主张应当将其引入国内
실제로 외국인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 경계와 배척,혐오와 무시 의 기미를 읽을 수 없다.멸시와 증오의 대상이었던 만주족과 일본인 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그런 점이 보이지 않는다.아니 거꾸로 그들의 장점을 배우려는 태도가 보인다.옛사람을 친구로 삼고자 하는 사대 부의 尙古的 자세보다 동시대 사람과의 유대를 더 중시하는 자세에 잘 나타난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세상 곳곳의 다양한 인간의 아름다움에 기꺼 이 매료될 마음의 준비를 한 초정의 모습은「懷人詩」 연작에 잘 나타 난다.그는「戲倣王漁洋歲暮懷人」60수,「懙人詩仿蔣心餘」50수,「續懙人詩」 18 수 등 총 128 수의 회인시를 통해 동시대 인물에 대한 우의와 매료된 심경을 표현했다.4)또「與李羹堂調元」과「與郭澹園執桓」,「謝鄭吏議志儉求見李吉大書」따위의 편지는 동시대 외국인 학자와 조선의 천민 기술자를 사귀는 문제를 두고 자신의 속내를 거침없이 발설했다.
그렇듯이 우정은 그의 작품에서 중심축이다.李書九列에서 하룻밤 을 자고 난 뒤 쓴 시에서"형제이지만 동기간은 아니요/부부이지만 안방을 같이 쓰지는 않네./사람이 하루라도 벗이 없다면/왼손이나 오 른손을 잃은 꼴이지"5)라며 벗을 형제나 부부 같다고 말하기도 했 다.6)벗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사유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북경에 갔을 때 초정은 더욱 적극적으로 명사들과 교유했다.그는 사람들을 사귈 때 잇속이나 편견에 휘둘리지 않았다.앞서 인용한 말 처럼"벗을 사귀는 한 가지 일에서만큼은 유독 정을 듬뿍 쏟았다." 그 결과 이전에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지식인과 깊이 있는 친분을 쌓았다.그런 결과는 결코 우연도 행운도 아니다.
초정의 적극성과 열의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있다.일면식도 없는 苹溪 王肇嘉란 秀才가 초정에게 성명과 字를 새긴 작은 인장 두 뿌를 보내주고,초정의 글씨를 쓴 부채를 부탁했다.나중에 나빙의 畫
室에서 그를 만났을 때 초정은"나는 정녕 情을 위해 죽고자 하나, 그댈 만나고서 단번에 아득해졌다"12)는 시를 지었다.자신보다 더 정 에 이끌리는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다는 놀라움을 표현했다.여기서情은 곧 우정으로,친구를 위해서는 죽기라도 하겠다는 언명이다.이 러한 적극성과 열의가 수많은 중국 인사와의 사귐을 유도했다.
초정이 중국 지식인들과 교유한 내용을 살펴보면,짧은 시간에도 인 간적 깊이를 나눈 사이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서점가인 琉璃廠의五柳居書肆에서 많은 서책을 구경했고,또 거기에서 많은 지식인을 만 났다.오류거서사의 주인과도 친밀해졌고,서점을 찾는 많은 학자들 예 컨대,錢東垣,黃丕烈,盛學度,夏文壽,曺江 등과 친분을 맺었다.
그런 만남은 여러 사람을 방문하거나 초빙을 받아서 식사하고 대화 하며 필담을 나누는 관계로 발전했고,또 그 자리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그런 만남이 이루어진 장소로 羅聘과 枌方綱,孫星衍의 집을 꼽을 수 있다.그 곳에서는 인상 깊은 文酒雅會가 펼쳐졌다.그 장면 을 생생하게 기록한 시문이 남아 있다.그런 우정의 양상을 몇 가지 사례로 살펴본다.
清代의 저명한 화가이자 시인인 羅聘(1733~1799)은 北京 琉璃廠 옆의 觀音寺에 우거했다.초정은 나빙 본인뿐만 아니라 그 부인 方婉儀와 두 아들 羅允纘.允紹 형제와도 친해졌다.그런 인연이 이들 가족과 초정 아들과의 우정으로 연결되었다.^(18)){ }^{18)}
나빙은 한 시대의 名士이기에 그의 우거는 당시 북경 명사들의 사 교장이었다.內閣學士 芴方綱,禮部尙書 紀䏛,少詹事 錢大昕,國子監祭酒 法式善,詩人 張問陶,학자 洪亮吉과 같이 당대의 명사로서 청대 학술사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그 일부였다.이들 외에도 張道渥과 같 이 비교적 덜 알려진 인물도 많이 드나들었다.
공협은 이어서 육아가 쓴 절구를 우연히 보고서 다시 시 두 편을 지어 초정에게 전해주었다.여기에 그치지 않고 1792 년 정월 25 일에 초정에게 보낸 편지에서 공협은"荑室께서 마르고 병들었다니 가련합 니다.그러나 지면에서 꽃다운 용모를 한번 보지 못했으니 크게 유감 스런 일입니다.足下께서 나를 위해 마련해주지 않으니 너무 속됨에 가깝지 않은지요?그게 아니라면 수수한 몸단장과 가벼운 비단이 점 차로 朱欄으로 옮겨갈까봐 봄빛을 감춰두고서 무관한 자에게 알아차 리지 못하도록 하는 것인지요?"27)라고 썼다.초정의 아내 小照라도 보여주지 않느냐고 서운한 심경을 비쳤다.그런 공협이 또 육아에게 편지를 보냈다.
서한을 六娥 仙史의 硯北에 바칩니다.次修 詞伯으로부터 大作 을 얻어 보고 紅塵세계를 벗어난 뜻을 알고 나니,저도 모르게 그 대에게로 정신이 내달립니다.삼가 작은 시 두 편을 부채에 써 바 쳐서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을 보냅니다.모르겠습니다만,小照를 그려 제게 보내주시고 아울러 좋은 소식을 보내주셔서 멀리서 그 리워하는 마음을 위로해주실 수 있는지요?바라건대,고아한 마음 과 고상한 품성으로 저를 저속한 놈이라 보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총총히 이렇게 써서 문안 인사를 올리오니 천만 珍重하시기 바랍 니다.신해년 정월 22 일 笠澤의 漁郞은 손을 부여잡고 서한을 올립 니다.謹空.^(28)){ }^{28)}
이 서한에서도 앞서처럼 小照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편지와 시가 모두 일종의 희학과 운치의 행동에 속한다.아내를 비롯한 여성과 직 접 대면하고 시문을 수창하는 풍조는 당시 청나라 사회에서는 꽤 유 행한 것이었으나 조선에서는 쉽게 행동에 옮기지 못할 일이었다.초 정이 그의 요청을 희학으로 치부하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 은 그러한 연유 때문이다.조선에서 이러한 풍조가 일부 문사들 사이 에 가능한 것은 19 세기 이후의 일이다.
보통 외국인 친구와의 만남에서 한 번 이별은 곧 영이별이 될 가능 성이 높기에 얼굴을 그려 眞影을 간직하는 것이 이별 뒤의 그리움을 달래는 길이었다.조선 지식인이 일본이나 중국에 사절단의 일원으로 갔을 때 간혹 필획이 적은 스케치로 초상화를 그려서 주고받았다.일 본인 화가가 홍세태나 성대중,이언진의 초상화를 그린 작품이 현존 하고,홍대용과 ㅁ⿱⿰口口⿸厂⿰⿱乛耳⿱⿰㇒一乂 誠이 서로의 초상화를 그려서 간직한 사례가 있 다.32)
초정과 그 주변 문사들은 중국인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유달리 초상 화를 빈번하게 주고받았다.연행하기 전에 이조원이 柳琴에게 자신의
小照를 보낸 것을 보고서 초정은 감동하여"초상을 보고 부처에게 절 하듯이 절한다"는 구절의 「기하실 유금이 소장한 운룡산인 이조원의小照에 쓰다(題幾何室所藏雲龍山人小照)」를 썼다.이들은 만 리 멀리 떨어진 친구를 그리워하며 그의 생일에 초상화를 앞에 놓고 생일을 축하하는 모임을 갖기도 했다.초상화를 조선까지 보낸 것이 깊은 인 상에 남아「懐人詩」에서 이를 언급하기도 했다.33)초정과 그 아들 박 장암은 이러한 柳琴의 사례를 본받고 싶어했다.^(34)){ }^{34)}
1778년 초정과 이덕무가 祝芷塘의 처소를 방문하여 그의 小照를 청 했을 때 그가 우거진 숲과 수려한 바위 옆에 한 미인이 거문고 소리 를 듣고 있는 그림을 주었다.35)이 때 축지당은 초정에게 자신의 小照를 선물했고, 2 차 연행 때 초정은 이 소조를 가지고 가서 그 제자 인 李鼎元으로 하여금 발문을 쓰게 했다.36)
이정원은 또 후에 유배간 초정을 애달파하며 박장암에게 보낸 편지 에서 초정을 蘇軾과 楊升庵에 견주고 자신의 35 세 때 모습을 그린 行樂小像을 보냈다.이 小像은 박장암의 요청에 부응한 것으로 추정한다.
중국 명사들이 자신의 小照를 준 것은 초정의 요청에 따랐거나 아 니면 그들의 자발적 증정이었다.그들은 소조를 보내는 데 그치지 않 고,역으로 초정의 小照도 요구했다.郭東山은 자신의 小像을 보내고 나서 초정의 小照를 보내 달라 부탁했다.그저 神交만 맺고 직접 손 을 맞잡을 수 없는 처지를 아쉬워하며 초상화를 봄으로써 직접 만나 는 것을 대신하고자 한다는 취지에서였다."이렇게 하면 비록 아침저
녁으로 손을 맞잡는 절절함에는 미치지 못하나 마음속으로 그 모습을 상상할 수는 있다"^(37)){ }^{37)} 고 했다.그의 말에서 소조를 교환하는 절절한 동기를 포착할 수 있다.
小照를 주고받는 양상은 1790 년 나빙이 귀국하는 초정의 소조를 그 리고 거기에 전별의 시를 써준 일에서 정점에 이른다.나빙은 먼저 墨梅와 소조를 그렸고,이어 절구 두 편을 썼다.그 절구는 이렇다.
三千里外远道而来的客人
相对三千里外人
为纪念遇见这位俊朗的儒生,特此绘制肖像
欣逢佳士写来真
可爱的你风采能比何物?
爱君丰韵将何比
想必是梅花幻化成了你的身躯。
知是梅花化作身
为何一见你便觉亲近
何事逢君便与亲
可曾听闻那离别的锥心之语?
忽闻别我话酸辛
从今对翩翩君子也该意兴阑珊了
从此冷眼看才子
唯有离别最伤神
唯有离情最伤神
삼천리 저 너머서 오신 분을 마주하고 相對三千里外人
멋진 선비 만난 기념으로 초상을 그리네. 欣逢佳士寫來眞
사랑스런 그대 풍채 어디에 비할거나? 愛君丰韻將何比
매화가 변신하여 그대 몸이 되었겠지. 知是梅花化作身
무엇 하러 그대 만나 바로 친해져 何事逢君便與親
날 떠난다는 괴로운 말을 들었던가? 忽聞別我話酸辛
이제부터 멋진 선비에는 심드렁해져야지 從今淡漠看佳士
이별의 정이 가장 마음 슬프게 만들 뿐이니. 唯有離情最愴神| 삼천리 저 너머서 오신 분을 마주하고 | 相對三千里外人 |
| :--- | :--- |
| 멋진 선비 만난 기념으로 초상을 그리네. | 欣逢佳士寫來眞 |
| 사랑스런 그대 풍채 어디에 비할거나? | 愛君丰韻將何比 |
| 매화가 변신하여 그대 몸이 되었겠지. | 知是梅花化作身 |
| 무엇 하러 그대 만나 바로 친해져 | 何事逢君便與親 |
| 날 떠난다는 괴로운 말을 들었던가? | 忽聞別我話酸辛 |
| 이제부터 멋진 선비에는 심드렁해져야지 | 從今淡漠看佳士 |
| 이별의 정이 가장 마음 슬프게 만들 뿐이니. | 唯有離情最愴神 |
초정은 중국 현지에서나 귀국한 이후에 중국 인사들과 많은 물건을 주고받았다.인적 교류에서 서화를 주축으로 한 물품의 교환은 우정 의 매개물로서 큰 역할을 한다.실제로는 많은 물품을 교환했으리라 추정하지만 구체적 내용을 밝혀줄 문건은 많지 않다.서로에게 특별 한 의미를 던지는 물품을 교환했을 경우에는 시와 문장에 반영했다. 시문의 도움을 받아 그 정황을 파악하는 것도 국제 교류의 일상적 모 습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물품 교환의 정황을 보여주는 장면의 하나가 나빙에게 부친 시구에 등장한다.초정은"내 물건에는 銀貨로 산 것 하나도 없나니,시 주머 니 그림 축이 엉성함을 비웃노라(我貨都非銀子買,詩囊畫軸笑零星.)" 고 한 데서 받은 선물이 많았다고 실토했다.글씨와 그림을 주고받은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풍부했다.그렇기 때문에 박지원은 아들에게 보
낸 편지에서"在先(筆者注:朴齊家의 字)의 집에 갖고 있는,우리나 라로 건너온 중국 사람의 詩筆 몇 첩을 빌려 볼 수만 있다면,이 며 칠 사이의 답답증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만 같구나.허나 그 인간 이 형편없고 무도하니,어찌 지극한 보물을 잠시인들 손밖을 벗어나 게 하겠느냐?그래도 모름지기 빌리도록 해라!"39)고 할 만큼 많은 서 화묵적을 갖게 되었다.
초정이 지인들과 주고받은 물품과 서화가 곧바로 우정의 깊이를 보여 주는 것은 아니나 밀접한 관련이 있다.특히,양이 아니라 질의 문제를 놓고 볼 때 그렇다.초정이 사귄 사람들이 대체로 학자와 문인이었기에 그들은 시와 저술로 자신을 소개했다.큰 학자로 인정받는 洪亮吉은 초 정의 시를 보고서 몹시 칭찬하여 만나고자 했는데 그 때 자신의 저작을 예물로 보냈다.그 때의 상황이 초정이 쓴「洪亮吉傳」에 잘 나타나 있다.吳明煌은 徽墨 2갑,徽茶 2포,自鳴鐘 2개,湖筆 10개 등 주로 문방도구 위주로 선물했다.이처럼 서화와 문방도구가 선물의 주축을 이뤘다.
초정이 중국인에게 선물한 물건에는 이외에도 조선의 갓과 幅巾 따 위가 들어있다.갓을 羅聘에게 선물했고,潘庭筠이 욕심내어 나빙에게 달라고 하여 강남으로 가져갔다.그 사실이 반정균과 나빙이 각각 초 정에게 보낸 편지에 실려 있다.단순한 기념 이상의 의미를 갓에 부 여했다고 볼 수 있다.초정은 여러 건의 복건을 집에서 만들어 가지 고 가서 그 하나를 玉水 曹江에게 선물했다.^(42)){ }^{42)}
물품 가운데에는 日本產 먹과 종이,그리고 日本刀가 포함되었다. 초정은 郭東山에게 일본종이를,나빙에게 일본 먹을 선물했다.또 ㅂ本刀 두 자루를 지니고 가서 曾燠과 張問陶에게 주었다.두 시인은 이 특별한 선물을 받고서 각기 「朝鮮使贈日本刀爲作歌」와「日本刀歌贈陳瀚-刀爲朴楚亭贈物」의 장편시를 지었다.43)그 가운데 증욱에게 준 일본도는 조선 땅에서 발굴한 것으로 임진왜란 때 왜병이 사용한 물건이었다.굳이 일본산 물건을 소지하여 중국인들에게 선물한 의도 는 분명치 않으나 상업과 유통을 강조하고 국제적 교류를 중시한 성 향과 깊은 관련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한편,초정이 문방도구와 서화만을 주고받은 것은 아니다.수레 한 대와 말 한 필을 사서 돌아갔고,44)양잠할 때 솜을 빼는 기구로서 씨 아의 일종인 羊腸彈이라는 기계를 수입했다.그는 이 기계를 조선에 들여와 실제 적용해보았다.45)이러한 종류의 물품이 적지 않았을 것
26)초정이 이 육아에게 애정을 느꼈는지는 알 수 없다.李箕元이 육아가 다른 남 자에게로 갔다고 밝힌 점을 보면 마음에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안대회,「楚亭 朴齊家의 인간면모와 일상-小室을 맞는 詩文을 중심으로」(『한국한문학 연구』 36 집,2005.117~150쪽)참조.
27)박장암,위의 책,262쪽."荑室瘦病可憐,然不得一覩紙上芳容,大是憾事.足下不爲我辦此,無乃近俗?或者淡粧輕素,取次入朱欄,故秘惜春光,不肯使等閒省識耶?"
28)박장암,위의 책,263~4쪽."書奉六娥仙史硯北.從次修詞丈處,得見大作,並悉有出塵之志,不覺神爲之馳.奉柬小句二首,書之畫筆,聊致傾慕之意.未識肯寫小照見示,並惠我好音,以慰遠懷否?想雅懷高致,或不以俗子況我也。多多佈此,用候興居,千萬珍重,千萬珍重!重光大淵獻,月正二十二日,笠澤漁郞拜手致書,謹空."
29)박제가,위의 책,「燕京雜絶」제34수,465쪽。"熊方受翰林,聞余卜小星,贈一聯云,舊聞才子名如日,新得佳人字莫愁."같은 내용이 『縞紵集』에도 실려 있다. 다른 내용으로"熊君送楹帖,蓋笑莫愁云.胡不持洋布,因風寄宛君."도 있다.
30)안대회,위의 논문, 140∼141140 \sim 141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