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쭙잖은 세후레가 될 바에야

친구이고 싶었다.

이제 와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늦은 감이 있지만.


원래 순리가 그랬다. 포옹? 세이프. 키스? 아슬아슬 세이프. 그런데 섹스는 무슨 이유를 붙이든 간에 무리였다. 섹스 전후에 아무 변화도 없는 건 말이 안 됐다. 만일 그게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미쳤든가 쿨병에 걸렸든가 둘 중 하나일 테다.


즉 유우시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제 리쿠와 평범한 친구 사이가 되기는 글렀다는 의미이다. 세후레처럼 된 지 반년이 넘은 데다 2개월째 동거 중이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저능함의 끝을 달리는 상황이었다. 일단 리쿠는 게이가 아니고 (아마) 연락하는 사람도 있다.


다소 짐승 같은 이야기지만 어쩌다 눈 맞으면 으레 그런 분위기로 흘러갔다. 그리고 유우시는 처박힐 때마다 후회했다. 실연 좀 했다고 무작정 집에 부르는 게 아니었다고…. 그러지만 않았더라면 평범한 지인 A에 머무를 수 있었을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if만 늘어난다.


유우시는 의외로 단순했다. 행위 중에만 잡생각이 많을 뿐 끝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싹 잊었다. 고민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다. 처음부터 안 될 게임인데 발 뺄 타이밍을 놓쳐버린 거지 뭐. 덕분에 영영 묶인 신세지만.


그래도 가끔 궁금하긴 했다. 널브러진 티슈랑 다 쓴 콘돔 치우고 있는 까만 등짝을 볼 때면… 쟨 도대체 무슨 생각 중일까 하고. 물론 소리 내 물어본 적은 없다.


“오늘 데이트 간다고?”


시체처럼 엎어져 있던 유우시가 언제 그랬냐는 듯 몸을 일으켰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트라기보다는 첫 오프라고 표현하는 게 바람직하겠지만… 굳이 정정하진 않는다. 귀찮으니까.


“뭐 하는 사람인데?”

“그냥 회사원.”

“사진 없어?”

“있어. 잠시만….”


유우시가 핸드폰을 들었다. 방해 금지 모드 탓에 밀린 메시지가 엄청났다. 대부분 매칭 어플에서 온 것들이지만. 개중엔 썸남 메시지도 있었다.

일단 사진 보여 달랬으니까…. 썸남 프로필을 누르고 리쿠 쪽으로 화면을 들이밀었다. 리쿠의 검은 눈동자가 무방비하게 화면을 담았다. 동시에 질색한다.


“누가 좆 사진 보여달래?”

“이게 프로필이야. 이거 말곤 못 봤어.”

“너 진짜 미쳤어?”


리쿠가 잽싸게 유우시의 손에서 핸드폰을 낚아챘다. 설마 너도 몸 사진 올려둔 거 아니지? 분명 낯선 앱일 텐데 유우시의 대답보다 리쿠가 프로필 확인하는 게 더 빨랐다. 다행히 유우시의 프로필엔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프로필 아래에 짤막한 자기소개가 있었다.

東京 04

핸드폰 쥔 게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듯 실시간으로 메시지가 쏟아졌다. 하나 같이 내용이 비슷했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만날 수 있나요?

40대도 괜찮나요?


40대? 이게 돌았나…. 리쿠가 멋대로 사용자를 차단했다.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유우시가 뒤늦게 폰을 뺏으려 들었다. 잽싸게 팔을 들어 막아낸 리쿠가 그 후로도 몇 명의 사용자를 차단했다.


“만나지 마.”

“왜?”

“상식적으로 좆 사진만 보고 만나고 싶냐?”

“이쪽에선 흔한 일이야.”


묘하게 선 긋는 뉘앙스였다. 연애를 주제로 대화할 때 유우시 화법이 대체로 그랬다. 게이라서 그래. 리쿠는 이런 거 모르잖아. 그런 식으로 말하면 리쿠 쪽이 할 말 없어진다는 걸 아는 사람처럼.


“몇 살인데?”

“스물여덟인가….”

“진짜 미친 거지? 스물여덟은 확실해?”


유우시의 몸이 자연스레 리쿠 쪽으로 기울었다. 리쿠 어깨에 턱을 대고 핸드폰 화면을 가볍게 터치해 방금 본 프로필 사진을 다시 띄웠다.


“사진 보면 스물여덟 같은데?”


다소 뻔뻔한 말투에 리쿠가 실소를 터뜨렸다.


“좆만 보고 어떻게 알아.”

“그냥 느낌이.”

“아무튼 만나지 마. 이 사람은 관둬.”

“아. 알았다. 질투하는 거지?”

“뭐?”

“리쿠보다 커서.”


정확히 10초 정도 침묵이 감돌았다. 아까까지 질색하던 리쿠가 유심히 화면을 바라봤다. 본의 아니게 도발해버렸나? 그런 얼굴로 유우시가 키득거렸다. 동시에 화면에서 시선을 뗀 리쿠가 답을 내렸다. 이 자식 일본인 아니네.


“맞아. 쭉 일본어로 대화했어.”

“요즘 일본 사는 외국인이 얼마나 많은데. 톡 좀 한 거론 몰라.”

“아니 일본인 맞다니까.”

“야 솔직히.”

“…….”

“이거 들어가면 너 찢어져.”


다시 지독한 적막이 찾아왔다. 유우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동시에 뺨과 귀가 익는 걸 실시간으로 목격하며 리쿠는 생각한다. 어라. 나 지금 실수한 건가.

아니나 다를까 유우시가 제법 사나운 눈으로 리쿠를 노려봤다.


“변태.”


리쿠가 아랑곳하지 않고 유우시의 핸드폰 전원을 아예 꺼버렸다. 연락 수단이 없으면 못 만날 테니까. 마지막으로 으름장을 놨다. 아무튼 못 만나게 할 거니까. 유우시가 듣는 시늉도 않고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원래 시부야에서 밥 먹기로 했어.”

“…….”

“스테이크.”


이 흐름은 아무래도 사달라는 거겠지. 딱 그런 얼굴을 하며 리쿠가 예상한 반응을 보였다.


“내가 사줄게.”

“오늘 아프게 했으니까?”


리쿠가 당황한 듯 웃었다. 그 난처한 얼굴을 보는 게 좋았다. 계속 짓궂은 농담을 뱉고 싶을 만큼.


“뭐… 응.”


그러나 이어지는 무신경한 대답이 단번에 유우시 속을 죽죽 할퀴었다. 그러니까 결국은 잤기 때문이라는 거지? 진심이 될 마음은 없지만 한 게 있으니 애프터 서비스는 하시겠다 이거고. 순 쓰레기 새끼 아니야….


억울하지만 익숙했다.

늘 이런 식이니까. 리쿠는 절대 유우시 혼자 꿈을 꾸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어지러운 생각)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우연이었다. 당시 리쿠는 주머니가 얕은 가죽점퍼를 입고 있었는데 핸드폰을 꺼내며 지갑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걸어가고 있었다. 그걸 동기와 걸어가던 유우시가 발견해 건네줬고 그때 처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인식했다.


바로 든 생각은 그거였다. 우리 학교에 이런 사람이 있었나? 금방 헤드폰을 귀에서 뗀 리쿠가 연신 고맙다고 중얼거렸다. 둘 다 낯가림 max 상태여서 그 이상 대화를 나누진 못했다. 라인 교환? 그런 걸 했을 리가. 유우시가 별거 아니라며 동기에게 돌아갔고 리쿠도 금방 돌아섰다.


그날 일을 완전히 잊었을 무렵 두 번째 우연이 찾아왔다. 이미 몇 주 들었던 교양 수업에서. 물론 캠퍼스에서 마주쳤으니 같은 학교 학생이겠거니 했지만 같은 강의를 듣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워낙 인원이 많은 강의라 한 사람 한 사람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한 게 원인이었다.


먼저 아는 척한 건 리쿠였다. 살갑게 말을 붙였다기보다는 어? 하고 눈치를 줬다. 눈이 마주쳤고 유우시가 몇 주 전의 기억을 더듬는 사이 리쿠가 자신의 지갑을 흔들었다.


“맞죠?”

“아….”


교수님이 들어오기 전까지 스몰토크를 나눴다. 학부는 어디인지. 몇 학년인지. 이름은 무엇인지. 강의 끝났을 땐 함께 나섰다. 어쩐지 리쿠가 가방 챙기는 걸 기다려 주는 눈치길래.


강의실 앞에서 리쿠를 기다리고 있던 여자와 마주쳤다. 리쿠~♡ 하고 부르는 애교 섞인 목소리엔 물결과 하트까지 포함인 듯했다. 리쿠가 웃으며 그쪽으로 다가가려다 말고 유우시를 향해 인사했다. 그럼 다음 주에 또 보자. 자연스레 말을 놓길래 유우시도 그대로 따라 했다. 응 다음 주에 봐.


그날을 계기로 교양 강의 때 서로의 옆자리를 사수했다. 마침 둘 다 서로를 제외하곤 아는 사람이 없었다. 과제 핑계로 라인을 교환했다. 리쿠의 프로필은 심플했다. 사진은 없었고 상태 메시지만 있었다.

前田陸

❤️

보통 남자가 자의로 빨간 하트를 눌렀다고 보긴 어렵지. 연애 중이겠거니 짐작했다. 아마 저번에 강의실 앞까지 찾아왔던 여자가 여자 친구 아니었으려나. 그 후로도 두 번 정도 더 봤으니까. 심각한 비음으로 리쿠~♡ 하고 부를 때마다 정말이지 물결과 하트까지 들리는 듯했다.


기말 테스트 날 처음으로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었다. 식당이라고 해봤자 학교 앞 라멘집이었지만. 마침 두 사람 다 직전에 치른 교양 테스트가 마지막 테스트였다.


“마에다군 여자 친구 있지.”


라멘을 기다리며 유우시가 물었다. 헤드폰을 정리해서 가방에 넣던 리쿠가 힐끔 유우시를 바라보며 웃었다.


“없는데.”

“그래? 저번에 강의실 앞에서 기다리던 사람이 여자 친구인 줄 알았어.”

“걘 그냥 후배야.”

“그럼 상태 메시지에 하트는?”


끝 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리쿠가 폭소했다. 잠시만. 나 지금 추궁 당하는 것 같은데. 하트?

리쿠가 서둘러 핸드폰을 켰다. 본인의 상태 메시지가 어떻게 돼 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이윽고 좀 황당한 반응이 터졌다. 에? 뭐야. 나 이런 거 설정 안 했는데.


“하? 네가 안 하면 누가 해.”

“모르겠어. 전 여친인가….”


빨간 하트 지우는 손가락을 바라보며 유우시는 생각했다. 보기보다 무신경한 구석이 있으시군. 모를 수가 있나? 프로필 사진을 아예 설정하지 않는 타입이라면 확실히 자신의 프로필을 볼 일이 없긴 할 테지만.

그래도 빨간색 하트는 좀 강렬하지 않나….


“전 여친이랑은 언제 헤어졌는데?”

“두 달 됐나?”

“헤….”

“토쿠노는? 여자 친구 있어?”

“…응.”


당시 유우시에겐 남자 친구가 있었다. 뭐… 성별 빼곤 거짓말은 아니니까. 리쿠가 그렇구나 하고 중얼거리는 사이 주문한 라멘이 나왔다. 자연스레 대화가 끊겼다. 면 요리라 그런지 먹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라멘 먹고 나왔을 땐 겨우 오후 두 시였다. 아쉽게도 뭘 더 하자고 제안할 사이는 아닌지라 깔끔하게 역까지만 함께 걸었다. 학부도 학년도 다른데 가을 학기에 또 같은 강의를 듣는 우연 따위 일어나지 않겠지. 리쿠와의 인연은 오늘로 끝일 거라고 생각했다. 대학 다니다 보면 으레 있는 일이라 딱히 아쉽진 않았다.

前田陸

유우시가 리쿠에게 미친 영향이라곤 원래 심플한 프로필을 더 심플하게 만든 것 정도일까. 몰래 리쿠를 짝사랑하던 사람들은 지금쯤 쾌재를 부르고 있겠군. 그날도 라인을 보내진 않았다. 물론 리쿠에게서 온 것도 없었다.


방학이 되자 연애와 바이트에 치이느라 자연스레 리쿠의 존재를 잊었다. 성인 되고 처음 사귄 남자 친구는 다섯 살 연상에 좀 구제 불능이었다. 연애 초기엔 안 그랬는데 갈수록 돈이 없다고 했다. 언제부턴가 데이트 비용을 유우시가 전부 부담하는 게 당연해졌다. 딱히 불만이었던 건 아니다. 초기엔 남자 친구가 낸 적도 있었으니까.


부모님에게 용돈을 더 달라고 말하기가 그래서 심야 바이트를 시작했다. 전석 룸 형식으로 된 고급 이자카야였는데 마감 타임 시급은 평균의 두 배였다. 열아홉 패기로 꾸역꾸역 버텼지만 먹는 양을 늘려도 살이 쭉쭉 빠졌다. 주변 모두 무슨 일 있었냐며 걱정하는데 남자 친구만 몰라줬다. 입버릇처럼 호주 여행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웬 호주? 하면서도 바이트 휴게 시간이면 비행기 표부터 찾아봤다. 이쪽이 얼마를 내야 하지? 당장 유우시의 한 달 월급으로 두 사람이 호주에 다녀오는 건 무리였다. 우연히 핸드폰 화면 바라본 바이트 동료가 끼어들었다. 에 토쿠노 호주 가게? 재밌겠다. 유우시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기에는 돈이 전혀 없습니다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호주행은 불발됐다. 며칠 후 우연히 일하던 이자카야에서 남자 둘이 키스하는 걸 목격했는데 (동성이라는 점은 내성이 있어 괜찮았지만) 그게 하필 유우시의 남자 친구였기 때문이다.

인생 처음으로 길에서 대판 싸웠다. 일방적으로 남자 친구 쪽이 언성을 높였다. 정작 화낼 사람은 따로 있는데 적반하장이 따로 없었다.


“솔직히 유우쨩이 요즘 나한테 소홀하긴 했잖아. 맨날 바이트 핑계나 대고.”

“피곤해서 그랬어.”

“그니까. 며칠 전에 내가 하자고 했을 때도 피곤하다고 거부했잖아. 나니까 넘어갔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가만 안 있어. 너 그게 얼마나 사람 자존심 짓밟는 짓인지 알아?”


그러는 너는. 나한테는 햄버거 하나도 얻어 먹으면서 이런 비싼 이자카야는 어떻게 온 건데?

따위의 말은 차마 뱉을 수 없었다. 남자 친구가 언성을 높이는 바람에 관중이 있었고 그냥 좀… 쪽팔렸다. 저를 두고 바람을 피운 것에 대한 슬픔보다 분노나 수치스러움이 훨씬 컸다. 너무 화가 나서 엉엉 소리 내 울고 싶었지만 아직 바이트가 끝난 게 아니라 가게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 그만하자.”

“유우시. 잠시만.”


팔목이 붙잡히는 바람에 걸음을 멈췄다. 놔. 소리쳐도 남자 친구는 들은 체도 안 했다. 유우시가 붙잡히지 않은 쪽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문지르며 한 번 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놓으라고.

자칫 몸 싸움으로 번질 것처럼 분위기가 험악해졌을 때였다.


“저기요. 상대가 싫다잖아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다 싶어서 고개를 들었을 때 뜻밖에도 리쿠가 있었다. 약 한 달 만인가. 오랜만에 보는 건데도 머리 스타일과 옷차림이 그대로여서 그런지 전혀 낯설지 않았다. 꼭 어제까지 만났던 사람처럼.


남자 친구가 리쿠와 유우시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다. 아 그럴 줄 알았어. 너도 바람 피우고 있었던 거지? 계속 핑계 대면서 안 만날 때 알아봤어.

헛소리도 이 정도면 병 아닐까. 그 말을 가볍게 무시한 유우시가 가게로 돌아갔다. 일은 일이니까 최대한 분노를 삭혔다. 다행히 남자 친구도 리쿠도 쫓아오지 않았다.


약 한 시간 후 마감하고 나오는 길에 리쿠와 맞닥뜨렸다. 리쿠는 맞은편 편의점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여태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눈이 마주친 순간 리쿠가 담배를 끄고 다가왔다.


“괜찮아?”

“…응.”

“안 본 사이에 살 많이 빠졌네.”


별거 아닌 한마디에 괜히 코 끝이 찡했다. 딱히 친하지도 않은 리쿠도 바로 아는 걸 애인이라는 놈만 몰랐다고 생각하니까 더 서럽고 괘씸해서.


“나 기다렸어?”

“응. 뭔가 좀 걱정돼서. 그 자식이 어디서 숨어있다가 덤빌지도 모르고.”


가로등에 비친 유우시의 눈이 조금 부었다. 리쿠의 시선이 제게 닿은 걸 알아차린 유우시가 고개를 한껏 숙이곤 분위기를 전환하려 농담을 던졌다.


“싸움 잘해?”

“아니. 나 평화주의라서.”

“…뭐야 그게.”

“그래도 하나보단 둘이 낫잖아.”


유우시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리쿠의 손이 가볍게 유우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꼭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동생을 대하는 듯한 손길이었다. 남자 친구와 나눈 대화 맥락상 티가 났을 게 분명한데 왜 여자 친구가 있다고 속였냐는 추궁 따윈 하지 않았다.


잠시 아무런 대화 없이 걸었다. 자취방에 가까워질 때쯤 유우시가 중얼거렸다. 자고 갈래?

딱히 꼬시려던 건 아니었지만… 뱉자마자 아차 싶었다.


“역겨우면 거절해도 돼.”

“뭐가?”

“…눈치챘을 거 아냐. 나 게이인 거.”

“응. 근데 역겹다곤 생각 안 했어.”


아. 그렇구나. 리쿠는 그런 거 개의치 않는 사람이구나. 유우시가 수긍하듯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묘하게 마음이 들뜨는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깨닫는다. 이게 헤테로의 무시무시함이구나. 아무런 의도나 자각 없이 사람 마음을 낚아버리는 거.


자취방의 작은 테이블 밑에 앉아서 리쿠와 캔을 깠다. 취기 없인 도저히 못 잘 것 같아서. 유우시 쪽이 일방적으로 폭주했다. 안주도 없이 연신 캔을 들이켰다. 그 결과 두 캔 비워낸 순간부터 처울기 시작했다. 마치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줄줄 흐르는데 도무지 제어할 수 없었다.


(전) 남자 친구가 낯선 남자와 키스하던 장면이 눈앞을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나를 두고 그럴 수 있지. 이자카야도 그 남자한테 뜯을 작정이었나. 그럼 결국 돈 때문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취기에 나른해진 유우시의 몸이 저절로 리쿠 쪽으로 기울었다. 책임 전가는 좀 약았다고 생각하지만 솔직히 이때 리쿠가 밀어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키스해줘.”


물론 리쿠는 밀어내지 않았다.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뱉은 건지 모를 말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저 유우시를 빤히 바라보며 곤란하다는 듯이 웃기만 했다.


“전에 사귀던 사람도 이런 식으로 꼬셨어?”

“…지금 꼬시는 거 아닌데.”

“아 그래?”


유우시의 손이 리쿠의 볼을 덥석 붙잡았다. 리쿠가 무언가 말하기도 전에 냅다 입술부터 갖다 댔다. 전 남친에게 이 장면을 보여줄 수 없다는 사실이 애석할 따름이었다. 툭 까놓고 말해서 리쿠 쪽이 훨씬 잘생겼으니까. 아까 너도 바람 피운 거냐며 부들댔던 것도 자격지심이었다든가?


리쿠의 입술을 간질이듯 빨다 말고 유우시가 하던 걸 멈췄다. 겨우 맥주 두 캔에 만취했을 리 없었다. 그냥 너무 울어서 정신이 나갔던 모양이다. 리쿠가 목석처럼 가만히 있으니까 정신이 확 들었다. 내가 지금 뭘 한 거지. 리쿠는 게이도 아니고 그전에 친하지도 않은 애매한 사이인데….

유우시가 황급히 리쿠에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미안.”


작게 중얼거리며 눈치를 봤다. 리쿠는 딱히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화난 느낌으로 정색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유우시를 빤히 응시하다 말고 웃으면서 다가왔다.


“네가 시작한 거니까….”


뒷말은 없었지만 꼭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네가 시작한 거니까 책임져.

다시 입술이 붙었다. 리쿠가 먼저 키스했다는 걸 인지한 순간 완전히 술이 깼다. 유우시가 슬쩍 몸을 뒤로 뺐다. 마에다군 잠시만….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금세 입술에 먹혀들었다. 밀어내야 하는데. 분명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상하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전 남친은 키스를 못 하는 편에 속했다. 키스하면서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불쑥 리쿠의 혀가 입안으로 들어왔을 때 뭔가 속이 간지러운 걸 느꼈다. 아래가 묵직해졌다. 리쿠가 키스를 잘하는 건지, 순전히 자신이 리쿠에게 반응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그 순간에 극도로 흥분했다는 사실이다.


리쿠의 손이 습관처럼 유우시의 납작한 가슴에 닿았다. 그때까지도 유우시는 혀 섞는 데 정신이 팔려 아무 생각도 못 했다. 기어코 움켜쥘 게 없는 가슴 어딘가를 방황하는 손길을 느꼈을 때… 유우시가 리쿠를 거세게 밀어냈다.


“…취했어.”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품이 큰 티를 입어 천만다행이었다. 발기한 걸 들켰다가는 진짜 혀 깨물고 뒤질 테니까. 언뜻 쳐다본 리쿠의 입술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유우시가 마치 못 할 짓을 했다는 듯 손으로 그걸 마구 닦아냈다. 툭 건드리면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리쿠의 시선이 헐렁한 티셔츠로는 미처 다 가리지 못한 유우시의 아래에 닿았다. 그 시선을 깨달은 유우시가 뒤늦게 다리를 한껏 오므려봤지만 소용없었다. 리쿠가 눈앞의 유우시를 낱낱이 훑기 시작했다. 부은 눈과 꼭 깨문 입술. 벌겋게 익은 뺨. 그리고 쭈뼛거리는 자세까지.


“도와줄까?”


곧 리쿠에게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유우시의 얼굴이 물음표로 변했다.


“어떻게?”

“손으로.”

“…설마 너도 이쪽이야?”

“아니. 근데 어떻게 하는지는 아니까….”


아. 집에서 셀프로 하던 걸 응용해보시겠다 이거군. 실험체는 눈앞의 토쿠노 유우시고. 유우시가 여전히 제 손목을 잡고 있는 리쿠의 손을 잠깐 바라봤다. 이 손으로 제 걸 쥔다고 생각하니까… 솔직히 꼴렸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맥주 두 캔에 유우시가 그 정도로 미치진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리쿠의 손을 떼어내며 실소를 터뜨렸다.


“농담하지 마.”

“…….”

“게이라고 남자면 다 되고 그런 건 아니니까….”

“…미안. 그런 뜻은 아니었어.”


그날 실수는 키스에서 그쳤다. 다음 날 낮 유우시가 잠에서 깼을 땐 리쿠는 이미 곁에 없었다. 침대 밑에 깔아둔 이부자리도 어제 먹다 남았을 맥주 캔도 싹 정리돼있어서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꿈이었나? 그럼 어디까지가 꿈이지. 설마 전 남친이 바람을 피웠다는 것도?


그럼 아직 현 남친인가… 하면서 라인을 눌러봤다.


그렇게 살지 마

어린 게 까져서는

어제 그 자식은 누구야?

보나마나 매칭 어플로 만난 놈이지?

너 속고 있는 거야

걔가 너한테 진심일 거 같냐?

정신 차려


전 남친 맞네. 유우시가 망설임 없이 차단 버튼을 눌렀다. 어차피 끝날 사이라면 말다툼 따위에 헛된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다. 번호도 차단하고. 몇 장 안 되는 같이 찍은 사진들도 다 지웠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라 그런지 정리할 게 많지 않았다. 남은 건 감정을 추스르는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불시에 새벽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전 남친이 말하는 ‘그 자식’은 정황상 리쿠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는 건 리쿠와 키스했던 것도 진짜라고 봐야겠지…. 사실 거짓일 가능성은 제로였다. 왜냐하면 유우시가 지나칠 정도로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 손목을 붙잡았던 손도. 리쿠의 혀도. 그리고 끝내 서버리고 만 것도.


도와줄까? 손으로.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렸을 뿐인데… 다시 반응이 오는 게 느껴졌다. 진짜 미친 거 아닐까. 원래 이렇게 밝히는 타입은 아니었다. 오히려 전 남친이 하자고 조를 때는 귀찮다고 느낀 적도 더러 있었다. 꼭 봉사하는 기분이 들어서.

반면 리쿠와 할 때는 전적으로 리드 당하는 느낌이었다. 평소 친구 같이 대해왔지만 그 순간 만큼은 연상 같았다.


속에서 악마가 묻는다. 그래서? 뭐 어쩔 건데? 유우시의 감상이 어떻든 간에 리쿠와는 가망이 없다. 본인이 이쪽은 아니라고 했었고… 그렇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리쿠의 프로필을 눌러 대화 창을 열었다. 어제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리쿠에게선 라인 하나 오지 않았다.


마에다군

어젠 내가 너무 취했나 봐

없었던 일로 해줘

진짜 미안


그냥 그렇게만 보내긴 조금 그래서 고심 끝에 귀여운 이모지를 하나 넣었다. 울고 있는 고양이 이모지. 이 정도면 그냥 넘어가 주지 않으려나? 딱히 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막연히 그런 확신이 들었다. 리쿠라면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어딘가에 떠벌리진 않을 것 같다는….


리쿠에게선 반나절이 지나도록 답이 없었다. 읽음 표시도 안 떴다. 이쯤 하자 그런 의문이 들었다. 이거 리쿠의 라인이 맞긴 한 건가? 마지막 테스트 날 하트 떼는 걸 실시간으로 봤으니 맞긴 할 텐데. 종일 세 번 정도 리쿠와의 대화 창을 들락날락했다. 지금쯤 읽었을까 하고.


자정에 가까워졌을 때 마침내 읽음 표시가 떴다. 보내자마자 읽히면 무섭다고 생각할 것 같아 일부러 대화 창 목록을 띄워놓고 잠자코 기다렸다.

도대체 무슨 대답을 하려는 거지? 답장이 오기만을 3분 정도 눈 빠져라 보고 있을 때였다.


무리笑


…하? 유우시가 그대로 정색했다. 이건 반나절 동안 열심히 생각한 약 20가지 정도의 예상 반응에 없는 기출 변형이었다. 무리? 지금 웃긴 상황인가? 왜 처웃지? 차마 대화 창 누를 용기가 나지 않아 목록에서 ‘무리笑’만 쳐다보고 있는데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만나서 얘기하자


윙크하는 귀여운 이모지가 하나 도착했다.

그러니까 저는 앞으로 당신을 안 볼 작정이었습니다만.


결국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리쿠와 만나기로 했다. 진심으로 그게 마지막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날이 더우니 밤에 보자길래 순순히 알겠다고 했다.


토요일 밤 신주쿠는 엄청 붐볐다. 정체 모를 지하돌에게서 받은 전단지로 부채질이나 하고 있는데 저 멀리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토쿠노 하고.

돌아봤을 땐 리쿠가 여태 본 적 없는 스타일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뭐지. 저 마성의 게이 같은 느낌은. (순전히 유우시의 감상이다) 학교에서는 물론 가게 앞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도 리쿠는 대체로 캐주얼한 차림이었다. 그냥 티에 청바지. 머리도 내추럴한.


그날은 달랐다. 검은 셔츠에 앞머리를 살짝 깐 스타일이었는데 과장이 아니고 수많은 인파 속에서 오직 리쿠만 눈에 들어왔다. 가까워질수록 링 피어싱 반짝거리는 게 시선을 분산했다. 좀 넋 놓고 보고 있었더니 리쿠가 유우시의 얼굴 앞에다 손바닥을 흔들었다.


“토쿠노?”

“아… 응.”


이럴 줄 알았으면 좀 꾸미고 나올 걸 그랬나…. 유우시가 뒤늦게 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거울을 보지 않아 리쿠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리쿠가 예약한 바에 도착했다. 칵테일 주문하며 저도 모르게 가격부터 살폈다. 혹시 몰라서 3만엔 가져왔으니까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주문을 마쳤다. 어쩐지 눈 마주치는 게 부끄러워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했다.


“마에다군 오늘 평소랑 좀 스타일이 다르네.”

“아. 낮에 약속 있어서.”

“여자 친구?”

“저번에 없다고 했잖아.”

“안 본 사이에 생겼을 수도 있으니까.”


상태 메시지 변경에 힘썼는데 다들 차였나 보군. 누군지도 모를 상대에게 속으로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칵테일이 나올 때까지 일부러 본론을 피해 대화했다. 바이트 얘기라든가 다음 학기 계획이라든가….

술이 들어가자 곧바로 본론이 튀어나왔다.


“…라인 답장 무슨 뜻이야?”

“뭐가?”

“무리라고 한 거.”

“아.”


리쿠가 수줍게 웃었다. 의미를 알 수 없지만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드는 웃음이었다. 대체로 그런 예감은 들어맞기 마련이다. 리쿠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까만 눈동자가 조명 두 개를 비춰 반짝거리고 있었다.


“사실 너랑 키스한 거 나쁘지 않았거든.”

“…….”

“남자한테 그런 적은 처음이라서 확인해보고 싶었어.”


하? 유우시의 얼굴이 저절로 굳었다. 어떤 표정으로 무슨 말을 뱉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고장 난 상태가 됐다. 다시 입을 뗀 건 꽤 텀을 둔 후였다.


“뭘 확인하고 싶은데?”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확인하면 어쩔 건데?”

“…글쎄. 내가 게이인지 아닌지 알게 되겠지?”


유우시가 칵테일 잔을 쥐었다. 도저히 맨정신으로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지라 무작정 마시기 시작했다. 옆에서 리쿠가 만류했다. 토쿠노 그거 달콤한 것 같아도 꽤 도수 있어. 그 말이 그 순간엔 아득하게 느껴졌다. 리쿠 말대로 거의 음료수처럼 느껴지는 맛이라 얕봤던 탓도 있었다.


내가 계산해야 하는데… 생각은 했지만 지갑 꺼낼 힘이 없었다. 멀쩡히 걸어서 들어갔다가 리쿠의 부축을 받으며 나왔다. 리쿠에게서 뭔가 좋은 향기가 났다. 어깨에 얼굴 묻고 킁킁거렸더니 리쿠가 못 말린다는 듯 혀를 찼다.

토쿠노. 정신 좀 차려봐. 나 너희 동네만 기억하지 집이 어딘지까진 기억 안 나.


“…집에 가지 말자.”

“뭐?”

“확인하고 싶다며. 하자는 거지? 하자.”


술이 들어가니 저절로 애교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시요. 시요. 이 말밖에 못 하는 사람처럼 중얼거렸더니 리쿠가 끝내 택시 잡기를 포기했다.

다시 팔이 붙들렸다. 리쿠가 걷는 대로 따라 걸을 뿐인데 발이 자꾸만 푹푹 빠졌다. 마에다군… 나 못 걷겠어. 투정과 함께 유우시가 냅다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앉았다. 문득 올려다본 리쿠의 얼굴이 좀 서늘했다. 귀찮아 죽겠다는 걸 전면적으로 드러낸다. 어라 근데 왜 꼴리지….


결국 업혀서 근처 비즈니스호텔에 들어갔다. 침대에 엎어져서 정신 못 차리고 있다가 옆에 앉은 리쿠를 보며 앓는 소리를 냈다. 마에다군 나 물…. 리쿠가 순순히 미니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다가왔다. 유우시가 자연스레 리쿠의 허벅지에 머리를 베고 누웠다.


“그러다 잘못 넘기면 큰일 나. 앉아서 마셔.”

“…못 앉겠어.”


마지못해 리쿠가 누워있는 유우시에게 물을 먹여줬다. 뭔 애도 아니고. 라고 생각했지만 고분고분 물 마시고 있는 얼굴을 보니 좀 어리게 생긴 것 같기도. 딱 거기까지 생각했는데 유우시가 더 안 먹겠다는 듯 고개를 뗐다. 동시에 유우시의 고개가 리쿠의 바지 쪽으로 돌아갔다.


“근데… 왜 섰어?”


당황한 리쿠가 생수병을 놓쳤다. 생수병에 든 물이 그대로 유우시의 얼굴로 쏟아졌다. 다행히 직전에 병은 붙잡았지만 이미 유우시의 얼굴을 흠뻑 적신 뒤였다. 질끈 눈 감은 유우시가 벌떡 일어났다. 눈이 따가운지 손바닥으로 마구 얼굴을 비볐다.

리쿠가 욕실에서 수건을 가지고 와 유우시의 얼굴을 닦아줬다. 고분고분 얼굴을 내준 유우시가 슬쩍 리쿠를 떠봤다. 있잖아.


“응.”

“마에다군은… 남자한테 박히는 거 무리겠지?”


리쿠가 쑥스럽다는 듯 콧등을 구기며 웃었다. 꼭 나쁘지 않을지도? 라고 말할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응. 절대 무리.”


예상대로 헤테로임을 강력 주장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유우시가 그새 충혈된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도 그럴 게 유우시는 여태 박으면 박았지 깔려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전 남친이랑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깔릴 바에야 헤테로로 사는 게 낫겠다 생각할 만큼 거부감이 있었다. 내로남불이라 지적해도 할 말 없지만 넣는 건 간단한데 들어온다고 생각하면 좀 아찔했다. 그러니 거절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했다. 잘 이해했는데…. 이놈의 빌어먹을 호기심이 문제였다.


아니면 취기 탓인가? 그냥 해보고 싶었다. 리쿠의 얼굴엔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한 번쯤은 괜찮지 않나…. 유우시가 속으로 어떤 고민을 하는지 꿈에도 모를 리쿠가 그 잠깐을 기다리지 못하고 키스했다.

아. 좋아. 저번에 키스한 후로 한동안 이 느낌을 잊지 못했지. 유우시가 자연스레 리쿠의 목을 끌어안았다. 뜨거운 손가락이 티셔츠 안으로 들어온다. 또 집요하게 납작한 가슴을 꼬집고 괴롭히는데 화나기보다는 흥분됐다.


섹스 자체는 처음이 아닌데 뒤를 내준 건 처음이라서. 몇 분을 아프다고 울다가 나중에는 생전 내본 적 없던 목소리로 앙앙댔다. 끝까지 처박히고 눌리는 느낌이 죽을 것 같았다. 침 흐르는 것도 못 닦고 그저 신음만 뱉어댔다. 몇 차례 행위가 끝나고 엎드린 채 발발 떨며 깨달았다.

아. 지금 새로운 세계에 눈 뜬 거구나. 좆 같은데 좋고, 좋은데 좆 같았다. 이거 대체 뭐지? 옆에서 태연하게 바닥에 널브러진 옷들을 개는 리쿠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딱 쟤 같이 박아줄 게이를 어디서 구하면 좋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리쿠와 비슷한 외모, 속궁합인 사람을 찾는다는 건….

오직 육체적 관계가 중점인 지금의 관계는 유우시가 제안했다. 당시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유우시가 좋아하는 건 리쿠와 섹스할 때 느꼈던 쾌감이지 리쿠 본체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리쿠가 그 말 같지도 않은 제안에 응할 줄은 몰랐다. 만약 받아주지 않았더라면 리쿠와의 관계는 그때 완전히 끝났을 테다.


그 순간부터 하고 싶을 때마다 했다. 먼저 연락하는 쪽은 단연 유우시였다. 리쿠는 거절하진 않았지만 먼저 연락하지도 않았는데 그게 유우시의 자존심을 서서히 짓밟았다. 갈수록 라인 보내기가 묘하게 부끄럽고 망설여졌다.

한 번은 일부러 일주일 이상 연락을 끊은 적도 있었다. 열흘 정도 지났을 때 리쿠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것도 밀당이랍시고 안 받을까 하다가 마지못해 받아줬더니.


“왜?”

“연락 없길래 죽었나 하고.”

“진짜 죽었으면 어쩌려고? 열흘이나 지났는데.”

“남자 친구 생긴 줄 알았어.”


리쿠는 또 아무렇지 않게 유우시의 속을 할퀴었다. 서로 애인이 생기면 이 관계는 안녕이라는 뜻인가.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애인 몰래 다른 누군가와 섹스한다면 그건 바람이 되니까.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자신의 저능함에 탄식했다. 새삼 리쿠와의 관계가 매우 불결하고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금기처럼 느껴졌다.


“…생겼다면?”

“헤어지면 안 되나?”

“…하?”

“솔직히 나보다 못생겼을 거 아냐.”


유우시 얼빠잖아…. 리쿠의 뻔뻔한 대사와 애교스러운 목소리에 말문이 막혔다. 리쿠는 종종 이럴 때가 있었다. 예상한 반응과는 전혀 다른 생뚱맞은 대답을 내놓는다.


“왜 헤어지라고 하는 건데?”

“유우시랑 계속 같이 있고 싶으니까.”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넘어가면 안 된다. 아무리 달콤한 말투로 말한다 한들 결국 섹스하고 싶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고.


“오랜만에 하고 싶어.”


봐. 이렇다니까. 그런데 냉철한 이성과는 달리 가슴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리쿠가 처음으로 먼저 나를 원한다는데… 괜찮지 않을까 하고.

거울에 비친 얼굴이 새빨갰다. 얼굴은 물론 귀와 목까지 화끈거렸다. 겨우 열흘 안 했다고 애타는 건 유우시도 마찬가지라서. 통화할 때 얼굴이 보이는 것도 아닌데 한껏 고개 숙인 채 웅얼거렸다.


“집으로 와. 기다릴게….”


핸드폰 저편에서 들리는 리쿠의 웃음소리가 심장을 들쑤셨다.

자꾸만 이대로도 괜찮은 거 아닐까 타협하게 된다.








아. 다 말하니까 후련하다.

그런 표정으로 유우시가 메론소다를 마셨다. 오늘따라 더 다네. 정작 생각지도 못한 심연을 들어버린 사쿠야는 어딘가 기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참고로 사쿠야는 유우시가 이자카야 다음으로 일하기 시작한 빵집의 단골로 빵 이야기를 하다 급격히 친해졌다. 사쿠야는 현재 고등학교 2학년이며 동급생을 짝사랑 중이라고 한 거로 보아 게이일 확률이 85% 정도 됐지만 (남고이므로) 정작 본인은 들켰다는 자각이 없다.


금세 귓불을 붉힌 사쿠야가 눈앞의 메론소다를 차마 마시지 못하고 빨대로 휘휘 젓기만 했다.


“…그러니까 결론이 뭐예요?”

“세후레를 관두고 싶어.”

“그럼 관두고 싶다고 말하면 되잖아요.”

“…그건 그런데.”


유우시가 말을 하다 말고 도중에 말끝을 흐렸다. 곧 사쿠야랑 마찬가지로 메론소다를 휘휘 젓기 시작한다. 유우시답지 않은 망설임에 사쿠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혹시 진심이에요?”

“…….”

“그건 안 되죠. 상대는 게이도 아니라면서요.”


어쩐지 고등학생 주제에 대학생인 자신보다 통찰력이 뛰어난 것 같은데…. 사실 사쿠야 말이 백 번 옳았다. 무작정 리쿠를 탓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어차피 안 될 관계를 여기까지 질질 끌고 온 건 유우시의 잘못도 크다.


“그냥 리쿠 속마음이 알고 싶어.”

“…….”

“하루만 연락하는 사람인 척 나 좀 도와주면 안 될까?”


사쿠야의 눈이 다시 커졌다.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강조하듯 제 교복 넥타이를 쥐고 흔든다.


“나 고등학생인데요?”

“상관없어.”

“상관 있을걸요. 가끔 중학생이란 오해도 받는데 백 퍼 안 믿을걸요.”

“중요한 건 우리가 잘 어울리냐가 아니야.”


도와줄 거지? 유우시가 대뜸 사쿠야의 손을 붙잡았다. 간절한 고양이 같은 눈으로 바라보는 걸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물론 그다음에 제안한 디저트 페어에 데려가 주겠다는 말 때문은 진짜 아니고. 세 살 차이에도 유대감이라는 게 있으니까. 다 우정과 의리 때문이다.


삼자대면의 순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리쿠와 스테이크 먹기로 약속한 날 유우시가 사쿠야와 함께 약속 장소로 향했다. 사쿠야는 최대한 어른스럽게 보이기 위해 노력했음을 강력 어필했다. 일단 무채색의 후드티에 청바지. 그리고 키링 하나 안 달린 크로스백을 맸다. 이 정도면 대학생으로 보이지 않으려나? 싶었지만 유우시가 단호하게 고3인 설정으로 가겠다고 일축했다.


마침내 약속 장소에 다다라 핸드폰 보고 있는 리쿠를 마주한 순간 사쿠야는 깨달았다. 이건 진지하게 게임이 안 됐다. 리쿠는 오늘따라 평소 안 끼던 안경에 블레이저까지 입고 있었다. 사쿠야가 경악하며 유우시의 뒤로 숨으려 했지만 유우시가 무력으로 사쿠야의 팔을 잡고 이끌었다.


“늦어서 미안. 한 명 더 껴도 괜찮지?”


핸드폰 두드리던 리쿠의 손가락이 멈췄다. 곧 리쿠의 시선이 눈앞의 유우시와 그 옆에 선 사쿠야에게 차례로 닿는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리쿠가 사쿠야를 보며 귀엽다는 듯 웃었다. 누구야? 사촌 동생?


사쿠야가 대놓고 쭈뼛거리기 시작했다. 저는 당신 세후레의 썸남(설정)입니다만…. 그런 말은 차마 못 했다. 사전에 유우시로부터 웬만해선 입 열지 말라는 잔소리를 단단히 들은 덕분이었다. 유우시가 들어가서 설명하겠다며 말을 잘랐고, 세 사람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으로 예약한 탓인지 테이블에는 딱 두 사람분의 물컵과 수저가 세팅돼있었다. 리쿠가 사람이 한 명 늘었다고 말하자 직원이 바로 자리를 바꿔줬다. 솔직히 사쿠야는 이때부터 가시방석이었다. 이어서 직원이 메뉴판 세 개를 나눠줬지만 하나는 쓸쓸하게 테이블 위에 엎어졌다. 유우시와 사쿠야와 메뉴판 하나를 함께 봤기 때문이다.


“사쿠탄은 뭐 먹고 싶어?”

“사쿠… 사쿠탄?!”


처음 듣는 애칭에 당황하기도 잠시 유우시가 사쿠야의 종아리를 툭 쳤다. 금세 상황을 파악한 사쿠야가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유우시가 골라주는 거면 다 좋은데…. 반사적으로 존댓말이 튀어나올 것 같은 걸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럼 비싼 거 먹자. 오늘은 리쿠가 다 사주는 날이니까.”

“…에 그래도 나까지 얻어먹는 건 좀.”

“괜찮아. 리쿠가 나한테 한 짓이 있어서 사쿠탄 것까지 사줘도 돼. 그치?”


진작 고르고 메뉴판을 테이블에 올려놨던 리쿠가 좀 황당하다는 듯 유우시를 바라봤다. 그러나 곧 수긍의 대답이 떨어진다. 응 눈치 보지 말고 알아서 골라.


“사쿠탄 들었지? 와인이나 샴페인은 어때?”

“…에 술은 좀.”

“논알콜로 마시면 되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작 주문은 평범하게 했다. 술은 사쿠야를 생각해서 따로 주문하지 않았다. 직원이 메뉴판을 걷어가자 테이블 위로 찬 바람이 쌩쌩 불기 시작했다. 

무심하게 핸드폰만 쳐다보던 리쿠가 뒤늦게 유우시를 바라봤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유우시가 뭐냐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리쿠가 턱짓으로 사쿠야를 가리켰다.


“누구야?”

“요즘 연락하기 시작한 사람.”

“내가 네 핸드폰에서 매칭 어플 다 지워버린 거로 기억하는데?”

“지인 소개로 만났어.”

“중학생을?”


사쿠야가 얼굴과는 전혀 매치되지 않는 중저음으로 끼어들었다.


“…수험생인데요.”


그리고 무참히 씹혔다.

리쿠는 아예 사쿠야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서 유우시만 바라보고 있었다. 유우시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쿠야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거 스테이크를 씹어 넘길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벌써 체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괜히 찬 물만 벌컥 들이켠다.


“들었지? 중학생 아니고 고3이야.”

“그래서?”

“뭐가?”

“나한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사쿠야의 눈이 커졌다. 이 형 왠지 심연을 꿰뚫고 있는 듯. 급하게 테이블 아래로 핸드폰을 켰다. 정말 티 나게도 30초 후에 유우시의 핸드폰이 작게 진동했다.


다 들킨 것 같은데요?


유우시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화면을 껐다. 리쿠가 맞은편에선 보이지도 않는 화면을 보며 핀잔했다. 답장 안 해? 유우시가 괜찮다며 테이블 아래로 사쿠야의 종아리를 툭 친다. 쓸데없는 짓은 말라는 듯이.


“너랑 이제 안 할 거라는 말이 하고 싶었어.”


그리고 냅다 질렀다. 동시에 사쿠야가 놀란 듯 딸꾹질을 했다. 유우시가 사쿠야의 컵에 다정하게 물을 따라주며 말했다. 괜찮아 사쿠탄. 내가 다 말할게.

그러니까 사쿠탄이라고 하지 말라고요…. 라는 말은 역시 할 수 없었다.


“아 그래?”

“별로 안 놀라네.”

“뭐 언젠가 이럴 것 같았어.”


유우시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너라면 언젠가 이럴 것 같았어? 그러니까 훨씬 전부터 끝이 올 걸 알고 있었다는 거지. 끝을 안 만들려는 생각 따윈 없으셨던 거고. 잠깐 떠보려다 진짜로 연을 끊게 생겼다. 좆 됐네 진짜….


냉전도 잠시 스테이크가 나온 순간 태연하게 썰기 시작하는 유우시를 사쿠야가 조금 경이롭다는 듯 바라봤다. 저 방금까지만 해도 사랑 때문에 고민하지 않으셨던가요. 유우시가 먼저 자른 스테이크 접시를 사쿠야 쪽으로 밀어주고 사쿠야의 접시를 자기 쪽으로 갖고 왔다.


“에… 고마워.”

“뭘. 사쿠탄과 나 사이에.”


남(친한 형의 세후레)이 사주는 스테이크는 생각보다 훨씬 맛있었다. 대화가 끊기고 음식이 입에 들어가니까 그냥 다 괜찮아졌다. 사쿠야가 맛있다는 듯 잘 먹는 걸 보며 유우시가 뿌듯하다는 듯 웃었다. 맞은편의 리쿠는 몇 입 먹지도 않았으면서 진작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음식 맛을 전혀 못 느끼는 얼굴로 저작 운동만 했다.


약속대로 계산은 리쿠가 했다. 사쿠야가 뒤늦게 눈치 보며 꾸벅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리쿠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니야. 잘 먹는 거 보니까 좋더라. 물론 명백한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저 형은 식사 내내 유우시만 쳐다봤으니까.


리쿠의 시선이 다시 유우시에게 닿았다. 집에 가자. 목소리는 무심한데 눈빛이 어딘가 집요했다. 그걸 가볍게 피한 유우시가 사쿠야 쪽으로 붙었다. 미안. 나 사쿠탄 바래다주고 갈게. 당황한 사쿠야가 손사래를 쳤다.


“에… 난 괜찮… 아니 응.”

“가자 사쿠탄.”


유우시가 자연스레 사쿠야의 어깨에 팔을 감고서 돌아섰다. 사쿠야가 잽싸게 뒤돌아 리쿠를 향해 인사했다. 리쿠는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으로 멀어지는 유우시의 등짝만 쳐다보고 있었다. 덕분에 스테이크만 먹고 나왔을 뿐인데 리쿠에게 못 할 짓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죄스럽달까. 다시 생각하면 이상한 표현이었다. 유우시와 리쿠가 단순히 세후레라면 사쿠야가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건 좀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어때요?”

“왜? 바래다줄게.”

“사실은 그냥 저 형이 질투했으면 하는 거죠?”

“뭐? 그런 거 아닌데.”

“좋아하는 마음은 솔직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 전해져요.”


마지막 말에 유우시가 우뚝 멈춰 섰다. 빨리 가요. 제가 봤을 땐 저 형도 마음 있는 것 같으니까… 빨리 가서 나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말해요.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던 유우시가 미안하단 말과 함께 돌아섰다. 리쿠가 그새 사라졌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급했다. 정신 차렸을 땐 어느새 달려가고 있었다.


다행히 리쿠는 여전히 아까 헤어졌던 길에 있었다. 그렇지만…. 리쿠의 뒷모습이 제대로 시야에 담긴 순간 유우시가 뛰던걸 멈췄다. 그 인기척에 리쿠의 옆에서 걷던 여자가 돌아본다. 안 본 지 반년이 지났는데도 낯이 익었다. 언젠가 강의실 앞에서 리쿠~♡하고 불렀던 후배라는 걸. 즉 유우시랑 동갑이라는 소리다.


차라리 모른 척 지나가길 바랐는데…. 걸음을 멈춘 여자가 리쿠에게 무언가 떠들었고 곧 리쿠가 돌아봤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아까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오늘따라 리쿠는 유우시가 좋아하는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고 나와서 최종적으로 만나는 게 결국 여자라는 거지.

그놈의 여자. 여자. 여자. 어느새 리쿠가 유우시의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사쿠탄인가 뭔가 중학생 데려다준다더니?”

“수험생이라니까.”

“아무튼.”

“그러는 넌? 집에 가자더니 약속 있었네.”

“우연히 만난 거야.”


그런 우연이 있을 리가. 라고 비꼬고 싶은 걸 꾹 참아냈다.


“그래서? 집에 안 가?”

“응. 한 잔 마시자길래.”


순간 표정 관리가 안 됐다. 리쿠를 노려보고 있다는 걸 인지하면서도 어떻게 바꿀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밤과 술과 여자라니… 끝장인 조합이다.


이런 상황에서 솔직하게 좋아하는 마음을 전할 수 있겠냐고. 금방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내가 리쿠를 좋아하는 게 맞긴 한가? 속궁합 좋은 거랑 사랑은 별개의 문제지. 객관적으로 리쿠 정도 외모면 어플에서 만날 수 있는 게이들의 평균치에 비해 월등히 높긴 했다. 결국 외모에 끌린 게 분명했다. 누구 말대로 얼빠라서. 마에다 리쿠가 좋은 게 아니라고. 애써 합리화했다.


마주한 리쿠의 눈빛이 건조했다. 후배라는 여자와는 거리가 좀 있는데도 일부러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기다리지 마.”

“…….”

“오늘 안 들어갈 수도 있어.”


웃을 듯 말 듯 애매한 얼굴로 리쿠가 쌩하니 돌아섰다. 몸매 실루엣이 다 드러나는 핑크 원피스 입은 여자 후배에게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는데… 꼭 패배한 기분이 들었다.


감히 쫓아갈 자신은 없어서 핸드폰을 켰다. 마음이 급해서 달달 떨리는 손으로 라인 대화 창을 눌렀다.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메시지를 입력한다.


리쿠

아ㄲ깐장난이었어

미안

잘못했어ㅓ

집에가자


멀어지는 리쿠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진동이 연달아 울리는 걸 알아차렸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바라본다. 찰나에 리쿠가 핸드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주변에 차가 쌩 지나가자 리쿠가 차도 쪽을 걷던 여자 후배와 방향을 바꿔 걷기 시작했다.


그걸 보면서 자연스레 깨닫는다. 사실 리쿠에게 저런 사랑을 받아보고 싶었던 것 같다고. 그냥 틈만 나면 섹스만 하는 거 말고. 그거 이외에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 말고. 그냥… 진짜 애인 같은 거. 물론 무리라는 걸 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상처 받을 것도 없지 않나.


죽어도 읽음 표시가 뜨지 않는 대화 창을 잠깐 바라보다 돌아서서 걸었다. 역과 반대 방향이었지만 리쿠가 걸어갔던 길을 따라가는 건 영 안 내켰다. 차라리 좀 걷다가 다른 역에서 타든가 하지 뭐.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가슴이 세차게 뛰어서 몸 전체가 경련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어떻게 됐어요?


사쿠야구나. 도대체 뭘 기대했던 건지 눈물이 핑 돌았다. 가까스로 참고서 답장을 꾹꾹 입력했다.


덕분에 잘 해결했어

다행이다

그 형 생각했던 것보다 잘생겨서 깜짝 놀랐어요

근데 유우시군도 잘생김


기분이 한없이 축 처졌다. 누군가에게 안겨서 위로 받고 싶었지만 딱히 연락할 상대가 없었다. 어플밖엔…. 충동적으로 깔려다가 관뒀다. 리쿠가 한 번만 더 어플로 사람 사귀면 자기랑은 끝이라고 강조했던 게 떠올라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게 끝이 아니면 뭐지? 신경 쓸 필요 있나? 앱 스토어에서 전 남친들 사귈 때 자주 이용했던 어플을 깔았다. (비록 전부 똥차였지만) 늘 그랬듯 프로필 사진은 설정하지 않고 상태 메시지만 바꿨다.

東京 04

그리고 게시글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신주쿠에서 번개 가능한 분. 이거 너무 섹스하잔 뜻 같나? 아예 아니라고도 못 하지만. 확인 버튼 누를지 말지 망설일 때였다.

뒤에서 후드 모자를 확 잡아 당기는 손길에 놀란 유우시의 손이 멋대로 핸드폰을 꽉 붙잡았다. 그게 전송 버튼을 눌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돌아본 곳에는 아까와 똑같은 착장의 리쿠가 서 있었다.


“집에 간다며.”

“…그러는 넌 술 마신다며.”

“라인이 너무 애절해서 돌아왔는데.”


리쿠의 시선이 어느덧 유우시의 핸드폰 화면에 닿았다. 유우시가 뒤늦게 핸드폰을 뒤로 숨기려 했지만 리쿠의 손이 낚아채는 게 더 빨랐다. 당황한 유우시가 무작정 손을 뻗었지만 리쿠가 핸드폰을 꼭 쥔 채 유우시를 피해 뒤로 걸어갔다. 순식간에 메시지가 35개나 쌓였다.


신주쿠 어디 계세요? 지금 나갈 수 있습니다

마침 신주쿠인데 만나서 대화해요

섹스하고 싶어?

37세입니다만 괜찮을까요?


어쩜 눈에 들어오는 내용들이 모조리 좆 같았다. 리쿠가 포스트를 삭제하고 재차 어플을 삭제했다. 이 놈의 어플은 삭제하고 삭제해도 또 깔린다. 아예 못 까는 기능을 개발하든가 해야지.

뒤늦게 다가온 유우시가 리쿠 손에서 핸드폰을 확 뺏었다. 그땐 이미 어플 자체가 사라진 후였지만.


“남의 핸드폰 멋대로 만지지 좀 마.”

“어플로 사람 만나는 거 관두랬지. 네 몸 소중한 줄 알라고.”

“네가 그런 말 하는 거 진짜 웃긴 거 알아?”


누가 보면 애지중지 다루는 줄 알겠네. 함부로 대하는 건 자기면서.

유우시가 톡 쏘아붙이곤 역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말은 세게 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들떴다. 리쿠가 결국 그 후배가 아닌 자신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한편으론 언제든 다시 가버릴 것 같아서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홱 돌아봤다가 바짝 쫓아오던 리쿠와 부딪칠 것처럼 됐다. 유우시가 리쿠의 블레이저 소매를 붙잡았다. 마치 강아지 데리고 가듯 앞장 선다. 리쿠가 순순히 그런 유우시 뒤를 따랐다.


결국 그날 밤도 질리도록 했다. 이거 진짜 언해피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함부로 대하는 건 네가 아니냐고 한마디 뱉은 게 어지간히 신경 쓰였는지 그날따라 리쿠가 애무에 한껏 공을 들였다. 거기에 일일이 흥분하고 마는 게 수치스러워서 끝나자마자 답지 않게 떼를 썼다. 이제 자신이 박는 게 아니면 절대 안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물부터 먹여주던 리쿠가 피식 웃었다.


“그래. 알았어.”


언젠가처럼 리쿠 허벅지에 머리 베고 누워 물을 받아 마시던 유우시가 생수병을 밀어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진짜로? 리쿠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웅. 그게 그렇게 소원이면.”

“…근데 너 해본 적 없을 거 아냐.”

“너도 내가 처음이라며.”

“그건 그런데….”

“여태 나한테 당한 거 다 나한테 풀어.”


어딘가 덤덤하게 중얼거리는 리쿠를 바라보며 유우시는 사쿠야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좋아하는 마음은 솔직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 전해져요.


솔직히 그동안 리쿠에게 마냥 당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리쿠가 싫다는 사람 붙잡고 억지로 뭘 한 것도 아니고 유우시도 다 동의했던 거니까. 이제 와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는 건 그저 투정에 불과했던 셈이다.

유우시가 천천히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키스할 것처럼 얼굴이 가까워졌다.


“…지금 이대로도 좋아.”

“갑자기?”

“너랑 하고 이쪽으로도 느낀다는 걸 알게 돼서.”

“…….”

“근데 너 말고 다른 사람이랑은 안 해봐서 잘 모르겠어.”


이쪽이 천성인지. 아니면 오직 리쿠에게만 반응하는 건지. 리쿠가 생긋 웃으며 유우시의 뺨에 쪽 입 맞췄다.


“그럼 그냥 계속 나랑만 하자.”

“…하?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사귈래?”

“가벼워서 싫어.”

“나 보기보다 진지한 남잔데.”


전혀 안 그래 보입니다만.

유우시가 금방 시선을 돌렸다. 방금 리쿠에게서 날아온 ‘사귈래?’라는 한마디가 반사적인 농담에 지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냥 리쿠의 화법 자체가 그랬다. 버튼 누르면 나오듯 쉬지 않고 플러팅을 해대는데 거기 놀아나면 이쪽만 곤란해진다. 아마 돌아서면 자신이 언제 그랬냐고 반문할 만큼 쉽게 뱉은 말일 테니까.


“넌 진짜 나랑 왜 해?”


유우시가 줄곧 참아왔던 질문을 꺼냈다. 딱히 바라는 대답이 있었다기보다는 진심으로 궁금해져서. 리쿠는 처음부터 대답이 정해졌던 것처럼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너랑 하는 게 제일 좋으니까.”

“전 여친이랑 할 때보다?”

“비교도 안 되지.”


와 정말 씹스럽다…. 그야말로 세후레다운 대사가 아닐 수 없다.


“그 정도야?”

“나도 너 말고 다른 사람이랑 안 해봐서 남자가 좋은 건진 잘 모르겠지만 너랑 하는 건 좋아.”


무엇보다 혐오스러운 건 그 씹스러움이 전혀 싫지 않다는 사실이다. 리쿠가 별안간 유우시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 뜨거운 품에 갇힌 유우시가 직전에 리쿠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그럼 너도 나랑만 해.”

“응. 당연하지.”


또 또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대답.

정말 그렇게 할지 조금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사실 리쿠 입에서 사귀자는 말이 튀어나온 게 그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종종 있었다. 첫 섹스 다음 날. 세후레 한 달 차. 동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공통으로 섹스 후에 그런 말을 꺼냈다. 아직 여운에 헐떡이는 유우시를 바라보면서 건성으로.

그건 뭐랄까… 사랑 고백으로 들리진 않았다. 아마 세후레를 다르게 표현할 단어가 필요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당시 유우시는 리쿠를 그저 속궁합 끝내주는 타과 선배 정도로만 인식했다. 문제의 남친과 헤어진 후 지인 소개로 알게 된 선배에게 금세 호감을 품었다. 그 선배랑 연락하는 중에도 리쿠와의 관계는 이어졌다.

대신 리쿠와 섹스하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때면 리쿠의 태도도 덩달아 거칠어졌다. 쾌감이 잡생각을 떨쳐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도록.


질투하나? 같은 생각은 못 했던 것 같다. 리쿠 주변에는 늘 사람이 많았고 리쿠는 동시에 여러 사람과 연락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냥 내로남불 같았다. 자긴 그렇게 해도 되지만 유우시가 그러는 건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고. 괘씸해서 리쿠에게 몇 번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잘 모르는 애라니까.”

“그래도 전공에서 볼 거 아냐.”

“도대체 걔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그냥… 잘생겼잖아.”


게이고. 단순한 대답에 리쿠가 혀를 찼다. 넌 잘생긴 게이면 다 좋아? 명백히 비꼬는 투였지만 유우시가 나름 심각하게 고민한 끝에 대답했다. 응.


어차피 리쿠가 도와주지 않아도 공통 지인이 있었기에 짝사랑 상대와 만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몇 번 둘이서 따로 만나서 밥을 먹었다. 눈 마주칠 때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리쿠를 조금 닮은 것 같다고…. 한 번 그렇게 생각하자 그 선배의 모든 걸 리쿠와 비교하게 됐다. 굳이 따지자면 리쿠보다 희고, 눈은 조금 더 작은 것 같고….


고작 세 번 본 거로 결정을 내렸다. 나쁘지 않은 듯. 리쿠와의 관계를 계속 이어 나가는 게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리쿠와 청산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거야. 그렇게 다짐하며 집 나설 때 리쿠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나갈 땐 솔로지만 돌아올 땐 커플일 거라면서.

리쿠는 그저 웃으며 건투를 빈다고 했다. 리쿠가 질투한다는 건 다 유우시의 망상이었음을 알려주듯이. 하긴 게이도 아닌데 유우시가 누굴 만나든 질투 따위 할 리 없다.


황당하게도 고백하려고 나갔다가 도리어 고백 받아버렸다. 유우시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망설이는 사이 상대가 선수를 쳤다. 이 정도면 잘 맞는 것 같은데 만나보는 것 어떠냐고. 분명 바랐던 상황이었는데 막상 현실이 되자 기분이 묘했다. 여기서 그러겠다고 대답하면 앞으로 리쿠랑은 어떻게 되는 거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로부터 몇 시간 후. 평소처럼 현관문을 연 리쿠의 눈이 살짝 커졌다. 빗소리가 들리긴 했는데 유우시가 이렇게 흠뻑 젖어서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말 그대로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된 유우시가 리쿠를 보자마자 와락 안겼다. 얼떨결에 리쿠가 유우시의 등허리를 껴안았다.

곧 유우시에게서 젖은 꼴 만큼이나 젖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리쿠. 나 차였어.”

“에?”

“나 별로 매력 없나 봐….”


그렇게 말하는 유우시의 얼굴이 어딘가 처연했다. 축 늘어뜨린 눈썹과 눈꼬리가 귀여웠다. 리쿠가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에 절대 아냐. 네가 얼마나 귀여운데.

어둠 속 유우시의 눈빛이 형형했다. 그 한마디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진짜?”


리쿠가 못 말린다는 듯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응. 진짜.”


유우시가 수줍게 웃었다. 곧 살며시 고개 들어 리쿠에게 입 맞췄다. 가볍게 포갠 입술이 금세 떨어졌다. 유우시가 작게 속삭였다. 나 때문에 적셔서 미안… 같이 씻자.

일련의 흐름이 자연스러웠다. 이번에도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리쿠가 먼저 욕실로 향하는 유우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웃음을 흘렸다.

가만 보면 아주 사람 혼을 쏙 빼놓는다니까….


유우시는 그날 여태 자각하지 못했던 두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나는 자신이 쾌감 따위가 아닌 리쿠 본체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언제부턴가 리쿠를 닮은 사람만 찾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로부터 몇 개월 지난 지금 유우시는 중증의 상사병을 앓고 있다. 상대는 여전히 같은 집에 살고 있으며 밤마다 자신을 괴롭히는데… 이 지독한 관계에 탈출구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달라진 건 리쿠도 마찬가지였다. 전과 달리 소유욕을 보일 때가 많았다. 바로 지금처럼.

내일 사쿠야랑 디저트 페어 간다는 말을 괜히 했나… 보이는 피부란 피부는 족족 빨렸다. 목, 쇄골, 팔 가릴 거 없이. 이래서 내일 나갈 순 있으려나.

물론 리쿠는 이걸 노린 걸 테지만.


“…아. 진짜 하지 마… 제발.”


이 짓은 왜 몇 번을 해도 질리지 않지. 한계까지 들어올 때마다 다리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이따금 시트로 떨어진다. 아니, 땀이 아니라 눈물인가. 이 저능한 패턴엔 변화가 없다. 싫다고, 하지 말라고 마구 소리치다 나중에는 좋다고 울어대는 것.

진짜 졸업해야 하는데. 대학 졸업 때까진 가능하려나….


새벽까지 시달린 탓인지 눈 떴을 때부터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았다. 그래도 사쿠야에게서 한껏 기대에 찬 라인이 온 걸 보니 차마 취소할 수 없어서 일단 씻고 손에 집히는 대로 남방을 꺼내 입었다.

거울에 비친 몰골이 가관이었다. 이건 뭐 전날 섹스했다고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오죽하면 리쿠도 핀잔했다.


“목 그러고 나갈 거야?”

“…그럼 뭐 이 날씨에 목도리라도 하고 가?”


할 말이 없어진 건지 리쿠가 입을 다물었다. 곧 입고 있던 잠옷 상의를 벗었다. 상대적으로 깔끔한 앞판과 달리 등이 엉망이었다. 손톱에 죽죽 긁힌 흔적이 처참했다. 가해자인 유우시가 조용히 눈을 피했다. 굳이 따지자면 이쪽이 더 심하니까 딱히 죄책감 같은 건 느끼지 않기로 했다.


“나도 따라갈래.”


어느새 네이비색 맨투맨을 입은 리쿠가 중얼거렸다. 동시에 유우시가 황당하다는 듯 리쿠를 바라봤다.


“너 디저트 페어에 관심 없잖아.”

“응. 근데 너한텐 관심 있으니까.”


뭐라는 거야 진짜. 타박하려다가 말았다. 말다툼할 기운도 없었기 때문이다. 끝내 사쿠야에게 양해의 라인을 보냈다. 허락을 구한다기보다 일방적 통보에 가까웠지만.


사쿠야 미안

리쿠도 같이 갈 것 같아

갑자기 디저트가 먹고 싶다네


전철 안 남방 옷깃을 올려 목을 최대한 가린 유우시가 리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기운이 없고 졸려서 사람들 시선 같은 건 신경 쓰이지 않았다. 리쿠도 딱히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저 손등으로 유우시 이마의 열을 확인하고는 가볍게 속삭였다. 가는 길에 약 좀 사자. 너 열 있는 것 같아. 유우시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사이에 두 번째 삼자대면이 이루어졌다. 사쿠야는 저번과는 정반대의 (리쿠 눈엔 사실 그게 그거였지만) 복장을 하고 있었다. 비비드 톤 후드티에 백팩을 매고 있었는데 키링이 가방 크기 만큼 뒤덮고 있었다. 리쿠와 눈이 마주친 사쿠야가 난처한 듯 가방의 방향을 바꾸어 뒷면을 안고 있다가 자리에 앉자마자 의자로 숨겨버렸다.


“오랜만이네 사쿠탄.”


뜻밖에도 인사는 리쿠 쪽이 건넸다. 사쿠야가 물을 마시다 말고 헛기침을 했다. 아니 이젠 쌍으로 나를 사쿠탄이라고…. 리쿠는 저번 만남과 달리 힘을 푼 차림이었다. 그러나 당장 사쿠야의 시야를 방해하는 건 리쿠의 옷차림 따위가 아니었다. 유우시 목과 쇄골 쪽의 무시무시한 자국은 보고도 모른 척하는 게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유우시 근데 화상 입었어?”


차라리 그랬기를 바라면서 물었다. 당황한 유우시가 얼굴을 붉히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미 그거로 대답을 들은 것도 같았지만 옆에 있던 리쿠가 대답을 대신했다. 아 이거 고데기에 덴 거야.

사쿠야의 눈이 유우시의 머리칼에 닿았다.


“…머리가 저렇게 짧은데요.”


동시에 리쿠의 눈도 유우시의 머리에 닿았다. 가볍게 유우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는다.


“응. 그래도 시도해볼 순 있으니까.”


사쿠야가 어딘가 멍한 눈으로 리쿠를 바라봤다. 이 형의 숨은 정체는 인간 고데기였구나…. 머릿속으로 잽싸게 리쿠에 대한 감상을 고친다. 유우시의 세후레. 잘생긴 형. 인간 고데기.


거의 죽은 눈으로 앉아있던 유우시가 쇼트케이크를 먹자 안광을 되찾았다. 사쿠야는 아까부터 맛있다는 말밖에 안 했다. 리쿠가 먹는 둥 마는 둥 두 사람을 관찰하다 사쿠야를 향해 물었다.


“사쿠탄은… 유우시 어디가 좋아?”


사쿠야가 휘낭시에를 먹다 말고 다시 헛기침을 했다. 유우시가 다급히 물컵을 챙겨줬다. 몇 모금 들이켜다 말고 리쿠의 눈치를 본다. 썸남 설정은 끝내기로 한 거 아니었나…. 어디까지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유우시를 바라봤더니 정작 유우시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람을 이용해놓고 방관이냐고….


“유우시랑은 그냥 친구 하기로 했어요.”

“친구? 왜? 우리 유우시 어디가 부족해서?”

“…엄마가 대학생 만나면 죽인댔어요.”


풉. 유우시가 억지로 웃음을 참아냈다. 리쿠가 멍한 얼굴로 유우시와 사쿠야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뒤늦게 맞장구를 쳤다. 하긴. 학생 때는 또래를 만나야지. 사쿠야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곧 회심의 일격을 가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엔 둘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리쿠가 사쿠야의 말에 유우시를 바라봤다. 네 전 썸남이 저러는데 어떻게 생각해? 꼭 이렇게 묻는 듯한 얼굴로.

유우시가 가볍게 화제를 전환했다. 사쿠야 이것도 먹어봐. 이게 여기 시그니처랬어. 사쿠야가 금세 디저트에 시선이 팔렸다. 유우시가 힐끔 눈치를 보다 리쿠에게도 중얼거렸다. 좀 먹어. 디저트 페어를 왔으면….


거의 식사 수준으로 디저트를 먹고 나온 세 사람이 갈림길에 섰다. 리쿠의 잠깐 구경할 게 있다는 말에 사쿠야가 눈치껏 빠져줬다. 공부하러 가야 한다면서. (방학이면서)

유우시가 자연스레 리쿠의 뒤를 따랐다. 걸으면서 문득 옷 소매를 보고 깨달았다. 이거 리쿠 남방이었구나. 어차피 옷장 공유한 지 오래라 중요한 건 아니지만. 뭘 구경하겠다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물었다.


“뭐 살 건데?”

“산다기보다 구경.”

“그러니까 뭐?”

“커플링.”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만나는 사람 없다더니? 최근 기억을 되짚어봤지만 딱히 누구랑 연락하거나 만나는 듯한 기색은 없었다. 누굴 만나는 와중에 사람 목을 이렇게 뜯어 놓으면 진짜 미친 새끼인 거지.


하지만 타인의 커플링을 대신 구경하는 사람도 있나? 정황상 자신이 살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나. 갖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리쿠에게선 이렇다 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계속 캐묻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리쿠는 이미 생각한 가게가 있는 듯 수많은 쥬얼리 샵을 지나쳐 어느 한 매장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들어가자마자 직원이 붙었다. 어느 분이 사실 거예요? 하고 묻자 리쿠가 가볍게 손짓했다. 여자 친구 분이 어떤 스타일 좋아하세요? 이어지는 질문에 리쿠가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심플한 거… 뭐 많이 안 박힌 게 좋을 것 같아요. 리쿠가 상대를 말해준 것도 아닌데 저절로 몇 번 마주쳤던 리쿠의 후배가 떠올라 기분이 축 처졌다. 아. 이래서 헤테로랑 엮이면 안 된다니까.


유우시는 그저 리쿠가 이것저것 껴보는 걸 옆에서 가만히 지켜봤다. 직원이 도중에 유우시에게 말을 붙였다. 한 번 둘러보세요. 꼭 커플링 아니어도 다양한 거 있으니까요. 유우시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마음에 드는 걸 찾았는지 같은 것만 몇 번을 껴보던 리쿠가 유우시에게 반지를 내밀었다. 유우시가 뭐냐는 듯 쳐다보자 가볍게 웃는다.


“잠깐 껴봐. 어떤 느낌인지 보게.”


가지가지한다 싶었지만 지켜보는 직원도 있고 해서 마지못해 꼈다. 검지에 꼈더니 리쿠가 다가와 확 반지를 뺐다. 커플링은 약지에 끼는 거라면서 고쳐 끼워주는데 직원이 급히 다른 사이즈를 갖다줬다. 고객님한텐 이 사이즈가 맞을 것 같아요. 리쿠가 직원에게 반지를 받아 다시 유우시의 손가락에 천천히 끼워줬다.


뭐랄까 그 순간이 꼭 슬로우 모션 같았다. 별로… 저랑 나눠 낄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괜히 속이 간지러워서. 동시에 아리는 것 같기도 했다. 유우시가 금방이라도 뺄 것처럼 다른 손으로 반지를 붙잡았다. 그걸 가볍게 떼어낸 리쿠가 물었다. 이거 어떤 것 같아? 유우시가 어색하게 웃으며 결국 반지를 빼 진열장 위에 올려놨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여자 친구한테 물어봐야지.”

“네 눈엔 어떠냐고.”

“괜찮은 것 같은데.”


건성으로 대답했다. 좀 차가웠나. 직원 눈치를 보며 유우시가 씁쓸하게 웃었다. 아니 난 그냥 커플링 같은 거 잘 모르니까…. 목소리 때문인지 직원은 리쿠와 유우시가 몇 살 나이 차이가 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직 어린 학생분은 이런 거 안 하긴 하죠. 분명 저를 위해 맞장구를 쳐주는 건데도 썩 기쁘진 않았다.


끝내 리쿠는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가게를 나서며 유우시가 한 번 더 물었다. 그때 우연히 마주쳤던 후배지?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연락하던 리쿠가 한 번에 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응? 뭐라고? 유우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아무것도. 그냥… 확인 사살 받아봐야 상처 받는 건 자신뿐이라는 생각에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하룻밤을 꼬박 앓았다. 리쿠가 밤새 간호해준 덕분에 금방 나았지만 솔직한 심정은 계속 아프고 싶었다. 다 나으면 금방 리쿠의 정신이 딴 데로 팔릴까 봐. 이젠 아무리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리쿠를 아주 많이 좋아하고 있음을. 언제부터인지 묻는다면 그건 오리무중이지만….


그 일이 있고도 두 사람의 관계는 여전했다. 리쿠는 꼭 남친처럼 굴었다. 틈만 나면 유우시의 핸드폰을 뺏어 자기 몰래 매칭 어플을 깔진 않았는지 확인하려 들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도망치듯 침대에 누우면 자기 침대 뻔히 놔두고 유우시의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 왔다. 손을 더듬어 얼굴을 찾고 냅다 입술을 붙여 입술에 닿는 감촉으로 입술을 찾았다. 키스만 했다 하면 금세 반응이 왔다.


뒤를 내준 채 신음할 때마다 생각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진짜로 벗어나야 해. 하지만 어떻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방법밖에 없어서 오랜만에 지인에게 연락을 돌렸다. 어차피 리쿠 같은 사람 따위 절대 찾을 수 없을 테니까 이젠 아무나 상관없었다. 게이면서 유우시를 진심으로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조건을 확 낮추자 만날 사람이 꽤 많았다. 갖은 핑계로 집에 있는 시간을 줄이고 새벽 늦게 들어가선 피곤하다며 침대에 직행했다. 처음 며칠은 리쿠에게서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그냥 유우시 말을 순순히 믿는 눈치였다.

그 짓을 일주일쯤 반복했을 때, 처음으로 리쿠가 새벽 네 시까지 자지 않고 유우시를 기다렸다. 무려 동이 틀 무렵에야 돌아온 유우시에게서 옅은 술 냄새가 났다. 확실히 전에 안 하던 이상 행동이었다. 리쿠가 아무렇지 않게 저를 지나쳐 욕실로 걸어가려는 유우시의 팔목을 붙잡았다. 빼려고 해도 단단히 힘을 준 덕분에 그럴 수 없었다.


“왜? 할 말 있어?”

“요즘 왜 그래?”

“뭐가?”

“만나는 사람 생겼어?”

“…그냥 알아가는 중이야.”


리쿠가 소파에서 일어나 유우시에게 다가왔다. 또 아무렇지 않게 입술을 붙이려고 하길래 유우시가 손으로 리쿠의 얼굴을 밀어냈다. 하지 마… 술 마셨어.

그러나 동시에 리쿠가 다시 다가왔다. 상관없어. 중얼거림과 함께 다시 입술을 빨기 시작했다. 원래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 지겨워야 정상인 건데. 이상하게 할 때마다 처음 받은 느낌과 비슷했다. 취기 때문인지 이성보다 본능이 앞섰다. 습관처럼 입술 벌려 혀를 받아내며 리쿠의 목에다 팔을 둘렀다. 더 밀착할 것도 없는 품에 리쿠를 꽉 채울 것처럼 끌어당긴다.

미친 사람처럼 혀를 섞다 말고 유우시가 불현듯 입술을 떨어뜨렸다. 타액이 번들거리는 입술을 후드티 소매로 마구 문질렀다.


“…치사해. 취한 사람한테 이러는 거.”

“내가? 네가 아니라?”

“내가 뭘 했다고….”

“나 말곤 아무랑도 안 하기로 했잖아.”


잠시 가늠하는 듯하던 유우시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애도 아니고 도대체 언제 이야기를. 그런 것쯤 분위기 타서 뱉은 말에 불과한데. 유우시가 알았다는 듯 입고 있던 남방을 벗었다. 곧이어 그 안에 입고 있던 티셔츠도 벗는다. 상체만 맨몸이 된 채 리쿠를 빤히 바라봤다. 상황에 맞지 않게 건드리면 울 것 같은 눈으로.


“그래. 하자. 해.”

“…….”

“결국 몸이 목적이지? 하라고. 상관없어. 별로.”


사랑 같은 거 없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고. 마지막 말은 어딘가 자신에게 뱉는 듯한 뉘앙스였다. 리쿠가 무심한 눈으로 유우시의 얼굴을 그리고 그 아래 몸을 천천히 훑었다. 곧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는다.


“그렇다기엔 넌 나 좋아하잖아.”


그 한마디가 유우시의 심장을 관통했다. 날카로운 무언가로 마구 찌른다. 진작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 표정. 그냥 리쿠의 모든 게 저를 비웃고 짓누르는 듯한 기분이 들어 참을 수 없었다. 모르는 줄 알았을 땐 그냥 넘길 수 있었던 모든 것이 알면서 그랬다고 생각하자 살의를 느끼게 만든다. 아는데 그랬어? 알면서 나를 갖고 놀았다고?

유우시가 새빨개진 눈으로 리쿠를 노려봤다. 독기어린 눈빛과 달리 축 내려간 눈꼬리가 서글픈 느낌을 자아냈다.


“…제일 싫어.”


그 한마디를 남긴 채 유우시가 욕실로 돌아갔다. 나왔을 때 리쿠는 어딜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신경 안 쓰는 척 침대로 직행했다. 리쿠는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끝 모를 냉전이 시작됐다. 리쿠 또한 유우시를 대놓고 무시했다. 유우시의 생일 전날까지도 그랬다. 원래는 생일을 핑계로 데이트하자 꼬셔볼 생각이었지만 물거품이 됐다. 애초에 리쿠와 데이트를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애인도 아닌데 데이트는 무슨.

소개 받아 연락 중이던 사람이랑 만나기로 했다. 알고 지낸 지 얼마나 됐다고 괜히 부담 주기 싫어 생일이란 사실을 숨겼기에 축하 따위는 받지 못했다.


한창 식당에서 밥 먹고 있는데 라인이 왔다.


유우시군

생일 축하해요


발신인은 사쿠야였다. 귀여운 생일 축하 이모지도 다섯 개나 왔다. 잠시 상대에게 양해를 구한 후 고맙다고 답장을 하려는데 라인이 하나 더 왔다.


근데 지금 어디예요?

긴자 왜?

아 뭐 하나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생일인데 맛있는 거 먹고 있어요?


순간 유우시의 시선이 테이블 옆에 놓인 메뉴판에 닿았다. 생각 없이 식당 이름을 보냈더니 검색해본 듯 사쿠야가 맛있겠다며 즐겁게 보내라고 했다. 이모지 하나로 답장을 대신한 유우시가 핸드폰을 내려놨다. 맞은편에 앉은 소개남이 누구냐고 묻길래 대충 아는 동생이라 둘러댔다.


소개남은 여덟살 연상으로 나이에 맞지 않게 소녀 감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다든가. 유우시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밝게 리액션을 해줬다. 전반적으로 착한 사람 같았다. 딱히 두근거린다든가 끌리는 느낌은 없지만.

도중에 소개남이 얼굴을 붉힌 채 쭈뼛거렸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눈치길래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웅얼거렸다.


“사실 이다음에 호텔 예약해놨는데 괜찮으시면 갈래요?”

“…….”

“꼭 뭘 하자는 건 아니고 그냥 대화라도 했으면 해서….”


무표정으로 파스타를 씹던 유우시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차피 갈 곳도 할 것도 없었으니까. 일순간 리쿠의 얼굴이 스치긴 했지만 금세 잊어냈다. 같은 집 살면서 자정부터 지금까지 축하한단 말 한마디, 라인 한 통 없는 사람한테 뭘 바라겠다고.

소개남이 수줍은 듯 웃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유우시가 다시 파스타 면을 집었다. 귀엽고 애교도 많은 사람 같은데 이상하게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이런 마음으로 계속 만나도 되는 걸까? 잠시 고민에 잠겼다.


식사는 소개남이 결제했다. 더치페이라도 하자고 했지만 자신이 나이가 많으니 사는 게 당연한 것 같다길래 그냥 가만히 있었다. 역시 전 남친이 희귀 케이스였던 것 같다. 살아보니 리쿠도 그렇고 이 소개남도 그렇고 사주는 사람도 많은 것 같아서. 그땐 전 남친 말대로 유우시가 호구였다.


소개남 차는 가게 근처 주차장에 있댔다. 차를 빼서 올 테니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소개남이 건널목을 건넜다. 갑자기 외톨이가 된 유우시가 다시 핸드폰을 바라봤다. 부재중 전화도 라인도 아무것도 없다. 리쿠에게서 온 거라곤. 아 이렇게 허무하게 끝인 건가?


“토쿠노.”


그때 소름 끼치게도 어디선가 리쿠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방향으로 돌아봤을 땐 리쿠가 막 집에서 나온 것 같은 차림으로 저를 향해 매섭게 돌진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고 왔… 까지 생각하던 유우시가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디저트 페어가 끝났을 때 리쿠와 사쿠야가 라인을 교환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온 리쿠는 어딘가 단단히 화난 얼굴이었다.


“가만 보면 넌 맨날 이런 식이야.”

“갑자기 나타나서 무슨 소리야?”

“진짜 몸이 목적이었다고 생각해?”

“…….”

“아무리 잘해보려고 해도 갖은 핑계 대면서 날 배제한 건 너잖아.”


뛰어왔는지 리쿠의 앞머리가 살짝 젖어있었다. 시선을 느낀 리쿠가 앞머리를 헝클다 말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유우시의 시선이 리쿠의 손바닥에 올려진 걸 담았다. 낯선 반지 케이스. 윗면엔 저번에 리쿠와 들렀던 가게의 브랜드명이 새겨져 있었다.

반지 케이스가 고스란히 유우시 손으로 넘어갔다. 리쿠가 억지로 쥐여준 탓이었다.


“생일선물이니까 누구랑 끼든지 알아서 해.”

“…….”

“그리고 사람 좀 가려서 만나. 너 남자 보는 눈 최악이니까.”


리쿠가 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돌아섰다. 디저트 페어 때 유우시가 빌려 입었던 남방이 멀어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차장에서 차를 끌고 온 소개남이 유우시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조수석 창이 열렸다. 타요.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유우시의 눈은 리쿠의 남방만 쫓고 있었다.


그게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반지 케이스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유우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곧 달리기 시작했다.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 리쿠의 그림자를 쫓아서. 다행히 리쿠의 뒷모습이 다시 유우시의 시야에 걸렸다. 조금 더 속도를 냈다.

이윽고 리쿠를 따라잡았을 때 유우시가 리쿠의 등을 주먹으로 퍽 쳤다. 꽤 둔탁한 소리와 동시에 리쿠가 앓는 소릴 내며 돌아봤다. 하? 진심으로 기가 막힌다는 얼굴.

유우시가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웃었다.


“너도 포함인 거 알지?”

“뭐?”

“내가 남자 보는 눈 최악인 거.”


그도 그럴 게 좋아하면 진작 말하라고.

유우시가 성큼성큼 리쿠에게 다가갔다. 곧 입술을 다 뜯을 것처럼 거칠게 키스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얼굴이 반쯤 뭉개졌지만 두 사람 다 개의치 않았다. 그 살기어린 키스의 무엇이 우스운지 리쿠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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