망쳐.”

-“어떻게 그래? 나도 도움이 될 수 있어.”

-“리시. 이번에는 내 말 들어.”

케이의 눈빛이 견고했기에, 리시는 더 이상 따지고 들지 않았다.

전투에 있어서는 케이가 리시보다 아는 게 많기도 했고, 리시 역시 자신이 전투에 큰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죽음이 리시를 노리는 상황에서, 전쟁터만큼 죽기 좋은 곳도 없었다.

리시가 그 자리에 있으면, 다들 리시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전투에 집중하지 못할 터였다.

문득 정면을 노려보던 케이가 입을 열었다.

“리시. 성유물들은 잘 가지고 있지?”

“응.”

“사용법도 기억하고?”

“응.”

“큰 문제는 없겠지만, 여차하는 순간이 벌어지면 당황하지 말고 사용해야 해.”

“응.”

“좋아.”

케이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앞서가는 일행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게, 리시의 눈에도 보였다.

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에르웰과 크리시나가 말의 목덜미를 살살 두드렸다.

그리고.

“지금이야. 도망쳐, 리시.”

케이의 조용한 명령과 동시에.

콰아아앙-!

협곡 절벽에서 커다란 바위들이 굴러떨어졌다.

(165) 은빛 털 뭉치

협곡 절벽에 숨어 있던 적군들은 케이 일행의 허리를 끊기 위해 먼저 바위를 굴렸다.

좁은 길을 두, 세 명씩 짝을 지어 길게 늘어서서 가는 그들을 중간에서 바위로 끊어놓으면, 그만큼 상대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라코젠은 협곡의 벽면에 난 균열에 다른 기사들과 함께 몸을 숨긴 채, 케이 일행이 기습에 당해 혼란스러워하는 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에 라코젠과 그의 군사들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황톳빛 먼지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인영.

두 마리의 곰이 양쪽에서 굴러오는 바위를 주먹으로 부수고, 자그마한 체구의 여인이 두 손으로 바위를 막아냈다.

“저게…… 뭐야?”

라코젠의 옆에 있던 병사가 중얼거렸다.

라코젠이야말로 묻고 싶었다.

대체 내가 뭘 보는 거지?

쾅-! 콰아앙-!

곰들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커다란 바윗덩이가 산산이 부서지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크리시나!”

케이의 외침과 동시에, 자그마한 여인의 그림자가 위에서 퉁, 날아드는 바위를 두 손으로 멈춰 세우고 번쩍 들어 올렸다.

라코젠은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왜 케이브란트의 목소리가 여기서 들리는 거지?’

랜디는 케이가 성유물을 찾기 위해 다른 곳에 간다고 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기사단장이 라코젠을 일깨웠다.

“주군. 어떻게 할까요?”

퍼뜩 정신을 차린 라코젠이 외쳤다.

“공격해!”

예상과 다른 일이 벌어지긴 했지만, 당황할 이유는 없었다.

이쪽은 백 명이 넘고, 저쪽은 고작해야 스무 명 남짓이다.

거기다 이쪽에는 랜디가 은밀히 보내준, 마탑에서 개조한 무기가 여러 개 있었다.

저들도 갖고 있겠지만, 결국 수가 많은 이쪽의 승리가 확실하다.

타앙-!

총성과 함께 여러 개의 화염구가 날아왔다.

라코젠의 기사가 방패를 들자, 푸른 방어막이 퍼져 화염구를 훌륭하게 막아냈다.

파스아-

방어막에 부딪힌 화염구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라코젠의 기사들은 방패를 들고, 적들을 향해 달려갔다.

개조 무기를 든 선두의 기사들은, 쉬운 싸움이 될 거라고 예상했다.

푸른 검기를 띤 검들이 부딪치고, 총성이 난무했다.

총알이 절벽에 적중해, 돌무더기가 떨어져 내리기도 했다.

라코젠의 기사들은 케이 일행의 앞쪽과 뒤쪽에서 치고 들어가, 그들을 제압하려 했다.

하지만 그 먼지 속에서 그들을 공격한 건, 검과 총뿐만이 아니었다.

무언가 검고 거대한 것이 훌쩍 뛰어올라 기사들의 목을 물어뜯고, 날카로운 발톱을 가슴에 찔러넣었다.

갈색 곰 두 마리가 커다란 앞발을 휘둘렀고, 검은 표범과 황금빛 사자가 재빠른 몸놀림으로 기사들 사이를 누볐다.

작은 쥐, 여우 같은 것들이 기사들의 발목을 세게 깨물고 도망치고, 기사들이 허둥거리는 틈에 날카로운 검이 기사들의 목을 베었다.

“수…… 수인……!”

사자를 앞에 둔 기사가 외쳤다.

사자가 히죽 웃자, 길고 강한 송곳니가 드러났다.

기사가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사자의 커다란 앞발이 검을 막아냈다.

송곳니가 기사의 목에 깊이 박혔다.

+++

왔던 길을 되돌아가던 리시는 뒤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몇 번이나 돌아보고 싶은 걸 참았다.

‘멀리 도망쳐야 해. 지금의 나는 방해가 될 뿐이야.’

윈디는 날 듯이 달렸다.

쾅-! 쿠웅-!

“으아아악!”

“이게 뭐야?”

“수인, 수인이다! 다들 정신 차려!”

고삐를 잡은 리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케이가 짐승으로 변신해서 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수인이 짐승으로 변신하면 그 짐승의 힘만 발휘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안 그래. 짐승으로 변신하기 시작한 기간이 언제냐에 따라서, 점점 더 강해지지.”

태어날 때부터 수인이었던 케이는 강할 것이다.

리시가 알기로 나단과 유진도 꽤 어릴 때부터 수인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고 하니, 평범한 사자나 표범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가졌을 것이다.

‘괜찮을 거야.’

전투의 소음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까지 왔을 때였다.

은빛 털 뭉치 같은 것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리시가 깜짝 놀라 고삐를 당기기 전에, 윈디가 알아서 달리는 속도를 늦췄다.

은빛 털 뭉치에 까만 구슬 두 개가 박혀 있었다. 그제야 리시는 그게 그냥 털 뭉치가 아닌, 여우라는 걸 깨달았다.

‘여우……?’

이런 곳에 왜 여우가 있는 걸까?

리시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는데, 여우가 휙 돌아서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윈디가 그 뒤를 따라서 달렸다.

“안 돼, 윈디. 어디 가?”

리시가 고삐를 아무리 당겨도 윈디는 멈추지 않았다.

여우는 협곡의 균열로 들어가 좁은 길을 계속해서 달렸다.

길이 점점 좁아질수록, 리시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어떡하지? 그냥 뛰어내릴까? 하지만…… 윈디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초조한 마음에 입술만 잘근잘근 깨무는데, 여우가 갑자기 멈추더니 리시를 돌아봤다.

여우는 잠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가 다시 리시를 올려다봤는데, 리시는 왜인지 여우가 좀 난처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미안해. 이 애가 갑자기 널 쫓아서…… 해칠 생각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여우의 몸이 점점 커지며, 다음 순간 그 자리에 건장한 성인 남성이 서 있게 된 것이다.

리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얼른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도 얼른 바닥에 떨어져 있던 모포를 들어 올려 제 몸을 가리고, 뒤로 돌아서서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사르락사르락 옷감이 부딪치는 소리를 듣는 동안, 리시는 당혹감에서 벗어났다.

“혹시…… 라포…… 아니, 랜디?”

“네. 이제 됐습니다.”

리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가죽옷을 입은 랜디가 바닥에 놓여 있던 무기를 하나하나 들어 올려 몸에 착용하고 있었다.

리시는 심장이 죄였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랜디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왜 저 전투를 돕지 않고 날 여기로 데려온 걸까?

“대장이 전투가 벌어지면 공작부인을 안전한 곳으로 모시라고 했습니다.”

리시는 주위를 둘러봤다.

좁은 협곡은 기습을 당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처럼 위험해 보였다.

리시의 불안을 짐작한 듯, 랜디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만약 적이 공격을 해온다면, 공작부인께선 여기로 피하십시오.”

랜디가 자기 왼쪽을 가리켰다.

사람 한 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동굴 입구가 있었다.

“처음에는 기어서 가야 하지만 갈수록 길이 넓어지고, 머지않아 동굴이 끝날 겁니다. 길은 하나이니 쭉 가다 보면 아까 대장이 계셨던…….”

설명하던 랜디가 갑자기 리시에게 달려들었다.

손목을 잡아서 끌어당기는 바람에 리시는 윈디에게서 떨어져 랜디의 품에 안겨 굴렀다.

윈디가 펄쩍 날 듯이 도망치는 것과 동시에, 리시가 있던 자리에 화살이 꽂혔다.

“제길.”

랜디가 검을 뽑았다.

“도망치…….”

푸욱-!

또 한 발의 화살이 날아와 랜디의 어깨에 꽂혔다.

랜디는 쓰러지지 않고 리시의 앞을 막아선 후,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노려봤다.

“도망치세요.”

“어떻게…….”

“어서!”

리시는 도망치려 했다.

자신이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게 명백하니까.

하지만.

“안 되지, 안 돼.”

랜디가 가르쳐줬던 동굴 입구 앞을, 어느새 나타난 활을 든 남자가 막아선 채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은빛 머리칼, 녹색 눈동자, 고양이 같은 눈매를 가진 곱상한 외모의 사내.

리시의 기억에 없는 사람이었다.

리시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이 남자가 쏜 화살이, 저쪽에서 날아왔어. 케이가 말한 그 활을 사용한 거겠지. 갑자기 여기 나타날 수 있었던 것도 분명…… 성유물 중 하나를 사용한 걸 거야. 이 남자가, 날 죽이려는 그 남자라면 유물술사일 거고…… 그렇다면.’

“랜디, 도망쳐요!”

리시는 외치는 것과 동시에, 이런 곳에서 쓸 만한 성유물을 꺼내 들고 남자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랜디는 도망치지 않았다.

팔로 리시의 허리를 감아 당겨 제 뒤에 세우고, 은발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런.”

채앵-!

남자가 든 단도와 랜디의 검이 부딪쳤다.

남자의 단도를 확인한 리시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리시, 기억해. 다른 건 몰라도 이 성유물만큼은 조심해야 해.”

며칠 전, 케이는 어느 성유물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건 확실하게 존재했던 거야.”

약 100년 전에 활동하던 성유물 수호자가 찾아낸 성유물, 제브론의 단도.

너무도 위험한 성유물이라서 파괴하려 했지만, 당시 수호자들의 힘으로는 파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보관하던 중이었는데, 누군가 훔쳐 갔어. 그리고 곳곳에서 그로 인한 일이 벌어지다가, 갑자기 끊겼지. 그걸 사용하던 놈이 죽었든, 다른 놈이 훔쳤든, 어쨌든 그 후로 그 단도를 찾아낼 수가 없었대.”

제브론의 단도가 위험한 이유는, 저 단도에 베이기만 해도 영혼이 속박당하기 때문이었다.

정신을 지배하는 아부틴의 빗보다 위험한 이유는, 단도에 베이는 순간 몸에 낙인이 생기며, 그 낙인이 찍힌 사람은 죽은 후에도 단도의 주인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단도의 주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죽은 자의 군사를 가질 수 있었다.

-“그 검은 보면 알 거야. 손잡이도, 검날도 검은색이거든. 그리고 손잡이가 뱀의 머리 모양이지.”

귀담아듣기는 했지만, 그런 위험한 성유물과 마주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은발 사내의 손에 쥔 검은색 단도는, 주위의 빛을 전부 흡수하는 듯한 암흑의 단도는.

“안 돼, 랜디!”

리시는 꺼냈던 팔찌를 끼고, 랜디의 등을 밀어냈다.

퍼억-!

랜디의 몸이 부웅 떠서 협곡 벽까지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랜디가 서 있던 자리를 검은 날이 베고 지나갔다.

은발 사내가 콧등을 찡그렸다.

“팔찌를 갖고 있나?”

리시는 말없이 그를 노려봤다.

케이에게 받은 괴력의 팔찌는 순간적으로 강한 힘을 내게 해주지만, 단도를 앞에 둔 상황에서는 그리 쓸모가 있지 않았다.

단도에 베이는 순간, 끝장이기 때문이다.

은발 사내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그렇게 경계하는 걸 보니, 이 검에 대해서 들은 모양이네.”

리시는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손을 허리 쪽으로 움직였다.

손가락 끝에 단단하고 가느다란 나무가 만져졌다.

와일즈의 지팡이.

리시는 지팡이에 손가락 끝만 댄 채로 예리하게 벼린 힘을 흘려보냈다.

“걱정하지 마. 네가 죽은 후에도 날 위해 싸울 수 있게 데리고 다녀줄게. 유물술사의 시체는 어떤 힘을 낼 수 있을지 궁금하거든.”

“그래? 그렇다면 안 됐네.”

리시가 담담히 읊조린 말에, 은발 사내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리시는 손끝만 대고 있던 지팡이를 꺼내서 들어 올렸다.

“시체가 되는 건 너고, 나는 네 시체를 재활용할 생각이 없거든.”

동시에, 굉음이 협곡을 채웠다.

(166) 사랑이야.

  수백 마리의 새들이 동시에 날아들었다.

수천 마리의 들짐승과 산짐승이 절벽을 타고 내려왔다.

귀를 찢는 날갯짓 소리. 천지를 진동시키는 짐승의 울부짖음.

날것 그대로의 살기가 협곡을 넘쳐 흘렀다.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생물이 밀집해, 하늘도 땅도 어둠에 휩싸인 듯했다.

상상도 못 한 광경에, 은발 사내가 주춤 물러섰다.

“와일즈 지팡이…….”

오래전, 이 대륙에 존재했던 위대한 테이밍술사 와일즈가 리시의 육체에 재림한 듯 그 능력을 펼쳤다.

날갯짓이 만들어낸 바람에 리시의 머리칼이 흩날렸다.

리시가 가느다랗고 짧은 지팡이를 천천히 들어 올리자, 사위를 둘러싼 짐승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수많은 짐승이 리시의 명령을 기다리며 눈을 빛내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하지만 은발 사내에게는 그렇지도 않은지, 콧등을 찡그리더니 휙 돌아섰다.

리시가 지팡이로 은발 사내를 가리키며 공격 명령을 내리는 순간, 은발 사내가 신은 신발도 그 능력을 발휘했다.

어디선가 시작된 돌풍이 은발 사내를 휘감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리시의 눈에, 어느새 절벽 끝까지 올라간 은발 사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절벽 너머로 사라지기 전, 잠시 뒤를 돌아서 리시를 노려봤다.

상당한 거리임에도, 리시는 그의 눈동자에 담긴 격렬한 살의를 느낄 수 있었다.

+++

전투는 쉽게 승패가 가려졌지만, 라코젠이 예상한 대로는 아니었다.

인간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고, 훨씬 강한 힘을 가진 수인들을, 평범한 기사들은 이길 수가 없었다.

맹수의 발톱이 라코젠의 기사를 찢고, 초식동물의 강한 다리가 기사를 차올렸다.

여기저기서 처절한 절규가 울려 퍼졌다.

라코젠은 검 한번 제대로 휘둘러 보지 못했다.

그는 흙바닥에 누운 채, 제 가슴을 찍어누른 검고 거대한 늑대를 올려다봤다.

서늘한 청회색 눈동자.

“수인이…… 쿨럭…….”

라코젠이 피를 토해냈다.

늑대의 길고 날카로운 발톱이 그의 폐부를 헤집어놓은 탓이었다.

늑대는 조용히 라코젠을 응시하다가 돌아섰다.

라코젠은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악몽을 꾸는 걸까?

이렇게 많은 수인이 있다는 것도, 케이가 수인이라는 것도 까맣게 몰랐다.

게다가 수인은 강해도 너무 강했고, 라코젠이 이곳으로 오기 전에 지원을 요청했던 곳에서도 도와줄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냉기가 점점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라코젠은 죽음을 실감했다.

자신이 이런 식으로 죽게 될 줄은 몰랐다.

미나스아릭을 기반으로 삼아서 꼴 보기 싫은 황태자와 황제를 죽여버린 후 가비자르까지 손에 넣고, 황제의 자리에 앉아서 수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으며, 아름다운 리시와 함께 평생 행복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소망이 꿈결처럼 라코젠의 눈 앞을 흐르기는 와중에, 또한 그리운 이가 라코젠의 눈앞에 나타났다.

검은 고양이.

전쟁터는 위험할 것 같아서 두고 온 검은 고양이가 왜인지 라코젠의 얼굴 옆에 얌전하게 앉아서, 슬픈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서 참으로 성가신 짓만 하던 고양이. 몇 번이나 내쫓으려 했지만 보드라운 털이, 어여쁜 황금빛 눈동자가, 까칠한 태도가, 배를 드러내고 체통 머리 없이 잠자는 모습이…… 그 모든 것이 귀여워서 도저히 쫓아낼 수가 없었던 검은 고양이.

이름조차 붙여주지 않은, 내 고양이.

안 그래도 마음에 걸렸는데, 죽기 전 환상으로라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는데, 고양이의 모습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라코젠의 눈앞에 앉아 있는 건 새까만 머리칼을 가진 한 여인이었다.

라코젠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여인은 여전히 라코젠의 옆에 앉아 있었다.

“너도…… 수인이었나……?”

“그래, 전하. 클로이라고 해.”

“클로이…….”

클로이는 무릎을 꿇고 앉아, 라코젠의 머리를 제 허벅지 위에 올려놨다.

클로이의 손가락이 라코젠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라코젠이 늘 고양이에게 해주었듯이, 그토록 다정한 손길이었다.

“바보 같았어, 전하. 랜디는 절대로 대장을 배신하지 않거든.”

“그래…….”

“왜…… 이렇게까지 했어? 미나스아릭을 손에 넣었으면 그냥 거기서 왕 노릇 하며, 그렇게 살 수도 있었잖아.”

클로이의 황금빛 눈동자가 슬프게 빛났다.

라코젠은 그녀의 눈빛도,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그녀의 손길도 마음에 들었지만, 그것을 느낄 시간도 길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시야 가장자리가 까맣게 물들어갔고, 그 어둠이 완전히 잠식하면 죽음이 찾아오리라.

이런 순간에도 라코젠은.

“그리워서…….”

그리웠다.

“이런 순간에도…… 그 얼굴이 보고 싶어서……. 딱 한 번이라도…… 쿨럭…… 정말…… 딱 한 번이라도…… 그 얼굴…… 그 손…… 마음껏…… 만져보고 싶어서……. 내게…… 내게 무슨 짓을 한 것이…… 분명하니까…… 죽어가는 순간에도…… 이토록 내 심장을 잡아끄는…… 저주를 건 것이 분명……하니까…….”

라코젠의 볼에 투욱, 물방울이 떨어졌다.

라코젠은 그것이 클로이의 눈물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녀가 우는 걸 볼 수 없었다.

시야는 이미 어둠에 잠식되었다.

내 까칠한 검은 고양이가 우는 걸 한 번쯤은 보고 싶었는데.

“아니야, 전하. 저주 같은 게 아니야.”

물기 젖은 음성이 라코젠의 귓가를 더듬었다.

“전하, 사람들은 그런 감정을 사랑이라고 해.”

“그래. 그런가……? 그럼…….”

라코젠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검은 고양이를 쓰다듬고 싶었다.

내가 없으면 돌봐주는 이가 없을까 걱정이었는데, 네가 수인이라 다행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손은 움직이지 않았고, 목소리도 더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 라코젠의 심정을 눈치챈 듯, 클로이가 라코젠의 손을 잡아서 제 볼에 가져갔다.

“그래, 전하. 지금 내게 느끼는 그 감정도 사랑이야. 공작부인을 향한 것과는 조금 다를 테지만, 이것도 사랑이야.”

라코젠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더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지만, 클로이는 한동안 그의 손을 제 볼에 댄 채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검은 늑대가 모포를 가져와 클로이의 어깨에 투욱 떨어뜨렸다.

클로이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미련하고 못된 사람이지만…… 내게는 좋은 사람이었어요, 대장.”

“알아.”

“정말로…… 내게는 좋은 사람이었어요.”

“미안해, 클로이.”

클로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검은 고양이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모르겠네. 전 갈게요.”

힘없이 걸어가는 검은 고양이의 옆에, 커다란 개와 노루가 따라붙었다.

인간일 때는 케이의 기사인 그들이 허락을 구하듯 케이를 돌아보자, 케이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다정하던 친구를 잃은 고양이는, 또 다른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참혹하고 슬픈 장소를 떠났다.

+++

적이 더는 없다는 걸 확인한 후, 짐승의 모습이었던 수인들이 하나둘씩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때, 협곡 저편에 소란이 일었다.

케이가 랜디에게 부탁해서 리시를 데려가라고 일러둔 곳이었다.

아직 늑대의 모습이던 케이가 달리자, 흑표범과 사자, 그리고 갈색 표범이 그 뒤를 따라 달렸다.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던 이들도 다시 짐승으로 변신해 대장의 뒤를 따라서 달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도착한 협곡 옆 균열 사이에서 그들이 본 건, 수많은 짐승 사이에서 지팡이를 들고 있던 리시가 쓰러지는 모습이었다.

랜디가 쓰러지는 리시를 안아 들자마자, 짐승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모두 그 기적 같은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지만, 케이는 랜디의 앞으로 걸어갔다.

“랜디.”

“습격이 있었습니다. 그때 활을 쏴서 샹들리에를 떨어뜨린 놈인 것 같아요.”

랜디의 어깨에는 아직도 화살이 박혀 있었다.

놈이 급히 도망치느라 화살을 회수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신을 수습하는 대로 화살을 회수하려 할 테니, 그 전에 힘을 무력화시켜야만 했다.

케이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화살을 손에 쥐고 수호자의 힘을 불어넣었다.

성유물이 가진 힘을 제압하고 찍어눌러 두는 힘.

어지간해서는 부러지지 않을 성유물이 케이의 손아귀에서 우직, 바스러졌다.

하지만 랜디의 몸에 박힌 부분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화살을 함부로 뽑으면 좋지 않으니, 돌아가서 치료받는 게 좋겠다.”

“핥으면 나을 수준이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다만, 공작부인께서…….”

랜디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리며 케이에게 리시를 건넸다.

케이는 리시를 받아들고 그녀의 상태를 살펴봤다.

“큰 힘을 사용해서 잠시 기절한 거야. 그렇게 많은 짐승을 불러냈으니…….”

“정말 경이롭더군요. 현실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래, 나도 매번 그런 생각을 해. 하지만 이렇게 쓰러질 때마다 속이 바싹바싹 타.”

“그럴 만도 하시겠네요.”

“괴력의 팔찌를 끼고 있는데도, 와일즈의 힘까지 써야 할 만한 상대였나?”

“그게…… 놈이 단도를 빼 들자마자 공작부인이 갑자기 절 밀쳐내시더니, 짐승을 불러들이셨습니다.”

케이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 단도가…… 검은색이었나?”

“네. 손잡이에 뱀 머리 조각을 해뒀더군요.”

“제길.”

케이가 씹듯이 욕설을 내뱉었다.

“성유물입니까?”

“위험한 거야. 몹시. 매우. 아주. 무척.”

“……그놈이 공작부인보다 강할까요?”

“그건 알 수 없지만, 그 단도는 정말 위험해. 어떻게 생긴 놈이었지?”

“은발에…….”

거기까지만 말했는데도, 케이가 표정을 구겼다.

“젠장. 하렌트 미어였군.”

“그 사람은…… 그렇게 힘이 강하지 않다고 들었는데요.”

“제 힘을 숨기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렇게 위험한 성유물을 갖고 있는 걸 보면, 리시를 죽이는 것 이상의 목적이 있을지도 모르고…… 아니, 지금은 이런 걸 논할 때가 아니지.”

“아, 2황자는 어떻게 됐습니까?”

“죽었어. 내가 죽였지.”

“그렇군요.”

랜디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물었다.

“클로이는 괜찮습니까?”

“……아니. 내가 못 할 짓을 했어.”

“그래 봬도 정이 많은 녀석이라서…….”

“그러게. 라코젠이 고양이를 그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2황자는 공작부인과 대장을 죽이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자니, 이쯤에서 끝내는 게 맞습니다. 클로이도 그 사실을 충분히 알 거고요.”

케이는 담담히 말하는 랜디를 지그시 응시했다.

“네게도 못 할 짓을 했다.”

“아닙니다, 대장. 대장은 그 지옥에서 절 구해주셨습니다. 대장이 아니었다면 이미 죽었을 목숨인데, 이건 목숨을 걸 만한 일도 아니었잖아요.”

케이가 쓰게 웃더니, 리시를 랜디에게 내밀었다.

랜디는 멍하게 리시를 내려다보다가 케이에게 의문이 담긴 시선을 보냈다.

“저기로 돌아가야 하는데, 내가 지금 옷이 없잖아.”

“아.”

랜디가 리시를 받아들자, 케이가 늑대로 변하며 말했다.

“저기에는 고상한 레이디들이 있거든.”

(167) 짙고 깊은 악의

  그 전투에서 에르웰과 크리시나만이 수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토미가 수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린 저택에서 함께 지내던 사람들이 수인이라는 건 꿈에도 몰랐다.

특히 케이브란트 그린.

성유물의 수호자이자, 신성국의 가호를 받는 케이브란트 그린이, 신성국에서 적대시하는 수인이라니.

이건 정말이지.

“끝내준다, 시니.”

“에르웰, 지금은 그럴 상황 아니야.”

“하지만…… 수인이잖아. 우와, 수인…… 우와, 공작님이 수인이었다니. 이거 진짜…… 우와, 뭐라고 말로 표현을 못 하겠네.”

“엘, 제발 좀 진정해.”

“하지만 생각해봐. 공작님은 유니콘을 가졌고, 심지어 수인이라고. 신성국에서 죽이려고 드는 수인인데, 성유물의 수호자이기도 해. 아이리스 님이 대체 왜 공작님이랑 결혼했나 싶었는데, 이제 알겠어. 완벽한 남자야. 공작님만큼 끝내주는 남자는 이 세상에 없어. 아!”

에르웰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탄성을 내뱉었다.

“그동안 아이리스 님 방에 늑대 털이 떨어져 있었거든. 뭔가 싶었는데, 공작님 거였구나. 우와, 모아둘걸.”

“미쳤어? 그걸 네가 왜 모아?”

“수인 거잖아! 평생에 수인을 볼 기회가 얼마나 되겠어? 아, 앞으로 계속 보겠구나. 그때, 아이리스 님의 시녀로 들어오길 진짜 잘한 것 같아. 미쳤어, 미쳤어. 와, 진짜 끝내주네.”

에르웰이 수인을 봤다는 기쁨에 겨워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케이와 부하들, 그리고 리시를 안은 랜디가 돌아왔다.

아직 늑대의 모습인 케이에게 달려가서 그 털 한번 만져봐도 되냐고, 안 되면 그 발톱이라도 만져볼 수 있느냐고 물어보려던 에르웰은, 기절한 리시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서 달려갔다.

“아이리스 님! 괜찮으신 거예요? 어디 다치셨어요?”

“괜찮아, 에르웰 양.”

검은 늑대가 대답했다.

에르웰은 우뚝 멈춰서 늑대를 보며 눈을 빛냈다.

그 눈에 서린 강렬한 야심, 집념 비슷한 소망에, 늑대가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왜 그렇게 보지, 에르웰 양?”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으니, 아이리스 님의 시녀로서 품격을 지키도록 할게요, 공작님.”

“그거 고맙군.”

에르웰과 케이가 정중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크리시나가 리시를 받아서 안고, 에르웰의 신발을 툭 찼다.

“아, 잠깐만.”

에르웰이 얼른 짐을 가져와, 그 안에서 모포를 꺼내 깔고 그 위에 리시를 눕혔다.

그러는 동안, 수인들은 인간으로 돌아와서 바닥에 널린 적군의 시신을 수습했다.

“대장, 이거 다 어떻게 할까요?”

“함부로 다루지 말고 예의를 갖춰서 한곳에 모아둬. 루미!”

케이가 고개를 들고 외치자, 하늘을 날던 부엉이가 날아와 케이의 어깨에 앉았다.

“제이미에게 가서 현장 수습하고, 내가 말한 대로 하라고 전해줘.”

 

+++

하렌트는 협곡이 시작되는 부분까지 달리다가 두 다리가 부서지는 듯한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크흑…….”

연한 노란색 구두로부터 시작된 힘이 하렌트의 발목을 타고 올라가 두 다리를 지배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하렌트를 차지하고 있는 또 다른 힘과 충돌해, 육체 안에서 부딪쳐 격통을 일으켰다.

하렌트는 신경질적으로 신발을 벗었다.

“제길.”

신발을 벗었음에도 통증은 가라앉지 않았다.

지끈거리는 발을 주무르는 하렌트의 머릿속에 아까 본 광경이 떠올랐다.

-“그래? 그렇다면 안됐네.”

흩날리는 연분홍 머리카락, 펄럭거리는 망토와 들어 올린 작은 지팡이.

그곳은 좁은 협곡의 골짜기 사이였음에도, 그녀는 마치 광활한 대지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녀를 보호하듯 에워싼 수천 마리의 짐승들.

아직도 그 많은 짐승이 그녀의 명령을 기다리며 숨죽이고 있던 것을 떠올리면 섬뜩했다.

작년에 리시가 치유의 반지로 사람들을 치료하고 다닌다는 걸 알게 된 산티아노는, 귀찮을 정도로 하렌트를 닦달했다.

-“내가 그렇게나 지원을 해줬는데, 그 여자의 반이라도 능력을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언제까지 아무 소득 없이 당신을 지원해줘야 합니까?”

산티아노는 하렌트가 가진 진정한 힘을 몰랐다.

-“아이리스 그린이 사람들을 치료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어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그 여자의 힘이 점점 더 강해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당신은 대체 왜 발전이 없는 겁니까?”

최근에는 산티아노만 생각하면 짜증이 치솟는다.

한때는 그동안 뒤를 봐준 산티아노에게 감사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한낱 인간 따위가 치유의 능력을 좀 가졌다고 기어오르는 꼴이 가소롭고 성가셔서 죽여버리고 싶다.

신성국의 대신관만 아니라면 진즉에 죽여버렸을 텐데.

생각이 이리저리로 튀었다.

최근에는 늘 이렇다.

내 머리가 내 것 같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가 성유물 때문인가 싶다가도, 금방 다른 생각으로 옮겨가서 깊이 생각할 수가 없어진다.

‘아이리스 그린.’

그녀가 강할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까지 강할 줄은 몰랐다.

유물술사의 능력을 가진 이가 많았던 옛날에도 그녀처럼 강한 유물술사는 찾아보기 힘들었었다.

‘옛날? 내가 옛날 일을 어떻게 알지?’

또다시 찾아온 의문은 모래처럼 흩어지고, 그 자리를 증오가 채웠다.

어느 한 사람을 향한 증오가 아니었다.

이 세상 전부를 향한 증오였다.

제 마음에 왜 이런 증오가 싹튼 건지, 하렌트는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하면서도 그저 증오했다.

모조리 그 대가를 치르게 해야만 한다.

‘대가? 무슨 대가?’

머리를 꿰뚫는 듯한 두통이 느껴졌다.

격통을 참기 위해 헐떡거리는 하렌트의 눈에 기이한 광경이 들어왔다.

협곡 저편에서 걸어오는 세 마리의 동물, 개와 노루, 그리고 고양이.

고양이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걷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도 이상해 보였기에, 하렌트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개와 노루는 마치 고양이를 보호하듯 몸을 바짝 밀착시키고 있었다.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기에, 하렌트는 그들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그들이 걸어온 방향을 돌아봤다.

저곳에는 아마 케이 일행이 있을 것이다.

‘이상한걸.’

하렌트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너무 이상해.’

하렌트는 벗어뒀던 구두를 신고, 주머니에서 두건을 꺼내 머리에 썼다.

그러자 하렌트의 모습이 흐릿하게 흩어져 주위의 사물과 비슷한 색을 띠게 되었다.

하렌트는 은밀하게 짐승들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

두둥, 두둥, 흔들리는 느낌을 받으며, 리시는 깨어났다.

포근한 것이 리시를 감싸고 있었다.

눈을 뜨지 않고도, 리시는 자신이 케이의 품에 안겨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리시는 모포에 감겨, 케이의 품에 안긴 채 말을 타고 달리는 중이었다.

‘대체 그건 뭐였지?’

리시가 기절한 이유는 힘을 너무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제 리시는 수천 마리의 짐승을 불러들인 정도로 기절하지 않을 힘을 갖고 있었다.

하렌트가 마지막으로 보인 살의에 찬 눈빛.

그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무언가 몹시 지독한 것이 리시에게 흘러들어왔다.

살의, 증오, 분노, 혐오…… 어둡고 격렬한 감정이 무게감을 가지고 덮쳐오는 바람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증오스러운 인간을 모조리 죽여야만 한다는 충동이 머리를 향해 꾸물꾸물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리시는 온 힘을 다해서 그 격렬한 살의를 밀어내기 위해 노력하다가 기절하고 말았다.

아직도 그 감정을 떠올리면 소름이 끼친다.

리시는 꼬물꼬물 움직여서 케이의 품에 파고들었다.

리시를 안은 케이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일어났어?”

“응.”

“길을 좀 서둘러야 할 것 같아서 당신이 깨는 걸 기다릴 수가 없었어.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케이.”

“당신이 괜찮다고 하는 말은 못 믿겠는데.”

리시가 작게 웃었다.

“정말 괜찮아.”

케이의 음성을 들으니, 언제 그랬냐는 듯 불안하게 술렁이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2황자는 어떻게 됐어?”

“죽었어.”

“아.”

“내가 죽였지.”

“그래.”

리시는 라코젠을 떠올렸다.

다시 생각해봐도 그가 왜 그렇게 자신을 죽이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이유는…… 물어봤어? 왜 나를 그렇게 죽이고 싶어 했는지.”

“아니. 이유를 알고 싶다면, 클로이에게 물어보면 될 거야.”

“클로이…….”

리시는 케이가 클로이를 라코젠 곁에 붙여뒀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지난번 라코젠이 그린 저택에 왔을 때, 라코젠은 검은 고양이의 좋은 주인처럼 보였다.

아마도 자신의 고양이에게 무척이나 상냥했겠지.

“클로이는 괜찮아?”

“……아니.”

“지금 어디에……?”

“저택으로 돌아갔을 거야. 아니면 황무지로 갔거나.”

“위로를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클로이는 중요한 게 뭔지 알고 있어. 일단 해야 할 일부터 끝내고, 위로는 돌아가서 해주면 돼.”

딱딱하게 굳은 그의 음성이, 그가 무척이나 클로이에게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리시도 클로이의 심정을 생각하면 마음이 쓰였다.

그렇다고 해서 케이를 탓할 수도 없었다.

케이도, 클로이도 라코젠이 그토록 검은 고양이를 아껴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얼른 일을 끝내고 돌아가자, 케이. 가서 클로이 곁에 있어 줘야지.”

“그래.”

“그리고 케이, 나…… 아까 은빛 여우를 따라갔었어. 그 여우가 랜디더라.”

“응. 내가 랜디에게 부탁해뒀거든. 전투가 벌어지면 당신을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고.”

케이는 랜디와 리시 사이에 묘한 소문이 돌 때, 브리트니가 반드시 그 소문을 이용할 거라고 예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브리트니가 몰래 들여보낸 루지나는 그 사실을 브리트니에게 알렸고, 브리트니는 라코젠에게 그 정보를 팔아먹었다.

케이는 이번에 저택을 떠나면서, 며칠 후 루지나를 저택에서 쫓아내라고 말해두었다. 브리트니를 도와서 그린 가문의 정보를 빼돌렸다는 소문과 함께.

브리트니가 스티무어에서 쫓겨난 후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초조해하던 루지나는, 앞으로 그 어느 귀족 가에서도 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리시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때문에 다들 고생하네.”

“당신 덕분에 구한 목숨이 더 많아, 리시.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렇다는 건 알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다들 마음을 다치고, 하기 싫은 일을 해야만 했던 것들에 대한 죄책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지난 삶에서 내 계획이 실패한다고 했지? 내가 실패했다는 건, 나와 뜻을 함께한 내 부하들도 전부 실패했다는 거고. 리시, 이건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얻기 위해 치러야 하는 희생이야. 이걸로 당신을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케이가 구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이 세상에 없을 생명들. 케이의 부하들은 케이에게 구원받던 날, 그와 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각오를 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지금 다른 문제도 있어, 리시. 랜디랑 도망친 곳에서 하렌트 미어를 만났다지?”

“그 사람이 하렌트 미어였어?”

“그래. 내 실수야. 난 그놈이 자기 힘을 감추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하렌트가 도망치는 와중에 쏘아보던 눈빛이 떠올랐다.

케이와 대화하면서 희미해졌던 그때의 감정이 떠올라서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 짙고 깊은 악의는 평범한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168) 말도 안 되는 일

 

“랜디에게 들었는데, 하렌트가 제브론의 단도를 가지고 있다더군.”

케이의 음성에, 리시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응, 그걸 갖고 있더라. 게다가…… 갑자기 나타났어. 분명 아무것도 없었는데, 아주 갑자기.”

“갑자기? 로브는 우리가 갖고 있는데.”

사용자의 모습을 감추게 해주는 제리어스 로브는 케이의 창고에 잘 보관하는 중이었다.

“아, 신발. 도망칠 때 그 남자가 신은 신발에서 기이한 힘이 느껴졌어. 그러고 나서 하렌트가 엄청난 속도로 거기를 벗어났고.”

“이런. 러후의 신을 갖고 있군.”

“러후의 신?”

“다리의 근육을 강화시켜주는 구두야. 잘 사용하면 다리의 힘만으로도 기사단 하나를 무력화시킬 수 있지. 칼로도 벨 수 없는 다리를 만들어주거든. 그리고 또 성유물 같아 보이는 건 없었어?”

“응, 그 외에는 잘…… 그런 것보다, 케이. 그 남자 어딘지 이상한 구석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앞서가던 나단이 뒤를 돌아봤다.

“대장, 슬슬 야영 준비해야겠는데요. 여긴 밤에 정말 춥거든요.”

“아, 그래. 준비들 하자.”

11월이라 원래도 춥긴 하지만, 협곡의 밤은 더 추웠다.

북쪽의 바람이 골짜기를 타고 그대로 불어오기 때문이었다.

케이의 부하들은 야영 준비를 하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리시의 목숨을 노리던 라코젠은 죽었지만, 또 누가 리시를 노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적이 나타나면 몰살당하지 않도록 띄엄띄엄 텐트를 쳤지만, 저녁은 한자리에서 먹었다.

리시는 입맛이 없어서 빵만 조금 뜯어 먹다가 일어났다.

리시의 표정을 살피던 케이가 그릇을 내려놓고 빵 몇 개를 챙긴 후, 리시를 따라왔다.

“케이, 난 신경 쓰지 말고 더 먹고 와.”

“소풍이나 가자, 리시.”

“응? 갑자기?”

“화이트.”

케이의 부름에 쉬고 있던 화이트가 빠르게 달려왔다.

케이는 리시를 들어서 화이트에게 앉히고, 자신도 그 뒤에 앉았다.

“저기로 가자.”

케이가 협곡의 절벽 위를 가리키며 말하자마자, 화이트가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사이로 단숨에 날아오르는 동안, 골짜기 사이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이 리시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리시의 눈에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협곡의 아름다운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거인이 손가락으로 땅을 깊이 긁어서 만들어낸 것 같은, 깊은 골짜기.

리시가 지나온 길은 거의 잿빛 돌뿐이었지만, 절벽 위쪽에는 나무와 풀로 무성한 숲이 있었다.

화이트가 절벽 끄트머리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온 곳에 내려앉았다.

케이와 리시는 잔디처럼 짧은 풀이 자란 바닥에 나란히 앉았다.

“하늘 좀 봐, 리시.”

리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밤하늘이 유독 청명했다.

구름 한 점 없는 진청빛 하늘을 가득 채운 별무리에 눈이 시렸다.

“정말 아름답다…….”

“응. 이제 입맛 좀 돌아?”

리시가 키득키득 웃었다.

“나한테 뭣 좀 먹이려고 하늘까지 난 거야?”

“당신 배를 채우는 게 나한테는 제일 중요한 일이거든.”

케이가 들고 온 빵 하나를 내밀었다.

리시는 빵을 조금씩 잘라서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으며, 밤하늘을 감상했다.

이번 삶을 다시 살게 된 후로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 많아졌다. 그만큼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높은 곳에서 보는 하늘을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밤하늘의 아름다움은 무척이나 경이로워서, 그녀가 안고 있는 인간사의 모든 문제가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문득 언젠가 쟈메트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리시가 쟈메트에게 어쩌다가 상단을 꾸리게 되었냐는 질문을 했을 때, 쟈메트는 ‘바다가 좋아서, 바다를 돌아다니는 일을 하고 싶었다.’며 덧붙였다.

-“나중에 공작부인께서도 시간이 되시면 한번 배를 타고 나가보세요. 해변에서 보는 바다도 멋지지만, 배 위에서 먼 바다로 나가서 보는 풍경은 또 다르거든요.”

-“어떻게 다른데요?”

-“제가 배운 게 없어서 뭐라고 설명은 잘 못 하겠는데, 뭐라고 해야 하지? 음…… 내가 안고 있는 고민 따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해야 할까요?”

쟈메트의 막연한 설명 때문에, 리시는 그 기분이 어떤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쟈메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알 것도 같다.

“케이. 나중에 배를 타고 여행을 가고 싶어.”

“배, 음. 좋지. 배.”

왜인지 케이는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당신은 배 타는 거 싫어?”

“아니, 좋아해. 아주 좋아, 리시.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지.”

리시가 미간을 좁혔다.

“배에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어?”

케이가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 나도 당신이랑 배 타고 여행 가고 싶어. 내가 가본 곳은 카보라스 왕국뿐이거든. 하비라스 해는 너무 험해서 가는 길이 좀 힘들었지만, 탈레하 왕국에 가는 길은 즐겁겠지.”

“흐음…….”

“여객선을 통째로 빌리자. 아주 고급 여객선으로. 아니면 당신을 위해서 내가 여객선을 하나 사둘까?”

“오버하긴.”

“아니, 진짜로. 또 나중에 하고 싶은 일 없어?”

그제야 리시는 케이가 묻는 ‘나중’이 이 모든 것이 끝난 후라는 걸 상기했다.

‘그래, 나중이 있지. 이제 몇 년만 더 지나면, 다른 평범한 부부처럼 아무 문제 없이, 죽음을 신경 쓰지 않고 지낼 수 있을 거야.’

리시는 케이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대륙 남쪽 끝에서부터 북쪽 끝까지,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여행을 하고 싶어. 많은 나라를 가보고, 많은 요리를 먹어보고…… 그렇게 다니다가 유독 마음이 가는 나라에서는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머물면서 여유롭게 지내고 싶어.”

“응, 그거 좋네. 여행 때는 에르웰 양을 동반하는 게 좋겠어. 아는 게 많으니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줄 거야. 그렇지, 에르웰 양?”

“흡!”

절벽 바로 아래쪽에서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리시는 무슨 일인지 몰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케이를 한 번, 그리고 절벽 끝을 한 번 쳐다봤다.

잠시 후, 절벽 끝에서 빨간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다음에는 민망한 기색이 가득한 녹색 눈이 나타났다.

“좋은 시간을 보내시는 데 방해해서 죄송해요.”

“위험하니 올라와서 얘기해.”

“이쯤이야 뭐, 위험할 것도 없는데.”

에르웰이 중얼거리면서 절벽을 기어 올라왔다.

그녀는 절벽을 기어서 올라오느라 흙먼지가 묻은 옷을 툭툭 털고 나서 말했다.

“방해해서 정말로 죄송해요. 아이리스 님이 울적해 보이시는 게 걱정이 되기도 하고 또…….”

어린아이처럼 호기심으로 가득 찬 녹색 눈동자가 케이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아, 아니에요. 역시 제가 여길 오는 게 아니었는데. 미쳤지. 제가 머리가 좀…… 아니, 근데 생각해보면 그렇잖아요. 전요, 그냥 평범한 애거든요? 그런데 아이리스 님의 시녀가 되고 나서,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일단 아이리스 님이 유물술사래요! 그것도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진 유물술사. 전 유물술사가 성유물을 사용하는 모습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에르웰은 민망해하던 기색을 버리고 열심히 말했다.

“그러더니 이게 웬걸? 갑자기 드래곤이 등장하네? 드래곤이 뭔지 아시겠어요? 아니, 드래곤이라니…… 이게 말이 돼요? 드래곤은 마법을 밥 먹듯이 사용하던 시절에도 전설처럼 여겨지던 존재였다고요. 그런데 내가 귀여워해 주던 애가 드래곤이래. 우와, 이거 진짜 말도 안 되잖아요.”

에르웰은 심각하게 말했지만, 리시와 케이는 웃음을 참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러더니, 또 뭐야? 유니콘? 말이 돼요? 아니, 왜 유니콘이 내가 일하는 저택에 있어? 그런데 거기에…… 하. 공작님이 수인? 공작님의 부하들도 다 수인? 진짜 미쳤다. 여기서 제가 제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할 이유가 하나라도 있어요? 네?”

입가에 힘을 주고 웃음을 참던 리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없는 것 같네요.”

“그렇죠? 아이리스 님이라면 알아주실 줄 알았어요.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이라니까요. 제가 돌아버리는 게 당연하죠.”

“알겠어, 에르웰 양.”

케이가 대꾸하는 것과 동시에 모습을 바꿨다.

에르웰은 자기 앞에 나타난 검은 늑대를 보고는 “으헙!” 하고 괴상한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천천히 다가와 정중하게 물었다.

“늑대님. 제가 늑대님의 털을…… 아니, 아니지. 발톱을 한번…… 만져볼 영광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된다면 한 번, 안 된다면 두 번 짖어주세요.”

“……에르웰 양. 나는 이 모습으로도 말할 수 있어.”

“아, 맞다. 그랬지. 진짜 미쳤다. 와, 말하는 늑대라니. 아, 진짜 어떡하지?”

에르웰은 감격에 겨워서 거의 기절할 것처럼 보였다.

늑대가 우아하게 앞발을 들어 올리자, 에르웰은 자신이 영광의 순간을 맞이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에르웰의 손가락이 늑대의 긴 발톱을 살짝 건드렸다가 떨어졌다.

좀 더 세심히 만질 줄 알았는데 저 정도로도 충분한가 보다.

에르웰은 발톱을 스친 손을 들어 올리고, 치밀어오르는 감동을 억누르려는 듯 잠시 서 있다가 말했다.

“저, 이 손 안 닦을 거예요. 말리지 마세요.”

“아무도 안 말려, 에르웰 양.”

“아시죠, 공작님? 전 정말…… 제가 살면서 이런…… 와, 아무튼 감사해요.”

“내가 더 고마워.”

“뭐가요?”

“그냥, 전부.”

에르웰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리시는 케이가 무엇을 고마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신의 저주를 받은 수인, 그리하여 혐오와 증오, 배척의 대상이 된 수인.

에르웰은 수인을 모르는 척해줬을 뿐만 아니라, ‘영광’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케이에게는, 그리고 다른 수인들에게는 그것이 큰 의미일 것이다.

에르웰이 돌아간 후에도 케이는 여전히 늑대의 모습으로 리시의 곁을 지켰다.

리시는 케이의 폭신한 털에 파묻히듯 안겨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케이 역시 리시의 체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날 밤, 찬란한 밤하늘 아래에서 잠든 그들도, 저 아래에서 잠든 케이의 일행도 알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전 세계에 비가 멎었다.

+++

수인은 짐승의 모습이 되면 인간일 때보다 체력이 강해지기 때문에, 먹지도 자지도 않고 오랫동안 달릴 수 있었다.

때문에 그들을 뒤쫓는 하렌트는 구두를 벗고 쉴 틈이 전혀 없었다.

하렌트의 두 다리를 부수는 것 같은 통증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몇 개의 성유물이 하렌트의 육체를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일이기에, 실제로 다리가 부서지지는 않았다.

그저 미칠 것 같은 통증에 시달리며 생명력이 야금야금 갉아 먹힐 뿐.

하지만 광기에 휩싸인 하렌트의 두 눈은 고양이와 개, 노루에게만 꽂혀 있었다.

자신의 몸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상관없다는 듯, 그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듯, 번들거리는 눈으로 세 마리의 동물을 노려보며 뒤를 쫓았다.

그렇게 그린령 근처까지 왔을 때, 길도 없이 우거진 숲속에서 하렌트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세 마리의 짐승이 인간이 되었다.

(169) 잔혹한 전투

  이반과 클로이, 체서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간 후, 나무 둥지에서 옷을 꺼냈다.

그린 공작령 근처의 깊은 숲속에는 이렇게 옷을 숨겨놓은 곳이 여러 군데에 있었다.

“클로이, 이제 좀 괜찮냐?”

이반의 질문에 클로이가 코웃음을 쳤다.

“애초에 안 괜찮을 것도 없었어. 대장 명령으로 붙어 있던 것뿐인데, 뭐.”

“그래도 네가 원래 정이 좀 많잖아.”

“그렇게 정 줬던 놈에게 배신당해서 죽을 뻔했었지.”

클로이는 연인에게 자신이 수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했다가, 연인이 관청에 고발하는 바람에 죽을 뻔했었다.

그런 클로이를 구해준 사람이 케이였다.

“이제 됐어. 라코젠은 자기가 자기 발등을…….”

푸욱-!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체서의 어깨에 깊이 박혔다.

이반과 클로이가 반사적으로 체서의 앞을 막아서며 무기를 꺼내 손에 쥐고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노려봤다.

“체서, 괜찮아?”

이반이 자신의 무기인 쇠사슬을 손에 감으며 물었다.

긴 쇠사슬 끝에는 가시가 잔뜩 돋친, 주먹만 한 크기의 쇠공이 여러 개 달려 있었다.

“응, 나는…… 큭!”

체서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체서의 등을 뚫고 들어와 심장을 찢은 단검 때문이었다.

이반과 클로이가 뒤로 물러나며 돌아봤을 때, 체서는 허물어지는 중이었다.

쓰러지는 체서의 뒤에, 은발의 남자가 서 있었다.

이반과 클로이는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뒤에서 습격을 받았다.

“여러 명인가?”

이반이 클로이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중얼거린 소리에, 하벤트가 씩 웃었다.

“아니, 나 혼자야.”

하벤트가 검은색 단검을 휘릭 돌리며 말했다.

하벤트는 어디로 쏴도 목표한 곳으로 날아가는 겐스트의 활을 사용해서 그들의 시선을 돌리고, 뒤에서 접근한 것이었다.

하벤트가 체서를 발로 툭 찼다.

체서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그제야 이반과 클로이는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이 새끼……!”

이반이 외치며 쇠사슬을 던졌다.

가시 달린 여러 개의 쇠공이 위협적으로 하벤트를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하벤트는 피하는 대신 명령했다.

“막아라.”

그러자 죽은 것이 분명한 체서가 일어나, 하벤트의 앞을 막았다.

이반은 깜짝 놀라서 쇠사슬을 거둬들였지만, 쇠공 중 몇 개는 체서의 얼굴과 목, 그리고 가슴에 강타했다.

쇠공의 가시가 체서의 피부를 찢었지만, 체서는 눈썹 하나 꿈틀하지 않았다.

빛 잃은 친구의 눈동자를 보며, 이반은 섬뜩함을 느꼈다. 하지만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친구를 공격할 수가 없어서, 쇠사슬을 꽉 움켜쥐기만 할 뿐이었다.

“저건 체서가 아니야.”

클로이가 중얼거리며 검을 들었다.

“저놈이 성유물을 사용한 거야.”

우웅-

리시가 마탑에 의뢰해서 만들어준 검은, 약간만 힘을 불어넣어도 검기를 푸른 검기를 뿜어냈다.

클로이는 검을 사선으로 세워 잡고 체서를 향해 달려들었다.

“날 지켜.”

하벤트의 명령에, 체서도 제 검을 뽑았다.

채앵-!

검과 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죽은 자는 검기를 쓸 수 없는지, 클로이의 검기가 체서의 검을 쉽게 잘라냈다.

잘린 검 윗부분이 바닥에 떨어졌지만, 체서는 당황한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반만 남은 검으로 클로이를 공격하려고 움직였다.

이반은 클로이가 체서를 상대하는 틈에, 하벤트를 향해 쇠사슬을 날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체서가 클로이를 놔두고 몸을 던져 하벤트를 지켰다.

퍽- 푸욱-

날카로운 쇠가시가 체서의 눈과 얼굴, 몸을 엉망으로 찢었다.

“윽…….”

이반이 작게 신음했다.

그제야 이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성유물이 하나 있었다.

이번 여정에 나서기 전에, 케이가 몇 번이나 주의하라고 한 성유물. 죽은 자를 되살리는 제브론의 단도.

‘체서는 죽었어. 죽은 거야. 저건 시체야.’

하지만 아무리 시체라도 생사를 오가며 함께 싸워온 친구가 엉망으로 찢기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거기에 친구를 찢는 게 자신의 무기라는 건, 더더욱 싫었다.

‘아니, 싫고 어쩌고 할 때가 아니야. 내가 망설이면 클로이까지 위험해져.’

하지만 망설이는 건 이반만이 아니었다.

클로이 역시 냉정하게 판단하긴 했어도, 체서가 온몸에서 피를 흘리는 걸 보자 속이 뒤집혔다.

클로이는 검기 실린 검으로 체서의 목을 베어내려다가 멈칫했다.

목을 자른다고 체서가 움직이지 않을까?

목이 잘린 채로도 계속 움직이면서 공격하고, 저 나쁜 새끼를 지키려 하지 않을까?

잠깐의 망설임이 패착이었다.

체서의 뒤에서 느긋하게 서 있던 하벤트가 순식간에 클로이의 옆으로 오더니, 그녀의 몸에 손바닥만 한 크기의 병을 가져다가 댔다.

그러자 클로이가 사라졌다.

클로이는 유리병보다 더 작아져서 그 안에 갇혔지만, 그걸 보지 못한 이반은 이를 으득 씹었다.

“클로이를 어떻게 했어!”

“글쎄, 어떻게 했을까?”

“클로이를 어디로 보냈느냐고!”

이반이 쇠사슬을 던졌다.

빠르게 날아간 쇠공이 체서의 육체에 육중하게 부딪히며 깊은 상처를 입혔다.

두 눈을 감아서라도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클로이라도 구해야만 한다.

“클로이를 내놔!”

이반은 친구의 시체를 자신의 무기로 찢으며, 하벤트를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하벤트는 검은색 단도를 옷소매에 숨긴 채, 이반이 더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체서는 점점 원래의 모습을 잃어갔다.

그런 체서를 보는 이반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쇠공을 뽑아낼 때마다 체서의 피가 이반의 몸을 적셨다.

그런데도 체서는 아직도 반만 남은 검으로 이반을 공격하려 하고 있었다.

“이 짓 좀 그만둬! 제발 좀 그만하라고!”

이반이 절규했다.

“체서를 그냥 좀 내버려두란 말이야!”

하벤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반은 검을 뽑아 체서에게 달려들었다.

이반의 검이 체서의 머리를 베는 순간, 하벤트의 단도가 이반의 가슴을 깊이 찔렀다.

“끅…….”

이반은 눈을 부릅뜨고 하벤트를 노려봤다.

하벤트는 빙긋 웃으며 단도를 한 번 비틀었다.

이반의 입에서 핏물이 흘렀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졌다.

투욱, 검이 떨어지고, 그다음에 육체가 허물어졌다.

하벤트는 제 몸에 튄 피를 닦아내며 이반에게 명령했다.

“짐승으로 변해봐.”

이반의 시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벤트가 피식 웃었다.

“죽은 후에는 변신할 수 없는가 보군. 역시 한 명은 살려두길 잘했어.”

하벤트가 유리병을 들어서 그 안에 담긴 클로이를 확인했다.

작아진 클로이가 두 손으로 유리병을 두드리며 뭐라고 외치고 있었다.

하벤트는 손가락으로 유리병을 톡톡 쳐본 후에, 병을 주머니에 넣고 돌아섰다.

그러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거기, 네 친구 시체 좀 어디 안 보이는 데다가 묻어두고 나서, 그 더러운 피 좀 씻어내고 날 따라오도록 해.”

이반은 그렇게 했다.

+++

이반과 체서가 죽던 날, 케이 일행은 마탑에 도착했다.

높은 산에 둘러싸인 분지에 있는 마탑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아서 꼭대기는 언제나 구름에 둘러싸여 있었다.

아직도 사용되는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마탑 입구 양쪽에는 고대의 거대병 둘이 서 있었다.

5미터가 넘는, 돌로 만든 기사.

옛날에는 마법으로 움직였지만, 이제 돌로 만든 거대병은 그저 과거의 영광을 자랑하는 거대한 석상일 뿐, 움직이지 않게 된 지 한참이 지났다.

“옛날에는 전쟁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마탑으로 사람을 보냈대요. 마법사의 도움을 얻어야 하니까. 그런데 정중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니라서, 그런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려고 저런 걸 만들어둔 거죠. 움직이는 모습을 한번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에르웰이 거대병을 올려다보며 아쉬운 듯 말했다.

그때, 마탑 문이 열리고 자그마한 체구의 남자가 뛰어나왔다.

“그린 공작부인?”

마법사 망토를 입은 남자가 물었다.

“네.”

“오, 저는 혼리스라고 합니다. 공작부인께서 저희 마탑에 해주신 후원에 감사드립니다.”

혼리스는 케이 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마법사의 자존심이 어떤지 아는 케이는 불쾌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리시하고만 인사를 나눈 혼리스는 그들을 마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마탑은 밖에서 볼 때보다 더 넓었고, 더 지저분했다.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종이와 마법 도구들, 바삐 오가는 사람들.

중앙에는 원형 계단이 꼭대기까지 이어져 있었다.

“오늘 오신 이유가 전에 말씀하신 보존 마법을 담은 마석 때문인 것 맞죠?”

“네, 맞아요.”

“저는 그쪽 담당이 아니라서 확실하게 모르니, 담당인 모사우에게 안내해드리지요. 계단을 한참 올라가셔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마탑주는 없나?”

케이가 물었다.

“안타깝게도 아르고넨 님은 몹시 중요한 일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혼리스는 케이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리시에게 설명했다.

“최근 마탑 운영비와 필요한 메르티움을 전부 후원해주는 공작부인의 방문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네, 이번에 좀…… 하여간 일단 올라가서 얘기하시죠. 연구소까지 올라가려면 체력을 좀 아끼셔야 합니다.”

리시 일행은 혼리스가 너무 과장한다고, 역시 마법사들은 체력이 너무 약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0분쯤 지나자, 그 생각을 바꿨다.

계단은 한 계단, 한 계단이 평범한 계단보다 높은 편인 데다가, 빙글빙글 돌아서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방향 감각을 잃기 일쑤였다.

체력에 자신이 있는 케이와 유진, 나단도 30분쯤 지났을 때는 호흡이 거칠어졌다.

“허억. 허억. 대체 건물을 왜 이따위로 만들어놓은 거야?”

나단이 숨을 몰아쉬며 투덜거렸다.

이번에도 혼리스는 나단을 돌아보지 않고, 리시에게 말했다.

“옛날에는 필요할 때마다 이 계단에 마법을 걸었답니다. 그러면 계단이 자동으로 움직였죠.”

“아. 그래서 계단이 이렇게 두 개로 나뉘어 있군요.”

“네. 한쪽은 내려가는 계단이에요. 원래는 그랬죠.”

그들이 올라가는 중에도 옆 계단을 통해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리시가 물었다.

“마석으로는 이 계단을 못 움직이나요?”

“할 수 있기는 한데, 마나 소모가 너무 크거든요. 귀한 마석을 이런 데 사용할 수는 없죠. 우리가 좀 고생하면 될 일인데.”

“구두쇠 같은 놈들.”

제일 뒤에서 따라오던 유진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혼리스의 귀에도 들렸지만, 혼리스는 깨끗이 무시했다.

그렇게 힘들게 연구실에 도착했다.

“연구실은…… 허억. 허억. 허억.”

혼리스가 연구실 문 앞에서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저러다가 기절할 것 같아서, 리시가 얼른 말했다.

“저기…… 나중에…… 조금…… 쉬었다가…….”

그들은 잠시 복도 한쪽에 서거나 앉아서 호흡이 안정되기를 기다렸다.

허억, 허억, 거칠게 울리던 숨소리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연구실은 여기서부터 꼭대기까지 전부입니다. 공작부인께서 맡겨주신 일은 이 층에 있는 연구실에서 진행하고 있고요. 다들 쉬셨으면 이제 들어갈까요?”

“그래요.”

리시가 대답하자마자 혼리스가 연구실 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안에서 비명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지금 문 열면 안 돼!”

“문 닫아!”

혼리스가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 했지만, 늦었다.

문틈으로 무언가 휘몰아치듯 쏟아져 나왔다.

(170) 멈추다.

  위이이이잉-

애애애애앵-

기괴한 소리를 내며 쏟아져나온 그것이, 처음에는 거대한 잿빛의 덩어리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에야 그것들이 손톱만 한 크기의 무언가가 한데 뭉친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한데 뭉쳐 있던 그것들은 연구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넓게 퍼져서 여기저기로 날아다니며 이곳저곳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으아아!”

“망했어, 대체 누구야?”

“저걸 다 어떻게 잡아?”

“미치겠네, 진짜. 아니, 누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요?”

안에서 빽빽 외쳐대는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리고 잿빛 머리카락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혼라우, 너였어?”

“어? 아니, 모사우, 대체 저게 뭐야?”

“저건 마석으로……! 어……? 누구야?”

모사우가 리시를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아, 그린 공작부인이셔. 공작부인, 이쪽이 모사우입니다.”

혼리스의 설명에 모사우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그때, 안에서 마법사들이 뛰어나왔다.

“모사우, 저거 다 어떡해? 저게 마석을 몇 개나 사용한…….”

모사우가 얼른 달려들어 마법사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리시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공작부인이시래.”

“아…….”

마법사들이 놀란 듯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그러더니 서로 눈치를 보다가 슬금슬금 연구실 안으로 돌아갔다.

그때, 아래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악! 이게 뭐야? 파리야?”

“아, 내 서류! 내 서류가 찢겼어.”

“이거 뭐야? 또 연구실 놈들이 일 친 거야?”

모사우가 눈을 데굴 굴리며 말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 나누시죠. 혼리스, 가서 저것들 내버려 두면 알아서 멈출 거라고 좀 전해줘.”

“얼마나 있어야 멈추는데?”

“글쎄? 두 시간쯤?”

모사우는 혼리스가 뭐라 하기 전에 얼른 문을 닫았다.

리시는 다른 곳보다 밝은 연구실의 광경을 둘러보고 있었다.

무엇에 쓰이는 건지 알 수 없는 기계들과 책상, 뭔가가 잔뜩 적인 종이들이 널려 있어서 흡사 쓰레기장처럼 보였다.

모사우는 리시 일행을 안쪽에 있는 휴게실로 안내했다.

휴게실도 지저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거기 편하게 앉으세요. 차라도 한잔 드릴까요?”

모사우가 뭔가 잔뜩 쌓여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

에르웰과 크리시나가 소파를 치우는 동안, 리시가 말했다.

“모사우. 아까 날아간 게 뭐죠?”

모사우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뭐, 그냥…… 아, 오는 길이 험하셨죠? 여기 올라오는 길이 좀 힘들어서.”

“모사우. 이번에는 대답이 돌아왔으면 좋겠네요. 아까 날아간 게 뭐죠?”

모사우가 입을 비쭉거리다가 말했다.

“도청하는 기계인데……. 두 개가 한 쌍인데, 한쪽을 날리면 목적지로 날아가서 도청을 하고 남은 쪽에 그대로 소리가 전해지는 기계예요. 그런데 완전히 완성된 건 아니라서, 가끔 저렇게 문제가 생기거든요. 아, 조금만 더 늦게 오셨으면 험한 꼴 안 보셨을 텐데. 전 공작부인이 여기 오시는 줄도 몰랐어요.”

모사우의 변명을 듣던 리시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모사우. 내가 마탑에 요청한 건 그런 게 아니었을 텐데요.”

“……네, 뭐. 그렇죠. 잠깐 쉬는 동안 겸사겸사…….”

“아주 시급한 상황이라고도 말했고요. 그 대가로 충분한 메르티움을 후원했으니, 그만큼 내 요청을 빠르게 들어줬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내 생각이 틀렸나요?”

리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어째서인지 그 자리에 있는 모두는 얼어붙을 것 같았다.

그건 모사우도 마찬가지이기에, 생전 처음 보는 공작부인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작고 여려 보이는 첫인상 때문에 무시했는데, 아무래도 잘못 본 것 같다.

모사우는 얼른 태도를 바꿨다.

“그게…… 거대한 창고를 채운 식량을 보존할 수 있는 마석은 만들었어요. 만들었는데…… 그게 공작부인께서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작동하질 않아요. 일단 거대한 공간 전체에 보존 마법을 걸 수가 없어서 여러 개를 사용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심하게 얼어버리는 경우가 생겨요. 그래서 좀 다른 방향으로 만들어봤더니, 이번에는 불에 타고……. 쉽지가 않아요.”

리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모든 게 원하는 대로 쉽게 돌아가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막힐 줄은 몰랐다.

‘역시 차선책을 사용할 수밖에 없나?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중, 리시의 계획을 아는 사람은 케이뿐이었지만 모두가 긴장한 채로 숨을 죽이고 리시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눈을 뜬 리시가 모사우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모사우.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노력해줘요. 충분한 보상을 해줄 테니.”

“네, 노력은 할게요. 정말로 노력은 할 텐데……“

“알아요. 쉽지 않다는 거.”

마법이 사라지고 있기에,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았다.

이만큼 해낸 것만 해도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그래도 부탁해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걸 최우선으로 삼아줘요.”

마탑 마법사들이 농땡이를 피우고 있을 거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다.

처음에야 수도 없이 지원해주는 메르티움에 놀라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해서, 리시가 요청하는 걸 가장 우선으로 여기고 만들어줬을 것이다.

하지만 풍부한 메르티움으로 마법을 쓸 수 있고, 마법 물품을 마음껏 만들어낼 수 있는 생활이 지속하자, 그들은 리시를 향한 감사의 마음을 잊었다.

원래 그렇게 풍족했다는 듯이, 해야 할 일을 미뤄두고 제각각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설명하고, 이게 얼마나 시급한지 알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기에 답답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연구실을 나와서 계단을 내려가는데,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르고넨 님께서 전서구를 보내셨어! 아무래도 진짜인 것 같대.”

“뭐? 어디 좀 봐봐.”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지?”

“시, 신께서 우리를 버리시려는 걸까요?”

“아직, 아직은 정확한 게 아니잖아. 며칠 지나면 정상으로 돌아올지도 모르니, 일단 이건 우리끼리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

“맞아요. 이 사실이 알려지면 전 대륙이 혼란에 빠질 거예요.”

리시와 케이가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서, 한곳에 모여 있는 마법사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리시 일행을 보자 화들짝 놀라서 여기저기 흩어졌다.

케이는 혼리스를 발견하고, 그의 팔을 붙잡았다.

“혼리스. 대체 무슨 일이지?”

“예? 뭐가요?”

“지금 나누던 얘기.”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연구실은 잘 살펴보셨습니까? 이제 볼일은 끝나신 거죠? 문 앞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혼리스가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그는 케이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케이에게 단단히 잡힌 혼리스에게, 마법사 몇 명이 안쓰럽다는 시선을 보냈다.

혼리스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저기…… 공작 전하. 왜 이러시는지요?”

아까는 케이와 말도 섞지 않으려 하더니, 이제는 공작 ‘전하’라고 부른다.

누가 봐도 수상한 태도에, 케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탑주가 자리를 비운 이유가 뭐지? 아까 설명해주려다가 계단을 올라가야 해서 멈췄잖나. 이제 설명해줘도 되지 않겠어?”

“아니, 그것이…… 진짜로 별일 아닙니다. 별일 아니에요. 다들 서둘러서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흐음. 글쎄. 나는 한번 시작한 얘기는 끝을 봐야 해서. 얘기할 생각이 없다면.”

케이는 혼리스의 팔을 잡은 채로 바닥에 털썩 앉았다.

“기다리지. 얘기해줄 생각이 들 때까지.”   혼리스가 창백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지만, 다들 시선을 피할 뿐 그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

“공작부인. 좀 말려보세요. 다들 바쁘시잖아요.”

“아니요. 나도 듣고 싶어서.”

리시가 빙그레 미소지으며 케이의 옆에 앉으려 하자, 혼리스가 두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아, 알겠어요. 알겠습니다. 말할게요.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군요. 어떻게 이렇게 고집이 셀 수가 있습니까?”

혼리스가 투덜거리더니, 깊이 심호흡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절대로 밖에 새어나가서는 안 됩니다. 마탑에서 얘기가 나올 때까지는 함구하셔야 해요.”

“약속하지.”

케이가 혼리스를 놔주고 일어났다.

혼리스는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갈등하는 표정이었지만, 자신을 에워싼 리시 일행을 보고는 자포자기한 듯 말했다.

“며칠 전에 이 지역에 비가 내렸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시기에 내리는 비는 일주일 정도 내리죠. 그런데 말입니다. 내린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서 비가 딱 멈추더라고요. 비가 멈추는 걸 보신 적 있습니까?”

케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혼리스가 말을 이었다.

“그래요. 그럼 아시겠네요. 비가 멈출 때는 서서히 멈춰요. 보통은 그렇죠. 그런데 그날 내린 비는 정말 이상할 정도로 갑자기, 느닷없이, 일제히 딱 멈춰버렸어요. 이 일대 전부가요.”

리시가 숨을 멈췄다.

“뭐, 별일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겠죠. 저도 그랬고요. 그런데 우리 쪽 마법사 중에 이런 기상 현상에 대해 흥미가 아주 많은 녀석이 있거든요. 로이드라는 녀석인데, 원래 좀 머리가 비상해서…….”

“혼리스.”

“아, 네네. 아무튼, 그래서 걔가 말을 타고 나가서 좀 돌아봤나 봐요. 그러다가 돌아와서 하늘을 한참 올려다보기도 하고요. 그러더니 아르고넨 님한테 뭔가 보고를 하러 가대요? 한참 지나서 어두운 표정으로 나오기에 무슨 일이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걔가 그러더라고요. 구름이 없다고.”

리시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리시는 저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지난 삶, 약 1년 후에.

“어디에도 구름이 안 보인대요. 그래서 제가 물었죠. 그게 왜? 그랬더니 걔가 그러더라고요. 비가 내리지 않는 것 같다고. 솔직히 처음에는 뭐가 문제인가 싶었는데, 아르고넨 님이 여기저기 나가 있는 마법사들이랑 한참 연락을 하시더라고요. 그러더니 어두운 표정으로 말씀하셨죠. 만약 이대로 비가 끊긴다면, 이 대륙에 대재앙이 내려앉을 거라고.”

대재앙.

대흉년.

대기근.

지난 삶, 오랫동안 이어진 흉년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하지만 그건 1년 후에나 있을 일이었다.

지금껏 리시가 해온 많은 것이 바로 그 대기근으로부터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대비책이었다.

전 세계 곳곳에 거대한 창고를 만들고, 1년 동안 여러 나라의 왕실과 귀족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 창고를 식재료로 채울 예정이었다.

보존 마법으로 그 안의 식재료를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게 한 후, 긴 흉년을 버틸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나눠줄 계획이었다.

혼리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방금 아르고넨 님이 보내신 서신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전 대륙의 비가 멈췄다. 이제 재앙이 시작될 것이다. 대비해라.]

(171) 세상에서 제일 좋아.

  미나스아릭 근처에서 대기하던 제이미는 케이의 전언을 받자마자 미나스아릭 왕궁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라코젠이 정예병을 전부 데리고 나가는 바람에, 미나스아릭 왕궁은 제이미의 군사를 막을 힘이 없었다.

설령 힘이 있었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라코젠이 미나스아릭 왕궁을 차지하고 왕을 죽인 후, 국민은 라코젠의 눈치를 보며 숨을 죽이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차라리 반쯤 미친 것 같은 라코젠보다 성유물의 수호자 가문이며 창천의 기사라 불리는 제이미가 왕좌를 차지한 편이 나았고, 실제로 그랬다.

제이미는 라코젠 때와 같은 일이 벌어질까 봐 긴장한 신하들을 달래고, 중신들을 불러 현재 상황을 알린 후, 가비자르 제국으로 사절을 보냈다.

사절은 가비자르의 황제에게 라코젠이 벌인 일과 그로 인한 죽음을 전했고, 가비자르 황제는 제 아들의 죽음에 크게 노하여 당장 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중신들과 황태자의 반대에 부딪혔다.

“폐하.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시는 게 우선입니다.”

“전염병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전쟁이 벌어진다면 민심이 혼란스러워질 것입니다.”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 그린 공작부인이 큰 공을 세웠음을 민중은 잊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 그린 가문을 공격하신다면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린 공작부인.

그 빌어먹을 그린 공작부인이 문제였다.

황제는 리시를 죽이고 싶어 했던 라코젠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리시의 존재는 그린 가문을 너무도 강하게 만들어준다.

대륙에서 가장 큰 제국의 황제인 이 몸의 발목까지도 붙드는 존재가 되었다.

황제는 분노를 억누르고 미나스아릭으로 사절을 보내, 무슨 일인지 상세히 알아오라 명했다.

가비자르 제국의 사절로서 미나스아릭에 찾아간 건, 라코젠과 이오벳 사이에서 황태자 자리를 두고 은근한 경쟁이 벌어질 때, 은밀하게 라코젠의 뒤를 밀어주던 샤린트 백작이었다.

샤린트 백작은 미나스아릭 왕실의 알현실에서 제이미 러셀 남작을 만날 수 있었다.

“러셀 남작. 이 대체 무슨 무엄한 짓이란 말이오. 미나스아릭에도 엄연히 왕족이 있는데 왕좌를 차지하다니.”

만나자마자 비난하는 샤린트 백작을 조용히 내려다보던 제이미는 사람을 시켜서 관을 하나 가져왔다.

오동나무로 만든 단단한 관 안에는 얼마 전에 미나스아릭 왕국에 도착한 라코젠의 시신이 담겨 있었다.

샤린트 백작은 제 앞에 놓인 관 안에 평온하게 눈 감고 있는 라코젠의 시신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라코젠이 케이를 기습하다가 죽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걸 실제로 보는 건 다른 기분이었다.

“이…… 이이…….”

“샤린트 백작. 2황자는 끊임없이 그린 공작부인을 노려왔지요. 그러더니 결국 아무 대비도 없이 여행 중이던 그린 공작님과 공작부인을 기습했습니다. 이에 그린 가문을 향한 가비자르의 적대감을 탓해야 하지만, 자식 잃은 황제의 마음을 고려해 그 문제는 크게 걸고넘어지지 않기로 했지요.”

제이미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무엄했다.

샤린트 백작은 두 눈을 부릅뜨고 제이미를 노려봤으나, 제이미는 평온하게 그 시선을 받아넘겼다.

“그러니 감사한 마음으로 2황자와 함께 돌아가도록 하세요.”

샤린트 백작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우리 2황자 전하께서 그린 공작부인을 죽이려 했다는 증거가 있소? 오히려 우리 쪽에서는 2황자 전하를 고까워하던 그린 공작이 이따위 수작을 부려 2황자 전하를 죽였다고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는데.”

“아. 증거.”

제이미가 피식 웃더니 고갯짓을 했다.

그린 가의 기사들이 나갔다가, 가비자르 기사단의 제복을 입은 기사 두 명을 끌고 들어왔다.

라코젠의 기사들로, 샤린트 백작도 얼굴을 아는 이들이었다.

케이의 기사들이 라코젠의 기사들을 거칠게 무릎 꿇려 앉혔다.

“증거가 거기 있으니, 샤린트 백작이 몸소 물어보시지요.”

샤린트 백작이 기사들을 노려봤다.

“2황자 전하께서 먼저 그린 공작을 공격했다는 게 사실이냐? 목숨을 아끼기 위해 거짓을 고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전하께서는…… 쭉 그린 공작부인의 목숨을 노려오셨습니다, 백작님. 백작님도 아시잖습니까? 전하께서 황실에 계실 때 몇 번이나 드나드셨으면서.”

기사의 지적에 샤린트 백작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내, 내가 언제……!”

당황하는 샤린트 백작을 보는 제이미의 눈이 가늘어졌다.

샤린트 백작은 제이미의 시선을 느끼고 버럭 외쳤다.

“거짓이오!”

“호오.”

“이 자는 거짓을 고하고 있소. 나는 2황자와 그 어떤 연도 없소. 그저 신하 된 도리로 인사를 드리러 갔을 뿐.”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2황자가 우리 그린 가문을 이유도 없이 고깝게 여겨 기습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지요?”

샤린트 백작은 말문이 막혔다.

벌게진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를 두둔해줄 만한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샤린트 백작은 라코젠의 시신이 담긴 관을 가지고 가비자르 제국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샤린트 백작은 황제 앞에서 미나스아릭에서 당했던 수모를 크게 과장해서 고했다.

샤린트 백작의 보고와 제 앞에 누운 라코젠의 시신을 본 황제의 머릿속이 분노로 채워졌다.

사실 아들의 죽음이 그렇게 슬픈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라코젠을 죽인 상대가 그린 공작이라는 점이었다.

안 그래도 그린 가문의 명성이 점점 높아지는 것이 마음에 안 들던 차였다.

그러던 중에 그린 공작부인이 전염병을 종식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그린 가문은 가비자르의 황실을 위협할 정도로 그 이름이 드높아졌다.

그런데 감히 가비자르의 2황자까지 죽이다니.

이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죄다.

황제는 주먹을 꽉 쥐고 터져 나오는 분노를 억누르며 느릿하게 말했다.

“그린 가문을 가비자르의 적으로 선포한다. 전쟁을 준비해라.”

 

+++

마탑에서 그린 저택으로 돌아오는 내내, 리시는 말이 없었다.

오만 가지 생각이 리시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어서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전 대륙의 비가 멈췄다. 이제 재앙이 시작될 것이다. 대비해라.]

마탑을 떠나기 전에 봤던 편지의 글씨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가지런한 글씨가 엉망으로 헝클어졌다가 부풀었다가 터지듯이 리시를 덮쳐왔다.

‘왜 벌써?’

너무 빠르다.

지난 삶에서 비가 멈추고 흉년이 시작된 건 크리드 2021년의 일이었다.

그때부터 3년간, 길게 이어진 흉년은 끔찍한 대기근으로 이어졌다.

당시 리시의 남편이었던 알포드 후치스가 그 전부터 창고에 쌓아둔 식량이 많았기에 3년을 버틸 수 있었다.

후치스 일가는 마탑에서 대륙 전체를 덮친 흉년에 대해 발표를 하자마자, 고용인을 전부 쫓아내고 자기 가족들끼리만 저택에 남아 창고에 쌓아둔 식량을 조금씩 소비했다.

리시를 가족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그들이 리시에게 살아남을 정도의 음식을 제공해준 이유는, 언젠가 대기근이 끝났을 때 알포드의 아름다운 장신구 역할을 해줘야만 했기 때문이다.

며느리가 굶어 죽었다는 말이 퍼져서 좋을 것도 없고.

그들은 리시가 굶어 죽을 것 같을 때마다 빵 한 조각, 치즈 한 조각을 던져줬다.

그렇게 리시는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의 끔찍한 허기 속에서 3년을 지냈고, 결국 살아남았다.

‘내 기억은 정확해. 그 일을 잊을 수가 없으니까…….’

3년 만에 비가 내렸지만, 세상은 끔찍하게 변해 있었다.

평소에 창고를 채워놓는 귀족들은 그나마 3년을 버텼지만, 평민들은 그러지 못했다.

지옥도가 펼쳐졌다.

그 지옥을 복구하는 데는, 흉년이 이어진 3년보다 두 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회귀한 후, 그린 가문에 들어오고 나서, 리시는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다.

그중 하나가 바로 대륙을 강타하는 재앙들을 막는 일이었다.

재앙을 막음으로써 그린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고, 그 누구도 감히 손대지 못할 권력을 손에 넣은 후, 수인에게 자유를 준다.

원래라면 죽었을 사람들도 살릴 수 있고, 수인에게 자유를 줄 수도 있는 기회로 여겼다.

모두를 살릴 수는 없다는 걸 알았다.

특히 이 대기근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적어도 전 세계가 지옥으로 변하는 건 막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아니었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

전염병으로 죽어야 할 사람들을 살렸다.

세계는 그런 짓을 한 리시뿐만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까지 죽이려 하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거야…….’

세계 곳곳에 거대한 창고를 세우려 했다.

오랫동안 식량이 썩지 않게 저장할 수 있는 거대한 창고를 만들어, 그 안을 음식물로 가득 채울 계획이었다.

귀족들에게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서 식량을 많이 저장해두라고 얘기하고, 위팅크 기자를 통해서 신문에 ‘식량 저장의 중요성’ 따위의 기사를 실어 평민들도 어느 정도는 흉년에 대비할 수 있도록 흐름을 이끌어갈 예정이었다.

그러면 흉년이 시작되더라도, 한동안은 버틸 수 있을 터였다. 적어도 지옥이 펼쳐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 준비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비가 멈췄다.

그것도 전 세계 동시에.

‘지난 삶에서는 이러지 않았어. 한 나라에서부터 비가 멈추고 점점 그 범위가 넓어져서 대륙 전체에 비가 멈춘 거였지.’

하지만 이번 삶에서는 대륙 전체의 비가 동시에 멈췄다.

말도 안 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내가 시간을 돌아와서 되살아난 것처럼 말도 안 되는 현상…….’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요 몇 년간 해온 일들이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걸 알게 되자, 덜컥 겁이 났다.

만약 이런 식으로 세계가 죽어야 할 사람을 죽이려 하는 거라면…….

‘아버님, 어머님이랑 젠도…… 이트리아도…… 다들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등골이 오싹해졌다.

지난 삶에서는 전염병이나 기근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어도, 큰 감흥은 없었다.

지난 삶의 아이리스에게는 소중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아이리스에게는 소중한 사람이 너무 많다.

잃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리시. 도착했어.”

케이의 음성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마차는 어느새 그린 저택 안에 들어와 있었다.

케이의 손을 잡고 내린 리시는 그렁그렁하게 눈물을 매달고 케이를 올려다봤다.

“케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나 봐.

차마 그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나는 당신의 부모님도, 당신의 여동생도, 그리고 당신의 부하들과 당신도 전부 지킬 수가…….

“누님!”

그때, 경쾌한 목소리가 리시를 덮쳐왔다.

우다다 달려온 토미가 리시의 앞에서 우뚝 멈추더니 꾸벅 허리를 굽혔다. 

“다녀오셨습니까?”

고개를 든 토미의 얼굴에 햇살 같은 미소가 가득했다.

소년의 얼굴 가득한 햇살이, 리시의 머릿속을 까맣게 채운 먹구름을 걷어냈다.

미처 걷어내지 못한 눈물이 리시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에, 토미가 깜짝 놀라 다가왔다.

“누님. 왜 우세요?”

아이의 성장은 빨랐다.

인간의 말도 제대로 못 했던 토미는 어느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을 줄도 알게 되었다.

지난 삶, 호랑이에게 키워져서 그저 숨어 지내다가 인간들에게 죽임당했던 소년은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 환하게 웃을 줄 아는 아이가 되었다.

리시는 아무것도 변하게 할 수 없다고 여겼지만, 아니었다.

토미의 세계는 변했다. 아주 확실하게.

리시가 두 팔을 들자, 토미가 와락 안겨 왔다.

리시는 토미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추운 겨울인데도 토미의 머리칼은 따뜻한 햇살 향기를 품고 있었다.

“그냥, 토미.”

리시는 속삭였다.

“널 보니까 참 좋아서.”

토미도 그랬다.

좋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란 소년은 리시를 만나면서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린 저택은 토미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했다.

따뜻한 햇살, 맛있는 음식, 친절한 사람들과 예쁜 호수, 꽃, 나무, 푹신한 침대…….

그중에서 가장 좋은 건 리시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그 모든 것을 다 모은다 해도, 리시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토미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리시에게 전해주고 싶었지만, 터질 것처럼 큰 애정을 표현하기에는 아직 어휘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토미는 그저 리시를 꽉 끌어안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감정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리시에게 조금이라도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172) 도망치지 않아.

  리시는 토미 덕분에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모두를 살릴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잖아. 나는 그냥 내가 할 일을 하면 되는 거야.’

마탑은 학자들과 의논한 후, 대륙의 이상 현상을 발표할 것이다.

‘흉년은 이미 시작됐어. 내가 울적해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해.’

리시는 케이에게 성유물을 찾으러 떠난 부하들을 저택으로 불러들이라고 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성유물을 아무리 찾아봐야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아, 케이.”

“하렌트 미어를 상대하려면 성유물의 도움이 필요할 텐데.”

“성유물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보다 어떤 식으로 다룰 수 있는지가 중요한 거잖아. 슬리브 스톤에 와일즈 지팡이, 괴력의 팔찌, 시간의 모래에 뱅커의 피리까지 있어. 어차피 여기서 더 많아 봐야 나 혼자서 다 다룰 수도 없어.”

“그건 그렇겠군.”

케이는 더는 반박하지 않고 부하들을 불러들였다.

케이 역시 아르고넨의 편지를 보고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대기근이 대륙을 덮치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경험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솔직하게는 ‘정말 재앙이 덮칠까?’라는 생각도 있었다.

케이의 부하들이 전부 저택으로 돌아올 무렵, 마탑에서 전 세계에 비가 멈췄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마탑주 아르고넨은 말했다.

“이 흉년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장기적으로 이어진다면 끔찍한 재앙이 될 것입니다.”

신문에 실린 기사로 아르고넨의 선포를 접한 리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런 식으로 불안감을 조성하면 안 되는데…….’

대륙 전체에 비가 내리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에 아르고넨이 당황한 건 이해하지만, 이렇게 성급하게 ‘재앙’이라는 말을 꺼내봐야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

‘생각보다 더 위험해지겠어.’

리시는 부하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기사가 실린 신문을 한 부씩 나눠주었다.

“기사에 보면 앞으로 비가 내리지 않을 시에,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자세하게 쓰여 있어요. 그중 가장 위험한 게, 반년도 되지 않아서 식량이 부족해질 거란 문장이에요. 이 기사를 읽은 사람들은 지금쯤 공포에 질렸을 거예요.”

식량 부족.

옛날보다 저장 기술이 좋아져서 굶어 죽는 사람이 줄었다고는 해도, 아직 겨울이면 굶주림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 번이라도 굶주림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식량 부족’이라는 단어가 날카롭게 박힐 것이 틀림없었다.

“곧 대륙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날 겁니다. 그린 령은 큰 소동이 없겠지만, 이 영지에 식량이 남는다는 걸 알면 많은 사람이 이쪽으로 넘어올 거예요. 변경의 경계를 강화하고 피난민은 거두되, 도적은 소탕하세요.”

지금껏 리시의 능력과 선견지명을 경험해온 케이의 부하들은, 리시의 말을 마음에 단단히 새겼다.

“앞으로 좀 힘들어질 겁니다.”

리시의 말대로였다.

각 나라의 왕과 영주들은 재앙이 닥쳤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어마어마한 세금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소작농들은 영주에게, 영주는 왕에게 창고를 털리는 수준이었다.

귀족들은 저택의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제 창고를 지켰으며, 평민들은 평민들대로 자기가 가진 것을 뺏기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떴다.

가진 게 없는 자는 남의 것을 뺏기 위해, 가진 게 조금이라도 있는 자는 제 것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이상 징후 발표가 있고 나서 채 두 달도 지나지 않아, 대륙은 혼란으로 뒤덮였다.

그럴 때, 가비자르의 황제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재앙을 막기 위해 애써야 할 시기인데, 갑자기 전쟁을 하겠다며 군사를 모으고, 국민의 창고를 털기 시작한 것이다.

황제의 군사들은 민가에 들이닥쳐, 쥐꼬리만큼 모아둔 식량을 다 빼앗아갔다.

반항하는 자는 ‘황명을 어겼다’라는 죄목을 붙여 죽이거나 옥에 가뒀다.

감옥에 갇힌 이는 잠시 시간을 벌었을 뿐, 끼니를 챙겨주지 않아 결국 굶어 죽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도 리시는 담담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케이의 성유물 창고에 보관하던 황금 술잔을 꺼내, 창고에 들어가서 힘을 사용했다.

까마득히 오랜 옛날, 대기근으로 죽어가는 평민들을 살리기 위해 몸 바친 사제가 갖고 다니던 술잔.

그 사제는 언제나 식사 때마다 황금 술잔을 채우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에렌 님의 평화가 이 땅에 깃들기를.”

지금이야말로 신의 평화가 이 땅에 깃들어야 할 때다.

리시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황금 술잔에 자신의 힘을 불어넣었다.

뛰어난 유물술사의 힘이 황금 술잔을 자극하면, 그 안에서 잘 익은 보리가 송골송골 나타나 술잔을 채우고도 넘쳐 창고 안에 쌓였다.

하루 종일 황금 술잔을 사용해도 만들어낼 수 있는 식량은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급한 불을 끌 수는 있었다.

마탑이 흉년을 예고하고 반년이 지났을 무렵, 사람들은 흉년을 몸으로 체감하게 되었다.

날이 더워지는 데도 비가 내리지 않아 땅은 말라붙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개울에는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았고, 강의 수위도 낮아졌으며 호수의 물도 줄어들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은 짐승의 사체가 널렸고, 사람들도 굶주림으로 죽어가기 시작했다.

그럴 때, 대륙 곳곳에 있는 포레스트 상회에서는 하루에 한 번씩 사람들에게 빵을 무료로 나눠주었다.

“줄 서세요, 줄. 아, 거기. 두 번 받아가면 안 됩니다. 거기, 갈색 옷! 그쪽은 아직 먹고살 만하잖아요. 아니, 그쪽은 백작님 댁 시종 아닙니까? 백작님 댁에는 먹을 것도 많은데 여기서 빵을 받아가시면 어떡해요? 욕심내지 마세요!”

빵을 무료로 나눠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두 번, 세 번씩 받아가려는 사람, 새치기하는 사람, 남이 받은 빵을 뺏는 사람, 거기에 빵 한 조각이라도 창고에 더 쌓아놓으려고 귀족 가에서 몰래 보낸 사람까지…….

하지만 그런 소동은 그린 가에서 친히 보낸 기사 덕분에 금방 가라앉았다.

케이는 무료 배급소에서도 폭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서, 포레스트 상회 모든 지점에 기사들을 보내두었다.

포레스트 상회에서 나눠주는 빵 덕분에 아사를 면한 사람들은 목소리를 모아 그린 가문을 칭송하기 시작했다.

아니, 콕 집어서 그린 공작부인을 칭송했다.

전염병이 걸렸을 때도, 대기근이 닥쳤을 때도, 보이지 않는 신보다 그린 공작부인이 가까이에 있다며, 그린 공작부인을 찬양했다.

이것은 신성국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한 일이었지만, 신성국 역시 그린 가문 덕분에 기근을 버틸 수 있었기에, 누구 하나 나서서 그린 공작부인을 찬양하는 걸 막지 않았다.

+++

리시는 울적한 기분으로 호수를 응시했다.

찰랑찰랑하게 물이 넘치던 호수는 이제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호수에서 살던 물고기들은 여기저기에서 배를 드러내고 썩어가는 중이었다.

비가 내리지 않아서 물이 줄어들자 호수의 수온이 높아져서, 아직 물이 남아 있는데도 물고기들은 버티지 못하고 죽어 나갔다.

“지난 삶에서는 나 하나 죽지 않으려고 버티는 것도 힘들어서 이렇게까지 끔찍한 줄은 몰랐어.”

리시의 목소리는 갈라진 입술만큼이나 건조했다.

그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황금 술잔으로 식량을 만들어낸 리시는, 병상에서 막 일어난 환자보다 초췌한 몰골이었다.

케이가 한숨을 삼키며 리시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당겼다.

안 그래도 리시가 너무 말라서 걱정이었는데, 지금은 정말로 부스러질 것만 같았다.

리시는 가만히 케이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매일, 매일 황금 술잔으로 보리를 만들어내는 데도, 창고가 비어가고 있어. 이제 두 달 정도 지나면 창고가 완전히 빌 거야. 그러면 내가 만들어낸 보리로만 먹고 살아야겠지.”

그린 가문의 창고는 굶어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서 개방했다.

그린 가 사람들만 먹고살면 3년이고, 4년이고 충분히 먹고도 남을 식량이었는데, 반년도 되지 않아서 동이 났다.

“어떻게든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 힘으로 대자연의 힘을 이기려는 건 오만이었어.”

“당신이 있어서 다들 이만큼이라도 버틸 수 있었던 거야, 리시. 운 좋으면 흉년이 더 일찍 끝날 수도 있잖아.”

리시는 그렇게 운이 좋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지난 삶보다 길게 흉년이 이어질지도 모른다.

“어머님, 아버님은? 제레시엔은?”

“얼마 전에 식량이 다 떨어졌대. 이쪽으로 오시라고 했어.”

“응, 잘했어.”

불현듯 찬 기운이 리시의 척추를 따라 흘러내렸다.

리시는 뻣뻣하게 굳어서 부릅뜬 두 눈으로 허공을 노려봤다.

뭘까, 이 불안한 기분은? 왜 갑자기 소름이 돋은 거지?

“부모님이랑 제레시엔이 함께 이곳으로 오고 계셔?”

“응.”

“……누구랑?”

“호위기사 두 명이랑 동행할걸. 아무래도 이런 시기에 먼길을 이동하는 건 식량 소모가 크다 보니, 그쪽 저택을 대충 정리하고…….”

리시가 갑자기 저택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당황해서 리시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케이도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뒤를 따라서 달렸다.

“리시! 리시, 왜 그래?”

“지난 삶에서…… 이트리아는 전염병으로 죽어. 내가 살렸고, 이트리아는 날 구하다가 죽을 뻔했지. 지난 삶에서 부모님과 젠은 사람들을 돌보다가 폭동에 휘말려서 돌아가셔. 하지만 이번 삶에서는 그러지 않았어. 아무 문제도 없었어.”

리시는 거기까지만 말했지만, 케이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케이의 가족에게 닥쳤어야 할 죽음이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리시는 마구간에 뛰어 들어가자마자 윈디에게 올라탔다.

“윈디, 달려. 최대한 빠르게.”  

+++

식량이 별로 없는 상황에서 많은 사람을 데리고 이동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와이번은 저택에 남아 있던 식량을 정리해서 가솔들에게 적당히 나눠준 후, 최소한의 인원으로 최소한의 식량만 가지고 길을 떠났다.

모자라는 식량은 가는 도중에 사냥이라도 해서 보충할 예정이었지만, 동식물도 다 죽어가는 판이었기에 그조차 쉽지 않았다.

강물은 말라서 썩은 내를 풍겼고, 식물은 말라비틀어졌으며, 숲길 여기저기에 썩어가는 짐승 사체가 널려 있었다.

그나마 한 마리 잡은 승냥이는 너무 비쩍 말라서, 와이번과 헤레이나, 젠, 그리고 기사 두 명이 나눠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호위기사들은 굶주림을 참고 충심을 발휘했지만, 와이번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들이 호위인데, 자네들이 먹어야지.”

한 사람이 배불리 먹을 수도 없을 것 같은 고기를 서로 양보하던 중에, 와이번이 벌떡 일어나서 검을 뽑았다.

와이번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어둠 속을 노려봤다.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는 걸 깨달은 기사들도 조용히 일어나서 검을 손에 쥐었고, 헤레이나와 젠도 제각각 싸울 준비를 했다.

쌔애액-!

화살이 날아왔다.

타앗-!

와이번은 검으로 화살을 가볍게 쳐냈다.

기사들이 방패를 드는 것과 동시에,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탁- 타닥-

대부분은 방패에 맞아서 떨어졌지만, 방패로 막지 못한 화살 몇 개가 와이번과 기사의 어깨와 허벅지에 박혔다.

“크흑.”

와이번은 작게 신음하며 귀를 기울였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숨소리와 목소리, 발소리.

그 수를 파악한 와이번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한두 명이 아니다.

적어도 50명이 넘는다.

와이번은 빠르게 기사들의 상태를 파악했다.

조금이나마 검기를 다룰 줄 아는 와이번의 호위기사들은,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어중이떠중이 50명 정도는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기사들은 굶주림으로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고, 그건 와이번이나 헤레이나, 젠도 마찬가지였다.

‘승산이 없겠군.’

그렇다고 해서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곧 화살이 멈출 거다.”

그 말을 하는 와중에도, 화살 하나가 와이번의 팔뚝에 꽂혔다.

헤레이나와 젠의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그들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더 굳건해진 눈으로 와이번의 말을 기다렸다.

“화살이 멈추자마자 공격을 감행할 테니, 헤레이나. 당신은 젠을 데리고…….”

헤레이나의 손가락이 와이번의 입술을 눌렀다.

헤레이나는 와이번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만으로도 와이번은 자신의 아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도망치지 않아. 절대.

(173) 대재앙 (1)

와이번의 말대로 곧 화살이 멈췄다.

그러고 나서 누군가가 외쳤다.

“공격해라!”

“놈들은 다섯 명이다!”

“그린의 문장이 있다! 필시 저 마차에는 먹을 게 잔뜩 쌓여 있겠지!”

“여자 한 명은 살려둬라. 인질로 삼아야 해!”

놈들은 원래 이 산에서 여행객이나 상단을 덮쳐서 생활하던 산적이었다.

원래는 이렇게 수가 많지 않았는데, 기근이 심해지면서 산적질에 합류하는 무리가 많아졌다.

예전이었다면 그린 가문의 문장을 단 마차를 공격하는 일은 없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다 굶어서 죽을 판에 그린 가문이 무엇이며, 왕이 무엇이란 말인가.

게다가 그린 가문은 아직도 먹을 게 넘쳐난다는 소문이 있었다.

최근에 지나가는 사람이라고는 죽기 직전의 피난민들뿐이었던 터라, 산적들도 식량이 다 떨어진 터였다.

그런 와중에 여기저기에 식량을 나눠주는 그린 가문의 마차가 지나가니 눈이 돌아갈 만도 했다.

아무리 와이번이라도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수십 명의 산적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이야아아앗!”

맨 앞에서 검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산적 세 명을.

챙- 채앵-!

두 명의 호위기사가 막아냈다.

와이번의 비도가 휘몰아쳐, 오른쪽의 산적 네 명을 베었다.

젠이 세 명을, 헤레이나가 한 명을 상대했다.

그들은 훌륭한 실력을 가졌지만, 상대가 너무 많았다.

검을 들어 올리는 와이번의 등을 뒤에서 다가온 산적이 사선으로 베었고, 검을 옆으로 빼는 젠의 옆구리에 몰래 다가온 산적의 단도가 깊숙이 박혔다.

헤레이나의 팔에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가 생기고, 기사들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비틀거렸다.

‘이런 식으로…….’

와이번은 처참했다.

성유물의 수호자로서 무수히 많은 사선을 넘나들었음에도 살아남았는데, 산적의 손에 죽다니.

‘하지만 다른 식이면 또 어떻단 말인가…….’

어차피 죽는 건 마찬가지다.

병에 걸려 죽든, 늙어 죽든, 산적의 손에 죽든, 죽으면 끝일 뿐이다.

검은색 안대를 한 산적의 검이 와이번의 목을 노리고 날아오는 짧은 순간, 와이번의 눈앞에는 아주 많은 영상이 스쳐 지나갔다.

헤레이나, 케이, 엘디, 젠, 그리고…….

연한 분홍색이 섞인 찬란한 은발을 가진 귀엽고 사랑스러운 막내딸 아이리스.

찬란한 은발이 와이번의 눈앞에서 비산했다.

‘그래, 이렇게 찬란한 은발이지.’

와이번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퍼억-! 퍽-!

강한 타격음과 함께.

“컥!”

“크헙!”

산적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리시!”

그리고 젠의 외침.

그제야 와이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죽음 앞에서 보는 마지막 그리운 장면이 아니었다.

실제로 리시가 와이번을 등지고 서 있었다.

“뭐야! 왜 멈춰!”

“뭐가 날아온 거야!”

괴력의 팔찌를 낀 리시가 날려버린 산적들이, 제 동료들을 덮치자 소란이 일어났다.

그 틈을 타서 리시는 뱅커의 피리를 들어 올렸다.

피리를 가로로 들고 입술을 댄 채, 느릿하게, 그러나 정교하게 숨을 불어넣었다.

이 상황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은은한 음악이 어둠을 물들였다.

리시의 머리칼과 드레스 자락이,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흩날렸다.

리시를 휘감고 지나간 그 바람은 날카롭게 벼려져, 산적들을 향해 거침없이 쇄도했다.

보이지 않는 바람의 칼날 수십, 수백 개가 소용돌이쳐 산적들을 쓸어올리고 베어냈다.

“으아아아악!”

“크악!”

“아아아아!”

어둠 속에서 한동안 고통에 찬 산적들의 비명이 울렸다.

이윽고 마지막까지 이어지던 신음조차 멈췄을 때, 리시는 천천히 피리를 내리고 뒤를 돌아봤다.

툭, 투둑-

리시의 뒤로, 피리가 만들어낸 칼날 소용돌이에 휘말려 올라갔던 산적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 앞에서 리시는 언제나처럼 고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좀 늦었어요, 어머님, 아버님.”

 

+++

와이번을 모시는 기사들은 어안이 벙벙한 채 리시에게 치료를 받았다.

그들도 와이번의 며느리인 그린 공작부인이 유물술사라는 건 알고 있었다. 전염병 이후로 그린 공작부인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이제 죽었구나 싶은 상황에서 전투의 여신처럼 등장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산적 전부를 소탕하더니, 이제는 성녀처럼 치료까지 해준다.

리시를 앞에 두면 늘 그랬듯, 와이번과 헤레이나의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졌는데, 기사들은 그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예뻐 죽을 만하지. 저런 며느리인데 어떻게 안 예쁘겠어?’

‘나도 나중에 저런 딸이나 하나 태어나면 좋겠네.’

리시는 그동안 내내 황금 술잔을 사용해와서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피리를 사용하고 치유의 반지까지 사용하려니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앞장서서 노공작 내외를 보호하던 기사들은 상처가 심했기 때문에 당장 치료가 필요했다.

칼에 깊이 베인 상처와 손상된 장기를 치유하는 동안, 리시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나마 상처가 심하지 않던 젠은 팔짱을 끼고 서서 리시를 지켜보다가, 옆에 있던 케이에게 작게 속삭였다.

“오빠는 왜 온 건데?”

“……걱정돼서.”

“도움이 하나도 안 되는데?”

“……어, 알아.”

“진짜 한심하다.”

“……그래. 맞아.”

케이는 한숨을 삼켰다.

리시를 만난 후, 언제나 리시의 뒤를 따라가기만 했다.

그래도 가끔은 그녀에게 힘을 보태줄 수가 있었는데, 최근에는 아니다.

자연이 만들어낸 대재앙을 맞서는 일에서, 케이는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기사들을 다 치료한 리시가 와이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와이번이 리시의 손을 가만히 거머쥐고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됐다.”

“아버님. 상처가 깊어요.”

“되었다. 나는 저택에 가서 천천히 치료를 받아도 된다.”

그래서 리시는 헤레이나와 젠을 돌아봤다.

두 사람도 고개를 저었다.

“아가, 이제 그만 돌아가자꾸나.”

“그래요, 리시. 이런 상처는 내버려 둬도 나아요.”

내버려 둬서 나을 상처가 아니었다.

하지만 리시는 자신을 생각해서 치료를 거부하는 가족들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한 명만 더 치료해도 기절할 것 같은데, 치료하다가 기절하면 가족들이 무척이나 미안해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상황을 수습한 후, 그린 저택으로 향했다.

+++

평민들은 굶주리고 도적에게 치이며 죽어 나가고 있었지만, 혈세를 거둬들인 가비자르 황실은 풍요로웠다.

눈이 돌아버린 황제는 세계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무모하게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반대가 없는 건 아니지만, 반대하는 신하마다 죽이겠다고 날뛰니 황제 앞에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황제가 너무 오래 산 게지요. 노망이 든 게 분명해요.”

“하필이면 그린 가문을 상대로 저러시니……. 지금껏 그린을 건드리고 무사한 나라가 없었는데…….”

“스티무어도 그렇고, 미나스아릭도 결국 그린 손에 떨어졌지.”

“설마 우리 가비자르가 그린에 당하겠어요?”

“황제가 그린을 치려고 한다는 건, 그린 공작 귀에도 들어갔을 거야. 그린 공작도 제 나름의 대비를 하고 있겠지.”

“명분이 없는 전쟁이니, 신성국은 그린의 손을 잡아주겠죠. 우리도 슬슬 살길을 찾아야 하는 거 아닐까요?”

“이런 시기에 가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요새 망명하기도 쉽지 않아.”

귀족들은 한숨을 삼켰고, 황태자는 피눈물을 흘리며 제 아버지의 미친 짓을 멈추게 하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황제가 전쟁을 반대하는 황태자까지 감옥에 가뒀다는 소식이 퍼지자, 사람들은 확신했다.

‘황제는 미쳤다.’

실제로 그랬다.

처음에 황제가 그린 가문에 갖고 있던 감정은 그저 고까움이었다.

성유물의 수호자라는 이유로, 한 나라의 황제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가문이라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황제 앞에서는 예의를 갖추고, 고작해야 ‘백작’이니 보아 넘길 수 있었다.

아이리스가 그린 가문으로 들어오면서 뭔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린의 명성이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고, 그린 백작은 그린 공작이 되었다.

짜증이 치밀었다.

그럴 때, 라코젠이 미나스아릭을 손에 넣었다.

미나스아릭이 가비자르의 소유가 된 건 아니지만, 그리될 날도 머지않았다고 여겼다.

그런 일을 해낸 라코젠이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케이가 라코젠을 죽였다.

라코젠이 먼저 케이를 습격했다는 그 말을, 황제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이건 전부 케이의 모함이다.

공작 작위를 받은 것 정도로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더 많은 걸 욕심낸 케이가 미나스아릭까지 먹기 위해서 라코젠에게 누명을 씌운 게 분명했다.

그런 게 아니라면 굳이 죽일 필요가 있는가.

그저 숨이 붙어 있을 정도로만 손을 봐주면 될 것을.

라코젠을 죽인 건, 라코젠의 입을 막기 위해서임이 분명했다.

감히 황족을 죽이다니. 그저 운 좋게 수호자의 능력을 갖고 태어난 것뿐이면서.

고까운 마음이 질투가 되고, 질투가 증오로 변질되었다.

그럴 때, 마탑이 대륙에 대재앙이 닥쳤음을 선포했다.

그 순간, 황제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툭 끊어졌다.

애초에 배포가 작았던 황제는 질투와 증오, 그리고 재앙으로 인해 들이닥칠 상황을 전부 버틸 재간이 없었다.

감히 가비자르의 황실에 도전한 케이브란트 그린을 처벌하기 위해 군사를 훈련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황제는 모든 복잡한 상황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그런 황제에게 하렌트 미어가 찾아왔다.

황제는 하렌트 미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지만, 그가 황제를 알현하고 싶다며 전한 말이 황제를 혹하게 했다.

“케이브란트 그린을 이기게 해드리겠습니다.”

 

+++

케이와 리시가 가족들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좋지 않은 소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클로이랑 이반, 체서가 황무지에도 없다고?”

케이는 수인을 해방해야 한다는 목표를 세웠을 때부터, 수인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모은 수인이 200명이 훌쩍 넘었다.

그 중 준비된 자들은 각 나라의 요직을 차지할 수 있도록 도와줘서, 상급 귀족의 기사나 왕실 기사 등으로 위장해 숨어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짐승의 땅이라 불리는 황무지에서 언젠가 필요할 날을 위해 훈련을 하며 실력을 키우고 있었다.

라코젠의 죽음으로 상심한 클로이가 먼저 떠났는데 저택에 없기에 황무지로 향한 줄 알았다.

만약 그녀만 사라진 거라면, 이 생활에 염증을 느껴서 잠시 모습을 감춘 거라고 여기겠지만.

“이반이랑 체서도 없는 게 확실해?”

이반과 체서까지 사라졌다는 건 이상했다.

제이미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장. 셋 다, 그날 이후로 봤다는 사람도, 연락을 받았다는 사람도 없습니다.”

셋 다 성인이고 자유가 있으니, 말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들이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심장을 내리눌렀다.

이상한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장. 가비자르 황실에서 뭔가 왔는데요.”

나단이 가비자르 황실의 문장이 찍힌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케이는 가비자르까지 신경 쓸 기분이 아니었지만, 봉투를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전무후무한 재앙이 대륙을 짓누르는 이때, 가비자르 황실은 피해가 큰 나라를 위해 황실 창고를 개방하기로 하였다.

식량이 부족한 자들은 태양의 날에 수도의 대광장으로 오라.

그곳에서 가비자르 제국의 은혜가 내리리라.]

오만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다.

“가비자르에 다른 나라를 도울 정도의 식량이 있나?”

케이의 질문에 나단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세금을 어마어마하게 거둬들이고 있긴 한데, 대부분 군사 훈련으로 써버린 걸로 알고 있어요. 국민은 배곯아 죽는데, 군사들은 기름기로 얼굴이 반질반질하죠.”

“그럼 왜……?”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저 무시해버리면 되는데, 왜인지 그럴 수가 없었다.

편지에서 짙은 악의가 느껴졌다.

고민을 거듭해도 답이 나오질 않아서, 리시에게 편지를 건네고 의견을 물었다.

리시 역시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지난 삶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삶에서 대기근이 닥쳤을 때, 가비자르 황제는 숨죽이고 버티다가 병에 걸려 죽고, 황태자였던 이오벳이 그 뒤를 잇게 된다.

이오벳이 황제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비가 내리고, 대기근이 끝나는 게 지난 삶의 일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케이.”

태양의 날은 두 달 후였다.

“우리도 가보는 게 좋겠어.”

(174) 대재앙 (2)

  식량을 나눠주겠다는 가비자르 제국 황제의 초대장은 각 나라의 왕이나 귀족에게만 전해진 게 아니었다.

[가비자르 제국의 황제, 드디어 정신 차렸나?!]

[태양의 날, 태양이 아닌 가비자르의 은혜가 대륙을 비출까?]

여러 신문에 기사가 났다.

일대 혼란이 일어나는 건 당연했다.

‘태양의 날, 가비자르 제국의 수도에 가면 굶주림을 면할 수 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얼마 안 되는 짐을 꾸려 가비자르 제국 수도를 향해 길을 떠났다.

각 나라에서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가비자르 제국을 향해 움직이니, 사건과 사고가 벌어지는 건 당연했다.

산적과 도적이 난무했고, 빵 한 쪽을 두고 싸움이 벌어져서 서로를 죽이는 일이 허다했다.

폭력과 증오, 혼란이 대륙 전역을 휩쓸었다.

비가 내리지 않아 갈라진 땅을 핏물이 적셨다.

죽지 않았을 생명이 덧없이 죽어 나가는 와중에, 가비자르의 황제는 흐뭇한 마음으로 태양의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날이 오면 모두가 알게 되리라.

그린 가문과 가비자르의 황족인 옥보시더스 가문 중 누가 더 귀하고 높은지. 그린 가문이 지금껏 얼마나 많은 사람을 능멸해왔는지. 샅샅이 밝혀질 것이다.

+++

빛 한 조각 들지 않는 축축한 지하 감옥은 가비자르 황궁의 아주 깊은 곳에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고도 또 지하로 내려가야만 있는 지하 감옥은, 대대로 황족 중에 큰 벌을 저지른 자가 있거나 남의 눈을 피해서 숨겨야 할 자가 있을 때에 사용하는 곳이었다.

그 지하 감옥 안에 두꺼운 철로 만든 또 하나의 철창이 있었다.

작은 짐승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 촘촘하게 창살을 박아넣은 철창.

클로이는 그 안에 웅크리고 있었다.

클로이의 전신에는 고문당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찢기고 뜯긴 상처가 곪아 고름이 흐르고, 벌레가 꼬였다.

클로이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지금쯤 쥐들이 달려들어 살을 뜯었겠지만, 클로이에게서 풍기는 고양이 냄새에 다행히 쥐들은 접근하지 않았다.

“슬슬 그 입으로 인정하는 것도 좋을 텐데.”

클로이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콧등을 찡그렸다.

은빛 머리칼을 가진 사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하렌트 미어.

금방이라도 죽을 듯 괴로운 상황에서도, 그를 향한 증오의 불길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클로이는 그의 단검에 찔린 체서가 죽은 후에도 얼마나 끔찍하게 움직였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케이브란트도 수인이다. 딱 그거 하나만 인정하면 너는 살려주겠다니까? 안 그러면 너, 곧 죽는다고.”

“퉷.”

클로이는 피 섞인 침을 뱉어내는 거로 대답을 대신했다.

케이가 수인이라는 걸 인정하라고? 차라리 죽고 말지.

케이는 클로이의 은인이었다. 케이가 아니었다면 이미 죽었을 목숨이다. 목숨 따위는 아깝지 않았다.

클로이의 건방진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하렌트가 검을 뽑았다.

체서를, 그 후에는 이반을 찌른 그 검인 줄 알고 긴장했는데, 다행히 평범한 검이었다.

하렌트는 검을 철창으로 푹 찔러넣었다. 날카롭게 벼린 검 끝이 클로이의 허벅지를 파고들었다.

“크아아아!”

비명과 함께 클로이의 육체가 작아지더니, 검은 고양이로 바뀌었다.

수인은 견디지 못할 통증을 받으면 인간에서 짐승으로, 짐승에서 인간으로 변한다.

예전이었다면 칼질 한 번에 모습이 바뀌지 않았겠지만, 지금 클로이는 이 정도의 고통을 견딜 체력도 없었다.

헐떡이는 작은 생물을 보며 하렌트가 비릿하게 웃었다.

“꼴에 의리 있는 척은.”

“…….”

“저주받은 수인 따위가!”

푸욱-

“인간인 척한다고 해서!”

푸욱-

“진짜로 인간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푸욱-

하렌트의 검이 클로이의 육체를 가차 없이 쑤셨다. 그럴 때마다 클로이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고양이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고양이로 변하기를 반복했다.

놀라울 것도 없었다.

이게 현재 이 대륙에서 수인에 대한 대우였다.

수인이라는 걸 고발당해 붙잡힌 수인은, 처형장에 묶인 채 많은 사람 앞에서 고문을 받으며 변신하는 모습을 보여준 후 처형당했다.

인간으로 모습으로 돌아온 클로이가 왈칵 피를 토해냈다.

“아차. 죽으면 안 되지. 안 되지, 안 돼. 그래. 이제 그만해야겠다. 그렇지? 응, 그만해야지.”

클로이의 눈에 하렌트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처음 봤을 때 이 지경은 아니었는데, 반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정말로 미친 것처럼 보인다.

‘아니, 뭔가에 씐 것처럼 보여. 설마…… 그 단검에 씐 건가?’

클로이도 성유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아는 게 있었다.

위험한 힘을 발휘하는 성유물은 그 안에 담긴 사념이 몹시 강해서 인간의 영혼을 틀어쥐고 정신을 지배하려 든다고 들었다.

하렌트도 그런 것처럼 보였다.

누군가를 달래듯 중얼거리던 하렌트가 클로이를 향해 히죽 웃었다.

클로이는 섬뜩함을 느끼며 몸을 움츠렸고, 그 모습을 본 하렌트는 몹시 만족스러운 눈빛을 지었다.

광기 서린 눈으로 한동안 클로이를 응시하던 하렌트는, “이제 머지않았어.”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지하 감옥을 빠져나갔다.

클로이는 하렌트가 나간 문을 노려보다가 고양이의 모습으로 변해서 몸을 둥글게 웅크리고 누웠다.

쌔액, 쌔액, 작은 짐승에게서 고통에 찬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

그러니까 토미는,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심장이 불쾌하게 두근거리고 제대로 잠을 잘 수도 없고 때로 토할 것 같은 이 기분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호랑이에게 키워진 작은 소년은 언제나 깊은 잠을 잤기에, 꿈을 꾼 적이 없었다.

아니, 꿈을 꾸더라도 잠에서 깨고 나면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며칠 전에 꾼 꿈은 이상했다.

너무도 이상했다.

-“너구나, 아이리스가 살린 생명.”

생전 처음 듣는 목소리였지만, 왜인지 편안했다.

토미는 ‘아이리스’가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이라는 걸 알았다.

-“이건 내가 도와준 것도 아닌데, 아이리스는 참 운도 좋아. 아니지, 그 애가 스스로 붙잡은 행운이지.”

토미는 상냥한 목소리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그 음성에 담긴, 아이리스를 향한 애정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아이리스가 널 살리고 널 지킴으로써 기회를 한 번 더 얻었어. 덧없이 스러졌어야 할 생명이 아이리스에게 큰 행운으로 작용하겠지. 나는 이제 그만한 행운을 줄 힘이 없거든.”

상냥한 목소리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음성을 듣는 게 좋았다.

그래서 토미는 우두커니 서서 그 음성을 귀담아들었다.

-“잘 들어, 토미. 이제부터 절대로 아이리스에게서 떨어지지 마. 그게 중요해. 절대로, 그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리스 곁에 붙어 있도록 해.”

잠에서 깨어난 토미는, 상냥한 목소리가 해준 말 중 대부분은 잊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마지막에 한 말만큼은 똑똑히 기억했다.

‘그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리스 곁에 붙어 있도록 해.’

토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리시의 말을 듣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리시보다 상냥한 음성의 말을 들어야만 할 것 같았다. 왜인지 그랬다.

“토미, 안 돼. 저택에서 기다려, 응? 다음에 나갈 때는 꼭 데려가 줄게.”

토미는 전에 없이 떼를 썼다.

가비자르로 떠나기 위해 준비하는 리시의 곁에 꼭 붙어서, 함께 가고 싶다고, 그래야만 한다고 졸라댔다.

“토미. 아이리스 님을 너무 곤란하게 만들지 마.”

에르웰이 달래도.

“토미! 왜 그렇게 버릇없이 굴어? 아이리스 님은 중요한 일 때문에 나가시는 거야!”

크리시나에게 혼나도.

“토미, 나랑 같이 시내에 가서 시장 구경할까?”

월라스가 미끼를 던져도.

토미는 리시의 손을 꼭 잡고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누님과 함께 갈 겁니다.”

“토미, 우리는 정말 중요한 문제로 나가는 거야. 돌아오면 너랑 같이 어디든 갈게. 그러니까 이번만 참자, 응?”

케이가 부드럽게 말했지만, 토미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리시는 난처했다.

토미는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아이가 아니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다른 때라면 못 이기는 척 토미를 데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가비자르의 황제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짐작도 되지 않는데도, 불길한 예감이 전신을 짓누르는 상태였다.

그런 곳에 아직 감정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토미를 데려갔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그렇다고 전에 없이 손을 꼭 잡고 늘어지는 토미를 모질게 떼어낼 수도 없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어미에게 버림받았던 아이에게 또 한 번 버림받는 기분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안절부절못하는데, 헤레이나가 말했다.

“그냥 데려가지 그러니?”

“하지만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어서요. 만약 위험하면…….”

“나도 같이 가마.”

와이번이 말했다.

“그만두세요, 아버지. 위험합니다.”

“케이,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러니 그만두세요.”

“아들이 불길한 곳에 가는데 아비가 돼서 모르는 척 눈 감으란 말이냐?”

“네. 그냥 눈 감고 귀 닫고 저택에서 편히 계세요. 무슨 일인지만 알아보고 돌아올 겁니다.”

케이가 단호하게 끊어냈다.

그리고 토미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런 와중에도 리시의 치맛자락을 놓지 않는 토미의 작은 손을, 케이가 억지로 벌려서 떼어냈다.

“안 됩니다! 누님이랑 같이 갈 겁니다! 누님한테 붙어 있어야 합니다.”

토미가 절박하게 외쳤지만, 케이는 못 들은 척 토미를 와이번에게 안겼다.

버둥거리는 토미를, 와이번이 꽉 끌어안았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같이 갈 겁니다! 누님! 누니임!”

토미가 절박하게 외쳤지만, 리시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윈디의 등에 올랐다.

케이와 리시, 시녀 두 명과 나단, 유진이 저택을 떠나 가비자르로 향했다.

+++

신성국에서도 마차 한 대와 기사단 하나가 가비자르를 향해 움직였다.

커다란 마차 안에는 교황과 산티아노, 미네르바를 비롯한 대신관 몇 명이 타고 있었고, 기사단은 엘디가 부단장으로 있는 테세이 성기사단이었다.

“교황 폐하. 아무리 생각해도 폐하께서 몸소 가비자르까지 가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도 기푸 대신관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폐하, 뭔가 불길합니다. 가비자르 황제가 은혜 운운하며 오만하게 군 건, 무엇을 하는지 보고 나중에 벌을 내리셔도 되지 않겠어요?”

미네르바가 전에 없이 산티아노의 말에 동의했다.

다른 대신관들도 두 사람의 말을 두둔했지만, 교황은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가비자르의 황제는 교황에게까지 초대장을 보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오만방자한 행동이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혼란의 시기에 그런 짓을 하는 미친 자들은 항상 몇 명씩 나타나는 법이니까.

다만.

‘그 악의는…….’

그 초대장에 아주 기분 나쁜 것이 묻어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모르는 척 넘어갈 수가 없는, 아주 기분 나쁘고 어두운 것이 글자 하나하나에서 전해졌다.

교황은 엘디의 능력을 눈치채고 있었기에, 엘디를 불러서 초대장을 보여줬다.

엘디는 교황이 건네는 초대장을 만지려 하지 않았다.

-“그 기분 나쁜 건 뭐죠?”

엘디도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없다고 했다.

다만 아주 좋지 않다고, 아무리 봐도 인간이 남긴 사념이란 느낌이 안 든다고 했다.

그리하여 교황은 직접 그곳에 가보기로 결정했다.

큰 도움은 되지 않을지라도, 무언가 벌어졌을 때 미약한 도움의 손길이나마 뻗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력이 좋은 대신관들과 가장 강한 기사단인 테세이 성기사단을 고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여차하면…….’

교황은 리시 덕분에 자신의 생명이 원래보다 더 길어졌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주어진 생일지도 모른다.

‘여차하면 내가…….’

(175) 대재앙 (3)

가비자르 황궁의 아름다운 별실은 햇빛이 잘 드는 곳이었지만, 하렌트가 앉아 있는 곳은 어두웠다.

분위기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 어둠이 하렌트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하렌트는 세계수의 지팡이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와일즈의 지팡이보다 한 뼘 정도 더 큰 지팡이는 끝이 구부러지고, 손잡이 부분에는 푸른 보석이 박혀 있었다.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증오가 지팡이 주위에서 넘실거렸다.

“지긋지긋한 인간 놈들…….”

하렌트는 세계수 지팡이의 원념에 완전히 잠식당했다.

그러기까지 고작 5년이 걸렸다.

하렌트는 가브릭 왕국 미어 백작의 사생아였다.

미어 백작은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지 않자, 애인에게서 낳은 하렌트를 백작가로 데려왔다.

하렌트가 백작가로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미어 백작 부인은 임신을 했고 아들을 낳았다.

사생아인 하렌트와 아내에게서 태어난 아들.

미어 백작은 하렌트도 아들로 인정하고 잘 키워줄 수도 있었다.

미어 백작 부인은 남편 애인의 아이인 하렌트가 싫어도 어느 정도 거리감을 유지한 채 가족으로 지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못했다.

미어 백작 부인은 제 아들만 감싸고 돌며 하렌트를 괴롭혔고, 미어 백작은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괴롭힘.

미어 백작 부부의 태도는 고용인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고용인들조차도 하렌트를 백작의 영식으로 대우해주지 않았다.

하렌트는 생각했다.

‘모조리 죽어버리면 좋겠어.’

백작 부부도,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도, 고용인들도, 하렌트만 보면 숙덕거리는 다른 귀족들도, 평민들도, 모조리 다 죽어버리면 좋겠다.

그렇게 간절히 소망할 때, 아부틴의 빗을 손에 넣었다.

뒷산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 밭에서 일하는 여자가 머리에 꽂고 있던 빗에 자꾸만 눈이 갔다.

당시 하렌트는 성유물도, 자신에게 그걸 다루는 재능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저 그 빗을 갖고 싶었을 뿐이다.

-“나 줘.”

백작가에서 아무리 대우해주지 않는다고 해도, 하렌트는 미어 백작의 영식이었다.

여자는 남편에게 받은 소중한 빗을, 어쩔 수 없이 하렌트에게 건네주었다.

그 빗을 손에 쥐는 순간, 하렌트는 무언가 굉장히 뜨거운 것이 제 머릿속에 흘러드는 기분을 느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모두를 죽여 없애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기분.

그래서 그렇게 했다.

산티아노가 하렌트의 재능을 눈치챈 후에야, 하렌트는 자신 같은 사람을 유물술사라고 부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대는 특별하답니다. 이 세상에 유물술사의 재능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죠.”

특별하다.

그 말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하렌트는 더욱더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성유물을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세계수의 지팡이를 손에 넣었다.

5년 전, 오랜 유적의 잔해 속에서 세계수의 지팡이를 찾아내 손에 쥐는 순간, 하렌트 미어는 더 이상 하렌트 미어가 아니게 되었다.

강렬한 사념을 머금은 세계수의 지팡이는 빠른 속도로 하렌트의 정신과 영혼을 잠식해나갔다.

세계수의 지팡이가 가진 그 격렬한 증오와 원한을 해결해주기 위해, 하렌트는 제 생명이 깎이는 줄도 모르고 지팡이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그리하여 이제 곧 찾아올 태양의 날.

“모조리…….”

하렌트는 키득키득 웃었다.

“고통 속에서 죽게 해주지. 너희가 우리에게 그랬듯이.”

 

+++

“흐아아아앙! 흐아아앙!”

저택에 토미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며칠 전 리시가 떠난 후, 울기 시작한 토미는 아무리 달래고 얼러도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토미는 좀처럼 울지 않는 아이였기에, 젠은 당황스러웠다.

토미가 왜 이렇게까지 우는 걸까?

리시가 한 달씩 저택을 비워도 늘 의젓하게 지냈었는데.

“토미, 울지 말고. 응? 나랑 맛있는 거 먹자. 어제부터 하나도 안 먹었잖아. 너 그렇게 계속 울고만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 리시가 속상해할걸.”

리시 이름을 꺼내면서까지 달래보아도, 토미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흐아아아앙! 가야 합니다. 누님한테 가야 합니다!”

“토미, 이번에는 정말로 안 된다니까. 다음에 같이 가자. 아니, 지금 나랑 나갈까? 다 같이 시내에 나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시장도 구경하고…….”

덥석-

토미가 젠의 손목을 세게 움켜쥐었다.

또래보다 유독 작은 아이인데도 움켜쥐는 힘이 상당했다.

토미의 황금색 눈동자가 젠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강렬한 눈빛은 마치 태양처럼 젠을 덮쳐왔다.

아이의 눈동자에 가득한 것이 그저 좋아하는 사람을 오래 볼 수 없다는 슬픔이나 외로움만이 아닌 듯했다.

“토미……?”

“제레시엔. 내 말을 이해해야 합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리스와 함께 있어야 합니다.”

토미의 진지한 음성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면서도, 이게 그저 아이의 고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래야 하는데?”

조심스레 묻는 말에, 토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도 무어라 설명해야 좋을지 알 수 없다는 듯, 잠깐의 당혹스러움이 토미의 눈동자를 스치고 지나갔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한 거야?”

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그린 가 사람이?”

토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제레시엔. 나는 이제부터 절대로 아이리스 곁에서 떨어지면 안 됩니다.”   젠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 대륙에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재앙이 찾아왔고, 대륙에서 가장 큰 나라의 황제는 꿍꿍이를 알 수 없는 짓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의 작은 소년 역시 영문 모를 소리를 해댄다.

애가 괜히 떼를 쓰는 거라고 무시해버리면 그만일 텐데.

‘왜 나까지……?’

토미는 아이리스의 곁에 있어야만 해.

그런 생각이 드는 걸까?

“토미, 이제 좀 괜찮아졌냐? 다 큰 녀석이 왜 그렇게 떼를 써?”

마침 와이번이 방으로 들어왔다.

젠은 와이번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버지. 리시에게 가야겠어요.”

와이번의 눈이 젠의 얼굴에서 젠이 꼭 잡은 토미의 손으로 옮겨졌다.

잠시 침묵하던 와이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자.”

 

+++

리시 일행은 평민처럼 허름한 옷을 입고 망토를 걸친 후, 망토에 달린 후드를 둘러쓰고 있었다.

황제가 ‘은혜’를 베풀기로 한 태양의 날.

가비자르 수도는 아비규환이었다.

리시 일행은 이틀 전에 수도에 도착했지만, 수도의 성문을 넘지 않고 성 밖에서 시간을 때운 터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렸는지, 성 밖까지 사람이 넘쳐 흘렀다.

귀족부터 평민에 빈민까지,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가비자르의 수도를 채우고 있었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싸움이 벌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밀치지 말라는 이유로, 먼저 가겠다는 이유로, 혹은 먹을 것 좀 나눠달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언성을 높이고 몸싸움을 하고 그러다가 상대를 죽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런데도 그걸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지옥 같네요.”

에르웰이 무기를 점검하며 중얼거리는 말에 크리시나가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절박한 사람들을 다 불러들였으니 이럴 수밖에 없지. 음식을 나눠주겠다고는 했지만 무한하게 있는 것도 아닐 테고…… 다들 자기 차례까지 안 올까 봐 불안할 거야.”

정말로 그랬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이미 굶주림으로 죽기 직전이었다.

행여나 앞에 서 있는 사람 때문에 자기에게까지 식량이 돌아오지 않을까 봐, 경쟁자를 죽이기 위해 은밀하게 손을 쓰는 사람도 있었다.

앞장선 나단은 요령 좋게 사람들을 요리조리 밀치고 피해 길을 만들었고, 그 뒤를 케이와 리시가 따라갔다.

공작 부부의 뒤를 에르웰과 크리시나, 가장 마지막을 유진이 지켰다.

그렇게 그들은 무사히 대광장 근처까지 올 수 있었다.

대광장 주위는 더 소란스러웠다.

“황제는 언제 나와!”

“벌써 정오가 지난 지 한참 됐다고!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냐!”

“먹을 걸 내놔! 혼자 살 궁리하지 말고 우리에게도 먹을 걸 내놓으라고!”

“난 샤크란에서 여기까지 왔다고요! 얼른, 얼른 먹을 걸 줘요!”

“설마 불러놓고 너무 많아서 내빼는 건 아니겠지?”

리시는 고함을 질러대는 사람들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들 때문에 이리저리 치이는 리시의 어깨를, 케이가 보듬어 안았다.

“리시, 내가 한 말 기억하지?”

“……위험하다 싶으면 어떻게든 도망치라는 말?”

“그래.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

“알겠어…….”

대답은 그리했지만, 리시는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이곳에서 도망치면 영영 케이를 못 볼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번 삶을 살아가면서 눈앞이 이렇게 캄캄해진 적은 처음이었다.

지난 삶과 똑같이 흘러가지 않아도, 언제나 차분하게 답을 구할 수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새까만 덩어리가 머리를, 가슴을 꽉 채우고 있었다.

악의가 느껴졌다.

이 모든 일에, 자연이 만들어낸 대재앙 때문이 아닌, 불길한 악의가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두근, 두근, 두근.

소란 속에서도, 제 심장이 불길하게 뛰는 소리가 전해졌다.

리시는 자신이 가져온 성유물을 점검했다.

여차하는 순간 슬리브 스톤을 사용하고, 그래도 안 되면 아부틴의 빗을 사용하자.

괴력의 팔찌도 있고, 시간의 모래에 뱅커의 피리까지 챙겼다.

그러니 어지간해서는 다 같이 이곳에서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상황을 그리며 대처할 계획을 세우는데, 앞쪽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키가 작은 리시는 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알 수 없었다.

“황실 기사들이 나왔어. 단상을 세우고 있군.”

케이가 설명했다.

“단상을?”

“황제가 저 위에 올라가서 교황인 척 거드름이라도 피우고 싶은가 보지.”

황실에서 나온 기사들이 뭔가 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더 크게 소리를 질러댔다.

식량을 내놔라, 연설은 됐으니 일단 먹고 시작하자. 배고프다. 죽겠다. 밀지 마라. 죽여버린다.

절박한 고함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렸다.

그때, 갑자기 사위가 고요해졌다.

리시는 황제가 등장한 거라고 예상했고, 그 예상이 맞았다.

황제가 천천히 단상 위로 올라가는 동안, 다들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이런 아비규환 속에서도 황제는 황제였다.

붉은 망토에 금실로 호화로운 자수를 새긴 망토를 걸친 황제는, 커다란 왕관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

무채색의 세상에서 황제에게만 색이 있는 것 같았다.

유독 높이 쌓은 단상 위에 올라간 황제의 모습은, 저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잘 보였다.

단상에 우뚝 선 황제의 뒤로, 기사들이 커다란 뭔가를 갖고 올라왔다.

네모난 상자에 천을 뒤집어씌운 것 같았다.

어둡고 불길한 것이 리시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왜인지 리시는 저 안에 아주 좋지 않은 것이,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 존재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은 손이 케이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케이…….”

리시는 상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우리…… 여기서 벗어나야 할 것 같아…….”

그런 기분이 들었다.

황제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온 건데, 확인해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확신.

그런 확신이 드는 건 케이도 마찬가지였다.

리시는 상자를 보느라 몰랐지만, 황제를 보는 케이는 알았다.

황제의 시선이 정확하게 케이를 향해 있다는 걸.

이 수많은 사람 중에서 오직 케이만을 향해 있다는 걸.

케이를 발견한 황제의 입가에 기분 나쁜 미소가 번졌다는 걸.

그리하여 케이는 리시의 손을 꽉 잡았다.

“그래, 리시. 가자.”

그렇게 말하고 뒤를 돌아서려 할 때였다.

황제가 상자를 덮고 있던 천을 확 걷어냈다.

(176) 대재앙 (4)

쿵, 쿵, 쿵, 심장이 아프도록 뛰었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그랬다.

젠은 왼쪽 가슴을 내리누르며 리시와 케이를 찾아서 두리번거렸다.

토미를 리시에게 데려다줘야겠다고 결심하자마자, 와이번과 헤레이나, 그리고 저택에 남아 있던 제이미와 월라스에 더해 기 사단들까지 모아서 가비자르로 향했다.

도착하기는 도착했는데, 상상보다 더한 혼란 속에서 리시 일행을 찾기가 힘들었다.

“누님…… 누님을 찾아야…… 흑…… 합니다…… 흐윽…….”

이곳으로 오는 내내 눈을 부릅뜨고 앉아 있던 토미는, 리시를 쉽게 찾지 못하자 다시 울기 시작했다.

울지 말라고, 괜찮다고, 금방 찾을 거라고, 리시는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그런 위로를 해줄 수가 없었다.

아무 일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제는 젠도 울고 싶을 정도로 불길한 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럴 때에, 황제가 등장했고 주위가 고요해졌다.

고요해진 틈을 타서 서둘러 리시를 찾으려 했는데…….

덥석-!

근처에 있던 월라스가 젠의 어깨를 세게 움켜쥐었다.

“왜 그래, 월라……?”

월라스의 얼굴을 본 젠은 말을 끝낼 수가 없었다.

월라스의 얼굴이 경악과 분노, 증오와 슬픔으로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지간해서는 화내는 법이 없는 월라스의 눈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게 달아올랐다.

젠은 천천히 움직여서 월라스의 시선이 향한 방향, 황제가 서 있는 단상 쪽을 돌아봤다.

그리고, 젠 또한 두 눈을 부릅떴다.

+++

케이와 리시는 얼어붙었다.

천 안에 있던 것은 상자가 아니었다.

철창이었다.

그리고 그 철창 안에 있는 건, 한 마리의 검은 고양이.

멀리서 봐도 상태가 좋지 않은 고양이 한 마리가 상자 안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한 고양이의 등장에 굳어 있다가, 곧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게 뭐야? 설마 그걸 보여주려고 여기까지 오라고 한 건 아니겠지?”

“그걸 먹으라는 거야? 그게 한 끼나 돼?”

“비쩍 곯아 붙은 고양이로 뭘 어쩌라는 거야?”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음식을 내놔! 창고를 열라고!”

황제가 스릉, 검을 뽑더니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러자 다시 조용해졌다.

여기저기서 투덜거리거나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는 했어도, 황제의 목소리가 멀리 닿을 정도로는 조용했다.

“나는 지금 그대들에게 이 대재앙의 진실을 알려주려 한다.”

대재앙의 진실.

작은 술렁임조차 사라졌다.

황제는 싱긋 웃었고, 이번에는 리시는 그 미소가 케이를 향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 순간, 황제의 검이 가차 없이 고양이의 옆구리를 찔렀다.

“키야아아앙!”

고양이의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으아아아! 저, 저게 뭐야?”

“벼, 변했어!”

“수인? 수인이야?”

“으어어어어!”

당황스러운 사람들의 외침 사이에서, 철창 안의 검은 고양이는 여자로 변신했다.

황제의 검이 다시 한번 여자를 찔렀고.

“으아아아악!”

이번에는 여자의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헉! 진짜 수인이잖아?”

“뭐, 뭐야? 왜 황제가 수인을 데리고 있어?”

“으아, 징그러.”

“토할 것 같아.”

여자는 고양이가 되었다.

황제는 또 고양이를 찔러서 고양이가 여자가 되도록 만든 후, 입을 열었다.

“여기, 수인이 있다. 그리고.”

황제가 검을 천천히 움직여 어딘가를 가리켰다.

사람들의 시선이 검을 따라 움직였다.

검 끝은 유독 키가 큰 한 사내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수인의 주인이, 그곳에 있다.”

식량을 얻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수인이 변신하는 광경에 놀라서 잠시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사람들은 황제의 의도대로 움직였다.

모두의 시선이 한 남자에게 꽂혔다.

“케이브란트 그린 공작.”

황제가 그 이름을 뱉는 순간, 술렁임이 해일처럼 번졌다.

“뭐? 케이브란트 그린?”

“그린 공작이라고? 그린 공작이 수인의 주인이라고?”

“뭐야? 몰래 수인을 데리고 있었던 거야?”

“여기서 그린 공작이 왜 나와? 그린 공작이 여기 와 있는 거야?”

콰앙-!

황제가 발을 구르자, 사람들이 다시 조용해졌다.

“케이브란트 그린 공작 또한 수인이다! 케이브란트 그린은 수인인 주제에 신의 축복을 받은 성유물의 수호자가 되었다. 저주받은 수인이 신의 대리인을 자처한 것이다. 수인처럼 더럽고 저주받은 생물이 성유물의 수호자랍시고 나대니, 어찌 신께서 노하지 않으시겠는가!”

황제는 사람들이 시끄러워지기 전에,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

“이 대재앙은 수인인 케이브란트 그린이 신을 기만하여, 크게 분노한 에렌께서 이 땅에 내린 형벌이다!”

공기가 잠시 팽팽하게 당겨졌다.

사람들에게는 이유가 필요했다.

갑작스러운 흉년의 이유, 이 굶주림과 죽음의 이유, 괴로움의 이유, 고통의 이유, 슬픔의 이유.

그동안은 이유도 모르는 채 굶주리고 죽고 소중한 이를 잃어왔다.

그런데 지금 황제가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사실 케이가 수인이라는 증거는 없었다. 그저 수인을 부하로 두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통받는 이유와 해결책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증거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이게 전부 케이브란트 그린 때문이야.

저주받은 수인이면서 신의 축복을 받으려고 한 그린 공작 때문이야.

케이브란트 그린 때문에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신 거야.

케이브란트 그린 때문에 내 딸이 굶어 죽은 거야.

케이브란트 그린 때문에…….

케이브란트 그린 때문에…….

사람들은 괴로움의 원인을 돌릴 곳을 찾았다.

지금껏 그린 가문이 사람들을 위해 얼마나 노력해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게 케이브란트 그린이 신을 농락해서 생긴 일이라는 것뿐.

케이를 보는 사람들의 눈동자가 광기로 까맣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리시는 정신을 차리고 품에서 슬리브 스톤을 꺼내 쥐었다.

그와 동시에, 팽팽하게 당겨졌던 공기가 폭발했다.

“그린을 죽여!”

“케이브란트 그린을 죽여라!”

“그린을 죽이면 이 모든 게 끝나!”

“신께서 분노하셨다! 케이브란트를 죽여!”

 

+++

교황은 외쳤다.

“이건 케이브란트 그린 때문이 아니다! 이 대재앙은 케이브란트 그린 때문이 아니야!”

하지만 교황의 처절한 외침은, 반쯤 미쳐버린 사람들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폐하…….”

교황의 옆을 초조하게 지키던 엘디가 괴로운 눈으로 교황을 돌아봤다.

교황이 고개를 끄덕이자, 엘디는 검을 쥐고 사람들을 밀치며 케이와 리시를 찾아 달렸다.

‘안 돼, 안 돼, 안 돼.’

엘디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

‘안 돼, 안 돼, 형.’

+++

리시는 슬리브 스톤을 사용했다.

진득한 졸음이 리시 일행을 둘러싸고 사방으로 퍼졌다.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악독한 표정으로 달려들던 이들이 표정을 풀며 스르륵 잠이 들어 툭툭 쓰러졌다.

하지만 그 범위가 리시의 예상처럼 넓지는 않았다.

‘왜 이러지……?’

뭔가가 리시의 힘을 막아내고 있었다.

리시는 슬리브 스톤에 힘을 밀어 넣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다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그는 자신을 감출 생각도 없었던 듯, 찬란한 은발을 빛내며 리시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렌트 미어.’

그는 해사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 미소가 리시를 오싹하게 했다.

‘저 자가 뭔가를 하고 있어.’

무엇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렌트를 발견한 순간부터, 리시는 이 주위를 까맣게 채운 무언가를 느꼈다.

묵직하고 기분 나쁜 것이 일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걸…… 걷어내야 해.’

하지만 어떻게?

지금 리시가 가진 성유물로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리시가 슬리브 스톤에 마구 힘을 밀어 넣으며 어떻게든 하렌트를 상대하려 할 때, 케이 역시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클로이를 버릴 수는 없어.’

클로이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어차피 다 들켰으니…… 황제를 죽이고 클로이를 빼내 도망치는 게 최선이겠지.’

케이는 나단과 유진을 돌아봤다.

그들은 케이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리시를 돌아봤다.

리시는 땀을 뻘뻘 흘리며 슬리브 스톤으로 접근하는 이들을 잠재우고 있었다.

“리시.”

“응, 케이.”

“나는 클로이를 버릴 수 없어.”

“응. 가서 구해.”

리시는 대답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듯했다.

케이가 에르웰과 크리시나를 돌아보자, 믿음직한 두 여성은 맡겨놓으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케이의 눈에 이반이 들어왔다.

픽픽 쓰러져 잠드는 사람들을 밀치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이반.

“이반! 리시를 지켜!”

케이는 그렇게 외친 후, 나단과 유진을 데리고 단상을 향해 달렸다.

+++

하렌트는 이 모든 것이 기꺼웠다.

혼란, 소란, 공포, 분노, 증오, 악의, 고통, 슬픔, 아픔, 그리고 죽음.

“흐……흐흐흐흐…….”

자꾸만 웃음이 흘러나왔다.

굶주림으로 이성을 잃은 사람들에게, 세계수의 지팡이의 힘을 덧씌우는 건 아주 쉬웠다.

세계수의 지팡이에서 비롯된 격렬한 증오와 분노가 마치 비처럼 사람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사람들은 세계수의 지팡이가 오랜 시간 머금고 기다려온 묵은 증오를, 의심 없이 흡수하고 표출해냈다.

사람들은 그저 케이브란트 그린만 죽이려 하지 않았다.

어깨가 부딪치면 때리고, 몸이 밀리면 죽였다.

그렇게 서로를 죽였다.

하렌트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제브론의 단도로 근처에 있는 사람들을 찔러 죽인 후, 죽은 자를 일으켜 세워 주변에 있는 자들을 죽이게 했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여라.

너희가 우리에게 했던 짓을, 이제 너희도 당해봐라.

리시는 슬리브 스톤으로 세계수의 지팡이가 뻗어내는 힘을 밀어내고 있었다.

거슬리기는 해도 버겁지는 않았다.

세계수의 지팡이에 담긴 원념에 하렌트가 깎아낸 생명을 더한 힘을, 리시의 힘으로는 밀어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자신이 죽는지도 모르는 채, 서로를 죽여 땅을 피로 적셨다.

+++

엘디는 달렸다.

달리다가 유독 큰 사내를 발견했다.

‘케이…….’

케이는 유진, 나단과 함께 사람들을 뚫고 황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엘디는 케이를 도우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눈에 비친 광경이 엘디의 발목을 붙들었다.

‘저게 뭐야?’

누군가가 리시의 망토를 잡아끄는 바람에 후드가 벗겨져서, 연한 분홍빛 머리칼이 드러났다.

그리고 리시를 향해 접근하는…….

‘이반이 왜……?’

이반을 둘러싼 기묘한 기운.

저건 이반이 아니다.

확신하자마자 엘디는 방향을 틀어서 리시를 향해 달려갔다.

+++

케이는 달렸다.

사람들을 헤치고 달리던 케이는 단상이 가까워지자 모습을 바꾸었다.

케이와 나단, 유진이 달리던 곳을, 검은 늑대와 황금빛 사자, 그리고 흑표범이 달렸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으헉!”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케이가 진짜 수인이라는 걸 깨달은 사람들의 눈에 경악이 서렸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케이는 검을 들고 클로이의 옆에 서 있는 황제의 목을 물어뜯을 생각뿐이었다.

이윽고 사자보다도 큰 검은 늑대가 단상에 올라섰을 때.

검은 늑대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을 때.

“리시!”

저 멀리서 들려오는 다급한 외침이 케이의 주의를 끌었다.

황제는 케이가 수인이라고 짐작했을 뿐, 확신을 갖지는 못했었기에 검은 늑대가 되어 달려오는 케이 때문에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케이가 멈칫하는 순간, 황제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푸욱-!

아직 클로이의 피가 묻어 있는 검이, 검은 늑대의 가슴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177) 기적

  어린 소년의 눈에 지옥도가 들어왔다.

토미는 보았다.

단상 위의 철창 안에서 쑤셔지고 베어지는 클로이를.

토미는 들었다.

“으…… 징그러.”

“수인이네. 진짜 수인은 처음 봐.”

“역겨워.”

클로이를 불쌍히 여기기는커녕 역겨워하고 징그러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 그저 멍하니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대체 왜? 우리가 뭘 어떻게 했다고 그렇게 미워하지?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이, 그래서 당신들이 굶주리는 것이, 어째서 우리의 탓이 되는 거지? 우리는 당신들이랑 똑같이 그저 태어났고, 그리하여 살아갈 뿐인데.

젠이 토미의 손을 꽉 쥐었다.

토미가 고개를 들자, 슬픔과 분노로 이를 악문 젠의 턱이 보였다.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이 투욱, 토미와 잡은 손에 떨어졌다.

뜨거운 눈물이, 토미에게는 위로였다.

토미는 젠이 좋았기에, 젠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수인을 위해 울어줘서 안심이었다.

요동치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는 순간.

검은 늑대와 황금빛 사자와 흑표범이 클로이를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

“꺄아아아!”

“주, 죽여! 죽여라! 수인이다!”

“그린 공작이 진짜로 수인이었어!”

혼란에 빠진 사람들의 외침.

토미의 손을 쥔 젠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뼈가 으스러지는 것처럼 세게 쥐는 손길을, 토미는 느끼지 못했다.

다른 짐승보다 빠르고 강하게 움직인 흑늑대가 높은 단상에 훌쩍 뛰어올랐다.

흑늑대의 송곳니가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순간.

“리시!”

날카로운 외침이, 토미의 귀에도 들려왔다.

그리고.

푸욱-!

황제의 검이 흑늑대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

토미는 케이를 좋아했다.

무표정할 때는 조금 무서운 느낌이 드는 케이는, 토미를 볼 때면 언제나 싱긋 미소를 지어주었다.

햇살을 머금은 듯한 청량한 미소를 보면, 왜인지 든든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아저씨가 있는 한, 나는 괜찮을 거야.

무엇으로부터 괜찮은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든든한 버팀목이, 장검에 찔러 허물어졌다.

거대한 흑늑대가 구겨지듯 쓰러졌다.

“크허어어어엉!”

황금빛 사자가 포효했다.

흑표범은 슬픔을 안에 가두고 소리 없이 단상 위로 뛰어올랐다.

흑늑대를 해치웠다는 승리의 기쁨에 젖은 황제는, 아직도 검을 거두지 않은 채였다.

흑표범의 커다란 앞발이 황제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커흑!”

황제는 흑표범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검을 놓친 채 나가떨어졌다.

“흐…… 흐아아아아……”

오만하게 턱을 치키고 군중 앞에 서 있던 황제는, 흑표범이 다가오자 오줌을 지렸다.

“나, 나, 나는 황제다!”

제 지위를 말하고.

“나를 죽이면…… 이 몸을 죽이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야!”

헛된 협박을 내뱉었다.

흑표범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표표히 걸어가, 앞발로 황제의 가슴을 찍어눌렀다.

그러자 군중이 외쳤다.

“수인은 역시 잔인해!”

“저주받은 생물!”

“수인이, 수인이 황제를 죽이려 한다! 어서 저걸 잡아!”

먼저 끔찍한 짓을 한 것은 황제이건만, 누구도 황제를 탓하지 않았다.

흑표범은 그저 제 동료를 지키고 구하려고 했을 뿐이건만, 모든 잘못이 흑표범의 것이 되었다.

흑표범은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새까만 눈동자가 서글프게 빛나는 것을, 토미는 보았다.

“안 돼, 안 돼, 토미.”

젠의 음성은 토미의 귀에 닿지 않았다.

토미는 아직 많은 종류의 감정을 가슴에 담아보지 못했다.

어미에게 버려져 호랑이에게 키워졌을 때, 토미는 그저 한 마리의 짐승이었다.

리시를 만나 사람이 되었고, 리시와 그린 가 사람들이 전해주는 감정만을 받아들였다.

애정, 다정함, 사랑, 기쁨, 온화함, 즐거움, 좋아함……

그런 햇살처럼 찬란히 빛나는 감정들.

증오, 저주, 분노, 역겨움, 경악, 혐오, 미움…….

그런 어둔 감정에는 취약했다.

그렇기에 참지도, 거두지도 못한 감정이 작은 육체 속에서 들끓었다.

“헉! 이건 또 뭐야?”

“도, 도마뱀!”

“수인이다! 여기도 수인이 있어!”

“죽여! 아직 작아! 얼른 죽여라!”

토미는 제 모습이 변한 줄도 몰랐다.

아우성치며 달려드는 사람들을, 토미는 멍하게 올려다보았다.

악귀처럼 변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토미는 생각했다.

저주받은 쪽은 누구인가?

가장 앞에 선 남자가 휘두르는 검이, 무방비한 토미를 향해 다가왔다.

토미는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원인 모를 분노와 증오가 담긴 검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 검은, 와이번의 검에 막혔다.

채앵-!

참 좋아하는 할아버지가, 토미의 앞을 막아섰다.

단단하고 넓은 등이, 토미를 지켰다.

그리고 젠이 토미를 보듬어 안고, 자신의 검을 꺼냈다.

월라스와 제이미도 토미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아주 잠시, 토미의 가슴에 들어찬 어둠이 물러날 뻔했다.

몰려드는 인파에 토미의 사람들이 다치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토미의 사람들은 강했으나, 눈이 뒤집혀 달려드는 수많은 사람을 모두 상대하기는 어려웠다.

월라스의 팔이 찢기고, 제이미의 허벅지가 뚫렸다.

와이번이 비틀거리고, 누군가 헤레이나의 치마를 잡아 세게 당겨 넘어뜨렸다.

한쪽 팔로 토미를 안고 있는 젠의 상태는 더 심각했다.

토미를 향하는 공격을 몸으로 막느라, 젠의 옷은 그녀의 피로 흠뻑 젖었다.

토미는 자신의 존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험에 처하게 한다는 걸 알았다.

“가만히 있어, 토미. 응? 가만히.”

이런 와중에도, 젠은 토미를 놔주려 하지 않았다.

“그냥 있어. 응?”

애원하는 듯한 젠의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지만, 토미는 힘껏 날개를 움직여 젠의 품을 벗어났다.

“토미, 안 돼! 이리 와!”

젠의 외침.

“저것 봐! 저게 날고 있어!”

“얼른 잡아! 총 없어?”

“저걸 쏴!”

총과 활을 가진 자들이, 토미를 향해 무기를 겨눴다.

토미는 제게 날아드는 총알과 화살을 쉽게 피했다.

토미는 깨닫지 못했다.

“저, 저게 커지고 있어!”

“으아…… 저거, 뭐야? 저게 대체 뭐야?”

젠의 품에 쏙 안길 정도로 작았던 드래곤의 육체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들의 음성은 토미의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케이를 구해야 한다.

토미는 케이를 향해 날아가던 중에, 연분홍 머리칼을 발견했다.

피에 젖은 아이리스 그린.

리시를 둘러싸고 이반과 싸우는 엘디가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도, 토미는 이반이 자신이 알던 이반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퉁명스럽게 말하다가도 씩 웃으며 장난감을 선물해주는, 다정한 아저씨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슬픔이 아플 정도로 휘몰아쳤다.

격동하는 감정에 드래곤의 크기가 점점 커졌다.

이제 사람들은 거대한 드래곤을 공격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게 그 경이로운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굶주린 광기와 세계수의 지팡이로부터 비롯된 혼돈으로 가득했던 사람들의 머릿속에, 기적이라는 글자가 새겨졌다.

‘드래곤.’

사람들은 회녹색 거대한 생물의 존재가 무엇인지, 그제야 깨달았다.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존재가 허공을 선회하다가 내려와, 주둥이로 리시를 툭 쳐올려 자신의 머리 위에 태웠다.

드래곤은 더 이상 이 광기와 혼돈의 땅에 존재하고 싶지 않다는 듯, 리시를 태운 채 높이 날아올랐다.

깊이 찢긴 리시의 옆구리에서 흐르는 피가 드래곤의 머리를 적셨다.

드래곤의 눈앞이 붉게 젖어 들어갈수록, 드래곤의 가슴에 휘몰아치는 분노의 색이 짙어져 증오로 바뀌었다.

모조리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드래곤은 생각했다.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힌 저 비루한 인간들 따위, 전부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좋겠다.

버러지 같은 것들. 더러운 것들. 지독한 것들.

토미는 몰랐지만, 세계수의 지팡이가 토미에게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지팡이에서 퍼져나온 강렬한 원념이 거대한 드래곤의 뇌를 멋대로 주물렀다.

토미 자신도 몰랐던 강대한 드래곤의 힘이 심장 부근에서 뭉쳐져 날뛰었다.

토미는 알았다.

몸 안에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힘으로 수백 개의 화염구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이 도시를 뒤덮을 거대한 불덩어리를, 혹은 얼음덩어리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그리하여 저 악랄하고 지독한 인간 놈들을 모조리 지워버릴 수 있음을, 토미는 저절로 알 수 있었다.

진짜 재앙이 될 드래곤의 분노가 지상에 쏟아져 내리기 직전, 몹시도 작고 몹시도 따뜻한 것이 드래곤의 이마에 내려앉았다.

리시의 손이었다.

“토미, 나는 괜찮아.”

괜찮지 않다고, 토미는 생각했다.

리시가 이런 말을 하는 순간에도, 그녀의 피는 토미를 적시고 있었다.

“잘 봐. 잘 느껴봐, 토미. 지금 저들이 느끼는 건, 저들만의 감정이 아니야. 무언가가 저들을 지배하고 있어.”

토미는 그런 것 따위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토미의 눈에는 쓰러진 늑대가 비치고 있었다.

내 상냥하고 다정한 아저씨.

“저들은 그저 무섭고, 두렵고, 그래서 그걸 풀어야 할 대상이 필요할 뿐이야. 그리고 무언가가 그 감정을 연료 삼아서 불을 붙였어. 그래서 그래, 토미. 그냥 그뿐이야.”

토미는 언제나 리시의 음성을 듣는 게 좋았다.

그녀의 음성은 케이크처럼 달콤하니까.

그러나 지금은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토미, 저기, 저 아이를 봐. 저 아이가 널 증오하고 미워하는 것 같니?”

토미는 보고 싶지 않았지만, 리시가 가볍게 토미의 이마를 두드렸다.

그 손길을 무시할 수 없기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두려움에 차서 제 동생을 끌어안고 있는 작은 소년이 보였다.

“저기, 저 여자가 널 미워하는 것 같니?”

한 여인이 옆 사람과 싸우는 남편의 팔을 잡고 말리고 있었다.

세계수 지팡이의 증오가 공기를 짓누르는 순간에도, 그에 물들지 않은 사람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냥 다들 너무 배고프고 지쳤을 뿐이야, 토미……. 그냥…… 무섭잖아…… 응? 비가 내리지 않아서…… 내 아이가 죽으니까……. 내 가족이 죽으니까……. 나도 죽을 것 같으니까…… 그래서…… 다들 너무 무서워서…… 그래…… 토미…….”

리시의 음성이 점점 작아졌다.

토미야말로 무서웠다.

이 음성을 평생 듣지 못할까 봐서.

“토미…… 그러니까…… 괜찮아, 응……? 괜찮아…….”

토미는 평생 리시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저 아래에 있는 인간들을 증오하는 것보다, 리시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것이 우선이었다. 늘 그랬다.

토미는 그것을 위해 자신이 무얼 해야 하는지 알았다.

드래곤의 거대한 심장에 응축된 마나의 색이 변했다.

증오로 까맣게 물들던 마나가 서서히 옅어져, 리시의 머리카락 색깔을 닮은 연분홍 은빛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드래곤의 입이 서서히 벌어지며.

“우오오오오오오.”

지상의 인간들이 평생 기억할, 드래곤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우오오오오오.”

그 노래가 하늘을 울리고 땅을 적셨다.

군중 사이에 흐르던 악의에 찬 원념을 밀어냈다.

“우오오오오오오.”

뜨거운 열기를 식히고, 피비린내 나는 공기를 쓸어냈다.

넓게 퍼지는 노래에, 아직도 싸우던 자들마저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대지가 진동하고 하늘이 흐느끼며, 뜨겁게 빛나던 태양이 빛을 잃었다.

어둠이 드리웠으나, 불길한 어둠이 아니었다.

지금껏 구름 한 조각 없던 하늘을 먹구름이 가득 채웠다.

자글자글 끓던 공기 중에 서늘한 바람이 섞였다.

그 바람에 물 냄새가 난다는 걸 깨닫기 전.

툭- 투둑-

후두두둑-

비가 내렸다.

흉년이 끝났다.

(178) 아이리스는 눈을 떴다.

사람들은 전설에 등장하는 드래곤의 기적을 떠올렸다.

드래곤은 강대하여 한 나라를 멸망시킬 수도 있고, 지킬 수도 있는 힘을 갖고 있다고 했다.

화염을 떨어뜨려 한 도시를 괴멸시키는 드래곤이 있는가 하면, 비를 몰고 다니는 드래곤도 있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드래곤은 전설이자 기적의 생물이며, 때로는 신의 반려동물, 혹은 신의 대변자라 불린다는 점이었다.

크리드 2019년 태양의 날.

굶주림을 안고 가비자르 수도에 찾은 이들은, 기적을 눈에 담았다.

거대하고 아름다운 드래곤의 노랫소리와 함께, 영원히 멈춘 줄 알았던 비가 찾아와 대지를 적셨다.

챙-

챙그랑-

툭-

사람들의 손에 들려 있던 무기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렌트는 계속해서 세계수의 지팡이에 제 생명을 밀어 넣었지만, 기적에 마음이 빼앗긴 이들에게 오래 묵은 사념은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증오, 분노, 미움, 원망, 다툼, 싸움이 멈춘 후에도, 드래곤은 오랫동안 공중을 선회하며 노래를 불렀다.

이윽고 노래를 멈춘 드래곤은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드래곤은 단상 위, 쓰러진 검은 늑대 옆에 내려앉았다.

리시가 비틀거리며 드래곤에게서 내려오자, 드래곤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더니 어린 소년으로 바뀌었다.

소년은 리시에게 안겨 하염없이 울었다.

“응, 응. 잘했어, 토미. 정말로…….”

리시는 그리 말하며, 토미를 보듬어 안고 사람들을 돌아봤다.

리시의 눈동자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래도 수인이 신의 저주인가요?”

그녀의 음성은 언제나처럼 달콤했지만, 그렇기에 더욱 날카롭게 폐부를 찌르고 들어왔다.

이 순간 사람들의 눈에 비친 것은 기적의 드래곤도, 저주받은 수인도 아니었다.

그저 이 모든 상황이 몹시 두렵고 슬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에게 안겨 펑펑 우는 어린아이뿐이었다.

이반을 처리한 엘디는 도망치려는 하렌트를 붙잡아 죽였고, 와이번이 달려와 세계수 지팡이의 힘을 내리눌렀다.

제브론의 단도에 찔려 죽은 자들을, 여기저기에서 나타난 짐승들이 제압했다.

사람들은 그 짐승들이 수인이라는 걸 알았지만, 더는 징그러워하지도, 피하지도, 경멸 어린 시선을 던지지도 않았다.

리시는 토미를 잠시 떼어놓고, 검은 늑대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모아, 치유의 반지에 힘을 불어넣었다.

푸른 빛이 검은 늑대를 다정하게 감쌌다.

축 늘어졌던 육체가 꿈틀 움직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리시의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

땅도, 하늘도 없는 어둠이 덮쳐왔지만, 리시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담담하게 서 있었다.

약간은 아쉬웠고, 또 약간은 후회가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마지막으로 본 사람들의 눈빛은 더 이상 수인을 저주받았다고 여기지 않는 게 확실했다.

그러니 되었다.

리시는 그저 그것을 바랐을 뿐이다.

내 사랑하는 남편이, 소중한 사람들이, 토미가,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수인들이 배척받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더 살고 싶었다.

케이와 함께, 토미와 함께, 내 소중한 가족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가끔 말다툼도 하고 장난을 치기도 하며, 그렇게 살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너무 큰 욕심이라는 걸, 리시는 알았다.

세계는 리시를 죽이려 했고, 그 결과 대재앙이 평소보다 이르게 들이닥쳤다.

리시가 살린 이들을 모조리 죽이기 위해, 더불어 리시까지 죽이기 위해.

살아남았다 해도 죽음은 끊임없이 리시를 찾아왔을 것이다.

그러면 케이도, 리시의 소중한 사람들도, 리시를 보호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평생을 살아가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걸로 됐어.”

“정말?”

이제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는 놀랍지 않았다.

“응, 정말. 정말로 이제 됐어. 내가 가야 할 곳으로 보내줘.”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리시의 눈앞에 빛이 생겨났다.

그 빛은 전보다 조금 더 컸고, 조금 더 찬란했다.

빛이 점점 커지더니, 어느 순간 리시의 눈앞에는 토미 또래의 아이가 서 있었다.

온통 하얀 그 아이는 여자아이 같기도 했고, 남자아이 같기도 했다.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외모에, 리시는 이 아이가 지금껏 리시와 대화를 해온 빛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이는 리시를 보며 생긋 웃었다.

“엄살은.”

“엄살이라니?”

“아이리스. 넌 죽지 않았어. 고작해야 허리를 좀 베여서 피를 많이 흘린 것뿐이야. 지금 에르웰이 네 옆구리를 부여잡고 연고를 퍼부어대고 있어. 미네르바까지 달려오고 있으니, 네 상처는 곧 나을 거야.”

리시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지는 걸, 아이는 즐거운 듯 응시했다.

“그럼 내가 왜 여기에……?”

“너는 유물술사니까. 안녕을 고하게 해주려고 불렀어.”

“응?”

리시는 아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아이는 잠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가, 다른 주제를 꺼냈다.

“세계는 널 죽이기 위해 실수를 하나 했어.”

“실수?”

“하렌트 미어를 살렸지.”

“그게 무슨……?”

“지난 삶에서도 하렌트 미어는 세계수의 지팡이를 손에 넣게 돼. 여기까지는 똑같아. 아, 좀 걸을까?”

아이가 걷기 시작하자, 그 걸음걸음마다 꽃이 피었다.

빛나는 꽃은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리시는 꽃을 보며 걸었다.

“오래전에, 정말로 오래전에, 이 대륙에 이종족 말살 정책이 펼쳐졌지. 인간들은 인간이 아는 이종족을 무시무시하게 짓밟고 짓이겨서 결국 멸종시켰어. 고블린도, 오크도, 오거도, 드워프도, 그리고 엘프도 그때 모조리 죽었지. 세계수의 지팡이는, 엘프의 장로가 갖고 있던 지팡이야.”

아이가 손을 펼치자, 그 참혹한 광경이 펼쳐졌다.

인간의 군대와 맞서 싸우지만, 그 수를 이기지 못해 결국 쫓겨 도망치는 엘프들.

항복하겠다고 외치지만, 듣지 않고 잔혹하게 살해하는 인간들.

인간들의 무기와 마법에, 아직 힘이 없는 어린 엘프들마저 생을 잃었다.

“죽어가는 엘프들과 그런 엘프들을 보는 장로의 슬픔, 괴로움, 증오 같은 것들이 지팡이에 담겼어. 그래서 지팡이는 힘을 얻었지. 엘프는 원래 인간보다 강해서, 지팡이에 담긴 사념 역시 강했어. 오래전에 활동하던 유물술사가 그걸 느끼고 지팡이를 찾지 못할 곳에 감춰뒀는데, 하렌트가 그걸 찾아낸 거야.”

아이가 손을 내젓자, 죽어가는 엘프들의 영상이 사라지며 다른 영상이 나타났다.

하렌트였다.

하렌트는 죽어가고 있었다.

지금과는 다른 모습에, 리시가 미간을 좁혔다.

“지난 삶의 하렌트야. 지팡이의 힘이 너무 강해서, 저 지팡이를 얻고 얼마 되지 않아 영혼이 잠식당하고 뇌가 타버려서 죽게 되지. 딱 그뿐인 존재였어. 그런데 이번 삶에서, 세계는 널 죽이기 위해 널 살리지.”

아이가 걸음을 멈추고 리시를 돌아봤다.

“금기를 범한 거야. 네가 죽어야 할 사람을 살린 것처럼, 세계 역시 죽어야 할 사람을 살린 거야. 게다가 대재앙까지 앞당겼어. 인과율을 배반했고, 그 결과.”

짝-!

아이가 손바닥을 마주쳤다.

“끝났어.”

“뭐가?”

“죽음. 세계는 이제 널 죽이기 위해 멋대로 움직이지 못할 거야. 물론 앞으로 네가 또 죽어야 할 사람을 살리고 많은 걸 바꾸려고 한다면 다시 움직일 힘을 얻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너는 죽음에서 벗어났어, 아이리스.”

이 행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몰라서, 리시는 천천히 심호흡했다.

아이가 생긋 웃었다.

“내가 만들어낸 행운이 아니야, 아이리스. 네가 거머쥔 거야. 너는 드래곤을 살렸고, 드래곤은 모두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지. 이런 건 신도 못 해. 인간이 만들어낸 기적이야.”

리시의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흐르는 눈물이 닦지 않은 채로, 그녀는 중얼거렸다.

“인간이 만들어낸 기적…….”

“그래. 네가 해냈어, 리시. 축하해. 마지막으로 이 말을 해주고 싶어서 불렀어.”

“마지막……?”

아이가 다시 돌아서더니 걸음을 옮겼다.

리시도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중간계는 산 자의 세상이야.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 살아가야 하는데, 죽은 자의 사념이 끼어들어서 조금 복잡해졌어. 내버려둬도 좋을 것 같아서 내버려뒀는데, 이제 거둬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아이가 손을 들자 나타난 영상에, 수많은 물건이 스쳐 지나갔다.

그중에는 리시가 아는 물건도 있었다.

황금 술잔, 죽음의 검, 와일즈 지팡이…….

성유물이라 알려진 물건들이었다.

“성유물은 신이 두고 간 물건이라고 하는데, 아니야. 그저 죽은 자의 원념이 남아 있는 물건일 뿐이야. 저런 게 남아 있어서 좋을 게 없어. 죽은 자는 죽은 자의 세계에서, 산 자는 산 자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게 옳으니까. 인간의 문제는 인간들끼리 해결하는 게 옳은 것처럼.”

아이가 주먹을 쥐자, 영상 안에 스쳐 가던 물건들이 산산이 부서져 먼지처럼 흩어졌다.

“이제 너의 세상에 성유물은 없어. 너 역시 유물술사가 아니야. 너는 그냥 아이리스 그린이야.”

“그냥 아이리스 그린.”

가슴이 부풀었다.

그냥 아이리스 그린.

그것이야말로 리시가 간절히 원하던 것이었다.

유물술사도, 위틀로 공작가의 꽃도, 리시는 원치 않았다.

그저 아이리스 그린이 되고 싶었다.

“가비자르의 황제는 굶주린 자들을 농락했어. 지금이야 인간들 머릿속에는 드래곤의 기적이 가득 차 있을 테니 괜찮겠지만, 인간들은 그 일을 잊지 않을 거야. 그리고 너의 기적도 잊지 않겠지.”

아이가 다가와서 리시를 마주 보고 섰다.

허리 정도 오는 크기였던 아이가 점점 자라나 리시와 같은 크기가 되었다.

그녀, 혹은 그는 리시를 보며 말갛게 웃었다.

“이 세상은 네가 계획한 대로 바뀔 거야. 네가 상상했던 세상에서, 이번에는 평화롭게 살아가도록 해, 아이리스.”

그 모습이 서서히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리시는 이게 진짜 마지막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직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황급히 손을 뻗었지만, 만져지는 것이 없었다.

“고마워. 그동안, 정말, 나를 위해 해준 모든 것에, 진심으로 감사해. 정말로.”

그, 혹은 그녀는 그저 미소 지었다.

“그런데…… 그런데 넌 대체 누구야? 어떻게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거야? 어떻게 이 모든 행운이, 기적이 가능하게…….”

“먼 옛날, 인간은 가늠할 수도 없는 오랜 옛날, 에렌은 고독하고 외로워서 잠시 이 땅에 유희를 내려왔어.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인간들 사이에 섞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돌아갔지. 그때, 유독 사랑스럽던 아이에게 귀걸이를 주고 가. 아이는 자라서 자신의 아이에게, 그 자식은 또 자라서 자신의 아이에게 물려주지만, 시간이 흐르며 잊히게 되지.”

에렌.

신의 이름.

“그때, 에렌이 이 땅에서 사용하던 이름은 트리사였어.”

“……!”

“내가 유일한 성유물이야, 아이리스.”

그리고.

아이리스는 눈을 떴다.

(179) 아이리스 그린

  케이브란트는 눈을 떴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검은 늑대는 흠뻑 젖은 제 털을 잠깐 돌아본 후 몸을 일으켰다.

에르웰과 미네르바의 간호를 받는 리시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 창백하기는 해도 고른 숨을 쉬고 있었다.

미네르바는 케이가 일어난 걸 보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네 부인은 무사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서 안도했다.

심하게 다친 검은 고양이는 크리시나의 품에 안겨 있었다.

검은 늑대는 헐떡헐떡 숨이 넘어갈 것만 같은 검은 고양이에게 다가갔다.

늑대의 접근을 느낀 듯 고양이가 힘겹게 눈을 떴다.

황금빛 눈동자가 술렁 흔들렸다가 늑대에게 고정되었다.

“괜찮아요.”

쇳소리 같은 목소리에 가슴이 미어졌다.

“가봐요, 대장…….”

이런 와중에도 다른 걱정을 하는 고양이 때문에, 늑대는 눈물을 흘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광인처럼 고함을 치고 서로를 죽이던 사람들은, 기적처럼 내리는 비에 홀려 전부 고개를 들고 있었다.

늑대는 단상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거대한 검은 늑대의 움직임에 근처에 있던 몇몇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흠칫하긴 했지만, 전처럼 경악에 찬 시선을 보내지는 않았다.

늑대가 걷자, 사람들은 스르륵 물러나 길을 터주었다.

늑대는 무거운 발을 간신히 움직여 걷고, 또 걸었다.

길이 열리고 또 열려 도달한 곳에는, 이반이 있었다.

늑대는 이반의 몸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희망을 붙들고 냄새를 맡았지만, 이반에게서 전해지는 건 죽음의 냄새뿐이었다.

늑대는 이반의 곁에 얌전히 앉았다.

생각 없이 말을 내뱉어서 빈축을 사기는 해도, 사실은 정이 많던 부하의 주검 옆에 앉았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검은 늑대는 그렇게 하염없이 비를 맞으며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제 부하의 곁을 지켰다.

+++

비가 멈췄던 대륙에 다시 내리기 시작한 비는, 일주일 내내 대지를 적시다가 그쳤다.

죽어가던 대지가 새로운 생명을 얻었고, 바싹 마른 땅에서도 웅크리고 있던 씨앗이 싹을 틔웠다.

식량을 나눠주겠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였던 황제는, 태양의 날 그 단상 위에서 죽었다.

황제를 죽인 건, 검은 늑대도, 흑표범도 아니었다.

세계수의 지팡이 힘에 점령당한 황제의 호위기사였다.

사람들은 혼란 속에서도 사람을 구하기 위해 움직이던 수인들을 잊지 않았다.

황제를 짓눌렀던 흑표범이, 사사로운 복수를 하는 대신 제브론의 단도에 찔려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 시체를 제압하려 한 것을 기억했다.

그 장면을 보지 못했던 사람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엘레르보의 위팅크 기자가 그날의 상황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한 기사를 쓴 것이다.

[엘레론드 대륙에 내린 신의 저주를 거둔 것은 다름 아닌 수인이었다.]

그런 문장으로 시작된 기사는, 대재앙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굶주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한 그린 가문에 대해, 가비자르의 황제가 그린 가문에 품고 있던 질투심에 대해, 그 사적인 감정 때문에 벌인 일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구하려고 노력한 수인들에 대해, 그리고 드래곤의 기적에 관해 이야기했다.

신성국의 교황은 수인이 신의 저주를 받은 생물이 아니며, 그저 변신 재능을 가진 인간일 뿐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물론 일부에서는 반대의 목소리가 있었으나, 절대다수가 수인이 인간이라는 것을 받아들였기에 반대 의견은 약간의 빛도 보지 못한 채 무시당했다.

대재앙이 끝나면 언제나 그렇듯, 세상은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

리시가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케이의 얼굴이었다.

마침 케이가 리시의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회청빛 눈동자는 리시로 가득했다.

자신으로 가득한 그의 눈동자를 보자 가슴이 벅차올라, 리시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흐르는 눈물이 그의 입술을 적셨다.

그는 리시의 눈가와 볼에 공들여 입을 맞추고, 다시 리시와 시선을 맞췄다.

“잘 잤어, 리시?”

“응, 잘 잤어.”

“그래야 할 거야. 한 달이나 잤으니까.”

“뭐? 아얏!”

한 달이나 잤다는 말에 깜짝 놀라서 몸을 일으키다가, 그와 이마를 부딪쳤다.

그가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내 아내는 과격하기도 하지. 이렇게 강렬한 스킨십을 시도하다니.”

“케이, 내가 정말로 한 달이나 잠들어 있었어?”

“응. 영원히 안 깨어날까 봐 걱정했어.”

리시는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어지럼을 느끼고 비틀거렸다.

케이가 리시를 부축하며 말했다.

“아직 함부로 움직이지 마. 당신, 너무 오랫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들어 있었어. 살아 있는 게 용할 정도야.”

“어떻게 됐어, 케이? 다들 무사해? 클로이는? 토미는? 하렌트 미어는? 토미가 어떻게 거기에 왔던 거야? 황제는 어떻게 됐어?”

쉴 새 없이 질문을 퍼붓는 리시를 보며, 케이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쓸쓸한 슬픔이 묻어 있는 미소를 보자 심장이 내려앉았다.

“설마……. 설마 클로이가…… 아니면 토미가……?”

케이가 고개를 저었다.

“클로이도, 토미도 무사해. 하렌트 미어는 죽었어. 그리고…… 이반도 죽었지.”

리시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리시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가 방울져 떨어졌다.

“클로이 얘기로는 협곡에서 전투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하렌트랑 마주쳤대. 그때, 클로이는 잡히고, 체서와 이반은 제브론의 단도에 찔렸다더군.”

“……그렇게 오래전에.”

철창에 갇혀 있던 클로이의 끔찍한 몰골이 떠올라서 가슴이 아렸다.

“치료는? 클로이는 이제 괜찮은 거야?”

케이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오랜 시간 고문을 당했어. 미네르바가 힘써주고 있기는 한데, 다리 한쪽은 평생 못 쓸지도 모른다고 하더군.”

“그럼 내가…….”

치유의 반지로 클로이를 치료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리시는 치유의 반지를 끼고 있던 왼손 검지를 확인했다.

반지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으나,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빛, 아이, 그, 혹은 그녀, 아니면 신, 트리사가 보여준 영상에서, 성유물은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지만, 정말로 그렇게 된 건 아닌 듯했다.

그저 성유물 안에 담긴 힘이 부서져 먼지가 되어 사라졌을 뿐.

그래도 혹시, 어쩌면 하는 마음에 슬며시 힘을 불어 넣어보려 했지만, 지금껏 리시의 안에서 고요히 흐르던 유물술사의 힘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케이는 리시의 표정만으로도 그녀가 왜 이러는지 눈치챈 듯, 리시의 손을 잡았다.

“성유물들이 힘을 잃었어. 당신도 느낀 모양이군. 나중에 얘기하려고 했는데.”

“사실은…….”

리시는 자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 보고 들었던 것을, 케이에게 전했다.

“그래, 그게 옳겠지.”

이제 그는 성유물의 수호자라는 권한과 특혜를 모두 잃게 생겼는데도, 딱히 아쉬워 보이지는 않았다.

리시는 힘 잃은 치유의 반지를 몇 번이나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클로이에게 가봐야겠어.”

클로이는 케이, 리시와 같은 층의 방에 머물고 있었다.

상태가 급변할 수 있기에, 가까이에 두고 챙기고 싶은 케이의 마음이었다.

클로이가 머무는 방에 들어갔더니, 케이의 그림자들과 다른 수인들이 전부 그 방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제 친구가 오랫동안 받은 고통에 마음이 쓰여, 시간이 날 때마다 클로이에게 찾아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농담을 걸고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리시가 들어가자, 수인들이 전부 일어섰다.

그중에는 토미도 있었지만, 어느덧 한층 성숙해진 토미는 전처럼 “누님.”이라며 달려와 리시에게 안기지 않았다.

그저 다른 수인들처럼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을 뿐이다.

리시는 그들 사이로 걸어가, 클로이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 섰다.

리시는 클로이의 당차고 쾌활한 모습을 기억했다.

몇 달간, 아무도 모르게 하렌트에게 붙잡혀 고문을 당한 클로이에게서 빛이 사라졌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클로이는 여전히 당차고 쾌활한 눈빛을 간직하고 있었다.

“공작부인.”

클로이가 몸을 일으키려 하기에, 리시가 얼른 달려가 그녀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리시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걸, 클로이는 놀랍다는 듯 응시했다.

“미안해요, 클로이. 정말 미안해요.”

“예?”

“내가…….”

리시의 눈물이 클로이의 손등에 떨어졌다.

클로이의 손등과 팔뚝에는 베이고 찔렸다가 아문 흉터가 불긋불긋하게 남아 있었다.

리시는 이런 흉터들이 클로이의 육체 곳곳에 남아 있으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치료해주고 싶은데…… 힘을 잃었어요. 치유의 반지로 치료해줄 수가 없어요. 많이 아플 텐데,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정말…… 미안해요.”

전에 없이 떨리는 리시의 음성에 진심이 가득 담겨 있다는 걸, 그 자리에 있는 수인들은 알았다.

그리하여 당혹스러웠다.

우리의 공작부인은, 어째서 저런 일로 미안해하시는 걸까?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클로이는, 알고 있었다.

리시가 케이와 결혼한 이후로 해온 그 모든 일이 수인의 자유를 위한 일이었음을, 케이에게 들어서 알게 되었다.

케이에게 듣지 않았더라도, 그들은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던 터였다.

때문에 그들은 작고 사랑스러운 공작부인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 위험에 맞서는 것이 두렵지도, 버겁지도 않았다.

희생이 있었다.

체서와 이반이 죽었다.

그러나 클로이는 살아남았다.

이렇게 말하면 체서와 이반에게 미안하지만, 고작 두 명이 죽었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 더 많은 희생을 각오하고 있었다.

이 정도의 희생으로 완벽하게 자유를 쟁취한 것은 전부 리시 덕인데, 리시는 클로이의 상처를 치료해주지 못해서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저 쓰고 버리는 패로 사용해도 서운하지 않았을 텐데, 고개 숙여 미안해하는 리시의 모습에 모두의 가슴이 촉촉하게 젖어 들어갔다.

클로이가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리시가 그러지 말라 했지만, 클로이는 침대에서 내려와 무사한 한쪽 발로 섰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리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와 동시에, 그 자리에 있던 수인 모두가 리시를 향해 한쪽 무릎을 굽혔다.

케이도 마찬가지였다.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진 사랑스럽고 존귀한 공작부인을 향해, 수인들은 고개를 숙였다.   클로이가 허리를 굽혀 리시의 발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공작부인께서 저희를 위해 해주신 이 모든 것들을,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세계는 변해갈 것이다.

대재앙을 내렸을 때, 황족도, 왕족도, 귀족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제 서서히 귀족의 시대는 저물고 능력 있는 자들의 시대가 올 터였다.

마법이 사라져가는 것처럼, 성유물 역시 사라졌다.

신에 대한 믿음도, 신성국과 교황청의 힘도 조금씩 약화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그 자리에 있는 수인들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린 가문에 꽃이 피었다.

그 꽃은 황무지처럼 쓸쓸했던 짐승들의 세계를 꽃으로 뒤덮었다.

꽃에 삼켜진 짐승의 세계는 눈이 시릴 만큼 찬란하고 아름답게 빛났다.

수인들에게는 그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였기에, 자신들의 세계에 핀 작고도 사랑스러운 꽃 한 송이가 더없이 귀하고 소중했다.

아이리스는 몰랐지만, 그 자리에 있는 수인들은 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아이리스가 우리의 세계를 찬란하게 만들어주었으니, 우리도 아이리스의 세계가 찬란해질 때까지 그 곁을 지킬 거라고.

<꽃이 삼킨 짐승_본편 완결>

(180) 외전 ; 게으른 공작 부인의 나날 (1)

비가 내리지 않은 건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회복하기까지는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재앙의 시기에 소중한 사람을 잃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상처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그나마 모두를 경이롭게 한 드래곤의 기적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 기적에 관해 이야기하며 버텨나가고 있었다.

“평화롭네요. 그때의 가뭄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예요.”

이제 황후가 된 이트리아는, 황제 이오벳과 오랜만에 정원에 나와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동안은 성나고 혼란에 빠진 민심을 안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어서 얼굴을 볼 시간이 거의 없었다.

선대 황제는 전 세계가 혼란스러울 때에 사사로운 감정으로 전쟁을 일으키려 하고, 그린 가문을 욕보이려 하다가 성유물에 정신이 흐트러진 호위 기사의 검에 죽었다.

그 아들인 이오벳이 황제 자리에 앉는 것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지만, 이오벳이 선대 황제의 만행을 막으려 하다가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은 결국 이오벳을 황제로 받아들였다.

드래곤의 기적이 불러온 비는 바싹 마른 대지를 흠뻑 적셔주려는 듯, 한동안 꾸준히 내리다가 그치기를 반복했다.

그리하여 작년에는 풍작이었다.

이오벳은 세금을 줄여서 농민들에게 먹고살 길을 열어주었고, 또 해가 바뀐 2021년 4월 가비자르 제국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대기근 발표로부터 2년이 지난 날이었다.

“그린 공작부인이 아니었다면 더 끔찍했겠죠. 가뭄은 고작 1년도 안 되게 이어졌을 뿐인데도 다들 그렇게 혼란에 빠질 줄이야…….”

이오벳은 그 혼란의 일부분이 자신의 아버지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어두운 표정으로 한숨을 삼켰다.

선대 황제가 그런 짓을 했는데도, 케이와 리시는 이오벳을 변함없이 대해주었다.

“아무래도 전 세계에 비가 멈췄으니까요. 평범한 흉년과는 달랐었죠. 그린 가문이 정말 큰일을 했어요. 흉년이 얼마나 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창고를 여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전염병 때도 그렇고, 그린 공작부인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이트리아는 여전히 리시에게 푹 빠져 있었다.

이제 성유물이 힘을 잃고, 리시에게는 유물술사의 힘이 남아 있지 않은데도 그랬다.

“맞아요, 정말 대단한 사람이죠.”

“토미도 그린 공작부인이 구해서 데려온 거라고 하더라고요.”

“아, 토미.”

토미의 이름이 나오자 이오벳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이오벳은 몇 개월 전 그린 령에 방문했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2019년 태양의 날에 가비자르의 수도에서 있었던 드래곤의 기적의 주인공 토미.

비를 불러와서 세계를 구한 토미는 엘레론드 대륙의 영웅이 되었다.

전설로만 전해진 드래곤 수인, 거기에 비를 불러올 만한 능력도 지닌 데다가, 심지어 토미는 귀엽게 생기기까지 했다. 대스타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세계가 좀 안정되기 시작하자마자 온갖 신문사의 기자들이 토미를 취재하기 위해 그린 령을 방문했고, 귀족과 평민들이 토미의 얼굴 한번 보기 위해 그린 저택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그린 저택을 벗어나 그린 가 가솔들 외의 사람을 만나본 적이 별로 없는 토미에게는, 그 모든 관심이 그리 기껍지 않은 게 당연했다.

이오벳과 이트리아가 그린 저택에 방문했을 때, 토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저택에 숨어 있느라 초췌해져 있었다.

-“토미, 그대가 이 세계를 위해 보여준 기적에 감사를 표하고 싶은데, 갖고 싶은 것이 있는가?”

이오벳의 질문에, 토미는 퀭한 눈으로 대답했다.

-“저 밖에 어슬렁거리는 사람들 좀 전부 쫓아내 주세요. 그거면 됩니다.”

이오벳은 그렇게 해주었지만, 아마 지금쯤 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을 것이다.

이트리아는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 날이 참 좋네요. 지금 그린 공작부인은 뭘 하고 있을까요?”

 

+++

베개 위에 연한 분홍색이 섞인 머리칼이 화사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마치 베개를 수놓은 꽃처럼.

두꺼운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햇빛이 닿은 머리칼은 은색으로 빛났다.

해가 중천에 떴지만, 리시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을 시작할 때, 리시는 결심했다. 그럴 준비가 된다면 게으르게 살겠다고.

대재앙 이후, 리시에게 문제가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이제 그 결심을 충실히 이행하는 중이다.

잠결에 두툼한 이불을 끌어 올리다가 복슬복슬한 것이 손에 닿아서 눈을 떴다.

그랬더니 발라당 뒤집혀서 배를 드러내고 자는 검은 늑대가 눈에 들어왔다.

리시는 늑대의 배 위에 살짝 손을 얹었다.

게으르게 지내는 건 케이도 마찬가지였다.

태어날 때부터 수인이었던 케이는, 자신이 세상에서 배척받는 존재라는 걸 알게 된 후 그 평가를 바꾸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이제 수인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은 그저 ‘수인도 인간이야. 받아들여 줘야지.’ 정도가 아니라, ‘수인이라니, 대단해!’로 바뀌었다.

이제 케이의 삶에서 문제가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크르르- 크르르르-

늑대에게서 나는 나직한 울림에, 리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늑대가 깊이 잠들었을 때 가끔씩 내는 코 고는 소리는, 인간일 때와 달랐다.

‘귀여워.’

케이를 깨우고 싶지 않아서 살짝 손만 올려놓고 다시 잘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북슬북슬하고 보들보들하고 크르르거리며 귀엽게 코 고는 생물이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잠을 자?

리시는 꼬물꼬물 움직여 늑대의 털에 얼굴을 파묻었다.

기척을 느낀 늑대가 크릉, 하더니 몸을 요리조리 비틀었다.

귀여워 죽겠다.

‘아, 진짜. 귀여워 죽겠어. 어떡하지?’

늑대의 배를 문질문질해주며 그 털의 보드라움을 충분히 느끼고 있는데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시가 늑대의 배를 마구 문지르자, 허공을 향해 뒷다리를 쭉 뻗었던 늑대가 실눈을 뜨고 제 몸에 달라붙어 있는 작은 여인을 돌아봤다.

“리시. 내 털을 다 뜯어낼 셈이야?”

“흐응, 너무 귀여워. 귀여워 죽겠어, 케이. 아, 보드라워. 따뜻해. 앞발 큰 것 봐. 느낌이 정말 좋아. 어떻게 이렇게 귀엽지? 아, 예뻐.”

리시가 늑대의 털에 얼굴을 문지르며 칭찬을 쏟아냈다.

케이는 지금 자신이 늑대의 모습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모습이었다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게 고스란히 드러났을 테니까.

모든 것을 끝낸 리시는 전보다 훨씬 달콤해졌다.

이렇게까지 달콤해질 수 있는 걸 쭉 참아왔다는 듯이, 애정과 애교를 아낌없이 쏟아냈다.

“예쁜 건 당신이지.”

“아니야, 당신이 더 예뻐. 아, 특히 이 털. 여기 배 부분의 털이 정말 좋아.”

리시는 아예 늑대의 몸에 올라탈 기세였다.

꼬물꼬물, 쓰담쓰담, 움직이는 리시 때문에 아침부터 케이의 몸이 뜨겁게 달궈졌다.

리시가 완전히 케이의 배 위로 올라왔을 때, 케이는 인간으로 모습으로 돌아왔다.

늑대의 가슴 털에 얼굴을 문지르고 있던 리시는, 볼에 닿는 감촉이 맨살로 변하자 실망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눈썹 끝을 살짝 내린 제 아내를 보며, 케이는 미간을 좁히고 짐짓 서운한 척 말했다.

“리시, 이러기야? 늑대일 때만 예뻐해주면, 나 삐쳐.”

“아, 맞아. 내 남편은 삐돌이지. 깜빡했네.”

“그래, 난 삐돌이니까 내가 인간일 때도 좀 예뻐해달라고.”

케이가 리시의 옆구리를 살짝 간질이며 투덜거렸다.

리시가 까르르 웃으며 몸을 비틀더니, 케이의 배 위에 앉은 채 상체를 일으켰다.

“아하하, 알겠어, 알겠어. 음, 어디 보자, 우리 남편. 요기 눈썹도 예쁘고.”

리시의 검지가 케이의 눈썹을 살며시 문지르고 지나갔다.

“눈이 갸름하고 긴 것도 예쁘고, 이 안에 담긴 회청색 눈동자도 예쁘고, 아, 코도 진짜 예쁘지. 어쩜 이렇게 오뚝한지. 음, 입술도 예쁘네. 안 되겠다. 입술은 너무 예뻐서 뽀뽀 좀 해줘야지.”

쪽,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떼려는데, 커다란 손이 리시의 뒤통수를 잡아서 고정시켰다.

이미 뜨거워진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작은 입술을 단숨에 삼켰다.

뭉근하게 눌리다가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의 향기가 밀려 들어왔다.

리시의 눈이 자연스럽게 감기며, 헤집듯 다급히 움직이는 그를 받아들였다.

그의 손가락이 리시의 등을 길게 그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등에서 둔부로 이어지는 굴곡에서 머무르던 손가락이 더 아래로 내려가자, 리시의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읍…….”

리시가 입술을 떼려 했지만, 그의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 번 더 몸에 힘을 주자, 그가 손에서 힘을 풀었다.

입술을 떼어낸 리시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침이야.”

“점심일걸?”

“어젯밤에도 늦게까지 했잖아.”

“뭘?”

순진한 척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가 얄미워서 간질여주려는데.

휘익-

케이가 순식간에 리시를 눕히고 그녀의 위로 올라왔다.

“케이!”

“당신이 시작했어.”

케이가 몸을 수그려 리시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내가 뭘…… 으음…… 시작해?”

항변하는 리시의 음성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케이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열꽃이 피어, 리시의 육체를 달큰하게 적셨다.

“아침부터 이리저리 만져대고 자극했잖아.”

“점심이라며……?”

“뭐든.”

“어젯밤에도…… 내내…… 하아…… 했으면서……”

“며칠이고 내내 할 수 있는데 참는 거야.”

열기가 뭉근하게 퍼지다가 한곳에서 뭉쳤다.

대화가 끊기고 숨과 숨이 얽혔다.

관능적인 소리가 침실을 채우고 점점 움직임이 커졌다.

그린 공작가의 아침, 아니, 점심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욕조 안에 따뜻한 물이 찰방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오렌지 몇 개가 물 위에 둥둥 떠 있다.

‘웬 오렌지지?’

리시는 오렌지를 하나 집어서 요리조리 돌려보다가, 다시 욕조 안에 퐁당 집어넣었다.

최근에 리시의 시녀들은 아침마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채워놓는다.

아침부터 뜨거운 시간을 보내는 공작부인의 몸을 염려해서일 것이다.

처음에는 그게 너무 민망했는데 이제는 익숙해졌다.

리시는 잠시 거울 앞에 서서 제 모습을 확인했다.

하얀 피부 여기저기에 케이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드레스를 입었을 때 드러나는 부분은 피해서 흔적을 남겼다.

처음에는 온몸에 남기는 바람에, “이러면 나, 몸을 꽁꽁 싸매고 다녀야 할 거야.”라고 말했더니, “오, 그거 좋은데. 당신 몸은 나만 보고 싶거든.”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리시를 생각해서인지, 그다음부터는 주의해서 남기는 케이가 귀여웠다.

“내 남편은 어디 하나 미운 구석이 없다니까.”

소리내서 중얼거리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하녀들이 목욕 시중을 들어주러 온 것이다.

이제는 하녀들의 목욕 시중을 받는 것도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이렇게 맨몸을 다 드러내 보이는 건 부끄럽다.

리시는 얼른 욕조에 들어가서 몸을 푹 파묻은 후에 대답했다.

“들어와요.”

욕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리시의 하녀가 아닌 에르웰이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잘 잤어요. 그런데 왜 에르웰이……?”

“아. 오랜만에 제가 하고 싶어서요.”

“그래요…….”

리시가 욕조에 몸을 더 깊이 파묻었다.

하녀들에게 몸을 보이는 건 익숙해졌지만, 에르웰에게는 아니다.

에르웰과 친한 만큼, 그녀를 그저 고용인으로만 생각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이리라.

그런 리시의 심정을 눈치챈 에르웰이 씩 웃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아이리스 님. 아이리스 님이랑 공작님이랑 금실 좋은 건 다들 아는 일인데요, 뭐.”

에르웰이 위로해주려고 한 말에, 리시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다들 알아요?”

“당연하죠. 모르는 게 이상하죠.”

“저런…….”

“뭐, 저희로서는 주인님과 주인마님의 사이가 좋은 게 좋은 일이니까요. 좀 더 힘내셔도 좋습니다!”

에르웰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람에, 리시는 웃음을 터뜨렸다.

“뭘 또 힘내래.”

에르웰이 웃으며 욕조로 다가왔다.

“오렌지 넣은 물은 어떠세요?”

“오렌지 향이 은은하게 풍겨서 좋네요. 그런데 웬 오렌지?”

“이번에 알츠레키 왕국에서 오렌지를 어마어마하게 보내줬대요. 아마 오늘 식사도 대부분 오렌지로 만든 걸 거예요.”

에르웰의 말대로였다.

(181) 외전 ; 게으른 공작부인의 나날 (2)

식당에 들어가자마자 오렌지 향이 확 풍겼다.

아직 음식이 차려진 것도 아닌데 그랬다.

리시와 케이가 식탁에 앉자, 하녀들이 음식을 내왔다.

오렌지와 꿀을 섞은 드레싱을 뿌린 샐러드, 얇게 저민 오렌지를 올린 수프, 으깬 생선 살과 채소를 오렌지로 감싼 식전 요리를 시작으로, 오렌지 소스를 올린 고기찜과 오렌지를 뿌려서 구운 생선구이 같은 것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묵묵히 식사하던 케이가 시종을 불러서 명했다.

“빌어먹을 오렌지들을 남김없이 가지고 나가서 사람들에게 나눠주도록 해.”

시종 역시 창고에 가득 쌓인 오렌지를 보며 한숨을 삼키던 차였기에, 케이의 명령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시종이 식당을 나가는 걸 지켜보며, 케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망할 놈의 오렌지…….”

리시는 키득거리며 하녀를 불러, 디저트는 오렌지를 넣지 않은 것으로 가져다 달라고 했다.

구운 빵을 썰어, 그 위에 꿀로 절인 견과류를 올린 디저트가 나왔다.

빵을 손으로 집어서 입에 넣고 씹으며, 케이가 말했다.

“이제 좀 살겠군.”

“그 정도였어? 난 오렌지 향 좋던데.”

“욕조에 오렌지를 듬뿍 넣어뒀더군.”

“아, 내 욕조에도.”

“몇 개나?”

“열 개 정도?”

“……내 욕조에 오렌지를 넣은 사람은 나단이야.”

그 말만으로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설마, 욕조가……?”

“그래. 오렌지로 아주 가득하던데. 물은 거의 없고.”

나단 성격에 오렌지 한 상자를 통째로 가져다가 들이부었을 것이다. 어쩌면 두 상자를 부었을 수도 있고.

오렌지로 넘치는 욕조를 보며 난감해했을 케이를 떠올리자 웃음이 나왔다.

리시가 웃는 모습을 보며 덩달아 웃던 케이가 물었다.

“그나저나 토미는 어떻게 할 거야?”

“아, 토미……. 음…… 당신 생각은 어때? 난 역시 보내는 게 좋을 것 같거든.”

“그 녀석이 10살쯤 됐나?”

“응, 아마도 그쯤 됐을 거야.”

리시와 케이는 토미의 정확한 나이를 알지 못했다.

토미 역시 자신이 태어난 날을 알지 못하기에, 그 정도의 나이가 됐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10살이면…… 슬슬 보내는 것도 좋긴 하겠지. 오히려 늦은 편일지도 몰라. 요새는 좀 더 일찍 보내는 추세니까.”

“역시 그렇지?”

“문제는 그 녀석이 과연 가려고 할 지인데……. 토미가 떠나려고 할까?”

“아마 싫다고 하겠지. 아직도 기자들이 찾아오고, 토미를 보려고 기웃거리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저택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어. 이 부분은 토미를 설득해야 할 것 같아. 토미도 이제 저택 밖의 세상을 알아야지.”

리시의 단호한 말에 케이가 싱긋 웃었다.

“당신은 이미 마음을 정했군. 토미를 아카데미에 보내기로.”

최근 두 사람은 토미를 아카데미에 보내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나이는 정해져 있지 않지만, 보통 8살에서 11살 사이에 입학해 초등부 3년, 중등부 3년의 과정을 거쳐 졸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등부도 있기는 하지만, 학구열에 불타서 교수나 학자가 되려는 게 아닌 이상 고등부 과정까지 남는 일은 거의 없었다.

토미가 그린 저택에 들어온 지도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영리한 토미는 3년간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혀, 이제는 야생 소년이었던 때의 어리숙한 면이 거의 사라졌다.

아직도 맨발로 다니며 나무타기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 외에는 평범한 또래 소년과 다를 게 없었다.

문제는 토미가 그린 가의 가솔을 제외하고는 사람을 만난 적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호랑이에게 키워진 토미에게 사람은 피해야 할 존재였고, 그 후 그린 저택에서 살다가 밖에 나가서 만나게 된 사람들은 수인을 저주하고 죽이려 하는 무리들이었다.

토미가 불러일으킨 기적으로 수인을 향한 시선이 달라졌고, 토미는 영웅보다도 귀한 대우를 받게 되었지만, 사람들을 향한 토미의 생각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토미가 평생 저택에 갇혀서 지내게 할 수는 없어.”

리시는 저택에 갇힌 삶이 어떤 건지 알았다.

지난 삶, 리시의 일생이 그랬으니까.

이 세상에는 아름답고 좋은 것이 넘치도록 많은데, 그런 것들을 전혀 모르고 지냈었다.

이번 삶에 와서야 리시가 보고 듣고 느끼는 그 많은 것들을, 토미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물론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받는 일도 생기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저 밖에 나가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것을 경험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래, 나도 같은 생각이야.”

리시는 시선을 돌려, 커다란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정원을 응시했다.

작년에는 비가 내리지 않아서 바싹 말라 있던 나무들이 올해는 수줍게 싹을 틔우고 있었다. 벌써 꽃을 피운 나무도 있었다.

넓고 아름다운 곳이지만, 이 밖으로 나가면 더 넓고 아름다운 것들이 즐비하다.

지금껏 토미가 이 저택 밖에서 보았던 것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토미의 세계가 한결 넓어지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시종이 와서 알렸다.

“피아몬도 대공께서 방문하셨습니다.”

+++

오랜만에 보는 미르는 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싱글싱글 웃는 얼굴과 화려한 차림새를 보면, 미르에게만큼은 대재앙도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한 것 같았다.

“아이리스 그린 공작부인. 케이브란트 그린 공작.”

미르가 팔을 크게 돌려 배에 대며, 과장된 동작으로 인사를 했다.

“자네는 정말 느닷없이 찾아오는군.”

“우리가 뭐, 서로 기별하고 찾아야 하는 사이인가.”

“그런 사이라고 보는데.”

“하하하. 자네는 여전히 수줍음이 많군.”

케이의 타박에도 미르는 여전히 유쾌하기만 했다.

오히려 미르의 보좌관인 레인게일이 얼굴을 붉히며 케이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미리 서신을 보냈어야 했는데, 서두르느라…….”

“됐어, 레인게일. 자네가 무슨 힘이 있겠어. 자네도 막으려고 노력했다는 것 정도는 알아.”

“우리 대공께서 공작님이 가진 배려심의 반만이라도 가지셨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너무 큰 희망을 갖지 마, 레인게일. 알잖아. 그런 일은 없을 거라는 거.”

“알지요. 아주 잘 압니다. 그래도 사람이란 게 말입니다. 때로 이뤄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희망이라는 걸 품게 되더라고요.”

케이가 레인게일의 고충을 위로해주는 동안 지루한 표정으로 하품을 하던 미르가, 레인게일에게 나가보라고 손짓했다.

레인게일은 걱정 가득한 눈으로 미르를 흘끔 쳐다보고는, 곧 고개를 숙인 후 응접실을 떠났다.

미르는 지팡이를 만지작거리며 리시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이리스. 공작부인이 이 세계를 위해 해준 일에 감사를 표하고 싶군요.”

“아니에요, 미르. 미르의 도움이 정말 컸어요.”

전염병 사태가 벌어졌을 때, 치료약을 개발하는 데에 미르도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대기근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르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린 가문은 더 힘들었을 것이다.

흉년이 끝난 후, 이런저런 문제들을 해결할 때도 미르가 뒤에서 많이 도와준 덕에, 예정보다 빠르게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안 그래도 한번 미르를 찾아가서 직접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미르가 먼저 찾아와줘서 고마웠다.

“내 도움이라 봐야 공작부인과 드래곤 소년이 한 일에 비하면 아주 미약하지요. 아까 들어오면서 드래곤 소년을 봤는데,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커졌더군요.”

“아이는 성장이 빠르니까요.”

“그렇죠. 아이는 성장이 빠르죠. 그렇다면 이것도 아십니까?”

“음? 어떤 거요?”

“사랑하는 자식은 여행을 보내라.”

생전 처음 듣는 말이라서, 리시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미르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문득 떠오르는 사실이 있어서, 리시도 웃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대공께서 이번에 여행사를 차렸지요. 굉장히 커다란 여객선을 다섯 척이나 사들이셨다고 들었어요.”

“역시 공작부인은 알고 계셨군요. 이 친구는 전혀 모르는 눈치인데.”

슬쩍 옆을 보니, 케이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여행사? 여객선을 다섯 척이나 샀다고?”

미르가 제 친구의 놀란 얼굴을 보며 즐거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케이. 이제 여행은 대세 상품이 될 테니까. 리시의 사업에서 힌트를 얻었지.”

“제 사업에서요?”

“그래요, 리시. 리시가 세계 곳곳에 아르헨의 찻집을 운영하고 있죠. 지점마다 나눠주는 티스푼 세트의 모양이 다르고. 전염병이랑 흉년 때문에 한동안 시들해졌었는데, 요새 와서 다시 그게 인기를 끌기 시작했어요.”

그건 리시도 알고 있었다.

귀부인과 영애들뿐 아니라, 이제는 평민 여성들까지도 아르헨의 찻집에서 일정 금액 이상을 쓰면 선물로 나눠주는 티스푼을 모아 한 세트를 만들어 액자나 상자에 진열해두는 것에 푹 빠졌다.

티스푼은 한 세트를 모으면 그림이 완성되는데, 기본적인 그림들 외에도 지역마다 그 지역의 특색을 담은 그림이 있어서, 그 세트를 모으려고 일부러 사람을 고용하기까지 했다.

“작년에 비가 적절하게 내려준 덕에 수확량도 늘었고, 다들 먹고살 만해지니까 숨통이 트였는지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늘었어요. 그중에 아르헨의 찻집 탐방 여행이 인기죠.”

거기까지는 리시도 몰랐다.

“그걸 보니, 여행사를 차리면 꽤 괜찮겠구나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리시에게도 언질을 해줄까 했는데…… 이거 하나쯤은 나 혼자 크게 키워도 되지 않겠습니까? 리시는 이미 부자니까.”

그렇게 말하며 화통하게 웃는 미르가 보기 좋았다.

멍하게 이야기를 듣던 케이가 물었다.

“그래서…… 여행사 이름이 뭔데? 설마 자네 이름을 붙인 건 아니겠지?”

“물론 그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드래곤 여행사지.”

“……뭐야, 그 촌스러운 이름은?”

“촌스럽다니. 요새는 드래곤이 대세 아닌가. 밖에 나가보게. 여기저기서 드래곤 얘기를 안 하는 곳이 없어. 술집에 들어가도, 식당에 들어가도 다들 드래곤 얘기뿐이라니까.”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쯧쯧.”

미르가 혀를 크게 차며 리시를 돌아봤다.

“역시 이 친구는 뭘 모르지 않습니까?”

리시도 드래곤 여행사라는 이름은 조금 촌스럽다고 생각했지만, 미르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리시의 반응에 미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곧 드래곤 여행사의 개업 기념으로 제일 큰 여객선 한 척을 타고 서쪽에 있는 섬으로 가벼운 여행을 가려고 하는데, 당연히 함께해주시겠지요?”

 

+++

그날 밤, 침실에서 케이는 투덜거렸다.

“당신은 미르한테 너무 약해.”

케이가 좋은 말로 여행을 거절하려고 했는데, 리시가 가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화장대 앞에 앉아서 머리를 빗던 리시는 거울로 케이를 보며 말했다.

“나랑 여행 잔뜩 다니기로 했으면서.”

“아…… 그거야 물론 그렇지. 다닐 거야. 다닐 건데…… 화이트랑 윈디를 타고도 어디든 다닐 수 있잖아.”

“응, 화이트랑 윈디를 타고도 다니고. 배를 타고도 다니고. 배를 타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타보고 싶어. 재미있을 것 같아. 에르웰이 그러는데 호화로운 여객선은 거의 저택 같다더라. 어마어마하게 넓고 근사하대. 카지노도 있고…… 아, 유진도 데려가면 좋아하겠다.”

꿈꾸듯 말하는 리시의 모습에, 케이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리시의 뒤로 와서, 리시가 손에 쥐고 있던 빗을 가져가 머리를 빗겨주었다.

연분홍 머리칼이 케이의 빗질에 부드럽게 흔들렸다.

케이는 종종 리시의 머리를 말려주기도 하고 빗겨주기도 했는데, 매번 기분이 좋았다.

남이 해주는 빗질이 이렇게 기분 좋은 거라는 것도, 그를 만나서야 알게 되었다.

“유진도, 다른 녀석들도 다 데려가자. 토미도 데려가고.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에 멀리 여행 한번 다녀오는 것도 좋겠지.”

“나는 미르에게 약하고, 당신은 나한테 약하네.”

케이가 콧등을 찡그리며 리시의 머리칼을 한 움큼 들어 올려 입을 맞췄다.

“나한테도 좀 약해져봐, 리시.”

“당신 앞에서는 푸딩만큼이나 약한걸.”

“그래서 그렇게 달콤한가?”

리시가 키득키득 웃자, 케이가 리시를 번쩍 안아 들었다.

리시는 그의 품에서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조각 같은 턱선과 미소를 머금은 입술을 보면, 아직도 가슴이 간질거린다.

리시는 검지로 그의 턱을 살살 어루만지며 말했다.

“케이, 내가 비밀 하나 가르쳐줄까?”

(182) 외전 ; 게으른 공작부인의 나날 (3)

 

“비밀?”

“응. 내가 미르에게 약한 이유.”

“뭐야, 비밀이라고 할 만큼 뭔가 있는 거였어?”

케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응, 뭔가 있어. 사실 평생 당신한테는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제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뭔데?”

“분위기 잡지 말고.”

케이가 리시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 그 옆에 앉았다.

“내용에 따라서.”

“귀여운 남자 같으니. 내가 딴 남자 얘기만 해도 질투 나?”

“알잖아. 질투 많은 놈인 거.”

케이가 툴툴거렸다.

리시는 그런 케이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그의 손을 깍지 껴서 잡았다.

“지난 삶에, 대공은 아주 음산하고 무서운 남자라는 평가를 받아.”

케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미르가 음산하고 무서운 남자라는 평가를 받는다고? 그 해맑은 바보가?”

“응. 그 해맑은 대공께서. 그래서 나도 이번 삶에서 처음 대공을 만났을 때 정말 놀랐어. 내가 아는 거랑 너무 다른 모습이었거든.”

“……미르가 음산하고 무서울 수 있다니. 상상도 못 하겠군.”

“그렇게 된 이유는 더 상상하기 힘들 거야.”

이런 이야기는 케이에게 하지 않으려 했다.

케이의 짐이 될까 봐서.

하지만 이제 모든 위험은 사라졌다.

리시는 케이를 향한 미르의 우정이 얼마나 깊고 짙은지 알려주고 싶었다.

지난 삶, 모두가 케이에게서 등을 돌렸을 때 그가 케이를 위해 무엇을 해주었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있지. 사실은 말이야. 지난 삶에서 이 시점에…… 당신에게는 가족이 없어.”

“……뭐?”

리시는 눈을 내리깔고 나직한 음성으로 설명했다.

지난 삶에서 케이의 가족들에게 벌어진 일을.

부모와 여동생의 죽음에 괴로워하던 엘디에게 벌어진 일을.

그리하여 케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를 천천히 설명했다.

케이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리시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 삶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불현듯, 리시와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슬리브 스톤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리시는 마치 슬리브 스톤을 아는 것 같은 반응을 보였었다.

‘그래서 내게 슬리브 스톤을 가져다 달라고 한 거였군. 잠을 제대로 자고 싶어서가 아니라…….’

케이는 새삼스럽게 가슴이 벅찼다.

대체 이 여자는 날 위해 얼마나 많은 걸 해주고, 얼마나 많은 것을 감당해온 걸까?

리시는 그런 부분에 대해 내색 한번 한 적이 없었다.

아마도 케이가 미안해하고, 고마워하고, 빚으로 여길까 봐 그런 것이리라.

‘리시가 없었다면…….’

지금쯤 부모님도, 엘디도, 젠도 곁에 없으리라는 걸 깨닫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리시, 정말로…….”

고마워, 라는 말은 리시의 검지에 막혔다.

그녀는 검지로 케이의 입술을 지그시 누르고 고개를 저었다.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거였으면 진작 얘기했을 거야, 케이.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얘기는 대공에 관한 얘기야.”

“아, 그랬지.”

가족들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 때문에, 미르에 대한 것을 새까맣게 잊었다.

“가족을 잃은 당신은 제정신이 아니게 돼. 광기에 젖어서 날뛰지. 대공은 그런 당신을 말리려다가 당신이랑 크게 싸워. 굉장히 크게 싸우고 완전히 관계가 틀어지거든.”

“……그랬군.”

“그 후에 대공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겨. 대기근 때 혼란을 틈타서 야만족이 대공의 영지에 침입하고, 그 전쟁에서 대공은 크게 다치지. 한쪽 눈을 잃고, 피부는 화상으로 문드러지고, 성대가 다쳐서 목소리도 변해.”

“……!”

“친구와 크게 싸운 데다가 전쟁으로 심하게 다치기까지 해서일까? 대공은 그때부터 미친 사람처럼 힘을 얻는 데에 열중하게 돼. 그러다가 금지된 마법에까지 손을 대지. 그래서 사람들이 대공을 피해. 가솔들도 대공을 떠나고…… 대공은 거의 고립된 상태에서 그저 금지 마법을 연구하며 시간을 보내거든.”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러, 그날이 온다.

“산티아노가 당신이 수인이라는 걸 밝히고, 가비자르의 황제는 산티아노와 손을 잡은 후 당신을 치려고 하지. 당신의 날개부터 꺾여. 당신의 부하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제이미가 크게 다친 당신을 데리고 도망쳐. 도망쳐서 도착한 곳이 대공의 저택이야.”

미르는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를, 수인이라서 죽임을 당해야 마땅한 친구를 받아준다.

“당신이랑 그렇게 싸운 후에 만난 적이 없는데도, 오히려 적대시하는 관계가 됐는데도, 그는 당신을 받아줘. 그리고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다가 죽지. 지난 삶의 밀란시스 피아몬도 대공은 반미치광이로 살다가, 친구를 위해 죽어, 케이.”

상상도 못 한 진실.

케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슴에 뭉클하게 차오르는 감정 때문에 눈가가 뜨거워졌다.

케이가 미르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케이는 수인이기에, 정체가 알려지면 죽임당하는 존재였기에, 가족과 수인이 아닌 상대에게는 마음을 열지 못했다.

미르에게도 그랬다.

미르는 그저 바보 같지만 착한 친구, 해맑고 귀찮지만 싫지는 않은 녀석, 그 정도일 뿐이었다.

우리의 우정 운운하는 미르의 말도, 대부분은 건성으로 받아들였다.

‘건성인 건 나뿐이었나?’

미르는 그러지 않았다.

리시가 바꾸지 않은 세상에서, 수인은 죽임당해 마땅한 저주받은 존재였고, 그런 수인을 감싸고 도와주는 사람 역시 같은 취급을 당했다.

모두가 등을 돌릴 상황에서, 미르는 가족과도 같은 정을 보여주었다.

케이의 손이 천천히 올라가 자신의 눈가를 가렸다.

“미르가…… 그랬군.”

“그래. 미르가 그랬어. 내가 미르에게 약한 이유를, 이제는 알겠지?”

리시가 깍지 낀 손에 힘을 줬다.

“미르는 좋은 친구야, 케이. 세상이 바뀌지 않았더라도, 미르는 당신에게 한결같은 우정을 보여줬을 거야.”

케이가 미르의 진심을 알고 감동에 벅차 있을 때, 미르는 토미와 정원에 앉아서 토미가 그저께 호숫가에서 마주친 새파란 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파랑새라……. 그걸 잡으면 구울 건가, 튀길 건가? 나는 튀기는 걸 추천하겠네.”

“……대공. 저는 그 새를 잡을 생각도 없고, 먹을 생각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저 그 새가 무슨 종류인지 알고 싶을 뿐이죠.”

“하하하하. 이런, 이런. 조크였네, 조크.”

“……아, 네.”

 

+++

드래곤 여행사의 개업 축하 선박 여행은 대륙 서쪽 끝에 있는 파레디아 항구에서 시작했다.

그린 가에서는 케이와 리시, 케이의 그림자들 네 명과 토미, 그리고 에르웰과 크리시나가 참가하기로 했다.

그 외에도 각 나라의 귀족과 왕족들이 올 거라고 들었다.

그린 저택에서부터 항구 도시인 파레디아까지는 마차를 타고 15일 정도가 걸렸다.

여행 사실을 알렸을 때부터 어두운 표정이었던 토미는, 곧 항구에 도착하는 지금까지도 입을 꾹 다문 채로 말이 없었다.   토미 또래의 소년이라면 배를 타고 섬으로 떠나는 모험에 대해 신나서 떠들어대기 마련인데, 너무 조용하니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토미와 같은 마차를 타고 가는 크리시나는 여러 가지로 마음이 쓰여서 에르웰에게 눈치를 줬지만, 에르웰은 마차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정경을 눈에 담으며 떠들어대기에 바빴다.

“시니, 저기 저 나무 보여? 저 나뭇잎 보면 끝이 뾰족하잖아. 이 지방 특색인데, 특히 저 나무에서 열리는 과일이 맛있어. 촉촉하고 달콤한데 눅진해서, 음…… 뭐라고 해야 하지? 아, 그래. 달콤한 치즈를 먹는 것 같아. 여기 다시 오게 되면 꼭 먹고 싶었던 건데, 마침 잘 됐다. 한 상자 사서 배에 타야지. 아니다, 피아몬도 대공께서 준비한 파티니까 저 과일 정도는 마련해뒀겠…… 아야! 시니, 왜 옆구리를 찌르고 지랄…….”

크리시나가 얼른 에르웰의 입을 막았다.

“애 앞에서 말투 좀 곱게 써.”

“우우…… 우!”

아무리 에르웰이라도 크리시나의 힘을 이기는 건 힘들었기에 몇 번이나 버둥거리다가 크리시나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는 너도 힘 좀 곱게 써. 애 앞에서.”

크리시나가 눈에 힘을 주고 눈동자를 굴려 토미를 향했다가, 다시 에르웰을 노려봤다.

에르웰은 ‘얘가 돌았나?’ 하는 표정으로 크리시나가 하는 꼴을 지켜보다가, 뒤늦게 크리시나의 의도를 눈치채고는 “아!” 하고, 토미를 돌아봤다.

“토미, 너, 쫄았구나?”

콰악-!

크리시나가 에르웰의 발을 꽉 밟았다.

“으아악! 아프잖아! 왜 이래?”

“너는, 애가……!”

“아니, 왜? 쫀 거 맞잖아. 아니야? 맞지?”

“그걸 굳이……!”

“토미가 무슨 유리구슬도 아니고, 뭘 그렇게 눈치를 보고 말을 골라? 애가 살면서 쓴소리도 좀 듣고, 쫄았다는 말도 좀 듣고, 그러면서 크는 거지. 안 그래, 토미?”

토미는 입술이 안 보일 만큼 꾹 다물었다.

크리시나가 저것 보라는 듯 에르웰을 향해 눈을 부라리자, 에르웰이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토미, 이해해. 무서울 수 있어. 쫄 수도 있고. 넌 아직 애고, 그럴 만한 나이야. 실컷 쫄아도 돼. 창피할 것도 없고, 미안할 것도 없는 일이야. 물론 아이리스 님은 네가 무척 즐거워할 줄 알고 여행에 데려오신 거겠지만, 뭐, 괜찮겠지. 네가 그렇게 어두운 표정으로 입 꾹 다물고 앉아 있겠다고 해서 나무라실 분은 아니잖아.”

토미의 입술에서 힘이 빠졌다.

에르웰은 계속해서 말했다.

“오히려 아이리스 님이 미안해하시겠지. 원치도 않는 여행에 데려와서 미안하다고. 그러니까 토미, 괜찮아. 실컷 쫄아. 실컷 침묵을 지키고, 실컷 울적해해. 그럴 수 있어.”

“에르웰…….”

크리시니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부르자, 에르웰이 어깨를 으쓱했다.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토미가 잘못한 게 아니야. 무서울 만해. 저택에서 사랑만 받으면서 지내다가, 밖에 나가자마자 만난 게 적의에 찬 시선들이었잖아. 거기에 클로이는 고문을 당했고, 공작님은 죽을 뻔했고…… 나 같아도 쫄겠어. 이건 토미 잘못이 아니야. 사람들을 만나는 게 무서운 게 당연하지.”

“나도 토미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해. 너의 그…….”

크리시나가 에르웰이 입술을 잡았다.

“가리지 않고 내뱉는 주둥이가 잘못이지!”

“우웃! 으…… 아프다고!”

“저는…….”

토미에게서 작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에르웰과 크리시나가 움직임을 멈췄다.

토미는 주먹 쥔 두 손을 허벅지에 바짝 붙이고, 그 손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말했다.

“무서운 게 아니에요. 그저…… 그냥…….”

“역겨워?”

차마 말하지 못하는 토미를 대신해서, 에르웰이 말했다.

토미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르웰이 “흐음…….” 하더니, 토미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토미, 이거 봐봐. 내 손등, 되게 뽀얗지?”

“……네.”

“그럼 요 아래 봐봐. 그림자가 져서 어둡지?”

“네.”

“뭐든 다 이래. 하얀 부분이 있고 까만 부분이 있지. 간혹 회색인 부분도 있고, 또 느닷없이 파랗거나 빨간 부분이 있기도 해.”

토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르웰이 씩 웃으며 검지로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토미, 넌 날 어떻게 생각해?”

“재미있고 좋은 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래? 정말?”

“네. 에르웰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굉장히요. 진심으로요.”

토미가 진지하게 말하자, 에르웰이 환하게 웃었다.

“우와, 그거 진짜 기쁘다. 그런데 토미, 그거 알아? 나 예전에 아카데미에 다닐 때, 날 싫어하는 사람이 엄청 많았어.”

“에르웰을요? 대체 누가 에르웰을 싫어해요? 그게 가능해요?”

“가능하더라고. 아주 많이들 싫어했거든. 내가 잘난 체하고 똑똑한 척하고 예의 바르지 못하고 나불거리고 조신하지 못하다고.”

“그게 왜……? 그건 아무 문제도 안 되잖아요. 게다가 에르웰은 정말 똑똑하고요.”

“그래,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게 문제가 돼. 나 같은 사람을 경멸하는 사람도 있지. 아마 그 사람들은 내가 역겨울 거야.”

“아니에요, 에르웰. 그럴 리 없어요. 저는 에르웰이 역겹지 않아요. 정말 좋아요.”

에르웰이 받았을지도 모르는 상처가 걱정되는 듯, 토미가 다급히 말했다.

그런 토미가 귀여워서, 에르웰은 한 손을 가슴 위에 올렸다.

“크리시나. 방금 들었어? 토미가, 날 좋아한대. 토미한테 반할 것 같아. 얘는 진짜 여자한테 인기 많을 거야.”

“그러게.”

(183) 외전 ; 게으른 공작부인의 나날 (4)

  에르웰이 크리시나에게 실없는 소리를 하는 동안에도, 토미는 걱정스럽게 에르웰을 지켜보고 있었다.

에르웰이 말했다.

“토미. 너는 날 좋아하고, 그린 가 사람들 대부분이 날 좋아하는데, 저 바깥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날 정말 싫어해. 여기 있는 크리시나도 마찬가지야.”

크리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근처에 살던 남작 부인이 날 정말 싫어했었지. 나만 보면 냄새가 난다는 둥, 머리 빈 깡통들이나 예술을 한다는 둥, 그런 소리를 지껄여댔다니까.”

“아니에요. 크리시나한테서는 정말 좋은 향기가 나요. 꽃향기보다 훨씬 더요.”

토미의 반박에 크리시나도 가슴에 손을 얹고 중얼거렸다.

“토미, 너는 나중에 크면 정말 인기가 많겠다…….”

“하여간.”

에르웰이 토미와 눈을 맞췄다.

“다 그래, 토미. 사람은 다 그래. 좋은 면이 있고, 나쁜 면이 있어. 날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날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 1년 전, 그 자리에서…… 그래, 정말 많은 사람이 수인을 증오했어. 하지만 그때의 상황을 이해해야 해.”

토미는 그때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았다.

모든 일이 끝난 후, 리시가 토미를 품에 안고 찬찬히 설명해줬었다.

-“토미, 그때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어.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래서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야.”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수인을 증오한 게 아니야. 그러지 않은 사람도 있었어. 지금 만나러 가는 피아몬도 대공만 해도, 언제나 공작님께 한결같은 태도를 보였지. 그런데 토미. 수인을 좋아한다고 해서 다 좋은 사람들인 건 아니야. 수인이라고 해서 다 좋은 사람인 것도 아니고.”

토미도 안다.

작년 이맘때, 그린 공작령 변두리 마을에서 강도질하던 사람을 잡았는데, 그 사람은 수인이었다.

원래 남의 것을 뺏으면서 살던 사람인데, 그린 공작이 수인을 잘 대우해준다는 말을 듣고 오던 길에 돈이 부족해져서 강도질을 했던 거라고 들었다.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나단이 중얼거렸던 말을 토미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했다.

-“그러고 보니, 10년 전에 저쪽에서 사람들 죽이고 다니던 살인마 말이야. 걔도 수인이었지. 걔가 갈색 말이었나? 아니다, 당나귀 수인이었지.”

절대 선도, 절대 악도 없다는 걸 알지만, 토미는 태양의 날에 그들을 덮쳤던 인간들의 악의를 깨끗이 잊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죽을 뻔했으면서도 사람들과 잘 지내는 클로이나 케이가 신기할 뿐이었다.

“저는…… 저는 그래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토미는 많이 성장했지만, 아직 10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였다.

리시와 케이가 자신을 많이 걱정하고, 자신에게 많은 사람을 만나게 해주고 싶어 한다는 걸 알지만, 그들의 마음에 보답할 수가 없어서 미안했다.

미안한 마음이 눈에서 방울져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크리시나가 손수건을 꺼내 토미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토미. 에르웰은 말투가 저래서 그렇지, 빈정거린 게 아니야. 정말이야. 무서운 게 당연해. 미안해할 이유는 없어. 다만, 아주 조금만. 정말 아주 조금만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 줬으면 하는 거야.”

“크리시나…… 저는…… 저는 아이리스 님이 원하시면…… 그러면 정말 사람들이랑…… 잘…… 잘 지내고 싶어요. 그런데…… 그런데 그날…… 그날 사람들이…… 나를…… 죽이려고…… 그래서 제레시엔 님도 다치고…….”

크리시나가 토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가,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꼭 안았다.

“그래, 맞아. 그때, 참 무서웠지. 나도 그 사람들이 참 미워. 정말 미워.”

“하지만…… 크리시나는…… 잘 지내잖아요…… 사람들이랑…….”

“응, 맞아. 어른이니까.”

“어른…….”

“그래야만 하는 것들이 있거든. 하지만 너는 아이니까, 아직 괜찮아.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고, 표현하고 싶은 대로 표현해도 돼. 다만 싫어도, 무서워도 아주 조금만 노력하면, 그러면 나중에 훨씬 즐겁고 재미있어질 거야. 우리 어른들은 그렇다는 걸 아니까, 네가 마음을 열지 않을까 봐 걱정되는 거고.”

토미는 자신이 왜 마음을 열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겠지만, 왜 그런 걱정을 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평생 그린 저택에서 그린 가문을 위해 일하며 살아가면 되는데, 왜 자꾸만 저택 밖의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려는 걸까?

하지만 토미는 리시와 케이를 좋아하기에, 에르웰과 크리시나를 믿기에, 그들이 원하는 대로 노력해보기로 했다.

+++

항구 도시인 파레디아에 들어서기 전부터 바다 냄새가 났다.

비릿한 짠 냄새가, 리시에게는 생소했다.

짠내가 진해질수록 리시의 표정이 기대감으로 물드는 것과 달리, 케이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하지만 리시가 말을 걸 때마다 케이도 쾌활하게 대꾸했기에, 리시는 케이가 울적해하는 걸 깨닫지 못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고 싶어. 항구 도시는 어떤 곳인지 구경도 좀 하고 싶고.”

리시의 제안에, 그들은 성문을 넘자마자 마차에서 내렸다.

여기까지 말을 타고 온 케이의 그림자들도 말에서 내리고, 토미와 에르웰, 크리시나도 마차에서 나왔다.

리시가 손을 내밀자 토미가 얼른 달려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토미, 표정이 좋아졌네. 이제 좀 괜찮아?”

토미의 안색이 어두운 걸 걱정한 건 리시도 마찬가지였다.

토미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이리스 님. 전 괜찮아요. 여행, 잘할게요.”

“너무 무리하지는 않아도 돼. 그냥 내 옆에만 있어줘. 나도 배 타는 건 처음이라서 좀 무섭고 떨리거든.”

“아이리스 님도 무서우세요?”

“당연히 무섭지. 그런데 네가 있어 주면 든든해서 덜 무서울 것 같아. 그래서 고집 좀 부렸어.”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아이리스 님을 지켜드릴게요.”

“정말 든든하다. 걱정 없이 배에 탈 수 있겠어. 안심이야, 케이. 그렇지?”

“그러게. 나도 바짝 긴장했었는데, 다행이네. 토미가 같이 있어 주다니.”

뒤에서 리시와 토미의 대화를 듣던 크리시나가 에르웰에게 속삭였다.

“아이리스 님이 너보다 애를 잘 다루시는 건 확실해.”

“아이리스 님이 뭔들 나보다 못하실까.”

“욕은 너보다 못하시는 게 확실해.”

“맞아. 그리고 너보다 밉상 짓도 못 하실걸, 크리시나.”

배가 출발하는 날짜는 이틀 후였기에, 항구 도시를 즐길 시간이 충분했다.

식당에서 파는 요리는 바닷가 식당답게 해산물로 만든 것이 많았다.

해산물이 듬뿍 들어간 수프는 저택에 있을 때도 몇 번 먹어봤지만, 신선한 해산물을 사용한 요리는 그 풍미부터 달랐다.

가장 특이한 요리는 전혀 익히지 않은 생선 살을 그대로 썰어서 접시에 담은 것이었는데, 리시가 포크를 대지 못하자 에르웰이 말했다.

“갓 잡은 생선이라서 굉장히 신선할 거예요. 하나도 비리지 않고요. 레몬즙을 이렇게 뿌려서, 소금을 살짝 올려 드시면 돼요.”

미심쩍지만, 지금껏 에르웰의 말을 들어서 나빴던 적이 없기에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어보았다.

레몬의 상큼한 향기에 섞여서 옅게 번지는 바다향. 조심히 씹어보자 탱글탱글한 식감이 느껴지고 짭짤한 맛과 단맛이 동시에 느껴졌다.

상상도 못 해본 맛의 향연에 놀라 눈이 동그래지는 리시를 보며, 에르웰이 씩 웃었다.

“맛있죠?”

“음.”

리시가 오물오물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케이가 중얼거렸다.

“내 아내는 저런 표정을 지으면 토끼 같고 사랑스럽지 않아?”   케이가 이러는 게 한두 번이 아니기에, 크리시나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네, 도대체 누가 수인인지 모르겠네요.”

“크리시나. 지금 빈정거린 것 같은데.”

“기분 탓이에요, 공작님. 아시잖아요. 빈정거리는 건 에르웰이나 하는 짓이라는 거.”

그 이후로 나온 요리도 하나 같이 맛이 좋았다.

같은 요리를 만들어도, 재료의 신선도에 따라서 맛이 이렇게까지 달라진다는 게 신기했다.

‘우리 영지민들도 이런 음식을 맛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재료를 이렇게 신선한 상태로 조달할 방법이 없을까?’

신선한 재료.

문득 흉년을 대비해서 마탑에 맡겼던 일이 떠올랐다.

거대 창고 안의 식재료를 상하지 않게,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는 마법 물품.

그때는 넓은 범위에 사용해야 하고, 장기간 보존이 가능해야 한다는 등의 조건이 붙어 있어서 실패했고, 그 후 갑자기 흉년이 시작되는 바람에 개발이 흐지부지되어 멈춰 있었다.

‘거의 완성 단계였었지. 넓은 범위는 안 되지만, 짐마차 하나 정도의 분량은 충분히 보존 가능할 거야.’

대륙 안쪽의 도시에서 먹을 수 있는 생선은 강이나 호수에서 잡은 민물고기나 건조해서 가져오는 바닷물고기가 대부분이었다.

신선한 바닷물고기는 민물고기와는 식감과 풍미부터 달랐다.

막 잡은 바닷물고기를 곧바로 보존해서 가져와 요리할 수 있다면, 상당한 인기를 끌 거라고 리시는 확신했다.

‘식당을 하나 차려야겠어.’

재앙이 끝나고 그때의 피해가 어느 정도 해소된 지금, 대륙은 ‘그린의 세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이번 재앙을 멈출 수 있었던 데에 그린 공작부인과 그녀가 키운 아이인 드래곤 수인의 힘이 컸다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포레스트 계열 상점을 드나들었다.

그렇게라도 그린 가문과 연을 맺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덕분에 리시가 주인으로 있는 포레스트 스파와 상회, 찻집이 대륙 곳곳에 성황리에 운영 중이었다.

하지만 리시는 그런 것도 오래 가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지금이야 대재앙의 충격이 가시지 않아서 그린 가문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 식지 않았지만, 다른 여러 일을 겪다 보면 대재앙은 먼 옛날의 꿈처럼 느껴지는 날이 올 터였다.

게으르게 살고는 싶지만, 현실에 안주할 생각은 없었다.

‘우선 그린령 수도와 가비자르, 스티무어의 대도시 몇 군데에서 동시 오픈해야지. 그전에 스파나 찻집에서 할인권 같은 걸 좀 나눠주고, 위팅크 기자에게 기사도 좀 써달라고 하고…….’

사업 구상을 하느라 식사하는 걸 잊었다.

포크를 든 채로 우두커니 앉아 있던 리시를 보다 못한 케이가 조용히 물었다.

“리시. 너무 맛있어서 기절했어?”

“아,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좀 하느라고.”

케이가 리시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살짝 걷어내서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식사 끝내고 나서 하고 싶은 거 있어?”

“음…….”

리시는 토미를 돌아봤다.

토미는 에르웰의 옆에서 묵묵히 식사하고 있었다.

처음에 리시와 살게 되었을 때만 해도 입이나 손으로 집어서 먹었었고, 그 후에 교육을 시켜도 포크로 먹는 걸 힘들어했었는데, 이제 토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매너 있는 태도로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 토미의 성장이 놀랍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마음 같아서야 토미가 하고 싶어 하는 일만 하게 해주고 싶지만, 그게 토미를 위한 일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만약 토미가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는 걸 그냥 놔뒀다면, 이렇게 여행을 와서 한자리에 앉아 식사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싫고 귀찮은 일을 하나씩 해내는 동안,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더 넓어진다는 걸 토미도 알게 되면 좋겠다.

“이 도시에 뭔가 재미있는 곳이 있을까? 우리 영지에서는 보기 힘든 것들.”

리시의 시선이 토미에게 향한 걸 눈치챈 케이는, 그녀가 어떤 재미를 원하는지 알았다.

케이가 씩 웃었다.

“당연히 있지. 나만 믿어. 깜짝 놀라게 해줄 테니까.”

(184) 외전 ; 게으른 공작부인의 나날 (5)

파레디아는 항구 도시이니만큼 거대한 조선소가 있었다.

커다란 선박을 만드는 기계들과 도구들, 까앙, 까앙, 울려 퍼지는 시끄러운 소리, 선박을 만들기 위한 거대 구조물.

조선소에 방문한 건 정답이었다.

여행 내내 흥미 없다는 듯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토미는 조선소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아, 거. 함부로 들어가면…….”

조선소 앞을 지키던 경비가 툴툴거리며 다가오다가, 리시 일행을 보고는 우뚝 멈췄다.

그의 눈동자가 케이의 검은 머리칼에서 리시의 연분홍 머리카락으로, 그 후에는 토미의 회녹색 머리카락으로 옮겨갔다.

그는 드래곤 기적의 날에 가비자르 수도에 있지 않았지만, 그 기적을 일으킨 사람들에 대해 들은 것이 있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경비가 후다닥 안으로 뛰어 들어가, 그린 공작의 방문을 알렸다.

원래 조선공들은 맡은 일이 있을 땐 한 나라의 왕이 방문해도 일이 끝날 때까지는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조선공들은 다들 손에 쥐고 있던 장비를 내려놓고, 조선소 입구를 향해 달렸다.

갑자기 뛰어 들어간 경비 때문에 어리둥절하게 기다리던 리시 일행은, 우르르 몰려오는 조선공들 때문에 긴장했다.

유진과 월라스의 손이 허리에 찬 검을 향해 스르륵 움직이고, 에르웰과 크리시나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리시의 앞을 막아섰다.

케이 역시 리시를 보호하기 위해 검으로 손을 뻗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몰려든 조선공들이 그들의 앞에서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것이다.

“대륙의 성녀님을 뵙습니다!”

“대륙의 성녀님을 뵙습니다!”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리시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리시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입술을 몇 번 달싹거리던 리시가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나는…… 성녀님이 아닌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가장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나이 지긋한 조선공이 고개를 들어 리시를 바라봤다.

“포레스트 치료소 덕분에, 제 아들이 목숨을 건졌습니다. 성녀님은 저희 가족의 은인이십니다.”

“구제소에서 나눠준 보리 덕분에 버틸 수 있었어요!”

“전염병 때 치료 약이 없었다면, 제 가족은 다 죽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성녀님!”

“성녀님 덕분에 제 동생이 살아남았어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증언에 귀가 울릴 지경이었다.

리시는 입술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아니에요, 나는 성녀가 아니랍니다.

그런 말을 해봐야 이들에게는 통하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에 말했다.

“다들 살아남아서 다행이에요. 이제 그만 일어나서 조선소를 구경하게 해주겠어요?”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아닙니다, 찰스보다는 제가 훨씬 꼼꼼하게 안내해드릴 수 있어요!”

안내인으로 다섯 명이나 붙었다.

덕분에 조선소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주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조선공들은 토미에게도 아주 큰 호감을 내보였다.

“참 잘생기셨습니다.”

“이야, 똘똘하시네요. 제 아들놈도 딱 토미 님 같으면 좋을 텐데요.”

“저는 이렇게 화가가 그린 드래곤 그림을 부적 삼아서 갖고 다닌답니다.”

토미는 조선공들의 칭찬보다는, 그들이 해주는 조선소와 배, 바다에 관한 설명이 더 마음에 드는 듯했지만, 말 많은 조선공들 덕분에 분위기가 좋아진 건 사실이었다.

조선소에서 즐겁게 지내고 나왔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문 후였다.

+++

파레디아에서 이틀간 좋은 시간을 보내고, 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이 밝았다.

약속 시각에 맞춰서 항구로 향하며, 리시가 물었다.

“배가 많을 텐데, 거기서 대공의 배를 어떻게 찾지?”

“미르는 눈에 띄는 녀석이니, 쉽게 찾을 수 있겠지.”

리시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수많은 선박이 들어와 있는 항구에서 밀란시스 피아몬도 대공의 배는 한 번에 찾을 수 있었다.

빨강과 파랑, 그리고 금색으로 장식한 거대한 여객선. 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옷을 입고 해사한 미소를 흩뿌리는 밀란시스 피아몬도 대공.

차마 가까이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우뚝 멈춰 있자, 미르가 환하게 웃으며 성큼성큼 다가갔다.

“도망치고 싶군.”

케이가 중얼거리는 말에, 리시는 반대할 수가 없었다.

지팡이를 빙글빙글 돌리며 다가온 미르가 케이를 향해 눈인사를 건넨 후, 리시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환영합니다, 공작부인.”

“초대 감사드려요, 대공.”

“다른 분들은 다 와 있으니 여러분만 타면 배가 출발할 겁니다. 어서 가죠.”

미르가 몸을 휙 돌려서 배를 향해 걸어갔지만, 아무도 그 뒤를 따라가지 않았다.

토미는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한 여객선에 타고 싶지 않다는 듯, 리시의 손을 꽉 잡았다.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다는 걸 눈치챈 미르가 뒤를 돌아봤다.

“왜 다들 안 따라오지?”

“미르, 대체 배를 저런 색으로 칠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케이의 타박은 미르에게 조금도 효과가 없었다.

“여기 있지.”

“……그렇군.”

“역시 저 색이 마음에 안 드는가?”

“마음에 안 들 걸 알면서도 저리 칠한 건가?”

“전혀 몰랐지. 그런데 이미 도착한 손님들이 다들 한 소리씩 하더군.”

“그랬겠지.”

신분 높은 대공에게 한소리 할 수밖에 없을 만큼, 여객선은 너무 심하게 찬란했다.

“공작부인도 영 마음에 안 듭니까?”

미르의 질문을 받은 리시는 곤란해졌다.

리시가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오므리자, 미르가 껄껄 웃었다.

“우리 대륙의 성녀님께서 마음에 안 드신다면 바꿔야지.”

미르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리시는 그 지팡이가 그저 멋으로 들고 다니는 지팡이인 줄로만 알았기에, 그다음에 벌어진 일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팡이 끝에서 가늘고 희미한 빛이 튀어나와 여객선을 향해 날아갔다.

빛이 여객선에 닿자, 마치 파도가 배에 부딪혔을 때처럼 부서지듯 퍼지며 여객선을 전부 감쌌다.

빛이 닿은 곳마다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광경을 보던 토미가 중얼거렸다.

“마법…… 같아요.”

미르가 토미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마법이지. 마법사거든.”

“아…….”

미르가 마법사라는 걸 몰랐던 토미는, 토미 또래의 아이들이 마법사를 만나면 으레 그렇듯 선망의 시선을 보냈다.

마법사가 사라져가는 시대가 아니었던 과거에도, 마법사들은 늘 소년소녀들에게 인기가 좋았었다.

여객선에서 벌어지는 마법에, 항구를 오가던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고 이제는 거의 볼 수 없는 마법을 구경했다.

이윽고 완전히 색이 바뀐 여객선이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동시에 탄식을 내뱉었다.

“아…….”

색이 완전히 바뀌기는 했어도 아까보다 나아진 점이 전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다.

번쩍거리는 진분홍과 녹색, 노란색으로 치장한 여객선.

아까보다 더 타고 싶지 않은 여객선의 모습에, 리시의 눈썹 끝이 아래로 내려가자 미르가 중얼거렸다.

“여인들의 취향은 정말로 모르겠군.”

“미르…… 이건 여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사람과 평범하지 않은 사람의 취향 문제야.”

“케이, 그린 공작부인은 평범한 여인이 아니네. 아주 위대하고 경이로운 여인이지.”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아니, 됐다.”

케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리시의 손을 잡았다.

“참을 수 있지?”

지금껏 수많은 고통을 감내해온 리시였지만, 이번만큼은 대답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난 삶 미르가 케이에게 보여준 우정과 이번 삶 그가 베푼 도움을 떠올리며, 리시는 마음을 다잡았다.

“물론.”

결심을 굳히고 여객선을 향해 걸어가려는데, 미르가 그 앞을 막았다.

“잠시만요, 리시. 조언을 좀 해줘요.”

“조언이요?”

“앞으로 여행사를 운영해야 하는데, 저 여객선에 타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아까 내 동생 가족들이 이딴 배에는 타고 싶지 않다면서 그냥 돌아가려는 걸 막느라 힘들었습니다.”

“아하.”

리시는 미르의 여객선을 쭉 훑어본 후에 말했다.

“우선 흰색 바탕으로.”

미르의 지팡이가 움직였다.

“난간은 파란색으로. 그리고 포인트는 연한 하늘색으로.”

마법의 빛이 여객선을 휘감았다가 사라지자, 딱 보기에도 시원해지는 여객선 한 척이 위용 있는 자태를 드러냈다.

멈춰서 지켜보던 구경꾼들이 “오오!” 하면서 박수를 치자, 미르가 중얼거렸다.

“사람들 취향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군.”

 

+++

여객선은 지하 3층, 지상 2층으로, 총 5층짜리 배였다.

리시 일행은 지하 2층에 있는 큰 선실로 안내를 받았다.

방이 여러 개로 나뉘어 있고, 중앙에 응접실이 있는 구조였다.

“와, 진짜 근사하긴 하네요.”

나단이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그러게. 리시가 색을 바꿔서 다행이야. 이 안도 그 원색의 향연이었다면 괴로울 뻔했어.”

케이가 흰색과 푸른색으로 바뀐 응접실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그들이 선실 구경을 끝내고 나서 짐을 풀고 있는데, 누군가 찾아왔다.

밀란시스 피아몬도 대공의 남동생인 웨스트 피아몬도 후작과 그의 가족이었다.

웨스트는 케이와 리시에게 정중하게 인사한 후, 리시가 답을 하기도 전에 말했다.

“또 하나. 여객선의 색상을 바꿔주신 점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서 이렇게 서둘러 찾아온 모양이다.

그때, 덜컹, 하고 배가 움직였다.

리시가 깜짝 놀라서 케이의 손을 붙잡는데, 웨스트가 말했다.

“오, 배가 출발하는 모양이군요. 나가보시겠습니까? 항구가 멀어지는 걸 구경하는 것도 꽤나 즐겁거든요.”

“좋아요.”

리시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지만, 케이는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리시가 돌아보자, 케이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좀 쉬고 싶군. 다녀와, 리시.”

케이의 미소가 평소와 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케이, 괜찮아? 어디 아파?”

“아니, 전혀.”

케이가 고개를 젓고는, 토미를 불렀다.

“토미, 난 피곤해서 좀 쉴 거니까…… 네가 뭘 해야 하는지 알지?”

토미가 리시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아이리스 님을 지킬게요.”

“그래. 그럼 난 안심하고 쉴게.”

리시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선실을 나갔다.

에르웰과 크리시나, 그리고 유진과 제이미, 월라스도 그 뒤를 따랐다.

선실 문이 닫히자, 케이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의 얼굴에 어둠이 내리깔리고, 청회색 눈동자에 고통이 깃들었다.

케이는 두 손을 거머쥐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응접실 구석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단이, 저벅저벅 걸어와 케이의 맞은편에 앉았다.

나단은 케이만큼이나 심각한 표정으로 케이를 응시하며 물었다.

“대장. 형수님한테 뱃멀미 심하다는 말, 안 하셨어요?”

 

+++

갑판에는 이번 여행에 초대받은 귀빈들이 대부분 나와 있었다.

리시가 아는 얼굴도, 모르는 얼굴도 있었지만, 그들은 전부 리시를 알았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다가와서 리시에게 인사를 건넸다.

한참 인사를 하는 동안, 항구는 어느새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다.

토미는 눈 앞에 펼쳐진 광활한 바다가 마음에 드는 듯 난간에 붙어서서 바다를 구경했지만, 리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선실을 나오면서 본 케이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파레디아에 도착한 후부터 케이가 가끔 좀 안 좋아 보였었어.’

파레디아에서 안 좋은 경험이라도 했던 걸까?

‘여행을 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었지. 혹시…… 배를 탔다가 사고가 난 적이 있나? 아니면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거나.’

생전 처음 하는 배 여행에 들떠서, 케이의 기분을 고려하지 못했다.

케이의 태도가 가끔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갔다.

반대 입장이었다면, 케이는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갑자기 미안해진 리시가 선실로 돌아가려는데, 제이미가 물었다.

“형수님, 벌써 들어가시게요?”

“케이가 걱정돼서요.”

리시의 말에 제이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제이미, 혹시…… 케이가 배와 관련해서 안 좋은 일이 있었나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파레디아에 온 후로…… 아니, 그전에 대공에게 여행 초대를 받았을 때부터 케이가 종종 안 좋은 표정을 지었거든요. 그땐 미처 헤아리지 못했는데, 아까 보니 뭔가 정말로 안 좋아 보여서…….”

“아.”

제이미가 싱긋 웃었다.

“내버려두셔도 돼요. 그런 허약한 늑대는.”

(185) 외전 ; 게으른 공작부인의 나날 (6)

허약한 늑대는 정말로 늑대 모습으로 돌아가 선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늑대 상태면 뱃멀미가 좀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늑대는 침대 위에서 뒤집어도 보고, 엎드려도 보고, 앉아도 보았지만, 속이 울렁거리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침대에서 뛰어 내려와 꾸엑, 꾸엑 토악질을 하는데.

벌컥-!

침실 문이 열리고 리시가 뛰어 들어오다가 그 광경을 보고 말았다.

“케이!”

케이는 언제나 그렇듯 여유 있게 웃어줄 수가 없었다.

“캐액. 꾸엑!”

거대한 늑대가 어깨를 옹송그리고 구역질하는 모습은, 인간일 때보다 더 안쓰럽고 안타까웠다.

리시는 발을 동동 구르며 늑대의 상태가 좀 나아지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토하는 걸 멈춘 늑대가 옆으로 풀썩 쓰러지자, 리시가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늑대의 발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니, 리시. 안 돼…… 그냥…… 만지면 안 돼…… 지금은 조금만 만져도…… 우욱…… 안 돼…….”

리시는 늑대의 앞발에 닿을 뻔한 손을 거두고,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늑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케이. 뱃멀미가 심하면 미리 말을 하지 그랬어?”

“아니…… 됐어. 괜찮아. 당신이 즐거우면…….”

“내가 즐거운 것보다는 당신이 괴로운 게 우선이지. 이렇게 고통스러워할 거면서…….”

“정말로…… 웁…… 후…… 죽겠군.”

검은 늑대는 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귀를 뒤로 한껏 젖히고 있었다.

리시는 케이의 뱃멀미를 멈추기 위해 뭐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그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

그때, 또 침실 문이 열리며 미르가 들어왔다.

“케이! 이 친구야, 뱃멀미를 하면 나한테 말을 했어야지!”

“……누가 내 뱃멀미에 대해 나불거리고 다니는 거지?”

“제이미 경이 무척이나 걱정하면서 말해줬다네.”

“제이미…….”

케이는 제이미가 무척이나 ‘걱정’하면서 말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아마 무척이나 ‘즐거워’하면서 말했겠지. 혹은 무척이나 ‘귀찮아’하면서 말했든가.

미르가 늑대를 사이에 두고 리시의 맞은편에 쭈그리고 앉았다.

“자네의 뱃멀미를 대신해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안타깝군.”

“됐으니…… 나가…….”

“친구가 고통스러워서 쓰러져 있는데 어떻게 그냥 나갈 수가 있겠는가. 옆을 지켜주기라도 해야지.”

“아니…… 됐어…… 필요 없어…… 나가…… 미르…….”

“케이, 내 우정은 그렇게 옅지 않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자네 곁을 지키겠네.”

케이는 제발 미르가 꺼져주었으면 했지만, 자신의 소망을 강력하게 주장할 힘이 없었다.

그때, 또 침실 문이 열렸다.

이번에 들어온 사람은 에르웰이었다.

“공작님! 멀미하신다면서요?”

제이미의 입은 얼마나 더 가벼워질 수 있는 걸까?

케이는 그냥 기절하고 싶었다.

에르웰이 다가와 미르의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공작님, 뱃멀미 심하세요?”

“……보면 알잖아, 에르웰 양…….”

구경꾼들에게 둘러싸인 늑대가 힘없이 말했다.

“그러게요. 심해 보이시네요. 왜 뱃멀미한다고 말씀 안 하셨어요? 진작 말씀해주시면 좋았을 텐데.”

“왜…… 진작 와서…… 구경하게……?”

“멀미가 그렇게 심하지는 않으신가 보네요. 비아냥거리실 힘이 남아 있으신 것 보면.”

“……하아.”

늑대가 귀를 늘어뜨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르웰이, 주머니에서 병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보라색 액체가 담겨 있었다.

“이거 10년 전에 저희 아버지랑 여행하다가 선장한테 얻은 건데요. 저는 쓸 일이 없어서 안 썼는데…… 음, 10년이나 지나긴 했지만 뭐, 썩은 것 같지는 않고. 드실래요?”

“레이디 에르웰. 케이가 고통스러워하긴 하지만 독을 마시고 자결할 정도는 아닐 겁니다.”

미르의 말에 에르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거 독 아니에요. 그 지방 선원들이 갖고 다니는 뱃멀미약이에요.”

뱃멀미약이라는 말에, 늑대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약효가 나오려면 12시간 정도는 있어야 하거든요. 진작 말씀하셨으면 어제 주무시기 전에 드시라고 했을 텐데…….”

늑대가 바들거리는 앞발을 들어 올렸다.

“에르웰 양…… 부디…….”

에르웰이 늑대의 커다란 앞발 위에 약병을 올려놨다.

늑대는 약병이 떨어질까 봐 앞발에 힘을 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 상태로…… 먹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아!”

에르웰이 다시 약병을 가져갔다가 리시에게 건넸다.

리시는 병뚜껑을 열고, 늑대의 입안에 약을 흘려 넣었다.

“어때, 케이? 좀 괜찮아?”

늑대는 대답 없이 눈을 감았다.

에르웰이 말했다.

“한숨 푹 주무시고 일어나면 나아지실 거예요.”

 

+++

리시는 케이가 깨어날 때까지 곁을 지키기로 했다.

그래서 토미는 월라스와 함께 다녔는데, 월라스를 알아본 사람들이 자꾸 말을 거는 통에 월라스와도 떨어지게 되었다.

‘나도 선실로 내려갈까?’

갑판 위는 재미있었다.

그린 영지와 다른 냄새가 섞인 바람도 좋았고, 간혹 난간에 내려앉았다가 다시 날아오르는 갈매기를 구경하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자꾸 말을 거는 사람들은 불편해서 피하고 싶었다.

‘공작님 괜찮아지실 때까지 나도 선실에 있어야겠다.’

토미가 계단으로 향하는데, 누군가 쪼르르 달려와서 토미의 앞을 막았다.

파란색 원피스를 입은 소녀로, 아까 선실에 찾아왔던 웨스트가 자기 딸이라고 소개했던 기억이 났다.

빨간 머리카락에, 빨간 눈동자를 가진 소녀는, 웨스트보다는 삼촌인 밀란시스와 더 닮아 보였다.

토미가 옆으로 피해서 가려고 하자, 소녀도 옆으로 옮겨서 또 토미의 앞을 막았다.

토미가 인상을 찌푸리자, 소녀가 말했다.

“토미지? 드래곤.”

“…….”

“나는 실리어야. 실리어 피아몬도. 아까 인사했는데, 기억 안 나니?”

“…….”

토미가 대답하지 않자 실리어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묶지 않은 빨간 단발머리가 고양이 같은 눈 위로 사르륵 흘러내렸다.

“너, 말 못 하니?”

“…….”

“흐음. 예절 교육을 안 받았나 보네.”

“…….”

“레이디가 말을 걸면 대답은 해야지.”

“실리어.”

부드러운 목소리가 실리어의 뒤에서 들려왔다.

그녀 뒤에서 비슷한 또래의 소녀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실리어가 고양이 같다면, 다가오는 소녀는 토끼 같은 분위기였다.

실리어 옆에 멈춘 소녀가 말했다.

“토미가 불편해하는데 그러지 마.”

“뭐야, 케이린. 너, 얘랑 인사했어?”

“아니.”

“그런데 왜 그렇게 친근하게 얘 이름을 불러?”

“아, 미안.”

케이린이라고 불린 소녀가 눈썹 끝을 늘어뜨렸다.

토미는 실리어의 태도 때문에 어이가 없었다.

자기도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서, 왜 남한테 뭐라고 하는 거지?

‘귀찮아.’

이유가 뭐든, 토미는 저들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실리어와 케이린을 피해가려는데, 실리어가 또 토미의 앞을 막았다.

“얘기 중에 어디 가?”

“얘기한 기억 없는데.”

“뭐야, 말 잘하네. 왜 지금까지 대답 안 했어?”

“비켜.”

“싫어. 나랑 얘기해. 난 드래곤은 처음 본다고.”

“드래곤을 처음 보는 건, 너뿐만이 아니야. 귀찮게 하지 말고 비켜.”

“너…… 우리 아빠가 누군지 몰라?”

“알아. 피아몬도 후작. 그래서?”

“넌 나한테 그렇게 함부로 대할 입장이 아니거든?”

“실리어…….”

케이린이 난처해하며 실리어의 팔을 잡았다.

실리어는 케이린의 손을 뿌리치며 토미에게 말했다.

“하지만 용서해줄게. 넌 위대한 드래곤이니까.”

“날 위대한 드래곤이라고 생각한다면 좀 비켜.”

“그건 못 하겠어. 나는 너랑 대화를…… 우와!”

재잘재잘 떠들던 실리어가 눈을 크게 떴다.

토미가 땅을 박차고 부웅 몸을 띄운 것이다.

토미는 실리어의 위를 나는 듯 점프해서 넘어갔다.

실리어가 몸을 휙 돌리자, 어느새 계단을 달려 내려가는 토미가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던 실리어의 양 볼이 붉게 물들었다.

미르만큼이나 장난기 가득한 붉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굉장해.”

실리어가 작은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드래곤, 진짜 굉장해.”

순수하게 감탄사를 터뜨리는 실리어 옆에서, 케이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저게 뭐가 굉장하다는 거야? 징그럽기만 하지…….’

태양의 날, 드래곤의 기적이 내린 후, 수인을 향한 사람들의 평가는 달라졌다.

하지만 모두가 달라진 건 아니었다.

사람들은, 특히 귀족들은 태어날 때부터 수인이 저주받은 생물이라는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그런 교육으로 인해 생긴 편견이, 기적 한 번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건 힘들었다.

케이린이 그랬다.

-“케이린. 그 드래곤 수인이 너랑 비슷한 또래라더구나. 이번에 대공에게 초대받은 여행에 그 아이도 온다니 마침 잘 됐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애와 친해져라. 알겠지?”

아버지인 페더 백작의 당부가 있었지만, 수인에게 가까이 가는 게 거리껴져서 망설이던 차였다.

그럴 때 어릴 적부터 친구로 지내온 실리어가 토미에게 접근하는 걸 보고 은근슬쩍 끼어든 건데.

‘건방진 놈.’

드래곤 소년은 생각보다 훨씬 건방지고 예의가 없었다.

‘평민 주제에…….’

드래곤 수인만 아니라면, 자기 앞에서 감히 고개도 못 들 신분인데, 격식을 차리기는커녕 인사 한번 제대로 안 하는 토미의 태도가 못마땅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얘는 왜 저렇게 야단이야? 드래곤이 뭐라고…….’

케이린은 아직도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서 있는 실리어가 한심했다.

신분으로 따지자면 실리어가 케이린보다도 한참 위인데, 그녀는 토미가 건방지게 구는 건 아무래도 좋은 것 같았다.

‘이런 애들 때문에 우리 귀족들에 대한 평가가 점점 낮아지는 거야.’

온통 마음에 들지 않는 것뿐이지만, 아버지의 명이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토미와 친해져야만 한다.

그래야 그린 가문과 페더 가문의 관계가 좋아질 테니까.

+++

케이가 눈을 떴을 때, 리시가 그의 품에 안겨서 잠들어 있었다.

에르웰이 준 약이 효과가 있었는지, 속이 울렁거리던 게 완전히 가라앉았다.

속이 멀쩡해지자 아까 자신이 보인 추태가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리시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뱃멀미 얘기를 안 했던 건데, 그 판단이 이런 결과를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다.

진작 에르웰과 상의해볼걸.

“케이, 일어났어? 속은 좀 어때?”

케이가 깬 걸 느낀 듯, 리시가 잠이 묻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괜찮아, 리시.”

“하아. 다행이다.”

리시가 케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진짜 걱정했어.”

“그냥 뱃멀미 좀 한 건데, 뭐.”

“그래도. 당신이 그렇게 아파하는 건 처음 봤으니까.”

“이제 당신이 아플 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좀 알겠어?”

“응. 정말 무서웠겠다.”

리시가 케이의 배를 살살 문질렀다.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케이가 물었다.

“계속 내 옆에 있었어?”

“응.”

“가서 좀 놀지. 여행, 기대했었잖아.”

“늑대가 귀를 축 늘어뜨리고 쓰러져 있는데, 당신이라면 놀 수 있겠어?”

“내 몰골이 그렇게 형편없었어? 내버려 두지 못할 만큼?”

“응, 굉장히. 그렇게 형편없는 몰골의 늑대는 처음이었어.”

케이가 작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몇 시나 됐지?”

“이제 다들 만찬을 즐기고 있을 거야. 당신은 좀 더 자야 하는 거 아냐?”

“아니, 이제 정말 괜찮아.”

사실 케이는 리시와 좀 더 침대에서 뒹굴고 싶었지만, 침대에서 내려와 리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여객선에서의 첫 만찬을 빠질 수는 없지.”

 

+++

여행 기념 첫 파티는 갑판에서 열렸다.

여기저기에 매단 라이트 마석에서 흘러나온 빛으로, 여객선 근처의 바닷물이 반짝반짝 빛을 내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여기저기 놓인 긴 테이블에 맛있는 요리가 차려져 있고, 악단이 바다와 어울리는 곡을 연주했다.

다들 웃는 낯으로 파티를 즐기고 있는데, 토미는 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아까부터 옆에 와서 떨어지지 않는 실리어 때문이었다.

“드래곤일 때는 어때? 인간의 모습일 때랑 느낌이 달라? 인간일 때도 마법을 쓸 수 있어? 아까 보니까 러셀 남작…… 제이미 님이랑 친하던데, 제이미 님은 어마어마하게 강하대. 너도 강해? 검 잘 사용해?”

토미가 대답하지 않는데도, 실리어는 지치지 않고 질문을 퍼부어댔다.

“실리어, 이리 와보겠니?”

다행히 피아몬도 후작 부인이 실리어를 지인들에게 소개해주기 위해 부른 덕에, 토미는 혼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 토미 옆에, 이번에는 케이린이 와서 앉았다.

“미안해, 토미. 실리어 때문에 많이 곤란하지?”

(186) 외전 ; 게으른 공작부인의 나날 (7)

토미는 너나 실리어나 귀찮은 건 마찬가지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귀족가의 영애들에게 예의를 차리지 않으면 리시가 곤란해하리라는 걸, 이 파티에 참석해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는 귀족 대부분이 리시에게 호의를 품고 있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리시나 케이, 그린 가문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하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나저나 그린 공작도 참 안 되지 않았어요?”

“그린 공작이 왜요? 요새 그린 가문 명성은 하늘을 찌르잖아요.”

“그런 명성이 1, 2년이나 가겠어요? 그래도 전에는 성유물의 수호자라서 명예라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저 장사치 가문이 된 거잖아요.”

“아니, 장사치라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사실이 그렇죠, 뭐. 게다가 포레스트가 그린 가문 건가요? 공작부인 거지. 공작부인이 돈줄을 꽉 잡고 있어서, 그린 공작이 자기 부인에게 꼼짝 못 하는 거잖아요.”

“하긴…… 오늘 공작님이 선실에서 나오지 않는 것도, 공작부인이 자기 남편을 다른 여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아서 그런다는 말이 있어요.”

토미는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케이 님은 아이리스 님이 너무 좋아서 자기 스스로 꼼짝 못 하는 거야!”라고 외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그린 공작은 공작부인을 너무, 아주 많이, 넘치도록 사랑해서 꼼짝 못 하는 겁니다, 오헤나 백작 부인.”

불쑥 들려오는 호탕한 목소리.

토미는 자기가 상상만 하다가 실제로 목소리를 낸 줄 알고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연회장 왼쪽의 테이블 근처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귀부인들 사이에, 언제부터인지 미르가 끼어 있었다.

“어, 어머나. 깜짝이야.”

“대공 전하. 왜 여기에…….”

뒷담화를 하던 귀부인들이 얼굴을 붉혔다.

미르가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린 공작이 안쓰러울 것도, 불쌍할 것도 없습니다. 그 녀석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영리하고 뛰어난 여자를 손에 넣었으니까요. 성유물의 수호자 같은 것보다는, 그린 공작부인과 평생 함께 살 수 있는 게 훨씬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요?”

귀부인들은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릴 뿐이었는데, 미르의 목소리는 연회장에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커서 모두가 그쪽을 돌아봤다.

주목을 받은 귀부인들이 어쩔 줄을 몰라하며 자리를 피할 궁리를 했다.

하지만 대공인 미르를 놔두고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안절부절못하며 서로 눈빛만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린 공작이 지금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는, 그 녀석이 무척이나 수줍음이 많아서…….”

“그린 공작 내외께서 입장하십니다!”

입구를 지키던 시종의 외침이, 미르의 말을 끊었다.

연회장 안이 일순 조용해졌다.

연회장의 문이 열리자, 모두가 내심 기다리던 그린 공작 부부가 입장했다.

진한 와인색 드레스를 입은 리시는, 케이의 팔에 살짝 얹고 우아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케이는 그런 리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아내를 응시하는 케이의 꿀 떨어지는 눈빛만 봐도, 그가 리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미르가 말한 ‘그린 공작은 그린 공작부인을 너무, 아주 많이, 넘치도록 사랑한다.’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게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모두가, 심지어 리시에 관한 뒷담화를 하던 귀족이나 귀부인들까지도 그들을 향해 경외의 시선을 보냈다.

세계를 구한 아이리스 그린.

“오, 케이! 수줍음을 이겨내고 파티에 와줘서 고맙네!”

미르가 언제나처럼 분위기를 깨뜨리며, 두 팔을 벌리고 케이에게 다가갔다.

케이가 슬며시 발을 움직여 미르의 포옹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발 나에 대한 유언비어 좀 퍼뜨리지 말아줄래?”

“하하하. 여전히 부끄러움이 많군. 대화의 중심이 되는 것이 그리 싫은가?”

케이는 미르를 노려봤지만, 미르는 이미 리시에게로 시선을 돌린 후였다.

“오늘 밤도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공작부인.”

“초대해주셔서 감사해요.”

“편하게 즐겨요, 리시. 혹시 부족한 점이 있다면 편하게 말해주고.”

케이와 리시의 등장에 연주를 멈췄던 악단이 다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리시는 다가온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토미를 찾았다.

토미는 연회장 한쪽 구석에 있는 소파에, 연갈색 머리칼의 소녀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친구라도 사귄 건가 싶었는데, 뚱한 표정을 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마음이 쓰여서 토미를 향해 손을 뻗자마자, 토미가 벌떡 일어나서 달려와 리시의 손을 잡았다.

“토미, 재미없어?”

토미가 고개를 저었다.

“재미있어요.”

“나랑 춤출까?”

“예? 춤이요?”

“댄스 수업도 받았었잖아. 교사가 그러는데, 네 댄스 실력이 굉장하다던걸.”

토미의 볼이 발그레 물들었다.

토미는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붕붕 저었다.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라니. 절대 싫다.   “아니요. 나중에요.”

“저런. 레이디의 댄스 요청을 거절하다니. 토미도 다 컸군.”

케이가 중얼거리는 말에, 토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여기는 저택이 아니라 많은 귀족이 모인 연회장이지.

저택에서처럼 자기 고집만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걸 깜빡했다.

레이디가 먼저 청한 춤을 거절하는 건, 그 레이디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었다.

리시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먼저 춤을 청했어야 옳았다.

토미는 리시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진 후, 예의를 차리며 말했다.

“그린 공작부인. 첫 곡을 저와 함께해주시겠어요?”

토미의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귀엽기도 하지.’라는 눈빛을 지었다.

리시가 웃음을 참으며 토미가 내민 손에 손을 얹으려다가, 케이를 돌아봤다.

“괜찮겠어요?”

“안 괜찮은데…… 이번에는 내가 참지, 뭐.”

그제야 리시가 토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어느새 부쩍 자란 토미의 손은, 이제 리시의 손과 비슷한 크기가 되어 있었다.

리시와 토미가 중앙의 무대로 향하자, 춤을 추던 사람들이 자리를 내주었다.

악단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후, 어린 소년에게 어울리는 빠르고 경쾌한 곡으로 바꿔 연주했다.

원래 몸놀림이 좋은 토미는 댄스 교습을 받을 때, 천재라는 평가를 얻을 정도로 빠르게 익혔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춤을 춰야 한다고 생각하니, 어깨가 뻣뻣해지고 다리 근육이 굳어서 잘 움직일 수가 없었다.

“토미, 나한테 집중해. 너랑 춤을 추는 건 저 사람들이 아니라 나잖아.”

리시의 부드러운 음성에 정신 차리고, 리시에게 집중하며 스텝을 밟았다.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여자와 가장 유명한 소년의 춤을, 사람들은 집중해서 지켜봤다.

“저 아이가…… 드래곤…….”

“듣자 하니, 그린 공작부인이 어디서 주워다 키운 거래요.”

“내가 먼저 발견해서 주웠으면 좋았을 텐데.”

“아휴, 귀여워라. 저 아이, 크면 정말 잘생겨질 것 같지 않아요?”

“그린 공작부인은 좋겠다. 드래곤이 저렇게 따라줘서.”

곡의 중간쯤 왔을 때부터, 사람들이 다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토미는 리시에게만 집중하려 했지만, 들려오는 소리를 완전히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불현듯 리시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미가 듣기로, 리시는 이보다 더한 수군거림을 들었었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담담하고 당당하게 지낼 수 있는 걸까?

“누님…… 아니, 아이리스 님.”

“음?”

“어떻게…… 저 목소리들을 무시하세요?”

“목소리? 아. 사람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나는 너처럼 귀가 좋지 못해서, 음악 소리만 들리는데.”

“들릴 때가 없어요?”

“들릴 때도 있지.”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도망치고 싶지.”

토미가 리시와 시선을 맞췄다.

리시는 이제 자신의 키를 거의 따라잡은 토미를 부드럽게 응시했다.

“늘 도망치고 싶었어. 그래서 도망만 쳤더니 내 세계에 아무도 없더라. 그걸 전부 남의 탓으로 돌렸는데, 알고 보니 도망만 쳤던 내 탓도 있더라고.”

토미는 리시가 지난 삶을 이야기한다는 걸 몰랐다.

그저 리시도 도망치고 싶었던 적이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도망치지 않았더니,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다 받아주는 사람이 생겼어.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 떠들어대든, 넌 뒤에서 내 욕을 하지 않을 거잖아.”

“당연하죠!”

“딱 한 사람만 있어도 되거든. 내가 무엇을 해도 내 편이 되어줄 사람, 딱 한 사람이면 되는데. 내가 도망치지 않았더니 더 많은 사람이 내 편이 되어주더라.”

곡이 끝나서 리시와 토미도 춤추는 걸 멈췄다.

리시는 토미의 손을 잡고 걸어가다가, 고용인이 들고 가는 접시 위에서 카나페를 하나 들어 토미의 입에 넣어주었다. 오물오물 씹는 토미를 보며, 리시가 싱긋 웃었다.

“저들이 무어라 하든, 나에게 너는 그냥 귀엽고 사랑스러운 토미야. 케이에게도, 에르웰과 크리시나도, 그리고 케이의 부하들도 다들 그렇게 생각할 거야.”

“……하지만…… 사람들이 아이리스 님에 대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하면 화가 치밀어요.”

“어머나. 내 걱정 때문에 그랬구나? 그럼 토미, 이렇게 하자.”

리시가 고개를 숙여 토미의 귀에 속삭였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욕하면 거기서는 꾹 참고 나한테 와. 그리고 나랑 둘이서 그 사람들 욕을 실컷 하자. 어때?”

토미는 리시가 뒤에서 남의 얘기를 하는 게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리시가 장난스럽게 웃는 눈빛을 보니, 아까보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토미 경. 이제 내가 부인과 춤출 기회를 주지 않겠어?”

어느새 다가온 케이가 토미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토미는 자신보다 한참 키가 큰 케이를 올려다봤다.

케이를 부인에게 꼼짝 못 하는 무능력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토미에게 케이는 거대한 산이었다.

토미는 케이가 수인들을 위해서 지금껏 해온 일에 대해, 다른 수인들에게 들었다.

토미가 아주 좋아하는 수인 동료들은, 케이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땅에 묻혀 사라졌을 생명들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 앞에서 젠체하지 않는 케이가, 토미는 저 높은 곳에 앉아 있는 황제나 왕보다 훨씬 위대해 보였다.

토미가 고개를 끄덕이고 리시의 손을 케이에게 넘겼다.

리시와 케이가 새로운 곡에 맞춰 춤을 추고, 다른 사람들도 짝지어 춤추기 시작했다.

소파에 앉아 케이와 리시를 지켜보는 토미의 귀에, 아까와 비슷하게 리시나 케이의 험담을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제 그건 토미의 마음을 괴롭게 만들지 못했다.

‘누가 그러는지 다 기억했다가 아이리스 님이랑 같이 욕해줘야지.’

다만 문제는.

“토미. 너 혹시 와인 마셔봤니? 나는 얼마 전에 아버지랑 같이 딱 한 잔 마셨거든. 난 조금도 취하지 않았어. 너는 어때? 술은 부모님에게 배워야 한다는데, 너는 공작님께 배우니? 아니면 공작부인께? 공작부인은 술 잘 마셔? 워낙 약해 보이셔서 술에도 약하실 것 같은데.”

옆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실리어만큼은 어떻게 감당해야 좋을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실리어, 토미가 불편해하잖아. 토미는 부모님이 안 계시는데, 그렇게 자꾸 부모님 얘기를 꺼내면 좀 그렇지 않을까?”

그나마 다행인 건, 케이린이 실리어 옆에 앉아서 실리어를 말려준다는 점이었지만.

‘왜 쟤가 더 싫지?’

토미는 실리어의 시끄러운 목소리보다, 케이린의 목소리를 듣는 게 더 싫었다.

그 이유가 실리어는 자연스럽게 그린 공작 부부를 토미의 부모로 인정했지만, 케이린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걸, 토미는 몰랐다.

(187) 외전 ; 게으른 공작부인의 나날 (8)

이름 없는 섬에 도착하기까지는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저기, 섬이 보이네요!”

목적지가 가까워지자, 사람들은 다들 갑판에 올라가서 자신들이 앞으로 일주일 동안 머물 섬을 구경했다.

멀리서 봐도 아름다울 것 같은 섬이었다.

넓은 백사장, 섬 중앙에 울창한 숲.

섬이 가까워지자 깨끗한 바닷물 아래로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니는 게 보였다.

잔교에 여객선을 세우고 다들 배에서 내렸다.

“어머, 아름다워라.”

“물이 정말로 에메랄드빛이네요.”

“와, 저기 물고기 좀 봐.”

“백사장 모래가 포슬포슬한 게 발바닥에 닿는 느낌이 참 좋군요.”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백사장 안쪽에는, 미르가 고용한 인부들이 미리 와서 만든 간이 숙소가 세워져 있었다.

간이 숙소에서 지낼 사람은 지내고, 그곳이 불편한 사람은 선실로 돌아가서 생활하면 된다고 했다.

미르의 보좌관인 레인게일이 섬에서의 생활에 대해 알리는 동안, 미르는 리시 옆에 서 있었다.

“어떻습니까, 공작부인?”

“정말 근사하네요.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아요.”

나무도, 풀도 전부 대륙에서 자라는 것과는 달랐다.

바다의 색깔 역시 파레디아에서 봤던 바다와는 완전히 달랐다.

깨끗하고 투명한 물빛에 눈이 시릴 정도였다.

“해변을 따라가면 동굴이 하나 있는데, 동굴 안이 참 아름답습니다. 내일은 동굴 탐험 일정도 계획해뒀지요.”

“그렇군요.”

“식사는 두 종류로 준비했습니다. 하나는 선실에서 차려준 음식을 먹는 거고, 또 하나는 이곳에서 직접 찾아낸 재료들로 요리해서 먹는 거죠. 다들 자기 손을 써서 재료를 찾아본 적이 없으니, 꽤 즐거운 여흥이 될 겁니다.”

“그렇겠네요.”

“저 안쪽 숲으로 들어가면 작은 폭포가 있는데, 거기는 또 색다른 분위기라서 바다에 있을 때와는 다른 기분을 느낄 수 있죠. 바다가 좀 질려갈 때쯤에 그쪽으로 이동할 겁니다.”

리시는 미르가 생각보다 훨씬 꼼꼼하게 일정을 준비해둔 점이 놀라웠다.

언제나 껄껄 웃기만 하는 가벼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케이가 물었다.

“자네는 언제 이런 곳을 찾아냈나?”

“6년 전이었나? 배 타고 수미트에 가다가 폭풍을 만났거든. 배가 길을 잃고 도착한 곳이 여기였지. 그때 배를 몰았던 선장도 수미트에 가는 길에 이런 섬이 있는 줄은 몰랐다고 하더군.”

“한번 점검은 해봤고?”

“당연하지. 그 후에 이 섬에 와서 한 번 다 돌아보고, 동굴도 샅샅이 뒤져봤네. 이 섬에서 제일 위험한 맹수는 고작해야 늑대야.”

“고작해야라니. 늑대는 맹수의 왕이라는 걸 잊었나 보군, 미르.”

“하하하하. 맹수의 왕은 사자나 호랑이 아닌가. 오, 그래. 저기 맹수의 왕께서 새들의 왕과 대화를 나누며 지나가시는군.”

미르가 나단과 제이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케이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정말로 기분이 상한 건 아니었다.

이제 나단과 제이미가 사자와 독수리라는 걸, 자신이 늑대라는 걸 농담 삼아서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아직도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미르가 자리를 떠나고 나서 케이와 리시는 손을 잡고 해변을 걸었다.

부드러운 모래가 깔린 해변은 걸을 때마다 신발이 푹푹 빠졌다.

리시는 케이에게 체중을 싣고 허리를 굽혀 신발을 벗었다.

맨발이 된 리시가 케이를 향해 웃었다.

“케이, 모래가 발에 닿는 느낌이 정말 좋아.”

사람들 앞에서 맨발이 되는 건 귀부인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케이는 그런 행동을 당당하게 해내는 리시가 무척 좋았다.

케이도 신발을 벗고 맨발이 되어 리시와 함께 모래사장을 걸었다.

문득 오래전, 리시가 케이를 찾아왔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나랑 결혼해요,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님.”

그때 리시가 지었던 눈빛은 청혼이 아닌 결투 신청을 하는 것 같았다.

그저 재미있는 여자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린 백작가도 따뜻한 온실은 아닐 겁니다, 레이디 위틀로.”

그 말에 리시가 뭐라고 했더라.

-“따뜻한 온실이 될 거예요, 그린 백작님.”

리시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그렇게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는 리시의 말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살짝만 건드려도 부서질 듯 연약해 보이는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다만 리시가 예뻤기에, 연약해 보임에도 전사 같은 눈빛을 지었기에, 그래서 마음에 들었기에, 그녀의 온실이 되어주고 싶었다.

“내가 당신의 온실이 되어주고 싶었는데, 결국 당신이 내 온실이 되었군.”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리시가 고개를 돌렸다.

“응?”

“내가 당신의 온실이 되어주지 못했다고.”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당신이 내 온실이 되어줘서, 내가 활짝 필 수 있었던 거 아닐까? 게다가……. 앗!”

밀려오는 파도가 리시의 발을 적셨다.

리시의 작은 발 위로 젖은 모래가 흠뻑 쌓였다.

리시는 까르르 웃으며 바다 쪽으로 더 가까이 걸어갔다.

“그러다 치마까지 젖을걸.”

“뭐, 어때. 갈아입을 옷이 산더미처럼 많은데.”

리시는 치맛자락을 무릎이 보일 때까지 걷어 올리고 바다 안쪽까지 들어가 찰방찰방 움직였다.

지켜보던 케이도 바지가 젖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리시가 바닷물에 손을 담갔다가 퍼 올려 케이에게 뿌렸다.

짭짤한 물방울이 케이의 입술을 적셨다.

케이는 얼굴에 묻은 물방울을 손으로 쓱 쓸어내린 후, 리시를 향해 싱긋 웃었다.

“리시, 해보자는 거야?”

“날 어떻게 하게?”

“이렇게!”

“꺄악!”

불쑥 다가선 케이가 리시를 번쩍 안아 드는 통에, 리시가 작게 비명을 지르며 케이의 목을 끌어안았다.

“내가 여기서 당신을 물에 던져버릴 수도 있어.”

“어쩌지? 내가 당신 목을 단단히 끌어안고 있는 건 안 느껴지나 봐? 나 혼자 빠지지는 않을 텐데.”

“글쎄. 한번 두고 볼까?”

케이가 위협하듯 리시를 더 높이 들어 올리자, 리시는 더 세게 케이의 목을 끌어안았다.

케이는 리시가 자신의 목을 단단히 끌어안는 느낌이 좋았다.

그래서 괜히 던지는 척하며 안 던지고, 또 던지려는 척하며 안 던지기를 반복했더니, 리시가 말했다.

“던질 생각 없구나?”

“당신이 긴장 좀 풀면 휙 던지려고.”

그 말에 리시가 다시 케이의 목을 힘주어 안았다.

케이가 작게 웃는 걸 보며, 리시는 그가 자신을 놀렸다는 걸 깨달았다.

“케이…….”

“당신이 이제 사람들 앞에서도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한테 매달리게 돼서 좋군.”

그제야 리시는 지금 단둘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슬그머니 해변 쪽을 돌아보자,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케이와 리시 쪽을 구경하고 있었다.

평생 예의를 차리며 고고하게 살아온 그들에게는, 바닷물에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애정행각을 벌이는 두 사람의 모습이 경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리시는 케이에게 내려달라고 하려다가 관뒀다.

“자기들이 보면 어쩌겠어.”

“하긴. 이제 이 세상은 포레스트가 사라지면 휘청거릴 정도가 되었으니까.”

“그것도 그렇고…… 당신이 내 온실이잖아. 저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든, 내 온실의 벽은 너무 두꺼워서 저 사람들 눈빛이 들어오질 않거든.”

케이와 리시가 보는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알콩달콩 대화를 나누는 동안, 월라스는 제이미와 나란히 앉아서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불을 피우고 있었다.

“있잖아, 제이미. 나는 대장이 보는 눈 신경 안 쓰고 저러는 걸 보면 창피해.”

“나도 그래요.”

“그런데 이상하지? 형수님이 저러시는 건 또 괜찮다?”

“나도 그래요.”

“왜 그럴까?”

“나도 그게 의문이지요.”

“그래도…….”

월라스는 케이의 품에서 벗어나 바닷물에 다리를 담그고 있는 리시를 눈부신 듯 응시했다.

“형수님이 즐거워 보이시니, 뭐.”

“토미도 즐거워 보이는군요.”

제이미의 말에 시선을 돌리자, 소녀 소년들에게 둘러싸인 토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제이미의 말과 달리 토미는 잔뜩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월라스도, 제이미도 토미의 표정이 여행 시작 때보다 훨씬 좋아졌다는 걸 느꼈다.

“토미. 드래곤으로 변했을 때 비를 내리게 했잖아. 그거 마법인 거야?”

한 소년의 질문에 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지금도 마법 쓸 수 있어?”

“아니. 드래곤일 때만 느껴져. 여기, 뭔가 있거든.”

토미가 가슴 위에 손을 얹고 말하자, 아이들이 전부 토미의 가슴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질투, 경외심과 경이로움이 담겨 있었다.

토미는 모두의 주목을 받는 게 여전히 긴장되긴 했지만, 전처럼 버겁게 느껴지진 않았다.

저 시선이 어떻게 바뀌든, 자신을 보는 그린 가 사람들의 시선은 변치 않으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

이름 없는 섬의 밤은 이름을 붙이기 힘들 만큼 아름다웠다.

해가 져도 밤바다는 어두워지지 않았다.

마치 사파이어를 잔뜩 조각내서 뿌려둔 것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저게 아마 이 섬 주위에 사는 작은 생물 때문일 거예요. 빛을 뿜어내는 생물이 있나 봐요. 대륙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어느 바다도 밤이 되면 저렇게 빛나거든요.”

에르웰이 작은 생물 때문이라고 설명해줬지만, 밤바다의 아름다움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바다는 이제 질렸다면서 선실에 들어갔던 사람들마저 밖으로 나와, 푸르게 빛나는 바다를 한참 지켜보았다.

둘째 날 들어간 동굴은, 처음에는 미끄럽고 좁아서 걷기 힘들었지만, 깊이 들어갈수록 길이 넓어지고 급기야는 호수가 있는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호수 역시 푸른 빛으로 빛났는데, 이건 생물 때문이 아닌 미르가 미리 와서 여기저기 설치해둔 라이트 마석 덕분이었다.

종유석 아래에 넓게 퍼져 있는 호수는 무척 맑고 깊어서, 그저 가만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시원해졌다.

섬에서 발견한 과일을 먹기도 하고, 대륙에서는 볼 수 없는 새나 짐승을 발견하기도 하며, 그들은 며칠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미르가 연 개업 기념 여행은 성공적이었고, 이번 여행에 함께한 기자는 이 여행에 관해 좋은 기사를 쓸 터였다.

일정을 마치고 다시 배를 타고 돌아가는 길.

파레디아 항구에 도착하기 하루 전날 밤, 미르가 리시를 찾아왔다.

“이번 여행은 어떠셨습니까?”

“무척, 굉장히 좋았어요. 아주 많이요. 초대해주셔서 감사해요, 미르.”

진심이었다.

모든 일이 끝나면 케이와 여행이나 다니며 살고 싶었다.

대륙 안에서 여행을 다닌 적이 몇 번 있었기에, 여행이란 그 정도의 즐거움일 거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짐을 전부 내려놓고 나서 하게 된 첫 여행은, 앞으로 또 이렇게 멋진 여행이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근사했다.

눈을 돌릴 때마다 들어오는 아름다운 풍경과 새로운 경험들.

직접 재료를 찾아서 불을 피워 요리를 하는 것도, 편한 침대가 아닌 침낭에서 잠을 자는 것도, 간혹 몰려드는 모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도, 조금 고생스럽기는 했지만 그렇기에 더 기억에 남았다.

“언젠가 또 오고 싶다는 마음이 듭니까?”

“그럼요. 이 여행 상품을 팔게 되면, 그때는 정식으로 예약을 하고 참가할게요.”

“그렇게 서운한 말 하지 마요, 리시. 친구에게는 언제나 열려 있으니까. 그나저나…… 저 섬은 어땠습니까?”

“아주 멋지더군요. 생각보다 넓어서 모든 곳을 다 보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였어요.”

“그렇군요.”

미르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리시를 빤히 응시했다.

리시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게 뭔가 제안할 것이 있으신가요?”

“공작부인은 눈치가 빨라서 좋아요. 공작부인, 나랑 일 하나 같이하지 않겠습니까?”

“일이요?”

“저 이름 없는 섬의 개발이요.”

미르의 이야기는 이랬다.

주인이 없는 섬은,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다.

먼저 손에 넣기 위해서는 섬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의 관청에 섬의 위치를 확실하게 알려주고 등록을 해야 하는데, 간혹 나라에서 욕심이 생겨 원래 자기네들 땅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그 섬에 먼저 건물을 하나 세워야 한다.

건물까지 지어놓고 나서 등록을 하면, 그들도 자기네 소유라며 말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미르의 설명을 들은 리시가 물었다.

“그곳이 주인 없는 섬인 건 확실한가요?”

(188) 외전 ; 게으른 공작부인의 나날 (9)

 

“물론이죠, 리시. 그 섬에서 제일 가까운 나라가 윈스토시 왕국인데, 거기 관청에 찾아가서 윈스토시 소유의 섬들을 확인까지 했습니다.”

리시는 잠시 고민했다.

섬을 갖는다는 건 근사한 일이지만, 섬을 개발하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건물 하나를 올리기 위해서도 각종 장비와 재료, 인부들을 배로 날아야 하기에, 많은 시일이 소요되고 막대한 금액을 투자해야 할 터였다.

때문에 미르도 혼자 할 자신이 없어서 리시에게 제안하는 것이리라.

“그럼 내일까지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시겠어요?”

“물론이죠. 좋은 답을 기대하겠습니다, 공작부인.”

미르가 리시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떠난 후, 리시는 케이를 찾아가서 미르에게 받은 제안을 설명했다.

“섬 하나를 개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무사히 건물을 올린다 해도, 그 섬에 살면서 그곳을 관리할 사람을 찾는 것도 어려울 거야.”

케이도 리시와 같은 걱정을 했다.

“응, 그렇긴 한데……. 내가 전에 당신에게 했던 얘기 기억나?”

“했던 얘기가 하도 많아서.”

“당신한테 예쁜 정장이랑 구두랑 장신구를 사주겠다고 했었잖아.”

“아……!”

케이가 그때를 떠올리는 듯 그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리고 정말로 그러고 있지.”

“당신에게 섬 하나도 사주고 싶은데.”

“마음은 감사하지만 무리할 것 없습니다, 부인.”

“무리라니요. 내가 당신에게 섬 하나 사주는 게 무리일 만큼 능력 없는 여자로 보이나요?”

“나는 그냥 부인만 있으면 돼요.”

“욕심도 많으셔라. 날 갖기가 제일 힘든 건데.”

“그러게 말입니다. 내가 주제도 모르고 욕심만 많네요.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부인이 선택한 게 이렇게 주제도 모르고 욕심만 많은 남자인데.”

리시가 키득키득 웃으며 케이의 볼에 입을 맞췄다.

“내 남자, 너무 사랑스러워서 섬도 사주고 싶고, 달도 따다 주고 싶고, 그래.”

“나도 그러고 싶은데. 달까지는 무리지만 별 정도는 따다 줄 수도 있어.”

“그 섬의 바다는 정말 근사했지? 바다에 별이 뜬 것 같더라.”

“응. 근사했지. 나도 그런 건 처음 봤어.”

“만약에 말이야, 케이. 우리 별장을 거기에 짓는다면 어떨까?”

“별장?”

“바다가 보이는 곳에 근사한 별장을 짓는 거야. 그리고 문득 그 바다가 그리워지면, 섬에 가서 그 별장에 머무는 거지. 거기서 먹었던 그 뿔 같은 게 달린 과일도 맛있던데. 그걸 따먹으면서.”

리시는 다시 그 섬으로 돌아간 듯, 그곳의 정경을 떠올렸다.

해변이 보이는 곳에 지은 별장에서, 돌아갈 날을 헤아리지 않고 그 아름다운 밤바다를 보며 시간을 보내는 나날을 상상했다.

꿈을 꾸는 듯한 리시의 얼굴을, 케이가 살며시 쓰다듬었다.

“리시,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 일단 결정을 내리면 내가 도울게.”

“그곳을 관광지로 개발하려면 안전해야 해. 대공이 확인했다고는 하지만, 섬 전체를 다 둘러보진 못했겠지. 섬의 안전 확인을 수인들에게 부탁 좀 할 수 있을까?”

“리시. 우리 수인들에게 당신은 자유를 찾아준 영웅이야. 우리의 영웅이 하는 부탁을, 수인들이 거절할 것 같아? 명령만 해. 우리는 당신이 무엇을 하든, 그 뒤를 받쳐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그리하여 리시는 결정을 내렸다.

미르와 공동으로 섬을 소유하고, 그 섬의 개발을 하는 건 꽤 긴 시간이 걸리고 어려운 일도 많을 테지만, 그 섬을 아주 많은 사람이 찾는 관광지로 만들 자신이 생겼다.

케이가 곁에 있으면, 리시는 늘 그랬다.

리시가 미르에게 함께 섬 개발을 해보자고 약속하는 것으로, 여행이 끝났다.

+++

미르와 레인게일이 탄 마차는 미르의 나라인 프리난 대공국에 접어들었다.

피아몬도 가문의 성이 있는 수도를 향해 가는 내내, 미르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린 가문이 세계를 구한 덕에, 세상은 더 빠르게 변할 테지.’

대재앙이 있기 전부터, 미르는 리시가 하는 일들이 세상을 변하게 할 거라고 예측했었다.

대재앙 때, 가비자르의 황제인 옥보시더스가 보인 추태 때문에 그 시기가 더 빨라졌다.

그전까지 대부분은 신분의 차이를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물론 100년 전만큼 신분제도가 굳건하지는 않았어도, 황족이나 왕족이 신이 내려준 혈통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월등히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황족이나 왕족이라도, 재앙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심지어 그 재앙을 끝낸 건, 황족도, 왕족도, 귀족도 아닌, 배척받던 수인이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수인 아이.

세상이 한 번에 뒤집히는 일은 없겠지만, 귀족을 향한 평민들의 시선이 달라졌다는 건 귀족 대부분이 느끼고 있을 터였다.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10년이 지나고, 또 10년이 지나면, 권력은 작위가 아닌 다른 것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재력. 혹은 능력.’

리시는 그걸 대재앙이 있기 전부터 간파했고, 포레스트 사업을 시작했다.

아마 앞으로도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시킬 것이고, 뒤늦게 그 중요성을 알게 된 사람들이 뛰어든다 해도 포레스트의 아류로만 여겨지게 되리라.

“전하.”

레인게일의 음성에 미르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린 공작과 공작부인의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지 않았습니까?”

“좋았지.”

“이제 전하께서도 슬슬 아내를 들이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미르가 껄껄 웃었다.

“레인게일. 내가 로하나와 결혼식을 올릴 때 신께 맹세했던 것을 잊었나? 내 평생에 아내는 로하나 한 명뿐이며, 로하나만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겠다고 맹세했었지.”

로하나는 미르의 전부인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전하. 다들 그런 맹세를 해도 이혼하고 나면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합니다. 로하나 님만 하더라도 이미 다른 분과 결혼하지 않았습니까?”

“로하나는 로하나고. 나는 그 맹세를 깰 생각이 없네.”

“그리하신다면 후계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설마 웨스트 님께 양보하시려 하십니까?”

“웨스트는 내가 양보한다고 해도 거절할 거야.”

“네, 그 부분이 문제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시면, 이 프리난 대공국은 어찌 되겠습니까?”

“흐음. 후계라…….”

미르도 후계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지금 미르가 사고에 휘말려 죽는다면, 미르의 동생인 웨스트가 프리난 대공국을 책임지게 될 터였다.

하지만 미르는 한 나라를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무게를 알고 있었다.

웨스트는 후작이라는 작위마저도 버겁다고 하는 녀석이니, 대공국을 맡게 되면 평생 숨통이 죄는 기분을 느끼며 살 것이 분명했다.

“생각해둔 게 있기는 한데…….”

“그럼 말씀해주십시오. 저도 알아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토미를 입양할까…….”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하아악!”

여자의 비명이 대화를 끊었다.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는 숲길이었다.

“전하는 여기 계십시오.”

레인게일이 얼른 말했지만, 미르는 마차에서 내렸다.

미르의 호위기사들이 이미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가는 중이었고, 미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상황이 끝나 있었다.

“강도들이 이 여자를 욕보이려 하고 있었습니다.”

다 찢어진 망토를 입은 여자의 주위에, 숨이 끊어진 사내 세 명이 쓰러져 있었다.

“대기근 때 도적이 된 놈들인 것 같습니다. 소탕한다고 했는데, 쥐새끼들처럼 숨어 있어서 종종 발견된다고 들었습니다.”

호위기사의 보고를 들으며, 미르는 거렁뱅이 같은 여자를 내려다봤다.

오랫동안 씻지 못해 연갈색처럼 보이는 머리카락과 여기저기 흉터와 버짐이 가득한 얼굴, 이리저리 뜯기고 찢긴 걸 꿰매고 또 꿰맨 허름한 옷.

“허으…… 허으으…….”

여자는 울 힘도 없는지, 바람 빠진 소리만 내고 있었다.

미르가 가까이 가려 하자, 호위기사가 그 앞을 막았다.

“병이 옮을 수도 있습니다.”

호위기사의 말대로 여자는 병에 걸린 것처럼, 온몸에 불긋불긋한 물집이 있었다.

미르는 호위기사를 살며시 밀어내고 여자에게 다가가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여자가 몸을 움츠리고 고개를 숙였다.

뻣뻣한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지만, 미르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푸른 눈동자를 발견했다.

미르가 천천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브리트니 위틀로.”

++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브리트니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전염병과 기근을 거치느라 상태가 안 좋아진 눈에, 화려한 복장의 사내가 들어왔다.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어서 가까이하려는데, 호위기사가 칼등으로 브리트니의 앞을 막았다.

“대공께 가까이 가지 마라.”

대공.

그제야 브리트니는 자기 앞에 있는 사내가 누군지 깨달았다.

밀란시스 피아몬도 대공.

“왜…… 여기에……?”

“여긴 프리난 대공국이다.”

“아…….”

떠돌던 사이에 어느새 프리난 대공국까지 온 모양이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군.”

브리트니는 자신은 괜찮으니 그만 가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말을 할 힘도 없어서 그대로 쓰러졌다.

미르는 쓰러진 브리트니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기사에게 말했다.

“근처에 치료소가 있나?”

“다음 도시에 하나 있습니다.”

“위틀로를 그곳으로 옮겨라.”

 

+++

브리트니는 꿈을 꾸었다.

스티무어에서 쫓겨난 후 가끔 꾸다가, 이제는 잠이 들 때마다 꾸는 꿈이었다.

꿈에서 브리트니는 위틀로 공작가의 공녀였다.

끔찍하고 악독한, 악마 같은 공녀.

공녀는 자신의 배다른 동생을 멸시하고 경멸하고 괴롭혀댔다.

머리를 쥐어뜯고 할퀴고 꼬집고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브리트니가 이제 그만하라고, 제발 관두라고 외쳐도, 위틀로 공작가의 공녀는 그토록 끔찍한 짓을 되풀이했다.

잠에서 깨면, 브리트니는 공녀가 한 그 모든 행동이 자신이 했던 일이라는 걸 되새기고 울었다.

어머니인 데니스가 함께 있을 때만 해도, 그런 꿈 따위는 무시했다.

하지만 데니스가 전염병에 걸려 죽은 후 혼자가 되자, 더는 그 꿈을 무시할 수가 없게 되었다.

악몽은 더 자주 찾아왔고, 심지어 깨어있을 때까지 눈앞에 나타나 브리트니를 괴롭혔다.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짓을, 아이리스가 고스란히 당했다는 걸 아주 뒤늦게 깨달았다.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인간이었는지 자각했다.

-“언니. 언니 머리카락은 정말 눈부셔요. 태양 같아요.”

아이리스는 그저 귀여운 동생이었는데.

-“그럼 너는 달 같겠네.”

나 역시 평범한 언니였는데.

-“외모로만 따지면 아이리스가 훨씬 예쁘지.”

-“아이리스가 하녀의 딸만 아니었어도 진짜 위틀로의 꽃이었을걸.”

들려오는 말들이, 브리트니의 자존심을 짓밟고, 여동생을 향한 감정을 까맣게 물들였다.

브리트니는 자신의 가슴에 검고 더러운 덩어리가 생기는 줄도 모르고, 아이리스를 미워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어린아이의 질투 섞인 괴롭힘이었다.

브리트니가 괴롭혀도 하녀의 딸인 아이리스는 반항하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언니, 너무 아파요.”

발 앞에 엎드려 우는 아이리스를 볼 때마다 묘한 쾌감과 아픔과 미안함이 동시에 찾아왔다.

그럴 때 부모 중 누군가가 브리트니를 꾸짖었다면, 동생을 괴롭히지 말라고 좋은 말로 설득했다면, 브리트니도 언젠가는 반성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와이번도, 데니스도 브리트니의 괴롭힘을 못 본 체했고, 아이리스를 미워하고 질투하며 괴롭히는 일은 습관이 되었다.

간혹 느껴지는 죄책감도 자존심 때문에 모르는 척 넘겨버렸다.

브리트니는 자신이 괴로운 상황에 놓이고 나서야, 아이리스가 얼마나 괴로웠을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괴롭힘이, 누군가에게는 죽고 싶을 수도 있는 일이라는 걸, 그 처지가 되어보고서야 알았다.

구걸하며 다니는 브리트니를 향해 쏟아지는 멸시의 말, 가끔 당하는 폭행, 그리고 병에 걸렸어도 치료받을 수 없는 상황들.

브리트니가 겪는 그 모든 일이, 아이리스가 어릴 때 위틀로 공작가에서 당했던 고통의 반의반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브리트니는 절망했다.

나는, 우리는, 그 어린아이에게 무슨 짓을 했던 걸까?

(189) 외전 ; 게으른 공작부인의 나날 (10)

아무리 반성해도 너무 늦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으니, 벌어진 일을 없던 일로 만들 수도 없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고통스러운 나날.

차라리 죽고 싶었지만, 죽는 것조차 힘들었다.

데니스와 똑같이 전염병에 걸렸는데 브리트니는 살아남았고, 많은 사람이 죽은 대기근에서조차 브리트니는 죽지 않았다.

마치 죽음이 이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아이리스는 20년간 고통을 받았어. 너도 그 정도는 받아야 하지 않겠니?”

그런 환청이 들려올 때마다, 브리트니는 묻고 싶었다.

아이리스. 넌 어떻게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니?

하지만 질문할 기회는 평생 오지 않으리라는 걸, 브리트니는 알았다.

대기근이 끝난 후, 아이리스는 황제보다도, 교황보다도 고귀한 신분이 되었다.

아이리스를 그저 공작부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대륙의 성녀.

대륙의 고귀한 꽃.

평민들뿐 아니라 거칠게 살아가는 용병들이나 도적들까지도 아이리스의 이름을 입에 담을 때는 조심스러웠다.

행여나 그 이름을 잘못 담았다가는 큰 벌이 내릴지도 모른다는 듯이.

“하아…….”

고통스러운 한숨과 함께, 브리트니는 잠에서 깨어났다.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포근한 침구에 감싸여 있다는 걸 깨닫고, 잘 보이지 않는 눈을 깜빡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뿌옇게 보이는 하얀 천장, 왼쪽 벽에서 들어오는 빛, 그리고 오른쪽에 앉아 있는 화려한 차림의 남자.

“깼나?”

“여긴……?”

“치료소다. 포레스트 치료소.”

“아…….”

브리트니는 도로 눈을 감았다.

아이리스에게 그토록 지독한 짓을 했는데, 거리를 떠도는 내내 브리트니는 아이리스에게 도움을 받았다.

포레스트 치료소, 그리고 포레스트 빈민 구제소.

그곳이 없었다면 브리트니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브리트니가 죽고 싶어졌을 때도, 이제 그만 살려줬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랄 때도, 그곳에서 나온 사람들이 브리트니를 발견하고 치료해주었다.

“의원의 말로는 7개가 넘는 병에 걸렸다더군. 체력이 너무 떨어진 상태라 잘못 치료했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대신관을 불렀어. 일주일이면 도착할 테니…….”

“부디…….”

브리트니가 희미하게 흩어지는 음성으로 미르의 말을 끊었다.

“부디 그냥…… 제발 그냥…… 죽게 해주세요…….”

미르의 미간이 좁아졌지만, 브리트니의 눈에는 그런 세세한 표정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제발…….”

“고생이 심했나 보군.”

무심한 음성이지만, 그동안 이리저리 치이던 브리트니에게는 화상을 입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대의 모친은 죽었나?”

“전염병으로…….”

“그때부터 쭉 그런 꼴로 헤매고 다닌 건가? 소일거리라도 하면 배를 곯지는 않았을 텐데.”

“누가…… 내게 소일거리를…… 주겠어요……?”

브리트니와 데니스도 먹고살 길을 찾기는 했다.

가진 돈이 다 떨어지고, 일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후, 자존심은 접어두고 평민들 밑에서라도 일하려 했다.

하지만 위틀로 가문의 모녀는 너무 유명했다.

그린 공작부인을 해하려 하고, 스티무어 황제를 꼬드겨 나라를 멸망시킬 뻔한 희대의 악녀.

어느 나라는 위틀로 모녀를 아예 발도 디디지 못하게 하라며, 변경에 공문을 보냈다.

어느 마을에 들어갔다가 브리트니의 얼굴을 아는 방랑기사가 떠들어대는 사람에, 모진 취급을 받고 쫓겨나기도 했었다.

아이리스가 위틀로 저택에서 잔혹한 취급을 받을 때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내주지 않았던 것처럼, 위틀로 모녀 또한 그러한 시간을 보냈다.

“그린 저택에 가보지 그랬나? 그대가 이리된 것을 본다면, 그린 공작부인이 내치지 않았을 텐데.”

물론 브리트니는 아이리스가 그랬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전까지는 위틀로 가문을 가혹하게 대했어도, 죽어가는 사람을 못 본 척할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잘 알았다.

“그래서요…….”

“음?”

“내치지 않을 걸…… 알아서…… 그래서…… 못 갔어……요…….”

브리트니는 아이리스를 아는 만큼, 자신을 알았다.

아이리스의 도움을 받아서 숨을 쉬고 살 만해지면, 또다시 아이리스를 질투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사선을 넘나들면서도 완전히 지우지 못한 질투로 자신을 물들이는 것도, 아이리스를 괴롭히는 것도 이제는 싫었다.

지쳤다.

“그러니…… 부디…….”

시야 가장자리가 새까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브리트니는 이제야 비로소 죽음이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려 한다는 걸 느꼈다.

“부디…… 아이리스에게는…….”

말하지 말아요.

내가 후회하고 있다는 것도.

미안해한다는 것도.

이토록 비참하게 죽었다는 것도.

그 애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저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우리 가족들과 있을 때는 누리지 못했던 행복을 티 없이 누리기를.

바라요.

마지막 말을 남기지 못한 채, 브리트니의 숨이 끊어졌다.

공녀로 태어나 한 제국의 황비 자리에까지 올랐던 여인의 말로는 그토록 비참했다.

미르가 조용히 브리트니를 지켜보는데, 뒤에 서 있던 레인게일이 물었다.

“전하. 어찌할까요?”

“이 여자가 브리트니 위틀로라는 걸 아는 자가 있나?”

“아까 전하 곁에 서 있던 호위기사와 저뿐입니다.”

브리트니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죽었지만, 미르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입단속을 시켜라. 그린 공작부인의 귀에 들어가서 좋을 게 없겠지.”

“알겠습니다.”

“시신은 정중하게 장례를 치러주도록 해.”

 

+++

깊은 밤, 리시는 조용히 침대를 빠져나와 정원으로 향했다.

라이트 마석을 설치한 정원은 늦은 밤에도 아름다운 빛을 머금고 있었다.

화단에 핀 봄꽃을 손바닥으로 쓸면서 걸어간 리시는, 작은 분수가 설치된 곳에 도착했다.

그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 리시는 조금 전에 꾼 꿈을 떠올렸다.

-“아이리스. 이거 예쁘지?”

-“너무 예뻐요. 언니랑 정말 잘 어울려요.”

-“이거 너랑 나랑 세트야. 엄마한테는 비밀로 해야 해.”

몇 살 때였을까?

아마도 5살쯤의 일일 것이다.

분홍색 보석이 중앙에 박힌 리본 머리핀.

양갈레 머리를 묶을 때 사용하라고 세트로 판매하는 머리핀 중 하나를, 브리트니는 리시에게 몰래 선물해주었다.

무심한 글로번과 눈만 마주치면 짜증을 내고 때리는 데니스 사이에서, 브리트니만은 리시에게 다정했었다.

‘잊고 있었는데…….’

여러 사건을 거치며 브리트니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위틀로 가문에서의 시간도 이제는 꿈결처럼 흩어져, 잘 떠오르지도 않게 되었다.

리시를 둘러싼 다정한 사람들 덕분에 그때 받았던 상처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물었다.

그래서인가 보다.

좋았을 때의 꿈을 꾼 걸 보면.

-“엄마랑 아빠가 너한테 너무 심하게 굴어서 미안해. 조금만 기다려, 아이리스. 내가 커서 엄마랑 아빠를 이기게 되면 널 지켜줄게.”

글로번과 데니스가 아무리 가혹하게 대해도, 브리트니가 있기에 리시는 버틸 수 있었던 때도 있었다.

바스락-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길고 멋진 뿔을 가진 사슴 한 마리가 화단의 꽃 냄새를 맡고 있었다.

아직 이곳에 리시가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듯, 꽃에 코를 파묻고 킁킁거리는 사슴이 귀여워서 작게 웃었다.

그 소리에 사슴이 화들짝 놀라서 펄쩍 뛰었다.

사슴이 휙 돌아서서 도망치려는데, 리시가 불렀다.

“월라스.”

사슴이 우뚝 멈춰서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제가 사슴인 줄 아셨어요?”

“……모를 줄 알았어요?”

“형수님 앞에서는 변신한 적이 없으니까.”

월라스는 자기가 사슴이라는 걸 부끄러워했다.

유진은 반들반들한 털을 가진 흑표범, 제이미는 커다란 날개를 가진 독수리, 게다가 여자로 오해받을 만큼 작은 체구에 예쁜 얼굴을 가진 나단은 사자인데, 자신만 초식동물이라는 게 영 못마땅했다.

물론 싸울 때는 멋지고 단단한 뿔과 튼튼한 뒷다리로 맹수들만큼이나 강하게 적들을 물리치지만, 그래도 맹수가 가진 근사한 발톱이 부러웠다.

그래서 수인들을 제외한 사람들 앞에서는 변신하지 않았는데, 리시에게 딱 들켜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도망치고 싶었지만, 리시가 뻗는 손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사슴은 터덜터덜 걸어가 리시의 작은 손에 살며시 뿔을 비볐다.

“멋지네요.”

“대장 발톱보다는 별로죠.”

“케이 발톱보다 멋진걸. 이렇게 뿔이 크고 근사하게 자란 사슴은 처음이에요.”

“……정말요?”

“월라스.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요?”

사슴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월라스는 사슴이라서 윈디랑도 대화가 가능한 거예요?”

“네.”

“케이나 유진은 대화가 안 되고?”

“아무래도 그렇죠. 저도 완벽하게 알아듣는 건 아니에요. 아, 토미가 어릴 때 더듬더듬 단어만 전달했잖아요. 그 정도 수준이죠.”

“그렇구나. 그래도 좋겠다. 나도 윈디랑 얘기해보고 싶은데.”

“제가 알려드릴게요. 뭘 알고 싶으세요?”

“윈디는 내가 주인인 게 괜찮대요?”

“당연하죠!”

“거짓말.”

“형수님. 제가 거짓말하는 거 보셨어요?”

리시는 잠시 고민해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못 본 것 같네요.”

“그것 봐요. 윈디는 형수님을 아주 좋아해요.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인간이라고 자랑스러워하죠. 그래서 화이트가 부러워해요.”

“정말?”

“정말로요. 화이트도 대장보다는 형수님을 태우고 싶대요. 원래 유니콘들은 예쁜 여자를 좋아하거든요.”

리시가 작게 웃자, 사슴도 기분 좋은 듯 푸르르 투레질을 했다.

“그런데 형수님은 이 시간에 왜 여기 나와 계세요? 안 주무세요?”

“잠이 안 와서 잠깐 나와 있었는데, 이제 다시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슴이 꽃 냄새를 맡는 평화로운 광경을 보다 보니, 가슴에 걸리적거리던 것들이 사라졌다.

그린 가의 사람들은 항상 이렇듯 리시에게 평안함이 되어주었다.

사슴은 리시를 본채 입구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갔다.

리시는 조용히 침실로 들어가 케이의 옆에 누웠다.

기척을 느낀 케이가 리시를 보듬어 안고, 잠에 취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슴 냄새가 나는군. 꽃 냄새도 나고…….”

“응. 월라스가 꽃 냄새를 맡고 있더라고.”

케이가 리시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 키득거렸다.

“짐승일 때 냄새를 맡는 게 훨씬 강렬하거든. 그 녀석, 자기 취미가 꽃 냄새 맡는 거라는 걸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으려고 하는데, 다들 알지.”

“참 귀여운 사람이야.”

“나보다?”

“오늘은 당신보다 더 귀엽더라고.”

“이런. 분발해야겠는걸. 나도 늑대로 변해서 꽃향기 좀 맡을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잠이나 자.”

“응.”

많이 졸렸나 보다.

대답하자마자 케이는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런 케이가 너무 귀여워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꼬물거리다가, 리시도 스르륵 잠이 들었다.

+++

토미는 잠이 오지 않았다.

이제 곧 아카데미에 입학한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싱숭생숭했기 때문이다.

그린 공작 부부가 케이에게 아카데미 이야기를 꺼낸 건, 여행에서 돌아온 날 밤이었다.

-“토미. 아카데미에 들어가지 않을래?”

솔직히 말하자면, 싫었다.

여행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래도 역시 그린 저택에서만 지내는 게 더 편하고 즐거웠다.

하지만 토미는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리시와 케이가 토미에게 나쁜 제안을 할 리 없다는 걸 알기에.

두 사람이 토미를 굳이 바깥으로 내보내려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아직은 그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리시와 케이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해보기로 결심했다.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해서 긴장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아카데미는 전원 기숙사제였기에, 이제 곧 저택을 떠나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가야만 했다.

토미는 결국 침대를 벗어나 복도로 나왔다.

케이의 부하들은 응접실이 달린 방을 하나씩 가졌고, 대재앙 후 토미 역시 부하들이 지내는 건물에 머물게 되었다.

토미가 1층으로 내려가려는데, 옆방 문이 열리고 나단이 나왔다.

“안 자냐?”

“나단은요?”

“네 한숨 소리 때문에 땅이 꺼질까 봐 불안해서 못 자겠어.”

“……제가 그렇게까지 한숨을 쉬었어요?”

나단이 어깨를 으쓱하고 복도의 창문을 열었다.

선선한 밤공기가 훅 밀려들어 왔다.

나단과 토미는 창가에 걸터앉았다.

“아카데미 생활은 즐거울 테니 걱정할 거 없어, 토미.”

“나단도 아카데미에 다닌 적이 있어요?”

“당연하지. 어릴 때 몇 년 다녔었어. 아주 성실하고 장래가 유망한 학생이었지.”

나단이 그리운 듯 말하는데, 복도 끝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190) 외전 ; 게으른 공작부인의 나날 (11)

유진이 하품을 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복도가 소란스러워서 잠을 깬 모양이었다.

유진은 창가에 걸터앉은 두 사람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섰다.

“넌 잠이나 자지, 왜 나와서 훼방을 놔?”

“토미, 잠이 안 오냐?”

유진은 투덜거리는 나단을 무시하고 토미에게 물었다.

토미는 한숨을 삼켰다.

아카데미에 가는 게 싫어서 잠도 설치는 어린애 같은 면이 사방팔방 알려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리 잠이 안 와도 침대에 콕 박혀 있을걸.

“걱정 마라, 토미. 네 아카데미 생활은 아주 즐거울 테니까.”

유진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기에, 토미는 고개를 들었다.

유진의 검은 눈동자가 무척 신중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말 그럴까요?”

“당연하지. 너는 입학하는 순간부터 아카데미 최고의 인기인이 될 거다.”

아, 그런 얘기였나.

토미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토미는 인기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 토미의 마음을 짐작한 듯, 나단이 웃으며 토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너, 지금은 다 귀찮게 여겨져도, 아카데미에서 일 년만 지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걸. 너는 그 대단한 그린 가문의 아이고, 심지어 재앙을 끝낸 영웅, 드래곤이라고. 모두가 너와 친해지고 싶어 하고, 모두가 널 좋아할 거야.”

“…….”

“지금 당장은 그걸 원치 않을지 모르겠지만…… 딱 1년만 버텨봐. 1년 후에도 지금이랑 같은 기분이 든다면, 내가 대장이랑 형수님에게 잘 말해서 네가 저택에만 머물 수 있게 해줄게.”

 

+++

토미가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날이 다가올수록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은 토미가 아닌 리시였다.

입학 당일. 토미를 배웅하기 위해 나간 리시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

“아이리스 님. 아카데미는 그렇게 위험한 곳이 아니에요.”

“맞아요, 아이리스 님. 토미는 거기서 정말 잘 지낼 거예요!”

크리시나와 에르웰의 말에, 리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자꾸만 눈물이 차오르는 걸 막기가 힘들었다.

케이는 코를 훌쩍거리는 리시를 귀엽다는 듯 지켜보다가 말했다.

“리시, 당신이 보내겠다고 한 거잖아.”

“응, 응.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토미가 멀리 떠난다고 생각하니…….”

“리시, 멀다고 해봐야 말을 타고 10분이면 가는 거리야.”

그랬다.

토미는 그린 아카데미에 입학 예정이었고, 그린 아카데미는 공작령의 수도인 다코트 시에 있었다.

그런데도 리시는 변방의 전쟁터에 아들을 보내는 엄마처럼 훌쩍거리는 중이다.

오히려 그동안 아카데미에 가기 싫어했던 토미가 의젓하게 말했다.

“아이리스 님. 주말에는 외출증을 받아서 저택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와서 인사드릴게요. 너무 울지 마세요.”

“응, 그래야지……. 그래도…… 아, 어떡해. 우리 토미, 가서 잘 지낼 수 있지?”

“그럼요.”

리시가 훌쩍거리며 토미를 꼭 끌어안았다.

토미는 자신의 세계 전부였던 그린 저택을 떠난다는 사실 때문에 심란했었다.

하지만 토미를 아카데미에 보내려 했던 리시가 더 심란해하는 모습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리시가 자신을 싫어해서 아카데미에 보내려는 게 아니라는 걸 확신했고, 이렇게 훌쩍훌쩍 울면서도 아카데미에 보내려고 한다는 건 그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라는 걸 느낀 것이다.

그렇다면 잘해내야지.

가서 아주 우수한 학생이라는 평가를 받아야지.

좋은 성적을 받아오면 다들 기뻐하겠지.

목적이 생기자 마음이 더욱 단단해졌다.

“아이리스 님. 저, 잘 지내다가 돌아올게요!”

토미의 씩씩한 목소리를 듣자, 리시는 가슴이 먹먹했다.

토미를 처음 봤던 날이 떠올랐다.

비쩍 말랐지만 사나운 눈빛을 짓고 있던 소년. 하지만 그 눈동자에 담긴 상처와 두려움을, 리시는 읽어냈었다.

지금 토미의 황금색 눈동자에는 공포도, 상처도, 아픔도 없었다.

이 아이가 언제 이렇게 성장한 걸까?

그래, 이건 먹먹한 게 아니다. 감격이 부풀어 답답할 정도로 가슴을 가득 채운 것뿐.

리시는 토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기다릴게, 토미. 잘 지내다가 와.”

토미는 제이미, 유진과 함께 아카데미를 향해 출발했다.

리시는 저택 대문 앞에 서서 토미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봤고, 제이미와 유진이 돌아올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토미가 무사히 입학했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마음이 시렸다.

함께 본채로 돌아가는 길이 유독 쓸쓸한 이유는, 언제나 토미가 만들어내던 웃음소리나 외침 같은, 행복한 소란이 없기 때문이었다.

정원을 지나가다 보니, 이곳에서 나무를 타고 놀던 토미가 떠올라서 또 눈가가 시큰거렸다.

훌쩍거리는 리시를 보며 케이가 씩 웃었다.

“당신이 이렇게 울보인 줄은 몰랐는데.”

“당신한테 옮았나 봐.”

“저런. 드디어 당신과 내가 일심동체가 됐군.”

케이는 본채로 들어가는 대신, 리시의 손을 잡고 마구간으로 향했다.

윈디와 화이트는 마구간 앞의 넓은 잔디밭에서 다른 말들과 함께 뛰놀고 있었다.

리시가 왔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윈디가 달려왔다.

반가운 듯 푸르르 소리를 내던 윈디는, 리시의 눈가에 아직 남아 있는 눈물을 보더니, 케이에게 나무라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케이가 두 손을 살짝 들었다.

“내가 그런 게 아니야. 아니, 진짜라니까. 어, 밀지 마, 윈디.”

윈디는 케이 때문에 리시가 울었다고 생각했는지, 콧등으로 케이를 자꾸만 밀어냈다.

“화이트, 네 애 좀 말려. 죄 없는 사람을 잡잖아.”

가만히 지켜보던 화이트도 윈디에게 합세해서, 콧등으로 케이를 밀어냈다.

케이를 충분히 떨어뜨린 윈디와 화이트가 보호하려는 듯 리시와 케이의 사이에 자리를 잡고 섰다.

위로해주고 싶은지 리시의 양쪽 어깨에 얼굴을 하나씩 올린 두 유니콘 덕분에, 리시는 조금 웃었다.

“고마워, 얘들아. 그런데 진짜로 케이가 날 울린 게 아니야.”

리시는 손을 들어서 윈디와 화이트의 콧등을 한 번씩 쓰다듬었다.

그 후, 케이와 리시는 유니콘을 타고 저택 숲의 호수로 향했다.

대흉년 때 바짝 말랐던 호수는 다시 깨끗한 물이 찰방찰방 차올라 있었다.

흉년 전보다 훨씬 깨끗하고 투명한 물로 가득한 호수는 가슴이 확 트일 정도로 보기 좋았다.

리시와 케이는 호숫가의 풀밭에 나란히 앉았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이 꽃과 풀의 냄새를 실었고, 그 냄새를 따라왔던 토끼 같은 작은 들짐승들이 풀밭에서 조금 놀다가 돌아가곤 하는 장면을, 리시는 가만히 지켜봤다.

그러다가 문득 이곳에서 열렸던 결혼식이 떠올랐다.

모두에게 ‘아이리스 그린’을 알리던 그날.

그리고 리시가 유물술사라는 걸 알게 된 그 날.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기도 하고, 몇십 년 전의 일처럼 까마득하기도 했다.

모두가 그린 공작부인을 대단하다고 하지만, 리시는 그 모든 것이 가능했던 건 케이 덕이라는 걸 알았다.

케이가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면, 믿어주지 않았다면, 모르는 척해주지 않았다면, 뒤를 받쳐주지 않았다면, 리시는 그 모든 걸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무슨 생각해? 아직도 토미가 보고 싶어?”

“보고 싶지. 그런데 지금은 당신 생각을 했어.”

“오, 드디어! 무슨 생각?”

리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사랑스럽고 귀여운 남편을 응시했다.

그는 리시가 할 말이 무척이나 기대된다는 듯 눈을 빛내고 있었다.

“트리사의 귀걸이가 내게 행운을 줬잖아. 회귀하게 해줬고, 죽음으로부터 보호도 해줬고, 내가 필요한 상황에서 그렇게 일이 돌아가도록 도움도 줬고…….”

“그랬지.”

“그런데 내 인생에서 제일 큰 행운은, 당신을 만난 거야.”

“…….”

“그거 알아, 케이? 지난 삶에서도 내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은 당신과 만나서 대화를 나눴던, 그 짧은 시간이었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케이가 리시의 볼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지난 삶의 내가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 녀석이 당신을 본 순간에 ‘이렇게 예쁜 여자를 보다니, 행운이군.’이라는 생각을 했을 거라고 확신해.”

이 남자는 어쩜 이렇게 예쁜 소리만 골라서 하는지.

“지금의 나도 그렇거든.”

리시가 눈을 감자 자연스레 입술 위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포개어졌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시작한 스킨십이 격렬하고 뜨겁게 이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불어오는 따뜻한 봄바람과 때때로 찰방거리는 물소리에 관능적인 숨소리가 섞였다.

서로의 향기가 서로에게 물처럼 배어들었다.

이윽고 어둠이 내려앉고 바람이 쌀쌀해졌지만, 그들은 오래도록 그 자리에서 마음을 섞었다.

+++

아직 밤에는 쌀쌀한 계절이었기에, 지난 밤늦은 시간까지 호숫가에서 시간을 보낸 리시는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열이 펄펄 끓는 리시 때문에 케이는 안절부절못했다.

케이가 얼른 교황청에 연락을 넣어서 대신관을 데려오라고 야단을 부리는 바람에, 리시는 아픈 와중에도 제발 좀 진정하라고 케이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케이…… 감기 때문에 무슨 대신관이야…… 콜록, 콜록.”

“이것 봐, 계속 기침을 하잖아.”

“감기에 걸리면 계속 기침을 해.”

위틀로 공작가에 있을 때 감기에 자주 걸렸던 리시는, 이 정도로 죽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지만, 케이는 아니었다.

수인은 기본적으로 튼튼한 육체를 가졌기에 질병에 강했다.

평생 감기 한번 제대로 걸려본 적 없는 케이와 다른 수인들은, 평소보다 더 창백한 얼굴로 콜록콜록 기침하는 공작부인 때문에 애가 닳을 수밖에 없었다.

“대장. 아직은 춥다고요! 형수님이 대장처럼 강한 것도 아닌데, 이 추운 날씨에 밖에서 밤을 새우면 어떡해요?”

나단의 타박에 케이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밤을 새운 건 아니야. 동틀 무렵에는 들어왔어…….”

“차라리 동이 트면 따뜻해지기라도 하죠. 아직 밤에는 춥다고요.”

“맞습니다, 대장. 이번에는 대장 잘못입니다.”

유진까지 어두운 표정으로 나단을 옹호했다.

월라스는 차마 침대 가까이에는 오지도 못하고 구석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며, “그래서 어떡해? 대신관님을 불러, 말아?”라는 질문을 몇 번이나 내뱉고 있었다.

“자, 자. 다들 너무 시끄럽게 하지 말고 나가세요. 감기에 걸리면 푹 쉬어야 한답니다.”

크리시나가 물이 담긴 양동이와 수건을 갖고 들어오며 말했다.

그 뒤로 에르웰이 상큼한 냄새가 나는 차와 약병을 갖고 들어왔다.

“그래, 리시는 쉬어야 하니 너희는 그만 나가.”

“공작님도 나가시죠. 저희가 아이리스 님을 돌봐드릴 테니까.”

크리시나가 수건을 들어 보이며 눈치를 줬지만, 케이는 팔짱을 끼고 서서 말했다.

“여기에 석상처럼 조용히 있을게.”

“공작님…….”

크리시나가 다시 수건을 흔들었다.

이 수건으로 리시의 몸을 닦아야 하니 그만 나가라는 표시였는데도, 케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남편이잖아.”

“적당히 하세요, 대장.”

제이미가 케이의 팔을 잡고 끌어내려 했지만, 그는 케이의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

제이미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무식하면 힘만 세다더니……”

“뭐라고, 제이미?”

“네? 뭐가요?”

“지금 내 욕을 한 것 같은데. 무식하다고.”

“전혀요. 제가 그런 말을 할 리가 있나요? 안 그래요?”

제이미가 돌아보자, 다른 수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시나가 팔짱을 끼고 케이를 노려봤다.

“공작님. 지금 충분히 소란스러우신데요.”

“너희 때문에 크리시나한테 혼났잖아! 다들 얼른 나가!”

“공작님도.”

크리시나가 케이의 등을 밀었다.

케이는 크리시나의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

“나가세요.”

크리시나는 어렵지 않게 케이를 방 밖으로 몰아냈다.

문을 닫기 전, 크리시나가 제이미를 향해 생긋 웃으며 물었다.

“무식한 게 힘만 세 보이나요?”

제이미가 얼른 고개를 젓자, 크리시나가 눈을 찡긋하고는 문을 닫았다.

제이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크리시나는 어떻게 저렇게 힘이 센 거죠?”

“페르니 가문이 예술로 유명해서 묻힌 거지, 대대로 힘이 셌다더군. 거인족의 피가 섞였다는 소문이 있지.”

케이와 부하들이 복도에 서서 고대에 존재했던 거인족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크리시나는 수건에 물을 적셔서 리시의 몸을 닦아주었다.

침실 안에 있는데도 복도에서 이러쿵저러쿵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다 들렸다.

리시가 걱정돼서 차마 떠나지 못하고 다들 문 앞에 모여 있는 것이리라.

아플 때마다 느끼는 그린 가의 따스함이, 리시는 참 좋았다.

(191) 외전 ; 게으른 공작부인의 나날 (12)

리시는 에르웰이 준비해준 물약을 마시다가 뱉어낼 뻔했다.

너무 써서 구역질이 날 정도였기 때문이다.

에르웰의 성의를 생각해서 재빨리 삼켰는데도, 잠깐 입에 머문 비릿한 냄새가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 약이 남아 있었지만 마실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냥 들고만 있었더니, 에르웰이 말했다.

“다 마시셔야 해요.”

“너무 비려서…….”

“비려요?”

에르웰이 약병을 가져다가 킁킁 냄새를 맡았다.

“이게 좀 쓴 약이긴 한데, 비린내는 안 날 텐데……. 그럼 레몬 티 한 모금 마시고 입을 헹궈보세요.”

레몬 티의 상큼한 향기 덕분에 비릿한 냄새는 가셨지만, 또다시 약을 마실 용기가 나지 않아 약병을 슬그머니 밀어냈다.

“에르웰, 이건 정말 못 마시겠어요.”

“음…… 이거 감기에 좋은 약인데. 입에 안 맞으시면 어쩔 수 없죠. 얼른 누우세요.”

안 그래도 눕고 싶던 참이었다.

열 때문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다.

눈이 뻑뻑하고 어깨가 쑤셔서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지쳤다.

크리시나가 한 번 몸을 닦아주었는데도, 또다시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안쓰러운 듯 지켜보던 크리시나가 말했다.

“열 때문에 더워서 힘드셔도 이불을 꼭 덮고 푹 주무셔야 해요. 근처에 있을 테니, 힘드시면 종을 울려주시고요.”

“응, 고마워요.”

목이 칼칼해서 대답을 하는 것도 힘들었다.

크리시나와 에르웰이 나가자마자, 리시는 잠이 들었다.

+++

크리시나는 응접실에 남아 있기로 하고, 에르웰만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서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고 있던 케이와 부하들이 에르웰을 돌아봤다.

“리시는?”

“주무세요.”

“내가 뭘 해야 하지?”

“그냥 조용히 계시면 될 것 같은데…….”

“그게 리시에게 도움이 되나?”

“푹 주무셔야 빨리 낫거든요. 이 약도 너무 비리다고 못 드셔서.”

에르웰이 반쯤 남은 약병을 보며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내가 입으로 먹여주면…….”

“대장, 제발 체통을 좀 지키시고요. 형수님 아프실 때 본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하지 마시고요. 아셨지요?”

제이미가 타박하자 에르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에요, 제이미. 제이미라도 정상이라서 다행이에요.”

“나는 정상이 아니란 건가?”

“어휴, 공작님. 제 주제에 어떻게 공작님이 정상이 아니라는 말을 솔직하게 할 수 있겠어요? 저는 이래 봬도 본분을 안답니다.”

“…….”

“아이리스 님이 레몬 티는 좀 드시니까, 레몬 티나 더 준비해둬야겠어요. 이게 마지막 레몬 티라서.”

주방으로 향하는 에르웰의 뒤를, 케이와 부하들이 졸졸 따라갔다.

주방 하녀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케이와 부하들 때문에 깜짝 놀라서 굳어버렸다.

에르웰이 뒤를 돌아봤다.

“저기요. 왜 다들 따라오신 거예요?”

“리시에게 뭔가 해주고 싶어.”

“성가신데…….”

에르웰이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케이가 부하들을 돌아봤다.

“들었지? 성가시게 하지 말고 다들 나가.”

“대장이 제일 성가신 존재인 것 같은데요.”

“나단.”

케이가 검지로 주방 입구를 가리키며 눈을 부라리자, 나단을 비롯한 부하들이 투덜거리며 주방에서 나갔다.

하녀들도 눈치를 보다가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공작님. 공작님도 나가시면 안 돼요? 바쁘시잖아요.”

“한가해, 에르웰 양. 알잖아.”

“네, 아주 잘 알죠. 너무 한가하셔서 우리 연약한 공작부인이 감기에 걸릴 때까지 밖에 데리고 계셨죠.”

“반성하고 있어. 내가 뭘 해야 해? 레몬 티를 만들면 돼?”

아무래도 케이가 이대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이기에, 에르웰은 포기하고 설명했다.

“네. 창고에 레몬 상자가 있거든요. 싱싱한 걸로 20개 정도만 가져다주세요.”

케이는 그렇게 했다.

“이제 뭘 해야 해?”

“레몬을 닦아야 해요.”

케이는 최선을 다해서, 아주 꼼꼼하게 레몬을 하나, 하나 닦았다.

“그리고?”

“썰어야 해요.”

검을 잘 쓰는 케이는, 부엌칼도 잘 썼다.

종잇장처럼 얇게 레몬을 저미는 케이를 보며, 에르웰이 감탄했다.

“와, 생각보다 훨씬 잘하시네요.”

가벼운 칭찬에 우쭐해진 케이가 말했다.

“이런 것쯤은 천 개라도 썰 수 있지.”

“아니, 그렇게까지는 필요 없고요.”

에르웰은 얇게 저민 레몬을 그릇 안에 차곡차곡 넣고 꿀을 듬뿍 뿌렸다.

레몬의 상큼한 향기가 주방 안에 가득했다.

“아이리스 님이 일어나실 때쯤 되면 어느 정도 맛이 들었을 거예요. 약도 제대로 못 삼키실 정도인 것 보면 몸이 정말 안 좋으신 것 같아요. 배도 고프실 텐데, 수프를 좀 만들 거거든요.”

“응. 내가 뭘 하면 되지?”

“이제 정말로 나가시면 돼요. 요리, 못 하시잖아요.”

“할 수 있어.”

에르웰의 눈이 커졌다.

“정말요?”

“당연하지. 내가 토벌 다니면서 노숙을 몇 번이나 했다고 생각해?”

“그건 알 길이 없지만, 노숙할 때 요리를 한 건 공작님이 아닐 것 같은데요.”

“옆에서 다 보고 배운 게 있어.”

“흐음……. 공작님. 환자가 먹을 음식은 다른 때보다 정성껏, 조심해서 만들어야 해요. 아주 부드럽고 먹기 편하면서도 영양가가 듬뿍 담긴 요리여야 하죠. 그래서 제가 직접 만들려는 거고요.”

“그래서?”

“저는 아무래도 불안한데…….”

“잘할게, 에르웰 양. 아주 잘할 수 있어.”

그 어느 때보다도 각오가 담긴 눈빛을, 에르웰은 믿어보기로 했다.

섣부른 믿음이었다.

에르웰은 쉬운 일을 시켰다.

“그릇에 달걀을 두 개만 깨주세요. 전 이것 좀 씻고 있을게요.”

“너무 쉬운 일만 시키는 거 아냐?”

파삭-

달걀을 깨면서 케이가 말했다.

무심코 뒤를 돌아본 에르웰은 생각했다.

그렇게 달걀 껍데기까지 전부 부숴서 그릇에 넣어버리니 쉬우시겠지요.

“저기, 공작님…… 달걀 껍데기는 들어가면 안 되는데요.”

“아차.”

아차는 무슨…….

에르웰은 케이가 공작만 아니라면 버럭 성질을 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케이는 손가락으로 그릇 안에 잔뜩 들어간 달걀 껍데기를 빼내고 있었다.

“공작님. 그냥 다 버리고 다시 하…… 아니다, 그냥 제가 할게요.”

“아니야, 에르웰 양. 내가 잘할 수 있어.”

“아니요. 못 하실 거예요.”

“잘할 수 있다니까 그러네.”

그릇을 사이에 두고 서로 뺏으려 하다가.

미끌-

그릇이 손에서 빠져 날아갔다.

빙글빙글 날아가며 주방 여기저기로 흩뿌려지는 달걀.

머리에 달걀을 뒤집어쓴 에르웰이 케이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케이도 에르웰을 마주 보며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에르웰의 손이 천천히 올라가더니 주방 입구를 가리켰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케이는 그녀의 굳게 다문 입술 안에서 얼마나 많은 욕설이 맴돌다 사라지는지 알 수 있었다.

“알겠어, 레이디 에르웰. 잘 부탁할게.”

축 처진 어깨로 주방을 나가는 케이.

그제야 에르웰은 리시를 위한 환자식을 만드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

리시는 영양가가 가득하고 소화가 잘되는 환자식을 먹고, 상큼달콤한 레몬 티도 마시며 하루를 보냈다.

꼬박 하루를 앓고 나니, 다음 날에는 상태가 조금 나아졌다.

기침도 가라앉고 두통도 어느 정도 가시기는 했지만, 온몸이 나른하고 묵직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럴 때 더 쉬셔야 해요.”

에르웰의 조언에 따라서, 리시는 침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방 안의 공기가 따뜻했다.

‘토미는 잘 지내고 있을까?’

그저께 입학했으니 두 번째 밤을 보내고, 오늘 세 번째 날을 맞이했을 것이다.

‘같은 방을 쓰는 아이와는 잘 지내야 할 텐데……. 괜찮을까?’

아카데미 기숙사에서 룸메이트를 잘못 만나면 내내 다툼이 생긴다고 들었다.

토미의 룸메이트는 토미를 거의 신처럼 추앙하는 소년이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리시는 걱정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주말에 토미가 오면 환영 파티를 열어주고 싶은데…….’

고작 며칠 저택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거지만, 다들 이렇게 널 기다렸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예쁜 옷이랑 편한 신발도 좀 더 사주고 싶고……. 주말에 토미가 돌아오면 같이 시내에 나가야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는 날이 저문 후였고, 케이가 옆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책을 읽는 그의 옆모습이 보기 좋아서, 리시는 잠시 그의 얼굴을 감상했다.

리시의 시선을 느낀 듯 케이가 고개를 돌렸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목소리는 괜찮지 않은 것 같은데.”

케이의 커다란 손이 리시의 이마를 덮었다.

“열은 좀 가라앉은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책을 그렇게 읽고 있었어?”

“아, 이거?”

케이가 책 표지를 보여줬다.

[환자를 위한 가정식 100선]

생각지도 못한 제목에 리시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뭐야?”

“당신한테 요리를 해주고 싶어서 에르웰을 도우려고 했다가 아주 호되게 혼이 났거든. 주방 금지령이 떨어졌어.”

“무슨 짓을 했기에……?”

“우선 달걀로 시작했지.”

케이는 주방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달걀을 제대로 깨지 못한 데다가 그릇을 날려버렸고, 나중에 또 슬그머니 들어가서 도우려 하다가 에르웰이 잘 볶아놓은 채소를 태워버렸고…….

길어지는 케이의 만행을 듣던 리시가 물었다.

“에르웰한테 안 맞았어?”

“그거 알아, 리시? 에르웰은 의외로 인내심이 깊더군.”

“그러게. 정말 놀라워.”

케이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자꾸만 잠이 쏟아졌다.

“케이. 내일이면 낫겠지?”

“나을 거야.”

“그럼 내일은 토미 환영 파티를 준비하자.”

“그래. 그러자. 지금은 좀 더 자. 많이 자야 한다더라.”

리시는 그날 밤에도 푹 잤지만, 몸은 나아지지 않았다.

토미가 오는 날까지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듯한 감각이 사라지지 않고, 자꾸 잠이 쏟아지는 데다가 으슬으슬 떨리기까지 했다.

리시는 저택 입구까지 토미를 마중 나가서 환하게 웃으며 아이를 안아주고 싶었는데, 결국 응접실 소파에 앉은 채 토미의 귀가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

“아가, 많이 안 좋은 게냐?”

와이번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토미를 환영해주기 위해 노공작 내외와 젠, 엘디까지 그린 저택에 찾아온 터였다.

어제저녁에 도착한 그들은, 언제나 씩씩한 리시가 아직까지 기운을 차리지 못하자 안절부절못하며 리시의 상태를 살폈다.

“너는 애가 옆에 붙어 있으면서 리시를 좀 잘 챙기지 못하고.”

헤레이나가 케이를 타박했다.

쌀쌀한 밤에 리시를 잡아둔 장본인인 케이는 반박할 말이 없기에 묵묵히 리시의 옆에 앉아 있었다.

“하여간 이 인간은 다들 자기처럼 튼튼한 줄 아는 게 문제야.”

젠도 헤레이나를 거들었다.

“형수, 의원은 뭐래?”

엘디의 질문에 리시와 케이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감기에 걸리자마자 에르웰이 준 약을 먹고 에르웰의 보살핌을 받은 터라, 의원을 부를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엘디가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의원도 안 부른 거야? 며칠째 아프면서?”

“우리에겐 레이디 에르웰이 있으니까.”

케이의 말에, 구석에 서 있던 에르웰이 입술을 오므렸다.

‘나도 만능은 아닌데…….’

하지만 에르웰 또한 자신이 보살피면 리시가 금방 나을 거라고 생각한 건 사실이기에,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럼 이럴 게 아니라 얼른 의원을…….”

와이번이 당장이라도 의원을 부르러 뛰어나가려 하는데,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토미가 들어왔다.

토미는 응접실에 모인 사람들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곧 환하게 웃었다.

“다녀왔습니다.”

토미의 밝은 표정을 보자, 리시는 그동안의 아픔이 싹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리시는 현기증을 느끼고 도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본 토미가 황급히 달려와서 리시의 앞에 섰다.

“아이리스 님. 어디 아프세요?”

“아니야. 잘 다녀왔어, 토미?”

“네. 저는 잘 다녀왔는데…….”

토미가 난처한 듯 시선을 문 쪽으로 돌렸다.

토미에게 가려져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소녀가 응접실 입구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제야 소녀를 발견했다.

케이가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실리어?”

웨스트 피아몬도 후작의 영애이자, 미르의 조카인 실리어가 토미와 함께 그린 저택을 찾아왔다.

(192) 외전 ; 게으른 공작부인의 나날 (13)

모두의 주목을 받으면서도 실리어는 긴장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풍성한 치마를 잡고 무릎을 살짝 굽히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피아몬도 후작 가의 실리어입니다.”

미르가 주최했던 여행에서 만났을 때와 달리, 실리어는 도도한 귀족 영애다운 모습이었다.

“그린 공작님과 공작부인께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실례를 무릅 쓰고 토미를 따라왔어요.”

“제가 절대 싫다고 했는데…… 제멋대로 마차에 올라타서 떼어놓을 수가 없었어요.”

토미가 변명하듯 말했다.

토미를 데리러 갔었던 나단과 월라스가, 실리어의 뒤에서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그들은 토미와 실리어를 지켜보는 게 재미있어서 견딜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케이는 간신히 웃음을 삼키며 진지하게 말했다.

“환영해, 실리어.”

케이가 실리어의 방문을 허락하자, 토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나저나 네가 그린 아카데미 학생이었는지는 몰랐는데. 프리난 대공국에도 명망 높은 아카데미가 있지 않나?”

“있지요. 하지만 그린 공작부인께서 설립하신 아카데미에 다니고 싶었어요. 아버지도 그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셨고요. 작년에 입학해서 올해 2학년이 되었답니다.”

“그렇군. 앞으로 토미를 잘 부탁할게.”

“맡겨주세요, 공작님.”

토미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아카데미에서 만난 실리어는 여행에서와 완전히 달랐다.

-“어머나. 토미. 토미도 그린 아카데미의 학생이 되었군요.”

전에는 쓰지 않던 존댓말을 쓰며 정중하게 인사를 해올 때만 해도, 여행 때만큼 귀찮지는 않겠다고 안심했었다.

물론 실리어는 여행 때처럼 토미를 졸졸 따라다니지는 않았다.

다만 실리어가 먼저 나서서 토미에게 인사를 한 일로, 순식간에 소문이 퍼졌다.

-“토미, 너 실리어 님이랑 사귄다면서?”

저택 안에만 있던 토미는 ‘사귄다.’라는 말에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지 몰랐다.

어쨌든 서로 아는 사이인 건 사실이기에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오만 가지 소문이 퍼져나갔다.

며칠 지나지 않아 왜인지 실리어가 토미의 여자친구가 되어 있었다.

실리어는 그 소문에 대해 제대로 해명하지 않았고, 토미는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올지 감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 소문을 해결하기에 토미는 경험이 너무 부족했다.

흐뭇하게 토미와 실리어를 지켜보던 리시는, 몰려오는 피곤함에 저도 모르게 하품을 했다.

리시가 남들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 있는 일.

“어머나. 죄송해요. 요즘 왜 이렇게 잠이 쏟아지는지…….”

“아가, 너는 역시 들어가서 좀 쉬는 게 좋겠구나.”

“그래, 리시. 토미와 실리어는 우리가 챙길 테니까 오늘은 좀 쉬렴.”

와이번과 헤레이나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형수, 밥은 잘 챙겨 먹는 거 맞아? 너무 창백한데. 아, 일단 의원을 부르자고. 토미, 형 올 때까지 여자친구랑 좋은 시간 보내고 있어.”

“여자친구 아니라고요.”

엘디가 토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고 나가려 할 때.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응접실에 울려 퍼졌다.

“공작부인. 임신하신 것 아닌가요?”

순간, 침묵이 내리깔렸다.

다들 멍하게 ‘임신’이라는 단어를 꺼낸 소녀의 입술을 응시했다.

실리어는 자신이 불러일으킨 충격을 깨닫지 못한 듯, 명랑하게 말했다.

“저희 언니가 얼마 전에 임신했는데, 공작부인과 똑같은 증상이었거든요. 창백해지고 계속 피곤해하고 잠만 자고. 혹시 몸이 으슬으슬 떨리지는 않으세요?”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리시를 돌아봤다.

숨도 쉬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던 리시는 여러 번 눈을 깜빡거리다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헤레이나와 젠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고, 엘디와 와이번, 그리고 케이의 부하들이 “의원!”을 외치며 뛰어나갔다.

에르웰이 달려들어 리시의 이마에 손을 얹고 열을 재봤고, 크리시나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래, 임신…… 임신했을 때 증상이지…… 내가 왜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지?”

그럴 만도 했다.

리시와 케이가 결혼한 지도 6년이 다 되어간다.

금실이 좋아서 매일 밤 좋은 시간을 보내는데도 아이가 생기지 않은 데다가, 리시와 케이도 그 부분에 대해 크게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래서 다들 그 부분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하고 있었기에, 평소라면 쉽게 짐작해볼 만한 증상을 떠올리지 못했다.

리시는 여전히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임신…… 내가……?’

지난 삶에서도 아이를 갖지 못했기에,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인 줄 알았다.

그래서 포기했다.

더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이번 삶으로 회귀해서 아주 많은 행복을 얻었으니, 더 이상 욕심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닐지도 몰라. 그냥…… 비슷한 증세일 뿐일 수도 있어. 너무 기대하지 말자. 너무 기대하면 안 돼.’

리시는 치마를 꽉 움켜쥐었다.

그러다가 케이가 떠올라서 돌아봤더니 케이는 오묘한 표정을 지은 채 얼어붙어 있었다.

“저기…… 케이?”

리시의 부름에 케이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삐끄덕 소리가 난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뻣뻣한 움직임.

“너무…… 너무 기대하지는 마. 아닐 수도 있어.”

“나는, 나는, 어…… 아무 생각 없어.”

아무 생각 없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서야, 리시는 그가 얼마나 ‘우리의 아이’를 기대했는지 깨달았다.

미안함과 서글픔이 밀려왔다.

임신이 아니면 어쩌지? 또 실망을 안겨주게 되면 어쩌지?

케이는 지금까지처럼 내색하지 않겠지만, 바로 그 점이 리시를 더욱 미안해하게 만들었다.

그때, 엘디와 제이미에게 호송 당하듯, 의원이 끌려 들어왔다.

의원은 응접실에 모여 있는 사람들 때문에 긴장한 듯했지만,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다들 나가주십시오.”

누구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의원이 엄하게 말했다.

“공작부인만 계셔야 제가 진찰하기 편합니다.”

그제야 다들 떨어지지 않는 발을 옮겼다.

타악-

응접실의 문이 닫히고, 의원이 리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진찰을 시작했다.

+++

케이는 창백한 얼굴로 복도에 서 있었다.

“임신…… 임신, 세상에. 임신이라니…… 임신…….”

“엘디, 가만히 좀 있어. 남들이 보면 오빠가 새언니 남편인 줄 알겠어!”

젠의 타박에도, 엘디는 복도를 이리저리 오가며 “임신…… 임신…….”이라고 중얼거렸다.

그건 와이번도 마찬가지였다.

와이번은 벌써 눈가가 촉촉해졌다.

“내가…… 내가 할애비가 되다니…… 응? 여보, 내가 할애비가…… 크흡…….”

감동에 목이 메는지 헛기침을 하는 와이번의 팔을, 헤레이나가 단단히 붙들었다.

“벌써부터 그러지 말아요. 그러다가 임신이 아니면 리시가 많이 속상할 테니까.”

“아, 그렇지. 그래, 그래. 임신이면 어떻고 또 아니면 어때? 암, 우리 새아가만 건강하면 되는 거지.”

안절부절못하는 건 케이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단은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면서 유진을 닦달하고 있었다.

“유진, 나는 아이가 형수님을 닮아야 한다고 봐.”

“동감이다.”

“반드시, 어떻게든 그래야 해. 외모도, 성격도 형수님이랑 똑 닮아야 해. 방법을 생각해봐.”

“저택 곳곳에 형수님 초상화를 걸어두는 게 좋겠군. 조각상도 세우고. 형수님도 좋은 걸 보셔야 태교에 좋겠지.”

아직 진찰 결과가 나오지 않았는데도 설레발을 치는 두 사람을, 제이미가 나직한 목소리로 나무랐다.

“아직 확실하지 않은 일이니 입들 닥치고 있어요.”

말과는 달리, 제이미는 아까부터 계속 코를 문지르고 있어서 코끝이 빨갰다.

월라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어떡하지? 나 쪼꼬만 아기는 한 번도 못 안아봤는데…… 내가, 내가 아기를 떨어뜨리면 어쩌지?”

“걱정하지 마, 월라스. 네가 아기를 안을 기회는 없을 거니까.”

엘디가 벌써 아기를 안는 연습을 하듯 팔로 자세를 취하고 말했다.

실리어는 이 모든 반응이 신기하기만 했다.

실리어에게 있어서 그린 공작 가문은 감히 바라보기도 힘들 정도로 위대하고 고귀한 가문이었다.

그런 가문의 사람들이 임신 사실 하나 때문에 이렇게 초조해하고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니, 재미있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공작부인께서는 어마어마하게 사랑을 받으시는구나.’

언제나 냉랭한 토미도 볼을 빨갛게 물들이고 응접실 문만 노려보고 있었다.

달칵-

문이 열리자, 다들 행동을 멈췄다.

의원이 복도로 나왔다.

그녀의 표정만 보고서는 결과가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새, 새언니는……?”

젠이 달려들 듯 묻자, 의원이 말했다.

“공작부인께 직접 들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후, 하나둘씩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리시는 아까처럼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조용히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리시는 좋은 이야기를 들은 사람 같지가 않았다.

다들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으로 침묵을 지키는데, 케이가 성큼성큼 걸어가서 리시의 앞에 섰다.

“리시, 우리 데이트하러…….”

“축하해.”

“응?”

리시가 고개를 들어 케이와 눈을 맞췄다.

“당신, 아빠 됐어.”

“……응?”

또다시 얼어붙은 케이.

리시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쭉 돌아보며 말했다.

“여러분, 저…… 임신했대요.”

 

+++

케이는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자신과 리시를 반씩 닮은 ‘우리의 아이’를.

하지만 리시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기에 내색하지 않았다.

리시만 있으면 된다고, 그녀만 내 곁에서 살아 있으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리시가 있기에 케이의 삶이 완성되었기에, 더 많은 것을 바라는 건 과욕으로 여겼다.

“내가…… 내가 할아버지…… 할아버지라니…….”

“리시, 뭐 먹고 싶은 건 없니?”

“리시, 그……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하는데…… 어, 그…… 필요한 건 없어요? 물…… 물이라도 마실래요?”

“내 조카의 검술 선생은 나밖에 없겠지. 휴가계를 내야겠어. 아주 긴 휴가계. 역시 조카의 보모는 내가 하는 게 낫겠지.”

케이의 가족들은, 케이가 알던 것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였다.

감격에 젖어서 눈시울이 붉어진 아버지, 리시에게 뭐라도 하나 더 해주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는 어머니와 여동생, 자기가 보모를 하겠다며 야단인 남동생까지.

야단법석인 건 케이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케이의 부하들은 ‘그린 가문의 후계자는 형수님을 닮은 아이로!’라는 목표를 세우고 심각한 토론의 장을 열었다.

토미는 실리어를 귀찮아하던 것도 잊은 듯, 그녀에게 두 손으로 적당한 크기를 만들어 보이며 질문을 던져댔다.

“아기는 요만해? 이것보다 작다고? 그럼 요만한가?”

에르웰과 크리시나는 제정신이 아닌 듯한 그린 가 사람들을 보며, 각오를 나누고 있었다.

“크리시나, 우리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해.”

“그러게, 에르웰. 지금 공작부인을 보살필 정신이 있는 건 우리뿐이야.”

그 소란 사이에, 리시와 케이는 손을 잡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케이는 마치 꿈결 속에 있는 기분으로 모든 것을 지켜보고 귀에 담았다.

이 기분을 무어라 표현해야 좋을지, 케이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남편으로서 임신한 아내에게 해줄 말이나 행동이 있을 텐데, 그런 것 또한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한심하게도 그저 아내의 손을 꽉 붙잡는 것으로 자신의 기분을 전했다.

리시의 머리가 살며시 케이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리시도 느끼지 못한 새에 흐른 눈물이 케이의 어깨를 적셨다.

모두가 리시의 임신을 벅찰 정도로 기뻐해 주고 있었다.

리시는 앞으로 태어날 자신의 아이가 모두의 축복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세상을 살아가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공작부인의 게으른 나날이 흘러가고, 눈부시게 빛나는 나날이 시작되었다.

<외전 ; 게으른 공작부인의 나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