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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꽃과 짐승 ...

잿빛 눈동자가 리시의 목덜미를 더듬었다. ...

그는 당장이라도 목을 물어뜯고 싶다는 듯 입술을 살짝 벌렸다가 닫았다. ...

음습하게 가라앉은 시선이 리시의 목을 더듬고 내려가 가슴으로, 복부로 내려갔다. ...

날카로운 시선이 드레스를 뚫고 들어와 온몸을 샅샅이 애무하는 기분이 들었다. ...

도망치고 싶었다. ...

역시 이 남자를 찾아온 건 잘못이었다. ...

반듯하게 자란 성유물의 수호자로 알려진 그가, 사실은 얼마나 포악한지 알고 있었다. ...

포악하기에 나를 지켜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건 오류였다. ...

짐승을 피해, 짐승의 소굴로 들어온 꼴이었다. ...

그러나 리시는 도망치지 않았다. 예전의 리시라면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았을 테지만, 이번에는 주저앉지도 않았다. ...

리시는 동요를 드러내지 않고 턱을 살짝 들어 그를 오시했다. ...

흔들림 없는 리시의 눈빛에, 그가 한쪽 입술을 비틀었다. ...

하지만 그의 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

피처럼 붉은 입술 사이로, 낮고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 지금 나한테 프러포즈를 한 건가? 그것도 제 발로 찾아와서?” ...

“그래요. 나랑 결혼해요,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님.” ...

케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

재미있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

리시의 속셈을 알아내겠다는 예리한 눈빛이었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은.” ...

케이가 성큼 다가와 리시의 앞에 바짝 붙어섰다. ...

케이에게서는 마치 숲을 담은 듯, 시원한 향기가 났다. ...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은데.” ...

그의 손이 슬며시 올라와 리시의 목덜미로 향했다. ...

커다란 손이 리시의 가느다란 목을 움켜쥐듯 다가오다가 살갗에 닿기 전에 멈췄다. ...

“결혼이라는 게 뭔지는 알고 있나?” ...

“알아요.” ...

아주 잘 알지. ...

“그렇다면…….” ...

멈춰 있던 손이 움직여 리시의 목에 닿았다. ...

차가운 손바닥이 목덜미를 쓸고 내려가 가녀린 어깨에서 멈췄다. ...

리시는 움찔, 몸을 떨었지만 그를 향해 고정한 시선을 떨구지는 않았다. ...

“부부끼리 뭘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겠군.” ...

알다마다. ...

너무 잘 알아서 깜짝 놀랄걸. ...

속에 있는 말을 하는 대신, 리시는 검지를 들어 제 어깨에 머물러 있는 케이의 손목을 밀어냈다. 케이의 손은 쉽게 떨어졌다. ...

“우리 지금은 결혼한 사이가 아니잖아요.” ...

케이가 싱긋 웃으며 두 손을 살짝 들어 항복 표시를 하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

여전히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아서, 리시는 조금 섬뜩하기까지 했다. ...

“레이디 위틀로.” ...

그가 손바닥을 위로 올려 문을 가리켰다. ...

“꺼져.” ...

무례하고 명백한 거절이었다. ...

다른 레이디였다면 창피해서 고개도 들지 못했을 것이다. ...

하지만 리시는 그렇지 않았다. ...

이 정도의 창피함은 아무것도 아니다. ...

그 집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제대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

리시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케이를 똑바로 응시했다. ...

“후치스 대상단의 주인인 알포드는 날 갖기 위해, 위틀로 공작에게 라벤트의 금광을 약속했어. 위틀로 공작은 그 금광을 받고 날 알포드에게 넘길 예정이야.” ...

“말이 짧아졌군.” ...

“당신이 먼저 짧게 했잖아. 존댓말이 좋으면, 당신이 먼저 써. 그럼 나도 그에 맞는 예의를 보여줄 테니까.” ...

케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

이번에는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

그는 말없이 리시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휙 돌아서서 소파로 걸어갔다. ...

소파에 털썩 앉아 다리를 꼰 그가, 턱으로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

앉으라는 의미겠지만 리시는 그러지 않았다. ...

이제 누구도 내게 명령하지 못한다. ...

내 인생은 내 마음대로. ...

누구도 내 삶을 멋대로 쥐고 흔들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

“당신이 가진 베노트의 금광을 준다면, 위틀로 공작은 분명 당신에게 날 넘기겠지. 베노트의 금광이 라벤트의 금광보다 훨씬 크니까.” ...

“레이디 위틀로는 본인이 베노트의 금광만큼이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내 생각에는 아닌데.” ...

“금방 망할 금광 따위보다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 낫지 않겠어? 적어도 아직 시들지는 않았으니까.” ...

케이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

그는 베노트의 금광이 금방 망하리라는 걸, 공작가의 꽃이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하고 있을 것이다. ...

하지만 리시는 그 의문을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

케이는 의문을 입 밖에 내는 대신, 손으로 방문을 가리켰다. ...

“다시 한번 말하지만, 레이디 위틀로. 꺼져.” ...

리시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자, 케이가 팔짱을 끼었다. ...

“나는 공작가의 꽃이 화사하게 피었든, 시들어가든 관심 없어. 곧 망해버릴 광산씩이나 주고 사 와야 할 만큼, 당신이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란 뜻이야.” ...

케이는 흥미가 떨어진 듯 나른한 눈으로 리시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

“그러니까 레이디 위틀로, 꺼져. 그 예쁜 목을 부러뜨리기 전에.” ...

케이가 공작가의 꽃 따위를 관심에 둘 리 없다는 건, 리시도 이미 알고 있었다. ...

다만 가진 패를 드러내기 전에 찔러봤을 뿐이다. ...

‘이제 꺼내는 수밖에 없나.’ ...

리시는 조용히 심호흡했다. ...

이 패를 꺼낸다는 건, 이 목도 같이 내놓는다는 의미다. ...

이 패를 꺼냈을 때, 케이가 리시를 살려둘지, 죽일지 알 수 없었다. ...

리시가 그린 백작 가에 방문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고, 그 사실을 케이도 알고 있었다. ...

어쩌면 케이는 리시를 죽임으로써 모든 것을 덮어두려 할지도 몰랐다. ...

‘여기서 죽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상관없어.’ ...

리시는 앞으로 자신에게 벌어질 일을 알았다. ...

그런 삶을 사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낫다. ...

마음을 견고히 다지고 입을 열었다. ...

“수인들의 왕.” ...

작게 읊조린 소리에, 케이의 눈이 커졌다. ...

견고했던 잿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

“당신이 뭘 하려는지 알아, 케이브란트.” ...

케이가 천천히 일어났다. ...

그의 뒤로 어두운 살기가 넘실거렸다. ...

살기가 흘러와 리시의 육체를 집어삼켰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은 피어보지도 못하고 떨어지겠군.” ...

케이의 손이 리시의 목을 움켜쥐었다. ...

핏빛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보였지만, 리시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

“꽃이 떨어지면 당신의 목도 떨어질 거야.” ...

목이 죄이는 순간에도 담담하게 흘러나오는 리시의 음성에, 케이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

잿빛 눈동자를 채운 살기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호기심이 채웠다. ...

“당신의 계획을 알아. 그 계획은 실패하고, 당신은 죽을 거야.” ...

“또 뭘 알지?” ...

“이제 당신이 나랑 결혼할 수밖에 없다는 거.” ...

케이가 눈을 크게 떴다가 곧 빙그레 웃었다. ...

“그 모든 걸 어떻게 아느냐고 물어도 답해주지 않겠군.” ...

“그래.” ...

“결혼하지 않는다고 하면 나가서 내가 수인이라는 걸 알릴 거고.” ...

“맞아.” ...

“여기서 죽인다고 해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을 거고.” ...

“응.” ...

“그런데 여기서 널 죽이면 나도 죽는 거고.” ...

“영리하네.” ...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

“이미 믿고 있잖아.” ...

리시는 거의 노래처럼 들릴 만큼 즐거운 어조로 말했다. ...

케이는 말없이 제 앞에 있는 겁 없는 여자를 내려다봤다. ...

핏줄이 비칠 만큼 하얀 피부와 가늘고 긴 목, 쭉 뻗은 예쁜 쇄골 아래의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

사내들이라면 군침을 흘릴 만한 여자였고, 실제로도 그렇다는 소문을 들었다. ...

온실 속에서 곱게 자란 위틀로 공작가의 꽃 아이리스를 손에 넣고 싶어 하는 남자가 수도 없이 많았다. ...

이 육체를 안고 싶어서 전전긍긍하는 사내들이 넘치겠지만, 케이에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

낭창낭창한 육체나 꽃처럼 아름답다는 얼굴 따위에, 케이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

케이의 관심을 끈 건, 리시의 태도였다. ...

케이의 살기는 물질감을 갖고 있었다. ...

보이지 않지만, 형체가 있어서, 실제로 상대의 육체를 짓눌러 공포에 질리게 했다. ...

평범한 여자, 아니, 제대로 훈련받은 병사라도 케이의 살기를 이기지 못해 오줌을 지리는 게 정상이었다. ...

하지만 리시는 그러지 않았다. ...

겁에 질린 눈빛조차 하지 않았다. ...

그것이 케이의 흥미를 끌었다. ...

게다가 리시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

리시의 눈빛에는 그녀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

“앉아서 얘기하지.” ...

케이가 리시의 목을 놔주고 소파로 걸어갔다. ...

리시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고고하게 서 있었다. ...

케이는 인상을 찌푸리다가 아까 리시가 한 말을 떠올렸다. ...

케이가 소파 맞은편을 정중하게 가리키며 말했다. ...

“부디 앉아주시겠습니까, 레이디 위틀로.” ...

리시가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

“좋아요.” ...

소파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그녀를 보자, 케이는 사람들이 리시를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

허리와 목을 똑바로 편 꼿꼿한 자세, 머리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흐르는 기품, 느릿하고 우아한 태도, 겁에 질린 작은 새처럼 가냘파 보이는데도 흔들림 없는 강인한 눈빛. ...

이윽고 소파에 앉은 리시가 두 손을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올리고 케이를 주시했다. ...

리시는 고고한 표정으로 케이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내가 수인이라는 거. 내가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는 거. 그게 실패해서 내가 죽으리라는 거. 당신이 그런 것들을 안다는 건, 이유를 묻지 않고 믿어드리죠.” ...

“…….”

“하지만 실패하고 죽을 수인 따위에게 결혼을 청하는 의도 정도는 알고 싶은데.” ...

흔들림 없던 보라색 눈동자에 술렁, 파문이 일었다. ...

끔찍한 걸 떠올리는 듯, 리시의 표정이 잠시 허물어졌다. ...

옆으로 떨어졌던 리시의 눈동자가 다시 케이에게로 향했다. ...

“그 빌어먹을 공작가에서 벗어나고 싶거든요.” ...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

“온실 속의 꽃인 줄 알았는데.” ...

“온실?” ...

리시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

어째서인지 케이는, 지금의 리시가 이 방에 들어온 어느 순간보다도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

“거긴 온실이 아니에요. 나도 꽃이 아니고. 나는 지옥의 불길에서 아등바등 살아남은 잡초에요.” ...

리시를 마주한 지 1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리시는 계속 케이를 놀라게 했다. ...

케이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

“그린 백작가도 따뜻한 온실은 아닐 겁니다, 레이디 위틀로.” ...

“따뜻한 온실이 될 거예요, 그린 백작님.” ...

리시가 단호하게 말했다. ...

“이 세상에서 제일 견고하고 따뜻한 온실. 누구도 허락 없이는 발을 디디지 못하는, 권력의 정점에 선 온실.” ...

권력의 정점. ...

이 여자는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고 말하는 걸까? ...

“그 온실에서 나는 온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해.” ...

리시의 입가에 달콤한 미소가 피었다. ...

“게으르게 살 거예요.” ...

케이는 단숨에 리시가 좋아졌다. ...

(2) 지는 꽃, 피는 꽃. ...

끈적거리는 손이 리시의 목을 졸랐다. ...

목을 조르는 손길이 평소보다 강했다. ...

아마도 오늘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보다. ...

알포드는 기분이 나쁘면 언제나 리시에게 손찌검을 했다. ...

“큭…….” ...

벌어진 입술 사이로 괴로운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알포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

“X팔. X팔.” ...

욕설을 내뱉으며 손에 더 힘을 줬을 뿐이다. ...

‘아, 그렇구나.’ ...

오늘 나는 죽겠구나. ...

리시를 보는 알포드의 눈빛이 달라진 걸 느낀 지는 꽤 오래됐다. ...

리시는 벌써 마흔을 앞두고 있었다. ...

돈 많은 알포드의 후처로 들어오고 싶어 하는 여자들은 많았다. ...

알포드에게 있어, 공작가에서 데려와 아내로 삼은 리시는 이제 버리지 못할 쓰레기일 뿐이었다. ...

오랫동안 산소를 받지 못한 폐가 비명을 질렀다. 눈앞이 흐릿해졌다. ...

늘 죽고 싶었지만 죽을 용기가 없었다. 그래, 이렇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싫은 남자의 손에 죽는 것이야말로, 이 한심하고 비참한 인생의 말로에 어울렸다. ...

그런 와중에도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

‘나는 왜 이렇게 살아왔을까?’ ...

이렇게 죽을 줄 알았다면 뭐라도 해볼걸. 죽음을 무릅쓰고 무엇이라도 해볼걸. ...

왜 목소리 한번 내지 못한 채, 그들이 하라는 대로, 네가 하라는 대로, 당신들이 하라는 대로, 그리 살아왔을까? ...

얼마 전 보았던 브리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

이제는 황후가 된 그녀는, 몹시도 행복해 보였다. ...

브리트니는 모든 걸 가졌다. ...

권력의 최정점에 선 남편과 건강하고 귀여운 아이들, 그리고 그녀의 애인이었던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까지. ...

똑같이 공작의 딸로 태어났건만, 브리트니와 리시의 삶은 이토록 달랐다. ...

‘넌 항상 주인공이었지.’ ...

아이리스는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 불렸지만, 단 한 순간도 꽃인 적이 없었다. ...

위틀로 공작가의 진짜 꽃은 브리트니였다. ...

브리트니는 리시가 꽃이 될 수 없도록 몇 번이나 짓밟고 꺾었다. ...

그럼에도 리시는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한 채, 밟히면 밟히는 대로, 꺾이면 꺾이는 대로 그리 살아왔다. ...

그 결과가 이거다. ...

흐릿했던 시야조차 이제는 사라졌다. 어둠에 잠식되자 덜컥 겁이 났다. ...

‘정말로 이게 끝이야?’ ...

후회 따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소망을 품는 건 사치였으니까. ...

하지만 침잠하는 죽음에 질식하면서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

‘이렇게는 싫어.’ ...

단 한 번도 행복한 순간이 없었다. ...

‘이런 식으로 죽고 싶진 않아.’ ...

행복의 한 조각 맛보지 못한 채 떠나야만 하는 건 너무도 처절한 일이었다. ...

‘다시 한번…….’ ...

새롭게. ...

‘딱 한 번만 더…….’ ...

뜨겁게. ...

‘오롯이 한 번…….’ ...

행복하게. ...

그리 살아보고 싶었다. ...

귓불이 뜨거웠다. 이제 끝난 줄 알았는데 통증이 느껴지는 게 이상했다. ...

-정말이야? ...

뜨거움 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

-정말 또 살아보고 싶어? ...

작은 새가 재잘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

응, 이라고 대답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

무언가 끊어지는 느낌과 함께, 리시는 자신이 완전히 죽었음을 깨달았다. ...

죽음이라는 건 이토록 쉽고 허무한 것이구나. ...

죽음을 자각하자마자 눈앞에 많은 것들이 흘러갔다. ...

‘이게 주마등이라는 걸까?’ ...

그것은 리시가 겪은 일이기도 하고, 겪지 못한 일이기도 했다. 과거이기도 하고, 현재이기도 하고, 미래이기도 했다. ...

‘주마등은 내가 과거에 겪은 일들만 흘러가는 줄 알았는데…….’ ...

그렇지 않은가 보다. 정보가 해일처럼 밀어닥쳐 리시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죽었는데도 두통이 느껴져서 덜컥 겁이 났다. ...

죽으면 다 끝인 줄 알았는데 아닌 걸까? ...

새로운 고통의 시작인 걸까? ...

죽음조차 내게 안식을 주지 못하는 걸까? ...

나는 영원한 지옥을 살아가야만 하는 걸까? ...

-살아봐. ...

또다시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그리고. ...

아이리스는 눈을 떴다. ...

+++

리시는 눈을 깜빡거렸다. ...

죽었다가 시간을 돌아와 되살아난 지 벌써 한 달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그때의 꿈을 꾼다. ...

잠에서 깰 때마다 몸에 소름이 돋는다. 악몽이 현실이고, 현실이 악몽일까 봐서. ...

처음에 시간을 돌아왔을 때는, 무척이나 긴 악몽을 꿨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꿈에서 있었던 일들이 되풀이되자, 그것이 평범한 악몽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

믿을 수 없지만, 리시는 악몽과도 같은 삶을 살았고, 죽었고, 시간을 돌아 되살아난 것이다. ...

눈에 익은 천장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천장 구석에 있는 곰팡이를 발견했다. ...

요 며칠 비가 내린다 싶더니, 역시나 곰팡이가 피었다. ...

벌컥-! ...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고, 하녀가 들어왔다. ...

“아가씨. 아직도 누워 있어요?” ...

하녀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 불리는 아이리스가, 저택에서 이런 취급을 받는 줄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

위틀로 공작가에서 리시의 위치는 하녀들보다도 낮았다. ...

“일어나려고 했어요.” ...

리시는 고분고분 침대에서 내려왔다. ...

“일찍, 일찍 좀 일어나요. 오늘 귀한 손님이 오셔서 바쁘다고요.” ...

하녀가 리시에게 걸레를 던졌다. ...

리시가 슬쩍 몸을 피하는 바람에, 걸레는 침대 끝을 맞추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

“나와서 복도 창문 좀 닦아요. 드레스는 그 후에 갈아입고.” ...

“알겠어요.” ...

“하, 진짜. 뭐 하나 나서서 하는 일이 없다니까. 지가 진짜로 공작님의 딸이라도 되는 줄 아나.” ...

하녀가 투덜거리며 방에서 나갔다. ...

리시는 바닥에 떨어진 걸레를 집어 들고 서늘하게 웃었다. ...

“공작의 딸 자리 따위, 내 쪽에서 거절해주지.” ...

 

글로번 위틀로 공작에게는 딸이 두 명 있었다. ...

장녀 브리트니와 막내 아이리스. ...

그중에서도 특히 아이리스의 외모가 아름답고 몸가짐이 발라, 사람들은 아이리스를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고 불렀다. ...

위틀로 공작 역시 막내 아이리스를 더없이 아껴서, 누구에게도 주지 않고 평생 데리고 살고 싶다고, 공공연하게 말해왔다. ...

어디까지나 공공연하게, 대외적으로만. ...

사실 아이리스는 위틀로 공작과 하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 ...

귀족이 애인을 두고 그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나는 일은 많았지만, 그 자식들은 귀족의 친자식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

하물며 하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말할 것도 없었다. ...

위틀로 공작부인은 자신의 남편이 하녀 따위와 정을 통해 아이를 낳았다는 끔찍한 사건을, 없는 일로 하려 했다. ...

둘 다 죽이기 위해 찾아간 허름한 방에서, 하녀의 품에 안겨 있는 갓난아기를 보는 순간, 위틀로 공작부인은 생각을 바꿨다. ...

“하녀는 죽이고 그 아이는 내 아이로 하겠어요.” ...

공작의 앞에서 공작부인은 말했다. ...

“그 아이를…… 키우겠다고?” ...

“그래요. 그 아이, 아주 예쁘게 자라겠더군요.” ...

“우리한테도 예쁜 딸이 있지 않소. 아들도 아닌 걸 굳이 키울 필요가…….” ...

“내 딸은 아무한테나 주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 계집의 딸은 다르죠.” ...

공작부인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맺혔다. ...

“곱게, 예쁘게, 잘 키우도록 해요. 중요한 순간에 팔아치우게.” ...

그리하여 아이리스는 위틀로 공작부인이 낳은 딸이 되었다. ...

아이리스는 위틀로 공작이 아끼는 막내딸로서 수많은 교육을 받으며 ‘팔아치우기 좋은 상품’으로 자랐다. ...

그렇다고 해서 공작 일가가 리시를 정말로 아껴준 건 아니었다. ...

그들은 리시를 하녀보다 못하게 대하고, 학대하고, 때리고, 굶겼다. ...

공작 일가가 리시를 대하는 분위기는 고용인들 사이에도 전해졌다. ...

공작 일가의 눈을 피해 리시에게 행하던 작은 괴롭힘이 조금씩 커졌고, 심지어 브리트니는 일부러 하녀들에게 시켜 리시를 발로 걷어차게 하거나, 리시가 하녀들 앞에 엎드리게 하기도 했다. ...

리시가 굴욕감을 느끼게 하는 걸, 브리트니는 무척이나 좋아했다. ...

-뭐라도 시켜. 쟤도 집안일을 잘해야 남편에게 사랑받지. ...

괴롭힘이라는 게 그랬다. ...

처음에 누군가는 리시를 불쌍히 여겼을지도 모른다. ...

또 어느 누군가는 ‘그래도 어떻게 공작님의 딸에게…….’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

하지만 한 명이 주도해서 ‘그래도 돼. 더 해도 돼.’라며 등을 떠밀자, 모두의 마음에 잔혹함이 깃들었다. ...

위틀로 공작가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리시는, 무슨 짓을 해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

청소를 끝내고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

‘귀한 손님’이 오는 자리라서, 하녀들이 최고급 드레스를 가져와 시중을 들어줬다. ...

코르셋을 꽉 죄고 있는데,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

“아이리스!” ...

브리트니가 경쾌하게 외치며 들어왔다. ...

하녀들은 리시를 대할 때와 달리 브리트니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

“괜찮아, 괜찮아. 얼른 아이리스 옷이나 갈아 입혀줘. 남편 될 사람을 처음 보는 자리인데, 예쁘게 하고 나가야지.” ...

브리트니는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

“아이리스, 넌 좋겠다. 그 커다란 상단의 주인인 알포드랑 결혼하다니. 다들 엄청 부러워할 거야.” ...

알포드. ...

‘역시 나는 시간을 돌아왔어.’ ...

쭉 평범한 일상이었기에, 회귀한 것이 사실인지 긴가민가하기도 했다. ...

하지만 오늘 알포드의 방문으로 확신했다. ...

나는 마흔에 가까울 때까지 살다가, 내 남편이었던 알포드의 손에 죽었고, 죽음 속에서 아주 많은 것들을 본 후, 20살 때로 되돌아왔다. ...

‘그때 곧장 케이를 찾아가길 잘했어.’ ...

한 달 전, 되살아났을 때 리시는 곧장 케이를 찾아갔다. ...

지난 삶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

새로 얻은 인생을, 끔찍한 핏빛으로 물들이고 싶지 않았다. ...

죽음 속을 유영하며 알게 된 정보를 가지고, 케이와 협상했다. ...

집에 돌아온 후, 며칠이나 저택에서 사라졌다는 이유로 많이 맞기는 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

그리고 오늘. ...

알포드가 온다. ...

지난 삶에서도 이런 날에 알포드가 찾아왔었다. ...

‘그리고 위틀로 공작의 뜻에 따라서 순순히 결혼했지. 작은 항변조차 하지 않고.’ ...

이번 삶에서 리시는 그렇게 한심하게 살다가 죽을 생각이 없었다. ...

‘이번에는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내가 정할 거야.’ ...

  휙-! ...

브리트니가 갑자기 리시의 머리채를 잡아 세게 잡아당겼다. ...

“야, 내가 지금 말하잖아. 집중 안 해?” ...

리시가 눈동자만 움직여 브리트니를 쳐다봤다. ...

브리트니가 인상을 찌푸렸다. ...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고 봐?” ...

“언니한테 집중하라고…….” ...

퍼억-! ...

브리트니가 주먹으로 리시의 머리를 때렸다. ...

“누가 네 언니야? 아가씨라고 부르랬지?” ...

“네, 아가씨.” ...

리시가 고분고분 대답하자, 브리트니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놔줬다. ...

“하여간 그 아저씨, 저번에 파티에 갔다가 봤거든. 엄청 배불뚝이야. 얼굴에 기름이 줄줄 흐르더라. 그걸 보니까 너, 그 집 가서 잘 먹고 잘살기는 하겠더라. 너도 그렇게 배 나오고 기름 줄줄 흐르게 될까 봐 좀 걱정되네.” ...

“…….”

“그래도 너 같은 애를 아내로 삼고 싶다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감사한 마음으로 그 아저씨를 잘 모시고 살아. 알겠지?” ...

“네, 그럴게요.” ...

“우리 집안에 먹칠하는 행동은 하지 말고. 뭐, 네 깜냥에 뭘 할 수나 있겠나 싶다만은…… 또 생각해보면…….” ...

브리트니가 리시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

그리고 하녀들이 듣지 못하도록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너희 엄마가 헤픈 여자였잖아. 너도 그러고 다닐까 봐 걱정이야. 핏줄, 어디 안 가더라고.” ...

수백 번을 들은 말이기에 타격도 없었다. ...

지금까지는 이런 말을 들어도 묵묵히 넘어갔지만, 이제는 그래 줄 생각이 없었다. ...

세상에서 제일 멋진 말을 했다는 듯 미소 지으며 떨어지는 브리트니에게, 이번에는 리시가 다가갔다. ...

그리고 브리트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

“그렇게 따지자면 너희 아빠도 마찬가지야.” ...

“뭐……?” ...

브리트니가 방금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

브리트니가 너무 충격을 받아서 화를 낼 생각도 잊은 듯 입술을 뻐끔거리는데, 밖에서 시녀가 뛰어 들어왔다. ...

“아가씨, 아가씨! 큰일 났어요!” ...

“뭐야?” ...

브리트니가 시녀에게 짜증을 냈지만, 시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

“그린 백작님이,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님이 찾아오셨어요!” ...

리시는 미소 지었다. ...

케이브란트 그린. ...

거래를 받아들이기로 했구나. ...

(3) 탐나는 남자. ...

“케이브란트 그린? 정말로 그 그린 백작이야? 성유물의 수호자?” ...

브리트니의 눈이 번쩍 뜨였다. ...

리시에게 너희 아빠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은 일은, 케이브란트 그린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

“그렇다니까요. 좀 전에 오셔서 지금 공작님이랑 응접실에 계세요.” ...

“무슨 일로 온 거래?” ...

“제가 살짝 엿들었는데 공작님의 영애 어쩌고,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응접실로 들어가시더라고요. 목소리가 낮아서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

“공작님의 영애? 나? 내 얘기겠지?” ...

“당연하죠. 달리 누가 있겠어요?” ...

브리트니의 얼굴이 발그레 물들었다. ...

케이는 지금 사교계에서 제일 인기가 많은 남자였다. ...

성유물의 수호자 가문은 신성국의 가호를 받기에, 황제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직함이 백작이어도 공작과 맞먹는 권력을 갖고 있었다. ...

하지만 가문은 둘째 문제. 중요한 건 케이의 외모였다. ...

그는 말 그대로 아름다웠다. 넓은 어깨와 잘록한 허리, 큰 키에 긴 다리를 가진 그는, 신이 최선을 다해서 만든 조각상이란 평을 받았다. ...

손질하지 않은 듯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과 짙은 눈썹 아래에 자리 잡은 청회색 눈동자는, 그저 닿기만 해도 숨이 벅찰 만큼 근사했다. ...

완벽한 모양의 코 아래의 붉은 입술은 촉촉하고 유혹적이라서, 수많은 여자가 그 입술이 자신의 살갗을 더듬는 상상을 했다. ...

귀족 가 아가씨들은 케이의 아내가 되고 싶어 했고, 귀부인들은 케이를 애인으로 삼고 싶어 군침을 흘렸다. ...

그러나 신성국의 백작인 케이는, 퇴폐적인 외모와 달리 몸가짐이 발라서, 여자와 염문설이 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

“사실 말이야. 저번에 파티에 갔을 때, 그린 백작이 나한테 춤을 청해서 같이 춤춘 적이 있거든.” ...

춤을 춘 건 사실이지만, 케이가 춤을 청해오지는 않았다. ...

브리트니가 조심스레 다가가 춤을 청했고, 레이디의 춤을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기에 케이가 받아줬을 뿐이었다. ...

하지만 브리트니의 기억 속에서 그 일은 미화되어, 케이가 자신에게 간절히 춤을 청한 것으로 바뀌었다. ...

“그때 춤추면서 대화를 많이 나눴는데…….” ...

“그건가 봐요, 아가씨. 그때 아가씨한테 반하셨나 봐요.” ...

시녀가 얼른 브리트니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줬다. ...

“역시 그런 거겠지?” ...

“아무렴요. 아가씨가 얼마나 아름다우신데요. 거기다 춤 실력도 뛰어나시고. 어느 남자가 안 반하겠어요?” ...

“나한테 결혼하자고 하면 어떡하지?” ...

“아가씨 마음은 어떠신데요? 그린 백작님이 마음에 드세요?” ...

“잘 모르겠어.” ...

사실은 좋아 죽겠다. ...

“대화한 것도 그때가 처음이니까…… 그래도 여기까지 찾아왔으니까 좋게 만나서 얘기는 좀 더 해봐야지.” ...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니에요. 어서 가셔서 드레스를 갈아입으셔야죠.” ...

“맞다, 맞다. 그래야겠다.” ...

브리트니는 리시의 존재 자체를 잊은 듯, 시녀와 리시의 시중을 들던 하녀들을 데리고 방에서 나가버렸다. ...

리시는 떨어진 코르셋을 집어 들어 가만히 응시하다가 옆으로 휙 던져버렸다. ...

알포드에게 선보이기 위해 입어야 했던 드레스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벗어서 의자에 걸쳐놨던 옷을 집어 들었다. ...

하녀들이 입는 것보다는 조금 나은 수준의 낡은 원피스. ...

리시는 원피스를 입은 후, 거울 앞에 섰다. ...

드레스 차림에 맞게 꾸며서 고정한 머리가 원피스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

리시는 머리를 고정한 핀을 하나, 하나 빼냈다. ...

붉은 기가 돌아 분홍색으로 보이는 은발이 사르락, 사르락 목덜미를 타고 떨어져 내렸다. ...

리시는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대충 빗은 후, 빙그레 웃었다. ...

자신의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도 근사했다. ...

+++

글로번 위틀로 공작은 난처한 표정으로 케이를 쳐다봤다. ...

“그 애를 말입니까?” ...

“그 애라니요. 장녀인 브리트니 양 이야기를 할 때는 우리 딸이라고 하시더니, 막내인 아이리스 양은 우리 딸이 아니신가 봅니다.” ...

마치 위틀로 가의 사정을 안다는 듯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말에, 글로번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

케이가, ...

“위틀로 가문과 연을 맺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

라고 말했을 때만 해도, 군사적이나 경제적 동맹을 말하는 줄 알았다. ...

“위틀로 공작님의 영애께서 그리 아름다우시다던데…….” ...

케이가 그렇게 말을 흘렸을 때는, 당연히 브리트니를 말하는 줄 알았다. ...

얼마 전 파티에 다녀온 브리트니가, 그린 백작이 자신에게 춤을 청했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떠들어댔기 때문이었다. ...

공작가라는 이름이 붙긴 했어도 쇠퇴의 길을 걷는 위틀로 가문에, 성유물의 수호자인 그린 가문의 케이브란트는 몹시 탐나는 사내였다. ...

하지만 성유물을 찾는 것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고 들어서, 시도해볼 생각조차 못 하고 포기한 터였다. ...

그런 케이가 제 발로 찾아와 영애 운운했을 땐, 이걸 기회라고 생각했다. ...

“아이리스 양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

케이가 그리 말하기 전까지는. ...

케이가 찾아온 게 아이리스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

아이리스는 ‘곱게 키워 내보이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딸’이라는 명목으로, 파티에도 보내지 않았다. ...

위틀로 가문의 돈줄이 되어줄 만한 사내들에게만 한 번씩 보여줬고, 그들의 입을 통해 아이리스는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 되었다. ...

모두가 아이리스를 궁금해하는데도 사교계에 데뷔시키지 않았더니, 아이리스를 한번 보고 싶어서 몸 단 사내들이 많아졌다. ...

그렇게 아이리스의 몸값은 높아져 갔고, 얼마 전 알포드가 라벤트에 있는 광산을 언급해서 오늘 알포드와 계약서를 작성할 예정이었다. ...

그런데 찾아오기로 한 알포드는 안 오고, 느닷없이 케이가 방문을 하더니 아이리스를 내놓으란다. ...

난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아, 그…… 음…… 아직 장녀가 결혼하기 전이라서…….” ...

힘겹게 꺼낸 변명에 케이의 입술이 비틀려 올라갔다. ...

서늘한 미소에, 글로번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

“요새 누가 그런 것을 따집니까? 로드번 백작 가도, 프룬타 후작 가도 둘째나 막내부터 결혼시킨 것을 아실 텐데요. 심지어 가비자르 제국의 3황자님과 5황자님도 황태자님보다 먼저 결혼하셨지요.” ...

케이가 느릿하게 말했다. ...

“혹시 공작님께서는 이 케이브란트 그린이 위틀로 공작가문의 사위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

“그, 그럴 리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위틀로 백작님. 다만…… 우리 아이리스가 부끄러움이 많고 연약해서…… 아직은 결혼할 마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사교계에 나가는 것도 두려워해서요.” ...

“호오, 그래요.” ...

케이가 입술을 끝을 비쭉 들어 올렸다. ...

웃음기 전혀 없는 눈으로 짓는 미소가 무섭다는 걸, 글로번은 처음 알게 되었다. ...

“그렇다 들으니 더욱 탐나는군요.” ...

낭패다. ...

글로번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 다른 이유를 찾아냈다. ...

“아시다시피 요새는 연애결혼이 유행이지 않습니까. 우리 아이리스는 전부터 자신은 연애결혼이 하고 싶다고 몇 번이나 말해와서…….” ...

“베노트에 금광이 하나 있습니다.” ...

케이가 글로번의 말을 끊었다. ...

베노트의 금광이란 말에, 글로번의 귀가 번쩍 뜨였다. ...

그린 가 소유의 베노트 금광은 풍부한 금이 매장되어 있고,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수십 개나 발견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금광이었다. ...

알포드가 주기로 약속한 라벤트의 금광과 비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큰 금광이었다. ...

“결혼지참금으로 베노트의 금광을 드리려 했는데…….” ...

꿀꺽- ...

글로번이 군침을 삼켰다. ...

“아이리스 양이 연애결혼을 원한다고 하니, 아쉽게 됐군요.” ...

케이가 더는 볼일이 없다는 듯 일어났다. ...

“자, 자, 잠깐만요, 백작님!” ...

이제 몸이 단 쪽은 글로번이었다. ...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 아이리스를 키웠다. ...

베노트의 금광. 거기에 그린 가문의 명성까지. ...

아내의 말대로 아이리스를 죽이지 않고 키우기를 잘했다. ...

“더 대화할 것이 남았습니까?” ...

아이리스를 포기한 케이는 냉정했다. ...

글로번은 이대로 케이가 떠나버릴까 봐 불안했다. ...

“이, 일단, 일단 좀 앉으시지요, 백작님. 참으로 오랜만에 얼굴을 뵙는 거 아닙니까?” ...

“흐음.” ...

“거기다…… 가만 생각해보니, 우리 아이리스가 연애하는 게 부끄럽고 두렵다면서, 제가 정해준 남자와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한 적이 있다는 게 생각났습니다. 그러니까…… 좀 앉으십시오. 예?” ...

글로번이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

케이는 천천히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

한참 어린 애송이가 예의 없는 행동을 하는데도, 글로번은 화가 나지 않았다. ...

글로번의 머릿속은 ‘베노트의 금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

“그…… 베노트의 금광을 지참금으로 주신다고요.” ...

“이렇게.” ...

케이가 품에서 서류를 하나 꺼냈다. ...

“서류까지 준비해 왔습니다. 공작님은 그저 사인만 하시면 되지요.” ...

“그, 그렇군요.” ...

서류를 보는 글로번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

“그렇다면…… 어…… 아무래도 그린 백작님이 우리 아이리스를 많이 아껴주실 것 같으니…….” ...

똑똑- ...

노크 소리가 글로번의 말을 끊었다. ...

중요한 순간을 앞둔 글로번은 방해를 받아서 짜증이 치밀었다. ...

“뭐냐!” ...

“아버지, 저예요.” ...

브리트니의 목소리를 듣자, 글로번은 다른 생각이 들었다. ...

역시 그린 백작의 부인 자리를 아이리스 따위에게 넘기는 건 아까웠다. ...

목석같은 케이가 브리트니에게 춤을 청할 정도였으니, 브리트니를 다시 보면 마음이 바뀌지 않을까? ...

“들어와라.” ...

케이에게 묻지도 않고 대답했다. ...

문이 열리고 여느 때보다도 화사하게 꾸민 브리트니가 사뿐사뿐 안으로 들어왔다. ...

브리트니는 눈부신 금발을 살짝 묶어 몇 가닥 흘러내리게 하고, 어깨가 드러나지만 야하다기보다는 기품 있어 보이는 분홍 드레스를 입었다. ...

작은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 덕분에 가느다란 목선이 돋보였다. ...

브리트니는 인형처럼 예뻤다. ...

브리트니가 케이를 향해 치마를 살짝 잡고 무릎을 살며시 굽혀 인사했다. ...

“오랜만이에요, 그린 백작님.” ...

“그렇군요.” ...

“지난 파티 때 이후로 처음 뵙네요.” ...

“그렇군요.” ...

글로번은 흘끔 케이의 표정을 살폈다. ...

하지만 케이의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

“이, 일단 앉아라, 브린.” ...

“네, 아버지.” ...

브리트니가 글로번의 옆에 살포시 앉았다. ...

여전히 케이의 눈빛은 서늘했다. ...

“그, 그러고 보니, 지난 파티 때 우리 브리트니에게 춤을 청하셨다고……. 참으로 아름다운 한 쌍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린 백작님.” ...

“호오.” ...

케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

“그래요? 누가 그러던가요?” ...

“예? 아, 그게…….” ...

당연히 브리트니에게 들었다. ...

“그때, 저랑 춤추셨잖아요, 백작님. 기억 안 나세요?” ...

브리트니가 해맑게 물었다. ...

그런 브리트니를 보며 케이가 무심히 말했다. ...

“브리트니 양은 머리가 매우 나쁘신가 봅니다.” ...

“예?” ...

“그때 춤을 청한 것은 내가 아니라 브리트니 양이었는데요. 제발 한 번만 춤을 춰달라고 간절히 청하셨지요. 아, 마지막에 부디, 라는 말도 덧붙였던가요.” ...

브리트니의 얼굴이 빨개졌다. ...

브리트니의 성격상 이럴 때 빽 고함이라도 쳐야 하는데, 상대가 그린 가의 백작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

브리트니는 치마를 꽉 움켜쥐고 헐떡거렸다. ...

이럴 때 아버지가 나서주면 좋겠는데, 글로번은 안절부절못하며 케이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 ...

똑똑- ...

무겁고 민망한 공기를 깨고,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

이쪽에서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문이 열렸다. ...

문 뒤에 서 있는 건 리시였다. ...

“아이리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

화 풀 곳이 생겼다. ...

리시를 데리고 나가는 척 이 방을 나가서 리시에게 화풀이를 해야겠다. ...

그런 생각으로 브리트니가 벌떡 일어났는데, 그보다 먼저 일어난 케이가 아이리스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허름한 원피스를 입은 리시는,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고 케이가 자신의 앞까지 걸어오는 걸 지켜봤다. ...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 ...

리시의 앞에 멈춘 케이가 배에 손바닥을 얹고,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

“처음 뵙습니다, 아이리스 양. 그리고 간절히 청합니다. 저와 결혼해주십시오, 부디.” ...

(4) 짐승입니다. ...

브리트니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믿을 수 없었다. ...

‘이건 꿈이야. 그래, 이건 꿈일 거야. 현실이라면 그린 백작이 저 초라한 계집애한테 청혼할 리가 없잖아! 거기다…… 저 멍청한 계집애가 저렇게 당당하게 청혼을 받고 있을 리도 없고.’ ...

케이의 갑작스러운 청혼에도 리시는 당황하지 않았다. ...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오만한 눈으로 케이의 머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

“고개를 드세요, 백작님.” ...

“아이리스 양이 제 청혼을 받아주실 때까지, 이 머리는 이곳에 있을 겁니다.” ...

“제가 받아주지 않으면 평생 그리 계실 건가요?” ...

“이 자세로 석상이 되겠지요.” ...

리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

‘저게 뭔 짓이야? 남들 보는 앞에서? 왜 저래!’ ...

브리트니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

원래대로라면 리시의 자리에 자신이 있어야만 했다. ...

그런데 왜 저 계집애가 저 자리에서 케이와 농을 주고받는 걸까? ...

“그린 백작님이 이렇다 하시는데…….” ...

리시의 보라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움직여 글로번에게 닿았다. ...

“어찌해야 할까요, 아버지.” ...

브리트니도 휙 고개를 돌려 글로번을 쳐다봤다. ...

브리트니는 글로번이 화를 내며 리시를 쫓아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흠, 흠. 그…… 흠흠. 그린 백작님이 그렇게까지 네가 마음에 드신다는데, 받아드리는 게 어떻겠느냐?.” ...

“그게 무슨……!” ...

브리트니가 벌떡 일어났다. ...

글로번이 브리트니의 손목을 잡고 엄한 시선을 보냈다. ...

“넌 그만 나가라, 브리트니.” ...

“하지만 아버지. 저는…….” ...

저는, 다음에 뭐라고 해야 할까? ...

제가 갖고 싶었던 남자를, 모두가 탐내는 저 남자를 아이리스 따위에게 주고 싶지 않다고? ...

내가 저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

아이리스는 알포드 같은 기름진 늙은이와 결혼하는 게 어울린다고? ...

한 가닥 남은 이성으로 케이의 앞에서 추태를 부리지 않을 수 있었다. ...

“브리트니, 그만 나가.” ...

글로번이 단호하게 말했다. ...

브리트니는 글로번을 향해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을 던졌지만, 글로번은 브리트니의 시선을 피했다. ...

브리트니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

여기 남아 있어 봐야 브리트니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브리트니는 빠르게 방을 나가다가 케이를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

“후회할 거예요, 그린 백작님.” ...

“글쎄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

“흥.” ...

브리트니가 나간 후, 글로번이 말했다. ...

“그린 백작님. 아이리스와의 결혼을 허락하겠으니, 어서 이리 와서 앉으시지요.” ...

“아직 레이디 아이리스의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

“아이리스, 뭐 하느냐, 얼른 대답하지 않고.” ...

“네, 아버지. 그린 백작님, 청혼을 받아들이겠습니다.” ...

그제야 케이가 허리를 폈다. ...

“아이리스, 나는 백작님과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너는 나가보도록 해라.” ...

글로번이 상냥하게 말했다. ...

“아니요, 공작님. 저는 아이리스 양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 ...

케이가 반대했다. ...

“예?” ...

“앞으로 모든 것을 함께할 부부인데, 지금부터 함께해야지요.” ...

“아…….” ...

글로번은 당혹스러웠다. ...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가 정말 그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이 맞는 걸까? ...

글로번이 아는 케이브란트 그린은 여자에게 상냥한 사내가 아니었다. ...

“저와 함께 계시겠습니까, 레이디 아이리스?” ...

케이의 청에 리시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

케이가 리시를 향해 팔을 올리자, 리시가 그 팔에 살며시 제 손을 걸쳤다. ...

둘은 오랜 연애를 한 것처럼 친밀한 모습으로 소파에 와서 나란히 앉았다. ...

“이제 금광에 관해 이야기하도록 하죠, 공작님.” ...

의심스러운 눈으로 케이를 지켜보던 글로번은 금광 이야기에 눈빛을 바꿨다. ...

그래, 금광. ...

그것만 얻을 수 있다면 케이의 상태가 어떻든 아무래도 좋았다. ...

“이 계약서에 사인하면 금광은 위틀로 공작님의 것입니다.” ...

케이가 서류를 펼쳤다. ...

“그리고 여기에 계신 아이리스 양은 제 것이 되는 거고요.” ...

“그, 그렇죠.” ...

글로번이 성급히 깃펜을 들고 서류를 끌어오려 하는데, 케이가 서류를 슬쩍 뒤로 물렸다. ...

“난 오늘 아이리스 양과 함께 내 영지로 돌아갈 겁니다.” ...

“예? 오늘 당장이요?” ...

“네.” ...

“하지만 결혼을 준비해야 하고…… 우리 아이리스한테 가르칠 것도 많아서…….” ...

“아이리스 양이 생각보다 훨씬 곱고 고운 분이라서, 공작님이 갑자기 생각이 바뀌어 딸을 주지 않겠다고 할까 봐 걱정입니다.” ...

“아니요,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백작님.” ...

“그리고 이렇게 손을 잡으니…….” ...

케이가 제 팔에 걸쳐진 리시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포갰다. ...

“놓고 싶지 않군요.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공작님.” ...

글로번의 눈이 흔들렸다. ...

원래 오늘 알포드가 오면 아이리스를 보낼 생각이긴 했다. ...

아직도 그린 백작의 아내 자리에 브리트니를 앉히고 싶은 마음이 있긴 했지만. ...

‘아니, 아이리스를 보내도 상관없겠지. 어차피 저 애는 내 말이라면 고분고분 다 들을 거고, 그린 백작이 저토록 저 애한테 빠졌으니 잘 이용할 수 있을 거야.’ ...

글로번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요, 그럼 그리하시지요.” ...

+++

알포드는 위틀로 공작가의 꽃 아이리스를 만나러 가는 길에, 복면을 쓴 수상쩍은 이들에게 습격을 당했다. ...

겁많은 알포드는 평소에도 큰돈을 치르고 강한 용병들을 고용해서 다니곤 했다. ...

용병 길드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용병을 전부 고용했는데, 그들은 복면인 세 명을 당해내지 못했다. ...

벌써 몇 시간째 마차에 갇혀 있던 알포드는, 마차의 작은 창문으로 슬쩍 밖을 내다봤다. ...

복면인은 두 명이었는데, 지금 보니 한 명이 더 추가됐다. ...

“볼일은 끝나셨대?” ...

귀를 기울이자 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

“어. 보내.” ...

복면인 한 명이 마차로 저벅저벅 다가와서, 알포드는 얼른 의자에 쓰러져 기절한 척했다. ...

벌컥-! ...

복면인이 마차 문을 거칠게 열고, 검집으로 알포드의 허벅지를 쿡 찔렀다. ...

“으아아아악!” ...

검에 다리를 찔린 줄 알고, 알포드가 비명을 질렀다. ...

“왜 그래?” ...

소란을 듣고 다른 복면인이 다가왔다. ...

“살짝 찔렀는데 이 지랄이잖아. 겁 많은 새끼.” ...

“아, 얼른 가자고.” ...

“알겠어, 알겠어. 야, 우린 갈 테니까 앞으로 착하게 살아라, 착하게. 여자 너무 밝히지 말고.” ...

복면인들이 키득거리며 떠나고도 한참 후까지 알포드는 마차 안에 틀어박혀서 덜덜 떨고 있었다. ...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도망치듯 위틀로 공작저에 도착한 알포드는, 아이리스가 이미 다른 남자의 부인이 되었다는, 경악할 만한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

+++

마차에 타자마자 리시는 케이의 팔에 걸쳤던 손을 내렸다. ...

케이는 리시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잘해주었다. ...

케이가 리시에게 청혼하는 순간, 구겨지는 브리트니의 얼굴을 아주 즐겁게 감상했다. ...

인형처럼 예쁜 얼굴 덕분에 어디에 가도 주인공이었던 브리트니는, 오늘 처음으로 엑스트라의 기분을 느꼈을 터였다. ...

‘이제 시작이야, 브리트니 위틀로.’ ...

지난 삶에서 위틀로 공작가는 리시를 팔아넘긴 대가로 받은 라벤트의 금광을 기반으로 삼아, 승승장구하게 된다. ...

리시가 죽지 못해 처절한 삶을 이어가고 있을 때, 브리트니는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죽을 때까지 리시를 괴롭혔다. ...

‘이번에는 네 손에 쥘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거야.’ ...

 

+++

그린 백작 저에 도착할 때까지, 케이는 말이 없었다. ...

리시 역시 생각할 것이 많았기에, 마차 안에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이 고마웠다. ...

“레이디 위틀로.” ...

그의 음성에 정신을 차렸을 때, 리시는 그의 방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

등진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 때문에 그림자가 져서, 케이는 마치 거대한 짐승처럼 보였다. ...

“리시라고 불러도 돼요.” ...

“좋아요, 리시. 당신도 날 케이라 불러도 좋습니다.” ...

“알겠어요, 케이.” ...

“오늘부터 당신은 이 방에서 나와 함께 잘 겁니다. 같은 침대에서.” ...

케이의 손이 커다란 침대를 가리켰다. ...

“알겠어요.” ...

“그게 끝입니까?” ...

“뭐가 더 필요하죠?” ...

그가 성큼 다가왔다. ...

역시 그에게서는 숲속 향기가 났다. ...

“같은 침대를 쓴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알 텐데요. 아, 위틀로 공작가의 꽃으로 순진하게 자라서 그런 것은 모르시나?” ...

리시가 피식 웃었다. ...

“난 바보가 아니에요, 케이.” ...

남자와 여자가 동침하는 것이 무엇인지, 리시는 알아도 너무 잘 알았다. ...

어떤 여자들은 그 행위를 참으로 귀하게 여긴다지만, 리시는 그렇지 않았다. ...

지난 삶에서도, 이번 삶에서도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

“다행이군요.” ...

케이의 손바닥이 리시의 목덜미에 닿았다. 뜨거운 체온에 리시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

“멍청한 여자에게 일일이 가르치는 건 취향이 아니라서.” ...

케이가 고개를 숙였다. ...

그의 숨결이 리시의 귓불과 볼을 스치고 내려갔다. ...

“아직 해가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

리시가 중얼거렸다. ...

“아시다시피 짐승 같은 놈이라서.” ...

“아, 짐승이라고 하니 생각났는데…….” ...

리시는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목에 닿아 있는 케이의 얼굴을 밀어냈다. ...

그 담백한 거절에, 케이는 도리어 재미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

“보여줄 수 있나요?” ...

“뭘요?” ...

“짐승.” ...

“후회할 텐데.” ...

“후회 같은 건 안 해요.” ...

“그래요. 금광씩이나 주고 데려온 부인이 보여달라 하시는데, 보여드려야지. 저쪽으로 물러나요.” ...

리시는 뒷걸음질을 쳐서 구석으로 향했다. 앞으로 눈앞에 펼쳐질 광경에 대한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었다. ...

해를 등진 케이의 그림자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등이 구부정하게 변하고, 조각 같던 얼굴이 형태를 바꿨다. ...

투둑- ...

옷이 뜯기는 소리가 들렸다. ...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케이가 있던 그 자리에 거대한 검은 늑대가 얌전히 앉아 있었다. ...

앉아 있는데도 리시의 키만큼이나 커다란 늑대였다. ...

늑대는 리시가 겁먹을까 걱정이라는 듯, 훈련을 잘 받은 개처럼 앉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

죽음의 어둠을 유영할 때, 리시는 이 늑대의 마지막을 목도했다. ...

배신당한 큰 짐승은, 마지막까지 처절하게 몸부림치다가 끔찍하게 죽었다. ...

리시는 천천히 늑대를 향해 다가갔다. ...

전에 봤을 때는 몰랐는데, 늑대의 눈썹이 있는 부분에는 은빛 털이 나 있었다. ...

리시가 조심스럽게 늑대의 주둥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

늑대도 느리게 리시의 손바닥에 자신의 주둥이를 비볐다. ...

“크군요.” ...

“무섭지 않습니까?” ...

늑대로 변한 케이의 목소리는, 인간일 때보다 낮고 굵었다. ...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울림이 섞여 있었다. ...

“귀엽네요. 특히 이 동그란 눈썹이.” ...

케이의 콧등에 주름이 생기며 길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

화가 난 게 아니라 웃는 것 같았다. ...

“당신은 겁이 없군요.” ...

“무서울 게 없거든요.” ...

어차피 한 번 죽어 봐서. ...

케이가 귀를 쫑긋하더니 갑자기 스륵, 하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

인간의 모습을 되찾은 케이의 모습에, 리시의 눈이 커졌다. ...

얼어붙은 리시를 내려다보며, 케이가 씩 웃었다. ...

“말했잖아요, 후회할 거라고.” ...

옷이 뜯기는 소리가 났을 때 예상했어야 했다. ...

늑대로 변할 때 뜯겨나간 그의 옷이, 인간으로 돌아온다고 해서 복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

(5) 먹고 싶은 당신. ...

수인. ...

‘짐승의 저주를 받은 인간’이라고 불리지만, 사실 수인이 왜 태어나는지에 관한 정확한 정보는 없었다. ...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수인이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수인과 수인 사이에서 수인이 태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

어디까지나 랜덤이었다. ...

보통 성인이 될 때쯤인 18살쯤에 변신을 하게 되며 본인이 수인이라는 걸 알게 되는데, 수인이 오래 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

변신하자마자 관청에 신고가 들어가고,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

오래전에는 수인도 인간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고 한다. ...

오히려 수인이라는 게 하나의 재능으로 인정받아, 마법사와 같은 대우를 받았던 적도 있다고 한다. ...

몇백 년 전 신성국이 수인을 ‘악마의 자식’이라고 칭하며 수인 말살 전쟁을 일으킨 후, 사람들의 머릿속에 수인은 ‘악마의 자식’ 혹은 ‘짐승의 저주를 받은 인간’으로 각인되었다. ...

수인은 차별받을 뿐 아니라, 살아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

그 신성국의 가호를 받는 그린 가문의 케이브란트가 수인이라는 아이러니한 진실은, 케이의 가족들만 알고 있었다. ...

지금까지는 그랬다. ...

케이는 자신을 보며 얼어붙은 자그마하고 하얀 여인을 즐거운 기분으로 응시했다. ...

무슨 일이 벌어져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을 것 같았던 리시가, 경악한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굳어 있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

이윽고 리시의 하얀 볼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

리시는 자신이 놀랐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은 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

리시는 평소처럼 고고한 표정으로 돌아갔지만, 얼굴은 여전히 새빨갰다. ...

“……당황스럽군요.” ...

리시가 중얼거렸다. ...

케이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내려다봤다. ...

“무엇이?” ...

“이…… 상황이요.” ...

“그런 편이지요. 마음에 듭니까?” ...

“마음에 들어야 하나요?” ...

“앞으로 당신이 매일 봐야 할 몸이니까.” ...

“매일…….” ...

리시가 꼴깍, 침을 삼켰다. 이제는 리시의 목덜미까지 빨갰다. ...

이 여자는 알까? 자기가 지금 얼마나 새빨개졌는지? ...

모르겠지. 그러니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고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겠지. ...

케이는 점점 리시가 마음에 들었다. ...

“짐승 같군요.” ...

“같은 게 아니라…….” ...

케이가 성큼 다가가자, 리시가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

곧 정신을 차린 듯, 리시가 다시 고개를 들고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

하지만 케이는 리시가 숨도 쉬지 않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짐승입니다, 리시.” ...

“아…… 그렇군요. 일단 옷을 좀…….” ...

“입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리시? 난 이대로 당신과 침대에 들어갈 예정인데.” ...

자수정 같은 리시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

그걸 보자 케이는 점점 더 리시를 놀리고 싶어졌다. ...

“침대가 싫다면 이 자리에서도 좋고.” ...

케이가 리시의 목덜미를 향해 허리를 굽히자, 리시의 작은 손이 치마를 꽉 움켜쥐는 게 눈에 들어왔다. ...

‘이제 그만 놀려야겠군.’ ...

케이가 그리 생각했을 때. ...

벌컥-! ...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며. ...

“대장! 대장! 형수님 되실 분…… 끄어어억! 뭐, 뭐 하는 거예요, 미쳤나 봐!” ...

월라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케이는 한숨을 삼키며 자세를 바로 했다. ...

“노크.” ...

“아, 맞다.” ...

월라스가 뒷걸음질을 쳐서 방문으로 가더니 손으로 문을 똑똑 두드렸다. ...

“들어가겠습니다, 대장. 끄아아악! 대장, 왜 그러고 있어요?” ...

“대장이 왜?” ...

굵직한 음성과 함께 나단이 들어왔다. ...

“헐…… 대장, 왜…… 헐…….” ...

뒷걸음질 치는 나단을 밀어내고 들어온 유진이, 묵묵히 옷장으로 가서 검은색 가운을 꺼내와 케이에게 건넸다. ...

케이가 가운을 입는 걸 보며, 유진이 말했다. ...

“시키신 일은 잘 끝냈습니다. 그리고 대장. 레이디 앞에서 첫날부터 이런 모습을 보이시는 건 실례되는 행동입니다. 자제하십시오.” ...

유진이 리시를 돌아봤다. ...

“레이디 아이리스. 대장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

“알겠습니다.” ...

어느새 리시의 얼굴에서 붉은 기가 사라졌다. ...

케이는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냉랭할 정도로 고고한 리시도 좋지만, 얼굴이 빨개져서 허둥거리는 리시도 상당히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

“저기, 형수님. 오늘부터 저희 형수님이 된 거 맞죠?” ...

월라스가 리시를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리시는 험상궂은 외모에 커다란 덩치를 가진 월라스를 겁 없이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리시라고 불러도 돼요.” ...

“아니, 아니. 제가 어떻게 감히 대장의 부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겠습니까. 우리 대장이 결혼할 줄은 정말 몰랐는데…… 크흡. 형수님. 잘 부탁드려요. 저희 대장, 부족한 게 정말 산더미처럼 많지만, 버리지 말고 오래오래 아껴주십쇼.” ...

월라스는 눈물도 훔치고, 리시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고 위아래로 흔들기도 하느라 바빴다. ...

“야, 레이디 손을 그렇게 함부로 붙잡으면 어떡해? 하여간 예의라고는 쥐뿔도 없는 자식이…… 저리 가봐.” ...

나단이 윌라스를 밀어내고 리시의 앞에 섰다. ...

나단은 차려 자세를 취하고 절도 있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

“잘 부탁드립니다, 형수님! 나단이라고 합니다.” ...

“나도 잘 부탁해요.” ...

“형수님, 지내시다가 부족한 게 있으면 이 나단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주무시다가도 뭔가 필요한 게 있으시다 싶으면, 그저 저기에 있는 종을 울리시면 됩니다.” ...

리시는 조금 놀라웠다. ...

케이가 수인이라는 비밀을 안다는 걸 빌미 삼아, 협박하듯 그와 정략결혼을 하기로 했다. ...

이 저택에서 리시를 환영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줄 알았다. ...

그런데 이렇게나 환대해주다니. ...

이 새로운 인생이, 예상보다 좀 더 즐거워질 것 같았다. ...

+++

브리트니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

“바로 데려갔다고요?” ...

“그래, 내 생각이 바뀌어서 걔를 안 보낼까 봐 걱정된다고 하더라.” ...

“말도 안 돼. 그린 백작이 정말 그런 말을 했다고요?” ...

“그렇다니까. 아이리스한테 아주 푹 빠진 모양이야.” ...

“아니, 진짜 말도 안 되잖아요. 그린 백작이 왜 그런 애한테…… 아니, 아니. 진짜 아니야.” ...

브리트니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

“아빠. 어떻게 좀 해봐요. 난 걔가 그린 백작이랑 결혼하는 거 정말 싫단 말이에요. 그린 백작이 얼마나 인기가 많은 줄 아세요? 걔가 그린 백작 부인이라면서 그린 백작이랑 팔짱 끼고 나타나는 꼴은 죽어도 못 보겠어요.” ...

“그 정도는 그냥 둬라. 걔가 아무리 그린 가로 갔어도, 우리 위틀로 가에 연이 있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거야.” ...

“아, 도움은 무슨……. 그런 거 다 필요 없다고!” ...

“필요 없긴. 걜 팔아치운 덕에 오늘 뭘 얻었는지나 알아? 베노트의 금광을 얻었다고, 그 큰 금광을!” ...

“아, 금광이 뭔 소용이에요.” ...

“금광뿐인 줄 알아? 그린 백작, 그 멍청이가 하둔 지역까지 사 갔다고.” ...

“하둔 지역을요? 거기 뭐 없지 않아요?” ...

“그렇다니까. 그 황무지를 어마어마하게 큰돈을 주고 사 갔어. 아이리스가 보는 앞이라서 돈 자랑 좀 하고 싶었겠지. 여보, 당신이 옳았어. 걜 곱게 키워서 팔아치우길 잘했어.” ...

글로번이 아내인 데니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

찻잔을 응시하던 데니스가 말했다. ...

“그래도 그린 백작 부인 자리는 조금 아깝긴 하네요.” ...

“아까울 거 없어. 황태자님 측근에게 줄을 대놨으니까, 우리 브리트니는 백작 부인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거야.” ...

황태자라는 말이 나오자 브리트니가 눈을 빛냈다. ...

“정말요?” ...

“그렇대도. 그러니까 넌 그린 백작 부인 자리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몸가짐이나 바르게 하고 있어. 여보, 우리 돈 생겼으니까 저택이나 좀 고칠까? 당신, 드레스도 사고 싶다고 했지?” ...

“안 그래도 봐둔 드레스가 있는데…….” ...

글로번과 데니스가 살 것 목록을 작성하는 동안, 브리트니는 황태자를 떠올렸다. ...

케이보다는 못하지만, 황태자도 잘생기긴 잘생겼다. ...

게다가 백작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는 황태자였다. ...

‘내가 황태자비가 되다니……!’ ...

브리트니는 벌써 황태자비가 된 기분이었다. ...

‘그래, 백작 부인 따위 너나 가져. 나는 황태자비가 돼서 매일매일 너랑 그린 백작을 부를 거야. 그리고 네가 보는 앞에서, 그린 백작을 내 걸로 만들어주겠어.’ ...

그러면 리시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

또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마디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겠지. ...

리시에게는 그런 게 어울렸다. ...

‘사랑받는 역할은 내 거잖아, 아이리스. 넌 걸레질할 때가 제일 예뻐.’ ...

 

+++

하녀들이 방으로 가져온 저녁을 먹으며, 케이와 리시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 긴 대화를 나눴다. ...

그러다 보니 어느덧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 ...

“잠옷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어요. 당신이 챙겨올 줄 알고.” ...

케이가 말했다. ...

“그 집에 내 것은 이 옷 한 벌이었거든요. 난 이걸 입고 자도 상관없어요.” ...

“그럴 수는 없지.” ...

케이가 옷장에서 자신의 가운을 하나 꺼내 가져왔다. ...

“오늘은 이거라도 입어요.” ...

“고마워요.” ...

리시가 가운을 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지만, 케이는 가운을 건네주지 않았다. ...

리시가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자, 케이가 말했다. ...

“첫날밤인데 내 아내의 옷 정도는 내가 갈아입혀 주고 싶군요.” ...

“아.” ...

리시는 아까 본 케이의 알몸이 떠올라 얼굴을 붉혔다. ...

사내의 몸 따위에 당황할 일은 없을 줄 알았다. ...

지난 삶, 지독한 꼴을 잔뜩 당하며 굳어진 심장이기에, 어지간한 일로는 뛰지 않을 줄 알았다. ...

하지만 케이의 몸을 보는 순간,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완벽한 육체를 눈에 담는 순간. ...

심장이 뛰었다. ...

그저 눈으로 본 것만으로도 이러한 감정을 느낄 수 있구나, 신기할 만큼 심장이 뛰었다. ...

“그렇게 해요, 그럼.” ...

리시는 애써 담담하게 말하며 제 옷에 손을 가져갔다. ...

리시는 자신의 안온한 삶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결심했다. 사내의 앞에서 옷을 벗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었다. ...

리시의 손이 천천히 움직여 원피스의 끈과 단추를 풀었다. ...

옷을 벗는 내내 케이의 시선은 리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

그럴 리 없는데도, 그의 눈빛이 리시의 전신을 샅샅이 쓰다듬는 느낌이 들었다. ...

원피스를 위로 올려 벗자, 코르셋과 함께 투명하리만큼 흰 피부가 드러났다. ...

맨살에 닿는 공기가 서늘했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

케이가 곧장 가운으로 리시의 몸을 덮어준 덕분이었다. ...

케이의 옷은 무척이나 커서, 리시는 마치 담요를 두른 꼴이 되었다. ...

“작군요.” ...

“네. 당신은 크고요.” ...

케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

즐거움을 담은 그의 눈웃음을 보자, 왜인지 리시도 즐거워졌기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

리시의 미소에 케이가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엄지와 검지로 리시의 작은 턱을 잡아 살며시 당겨 올렸다. ...

케이는 청회색 눈동자로 리시를 응시하며 속삭였다. ...

“웃으니 예쁘군요, 아이리스. 단숨에 삼켜버리고 싶을 만큼.” ...

(6) 안심하고 피어도 돼. ...

깊고 맑은 눈동자에 오롯이 리시만이 담겼다. ...

그의 눈동자 속에서 길을 잃을 것만 같았다. ...

리시의 코끝에 뜨거운 숨이 닿았다. ...

제 숨도 그의 코에 닿을까 봐, 숨을 멈추고 그를 응시했다. ...

심장 부근에서 술렁, 하고 파문이 일었다. 잔잔하게 인 파문이 부드럽게 번져 심장을 자극했다. ...

지난 삶, 리시에게 사내의 눈빛이란 그저 두려움과 역겨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

때문에 리시는 그의 회청빛 눈동자를 마주하며 느끼는 이 묘한 감정이 당혹스러웠다. ...

“하아.” ...

저도 모르게 숨을 내뱉었다. ...

붉고 촉촉한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숨이 가까이에 있는 그의 입술을 간질인 듯, 그의 얇은 입술이 살짝 움직였다. ...

그의 입술이 닿지 않았는데도 온기가 전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 ...

리시는 당장이라도 덮쳐올 것만 같은 그의 핏빛 입술로부터 멀어지고 싶었지만, 곧게 서서 그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

“단숨에 삼키기엔 내가 너무 크지 않나요?” ...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

“그건 두고 봐야겠지요.” ...

나직한 음성과 함께 흘러나온 숨결이 리시의 입술을 스쳤다. ...

리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

이번 삶, 새로운 인생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각오했다. ...

좋은 기회가 되어준 케이브란트 그린과 잠자리에 드는 것 정도는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

풍성한 속눈썹 너머로,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그의 얼굴이 보였다. ...

반듯한 이마와 끝이 살짝 올라간 짙은 눈썹. ...

깊이 자리 잡은 눈은 마치 리시를 시험하는 것처럼 고요히 빛나고 있었다. ...

이윽고 리시는 입을 열었다. ...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

대답이 끝나자마자 그의 굵은 팔이 리시의 잘록한 허리를 감아 끌어당겼다. ...

리시의 육체가 그의 몸에 밀착되었다. ...

얇은 가운 너머로 그의 뜨거운 체온이 전해졌다. ...

그는 리시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

붉은 기가 도는 긴 은발이 침대 위에 꽃처럼 흐트러졌다. ...

리시는 등에는 푹신한 침대를, 배에는 그의 단단한 육체를 느꼈다. ...

리시의 몸을 감싸고 있던 큰 가운이 벌어지면서 둥글고 마른 어깨가 드러났다. ...

그가 고개를 숙여 리시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 ...

마치 낙인처럼 눌리는 뜨거운 입술에, 리시는 움찔 긴장했다. ...

저도 모르게 들어 올린 손목을 케이가 살며시 붙잡았다. ...

커다란 손이 가느다란 손목을 쥐어 리시의 얼굴 옆으로 살짝 내리눌렀다. ...

어깨를 지분거리던 그의 입술이 어깨선을 따라 올라와 목덜미에서 멈췄다. ...

그의 뜨거운 숨이 족쇄처럼 목을 타고 흐르는 순간, 리시는 지난 삶을 떠올렸다. ...

지난 삶, 리시를 짓누르던 알포드의 무게. ...

리시는 비명을 삼켰다. ...

‘견뎌야 해.’ ...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도로 번쩍 떴다. ...

이 상황을 오롯이 받아들여야만 한다. ...

눈을 감고 피해버리는 건, 지난 삶의 멍청하고 유약한 아이리스 후치스로 족하다. ...

이번 삶의 아이리스 그린은 그 어떤 두려움 앞에서도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

그렇기에 리시는 공포를 억누르고 이를 악문 채 천장을 노려봤다. ...

목덜미를 뜨겁게 스치던 그의 숨결이 멀어진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

“목석같은 여자로군요, 리시.” ...

그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을 때에야, 리시는 눈동자를 움직일 수 있었다. ...

리시의 목 부근에 있었던 그의 얼굴이 어느새 리시의 얼굴과 같은 위치까지 올라와 있었다. ...

“침대 위에서 여인이 목석이 될지, 꽃잎을 펼치는 꽃이 될지는 사내에게 달린 일이 아니겠어요?” ...

케이는 가만히 리시를 내려다봤다. ...

어쩌면 케이가 화났을지도 모르겠다. 침대 위에서 사내를 탓하는 건, 그의 자존심을 완전히 뭉개버리는 일이니까. ...

하지만 리시는 자신의 말을 번복할 생각이 없었다. ...

이걸로 자존심 상한 케이가 보일 행동은 둘 중 하나였다. ...

홧김에 리시를 강제로 취하거나, 자존심이 상해서 두 번 다시는 리시를 건드리지 않거나. ...

둘 중 어느 것이라도 상관없었다. ...

케이가 엄지로 리시의 눈가를 살며시 쓸었다. ...

그 손길이 다정해서, 리시는 조금 놀랐다. ...

화났을 줄 알았는데. ...

침대 위에 흐트러진 리시의 머리를 조심스레 정리해준 케이는, 조용히 리시의 옆에 누웠다. ...

리시는 케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이걸로 끝인가요?” ...

리시의 질문에 케이가 머리를 돌려 리시를 마주 봤다. ...

“나는 뜨거울 때 먹는 걸 좋아해서.” ...

“어머, 까다롭기도 하셔라. 그런데 어쩌죠? 나는 쉽게 뜨거워지지 않는데.” ...

“글쎄요.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요, 리시.” ...

여상히 들려오는 그의 음성이 듣기 좋았다. ...

어깨에서 긴장이 빠져나갔다. 눈을 감자마자 고단함이 몰려왔다. ...

오늘 하루, 많은 일이 있었다. ...

그가 리시의 가운을 잘 여며주는 느낌이 있었지만, 손을 움직이기도 힘들 만큼 묵직한 수마가 덮쳐왔다. ...

“자요, 리시.” ...

까무룩 잠에 빠져드는데,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

“좋은 꿈을 꿀 겁니다.” ...

글쎄, 과연 그럴까? ...

리시는 좋은 꿈을 꾼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

그래도 잠들기 전에 듣는 그의 목소리가 다정해서 좋다고, 리시는 생각했다. ...

+++

리시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케이는 조용히 침대를 빠져나왔다. ...

선대 그린 백작이 케이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고 은퇴한 후, 가문을 이끌어야 하는 케이에게는 할 일이 많았다. ...

당연히 여자에게 신경 쓸 시간조차 없었고 앞으로도 쭉 그러리라 생각했다. ...

그런데……. ...

‘신기한 여자야.’ ...

케이는 침대 옆에 서서 잠시 리시를 내려다봤다. ...

위틀로 가문의 꽃 아이리스에 대한 소문은, 여자에 관심 없는 케이의 귀에 들어올 정도였다. ...

위틀로 공작 가의 아이리스는 너무도 곱고 아름다워, 위틀로 공작이 애지중지 키워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더라. ...

아이리스의 손가락 끝에 작은 상처만 나도, 위틀로 공작이 눈물을 글썽인다더라. ...

하지만 다른 소문도 있었다. ...

위틀로 공작 가의 아이리스는 사실 하녀가 낳은 아이라더라. ...

아이리스는 위틀로 공작 가에서 하녀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다더라. ...

그런 소문은 미미해서, 남을 깎아내리기 좋아하는 자들이 흘린 헛소문으로 치부되었다. ...

‘이제 보니 그 헛소문이 사실은 헛소문이 아니었나 보군.’ ...

리시는 묘한 여자였다. ...

오만하고 강한 듯한데,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 연약해 보이기도 했다. 때로는 그녀의 말대로 지옥의 불길 속에서 아등바등 살아남은 잡초 같은 눈빛을 짓기도 했다. ...

곱게 자란 귀족의 영애는 결코 가질 수 없는 무언가가, 리시에게는 있었다. 평범한 여자와는 다른, 그런 점들이 자꾸 케이의 마음을 잡아챘다. ...

그녀를 안으면 어떤 느낌일지,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고 싶어서, 리시를 침대에 눕혔다. ...

리시는 케이의 예상과 다른 반응을 보였다. ...

그녀는 여전히 고고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타인의 감정에 민감한 케이는 그녀가 겁에 질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무엇이 당신을 무섭게 하는 거지, 아이리스?” ...

케이는 이불을 끌어 올려 리시에게 덮어줬다. ...

“설마 위틀로 공작이 당신에게 몹쓸 짓을 한 건 아니겠지?” ...

욕심 가득한 글로번 위틀로 공작의 얼굴이 떠올랐다. ...

“만약 그런 거라면 내가 그놈에게 지옥을 보여주지.” ...

리시를 위해 그렇게까지 해줄 의리는 없었다. 리시는 케이의 약점을 잡고 케이에게 거래를 해온, 동맹 관계일 뿐이었다. ...

이 결혼 역시 서로의 이익을 위한 결혼일 뿐. ...

그러나 케이는 리시가 마음에 들었다. ...

리시의 전신에 흐르는 오만한 강함도, 때때로 새어 나오는 애절한 약함도. ...

그녀 자신도 모르게 내보이는 수줍음과 가끔 보여주는 즐거운 듯한 미소도. ...

애정의 형태가 꼭 남녀 사이의 애정만 있는 건 아니다. 동맹 관계에서 생기는 애정도 있다. ...

리시와 정략결혼을 했다고 해서, 그녀를 함부로 대할 생각은 없었다. ...

이 결혼의 이유가 무엇이든, 리시는 그린 백작 부인이다. ...

“이제 당신은 그린 가문의 꽃이야, 아이리스. 그러니…….” ...

안심하고 피어도 돼. ...

그린 가문의 모든 것이 당신을 위해 움직일 테니까. ...

케이가 방에서 나와 복도를 걷는데, 누군가 케이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

케이의 시중을 드는 시녀, 질레트 메르디였다. ...

질레트는 메르디 자작의 딸로, 3년 전부터 케이의 시녀가 되어 시중을 들고 있었다. ...

“백작님. 차를 올릴까요?” ...

“아니. 필요 없으니 쉬어라.” ...

케이가 냉랭하게 말하고 서재로 걸어갔다. ...

서재에서는 케이의 부하들이 케이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

질레트가 케이의 뒤를 따라 걸었다. ...

케이는 걸음을 멈추고 질레트를 돌아봤다. ...

“내게 할 말이 있나?” ...

“네, 저기…….” ...

질레트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케이를 바라봤다. ...

“정말로…… 결혼하시는 건가요?” ...

“결혼하는 게 아니라 이미 했지.” ...

“식은…….” ...

“그런 게 필요한가?” ...

“아…….” ...

왜인지 질레트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

“정략결혼인 거군요. 안 그래도 너무 갑작스러워서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

“할 말은 그게 다인가?” ...

“저기…… 부인께서는 위틀로 가문의…….” ...

“내 결혼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거라면 그만두지.” ...

케이는 차갑게 말하고 몸을 휙 돌려 서재로 걸어갔다. ...

질레트는 더 이상 케이의 뒤를 따라가지 않았다. ...

질레트는 케이의 듬직한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응시하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

케이브란트 그린. ...

어릴 때 그를 처음 본 이후로 쭉 흠모해왔다. 질레트는 아빠를 졸라 케이의 시중을 드는 시녀로 그린 백작 가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

미혼인 귀족의 시중을 들던 시녀가 눈에 띄어 연애하다가 결혼까지 하는 일이 왕왕 있었다. ...

질레트는 케이가 언젠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질레트는 어릴 때부터 예쁘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청혼을 해오는 남자들도 심심치 않게 있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케이의 옆에서 수족처럼 시중을 든 지도 3년. ...

케이는 질레트에게 조금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

그렇다고 다른 여자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기에, 그저 바빠서 아직은 여유가 없는 것뿐이라고, 언젠가는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할 거라고 믿었다. ...

그런데 갑자기 케이가 위틀로 공작 가의 꽃 아이리스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

엘프와 견줄 정도로 아름답다는 소문이 도는 아이리스. ...

수많은 사내가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서 안달복달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케이가 그런 사내 중 한 명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

‘하지만 아니었어. 정략결혼일 뿐인 거야.’ ...

그 증거로 케이는 결혼식조차 올리지 않았다. ...

아무리 정략결혼이라도 결혼식만큼은 성대하게 여는데, 케이는 아이리스를 위해 그 정도도 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

케이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드리웠던 먹구름이 가셨다. ...

질레트는 빙그레 웃으며 몸을 돌렸다. ...

(7) 평생 단 하나 ...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리시의 얼굴 위에 자리 잡았다. ...

리시는 눈을 뜨고 낯선 천장을 응시했다. ...

‘여긴 어디지?’ ...

답은 금방 나왔다. ...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의 침실. ...

이제는 그린 백작 부부의 침실. ...

케이가 누워 있던 자리는 비어 있었지만, 그의 향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

-좋은 꿈을 꿀 겁니다. ...

꿈결처럼 들었던 음성이 떠올랐다. 그 말대로 좋은 꿈을 꾼 것 같다. ...

리시는 느릿하게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로 향했다. ...

커튼을 치자마자 쨍한 햇살이 두 눈으로 달려들었다. 살짝 찡그린 채 창문을 여니, 더운 기를 품은 바람이 훅 밀려들어 왔다. ...

‘셔벗이 먹고 싶은 날씨네.’ ...

라고 생각하며, 시선을 내리자 그린 저택의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

성유물의 수호자인 그린 가문은 명예가 드높기는 해도, 돈이 많은 가문은 아니었다. 그래서 큰 기대가 없었는데, 넓지는 않아도 잘 관리한, 훌륭한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

리시는 양산을 들고 나가서 정원 중간에 있는 분수 앞 벤치에 앉아 셔벗을 먹는 상상을 했다. ...

지난 삶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었던, 소소하지만 즐거운 일상. ...

심지어 위틀로 가문을 떠나 후치스 자작부인이 된 후에도, 그러한 일상을 즐길 수는 없었다. ...

지난 삶, 아이리스 후치스 자작부인은 그저 알포드를 빛나게 해주는 장신구이자 장난감일 뿐이었다. ...

즐겁지 않았던 지난 삶을 떠올리고 있는데, 남자 두 명이 나란히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

짙은 회색 머리카락에 덩치가 큰 사내가 어제 인사를 나눈 월라스라는 건 알겠는데, 그 옆에 있는 호리호리한 체구의 남자는 처음 본다. ...

어깨까지 내려오는 길이의 금빛 머리칼을 뒤로 묶은 남자였다. ...

그때 리시를 발견한 월라스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크게 흔들더니, 검지로 리시를 가리키며 금발의 남자에게 뭐라고 이야기했다. ...

무심코 고개를 돌린 금발 사내가 리시를 보고는 깜짝 놀라, 월라스의 검지를 잡아 꺾듯이 아래로 내렸다. ...

“아아악! 아프잖아, 제이미!” ...

월라스가 버럭 외치는 소리가 리시의 귀에까지 들렸다. ...

월라스의 흉흉한 기세에도, 제이미라고 불린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리시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

잠시 후, 그 두 사람이 리시의 방문을 노크했다. ...

리시는 자신이 아직 케이의 커다란 가운을 입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

원래 입고 온 옷으로라도 갈아입을까 싶어 방 안을 둘러봤지만, 세탁이라도 보낸 건지 찾을 수가 없었다. ...

어쩔 수 없이 가운을 여미고 방문을 열었다. ...

“형수님, 잘 주무셨습니까?” ...

월라스가 유쾌한 목소리로 물었다. ...

“덕분에요.” ...

리시의 대답에 월라스가 제이미를 돌아봤다. ...

“들었지? 내 덕분이시래. 내 덕분.” ...

제이미는 월라스에게 대꾸도 하지 않고 리시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

이제 보니 제이미는 무척 단정하고 곱상한 생김새였다. ...

하얀 피부에 살짝 내려간 눈매, 그 안에 담긴 새파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

제이미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맺혀 있었다. ...

이윽고 제이미가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입을 열었다. ...

“대장…… 백작님께 미리 이야기를 듣지 못해, 백작 부인께서 오시는 줄도 몰라서 어제는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

“형수님, 얘가요. 자기만 형수님이 오시는 걸 몰랐다고 엄청 삐쳤다니까요. 그래서 밤새도록 대장을 어찌나 괴롭혔는지……. 얘가 이렇게 헤실헤실 웃는 것처럼 보여도 속은 아주 좁아터져서…….” ...

퍼억-! ...

주절주절 떠들어대는 월라스의 명치를, 제이미가 팔꿈치로 세게 찍었다. ...

호리호리해도 힘은 보통이 아닌지, 월라스가 쿨럭, 마른기침을 내뱉으며 뒤로 물러났다. ...

“너, 방금 진짜로 날 죽이려고 한 것 같은데?” ...

월라스가 항의했지만, 이번에도 제이미는 월라스에게 신경 쓰지 않고 리시에게 말했다. ...

“이제야 인사드리는 결례를 용서해주세요, 백작 부인.” ...

“용서라니요. 잘못한 것도 없는걸요. 갑작스러운 결혼이기도 했고요.” ...

“저는 제이미라고 합니다. 이 저택의 집사로, 앞으로 백작 부인께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제게 말씀해주세요.” ...

“그래요. 그럼 우선…… 그 백작 부인이라는 호칭부터 바꿔주겠어요?” ...

“호칭을요?” ...

월라스를 대하는 제이미의 태도를 보면, 제이미 역시 케이와 끈끈한 관계인 듯했다. ...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도 돼요.” ...

“어, 그럼 저도…….” ...

퍼억-! ...

끼어들려는 월라스의 옆구리를, 제이미가 말없이 가격했다. ...

“감히 편하게 이름을 부를 수는 없습니다. 백작 부인이라는 호칭이 부담스러우시다면 아이리스 님이라고 부르도록 하지요.” ...

“그래요.” ...

“또 필요하신 것은 없으신가요?” ...

“옷이 필요해요.” ...

“재단사를 부르도록 하지요.” ...

“아니, 지금 당장 입을 수 있는 옷으로요. 어제 보니, 나단이라는 분이 저랑 체구가 비슷한 것 같던데…….” ...

“나단이 계집애처럼 보이기는 해도 사실 사내놈인데요, 형수님.” ...

월라스가 설명했다. ...

“괜찮아요. 내 집에서 내가 뭘 입든, 누가 뭐라 하겠어요? 편하면 그만이지.” ...

리시의 대답에 월라스가 씩 웃었다. ...

“맞아요, 편하면 그만이죠. 제가 가서 나단 옷을 싹 빼앗아 오겠슴다!” ...

월라스는 리시가 한 벌이면 된다고 말하기도 전에 후다닥 달려가 버렸다. ...

“설마 월라스가 정말로 나단 옷을 다 뺏어오지는 않겠죠?” ...

“다 뺏어 올 거예요, 아이리스 님. 월라스는 한다면 하는 바보라서요.” ...

“나단에게 미안하게 됐네요.” ...

“괜찮아요. 누가 감히 아이리스 님께서 하시는 일에 입을 대겠습니까? 또 필요하신 것은 없나요?” ...

“셔벗이 필요해요. 그리고 양산도.” ...

“준비하지요.” ...

제이미는 왜 그런 것이 필요하냐고 묻지도 않았다. ...

리시가 가만히 제이미를 응시하자, 제이미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

금빛 머리칼 몇 올이 차르르 흘러, 제이미의 고운 얼굴을 가로질렀다. ...

“하실 말씀이라도?” ...

“내가 이 집에서 어디까지 내 멋대로 굴어도 되는 거죠?” ...

제이미가 미소 지었다. ...

“방금 아이리스 님께서 ‘내 집’이라고 하셨지요. 아이리스 님의 집에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는, 아이리스 님이 결정하실 일입니다.” ...

 

+++

월라스는 정말로 나단의 옷을 싸그리 다 가져온 것 같았다. ...

월라스가 나단의 방에 쳐들어가서 옷장을 열고 옷을 챙겨나갈 때, 나단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돼서 웃음이 나왔다. ...

리시는 월라스가 소파 위에 수북하게 쌓아두고 간 옷을 한 벌, 한 벌 확인하며 입을 옷을 골랐다. ...

다리에 착 붙는 검은색 일자 바지에, 소매가 넓은 하얀 셔츠, 그리고 진한 갈색 가죽조끼를 선택했다. ...

지난 삶에서는 한 번도 입어본 적 없는 스타일이었다. ...

나단이 아무리 체구가 작다 해도 남자는 남자였다. ...

그의 옷은 리시가 입기에 조금 컸지만, 그래도 케이의 가운을 걸쳤을 때보다는 나았다. ...

거울 앞에서 제 모습을 확인한 리시는,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방에서 나왔다. ...

제이미가 현관문 앞에서 양산과 셔벗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

리시를 본 제이미의 눈이 커졌다가 즐겁게 가늘어졌다. ...

“근사하십니다, 아이리스 님.” ...

“고마워요.” ...

“정원을 안내해드릴까요?” ...

“아니, 혼자서도 괜찮아요.” ...

리시는 양산과 셔벗이 든 유리그릇을 가지고 정원에 난 자갈길을 걸었다. ...

자갈을 밟을 때마다 자르락, 자르락 울리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

마침내 분수가 있는 중앙에 도착한 리시는, 벤치에 앉아 양산을 펼쳤다. ...

양산으로 햇빛을 가리고 우아하게 셔벗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한 손으로 양산을 들고 한 손에 유리그릇을 들었더니, 스푼을 잡을 손이 없었다. ...

이렇게도 저렇게도 모양이 안 나와서, 결국 양산을 포기했다. ...

얼굴 좀 타면 어때. ...

리시는 양산을 옆에 내려놓고 스푼을 들었다. ...

레몬 과즙과 꿀을 넣은 셔벗은 새콤달콤하고 시원했다. ...

한참 셔벗을 먹고 있는데 머리 위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

누군가가 옆에 놓여 있던 양산을 들어 리시의 머리 위에 씌워준 것이다. ...

고개를 돌리니 케이가 있었다. ...

“제이미를 만났다고 들었어요, 리시.” ...

“예의 바른 사람이더군요.” ...

“으흠?” ...

케이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고 리시의 옆에 앉았다. ...

“아침부터 셔벗인가요?” ...

“더워서요.” ...

“맛있어요?” ...

“먹어볼래요?” ...

리시가 셔벗을 한 스푼 떠서 케이의 입 앞에 내밀었다. ...

케이의 눈이 짓궂게 빛났다. ...

“이렇게 먹는 것보다는…….” ...

케이의 얼굴이 리시의 눈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

“그 예쁜 입술로 먹여줬으면 하는데.” ...

어젯밤이었다면 당황했을 것이다. 어쩌면 깜짝 놀라서 몸을 뒤로 뺐을지도 모르겠다. ...

하지만 리시는 이제 케이의 성격을 파악했다. ...

그래서 얼굴을 붉히고 머리를 뒤로 빼는 대신, 스푼을 떨어뜨리고 그 손으로 케이의 뒤통수를 잡아 끌어당겼다. ...

설마 이럴 줄은 몰라 무방비하던 케이의 머리가, 리시의 작은 힘에 끌려왔다. ...

살짝 떨어져 있던 입술과 입술이 겹쳐진 건 순식간이었다. ...

생각지 못한 상황에 놀란 케이가 굳어 있는 동안, 리시의 입술이 벌어졌다. ...

리시의 입안에 남아 있던 새콤달콤한 액체가 케이의 입안으로 넘어왔다. ...

목적을 달성한 리시가 입술을 떼어낸 후에도, 케이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멈춰 있었다. ...

어제 내내 리시를 놀렸던 케이가 이번에는 반대로 당해서 놀란 걸 보니 즐거웠다. ...

리시는 엄지로 그의 입술을 쓰윽 문질러 닦아주며 말했다. ...

“어떤가요? 맛있나요?” ...

그제야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

“달군요, 리시. 더없이 달아요.” ...

“그거 다행이네요.” ...

리시가 웃으며 바닥에 떨어진 스푼을 집어 들려 했는데 그의 손이 리시의 손 위에 겹쳐졌다. ...

케이는 리시의 손을 살며시 감싸 쥐고 들어 올려, 리시가 자신을 보게 했다. ...

“그 옷은 나단의 옷이군요.” ...

“입을 옷이 없어서요. 하녀들이 입는 옷은 입고 싶지 않고요.” ...

“내 옷을 입어도 됐을 텐데.” ...

“당신 옷은 너무 크거든요.” ...

“당신은 너무 작고.” ...

어젯밤의 대화를 떠올리며 리시가 빙긋 웃었지만, 케이는 웃지 않았다. ...

“내 아내가 다른 사내의 옷을 입은 걸 보는 건, 썩 유쾌하지 않군요.” ...

“어머, 그린 백작님이 질투라는 것도 할 줄은 몰랐는데요.” ...

“나도 몰랐어요, 리시. 그런데 그거 알아요?” ...

그의 입술이 리시의 입술 옆을 스치고 지나가 귓가에 머물렀다. ...

그가 리시의 귓불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

순간, 달콤한 전율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

“늑대는 평생 단 하나의 암컷만을 곁에 둬요, 리시.” ...

발가락 끝까지 퍼진 기묘한 감각에 섞여, 그의 음성이 흘러들어왔다. ...

농밀한 음성이 귓불을 타고 내려와 전신을 쓰다듬는 것만 같았다. ...

“그러니 당신 몸에 체취를 남길 수 있는 수컷도 나 하나여야만 해요.” ...

(8) 고집 세고 욕심 많은 여자. ...

  케이브란트 그린은 냉정하고 서늘한 사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

분노와 절망에 찬 그의 마지막 모습만 제외하면, 리시가 아는 지난 삶의 케이브란트는 북쪽 얼음 지대의 바람 같은 사내였다. ...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리시의 앞에 있는 케이는 여름 햇살보다 뜨거웠다. ...

케이가 갑자기 리시를 번쩍 안아 올렸다. ...

“핫!” ...

그에게 공주님처럼 안긴 리시는, 저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지르며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안긴 게 처음이라, 높은 위치가 무서웠다. ...

“적극적이군요, 리시.” ...

“장난이 많으시네요, 케이. 내려줘요.” ...

“싫어요.” ...

케이는 그렇게 리시를 안은 채 본채를 향해 걸어갔다. ...

“누가 보면 어떡해요.” ...

“내 저택에서 내가 무엇을 하든, 수상하게 여길 사람은 없으니 안심해요, 리시.” ...

“그런 말이 아니라…….” ...

“부끄러워서 그래요?” ...

부끄럽다고 하면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리시는 입을 꾹 다물었다. ...

“창피하고 부끄럽다고 하면 내려줄게요, 리시.” ...

“내 저택에서 내가 무엇을 하든, 창피하고 부끄러울 것이 뭐가 있겠어요?” ...

케이는 즐거운 듯 소리 내서 웃었다. ...

“옳은 말이에요, 리시.” ...

케이는 리시가 이 저택을 ‘내 저택’이라고 한 부분을 지적하지 않았다. ...

그제야 리시의 몸에서 긴장이 풀렸다. ...

케이의 키가 커서 안긴 위치가 높긴 하지만, 그의 가슴은 넓고 두 팔은 단단했다. 케이가 리시를 떨어뜨릴 일은 없을 것이다. ...

케이는 리시를 안은 채로 침실에 들어와, 리시를 소파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소파 위는 아직도 나단의 옷으로 가득했다. ...

“내 가운으로 갈아입어요, 리시. 재단사를 부를 테니, 내일까지는 내 가운을 입고 이 방에 있는 게 좋겠어요.” ...

“케이, 나는……!” ...

“나도 그렇게 할게요.” ...

나는 온실 속 화초가 아니에요. 당신 원하는 대로 날 다룰 생각하지 마요. ...

하려던 말이 케이의 말에 막혔다. ...

“나도 가운을 입고 오늘은 온종일 이 방에 있도록 하죠. 그럼 공평하겠죠?” ...

리시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그를 올려다봤다. ...

“왜 그렇게 봐요?” ...

“의외라서요.” ...

“무엇이?” ...

“우리, 서로의 입장이 있어서 정략결혼을 한 줄 알았는데.” ...

“그 앞에 무엇이 붙든 결혼은 결혼이고, 당신이 내 아내가 되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죠. 사무적인 관계를 원했다면 그 소망은 접어둬요, 리시. 나는 이런 사람이니까.” ...

사실 케이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

케이야말로, 리시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에 놀라워하는 중이었다. ...

평생 단 하나의 암컷이네, 내 체취만 남겨야 하네. ...

이런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

부하들이 들었다면 배를 잡고 웃었을 것이고, 5년 정도 놀림감으로 삼았을 것이다. ...

‘하지만…….’ ...

케이는 약간은 불만스러운 듯, 약간은 즐거운 듯 묘한 표정을 짓고 앉아 있는 리시를 내려다봤다. ...

허리까지 길게 늘어진 은빛 머리카락이 탐스러웠다. 위틀로 공작 가의 꽃이면서도, 사내의 옷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다니는 그녀의 행동거지가 케이를 즐겁게 했다. ...

저 옷이 케이의 옷이라면 더 즐거웠겠지만. ...

‘재미있는 여자야.’ ...

케이는 재미있는 게 좋았다. 리시는 케이가 아주 오랜만에 만난 재미있는 상대였다. 리시의 앞에서 자신답지 않게 변하는 자신이 싫지 않았다. ...

“옷을…… 갈아입을게요.” ...

이윽고 리시가 말했다. ...

“그래요.” ...

“보지 말아요.” ...

“우린 부부인데?” ...

리시가 지그시 케이를 노려봤다. ...

케이는 그 모습마저 귀여워 보였다. ...

“알겠어요, 안 볼게요.” ...

케이가 돌아서자 사락, 사락 옷 벗는 소리가, 남들보다 몇 배는 뛰어난 케이의 청각을 자극했다. ...

묘하게 뜨거운 감각이 아랫배 부근에 뭉쳤다. 케이는 괜히 흠흠, 헛기침해서 옷 벗는 소리를 떨쳐냈다. ...

“다 갈아입었어요.” ...

“그래요.” ...

“당신도 갈아입어요.” ...

“그러죠. 아, 내가 갈아입는 모습은 봐도 돼요.” ...

“안 볼 거예요.” ...

리시가 고집스럽게 말하고 돌아서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

“내 전속 시녀가 필요해요.” ...

케이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리시가 말했다. ...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양질의 교육을 받고, 입이 무거운 사람이면 좋겠어요.” ...

“제이미에게 말해두죠.” ...

“그리고 며칠 후에 아마도 알포드 후치스 자작이 찾아올 거예요.” ...

알포드 후치스 자작? 그게 누구지? ...

뒤늦게 리시와 결혼하려고 했던 남자라는 걸 떠올렸다. ...

“그 남자가 나를?” ...

“혹은 나를.” ...

가운을 다 갈아입은 케이가 돌아섰을 때도, 리시는 여전히 등을 보인 채였다. ...

“난 다 갈아입었어요, 리시.” ...

리시는 케이가 거짓말을 한 줄 알았는지 살짝 고개를 돌려 옷을 제대로 입었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몸을 돌렸다. ...

그녀는 두 손을 허벅지 앞에 가지런히 모으고 있었는데, 정중한 그 자세가 신기하게도 리시가 하면 오만해 보였다. ...

“알포드 후치스가 왜 나를, 혹은 당신을 찾아오는 거죠?” ...

“아마 우리 결혼을 인정 못 한다고, 날 내놓으라고 할 거예요. 어쩌면 날 내놓기 전에는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무례하게 행동할지도 몰라요.” ...

“흐음. 그 남자를 본 적도 없으면서 잘 아는 것 같군요.” ...

“나는 아는 게 많거든요.” ...

리시가 소파를 가리키자, 케이가 무의식적으로 소파에 수북이 쌓인 나단의 옷을 옆으로 밀어내 앉을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

리시는 케이가 그녀를 위해 그런 일을 해주는 게 당연하다는 듯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고 빈자리에 앉았다. ...

“내가 그 남자를 어떻게 해줄까요, 리시? 다시는 당신 눈앞에 띄지 않게 그 목을 따버릴까?” ...

리시가 고요히 미소 지었다. ...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저 그 남자에게서 라벤트의 금광을 양도받도록 해요. 그리고 그 금광을, 내게 결혼 선물로 줘요.” ...

리시는 알포드를 잘 알았다. ...

리시가 케이와 결혼했다고 해도, 알포드는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지금쯤 공작 저택에 머물며, 리시를 데려오라고 무례하게 행동하고 있지 않을까. ...

또한, 리시는 브리트니를 잘 알았다. ...

브리트니는 리시가 그린 백작을 가졌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아마 지금쯤 질투로 잠도 못 자며, 리시와 케이의 사이를 멀어지게 할 간계를 꾸미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으리라. ...

리시는 알포드와 브리트니에 대해 너무도 잘 알기에, 그들의 수준 역시 알고 있었다. ...

알포드는 반드시 이곳으로 찾아올 것이다. ...

“결혼 선물이라…….” ...

케이의 음성이 냉랭했다. 리시는 흔들림 없이 케이를 올려다봤다. ...

“뭔가 오해하는 모양인데, 리시. 내가 당신에게 결혼 선물을 줘야 할 의무는 없어요. 당신은 내가 수인이라는 걸 알리지 않기로 했고, 나는 당신을 위틀로 가에서 데려와 그린 백작 부인으로 만들어주기로 했죠. 그걸로 우리 사이의 계산은 끝났다고 보는데.” ...

“그린 백작은 계산이 정확하지 않네요. 내가 잡은 건 당신 목숨줄인데, 우리의 이 결혼, 한쪽으로 많이 기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리시.” ...

케이가 테이블 너머로 성큼 다가와 리시의 턱을 검지로 들어 올렸다. 그의 회청빛 눈동자에 음산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

“내가 잡은 것 또한 당신의 목숨줄이니까.”   이번에도 리시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목을 뜯어낼 것 같은 살기를, 리시는 조금도 겁내지 않고 흘려보냈다. ...

케이는 리시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었지만 살기를 거두지 않았다. 목을 죄는 이 살기 속에서, 리시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

“옹졸한 남자 같으니…….” ...

리시의 도톰한 입술 사이로 생각지 못한 말이 흘러나오는 바람에, 케이의 살기가 무너졌다. 리시의 입꼬리가 살풋 올라갔다. ...

“그 대단한 그린 백작이 고집 세고 욕심 많은 아내를 위해 라벤트의 금광 하나 선물도 못 해주는 남자라는 건 몰랐네요.” ...

리시가 여상히 중얼거렸다. 케이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날 너무 능력 없는 남자로 만들지 말아요, 리시.” ...

“하는 거 봐서요.” ...

“고집 세고 욕심이 많은 데다가 까다롭기까지 하군요.” ...

“익숙해져야 할 거예요.” ...

케이의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접혔다. 그는 한동안 리시를 빤히 응시하다가 물었다. ...

“라벤트의 금광을 받아서 뭘 하고 싶은 거예요?” ...

“살아보니, 세상은 돈이 많아야 하더군요.” ...

“뭘 얼마나 사셨다고.” ...

“당신이 놀랄 만큼은 살았어요.” ...

리시가 일어나 창문을 향해 걸어갔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리시의 은빛 머리칼이 눈부시게 빛났다. ...

리시가 걸을 때마다 낭창낭창 흔들리는 가운 끝을, 케이는 넋을 놓고 지켜봤다. ...

자그마한 여자가 걸어갈 뿐인데, 세상의 중력이 그녀에게 모인 것처럼 빨려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그린 가문은 무척이나 명예가 드높은 가문이라, 돈이 없어도 모두의 존경을 받죠. 하지만 존경만으로는 부족해요.” ...

리시가 창문 밖으로 시선을 둔 채 말했다. ...

그녀는 햇빛에 둘러싸여, 케이가 잡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

케이는 리시의 곁으로 다가갔다. ...

“리시, 당신은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죠?” ...

“처음에는 무더운 남부. 다음에는 험난한 서부에서 추운 북부, 그리고 마지막에는 풍요로운 동부까지.” ...

리시가 케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전부 내 발아래에 둘 거예요.” ...

케이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

“꿈이 크군요, 리시. 가비자르 제국의 황제들도 그 염원을 이루지 못했어요.” ...

가비자르 제국은 엘레론드 대륙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였다. 가비자르 제국의 역대 황제들은 엘레론드 대륙을 발아래에 두고 싶어서 여러 방법으로 노력해왔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

케이는 위틀로 공작 저택에서 조용히 살아온 리시가 세상을 알지 못해서 터무니없는 꿈을 꾼다고 생각했다. ...

“글쎄요. 라벤트의 금광이 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지갑이 될지, 이 대륙을 내 발아래에 둘 포석이 될지는 두고 봐야겠죠.” ...

리시의 검지가 케이의 가슴을 콕 찔렀다. 케이를 올려다보는 리시의 연한 보라색 눈동자가 조금은 장난스럽게 빛났다. ...

“당신도 배포가 있는 사내라면 내게 투자해봐요.” ...

사실 케이는 라벤트의 금광 따위, 얼마든지 리시에게 선물로 줄 수 있었다. 리시가 그 금광에서 얻은 이익으로 드레스를 사든, 목걸이를 사든, 아무래도 좋았다. ...

다만 리시와 이렇게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게 즐거웠을 뿐이다. ...

케이는 리시가 이 대륙을 발아래 두겠다는 포부를 믿지 않았다. ...

만약 리시가 라벤트의 금광으로 사치를 즐긴다 해도, 오늘의 대화를 거론하며 조금 놀리고 나서, 그래도 괜찮다고 웃어줘야지. ...

그런 생각을 하며 케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어요, 그린 백작 부인. 당신에게 라벤트의 금광을 선물하도록 하죠.” ...

(9) 내 남자의 정부?! ...

“아아악!” ...

브리트니는 들고 있던 찻잔을 집어 던졌다. ...

쨍그랑- ...

시녀들이 화들짝 놀라 깨진 찻잔을 치우는 동안, 브리트니는 씩씩거리며 창문 밖을 노려봤다. ...

며칠 전, 케이가 찾아왔을 때의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

아버지가 황궁 쪽에 줄을 대놨다는 말에 잠깐 기분이 좋긴 했지만, 황태자비가 되고 싶어 하는 여자들이 수십, 수백 명이다. ...

그 경쟁률을 뚫고 황태자비가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

하지만 케이브란트 그린의 아내가 되고 싶어 하는 여자들도 수십, 수백 명이었는데, 리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의 아내가 되어버렸다. ...

그날 느낀 모멸감이 사라지질 않았다. ...

-그렇게 따지자면 너희 아빠도 마찬가지야. ...

리시가 속삭인 말도. ...

응접실에 찾아온 리시가 브리트니를 오시하던 눈동자도. ...

‘아이리스, 그년…… 착하고 고분고분한 척하더니, 사실은 뱀 같은 계집애였어. 그린 백작이 그년의 본성을 알아야 하는데…….’ ...

케이가 브리트니를 조롱했던 일은, 브리트니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브리트니가 기억하는 일은 오직 리시가 보였던, 오만하고 뻔뻔한 행동뿐이었다. ...

‘아이리스, 그 계집애는 항상 내걸 뺏어가. 우리 아빠부터 시작해서…… 라포드…… 그래, 라포드까지.’ ...

브리트니는 자신을 향해 선량하고 따뜻한 미소를 지어줬던, 하늘색 머리칼의 소년을 떠올렸다. ...

브리트니가 처음으로 사랑했던, 다정하고 상냥한 라포드. ...

-미안해, 브린. 나는……. ...

브리트니의 고백을 거절하던 라포드의 시선은, 아이리스를 향해 있었다. ...

창문을 닦던 아이리스가 고개를 돌리다가 라포드와 눈이 마주쳤고, 라포드는 아이리스를 향해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브리트니에게는 보여준 적 없는 종류의 미소였다. ...

아이리스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사내를 홀리는, 헤픈 미소를 지었겠지. ...

라포드 이후에도 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 ...

그렇게 헤프게 살았으면서 성유물의 수호자인 그린 가문에 들어가다니. ...

케이는 아이리스가 얼마나 헤픈 여자인지 모를 것이다. 아이리스는 그린 가문의 명성에 먹칠할 게 분명했다. ...

‘모른다면…….’ ...

브리트니의 눈에 알포드 후치스 자작의 모습이 들어왔다. ...

며칠 전, 어째서인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위틀로 공작 저택에 찾아온 알포드는, 아이리스가 이미 케이브란트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데도, 아이리스를 내놓으라며 공작 저택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

아이리스를 내놓지 못한다면 브리트니라도 내놓으라는 망발까지 해댔다. ...

알포드는 자작에 불과했지만, 후치스 대상단의 주인이기도 했다. 작위보다 재산이 더 가치 있기 시작한 시대이기에, 위틀로 공작도 알포드를 함부로 쫓아내지 못했다. ...

‘가르쳐주면 그만이지.’ ...

브리트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알포드도 쫓아내고, 행복해하고 있을 아이리스에게 찬물을 끼얹을,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계획을 세우자마자 브리트니는 얼른 방에서 나와 알포드에게 달려갔다. ...

알포드는 다디단 초콜릿 쿠키를 먹으며, 옆에 있는 하녀에게 자신이 얼마나 돈이 많은지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었다. ...

“후치스 자작.” ...

“오, 브리트니 양. 알포드라고 불러요.” ...

알포드가 기름진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알포드는 브리트니가 조만간 자신의 아내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

“어찌 그러겠어요. 후치스 자작은 내 사랑하는 동생, 아이리스의 남자인데.” ...

알포드의 얼굴이 구겨졌다. ...

“공작님이 그 아이리스를 그린 백작에게 줘버렸지 않습니까?” ...

“줘버리다니…… 무슨 그런 말씀을…….” ...

“그럼 아닙니까? 약속대로라면 난 이미 아이리스 양을 데리고 내 영지로 돌아갔을 거예요.” ...

“알아요, 알아요. 아이리스도 그럴 수 있기를 얼마나 고대했다고요.” ...

“……그래요?” ...

“그럼요. 케이브란트 그린. 그 작자가 성유물의 수호자인 걸 내세워서 아이리스를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리는 바람에…… 우리 아이리스가…….” ...

브리트니는 그날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물론 슬퍼서가 아니라 화가 치밀었기 때문에 샘솟는 눈물이었다. ...

“그린 백작의 마차에 탄 아이리스가 얼마나 눈물을 흘리던지……. 아직도 그것만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져요.” ...

브리트니의 볼을 타고 또르르 흐르는 눈물에, 알포드가 안됐다는 시선을 보냈다. ...

“하지만…… 하지만 어쩌겠어요? 위틀로 공작님도 어쩌지 못하는 그린 백작에게서, 내가 어떻게 아이리스를 뺏어올 수 있겠어요? 그러니 브리트니 양, 저랑…….” ...

“아이리스가 정말 아름답다는 거, 알아요? 초상화를 보셨을 텐데…….” ...

“그, 그거야 물론…….” ...

“그렇게 예쁜 우리 아이리스가 후치스 자작을 그리워하면서 울었는데……. 그렇지 않니?” ...

옆에 있는 하녀에게 묻자, 하녀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

“마, 맞아요. 아이리스 아가씨께서, 정말 많이 우셨죠.” ...

알포드가 꿀꺽 침을 삼켰다. ...

“저, 저도 원래 아이리스 양과 결혼하기로 했으니, 당연히 아이리스 양과 결혼하면 좋죠. 하지만 방법이 없잖습니까, 방법이…….” ...

“없긴요. 사내가 되어서는…….” ...

“아니, 여기서 제가 사내인 게 왜 튀어나와요?” ...

“후치스 자작, 정말 모르겠어요? 사내들이 왜 우리 아이리스에게 열광했는지…….” ...

“그거야 아름다우시니…….” ...

“물론 그것도 있지만, 우리 아이리스가 때 묻지 않은, 아주 순수한 아이라서 그런 거잖아요. 사내들의 손길도, 입김도 전혀 닿지 않은, 호수 한가운데의 꽃.” ...

알포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

“그야 그렇죠…….” ...

“아마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도 아이리스의 그런 면 때문에 갖고 싶었던 걸 거예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죠?” ...

알포드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자였다. ...

“하지만 그걸 누가 믿어주겠습니까?” ...

“걱정하지 말아요, 후치스 자작. 당신 뒤에는 우리 위틀로 공작 가문이 있고, 우리가 당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진실로 만들어줄 거니까요.” ...

 

+++

그린 백작 저택이 있는 다코트 시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디자이너와 재봉사가 찾아왔다. 리시는 디자이너가 가져온 디자인 북을 펼쳐, 원하는 디자인을 몇 개 골랐다. ...

화려한 드레스 두 벌, 우아한 드레스 한 벌, 원피스 세 벌과 평상복 몇 벌, 그리고 잠옷. 옷감은 가장 비싼 것보다 몇 단계 아래의 것으로 선택했다. 아직은 그린 가문의 돈을 아껴야 할 때였다. ...

“평상복은…… 정말 이걸로 괜찮겠습니까?” ...

디자이너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리시가 선택한 평상복 디자인은 귀부인이 입을 만한 디자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그걸로 괜찮아요.” ...

디자이너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백작님께서 일단 입을 수 있는 드레스를 가져오라 하셔서 몇 벌 가져왔는데 입어보시겠습니까?” ...

“그러죠.” ...

리시는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몇 벌의 드레스를 입어본 후, 당분간 입을 드레스를 몇 벌 선택했다. 디자이너가 가져온 장신구 함에서도 몇 개 골랐다. ...

“안목이 뛰어나시네요.” ...

디자이너의 말에 리시가 미소 지었다. ...

안목이 뛰어날 수밖에. 어쨌든 지난 삶에서는 대상단의 안주인으로 한참을 살았으니. ...

디자이너와 재봉사가 돌아간 후, 리시는 녹색 드레스를 집어 들었다. 가슴 부분은 거의 하얗게 보일 정도로 연한 녹색이지만,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색이 짙어지는 드레스였다. ...

이번에도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서 드레스를 갈아입었다. ...

‘시녀는 언제쯤 오려나?’ ...

하녀들은 귀부인의 드레스를 갈아입혀 주는 일을 해본 적이 없기에, 눈치껏 도와주면서도 허둥거렸다. ...

하녀 중에 머리를 만질 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이번에도 리시는 긴 머리를 흘러내리게 놔뒀다. ...

방 밖으로 나간 리시의 눈에 복도를 걸어오는 여자가 보였다. 갈색 머리카락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였는데 며칠 전부터 눈에 띄었다. ...

그녀는 리시를 보자 언제나처럼 고개만 건성으로 까딱하고는 스쳐 지나갔다. ...

하녀 중에는 새 안주인을 받아들이지 못해 질투하는 하녀가 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

‘거슬리네.’ ...

리시는 아직 백작 가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이 집안의 사람들에게 적응할 시간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저런 태도는 좋지 않다. ...

“백작님, 저 왔어요.” ...

뒤에서 여자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는 케이의 방 앞에 서 있었다. ...

케이와 리시는 침실을 같이 쓰지만, 개인 방은 침실을 사이에 두고 양옆에 따로 있었다. ...

리시도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 케이의 방 앞에서, 여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도 않고 ‘저 왔어요.’라며 문을 열어주길 요청하는 것이다. ...

케이가 들어오라고 했는지, 여자가 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

‘평범한 하녀는 아니었군.’ ...

어쩌면 케이의 정부일지도 모르겠다. ...

귀족이 하녀나 시녀를 자신의 정부로 삼고 저택에 두는 일은 흔하니까. ...

케이도 젊은 남성이니 정부 한둘쯤 가진 건 이해했다. ...

하지만 정부가 저택의 안주인인 리시에게 저런 태도를 보이는 건 잘못됐다. ...

“저 여자는 누구지?” ...

리시의 질문에 하녀가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백작님의…… 전속 시녀인데요.” ...

“이름은?” ...

“질레트 메르디 님이세요. 메르디 자작님의 따님이시라고…….” ...

“자작의 영애라고?” ...

“예.” ...

대답한 하녀도 질레트를 케이의 정부라고 생각하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

‘자작의 딸이 백작의 시녀를 하고 있다니…….’ ...

후작 이상 가문에 그보다 낮은 가문 영애들이 시녀로 들어가는 일은 있지만, 백작 가문에 자작 가문 영애가 시녀로 들어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

‘역시 케이의 정부였군.’ ...

리시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

질레트가 평민이라도 저런 태도는 골치가 아픈데, 자작 가문 영애라면 더 골치 아플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

리시의 목적은 평온하고 고요한 삶이었기에, 누군가 자신의 둥지를 건드리는 걸 원치 않았다. ...

‘눈앞에서 치워야겠어. 아니면 내 앞에서 고개도 못 들게 만들든가.’ ...

케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안주인에게 저런 태도를 보이는 여자를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

“아이리스 님.” ...

제이미의 부름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

“시녀들을 데려왔습니다. 지금 응접실에 있는데, 가서 만나보시겠어요?” ...

“그래요.” ...

응접실로 향하며, 제이미가 말했다. ...

“급하게 구하느라 이번에는 두 명밖에 구하지 못했어요. 대장…… 백작님께서 결혼 사실을 미리 알려주셨더라면 이렇게 허둥거릴 일이 없었을 텐데 말이에요.” ...

아무래도 케이에게 결혼 이야기를 미리 못 들은 것에 대한 서운함이 아직도 안 풀렸나 보다. ...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제이미는 굳이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닌 듯, 계속해서 말했다. ...

“하지만 저는 실력이 좋으니 이런 상황에서도 제대로 일을 해내지요. 백작님이 저 같은 부하를 둔 게 참으로 다행이지요?” ...

“그러게요. 다행이네요.” ...

이번에는 적당히 대답할 수 있었다. ...

제이미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음, 음, 하고 웃는 동안, 응접실 앞에 도착했다. ...

문을 열기 전, 제이미가 안에서 기다리는 두 명의 시녀에 관해 설명했다. ...

루테크 가문의 에르웰과 페르니 가문의 크리시나. ...

루테크도, 페르니도 평민이지만 준 귀족에 대우를 받을 정도로 명성이 있는 가문이었다. ...

응접실 안에 들어가기 전, 리시는 제이미에게 말했다. ...

“이 저택 사람 중, 한 명 더 내 시녀로 두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

“네, 말씀하세요.” ...

“질레트 메르디. 그녀에게 내 방에서 기다리라 일러두세요.” ...

(10) 백작 부인 뜻대로. ...

유명한 학자를 많이 배출한 루테크 가문의 에르웰. ...

예술가 집안으로 명망 높은 페르니 가문의 크리시나. ...

리시는 그 두 사람이 마음에 들었다. ...

에르웰은 리시와 비슷한 또래로, 빨간 머리에 녹색 눈동자, 콧등의 주근깨가 귀여운 아가씨였다. ...

크리시나는 아이가 있는 유부녀로 칠흑처럼 검은 머리칼에 새파란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

에르웰은 그린 저택에서 머물러도 괜찮다고 했고, 크리시나는 아이 때문에 일주일에 두세 번은 집에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

“명망 있는 가문의 영애들인데 이렇게 와줘서 고마워요.” ...

“아닙니다, 백작 부인. 저야말로 이름난 위틀로 공작 가의 꽃을 실제로 뵐 수 있고, 곁에서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이에요.” ...

크리시나의 말에 에르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위틀로 공작 가의 꽃? 헉, 진짜로 그 아이리스였던 거예요?” ...

크리시나가 에르웰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

“엘.” ...

“아! 죄송합니다, 백작 부인. 너무 놀라서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

에르웰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

진짜 그 아이리스냐고 물어볼 때와는 사뭇 다르게 차분해진 목소리였다. ...

“둘은 아는 사이였나 보네요.” ...

“네, 루테크 가문과는 평소 인연이 있어서, 이 아이가 어릴 때부터 쭉 교류를 해왔어요.” ...

에르웰은 입을 꾹 다물고 있고, 크리시나가 대신 대답했다. ...

“에르웰은 말이 없는 편이라서, 혹시 가끔 제가 대신 대답하게 되더라도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어요, 백작 부인.” ...

크리시나가 덧붙인 말이 의아했다. ...

말이 없는 편이라고? ...

리시의 눈에 에르웰은 이런저런 걸 묻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좀이 쑤신 것처럼 보였다. ...

하지만 굳이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았다. ...

첫날이기에 간단한 인사만 나누고 응접실에서 나왔다. 응접실 앞에서 기다리던 제이미가 얼른 리시에게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

“질레트 양은 아이리스 님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

리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이제 시녀가 된 둘에게 방을 안내해주라고 일렀다. ...

자신의 방으로 걸어가는 리시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

+++

제이미는 에르웰과 크리시나에게 방을 안내해준 후, 리시에게서 별도의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방에서 쉬어도 좋다고 했다. ...

제이미가 나가자마자 에르웰이 크리시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

“와, 대박. 개쩐다. 와, 시니. 대박.” ...

“엘…….” ...

“아니, 진짜 개쩔잖아. 와. 위틀로 공작 가의 꽃 아이리스. 과장된 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와, 진짜 예쁘시더라. 깜짝 놀랐네. 나한테 웃어주시는 거 봤어? 와, 진짜. 녹을 뻔. 심장 멈출 뻔.” ...

크리시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

“엘, 제발 말투 좀 바꿔. 벌써 스물다섯이나 된 여자애가 말투가 그게 뭐니? 그러니까 널 데려가겠다는 남자가 안 나타나지.” ...

“아, 됐어. 날 데려가겠다는 남자 없어도 된다니까. 난 고상한 척하면서 사는 건 죽어도 못 하겠어.” ...

에르웰이 소파에 털썩 앉아 테이블에 발을 올리는 모습에, 크리시나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

예쁜 드레스를 입고도 저런 행동거지라니. ...

우아한 백작 부인께서 에르웰의 저런 모습을 봤다가는 기절할지도 몰랐다. ...

“에르웰, 내가 딴 건 몰라도 딱 하나만 부탁할게.” ...

“뭔데?” ...

에르웰이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

“제발 그 드레스 속에 감춰둔 흉측한 암기들, 그것 좀 갖다 버려!” ...

 

+++

리시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소파에 편하게 앉아 있는 질레트를 발견했다. ...

질레트가 마치 이 방의 주인인 것처럼 보였다. ...

리시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질레트는 일어나지 않았다. 고개만 돌려 리시를 빤히 올려다봤을 뿐이다. ...

리시는 별말 없이 걸어가 소파 맞은편에 앉아서 질레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 커다란 눈과 녹색 눈동자. 자그마한 얼굴에 오밀조밀 들어찬 이목구비는 조화로웠다. ...

브리트니와 견줄 만큼 예쁘게 생긴 얼굴이라서, 리시는 질레트가 뭘 믿고 이렇게 오만방자하게 구는지 알 수 있었다. ...

질레트는 처음에 비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리시의 시선을 받아들였지만, 리시가 입을 열지 않자 견디기 힘들어졌는지 손가락을 꼼실거렸다. ...

결국, 침묵을 깬 건 질레트였다. ...

“왜 불렀어요?” ...

“메르디 가문은 돈이 없어 시장 비렁뱅이에게 가정교육을 맡겼나 봅니다.” ...

“예?” ...

질레트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

질레트는 뒤늦게 자신을 비난하는 말이라는 걸 눈치채고 얼굴을 붉혔다. ...

리시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질레트는 리시의 말에 반박하고 싶은 듯했지만, 할말을 찾기 힘들 것이다. 이 저택의 안주인에게 버릇없이 군 건 사실이니까. ...

질레트는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깨물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여유롭게 허벅지 위에 올려져 있던 질레트의 두 손이 하얗게 될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

‘날 한 대 때리고 싶겠지.’ ...

리시는 이미 질레트에 대한 파악을 끝냈다. ...

만약 질레트가 지혜로운 자였다면, 저택의 안주인에게 예를 표하며 뒤에서 살금살금 케이의 마음을 홀렸을 것이다. ...

하지만 질레트는 자신의 감정을 전부 내보이고 있었다. 이런 상대를 다루는 건 쉽다. ...

“그런 말을 하려고 부른 거라면 가겠어요!” ...

이윽고 질레트가 벌떡 일어났다. ...

리시는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한 채 나직하지만 강하게 말했다. ...

“앉아, 질레트 메르디.” ...

질레트가 움찔했다. ...

리시는 여전히 질레트를 올려다보지 않고, 고고하게 앉아 정면을 오시하고 있었다. ...

질레트가 아무리 내 세상처럼 굴었더라도, 리시는 그린 백작 부인이다. ...

‘시녀’의 자격으로 들어온 이 저택에 있는 한, 리시의 말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었다. ...

질레트는 도로 자리에 앉았다. ...

이번에도 리시는 입을 열지 않고, 질레트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

“할 말 있으면 빨리하세요.” ...

“질레트. 그대는 오늘부터 내 시녀예요.” ...

질레트의 눈이 커졌다. ...

“무슨…… 난 백작님의 전속 시녀예요!” ...

“오늘부터는 아니에요. 내 전속 시녀예요.” ...

“하! 말도 안 돼. 나는 당신의 시중을 들려고 이 저택에 들어온 게 아니에요. 내가, 우리 메르디 가문이 백작 부인 시중이나 들 가문인 줄 아세요?” ...

“그렇다면 백작 시중을 들 가문인가요?” ...

“그거랑 그건 다르죠.” ...

“다르지 않아요. 부부는 한 몸이라고들 하니까.” ...

“하지만……! 정략결혼이잖아요. 다 알아요.” ...

리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

“정략결혼이든, 연애결혼이든, 결혼은 결혼이라는 걸 알 만한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

질레트가 이를 악물었다가 말했다. ...

“백작님께서 허락하지 않을걸요.” ...

“글쎄요. 내 생각은 다른데.” ...

질레트가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갔다. ...

리시는 이번에는 그녀를 붙잡지 않고 내버려뒀다. ...

질레트는 신경질적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가슴에 분이 차올라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

‘짜증 나!’ ...

질레트를 아래 것 보듯 내려다보는 리시의 눈동자가 싫었다. ...

흔들림 없는 차분한 태도도, 높낮이 없이 이어지는 말투도, 위틀로 공작 가의 꽃이라는 칭송조차 모자란 것 같은 그 아름다운 외모도, 전부 다 싫었다. ...

‘백작님이 저 여자에게 날 시녀로 보낼 리 없어.’ ...

질레트는 케이의 유일한 전속 시녀였다. 질레트는 이 저택에서 케이의 서재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여성이었다. ...

케이는 자신이 없을 때라면 언제든 편하게 서재에 들어와 책을 읽어도 좋다고 말해줬다. 케이가 서재에 있는 걸 알면서 모르는 척 벌컥 문을 열어도, 케이는 화낸 적이 없었다. ...

‘백작님은 나한테만 관대해. 정략결혼을 했을 뿐인 저 여자랑 나는 달라.’ ...

케이가 질레트를 리시의 전속 시녀로 보내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질레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이번에는 모르는 척 문을 벌컥 열 수 없었다. 케이에게 리시의 만행을 알리려고 찾아온 것이기 때문이다. ...

질레트는 표정을 갈무리하고 크게 심호흡한 후, 서재 문을 노크했다. ...

“누구냐?” ...

“백작님, 저 질레트인데요.” ...

“일하는 중이다.” ...

“긴히 드릴 말씀이…….” ...

“일하는 중이라 했다.” ...

케이의 단호한 거절에, 질레트는 차마 서재 문을 열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

그때, 언제 따라온 건지 리시가 질레트의 옆에 섰다. ...

“케이.” ...

“백작님은 일하는 중이에요.” ...

질레트가 지적하는 것과 동시에 서재 문이 열렸다. ...

질레트에게는 일하는 중이라고 거절했던 케이가, 리시의 부름 한 번에 손수 문을 열어준 것이다. ...

질레트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어서 눈을 홉뜨고 케이를 올려다봤다. ...

케이의 회청빛 눈동자는 이 자리에 질레트가 없는 것처럼 오롯이 리시만을 향해 있었다. ...

케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질레트에게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미소였다. ...

“드레스를 자랑하러 온 건가요, 리시?” ...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케이의 음성은 잔잔하고 달콤했다. 이 또한 질레트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

“그래 보이나요?” ...

“그리 근사한 모습이라면 자랑하고 싶을 것 같아서.” ...

케이가 손을 뻗어 리시의 머리카락 끝을 살짝 손가락에 감았다가 풀었다. ...

“녹색 드레스를 입으니, 마치 수풀 사이에 서 있는 엘프 같군요.” ...

“엘프가 정말 있나요?” ...

“방금 말했잖아요. 내 눈앞에 있다고.” ...

케이와 리시는 이보다 더 재미있는 농담은 없을 거라는 듯,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

질레트는 두 사람이 자신을 옆에 두고도 둘만 있는 것처럼 농을 주고받는 모습에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도저히 끼어들 수가 없는 분위기라서 아랫입술만 깨물 뿐이었다. ...

‘이 남자 누구야?’ ...

케이는 질레트가 아는 케이브란트 그린 같지가 않았다. ...

케이는 북극의 얼음 성처럼 감정 표현을 거의 하지 않는 냉정한 남자였다. 부하들과 함께 있을 때는 가끔 웃기도 하지만, 평소에는 과묵하고 표정 변화도 거의 없었다. ...

그런 케이가 리시를 상대로는 마치 봄바람 맞은 강아지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리시?” ...

“제이미가 데려온 시녀들이 아주 마음에 들어요. 루테크 가문의 에르웰과 페르니 가문의 크리시나라니. 상상도 못 했어요.” ...

루테크 가문과 페르니 가문은 질레트도 알고 있었다. ...

학자와 예술가를 수없이 배출해서, 메르디 자작 가문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집안이었다. ...

“하지만 시녀 두 명으로는 부족해서요.” ...

“그래요. 시간을 준다면 루테크와 페르니 정도로 좋은 가문의 영애를 찾아보죠.” ...

“아니요. 그렇게 좋은 가문의 영애까지는 필요 없어요.” ...

드디어 리시의 눈동자가 질레트에게로 향했다. ...

케이는 그제야 질레트의 존재를 눈치챘다는 듯 질레트를 돌아봤다. ...

“이 정도면 돼요.” ...

케이의 앞이 아니었다면 질레트는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

리시는 메르디 가문을 루테크와 페르니 가문 이하로 만드는 동시에, 질레트 또한 두 시녀보다 격이 낮은 존재로 떨어뜨렸다. ...

케이의 대답이 질레트의 마지막 지푸라기였다. ...

질레트는 케이가 거절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케이의 입술만 응시했다. ...

질레트를 흘끗 돌아본 케이가 무심히 대답했다. ...

“원하는 대로 해요, 리시.” ...

(11) 버릇없는 늑대 ...

  시녀를 구했으니 이제는 평생 놀고먹기 위한 기반을 다지기 위해 노력해야 할 때다. ...

리시는 제이미에게 부탁해서 백작령에 발간되는 모든 신문과 잡지를 매일 사다 달라고 했고, 그린 가문의 여러 부서 책임자를 직접 만나서 이것저것 배우느라 늦은 시간에야 침실에 들어갔다. ...

하지만 케이는 더 바쁜지, 리시보다도 늦게 침실에 들어왔다가 일찍 나가거나 아예 들어오지 않기 일쑤였기에, 서로 얼굴을 마주할 새가 거의 없었다. ...

“백작님께서는 아주 바쁘신가 봐요.” ...

날씨 좋은 어느 날, 리시의 방 거실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크리시나가 허브차를 내오며 말했다. ...

크리시나가 시녀로 들어온 후, 케이의 얼굴을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마음이 쓰인 모양이었다. ...

“당연하죠. 백작님은 여러 가지 계획이 있으셔서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으시거든요.” ...

리시는 아무 말 하지 않았는데, 질레트가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조용히 서 있던 에르웰이 표정을 구기더니, 드레스 허리춤으로 슬그머니 손을 가져갔다. 크리시나가 무시무시하게 노려보자 곧 입술을 비쭉거리며 도로 손을 빼냈지만. ...

세 명밖에 없는 시녀인데도 관계가 썩 좋지 않았다. ...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에르웰과 크리시나는 질레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

질레트가 리시의 앞에서 무례하게 행동하는 데다가, 에르웰과 크리시나에게도 자신이 귀족 가의 영애라는 걸 내세우기 때문이었다. ...

크리시나는 질레트의 무례한 행동도 조용히 넘어가곤 했지만, 에르웰은 그럴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고 드레스 어딘가로 손을 넣으려 하곤 했다. ...

뭘 꺼내려는 것 같은데, 리시는 에르웰이 뭘 꺼내려고 하는 건지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매번 크리시나가 에르웰이 노려보는 바람에, 에르웰이 꺼내려는 걸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

“그러고 보니 아이리스 님. 아이리스 님은 결혼반지가 없네요. 설마 백작님한테 반지도 못 받은 거예요?” ...

질레트가 ‘난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거예요.’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

리시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드레스에 어울리는 팔찌는 차고 있지만, 반지는 끼지 않았다. ...

지금껏 결혼반지에 대해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

“하긴. 정략결혼이다 보니 그런 번거로운 절차는 생략했겠어요. 결혼식도 안 올렸으니까. 그래도 다른 정략결혼 하는 사람들은 결혼식 정도는 올리던데…… 백작님 너무하신다. 내가 다 속상하네.” ...

말과 달리 질레트는 즐거워 보였다. ...

“질레트 양. 백작 부인 앞에서는 언행을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

에르웰이 꼼짝 못 하게 노려보던 크리시나가 결국 참지 못하고 한소리했다. ...

질레트가 어이없다는 듯 크리시나를 쏘아봤다. ...

“지금 날 나무라는 거야? 우리가 같은 시녀이긴 해도, 나 메르디 자작님의 딸이야.” ...

크리시나가 질레트를 응시하느라 에르웰을 말리지 못하는 바람에, 에르웰이 허리춤에서 꺼내려던 게 언뜻 보였다. ...

은빛으로 빛나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기 전 노크 소리가 방 안의 긴장된 분위기를 깨뜨렸다. ...

“리시. 들어가도 돼요?” ...

케이였다. ...

질레트는 아직 케이를 포기하지 못한 듯, 얼른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머리를 손질했다. ...

에르웰과 크리시나가 기가 막힌다는 듯 질레트를 쳐다봤다. ...

“들어와요.” ...

리시의 허락이 떨어지자 케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

그는 멀리 나갔다가 온 듯 제대로 된 정장 차림이었다. ...

흰색에 금테를 두른 정장을 입은 그는, 마치 남신처럼 아름다웠다. ...

“하아앙.” ...

질레트가 저도 모르게 감탄의 한숨을 뱉어냈다. 에르웰이 토하는 시늉을 하는 걸 본 사람은, 크리시나뿐이었다. ...

크리시나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에르웰이 몸가짐을 바르게 하게 시키는 동안, 케이는 즐거운 표정으로 리시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

“오랜만에 시간이 났어요. 저택 구경은 끝났어요?” ...

“아직 전부 돌아보지는 못했어요.” ...

“잘됐네요.” ...

케이가 리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

리시는 뭘 하라는 건지 몰라 그의 커다란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

그의 손가락은 길고 마디가 굵었는데, 검을 많이 쥐어 손바닥 곳곳에 굳은살이 있었다. 리시는 이렇게나 싸움에 능숙한 자의 손을 처음 보기에, 넋을 잃고 그의 손바닥을 감상했다. ...

“리시?” ...

그의 부름에 멍하게 올려다봤다. ...

“뭐해요? 손 줘요.” ...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바닥 위에 손을 얹었다. ...

그가 씩 웃었다. ...

“달란다고 주다니, 훈련을 잘 받은 강아지 같군요, 리시.” ...

“당신은 버릇없는 늑대고요.” ...

두 주인이 주고받는 밀담에, 눈치 빠른 크리시나가 다른 시녀들에게 눈짓하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질레트는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두 눈을 부릅뜨고 리시와 케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

결국, 크리시나가 질레트의 드레스 자락을 붙잡아 끌었다. 질레트는 짜증스럽게 크리시나의 손을 쳐내고 자기 스스로 방을 나갔다. ...

시녀들이 나가자, 케이가 리시의 손을 잡고 소파에서 일으켰다. ...

“시녀 중에 이빨을 드러내는 시녀가 있는 것 같은데.” ...

“당신이 버릇없이 키워서 그렇겠죠.” ...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뭔가를 키우는 거예요, 리시. 화초 하나도 제대로 못 키우죠.” ...

“질레트의 말로는, 당신의 시중을 들었다고 하던데.” ...

“내 시중을? 아……!” ...

케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

“리시, 혹시 질레트가 내 밤일을 도와줬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바쁜 척하며 날 피했고?” ...

“첫 번째는 맞고, 두 번째는 틀려요.” ...

“이런, 리시.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무나 이 케이브란트 그린의 몸에 손을 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

리시는 케이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그의 가슴 위에 올리고 도발적으로 그를 응시했다. ...

“이렇게 쉽게 손댈 수 있는데.” ...

그러자 케이가 고개를 숙여 리시의 귓불을 잘근 깨물었다. ...

“당신은 아무나가 아니잖아.” ...

그의 숨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영문 모를 저릿한 감각이 귀에서부터 척추를 쓰다듬으며 발가락 끝까지 쭉 퍼졌다. ...

리시가 움찔하자 그가 키득키득 웃었다. ...

웃을 때마다 그 숨결이 귀를 간질여, 리시는 숨도 쉴 수 없었다. ...

리시는 자신이 사내와 여인의 은밀한 행위에 대해서 닳고 닳을 정도로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케이의 작은 접촉, 작은 숨결에 자꾸만 긴장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리시는 케이에게서 살짝 떨어져 그를 올려다봤다. 지금 느끼는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그에게 물었다. ...

“그렇다면 질레트가 왜 저리도 제멋대로 굴게 내버려둔 거죠?” ...

“메르디 가문은 쓸만하거든.” ...

“상단의 주인이라서요?” ...

“응.” ...

“버려요. 쓸모없으니.” ...

“그러지.” ...

케이는 어떻게 아느냐고 묻지도 않고 순순히 대답했다. ...

리시는 그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

“말이 짧아지네, 케이.” ...

케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

“아, 미안, 미안. 가끔 당신이 나한테 반말하던 모습이 떠올라서. 다시 봐도 오싹할 정도로 매력적이네요, 리시.” ...

“칭찬인가요?” ...

“물론.” ...

케이는 리시의 손을 이끌어 복도로 나갔다. ...

“어딜 가는 거죠?” ...

“시간이 났으니 저택 안내를 해줄게요. 듣자 하니 그린 가문에 대해서 이것저것 배우는 것 같던데, 눈으로 보는 것만큼 정확한 게 없잖아요.” ...

 

+++

케이가 저택 부지 안에 있는 본채와 별채, 기사 숙소 등 여러 곳을 구경시켜준 후 마지막으로 데려간 곳은, 어느 새까만 건물이었다. ...

마치 창고처럼 창문조차 없는, 까만 건물. ...

건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딱 하나였는데, 쉽게 부수기 힘든 육중한 철문으로 되어 있었다. ...

그 건물이 보이기 시작하자, 케이가 말했다. ...

“여기서부터는 내가 밟은 곳만 밟으면서 따라와야 해요.” ...

“함정이 있나요?” ...

“영리하군요, 리시.” ...

리시는 케이가 밟은 곳만 밟으려고 집중하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

케이는 혹시라도 리시가 실수할까 봐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

리시는 집중한 듯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는데, 그게 귀여워 보였다. ...

최근에 너무 바빠서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동안, 케이의 머릿속에는 항상 리시가 있었다. ...

케이는 시간 낭비하는 걸 싫어하는데, 이상하게도 리시와 무의미하게 농담을 주고받는 게 즐거웠다. ...

“여기서부터는 편하게 움직여도 괜찮아요. 아, 문에 손을 대지는 말고요.” ...

건물 앞에서 케이가 말했다. ...

“무시무시한 곳이군요.” ...

“귀한 것이 있어서. 잠시 실례.” ...

리시가 눈 깜빡할 사이에, 케이가 커다란 늑대로 모습을 바꿨다. ...

오랜만에 보는 늑대의 모습. ...

리시는 무심코 그에게 다가가 그의 콧등을 쓰다듬었다. ...

부드러운 털결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

리시가 콧등을 쓰다듬자 그는 잠깐 긴장했지만, 곧 기분 좋은 듯 눈을 가늘게 떴다. ...

“이 모습일 때 누가 날 쓰다듬는 건 처음이에요, 리시.” ...

“불쾌한가요?” ...

“아니, 계속해요.” ...

케이는 발라당 뒤집어서 배라도 보여줄 기세였다. ...

리시는 자기보다 훨씬 큰 늑대가 눈을 반쯤 감고 손길을 받아들이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

특히 눈썹처럼 보이는, 눈 위의 회색 털이 움찔움찔 움직이는 게 귀여웠다. ...

“강아지나 한 마리 키울까 봐요.” ...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케이가 번쩍 눈을 떴다. ...

“그런 건 나 하나로 족하잖아요.” ...

“당신은 너무 크니까.” ...

“후회할 텐데.” ...

지난번에도 케이가 후회할 거라고 말한 걸 무시했다가 봉변을 당한 적이 있기에, 이번에는 흘려듣지 않았다. ...

“왜 후회하죠?” ...

“강아지는 날 무서워해서, 내 근처에만 있어도 오줌을 지리거든요.” ...

“저런…….” ...

케이가 웃는 듯 입을 길게 찢어 올려서, 크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

리시는 겁 없이 그의 송곳니에 손을 댔다. ...

“무섭네요.” ...

“전혀 무서워하는 표정이 아닌데요, 리시.” ...

케이가 입을 벌려 리시의 손바닥을 할 짝 핥는 바람에, 리시는 깜짝 놀라 손을 거뒀다. ...

검은 늑대의 목에서 크르릉,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

웃는 소리인가 보다. ...

케이는 리시에게서 몸을 돌려 건물 문 앞으로 걸어가 앞발을 들었다. 커다란 앞발에 있는 날카로운 발톱을 세워, 문에 있는 네 개의 틈에 끼워 넣었다. ...

철컹- ...

문이 열렸다. ...

“이 문은 내 발톱으로만 열 수 있죠.” ...

케이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서 옷을 입는 동안, 리시는 이 검은 건물 안에 들어 있는 게 뭔지 추측해냈다. ...

‘성유물이 있는 곳이구나.’ ...

 

+++

알포드는 눈앞에 있는 그린 백작 저택을 노려봤다. ...

그동안 자신을 제일 돋보이게 할 옷을 제작하고, 이런저런 포석을 깔아두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

준비하는 동안에도 ‘나의 아이리스’가 무뢰배인 케이브란트에게 끔찍한 일을 당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속이 탔는지 모른다. ...

알포드의 머릿속에서 아이리스는, 원치도 않는데 그린 백작에게 끌려가 알포드를 그리워하는, 안쓰럽고도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

알포드는 고개를 바짝 치켜들고 정문을 지키는 병사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

“알포드 후치스 자작이 그린 백작과 만남을 청한다고 알려라.” ...

(12) 백작 부인은 과거가 있다. ...

어두운 건물 안을 천장에 있는 희미한 빛이 밝히고 있었다. ...

리시는 고개를 들어 빛의 근원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

“영구 마법을 걸어둔 마석인가요?” ...

“그래요.” ...

“값이 어마어마했을 텐데.” ...

마법이 사라지는 시대. ...

마법사를 고용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고, 마법 물품의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었다. ...

“당연히 신성국에서 지원해줬죠. 마석 가격이 이렇게까지 비싸지 않았을 때 만든 건물이기도 하고.” ...

건물 안에는 따로 방이 없는, 넓은 공간이었다. 그 중앙에 황금색으로 빛나는 여러 개의 진열대가 놓여 있었다. ...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 길에도 함정이 설치되어 있는지, 케이가 앞서 걸어가며 함정을 해제했다. ...

이윽고 황금 진열대 앞에 도착한 리시는, 그 위에 놓인 네 개의 물건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

술잔. 검. 지팡이. 로브. ...

그냥 봤을 때는 특별한 것이 하나도 없는, 오히려 낡고 쓸모없어 보이는 물건들이었다. ...

“절대로 만지면 안 돼요, 리시.” ...

케이가 경고하지 않았더라도, 리시는 그것을 만질 생각이 없었다. ...

성유물은 평범한 사람이 잘못 만지면 죽거나,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상황에 빠지게 된다. 성유물이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험한 일이 벌어지는 일도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성유물에 대한 기록은 많아요. 예전에는 성유물을 트레저라고 하면서 찾아다니는 전문 직업도 있을 정도였죠. 평민 중에서도 성유물을 가진 사람이 있을 정도였어요.” ...

성유물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신성국이 성유물을 모아서 관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날 벌어진 전쟁으로, 수많은 성유물이 파괴되거나 사라졌다. ...

지금 케이가 가진 네 개의 성유물은, 그 혼란 속에서도 신성국이 힘겹게 지켜낸 것들이었다. ...

“성유물에는 각각 능력이 있어요. 오래전에는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도 있었다고 하는데…….” ...

“지금은 전혀 없나요?” ...

“없어요. 있을 수도 있지만, 워낙 위험해서 시도조차 못 해보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

“만지기만 해도 죽는 건가요?” ...

“죽으면 차라리 다행인데……. 육체 안에 갇히는 경우가 있어요.” ...

“육체 안에 갇힌다?” ...

“정신은 멀쩡한데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거죠. 눈동자조차도. 한마디로 육체가 감옥이 되는 거예요.” ...

리시는 그런 상황을 상상해보았다. 정신은 멀쩡하지만, 눈동자조차 움직일 수 없는 상황. ...

“끔찍하군요.” ...

“물론 모든 성유물이 그렇게 위험한 건 아니고, 만져도 괜찮은 경우가 있긴 하지만, 혹시 모르는 거니까요.” ...

케이는 네 개의 성유물에 대해 설명해줬다. ...

곡식이 끊임없이 흘러나온다는 황금 술잔. ...

심장에 찔러넣으면, 소생할 수 없을 정도로 다치거나 병든 자를 완벽하게 치료해준다는 죽음의 검. ...

짐승이 명령을 따르게 해주는 와일즈 지팡이. ...

몸을 투명하게 만드는 제리어스 로브. ...

나직해서 듣기 좋은 목소리로 설명하던 케이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

리시도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

“기다리던 손님이 온 것 같군요, 리시.” ...

“응?” ...

“알포드 후치스 자작.” ...

“아…… 그걸 어떻게……?” ...

케이가 자기 귀를 톡톡 두드렸다. ...

“늑대는 청각이 뛰어나거든.” ...

케이가 리시의 손을 잡았다. ...

“같이 갈래요? 우리의 다정한 모습도 보여줄 겸.” ...

“아니요.” ...

리시가 고요히 미소 지었다. ...

“혼자 가요, 케이. 내 도움 없이 후치스 자작에게서 금광을 뺏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

+++

알포드는 응접실에 들어가지 않고 그 앞 복도에 서서, 집사와 근처를 지나가는 하녀들에게, 아이리스가 자신과 얼마나 뜨거운 연애를 했는지에 대해 떠들어댔다. ...

아직 아이리스를 많이 경험하지 못한 하녀들은 “어머. 어머.” 하면서 흥미롭게 알포드의 이야기를 들었다. ...

그중에는 질레트도 있었다. ...

“그 호수 앞이었지. 우리가 첫 키스를 나눈 건……. 그때 파르스름하게 떨리던 우리 아이리스의 속눈썹이 아직도 생생해. 나는 그때 결심했어. 아이리스와 결혼하겠다고! 아이리스 역시 내 마음과 같다고 대답했고 말이야.” ...

알포드가 떠들어대는 걸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귀부인이 숨기고 싶은 과거는, 하녀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깃거리였다. ...

알포드가 평범한 집사일 뿐이라고 생각한 제이미도 옆에 서서 알포드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

제이미는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예리한 눈빛으로 그 자리에 있는 하녀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있었다. ...

“헉……. 야, 얼른 가자.” ...

복도 멀리서 걸어오는 케이의 모습에, 하녀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

알포드의 옆에 남은 건 제이미뿐이었다. ...

알포드는 당당하게 서서 케이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지 않고.” ...

이윽고 알포드의 앞에 도착한 케이가 먼저 응접실에 들어가며 중얼거렸다. ...

어째 말이 짧다 싶었지만, 알포드는 일단 케이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

알포드는 소파에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

“아이리스에 대해 할 말이 있어서…….” ...

“라벤트의 금광을 나한테 팔도록 해, 후치스 자작.” ...

말이 끊기는 바람에, 알포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

한참 어려 보이는 케이가 자신에게 반말을 사용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아무리 케이의 작위가 더 높다지만, 요새는 같은 귀족이라면 상대의 나이가 많을 땐 서로 존댓말을 하는 것이 예의였다. ...

“이봐요, 그린 백작님. 나는…….” ...

“좋은 값을 쳐주지.” ...

“내 말 좀…….” ...

“나는.” ...

케이가 우아하게 다리를 꼬았다. ...

“금광 얘기가 아니면 하고 싶지 않은데.” ...

“아이리스는 내 여자예요!” ...

케이가 말한 것과 알포드가 외친 것은 동시였다. ...

소리높여 외친 알포드는 씩씩거렸지만, 케이는 눈썹 한번 꿈틀하지 않고 여유롭게 말했다. ...

“금광 시세보다 10프로 정도 더 쳐줄 수도 있어, 자작.” ...

“백작님! 난 지금 아이리스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서 뺏어간, 불쌍한 아이리스 이야기요!” ...

“그런 것 같군. 그런데 어쩌나. 나는 금광 얘기가 더 끌리는데.” ...

“애초에 금광 얘기는 꺼낼 생각도 없었다고요!” ...

“나는 금광 생각뿐이었는데.” ...

농담하는 건가 싶어서 쳐다봤지만, 케이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

그는 느른한 표정으로 금광 얘기만 반복할 뿐이었다. ...

이러다가는 끝이 없겠다 싶어서, 알포드는 말했다. ...

“라벤트의 금광은 안 팝니다. 천만 골드를 준다고 해도 안 팔아요.” ...

“듣기로는 위틀로 공작에게 주려고 했다던데.” ...

“그거야……!” ...

아이리스를 사 오는 대가지, 라는 말을 덧붙일 수 없었다. ...

“앞으로 장인어른이 될 분이니까…….” ...

“흐응.” ...

“아무튼, 금광 얘기는 여기서 끝내고 아이리스 얘기를 합시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리스는 오래전부터 나랑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어요. 우리가 만난 건,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인데…….” ...

알포드가 아까 하녀들 앞에서 했던 이야기를 반복했다. ...

케이는 이번에는 알포드를 방해하지 않고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

원래 알포드에게서 라벤트의 금광을 양도받기 위한 계획을 여러 개 세워뒀다. 알포드가 운영하는 후치스 대상단의 각종 비리도 조사했다. 여차하면 그것들을 가지고 알포드를 회유할 작정이었다. ...

하지만 응접실에 걸어오면서 알포드가 아이리스를 두고 지껄이는 소리를 듣는 순간, 계획을 바꿨다. ...

알포드에게는 좀 더 험한 맛을 보여주는 게 좋겠다. 저 입으로 아이리스에 대해 두 번 다시는 떠들어대지 못하도록. ...

“이제 아시겠죠, 그린 백작님? 아이리스는 나랑 같이 있어야만 행복하게 웃을 수 있어요.” ...

“내 앞에서도 잘 웃던데.” ...

“그거야 백작님이 강압적으로 아이리스를 취하는 바람에 무서워서 그런 거겠죠. 아이리스는 겁이 많고 여리거든요.” ...

겁이 많다고? 아이리스가? ...

정말 이 남자는 리시에 대해 조금도 모르는군. ...

“아무리 백작님이라도 한 여자를 강제로 데려갈 수는 없는 거예요. 성유물의 수호자가 그 명예를 이런 식으로 이용했다는 걸 알면, 사람들이 욕할 겁니다. 신성국에서 알게 되면 성유물의 수호자 자격을 박탈당할지도 모르고요!” ...

케이가 별말 하지 않자, 기세등등해진 알포드는 이제 케이를 은근히 협박하기 시작했다. ...

케이는 천천히 일어났다. ...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 자작. 따라와.” ...

“일단 아이리스 문제부터 해결하고…….” ...

“따라와, 자작.” ...

케이가 응접실을 떠나는 바람에, 알포드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

케이는 복도를 걸어가며 제이미에게 눈짓했다. 제이미가 고개를 끄덕이고 모습을 감췄다. ...

알포드는 케이를 따라잡기에 바빠서, 케이와 제이미가 눈빛을 교환하는 걸 보지 못했다. ...

케이는 느긋하게 걷는 것 같은데, 알포드가 뛰듯이 그 뒤를 쫓아도 가까워지질 않았다. ...

둘은 한참을 걸었다. ...

‘저택이 이렇게 넓었나?’ ...

계단을 오르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했다. 복도 오른쪽으로 가기도 하고 왼쪽으로 가기도 했다. ...

밖에서 봤을 때는 이렇게까지 넓어 보이지 않는데, 마치 거대한 미로를 걷는 것 같았다. ...

이윽고 도착한 곳은, 두꺼운 철문으로 된 어느 방이었다. ...

혼자서는 열기 힘들 것 같은 그 문을, 케이는 어렵지 않게 열고 들어갔다. ...

알포드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

쿵-! ...

육중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는 바람에, 알포드가 펄쩍 뛰었다. ...

케이는 알포드를 향해 속을 알 수 없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

“여, 여긴 뭡니까?” ...

어두워서 주위가 잘 보이지 않았다. ...

케이가 벽에 있는 버튼을 누르자, 방 안이 환해지며 그 안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

“헉!” ...

알포드가 숨을 들이마셨다. ...

“고문실이라고 하지. 내가 아주 좋아하는 곳이다.” ...

케이가 여상히 말하며 어느 끔찍한 모양의 의자 앞으로 걸어갔다. 의자에 이상한 장비가 설치되어 있었다. ...

“이걸 머리에 씌우고 이건 목에 고정하지. 이 버튼을 누르면 머리가 죄고, 이 버튼을 누르면 목에 낀 이 고리가 위로 서서히 올라가.” ...

케이가 즐겁다는 듯 설명하는 걸 들으며, 알포드는 그 광경이 상상돼서 오싹해졌다. ...

“자작은 목이 짧으니 이 고리로 목을 좀 늘리는 것도 좋겠군.” ...

“무, 무슨 그런 농담을…… 하하하하.” ...

“농담 아닌데.” ...

케이가 작게 중얼거린 말을, 알포드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

“여기 이 동상은 유명하지. 평범한 동상으로 보이지만 안에는 날카로운 바늘이…….” ...

“이 둥근 통에는 사람을 가둬. 안에 넣고 아래에 불을 지피면…….” ...

“여기 이 도구는 이빨을…….” ...

“이건 손톱을…….” ...

케이는 방 안 곳곳에 있는 장치와 도구를 일일이 설명했다. ...

알포드는 참지 못하고 외쳤다. ...

“대체 내게 이런 걸 보여주는 저의가 뭡니까? 날 협박이라도 하려는 겁니까?” ...

“오!” ...

날카로운 도구를 들고 만지작거리던 케이가 눈을 크게 떴다. ...

“다행이군. 그걸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아서.” ...

케이가 성큼 다가왔다. ...

케이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알포드를 물끄러미 응시했을 뿐이다. ...

그런데 이상하게도 알포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에 짓눌려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

그런 알포드를 지그시 응시하며, 케이가 속삭였다. ...

“기름 흐르는 사내랑 밀폐된 공간에서,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거든.” ...

(13) 강아지는 털발 ...

  케이가 시선을 돌리자마자 알포드는 정신을 차렸다. ...

그제야 수치심이 찾아왔다. 남의 앞에서 오줌을 지리다니. ...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

위틀로 공작에게 주려고 했던 라벤트의 금광은, 사실 곧 폐광할 금광이었다. 매장된 금을 거의 다 캐냈기 때문이었다. ...

그런 금광 따위, 남에게 줘도 상관없긴 하지만, ‘나의 아이리스’를 빼앗아 간 케이에게만큼은 절대로 주고 싶지 않았다. ...

“이, 이런다고 해서…… 이런다고 해서 내 금광을 줄 수는 없어요! 이 문제는 신성국에 가서 교황님께 정식으로 항의할 겁니다!” ...

알포드는 자신이 가진 모든 용기를 짜내서 외친 후, 휙 돌아섰다. ...

그대로 도망칠 생각이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언제 들어온 건지, 복면을 쓴 사내 세 명이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

그들을 보자, 며칠 전 위틀로 공작 저로 향할 때, 마차를 습격한 괴한들이 떠올라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

“뭐, 뭐 하는 거냐? 저리 비켜!” ...

알포드는 그들에게 차마 가까이 가지 못하고 외쳤다. ...

그들은 알포드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정면만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

알포드는 뒤를 돌아서 케이에게 항의하고 싶었지만, 무서웠다. 왜인지 악마 같은 것이 등 뒤에 있는 것 같아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

검은 공포가 발등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알포드를 잠식했다. 왠지 자기가 서 있는 곳이 이 세상이 아닌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이……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습니까, 그린 백작님?” ...

알포드는 다리를 후들후들 떨면서 말했다. ...

“아, 아무리 협박해도…… 나는…… 나는 이 문제를 반드시 교황님께 전할 겁니다. 아니, 기자들에게도 알릴 거예요.” ...

일단 말을 시작하자 두려움이 좀 가셨다. 그제야 알포드는 케이를 돌아볼 수 있었다. ...

“백작님은 나랑 결혼하기로 약속한 아이리스를 억지로 데려갔고, 그에 대해 항의하려고 찾아온 나를 고문실에 가두고 욕보였습니다. 그 성실한 성유물의 수호자가 사는 저택에 이런 고문실이 있는 것 자체도 알려지면 큰일인데, 거기에 날 가두고 협박한 건 아주 큰 문제가 될 거예요.” ...

케이가 씩 웃었다. 문 앞을 지키는 복면인들도 키득거렸다. ...

알포드는 그들이 왜 웃는지 알 수 없어서 불안했다. ...

“자작. 고마워. 날 웃게 해줘서.” ...

말과 달리, 케이의 눈빛은 서늘해졌다. ...

“자작이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서 교황님을 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니. 정말 재미있네.” ...

뒤늦게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알포드가 놀라서 펄쩍 뛰며 돌아서서 문을 향해 달려갔지만, 복면인들이 막고 있어서 문에 닿을 수 없었다. ...

복면인 중 덩치가 큰 사내가 알포드의 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

“컥!” ...

알포드가 숨 빠지는 소리를 냈다. 복면인이 알포드의 목을 잡은 채 들어 올렸다. ...

알포드가 다리를 버둥거렸지만, 복면 사이로 보이는 갈색 눈동자는 냉혹했다. ...

“커…… 크헉……!” ...

알포드는 복면인이 적당히 겁을 준 후에 내려 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복면인의 손에서는 힘이 빠지지 않았고, 반대로 알포드의 육체에서는 점점 힘이 빠졌다. ...

세상이 까맣게 변했다. ...

“으헉!” ...

찬물을 뒤집어쓴 알포드가 깨어났을 때, 눈앞에는 케이가 있었다. ...

알포드는 자신이 기절하기 전에 경험한 죽음의 공포를 잊지 않았다. 죽음 앞에서 수치심이나 모멸감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감정이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

알포드는 벌떡 일어나 케이의 앞에 무릎 꿇었다. ...

“드, 드리겠습니다.” ...

케이가 느른한 시선을 보냈다. ...

“무엇을?” ...

“그, 금광이요. 라벤트의 금광, 그거. 드리겠습니다. 네, 드려야죠.” ...

“아쉬운걸.” ...

“예?” ...

“이걸 써보고 싶었는데.” ...

케이는 뭐에 쓰는 건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무시무시한 기구를 손에 들고 있었다. ...

가시가 잔뜩 달린 기구를 보며, 알포드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

케이가 눈짓을 하자, 복면인이 얼른 서류를 가져왔다. ...

라벤트의 금광을 아이리스 그린에게 양도한다는 계약서였다. ...

“아, 아이리스…….” ...

계약서에 적힌 이름을 보고, 알포드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자작.” ...

케이가 무시무시한 기구로 알포드를 겨눴다. ...

“남의 아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 백작 부인이라는 좋은 호칭이 있잖아.” ...

“죄, 죄송합니다.” ...

알포드는 더 이상 케이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그저 얼른 이 고문실을 빠져나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

‘내가 나가기만 해봐라. 가만 안 있을 테니까.’ ...

알포드는 금광을 넘긴다는 계약서에 사인하고, 지장을 찍고, 도장까지 찍은 후에야, 고문실을 나올 수 있었다. ...

케이는 알포드를 저택 대문까지 배웅해줬다. ...

알포드는 이대로 달려가서 대형 신문사의 기자를 만나 이 일에 대해 전부 이야기하고, 신성국으로 향할 계획이었다. ...

“자작. 내가 자작을 위해 영양가 풍부한 이야기를 하나 해주지.” ...

이야기고, 뭐고, 알포드는 얼른 떠나고 싶었지만, 꾹 참고 케이를 올려다봤다. ...

“자작은 욕심 많은 상단 주인이고, 나는 성유물의 수호자야. 자작이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면 나도 대응하게 될 텐데…… 과연 사람들은 누구 말을 믿을까? 상단 주인? 아니면 성유물의 수호자?” ...

“……!”

“자작이 개소리를 지껄인 순간, 아까 본 내 그림자들이 자작을 찾아갈 거야. 과연 뭐가 빠를까? 내 그림자들이 자작을 찾아내는 거? 아니면 자작이 신성국의 교황님을 뵙는 거?” ...

알포드는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

“착하게 굴어, 자작. 내가 지켜볼 건데, 그냥 지켜보게만 해줘. 그럴 수 있지?” ...

 

+++

“아까 찾아온 사내 때문에 하녀들 사이에서 안 좋은 소문이 돌고 있어요.” ...

리시는 창밖을 내다보면서 크리시나의 보고를 들었다. ...

“아무래도 하녀들은 그 남자 말을 믿는 것 같아요. 게다가…… 질레트 양까지 나서서 그런 이야기에 동참하는 바람에…….” ...

크리시나가 말끝을 흐리는데, 작게 속삭이는 듯한 욕설이 겹쳐졌다. ...

“미친년…….” ...

아무래도 에르웰의 목소리 같지만, 리시는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아이리스 님, 질레트 그…….” ...

과묵한 에르웰이 모처럼 입을 열었는데, 퍽 소리가 났다. ...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에르웰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옆구리를 움켜쥔 채 크리시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에르웰?” ...

“질레트 양을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아요, 아이리스 님.” ...

크리시나가 말했다. ...

에르웰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옆구리를 잡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뭔가 불만족스러운 듯 입술을 비쭉거리기는 했지만. ...

“아이리스 님의 전속 시녀인 질레트 양이 그런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니면, 하녀들은 그 헛소문을 더 믿게 될 거예요.” ...

크리시나의 말에 에르웰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

“에르웰, 내게 할 말 있어요?” ...

“아, 에르웰은 말수가 적어서…….” ...

크리시나가 대신 대답했다. ...

아닌데. 할 말 진짜 많은 것 같은데. ...

“질레트는 그냥 둬도 돼요.” ...

리시의 말에 에르웰이 인상을 구겼다. 말수는 적지만 표정은 다양한 사람이라고, 리시는 생각했다. ...

질레트의 문제는 조금 더 시간을 들여서 해결하기로 했다. ...

지금 당장은 나름대로 성실하게 일하는 질레트를 백작 가에서 쫓아낼 명분이 없었다. ...

이유도 없이 질레트를 쫓아내면, 사람들은 새로 온 백작 부인이 백작 곁에 있는 시녀를 질투해서 쫓아냈다고 생각할 것이다. ...

리시에게 무례하게 굴었다는 이야기를 해도, 다들 믿어주지 않으리라. 사람들은 강자보다 약자가 당한 부조리를 편드는 걸 더 좋아하니까. ...

창밖을 내다보던 리시의 눈에, 알포드가 케이와 함께 저택 정문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

알포드는 마치 도망치는 것처럼 발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

잠시 후, 케이가 리시를 찾아왔다. ...

리시가 눈짓하자 시녀들이 방에서 나갔다. ...

케이가 리시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

“라벤트의 금광을 얻었어요, 리시.” ...

계약서에는 분명하게 아이리스 그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

아이리스 그린. ...

지난 삶, 리시는 아이리스 위틀로로, 결혼한 후에는 내내 아이리스 후치스로 살다가 죽었다. ...

요새는 그린 백작 부인이라고 불리지만, ‘아이리스 그린’이라고 적힌 문서를 보니 새삼스럽게 가슴이 뭉클했다. ...

“잘했어요, 케이.” ...

“그게 끝이에요?” ...

“뭐가 더 필요해요?” ...

“날 우쭐하게 해줄 칭찬, 혹은 보상.” ...

우쭐하게 해줄 칭찬이라니. ...

아무리 궁리해도 ‘잘했어요.’ 이상의 칭찬을 찾을 수가 없었다. ...

“털이라도 빗겨줄까요?” ...

농담 삼아서 한 말인데, 케이가 “오!” 하더니, 얼른 늑대로 변했다. ...

리시는 당황했다. ...

정말로 케이의 털을 빗겨줄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

케이는 늑대로 변하면 원래 입고 있던 옷이 벗겨졌다. ...

그렇다는 건 케이가 알몸이라는 건데……. ...

알몸인 사내의 몸을 빗질하라고? ...

하지만 리시가 뭐라 하기도 전에, 케이는 이미 리시의 화장대에서 큼지막한 빗을 물고 왔다. ...

케이는 빗을 내려놓고 리시의 앞에 얌전하게 엎드렸다. ...

훈련을 잘 받은 커다란 강아지 같은 모습에, 왜인지 가슴 한 부분이 간질거렸다. ...

‘그래, 뭐…… 강아지들한테는 털이 옷이나 마찬가지니까.’ ...

귀족들은 자신이 키우는 강아지의 털을 완벽하게 관리해준다. ...

강아지의 털을 관리해주는 애견 미용사가 떠오르는 직업 중 하나가 되었을 정도였다. ...

리시는 빗을 들어서 케이의 옆에 살포시 앉아, 그의 등에 난 털을 빗겨줬다. ...

늑대의 털은 뻣뻣하지만, 윤기가 흘러서 만지다 보면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 ...

털을 빗겨주다 보니 머릿속에 가득했던 생각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다. ...

‘강아지 털을 빗겨주는 건, 빗겨주는 쪽도 힐링 받는 일이구나.’ ...

리시가 자신을 ‘강아지’라고 생각하는 걸 꿈에도 모르는 케이는, 그르르, 그르르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눈을 감고 있었다. ...

+++

케이의 여동생인 제레시엔은, 오랜만에 참석한 친구의 조촐한 티파티에서 상상도 못 한 이야기를 들었다. ...

끝이 살짝 올라간 제레시엔의 날카로운 눈이 더 날카로워졌다. ...

“뭐라고?” ...

“그러니까, 그린 백작 부인. 네 새언니 되는 사람이 네 오빠를 두고 불륜 행위를 하고 있다고.” ...

“그게 무슨…….” ...

제레시엔의 청회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

그 소식을 전해준 친구가 안쓰럽다는 듯 제레시엔의 어깨를 토닥였다. ...

“진짜 말도 안 되지? 네 오빠를 두고 딴 남자를 만나다니……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소문으로는 네 새언니가 결혼하기 전부터 그 남자랑 연애했다고 하더라. 그 남자가 너희 오빠 저택에도 찾아갔었대.” ...

“하…… 말도 안 돼.” ...

“그럼, 그럼. 말도 안 되지. 젠, 그러니까 너도 저택에만 틀어박혀 있지 말고, 나와서 좀 사람들 얘기도 듣고 그래. 이 이야기, 너만 몰라. 저번에는 잡지에도 실렸어. 믿을 만한 사람이 제보했대.” ...

“와, 진짜 말도 안 돼.” ...

제레시엔이 두 손으로 자신의 짧은 단발을 거머쥐었다. ...

“우리 오빠, 대체…….” ...

티파티에 참석한 제레시엔, 젠의 친구들이 그녀를 향해 안쓰럽다는 시선을 보냈다. ...

그런 친구들을 쳐다보며, 젠이 물었다. ...

“언제 결혼한 거야?” ...

(14) 내 오빠의 아내. ...

젠이 그린 백작 저택을 방문했을 때, 케이와 리시는 금광 문제로 집에 없었다. ...

응접실에서 젠은 유진과 나단, 월라스, 제이미를 한 명, 한 명, 돌아본 후 입을 열었다. ...

“사자, 표범, 독수리, 사슴.” ...

젠의 부름에 케이가 자신의 그림자라고 부르는 부하들이 어깨를 움찔했다. ...

케이의 그림자들 역시 케이와 같은 수인이었고, 케이의 가족들은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

젠은 화가 날 때면 그들을 이름이 아닌, 그들이 변신하는 동물로 부르곤 했다. ...

눈치 빠른 제이미가 입을 열었다. ...

“젠. 나도 너랑 같은 상황이지요.” ...

“……뭐가?” ...

“나도 대장이 결혼했다는 걸, 위틀로 공작 가에서 돌아오는 길에 관청에 혼인계약서까지 내버렸다는 걸, 한참 나중에야 알았지요.” ...

제이미를 향해 있던 젠의 눈동자가 유진에게로 향했다. ...

젠이 화가 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 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항변하기 위해 입술을 움직였다. ...

“나는 그 일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

“맞아, 전혀 모른다고!” ...

나단이 얼른 끼어들었다. ...

“난 그냥 말 타고 있는데, 대장이 갑자기 불러서 그랬단 말이야.” ...

-나, 결혼하려는데 너희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

나단이 케이의 표정과 말투를 따라 했지만, 젠은 웃지 않았다. ...

“대장이 왜 갑자기 결혼하려고 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하겠다는데 어떻게 해? 우리가 그 고집쟁이를 어떻게 말려?” ...

나단이 항의하는 동안, 월라스는 옆에서 머리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

그들의 앞에 선 젠은 팔짱을 낀 채, 표정의 변화 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

그럴 때의 젠은 누가 봐도 케이의 동생이라는 걸 알 정도로, 케이와 닮았다. ...

“하여간 우리는 아는 거 없어, 젠. 대장이 형수님이랑 어디서 만났는지,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그런 거, 하나도 몰라. 왜 갑자기 결혼하기로 했는지도 모르고. 아, 왜 결혼하려고 했는지는 알겠다. 우리 형수님, 진짜 깜짝 놀랄 정도로 예쁘다?” ...

월라스가 자기 누이동생을 자랑하듯 말하자, 젠의 한쪽 눈썹이 쓰윽 치켜 올라갔다. ...

젠의 기분을 눈치챈 제이미가 월라스의 옆구리를 쿡 찔렀지만, 월라스는 계속해서 말했다. ...

“너도 보면 놀랄걸? 아, 너도 들어봤지? 위틀로 공작 가의 꽃. 진짜 꽃 같으셔.” ...

“꽃 같다…….” ...

젠이 중얼거렸다. ...

어째 욕처럼 들리는 말투였다. ...

“응, 정말로. 대장도 어쨌든 남자니까, 형수님이 너무 예뻐서 홀딱 반하신 거 아닐까? 어? 젠, 표정이 왜 그래? 아, 너 말고 다른 분 예쁘다고 해서 그래? 너도 예뻐, 예뻐.” ...

월라스를 제외한 부하들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저 눈치 없는 자식을 어떡해야 하지? ...

“오빠랑 결혼한 그 여자가 위틀로 공작 가의 꽃인지, 똥인지는 아무 관심 없어.” ...

젠이 싸늘하게 말했을 때야, 월라스가 입을 다물었다. ...

“내가 놀라운 건. 이 중에서 우리 오빠의 결혼 사실을 우리 가족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거야.” ...

  +++

리시와 케이는 마차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는 중이었다. ...

케이는 리시의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

살짝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과 그 아래로 쭉 뻗은 콧날과 입술 선이 마치 그림처럼 완벽했다. ...

마침 불어온 바람에 케이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

케이는 성가신 듯 머리칼을 뒤로 넘기다가, 리시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

“왜 그렇게 봐요, 리시?” ...

“같이 가지 않아도 되는데. 당신, 바쁘잖아요.” ...

“부인이 멀리 가는데 혼자 가게 둘 수는 없죠.” ...

“월라스가 나단과 함께 가주겠다고 했는데.” ...

“그 녀석들보다는 내가 더 강합니다, 리시.” ...

“그건 알아요. 하지만 바쁜데 괜히 자리를 비우게 한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하네요.” ...

“결혼해본 게 처음이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부인이 가는 길에 남편이 동행하는 경우, 보통은 부인이 남편한테 폐를 끼친다고 생각하나요?” ...

“……그렇지는 않겠죠?” ...

“그럼 됐어요, 리시. 이유가 뭐든 우리는 부부니까. 그나저나 그 차림, 근사하다고 내가 말했던가요?” ...

리시는 마치 사내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

늘씬한 다리를 돋보이게 해주는 딱 붙는 검은색 바지와 짙은 갈색 셔츠, 그리고 딱 맞는 조끼. ...

긴 머리는 뒤로 질끈 묶고, 검은색 페도라를 썼다. ...

언뜻 보면 호리호리한 체구의 남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

“오늘은 처음 말하네요.” ...

“근사해요, 리시. 어떻게 그런 옷을 주문할 생각을 했죠? 레이디들은 즐겨 입지 않는 옷인데.” ...

“밖에 돌아다닐 때, 너무 눈에 띄고 싶지 않거든요. 내가 하는 일들이 여기저기 퍼지는 것도 싫고.” ...

“그런 거라면 실패했어요, 리시.” ...

케이가 리시의 손가락 끝을 잡아 올렸다. ...

그는 리시의 손가락 마디에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마치 낙인을 찍는 듯 눌려오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리시는 움찔했다. ...

눈만 올려 리시를 응시하며, 케이는 리시의 손가락 마디 하나, 하나에 전부 입을 맞추고, 갑자기 리시를 끌어당겼다. ...

리시는 그의 힘을 이기지 못해 훌쩍 딸려가, 그의 품에 안기듯 허벅지 위에 앉았다. ...

케이가 리시의 손목 안쪽에 입을 맞추며, 가죽조끼 안으로 손을 넣어 리시의 등을 쓰다듬었다. ...

얇은 셔츠 너머로 전해진 열기가 척추를 타고 흘러내려 갔다. ...

“지금도 눈을 뗄 수 없거든.” ...

“으흥……?” ...

등과 손목에 닿는 자극에 신경 쓰느라, 그와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 잊었다. ...

리시의 붉고 도톰한 입술 사이로 신음과 비슷한 소리가 흘러나오자,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리시를 마차 안의 긴 의자에 눕혔다. ...

그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 ...

“여기…… 마차 안이에요.” ...

“짐승이 그런 걸 신경 쓸 것 같아요?” ...

케이의 무게가 배와 허벅지를 묵직하게 눌러왔다. ...

리시는 눈을 질끈 감았다. ...

그의 입술이 귓가를 지분거리고, 그의 손가락이 리시의 두피를 긁듯이 머리칼 안으로 깊이 들어왔다. ...

그의 입술과 손이 닿는 곳마다, 그의 무게가 눌러오는 곳마다, 안에서 전기가 터지듯 저릿해졌다. ...

심장이 뛰고 호흡이 가빠지는 걸, 리시도 느낄 수 있었다. ...

그가 귓불을 깨물었을 때, 목덜미를 빨아들였을 때, 몇 번이나 신음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간신히 삼켰다. ...

케이와 결혼하고 나면 당연히 따라오는 이 행위를, 리시는 거부할 생각이 없었다. ...

케이가 무엇을 원하든, 몇 번을 원하든, 얼마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

다만. ...

‘어떡해야 하지?’ ...

리시는 혼란스러웠다. ...

‘어떻게 반응해야 해?’ ...

지난 삶에서는 이러지 않았다. ...

알포드의 아래에 있을 때도, 심장이 뛰고 호흡이 가빠지기는 했다. 신음을 흘리기도 했다. ...

하지만 그건 무섭고 역겹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

이렇게 달콤하고 간질거리면서도 저릿하고 끈적이는 느낌은 처음이기에, 이 때문에 터져 나올 자신의 반응이 어떨지 두렵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자꾸 알포드와의 일이 겹쳐져서 속이 울렁거리기도 했다. ...

케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었다. ...

케이는 그 남자처럼 거칠지도 않고, 역겹지도 않은데. 오히려 정략결혼임에도 부부라는 이유로, 먼 곳까지 함께해주는 배려를 보여주는데. ...

“긴장 풀어요, 리시.” ...

너무 긴장해서 케이가 어느새 떨어졌다는 것도 몰랐다. ...

케이는 리시의 손목을 잡아, 아프지 않게 일으켜 앉혀주면서 말했다. ...

“전에도 말했지만, 난 뜨거운 걸 좋아하거든.” ...

“그래요.” ...

리시는 간신히 대답하며 옷매무새를 정돈하는 척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화끈거렸기 때문이다. ...

“뜨겁게 만들려고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는 것 정도는 이해해줘요.” ...

“뭐든 해도 돼요.” ...

“그렇게 대답하면 안 돼, 리시.” ...

좋아할 줄 알았는데, 케이는 짐짓 엄하게 말하며 검지로 리시의 턱을 들어 자신을 보게 했다. ...

케이는 미간을 살짝 좁히고 어두운 눈으로 리시를 응시하고 있었다. ...

“싫을 땐 거부해야지.” ...

어째서인지, 리시는 그 짧은 문장에서 애정을 느꼈다. ...

누구도 리시에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 ...

문득 리시를 괄시했던 여러 목소리가 떠올랐다. ...

-싫어도 해. 네까짓 게 싫으면 어쩔 건데? ...

-싫어? 지금 그 입으로 싫다는 말을 한 거야? ...

-하라면 해! 먹여주고 재워줬는데 그 정도는 해야지! 밥벌레 같으니라고. ...

리시의 지난 삶을 상처 입히고 짓이긴 그 말들이, 케이의 한 마디에 흐릿하게 지워졌다. ...

리시는 눈가가 시큰해져서, 고개를 슬그머니 옆으로 돌렸다. ...

“알겠어요.” ...

 

+++

리시는 움막처럼 보일 정도로 허름한 집 앞에 서 있었다. ...

지난 삶의 기억을 더듬어서 찾아온 집이었다. ...

‘가우저…….’ ...

한때는 위틀로 가문의 재산 관리인으로서 위엄 있던 그가, 이런 곳에서 살고 있다니. 가슴 아픈 일이었다. ...

“여긴 누가 살죠?” ...

케이는 마차로 한참을 달려서 도착한 목적지가, 빈민가 근처에 있는 집이라는 사실이 신기한 듯 물었다. ...

“가우저. 예전에 위틀로 가문의 재산 관리인이었죠.” ...

위틀로 공작 가에도 리시를 안쓰럽게 여기는 사람은 있었다. 가우저가 그 대표적인 예였다. ...

가우저는 하녀들이 리시를 하대하거나 조롱할 때, 시녀들이 리시를 부려먹을 때, 브리트니가 심할 정도로 리시를 때리거나 욕보일 때, 리시의 편을 들어주곤 했다. ...

“어느 날, 위틀로 공작에게 내 처우를 개선해줘야 한다고 항변했어요. 그 결과, 쫓겨났죠. 쫓겨난 후에는 아내에게 이혼도 당했고요.” ...

“그렇군요.” ...

“나는 가우저를 라벤트 금광의 관리인으로 고용할 거예요.” ...

“그럴 수는 없어요, 리시. 나는 위틀로의 사람이었던 자를 내 저택에 들이고 싶지 않아요.” ...

케이의 반대가 있을 것은 예상했다. ...

“저택에 들이는 게 아니에요. 내 금광에 고용하는 거지. 내 이름으로.” ...

리시가 단호하게 말하자, 케이가 검지로 리시의 턱을 받쳤다. ...

“리시, 당신 참 신기한 거 알아요? 가끔 보면 순종적인 것 같은데, 또 가끔 보면 되게 무섭단 말이야.” ...

리시도 눈을 반으로 접으며, 그의 손가락을 살며시 잡아 아래로 내렸다. ...

“그런 건 별로 알고 싶지도 않네요.” ...

“금광을 맡기는 건, 정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해야 해요. 그리고 내게는 신뢰할 만한 부하들이 여럿 있고.” ...

“하지만 내 부하는 아니죠.” ...

“이제 내 부하가 당신의 부하이기도 해요.” ...

“그들이 날 위해 당신을 죽일까요?” ...

“그러진 않겠죠.” ...

“하지만 그들은 당신을 위해 날 죽일 수 있을 거예요.” ...

이 말에 케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

리시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가슴을 톡톡 두드렸다. ...

“아내가 하는 일에 너무 끼어드는 남자는 매력 없어요, 케이.” ...

“입 닥치고 구경이나 해라?” ...

“그래요.” ...

케이가 고른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리시는 케이가 저렇게 웃을 때가 좋았다. ...

“알아모시겠습니다, 부인. 원하는 대로 하시지요.” ...

케이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선 후에야, 리시는 문을 두드렸다. ...

똑똑- ...

잠시 기다렸지만, 반응이 없었다. ...

똑똑- ...

안은 조용했다. ...

보다 못한 케이가 나서서 발로 문을 걷어찼다. ...

쾅쾅-! ...

그제야 안쪽에서 우당탕, 하고 뭔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이런, 시부럴!” 하는 욕설이 들려왔다. ...

하지만 리시는 고고하게 서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

가우저. ...

후에 황제의 인정을 받아 황실의 재정을 관리하고, 특유의 공격적이면서도 영리한 투자로 황실의 재산을 불려주게 될 인재 중의 인재. ...

리시는 반드시 가우저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

(15) 백작 부인을 위해. ...

술이 덜 깨서 불퉁한 얼굴로 나온 가우저는, 리시의 기억과 다른 모습이었다. ...

공작 가에 있을 때, 가우저는 언제나 정장을 입었고, 포마드로 고정한 머리칼은 단 한 올도 빠져나오지 않아서, 예리하고 단정한 느낌이었다. ...

하지만 지금 리시의 눈앞에 있는 가우저는, 오랫동안 자르지 않은 머리카락이 헝클어졌고 수염이 덥수룩한 데다가, 이리저리 구겨지고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

가우저 특유의 호박색 눈동자가 아니었다면, 사람을 잘못 찾아온 줄 알고 돌아섰을지도 모르겠다. ...

“뭐요?” ...

말투도 바뀌었다. ...

가우저는 리시가 아닌 케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케이는 대답 없이 손바닥을 위쪽으로 해서 리시를 가리켰다. ...

그제야 가우저의 시선이 리시에게로 향했다. ...

흐리멍덩하던 눈동자에 경악이 깃들었다. ...

“아, 아가씨……?” ...

가우저는 리시를 아가씨라고 불러주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

고지식한 표정으로 언제나 아가씨라고 불러준 가우저가 떠올라서, 리시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지난 삶, 가우저가 황실의 재정 관리인이 됐을 때만 알지, 그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알지 못했다. ...

‘이렇게 살았군요. 아내와 자식이 떠나고 외로워하고, 괴로워하면서, 이리 살다가 정신을 차리고 훌륭하게 그 자리에 앉았던 거군요.’ ...

“저, 정말로…… 정말로 아이리스 님입니까?” ...

리시가 대답하지 않자, 가우저가 다시 물었다. ...

공작 가에 있을 때와는 사뭇 달라진 모습에, 알아보지 못하는 건 가우저도 마찬가지였다. ...

“그래요. 아이리스예요. 이제는 아가씨가 아니지만.” ...

“예? 결국…… 결국 그자들이 아가씨를 쫓아낸 겁니까? 아니, 아니. 어쩌면 그런 취급을 받느니 쫓겨나는 게 나을지도…….” ...

술이 덜 깬 가우저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주절주절 내뱉었다. ...

“쫓겨난 게 아니라 내 발로 나왔어요. 결혼했거든요. 여기, 이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님과.” ...

가우저는 눈이 튀어나올 만큼 크게 뜨고 케이를 올려다봤다. ...

“그린 백작님……. 허…….” ...

입술을 벌린 채 한참 케이의 얼굴을 살펴보던 가우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

가우저는 코를 훌쩍거리며 리시의 손을 덥석 잡았다. ...

“다행…… 다행입니다, 아가씨. 이리 근사하고 멋진 분과 결혼했다니…… 정말 다행…… 크흡…… 훌쩍…….” ...

가우저에게 잡힌 리시의 손을 노려보던 케이는, ‘이리 근사하고 멋진 분’이라는 말에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

“아, 죄송합니다. 너무 감격스러워서 그만…… 저는 그 빌어 처먹을 놈들이, 아, 실례. 하여간 그 집안 놈들이 아가씨를……. 아니, 아닙니다.” ...

리시는 가우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았다. ...

그 집안 놈들이 아가씨를 알포드 같은 놈에게 팔아치울 줄 알았거든요. ...

그리 말하려다가, 케이가 있어서 멈춘 거겠지. ...

“일단, 일단 들어오세요. 아…… 집을 치우지 못해서…… 잠시…….” ...

“가우저. 기다려요.” ...

리시는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 가우저를 불러세웠다. ...

“그대와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어요. 우선 술이 좀 깬 후, 저쪽 중앙 광장 옆에 있는 술집으로 와요.” ...

+++

지난 삶, 대륙에서 가장 큰 상단을 운영하게 된 알포드는 술집을 좋아했다. ...

술도 술이지만, 온갖 소문을 들을 수 있는 곳인데, 그 소문을 잘만 걸러서 들으면 사업에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

리시도 알포드가 술집에 가는 게 좋았다. ...

알포드는 술집에 가면 하루, 이틀 정도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

알포드가 술집에서 무엇을 하는지, 어떤 여자를 만나는지, 리시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

리시와 케이가 들어가자, 여기저기에 앉아서 떠들던 사람들이 일순 말을 멈추고 귀티 나는 두 사람을 돌아봤다. ...

리시는 반사적으로 페도라의 앞을 꾹 눌러 얼굴을 가리며, 케이의 뒤를 따라 구석에 있는 자리로 걸어갔다. ...

“봐요, 눈에 띈다고 했죠?” ...

의자에 앉으며 케이가 말했다. ...

“당신 때문이에요. 당신이 너무 크니까.” ...

“아닐 텐데.” ...

“그럼 이 머리카락 색깔 때문이겠죠. 독특하니까.” ...

리시가 붉은 기 도는 은발의 끝을 검지로 돌돌 말면서 말했다. ...

“눈에 띄고 싶지 않다면 후드 달린 로브를 입는 게 좋아요, 리시. 당신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계속 보고 있고 싶어지는 외모거든.” ...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케이의 눈동자는 리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

이상하게도 리시는 케이가 저런 눈빛으로 지그시 응시해올 때마다 안절부절못하는 기분을 느꼈다. 가슴 쪽이 간질거리기도 하고, 허리에 힘이 들어가기도 하고, 발가락을 꼼질거리기도 했다. ...

“그나저나.” ...

다행히 케이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

“당신과 알포드 후치스 자작과의 은밀한 관계에 대한 소문이 점점 진실이 되어 가고 있다는 건 알아요, 리시?” ...

“알고 있어요. 얼마 전에는 기사로도 났더라고요.” ...

“소문의 근원을 모르는 건 아닐 테고……. 언제까지 두고 볼 거죠?” ...

“혹시 이 소문 때문에 당신이 직접 피해를 본 게 있나요?” ...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앞으로는 모를 일이죠.” ...

“그렇다면 좀 더 지켜보죠. 무르익어야 더 맛있는 법이니까.” ...

아직 끼니 전이었기에, 간단하게 식사를 할 생각으로 메뉴판을 확인했다. ...

“소금에 절인 양고기와 치즈, 호밀빵, 채소스튜에 말린 버섯을 구운 거, 어때요? 아, 그리고 난 맥주 한 잔을 할 생각인데, 당신은?” ...

케이가 물었다. ...

“난 술을 안 마셔봐서요.” ...

“오, 그래요?” ...

왜인지 케이가 즐거운 듯 눈을 빛냈다. ...

“왜 그런 눈빛이죠?” ...

“내 눈빛이 어떤데?” ...

“뭔가 꾸미는 눈빛인데.” ...

“꾸미다니요. 그저 내 아내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을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뿐인데.” ...

“아, 그래요.” ...

리시는 케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

술을 마셔본 적 없는 데다가, 리시의 이미지를 봐서, 술이 약할 거라고 확신한 모양이다. ...

아마도 리시가 술을 마셔서 취하면, 술주정을 즐겁게 감상하려는 거겠지. ...

리시가 케이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

리시는 이번 삶에서는 술을 마셔본 적이 없지만, 지난 삶에서는 마셔보았다. ...

그것도 아주 많이. ...

리시는 자신이 술을 마시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

“오늘은 그만두죠. 곧 가우저가 올 테니까.” ...

 

식사를 거의 끝내갈 때, 가우저가 술집에 들어왔다. ...

“오, 이게 누구야? 가우저? 몰라보겠는데!” ...

“오늘 아침까지 퍼마시더니, 또 마시러 온 거야? 자넨 그러다 죽을 거야.” ...

“그런데 왜 그렇게 차려입고 왔어? 젤린이라도 꼬시게?” ...

가우저는 이 술집의 유명인인지, 다들 그를 알아보고 낄낄거렸다. ...

가우저는 그들에게 건성으로 대꾸하고 리시와 케이 쪽으로 걸어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가우저를 따라왔기에, 리시는 이곳을 약속 장소로 잡은 걸 후회했다. ...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가씨.” ...

가우저가 정중하게 말했다. ...

“인기가 좋네요, 가우저.” ...

가우저가 얼굴을 붉혔다. ...

“아, 제가 좀…… 충격을 잊느라 술을 마시다 보니…….” ...

“앉아요.” ...

가우저가 앉자마자 리시는 본론으로 꺼냈다. ...

“가우저. 날 위해 일해줘요.” ...

“예?” ...

“라…….” ...

말을 꺼내려던 리시는, 주위 사람들이 모두 리시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걸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

“아무래도 여긴 안 되겠네요.” ...

계산하고 나와서 사람이 많은 시장으로 향했다. ...

비밀 이야기를 하기에는 차라리 이렇게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이 나았다. ...

가우저와 케이의 사이에서 걸어가며, 리시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라벤트에 금광이 있어요.” ...

“네, 후치스 자작의 것이죠.” ...

“이제 내 거예요.” ...

“예에?” ...

“그대가 그곳을 관리해줬으면 해요.” ...

“아…….” ...

가우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리시를 쳐다봤다. ...

“아가씨는 계속 절 놀라게 하시는군요. 라벤트의 금광이 아가씨 것이 되었다고요?” ...

“그래요.” ...

“그리고 제게 그 금광을 맡기신다고요?” ...

“그래요. 인부들을 고용하는 것부터, 거기서 캐낸 광물의 관리까지. 전부 그대에게 맡길 거예요.” ...

“이런…….” ...

가우저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턱을 문질렀다. 그는 기쁜 한편 난처한 기색이었다. ...

“아가씨께서 절 믿어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아가씨, 저는 그런 막중한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이제 전 그저 술주정뱅이예요.” ...

“그대가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치 않아요.” ...

“예에?” ...

“중요한 건.” ...

리시는 걸음을 멈추고 가우저를 올려다봤다. ...

“내가 그대에게 내가 가진 유일한 재산을 맡기고 싶다는 것뿐이에요. 그 금광은, 가우저, 그대가 맡아야겠어요.”   부드러운 어조지만 명령이었다. ...

어떤 사람은 그걸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가우저는 그러지 않았다. ...

가우저는 공작 가에서 어둡게 지내던 아이리스 위틀로를 기억했다. ...

위틀로이지만, 위틀로가 아니었던, 안타깝고 안쓰러운 아이. ...

고개를 들어 하늘 한 번 쳐다보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한 아이. ...

바람에 치여, 어둠에 싸여, 그리 부서지고 흩어질 것만 같았던 아이. ...

그런 아이가 어느덧 당당한 백작 부인이 되어, 가우저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

그것이 무척이나 사무쳐서, 가우저는 또다시 눈물을 글썽거렸다. ...

“많이 변하셨습니다, 아가씨. 아니, 백작 부인.” ...

리시가 미소 지었다. ...

“보기 좋지요?” ...

“무척이나.” ...

가우저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

아이리스의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고 공작에게 항변했다가, 이런저런 누명을 뒤집어쓰고 공작가에서 쫓겨났다. ...

위틀로 공작이 뒤집어씌운 누명 때문에, 가우저를 고용하려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

아내는 가난에 지쳐서 아이를 데리고 떠났다. ...

엄마의 손을 잡고 떠나던 아이는 그에게 모멸감과 원망이 담긴 시선을 보냈다. ...

아무것도 남지 않은 가우저는 고통과 외로움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며,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때 이 세상이 끝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

하지만 세상은 끝나지 않았고, 계속되는 세상에서 안쓰럽던 작은 아이가 당당한 여인이 되어 가우저를 찾아왔다. ...

하녀조차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던 아이는, 당당한 눈으로 가우저를 오시하며 말했다. ...

내 모든 것을 맡길 만큼 널 신뢰하니, 나를 위해 살아라. ...

대답은 하나였다. ...

“백작 부인을 위해 살겠습니다.” ...

(16) 내 아들은 안 그래. ...

브리트니는 시녀가 가져온 잡지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

알포드는 리시를 케이의 손에서 뺏지는 못했고, 브리트니 역시 거기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

그저 케이와 사람들의 머릿속에, 리시가 얼마나 문란한 여자인지를 심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

리시에 관한 기사가 실린 잡지는, 유령이나 흡혈귀 같은 것들을 다루는, 신뢰도가 부족한 잡지이기는 했다. ...

하지만 귀족 가의 염문설이 실리면 너도나도 사서 읽으니, 이 기사가 멀리 퍼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터였다. ...

‘아이리스는 곧 쫓겨날 거야. 성유물의 수호자 가문에서, 더럽고 문란한 계집애를 품어줄 리 없으니까.’ ...

아이리스가 케이브란트와 결혼식을 올린다는 얘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 ...

그린 가족들의 반대를 받는 게 분명했다. ...

‘아니면 그린 백작이 충동적으로 아이리스를 데려갔다가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 계집애는 성격도 어둡고 재미없으니까. 얼굴 좀 예쁜 게 다잖아?’ ...

리시가 쫓겨나서 공작가로 기어들어 올 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만큼 즐거웠다. ...

“아가씨. 레이디 먼디스께서 찾아오셨어요.” ...

킬킬거리며 잡지를 보던 브리트니는, 시녀의 말에 벌떡 일어났다. ...

“캐트리나가? 들어오라고 해.” ...

브리트니와 동갑내기 친구인 캐트리나는 먼디스 후작의 영애로, 브리트니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였다. ...

적당히 멍청해서 시녀처럼 다루기에 딱 좋았기 때문이다. ...

“브린, 브린, 브린! 이거 봤어?” ...

캐트리나는 언제나처럼 호들갑스러웠다. ...

그녀의 손에는 방금 브리트니가 읽고 있던 것과 같은 잡지가 들려 있었다. ...

브리트니는 잡지를 슬그머니 쿠션 뒤로 감추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

“그게 뭔데?” ...

“이것 봐, 이것 봐. 아무것도 모를 줄 알았어. 하여간, 넌 너무 사교계 일에 무심해서 탈이야.” ...

안쓰럽다는 듯 말하는 캐트리나를 보며, 브리트니는 순진한 척 눈을 깜빡거렸다. ...

캐트리나가 잡지를 펼쳤다. ...

“이 기사!” ...

잡지 한쪽에 실린 짧지만 강렬한 기사였다. ...

[모 백작 부인의 은밀한 사생활] ...

잡지에서는 실명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기사 내내 ‘신성한 가문’, ‘신성국의 가호를 받는 가문’, ‘성유물을 지키는 가문’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누가 봐도 그린 가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여기 이 ‘엘레론드 대륙 전역이 아는 모 공작가의 꽃’이 아이리스를 말하는 거지? 신성한 가문은 그린 가문을 말하는 거고.” ...

“아…….” ...

“정말이야? 정말 아이리스, 그 애가 그린 백작이랑 결혼한 거야? 그, 그린 백작이랑?” ...

“으응…….” ...

“웬일이야? 원래 후치스 자작이랑 결혼할 예정이었던 거 아냐? 아이리스가 후치스 자작을 너무 좋아해서, 졸졸 따라다녔다면서?” ...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어쩌다 보니…….” ...

케이가 직접 찾아와서 아이리스에게 청혼했다는 말은 죽어도 할 수 없었다. ...

“아무래도 자작보다는 백작이 낫기도 하고…… 아이리스가 그린 백작의 약점을 잡고 협박했다는 얘기를 들었어. 자기랑 결혼하자고.” ...

“진짜? 그린 백작 약점이 뭔데?” ...

“그건 나도 모르지. 아니, 뭐. 이게 꼭 진짜인 건 아니고…… 그런 뉘앙스가 있었을 뿐이야.” ...

브리트니는 캐트리나와 대화할 때면 ‘이건 진짜가 아니야. 나도 잘은 몰라. 추측일 뿐이야.’라는 말을 반드시 덧붙였다. ...

그래야 나중에 문제가 됐을 때 빠져나갈 구멍이 생기니까. ...

“헐, 어쩜 그래? 아이리스 걔,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무서운 애다.” ...

“아냐, 아이리스, 착해. 그냥 헛소문이겠지.” ...

“그럴 리가 있어? 갑자기 그린 백작이 아이리스한테 결혼하자고 한 것부터가 너무 이상하잖아. 게다가…… 그린 백작이랑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바람을 피워? 아니지, 아니지. 원래 후치스 자작이랑 그런 관계였으니까, 그린 백작이랑 바람을 피운 게 되나?” ...

“에이, 아니야. 바람은 무슨…… 그래도…… 후치스 자작이 상처를 많이 받은 것 같아. 얼마 전에 여기 찾아와서 많이 울다 갔거든.” ...

“안 그래도 후치스 자작이 너희 저택에 머문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많이 울었구나.” ...

“그러게. 안쓰럽더라. 미안하기도 하고.” ...

“진짜 그렇겠다. 그런데 좀 이상하네.” ...

캐트리나가 턱에 검지를 대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

“그린 백작이랑 아이리스, 왜 결혼식을 안 올린 거지?” ...

“흐음…… 글쎄.” ...

“아, 혹시 가족들이 반대하는 거 아냐? 그린 노백작 성격이 진짜 깐깐하다잖아. 노백작 부인 성격은 말할 것도 없고.” ...

“그럴지도 모르고…….” ...

“그럴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확실해. 내가 저번에 티파티에 갔다가 제레시엔 그린을 본 적 있거든.” ...

“제레시엔 그린이라면…… 그린 백작 여동생? 그 여자는 파티 같은 데 잘 안 간다고 들었는데.” ...

“친한 친구 파티에는 종종 참석하나 봐. 하여간 그때 한 번 봤는데 무섭더라. 진짜 까칠해.” ...

“그래?” ...

브리트니는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

이거면 됐다. ...

말 많고 친구 많은 캐트리나는 이 일에 살을 붙여서 여기저기 퍼뜨리고 다닐 것이다. ...

후작 영애가 하는 이야기는 그린 백작가 시녀나 하녀들이 하는 이야기보다 강하게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힐 것이다. ...

+++

일찌감치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준 와이번 그린 노백작은 햇빛이 찬란하게 내리비치는 정원에 앉아, 자신의 부인인 헤레이나와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

노부부의 느긋한 시간은 황급히 찾아온 보좌관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졌다. ...

“이걸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보좌관이 가져온 건, 신문이었다. ...

와이번이 구독하는 신문은 아니었다. ...

보좌관이 가리킨 기사를 묵묵히 읽은 와이번이, 헤레이나에게 신문을 넘겼다. ...

기사를 쭉 읽던 헤레이나가 입을 열었다. ...

“우리가…… 케이의 결혼을 반대한 적이 있던가요?” ...

“내가 노망이 들어서 기억 못 하는 게 아니라면, 없을 거요.” ...

“그렇겠죠? 당신이랑 내가 동시에 노망이 들 리는 없으니…….” ...

헤레이나가 신문을 접어서 보좌관에게 돌려줬다. ...

보좌관이 난처한 표정으로 물었다. ...

“신문사 쪽에 항의할까요?” ...

“항의를? 무슨 이유로?” ...

헤레이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

“그거야…… 이런 헛소문을 사실인 듯이 실었으니까요.” ...

“놔둬요. 헛소문에 대응해봐야 그것이 진실이라 여겨질 뿐이니.” ...

“하지만…… 지금도 사람들이 진짜일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

“믿는 자들의 목소리가 클 뿐, 믿지 않는 자들이 더 많을 거예요.” ...

“그거야 그렇지만 걱정입니다. 혹여 여기 실린 기사가 진실이라면…….” ...

헤레이나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는 바람에, 보좌관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

“나는 우리 아들이 부모에게 말도 없이 멋대로 결혼하는 아이는 아닐 거라고 믿어요. 그렇죠, 여보?” ...

보좌관은 ‘두 분의 아들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습니다.’라고 생각했지만, 당연히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

+++

젠의 인내심이 서서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

하루 이틀이면 돌아올 줄 알았던 케이가 돌아오지 않는 데다가, 그린 백작 부인의 불륜 기사가 신문에까지 났기 때문이다. ...

신문에 실린다는 건, 잡지에 실리는 것과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

아무나 만들어서 운영할 수 있는 잡지사와 달리, 신문사는 왕실이나 황실, 혹은 연합 등, 정부의 허락이 있어야만 설립할 수 있었다. ...

그만큼 신뢰도 측면에서, 잡지를 월등히 뛰어넘었다. ...

안 그래도 폭발 직전인 젠을 더욱 거슬리게 하는 건, 한때 케이의 전속 시녀였다가 리시의 전속 시녀가 되었다는 질레트 메르디의 존재였다. ...

케이도, 리시도 없는 그린 백작저에서, 질레트는 마치 안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활개를 치며 다녔다. ...

“다들 뭐 하는 거야? 늦어도 오늘 저녁 전에는 백작님이 돌아오신다는데, 청소 상태가 이래서야 되겠어?” ...

하녀들을 나무라는 질레트를 계속 지켜보다가는 욕설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젠은 정원으로 나왔다. ...

마침 나단이 총 하나를 손가락에 걸고 휙휙 돌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

“나단. 대체 저 안에서 안주인 행세를 하는 여자는 뭐야?” ...

“하, 진짜. 몇 번을 말해야 해? 질레트 메르디. 형수님의 전속 시녀!” ...

벌써 17번째 같은 질문을 받은 나단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

“그런 의미가 아닌 거 알잖아. 대체 왜 저러는 걸 그냥 놔두는 거야?” ...

“그럼 어쩌는데? 저래 봬도 형수님 시녀인데, 저 엉덩이를 걷어차 주기라도 해?” ...

“걷어차는 거, 잘하잖아.” ...

“아무리 나라도 아무나 걷어차고 그러진 않거든?” ...

“어릴 때는 우리 아빠도 걷어차려고 했으면서…….” ...

“너도 어릴 땐 노백작님 걷어차고 그랬잖아. 지금도 막 걷어차고. 아, 이것 봐, 이것 봐. 또 걷어차려고 하네.” ...

나단이 재빠르게 젠의 발길질을 피했다. ...

“야, 대장 오신다!” ...

그때, 월라스가 정문을 향해 달려가며 외쳤다. ...

제이미와 유진, 그 외의 저택 사람들도 백작 내외를 맞이하기 위해 대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

젠은 달려가려는 나단의 소매를 잡았다. ...

“야, 왜?” ...

“숨어!” ...

“뭐?” ...

젠은 나단을 끌고 정원 목 사이에 몸을 감췄다. ...

“이거 놔, 젠. 나도 가서 대장이랑 형수님한테 인사할 거라고.” ...

“가만히 있어, 좀!” ...

“하, 진짜 영문을 모르겠네!” ...

젠은 리시의 꾸밈없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

일단 남편의 가족이라고 하면 잘 보이고 싶어서 내숭 떠는 여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 ...

사교계에 관심 없는 젠의 귀에까지 들렸던 그 명성이 얼마나 진짜인지, 그 주인공이 얼마나 가녀린 꽃인지, 조용히 관찰하고 싶었다. ...

이윽고 케이와 리시의 모습이 젠의 눈에 들어왔다. ...

리시의 얼굴보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신문이 먼저 보였다. ...

문득 리시가 정원의 넓은 공터에서 걸음을 멈췄다. ...

마중 나온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그녀를 쳐다봤다. ...

케이의 그림자들을 제외하고는, 리시에게 고운 시선을 보내는 이가 별로 없었다. ...

그도 그럴 것이, 리시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자기들이 경외하는 주인과 가문의 명성에 흠집을 냈으니,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

리시도 당연히 고용인들의 시선에 담긴 분위기를 느낄 것이다. ...

하지만 리시는 고개를 숙이지도 않고, 눈을 돌리지도 않았다. ...

그녀는 우아한 미소를 띤 채 고용인들을 쭉 둘러보더니, 신문을 들어서 살짝 흔들었다. ...

“재미있는 기사를 봤어요.” ...

몇몇 고용인들이 움찔했다. ...

젠은 리시가 기사에 대해 어떻게 변명할지 궁금했다. ...

“나는.” ...

리시의 시선이 질레트에게서 멈췄다. ...

“이 기사의 출처가 우리 집안 사람이 아닐 거라고 믿어요.” ...

거기까지 말하고, 리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걷기 시작했다. ...

기사 내용에 대한 변명은 없었다. ...

하지만 젠은 그녀의 태도를 보고 알 수 있었다. ...

‘기사는 거짓이구나.’ ...

아마 그 자리에 있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들 역시 눈치챘을 것이다. ...

‘그리고 기사는 이 집안의 사람 중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왔구나.’ ...

누구의 입에서 흘러나왔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

적어도 멀리 떨어져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젠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

그제야 젠은 리시의 얼굴을 제대로 눈에 담았다. ...

하얗고 자그마한 얼굴, 완벽하게 자리 잡은 이목구비와 보석처럼 맑은 연보라색 눈동자. ...

사내 같은 차림을 하고, 흔들림 없이 정면을 오시하며 천천히 걷는 그녀의 당당한 모습이, 젠의 눈에 새겨졌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는 칭송조차 모자랄 만큼, 그녀는 밝은 빛을 뿜어냈다. ...

“대체…….” ...

그들이 멀어진 후, 젠이 입을 열었다. ...

“저런 여자가 왜 우리 오빠 같은 거랑 결혼한 거지?” ...

나단이 인상을 찌푸리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

(17) 내 남편의 여동생. ...

“백작님의 가족이 찾아왔다고요?” ...

리시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크리시나가 젠의 방문 사실을 알렸다. ...

리시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

남편의 가족. ...

지난 삶, 후치스 자작의 가족들과의 관계는 끔찍했다. 시부모와는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차라리 위틀로 공작가가 더 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

그들은 리시가 주제도 안 되는데, 자신의 대단하고 잘난 아들을 홀려서 결혼했다고 믿는 듯했다. ...

알포드의 누나인 줄리안느는 발터 백작의 아내였는데, 밖에서와 안에서의 행동이 완전히 다른 여자였다. 밖에서는 고상하고 상냥한 발터 백작 부인이었지만, 안에서는 신경질적이고 잔인한 면이 있었다. ...

줄리안느는 알포드의 저택에 방문할 때마다 집안 상태를 점검했다. 줄리안느가 구석구석 살펴보는 동안, 시녀처럼 얌전히 그녀의 뒤를 따라다녀야만 했다. ...

저택 청소는 리시가 해야 할 일이 아니었음에도, 창틀에 먼지 한 톨이라도 발견되면 리시의 탓으로 돌렸다. ...

-너는 안주인이 돼서 하는 일도 없이 이런 거 하나 제대로 관리 못 하니? 위틀로 공작가에서 꽃으로만 사느라, 이런 건 하나도 못 배운 거야? 기본이 안 됐어, 기본이. ...

그러면서 시녀에게 회초리를 가져오라 했다. ...

-잘못했으면 매를 맞아야지. ...

짜악, 짜악, 날카롭게 종아리를 내리치던 가느다란 회초리의 통증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기억났다. ...

연약한 흰 피부에 붉은 줄이 생기고, 가끔 피가 터질 때도 있었다. ...

종아리를 타고 주르륵 흐르는 피. ...

줄리안느는 그걸 보며 당황하기는커녕,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러기를 바랐다는 듯이. ...

리시의 종아리가 부르튼 걸 보고도 알포드는 줄리안느의 편을 들었다. ...

-누님은 예의범절을 중요시해. 넌 배운 게 별로 없잖아. 말만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지…… 네가 그 집안에서 그런 취급을 받는 줄 알았으면 너랑 결혼 같은 거 안 했을 텐데. 감사한 줄 알아, 너 같은 걸 버리지 않고 옆에 두는 거. ...

시부모도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

리시는 눈을 감고 가빠지려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

‘다 지나간 일이야. 이번에는 그럴 일 없어.’ ...

케이에게도 가족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

성유물의 수호자인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이 유명한 만큼, 그의 가족들 또한 유명했다. ...

선대 백작인 와이번 그린과 그의 아내 헤레이나. ...

그린 가문의 차남이자 신성국 소속 성기사단의 부단장인 엘드허트. ...

그리고 막내 제레시엔. ...

리시가 알기로 제레시엔은 사교 모임에는 잘 참석하지 않지만, 모두가 친해지고 싶어 하는 인물이었다. ...

‘제레시엔…….’ ...

지난 삶에서, 리시는 파티에 참석했다가 제레시엔을 본 적이 두어 번 있었다. ...

하지만 멀리에서 봤을 뿐, 대화를 나눈 적은 없다. ...

‘차가운 느낌이었는데…….’ ...

‘지난 삶’이라고는 해도, 리시에게는 고작 한 달 전의 일이었다. ...

죽기 직전에도 줄리안느에게 아이를 못 낳는 문제로 매를 맞았던 터라, ‘남편의 가족’에 대한 트라우마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심장이 얼마나 쿵쿵 뛰는지, 관자놀이까지 두근거릴 지경이었다. ...

“아이리스 님, 괜찮으세요? 낯빛이 많이 안 좋으신데…….” ...

리시는 꿈에서 깬 것 같은 표정으로 멍하게 크리시나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

‘그래, 난 아이리스 위틀로도, 아이리스 후치스도 아니야. 아이리스 그린이지.’ ...

아이리스 위틀로와 아이리스 후치스는 부당하게 매를 맞아도 꾹 참았지만, 아이리스 그린은 다르다. ...

“아무래도 여독 때문에 몸이 안 좋으신가 봐요. 의원을 부를까요?” ...

크리시나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

크리시나의 어깨너머로, 질레트가 입술을 비쭉거리는 게 보였다. ...

‘의원은 무슨. 약한 척 되게 하네.’라는 표정이었다. ...

에르웰은 ‘저걸 그냥 죽여버릴까?’라는 눈빛으로 질레트를 쏘아보고 있었지만, 리시는 자신이 오해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유명한 루테크 가문의 영애가 그런 험한 생각을 할 리는 없으니까. ...

“괜찮아요. 날이 조금 더워서.” ...

“무리하지 않으시는 게 좋아요, 아이리스 님. 오늘 저녁에 제레시엔 님과 함께 식사하게 되실 텐데……. 제레시엔 님이 조금…….” ...

크리시나가 말끝을 흐리다가 덧붙였다. ...

“백작님의 가드들이 제레시엔 님 앞에서 쩔쩔매더라고요.” ...

에르웰이 동감한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

리시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

하지만 케이의 가족들을 평생 피하면서 살 수는 없었다. ...

‘게다가…….’ ...

죽음을 유영할 때에, 리시는 케이의 가족들이 죽는 광경을 보았다. ...

케이의 부모도, 남동생도, 여동생도, 여생을 편안하게 살다가 죽는 게 아니었다. ...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지만…….’ ...

죽음 속에서 본 광경이 정말로 벌어질 미래라면, 바꿀 수 있는 부분은 바꿔야만 한다. ...

‘일단.’ ...

리시는 두려움을 버리고 평정심을 되찾았다. ...

‘내가 그들을 판단하고 나서.’   ...

+++

결혼이라는 것이, 혼자 멋대로 진행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케이도 알고 있었다. ...

연애결혼이 유행한다지만, 아직은 가문과 가문 간의 중요한 일이라는 것쯤은 케이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다만. ...

“새까맣게 잊었다.” ...

노백작 내외에게도 결혼 사실을 알리지 않은 거냐고 묻는 제이미에게, 케이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

제이미가 기가 막혀서 케이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말했다. ...

“대장이 그렇게 정신이 빠져 있으면, 제가 더 힘들어지겠지요?” ...

“미안, 미안. 그런데 정말…… 새까맣게 잊었어.” ...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

“그러게…….” ...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케이도 알 수 없었다. ...

리시가 후드를 뒤집어쓰고 찾아온 그날부터, 케이의 머릿속에는 대부분 리시 생각뿐이었다. ...

리시의 정체는 뭘까? ...

왜 그렇게 이상할 정도로 신비롭게 느껴질까? ...

그렇게 오만하고 강한 모습을 보이는데도, 가끔씩 부서질 듯 위태롭게 보이는 걸까? ...

언제쯤에야 마음을 열어줄까? ...

뜨거워진 리시는 어떤 모습일까? ...

침대 위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까? ...

우리의 첫날밤은 어떨까? ...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꽉 채워서, 가족들에게 결혼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

“젠도 젠이지만…… 노백작님과 노부인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가만히 계실 것 같아요?” ...

“흐음. 난감하군.” ...

“난감한 정도가 아니겠지요?” ...

제이미가 미소를 띤 채,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

“일단 젠이랑 얘기 좀 해야겠군.” ...

자신의 여동생이 얼마나 드센 성격인지는 케이도 잘 알기에, 젠부터 달랠 요량이었다. ...

“소용없으니 앉아요, 대장.” ...

제이미가 검지로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

“난 가끔 네가 대장인지, 내가 대장인지 헷갈리더라. 젠이 뭐래?” ...

“장식으로 대가리를 달고 다니는 오빠 따위는 길게 보고 싶지도 않으니, 저녁 먹을 때나 불러!” ...

“…….”

“……라고 하셨지요.” ...

“걔는 나이도 찼는데 말투가 왜…….” ...

“그럴 만도 하겠지요?” ...

케이는 입을 다물었다. ...

케이가 없는 동안 젠이 그림자들을 얼마나 닦달했을지 안 봐도 훤했다. ...

변명할 말이 있을 리가 없다. ...

“저녁 식사 시간이 될 때까지, 노백작님께 편지나 쓰세요, 대장. 지금이라도 결혼에 대해 말씀드려야 착한 아들이겠지요?” ...

 

+++

“예고도 없이 내 동생이랑 저녁을 함께하게 돼서 미안해요, 리시. 아, 그 드레스. 잘 어울리네요.” ...

만찬 전, 리시를 데리러 온 케이가 말했다. ...

리시는 화려하지 않지만 우아한 느낌을 주는, 짙은 와인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

“미안할 거 없어요. 당신도 몰랐던 일이니까.” ...

리시는 케이의 팔에 살짝 손을 걸치고 복도를 걸었다. ...

“그…… 미리 말해둘 게 있어요.” ...

“말해요.” ...

“내 동생이, 음. 두 명인데, 오늘 온 애는 여동생으로, 우리 집 막내예요.” ...

“그렇군요.” ...

“그래서 애가 철딱서니가 없기도 하고…… 성격이 아주 좀…… 뭐라고 말해야 하나…….” ...

“지랄 맞죠.” ...

라는 대답은, 뒤에서 들려왔다. ...

언제 온 건지, 나단이 둘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

리시는 나단을 볼 때마다, 여자라고 착각하곤 했다. ...

리시와 비슷한 체구와 희고 예쁜 얼굴, 약간 긴 연한 금색 머리칼. ...

나단이 한 손으로 성가신 듯 머리를 쓸어넘기며 덧붙였다. ...

“저도 저녁 같이 먹을래요, 대장. 그 지랄 맞은 계집애가 형수님한테 무슨 소리를 할지 모르니까.” ...

나단이 제 여동생을 ‘지랄 맞은 계집애’라고 하는데도, 케이는 지적하지 않았다. ...

케이와 그림자들의 관계가 평범한 귀족과 기사의 관계가 아니었다는 게 떠올랐다. ...

리시가 알기로, 케이의 그림자들은 케이의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

“그게 좋겠군.” ...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

리시는 간신히 떨쳐낸 불안감이 다시 차오르기 시작했다. ...

제레시엔이 대체 어떤 성격이기에, 다들 이렇게 그녀가 범할 무례를 걱정하는 걸까? ...

“형수님.” ...

나단이 얼른 리시의 옆으로 와서 말했다. ...

“제레시엔이 무슨 소리를 하든, 그냥 흘려서 들으세요. 딱히 귀담아들을 내용은 없을 거예요.” ...

“그런가요?” ...

“네. 걔는 진짜…… 속에 있는 말을 돌려서 말할 줄 모르는 애거든요.” ...

리시가 옅게 웃자 나단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

“왜 웃으세요?” ...

“나단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서.” ...

나단이 고른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형수님도 만만찮은데요.” ...

나단은 웃으니까 더 여자처럼 보였다. ...

“아무튼, 형수님. 듣기 싫은 얘기는 그냥 흘려들으시고, 듣기 좋은 소리만 제대로 들으세요. 젠도 그런 성격이라서, 형수님이 그런다고 뭐라고 못 할 거예요. 뭐라고 하면 제가 걷어차 줄게요.” ...

“걷어차다니…… 레이디인데.” ...

“레이디요? 제레시엔이요?” ...

나단이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우리 형수님 말하는 것 좀 보세요.’ 하듯이 케이를 쳐다봤다. ...

케이가 말했다. ...

“리시. 제레시엔은 레이디라기보다…… 대장부입니다.” ...

+++

저녁 만찬을 갖기로 한 식당에는, 젠이 먼저 와 있었다. ...

긴 테이블에서 긴 쪽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젠이,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

리시는 케이의 팔에 손을 걸치고, 천천히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

리시의 왼쪽 옆에는 나단이 있었다. ...

젠은 나단이 함께 온 걸 보고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

케이가 상석으로 향하고, 리시는 젠의 맞은편에서 멈췄다. ...

젠이 리시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케이를 돌아봤다. ...

“자리 바꾸지?” ...

“뭐?” ...

“오빠가 뭐나 된다고 상석이야? 오늘은 오빠 아내가 주인공 아니야?” ...

생각지 못한 말에, 리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

케이도 마찬가지였다. ...

“아, 그렇군.” ...

케이가 순순히 대답하더니 리시와 자리를 바꿨다. ...

리시는 상석에 앉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어색한 기분으로 상석으로 향했다. ...

리시가 의자를 앞에 두고 서자, 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이쪽은…….” ...

케이가 소개를 하려는데, 젠이 검지를 올려 케이의 말을 끊었다. ...

“오빠 말고, 오빠 아내 목소리를 듣고 싶은데.” ...

리시는 당황스러웠다. ...

젠이 뭘 원하는 걸까? ...

저건 신종 괴롭힘인가? ...

젠이 리시를 보며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

어서 네 입으로 자기소개를 해보라는 듯이. ...

리시는 손해 볼 것도 없으니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

“반가워요. 나는 아이리스 그린. 얼마 전에 제레시엔 양의 오라버니인 케이브란트 그린과 혼인신고를 했어요. 그전에는 아이리스 위틀로였고요.” ...

“나는 제레시엔 그린이에요. 젠이라고, 편하게 불러요.” ...

젠이 표정 없이 말했다. ...

그리고 덧붙였다. ...

“새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

이번에는 젠에게 표정이 생겼다. ...

리시보다 나이가 많은 시누이는, 공 던져주기를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

(18) 좋아서. ...

새언니라고 부르고 싶다는 젠의 표정을 보니,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진심인 것 같았다. ...

상석에 앉힌 것도 정말로 리시를 주인공이라고 생각해서이고, 오빠 아내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한 것도, 정말 리시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이고. ...

‘내가 너무 앞서나가는 걸까?’ ...

리시는 표정을 허물어뜨리지 않기 위해 애쓰며 말했다. ...

“네, 좋아요. 새언니라고 불러도.” ...

젠이 언제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었냐는 듯, 싸늘한 무표정으로 되돌아갔다. ...

‘네까짓 게 감히 내 오빠랑 결혼하다니!’라는 분위기로, 젠이 물었다. ...

“새언니는 왜 우리 오빠 같은 거랑 결혼한 거죠?” ...

“젠.” ...

“오빠는 조용히 해봐. 나, 지금 새언니랑 얘기하잖아.” ...

“일단 식사라도 하면서…….” ...

“누가 하지 말래? 식사 내오라고 해. 아, 새언니도 드시면서 얘기하셔도 돼요. 새언니, 대체 왜 우리 오빠 같은 거랑 결혼했어요?” ...

“그게…….” ...

당신의 오빠가 지난 삶에서 얼마나 큰 노력을 했고, 얼마나 처절하게 죽어갔는지 알아서. ...

당신의 오빠가 지난 삶에서 딱 한 번 나와 마주쳤을 때, 내게 베풀어준 선행을 잊을 수 없어서. ...

당신의 오빠와 함께라면 내 삶이 지난 삶과 달라질 것 같아서. ...

또한, 당신의 오빠의 마지막 또한, 그토록 잔혹하고 처절하지 않게 만들어주려고. ...

그런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

리시는 흘끔 케이를 쳐다봤다. ...

케이는 리시가 뭐라 대답할지 궁금하다는 듯, 흥미로운 표정으로 리시를 관찰하고 있었다. ...

“좋아서.” ...

리시가 케이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

“구름 낀 하늘 같은 저 눈동자가. 그림을 그린 듯한 눈썹이. 잘 빚은 것 같은 턱이.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바람 부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

리시는 그동안 케이를 보면서 좋았다고 생각한 것들을 열거했다. ...

리시의 말이 계속되는 동안, 왜인지 케이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케이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

내 눈의 착각일까? ...

케이의 귓불이 빨개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케이가 슬그머니 손을 올려 자신의 입가를 가리는 걸 보며, 리시가 말을 맺었다. ...

“그런 것들이 참으로 좋아서요. 평생 보고 싶어서요.” ...

리시가 젠을 돌아봤을 때, 젠의 눈동자는 리시가 아닌 케이를 향해 있었다. ...

젠은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표정이었고, 그건 나단도 마찬가지였다. ...

리시는 저들이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다. ...

내가 무슨 말을 잘못한 걸까? ...

“젠?” ...

“아…… 예에. 어…… 예에에…… 그렇군요…… 음, 새언니. 그래요. 어, 음. 사람마다 보는 눈도, 취향도 다르니까요. 네, 그럴 수 있죠. 아무렴요, 그럴 수 있고말고요.” ...

여유를 되찾은 젠이 케이를 보며 놀리듯 웃었다. ...

“좋겠네, 오빠. 구름 낀 하늘 같은 눈동자에 그림을 그린 듯한 눈썹, 잘 빚은 턱이랑…….” ...

“젠.” ...

나단이 젠의 말을 끊었다. ...

“나, 속이 좀 안 좋은데…….” ...

“아, 미안. 그만할게. 식사를 앞에 두고, 내가 너무했네. 인정.” ...

그들이 영문을 알 수 없는 반응을 보이는 동안, 리시는 눈동자만 또르르 굴리며 그들의 얼굴을 쳐다봤다. ...

그러다가 케이와 눈이 마주쳐서, 입 모양으로만 물었다. ...

‘내가 뭐 잘못 얘기했어요?’ ...

케이가 싱긋 웃으며, 식탁 아래쪽으로 슬며시 엄지를 들어 보였다. ...

기가 막히게 그 장면을 놓치지 않은 젠이 외쳤다. ...

“뭐야, 그 엄지? 아, 그거구나? 오빠가 새언니한테 그렇게 대답하라고 강요했지? 외우게 한 거지?” ...

“아! 그럼 그렇지!” ...

나단이 이제야 이해된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

“와, 미쳤나 봐. 본인 자랑을 아내에게 외우게 시키고…… 와, 진짜 역겹네.” ...

그런 게 아닌데. ...

리시가 케이를 위해 변명해주려 했지만, 케이가 눈짓으로 말렸다. ...

‘그냥 둬요, 괜찮으니까.’ ...

젠은 ‘아내에게 제 자랑을 읊어대는 남자’가 얼마나 매력 없고 끔찍한지에 대해 한참을 떠들어댔고, 나단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젠의 말에 찬사를 표했다. ...

케이가 자기 얘기가 아니라는 듯 수프를 먹기 시작했기에, 리시도 스푼을 들었다. ...

오늘 저녁은 제대로 먹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

리시를 대하는 젠의 태도는, 리시가 아는 ‘남편의 가족’과 완전히 달랐다. ...

오히려 리시를 좋아하는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했다. ...

‘남편의 가족’과 있는 시간이 불편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오히려 편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

이런 가족도 있을 수 있구나. ...

제레시엔도 줄리엔느처럼 밖에서와 안에서의 모습이 달랐지만, 좋은 쪽으로 달랐다. ...

입을 다물면 찾아오는 싸늘한 표정도, 화가 나서가 아닌 평범한 무표정일 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그런데 오빠.” ...

한동안 말없이 식사하던 젠이 침묵을 깨뜨렸다. ...

“아무리 결혼식을 작게 올렸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가족들을 초대 안 해? 누구누구 초대했어? 설마 둘만의 결혼식이었어?” ...

“……결혼식, 안 했는데.” ...

“어? 뭘 안 해?” ...

“결혼식.” ...

“어?” ...

젠이 어리둥절하게 케이를 쳐다봤다. ...

큼지막한 스테이크를 썰던 나이프가 허공에서 멈췄다. ...

케이는 그 나이프가 자기 목에 날아와 꽂힐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듯, 나이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여상히 대꾸했다. ...

“혼인신고만 했다.” ...

젠이 리시를 돌아봤다. ...

정말이냐는 눈빛이기에, 리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타앙-! ...

젠이 나이프와 포크를 거칠게 내려놓으며 벌떡 일어났다. ...

케이가 미간을 좁혔다. ...

“젠, 제발 예의를…….” ...

“예의를 지키지 않은 건 오빠야! 어떻게 결혼식을 안 하고 혼인신고만 해?” ...

“그게 그렇게까지 흥분할 일은 아니잖아, 젠.” ...

“이건 이렇게까지 흥분할 일이야, 뚱땡이 개.” ...

“너, 언제의 별명을…….” ...

케이가 얼굴을 붉혔다. ...

뚱땡이 개라는 별명이 있었다니. ...

리시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

“결혼식은 여자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문제야. 생략해서는 안 되는 거라고.” ...

케이와 나단이 정말이냐는 듯 리시를 돌아봤다. ...

“자꾸 새언니 쳐다보지 마! 오빠가 그 모양이니까, 새언니도 결혼식 하자고 말을 못 한 거겠지.” ...

“아니요, 젠. 나는 결혼식 같은 거 하지 않아도 돼요.” ...

“새언니. 그러면 안 돼요.” ...

젠은 단호했다. ...

“이 세상에는 취향이 특이하고, 보는 눈이 무척이나 낮은 여자들이 굉장히 많아요. 아, 새언니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요. 아무튼, 그런 여자들이 무수히 많아서, 우리 오빠가 인기가 많거든요.” ...

그제야 리시는 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다. ...

“그 여자들은 새언니를 질투할 거고, 결혼식조차 올리지 못한 일로 새언니가 우리 오빠에게 괄시받는다고 떠들어댈 거예요.” ...

“아…… 그렇군.” ...

“아, 그렇군이 아니야, 오빠. 백작 노릇을 한 지 몇 년이나 됐는데, 그 정도는 그 머리로 생각했어야지. 그 머리통을 장식으로 달고 있다는 걸, 새언니도 눈치채면 어쩌려고.” ...

성유물의 수호자, 명예가 드높아 높은 신분의 귀족들조차 함부로 말을 걸지 못하는 케이브란트 그린. ...

그가 집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이미 리시도 알아버렸다. ...

뚱땡이 개. ...

장식품인 머리통. ...

한참 케이의 어깨 위에 달린, 아무 쓸모없는 장식품에 대해 한참 떠들던 젠이 리시를 휙 돌아봤다. ...

“새언니, 나한테 맡겨요.” ...

“무엇을?” ...

젠이 해사하게 웃었다. ...

지난 삶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젠의 미소. ...

참으로 눈부시다고 생각하는데, 젠이 대답했다. ...

“꽃 중의 꽃 아이리스와 뚱땡이 개의 결혼식 준비.” ...

 

+++

저녁 식사가 끝난 후에야, 케이는 젠과 독대를 할 수 있었다. ...

케이의 방에 불려간 젠은, 건방지게 다리를 테이블에 올리고 소파에 늘어지듯 앉아 케이를 쏘아봤다. ...

“젠. 리시를 처음 보는 자리에서, 무례했다.” ...

“새언니한테?” ...

“나한테.” ...

“……그게 뭐?” ...

“네 새언니가 날 어떻게 생각하겠냐?” ...

“하긴. 오빠의 그 머리가 장식품이라는 걸 눈치채서 도망칠지도 모르겠네.” ...

“……젠. 리시 앞에서 날 뚱땡이 개라고 부르는 건 그만둬.” ...

“뭐, 어때? 그렇게 부른다고 오빠가 수인일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 할 텐데.” ...

리시는 이미 케이가 수인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케이는 젠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다. ...

리시가 그 사실을 안다는 이유로, 젠이 그녀를 경계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

“그런 문제가 아니야.” ...

“아, 오빠가 어릴 때 뚱땡이였다는 거 들킬까 봐?” ...

화살촉처럼 찔러오는 말에, 케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잠시 그런 적이 있었다. ...

케이는 태어난 순간부터 변신할 수 있었다. ...

그게 이상한 줄 모르고 살다가, 머리가 좀 크고 나서야 수인이 배척받는다는 걸, 그 사실을 들키면 죽임을 당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

자신이 이 세상이 용납하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에, 케이는 낙담하고 절망에 빠졌다. ...

그때부터 늑대의 모습을 한 채 집에 틀어박혀, “나 같은 건 인간이 아니야.”라며 먹고 자기만 했다. ...

당연히 살이 쪘고, 동생들은, 아니, 젠은 그런 케이를 놀려댔다. ...

뚱땡이 개라고. ...

젠에게는 악의가 없었지만, 오히려 애정을 듬뿍 담은 놀림이었지만, 어릴 때의 케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

‘그래, 뚱땡이 개 따위는 죽어야지, 살아서 뭐해.’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

“괜찮아, 오빠. 오히려 지금보다는 뚱땡이 개일 때가 훨씬 귀여웠어. 동글동글하고, 굴러다니고…….” ...

“그 정도는 아니었다.” ...

케이가 으르렁거리듯 말했지만, 젠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

“결혼식 준비는 못 해도 한 달 정도는 걸릴 거야. 이 저택에는 사내놈들만 득실거려서 뭐가 없거든. 여기저기 사람을 보내서 사 와야 할 게 많아. 인부를 부르기도 해야 하고.” ...

“넌 티파티에도 안 가는 애가 그런 걸 할 수나 있겠냐?” ...

“이래 봬도 안목은 좋거든. 그런 걸 아주 좋아하는 친구한테 도움을 받기도 할 거고.” ...

“그래, 멋대로 해.” ...

케이는 반성하는 중이었다. ...

자신이 사교계에 관심이 없기에,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리시가 귀부인들에게 어떤 소리를 들을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

“돈은 얼마나 써?” ...

“원하는 대로.” ...

“엄청 쓸 건데?” ...

“다 써버려도 돼.” ...

“이야, 우리 오빠. 다 컸네. 자기 여자를 위해서 빈털터리가 될 각오도 하고.” ...

“아니, 빈털터리가 될 생각은……!” ...

젠이 한 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는 걸 깨달은 케이가 젠을 말리려 했지만, 젠은 이미 방을 나간 후였다. ...

+++

젠이 케이를 빈털터리로 만들겠다고 선언한 후로부터 며칠 뒤. ...

신성국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

세간에 떠도는 그린 백작 부인의 과거와 불륜에 관한 조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

(19) 이혼하겠다. ...

브리트니는 영애들끼리 모인 티파티에서, 제레시엔이 뒤늦게 케이의 결혼을 알고는 몹시 분노하여 그린 백작가로 찾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

“제레시엔 양이 내 동생한테 해코지라도 하면 어떡하죠?” ...

걱정하는 척했지만 웃음을 참으라 힘들었다. ...

“일이 터져도 크게 터질 거예요. 제레시엔이 정말로 화가 났거든요. 제레시엔은 한번 화가 나면 정말 무서워져서…….” ...

그 자리에 있었던 영애가 말했다. ...

“그나저나 그린 백작 부인도 안됐네요.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채, 몰래 혼인신고만 했다니……. 그거 완전히 정부 취급 아닌가요?” ...

“차라리 정부가 낫죠. 정부는 사랑이라도 받으니까. 그건 뭐, 아무리 정략결혼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그린 백작님은 아내에게 그리 모지신지…….” ...

그렇게 말하는 어느 백작의 영애는, 내용과 달리 고소해서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

“아, 브리트니 양 앞에서 미안해요. 동생 일인데…….” ...

“아니에요. 나도 동생이 걱정돼서……. 허구한 날 울고 있지나 않을지……. 애가 좀 어두운 편이거든요. 말도 없고. 그래서 그린 백작님이 영 마음에 안 차시나?” ...

“그럴지도 모르죠.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는 얘기에 결혼은 했는데, 애교도 없고 음침하면 실망스러울 법도 하죠. 자고로 남자들은 침대 위에서는 뜨겁고, 평소에는 달콤말랑한 여인을 좋아하지 않겠어요?” ...

“그래도 알포드 자작에게는 달콤말랑한 여인인가 보던데?” ...

영애들이 까르르 웃었다. ...

이 자리에 모인 영애들 대부분이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에게 눈독을 들여왔기에, 느닷없이 그린 백작 부인 자리를 꿰찬 아이리스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

“이 자리에 넬라니커스 제널 백작 부인도 있었더라면 좋을 뻔했어요.” ...

어느 영애의 말에 브리트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제널 백작 부인은 왜요?” ...

사교계의 여신, 넬라니커스 제널 백작 부인. ...

그녀는 모든 영애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

어린 나이에 백작 부인이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교계를 단단히 틀어쥐었다. ...

황후조차 넬라니커스의 사교 모임에 초대를 받고 싶어 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

제널 백작 부인의 이름을 꺼낸 영애가 말했다. ...

“제널 백작 부인이 결혼 전에 그린 백작님을 굉장히 좋아했잖아요. 얼마 전, 파티에 그린 백작님이 참석했을 때도 열렬한 시선을 보내시더라고요.” ...

+++

영애들이 티파티에서 신나게 아이리스에 관한 험담을 나누고 있을 때, 넬라니커스 제널 백작 부인은 자기 앞에 얌전하게 앉아 있는 제레시엔 그린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

“제레시엔 양이 내게 그런 청을 해올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님의 결혼식 준비를 도와달라니.” ...

이윽고 넬라니커스가 서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

젠이 우아하게 찻잔을 들었다. ...

“그야 그린 가문의 명성이 있으니, 중요한 파티를 열 때 사교계의 여신인 제널 백작 부인께 청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

“그린 가문의 파티를 돕는 건, 우리 제널 가문에게도 영광이겠지만…….” ...

넬라니커스도 찻잔을 들었다. ...

“내가 여는 파티는 명성만 있을 뿐, 돈은 없는 그린 가문과는 어울리지 않을 거예요.” ...

“어머나, 무슨 그런 망발을. 제널 백작 부인이 모르셔서 하는 소리예요. 오라버니께서 통 크게도 결혼식 준비에 전 재산을 털어도 좋다고 하셨답니다.” ...

“어머…… 그 옹졸한 구두쇠 그린 백작님께서요?” ...

“네, 그 옹졸한 구두쇠 그린 백작님께서요.” ...

동시에 찻잔을 입술에 댄 두 여자가 눈을 맞추더니, 키득키득 웃었다. ...

넬라니커스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

“아, 진짜 못 하겠어, 젠. 우리 그냥 아카데미에 있을 때처럼 하자.” ...

“그래, 넬스. 네가 고상 떠는 거 보면서 차 마시는 거, 쉽지 않네.” ...

젠과 넬스는 아카데미 시절 같은 전공을 한 동기인 데다가,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부터 친구이기도 했다. ...

“안 그래도 케이의 결혼 소문을 듣고 궁금한 게 많았어. 정말로 케이가 결혼한 거야?” ...

“그렇대. 결혼식은 안 올리고 관청에 혼인신고만 홀딱 해버렸다더라.” ...

“웬일이니. 너희 오빠는 진짜 변함이 없네. 여자 마음을 하나도 모르고, 머리를…….” ...

“장식으로 달았지.” ...

넬스가 이제 백작 부인인지라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젠이 대신해주었다. ...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야? 하필이면 상대가 위틀로 공작가의 꽃 아이리스라니. 정말이야? 정말 위틀로의 꽃이랑 결혼한 거야?” ...

“응. 정말로. 진짜로.” ...

“예쁘니?” ...

“초상화 봤으면 알잖아.” ...

“초상화는 미화시키는 경우가 많잖아.” ...

“초상화가 우리 새언니의 미모를 못 담아. 반의반도 못 담았어.” ...

“웬일. 진짜? 초상화만 봐도 어마어마하던데.” ...

“더 어마어마해. 빛나. 번쩍번쩍.” ...

“어머나. 그런 분이 왜…… 케이랑 결혼했대? 설마…… 강압? 납치? 강요?” ...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넬스는 케이를 끔찍이 싫어했다. ...

어릴 때부터 그린 백작가에 드나들며 자주 마주친 케이는, 넬스만 보면 끔찍한 것을 본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

케이가 한창 자신이 수인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서, 그 사실이 들킬까 봐 외부인이 드나드는 걸 두려워할 때의 일이었다. ...

그 사실을 모르는 넬스로서는, 눈만 마주치면 인사도 하지 않고 휙 돌아서는 케이가 싫을 수밖에 없었다. ...

자신이 보기만 해도 눈살 찌푸릴 만큼 못생겼나, 라는 자격지심이 생길 지경이었다. ...

나이가 들면서는 괜찮아졌지만, 케이가 서글서글하게 인사를 해올 때마다 어릴 때가 떠올라,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노려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나도 그런 쪽으로 생각하긴 하는데, 우리 새언니가 또 착하기는 얼마나 착한지…… 자기가 우리 오빠를 대단히 좋아해서 결혼했다더라. 그렇게 우리 오빠 기를 살려주려는 거겠지.” ...

“그래?” ...

“구름 낀 하늘 같은 눈동자랑 그림을 그린 듯한 눈썹, 잘 빚은 것 같은 턱선이랑…….” ...

“아니. 그만.” ...

넬스가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

“안 들을래.” ...

“응, 나도 끝까지 하고 싶진 않았어. 하여간, 넬라니커스 제널 백작 부인. 잘 부탁해요. 영애들도, 귀부인들도, 입 벙긋 못 하게. 기가 죽어서 우리 새언니를 감히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게.” ...

사교계를 휘어잡는 넬스는, 젠이 뭘 원하는지 알았다. ...

넬스가 화려한 부채를 펼치며 말했다. ...

“놀랄 준비나 하시라고 전해요, 제레시엔 양.” ...

 

+++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가의 응접실. ...

케이는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젊은 신관을 느른하게 응시했다. ...

이제 막 수습에서 벗어나 신관이 된 햇병아리인 게 분명한 그는, 케이가 응접실로 들어오는데도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

케이가 신성국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

“교황 폐하께서는 최근 그린 가문을 둘러싼 소문으로 무척 심기가 불편하시오.” ...

신관이 케이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

“그린 백작도 알다시피 성유물의 수호자 가문은 신성국의 가호를 받는 만큼, 그 행실과 명성이 반듯해야 하오. 그린 가문에 대한 평가가 신성국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그린 백작도 잘 알 거라 믿소.” ...

그린 가문을 향한 예의도 모르는 새내기 신관을 보낸 걸 보면, 교황은 이 일에 큰 관심이 없는 게 분명했다. ...

아마 신관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서, 귀찮은 마음에 애송이 신관이라도 보낸 거겠지. ...

“안 그래도 교황 폐하의 허가도 받지 않고 혼인을 치러, 교황 폐하께서 근심이 가득하신데, 이런 좋지 않은 소문들이 대륙 전역으로 퍼져가는 사태를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소.” ...

“결혼은 개인사인데, 일일이 교황 폐하의 허가를 받아야 할 줄은 몰랐는걸.” ...

케이가 중얼거린 말에 신관이 눈썹을 추어올렸다. ...

“그게 무슨 말씀이오, 알 만한 사람이! 그린 가문이 이토록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이 누구 덕분이라 생각하는 거요? 당연히 우리 교황 폐하께서 어여삐 여기신 덕분 아니오. 그린 가문에 교황 폐하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는 걸 잊은 거요?” ...

교황이 어여삐 여긴다라. ...

이 신관은 수습 시절 시험 성적이 아주 안 좋았을 게 분명하다. ...

교황은 그린 가문을 어여삐 여기는 게 아니었다. ...

그린 가문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 ...

잘못 만졌다가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성유물을 만져도 아무 영향 없는 유일한 혈통. ...

위험한 성유물을 찾아내서 보관할 수 있는 유일한 가문이, 바로 성유물의 수호자 그린 가문이었다. ...

이 건방진 신관은 그린 가문이 성유물의 수호자가 된 게, 교황의 예쁨을 받아서라고 생각하나 보다. ...

“물론 교황 폐하는 내게 아버지 같은 존재지. 그런데 어쩌나. 내 친아버지조차 내 결혼 소식을 모르셨거든.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

생각지 못한 말에 신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그, 그런…… 하지만 그것과 이건 다르오. 백작은 친부보다 교황 폐하께 더 예의를 차려야 마땅하오.” ...

“그래서? 신성국에서는 내가 뭘 어쩌길 바라는 거지?” ...

“그린 백작 부인은 정통한 부인이 아니라는 판단이오. 교황 폐하의 허락도 없이 결혼한 데다,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더러운 소문으로 그린 가문을 비롯하여 신성국의 명예까지도 흔들리게 만들고 있소. 이에, 교황 폐하께서는 그린 백작 부인과 이혼하고 교황 폐하께서 직접 간택하신 신성국 출신의 여인과 재혼하라 명하셨소.” ...

“호오.” ...

케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

“그래? 그걸 교황 폐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고?” ...

“그렇소!” ...

그럴 리 없다는 걸, 케이는 알고 있었다. ...

아마도 대신관 중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

이 신관은 교황의 명을 거짓으로 전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르는 걸까? ...

케이는 그 부분을 지적하는 대신, 느긋하게 다리를 꼬며 말했다. ...

“세간에 내 아내와 관련해서 떠도는 소문이 진실이 아니라면?” ...

“위틀로 백작가의 꽃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여인에게 홀려, 그녀를 믿고 싶어 하는 백작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오. 하지만 백작, 진실을 봐야 하오. 삼류 잡지뿐 아니라 공인된 신문사에도 백작 부인과 관련된 기사가 실리고 있소.” ...

“기사가 항상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지. 그 소문의 시작이 삼류 잡지였다. 어떤 신문사들은 일단 잘 팔리겠다 싶으면 진위를 판단하지 않고 기사로 내보내기도 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

신관은 말이 통하지 않아서 답답했다. ...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그린 백작 부인의 만행으로 신성국의 명성이 더럽혀지게 생겼다. ...

왜 이 백작은 그걸 모르는 걸까? ...

‘그린 백작, 그린 백작 해서 어떤 자인지 궁금했는데, 대단할 것도 없는 자였군. 여자에게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차라리 동생인 엘드허트 경이 백작 작위를 물려받았다면, 이런 일은 안 생겼을 텐데…….’ ...

“나는 내 아내가 세간에 떠도는, 그런 짓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내 가정의 일이고, 아무리 교황 폐하라도 내 집안일에 손을 대실 수는 없다. 돌아가라, 신관. 그럼 오늘의 일은 없었던 일로 해줄 테니.” ...

“하!” ...

신관은 케이의 오만한 태도에 기가 막혔다. ...

이 상황에서 신관의 비위를 맞춰주며 교황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라 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오늘의 일 운운하다니. ...

“이보시오, 그린 백작. 뭔가 잘못 생각하는 모양인데, 지금 이것은 교황 폐하의 뜻이고, 명령이오. 그렇게 쉽게 거부할 수 있는 게…….” ...

신관은 말을 끝낼 수 없었다. ...

케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

케이의 뒤로 검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

그 검은 기운은 물질감을 가지고 있어서, 차갑게 신관을 집어삼켜 아작아작 씹어버릴 것만 같았다. ...

“혼인은 신성국이나 교황 폐하가 아닌, 신께 맹세하는 일이다, 신관.” ...

나직하게 들려오는 케이의 음성이, 이상하게도 신관의 고막을 터뜨릴 듯 쩌렁쩌렁 울리는 것 같았다. ...

“신께 맹세 드린 일을 교황 폐하의 명으로 끊어내라고? 이유도 없이 신과의 약속을 파기하라는 것이, 진정 교황 폐하의 명이란 말인가?” ...

냉혹하게 빛나는 회청빛 눈동자가 신관을 내리눌렀다. ...

신관은 숨도 쉬지 못하고 케이를 올려다봤다. ...

케이와 눈을 맞추고 있는 게 두려웠다. ...

하지만 피할 수 없었다. ...

피하는 순간, 저 무시무시한 눈이 자신을 부숴버릴 것 같아서. ...

죽는 줄도 모르고 죽게 될 것만 같았다. ...

“이, 이, 이유도, 이유도 없는 게…… 아, 아니잖소.” ...

“건방지군, 신관!” ...

“읏!” ...

신관은 오줌을 지릴 것만 같았다. ...

다행히 그 순간, 신관의 어깨를 짓누르던 검은 힘이 깨끗이 사라지고, 케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도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

신관은 악몽을 꾼 것만 같았다. ...

케이의 뒤에는 검은 기운이 없고, 케이의 눈동자 역시 아까처럼 나른했다. ...

“좋아, 신관. 교황 폐하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이혼하도록 하지.” ...

(20) 당신 입술이 달아서. ...

신관의 표정이 밝아졌다. ...

그걸 보며 케이가 빙그레 웃었다. ...

“하지만 그건 소문의 진위를 판단하고 나서다. 거짓 소문에 휘둘려 교황 폐하께서 그린 백작 부인을 험담하고, 결혼을 깼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것이 더 신성국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 될 테니까.” ...

케이가 조건을 붙였지만, 신관은 자신만만했다. ...

공신력 있는 신문사가 그린 백작 부인의 염문설을 1면에 냈다. ...

그린 백작 부인의 외모에 홀려, 아내를 단속하지도 못하는 그린 백작을 조롱하고, 나아가 그런 그린 백작을 보호하는 신성국에 유감을 표했다. ...

그린 백작 부인이 방탕한 여자라는 게, 그저 소문일 리는 없었다. ...

“이제야 말이 통하니 다행입니다, 백작님.” ...

지금껏 고자세를 유지하던 신관이, 저도 모르게 존댓말을 사용했다. ...

신관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

아까처럼 무서운 일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어쨌든 목적은 달성했으니, 케이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얼른 이곳을 떠나 안전한 신성국의 신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

“잠깐.” ...

신관이 일어서려는데 케이가 불러 세웠다. ...

“아직 내 얘기 안 끝났는데.” ...

“무, 무슨 얘기를 더……?” ...

“만약 그 소문이 거짓이라면? 그땐 거짓 소문에 휘둘려 내 아내와 그린 가문, 그리고 날 무시한 대가는 어떻게 치를 거지?” ...

“대, 대가라니…….” ...

“설마…… 거짓 소문으로 교황 폐하께서 직접 내 이혼을 조장한 걸, 그냥 넘어가려는 건 아니겠지?” ...

신관은 마른침을 삼켰다. ...

거기까지는 생각해본 적도 없고, 대신관도 어떻게 대응할지 알려 주지 않았다. ...

하지만 케이가 이런 요청을 하는 건 마땅한 일이었다. ...

“무, 무엇을 바라십니까?” ...

적당히 들어보고 대신관에게 전하면 되겠지. ...

“조만간 내가 결혼식을 올릴 건데 말이야.” ...

케이가 느긋하게 다리를 꼬며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

“교황 폐하께서 직접 참석하셔서 결혼을 축복해주시고, 내 아내에게 정식으로 사과해야, 이 모멸감이 사라지겠어.” ...

말도 안 되는 요청에, 신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교황은 그렇게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

대륙에서 가장 큰 제국 황제의 결혼식조차 교황은 참석하지 않았다. ...

멀리서 축하와 축복의 전언을 보냈고, 그것만으로도 모두가 감지덕지했다. ...

그런데 직접 와서 축복해줄 뿐 아니라, 사과까지 하라니. ...

하지만 신관은 ‘안 된다.’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

케이는 미소짓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아까처럼 음산해졌고, 그의 등 뒤에서 묵직한 검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듯한 착시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

‘상관없겠지. 소문이 거짓일 리도 없고, 설령 그렇다 해도 나중에 가서 이유를 붙여 교황 폐하께서 축복의 전언만 보내셔도 감사해할 테니까.’ ...

그렇게 생각한 신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습니다. 그 조건, 받아들이죠.” ...

케이가 싱긋 웃으며, 재킷 주머니에서 작은 기계를 하나 꺼냈다. ...

신관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계였다. ...

“오래전에 대화를 기록했다가 똑같이 재생할 수 있는 마법이 있었다는 거 알아?” ...

물론 알고 있지만, 신관은 케이가 왜 이런 엉뚱한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

“얼마 전에 마탑에서 재미있는 기계를 하나 발명했어. 기계공학자들이랑 손을 잡고서. 언제나 그렇듯 명예가 드높은 그린 백작에게도 쓸만한지 확인해달라고 보내왔고.” ...

달칵- ...

케이가 기계의 버튼을 누르자, 지금까지 케이와 신관이 나눴던 대화가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울려 퍼졌다. ...

거기에는 신관이 케이가 내민 조건을 받아들이겠다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도 녹음되어 있었다. ...

숨도 못 쉬는 신관을 보며, 케이가 빙그레 웃었다. ...

“쓸만한 것 같네.” ...

 

+++

케이는 조만간 소문의 진상을 판별할 테니, 백작가에 머물며 기다리다가 돌아가라고 했다. ...

제안이 아닌 명령에 가까웠기에, 신관은 그린 백작저의 손님용 건물인 서채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

‘어떡하지……?’ ...

인제 와서야 케이의 앞에서 오만하게 굴었던 게 후회가 됐다. ...

‘만약 그 소문이 다 거짓이었다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

 

+++

리시는 서재에서 가져온 책을 읽고 있었다. ...

신성국의 역사에 관한 책으로, 오래전 신성국이 수인을 배척하게 된 과정이 적힌 부분이었다. ...

[차기 교황이라 촉망받던 베네데르템이 수인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

다만 그가 어떤 종으로 변화하는지는 뒤늦게 알려졌는데, 그것이 알려진 게 바로 ‘1차 수인의 난’이 벌어진 시발점이었다. ...

당시 수인은 인간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으나, 무엇으로 변하는지에 따라 조롱을 받기도, 경외를 받기도 하였다. ...

베네데르템은 생쥐로 변하는 수인이었다. ...

차기 교황이 될지도 모르는 자가 전염병을 일으키는 생쥐로 변한다는 사실은 신성국을 비롯해 대륙 전체를 술렁이게 했다. ...

신의 뜻을 받드는 자가, 더럽고 작은 생쥐라니. ...

게다가 그 사실을 감추고 명예로운 대신관이 되어, 차기 교황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니. ...

베네데르템은 올바르고 정직한 자였으며 신심이 깊었다. ...

생쥐로 변화한다고 하여 그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대중의 인식에 박힌 생쥐란 짐승에 대한 평가를 억누를 수는 없었다. ...

베네데르템은 손바닥 뒤집듯 그에 대한 대우가 달라진 신관들과 대중, 그리고 교황의 태도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

그는 삿된 마음을 품고 은밀히 비슷한 처지의 수인들을 모아, 신성국을 상대로 ‘1차 수인의 난을 일으켰다.] ...

거기까지 읽었을 때, 케이가 찾아왔다. ...

“리시, 방해해서 미안해요.” ...

“아니에요. 오늘은 조금 한가해서 책을 읽고 있었던 것뿐이니.” ...

리시는 책을 덮고 케이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났다. ...

“잠깐 걸을래요? 둘이서.” ...

“좋아요.” ...

시녀들을 방에 남기고 케이와 둘이 밖으로 나왔다. ...

중앙 정원을 걷는 줄 알았는데, 케이가 향한 곳은 서채쪽이었다. ...

“귀한 손님이 온 것 같던데.” ...

“귀하다면 귀하겠지. 우리의 결혼식을 더욱 찬란하게 만들어줄 손님이니.” ...

“우리 결혼식을?” ...

케이가 신관과 어떤 약속을 했는지 모르는 리시가 의아한 듯 되물었지만, 케이는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

이윽고 서채 앞 정원에 도착했다. ...

중앙 정원보다는 작지만, 향긋하고 달콤한 향기로 가득한 곳이었다. ...

정원수 대부분이 과실나무였다. ...

케이는 눈앞에 보이는 나무로 손을 뻗어 복숭아를 하나 따서 리시에게 건넸다. ...

“우리 저택의 복숭아는 달기로 유명하죠.” ...

“이런 게 있는 줄은 몰랐어요.” ...

리시가 탐스러운 복숭아를 한입 깨물었다. ...

단 과즙이 입가를 촉촉하게 적셨다. ...

“와, 정말…….” ...

맛있네요, 라는 말은 케이의 입술에 삼켜졌다. ...

과즙 묻은 리시의 입술을 조심히 맛본 케이가 리시에게 이마를 대고 속삭였다. ...

“미안. 당신 입술이 복숭아보다 달아 보여서.” ...

“그리 달던가요?” ...

“더욱 달더군요.” ...

케이가 한 번 더 리시의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

조금 전에는 놀라서 멈췄던 심장이, 이번에는 달큰하게 뛰는 게 느껴졌다. ...

이상하게도 케이가 은밀하고 끈적하게 리시를 만져오는 것보다, 이 짧고 가벼운 입맞춤이 더 두근거렸다. ...

이상하게 빨라진 이 심장 소리가 케이에게까지 들리지 않을지 걱정하는데, 입술을 뗀 케이가 엄지로 리시의 입술을 닦아주며 말했다. ...

“신관에게 소문이 거짓이라는 걸 증명하기로 했어요.” ...

“그렇군요.” ...

“언제 할 거죠, 리시?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 같은데.” ...

“신관이 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토니의 동굴을 예약해뒀어요.” ...

주점 ’토니의 동굴‘은 그린 백작령의 수도인 론데리반 시 대광장 옆에 있었다. ...

론데리반 시에서 가장 크고 넓은 가게라, 평민들이 파티를 열 때 종종 이용하는 곳이었다. ...

“내일, 그곳에서 평민들을 위한 파티를 열 거예요.” ...

“난 뭘 준비해야 할까요?” ...

리시는 턱에 검지를 대고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며 생각하는 척하다가, 그 검지로 케이의 코끝을 가볍게 찍었다. ...

“웃을 준비.” ...

 

+++

소문의 그린 백작 부인이 평민을 위해 여는 깜짝 파티. ...

주점 ’토니의 동굴‘ 옆 대광장에는, 파티 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간부터 사람들이 잔뜩 모여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었다. ...

따로 초대장을 보낸 것은 아니기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

그린 백작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사람. ...

소문의 그린 백작 부인을 구경하고 싶은 사람. ...

문란한 그린 백작 부인에게 곱지 않은 마음을 품은 사람. ...

맛있는 거나 실컷 먹고 돌아갈 각오인 사람. ...

그린 백작의 눈에 띄어서 신분 상승을 하고 싶은 사람. ...

가까운 곳에 사는 귀족들. ...

그리고, 소문의 주인공을 취재하기 위해 몰려온 기자들. ...

그들이 이 파티를 두고, ...

“교황 폐하까지 움직이시니, 백작 부인이 발등에 불이 떨어지긴 했나 봐. 이런 파티도 열고.” ...

“이렇게 한다고 해서 백작 부인이 한 짓이 없던 일이 되겠어?” ...

“꼭 그렇게만 생각할 건 아니지. 백작 부인이 파티를 좋아해서, 우리에게도 베풀어주고 싶어 하는 걸지도 모르잖아.” ...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리시는 드레스로 갈아입고 있었다. ...

우아하지만 너무 화려하지는 않게. ...

꾸미지만 너무 꾸민 것처럼은 보이지 않게. ...

그러면서도 리시의 외모를 가장 빛나 보이게. ...

연한 붉은 빛이 도는 긴 은발을 틀어 올려 동그랗게 말아 고정하고, 몇 가닥을 빼내어 우아한 곡선을 지닌 어깨로 늘어뜨렸다. ...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진주가 박힌 머리핀을 딱 하나만 꽂아 장식하고, 작은 크기의 진주알 귀걸이와 목걸이를 착용했다. ...

드레스는 아주 연한 하늘색. ...

어깨가 드러낸, 넓고 찰랑거리는 소매가 손등까지 내려오는 드레스였다. ...

레이스나 장식이 하나도 없어서 수수해 보이는 드레스지만, 리시가 입었더니 우아하고 기품 있어 보였다. ...

“아무에게나 어울리는 드레스가 아니라서 걱정했는데…… 정말 아름다우세요, 아이리스 님.” ...

시중을 들던 크리시나가 감탄했다. ...

에르웰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

질레트는 자리에 없었다. ...

오늘 파티 이야기를 들은 질레트가, 자신도 자작 영애로서 참석하고 싶다며 휴가계를 냈기 때문이었다. ...

마침 리시가 바라던 바였기에 군말 없이 허락했지만, 크리시나는 본분을 잊은 질레트가 마뜩잖은 듯했다. ...

시녀도 아름답게 꾸미고 파티에 참석할 자격은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자신이 모시는 귀부인의 시중을 드는 걸 우선으로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

“나는 이 정도면 됐으니, 크리시나랑 에르웰도 가서 파티 준비를 하도록 해요.” ...

“저는 파티…….” ...

“네, 백작 부인. 얼른 가서 준비하고 돌아올게요.” ...

에르웰이 무어라 말하려는데, 크리시나가 에르웰의 말을 끊었다. ...

에르웰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크리시나를 노려보다가, 그녀의 손에 붙잡혀 끌려나갔다. ...

복도로 나가자마자 에르웰이 크리시나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

“시니, 제발 나도 백작 부인이랑 대화 좀 하자.” ...

“뭐라고 하려고 했는데?” ...

“그거야…… 파티에 참석하면 두드러기가 나는 체질이라고…….” ...

“그게 아닐 텐데, 에르웰.” ...

“아, 씨. 나는 파티랑 옘병나게 안 어울린다고 하려고 했다, 왜?” ...

크리시나가 에르웰을 가만히 노려봤다. ...

“나도 알아. 안다고. 하지만 어릴 때부터…… 에이씨.” ...

에르웰이 자기도 이런 자신이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북북 긁었다. ...

“그런데 제레시엔도 마찬가지잖아. 제레시엔도 지가 하고 싶은 대로 말하는데…….” ...

“제레시엔 양이라고 해야지. 레이디 그린이라고 하든가.” ...

“레이디는 옘병…….” ...

에르웰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케이가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다. ...

둘은 얼른 말을 멈추고 케이를 돌아봤다. ...

왜인지 케이는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크리시나는 순간 케이가 자신들의 대화를 들었나 싶었지만,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

둘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으니까. ...

‘아이리스 님을 볼 생각에 기분이 좋으신 거겠지. 이 방에 들어가실 때면 항상 웃고 계시니까.’ ...

(21) 소문의 백작 부인 ...

방에 들어온 케이가, 거울 앞에 서 있는 리시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

그는 곧 옅은 미소를 지으며 리시의 뒤로 다가와,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한쪽 팔로 끌어안았다. ...

그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리시의 목덜미에 닿았다. ...

뜨거운 입김이 리시의 쇄골까지 번졌다. ...

이 자연스러운 스킨십이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닿을 때마다 긴장되고 뜨거워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케이는 리시의 어깨에 턱을 괴고, 거울에 비친 리시를 응시했다. ...

그의 회청빛 눈동자가 거울 속의 리시를 은근하게 훑어 내려갔다. ...

“아름답군요, 리시.” ...

“당신도.” ...

거짓이 아니었다. ...

파티용 정장을 차려입은 케이는, 깜짝 놀랄 정도로 근사했다. ...

평소에는 흐트러뜨리고 다니는 머리칼도, 이번에는 포마드를 이용해 단정하게 뒤로 넘겨서 고정했다. ...

반듯한 이마 아래의 짙은 눈썹이 평소보다 인상적이었다. ...

“제이미에게 뭔가 시켰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그게 뭔지는 말해주지 않더군요. 내 부하를 어떻게 구워삶은 거죠?” ...

“굽지도, 삶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날개를 접던걸요. 주인에게 잘 배운 덕이겠죠.” ...

농담 삼아서 한 말인데, 케이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

케이가 리시를 돌려세워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 ...

“어떻게 안 거죠? 제이미가 뭐로 변하는지.” ...

아차, 싶었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

앞으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할 것이다. ...

아무도 몰라야만 하는데, 리시가 아는 일들. ...

“그게 중요해요?” ...

리시가 담담히 물었다. ...

“중요해요. 하지만 말해주지 않을 테죠.” ...

“아직은.” ...

“언젠가는 말해줄 건가요?” ...

그건 리시 자신도 알 수 없었다. ...

한 번을 살았고, 한 번을 죽었다. ...

그렇게 끝난 줄 알았는데, 두 번을 살게 되었다. ...

그걸 순순히 믿어줄 사람이 있을까? ...

설령 믿는다고 해도, 시간을 되돌아와 다시 살아가게 된 사람을 마녀로 여기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

시간을 돌아 되살아났다고 해서 특별한 능력이 생긴 건 아니었다. ...

’내 한 몸 지킬 만한 힘도 없지. 그래서 이 남자에게 의탁한 거고.‘ ...

리시는 케이의 눈을 바라봤다. ...

그의 눈동자는 몹시도 깊고 차가워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이 시간을 되돌아왔다는 걸 알게 되면, 이 남자가 어떻게 행동할지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

지난 삶,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조금도 아물지 않았기에, 리시는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호의적이라도,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 ...

리시는 검지로 케이의 단단한 가슴을 쿡 찔렀다. ...

“당신 하는 거 봐서.” ...

케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냉기가 사라지고 다정한 온기가 그 자리를 채웠다. ...

“더욱더 잘해야겠군요. 나는 궁금한 건 반드시 알아내야만 하는 성격이라서.” ...

“기대할게요.” ...

“긴장해야 할 겁니다. 깜짝 놀라게 잘할 테니까.” ...

+++

주점 ’토니의 동굴‘은 상당히 넓은 가게인데도 그곳에 모두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였다. ...

토니의 동굴 옆 대광장에도 뷔페와 식탁이 마련되었기에, 주점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대광장에 모여서 그린 백작 부인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이윽고 그린 백작 가문의 마차가 들어서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길 주위로 모였다. ...

마차 창문에는 커튼이 있어서, 그 안에 탄 백작 부인을 볼 수 없는데도, 다들 목을 쭉 빼 밀고 뭐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 기웃거렸다. ...

마차가 토니의 주점 앞에 멈추자, 시끄러웠던 대광장이 조용해졌다. ...

달칵- ...

마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크게 울릴 정도의 고요. ...

먼저 내린 건 케이였다. ...

마치 남신 같은 그의 모습에, 몇몇 여성들이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

케이가 마차 안쪽으로 손을 내밀자, 곱고 작은 손이 케이의 커다란 손바닥 위에 놓였다. ...

단지 손만 나왔을 뿐인데도, 사람들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

아이리스 그린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

사람들은 마른침조차 삼키지 못하고 홀린 듯 그녀의 모습을 바라봤다. ...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은빛 머리카락, 희고 고운 피부와 잘 어울리는 연한 하늘색의 우아한 드레스. 자그마한 얼굴에 자리 잡은 큼직한 이목구비는 신이 온 힘을 다해 만든 것처럼 완벽했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 ...

그녀를 표현하는 수식어조차 무색할 만큼, 아이리스 그린 백작 부인은 눈부셨다. ...

그녀는 청초하게도, 우아하게도, 오만하게도 보였다.마차에서 내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는 그녀의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아름다웠다. ...

사람들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서 정신없이 리시를 바라봤다. ...

도톰하고 붉은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

“어머나.” ...

작게 흘러나온 감탄사. ...

그리고 리시의 얼굴에 부드럽게 번지는 미소. ...

“이렇게 많이 와주실 줄은 몰랐는데. 기쁘네요.” ...

그 순간 사람들은 자신이 그녀를 기쁘게 해줬다는 사실이 감개무량했다. ...

그 황홀한 정적을 깬 건, 마차가 다가오는 소리였다. ...

그제야 사람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

천상의 구름을 밟는 것 같았던 황홀경에서 벗어나, 짜증스럽게 이쪽으로 다가오는 마차를 노려봤다. ...

리시도 고개를 돌려 마차를 응시했다. ...

메르디 자작가의 마차였다. ...

마차에서 내린 질레트의 모습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

그녀의 화려한 차림 때문이었다. ...

풍성하게 퍼지는 빨간색 드레스의 가장자리는 금실로 수를 놓았고, 어깨 부분은 다이아 가루를 뿌려서 만든 실로 마감했다. ...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목걸이와 귀걸이. 긴 머리를 틀어 올려서 꽂은 수십 개의 보석 머리핀. ...

’저 하늘에 태양이 있다면, 이 땅의 태양은 나다!’라고 주장하는 듯한 질레트는, 아름답기는 했다. ...

원래 예쁘장한 얼굴인데, 드레스에 지지 않도록 걸맞은 화장을 해서 더욱 아름다웠다. ...

만약 이곳이 평범한 귀족 파티였다면, 그녀의 차림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

대부분이 질레트만큼 화사하게 꾸미고 올 테니까. ...

하지만 이곳은 평민을 위한 파티. ...

주최자가 ’평민을 위해서.’라는 주제를 건 이상, 귀족이 참석한다 해도 그에 걸맞는 복장을 하는 것이 예의였다. ...

이 자리에 있는 귀족들은 소재는 고급이지만 수수해 보여서 평민들과 섞여 있어도 위화감이 크지 않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

그건 질레트의 부모인 메르니 자작 내외도 마찬가지였다. ...

질레트보다 먼저 파티 장소에 와 있던 메르디 자작 내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딸을 쳐다보고 있었다. ...

질레트는 모두가 자신을 주목하자 기분이 좋은 듯, 생긋 웃으며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했다. ...

그러고는 고개를 바짝 들고 리시를 향해 또각또각 걸어왔다. ...

리시는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 자세로 질레트가 오는 것을 지켜봤다. ...

모두가 숨을 죽이고 리시와 질레트를 쳐다봤다. ...

질레트의 눈이 빠르게 리시의 차림을 훑더니, 자기가 이겼다는 듯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

“백작 부인. 오늘 이렇게 파티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해요.” ...

“따로 초대한 기억은 없는데.” ...

“예?” ...

“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 파티이니 감사할 것 없어요, 질레트 양.” ...

“네, 뭐. 그래도요.” ...

질레트는 흥, 하고는 휙 돌아서서 귀족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

아는 영애들을 발견한 질레트가 환하게 웃으며 그들 무리에 섞였다. ...

리시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미소지었다. ...

“오늘 이렇게 파티에 참석해줘서 고마워요. 부디 즐겁게 지내세요.” ...

“백작 부인께서는 요새 백작 부인을 둘러싼 소문을 아십니까?” ...

리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날카로운 질문이 들려왔다. ...

이 예의 없는 행동에 모두가 숨을 삼키며, 소리가 난 쪽을 돌아봤다. ...

예리한 눈매를 가진 남자가 리시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

리시는 자신의 손을 잡은 케이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

엄지로 그의 손등을 톡톡 쳐서 가만히 있으라고 한 후, 남자에게 말했다. ...

“무례하군요.” ...

“압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파티, 그 소문에 대한 진상을 해명하기 위해 연 것 아닙니까?” ...

모인 사람들의 반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반은 ’그런 거였어?‘라는 표정이었다. ...

리시는 그를 응시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

“내가 왜 그 소문에 대해 해명을 해야 할까요?” ...

“예?” ...

리시가 이런 태도를 보일 줄은 몰랐는지, 남자의 예리한 눈빛이 잠시 허물어졌다. ...

“해명한다 해도 믿고 싶은 것만 믿을 테고. 내 사적인 문제이니 그저 내 남편과 가족들만 그 소문이 그저 악의적인 헛소문일 뿐이라는 걸 알아주면 되지 않나요?” ...

리시는 케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

케이도 리시와 눈을 마주치고, 더없이 행복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

마차에서 내릴 때부터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이 세상에 둘밖에 없다는 듯 서로를 응시하는 리시와 케이. ...

둘은 누가 봐도 아무 문제 없이 사랑에 푹 빠진 신혼부부였다. ...

“하지만 신성국에서 소문의 진상을 알기 위해 사람을 보낸 이상, 그런 말로 넘어갈 문제는 아니게 되지 않았습니까?” ...

남자는 지지 않았다. ...

리시는 남자의 고집이 고마웠다. 바로 이런 상황을 원했기 때문이다. ...

시선을 돌려 그 사내를 응시했다. 리시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

사건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그가 이 자리에 올 거라는 짐작도 하고 있었다. ...

리시의 예상대로 그는 이 자리에 왔고, 리시가 예상한 행동을 했다. ...

“누구죠?” ...

모르는 척 묻자, 그가 당당하게 답했다. ...

“엘레르보의 위팅크입니다.” ...

엘레르보. 엘레론드 대륙 대부분의 나라에 지점을 둔, 가장 크고 가장 공신력 있는 신문사. ...

그 신문사의 기자인 위팅크는 무례한 취재로 욕을 먹기는 해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기사를 쓰는 자였다. ...

그리고 지난 삶, 케이가 수인이라는 이유로 죽임당한 후, 케이를 죽인 것이 얼마나 큰 손실이며, 잔혹한 짓인지에 대한 기사를 썼다가, 황제의 분노를 사서 사형당했다. ...

목이 매달려 죽는 순간까지, 그는 “이 세상은 미쳤어! 다들 미쳤다고!”라고 외쳤던 걸, 리시는 죽음의 어둠 속에서 보았다. 리시는 천천히 사람들을 둘러봤다. ...

주점 안에 있던 사람들까지도 슬금슬금 밖으로 나와, 그동안 자신들을 즐겁게 했던 소문의 진상을 알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

대부분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었지만, 몇몇 사람들은 ’꼴 좋다.‘라는 눈빛을 짓고 있었다. ...

리시는 아직 앳된 외모의 그들이, 평소에 케이를 흠모하던 귀족 영애들일 거라고 확신했다. ...

“좋아요.” ...

리시의 여상한 음성이 크게 울릴 정도로, 광장은 조용했다. ...

“모두 내 사사로운 부분까지 캐내고 싶어 할 만큼 내게 애정을 보여주니, 그에 응해야 하겠군요.” ...

리시의 시선이 질레트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위팅크에게로 향했다. ...

“그럼 이제부터 진상이 무엇인지 알아볼까요?” ...

(22) 내가 그런 게 아니에요. ...

리시와 케이의 뒤에서 기척을 감추고 있던 제이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리시의 옆에 섰다. ...

다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등장한 제이미를 얼떨떨하게 쳐다봤다. ...

“모두 알겠지만 내 소개를 해야, 이 자리가 더욱 즐거워지겠지요? 나는 창천의 기사이자 전장의 불꽃, 타오르는 화염……이 되고 싶은 제이미 러셀 남작이에요.” ...

제이미의 명랑한 소개에 작은 웃음소리가 퍼졌다. ...

창천의 기사, 전장의 불꽃, 타오르는 화염. ...

제이미는 그렇게 되고 싶다고 했지만, 사실은 이미 그렇게 불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리고 또한 여기 계신 두 분의 충성스러운 집사장이기도 하지요. 사사로운 부분까지도 관리하는 집사장.” ...

제이미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 케이와 리시 앞에 섰다. ...

“우리 곱고 귀한 백작 부인께서 구태여 나설 일도 아닌지라, 내가 한번 이 소문의 진상을 알아볼까 해요. 괜찮겠지요?” ...

누가 안 된다고 할까. ...

저렇게 무시무시한 눈빛을 하고 있는데. ...

제이미는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모두를 찢어버릴 듯 날카로웠다. ...

“자, 이 자리에 온 신문과 잡지 기자들. 손들어볼까요?” ...

십수 명 되는 기자들이 와 있을 텐데, 손을 든 건 위팅크뿐이었다. ...

아마 일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해서, 불똥이 튀기 싫어 몸을 사리는 것이리라. ...

제이미가 싱긋 웃었다. ...

“누가 기자인지 다 아는데…….” ...

그제야 기자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

제이미는 어느 기자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고, 사람들은 썰물처럼 길을 내주었다. ...

“제일 처음에 그린 백작 부인에 관한 기사를 쓴 잡지사의 기자지요?” ...

“예, 그렇긴 한데…….” ...

“그 내용은 누구에게 듣고 썼을까요?” ...

“아, 그건…… 누구에게 들었다기보다는…… 소문이…….” ...

“소문!” ...

짝-! ...

제미이가 손바닥을 마주치는 소리에, 사람들은 화들짝 놀랐다. ...

“진실 여부는 가리지 않고 떠도는 소문만으로 기사를 썼다. 이 얘기가 맞나요?” ...

“아, 아니…… 그게 아니라…….” ...

“그게 아니라?” ...

“그…….” ...

기자가 마른침을 삼키며 도와달라는 듯 사람들을 돌아봤지만,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결국, 기자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

“진실 여부는 가리지 못했습니다.” ...

“좋아요.” ...

제이미가 전혀 좋지 않다는 눈빛으로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

다른 기자 앞에 선 제이미가 말했다. ...

“신문사의 기자. 이 소문에 관한 기사를 실은 첫 신문사였지요. 신문사이니만큼 그저 떠도는 소문만으로 기사를 싣지는 않았을 거라고 믿고 싶은데…….” ...

“네, 저는 인터뷰를 했습니다.” ...

“이 자리에 있어요?” ...

“네, 저기…….” ...

기자가 누군가를 가리켰다. ...

턱이 뾰족한 평민 여자였다. ...

제이미는 겁에 질린 그녀에게로 가서 물었다. ...

“그린 백작 부인께서 알포드 후치스 자작과 몰래 만나는 장면을 직접 봤나요?” ...

제이미의 질문에, 강 건너 불구경하듯 쳐다보던 사람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

제이미가 이런 식으로 한 명, 한 명, 소문의 진상을 조사하려고 할 줄은 몰랐다. ...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이 그 소문을 입에 올린 적 있었다. ...

“아, 아니요. 저도 들은 거라서…….” ...

“누구에게 들었죠?” ...

“그게…….” ...

평민 여자가 누군가를 가리켰다. ...

제이미는 그녀에게로 다가가 같은 질문을 반복했고, 같은 대답을 들었다. ...

그렇게 한 명, 한 명, 그래야만 한다면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심문하겠다는 듯. ...

질레트는 이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숨을 멈췄다. ...

제이미가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

이윽고 제이미가 누군가에게 지적당한, 질레트 옆에 있는 귀족 영애에게 물었다. ...

“그린 백작 부인이 알포드 후치스 자작과 몰래 만나는 장면을 직접 봤나요?” ...

“아니요…….” ...

귀족 영애가 질레트를 힐끔거렸다. ...

질레트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

어떻게든 여길 빠져나가고 싶은데, 너무 화려한 차림이라서 몰래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

‘아, 아니야. 당황할 거 없어. 나도 그냥 남한테 들었다고 하면 돼.’ ...

“그럼 누구에게 들었죠?” ...

질레트의 친구인 귀족 영애는 잠깐 망설이다가 질레트를 가리켰다. ...

질레트는 자신을 배신한 그녀의 뺨을 치고 싶었지만, 꾹 참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

“질레트 메르디 양. 그린 백작 부인의 시녀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자신이 모시는 백작 부인의 소문을 입에 담았다니, 내가 너무 실망스럽겠지요?” ...

제이미의 지적에 질레트는 주먹을 꽉 쥐었다. ...

질레트가 소문의 근원이든 아니든, 리시의 시녀이면서 리시의 소문을 입에 담았다는 것만으로도, 질레트의 명예가 떨어지는 일이었다. ...

질레트의 부모는 숨도 못 쉬고 자신의 딸을 지켜보고 있었다. ...

질레트는 제이미가 누구한테 들었냐는 질문을 해주길 바랐지만, 제이미는 아무 말도 없이 질레트를 응시하고 있었다. ...

제이미뿐만이 아니었다. ...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질레트에게 향해 있었다. ...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질레트는, 결국 자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저도 들은 거예요.” ...

“누구에게?” ...

“하녀들에게.” ...

“그럴 리는 없어요, 질레트 양.” ...

“정말이에요. 하녀들이 직접 보고서 얘기해줬어요. 백작 부인이…… 서쪽 정원 나무 아래에서 알포드 후치스 자작이랑 몰래 만나는 걸 봤댔어요.” ...

“정말로 그럴 리는 없어요, 질레트 양.” ...

“왜…… 왜 제 말은 안 믿어줘요? 정말이라니까요.” ...

“질레트 양. 내가 안 믿을 때는 이유가 있겠지요?” ...

이쯤 되니 질레트도 슬슬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

왜 다들 나한테만 이래? ...

“백작 부인이 날 싫어해서요? 내가 백작님이랑 친밀해서, 백작 부인이 날 범인으로 몰아붙이라고 명령했어요?” ...

질레트의 어머니인 메르디 자작 부인은 거의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

제 딸의 입을 막고 싶은 듯했지만, 모두가 주목하는 상황에서 그럴 수도 없었다. ...

“아니요, 질레트 양. 그런 게 아니에요. 백작 부인은 아무도 싫어하지 않아요.” ...

“뭘 안 싫어해요? 싫어해요. 처음부터 날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요! 난 아니에요. 난 아무 짓도 안 했어요. 나도 들은 거라고요.” ...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하고 잘못을 빌면, 백작 부인께서는 용서해주실 거예요.” ...

“난 아니라니까요! 나도 하녀들에게 들었다고요!” ...

“그러니까, 그게 그럴 리 없어요, 질레트 양. 내가 오늘 아침에 하녀들에게 전부 물어보고 왔거든요. 모두 질레트 양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더군요.” ...

“……그…… 거, 거짓말이에요. 걔들은…… 걔들은 원래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잖아요. 게다가 날 질투해서…….” ...

“아무도 질레트 양을 질투하지 않아요.” ...

“아니요, 질투해요. 난 정말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진짜라니까요.” ...

질레트의 주위에 있던 귀족 영애들은 이 상황에서 질레트를 구할 방법이 없음을 깨달았다. ...

그들은 슬금슬금 질레트로부터 멀어졌다. ...

메르디 자작 가문의 질레트. ...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자, 지금은 그린 백작 부인인 아이리스. ...

누구 편에 서야 할지는 정해져 있었다. ...

“네가 직접 봤다면서…….” ...

귀족 영애 한 명이 중얼거리자, 질레트가 두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노려봤다. ...

“아니, 왜 그렇게 봐? 네가 그랬잖아. 직접 봤다고. 그래서 너무 놀랐다고. 안 그래?” ...

“맞아요. 언니가 직접 보셨다면서……. 저희는 그 말을 믿었는데.” ...

“우리가 안 믿으니까 정말이라면서 몇 번이나 말해줬잖아. 후치스 자작이랑 그린 백작 부인이 어떤 표정을 지었고,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도…….” ...

질레트가 빠져나갈 구멍이 사라졌다. ...

하지만 질레트는 여기서 무너질 수 없었다. ...

만약 이걸 인정하면, 메르디 자작 가문은 이곳에서 살 수 없게 된다. ...

자리에는 기자들이 많았다. ...

이 일은 여러 신문에 실려, 대륙 곳곳에 퍼져나가리라. ...

상대는 다른 사람도 아닌, 신성국의 가호를 받는 그린 백작 가문이었다. ...

그린 백작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은, 신성국에게 도전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

메르디 가문은 이곳만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도 살기 힘들 것이다. ...

“나…… 나는…… 나도…… 나도 후치스 자작에게 들은 거예요!” ...

질레트는 마지막 남은 지푸라기를 잡기로 했다. ...

“후치스 자작이 그랬어요. 원래 백작 부인이랑 그런 관계였다고. 그런데 백작 부인이 명예를 원해서 후치스 자작을 버리고 그린 백작님이랑 결혼한…….” ...

질레트는 말을 멈췄다. ...

제이미의 미소가 짙어졌기 때문이다. ...

“그렇군요, 질레트. 그래서 내가 직접 후치스 자작을 불러왔지요.” ...

거짓말일 거라고, 겁을 주려고 하는 말일 거라고 생각했다. ...

아니었다. ...

알포드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

알포드의 양쪽에는 유진과 월라스가 있었다. ...

질레트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

알포드가 옆에 서자, 제이미가 입을 열었다. ...

“알포드 후치스 자작. 방금 들었지요?” ...

“예? 아, 예에…… 예.” ...

“후치스 자작이 그린 백작 부인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고 얘기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니에요. 내가 어떻게 감히 그런 소리를…… 아닙니다.” ...

“맞잖아요!” ...

질레트가 빽 외쳤다. ...

“당신이 저번에 그린 백작님을 찾아온 날, 그린 백작 부인이랑 얼마나 뜨겁게 연애했는지 계속 얘기했잖아요.” ...

“그게 뭔 소리요? 난 그런 말 한 적 없소! 정말로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러셀 자작. 내가 미쳤다고 그린 백작 저택에서 그런 소리를 떠들겠습니까? 저 여자가 날 모함하는 거예요.” ...

“모함이라니……! 제이미. 난 정말로 저 사람한테 들었어요. 아, 그날 하녀들도 다 들었을 거예요. 하녀들에게 물어보세요.” ...

“하녀들에게는 이미 물어봤지요.” ...

질레트와 알포드가 서로 악을 쓰는 가운데, 제이미가 담담히 말했다. ...

“하녀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질레트 양.” ...

“그, 그런…….” ...

질레트가 비틀거렸다. ...

이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이 전혀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

도움을 청할 사람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다가, 멀찍이 서 있는 리시와 눈이 딱 마주쳤다. ...

리시는 고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저 여자 때문이야. 저 여자가 날……!’ ...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리시의 머리를 잡아 뜯고 싶었다. ...

저 고고하고 오만한 표정이 엉망으로 일그러지는 걸 보고 싶었다. ...

하지만 한 가닥 남은 이성이 질레트의 발목을 붙잡았다. ...

그때였다. 누군가 그린 백작 내외를 향해 달려간 것은. ...

질레트는 그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걸, 뒤늦게 눈치챘다. ...

케이의 앞까지 달려간 메르디 자작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

귀족이 평민들이 보는 앞에서 다른 귀족에게 무릎을 꿇는 건, 거의 없는 일이라도 봐도 무방했다. ...

“어머머.” ...

“저런…….” ...

귀족들이 혀를 차거나 신음을 삼키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

메르디 자작은 자기 자식뻘인 케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

“그린 백작님. 제가 딸을 잘못 키웠습니다. 부디 넓은 마음으로 용서를 해주십시오. 그렇다면 그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

“자작이 용서를 빌어야 할 대상은 내가 아니라 내 아내인 듯한데.” ...

그러자 메르디 자작은 리시를 향해 몸을 돌렸다. ...

“백작 부인. 제 딸이 큰 죄를 범했습니다. 아직 어려서 그런 거니, 부디 넓은 아량으로 용서를…….” ...

서늘한 눈으로 메르디 자작을 오시하던 리시가 입을 열었다. ...

(23) 와인 향기는 아찔했다. ...

“질레트 양이 아직 어리다는 소리를 들을 나이는 아니지 않은가요?” ...

메르디 자작의 얼굴이 빨개졌다. ...

“부디…… 부디…….” ...

질레트는 자신의 아버지가 리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

저 여자가 뭔데? 남편 잘 만나서 ’그린 가문‘의 명예를 얻고 있는 것뿐이잖아. ...

방탕하게 산 주제에, 남편을 잘 만나서 날 이런 꼴로 만드는 거잖아. ...

하지만 질레트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여기서 자신이 움직여봐야 상황이 더 악화될 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

게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메르디 자작 부인이, 질레트의 손목을 부러뜨릴 듯 잡고 있기도 했다. ...

그제야 질레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

세상에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가문이 있었다. ...

신성국의 가호를 받는, 그린 가문이 그랬다. 그린 가문은 황제조차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가문. ...

질레트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

다만, 리시가 케이와 결혼하는 순간부터 그린 가문이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이다. ...

질레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끔찍이 싫지만 어쩔 수 없었다. ...

이 순간, 리시가 원하는 건 명백했다. ...

질레트의 사과. ...

질레트의 굴복. ...

질레트가 리시를 향해 걸어가려 하자, 자작 부인이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는 듯 질레트를 노려봤다. ...

질레트는 “괜찮아.” 하고 작게 속삭인 후, 리시의 앞으로 향했다. ...

모두의 시선이 질레트를 따라서 움직였다. ...

이윽고 리시 앞에 선 질레트는, 메르디 자작 옆에 차분하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

“제가 헛소문을 퍼뜨렸습니다.” ...

실제로 그 이야기를 꺼낸 건 알포드였다. 하지만 알포드는 절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그 자리에 있던 하녀들 또한 사실을 고하지 않을 것이다. ...

“잘못했습니다, 그린 백작 부인. 제가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벌을 내려주세요.” ...

이제 사람들의 눈동자는 리시의 입술로 향했다. ...

귀부인의 추문을 만들어내, 다른 나라에까지 소문을 낸 죄는 컸다. 그것도 평범한 귀부인이 아닌, 그린 가문의 귀부인이자 위틀로 공작의 영애의 추문이었다. 다들 리시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벌을 내릴지 궁금한 표정이었다. ...

‘못 해도 추방이겠지.’ ...

하지만 리시는 모두의 예상에서 벗어나는 말은 했다. ...

“벌은 없어요.” ...

리시가 담백하게 말했다. ...

“솔직하게 말하고 사과했으니 용서하도록 하죠. 이 일은 여기서 끝이에요.” ...

그 자리에 있는 평민과 귀족 대부분은, ...

‘마음도 넓으시네. 공작가의 꽃이라더니, 너무 곱게만 자라서 저러시나?’ ...

라고 생각했고, 그 자리에 있는 귀족 중 몇몇은, ...

‘공작가의 꽃이라고 순진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조심해야겠군.’ ...

이라고 생각했다. ...

리시는 질레트를 용서했고, 이 사실은 이 자리에 있는 기자들이 기사로 써서 널리 퍼뜨릴 것이다. ...

추문을 거짓으로 만들어내 퍼뜨린 자작 영애를 용서한, 마음 넓은 그린 백작 부인. ...

하지만 실상은 용서가 아니라는 걸, 이 자리에 있는 몇몇은 알고 있었다. 진짜 용서할 생각이었다면, 이런 자리에서 진실을 파헤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뒤에서 조용히 알아낸 후, 둘이서 얘기하고 용서했겠지. ...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이 드러난 이상, 질레트도, 메르디 자작 가문도, 거짓 소문으로 그린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려 했다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

메르디 가문은 귀족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하게 될 것이고, 어디를 가도 손가락질받으며 웃음거리가 되리라. 메르디 가문이 하는 모든 사업에 이 사건이 따라붙을 것이고, 머지않아 메르디 가문의 이름으로 벌인 사업들은 망하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

그러나 리시는 질레트를 용서했으니, 메르디 가문이 앞으로 어떤 취급을 받든, 리시와는 관계없는 일. ...

리시가 너무했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

엘레르보의 위팅크 기자 역시 리시가 질레트를 용서한 이유를 눈치챘다. ...

평소라면 위팅크는 ’위틀로 공작 가의 꽃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있었다.‘라고 기사의 서문을 썼겠지만, 이번에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

‘그린 백작 부인. 재미있는 분이네.’ ...

케이를 찾아온 신관 역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

일이 진행될수록 신관의 얼굴은 점점 파래졌다. ...

이윽고 질레트가 리시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신관이야말로 무릎을 꿇고 싶은 심정이었다. ...

‘신이여.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

+++

리시는 따뜻하고 향긋한 물이 가득 찬 욕조에 몸을 담그고 신문을 읽는 중이었다. ...

오늘 아침 발간된 엘레르보의 신문. ...

1면에 리시와 관련된 기사가 실려 있었다. ...

위팅크가 쓴 기사는 리시에게 호의적이었다. ...

‘위팅크라면 내가 무슨 생각으로 질레트를 용서했는지 눈치챘을 거야.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어.’ ...

그렇다는 건, 위팅크가 리시에게 호감을 느꼈다는 의미다. ...

예전처럼 귀족의 힘이 절대적이지 않은 이 시기에, 기자의 호감을 사두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

‘다만…….’ ...

  [위틀로 공작가의 꽃은 여전히 화사한 꽃잎을 지니고 있었다.] ...

리시는 기사의 마지막 부분을 노려봤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 ...

리시를 표현할 때는 언제나 따라붙는 칭호. ...

리시는 그 칭호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

‘쉽지 않겠지.’ ...

지난 삶에서는 죽을 때까지 그 칭호가 따라왔다. ...

달칵- ...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케이가 쟁반을 들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

리시는 반사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

욕조 안에 가득 띄운, 새빨간 장미 꽃잎. ...

무수히 많은 장미 꽃잎 사이로 리시의 하얀 살결이 언뜻 드러났다. ...

이런 모습을 케이에게 보이는 게 창피했지만, 이런 거로 창피해한다는 걸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

그 어떤 일에도 당황하지 않고 여유로운 아이리스. ...

리시는 이번 삶에서 그런 여자가 되고 싶었다. ...

당당하게 턱을 살짝 치켜들었지만, 몸이 스르륵 욕조 깊이 들어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

“무슨 일이죠?” ...

“내 아내의 목욕 시중을 들고 싶어서. 겸사겸사 축배도 들고 싶고.” ...

케이가 가져온 쟁반 위에는 신선한 청포도와 치즈, 와인과 잔이 놓여 있었다. ...

케이는 쟁반을 욕조 옆 테이블에 내려놓고,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

그가 손가락 끝으로 욕조 안의 물을 길게 쓸었다. ...

그의 예쁜 손가락에 빨간 장미 꽃잎 몇 장이 붙었다. ...

그가 느른하게 장미 꽃잎을 한 장, 한 장 떼어 욕조에 도로 떨어뜨리는 걸, 리시는 멍하니 지켜봤다. ...

그는 마치 무대 위의 배우처럼 움직였는데, 그것이 몹시도 강렬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장미 꽃잎을 다 떼어낸 그는 젖은 손으로 머리를 뒤로 쓱 쓸어올리고, 리시를 보며 싱긋 웃었다. ...

“내 얼굴 뚫리겠어요, 리시.” ...

“아…….” ...

리시는 얼굴을 붉히며 와인 병으로 눈동자를 움직였다. ...

“배우처럼 행동하기에, 봐줬으면 하는 줄 알고.” ...

“배우처럼 행동한 적은 없는데, 당신 눈에 그렇게 보였다니 기쁘군요.” ...

“딱히…….” ...

“쉿.” ...

그의 검지가 리시의 입술을 가만히 눌렀다. ...

입술에 닿는 젖은 손길이 뜨거웠다. ...

그는 회청빛 눈동자로 리시를 지그시 응시하며 말했다. ...

“그만 말해요, 리시. 착각일지라도, 내가 좀 더 기뻐할 수 있게.” ...

리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손가락을 떼어냈다. ...

케이는 능숙하게 와인을 따라, 잔을 리시에게 건넸다. ...

잔을 받으려고 물에 잠겨 있던 팔을 올리는 바람에, 찰방, 하고 물결이 생겨났다. ...

리시의 상체 쪽을 가리고 있던 장미 꽃잎들이 사라락 퍼져나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

짧은 틈에 드러난 살결에 그의 시선이 잠깐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

리시는 와인이고 뭐고, 얼굴이 욕조 안에 푹 잠기게 하고 싶었지만, 우아하게 잔을 받아들었다. ...

“뭐로 건배를 하죠?” ...

리시가 잔을 살살 굴려 와인 향기를 맡으며 물었다. ...

“당신의 오명이 풀린 것. 유례없을 정도로 근사할 우리의 결혼식. 엘레르보의 위팅크 기자의 호감을 얻은 것. 어떤 게 좋을까요?” ...

역시 케이는 예리했다. ...

그 역시 엘레르보에 실린 기사만 읽고도, 위팅크가 리시에게 호의를 표현한 것을 눈치챘다. ...

“셋 전부.” ...

리시가 대답하며 잔을 내밀자, 케이가 가볍게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

챙- ...

고운 소리가 욕실 안에 퍼졌다. ...

리시는 입안에 감미롭게 번지는 와인 향을 즐겼다. ...

따뜻한 욕조 안, 주위에 가득한 장미 향기, 그리고 입안을 즐겁게 해주는 와인. ...

이미 모든 걸 다 이룬 기분이 들었다. ...

케이가 접시에 작게 자른 치즈 하나를 집어 리시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 ...

“결혼식에 가본 적 있어요, 리시?” ...

지난 삶에서는 몇 번 가본 적 있었지만, 이번 삶에서는 아니었기에 고개를 저었다. ...

케이가 포도 한 알을 따서 리시의 입에 넣어주며 말했다. ...

“피곤할 거예요. 참석자도, 주최자도, 아주 피곤해요.” ...

“파티를 좋아하지 않나 봐요.” ...

“무척. 그럴 시간에 밖에 나가서 성유물을 찾고, 야만족을 토벌하는 게 더 유익하잖아요.” ...

“나는 당신이랑 파티에 자주 참석하고 싶었는데.” ...

“그렇다면 앞으로 파티를 좋아해야겠네요.” ...

케이가 담담히 대꾸하며 또 포도 한 알을 따서 리시의 입에 넣어줬다. ...

별생각 없이 포도를 받아먹던 리시는, 누군가 이렇게 음식을 먹여주는 게 처음이라는 걸 떠올렸다. ...

이게 사랑받는 기분일까? ...

이 남자는 날 사랑하는 게 아닌데. ...

케이의 감정이야 어떠하든, 그가 리시를 소중하게 대해주는 것만은 분명했다. ...

‘지난 삶에서도…… 그랬지. 아주 잠깐이었지만.’ ...

리시는 지난 삶, 케이와의 짧은 만남을 떠올리며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

리시의 시선을 느낀 그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상체를 숙여 리시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

리시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벌어지며 그를 받아들였다. ...

그의 손이 리시의 머리칼을 파고들고, 그의 숨결이 리시를 뜨겁게 물들였다. ...

따뜻한 물이 차게 느껴질 정도로, 그의 입술이 뜨거웠다. ...

“당신이 그런 식으로 날 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리시.” ...

그가 입술을 겹친 채 나직하게 속삭였다. ...

“모르는 것 치고는 아주 잘하는데요.” ...

그가 키득거렸다. ...

“당신한테서 포도 맛이 나요.” ...

“당신도요.” ...

“그거 알아요, 리시? 요새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

그가 와인병을 가져와 욕조 위에 기울였다. ...

값비싼 와인이 콸콸 쏟아져 욕조를 붉게 물들였다. ...

“와인으로 목욕하는 게 유행이래요.” ...

와인이 튀어 리시의 목덜미와 쇄골 위에 피처럼 떨어졌다. ...

진한 와인 향 때문일까? ...

아니면 리시에게 고정되어 흔들리지 않는 저 청회색 눈동자 때문일까? ...

리시는 취한 듯 몽롱해졌다. ...

다시 다가오는 그의 입술을 받아들이려 고개를 들었는데, 그는 리시의 얼굴을 지나쳐 리시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

그의 입술이 목선을 따라 움직였다. ...

그의 젖은 입술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와 리시의 입술 위에 겹쳐졌다. ...

이번에는 리시도 그에게서 포도 맛을 느꼈다. ...

그와 같은 맛을 공유한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그만 아찔해졌다. ...

이성이 아득히 멀어지고, 그에게 겹쳐져 그의 안으로 녹아내리고 싶다는 욕망이 빈자리를 채웠다. ...

그의 손이 리시의 목선을 타고 내려가 둥근 어깨를 쥐었다. ...

문득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케이는 리시의 어깨를 꽉 쥐었다가, 끄응, 소리를 내며 얼굴을 멀찌감치 떨어뜨렸다. ...

리시가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

그가 엄지로 리시의 눈가를 가볍게 쓸며 말했다. ...

“청첩장이 나왔어요, 리시.” ...

기분 탓일까? ...

리시의 귀에는 케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처럼 들렸다. ...

수인의 왕, 성유물의 수호자인 케이브란트 그린이 떨 리 없는데도. ...

(24) 첫 번째 이혼남. ...

케이는 도망치듯 욕실을 나왔다. ...

리시의 방 응접실에 앉아 있던 에르웰과 크리시나가 벌떡 일어났다. ...

그들의 눈에도 케이의 모습이 이상해 보였나 보다. ...

“백작님. 괜찮으세요?” ...

크리시나의 질문에, 케이는 한 손을 가볍게 들어 보인 후 그대로 리시의 방을 빠져나왔다. ...

복도로 나온 후에야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

“미치겠군.” ...

신음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

이상하게도 리시와 함께 있으면 이성을 잃게 된다. ...

그녀의 연한 보라색 눈동자가 케이를 가만히 응시하면, 이름을 붙이기 힘든 감정이 아랫배부터 차올라 명치를 콱 짓눌렀다. ...

그저 와인을 마시며 오늘의 일로 농담이나 주고받으려고 들어간 건데, 케이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하는 리시의 얼굴이나 보려고 들어간 건데. ...

‘이쪽이 더 당황해버렸군.’ ...

“대장.” ...

뒤에서 들려오는 월라스의 목소리에, 케이는 총 맞은 사람처럼 놀라서 휙 돌아섰다. 월라스와 제이미가 나란히 서서 수상하다는 듯 이쪽을 보고 있었다. ...

“왜 형수님 방 앞에서 그러고 있어요? 형수님이 못 들어오게…… 어? 대장, 얼굴이 왜 그렇게 벌게요? 어디 아파요?” ...

월라스가 걱정스러운 듯 성큼성큼 걸어왔다. ...

케이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한 손을 앞으로 뻗었다. ...

“멈춰, 월라스.” ...

“왜요? 전염병이라도 걸렸어요? 얼굴, 너무 빨간데. 그렇지, 제이미?” ...

제이미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케이를 보고 있었다. 케이가 왜 저러는지 알 것 같다는 눈빛이었다. ...

케이는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

“가라. 얘기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

“왜 그래요, 대장? 광견병 같은 거 걸렸어요?” ...

“……월라스…….” ...

“그럼 큰일이잖아요. 그거 걸리면 답이 없다던데. 저번에 에오르트 어느 마을인가? 거기서 광견병 걸린 개한테 물린 사람이 미쳐 발광했다더라고요. 아, 그러고 보니 광견병 걸리면 물을 무서워한다는 얘기가 있던데…… 물 좀 뿌려볼까, 제이미?” ...

케이는 월라스를 한 대 때릴지, 못 들은 척 서재로 들어갈지 고민했다. ...

“괜찮아요, 월라스. 대장은 그냥 성인 남자라면 누구나 겪는, 격동의 시기에 들어간 것뿐이지요.” ...

역시 제이미는 눈치챘다. ...

“격동? 뭔 격동?” ...

월라스가 못 알아듣고 제이미와 케이를 번갈아 봤다. ...

제이미가 월라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

“대장은 말이죠. 아이리스 님이…….” ...

“제이미. 그만하고.” ...

케이가 제이미의 말을 끊고 복도 반대쪽을 가리켰다. ...

입 닥치고 꺼지라는 의미였고, 제이미는 잘 알아들었다. ...

싱긋 미소를 지은 제이미가 월라스에게 속삭였다. ...

“저쪽에 가서 자세하게 설명해주죠.” ...

“제이미…….” ...

“아, 대장. 청첩장 건으로 노백작님께서 연락하셨어요. 무척이나 언짢으신 것 같던데…… 대장이 직접 연락해보시는 게 좋겠지요?” ...

“알겠다.” ...

제이미가 월라스와 함께 복도 반대쪽으로 걸어가며, 뭐라고 속삭였다. ...

아마도 케이의 상태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리라. ...

케이는 골치가 아팠다. ...

‘그림자’라고 부르는 최측근들에게 케이는 위엄 있는 대장이라기보다는 믿을 만한 동료였다. ...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케이 본인도 모를 수상쩍은 감정을 다 드러내고 싶은 건 아니었다. ...

‘정신 좀 차려야겠어.’ ...

케이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통신실로 향했다. ...

십수 년 전, 마법사와 기계공학자들이 통신기를 발명했다. ...

번호만 알면 여기서 저기로 쉽게 연락할 수 있는 기계였다. ...

악용할 수 있다는 이유로 아무나 소유할 수는 없고, 도시나 큰 마을의 관청 소속 통신소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

단, 나라에서 허가를 내주면 개인도 가질 수 있는데, 조건이 까다로워서 통신기를 가진 개인은 몇 명 되지 않았다. ...

당연히 성유물의 수호자인 그린 가문은 쉽게 허가를 받아 통신기를 갖고 있었다. ...

통신실에 들어간 케이는 커다란 통신기 앞에 서서, 그린 노백작의 저택으로 연결되는 버튼을 눌렀다. ...

이윽고 노백작의 집사와 연결됐고, 집사가 와이번 그린 노백작을 불러왔다. ...

“아버지.” ...

[케이브란트 그린.] ...

와이번이 낮은 음성으로 케이의 이름을 정식으로 읊조렸다. ...

무척 화가 났다는 의미다. ...

“사정이 있습니다.” ...

[나랑 네 엄마는 신문에서 아무리 떠들어대도 믿지 않았다. 왜냐. 우리는 신문쪼가리보다 널 더 믿으니까.] ...

“압니다. 하지만 사정이…….” ...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지? 듣자 하니 위틀로 공작이 제 딸은 아무나 보여주기 싫다며 꽁꽁 싸매고 있었다 하더구나.] ...

[케이, 엄마다.] ...

어머니인 헤레이나 그린이 와이번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

“어머니…….” ...

[사내가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 이해한다. 그래, 영웅은 미인을 좋아한다고 하지. 하지만 케이, 엄마는 영 마음이 그렇구나. 다 큰 자식이 자기 결혼할 여자를 스스로 정하고, 부모님에게 말도 없이 결혼한 거? 그래서 우리가 제일 늦게 결혼 소식을 알게 된 거? 그거 다 이해해.] ...

이해하지 못한다는 목소리였다. ...

[하지만 케이. 위틀로 공작은 욕심이 많은 자야. 그런 자가 첫째 딸인 브리트니는 일찌감치 사교계에 데뷔시켰으면서, 둘째이자 그렇게 눈부시게 예쁘다는 아이리스를 감춰둔 이유가 뭐겠니?] ...

“그건…….” ...

[팔아먹기 위해서야. 예쁘장한 브리트니를 보면서, 다들 궁금해하게 했겠지. 저 예쁜 브리트니도 내보내는데, 아깝다고 못 내보내는 아이리스는 대체 얼마나 예쁘기에. 그런 기대감을 품게 만들기 위해서겠지.] ...

케이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일찍 모든 걸 내려놓고 조용한 시골에 가서 지내는 부모님이 이토록 예리하게 정세를 살피고 있을 줄은 몰랐다. ...

“어머니, 그것도 사정이 있습니다.” ...

[뭘 주고 그 아이를 데려온 거니?] ...

노백작 내외는 케이에게 변명할 틈을 주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없던 일이었다. ...

케이는 자신의 부모님이 얼마나 분노했는지 알 수 있었다. ...

“아무것도요.” ...

[이제는 여자 때문에 엄마에게 거짓말까지 하는구나. 그 아이를 데려오던 날, 그린 소유의 광산 하나가 위틀로 쪽으로 넘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

“대체 그 소식통은 누굽니까? 그런 좋은 소식통이 있으면 저 좀 주세요.” ...

[지금 너랑 농담하는 거 아니다, 케이브란트 그린. 나는 네가 미인을 좋아하고, 멋대로 결혼하려고 하는 거, 다 이해해. 하지만 뭔가를 주고 여성을 사 오는 건, 옳지 못한 짓이야. 레이디 위틀로도 네 뜻에 동의한 거니?] ...

케이는 한숨 놓았다. ...

부모님이 화난 이유가 단순히 케이가 멋대로 결혼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부모님은 싫어하는 리시를 억지로 사 온 걸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

“레이디 위틀로가 아니라 그린 백작 부인입니다, 어머니. 결혼식은 안 했어도……” ...

[내가 그런 걸 질문한 게 아닐 텐데.] ...

“리시, 아이리스도 동의했습니다.” ...

잠시 대화가 끊겼다. ...

하지만 유독 상태가 좋은 통신기는, 저 너머의 노백작 내외의 대화를 고스란히 전해줬다. ...

[여보, 어떡해요? 우리 케이가 거짓말이 늘었어요.] ...

[다 내가 잘못 키운 탓이오. 울지 말아요, 헤라.] ...

[하지만…… 우리 아들이 여자를 돈 주고 사 오는 놈으로 커서…….] ...

케이는 한숨을 삼켰다. ...

물론 광산 하나를 주고 데려오긴 했다. 하지만 그건 리시의 뜻이었다. ...

그렇다고 부모님에게 “리시가 광산을 주고 자기를 사랬어요.”라며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차라리 자신이 돈 주고 여자를 사 온 나쁜 놈이 되는 게 나았다. ...

이윽고 와이번이 말했다. ...

[케이브란트 그린. 오늘 출발하마. 제일 빠른 마차를 타고 갈 테니, 2, 3일 후면 도착할 거다.] ...

헤레이나가 덧붙였다. ...

[만약 레이디 위틀로가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한 거라면, 넌 우리 가문에서 첫 번째 이혼남이 될 거야.] ...

 

+++

브리트니는 정원 온실에서 티파티를 열었다. ...

케이가 리시를 데려가는 대가로 준 베노트의 금광에서 상당량의 금이 나오고 있었기에, 정원과 온실을 새로 꾸몄고, 그걸 다른 영애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

“그래도 다행이네요. 그린 백작 부인이 오해를 풀어서. 브리트니 양도 한숨 돌렸겠어요.” ...

그 말을 한 영애는 딱히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브리트니도 마찬가지였지만, 애써 미소지었다. ...

“그러게. 정말 다행이지. 아이리스가 누명을 써서 울고 있을까 봐 잠도 제대로 못 잤거든.” ...

“어쩜. 동생 생각하는 마음이 깊기도 하셔라.” ...

깊긴 깊었다. ...

이 자리의 영애들이 아는 쪽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

질레트라는 여자가 한 짓이 드러나면서, 그동안 리시를 욕하고 조롱하던 신문사들이 황급히 태도를 바꿨다. ...

그들은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자, 성유물의 수호자인 그린 가문의 아이리스를 욕보였다. ...

진짜도 아닌 일로 귀족 부인의 명예를 더럽힌 일은, 큰 벌을 받아 마땅했다. ...

자칫 잘못하면 신문사가 폐업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

하지만 리시는 신문사를 상대로는 아무 소송도 걸지 않았고, 한 번쯤 리시를 욕한 적 있는 신문사들은 너도나도 앞다퉈 리시의 넓은 아량과 아름다움을 칭찬하는 기사를 냈다. ...

“요새 기자들은 그린 백작 부인을 칭찬하느라 몸이 달았던데…… 나는 생각이 좀 달라요. 남들 앞에서 그렇게 질레트 양을 몰아붙이다니. 그건 그냥 목메고 죽으라는 소리 아니겠어요?” ...

어느 영애의 말에, 브리트니는 박수를 쳐주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

“그런 의미는 아니었을 거예요. 물론 아이리스가 자기한테 잘못한 사람을 끝까지 용서하지 못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설마 목메고 죽으라고 그랬겠어요? 나름대로 용서한 거겠죠.” ...

브리트니가 두둔 아닌 두둔을 했다. ...

“글쎄요. 듣자 하니 그 여자가 그린 백작님의 밤 시중을 들던 여자라는 얘기가 있던데…… 질투 나서 그런 거 아니겠어요?” ...

“물론 질투는 좀 했겠죠. 하지만…….” ...

브리트니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난처한 척 입술을 달싹거렸다. ...

얘기를 꺼낸 영애가 부채를 살랑살랑 부쳤다. ...

“미안해요. 브리트니 양을 몰아붙이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

브리트니의 시녀가 찾아온 건, 그때였다. ...

시녀는 브리트니의 옆에 조용히 서서, 봉투를 하나 건넸다. ...

“이게 뭐지?” ...

금띠를 두른 하얀 봉투 중간에는 멋진 글씨체로 [청첩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

“누가 결혼하나?” ...

영애들을 둘러봤지만 다들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

브리트니는 봉투 안에서 청첩장을 꺼냈다. ...

진짜 금을 가장자리에 두른, 호화로우면서도 우아한 청첩장이었다. ...

청첩장을 확인한 브리트니의 눈이 커졌다. ...

[케이브란트 그린과 아이리스 위틀로의 결혼식에 초대합니다.] ...

시작은 그러했다. ...

“누구 결혼이래?” ...

옆에 있던 캐트리나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

“그린 백작이랑…… 아이리스…….” ...

“어머나. 그 애, 몸 좀 달았나 보네.” ...

캐트리나가 그렇게 말하며 귀족 영애들을 돌아봤다. ...

귀족 영애들이 조롱 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자기를 둘러싸고 어떤 소문이 도는지 알았나 보네요. 필시 그린 백작님을 닦달해서 결혼식을 열자고 했겠죠.” ...

“어쩜, 그렇게 창피한 짓을 하지? 난 죽어도 나 싫다는 사람한테 억지로 결혼하자는 말은 못 할 것 같아요.” ...

“그러게 말이에요. 사교계에 나와본 적이 없으니, 레이디로서의 기품을 알기나 하겠어요?” ...

브리트니는 평소라면 그들의 말을 즐거워하며 들었을 것이다. ...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목소리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

청첩장 제일 말미에 쓰인 이름 때문이었다. ...

브리트니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듯, 캐트리나가 조심스럽게 청첩장을 넘겨다 봤다. ...

뚱한 표정으로 청첩장을 보던 캐트리나의 눈이, 브리트니가 읽고 있는 그곳에서 멈췄다. ...

“이게 뭐야……?” ...

“왜 그래요?” ...

“뭐죠?” ...

영애들이 관심을 보였다. ...

캐트리나는 저도 모르게 브리트니의 손에서 청첩장을 빼앗듯 가져와 흔들면서 말했다. ...

“파티 주최자가…… 넬라니커스 제널 백작 부인이에요!” ...

(25) 내 남편의 부모님 ...

리시는 침대에 앉아, 전에 읽던 역사서를 계속해서 읽었다. ...

‘1차 수인의 난’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베네데르템은 포기하지 않았다. 간신히 살아남은 그는 음지에 숨어, 조용히 자신을 도울 사람을 모았다. ...

베네데르템은 말했다. ...

“수인 역시 인간이며, 짐승으로 변신하는 것은, 신의 저주가 아닌 타고난 재능일 뿐이다. 교황은 신이 내린 선물을 자신이 받지 못한 열등감으로 수인을 박해하는 것이다.” ...

그리고 또 베네데르템은 말했다. ...

“신의 선물은 수인만이 아닌 마법사 역시 받았다. 처음에는 수인. 수인이 멸종하면 교황의 시선은 어디로 향할까? 교황 역시 마법적 재능이 없으니, 마법사의 멸망 역시 예정된 미래일 것이다.” ...

마법사 대부분은 코웃음 쳤으나, 믿음 없는 마법사들이 베네데르템의 뜻에 동조했다. ...

그런 삿된 거짓말로 재능 있는 자들을 선동한 베네데르템은, ‘2차 수인의 난’을 일으켰다. ...

동쪽의 아마스 해가 핏빛으로 물든, 죽음의 전쟁이었다. ...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리시는 책을 접어서, 침대 옆 협탁에 내려놨다. ...

“계속 읽어도 돼요, 리시.” ...

케이가 그렇게 말하며 옷장 앞에서 옷을 벗었다. ...

그의 탄탄한 등 근육이 드러나자, 리시는 얼른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

가운으로 갈아입은 그가 성큼성큼 걸어와서 리시의 옆에 앉았다. ...

그는 자연스럽게 리시의 머리카락 끝을 잡아올려 입을 맞췄다. ...

“향이 좋군요.” ...

“덕분에요.” ...

왜인지 케이는 조금 난처한 표정이었다. ...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꺼내기 어려운 듯,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

“나한테 할 말 있어요?” ...

“곤란한 일이 생겼어요.” ...

기다렸다는 듯, 케이가 말했다. ...

“말해봐요.” ...

“부모님이 화가 잔뜩 나셨어요.” ...

척추에 찬 기운이 싹 훑고 내려갔다. 리시는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

“당연히 그러실 거예요. 두 분께 말도 없이 결혼했으니.” ...

“터치하지도 않으시고, 내가 하는 일에 관심도 없어 보이셔서, 이렇게까지 노하실 줄은 몰랐어요. 아무래도 이틀 후쯤 이곳에 오실 것 같아요.” ...

“그렇군요.” ...

“여자를 만나본 적도, 두 분께 소개해드린 적도 없어서, 두 분이 어떻게 나오실지 예측할 수가 없어요.” ...

리시는 그를 빤히 응시했다. ...

케이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

“왜 그렇게 봐요?” ...

“정말로 여자를 만나본 적이 없어요?” ...

“없어요. 왜 그런 거로 거짓말을 하겠어요?” ...

“하지만…….” ...

리시는 저도 모르게 그의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부드러운 뺨과 수염 때문에 까끌한 턱을 가만히 쓸면서 말했다. ...

“이렇게 잘생겼는데.” ...

케이의 눈이 커졌다. 그는 그대로 리시를 응시하다가, 리시의 손목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

“내가 잘생겼어요?” ...

“아무도 그런 말을 안 해주던가요?” ...

“아니. 당신 눈에도 내가 잘생겨 보여요?” ...

리시는 어이가 없었다. ...

당연히 잘생겨 보이지. 이렇게나 완벽한데. ...

말문이 막혀서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그의 귓불이 빨개 보이는 건, 아마도 착각일 거라고, 리시는 생각했다. ...

다시 시선을 돌려 눈을 맞춘 케이가 말했다. ...

“키스하고 싶어요. 키스해도 돼요?” ...

어딘지 모르게 열띤 눈동자와 음성이 리시의 청각뿐 아니라 촉각까지도 자극했다. ...

민망함에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며 대꾸했다. ...

“지금까지는 묻지도 않고 했으…….” ...

마지막 말은 그가 삼켰다. ...

그의 입술이 약간은 거칠다 싶게 리시를 탐했다. ...

그의 무게가 리시를 뒤로 넘어뜨리고, 그의 체취가 리시를 취하게 했다.   침대 위에서 이불과 그와 리시가 뒤엉켰다. ...

격렬한 입맞춤에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도, 케이가 왜 갑자기 이렇게 흥분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설마…… 잘생겼다고 해서? 아니겠지. 그런 말은 자주 들었을 텐데…….’ ...

입맞춤이 길어질수록 숨이 가빠졌다. 터질 것처럼 뛰는 심장박동이 거슬리지 않는 건, 그의 심장박동과 겹쳐졌기 때문이었다. 밀착한 가슴의 울림이 내 것인지, 그의 것인지조차 가늠할 수가 없었다. ...

살결이 부딪치는 느낌이 아찔했다. 그의 등에 손톱을 박아넣으며 잘은 숨을 흘렸다. ...

그의 근육이 단단하게 경직되는 게 느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입술을 뗀 그가 리시를 꽉 끌어안았다. ...

그의 가슴에 얼굴이 짓눌려 숨을 쉬기 힘들어졌지만, 리시는 이토록 거세게 안기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그의 품이 안전하게 느껴졌다. ...

“나는 최대한 막을 거지만, 어쩌면 내 부모님 때문에 당신이 상처받는 일이 생길지도 몰라요, 리시.” ...

갑자기 원래의 주제로 돌아갔다. ...

리시는 이런 와중에도 담담히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는 케이가 신기하기만 했다. ...

케이가 얼마나 힘겹게 이성을 붙들고 있는지, 리시는 전혀 몰랐다. ...

“케이. 난 유리로 만든 꽃이 아니에요. 말 몇 마디, 손찌검 몇 번이 날 아프게 하지는 못해요.” ...

리시가 속삭이듯 뱉은 말에, 케이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

케이는 리시의 정수리에 얼굴을 묻었다. ...

“그러면 안 돼요, 리시. 나는 내 아내가 그런 것들에 익숙해지는 게 싫어요.” ...

“하지만 익숙한걸.” ...

“새살은 돋아요, 리시.” ...

그의 손바닥이 리시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

“새로 돋은 그 부드러운 살에는, 아주 작은 상처 하나 나지 않게 할 거예요.” ...

말뿐이라도 좋았다. ...

그래서 리시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키득거렸다. ...

“내가 연약해져서 징징 울기나 하는 레이디가 되길 바라요?” ...

케이에게는 왜인지 지금 리시의 웃음소리가 울음처럼 들렸다. ...

그녀에게 자신의 온기를 전부 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

“원한다면요. 당신이 원한다면, 리시.” ...

 

+++

브리트니는 청첩장을 구겨서 집어던졌다가, 다시 주워와서 읽기를 반복했다. ...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주최자 명단 제일 위에 있는 ‘넬라커니스 제널 백작 부인’이라는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

그 아래에 있는 ‘제레시엔 그린’이라는 이름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

넬라커니스 제널 백작 부인. ...

황후도 친해지고 싶어 할 정도로 유명한 사교계의 여신. ...

그녀가 아이리스의 결혼식 주최자라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

‘어째서? 왜 그런 애 결혼식을?’ ...

넬라커니스 제널 백작 부인의 속을 알 수 없었다. ...

그녀는 딱히 그린 가문에 잘 보이지 않아도, 그녀 자체의 명성만으로 빛나는 여자였다. 그런데 어째서 안 좋은 소문으로 가득한 아이리스의 결혼식에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걸까? ...

브리트니는 다시 청첩장을 집어던진 후, 씩씩거리며 데니스 위틀로 공작부인의 방으로 향했다. 데니스는 유명 디자이너를 불러, 그의 디자인화가 실린 카탈로그를 보는 중이었다. ...

데니스가 눈짓하자, 디자이너가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

“엄마. 나, 아이리스를 만나러 가야겠어.” ...

“뭐?” ...

“아이리스 청첩장 받았지? 어차피 결혼식에 갈 텐데, 좀 일찍 가려고.” ...

브리트니는 그린 백작 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아이리스가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

만약 케이브란트가 아이리스에게 속아서 귀하게 대접해주고 있다면, 그가 정신을 차리게 도와줘야만 했다. ...

결혼식을 올린 후에는 늦는다. ...

“거길 왜 일찍 가? 뭐 좋은 일이라고.” ...

“좋은 일이 아니니까 먼저 가서 확인해야지. 걔가 그린 백작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도 알아보고.” ...

“브린. 괜히 건드릴 것 없어. 그린 백작이 주고 간 금광 덕분에 요새 살맛 나잖니. 그러다가 그린 백작이 결혼을 취소한다면서 금광을 돌려달라고 하면 어쩔 거야?” ...

“설마 그런 치사한 짓을 하겠어? 오히려 나중에 가서 아이리스가 얼마나 헤프고 멍청한지 알게 되면, 우리 탓을 할 수도 있다고.” ...

“흐음.” ...

브리트니는 마뜩잖아 보이는 데니스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

“그러니까 엄마. 얼른 가자. 우린 아이리스 가족이니까, 며칠 일찍 간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도 없을 거 아냐? 이번 기회에 그린 백작 저택 구경도 좀 하고.” ...

 

+++

그린 노백작 내외가 그린 백작 저에 도착했다. ...

한때 이 저택의 안주인이었던 헤레이나 그린은 매서운 눈으로 주위를 살펴봤다. ...

헤레이나가 이곳에서 살 때와 달라진 점은 거의 없었다. ...

다음에 헤레이나의 시선이 향한 곳은, 자신들을 마중 나온 리시와 케이에게였다. ...

처음에 눈에 들어온 건, 당연히 덩치가 큰 케이였다. ...

케이는 난감한 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는데, 헤레이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

부모님을 앞에 두고 저런 미소를 짓다니. ...

뭔가 잘못해도 한참 잘못한 일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

그다음에 헤레이나는 리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리시는 두 손을 앞에 가지런히 모은, 우아하지만 정중한 자세로 노백작 내외를 바라보고 있었다. ...

표정 없는 얼굴은 마치 인형, 아니, 신이 공들여 만든 조각상 같았다. ...

반만 묶어서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연분홍빛으로 보이는 은발, 그린 듯한 눈썹 아래에 자리 잡은 큰 눈과 연보라색 눈동자. 오뚝한 코와 잘 어울리는 도톰하고 붉은 입술. 자그마한 얼굴에서 곱게 떨어지는 목선과 부드럽게 이어지는 어깨선. ...

수수한 드레스를 입었음에도, 빛이 발했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더니…….’ ...

과연 그런 칭호가 붙을 만했다. ...

외모만큼은 그 어느 한구석도 지적할 곳이 없었다. 궂은일 한번 해보지 않고, 귀한 대우를 받으며 자란 여인처럼 보였다. ...

어쩌면 위틀로 공작이 정말로 막내딸을 너무 아껴서, 세상에 내보이지 않은 게 진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인사를 나눈 후, 그들은 본채로 이동했다. ...

응접실 앞에서, 헤레이나는 케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

“우리는 레이디 위틀로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구나. 너는 가서 할 일이나 하렴.” ...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 ...

케이가 단호하게 거절하며 리시의 손을 잡았다. ...

헤레이나는 손이 잡힌 리시가 어떤 기분일지 궁금해서 표정을 살폈지만, 그녀의 조각 같은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

“케이브란트 그린. 부모에게 말도 없이 결혼했으면서, 이 정도도 양보 못 하겠다는 거니?” ...

“말씀도 드리지 않고 결혼한 것은, 제 잘못입니다. 하지만 이건 다른 문제입니다. 어머니가 제 아내를 레이디 위틀로라고 부르시는데, 제가 어떻게 제 아내만 들여보내겠습니까?” ...

헤레이나는 화가 치밀었다. ...

케이가 금광을 주고 억지로 리시를 데려왔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

리시에게 푹 빠진 듯한 케이와 달리, 리시의 기분이 어떤지는 도통 읽어낼 수가 없었다. ...

“케이브란트 그린.” ...

“여보.” ...

헤레이나의 노기 띤 음성을, 와이번이 막았다. ...

아까부터 조용히 리시를 관찰하던 와이번은, 헤레이나의 팔에 가볍게 손을 얹으며 말했다. ...

“케이 말에도 일리가 있으니, 같이 들어가는 게 좋겠소.” ...

“하지만…….” ...

항변하려는 헤레이나를 보며, 와이번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

헤레이나는 리시가 와이번의 마음에 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

단지 저 예쁜 외모 때문은 아닐 것이다. ...

헤레이나는 자신의 남편이 상대를 외모로 판단하는 자가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다. ...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든 거지?’ ...

헤레이나도 리시가 싫은 건 아니었다. 그저 케이가 리시를 억지로 사 왔을지도 모른다는, 이 상황이 싫을 뿐. ...

와이번이 먼저 응접실로 들어갔고, 헤레이나는 그 뒤를 따라서 들어갔다. ...

응접실 소파에 그린 노백작 내외와 그린 백작 내외가 마주 보고 앉았다. ...

“레이디 위틀로.” ...

헤레이나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

그런 헤레이나를 가만히 응시하던 리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

“그린 노백작 부인. 아이리스라고 불러주세요. 리시라고 부르셔도 되고요.” ...

정중하지만 단호한 말투였다. ...

헤레이나는 리시가 그저 온실 속에서 귀하게 자란 꽃이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

리시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

“그리고 편하게 대해주세요.” ...

그 미소가 어찌나 해사하고 상냥한지, 헤레이나는 리시 같은 딸이 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

제레시엔 그린은 너무 우악스러우니까. ...

(26) 신의 앞이라 할지라도. ...

  리시는 한껏 긴장한 상태였다. ...

지난 삶, 리시가 겪은 시부모는 정말이지 끔찍했다. ...

리시가 숨을 쉬는 것조차 싫다는 듯, 리시를 멸시하고 학대했다. ...

그린 노백작 내외가 후치스 일가와 같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지만,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위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하지만 리시는 온 힘을 다해 표정을 갈무리하고 그린 노백작 내외의 시선을 받아냈다. ...

“그래, 리시. 편하게 대하마.” ...

헤레이나의 음성은 차가웠다. ...

“이제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가 널 불쾌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은 미리 사과하마.” ...

“어머니.” ...

헤레이나가 눈치도 없이 끼어든 케이에게 한소리 하려는데, 리시가 케이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

“케이.” ...

리시가 지그시 노려보자, 케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

헤레이나는 내심 놀랐다. ...

‘우리 아들을 저렇게 조련하다니.’ ...

케이는 고집이 쇠심줄 같아서, 부모 말에 잘 따르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제멋대로 행동하는 아들이었다. ...

“케이브란트와는 어떻게 만난 거니?” ...

“제가 그린 백작님을 찾아왔습니다. 제가 그린 백작님에게 청혼했고요.” ...

상상도 못 한 대답에 헤레이나뿐 아니라, 와이번과 케이의 눈까지 휘둥그레졌다. ...

“리시!” ...

케이와는 얘기가 안 된 일인지, 케이가 리시의 손을 잡았다. ...

리시는 조심스럽게 그 손을 빼냈다. ...

리시의 시선은 여전히 헤레이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

“네가 먼저…… 우리 아들을 찾아와서 청혼했다고?” ...

“네.” ...

이번에도 리시는 담담히 대답했다. ...

헤레이나는 이 대화의 방향을 종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

레이디가 먼저 청혼하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고, 설령 있다고 해도 대외적으로는 남자 쪽에서 먼저 청혼을 한 것처럼 말하곤 했다. ...

레이디가 사내에게 들러붙는 건, 레이디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

하지만 이런 순간에도 리시의 품격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고고하고 우아한 빛을 흘리고 있었다. ...

정신 차린 헤레이나가 간신히 물었다. ...

“이유는?” ...

“도망치고 싶어서요. 저는 위틀로 공작가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

위틀로 공작이 리시로 장사를 하려는 걸지도 모른다는 예상은 했었다. ...

하지만 그만큼 귀하게 자랐을 줄 알았는데, 왜 도망치고 싶었다는 걸까? ...

헤레이나는 쉽게 건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어떤 식으로 돌려서 질문해야 할지 고민했다. ...

하지도 않아도 될 고민이었다. 리시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

“저는 사생아입니다. 위틀로 공작과 하녀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

순간,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늘한 공기가 응접실을 채웠다. ...

다들 숨조차 쉬지 못한 채, 상상도 못 한 진실을 담담하게 내뱉은 리시의 입술을 응시했다. ...

이건 리시가 던진 승부수였다. ...

‘내가 공작의 사생아라는 사실은 언젠가 내 발목을 잡을 거야. 그렇다면 내 쪽에서 먼저 진실을 밝히는 편이 나아.’ ...

그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

설령 케이가 실망해서 리시를 내쫓더라도. ...

나중에 가서 사생아라는 사실이 밝혀져,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

헤레이나 역시 리시의 의도를 간파했다. ...

‘영리하구나.’ ...

헤레이나는 영리한 아이를 좋아했다. ...

“위틀로 공작은 제 어머니를 죽이고, 저만 살려뒀습니다. 저를 잘 키워서 팔아치우기 위해서요. 하지만 위틀로 공작 내외는 아이를 키우는 데는 소질이 없었죠. 너무 오냐오냐하거나, 너무 학대하거나.” ...

리시의 얼굴에 잠시 쓴웃음이 번졌다가 사라졌다. ...

“심한 학대를 당했어요. 맞고, 경멸당하고, 조롱당했죠. 저는 하녀처럼 일해야만 했고, 하녀들 역시 절 공녀로 대우해주지 않았습니다. 하녀 모두의 입을 막을 수가 없어서, 종종 저에 관한 이야기가 밖에도 흘러나가는 듯했지만…….” ...

리시는 한숨을 삼켰다. ...

“이야기를 흘린 자도, 그 이야기를 들은 자도, 죽었어요. 저에 대한 진실은 잠시 피어올랐다가 사라졌고, 가짜 소문만이 무성해졌죠. 위틀로 공작가의 꽃. 위틀로 공작이 더없이 아끼는 막내딸.” ...

리시는 잠시 말을 멈추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

머리칼과 같은 색의 풍성한 속눈썹이, 리시의 눈동자에 담긴 감정을 감췄다. ...

“위틀로 공작은 후치스 자작에게 금광을 받고 절 넘겨주기로 했습니다. 저는 싫었어요. 그래서 그린 백작님을 찾아왔고요.” ...

“왜…… 하필이면?” ...

“그린 백작님이라면 절 도와주실 것 같아서요.” ...

“왜 그런 생각을 했지? 케이는 여자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애인데.” ...

“제가 백작님의…….” ...

“편지를 썼습니다.” ...

케이가 리시의 말을 끊었다. ...

케이는 리시가 솔직하게 ‘백작의 약점을 안다!’라고 말하리라는 걸 눈치챘다. ...

그것까지는 안 된다. 부모님은 그 부분에 몹시 예민했다. ...

“제가 몇 번이나 리시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위틀로 공작의 약점을 알려달라고.” ...

다행히 부모님은 케이에게 입 다물고 있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

“위틀로 공작의 약점?” ...

“네. 브리트니 위틀로가 저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더군요. 제가 춤을 청했고, 그녀에게 반했다고. 성가셔서 약간 장난을 쳐줄 계획이었습니다.” ...

헤레이나가 미간을 좁혔다. ...

와이번은 흐음, 하며 재미있다는 듯 소파에 등을 기댔다. ...

“저는 그 집안의 정보가 필요했고, 겸사겸사 그 집안의 꽃이라고 불리는 아이리스라는 영애와 교류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보냈죠.” ...

“그러니?” ...

헤레이나가 전혀 믿지 않는 표정으로 리시를 돌아봤다. ...

입술을 살짝 벌리고 케이를 보던 리시가,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

“네.” ...

“내가 그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하니?” ...

“아니요.” ...

리시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

헤레이나는 그 모습에 그만 미소를 짓고 말았다. ...

리시가 부모님에게 혼나는 어린 여자아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

“묻지 않으마. 아무리 자식 일이라도, 남녀 관계에 대해 깊이 캐묻는 것은 실례겠지. 하나, 이것만은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구나. 이 집은, 위틀로 공작가보다 살기 괜찮니?” ...

그 질문에 처음으로 리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연보라색 눈동자가 일렁, 물결을 만들어냈다가 잠잠히 가라앉았다. ...

리시는 미소 지었지만, 헤레이나는 리시가 우는 것처럼 보였다. ...

“저는 살면서.” ...

리시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리시도 그걸 깨달았는지 잠시 말을 멈췄다. ...

살짝 숨을 들이마신 리시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이렇게나 행복한 적이 처음이에요.” ...

케이가 리시의 손을 꽉 잡았다. ...

“앞으로 더 행복해질 텐데.” ...

리시가 케이를 마주 봤다. ...

“기대되네요.” ...

서로를 보며 은은한 미소를 짓는 둘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연인이었다. ...

그제야 헤레이나는 안도했다. 아들이 억지로 레이디를 데려와 부인 자리에 앉힌 게 아니었다. ...

“그래, 잘 알겠다. 그런 거면 됐지. 더는 너희 결혼에 관해 언급하지 않으마.” ...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

“그건 네가 죄송할 일이 아니지.” ...

헤레이나가 케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

케이가 씩 웃었다. ...

“죄송해요, 어머니. 아버지.” ...

“우리는 좀 더 이따가 나가마. 너희 먼저 나가렴.” ...

“네, 그럼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그린 노백작 부인.” ...

“리시.” ...

“네?” ...

“그린 노백작 부인이 아니다.” ...

“그럼……?” ...

“혼인신고는 벌써 했다던데, 어머니라고 불러도 되지 않겠니?” ...

눈을 크게 뜬 리시가 곧 환하게 웃었다. ...

“네, 어머니.” ...

 

리시와 케이가 나가자마자, 헤레이나는 자신의 남편을 돌아봤다. ...

“당신, 리시를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 한 이유가 뭐예요?” ...

“리시는 누가 봐도 청초하고 가녀린 레이디 같아 보이는데…….” ...

와이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전사의 눈빛을 하고 있더군.” ...

 

+++

케이와 리시는 응접실에서 나와 정원으로 향했다. ...

탁 트인 곳으로 나가서야, 리시는 편하게 숨 쉴 수 있었다. ...

“너무 긴장했어요.” ...

“그렇게 보이지 않던걸.” ...

“미안해요.” ...

“뭐가요?” ...

“내가 사생아라는 걸 숨겨서.” ...

“예상은 하고 있었어요.” ...

“그래요?” ...

케이가 리시의 머리카락 끝을 살며시 잡아 검지에 감았다. 그리고 그 감긴 부분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

“이렇게나 예쁜데 학대를 당했다면,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

예쁘다는 말은 참 많이도 들었다. ...

하지만 케이가 이렇게 똑바로 응시하며 예쁘다는 말을 해줄 때는, 심장 부근이 간질거리며 케이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

리시는 슬그머니 시선을 옆으로 피하며 말했다. ...

“당신의 부모님이 절 받아주셔서 다행이에요.” ...

“내 부모님이 아니에요, 리시. 이제 당신의 부모님이기도 해요.” ...

“하지만…….” ...

“믿어요. 당신에게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한 순간부터, 어머니는 당신을 우리 가족으로 받아들인 거니까.” ...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

지난 삶, 알포드의 어머니 역시 처음에는 그런 말을 했었다. ...

-이제부터 어머니라고 부르렴. 나도 널 딸처럼 대할 테니. ...

위틀로 공작가에서와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

위틀로 공작이 브리트니를 아끼듯, 알포드의 어머니 역시 자신을 아껴줄 거라는, 바보 같은 기대를 품었었다. ...

하지만 상황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

아니, 오히려 더 괴로워졌다. ...

“리시?” ...

케이의 부름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

케이의 청회색 눈동자에 담긴 걱정이, 리시의 답답한 가슴을 부드럽게 풀어줬다. ...

“당신이 가끔 무척이나 괴로운 표정을 짓는 거 알아요?” ...

“그런가요?” ...

조심해야겠다. ...

“내가 무엇을 해야 내 아내가 괴로워하지 않을까?” ...

“케이, 난 괴롭지 않아요.” ...

케이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

“어떻게 해야 내 아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을까?” ...

“난 거짓말쟁이 아니에요, 케이. 정말 괴롭지 않아요.” ...

그저 지난 삶의 기억이 남아 있어서, 때때로 이 가슴을 짓눌러서, 그게 조금 싫을 뿐. 케이와의 생활에는 더없이 만족했다. ...

“아, 좋은 게 떠올랐어요.” ...

케이가 갑자기 리시를 꽉 끌어안았다. ...

숨이 막힐 정도로 단단한 포옹. ...

케이에게 이런 식으로 안길 때면,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새로운 긴장이 찾아왔다. ...

검고 무거운 긴장과는 완전히 다른, 분홍빛의 달콤한 긴장감. ...

“내가 수인이 평범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돼서 괴로워할 때. 내가 울적해하면 가족들이 이런 식으로 날 안아주곤 했죠. 그러면 기분이 나아지더군요.” ...

“나아지는 정도가 아닌데요.” ...

케이의 가슴에 얼굴이 파묻힌 리시가 웅얼웅얼 중얼거렸다. ...

케이가 웃으며 리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좋아졌어요?” ...

“무척이요.” ...

“다행이에요. 그럼 리시, 당신이 괴로워 보일 때마다 이렇게 안아줄게요.” ...

“어디서든?” ...

“그 언제든, 그 어떤 곳에서든.” ...

“황제 앞에서도?” ...

케이가 작게 웃으며 리시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

머리칼을 파고드는 그의 입김이 따뜻하고 야릇했다. 그가 입술을 댄 채 속삭였다. ...

“신의 앞이라 할지라도.” ...

 

+++

위틀로 공작 가문의 마차가 저택을 나섰다. ...

목적지는 그린 백작 저택이었다. ...

(27) 나는 훔치지 않았어요. ...

리시는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는 중이었다. ...

공작의 딸임에도, 리시의 앞에서 더러운 그릇을 치워주는 사람은 없었다. ...

철들기 전부터 이렇게 살아왔기에, 리시는 이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

위틀로 공작 부부를 엄마, 아빠라고 부르는 건 손님들 앞에서만. ...

예쁜 옷을 입고 귀하게 자란 티를 내는 것 또한 손님들 앞에서만. ...

“엄마아아아!” ...

밖에서 브리트니가 징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나, 목걸이가 사라졌어!” ...

그 말을 듣는 순간, 등골이 싸하게 식으며 식은땀이 맺혔다. ...

최근 브리트니는 시녀인 에바의 조언으로, 재미있는 놀잇거리를 알게 되었다. ...

뭔가를 도둑맞은 것처럼 꾸민 후, 범인을 찾는 놀이였다. ...

그 범인은 보통 리시인 경우가 많았다. ...

“또? 아이리스 어디에 있어?” ...

데니스 위틀로 공작부인이 빽 외치는 소리에, 리시는 숨이 막혔다. ...

데니스가 매번 물건이 사라진다는 브리트니의 말을 믿는지, 믿지 않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데니스는 자기 남편이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에게, 해코지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

꽁꽁 얼어붙어 있던, 비쩍 마르고 작은 소녀는 건장한 하인에게 우악스럽게 잡혀 끌려나갔다. ...

브리트니는 데니스 옆에 딱 붙어서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

그러다가 리시와 눈이 마주치자, 무섭다는 듯 데니스의 치마를 잡고 그 뒤로 숨었다. ...

“쟤가 째려봐……. 무서워, 엄마.” ...

브리트니가 칭얼거리자, 데니스가 들고 있던 부채로 리시의 머리를 후려쳤다. ...

“남의 걸 훔친 주제에 어디서 두 눈을 똑바로 떠?” ...

리시는 아직 7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 자리에서 자신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았다. ...

자신에게 피를 반 나눠준 위틀로 공작이 이 자리에 있었다 해도, 그가 리시를 외면하리라는 걸 알았다. ...

“제가 훔치지 않았어요.” ...

그래도 리시는 항변했다. ...

아직은 리시에게 희망이 있었다. ...

이렇게 말하다 보면, 언젠가는 이 말을 믿어줄 사람이 나타나리라는 희망. ...

처연한 희망의 불꽃이 아직은 남아 있을 때였다. ...

“저는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어요.” ...

흐느끼듯 말하는 리시를, 모두가 지켜보고 있었다. ...

그중에는 동정의 눈빛을 한 사람도, 꼴 좋다는 눈빛을 한 사람도 있었다. ...

“데니스 님!” ...

그때, 브리트니의 시녀인 에바가 달려왔다. ...

에바의 손에는 목걸이가 들려 있었다. ...

“찾았어요.” ...

“어디서 찾았지?” ...

리시는 대답을 알 수 있었다. ...

“아이리스의 방에요. 베개 속에 감춰져 있었어요.” ...

리시는 처음 보는 목걸이였다. ...

“저는 그런 걸 본 적 없어요.” ...

통하지 않을 항변이라는 걸 알면서도, 리시는 외쳤다. ...

“저는 훔치지 않았어요.” ...

비쩍 마른, 작은 소녀의 목소리는 누구의 귀에도 닿지 않았다. ...

리시는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창고에 갇혔고, 지독한 어둠보다도 굶주림에 괴로워 훌쩍거리다가, 3일 후에나 풀려날 수 있었다. ...

. .

“헉!” ...

리시는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

창고 안의 곰팡내 섞인 퀴퀴한 공기. 작은 짐승이 움직이듯 바스락거리는 소리. 며칠간 먹지 못했던 굶주림. ...

몹시도 생생한 감각이 리시를 덮쳐왔다. ...

무서운 밤이었다. ...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창고에 갇혀, 열어달라고 부르짖어도, 잘못했다고 빌지 않아도 될 용서를 빌어도, 응해주는 이 한 명 없는 그 시간은. ...

어린아이가 견디기에는 몹시도 무서운 시간이었다. ...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몸을 웅크리려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

그제야 묵직한 팔이 자신을 끌어안고 있음을, 자신의 얼굴이 누군가의 가슴에 묻혀 있음을 깨달았다. ...

꿈에서부터 따라온 곰팡내가 사라지며, 익숙한 향기가 리시의 코끝을 간질였다. ...

숲과 들판, 밤하늘과 별빛을 담은 향기. ...

케이브란트 그린의 체취. ...

두려움에 헐떡이며 튀어 오르던 심장이 제자리를 되찾았다. 차게 식은 손가락 끝에 온기가 돌아왔다. ...

그래도 아직 추워서, 리시는 꼬물꼬물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

그가 잠결에 리시를 보듬어 안으며,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

“추워, 리시?” ...

“조금.” ...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

그는 리시의 어느 곳 하나 그냥 두지 않겠다는 듯, 두 팔과 단단한 허벅지로 리시를 옭아매듯 안았다. ...

그의 체온이 리시에게로 스며들었다. ...

“괜찮아, 리시.” ...

케이가 속삭이며 리시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

“괜찮아.” ...

괜찮긴. 아무것도 모르면서. ...

그래도 그의 속삭임이 듣기 좋았다. ...

리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손길이 점점 느른해지다가 멈췄다. ...

케이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리시는 잠들 수가 없었다. ...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그의 체온에 녹아들며, 그렇게 밤을 지새웠다. ...

이윽고 커튼 사이로 새벽빛이 새어 들어올 때야, 리시는 눈을 감았다. 잠이 오기 때문이 아니라, 케이가 잠에서 깬 듯 작은 신음을 흘렸기 때문이다. ...

리시는 또 악몽을 꿀까 봐 무서워서 잠들지 못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

케이는 잠시 리시를 끌어안은 채 가만히 있다가, 리시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

한 번 쪽. ...

그리고 잠시 지나서 한 번 더 쪽. ...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는 듯, 이번에는 두 번 더 쪽, 쪽. ...

그러더니 “흐음.” 하고 뭔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신음을 흘렸다. ...

리시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팔을 빼낸 케이는, 상체를 일으키고 한동안 리시를 내려다봤다. ...

눈을 감고 있는데도 그의 시선이 느껴져서 볼이 화끈거렸다. 리시는 자신이 깨어 있는 걸, 그가 눈치챈 게 아닌가 싶었다. ...

슬슬 일어난 척할까? ...

그런 생각을 하는데, 케이가 리시의 머리카락 끝을 살짝 붙잡고 말했다. ...

“자는 얼굴도 예쁘구려, 부인.” ...

생각지도 못한 말에 굳어 있는데. ...

“내가 뭔 소리를 하는 건지…….” ...

케이가 중얼거리며 침대에서 내려갔다. ...

리시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

항상 케이가 먼저 일어나기에, 그가 잠에서 깨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

‘설마…… 매일 이러는 건 아니겠지?’ ...

그가 침대에서 멀어진 것 같아서 작게 실눈을 떴다. ...

케이가 있어야 할 자리에, 검은 늑대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

어느새 늑대로 변한 그는, 침실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요리조리 돌아보고 있었다. ...

반듯한 자세로 앉아서도 보고, 앞발을 들어도 보고, 고개를 돌려 옆모습을 살펴보는 모습에, 리시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리시는 꼬물꼬물 이불을 머리 꼭대기까지 뒤집어썼다. ...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는데, 다시 사람으로 변한 케이가 가운을 걸치고 다가와서, 슬그머니 이불을 들췄다. ...

“언제 깼어요, 리시?” ...

“방금…….” ...

케이는 리시의 입가에 남은 미소를 발견했다. ...

케이의 얼굴이 붉어졌다. ...

“언제부터 봤어요, 리시?” ...

“커다란 늑대가 거울 앞에서 몸단장하고 있을 때부터요.” ...

케이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

케이는 그 일에 대해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몇 번이나 입술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

“그렇게 창피해하지 않아도 돼요, 케이. 침실에서 나가기 전에 몸단장하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물론…… 늑대가…… 풉…… 아니, 미안해요. 그냥…… 늑대가 몸단장하면서 뽐내는 표정을 짓는 건 처음…… 큭…….” ...

“뽐내지 않았어요.” ...

“하지만…… 턱 살짝 들고 반듯하게 앉아 있는 게…… 되게 뽐내는 것처럼…… 크큭…… 아, 미안해요. 진짜로 비웃는 게 아니라…… 신기해서…….” ...

“됐어요. 웃으려면 그냥 크게 웃어요. 참지 말고.” ...

그래서 리시는 마음껏 웃기로 했다. ...

“아하하하하.” ...

불만스럽게 팔짱을 끼고 있던 케이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

“그게 그렇게 웃겼어요?” ...

“다시 한번 말하지만 신기해서요.” ...

“내 아내는 신기하면 웃나 보네요. 그렇다면 앞으로 신기한 걸 잔뜩 보여줘야겠어요.” ...

케이는 삐친 것처럼 말했지만 눈은 웃고 있었다. ...

이제 리시의 머릿속에서는 지난 밤에 꾼 악몽이 완전히 지워졌다. ...

“기대할게요.” ...

“그렇다면 말 나온 김에.” ...

케이가 리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리시는 자연스럽게 그의 커다란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

그가 리시의 손을 거머쥐고 살며시 힘줘서 끌어당겼다. ...

“나가죠. 정원에서 가볍게 요기하고 신기한 걸 보여줄게요.” ...

 

+++

구름 한 점 없이 좋은 날씨였다. ...

크리시나가 가져다준 양산을 쓰고, 정원을 걸었다. ...

이른 시간이라, 풀잎에는 아직 이슬이 맺혀 있었다. ...

리시는 손을 뻗어 풀잎을 사르륵 쓸었다. ...

손가락 끝에 맺히는 찬 이슬이 기분 좋았다. ...

“감기 걸려요, 리시.” ...

옆에서 걷던 케이가 말했다. ...

“손가락 끝에 물 좀 닿았다고 감기 걸릴 만큼 약하진 않아요.” ...

“내 눈에는 그만큼 약해 보여요. 당신은 너무 작고 말랐거든.” ...

“당신이 너무 큰 거죠.” ...

정원의 한 공간에 이미 테이블과 아침이 마련되어 있었다. ...

테이블 옆에는 단정한 복장의 제이미가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정말 부지런하네.’ ...

리시가 알기로, 제이미는 새벽까지 케이와 함께 일한다. 제이미도, 케이도, 잠을 거의 자지 않는 것 같았다. ...

제이미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의자에 앉았다. 케이가 제이미에게 무언가 속삭이자, 제이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

갑자기 차린 식사인데도 훌륭했다. 신선한 샐러드와 고소한 향이 나는 수프, 쫄깃한 빵과 부드러운 치즈, 갓 구운 베이컨. ...

케이는 빵을 반으로 잘라서 치즈와 베이컨을 끼워 리시의 접시에 놔주었다. 그리고 자기 몫의 빵을 반으로 자르며 물었다. ...

“잘 때 악몽 꿔요?” ...

“조금요.” ...

“조금이 아닌 것 같던데.” ...

“그냥 조금요.” ...

악몽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 악몽이 현실만 아니라면, 리시는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다. ...

케이는 리시를 빤히 응시하다가, 들고 있는 빵으로 시선을 내렸다. ...

“성유물 중에 슬리브 스톤이라는 게 있어요.” ...

“슬리브 스톤!” ...

리시는 그 성유물을 알고 있었다. ...

지난 삶, 그 성유물 때문에 케이의 남동생인 엘드허트가 영원한 잠에 빠졌다. ...

케이는 엘드허트를 깨우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

“들어봤어요?” ...

리시의 반응 때문에, 케이가 미심쩍다는 듯 물었다. ...

“아뇨. 이런 반응을 해야 말하는 쪽에서도 신나지 않을까 싶어서.” ...

케이는 리시의 변명을 믿는 듯 작게 웃었다. ...

“말하는 맛이 나는 청중이네요. 좋아요. 슬리브 스톤은 잘만 사용하면 좋은 꿈을 꾸게 해주는 돌이에요. 요만한 크기의 파란색 돌이죠.” ...

케이가 엄지 한마디를 들어서 보여줬다. ...

“다만 잘못 사용하면 영원한 잠에 빠지는 경우가 있어요. 현실보다 꿈이 좋아서, 돌아오지 않게 되는 거죠. 난 그 돌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

지난 삶, 엘드허트는 현실이 괴로워 꿈으로 도망쳤다. ...

케이는 엘드허트가 그토록 괴로워하는 줄은 몰랐을 것이다. ...

아니, 어쩌면 알기에, 엘드허트가 몰래 그 돌을 사용하는 걸 모르는 척했을지도. ...

‘견디기 힘들었겠지. 부모님과 여동생의 죽음을.’ ...

앞으로 3년 후. ...

와이번과 헤레이나, 제레시엔은 죽는다. ...

그로부터 1년 후, 엘드허트는 영원한 잠에 빠진다. ...

가족을 잃은 케이는, 그의 그림자들 덕분에 살아가지만, 마치 껍데기 같았다. ...

“신성국에는 보고하지 않은 성유물이 몇 개 있어요. 굳이 건드릴 필요 없는 성유물은 그냥 놔뒀죠. 내 힘이 조금 더 강해지면 수거하려고.” ...

성유물의 힘이 주위에 피해를 주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수호자의 힘이 필요했다. ...

케이는 아직 그 모든 성유물을 다 억제할 만한 힘이 없었다. ...

“돌 하나쯤 더 있어도 괜찮거든. 당신이 원한다면 슬리브 스톤을 가져다주죠. 몇 번 정도는 그 힘을 억제해서 당신이 좋은 꿈을 꾸게 해줄 수 있어요.” ...

고작 악몽을 꿨을 뿐인데, 성유물까지 가져다가 리시를 편안하게 해주려는 케이의 마음 씀씀이에 가슴이 저릿했다. ...

리시는 지난 삶, 가족을 잃은 케이가 어떤 눈빛을 지니게 되는지 알았다. ...

텅 빈 눈동자. ...

그 무엇에도 요동치지 않는, 마치 영원한 허공과도 같은 눈동자. ...

리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

“가져다줘요.” ...

그 빌어먹을 돌을 부숴버려야겠으니까. ...

(28) 작고 하얗고 사나운 생물 ...

식사가 끝날 무렵, 제이미가 돌아왔다. ...

“준비됐어요, 대장.” ...

“리시, 가죠. 신기한 걸 보러.” ...

슬리브 스톤을 생각하느라, 케이가 신기한 걸 보여주겠다고 했던 걸 잊고 있었다. ...

리시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

그들이 향한 곳은 저택 구석에 있는 마구간이었다. ...

마구간 앞의 넓은 평지에는, 튼튼해 보이는 말들이 편안하게 쉬거나 뛰놀고 있었다. ...

말들을 전부 풀어놓은 듯, 마구간 안은 비어 있었다. ...

마구간 가운데의 길을 따라 걸어가자, 닫힌 문이 하나 있었다. ...

제이미가 문을 열었다. ...

제일 먼저 보인 건 유진이었다. ...

평소에는 차가울 정도로 무표정한 유진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이 열린 걸 깨닫고는 얼른 표정을 갈무리했다. ...

“대장. 형수님.” ...

“오랜만에 보네요, 유진. 잘 지냈어요?” ...

명랑하게 말을 건네는데, 케이가 리시의 턱을 살짝 잡아서 돌렸다. ...

“리시가 봐야 할 건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에요.” ...

무심코 시선을 돌린 리시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

“어머나!” ...

하얀색의 작은 말이, 똑같이 하얀색의 어미 말 옆에 꼭 붙어서 서 있었다. ...

놀라운 건. ...

“뿔이…….” ...

작은 말에 뿔이 있었다. ...

금빛이 감도는 긴 뿔. ...

리시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

긴 뿔을 가진 하얀 말을, 리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전설 속에나 나오는 생물이었다. ...

“유니콘…….” ...

유니콘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그래요, 유니콘이죠.” ...

“하지만…… 어미는 뿔이 없는데.” ...

어미는 평범한 흰색 말처럼 보였다. ...

“이 녀석들은 성체가 되면 뿔을 보이지 않게 할 수 있어요. 살아남기 위해 진화한 거죠.” ...

케이가 리시의 손을 끌어서 어미 말의 머리 쪽으로 가져갔다. ...

리시는 말이 손을 물까 봐 걱정했지만, 말은 얌전하게 서 있었다. ...

분명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딱딱한 뭔가가 만져졌다. ...

“뭔가…… 있네요.” ...

“뭔가가 있죠. 화이트.” ...

화이트가 유니콘의 이름인가 보다. ...

케이가 이름을 부르자 보이지 않았던 뿔이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

새끼보다 훨씬 화려하게 빛나는 금빛 뿔. ...

리시는 전설이 현실이 되는, 그 경이로운 광경을 숨죽이고 눈에 담았다. ...

“유니콘은 영리하고 강해요. 말을 잘 알아듣고,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충성을 바치죠. 성체가 된 후에는 하늘을 날기도 해요.” ...

“전설이랑 똑같네요…….” ...

“전설이 아니에요, 리시. 인간들은 자신들이 멸종시킨 생물에 전설이라는 근사한 이름을 붙여줬을 뿐이에요.” ...

화이트의 뿔이 다시 사라졌다. ...

케이는 새끼 유니콘을 내려다봤다. ...

“이 아이는 아직 이름도 없어요.” ...

“그렇군요. 당신이 붙여주는 건 안 될 것 같아요.” ...

“음? 왜요?” ...

“작명 센스가 좀……. 하얗다고 화이트라니…….” ...

조용히 서 있던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

화이트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보였다. ...

“하얀 걸 블랙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

“하여간 이 아이의 이름은 다른 사람이 붙여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당신이 붙여요.” ...

“네?” ...

“이제 이 아이는 당신 거예요.” ...

리시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케이를 쳐다봤다. ...

진심일까? ...

유니콘이 진짜로 존재한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데, 그 유니콘을 결혼 선물로 주다니. ...

만약 유니콘이 하늘을 날기까지 한다면, 케이의 그림자들이 가져야 하는 거 아닐까? ...

리시는 유진을 돌아봤다. 유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

그래서 이번에는 제이미를 돌아봤다. 제이미가 싱긋 웃었다. ...

“아이리스 님이 가지세요. 저희는 육아에 소질이 없어서…….” ...

“육아요?” ...

“음, 뭐라고 해야 할까요. 사실 저희는 이 녀석을 아이리스 님께 선물로 드리겠다는 의견에 반대했어요.” ...

당연히 그렇겠지. ...

이런 귀한걸. ...

“이건 선물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형수님.” ...

묵묵히 서 있던 유진이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끼어들었다. ...

“예?” ...

“유니콘들은 귀엽죠. 정말 아름답고 우아합니다. 하지만…….” ...

유진이 새끼 유니콘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

그리고. ...

덥석-! ...

물렸다. ...

“보세요.” ...

유진은 손을 빼내지 않고 말했다. ...

“주인이 없는 유니콘은 사납습니다. 제멋대로죠. 대장이 화이트를 길들이는 데는 정말로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

이제 유진이 손을 빼내려 했지만, 새끼 유니콘은 유진의 손을 놔주지 않았다. ...

“가정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3, 4살짜리 어린애를 키우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형수님. 그런 어린애들이 어떤지 아십니까?” ...

쏴아아아- ...

비 오는 소리가 들렸다. ...

새끼 유니콘이 유진의 손을 문 채 오줌을 싸고 있었다. ...

유진이 이것 보라는 듯, 왼손으로 새끼 유니콘을 가리켰다. ...

“가르치고 길들이고 주인으로 인정받아야만 합니다. 사람 할 짓이 아닙니다, 형수님. 제가 보기에 대장은 자기가 해야 할 육아를 형수님에게 떠넘기려는 것 같습니다.” ...

리시는 케이를 돌아봤다. ...

케이는 즐거운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유진 말이 정말이에요?” ...

“어떨 것 같아요?” ...

“조금은 사실. 그리고 조금은.” ...

리시는 그녀를 바라보는 케이의 눈빛으로, 그의 속내를 알 것도 같았다. ...

“기대하는군요. 내가 이 아이를 길들이기를.” ...

“기대뿐만이 아니리라 믿어요. 당신이 이 아이를 길들일 수 있을 거라고.” ...

“글쎄요. 육아는 해본 적이 없는데.” ...

지난 삶, 아이들을 대하는 게 힘들었다. 어릴 때부터 아이 취급을 받아본 적이 없기에,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유니콘은 빨라서 그 어떤 말도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

케이가 리시의 손을 잡았다. ...

“당신이랑 같이 이 아이들을 타고 달리고 싶어요.” ...

리시는 눈부신 유니콘을 타고 케이와 함께 달리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려 했다. ...

하지만 상상이 되질 않았다. 승마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

앞으로 리시 혼자서 말을 타고 나가야 할 일들이 생길지도 모른다. ...

유니콘이 있다면 유용할 것이다. ...

“좋아요.” ...

리시는 대답했다. ...

“내가 이 아이의 주인이 되어보죠.” ...

 

+++

리시는 서재에서 책을 잔뜩 가지고 방으로 돌아왔다. ...

[재밌다! 환상 동물 사전], [세계의 전설], [전설의 생물], [실제로 존재하는 환상 동물], [초보 사냥꾼을 위한 전설의 생물 사전] ...

대부분 재미 삼아서 읽고 버리는, 삼류 잡지 수준의 책이었다. ...

매력적인 소재인 유니콘은 책마다 실려 있었다. ...

하지만 짧게 몇 줄이라든가, 그 외모에 관해서만 서술해둔 것이 대부분이라서, 유니콘의 습성이나 취향 같은 것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

그중에서도 리시를 끔찍하게 만든 정보는, ...

[유니콘의 주식은 살아 있는 생쥐다.] ...

라는 것이었다. ...

‘설마…… 진짜로 생쥐를 먹는 건 아니겠지?’ ...

고 작고 귀여운 생명체가 생쥐를 우득우득 씹는 장면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

“아이리스 님. 뭘 그렇게 열심히 읽으세요?” ...

아까부터 가만히 앉아 있는 게 힘들어서 꼼질거리던 에르웰이, 잠시 크리시나가 자리를 비운 틈에 물었다. ...

“전설의 생물에 대해서 아는 것 좀 있어요?” ...

“아카데미에 다닐 때 교양 과목으로 배우긴 했는데…….” ...

“유니콘은 어때요? 뭘 좋아하는지도 배웠나요?” ...

“유니콘이요? 어우, 그 새끼…… 아니, 걔들은 별로예요. 커다란 애벌레를 즐겨 먹는대요.” ...

“아…….” ...

이번에는 애벌레다. ...

리시는 유니콘이 애벌레를 먹는 광경 또한 보고 싶지 않았다. ...

“유니콘은 옛날에 진짜로 있었다고 하던데, 성격이 지랄…… 아니, 별로 좋지 않은 데다가 유니콘 고기가 몸에 좋대요. 특히 유니콘 뿔. 그걸 먹으면 죽은 사람도 살아난다고…… 그래서 무차별로 사냥당하다가 결국 멸종했대요.” ...

“그렇군요.” ...

“그런데 유니콘은 왜요?” ...

리시는 에르웰에게 유니콘에 대해 말해도 좋을지 망설였다. ...

유니콘의 존재는 케이와 그의 그림자들 정도만 알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

“백작님에게 망아지를 한 마리 선물 받았어요. 말을 보다 보니까 유니콘에게 관심이 생겨서.” ...

결국, 거짓말을 했다. ...

에르웰은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망아지. 망아지는 순하죠. 목덜미 좀 긁어주고 눈도 좀 맞춰주고 당근 좀 먹여주면 금방 따를 거예요.” ...

그럴 것 같지 않아서 문제란 말이지. ...

“그런데 말 이름은 지으셨어요?” ...

“아직.” ...

“이름부터 지어주는 게 좋아요. 뭐든 이름을 지어줘야 친해지거든요.” ...

리시는 생물에게 이름을 지어준 적이 없었다. ...

그래서 그 작고 예쁜 유니콘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

“하얀색 말인데, 어떤 이름이 좋을까요?” ...

“하얀색 말이요? 그럼 흰둥이죠. 흰둥이.” ...

“……아, 그래요.” ...

에르웰도 케이보다 작명 센스가 낫지는 않았다. ...

리시는 책을 덮고 일어나 방을 나섰다. 책을 읽는다고 해서 유니콘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것 같지도 않았다. ...

계단을 내려가다가 후다닥 올라오는 나단과 마주쳤다. ...

“어, 형수님! 좋은 아침입니다.” ...

나단이 우뚝 멈춰서 꾸벅 인사했다. ...

“좋은 아침이에요, 나단. 어디 가요?” ...

“대장이 뭐 할 게 있다고 불러서요. 아, 맞다. 형수님, 유니콘 받으셨다면서요?” ...

“네, 그렇게 됐어요. 혹시 조언해줄 게 있나요?” ...

“음. 조언, 조언이라…….” ...

나단이 팔짱을 끼고 미간을 모았다. ...

예쁜 얼굴을 찡그리고 한참 고민하던 나단이, 리시를 진지하게 응시하며 말했다. ...

“물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좀 크고 나면 뒷발질을 하게 될 텐데, 뒤에 서 계시면 안 돼요. 걷어차여요. 그렇다고 앞에 서서 계시는 것도 좋지 않아요. 뿔로 박아 버릴지도 모르거든요. 그냥 멀찌감치 떨어져서 신선한 당근 하나 던져주고, 구경만 하시는 편이 좋을 거예요.” ...

“아주 유용한 조언이네요.” ...

나단이 해사하게 웃었다. ...

“조심하세요, 형수님. 형수님 다치면, 젠이 대장을 걷어찰 테니까요.” ...

“내가 다치는데 왜 케이를……?” ...

“대장이 형수님에게 그런 위험하고 무시무시한 선물을 준 거니까요.” ...

위험하고 무시무시한 선물. ...

점점 자신감이 사라진다. ...

그 하얗고 작은 아이를 길들일 수 있을까? ...

생각에 잠겨서 본채를 빠져나가 정원을 걷던 리시는, 도란도란 들려오는 음성에 걸음을 멈췄다. ...

정원 목 사이로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보였다. 노백작 부부가 정원을 걷고 있었다. ...

노백작 부부가 이 저택에 와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

아차 싶었다. 문안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

지난 삶, 알포드의 부모는 리시가 미리 방 앞에 와서 대기하다가, 아침 인사를 올리지 않으면 크게 화냈다. ...

배운 게 없어서, 아는 게 없어서, 주변머리가 없어서, 저런 게 어쩌다가 우리 집안에……. ...

리시는 황급히 노백작 부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

“오, 리시. 잘 잤니?” ...

다행히 헤레이나는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

“네, 어머님. 죄송해요, 문안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

“음? 문안 인사? 아, 문안 인사……. 여보, 문안 인사래요.” ...

“허허…….” ...

와이번이 신기하다는 듯 웃었다. ...

리시는 둘의 반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웃는 것도 아니고. ...

“참 예의가 바르구나, 리시. 우리 애들한테는 문안 인사라는 걸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래, 그런 게 존재하는구나.” ...

헤레이나는 정말로 놀라워하는 것 같았다. ...

그제야 리시도 긴장을 풀었다. 지난 삶과는 다른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했는데, 아직도 지난 삶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그린 가문은 위틀로 가문과도, 후치스 가문과도 다르다. ...

“그나저나 마침 잘 만났다, 리시. 네게 묻고 싶은 게 있었거든.” ...

헤레이나가 호박색 눈동자로 리시를 가만히 응시하며 물었다. ...

“우리가 위틀로 공작 부부를 어떻게 대하는 게 좋겠니?” ...

(29) 질투 많은 짐승. ...

헤레이나가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리시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

헤레이나와 와이번은 조용히 서서 리시가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

“어머님, 아버님께서 편하신 대로요.” ...

“정말 그래도 되겠니? 내가 편해지면 한없이 편해질 텐데.” ...

“얼마든지요. 하지만 어머님, 저를 위해 대신 싸워주시지는 않아도 괜찮아요. 싸움은 제가 할게요.” ...

“그럼 나는 무엇을 해줄까?” ...

“그냥…….” ...

리시는 지난 삶, 이 금실 좋은 노부부가 끔찍한 사건에 휘말려 죽어간 것을 떠올렸다. ...

이들이 죽은 후, 두 아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도. ...

“이대로 건강하게, 이렇게 계셔주세요.” ...

리시가 헤레이나와 와이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

어떻게 들으면 입에 발린 소리로도 들릴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헤레이나는 왜인지 가슴이 뭉클해지는 걸 느꼈다. 리시의 연보라색 눈동자에 담긴 진심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

그런 사람이 있다. ...

아무리 오래 보고 만나도 정을 줄 수 없는 사람. ...

그리고 또 그런 사람이 있다. ...

보자마자 끌리고 대화 몇 번 나누지 않았는데도 정이 가는 사람. ...

헤레이나에게 리시는 후자였다. ...

청초하고 연약해 보이는데 은근히 강단 있고, 쓸쓸한 눈빛을 하고 있는데 웃으면 더없이 밝아지는 리시가 마음에 들었다. ...

와이번이 리시에게서 ‘전사의 눈빛’을 봤다면, 헤레이나는 ‘상처 입었지만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작은 짐승’을 발견했다. ...

그게 헤레이나의 모성본능을 자극했다. ...

“리시, 유니콘을 선물 받았다면서?” ...

와이번이 헤레이나와 리시 사이에 머문 침묵을 깨뜨렸다. ...

“네, 그런데 어떻게 길들여야 할지…….” ...

“이름을 붙여주거라, 리시. 무엇이든 이름을 붙여야 존재하는 것이 되는 법이니까.” ...

+++

리시는 마구간으로 향했다. ...

‘이름. 이름을 뭐라고 지어야 하지?’ ...

와이번의 조언에 따라 이름을 지어보려고 했는데, 리시에게 생각나는 이름도 결국 ‘화이트’밖에 없었다. ...

‘케이의 작명 센스를 놀릴 게 아니었어.’ ...

리시가 유니콘 우리에 들어가려 하자, 마구간지기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

“백작 부인. 위험할 겁니다.” ...

“괜찮아요. 가까이 가지는 않을게요.” ...

“절대로 울타리 너머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아셨죠?” ...

몇 번이나 주의를 받은 끝에야 유니콘 우리에 들어갈 수 있었다. ...

우리 안에는 가슴 높이의 울타리가 있었는데, 아침에는 열려 있던 울타리의 문이 단단히 닫혀 있었다. ...

리시가 들어가자 화이트가 귀를 쫑긋거렸고, 새끼 유니콘이 울타리 가까이 다가왔다. ...

새끼 유니콘은 초롱초롱한 까만 눈으로 리시를 빤히 올려다봤다. ...

그게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

탁-! ...

다행히 유니콘이 리시의 손을 물기 전에 손을 치웠다. ...

‘깜짝이야.’ ...

큰일 날 뻔했다. ...

“아가야. 나는 널 해치지 않아.” ...

“힝!” ...

새끼 유니콘이 콧방귀를 뀌었다. 영리하다더니, 말을 알아듣기는 하는 모양이다. ...

새끼 유니콘은 돌아서서 뒷발로 바닥을 탁탁 쳤다. ...

바닥에 깔려 있던 지푸라기와 모래가 리시의 원피스까지 날아왔다. ...

“너, 정말 못됐구나.” ...

“히힝!” ...

새끼 유니콘은 뒷발질을 멈추지 않았다. ...

보다 못한 화이트가 코로 새끼 유니콘의 허리를 툭툭 밀었다. ...

그제야 뒷발질을 멈춘 새끼 유니콘이 화이트의 품에 파고들었다. ...

못됐지만 귀엽다. ...

“네 이름을 지어야 하는데, 어떤 이름이 좋을 것 같니?” ...

대답이 돌아올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물었다. ...

“흰둥이 어때요?” ...

뒤에서 들려온 음성에, 리시는 자신이 미소짓는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미소 지으며 뒤를 돌아봤다. ...

어느새 케이가 리시의 뒤에 와 있었다. ...

“이미 기각한 이름이에요.” ...

“누가 이런 센스 있는 이름을 제시한 거죠?” ...

“에르웰.” ...

“아, 에르웰 양.” ...

케이가 뭔가 떠오르는 게 있는지 키득키득 웃었다. ...

“왜 그렇게 웃어요?” ...

“그냥 에르웰 양이……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

에르웰을 떠올리면서 웃었구나. ...

그렇게 생각하니 왜인지 기분이 나빠졌다. ...

“요기에.” ...

케이가 검지로 리시의 미간을 콕 눌렀다. ...

“왜 힘을 주는 거죠, 리시?” ...

“난 원래 요기에 힘을 주는 걸 좋아하거든요.” ...

“아닐 텐데.” ...

케이가 한쪽 팔로 리시의 허리를 감아 바짝 끌어당겼다. 그는 단단한 허벅지를 리시에게 밀착시키고, 은근하게 물었다. ...

“내가 다른 여자를 생각하면서 웃는 게 싫은 거 아니에요?” ...

“그게 왜 싫겠어요? 당신이 생각하고 웃는 건 당신 마음인데.” ...

고집스럽게 말하며 케이의 가슴을 밀어내려 했지만, 케이는 리시를 놔주지 않았다. ...

“그런 것 치고는 입술이 비쭉 나와 있는데?” ...

리시가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넣고 오므리자 케이가 웃었다. ...

“일부러 그러는 거예요?” ...

“모고요?” ...

입술을 안으로 넣고 말하는 바람에, 발음이 요상해졌다. ...

“이렇게 귀여운 거. 내가 못 참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냐고.” ...

“그럴 리가요.” ...

“일부러 귀여운 거 같은데.” ...

“귀여운 게 일부러도 될 수 있나요? 정말 그런 거 아니니까…….” ...

다시 케이의 가슴을 밀어내려 했지만, 케이의 입술이 더 빨랐다. ...

그는 리시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겹치고, 리시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

그의 입술이 닿을 때면 언제나 그랬듯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

달콤한 아찔함이 빈자리를 채웠지만, 리시는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고 두 손으로 케이의 가슴을 밀었다. ...

입술을 뗀 케이가 이마를 붙인 채 말했다. ...

“오늘따라 왜 이렇게 거부해요?” ...

“애가 보잖아요.” ...

“애?” ...

리시가 꼬물꼬물 손을 움직여 새끼 유니콘을 가리켰다. ...

“하하하. 애, 그래요. 애가 맞긴 맞네요. 애 앞에서 이러면 안 되겠죠. 하하하.” ...

케이가 웃으며 리시를 놔줬다. ...

“애가 본다니…….” ...

케이는 뭐가 그리 웃긴지 리시의 말을 되풀이하며 웃었다. ...

신기했다. ...

이렇게 잘 웃는 사람이었구나. ...

지난 삶, 리시가 본 케이는 웃음이 없는 남자였다. 예의상 짓는 미소조차 어찌나 차갑고 예리한지, 그 앞에 있다가는 온몸에 상처가 나 피를 흘리게 될 것 같았다. ...

“그렇게 보지 말아요, 리시.” ...

리시의 시선을 느낀 케이가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말했다. ...

“또 애 앞에서 키스할 것 같거든.” ...

“그런 건 됐고요. 이 아이 이름을 먼저 지어야 할 것 같은데, 이름 잘 짓는 사람 없나요?” ...

“그런 건 됐다니. 내 감정보다 이 애가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

“설마 이 애를 질투하는 건 아니죠?” ...

“왜 아니겠어요, 리시.” ...

케이가 리시와 새끼 유니콘 사이를 가로막았다. ...

“당신이 내내 저 애만 쳐다보는데.” ...

“당신도 봐줬잖아요.” ...

“부족해요. 그 예쁜 눈동자에 나만 담겼으면 좋겠거든.” ...

“욕심도 많으셔라.” ...

케이가 리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자연스럽게 그녀를 돌려세워, 유니콘 우리에서 데리고 나갔다. ...

“며칠 집을 비울 것 같아요. 길면 일주일, 빠르면 나흘. 결혼식 전까지는 돌아올 테니 안심하시고.” ...

어디에 가는 거냐고 물어보려는데, 마침 불어온 바람이 리시의 머리칼을 스쳤다. ...

동시에 새끼 유니콘에게 지어줄 이름이 떠올랐다. ...

“윈디.” ...

“응?” ...

“저 아이 이름은 윈디가 좋겠어요. 바람처럼 빠르고 자유롭게 달리라고. 어때요?” ...

좋은 이름인 것 같아서 환하게 웃으며 케이를 돌아봤는데, 케이는 뚱한 표정이었다. ...

“마음에 안 들어요?” ...

“들겠어요? 남편이 멀리 떠난다는데, 그 예쁜 머릿속에는 저 유니콘 생각뿐이잖아요.” ...

“당신이 준 선물이거든요.” ...

“내내 저 애 생각만 하라고 준 건 아니에요, 리시. 저 애를 보면서 내 생각을 하라고 준 거지.” ...

케이가 정말로 질투하는 것처럼 보여서, 리시는 기분이 이상했다. 평범한 부부라면 이상하지 않을 일이지만, 케이와 리시는 평범하지 않았다. ...

그린 백작 부인이 된 이상, 케이가 리시를 자신의 부인으로 대해주기로 한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케이는 마치 사랑에 빠진 남자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

묻고 싶었다. ...

‘케이, 혹시 정말로 날 좋아해요?’ ...

하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

리시가 케이에게 원한 건 신뢰와 동료애였지,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었다. ...

남녀의 사랑처럼 부질없는 것은 없다. 서로를 위해 목숨도 줄 것 같은 사랑이 끝난 자리에는, 새까만 상처만이 남는다. ...

지난 삶에서, 그리고 죽음 속에서, 그러한 광경을 수없이 목격했다. 사랑보다는 차라리 우정이 믿을 만했고, 리시는 케이에게 우정을 원했다. ...

나 역시 그만한 우정을 케이에게 줄 것이고. ...

“어디에 가는 거예요?” ...

리시는 다른 질문을 했다. ...

케이도 삐친 듯한 표정을 지우고 답했다. ...

“슬리브 스톤을 가지러요.” ...

“그리 급할 건 없는데.” ...

“급해요. 당신이 좋은 꿈을 꿨으면 하거든.” ...

케이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

리시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고 그의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

“나는 이미 좋은 꿈을 꾸는 기분이에요, 케이. 무리하지 말아요.” ...

 

+++

케이와 함께 슬리브 스톤을 찾으러 가던 나단이,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

“대장, 형수님한테 뺨이라도 맞았어요?” ...

케이는 아까부터 계속 자신의 왼쪽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

“아니, 그보다 더 강렬한 걸 받았지.” ...

“걷어차였어요?” ...

“……나단.” ...

“그럴 만해요, 대장. 결혼 선물로 새끼 유니콘이라니…… 형수님처럼 연약한 레이디에게 그런 걸 선물로 주면 안 된다는 건, 월라스도 알 걸요.” ...

나단이 투덜거렸지만, 케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 ...

유니콘을 길들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리시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

리시가 무엇을 하려는지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유니콘은 리시에게 좋은 친구이자 동료가 되어줄 것이다. ...

-나는 이미 좋은 꿈을 꾸는 기분이에요, 케이. ...

아까 들었던 리시의 음성이, 나단의 투덜거림을 밀어냈다. ...

달콤한 음성, 진심이 담긴 눈빛. 그리고 부드러운 손길. ...

오롯이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이 감정에, 성급하게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했다. ...

상처 입은 짐승에서 섣불리 다가가면 도망치기 마련이니까. ...

+++

신성국 테세이 성기사단의 부단장 숙소. ...

토벌을 나갔다가 오랜만에 돌아온 엘드허트는, 자신의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신문과 잡지를 발견했다. ...

그걸 읽어내려가는 엘드허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

“엘디!” ...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며 오손이 뛰어 들어온 건, 엘드허트가 제일 아래에 깔려 있던 청첩장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님이 결혼하셨다던데. 알고 있었어?” ...

엘디가 청첩장을 흔들었다. ...

“방금 초대받았다.” ...

“초대받았다고? 이미 결혼하셨다던데.” ...

“관청에 신고를 먼저 한 모양이야.” ...

“히야. 그 대단한 그린 백작님도, 위틀로 공작가의 꽃을 놓치고 싶진 않으셨나 보다. 식을 올리기도 전에 혼인신고를 먼저 하다니……. 하긴, 위틀로 공작 가의 꽃쯤 되면…….” ...

거기까지 말한 오손이 말을 멈췄다. ...

청첩장을 응시하는 엘디의 눈빛이 몹시 싸늘했기 때문이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 ...

엘디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

“위틀로 공작이 저택에 숨겨두고 곱게 키워서, 좋은 집안에 팔아치우려고 키운 여자겠지.” ...

“에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해서 조심하며 키우느라 밖에 내보내질 못했다던데.” ...

“글쎄.” ...

엘디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

“형님한테는 실망이야. 꽃 따위에 홀려서, 그런 여자를 우리 가문에 들이다니…….” ...

엘디의 손에서 청첩장이 구겨졌다. ...

“그래서…… 결혼식, 안 가게?” ...

엘디가 청첩장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

“가야지. 겸사겸사 이 결혼도 깨버리고.” ...

(30) 예의를 가르쳐주지. ...

  제이미가 리시에게 찾아온 건, 케이가 저택을 비운 지 이틀이 지났을 때였다. ...

아침부터 유니콘 축사에 가서 지푸라기와 흙을 맞아 더러워진 리시는, 마침 옷을 갈아입으려던 참이었다. ...

방문 앞에서 기다리던 제이미가 리시의 옷을 보고 싱긋 웃었다. ...

“육아가 보통 일이 아니지요?” ...

“그러네요. 육아라고 하기에는 그 애를 만져보지도 못했지만.” ...

“위험하니까 무리하지는 마세요. 아,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

“손님이요? 내게?” ...

“위틀로 공작 일가.” ...

“아.” ...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

예상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도 예상한 대로 행동해서. ...

청첩장이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브리트니에게 보냈다. ...

브리트니가 결혼식 하루, 이틀 전에 와서 돌발행동을 하는 것보다는, 미리 불러들여서 기를 죽여놓고 결혼식 당일에는 아무 짓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

‘어쩌면 결혼식 일정에 맞춰서 올지도 몰라. 이미 집을 떠나버린 내게서 신경을 끊었을지도.’ ...

라는 기대를 품었다. ...

역시나 헛된 기대였다. ...

“그들은 어디에 있죠?” ...

“아직 정문 앞에 있지요. 그들을 초대한 기억이 없어서.” ...

제이미가 담담히 대답했다. ...

어찌 되었든 위틀로 공작 일가는 리시에게는 친정이었다. ...

그런데 밖에 세워두다니. ...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

그들의 방문을 알리는 제이미의 어조에는 묘하게 가시가 있었다. ...

어쩌면 제이미는 리시가 그 집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

“어찌할까요, 아이리스 님?” ...

케이는 저택에 없었다. 결정권은 리시에게 있었다. ...

“오늘은 몹시 바쁘니 내일 다시 찾아오라고 하세요.” ...

제이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방에서 나갔다. ...

한숨을 삼키며 돌아서자, 크리시나와 에르웰이 의아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게 보였다. ...

가족들이 찾아왔는데 냉정하게 내치는 리시의 모습에 당황한 것 같았다. ...

리시는 여상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거든요.” ...

크리시나와 에르웰의 얼굴에서 의아함이 사라졌다. 대신 무엇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각오가 그들의 눈동자에 깃들었다. ...

리시가 다시 방으로 걸어가는데,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

“나쁜 새끼들이라는 말씀이시지?” ...

에르웰의 목소리 같았지만, 리시는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

“뭐가 어쩌고 어째?” ...

글로번 위틀로 공작이 두 눈을 부릅떴다. ...

저택 부지에 마차도 못 들이게 하고 밖에서 기다리라고 한 것도 속이 부글부글 끓을 일이지만 참았다. ...

그런데 바빠서 내일 다시 찾아오라니. ...

물론 초대장에 적힌 날짜는 한참 후니까, 저택 주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

하지만 아이리스는 그래서는 안 됐다. 감히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

“아이리스가 그렇게 말했다고?” ...

“네, 공작님. 백작부인께서는 몹시 바쁘셔서 오늘은 손님을 맞이할 시간이 안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

제이미가 은은하게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

“그럴 리가 없어. 우리가 찾아온 거라고 정확하게 전달한 거예요?” ...

데니스 위틀로 공작부인이 도끼 눈을 하고 물었다. ...

“위틀로 공작님과 공작부인, 그리고 브리트니 양이 찾아왔다고 정확하게 전달했습니다.” ...

“그런데도 바쁘다고 했다고?” ...

“네, 공작부인.” ...

“말도 안 돼! 그 애가 그럴 리가 없어.” ...

“그런가요? 왜 그럴 리가 없을까요?” ...

“뭐……?” ...

“우리 그린 백작 부인께서는 그린 백작 가의 안주인이 되셨지요. 안주인께서는 무척이나 공사다망하십니다.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

제이미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

리시는 이제 위틀로 공작의 딸이 아닌, 그린 백작가의 안주인이었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

“나는 그 애 아버지라네.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문전박대하는 게 어느 경우에 있는 일인가?” ...

“초대한 날짜보다도 너무 이르게, 연락도 없이 방문하는 경우에는 있을 수도 있는 일이지요.” ...

제이미가 담담하게 말했다. ...

글로번은 화가 치밀었다. ...

감히 백작의 개 따위가. ...

하지만 창천의 기사인 제이미를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다. 글로번도 제이미의 명성 정도는 알고 있었다. ...

“아이리스가 바쁘다면 당장 그 애 얼굴을 보지는 못해도 좋네. 일단 손님용 방이라도 내어주게.” ...

“그것 또한 힘듭니다, 공작님. 손님용 방이 준비되지 않아서요.” ...

“그럴 리가 있나! 대체 어느 집이 손님용 방도 준비해두지 않는단 말인가?” ...

“아시다시피 성유물의 수호자인 그린 백작님께서는 무척이나 바쁘셔서 손님을 초대할 기회가 많지 않지요. 갑작스럽게 찾아올 손님을 위해 마련된 방이 없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

글로번은 제이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지적할 수는 없었다. ...

없다는데 방을 내어달라고 애원하고 싶지도 않았다. ...

“아이리스에게 한 번 더 얘기해봐요. 우리가 왔다고 하면 분명…….” ...

“그만해.” ...

글로번이 데니스의 말을 끊었다. 데니스가 왜 그러냐는 듯 글로번을 노려봤다. ...

“묵을 곳이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오늘은 아이리스가 바쁘다고 하니 내일 다시 찾아오지.” ...

“하지만 여보. 우리가 아무 데서나 잘 수는 없잖아요. 게다가 아이리스, 걔가 이렇게 버릇없이 나오는데……” ...

“여보!” ...

글로번은 제이미가 듣는 곳에서 아이리스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데니스도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

마차에 오르자마자 브리트니가 달려들 듯 물었다. ...

“아빠, 걔 미친 거 아니에요? 지가 바쁘다고 우리를 들여보내지도 않아?” ...

“미친 게 분명하지. 그것이 집 떠나 있더니,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

데니스가 이를 갈았다. ...

“왜 그냥 들어왔어요? 아무리 우리가 연락 없이 왔어도 손님인데, 이런 식으로 보내는 건 예의가 없는 거잖아요.” ...

“그만해라, 브리트니. 그리고 당신도. 그린 백작은 성유물의 수호자야.” ...

“아무리 성유물의 수호자라도 그렇지. 우리는 공작 가문이잖아요.” ...

“브리트니. 너, 남들 듣는 데서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마라.” ...

대대로 성유물의 수호자인 그린 가문과 몰락해 가는 위틀로 공작 가문. ...

어느 쪽이 위인지는 명백했다. ...

케이의 눈 밖에 나서 좋을 건 없었다. 하지만 아이리스의 무례한 태도도 용서할 수 없었다. ...

“내일 다시 찾아가자. 그린 백작은 자리를 비웠다더구나. 일단 그 저택에만 발을 들이면…….” ...

그 계집의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줘야지. ...

+++

글로번이 단단히 벼른 ‘아이리스의 버르장머리 고치기’는 그다음 날에도 시행할 수 없었다. ...

“백작 부인께서는 오늘 몸이 좀 안 좋으셔서요. 내일 다시 오셔야겠습니다.” ...

그다음 날에도. ...

“백작 부인께서는 오늘 바쁘셔서요. 내일 다시 오셔야겠습니다.” ...

문 앞까지 찾아갔다가 쫓겨날 때마다 글로번의 얼굴은 점점 붉어지고, 언성도 높아졌다. ...

나중에는 삿대질까지 했지만, 제이미는 처음과 똑같이 은근한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었다. ...

제이미가 들어가고도 한참 동안 저택 앞에 머물며 욕설을 퍼붓던 공작 일가가 돌아가는 걸 확인한 후, 제이미는 온실로 향했다. ...

리시는 사과나무 아래에서 잘 익은 사과를 하나 따는 중이었다. ...

“위틀로 공작 일가는 돌아갔습니다, 아이리스 님.” ...

“그렇군요.” ...

“오늘은 정말로 영지를 떠날지도 모르겠어요.” ...

“그러지는 않을 거예요. 알량한 자존심을 놓지 못하는 인간이라서. 수확도 없이 돌아가지는 않겠죠. 발도 못 디디고 돌아갔다는 소문이 퍼지면 얼굴을 들기 힘들 테니.” ...

리시가 냉랭하게 말했다. ...

제이미는 리시가 케이의 앞에 있을 때와 위틀로 공작에 대해 말할 때의 표정과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게 신기했다. ...

“내일은 뭐라 하면서 쫓아낼까요?” ...

제이미가 물었다. ...

“백작님은 아직 소식이 없나요?” ...

“네, 아무래도 일주일 안에 다녀오기도 힘든 곳이라서…….” ...

“제레시엔은요?” ...

“젠은 2, 3일 후에 올 거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

“그렇다면.” ...

리시는 사과를 하나 따서 바구니에 넣고 제이미를 응시했다. ...

“젠이 오기 전까지는 위틀로 공작에게 예의를 가르쳐둬야겠네요. 그렇죠?” ...

제이미는 리시가 이렇게 웃을 때 좋았다. ...

오만하면서도 장난기가 담긴 미소. ...

여자에게 전혀 관심 없던 케이가 왜 그리도 리시에게 홀렸는지 알 것 같은 미소. ...

제이미도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많은 가르침을 주시면 좋겠네요.” ...

 

+++

브리트니는 짜증이 나서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

벌써 세 번이나 문전박대를 당했다. ...

아무리 전보다 권력이 낮아졌다고는 해도, 위틀로 공작 가문이었다. ...

백작 따위가 문전박대해도 좋을 집안이 아니라는 말이다. ...

그런데 세 번. ...

직접 찾아가서 청하는데도, 저택 안에 발도 디디지 못했다. ...

그것도 케이 때문이 아니라 리시 때문에. ...

“이건 진짜 말도 안 돼!” ...

네 번째로 그린 백작 저를 찾아가는 길. ...

브리트니는 마차 안에서 빽 외쳤다. ...

“자기들이 아무리 성유물의 수호자라고 해도 그렇지, 우리를 이렇게 대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요!” ...

“브리트니 말이 맞아요, 여보. 이건 정식으로 항의해야 해요.” ...

“맞아요, 신성국에도 알리고…… 그리고 그린 백작한테도 직접 말해야 해요. 그린 백작이 집을 비운 틈에, 아이리스가 제멋대로 행동하는 거잖아요!” ...

“걱정하지 마라. 오늘도 쫓아내면 신성국은 물론, 황제 폐하께도 그린 백작가의 무례에 대해 고할 테니까.” ...

글로번이 가비자르 제국의 황제를 찾아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늘은 순순히 문이 열리고, 정문 안으로 마차가 들어갈 수 있었다. ...

위틀로는 아이리스를 보자마자 그 뺨을 한 대 올려 붙여줘야겠다고 결심했다. ...

하지만 그럴 기회는 오지 않았다. ...

“응접실에서 잠시 기다리시지요.” ...

분명 ‘잠시’라고 했는데, 한 시간이 지나도 두 시간이 지나도, 아이리스는 응접실로 찾아오지 않았다. ...

기다림에 지쳐 제이미를 불렀지만 오지 않았고, 지나가는 하녀들에게 물어봐도, “잠시 더 기다리세요.”라는 대답뿐이었다. ...

심지어 그들은 차 한 잔 대접하지도 않았다. ...

이른 아침에 찾아왔는데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제이미가 돌아왔다. ...

글로번은 벌떡 일어났다. ...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

“네? 뭐가요?” ...

제이미가 전혀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

“잠시 기다리라더니, 이게 몇 시간째냔 말이야! 게다가 차 한 잔, 식사 한 끼도 대접하지 않고!” ...

“아, 배고프세요? 갑작스러운 방문이시라 손님용 식사를 준비하지 못해서. 죄송하게 됐습니다.” ...

제이미는 전혀 죄송하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

“너……!” ...

글로번이 참지 못하고 제이미를 향해 위협적으로 걸어가는데, 브리트니가 얼른 다가와서 글로번의 팔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

브리트니는 글로번에게 살짝 눈짓한 후,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제이미에게 물었다. ...

“아이리스가 시켰나요?” ...

“무엇을요?” ...

“우리 가족을 이렇게 모질게 대하라고요.” ...

“그럴 리가요. 정중하게 모시라고 하셨지요.” ...

“그린 백작가에서는 이게 정중한 대접인가요?” ...

“상대에 따라서는요.” ...

“상대? 우리 위틀로 가문이 차 한 잔의 대접도 못 받을 정도의 상대인가요?” ...

브리트니가 차분하게 물었다. ...

제이미가 빙그레 웃으며, 리시에게 지시받은 대로 말했다. ...

“위틀로 가문이 우리 백작 부인께 한 짓을 생각하면, 이 정도도 몹시 정중한 대접이라고 생각하지요.” ...

(31) 배운 게 없어서. ...

잠시 침묵이 흘렀다. ...

위틀로 공작 일가는 제이미가 한 말의 뜻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

뒤늦게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글로번이 버럭 외쳤다. ...

“그게 무슨 소리야!” ...

“무슨 소리인지는 공작님이 더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

“아, 아이리스가 또 거짓말을 늘어놨나 보네요, 여보.” ...

데니스가 얼른 글로번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

글로번도 정신을 차리고 큼큼, 헛기침했다. ...

“제이미 경. 그대가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사실 우리 아이리스는 허언증이 있다네.” ...

글로번이 태도를 바꿨다. ...

“맞아요. 우리도 그 부분을 걱정했는데…… 아휴. 여기에 와서도 그 습관을 못 버렸나 보네요. 결혼하면 나아질 줄 알았더니.” ...

브리트니도 글로번을 거들었다. ...

“그래도 우리 아이리스, 너무 미워하진 마세요. 걔도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 거라서 어쩔 수가 없을 거예요. 고치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기도 하고요.” ...

브리트니가 동생을 걱정하는 언니의 눈빛을 지으며 말했다. ...

제이미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

“아는지 모르겠는데, 사실 우리 아이리스가 아직은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했거든요. 그런 와중에 그린 백작님이 강압적으로, 아, 실례해요. 제이미 경의 주인인데.” ...

브리트니가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

“아닙니다. 계속하시지요. 저도 몰랐던 일이라서.” ...

“음. 하여간 내 동생이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돼서 우리에게 많이 화났나 봐요. 그래서 우리를 피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알잖아요. 위틀로 공작가의 꽃. 우리가 걔를 얼마나 곱게 키웠는데요.” ...

“너무 오냐오냐하면서 키운 게 문제겠지.” ...

데니스가 덧붙였다. ...

“막상 우리 얼굴을 보면 좋아하겠지. 마음도 풀릴 거고. 제이미 경. 가서 우리가 기다린다고 잘 좀 말해두게.” ...

글로번이 말했다. ...

제이미는 놀라웠다. ...

위틀로 공작 일가는 리시가 언질을 준 대로 말하고 행동했다. ...

-아마 그들은 내게 허언증이 있다고 할 거예요. 브리트니는 좋은 언니인 척, 날 걱정하는 척하겠죠. ...

-그럼 전 어떻게 반응할까요? ...

-믿는 척해요. 그리고 서채로 안내해준다고 하고요. ...

-그들이 순순히 서채로 갈까요? ...

-아니요. 날 찾으려고 하겠죠. ...

정말로 그랬다. ...

손님용 방이 있는 서채로 안내해줄 테니, 내일 다시 아이리스를 만나라는 말에, 글로번은 태도를 바꿔서 당장 아이리스를 만나야겠다며 응접실을 뛰쳐나갔다. ...

데니스와 브리트니도 글로번을 말리는 척하면서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

제이미는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

-내버려두세요. 거기까지가 제이미가 할 일이에요. ...

제이미가 할 일은 끝났다. ...

이제부터는 리시의 일이다. ...

그 현장을 직접 볼 수 없는 게 아쉬웠다. ...

+++

하녀들에게 물어서 찾아간 리시의 방문 앞을, 두 남자가 지키고 있었다. ...

짙은 잿빛 머리칼에 수염이 있어서 야성적인 느낌을 주는 남자가 한 명. ...

서늘한 눈빛에 갈색 머리칼을 가진, 무표정한 남자가 한 명. ...

다른 분위기지만 둘 다 훤칠하게 잘생겼다. ...

브리트니는 예전에 파티에서 케이를 호위하던 그들을 본 적이 있었다. 야성적인 느낌의 남자는 월라스, 서늘한 눈빛을 가진 남자는 유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

위틀로 공작 일가가 다가가자, 그들이 허리에 찬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이유도 묻지 않고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위틀로 공작가의 호위 기사들도 바짝 긴장했다. ...

위틀로 공작가의 호위 기사들은 유진과 월라스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덤벼도 유진과 월라스에게는 작은 상처 하나 입힐 수 없을 것이다. ...

“여기가 아이리스의 방인가?” ...

글로번이 짐짓 위엄 있게 물었다. ...

“그린 백작 부인의 방입니다.” ...

유진이 대꾸했다. ...

“내가 누군지는 경들도 알고 있겠지? 나는 딸을 만나러 왔네.” ...

“그린 백작 부인께서는 바쁘십니다.” ...

“바쁘다, 바쁘다, 바쁘다! 그놈의 바쁘단 소리를 며칠 전부터 들었는 줄 알아? 계집애가 할 일이 뭐가 있다고!” ...

글로번의 인내심이 한계에 부딪혔다. 버럭 외치는 말에, 월라스가 인상을 구겼다. ...

“도대체 부모가 자식을 만나겠다는데 이렇게 막는 건, 어느 나라 예법인가? 당장 비켜! 나는 오늘 딸을 만나야겠으니까!” ...

글로번이 한 걸음 앞으로 나갔지만, 월라스와 유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

브리트니가 얼른 글로번의 팔을 잡았다. ...

“아버지, 진정하세요.” ...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다들…… 우리 아이리스에게 몹쓸 짓이라도 하는 거 아니야? 그래서 아이리스가 바쁘다는 말로, 우리를 피하는 척하게 만드는 거 아니냐고?” ...

“그래요. 혹시 그린 백작이 우리 아이리스를 때리기라도 했나요? 우리 아이리스 얼굴에 흉을 남겨서, 아이리스가 우리를 피하는 거예요?” ...

데니스가 글로번을 거들었다. ...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유진과 달리, 월라스의 표정은 점점 무시무시해지고 있었다. ...

위틀로 가문의 기사들의 등에 식은땀이 맺혔다. ...

달칵- ...

그때, 방문이 열리고 시녀로 보이는 여자가 나왔다. 기품 있어 보이는, 검은 머리의 시녀가 유진에게 말했다. ...

“백작 부인께서 밖이 너무 시끄러운데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하셨어요.” ...

글로번은 방문이 열린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던졌다. ...

하지만 유진과 월라스의 예리한 감각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유진과 월라스는 글로번의 양쪽 팔을 하나씩 잡고, 거의 내동댕이치듯 복도로 밀어버렸다. ...

“이익!” ...

글로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

아무리 신성국의 가호를 받는 그린 가문이라고 해도, 공작인 자신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건 말도 안 된다. ...

이게 전부 능력이 있으면 신분 상승을 시켜주는 정부의 방침 때문이다. 개나 소나 귀족 작위를 얻으면서 신분 체계가 무너지니, 이렇게 경우 없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

“감히……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

글로번이 부들부들 떨면서 유진과 월라스를 노려봤다. ...

“나는…… 나는……!” ...

‘공작이야!’라는 말이 이들에게 통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

그래서 글로번은 외쳤다. ...

“아이리스의 아빠야!” ...

그 순간, 표정 없던 유진에게도, 찡그리고 있던 월라스에게도, 비웃음과 비슷한 조소가 입가에 맺혔다. ...

그걸 본 브리트니는 섬뜩해졌다. ...

‘왜 이런 표정이지? 아까 제이미도 그렇고…… 설마 진짜야? 진짜로 아이리스가 우리한테 당한 일을, 이 저택 사람들에게 다 말한 거야?’ ...

그럴 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

브리트니가 아는 아이리스는 그럴 만한 주변머리가 없는 인물이었다. 설령 있다고 해도, 집에서 하녀 취급을 받았다는 창피한 소리를 여기저기 떠들 리 없다. 대체 어느 누가 자신의 치부를 떠들고 다니겠는가? ...

‘하지만…….’ ...

그린 가문 고용인들의 태도는 명백히 이상했다. ...

위틀로 일가는 아이리스가 그린 가문과 연을 맺었다 해도, 여전히 자신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다. 결코, 자신들을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결혼 전처럼 부르면 오고, 엎드리라면 엎드리는 개처럼 살 거라고 여겼다. ...

‘아이리스…….’ ...

브리트니는 주먹을 꽉 쥐고 반쯤 열린 방문을 노려봤다. ...

‘그렇게는 안 될 거야. 너는 언제까지라도 위틀로 공작가의 꽃으로 살아가야 해. 그린 백작 부인이라니, 말도 안 되잖아. 나도 갖지 못한 걸, 네가 갖게 할 수는 없어.’ ...

신성국의 가호를 받는, 성유물의 수호자 그린 가문의 명예. ...

그린 가문이기에 누릴 수 있는 온갖 특혜. ...

그리고 모든 기사가 선망하는 기사인 케이의 부하들까지. ...

브리트니는 리시가 어느 하나도 갖지 못하기를 바랐다. ...

그때, 드디어 리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

리시는 마치 사내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날씬한 다리를 돋보이게 하는 검은색 바지와 흰색 셔츠. 그 위에 걸친 검은색 조끼와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짙은 갈색 부츠. ...

레이디가 할 법한 차림이 아닌데, 그 어떤 레이디보다도 우아하고 섹시한 모습에, 브리트니는 숨을 삼켰다. ...

‘저게 아이리스라고? 말도 안 돼…….’ ...

모르는 사람 같았다. ...

위틀로 일가를 오시하는 차가운 눈빛과 자신감 넘치는 미소, 턱을 살짝 든 오만한 자세의 아이리스는, 브리트니가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보게 될 거라 상상해본 적도 없는, 아이리스였다. ...

글로번과 데니스 역시 아이리스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기에, 처음에는 멍하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

뒤늦게 그녀가 아이리스라는 걸 알아본 글로번이 크게 외쳤다. ...

“아이리스! 그 꼴이 뭐냐?” ...

예전이었다면, 글로번의 꾸짖음에 리시는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겁에 질린 짐승처럼 바들바들 떨었을 것이다. ...

하지만 지금의 리시는 글로번의 고함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도리어 옅은 미소를 지었다. ...

“어머나. 다들, 오셨으면 말씀을 하시지.” ...

느른하게 흘러나오는 음성에, 위틀로 일가는 기가 막혔다. ...

“벌써 몇 번을 찾아오고, 몇 번이나 얘기했는데! 너, 지금 우리를…….” ...

“아버지.” ...

브리트니는 침착하지 못하게 성질내는 글로번의 팔을 잡았다. ...

이곳은 보는 눈이 많다. 모두의 앞에서 아이리스에게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그제야 글로번도 브리트니의 뜻을 눈치채고 성질을 억눌렀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시가 입을 열었다. ...

“결혼 준비로 바빠서, 사소한 일은 보고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

“사소? 사소한 일이라고? 우리가 이곳까지 몸소 찾아왔는데, 이게 너한테는 사소한 일이란 말이냐?” ...

글로번이 이를 으득 갈면서도, 아까보다는 작아진 목소리로 책망했다. ...

브리트니는 이 분위기를 바꿔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

“미안해, 아이리스.” ...

브리트니의 사과에 리시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

“네가 결혼하기 싫어하는데 이렇게 되어버려서…… 우리한테 많이 화가 난 거지? 그래서…… 우릴 보고 싶어 하지도 않고, 우리한테 안 좋은 일을 당했다고 거짓말도 하고……. 미안해. 네가 이렇게까지 그린 백작님을 싫어할 줄은 몰랐어.” ...

브리트니는 리시가 ‘그렇지 않아요. 난 거짓말 같은 거 하지 않았어요.’라며 반박하기를 바랐다. 사람 한 명을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는 건, 누명을 푸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

하지만 리시는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저 브리트니를 보며 은은한 미소를 짓다가 말했다. ...

“들어와요.” ...

 

+++

드디어 리시의 방에 들어온 브리트니는, 빠르게 방 안을 살펴봤다. ...

리시의 방은 깨끗하지만 화려하지는 않았다. ...

‘내 방보다는 별로네.’ ...

다행이다. ...

자신의 방보다 호화로운 방이었다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을 것이다. ...

글로번과 데니스는 자신들이 이 방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저벅저벅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 방을 둘러보던 브리트니도 얼른 자신의 부모 옆에 앉았다. ...

리시는 그들의 맞은편 소파에 앉더니 다리를 꼬았다.   건방진 태도에 데니스가 미간을 좁혔다. ...

“아이리스, 너. 지금 그게 무슨 태도니? 어른들 앞에서 예의 없이.” ...

“무례한 건 이해하세요. 가정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

리시가 발끝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

“하!” ...

글로번과 데니스가 헛숨을 내뱉었다. ...

사람이 너무 화가 나면 오히려 화낼 기운을 잃게 되는데, 그들의 상황이 딱 그랬다. ...

(32) 좋은 가족이 되어줄게. ...

“아, 제 시녀들을 소개해야겠네요. 이쪽은 페르니 가문의 크리시나. 그리고 이쪽은 루테크 가문의 에르웰이에요.” ...

리시가 소파 뒤에 나란히 서 있는 여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

화가 나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페르니와 루테크라는 가문 이름은 정확하게 들렸다. ...

둘 다 내로라하는 명성을 가진 가문이었다. ...

그런 가문의 여자들이 리시의 시녀를 하다니. ...

물론 공녀인 브리트니의 시녀 중에도 자작이나 남작 가문의 딸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페르니와 루테크 가문은 자작, 남작 정도의 작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명예가 있는 가문이었다. ...

그린 백작 가문이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 슬슬 실감이 되기 시작했다. ...

글로번과 데니스도 긴장했다. 일단 방에만 들어오면 리시를 호되게 혼내줄 생각이었는데, 명망 있는 가문의 시녀들 때문에 그럴 수 없게 됐다. ...

“그나저나 초대장에 날짜를 확실하게 적어뒀는데, 이렇게 이른 방문을 한 이유가 뭘까요? 내가 보고 싶어서는 아닐 테고.” ...

“그, 그거야…… 우리는 네가 걱정돼서…….” ...

데니스의 말에 리시가 빙긋 웃었다. ...

“무엇이 그리 걱정됐을까요?” ...

“걱정이 안 되겠니? 그린 백작이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너랑 결혼하겠다며 납치하듯이 데려갔는데…… 결혼식 소식은 들리지도 않고.” ...

“그래. 게다가 너, 안 좋은 소문도 났었잖아. 신문이고 잡지고 야단이더라. 결혼하자마자 네 치부가 다 드러나는 거 같아서, 내가 얼마나 걱정했다고.” ...

브리트니가 얼른 끼어들었다. ...

리시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

“왜…… 왜 그렇게 웃어?” ...

“재미있어서. 네가 걱정했다는 게.” ...

“내가 동생 걱정하는 게 재미있는 일이야?” ...

“아무래도 그렇지. 네가 후치스 자작을 부추겨서 여기로 보냈고, 그것 때문에 내가 곤란한 상황이 됐던 건데. 너도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거 아냐?” ...

“그게 무슨…… 내가 후치스 자작을 왜 여기로 보내? 미쳤니? 아, 그리고…… 너, 왜 말이 짧아?” ...

“네가 먼저 짧게 했잖아.” ...

“나는 네 언니야, 아이리스.” ...

“브리트니. 내가 아직도 아이리스 위틀로인 것 같니?” ...

리시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

“나는 아이리스 그린 백작 부인. 그린 백작가의 안주인에게 마땅한 예의를 보이면, 나도 예의를 보이도록 하지.” ...

“정말이지, 더는 못 봐주겠구나, 아이리스!” ...

데니스가 쨍하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

“집 떠나서 그린 백작 부인이 되었다고, 네가 위틀로 가문의 핏줄을 이었다는 게 없었던 일이 될 것 같니? 아무리 이번 결혼으로 마음이 상했다고 해도, 가족에게 그렇게 대하는 건 레이디가 할 짓이 아니지 않니?” ...

데니스는 분노를 참기 위해 잠시 말을 끊었다. ...

남편이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하녀와 정을 통해 낳은 아이. ...

마음 같아서는 그 자리에서 죽이고 싶었지만, 꾹 참고 길렀다.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는 별칭까지 붙여주며, 20년을 키웠다. ...

그런데 돌아오는 게 이런 태도라니. 몇 시간도 못 살고 죽을 것을, 이제껏 살려줬더니! ...

“우리가 지금껏 너에게 어떻게 대했는데…… 잘 먹이고, 잘 키워줬으면 응당 그 은혜를 갚아야 하는 것이야.” ...

“은혜.” ...

리시는 그 단어가 생전 처음 듣는 단어라는 듯, 생경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

“은혜. 그래요. 그래서 갚고 있지 않나요, 공작부인. 당신들이 내게 한 것보다 더 상냥하고 다정하게 대해주는데…… 이것으로는 부족한가요? 아, 당신들이 내게 한 것과 똑같이 해주기를 바라는 거라면…….” ...

리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브리트니는 섬뜩함을 느꼈다. ...

“설거지를 시켜드릴까요? 아니면 창문을 닦게 하거나. 훔치지도 않았는데 누명을 뒤집어씌워 창문도 없는 창고에 밥도 주지 않고 가둬둘까요? 하지도 않은 일로 혼내며 매를 때릴까요? 당신들이 내게 한 그대로, 내가 해드리기를 바라는 건가요? 진정?” ...

리시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담담한 진실에, 위틀로 일가는 숨도 쉴 수 없었다. ...

리시가 자신의 치부를 시녀들 앞에서 고스란히 드러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

“헐…… 미친 새끼들이었네…….” ...

리시의 뒤쪽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리시는 뒤를 흘끗 돌아봤다가, 다시 위틀로 일가를 마주 보며 말했다. ...

“왜들 그런 표정이죠? 혹시 내가 시녀들 앞이라서 이런 이야기를 하지 못할 줄 알았나요?” ...

리시가 재미있다는 듯 두 다리를 테이블에 올리고 팔짱을 끼었다.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은 자세로, 말을 이었다. ...

“왜 그렇게 생각하셨을까? 맞고, 학대당하고, 누명을 뒤집어쓰고, 툭하면 굶고, 갇히고, 그래서 울었던 건 내 잘못도, 내가 부끄러워할 일도 아닌데.” ...

“아, 아이리스…….” ...

글로번이 간신히 입술을 달싹거렸다. ...

“잠시…… 우리끼리 이야기 좀 하자.” ...

“글쎄요.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네요. 그쪽도 셋, 이쪽도 셋. 이게 공평하잖아요.” ...

“우, 우리 가족끼리 얘기 좀 하자는 거야.” ...

“머리가 나쁘시네.” ...

리시가 미간을 좁혔다. ...

“뭐, 뭐라고!” ...

“지금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나, 당신들 가족 아니라고 말하는 거야.” ...

“아이리스!” ...

글로번이 더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당장이라도 리시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다는 듯 노려봤다. 꽉 쥔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

예전의 리시였다면 글로번의 언성이 조금 높아지기만 해도 고개를 푹 숙이고 바들바들 떨었을 것이다. ...

하지만 지금 그들 앞의 리시는, 여전히 오만한 자세로 소파에 몸을 파묻고 앉아 글로번을 흘끔 올려다볼 뿐이었다. ...

“앉아요, 위틀로 공작님. 여기는 위틀로 저택이 아니고, 나는 아이리스 위틀로가 아니니까. 위틀로 저택에서처럼 그 주먹이 내 머리를 치면, 여기서는 큰일이 벌어질 거예요.” ...

“내가…… 내가 언제 널 때렸다고!” ...

“아, 그걸 하려는 거군요. 날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이는 거.” ...

물론 그럴 생각이었다. ...

글로번도, 데니스와 브리트니도, 어떻게든 리시가 지금 내뱉은 모든 말을 거짓말로 만들어버릴 궁리를 하고 있었다. ...

“얼마든지 해도 좋아요. 하지만 이건 기억하세요. 당신들이 내게 해코지를 시작하는 순간, 나는 관청에 달려가서 나와 위틀로 공작가의 연을 끊어달라고 신청할 거예요. 그들은 이유를 묻겠죠. 그러면 나는 당신들에게 당한 일을 솔직하게 고백할 거예요.” ...

데니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리시가 검지를 들어 멈추게 하고 계속해서 말했다. ...

“물론 당신들은 그 자리에서도 날 거짓말쟁이로 만들려고 하겠죠. 하지만 내가 위틀로 저택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아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걸 잊지 마세요.” ...

글로번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

“이번에는 그들을 죽여 입을 다물게 할 수도 없을 거예요. 앞으로 나는 위틀로 공작가 고용인들의 움직임을 주시할 거고, 전처럼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거나 원인 모를 죽임을 당한 채 발견되면, 고발할 거예요. 관청에, 황실에, 그리고 신성국에. 아이리스 위틀로에게는 그럴 힘이 없었지만.” ...

리시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어찌나 달콤한 미소를 짓는지,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연인을 향한 미소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

리시는 미소를 띤 채 천천히 일어나 위틀로 일가를 내려다봤다. ...

“아이리스 그린 백작 부인에게는 그럴 힘이 있으니까.” ...

리시가 검지를 뻗어 방문을 가리켰다. ...

“그만 나가요. 피곤하니까.” ...

 

+++

쫓겨나듯 리시의 방에서 나와 서채로 돌아오는 내내, 위틀로 일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서채의 손님용 방에 들어가자마자, 데니스와 브리트니가 분통을 터뜨렸다. ...

악다구니를 쓰는 두 여자 사이에서, 글로번은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

‘시리엘…….’ ...

아주 오랜만에 그 이름을 떠올렸다. ...

오래전, 글로번이 억지로 굴복시켜 자신의 것으로 만든, 예쁘고 당찬 하녀. ...

-날 여기서 죽이는 게 좋을 거야, 글로번. 살려두면 반드시 네놈을 죽여버릴 거니까. ...

막 태어난 아이리스를 품에 안고, 글로번을 노려보던 섬뜩한 눈동자. ...

지금껏 아이리스를 보면서 제 어미와 닮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린 백작 부인이 된 아이리스는, 그녀의 어머니와 눈빛도, 성격도, 닮아 있었다. ...

그걸 깨닫는 순간, 글로번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아이리스는 위틀로 공작 가문이 만든 새장을 벗어났다. 앞으로 그 무슨 짓을 해도 아이리스가 새장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

그나마 아직 아이리스가 위틀로 가문과 정식으로 절연하지 않았다는 것이 위안이었다. ...

차라리 이대로 아이리스의 기분을 맞춰주면서 그린 가문과 연을 맺어두는 편이 나았다. 언젠가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

“돌아가자.” ...

지금은 돌아가는 게 낫다. 아이리스가 자신들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지금, 백작 저에 오래 머물러서 좋을 게 없었다. 결혼식 당일에 찾아와서 얼굴만 비출 생각이었다. ...

“돌아가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대로 물러나자는 거예요? 저 계집애가 저렇게 본 데 없이 구는데?” ...

데니스는 글로번과 생각이 달랐다. ...

어떻게든 아이리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줄 계획이었다. ...

“저 애가 싫다잖소. 저 애 말대로 여긴 그린 백작 저택이고, 저 애는 이 저택의 안주인이야. 안주인이 싫다는데 계속 머물러봐야…….” ...

“하! 저 애가 뭐라 하든, 저 애는 아이리스 위틀로예요. 우리가 먹여주고 재워주고 이때까지 키워준, 아이리스 위틀로라고!” ...

“맞아요, 아빠. 이대로 돌아가는 건 진짜 아닌 것 같아요.” ...

브리트니가 데니스를 거들었다. ...

“쟤가 우리 가족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떠들어대면 어떡해요? 차라리 여기 머물면서, 우리가 좋은 사람들이라는 걸 보여주는 편이 나아요.” ...

“그래요, 여보. 내가 여기서 아이리스를 괴롭히겠다는 게 아니에요. 우리 이미지도 관리해야지. 우리가 여기서 돌아가면, 저 애의 헛소리를 전부 진짜라고 생각할 거 아니에요.” ...

글로번은 과연 자신의 아내와 딸이 이곳에 남아 있는다고 해서, 이미지가 바뀔지 의문이었다. ...

하지만 데니스와 브리트니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

글로번은 끄응,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굴렸다. ...

그린 가문의 결혼식이니 분명 각 나라의 황실과 왕실에서도 사람을 보낼 것이다. 황제까지는 아니더라도 황태자나 황자, 왕자들은 참석하리라. ...

글로번은 가비자르 제국의 이오벳 황태자를 사윗감을 노리며, 뒤에서 여러 가지 공작을 펼치고 있었다. ...

‘황태자는 이런 자리에 참석을 안 하는 편이니 올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

만약 아이리스가 결혼식에서까지 쓸데없는 소리를 떠들어대서, 황실 측 사람의 귀에 들어가면 큰일이었다. 이곳에 머물며 아이리스의 비위를 맞춰주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

위틀로 일가는 결혼식까지 그린 백작 저택에 머물기로 했다. ...

+++

“위틀로 일가는 결혼식까지 머물 거라고 합니다.” ...

제이미의 보고를 들으며 리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

리시가 예상한 대로였다. ...

앞으로 위틀로 일가가 어떻게 나올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

‘내게 잘 대해주겠지. 결혼식에는 황실 측에서도 사람을 보낼 테니, 그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주고 싶을 거야.’ ...

그렇다면 그들이 해주는 거짓 대우를, 잘 받아줄 생각이었다. ...

‘얼마나 좋은 부모, 좋은 언니 역할을 하는지 지켜봐주지. 큰 노력이 필요할 거야.’ ...

(33) 좋은 꿈. ...

제이미는 앞으로 위틀로 일가를 어떻게 대하는 게 좋겠냐고 물었다. ...

“잘 대해줘요. 평범한 손님을 대하듯이.” ...

내가 이제 아이리스 위틀로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건, 이 정도면 됐다. 앞으로의 무례는 오히려 그린 가문에 해가 될 것이다. ...

“아, 그리고 아이리스 님. 대장이 내일쯤 도착할 거라고 합니다.” ...

“그렇군요.” ...

제이미가 나간 후, 리시는 시녀들을 물리고 혼자 방 응접실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

케이가 돌아온다. ...

그리고 이 저택에는 브리트니가 있다. ...

지난 삶, 황태자와 결혼한 브리트니는 케이를 자신의 애인으로 뒀다. 물론 애정이 아닌, 필요에 의한 계약 연애였다. ...

브리트니 쪽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케이는 확실했다. 가족을 잃고 엘드허트마저 영원한 잠에 빠지게 되자, 케이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

케이에게는 더욱 강한 권력이 필요했고, 브리트니에게는 사교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자를 곁에 두는 게 필요했다. 둘은 손을 잡았고, 그들의 동맹은 잘 유지되는 것처럼 보였다. ...

적어도 케이가 수인이라는 게 들통나기 전까지는. ...

‘이번 삶에서는 어떨까?’ ...

리시는 소파에 비스듬히 드러누웠다. ...

‘이번에도 케이가 브리트니를 필요로 하게 될까?’ ...

리시는 그린 가문의 누구도 죽게 놔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

하지만 미래를 바꾸는 것이, 시간의 흐름에 어떤 영향을 가져올지 알 수 없었다. ...

[운명은 반드시 이뤄진다.] ...

언젠가 읽었던 책에서 그런 글귀를 보았다. ...

만약 운명이 반드시 이뤄진다면, 리시가 후에 있을 사건에서 그린 노백작 부부와 젠을 살려도, 또 다른 죽음의 운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

새로운 운명은 리시가 알 수 없기에, 다시 덮쳐오는 죽음으로부터 그들을 구할 수 있을지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리시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

‘아니,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로 두려워할 이유는 없어. 나는 그냥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돼.’ ...

지금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려고 했는데, 생각의 초점이 다시 브리트니와 케이에게로 맞춰졌다. ...

지난 삶, 어느 파티에 참석했을 때, 브리트니가 30분 후에 정원에서 보자고, 할 얘기가 있다고 말했다. ...

약속 시각에 맞춰 정원에 간 리시는, 브리트니와 케이가 입 맞추는 장면을 목격했다. 브리트니는 케이의 목에 두 팔을 두르고 입을 맞추며, 리시를 응시했다. ...

‘이것 봐. 이렇게 멋진 남자가 내 연인이야. 나는 앞으로 곧 황제가 될 남편을 가졌고,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연인을 가졌지. 부럽지 않니?’ ...

브리트니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리시는 브리트니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리시는 알포드의 부인이었고, 케이처럼 굉장한 남자를 마음에 품을 주제도 되지 않았다. ...

리시에게 그린 백작은 얼굴 한번 보기 힘든, 멀고도 높은 존재였다. 리시는 브리트니가 가진 걸 뺏으려고 한 적도 없고, 브리트니는 리시가 결코 손에 넣지 못할 것들을 전부 가졌다. ...

그런데 왜 굳이 그런 장면까지 보여주며 우쭐해했던 걸까? ...

그러지 않아도 리시의 삶은 어둡고 절망적이었는데. ...

내버려둬도 진탕 속에서 살다가 죽었을 텐데. ...

‘그러고 보니…… 입을 맞췄지. 케이랑 브리트니…….’ ...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고 넘겼던 그 장면이, 유독 생생하게 떠올랐다. ...

‘그때 케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브리트니는 예쁘니까 아무리 계약 때문에 하는 연애라고 해도, 좋긴 좋았겠지?’ ...

남자라면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법이니까. ...

‘브리트니는 남자 앞에서 애교도 많으니까…… 어쩌면 정말로 브리트니에게 끌렸을지도 몰라.’ ...

케이가 브리트니를 어떻게 대했을지 궁금했다. ...

‘지금의 날 대하는 것처럼 대했을까?’ ...

리시의 앞에서 케이는 달았다. 몹시도 달아서 녹아버릴 것 같을 때가 종종 있었다. ...

울컥, 하고 아랫배 부근에서 명치까지, 기묘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리시는 가만히 자신의 명치에 손바닥을 댔다. ...

‘뭐야, 이건…….’ ...

왜인지 짜증이 난다. ...

지난 삶에서 벌어진 일이고, 이번 삶에서는 벌어지지 않을 일인데. ...

아니, 걱정된다. ...

이번 삶에서도 브리트니와 케이가 그렇게 키스하는 일이 벌어질까 봐. ...

케이가 브리트니를 유용하다고 여기고, 리시 몰래 계약 연애를 시작할까 봐. ...

리시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

벌어지지도 않은 일로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은데, 왜 자꾸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건지 모르겠다. ...

위틀로 일가가 이 저택에 머무는 걸 허락한 게 후회됐다. 케이와 브리트니가 만나는 일이 없었으면 했다. ...

리시는 두 다리를 올려 허공을 걷어찼다. 그래도 기분이 안 풀려서 몇 번이나 더 허공을 걷어차다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다리를 내렸다. ...

“적당히 해, 아이리스. 적당히.” ...

리시는 눈을 감았다. ...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좀 나아지겠지. ...

잠결에 머리를 스치는 손길을 느꼈다. ...

머리칼을 헤집고 들어온 손가락이 두피를 기분 좋게 자극했다. ...

‘누구지?’ ...

답은 금방 나왔다. ...

‘케이가 돌아왔구나.’ ...

그렇다면 일어나서 인사를 해야겠다. ...

그런데 무언가 딱딱하고 따뜻한 것이 리시의 볼에 닿았다. ...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나른하고 기분 좋은 온기에, 리시는 다시금 잠에 빠져들었다. ...

+++

어젯밤, 리시는 알포드를 늦은 시간까지 기다리다가 잠깐 졸고 말았다. ...

그사이에 술에 취해 들어온 알포드는, ...

“감히 남편이 들어오기도 전에 잠을 자?” ...

라며, 리시를 때렸다. 단단한 매로 종아리를 몇십 대나 맞았다. 희고 연한 피부에 쫙쫙 붉은 줄이 새겨지다가, 결국 피가 흐르고 말았다. ...

그런데도 알포드는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

그렇게 한참 때리던 알포드는, ...

“앞으로 잘하란 말이야. 응?” ...

하고 삿대질을 하더니,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

리시는 잘 수 없었다. 맞은 곳이 너무 쓰리고 아팠다. ...

이제 몇 년 후면 마흔 살인데도, 여전히 매질을 당하는 자신의 신세가 한심했다. ...

변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여러 번인데, 막상 그런 상황이 닥치면 얼어붙었다. 잘못해도, 하지 않아도, 수시로 폭행을 당해온 리시의 육체는, 상대의 눈빛이 조금만 험악해져도 움직임을 잃곤 했다. ...

리시는 멍하게 앉아, 즐거운 표정으로 파티를 즐기는 남녀를 지켜봤다. ...

어젯밤 맞은 종아리가 욱신욱신 쑤셨다.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서 곪고 있나 보다. ...

더는 미소지으며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절뚝거리며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리시가 사라진 걸 알면 알포드가 화를 내겠지만, 지금은 그런 나중의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

‘아파…….’ ...

리시는 울고 싶었지만 울지 않았다. 눈물을 흘린다고 이 통증이 가라앉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

아무도 오지 않는 정원 구석의 벤치에 앉아, 치마를 살짝 걷어 올렸다. 시원한 공기가 치마 안쪽으로 들어와서, 통증이 아주 조금은 가셨다. ...

“대장, 피아몬도의 움직임이 수상해요. 잘 지켜봐야 합니다.” ...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이 파티에 온 거다. 그나저나 그 귀걸이는 가져왔나?” ...

“네, 갖고 오긴 했는데…… 이건 성유물이 아닌 것 같아요. 뭐, 반짝거리고 예쁘긴 하네요.” ...

“일단 살펴보도록 하지.” ...

“피아몬도 잘 살펴보시고요. 먼저 가볼게요.” ...

누군가 자리를 뜨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또 누군가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소리. ...

리시는 숨을 멈추고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관목 사이로 나온 그에게서 모습을 숨길 수는 없었다. ...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 ...

브리트니의 연인. ...

리시를 발견한 케이는 무척 당황한 듯했지만 허둥대지는 않았다. ...

“후치스 자작 부인.” ...

케이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

리시는 케이가 자신을 안다는 게 놀라웠다. ...

리시도 일어나서 그의 인사를 받아줘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종아리가 찌르는 듯 아팠기 때문이다. ...

“어디 아프십니까?” ...

케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누군가 이토록 다정하게 리시의 상태를 걱정해준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

리시는 입을 꾹 다물고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

“아프신 것 같은데…… 식은땀이…….” ...

케이가 리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

리시는 자신이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

치맛자락 사이로 리시의 종아리를 본 케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

“대체 누가 이런…….” ...

리시는 황급히 치마를 내렸다. ...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린 백작님.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

리시의 절박한 말에 케이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그는 한동안 리시를 응시하다가 말했다. ...

“참고 감추는 것이 모든 일을 해결해주지는 않습니다.” ...

“알아요. 하지만…… 참고 감춰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도 있답니다.” ...

케이는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곧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일어났다. ...

“알겠습니다, 자작 부인. 상처에 연고를 발라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안 그러면 그 예쁜 종아리에 흉터가 남을 테니.” ...

“고마워요.” ...

리시는 케이가 얼른 가줬으면 했다. 이런 모습을 들킨 것도 창피하고, 아프지 않은 척하는 것도 괴로웠다. ...

다행히 케이는 관목 사이로 떠나갔다. ...

리시가 크게 한숨을 뱉어내려는데, 케이가 다시 돌아왔다. ...

리시는 한숨을 쉬기 위해 입술을 벌린 상태로 굳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케이를 올려다봤다. ...

케이는 리시를 향해 주먹을 내밀었다. 리시는 뭘 하라는 건가 싶어서 가만히 그의 주먹을 내려다봤다. ...

“받으세요.” ...

“무엇을?” ...

케이가 답답한 듯 리시의 손목을 잡아올려, 리시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줬다. 파랗고 작은 보석이 달린 귀걸이였다. ...

리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

“트리사의 귀걸이라고, 지니고 있으면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귀걸이입니다.” ...

“아…….” ...

“부디 후치스 자작 부인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 ...

 

+++

리시는 눈을 떴다. ...

-부디 후치스 자작 부인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 ...

따스한 음성이 귓가에 머물렀다. ...

‘지난 삶의 꿈을 꿨네.’ ...

리시가 처음으로 받아본 다정한 온기, 고마운 배려. ...

지난 삶, 대화 한번 제대로 나눠보지 못한 케이가 자신을 안다는 것도 신기한데, 그는 리시를 불쌍히 여겨 귀걸이까지 선물해줬다. ...

행운을 준다는 트리사의 귀걸이. ...

그 귀걸이는 리시에게 아무 행운도 가져다주지 않았지만, 그것을 낄 때마다 케이의 다정한 위로가 느껴져서, 알포드 몰래 종종 끼곤 했었다. ...

죽던 날 밤에도, 리시는 그 귀걸이를 차고 있었다. ...

그날의 일을 떠올리자, 리시는 가슴이 따뜻해졌다. ...

‘그러고 보니, 케이는 그때도 내 종아리를 보면서 예쁜 종아리라고 했구나. 그게 말버릇인가?’ ...

지난 삶 케이를 봤을 때 리시가 느꼈던 감정과 지금 케이를 볼 때 리시가 느끼는 감정이 겹쳐져서 웃음이 나왔다. ...

지난 삶에서 케이는 정말 어렵고 위대하고 머나먼 존재였는데. ...

이번 삶에서 케이는 뚱땡이 개라고 불리고, 리시에게 털을 빗겨달라고 하는, 귀여운 늑대였다. ...

“기분 좋은 꿈 꿨어요?” ...

문득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

고개를 돌려보니, 케이가 손에 머리를 괴고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

“왜 그렇게 놀라요? 남편 몰래 나쁜 짓이라도 한 것처럼.” ...

“언제 왔어요?” ...

“늦은 밤. 소파에서 자고 있기에, 침대로 옮겼어요. 옮긴 줄도 모르고 자던데요.” ...

그러고 보니, 리시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

어제 입은 차림 그대로. ...

부츠는 케이가 벗겨준 듯했다. ...

“깨우지.” ...

“곤히 자는데, 굳이 깨울 필요가 뭐가 있어요? 잘 잤어요?” ...

“응, 무척이나.” ...

“좋은 꿈 꿨어요?” ...

케이가 다시 물었다. ...

그제야 리시는 케이가 자신에게 슬리브 스톤을 사용했다는 걸 깨달았다. ...

“무척이나.” ...

당신이 나오는 꿈을 꿨어요. ...

당신이 내게 다정한 온기를 나눠주는 꿈. ...

“행복한 꿈을 꿨어요.” ...

(34) 사교계의 여신 ...

“그거 다행이네요. 무슨 꿈 꿨어요?” ...

당신 꿈을 꿨어요, 라고 말하기 민망했다. ...

리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

“윈디를 타는 꿈을 꿨어요.” ...

“그거 실망인걸.” ...

“응?” ...

“내 꿈을 꿨으면 했거든.” ...

케이가 손등으로 리시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의 손등이 닿은 부위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

새삼스럽게 이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이 내 앞에서 제 꿈을 꾸지 않았다고 투덜거리다니. ...

이게 정말 현실일까? ...

어쩌면 이거야말로 행복한 꿈인 것이 아닐까? ...

죽음 속에서 내가 원하는 환상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 ...

문득 두려워져,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바닥을 그의 뺨에 대고 그의 체온을 확인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손을 움직여 그의 단단한 팔을, 가슴을, 허리를……. ...

“리시. 그만.” ...

그가 리시의 손목을 잡았다. ...

“날 그만 자극해. 지금도 간신히 참고 있는 거니까.” ...

“아…… 미안해요.” ...

자기가 무슨 행동을 했는지 깨달은 리시가 얼굴을 붉히자,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

“미안할 건 없고. 아내가 아침부터 이렇게 적극적으로 내 몸을 더듬어주는 것도 썩 나쁘지 않군요. 만약 내가 참지 않아도 되는 거라면…….” ...

케이가 자세를 바꿔, 리시의 위로 올라탔다. 그는 팔꿈치로 자신의 상체를 지탱하고 리시를 내려다봤다.   그의 단단한 허벅지가 리시의 허벅지에 부딪혔다. 그와 밀착된 배가 신경 쓰여서, 리시는 숨을 멈췄다. ...

“감사한 마음으로 먹어치우고 싶은데.” ...

그의 음성이 은밀한 부분을 자극했다. ...

리시는 사내의 무게가 두려웠다. 그러나 지금 리시를 짓누르는 그의 무게는 두렵지 않았다. ...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알고 싶었다. 평소보다 열띤 그의 눈동자가 얼마나 더 뜨거워질 수 있는지. ...

문득 지난 삶에서 브리트니와 입맞춤하던 케이가 떠올랐다. ...

그때 케이는 어떤 눈빛이었을까? ...

이렇게 관능적인 열기를 띠고 있었을까? ...

“그렇게 무서워하지 말아요, 리시. 농담이니까.” ...

리시의 눈빛을 오해한 듯, 케이가 싱긋 웃으며 리시에게서 내려와 도로 옆에 누웠다. ...

리시는 아쉽다는 마음이 드는 게 당혹스러워서,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

케이는 나른하게 누워서 리시를 올려다봤다. ...

“그래서 윈디랑은 어때요? 내가 없는 동안, 꿈까지 꿀 정도로 많이 친해진 거예요?” ...

“음. 그 애에게 사과를 주면 내 손을 먹으려고 해요. 유니콘이 육식하는 줄은 몰랐어요.” ...

케이가 키득키득 웃었다. ...

“유니콘은 뭐든 먹죠. 잡아먹히지 않게 조심해요, 리시. 뭐든 당신의 처음은 나였으면 하거든.” ...

“늑대의 먹거리가 되는 편이 나을 것 같진 않은데요.” ...

“그건 두고 보자고요.” ...

케이가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리시의 허벅지에 제 머리를 올렸다. ...

리시는 망설이다가 그의 머리칼에 손을 올렸다. 그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헤집었다. 손가락 끝이 그의 두피에 닿았다. 리시는 부드럽게 그의 두피를 자극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

“내게 슬리브 스톤을 사용한 거예요?” ...

케이는 대답 대신 품에서 팔찌를 꺼냈다. 중앙에 파란색의 작은 진주 같은 것이 박힌 팔찌였다. ...

“쿼튼 족 족장이 팔찌로 예쁘게 가공해뒀더군요.” ...

“순순히 주던가요?” ...

“약간의 마찰이 있었지만, 대화로 해결했죠.” ...

과연 대화로 해결했을까? ...

리시가 슬리브 스톤을 만져보려고 손을 뻗자, 케이가 얼른 그것을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

“막 만지는 건 안 돼요, 리시. 그렇게 위험한 건 아니지만, 가끔 불행하거나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만지면 위험해질 수도 있거든요. 내가 옆에 있으니 그렇게까지 큰 문제는 안 생기겠지만.” ...

“내가 죽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여요?” ...

리시의 질문에 케이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

“흩어질 것처럼 보일 때가 있어요.” ...

몰랐다. ...

리시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자신이 그렇게 위태로워 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

오만해 보일 정도로 당당하게, 그렇게 살아가려고 했는데. ...

‘아직 멀었구나.’ ...

마음을 다잡으며 케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

“나는 흩어지지 않아요, 케이.” ...

“그래요. 그래도 이걸 막 만지는 건 안 돼요.” ...

“그것도 성유물 보관소에 넣어둘 건가요?” ...

“아니. 신성국에는 아직 비밀이거든요. 내 아내가 스스로 좋은 꿈을 꿀 때까지는 잘 사용해주려고요.” ...

“그렇게 막 사용해도 되는 거예요?” ...

“괜찮아요. 내가 수호자인데, 누가 뭐라 하겠어요?” ...

케이는 지난 삶에 보았을 때와 이미지가 달랐다. ...

좀 더 우직하고 융통성 없는 성격인 줄 알았는데, 자신의 아내를 위해 신성국의 눈을 속이는 면도 있을 줄은 몰랐다. ...

“잘 관리해야 해요, 케이. 잃어버리지 말고, 아무나 줍게 하지 말고.” ...

케이가 고른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왜 그렇게 웃어요?” ...

“아니, 그냥. 아내에게 잔소리를 듣는 것도 꽤 괜찮구나 싶어서.” ...

“잔소리가 아니라 걱정하는 거거든요.” ...

“네, 네. 알겠습니다, 부인.” ...

싱글싱글 웃는 케이가 얄미워서, 그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

그는 입가에 미소를 묻힌 채 눈을 감았다. ...

“당신이랑 이러고 있으니 잠이 솔솔 오네요.” ...

그러고 보니 케이는 피곤해 보였다. ...

“좀 자요.” ...

“응. 아, 위틀로 일가가 방문했다던데.” ...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잠이나 자요.” ...

“난 당신이 그런 말투로 말할 때가 좋더라.” ...

“어휴, 좀.” ...

손바닥으로 케이의 입술을 살짝 눌렀다. ...

케이가 작게 웃었다. ...

잠시 후, 케이의 입가에서 힘이 빠지고 그의 얼굴 근육이 나른하게 풀어졌다. ...

그가 잠든 후에야, 리시는 자신이 웃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

리시는 웃음을 거두고, 슬리브 스톤을 넣어둔 케이의 주머니로 시선을 옮겼다. ...

‘괜찮을까? 저걸 없애지 않아도?’ ...

리시는 케이의 가족에게 벌어질 일을 막을 계획이었다. ...

하지만 만약 그게 잘못된다면, 혹은 막았는데도 그만한 불행이 닥쳐온다면. 저것이 엘드허트를 영원한 잠에 빠지게 해서, 케이를 더 불행하게 만들지는 않을까? ...

‘하지만…… 케이가 저걸 가져온 것만으로도 지난 삶보다는 안전해졌어.’ ...

성유물이 뿜어내는 힘을 억누를 수 있는, 수호자의 힘. ...

케이가 가진 한, 누군가 저걸 건드려서 영원한 잠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

‘그래, 어차피 내가 저걸 부술 방법도 없고.’ ...

망치로 때리거나 높은 곳에서 던져보려고 했지만, 그런 거로 성유물이 부서질 것 같진 않았다. ...

마지막 방법은 저걸 깊은 호수에 던져버리는 건데, 케이는 리시에게 슬리브 스톤을 선물해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

‘남편 걸 훔칠 수는 없지.’ ...

리시는 변화가 생기기 전까지, 슬리브 스톤을 케이에게 맡겨두기로 했다. ...

+++

케이는 딱 한 시간만 자고 일어나, 처리할 업무가 있다며 서재로 가버렸다. ...

리시는 따뜻한 물에 씻고 나와서 수수한 원피스로 갈아입고 식당으로 향했다. ...

식당에는 나단과 월라스가 있었다. 리시가 들어가자,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

“형수님, 대장은 일이 많아서 조금 늦게 오신대요. 먼저 드시라고 하셨어요.” ...

나단이 보고했다. ...

리시가 의자에 앉자 나단과 월라스도 앉았다. 요리사가 와서 오늘 마련한 요리를 읊었다. 리시는 수프와 생선구이를 선택했고, 나단과 월라스는 고기와 고기, 그리고 또 고기를 선택했다. ...

덩치가 큰 월라스야 그렇다 쳐도, 호리호리하고 작은 체구의 나단이 저렇게 많이 먹는다는 게 신기했다. ...

“형수님, 윈디랑은 좀 친해지셨어요? 그 녀석, 이름이 마음에 든다고 하더라고요.” ...

월라스의 말에, 리시가 포크를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윈디랑 대화가 가능해요?” ...

월라스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

“예? 아…… 아아…… 니요. 그게…… 어…… 느낌상, 그렇다고요.” ...

월라스의 태도가 수상쩍었다. 나단은 뭔가 아는 게 있는 듯 웃음을 참고 있었다. ...

“그래요? 내가 보기엔 싫어하는 것 같던데. 어제 윈디라고 불렀더니 뒷발질을 하더라고요.” ...

“그거 괜히 그러는 걸 거예요. 관심 끌려고.” ...

“윈디에 대해 잘 아네요, 월라스.” ...

“아뇨, 전혀요. 저는 아는 게 전혀 없어요. 제가 뭘 알겠어요.” ...

월라스가 두 손을 저으며 말했다. ...

월라스가 케이를 배신할 일은 없겠구나. 저렇게 거짓말을 못하는 걸 보면. ...

리시는 월라스가 뭘 저렇게 숨기고 싶어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

리시가 빤히 쳐다보자, 안절부절못하던 월라스가 빵을 반으로 잘라서 내밀었다. ...

“드실래요?” ...

“야, 네가 먹던 걸 드리고 그래?” ...

나단이 월라스의 손목을 탁, 쳐서 빵을 떨어뜨렸을 때, 식당 문이 활짝 열리며 젠이 들어왔다. ...

“리시! 내 새언니!” ...

젠이 두 팔을 벌리고 리시를 향해 걸어왔다. 격렬한 환호에 당황스러웠지만, 리시는 침착하게 일어나 젠을 맞이했다. 젠이 리시를 꽉 끌어안았다가 놔줬다. ...

“나 없는 동안 잘 지냈어요?” ...

“덕분에요. 젠은 잘 지낸 것 같네요.” ...

“돈을 흥청망청 쓰는 건 즐거운 일이거든요. 이 집안 재산을 거덜 낼 각오를 했더니, 절로 행복해지더라고요.” ...

이 집안 재산을 거덜 낼 정도의 파티라니. ...

농담이겠지. ...

“아, 소개할게요. 넬라니커스 제널 백작 부인이에요. 내 아카데미 동기죠.” ...

젠이 문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

그제야 문가에 서 있던 우아한 여성이 천천히 걸어와 리시의 앞에 섰다. ...

“인사드려요, 그린 백작 부인. 젠에게 말씀 많이 들었어요. 그전에도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요.” ...

넬라니커스 제널. ...

젠에게 청첩장을 받아서 확인했을 때, 그 이름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

사교계의 여신 넬라니커스 제널 백작 부인. ...

지난 삶, 사교계를 휘어잡은 그녀의 권력은 황후가 된 브리트니보다도 커지게 된다. 브리트니가 아무리 호화로운 파티를 열어도, 넬라가 참석하지 않으면 그 파티는 빛을 잃었다. ...

브리트니는 넬라와 친해지려고 노력했지만, 왜인지 넬라는 브리트니를 멀리했고, 브리트니가 여는 파티에도 잘 참석하지 않았다. ...

지난 삶, 리시는 딱 한 번 넬라의 파티에 초대를 받아서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 파티에서 넬라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몇 번이나 넬라와 눈이 마주쳤다. 넬라는 리시를 관찰하는 것 같았다. ...

그때, 넬라가 아무 친분도 없는 리시를 파티에 초대했는지, 어째서 그렇게 관찰하는 듯한 시선을 보낸 건지는 끝까지 알 수 없었다. ...

그 이후로 넬라의 파티에 초대되는 일도, 다른 파티에서 넬라와 마주치는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지난 삶의 일은 지난 삶의 일일 뿐. 이번 삶에서의 관계는 달라질 것이다. ...

“나야말로 제널 백작 부인의 명성을 익히 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날 수 있어서 기쁘네요. 리시라고 편하게 불러줘요.” ...

“나도 넬라라고 편하게 불러주세요.” ...

리시와 넬라가 서로를 탐색하는 듯한 시선을 교환했다. ...

젠이 리시의 팔에 팔짱을 끼며 말했다. ...

“어때? 우리 새언니, 소문보다 예쁘지?” ...

확실히 소문보다 예쁘다고, 넬라는 생각했다. ...

게다가 리시에게는 뭐라 표현하기 힘든 분위기가 있었다. ...

많은 것을 아는 듯한 깊은 눈빛, 여린 듯한데 결코 흔들릴 것 같지 않고, 상냥한 듯하지만 단호한 일면이 느껴졌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 그리고 브리트니의 동생.’ ...

넬라는 브리트니를 싫어했다. ...

순진한 척, 착한 척하면서 남을 욕하고 다니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그래서 리시에게도 큰 기대는 없었다. 브리트니의 여동생이니, 귀하게 자란 여우일 거라고 생각했다. ...

경계심 많은 젠이 ‘우리 새언니, 우리 새언니’ 하며 자랑을 할 때부터 ‘내 생각이 틀린 건가?’ 싶었는데, 실제로 보니 알겠다. ...

리시는 브리트니와 다르다. 리시의 눈동자에 담긴 것은, 브리트니처럼 가볍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전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거지?’ ...

리시는 저택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공작의 보호를 받으며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을 텐데. ...

그때, 식당 문이 벌컥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식당 문으로 향했다. ...

막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는, 식당 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을 줄 몰랐다는 듯 얼어붙었다. ...

리시가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

“브리트니.” ...

(35) 지옥 같은 시간. ...

브리트니는 얼어붙은 채 식당 안을 돌아봤다. ...

조금 전, 그린 가의 시종이 오찬을 어떻게 할 건지 물어보러 왔다. 케이가 돌아왔다는 걸 모르는 브리트니는, 당연히 리시 혼자서 아침을 먹을 거라고 생각했다. ...

위틀로 공작 부부는 방에서 먹겠다고 했지만, 브리트니는 기어코 본채의 식당으로 향했다. 리시와 단둘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식당에는 리시 혼자가 아니었다. ...

월라스와 나단, 그리고 젠과 넬라. ...

“브리트니.” ...

리시의 부름에 브리트니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

리시의 미소를 보자 왈칵 화가 치밀었다. ...

‘이것 봐, 브리트니. 네가 어려워하는 제레시엔과 넬라니커스가 나랑 이렇게 친밀하게 지내고 있어. 부럽지 않니? 너, 이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어 했지만, 제대로 대화도 못 해봤잖아.’ ...

리시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

‘네까짓 게!’ ...

전처럼 리시의 머리채를 잡고, 어디서 그런 식으로 웃느냐고 혼쭐을 내주고 싶었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나대는 리시에게 버르장머리를 가르쳐주고 싶었다. ...

하지만 브리트니는 젠과 넬라의 앞에서 악다구니를 쓰지 않을 이성이 남아 있었다. ...

“응, 리시.” ...

잘 부르지 않는 애칭을, 상냥하게 불러주며 미소 지었다. ...

동생을 더없이 사랑하는 언니처럼. ...

“같이 아침을 먹고 싶어서 왔는데, 내가 오면 안 되는 자리였을까?” ...

“아니야. 소개할게. 이쪽은 넬라니커스 제널 백작 부인이고, 이쪽은 내 남편의 여동생인 제레시엔 그린이야. 아, 언니는 파티에 자주 나갔으니 안면이 있겠구나.” ...

물론 안면이 있다. 대화해본 적이 없어서 문제지. ...

브리트니는 리시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기 전에, 저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

넬라와 젠은 고개를 살짝 끄덕했을 뿐, 스스로 자신을 소개하며 인사하지는 않았다. ...

“그러고 보니, 언니는 파티에만 나가면 인기가 대단하다고 했지. 넬라만큼 아는 사람도 많고, 다들 언니랑 친해지고 싶어 한다고 했잖아. 그럼 넬라와도 친하겠네.” ...

브리트니는 입을 꾹 다물고 리시를 노려봤다. ...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

“내게 나도 모르는 친구가 있었군요.” ...

넬라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

명백한 거절과 조롱이 담긴 그 말에, 브리트니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

“아…… 하하하……. 내가 언제 그런 소리를 했다고…… 또 그렇게 허풍을 떠네. 아무래도 바쁜 것 같으니까 돌아갈게.” ...

브리트니는 이 자리에 앉아서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변해버린 리시를 상대할 자신도 없었다. ...

넬라와 젠에게 둘러싸인 리시는, 아무리 봐도 예전의 리시와 달랐다. 눈빛도, 자세도, 말투와 행동도, 전부. 리시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다른 사람 같았다. ...

브리트니가 몸을 돌리려는데, 리시가 말했다. ...

“어디 가? 같이 밥 먹으려고 왔다면서? 앉아.” ...

부드러운 음성이지만 명령조였다. ...

브리트니는 주먹을 꽉 쥐며 애써 미소 지었다. ...

“아니야. 결혼 준비랑 바쁠 텐데, 내가 괜히 여기까지 찾아온 것 같아서……. 동생 보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네 사정을 생각하지 못했어.” ...

“생각 안 해도 돼. 거기 앉아서 내 얼굴 실컷 봐.” ...

리시의 입가에 우아한 미소가 번졌다. ...

브리트니는 분노 때문에 거칠어지는 호흡을 간신히 억눌렀다. 리시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그냥 돌아가면, 패배한 개처럼 보일 것이다. 브리트니가 자리를 비운 후, 리시가 저들에게 무슨 말을 떠들어댈지 모른다. ...

어쩔 수 없이 리시가 가리킨 곳, 리시의 옆자리에 앉았다. ...

이 식당에는 리시와 젠, 넬라, 월라스와 나단, 그리고 브리트니, 이렇게 여섯 명이 있었다. ...

세 명씩 마주 보고 앉으면 될 텐데, 젠과 넬라는 월라스와 나단 옆에 가서 앉았다. ...

위틀로 가의 두 딸을, 그린 집안 사람들이 관찰하는 모양새였다. ...

브리트니는 얼굴을 들고 있기 힘들었다. ...

‘분명 아이리스랑 내 얼굴을 비교하고 있을 거야.’ ...

어릴 때부터 그런 일을 자주 당했다. 유모나 하녀들이 ‘그래도 외모는 브리트니 님이 아이리스를 따라가지 못하지.’라는 소리를, 뒤에서 수군거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

‘그래서 라포드도……. 아니, 라포드 생각은 이제 그만하자.’ ...

브리트니는 자신의 앞에 놓인 포크를 집어 들고, 먹는 데에 집중하기로 했다. ...

리시는 갖지 못할, 위틀로 공작가의 진짜 공녀의 품위를 보여줘야지. ...

‘리시, 네가 그린 백작이랑 결혼하더니 아주 하늘 높은 줄을 모르는 모양인데, 결국 네가 얼마나 천한 핏줄인지 다 드러날 거야.’ ...

리시가 저렇게 기세등등한 건 지금뿐이리라. ...

케이도 리시의 외모에 홀려서 잠시 넋이 나간 것일 뿐, 리시와 살다 보면 1년도 지나지 않아서 질릴 게 분명했다. ...

리시는 젠, 넬라와 즐겁게 담소를 나누며 식사했다. 간간이 월라스와 나단이 대화에 참여했고, 그들의 말투에서는 리시를 향한 존중이 느껴졌다. ...

까르르, 들려오는 리시의 웃음소리에, 간신히 억누른 짜증이 또 치밀어올랐다. ...

‘거긴 네 자리가 아니야, 아이리스! 원래는 내 자리라고!’ ...

아이리스만 아니라면, 케이와 결혼하는 것은 자신이었을 거라고, 브리트니는 생각했다. ...

케이가 원하는 건 분명 위틀로 공작가의 명성일 것이고, 그에게 그 명성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은 진짜 공녀인 브리트니뿐이었다. ...

‘그린 백작은 리시가 천한 핏줄이라는 걸 모르니까, 얼떨결에 리시를 선택한 거겠지. 소문의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는 여자가 궁금하기도 했을 거고.’ ...

브리트니는 아무리 생각해도, 리시가 자기 자리를 빼앗은 것만 같았다. ...

“브리트니.” ...

리시의 부름에 브리트니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

“말이 별로 없네. 불편해?” ...

걱정하는 듯한 말투, 그렇지 않은 눈빛. ...

“아니, 불편할 리가. 내가 입 열면 너한테 별로 좋지 않잖아.” ...

브리트니는 경고를 담아서 말했다. ...

그 말에 대꾸한 건 브리트니가 아닌 젠이었다. ...

“왜 브리트니 양이 입을 열면, 내 새언니에게 안 좋다는 거죠? 동생을 아끼는 언니인 줄 알았는데, 내 새언니의 약점이라도 쥐고 있나 봐요?” ...

브리트니는 아차 싶었다. 너무 짜증이 나서 그만 안 해도 될 말을 하고 말았다. ...

젠과 넬라, 그리고 월라스와 나단의 서늘한 시선이 브리트니에게 꽂혔다. 그들은 ‘어디 한번, 우리 아이리스에 대해 지껄여봐.’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

이 자리에서 리시에 대해 아무리 떠들어봐야 브리트니의 편을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

“아니, 그냥…… 농담한 거예요.” ...

“그렇군요. 별로 재미는 없네요.” ...

브리트니는 살면서 이렇게까지 모멸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

젠과 넬라는 다시 다정한 눈빛으로 돌아가, 리시와 결혼식에 입을 드레스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

‘내 자리여야만 했어!’ ...

젠에게 ‘새언니’라고 불리는 것도, 넬라에게 드레스에 대한 조언을 듣는 것도, 기사들이 경외하는 월라스와 나단에게 존중을 받는 것도. ...

전부 내 것이어야만 했다. ...

‘아이리스, 넌 또 내 걸 뺏었어! 넌 항상 그래!’ ...

브리트니는 분노 때문에 차오르는 눈물을 꿀꺽 삼키고, 음식이 반쯤 남은 자신의 접시를 노려봤다. ...

‘그래, 그 거지 같은 그린 백작 부인 자리는 네가 가져. 나는 황태후가 될 거니까.’ ...

가비자르 제국의 황태자인 이오벳은, 왜인지 아직까지 황태후를 두지 않았다. 좋은 가문의 황태후는, 앞으로 황제가 될 황태자에게 있어야만 하는 존재였다. ...

대부분의 황자들이 20살이 되기도 전에, 연을 맺을 가문을 선택하고 그 가문의 힘을 빌려 황태자 자리를 노린다. ...

이오벳은 그의 출중한 재능과 인덕만으로 지금껏 버텨왔으나, 요새는 꽤 위험해져서 황태후로 앉힐 가문의 여자를 물색하고 있었다. ...

브리트니가 알기로, 공작 가문이지만 외척 세력이 아주 크지는 않은 위틀로 공작가가 물망에 올라 있었다. ...

‘내가 황태후가 되기만 하면, 오늘 이 수모를 반드시 돌려주겠어. 제레시엔, 그리고 넬라니커스. 너희들에게도.’ ...

 

+++

아침 식사가 끝나갈 무렵, 케이가 식당에 왔다. ...

브리트니는 자세를 바로 하고 표정 관리를 했지만, 케이는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고 리시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

“리시.” ...

리시의 옆에 선 케이가 허리를 굽혀, 리시의 뺨에 가볍게 입 맞췄다. ...

그 모습에 브리트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

“식사 끝났어요?” ...

“이제 슬슬 끝나가는 참이에요. 당신은 아침 안 먹어요?” ...

“서류 처리하면서 샌드위치를 먹었어요. 다 먹고 나서 나랑 같이 좀 나가요.” ...

“저기요, 오빠. 여기 우리도 있거든?” ...

젠이 손을 흔들어, 케이의 시선을 끌었다. 그제야 젠을 돌아본 케이가 싱긋 웃었다. ...

“젠, 제널 백작 부인. 실례했어. 내 아내가 너무 빛나서 주위가 눈에 안 들어왔거든.” ...

“엑.” ...

넬라가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

젠과 월라스, 나단은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은 안색이었다. ...

그리고 브리트니는 눈앞에 보이는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

‘미친 거 아냐? 이게 정말 케이브란트 그린이라고?’ ...

저번에 공작가에 찾아와서 아이리스에게 청혼할 때도 이러긴 했지만, 그건 아이리스와 결혼하기 위해 꾸며낸 태도라고 생각했다. ...

분명 지금은 파티에서 봤을 때처럼 냉랭할 거라고, 후치스 자작과의 염문설에 휘말렸던 아이리스를 곱게 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

“저것 봐, 늘 저런다니까.” ...

젠이 지겹다는 듯 말했다. ...

‘늘 저러다니……. 정말 늘 아이리스에게 저렇게 행동한다고? 말도 안 돼.’ ...

심지어 케이는 리시의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브리트니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

‘아니, 차라리 눈에 안 띄는 게 낫겠어. 저건 내가 아는 그린 백작이 아니야.’ ...

라고 생각하는데, 리시가 브리트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

“케이. 내 언니예요. 브리트니.” ...

“아.” ...

리시가 일부러 소개했는데도, 케이는 딱 그 한마디만 했다. 눈인사도, 고개를 가볍게 까딱이는 인사도 없었다. ...

아주 잠깐 브리트니에게 머물렀던 시선이, 그 짧은 시간도 아깝다는 듯 다시 리시에게로 돌아갔다. ...

‘어쩜 저렇게 무례할 수가!’ ...

브리트니의 기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케이는 리시에게 말했다. ...

“리시, 얼른 식사 끝내요. 당신이랑 가고 싶은 곳이 있어.” ...

“어딘데요?” ...

“비밀.” ...

“음…… 그럼…….” ...

리시가 젠과 넬라 쪽을 돌아봤다. ...

넬라는 ‘저 역겨운 꼴은 보고 싶지도 않아.’라는 듯 다른 쪽을 응시하고 있었고, 젠은 얼른 가버리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

리시가 웃으며 일어났다. ...

“먼저 가볼게요.” ...

리시가 떠나자, 젠이 넬라에게 말했다. ...

“봐봐, 저런다니까?” ...

“그린 백작님이 저런 말도 할 줄 아는 분인 줄은 몰랐는데…… 끔찍하네요.” ...

“맞아요, 가끔 온몸에 소름이 돋아요. 대장은 업무를 보면서도 백작 부인께 달려가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들썩하신다니까요.” ...

나단이 거들었다. ...

브리트니는 불편한 기분으로 앉아 있었다. ...

그 자리에서 브리트니를 신경 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데, 말없이 나갈 수도 없어서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나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

울고 싶었다. ...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해? 아이리스, 대체 이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한 거야? 왜 다들 날 이런 식으로 대해?’ ...

저들이 차라리 리시에게 왜 그런 짓을 했냐며 쏘아붙이기라도 하면, 그런 일은 절대 없었다고 항변하며 리시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어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

하지만 그들은 브리트니에게 그 어떤 지적도 하지 않았다. ...

괴롭힘보다 무관심이 더 무섭다는 걸, 브리트니는 알고 있었다. ...

자신이 당해본 것은 처음이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좋을지는 알 수 없었다. ...

결국, 브리트니는 젠이 먼저 “그만 일어나죠.”라고 말한 후에야 지옥 같은 식당을 벗어날 수 있었다. ...

(36) 그대를 볼 때마다. ...

제이미가 본채 앞에 말을 준비해두었다. ...

윤기가 흐르는 흑마로, 케이의 유니콘인 화이트보다 체구가 컸다. ...

투레질하던 흑마는, 케이가 가까이 가자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

“타볼래요?” ...

케이가 리시를 돌아보며 말했다. ...

리시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

“괜찮아요.” ...

승마를 해본 적 없는 리시가 도전하기에, 흑마는 너무 크고 험상궂어 보였다. ...

케이가 짓궂게 물었다. ...

“무서워요?” ...

리시가 고집스럽게 대꾸했다. ...

“무서운 게 아니라, 나는 걷는 걸 좋아해요.” ...

“이 녀석은 유니콘에 비하면 온순해요.” ...

“내 손을 먹으려고 하는 윈디보다 온순하다면, 적어도 날 먹지는 않겠군요.” ...

“그래요. 아주 점잖은 녀석이죠.” ...

케이가 리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리시는 망설이다가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

“그거 알아요? 내가 손 내밀 때마다 당신이 자연스럽게 손을 주는 게 좋아요.” ...

케이의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묵묵히 서 있던 제이미가 흠흠, 헛기침하더니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

제이미는 월라스나 나단과 달리 토할 것 같다는 기분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자제력이 있었다. 하지만 탁탁탁, 신경질적인 발소리는, ‘적어도 제 앞에서는 적당히 좀 하시라고요, 대장!’이라고 주장하는 것만 같았다. ...

리시는 민망했지만, 제이미를 쫓아 보낸 장본인인 케이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

“이리 와요, 리시. 이 녀석의 눈을 좀 봐요.” ...

케이는 리시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지 않고, 그녀가 스스로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

리시는 크게 심호흡한 후, 흑마를 향해 다가갔다. ...

전쟁터를 누비는 검은 죽음처럼 크고 위협적인 생김새의 흑마는, 털만큼이나 새까만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커다란 눈동자는 무척이나 맑고 깊었다. ...

리시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흑마에게 내밀었다. 흑마가 리시의 손바닥에 자신의 볼을 가만히 가져다 댔다. ...

케이의 말대로 유니콘보다는 온순했다. ...

“이 아이의 이름은 블랙인가요?” ...

“오, 어떻게 알았어요?” ...

“뻔하잖아요. 당신 작명 센스.” ...

“나에 대해 뻔하다고 할 만큼 잘 알다니. 역시 그린 백작 부인은 경이로우십니다.” ...

케이가 배에 손을 대고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

호들갑스러운 칭찬에, 리시는 웃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

“좀 그런 편이죠.” ...

케이는 리시를 뒤로 조금 물러서게 했다. ...

흑마의 등에 손바닥을 대고, 그대로 바닥을 차서 몸을 띄워 흑마에 타는 그의 모습이 눈부셨다. ...

백마 탄 왕자라는 말이 있는데, 흑마 탄 백작도 썩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

케이가 리시를 향해 손을 뻗었다. ...

“이리 와요, 리시.” ...

“난 걸을게요.” ...

“그러지 말고. 내가 단단히 잡아줄 테니까. 응?” ...

어린아이를 어르는 듯한 그의 음성이 듣기 좋아서, 리시는 홀린 듯 그를 향해 걸어가 손을 뻗었다. ...

케이가 리시를 향해 허리를 굽혀, 리시가 뻗은 팔을 잡아당기는 것과 동시에, 다른 쪽 팔로 리시의 허리를 살짝 받쳐 올렸다. ...

“으악!” ...

몸이 허공에 붕 떠오르자, 리시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다음 순간, 리시는 케이의 앞에 앉아 있었다. ...

“봐요, 리시.” ...

케이가 손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

“높은 곳에서 보는 광경은 꽤 근사하죠?” ...

정말 그랬다. ...

불어오는 바람의 농도도, 들어오는 경치의 색조도, 아래에서 볼 때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엉덩이가 말 등에 붙어 있는데도,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

케이의 팔이 리시의 허리를 단단히 감았다. 다른 쪽 손으로 고삐를 잡은 케이가 속삭이듯 말했다. ...

“달릴게요.” ...

“아니, 잠깐……!” ...

블랙이 정원에 난 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달린다기보다는 조금 빠른 속도로 걷고 있을 뿐이었지만, 리시에게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

리시는 뭐든 잡고 싶어서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의 배를 감고 있는 그의 팔을 꽉 붙잡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눈을 감았기 때문일까? ...

다그닥다그닥- ...

말발굽 소리가 점점 빨라지고, 머리칼을 스치는 바람이 점점 세지는 것 같았다. ...

그래서 더 눈을 뜰 수 없었다. ...

“리시.” ...

케이가 어깨에 턱을 괴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

“리시, 긴장 풀어도 돼요.” ...

이 남자가 진심으로 하는 소리일까? 긴장을 푸는 순간, 저 멀리 날아갈 것만 같은데. ...

“내가 잘 잡고 있으니까.” ...

그제야 리시는 제 등에 느껴지는 그의 온기를 느꼈다. 리시는 그의 허벅지 사이에 꼭 끼운 듯 앉아서, 그에게 등을 딱 붙이고 있었다. ...

“눈 떠봐, 리시.” ...

그의 체온을 느낀 후에야 조금 긴장이 풀렸다. 리시는 살그머니 눈을 떴다. ...

“와아!” ...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정경에,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뱉어냈다. ...

언제 여기까지 온 걸까? ...

그들은 넓고 깨끗한 호수 주위를 달리고 있었다. 호수 둘레길에는 잔디가 깔려 있고, 그 너머에는 여러 종류의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맑은 물 위에 햇빛이 떨어져, 호수는 마치 금가루를 뿌린 것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

블랙이 조금씩 속도를 줄이더니,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완전히 멈췄다. ...

케이가 먼저 내려서, 리시가 내릴 수 있게 도와줬다. ...

“근사한 곳이네요. 여기를 보여주고 싶었던 거예요?” ...

“브리트니 양이 함께 있다고 하기에, 거기서 꺼내주고 싶기도 했고요. 내가 괜한 짓을 한 건가?” ...

“아니, 잘했어요.” ...

리시의 칭찬에, 케이가 고른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기분 좋아하는 그의 모습이, 주인의 칭찬을 받고 즐거워하는 강아지 같아서 귀여웠다. ...

어떻게 나보다 훨씬 큰 사람이 귀여워 보일 수 있을까? ...

게다가 상대는 그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인데. ...

리시는 저도 모르게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줄 생각이었는데, 어떻게 눈치챘는지, 그가 쓰다듬기 편하도록 고개를 숙였다. ...

리시는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살살 긁듯이 쓰다듬어주었다. ...

“당신이 이렇게 만져주는 게 좋아.” ...

“음, 나도.” ...

“그래?” ...

케이가 고개를 들더니 리시의 머리에 두 손을 올렸다. ...

케이의 손은 크고, 리시의 머리는 작아서 그의 손이 완전히 리시의 머리를 덮어버렸다. ...

그는 갈퀴처럼 손가락을 구부려, 리시의 머리를 마구 긁는 것처럼 쓰다듬었다. 연분홍빛을 띤 은발이, 그의 손가락에 걸려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

‘날 만지는 게 좋다는 게 아니라, 당신을 만지는 게 좋다는 거였는데.’ ...

하지만 리시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 끝이 두피를 자극하는 느낌이 좋았기 때문이다. ...

머리 전체를 쿡쿡 누르고 긁는 것이 이렇게 긴장 풀리고 나른해지는 일인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그저 노곤해질 뿐이었는데, 자극이 계속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

아주 작은 전기 자극이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 척추를 따라 흘렀다. 자극을 받는 건 머리인데, 이상하게도 꼬리뼈 부근이 간질거리고 오금이 저릿했다. ...

뭉근하게 번진 열기가 복부 부근에 모였다. 야릇한 기분에 감싸여 이대로 그의 가슴으로 허물어질 것만 같았다. ...

“케이.” ...

흘러나온 음성이 자신의 것 같지가 않았다. ...

“언제까지 할 거예요?” ...

“아. 그만하라는 말이 없어서.” ...

케이가 손을 떼어냈다. 리시의 머리칼은 완전히 헝클어져서 얼굴에도 몇 가닥이나 흘러내렸다. ...

머리칼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고개만 들어서 그를 쳐다봤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는 즐거워 보였다. ...

“그리해도 예쁘군요.” ...

“가리는 게 예쁘다고요?” ...

“왜 그걸 꼬아서 들으실까.” ...

케이가 두 손으로 리시의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

“가려도, 보여도 예쁜 얼굴이라는 거 알면서.” ...

그의 회청빛 눈동자에 리시의 얼굴이 비쳤다. ...

리시는 자신이 예쁜 얼굴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모두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

하지만 그 케이브란트 그린의 눈에도 자신이 예뻐 보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

리시가 아는 케이는 여자를 그야말로 돌처럼 보는 남자였다. ...

“내가 정말 예뻐 보여요?” ...

리시의 질문에 케이는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

“리시, 당신도 알잖아요. 당신이 얼마나 예쁜지.” ...

“물론 알아요. 하지만 당신은…… 여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잖아요.” ...

“오해할 만한 소리 하지 말아요, 리시. 난 여자를 좋아해요. 다만 이 눈에 차는 여자가 없었을 뿐이지.” ...

“나는 당신 눈에 차요?” ...

“넘쳐요.” ...

케이가 엄지로 리시의 귀밑머리부터 귓바퀴를 부드럽게 쓸었다. ...

“넘쳐요, 리시.” ...

여기서 만족해야 한다. 이보다 더 깊이 들어가면 헤어나올 수 없게 될지도, 이 삶의 목적이 방향을 틀지도 모른다. ...

하지만 리시는 알고 싶었다. ...

나를 향한 그의 마음의 색채가 나와 비슷한지. ...

내가 그에게 좀 더 확신을 가져도 괜찮을지. ...

그와 함께 살아갈 이번 삶을 좀 더 기대해도 되는지. ...

알고 싶었다. ...

“내가 당신 아내라서?” ...

“아니. 내 아내가 되기 전부터 예쁘다고는 생각했어.” ...

“그럼 지금은?” ...

“예전에 유진이랑 야만족 토벌을 나갔다가, 어느 협곡을 지나간 적이 있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어. 당신도 알겠지만, 유진은 어지간해서는 웃지 않는 녀석인데, 웃더군. 큰소리로.” ...

케이가 갑자기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리시는 어리둥절해졌다. ...

“물었지. 왜 그렇게 웃느냐고. 유진이 그러더군. 아름다운 걸 보면 웃음이 나올 때가 있지 않습니까, 라고.” ...

“…….”

“나를 봐, 리시.” ...

케이가 엄지와 검지로 리시의 턱을 잡아 올렸다. 그는 진중한 눈으로 리시를 응시하며 말했다. ...

“나는 당신을 볼 때마다 웃어.” ...

꽃이 피었다. ...

리시의 가슴 깊은 곳에, 처음으로 꽃이 피었다. ...

그 꽃은 아주 달콤하고 부드러운 연분홍 꽃잎을 가지고 있었다. ...

수줍게 고개를 들고 자랑스럽게 꽃잎을 펼친 그 꽃은,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 아니었다. 두근두근, 다정한 울림을 가진 그 꽃을, 리시는 그저 아이리스라고 부르기로 했다. ...

애정이 담긴 그의 눈동자 아래에서, 아이리스가 피어난 순간이었다. ...

+++

케이는 리시에게, ‘당신은 어때?’라고 묻지 않았다. ...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만으로도 그녀의 감정이 조금은 전해졌다. ...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게 이런 걸 말하는 건가?’ ...

그림자들이 들었다면 오만상을 찌푸릴 생각을 하며, 케이는 동그스름한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

리시가 놀란 토끼처럼 눈을 깜빡거렸다. ...

케이는 복부 아래에 뭉근한 열기가 번지는 걸 느꼈지만, 꾹 참았다. ...

“좀 걷죠, 리시. 당분간 여기에 오기 힘들 테니까.” ...

“왜요?” ...

“젠은 우리 결혼식을 이곳에서 할 거라고 하더군요. 내일부터 공사에 들어갈 거래요.” ...

“어머. 공사까지요? 그럼 돈이 많이 들 텐데.” ...

“돈 문제는 당신이 신경 쓸 거 없어요.” ...

“당신은 신경 쓸 거잖아요.” ...

“별로요. 교황청이 성유물의 수호자가 굶어 죽게 내버려두지는 않을걸요. 다만 당분간 당신에게 드레스나 구두, 장신구를 선물해주기는 힘들 수도 있겠네요.” ...

“그런 건 지금도 충분히 많아요. 그리고 걱정 마요. 교황청에 갈 것도 없이, 당신은 내가 먹여 살릴 테니까.” ...

리시의 당찬 포부에, 케이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요 작고 연약한 여인이 뭘 할 수 있다고. ...

“리시, 난 그렇게 능력 없는 남자 아니에요.” ...

“당신이 능력 없다는 게 아니에요. 당신보다 내가 좀 더 능력이 있을 뿐이지.” ...

“호오, 그래요?” ...

“그래요, 케이.” ...

리시가 케이의 팔뚝을 톡톡 두드렸다. ...

“조금만 기다려봐요. 내가 예쁜 정장에 구두, 그리고 장신구를 사줄 테니까.” ...

(37) 못 말리는 여자. ...

케이는 당차게 말하는 리시가 귀여워서 견딜 수 없었다. ...

어떻게 이렇게 귀여운 생물이 있을 수 있을까? ...

귓불부터 목덜미, 손가락과 발가락까지 잘근잘근 씹어주고 싶었다. ...

“왜 그렇게 웃어요?” ...

리시가 미간을 모으고 말했다. ...

케이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입가를 가렸다. ...

“내가 어떻게 웃는데?” ...

“내 말이 우습다는 것처럼.” ...

“우습지 않아요. 음…… 예전에 유진이…….” ...

“귀여운 걸 보면서 웃은 적이 있나 보죠?” ...

“오, 딱 맞췄어요. 귀여운 걸 보면 웃음이 나오죠.” ...

리시는 불만스럽다는 듯 입술을 내밀었지만, 그녀의 입가 역시 실룩거리고 있었다. ...

“당신도 내가 귀여워서 웃고 싶으면 그냥 웃어도 돼요.” ...

“웃고 싶은 기분이 아니거든요.” ...

“아닌데. 요 입가는 웃음이 터져 나오기 직전인데.” ...

케이가 검지로 리시의 입가를 쿡 눌렀다. ...

결국, 리시가 졌다. 그녀가 작은 웃음소리를 내며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

“맙소사. 그렇게까지 크게 웃다니. 당신 눈에 내가 그렇게나 귀여워 보일 줄은 몰랐어요, 리시.” ...

“당신은 청각에 문제가 있나 봐요. 나, 그렇게 크게 안 웃었는데.” ...

“알다시피, 늑대는 청각이 좋거든.” ...

리시가 까르르 웃었다. ...

그녀의 청량한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

케이는, 이 상황에서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호수에 풍덩 빠뜨리면,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

리시가 검지로 케이의 눈가를 두드렸다. ...

“못된 생각을 하는 눈빛이에요, 케이.” ...

“이런. 부인을 속일 수는 없군요. 다음부터 못된 생각을 할 땐 눈을 가리고 해야겠어요.” ...

“어떤 못된 생각을 했는데요?” ...

“당신을 저 호수에 풍덩 빠뜨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 ...

리시가 호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잠시 호수를 바라보던 리시가 구두를 벗고 드레스 자락을 잡아 올리더니, 호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

케이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리시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리시가 호수에 발을 담근 후에야 “리시!” 하고 외쳤다. ...

어느새 무릎까지 물에 담근 리시가 환하게 웃으며 케이를 돌아봤다. ...

“나도 궁금했어요, 케이. 내가 갑자기 호수에 첨벙, 들어가면 당신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들어와요, 케이. 무서워하지 말고.” ...

“당신은 정말 못 이기겠네요.” ...

케이도 신발을 벗고 호수로 들어갔다. ...

“날 이길 생각이었어요?” ...

“도전 정도는 해볼 수 있잖아요.” ...

“실패할 때마다 울지 말아요.” ...

“난 울보 아니에요, 리시.” ...

“젠의 얘기로는 울보였다던데.” ...

“하아, 제레시엔 그린…….” ...

리시가 키득거리며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

“조심해요, 리시. 갑자기 깊어지니까.” ...

케이는 황급히 리시를 따라갔다. ...

문득 자신이 평생 이렇게 리시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싫지 않은 예감이었다. ...

리시는 허리까지 오는 깊이에서 멈춰, 그 너머의 깊은 물을 응시했다. ...

“물이 정말 맑네요.” ...

“당신 눈동자처럼?” ...

“별소리를 다 해, 진짜. 아까 당신이 이런 식으로 말할 때,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알아요?” ...

“걔들 표정은 아무래도 좋아요, 리시. 당신 표정이 중요하지.” ...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데요?” ...

“좋아 죽겠다는 표정.” ...

리시가 키득거렸다. ...

“당신은 정말 내 표정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어요.” ...

“아닐걸요. 내가 정말 제멋대로 해석했다면, 다른 쪽으로 해석했겠지.” ...

“어떻게?” ...

“나랑 입 맞추고 싶어 하는 표정이라고.” ...

케이는 리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촉촉하게 부푼 그녀의 입술이, 아까부터 신경에 거슬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

갑작스러운 입맞춤에도, 그녀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벌어져 케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았다. ...

입술의 온도가 같아지고, 맞붙은 체온이 섞였다. 그녀의 허리를 꽉 안아 밀착시켰는데도 부족하게 느껴졌다. ...

좀 더 가까이, 좀 더 깊이. ...

키스하는데도 갈증이 생긴다. ...

리시와 입 맞추지 못했을 때는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

잠시 입술을 떼고 그녀와 이마를 맞댔다. ...

거칠어진 호흡이 얽혔다. ...

“리시, 당신 때문에 미치겠어.” ...

“미치면 안 돼, 케이. 광견병이라는 게 있는데…….” ...

“아하핫!” ...

생각지도 못한 대꾸에 케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

“나를 개 취급하다니. 이러기예요, 리시?” ...

케이가 리시에게서 조금 떨어져, 그녀에게 물을 끼얹었다. ...

맑은 물이 그녀의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

“어머나. 걱정해주는 아내에게 물을 끼얹다니. 이러면 못 써요, 케이.” ...

리시도 두 손 한가득 물을 퍼 올려 케이를 향해 끼얹었지만, 케이는 움직임이 빨랐다. ...

원하는 대로 물을 맞추지 못하자, 리시가 볼을 부풀리더니 다시 물을 퍼서 끼얹었다. ...

이번에도 케이는 요령 좋게 피하며, 한 손으로 물을 떠 올려 리시에게 던졌다. ...

촤악- ...

실수다. ...

이렇게 많이 끼얹으려는 게 아니었는데. ...

리시의 머리 꼭대기에 떨어진 물이 리시의 얼굴과 목덜미, 그리고 앞가슴 쪽을 전부 적셨다. ...

“미안해요, 리시. 이렇게까지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

케이가 사과하며 다가가는 순간, 리시가 갑작스럽게 공격했다. ...

물론 케이는 피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못 피한 척 그녀가 끼얹은 물을 맞아주었다. ...

공격에 성공한 리시가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

케이는 그런 리시가 말도 못 하게 귀여워서, 확 깨물어버리고 싶었다. ...

아니, 깨물어야겠다. ...

더는 못 참겠다. ...

어디를 깨물어야 잘 깨문 느낌이 날지 가늠하고 있을 때였다. ...

“한창 즐거운 물놀이 중에 죄송하지만.” ...

호숫가에서 제이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리시와 케이는 동시에 그쪽을 돌아봤다. ...

제이미가 말 위에 앉아, ...

‘저분들은 체통 머리 없이 뭘 하고 계신 걸까?’ ...

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

“누구지?” ...

케이가 리시의 손을 잡고 호수를 첨벙첨벙 벗어나며 물었다. ...

제이미는 케이가 자신에게도 물을 튈까 겁나는지, 말을 뒤로 물리며 말했다. ...

“대장 말고, 아이리스 님께요.” ...

 

+++

방에 들어가자 크리시나가 깜짝 놀라 다가왔다. ...

“어머나. 왜 이렇게 다 젖으셨어요? 감기 걸리시면 어쩌려고.” ...

에르웰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

“적의 습격입니까?” ...

“아니, 호수에서 조금…….” ...

“적이 조금 공격한 겁니까?” ...

“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서 수건이나 가져와.” ...

“쓸데없는 소리라니. 브리트니, 그 못된 녀…….” ...

  퍼억-! ...

이번에는 리시도 분명하게 목격했다. ...

크리시나의 팔꿈치가 에르웰의 날씬한 배를 사정없이 찍어 버리는걸. ...

리시는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는데, 정작 에르웰은 많이 아프지는 않은 것처럼 배를 문질렀다. ...

“나보다는 네가 더 조심해야 할 것 같은데……. 아이리스 님 놀라신 것 봐.” ...

에르웰이 투덜거리며 욕실로 향했다. ...

크리시나가 리시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

“아이리스 님 앞에서 죄송해요. 에르웰, 저 아이가 가끔 귀부인 앞에서 좋지 못한 언행을 할 때가 있어서요.” ...

“괜찮아요, 크리시나. 욕설 몇 번 정도로 놀랄 만큼 심장이 나쁘진 않아요.” ...

“물론 그러시겠죠. 하지만 욕설 몇 번 정도가…… 아, 아무튼 왜 이렇게 젖으신 거예요?” ...

“백작님이랑 같이 호수에서 좀 놀았거든요.” ...

“어머나. 사이도 좋으셔라. 그린 백작님은 무뚝뚝한 분이신 줄 알았는데, 아이리스 님과 함께 있는 때는 소년 같은 모습도 보이시나 봐요.” ...

소년 같은 모습. ...

듣고 보니, 호수에서의 케이는 정말 그랬다. 싱그럽게 웃던 그의 미소가 떠올라 가슴이 따뜻해졌다. ...

이윽고 에르웰이 수건을 가져왔다. 젖은 몸을 닦고, 새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중요한 손님이 찾아왔기에,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

머리가 아직 젖어 있어서 핀으로만 살짝 고정하고, 손님이 기다리는 응접실로 향했다. ...

케이가 응접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

“같이 들어가도 돼요, 리시?” ...

리시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좋아요.” ...

제이미가 응접실 문을 열었다. ...

소파에 앉아 있던 사내가 벌떡 일어났다. ...

라벤트의 금광 관리를 맡겨뒀던 가우저였다. ...

+++

인사를 나눈 후에도, 가우저는 곧장 본론을 꺼내지 않았다. ...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한참을 앉아 있었다. ...

리시는 그가 찾아온 이유를 알고 있기에, 묵묵히 그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쉰 끝에, 가우저가 입을 열었다. ...

“시간을 끌어서 죄송합니다, 아이리스 님. 아무래도 좋지 않은 소식이라서…….” ...

“괜찮으니 이야기해봐요.” ...

“금광이…… 막혔습니다.” ...

“금광이 막혔다.” ...

“죽은 금광입니다. 이쪽으로 가도, 저쪽으로 가도, 바위로 막혀서 더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

“그렇군요.” ...

지난 삶에서도 라벤트의 금광은 금방 막혔다. ...

리시를 팔아 라벤트 금광을 받은 글로번 위틀로는, 후치스가 자신을 속였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

글로번 위틀로가 후치스 자작 저택을 찾아왔을 때, 알포드는 일 때문에 집을 비운 상황이었다. ...

어쩌면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자리를 피했는지도 모른다. ...

알포드를 만날 수 없게 되자, 글로번은 모든 화살을 리시에게 돌렸다. ...

-네년이 되먹지 못한 탓이야! 그나마 우리 가문에 도움이라도 되라고 잘 키워줬더니, 그 빌어먹을 금광은 뭐 하나 꺼내기도 전에 끝이 났다고! ...

라벤트의 금광을 선택한 것도, 리시를 알포드에게 보낸 것도 전부 글로번의 결정이었는데, 어째서인지 리시의 탓이 되어버렸다. ...

한참 리시에게 욕설을 퍼붓던 글로번은 그대로 라벤트 금광을 찾아가, 금광 관리인과 광부들에게 채굴을 계속하라고 외쳐댔다. ...

그러다가는 모두 죽을지도 모른다고 항변해도 소용없었다. 광부들은 하늘처럼 높은 공작의 말을 듣는 수밖에 없었다. ...

그리고 기적이 벌어졌다. ...

위틀로 공작가에 벌어진 기적. ...

이번 삶에서 리시는 그것을 아이리스의 기적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

“가우저. 북쪽 벽을 봤나요?” ...

“네, 제가 직접 들어가서 확인했습니다. 단단하고 거대한 바위라서, 어떻게 할 수가 없더군요. 기술 좋은 광부들이 부수려고 해봤지만, 곡괭이가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

“폭탄은요?” ...

리시의 질문에 가우저가 숨을 멈췄다. 가우저는 자기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

“예?” ...

“폭탄이요. 사용해봤어요?” ...

“아이리스 님. 폭탄은…… 거기에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너무 깊은 곳이에요. 폭탄을 터뜨리려면 일정 거리 내에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거기서 폭탄을 터뜨리면 바위뿐만 아니라 광산 전체가 부서질 수도 있습니다.” ...

리시가 사정을 몰라서 그런다고 생각한 듯, 가우저가 설명했다. ...

“안 부서질 거예요.” ...

리시가 단호하게 말했다. ...

“누구도 죽지 않을 거고.” ...

“아니요, 아이리스 님. 아이리스 님도 거기에 들어가 보시면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실 겁니다.” ...

“이해해요. 하지만 부서지지 않아요. 북쪽을 막은 바위, 오른쪽 아래에 하나, 왼쪽 위에 하나. 폭탄을 설치하고 터뜨리세요. 바위는 부서질 거고, 다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

가우저가 말려달라는 듯 케이를 돌아봤다. ...

리시의 단호한 언사에 의아한 듯한 시선을 보내던 케이는, 가우저의 시선을 눈치채고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못 말려.’라는 행동이었다. ...

“아이리스 님, 희생자가 발생한 후에는 늦습니다.” ...

“희생자는 없어요. 하지만 생긴다면, 내가 책임질게요.” ...

“아니요, 책임지는 건 접니다. 제가 그곳 관리인이니까요. 다만…… 저는 아무리 평민이라도, 사람 생명은 금보다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

가우저의 올곧은 말에, 리시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

이래서 가우저가 좋았다. ...

“나도 마찬가지예요, 가우저. 내가 사람 생명을 귀히 여기지 않을 것 같나요?” ...

잠시 침묵이 흘렀다. ...

한동안 리시와 눈을 맞추던 가우저의 눈동자에 결의가 깃들었다. ...

“아이리스 님을 따르기로 했죠. 따르겠습니다.” ...

“그렇게 해요, 가우저.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 ...

(38) 하나가 되고 싶어. ...

리시의 태도 때문에 어젯밤부터 끙끙 앓는 시늉을 하던 데니스 위틀로 공작부인은,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점심시간에는 식당으로 향했다. ...

서채의 식당은 많은 손님이 왔을 때를 위해 넓은 공간에, 여러 개의 테이블이 띄엄띄엄 놓여 있었다. ...

오늘의 점심은 버섯 수프와 치즈를 올린 샐러드, 부드럽게 다진 고기를 넣어 만든 파이와 생선 살을 넣은 파스타, 후식은 우유 푸딩이었다. ...

공작 저택에 있을 때 먹는 것보다 종류가 많지는 않지만, 맛은 있었다. ...

“이 저택의 요리사는 솜씨가 좋은 것 같네요.” ...

데니스의 말에 브리트니가 인상을 찌푸렸다. ...

“요리사가 솜씨 좋은 게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아빠, 그때 말했던 황태자 건은 잘 진행되고 있는 거죠?” ...

“그래, 브리트니. 황실 측 사람이 말하기를, 황태자의 측근들이 우리 가문을 제일 마음에 들어 한다고 하더구나.” ...

“그거, 정말이에요?” ...

“그렇대도. 지금 2황자의 움직임 때문에 황태자 쪽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 서둘러 혼인을 하려고 할 거야. 안 그래도 결혼이 늦은 편이고, 황제 폐하께서도 채근한다고 하시니 곧 소식이 있을 거다.” ...

브리트니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

그 소식이 당장 들려오면 좋겠다. ...

황태자와 결혼을 하게 되면, 리시가 여는 결혼식보다 훨씬 호화로운 결혼식을 열어 리시를 초대할 것이다. ...

리시보다 멋진 드레스, 리시보다 높은 신분의 하객들. ...

모두의 축복을 받는 결혼식에서, 리시의 얼굴이 질투로 일그러지는 꼴을 보고 싶었다. ...

“황태자 전하께서 이 결혼식에 오실까요?” ...

“안 오시겠지. 공사가 다망한 분이시니. 황실 측에서는 3황자나 4황자를 보내지 않을까?” ...

“역시 그렇겠죠?” ...

하지만 내 결혼식은 달라. ...

이 대륙에서 제일 큰 가비아르 제국 황태자의 결혼식이니까, 누구도 초대를 거부하지 못할 거야. ...

브리트니가 황태자의 옆에 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을 때, 식당 문이 열리고 그린 노백작 부부가 들어왔다. 이곳에 그린 노백작 부부가 와 있는 줄 몰랐던 글로번과 데니스는 깜짝 놀라 두 사람을 돌아봤다. ...

위틀로 일가를 발견한 노백작 부부가 천천히 걸어오자, 글로번과 데니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의 신분이 더 높긴 하지만, 상대는 ‘그린 노백작’이었다. ...

“그린 노백작님. 노백작 부인.” ...

“위틀로 공작님.” ...

양가 부모는 가볍게 눈인사를 나눴다. ...

그린 노백작 내외는 위틀로 일가의 옆 테이블에 앉았다. ...

“와 계신 줄 몰랐습니다.” ...

“아들이 결혼한다는데 미리 와서 지켜봐야지요. 공작님의 방문을 알았다면 진즉에 가서 인사를 드렸을 텐데.” ...

“아, 아닙니다. 이렇게 뵀으면 됐지요.”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

이윽고 시종이 들어와 노백작의 식탁에도 식사를 차렸다. ...

“그나저나…… 부족한 우리 아이리스가 두 분 눈에는 차시는지…….” ...

데니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헤레이나가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

“부족하긴요. 우리 아들에게는 차고도 넘치는 며느리지요. 어찌나 사랑스럽고 영리한 아이인지. 딸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공작부인께서는 염려를 놓으셔도 됩니다.” ...

‘거짓말.’ ...

이라고, 브리트니는 생각했다. 리시가 노백작 부부의 마음에 들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

‘그냥 말만 저러는 거겠지. 우리 가족 앞이니까.’ ...

브리트니는 입술이 근질거렸다. ...

걔, 거짓말쟁이예요. 아주 못됐어요. 걔 옷차림은 보셨어요? 우리 앞에서 얼마나 건방지게 행동하는지를 보셨어야 했는데. 수많은 말들이 입안에 맴돌았다. ...

“아무래도 우리 딸이 집안에서 보호만 받으며 살다 보니,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아요. 어쩌면 노백작 부인 앞에서 예의 없이 행동할지도 모르는데, 너그러운 마음으로 많은 가르침을 주시면 좋겠어요.” ...

“부족한 점이 없다고 말씀드렸는데, 뭘 또 그리 부족한 점을 부각하려 하시는지……. 공작부인께서는 제가 아이리스의 행동 하나하나를 꼬투리 잡는 시어미가 되었으면 하시나 봅니다.” ...

헤레이나의 날카로운 지적에, 데니스는 말문이 막혔다. ...

데니스와 헤레이나는 비슷한 또래였지만, 알로르 왕국의 공주였던 헤레이나와 가비자르 제국 백작의 딸이었던 데니스 사이에는 접점이 거의 없었다. ...

데니스는 헤레이나의 성격을 잘 알지 못했다. ...

“그나저나 그 가르침이라는 것은, 매를 드는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공작부인?” ...

헤레이나가 덧붙인 질문에, 데니스는 입을 꾹 다물고 글로번을 돌아봤다. ...

“허, 허허허. 매라니요. 우리가 아이리스를 얼마나 곱게 키웠는데…… 손에 물 한 방울 못 묻히게 하고, 그저 오냐오냐하며 키웠지요. 위틀로 공작가의 꽃. 소문을 들으셨을 텐데요.” ...

글로번의 변명에도 헤레이나의 차가운 입매는 풀어지지 않았다. ...

“그 아이 손을 잡아봤는데,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손은 아니더군요. 오히려 매일 집안일을 하는 하녀들보다 거칠어서, 위틀로 공작가의 꽃은 사실 잡초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었던 참이었습니다.” ...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

데니스의 눈동자가 또르르 굴렀다. ...

“우리 아이리스가 그리 말하던가요?” ...

“아이리스는 그리 말하지 않았어요. 내가 미루어 짐작했을 뿐이지.” ...

“너무하시군요, 백작 부인. 우리 딸을 그리 평가하는 건, 우리 가문을 모욕하는 일이에요.” ...

“눈에 들어온 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사실이 아니라면 죄송하네요.” ...

헤레이나의 서늘한 눈동자에는 미안한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

글로번이 흠흠, 헛기침했다. ...

“백작 부인, 우리는 그저 아이리스가 그린 백작가의 명성에 누를 끼치는 일이 생길까 봐 걱정되는 것뿐입니다. 그린 가에 들어오자마자 안 좋은 소문에도 휘말렸고…….” ...

“소문일 뿐이었지요.” ...

“예, 물론 그렇지요. 우리 아이리스가 그런 짓을 하고 다닐 리는 없으니까요. 다만 걱정되는 점은…… 우리 아이리스의 단점을 말하는 것 같아서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좀 그렇지만…… 아이리스가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점을 잘 고쳐서 보냈어야 했는데…….” ...

“아이리스는 부모님과 언니에 대해 좋은 말만 했는데, 여러분은 아이리스를 험담하고 싶어 하는 것 같군요.” ...

“허, 험담이라니…… 우리는 그저 죄송스러워서…….” ...

“죄송할 것 없습니다. 이제 아이리스는 내 딸이나 마찬가지지요. 그 애가 사고를 쳐도, 거짓말을 해도, 이 어미가 책임질 일. 앞으로 누구든 그 애의 험담을 한다면, 이 그린 가문을 향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

위틀로 일가는 눈을 홉뜨고 헤레이나를 쳐다봤다. ...

다들 헤레이나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아들이 제멋대로 결혼해버린 상대를 고깝게 생각할 줄 알았는데, 지금 헤레이나의 태도는 마치 친딸을 감싸주는 것처럼 보였다. ...

하지만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아끼겠다는데, 그걸 지적할 수는 없었다. 친정 입장에서는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

“우, 우리 딸을 그리 아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

글로번의 말에 헤레이나가 미소 지었다. ...

이곳에 들어와서 처음 짓는 미소인데, 위틀로 일가는 그 미소가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상대를 베어 죽일 듯, 날카롭고 차가운 미소였기 때문이다. ...

“그런 표정들이 아니신데, 내 착각이겠지요. 특히 브리트니 양은 화가 치밀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군요. 여동생이 사랑받는 게 그리 싫은가요, 레이디 위틀로?” ...

브리트니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얼른 표정을 갈무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을 깜빡거렸다. ...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노백작 부인. 제가 아이리스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

“맞아요. 이 애는 아이리스가 저택을 떠난 후로, 매일 아이리스를 보고 싶다면서 운다고요.” ...

데니스가 거들었다. ...

헤레이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

“그렇군요. 내가 늙어서 눈이 안 좋아졌나 봅니다. 어서 식사들 하시지요.” ...

+++

늦은 밤 리시는 슬립으로 갈아입고, 창가에 서서 어두운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금광에서는 결혼식이 끝날 무렵에 소식이 들려오겠지.’ ...

금광에서 들려올 소식은 시작일 뿐이었다. ...

‘할 일이 많아. 내가 미래를 바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정보에 밝은 사람이 필요해. 그리고 탈레하 왕국 쪽과 교역도 터야 하고.’ ...

섬나라인 탈레하 왕국과 교역을 트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

‘내 계획에 동참해줄 사람이 있어야 해.’ ...

생각에 잠겨 있어서 케이가 들어오는 줄도 몰랐다. 그의 두꺼운 팔이 리시의 허리에 감긴 후에야 눈치챘다. ...

그의 입술이 리시의 귓바퀴와 목덜미에 한 번씩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주 짧은 접촉일 뿐인데도, 닿은 부위가 화끈거렸다. ...

“케이. 오늘은 일찍 왔네요.” ...

“일이 일찍 끝났거든요. 무슨 생각을 하느라 내가 들어오는 줄도 몰라요?” ...

“음. 내 남편에게 이것저것 사줄 생각?” ...

케이가 리시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 쿡쿡 웃었다. ...

그의 웃음소리는 듣기 좋지만, 목덜미에 그의 숨결이 스칠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어서 난처했다. ...

리시는 슬그머니 돌아서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침대로 향했다. ...

케이가 리시의 옆에 앉았다. ...

“리시, 오늘 일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

“하세요.” ...

“일단 당신이랑 호수에서 데이트한 건 무척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가죠. 그때는 도시락도 싸서.” ...

“좋아요.” ...

“그리고 윈디 말인데……” ...

“케이. 말 돌리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을 해요.” ...

“미래를 봐요?” ...

“음?” ...

“아까 금광 일 말이에요. 당신은 금광이 막혔다는 말을 듣고도 당황하지 않았고, 폭탄을 터뜨리라고 할 때는 확신에 차 있었어요. 금광 뒤에 뭔가 있을 거고, 그 과정에서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는 확신.” ...

케이가 이 부분을 의심할 줄 알았다. ...

“미래를 봐요? 그러니까…… 예언의 힘, 이런 게 있어요?” ...

“예언 같은 건 하지 못해요.” ...

앞으로 미래는 변할 것이다. 케이가 리시에게 예언의 힘이 있다고 믿고, 그녀에게 기대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

“그럼 어떻게 알았죠?” ...

“계산했어요.” ...

“계산…….” ...

“과거와 현재를 알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 있죠.” ...

“짐작 정도가 아니었는데.” ...

“짐작이에요. 다만 내가 날 믿기에 확신할 뿐이지.” ...

이런 변명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케이가 더 깊이 캐묻지 않으리라는 것 또한 알았다. ...

케이는 리시가 어떻게 그의 정체를 눈치챘는지에 대한 의문도 풀리지 않았지만, 그에 관해 캐묻지 않기로 했다. ...

“당신은 정말 신비로운 여자야, 리시.” ...

케이가 리시의 머리칼을 검지에 감아, 그 끝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

“내가 당신 변명을 믿지 않는다는 거 알지?” ...

“알아.” ...

“언젠가 진실을 얘기해줄 거야?” ...

이 질문에는 곧장 대답할 수 없었다. ...

내가 겪은 그 모든 일을 말할 날이 올까? ...

그 말을 한들, 이 남자가 믿어줄까? ...

“봐서.” ...

리시의 딱딱한 대답에, 케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

“아, 정말. 리시, 아이리스. 당신은 날 들었다 놨다 하는군.” ...

“그래서 싫어?” ...

“아니.” ...

케이가 리시의 등을 받쳐, 침대에 눕히고 그녀의 위에 올라왔다. ...

“너무 좋아.” ...

케이는 마치 커다란 강아지처럼 리시의 가슴 윗부분에 얼굴을 파묻었다. ...

그의 검은 머리칼이 리시의 턱을 간질였다. ...

리시는 미소지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나도 그래. 나도 당신의 이, 개 같은 점이 좋아.” ...

“개 같다니. 늑대와 개는 엄연히 달라, 리시.” ...

“하지만 지금 당신은 꼬리를 흔드는 개 같은걸.” ...

“적어도 강아지라고 해줘, 리시.” ...

가슴 윗부분에서 시작된 그의 숨결이, 얇은 슬립을 타고 내려왔다. ...

보이지 않는 숨결이 마치 쓰다듬듯이 리시의 가슴을 쓸어내려, 그의 입술이 닿았을 때처럼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

그가 말을 할 때마다, 숨을 내쉴 때마다, 뭉근한 열기가 퍼져나갔다. 그는 그저 강아지처럼 굴면서 즐거워할 뿐인데, 나는 왜 이렇게나 야릇한 감각에 휩싸이는 걸까? ...

리시는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

지난 삶에서 사내와의 접촉은, 리시에게 그저 끔찍한 경험일 뿐이었다. ...

케이와 부부가 되었으니 그런 짓을 해도 받아들일 각오는 되어 있었지만, 자신이 먼저 그를 원하게 될 줄은 몰랐다. ...

‘그래, 나는 이 남자를 원하는 거야.’ ...

화살처럼, 깨달음이 리시의 머리에 꽂혔다. ...

‘나는 케이랑…….’ ...

하나가 되고 싶다. ...

연결되고 싶다. ...

그 어느 부분 하나 빼놓지 않고, 그에게 스며들고 싶다. ...

(39) 여자의 마음을 얻는 방법 (1) ...

  깨달음을 얻는 것과 동시에 밀려드는 욕망이, 리시는 당혹스러웠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기에, 리시는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

저도 모르게 케이의 머리를 두 손으로 쭉 밀어냈다. 케이의 머리가 뒤로 완전히 젖혀질 만큼. ...

아차, 싶었다. ...

이렇게 거부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

다행히 케이는 기분 나쁜 기색 없이, 몸을 빙글 돌려 리시에게서 내려가 옆에 누웠다. 한쪽 팔을 리시 쪽으로 쭉 뻗은 케이가, 뭐 하냐는 듯 눈동자로 자신의 팔에 흘끗 시선을 줬다가 리시와 눈을 맞췄다. ...

케이가 뭘 하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멀뚱멀뚱 쳐다보는데, 케이가 자신의 팔을 툭툭 치며 말했다. ...

“뭐해요, 눕지 않고.” ...

하지만 케이의 팔이 리시의 자리를 넘어와서, 리시가 누울 만한 공간이 없었다. ...

리시는 어디에 누워야 할지 가늠해보다가, 그의 팔이 닿지 않은 구석으로 가서 누웠다. ...

리시를 지켜보던 케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

“리시, 당신은 가끔 되게 엉뚱한 거 알아요?” ...

리시는 그가 왜 웃는지도 알 수 없어서,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

케이는 리시에게 바짝 다가오더니, 리시의 머리 아래에 팔을 넣고는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

“이렇게 누우라는 뜻이었어요, 리시. 팔베개 몰라요, 팔베개?” ...

물론 안다. ...

하지만 그런 달콤한 것을, 멀쩡한 정신으로 해본 기억은 없었다. ...

그의 가슴에 얼굴이 눌려, 그의 체취가 강하게 후각을 자극했다. ...

숲과 풀과 흙냄새. ...

맑은 호수가 떠오르는 상쾌한 향기. ...

“당신한테서 흙냄새가 나요, 케이.” ...

“몰랐어요? 나, 자기 전에 늑대로 돌아가서 흙바닥에 뒹굴다가 오는데.” ...

“정말요? 그렇다면 한번 보고 싶네요.” ...

“농담이에요, 리시.” ...

그가 리시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

리시를 보듬어 안은 그의 팔은 충분히 단단했지만, 리시는 좀 더 그에게 꽉 끌어안기고 싶었다. 이보다 더 세게 안기면 숨이 막힐지도 모르는데, 뭔가 부족한 기분이 들었다. ...

“어서 자요, 리시.” ...

“잠이 안 와요.” ...

“그렇다면…….” ...

그가 주머니에서 슬리브 스톤을 꺼냈다. ...

리시는 아직 잠들고 싶지 않았다. 조금 더 그의 품에 안긴, 이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

하지만 리시가 그리 말하기 전, 슬리브 스톤이 리시의 관자놀이를 스쳤다. 순식간에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

케이는 슬리브 스톤을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은 후, 자신의 품에서 무방비하게 잠든 리시를 가만히 응시했다. ...

그녀를 안고 있는데도 자꾸만 부족한 기분이 들었다. ...

원하는 만큼 세게 끌어안으면 이 갈증이 해소될까? ...

‘아니, 리시가 부서지겠지.’ ...

그녀의 살은 부드럽고 연해서, 조금만 세게 안아도 푸딩처럼 몽글몽글 부서질 것 같았다. 이렇게 여린 존재를 품에 안는 건 처음이라서, 어느 정도까지 해도 가능한지 알 수 없었다. ...

마음 같아서는 이보다 더 세게 끌어안고 싶은데, 그러다가 부서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

리시는 좋은 꿈을 꾸는지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

그저 자는 모습을 지켜볼 뿐인데 즐거워서, 케이는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그녀를 내려다봤다. ...

그림자들이 케이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침대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

“대장은 왜 안 오시지?” ...

“형수님이랑 같이 잠드신 거 아냐?” ...

“에이, 설마. 대장이 우리한테는 자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으면서, 자기 혼자 늘어지게 자는 무뢰한일 리가 없잖아.” ...

케이의 밝은 귀에, 그림자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

‘진짜로 일어나야겠군.’ ...

케이는 리시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팔을 빼내고 침대에서 벗어났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침대 옆에 서서 잠시 리시를 내려다보다가 돌아서는데. ...

“아힝…….” ...

애교스러운 콧소리가 케이의 발목을 잡았다. ...

‘아힝?’ ...

케이는 고개를 휙 돌렸다. ...

리시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는데, 아까보다 깊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아잉, 이러지 마아.” ...

리시의 붉고 도톰한 입술이 옹알옹알 움직였다. ...

케이에게는 한 번도 들려주지 않은, 애교 넘치는 목소리. ...

“이러면 안 돼애, 흐응.” ...

  꿀꺽- ...

케이는 침을 삼켰다. ...

대체 무슨 꿈을 꾸기에 내 아내가 저토록 애교 넘치는 소리를 내는 걸까? ...

‘당연히 내 꿈이겠지.’ ...

케이는 자신 있었다. ...

꿈은 무의식의 산물. ...

리시가 꽁꽁 감춰둔 애교를, 마음껏 드러내 보일 상대는 케이브란트 그린, 자신뿐이라고 믿었다. ...

언젠가 리시는 현실에서도 케이에게 저토록 달콤해지리라. ...

‘머지않아 그리되도록 해주겠어.’ ...

케이가 결심하며 돌아설 때였다. ...

“으응, 너무 귀여워, 윈디.” ...

 

+++

성유물의 수호자인 케이에게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

전대 수호자였던 와이번 그린 노백작은, 성유물을 찾아내서 수거하는 일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

-이런 위험한 물건을 한군데 모아두면, 반드시 사달이 생기지. ...

성유물의 위치를 알게 되어도, 그게 크게 위험하지 않은 이상은 내버려뒀다. ...

케이 역시 비슷한 방침이었지만, 성유물의 위치를 찾아내는 데는 적극적이었다. ...

수인의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할 때, 성유물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성유물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을 찾지는 못했지만, 전 대륙을 오가다 보면 한 명쯤, 아주 조금이라도 성유물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

그렇게만 된다면, 마법사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이때, 케이에게 큰 힘이 되어줄 터였다. ...

대륙에서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는 곳을 찾아내고, 성유물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밤늦도록 회의를 하는 게, 케이의 그림자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

오늘 밤, 회의가 열리는 회의실에서 당연하지 않은 게 하나 있었다. ...

울적한 표정의 케이였다. ...

그림자들을 한껏 기다리게 만들고 늦게야 회의실에 들어온 케이는, 들어오는 순간부터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왜 저러셔?’ ...

나단이 제이미에게 눈빛으로 물었다. ...

‘네가 모르는 걸, 내가 알겠어요?’ ...

제이미도 눈빛으로 대답했다. ...

유진은 언제나처럼 묵묵히 앉아, 케이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그리고 월라스는. ...

“대장. 형수님한테 까였어요?” ...

언제나처럼 눈치가 없었다. ...

케이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

나단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월라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월라스는 그걸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

“뭔데 그래요? 우리한테 말해보세요. 형수님이 대장 별로래요? 아니면 억지로 형수님한테 뭐라도 하다가…….” ...

“월라스. 넌 그 입 좀 닥쳐야겠어요.” ...

케이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자, 제이미가 월라스의 말을 끊었다. ...

월라스가 ‘왜? 뭐? 내가 뭐 잘못했어?’라는 눈으로 모두를 돌아봤다. ...

“대장. 대체 무슨 일이시죠?” ...

제이미가 케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

어두운 눈으로 탁자를 노려보던 케이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

“윈디에게 졌다.” ...

“예?” ...

“리시에게 슬리브 스톤을 사용했는데, 윈디 꿈을 꾸더군.” ...

“……예에?” ...

“아주 즐거워 보였어. 나에게는 들려주지도 않는 목소리를 내던데…….” ...

케이는 테이블을 노려보느라, 그림자들의 표정이 험악해지는 걸 깨닫지 못했다. ...

“내 아내가 나보다 유니콘 따위를 더 좋아하는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

“한 대 후려치고 싶다고 생각해요, 대장.” ...

제이미의 말에, 케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

“제이미, 아무리 그래도 리시를 후려치고 싶다는 말은……!” ...

“아이리스 님 말고요, 대장. 대장, 널 말하는 거예요. 네놈의 뒤통수!” ...

제이미의 푸른 눈동자가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제야 케이는 다른 그림자들의 눈빛도 제이미와 다를 게 없다는 걸 눈치챘다. ...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당장 무기를 꺼내 케이를 후려치고 싶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

“이 늦은 시간까지 기다리게 하더니…… 뭐요? 아이리스 님이 윈디 꿈을 꿔서 토라지셨어요? 어이구, 그러셨어요? 아내가 유니콘 꿈을 꾸면서 즐거워하는 게 그렇게나 서운하셨어요? 응?” ...

“아니, 그게…… 정말 나한테는 한 번도 들려주지 않은 목소리라서…….” ...

“어휴, 그러셨구나. 우리 대장이 빌어 처먹게 매력이 없어서 아내 꿈에 나타나지도 못하는 게 그렇게나 서운하셨구나아.” ...

“제이미. 말이 좀 심해.” ...

“내 말이 심해요?” ...

제이미가 그림자들을 돌아봤다. ...

그림자들이 고개를 저었다. ...

“안 심하다고 하네요, 대장.” ...

다른 그림자들이야 그럴 수 있다 쳐도, 평소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유진마저 케이를 향해 ‘저런 한심한 작자.’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

케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미안.” ...

제이미가 품에서 반쯤 꺼냈던 단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

“제이미, 정말로 날 벨 생각이었나?” ...

“왜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

“……그래. 미안. 이번 건 내가 잘못했다.” ...

“알면 됐어요.” ...

“푸하하하하하하!” ...

갑자기 월라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

“넌 또 왜 웃어요?” ...

“크하하하하. 대장이…… 대장이, 유니콘을 질투하잖아. 대장이…… 하하하하하. 진짜…… 하하하하. 진짜 멍청해 보인다, 우리 대장. 하하하하하. 아, 웃겨 죽겠네.” ...

나단과 유진의 입술도 실룩거렸다. ...

졸지에 웃음거리가 된 케이는, 얼른 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대륙 전도를 펼쳤다. ...

“이번에 들어온 정보로는…….” ...

“풉…… 크크크큭. 형수님이 유니콘 꿈을 꿨대…… 큭……. 아, 웃겨……” ...

“월라스, 그만 좀 웃지?” ...

“푸하하하하. 위엄 있는 척해도 소용없어요, 대장. 유니콘…… 푸하하하. 그 어린 윈디를 질투하다니…… 하하하하. 내일 젠한테 말해줘야지.” ...

“월라스! 회의실에서 벌어진 일에 관해 밖에서 떠드는 건 안 된다 했을 텐데.” ...

케이가 위엄 있게 꾸짖었다. ...

“대장, 인제 와서 뭔 위엄 있는 척이에요? 어린 유니콘 질투하는 거, 다 들통났는데.” ...

나단이 월라스의 편을 들어줬다. ...

묵묵히 앉아서 웃음을 참던 유진이 입을 열었다. ...

“저는 내일 노백작님 내외를 만나 뵐 생각입니다.” ...

“넌 또 왜……?” ...

“두 분의 아드님께서 어떻게 성장하셨는지를 알아야 하니까요.” ...

“하아.” ...

케이는 두 손으로 머리를 거머쥐었다. ...

“너희들, 날 놀릴 거리 하나 잡으면, 그걸로 평생 놀릴 계획만 하고 살지?” ...

“에이, 대장. 평생이라니, 아니에요. 이번 건…… 음. 나단, 이번 건 얼마나 갈까?” ...

월라스가 케이를 달래듯 말하며 나단을 돌아봤다. ...

“이런 건 5년 정도? 하지만 젠이라면 10년은 놀리겠지.” ...

“10년까지는 가지 않을 거예요.” ...

제이미가 단호하게 말했다. ...

“대장은 앞으로 이보다 멍청한 짓을 더 많이 할 것 같으니.” ...

제이미의 말대로였다. 케이는 놀림을 받는 이 와중에도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어떻게 해야 리시가 내 꿈을 꿔줄까?’ ...

케이는 자신을 놀리느라 여념 없는 그림자들을 돌아봤다. ...

케이의 그림자들은 앞으로의 계획 때문에 가정을 꾸리지 않았지만,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

그래, 어차피 오늘 회의는 글렀다. ...

지금 당장 중요한 일은 성유물의 위치를 찾는 게 아니다. ...

케이는 두 손으로 테이블을 쾅, 내려쳤다. ...

“다들 그만!” ...

키득거리던 그림자들이 웃음을 멈추고 케이를 돌아봤다. ...

케이는 자신의 소중하고 믿음직스러운 부하들을 쭉 둘러본 후, 입을 열었다. ...

“여자는 뭘 해줘야 좋아하지?” ...

(40) 여자의 마음을 얻는 방법 (2) ...

‘여자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논의는, 새벽빛이 밝아올 때쯤에야 끝났다. ...

부하들의 조언을 머리에 담고, 케이는 방으로 돌아왔다. ...

리시는 여전히 푹 잠들어 있었다. ...

케이는 그녀의 옆에 앉아, 리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형수님이 윈디의 꿈을 꿨다면, 아무래도 동물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좋아하는 걸 선물로 주는 게 확실하죠. 요새 예쁜 강아지들 많던데, 작고 귀여운 녀석으로 한 마리 선물하시는 게 어때요? ...

그렇게 말한 건 나단이었다. ...

작고 귀여운 강아지라니. ...

리시에게 귀여운 동물은 나 하나면 충분하다. ...

케이는 늑대의 모습으로 변한 후, 그녀의 머리맡에 감싸듯 몸을 둥글게 말고 눈을 감았다. ...

+++

굉장히 좋은 꿈을 꿨다. ...

윈디가 리시의 손 대신, 리시가 주는 사과를 받아먹고 나서 안겨 오는 꿈이었다. ...

기분 좋게 잠에서 깨어났는데, 볼 근처가 간질거렸다. 무심코 손을 올렸는데 북슬북슬한 것이 만져졌다. ...

‘뭐지?’ ...

고개를 돌리자, 두툼한 꼬리가 눈에 들어왔다. ...

새까맣고 털결이 좋은 두툼한 꼬리. ...

‘케이?’ ...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니, 검은 늑대의 커다란 얼굴이 보였다. ...

늑대는 세상모르고 자는 중이었다. ...

입술 사이로 살짝 나온 송곳니와 으르르, 으르르 작은 울림을 가진 숨소리. ...

리시는 다시 꼬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북슬북슬한 꼬리에 얼굴을 파묻으면 기분 좋을 것 같았다. 꼬리를 살며시 잡고 얼굴을 비볐더니, 늑대가 “크르…….”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꿈틀거렸다. ...

깨라고 한 건 아닌데. ...

리시는 얼른 꼬리를 잡고 있던 손을 떼었다. 꼬리 쪽에 있는 뒷다리가 바둥거리는가 싶더니, 늑대가 빙글 몸을 뒤집었다. ...

리시는 상체를 일으켜 늑대를 내려다봤다. ...

깨어 있을 때는 위협적으로만 보이는 검은 늑대가 네 다리를 위로 올린 자세로 배를 드러내고 자는 모습은, 웃음이 나올 만큼 귀여웠다. ...

‘잘도 자네.’ ...

커다란 앞발 두 개가 꼬물꼬물 움직였다. ...

평원을 달리는 꿈이라도 꾸는 걸까? ...

평소에는 위협적으로 보일 게 분명한 커다란 앞발이, 일정한 리듬에 맞춰 까딱까딱 움직이는 게 말도 못 하게 귀여웠다. ...

리시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꿈꾸는 늑대를 지켜봤다. ...

이번에는 공격이라도 당했는지 끄응끄응, 하던 늑대가 “컹!” 하고 짖으며 눈을 떴다. ...

검고 깊은 눈동자가 허공을 헤매다가 리시에게서 멈췄다. ...

“리시.” ...

늑대일 때의 케이의 음성은 인간일 때보다 엄숙했다. ...

하지만 인제 와서 엄숙하면 뭐해? ...

지금껏 꿈꾸느라 발라당 뒤집혀서 앞발을 까딱까딱하고, 끙끙거리는 걸 다 봤는데. ...

“왜 내 아내가 아침부터 조롱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는 거죠?” ...

“조롱이라니요, 케이. 이건 그냥…… 음, 미소예요.” ...

“아닌 것 같은데.” ...

  할짝- ...

늑대가 리시의 입가를 핥았다. ...

“내가 잠꼬대라도 했어요, 리시?” ...

“아니요. 조용히 잘 자던데요.” ...

끙끙거리고 까딱까딱했다고 말하면, 다시는 늑대의 모습으로 옆에서 잠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

“흐응…….” ...

케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리시를 응시하다가 침대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

눈앞에 어떤 광경이 펼쳐질지 짐작한 리시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

이윽고 인간 케이의 음성이, 리시의 귀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

“리시, 왜 고개 돌리고 있어요?” ...

“얼른 옷이나 입어요.” ...

“이미 봤으면서 새삼스럽게.” ...

“본 적 없어요. 놀라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거든.” ...

“거짓말. 깜짝 놀라는 눈빛, 내가 다 봤는데?” ...

“얼른 옷이나 입으라니까, 케이.” ...

리시가 꾸짖듯 말하자 케이가 키득거렸다. ...

사락, 사락, 옷 입는 소리가 들려왔다. ...

“리시, 오늘 나랑 어디 좀 가요.” ...

“어디?” ...

“가보면 알아요.” ...

어젯밤 케이가 부하들과 날이 샐 때까지 ‘여자가 좋아하는 것’에 관해 논의했다는 걸 모르는 리시는, 공사다망한 케이가 어딜 그렇게 쏘다니려고 하는 건지 의아했다. ...

옷을 다 입었는지 사락거리는 소리가 사라졌지만, 리시는 그대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

케이가 침대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그의 손가락이 리시의 등에 닿았다. ...

그의 손가락이 척추를 따라 내려가는 게, 얇은 슬립 한 장 너머로 분명하게 느껴졌다. ...

“옷은 이렇게 야한 거 말고.” ...

그의 검지가 꼬리뼈 부근에 멈췄다가 떨어졌다. ...

“평민 복장을 해요. 편하게 다니고 싶으니까.” ...

 

+++

“평민 복장이요?” ...

응접실에 있던 시녀들에게 오늘의 옷차림을 알리자, 크리시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

“어머나. 데이트를 나가시려나 봐요.” ...

“데이트요? 그럴 리가요.” ...

“왜 그럴 리예요?” ...

“우리는 이미 결혼한걸요.” ...

“그게 무슨 상관이래요. 하고 싶으면 하는 게 데이트지.” ...

데이트. ...

서로 호감이 있는 남녀가 만나 좋은 시간을 보내는 일. ...

지난 삶, 리시는 데이트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다. ...

물론 들어본 적은 많다. 브리트니가 항상 자랑하듯 떠들어댔으니까. 어느 잘생긴 기사의 청으로 연극을 봤고, 어느 잘생긴 자작의 청으로 전시회를 다녀왔고……. 브리트니에게는 항상 ‘잘생긴’ 남자가 있었다. ...

호감이 있는 사내와 데이트를 하는 건, 리시에게 먼 세상의 일이었다. ...

결혼 전에는 위틀로 가에서, 결혼 후에는 후치스 가에서. ...

리시는 그저 살아남는 데만도 벅찼다. ...

크리시나는 신이 나서 옷장을 열고 어떤 옷으로 할지 고르는데, 에르웰은 할 말이 있는 듯 자꾸 리시를 쳐다봤다. ...

“에르웰, 뭐 할 말 있어요?” ...

“아이리스 님. 저도 동행할게요.” ...

“예?” ...

“백작님이 어디를 가실지 모르겠지만, 저택 밖은 위험해요. 제가 동행해야 할 것 같아요.” ...

저택 밖이 위험한데, 왜 에르웰이 동행하려는 걸까? ...

연약한 여인이기는 에르웰도 마찬가지인데. ...

“어머, 엘. 무슨 그런 미친 소리를…….” ...

옷을 한 아름 들고 온 크리시나가 엉덩이로 에르웰을 툭 밀어냈다. 그리 세게 친 것도 아닌데, 에르웰은 휘청거리며 옆으로 밀려났다. ...

‘저리 연약하면서…….’ ...

“아이리스 님은 백작님께서 자알 지키실 테니, 눈치 없이 데이트에 끼어들 생각은 하지도 마.” ...

“하지만 시니. 아이리스 님은…… 아이리스 님은 너무 예쁘잖아! 누가 홀딱 집어가면 어쩌려고?” ...

“어머나.” ...

에르웰의 외침에 리시는 얼굴을 붉혔다. ...

예쁘다는 칭찬은 많이 들어왔지만, 이렇게 직선적이고 꾸밈없는 칭찬을 들으면 몸 둘 바를 모르게 된다. ...

“그건 백작님이 알아서 하실 문제야, 엘. 남의 데이트에 따라가려는 멍청이가 어디 있나 했는데, 여기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

크리시나가 리시의 앞에 옷을 한 벌씩 대보면서 중얼거렸다. 함께 지낸 시간이 길어지면서 크리시나도 리시가 편해진 모양인지, 평소보다 과격한 언사였다. ...

리시는 그 점이 싫지 않았다. 이 두 사람과는 편하게 지내고 싶었다. ...

크리시나는 리시의 미소를 오해한 듯 얼른 말투를 바꿨다. ...

“죄송해요, 아이리스 님. 에르웰이 너무 바보 같은 소리를 해서 저도 모르게 그만. 호호호.” ...

“아니에요. 그냥 편하게 해도 돼요.” ...

“크리시나가 편하게 하면 아이리스 님은 숨넘어가실걸요.” ...

에르웰이 툴툴거렸다. ...

여차여차 옷을 갈아입고 나갔더니, 케이가 복도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

“이런. 평민 복장을 하라고 했더니, 너무 눈부시게 하고 나왔는데. 누가 당신을 평민으로 보겠어요?” ...

“하지만 이게 내가 가진 옷 중에 가장 평범한 옷인걸.” ...

“흠. 후드 없어요?” ...

케이의 말에, 크리시나가 얼른 들어와서 긴 후드 망토를 한 벌 챙겨 나왔다. ...

케이는 직접 망토를 리시에게 둘러주고, 모자를 깊이 씌워줬다. ...

그러고 나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팔짱을 끼고 리시의 모습을 살펴본 후 말했다. ...

“음. 그렇게 해도 아름다운데.” ...

리시는 어젯밤 케이의 부하들이 ‘여자는 칭찬에 약하다.’라는 조언을 해줬다는 걸 몰랐기에, 이 남자가 오늘따라 왜 이러나 싶었다. ...

리시의 뒤에 서 있던 에르웰이 팔뚝에 소름이 돋는지 팔을 쓰다듬었다. ...

“어쩔 수 없어요. 진흙을 발라도 아름다울 테니까.” ...

리시의 말에 케이가 웃었다. ...

“정답이에요. 어쩔 수 없겠군요. 이대로 나가는 수밖에.” ...

저택 앞에서 마차를 타고 길을 따라 내려간 후, 번화가에 들어가기 전에 마차에서 내렸다. ...

케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며, 리시는 열심히 도시의 정경을 눈에 담았다. ...

리시는 이렇게 나와서 도시를 걸어보는 게 처음이었다. ...

지난 삶, 위틀로 공작가에 갇혀 있다가 후치스 자작가로 옮긴 후로도, 이렇게 바깥을 구경할 기회가 없었다. ...

저택을 벗어나는 건, 파티에 참석할 때뿐. 항상 마차로 이동했기에, 이렇게 생생한 현장에 발을 디뎌보지 못했다. 지난번에 알포드 사건으로 토니의 동굴에 향할 때 역시 마차를 타고 이동했었다. ...

수많은 사람이 바삐 오가며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

어깨에 짐을 짊어지고 다니며 “굴뚝 청소합니다, 굴뚝!” 하고 외치는 청년, 나란히 줄지어 앉아 구두를 닦는 구두닦이들, 바구니를 갖고 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 ...

다양한 사람들을 정신없이 구경하면서 지나가다 보니, 어느새 깨끗하고 넓은 거리에 접어들었다. ...

“여기는 조용하네요.” ...

상점은 많아도 호객꾼이나 행상인, 가판대에서 물건을 파는 이가 없었다. ...

“여긴 잡상인 금지 구역이거든요. 상점을 가져야만 물건을 팔 수 있죠. 귀족이나 돈 많은 평민이 자주 찾는 곳이에요.” ...

케이의 설명을 들으며 상점가를 쭉 걸어갔다. ...

케이가 멈춘 곳은, 연분홍색과 하늘색으로 꾸민, 눈에 띄는 건물이었다. [아르헨의 찻집]이라는 간판이 입구 위에 붙어 있었다. ...

“여기에 갈 거예요, 리시.” ...

케이가 손바닥을 위쪽으로 하고 입구 쪽을 가리켰다. 케이는 ‘이것 봐. 감동했지? 놀랐지?’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리시는 입구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

“나는 이런 곳보다는 아까 여기로 오던 거리를 더 구경하고 싶은데.” ...

리시의 중얼거림에 케이는 무릎이 꺾이는 기분이었다. ...

-아르헨의 찻집이라고 있는데요. 요새 거기가 유행인가 봐요. 가격은 엄청 비싼데, 여자들이 딱 좋아할 분위기래요. ...

-아, 나도 거기 들어봤어. 하녀들이 누가 자기 좀 데리고 거기에 가줬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사랑에 빠질 거라고 하더라고. ...

어제 부하들의 조언에 따르면, ‘아르헨의 찻집’은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대단한 곳이었다. ...

방문객에게는 아르헨의 찻집에서만 볼 수 있는 작은 티스푼을 선물로 주는데, 이 티스푼을 가진 여자들은 모두의 부러움을 산다고 했다. ...

“여기에 가면 티스푼을 선물로 준대요.” ...

리시가 모르나 싶어서 말해줬더니, 리시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

“티스푼은 이미 많잖아요.” ...

“아니, 그게 아니라…… 여기서 주는 티스푼이 아주 특별한 건데…….” ...

“알아요. 하지만 나는 아까 그 거리에서 팔던 빗을 더 갖고 싶어요.” ...

“빗?” ...

“응, 윈디의 털을 빗겨주고 싶어서요.” ...

또 윈디다. ...

그놈의 윈디! ...

하지만 리시에게 윈디를 질투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

-대장, 데이트에서 제일 중요한 건, 아이리스 님이 즐거워야 하는 거예요. ...

제이미의 조언이 떠올랐다. ...

그래, 윈디의 빗을 사는 게 리시가 즐거워할 일이라면 따르는 수밖에. ...

“알겠어요, 그럼. 거기로 가죠.” ...

케이가 몸을 휙 돌려 걷기 시작했다. 리시가 얼른 케이를 따라오며 말했다. ...

“케이, 화났어요?” ...

“내가 왜 화나요?” ...

“화난 것 같아서. 아! 아르헨의 찻집에 꼭 가고 싶었던 거예요?” ...

“아니에요.” ...

“그런 것 같은데. 티스푼이 필요했어요? 그럼 아르헨의 찻집으로 가요. 난 거기도 좋아요.” ...

“아니에요, 리시. 티스푼 같은 건 필요 없어요.” ...

“그럼?” ...

“뭐가요?” ...

“왜 삐쳤는데?” ...

“안 삐쳤다니까.” ...

툴툴거리는 케이의 앞을, 리시가 가로막았다. ...

리시는 고개를 바짝 들고 케이를 올려다봤다. 리시의 검지가 케이의 입술에 닿았다. ...

“삐쳐서 입 나왔네, 뭐.” ...

케이가 입술을 오므렸다. ...

“안 나아꺼등여.” ...

입술을 오므리고서도 항변하는 케이의 모습에, 리시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

(41) 생각 깊은 언니. (1) ...

“정말 아르헨의 찻집에 안 가도 되겠어요?” ...

“리시, 내가 아르헨의 찻집에 가고 싶었던 건……!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 진짜로 안 삐쳤으니까, 가서 윈디의 털을 뽑아버릴…… 아니, 빗겨줄 빗을 사자고요.” ...

삐친 것 같은데. ...

리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케이를 올려다봤다. ...

‘설마 윈디를 질투하는 건 아니겠지?’ ...

그럴 리 없겠지. 그 대단한 그린 백작이 어린 유니콘을 질투해서 툴툴거리다니. ...

리시가 케이의 손을 잡자, 케이의 표정이 풀어졌다. ...

“케이, 정말로 아르헨의 찻집에 가도 좋아요. 나도 티스푼 갖고 싶어.” ...

“됐어요, 리시. 당신 의외로 거짓말 못하는 거 알아요? 거짓말하면 콧구멍이 벌렁거려요.” ...

리시가 깜짝 놀라 케이의 손을 놓고,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

케이가 키득거렸다. ...

“농담이에요.” ...

“케이…….” ...

“자, 가죠. 윈디의 털을 뽑…… 아니, 빗겨줄 만한 빗이 있나 구경하러.” ...

케이는 아까 ‘아르헨의 찻집’에 갈 생각뿐이라, 시장 거리를 걸어올 때 리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

시끄러운 시장 거리로 돌아간 리시는,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

리시는 길을 따라 늘어선 노점상을 구경하기도 하고, 바구니를 들고 가는 여자를 불러 약초를 살펴보기도 했다. ...

‘그래, 리시가 즐거우면 됐지.’ ...

한참 구경하던 리시가 생필품을 늘어놓고 파는 판매대 앞에서 멈췄다. ...

리시는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빗을 하나 들어서 손바닥에 쓰윽 문질렀다. ...

케이도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

빗을 하나씩 확인해보는 리시의 옆모습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가지런한 눈썹이 살짝 아래로 내려갔고, 눈꼬리가 휘어져 있었다. ...

저토록 달콤한 표정으로 윈디의 털을 빗겨줄 생각을 하다니. ...

“케이, 손 좀 내밀어봐요.” ...

케이가 손을 내밀자, 리시가 케이의 손바닥을 빗질하듯 쭈욱 긁었다. ...

“느낌 어때요?” ...

“내 느낌이 중요해요? 윈디가 좋아해야지.” ...

“하지만 이건 당신 빗겨줄 빗인걸.” ...

생각지 못한 말에, 케이의 눈이 커졌다. ...

방금 그 달콤한 표정이, 날 빗겨줄 생각에 흘러나온 거였다고? ...

“윈디 걸 사는 줄 알았는데.” ...

“당연히 당신이 먼저죠. 윈디는 두 번째.” ...

리시가 케이의 코를 콕 찍었다. ...

케이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윈디를 질투한 자신이 한심해서. 자신을 들었다 놨다 하는 이 여자가 사랑스러워서. ...

“당신 때문에 못 살겠어, 리시.” ...

“그래도 살아봐, 케이.” ...

리시가 빗으로 케이의 머리를 쓰윽 빗어 넘기고 눈을 맞췄다. ...

“앞으로 더 좋은 일이 많아질 테니까.” ...

+++

어제 리시와 데이트를 하고 돌아온 후, 케이는 계속 싱글싱글 웃으며 돌아다녔다. ...

응접실 근처에서 딱 마주친 젠과 넬라에게, 케이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

“아름다운 아침이야, 젠. 넬라. 날씨가 참 좋아.” ...

오늘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

젠과 넬라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

“왜 그렇게 재수 없는 표정으로 다녀? 사람들 놀라게.” ...

“난 앞으로 더 좋은 일이 많아질 거거든.” ...

넬라가 젠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

미친놈 상대하지 말고 그냥 가자는 표현이었다. ...

그러거나 말거나, 케이는 창밖을 향해 아련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

“하, 진짜 날씨 좋네.”   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넬라의 팔짱을 끼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

“저 인간, 왜 저래?” ...

넬라가 경악한 표정으로 물었다. ...

“어제 새언니랑 데이트했대.” ...

“데이트 좀 했다고 저렇게까지 미쳐? 대체 리시가 뭘 해줬기에?” ...

“몰라.” ...

“와, 믿을 수가 없네. 저게 진짜 케이브란트야?” ...

“아니었으면 좋겠어. 저런 징그러운 게 내 오빠라니…….” ...

“으아! 대장, 표정이 왜 그래요? 미쳤어요? 입 좀 다물어요.” ...

뒤에서 나단의 외침이 들려왔다. ...

젠과 넬라는 황급히 계단을 올라가 리시의 방에 들어갔다. 리시는 시녀들과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

“리시, 어제 우리 오빠랑…… 아니, 아니다. 알고 싶지 않아. 아무튼, 리시, 오늘은 결혼식 때 입을 드레스를 고를 거예요.” ...

“드레스라면 많은데.” ...

리시의 대답에, 넬라가 고개를 저었다. ...

“그런 거로는 안 돼요, 리시. 자비자르에서 유명한 디자이너가 올 거예요. 드레스는 전야제 때 입을 드레스 세 벌과 웨딩드레스 한 벌, 그리고 후야제 때 입을 드레스 두 벌. 그리고 식사 때 입을 드레스 네 벌. 총 열 벌을 맞출 예정이에요.” ...

“그렇게 많이요?” ...

“이것도 줄이고 줄인 거예요. 마음 같아서는 시간마다 갈아 입혀주고 싶은데. 리시는 드레스 입힐 맛이 날 것 같거든요.” ...

넬라가 리시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군침을 삼켰다. ...

“전야제는 이틀간 진행될 거예요, 리시. 그전부터 손님이 와서 가끔 식사를 함께하게 될 텐데, 그에 맞는 의상을 입어야 해요. 그렇게 입지 말고.” ...

젠이 지적했다. 지금 리시는 평민들이 입는, 평범하고 편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

“전야제 파티는 이틀, 그리고 결혼식, 다음 날 후야제. 이렇게 네 번의 파티가 있어요. 후야제는 배웅하는 의미라서 아주 성대하지는 않지만, 댄스 요청을 많이 받을 거예요.” ...

넬라가 설명했다. ...

결혼식 전야제 때는 예비 신부, 결혼식 당일에는 신부이기에, 오롯이 남편의 여인으로 대우한다는 의미에서 댄스 신청을 하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

물론 신분이 아주 높은 자는 ‘내 축하를 받으시오.’라는 의미로 댄스 신청을 해도 괜찮았다. 신분 높은 이의 댄스 요청을 받는 건, 신부에게 영광이니까. ...

결혼한 후의 댄스 요청은, ‘당신을 누구누구의 부인으로 인정한다.’라는 의미였다. ...

결혼 후 댄스 요청 예절이 생긴 건, 귀족과 평민 사이의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워진 최근의 일이다. 귀족가의 영애가 평민 사내와 결혼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반대의 경우는 종종 있어서 이런 예의가 생겼다. ...

하지만 평민 여자가 귀족가의 영식과 결혼한 경우, 후야제 때도 댄스 신청을 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직은 평민을 귀족 사회로 받아들이는데, 거리낌을 가진 자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

“리시, 댄스 실력은 어때요?” ...

넬라의 질문에 리시가 빙그레 웃었다. ...

“내 입으로 잘 춘다고 말하기는 좀 그럴 것 같은데.” ...

“아하하. 그도 그러네요. 그럼 댄스 부분은 우리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거죠?” ...

“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

알포드 후치스는 자신의 아내인 리시가, 파티에서 바보처럼 보이는 걸 원치 않았다. ...

그는 자신이 데리고 다니는 액세서리가 최고로 빛나기를 바랐다. 알포드와 결혼 후, 춤을 배운 적 없는 리시는 알포드와 그의 누나 줄리안느에게 맞아가며 춤을 배워야만 했다. ...

어떤 식으로 파티를 진행할지 대화를 나누는 중에, 디자이너와 재봉사들이 도착했다. ...

그들은 우선 리시의 치수를 재고 나서, 카탈로그를 펼쳤다. ...

화려하고 아름다운 드레스 디자인이 잔뜩 담긴 카탈로그. ...

리시의 눈에는 전부 비슷하게 아름다웠는데, 젠과 넬라의 눈에는 전부 다 다른 모양이다. ...

“이건 좀 칙칙한 느낌이야. 리시 얼굴이 죽어 보일걸.” ...

“이걸 입으면 리시가 너무 파묻힌 느낌이 들 것 같아.” ...

“오, 이건 예쁘네.” ...

리시는 그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드레스들이, 어디가 어떻게 다른 건지 알 수 없었다. ...

“샘플 몇 벌 가져왔죠? 일단 한번 입은 걸 보고 싶은데.” ...

젠의 질문에 디자이너의 조수가 얼른 일어나서 커다란 가방들을 여러 개 끌고 왔다. ...

저게 뭔가 싶었는데, 샘플 드레스를 넣은 가방인가 보다. ...

가방을 열자, 이미 완벽한 드레스들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

젠은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치마 끝부분만 연한 분홍색이 들어간, 화려하다 못해 눈부신 드레스를 꺼냈다. ...

“리시, 이거 입어봐요.” ...

조용히 서 있던 크리시나와 에르웰이 도와주기 위해 다가왔을 때였다. ...

“리시.” ...

케이가 리시를 부르며 방문을 열었다. ...

그 순간, 젠의 움직임에 리시는 깜짝 놀랐다. ...

소파 근처에 있던 젠이 총알처럼 날아가 방문을 쾅 닫아버린 것이다. ...

“악!” ...

방문에 얼굴이 찍힌 듯, 케이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

“뭐 하는 짓이야, 젠?” ...

“이 미친 인간아. 내가 오늘 드레스 고를 거라고 했지?” ...

“그래서 온 거야. 내 아내가 입는 드레스, 나도 같이 고르려고.” ...

젠과 넬라가 ‘이건 또 무슨 미친 짓이래?’라는 시선을 교환했다. ...

“케이. 제발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바보 같은 소리 좀 지껄이지 마. 나, 많이 창피해.” ...

“아니, 대체 왜? 뭐가 문제인데?” ...

“신랑은 결혼식 때까지 신부 웨딩드레스를 보면 안 된다는 규칙도 몰라?” ...

“그건 또 뭔 규칙이야? 법으로 정해지기라도 한 거야?” ...

“그래! 어기면 사형!” ...

“무시무시하네. 결혼식이 잘못하면 사형까지 당하는 일이었다니. 그래서 한 번만 하려고 하는 건가?” ...

“그러니까 얼른 꺼…… 가버려요, 오라버니.” ...

뒤늦게 이 안에 있는 디자이너 일행을 의식한 듯, 젠이 고상하게 말했다. ...

“풉…….” ...

에르웰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

젠이 휙 고개를 돌리고 에르웰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디자이너 일행은 그 위대한 그린 백작이 여동생에게 당하는 취급에 놀란 듯, 얼어붙어 있었다. ...

젠은 그들을 향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자, 어서 하던 일 계속할까요?” ...

 

+++

“티오렛? 아이리스의 드레스를 맞추러 티오렛이 왔다고?” ...

브리트니가 벌떡 일어나, 소식을 가져다준 시녀를 노려봤다. ...

“네, 아까 본채로 들어가는 걸 봤어요.” ...

“하! 티오렛이라니. 확실해?” ...

“확실해요. 파란색 단발머리에, 빨간색 뿔테 안경.” ...

티오렛은 가비자르 제국에서, 아니, 전 대륙에서 가장 인기 좋은 디자이너였다. ...

어찌나 인기가 좋은지, 타국의 왕실에서 드레스 제작을 요청해도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하기 일쑤였다. 티오렛의 드레스는 귀를 의심할 정도로 비싸지만, 그 가치는 톡톡히 했다. ...

입는 사람을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드레스. ...

거기에 티오렛이라는 브랜드 평가까지. ...

사교계에서 티오렛의 드레스를 입고 파티에 등장한 레이디는, 그날의 영웅 대우를 받았다. ...

브리트니는 티오렛에게 드레스를 의뢰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다. ...

“말도 안 돼. 그린 백작가에 돈이 어디 있다고…… 아이리스, 걘 벌써 너무 낭비하는 거 아냐?” ...

“그러게 말이에요.” ...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내가 가서 한소리 해줘야지.” ...

그런 것보다는 정말 티오렛이 온 건지, 티오렛의 드레스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싶었다. ...

그리고 그 자리에 그린 가 사람들이 있다면, 지금 리시가 하는 행동이 얼마나 허영심 가득한 행위인지, 명예를 중시하는 그린 가문의 이름에 얼마나 먹칠을 할지도 알려주고 싶었다. ...

더불어 내가 이렇게나 동생을 걱정하는, 생각 깊은 언니라는 것도 알려줘야지. ...

(42) 생각 깊은 언니. (2) ...

브리트니가 리시의 방문 앞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 방문 앞을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

하지만 브리트니는 쉽게 문을 열 수가 없었다. ...

방안에서 들려오는 화기애애한 대화가 방벽처럼 브리트니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

“와, 리시. 너무 예쁘다.” ...

“이게요?” ...

“예뻐요, 예뻐. 특히 이 어깨에서 등 라인이…….” ...

“아핫, 간지러워요, 넬라.” ...

“오빠가 보면 넘어가겠네, 진짜.” ...

브리트니는 이를 으득 갈았다. 식당에서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브리트니를 없는 사람 취급하던 젠과 넬라는, 리시의 방에서 마치 리시의 친한 친구 같은 분위기로 대화하고 있었다. ...

‘돌아갈까?’ ...

하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로 티오렛이 왔는지. ...

브리트니는 크게 심호흡한 후 표정을 갈무리했다. ...

어디까지나 동생을 사랑하고 걱정하고 아끼는 언니의 표정. ...

식당에서는 실패했지만, 오늘은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

똑똑- ...

노크 소리에 안에서 들려오던 대화가 뚝 끊겼다. ...

문이 열리고 크리시나가 얼굴을 내밀었다. ...

“리시를 만나러 왔어.” ...

“아, 잠시만요.” ...

크리시나가 문을 닫았다. ...

브리트니는 닫힌 방문을 노려봤다. ...

감히 내 앞에서 방문을 닫다니. ...

잠시 후 문이 열렸을 때, 브리트니는 우아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

“들어오시랍니다.” ...

크리시나가 문을 열고 옆으로 비켜섰다. ...

브리트니는 안에 들어가며, 방 거실에 펼쳐진 광경을 눈에 담았다. ...

여기저기 널려 있는 수많은 드레스. ...

그리고 파란색 단발에 빨간 뿔테 안경을 쓴, 작은 체구의 여자. ...

정말로 티오렛이었다. ...

브리트니는 흐읍, 숨을 들이마시고 리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리시는 하늘하늘한 소재의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거의 안 입은 것처럼 보이는 얇은 소재의 드레스였다. ...

드레스의 등 쪽이 파여서 하얗고 고운 등이 고스란히 드러났고, 검은색 옷감은 리시의 흰 피부를 더 돋보이게 했다. ...

“무슨 일?” ...

리시의 옆에 시녀처럼 드레스를 들고 서 있던 젠이, 거의 반말처럼 물었지만, 브리트니는 우아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

“동생이랑 담소를 나누고 싶어서 왔는데, 이렇게 바쁜 줄 몰랐네요.” ...

“아. 보다시피 바빠요.” ...

젠이 알면 꺼져, 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브리트니는 모르는 척 말했다. ...

“결혼식 때 입을 드레스를 맞추는 중인가 봐요. 그런데 그 드레스는 결혼식에서 입기에는 조금 야한 편인 것 같은데. 리시, 아직도 그런 드레스만 고집하는 거야?” ...

리시는 그저 옅은 미소만 지었다. ...

‘내가 언제 이런 드레스를 고집했어?’라는 항변을 하는 것보다, 저런 미소를 짓는 게 더 속이 뒤집혔다. ...

언제 고집했냐고 주장하면, ‘항상 그랬잖니.’ 하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만들어냈을 텐데. ...

“이 드레스가 어때서요? 리시랑 잘 어울리지 않나요? 내 눈에는 무척 아름다운데.” ...

넬라가 말했다. ...

“물론 아름다워요. 우리 리시는 뭘 입어도 잘 어울리거든요. 워낙 얼굴이 보물이라서.” ...

“그러게 말이에요. 티오렛이 가져온 드레스를 다 입혀봤는데, 뭐 하나 안 어울리는 게 없더라고요.” ...

“제가 오늘처럼 옷 만든 보람을 느낀 게 처음이에요. 마음 같아서는 여기 있는 드레스를 전부 선물로 드리고 싶다니까요. 아이리스 님께서 입어주시면 어마어마하게 홍보가 될 거예요.” ...

티오렛의 말에 브리트니는 갈비뼈가 죄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

“어머, 티오렛은 이미 유명하면서. 하지만 선물로 주시면 우리 리시에게는 정말 좋은 일이겠네요. 리시가 이렇게 값비싼 드레스를 참 좋아하거든요. 덕분에 나도 리시에게 많이 물려받아서 입었죠.” ...

이번에도 리시는 미소만 지었다. ...

‘그래,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는 태도였다. ...

젠과 넬라, 그리고 티오렛과 그녀의 일행은 여인들 간의 묘한 신경전에 관해 알 만큼 알았다. 그 때문에 브리트니의 말에 담긴 가시를 눈치챘지만, 브리트니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

“그래도 좀…… 나는 걱정돼, 리시. 결혼식이 호화로우면 좋긴 하지만 너도 이제 그린 가문의 안주인이잖아. 처녀일 때처럼 낭비하는 건 좋지 않아. 그래서 말인데…….” ...

브리트니가 젠과 넬라를 돌아봤다. ...

“우리 리시가 결혼식에 쓰는 비용은, 우리 위틀로 공작가에서 지불하도록 할게요.” ...

빈말이었다. ...

결혼식 비용은 남자 쪽에서 내는 게 당연했고, 그린 가문에서 처가에 손을 벌리는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

아마도 ‘에이, 어떻게 그래요? 마음이라도 감사해요.’라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 ...

“좋은 생각이에요, 언니.” ...

지금껏 한마디도 하지 않던 리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

상상도 못 한 대답에, 브리트니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

리시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

“안 그래도 남편이 돈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아서 걱정이었는데, 우리 가족이 날 위해 결혼식 비용을 책임진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죠. 어머니, 아버지께 감사하다고 전해줘요.” ...

예상한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자, 브리트니는 당황했다. ...

‘그래, 그렇게 할게. 그래도 결혼했으니까 앞으로는 너무 낭비하지 마.’라고 말하는 게 최선인데, 그런 말을 할 수도 없었다. ...

지금 이 방에 있는 드레스만 수십 벌이다. ...

티오렛의 드레스 한 벌은, 귀족가의 몇 달 치 생활비를 오갈 정도로 비쌌다. 위틀로 공작가에 금광이 있다고 해도, 이 드레스의 가격을 전부 내는 건 무리한 일이었다. ...

꿀꺽- ...

브리트니는 마른침을 삼켰다. ...

‘어떡하지?’ ...

우아하게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자기가 한 말인데, 인제 와서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리시의 호화로운 결혼식에 돈을 내주는 일 따위,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

리시가 ‘농담이에요.’라고 말해주거나, 젠이 ‘아니에요. 결혼식 비용은 당연히 우리 쪽에서 책임져야죠.’라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

하지만 그들은 입을 꾹 다문 채 브리트니를 응시할 뿐. 누구 하나 브리트니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

심장이 죄여들었다. ...

‘어떡해…….’ ...

울고 싶었다. ...

침묵 속에서 머리를 굴리던 브리트니는 간신히 할 말을 찾아냈다. ...

“겨, 결혼식 비용을 우리 쪽에서 내면…… 어…… 괜찮겠어요? 아무래도 남자 쪽에서 담당하는 게 당연하다 보니, 말이 나올 텐데요.” ...

“괜찮아요. 브리트니 양이 먼저 제안해준 일이기도 하고, 이런 일로 뒤에서 우리 그린 가문에 관해 떠들어댈 사람은 없으니까.” ...

젠이 담담히 대꾸했다. ...

이제 정말로 빠져나갈 구멍이 사라졌다. 브리트니는 표정을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잊었다. ...

흔들리는 눈동자로, 이 방 안에 가득한 드레스 더미를 돌아봤다. ...

이 드레스만 해도 생활비 몇 년 치일까? ...

결혼식 비용이 드레스 가격만은 아니었다. 넬라가 주최하는 파티는, 준비 금액이 어마어마할 터였다. ...

“저는…….” ...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해야 하는데. 지금이라도 농담이었다고 할까 싶었지만,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

심지어 이 자리에는 티오렛과 그녀의 조수들까지 있었다. ...

“그럼…… 그렇게 해요.” ...

브리트니는 핏기 가신 얼굴로 휙 돌아서서, 도망치듯 리시의 방을 빠져나왔다. ...

복도를 달리는 브리트니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

‘어떡하지? 어떡해?’ ...

 

+++

“그게 무슨 미친 소리야!” ...

글로번의 외침에 브리트니는 움찔 고개를 숙였다. ...

글로번이 브리트니에게 이렇게 화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브리트니야말로 악을 쓰고 싶은 기분이었으니까. ...

“결혼식 비용을 우리가 대다니……. 우리가 왜! 그 돈이 다 얼만데? 듣자 하니 마탑에 청해 건축용 기계들까지 빌렸다더라. 마탑에서 기계를 빌리는 비용이 얼마나 되는지, 알기나 해?” ...

“하, 하지만…… 리시가…… 우리가 낼 거라고 고집을 부려서…….” ...

“그럼 말렸어야지! 그런 일 없다고 말했어야지! 넌 거기 앉아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

“거기서 어떻게 말려? 리시가 우리 부모님이 결혼 비용 낼 거라고 하는데.” ...

“왜 못 말려? 결혼 비용을 여자 쪽에서 내는 경우는 없다고, 차분하게 얘기하면 되지. 제레시엔 그린이랑 제널 백작 부인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들도 아닌데, 그렇게만 말해도 잘 알아들었겠지!” ...

물론 그랬을 것이다. ...

문제는 그 얘기를 먼저 꺼낸 게 브리트니라는 점이었다. ...

하지만 브리트니는 머리 꼭대기까지 분노한 글로번 앞에서, 차마 진실을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

“아이고, 머리야. 리시, 그 계집애가 아주 미쳐서는…….” ...

데니스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

“하여간 안 돼! 이 결혼식 비용은 절대 안 내. 아니, 못 내!” ...

“하지만…… 아빠. 우리 가문 명예도 걸린 일인데…….” ...

“명예는 무슨! 먼저 명예를 더럽힌 건 저쪽이야. 결혼식 비용을 신부 쪽에서 내라니…… 무슨 그런 미친 소리를……. 아이리스가 그런 소리를 하면, 그 집 딸이라도 말렸어야지. 제레시엔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서?” ...

“으응…….” ...

“돈 한두 푼도 아니고. 내가 이 부분은 정식으로 항의하고 와야겠다!” ...

“누, 누구한테? 아이리스한테?” ...

“그린 백작에게!” ...

 

+++

기다릴 것도 없이 케이에게 항의하러 간 글로번은, 케이의 말에 얼어붙었다. ...

“뭐, 뭐라고요?” ...

“브리트니 양이 먼저 좋은 제안을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위틀로 공작님.” ...

“그, 그게 무슨……?” ...

“아, 못 들으셨습니까? 브리트니 양이 일부러 아이리스의 방에 찾아와서, 거기 있는 드레스와 결혼식 비용 전부를 위틀로 공작 가에서 부담하겠다고 말했다던데.” ...

글로번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

“우, 우리 브리트니가 그랬을 리가…….” ...

“왜 없겠습니까. 브리트니 양이 동생을 그리 아끼는데, 결혼식 비용 정도는 내주고 싶었겠지요. 참으로 다정한 딸을 두셨습니다, 공작님.” ...

글로번은 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

“그린 백작님. 혹시 우리 딸이 순진한 걸 이용하는 것 아닙니까?” ...

“공작님의 딸이라면 브리트니 양이요, 아니면 아이리스요?” ...

“당연히 브리트니를 말하는 겁니다!” ...

“아. 그렇군요. 전혀 몰랐습니다. 짐작조차 못 했네요.” ...

글로번은 울컥했다. ...

“우리 브리트니는…….” ...

브리트니의 순수함에 관해 이야기하려다가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떠올렸다. ...

“아, 아무튼 우리 브리트니가 그런 소리를 할 리도 없고, 여자 쪽에서 비용을 지불해야 그린 가문만 안 좋은 소리를 듣게 되니, 이건 없었던 일로 하죠.” ...

“음. 공작님, 뭔가 잘못 생각하고 계시네요. 우선, 브리트니 양이 먼저 결혼식 비용을 꼭 내주고 싶다고 말한 자리에, 증인들이 많습니다. 우리 제레시엔과 넬라니커스 제널 백작 부인, 디자이너 티오렛과 그녀의 일행들.” ...

글로번이 숨을 삼켰다. 그렇게 사람이 많은 자리였을 줄은 몰랐다. ...

“만약 여기서 말이 바뀌면 위틀로 가문이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

글로번이 뭐라 말하려 했지만, 케이가 검지를 들어서 막았다. ...

“두 번째. 우리 그린 가문과 결혼하는 건, 위틀로 가문에 큰 영광이겠지요. 그래서 위틀로 가문이 결혼 비용을 일체 감당해도,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 가문과 연을 맺고 싶어 하는 이들이 널리고 널렸으니까요.” ...

옳은 말이었다. 결혼식 규칙 같은 걸 좀 어겼다고 해서 뒷이야기를 들을 그린 가문이 아니었다. 아니, 다들 그럴 만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

글로번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무래도 브리트니가 무슨 짓을 하긴 한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자존심을 내세우며, ‘우리만 믿고 맡기세요.’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

금광에서 나온 돈은 대부분 황태자 측근들의 마음을 얻는 것과 사치하는 데에 썼다. 앞으로 쭉 돈이 들어오겠지만, 지금은 수중에 있는 돈이 그리 많지 않았다. ...

그런 상황에서 누가 봐도 어마어마할 것 같은 결혼식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니. ...

케이는 다리를 꼬고 앉아, 미소를 머금고 글로번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

(43) 사랑해. ...

글로번은 선택해야만 했다. ...

뱉은 말을 취소해 굴욕을 당하든, 빚을 져서라도 명예를 지키든. ...

케이의 표정을 보니 반씩 하자는 말은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

‘어차피 우리 브리트니는 황태자와 결혼할 거야.’ ...

다행히 글로번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

브리트니가 황태자비가 되면, 결혼식 비용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

위틀로 가문과 연을 맺고 싶어서 돈과 선물을 보내올 이들이 넘치고 넘칠 테니까. ...

글로번은 표정을 바꾸고, 케이만큼이나 느긋하게 앉아 미소 지었다. ...

“좋습니다, 그린 백작님. 당연히 내 사랑하는 딸을 위해, 결혼식 비용 정도는 낼 수 있지요.” ...

“오, 그럴 줄 알았습니다.” ...

케이가 만면에 미소를 띠며 품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마탑에서 빌린 장비, 티오렛에게 의뢰한 드레스와 장신구, 하객을 위한 파티와 요리 등의 청구서였다. ...

청구서에 적힌 금액은 눈이 돌아갈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

“사인해주시지요.” ...

글로번은 케이가 내민 펜을 그의 얼굴에 집어 던지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청구서에 서명했다. ...

케이는 글로번의 이름이 적힌 청구서를 착착 접어서 품에 넣었다. ...

“감사합니다. 위틀로 공작님이 우리의 결혼식을 위해 애써주신 것은 잊지 않겠습니다.” ...

케이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

“그럼 나는 할 일이 많아 먼저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

글로번의 대답도 듣지 않고 나가는 케이를 보며, 글로번은 케이가 자신을 한 번도 ‘장인어른’이라 불러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

+++

케이는 복도를 걸어가며 품에 넣어둔 청구서를 꺼냈다. ...

어마어마한 금액 아래에 적힌 글로번 위틀로의 사인. ...

케이가 알기로 글로번의 재정 상태는 이 정도 금액을 당장 운용할 상황이 아니었다. 보유한 저택 몇 채를 팔거나 은행에서 빚을 져야 할 것이다. ...

케이는 아까의 일을 떠올렸다. ...

드레스를 고르는 중이라고 젠에게 쫓겨났는데, 다시 부르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황급히 달려갔다. ...

어느새 방 안은 깨끗이 치워졌고, 리시와 젠만 남아서 케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

리시는 젠에게 말했다. ...

-젠, 케이에게 지금까지 결혼식 때문에 사용한 청구서를 줘요. ...

그러고 나서 케이를 보며 말했다. ...

-위틀로 공작이 당신에게 항의할 거예요. ...

갑자기 무슨 항의, 라고 생각하는데, 젠이 브리트니와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놨다. ...

-위틀로 공작은 명예를 지키는 쪽을 택할 거예요. 황태자와 브리트니를 연결해주려는 상황에서, 이런 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건 좋지 않을 거거든. ...

리시의 말대로였다. ...

‘영리한 여자야.’ ...

리시는 무언가를 진행할 때, ‘그럴지도 몰라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투와 눈빛은 언제나 확신에 차 있었다. ...

케이의 앞에서 얼굴을 붉히는 리시도 좋지만, 확신에 차서 일을 진행하는 리시도 좋았다. ...

싫은 구석이 한 군데도 없는 여자였다. ...

케이는 싱글거리며 리시의 방에 들어갔다. ...

“리시. 가져왔어요.” ...

케이가 청구서를 팔락거리며 우쭐한 미소를 지었다. ...

리시의 눈에는 케이가 뼈다귀를 물고 와서 칭찬받고 싶어 하는 강아지처럼 보였다. ...

그렇다면 아낌없이 칭찬해줘야지. ...

“잘했어요, 케이.” ...

“정말 잘했어요?” ...

“가짜로 잘한 것도 있어요?” ...

“보상이 없어서.” ...

“뭘 해줄까요?” ...

케이는 리시의 옆에 앉아 볼을 내밀었다. ...

리시는 뭘 하라는 건지 몰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매끄러운 볼을 응시했다. ...

“얼른.” ...

케이가 채근했다. ...

리시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가 “아!” 하고는, 손바닥으로 케이의 볼을 가볍게 두드렸다. ...

“잘했어요, 케이.” ...

이번에는 케이의 눈이 커졌다. ...

“이게 뭐예요, 리시?” ...

“응?” ...

“보상이 너무 짜잖아. 너무 짜서 고기를 찍어 먹어도 되겠어.” ...

케이가 투덜거리며 리시의 어깨를 눌러 소파에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타 입을 맞췄다. ...

케이의 입술이 떨어지자 리시가 말했다. ...

“키스를 원한 거였다면 입술을 내밀어야죠.” ...

“키스가 아니라 볼 뽀뽀를 원한 거였어요. 키스를 한 건 이자가 붙어서 그런 거고.” ...

볼 뽀뽀. ...

생각도 못 했다. 지금껏 리시에게 볼 뽀뽀를 해달라며 뺨을 내미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

“짠 건 당신이야. 몇 초 만에 이렇게 어마어마한 이자를 붙이고.” ...

“그러니까 긴장 풀지 마, 리시. 아차 하는 순간, 이보다 더한 이자가 붙을 수도 있거든.” ...

키스보다 더한 이자가 뭘지 궁금했다. ...

그 이자, 지금 보여줘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케이가 리시의 허리를 감아 도로 소파에 앉혀줬다. ...

“당신이 말한 대로 위틀로에게 돈을 뜯어내긴 했지만, 걱정되는 부분이 있어요.” ...

케이는 순식간에 야릇한 분위기를 벗어던지고, 일 얘기로 돌아갔다. 리시는 아쉬운 마음이 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위틀로가 황태자비 자리를 노린다면, 이번 일로 자기 재산을 처분하지는 않겠죠. 은행에서 빌릴 텐데, 그걸 위틀로가 갚는다면 다행이지만 갚지 못하면, 우리 쪽에서 감당해야 할지도 몰라요.” ...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내가 알아서 할게.” ...

“어떻게 하려는지 알려주면 안 돼요?” ...

“음, 어쩔까? 예쁜 짓 하면 알려줄 수 있을지도.” ...

“예쁜 짓. 어떻게 해야 내가 당신 눈에 예뻐 보일까?” ...

농담 삼아서 한 말인데, 케이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

그래서 리시는 그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소망을 하나 이뤄보기로 했다. ...

“예쁜 짓은 늑대로 변해서 해야 할 것 같은데.” ...

“그러죠.” ...

케이가 순식간에 늑대로 변했다. ...

리시는 일어나 소파 옆으로 갔다. ...

늑대도 리시를 따라 움직였다. ...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일 때문에 당신이 화낼지도 몰라요.” ...

“나는 당신한테 화 안 내, 리시.” ...

“음, 좋아요. 그럼 우선. 앉아.” ...

“응?” ...

“앉아, 케이.” ...

검은 늑대의 입이 벌어졌다. 늑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리시를 쳐다보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 ...

“하하하하하.” ...

늑대의 웃음소리는 인간일 때와 조금 달랐다. ...

웃음소리에 섞인, 약간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

“아, 리시. 당신은 항상 날 놀라게 해.” ...

그리 말하며, 케이가 얌전하게 앉았다. ...

리시가 케이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

“손.” ...

늑대가 커다란 앞발을 리시의 손바닥 위에 턱 얹었다.   늑대의 앞발은 리시의 손을 전부 덮고도 남을 정도로 컸다. ...

리시는 경이로운 기분으로, 긴 발톱을 쓰다듬었다. ...

“이제 말해줄 거야?” ...

늑대가 꼬리로 바닥을 탁탁 치며 물었다. ...

“아니, 엎드려.” ...

늑대가 납작 엎드렸다. ...

“굴러.” ...

“오, 리시.” ...

“굴러, 케이.” ...

케이가 엎드린 자세로 빙글, 구르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리시를 덮쳐왔다. ...

거대한 늑대가 덮쳐오는데도, 리시는 무섭지 않았다. 그의 송곳니와 발톱이 자신을 해칠 일은 결코 없으리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

리시의 예상대로, 늑대는 일어나서 두 앞발을 리시의 어깨에 얹을 뿐이었다. ...

늑대의 커다란 코가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

“리시. 지금까지 나한테 이런 명령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

“젠도?” ...

“……걔는 빼고.” ...

“어머님, 아버님도?” ...

“……두 분도 빼고.” ...

“당신의 남동생도?” ...

“……걔도 빼자.” ...

리시가 까르르 웃었다. ...

케이가 얄밉다는 듯 리시의 얼굴을 할짝 핥았다. ...

“꺅!” ...

하면서 얼굴을 뒤로 빼다가 휘청 넘어가려는데, 다시 인간으로 돌아온 케이가 리시의 허리를 팔로 감았다. ...

열기를 띤 청회색 눈동자 속에 리시가 담겨 있었다. ...

리시는 그의 눈동자 안에 오롯이 담긴 제 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더없이 행복하게 미소 짓고 있음을 깨달았다. ...

‘나는 이런 표정으로 웃게 됐구나.’ ...

엄지로 그의 눈가를 쓸었다. ...

“리시.” ...

중저음의 음성이 그녀의 이름을 부른 후에야, 리시는 늑대에서 인간으로 돌아온 직후의 케이가 어떤 모습인지 떠올렸다. ...

그런 케이에게 안겨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

하지만 그를 밀어내고 싶지는 않았다. ...

이렇게 그와 밀착해 있는 게 좋았다. ...

이런 눈빛을 할 때의 케이는 리시에게 입을 맞추고, 뜨거운 숨을 뱉어내곤 했다. ...

야한 농담을 하고, 리시의 목덜미를 지분거리며 야릇한 기분에 감싸이게 만들었다. ...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는데. ...

“돌아서요. 옷 입을 테니.” ...

케이는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옷을 입었다. ...

화끈거리던 열기가 순식간에 식으며, 가슴에 싸한 바람이 불었다. ...

‘왜 저러지? 내가 그런 걸 시켜서 화났나?’ ...

아무래도 선을 넘은 것 같아서 걱정하는데, 옷을 다 입은 케이가 뒤에 서서 리시를 끌어안았다. 케이의 입술이 리시의 목덜미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

“위틀로의 빚을 어떻게 감당할지는 나중에 들을게요. 할 일이 생각나서.” ...

케이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이고 휙 돌아섰다. ...

리시도 몸을 돌려,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

“케이.” ...

“응?” ...

“화났어요?” ...

케이가 도로 리시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리시를 향한 그의 눈빛은 여전히 다정했다. ...

“리시, 난 당신에게 화 안 내요.” ...

케이는 리시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 방을 나갔다. ...

+++

케이는 연무장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가슴에 이는 열기를 식히려면 몸을 좀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

‘미치겠군.’ ...

리시가 늑대인 케이에게 말도 안 되는 명령을 했을 때. ...

케이는 화나지 않았다. ...

오히려 리시가 즐거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며 명령하는 게 재미있었다. ...

까르르 웃는 리시의 모습에 가슴이 뜨거워졌고, 홀린 듯 케이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리시 때문에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는 표현을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성이 끊어져, 그녀가 두려워해도 강제로 취할 뻔했다. ...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그녀의 고운 피부를 전부 자신으로 물들일 뻔했다. ...

‘내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

이런 격정적인 충동에 휩싸인 건 처음이었다. ...

리시와 침대 위에서 뒹굴 때마다 뭉근한 열기가 퍼지기는 해도, 자제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리시가 두려워하면 언제든지 멈출 자신이 있었다. ...

하지만 지금은 그럴 자신이 없다. 한번 시작되면 멈추지 못하고 그녀를 집어삼켜야만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녀의 눈동자가 나 때문에 두려움에 물드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장난처럼 그녀와 엉켜서 섞이는 행동조차 조심스러워졌다. ...

연무장에 들어가자마자 목검을 들고, 수련용 나무를 미친 듯이 내리쳤다. ...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

“대장. 목검이 부러졌습니다.” ...

뒤에서 들려오는 유진의 음성에, 케이는 정신을 차렸다. ...

목검이 부러져서 덜렁거리고 있었다. ...

케이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목검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중얼거렸다. ...

“유진. 아무래도 사랑 같다.” ...

리시를 향한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건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폭발할 것 같고, 리시가 그 폭발에 휘말려 더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으니까. ...

그래서 이름을 붙이지 않았더니, 이번에는 케이의 심장이 폭발할 지경이었다. ...

“아니, 같은 게 아니야. 내가 아이리스를 사랑해.” ...

(44) 내 남편의 남동생. (1) ...

유진은 아이리스를 향한 마음을 고백하는 케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

내 대장이 느닷없이 부인을 향한 사랑을 고백해올 때, 부하로서 어떤 대답을 해야 좋은 걸까? ...

그나저나 내 대장은, 왜 다들 아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말하는 걸까? ...

“압니다.” ...

“어떻게?” ...

“어떻게……냐고 물으시면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

“아는 대로 대답해봐.” ...

“아는 대로…… 음.” ...

말 잘하는 제이미라면 근사한 대답을 해줬을 테지만, 유진은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

“대장은 형수님을 향한 사랑을 티 내고 다니십니다.” ...

“내가? 그럴 리가.” ...

케이는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

“왜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

“나는 표정에 내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 ...

“물론 지금까지는 그러셨지만…….” ...

“요샌 안 그랬다는 거야?” ...

“네.” ...

“어떤 부분에서?” ...

“나단이 그러는데, 대장이 바보처럼 웃을 때는 형수님과 좋은 일이 있었을 때라고 했습니다. 제이미는 대장이 멍청하게 헤실거리고 다닐 땐 형수님과 그렇고 그런 걸 해서 그런 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

“아니, 아니. 그만해도 돼.” ...

케이가 손을 저었다. ...

“그럼 검 연습을 하러 가도 되겠습니까?” ...

“넌 대장이 사랑에 빠졌다는데, 그게 다야?” ...

유진은 케이가 뭘 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

사내가 여인을 사랑하는 건 이상한 일도,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

본인에게는 특별하겠지만, 타인에게는 아무 감흥도 없는 일이었다. ...

물론 그동안 여자에게 관심 없던 케이가 사랑을 하고, 바보가 되었다는 게 조금 신기하긴 해도 그뿐이었다. ...

“혹시 축하 파티를 열어주길 바라십니까?” ...

“……아니다, 됐다. 가봐. 연습해.” ...

“네.” ...

더는 관심 없다는 듯 목검을 휘두르는 유진을 보다가, 케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연무장을 나왔다. ...

사랑에 빠졌다. ...

아이리스를 사랑한다. ...

처음부터 그녀를 향한 감정이 특별하다고는 생각했다. ...

리시가 당신의 정체를 아니, 나랑 결혼하자고 청했을 때. ...

그 가느다랗고 예쁜 목을 물어뜯어 죽여버리면 그만인데도 그녀의 청을 받아들였을 때. ...

그녀가 특별하다고는 생각했다. ...

함께 지내면 지낼수록 그녀가 빛나 보일 때도, 이 감정이 더 뜨거워지리라는 걸 예감했다. ...

그런데 이렇게 빨리 폭발할 줄이야. ...

‘큰일이군.’ ...

마음을 자각하고 나니, 리시가 더 애틋하고 더 그립고 더 탐스럽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리시만 보면 뭉클뭉클 올라오던 열기가, 참기 어려운 수준으로 뜨거워졌다. ...

사랑해본 것이 처음이기에, 케이는 궁금했다. ...

사랑에 빠진 남자들은, 당장 달려가서 상대를 안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참는 거지? ...

+++

이오벳 옥보시더스 황태자는 호화로운 청첩장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

“이게 정말 그린 백작이 보낸 청첩장이란 말이야?” ...

“그렇습니다, 전하.” ...

보좌관 세트니가 대답했다. ...

“못 본 사이에 그린 백작의 취향이 바뀐 건가? 원래 이렇게 화려한 걸 좋아하지 않는 거로 아는데.” ...

이오벳은 청첩장을 팔락거렸다. ...

“아이리스 위틀로의 취향인가?” ...

케이가 위틀로 공작가의 꽃과 결혼했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다. ...

이오벳은 케이를 알기에, 단지 그녀의 미모 때문에 결혼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분명 위틀로 공작가와 그린 백작 가 사이에 오간 것이 있을 것이다. ...

하지만 이렇게 화려한 청첩장은 케이가 할 만한 짓이 아니다. ...

“공작가의 꽃으로 자랐다더니, 허영심이 많은가 보군.” ...

“그런 소문이 있더군요.” ...

“그에 비해 그녀의 언니인 브리트니 양은 검소하고 생각이 깊다지?” ...

“그렇다고들 합니다. 동생 걱정을 많이 한다고 하더군요.” ...

“흐음. 이번 파티에는 브리트니 양도 오겠군. 그 대단한 아이리스 위틀로는 당연히 있을 거고.” ...

“그렇습니다, 전하. 하지만 브리트니 양을 보러 꼭 거기까지 발길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황실로 불러들이면 그만이지요.” ...

“아니, 그럴 수는 없지. 오랜 친구가 결혼한다는데.” ...

이오벳이 세트니에게 청첩장을 건넸다. ...

“참석한다고 해.” ...

 

+++

이제 결혼식까지 일주일 남았다. ...

그 남자가 리시의 앞에 나타난 건, 리시가 윈디에게 줄 과일을 따고 있을 때였다. ...

“아이리스 위틀로.” ...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음성에 리시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

그리고 그 얼굴을 확인한 후, 더 놀랐다. ...

깊은 눈, 황금 테를 두른 듯한 녹색 눈동자와 검은 머리칼, 어딘지 모르게 퇴폐적으로 보이는 이목구비. ...

엘드허트 그린. ...

케이의 동생이었다. ...

“누구신지?” ...

알면서도 물었다. ...

“엘드허트 그린. 곧 네 남편이 될 남자의 동생이지.” ...

“아하.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

“너한테 볼일이 있어서.” ...

“볼일이 뭔데?” ...

엘드허트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

“예의가 없군, 아이리스 위틀로.” ...

“예의는 그쪽이 없는 것 같은데. 결혼식은 아직 올리지 않았지만, 내가 네 형이랑 혼인신고를 했다는 건 알고 있지 않아?” ...

“그래,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

엘드허트가 위협적인 눈빛으로 리시를 노려보며 성큼 다가왔다. ...

엘드허트는 엄지와 검지로 리시의 턱을 잡아 올리고, 관찰하듯 리시의 얼굴을 뜯어봤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 ...

“아니, 엘드허트.” ...

리시는 엘드허트의 손목을 '탁' 쳐서 떼어냈다. ...

“그린 백작 부인이겠지. 네가 네 형의 선택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면.” ...

리시는 케이의 가족이 전부 자신을 좋아해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기에, 엘드허트의 태도가 당혹스럽지 않았다. ...

어찌 보면 이런 태도가 당연할지도 모른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에게는 여러 가지 소문이 있었다. 좋은 소문도, 나쁜 소문도, 리시가 수습할 수 없기에 발 빠르게 퍼져나갔다. ...

그런 소문의 여자가 그린 백작과 연을 맺는다는데, 그걸 두 팔 벌려서 환영하는 게 이상한 일이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례한 태도를 참아줄 생각도 없었다. ...

상대가 날 싫어한다면, 나도 있는 힘껏 싫어해주기로 했다. 날 싫어하는 사람의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기로 했다. ...

“기분이 좋은 모양이네. 그린 백작의 부인 자리를 꿰차서.” ...

“싫을 필요는 없잖아?” ...

“케이에게 뭘 제시했지? 아무 이유도 없이 케이가 너 같은 거랑 결혼할 리가 없는데.” ...

리시가 미소 지었다. ...

“나랑 케이 사이에 뭔가 오갔더라도, 그건 부부 사이의 일. 네가 끼어들 공간은 없어, 엘드허트.” ...

“케이는 내 형이야.” ...

“형 뺏긴 기분이 들어서 속상하니?” ...

리시의 비아냥에, 엘드허트의 눈빛이 차게 가라앉았다. ...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어오르는군. 케이가 많이 봐줬나 봐?” ...

“어머나. 본인이 하늘이라고 생각할 줄은 꿈에도 몰랐네.” ...

“나는 여자도 때려, 아이리스. 그린가의 망나니라고 못 들어봤나?” ...

“네가 그렇게까지 소문을 몰고 다니는 남자는 아니야, 엘드허트.” ...

순간, 예리하게 빛나던 엘드허트의 눈빛이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

하지만 곧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리시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처럼. ...

엘드허트가 손을 들어 올렸다. 커다란 손이 리시의 뺨을 향해 다가올 때였다. ...

“거기까지 해요, 엘디.” ...

제이미의 음성이 엘디의 움직임을 끊었다. ...

제이미가 저벅저벅 걸어와 리시와 엘디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

“제이미, 오랜만이군. 더 예뻐졌네.” ...

리시를 상대할 때와 다르게, 엘디는 제이미를 향해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

“언제 온 거죠? 오는 줄 알았다면 미리 문을 걸어 잠갔을 텐데.” ...

“잠근다고 해서 못 들어올 내가 아니지. 성기사단의 부단장을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냐?” ...

“우습게 보지는 않아요, 엘디. 네가 그렇게까지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

“화가 났군, 제이미.” ...

엘디가 검지로 제이미의 미간을 눌렀다. ...

“설마 내가 저 여자에게 무례를 범했다는 이유로 화를 내는 건 아니겠지?” ...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궁금하군요, 엘디.” ...

“기가 막히는군. 설마 너까지 저 여자한테 홀린 거야?” ...

제이미는 대답 없이 자신의 가슴 쪽으로 손을 움직였다. ...

엘디가 황급히 제이미의 손목을 잡았다. ...

“검을 꺼내려고 하는 게 아니라고 믿고 싶어, 제이미.” ...

“웬 사내가 몰래 기어들어 와서 백작 부인께 무례를 범하는데, 내가 가만히 있어서야 면이 살지 않겠지요, 엘디?” ...

“웬 사내라니……. 나 엘드허트 그린이야.” ...

“그리고 네가 무례하게 군 상대는 아이리스 그린이지요, 엘디.” ...

제이미의 눈빛이 점점 무거워지자, 엘디가 살짝 두 손을 들었다. ...

“알겠어, 내가 졌어. 하지만.” ...

엘디가 제이미의 뒤에 서 있는 리시를 노려봤다. ...

“결혼은 가문의 일. 나는 저 여자가 우리 가문에 들어오는 걸 인정 못 해. 위틀로 공작가의 꽃? 글쎄. 정말 꽃일지, 독초일지, 알 게 뭐야?” ...

 

+++

엘디는 인상을 찌푸리고 복도를 걸었다. ...

엘디의 눈에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였다. ...

‘영혼’이라고 이름을 붙이긴 했지만, 그보다는 원념이나 집념, 집착, 각오 같은 것이었다. ...

그 힘으로 엘디는 성유물의 진위를 판별할 수 있었다. ...

신성국은 성유물을 ‘신의 선물’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인간의 집념 같은 것이 남아서 만들어진 물건이니까. ...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고 불리는 리시는, 청초하고 연약한 척하거나, 우아한 척하거나, 사랑스러운 척하는 여자일 거라고 예상했다. 사내들에게 먹히는 태도로, 케이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

아니었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고 불렀을 때, 화마처럼 붉게 빛나던 그녀의 영혼은, 저택에 틀어박혀 곱게 자란 여인이 가질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

엘디는 그런 종류의 영혼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

-네가 그렇게까지 소문을 몰고 다니는 남자는 아니야, 엘드허트. ...

리시가 그리 말했을 때는, 조금 재미있는 여자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케이가 이런 부분에 반했을지도 모른다고, 마음을 열 뻔했는데. ...

‘그건 뭐였지?’ ...

그 순간, 리시의 영혼에 또 다른 영혼이 겹치는 듯 보였다. ...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그걸 잡아보려고 하는데, 제이미가 등장했다. 그리고 리시의 얼굴 근처에서 어른거리던 색다른 영혼도 자취를 감췄다. ...

‘그런 건 처음 봐.’ ...

엘디는 나이가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릴 때부터 성기사단에 있으면서 많은 경험을 하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

하지만 리시에게 벌어진 것 같은 증상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성유물의 영향을 받은 건가?’ ...

간혹 성유물에 지배된 사람에게 성유물에 남겨진 원념이 겹쳐지는 일은 있었다. 하지만 리시와 같은 방식은 아니다. ...

성유물의 원념은 떼려면 얼마든지 뗄 수 있을 것처럼 또렷한 모양으로 들러붙는다. ...

리시의 ‘그것’은 리시의 영혼과 동화된 듯 보였다. 그 무슨 짓을 해도 떼어낼 수 없을 듯, 마치 리시의 영혼 그 자체인 듯. ...

‘문제는 그게 아주 매혹적이라는 거야.’ ...

언뜻 보였을 뿐인데도, 한눈에 홀릴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

‘어쩌면 케이랑 제이미가 그 여자에게 홀린 게, 그 영혼 탓인지도 몰라.’ ...

케이도 케이지만 제이미는 경계심이 강했다. 단순히 자기 대장이 선택한 여자라는 이유로 호의를 베푸는 사내가 아니었다. ...

그런 제이미가 리시를 지키기 위해, 엘디에게 검을 겨누려 했다는 건, 홀려도 단단히 홀렸다는 의미다. ...

‘아이리스 위틀로는 내 예상보다 더 위험한 여자일지도 모르겠군.’ ...

(45) 내 남편의 남동생. (2) ...

가족들을 만나면서, 엘디는 자기 생각에 점점 확신을 품게 됐다. ...

가족으로 받아들인 이상 ‘내 딸’이라고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야 그렇다 쳐도, 젠은 정상이 아니었다. ...

“우리 새언니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지 마, 엘디. 그리고 아이리스 위틀로라니,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야?” ...

젠은 홀려도 단단히 홀렸다. ...

엘디가 아는 젠은 누구보다도 리시를 의심하고, 둘의 결혼을 반대해야 옳았다. 하지만 젠은 리시를 의심하긴커녕, 주인을 따르는 개처럼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

“대체 그 여자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

“나한테 무슨 짓을 하긴 뭘 해? 난 네가 그렇게 뾰족하게 구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리시가 우리한테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니고, 케이를 괴롭히는 것도 아니고. 다들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는데, 왜 끼어들어서 분탕질을 하고 지랄이야?” ...

“넌 오빠한테 무슨 말투가……!” ...

“오빠는 개뿔. 우린 바쁘니까 꺼져.” ...

한창 예식장을 꾸미는 중이었던 젠이,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

엘디는 옆에 있던 넬라를 향해, ‘얘, 이상하지 않아?’라는 시선을 보냈지만, 넬라는 ‘그럴 만도 하지.’라는 미소로 응해줄 뿐이었다. ...

‘이 저택에 정상인 건 나밖에 없군. 아니, 케이라면…….’ ...

마지막으로 믿을 사람은 케이뿐이었다. ...

어쩌면 케이는 리시에게 이상한 부분이 있다는 걸 먼저 알아채서, 곁에 두고 관찰하기 위해 결혼을 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

케이는 영혼을 볼 수 없지만, 사람 보는 눈은 밝았다. ...

엘디는 자신의 형을 믿어보기로 했다. ...

“케이!” ...

노크도 없이 서재 문을 열고 들어간 엘디는, 먼저 케이의 영혼을 살펴봤다. ...

케이의 영혼은 언제나처럼 고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

“엘디.” ...

케이가 의자에 앉은 채 눈만 들어 엘디를 노려봤다. 기분이 안 좋아 보였지만, 엘디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

“그 여자, 뭔가 이상해.” ...

“네가 그 여자라고 부르는 사람이 내 아내는 아니기를 바란다.” ...

“솔직하게 말할게. 그래, 처음에는 형이 그 위틀로 공작의 딸이랑 결혼한다고 해서 미쳤나 싶었고, 그냥 그 여자가 마음에 안 들었어.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니. 우습잖아, 그런 거.” ...

케이가 계속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경계했고, 싫은 기분으로 그 여자를 상대했지. 그런데 그 순간, 그 여자 영혼이 묘하게 움직였어. 하마터면 거기에 홀릴 뻔했지. 이 엘드허트 그린이 홀릴 뻔했다고.” ...

“흐음.” ...

“수상쩍은 영혼을 가졌어, 형. 난 그런 걸 한 번도 본 적 없어. 마치…… 뭔가 다른 영혼이 그 여자 영혼에 섞인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뭔가가 그 여자에게 붙어 있어. 그 여자는 평범하지 않아, 형.” ...

“알아.” ...

역시! ...

엘디는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케이라면 눈치챘을 줄 알았다. ...

“리시는 아주 특별한 여자야.” ...

그런데 어째 케이의 표정이 묘하다. ...

“보면 볼수록 새로워. 언제나 날 놀라게 하지.” ...

케이는 몹시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엘디는 케이가 저런 식으로 미소짓는 걸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

리시에게서 수상쩍은 영혼을 봤을 때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경악했다. ...

“지금 그게 뭐 하는 거야, 케이?” ...

“내가 뭘?” ...

“왜 그렇게 멍청하게 웃어? 미쳤어?” ...

“내가 그랬나?” ...

케이가 한 손으로 제 입가를 문질렀다. ...

“뭐, 사랑하면 바보가 된다고들 하지. 내가 바보가 됐나 보군.” ...

엘디는 말문이 막혔다. 입술을 벌린 채 케이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

“다들 미쳤어.” ...

“미친 건 네 쪽이다, 엘디.” ...

케이가 미소를 지우고 천천히 일어나 엘디의 앞으로 걸어왔다. 엘디를 노려보는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나는 아이리스를 선택했고, 아이리스는 내 아내가 되었지. 그런데 오늘 아이리스를 위틀로라고 부르며 무례를 범했다더군.” ...

“제이미, 그 자식…….” ...

“엘드허트 그린. 내 아내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

케이가 엘디의 어깨를 세게 잡았다.   어깨뼈가 으스러질 것처럼 강한 힘이었다. ...

엘디는 케이가 얼마나 화났는지, 그리고 앞으로 그의 청을 무시하면 얼마나 더 화를 낼지 알 수 있었다. ...

엘디는 케이를 좋아하고 존경했기에, 케이의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상황을 믿고 싶지 않았다. ...

“케이, 설마…… 여자 한 명 때문에 동생을 버리는 거야?” ...

“여자 한 명이 아니라, 내 아내다. 만약 리시가 먼저 네게 무례를 범하고 네게 해를 끼치려 한다면, 나는 널 위해 리시와 싸우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 반대의 상황인 것 같은데, 엘드허트.” ...

옳은 말씀이었다. ...

“형이랑 싸우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내가 이러는 이유를 이해해야 해. 그 여자…… 아니, 아이리스의 영혼은 분명 정상이 아니야. 형도 내 눈에 보이는 걸 믿잖아.” ...

“믿어.” ...

“그런데도 그 여자, 아이리스를 위해 날 이런 식으로 내친다고?” ...

“아이리스의 영혼이 어떤 형태이든, 난 지금까지 내가 보고 경험한 아이리스를 믿어. 그리고 엘디. 난 널 내치는 게 아니라, 형수님에게 무례한 너를 혼내고 있는 거다.” ...

어깨를 잡은 케이의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

엘디는 케이의 눈동자를 살펴봤다. 그의 눈동자는 리시를 향한 신뢰로 견고하게 빛났다. ...

케이가 리시를 믿는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엘디는 케이가 리시의 기묘한 영혼에 홀릴 남자가 아니라고 믿었다. ...

“형의 선택이 옳기를 바랄게. 하지만 형의 선택이 틀렸더라도.” ...

엘디는 케이의 손을 쳐냈다. ...

“나는 형이 지금 나에게 한 것처럼 형을 대하지는 않을 거야.” ...

 

+++

케이는 엘디가 상처받았다는 걸 알았지만, 그를 달래줄 생각은 없었다. ...

리시를 수상하게 여기는 엘디의 마음은 이해했다. ...

엘디 입장에서는 여자에게 관심 없던 케이가 갑자기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랑 결혼한다고 하니,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

그래서 공들여 리시를 관찰했고, 그녀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겠지. ...

그렇다 해도 리시는 케이의 아내였다. 케이의 앞에서는 뭐라 떠들어대든, 리시의 앞에서 무례하게 행동한 것은 잘못이었다. ...

‘두 개의 영혼이라…….’ ...

엘디가 나간 후, 케이는 청첩장에 대한 답장 받은 것들을 가지고 방으로 가며 엘디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

‘엘디가 잘못 봤을 리는 없겠지. 리시의 영혼에 특별한 구석이 있는 게 분명해.’ ...

엘디는 ‘그런 건 처음 봤다.’라고 단언했다. ...

‘혹시 그게 리시가 미래를 아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관계있는 건가?’ ...

하지만 그건 리시를 의심할 이유가 되지 않았다. ...

모두 특별한 능력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

케이에게는 성유물의 힘을 억누를 수 있었고, 엘디에게는 원념, 집착 같은 것을 보는 힘이 있었다. ...

리시가 가진 힘의 정체는 알 수 없지만, 그것으로 케이에게 해를 입히지만 않는다면 아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케이는 리시가 자신에게 해를 입힐 리 없다고 확신했다. ...

리시는 침실 소파에 엎드려서 책을 읽고 있었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케이가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

케이는 잠시 방문 앞에 서서 리시를 살펴봤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엘디가 말하는 ‘영혼’이라는 걸 볼 수 없었다. ...

엘디의 눈에는 리시가 어떻게 보이는 걸까? ...

내 눈에는 그저 예쁘기만 한데. ...

“언제까지 그렇게 보고만 있을 거예요?” ...

리시가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

그녀의 음성을 듣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케이는 리시의 발치에 가서 앉으며 물었다. ...

“내가 온 줄은 언제부터 알았어요?” ...

“들어왔을 때부터.” ...

“책에 집중한 줄 알았더니.” ...

“집중력이 좋은 편은 아니에요.” ...

리시가 솔직하게 말하며, 빙글 몸을 돌려 누웠다. ...

리시의 작고 고운 발이 시야에 아른거렸다. 케이는 그녀의 가느다란 발목을 잡아서 끌어당겼다. ...

그녀의 몸이 쭉 끌려 왔고, 작은 발이 케이의 허벅지 위에 놓였다. ...

어떻게 이런 작은 발로 걸을 수 있는 걸까? ...

케이는 리시의 엄지발가락을 엄지와 검지로 꾹 눌렀다. ...

“아…….” ...

리시의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신음이 야릇했다. ...

사탕을 핥듯 그녀의 동그란 엄지발가락을 핥으면,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

하지만 지금은 은근히 달아오르는 욕망에 불을 지필 때가 아니었다. ...

“엘드허트가 당신에게 무례를 범했다고 들었어요.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리시.” ...

왜인지 리시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

놀라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표정. ...

리시는 때때로 이런 표정을 짓곤 했다. ...

“내가 뭔가 잘못 말했나요?” ...

“아, 아니요. 이런 일로 사과를 받을 줄은 몰라서. 괜찮아요. 엘드허트의 의심은 합당하니까.” ...

“합당하긴요. 당신은 내가 선택했고, 결혼식은 안 했어도 이미 내 아내예요.” ...

“케이, 선택을 한 건 나예요. 실제로 당신을 좀 협박해서 결혼하기도 했고. 잊었어요?” ...

잊고 있었다. 리시의 지적을 받은 후에야,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

“오히려 어머님, 아버님과 젠이 아무 의심도 없이 내게 잘해주시는 게 이상한 일이죠.” ...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리시. 두 분과 젠은 날 믿고 사랑하기에, 내가 선택한 여자 또한 믿고 사랑하는 거예요. 그게 당연하잖아요.” ...

이 당연한 일을, 리시는 몰랐나 보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

케이의 짐작대로 리시는, ...

‘그게 당연한 거라고? 단지 아들이 믿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가 선택한 여자까지 믿고 사랑해주는 게?’ ...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지난 삶, 알포드의 가족들은 그 당연한 걸 해주지 않았으니까. ...

‘아니, 애초에 알포드가 날 사랑한 것도 아니었지.’ ...

리시는 케이와 좋은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알포드가 떠오르는 게 끔찍이 싫었다. ...

얼마나 지나야 그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

“엘드허트에게 잘 말해두긴 했지만, 어쩌면 또 당신에게 무례를 범할 수 있어요. 그럴 때는 그 녀석의 뺨을 날려주도록 해요, 리시.” ...

케이는 엘디 때문에 불안한 듯했지만, 리시는 엘디의 문제가 그리 신경 쓰이지 않았다. ...

모든 사람이 자신을 좋아해주기를 바라는 건 오만이다. 날 싫어하더라도 내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

리시는 케이에게 미소로 답해준 후, 케이가 아까 테이블 위에 내려둔 청첩장 답장을 확인했다. ...

그린 가문의 결혼식이니만큼 답장을 보낸 이들도 호화로웠다. ...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

이오벳 옥보시더스 황태자. ...

‘황태자가 오다니…….’ ...

황제와 황태자는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황궁 밖으로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특히 황태자의 경우, 그 자리를 노리는 이들이 많기에 황제 자리에 오르기까지 몸을 사리는 경우가 많았다. ...

리시가 황태자의 답장을 빤히 보고 있자, 케이가 설명했다. ...

“이오벳 황태자와는 예전부터 아는 사이예요. 어릴 때, 아카데미에서 잠깐 같이 공부한 적이 있거든요.” ...

“아, 그렇군요.” ...

리시는 건성으로 대꾸하며, 지난 삶의 이 시기쯤에 황태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리려고 애썼다. ...

‘황태자가 무슨 사업 같은 걸 벌리려고 했던 것 같은데…… 정확하게 뭐였지?’ ...

기억을 더듬느라, 케이가 어깨를 감싸서 끌어당기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

“리시.” ...

중저음의 음성이 귓바퀴를 훑었을 때야, 아직 케이와 함께 있다는 걸 떠올렸다. 케이가 엄지와 검지로 리시의 작은 턱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

“날 너무 질투 나게 만들지 말아요.” ...

(46) 내 남편의 남동생. (3) ...

“질투?” ...

예상치 못한 단어에, 리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그래요, 질투.” ...

“음, 갑자기?” ...

“갑자기가 아니에요.” ...

케이가 리시의 손에서 살며시 황태자의 답장을 빼내, 그것을 팔락거리며 말했다. ...

“이오벳의 답장을 너무 심각하게 보고 있잖아요.” ...

“아……. 아아.” ...

리시는 어리둥절했다. ...

이오벳의 얼굴을 빤히 본 것도 아니고, 그저 그의 답장을 보고 있었을 뿐인데, 이 남자는 대체 어느 부분에서 질투하는 걸까? ...

리시가 당황해서 보내는 시선을 어떻게 오해한 건지, 케이가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

“너무 그렇게 보지는 말고. 나도 지금 내 행동 때문에 당황하는 중이니까.” ...

“아, 그래요?” ...

“그래요. 이런 건 처음이라…….” ...

케이가 리시를 똑바로 볼 수 없다는 듯 시선을 옆으로 움직였다. ...

리시는 왜인지 그런 케이가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뻗어 그의 양쪽 뺨을 감쌌다. ...

옆으로 도망쳤던 그의 회청빛 눈동자가 다시 리시에게로 향했다. ...

“알겠어요, 리시. 이런 거로 질투 안 할게. 이번 건 내가 좀 바보 같았다는 거, 나도 알아요.” ...

“아니, 그게 아니라…….” ...

케이의 질투가 싫지 않았다. ...

이게 질투할 일인가 싶어서 당황하긴 했지만, 싫은 건 아니었다. ...

“케이, 내 말 잘 들어요.” ...

“그 부분은 걱정 안 해도 돼요. 늑대는 청각이…….” ...

리시는 케이의 양 볼을 감싼 채, 엄지만 움직여 쫑알거리는 케이의 입술을 막았다. ...

엄지에 닿는 그의 입술이 보드라워서 기분 좋았다. ...

“나는 앞으로도 당신이 아닌 다른 사내의 이름을 되뇔 수 있고, 또 다른 사내를 뚫어지게 쳐다볼 수도 있고, 당신이 아닌 다른 사내에게 미소 지을 수도 있어요.” ...

케이가 미간을 좁혔다. ...

“하지만 케이. 이걸 알아야 해요.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오롯이 당신을 위한 것이라는 걸. 그리고 내가 그린 백작 부인으로서 기품과 명예를 잃을 만한 행동은 하지 않으리라는 걸.” ...

케이의 미간에 새겨진 주름이 서서히 펴졌다. ...

“어때요? 알아줄 수 있겠어요?” ...

케이가 입술을 벌려, 아직도 그의 입술을 막고 있는 리시의 엄지를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

그의 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

“좋아요. 하지만 당신도 알아줄 게 하나 있어요.” ...

“뭔데요?” ...

“내가 내 예상보다 더 질투 많은 남자라는 거.” ...

“그런 건 이미 눈치챘어요.” ...

“역시 내 아내는 눈치가 빨라.” ...

케이가 리시의 잘록한 허리를 두 팔로 감아 끌어당겼다. 그의 입술이 서서히 다가와 리시의 입술에 겹쳐지는 순간. 리시는 이 시기에 황태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떠올렸다. ...

“아!” ...

하고, 탄성을 내뱉은 리시가 두 손으로 케이의 가슴을 밀어냈다. ...

그리고 키스를 거부당해서 당황하는 케이에게 말했다. ...

“케이, 황태자에게 나를 자랑하도록 해요.” ...

“응? 아니, 물론 자랑할 생각이긴 한데…….” ...

“당신이 생각하는, 그 정도로는 안 돼요. 이렇게까지 자랑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자랑해요. 이 녀석, 머리가 약간 이상해진 거 아냐,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날 자랑해야 해요.” ...

“아…….” ...

케이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멍하게 리시를 쳐다봤다. ...

알 수 없는 여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지만, 지금처럼 알 수 없는 건 처음이었다. ...

타인에게 내 자랑 좀 해달라고 이렇게 강하게 요청하다니. ...

리시가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가리켰다. ...

“특히 이 부분에 대해 자랑해줘요.” ...

“당신이 예쁘다는 건 따로 자랑하지 않아도 알 만큼 알 텐데.” ...

“아니, 그게 아니고, 내 머리요.” ...

“머리? 요 예쁜 머리가 가끔 좀 이상하다는 걸 자랑하라고?” ...

자기 자랑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진지하던 리시가 키득 웃었다. ...

“아, 미안해요, 케이. 내가 지금 좀 미친 것처럼 보였겠네요.” ...

“아니, 미친 것까지는 아니고 살짝?” ...

케이가 검지로 관자놀이 주위를 빙글빙글 돌렸다. ...

리시가 까르륵 웃었다. ...

별로 웃긴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그녀가 경쾌하게 웃어주는 게 좋았다. ...

“황태자에게 내가 아주 영리하고 선견지명이 있는 여자라는 부분을 자랑해줘요.” ...

“난 당신이 자신을 영리하고 선견지명이 있다고 표현하는 게 좋아요. 아주 자신만만해, 내 아내는.” ...

“놀리지 말고.” ...

리시가 주먹으로 케이의 가슴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

“알겠어요. 그걸로 뭘 하려는 건지는, 이번에도 말해주지 않을 거죠?” ...

“말해줄게요.” ...

놀랍게도 리시는 케이의 귀에 대고 소곤소곤 자신의 계획을 털어놨다. ...

리시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케이의 눈이 점점 커졌고, 이야기가 끝났을 때 케이는 말했다. ...

“당신, 정말…… 영리하고 선견지명이 있네요. 거기다 사람 볼 줄도 알고.” ...

리시가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

“그래요. 그러니까 황태자에게 거짓 없이, 그저 진실만 전해요. 아이리스 그린이라는 여자에 대해서.” ...

 

+++

엘드허트는 창문으로 정원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

케이와 리시가 손을 잡고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케이는 때때로 리시의 머리를 넘겨주기도 하고, 키득키득 웃으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

케이가 저런 행동을 하는 건 처음 봤다. 리시 옆의 케이는 정말로 다른 사람 같았다. ...

“질투는 적당히 해, 엘디. 그래서 네가 브라더 콤플렉스가 있다는 소리를 듣는 거야.” ...

언제 왔는지, 옆에 서 있던 젠이 말했다. ...

“아무도 나에게 브라더 콤플렉스라는 소리를 하지 않아, 젠.” ...

“내가 했네. 계속 그딴 눈으로 리시를 노려보면, 다른 사람들도 하게 될 거고.” ...

“저 여자의 영혼은 이상해.” ...

“저 여자가 아니라 형수님이겠지. 그리고 네가 본 적 없다고 해서, 그게 잘못된 일인 건 아니야. 네 견문이 짧은 거겠지.” ...

“넌 대체 왜 그렇게까지 저 여자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거야?” ...

젠이 엘디를 돌아봤다. ...

“케이가 좋아하는 사람이잖아.” ...

“형이 잘못된 사람을 좋아하면, 그걸 말려야 하는 게 가족이야.” ...

“리시는 잘못된 사람이 아니야.” ...

“저 여자의 영혼은…….” ...

“수인은?” ...

엘디가 눈을 부릅떴다. ...

“모두 수인을 잘못됐다고 하지. 신의 저주를 받은 존재라고. 그럼 케이도, 유진이나 제이미 같은 애들도, 전부 잘못된 거야?” ...

“그거랑은 달라!” ...

“같아, 엘디. 같아.” ...

“아니, 그건…….” ...

“리시는 그저 독특한 영혼을 지녔을 뿐이야. 수인이 특별한 존재이듯, 리시도 조금 특별할 뿐이지, 잘못된 건 없어.” ...

엘디는 대응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젠이 다시 정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리시는 공작가에 있을 때 학대를 당한 모양이야.” ...

“뭐?” ...

“처음에는 케이가 좋아하는 여자고, 소문보다 더 예쁘고, 똑똑해 보여서 좋았어.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학대를 당했는데도, 그 사실을 창피해하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는 당당함이 좋아.” ...

글로번 위틀로 공작이 제 딸로 장사를 하려고 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리시가 그들에게 학대를 당하면서 살았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

엘디는 신성국의 성기사로서 여러 곳을 다니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보았다. 그중에는 가족에게 학대를 당한 아이들도 있었다. ...

그 아이들은 전부 죽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영혼은 어둡고 질척거리거나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흐릿한 색상이었다. ...

리시의 영혼에는 그런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눈이 아플 정도로 밝게 빛나는 영혼을 가졌다. ...

“그렇다고 해서 학대당한 아픔이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 ...

젠이 엘디의 팔을 툭 치며 덧붙였다. ...

“우리 가족까지 리시에게 아픔을 주지는 말자, 엘디.” ...

 

+++

윈디는 언제나처럼 제 어미 옆에 딱 붙어서 푸릉, 푸릉, 콧김을 내뱉었다. ...

리시를 향한 새까만 눈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

윈디의 어미인 화이트가 리시를 향해 안쓰럽다는 시선을 보냈지만, 리시는 그걸 깨닫지 못할 정도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

결혼식에 이오벳 황태자가 온다는 건, 리시에게 아주 좋은 일이었다. 시간을 돌아온 후, 이 세상이 리시를 위해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

‘그래도 자만해서는 안 돼.’ ...

윈디를 향해 사과를 내민 채, 이오벳을 어떤 식으로 끌어들일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

“딴생각을 하는군.” ...

뒤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딴 식으로 대하니, 저 꼬맹이가 마음을 안 열지.” ...

엘디가 리시의 옆으로 걸어와서, 리시가 들고 있던 사과를 빼앗듯 가져갔다. ...

엘디는 사과를 처음 보는 것처럼 가만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

“케이가 유니콘을 선물했다지? 넌 유니콘을 선물 받는 게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알고 있긴 해?” ...

리시는 대답 없이 사과를 빼앗으려 했지만, 엘디는 손을 쓱 움직여 리시의 손을 피했다. ...

“유니콘을 앞에 두고 딴생각이나 하는 걸 보면, 유니콘의 가치를 모르는 것 같은데…… 케이가 왜 너 같은 여자에게 이 귀한 생물을 선물했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

“내가 이 집안에 안 어울린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라면, 네 형에게 가서 해. 울면서 매달리면 나랑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해줄지도 모르잖아.” ...

리시가 비아냥거리는데도 엘디는 기분 나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

“케이한테도 그런 식으로 대하나?” ...

“그럴 리가. 애교 많고 사랑스럽고 연약한 척하지.” ...

엘디가 작게 웃었다. ...

“그런 것 같지는 않던데. 애교 많고 사랑스럽고 연약한 척하는 여자들은 널리고 널렸거든. 그 여자 중 반 이상이 케이를 가지고 싶어 하는데, 그동안 케이는 눈길 한번 준 적 없단 말이지.” ...

엘디가 리시를 향해 성큼 다가왔지만, 리시는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서서 엘디를 올려다봤다. ...

“아주 묘한 방법을 써서 우리 가족의 마음을 손에 넣은 것 같은데, 내 마음을 손에 넣는 건 쉽지 않을 거야, 아이리스.” ...

리시는 엘디가 이제 리시를 부를 때, ‘아이리스 위틀로’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

“엘드허트.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난 네 마음 같은 거, 줘도 안 가져.” ...

이번에도 엘디는 기분 나빠하지 않고 씩 웃기만 했다. ...

“어찌 되었든, 그린 가문에 들어왔으니 남들이 보는 앞에서 가족으로 대해주기는 하겠어. 하지만 널 신뢰한다는 뜻은 아냐. 난 네가 평범한 여자가 아니라고 확신하거든.” ...

“남들 앞에서라도 예의를 차려주겠다니 다행이네. 네 망나니 같은 행동으로 내 남편의 명예에 작은 흠집이 생길까 봐 걱정했거든.” ...

엘디는 콧등을 살짝 찌푸려 준 후, 윈디를 향해 돌아섰다. 엘디가 사과를 위로 던졌다가 받으며 말했다. ...

“좋으나 싫으나 내 형수인데, 새끼 유니콘 한 마리 길들이지 못한다고 하면 가문의 수치겠지. 너 때문에 수치를 당하고 싶지 않으니, 유니콘 다루는 방법 정도는 알려줄게.” ...

예상치 못한 배려였다. ...

‘그래, 엘드허트는 케이가 유니콘을 어떻게 길들였는지 알겠지.’ ...

케이조차 도와주지 않는 상황이기에, 엘디의 오지랖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

“유니콘은 영리한 생물이라서, 진심으로 대해야 해. 딴생각을 하면서 주는 사과 따위, 받아먹지 않는 게 당연하잖아.” ...

그렇구나! ...

“게다가 저 녀석은 어린애야. 애정을 가지고 저 꼬맹이에게 집중한다는 걸 알려줘야 해. 나는 너를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한단다, 라는 느낌을 전해줘야 하지.” ...

엘디가 윈디를 향해 다정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놀랍게도, 제 어미 옆에 붙어 있던 윈디가 엘디를 향해 조금씩 다가왔다. ...

엘디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윈디를 향해 사과를 내밀었다. 엘디를 향한 윈디의 까만 눈동자가 리시를 볼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빛났다. ...

“먹어, 꼬맹이. 그 옹골찬 주둥이를 움직여봐.” ...

윈디가 프힝, 하고 애교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다. ...

그리고. ...

콰직-! ...

엘디의 손을 대차게 물어버렸다. ...

(47) 내 남편의 남동생. (4) ...

“훗.” ...

엘디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웃음을 흘렸다. ...

‘분명 뼈가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는데.’ ...

리시는 걱정스럽게 엘디를 쳐다봤지만, 엘디는 이런 일을 예상했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윈디를 향해 내민 오른손은 여전히 윈디의 입에 물려 있는 상태였다. ...

“영리한 녀석이군.” ...

영리하다고? 사과가 아니라 네 손을 물어뜯었는데? ...

“꼬맹이. 내 손이 사과같이 탐스럽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이건 먹는 게 아니야. 착하지?” ...

엘디가 왼손으로 윈디의 턱을 쓰다듬어주려 했지만, 윈디가 힝, 하며 고개를 털어냈다. 물론 엘디를 문 입에서 힘을 빼지는 않았다. ...

“엘드허트, 괜찮아?” ...

이쯤 되니 리시도 걱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

엘디가 별일 아니라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

“나한테 묻는 거야? 내가 누군지 몰라?” ...

알지. 바보잖아. 손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데, 자존심 때문에 괜찮은 척하는 바보. ...

“난 테세이 성기사단의 부단장 엘드허트 그린이야. 유니콘 꼬맹이가 문 정도는 비명을 지를 일도 아니라고.” ...

엘디의 목덜미에 혈관이 툭 불거져 나왔다. ...

아무래도 엄청 아픈 걸 참는 것처럼 보이는데. ...

“야, 꼬맹이. 오빠가 좋은 말 할 때 이거 놓자. 응?” ...

  콰직-! ...

윈디가 더 세게 물었다. ...

이번에는 엘디도 못 참겠는지 눈을 부릅떴다. ...

“왜 또 화가 난 건데?” ...

“걔, 남자애거든.” ...

“하!” ...

엘디는 진퇴양난에 빠진 듯했다. ...

리시의 앞에서 그렇게 잘난 척을 다 해놨는데, 여기서 아프다고 길길이 날뛸 수도 없는 노릇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 통증을 계속 참는 것도 힘들 거고. ...

리시는 엘디를 도와주기로 했다. ...

“윈디.” ...

리시가 부드럽게 윈디를 불렀다. ...

엘디의 조언대로, 윈디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소중한 생물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윈디를 바라봤다. ...

“그 아저씨 손 놔주자.” ...

“아저씨라니……!” ...

“응? 윈디. 그 못된 아저씨 손 놔주고 이리 와.” ...

윈디가 까만 눈동자를 또로록 굴려 엘디를 한 번 쳐다보더니, 킁,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

콧물이 분무해 엘디의 얼굴에 쏟아졌다. ...

“야, 콧물! 드러운 자식.” ...

얼굴에 묻은 콧물 때문에 엘디는 자신의 오른손이 자유로워졌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

엘디가 얼굴을 닦는 동안, 윈디는 차박차박 걸어와 리시의 앞에 멈췄다. 작고 사랑스러운 생물은, 고개를 바짝 들고 얌전히 리시를 응시했다. ...

그 순간, 리시의 가슴에 무언가 몽글몽글한 것이 가득 차올랐다. 이 작고 영리하고 짓궂은 생명체가 몹시도 사랑스러웠다. ...

애정 담긴 미소가 저절로 흘러나와 리시의 입가를 적셨다. 리시가 살며시 두 팔을 들어 올리자, 윈디는 리시가 뿔에 다치지 않도록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리시의 배에 머리를 비볐다. ...

“너, 정말 착하구나.” ...

리시가 윈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

“착하긴. 그건 악마야.” ...

엘디가 욱신거리는 오른손을 문지르며 으르렁거렸다. ...

“정말 예쁘다, 윈디. 털도 부드럽고…… 귀여워.” ...

리시는 엘디를 깨끗이 무시했다.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윈디와 눈높이를 맞췄다. ...

“윈디, 내가 부족한 게 많을 거야. 나는 어떻게 아껴주고 예뻐해주고 소중하게 여겨줘야 하는지, 아직 잘 모르거든. 하지만 지금 네가 몹시 소중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아. 앞으로 더 잘 알게 될 테니까, 부족한 게 있어도 이해해줘. 알겠지?” ...

윈디가 괜찮다고 말하듯 뿔 옆면으로 리시의 목덜미를 비볐다. ...

엘디는 아픈 손을 문지르며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봤다. ...

예민하고 경계심 강한 윈디가 리시에게 마음을 여는 순간, 리시의 영혼이 이상하게 빛나는 느낌은 없었다. ...

‘저렇게 보면 평범한 여자로 보이기도 하는데. 아니지, 평범한 여자의 영혼은 저렇게 무시무시하게 빛나지는 않지.’ ...

이런 순간에도 리시의 영혼은 눈이 시리게 빛나고 있었다. ...

엘디의 시선을 눈치챈 리시가 왜 그러냐는 듯 엘디를 올려다봤다. 엘디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리시가 말했다. ...

“손, 많이 아픈 것 같은데.” ...

엘디는 인상을 찌푸렸다. ...

“날 도와줬다고 생각하지 마, 아이리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니까.” ...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도와준 쪽에서 해야 하는 말 아냐? 내가 아니었다면 네 사과 같은 손, 사과처럼 반쪽으로 툭 잘렸을걸.” ...

리시가 엘디의 발 근처에 떨어져 있는 사과를 가리켰다. 아까 엘디가 들고 있던 사과는, 윈디의 이빨에 반으로 쪼개진 상태였다. ...

“오늘 일은 잊어도 좋아, 아이리스.” ...

“그 말도 내가 해야 하는 말 같은데.” ...

하여간 저 여자는 한마디도 안 진다. ...

그 점이 싫은 건 아니었다. 연약한 척하면서 살짝만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어도 울음을 터뜨리는 여자보다는 낫다. ...

“아무튼, 나는 널 여전히 의심하니까 지켜보겠어, 아이리스.” ...

그 말에 리시가 피식 웃더니, 몸을 일으켜 엘디에게 다가왔다. 엘디의 앞에 선 리시가 손바닥으로 엘디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

생각지도 못한 행동이라서, 아무리 엘디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굳어버린 엘디를 향해, 리시가 말했다. ...

“난 널 경계하지 않을 거야, 엘드허트. 고집쟁이에 자존심이 강한 아이를 귀엽게 여기는 편이거든.” ...

애 취급을 당했다. ...

엘디는 리시가 자신보다 6살은 어리다는 걸 알고 있었다. ...

경악해서 입술만 뻐끔거리는 엘디를 보며 리시가 덧붙였다. ...

“꼭 윈디 같아.” ...

 

+++

“아이리스가 몇 살인 줄 알아? 고작 20살이라고! 그런데 나한테 아이래. 이게 말이 돼?” ...

“흐응.” ...

“한 주먹이면 날아가게 생겨서는, 어디서 감히 날 애 취급해?” ...

“관둬. 한 주먹으로 형수님을 날려버리면, 넌 내 총에 죽어, 엘디.” ...

엘디가 아무리 떠들어대도 총만 만지작거리던 나단이, 한 주먹에 날릴 거라는 말에 반응했다. ...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진짜로 때리겠냐?” ...

“모를 일이지. 네 성질머리에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알아?” ...

“하여간 그 여자는 이상해.” ...

리시의 어린애 취급에 화가 나야 마땅했다. ...

하지만 그 순간, 엘디는 정말로 한참 나이가 많은 여성에게 꾸중을 듣는 기분을 느꼈다. ...

그런 기분을 느꼈다는 건, 당연히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 ...

“이상할 거 없어. 다른 사람들 눈에는, 네가 더 이상해 보일 테니까. 형수님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너 한 명, 널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수천, 아니, 수만, 수백만 명. 그럼 진짜로 이상한 쪽은 누굴까?” ...

나단이 총구로 엘디를 가리켰다. 엘디는 검지로 총구를 옆으로 치우며 대꾸했다. ...

“나는 정당한 의심을 할 뿐이야.” ...

“그게 이상하다는 거지. 형수님이 이 저택에 들어온 후로 아무 문제도 없었고, 대장은 굉장히 즐거워 보여. 뭐, 우리도 예쁜 형수님 얼굴 보면 기분 좋고.” ...

“얼굴에 홀리지 마, 나단. 넌 여자 얼굴 따위에 홀리는 녀석이 아니잖아.” ...

“대장이 좋아하는데 얼굴까지 예쁘니까 더 좋은 거지. 대장은 우리를 위해서 가족도 만들지 않으려고 했던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누구 좋다고 저러고 다니는 걸 보니까 안심이 된다고 해야 하나?” ...

“…….”

“노백작님 부부도, 젠도, 다 비슷한 마음이겠지. 케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아시니까, 케이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걸 기뻐하시는 거잖아. 그에 비해 넌.” ...

나단의 고운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

“징그러워. 자기 형 뺏겼다고 형수님을 질투하는 것처럼 보여서. 아주 역겨워.” ...

“질투하는 게 아니야. 케이를 걱정하는 거지.” ...

“걱정도, 경계도, 대장이 알아서 할 일이고. 네가 우려하는 일이 벌어지면 우리도 나설 거고. 벌써부터 네가 형수님한테 ‘우리 형 뺏어가지 마, 우리 형 데려가면 싫어, 싫어.’ 같은 짓을 할 건 없어.” ...

“난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아, 나단.” ...

“내 눈엔 그렇게 보이는데?” ...

나단의 방에 오기 전에 방문한 어머니와 젠에게도 비슷한 말을 들은 터라, 엘디는 반박할 말이 없었다. ...

“그나저나 넌 그새 취향이 바뀌었냐? 총에 보석을 왜 그렇게 박아넣었어?” ...

나단이 만지는 총은 손잡이 부근에 연분홍색 보석이 박혀서 화려하게 빛났다. ...

“아, 이거. 결혼 선물로 형수님께 드리려고. 형수님도 여차할 때 자기 몸을 지킬 무기가 필요하잖아.” ...

엘디는 오전에 유진과 윌리스가 결혼 선물로 뭘 준비할지를 두고 심각하게 논의하는 현장을 목격했었다. ...

“다들 정신이 나갔어! 그 여자가 뭐나 된다고!” ...

엘디가 분통을 터뜨렸지만, 나단은 깨끗이 무시하고 질문을 던졌다. ...

“그래서, 넌 결혼 선물로 뭘 드릴 건데?” ...

엘디가 씩씩거리다가 되물었다. ...

“여자들이 결혼 선물로 제일 가지고 싶어 하는 게 뭐지?” ...

 

+++

하객들이 그린 백작 저택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

결혼식까지 서채에 묵는 이들도 있었고, 근처에 숙소를 잡거나 자신의 별장에 머물기로 한 이들도 있었다. ...

리시는 손님을 맞이하는 현장에 나가지 않았다. 신부는 결혼식 전야제 파티가 열리기 전까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

“브리트니 양이 자기가 안주인이라도 된 듯이 손님을 맞이하는 모양이에요. 조금 유명한 가문이다 싶으면 나서서 이 저택 안내까지 해준다던데, 괜찮을까요?” ...

리시의 머리를 빗겨주던 크리시나가 말했다. ...

“응, 괜찮아요.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내버려둬요.” ...

어차피 브리트니가 할 짓이야 뻔했다. 브리트니가 뭘 하든, 그 행동은 앞으로 그녀의 발목을 잡아 진탕에 끌어들이게 될 것이다. ...

리시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저 멀리 보이는 저택 정문 앞이 유독 북적거렸다. 정문 앞에 황실 마차가 서 있었다. ...

‘황태자가 왔군.’ ...

결혼식 첫 번째 전야제 파티는 내일. ...

파티가 열리기 전까지는 황태자가 리시라는 인물에 대해 호기심을 가져야만 한다. ...

‘케이가 알아서 잘해주겠지.’ ...

 

+++

브리트니는 신이 났다. ...

신부인 리시가 아무 데나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기에, 저택은 브리트니의 세상이나 마찬가지였다. ...

남자 귀족이 올 때마다 브리트니는 그들에게 주의하라고 경고했다. ...

“그린 백작님은 질투가 얼마나 많은지…… 만약 후야제 때 내 동생에게 춤을 청하면 그린 백작님의 미움을 사게 될 거예요.” ...

후야제 때 아무에게도 댄스 신청을 받지 못한 신부는 조롱을 당했다. 젊은 귀족들은 다들 케이의 환심을 사고 싶어 하니, 리시에게 춤을 청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신부를 위한 자리에 조용히 앉아만 있을 리시의 모습을 상상하자, 묵은 체증이 쭉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

‘황태자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화가 났는데, 생각해보면 나에게는 좋은 기회야. 아마 황태자도 아이리스가 아닌 날 보려고 온 거겠지.’ ...

브리트니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

‘얼른 후야제를 했으면 좋겠네.’ ...

황태자가 위틀로 공작가의 브리트니를 황태자비로 염두에 두고 있다는 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

황태자는 브리트니에게 춤을 청할 것이고, 그러면 다른 귀족들 역시 너도나도 브리트니에게 춤을 청하리라. ...

리시는 모두에게 외면당할 것이고. ...

‘나는 모두가 원하게 될 거야. 알겠어, 아이리스? 이번 파티의 주인공은 나야.’ ...

브리트니는 마차에서 내리는 황태자를 향해 더없이 우아하고 선량한 미소를 지었다. ...

(48) 늑대의 털갈이 ...

마차에서 내린 이오벳은 모두가 고개를 숙인 가운데, 유일하게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자신을 마주 보는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

‘브리트니 위틀로.’ ...

브리트니는 눈이 마주칠 줄 몰랐다는 듯 깜짝 놀라더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

‘인형처럼 생겼군.’ ...

위틀로 공작이 잘생겨서 그런지, 그 딸인 브리트니도 상당한 미모였다. ...

황태자비야 누구를 들이든 상관없지만, 이왕이면 예쁜 편이 좋겠지. ...

‘하지만 그보다는…….’ ...

이오벳은 고개를 들었다. ...

저택 건물 2층의 커튼이 사락, 흔들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까지 누군가 그 뒤에 서서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처럼. ...

‘위틀로 공작가의 꽃인가?’ ...

아이리스의 초상화를 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위틀로 공작은 저 예쁜 브리트니도 사교계에 내보내는데, 너무 어여쁘다며 꽁꽁 감춰둔 아이리스가 어떤 생김새일지 몹시 궁금했다. ...

손님은 손님용 별채인 서채에 머무는 것이 보통이지만, 황태자는 귀빈이기에 본채의 특별실로 안내받았다. ...

저택의 주인인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이 몸소 안내했다. ...

“방은 마음에 드십니까?” ...

“훌륭하군.” ...

“부디 편히 머무십시오.” ...

케이가 그냥 나가려고 하기에, 이오벳은 케이의 손목을 붙잡았다. ...

“그린 백작. 그냥 나갈 셈인가?” ...

“제게 명하실 것이 있습니까, 황태자 전하?” ...

이오벳은 보좌관인 세트니에게 나가보라고 눈짓했다. ...

세트니가 나가자, 이오벳이 케이를 노려봤다. ...

“한 번만 더 그 징그러운 말투를 사용하면, 엉덩이를 걷어차주지.” ...

“저런. 그 빌어먹을 성질머리는 여전하십니다, 황태자 전하.” ...

“케이브란트 그린. 자꾸 이러면, 그냥 간다?” ...

이오벳이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리듯 말하자, 케이가 싱긋 웃었다. ...

“성질 급한 건 여전하네, 황태자 전하.” ...

어릴 적, 황태자가 되기 전 잠시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다. ...

케이는 황자인 이오벳을 모두가 어려워할 때, 유일하게 스스럼없이 대해줬다. 황자로 태어나 황실의 온갖 모략에서 살아남아야만 했던 이오벳에게, 케이는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

“설명해.” ...

“뭘?” ...

“이 결혼에 대해.” ...

“내 나이가 벌써 27살이야, 전하. 이 나이에 결혼하지 않은 게 더 이상한 거였어.” ...

“더 이상한 게 뭔지 알려줄까? 너는 메어리 공주가 그렇게 따라다니는데도 무시했었어. 그런데 난데없이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고?” ...

미나스아릭 왕국의 메어리 케트벤 공주. ...

엘레론드 대륙의 아름다운 여성을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이름이었다. ...

메어리가 케이브란트 그린을 좋아하고, 결혼하고 싶다며 따라다녔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

몇 년 전에는 아예 짐을 싸 들고 케이의 저택에 찾아왔다가, 케이가 저택에 없다는 걸 알고는 그린 노백작 부부가 사는 저택으로 가서 한참을 머물다가 떠났다. ...

그때 귀족들 사이에서는, 메어리가 그린 노백작 부부를 졸라서 케이와의 결혼을 승낙받았을 거라는 소문이 돌았었다. ...

그 후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자 소문도 서서히 사라지긴 했지만. ...

“이오.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 아니라 그린 백작가의 꽃이야. 관청에 이미 혼인신고를 했다는 거 알잖아.” ...

“위틀로 공작은 형편없는 놈이야.” ...

“그리고 전하는 황태자비 자리에 위틀로 공작의 장녀를 염두에 두고 있지.” ...

“당연히 그래야지. 외척은 형편없는 편이 낫거든. 그러면서도 적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하지만 넌 달라, 케이. 위틀로의 막내딸보다는 메어리 공주가 그린 가문에는 더 도움이 됐을 거야.” ...

“글쎄. 내 아내는 이미 우리 가문에 큰 도움이 되고 있어서. 물론 도움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결혼한 건 아니지만.” ...

“위틀로의 꽃이 네게 도움이 된다는 말을 하려면, 적어도 네가 금광을 주고 그녀를 사 왔다는 소문은 돌지 않게 했어야지. 사람들이 네 결혼에 대해 뭐라고 떠들어대는 줄 알아?” ...

“알아. 그린 백작도 결국은 별수 없는 남자입네, 어쩌네 떠들어대겠지.” ...

“그럴 가치가 있어?” ...

“넘쳐, 이오. 넘쳐흘러.” ...

순간, 이오벳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

케이의 입가에 번지는 감미로운 미소. ...

이오벳은 케이가 저런 미소를 짓는 걸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

케이의 미소는 나타날 때만큼이나 순식간에 사라졌다. ...

“이오. 내가 단지 외모에 홀려서 아내를 선택했다고 생각하면 서운해.” ...

다른 게 있구나. ...

이오벳은 케이가 그렇고 그런 사내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

“그리고 이오. 내가 선택한 게 아니야.” ...

케이가 이오벳에게 가까이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

“그녀가 날 선택해준 거지.” ...

 

+++

그저 예쁠 준비만 해야 하는 신부와 달리, 신랑은 할 일이 많았다. ...

젠과 넬라에게 잡혀 내일 입을 드레스를 입어보고 헤어스타일과 장신구를 점검받고 나니 할 일이 별로 없었다. ...

책을 조금 읽고 있노라니, ...

“아이리스 님. 일찍 주무셔야 합니다.” ...

크리시나가 피부 상태를 위해 일찍 자야 한다고 잔소리했다. ...

어쩔 수 없이 침대에 누웠는데 의외로 금방 잠이 들었다. ...

스륵, 이마를 스치는 손길에 눈을 뜨니 케이가 보였다. 잔잔한 회청빛 눈동자가 이쪽을 향해 있는 게 좋았다. ...

“깨워서 미안해요.” ...

중저음의 목소리도 듣기 좋았다. ...

“아니. 일은 끝났어요?” ...

“응.” ...

케이가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한 이불 아래로 그의 따스한 체온이 전해져서, 잠결에도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

그는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 누운 채 리시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

‘전에는 더 가까이에서 잤던 것 같은데.’ ...

언젠가부터 케이가 필요 이상으로 리시에게 가까이 오지 않게 되었다. ...

‘언제부터였더라?’ ...

떠올리다가 귀찮아져서 그만뒀다. 그보다는 케이를 끌어안고 싶었다. ...

오랜만에 그의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의 체취를 마음껏 들이마시고 싶었다. ...

이런 기분이 드는 게 당혹스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다. ...

‘나, 왜 이러지?’ ...

케이는 바른 자세로 누워서 눈을 감고 있었다. 두 손은 그의 가슴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

마디가 굵은 그의 손가락이 예뻤다. 그 손가락에 깍지 끼고 싶었다. ...

‘정말 왜 이래?’ ...

리시는 눈을 질끈 감았다. ...

‘잠이나 자자.’ ...

그럼에도 아쉬운 기분을 전부 거두기 힘들어, 웅얼거리듯 내뱉었다. ...

“멍멍이가 좋은데.” ...

그가 늑대 모습이라면, 털이 보드랍다는 핑계로 끌어안을 수 있으니까. ...

슬쩍 눈을 떴더니, 그가 눈을 감은 채 싱긋 웃는 게 보였다. ...

눈을 한 번 깜빡이자, 그가 있던 자리에 거대한 검은 늑대가 얌전히 엎드려 있었다. 늑대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리시는 이 사랑스러운 검은 늑대가 자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

그래도 모르는 척 꼬물꼬물 다가가, 늑대의 허리 위에 제 팔을 올렸다. ...

늑대가 꿈틀 긴장하는 게 전해졌다. ...

리시는 늑대의 보드라운 털에 얼굴을 묻었다. ...

이제야 제 자리를 찾은 기분이 드는 연유는 무엇일까? ...

의문에 대한 고민은 길지 않았다. 리시는 늑대를 끌어안은 채,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크리시나와 에르웰이 왔을 때, 리시는 방 거실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

그 옆에는 케이가 올려보낸 빵과 수프, 과일잼과 버터, 샐러드와 고기조림이 담긴 트롤리가 놓여 있었다. ...

“일찍 왔네요.” ...

리시가 가볍게 인사하며 빵을 향해 손을 뻗는데, 크리시나가 얼른 달려와 트롤리를 옆으로 밀어냈다. ...

리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크리시나를 올려다봤다. ...

음식을 갑자기 치운 것도 놀랍지만, 크리시나의 움직임이 엄청나게 빨랐기 때문이다. ...

“아침을 얼마나 드셨나요, 아이리스 님?” ...

“빵 하나에, 오렌지 하나?” ...

“그럼 충분해요.” ...

“날 굶겨 죽일 셈이에요, 크리시나?” ...

“어쩔 수 없어요. 파티의 시작은 오후 4시. 가장 아름답게 드레스를 입으시려면 오늘은 아무것도 드시지 말았어야 해요. 이미 드셨으니 어쩔 수 없지만…….” ...

리시는 한숨을 삼켰다. ...

드레스를 입기 전에는 굶어야 한다는 걸 깜빡했다. ...

그래서 리시는 지난 삶, 파티에 참석하는 걸 싫어했었다. ...

“그런 표정을 지으셔도 어쩔 수 없어요. 오늘의 주인공은 아이리스 님이시니, 누구보다도 빛나셔야죠.” ...

“늑대 털…….” ...

그때, 에르웰이 바닥에서 집어 든 검은 털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

리시는 깜짝 놀라서 에르웰을 돌아봤다. ...

에르웰의 눈동자가 전에 없이 날카롭게 빛났다. ...

“아이리스 님. 간밤에 이 방에 늑대가 드나든 것 같습니다. 검은 늑대인 듯한데, 어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

“예? 아…… 늑대가 드나든 적은…….” ...

“또 늑대 털.” ...

에르웰이 바닥에서 털 하나를 더 집어 올렸다. ...

리시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

“길이로 봐서는 큰 놈인 것 같은데…….” ...

“늑대라니. 이 저택에 늑대가 함부로 들어오는 게 말이 되니?” ...

크리시나가 나무랐지만, 에르웰의 눈빛은 여전히 흉흉했다. ...

“봐, 시니. 이거 늑대 털이라고. 잘 봐봐.” ...

에르웰이 크리시나의 눈앞에 털 두 개를 내밀었다. ...

눈을 가늘게 뜨고 털 모양을 확인한 크리시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

“정말이네. 아이리스 님, 혹시 다치신 곳은…… 간밤에 뭔가 침입한다거나 그런 느낌은 못 받으셨어요?” ...

“아…… 전혀요. 아무것도…….” ...

“어쩌면 여기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잠시 기다리세요, 아이리스 님.” ...

리시가 말리기도 전에 에르웰이 움직였다. ...

에르웰은 늑대가 몸을 감출 만한 곳을 찾아 샅샅이 뒤졌다. ...

리시는 난처했다. ...

저게 케이의 털이라는 걸 알릴 수도 없고. ...

한참 방을 뒤진 에르웰이 의아함 가득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

“침실로 향하는 문 근처에 털이 많이 떨어져 있던데……. 아이리스 님, 침실에 들어가서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

“아니, 안 돼요.” ...

리시가 단호하게 말했다. ...

“하지만…… 늑대가 드나드는 거라면 큰일입니다. 특히 굶주린 늑대는 위험해요. 이건 백작님께 알려야 하는 문제예요.” ...

리시는 이 사실을 알렸을 때 케이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

리시가 에르웰의 움직임을 쫓는 동안, 어딘가로 사라졌던 크리시나가 제이미와 함께 돌아왔다. ...

“실례하겠습니다, 아이리스 님. 뭔가 큰일이 벌어졌다고 들었는데요.” ...

“이것 봐요, 제이미.” ...

에르웰이 제이미의 눈앞에 늑대 털 몇 개를 내밀었다. ...

“늑대 털입니다. 늑대가 아이리스 님의 침실에 드나드는 것 같아요. 검은 놈일 거고요.” ...

“아.” ...

제이미는 입술을 살짝 벌린 채 굳었다. 웃음이 터져 나오는데 웃을 수 없어서 움직임을 멈춘 듯했다. ...

“굶주린 놈인 게 분명합니다. 이 근처에 먹을 게 없나 어슬렁거리다가 들어온 거겠죠. 이놈이 아이리스 님을 덮치기라도 하면, 연약한 아이리스 님의 목은 그대로 부러질 거예요.” ...

“아…… 덮치면, 그거…… 큰 문제죠.” ...

“경계를 강화해야 합니다. 침실에 숨어 있을지도 몰라요. 가서 찾아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침실이라서. 적어도 백작님께 알려서 침실을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그렇지요. 살펴봐야겠지요. 백작님께는 잘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

“그리고, 여기 보세요. 이 침실 문 앞에 털이 상당히 많은 거로 봐서는 침실에 들어가기 전에 문 앞에서 막 뒹군 것 같아요.” ...

에르웰이 침실 문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

제이미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웃음을 참느라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

“털갈이하는 걸까요?” ...

에르웰이 심각하게 묻는 말에, 제이미가 웃음을 참다가 꾸룩, 하고 이상한 목 울림을 냈다. ...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한동안 표정을 갈무리하던 제이미가, 간신히 대꾸했다. ...

“뭐, 애교가 많은 늑대일지도요.” ...

(49) 황태자 이오벳 (1) ...

제이미가 경계를 강화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돌아갔지만, 에르웰은 침실 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그러는 동안 크리시나는 바삐 움직였다. 하녀들에게 시켜 욕조의 물을 채우고 향료와 꽃잎, 과일을 넣고, 리시가 목욕하는 동안 얼굴에 팩도 해줬다. 목욕을 끝낸 후에는 머리를 말리고 한참 동안 빗질했다. ...

그쯤에는 에르웰도 크리시나가 시킨 일을 하느라, 늑대 생각에서는 벗어난 듯했다. ...

화장하고 머리를 하고 드레스까지 입었더니 거의 4시였다. ...

“시간이 많은 줄 알았는데…….” ...

리시는 파티에 간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꾸며본 적이 없었다. ...

“신부가 꾸밀 땐,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부족해요.” ...

크리시나가 심각하게 보석함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

“검은 드레스니까 목걸이는 하얀색이 좋을 것 같은데. 이런 느낌은 어떠세요?” ...

크리시나가 화려한 목걸이 하나를 꺼내 리시의 목에 대보며 말했다. ...

“마음에 들어요.” ...

“아니, 이건 헤어스타일이랑 안 어울리네요. 이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

크리시나가 다른 목걸이를 꺼냈다. ...

리시는 첫 번째 목걸이와 두 번째 목걸이의 차이를 알 수 없었다. 거울 구석에 비친 에르웰도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음, 이것보다는 이게 나으려나?” ...

“다 비슷한 것 같은데.” ...

“다 비슷하긴요.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지는데.” ...

크리시나는 예술가 집안이다 보니, 보는 눈이 남다른가 보다. ...

“이 목걸이가 나은 것 같기도 하네요. 여기에 이 귀걸이를 하면…… 아니, 아니야. 이 귀걸이는 색이 좀 죽어요. 차라리 이 귀걸이가 낫겠어요.” ...

장신구를 고르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

귀걸이를 착용하고 있을 때, 음악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

파티가 시작한 모양이다. ...

전야제 첫 번째 파티는 본채에 있는 연회장에서 열린다. ...

“어머, 어머. 큰일이네. 아직 머리핀도 고르지 못했는데.” ...

“크리시나. 난 이 머리핀도 괜찮은 것 같아요.” ...

“아니요, 아이리스 님. 이 머리핀은 아이리스 님의 머리카락 색깔을 못 살려요. 귀걸이가 흰색이니, 머리핀은 드레스에 맞추는 게 좋겠어요. 음, 이거…… 아니, 이게 낫겠네요.” ...

틀어 올려서 고정한 머리에, 검은색 진주가 박힌 머리핀을 꽂고 나서야 리시는 숨을 돌릴 수 있었다. ...

똑똑- ...

힐을 신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

“이제 슬슬 내려가야 해요.” ...

케이가 기다리다 못해 노크한 듯했다. ...

크리시나는 힐까지 신은 리시를 아래위로 쭉 살펴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리시는 안도했다. ...

크리시나가 ‘아직 안 돼요.’라고 말할 수도 있어서 긴장하던 참이었다. ...

“아름다우세요, 아이리스 님.” ...

“맞아요. 지금까지 전 아이리스 님만큼 아름다운 여자는 본 적이 없어요. 우와, 진짜 쩔어…….” ...

퍽-! ...

크리시나가 에르웰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

에르웰이 크리시나를 향해 눈을 부라리는 걸 보며, 리시는 작게 웃었다. ...

“그 아름다운 여자, 나도 좀 보고 싶은데.” ...

밖에서 케이가 채근했다. ...

리시는 방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

크리시나가 방문을 열었다. ...

초조하게 기다리던 케이는 리시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는 한동안 말없이 리시를 쳐다보기만 했다. ...

“백작님?” ...

크리시나가 작게 불렀다. ...

“아, 이런.” ...

케이가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

“상상도 못 한 모습이라서…….” ...

“아름다우시죠?” ...

“말도 못 해요, 크리시나. 정말 말도 못 해요.” ...

크리시나는 마치 자신이 칭찬받은 것처럼 우쭐해하며 말했다. ...

“오늘의 그린 백작 부인께서는 두고두고 회자되실 거예요. 결혼식 전야제 때 이런 드레스를 입은 첫 번째 여인이실 테니까요.” ...

+++

브리트니는 약간 수수해 보일 수도 있는 연분홍색 드레스를 입었다. ...

처음에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어서 리시의 코를 콱 눌러줄까 했지만, 황태자가 온 걸 보고 생각을 바꿨다. ...

리시와 경쟁하는 것보다는, 리시를 위해 수수한 드레스를 입은, 마음 넓은 언니로 보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수수한 드레스는 아니었다. 고급 원단을 사용했고, 드레스가 수수한 대신 화려한 액세서리와 머리핀을 착용했다. ...

다이아몬드 수십 개가 박힌 목걸이가 얼마나 화려한지, 브리트니의 얼굴색이 어두워 보일 정도였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

“브리트니, 너 이 파티에서는 쓸데없는 행동하지 마라. 알겠지?” ...

글로번 위틀로 공작은 파티장에 들어가기 전 몇 번이나 브리트니에게 주의를 시켰다. ...

“알겠다니까요.” ...

이미 쓸데없는 짓으로 이 결혼식에 드는 비용 전부를 책임져야만 했기에, 브리트니는 순순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

“황태자님 앞에서 일부러 잘 보이려고 할 것도 없어. 네가 그쪽에 잘 얘기해뒀으니, 황태자님께서는 제일 먼저 네게 춤을 청하실 거다. 그때까지는 그냥 모르는 척하고 있어. 알겠지?” ...

“알겠어요.” ...

지금 브리트니는 리시보다는 황태자 쪽이 더 신경 쓰였다. ...

어차피 황태자가 신부인 리시에게 춤을 청할 리는 없으니까, 황태자의 첫 댄스 상대는 자신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그의 손을 잡고 홀에 서는 순간, 귀족가의 영애들이 보낼 질투의 시선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부풀었다. ...

넬라니커스 제널 백작 부인이 주도한 파티니만큼, 파티장은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

하지만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아이리스는 아직 안 왔네. 주인공이니까 좀 나중에 들어오겠지. 하지만 상관없어. 언제 들어오든, 황태자 전하의 첫 댄스 상대는 내가 될 테니까.’ ...

아는 얼굴이 몇 명 있었다. ...

브리트니를 알아본 이들이 다가와서, 잠시 담소를 나눴다. ...

“황태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

입구를 지키던 시종의 말과 함께, 조용히 오가던 대화가 멈췄다. 악단이 연주하는 은은한 곡만이 홀 안에 흐르고 있었다. ...

문이 열리고 이오벳이 모습을 드러냈다. ...

브리트니는 숨을 멈추고 이오벳을 응시했다. ...

어제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참으로 잘생긴 사내였다. ...

케이가 어둠 속의 달과 같다면, 이오벳은 밝은 날의 태양 같았다. ...

화사한 금발과 새하얀 피부, 하늘보다 맑은 파란 눈동자. 키가 크고 어깨가 넓어서, 그 자체가 빛을 흩뿌리는 것처럼 보였다. ...

위용 있는 자태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온 이오벳이 해사하게 웃었다. ...

“내가 주인공인 파티도 아닌데, 너무 긴장들 하지 말고 즐기시오.” ...

그 말을 시작으로 황태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이들이 눈치를 보다가 그에게 접근했다. ...

브리트니는 계속 황태자를 관찰하고 싶었지만, 모르는 척하라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리고 영애들과 어울렸다. ...

“황태자 전하께서 황태자비로 브리트니 양을 염두에 두고 있단 이야기가 있던데, 그게 정말인가요?” ...

누군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

“그냥 소문일 뿐이에요.” ...

브리트니가 겸손한 척 말했다. ...

“그린 백작님이 결혼하시는 바람에, 황태자 전하의 인기가 더 높아졌대요. 그린 백작 부인 자리를 노리던 가문들이 이제 황태자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더라고요.” ...

“위틀로 공작님은 뿌듯하시겠어요. 차녀는 그린 백작 부인이 됐고, 장녀는 황태자비가 될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 ...

“소문은 소문일 뿐이죠.” ...

질투 담긴 시선을 보내는 영애에게, 브리트니는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

“그런 소문보다, 오늘은 내 동생을 축하하러 온 자리잖아요. 난 오늘 내 동생이 얼마나 예쁠지 기대하는 중이랍니다.” ...

“얘기를 들어보니 그린 백작님이 백작 부인 미모에 홀려서 정신을 못 차리신다던데.” ...

누군가의 말에 브리트니는 짜증이 왈칵 솟았지만, 애써 미소 지었다. ...

“그럼요. 우리 아이리스가 예쁘긴 정말 예쁘죠.” ...

“기대되네요. 얼마나 예쁘기에 그 그린 백작님이 정신을 못 차리시는지.” ...

리시에 대해 말하는 그들의 목소리에는 고까움이 담겨 있었다. ...

브리트니는 그들이 더욱더 기대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이니까. ...

모두 ‘그린 가문’의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제일 좋은 드레스를 입고 제일 멋지게 꾸미고 왔다. ...

리시가 아무리 유명한 디자이너의 드레스를 입고 나와봐야, 이곳에 모인 영애들보다 훨씬 아름답지는 않을 것이다. ...

“그린 백작 내외께서 드십니다.” ...

시종의 알림에, 이번에는 음악도 멈췄다. 그것이 파티 주최자에 대한 예의였다. ...

황태자와 그 근처에 있던 무리도 입구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

파티장 문이 열리고 그린 백작 내외의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

“아!” ...

“와아.” ...

“어머나.” ...

“우와.” ...

저도 모르게 터뜨린 감탄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

그럴 수밖에 없었다. ...

결혼식 전야제 파티에서, 신부는 청초하게 흰색이나 그 비슷한 색의 드레스를 입는 게 보통이었다. ...

하지만 아이리스가 입은 드레스는, 옆에 선 케이브란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강렬했다. ...

한쪽 어깨를 드러내며 허리에서 둔부로 이어지는 굴곡을 드러내며, 종아리 부근에서 화려하게 퍼지는 검은색 드레스. ...

드레스를 수놓은 금실은 과하지 않게 빛났지만, 리시의 하얀 피부가 검은 드레스와 대조적으로 더 희게 빛나서 눈부셨다. ...

진주 팔찌와 목걸이, 귀걸이가 야하게 보일 수도 있는 드레스를 우아해 보이게 했고, 붉은 기가 도는 은발에 꽂힌 까만 진주 머리핀이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

아무에게나 어울리는 드레스가 아니었다. ...

그 자리의 귀부인과 영애들은, 아이리스이기에 저 드레스를 소화해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 ...

모두가 궁금해했던 그녀는 꽃이라는 말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

작고 하얀 얼굴을 가득 채운 이목구비는, 하나하나 뜯어봐도 하나로 합쳐 봐도 완벽했다. 커다란 눈 안에 담긴 연한 보라색 눈동자조차, 그 어떤 장신구보다 예쁜 빛깔이었다. ...

완벽하게 빚어낸 코 아래에 자리 잡은 도톰하고 붉은 입술은, 금방이라도 상큼한 과즙을 흘릴 듯 촉촉했다. ...

리시가 케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홀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동안, 모두 숨조차 쉬지 못하고 리시를 쳐다봤다. ...

하늘하늘 흔들리는 드레스 자락도 하객들의 시선을 잡아채지 못했다. ...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리시의 얼굴에서, 악단의 연주자들조차도 눈을 떼지 못했다. ...

주최자 내외가 파티장에 들어온 순간부터 다시 연주해야 하는데, 그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

하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

아이리스 그린. ...

그 순간 그 파티장에서는, 그녀가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

“이렇게 자리를 빛내주셔서 감사합니다.” ...

케이가 입을 열었을 때야, 악단이 다시 연주를 시작하고 사람들도 멈췄던 숨을 쉴 수 있었다. ...

여인들은 자신들이 리시의 외모에 홀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는 것에 수치심을 느꼈고, 사내들은 저 아름다운 여인을 손에 넣은 그린 백작에게 질투를 느꼈다. ...

케이의 인사말이 끝난 후 파티가 재개되었지만, 아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

“그린 백작님이 대단하니 어쩌니 해도, 결국 남자는 남자였네. 여자 얼굴에 홀려서 결혼했다는 소문, 정말 믿고 싶지 않았는데.” ...

“그러게 말이에요. 그래도 진짜…… 와, 소문보다 예쁘네요. 아니, 예쁘다기보다는 강렬해요.” ...

“아무리 그래도 저런 드레스를 입을 생각을 하다니…… 자기가 신부라는 자각이 없는 건가?” ...

“법으로 정해진 건 아니니까요. 잘 어울리면 그만이지 않아요?” ...

“하긴, 뭐. 잘 어울리면 그만이긴 하지.” ...

여자들은 리시를 흘끔흘끔 쳐다보며 여러 가지 평가를 했다. ...

브리트니는 아까보다 리시에 대한 좋은 평가가 많아진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

원래 첫 댄스는 파티 주최자가 시작하지만, 그보다 높은 신분의 황태자가 와 있으니 황태자가 첫 춤을 시작해야만 했다. ...

결혼식 전에 신부인 리시에게 댄스 신청을 할 수 있는 건, 황제의 피가 흐르는 황태자뿐. 하지만 브리트니는 황태자가 리시에게 춤 신청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

높은 신분의 사내가 결혼식 전에 신부에게 춤을 청하는 건, 그녀를 향한 자기 가문의 가호를 약속하는 것과 같았다. 황실의 가호는 아무에게나 내려주는 것이 아니다. ...

그 대단한 넬라니커스 제널 백작 부인조차 황실의 가호를 받지 못했다. ...

“아!” ...

“헉!” ...

그때, 리시가 입장할 때보다 더 큰 탄성이 울렸다. ...

황태자가 리시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

(50) 황태자 이오벳 (2) ...

‘아니, 아닐 거야. 절대 아니어야 해.’ ...

브리트니는 숨을 멈추고 이오벳의 등을 응시했다. ...

‘그냥 그린 백작에게 말을 걸려고 가는 걸 거야.’ ...

이오벳이 그린 백작 내외 앞에 멈췄다. ...

‘아이리스에게 댄스 신청 같은 걸 하지 마!’ ...

브리트니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 자리에 있는 몇몇 영애들도 브리트니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

하지만 그들의 생각이 이오벳의 행동을 멈출 수는 없었다. ...

“아이리스 그린 백작 부인.” ...

이오벳이 아이리스의 전체 이름을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

‘그린 백작 부인’이 아닌 아이리스의 전체 이름을 불렀다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했다. ...

그린 가문만이 아닌, ‘아이리스’에게 황태자의 호의를 보이겠다는 의미였다. ...

“부디 첫 춤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또 여기저기서 탄성과 헛숨을 마시는 소리가 울렸다. ...

하지만 이오벳은 신경 쓰지 않고 리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

이오벳은 리시의 태도가 놀라웠다. ...

황태자의 첫 댄스의 상대가 되는 영광은, 레이디가 졸도할 정도의 영광이었다. 그런 영광을 받았음에도 리시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응당 벌어질 일이었다는 듯, 리시의 입가에 우아한 미소가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

리시의 눈빛은 정중하면서도 오만했다. 이오벳은 어쩐지 자신이 리시보다 낮은 신분인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

이오벳의 손바닥 위에 작고 따스한 것이 겹쳐졌다. ...

이 상황은 분명 리시에게 영광이어야 할 텐데, 오히려 이오벳이 영광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

“잘 부탁드립니다, 황태자 전하.” ...

리시가 작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듣기 좋은 음성이었다. ...

브리트니가 눈물을 글썽이며 파티장을 벗어난 것도, 귀족들 사이에 소곤소곤 여러 대화가 오가는 것도, 이오벳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

이 순간 이오벳은 리시와 단둘이 파티장에 남겨진 것 같았다. ...

‘하!’ ...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고?’ ...

말도 안 되는 별명이다. ...

‘이 여자는 꽃 같은 게 아니야.’ ...

그저 짧게 눈빛을 나눴을 뿐인데도 알 수 있었다. ...

‘모든 걸 집어삼킬 수 있는 맹수지.’ ...

케이가 리시에게 홀린 이유를 알겠다. ...

메어리 공주 따위는 이름도 못 내밀 외모도 외모지만, 리시의 분위기와 눈빛, 자태, 그 모든 것이 남달랐다. ...

‘평범한 여자는 아니군. 대체 어떻게 위틀로 저택에 틀어박혀 있었으면서 이런 눈빛을 가질 수 있는 거지?’ ...

수많은 전쟁과 죽음을 헤치고 나온 전사의 눈빛. ...

‘뭐가 어찌 됐든 탐나는 여자야. 케이가 먼저 발견한 게 아쉽군.’ ...

외척으로 위틀로 가문이 거론되었을 때, 브리트니가 아닌 아이리스로 하겠다고 선포할 걸 그랬다. 그러면 이 신비로운 눈빛을 가진 여자를 황태자비 자리에 앉힐 수 있었을 텐데. ...

‘케이, 이 자식. 모두가 탐낼까 봐, 결혼식을 하기도 전에 혼인신고부터 해버렸군.’ ...

이제 황명으로도 아이리스를 빼앗을 수 없게 되었다. 황실의 권력으로도, 누군가의 아내를 빼앗을 수는 없었다. ...

물론 빼앗을 수 있다 해도, 이오벳은 케이가 먼저 손에 넣은 여자를 빼앗지는 않았을 것이다. ...

케이는 유일한 친구니까. ...

‘눈빛뿐이 아니야. 댄스 실력도 훌륭하군. 날 이끌고 있어.’ ...

리시가 유려하게 춤춰서, 이오벳은 자신이 춤을 추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

리시는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실력으로, 마치 물 흐르는 듯 춤을 주도하고 있었다. ...

“황태자 전하.” ...

문득 리시가 입을 열었다. 꽤 빠른 속도의 춤인데도 숨찬 기색이 없었다. ...

“워번은 좋지 않습니다.” ...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나오는 바람에, 이오벳은 우뚝 멈추고 말았다. ...

리시가 다정한 미소를 보내며 속삭였다. ...

“춤 주셔야지요, 전하.” ...

“아, 실례.” ...

이오벳은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리시의 움직임에 따라 다리를 움직였다. 하지만 머릿속은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

워번 상단. ...

최근 이오벳이 투자하려고 하는 상단이었다. 주로 메르티움을 다루는 상단으로, 이 상단을 손에 넣으면 황태자 자리를 견고히 하는 데에 상당한 도움이 될 터였다. ...

문제는 2황자도 워번 상단에 눈독을 들인다는 점이었다. 2황자가 손을 댈 수 없도록 워번 상단을 온전히 손에 넣을 방법을 궁리하는 중이기는 했는데. ...

‘이 여자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지? 내가 잘못 들었나?’ ...

리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춤에 집중하고 있었다. ...

그러는 동안 한 곡이 끝났다. ...

이제 그녀의 손을 놔주고 다른 영애에게 댄스를 신청해야 할 때였다. ...

하지만 황태자는 그럴 수가 없었다. ...

“한 곡 더 부탁드립니다, 그린 백작 부인.” ...

황태자가 연속으로 춤을 청하는 건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

표정을 수습하고 돌아와서 댄스 신청을 받을 준비를 하던 브리트니도, 자기에게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준비하던 영애들도, 모두 벌어진 입술을 다물지 못했다. ...

“다른 영애들께도 기회를 드려야지요, 전하.” ...

리시가 어린애 달래듯 말하는 소리에,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

“나는 백작 부인과 한 곡 더 춰야겠습니다. 부디 한 곡 더 부탁드립니다.” ...

리시를 무례한 거절을 꾸짖기는커녕, 매달리듯 춤을 청하는 황태자 때문에 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보좌관인 세트니조차 기절할 지경이었다. ...

리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황태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

“전하, 두 곡이나 제게 청하시면 곤란합니다. 다른 영애들이 전하와 춤을 출 영광을 기다리는데요.” ...

“워번에 대해 어떻게 아는 겁니까?” ...

“제게는 좋은 정보원이 있답니다. 아, 정보원에 관해 알려달라 하시면 곤란해요.” ...

리시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

이오벳은 타인의 정보원을 알려달라고 하는 게 무례한 행동이라는 걸 알았다. 춤 두 곡은 연속으로 신청했어도, 정보원까지 알려달라는 무례를 범할 생각은 없었다. ...

“정보원의 출처는 아무래도 좋아요. 하지만 황태자인 내 뒤를 캔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는 압니까?” ...

“전하의 뒤를 캔 것이 아닙니다. 워번을 캐다 보니 전하의 존함이 나온 것이지요.” ...

“워번이 좋지 않다는 이유는?” ...

“세 곡이나 함께할 수는 없습니다, 전하.” ...

여기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

“케이, 그린 백작이 당신은 평범한 여자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

“특별할 것은 없어요. 그이가 절 너무 좋게 봐주는 거죠.” ...

“나도 그런 줄 알았어요, 백작 부인. 그런데 아닌 것 같군요. 파티가 끝난 후에 내게 차 한 잔을 대접해줘요.” ...

“부디.” ...

리시가 살풋 미소 지었다. 그녀의 미소에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

두 번째 곡을 끝낸 이오벳은 더는 춤을 추지 않았다. 구석에 가만히 서서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

이오벳의 시선이 간간이 리시에게 향하는 걸, 그 자리에 있던 귀족들은 놓치지 않았다. ...

그들은 ‘황태자님께서 그린 백작 부인에게 홀린 건 아니겠지?’라는 생각을 했지만, 감히 그 말을 꺼낼 배짱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

그리고 브리트니는. ...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왜 아이리스랑만 춤추고 나랑은 안 추는 건데?’ ...

속이 타들어가는 걸 견디지 못하고. ...

“황태자 전하. 저와 한 곡 함께해주시겠어요?” ...

두고두고 뒷얘기가 나올 행동을 하고 말았다. ...

레이디가 먼저 춤을 청하면, 아무리 싫어도 응해주는 것이 예의. ...

하지만 생각할 거리가 많은 이오벳은, 그 예의조차 보이지 않았다. ...

“피곤해서 먼저 실례하지.” ...

이오벳은 눈앞에 브리트니가 없다는 듯,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하고 그대로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

브리트니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아주 볼만했어요.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 같더라니까요. 뒤에서 영애들이 얼마나 소곤거리는지, 그 계집…… 아니, 브리트니는 알런가 몰라.” ...

리시가 나간 후 드레스로 갈아입고 파티에 참석했던 에르웰이 신나서 떠들어댔다. ...

크리시나가 리시의 드레스를 벗겨주며 말했다. ...

“전에 그린 백작님께도 춤을 청한 적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백작님은 응해주시기는 한 것 같던데, 이번에는 거절당해서 웃음거리가 됐어요. 아마 모이기만 하면 브리트니 양 얘기를 하겠죠.” ...

이번 파티에서 브리트니를 곯려줄 생각은 없었는데, 브리트니가 스스로 제 발을 걸고 말았다. ...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갔을 텐데. ...

크리시나의 말대로 이 일은 사교계에서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브리트니는 이보다 더한 짓들을 해왔으니까. ...

“아니, 그 옷 말고 저 드레스로 할게요.” ...

“잠자리에 드시는 거 아니세요?” ...

“갈 데가 있거든요.” ...

크리시나는 의아해하면서도 리시가 고른 드레스로 갈아입혀 줬다. ...

“오늘 고생 많았어요. 인제 그만 쉬도록 해요.” ...

시녀들을 내보낸 후 챙겨야 할 것을 챙겨 케이의 방으로 향했다. ...

황태자의 청이라 해도 그와 단둘이 만나는 건 피하는 게 좋았다. 필요 이상의 구설에 오르내리고 싶진 않았다. ...

이오벳은 방에서 혼자 리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케이가 함께 올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

“그린 백작 부인.” ...

“아이리스라고 불러주세요.” ...

“좋아요, 아이리스.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워번이 좋지 않은 이유가 뭡니까?” ...

“사기꾼이에요.” ...

“사기꾼이라고?” ...

“그들이 취급하는 건 메르티움이 아니에요. 메르티움으로 위장한 보통의 광석이지.” ...

“그럴 리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어요. 그걸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죠.” ...

“이걸로도.” ...

리시는 오늘을 위해 준비해둔 광석을 하나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

“마법은 사용할 수 있어요.” ...

리시가 광석을 톡톡 두드리자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다. ...

“이것도 메르티움이잖아요.” ...

“아니요. 이건 작은 메르티움을 박아넣은 평범한 검은 돌이에요. 잠시 시간이 흐르면.” ...

돌이 빛을 잃었다. ...

“마법이 끝나죠.” ...

“하!” ...

이오벳이 헛웃음을 흘렸다. ...

“그놈들이 내게 사기를 쳤단 겁니까?” ...

“네.” ...

“감히 내게?” ...

“뒤에 2황자가 있었죠. 2황자는 자기가 뒤를 봐주겠다고 했을 거예요.” ...

“이런. 나는 라코젠도 워번에 투자하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

라코젠은 2황자의 이름이었다. ...

“그것 또한 사실이에요.” ...

리시의 단호한 말에 이오벳이 미간을 좁혔다. ...

“라코젠이 워번에 투자하려는 게 사실이라고?” ...

“네. 워번 상단은 1상단과 2상단이 광석과 비단, 두 개로 나눠서 운영하고 있어요. 광석 쪽인 1상단이 잘되다 보니 다들 그쪽에 투자하고 싶어 하죠. 전하께서도 그러려고 하셨고요.” ...

“그랬죠.” ...

“2황자는 2상단에 투자할 거예요.” ...

“비단 쪽은 아무리 잘돼봐야 한계가 있는데.” ...

“워번은 2황자께 2상단에서 진짜 메르티움을 거래할 거라고 말했어요. 2황자에게 진짜 메르티움을 보여줬죠. 1상단은 곧 버릴 패고, 2상단만 키울 거라고 했죠. 상단이 여러 개를 운영하다가 하나를 버리는 건 으레 일어나는 일이니까.” ...

“하지만 그 말이 거짓이다?” ...

“거짓말이에요. 2황자에게 보여준 메르티움은 진짜였지만.” ...

이오벳은 리시의 말을 믿기 어려웠다. ...

리시는 마치 바로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

“아이리스. 워번이 황실을 상대로 사기를 쳐서 얻을 수 있는 게 뭘까요? 내가 듣기에는 오히려 그대가 내게 거짓을 고하는 것 같은데.” ...

“워번이 사기 쳐서 얻는 건, 역시 돈이죠. 막대한 투자금.” ...

“돈을 얻어도 그 목숨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지.” ...

리시는 챙겨온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대륙을 벗어나 바다 어딘가에 있는 섬을 가리켰다. ...

“워번은 망명 신청을 해뒀어요. 투자금을 받고 나면 이 섬나라, 카보라스 왕국으로 떠날 예정이죠. 대가로 지급하는 건 투자금의 반. 알다시피 카보라스는 대륙 진입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황실에서 투자한 어마어마한 돈은 카보라스 왕국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

이오벳은 할 말을 잃었다. ...

섬나라인 카보라스 왕국이 대륙 진출을 위해 수군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

“황태자 전하께서는 두 개의 길을 선택하실 수 있어요. 혼자서만 발을 빼시거나, 2황자께도 언질 줘서 함께 발을 빼시거나.” ...

“내가 그대의 말을 믿지 않는 선택지는 없나 보군요.” ...

리시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

“믿고 계시잖아요.” ...

당돌한 태도에 기가 막히면서도 놀라웠다. ...

케이를 돌아보니, 케이가 ‘이것 봐. 놀라운 여자라고 했잖아.’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51) 황태자 이오벳 (3) ...

이오벳은 케이의 부인인 리시가 자신의 뒤통수를 칠 일은 없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워번 상단의 일을 함부로 처리할 수도 없었다. ...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오벳의 위치는 확고했다. 3년 전, 황후인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이오벳의 위치 역시 전처럼 견고하지는 않게 되었다. ...

이오벳은 황제와 1후궁의 아들인 라코젠보다 조금 늦게 태어났다. 이오벳 개인의 능력이 뛰어난 것도 있지만, 황제와 황후 사이의 아들이기에 어렵지 않게 황태자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

하지만 황후가 죽자, 1후궁이 제 아들을 위해 빈틈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1후궁과 2황자인 라코젠이 적극적으로 움직이자, 신하들의 움직임도 전과 달라졌다. ...

이오벳은 제 곁에 머물던 신하들이 어느새 라코젠의 곁에 서게 된 것을 몇 번이나 목격했다. 이오벳이 아무리 영리하고 제왕의 품격을 지녔다 해도, 황제 자리에 앉는 것은 결국 등 뒤를 받쳐주는 사람이 많은 자였다. ...

그리하여 이오벳은 돈이 필요했고, 최근 이름을 날리는 워번 상단에 투자하여 위치를 견고히 다질 만한 자금을 손에 넣을 작정이었다. ...

리시가 ‘그놈들은 사기꾼.’이라고 한다 해서, 그 말만 믿고 워번과의 연을 끊을 수는 없었다. ...

“내게 또 다른 조언을 해줄 것은 없습니까?” ...

“워번 상단의 일을 당장 처리하기는 힘드실 거예요. 당장 문제가 생기지도 않을 테고. 워번 상단에 대해 잘 알아보시고, 제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부터 확인해보세요.” ...

리시가 차분하게 말했다. ...

이오벳은 리시가 말할 때 자신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다는 걸 깨달았다. ...

그녀의 연보라색 눈동자에는, 한번 마주하면 시선을 돌리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었다. ...

“제 말이 진실이라는 걸 확인하시면, 지금보다는 절 신뢰하실 수 있겠죠. 그때 제게 조언을 구하신다면, 좋은 조언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이오벳은 다른 것보다도 리시의 배짱에 혀를 내둘렀다. ...

황태자인 이오벳 앞에서, 이렇게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아니, 케이가 있으니 두 번째로 봤다고 해야 하나? ...

하지만 지금 리시는 케이와 다른 대담함을 보였다. ...

리시의 말에는 가정이 없었다.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반드시 벌어질 예언을 말하는 듯, 정확하고 분명하게 말했다. ...

“하지만 시간이 많지는 않습니다, 전하. 한 달 이내에 결론을 내리고 말씀해주세요. 그러면 전하께서는 워번 상단에 투자할 때와는 비할 수 없는 재력을 손에 넣으실 겁니다.” ...

“내가 뭘 필요로 하는지 아는군요. 왜 필요로 하는지도 알고.” ...

“네.” ...

“알겠어요, 아이리스. 워번을 제대로 조사해보죠. 하지만 만약 그대의 말이 틀렸다면, 그대가 아무리 내 친구의 아내라도 날 기만한 벌을 받게 될 겁니다.” ...

“물론이죠.” ...

리시는 겁에 질린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이오벳은 아주 강한 상대를 앞에 두고 게임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

“그 외에 또 조언해줄 것은 없어요? 가볍게라도.” ...

“가벼운 조언이라…….” ...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고 생각하던 리시가 곧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브리트니는 좋은 여자가 아니에요. 황태자 전하께 도움이 되는, 더 좋은 여성이 나타날 겁니다.” ...

+++

리시는 “두 분께서 나누실 말씀이 있을 테니 먼저 나가보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

리시가 나간 후, 방에는 한동안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오벳은 팔짱을 끼고 검지로 팔뚝을 톡톡 두드리며, 자신의 오랜 친구를 가만히 응시했다. ...

케이가 2황자의 편으로 돌아서서, 제 아내를 사주해 워번 상단과 황태자의 거래를 끊어버릴 확률은 얼마나 될까? ...

모르겠다. 오른팔인 부하가 여러 가지 이유로 주인을 배신하는 일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

“케이. 날 배신하려는 건 아니겠지?” ...

“전하. 설마 내가 2황자의 편에 설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나랑 2황자는 체질적으로 안 맞아.” ...

“그건 알아. 알지만…… 네 아내는, 모르겠어. 놀랍도록 신뢰가 가. 그런데 그게 이상해. 너도 알다시피 나는 그렇게 쉽게 누군가를 믿지 않아.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커왔어.” ...

“으흠.” ...

“네 아내, 마법이라도 써?” ...

“아직도 남의 신뢰를 얻게 해주는 마법이 남아 있던가?” ...

이오벳은 고개를 저었다. ...

“굉장한 여자를 손에 넣었군, 케이. 만약 아이리스가 말한 대로 워번 상단이 내 뒤통수를 칠 준비를 하고 있다면…… 난 널 평생 부러워할 거야.” ...

케이가 우쭐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얄미워서 옆에 있던 쿠션을 집어 케이에게 던졌다. ...

케이는 가볍게 고개를 틀어 쿠션을 피하며 말했다. ...

“전하가 의심하는 건 당연해. 내가 전하 입장이었어도 리시 이야기를 한 번에 믿지는 못했을 거야. 그러니 알아봐. 워번 상단이 전하 몰래 뭘 하고 있는지.” ...

“안 그래도 당장 그럴 생각이야. 그건 그렇고, 브리트니가 좋은 여자가 아니라는 건 무슨 의미지? 브리트니가 내 아내가 되면, 그녀의 동생인 아이리스에게도 좋은 일 아닌가?” ...

“그 부분은, 음. 이오벳.” ...

케이가 이오벳과 눈을 맞췄다. ...

“리시는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 아니야. 지금까지는 그래왔어도 앞으로는 결코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 아닐 거야.” ...

케이가 평소보다 낮은 음성으로 힘 있게 말했다. 이오벳은 그것만으로도 케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들었다. ...

‘위틀로 공작가와 연을 끊으려는 거군.’ ...

리시가 자신의 가문과 연을 끊으려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그것이야말로 개인사였기에 묻지 않기로 했다. 그린 가문이 위틀로 가문과 연을 끊으려 한다는 걸 안 것만으로 충분했다. ...

둘 중 한 가문을 선택해야만 한다면, 당연히 그린 가문이었다. 이오벳이 케이의 친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라도 그런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

“알겠어, 케이. 그린 백작 부인께 조언 감사하다고 전해줘.” ...

 

+++

방에 돌아온 리시는 제 손에 쥐고 있는 검은색 돌을 내려다봤다. ...

검은색 돌은 어디서나 주울 수 있는 평범한 돌이었다. ...

중요한 건 검은색 돌 틈 사이에서, 마치 빛을 흡수하듯 더 검게 빛나는 검은색 작은 광석. ...

이것이 메르티움이다. ...

메르티움은 마나를 아주 오랫동안 잡아둘 수 있는 광석으로, 마석의 재료로 쓰였다. 메르티움을 쓰지 않아도 마석을 만들 수는 있지만, 평범한 광석에 마나를 담아두면 쉽게 부서지거나 망가진다. ...

반면에 메르티움을 넣어 가공한 마석은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

문제는 메르티움이 잘 발견되지 않고, 매장량이 많지 않아서 그 가격이 어마어마하다는 점이었다. ...

지금 이 돌에 박아넣은, 손톱보다도 작은 메르티움만 해도 10골드나 주고 어렵게 구했다. ...

리시는 검은색 돌을 테이블 위에 또르르 굴렸다. ...

‘황태자는 몸이 달 거야.’ ...

리시에게도 상단이 필요했다. 좋은 상단을 알고 있지만, 당장 그 상단과 거래를 트기에는 돈이 부족했다. 이런 상황에서 황태자는 그 상단과의 거래를 트는 데 유용할 것이다. ...

오늘 그 상단의 이름을 언급할 수도 있었지만, 다음으로 미뤘다. 기다렸다는 듯 상단의 이름을 말해줘봐야, 이쪽의 패를 내놓는 꼴만 된다. ...

나는 필요 없지만, 널 위해 알려줄게. ...

딱 이 정도의 위치에서 조언을 해주는 편이 좋았다. ...

‘황태자가 뭘 조사해야 할지 알았으니, 워번 상단의 문제는 금방 드러나겠지. 황태자로서는 2황자를 돕고 싶지 않을 테니, 혼자서만 발을 빼고 찾아올 거야.’ ...

한 달 안에, 황태자가 필요하다. ...

리시는 굳이 기일을 정하지 않았더라도 황태자가 금방 찾아오리라고 확신했다. ...

리시는 창가에 비스듬히 앉아 창틀에 등을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

청빛 하늘에 보름달이 밝은 밤이었다. 별이 촘촘히 수놓은 밤하늘이 유독 아름다웠다. ...

‘지난 삶에서는 이렇게 느긋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도 거의 없었지.’ ...

크리시나가 알면 일찍 주무셔야 내일 피부 상태가 좋아진다고 채근하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

‘나, 좀 들떴구나.’ ...

회귀했다는 걸 알게 된 후, 머릿속에 큰 그림을 하나 그렸다. ...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그림을 현실의 그림으로 바꾸는 건 어려운 과정이 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수월했다. ...

보이지 않는 힘이 리시를 도와주는 것만 같았다. ...

달칵- ...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케이가 방에 들어왔다. ...

“이오벳이 조언 감사하다고 전해달래요.” ...

케이가 리시를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 리시의 옆에 선 케이가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

“벌써 보름인가. 어쩐지…….” ...

라고 중얼거렸다. ...

“리시, 나랑 같이 좀 나갈래요? 아, 내일을 위해 일찍 자야 하나?” ...

“괜찮아요.” ...

케이가 어디에 가려는 건지 궁금했다. 케이의 손을 잡고 창틀에서 내려왔다.   “이오벳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모습이 멋졌어요. 이오벳이 날 부러워하더군요.” ...

“나 같은 아내가 있어서?” ...

“응. 아주 우쭐했어요. 내 능력이 아니라 내 아내로 인해 어깨가 으쓱한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는데.” ...

둘은 손을 꼭 잡고 본채를 벗어났다. ...

리시는 마디가 굵은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손가락에 빈틈없이 깍지낀, 이 느낌이 좋았다. ...

언제 어디서 넘어져도, 그가 단단히 지탱해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그런데 우리, 어디에 가는 거예요?” ...

“사람이 없는 곳.” ...

“그런 곳은 왜?” ...

케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케이도 고개를 돌려 리시와 눈을 맞췄다. ...

기분 탓일까? 그의 회청빛 눈동자가 평소보다 농밀하게 빛나고 있었다. ...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은밀한 행위를 하려고요.” ...

중저음의 음성이 야릇하게 리시의 귓바퀴를 훑고 지나갔다. ...

리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

“은밀한 행위라니…….” ...

“일단 가요, 리시.” ...

케이가 걸음을 서둘렀다. ...

은밀한 행위라는 말에 여러 가지 피부색 그림이 떠올라, 리시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남녀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하는, 그 행위들은 리시를 두렵게 만들었다. ...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달콤한 기대감이 몽글몽글 피어올라, 혈관을 타고 흘러 온몸을 따뜻하게 데웠다. 심장이 콩, 콩, 콩,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입안이 바싹 말라서 괜히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

케이는 저택의 정문이 아닌 작은 문으로 나가서, 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향했다. 호수와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낮에도 어두울 만큼 나무와 갖가지 식물이 무성한 곳이었다. ...

쏴아아아, 불어오는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가 달큰하게 청각을 자극했다. ...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높아져서 가슴 높이까지 올라온 수풀. 수풀을 헤치고 들어갈수록, 리시의 심장은 더 빠르게 뛰었다. ...

대체 무얼 하려는 걸까? ...

어디까지 들어가려는 거지? ...

여기서 하려는 걸까? ...

갑자기 케이가 걸음을 멈추더니 리시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케이는 기우뚱 끌려간 리시의 허리를 감아, 자세를 낮추게 했다. ...

“소리 내지 마요, 리시.” ...

물론 소리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다. ...

하지만 정말로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있을까? ...

볼에 닿는 그의 숨결만으로도 반사적으로 신음이 흘러나오려 하는데. ...

그림자 진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숨이 가빠오는데. ...

(52) 당신의 취향 ...

케이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리시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눈은 감지 말고.” ...

케이의 속삭임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

“저길 봐요.” ...

‘저길 보라고?’ ...

뭔가 좀 이상하다. ...

아무래도 상상과는 다른 일이 벌어지는 것 같아서, 리시는 살그머니 눈을 떴다. ...

케이의 얼굴은 리시를 향해 있지 않았다. 그는 리시의 볼에 자신의 볼을 붙이듯이 대고 수풀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

리시도 천천히 시선을 돌려 그쪽을 응시했다. ...

수풀 너머에는 너른 공터가 있었는데, 그 공터 중앙에. ...

“사슴……?” ...

사슴 한 마리가 껑충껑충 춤을 추듯이 뛰고 있었다. ...

길고 멋진 뿔을 가진 사슴은, 오늘 하루 무척이나 좋은 일이 있었던 것처럼, 가늘고 긴 다리로 껑충껑충 즐겁게 공터를 뛰어다녔다. ...

리시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

“어때요?” ...

케이가 물었다. ...

“무엇이……?” ...

“귀엽지 않아요?” ...

“귀엽긴 한데…….” ...

새삼스럽게 얼굴이 확 달아오른 이유는, 자기 혼자 멋대로 야릇한 망상을 했던 것이 창피했기 때문이다. ...

‘나, 진짜…… 왜 이러니?’ ...

무섭고 싫어서 피하고 싶었던 행위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얼어붙어, 목석같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

앞으로도 쭉, 평생 그럴 줄 알았다. 언젠가 케이와 동침하더라도, 원해서가 아닌 의무이기에 해야만 하는, 그런 행위로 남게 될 줄 알았다. ...

‘그런데 이게 뭐람. 이 남자는 생각도 없는데, 나 혼자서…….’ ...

생각해보면 좋은 침대 놔두고, 굳이 숲에 들어가서 그런 걸 할 이유가 없다. ...

그런데도 혼자 망상에 젖어 얼굴이 빨개지고, 두근거리고, 긴장하고, 눈을 감고……. ...

얼마나 멍청해 보였을까? ...

‘케이가 내 속마음을 읽지 못해서 다행이야.’ ...

정말로 다행이다. 들켰으면 한동안 케이 얼굴을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

“리시?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개요?” ...

케이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리시는 입술을 꼭 여미고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케이의 눈이 재미있다는 듯 가늘어졌다. 리시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

“설마 여기서 뭔가 할 줄 알았던 거야, 리시?” ...

“아, 아니거든.” ...

말을 더듬고 말았다. ...

케이의 눈이 커졌다가 다시 가늘어졌다. ...

“당신이 말 더듬는 건 처음 봐. 아무래도 내 추측이 맞는 것 같은데.” ...

“아니라니까, 케이.” ...

짐짓 엄한 척 말하며 그의 가슴을 밀어내려는데, 그가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을 줬다. 그 바람에 그의 손가락 끝이 허리를 파고들어서 간지러웠다. ...

“아흣!” ...

간지러움을 참느라 소리를 죽여야 한다는 걸 잊었다. 괴상한 소리가 어둡고 고요한 숲에 울려 퍼졌다. ...

껑충껑충 뛰던 사슴이 우뚝 멈추더니 이쪽을 응시했다. ...

“이런. 들켰네요.” ...

케이가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

사슴이 한쪽 귀를 팔락거리다가 케이를 향해 걸어왔다. 반가운 듯 차박차박 걸어오던 사슴은, 케이의 옆에서 일어나는 리시를 보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

잠시 그렇게 굳어 있던 사슴이 휙 돌아서서 나무 사이로 도망쳤다. ...

“저런, 도망가버렸네.” ...

“왜 도망치는 거죠?” ...

“글쎄요. 당신이 무서워서?” ...

“하지만 월라스는 내가 그를 해칠 리 없다는 걸 알잖아요.” ...

케이가 키득거렸다. ...

“월라스는 자기가 사슴이라는 걸 창피해하거든요. 그 덩치에 저렇게 귀여운 사슴이라는 걸 감추고 싶어 하죠.” ...

“하지만 근사한 뿔이던데.” ...

“맞아요. 나중에 녀석에게 그렇게 말해주면 좋아할 거예요.” ...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케이가 늑대로 변했다. ...

“우리는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피가 들끓어요. 그래서 한 달에 두 번, 보름달이 뜰 때마다 참지 못하고 변신하죠.” ...

그건 리시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

지금까지는 수인이라도 평생 짐승으로 변하지만 않으면, 아무에게도 걸리지 않을 텐데 왜 굳이 변신하는 장면을 들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

“견디지 못하나요? 막 죽을 것 같고 그래요?” ...

리시의 질문에 케이가 크르릉, 하는 소리를 냈다. ...

웃음소리다. ...

“아니, 죽을 것 같은 건 아닌데……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

케이가 리시를 흘긋 쳐다보더니 갑자기 두 앞발을 리시의 어깨에 얹었다. ...

묵직한 무게감에 리시의 무릎이 휘청 꺾였다. ...

간신히 버티고 선 리시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케이가, 리시의 볼을 핥았다. ...

“당신을 앞에 두고도 못 먹는 거랑 비슷해, 리시.” ...

“식욕?” ...

케이가 크르릉, 하고 또 웃었다. ...

“아니, 리시. 좀 전에 당신 머릿속을 가득 채워서, 당신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그거 말이야. 그런 거랑 비슷하지.” ...

리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케이를 노려봤다. ...

“그런 거 아니라니까.” ...

“그런 게 뭔데?” ...

그리 되물으니 할 말이 없다. 성욕, 이라고 대답하면 내 머릿속이 그런 거로 가득했다는 걸 인정하는 꼴만 되니. ...

케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히죽 웃었다. 늑대 모습인데도 리시를 놀리는 게 확연히 느껴지는 표정이라서 얄미웠다. ...

리시는 얼굴 앞에 있는 케이의 커다란 코를, 이마로 콩 받았다. ...

“놀리지 마, 케이. 버릇없는 멍멍이는 엉덩이를 때려줄 거니까.” ...

“어이구, 무서워라.” ...

케이가 앞발을 내리고, 리시를 향해 등을 보이며 앉았다. ...

“뭐야, 때려달라는 거야?” ...

“그게 당신 취향이라면 뭐, 몇 대쯤 맞아줄 수 있어.” ...

“난 그런 취향 아니야.” ...

“그럼 타.” ...

“응?” ...

“타, 리시.” ...

“당신 등에?” ...

“그래, 내 등에.” ...

케이가 엎드렸다. ...

리시는 타기에 딱 좋게 엎드린 검은 늑대의 등을 응시했다. 늑대를 타는 건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

“그러다 당신 허리 부러지면…….” ...

늑대가 엎드린 채 크르르르 웃었다. ...

“내가 밤에 당신을 안아주지 못할까 봐 걱정돼?” ...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알면서.” ...

늑대의 꼬리가 강아지 꼬리처럼 휙휙 움직였다. ...

“얼른 타, 리시. 난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튼튼한 허리를 갖고 있으니까.” ...

리시는 불안한 마음으로 살며시 케이의 등에 올라갔다. 허리 가운데쯤에 굴곡이 있어서, 의외로 편했다. ...

리시가 자리를 잡자 케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꺅!” ...

리시가 작게 비명을 지르며 케이의 목덜미 털을 세게 잡았다. ...

“잘 잡아, 리시.” ...

케이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리시는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며, 케이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케이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

“저기, 케이.” ...

“달릴게, 리시.” ...

잠깐, 이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거대한 검은 늑대는 바람을 갈랐다. ...

말을 탈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

엉덩이에 닿은 그의 튼튼한 허리 근육이 날뛰고, 술렁술렁 부드럽고도 빠르게 전신이 움직였다. ...

숲에 빼곡한 나무들 사이를, 케이는 요령 좋게 요리조리 몸을 비틀며 나아갔다. ...

나무가 단숨에 다가올 때마다 부딪칠 것 같아서, 리시는 몇 번이나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얼마쯤 시간이 흐르자, 그가 나무에 부딪힐 리 없다는 걸 믿게 되었다. ...

그를 믿고 그의 목을 꽉 끌어안은 채, 빠르게 흘러가는 경치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

환상적이었다. ...

끝내주는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

한참 후 둘은 출발했던 곳에 돌아와 있었다. 리시는 케이에게서 내려, 그를 마주 보고 섰다. 그렇게 달렸으면서도 케이는 지친 기색이 전혀 없었다. ...

리시는 검은 늑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는 즐거운 듯 눈을 감고 리시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

“굉장했어요, 케이.” ...

“앞으로도 얼마든지.” ...

당연한 듯 여상히 들려오는 그의 대꾸가, 참으로 따뜻했다. ...

오늘 밤은 슬리브 스톤이 없어도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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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가 리시를 등에 태우고 달리던 그 시각. ...

사슴 한 마리가 커다란 사자 앞에 우울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

사슴 정도는 한입에 먹어치울 것처럼 거대한 사자는, 지루한 듯 앞발에 턱을 괴고 누워서 하품했다. ...

“하품할 때가 아니라니까, 나단!” ...

“월라스, 나는 형수님이 네 꼴을 비웃든 말든 아무 관심이 없어.” ...

“넌 사자니까 그렇게 팔자 좋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거야. 사자는 들켜도 멋지잖아.” ...

“넌 형수님이 우리가 수인이라는 걸 아는 것보다, 네가 사슴이라는 걸 아는 게 더 큰일이냐?” ...

“우리가 수인이라는 거야, 뭐. 대장이 자기가 늑대라는 걸 이미 밝힌 마당에 눈치채시는 게 당연하지. 똑똑한 분이잖아. 아, 진짜. 하품 좀 그만하라고.” ...

“졸린다고, 나는.” ...

나단이 눈을 감았다. ...

월라스는 백수의 왕인 사자로 변하는 나단이 부럽기만 했다. ...

인간일 때는 조그만 계집애 같은 게, 사자처럼 근사한 짐승으로 변신하다니. ...

월라스는 길고 근사한 뿔로 잠들려는 사자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

“크아아앙! 아프잖아!” ...

사자가 벌떡 일어나 아가리를 벌렸다. ...

크고 무시무시한 송곳니가 드러났지만, 사슴은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이 앞발로 바닥을 탁탁 찼다. ...

“형수님이 아까 그 사슴이 나라고 생각하진 않으시겠지?” ...

“대체 그 소리를 몇 번째 하는 거야? 너라고 생각하시든 말든 나랑은 아무 상관 없다니까 그러네. 그 가늘고 연약한 목을 물어뜯기 전에 꺼져!” ...

사자가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듯 으르렁거렸지만, 사슴은 뿔로 땅을 파며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

“하아. 형수님이 내가 사슴이라는 걸 눈치채면 안 되는데…….” ...

“하, 진짜 집요한 사슴 새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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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야제 두 번째 파티에, 황태자는 참석하지 않았다. ...

귀부인들은 아직도 어제 황태자가 리시에게 춤을 청한 일을 주제로 소곤거리느라 바빴다. ...

브리트니는 그들 모두가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서 속이 끓었다. ...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아이리스가 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어.’ ...

어쩌면 황태자에게 큰돈을 주면서 자신과 춤을 춰달라고 부탁했을지도 모른다. ...

물론 황태자가 돈을 받는다고 신부에게 춤을 청하는, 격 떨어지는 행위를 할 리 없지만, 브리트니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

황태자에게 직접 춤을 청했다가 거절당했다. 레이디가 먼저 댄스 신청을 하는 것도 이례적인 일인데, 거절까지 당했으니 이 일은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다. ...

모멸감에 얼굴을 들 수 없지만, 파티에 참석하지 않으면 더 떠들어댈 것 같아서 기어코 참석했다. 어제보다 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더 당당하게 행동하기 위해 애썼다. ...

하지만 브리트니가 애쓴다고 해서, 어제의 일이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

“브리트니 양 좀 봐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데, 안쓰럽네요.” ...

“먼저 댄스 신청을 했는데 거절당하다니…… 그때 브리트니 양 표정 봤어요?” ...

“아, 나 같으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거야. 그런데 또 파티에 참석하다니, 뻔뻔하기도 해라.” ...

“그린 백작 부인도 안됐어요. 자기 언니가 저래서 똑같은 취급을 당할 거 아니에요. 얼마나 창피할까?” ...

실제로 들리는 건 아니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오갈 게 분명했다. ...

‘이건 다 아이리스 때문이야. 쟤가 수작을 부려서…….’ ...

브리트니는 리시를 쏘아봤다. 리시는 어제와 다른, 우아한 분위기의 드레스를 입고 케이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

눈이 마주쳤다. 리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날 조롱하고 있어!’ ...

어제의 충격으로 머릿속이 엉망으로 헝클어져서, 정상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저 계집애의 머리를 쥐어뜯어 줘야, 터질 듯 부글거리는 속이 잠잠해질 것 같았다. ...

브리트니는 손톱을 세우고 리시를 향해 달려들었다. ...

(53) 브리트니의 매너 ...

브리트니는 리시의 근처에도 갈 수 없었다. ...

그녀의 앞을, 건장한 사내가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

브리트니가 한참 고개를 들고 나서야, 사내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케이의 동생인 엘드허트 그린이었다. ...

기사단 제복을 입은 엘디는, 서늘한 눈으로 브리트니를 내려다봤다. ...

파티장 안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두 사람을 쳐다봤다. ...

“내 형수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레이디 위틀로?” ...

브리트니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을 차렸다. 모두가 이쪽을 보고 있다. ...

“무슨…… 짓이라니……? 내가, 뭘…….” ...

“뻔뻔하군, 레이디 위틀로. 레이디답지 못한 눈으로 내 형수를 노려보던데.” ...

“나, 나는…….” ...

브리트니는 도와줄 사람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시선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시선을 돌리는 순간, 경멸 어린 시선들과 마주칠 것 같았다. ...

아버지도, 어머니도 오늘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 창피해서 도저히 파티에 갈 수가 없다며 방에 틀어박혔다. 이 자리에 브리트니의 편은 없었다. ...

“그린 경. 뭔가 오해하는 모양인데, 나는 그저 내 동생에게 예쁘다는 말을 해주려고 했을 뿐이에요.” ...

브리트니는 머리를 차게 식혔다. 어차피 증거도 없으니 흥분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리시의 머리를 쥐어뜯기 전, 엘디가 말려줘서 고마울 따름이었다. ...

“그래? 예쁘다고 해주려는 눈빛은 아니던데. 혹시 어제의 모멸감의 원인이 내 형수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엘디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

브리트니는 뜨끔했지만 뻔뻔하게 미소 지었다. ...

“어제, 내가 모멸감 느낄 만한 일이 있었던가요? 나는 그저 평소 동경하던 황태자 전하께 댄스를 신청했고, 전하께서 바쁘신 일이 있어 거절당한 것뿐인데요.” ...

“그렇지. 하지만 거절당한 직후의 표정은 가관이던걸. 이런 말로 포장할 거였다면, 거절당한 직후부터 표정 관리를 했어야지.” ...

브리트니는 엘디의 뺨을 날려주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 ...

엘디가 그린 가문의 망나니라고 불린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

누구에게나 무례한 남자, 그러나 그 실력과 가문이 대단하여 아무도 뭐라고 하지 못하는 남자. ...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그린 경. 비켜줄래요, 내 동생에게 할 이야기가 있으니.” ...

“그럴 순 없어, 레이디 위틀로. 너 때문에 내 형수까지 창피를 당하는 건, 어제 한 번으로 족해.” ...

“나는 내 동생을 창피하게 만든 적 없어요, 그린 경. 오히려 경의 행동이 그린 백작님을 창피하게 만드는 것 같은데요.” ...

“아, 상관없어. 난 반쯤 내놓은 자식이라서. 봐봐, 내 부모님도 모르는 척하시잖아.” ...

엘디가 그린 노백작 부부 쪽을 가리켰다. ...

그린 노백작 부부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는 듯, 옆에 있는 다른 공작 부부와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

“자, 레이디 위틀로. 얘기가 길어질수록 네 입장만 난처해져. 자존심도 좋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지 그래?” ...

이만 돌아가는 게 낫다는 걸, 브리트니도 알았다. ...

하지만 지금 돌아간다면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개 취급을 당할 것이다. ...

브리트니는 이 상황을 모면할 방법을 찾아 머리를 굴렸다. 마땅히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화가 나고 분통 터지고 서러워서, 눈물을 참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

‘왜 다들 나한테만 이러는 거야? 내가 뭘 어쨌다고? 나쁜 건 아이리스라고! 쟤가 뒤에서 다 조종하는 건데, 왜 아무도 몰라주는 거야?’ ...

브리트니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아이리스의 만행을 낱낱이 고하고 싶었다. ...

하지만 그래 봐야 위틀로 가문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할 정도의 이성은 남아 있었다. ...

브리트니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고 엘디를 노려보다가 말했다. ...

“그린 가문이 이토록 무례한 행위를 눈감아주는 가문일 줄은 몰랐네요. 내 동생에게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

내 동생은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해요, 라는 뒷말을 끝낼 수 없었다. 엘디가 말을 끊었기 때문이다. ...

“형수에게는 아무 말도 못 들었어. 나, 형수랑 별로 안 친하거든. 말했잖아, 내놓은 자식이라고.” ...

평소의 이미지라는 게 그렇다. ...

망나니로 소문난 엘디가 파티장에서 하지 말아야 할 행위를 하며 무례하게 행동하는 건, 다들 그러려니 했다. ...

엘드허트 그린은 원래 저러니까. 오히려 평소보다는 매너가 있네. 그래도 자기 형 결혼식 전야제라 예의를 지키는 모양이야. ...

엘디와 달리 브리트니는 동생을 아끼고 걱정하는, 좋은 언니의 이미지를 쌓으며 살아왔다. 그러니 브리트니가 하는 작은 실수조차도 크게 부풀려져, 사람들 사이에 뒷얘기를 오가게 했다. ...

미친개와 싸우면 이겨도 욕을 먹고, 져도 욕을 먹는다는 말이 있다. 애초에 미친놈과는 싸우지도 말라는 뜻이다. ...

브리트니는 자신이 결코 이길 수 없는 남자를 상대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끌어 모두에게 얘깃거리를 만들어주느니, 꼬리 말고 도망치는 개가 되는 편이 나았다. ...

브리트니는 휙 돌아섰다. ...

하지만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다. 턱을 바짝 들었다. ...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무례한 사내 때문에 기분이 상해 나가는 것처럼 보이도록, 우아하고도 느릿하게 걸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

복도로 나가는 순간, 브리트니는 달렸다. 눈물이 흘렀지만, 그조차 깨닫지 못했다. 분했다. ...

제 언니가 당하는데도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앉아만 있던 아이리스를 용서할 수 없었다. ...

‘두고 봐. 내가 황태자비만 되면, 너도, 엘드허트 그린도, 전부 다 없애버릴 거야!’ ...

 

+++

브리트니가 나간 후, 엘디는 리시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

“이걸로 윈디 일은 갚아준 거야. 앞으로 내가 도와줄 거란 기대는 하지 마.” ...

“도움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딱히 윈디 일을 도와줬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데.” ...

“그때 너, 아니, 형수는 은혜를 베풀었다는 표정이었다고. 얼마나 우쭐한 표정이었는지 알아?” ...

리시가 키득 웃었다. ...

“마음에 담아뒀었구나, 엘드허트. 착하기도 하지.” ...

“젠장. 애 취급하지 마. 기분 나쁜 여자 같으니.” ...

엘디가 툴툴거리며 멀어졌다. ...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귀족들은 생각했다. ...

‘별로 안 친하다더니, 굉장히 친해 보이는걸. 그린 백작 부인은 그린 가문 사람들에게 되게 사랑받나 보네. 앞으로 함부로 대하면 안 되겠어. 저 그린 가문의 망나니를 적으로 돌리지 않으려면.’ ...

 

+++

눈이 벌게져서 돌아온 브리트니의 모습에, 글로번은 속이 타들어 갔다. ...

펑펑 우는 브리트니가 안쓰러운 한편, 가만히 있으라 해도 말을 듣지 않는 브리트니에게 화가 치밀었다. ...

‘아이리스라면 잠자코 내 말을 들었을 텐데.’ ...

고분고분한 아이리스와 비교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하지만 이제는 아이리스도…….’ ...

글로번은 바보가 아니었다. ...

그린 가문에 들어온 후, 리시는 변했다. 그린 가문을 주도해 위틀로 가문을 멸시하고 밀어냈다. 리시를 이용해서 그린 가문을 쥐고 흔들 계획이었는데, 그 계획은 시도조차 해볼 수 없었다. ...

이제 리시는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 아닌, 그린 가문의 안주인이다. 글로번이 고함을 지르면 찔끔해서 고개를 숙이고, 잘못했다는 말을 웅얼거리던 아이리스는 사라졌다. ...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왜 아이리스가 그렇게까지 변한 거지?’ ...

엎드리라 하면 엎드리고, 기라고 하면 기는, 말 잘 듣는 강아지로 키웠는데, 결혼 좀 했다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다니. ...

‘그린 백작이 무슨 짓을 한 건가?’ ...

아니, 생각해보면 결혼 전부터 그랬다. 케이가 리시와 결혼하고 싶다고 찾아온 날부터. ...

그날은 금광에 눈이 멀어 리시를 제대로 살피지 않았는데, 인제 와서 생각해보면 응접실에 들어온 리시는 평소와 조금 달랐다. ...

겁에 질린 눈빛도, 울적한 입매도, 축 늘어진 어깨도 없었다. 리시는 어깨를 폈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고, 당당한 눈빛으로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케이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

‘호랑이 새끼가 발톱을 감추고 있었어.’ ...

위틀로 공작저에 있을 때의 행동은, 전부 꾸며낸 것이 틀림없다. ...

‘제 어미의 복수라도 할 셈인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낳기만 한 년이 뭐가 좋다고. 나는 키워주고 먹여주고 아껴줬는데!’ ...

글로번은 리시가 괘씸했다. ...

하녀에게서 태어나 하녀 취급을 받으며 살 것을 공작의 막내딸로 잘 키워줬는데, 그래서 그린 백작과 결혼까지 할 수 있었는데, 은혜를 갚기는커녕 이빨을 드러낸다. ...

‘아이리스도 그렇고, 그린 백작도 그렇고…… 우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생각은 없다고 봐야겠지. 그렇다면…….’ ...

황태자밖에 없다. ...

초조함을 드러내지 않고 느긋한 척 공들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

글로번은 곧장 서채에 있는 황태자 보좌관들의 방으로 찾아갔다. 황태자의 수석 보좌관인 세트니는 황태자의 옆방을 쓰지만, 다른 보좌관들은 서채의 방을 사용했고, 파티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

보좌관의 방 앞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글로번이 줄을 대고 있던 차석 보좌관 쿠리언이 복도를 걸어오는 중이었다. ...

수석 보좌관인 세트니와 손을 잡는 편이 좋았겠지만, 세트니는 고지식하고 충심이 가득해서 돈에 흔들리지 않는 자였다. ...

차석 보좌관인 쿠리언은 머리가 좋지만 돈 욕심이 많기로 유명했다. ...

글로번에게 큰돈을 받은 쿠리언은 브리트니를 황태자비로 강력하게 밀었고, 세트니 역시 위틀로 가문 정도면 괜찮겠다 싶었는지 쿠리언의 의견에 찬성하고 있었다. ...

황태자도 수석과 차석 보좌관의 말을 크게 반대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쿠리언!” ...

글로번의 외침에 복도에 있던 고용인들이 깜짝 놀라서 돌아봤다. ...

쿠리언이 인상을 찌푸리고 빠르게 걸어와 글로번의 팔에 손을 얹었다. ...

“이거, 이거. 왜 얼굴을 보자마자 고함을 치고 그러십니까, 공작님.” ...

“황태자 전하께서 우리 브리트니와 춤을 추지 않았다는 걸 들었을 텐데!” ...

“이런. 공작님, 보는 눈도, 듣는 귀도 많은 곳에서 브리트니 양의 치부를 낱낱이 고할 셈이십니까? 자리를 옮기시지요.” ...

쿠리언이 달래듯 말했다. 그제야 글로번도 큼큼 헛기침하며 쿠리언과 함께 테라스로 나갔다. ...

“브리트니 양에게 벌어진 안타까운 일은 저도 이미 들었습니다.” ...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쿠리언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

“하지만 공작님. 황태자 전하께서 황태자비 후보에게 춤을 청해야 한다는 법도는 없습니다. 아실 텐데요.” ...

“법도는 없지만, 매너라는 게 있지 않소. 보통 파티가 열리면 전하께서는 황태자비 후보들에게 춤을 청하시는 법이오. 후보 중에서도 1순위 후보에게 제일 먼저 춤을 청하시지. 이것은 황제 폐하께서 황태자이실 때도 마찬가지였소.” ...

“물론 그렇지요.” ...

“그런데 이건 뭐요? 황태자 전하께서는 뜬금없이 아이리스에게 춤을 청하시고는, 그 후로 아무와도 춤추지 않고 돌아가시지 않았소? 오늘은 파티에 참석조차 안 하셨다지?” ...

“하아.” ...

쿠리언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표정을 굳혔다. ...

“공작님. 이상하네요. 그린 백작 부인께서도 공작님의 영애 아니십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결혼식을 올리기 전의 신부에게 춤을 청하신 것은, 황실의 가호를 내린다는 크나큰 영광인데, 왜 그리 화가 나셨는지요?” ...

글로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와 반대로 쿠리언의 표정은 점점 사라졌다. ...

“그리고 공작님. 그리 매너를 따지시는데, 브리트니 양의 매너부터 어떻게 좀 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

(54) 널 사랑하나 봐. ...

“무, 무엇이?” ...

“그렇잖습니까? 감히 황태자 전하께 먼저 나서서 춤을 청하시다니. 상대가 황태자 전하가 아니라도, 레이디가 먼저 춤을 청하는 건 민망한 일인데, 하물며 황태자 전하께 그러시는 것은…….” ...

“그, 그건…….” ...

글로번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

“듣자 하니 예전에 브리트니 양이 그린 백작에게도 먼저 춤을 청했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그 얘기를 들었을 때야 당찬 여성이라고 생각했는데, 황태자 전하께까지 그러는 것은 좀…….” ...

쿠리언이 경멸 어린 표정을 지으며,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

글로번은 브리트니가 옆에 있다면 뺨을 한 대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브리트니에게 화가 났다. 그러게,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거늘. ...

무슨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글로번은 주절주절 내뱉었다. ...

“우리 사이의 약속이 있지 않소. 황태자 전하께서 당연히 우리 브리트니에게 춤을 청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러지 않으시니, 브리트니도 애가 닳아서 그런 거 아니겠소?” ...

“그러니까 그게 문제란 말입니다, 공작님. 소문에 브리트니 양은 어른스럽고 차분하다고 해서 믿었는데. 그렇게 애 닳은 기분을 겉으로 드러내서야, 황태자비라는 어렵고 귀한 자리에서 버틸 수나 있을지…….” ...

글로번은 아차 싶었다. 얘기가 어째 점점 안 좋게 돌아간다. ...

“내게, 내게 돈을 받지 않았소! 돈값은 하셔야지.” ...

“저런. 공작님, 그리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을 텐데요. 공작님께 받은 자금은 전부 브리트니 양을 황태자비로 만들기 위한 준비로 쓰일 것이라고. 그 돈 중에 제가 개인적으로 쓴 돈은 하나도 없습니다.” ...

글로번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지적하지 않았다. ...

브리트니를 황태자비로 만들기 위해 믿을 사람은 쿠리언밖에 없었다. 쿠리언와 틀어지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허사가 된다. ...

“쿠리언, 내가 답답해서 그러네, 답답해서.” ...

“압니다, 공작님. 알고말고요. 하지만 이번에 브리트니 양이 너무 큰 실수를 하셔서…… 어렵게 됐습니다. 가만히만 계셨어도 돌아가는 대로 황태자비 발탁을 하셨을 텐데요.” ...

“뭔가 방법이 없겠소?” ...

“글쎄요. 어제의 일로 귀부인들은 물론이거니와 귀족들 사이에서도 말이 나와서요. 아시지요? 사교계에서 너무 언급되는 여인은 황태자비가 되기 힘들다는 거…….” ...

“어음을 끊어주지. 필요한 금액을 말해보시오.” ...

쿠리언이 고개를 저었다. ...

“아시다시피 어음은 받지 않습니다, 공작님. 현물이어야 곧바로 자금을 융통해서 브리트니 양을 위해 쓸 수 있죠.” ...

“끄응…….” ...

글로번은 골치가 아팠다. ...

그동안 쿠리언에게 준 돈만 해도 1만 골드가 넘었다. 리시의 결혼식 비용으로 나갈 돈이 적어도 3천 골드는 될 터였다. ...

아무리 금광이 있다 해도, 2, 3년은 쉬지 않고 캐내야 벌 수 있는 돈이다. 황실에서 공작에게 매년 지급하는 연급이 1천 골드는, 다 쓴 지 오래였다. ...

“내 금광의 권리 중 10프로를…….” ...

“말씀드렸잖아요, 공작님.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자금이 필요하다고.” ...

쿠리언이 딱 잘라 거절했다. ...

“좋소. 그렇다면 내 지금 당장 은행에 가서 자금을 빌려오지. 지금까지 드린 돈이 있으니 한 5백 골드면 되겠지?” ...

“아니요, 공작님. 2천 골드는 필요합니다. 지금 노리시는 자리가 그냥 왕비 자리 정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 대륙에서 가장 부강한 제국의 황태자비가 되시려면, 배포가 크셔야지요.” ...

+++

브리트니는 어딘가에 나갔다가 돌아온 글로번에게 크게 혼났다. ...

“아무 짓도 하지 마, 브리트니! 제발 아무 짓도 하지 말라고!” ...

글로번은 거의 절규했다. ...

“네가 한 짓 때문에 안 써도 되는 돈을 얼마나 쓴 줄 알아? 자그마치 5천이 넘는다고, 5천이!” ...

“5천이라니…… 설마, 5천 실버?” ...

“실버? 실버어?” ...

“설마…… 골드야? 5천 골드? 아이리스 결혼식 비용이 5천 골드나 돼요?” ...

“아이리스 결혼식 비용뿐만이 아니야! 널 황태자비로 만들기 위해서도 돈이 들어. 그런데 네가, 네가 괜한 짓을 해서!” ...

브리트니의 표정이 밝아졌다. ...

“나 아직 황태자비 될 수 있는 거 맞죠?” ...

철없이 웃는 브리트니의 모습에, 글로번은 억장이 무너졌다. ...

“네가 아무 짓도 하지 않으면! 황태자가 춤을 청하지 않는다고 먼저 춤을 청하고, 아이리스에 대해 괜한 말을 떠들어대지만 않으면!” ...

“아니, 여보. 왜 애한테 자꾸 소리를 질러요?” ...

데니스 위틀로 공작부인이 볼멘소리를 냈다. ...

글로번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

“지금 소리를 안 지르게 생겼어? 브리트니가 황태자비가 된다고 해서 곧바로 돈을 벌어다 줄 것도 아니고, 황후가 될 때까지는 몸 사려야 하는데…… 빚이 잔뜩이라서 당장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아야 한다고!” ...

“허리띠가 문제예요, 지금? 우리 브리트니가 황태자비가 되는데?” ...

“하이고야, 하이고야.” ...

글로번이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

브리트니는 아버지 속도 모르고 생글생글 웃으며 꿈꾸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브리트니,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무 짓도 하지 마라. 만약 내일 결혼식을 망칠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거 절대로 하지 마. 네가 뭐 하나 하면, 황태자비의 길에서 멀어질 뿐이니까.” ...

브리트니는 내일 리시의 결혼식을 망치기 위한, 수십 개의 계획을 세워둔 터였다. 리시가 행복한 얼굴로 결혼식을 무사히 마치는 것만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하지만 황태자비가 되려면 어쩔 수 없지.’ ...

속은 좀 뒤집히겠지만, 내일은 웃는 얼굴로 아이리스를 축하해주는 수밖에. ...

+++

파티가 끝난 후, 방에 돌아온 리시는 곧장 화장을 지우고 따뜻한 물이 담긴 욕조에 몸을 담갔다. ...

아직 힐에 익숙하지 않은 발에는 물집이 생겼고, 종아리는 퉁퉁 부었다. 드레스를 입어야 해서 밥도 제대로 먹지 않아, 졸도할 것만 같았다. ...

크리시나는 꿀과 허브, 과일을 적절하게 섞은 팩을 리시의 얼굴에 붙여줬다. ...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참으세요, 아이리스 님. 이제 곧 끝이에요.” ...

“이틀이나 남았잖아요. 하, 정말 괴롭네요. 결혼식.” ...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신부가 되셔야 하는데 괴로우시다니요. 내일 아이리스 님은 정말 아름다우실 거예요.” ...

“물론 그렇기야 하겠지만.” ...

크리시나는 리시가 괜한 겸양을 떨지 않는 부분이 좋았다. ...

“배가 많이 고프실 텐데, 샐러드를 준비해뒀으니 나오시면 드세요.” ...

“여기서 먹을래요.” ...

“잠시만요.” ...

크리시나가 가져온 접시에는 샐러드가 반만 들어 있었다. ...

“으, 또 풀떼기.” ...

리시가 진저리를 치자 크리시나가 쿡쿡 웃으며 욕조 덮개를 설치하고, 그 위에 샐러드 접시를 내려놨다. ...

“맛있게 드세요, 아이리스 님. 앞에 있을 테니 필요하면 부르시고요.” ...

리시는 포크를 들었다. 너무 굶주려서 드레싱을 치지 않은 샐러드마저 맛있어 보였다. ...

쓴맛이 나는 샐러드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데, 욕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에르웰이 들어왔다. ...

“에르웰, 무슨……?” ...

에르웰이 검지를 입에 대기에, 리시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

바깥을 살피며 다가온 에르웰이, 욕조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

“시니는 잠깐 졸고 있어요.” ...

조는 걸 일러바치러 온 걸까? 늘어지게 자도 상관없는데. ...

“시니는 좀…… 가혹해요. 시니는 드레스 입을 일이 많아서 굶는 게 익숙하거든요.” ...

아, 뒷말을 하러 온 거구나. ...

그러고 보니, 크리시나와 있을 때 에르웰은 항상 당하는 처지였다. ...

“하지만 아이리스 님은 그렇지 않으시겠죠.” ...

에르웰이 소곤거리며 품에서 뭔가를 꺼내 쓱 내밀었다. 그것은 냅킨에 싸여서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냄새만으로도 뭔지 알 수 있었다. ...

리시는 떨리는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들었다. ...

포장을 벗기자, 그 존재만으로도 찬란하게 빛나는……. ...

“고기 샌드위치라니……. 거기에 고기가 두 장이나…….” ...

“어서 드세요, 아이리스 님. 파티 전날 그것 좀 드신다고 못생겨지실 분도 아닌데…….” ...

“에르웰…… 나, 나 몰랐는데, 에르웰을 사랑하나 봐요.” ...

에르웰이 얼굴을 붉혔다. ...

“저야 무척이나 영광이긴 한데, 그렇게 홀딱 벗으신 채로 말씀하시면 너무 진심이신 것 같아서, 입맞춤이라도 해드려야 하나 싶기도 하고…….” ...

에르웰이 횡설수설하는 동안, 리시는 이미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고 있었다. ...

입에 넣자마자 퍼지는 진한 고기 향과 달콤짭짤한 소스의 맛. ...

리시의 가슴에 에르웰을 향한 애정도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높아졌다. ...

“에으에. 어마로…….” ...

“네, 네. 알겠으니까 드시는 데 집중하세요. 크리시나가 뺏으러 오기 전에요.” ...

입에 샌드위치를 가득 넣고 우물우물 사랑 고백을 하던 리시는, 크리시나가 올지도 모른다는 말에 결의에 찬 눈으로 샌드위치를 먹는 데 집중했다. ...

에르웰은 욕조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열심히 샌드위치를 먹는 리시를 지켜봤다. ...

처음에 그린 백작 부인의 시녀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땐, 솔직히 좀 기분 나빴다. ...

물론 다른 곳도 아닌 ‘그린 가문’의 시녀 자리이니, 누구나 원하는 자리인 건 분명했지만, 에르웰은 단지 시녀 같은 걸 할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

그럼에도 수락한 이유는 크리시나 때문이었다. ...

-궁금하지 않아? 그 그린 백작이 선택한 여자가 어떤 여자일지. ...

처음에는 리시가 예뻐서 마음에 들었다. 위틀로 공작가의 꽃이라는 별명조차 아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

다음에는 다른 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

버릇없는 질레트를 대하는 태도, 그린 백작을 다루는 솜씨, 당혹스러울 상황에서도 잃지 않는 미소와 품격. ...

자그마한 체구를 가진 리시가 때때로 그 누구보다도 거대하게 느껴지곤 했다. ...

그래서 에르웰은, 리시가 마음에 들었을 뿐 아니라, 이 작고 영리하고 강한 듯하지만 약한 부분도 있는 백작 부인을, 온 힘을 다해 지키고 싶어졌다. ...

‘아, 가끔 귀엽기도 하시지.’ ...

리시는 샌드위치를 다 먹고 나서, 손가락에 묻은 소스를 쪽쪽 빨아먹는 중이었다. ...

다른 사람이 하면 더러워 보일 행동인데, 리시가 하면 순수한 소녀가 하는 행동처럼 보여서 귀여웠다. ...

에르웰은 리시의 이런 행동을 볼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알았다. ...

리시가 이렇게 허물없는 행동을 한다는 건. ...

‘날 신뢰하신다는 거겠지.’ ...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

“굉장했어요, 에르웰. 방금 건 정말, 굉장했어요.” ...

“그렇죠?” ...

“하, 정말…… 에르웰, 이 은혜는 꼭 갚을게요. 언제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반드시 내게 말해줘요. 이건, 음. 열 번.” ...

리시가 손가락 열 개를 쫙 펼쳤다. ...

“열 번쯤은 에르웰을 도울 수 있을 만한 일이야.” ...

에르웰이 키득키득 웃었다. ...

“즐거워 보이는군요.” ...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에르웰은 벌떡 일어나 반사적으로 옆구리에 손을 가져갔다. ...

언제 들어온 건지, 문에 등을 기대고 있던 케이가 두 손을 살짝 들었다. ...

“워어. 나야, 에르웰.” ...

에르웰이 허리에서 손을 떼고 케이를 노려봤다. ...

“노크하셔야지요, 백작님.” ...

“리시를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살금살금 들어왔는데, 네가 있을 줄은 몰랐지.” ...

에르웰은 자신이 케이가 들어오는 기척을 전혀 알아챘지 못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

그러고 보면 항상 그랬다. 케이는 언제나 갑작스럽게 등장했다. ...

“리시랑 좋은 시간을 보내는 중에 미안한데, 그만 가서 쉬어. 나머지 시중은 내가 들 테니까.” ...

(55) 당연히 치료만 ...

  에르웰이 나간 후, 케이가 욕조 옆으로 다가왔다. ...

리시는 욕조 위에 욕조 덮개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에르웰이 뭔가 굉장한 걸 해줬나 봐요.” ...

“응, 해줬어요. 어마어마했죠.” ...

“뭘 해준 거예요?” ...

“비밀이에요.” ...

“나한테도?” ...

“당신한테도.” ...

“그거 너무하네. 나도 당신한테 굉장한 걸 잔뜩 해줄 수 있는데.” ...

“에르웰만큼은 아닐걸요. 에르웰,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에르웰 같은 사람을 시녀로 영입해줘서 고마워요, 케이.” ...

“흐음.” ...

케이가 욕조 끝에 걸터앉아 미간을 좁혔다. ...

“나보다 에르웰이 더 좋아요?” ...

“또 질투해요, 케이?” ...

“말했잖아요. 난 질투가 많다고.” ...

리시는 물을 조금 퍼 올려서 케이의 얼굴에 뿌렸다. ...

“이상한 질투는 하지 말아요. 에르웰은 여자잖아요.” ...

“보통 여자가 아니지. 어마어마한 여자거든요, 에르웰은.” ...

“어마어마하다고요?” ...

“아, 그런 게 있어요.” ...

케이가 싱긋 웃으며 욕조 덮개에 놓인 샐러드를 가리켰다. ...

“안 먹어요?” ...

“괜찮아요.” ...

“듣자 하니 요새 끼니를 거르고 있다던데. 샌드위치 하나로는 배고프잖아요.” ...

“새, 샌드위치라니요?” ...

리시가 모르는 척하자 케이가 쿡쿡 웃었다. ...

“리시, 늑대는 후각이 좋아요.” ...

“늑대는 참 좋은 것도 많네요.” ...

“뭘 먹었다고 나무라려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꽉 죄는 드레스를 입는 것보다는 굶주리지 않는 게 우선이에요. 누구도 내 아내를 굶주리게 만들 순 없어요.” ...

“크리시나가 굶주리게 하던데.” ...

“혼내줄까요?” ...

“이길 수나 있겠어요?” ...

“하긴. 크리시나도 어마어마한 여자라서…….” ...

어마어마하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크리시나의 말발이 케이보다는 셀 거라고 말한 거였는데. ...

“풀떼기만 먹는다는 말을 들어서 요리를 좀 준비했어요. 욕조 안에서도 먹을 수 있는 것들인데.” ...

“됐어요. 샌드위치 하나면 충분해요. 내일이 진짜인데, 드레스를 잘 소화해내고 싶어요.” ...

“저런, 리시. 아직도 몰라요?” ...

케이가 눈을 부릅떴다. ...

모두가 아는 사실을 리시만 모른다는 게, 하늘이 떨어질 정도로 놀라운 일이라는 표정이었다. ...

내가 놓친 게 있는 걸까? ...

“응? 뭘요?” ...

“거적때기를 입고 나가도, 내일 당신이 제일 예쁠걸요.” ...

“하…….” ...

저 주접을 어찌해야 하나. ...

리시가 기막히단 한숨을 내뱉자 케이가 웃었다. ...

“왜, 당신도 알잖아. 당신이 얼마나 예쁜지.” ...

“알아요. 하지만 거적을 걸쳐도 제일 예쁠 정도는 아니야.” ...

“그렇다면 당신이 잘못 알고 있는 거야. 당신은 홀딱 벗고 있어도 세상에서 제일 예쁘거든. 솔직히 말하자면…….” ...

케이의 음성이 은밀하게 낮아졌다. ...

몇 번이나 속았으면서도, 리시는 또 속았다. 혹시 다른 말이 나올까 싶어, 덩달아 진지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

“좀 곤란해. 당신이 너무 눈부셔서 시력이 떨어지고 있어.” ...

“……케이.” ...

“그러니까 리시.” ...

케이가 벌떡 일어나서 욕실을 나가더니, 트롤리를 밀고 들어왔다. ...

“마음껏 먹어. 지금보다 두 배 더 살이 쪄도, 세상에서 제일 예쁠 거야.” ...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

리시가 고개를 저었지만, 케이는 트롤리에서 맛있어 보이는 카나페를 들어 올려 리시의 입 앞으로 가져왔다. ...

리시는 거의 넘어갈 뻔했다. ...

살짝 벌어진 입술로, 엄청 맛있을 것이 분명한 카나페를 품으려 했다. 입술이 짭조름한 크래커에 닿는 순간, 리시는 정신을 차렸다. ...

한번 먹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 게 분명하다. ...

“안 돼요, 케이.” ...

리시가 손등으로 카나페를 밀어냈다. ...

“흐음. 이렇게 맛있는데.” ...

케이가 카나페를 한입에 쏙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

얄미운 남자 같으니. ...

“이것도 맛있어요, 리시. 한입만이라도 먹어봐요.” ...

케이가 얇게 저며서 살짝 익힌 소고기를 손가락으로 집어서 리시의 입술 앞에 가져왔다. ...

리시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고, 그 고기는 케이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

우물우물- ...

케이는 세상에서 이보다 더 맛있는 음식이 없다는 표정으로 야무지게 씹어서 꿀꺽 삼켰다. ...

“와, 맛있네. 그거 알아요? 우리 저택 요리사는 대륙에서 이름을 날리는 요리사라는 거. 황실 파티에 초청을 받아서 요리를 만든 적도 있죠.” ...

“…….”

“아, 이건 어때요? 해산물은 살 안 쪄요.” ...

케이가 조개 위에 치즈를 올려서 구운 요리를 내밀었다. ...

“치즈는 살쪄요. 짠 거 먹으면 얼굴 붓고.” ...

“얼굴 부으면 동글동글해서 엄청 예쁠 텐데.” ...

“당신 심미안은 좀 이상해.” ...

“와, 이거 정말 맛있네. 짭짤한 맛에 치즈의 고소한 풍미가 교묘하게 어우러져서 혀에 닿는 맛이…….” ...

찰방-! ...

리시는 참지 못하고 물을 한 아름 퍼서 케이의 얼굴에 뿌렸다. ...

“이 밉살맞은 남자 같으니.” ...

케이가 킬킬 웃으며 트롤리를 쭉 밀어 구석으로 보냈다. ...

“이해해줘요, 리시. 내 아내가 굶다가 쓰러지는 걸 보고 싶지 않거든.” ...

“이 정도 굶었다고 쓰러지진 않아요.” ...

리시는 이보다 더 많은 날을 굶은 적이 있었다. ...

“배고픈 것보다는 발이 문제예요. 내 발은 높은 힐을 견딘 적이 별로 없거든요.” ...

그저 케이가 리시의 배고픔에서 관심을 꺼주기를 바라며, 다른 주제를 꺼냈을 뿐이었다. ...

리시는 케이가 곧장 욕조 덮개를 걷어 올리고, 리시의 발을 살펴볼 줄은 몰랐다. ...

케이는 심각한 눈으로, 물속에 잠겨 있는 리시의 발을 확인했다. ...

그의 눈앞에 훤히 드러난 맨발과 종아리, 허벅지가 민망했다. ...

“괜찮으니까 그거 덮어줘요.” ...

“문제라면서요. 이런. 발가락에 물집이 생겼네요.” ...

케이가 욕조에 손을 넣어 리시의 발목을 잡아 살짝 들어 올렸다. ...

“뒤꿈치는 까졌고, 종아리도 부었어. 이렇게 아프면 진작 말했어야지, 리시.” ...

“견딜 만했어요.” ...

“하.” ...

케이가 난처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

내가 그를 성가시게 한 걸까 싶어서 덜컥 걱정됐다. ...

“알겠어, 리시. 이제 어쩔 수 없겠네.” ...

“뭘……?” ...

“당신 발을 관리할 영광을 주겠다니, 황송하게 받아주지.” ...

케이가 미간을 좁힌 채 진지하게 말하는 바람에, 무슨 의미인지를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

그가 커다란 수건을 가져와서 리시에게 나오라고 한 후에야, 그가 뭘 하려는지 깨달았다. ...

“케이, 내 발은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

“알아서 못 하니까 그렇게 엉망이 된 거잖아.” ...

“엉망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야.” ...

“엉망이야. 그 예쁜 발에 물집이라니. 나와, 리시.” ...

“난 당신에게 내 발을 관리할 영광을 주지 않았어.” ...

리시는 케이에게 자신의 발을 맡기고, 그가 신중하게 그 말을 꼼꼼히 살펴볼 때 느끼게 될 감정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

그건 너무 창피하다. 사내에게 맨발을 관찰당하다니. 지금도 창피해 죽겠는데. ...

“영광도 주지 않을 만큼 옹졸한 여자인 줄은 몰랐는데.” ...

“그럼 이제부터 알도록 해. 나, 굉장히 옹졸해. 그린 백작가의 옹졸이라고 불릴지도 몰라. 아니면 레이디 옹졸이라거나.” ...

찌푸리고 있던 케이의 미간이 펴졌다. 케이의 입가 근육이 실룩거렸다. 그는 웃음을 참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

“아하하하. 레이디 옹졸이라니. 그거 근사한걸. 내 부하들이 들으면 좋아하겠어.” ...

“당신이 그렇게 좋아해주니 기쁘네. 앞으로 당신과 그림자들의 기쁨을 위해, 더욱더 옹졸해지려고 노력할게.” ...

“하하하. 알겠어, 리시. 당신이 이겼어. 하지만 당신 발은 정말 걱정이야. 지금이야 따뜻한 물 안에 있으니 괜찮겠지만, 내일은 걸을 수 없을 정도일 거라고. 그냥 치료만 해줄게. 응?” ...

케이가 간절히 말하며 눈썹 끝을 늘어뜨렸다. ...

리시는 자신이 저 표정에 약하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케이가 저토록 원하는데, 민망함 같은 건 한 번쯤 참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알겠어. 치료만 하는 거야.” ...

리시가 욕조에서 나오자마자, 케이가 커다란 수건으로 리시의 몸을 감쌌다. ...

그가 리시의 귀를 살짝 깨물고 속삭였다. ...

“당연히 치료만 하지. 뭘 기대하는 거야, 리시.” ...

+++

리시는 발이 이렇게까지 야릇한 부위가 될 수도 있다는 걸 꿈에도 몰랐다. ...

리시를 소파에 앉힌 케이는,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리시의 종아리를 세운 무릎 위에 얹었다. ...

그는 부드러운 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물기를 닦아내고, 작은 발을 요리조리 돌려 상태를 확인했다. ...

“오늘 밤에는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감아두죠. 효과가 좋은 연고니까 내일이면 가라앉을 거예요.” ...

케이가 약통에 든 연고를 듬뿍 퍼서, 리시의 발에 발랐다. 그의 손가락이 발가락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문질렀다. ...

연고로 미끌거리는 손가락이 발가락의 신경을 야릇하게 자극했다. 리시는 손이 하얗게 될 정도로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발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어째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뭉글뭉글 들어찼다. ...

연고를 바른 부위가 금세 시원해지며 통증이 가라앉았지만, 이상하게도 리시는 뜨겁게 느껴졌다. ...

‘저 연고, 굉장히 비쌀 텐데. 저걸 저렇게 많이 쓰다니.’ ...

다른 생각을 하면서 묘한 기분을 털어내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

신중한 눈으로 리시의 발을 응시하는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청각이 좋은 케이가 이 소리를 듣고, 이 기분을 눈치챌까 봐 걱정이었다. ...

리시의 양쪽 발에 전부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감아준 케이가 말했다. ...

“리시.” ...

“헛?” ...

너무 긴장하고 있어서 바보 같은 대답을 하고 말았다. 케이는 그 부분을 놀리지 않고 말했다. ...

“종아리 좀 주무를게.” ...

“아, 아니. 아니, 괜찮아.” ...

리시가 황급히 발을 빼내려 했지만, 케이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버둥거리다가 슬립이 말려 올라가, 하얀 허벅지가 드러나는 걸 보고서야 버둥거리는 걸 멈췄다. ...

케이의 눈동자가 리시의 허벅지를 향했다. 리시가 움찔하며 손을 뻗기 전에, 케이의 손이 슬립을 끌어 내려 허벅지를 덮어줬다. ...

“날 유혹하려고 그런 거라면 성공했어. 이성이 날아갈 뻔했거든.” ...

케이가 단조롭게 말했다. 이런 농담은 종종 나눴기에, 리시는 당황하지 않고 대꾸했다. ...

“아쉽네. 완전히 날아가진 않아서. 내가 좀 더 야해져야 하나 봐?” ...

“안 그래도 돼, 리시. 당신이 숨만 쉬어도 내 이성이 왔다 갔다 하니까.” ...

농담하는 게 아니었나? ...

리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케이의 표정을 살폈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

그러는 동안, 그의 손이 리시의 종아리에 닿았다. 그는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서, 리시의 종아리를 요령 좋게 주물렀다. ...

높은 힐을 신어서 뭉친 근육을 자극하는 손길. 아파서 야릇한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

“으…… 아…… 앗…… 으…….” ...

케이의 손가락 끝이 꾹 누를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에, 리시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

처음에는 그저 아프기만 했는데, 뭉친 근육이 좀 풀리고 나니 시원했다. ...

“하아…… 음…… 아…….” ...

리시는 졸린 고양이처럼 눈을 반쯤 감고, 종아리 마사지를 즐겼다. ...

그래서 케이의 눈동자가 관능적 어둠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

(56) 그린 백작 가문의 결혼식 (1) ...

꿀꺽- ...

케이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

케이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

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

이 순진한 여자는, 지금 자기가 어떤 소리를 내고 있는지 모른다. ...

저런 소리를 들은 사내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상상도 못 하겠지. ...

리시가 마음의 준비를 할 때까지, 그녀를 취하지 않으려 한 것과는 별개로, 오늘은 결혼식 전날 밤이다. ...

신부는 충분히 쉬고, 최고의 상태로 결혼식을 치러야만 했다. ...

‘참자. 참아야 한다, 케이브란트 그린. 잘하잖아, 참는 거.’ ...

아니, 모르겠다. 지금까지 참아야만 하는 순간이 많지는 않았다. ...

“아핫…… 음…….” ...

아, 못 참겠다. ...

아무래도 나는 인내심이 전혀 없는 것 같다. ...

“리시.” ...

“응?” ...

“그…… 뭐라고 해야 하나.” ...

한 가닥 남은 아주 가느다란 이성의 끈을 의지해서, 케이는 힘겹게 말했다. ...

“그 소리 좀…….” ...

“소리? 아!” ...

리시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이 발그레 물드는 걸 전부 가리진 못했다. ...

‘그냥 종아리나 보고 있을걸.’ ...

리시의 얼굴을 보는 바람에, 더 참을 수 없게 되었다. ...

이성의 끈은, 발그레 물든 리시의 얼굴을 버텨줄 만큼 강하지 못했다. ...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리시의 위에 올라타 입을 맞추고 있었다. ...

달큰한 타액을 삼켜도 갈증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다. ...

간신히 입술을 떼어내고 내려다보니, 리시가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케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성이 끊긴 와중에도 그녀를 두렵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

케이는 엄지로 리시의 눈가를 쓸었다. ...

“울어요?” ...

“내가? 왜?” ...

“무서워서.” ...

리시의 눈이 가늘어졌다. ...

“난 당신이 무섭지 않아요, 케이.” ...

“하지만 눈가가 젖어 있어.” ...

리시가 손을 뻗어, 케이가 한 것처럼 엄지로 케이의 눈가를 쓸었다. ...

아주 짧게 스친 손길이 뜨거웠다. 눈가에서 시작된 열기가 전신으로 퍼졌다. ...

“당신 눈가도 젖어 있어, 케이.” ...

그녀의 대꾸로 깨달았다. ...

리시가 더는 케이를 거부하지 않는다는 걸. ...

앞으로 벌어질 행위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케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걸. ...

“아이리스. 당신, 뜨거워졌군.” ...

리시가 살짝 웃었다. ...

“당신은 전부터 뜨거웠고.” ...

케이는 당장 그녀의 모든 것을 이 안에 가두고 싶었다. 구석구석 남김없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녀에게 제 냄새를 묻혀, 내 것이라 증명하고 싶었다. ...

하지만 오늘은 참기로 했다. ...

내일, 리시는 주인공이다. ...

주인공인 그녀가 아픔을 참으며 절뚝거리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

“리시, 젠은 눈치가 빨라요.” ...

리시는 검지로 케이의 입술을 눌렀다. ...

영리한 리시는 케이가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 금방 알아들었다. 젠이 넬라와 함께 주도한 결혼식을 망칠 수는 없다는 의미이리라. 망친 이유를, 젠은 한 번에 알아챌 거고. ...

리시 역시 최상의 상태로 결혼식을 진행하고 싶었다. ...

“걱정 마요, 케이. 내일도 나는 뜨거울 것 같으니까.” ...

 

+++

그의 잠긴 음성이 듣기 좋았다. ...

그가 얼마나 리시를 원하는지, 그러면서도 얼마나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지, 그의 쉰 음성으로 알 수 있었다. ...

그걸 알고 나니, 사랑스러웠다. 안타까울 정도로 그가 사랑스러워서, 더는 두렵지 않았다. ...

아니, 오히려 그를 원했다. 그와 나의 향기가 같아지기를 바랐다. ...

그에게 거친 입맞춤을 당할 때도, 지난 삶의 생각은 나지 않았다. 두려움도, 긴장도 없었다. 그가 날 다치게 하는 일은 절대 없으리라는 걸 믿었다. ...

그리하여 리시는 알았다. ...

‘아아, 그렇구나. 내가 이 남자를 사랑하는구나. 어느새 그리되어버렸구나.’ ...

수줍게 고개를 내민 아이리스라는 꽃이, 모르는 사이에 활짝 피었나 보다. ...

이 감정이 사랑이라는 걸 알았음에도 두렵지 않을 만큼. ...

그의 감정은 다를지도 모르는데 무섭지 않을 만큼. ...

리시의 심장에 핀 꽃은 다부지고 단단했다. ...

+++

결혼식은 정오, 햇살이 밝을 때 열린다. ...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르렀다. ...

리시는 새벽부터 치장해야 했다. ...

디자이너인 티오렛까지도 조수들을 이끌고 찾아왔다. ...

“제 인생 최고의 작품을 눈에 담고 싶어서요.” ...

전야제 파티 때보다 더 오랜 시간이 들었다. ...

디자이너인 티오렛과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감각을 타고 난 크리시나. ...

둘의 도움으로 완벽한 드레스에 어울리는 완벽한 헤어스타일과 장신구를 작용할 수 있었다. ...

“하, 이럴 수가.” ...

모든 준비를 마치고 선 리시를 보며, 티오렛은 눈물을 흘렸다. ...

“저 드레스를 내가 만들었다니…… 백작 부인, 정말…… 그 드레스를 훌륭하게 소화해내실 수 있는 사람은 백작 부인뿐일 거예요. 완벽해요. 역시 제 인생 최고의 작품이에요.” ...

티오렛이 호들갑스럽게 칭찬했고, 조수들도 그럼, 그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이제 슬슬…… 으아, 깜짝이야!” ...

리시를 부르기 위해 찾아온 젠이, 숨을 들이마셨다. ...

“뭐야, 리시. 왜 이렇게 예쁘지? 이건 좀…… 와, 말도 안 되잖아요, 리시.” ...

“과찬이에요, 젠. 너무 그러면 민망해요.” ...

“아니, 아니. 이것도 부족하죠. 아니, 예쁠 줄은 알았거든요. 정말 알았는데…… 아니, 좀…… 와, 너무 예쁘다. 음, 이거 좀 큰일인데.” ...

“왜요?” ...

“리시가 너무 눈부셔서 다들 리시를 제대로 못 볼 거 아니에요.” ...

남매가 똑같구나. ...

리시는 어이가 없었다. ...

예쁘기로 따지자면 젠도 마찬가지였다. 형제의 결혼식에 어울리는, 우아하고 차분하면서도 약간은 섹시한 느낌을 풍기는 드레스를, 젠은 훌륭하게 소화했다. ...

그런 젠이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

“아무튼! 이제 출발해야 해요. 마차를 대기시켜뒀어요.” ...

본채 앞에서 기다리는 마차의 선두를 이끄는 말은, 케이의 흑마인 블랙이었다. ...

블랙은 위용 있는 자태로 푸르르거리다가, 리시를 알아봤는지 힝힝, 애교스러운 소리를 냈다. ...

리시가 블랙을 쓰다듬어주려고 다가가려는 걸, 젠이 막았다. ...

“지금은 안 돼요, 리시. 얼른 마차에 타요. 너도 그만 풍풍거리고.” ...

젠이 블랙을 꾸짖으며 리시를 마차에 태웠다. ...

드레스 치맛자락이 넓게 퍼져서 마차에 타기 위해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내릴 때도 도와줄 사람들이 몇 명 같이 마차에 올랐다. ...

마차 창문은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밖에서는 절대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구조였다. ...

“순서는 이미 설명했지만, 다시 얘기해줄게요.” ...

젠이 벌써 열 번쯤 알려준 진행 순서를 되풀이해서 말하는 동안, 마차는 쉬지 않고 결혼식이 열리는 호수를 향해 달렸다. ...

+++

넬라니커스 제널 백작 부인이 주도해서 진행하는 결혼식이니만큼 화려할 거라는 건, 다들 짐작하는 바였다. ...

그러나 이 결혼식은 화려함을 넘어섰다고, 그 자리에 모인 귀족들은 한마음으로 생각했다. ...

넓은 호수, 호수 주위의 둘레길과 넓은 공터, 그리고 둘레길 너머로 자라는 빼곡한 나무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화려하게 꾸몄다. ...

무슨 수를 쓴 건지, 호수를 둘러싼 나무들은 이파리도, 줄기도 흰색이었고, 이파리 사이사이에 갖가지 색의 보석이 반짝거렸다. ...

호수 둘레를 따라서 깔린 잔디 길을 걸어가면, 식이 열리는 넓은 공터가 나온다. ...

하얀색 아치는 자세히 보면 여러 종류의 보석이 박혔고, 양쪽에 연한 분홍색 꽃을 늘어뜨려서 화려하면서도 우아했다. ...

공터에 만들어진 연회장 아래는 하얀 돌이 깔려 있었다. 완전히 하얗지는 않고 파스텔 톤의 모래를 섞어 만들어서 달콤한 느낌을 내는 벽돌이었다. ...

하객석과 테이블도 흰색이지만, 테이블보는 하늘색이라서 바닥에 깔린 벽돌과 잘 어울렸다. ...

하객석은 호수를 정면으로 둘 수 있게 놓여 있었고, 그곳에는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주례석이 놓여 있었다. ...

하객들을 가장 감탄하게 한 건, 주례석 뒤로 보이는 호수였다. 호수 안에 있던 돌들을 전부 아름다운 색의 돌로 바꿔서, 호수가 햇빛을 받아 다채로운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

두 번은 볼 수 없을 것 같은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

‘그나저나 저기에는 누가 타고 있는 거지?’ ...

호수에 한참 감탄한 하객들은 마지막으로, 주례석 근처에 서 있는 마차에 의문을 품었다. ...

하얀색과 하늘색이 섞인 커다란 마차에는 가문의 문장이 없었다. ...

신부가 타고 있을 리는 없었다. 신부가 탄 마차는 웨딩로드의 끝, 신랑의 뒤에서 대기하는 법이니까. ...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아이리스는 전야제 파티 때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오는 등,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

어쩌면 저 하얀 마차에서 짠, 하고 등장할지도 모른다. ...

‘그렇다면 정말 형편없어 보이겠어. 전야제 때의 드레스야 잘 어울리니 그만이라 쳐도, 결혼식 때까지 기이한 만행을 보이는 건 좋지 않잖아.’ ...

‘호수가 너무 빛나서 신부가 좀 묻힐 것 같은데.’ ...

‘나도 이런 데서 결혼하고 싶다. 빌려주지 않으려나?’ ...

제각각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가운데, 하객석은 빈틈없이 채워지고 결혼식 시간이 다가왔다. ...

황태자는 가장 앞자리에 앉았다. 황태자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는 위틀로 공작 일가, 왼쪽에는 그린 백작 일가의 자리였다. ...

모두 조용히 앉아서 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

처음에 결혼식장에 들어선 브리트니는, 리시의 결혼식장이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하다는 사실에 짜증이 치밀었다. ...

하지만 황태자의 옆자리에 앉게 되자, 리시에 관한 생각은 깨끗이 사라지고, 저 웨딩로드를 황태자와 함께 걷는 상상으로 가득 찼다. ...

‘내 결혼식은 이보다 훨씬 더 화려할 거야. 더 많은 돈을 쓸 거고, 더 유명한 디자이너한테, 더 비싼 드레스를 의뢰할 거야. 더 굉장한 하객들만 초대할 거고. 아이리스, 너는 나한테 안 돼.’ ...

브리트니는 황태자가 자신을 돌아볼 것에 대비해 고개를 살짝 들고 우아한 미소를 지었지만, 황태자는 묵묵히 주례석만 응시하고 있었다. ...

‘대체 주례는 누가 보는 거지? 나한테 부탁할 줄 알았는데.’ ...

동갑이기는 해도 황태자의 신분은 케이보다 훨씬 높아서, 이오벳이 주례를 서준다면 그린 백작 가문의 영광일 것이다. ...

하지만 케이는 주례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

주례에 대해 생각하는 건 이오벳만이 아니었다. ...

몇몇 하객들도, ...

‘황태자 전하께서 주례를 서시겠지. 그린 백작 부인에게 춤을 신청하실 정도였으니.’ ...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신랑인 케이가 웨딩로드의 시작인 아치 아래에 섰고, 그 뒤로 신부인 리시가 탄 마차가 멈췄다. ...

정장을 완벽하게 차려입은 제이미가 주례석 옆에 서서 큰 소리로 식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

그린 백작가에서는 집사로 일하는 제이미가 사회를 보는 걸,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제이미 러셀은 황제도 탐내는 ‘창천의 기사’니까. ...

“오늘은 케이브란트 그린 백작님과 아이리스 그린 백작 부인이 하나가 되시는 날입니다.” ...

보통 이럴 때는 ‘그린 가문과 위틀로 가문이 하나가 되는 날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기에,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

하지만 그 의아함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

“두 분의 아름다운 결혼식을 축복해주실 주례를 모시겠습니다.” ...

제이미의 눈이 주례석 근처에 있던 건물로 향했다. 모두 제이미를 따라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누군가 안쪽에서 문을 열었다. 문 너머에서 붉은 망토가 어른거렸다. ...

‘설마……!’ ...

사람들은 숨을 삼켰다. ...

‘아니, 아니겠지.’ ...

방금 그들이 상상한 인물은 너무 터무니없었다. ...

그 인물은 황제의 결혼식조차 직접 찾아와서 축복해주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

그때, 제이미가 그들의 짧은 상상 속에 등장한 인물의 이름을 말했다. ...

“안드리제 고델름 교황 폐하이십니다.” ...

(57) 그린 백작 가문의 결혼식 (2) ...

금실로 장식한 붉은 망토, 머리 위에 쓴 신성국의 왕관, 끝에 붉은 보석이 박힌 긴 지팡이. ...

교황이었다. ...

황제조차 모실 수 없는 교황이, 그린 백작의 결혼을 축하해주기 위해 주례석으로 향하고 있었다. ...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다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 하객들은 자신들이 꿈을 꾼다고 생각했다. ...

하얀 수염을 길게 기른 교황은 천천히 걸어가 주례석 앞에 섰다. ...

교황이 인자한 눈으로 하객들을 돌아봤다. ...

“오늘 이렇게…….” ...

거기까지 말했을 때, 이오벳이 벌떡 일어났다. 이오벳을 시작으로, 다른 하객들도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교황 폐하.” ...

“교황 폐하!” ...

모두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

교황이 난처한 듯 미소 지었다. ...

“오늘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네. 다들 편히 앉으시게.” ...

교황의 음성은 큰 것도 아닌데 멀리 있는 사람들의 귀에까지 콕콕 박혔다. ...

다들 어쩔 줄 몰라 하며 서로를 쳐다봤다. ...

하객 중에는 교황의 얼굴을 처음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황태자인 이오벳조차 교황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

“자, 자. 어서 앉으시게. 식을 진행할 수 없지 않은가.” ...

교황이 한 번 더 말한 후에야, 하나둘씩 자리에 앉았다. ...

그러는 동안에도 브리트니는 꼼짝 않고 앉아서 교황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

‘이게 뭐야?’ ...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

‘교황이…… 교황이 왜 여기 있어?’ ...

교황이 주례를 서다니. ...

황실의 결혼식도 오지 않으면서, 고작해야 아이리스의 결혼식 따위에 몸소 발길 하다니. 정말이지,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

브리트니가 황태자와 결혼식을 해서 대륙에 존재하는 국가의 왕족 모두를 초대한다 해도, 교황 한 사람을 이길 수 없었다. ...

아이리스의 결혼을 축복하러 교황이 직접 찾아왔다는 이야기는, 순식간에 대륙 전역에 퍼질 것이다. ...

그리고 모두 한 마음으로 생각하겠지. ...

‘교황의 가호를 받다니. 그린 백작 부인 앞에서는 몸을 사려야겠어.’ ...

싫었다. ...

리시가 그런 대우를 받는 건 끔찍이 싫었다. ...

하지만 교황이 주례를 서는 결혼식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

브리트니는 그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간신히 숨만 쉴 뿐이었다. ...

브리트니의 기분이야 어떠하든, 결혼식은 아무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

“오늘 이렇게 그린 백작과 백작 부인의 결혼식에 와주신 그대들에게 신의 축복이 있으리.” ...

교황이 결혼식 하객들에게까지 축복을 내리다니. 하객들은 감동을 받아 정신이 없었다. ...

교황이 제이미에게 눈짓하자, 제이미가 외쳤다. ...

“신랑 입장하십니다.” ...

악단이 경쾌한 곡을 연주했다. ...

하객석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파란색 웨딩로드를 따라, 케이가 성큼성큼 걸어와 주례석 앞에 섰다. ...

하지만 아무도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다들 뵙기 힘든 교황 폐하의 용안을 눈에 담느라 정신없었기 때문이다. ...

그건 신부 입장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

신랑 입장 때와는 다른, 좀 더 부드럽고 은은한 음악이 시작되고, 리시가 마차에서 내렸음에도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이는 없었다. 그린 가문 사람들만 리시를 돌아봤을 뿐이다. ...

원래대로라면 신부가 아무리 못생겨도 다들 신부에게 주목하고, 신부가 웨딩로드를 따라서 반쯤 걸어오면 일어나서 아름다움에 감격한 듯 박수를 쳐야 했다. ...

모두가 교황에게 정신이 팔린 지금, 리시는 박수를 받을 수 없을 것 같았다. ...

브리트니는 ‘꼴좋다.’라고 생각하며, 리시를 돌아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

리시가 어떤 드레스를 입었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

그래서 브리트니는 못 봤지만, 리시의 입가에 번진 행복한 미소는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

마차에서 내린 리시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아치 앞에 섰다. 그렇게 서서 잠시 기다렸다. ...

교황이 리시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보냈다. 교황은 손바닥을 위로 올려 리시를 가리켰다. ...

“보시게. 참으로 아름다운 신부가 아닌가.” ...

그 말에 모두가 교황의 손을 따라 리시를 돌아봤다. ...

“아!” ...

“와아!” ...

“헉!” ...

여기저기서 숨죽인 탄성이 흘러나왔다. ...

하얀 아치 아래에 서 있는 신부는 교황을 잊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때, 아치 위에 숨겨져 있던 장치가 파팡, 하고 터지며 연하늘과 연분홍 꽃잎이 눈처럼 흩날렸다. ...

그제야 리시는 웨딩로드를 걸었다. ...

턱을 살짝 들고 천천히, 앞으로 이 웨딩로드의 끝에 펼쳐질 미래를 기대하며, 걸었다. ...

웨딩로드 중간에 다다를 때쯤, 주례석 앞에 서 있던 케이가 성큼성큼 걸어와 리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

리시는 케이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케이가 리시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나서, 주례석을 향해 몸을 돌렸다. ...

나란히 걷는 신랑과 신부가 꿈처럼 아름다워서, 하객들은 아버지인 글로번이 리시의 손을 잡고 웨딩로드를 함께 걸어주지 않은 걸 이상하게 생각할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

케이와 리시가 주례석 앞에 멈추자, 교황이 둘을 축복하고 주례를 시작했다. ...

+++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유일무이한 결혼식.]이라는 제목을 붙여야 할까? [신이 허락한 사랑]이라는 제목은 너무 구리고.’ ...

하객석 중 하나에 앉아 있던 위팅크는, 상상한 것과 재미있는 교황의 주례사를 들으며 생각했다. ...

‘영리한 분이야. 그린 백작 부인.’ ...

청첩장을 받았을 때는 의아했다. ...

귀족들은 결코 기자들에게 청첩장을 보내지 않았다. 평민은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화려한 결혼식. 평민 기자들이 그런 걸 좋게 써줄 리 없기 때문이었다. ...

주변에 알아보니, 청첩장을 받은 기자는 위팅크뿐이었다. ...

‘이건 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의도겠지. 난, 이 정도로 쉽게 움직이지는 않는데 말이야.’ ...

물론 리시가 싫은 건 아니었다. 재미있는 귀부인이라고 생각한다. ...

하지만 리시가 잘못된 일을 하면 가차 없이 비난하는 기사를 쓸 수 있었다. ...

‘오늘은 좋은 기사를 쓸 수밖에 없네.’ ...

주례가 교황인 결혼식을, 어느 누가 안 좋게 쓸 수 있을까? ...

온갖 미사여구를 덧붙여 칭송해야 마땅한 결혼식이었다. ...

행여나 이 결혼식에서 큰 문제가 벌어지더라도, 교황의 주례라는 것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무마할 수 있었다. ...

그래서 리시는 위팅크를 초대했을 것이다. 이 결혼식을 알리라고. 내가 교황에게 어떤 가호를 받았는지, 대륙 전역에 퍼뜨리라고. 당신의 글솜씨라면, 이 결혼식의 황홀한 순간을 열 배쯤 부풀릴 수 있을 거라고. ...

하여간 영리하고 재미있는 백작 부인이시다. 앞으로 재미있는 기삿거리를 잔뜩 가져다줄 것 같다. ...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지요, 백작 부인. 더불어 그 기사를 처음으로 내보낼 내 가치도 올라갈 것 같으니.’ ...

 

+++

두고두고 기억될 완벽한 결혼식이었다. ...

교황은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하객들이 인사할 틈도 없이 저택을 떠났다. ...

교황이 마차에 오르기 전 케이에게 입 모양으로, ...

‘조만간 찾아오거라.’ ...

라는 말을 남기는 건, 아무도 보지 못했다. ...

지난번, 신성국의 신관이 리시의 만행을 넘겨짚고 떠들어대는 바람에 이런 상황이 만들어졌다는 걸 아는 건, 케이와 리시뿐이었다. ...

신랑과 신부는 같은 마차를 타고 본채로 이동했다. ...

두 사람이 피로연 파티 복장으로 갈아입고 오는 동안, 하객들은 연회장에 남아서 그린 노백작 부부와 위틀로 공작 부부에게, 멋진 결혼식과 멋진 자녀들을 칭찬했다. ...

그러는 동안에도 브리트니는 꼼짝 않고 앉아서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질투가 나서 표정 관리를 하는 게 힘들었다. ...

‘교황이라니. 교황의 주례라니!’ ...

옆에 있던 이오벳이 자리를 떠난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

이오벳이 옆자리라는 걸 알았을 때만 해도, 지난 파티 때 망친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이것저것 노력해볼 계획이었다. ...

하지만 교황을 보는 순간, 황태자의 존재는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졌다. 너무 분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간신히 참고 있는데, 안면이 있는 영애가 다가와서 건넨 말이 불을 붙였다. ...

“브리트니 양은 정말 좋겠어요. 아이리스 위틀로, 아니, 그린 백작 부인께서 이렇게나 영광스러운 결혼식을 올리다니. 얼마나 보기 좋으세요.” ...

보기 좋아? 영광스러워? ...

브리트니는 울화통이 터졌지만 애써 미소 지었다. ...

“그러게요. 할 줄 아는 게 없는 동생이라, 결혼은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다행이에요.” ...

“어머, 할 줄 아는 게 없으면 어때요? 여자로 태어나 저리 아름다우면 그만이지요.” ...

브리트니는 어이가 없었다. ...

이 영애는 평소에 브리트니의 앞에서 아이리스를 욕하는 데 앞장섰다. 요새는 예쁘기만 해서 되는 세상이 아니라는 둥, 여자도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둥, 너무 보호만 받고 자라는 여자는 매력 없다는 둥. ...

그런 말을 열심히 떠들어댄 주제에, 이제는 아름답기만 하면 그만이라니. ...

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앞으로 한동안 사교계에서 그린 백작 부인에 관한 안 좋은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을 것이다. ...

리시가 그 어떤 포장을 해도 용납받기 힘들 정도로 나쁜 짓을 하지 않는 이상, 리시는 황후만큼이나 조심스러운 대우를 받을 것이다. ...

아이리스의 가족으로서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건 알지만,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

드레스를 갈아입고 돌아온 리시에게 알랑방귀를 뀌어댈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끓었다. 그 꼴을 보면 정말로 비명을 지를지도 모른다. ...

브리트니는 휙 돌아서서 도망치듯 발을 옮겼다. ...

“브린.” ...

그런 브리트니를 잡은 건, 어머니인 데니스였다. ...

“어디 가니?” ...

“갈 거야. 더는 여기에 있을 수 없어요. 우리, 집으로 돌아가요.” ...

“네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럴 수는 없다는 거 알잖니. 좋으나 싫으나 우리는 아이리스의 가족이야. 아이리스가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자리를 뜨면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겠어? 분명 뒷말이 나올 거다.” ...

“뒷말이 중요한 게 아니야. 나, 이대로 계속 여기에 있다가는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그래. 갈 거예요. 가야겠어요.” ...

데니스와 브리트니가 속닥거리며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곁눈질하고 있었다. ...

브리트니는 그들이 자신에 대해 뒷담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브리트니도 안됐어. 동생이 먼저 결혼한 것도 그렇고, 그 결혼식의 주례를 교황 폐하께서 서주신 것도 그렇고. 뭘 해도 동생보다 못하다는 말을 들을 거 아냐.” ...

라는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을까? ...

‘내가 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걔는 하녀한테서 태어난 애라고! 진짜로 공녀도 아니란 말이야! 걔가 그렇게 천한 핏줄인 줄 알았다면 교황도 주례 같은 거 서주지 않았을걸?’ ...

브리트니는 리시의 출생에 대해 알리고 싶었다. ...

당신들이 대단하다고 우러러보게 된 그린 백작 부인이, 사실은 어떤 여자에게서 태어난 아이인지 모두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

피로연 드레스로 갈아입은 리시와 케이가 돌아온 건, 브리트니가 기어코 연회장을 떠나기 위해 데니스의 손을 뿌리칠 때였다. ...

“와아!” ...

“어머, 아름다워라.” ...

다시 등장한 신혼부부를 보며, 하객들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

브리트니는 그조차 어이가 없었다. ...

리시는 아까보다 특별히 더 아름답지도 않았다. 아까는 고까운 시선을 보낸 주제에, 이제는 일부러 리시에게 들리라는 듯 칭찬해대는 꼴이라니. ...

저래서야 먹이를 든 사람 앞에서 꼬리를 흔드는 개와 다를 게 뭐란 말인가. ...

‘치졸한 것들. 저렇게 알량한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드니, 꼬리를 치는 거겠지. 저렇게 태도를 바꾸면 바꿀수록 자기들이 얼마나 없어 보이는지도 모를 거야.’ ...

브리트니가 고까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욕하고 있을 때였다. ...

“이렇게 갑자기 들이닥치시면 안 됩니다, 대공.” ...

“이거 놔! 나는 자격이 있으니!” ...

“자격이라니…… 초대장도 없으시면서…….” ...

제이미의 난처한 음성과 함께, 한 사내가 파티장에 난입했다. 훤칠한 키에 불처럼 새빨간 머리카락과 새빨간 눈동자를 가진 사내였다. ...

그는 모두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지팡이를 휘두르며 성큼성큼 걸었다. 이 세상에 자기 자신만이 존재한다는 듯한 태도였다. ...

그렇게 걸어가 케이의 앞에 선 그는 지팡이를 휙 들어 올려 케이를 가리키며 외쳤다. ...

“케이브란트 그린!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지? 날 결혼식에 초대하지 않았다니!” ...

(58) 그린 백작 가문의 결혼식 (3) ...

리시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갑자기 난입한 사내를 응시했다. ...

그는 붉은 머리칼과 눈동자, 그리고 그 기세 때문에 마치 불타는 것처럼 보였다. ...

케이만큼이나 키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져서 덩치가 좋은데, 위압감은 들지 않았다. 콧등에 주근깨가 그를 장난스럽고 선량한 소년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

‘이 남자, 누구지?’ ...

새빨간 머리카락과 새빨간 눈동자를 가진 사내라면 짚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다만 지난 삶에서 리시가 본 그는, 이런 잘생긴 외모를 가진 화사한 분위기의 사내는 아니었다. ...

“이런, 밀란시스 피아몬도 대공. 이런 식으로 난입하면 곤란한데.” ...

케이가 당혹한 기색 없이 느른하게 중얼거리는 말에, 리시는 숨을 멈췄다. ...

‘이 남자가 밀란시스 피아몬도라고? 정말?’ ...

지난 삶, 밀란시스 피아몬도는 적과 싸우다가 크게 당해서 얼굴의 반 이상이 화상으로 뭉개지고, 한쪽 눈을 잃었다. 성대도 다쳐서 지금처럼 맑은 목소리가 아닌, 잔뜩 쉬고 뭉그러진 목소리에, 음산한 분위기를 몰고 다녔다. ...

기묘한 사술에 심취한 그를,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피했었다. ...

하지만 지금의 밀란시스는 모두가 호감을 느낄 만한, 해사한 느낌의 사내였다. ...

“곤란한 건 나라네, 케이. 내가 아주 곤란하게 됐어. 어떻게 자네의 결혼식에 날…… 음? 여기 이 아름다운 레이디는 누구시지? 처음 뵙는 분이신데.” ...

케이에게 큰소리로 외치던 밀란시스가 갑자기 리시에게 관심을 보였다. ...

리시는 황당했다. ...

이 상황에서 케이의 옆에 서 있는 레이디가 케이와 결혼한 그린 백작 부인 외에 누가 있겠는가. ...

농담인가 싶어서 밀란시스의 표정을 살펴봤지만, 밀란시스는 정말로 리시의 정체가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

리시의 눈빛을 어떻게 오해한 건지, 밀란시스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

“이런, 레이디 아무개. 그런 눈으로 절 보시면 안 됩니다. 현재 임자는 없지만, 연애는 자제하려는 중이라서…….” ...

몇몇 레이디들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

그제야 리시는 밀란시스가 크게 다치기 전, 레이디들 사이에서 어떤 평가를 받았었는지 떠올렸다. ...

-잠깐 만나는 연애 상대로는 괜찮지만, 남편으로는 좀……. ...

일찍 결혼했던 밀란시스가 2년도 지나지 않아서 이혼당했다는 것도 떠올랐다. ...

조용하고 어른스럽기로 유명했던 그의 전 부인이 그에게 마지막으로 외친 말도. ...

-이 지긋지긋한 인간! ...

밀란시스에 관한 여러 가지 평가들은, 그가 크게 다쳐 성격이 변하면서 사라졌었다. ...

그러니까 이번 삶에서 아직 다치지 않은 밀란시스는 ‘잠깐 만나는 연애 상대로는 괜찮아도 남편감으로는 별로인, 지긋지긋한 인간’이라는 뜻이다. ...

“미르.” ...

케이는 밀란시스, 미르의 이런 태도가 익숙한 듯 차분하게 말했다. ...

“지금, 이 상황에서 딱 보면, 내 곁에 있는 여인이 누구인지는 답이 나오지 않나?” ...

“음? 그래? 내가 이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맞혀야 하는 상황인가?” ...

미르가 중얼거리며 슬며시 제 보좌관을 돌아봤다. 묵묵히 미르의 곁을 지키던 그의 보좌관 레인게일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그린 백작님과 오늘 결혼식을 올린, 그린 백작 부인입니다, 대공.” ...

“아! 그렇지. 하하하. 이미 알고 있었네. 조크였어, 조크. 알지, 케이? 내가 조크 좋아하는 거.” ...

“……자네의 개그 감각은 항상 나를 놀라게 해, 미르.” ...

“그나저나 참으로 아름다우십니다, 그린 백작 부인.” ...

미르는 리시가 손을 내밀지 않았는데도, 막무가내로 리시의 손을 잡아 올려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

이 무자비한 무례에 대해 리시가 반응하기도 전에, 미르는 리시를 위해 자기가 할 일을 다 끝냈다는 듯 손을 놔주고 케이를 돌아봤다. ...

“하여간 케이, 나는 몹시 실망했네. 아주 충격이라고. 어떻게 날 자네의 결혼식에 초대하지 않았지? 내가 누군가? 나야, 밀란시스 피아몬도. 자네의 절친한 친구!” ...

“2년 전에 자네가 내게, 꼴도 보기 싫으니 두 번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도 말라고,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보이면 목을 베어버릴 거라고 악을 쓰고 가버린 일을 기억 못 하나?” ...

케이의 응대에 미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슬며시 레인게일을 돌아봤다. ...

레인게일이 차분하게 답했다. ...

“사실입니다, 대공.” ...

“이럴 수가, 케이! 조크였네, 조크! 그 조크를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건가? 자네는 정말이지, 조크가 안 통하는 친구야.” ...

미르가 껄껄 웃으며 케이의 팔을 두드렸다. ...

퍽-! 퍽-! 퍽-! ...

어찌나 세게 두드리는지, 리시는 케이가 아픈 내색을 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

“조크에 강한 자네가 내 결혼식에 올 줄은 몰랐지만, 이왕 이렇게 왔으니 즐기다 가게.” ...

“그래? 식은 언제 시작하나?” ...

“……이미 끝났네, 미르.” ...

“아니, 그게 말이 되나? 내가 없이 결혼식을 진행하다니. 나는 자네의 들러리를 해주려고 결혼반지도 들고 왔다고!” ...

미르가 오른손을 올리자, 레인게일이 그의 손 위에 반지 케이스를 올렸다. ...

미르는 마치 청혼하는 것처럼, 케이의 앞에서 반지 케이스를 열었다. ...

안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들어 있었다. 케이가 리시에게 준 것보다 훨씬 크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반지였다. ...

“아무리 그래도 늦었어, 미르. 결혼식은 신랑과 신부만 있으면 충분하거든. 그래도 반지는 고맙게 받지.” ...

케이가 케이스 안에서 반지만 꺼내 가져갔다. ...

미르는 기분 나쁜 기색 없이 빈 케이스를 레인게일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

“이걸로 끝은 아니겠지, 케이? 날 위해 한 번 더 결혼식을 올릴 수는 없는 건가?” ...

케이는 조용히 레인게일을 응시했다. 레인게일이 고개를 숙였다. ...

“죄송합니다, 백작님. 백작 부인.” ...

“아니, 레인. 왜 네가 사과를 해?” ...

“대공, 제발 그만하시지요. 그만 가보십시오, 백작님.” ...

“고생이 많군, 남작.” ...

케이가 레인게일에게 눈인사를 한 뒤, 리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뜨려 했다. ...

돌아서는 케이를 노려보던 미르는, 케이의 바지 주머니에 튀어나온 끈을 발견하고는, 무심코 손을 뻗어 그 끈을 잡아당겼다. ...

케이의 바지 주머니 안에 담겨 있던 것이 쏙 빠져나왔다. 하얀 천으로 만든 작은 파우치였다. ...

케이는 몸을 돌린 상태였지만, 리시는 아직 미르 쪽을 향해 있었다. 리시는 미르가 케이의 주머니에서 빼낸 파우치가 무엇인지 금방 알아봤다. ...

슬리브 스톤이 담긴 파우치였다. ...

케이가 슬리브 스톤을 항상 지니고 다닌다는 건 알지만, 이렇게 아무렇게나 주머니에 넣고 다닐 줄은 몰랐다. ...

‘안 돼!’ ...

리시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파우치를 잡아 끌어당겼다. 미르가 끈을 세게 잡고 있던 건 아닌지, 파우치는 쉽게 리시의 손에 들어왔다. ...

“밀란시스 피아몬도.” ...

바지에서 파우치가 빠져나가는 감각에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 케이가, 으르렁거리듯 미르의 이름을 불렀다. ...

“남의 것을 함부로 가져가면 안 된다는 걸 아직도 모르나?” ...

“바지 주머니에서 끈이 빠져나와서 보기 안 좋기에 처리해주려고……. 아니, 이게 뭐 그렇게 화낼 일인가? 그래 봐야 작은 파우치인데!” ...

“하아. 밀란시스, 자네는 정말…….” ...

케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왜 나한테만 뭐라고 하나? 지금 그건 자네 부인 손에 있네. 자네 부인이 가져가는 건 괜찮고, 절친한 친구인 내가 가져가는 건 안 되는 건가?” ...

“부부는 일심동체야, 미르. 내 아내가 내게서 뭘 가져가든, 그건 문제 될 게 없네. 하지만 자네가 가져가는 건 문제가 돼.” ...

“나보다 자네 부인이 더 소중하다는 건가?” ...

“……미르. 그것도 조크라고 하는 건가?” ...

“난 조크를 즐기지 않네! 아주 고지식하지!” ...

“…….”

케이와 미르가 티격태격하는 동안, 리시는 처음으로 제 손에 들어온 슬리브 스톤의 파우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이건 내게 좋은 꿈을 꾸게 해줘. 하지만…….’ ...

리시는 고개를 돌려,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는 엘디를 봤다. ...

‘지난 삶에서 엘디는 이 돌 때문에 영원한 잠에 빠졌었지. 케이는 이 돌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모르고 있어. 그러니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주머니에 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